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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CURACADEMIA

Author: Kakao_Cuenta_4694

© Web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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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막 시점 1화

그저 덕질이 하고 싶었을 뿐이다.

누구보다도 내가 그 작품을 사랑한다고 증명하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작품이 완결난 후에도 캐릭터들의 삶을 계속 지켜보고 싶었을 뿐.

그렇게 어디에나 흔히 있는 빠돌이였던 나는, 작품의 모든 팬들이 부러워할 만한 기회를 얻었고.

그 결과.

실시간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쿠헉! 커흑... 콜록! 콜록!"

"도련님!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쾅쾅쾅!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을 할애할 여유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뒤질 것 같다.

아니, 농담이나 과장 따위가 아니다.

이대로라면 1년. 아니, 3개월 안에 난 틀림없이 죽게 되겠지.

"제기랄... 콜록!"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했다.

무언가가 피와 섞여 속에서 튀어나왔다.

아기 손톱만 한 크기의 금속 조각들.

'씨부럴....'

이 금속 파편들이 튀어나오면서 기도를 다 헤집어 놓은 것 같았다. 출혈이 나면서 기침이 더더욱 격해졌다.

연신 기침을 반복하며 한참이나 피를 토해 낸 뒤에야 간신히 혼미해지던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가까스로 세면대를 붙잡아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버텼다.

차라리 정신을 잃고 바닥에 누워 버리면 몸은 편할 테지만 그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 몸'의 자존심이 그 행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 강한 에고는 상스러운 욕설을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도 속으로만 저주를 퍼붓는 것으로 울분을 다스려야 했다.

'제길. 진짜로 좆됐다. 이러다 아무것도 못 하고 죽겠어.'

한때 이 몸을 고른 것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믿었던 내가 한심스러워졌다.

머릿속에 있었던 내 완벽한 계획들은 '불치병'이라는 단 하나의 요소 때문에 통째로 어그러지고 말았다.

"허억... 허억...!"

간신히 조금 기력을 회복하고서 고개를 들어 정면의 세면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시선을 감지한 스마트 거울은 곧장 내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아론 도련님.]

[오늘 도련님의 건강 점수는 11점입니다. 심장, 폐, 신장을 비롯한 신체 123개소에서 이상 물질 반응을 감지했습니다.]

[조속히 병원을 방문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주치의에게 응급 콜을 넣을까요?]

"닥치고 얼굴이나 비춰."

[취소하겠습니다.]

디스플레이 거울에 팝업되어 있던 주치의의 번호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젊은 남성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걸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멋은 부린다는 건가.'

검은 머리칼은 포마드를 발라 정갈하게 넘겼고, 예리한 두 눈은 호박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턱선은 날렵하면서도 남자다웠다.

남자인 내가 봐도 반해 버릴 것 같은 미형의 얼굴.

원판 불변의 법칙에 따라, 전생의 나였다면 몇 억을 쏟아부어도 따라잡을 수 없는 미남이었다.

심지어 지금 입가에 묻은 피도, 죽을병에 걸려 창백해진 피부마저도 그 아름다움을 증폭시키기 위해 연출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론... 스팅레이."

입가의 피를 닦아 내며, 이제는 '내 것이 된'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아론 스팅레이.

내 최애소설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 2권에 등장해서 주인공을 위협했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일찌감치 퇴장한 빌런.

작중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악의 기업 스팅레이 사(社)의 첫째 아들이자, 소설 전편을 통틀어서 주인공이 확실하게 승리하지 못했던 유일한 인물.

말하자면 세계관 최강자 중의 하나.

'거기까지는 참 좋은데 말이지....'

문제는 이 녀석의 몸이 시한부라는 점이었다. 원인은 체내에 심어진 군용 나노머신 '아담'의 이상 작동.

일반적으로는 500만 명 중 한 명에게 일어날까 말까 한 확률이라던데, 재수 없게 아론 스팅레이는 거기에 당첨되고 말았다.

신체 곳곳에서 생성되는 날카로운 금속 물질이 장기를 갉아 먹으며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 그 증상.

이렇게 강한 인물이 소설 초반의 허접한 주인공에게 패한 이유 역시, 전투 도중 급속도로 진행된 이놈의 병 때문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주인공이 '그에게 병이 없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그의 손에 죽었을 거야.'라고 설명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일개 소설 독자였던 내가 어떻게 그리 대단한 녀석이 되어 있느냐 묻는다면....

"누굴 원망하겠어... 내 선택인 것을."

* * *

지금으로부터 2주 전.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의 완결 기념 이벤트로 공식 사이트에 공지 하나가 올라왔었다.

-뭐? 퀴즈를 전부 맞히면 엄청난 선물을 주겠다고?

퀴즈는 소설의 내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제시된 문제들이 객관식이나 단답형이 아니라, 서술형이었다는 점이다.

가령 질문은 이런 것들이었다.

[문제 1. 28화. 여자주인공 '아이리 엘리스밸'이 주인공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던 이유와 그녀의 심경에 대해 서술하시오. (300자 이내)]

[문제 2. 35화, 천재 모듈러 '미유'가 말한 '목표'를 51화 에피소드와 결부시켜 서술하시오. (300자 이내)]

"이게 퀴즈야, 논술 문제야...."

오픈북을 허용해도 정말로 독자가 아니면 풀기 어려운 문제.

말하자면 얼마나 소설과 그 캐릭터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한 내용이었다.

물론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의 골수팬이라고 자부하는 나는 약 4시간에 걸쳐 모든 문제의 답안을 깔끔하게 채워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

그것은 앞의 문제들과는 좀 달랐다.

[추가 문제. 당신은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 속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캐릭터가 되고 싶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소설 속 세계는 암울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지만 나는 그 질문에 곧장 '예'라고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암울한 것은 내 현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오히려 내 '최애'들이 있는 소설 쪽이 더 희망을 품을 여지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누가 되고 싶느냐'는 질문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한 캐릭터의 이름을 적었다.

"아론 스팅레이."

내가 그를 고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스팅레이 재벌의 장남인 아론 스팅레이는 엄청난 미모와 재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돈과 얼굴이 받쳐주면 세상은 살 만해지니까.

두 번째.

발병 이전의 아론 스팅레이는 주인공조차 이기지 못하는 세게관 최강 무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힘이 있으면 어지간한 위협들은 다 씹어 먹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세 번째.

작품 초반에 퇴장하여 후의 내용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리고 부연 설명으로 나는 이렇게 적었다.

-물론 시한부라는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체내 나노머신의 오작동만 고칠 수 있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만약 내가 아론이 된다면, 재력과 재능을 이용하여 병을 치료한 뒤, 캐릭터들의 행보를 한 발 뒤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며 살아가고 싶다.

그래, 덕질!

나는 누구보다도 소설 속 캐릭터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은 허구의 인물이었지만, 내 비참한 현실의 삶을 잊게 해 준 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찍 죽어서 퇴장하는 만큼, 죽은 것처럼 조용히만 지내면 뒤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있을 터였다.

내 최애들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다!

하지만 내가 직접 스토리에 관여하면서 고생하기는 싫다! 적당히 꿀 빨고 싶다!

그런 덕심을 채워 주기에 가장 적합한 캐릭터가 다름 아닌 아론 스팅레이었다.

나는 그렇게 홀로 몇백 번씩 굴려 본 행복한 상상을 마지막 문제에 적었고, 3번쯤 검토한 뒤에 제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바로 나흘 전.

이벤트 당첨자가 발표되었다.

곧장 페이지에 들어간 나는, 놀랍게도 퀴즈 이벤트 1등 자리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굿즈다! 공식 굿즈야!"

그렇게 기뻐하면서 작가가 직접 준비한 특별한 선물이 뭘까 기대하던 도중, 갑자기 모니터에서 새어 나온 빛에 정신을 잃었다.

* * *

"그리고 다시 깨어나 보니 이렇게 됐단 말이지...."

콜록, 콜록.

다시금 기침 세례가 시작되려고 했다.

나는 세면대에 올려 둔 진통제를 허겁지겁 수돗물과 함께 삼켰다. 어찌나 효과가 좋은지, 곧장 기침과 온몸을 찔러 대던 아픔이 멎었다.

"후우...."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아 내고서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넓은 방 한쪽에 배치된 넓은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빙의한 건 좋다. 다른 웹소설처럼 원치도 않는데 끌려온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하던 캐릭터에 빙의했으니...."

게다가 난 공식 이벤트의 1등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작가 다음으로 이 작품과 세계에 대해 가장 깊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내 빙의로 인해 벌어진 전개의 궤도 이탈 정도는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남은 건 전생에 미리 세워두었던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하는 것뿐.

하지만 딱 하나 예상치 못한 문제.

'너무 아파....'

아프다.

아파도 너무 아프다.

이 희귀한 확률의 불치병을 너무 우습게 봤다는 게 내가 유일하게 놓친 부분이었다.

수시로 약을 먹지 않으면 격통이 몰려왔고, 먹은 뒤에는 반쯤 정신이 멍해져서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는다. 사실 지금도 방금 약을 먹은 탓에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다.

그나마 정신을 바짝 차리면 하루 몇 시간 정도는 졸도하지 않고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게 다행일까. 본격적으로 계획을 진행시키기에는 상당히 부족하지만.

어떻게 이딴 병을 달고서 원작 주인공을 그렇게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인지, 진심으로 경이롭다. 물론 무리하게 싸우다 결국 죽었지만.

"힘이 빠지는군...."

또다시 약효가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하면서 눈꺼풀이 감겨 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약을 먹고 잠들었다가 다시 격통에 몸부림치며 깬 뒤 진통제를 찾는 게 빙의한 뒤 요 며칠간의 내 생활 패턴이었다.

"빨리 '그걸' 찾아야 할 텐데...."

그렇게 다시 시야가 어둑어둑해지려는 찰나,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도련님!? 아론 도련님!"

안쪽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들어온 사람은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검은 장발의 여성.

아론의 기억이 남아 있던 덕에 나는 그녀가 누군지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마리아...."

내 전속 비서이자, 수행원.

어릴 적 스팅레이 재벌의 손에 거두어져 유능한 전투병기이자 부하로 길러진 인물이었다.

겉보기엔 가녀린 동양계 미녀지만, 나는 알고 있다.

개조된 그녀의 몸에는 일반적인 경찰특공팀 하나는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화력의 무기들이 내장되어 있음을.

하지만 그런 인간병기를 상대로도 겁 따윈 전혀 나지 않았다. 내 입이 멋대로 움직이더니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뇌까렸다.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마리아."

"죄, 죄송합니다. 허나 도련님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였을 때...."

"시끄럽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네가 쓸데없이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

"죄송합니다."

마리아는 곧장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거의 티가 나지 않았지만 약하게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은 불안과 경외.

얼마나 아론 스팅레이라는 인물이 마리아에게 있어 두려운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원래의 아론과는 달리, 내겐 이런 미인을 괴롭히는 취미 따위는 없었다. 언제까지고 육체 쪽의 자아에 휘둘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됐으니 일어나라. 그보다 '그건' 어떻게 됐지? 찾아냈나?"

그것.

내 계획의 첫 단계.

이 빌어먹을 몸뚱이를 고칠 단서.

내 물음에 마리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는 의미임은 금세 알 수 있었다.

"...."

순간적으로 열불이 뻗쳤다.

지금 내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데 이 녀석들은 그 간단한 일 하나 해내지 못한다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아니....'

다시금 머리가 차가워졌다.

뇌리를 스치는 위화감.

약 기운 때문에 다소 흐리멍덩한 상태였으나, 그 위화감을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뭔가 이상해.'

작중 스팅레이 사는 빈민가에 굴러다니는 이름 없는 고아 한 명도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찾아낼 만큼 엄청난 정보력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런데 스팅레이 가의 장남인 내가.

내 목숨을 위해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고 당부하며 지시했던 일을.

나흘이 지날 때까지도 완수하지 못했다고?

'이건 단순히 부하들의 무능함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소설의 내용과 설정을 빠르게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아론 스팅레이.

스팅레이 재벌의 장남.

도시를 좌지우지하는 최대의 군수업체.

내 위로는 재벌 총수인 아버지가, 밑으로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더랬다.

"과연...."

소설 속에서 작가가 직접 '그런' 설정을 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

순식간에 결론까지 다다른 나는 자리에서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말했다.

"나가겠다. 옷을 준비해라."

"어, 어디로 가십니까?"

"E섹터의 상공업지구다. 네놈들의 무능함을 지켜보느니 내가 직접 찾아 나서는 게 차라리 편하겠군."

"하, 하지만 도련님! E섹터는 대단히 치안이 위험한 곳으로...!"

"위험하다? 내가?"

"시, 실언했습니다."

마리아를 쏘아보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래, 내게 문제 되는 것은 E섹터의 불한당들이 아니라 이 빌어먹을 병마뿐이다.

내 목숨을 계속 남의 손에 맡겨 둘 수도 없다. 내가 직접 찾을 수밖에.

만약 실패한다면 나는 원작의 흐름을 따라 결국 죽게 될 테니까.

그것도.

내 가족들의 손에 의해서.

아카데미 흑막 시점 2화

뉴 발할라 시티.

내가 빙의한 소설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의 주무대이자 인구 7200만 명의 거대한 메갈로폴리스.

'발할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곳은 괴물들로 들끓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문명이 이어지는 곳이며, 엄청난 기술적 진보를 토대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낸 미래도시이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신비]라 불리는 괴물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일도 없고, 대부분의 질환은 의료기술의 힘으로 치료할 수 있다.

또한 기아도 없고, 전쟁도 없다.

자유롭게 일하고, 능력껏 보상을 받는 그야말로 낙원과 같은 도시.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부와 기업이 배포하는 선전물에서의 이야기.

'조금만 들여다보면 실상은 다르지.'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는 사이버펑크와 아카데미물이 합쳐진 소설.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빈민가 사람들은 매일 굶주림과 병마에 허덕이고 있으며, 공권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갱들끼리의 전쟁이 벌어진다.

정치인들은 돈에 눈이 멀어 재벌들의 눈치를 살피고, 기업들은 시장을 독점하여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아카데미]라는 이름의 사병훈련소를 만들어 아이들을 전투 병기로 키워 낸다.

그렇게 화려해 보이지만, 곳곳에 땟국물이 줄줄 낀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이 '뉴 발할라 시티'의 참모습이었다.

'...뭐, 현실이라고 다르겠냐마는.'

어쨌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뉴 발할라 시티의 치안은 전체적으로 보면 썩 좋은 편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최상위 특권층의 거주지 '엘리시움'은 당연히 살기 좋고, D섹터까지도 사람이 살 만하다.

범죄가 발생하면 경찰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곳곳에 CCTV가 있어서 검거율도 매우 높다.

하지만 E섹터부터는 다르다.

여기서부터는 아예 마피아와 갱들이 경찰 대신 공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즉, 무법지대.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이 골목을 지나면 E섹터의 블랙마켓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게 차를 세웠다. 그녀는 곧장 문을 여는 대신, 내게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론 도련님."

"왜 그러지?"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지금이라도 재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곳의 위험성은 평소 다니시던 장소들에 비할 바가 아닌지라...."

"이미 알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분위기만 보아도 내가 아론에 빙의한 이후 머무르던 엘리시움과는 완전히 딴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거리에는 쓰레기가 보란 듯이 굴러다니고 인기척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뒤에서 칼이나 불법 총기를 든 강도가 튀어나온대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풍경.

하지만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지?"

한낱 강도 따윈 아론 스팅레이라는 남자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한다.

"내가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사회의 쓰레기들에게 겁이라도 먹어야 하나?"

"아, 아닙니다. 다만 저는 도련님의 건강이 상할까 염려되어...."

"건강이라."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그녀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내 건강 따위가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혹여나 내가 스팅레이 가문을 위태롭게 만들지 않을까 우려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게 아론 스팅레이는 소시오패스 기질이 있으니....'

그래, 본디 아론은 피에 미친 살인귀다.

미모와 재력, 지성과 무력.

