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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57% APOCMASCOT / Chapter 22: 22

Chapter 22: 22

192. 언덕

차우진은 유지원과 성혜리에게 밥을 샀다.

유지원은 밥을 먹으면서 연태준 상무에 관한 소문을 계속 꺼냈다. 그러면서 성혜리를 조금씩 놀려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후에 유지원이 슬쩍 제안했다.

"차 이사님. 이렇게 만났는데 그냥 헤어지기 아쉽지 않아요? 술 마시러 갈래요?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바가 있는데요."

옆에서 성혜리가 째려보았다.

유지원이 얼른 한마디 보탰다.

"물론 둘이 아니라 셋이서요."

"다음에 합시다. 오늘은 다른 데 또 가봐야 해서."

"어머. 바쁘신가 보다."

"요즘 좀 그런 편입니다."

차우진은 술 마시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그곳을 떠났다.

유지원은 차우진이 떠난 후에 말했다.

"혜리야. 차 이사님 말이야. 두 회사에서 이사님을 하느라 바쁘신가 보다."

"두 회사 아니야."

"응?"

"차 이사님이 임원으로 있는 회사가 많아."

유지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 혹시 작은 회사에 이름만…."

"중견기업들도 있어. 아니, 중견기업이 더 많아."

"와…."

"대단하지?"

"지금 자랑할 때야? 혜리야. 너 저 사람 잡을 수 있겠어? 능력이 좀 많이 쩌는 거 아니야?"

"네가 아는 것보다 더 쩔어."

SL 제약 공장 폭파 미수 사건도 차우진 덕분에 해결했다. 그때 폭탄이 터졌으면 사람도 많이 죽고 회사도 망하고 성혜리의 집안도 박살 날 뻔했다.

성혜리는 그때 그 사건을 차우진이 어떻게 막았는지 같이 다니면서 직접 봤다.

그녀가 차우진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언젠간 잡고 말 테다."

"그러다 놓치면 나한테 꼭 연락…."

"야!"

"농담이야. 농담. 넌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

차우진이 정예지를 만났다.

정예지는 한밤중인데도 선글라스와 마스크, 모자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나왔다.

차우진이 말했다.

"꽁꽁 싸맸구나."

그녀가 째려보았다.

"마스크 확 벗을까?"

"이 시간에 나랑 있는 거 걸리면 스캔들 난다."

"매니저라고 하면 되지. 차 매니저."

"그 꿈은 아직도 안 버렸구나."

"쳇. 언젠간 매니저로 만들어서 막 부려먹을 테다."

차우진이 물었다.

"KYL 엔터랑 좀 알지?"

정예지가 도로 물었다.

"알긴 아는데, 내가 아는 건 어떻게 알았어?"

"무전기 폭탄 사건 때 네가 블루퍼핏의 게스트로 나갔잖아. 그것도 갑자기. 방송국이 아무리 편의를 봐줘도 상대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게 될 리 있나."

"우리 엄마가 상혁이네 엄마랑 알아서 걔랑 나랑도 아는 사이야. 그래서 소속사인 KYL 엔터도 알긴 해."

차우진이 충고했다.

"거리 둬라."

"응? 걔들 착한데 왜?"

"아니. 블루퍼핏 말고 소속사인 KYL 엔터랑."

"왜 갑자기…. 앗!"

정예지가 주변을 두리번거린 후에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 회사에도 악당이 있어? 사건이야?"

"넌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다크 히어로?"

"난 그런 거 아니다."

"그래. 뭐. 믿어는 줄게."

"안 믿는구나."

정예지가 물었다.

"그런데 겨우 그 이야기하려고 갑자기 보자고 한 거야?"

"어. 네 생각이 나더라고."

"어머어. 내 생각을 했구나?"

"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 너도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타입이잖아."

"그러니까 내 생각이 났다는 거잖아."

"위험관리의 일환이지."

이미 밤이 늦었다. 차우진은 정예지와 차만 마시고 헤어졌다.

정예지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났기 때문에 금방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는 길에 집 앞 편의점에 들러 맥주도 두 캔 샀다.

그녀가 집에 들어가 현관을 닫았다. 맥주는 식탁에 두고, 얼굴을 완전히 가렸던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도 벗었다.

복숭아색으로 달아오른 뺨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그 자리에 서서 소리를 작게 질렀다.

"꺄아아. 내 생각을 했대!"

***

차우진은 오늘 저녁에 유지원과 성혜리, 그리고 정예지를 만났다.

정예지와의 만남은 알리바이로 쓸 수 없다. 잘못하면 스캔들이 난다.

유지원과 성혜리 정도로는 알리바이가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문제가 생겼을 때 둘러댈 핑계 정도는 된다.

차우진이 새벽에 KYL 엔터 건물 옥상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써서 4층 아래까지 점프했다.

그는 어제처럼 연태준의 임원실 창틀에 매달린 후에 창문을 열었다. 오늘도 창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차우진이 임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어제 숨겨둔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메모리카드를 뽑았다. 그걸 태블릿 PC에 넣고 녹화된 영상을 고속으로 확인했다.

영상 중간에 연태준이 통화하는 모습이 몇 번 나왔다. 노트북에 로그인하는 모습도 있었다.

그는 연태준의 어깨 움직임을 통해 손가락이 대충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했다.

차우진이 책상 위에 있는 연태준의 노트북을 켜고 자판 위로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손끝이 자판에는 닿지 않은 상태로 방금 파악한 움직임을 재현했더니 예상되는 단어가 있었다.

차우진이 그 단어를 자판에 입력했다.

로그인에 실패했다. 암호가 달랐다.

차우진이 손가락을 조금 옆으로 움직인 후에 다시 단어를 추측해 보았다.

"아. 이건가? 몰디브1."

이번에는 비밀번호가 일치했다. 로그인에 성공했다.

차우진이 문서 자료들을 확인했다.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 몇 개를 열어봤지만 위험하거나 수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봐서는 구분하기 어려운 자료들도 있었다.

"경찰의 압수수색을 대비해서 다 지웠나?"

차우진이 노트북을 뒤집어보았다. 바닥에 제조 일자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아니네. 노트북을 아예 신품으로 교체했어."

수상했다.

"경찰의 포렌식까지 대비하려면 노트북을 교체해야지. 이렇게까지 하는 건 숨겨야 할 일이 있다는 거겠지."

***

합수부 형사가 보고했다.

"팀장님. 연태준 이사 말인데요. 미행해봐도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연태준이 만난 사람들은 털어봤어?"

"털 것도 없습니다. 출근하면 회사 스케줄만 다니고, 그렇게 만나는 사람도 다 업계 관계자입니다. 퇴근하면 바로 집에 들어갑니다."

팀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알아서 조심하나 본데? 이러면 더 따라다녀도 나오는 게 없겠어."

"어떻게 할까요?"

"끄응. 인원이 부족한데 혐의가 애매한 연태준 한 명한테 너무 매달릴 순 없지. 손 떼고 휴대폰 위치추적이나 매일 해."

"알겠습니다."

***

차우진은 연태준의 노트북 속 데이터를 USB 메모리에 복사했다. 새 노트북에 쓸 만한 자료가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혹시 몰라 일단 챙겼다.

데이터의 양이 많아서 복사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는 복사를 걸어놓고 동영상을 마저 확인했다.

영상 속에 연태준이 스마트폰을 보다가 메모지에 뭔가 적는 모습이 있었다. 메모지 내용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깨의 움직임을 뒤에서 본 것만으로 글씨까지 재현하는 건 무리였다.

대신에 연태준이 제일 아래 서랍의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건 영상에 제대로 나왔다. 그것도 손의 모양까지 나오진 않았지만, 뭘 눌렀는지는 알 수 있었다.

차우진이 그 번호를 그대로 입력했다. 서랍이 열렸다.

서랍 속에는 종이 서류 몇 장과 메모지 몇 장이 있었다. 지폐 뭉치나 다른 것도 있었다.

"콘돔? 변태라서 이걸 사무실에 두나?"

차우진이 서류와 메모지를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

경비원이 복도를 순찰하다가 임원실 쪽에서 작은 불빛을 보았다.

"어? 지금 누가…."

이미 자정이 지났다. 직원은 모두 퇴근했다. 사무실 불도 꺼져 있다.

경비원의 이 순찰은 침입자를 대비하는 게 아니다. 화재나 파손 같은 걸 대비한 안전점검이다.

그래도 불빛을 봤으니 확인은 해야 한다.

경비원이 사무실 보안장치를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에 불빛이 살짝 보였던 연태준 상무의 임원실 앞으로 갔다.

임원실은 문이 유리로 되어 있다. 유리 대부분은 불투명 처리가 되어 있지만, 사이에 투명한 부분이 있어서 가까이에서 보면 내부를 확인할 수는 있다.

경비원이 손전등으로 임원실 내부를 비춰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그가 임원실 내부의 창문도 손전등으로 확인했다. 창문도 모두 닫혀 있었다.

몸을 돌려 사무실도 손전등 불빛으로 훑었다. 아무도 없었다.

"밖에서 들어온 빛이었겠지."

경비원이 별 의심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차우진은 이미 사무실을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는 경비원이 보안장치를 해제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곳을 빠져나왔다.

"늦을 뻔했네."

USB 메모리는 경비원이 도착하기 전에 복사가 끝났다. 그래서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려놓고 창문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이튿날 낮에 유지원이 차우진을 만났다. 이번에도 성혜리가 함께 왔다.

차우진이 물었다.

"성 대리는 바쁠 텐데?"

"지원이가 낯을 많이 가려요. 그래서 같이 왔어요."

"의외네요. 유지원 씨는 인싸인 줄 알았는데."

유지원이 맞장구쳤다.

"저도 제가 낯을 가린다는 걸 오늘 알았어요."

"그리고 성 대리한테 한 말은 지금 근무시간 아니냐는 뜻인데."

성혜리가 손가락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웃었다.

"어머어. 차 이사님. 출근도 잘 안 하시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해요."

"아. 내가 그걸 지적할 입장은 아니구나."

유지원은 어제 아는 동생에게 연락해서 연태준과 같이 놀아난 놈들을 알아본다고 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

차우진은 그중에서 조폭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유지원은 상황을 설명했다.

"제가 아는 동생이요. 연태준이 압구정 술집으로 불러내서 나갔는데, 거기서 아이스 이글이라는 놈을 만났대요."

"별명인가요?"

"그렇겠죠. 본명은 못 들었는데, 영어를 잘 썼다고 했어요."

"다른 특징은?"

"조폭 같다고 했어요. 제가 아는 동생이 연태준한테 항의하니까, 그놈이 부하 몇 놈하고 같이 왔다고 했거든요. 전부 다 몸에 문신이 가득했대요. 글자 몇 개 적는 문신 말고, 온몸에 하는 거 있잖아요."

"하는 짓까지 보면 확실하군요."

유지원이 메모지를 한 장 내밀었다.

"연태준과 놀아난 드라마 제작사나 방송국 간부, 그리고 기자 이름은 여기 적어왔어요. 들은 대로 적은 거라 조금 틀릴 수 있어요."

차우진이 메모지를 받았다.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유지원이 걱정했다.

"겨우 이걸로 연태준을 잡을 수 있을까요?"

"조사해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요."

성혜리가 큰소리쳤다.

"뒷조사는 우리 분석팀에 맡겨주세요. 그 쪽지에 있는 놈들의 업계 평판 정도는 금방 알아올게요."

***

차우진은 두 사람과 헤어진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새벽에 연태준의 사무실에서 가져온 자료를 확인했다.

영상에서 연태준은 메모지에 볼펜으로 몇 글자를 적은 후에 그걸 책상 서랍형 금고에 넣었다. 그 메모지는 차우진이 카메라로 찍어왔다.

"스마트폰을 보다가 적었으니, 메신저를 통해 뭔가 받은 걸 옮겨적은 거겠지. 메신저의 데이터는 삭제했을 테고."

그 메모지 중 한 장에 '언덕'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어젯밤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유지원이 오늘 아이스 이글이라는 놈에 대해 알려주었다.

"언덕. 얼은 오리. 아이스 이글. 얼음 독수리. 얼은 오리. 언덕은 지명이 아니라 그놈이구나."

차우진이 다시 메모지 사진을 확인했다.

[언덕. 10. 11. 원피스.]

"경찰에 발각됐을 때를 대비해서 남은 알아보지 못하게 메모한 건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 궁리해보았다.

아이스 이글과 언덕을 생각하면 의미가 크게 바뀌는 건 아니다.

"10일 11시, 아니면 11일 10시에 원피스라는 곳에서 언덕이랑 뭔가 있나 본데."

문제는 언덕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 원피스가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건 알만한 놈을 찾아봐야겠다."

***

나인세븐 엔터 출신 조연 배우 김상훈이 집 앞 골목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우. 뭐 안 좋은 일이 생기려고 하나? 왜 몸이 부르르…."

"너 감이 좋다?"

김상훈은 차우진을 발견하고 경기를 일으켰다.

"히이익! 혀, 형님?"

"내가 너한테는 안 좋은 일이냐?"

"아, 아닙니다."

"아니긴. 안 좋은 일 맞지."

"여, 여, 이건 어떻게…."

"너 만나러 가던 중이다. 벨이라도 누르려고 했는데, 내가 알아서 골목으로 나오네?"

"제, 제가 마중 나와야죠. 하, 하하."

차우진이 물었다.

"너 아이스 이글이 누군지 아냐?"

김상훈이 도로 물었다.

"네? 그게 누군데요? 야구단이에요?"

"모르냐?"

"처음 듣습니다."

"왜 모르냐?"

"네?"

"네가 그놈을 모르면 내 여기까지 찾아온 게 헛수고가 되잖아."

김상훈은 당황했다.

"그, 그게…. 아! 그놈이면 남자인 겁니까? 제가 원래 여자 고객들을 전문적으로 상대해서 남자는 잘 모릅니다."

"너 남자하고도 놀았다며."

"그거야 앞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형님이라고 부른 거지요. 저는 그냥 분위기 띄우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래서 별명을 모른다?"

"물론 그 손님이 얼마나 잘 나가는 분인지는 들었습니다. 그래야 더 띄워주기 좋으니까요. 그런데 남자 손님과의 대화는 여자 선수들이 주로 해서…."

"그럼 여자 선수들은 아이스 이글을 알 수도 있겠네?"

"그렇죠."

"김수정 지금 어디 있냐?"

김수정은 나인세븐 엔터 출신 선수다. 그녀는 김은솔이라는 이름으로 성수당바이오의 유해준 팀장에게 접근했다가 차우진에게 걸렸다.

"나인세븐 엔터는 망했잖습니까? 그래서 김수정이 어디 있는지는 저도 잘…."

"알아내."

"언제까지…."

"열 시까지."

"네? 삼십 분 남았는데요?"

"알아."

193. 요트 선착장

나인세븐 엔터 출신인 김상훈이 허겁지겁 전화를 걸었다.

"그래. 김수정 말이야. 걔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몰라? 왜 몰라!"

통화 상대방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 왜 나한테 화를 내는데? 우리 몇 번 잤다고 막 대해도 되는 줄 알아?

김상훈이 즉시 굽신댔다.

"미안.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근데 둘이 친한 거 아녔어?"

- 안 친해. 그리고 걔는 왜? 이번에는 걔로 갈아타게?

"내가 설마 그러겠어? 아니야. 그냥 뭐 좀 물어보려고 그래."

- 은지한테 전화해봐. 알지도 몰라.

"어…. 은지는…."

- 왜? 은지랑도 잤냐? 꺼져! 다시는 전화하지 마!

김상훈이 전화를 몇 번 더 건 후에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찾았습니다! 지금 서울에 있습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김수정을 찾는다고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지 그러냐?"

"죄, 죄송합니다."

"누가 물어보면 네가 김수정한테 관심 있어서 알아본 거다."

"당연하죠. 저 입 무거운 거 아시잖습니까? 하, 하하."

"아이스 이글을 찾는다는 말은 핑곗거리로도 쓰지 마라."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오늘 갑자기 귀가 안 들려서요."

"너 오래 살겠다?"

"감사합니다!"

차우진이 김수정의 주소를 받아 그곳을 떠났다.

김상훈은 차우진이 완전히 떠난 후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살았다."

***

나인세븐 엔터 출신 김수정은 김은솔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그녀가 짙은 색 잠자리 선글라스와 대형 마스크, 모자까지 쓰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 아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상대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다.

"좋아. 완벽…."

"다른 호구 찾으러 가냐?"

"히익!"

김은솔은 화들짝 놀랐다.

"누, 누구세요?"

차우진이 김은솔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건 여자 연예인용 표준 은신템인가?"

정예지를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났을 때 그녀도 이렇게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나왔다.

차우진도 마스크는 쓰고 있다. 그가 마스크를 슬쩍 내렸다.

"오랜만이다?"

"히익! 당신은…."

"반갑지?"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저를 어떻게 찾은 거죠?"

"그동안 너를 쭉 지켜보고 있었지."

"왜, 왜, 왜요?"

"다음에는 누구를 털어먹는지 보려고?"

"그때 이후로는 그런 일은 안 하고 있어요. 진짜예요."

차우진이 경고했다.

"계속 그래야 할 거다. 또 산업스파이 짓으로 순진한 사람 털어먹으려고 하면 감방에 처넣어버릴 테니까."

그녀는 지난번에 성수당바이오의 연구팀장 유해준에게 접근해 정보를 빼내려 했었다.

"이제 그런 일 안 할 거예요. 그런데…."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해준 오빠는 잘 지내요?"

"왜? 넌 돈 좋아해서 유해준은 안 된다더니?"

"그냥, 미안해서 그래요."

"와…. 너한테 미안하다는 감정이 있다고?"

김은솔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해준 오빠는요. 사람이 재미는 없고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까 제가 만난 사람 중에 유일하게 착했어요. 이제 그 일 안 하니까, 생각이 좀 나서…."

차우진은 김은솔이 찾아가면 유해준이 받아줄 수 있다는 걸 안다. 유해준은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후에도 차우진과 술을 마시면서 김은솔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경고했다.

"유 팀장 다시 건드리면 넌 다이렉트로 감방 가는 거야."

김은솔이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래요. 저도 그 정도 염치는 있어요."

"넌 그런 거 없잖아."

"해준 오빠한테만 염치가 있는 거예요. 그 오빠는 예외니까요."

"수작 부리지 마라."

"네…."

차우진이 본론을 꺼냈다.

"너 아이스 이글 알지?"

"아이스 이글? 아. 그 사람. 직접 아는 건 아니에요."

"알긴 아는구나."

"그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아는 거 다 말해봐."

"암호 화폐 거래하는 거 도와주는 일로 돈을 많이 벌었대요."

"코인 브로커군."

그녀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무실이 압구정에 있대요. 그래서 그 근처 룸살롱에 자주 간댔어요."

타깃이 압구정에 출몰한다는 건 차우진이 이미 수집한 정보에도 있다. 그래서 김은솔이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정확한 주소는?"

"그것까지는 모르죠. 저도 들은 건데."

"아이스 이글을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은?"

"가슴에 얼음 독수리 문신이 있어요. 그래서 아이스 이글이라고 부른대요."

***

차우진은 아이스 이글의 사무실이 압구정에 있다는 건 알아냈다.

"그럼 접선장소인 원피스는 어디냐…."

예상되는 곳이 없었다.

연태준을 계속 미행하면 그 장소를 알아낼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러면 차우진의 알리바이에 빈틈이 생길 위험이 있다.

그런 사태를 피하려면 접선장소를 미리 알아내야 한다. 아이스 이글이 누구인지도 파악해야 한다.

연태준이 메모지에 적어놓은 '언덕'이 아이스 이글이라는 건 알아냈다. 그런데 원피스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연태준이 술집 상호를 그대로 썼을 리는 없다.

"일단 언덕이부터 찾자."

차우진은 김은솔에게 들은 정보에 안무가 유지원이 알아온 것을 더했다. 그러면 상대가 어느 골목 룸살롱에 주로 가는지는 알 수 있다.

그 룸살롱 근처에는 사무실로 쓸만한 건물이 여럿 있었다. 차우진이 근처 건물 옥상에서 그곳을 감시했다.

타깃의 인상착의도 김은솔과 유지원 양쪽에서 들은 걸 조합했다. 양쪽 다 머리가 짧고 덩치가 크다고 했다.

"키 180 이상에 몸무게 120 이상. 근육 자랑도 좀 했고."

그것만 해도 대상이 확 줄어든다.

"사나운 인상. 안경은 쓰지 않았고."

차우진이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욕을 잘하고."

조건에 딱 맞는 사람이 지나갔다. 입에 욕이 붙어 있었다.

"가슴에 얼음 독수리만 확인하면 되겠네."

***

이덕수가 욕을 뱉으며 걸어갔다.

"씨발. 카악. 퉤. 일이 뭔가 꼬이는 느낌인데…."

차우진이 이덕수를 뒤따라갔다. 그러면서 구슬을 툭 굴렀다. 플라스틱 구슬이 도로 위를 빠르게 굴러가다가 이덕수가 걷는 경로와 겹쳤다.

이덕수가 구슬을 밟았다. 한쪽 다리가 쭉 미끄러지면서 몸이 크게 휘청였다.

"으헉!"

차우진이 얼른 다가가 휘청이는 이덕수를 붙잡았다.

"괜찮습니까?"

"어우. 씨. 뭐야? 씨발."

차우진이 이덕수를 잡아줄 때 일부러 셔츠를 잡아당겼다. 물 건너온 비싼 셔츠가 쭉 늘어나며 가슴에 새겨놓은 문신이 드러났다.

