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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SCALTORREHANAM / Chapter 1: 112-117
ESCALTORREHANAM ESCALTORREHANAM original

ESCALTORREHANAM

Author: Kakao_cuenta

© WebNovel

Chapter 1: 112-117

<하남자의 탑 공략법 112>

상하이의 한 부동산 회사.

겉으로는 평범하지만 실은 중국 내 삼합회 총단.

삼합회 회주 구량춘이 경호원을 대동하고 어떤 남자와 탁자에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믿을 수 없군. 정말 바이룽, 자네인가?"

"회주님, 이미 확인시켜드렸잖습니까. 지금 이 모습은 형상 변환 반지로 모습을 바꾼 겁니다."

바이룽.

중국 신임 주석 왕위안을 암살하고 도망친 플레이어.

공안과 인민 해방군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그 바이룽이 보란 듯이 구량춘의 눈앞에 나타났다.

원래 삼합회 회주 구량춘과 바이룽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과거 바이룽이 중국 최고 플레이어였을 때 꽌시를 형성한 적이 있으니까.

"그래서 자네가 필요한 것이 뭐라고?"

"미화 3천만 달러와 완벽한 신분의 여권, 대만이나 싱가포르 국적이면 좋겠네요. 단 플레이어 활동 이력이 있어야 합니다."

"플레이어 활동도 계속하려는 게군."

"그럼 제가 뭘로 먹고 살겠습니까?"

구량춘은 피식 웃었다.

플레이어의 능력을 현실에서 발휘할 수 있다지만 중국을 탈출하는 건 매우 어렵다.

얼굴만 바꾸면 뭘 해?

신분증이 없으면 비행기는커녕 철도 같은 장거리 교통도 이용하지 못한다.

해방의 룬 목걸이 또한 지속 시간과 횟수 제한이 있기에 섣불리 사용할 수 없을 테고.

게다가 돈도 다 떨어졌겠지. 

이렇게 거지꼴로 나타난 걸 보면.

"대가는?"

"회춘의 비약을 드리죠."

"부족해, 질병 치료의 포션도 넘기게."

"흐음, 뭐, 약속만 지켜주신다면야."

구량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분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네."

"반드시 플레이어 신분이어야 합니다."

"걱정 말게. 비약과 포션은 언제 받을 수 있지?"

"제가 뉴욕 공항에 도착한 직후에요."

바이룽은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 후 미국 탑 등반국에 귀화를 요청할 계획.

미국은 플레이어 귀화에 관대한 편.

요청하면 즉시 받아들여진다.

형상 변환으로 얼굴과 체형도 바꾸었다.

거기에 새로 얻은 신분도 완벽하면 자신이 바이룽인지 어떻게 알아?

"먼저 실물을 보여주게, 비약과 포션,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신분증 작업하지."

얼굴을 찌푸리는 바이룽.

"구회주님, 절 못 믿으시는 겁니까?"

"응? 자네야말로 이상하군. 그거 보여주는 것이 뭐가 어렵나?"

구량춘은 자신의 앞에 놓인 보이차를 호로록 마시며 말을 이었다.

"가슴에 찬 그 목걸이, 해방의 룬 목걸이겠지."

"...."

"그 힘을 발동하면 나 같은 늙은이, 이 방안에 모든 이들, 눈 깜짝할 새에 죽일 수 있을 거고."

어깨를 으쓱하는 바이룽.

"구회주님, 절 뭐로 보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전 아무나 죽이는 살인마가 아닙니다. 왕위안 주석의 일도 사고였어요."

사고는 무슨.

CCTV 안본줄 아나.

"네, 까짓거 보여드리죠."

스르륵!

바이룽의 인벤토리에서 나오는 물약병 2개.

"이게 회춘의 비약이고, 이게 질병 치료의 포션..."

그때였다.

챙!

유리창에 구멍이 나더니,

퍽!

소리와 함께 바이룽의 이마에 붉은 구멍이 뚫렸다. 

비명도 없었다.

쿵!

그대로 머리를 탁자에 박고 절명해버렸다.

구량춘의 이마에도 핏물이 튀었다. 

천천히 닦아내면서.

"쯧쯧, 이 친구야. 중국 정부를 너무 우습게 봤어. 자네하고 내가 꽌시 관계라는 걸 그들이 모르고 있었겠나?"

자신뿐만이 아니다.

바이룽과 관계있는 모든 사람에게 공안이 접근했을 것이다.

삼합회?

중국 정부의 꼭두각시가 된 지 오래였다.

이미 이곳엔 인민 해방군 저격수가 배치되어 있었다. 

바이룽이 자신에게 올 가능성이 1% 미만이라 할지라도.

'제발 오지 말라고 빌었는데.'

결국 나타나고야 말았다.

'병신 같은 놈.'

어쩔 수 없었다.

지시대로 행동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함께 엮여 죽을 테니까.

플레이어가 국가 권력에 대항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크나 큰 착각.

아무리 힘을 해방했다고 해도.

우르르르르,

사무실 계단을 올라오는 공안들의 발소리.

구량춘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탁자 위 회춘의 비약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심내지 않았다.

10년 젊어지려다. 10년 일찍 죽을 수 있다.

***

한국 각성 관리청.

탑 재료창고에서 전광일 부청장과 다시 만난 주혁,

다양한 대화가 오고 갔다.

플레이어 샵에서 얼마만큼의 아이템들이 팔리고 있는지, 되팔이가 기승을 부린다든지.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한국의 국격이 올라갔다.

부러움을 한 몸에 사고 있다.

각국 한국 대사관에 플레이어들이 귀화 요청을 해 오고, 성수가 나오고 있음에도 성검 대여 순조롭고.

또 프랑스 특사단과의 진행과정도, 

여전히 곤란한 요구를 하고 있지만 곧 협상이 마무리될 것이다.라는 것까지.

'어우, 귀 따가워, 말이 많아지셨어.'

사실 주혁은 아까부터 전광일의 가슴에 달린 플래티넘 배지를 힐끗힐끗 훔쳐보고 있었다.

'저거 다시 회수해?'

한 개 한 개가 아쉬운 판에.

물론 달라고 하면 주겠지만.

참자.

그건 너무 치사한 짓이다.

'그래도 배지 5개면 피소환인 LSSR 등급 스킬 업그레이드가 가능한데.'

티클 모아 태산, 배지 모아 LSSR.

'하아.'

그래도 지금은 아니다.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아이고, 별말씀을, 가져다주신 아이템 덕분에 우리 엘리트 플레이어들의 탑 등반이 매우 안전해졌습니다. 상급 마정석도 순조롭게 채굴되고 있고요."

마음이 뿌듯하다.

이렇게 착한 사람 배지를 빼앗으려 했다니.

"참! 전에 부탁하신 빌딩 말입니다."

"아, 맞다. 어떻게 됐죠?"

"청장님께서 알아본 결과...."

전광일이 열심히 설명했다. 

강남 61층짜리 빌딩이 매물로 나왔다는 말.

지금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고,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난 상황이라며 법적인 절차만 남았다고.

그런데 빌딩의 가격이,

"…얼마라고요?"

"1조 3천억입니다. 모기업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싸게 나온 물건입니다."

"어..."

주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1조 3천억?'

아니, 빌딩 하나 산다고 한 건 맞지만 1조 단위까지는 생각조차 안 했는데.

"봉 플레이어님의 사회적 위치에 비하면 이보다 더 좋은 빌딩을 소개해드려야 하는데, 현재 매물로 나온 게 이것밖에 없어서."

"...."

이 사람들 왜 이래?

'내 사회적 위치가 어때서.'

대한민국 평범한 하남자 아닌가.

각성 특성 하나 잘 얻어서, 그리고 피소환인들 잘 만난 덕택에 여기까지 온 것뿐인데.

'내가 어디 봐서 1조 3천억 척척, 지를 사람이야?'

이거 어쩌나.

그 1 비싼 빌딩을 어떻게 사? 

그냥 동네 꼬마 빌딩 정도만 생각했는데.

일이 너무 커졌다.

1조 3천억만큼 커졌다.

애초에 그만한 돈이라도 있나? 

계좌 확인해보니 절반도 못 미친다.

'안 산다고 할까?'

하지만 이야기가 다 된 상황이라고 하니.

"각성 관리청 법률 자문을 담당하는 박앤김 로펌에서 모든 업무를 대행해주기로 했으니 따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네."

무섭다.

3백억짜리 펜트하우스 구입할 때도 살까 말까,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벌벌 떨었다.

그런데 1조 3천억짜리, 강남 61층 빌딩 구매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다니.

"...저기, 대출은 받을 수 있죠?"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출 이자 싼 은행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부청장님.

저 그렇게 간 큰놈 아닙니다.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심장이 폭풍처럼 뛰고 있어요.

"그리고 곧 라직스 물산에서 와이번 가죽제품을 런칭할 계획 입니다. HG 그룹에서도 바실리스크 가죽 대금이 들어올 예정이니까."

"아!"

그래, 잊고 있었다. 

라직스 물산이 있었구나.

주혁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라직스 덕분에 와이번 가죽을 상품화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당연히 이름도 그렇게 지어야지.

'그러고 보니 나 회사 대주주네?'

성검주, 건물주, 대주주.

맞다.

트리플 주(主)가 될 사람인데 그깟 1조 3천억쯤이야.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진다.

자신감도 생겼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열심히 벌어야 한다..

이 빌딩 질러버리면 한우 새우살은커녕 삼시세끼 라면도 못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딸린 식구가 몇 명인가?

곧 새로운 피소환인도 한명 더 올 테고.

한 달마다 한 명씩 온다.

한집안 가장의 어깨 위에 놓인 짐이 이렇게나 무거울 줄이야.

열심히 벌자.

뼈가 으스러지게 벌어서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한다.

주혁은 굳은 의지를 담아 전광일에게 말했다.

"번거로우실 테지만 또 부탁드릴게요."

"네? 뭘 말씀이십니까? 빌딩 하나 더 알아봐 드릴까요?"

이 양반이 정말 사람 파산시키려고 하나.

"그건 됐고요. 아이템 판매 대행요."

"...어? 네?"

"팔 것이 더 있거든요."

"어, 얼마나"?

주혁은 라직스를 지정 소환했다.

"호에,"

짧은 팔을 번쩍 들고 나타난 우주대머슴.

전광일은 긴장했다.

라직스 님이 나타났다.

그럼 설마?

"여기, 종류별로 차곡차곡 쌓아요."

"호엥!"

라직스가 아공간 가방을 개방했다.

아이템이 쌓이기 시작했다.

상급 마정석, 장비 아이템, 형형색색의 보석, 금괴....

말그대로 쌓였다.

높디높은 재료창고 천장에 닿을 정도로.

'...이, 이게 다 뭐야?'

또?

전광일은 그저 넋 놓고 지켜만 봤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해?

전보다 양이 많다.

그냥 많다고 할 수준이 아니다.

2배, 아니 3배 이상?

진짜 탑 안에 보물창고라도 있나?

"다 팔아주실 수 있나요?"

"…어음, 네네, 파, 팔아야죠. 열심히 팔겠습니다."

이 많은 걸 언제 다 소화하지?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주혁에게 물어오는 전광일.

"저어, 이번 기회에 외국 플레이어에게도 플레이어 샵입장을 허가할까요? 이 정도 물량이면 그래도 될 것 같은데."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게 하죠."

당연히 찬성.

빨리 팔려야 1조 3천억 마련할 수 있지 않겠나?

한국 플레이어만 탑 공략하나?

외국 플레이어도 자국 탑 공략해야 한다.

하지만 곧 완판될 것이다.

전 세계 플레이어 숫자만 해도 몇 명인가?

70만에서 150만 사이.

그중에서 절반만 플레이어 샵에 들러도....

하나만 사는 게 아니라 두세 개, 서너 개, 대여섯 개, 막 사갈 텐데.

'이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어.'

어디서 더 구할 데 없나?

광마가 그랬다.

한국 검은 탑이 아니라 다른 국가 검은 탑이면 보물창고가 또 있을 수도 있다고.

'가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현재 다국적 탑 이용권이 6장 정도 있다. 

자주 나오는 아이템이니까....

"프랑스 정부가 부탁해온 것이 뭐였죠?"

"71층에 등반해서 4종 아이템 넘겨달라고.... 아주 뻔뻔한 요구 조건입니다. 지들은 손도 안대고 코 풀겠다는 말 아닙니까?"

거, 코 좀 풀어주면 어때서?

"해주겠다고 하세요."

"...네?"

"대신 제가 프랑스 검은 탑을 73층까지 공략하는 것이 조건이라고 전해주시고."

"헉!"

전광일은 화들짝 놀랐다.

70층 공략이 아니라 73층까지 공략해 준다고?

"혹시 거절할까요?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번쩍 차린 후에.

"아, 아뇨. 절대 거절할 리 없을 겁니다. 감히 마다하겠습니까?"

맞다.

붕괴 시한이 중첩되는데. 

540일의 시간을 벌게 되는 셈인데.

"그럼 부탁드릴게요. 일단 프랑스 정부 허락은 받아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청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돈!

돈을 벌어야 한다.

곧 있으면 통장 계좌가 텅텅 빈다.

빈 통장은 바로바로 채워 넣어야 한다.

갑자기 떠오르는 고민.

'빌딩 사면 관리는 누구에게 맡기지?'

걱정 없다.

집에 노는 사람 한 분 계신다.

아버지 봉수철.

엄마도 계시니까.

아아아!

얼마나 효자인가?

부모님 직장도 마련해드리고.

'그런데 프랑스 검은 탑에도 보물 창고가 있겠지?'

없으면 나가리인데.

뭐, 그래도 배지 획득하는 걸로 만족하면 된다.

현재 누적 개수 85개.

인벤토리 안에 남은 현물 배지는 53개.

어제까지 57개였다가 코사크 1개, 광마 1개, 라직스 2개를 달아줬기 때문에 이렇다.

'프랑스 검은 탑, 70층, 71층, 72층, 73층을 모두 공략하면?'

70층은 S++ 등급밖엔 안 되니까 플래티넘 배지 1개, 71층부터는 2개씩 모두 7개.