얼핏 완벽해 보이는 부잣집 도련님이 세계관 최악의 빌런으로 주인공과 대립했던 이유 역시 그 때문.

'아마 내가 빙의하기 전에도 수차례 살인을 저질렀겠지.'

물론 소설에서 직접 묘사가 나오지는 않는 부분이지만 그의 성정과 배경을 생각해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아론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악행을 저지르고, 또 그것을 가문의 힘으로 사건을 무마시켰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가문에서는 나를 암암리에 없애려고 하는 거겠지.'

아무리 도시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기업이라고 한들, 총수의 장남이 살인귀라는 사실이 세상에 널리 퍼진다면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사건들을 덮어 왔지만 이런 시한폭탄을 계속 품고 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고 암살자를 고용하자니 어지간한 실력으론 아론의 오히려 심기만 건드릴 뿐. 차라리 병으로 서서히 자연스럽게 죽게 만드는 게 최선이다.

'업보라고 해야겠지.'

가족과 부하들에게마저 손절당하고, 끝내는 피를 갈구하며 싸우다가 사망.

어떻게 보면 소시오패스 살인마에게 가장 어울리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원작의 이야기.

이놈이 과거에 뭔 짓을 저질렀든, 이제부터 이건 내 몸이다.

그렇게 순순히 죽어 줄 생각도 없고, 몸 쪽의 자아에 휘둘려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썰고 다닐 생각도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문이나 열도록."

목소리를 내리깔고 지시했다.

나 역시 아론의 살인 충동을 경계하여 빙의 이후 줄곧 조심스레 행동하며 관찰했다.

그리고 병마 때문인지 아니면 가까운 사람들만 대면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또 여차할 때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일부러 무기를 놓고 왔다.

괜히 나이프 같은 거 챙겼다가 학살이라도 벌어지면 스토리 전체가 꼬일 가능성도 있으니.

'병에 걸렸다곤 해도 어지간한 양아치들보단 강하니까 말이지. 무기까지 들면 오히려 과잉무장이야.'

같은 이유로 지금 내가 장착한 전투 모듈도 전부 비활성화해 뒀다.

병의 진행을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로써 육체가 갑자기 폭주한다고 해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마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차 말해 왔다.

"도련님. 하다못해 제가 동행하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면 호위드론이라도 몇 기...."

"필요 없다고 했다."

내가 네 녀석의 뭘 믿고 데려가겠냐.

스팅레이 가문의 사냥개보다는 차라리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소설로 계속 접해 왔던 주인공 일행 쪽이 훨씬 더 신뢰가 간다.

나는 그녀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고, 마리아는 마지못해 차의 잠금을 풀었다. 이내 고급 승용차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나는 현기증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하차했다.

"가 보도록. 2시간 내로는 연락하겠다."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마리아는 내 고집에 못 이겨 얌전히 차를 출발시켰다.

비행형 고급 세단이 하늘 멀리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간신히 혼자가 됐군.'

마리아가 스팅레이 가문의 다른 누군가에게 동조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 다소 위험하더라도 혼자 다니는 게 옳겠지.

'슬슬 이동할까.'

내가 멀쩡하게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그러니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지.

* * *

현재 내 가장 큰 목표는 두 가지.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내 체내 나노머신이 일으킨 오작동을 수리하고 병을 치료하는 것.

다른 하나는 원작의 주인공과 조연들을 찾아내고 적당한 관계성을 맺는 것.

이건 단순히 내 개인적인 덕질을 넘어서, 현시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원작의 흐름을 맞춰 가기 위함이었다.

'후자 쪽은 적당히 아카데미에 돌아가게 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다.'

그러니 당장 찾아야 하는 것은 이 블랙마켓 어딘가에 있는 '그 녀석'이다.

'천재 모듈러 미유.'

원작의 주인공에게 '시체 먹는 자'라는 치트적인 힘을 선물해 준 기술자임과 동시에 여러 서브 히로인 중의 한 명.

의사는 아니지만 세계관 최고의 나노머신 기술자이기에, 그녀라면 틀림없이 내가 가진 병을 치료할 수 있을 터였다.

...만약 안 된다고 하면?

...아니야, 되겠지.

그런 불안감을 뒤로하고 나는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섰다.

E섹터의 블랙마켓은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렸던 이미지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온갖 나라의 언어가 뒤섞인 간판.

곳곳에서 증기가 피어오르고 구석에서 희한하게 얼굴을 치장한 마약쟁이가 좀비처럼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가게 주인들이 진열해 놓은 물건들도 평범하지 않았다.

수제 총기, 불법 포르노 정크칩 등등 일반적인 시중에선 내놨다간 잡혀가는 것들로 가득했다.

'상당히 질 나쁜 공간이군.'

그런 곳에서는 발가벗고 다니는 것보다도 오히려 나처럼 말끔하게 차려입은 쪽이 눈길을 끌기에 십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블랙마켓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행인과 상점 주인들의 눈길이 점점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개중에는 내게 불온한 의도를 품는 이들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빨리 끝내야겠군.'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이목을 끌기보단 적당한 가게 하나에서 정보를 묻기로 했다. 나는 근처에 무기를 진열해 놓은 노점상 하나에게 다가갔다.

상인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앞니 하나가 빠진 게 눈에 띄었다.

"어서 옵쇼! 뭘 찾으시나? 권총? 나이프? 칩셋? 아니면 학교에서 괴롭히는 녀석 미간에 조용히 구멍을 낼 수 있는 물건이 있는데... 그런 건 관심 없으신가?"

"뭣 좀 물어보지."

"뭐야, 내가 정보상으로 보이슈? 안 살 거라면 돌아가!"

"1만 크레딧. 쓸 만한 정보를 준다면 1만을 추가로 주겠다. 전부 현금이다."

"오호라. 생각보다 더 부유한 도련님이었구만 그래?"

1만 크레딧 정도면 빈민가 4인 가족이 일주일은 쓸 수 있는 돈이다. 물론 스팅레이 가문의 일원에게는 껌값과 다름없는 돈이었지만.

상인은 어서 돈을 내놓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고, 나는 미리 준비해 온 현찰을 그에게 전달했다. 요즘 시대에 현찰은 보기 어려운 물건이었지만 이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왔다.

"자, 그래서 원하는 정보가 뭐요?"

"이 근방에 '말하는 자판기'를 찾고 있다."

"말하는 자판기? 음료수라도 뽑아 마시려고? AI 딸린 자판기라면 저쪽으로 50미터만 걸어가도 있긴 한데 추천은 안 해. 얼마 전에 회로가 뻑 가더니, 손님한테 쌍욕을 박더라고, 개 같은 거."

"정확히는 여자 목소리를 내는 자판기다. 모든 품목은 항상 품절이고, 취급하는 물건은 전투 모듈...."

거기까지 말한 순간, 상인의 눈빛이 싹 바뀌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짚이는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더욱 강하게 추궁했다.

"당신. '미유'라는 여자를 알고 있지?"

"모, 모른다고 한다면?"

"2만 크레딧이라면 기억나겠나?"

"이, 이봐, 형씨. 내 노파심에서 경고하는데, 그 이름은 여기서 꺼내지 않는 게 좋아. 옛날 같으면 몰라도 요새는...."

"10만."

"...."

꿀꺽.

상인이 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그저 '말하는 자판기'의 위치를 말하는 것만으로 10만 크레딧이다. 군침이 돌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손사래를 치면서 내 지갑에 못박혀 있던 시선을 떼었다.

"돼, 됐어! 돈이 문제가 아냐! 받은 돈도 돌려줄 테니 어서 돌아...!"

"100만."

"히끅."

상인이 딸꾹질을 했다.

이 자식이 제정신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떠들어 대는 건가 가늠해 보는 눈빛이었다.

물론 나 역시도 100만 크레딧이라는 금액이 와닿지는 않지만,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얼마나 그에게 강한 유혹이 되는지도.

모든 거래는 돈 많은 쪽이 유리한 법.

이제 주도권은 이쪽에 있다.

"정 안 된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결정까지 3초를 주지."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는 황급히 자신의 옆에 있던 기계의 버튼을 눌러 작동시켰다. 이쪽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게 해 주는 사운드 캔슬링 장치였다.

"댁이 찾는 자판기는 저쪽 58-1 거리에 있어. 조금 뜬금없는 위치에 놓여 있으니까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됐지? 어서 돈을...."

"안내해라."

"무, 뭐?!"

"그 정보를 신뢰할 수 없다. 100만 크레딧은 네놈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게 확실해지면 넘겨주지."

"미, 미쳤어?! 거기가 어디라고 나를 끌고 가려고?! 거기는...!!"

"'혈랑'이라는 놈들의 구역이지. 안 그런가?"

"...!"

혈랑.

최근 E섹터에서 급속도로 세를 불리기 시작한 갱단의 이름이었다.

뉴 발할라 시티의 부자들을 깡그리 죽여 버리겠다는 위험한 사상을 지닌 과격파 집단. 하나의 신념으로 똘똘 뭉친 놈들이라 돈으로는 어떻게 못하는 놈들이다.

놈들은 작품 초반부에 미유가 개발한 나노머신과 모듈, 장비들을 이용하여 이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의 불법적인 거래를 주인공이 막아서면서 벌어지는 싸움이 대충 소설 도입부의 내용.

그리고 내가 찾는 '말하는 자판기'라는 것은 미유와 혈랑 녀석들이 물건을 교환하는 거래처였다.

요컨대 나는 상인에게 '100만 크레딧을 줄 테니 목숨을 걸어라'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무래도 목숨이 아까워졌는지 상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돼, 됐어! 없던 이야기로 해!"

"100만 크레딧은 없던 이야기가 될 텐데. 괜찮은가?"

"필요 없어! 제기랄, 나는 아무 이야기도 안 한 거야. 알겠어? 우리 사이엔 아무런 거래도 없었던 거라고!"

그때였다.

"어디를 가시려고? 무기상 제렌 씨."

"헉!!"

어슬렁어슬렁.

골목길 양쪽에서 다수의 인기척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수는 총 8명.

딱 봐도 질 나빠 보이는 녀석들이 우리를 천천히 포위했다.

느긋함을 유지하며 무기상에게 물었다.

"이 녀석들이 혈랑인가?"

"시, 시끄러워! 다 형씨 때문이야!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여보세요들? 뭔 이야기들을 그리 속닥거리시나? 너무너무 수상쩍게 말이야."

타아앙!

총성과 함께 무기상의 옆에 있던 사운드 캔슬러가 부서졌다. 혈랑 조직원 중 하나의 손에 꽤 그럴듯한 완성도의 권총이 들려 있었다.

'혹시 저 무기, 미유가 만든 건가?'

그렇다면 차라리 잘 됐다.

이놈들을 쓰러뜨린 다음에 적당히 구슬리면 말하는 자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지.

'괜히 이목을 끌어 봤자 좋을 거 없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다음에 취할 행동을 조심스레 정하려던 찰나.

서거억-!

손끝을 타고 짜릿한 감각이 뇌수까지 내달린다. 묘한 소리와 함께 음습한 쾌감이 동시에 전신의 세포를 자극했다.

"하아...."

짧은 황홀감.

그러다 이내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닫고서 내 오른손을 바라본다. 정확히는 내가 오른손에 쥔 물건을.

한 자루의 예리한 환도.

당연하지만 내 물건은 아니다. 이곳에 찾아올 때는 '일부러' 무기를 놓고 왔으니까.

다만 어딘가 낯이 익은 물건이었다. 어디서 본 것인지 살피다가 곧 정답을 알아냈다. 분명 조금 전까지 무기상이 늘어놓고 팔던 물건들 중 하나였다.

어째서 이런 게 갑자기 내 손에?

그런 의문을 품은 찰나-

"으아아아아아악!"

등 뒤에서 비명이 터졌다.

고개를 돌리니 그 자리에는 조각난 시체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 고깃덩이들은 분명, 조금 전까지 멀쩡히 살아 숨 쉬던 혈랑의 갱단원들이었다.

난생처음 직접 목도한 죽음.

그럼에도 내가 느낀 것은 공포나 역겨움 따위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지어지는 비릿한 미소.

그리고 뒤늦게 깨닫는다.

'제기랄, 아론. 이 미친 괴물 새끼.'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마련해 둔 여러 개의 방지책이 모조리 무용지물이 된 순간이었다.

"쯧...."

이 몸.

능력이 봉인된 거 아니었나?

아카데미 흑막 시점 3화

'이 몸, 능력이 봉인된 거 아니었나?'

적어도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해 봤을 때는 틀림없이 병의 진행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아 두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서둘러서 내가 착용한 전투용 모듈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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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al Number: AST-000

운영체제: ADAM v.2.3

사용자: 아론 스팅레이

대체율: 69.9퍼센트

장착된 전투 모듈

[신비]

[구름거미 Lv.5]-비활성

[테크 블레이드 Lv.5] - 비활성

[통상]

[스트렝스 Lv.3] - 비활성

[헤이스트 Lv.5] - 비활성

[인듀어런스 Lv.5] - 비활성

[호크아이 Lv.5] - 비활성

[뉴럴 부스터 Lv.3] - 비활성

[셀 리제너레이터 Lv.2] - 비활성

[웨폰 레코그나이저 Lv.4] - 비활성

·

·

·

활성화된 전투 모듈: 0개

비활성화된 전투 모듈: 26개

과부하: 0퍼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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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활성화된 모듈이 전혀 없어.'

내게 장착된 26종류의 전투 모듈 중에 활성화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내 병은 나노머신의 이상 작동이 원인이었다.

나노머신의 힘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이러한 전투 모듈들을 사용할수록 병의 침식이 빨라진다.

당연히 전부 전원을 꺼 두는 수밖에.

'아니, 잠깐. 그렇다는 건....'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경악했다.

지금 내가 가진 모든 전투 모듈들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인즉, 조금 전 내가 혈랑 녀석들을 칼로 단번에 썰어 버린 것은....

'이 육체가 갖고 있는 순수한 피지컬이라는 건가? 전투 모듈들의 보조를 받은 게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네.

진짜 사기적인 괴물 새끼.

아무리 스팅레이 일가의 전원이 유전자 공학의 정수로 만들어진 '완벽한 인간'이라지만, 이 녀석은 그중에서도 유독 더 괴물인 듯했다.

'진짜 이놈의 병만 아니었으면 주인공 녀석도 2권에서 죽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뒤늦게 정적이 깨졌다.

울부짖는 소리.

혈랑 놈들이 눈앞에서 벌어진 토막 살인의 충격에서 뒤늦게 헤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 새끼! '적응자'였냐고!"

"쪼, 쪼, 쫄 거 없어! 우리도 그렇잖아! 씨발, 쫄 거 없다고!"

"제기랄, 스미스! 스미스가...!"

"복수해 주마! 네놈의 몸에 박힌 사이버웨어고 장기고 탈탈 털어서 판 다음에 남은 찌꺼기만 블랙마켓 입구에 걸어 줄 테다!"

적응자.

나노머신, 그중에서도 전투용 나노머신 '아담'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여 초인이 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당연하게도 적응자는 일반인보다도 수십 배 강한 신체 능력과 특수한 능력을 얻게 되며, [신비]라 불리는 초현실적, 초자연적 괴물과도 맞설 수 있게 된다.

다만 이 세계의 나노머신 제조는 우리 스팅레이 사(社)가 95% 이상을 독점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나 '아담'은 투여대상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 녀석들이 정상적인 루트로 적응자가 됐을 리는 없겠지.'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도 이들은 미유가 제작한 사제 나노머신을 통해 적응자가 되었다는 묘사가 있었다.

나는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며, 놈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미 이렇게 일이 커진 거, 흐름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먼저 무기를 꺼낸 것은 너희들 쪽일 터다. 여태 실컷 블랙마켓의 룰을 파괴해 온 놈들이 이 정도로 우는소리를 해서야 쓰겠나?"

"이 새끼가...!"

"여기서 순순히 물러난다면 나도 쫓지는 않겠다. 이 이상 소란을 피우는 건 나로서도 사양이니까. 하지만 다른 선택지를 고른다면... 나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겠군."