이덕수가 차우진을 밀었다.

"씨발. 어딜 당겨!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넘어지는 것 같아서 붙잡은 겁니다만?"

"씨발. 쪽팔리게."

이덕수가 어깨를 위로 크게 움직인 후에 다시 걸어갔다.

차우진이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맞네. 언덕이."

이덕수의 가슴에는 얼음 독수리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덕수가 조금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넘어질 때 붙잡아준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내 셔츠 목이 다 늘어났잖아. 이거 국내에 몇 장 안 들어온 건데, 그 새끼가 그새 튀었네."

그가 어깨를 흔들며 계속 걸어갔다.

***

이튿날 10시에 이덕수가 한강 유람선을 탔다.

그는 유람선 갑판 위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서 맥주를 마셨다.

그의 옆자리에 연태준이 앉았다. 둘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덕수가 물었다.

"거 맥주라도 좀 하시지."

"차를 가져와서."

"차는 나도 가져왔는데?"

연태준은 이덕수가 아니라 한강을 보며 인상을 썼다.

"음주 단속에 걸리면 어쩌려고?"

"단속 절대로 안 하는 코스를 딱 아니까 상관없습니다. 흐흐흐."

"끄응. 알아서 하시겠지."

이번에는 이덕수가 물었다.

"이제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봅니다?"

"꼬리가 떨어졌으니까 괜찮습니다."

"그 꼬리, 확실히 떨어진 거 맞습니까?"

연태준이 피식 웃었다.

"합수부에서 내 미행은 포기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앞으로는 내 휴대폰 위치만 가끔 추적하기로 했다더군요."

"역시 돈이 좋지요? 수사 정보를 이렇게 쉽게 빼내니까요."

"돈과 인맥의 힘이지요. 그리고 정보를 빼내는 게 쉽진 않았습니다."

"위치추적 대상인 휴대폰은?"

"집에 놔뒀습니다."

"흐흐. 그럼 다 됐네. 여기 있으면 바람 소리 때문에 도청도 못 하고 다 괜찮으니까, 이제 편하게 이야기합시다."

"여기 오래 앉아있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군. 본론만 빠르게 진행합시다."

이덕수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토요일 밤 인천 앞바다로 밤낚시나 가시지요?"

"내 요트로?"

"그러라고 있는 요트잖습니까?"

"이번에도 물건인가?"

"중국 쪽에서 배가 올 겁니다."

"이번엔 뭘 들여옵니까?"

"모르는 게 좋으실 텐데, 왜 갑자기 물건에 관심을 가지실까?"

연태준이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경찰한테 미행까지 당했는데, 계속 이래도 되나 싶어서."

"그런 후회를 하기엔 너무 늦었을 텐데요? 지금 그 자리에 누구 돈으로 올라갔는데."

"끄응.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가는?"

"평소처럼 한 장."

"아니, 이번엔 다섯 장은 받아야겠습니다."

이덕수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연 상무님. 욕심이 많아지셨어."

연태준이 짜증을 냈다.

"남들이 있는 곳에서는 내 이름이나 직책을 직접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 배 위는 시끄러워서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못 듣는데 예민하기는."

"그리고 이번 일로 내가 얼마나 위험해졌는지 압니까?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거, 이젠 위험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다섯 장은 받아야겠다는 겁니다."

"흐흐. 알았습니다. 알았어. 이번에는 넉넉히 챙겨드리지."

"정확한 접선 시각과 위치는?"

이덕수가 말했다.

"인천 요트 선착장에서 토요일 밤 아홉 시에 알려드리지. 그때 출발하면 늦지 않을 겁니다."

연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때 봅시다."

연태준이 한강 유람선 안쪽으로 걸어갔다. 이턱수가 그런 연태준의 뒷모습을 보며 실실 웃었다.

"다섯 배라…. 흐흐흐."

차우진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둘의 모습을 보았다. 소음이 많아서 대화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알아낸 건 있었다.

"연태준이 돈을 더 달라는 데도, 언덕이가 그냥 웃어? 재밌네."

***

차우진이 알아내려는 건 멸망급 빌런의 현재 위치다. 이덕수를 잡는 게 목적이 아니다.

이튿날 오전에 차우진이 SL 제약에 출근했다. 그는 사장 성기호를 찾아가 물었다.

"성 사장님.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오랜만에 배 띄워서 바다낚시 어떠십니까?"

성기호가 활짝 웃었다.

"어? 차 이사 시간 돼? 나야 좋지!"

"오후에 나갔다가 저녁때쯤 돌아오는 코스로 하시죠."

"오후에 낚시하고 밤에 별 보면서 배 위에서 술 마시는 것도 좋은데."

"그래도 여덟 시까지는 돌아와야지요."

"그럼 어디로 갈까? 남해? 동해?"

"저번처럼 서해로 가시죠. 인천 요트 선착장에서 출발했다가 돌아오는 코스로요."

성기호가 멈칫했다.

"어…. 서해. 나는 좋은데, 우리 혜리가…. 아니지. 혜리는 내일 바쁘다고 했으니까 우리끼리 가면 되겠네."

***

성혜리는 집에서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재빨리 말했다.

"나 내일 하나도 안 바빠요!"

"응? 혜리야. 너 내일 친구랑 만난다고…."

"그 친구도 데려가면 되죠!"

"그러면 차 이사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아빠 친구들은 데려오면서! 그리고 지원이 데려갈 거예요. 유지원이요. 걔는 차 이사님도 알아요."

***

토요일 오후에 낚싯배에서 차우진이 말했다.

"유지원 씨도 왔군요."

"원래는 혜리랑 백화점 가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어제 갑자기 장소가 여기로 바뀌더라고요."

성혜리가 작게 말했다.

"야. 툴툴대지 마."

"나 낚시 안 좋아해. 이런 거 해본 적도 없어."

배가 바다로 나가고 1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유지원이 흥분해서 외쳤다.

"잡았어! 내가 잡았다고!"

유지원은 손바닥보다 조금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다.

차우진이 물었다.

"낚시 처음이라더니 마음에 드나 봅니다?"

"살생이 이렇게 재미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출발 2시간 후에 유지원이 물었다.

"멀리 나오니까 바다가 진짜 좋다. 수영복 가져왔는데 바다에 들어가도 되죠?"

"안 됩니다."

"네? 왜요? 상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차우진이 성혜리를 슬쩍 보았다.

저번에 서해에서 성혜리가 바다에 떨어져 죽을 뻔했다. 유지원이 바다에 들어가면 성혜리가 그때 일을 떠올릴 수 있다.

차우진이 말했다.

"우리는 낚시하러 온 겁니다. 그리고 장비 없이 깊은 바다에 들어가지 말아요. 위험하니까."

차우진이 있으니 유지원이 물에 빠져도 구해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기면 요트 선착장으로 너무 빨리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일이 꼬인다. 이 배는 해가 지고 난 후에, 그리고 연태준의 요트가 떠나기 전에 선착장에 도착해야 한다.

194. 술래

차우진 일행은 인천 요트 선착장을 떠나 3시간쯤 지난 후에 저녁을 먹었다.

요리는 배에 있는 간이 주방에서 차우진이 직접 만들었다. 낚시로 잡은 물고기가 제일 흔한 식재료였다.

오늘은 다른 식재료도 꽤 많았다. 향신료도 골고루 있었다.

성혜리가 자랑했다.

"제가 아이스박스 가져오길 잘했죠?"

그녀는 오늘 저녁을 위해 아이스박스에 식재료를 담아오고, 별도의 박스에 다양한 향신료도 담아왔다.

심지어 칼 세트도 있었다.

"전부 새것이네요?"

"좋은 거로 골라왔어요."

향신료들은 백화점에서 쓸어와서 포장조차 뜯지 않은 상태였다. 뭐가 좋은지 몰라서 비싼 것들로 골라왔다.

"집에 남는 거 가져와도 되는데."

성혜리가 나와서 사는 집은 주방이 텅텅 비어 있다. 그러니 가져올 것이 없다.

그녀가 얼른 둘러댔다.

"한 세트 새로 쫙 맞추려고 한 거죠. 다음에 또 쓰려고요!"

"그러시구나. 원하는 요리가 있습니까?"

"저번에 먹은 거 다 맛있었어요."

"그럼 회도 좀 썰고, 튀김도 좀 하고, 조림도 좀 해야겠네요."

차우진이 음식을 빠른 속도로 조리해 내놓았다. 회는 지난번처럼 얇게 썰었다. 튀김도 있었다.

유지원이 차려진 음식을 먹으며 환성을 질렀다.

"대박! 맛있어! 이거 술이랑 너무 잘 어울려! 오늘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

성혜리가 자랑했다.

"거봐. 내가 재미있을 거라고 했잖아."

"왜 네가 자랑해? 내가 보니까 이 배가 어느 코스로 가는지부터 이 요리까지 차 이사님이 다 알아서 하던데."

"그래서 더 재미있었나? 흐흐."

"좋냐? 좋아? 근데…."

유지원이 요트 반대쪽에서 성기호와 이야기하는 차우진을 힐끗 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내가 오늘 봤는데, 차 이사님이 너한테 안 넘어오는 거 같다?"

"괜찮아.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대."

"내 친구가 스토커였네?"

"야!"

차우진과 성기호가 성혜리를 돌아보았다.

성혜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인 후에 유지원에게 말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야. 다른 나무꾼이 너보다 먼저 찍어서 넘어뜨리면 어쩌게?"

"좀 수상한 나무꾼이 있긴 해."

"누구?"

"정예지."

"배우 정예지? 그럼 내가 소문이라도 좀 들어볼까?"

유지원은 안무가라서 연예계에 아는 사람이 꽤 있다. 그녀의 인맥은 주로 가수 쪽에 있지만, 가수와 배우를 겸업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배우 쪽 소문도 들을 수 있다.

성혜리가 활짝 웃었다.

"지원아! 좋은 생각이야. 네가 이렇게 도움되다니! 더 먹어. 더. 술 더 마실래?"

차우진은 요트 위에서 바다 위에 떠 있는 다른 배들을 확인했다.

'바다 위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찾기 어렵네.'

상대가 가까운 거리에서 이 배를 향해 총이라도 쏘려고 하면 전투 센스가 반응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배는 없었다.

배는 해가 떨어진 후에 요트 선착장 부두로 돌아왔다. 시간은 8시였다.

성기호는 많이 취했다.

"차 이사. 2차 가자! 2차!"

"따님하고 같이 집에 가셔야죠."

"응? 우리 딸?"

성혜리도 분위기에 취해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꽤 취했다.

"맞아. 아빠는 집에 가. 나는 차 이사님하고 좀 더 마시다가 갈게."

"응? 아니, 그건 좀…."

차우진이 제안했다.

"유지원 씨가 두 분을 모시고 갔으면 합니다."

안무가 유지원은 상태가 그나마 나았다.

"저요? 왜요? 비서님이 계신데요."

성기호의 비서는 인천에서 쉬다가 배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부두로 돌아왔다. 집에 갈 때는 그 차를 타고 가면 된다.

성혜리가 유지원의 팔을 잡았다.

"너 혼자 남아서 차 이사님하고 뭐하려고?"

"야. 네가 어떻게 나를 의심…. 후우. 얘 눈 다 풀렸네. 아니다. 가자. 내가 오늘 너네 집에서 자고 갈게."

"응? 우리 본가?"

"아니. 너 밖에서 잘 때 쓰는 집."

"그래. 가자. 가서 또 마시자!"

세 사람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차우진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술을 너무 먹였나."

차우진이 그들을 먼저 보내기 위해 술을 꽤 많이 권했다. 그러면서 차우진도 같이 마셨다.

차우진은 해독 스킬 덕분에 그 정도 술로는 취하지 않았다.

이 낚시용 요트는 성기호의 소유가 아니라 서해에 올 때마다 빌리는 배다.

선장은 배를 정박하고 떠났다.

차우진은 배를 떠나는 척하다가 슬쩍 돌아왔다.

그는 배 뒤쪽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근처의 다른 배에 설사 블랙박스가 있더라도 찍히지 않는 위치였다.

차우진이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연태준 상무의 임원실에는 요트 사진이 액자에 들어 있었다. 차우진이 그 사진을 카메라로 찍어서 가져왔다.

멀지 않은 곳에 사진 속의 배와 똑같은 배가 떠 있었다. 연태준 상무의 요트였다.

"CCTV가 안 찍히는 곳에 요트를 정박해놨네. 누가 저 배에 타고 내리는지 알려지면 곤란하니까 그랬겠지."

그 요트까지의 거리는 조금 멀었다.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로는 한 번에 갈 수가 없다.

상관없다. 중간에 있는 다른 요트 몇 척을 징검다리로 이용하면 CCTV를 피해서 이동할 수 있다.

차우진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이쪽 배에서 사라졌다가 다른 요트에 나타났다.

그냥 아무 배나 골라서 옮겨간 건 아니다. 일부러 난간이 높은 배를 고르고, 자세도 낮게 낮췄다.

근처 다른 배에 블랙박스가 있다 해도, 이동한 배의 난간이나 짐을 이용하면 몸이 노출되진 않는다.

이렇게 네 번만 더 이동하면 연태준의 요트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 공간이동 스킬은 체력을 소모한다.

"배에서 미리 실컷 먹어두길 잘했지."

***

연태준은 9시가 다 되어서야 부두에 도착했다. 그는 개인용 요트에 올라탄 후에 익숙하게 장비를 조작했다.

"경찰의 감시는 끝났다지만, 굳이 지금 시기에 물건을 들여와야 하나? 그 리스크는 나만 감수하는데? 젠장."

연태준이 '언덕'이라고 메모지에 적은 이덕수가 배 위로 올라왔다.

"연 상무님. 이 배도 다 우리 일 해주면서 번 돈으로 산 건데, 그렇게 불평만 하면 쓰나."

"이건 내가 노력해서 번 돈으로 산 요트입니다만?"

"연 상무님이 투자 실패에 횡령으로 감방 갈 뻔한 걸 내가 돈 대서 살려놨는데? 내 돈이 없었으면 상무님은 이미 예전에 바다에 뛰어들었어야 할 겁니다."

"끄응. 그래서 이렇게 협조하잖습니까?"

"내가 여기 오래 있으면 좀 그러니까 용건만 간단히 전하겠습니다. 출발은 지금 하시고, 속도는 평소처럼. 여기로 가면 접선 상대가 올 겁니다."

이덕수가 쪽지를 주었다. GPS 좌표가 적혀 있었다.

이덕수는 쪽지를 준 후에 배에서 내렸다.

연태준의 요트가 선착장을 벗어나 바다로 나갔다. GPS 좌표 위치로 가는 건 간단했다.

그가 해당 지역에 도착한 후에 주변을 보았다.

어두운 조명만 달고 다가오는 배가 있었다.

그 배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작은 낚싯배였다.

연태준이 배를 가까이 댔다. 요트와 낚싯배 사이에 이동용 발판이 걸쳐졌다.

낚싯배에서 세 사람이 요트로 올라탔다.

연태준이 물었다.

"물건은 어디 있습니까?"

고현우가 얼굴의 칼자국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말했다.

"일단 다른 것부터 확인합시다. 전에 말한 작업장이 필요한데."

"충청남도 남쪽에 적당한 별장이 있습니다."

"위치는?"

연태준이 지갑에서 쪽지를 꺼내 흔들었다. 거기에 주소가 적혀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 별장은 깨끗한 겁니까?"

"노숙자 신분증을 입수해 차명으로 빌렸습니다.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좋군. 차량은?"

"그쪽 해안가 숲에 대포차를 한 대 뒀습니다. 철판이 다 썩어가는 차라서 아무도 안 가져갈 겁니다."

남자가 쪽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역시 일을 참 잘하십니다. 밝은 곳에서 사업 하는 분이라 그런가?"

연태준이 쪽지를 넘겨주지 않고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이제 물건을 주시지요. 받아서 숨겨놔야 하니까."

고현우가 히죽 웃었다.

"아. 물건. 그거 지금 배에 있는데?"

"그럼 가져오셔야지. 그래야 내가 육지로 따로 옮겨드리지."

"연 상무님이 좀 가져다주셔야겠는데."

연태준이 인상을 썼다.

"내가 왜? 나 그런 거 하는 사람 아닙니다."

"저쪽에서 보여드릴 것도 좀 있고."

연태준의 표정이 더 나빠졌다.

"내가 일을 돕는다고 해서 나를 시다바리 취급하는 겁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일단 저 배로 가면 왜 그러는지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안 간다는 사람을 왜 자꾸…."

연태준은 의심이 들었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왜 나를 자꾸 저 배로 보내려는 거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연태준이 허리 뒤쪽 삼단봉에 손을 댔다.

"날 확실히 납득시켜야 할 겁니다."

고현우가 인상을 썼다.

"우리 연 상무님. 눈치가 빠르네?"

"뭐?"

고현우가 칼을 꺼냈다. 단검의 칼날 길이가 제법 길었다. 그와 함께 올라온 두 놈도 같은 칼을 뽑았다.

연태준이 배 위에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카, 칼?"

"연 상무. 바다 위 배에서 도망칠 곳이 어디 있다고 물러나고 그래?"

"왜, 왜 날…. 다섯 배를 요구해서 그래? 다시 예전 가격에 해줄게! 그러니까 이러지 맙시다!"

"이미 늦었어. 그리고 말이야. 어차피 당신은 정리하려고 했다."

"뭐? 왜…."

고현우가 연태준을 칼끝으로 가리켰다.

"당신은 이미 노출됐잖아. 경찰이 따라다닌다면서. 당신이 잡히면 우리가 곤란해져."

연태준이 삼단봉을 뽑으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이 새끼가…. 내가 죽으면 경찰이 어떻게 생각할 거 같나!"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부담을 느낀 연태준 상무.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생각하겠지. 일단 기사는 그렇게 날 거야."

"그러니까 계획적으로 나를 여기로 유인했구나!"

"물론 시체는 발견되지 않을 거야. 자살한 시체에 칼자국이 있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내가 죽으면 핏자국은 어쩔 건데!"

고현우가 투덜댔다.

"그러니까 우리 배로 넘어갔으면 일이 간단했잖아. 괜히 여기서 칼 맞으면…. 이 배는 침몰시켜야겠지."

거기까지 말한 고현우가 턱짓을 하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뭐해? 죽여."

그의 부하 둘이 연태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연태준이 삼단봉을 수평으로 내질렀다. 빨랐다.

달려들던 놈 하나가 삼단봉에 얻어맞고 옆으로 나자빠졌다.

"켁!"

하지만 한 놈을 제끼는 게 한계였다. 다른 놈이 연태준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연태준이 황급히 피하려 했다.

소용없었다.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칼을 피하기 어렵다.

연태준의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 깊게 베고 지나갔다.

"끄아악!"

연태준이 비명을 지르며 삼단봉을 다시 휘둘렀다. 두 번째 놈도 얻어맞았다.

"케엑!"

연태준이 왼손으로 옆구리를 막고 오른손 삼단봉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이 새끼들아! 나도 원래 칼잡이…."

고현우가 갑자기 연태준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피하거나 막기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단검이 연태준의 어깨에 푹 꽂혔다.

"끄아악!"

연태준이 비명을 질렀다. 손에서 삼단봉이 떨어졌다.

고현우가 단검을 하나 더 뽑으며 부하들에게 욕을 했다.

"이 등신 새끼들아. 아마추어 한 놈한테 무슨 꼴이야?"

부하 두 놈이 바닥에 떨어뜨린 단검을 주우며 몸을 일으켰다.

"아마추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상관없어. 어차피 다구리 앞에 장사 없으니까."

고현우가 얼굴의 칼자국을 손톱으로 긁으며 말했다.

"연 상무. 그냥 깔끔하게 가자. 어차피 죽을 거, 그러는 게 서로 편…."

갑자기 차우진이 나타나 연태준의 목 뒤를 꾹 눌렀다.

"끅!"

연태준은 짧은 신음과 함께 기절해 쓰러졌다.

고현우는 깜짝 놀랐다.

"어? 너, 너 뭐야?"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연 상무님이 고용한 경호원."

"뭐, 뭐?"

"그게 아니면 이 바다 한복판에서 내가 어떻게 이 요트에 탔겠냐?"

"이제 알겠다. 연태준은 숨겨둔 수가 있었구나."

고현우가 단검을 슬슬 흔들었다. 그의 부하들이 고현우의 양옆에 섰다.

그가 차우진을 비웃었다.

"멍청한 놈. 연태준이 당하기 전에 밖으로 나와서 같이 반항했어야지. 그랬으면 조금 더 버텼을 텐데."

"그러게? 내가 좀 늦었네?"

일부러 늦게 나타났다. 일부러 연태준이 칼을 맞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절시켰다.

"그런데 그거 아냐?"

차우진이 세 놈을 보며 히죽 웃었다.

"내 술래잡기에서는 늦든 빠르든 술래한테 잡히면 죽어. 근데 내가 술래다?"

195. 술래 II

낚싯배에서 요트로 넘어온 고현우가 비웃었다. 얼굴에 난 칼자국이 같이 비틀렸다.

"우린 셋이고 넌 혼자니까 네가 죽어야지."

"내가 술래라니까?"

연태준 상무는 이미 기절했다. 고현우가 바닥에 쓰러진 연태준을 힐끗 보며 말했다.

"너랑 연 상무가 서로 찔러죽인 거로 처리하는 게 더 깔끔하겠어. 배를 침몰시키는 것보다는 그게 자연스럽지."

고현우가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죽여."

