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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8% APOCMASCOT / Chapter 11: 11

Chapter 11: 11

110. 로즈

차우진과 손하은이 오전에 병원을 방문했다.

병실에서 차우진이 그녀의 어머니에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누구…. 혹시 우리 딸 남자친구…."

손하은이 얼른 말했다.

"아니야. 학교 선배야. 오늘 근처에서 모임이 있어서 만났다가 잠깐 들렀어."

"진짜니?"

"진짜라니까?"

"난 너 시집가는 거 보고 죽는 줄 알았다."

"엄마가 죽긴 왜 죽어."

차우진이 손하은의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님의 쾌유를 위해 저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뭘 이렇게까지."

차우진이 손하은의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독 감지 스킬을 사용했다. 그가 독을 직접 먹은 건 아니라 정확한 건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손바닥의 땀을 통해 아주 약간의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멸망한 세계에서 백희선의 별명은 백독거미다. 독을 잘 써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역시나네.'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총으로 책상 위에 있는 알약을 건드렸다.

"레드 크리스털이 여기에 있네?"

차우진이 물었다.

"블러드 크리스털이 아니라?"

"어. 이거 레드다."

"그건 아주 옛날에나 돌던 거 아닌가?"

"레드가 블러드의 재료템이잖아. 이걸로 블러드를 만들려고 했겠지."

멸망급 마약 블러드 크리스털의 첫 번째 재료가 레드 크리스털이라는 마약이다.

차우진이 말했다.

"너무 옛날 방식인데? 재료를 아끼려면 다이렉트로 블러드를 만드는 게 낫다며."

블러드 크리스털은 초기에는 레드 크리스털에 다른 마약 두 가지를 섞고 특수 물질까지 더해야 만들 수 있었다.

돈이 되는 시장이 생기면 그게 뭐든 기술 발전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게 마약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멸망 초기의 블러드 크리스털은 세 가지 마약을 먼저 만드는 중간단계 없이 제조됐다. 그렇게 하면 재료도 절약하고 더 많은 양을 더 빨리 만들 수 있었다.

박창수가 주변을 가리켰다. 이곳은 다 무너진 폐허였다.

"요즘 시대에 블러드 생산용 정밀장비를 어디서 구하냐? 그런 건 벌써 옛날에 다 파괴됐지."

"하이에나 새끼들이 레드를 만들 만큼은 장비를 구했나 보네."

박창수가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럼 그것도 있으려나."

"그거라니?"

"레드 크리스털을 만들 때 중간단계에서 생성되는 재료템인데, 사람 컨디션을 중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다운시키는 게 있거든."

"아. 그거. 방송에서 봤다. 그런데 그건 왜?"

"손하은 씨가 그게 보이면 가져오라더라. 그걸 다른 재료랑 반응시키면 약이 된다더라."

"약?"

"어. 몇 가지 병을 치료할 수 있다더라."

차우진이 물었다.

"손하은 씨는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제약 전문가니까 알겠지. 멸망하기 전에 제약회사라도 다닌 거 아닐까? 자기 옛날이야기는 잘 안 해서 모르겠다."

"설마 옛날에 그걸로 레드 크리스털을 만들었던 건 아니겠지?"

"손하은 씨가? 에이. 그럴 리가 있냐?"

"당연히 농담이야."

***

차우진이 손하은을 슬쩍 보았다.

'창수 형. 그거 농담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

손하은과 그녀의 어머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차우진이 손하은에게 눈짓했다.

그들이 이곳에 온 건 피가 필요해서다.

손하은이 말했다.

"엄마. 채혈 조금만 할게."

"응? 네가?"

"내가 제약회사 연구원이잖아. 회사에 가져가서 검사하려고."

"조금만 뽑아. 안 그래도 피가 모자라."

"알았어. 근데 병원에는 말하지 마. 괜히 알면 내 상황이 난처해져."

"알았다."

손하은은 주사기로 피를 조금 뽑아 시험관 두 개에 옮겨 담았다. 그녀의 손이 조금 떨렸다.

차우진이 병원 밖에서 혈액 샘플 하나를 넘겨받으며 말했다.

"난 이걸 분석할 테니까, 내 결과가 나오면 손하은 씨도 확인해봐요."

"나도 오늘 당장 분석할게요."

차우진이 말렸다.

"손하은 씨는 여기서 뭘 찾아야 하는지 모르잖습니까? 그리고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토요일에 출근해서 분석 장비를 쓰면 의심만 살 겁니다."

"누가 의심한다는 거예요?"

"당연히 회사지요."

"왜…."

"확인하고 싶으면 월요일에 남들 모르게 분석해요. 그건 안 말릴 테니까."

"으….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

이선정 박사는 주말에는 회사에 출근해서 개인 연구를 진행한다.

그녀가 기지개를 쭉 켰다.

"배고프다."

전화가 걸려왔다. 차우진이었다.

그녀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머. 어떻게 내가 배고픈 걸 딱 알고 전화했지? 통하는 게 있나 봐요?"

- 어…. 안 통했나 본데요?

"네?"

- 분석을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한 건데.

"쳇. 그럼 맛있는 거라도 사와요."