누적 92개 현물은 60개.

배지 수도 늘리고, 특전도 한 번 더 받고, 더불어 사령술사의 던전 보물창고와 왕궁 보물창고도 털어온다.

이게 바로 일석사조(一石四鳥) 아닌가.

***

주혁의 의사를 전달받은 박경수 청장은 즉시 프랑스 특사단과 협상을 시도했다.

4종 선물 세트 받아서 넘겨주겠다.

대신 프랑스 검은 탑을 73층까지 공략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자.

프랑스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환영이었다.

71층, 72층, 73층을 공략하면 540일의 붕괴 시한이 축적되니까.

주혁도 피소환인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지정 소환으로 모두 부른 후에.

"빌딩 하나 사야겠어요."

"오! 건물이 최고임다. 부동산 불패 아임까."

"소녀도 찬성이옵나이다. 공자님이시라면 빌딩 한 채가 문제겠습니까?"

모두 흐뭇한 표정. 

하지만.

"조금 비싸요. 돈을 더 벌어야 해서."

"얼맘까? 한 500억 함까?"

견달래가 코웃음 쳤다.

"흥! 이 집이 300억입니다. 빌딩 한 채를 사는 건데, 최소한 1,000억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혀를 내두르는 코사크,

"와! 진짜 비쌈다. 그 돈이면 평생 한우 등심 먹어도 남슴다."

"사람들이 건물주, 건물주 하는 이유가 있지요."

주혁은 빌딩의 가격을 밝혔다.

"1조 3천억요."

"...넴?"

"강남 요지에 61층 빌딩. 1조 3천억이라고요."

"어음, 1조가 그 1조 맞슴까?"

"네."

"진짜?"

"속고만 사셨나? 제가 코사크님인 줄 아세요?"

코사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큰일임다. 우리 이제 쫄쫄 굶어야 함다. 대출 빚에 시달려 쫓겨 다녀야 할지도 모름다. 이 집 팔아봐야 300억임다."

견달래는 충격이 큰 모양.

"아아아아...."

이마를 손가락으로 짚더니 비틀하면서 혼절했다.

"어이쿠, 공주님! 일어나십쇼! 이럴 때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함다."

광마도 궁금한 표정으로.

"대체 1조가 얼마나 많은 돈이기에? 소환사가 감당 못 할 만큼인가?"

"조금 비싸긴 하죠. 그래도 열심히 벌면...."

"그럼 뭐가 문제인가? 사면 되지."

그러자 코사크가 버럭 화를 내며 광마를 타박했다.

"광마님은 세상 물정도 모르심까? 엘리트 플레이어 연봉이 120억임다. 그걸 그대로 10년 모으면 1,200억임다. 100년 모아야 1조 2천억임다. 그래도 천억 모자라 강남 빌딩 못 삼다."

광마는 흠칫! 놀랐다. 

궁색한 표정으로,

"허허, 그, 그 정도일지 노부는 몰랐지."

코사크의 매서운 시선을 피하는 광마.

"뿐임까? 취득세에, 재산세에, 종합부동산세에, 관리비에… 아이고, 우리 봉 소환사님 빌딩 거지 되셨네. 빌거야, 빌거."

베로니카는 질린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고방과 바르딘은 실감이 나지 않는지 그저 멀뚱한 표정.

하지만 딱 한 사람만은 달랐다. 

비웃는 듯한 표정의 라직스.

"호에에에에."

그깟 1조 3천억?

나만 믿으라는 듯, 주혁을 보면서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그래, 우리 라직스 밖에 없다.

"라직스 씨, 할 수 있겠어요?"

"호엥!"

"좋아요! 그럼 해봅시다."

시간은 충분하다.

하루에 두 개 층 공략하면 고작 이틀.

마침 프랑스와 계약이 끝났다고 하니.

먼저 다국적 탑 이용권 한 장을 찢은 후에.

[다국적 탑 이용권 티켓을 사용하셨습니다.]

[입장하고자 하는 탑의 국가 명과 층수를 말씀하세요.]

"프랑스 검은 탑, 70층."

[입장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지금 입장하시겠습니까?]

"입장."

스팟!

[프랑스 검은 탑 70층에 입장합니다.]

저벅저벅!

카발란이 숨어있는 저택을 향해 걸어가는 주혁과 피소환인들.

다들 표정이 흉흉했다.

강렬한 전투 의지.

눈에 보이는 건 모조리 쳐부수겠다는 일념.

삐걱,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복사본 카발란이 비릿한 표정으로 좌중을 굽어보면서.

"어서 오너라."

어서 오긴 뭘 어서 와?

"쳐요!"

우르르르!

퍽퍽퍽퍽!

"…커허헉! 무, 무슨?"

바쁘다고, 이 새끼야.

걸리적거리지 말라고.

[공지 : 검은 탑(프랑스)의 70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를 수여합니다.]

뒤를 이어 주욱 올라가는 세계 공지.

프랑스 검은 탑에서 혜택이 어쩌고, 상급 마정석 보상이 저쩌고.

들을 필요도 없다.

퇴장하고 나와서.

다음 71층으로.

바로 4종 선물 세트 받아놓고.

"기본임무만 함까?"

"그냥 싹 치워버립시다."

아이템 보상도 받았다.

흔하게 나오는 거다.

해방의 룬 목걸이에, 성수 그런 거.

다국적 탑 이용 티켓이나 한 장 더 줄 것이지.

"썅년, 조준 완료."

"쏘세요!"

찌이이잉!

파주주죽!

퍼억!

그렇게 도망가는 케이트까지 죽인 후에.

[공지 : 검은 탑(프랑스)의 71층 공략 등급 S+++를 달성하셨습니다.]

[S+++ 공략 보상 : 플래티넘 배지 2개를 수여합니다.]

내일은 보물 창고 두 개 터는 날.

하지만 부족할 것 같다.

보물창고 한 10개만 털어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텐데. 

어디 또 털탑 없나?

***

이날, 세계 공지를 접한 프랑스 국민들은 환호했다.

그분이 오셨다.

프랑스의 구원자가 말이다.

덕분에 프랑스는 유럽에서 최초로 상급 마정석 보상 가능 국가로 올라섰다.

세계 각국도 프랑스의 사례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굳이 애써서 올라갈 필요 없이 그냥 우리도 공략해 달라고 하면 안 될까?

그럼 매우 편하고 확실할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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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자의 탑 공략법 113>

71층 공략이 끝난 직후,

주혁은 전광일을 만나 해방의 룬 목걸이와 형상 변환의 반지를 전해줬다.

전광일의 손을 거쳐 프랑스 특사단에 전달될 예정.

프랑스 정부도 계약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어차피 71층에 올라가서 목걸이와 반지를 프랑스 정부에 넘기는 게 본 계약의 전부.

파리 드골 공항에서 미리 포장을 끝마치고 대기 중이던 한국의 문화유산들이 수송기를 통해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직지심체요절, 외규장각 문서, 왕오천축국전, 김홍도의 그림을 비롯한 900점 이상의 고서적과 미술품,

다들 주혁의 개인 소장품이 될 것이다. 계약서에도 그렇게 명시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국가가 대여해서 박물관에 전시하는 방식.

국가적 보물을 개인이 소유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어 표면적으론 한국에 반환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것만 해도 빌딩값은 벌고도 남았다.

팔 수만 있다면 말이다.

다음 날 주혁은 또 다국적 탑 이용 티켓을 이용해 탑에 입장했다.

임시 귀화?

한번 해봤으니 됐다.

처음엔 색다른 느낌 때문에 봉주르, 메르시하고 다니면서 장난질도 쳤는데,

별로 재미가 없다.

귀화 절차도 귀찮고,

대사관 사람과 또 만나야 하니까.

전광일 부청장도 임시 귀화는 안 했으면 하는 눈치.

관리청으로서도 얼마나 부담이 될까?

국가 최고 플레이어가 또 임시 귀화라니.

티켓이야 또 보상으로 받으면 된다.

의외로 잘 나온다.

한국 검은 탑 71층과 3층에서도 한 장씩 먹었다.

보상 확률이 높아진 탓일까?

'정 급하면 쉬면서 겸사겸사 조각 맞추기나 해봐야지.'

프랑스 검은 탑 72층.

임무 보상으로 상급 마정석에 무기와 장비 아이템 등등 여러 개.

뭐, 보상받으러 왔나?

보물창고 털러 왔지.

초마수 하이드라와 사령술사 노마는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공략에 임한 광마 앞에선 말이다.

문제는 보물창고,

과연?

"호엑!"

두 손을 번쩍 든 강탈자 라직스,

"만세!!!"

"우주대도적 라직스이옵니다."

"실로 강호 제일의 신투로다."

"보급관님, 필승!"

72층 사령술사 던전 보물창고 위치이동 완료.

이어서,

73층 노턴 왕국 보물창고도 위치이동 완료.

다행스러운 건,

73층 관중석 초승달 부메랑 파도타기 대량 살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왕만 죽였다.

주혁의 정신건강을 염두에 둔 광마의 배려였다.

***

스팟!

주혁은 일행과 함께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실로 위풍당당한 탑 도적단들.

그깟 1조 3천억?

한탕하면 금방이다.

"우리가 도적이 될 상임까?"

"코사크님이야 옛날부터 도둑놈, 아니 도적이었지요."

"우주대도적 라직스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아임다."

"호엥!"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우주대도적 얼굴을 보십쇼. 역시 털어도 크게 털어야 함다."

남의 나라 탑 보물창고를 털어와서 살짝 미안했지만 애초에 라직스가 아니고선 누가 그 보물들을 가져올 수 있을까?

자, 빠르게 논공행상 시작.

배지 수여식.

다 하나씩 돌리기로 했다.

아낄 필요가 없다.

피소환인들의 스킬 업그레이드는 곧 주혁 자신의 업그레이드.

이번에 스킬 업그레이드 대상자는 모두 3명,

코사크와 베로니카, 광마가 각각 5개씩.

코사크는 어떤 스킬을 LSSR 등급으로 올렸을까?

화악!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며 사라지는 배지 5개.

"은신 스킬 업그레이드임다. 아무도 못 찾슴다. 광마 어르신도 어려울 검다."

스르륵,

사라지는 코사크.

"호오! 감쪽같구나. 네 말이 맞다."

"으헤헤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긴 해도 어느 방향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고방이 내 딱밤 때리려면 먼저 날 찾아야 할 검다."

쯧쯧.

결국 딱밤 피하기 위해서였나?

맞을 짓 안 하면 되는 건데,

다만 그리 길진 않은 것 같다.

금방 스르륵, 나타나는 코사크,

광마가 피식 웃으며,

"조루였어, 유지 시간이 짧아."

"당연하지 않슴까? 스스알 등급이 르스스알 스킬 사용하니 가랑이가 찢어지는 검다."

"그래도 주제 파악은 되어 있구나."

"예압!"

베로니카는?

"상사 베로니카 캘리버, 마총 사격술입니다. 전체적인 공격력 상승, 명중률 보정, 그리고 탄환 소모도 적어집니다."

베 상사답게 효율적인 선택,

군인이면 총을 잘 쏴야지.

"마음에 듭니다. 베 상사밖에 없어요."

다리를 착! 모으고 오른손을 힘차게 올려 척! 경례하는 베로니카,

"필승!"

출렁!

그럼 광마는?

조금 이상하다.

코사크와 베로니카는 배지 5개가 되자마자 몸속으로 흡수되었는데 광마는 그대로,

왜 광마님은 흡수되지 않지?

LSSR 등급은 남다른가?

"업그레이드할 스킬이 있어야 말이지. 다 극의를 본 것이라."

뭐야?

필요도 없으면서 왜 받아?

달아드릴 필요가 없잖아.

"그래도 빼앗지는 말아주시오. 언젠간 다 쓸데가 있지 않겠소?"

흠.

어디다 쓰려고?

조금 수상한데?

뭔가 있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

'뭐, 상징적인 의미로 달고 다니시는 거겠지.'

광마님이야 그래도 된다.

아깝지 않다.

이제 마지막 남은 순서,

플래티넘 배지 누적 91개.

특전 확인이 남았다.

"솔직히 이젠 기대도 안 돼요. 자꾸 이상한 아이템이나 주고 말이야."

광마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음? 이전 특전을 무엇으로 받았길래."

"...어, 별로 안 좋은 겁니다. 쓰레기 같은 거요."

광마에게 탑 강점 선포 확성기를 밝힐 수 없다.

그랬다간 당장 사용해서 다른 나라 탑 빼앗자고 할 것이 뻔하다.

"쓰레기라, 알만하오. 뭐가 나오던지 전 같지는 않을 거요."

침중한 표정의 광마.

"해방의 룬 목걸이가 풀린 이상 탑의 장난질이 극에 달할 테니까."

아니, 장난칠 때 치더라도 줄 건 줘야지.

이쯤 되면 특성 강화 한번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이번에도 주사위나 확성기 주면 확 엎어버린다.

새로운 가족도 올 텐데.

주혁은 긴장된 마음으로 인벤토리를 열어 새로 획득한 배지를 확인했다.

[플래티넘 배지 90개 누적으로 특전을 지급합니다.]

"제발 특성 강화!"

"특성 강화 나와라."

"특강임다."

"공자님의 건승을 기원하나이다."

"마이 로드! 특성 강화를 쟁취하시길."

"호에!"

[특전 : 특성...]

"으아아아, 특서어엉...."

[특전 : 특성 추가의 룬이 탑 전용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엥?"

특성 강화가 아니라 특성 추가.

앞에 특성이란 말을 듣고 소리치려다 말았다.

'...이건 또 무슨??

처음 보는 아이템.

<특성 추가의 룬,〉

효과 : 특성을 하나 더 추가해 이중 특성으로 진화합니다.

한계 : 추가되는 특성은 랜덤입니다. 같은 특성이 나왔을 시 기존 특성을 강화합니다.

'이중 특성?'

특성을 하나 더 준다는 말,

예를 들어 [검술]이라는 특성을 랜덤으로 획득하면 주혁의 상태창은,

[특성 ] : 소환(동시 소환 : 7) / 검술(강화 1단계)

이렇게 변한다는 건가?