그의 부하 두 놈이 차우진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단검은 똑같은 형태라 어느 칼에 맞아도 같은 유형의 상처가 남는다.

오른쪽 놈이 더 빨랐다. 그놈이 차우진의 목을 향해 단검을 들이밀었다.

차우진은 빈손이 아니다. 그는 이 배의 선실 주방에서 작업용 칼을 하나 가져왔다. 폭이 좁지만 끝이 날카롭고 무게가 제법 나가 던지기 좋았다.

차우진이 팔을 오른쪽으로 쭉 뻗었다. 쥐고 있던 칼이 화살처럼 날아가 달려들던 놈의 가슴에 푹 박혔다.

"끄아악!"

오른쪽 놈이 허공으로 칼을 뻗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차우진이 적에게 다가가 칼을 잡아챘다.

차우진이 던진 칼은 깊게 박히긴 했지만 한 방에 죽지는 않았다. 차우진이 엎어지는 놈을 걷어찼다. 발차기에 체중이 실렸다.

적이 요트 난간 너머로 밀려나다가 바다에 떨어졌다.

왼쪽 놈이 그 틈에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적의 칼날은 차우진의 목을 노렸다. 차우진을 단칼에 죽이려는 의도가 확실히 보였다. 칼질에 망설임이 없었다.

차우진이 몸을 슬쩍 젖혀 적의 칼을 피했다. 그러면서 방금 빼앗은 칼을 수평으로 휘둘러 적의 가슴에 콱 박았다.

"끄악!"

차우진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는 놈의 손에서 다시 단검을 잡아챘다.

고현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부하들이 너무 빨리 당했다.

고현우는 부하들이 싸울 때 빈틈을 찾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두 놈이 너무 빨리 당했다. 심지에 한 놈은 바다에 떨어졌다.

그렇다고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그는 차우진이 두 번째 부하를 찌를 때 단검을 던졌다.

그리 크지 않은 배 위에서 던진 단검이 차우진을 향해 날아갔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보통 사람은 이 거리에서 던진 칼을 피하지 못한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느려진 것처럼 보였다. 고현우가 던진 칼도 느리게 날아왔다.

차우진이 방금 빼앗은 단검으로 느리게 날아오는 적의 칼을 쳐냈다. 날카로워야 할 쇳소리가 조금 둔탁하게 들렸다. 적의 단검은 옆으로 튕겨 나가 바다에 떨어졌다.

가속 스킬의 유효 시간이 끝났다. 다시 세상이 평소의 속도로 움직였다.

고현우의 눈이 커졌다.

"어, 어떻게 이 거리에서 내가 던진 칼을…."

차우진이 왼쪽에서 덤비다가 칼에 맞은 놈을 배 밖으로 밀어버린 후에 말했다.

"역시 난 야구를 해야 했어."

고현우가 단검을 하나 더 뽑았다.

"이건 말이 안 돼! 이것도 막아봐라!"

차우진이 물었다.

"단검을 좀 던지나 본데, 그것까지 던지면 남는 칼이 있냐?"

없다.

고현우가 가지고 다니는 단검은 세 자루뿐이다. 이미 두 자루를 던졌다. 지금 손에 쥔 단검이 마지막이다.

고현우는 긴장했다. 부하 둘은 순식간에 칼을 맞았다.

'나보다 칼을 잘 쓰는 놈이야.'

이 단검을 던졌는데 차우진을 죽이지 못하면 그가 죽는다. 그 생각을 하니 함부로 던질 수도 없었다.

"씨, 씨발…."

차우진이 성큼 다가갔다. 고현우가 왼손으로 앞을 견제하며 차우진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오지 마!"

차우진이 그 팔을 툭 쳐내며 칼날을 뻗었다. 칼날이 고현우의 가슴을 푹 찔렀다.

"컥!"

깊이가 얕았다. 치명상은 아니다.

고현우가 뒤로 물러나며 칼을 크게 휘둘렀다.

차우진이 그 칼도 피하며 칼을 다시 뻗었다. 이번에는 칼날이 고현우의 옆구리를 얇게 베고 지나갔다.

요트 위로 피가 튀었다.

"끄아악!"

고현우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발판이 몸에 닿았다. 낚싯배에서 요트로 넘어올 때 사용한 발판이었다.

'도망칠 수 있어!'

고현우가 손에 쥔 단검을 차우진을 향해 던졌다.

시간 가속 스킬은 방금 사용해서 다시 쓰기 어렵다.

상관없다.

차우진은 고현우가 단검을 던지려고 할 때부터 대비했다. 고현우의 몸이 회전하고 어깨가 움직이는 걸 보면서 그 칼이 어디로 날아올지 예측했다.

'던지고 튀겠지.'

차우진이 먼저 몸을 비틀었다. 단검의 그의 옆으로 날아갔다.

고현우는 단검을 던지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판을 밟고 뛰었다.

차우진이 도망치는 고현우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그가 던진 단검이 고현우의 등을 베고 지나갔다.

"으아악!"

고현우가 비명을 지르며 낚싯배로 뛰어들었다. 그는 그 배로 넘어가자마자 발판부터 떼어냈다.

배 두 척을 연결하던 발판이 바다 위로 떨어졌다.

고현우가 허겁지겁 낚싯배를 출발시켰다. 요트와 낚싯배의 거리가 벌어졌다.

고현우가 조타실에서 차우진이 있는 요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나중에 너 찾아내서 꼭 죽인다! 꼭 죽인다고!"

차우진이 요트 위에서 말했다.

"너 내가 이 요트로 그 배를 쫓아가면 어쩌려고 여유 부리냐?"

"씨, 씨발!"

고현우가 급히 앞을 보며 배의 속도를 최고로 높였다. 그는 요트에서 어느 정도 멀어질 때까지는 전방과 계기판에만 집중했다.

그는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진 후에 뒤를 돌아보았다.

요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떠 있었다. 차우진은 보이지 않았다.

"씨발. 술래 새끼한테 잡혔으면 진짜 죽었을 거야."

그의 부하들은 죽었다.

"난 살았어. 살았다고."

그가 고개를 돌려 상처를 치료할만한 걸 찾아보았다. 조타실에는 구급함이 없었다. 출혈은 계속됐다.

그렇다고 배를 뒤져 구급함을 찾을 여유는 없었다.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구급함을 찾다가 요트에 따라잡힐까 봐 두려웠다.

그가 낚싯배의 속도를 높였다. 낡은 엔진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차우진이 그 배에 타고 있어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소음이 심했다.

***

연태준 상무가 요트 위에서 눈을 뜨고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차우진은 고현우 패거리와 싸우기 전에 연태준을 기절시켰다. 그래서 연태준은 배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못했다.

차우진이 사용한 기절 기술은 원래 유지 시간이 짧다. 게다가 연태준은 아까 고현우가 던진 칼에 맞았다. 그 고통 때문에 눈이 떠졌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보며 팔을 휘저었다.

"비켜…. 으아악!"

어깨에서 깊고 날카로운 통증이 확 밀려왔다. 칼은 아직 어깨에 꽂혀 있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 이 새끼들 어디 있어?"

저 멀리 멀어지는 낚싯배가 보였다. 고현우가 타고 있는 배였다.

"내가 죽은 줄 알고 그냥 갔구나! 개새끼들아! 나는 살아 있다!"

평소의 연태준이라면 고현우가 자신이 죽었는지 확인하지 않은 이유를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계속 살아남으려면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보다 급한 게 있다.

그는 칼을 맞았다. 그것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가 선실로 들어갔다. 거기에 구급용 약품과 도구가 있었다.

"씨발. 지혈…."

그가 어깨에서 단검을 뽑았다.

"으아악!"

급히 압박붕대를 어깨에 감았다. 허리의 상처도 붕대를 감아 지혈했다.

그걸로 출혈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상처를 그냥 놔두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는 구급함에서 소독약을 찾아 붕대 위에 쏟아부었다. 약통에서 항생제와 소염진통제도 찾아서 몇 알씩 입에 털어 넣었다.

"개새끼들."

그가 선실에서 나와 조타실로 갔다. 그곳에서 배의 시동을 걸었다.

"일단 몸부터 피해야 해."

그는 이미 폭탄 테러 미수 사건으로 경찰의 의심을 받고 있다. 칼에 맞은 상태로 병원에 가면 경찰이 그 사건과의 연관성을 다시 캐지 않을 리 없다.

"집은 안돼. 경찰이 모르는 곳으로 가야 해."

연태준이 바지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그가 비밀 거점으로 준비해둔 집의 주소가 거기 적혀 있었다. 그 집은 노숙자의 명의로 빌렸다.

"일단 여기에 숨어 있어야겠어. 복수할 테다. 개새끼들아."

칼을 맞은 어깨와 옆구리가 너무 아팠다. 진통제를 몇 알이나 삼켰지만 아직 약효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이덕수 그 새끼도 한패였어. 감히 나를 죽을 자리로 보내? 넌 내가 꼭 죽인다!"

***

고현우가 낚싯배를 몰고 한참을 달렸다. 앞쪽에 요트가 떠 있었다. 연태준의 것보다 훨씬 더 큰 요트였다.

"끄윽. 찾았다."

그가 낚싯배를 요트에 접근시켰다.

요트에서 누군가가 손전등으로 낚싯배를 비추었다.

고현우가 욕을 했다.

"빨리 배나 보내달라고. 새끼들아."

요트에서 작은 고무보트가 내려지더니 낚싯배로 다가왔다. 고무보트는 두 놈이 몰았다.

고현우가 비틀거리며 고무보트에 올라탔다. 그런 후에 소리를 질렀다.

"닥터! 닥터 나오라고 해!"

고무보트가 다시 요트로 이동했다.

요트의 뒤쪽에는 고무보트에서 밟고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붙어 있었다.

칼자국이 비틀거리며 계단을 밟고 요트 위로 올라갔다. 그의 몸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고현우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닥터!"

닥터가 인상을 쓰며 다가왔다.

"칼에 맞았나?"

고현우가 갑판에 벌렁 드러누웠다.

"씨발. 나 좀 살려줘. 나 칼을 너무 많이 맞았어."

닥터가 상처를 살폈다.

"음…. 죽지는 않겠는데? 상처가 보기보다 얕아. 치명상은 없어."

"진통제, 진통제도 줘! 아파 죽겠어."

"진통제는 선실에 있는데."

다른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보고가 먼저다. 어떻게 된 거지? 다른 놈들은?"

"두목. 내가 지금 진짜 죽을 거 같습…."

"보고부터 해라."

고현우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연태준이 칼잡이를 데려왔습니다."

"연 상무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더니, 정보가 틀렸군. 그럼 네가 데려간 놈들은?"

"그 칼잡이한테 당했습니다."

"그럼 너는?"

"예?"

"부하들이 다 죽었는데 너는 도망쳤단 말이냐?"

고현우가 변명했다.

"두목. 저도 칼을 세 방이나 맞으면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새끼 실력이 너무 대단했습니다. 애들이 다 자빠졌지만, 저는 이 사태를 보고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후퇴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두목이 인상을 쓰며 바다를 보았다.

"그놈에게 꼬리를 밟히지는…. 이 바다에서 미행당하진 않았겠지."

"맞습니다. 그 새끼가 연태준의 배에 남아있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연태준은 어떻게 됐지?"

"제가 칼을 두 방 찔렀는데, 죽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두목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러니까 살아 있을 수도 있다?"

고현우가 다급히 말했다.

"그, 그래도 그 새끼가 자수하지는 못할 겁니다. 자수하면 그 새끼도 끝장이니까요!"

"찾아내라."

"꼭 찾아내서 확실히 끝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치료받지 않으면 제가 죽을 거 같아서…."

두목이 턱짓을 했다.

"닥터. 치료해줘."

"오케이. 진통제부터 가져올 테니까 그동안 들것이라도 준비해. 저 상태로 옮기면 선실까지 피바다로 만들겠다."

닥터가 선실로 들어갔다.

다른 부하가 낚싯배를 가리키며 두목에게 물었다.

"저 배는 어떻게 할까요?"

"침몰시켜."

"알겠습니다."

차우진이 물었다.

"그럼 이 배는 어떻게 할까요?"

두목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항구로 간다. 가서 연태준부터 찾아내. 그놈을 죽여야 뒤탈이 없…. 누구냐!"

두목이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차우진이 배 뒤쪽 계단을 올라오며 말했다.

"야. 바다에서 미행하는 거 참 쉽더라?"

두목이 차우진을 노려본 후에 고현우를 돌아보았다.

"꼬리를 밟혔구나. 저놈도 저 낚싯배에 타고 있었어."

고현우는 당황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저 새끼가 연태준의 요트에 있는 걸 봤는데…."

"네가 착각했겠지."

이 요트에는 두목과 멀쩡한 부하 일곱이 있다.

원래는 부하가 셋이 더 있었다. 그중 둘은 차우진에게 당해 바다에 떨어졌다.

고현우는 지금 부상이 심해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가누기 때문에 싸울 수 없다.

차우진이 말했다.

"네가 두목이라며? 두목은 아는 게 좀 있겠지?"

"알고 싶은 게 있나?"

"네 위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서."

두목은 차우진이 혼자 왔다는 걸 확인하고 히죽 웃었다.

"저승에 가서 물어봐라."

"내가 저승에서 일하는데, 거기선 누군지 모르겠더라고."

"뭐?"

"저승과 이승의 법도가 달라서 정보 수집에 어려움이 좀 있어."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놈이군."

두목이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죽여라."

당황한 고현우가 급히 소리를 질렀다.

"술래 새끼한테 그냥 덤비면 다 죽습니다!"

두목이 물었다.

"술래라니?"

차우진이 대답했다.

"내가 술래야."

196. 술래 III

요트 위에서 두목이 물었다.

"술래는 원래 진 놈이 하는 거 아닌가?"

"내 술래잡기는 달라. 술래가 뜨면 도망쳐야지. 술래한테 잡히면 죽거든."

이미 차우진와 싸워본 고현우가 다급히 말했다.

"저 새끼는 진짜 칼잡이입니다. 셋이 덤볐는데 순식간에 둘이 당하고 저 하나 겨우 살아서 돌아왔단 말입니다!"

"그래? 칼을 그렇게 잘 쓴다는 말이지."

부하들은 차우진을 공격하려고 칼을 꺼냈다가 고현우와 두목의 대화를 들었다. 그들은 두목의 지시를 기다렸다.

두목이 부하들에게 다시 손짓했다. 대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칼을 잘 쓴다면."

두목이 재킷을 젖히며 권총을 뽑았다. 탄창을 사용하는 반자동권총이었다.

"칼잡이에게는 이게 카운터지."

차우진이 말했다.

"역시 탄약만 충분하면 칼보다는 총이지."

"흐흐. 당연하지."

두목이 권총에 소음기를 끼우고 장전 슬라이드를 뒤로 젖혔다 놓으며 말했다.

"칼을 아무리 잘 써도 총 앞에서는 안 되거든."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소음기까지? 잘됐네."

두목이 물었다.

"잘 되다니?"

"잘 쓰겠다고."

"미친놈이군."

두목이 차우진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미친놈도 총에 맞으면 죽…."

차우진이 두목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두목이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헉!"

두목만 놀란 게 아니다. 갑판에 있던 다른 부하들도 기겁했다.

"히익!"

"뭐, 뭐야!"

두목이 커진 눈으로 앞쪽을 두리번거렸다.

"어, 어디 있는 거야! 분명히 저기 있었잖아!"

부하들의 눈이 두목을 향했다. 다들 눈이 커지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두목이 물었다.

"왜…."

바로 옆에서 차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승에서 왔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더냐?"

"히이익!"

두목이 허리를 비틀며 권총을 옆으로 돌렸다.

차우진이 더 빨랐다. 그는 돌아서는 두목의 손목을 후려치며 권총을 잡아챘다.

손목이 꺾인 두목이 비명을 질렀다.

"끄악!"

차우진이 두목을 발로 밀어 찼다. 두목이 뒤로 쭉 밀려나다 나자빠졌다.

부하들은 차우진이 공간을 건너뛰는 걸 보고 경악했다.

"어, 어떻게 사람이 갑자기…."

"귀, 귀신?"

"진짜 저승에서 왔…."

차우진이 그들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봤구나?"

"히이익!"

두목이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죽여! 저 새끼를 빨리 죽이란 말이다!"

부하들이 그 명령에 반응했다. 어차피 배 위에서는 도망칠 곳이 없다.

일곱 놈이 차우진을 향해 움직였다. 그중 한 놈이 단검을 힘껏 던졌다.

갑자기 던진 것치곤 단검이 꽤 정확하게 날아왔다. 그대로 있으면 차우진의 가슴에 칼날이 꽂힌다.

차우진이 상체를 젖혀 그 칼을 피하며 말했다.

"너부터구나."

차우진이 단검을 던진 놈을 향해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소음기를 통과한 9mm 총탄이 고속으로 날아가 적의 가슴에 박혔다.

칼을 던진 놈의 가슴에서 피가 두 번 튀었다. 적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으아악!"

뒤늦게 옆쪽에서 달려들려는 놈이 있었다.

차우진이 몸을 옆으로 휙 돌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에도 두 발이었다.

달려들던 놈도 몸통에 두 발을 맞고 엎어졌다.

"컥!"

요트의 2층 갑판에 작살총을 가진 놈이 나타났다. 그놈이 작살총을 차우진 쪽으로 조준했다.

차우진이 뒤로 휙 돌아서며 사격했다. 총탄 두 발이 2층으로 날아가 적의 몸에 퍽퍽 꽂혔다.

"케에엑!"

총에 맞은 놈이 떨어지며 작살이 발사됐다. 눈먼 작살이 반대편에서 주춤거리던 놈의 목을 관통했다.

"켁!"

순식간에 넷이 쓰러졌다.

부하는 이제 셋이 남았다. 낚싯배를 타고 온 고현우도 있지만, 그놈은 부상이 심해서 싸울 수 없다.

남은 셋은 겁에 질렸다.

"으아악!"

먼저 도망치려던 놈이 차우진의 총탄 두 발을 맞고 고꾸라졌다.

다른 놈이 요트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차우진이 2층으로 점프했다. 2층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가 난간을 잡고 올라가 반대편을 확인했다.

그쪽으로 도망치던 놈은 차우진이 쫓아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위쪽으로 칼을 던졌다.

차우진이 그 칼을 쉽게 피하며 사격했다.

"컥!"

차우진이 2층에서 다시 갑판으로 뛰어내렸다.

마지막 놈이 난간 끝에서 차우진이 뛰어내리는 틈을 노리고 단검을 던지려 했다.

차우진이 뛰어내리는 도중에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이 적의 가슴에 꽂혔다.

"컥."

차우진이 착지하면서 한 발을 더 발사했다. 비틀거리던 적이 고꾸라졌다.

부하 일곱이 열네 발의 총탄을 맞았다. 전투 진행 속도가 너무 빨랐다.

닥터는 선실로 진통제 약병과 주사기를 가지러 들어갔다가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왔다.

그가 본 건 총에 맞아 쓰러진 놈들이었다.

닥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이게 무슨…."

이제 남은 건 두목과 닥터, 그리고 고현우뿐이다.

차우진이 닥터에게 물었다.

"너 의사냐?"

"그, 그렇습니다!"

"의사가 왜 여기 있어?"

닥터의 눈이 갑판 위를 훑었다. 두목의 부하들이 총에 맞아 굴러다녔다.

"끄, 끌려왔습니다."

두목은 공포에 질렸다.

"어,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저승사자라니까. 왜 그걸 농담이라고 생각하냐?"

"지, 진짜로 그런 게 있…."

"지옥불이 너를 기다린다."

"히익!"

차우진이 두목을 향해 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너한테 일 시키는 놈. 지금 어디 있냐?"

"그, 그건…."

차우진이 두목의 어깨에 한 방을 발사했다.

"으아악!"

"지옥불에 떨어지면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지."

"처, 천안에 있습니다! 천안에 김 사장이라고…."

차우진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두목의 다른 어깨를 뚫었다.

"아아악!"

총탄이 떨어졌다. 권총 슬라이드가 뒤로 젖혀진 채로 고정됐다. 열여섯 발이나 쐈더니 탄창이 비었다.

차우진이 권총을 두목의 옆에 툭 던졌다.

"네 말에 거짓이 가득하구나."

양쪽 어깨를 당한 두목이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끄으윽. 브로커 통해서 연락받습니다. 돈도 브로커를 통해서 다 받습니다."

"브로커가 누구냐?"

"그놈 정체는 연태준이 압니다."

이덕수는 암호 화폐 브로커 일을 한다. 그는 오늘 부두에서 연태준 상무를 만나 바다에서 고현우와 접선하게 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연태준은 죽었다."

살아 있다. 차우진이 일부러 살려놓았다.

그런데 이놈들은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네가 아는 놈을 말해."

"돈은 그쪽에서 주지만, 일을 주는 건…."

두목의 눈동자가 옆으로 슬쩍 움직였다.

차우진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닥터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정체를 들키자마자 손을 휘두르며 옆으로 뛰었다. 수술용 메스처럼 생긴 작은 단검 세 개가 차우진 쪽으로 날아왔다.

차우진이 옆으로 움직였다. 작은 칼 두 개가 허공을 갈랐다.

마지막 하나는 두목의 목에 박혔다.

"컥!"

두목이 눈을 까뒤집으며 옆으로 자빠졌다.

닥터는 칼을 던진 후에 배 반대쪽으로 뛰었다.

차우진은 정보가 필요하다. 다 죽여버리면 정보를 줄 놈이 없어진다.