물러나는 게 좋을 거라는 듯이 말은 했지만, 내 몸은 후자 쪽을 바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제기랄, 망할 살인귀 새끼.

네가 멋대로 날뛰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다. 이 몸의 주인은 이제 나다.

"죽여! 쳐 죽여 버려!"

"와아아아아아!"

놈들은 내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떤 놈은 총을 빼 들고 겨누었고, 어떤 놈은 나이프를 들었다.

또 어떤 놈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못 박힌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댔다. 어떻게 개조했는지 야구방망이가 빙빙 돌아가며 불길이 솟구쳤다.

'빠르군.'

과연. 놈들의 움직임은 평범한 인간을 벗어나 있었다.

말단 조직원의 전투력이 이 정도 수준이니, 다른 갱단들이 혈랑에게 밀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이 통하는 건 어디까지나 뒷골목 양아치들뿐이다. 굳이 뉴 발할라 시티의 뒷세계를 주름잡는 굵직한 거물들까지 끌고 와서 비교할 필요도 없다.

"이래서야 아카데미 1학년 생도들 수준도 안 되겠어."

손에 들고 있는 검이 본능에 따라 저절로 궤적을 그린다. 그 칼날이 내달리는 방향은 상대의 목.

'안 돼. 여기서 더 죽이면 스토리가 꼬일 가능성이 있다.'

어디까지나 혈랑 놈들을 처리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주인공의 역할이 되어야만 한다. 나중에 뒤탈이 없게 하려면 적당히 실력 차이만 보여 주고 여기서 끝내는 게 옳다.

피를 보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고, 검의 궤도를 강제로 수정한다. 칼날은 물리 법칙을 벗어난 듯한 움직임으로 방향을 틀었다.

간신히 목 대신 팔을 베어 냈다.

"으아아아악! 파, 팔이이이!"

내게 달려들던 세 명의 조직원들은 뒤늦게 자신들의 너덜거리는 팔을 보고서 비명을 질렀다.

사실 근육만 살짝 베어 내려고 했는데 전투는 처음이라 그런지 본능이 내 의지를 잘 따르지 않았다.

내가 의도했던 것보다는 조금 더 끔찍한 광경이 연출되고 말았다.

"경고했을 터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허어억!?"

내가 노려보자 팔을 베인 세 명이 겁에 질려 다급히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아직 전투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들은 권총을 쥔 동료의 등 뒤로 숨으며 소리쳤다.

"쏴! 저 새끼 미간을 쏴 버려!"

"뭐 하냐고! 어서 쏘라고!"

"다 닥쳐! 다 싸물란 말이야!"

총잡이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듯 보였다. 허나 그의 등을 다른 동료들이 붙잡고 있어 억지로 내게 총구를 겨누었다.

패닉에 빠진 얼굴과 달리 조준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권총사격 보정 모듈을 장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은 정확히 내 미간을 향해 날아오겠지.

그런 그를 향해 물었다.

"쏠 텐가? 정말로?"

"윽! 내, 내가 못 쏠 거 같냐고! 이 개새끼야!!"

"잘 생각해서 결정하도록. 말해 두지만 지금 네놈들에게 기회를 주는 거다."

"으아아악! 닥쳐! 닥쳐어!"

"안 들리는 모양이군."

이미 공포에 질려 판단이 흐려진 듯했다.

그 모습에 살해충동도 조금 가라앉는다. 이 녀석의 피 따위는 볼 가치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

나는 칼끝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옆을 지나쳐 그대로 블랙마켓의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혈랑 녀석들은 총을 쏘기는커녕 끝내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놈들의 옆을 스쳐갈 때 암모니아 냄새가 슬금슬금 올라왔다. 정체불명의 액체가 흘러나와 길바닥이 젖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쯧."

그 불결함에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주변 상인과 행인들이 몰래 숨어서 이쪽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내일쯤 되면 E섹터 전역에 오늘 사건의 소문이 퍼지겠지.

물론 전혀 알 바 아니었다.

E섹터의 하층민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간에, 스팅레이 가의 일원인 내게는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턱짓을 했다.

"안내해라, 무기상."

"에... 예엣?!"

"58-1 거리. 말하는 자판기."

"아, 네! 아, 알겠습니다! 네!"

무기상은 바닥에 널브러진 고깃덩이를 밟지 않게 조심하며 내 쪽으로 다급히 달려왔다.

"이쪼... 이, 이쪽입니다! 예!"

"뭐라고 하는 거지? 혀를 똑바로 놀리기 어려운가?"

"아닙니다! 죄, 죄송합니다, 나으리!"

그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길 안내를 시작했다. 어느새 호칭도 '형씨'에서 '나으리'로 바뀌어 있었다.

벌벌 떨어 대는 모습은 다소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사실 거짓말이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

모든 이의 위에 서는 것.

모든 이의 두려움을 사는 것.

그것은 아론 스팅레이라는 인물에게 있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 * *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블랙마켓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폐공장 단지였다.

아까 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다'라는 무기상의 말처럼 자판기는 다소 뜬금없는 위치에 처박혀 있었다.

"저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저 근처에서 혈랑 놈들이 자주 어슬렁거리곤 했습죠! 저희 같은 놈들은 다가오지도 못하게...."

"설명은 됐다. 가 보도록."

그러면서 나는 지갑에서 크레딧 다발을 꺼내어 무기상을 향해 대충 집어던졌다.

무기상은 바닥에 떨어진 지폐를 허겁지겁 주운 뒤, 황송하다는 듯 꾸벅 허리를 숙이곤 도망쳤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자판기 쪽으로 다가갔다.

전투 모듈을 파는 하얀색 몸체의 자판기. 그리고 모든 물건에 '품절'이라는 표시.

소설에서 읽었던 묘사와 전부 정확하게 일치했다.

[죄, 죄송해요오... 무, 물건들이 전부 팔려 나가서어... 다, 다음에 다시 와 주시면 가, 감사할 거예요오....]

자판기에서 자존감이라고는 1그램도 없어 보이는 여성의 음성이 재생되었다.

이 역시 소설 속 묘사 그대로. 내가 찾던 녀석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걸 어떻게 열더라....'

분명히 버튼을 어떻게 차례대로 누르면 비밀 통로가 나타난다 했던 거 같은데.

머릿속으로 소설의 내용을 되살려 보는 것도 잠시, 만사가 귀찮아졌다. 조금 전 칼부림을 벌여서 그런지 컨디션이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었다.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손을 자판기 틈새로 무작정 비집어 넣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으드드드드드득-!

[지, 지금 뭐 하는 건가요오...?! 다, 당장 그만... 아, 아니 저 같은 게 명령하는 건 아니고... 죄, 죄송합니다만 그런 과격한 짓은... 그게....]

당황했는지 어버버하는 목소리가 자판기에서 흘러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더 강하게 주었다.

이윽고 우지끈! 하는 소리와 동시에 자판기의 앞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내부 기계장치 따위가 아닌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 통로였다.

"쿨럭, 쿨럭!"

제기랄.

조금 전까진 괜찮다가 또다시 그놈의 기침이 도졌다. 폐가 가위에 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이물질을 토해 냈다. 피에 젖은 금속쪼가리 몇 개가 손수건에 달라붙었다.

"허억...."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기력을 잃기 전에 진정제 몇 알을 꺼내어 물 없이 삼켰다. 그런 뒤 벽을 짚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발짝. 한 발짝.

비틀거리며 내려간 지하통로 끝에서는 창백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불빛의 근원을 향해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하지만 흐릿해지는 시야 때문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화학약품과 기름 냄새 같은 게 섞여서 더욱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우당탕탕!

어디선가 크게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어째서인가 진정제가 제대로 듣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대충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

"모듈러... 미유...!"

최대한 목청을 높인다고 낸 목소리는 죽어 가는 쥐새끼의 울음소리와 닮아 있었다.

묘하게 자존심이 구겨지는 느낌이었으나,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도움... 을... 쿨럭! 요청... 한다...!"

비틀.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더니 시야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어느새 신경까지 죽어 버린 것인지 바닥에 부딪히는 충격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괘, 괜찮으신가요오...?!"

그 대신 포근하고도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 몸을 받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힌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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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달성]

천재 모듈러 '미유'를 만났다.

업적 포인트: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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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시스템 메시지가 시야를 가렸다.

허나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4화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정신을 차리자, 시야에 낯선 '무언가'가 들어왔다. 물론 그것은 '모르는 천장' 같은 진부한 것이 아닌, '정체불명의 시스템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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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달성]

천재 모듈러 '미유'를 만났다.

업적 포인트: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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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포인트?'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에서는 등장한 적 없는 명칭이었다.

하지만 나름 웹소설 편력이 긴 나였기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 이게 내 특전인가.'

종종 웹소설에 빙의한 캐릭터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능력, 혹은 치트라 불러야 좋을 그것.

나 역시 그러한 빙의자(?) 중 한 명이 된 만큼 특전이 주어진 모양이었다.

'당장 어디에 쓰는 건지는 알 수 없고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또 얼마나 유용할지도 모르겠지만... 뭐,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포인트'라는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모아서 특별한 아이템을 구매하는 화폐처럼 쓰거나, 혹은 일정 수치 이상을 모으면 보상을 얻는 시스템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또한 업적의 내용으로 짐작해 보자면, 내가 원작 스토리에 관련된 인물과 관계를 맺거나 중요한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포인트를 얻을 수 있을 듯했다.

'특전은 빙의물 주인공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지. 날 이 세계에 데리고 온 존재도 그럴 요량이려나?'

뭐,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흐름이라 놀랄 이유는 없었다. 어찌 되었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조금 더 조사가 필요하겠지.

솔직히 말해서 당장은 '업적 포인트'니 뭐니 전혀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내가 해결해야 할,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니까.

그것은 바로.

'미유는 어디에 있지?'

내 최애 중 한 명을 알현하는... 아, 아니, 이 세계에서 내 목숨을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그녀의 모습을 찾았다.

주변은 온통 정체불명의 기계장치와 수술 도구로 가득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모니터에 심박수를 비롯한 누군가의 생체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 몸에 대한 정보였다.

한 발 늦게 내가 누워 있는 곳이 수술용 침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치과에 가면 놓여 있는 것과 똑같이 생겼다.

'그 녀석이 날 여기까지 옮긴 건가?'

내가 쓰러진 곳은 분명 입구 근처였으니까 말이다. 자세히 보니 몸 이곳저곳에 전극이 연결되어 있었다.

미유가 날 여기까지 옮기고서 검사를 하고 있었다고 추론하는 게 타당하겠지.

'그러다 내가 깨어날 기미가 보이니까 겁먹고 도망친 거겠고.'

아직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지만, 나는 그 녀석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지닌 주제에 자존감은 바닥.

낯선 이를 극도로 경계하는 탓에 이런 연구실에 처박혀서 밖에는 나가지도 않는다.

입구가 자판기로 위장되어 있던 것 역시, 그녀가 손님을 직접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방구석 폐인의 끝판왕인 녀석이니,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밖으로 도망치지는 않겠지.'

즉, 이 근처에 숨어 있을 뿐.

나는 시선을 돌려서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 틈새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10초도 되지 않아, 방의 한쪽 모퉁이에서 파들파들 떨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찾았다.'

내가 발견한 것은 '기계 몸체를 지닌 뱀' 같은 무언가.

하지만 그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나는, 몸에 연결된 전극들을 떼어 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기계 뱀이 당황한 듯 머리를 다급히 흔들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뱀 주변에 쌓인 물건들을 이리저리 치우자,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작은 몸집의 예쁘장한 여자애였다.

"드디어 만났군, 미유."

"...?!"

그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구석에서 발견한 여자아이는 내가 내뱉은 한마디에 기절하기 직전까지 몰린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찬찬히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푸른빛 도는 검은 장발은 허리를 넘어서 발목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고, 푸른 눈동자는 겁에 질린 듯 울먹이고 있었다.

조금 전, 뱀을 닮았다고 했던 기계장치는 그녀의 엉덩이 꼬리뼈와 이어져 있었다.

"이건 위험하니 치워 놓도록 하지."

나는 그녀가 손에 꽉 쥐고 있던 스턴건을 강제로 빼앗아 다른 곳에 휙 던졌다.

물론 '거꾸로' 쥐고 있었으니 제대로 쓰지도 못했겠지만, 혹시나 자기 자신을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

호신용 무기까지 빼앗긴 미유의 얼굴은 더더욱 공포로 질렸다.

이제 마지막 수단까지 빼앗겼다고 생각했는지, 급기야 두 손을 모아 빌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죽이지 말아주세요!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오!"

"...뭐라고 했지?"

"죄, 죄송해요! 시, 실언이었어요! 용서해 주세요오...!"

파들파들 떨어 대는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계속 골려 주고 싶은 욕망이 일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줄곧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인물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이돌을 실제로 영접한 팬의 마음이 이러한 것일까.

원래의 나였다면 흥분을 주체 못 하고 환호성을 질러 대거나 입이 귀에 걸려서 내려오질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아론 쪽의 자아가 그런 경박스러운 행동을 막아주고 있었다.

후우, 짧은 한숨으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안심해라. 널 해하려는 생각은 없다."

만에 하나라도 이 빌어먹을 몸이 충동을 못 이기고 이 녀석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낸다면 차라리 손을 자르고 말리라.

"...저, 정말인가요오?"

"그래. 나는 그저 이 지긋지긋한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 네게 왔을 뿐이다."

"제, 제네틱 오버캐스트(Genetic Overcast) 말씀이신가요오...?"

"역시 내가 기절한 사이에 검사를 끝낸 모양이로군."

"죄, 죄송해요! 때리지 말아 주...!"

"안 때린다. 딱히 나무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가 빨라져서 나로선 좋은 일이... 쿨럭!"

다소 흥분했던 탓인지 기침이 다시금 시작되려 했다.

그러자 미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몸을 받쳤다.

"괘, 괜찮으신가요?"

"콜록! 콜록!"

"이, 이쪽으로... 조심해서...!"

그녀는 나를 부축하여 다시금 수술용 침대로 끌고 갔다. 아론의 에고는 누군가가 내 몸에 닿았다는 것에 큰 거부감을 느꼈지만, 내가 그것을 강제로 억눌렀다.

미유는 나를 침대에 눕힌 뒤 다시금 전극들을 연결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 나노머신들은 사용자의 정보를 유전자 단위로 분석해서 스스로의 코드를 구성하며 진화해요... 하, 하지만 이론상 천문학적인 확률로 그 과정에서 에러가 발생해서... 그게...."

"그래. 사용자를 죽음으로 이끌지."

인체를 스마트폰에 비유하자면, 나노머신은 시스템의 기반이 되는 OS고, 모듈은 어플리케이션이다.

가령 '합금 골격'이라는 모듈을 장착하면 빠르면 몇 초에서 느리면 며칠 내에, 나노머신은 모듈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용자의 뼈를 합금 재질로 바꿔 놓는다.

반대로 그 모듈을 제거하면 나노머신은 사용자의 재생능력을 증폭시켜서 원래의 뼈를 돌려놓는 방식.

하지만 그 인체 개조와 재생의 모든 과정을 관리해야 할 나노머신이 오작동을 일으킨다면?

폐에서 특수금속 재질의 뼈가 자라난다든가, 재생되어야 할 피부가 다시 생기지 않아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다든가 하는 치명적인 문제를 발생시킨다.

내 경우는 눈에 띄는 외형의 변화는 없었지만, 몸 곳곳에서 금속이 자라나는 게 증상이다.

지금은 꾸준하게 체내 이물질을 녹이는 억제제를 복용하고 있다. 그 덕에 기침할 때마다 호흡기 쪽이 조금 너덜너덜해지는 정도로 끝났다.

하지만 만약 심장 대동맥 쪽에서 금속이 자라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겠지.

"주치의는 불치병이라고 하더군."

제네틱 오버캐스트.

그것이 내가 겪는 질병의 이름.

아니, 그조차 사실은 정식적인 병명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질병이었으니.