***

차우진이 이선정을 찾아가 혈액 샘플을 맡겼다.

이선정이 물었다.

"그냥 성분 분석을 해요?"

"찾을 대상이 있는 편이 낫지요?"

"당연하죠. 여기서 뭘 찾으면 되는 건데요?"

차우진은 독 감지 스킬로 손하은의 어머니가 중독됐을 수도 있다는 건 알아냈다.

만약 중독된 게 사실이라면, 짐작 가는 게 하나 있었다.

'창수 형이 말한 그거.'

"지난번에 분석해달라고 한 마약 있잖습니까?"

"레드 크리스털이요?"

"그것과 성분이 겹치는 게 있는지 찾아줘요."

이선정은 당황했다.

"네? 이거 마약중독자의 혈액이에요?"

"아니요."

"그럼…."

"그걸 만드는 데 사용한 원료 중 하나가 나올 거 같아서."

"음…. 분석해서 나온 물질이 신체 대사를 거치기 전에 어떤 형태였는지 알아야 할 수도 있는데…."

"맞습니다. 그걸 찾아주셔야죠."

"제가요?"

"네."

이선정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장담은 못 해요."

"박사님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 없는 믿음은 뭐죠?"

"근거가 없긴요.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건데."

"아니, 기분은 좋은데, 내가 그 정도 실력자는 아닌데…."

"본인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그녀는 무려 멸망급 재난인 오메가 바이러스를 혼자 힘으로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미래의 전문가들은 그녀가 천재라고 했다.

이선정은 기분이 좋아졌다.

"알았어요. 한번 해 볼게요."

이선정은 분석 장비를 세팅하고 필요한 작업을 했다.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두 사람은 저녁을 먹었다.

회사에는 조리도구가 없어서 배달 음식을 시켰다.

이선정 박사는 피자를 먹었다. 차우진은 오븐 스파게티까지 추가로 먹었다.

차우진이 서비스로 따라온 500mm 콜라를 이선정의 컵에 따라주려고 했다.

이선정이 말했다.

"저는 물 마실 테니까 콜라는 우진 씨 드세요."

"개꿀. 내가 콜라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고."

이선정은 신나서 콜라를 마시는 차우진을 보며 말했다.

"정말 잘 드신다."

"돼지?"

"아뇨! 뭐라 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뭐랄까…. 그렇게 드시는데 처음 봤을 때보다 배가 들어간 거 같아서…."

차우진의 표정이 굳었다.

"요즘 바쁘게 움직였더니 뱃살이 계속 빠지네요. 이러면 안 되는데."

"네?"

"농담입니다."

"드시는 거 보면 농담이 아닌 거 같…."

분석 장비에서 신호음이 들렸다. 첫 번째 결과가 나왔다.

분석기는 하나만 돌린 게 아니다. 이선정은 몇 가지 테스트를 동시에 진행했다.

모든 테스트가 끝난 후에 그녀가 결과물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내용을 확인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혈액에 원래 있으면 안 되는 성분을 찾아야 합니다."

"이미 그런 걸 몇 개 찾아냈어요."

"저번에 분석한 마약과 겹치는 성분이어야 하고요."

"직접 겹치는 건 없어요. 다만 몸에서 대사되기 전 상태를 추측해 보면…. 역시 어렵네요."

"힘내요. 콜라는 안 드시니까 피자라도 썰어드릴까요?"

"썰어서 입에도 넣어주…. 아, 아니네요. 집중하다 보니 헛소리가 나왔어요."

이선정이 손으로 얼굴에 바람을 부친 후에 데이터에 집중했다.

"의심 가는 게 있긴 한데, 이 변화가 가능한가? 체내 대사 반응을 생각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차우진이 피자 조각을 이선정에게 주려고 젓가락으로 집으며 물었다.

"찾았습니까?"

"확실한 건 아니에요. 의심 가는 걸 찾긴 했는데, 신체 대사 반응의 중간 과정을 모르니까요."

"이선정 박사님은 가능하다고 보는 거군요."

"그냥 감으로…."

"그거면 됐습니다. 직접 확인해볼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요. 자료 주시죠."

이선정이 물었다.

"혹시 그 사람을 지금 만나러 가는 거예요?"

"시간을 끌 일이 아니라서."

"위험한 곳인가요?"

"아니요. 오늘은 젊은 여자 한 명만 만나는 거니까."

이선정이 얼른 말했다.

"같이 가요."

"굳이?"

"안 위험하다면서요. 그리고 이 내용을 설명할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요. 우진 씨가 직접 할 거 아니면 제가 가야죠."

"음…. 알겠습니다. 두 가지만 주의하면."

"뭔데요?"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절대로 이름을 말하지 말아요."

"네? 안 위험하다면서요."

손하은보다 이선정이 더 중요하다. 이선정은 혼자서 멸망급 재난인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하는 사람이다.

만약 둘 중 한 명만 믿거나, 한 명만 확실히 보호해야 한다면 이선정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 그녀의 얼굴이나 이름이 노출되는 건 피하는 게 좋다.

차우진이 말했다.