'애매하네.'

오히려 한계가 더 괜찮아 보인다.

같은 특성이 나왔을 시 기존 특성을 강화한다는 한계,

잘하면 특성 강화를 한 번 더 이뤄낼 수도......

"뭐 나왔슴까?"

"특성 추가의 룬이요."

"아!"

"그게?"

"으음."

피소환인들의 안색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것도 쓰레기인가요?"

대표로 답변하는 광마.

"나쁠 건 없소. 특성이 추가되면 스킬도 늘어날 것이고, 그만큼 소환사의 힘도 강해지니까."

그렇지.

교체되거나 빠지는 게 아니라 더해지는 거다.

"그러나 하필 이 시기란 말이오. 해방의 룬 목걸이가 풀리고 있는 때에..., 이것도 장난질일 수도."

광마가 계속 말을 이었다.

"플레이어의 특성은 종류가 매우 많소. 그중에서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특성도 다수 존재하오. [광전사]라든지, [블러드], [천살성], [괴력난신], 이런 것들이 특성으로 추가되면?"

아!

아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이성은 감정을 이기지 못한다오.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이지 않소?"

만약 주혁이 특성 추가의 룬을 먹고 랜덤으로 추가된 특성이 [광전사]라면?

미쳐 날뛰는 소환사가 될 것이다.

전투가 일어났을 때 제일 먼저 뛰어나가는 그런 소환사,

또한 특성 강화 투자도 못 한다.

강화 룬 있으면 소환 특성에 써야지, 다른데 왜 써?

"그다지 필요한 물건은 아니군요."

"정확하오. 심심풀이 용도로 쓸 수는 있지만, 앞서 말했듯 장난질이라면 이상한 특성이 추가 될 수 있으니."

어떤 새끼들인지 몰라도 함정 여러 개 파녜.

탑에서도, 현실에서도.

지금은 주력 특성에 집중하는 것이 더 급하다.

특성 하나 추가해서 뭐 하게?

'지금 당장은 먹지 말자.'

똑같은 특성이 나와 강화로 이어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희박한 확률이라 위험부담이 크고, 이것도 확성기에 이어 인벤토리 행,

'쩝, 진짜 다음 특전엔 굿이라도 풀어봐야 하나??

아무튼 다 확인했다.

털어온 아이템은 전광일 부청장에게 판매 대행으로 넘기고 푹 쉬자.

무작위 소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될 때까지.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

전 세계 탑 공략의 판도가 변화하고 있었다.

붕괴 시한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71층으로,

미국 국토안보부,

맥밀란 장관과 안토니오 국장도 이번 변화에 심각하게 고심 중이었다.

원래는 동부 탑만 71층으로 올릴 계획이었다.

서부 탑은 붕괴하면 치명적이라 너무 높이 올려두면 안 된다고 판단했었다.

정말이지 서부 탑은 골칫덩어리.

탑이 여러 개 있다고 한들 뭐가 좋아?

아무런 이익이 없다.

붕괴 시한폭탄만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일 뿐,

상급 마정석 생산도 그렇다.

순전히 플레이어 수와 활동량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탑이 여러 개일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긴 하다.

71층 등반 시 받을 수 있는 4종 선물 세트.

누구든 최초 등반하기만 하면 받는다.

서부 탑 71층에 오를 수 있는 플레이어는 현재 제랄드 뿐,

60층 대 언데드 구간이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이 일종의 방어선 역할,

예전보다 난도가 매우 하락했다고 하지만 일반 플레이어들이 이 구간을 등반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검을 아무에게나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플레이어들의 활동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한국 플레이어 샵 전면 개방,

전 세계 플레이어들이 한국 각성 관리청 플레이어 샵을 방문해 아이템 사 가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아이템 빨이 플레이어에게 미치는 영향은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능력이 향상된 플레이어.

심지어 성수(聖水)만으로 언데드 구간을 돌파하고 있는 플레이어도 나타났다.

그로 인해 언데드 구간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미국으로선 큰 위협.

통제되지 않은 플레이어가 71층을 등반해버린다면?

"제랄드는?"

"71층 반복 공략 중입니다."

한국 정부에서 전 세계로 정보를 뿌렸다.

웬만하면 72층과 3층은 기본 임무만 하고 끝내라고. 특히 조건 공략이 붙으면 절대 진행하지 말라면서,

상세한 이유도 설명해줬다.

그런 이유로 현재 제랄드의 72층 등반을 막고 있다.

"순순히 따르던가?"

"천만에요. 자존심 상해하더군요. 자신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게 아니냐면서."

그렇겠지.

한국 플레이어는 73층까지 S+++ 등급으로 공략했는데,

"흠, 대신에 서부 탑도 71층까지 공략하지. 백악관 결재가 떨어졌어. 제랄드에게 말해 보게."

안토니오 국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성검 대여는요? 한국으로 갈 준비할까요?"

"아니, 이번엔 성수로, 진짜 성검 없이 되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가능할 겁니다. 성수만 충분하면요."

미국 정부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부 탑 71층엔 아직 4종 선물 세트가 남아있다.

누가 가로채기 전에 미국 정부가 먼저 확보해야 한다.

***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집에서 빈둥빈둥, 지겨우면 밖으로 나가 빈둥빈둥.

가끔 한국 검은 탑에도 들어가 봤다.

혹시나 보물창고들이 다시 생성됐을까 싶어서,

하지만 공략 대상들은 모두 리젠되었지만 보물창고는 아니었다.

장소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실망하진 않았다.

지구의 검은 탑은 145개.

언젠가 기회가 또 오겠지.

라직스가 털어버린 4개의 보물창고,

그곳에서 나온 양질의 아이템들.

무서운 속도로 팔리고 있었다.

주혁의 계좌도 따라서 풍요로워졌고,

어디 주혁에게만 좋은 일인가?

플레이어들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반복 공략은 안전해졌고, 미공략 상층 등반도 순조로워졌다.

아랍에미리트도 플레이어 샵에서 수십 개의 아이템을 구매해갔다.

온 김에 성검을 대여해서 주혁의 도움 없이 60층, 61층을 공략해냈다.

빈살라 왕세자가 고마움의 표시로 주혁에게 줄 선물을 전광일 부청장에게 맡겼다던데, 나중에 받으면 되고,

이렇게 좋은 일만 가득한데,

정작 주혁의 펜트하우스는 눈물바다였다.

"고방 씨, 2주 후에 꼭 다시 봐요."

·전사는 소환사의 방패다. 조금만 기다려라. 소환사는 전사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의미다."

아아아!

어떻게 눈물을 참을 수 있겠어?

주혁은 천천히 고방의 가슴에 배지를 달아 주었다. 25개가 될 때까지.

그리고 손에다 피소환인 등급 돌파의 룬을 쥐여줬다.

이제 LSSR 등급 돌파를 위해 떠나야 할 시간.

견달래는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옷소매로 찍었고, 바르딘은 고방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베로니카와 라직스는 차렷 자세로 경례를 붙이며 떠나는 고방에게 경의를 표했다.

심지어 광마도 고방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단 코사크만이 불퉁한 표정.

"누가 보면 나라 잃은 줄 알겠슴다. 2주 후에 또 볼 거 아임까?"

"진짜 매정하네요. 안타까운 시늉이라도 해보세요."

주혁이 떠밀자 마지못해,

"무, 무사히 다녀와."

"나 대신 소환사를 부탁한다."

"...알았어. 나만 믿어."

겉으로는 저래도 고방이 걱정스럽겠지.

그럼,

"고방 소환 해제."

스팟!

고방도 갔으니까.

우울한 기분은 싹 잊어버리고,

"새로운 식구 맞이해 볼까요?"

무작위 소환 재사용 시간이 돌아왔다.

빠르게 불러내 보자.

먼저 티켓을 꺼내고.

"기대되네요."

"좋은 분이 오실 거라 믿사옵니다."

그래야지.

찌이익!

주혁은 티켓을 찢었다.

[LSSR 등급 확정 소환 티켓을 사용하셨습니다.]

[다음 무작위 소환 시 LSSR 등급의 피소환인이 확정적으로 소환됩니다.

"무작위 소환!"

시작됐다.

화아아아앗!

여기저기서 생겨나는 빛무리.

형형색색 다채로운 색깔,

순간! 파파팟!

사라지는 빛무리.

나타났나?

어디 있지?

없다.

눈을 비비고 다시 찾았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 소환 실패하는 경우도 있나요?"

"그럴 리 없사옵니다. 감히 어느 누가 공자님의 부름을 거부하겠사옵니까?"

그런데 이게 뭐야?

없잖아?

바로 그때!

"호에에...."

라직스가 짧은 팔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누군가 눈에 들어왔다.

거실 코너 부분에 머리를 박고 쭈그리고 앉은 한 사람,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머리 스타일과 입은 옷을 보니 성별이 여자 같았지만,

<카탈로그 : 대인기피 방구석 은둔형 외톨이 연금술사.>

- 이름 : 알리아마리,

- 등급 : LSSR(레전드 스페셜 슈퍼 레어)

- 유형 : 연금술사(엘프)

- 현신기한 : 3시간

- 만족도 평가 : 없음.

- 재소환 대기 시간 : 6시간(소환 해제 후 적용)

'...대체 무슨??

LSSR이 은둔형 외톨이라고?

게다가 엘프라면서.

"저기...."

주혁이 말을 걸자.

움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언제 썼는지 글자가 적힌 종이를 거실 바닥으로 스윽 밀었다.

물론 한글로.

종이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죄송해요. 대답하기 어려워요. 입으로 말해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흠.

어쩌지?

그래서 주혁도 그 종이에 글씨를 적었다.

반갑습니다. 알리아마리님. 잘 오셨어요.

스윽,

밀어주자.

긁적긁적 글씨를 적으며 또 다시 스윽.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리라고 불러주세요.

뭐, 대화는 통한다. 그나마 다행.

심각한 성격장애는 없는 것 같아서.

그건 그렇고,

연금술사.

'생산직이네?'

그리고 왠지 마음에 든다.

동병상련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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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자의 탑 공략법 114>

무한의 감옥.

일명 무저갱,

엄청나게 넓은 곳이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소문은 의외로 빠르게 퍼져나간다.

그들의 소통 방식 때문이다.

영혼과 영혼의 감응.

즉 텔레파시.

『소문 들었어? 또라이 엘프 년이 밖으로 나갔다더군.』

『설마 욕쟁이 알리아마리?』

『그래, 걔, 아무 데서나 욕 찍찍 내뱉는.』

『일 났군. 나가자마자 소환사에게 욕부터 박는 거 아냐?』

『아무리 미쳐도 그짓은 못 하지.』

『아니, 이번 소환사는 무슨 폐지 수집가인가? 어째 그런 애들만 불러내?』

『이제야 알겠군. 내가 나가지 못한 이유.』

『뭔데?』

『너무 정상적으로 살아서 그랬어.』

『나도 마찬가지야. 여기서 나만큼 정상적인 사람 있나?』

『하아, 정상인들은 나가지 못하고, 어디 한군데 부족한 놈들은 잘도 나가고.』

『깔깔깔, 미친놈들이, 어디서 정상인 흉내들이야? 니들 다 폐지잖아.』

『닥쳐라! 요사스러운 년아!』

『음, 그래, 하지만 이번 소환사가 정말 폐지 수집가가 맞는다면 걱정할 것 없어. 언젠간 너희들도 불려질 거야.』

『...그런가? 그럼 나도 희망이 있겠군, 광마보다 더 또라이가 될 자신이 있다.』

『원래 이 구역 미친년은 나지, 알리아마리는 내 발밑이었어.』

『사실 나도 엘프년보다 욕 하나는 잘 했어.』

『갑자기 미친년, 미친놈 경진대회?』

『진짜 대회가 열렸으면 좋겠군. 그렇게라도 밖으로 나가보게.』

『나도.』

『나도.』

***

LSSR 등급의 연금술사 알리아마리. 

어제 살펴본 그녀의 배경 설명.

- 엘프 연금술사 알리아마리의 삶은 매우 불행했다. 어릴 적 같은 종족에 의해 고룡 블랙드래곤 카시우루스에게 제물로 바쳐진 알리아마리, 평생을 카시우루스의 레어에서 노예로 살았다.

- 블랙드래곤은 그녀에게 연금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연금술은 고독함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가 되었다. 그렇게 평생을 홀로 살 줄 알았는데 변화가 생겨났다. 고룡 카시우루스가 그녀보다 일찍 마나의 품으로 돌아갔다.

- 이제 자유가 된 알리아마리, 하지만 그녀는 레어 밖을 나가지 않았다. 천 년 동안의 고독은 이미 알리아마리 삶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죽을 때도 그녀는 혼자였다.

극심한 대인기피증, 그리고 방구석 연금술사가 된 이유.

소환사인 주혁 말고는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종이로 나누는 필담조차도.

같은 여자인 견달래와 베로니카의 말도 씹었고, 라직스의 귀여움도 통하지 않았다.

코사크도 앞에서 알짱거리다 철저하게 개무시 당했고, 광마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면 곤란하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녀의 대인기피증을 고치려고?

천만에!

그럴 생각 없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리하여 일종의 정체성이 되어버렸는데, 

쉽게 고쳐질까?

다만 소통 정도는 가능하게 할 생각.

불편하게 종이에 글자를 적는 방식 말고.

여긴 21세기 한국.

얼굴을 맞대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주혁은 전광일 부청장에게 연락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만나서.

"아이템은 잘 팔리고 있죠?"

"네, 플레이어 샵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마 빌딩 구매하실 때 대출 같은 건 필요 없으실 듯합니다."

"다행이네요. 혹시 모자라면…"

"아닙니다. 재고가 넘쳐납니다. 참! 그리고 여기..."

주혁에게 서류철과 사과 패드 3개가 든 종이가방을 건네는 전광일.

"그분들 모두 한국으로 영구귀화한 플레이어들로 처리했습니다. 완벽한 신분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해요."

"아이고, 별말씀을."

주혁은 피소환인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해주기로 했다.