어차피 사방이 바다라 숨을 곳은 없다.

차우진이 갑판에서 말했다.

"의사라면서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고 다니는구나."

닥터가 배 반대편에서 소리를 질렀다.

"너 뭐야! 정체가 뭐냐고!"

"저승사자."

차우진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썼을 때 다른 놈들은 갑판에 있었다. 그런데 닥터는 그때 진통제를 가지러 선실에 갔었다.

그래서 닥터는 차우진이 스킬을 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네가 유럽에서 왔다면 다르게 불러도 되겠지."

"난 유럽에서 온 게 아니…."

"타락천사는 어떠냐?"

"타락…."

닥터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히이익! 서, 설마 죽음의 천사…."

"그래. 그거라고 하자."

"거, 거짓말 마! 죽음의 천사는 프라하에 있어야지, 어떻게 한국에 있단 거냐!"

"음? 프라하?"

레드 크리스털 사건 때 차우진이 프라하에 가서 러시아계 마약 조직 스컬스를 쓸어버렸다. 그때 체코 현지 조직인 울프팩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닥터가 악을 썼다.

"몰라? 역시 넌 죽음의 천사는 아니구나!"

"유럽 상황을 아는 걸 보면, 역시 저놈은 하수인이고 네가 핵심 인물이겠어."

박창수는 멸망급 테러 빌런이 멸망 초기에 유럽에서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유럽을 떡밥으로 던져보았다. 닥터가 거기 반응했다.

차우진이 물었다.

"너는 목동 공개홀 폭탄 테러를 지시한 놈을 알지? 누구냐?"

"씨발. 그걸 말하면 내가 죽어!"

닥터가 갑자기 요트 2층 난간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기관단총이 있었다.

차우진이 그걸 보고 혀를 찼다.

"쯧. 배 앞쪽에 무기를 숨겨둔 건가?"

닥터가 2층에서 차우진이 있는 갑판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으아아아! 죽어!"

기관단총이 불을 뿜으며 9mm 총탄이 갑판으로 쏟아졌다. 조준은 정확하지 않았다. 흩뿌려지는 총탄이 갑판 한쪽에 있던 고현우 쪽으로도 날아갔다.

빗나간 총탄이 고현우의 몸에 꽂혔다.

"케엑!"

정작 갑판 위에 있던 차우진은 사라졌다.

닥터는 기겁했다.

"히익! 어, 어디 있…."

닥터의 바로 뒤에서 차우진이 말했다.

"저승사자라고 말했을 텐데. 네가 자백하지 않으면 넌 지옥불에 떨어진다."

"히이익!"

닥터가 급히 뒤로 돌아섰다. 손가락은 이미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총탄이 바다 위로 부챗살처럼 퍼졌다.

그가 뒤로 다 돌아서기도 전에 차우진이 닥터의 팔을 잡고 옆구리를 후려쳤다.

"컥!"

차우진이 닥터의 기관단총을 붙잡았다. 총신이 맨손으로 잡기에는 좀 뜨거웠지만, 차우진도 가죽장갑을 끼고 있어서 그 정도는 상관없었다.

차우진이 기관단총을 붙잡고 닥터를 걷어찼다.

닥터가 총을 놓치며 2층 갑판에서 뒤로 밀려났다.

2층 난간이 닥터의 등에 걸렸다. 닥터는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히이익! 마, 마귀!"

목동 공개홀 폭파 사건을 주도한 건 인도자라고 불리던 놈이다. 그놈은 강원도에서 사이비 교주로 활동했다.

그런데 그놈도 차우진을 마귀라고 불렀다.

닥터도 방금 차우진을 마귀라고 불렀다.

차우진이 기관단총을 닥터의 가슴에 겨누며 말했다.

"마귀는 네가 믿는 그놈이다. 너는 속고 있지. 나는 그놈을 잡으러 왔지."

"그럴 리가 없…."

"그놈이 너에게 나와 같은 기적을 보여주더냐?"

"그, 그건…."

"그놈은 천국이 있다고 말로만 떠들었지. 그리고 현세에서 그 천국을 누리게 해준다 했지. 그동안 많이 누렸느냐?"

"아, 아니…."

차우진이 닥터의 팔에 난 상처를 보았다. 기관단총을 빼앗길 때 난 상처였다.

그건 상처라고 하기엔 작았다. 피부가 긁혀 피만 살짝 맺혔다.

차우진이 그 상처에 손끝을 댔다.

차우진과 박창수는 자기 자신의 회복력을 높이는 스킬이 있다. 그 스킬이 있으면 어지간한 상처는 약을 먹고 소독약을 바르면 회복된다.

먹고 바를 약이 귀하다는 게 문제이지만, 약만 구할 수 있으면 작은 부상쯤은 회복 스킬로 해결할 수 있었다.

차우진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상대의 회복력을 높이는 스킬도 있다. 이렇게 작은 상처에는 그 스킬의 효과가 더 확실하게 먹힌다.

"네 상처를 보아라."

차우진이 손끝을 긁힌 상처에 대고 스킬을 사용했다. 체력이 쭉 빠졌다.

차우진이 긁힌 상처의 피를 닦아냈다. 상처가 사라지고 말끔한 피부가 나타났다.

"그놈이 이런 기적을 보일 수 있더냐?"

닥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이건…."

"치유의 기적이다. 마귀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지."

"저, 정말로…."

이 스킬은 가성비가 나쁘다. 연고만 발라도 낫는 작은 상처를 지우는 것뿐인데도 체력이 많이 소모된다.

그렇지만 피곤한 티를 내면 안 된다. 간단한 일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

차우진이 말했다.

"닥터.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그 마귀의 위치를 고하여라."

이미 사이비를 믿는 사람을 스킬을 이용해 흔드는 건 쉬웠다.

닥터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스페인에 있습니다!"

"스페인이라."

농업 계열 회사 쿠에르노의 본사가 스페인에 있다.

"정확한 위치는?"

"그건 모르지만…."

"모르면 지옥불에 떨어져야지."

닥터가 다급히 말했다.

"저를 보내주시면 제가 스페인에 가서 유인하겠습니다!"

"너를 믿으란 말이냐?"

"미, 믿어주십시오. 저는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유인할 방법을 말하라."

"그, 그건 어떻게든 잘…."

"네가 나를 기만하느냐?"

닥터가 정보를 토해냈다.

"한국에는 셋이 들어왔습니다. 한 놈은 강원도에서 죽었지만, 자금을 담당하는 놈이 남아있습니다."

"계속하라."

"그놈이 그분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돈을 다루는 놈은 직접 연락을 합니다."

"그거 좋은 정보구나. 너 같은 놈들에게 현실에서 천국을 보여주려면 돈을 집행할 놈이 필요하겠지."

닥터가 공손히 물었다.

"저기, 제가 협조하면, 저는 신의 사도로 일할 수 있습니까?"

"아. 이제 그걸 알려줄 때가 되었구나."

"경청하겠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거, 다 구라다."

"예?"

"내가 저승사자라고 한 거, 다 뻥이라고. 나 사람이다."

197. 유인

차우진이 말했다.

"사이비를 믿는 놈이라 그런가? 잘 속더라? 나 사람이다?"

"그, 그럴 리가 없다! 네가 사람일 리가 없다!"

닥터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총을 쏠 때 눈앞에서 사라졌잖아!"

차우진이 설명했다.

"네가 총을 쏘자마자 갑판 아래로 뛰었지."

당연히 거짓말이다. 스킬을 사용해 공간을 건너뛰었다.

"뛰는 모습은 못 봤…."

차우진이 둘러댔다.

"넌 기관단총을 발사할 때 사격 충격 때문에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그때 아래로 뛰면 2층 네 위치에서는 시야각 때문에 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내, 내가 눈을 잠깐 감았다고?"

닥터는 그 행동이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차우진도 보고 말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닥터를 속이기 위해 한 말이다.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연발로 사격했는데, 그때 눈을 깜빡였는지를 초보자가 기억하긴 어렵지.'

닥터가 사격 초보라는 건 기관단총의 조준이 형편없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닥터가 쏜 총탄은 갑판 여기저기에 흩뿌려졌다. 낚싯배를 타고 온 고현우도 그렇게 빗나간 총알에 맞아 죽었다.

닥터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럼 내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건…."

"배 옆으로 이동해서 난간을 이용해 위로 점프, 2층에 올라가서 네 뒤로 다가갔지. 넌 앞쪽 갑판만 두리번거리느라 뒤는 돌아보지 않더라."

닥터가 소리를 질렀다.

"그, 그런 건 속임수잖아!"

"당연히 다 눈속임이지. 마술쇼 같은 거다."

이제 닥터의 손도 덜덜 떨렸다.

"내, 내가 속았다고? 내가?"

그러다 닥터의 눈에 자신의 팔이 보였다. 조금 전에 기관단총을 빼앗길 때 긁힌 상처가 생겼는데 그걸 차우진이 지웠다.

"사, 상처는? 내 상처를 낫게 했잖아!"

"긁힌 상처에서 쓰라림이 느껴졌냐?"

"어? 그, 그건…."

못 느꼈다.

닥터는 전투 때문에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그쯤 되면 칼에 찔려도 모를 수 있다. 긁힌 상처의 통증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못 느꼈겠지.'

차우진이 말했다.

"넌 긁힌 적이 없어. 내가 네 팔에 피를 살짝 묻혀서 긁힌 것처럼 보이게 했다가, 도로 닦아냈지."

닥터의 머릿속에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니야! 네가 손가락을 댔을 때 통증이 조금 느껴졌단 말이다!"

"내가 살짝 꼬집어 착각하게 한 거다. 디테일을 살린 거지."

"그, 그렇게까지 왜…."

"네가 나를 신이 보냈다고 생각해야 아는 걸 털어놓을 테니까."

닥터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그, 그럼 그렇지. 내가 속은 거였어. 넌 죽음의 천사도 아니고, 마귀도 아니야."

"당연하지."

"그, 그럼 넌 누구지?"

"돈 받고 일하는 킬러."

"누가 너를…."

"가슴에 얼음 독수리 문신이 있는 남자."

연태준을 서해로 보낸 코인 브로커 이덕수의 가슴에 얼음 독수리 문신이 있다.

닥터의 눈이 커졌다.

"뭐? 그, 그럴 리가 없다. 그놈은…."

"네가 방금 팔아치운 그놈이지. 너희 조직에서 한국에 들어온 셋 중에 돈을 담당하는 놈."

"그놈이 왜!"

차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억울해하지 마라. 그놈은 너보다 한 발 먼저 너를 친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왜!"

"돈을 다루는 놈이니까 당연히 돈 때문이다. 이덕수가 너희 조직의 모든 돈을 챙길 거다."

닥터가 소리를 질렀다.

"그놈이 그러고도 살아남을 줄 안단 말이냐!"

"당연히 살아남지. 네가 마지막 제거 대상이니까."

"뭐?"

"인도자가 죽고 너까지 죽으면 이덕수의 짓인지 누가 알겠어? 너를 보낸 놈에게 그런 초능력이 있어 보이냐?"

"이덕수 그 새끼가 나를…."

차우진이 기관단총을 닥터에게 겨누었다.

"그러니까 너도 죽어줘야겠다."

닥터가 다급히 사정했다.

"사, 살려줘. 내가 뭐든 할 테니까 목숨만…."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그렇지만 이게 내 비즈니스라서, 마무리는 해야지."

차우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나가지 않았다. 닥터가 난사할 때 탄창의 탄약을 이미 다 소모했다.

차우진이 이럴 줄 몰랐던 것처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탄창이 비었…."

닥터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손을 휙 뻗었다.

메스처럼 생긴 작은 단검이 차우진을 날아갔다. 하나뿐이지만 거리가 가까웠다.

차우진은 닥터의 어깨가 움찔할 때부터 칼이 날아올 줄 알고 있었다.

차우진이 뒤로 훌쩍 물러나며 기관단총으로 단검을 막았다.

닥터는 차우진과 싸울 생각은 없다. 어차피 칼도 남은 게 없다. 싸우면 죽는다고 판단했다.

닥터는 대신에 차우진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난간 너머로 뛰어내렸다. 요트의 2층에서 1층 갑판까지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다. 다리에 충격이 좀 들어오긴 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닥터가 갑판 위를 뛰었다. 다시 난간이 나타났다. 그 난간 너머로 몸을 날렸다.

닥터가 바다에 풍덩 빠졌다.

죽으려고 뛴 건 아니다. 그가 뛰어내린 곳 옆쪽에 고현우가 몰고 온 낚싯배가 있었다.

닥터가 바다 위를 빠르게 헤엄쳐 그 낚싯배에 도착했다. 배의 높이가 낮고 붙잡을 것도 있어서 기어 올라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낚싯배는 아직 시동이 걸려 있었다.

닥터가 허겁지겁 배를 출발시켰다. 낚싯배가 요트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허억. 허억. 살았다."

닥터가 숨을 몰아쉬며 요트를 돌아보았다.

차우진이 갑판 난간 앞에 서서 멀어지는 낚싯배를 보고 있었다.

닥터가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게 말이 되냐! 다 속임수였어! 넌 여기로는 못 넘어온다!"

닥터가 차우진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외쳤다.

"지금 이 거리는 사람이 건너뛸 수 없단 말이다!"

차우진이 배 옆으로 걸어가 닥터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닥터가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포기했구나! 그럴 줄 알았다! 이 사기꾼 새끼야!"

닥터가 앞을 보며 배의 속도를 높였다. 요트는 바다 위 그 자리에 혼자 떠 있었다.

닥터는 무사히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이제 요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살았어. 나는 살아남았어. 흐흐흐."

그는 배를 계속 몰아 육지로 갔다.

서해안에 사람이 없는 간이 선착장이 있었다. 어선이 배를 댈 수 있게 만들어둔 곳인데 지금은 이용하는 배가 없었다.

닥터가 그 선착장에 대충 배를 대고 내렸다.

단단한 콘크리트가 발에 닿았다. 닥터가 선착장을 걸어서 빠져나가며 말했다.

"그 사기꾼 킬러 새끼. 내가 넌 꼭 죽인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일 테다."

그가 선착장을 벗어나 한참을 걸었다. 작은 농가가 보였다. 농가의 불은 꺼져 있었다.

그 농가 옆에 자전거가 한 대 서 있었다. 낡은 자전거였다.

"한국은 자전거 도둑이 많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겠지."

닥터가 그 자전거를 훔쳤다.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미 깜깜한 밤인데 가로등도 없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에는 소형 전조등이 붙어 있긴 했다. 그렇지만 광량이 부족해서 그것만으로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결국 돌부리를 밟으면서 자전거가 넘어졌다. 닥터가 바닥을 굴렀다.

"끄아악!"

닥터가 욕을 내질렀다.

"씨발. 그 사기꾼 킬러 새끼! 배신자 이덕수 새끼! 엿 같은 자전거!"

닥터가 자전거를 근처 풀숲으로 던져버렸다. 그런 후에 절뚝거리며 계속 걸었다.

이제 바다에서 꽤 멀어졌다.

그가 산길을 통해 산으로 들어갔다. 잡초 위에 1톤 트럭이 한 대 서 있었다. 철판 곳곳에 녹이 슬어 있는 낡은 트럭이었다.

닥터가 불평했다.

"아무리 위장이 필요해도 그렇지, 이런 다 썩어가는 차를 준비해?"

이 차는 일이 잘못됐을 때를 대비해 비상용으로 준비해둔 차였다. 이런 차는 서해안 쪽에 세 대가 있었다. 세 번째 차는 연태준이 준비했다.

이 차는 그 전에 준비된 차였다.

"어디 폐차장에서 주워왔나?"

워낙 낡은 차였기 때문에 힘들게 훔쳐가 봤자 팔아먹기 어려웠다. 그만큼 도난 위험이 낮았다.

닥터가 절뚝거리며 트럭에 다가갔다.

자동차 키는 바퀴 안쪽에 끼워져 있었다. 그가 키를 꺼내 운전석 문을 열었다.

"이 차를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닥터가 보닛을 열고 배터리를 연결했다. 시트 사이에 숨겨둔 퓨즈도 찾아내 새로 끼웠다.

그런 후에 1톤 트럭의 시동을 걸고 그곳을 벗어났다.

차체는 다 썩어가지만, 구동계는 최소한의 정비는 되어 있었다. 차가 굴러가기는 했다.

그렇지만 상태는 좋지 않았다. 엔진 소리에 잡소리가 끼어 있고 바퀴 쪽도 이상했다.

"한 시간만 퍼지지 말고 가자. 한 시간만."

트럭은 한 시간 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산속에 집이 한 채 있었다. 전원주택처럼 보이는 집이었다.

그가 녹슨 트럭을 그 앞에 세우고 내렸다.

이 집의 대문과 현관에는 도어락이 설치되어 있었다.

닥터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거점은 탈출용 트럭과는 달리 관리가 나쁘지 않았다. 스위치를 누르자 전등이 켜졌다. 통조림 같은 장기보존형 비상식량과 술도 있었다.

닥터가 찬장에서 위스키를 한 병 꺼냈다. 그걸 컵에 콸콸 붓더니 입에 들이붓고 꿀꺽 삼켰다.

"크으윽. 씨발.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일단 숨은 좀 돌렸다.

"그 킬러 새끼는 꼭 죽인다. 그리고 이덕수 그 배신자 새끼도 죽인다."

하지만 닥터 혼자서 그 일을 하기는 어렵다. 지원이 필요했다.

그가 벽에 숨겨진 소형 금고를 열었다. 그 안에 6연발 리볼버 권총, 폭탄에 쓰는 기폭장치 몇 개, 현금, 그리고 스마트폰이 들어 있었다.

닥터가 스마트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너네는 이제 죽은 목숨이다."

닥터는 통화버튼은 누르지 않고 어플을 실행했다.

그가 실행한 건 암호화 처리된 데이터를 이용해 음성통화를 하는 어플이다. 공용 어플은 아니라서 스마트폰에 직접 설치해야 한다.

당연히 상대편의 스마트폰에도 같은 어플이 깔려있어야 통화가 가능하다.

잠시 후에 상대편과 연결됐다.

닥터가 영어로 보고했다.

"이덕수가 배신했다."

몇 초 정도 침묵이 흐른 후에 상대가 물었다.

- 확실한가?

"확실하다. 한국 강원도에 있던 인도자도 이덕수가 죽였다. 건물 폭파 실패도 다 이덕수 짓이다."

- 현지 무력조직을 지휘해 배신자를 처단하라.

닥터가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불가능하다. 우리 배도 당했다. 무력조직은 전멸했다."

- 그것도 이덕수의 짓인가?

"그렇다. 그 새끼가 완전히 배신했단 말이다!"

- 이덕수는 이쪽에서 직접 처리하겠다. 현지 협력자는 어떻게 됐나?

"연태준은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제거하려고 셋을 보냈는데 하나만 돌아왔다. 칼을 맞았지만,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다."

- 찾아라. 처리는 직접 하겠다.

통신이 끝났다.

닥터가 스마트폰을 끄고 금고 안에 넣으며 히죽 웃었다.

"이덕수를 처단할 때 그 사기꾼 킬러 새끼도 같이 죽이게 해야지. 너네는 이제 다 죽었다. 흐흐흐."

뒤에서 차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한테도 그 새끼하고 연락할 방법이 있네?"

닥터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돌아섰다.

"히익!"

차우진이 말했다.

"그 새끼랑 연락할 방법은 이덕수만 가지고 있다더니, 너도 되잖아. 날 속인 거냐?"

닥터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차우진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어, 어, 어떻게 여기에…."

"하긴. 나도 아까 속은 척했지."

닥터가 소리를 질렀다.

"넌 분명히 그 요트에 남아 있었잖아! 그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냔 말이다!"

공간이동 스킬을 쓰면 그 정도 거리는 건너뛸 수 있다.

"신기하지?"

"싸, 쌍둥이? 그렇구나! 쌍둥이 트릭이었어!"

지금 닥터의 바로 옆 금고에는 권총이 들어 있다. 6연발 리볼버 권총이라서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나간다.

닥터가 차우진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오른손을 옆으로 뻗었다. 손에 금고 속 현금이 닿았다. 그걸 밀치며 더듬었다.

금속으로 만든 권총이 손에 잡혔다. 그걸 허겁지겁 잡아 꺼냈다.

눈으로 보지 않고 권총을 잡아서 꺼내다가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실수였다.

금고 안에서 총탄이 발사됐다. 총탄은 내부 철판을 때리고 밖으로 튕겨 나갔다.

튕겨 나온 총탄이 닥터의 얼굴을 스쳤다.

"끄악!"

닥터가 비명을 지르며 총구를 차우진 쪽으로 향했다.

"제발 좀 죽어!"

닥터가 차우진을 정확히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차우진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까 요트에서 봤던 일이 또 일어났다.

"히익! 차, 착각이 아니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넌 내가 아직도 사람으로 보이냐?"

198. 연결

닥터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끼아아악!"

눈앞에서 사라졌던 차우진이 뒤에서 나타나 말을 걸었다. 그건 닥터의 상식을 한참 벗어난 현상이다.

자기가 사람으로 보이냐는 차우진의 말도 공포에 질리게 했다.

닥터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러면서 몸을 뒤로 돌렸다. 손가락은 이미 권총 방아쇠에 걸려 있었다. 뒤쪽으로 총구를 향하고 방아쇠만 당기면 된다.

그러기 전에, 차우진이 뒤로 돌아서는 닥터의 가슴에 칼을 푹 꽂았다.

"커, 컥."