"오늘 만나는 사람은 안 위험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

차우진이 손하은에게 이선정을 소개했다.

"이쪽은 나랑 일하는 분."

이선정이 말했다.

"코드네임 로즈라고 불러줘요."

차우진은 동그래진 눈으로 이선정을 돌아보았다.

이선정이 얼른 출력해온 데이터를 보여주었다.

"이걸 알아보실 분이라고 들었어요."

"이게 뭔데요?"

"혈액검사 결과예요. 여기서 이상한 걸 좀 찾았는데요."

이선정이 분석 데이터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인체 대사 이전에 어떤 형태였을지 추측하고, 그게 마약에서 추출한 어떤 성분과 연결될 수 있는지도 설명했다.

손하은의 표정은 설명을 들을수록 창백해졌다. 나중에는 손을 가늘게 떨었다.

"이게 왜?"

"이게 뭔지 아는 눈치네요?"

"제가 만든 건데…. 이게 우리 엄마 혈액에서 나왔다고요?"

"이미 몸에서 대사를 거친 후라서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이게 마약 재료라고요?"

"마약에만 쓰이는 건 아닐 수 있지만, 마약 재료로 쓰인 건 맞아요."

"믿을 수 없어요. 이건 그러려고 만든 게 아니에요."

"개발 목적과 다른 효과를 보이는 약은 많잖아요."

차우진도 그런 약을 안다.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도 그런 케이스지'

이선정이 계속 설명했다.

"의약품으로 개발됐는데 마약으로도 쓰이는 건 많으니까요. 아편도 옛날에는 진통제로 쓰기도 했어요."

"그야 그렇지만, 이건…."

"그럼 이건 어떤 용도죠?"

"그건 회사에서…."

손하은은 아직도 말을 아꼈다.

차우진은 그 모습을 보며 고민했다.

'손하은이 블러드 크리스털의 개발자인가? 아니면 개발자 중 한 명?'

멸망한 세계의 손하은을 생각하면 개발 능력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결과를 알고 만들었느냐가 중요했다.

'그렇게 보기엔 여전히 걸리는 게 있단 말이야.'

차우진이 제안했다.

"우리를 못 믿겠으면 월요일에 연구실에 가져가서 확인해보던가요. 혈액 샘플 하나 더 가지고 있잖아요."

손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회사에 안 들키게 조심해서."

"다른 혈액 분석 실험에 끼워서 하면 안 들켜요."

***

돌아오는 길에 차우진이 물었다.

"코드네임 로즈?"

이선정이 두 손을 뺨에 댔다.

"나 오늘 미쳤나 봐요."

"취향이 첩보물 쪽이신가?"

"정확히 말하면 히어로물이죠. 제가 이공계라 그런 거 구분에 철저해서."

"저도 이공계인데 당혹스럽군요. 코드네임을 로즈…."

"코드네임 마법 소녀로 할 걸 그랬나요?"

"소녀?"

이선정 박사가 두 손을 뺨에 댔다.

"꺄악! 내가 뭐라고 한 거야!"

111. 협력자

월요일 밤에 차우진이 손하은을 찾아갔다.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차우진이 그녀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확인했나 보네요?"

이선정 박사도 그 옆에 앉았다.

손하은이 대답했다.

"두 분 말이 맞았어요. 같은 결과가 나왔어요."

"누군가 그 약을 어머님께 쓰고 있습니다."

"왜요?"

"그래야 계속 아픈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왜…."

"그래야 손하은 씨를 통제할 수 있으니까."

손하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엄마를, 엄마를 당장 퇴원시킬 거예요."

"지금 그러면 저쪽에서 눈치챕니다."

손하은이 소리를 빽 질렀다.

"저쪽 누구요!"

"짐작 가는 사람이 있을 텐데?"

손하은의 어머니를 그 병원에서 치료받게 해준 건 회사 고위층이다.

"백희선 이사님?"

"이제 '님'은 떼도 될 것 같은데 말이죠."

"내 약점을 잡으려고?"

"시키는 일은 뭐든 하게 통제해야 하니까."

"그럼 옥탑방에서 나를 죽이려던 놈들은…."

"손하은 씨에게 시킨 일이 노출되면 백희선이 곤란해지니까 입막음을 위해서."

그래서 차우진은 손하은이 블러드 크리스털의 핵심 개발자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핵심 개발자라면 그렇게 쉽게 제거하려 할 리 없으니까.'

차우진이 물었다.

"그 약을 손하은 씨가 개발했습니까?"

전에는 회사 기밀이라며 망설이던 손하은의 입이 쉽게 열렸다.

"아니요. 저는 러시아 기술을 받아서, 양산이 가능하게 개선한 거예요."

"그 기술을 가져온 사람은?"

"백희선 이사…."

손하은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진짜로 나한테 그 일을 시키려고 우리 엄마를…."

차우진이 이선정을 향해 눈짓했다.

이선정이 분석 자료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건 레드 크리스털이라는 마약의 분석 데이터예요. 이거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이건 처음 봐요."

"손하은 씨가 만든 그 약이 이 마약의 원료 중 하나예요."

"그럼 제가…."

손하은이 황망한 얼굴로 물었다.