서류상으로 말이다.

이름은 대충 지었다.

주민등록번호만 제대로 나오면 된다.

원래는 썩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굳이 피소환인들을 국가 전산망에 등록할 필요가 뭐가 있어?

하지만 이젠 필요성이 생겼다.

알리아마리 때문에라도.

"그럼 무슨 일이 생기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전광일과 헤어지고 나서.

주혁은 서류를 들고 다시 펜트하우스로 올라왔다. 

그리고 피소환인들 소환.

"자자, 모여봐요."

주혁은 사과 패드를 꺼냈다.

일전에 사두었던 패드가 6개, 이번에 전광일에게 부탁해서 추가로 산 패드가 3개, 모두 합쳐 9개.

13인치 큰 화면에 셀룰러 겸용.

전광일 부청장이 통신사 가입까지 일괄적으로 처리해줬다.

"케톡 회원 가입하세요. 주민번호는 제가 나눠드릴게요."

주혁의 설명에 따라 회원가입도 하고, 닉네임도 설정하고, 친구추가까지 마친 후.

주혁은 작은 방으로 가서 알리아마리를 소환했다.

이번에도 역시 방구석에 머리를 박고 나타난 그녀.

그녀의 회원가입은 주혁이 대신해줬다.

사용 방법은 종이에 글자를 적어 알려주고 나서.

단체 채팅방으로 일괄 초대.

띠링띠링, 울리는 메시지 알림음.

다들 각자 설정한 닉네임으로 채팅방에 입장했다.

<인싸코사> : 저 왔슴다.

인싸라고 주장하는 코사크.

견달래 공주는,

<겅듀♥무녀> : 공자님, 소녀, 인사드리옵니다.

저런 건 어디서 배웠대? 

요즘 MZ들은 저런 거 안 하는데.

하긴 견달래가 요즘 소녀인가?

<우주대머슴> : 호에!

자신의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라직스의 닉네임.

<베로베로베상사> : 필승!

베상사도.

<광마> :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소.

<주군의성검> : 마이 로드!

베 상사, 광마님, 바르딘까지 입장했다.

연금술사 알리아마리는? 

분명 초대를 눌렀는데.

<상남자> : 마리님?

그러자.

<마리> : 네.

왔구나.

이제 본격적으로 소통을 시작해볼까?

코사크가 먼저 스타트를 끊었다.

<인싸코사> : 마리님, 반갑슴다. 그동안 외로우셨을 검다. 앞으로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성심성의껏....

바로 그때!

<마리> : 닥쳐! @#%야!

<인싸코사> : 넴?

<마리> : 슴다. 검다. 넌 키보드 말투도 그딴 식이야? 관종 컨셉도 정도가 있지, &%@새끼!

순간 침묵하는 채팅방.

주혁도 눈을 의심했다.

갑자기 급발진?

<겅듀♥무녀> :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코사크님이 부족한 구석이 있지만....

<마리> : 겅듀같은 소리하고 있네. 넌 &#%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 해줄까?

<겅듀♥무녀> : 아아아.

이거 점점.

<베로베로베상사> : 마리님. 욕은 자제하세요. 배우신 분이.

<마리> : %#@세요. 가슴만 큰 년이 $*@$래? 확 &@%해버릴까.

<베로베로베상사> : 와! 나 오래 살겠네.

상상도 못 했다.

<광마> : 알고 보니 또라이였어. 가만! 미친 엘프라, 그러고 보니 들은 기억이 나는군.

<마리> : 응, $%#야. 틀니, $@&할까?

<광마> : 허허허, 재미있구나.

실제로는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대인기피증이지만,

<주군의성검> : 마리님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마리> : 회개? &@$ 새끼가, 입 구멍에다 %&#를 확! @%# 해버릴라.

<주군의성검> : 빛이여!!!

채팅방에선 포악한 키보드 워리어.

<우주대머슴> : 호에?

<마리> : 넌 귀여운 척하지 마! 하나도 안 귀여워! 진심이야.

<우주대머슴> : 호에에에,

<마리> : 아이씨! 하지 말라고!

살짝 흔들린 듯했지만 라직스도 통하지 않았다.

<상남자> : 저기, 마리님.

<마리> : 말씀하세요. 소환사님♡♡♡♡♡♡.

주혁만 빼고.

근데 하트는 뭐래?

급기야 알리아마리가 있는 방문 앞에 선 광마. 

쾅쾅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 거라. 어디 얼굴 보고 이야기해 보자꾸나. 과연 계속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 있는지."

하지만 굳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

제랄드의 집은 미국인답게 워싱턴DC의 근교 대저택이었다.

그의 저택에는 수십 명의 무장 경호원들이 상주하면서 근거리에서 그를 지켰다.

미국 최고 플레이어의 위엄.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

사실은 경호를 가장한 감시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유로 제랄드는 자유 시간의 대부분을 자신의 집 지하에 설치된 벙커에서 보냈다.

핵전쟁이 발발할 시 몸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지하 벙커.

특별한 것도 아니다.

워싱턴 대저택에 이런 벙커 정도는 다 구비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여긴 CCTV가 없다.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인벤토리에서 해방의 룬 목걸이를 꺼내 목에 건 제랄드.

목걸이 룬을 쿡! 눌러서 플레이어의 힘을 해방했다. 

이번이 두 번째.

순간!

우우우웅!

그의 몸 안에서 요동치는 마력의 기운.

"...아아아!"

마력이 용솟음쳤다.

그가 익혔던 모든 스킬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파이어볼."

화르륵!

제랄드의 손위에 떠오른 불덩어리.

근접 스킬도 마찬가지.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마력을 입히니.

지이이잉!

선명하게 입혀지는 검기.

서걱!

실험용으로 가져다 둔 두꺼운 철근 덩어리가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믿을 수 없군.'

정부에서 왜 이 아이템을 규제하려는 지 알 것 같다. 

위험한 아이템이다.

플레이어들이 이와 같은 아이템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금방 망할 것이다.

플레이어들의 손에 의해서.

제랄드도 바깥에서 사용할 생각은 절대 없다.

그저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조용하게.

소심한 방식으로 욕망을 채울 뿐.

지속시간 1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이제 사용 가능한 횟수는 1번.

<해방의 룬 목걸이.>

효과 : 1시간 동안 플레이어의 능력을 탑 바깥에서도 발현합니다.

한계 : 총 1회 사용 가능합니다. 횟수가 다 하면 룬이 파괴됩니다.

'어떻게 하나 더 구할 방법은 없나?'

이렇게 몰래 숨어서 가지고 노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데.

'놀 만큼 놀았으니까.'

제랄드는 다시 벙커에서 나왔다.

슬슬 공략 준비해야지.

서부 탑 68층부터 등반, 71층에 입장해서 4종 선물 세트 수령하기.

그런데 동부 탑 72층과 73층은 왜 기본 임무만 수행하라고 할까?

그곳이 어떻기에?

정보를 듣긴 했지만 불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71층은 매우 쉬웠다.

추가 선택 임무와 고난도 선택 임무도.

물론 마지막 초고난도는 어려웠다.

도망치는 사령술사 케이트를 처치하기 말이다.

반복 공략에도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나타나자마자 마법부터 갈기고, 필살기를 날렸는데, 블링크로 도망치거나 보호막에 막혔다.

왜 안 되는 거지?

한국의 플레이어는 어떻게 케이트를 잡았을까?

그것도 S+++ 등급 공략으로 말이다.

자존심이 상했다.

S+++ 등급 공략에 욕심내는 것도 아니다.

제랄드도 자신의 분수를 안다.

그 플레이어와 경쟁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저 층마다 주어지는 추가, 고난도, 초고난도 선택 임무를 평범하게 공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못 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은 미국 최고 플레이어였는데.

그리고 한국의 S+++ 등급 공략 플레이어가 나타나기 전까진 세계 최고였고.

'내가 못 할게 뭐가 있어.'

어떻게 할까?

예전부터 고민해왔다.

동부 탑 72층 공략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제랄드는 결정했다.

'72층 올라가 봐야겠군.'

도저히 못 참겠다.

추가 선택 임무와 고난도 임무까지만 완수한다.

초고난도는 빼고,

'나중에 안토니오 국장에게 한 소리 듣겠지만....'

뭐 어때?

공략하면 붕괴 시한도 늘어나니까 오히려 좋지.

일 저지르고 나서 사과하면 그만이고.

'언제 갈까?'

오늘.

아직 탑에 들어가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제랄드는 안토니오 국장에게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남겼다.

- 동부 탑 72층 공략하고 올게요. 서부 탑 공략하기 전에.

스팟!

사라지는 제랄드.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하루가 다 지나도록 말이다.

***

주혁의 펜트하우스.

어제는 대단했다.

대인기피증 연금술사 알리아마리.

전형적인 키보드 워리어.

광마의 말에 의하면 저쪽 세상에서도 원래 유명했단다.

욕쟁이 엘프.

대놓고 욕을 지껄인다고.

그래서 이 엘프가 그 엘프인지 꿈에도 몰랐단다.

미친 엘프가 사실은 대인기피증이었다니.

어떻게 몰랐지?

그건 저쪽 세상에서 의사를 소통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광마와 어제 나눴던 대화에서.

'영혼들은 입으로 말하지 않소.'

'그럼 어떤 방법으로?'

'일정 지역 안에서 영혼과 영혼이 감응하여 텔레파시 형식으로 의사를 전달한다오. 이 채팅창과 상당히 유사한 방식이오.'

이해는 된다.

천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살아온 엘프 알리아마리.

사람 만나는 건 당연히 무섭지.

대인 기피증.

그녀의 욕설은 자기방어에 가까웠다.

혹은 일부러 자신을 싫어하게 만든다거나, 그래야 말을 거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웬만하면 앞으로 둘이서만 대화를 해야겠네.'

순간. 지이잉! 

걸려오는 전화.

확인해보니 전광일 부청장이었다. 

불과 어제 만났는데.

"여보세요."

- 아, 봉 플레이어님, 혹시 바쁘신지....

"아뇨, 괜찮아요. 무슨 일로?"

- 방금 안토니오 국장과 통화했습니다. 그런데...

안토니오 국장과 전광일 부청장은 평소에도 친분이 있는 사이.

서로 통화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지만 잠시 침묵했다가.

- 플레이어 제랄드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네?"

주혁은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플레이어 제랄드라면....'

우리 형님 아니신가. 

미국 최고 플레이어. 

성검 대여의 첫 고객.

하루에 두 번 성검을 대여해주셔서 펜트하우스를 구매하게 해주셨던 은인.

"어, 어떻게요? 혹시 탑 등반하다가?"

- 맞습니다. 안토니오 국장 이야기로는 제랄드가 스마트폰 메시지로 동부 탑 72층 공략하러 가겠다고 하면서 탑으로 입장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이네요."

- 그렇습니다.

72층이라.

아마 초고난도 8서클 사령술사 노마 공략에 도전하다가 변을 당한 모양.

아니, 기본 임무까지만 하는 게 좋겠다고 전광일 부청장을 통해 신신당부했는데.

그로 인해 미국에 비상이 걸렸단다.

현재 초상집 분위기.

방법이 있을까?

없다.

플레이어가 나오지 않으면 그걸로 끝.

오죽하면 전광일 부청장에게까지 연락해 왔을까?

- 봉 플레이어님도 항상 조심하십시오, 방심하면 큰일 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전광일 부청장도 불안한 나머지, 자신에게 전화한 모양.

'후우,'

주혁도 착잡했다.

비록 얼굴 한번 못 본 사이라고 해도 같은 플레이어 아닌가. 

성검 대여에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하고.

안타깝다.

살릴 방법은 없나?

'미리 알았더라면....'

뭐, 그래도 속수무책이었겠지만. 

탑이 이렇게나 무섭다.

잘 나가다가 사고 한번 터지면 되돌릴 방법이 없다.

자신도 긴장해야 한다.

언제 어느 때든 위험이 닥칠 수 있으니까.

만약 피소환인 중 한 명이 변을 당한다고 생각해보라.

100일 동안 못 본다.

2주 동안 고방을 못 봐도 가슴이 아픈데.

'그래도 부활의 룬이 있으니까.'

특전으로 받은 스타트팩, 

한번은 살릴 수 있겠지.

생각난 김에 주혁은 인벤토리에서 스타트팩 아이템들을 꺼냈다.

피소환인 부활의 룬, 탑 층 난입 티켓,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

모두 받고 나서 한 번도 사용을 안 했다.

탑 공략 임무 리셋 티켓은 쓸 일이 있을지 몰라도.

이 중에서 제일 신기한 아이템이 뭘까? 

바로 탑 층 난입 티켓.

<탑 층 난입 티켓>

효과 : 타 플레이어가 공략 중인 탑층에 난입합니다. 입장 레벨이 맞아야 합니다. 71층부터 사용할 수 있습니다.

타 플레이어가 있는 층에 들어간다니.

솔직히 말이 돼?

플레이어들의 공략은 무조건 솔플인데.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찢으면 되나?

그때였다.

[탑 층 난입 티켓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현재 난입 가능한 검은 탑 목록을 표시합니다.]

[플레이어 레벨이 낮은 순으로 정렬합니다.]

"아!"

주르르륵!

떠오르는 항목들.

수도 없이 이어졌다.

[러시아 검은 탑 8층, 현재 공략 중인 플레이어의 레벨 8LV]

[영국 검은 탑 9층, 현재 공략 중인 플레이어의 레벨 9LV]

[베트남 검은 탑 10층, 현재 공략 중인 플레이어의 레벨 10LV]

[대한민국 검은 탑 10층, 현재 공략 중인 플레이어의 레벨 10LV]

.

.

.

그리고 마지막으로,

[난입하고 싶은 검은 탑 층을 고른 후 티켓을 찢으면 즉시 이동합니다.]

'이런 거였어?'

환장하겠다.

난입하고 싶은 장소도 알아서 정해준다.

그 층에 있는 플레이어 레벨도.

사실 플레이어가 탑에 들어가면 똑같은 층이라도 위상이 갈라진다.