닥터가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만 걸어놓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에서 권총이 빠져나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닥터가 가슴에 칼을 박은 상태로 비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 사람이 아니…."

"저승사자라니까."

"아, 아까 요트에서 나를…."

"일부러 풀어줬지."

"왜…."

"그래야 네가 윗놈에게 연락할 테니까."

닥터는 조금 전에 스마트폰 어플을 사용해 이덕수가 배신해서 한국에 침투한 조직이 전멸했다고 보고했다.

"사, 살려…."

"네 할 일은 끝났다. 너는 이제 지옥불에 떨어져서 영원히 고통받으리라."

"아, 안…. 컥."

닥터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가슴에는 칼이 박힌 상태였다.

차우진이 닥터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불러들인 놈들은 그 빌런 새끼를 더 잘 알겠지. 빌런 새끼가 직접 와주면 더 좋고."

199. 수사

형사팀장이 말했다.

"사망자는 목동 공개홀 사건의 범인이거나, 최소한 범인 중 하나이긴 할 거다. 여기서 폭탄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팀장님. 서해 요트만 해도 사이즈가 큰데, 폭탄 테러까지 연결되면 이거 우리 손에서 벗어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겠지. 해경 쪽은 몰라도 여기는 목동 공개홀 합동수사본부에서 가져갈 거야."

"에휴. 사전 조사만 깔끔하게 하겠습니다."

"그래. 여기 뭐가 더 있을지 모르…. 잠깐. 여기에 기폭장치는 있는데 폭탄은 없을까?"

"네?"

"그냥 다 밖으로 나가! 여기 위험하다!"

***

서해에 떠 있던 요트를 신고한 건 낚싯배 선장이다. 손님 중 두 명은 상갓집에 간다고 둘러대고 그 배를 탔다.

사위가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하며 말했다.

"장인어른. 이번 밤낚시는 하다가 말았네요."

"어쩔 수 있나. 유령선을 봤는데."

"다음에는 갯바위로 가시죠?"

"그럴까? 나도 당장 배 타는 건 좀 그러니까 말이야."

그들은 한동안 배를 타고 있다가 해경을 따라 부두로 이동했다. 아침이 될 때까지는 경찰서에서 시간을 보냈다.

경찰서를 나오며 사위가 말했다.

"가서 뜨끈한 해장국이라도 드시죠."

"어…. 백반 먹자. 백반."

"아. 네. 그렇죠. 선지는 이제 좀…. 그냥 밥 먹어야죠. 밥."

그들은 아침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원래는 그렇게 마무리됐어야 하는데, 사건이 커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합수본 형사들이 그들의 집에 찾아와 몇 가지를 더 묻고 돌아갔다.

사위의 아내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물었다.

"상갓집이 서해 용궁에 있었니?"

"아니, 자기야. 난 안 간다고 했는데 장인어른께서 자꾸 가자고 하셔서…."

"아빠도 갔어? 아주 그냥 네가 아빠랑 살아!"

"그럼 주말에만 장인어른이랑…."

"야!"

***

닥터는 총이 아니라 칼에 당했지만, 현장에서 총기가 사용됐기 때문에 그 사건은 처음부터 심각하게 취급된다.

서해에 떠 있는 요트에서는 외국인이 여럿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거기서도 총기가 사용됐다.

게다가 그 사건들이 목동 공개홀 폭파 미수 사건과 연결된다는 것도 밝혀졌다.

합동수사본부는 바빠졌다. 수사력이 집중되면서 다양한 정보가 들어왔다.

닥터가 타고 있던 요트는 한국 배다. 주로 머무는 선착장도 한국에 있었다.

형사들이 그 요트가 정박했던 선착장의 CCTV를 전부 다 확인했다. 특히 누가 타고 내리는지를 집중해서 조사했다.

탑승객은 모두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모자를 써서 인상착의까지 확인하긴 어려웠다.

대신에 몇 명이 탔는지는 확실히 셌다.

"그 배에 탑승한 사람 중에 세 명이 사라졌습니다."

합수본부장이 물었다.

"셋이나?"

"예. 몇 번이나 교차 확인했습니다. 세 명이 모자랍니다."

"그중에 그 시한폭탄 기폭장치가 발견된 곳에서 죽은 놈도 있나?"

"CCTV의 화질이 안 좋아서 얼굴까지는 확인이 어렵습니다만, 복장은 일치합니다."

"역시 그놈은 그 배에서 나온 놈이야."

그것까지는 이미 예상했다. 요트에 접근했다가 떠난 낚싯배를 추적했더니 그 끝에 닥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채로 발견되지 않았다면 아직도 찾느라 바빴겠지."

"그건 그렇습니다. 낚싯배가 정박한 곳에서 차로 한 시간은 가야 하는 곳이었으니까요."

합수본부장이 물었다.

"그런데 아직 두 놈이 모자라잖아. 그놈들은 어디 있지?"

"찾는 중입니다."

***

연태준 상무는 어젯밤에 인천 요트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닥터가 탄 배는 다른 지역 선착장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쪽 CCTV는 경찰의 수사대상이 아니다.

그는 허리도 베이고 어깨에 칼도 맞았다. 어깨의 부상은 고현우가 던진 단검에 맞아 생긴 것이라 상처가 깊었다.

그는 그 상처를 압박붕대로 칭칭 감고 겉옷을 입어 핏자국을 숨겼다. 그 상태로 자신의 차를 타고 인천을 떠났다.

칼을 두 방이나 맞았으니 그걸 방치하면 죽을 수 있다. 치료를 받아야 한다.

연태준이 허름한 의원을 찾아갔다.

나이 많은 의사가 연태준의 상처를 꿰매주면서 말했다.

"업자 생활은 은퇴하고 양지에서 잘 사는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왔나 봐?"

"씨발.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이건 바람이라도 피다가 눈 돌아간 남편한테 찔렸나?"

"영감님. 옛날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더니 궁금한 게 많아지셨어."

의사가 킬킬댔다.

"나도 이쪽 일은 은퇴했거든. 요즘은 젊은 친구가 이 일을 한다더라고."

연태준이 물었다.

"젊은 친구?"

"누군지는 나도 몰라. 자네는 옛날 인연이라서 치료해주는 거야. 어차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까."

나이 많은 의사는 칼에 맞은 사람을 치료한 경험이 많았다. 그가 상처를 모두 꿰맨 후에 말했다.

"운이 좋았어. 조금만 더 깊었어도 제대로 된 수술실이 있는 병원에 가야 했을 텐데."

"씨발. 운이 좋으면 칼을 안 맞았지."

치료가 끝난 후에 의사가 물었다.

"치료비는 뭐로 낼 건가?"

"영감님. 비트코인도 받나?"

의사가 웃었다.

"흐흐흐. 요즘 그거 안 받으면 이 일을 어떻게 하라고."

"은퇴했다며?"

"자네처럼 옛날 인연이 가끔 찾아오거든. 용돈 벌이나 하는 거지."

"씨발. 용돈 더럽게 많이 받네."

***

차우진은 어젯밤에 닥터를 처리하고 아침에 집에 돌아왔다.

차유리가 투덜대면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젠장. 아침부터 이게 뭐야."

차우진이 물었다.

"일요일인데 어디 가게? 놀러 가?"

차유리가 사나워졌다.

"뒈진다?"

"일하러 가는구나. 이번엔 또 뭔데?"

"목동 공개홀 사건의 다른 범인이 나왔다."

"합수본에서 불러?"

"어. 다시 와서 도와달란다. 야. 일요일까지 나가서 일하면 난 언제 쉬냐."

차우진이 요트도 처리하고 닥터도 처리했더니 차유리가 또 일하러 간다.

차우진이 제안했다.

"밤에 야식 만들어갈게."

"매운 거로 만들어와라. 스트레스 팍팍 풀리게."

"오케이."

차유리가 짐을 챙기며 물었다.

"근데 넌 밤새 뭐하고 지금 돌아와?"

"어젯밤에 SL 제약 사장님이랑 배낚시 갔어."

차유리가 멈칫했다.

"어? 배낚시? 어디로?"

"서해?"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야. 너 몇 시까지 바다에 있었냐? 혹시 오늘 아침까지 있었던 거야? 너 잘못하면 피곤해질 수 있다?"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젯밤 8시쯤에 선착장으로 돌아왔지."

"8시? 뭐 그럼 상관없네. 근데 낚시는 어젯밤에 끝났는데 왜 아침에 들어와?"

"배에서 술 마셨으니까 운전하면 안 되잖아. 인천에서 여기까지 대리 부를 돈으로 근처에서 하룻밤 잤다."

차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새끼 수상한데? 여자냐?"

"진심으로 묻는 거냐?"

차유리가 피식 웃었다.

"하긴. 네 주제에 연애는 무슨."

"반사."

***

합동수사본부에 낮에 가서 야식을 줄 수는 없다. 낮에 굳이 간식을 가져다주는 것도 이상하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피곤하다."

어젯밤에 스킬을 많이 써서 체력이 많이 빠졌다. 닥터를 처리하고 빠져나올 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동하느라 스킬을 더 써야 했다.

게다가 잠도 못 잤다.

그 상태로 정예지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공식적으로는 어제 술 마시고 잔 것으로 되어 있어서 낮 약속을 취소할 수가 없었다.

차우진이 하품을 크게 했다.

"흐아암."

정예지가 물었다.

"우진 오빠. 요새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몸이 축나나 보다?"

"그래 보이냐?"

"요즘 살이 점점 빠지던데, 오늘은 더 빠졌잖아."

"살이 빠지면 큰일인데."

그러면 체형 변화를 이용한 트릭은 쓰기 어려워진다.

"그게 왜 큰일인데? 배 들어가서 보기 좋은데."

"더 많이 먹어서 인격을 회복해야겠다."

"미쳤냐고."

정예지가 시킨 음식의 절반 이상을 차우진이 먹어치웠다. 소모된 체력을 회복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

"넌 안 먹냐?"

"스케줄 들어온 거 있어서 양을 줄여야 하는데, 그렇다고 반 넘게 빼앗아 먹는 건 아니지 않아?"

"더 시킬까?"

"안돼! 멈춰!"

정예지가 추가 식사를 차단한 후에 말했다.

"근데 KYL 엔터 말이야. 내가 좀 알아봤거든?"

"거기랑 거리 두라니까."

"직접 캐본 건 아니고 눈치 못 채게 소문만 들은 거야. 근데 그 회사 쪼개지게 생겼더라?"

"왜?"

"연태준 상무가 사장을 쫓아내려고 하나 봐."

"사장이 그냥 쫓겨나진 않을 텐데?"

"당연히 반발하지. 그런데 연태준의 지분이 꽤 있어서 끝까지 가면 회사가 쪼개질 것 같대."

"양아치가 회사까지 삼키려고 했구나."

"연태준이 양아치야?"

"어. 아마 사장이 못 버티게 따로 수를 쓸 생각이겠지."

"어떻게?"

차우진은 연태준이 어떤 놈인지 알고 있다.

"납치 폭행?"

"에이. 설마 기획사 사장을 납치하려고."

"아니면 마약이라도 몰래 먹이고 신고하던가."

정예지가 걱정했다.

"그러면 KYL은 어떻게 되는 거야? 블루퍼핏이 거기 소속되어 있잖아."

"회사가 공중 분해되면 걔들은 계약 파기하고 옮기면 되지."

정예지가 눈을 껌뻑였다.

"응? 공중분해? 갑자기?"

"서로 싸우면서 상대의 비리를 터트리다 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어쨌든 도움이 많이 됐다."

"그래? 그럼 정보료로 저녁은 우진 오빠가…."

"난 갈 곳이 있다."

정예지가 항의했다.

"사람 불러내더니 점심만 먹고 땡이냐?"

"이번 일이 끝나면 시간이 좀 날 거야. 저녁은 그때 먹자."

"도대체 어디서 무슨 전기 공사를 하는데 일요일에도 일해?"

"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치는 거야."

"응?"

"그런 게 있다."

***

차우진은 오후에는 잠을 잔 후에, 저녁때 야식으로 먹을 요리를 잔뜩 만들었다. 그걸 가지고 합수본에 며칠 파견 간 차유리를 찾아갔다.

"야식 배달 왔다."

차유리는 모니터 속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야. 회의실에다 놔. 바쁘다."

"아주 그냥 내가 야식 자판기지?"

"시끄러."

합수본 형사팀장이 다가왔다.

"어이쿠. 차 형사 동생분이 이번에도 오셨군요. 뭐해? 다들 야식 먹고 하자."

다른 형사들도 다가왔다.

"이야아. 저번엔 진짜 맛있었습니다."

"어휴. 이번에도 맛있네요."

차우진은 야식을 쭉 돌리면서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다. 전투 센스가 적용될 때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작게 대화하는 것도 들린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대부분 차우진이 아는 이야기다. 현장에 있던 차우진이 아는 걸 형사들은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형사들이 야식을 먹으며 말했다.

"배에서 발견된 사망자 중 절반은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아시아계 청부 용병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누군지 확인이 어렵습니다."

"같은 용병 조직원이겠지."

그건 차우진도 예상했다.

'닥터가 세 명만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으니까, 다른 놈들은 오는 길에 섭외한 외부 용병이겠지.'

그건 특별한 정보는 아니다.

"그럼 시한폭탄 기폭장치가 있는 집에서 발견된 놈은?"

"별명은 닥터. 인터폴 적색수배 대상입니다."

"적색수배?"

"폭탄 테러 혐의가 있습니다."

"미친 새끼였구나."

닥터가 테러리스트라는 것도 예상했다. 멸망급 테러 빌런과 직접 연락하는 놈이 평범할 리는 없다.

"그럼 닥터를 죽인 건 누구야?"

"모르겠습니다. 현장에 단서가 없습니다."

"CCTV는?"

"그 지역은 외진 곳이라 CCTV가 없습니다."

"젠장. 닥터라는 놈이 일부러 거점을 그런 곳에 만든 거야."

차우진이 지금 당장 원하는 정보는 그것 하나뿐이다. 경찰이 차우진을 추적하지 못한다는 것만 알면 됐다. 다른 건 그 외에 어지간한 건 기다리면 뉴스에 나온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럼 전 먼저 가겠습니다. 빈 통은 누나한테 맡겨서 돌려보내 주십시오."

"어이쿠. 같이 좀 드시지."

"괜찮습니다."

차우진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언덕이는 당연히 잠수를 탔겠지만, 연태준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겠지. 언덕이가 자기를 죽을 자리로 보냈는데 그냥 넘어갈 리 없으니까."

***

서해 요트 사건이 뉴스에 나왔다. 그건 목격자가 여럿 있어서 숨길 수가 없었다.

경찰도 대략적인 정보는 공개했다.

기사가 쏟아졌다. 보통은 다른 기사를 다시 가져와 올리거나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를 올리는 것이었다.

강력사건 전문 기자 도인선의 기사는 좀 더 자세했다. 그 기사에 댓글이 붙었다.

- 요트에 발견된 시체들이 외국에서 수배된 범죄조직이라고?

- 닥터라는 놈의 집 금고에서 발견된 기폭장치가 목동 공개홀 사건 때와 같은 거랍니다.

- 그런 조직을 누가 전멸시킨 거야?

- 그걸 알면 경찰이 체포했겠죠.

- 이 정도면 목동 공개홀의 수호신인가 싶은데, 안 잡히면 좋겠다.

200. 수배

합동수사본부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빌런 킬러?"

윤 형사가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그 도시 전설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우리만 곤란해진다고 했을 텐데?"

"제가 아니라, 인터넷에 그런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음? 우리 쪽에서 샌 거야?"

"아닙니다. 이걸 보시죠."

윤 형사가 화면에 댓글을 띄웠다.

[그래서 그 외국 범죄조직을 누가 전멸시킨 거냐?]

[지하세계 소문인데, 혼자서 조직 몇 개를 전멸시킨 킬러가 있다더라. 난 그 킬러가 떴다고 본다.]

합수부장이 투덜댔다.

"환장하겠네. 빌런 킬러는 뭐 하나 몰라? 저런 소문 퍼트리는 놈 안 잡아가고."

"네?"

"농담이야. 농담."

"그리고 보셔야 할 게, 이런 댓글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목동 공개홀의 수호신인가 싶은데, 안 잡히면 좋겠다.]

합수부장이 불평했다.

"거봐. 내가 걱정한 게 저거야. 빌런 킬러 이야기가 괜히 수면 위로 올라오면 우리만 피곤해져."

***

차우진은 월요일 오전에 SL 제약으로 출근했다.

성혜리가 분석팀 사람들에게 토요일에 바다낚시 간 일을 자랑했다. 그녀의 말만 들으면 태평양 횡단 호화 유람선에서 산해진미라도 즐긴 것 같았다.

"그 요리를 다 차 이사님이 만들어줬어요."

"맛있었겠어요."

"진짜 맛있었죠."

차우진이 끼어들어 물었다.

"우리가 부두에서 헤어진 게 8시쯤이었는데, 집에는 언제 도착했습니까?"

"지원이랑 9시쯤에 집에 가서 놀았어요. 차 이사님이랑 2차로 한 잔 더 해도 좋았을 텐데."

"토요일에는 이미 워낙 많이들 마셔서."

성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 다 많이 마시긴 했죠. 아빠가 제일 많이 마시고 그다음이 차 이사님이었나?"

"성 대리는 왜 빠집니까? 나중에는 글라스에 술을 붓던데."

"어머. 잘못 보신 거예요."

***

차우진은 오후에는 LPP 엔터를 방문했다.

걸그룹 루나페어리가 회사에 있었다. 그녀들은 차우진을 보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따라 기운이 넘치네?"

김세린이 신나서 활짝 웃으며 설명했다.

"음원 차트에 우리 노래가 있어요! 그것도 첫 페이지에요!"

"좋겠네."

"히히. 진짜 좋아요."

차우진은 전현석 사장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원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차 이사님. KYL 엔터요? 거긴 마음에 안 드신다고…."

"그렇죠. 그런데 거기 소속된 블루퍼핏이 생각나서요."

"혹시 곡을 주시려고…."

"블루퍼핏이 사고로 죽으면 그 회사에서는 누가 제일 타격을 받을지가 궁금한 겁니다."

"예? 갑자기 사고라니요?"

"걔들이 저번에 무전기 폭탄으로 죽을 뻔했잖습니까?"

"아. 그래서 하시는 이야기구나."

전현석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아무래도 사장 아니겠습니까?"

"역시 그렇지요?"

"그러고 보니 걔들한테 보험을 많이 들어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보험이요?"

"무슨 사고가 나면 회사가 보상을 받는 건데, 블루퍼핏은 네 명이니까 보험금이 꽤 크다더군요."

정현석이 그 말을 하다가 웃었다.

"하하하. 물론 범인이 그 회사의 로드 매니저니까, 설사 그 무전기가 폭발했다고 해도 보험금이 나올 리는 없지만요."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멸망한 세계에서 범인이 제대로 잡혔으면 반년 뒤에 공개홀이 무너졌을 리 없다.

'로드 매니저를 처리하면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보험금이 나오겠지.'

그 돈을 누가 먹을지도 짐작이 갔다.

'블루퍼핏이 그때 죽었으면 연태준이 사장에게 책임지라고 압박해 사임시키고, 회사를 장악하고, 그 후에 들어온 보험금도 먹었겠지.'

전현석이 제안했다.

"기왕 오셨는데 저녁이라도 드시죠.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그럴까요?"

***

차우진은 일부러 저녁을 먹은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올 때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CCTV에 모습이 확실히 찍히게 했다.

오늘 하루 알리바이는 충분히 만들었다. 회사를 두 군데나 들르고, 저녁도 먹고, 집에 돌아오는 모습도 확실히 남겼다.

차유리는 합수본에 파견 가서 일하는 중이다. 적어도 오늘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차우진이 체형을 바꾸는 보정 속옷을 입고 상태를 확인했다.

"배가 자꾸 들어가서, 이제 이걸로는 슬슬 한계가 보인단 말이야."

차우진이 베란다 문을 살짝 열었다. 맞은편 아파트 옥상이 보였다.

차우진이 기운을 모았다가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베란다에서 사라졌다가, 맞은편 동 옥상에 나타났다.

이런 방식으로 이동하면 집에 들어가는 모습만 CCTV에 남고 나가는 모습은 찍히지 않는다.

"이제 태준이 찾으러 가자."

***

연태준은 시골집에 숨어있었다.

이 집은 다른 집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완전히 외진 곳은 아니지만 여기서 폭탄 제조를 해도 들키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연태준은 폭탄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 이 집도 안전가옥을 마련해달라는 코인 브로커 이덕수의 요구를 받고 노숙자 명의로 빌렸다.

그런데 그는 이 집의 주소를 서해에서 접선한 놈들에게 넘기진 않았다. 원래는 일이 마무리된 후에 집을 넘길 생각이었는데, 넘겨주기 전에 고현우의 칼을 맞았다.

그는 지난 이틀간 여기 숨어있었다.

연태준이 이 집을 빌릴 때 노숙자의 명의로 개통한 휴대폰을 사용해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들을 검색했다. 옆에는 술병이 굴러다녔다.

"서해에 떠 있던 요트에서 국제 범죄조직으로 보이는 놈들이 죽은 채로 발견됐다라…."

기사에는 요트 사진도 있었다. 직접 찍은 사진이 아니라, 서해 사건의 요트와 같은 타입의 배 사진이었다.

연태준은 그 요트를 본 적은 없다.

그가 사진을 조금 더 뒤졌다. 거의 쓰이지 않는 간이 선착장에서 발견됐다는 낚싯배 사진이 나왔다.