"마약을 만들던 거예요?"

"아마도요?"

"그럼 저 감옥에 가나요?"

"모르고 했으면 그러진 않을 걸요?

"그럼 자수하면…."

차우진이 옆에서 말했다.

"자수는 좋은 선택이 아닌데."

"네?"

"손하은 씨가 눈치챘다는 거, 백희선은 모르는 게 좋습니다."

"왜…."

"백희선이 최종 보스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는 도대체 무슨 일에 말려든 거예요?"

"이대로 쭉 갔으면 나중에 후회했을 일."

손하은은 멸망한 세계에서 약을 만드는 제약 기술자였다.

알코올 계열 소독약은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많았다. 원료인 식량이 부족해 의료용 알코올의 값은 비쌌지만, 흔히 쓰이는 약이기도 했다.

해열제나 소염진통제를 만들려면 좀 더 고급 기술이 필요했다.

효과 좋은 항생제는 만드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있더라도 효과가 천차만별이었다.

손하은의 항생제는 효과가 굉장히 좋아서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손하은은 질병에 쓰이는 약도 자연계의 재료만으로 곧잘 만들어냈다. 그 재료를 가공해 약으로 만들 때 필요한 스킬도 있었다.

그 수준까지 가능한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차우진도 손하은의 약을 자주 이용했다. 다른 생존 커뮤니티의 부탁을 받고 그녀가 만든 약을 전달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의 손하은은 과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제약회사나 연구소 출신이라고 생각했다.

차우진은 미래의 손하은이 그러는 이유를 이제는 짐작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나중에 알게 됐겠지. 그래서 백독거미를 그렇게 싫어했던 거고.'

차우진이 말했다.

"이거 해결하지 못하면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겁니다."

손하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해결할 수는 있는 거예요?"

"백희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레드 크리스털을 만드는 놈이 누구인지 알아낸다면?"

블러드 크리스털은 멸망급 마약이다.

마약 조직이 그 마약을 만들려면 신규 감염자의 피가 필요하다. 그래서 마약 조직과 중독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중독시켰다.

누군가를 중독시킬 때 그게 마약이라는 걸 꼭 알려줄 필요는 없다. 모르는 사이에 중독되게 할 방법은 많았다. 그렇게 그 마약이 전 세계로 퍼졌다.

전 세계에 블러드 크리스털처럼 공격성을 높이는 마약이 퍼지면, 치안 시스템이 무너진다.

멸망 초기에는 경찰 내부에도 중독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들 중 일부가 마약 조직과 결탁했다. 그 사태를 막으려던 경찰이 무수히 죽어 나갔다.

멸망 초기의 치안 상황이 좋을 리가 없다. 블러드 크리스털이 그 상황에 기름을 부었다. 문명이 무너지는 속도가 가속됐다.

블러드 크리스털은 그 자체로도 최악의 마약이지만, 다른 재난이 터질 때 그 피해를 키우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막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누나가 살지.'

차유리는 경찰이다.

차우진이 물었다.

"우리 일에 협조할 겁니까?"

손하은은 고민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다. 무서웠다.

"혹시요. 백 이사가 저를 다시 죽이려고 할까요?"

"지금 당장은 경찰이 주시할 테니까 괜찮겠지만, 경찰의 관심이 사라지면 다시 증거를 없애려고 하겠지요."

손하은은 그녀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우리 엄마 몸에도 증거가 남아있으니까 그러면…."

"손하은 씨가 지금 자수하면, 즉시 그 증거를 없애려고 하겠지요."

손하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뭘 하면 돼요? 그놈들을 다 잡으려면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하던 일을 그대로 계속해요. 백희선을 어설프게 방해하려고 하지 말아요. 그러면 의심만 사니까."

"겨우 그걸로 되는 건 아니죠?"

"그러면서 쓸만한 정보를 찾아야 합니다. 난 외부에서 백희선을 조사할 테니까 손하은 씨는 내부에서 살펴봐요.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손하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러면, 연락은 어떻게 할까요?"

"톡으로 해요. 국산 톡 말고 서버가 외국에 있는 거로. 전화 통화는 손하은 씨가 도청당할 위험이 있으니까 하지 말고."

"아…. 네. 알겠어요."

"휴대폰은 공장 초기화한 후에 보안 프로그램을 깔아요."

"그럴게요."

상황이 정리됐다.

손하은이 내부 협력자가 되었다.

그들이 헤어지기 전에 손하은이 차우진을 보며 물었다.

"저기, 진짜 기자는 아니시죠?"

"아닙니다. 그거 위장신분이었습니다."

"그럼 무슨 일 하세요? 어딘가의 요원이세요?"

그녀가 이선정 박사를 힐끗 보았다.

"저분의 코드네임은 로즈였는데…."

차우진이 대답했다.

"백수입니다."

"네?"

***

돌아오는 길에 이선정 박사가 물었다.

"저도 우진 씨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긴 해요."

"전기 기술자라고 말했을 텐데요."

"그렇게 생각하기엔 하는 일이 너무…. 저한테만 말해주면 안 돼요?"

"회사도 가끔 다니고."