즉 같은 레벨의 플레이어 2명이, 같은 국적의 탑, 같은 층에 들어가도 각각 다른 장소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 타켓을 정해주면?

들어가고 싶은 곳에 정확하게 찾아갈 수 있다.

그렇게 들어가서 특정 플레이어의 탑 공략을 방해하거나 죽일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이건 사용하지 말아야겠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남이 공략하고 있는 탑에 왜 들어가? 

그런데?

"어?"

주혁에게 목록 제일 하단에 표시된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아메리카 검은 탑(NO.1) 72층, 공략 중인 플레이어의 레벨 72LV]

"…무슨?"

미국 탑 72층?

심지어 동부 탑. 

제랄드가 들어간 층,

'72레벨 플레이어가 제랄드 말고 더 있었어?'

아니다.

주혁이 아는 바로는 없다.

미국 검은 탑 71층도 제랄드가 공략했다.

'...이거 혹시?'

제랄드가 맞는다면 공략 시한이 지났는데 왜 아직 공략 중이라고 뜨지?

'설마 살아있는 거 아냐?'

아니면 제랄드가 아닌 다른 72레벨 플레이어가 들어가 있을 수도.

가만있을 수 없다.

확인해봐야겠다.

'피소환인들은 탑 입장해서 불러내고.'

주혁은 탑을 특정하고 난입 티켓을 찢었다.

찌익!

[아메리카 검은 탑(NO.1) 72층에 난입합니다.]

────────────────────────────────────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15>

72층 사령술사 노마의 작업장.

오망성과 주술진이 그려진 제단 위.

플레이어 제랄드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움직이지도, 말도 할 수 없었다.

공략시한이 다 지났는데도 탑을 나가지 못했다.

시한이 지나면 자동 퇴장 아닌가?

그러나 하루가 지났음에도 제단에 속박된 채 그대로.

'...왜 이렇게 됐지?'

72층 공략.

예상대로 쉬웠다.

71층 임무처럼.

기본 임무 완수.

키메라 따위는 어렵지 않게 처치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추가 선택 공략.

거기서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갑자기 띠링!

시스템 메시지가 뜨더니.

[임무가 변경되었습니다.]

변경되었다고?

뭐가?

[추가 선택 임무부터는 조건 공략입니다.]

조건 공략.

[원치 않으시면 여기서 탑을 퇴장하실 수 있습니다.]

[공략 성공 시 10배의 상급 마정석과 100% 확률로 추가 공략 보상이 주어집니다.]

들은 바 있다.

안토니오 국장이 한국 각성 관리청에서 들었다는 정보.

조건 공략이라는 임무가 뜨면 무조건 포기하고 탑을 나와라.

선택해야 했다.

기본 임무만 하고 나가느냐, 아니면 조건 공략이라고 해도 추가 선택 임무를 진행하느냐.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기본 임무만 하러 왔나?

처음부터 추가 임무에, 최소한 고난도까지 수행하려고 들어왔다.

초도난도는 포기하더라도.

보상은 어떻고?

저걸 어떻게 참아?

그래서 진행. 

하지만.

[조건 공략이 성립되었습니다.]

[사령술사 케이트와 사령술사 노마가 추가 임무에 가세합니다.]

'뭐?'

[고난도 및 초고난도 선택 임무 또한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중도 포기가 불가능합니다.]

중도 포기 불가라니.

동시에 나타난 키메라들.

거기에 더해 머리 위에 이름표를 달고 나타난 여자와 노인.

"너구나? 그렇지 않아도 스승님하고 잡으러 가려고 했는데, 제 발로 나타났네?"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거였어?

71층에서 사령술사 케이트를 놓친 결과가 72층에서 나타나?

필사적으로 싸웠다.

모슨 스킬을 다 쏟아냈다.

그러나 역부족.

지금은 이런 신세고.

중도 포기 불가.

그 의미는 공략 실패하면 탑에 갇힌다는 것.

"기분이 어때?"

사령술사 케이트가 제랄드의 귀에 속삭였다.

"궁금하지? 네가 어떻게 될지 알려줄게."

비웃는 듯한 표정의 그녀,

"일단 네 영혼을 뽑을 거야. 영혼은 우리 귀염둥이 하이드라를 강화하는 데 쓰일 거고, 육체는... 내가 특별히 키메라로 만들어줄게."

영혼을 뽑아? 

날 키메라로 만들어?

"뭐,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이 가장 효과가 좋은데.... 너 때문에 실패했잖아. 대가를 치러야지, 더러운 영혼이지만 잘 써줄게."

가짜주제에 진짜 인간을 어떻게 한다고? 

탑의 임무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게임에 비유하자면 NPC 같은 새끼들이.

"솔직히 말하자면 난 네가 마음에 들었어."

웃기고 있네. 

차라리 죽여!

"우리 마을에서 봤잖아. 네가 용병단 애들 거침없이 죽였던 날."

그게 뭘?

"마을 청년이나 노인들이 죽어도, 아이들을 지키던 엄마가 죽어도, 제법 큰아이들도 죽임을 당해도 넌 눈도 깜짝 안 하더라?"

어쩌라고?

임무잖아.

탑이 준 임무.

"사실 정상적인 모험가라면 사람들부터 구하는 법이거든. 그런데 넌 안 그랬어, 필요하다면 마을 사람도 죽였을 거야? 그치?

…무슨?

"난 악당이 좋아. 비열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그런, 비슷한 사람끼리 끌린달까."

뭐지?

감히 NPC 따위가 인간의 윤리를 들먹여?

'실제 세상이었다면 사람들부터 살렸지.'

살아있는 실제 인간하고 탑의 컨텐츠 대상을 어떻게 비교...

'음.'

갑자기 문득 든 의문.

과연 이들이 만들어진 인간일까?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조롱하며, 고백(?)하고, 선악을 따지는 존재가 정말 가짜일까?

제랄드는 71층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문을 열자마자 맡았던 피비린내, 사람들의 비명.

마을 주민들은 용병들에 의해 죽어갔고, 아이들은 납치당했다.

칼을 치켜들고 여인을 죽이려 드는 용병 새끼, 엄마를 지키려다 죽은 아이.

돌이켜보면 참혹한 광경이었다.

당시 자신은 뭘 했지?

그저 보기만 했었다.

중요한 건 임무였으니까.

'...제기랄!'

아무리 그들이 가짜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사람들부터 구해야 했다.

밀려드는 죄책감.

제랄드의 정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케이트야, 이제 뽑아라. 다 된 것 같으니."

"네, 스승님."

케이트가 제랄드의 입에 동그란 물체를 물렸다. 

영혼 적출의 구슬이었다.

***

[아메리카 검은 탑(NO.1) 72층에 난입합니다.]

72층에 나타난 주혁.

곧바로 피소환인들을 불러냈다.

나오자마자 견달래가.

"공자님, 여긴 72층 아니옵니까? 혹여 또 보물창고라도."

"한번 털었는데, 아이템이 있을 리가."

그러나,

"호에, 있어요."

"응? 있다고?"

맞다. 있을 수밖에.

주혁은 피소환인들에게 여기 온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역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심다. 프랑스에 이어 이번엔 미국임다. 아주 세계적으로 노시는 봉 소환사임다. 헤헤헤."

뭐, 어쩌다 보니,

"웰컴 투 더 아메리카 블랙 타워 세븐티 세컨드 플로어 임다."

"..."

뭐야?

왜 이렇게 영어를 잘해?

"일단 확인하러 가보죠. 제랄드가 맞는지, 맞으면 살아있는지, 살아있으면 데리고 나와야 하니까."

"예압!"

"노부가 길을 열겠소."

한자리 남는다.

그럼 혈랑도 불러서.

"호에에!"

"컹컹!"

반색하는 라직스.

꼬리를 흔드는 혈랑.

얘들도 고방과 바르딘처럼 영혼의 단짝이 된 모양.

광마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빠른지 따라가기도 힘들 정도.

'임무는 안 뜨는구나.'

당연하다.

여긴 다른 플레이어가 공략 중인 곳이니까.

자신은 난입했을 뿐이니까.

이윽고 보이는 던전의 대형 공동. 

사령술사 노마의 작업장.

그런데?

"어머? 너희들은 누구지?"

케이트였다.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71층에서 잡지 못했구나.

"베 상사."

"조준 완료."

찌이이잉!

파주주죽!

출렁!

"뭐, 뭐야?"

퍼어억!

베상사에게, 3개의 탑에서, 3번의 출렁임으로, 3번 죽은 케이트.

"광마님."

스팟! 

이미 사령술사 노마의 머리를 잡아가는 광마. 

뿌드드득!

초마수 하이드라도. 

파주주죽! 콰악! 서거거걱! 

도리깨에 맞고, 마총에 저격당하고, 코사크 칼부림에, 광마의 마무리까지.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주혁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플레이어인 듯한 사람이 사령술사의 제단 위에 눕혀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제랄드."

그가 맞았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

마치 죽은 사람처럼 하였다.

늦어버렸나?

가슴 부분에 귀를 대보니 미세하게 뛰는 심장.

"휴우,"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주혁은 제랄드를 흔들었다.

"여보세요? 미스터 제랄드? 아니 왓슨인가?"

그러자 슬며시 눈을 뜨는 제랄드.

'…뭐지?'

하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혀.

여전히 온전치 않은 정신.

"아참, 한국말 모르겠구나."

제랄드는 혼미한 상황에서도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나타난 이 동양인은 누굴까?

'환각인가?'

아무튼 잠깐 정신이 돌아왔지만 버티기 힘들다. 

퍽!

제랄드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어어? 왜 또 기절해?"

코사크가 빠르게 달려와.

"제가 깨워보겠슴다."

찰싹찰싹! 

제랄드의 뺨을 때리며,

"헤이, 제랄드, 웨이크 업! 웨이크 업! 오픈 유어 아이즈! 왓쯔 더 매러?"

"..."

이 양반 아까부터 영어 잘하네. 

아무튼 깨어나지 않으니.

'어떡한다?'

그리고.

"호엥!"

"컹!"

혈랑을 타고 나타나는 라직스.

표정을 보니 보물창고 또 털었나 보다.

역시 우주대도적.

어쨌거나 탑을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케이트도 죽고 노마도 죽고 하이드라도 죽었다.

공략 성공이면 퇴장하는 거 아닌가?

'으음,'

짐작은 간다.

어차피 공략시한이 지난 층.

제랄드가 겁도 없이 달려들다 이 지경이 되었으니 공략 성공 판정이 나올 리 있나?

'닫힌 층이 됐네.'

그럼 어떻게 나가?

[난입한 층에서 퇴장하시겠습니까?]

"오!"

역시 시스템.

다 절차가 있구나.

주혁은 제랄드를 안아 들었다.

"퇴장!"

스팟!

***

청담동 펜트하우스.

제랄드는 침대에 곱게 눕혀졌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쯤 되면 혈색도 돌아오고 깨어날 기미라도 보여야 하는데, 어째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다.

심지어 시간이 갈수록 창백해지는 안색. 

이러다 죽어버리는 거 아닌지.

'병원에라도 데려가야 하나?'

아니다.

일반적인 질환이라면 당장 병원에 갔을 테지만, 이건 마법적 손상.

의사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전문가 불러봐야겠네.'

일단 한 명 돌려보내고.

"혈랑 소환 해제."

스팟! 

혈랑 들어가고, 

제랄드가 누운 방으로 들어가서.

"알리아마리 지정소환."

스팟! 마리 나오고.

세 번째 소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쭈그리고 앉아 방구석 벽에 머리를 박고 있는 연금술사 마리.

"마리 씨?"

움찔!

사람 목소리 듣기도 힘든 모양. 

말하는 것도 안 되고, 듣는 것도 안 되고. 

중증이다. 중증.

태블릿으로 시작된 대화.

톡톡톡, 키보드 두드려서.

<마리> :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별점 5점도. 제가 받을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별점이야 무조건 5점 줘야지.

비록 욕쟁이 키보드 워리어라 할지라도.

<상남자> : 아유, 천만에요. 우리 마리씨는 언제나 만점이죠. 참!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마리> : 말씀하세요'

<상남자> : 사령술사에게 당한 플레이어가 있는데,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서.

<마리> : 침대 위에 저 남자요?

<상남자> : 네.

마리가 앉은 자세에서 엉덩이를 바닥에 밀며 이동했다. 

소환사에게도 얼굴을 보이기 싫은 듯.

뒷모습 그대로 침대에 앉아 제랄드에게 고개를 돌려 유심히 살피는 마리.

정신 잃은 사람에겐 대인기피증이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마리> : 사령술 맞아요. 영혼 적출에 당했어요. 입 안을 벌려 보세요.

과연 붉은 구슬 하나가 제랄드의 입속에 들어 있었다.

<상남자> : 이거 어떡하죠?

<마리> : 빼내서 깨트리세요.

주혁은 시키는 대로 했다.

와그작! 부서지는 구슬.

<마리> : 적출당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영혼이 제자리를 찾아 갈 거예요.

<상남자> : 그럼 바로 일어나나요?

<마리> : 생명력도 많이 손상된 터라, 그리고 정신이 오염되어서, 정화의 비약과 소생의 영약을 먹이면 곧 일어날 것 같아요.

오!

역시 척 보고 바로 진단.

처방전도 나왔고.

<마리> : 정신 오염을 정화주고 생명력을 채워주면 돼요. 약물은 제가 만들 수 있어요. 필요한 약초는....

마리가 종이에 빼곡하게 약초의 이름을 적어줬다. 

약초가 있을까?

"라직스 씨."

이름을 부르자.

데구르르르, 굴러서 방 안으로 들어오는 우주대머슴.

"호엥?"

주혁은 마리가 적은 약초 목록을 라직스에게 보여줬다.

"구할 수 있어요?"

"호에, 지금 가지고 있어요."

"오!"

그동안 약초도 틈틈이 컸나 보다.

사실 탑 재료 중에 가장 돈 안 되는 물건이라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라직스가 마리 옆에 약초를 꺼내놓았다. 

마리가 약초를 받으면서.

<마리> : 유능한 일꾼이네요.

<상남자> : 우주대머슴이죠.