그는 그 낚싯배를 토요일 밤에 똑똑히 보았다.

"그 새끼들이 타고 온 그 배가 맞아."

그래서 이덕수와 연결된 용병 조직이 전멸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누가 죽인 거지?"

연태준은 이덕수는 알아도 다른 놈들은 잘 모른다.

그는 죽은 놈 중에 이덕수도 있는지 찾아보았다. 기사에 그런 내용은 없었다.

"누가 죽였든 잘 죽였다. 개새끼들. 잘 죽었다!"

그가 욕을 하며 기사를 계속 검색했다. 이덕수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사건에 코인 브로커가 관여됐다는 기사도 없었다.

자신의 이름은 이미 검색해보았다. 연태준의 이름도 나오지 않았다. 연예 기획사의 임원이 개입했다는 말도 없었다.

"만약 이 새끼들이 다른 조직과 싸우다가 이덕수만 빼고 다 죽어버린 거라면."

연태준이 서늘하게 웃었다.

"크흐흐흐. 덕수 그 새끼만 내 손으로 죽여버리면, 이제 아무도 나에 대해 모르겠구나. 그럼 내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러면 개이득이지!"

이덕수를 제거하려면 먼저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연태준이 숨어있던 시골집에서 나와 밖에 세워놓은 차로 걸어갔다. 그 차는 번호판만 바꿔 붙이고 그냥 타고 왔다. 다른 차로 갈아탈 여유가 없어서였다.

그가 차 트렁크를 열었다. 팔을 위로 움직였더니 칼을 맞은 어깨가 아팠다.

"씨발. 어깨가 이 꼬라지니까 덕수 그 새끼와 정면에서 싸우면 내가 지겠는데? 좀 회복하고 나서 뒤통수를 쳐야겠다."

그가 투덜대며 트렁크에 있던 짐을 내렸다. 그런 후에 트렁크 바닥을 들었다.

그 밑에서 스마트폰이 하나 나왔다. 지금까지 쓰던 것과는 다른 스마트폰이었다.

"나에 관한 기사는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이걸 써도 되겠지."

그 스마트폰도 대포폰이다.

다만 이건 예전에 몇 번 사용한 적이 있어서 지금까지는 쓰지 않았다. 다른 대포폰이 있는데 굳이 이걸 쓸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별장으로 돌아가 스마트폰을 켰다. 그런 후에 위치추적기 어플을 실행했다.

화면에 지도가 떴다. 지도 위에 빨간 점이 나타났다. 위치는 서울시 관악구였다.

"흐흐흐. 덕수 새끼. 내가 준 물건을 아직도 가지고 다니는구나. 이것만 있으면 넌 내 손바닥 위에 있는 거다. 넌 내가 꼭 죽인다."

연태준이 스마트폰을 껐다. 그런 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찬장…. 아니야. 더 안전한 곳이 필요해."

그가 스마트폰을 비닐 봉투에 담았다. 그 비닐을 꽉 묶고 다시 비닐로 감쌌다. 그렇게 몇 번을 밀봉한 후에 밖으로 나와 땅을 조금 팠다.

한쪽 어깨는 칼을 맞아 한쪽 팔만으로 땅을 파야 했다. 깊게 파기는 힘들었다.

연태준이 땅을 조금만 판 후에 구덩이에 스마트폰을 넣었다. 그러고 나서 그 위에 흙을 덮었다.

힘을 썼더니 어깨가 아팠다. 연태준이 집안으로 돌아가 약을 꺼내 삼켰다.

"어깨만 나으면 다 죽여버려야지."

***

차우진이 연태준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연 상무를 살려서 보낸 보람이 있어. 넌 언덕이가 어디 있는지 알 거 같더라."

연태준이 여기 숨어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연태준은 토요일에 바다에 있을 때 이곳의 주소가 적힌 쪽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차우진은 고현우가 낚싯배를 타고 도망친 후에 연태준의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이 주소를 확인했다. 그런 후에 그 쪽지를 다시 기절한 연태준의 주머니에 넣어놓았다.

"언덕이를 죽이겠다라…."

연태준이 이덕수를 죽이게 놔둘 수는 없다.

"그놈이 미끼인데 죽으면 곤란하지."

이덕수를 미끼로 써먹으려면 먼저 연태준을 처리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처리되려면, 연 상무의 요트가 발견되어야겠네."

***

인천 경찰에 신고가 들어왔다.

"핏자국이요?"

- 여기 인천 요트 선착장인데요. 누가 이상한 얼룩을 봤다고 해서 보니까, 배에 핏자국이 잔뜩 있습니다.

"생선 잡을 때 나온 피 아닙니까?"

- 핏자국이 좀 다른데….

"예. 저희가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정확한 위치를 말씀해 주시죠."

근처 지구대의 경찰 두 명이 요트 선착장으로 향했다.

최 순경이 물었다.

"물개 같은 거 몰래 잡은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들은 요트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신고한 사람은 이 선착장을 관리하는 직원이었다.

"여기입니다."

박 경장이 요트를 확인했다.

"어?"

핏자국이 있는 곳은 방수포로 덮여 있었다. 그런데 방수포가 조금 밀려난 곳에 핏자국이 보였다.

"이건 피가 튄 건데…."

박 경장이 방수포를 조금 밀어보았다.

"핏자국이 꽤 많은데? 설마 이거 사람 피인가?"

최 순경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 경장님. 토요일에 서해에서 요트 몰살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그 요트는 이 선착장을 이용한 게 아니잖아."

"그래도 혹시 관계가…."

"그치? 일단 지원 요청해."

현장 조사 결과는 합수본으로 넘어갔다.

합동수사본부장이 물었다.

"사람 피가 확실해?"

윤 형사가 대답했다.

"예. 확인했습니다."

"신고한 사람은?"

"그 선착장의 관리 직원입니다."

"어떻게 알았대?"

"이상한 얼룩을 봤다는 민원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확인했더니…."

"잠깐. 그 민원은 누가 넣었어?"

"그건 확인이 안 됩니다. 누가 지나가던 관리실 직원에게 말했다는데, 직원이 신분증을 보자고 할 수는 없는 거라서요."

"핏자국이 며칠은 지난 거라니까 그 사람이 저지른 건 아닐 테고…."

합수부장이 물었다.

"그럼 그 요트는 누구 거야?"

윤 형사가 화면에 목록을 띄웠다.

"연태준. KYL 엔터의 상무입니다. 그 회사의 2대 주주이기도 합니다."

"그 정도면 요트 살 돈은 충분히 있겠군. 지금 어디 있어?"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찾는 중이지?"

"예. 휴대폰 위치추적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탐문도 하고 있습니다."

합수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왜 우리한테 넘어온 거야? 어느 부분이 목동 공개홀 사건하고 연관이 있냐?"

"토요일 밤에 서해에서 발견된 요트 말입니다."

"그래. 그건 공개홀과 관계가 있지. 거기서 빠져나간 놈의 집에서 기폭장치가 네 개나 발견됐으니까. 그럼 이것도 요트 사건이니까 우리한테 넘어온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배는 다릅니다만, 이 시기에 혈흔이 나왔으니까요."

보고하던 윤 형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윤 형사가 발신자를 확인했다. 어지간한 전화는 무시하려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어? 부장님. 국과수의 연락입니다. 국과수 쪽에 긴급으로 혈흔 분석을 부탁했는데…."

"받아봐."

윤 형사가 잠시 통화했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확실합니까? 알겠습니다."

윤 형사가 통화를 마쳤다. 합수부장이 물었다.

"새로운 단서라도 나왔어?"

"연태준의 요트에서 발견된 혈흔은 네 종류랍니다. 그러니까 네 사람의 것이랍니다."

"어떤 놈들이 그 배에서 한바탕 했구나."

"그런데 그중 하나가 서해 요트에서 발견된 놈 중 하나의 피와 일치합니다."

합수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확실해?"

"정확한 검사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담당자가 볼 때는 그럴 확률이 높답니다."

"오케이! 드디어 걸려들었구나! 연태준 당장 수배 때려! 잡아서 내 앞으로 끌고 와!"

201. 추적

연태준은 시골 독채에 숨어있었다. 주변에 다른 집이 있긴 하지만 거리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차우진이 한밤중에 그곳을 찾아가 집 앞 땅을 확인했다.

연태준이 스마트폰을 묻어둔 곳을 찾는 건 쉬웠다. 위치는 알고 있고, 땅을 팠던 흔적도 아직 남아있었다.

차우진이 그 땅을 천천히 팠다.

"집안에 숨겨뒀어도 곯아떨어져 있으니 큰 상관은 없겠다만, 집 밖이니까 더 쉽네."

연태준은 항생제와 소염진통제을 너무 많이 먹어서, 약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연태준은 살려서 경찰에 넘기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경찰이 요트에서 핏자국을 찾았으면 여기도 결국 찾아내겠지."

경찰이 연태준을 체포하면 그냥 떠날 리가 없다. 연루된 사건이 워낙 커서, 당연히 이 주변을 철저히 수색할 게 뻔하다.

그때 이 스마트폰이 발견되면 곤란하다. 이건 코인 브로커 이덕수를 추적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다.

"이건 경찰에 넘어가면 안 되지."

코인 브로커 이덕수는 아직 잡히면 안 된다. 지금은 연태준만 먼저 처리되어야 한다.

차우진이 스마트폰을 빼내고 구덩이를 도로 잘 덮었다. 그런 후에 그 집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

합수본에서 윤 형사가 수사 상황을 보고했다.

"연태준의 요트는 CCTV에 찍히지 않는 곳에 정박해 있습니다."

합수부장이 말했다.

"아주 계획적이야. 그래서 연태준을 못 찾는다는 건 아니겠지?"

"대신에 연태준이 선착장에서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모습은 찍혔습니다."

"영상 있지?"

"예."

윤 형사가 화면에 CCTV 영상을 띄웠다.

합수부장이 인상을 썼다.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조금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요트에서 발견된 혈흔 중에 연태준의 것도 있나?"

"연태준의 유전자 정보가 없어서 그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서해 요트에서 죽은 고현우의 유전자 경보는 경찰이 확보했다. 그래서 이 요트의 혈흔과 비교할 수 있었다.

합수부장이 영상을 보며 말했다.

"저 새끼 저거 칼 맞았다. 내가 옛날에 현장에서 저런 거 몇 번 봤어."

"연태준은 저 상태로 주차장으로 가서."

윤 형사가 주차장 CCTV 영상을 재생했다.

"본인의 차를 타고 떠났습니다."

"차량 추적은?"

"도로 CCTV로 추적했는데, 경기도를 벗어나자마자 사라졌습니다."

합수부장이 인상을 썼다.

"놓쳤다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인근 도로를 지나간 번호판이 다른 동일 모델 차량을 모두 조사해서, 다시 찾아냈습니다."

윤 형사가 확대 사진을 띄웠다.

"차량 번호와 차 모델이 맞지 않습니다. 번호판을 바꿨습니다."

"아주 계획적이야."

"이 차량을 계속 추적했는데, 청주 인근에서 다시 사라졌습니다. CCTV가 없는 길을 이용해 속리산 방면으로 간 것 같습니다."

합수부장이 지시했다.

"저 차량 찾아. 멀리 갔으면 다시 찍혔겠지. 찍힌 게 없으면 저 지역을 샅샅이 뒤져."

***

차우진은 집으로 돌아왔다.

"바쁘다."

그가 일단 씻고 나서 제육볶음을 준비했다.

"체력을 너무 썼어. 고기랑 밥을 먹으면서 좀 쉬…."

현관문이 벌컥 열리면서 차유리가 들어왔다.

"아오! 젠자앙!"

"왜 들어오자마자 화를 내는데? 합수본 파견은 끝날 때 되지 않았어?"

"야. 옷 가지러 온 거야. 너 빨리 밥이나…. 이미 하고 있구나. 그거 내놔!"

"시간은 얼마나 있는데?"

"한 시간."

"일단 씻어라. 냄새난다."

차유리가 씻는 동안 차우진은 음식을 마저 준비했다.

차유리는 식탁에 앉자마자 밥에 제육볶음을 수북하게 얹어 먹었다.

"젠장. 맛은 있네."

"좋은 고기로 만들었거든."

그녀가 볼이 불룩해질 정도로 밥을 입에 밀어 넣으며 불평했다.

"야. 너 연태준 상무라고 알아?"

"밥알 튄다."

"몰라?"

"KYL 엔터?"

"너도 엔터 회사 이사니까 역시 아는구나."

"전에 미팅 한 번 했거든. 왜? 연 상무가 사고라도 쳤어?"

차유리가 숟가락을 밥그릇에 퍽퍽 꽂으며 말했다.

"쳤지. 그 새끼 때문에 내가 파견 끝나고 집에 오다가 도로 불려가잖아."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경찰이 연태준의 요트에서 증거를 확보했구나.'

차유리가 인상을 썼다.

"이 새끼. 왜 웃지? 수상하게?"

"고생하는 건 내가 아니니까?"

"저 소파 네가 독점하려고 그러는 거구나? 나쁜 새끼."

"밥을 해준 사람한테 그렇게 욕하는 거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들 시간 있나? 빨리 먹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차유리가 얼른 밥을 입에 계속 구겨 넣었다.

"화가 나는데, 진짜 맛은 있네."

그녀가 밥을 먹다가 물었다.

"야. 너 공사하느라 지방 출장 많이 다녔지?"

"알잖아. 전국을 돌아다닌 거."

"청주 근처에서 속리산 쪽으로 연태준이 튀었다 치고, 그럼 어디에 숨었는지 짐작 가는 데 있냐?"

"일단 속리산 깊은 곳은 당연히 아니겠지."

"왜?"

"돈이 많은 놈이니까 미리 마련해둔 거점쯤은 있을 거야. 너무 허름하진 않지만, 너무 튀지도 않고, 적당한 거리감도 있는 별장 느낌의 단독주택 같은 거. 튄다면 그 별장으로 튀었겠지."

"오케이. 별장. 그럴듯해."

차우진이 스마트폰에 지도를 띄운 후에 손가락으로 몇 군데를 짚었다.

"전에 지나가면서 보니까 이런 곳에 독채가 여럿 있더라. 서울 사람이 별장으로 써도 되겠더라고."

"설마 거기 있겠냐?"

"그리고 이쪽으로 쭉 가면 맛집이 있거든? 밥은 거기서 먹어."

"야. 방금 골라준 지역들 나한테 보내라. 나 거기 가서 수색해야 하니까, 식당 가는 김에 둘러봐야겠다."

***

차유리는 새벽에 차를 몰고 청주 인근으로 내려갔다. 다른 형사와 함께였다.

그들은 아침부터 합수부에서 골라준 구역을 조사하러 다녔다. 그 지역 경찰은 다른 곳을 조사했다.

차유리는 점심때가 다가오자 합수부에서 할당해준 구역을 벗어났다. 동료 형사가 물었다.

"차 형사. 이 길은 아니잖아."

"선배. 내 동생이 전기 공사 때문에 지방 출장을 많이 다녔는데, 이쪽으로 쭉 가면 맛집이 있대. 우리 고생하는데 밥이라도 맛있는 거 먹어야지."

"그거 좋은 생각이다."

차유리가 차를 운전했다. 그러면서 혼자 떨어져 있는 주택을 몇 개 지나쳤다.

동료 형사는 조수석에서 차유리가 말한 식당을 검색했다.

"차 형사. 여기 맛집 맞아? 평이 애매한데…."

"선배. 블로그 그만 보고 저기 주차된 차 좀 봐봐. 연태준의 차랑 같은 모델이다."

"그러네. 저것도 검은색 삼각별이네."

그들은 이미 비슷한 모델의 검은색 색의 차를 여러 대 확인했다.

지금까지 본 건 다 허탕이었다. 그중에는 똑같은 모델인데 번호판만 다른 차도 있었다.

연태준이 번호판을 또 바꿨을 수 있어서, 그 차는 사진만 찍어서 전송했다. 그러면 합수본과 지역 경찰에서 확인하기로 했다.

동료 형사가 말했다.

"속도 좀 늦춰. 벌써 지나갔잖아. 번호판 못 봤는데."

"내가 봤어."

"응? 우린 순식간에 지나갔는데?"

"우리 집안 사람들이 원래 동체 시력이 좋아."

"그래서 어때? 비슷해?"

차유리가 씩 웃었다.

"다른 건 가려져 있었는데, 노출된 뒷자리 세 개가 885야."

"어? 뭐?"

"찾았다고."

차유리가 합수본에 전화를 걸었다.

"차유리입니다. 연태준의 차를 찾았습니다."

***

연태준은 약기운과 술기운에 취해서 자다가 오후에 일어났다. 그가 어깨를 만져보았다. 아직도 통증이 심했다.

"젠장. 영감이 제대로 치료한 거 맞아? 왜 낫지를 않아?"

그의 옆에는 술병이 굴러다녔다. 술을 마시면 상처 회복이 느려진다.

그가 허리도 만졌다. 그쪽도 칼에 베였는데 거기는 상처가 얕아서 그나마 상태가 나았다.

그가 대포폰을 켜 서해 요트에 관한 새로운 기사가 떴는지 확인했다.

"내 이름도 없고, 이덕수도 없어. 일이 잘 풀리고 있어."

집안에만 있었더니 답답했다.

연태준이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씨발. 며칠이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하나."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연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배달할 때 흔히 쓰는 소형 오토바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연태준이 조금 긴장했다.

'저게 이리로 오나? 왜?'

차유리가 집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헬멧을 벗었다.

"어머. 집에 누가 계셨네요? 잘됐다."

연태준이 얼굴을 구겼다.

"잘 되다니? 당신 누구야?"

"면사무소에서 왔어요. 오상훈 씨 맞으시죠? 전입신고를 안 하셨더라고요."

연태준은 노숙자의 명의로 이 집을 빌렸다. 그 노숙자의 이름이 오상훈이다.

연태준이 둘러댔다.

"내가 오상훈이데, 별장으로 쓰는 거라 전입신고는 안 할 겁니다."

차유리가 오토바이에서 내려 연태준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어머. 부자신가 보다. 별장도 있으시고. 그래도 법이 그렇지가 않아요. 누가 사시는지 저희가 알아야 하거든요."

거리가 가까워졌다. 연태준이 짜증을 냈다.

"법 어디에 그런 규정이 있는데?"

"아. 없나? 이런 쪽은 잘 몰라서. 근데 모르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연태준의 표정이 싹 변했다. 그는 차유리가 면사무소 직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너 누구야? 누가 보냈어?"

"어머. 짐작 가는 데가 있으신가 보다?"

"덕수냐!"

"맞아. 덕수가 보냈어. 너한테 할 말이…."

연태준은 한쪽 어깨는 칼을 맞았다. 대신에 다른 쪽 팔은 멀쩡했다.

연태준이 재빨리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냈다.

"너 내가 누군지…."

잭나이프의 칼날을 뽑기도 전에 차유리의 주먹이 연태준의 턱을 돌렸다.

"컥!"

비틀거리는 연태준의 몸통에 차유리의 발차기가 들어갔다. 순식간에 세 발이 몸통에 꽂혔다.

"케에엑!"

연태준이 옆으로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근처에 잠복한 채로 상황을 보던 형사들이 화들짝 놀라 뛰어갔다.

"차 형사! 멈춰!"

"정보를 캐내다가 제압만 하라고 했잖아! 제압만!"

형사들이 도착했다. 연태준은 바닥에 쓰러져서 꿈틀대기만 했다.

차유리가 변명했다.

"어머. 윤 선배. 용의자가 칼 꺼내는 거 보니까 무서워서 그랬어요."

"네가 무서운 게 있을 리가…."

형사팀장도 뛰어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그런 거로 하자. 안 그러면 문제 생겨. 저놈이 돈이 많다잖아."

"아, 그렇죠. 이번에 차 형사 또 징계 먹으면 또 죽 쒀서 남 주는 거니까."

차유리가 큰소리쳤다.

"내 동생도 돈 많아요. 누나가 잘리게 생기면 걔가 좋은 변호사 써주겠지."

"그거 믿고 대놓고 깠냐?"

"어머. 칼이 무서워서 그랬다니까요?"

"그래. 꼭 그런 거로 해라. 방금처럼 말실수하지 말고."

"말실수는 윤 선배가 하던데."

형사팀장이 말했다.

"윤 형사 너도 입 조심해."

"아니, 팀장님은 왜 나만…."

"네가 잡았냐?"

"아뇨."

"그러니까 넌 조용히 해."

***

차우진이 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가 차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집에 오나?"

- 네가 어쩐 일로 나한테 집에 오는지를 다 묻냐?

"저녁 어떻게 할지 생각 중이라서."

차유리의 목소리는 신나 있었다.

- 야. 너 알아서 먹어라. 나 오늘 그 새끼 잡았다.

"열심히 찾으러 다녀야 한다더니?"

- 네가 어제 말한 별장들이 생각나서 그쪽을 쭉 훑다가, 내 이 매 같은 눈으로 가짜 차량 번호판을 딱 찾아냈다는 거 아니냐.

"누나가 눈빛이 사납긴 하지."

- 닥쳐. 난 내가 잡은 놈 취조해야 하니까 넌 밥 알아서 먹고 전화하지 마라.

"알았다고."

차우진이 전화를 끊고 피식 웃었다.

"직접 잡았으니까 우리 누나 실적 제대로 챙겼겠네."

연태준은 어차피 잡혀야 한다. 기왕이면 가족이 실적을 챙기는 게 났다.

"이제 연태준은 경찰 손에 있으니까."