"가끔이면 알바 하시는구나."

"촬영 현장에서 엑스트라도 가끔 하고."

"어머. 배우?"

"엑스트라라니까요."

"언젠간 주연배우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연기력이 안 됩니다."

"손하은 씨한테 기자인 척한 거 보면 연기 잘하던데."

"그건 위장 활동이고요."

***

차우진이 집으로 돌아와 궁리했다.

"레드 크리스털 관련 기술을 손하은에게 가져다준 건 백희선이야."

백희선은 손하은에게 그 기술을 러시아에서 들여왔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 여자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확인이 필요하다.

"기술을 입수한 경로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백희선은 아직 잡히면 안 된다.

"쉽게 해결될 거였으면 레드가 멸망급 마약의 씨앗이 됐을 리가 없지."

손하은이 가진 증거만으로는 백희선을 경찰에 넘기기 어렵다. 손하은이 만든 건 원료물질이지 레드 크리스털 자체가 아니다.

백희선도 최종 목표가 아니다. 멸망급 마약인 블러드 크리스털이 개발되는 걸 막아야 한다.

"백희선을 궁지에 몰아넣으면 좀 움직이려나?"

***

이튿날 차우진이 딥어스테크의 특별조사팀을 소집했다.

"백희선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냈습니까?"

특별조사팀원들이 다양한 경로로 수집한 자료를 정리해 보고했다.

"러시아에서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성과에 비해 승진이 빠릅니다."

"학벌이 괜찮긴 한데, 학벌만으로 그 나이에 이사가 되는 건 어렵습니다."

"외부에는 좋은 이미지로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습니다만, 회사 내부 직원들은 싫어합니다. 성격이 지독해서요."

차우진이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승진했습니까?"

"검증된 정보로는 설명이 어렵습니다만…."

"검증되지 않은 정보로는?"

"사장의 숨겨둔 딸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숨겨둔 딸?"

"호적에는 이름이 없지만, 그런 정황이 있습니다."

"흐음…. 사실이라면 기존 자식들과 갈등이 있겠군요."

"사장의 호적에는 아들만 둘입니다. 백희선과는 나이 차이가 꽤 납니다."

"지분은?"

"사장이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장은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병이 깊어 경영 복귀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회사 지분을 가지고 상왕으로 존재하지만, 경영은 자식들에게 맡긴다?"

"현재 상황은 그렇습니다. 승자에게 회사를 맡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단 사장이 되면 지분을 상속받을 때도 유리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어느 쪽이든 승자가 상대편의 손발을 잘라 허수아비로 만들 거라고 판단됩니다."

차우진이 라이프레인 제약의 지분 상황 도표를 보며 궁리했다.

'사덕리소스와 딥어스테크를 같이 움직여도 인수는 불가능해.'

차우진이 두 회사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사장인 건 아니다.

게다가 제약회사는 사업분야가 너무 다르다. 명분도 없는 인수전을 할 수는 없다.

'내부를 공격하기 어려우면, 외부에서 흔들어봐야 하려나?'

차우진이 물었다.

"경쟁사들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새로운 도표가 화면에 떴다. 여러 제약회사의 관계도였다.

"일부 회사와는 경쟁 관계입니다. 적당히 협력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저 빨간색 선은 뭡니까?"

"라이프레인 제약과 적대적인 관계인 회사입니다. 거의 전쟁 수준입니다."

"그래요? 누가 유리합니까?"

"라이프레인이 더 큰 회사라서 유리합니다만, 상대도 만만치 않습니다."

차우진이 그 회사 이름을 보았다.

"순수생명제약?"

차우진이 그런 이름의 회사를 생각해보았다.

'멸망 초기에 그런 곳이 있었나?'

팀원이 말했다.

"정식 이름은 순수생명제약인데, 상품을 판매할 때는 SL 제약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아. SL 제약."

***

차우진이 폐허 속에서 약통을 꺼냈다.

"창수 형. 약 찾았다."

박창수가 환한 얼굴로 물었다.

"뭔데? 소염진통제? 항생제?"

"소화제."

"어?"

"SL 제약에서 나온 소화제를 한 통 찾았어."

박창수가 혀를 찼다.

"쯧. 요즘 세상에 소화제가 필요할 정도로 많이 먹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교환가치가 진통제보다도 낮겠어."

"사냥에 성공했는데 고기를 가져갈 수 없을 때? 최대한 먹어야 할 때?"

"그러네. 다시 생각해보니까 필요는 하네. 근데 SL 제약이면…. 그거 너무 옛날에 만든 거 아니냐? 멸망 초기에서 10년쯤 전에 망한 회사잖아."

"여긴 왜 망했지?"

"SL 제약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어. 그 사고로 사람이 많이 죽었지. 회사는 당연히 망했고."

"그럼 이거 진짜 오래된 약이네. 이거 먹고 오히려 소화불량 걸리는 거 아니야?"

***

차우진이 말했다.

"망하는구나."

팀원이 도로 물었다.

"예? 잘 못 들었습니다."

"혼잣말입니다. SL 제약을 상대하는 건 라이프레인의 누구입니까?"