확실히 LSSR 등급 정도 되니까 보는 눈이 있다.

<마리> : 연금술 선반을 꺼낼게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

스르륵!

마리의 앞에 탁자 하나가 생겨났다.

생산직이라 그런지 아공간 아이템도 가지고 다니는 모양.

<상남자> : 우리 다음에 시간 내서 연금술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눠봐요.

<마리> : 네♪♪

비약은 금방 만들어졌다.

이제 먹여주기만 하면 끝.

그러고 나서.

'슬슬 전광일 부청장님이나 불러볼까?'

주혁은 스마트폰으로 전광일에게 전화했다.

***

전광일은 미친 듯이 주혁의 펜트하우스 지하 주차장을 뛰었다.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숨이 차올랐다.

뛰어서 그런 게 아니다.

하도 떨려서 그랬다.

봉 플레이어 집에 누가 있다고?

제랄드?

아니,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봉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한 말인데.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어?

사실이라면 대체 무슨 수로? 

설명을 듣긴 했다.

탑을 난입하는 티켓, 그걸로 미국 탑 72층에 들어가, 어쩌고 하던데.

자세한 대화는 나중에.

먼저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전광일은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지, 지금 엘리베이터 앞입니다."

저절로 열리는 문.

스우웃!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올라갔다.

띵!

펜트하우스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현관문으로 들어가서.

"봉 플레이어님."

"저쪽 방이요. 아직은 잠들어 있지만 곧 깨어날 거예요."

"아, 네네."

서둘러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보니.

"...헉!"

진짜 제랄드였다.

모를 수 있나?

성검 대여해주면서 대화도 많이 나눈 사이. 

갑자기!

"끄응."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린 제랄드.

그리고 상체를 일으키는 도중에 전광일과 눈이 마주쳤다.

"제랄드?"

"...부청장님?"

둘은 그저 멍하니 서로를 바라봤다.

"부청장님이 왜 여기 있죠?"

"그, 글쎄요."

"여긴 탑 속인데.... 헉?"

설명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

미국 워싱턴 DC. 

제랄드의 자택 거실.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었다.

하지만 침울한 분위기.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안토니오 국장은 절망적인 표정. 

이게 다 꿈이었으면,

72층을 공략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탑으로 입장한 제랄드. 

그러나 아직 나오고 있지 않았다. 

하루가 훨씬 지났음에도 말이다.

미국은 최고 플레이어를 잃었다.

조국을 위해 두 개의 탑을 성공적으로 공략해 주었던 영웅을 말이다.

"마음을 추스르게,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 앞을 준비해야지."

역시 침통한 표정의 맥밀란,

"우리로선 불가항력이었어. 플레이어가 탑에 들어가는 걸 어떻게 막아?"

"아뇨. 관리 소홀이 맞습니다.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탑에 들어가서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을 척척 처리하는 플레이어들.

그들의 겉모습만 보고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알고 보면 한없이 약한 존재들.

그래서 옆에 붙어 자존감과 멘탈을 관리해주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안토니오 국장은 그걸 하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

"모든 책임은 제가 지죠.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쯧, 자네가 물러나면 나도...."

순간! 지이이잉!

안토니오의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전화 받을 때가 아니다. 

놔두면 곧 끊기겠지.

그런데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계속 울린다. 

중간에 끊겼다가 다시 걸려왔다. 

지이잉! 지이잉!

'...대체 누구야?'

화면을 확인해보니 한국 각성 관리청의 전광일. 

위로 전화라도 하려나 본데....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왓더퍽!!!"

화가 치밀어 오른다. 

미친 건가?

왜 자꾸 전화질이야? 

안토니오는 전화를 받았다.

"뭡니까? 전화한 이유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지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요? 알만한 사람이 왜! 누구요? 제랄드? 한국에 있다고요?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으음, 아! 자, 잠깐!"

잘못 들었나?

"...누, 누가 한국에 있다는 건지,"

전화를 받는 안토니오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제랄드?"

제랄드라니.

"우리 플레이어 제랄드 왓슨? 미국 최고 플레이어 그 제랄드가 한국에? 확실해요?"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

CCTV로 확인했다.

제랄드가 탑으로 입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하루가 지나도록 나오지도 못했는데.

"안토니오, 무슨 말이야?"

맥밀란이 물어오자 기다려달라는 듯 손을 드는 안토니오.

"마, 만약 농담이라든가, 장난이면 죽여버릴... 증거? 네, 지, 지금 보내주세요."

바로 그때! 

띠링! 

울리는 메시지 알림음.

사진이었다.

매우 건강해 보이는 남자의 모습.

제랄드.

확실하다.

옆에는 전광일 부청장도 있었다.

정말 제랄드?

"...세상에!"

뭐지?

왜 한국에 있는 거지?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가.

안토니오 국장이 손을 번쩍 들었다.

"…맙소사! 살아있었어! 살아있었다고!"

"진짜? 나 좀 보여줘."

"잠깐만 기다려 봐요. ...전 부청장? 제랄드와 통화할 수 있나요? 네, 바꿔 주세요."

"스피커 모드로 해!"

그리고 잠시 후.

제랄드의 대저택이 떠나갈 듯, 엄청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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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자의 탑 공략법 116>

미국에서 전용기를 타고 출발한 맥밀란 장관과 안토니오 국장이 평택 미군기지에 도착했다.

그곳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제랄드가 있었다. 

어제 비밀리에 서울에서 평택으로 이송됐다.

제랄드가 죽을 뻔한 사실은 극비.

아무도 몰라야 했다.

기지 내부.

엄중하게 경비 중인 건물에 들어가, 

드디어 제랄드를 만난 안토니오와 맥밀란.

"제랄드!"

"다친 데는 없어?"

제랄드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미안해요. 깊이 뉘우치고 있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안토니오 국장이 덥석 제랄드를 껴안으며 말했다.

"살았으니 됐어. 다음부터 안 그러면 돼."

"이제 정신 차렸어요. 제 수준에 맞게 등반할 겁니다."

"그래, 자세히 말해봐. 탑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어떤 일이 있었냐고 하면..."

제랄드가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맥밀란과 안토니오.

사실 대략적인 내용은 전광일 부청장에게 전해 들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보고, 팩트 체크도 하고.

"제랄드."

"네."

"자넬 구해줬다는 사람이, 이 남자 맞아?"

안토니오 국장이 태블릿으로 사진을 보여줬다.

"아! 맞아요. 이분이에요. 하아, 진짜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사진 속 남자는 봉주혁.

그럴 줄 알았다.

이 사람이 아니고서 누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흥분한 제랄드가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이분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전 죽었을 거예요. 영혼이 뽑혀 나갈 뻔했다니까요? 얼마나 끔찍한 경험인 줄 모르죠?"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어요. 진심을 담아서 내 뜻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말이 안 통하니까 얼마나 답답한지."

"당장 한국말부터 배워서 정식으로 다시 감사하다고 말해야겠어요. 물질적인 보답도 해야겠죠? 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제랄드의 음성이 점점 커졌다.

맥밀란과 안토니오는 그런 그를 이해했다. 

생명의 은인인데.

"진정하라고, 보상은 미국 정부 차원에서 진행할 거야."

"나도 개인적으로 꼭 할 겁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갑자기 제랄드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아! 온 김에 서부 탑 68층부터는 성검 대여로 공략할게요."

"왜?"

"대여비가 그분에게 들어가니까요. 푼돈이겠지만."

의아하다는 눈빛의 안토니오.

"...이 남자가 성검 실소유주라는 거 알고 있었어?"

제랄드가 픽, 웃으며 말했다.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 성검 실소유주일뿐만 아니라 S+++ 등급 공략자잖아요. 아이템을 사용해서 아메리카 탑에 들어와 절 구출해줄 수 있는 사람이 그분 말고 또 있나?"

하긴,

"알았어. 그렇게 하지, 자넨 일단 푹 쉬고 있어."

문을 닫고 방에서 나오면서, 맥밀란이 안토니오에게 말했다.

"탑 난입 티켓이라..., S+++ 등급 공략 보상으로 받은 거겠지?"

"아무렴요. 그런 아이템이 평범한 보상으로 뜰 수나 있겠어요?"

진짜 기상천외한 아이템.

물론 탑 아이템이 다 그렇지만.

"이름은 수상쩍지만 우리 미국에겐 구원의 아이템이었어."

"아이템이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렸죠. 아이템이 구원이 아니라 봉주혁, 그 사람이 구원입니다."

그렇다.

아이템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

다국적 탑 이용 티켓, 탑 난입 티켓, 둘 다 똑같다.

특정 국가의 탑을 강제로 공략해 탑 붕괴를 유도한다거나, 혹은 타국의 플레이어를 죽인 다거나.

하지만 봉주혁은 그러지 않았다.

다국적 탑 이용 티켓으로 붕괴 시한이 목전에 다다른 국가를 도와줬고.

탑 난입 티켓으로는 생사의 기로에 선 플레이어를 구출했다.

"솔직히 처음엔 그가 위협적이라고 생각했어. 어쨌거나 통제 범위 밖의 개인이잖아? 그것도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춘."

그렇다.

국가는 강한 힘을 가진 개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생각을 바꿔야겠군. 미국은 그에게 큰 신세를 졌어."

"아까 말했듯, 우리에겐 이미 구원자죠."

"인성도 훌륭하고."

미국 검은 탑 72층에 누군가 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난입했다.

그 귀한 아이템을 팍팍 써가며 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우선인데.

"게다가 우리만 은혜를 입은 게 아니잖아요."

미국뿐이 아니었다.

아랍에미리트도, 프랑스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정부 차원에서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후우, 보상 금액을 얼마로 책정해야 할지."

맥밀란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말했다.

"돈은 무슨! 봉주혁 플레이어가 어디 가난한 사람인가?"

"그렇죠. 그래서 더 어렵네요."

안토니오가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참! 좀 전에 제가 전광일 부청장과 통화할 때, 봉주혁 플레이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미리 물어봤습니다."

눈을 반짝이며 묻는 맥밀란.

"그래? 뭐라던가?"

"특성 강화의 룬이요. 그것 말고는 필요한 게 없을 거랍니다."

그러자 난감한 기색으로.

"특성 강화의 룬이라, 어려운 과제군."

"하아, 맞습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시장에선?"

"글쎄요. 물량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요."

미국도 현재 보유하고 있지 않다.

있었으면 진작에 제랄드에게 먹였지.

맥밀란 장관이 말하는 시장이란?

말 그대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매우 은밀한 경로로 플레이어들을 위한 각종 아이템이 몰래 거래되는 무형의 장소.

즉 암시장.

플레이어들이 처음 탑 등반을 시작했을 때부터 존재해 왔던 곳.

암시장을 운영하는 조직도 있다.

그러나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운영 주체가 누구인지, 얼마 만큼 큰 조직인지 아무도 모른다.

미국 정보부에서도 암시장을 추적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없애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실 암시장은 개인보다 각국 정부들이 주요 고객이기에.

사우디나 아랍에미리트가 쓸어갔던 특성 강화의 룬, 중국이 확보한 탑 점핑 티켓, 일본 자위대가 구매한 레벨업의 룬. 

그게 다 어디서 나왔을까?

"암시장에 접촉해 봐. 필요하다면 구해줘야지."

"네, 이건 자존심 문제죠. 도움을 받고도 모른 체하면 있으면 미국의 망신입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걸 받을 자격이 있어."

또한 가장 중요한 목적.

"이 기회에 봉 플레이어와 미국과의 관계를 더더욱 친밀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

그는 친해져야 할 사람이다.

특성 강화의 룬은 봉주혁과의 친목을 위한 아주 작은 투자일 뿐.

"문제는 가격인데…"

"마지막으로 접촉했을 때 구매했던 가격이 50억 달러입니다."

"흐음."

하지만 지금은 더더욱 희귀해졌으니.

"최소 두 배 이상 올랐을 겁니다."

"그럼 100억 달러?"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백악관 결재부터 받아야겠군."

사실 보통의 평범한 국가들은 특성 강화 룬 확보에 큰돈을 선뜻 쓰기 어렵다.

플레이어 능력을 강화하려면 이만한 게 없지만 너무나 비싼 가격에 주저할 수밖에 없기에.

그러나 미국은 다르다.

달러를 찍어내는 국가 아닌가?

"물량에 여유가 있으면 두 개를 사. 하나는 제랄드에게 줄 거니까."

"하나만 구할 수 있으면?"

"당연히 봉주혁에게 넘겨야지."

앞으로 탑 등반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당장 카발란의 저주만 해도 그렇다.

일본이 어떻게 당했는지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나?

보험이 있어야 한다.

봉주혁이라는 든든한 보험 말이다.

***

청담동 펜트하우스.

주혁은 매우 기분이 좋다.

어깨가 솟구쳐 승천할 정도로.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고 진심 어린 감사를 받는다는 것.

안 해보면 그 기분 모른다.

얼마나 뿌듯한지 말이다.

"그래서 제랄드 그 놈, 설마 입 싹 닦은 건 아임까? 아무것도 안 주고?"

"그놈이라니요! 우리 성검 대여 고객님이신데, 당연히 고맙다는 말은 들었죠."

왠지 불만 섞인 코사크의 표정,

"뭐라고 했슴까?"

"으음... 탱큐?"

사실 그보다 더 많은 말을 했지만 영어가 딸려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럼 봉 소환사님께선?"

"...유 어 웰컴?"

코사크가 땅바닥을 손바닥으로 탕탕 치면서 한탄했다.

"아이고, 입 닦았슴다. 뒤통수 맞았슴다. 이래서 그냥 막구해주면 안 되는 검다. 그전에 얼마 줄래? 하면서 협상부터 했어야 함다."

쯧쯧, 저 속물근성.

"사람을 구하는데, 어? 대가를 바라면 되겠어요? 어? 의미가 퇴색되잖아요!"

여전히 코사크는 억울한 모양.

"부자 나라 미국 아임까? 최소한 10억 달러 정도는 턱, 내놓아야 했슴다."

아니, 이 양반이 간도 크네.

"10억 달러가 개 이름이에요? 1조 3천억, 강남 고층 빌딩 한 채 가격인데."