스팅레이 사(社)는 자신들이 만들어 낸 전투용 나노머신 '아담'이 완벽하다고 광고한다. 그러니 그런 병도 실재하지 않는 거짓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들은 천문학적 확률을 뚫고 발생하는 환자들을 비밀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막대한 연구비를 들여서 극소수 환자들의 치료법을 개발해 내느니, 그냥 그 환자들 자체를 없던 것으로 해 버리는 편이 싸게 먹히니까.

'가문의 장남이라도 예외는 아니지.'

하물며 이것은 아론 스팅레이라는 자신들이 낳은 괴물을 자연스럽게 처리해 줄 기회였다.

만약 비밀리에 개발된 치료법이 있다고 해도 내게는 써 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즉,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눈앞의 저 겁 많은 여자애뿐이다.

"모듈러 미유.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이 병을 네가 치료할 수 있나?"

원작에서 미유는 그녀가 가진 기술로 거의 다 죽어 가는 주인공을 막강한 치트 능력을 보유한 적응자로 되살렸다.

그러니 그녀라면 내 병을 치료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만약 안 된다고 하면 나는 죽는다.'

애당초 내가 세운 모든 계획은 '미유의 기술로 내 병을 고친다'라는 전제 아래에서 성립하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세게관 최고의 나노머신 기술자인 그녀가 '불가능하다'라고 판단한다면 이 이상 손 쓸 방도가 없다.

아카데미에 가는 것도, 거기서 주인공과 다른 등장인물들을 만나는 것도, 그들의 행보를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는 것도 전부 불가능해진다.

"...솔직하게 답해 주길 바란다. 나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긴장된 마음으로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의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저... 그, 그게...."

미유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요동쳤다.

그 흔들림이 단순히 낯선 사람 앞에서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내 희망을 짓밟을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곧 그녀는 내게 판결을 내렸다.

"고, 고칠 수는 있는데요오...."

아아.

순간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분명히 팔짝 뛰며 좋아해도 모자랄 상황인데도, 나는 그저 묵묵하게 안도할 뿐이었다.

그런 그때.

미유가 뒷말을 덧붙였다.

"그,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있어서요오...."

"문제? 돈인가? 사례금이 필요한 것이라면 얼마를 원하든 그 2배의 액수를 준비하도록 하지."

"아, 아뇨! 돈은 그렇게까진 필요하지 않아서... 주신다면 받겠지만 그 문제는 아니고요오...."

미유는 양손을 앞으로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녀의 기계꼬리도 함께 머리를 흔들며 그녀의 뜻을 강조했다.

"그, 그게... 첫째로는 치료 후에 지금 사용하고 계시는 모듈들을 대부분 못 쓰게 되실 텐데... 괜찮으신가요오...?"

"못 쓰게 된다? 어째서지?"

"이, 이미 제네틱 오버캐스트를 일으킨 체내 나노머신을 고치는 건 불가능해서요오... 아마 '판도라'를 주입하는 방법밖에... 앗! '판도라'라는 건 제가 개발한 '나노머신'의 이름인데...."

"그렇군."

이미 알고 있다.

원작의 주인공 '셰이드'를 구한 것 역시, 그녀가 직접 개발한 '판도라'라는 사제 나노머신이었다.

"그, 그게…요오... 정확히 원리를 설명하자면...."

"그건 됐다."

어차피 전문용어를 떠들어 봤자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미유는 자기 전문분야가 나오면 몇 시간이고 흥분해서 떠들곤 하는 녀석이다.

몸이 멀쩡하면 모를까, 아무리 내가 그녀를 좋아해도 지금은 그걸 듣고 있어 줄 여유가 없었다.

"요컨대 지금 내 몸에 있는 나노머신 '아담'을 대체한다는 의미로군. '아담'에 맞춰진 전투 모듈들이 '판도라'에 완벽하게 호환되리라 기대할 순 없겠지."

호환성은 중요한 문제다.

같은 '아담'을 주입받은 적응자라도, 사용자에 따라서 특정 모듈을 사용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크게 갈리니까.

나는 빠르게 결정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깝긴 했다.

지금 내가 장착한 26개 전투 모듈들의 총합 레벨은 100이 넘어간다. 대부분 특별한 성능을 지닌 '신비' 모듈이 아닌 '통상' 모듈이긴 해도, 하나같이 최고급의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것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원작에서 아론이 보여 주었던 무시무시한 무력을 전부 잃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까."

목숨과 힘.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전자다. 능력이야 다시금 키우면 그만이지만 목숨은 잃으면 되찾을 수 없다.

'애초에 그림의 떡이기도 했고.'

이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병마의 침식을 막기 위해서 장착 모듈들은 전부 비활성화해 두었다.

어차피 사용하지도 못하는 힘에 집착할 필요도 없었다는 거다.

또한 아까 혈랑 놈들을 상대로 확인해 본 바, 이 몸은 전투 모듈이 없는 상태로도 어지간한 적응자들은 일격에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다.

힘의 공백은 걱정할 필요 없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혹시 모르지. 새로운 힘을 각성할 수 있을지도.'

원작의 주인공 셰이드는 미유의 '판도라'를 통해 특별한 힘을 각성했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지금의 '아담' 대신 '판도라'로 나노머신을 대체하면 무언가 특별한 힘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여러모로 따져 보아도, 현재 가진 전투 모듈들을 포기하고 병을 치료하는 게 훨씬 이득....

'아니, 잠깐.'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나는 허공을 노려보며 여러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려 보는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포인트 상점.'

내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자 새로운 창이 시야에 떠올랐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 '200 Point'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상점에 올라와 있는 목록들을 빠르게 살피고, 속으로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약해진다고?

그런 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5화

포인트 상점에 올라와 있는 판매 품목의 종류는 손으로 셀 수 있는 정도였다.

눈으로 슬쩍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무엇이 가장 유용한 물건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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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 상점 Lv.0]

[모듈 호환성 상승 티켓]

Price: 3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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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다...!'

이것만 있으면 내가 지금 가진 모듈들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 호환되는 쓸 만한 전투 모듈들을 새롭게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뿐이랴.

'더 사기를 치는 것도 가능하지.'

가령 성능은 좋지만, 호환이 되지 않아 장착하지 못하던 모듈들도 쓰는 게 가능해진다.

'이거 완전 주인공 능력이잖아?'

원작 소설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의 주인공 '셰이드 웰즈.'

그 청년은 미유의 나노머신 '판도라'의 적응자가 되면서 정체불명의 신비모듈, [시체 먹는 자]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모듈의 호환성을, 장착 및 사용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려 주는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이 세계에서 적응자의 힘은 모듈에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RPG로 말하자면 장비 아이템.

장착한 모듈이 얼마나 강한가?

장착한 모듈이 몇 개인가?

장착한 모듈에 얼마나 적응했는가?

그것들의 조합과 수치에 따라서 강자와 약자가 갈린다.

그러니 주인공의 [시체 먹는 자]를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 비유하자면, 모든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웨폰 마스터'라고 할 수 있다.

'즉, 만약 내가 이 티켓의 상점을 이용해서 [시체 먹는 자] 모듈을 내 것으로 삼는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을 비웠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강해지는 건 좋지만, 그것은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수준이면 충분하다. 이것저것 욕심을 내다간 틀림없이 원작의 아론처럼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하는 빌런으로 전락해 버리겠지.

'그건 내가 바라는 루트가 아니다.'

뭣보다 [시체 먹는 자]라는 모듈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그에게 남겨 주신 유품이었다.

히로인들뿐만 아니라 주인공 역시 내 최애 캐릭터 중 하나다.

굳이 그의 원한을 사면서까지 강해지고 싶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 몸은 강하다.

매우 차고 넘칠 만큼.

'티켓은 판도라를 이식받고서 최대한 빨리 잃어버린 힘을 되찾는 용도로만 쓰자. 스팅레이 가문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미유가 옆에서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아, 아론 씨...?"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조금 시간을 소모한 탓이다. 미유에게는 내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린 것처럼 느껴졌겠지.

나는 포인트 상점창을 닫고 다시금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판도라를 이식받았을 때의 다른 문제는 뭐지?"

"그, 그게...."

미유의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지, 지금 '판도라'의 재고가 다 떨어져서요오...."

"...뭐라?"

미간이 저절로 좁혀지는 이야기였다.

미유는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보고서 또다시 움츠러들어선 "히익! 죄송해요! 죄송해요!"하고 사과를 해 댔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최대한 온화한 목소리와 표정을 가장하며 말을 이었다.

"널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재고가 다 떨어졌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을 뿐이다."

"그, 그게... 혀, 혈랑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재고를 다 가져가셔서요...."

혈랑이라면 아까 블랙마켓에서 나를 습격해 온 녀석들이다.

미유가 만든 나노머신과 각종 모듈, 장비들을 상납받고 있던 녀석들이지.

뭐, 다 좋다. 원래 스토리가 그러니까.

근데 하필이면 내가 이곳에 찾아온 시점에 물량이 다 떨어졌다니.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있나.

'어떻게 하지? 그놈들 아지트로 쳐들어가서 놈들이 쌓아 놓은 걸 빼앗아 와야 하나?'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했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아까 조직원 몇 놈을 썰어 버리면서 불필요한 접점을 만든 참이다.

안 그래도 스토리가 궤도 이탈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완전히 본거지까지 부숴 버린다?

확실하게 스토리를 뒤집어엎을 생각이 아니라면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놈들을 쓰러뜨리는 건 내가 아니라 주인공이어야만 한다.'

원작의 주인공 '셰이드 웰즈'는 미유의 손에 목숨을 건진 뒤, 그녀가 혈랑 놈들에게 속아서 무기를 납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그에 분노하여 새롭게 얻은 힘을 이용하여 조직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미유에게 현실을 알려 준다.

그것을 계기로 미유는 주인공과 함께하며 스스로 세상을 마주할 용기를 가지게 된다.

'훗날을 생각하면 절대 스킵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에피소드야.'

물론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그 갱단 놈들을 쓸어버리고 싶다.

허나 놈들은 이 몸의 살인 충동을 채워 줄 먹이가 아니라, 주인공과 미유를 성장시켜 줄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서 미유에게 다시 물었다.

"새롭게 판도라를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걸리지?"

"어... 대, 대략 한 달 정도요오...."

"오래 걸리는군."

숨이 덜컥 막히는 수치다.

과연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원작에서야 그때까지도 살아 있었지만, 그것만 믿고 이 고통을 계속 견뎌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 진짜 죽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미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제가 그분들에게 한번 부탁해 볼까요? 남는 나노머신을 하나만 양도해 주실 수 있을까 하고...."

"됐다."

곧장 거절했다.

미유는 놈들이 악당 조직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또한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그 조직원들을 3명이나 썰어 버렸다는 사실도.

그러니 머리 숙여서 부탁하면 들어줄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다.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다.

'어떡해야 좋을까....'

가급적 스토리를 건드리지 않고 내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

고민을 이어 가던 찰나, 미유가 무심결에 중얼거린 한마디가 내 뇌리를 강타했다.

"셰이드 씨에게 투여한 앰풀이 마지막이었는데 말이죠...."

뭐라고?

순간 숨이 멎었다.

내가 세워 놓았던 모든 계획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내가 잘못 들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유에게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네?"

"'셰이드'라는 게 설마 '셰이드 웰즈'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미유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희망을 확실하게 박살 내듯이.

"어? 셰이드 씨를 아시나요?"

알다마다.

셰이드, 셰이드 웰즈.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의 주인공.

원래라면 지금 시점에서 미유는 그를 알아선 안 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와 면식이 있는 듯했다.

"너야말로 어떻게 그 녀석을 알지?"

"나, 나흘 전에 갑자기 찾아오셔서 도움을 요청하셨어요. 그래서 그분이 원하시던 대로 나노머신 앰풀을 투여해 드렸는데...."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나?"

"어... 혈랑 분들과 대화를 해 보겠다고 하시면서 떠나신 뒤에 돌아오지 않으셨는데요... 서, 설마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잘못한 게 없다.

주인공에게 판도라를 투여해서 적응자로 만드는 것, 각성한 주인공이 혈랑 놈들과 한판 붙으러 떠나는 것.

모두 원작대로다.

다만 이상한 점이 세 개 있었다.

첫째는 미유의 증언.

'원래 주인공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미유에게 목숨을 구원받는다. 하지만 미유는 주인공이 직접 찾아왔다고 했어.'

둘째는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주인공과 미유가 만나는 것은 최소 2주 뒤여야 한다.'

원래대로라면 두 사람이 만나는 시점은, 원작의 본 무대가 되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입소일 2주 전. 그리고 현시점은 아카데미 입소일까지 한 달이 남았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2주 뒤에나 벌어질 일이 나흘이나 전에 일어난 것이다. 내가 빙의한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셋째로 주인공의 행방.

미유 말대로 주인공이 적응자가 된 시점이 나흘 전이라면, 진즉에 혈랑 놈들은 각성한 주인공의 손에 괴멸당해서 사라졌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놈들은 멀쩡하게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진즉에 갱단 토벌을 끝내고 돌아왔어야 할 주인공 녀석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내 빙의에 의한 나비효과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가?

여러 가설을 떠올려 봤지만 빙의한 이후로 줄곧 며칠간 방에서 골골거리기만 했던지라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이 있긴 하지만, 그 역시 확인할 방법은 없다.'

결국 고민해 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론 씨?! 지금 일어나시면...!"

"놈들의 아지트는 어디지?"

"놈들이라니요...? 아, 아론 씨, 설마 지금 이런 몸 상태로 그분들한테 가시려는 건 아니겠죠?! 아, 안 돼요! 그분들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아지트."

나는 짤막하게 그녀를 재촉했다.

미유는 차마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울먹거리며 망설였다.

그러던 그때였다.

삐릭!

미유의 시선 앞에 홀로그램 창이 하나 떠올랐다. 거기에서 말하는 자판기, 즉, 미유의 연구실 입구를 찍은 CCTV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그 부르주아 새끼가 여길 찾고 있었다는 거지?

-그래, 틀림없어. 그 모듈러 년을 찾고 있는 거 같았어.

-자판기가 망가져 있다. 여기에 다녀간 게 분명한 모양이다.

-조심해. 아까 칼 하나로 순식간에 우리 애 세 명이 당했어.

"저건...!"

혈랑의 조직원들로 보이는 5인방.

아까 블랙마켓에서 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장 상태가 훌륭했다. 아마 내게 복수하겠다고 온 거겠지.

"마침 잘 됐군."

굳이 미유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어졌다. 여전히 몸 상태가 안 좋긴 하지만 아예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진통제를 한 알 더 꺼내어 삼켰다. 그러고선 미유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치지 않게 숨어 있어라."

곧 난장판이 벌어질 테니까.

* * *

E섹터 28번 공업지구

몇 년 전에 도산한 스마일 사(社)의 합성 식품공장은 신흥 폭력갱단 혈랑의 아지트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는 합성단백질 식품 대신 모듈러 미유가 만든 각종 무기와 나노머신 앰풀이 쌓여 있었다.

또 다른 쪽에는 그들이 아무렇게나 버린 폐주사기와 술병, 음식물쓰레기들이 썩어 가며 악취를 풍겼다.

참으로 불결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지만, 이미 그 공간에 익숙해진 갱단원들은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는 신장이 2m를 훨씬 넘을 듯한 거한이 낡아빠진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눈알.

정확히는 아까 전 아론의 손에 의해 고깃덩이로 바뀌어 버린 갱단원의 인공안구였다.

"...됐군."

거한은 커다란 손으로 인공안구에 전선을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인공안구를 통해 검을 쥔 한 남자의 얼굴이 영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와 황금색 눈동자.

창백한 피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위태로움을 품고 있었으나, 그 미형의 얼굴에서는 절대 꺾이지 않을 강단과 예리함이 흘러넘쳤다.

그 남자는 아론 스팅레이었다.

"이 녀석인가? 우리 애들을 그 꼴로 만든 게?"

"그런 거 같습니다, 보스."

"흐음...."

보스라 불린 거한은 영상에 비친 아론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서 본 얼굴 같군."