차우진이 연태준의 거점에서 가져온 스마트폰을 보았다. 그 스마트폰에 이덕수를 추적하는 어플이 설치되어 있다. 역추적 위험이 있어서 전원은 꺼놓은 상태였다.

"난 언덕이한테 가야겠네?"

***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다섯 명이 입국했다. 그들은 관광을 핑계로 입국했다.

다섯 명은 공항에서 렌트카를 빌렸다. 그들이 그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그들의 대화에 사용하는 언어는 스페인어였다.

리더인 마누엘이 물었다.

"이덕수의 위치는?"

"위치추적기가 서울 관악구에 있습니다."

위치추적기는 이덕수의 물건 속에 숨겨져 있었다.

"이동 시기와 경로는?"

"닥터가 이덕수의 배신을 보고했을 때는 강남구에 있었지만, 이튿날 관악구로 이동했습니다. 그 후에는 해당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이 틀어졌다는 걸 깨닫자마자 이동했으니까, 거기에 은신처가 있겠지."

"바로 처리합니까?"

"은신처 주변 정찰부터. 매복이 있으면 그것부터 제거하고."

마누엘의 눈이 번뜩였다.

"없으면 바로 이덕수를 친다."

202. 마누엘

KYL 엔터 연태준 상무가 체포됐다.

차유리만 먼저 투입된 건 연태준을 쉽게 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쉽게 잡으려면 단체로 덮치는 게 제일 간단하다.

차유리가 면사무소 직원으로 위장해 접근한 건, 다른 놈들이 더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성과는 있었다. 차유리는 '덕수'라는 이름을 알아냈다.

연태준은 합수부에 끌려와서도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내가 누군지 알아?"

차유리가 대답했다.

"네. 연태준 씨."

"씨라니! 너 몇 살이야!"

"확 씨."

"어?"

차유리가 인상 썼던 얼굴을 펴며 웃었다.

"왜 그러시는지? 잘못 들으셨나 봅니다?"

연태준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나 KYL 엔터 연태준 상무야!"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기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내가 전화만 돌리면 방송국 피디들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요. 전화 쭉 돌리시죠."

차유리가 옆을 보며 말했다.

"윤 선배. 연태준 씨 휴대폰 드려."

"진짜?"

"기자든 피디든, 통화한 사람 내가 찾아가서 확 씨. 어쩌면 그 기자나 피디가 폭탄 공급책일 수도 있잖아."

연태준은 당황했다.

"어? 어?"

"연태준 씨. 지금 무슨 사건으로 조사받는지 모르나 봅니다?"

"모,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별장에서 쉬다가 끌려왔어!"

"그 집은 연태준 씨 명의로 빌린 게 아니던데?"

"아니면 뭐! 벌금 얼마야! 돈 내면 되잖아!"

차유리가 서류를 몇 장 내밀었다.

그건 목동 공개홀 폭파 사건, 강원도에서 범인들이 몰살한 사건, 서해 요트에서 몰살한 사건에 관한 서류들이다.

그렇다고 실제 수사 자료를 보여준 건 아니다. 그 정보를 보여줄 이유는 없다.

차유리가 꺼낸 건 일부러 큰 글씨로 몇 줄씩 눈에 잘 보이게 작성하고, 내용은 적당히 채워 넣은 위장 서류였다.

그녀가 잠깐 제목만 보여준 서류들을 도로 챙겨 넣었다.

"이 사건들, 셋 다 익숙하시죠?"

연태준은 기가 죽었다.

"아, 아니, 내가 피해자인데…. 나 칼 맞은 거 봐요. 난 습격당한 겁니다. 습격."

"왜 습격당했습니까?"

"그, 그건…."

"아이돌 무전기 폭탄 살해 미수 사건 때부터 우리 쪽 조사를 받으셨던데."

"그건 무혐의로…."

"무혐의라니요? 계속 수사 중입니다만?"

경찰이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건 연태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몸조심했었다.

차유리가 다른 서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해상 레이더 기록을 보면 연태준 씨의 요트와 접촉한 낚싯배가 서해에 떠 있던 요트로 직행했더군요."

"그, 그건…."

"연태준 씨를 모르면 이럴 수 없죠."

"그놈들이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나는 모르…."

"연태준 씨가 시킨 겁니까? 그 요트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라고?"

"아, 아닙니다!"

"정황만 보면 그런데요?"

연태준은 다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경찰은 고현우의 낚싯배가 연태준과 닥터의 요트 사이를 오갔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자기가 죄를 다 뒤집어쓸 수도 있다.

그가 머리를 굴렸다.

'최소한만 인정하고 비싼 변호사를 쓰면 집행유예로 빠질 수 있을까?'

돈을 많이 쓰면 가능할 것 같았다. 거기에 걸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러려면 대신 뒤집어쓸 놈이 필요하다.

차유리가 연태준의 몸에 감긴 붕대를 힐끗 보며 말했다.

"덕수가 누구입니까? 이번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까?"

연태준이 결정을 내렸다.

'그놈을 팔아먹자.'

"그거 다 이덕수가 저지른 짓입니다. 나는 아닙니다."

"같이 한 거 아닙니까?"

"나는 이덕수에게 일방적으로 협박당했단 말입니다!"

연태준은 모든 일은 이덕수가 주도한 것처럼 말했다. 자신은 잘못 엮여 심부름만 한 거지 무슨 일인지도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그놈이 무전기에 폭탄을 심었다는 걸 알고, 이건 범죄구나 싶어서 손 떼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놈이 나를 죽이려고 했단 말입니다!"

범죄구나 싶어서 손을 떼려던 게 아니다. 무전기 폭탄 사건 이후로는 경찰의 감시가 붙었기 때문에 몸조심을 했던 것뿐이다.

지금 여기에 연태준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덕수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건 알아냈다.

차유리가 물었다.

"이덕수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연태준은 멈칫했다.

'가만? 경찰이 내 위치추적용 스마트폰을 못 찾은 건가? 이러면…. 덕수가 안 잡히는 게 나한테는 더 좋겠는데? 그래야 내가 시나리오를 꾸미기 좋잖아.'

그가 눈알을 굴리다가 말을 바꾸었다.

"나도 모릅니다."

"이봐요. 연태준 씨."

협조하는 척하려면 정보를 주기는 줘야 한다.

연태준이 위치추적 휴대폰을 켰을 때 이덕수의 위치는 관악구였다.

"아마 압구정에 있을 겁니다."

***

이덕수는 관악구에 있는 단독주택에 숨어있었다.

아파트가 아니라 단독주택에 있는 건 CCTV도 싫고 탈출로가 없는 것도 불안해서였다. 아파트는 출입할 때 CCTV를 피하기 어렵다. 적이 현관을 막으면 도망칠 방법도 없다.

그 단독주택은 차명으로 빌린 곳이다.

"뉴스에 내 이름은 안 나오는데…."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연태준도 안 나오잖아. 그럼 그 새끼도 살아있다는 건데…."

그는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연태준 그 새끼가 청부업자들을 동원해서 우리 쪽 용병부대를 전멸시킨 건가?"

이덕수는 연태준을 속여서 서해로 내보냈다. 그런데 서해에서 연태준을 죽였어야 할 용병들이 전멸했다.

"그 새끼 함정에 내가 거구로 빠진 건가?"

그가 관악구로 도망친 건 경찰 때문만은 아니다. 연태준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덕수가 권총을 확인했다. 그건 그의 배후가 구해준 권총이다. 인도자와 닥터도 밀수한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이덕수가 권총을 쥐며 침을 꼴깍 삼켰다.

"씨발. 연태준이 그렇게 무서운 새끼였다니."

***

합수부장이 말했다.

"이덕수라는 놈이 압구정에 있어?"

차유리가 대답했다.

"연태준은 그렇다고 주장했습니다."

"압구정에 있다 치고, 거기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그 많은 건물과 주택을 다 수색할 수는 없어."

형사팀장도 같이 고민했다.

"수색한다고 해서 찾는다는 보장도 없죠. 이덕수라는 이름이 본명인지도 모르는데."

"압구정에 사는 이덕수는 찾아봤어?"

"주민등록상으로는 없습니다."

"끄응. 그럼 어쩐다. 공개수사는 부담스러운데."

차유리가 손을 들었다.

"이덕수가 연태준이랑 만나긴 했을 테니까, 그쪽으로 좀 알아볼까요?"

합수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태준이 만난 사람들을 추적해서 그중에 이덕수가 있나 알아본다? 그래. 일단 그렇게라도 해야지."

"그럼 지금 전화하겠습니다."

합수부장이 물었다.

"응? 전화라니? 누구에게?"

차유리가 차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 바빠.

"이거 스피커폰이다. 여기 우리 회의실이야."

- 안녕하세요. 누나 동생입니다.

"너 연태준 안다고 했지."

-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 회사 일 때문에 좀 알아본 건 있지만.

"연태준이랑 압구정이랑 연결되는 거 있냐? 우리가 누굴 찾아야 하는데, 단서가 압구정에 있다는 것뿐이네?"

차우진이 슬쩍 웃었다.

- 흐흐. 그러니까 진짜 형사 같다?

"나 진짜 형사다? 근데 너 왜 웃냐?"

- 연태준이 압구정 룸살롱을 그렇게 좋아한다더라.

"룸살롱? 거기서 혼자 술 마시진 않았을 테니까 사람도 만났겠네. 거기 이름은?"

"압구정 아르카나."

"오케이."

차유리가 용건만 듣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난 후에 합수부장이 물었다.

"차 형사 동생이 누군데 그런 걸 알아?"

"배 나온 바보인데요."

팀장이 대신 대답했다.

"LPP 엔터라는 연예 기획사의 이사입니다. 연태준은 KYL 엔터의 상무니까, 업계에 도는 이야기를 좀 들었나 봅니다."

"그래? 차 형사 동생은 문화예술계에서 일하는구나. 그런데 차 형사는 왜…."

"네? 제가 왜요?"

합수부장이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나도 차 형사 스타일은 들은 게 있어서."

"네?"

"실적만 보면 벌써 승진했어야 하지만, 체포 과정에서 범인들이 많이 다쳐서 실적을 다 까먹었다며?"

"선빵은 그 새끼들이 쳤는데요?"

"어…. 역시 차 형사는 들은 대로네."

***

마누엘은 스페인에서 온 킬러 부대의 리더다.

이덕수가 숨어있는 단독주택은 관악산 앞에 있다. 그는 유사시에 관악산을 이용해 탈출하려고 일부러 그곳에 있는 집을 아지트로 삼았다.

마누엘이 관악산 숲에서 그 집 방향을 보며 물었다.

"정찰 결과는?"

이덕수의 집 주변을 조사한 부하가 보고했다.

"주변에 경찰이나 감시하는 놈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연태준은?"

연태준이 경찰에 체포됐다는 건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이 주변에서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덕수는?"

"주택 내부에 움직임이 있습니다."

"집에 숨어있군. 밤이 조금 더 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람들이 없을 때 처리한다."

"알겠습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내가 스페인어를 모르니까 슬쩍 끼어들기가 어렵네."

갑자기 뒤쪽에서 들린 한국말에 다섯 놈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누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가 소리가 들렸던 방향을 가리키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수색해."

그의 부하 넷이 칼을 뽑으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움직였다.

차우진이 마누엘의 등 뒤에서 말했다.

"칼이네? 갑자기 한국에 들어오느라 총은 못 구했나 보다?"

마누엘이 뒤로 휙 돌아서며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칼을 휘둘렀다. 칼날의 궤적이 초승달 모양으로 번뜩였다.

하지만 칼날이 닿지 않았다.

차우진이 조금 뒤로 빠졌다가 앞으로 튀어나가며 마누엘의 팔에 칼을 꽂았다.

그가 사용한 흔히 구할 수 있는 작은 장식용 칼이었다. 칼날의 길이가 손가락만큼밖에 안 될 정도로 짧았다. 굵기도 그만큼 가늘었다.

아무리 작고 가늘어도 칼은 칼이다. 마누엘은 팔에 칼을 맞는 순간 손이 풀렸다.

"큭!"

차우진이 마누엘이 놓친 단검을 잡아챘다.

앞쪽으로 수색하러 갔던 놈들이 뒤늦게 사태를 깨닫고 돌아섰다.

"헉!"

"뒤다!"

마누엘이 차우진을 향해 왼손을 내질렀다. 그의 손에서도 작은 단검이 튀어나왔다.

차우진이 그 팔을 쳐내며 마누엘의 가슴을 빼앗은 단검으로 푹 찔렀다. 마누엘이 급히 상체를 젖혔다.

"큭!"

칼이 얕게 들어갔다. 작은 부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투력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마누엘이 손으로 상처를 누르며 뒤로 물러났다.

마누엘은 한국어로 물었다.

"누구냐!"

차우진은 쫓아가지 않았다. 그가 대답했다.

"이덕수는 우리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내가 이덕수를 지키고 있지."

"우리라니?"

차우진이 목소리를 깔았다.

"내래 평양에서 왔수다."

"노스 코리아?"

"기래."

마누엘은 한국말을 할 줄 알고 한국 문화도 어느 정도는 알지만, 북한의 간첩까지 잘 아는 건 아니다.

그는 북한 사투리도 익숙하진 않았다. 그냥 그런 게 있다는 정도만 알았다.

마누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노스 코리아가 왜 이덕수와…."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말했다.

"그 테러 빌런 새끼가 북한이랑 커넥션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어."

"멸망 초기의 뉴스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멸망 여러 해 전에 나왔던 이야기야. 그런데 그게 진짜인지는 나도 몰라. 그냥 카더라 수준의 첩보였으니까."

"커넥션은 어떤 건데? 폭탄?"

"폭탄은 테러 빌런 새끼도 많은데 굳이?"

"그러면?"

박창수가 대답했다.

"코인."

***

차우진이 둘러댔다.

"이덕수의 코인을 대신 처리해주면서 떼어먹는 게 짭짤하거든."

마누엘이 인상을 썼다.

"코인을 굳이 이덕수를 통해서 거래한다고?"

"이덕수와도 거래하는 거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마누엘이 오른팔을 움직여보았다. 작은 칼에 찔리긴 했지만 팔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가슴의 상처도 깊지 않았다.

마누엘이 물었다.

"이덕수를 넘길 생각은?"

"당연히 없지. 나도 당의 지시를 받고 하는 일이라서."

마누엘은 차우진이 최소한 동료 한 명은 더 데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처음 들린 목소리는 반대편에서 났기 때문이다.

그가 부하들에게 수신호를 했다.

부하 셋이 뒤쪽으로 움직여 주변을 수색했다. 하나는 마누엘에게 다가왔다.

마누엘이 차우진을 향해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너를 잡아놓고 듣도록 하지."

"둘이서 되겠어?"

"너는 혼자이다만?"

"나는 돼."

마누엘이 단검을 새로 뽑아 거꾸로 잡으며 말했다.

"피차 소리를 크게 내면 곤란한 입장일 테니까, 조용히 승부를 보자."

"다구리치는 놈이 승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마누엘이 차우진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의 부하는 옆으로 후다닥 뛰었다.

차우진도 옆으로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디뎠다. 차우진이 먼저 뛰어오는 부하부터 요격하는 코스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차우진의 측면에 빈틈이 드러났다. 적어도 마누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마누엘이 그 빈틈을 향해 돌진했다.

203. 차유리

마누엘은 차우진의 빈틈을 발견했다고 판단했다. 차우진이 부하를 향해 이동할 때, 옆쪽이 비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차우진을 향해 돌진하며 수를 계산했다.

'옆쪽 빈틈으로 공격.'

그 한 수만 본 건 아니다.

'막아낸다면, 우측으로 이동해 뒤를 잡고 공격.'

그것까지 막아내도 다음 계획은 있다.

'내 부하가 적의 뒤를 칠 테니까, 앞뒤에서 공격. 잡았다. 빠져나갈 곳은 없다.'

그렇게 판단하고 돌진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차우진이 느렸다. 그런데 마누엘이 돌진하자마자 차우진도 빨라졌다.

차우진이 마누엘보다 먼저 부하를 덮쳤다.

마누엘의 부하는 당황하지 않고 차우진을 향해 칼을 크게 휘둘렀다. 차우진을 제압하려는 게 아니라, 접근하지 못하게 견제하는 공격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 마누엘이 차우진의 뒤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판단은 좋았지만, 소용없었다.

차우진이 몸을 슬쩍 기울여 적의 공격을 피했다. 피하면서 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 단검을 옆으로 내밀었다. 목표는 적의 가슴이었다.

적이 황급히 몸을 비틀며 팔로 막으려 했다.

늦었다.

"컥!"

차우진의 단검이 적의 가슴에 박혔다. 적은 손에 쥔 단검을 놓치며 비틀거렸다.

차우진이 떨어지는 단검을 잡아채며 앞으로 튀어나갔다가 뒤로 휙 돌아섰다.

마누엘이 차우진을 뒤쫓아와 덮치려 했다. 차우진이 칼을 크게 휘둘렀다. 조금 전에 부하가 견제할 때 썼던 것과 똑같은 움직임이었다.

마누엘은 그런 식의 공방에 익숙했다. 차우진의 칼은 평소에 훈련하면서 많이 경험해본 각도로 들어왔다.

'이건 얼마든지 피한다!'

마누엘이 그렇게 판단하며 즉시 몸을 젖혔다.

그러면 될 줄 알았다.

차우진은 마누엘의 시선을 칼 쪽으로 끌면서 다리를 툭 뻗었다.

몸을 젖히던 마누엘이 중심을 잃고 옆으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큭!"

차우진이 말했다.

"나한테서 빈틈이라도 보였냐? 신나서 쫓아오더라?"

주변을 수색하던 마누엘의 부하들이 뒤늦게 달려왔다.

차우진이 마누엘을 걷어찼다.

마누엘이 급히 단검을 위로 들어 차우진의 다리를 받아치려 했다. 제대로 반격하면 걷어차던 사람의 다리를 칼로 자를 수 있다.

차우진이 발끝의 방향을 슬쩍 틀었다.

마누엘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차우진이 발은 마누엘의 옆구리에 꽂혔다.

"컥!"

마누엘의 몸이 옆으로 밀려났다.

차우진이 말했다.

"승부를 보자더니 부하들을 부르네?"

차우진이 달려오는 세 놈을 슬쩍 보더니 산으로 뛰었다. 바로 앞은 산길조차 제대로 없는 울창한 숲이었다.

마누엘이 옆구리를 잡고 일어나며 외쳤다.

"쫓아가서 죽여!"

부하들이 차우진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마누엘이 겨우 몸을 일어났다.

옆구리 부상이 심했다. 갈비뼈에 금이 가서 뛰기 어려웠다. 걷는 것도 이를 악물어야 했다.

"젠장. 이덕수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더니, 정찰을 어떻게 한 거야?"

정찰을 책임졌던 부하는 칼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중상이었다.

마누엘이 숨을 고르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부하를 챙길 때가 아니라 차우진부터 처리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의 부하 셋이 먼저 숲으로 들어갔다. 셋은 일렬로 움직였다. 선두에 선 놈이 말했다.

"놈을 따라잡으면…."

차우진이 갑자기 세 번째 놈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놈은 뒤에서 소리가 나는 걸 듣고 고개를 돌렸다가 차우진을 발견했다. 그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여…."

차우진이 적의 목을 후려쳤다.

"켁!"

적이 목을 잡고 비틀거렸다. 그런 놈의 배에 칼이 꽂혔다.

"끄악!"

차우진이 적의 손에서 단검을 가로챘다.

앞에 있던 두 놈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본 건 쓰러지는 동료와 숲 속으로 사라지는 차우진의 그림자였다.

"어, 언제 뒤로…."

"쫓아!"

마누엘은 숲에 들어갔다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부하 하나가 목을 붙잡은 채로 고꾸라져 있었다. 배에는 칼이 꽂혀 있었다.

"어?"

두 놈이 차우진을 쫓아갔다. 앞에서 뛰던 놈이 차우진을 발견했다.

"찾…."

차우진이 단검을 던졌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적이 뭔가 해보기도 전에 칼이 가슴에 박혔다.

"컥!"

마지막 놈은 겁에 질렸다.

"이, 이건…."

다섯이 왔는데 벌써 셋이 칼을 맞고 쓰러졌다. 리더인 마누엘도 차우진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

차우진이 다가오며 말했다.

"이제 너 하나 남았네?"

마누엘이 숲에서 가슴에 칼을 맞은 부하를 발견했다.

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빠르게 쫓아왔다. 그런데 부하들이 줄줄이 당했다.

"어떻게 벌써…."

마지막 부하가 숲에서 도망치며 소리를 지르는 게 보였다.

"으아악!"

마누엘은 전투에서 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도망쳤다.

"제, 젠장!"

***

30분 전에, 차유리가 보고했다.

"이덕수를 찾았습니다."

혼자 찾은 건 아니다.

합수본 수사팀이 룸살롱 아르카나를 털었다.

그녀가 화면에 이덕수의 사진을 띄웠다. CCTV에 찍힌 모습이었다.

"이 남자가 압구정 룸살롱 아르카나에서 연태준과 여러 번 만났습니다."

"이름은? 이덕수 맞아?"

"여자들 앞에서는 자신의 이름이 아이스 이글이라고 했습니다만, 이덕수라는 이름을 들은 여자가 한 명 있습니다."

"주민등록 정보와 비교해 봤어?"

"이덕수라는 이름을 가진 내국인 중에는 일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외국인이거나 가명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저놈이 이덕수라는 거잖아. 지금 어디 있어?"

"며칠 전에 압구정에서 관악구로 차량을 이용해 이동한 걸 확인했습니다."