"백희선 이사입니다. 백 이사가 관리하는 사업에서 충돌하면서 적대적 관계가 됐다고 합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예?"

"그럼 SL 제약이 공세를 강화하면 백희선은 경영권 싸움에서 불리해지겠군요."

"그렇습니다."

차우진은 SL 제약의 공장 폭발사고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았다.

'날짜는 모르겠지만, 창수 형이 멸망 초기보다 10년 전이라고 했으니까 올해쯤일 텐데….'

그 폭발사고를 누가 일으켰는지는 뻔했다.

'회사에서 실수로 터진 게 아니라면, 이익을 보는 사람이 터트렸겠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지독한 사람일 테고.'

백희선이 그 조건에 딱 맞았다.

차우진이 물었다.

"SL 제약의 내부 상황을 알고 싶군요."

"어, 그건 아직 조사를…."

"자세한 건 수집되면 주시고, 일단 경영진 같은 간단한 정보부터 보죠. 그건 언제까지 되겠습니까?"

"내일까지 보고하겠습니다."

112. SL 제약

차우진도 직접 움직였다.

그는 SL 제약 공장의 전기 설비 교체 일자리를 어렵지 않게 얻었다.

공장 관리자가 차우진의 이력을 보고 물었다.

"실력도 좋아 보이고 경력도 좋은데 왜 굳이 하루짜리 일을…."

현장을 직접 확인하러 왔다.

"요즘은 휴식기였는데, 누나가 사고를 쳐서 급전이 필요해서요."

"아. 그러시구나."

차우진은 전기 설비 교체 작업을 하며 공장 내부를 정찰했다.

공장에는 외부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허가받은 관계자만 들어갈 수 있는 제한구역이 따로 있었다.

핵심 시설은 모두 제한구역에 있었다. 차우진처럼 외부에서 일하러 들어온 사람은 제한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가 공장의 외부 시스템을 확인한 후에 공사 관리자에게 슬쩍 물었다.

"이 공장은 안전관리 수준이 괜찮네요?"

"약 만드는 공장이잖아요. 어설프게 관리했다가 문제 생기면 큰일 나니까."

차우진이 전기 설비를 교체면서 그 작업에 사용되는 부품의 스펙을 확인했다.

대부분 권장 스펙보다 사양이 높았다. 품질이 떨어지는 건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공장 외곽에서 이렇게 할 정도면, 제한구역은 더 철저히 관리하겠는데?"

그가 작업하는 곳은 공장 외부인데도 다른 회사의 공장 내부보다 관리 상태가 나았다.

이것보다 더 철저히 관리하는 제한구역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건 이상했다.

"아무리 조심해도 터질 수는 있지만, 갑자기 터지는 건 역시 이상하지."

백희선이 수작을 부려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한구역 안에서 폭발을 일으키려면 그 안으로 누군가 들어가야 한다.

박창수는 그 사건이 사고라고 말했다.

사건을 사고로 위장하는 건 더 어렵다.

"백희선. 누구를 이용해서 어떻게 터트리려는 거냐."

***

백희선이 사진을 보았다.

"성준혁…."

성준혁은 SL 제약 사장 성기호의 아들이다.

"군 복무 중이라서 아쉬웠는데, 드디어 휴가를 나왔구나. 시기가 참 좋아."

그녀가 전화를 걸었다.

"진행해."

- 알겠습니다.

그녀가 전화를 끊고서 사진을 손끝으로 만지며 웃었다.

"너 내 목마가 되어라."

***

성준혁이 클럽에 가서 친구와 술을 마시며 말했다.

"군대에도 클럽이 있으면 좋겠다."

"너 벌써 일병이잖아. 이렇게 빨리 시간이 가면 금방 제대하겠던데?"

"야. 부대 안에 있어 봐. 시간 진짜 안 간다."

그들의 테이블에 젊은 여자가 앉았다. 상당한 미녀였다.

그녀가 성준혁을 보며 웃었다.

"어머. 오빠 내 취향이다."

성준혁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제가요?"

"그럼요. 잘생겼어요."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잘생겼다고 하는 사람은 다 사기꾼이라고 조심하라고 했는데…."

"호호. 이 오빠 웃기다. 우리 같이 놀아요."

그녀가 새 술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술을 따랐다. 손가락 사이 끼워져 있던 알약이 술잔으로 톡 떨어졌다.

그녀가 그 술잔을 성준혁의 앞에 놓으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배우예요. 배우."

"진짜요?"

그녀가 스마트폰으로 드라마 영상을 보여주었다. 화면에 그녀가 잠깐 보였다. 대사도 있었다.

성준혁의 친구가 놀란 소리를 냈다.

"어? 맞다! 나 이 드라마 봤다!"

나인세븐 엔터 출신 중에는 회사가 망한 후에도 프리랜서로 예전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가 성준혁의 옆에 앉으며 팔짱을 꼈다. 가슴이 팔에 닿았다. 흥분한 성준혁의 콧구멍이 커졌다.

성준혁은 군대에서 남자만 보다가 휴가를 나왔다. 지금 그의 예쁜 여자 저항력은 매우 낮았다.

그녀가 물었다.