거한은 곧장 경찰용 시민 ID 데이터베이스 파일을 열람해서 영상 속 남자의 얼굴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운 좋게 손에 넣은 물건이었다.

몇 초도 되지 않아 검색 결과가 나왔다. 그것을 본 거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대박이군."

함께 결과를 본 갱단원들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뭐? 아론? 그럼 황제의 아들이잖아!

-부르주아 돼지 새끼! 그 새끼가 우리 동료를 죽인 거였다니!

-복수해야 해! 자본가들에게 죽음을!

"조용."

거한은 부하들을 한마디로 입 다물게 했다. 그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부하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숨을 죽였다.

아지트가 조용해지자, 거한은 다시금 아론의 영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론 스팅레이.

이 도시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스팅레이 재벌의 첫째 아들.

모종의 문제로 한동안 외부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었는데,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이야.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보스? 바로 복수하러 갑니까?"

"...조금 기다려 봐라."

"예?! 이건 둘도 없는 기회입니다! 우릴 벌레처럼 여기는 재벌 새끼들에게 한 방 먹여 주자고요, 보스!"

"시끄럽다."

아무리 갱단이 커졌어도 스팅레이 가문을 상대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싸움을 거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부하들을 잃고서 겁먹은 생쥐처럼 아지트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그의 성미에는 맞지 않았다.

복수와 신념인가.

아니면 조직의 안전인가.

거한은 덩치에 맞지 않는 신중함으로 심사숙고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애들 준비시켜라."

"그 말씀인즉...?"

"오늘, 우리는 황태자를 죽인다."

"예!"

거한의 한마디에 혈랑의 갱단원들은 신이 나서 무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씨익 웃었다.

스팅레이의 황태자를 죽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결정을 내리는 건 불가능했겠지. 만약 며칠 전 '녀석'이 난데없이 찾아와 주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게 다 네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이름은 기억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거한은 아지트 한쪽 구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갈기갈기 해체된 남자의 시체가 한 구 놓여 있었다.

그 시신은 한때.

'셰이드 웰즈'라 불리던 남자였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6화

사흘 전이었다.

여느 날처럼 조직과 사업의 성장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니던 그때, 난데없이 아지트가 급습을 당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조직원 몇 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단단히 세워 두었던 바리케이드가 깡그리 부서져 버렸다.

혈랑의 보스, '빅 데이비드'는 처음에 그것을 적대 세력의 소행이라고 판단했다.

최근 E섹터의 블랙마켓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혈랑에게 위기감을 느낀 경쟁자들이 벌인 테러라고.

갑작스런 사태이긴 했으나, 리더인 데이비드의 판단은 빨랐다.

겉모습만 보고 그를 근육 바보로 여기는 이들은 많았지만, 실제 그는 꽤나 머리 회전이 빨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생 갱단을 수백 명의 부하를 보유한 거대조직으로 키운 남자였으니까.

데이비드는 재빠르게 혼란을 수습하고 부하들을 지휘하여 어떻게든 습격자를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다.

놀랍게도 범인은 단 한 명이었다.

그것도 20살 남짓한 말라깽이 청년.

-뭐 하는 새끼냐, 넌?

빅 데이비드는 거대한 손으로 청년의 머리칼을 움켜쥐며 물었다. 청년은 겁을 잔뜩 먹고서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 안 할 건가?

-김... 아, 아니, 셰이드 웰즈....

-셰이드 웰즈?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어째서 우릴 습격했지? 누가 내린 명령인가? 올리버 패밀리? 아니면 짭새 쪽인가?

-죄,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만...!

-누가 시켰냐고.

-저, 저 혼자... 그, 단독... 아니...!

-네가 혼자 꾸민 일이다? 왜? 우리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졌나?

-아, 아아... 으흐흐흑...!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셰이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울부짖었다.

데이비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지트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날뛰던 녀석이 갑자기 찌질이처럼 변해 버리다니.

-사, 살려 주세요!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제발, 다시는 실수 안 할 테니까...!

-이상한 새끼군.

데이비드는 셰이드의 애원을 코웃음으로 받아쳤다. 그러던 그때, 부하가 보고를 해 왔다.

-보스. 이 새끼 모듈 장착 상태가 좀 이상한데요?

-뭐가 이상하지?

-신비모듈 몇 개를 포함해서 별별 희한한 걸 동시에 다 끼고 있는데요? 서로 성능이 반발하는 것들도 있고... 보통은 이런 식으로 끼고 있으면, 성능이 안 나오는 건 둘째치고, 높은 확률로 뒈짐다.

-호오.

빅 데이비드는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셰이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차가운 시선에 만신창이가 된 그의 얼굴에 공포가 깃들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지?

-아마 이거 때문인 거 같슴다.

부하가 태블릿을 내밀며 화면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정체불명의 모듈의 3D 청사진이 느린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이 모듈이 중심이 되어서 다른 모듈들의 호환성을 조절해 주고 있는 거 같습니다. 더 자세한 건 더 연구해 봐야겠지만....

-뭔가 문제가 있나?

-조금 과격하게 진행해도 됨까?

과격하게.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까놓고 말해서 연구 중에 죽여 버려도 상관없냐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빅 데이비드의 대답은 간결했다.

-진행해.

* * *

"마, 말도 안 돼... 웰즈 씨가...!?"

함께 영상데이터를 확인한 미유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여러모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혈랑에게 무기를 지급한 것도, 셰이드를 적응자로 만들어 준 것도 그녀였으니까.

"이게 끝인가?"

나는 영상을 종료시키며 물었다. 그에 눈앞의 녀석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렇습니다!"

"저희한테 저장된 영상은 그게 답니다! 부, 부족한 게 있으면 뭐든 아는 대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 주십쇼... 크흐흑!"

내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는 녀석들은 날 노리고 찾아온 혈랑의 암살자들.

녀석들은 5분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지만, 몇 명만 본보기로 제압해 주고 나니 금세 얌전해졌다.

지금 나는 놈들의 사이버네틱스(전자두뇌) 장치에 저장된 기록영상을 공유받아 미유와 함께 확인한 차였다.

그리고 끔찍한 진실을 마주했다.

주인공, 셰이드 웰즈가 죽었다.

-뭔 이런 괴물 새끼가 다 있어?!

-분명 소문으로는 불치병이라고 했잖아! 노리려면 지금이 기회라면서!

-레벨 2 강화 외골격을 맨손으로 부숴 버리는 놈이 어딜 봐서 환자인데?!

-나 허벅지 뼈가 완전히 으스러진 거 같아. 죽을 거 같아....

-나, 나도 마찬가지야....

-쉿, 아론 스팅레이는 망나니로 유명하댔어! 성질 더러운 놈이니 괜히 심기 거슬렸다간 우리도 죽는다고!

주인공이 죽었다는 사실에 슬퍼할 틈도 없었다. 놈들끼리 자체 통신망으로 나누는 대화가 내 시야 구석 UI에 떠올랐다.

수상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싶어 해킹 관련 모듈을 잠시 활성화했는데, 이걸 보니 그럴 걱정까진 할 필요 없을 듯했다.

나는 조금 안심하면서 해킹 모듈을 다시금 비활성화했다. 이놈의 불치병 때문에 모듈을 계속 사용하는 건 몸에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다만 여전히 경계는 풀지 않은 채 녀석들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영상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지? 거기, 네놈이 대답해라."

"ㄴ... 네?! 저요?!"

"거짓말했다간 이 영상 속 셰이드라는 녀석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주지."

물론 진심이었다.

아직 내가 놈들의 머리를 으스러뜨리지 않은 것은 내 옆에 미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순진무구한 아가씨한테 트라우마를 심어 줄 수는 없으니.

그러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

이 새끼들을 잘게 다져 놓는 일은.

"빨리 답해라."

"그, 그러니까...."

놈이 설명하길, 혈랑의 엔지니어 단원이 셰이드를 산 채로 해부해서 연구했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비정상적'인 모듈 장착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 후, 얼추 정보를 얻어 낸 그들은 셰이드가 끼고 있던 대량의 전투 모듈들을 꿀꺽했다고 한다.

"보스가 먼저 자기가 쓸 모듈 몇 개를 챙겨 가고선 나머진 부하들한테 뿌렸습니다. 꽤 성능이 괜찮은 것들이 많았던 덕에...."

놈이 말을 흐렸다.

요컨대 셰이드가 끼고 있던 모듈들을 빼앗은 덕에 전투력을 대폭 끌어 올릴 수 있었다는 거지.

"아아...."

옆에 있던 미유의 표정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그러더니 크게 휘청거렸고, 나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었다.

"괜찮나?"

"아... 죄, 죄송해요오...."

"정 힘들다면 듣지 않아도 괜찮다."

"아, 아뇨. 저도 책임이 있어요...."

"...마음대로 해라."

폼 잡으며 말하긴 했지만, 사실 나 역시 그렇게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몸 상태도 썩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모은 정보가 가리키는 진실의 방향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셰이드가 나와 같은 빙의자였다고?'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지만, 전후 상황을 따져 보았을 때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내가 아론 스팅레이가 된 이유는 퀴즈 이벤트에서 1등을 했기 때문이었다.

즉, 나 다음으로 퀴즈 이벤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사람들이 이 세계에 초대받았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멍청한 새끼....'

셰이드에게 빙의한 녀석은 자신의 입맛대로 스토리를 고치려 했음이 분명했다.

놈은 그를 위해 원작보다 이른 시점에 미유를 찾아 적응자가 되었고, 혈랑의 아지트를 습격하기 전에 미리 다양한 전투 모듈들을 준비했다.

'하지만 결국 죽었지.'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쩌면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녀석이 셰이드의 재능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 셰이드 웰즈는 성장형 천재 캐릭터다. 빙의자가 육체의 재능을 100퍼센트 발휘하지 못했다는 시나리오도 충분히 가능하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중요한 것은.

'골치 아프네.'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놈이 멋지게 죽어 준 덕분에, 내 계획들이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주인공은 없다.

이 세계는 주인공 없이 모든 시련을 견뎌 내야만 하고, 등장인물들은 주인공 없이 스스로 세계의 위기를 이겨 낼 만큼 성장해야만 한다.

차례차례 찾아오는 수많은 악당과 괴물들. 그들이 이 도시와 인류를 위협할 때, 그 싸움을 앞장서서 이끌어 갈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더 골치 아픈 점이 있다.

'나나 그 녀석 이외에도 빙의자가 있을 수도 있어.'

빙의자가 몇 명이나 될지는 모른다는 것.

하지만 감히 장담하건대 녀석들은 내게 협력하기보단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필요한 쪽으로 스토리를 바꾸려 들겠지.

그 과정에서 정해진 시나리오가 어떻게 어디로 튈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한부. 주인공의 죽음. 조연들의 성장.

빙의자. 세계의 위기. 스팅레이 가문.

시체 먹는 자. 신비. 포인트 상점.

트리니티 아카데미.

수많은 키워드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돌아다녔다. 그것들이 이리저리 부딪치며 뇌혈관을 모서리로 박박 긁어 대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야 구석으로 미유의 모습이 비쳤다.

겁을 먹은 듯한, 혹은 후회하고 있는 듯한 얼굴.

모종의 번뜩임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아직이다.'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수습할 수 있다.

나라면 할 수 있다.

이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게 이해하는 독자였던 나라면 가능하다.

흩어졌던 계획들이 점점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망설일 필요는 없다.

"모듈러 미유."

"네, 네?! 왜, 왜 그러시나요?!"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 거 같군."

"아, 아니... 저, 그게...."

"이 녀석들이 가져간 물건들을 전부 파괴해 달라는 거겠지."

"...!"

내 말에 미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자기 마음을 읽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미유'라는 인물이 어떻게 움직일지 안다.

미유는 연약한 캐릭터다.

과거의 상처로, 골방에 틀어박혀 줄곧 사람 대신 기계만을 상대해 온 소녀.

그러나 그녀는 자신감이 없고 세상을 두려워해 그로부터 눈을 돌렸을 뿐, 아예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진즉부터 혈랑의 성향에 대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애써 무시하고 있었을 뿐.

자신을 속이며 현실에서 눈을 돌리면 당장은 즐겁고 편하니까.

혈랑 녀석들이 가져다주는 크레딧과 재료가 있으면, 기존 자판기 판매만 하던 때에는 하지 못했던 연구와 제작을 할 수 있으니까.

"네 입으로 똑똑히 말해라."

그러나 이제는 바뀌었다.

미유는 현실을 보았다.

자신이 만든 물건으로, 자신이 살려 준 목숨이 사라지는 현실을.

"지금이라도 네가 저지른 실수들을 수습하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지."

"저, 저는...."

망설이는 표정.

그러나 그녀가 할 말은 정해져 있다.

"제, 제가 감히... 아론 씨께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 건...?"

"내 전속 모듈러가 되도록."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

"말 그대로다. 네가 앞으로 내 지시에만 따라서 모듈을 제작하고, 관리할 것을 약속하면 도와주지."

"어, 네? 그게 무슨...?"

미유는 당황스럽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앞으로의 행보를 위해서라도, 그녀의 활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미유의 기술은 위험하다.'

본인은 여전히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그녀가 가진 기술 중 몇 가지는 뉴 발할라 시티를 근간부터 뒤틀어 버릴 수도 있다.

원래라면 주인공과의 교류로 정신적으로 성장하며, 자신이 지닌 기술의 위험성을 깨달아 가야겠지만... 그 역할을 해야 할 녀석이 죽어 버렸으니.

'내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다른 빙의자도 미유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녀석들이 애먼 짓을 하기 전에 미리 손을 써 두는 게 좋겠지.

'미유뿐만이 아니다.'

내가 모두 처리할 수밖에.

죽어 버린 주인공이 해야 할 일.

그리고 또한 아론 스팅레이라는 악역으로서 해야 할 일.

주인공과 빌런.

두 개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거다.

완벽하게. 빈틈없이.

"마지막으로 묻겠다. 거래하겠나?"

다시 한번 미유를 돌아보며 물었고.

미유는 결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 할게요!"

"거래 성립이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모듈 온라인. [구름 거미]."

비활성화해 두었던 각종 모듈 중 하나를 다시금 가동했다. 그와 동시에 내 손에는 검은 가죽장갑이 씌워졌다.

장갑을 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 본다.

희한할 정도로 익숙한 감각이었다.

아마도 아론의 기억 덕분이겠지.

"분명... '빅 데이비드'라는 놈이었지."

혈랑의 리더, 빅 데이비드.

놈은 대가를 치를 것이다.

내 최애를 죽인 대가를.

내 계획을 모조리 망가뜨린 대가를.

'나는 알고 있다, 빅 데이비드.'

네놈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를.

"그럼, 일단은 너희부터 시작하지."

"ㄴ... 네?!"

내 앞에 무릎 꿇린 녀석들에게 말했다.

놈들의 표정이 공포로 물들었지만,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7화

E섹터 28공업지구.

폐쇄된 스마일 식품공장 안쪽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혈랑의 간부회의가 진행되던 도중이었다.

타앙-! 타앙, 타앙-!

사무실 밖에서 커다란 총성이 들려왔다. 총성의 음색으로 보아 에너지 탄환을 쓰는 종류인 듯했다.

이게 무슨 일일까.

간부들이 일제히 긴장하는 와중, 조금 뒤 누군가가 황급히 사무실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부하 하나가 창백해진 얼굴로 나타났다.

"보, 보스! 보고드릴 일이 있슴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조금 전 루드빅 녀석이 돌아오더니, 갑자기 미쳐서 총을 쏘면서 날뛰고 있슴다!"

"루드빅?"

루드빅이라면 아론 스팅레이를 상대하기 위해 보냈던 정예 중 한 명이었다.

에너지 소총은 루드빅이 애용하던 무기였으니, 조금 전의 총성 역시 그가 일으킨 소동일 가능성이 컸다.

"그 새끼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모, 모르겠슴다. 보스를 죽여야 우리가 다 살 수 있다니, 뭐라니 떠들면서...."

타앙-! 투두두두두-!