"휴대폰 위치추적은?"

"휴대폰은 꺼져 있습니다. 다른 명의의 휴대폰을 사용 중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대포폰이군. 그럼 현재 위치를 알 방법은?"

"정확한 위치는 아닙니다만."

차유리가 화면에 지도를 띄웠다.

"차량의 이동 경로를 보면, 관악구 이 지역에 숨어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기에 수사팀 투입해. 관할 경찰서와 협조해서 반드시 찾아내."

***

마누엘은 그냥 도망친 게 아니다. 뛰다가, 숨었다가, 다시 조용히 움직였다. 마치 침투 작전이라도 뛰듯이 노출을 최소로 줄이며 움직였다.

그러다 철제 운동기구가 몇 개 설치된 작은 공터를 발견했다.

마누엘이 그 공터로 나갔다. 숲에서는 차우진이 더 강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그 공터가 나아 보였다.

그가 한 손에 단검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어. 이 임무는 이렇게 진행되면 안 되는데."

그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런 후에 거기 설치된 음성통화 어플을 실행했다.

어플이 상대편과 연결됐다.

"뭔가 잘못됐습니다."

닥터가 통화했을 때 들렸던 것과 같은 목소리가 질문했다.

- 이덕수를 못 찾았나?

"찾았습니다."

- 제거하지 못했나?

"이덕수에게 경호원이 붙어 있습니다."

- 모두 제거하라.

"우리 쪽이 제거됐습니다."

몇 초쯤 침묵이 흐르다가 상대가 물었다.

- 어째서?

"놈이 노스…."

숲에서 돌이 날아와 마누엘의 손을 때렸다. 스마트폰이 옆으로 날아갔다. 마누엘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큭!"

차우진이 말했다.

"넌 전화할 여유가 있나 보다? 도망 안 치냐?"

마누엘이 칼을 겨누며 자세를 낮췄다.

"조금 전에는 당황했던 것뿐이다. 내 검술은 유럽 정통…."

"말이 많은 새끼네."

차우진이 성큼 걸었다.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마누엘이 즉시 차우진의 목을 향해 칼을 날렸다.

차우진은 상대의 어깨와 허리, 다리의 움직임을 보고 어디를 공격하려는지는 판단했다.

차우진이 그 칼을 쉽게 피했다.

마누엘은 일단 공격을 날리고 나서 거리를 좁히려 했다. 바짝 붙어서 다시 칼을 쓰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다가오는 마누엘의 다리를 차우진이 걷어찼다.

마누엘이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끄악!"

"넌 배우는 게 없냐? 한 번 당해봤으면 다리를 조심했어야지."

마누엘이 땅바닥에 쓰러진 상태로 단검을 휘둘렀다. 목표는 차우진의 발목이었다.

차우진은 마누엘이 단검을 움직이려 할 때 뒤로 물러났다.

칼날이 닿지 않았다.

마누엘은 그의 연속 공격을 마치 서로 합을 맞춘 것처럼 차우진이 피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공격한 후에 피하는 게 아니야. 내가 공격할 때 같이 움직여 피한다.'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내 공격이 읽히고 있다!'

그러면 정통 공격이 아니라 편법이 필요하다.

그가 왼손으로 바닥의 흙을 잡아 차우진 쪽으로 뿌렸다.

차우진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마누엘이 상체를 일으키며 뒤쪽으로 칼을 크게 휘둘렀다.

차우진이 옆에서 물었다.

"너 뭐 하냐?"

"으아아!"

마누엘이 다시 칼을 크게 휘두르려 했다.

차우진의 발이 마누엘의 옆구리에 꽂혔다. 갈비뼈에 또 금이 갔다.

"끄악!"

마누엘이 고통을 참으며 칼을 다시 뻗으려 했다. 하지만 부상 때문에 공격 속도가 느려졌다.

내지르는 팔을 차우진이 잡아 꺾었다.

칼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끄아악!"

공터 아래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차우진은 마누엘이 들을 수 있게 일부러 혀를 찼다.

"쯧. 경찰인가?"

차우진이 뒤로 물러나더니 숲 속으로 쓱 사라졌다.

마누엘도 사람들이 다가온다는 걸 알았다. 그 사람들이 경찰이라는 것도 알았다.

'도망쳐야 해.'

일단 뛰려고 했다.

"큭."

다리에 통증이 확 밀려왔다. 한쪽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절뚝거리면서 도망쳤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다.

차유리가 숲을 수색하다가 마누엘을 발견했다.

"거기 선생님. 경찰입니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마누엘이 영어로 말했다.

"아이 캔트 스피크 코리안."

"어디서 개수작이십니까?"

"인 잉글리쉬."

"상태를 보니까 한 판 제대로 뜨다가 처맞은 꼴인데, 순순히 한국말로 하시죠?"

마누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가 차유리를 훑어보며 평가했다.

'내가 좀 다쳤지만, 여자 하나쯤은 금방 처리하고 빠져나갈 수 있어.'

마누엘이 차유리를 향해 절룩거리며 다가갔다.

"썸바디 헬프 미."

"이 사람이 끝까지…."

거리가 가까워졌다. 마누엘이 갑자기 차유리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차유리가 그 손을 쳐내며 말했다.

"쳤냐?"

마누엘은 다리와 갈비뼈 부상으로 평소의 속도가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이미 시작한 싸움을 멈출 수는 없다.

다리를 다쳐서 발차기는 쓸 수 없다. 가능한 건 손뿐이다.

마누엘의 손이 벨트를 훑었다. 벨트에 숨겨져 있던 작은 칼이 손에 잡혔다. 칼날의 길이는 손가락 하나만큼 짧고 폭도 손가락 정도였다. 칼날의 두께는 얇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작은 칼도 급소에 맞으면 위험하다.

차유리가 삼단봉을 뽑으며 경고했다.

"칼이네? 그러다 뒈…."

차유리가 삼단봉을 펴기도 전에 마누엘이 달려들며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차유리의 목을 노렸다. 작은 칼날이라도 목에 꽂히면 치명상을 입는다.

차유리가 상체를 뒤로 젖히며 달려드는 마누엘을 걷어찼다. 강력한 발차기가 마누엘의 배에 꽂혔다.

"꾸엑!"

마누엘은 이미 갈비뼈에 금이 간 상태에서 발차기를 맞았다. 부상이 더 심각해졌다.

마누엘이 뒤로 나자빠져 기침을 토했다.

"커컥."

이번에는 갈비뼈가 아예 부러졌다. 조금 전에는 움직이고 싸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전투력을 상실할 정도로 부상이 심해졌다.

차유리가 삼단봉을 펴며 물었다.

"어? 선생님? 그거 맞고 너무 엄살 부리는 거 아니냐?"

다른 형사들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뛰어왔다.

윤 형사가 현장을 보더니 말했다.

"차 형사. 너 또…."

"아니거든? 이 새끼 이미 어디서 처맞고 왔거든?"

"진짜?"

"저 새끼가 먼저 칼을 휘두르며 공격해서 배만 살짝 톡 찼거든? 칼을 맞아줄 순 없잖아요."

윤 형사가 차유리의 삼단봉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그건?"

"이건 지금 뽑았거든요?"

"이번엔 진짜지?"

"이번엔 진짜라고."

형사들이 마누엘의 팔에 수갑을 채웠다. 바닥에 떨어뜨린 작은 칼은 증거물로 챙겼다.

윤 형사가 그 칼이 들어 있는 봉투를 차유리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잘 챙겨야 돼. 그래야 너 또 징계 먹는 거 피한다."

"윤 선배. 그거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요. 나 요즘 좀 억울해서 승진해야겠어."

***

마누엘은 체포됐다.

먼저 도망쳤던 부하도 잡혔다. 그놈은 경찰 다섯 명 앞에서 칼을 들고 저항하다가 테이저건에 맞았다.

현장에서 발견된 셋은 몸에 칼을 하나씩 꽂고 있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들은 부상이 워낙 심각해서 일단 병원으로 보냈다.

구급차가 여러 대 오갔다. 이미 조용히 수사하긴 그른 상황이다. 지원병력이 도착했다. 현장에 경찰이 많이 모였다.

이덕수는 은신처로 쓰는 집에 숨어서 창밖을 살짝 보았다. 경찰은 그의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모여 있었다.

"휴우. 나 잡으러 온 건가 했더니, 아닌가 보다. 괜히 긴장했네."

204. 차유리 II

스페인에서 온 코인브로커 이덕수가 집 안에 숨어서 창밖을 보면서 욕을 했다.

"씨발. 어떤 새끼가 하필 이 근처에서 사고를 쳐서 경찰까지 오게 해? 나 잡으러 온 줄 알고 괜히 긴장했네."

나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싶긴 했다. 하지만 그러다 들키는 게 두려워서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그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권총을 본 후에 다시 창밖을 보며 말했다.

"여기는 불안해서 안 되겠다. 예비 은신처로 옮겨야겠다."

***

합동수사본부장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미 현장은 시장바닥처럼 번잡한 상태였다. 무슨 일인지 구경하러 온 주민들도 있었다.

합수부장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이덕수를 잡으러 가라고 했더니, 이게 뭐냐? 조용히 처리하는 거 아니었어?"

형사팀장이 대답했다.

"조용히 현장을 수색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비명도 들리고 싸우는 소리도 나서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덕수에게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칼을 맞았는데, 아시잖습니까? 서해 요트에 있던 사망자들도 전부 외국인인 거."

"이덕수과 관계가 있는 놈들이겠네?"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덕수는?"

"이놈들이 여기 있는 걸 보면 이덕수도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합수부장이 주변을 보며 물었다.

"그럼 이거 일부러 시끄럽게 판을 키운 거야?"

"예. 이덕수를 잡으러 온 거 눈치 못 채게 하려고, 일부러 더 소란스럽게 이놈들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건 잘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확실히 일반인이 아니지?"

"아닙니다. 한 놈이 도주하다가 차 형사를 공격했습니다."

"맨손으로?"

"칼을 썼습니다. 혁대에 작은 칼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일반인이라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차 형사는?"

"그런 작은 칼에 당할 친구는 아니라서요."

"하긴. 나도 차 형사 소문은 많이 들었다."

합수부장의 표정이 풀렸다.

"그럼 잡힌 놈들은 정체가 뭐야?"

"그게…."

"반응이 왜 그렇게 신중해?"

형사팀장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차 형사가 잡은 놈 말고, 테이저건을 맞고 잡힌 놈의 입에서 '노스 코리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합수부장의 얼굴이 당장 구겨졌다.

"뭐? 이 새끼들 간첩이야?"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싸운 상대가 자기 두목과 대화할 때 그런 말이 나왔답니다. 평양이란 말도 들었답니다."

합수부장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거, 수사 기밀 철저히 지켜야 하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곤거리잖습니까?"

"관계 부처에 연락은 내가 돌리지."

***

차우진이 집에 도착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새끼가 벨트에 칼을 숨겨뒀을 줄은 몰랐네. 경찰에 잡힐 줄은 알았지만, 하필 누나랑 마주칠 줄도 몰랐고. 방심했다."

어쨌든 차유리가 상대를 간단히 제압했다.

"역시 등 뒤에서 아군 몇 놈이 총질하지만 않으면 당할 리가 없지."

멸망 초기의 차유리는 그렇게 당했다. 차우진이 멸망을 막아내면 그런 상황은 오지 않는다.

"이제 경찰에서 내가 그놈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그러라고 일부러 마누엘도 살려주고, 일부러 북한 사투리도 썼다.

차우진이 집에서 차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 왜?

"오늘 집에 들어오냐?"

- 가겠냐?

"집에도 못 들어오는데 목소리가 밝다?"

- 야. 나 이번에 승진할 거 같다.

"또 헛물 켜는 거 아니야?"

- 이번엔 진짜다. 한 건 크게 했거든. 그동안 징계 먹은 거 싹 다 정리하고 승진할 거 같다. 자세한 건 말 못하고, 축하 파티나 준비해라.

"그래서 언제 오는데?"

- 오늘은 못 가.

차유리가 전화를 끊었다.

차우진이 씩 웃었다.

"간첩을 잡았다고 생각하나 본데? 내가 그놈이랑 한 말을 합수부가 알아냈구나. 후후…. 어?"

다시 생각해보니 이게 꼭 웃을 일은 아니다.

"근데 난 간첩이 아니잖아. 그놈들도 아니고. 누나가 실망하겠는데?"

***

차유리가 연태준 앞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외쳤다.

"연태준 씨! 당신이 간첩이라는 걸 알아냈어! 당신 이제 끝났다고!"

연태준은 화들짝 놀랐다.

"가, 간첩이라니! 내가 왜 간첩이란 겁니까!"

"인민무력부 간첩이 이덕수를 지키고 있더라! 그럼 이덕수는 간첩이고, 그놈이랑 같이 활동한 당신도 간첩이잖아!"

취조실 밖에서 합수부장이 물었다.

"인민무력부? 이번에 알아낸 것 중에 그것도 있었어?"

윤 형사가 옆에서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범인이 평양을 언급했다는 것까지만 알아냈습니다."

"그럼 지금 차 형사가 말한 건 뭐야?"

"차 형사가 원래 디테일이 좀 약합니다. 머릿속에서 생각과 단어가 좀 뒤섞였나 봅니다."

차유리가 취조실 책상을 두드렸다. 그녀가 책상을 칠 때마다 탕탕 소리가 크게 울렸다.

"평양에서 얼마 받았어!"

연태준에게는 그 소리가 사형장의 총살소리처럼 들렸다.

"아, 아닙니다! 난 간첩이 아닙니다!"

"간첩이 자기가 간첩이라고 하는 거 봤어? 딱 봐도 간첩처럼 생겼네!"

연태준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아니라니까!"

차유리가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간첩이 형사 친다!"

"내, 내가 언제…."

"으아아아! 아이고 무서워라!"

합수부장이 물었다.

"차 형사 말이야. 원래 좀 저래?"

윤 형사가 대답했다.

"네."

"왜?"

"집안 내력이라던데요."

***

차우진이 집에서 고기를 매콤한 양념과 함께 볶으며 말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샐 텐데, 잘하고 있으려나."

민수연이 식탁에 앉아서 쥐포를 뜯어 먹으며 물었다.

"넌 유리 언니를 그렇게 못 믿어?"

"넌 믿냐?"

민수연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사람 팰 일이 있을 때는 세상에서 제일 믿지."

"그건 인정."

차우진이 질문했다.

"수연아. 너한테는 합수본에서 도와달라는 말 없어?"

"딱히?"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을 분석하고 추적하는 건 네가 잘하잖아."

"나 말고도 잘하는 사람 많아. 그런 게 여러 대 있어서 손이 모자라면 그때는 나한테도 연락이 오겠지. 한두 대 정도 찾아낸 거면 거기서 알아서 해."

"그런 게 더 있어야 너한테까지 차례가 가는구나."

민수연이 물었다.

"야. 일 이야기는 하지 마. 진짜 나까지 불려갈까 봐 걱정되니까. 먹는 이야기나 하자. 내 제육볶음은 언제 다 되는데?"

"넌 아줌마가 어디 가실 때마다 반찬 얻으러 올 거냐?"

"아빠가 그러래. 네 요리가 더 맛있어졌대. 파는 것보다 맛있대."

"아저씨를 믿었는데…."

"야. 많이 볶아. 고기 많이 넣고 볶아. 나 많이 먹을 거야."

"돼지냐?"

"반사."

***

마누엘과 부하들은 모두 체포됐다. 셋은 칼이 몸에 꽂힌 채로 병원에 실려 갔지만, 둘이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잡혔다.

마누엘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다리도 다쳤지만, 조사를 받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테이저건을 맞은 부하는 유일하게 사지가 멀쩡했다.

그는 공포에 질려서, 경찰이 뭘 묻든 술술 털어놓았다.

다만, 아는 게 많지는 않았다. 핵심 정보는 마누엘이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하도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한국에 온 건지는 알았다.

합수부장이 물었다.

"이덕수를 제거하러 왔다고?"

마누엘의 부하를 조사한 윤 형사가 보고했다.

"예. 그리고 이덕수가 고용한 킬러도 제거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킬러가 간첩이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데?"

"연태준도 타깃이었답니다."

"연태준까지?"

"이름을 말한 건 아닌데, 이덕수와 일한 현지 협력자라고 하는 걸 보면 연태준이 유력합니다."

"이 새끼들이, 싹 다 죽이고 꼬리를 자르려고 한국에 왔구나."

***

정보가 늘어났다. 차유리가 서류를 흔들며 연태준을 압박했다.

"타깃 중에 당신도 있었다고!"

"나, 나를?"

연태준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고현우가 찌르고 던진 칼을 두 방이나 맞았다.

"제, 젠장. 나, 난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당신 지금 풀려나면 죽어! 그놈을 잡아야 당신이 살아! 이덕수 지금 어디 있어?"

연태준은 살고 싶다.

감옥에 가는 게 죽는 것보다는 낫다. 게다가 그는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른다. 그가 들은 건 모두 경찰이 적당히 추려서 말한 것뿐이다.

연태준이 항복했다.

"형사님. 협조할 테니까 잘 좀 봐주십시오."

"뭘 어떻게 협조하나 봐서."

"이덕수를 추적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

연태준이 숨어있던 거점에는 경찰의 노란색 폴리스 라인이 처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곳을 지키는 경찰은 없었다. 이미 현장 조사가 끝났기 때문이다.

차우진이 그곳에 조용히 침투해 땅을 조금 팠다.

"슬슬 경찰에서 이거 찾으러 올 때가 됐으니까, 제자리에 돌려놔야지."

그동안 위치추적용 스마트폰을 경찰이 찾을 수 없게 한 건, 이덕수가 잡히지 않아야 마누엘 패거리를 유인해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누엘은 잡았으니까, 이덕수도 경찰에 잡혀야 한다.

***

형사들이 연태준이 숨어있던 집으로 급파됐다. 그들이 집 주변을 파헤쳤다.

연태준이 말한 위치의 땅을 팠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없어?"

"호미질을 해도 돌만 계속 나옵니다."

삽을 쓰다 땅을 잘못 찍으면 스마트폰이 망가질 수 있어서, 형사들은 호미로 땅을 긁고 있었다.

그 작업은 시간이 걸리고 힘들었다.

"연태준 그 새끼가 우리를 속인 건가?"

"어? 찾았습니다! 여기 비닐에 싼 게 있습니다!"

"야. 잘 찾았…. 잠깐."

팀장이 약도를 확인하며 인상을 썼다.

"그 구역은 전에도 조사한 곳 아니야? 여기 서류에 수색 완료 표시가 있는데?"

"놓친 거 같은데요?"

"여기 누가 조사했어?"

"다 같이 조사해서, 그건 잘…."

***

이덕수는 원래는 단독주택을 은신처로 삼았다. 그런데 그 근처에서 마누엘 패거리가 잡혔다.

그래서 그는 예비 은신처로 이동했다. 이번에 옮겨간 곳은 빌라 3층이었다.

멀리 이동한 건 아니다. 이 빌라의 창문에서 원래 은신처인 단독주택을 볼 수 있었다.

"만약 경찰이 저곳으로 쳐들어가면, 여기서 그 모습이 보이겠지."

그는 일주일쯤 이곳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으면 돌아가서…."

대문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이덕수는 바짝 긴장했다.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누, 누구요?"

차유리가 말했다.

"아랫집 사람인데요. 화장실에서 누수가 있나 봐요. 우리 집으로 물이 떨어져요."

이덕수는 이런 상황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젠장. 평소에 안 쓰던 집이라 그런가?"

그래도 여자 목소리라서 경계를 조금 덜 하긴 했다.

"거 얼마면 됩니까? 내가 돈 줄 테니까 수리해요."

"수리를 여기서 확인하고 해야지 우리 집에서 어떻게 하는데요? 천장 뚫어요?"

"어? 그런가?"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화장실만 보고 나갈게요."

"그건 곤란한데."

"안 열어주면 확 신고할 거예요."

경찰에 신고하면 이덕수는 굉장히 곤란해진다.

그가 문구멍으로 밖을 확인했다. 차유리 혼자 파마머리 가발을 쓰고 서 있었다.

'저 아줌마한테 겁을 줘서 입 닥치게 해야겠군.'

이덕수가 권총을 등 뒤 허리춤에 꽂았다. 그런 후에 셔츠의 단추를 풀어 상체가 반쯤 보이게 했다. 가슴에 새겨진 얼음 독수리 문신이 옷 사이로 드러났다.

이덕수가 문을 열었다.

"이 아줌마가 확 그냥! 내가 누군지 알아?"

차유리가 이덕수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방긋 웃었다.

"덕수?"

"어?"

"맞네?"

이덕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 누구…."

차유리가 문을 활짝 열었다. 이덕수가 황급히 주먹을 날렸다.

차유리는 무술 특기로 채용된 선수 출신 형사다. 그런 뻔한 공격에 맞을 사람이 아니다.

차유리가 이덕수의 팔을 잡아 꺾으며 다리를 후려쳤다.

"컥!"

"잡았다!"

아래층 계단에 모여 있던 형사들이 우르르 뛰어 올라왔다.

"수갑 채워!"

차유리가 소리를 질렀다.

"수갑 내 거 쓸 거야! 새치기하면 뒈진다!"

이덕수가 급히 다른 팔을 허리 뒤로 넣어 권총을 잡았다.

그 손을 차유리가 다시 덥석 잡았다.

"너 뭐 하냐? 이 상태로 방아쇠 당기면 너 고자 된다?"

"히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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