"술 마실 줄 알죠?"

"술 진짜 잘 마십니다."

"그럼 우리 오늘은 해 뜰 때까지 술 마시면서 노는 거예요. 콜?"

"코, 콜."

***

차우진이 이튿날 딥어스테크 조사팀을 다시 소집했다.

특별조사팀이 SL 제약 사장 성기호에 관한 정보를 보고했다.

"자녀로는 딸과 아들이 한 명씩 있습니다. 딸은 SL 제약에서 일하고 있고, 아들은 대학생입니다. 현재는 군 복무 중입니다."

"그쪽은 더 조사하시고, 성기호 사장의 일정은요?"

"공식적으로 확인된 스케줄과 개인 스케줄이 있습니다."

"둘 다 보죠."

"일단 공식 행사입니다. 내일 기업 연합회가 주최하는 행사에 강사로 참석합니다."

"강연 주제는 어떻게 됩니까?"

***

SL 제약 사장 성기호가 기업 연합회가 주최한 공식 행사에 참석했다.

성기호는 행사에서 강연하는 다섯 명 중 하나였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간단한 교류의 장이 열렸다. 본 행사보다 여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행사가 끝날 때쯤이나 끝난 후에 도착했다.

성기호에게 차우진이 다가갔다.

"성기호 사장님?"

"음? 누구신가?"

차우진이 명함을 내밀었다.

"사덕리소스의 차우진입니다."

"아. 차우진 이사님이시군요."

"오늘 강연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성기호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사덕리소스는 뉴스를 통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광산 회사니까 우리 회사와는 업종이 아예 달라. 그럼 정말로 내 이야기가 듣기 좋았나 보군.'

차우진은 성기호와는 몇 분 정도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 붙잡고 있어 봤자 이상하다는 생각만 준다.

그래도 몇 분이면 상대가 그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

조사팀 팀원이 성기호의 사적인 일정을 보고했다.

차우진이 물었다.

"골프대회 심사위원이라…. 성기호 사장의 실력은 어떻습니까?"

"아마추어 골프대회 수상경력이 있습니다. 골프 실력에 자부심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차우진이 화면에 떠 있는 골프대회 정보를 가리켰다. 이번 주 토요일에 열리는 대회였다.

"저 골프대회는 어떤 겁니까?"

"기업 협회가 주최하는 가벼운 친목 대회입니다. 정식 골프대회가 아니라 비거리나 퍼팅 같은 걸 겨루는 시합입니다."

차윈이 스크린에 뜬 자료를 보며 말했다.

"성기호 사장은 선수가 아니라 심사위원으로 참석하는군요."

"예. 직접 공을 치는 건 아닙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입니다."

"저 대회에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가 자격에 제한이 있습니다만, 정식 대회가 아니라서 빈자리가 생기면 우리 회사 이름으로 추가 접수할 수 있습니다."

"자리를 마련해보시죠."

"선수는 누가…."

"제가 갈 겁니다."

"알겠습니다."

박효정이 물었다.

"차 이사님. 골프 잘 치세요?"

"지금부터 배워보려고요."

"네?"

"개인적으로 아는 골프 강사가 있는 분? 입이 무거우면 더 좋은데."

비서실에서 온 송미소가 손을 들었다.

"프로골퍼를 섭외할 수 있어요. 유명한 선수는 아니지만, 잘 가르쳐요."

"입은 무겁습니까?"

"사촌 언니예요. 입은 제가 막을 수 있어요."

"딱 좋군요."

***

차우진이 프로골퍼 송민정을 만났다. 그녀가 물었다.

"미소네 회사 이사님이시라고요?"

"예. 어쩌다 보니."

그녀가 차우진을 보며 말했다.

"미소가 자기가 담당하는 분이니까 잘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데…. 이렇게 젊으신 줄은 몰랐어요."

"동안입니다."

"혹시 골프 쳐본 적 있으세요?"

"전혀요."

"속성교육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대회 참석이 목표라서요."

"정식 대회는 아니라니까 참가에 뜻을 두는 정도는 속성으로 어떻게 가능하려나…. 일단 자세부터 보죠."

그녀가 골프채의 그립을 잡는 법과 스윙하는 법을 먼저 설명했다.

차우진이 배운 대로 골프채를 휘둘렀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음…. 진짜 완전 생초보시네. 제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해보세요."

그녀가 시범을 보였다.

"조금 더 허리를 돌리고, 팔의 각도는 조금 더 높게."

"이렇게?"

"잘했어요. 다리 각도를 조금 조정하죠. 저처럼요."

"이렇게?"

"잘했어요. 타점을 조금 조정할게요. 여기 이 부분을 저처럼 쳐보세요."

"아. 이렇게."

"잘하네요?"

그녀는 당황했다.

"아니, 왜 시키는 대로 다 하세요?"

"하지 말아야 했나요?"

"그게 아니라, 왜 가르쳐주는 걸 다 할 수 있냐고요. 골프 처음인 거 맞아요?"

"한 시간 전에는 골프채 잡는 법도 몰랐습니다만?"

그건 송민정도 안다. 직접 가르쳐봤는데 모를 수가 없다.