보고하는 부하의 등 뒤로 총격전이 펼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루드빅에 맞서 다른 녀석들이 싸우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게 무슨...."

루드빅은 전투력도, 충성심도 유독 빼어났던 부하였다.

간부가 되기에 머리 쓰는 게 좀 부족해서 행동대원으로 놔뒀을 뿐, 데이비드는 여건만 된다면 그를 간부급으로 올릴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그랬던 루드빅이 난데없이 아지트로 돌아와선 같은 갱단원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니, 솔직히 잘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간부들이 입을 열었다.

"아론 스팅레이. 어쩌면 그 자식이 루드빅에게 뭔가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작전은 실패했다는 건가? 한심한 새끼들. 정예라는 놈들이 그런 부르주아 애새끼 하나한테 놀아나선...."

"어떻게 합니까, 보스? 제가 가서 상황 정리할까요?"

"음."

데이비드는 턱을 쓰다듬었다.

결국 아론 스팅레이 납치 작전은 실패한 모양이었다. 상황을 좀 더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데이비드가 물었다.

"현재 상황은?"

"지, 지금 연락 온 바로는 경비를 서던 막내 두 명이 죽었고, 다섯 명이 총에 맞았슴다. 이쪽에서도 몇 방 먹여 주긴 했는데 쉽게 죽질 않아서...."

루드빅은 상당히 강한 적응자다.

아무리 일 대 다수라고 해도 평범한 조직원들이 상대하기에는 다소 버거울 수밖에 없겠지.

데이비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 험악한 표정에 부하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아무튼 루드빅 녀석은 신경 안 쓰셔도 됨다.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슴다."

"...아니."

데이비드가 남들보다 두 배는 커다란 몸을 의자에서 일으켰다.

"내가 직접 한다."

"보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간부 하나가 만류하는 척을 했으나 강하게 나서진 않았다. 자신들의 보스가 한 번 뱉은 말은 절대 번복하지 않는 인물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데이비드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간부들이 일제히 그의 뒤를 따랐다.

복잡하게 개조된 복도를 지나 아지트 입구에 도착하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엄폐물을 끼고 서로 총을 쏘아대는 루드빅과 말단 조직원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녀석들도 몇 명 보였다.

그러다 데이비드가 등장하자, 그의 묵직한 존재감에 모두의 이목이 그곳으로 쏠렸다.

부하들은 마치 구세주를 영접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두목님!"

"간부분들도 오셨어!"

간부 하나가 부하들을 호되게 질책했다.

"이 쓸모없는 새끼들아! 너희 때문에 보스가 직접 행차해야겠냐?! 엉?!"

"죄, 죄송합니다!"

"다 조용히."

데이비드의 한마디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데이비드는 루드빅이 숨어 있는 엄폐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머리카락 하나 드러내지 않은 완벽한 엄폐였지만, 데이비드에겐 루드빅의 모습이 잘 보였다.

그가 장착한 [Lv.2 벽 관통 이미지 모듈(Wall Penetrating Image Module)] 덕분이었다.

루드빅은 엄폐물 뒤에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몸 곳곳이 대(對)적응자용 총탄에 꿰뚫려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고, 피부가 벗겨진 곳에서 금속으로 된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거의 다 죽어 가는 꼴.

"루드빅."

데이비드가 입을 열었다.

그는 천천히 루드빅이 숨은 곳을 향해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어째서 우릴 배신한 거냐. 너는 그런 녀석이 아니었을 텐데."

"다, 닥치고 그냥 뒈져어어어!"

투두두두두두!

루드빅은 순식간에 엄폐물에서 뛰쳐나와 데이비드를 향해 에너지 소총을 갈겨댔다. 하지만 그가 쏘아낸 에너지 탄환들은 데이비드의 피부를 단 1mm도 파고들지 못했다.

그의 피부에 닿은 탄두는 그대로 힘을 잃고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소멸했다.

"씨발! 씨바알!"

"아론 스팅레이를 만난 모양이지? 그 자식이 네게 뭐라고 했던 거냐?"

"으아아아아!"

루드빅은 패닉에 빠진 채로 총알 세례를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데이비드에게는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철컥, 철컥.

이내 에너지 라이플의 탄창이 비어 버리자, 루드빅은 예비 권총을 꺼내어 데이비드의 미간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겨댔다.

"뒈져! 뒈지란 말이야아아아!"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

납 탄두 역시 데이비드에겐 먹히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날아드는 탄환 따위는 간지럽다는 듯 받아내며 루드빅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덥석.

그의 큼지막한 오른손이 루드빅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팔을 들어 올리자, 루드빅의 몸이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루드빅은 손아귀를 빠져나오려 발버둥 쳤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대답해라. 아론 스팅레이가 네게 뭐라고 한 거냐?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씨발... 하하하...!"

데이비드의 질문에 루드빅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러나 그의 양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자의 눈이었다.

그리고 루드빅이 입을 열었다.

"우린 다 좆된 거야... 너 때문에!"

"뭐라?"

"니 멍청한 명령 때문에 우린 다 그 새끼 손에 뒈지게 생겼―!"

루드빅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

데이비드는 오른손에 전달되는 무게가 갑자기 가벼워짐을 느꼈다.

털썩.

루드빅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정확히는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서.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

"드디어 나타났군, 빅 데이비드. 너라면 이런 소란에 직접 나설 줄 알았다."

낯선 사내의 미성(美聲).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우아하게 걸어왔다. 미끄러지듯 다가온 그 사내는 루드빅의 사체가 만들어 낸 피 웅덩이 직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올백으로 넘긴 검은 머리칼.

황금빛 예리한 시선이 데이비드의 몸체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곤 코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흠.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올려다봐야 하는군. 역시 실물은 더 큼지막했나."

"네놈은――!"

아론 스팅레이.

데이비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사내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던 찰나, 엄청난 폭음과 함께 등 뒤에서 후끈한 열기가 뻗쳐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거대한 화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원인 모를 화재가 아지트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근거지를 잃게 생긴 혈랑의 조직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부, 불이야아!"

"갑자기 왜 불이?!"

"어서 불을 꺼!"

그런 그들을 향해 아론이 중얼거렸다.

"모두 멈춰라. 살고 싶다면."

싸늘한 냉기가 어린 목소리.

작은 크기였지만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그 강렬한 존재감에 모든 이가 무심코 그를 돌아봤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런 경고가 피가 머리끝까지 솟은 갱단원들에게 먹힐 리 없었다.

"저 새끼가 뭔 개소리를!"

"분명 저 새끼가 범인이야!"

조직원들은 곧장 무기를 손에 집었다.

그러나-

"그런가. 살고 싶지 않은가."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한마디.

그 순간 무기를 가장 먼저 쥐었던 인원 다섯 명의 머리가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루드빅이 죽은 것과 완전히 같은 방식이었다.

아론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조절이 어렵군. 이 컨디션으론 이 정도가 한계인가."

"이, 이게 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현상.

그러나 그 학살을 일으킨 것은 틀림없이 아론이었다. 그에 혈랑의 간부 하나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움직였다.

"이... 이 미친 새끼가아아!!"

허나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그 간부 역시 조금 전의 다섯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몸에서 머리가 분리되었다.

털썩. 바닥으로 쓰러진 그의 몸이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한 조직원들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오직 데이비드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격을 시도했다.

"흐읍!"

데이비드는 아론의 시선이 잠시 딴 곳을 향한 틈을 노려 주먹을 휘둘렀다.

부우웅!

거대한 기둥과도 같은 팔이 아론을 향해 포탄처럼 날아들었다.

각종 신체강화 모듈을 장착한 그의 힘은 어지간한 적응자 따위는 일격에 산산조각 낼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공격이 아론에게 닿기 직전, 데이비드의 주먹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마치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이.

"...!?"

어지간한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빅 데이비드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에 아론이 조롱하는 투로 물었다.

"지금 어떤 기분이지, 빅 데이비드? 소중한 부하들을 잃은 상황이? 아니, 대답하지 말거라. 딱히 네놈의 불쾌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물은 게 아니니."

"너 이 자식...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것 같-!"

스윽.

아론이 손가락을 살짝 튕기는 것과 동시에 또다시 갱단원 한 명의 머리가 분리됐다.

데이비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대답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버러지 치곤 현명한 축에 속하는 걸로 알고 있었건만, 아니었나?"

그제야 데이비드는 깨달았다.

아까 전 루드빅이 했던 말의 의미를.

-우린 다 좆된 거야... 너 때문에!

그 말대로였다.

상대를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세간에서 떠도는 아론 스팅레이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헛소문에 낚였던 탓에.

그리고 셰이드란 녀석에게서 얻은 각종 모듈들로 자신들이 훨씬 더 강해졌다는 착각에 빠졌던 탓에.

눈앞에 있는 아론은 절대 이길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적어도 정면 승부로는 절대로.

데이비드는 즉각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하, 항복하겠다!"

그는 소리쳤다.

이대로 가다간 전멸이다.

빌어먹을 기업의 부르주아 따위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부터가 내장을 헤집는 듯이 고통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가 네게 뭘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부디 용서해다오. 무조건 항복하겠다."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다... 라고?"

아론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데이비드는 이를 악물었다.

물론 암살대를 보내놓고서 하기에는 너무나도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었으나, 선택지가 없었다.

암살대를 보내서 미안하다! 라고 한들 사과가 먹힐 리 만무하지 않은가. 어떻게든 밑에 녀석들이 멋대로 저지른 짓이라고 둘러대는 수밖에.

"어떻게든 책임을 지겠다... 아니, 지겠습니다. 보상도 하겠습니다.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데이비드는 자존심을 굽히고 무릎을 꿇었다. 다른 부하들도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눈치였다.

아론이 되물었다.

"보상이라?"

"예."

데이비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도시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기업의 장남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돈? 모듈? 기술? 사람?

모두 아니다.

이쪽이 유일하게 지닌 패는....

"저희가 가진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일반적인 기업의 정보부로서는 알 수 없는 정보를."

혈랑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업 타도.

언젠가 다가올 때를 위해서 다양한 기업들이 세간에 밝히기 껄끄러워하는 정보... 말하자면 약점들을 몇 가지 알고 있다.

'밀레테크', '로먼 코퍼레이션', '퓨어리티 서비스' 등등 '스팅레이 그룹'의 경쟁사 및 협력사들의 약점이라면 아론 역시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일 터.

물론 스팅레이가 이 정보들을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해서 일단 던진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론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과연. 그런 쪽 정보란 말이지."

일단은 살았다.

위기는 한 차례 넘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존심을 구기고 목숨을 건지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데 긴장이 풀린 탓일까?

데이비드는 저도 모르게 몸이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기울어지다 못해 아래로 떨어진다.

쿠웅.

머리를 어딘가에 부딪쳤다.

시선이 돌아가서는 안 될 방향으로 돌아갔다.

...머리 없는 자신의 몸이 보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 광경을 이해하기도 전에,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네놈이 가진 뒷골목 정보 따위."

아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모를 리 없잖느냐."

* * *

데이비드의 사망과 동시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우두머리가 속수무책으로 쓰러지자 겁을 먹고 줄행랑치는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금 덤벼드는 녀석들도 있었다.

물론 후자의 경우, 예외 없이 죽였다.

'이걸로 끝인가.'

정리가 끝났다고 판단되자마자 나는 빠르게 [구름거미] 모듈을 다시금 비활성화시켰다. 그와 동시에 내 손의 가죽장갑이 스르륵 자취를 감추었다.

'내가 했지만 역시 사기야.'

신비 모듈 [구름거미].

신비 모듈이란 도시 밖을 지배하고 있는 괴물들, 일명 [신비]라 하는 놈들에게서 추출한 정수를 통해 만드는, 특별한 모듈이다. 말하자면 유니크 장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내가 방금 사용한 [구름거미(雲蝃)]는 아론 스팅레이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모듈.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느다란 실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때로는 칼날처럼, 때로는 밧줄처럼 이용할 수도 있다.

'원작에서도 주인공이 이거에 일방적으로 탈탈 털렸지.'

지금 몸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최대한 출력을 낮추었는데도 이 정도다. 역시나 시한부라는 점 하나만 제외하면 아론만큼 사기인 캐릭터도 없다.

'...일단 감탄은 뒤로 미루자.'

[구름 거미]를 사용했던 반동인지 컨디션이 시시각각 최악으로 치닫고 있음이 느껴졌다. 오래는 못 버틸 것 같았다.

나는 남아 있던 진통제를 전부 입에 털어 넣은 뒤, 멀찌감치 숨어 있던 녀석에게 명령했다.

"뒤져라."

"네,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아, 알겠습니다!"

이름 모를 혈랑의 갱단원 하나가 허겁지겁 데이비드와 간부들의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까 전 이때를 위해 제일 만만해 보이던 녀석 하나를 살려 두었다.

내 손으로 저 더러운 몸을 직접 만지는 건 죽어도 싫었으니 말이다.

녀석이 쓸 만한 시체들에서 쓸 만한 모듈들을 긁어모으는 동안, 나는 마리아와 미유에게 각각 연락을 넣었다.

마리아에게는 이 현장을 수습하라는 명령의 메시지를, 미유에게는 '판도라'의 앰풀을 회수했으니 시술을 준비하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얼추 상황이 다 정리가 되어 갈 때쯤, 내 시야를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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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달성]

혈랑의 보스, '빅 데이비드'를 처치했다.

업적 포인트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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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막 시점 8화

"돌아가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여기서부터는 저희 스팅레이 그룹의 사고관리반에서 처리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러, 니 까! 왜 당신네가 우리가 할 일을 멋대로 하느냐고! 당신들이 무슨 경찰이라도 돼?!"

"이미 VCPD(Valhalla City Police Department, 발할라 시티 경찰국) 쪽과는 협의가 끝난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곳은 저희 담당입니다."

"뭐라고?!"

"정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본부에 연락해 보시면 됩니다."

"그래? 어디 보자고!"

출동한 형사는 씩씩거리며 곧장 서에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어서 철수하고 돌아오기나 해라'라는 대답이었다. 오는 길에 술집에 들를 생각 따위 하지 말라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아무래도 윗선에서 뭔가 멋대로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결국 복귀명령을 들은 형사는 신경질적으로 무전기를 내던지고서는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당신들, 무슨 수를 쓴 거요?!"

"수를 쓰다니요.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양해를 부탁드린 것밖에 없습니다. 이곳을 점거하던 '혈랑'이라는 반기업 갱단이 저희 사(社)가 개발한 신형 군용드론을 탈취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만약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출동한 경찰이나 소방관분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또 저희 쪽 기술적 보안을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헛소리!"

형사는 코웃음을 쳤다.

"아까 목이 잘린 시체를 다수 봤다는 신고가 들어왔소! 총성도 있었고! 당신네 신형드론이라는 놈은 그런 기능을 달아 놨나?"

"밝힐 수 없는 정보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밝혀낸 정보로는, 화재가 발생하기 직전에 갱단에서 내분이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그럴 리가.

그런 식으로 서로의 목만 잘라대는 내분이 대관절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게다가 몇 시간 전에는 E섹터 블랙마켓 쪽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신고도 들어왔다.

물론 수많은 범죄조직이 들끓는 E섹터에서 살인사건이야 예삿일로 넘길 수도 있지만....

"...당신들, 대체 뭘 숨기는 거요?"

형사로서 그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건 평범한 사건이 아니다.

무언가 숨겨져 있다고.

그러나 마리아는 여전히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이미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다 이야기했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시죠."

"쯧. 본부는 몰라도 나는 이 일을 절대 좌시하지 않을 거요!"

"그럼 이만."

"뭐? 얘기 안 끝났어! 이봐!"

마리아는 형사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다시금 현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Lv.3 파워드 슈트(Powered Suit)로 무장한 스팅레이 보안 인력들이 그녀를 뒤쫓으려 드는 형사를 막아섰다.

[형사님. 이만하시죠.]

"알겠으니까 놓으쇼!"