"으음, 그렇긴 함다. 그래도 최소 5억 달러 정도는...."

"나중에 따로 연락이 오겠죠."

솔직히 기대하는 마음이 없진 않다. 

미국 최고 플레이어를 구해줬는데,

보상금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통장에 한 3억 달러만 꽂아주면 얼마나 좋아?

아무튼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주혁과 피소환인들.

각자 TV를 본 다거나, 태블릿으로 웹 서핑을 한다거나, 낮잠을 잔다거나,

마리도 소환했다.

광마님은 빼고.

둘이 붙여 놓으면 싸울 수도 있으니까.

음료수와 간식거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라직스.

마리가 틀어박혀 있는 방문을 짧은 팔로 톡톡 노크하더니, 문 앞에 쟁반을 두고 돌아갔다.

잠시 후,

빼꼼, 문이 열리고 쟁반을 스윽, 끌어당기는 하얀 손, 툭 닫히는 문.

"...와! 대단함다. 방구석 히키코모리, 엄청난 대인기피증임다."

"그래도 라직스에겐 마음을 연 것 같은데."

"라직스 머슴 인간 아임다. 햄스터임다."

그래서 그런가?

"근데 봉 소환사님은 친구 없슴까?"

"...."

뭐야?

싸우자는 거지?

"가끔 나가서 친구도 만나시고 취미 활동 같은 것도 해야 정신 건강에 좋슴다."

"...."

누가 그걸 몰라서 안 하는 줄 아나.

"동창회 같은데도 나가십쇼."

연락이 와야 나가지.

"동창회, 얼마나 좋슴까?"

"…뭐가 좋아요?"

신이 난듯한 코사크.

"어느 날 동창회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고, 봉 소환사님이 거지꼴로 동창들 모인 자리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검다. 그럼 동창들은 이렇게 생각할 검다."

어떻게?

"쯧쯧, 봉주혁, 요즘 살기 어렵나? 꼴이 백수 같은데? 동창회 망치러 왔군. 저런 너절한 옷차림으로 감히 신성한 동창회를 와? 옥장판 사라고 권하는 거 아냐?"

음.

"그런데 동창회 마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봉 소환사님이 주머니에 차 키를 들고 콕! 누르는 검다. 그랬더니 저기서 벤틀리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번쩍하며 웅장한 시동음을... 캬아!"

어디서 많이 보던 스토리,

"다들 놀라는 눈초리로, 우아! 저 차 누구 거야?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데, 봉 소환사님 벤틀리에 떡! 타시는 검다."

이게... 상상이 되네?

"봉 소환사님을 무시하던 눈초리가 단번에 선망의 눈빛으로 바뀜다. 저 차, 주혁이 거였어? 성공했구나! 그 말을 듣고 한마디 하는 검다."

뭐라고.

"저쪽에 보이는 61층짜리 빌딩, 사실은 내 거야. 나중에 놀러 와."

"...."

이 양반 요즘 웹소설 읽나?

"재벌물 읽슴다."

"네네, 열심히 보세요."

"예압!"

뭐, 동창회 안 나가도 된다.

여기 친구들이 얼마나 많아?

인종 불문, 성별 불문, 나이 불문.

오히려 방구석 연금술사 마리가 더 걱정이다. 

빨리 피소환인들과 친해져야 하는데.

이참에 대화나 나눠보자.

개인 채팅방으로 그녀를 초대해서.

<상남자> : 똑똑, 뭐 하세요?

<마리> : 태블릿으로 놀고 있어어요.

혹시 이상한 사이트에서 댓글 배틀 붙거나 악플 달고 하는 건 아니겠지?

<상남자> : 저기, 다른 사람하고 대화할 때 최소한 욕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마리> : 노력해볼게요

평소엔 이렇게나 정상적인데.

<상남자> : 연금술은 어떤 학문인가요? 비약이나 영약, 포션을 만드는 건가?

<마리> : 맞아요. 재료만 있으면 다 가능해요. 가장 많이 쓰이는 건 약초고요.

약초.

아직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탑 재료.

연구가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유의미한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가 소환됨으로써 약초가 제대로 쓰일 날이 곧 올 것이다.

<상남자> : 어떤 약을 만들 수 있는지?

<마리> : 뭐, 힐링 포션이나 마력, 근력, 민첩, 지혜 등의 비약이나 영구적으로 능력을 올려주는 영약 같은 것도요.

<상남자> : 대량생산은?

<마리> : 얼마든지요. 재료만 충분하면

괜찮은데?

물약은 탑 보상에서도 나온다.

하지만 양이 턱없이 부족하고 가격도 비싸다.

그런데 대량생산이라면?

싼 가격에, 마음껏 구입할 수 있어 플레이어들은 더더욱 안전 해질 것이다.

<상남자> : 혹시 다른 것도 제작 가능해요? 예를 들어 룬이라든가,

<마리> : 룬이라면?

<상남자> : 특성 강화의 룬.

<마리> : 으음, 그건 불가능해요. 넥타르나 엘릭서라면 몰라도.

넥타르와 엘릭서?

<마리> : 넥타르 좋아요. 마시면 소환사님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 늙지 않고 건강하게.

<상남자> : 회춘의 비약처럼요?

<마리> : 그건 최하급 넥타르에요. 고작 10년 짜리.

회춘의 비약이 최하급 넥타르였구나.

<상남자> : 엘릭서는요?

<마리> : 종류별로 달라요. 강화의 엘릭서, 부활의 엘릭서, 치유의 엘릭서.

오!

솔깃한데.

<상남자> : 엘릭서 만들려면 뭐가 필요하죠?

<마리> : 최상급 제작 시 필요한 주요 재료는 드래곤 하트, 불사조의 깃털, 세계수의 열매, 최상급 마정석..., 그리고 현자의 돌이요.

...뭐야?

그런 게 어디 있다고?

<마리> : 현자의 돌은 제가 가지고 있어요. 나머지 재료만 구하면 돼요.

그 나머지 재료가 문제지.

<상남자> : 혹시 어디서 구하는지 아세요? 탑에서도 가능한가?

<마리> : 당연하죠. 모두 다 탑에서 나오는 것들이에요.

<상남자> : 몇 층에서?

<마리> : 최소 80층 이상이요.

<상남자> : 아, 네네.

아직은 그림의 떡.

80층 이상에서 드래곤이라도 나온다는 건가?

'흠.'

역시 쉬운 게 없다.

LSSR 등급의 연금술사를 소환해 놓고도.

어떡하지?

또 등반해야 하나?

아무튼 지금은 아니다.

고방이 돌아오고 나서.

<상남자> : 열심히 재료 찾아서 갖다 드릴게요. 마리 씨는 탑에 들어갈 필요 없으니까, 편하게 방에서 작업하세요

연금술사는 비전투 요원.

게다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니.

<마리> : 저도 전투에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상남자> : 그거야 당연하죠. 비약만 만들어 주셔도 큰 힘이 될 겁니다.

<마리>: 비약이 아니라, 으음, 제가 만들어 둔 게 있는데.... 지금 드릴게요.

'뭘 준다고?'

순간!

삐걱 열리는 방문.

그러자 농구공 크기의 둥그런 물체가 데구르르, 굴러 나왔다.

'어?'

주혁은 가까이 가서 물건을 들고 살펴봤다.

은빛 금속 공이었다.

접합 부분 하나 없이 완벽한 구체.

<마리>: 호문쿨루스에요. 고위급 연금술사만이 연성할 수 있는 역작, 숫자가 충분하면 드래곤도 상대할 수 있어요.

호문쿨루스,

라틴어로 작은 사람.

<마리> : 더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아다만트와 오리할콘 등 각종 탑 금속과 희귀 약초, 마정석만 충분하면,

그런데 전혀 매치가 안된다.

'이게 호문쿨루스라고?'

사람 모양도 아니다.

그냥 공.

금속으로 만들어서 무게도 상당히 무겁다.

이걸로 뭘 하지?

몬스터와 공놀이라도 해?

<마리> : 저기, 죄송한데, 손가락에 상처를 내서 피를 구체에 묻혀보세요.

<상남자> : 얼마만큼?

<마리> : 조금만.

.

아오, 상처 내기 싫은데.

그래도 시키는 대로 해보자.

주혁은 싱크대로 가서 식칼로 손가락 끝을 찔러 피를 냈다. 

그런 다음 금속 공을 만지자.

지이잉.

진동하는 공.

동시에 찬란하게 빛났다.

마치 태양처럼.

그리고,

"아!"

무언가 느껴진다.

주혁과 금속 구체.

그 둘이 지금 연결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주혁은 금속 구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바닥으로 툭! 떨어져, 

촤라라락!

흩어지는 조각들.

조각들이 바닥에 통통 튀면서 계속 허물어졌다.

작은 조각들이 더 작은 조각으로.

더 작은 조각들이 더더 작은 조각으로.

마침내 금속 구체가 아주 작은 은색의 알갱이가 되어 거실 바닥에 쌓였다.

은색 작은 알갱이.

그러나 알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조각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사실은 각 한 개체의 호문쿨루스라는 걸.

주혁은 의지를 발현했다.

나에게 오라고.

츠츠춧!

은빛 알갱이가 움직인다.

살아있는 뱀처럼 뭉쳐서 주혁의 옷을 휘감고 기어 올라왔다. 

츠츠츠츠춧!

어떻게 생겼을까?

하도 작아서 자세히 봐야 보인다.

개당 크기가 5mm 정도.

사람처럼 생기긴 했다.

머리와 몸통, 팔다리만 달린.

눈코입은 없다.

'이래서 호문쿨루스, 작은 사람인가?'

비유하자면 픽토그램.

화장실 안내판이나 교통 표지판, 비상구 표식, 혹은 스포츠 종목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사람을 나타내는 기호 말이다.

그렇게 생긴 알갱이 호문쿨루스가 대충 수만 개.

'나노 로봇 같은 거구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조종되는.

평범한 연금술 물건이 아니다.

LSSR 등급 연금술사 마리 씨가 만든 것이다. 

심지어 현실에서도 쓸 수 있다.

'연습해 봐야겠네.'

능숙해질 때까지.

────────────────────────────────────

────────────────────────────────────

<하남자의 탑 공략법 117>

호문쿨루스.

고위급 연금술사만이 연성할 수 있는 하이엔드 역작,

작은 인간처럼 생겼지만 하나하나가 지능이 있다거나 생명력을 가지고 있진 않다.

일종의 도구일 뿐.

사용자의 의지와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의지로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지시에 따른 행동을 하려면 마력, 혹은 내공이 필요하다.

그렇다.

에너지를 소모하는 호문쿨루스들.

단순한 움직임만으로는 크게 소모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복잡한 행동을 하면 제법 기운이 많이 들어간다.

기운의 소모.

단점일까?

아니, 장점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장점.

호문쿨루스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각 개체는 자신의 기운을 받아 움직인다.

당연히 스킬도 시전할 수 있다.

주혁은 일단 호문쿨루스들을 모조리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가지고 다니는 것도 얼마나 편한지.

이렇게 넣어두고 움직일 수 있는 숫자만 꺼내서.

아직은 초보자에 불과하니 맛보기로 100개만.

크기가 개미만 하기에 100개라고 해봐야 한 줌도 안 된다.

그럼 시작해볼까?

열과 줄을 맞춘 호문쿨루스,

'앞으로 가!'

그러면 작은 호문클로스들이 발을 움직여 착착착착!

'우향우.'

착착착착!

'왼쪽으로.'

착착착착!

'제자리에 서!'

착!

이렇게 단순한 명령부터.

'스마트폰 가져다줄래?'

착착착착!

목봉 체조처럼 스마트폰을 머리에 이고 가져오는 호문쿨루스. 

주혁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그것을 가져오는 심부름도.

이제 하이라이트.

주혁은 의지를 발현했다.

미세하지만, 

스윽, 내공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우웅, 붉게 빛나는 100개의 호문쿨루스들.

혈옥강기.

체고 5mm 호문쿨루스 100개가 펼치는 스킬.

실험을 위해 코사크가 보도블록 하나를 주워왔다.

과연 위력은?

혈옥강기의 호문쿨로스가 도도도도 달려가서 블록에 돌진했다.

파삭! 파사사삭! 그극, 그그극, 

단숨에 조각조각 나는 보도블록,

짝짝짝짝!

그모습을 본 피소환인들이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오오오오! 멋짐다."

"마이 로드! 훌륭합니다."

"엄청난 발명품이옵니다. 과연 르스스알 연금술사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옵니다."

"호에!"

광마도 진심으로 감탄했다.

"욕쟁이 미친 엘프지만, 노부도 감탄할 수밖에 없군. 어찌 저런 기물을."

혈옥강기 뿐만이 아니다.

이동속도는?

그림자 발걸음으로 확인.

스팟! 팟! 팟! 팟! 팟! 팟! 팟! 팟…

펜트하우스 거실이 번쩍인다.

키가 작아도 사람 머리 높이까진 뛰어오를 수 있었다.

100개의 호문쿨루스가 한꺼번에 그림자 발걸음을 펼치니 실로 장관이었다.

혈옥강기와 함께 동시에 펼칠 수도 있었다.

'괜찮은데?'

내공 소모도 크지 않고.

하긴, 겨우 100개.

무리하면 몇 개까지 움직일 수 있을까? 

본격적인 실험은 나중에.

마지막으로.

'혼원벽력곤(混元霹靂棍) 낙뢰추혼(落雷追魂).'

파칙! 파치치치치치치치치치칙!

거실 허공을 한꺼번에 뒤덮은 100개의 작디작은 스파크.

"으힉!"

"호에에엑?"

"아름답습니다."

"빛이여!!!"

"허허허."

환상적이었다.

마치 소형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역시 르스스알 연금술사님.

대인기피증이면 어때? 어? 키보드로 험한 말 좀 할 수 있는 거지.

이제 탑에서 실험해보면 되겠다.

몬스터 잡을 때도 쓸모가 있는지.

'오크 정도면 적당하겠어.'

며칠 동안 반복 공략에만 몰두했다.

호문쿨루스 숙련도 올리기.