마리아는 실랑이를 벌이는 그들의 모습을 곁눈질로 힐끗 본 뒤, 폐공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지 마시오- Do Not Enter]라고 적힌 홀로그램 표시기를 뚫고 지나가자, 스팅레이 사고관리반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는 공장에 난 불길을 잡으려 소화제를 분사하고 있었고, 나머지 일부는 목 잘린 시체들을 시신 가방에 옮겨 담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한숨 쉬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아론 도련님...."

아론은 건강을 잃기 전부터 종종 사냥감을 찾아 엘리시움을 훌쩍 떠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마리아는 그가 저지른 행위가 스팅레이 그룹에 해가 되지 않도록 사건들을 은폐하는 데에 힘을 써 왔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오늘도 누군가가 아론의 손에 목숨을 잃으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아론이 오늘 밤 사냥터로 E섹터를 골랐다는 사실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치안이 나쁘기로 유명한 E섹터라면, 사람 한두 명쯤 토막 난 사체로 발견된다 한들 손쉽게 덮을 수 있으니까.

허나 오늘 밤 사건의 규모는 마리아가 예상했던 범위를 크게 벗어났다.

폐공장 전체를 삼킨 화재.

인근 주민들이 총성을 들었다는 증언도 이어지고 있으며,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확인되는 사람만 벌써 스무 명을 넘어섰다.

'그나마 상대가 범죄조직이었다는 점이 다행일까.'

당장은 급한 대로 '신형 군용드론' 같은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여차하면 다른 핑계를 댈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사건을 수습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아론의 행각은 점점 대담해지고 잔혹해졌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그동안 참아왔다는 것을 표현이라도 하듯 이런 학살극을 벌이다니.

천만다행으로 아론이 일찌감치 연락을 주었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으면 경찰이나 언론이 먼저 냄새를 맡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경찰과 언론의 눈을 피했다고 문제가 끝난 게 아니다. 진짜 문제는 스팅레이 그룹 내부에서도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그룹 전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스팅레이 가문을 '황가(皇家).'라고 부르기도 한다. 뉴 발할라 시티에서 정부 이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들을 황제에 빗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압도적인 권력이라고 해도 절대는 없는 법.

지금도 스팅레이의 파멸을 바라는 경쟁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스팅레이를 몰락시킬 방법을 찾고 있다.

'...그리고 아론 도련님은 우리 그룹에 있어서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 이들에게 아론이 저지른 일들이 들킨다면, 그룹 전체가 휘청일 게 분명했다.

스팅레이 그룹에 삶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마리아에게 있어, 그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이상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마리아는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사적인 정에 치우쳐서 하지 못했던 결정을.

'아론 스팅레이는 없어져야 한다.'

* * *

"주, 준비되셨나요?"

"그래."

치과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의자에 누운 채로 미유의 말에 대답했다. 그녀의 엉덩이 뒤로 길게 뻗어 나온 기계 꼬리가 긴장한 듯이 뻣뻣하게 흔들렸다.

나름대로 표정을 관리하려고 하는 게 보였지만 꼬리 쪽이 너무 솔직해서 소용이 없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라."

"최, 최선을 다해 볼게요."

사실 미유가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내 생명을 갉아먹고 있던 '제네틱 오버캐스트'라는 이름의 병은 사실상 이론적으로나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세계관 최고의 기술을 가진 미유라고 해도 이 병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일 테니....

"죄, 죄송해요오... 남성분의 반라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서...."

"...."

아무래도 긴장한 이유가 다른 데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해결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 아가씨, 살짝 변태기가 있었지....'

하기야 10년 가까이 골방에서 기계만 상대해 온 녀석이 마냥 멀쩡한 인간이길 바라는 게 이상한 거겠지만.

"근데 내가 처음이라고 했나? 지금까지 나노머신을 잔뜩 만들어왔으면서?"

"주, 주입할 땐 딱히 탈의가 필요 없단 말이에요오...!"

미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이상 추궁하지 말도록 하자.

하여튼 다소 불안하긴 해도, 쓸데없는 데에 신경을 쓰는 만큼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자신이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전부 끝날 때까지 얼마나 걸리지?"

"아, 아마 3시간 정도요오...?"

"생각보다 짧군."

"판도라를 투여한 뒤에 살짝 조정을 가하는 게 전부라서요오... 나머지는 아론 씨의 체력에 달려 있어요오...."

미유가 계속해서 과정을 설명했다.

첫 번째, 판도라를 투여한다.

두 번째, 판도라가 몸속 곳곳을 돌며 오작동을 일으킨 아담을 제거하고, 아담의 역할을 넘겨받는다.

세 번째, 장착한 모듈을 완전히 장착 해제한다.

네 번째, 판도라로 강화된 재생능력을 통해 서서히 자연 상태의 육체로 복구된다.

위와 같은 단계를 통해서 이 며칠간 나를 괴롭히던 병을 말끔히 고칠 수 있다고 한다.

"이, 일단 대체율을 0퍼센트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오...."

"어째서지?"

"그래야 아론 씨에게 맞춰서 판도라의 설정을 세부 조정할 수 있거든요오... 아론 씨 같은 고(高)대체율 적응자는 모듈을 장착한 상태에서는 옵션을 조절하기가 어려워서...."

대체율.

한마디로 말해, 신체의 몇 퍼센트나 모듈을 통해 기계로 갈아 끼웠냐는 의미다.

가령 뼈를 전부 다 텅스텐 합금으로 대체하면 10퍼센트 내외의 대체율이 나온다.

거기서 근육을 합성 카본케이블로 전부 바꾼다든지, 장기를 바이오 발전기로 바꾼다든지 하면 대체율은 점점 더 올라간다.

어떻게 보면 장착한 모듈의 개수를 늘리고 신체를 증강할수록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모듈을 장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 모듈 간의 호환성이 맞지 않아 에러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체율이 70퍼센트 수준을 넘어서면 어째서인가 모듈을 해제해도 원래의 신체가 돌아오지 않는 이상 증상이 생긴다.

'요컨대 한 번 장착한 모듈을 변경할 수가 없게 되는 거지.'

그런 탓에 정부에서는 대체율 70퍼센트가 넘는 모듈링(Moduling)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또한 그것을 어긴 범법자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규정해 버린다.

30퍼센트의 자연적인 육신.

그것이 이 세계에서 인간으로서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더더욱 미유 같은 뛰어난 모듈러의 존재가 중요하지.'

모듈러는 단순히 모듈을 생산, 정비할 뿐만 아니라 고객의 의중에 맞추어 70퍼센트라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효율적인 모듈 세팅을 해 주기도 한다.

판타지 작품 세계관으로 따지면 전속 대장장이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초반부터 미유를 영입할 수 있었던 건 큰 메리트다.'

물론 지금은 단순히 계약으로만 묶인 관계에 불과하다. 그녀를 진정한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이후로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할 것이다.

"그, 그럼 시작할게요오...."

"그래."

의자가 눕혀지면서 자연스레 시선이 천장으로 옮겨갔다. 기계 팔에 달린 커다란 주삿바늘이 일제히 내 몸을 향했다.

"조금 따끔할 거예요오...."

온몸을 동시에 찌르는 감각.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다시 눈을 떴다.

'뭐지?'

시술이 뭔가 잘못됐나?

체감상 30초도 지나지 않은 듯했다.

"아, 깨셨군요! 시술은 잘 끝났어요오."

다행이군.

근데 이렇게 시간이 짧게 느껴질 수가 있나?

"벌써 3시간이 지났나?"

"아, 아뇨. 아론 씨의 회복력이 상상 이상으로 뛰어나셔서 1시간 조금 더 지났어요오. 아무래도 판도라가 아론 씨의 몸에 더 잘 맞는 모양이네요오."

"그게 무슨 의미지?"

"어... 그게... 보여드릴게요오."

그러면서 미유는 그래프를 하나 보여주었다. 전문용어가 많이 적혀있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퓨어 스펙이 더 강해졌군."

"대략 21.3% 정도의 능력향상이에요오."

모듈을 착용하지 않은, 말 그대로 완전히 기본적인 상태에서 2할 정도 더 뛰어나졌다. 근력, 체력, 민첩력, 회복력, 모든 부분에서 체감할 수 있는 힘일 거다.

'아니, 미친. 미유가 만든 나노머신이 성능이 좋은 건 알고 있긴 했는데 이건 좀....'

이미 세다고.

더 세질 필요 없다고.

불치병만 고치면 됐지, 어디까지 강해지려는 거냐 이 괴물 같은 몸뚱아리야.

"대신 평소보다 감각이 예민해지셔서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는데에... 지금은 모듈은 검사용을 제외하고 전부 해제했고, 이제 남은 건 판도라의 옵션만 조금 더 조정하면...."

그러면서 미유는 태블릿을 들고 내 옆에 앉았다.

그녀는 내게 어딘가 통증은 없는지, 색깔이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지 등등을 하나씩 물어가며 컨디션을 체크했다.

솔직히 다소 어안이 벙벙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몸이 훨씬 더 가벼웠고 지긋지긋한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병이 전부 나은 건가?"

"물론이에요오. 보아하니 판도라가 자리를 제대로 잡은 것 같네요오. 이제 점검용 모듈을 빼셔도 좋아요오."

지시에 따라 뒷덜미 사이버웨어 소켓에 박혀 있던 모듈을 빼내어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건네받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아론 씨의 스펙에 최대한 맞춰서 판도라의 옵션을 '군용' 스펙으로 조절해 두었어요. 어플리케이션도 깔아두었고요. 다만 기존에 쓰시던 모듈 중에 못 쓰게 된 게 상당수 있어서요오...."

"일단 확인해 보지."

"목록을 전송할게요오."

미유가 태블릿을 조작하자 시야에 메일 알림이 떠올랐다.

메일에는 모듈 호환성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 빠르게 훑어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거의 전멸이군.'

기존에 장착하던 모듈 중 호환성이 떨어져서 쓰지 못하게 된 것이 9할 가까이 되었다.

그나마 쓸 수 있는 수준으로 남아 있는 것은 내 전용 무기인 [구름거미] 정도였다.

이 역시 호환성이 상당히 감소하긴 했으나, 사용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없을 듯했다.

'뭐, 무기 모듈은 사용할수록 호환성이 상승하는 사례도 있을 테니 상관없겠지.'

이 정도면 당장 내 몸을 지키고 계획을 진행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듯했다.

아니, 오히려 퓨어 스펙이 20%나 강해졌다는 점에서는 좀 오버스펙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게임으로 따지면 만렙이 Lv.100에서 Lv.120으로 확장된 셈이다.

당장이야 모듈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궁극적으로 그걸 전부 회복한다면? 원작의 정점에서 20%나 더 강해진 아론의 스펙?

...아무리 내 몸이라고 해도 좀 무섭다.

하물며 내게는 '그것'까지 있었다.

"미유. 내가 수거해 온 모듈은 확인해 봤나?"

"죄, 죄송해요. 까먹고 있었어요오...."

"상관없다. 좀 가져다주겠나?"

미유는 한쪽에 보관해 두었던 비닐봉지를 가져다주었다.

그 안에는 SD카드와 비슷한 형태의 모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까 전 혈랑 놈들의 시체에서 수거한 모듈들이었다.

나는 봉지 안을 이리저리 헤집었고, 그중에서 독특한 색깔을 한 모듈칩 하나를 꺼냈다. 나머진 쓸모없는 것들 뿐이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미유가 물었다.

"그, 그건 뭔가요? 제가 만든 모듈이 아닌 거 같은데...."

"[시체 먹는 자]라는 모듈이다."

죽어 버린 주인공, 셰이드 웰즈의 유품.

대체율을 조금 잡아먹는 대신 함께 장착한 모듈의 호환성을 끌어 올려 주는 사기적인 능력의 [신비] 모듈이다.

그렇게 설명하자 미유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연구해 보고 싶나?"

"네?! 아, 저기...."

"사양할 필요 없다. 이제 넌 내 전속 모듈러다. 네가 연구해서 성과를 내놓는다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지."

"그, 그게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망가뜨리지만 말도록."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내게서 [시체 먹는 자]를 받은 미유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어댔다.

미유의 행복해하는 모습에 나 역시 덩달아 흐뭇해졌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기뻐하는 모습에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것도 함께 살펴보도록."

"이, 이건 또 뭐죠오...?"

"이 역시 호환성을 강제로 끌어 올리는 특수한 아이템이라더군."

일명 [모듈 호환성 상승 티켓].

아까 혈랑을 박살 내는 것으로 포인트가 충분해졌기에, 판도라를 주입받기 전에 미리 구매해 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상점에서 구매하자마자 이렇게 현물이 눈앞에서 생성되었다. 원래라면 곧장 사용해 버릴까 싶었지만, 미래를 위해서 투자하기로 했다.

"이것도 함께 네게 맡기겠다. 어떤 원리인지 밝혀낼 수 있으면 좋겠군. 못 하겠다고 한다면 회수하겠다만."

"하, 하,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마도!"

자존감이 바닥인 녀석치고는 최선을 다한 대답이었다. 어지간히도 새로운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었던 모양이다.

"한 달 안에 뭐든 좋으니 결과를 들었으면 좋겠다. 아마 그 이후로는 그걸 회수해야만 할 테니."

"하, 한 달이요?"

미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어째서 한 달인지 여쭤봐도 될까요오? 조금 더 시간을 주시면...."

"안 된다. 반드시 한 달이다. 그때쯤에는 나와 함께 갈 곳이 있으니."

"제, 제가요? 어디로요 가시는데요오?"

그에 나는 즉답했다.

"트리니티 아카데미."

아카데미 흑막 시점 9화

"트, 트리니티 아카데미요...?"

"역시 모르는군."

"죄, 죄송해요오...."

"죄송할 일이 아니다. 이런 걸로 일일이 사과하지 마라."

나는 그렇게 재차 당부하고는 곧장 설명을 이어 나갔다.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뉴 발할라 시티 최대 규모의 적응자 육성기관이다."

트리니티 아카데미.

줄여서 그냥 아카데미.

[신비]와 맞서 싸울 인재들을 육성할 목적으로 설립된 이곳에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뜻하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창설자.

그곳이 원래 정부·기업·시민, 이렇게 세 세력이 합심해서 세운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뉴 발할라 시티 행정국과, 스팅레이를 필두로 하는 TOP5 기업체들, 그리고 민중파라고 불리는 도시 최대의 시민조직의 합의 하에 설립되었다.

또한 두 번째 이유는 설립이념.

이 설립이념을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아카데미 정문에 새겨진 오래된 문구를 읽어 보면 된다.

-관측 가능한 존재라면, 설령 그것이 신성(神性)일지라도 정복할지니.

[신비]라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와 상상력으로부터 탄생한 괴물들.

개중에는 도시괴담이나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놈들도 있으며, 실제로 이 도시는 몇 번인가 그들에 의해 멸망할 뻔한 적도 있다.

어리석은 누군가는 그 괴물들을 신으로서 모시며, '신이 죄에 물든 인간을 벌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라고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신비]에 맞서 싸울 전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인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는, 신이나 악마 따위 인류를 위협하는 적으로 볼 뿐이다.

이성과 합리 아래에서는 미지와 공포가 발 디딜 틈은 없으며, 인류를 위해서라면 신성 따위 얼마든지 모독해 주겠다.

그러한 의미에서 트리니티.

이곳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존재들이 성장해 나가는 장소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최고의 인재들과 기술이 모여 있는 곳이다. 분명 그곳에서는 네가 본 적도 없는 기술과 지식을 배울 수 있을 테지."

"네, 네?! 제, 제가 다니는 건가요오?!"

"그래."

"아론 씨가 아니라요오?!"

"그래. 뭔가 착각하고 있던 모양이군. 나는 학생이 아니라 스폰서다."

군인과 기술자를 키우는 교육기관에 도시의 황족이 다닐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설령 모종의 이유로 다니게 되었다 해도 아론 스팅레이 같은 먼치킨이 아카데미에서 배울 건 없다. 학우들을 썰고 다니지나 않으면 다행일까.