탑 속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시간이 흘렀다.

그리하여 주혁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는 호물쿨루스의 숫자는 약 3000개.

그래봐야 얼마 되지 않지만, 

이제야 비로소…

'나도 한몫할 수 있겠네.'

안전하게.

손만 딸깍해서.

***

한국 각성 관리청.

대화 중인 전광일과 박경수.

"제랄드는 출국했나?"

"네, 어제 아메리카 서부 탑 71층 공략하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정말 대단한 플레이어야,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면서 바로 공략에 뛰어들다니."

제랄드가 미국 최고 플레이어인 이유가 있다.

멘탈 회복이 매우 빨랐다.

이것도 알고 보면 엄청난 재능.

"다른 말은 없었고?"

"봉 플레이어에게 안부 전해달랍니다. 곧 다시 와서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그리고?"

"71층에서 자신이 한 실수를 만회해서 기쁘다던데요."

"무슨 실수?"

"저야 모르죠."

박경수 청장은 피식 웃었다.

"아무튼 제랄드는 그렇다 쳐도, 미국 정부 차원에서 봉 플레이어에게 보상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제가 언질을 줬습니다. 봉 플레이어가 뭘 원하는지."

"뭐라고 했는데?"

"당연히 특성 강화의 룬이죠."

"잘했어. 돈 몇푼 보다는 그게 최고지, 봉 플레이어에게 말했나?"

"아직, 확실히 정해지면 말해야죠, 못 구할 수도 있으니."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다.

만약 미리 이야기했다가 불발되면 얼마나 실망이 클까?

"그건 그렇고, 청와대 다녀오신 일은...?"

"아! 그거?"

오늘 긴급 국무회의에 참석한 박경수.

회의 안건은 급변하고 있는 북한의 정세.

"내가 뭐, 말할 게 있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만 들었지."

"상황이 어떻답니까?"

박경수 청장은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전광일에게 설명해줬다.

"...하아, 진짜 기가 막히네요."

"나도 그래,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잖아."

한국의 플레이어 숫자가 몇 명일까? 

상태창 국적이 대한민국으로 된 플레이어 말이다.

대략 7천 명에서 1만 명 사이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옛말이었다.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었다.

정확하게 몇 명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 원인은?

대한민국은 진본 카발란을 공략한 국가.

그 혜택으로 아이템 보상 확률이 대폭 늘어났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게다가 상급 마정석의 수요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

일주일 전만 해도 일반 마정석의 2배였던 상급 마정석 가격이 지금은 4배로 껑충 뛰었다.

그런 이유로 대한민국 상태창 국적은 전 세계 플레이어들의 워너비.

채굴되는 상급 마정석의 양도 월등하고, 심심치 않게 장비 아이템, 새로운 비약과 포션 등이 속속 보상으로 나오고 있었다.

플레이어 샵으로 인해 가격이 하락했다지만 장비 아이템은 여전히 비싸다.

투척 단검 하나가 1억 출발인데.

하지만 한국 검은 탑에선 공짜로 얻을 수 있다.

그 때문에 한국 정부나 대사관에 귀화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도 귀화를 받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한국 검은 탑에 입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있다.

사우스 코리아만 한국인가?

노스 코리아도 한국이다.

북한.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탑을 공유하는 국가.

한국이 안 되면 북한으로.

북한 대사관이 있는 국가에서 귀화 요청이 쇄도했다.

귀화의 유형은?

단기 임시귀화.

당연히 대가가 따른다.

한 달간 임시귀화를 허락받는 조건으로 북한 정부에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도 줄을 섰다.

상급 마정석 채굴과 장비 아이템 획득으로 대박을 노릴 수가 있기 때문에.

또한 상태창 국적 변경이기에 직접 북한으로 가야 할 필요도 없고.

자신이 원래 살고 있던 나라에서 편안하게 등반하면 되니까.

"북한 정부가 귀화 장사로 돈을 쓸어 담고 있어, 북한 정부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지."

그 돈이 북한 주민에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결코 없으니.

"플레이어 숫자가 얼마나 늘었답니까?"

"글쎄, 너무 많아서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라던데."

"…미쳤네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가 각성을 시작한 이래 이런 경우가 있었나?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동유럽, 남미... 아무튼 전 세계 북한 대사관이 있는 국가는 다 그래, 유행처럼 번지고 있으니까."

그럼 다른 나라는?

아무리 임시귀화라지만 자국의 플레이어들이 북한으로 유출되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까?

우습게도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권장하고 있는 나라도 있다.

왜?

경제에 도움이 되니까.

플레이어들이 북한으로 임시귀화한들, 상급 마정석과 부산물, 아이템은 원래 자신들이 살고 있던 본국에 팔아야 한다.

달라질 게 없다.

오히려 70층을 공략해야 얻을 수 있는 상급 마정석이 풀리는 데 마다할 나라가 있나?

또한 임시귀화를 요청하는 사람들은 주로 일반 플레이어들. 

국가가 공을 들여 육성하는 엘리트들이 아니다.

정부는 국가 육성 플레이어들만 신경 쓰면 된다.

잘 키운 플레이어 몇 명이면 탑 붕괴는 얼마든지 방어가 가능한데.

"하아, 씨발,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놈이 벌고 있으니."

박경수의 욕설에 전광일도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막아?

탑은 하나인데 정부는 두 개.

솔직히 열불이 터지지만, 탑 붕괴하고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니까 참아야지.

전쟁할 것이 아니라면.

"골치 아픈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아랍 에미리트 빈살라 왕세자가 맡긴 선물 말이야"

"아! 그거요?"

"아직 창고에 있나?"

"네,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수신인은 고방.

즉, 봉주혁 플레이어.

"언제 전해 줄 거지?"

"내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래? 어쨌든 자네가 계속 수고해줘."

***

검은 탑이 생성된 지 20년이 지났다.

따라서 플레이어들이 각성을 시작한 지도 20년.

탑 생성 초기 몇 년간 플레이어들은 자유로웠다.

현실에서 이들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이나 정책 같은 건 마련 되지도 않았다.

플레이어들이 가져온 마정석 혹은 탑 부산물, 아이템도 자연스럽게 거래됐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낮아서 초기 탑 보상 물건들은 상당히 비싼 가격에 팔렸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플레이어들은 범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현실에선 제대로 된 힘을 쓸 수 없기에, 

납치당한다든지, 고문에 의해 인벤토리에 든 아이템을 모조리 강탈당한다든지, 아니면 살해당한다든지.

플레이어와 탑 부산물을 대상으로 한 수많은 범죄가 생겨났다.

기존의 갱 조직 혹은 마약 밀매 조직, 부도덕한 기업, 테러 집단도 범죄에 가담했다.

그에 맞서 플레이어들도 뭉쳤다.

서로 연합해서 길드나 클랜을 만들고, 경호원들을 고용하여, 안전한 장소를 구해 탑 등반에 올랐다.

나중에 탑 붕괴라는 악몽도 경험하고, 마정석 연구가 활발해져 국가적 차원에서의 플레이어들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이 나아졌다.

국가가 개입하자 플레이어 대상 범죄조직은 거의 다 괴멸됐다.

민간 길드나 클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하지만 아직도 건재한 조직이 있었다.

과거 플레이어들이 모여 만든 마정석 및 아이템 유통 길드.

탑 등반 초기, 세계 각국 플레이어들의 권익을 보장하고 원활한 거래를 위해 만들어졌다.

모든 플레이어가 그 유통 길드와 거래했다.

안전하고 익명성을 보장받았으니까.

그 유통 길드는 20년이 지난 2024년에도 건재했다.

그것이 바로 암시장 길드.

세계 최대 규모의 탑 부산물 및 아이템 거래 유통 조직.

보통 딥웹이나 다크웹을 통해 물건을 중계 혹은 직접 판매했다.

그런데 지금은 설립 취지와는 다르게 변질해 버렸다.

범죄조직에 맞서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지만 현재는 암시장 길드 자체가 범죄 단체.

세계 각국도 이들의 존재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건드리지 못했다.

워낙 방대해서 어느 나라에도 길드원들이 있었다. 

심지어 국가 최고 플레이어 중에도 길드원이 있을 정도.

소탕하는 건 불가능했다.

누구 한 명 붙잡아 조사해도 거기서 꼬리가 끊겼다.

꼬리를 잡아 찾는다고 해도 마찬가지.

각국 정부가 몰래 이곳을 통해 거래하는 판에.

"길드장님, 미국에서 특성 강화의 룬을 사겠다고 접촉해 왔습니다."

"미국이라면 안토니오?"

"부여된 식별번호로 보아 안토니오가 맞습니다."

길드장이라 불리는 남자는 픽, 웃으며 말했다.

"제랄드에게 먹이려는군."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물량이 있다면 2개를 사고 싶다던데."

"2개라."

특성 강화의 룬.

탑 생성 초기엔 꽤 많은 물량이 쏟아져나왔지만 어느 순간에 보상 확률이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대표적인 아이템.

"우리가 보유한 개수는?"

"재고가 3개밖에 없습니다."

"제시 가격은?"

"개당 50억 달러에 2개를 사고 싶다고."

"어림도 없다고 전해, 개당 100억 달러.... 으음."

잠시 말을 멈추더니.

"2개 사면 5% 깎아서 190억 달러로 맞춰 줘."

"네."

이 기회에 특성 강화의 룬은 털어낸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그에 발맞춰 새로운 사업 구상이 필요하다.

"길드원들 임시귀화 작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완료했습니다. 현재 탑에 들어가 공략 중이고요."

새로운 사업이란 다름 아닌 탑 전용 수식어가 없는 아이템 확보.

특히 해방의 룬 목걸이, 형상 변환의 반지, 회춘의 비약 및 질병 치유의 포션.

71층 입장 선물이기도 하지만 71층 이상에서 탑을 공략해도 보상으로 나온다.

암시장을 통해 구매 의뢰가 폭증하고 있었다. 

부르는 게 값이다.

특성 강화의 룬 재고가 바닥난 지금, 미래 암시장의 주요 판매 물품이 될 아이템들.

이 아이템들을 얻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70층 공략이 완료된 국가들.

그래서 71층에 입장 가능한 검은 탑.

한국, 중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

이 중에서 보상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은?

당연히 한국이다.

그냥 한국이 아닌 노스 코리아.

북한에 임시 귀화하면 상태창 국적은 대한민국.

암시장 길드원 전체가 북한으로 임시귀화했다.

그리하여 암시장 길드장과 부길드장의 현재 국적도 대한민국이었다.

보상받는 건 걱정할 것 없다.

암시장 길드원들은 거의 다 초기 각성 플레이어들.

20년 가까이 플레이어 생활을 해온 터라 최정예 멤버들이니까.

대한민국 검은 탑은 암시장 길드의 아이템 공급원이나 다름 없었다.

***

주혁은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요 며칠 너무 열심히 수련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와그작, 와그작!

팝콘을 씹고 있는 코사크. 

혼자서 먹고 말이야.

'나도 먹어볼까?'

그럼 호문쿨루스 몇 마리 팝콘 봉지로 보내,

"으잉? 도둑들임다!"

하나씩 영차영차 들고 배달.

개미들이 먹이를 운반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손을 쓸 필요도 없다.

가만히 입만 벌리고 있으면 하나씩 떨어뜨려 주니까.

툭툭툭툭.

와그작, 와그작.

"고소하네."

"…개미 왕이심까?"

"호문 킹이라 불러주세요."

TV 채널 돌리는 것도 쉽다. 

호문들이 리모컨 위로 올라가 도움닫기 한번 하면.

톡!

바뀌는 화면.

이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견달래.

"…공자님."

"왜요?"

"이러다 습관이 되시면 게을러지지 않을까 걱정이옵니다. 직접 몸을 움직이셔야 하옵니다."

어쩔 수 없다. 

이미 게을러졌다. 

그래도 변명하자면.

"우리 호문이들 움직이는 것도 다 수련입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 건데요?"

"어렵지 않아 보여서 드리는 얘기이옵니다."

"생각보다 어려워요."

"글쎄요."

하아, 우리 공주님 잔소리.

맨날 자는 사람도 있는데. 

베 상사 보고는 아무 말도 안 하면서.

마침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요즘 최고의 이슈.

북한의 임시귀화 폭증 사태. 

보상 확률이 높아진 대한민국 검은 탑을 공략하기 위한 우회 임시귀화.

사람들 참 머리가 좋단 말이야.

어떻게 저런 발상을 했을까?

뭐, 기생충도 아니고.

신나게 귀화 장사를 하는 북한이 얄밉지만,

"다른 세상에서도 저런 경우가 있었나요?"

"제 기억엔 없슴다. 그전에 세상이 망했슴다."

"보통은 카발란의 저주를 극복하지 못했사옵니다."

별일 없으려나?

걱정될 수밖에 없다.

광마님 생각은? 

소환해서 물어보자.

"시스템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저층이면 몰라도, 71층에 들어선 이상."

그렇다.

71층부터는 탑 점핑 티켓도 막혔다.

"제재가 들어올까요?"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제재가 있지 않겠소?"

"어떤 거요?"

"예를 들면..."

그때였다.

[세계 공지 : 특정 국가에 플레이어 과밀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어?"

뜬금없이 든 세계 공지.

과밀화 현상이라니.

[세계 공지 : 플레이어 인구 집중을 해소하기 위해 신(新)검은 탑을 건설합니다.]

이게 무슨?

신도시 건설 발표야?

[세계 공지 : 대한민국 검은 탑이 분단되었습니다.]

[세계 공지 :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국적의 검은 탑이 신설되었습니다.]

순간!

쿠구구구...

서울 펜트하우스에까지 전해지는 진동.

[세계 공지 : 신설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국적 검은 탑의 미공략 등반 시작 층수는 지구 검은 탑 최저 공략 층수인 55층으로 정해졌습니다.]

[세계 공지 :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플레이어들의 검은 탑 상층 등반을 응원합니다.]

[세계 공지 : 앞으로 1년간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국적의 플레이어는 상태창 국적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와!"

어이가 없다.

이제 탑마저도 남북이 분단되고 말았다.

아무튼 또 한 번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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