내 말에 미유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무, 무리예요오! 저 같은 게 그런 곳에 다닐 자격 같은 건... 애초에 저는 초등학교도 못 나왔는걸요오...."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 아니냐.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녀석이 독학으로 각종 모듈은 물론, 아담을 뛰어넘는 사제 나노머신까지 만들어 냈다는 게.

"저, 저한테는 과분한 곳이에요오... 그런 대단한 곳에서 저를 가르쳐 주려고 할 리도 없고요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한마디만 하면 그까짓 문이야 얼마든지 열릴 테니까."

물론 옛날의 아카데미였다면 아무리 스팅레이 그룹이라고 해도 편법을 쓰기란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재의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사실상 스팅레이 그룹과 몇몇 대기업의 자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세 개의 기둥 중 하나였던 정부는 자본 앞에 딸랑거리는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렸고, 또 다른 기둥이었던 시민조직 '민중파'는 계파 싸움으로 사분오열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세력이 도시에서의 영향력을 잃자, 기업들이 아카데미 운영권을 통째로 꿀꺽해 버렸다.

물론 여전히 설립 당시의 전통은 남아 있어 각 세력에서 선출된 세 명의 학원장들이 함께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중 정부와 시민 측 학원장들이 사실상 바지사장에 불과하다는 것은 굳이 말할 것도 없겠지.

'현재의 아카데미는 기업들끼리 세금을 이용해서 합법적으로 적응자 사병과 기술자들을 육성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공정하고 깨끗해 보여도 온갖 비리의 온상이 펼쳐지는 곳이 트리니티 아카데미.

그곳에는 공공연하게 '스폰서'라는 이름으로 기업들이 일찌감치 인재들을 영입하고 팀을 이루어 서로 경쟁하고 있다.

당연히 스팅레이 그룹도 그 인재 영입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워낙 자본의 규모나 전통 면에서도 남다른 만큼 운영과정에서도 상당히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학생 몇 명쯤 편법으로 입학시킨대도 그냥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뭐, 진짜 문제는 입학하는 과정보다도 미유가 거기서 적응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겠지.'

원작 소설 속에서도 소심하기 짝이 없는 미유는 그만한 재능을 지니고서도 아카데미에 적응하기 어려워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꼭 필요한 과정이야.'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의 주요 무대가 되는 곳이다.

세상에는 많은 덕후가 있고, 개중에는 최애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기는 녀석도 있지만... 나는 그쪽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미유를 어딘가 아늑하고 편안한 방에 모셔놓고 '아이구 내 새끼' 하면서 불편한 것 하나 없이 잘 보살펴 주며 지내고 싶다.

하지만 미유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또 자기 자신을 위해 성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성장을 위해서는 다양한 시련을 맛보아야만 한다.

내 마음을 비유하자면 절벽에서 새끼를 떨어뜨리는 어미 사자의 심정이라고 할까.

"너는 나를 위해서도 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알겠다면 연구 진행과 동시에 틈틈이 이사 준비를 해 두도록. 필요한 건 그쪽에서 전부 구해 줄 테니 짐은 최소한으로 준비하고."

"아, 알겠습니다. 아론 씨...."

미유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당히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나는 그녀의 성격상 한마디도 불평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개인 연락처를 넘겨줄 테니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지 개의치 말고 말하도록.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다."

"그, 그렇군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오...."

"왠지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아, 아뇨. 그럴 리가요오...!"

미유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며 당황했다.

조금 더 골려줄까 싶었지만 참았다. 오늘 많은 일을 겪었으니 그녀도 상당히 피곤하고 지쳤을 것이다.

모르는 남정네가 문을 뜯고 쳐들어온다든가, 병을 고친다든가 말이다.

그러니 이쯤 하고 쉴 수 있게 해 주는 게 맞겠지.

"그럼 푹 쉬도록."

나는 웃옷을 다시 걸쳐 입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연구실을 빠져나오기 직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원래의 아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을.

"그러고 보니 말하는 걸 잊었군."

"네?"

"날 살려 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 * *

미유의 연구실에서 벗어난 나는, 블랙마켓 인근에 있는 공터로 이동했다. 처음에 E섹터에 도착했을 때 차를 댔던 장소였다.

곧장 마리아에게 태우러 오라고 연락을 넣었다. 그러자 5분도 되지 않아 비행형 고급 세단이 나타나 내 앞에 정차했다.

스스륵.

뒷좌석이 부드럽게 열렸고, 나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올라타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눕혔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그래. 본가로 돌아가지."

내 지시에 따라 마리아는 엘리시움 방향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차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뉴 발할라 시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쯤.

"도련님."

핸들을 붙잡고 있던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참고로 이 세단에는 자동운행기능이 달려 있었지만, VIP를 모실 때에는 사람이 직접 운전하는 게 예의라나 뭐라나.

"찾으시던 것은 어떻게 됐습니까?"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정 조절 모듈을 빼둔 상태에서 어쭙잖게 거짓말을 하다가 그녀에게 치명적인 정보를 넘겨줄까 염려돼서였다.

원래부터 스팅레이의 충실한 사냥개인 그녀는 살인귀에 망나니인 나를 그리 탐탁지 않아 했다.

게다가 오늘 혈랑을 쓸어버린 일 때문에 내 평가가 더욱 하락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모듈 대부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됐다는 걸 알게 된다면 곧장 내 목숨을 노리고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지.'

넘겨주는 정보는 최소한으로.

받아오는 주도권은 최대한으로.

어차피 병이 나았다는 사실은 오래 숨기지 못하니, 저쪽이 수를 쓰기 전에 먼저 치고 나가야 한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화제를 바로 돌려 버렸다.

"베네딕트 녀석에게 연락해라."

"작은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베네딕트 스팅레이.

스팅레이 가문의 둘째 아들.

즉, 내 남동생이다.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오자 마리아의 포커페이스가 조금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로서는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던 모양이다.

"...무슨 연유로 그러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레 연락을 드리면 작은 도련님께서도 당혹스러워하실 겁니다."

"아카데미 관련 건이다."

"설마 스폰서 말씀이십니까?"

"그래."

현재 스팅레이 그룹의 인적자원개발 재단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둘째인 베네딕트 스팅레이.

원래는 내가 빙의하기 전의 아론이 이사장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병에 걸리면서 베네딕트에게 임시로 권한을 넘겨준 것이었다.

그러다 2권 시점에서, 그러니까 대략 반년쯤 뒤에 원작 속 아론의 병세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해진다.

그는 자신이 죽을 때가 다가옴을 알고 동생에게 완전히 권한을 넘겨줄 요량으로 아카데미에 잠시 들른다.

그때 우연히 아카데미에서 발견한 몇 명의 '사냥감'이 그의 살인 충동을 자극했고, 몇 차례의 살육 파티를 벌이다가 결국 주인공에게 들켜 싸우게 된다.

'원작을 따르려면 동생에게 자리를 넘겨야겠지만... 여기선 반대로 가야겠지.'

인적자원개발 재단의 역할은 아카데미를 포함하여 도시 곳곳에 있는 인재들을 찾아내고 후원하며 영입하는 것.

그 장점은 당연히 미래의 기술부와 보안부 상급 직원이 될 인재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꽂아 넣을 수 있다는 부분에 있다.

그리고 스폰서라는 자리를 이용해서 미유를 비롯하여 작중 주요 인물들을 미리 내 편으로 만들어 두는 것이 내 궁극적인 목표.

하지만 당연하게도 둘째 동생 녀석이 그런 좋은 자리를 내게 순순히 돌려줄 리가 없었다.

마리아도 그 점을 우려한 듯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간 작은 도련님께서 그쪽에 굉장히 공을 들이셨던 터라 분명 화를 내실 듯합니다만."

"공을 들여? 어이가 없군."

나는 코웃음을 쳤다.

"작년 그 녀석이 후원대상으로 뽑은 1학년들은 하나같이 형편없었다. 고작 그런 눈을 가진 녀석에게 재단 이사장직은 과분한 자리지."

"외람되오나, 도련님. 올해 저희의 후원을 받은 학생들은 하나같이 상위권의 성적으로, 그중에서도 작년 1학년들은...."

"쓰레기들이다."

물론 나는 그 후원을 받은 학생들이 누군지 얼굴도 이름도 전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재능이 보잘것없으리라고 확신을 담아서 말할 수 있었다.

왜냐고?

원작에선 걔네 전부 엑스트라였거든.

심지어 이름도 안 나왔다.

"차라리 내가 오늘 구한 녀석이 백 배 나을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리석구나, 마리아. 내가 아무 이유 없이 폐공장 지구를 그런 꼴로 만들었을 것 같으냐?"

내 말에 마리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 반응을 보건대 내가 아무 이유 없이 그놈들을 죽이고 싶어서 날뛰었던 거라고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물론 실제로도 그렇긴 하지만... 조금 양념을 쳐두는 편이 좋겠지.

"오늘 그놈들에게 착취당하던 모듈러 한 명과 계약을 맺었다. 아직 어수룩하지만, 베네딕트 놈이 고른 녀석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지."

"호, 혹시 그 모듈러가 '말하는 자판기'와 관련된...."

"그래. 내가 너희들에게 찾으라고 지시했지만 찾지 못한 녀석이다."

이것으로 마리아는 내 병이 나았다고 추측할 것이다. 이제 함부로 날 노릴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

"베네딕트에게 당장 연락해서 내가 한 말을 정확하게 전달해라. '네놈의 사람 보는 눈을 쓰레기고, 스폰서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알겠습니다. 하오나 도련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작은 도련님은 그걸로 순순히 물러나실 분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나온다면 내기라도 해서 결정하면 되겠지."

"어떤 내기 말씀이십니까?"

"음. 이건 어떤가?"

나는 짐짓 고민하는 척하면서 미리 준비한 계획을 얘기했다.

"각자가 뽑은 기술자들끼리 실력을 겨뤄보는 거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0화

쾅!

"재단 이사장 자리에서 비켜달라고? 이게 대체 뭔 미친 소리야!"

스팅레이 가문의 차남.

베네딕트 스팅레이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격한 분노를 토했다.

"그 시한부 환자 새끼는 적당히 침대에서 굴러다니다 뒤질 것이지! 끝까지 살아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소문으로는 큰 오라버니의 병이 완전히 나으셨다는데요?"

여동생 칼리아 스팅레이의 말에 베네딕트의 언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너도 알다시피 그 새끼의 병은 '제네틱 오버캐스트'였어!"

스팅레이의 일원 중에서도, 베네딕트는 특히 나노머신 기술에 일가견이 있었다.

형의 생명을 갉아먹던 병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어지간한 의사나 엔지니어보다 훨씬 더 잘 안다.

"그건 우리 쪽 기술부나 의료부에서도 전혀 치료법을 찾지 못한 희귀병이야! 그 새끼는 6개월 안에 반드시 죽을 운명이었다고!"

천문학적 확률로 발현되는 오작동 현상이기에 연구 자체가 쉽지 않다. 아마 유전자의 특정 코드가 에러를 일으키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평범한 병이 아니기에 같은 병이라도 증상이 제각기 다르다. 당연히 치료할 약도 기술도 없다.

물론 병의 원인인 나노머신을 체내에서 아예 없애 버린다면 고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 그런 기술은 없다.

한 번 나노머신을 이식받아 적응자가 된 사람은 자연 상태로 돌아올 수 없다.

설령 모종의 방법으로 신체 구석구석에 퍼진 나노머신 중 99.99퍼센트를 없애는 데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0.01퍼센트의 개체가 자가 복제를 통해 원래 상태로 되돌려 버린다.

"그 빌어먹을 소문의 출처가 어디야? 그 괴물 새끼의 병이 나았다는 거, 정말로 믿을 만한 정보인가?"

"저도 몰라요. 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닌 거 같던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며칠 전에 정보부 직원들이 큰 오라버니의 지시로 이리저리 뛰어다녔잖아요. 벌써 잊으셨어요?"

"아, 그 '말하는 자판기'인가 뭔가를 찾으라고 했던 거?"

나흘 정도 되었던가?

그날 아침 침대에서 깨어난 아론이 난데없이 'E섹터에서 말하는 자판기를 찾아내라'라며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그게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단이니 뭐니 하면서 아론이 떠들어댔기에, 정보부 쪽에서도 난리가 나서 대대적으로 E섹터를 수색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소식이 얼마 가지 않아 아버지와 베네딕트의 귀에 들어왔고, 그들은 아론이 내린 지시를 몰래 취소시켜 버렸다.

말기 시한부 환자가 떠들어 대는 근거 없는 헛소리에 회사의 인력을 낭비하는 건 좋지 않았고, 뭣보다 그들은 아론의 병이 낫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설마 그게 진짜였다고? 말하는 자판기가 그 괴물 새끼의 병을 고쳤다?"

"믿기 어려운 얘기긴 하죠?"

"허."

베네딕트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머리를 싸매고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값비싼 천연 커피를 홀짝이던 칼리아가 물었다.

"그래서 오라버닌 어떡하실 생각이죠?"

"어떡하다니?"

"큰 오라버니가 쾌차하셨으니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겠죠. 지금까지 공들인 작업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텐데요?"

"그렇게는 두지 않는다."

"진짜요? 이번엔 정말로 그러면 좋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냐."

"오라버니도, 심지어 아버님도 큰 오라버니를 두려워하시잖아요? 우리 집 남자들은 큰 오라버니 앞에서는 다 겁쟁이가 된다니까."

비아냥대듯 하는 말이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아론의 재능은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남은 물론, 재계의 늙은 여우라 불리는 아버지조차 위협하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머리싸움만 따지면 스팅레이 회장이 한 수 위다. 베네딕트도, 칼리아도 수 싸움으로는 그에게 밀리지 않는다.

문제는 그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단언컨대, 아론 스팅레이란 남자는 베네딕트가 여태껏 보아 왔던 어떠한 존재보다 강했다.

굳이 '존재'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최신형 군용드론조차 아론의 앞에선 한낱 고철덩어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너야말로 이상해. 어떻게 그 괴물 새끼하고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거지?"

그야말로 괴물.

과연 일개 인간이 저렇게 강한 힘을 갖고 있어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아론은 타고난 사냥꾼이자 최상위 포식자였다.

주먹은 법보다 가깝다.

아무리 등 뒤에 수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눈앞의 상대가 부하들보다 더 강하면 소용없는 법이다.

가령 가족 동반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그가 날뛰기라도 하면? 아론과 함께해야만 하는 모든 일에 군대를 대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스팅레이 회장과 베네딕트의 경계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생물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생존 본능과 같은 것이기에.

오히려 어떻게 보면 평소 아론에게 아무렇지 않게 장난까지 쳐 대는 칼리아 쪽이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큰오빠는 원래 막내 여동생을 아끼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법이에요."

"...."

실험실에서 태어난 주제에 뭔.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베네딕트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딱히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는지 칼리아가 말을 이었다.

"이건 제 생각인데요, 이번은 일단 순순히 물러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더러 꼬리를 말고 도망치라고? 너는 그 괴물 새끼 쪽에 붙을 생각이냐?"

"글쎄요. 전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까요. 다만 오라버니는 어디까지나 '이사장 대리'로 그 자리에 있을 뿐이잖아요? 그걸 억지로 붙잡고 있는 건 그림이 안 좋아요."

"그딴 건 나도 안다!"

베네딕트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싸우든 그림이 안 좋다.

형의 병이 다 나았는데도 자리에 욕심을 부려 물러나지 않는 동생.

스팅레이에 반감을 품고 있는 삼류 찌라시 언론사들이 물기에 딱 좋은 소재다.

"인적자원개발 재단은 그 역할 때문에 더더욱 상징성이 큰 자리야. 직급도 무려 전무이사고 차기 회장을 위한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런 자리를 괴물 따위에게 순순히 넘겨줄 수는 없다."

"그럼 어떡하시려고요?"

"내기에 응해야지."

"큰 오라버니의 도발에 응하는 게 별로 좋은 선택 같진 않은데요."

"시끄럽다. 이번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그 괴물 자식의 입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어."

"음."

상당히 자신만만한 태도.

칼리아는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라는 듯 시큰둥한 태도로.

"뭐, 응원할 테니 열심히 해 보셔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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