"그, 그렇죠. 근데 왜 벌써 이 정도로 칠 수 있는 거죠?"

"제가 원래 운동신경이 좋습니다."

그의 전투 센스는 멸망한 세계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도 살아남을 만큼 특별했다.

그렇다고 멸망 초기부터 이 정도 능력을 갖췄던 건 아니다.

운동신경은 타고났다. 거기에 각성 스킬의 보조 효과가 중첩됐다. 실전을 통해 익힌 전투 센스가 추가됐다.

그래서 송민정의 동작을 똑같이 따라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송민정도 인정했다.

"운동신경이 좋은 건 보면 알아요.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그러면 송 프로님이 시범을 잘 보여주셔서?"

"이게 시범 좀 본다고 되는 게 아닌데…."

차우진의 스윙은 너무 깔끔했다. 그의 스윙은 겨우 한 시간 배운 사람이 할 만한 게 아니다.

"골프채를 정말 잘 다루시네요?"

"제가 원래 기다란 걸 휘두르는 일을 잘합니다."

특히 기다란 칼을 잘 다룬다.

"그래 보여요."

"공은 언제 제대로 쳐볼 수 있습니까?"

"어…. 원래는 자세부터 잡고 나서 하려고 했는데…. 속성교육이니까 바로 갈까요?"

그녀가 차우진을 골프 연습장으로 데려갔다.

그녀가 그곳에서 공을 치는 시범을 먼저 보여주었다. 공이 딱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공을 때릴 때 이렇게 좋은 소리가 나야 해요."

차우진은 무기를 휘둘러 적의 급소를 때리는 걸 잘한다. 전장에서는 적의 칼을 피하면서 적이 방어하지 못하는 곳을 때려야 한다.

골프채는 맞받아치는 칼이나 방어하는 방패가 없다. 그냥 휘두르면 된다.

차우진이 골프채를 크게 휘둘렀다. 헤드가 골프공의 타점을 정확히 때렸다. 송미경이 친 곳과 같은 위치였다.

맑은소리와 함께 공이 멀리 날아가 골프 연습장의 그물망을 때렸다.

송민정이 감탄했다.

"와…. 미쳤다."

차우진이 말했다.

"난 야구가 아니라 골프를 배웠어야 했나 보다."

"어머. 야구 하셨어요?"

"아니요. 학교 다닐 때 야구를 안 배운 걸 후회하는 중입니다."

"아. 그러시…. 그럼 도대체 뭘 배운 거예요?"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차우진이 말을 돌렸다.

"이 정도면 골프 연습장은 넘어가도 됩니까?"

"몇 번 더 쳐보죠. 방금은 우연일 수도 있잖아요."

차우진이 스윙을 몇 번 더 했다. 그때마다 골프공이 쭉쭉 날아갔다.

차우진이 물었다.

"이 정도면?"

"할 말이 없네요."

"그럼 골프장에는 언제 가서 연습할 수 있습니까? 내일 스케줄 가능합니까?"

"네? 공을 잘 치긴 하는데 벌써 필드에 나가는 건 좀…. 기초를 더 단단히 쌓으시는 게 나중에 좋아요."

"선수가 되려는 게 아니라 속성교육만 받고 친목 대회에 나가야 해서."

송민정이 손뼉을 쳤다.

"아. 맞다. 그렇게 들었죠. 하도 잘 치시니까 제가 그 생각을 잠깐 잊었어요. 그런데 내일 당장 골프장을 예약하려면 비용이…. 아니다. 이사님이라고 하셨으니 괜찮으시겠지."

안 괜찮다. 기왕이면 싼 곳이 좋다.

송민정이 말했다.

"비용은 두 배로 들지만, 대신에 내일 당장 갈 수 있는 곳이 있어요. 거리도 가까워요. 거기로 가시죠."

"어…. 그러시죠. 오늘부터 라면만 먹어야겠네."

"어머. 차 이사님. 농담도 잘하신다. 호호."

"농담 아닌데."

그녀가 조언했다.

"필드에 나가면 연습장에서 해본 것하고는 또 느낌이 다를 거예요. 너무 실망하지는 말아요. 오늘 한 것만 해도 진짜 대단한 거니까."

***

이튿날 골프장에서 두 시간쯤 연습한 후에 송민정이 물었다.

"진지하게 묻는 건데요. 프로 골프 선수를 목표로 할 생각 없어요?"

"없습니다."

"아니, 왜 없어요?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해야죠!"

"지금 이건 야매로 배운 거라서."

"야매 아니에요! 프로골퍼인 내가 가르쳤잖아요!"

113. 대회

배우 정예지는 기업 협회가 주관하는 친목 골프대회에 게스트로 참석했다.

그녀는 오늘은 야구장에서 시구하듯이 공을 치면 된다.

이 스케줄 자체는 돈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회사에서 이 스케줄을 잡은 건, 오늘 대회 참석자 중에 기업 임원들도 있기 때문이다.

매니저가 말했다.

"나중에 광고 딸 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어서, 홍보 차원에서 이 스케줄을 잡았대."

정예지도 오늘 스케줄을 반겼다.

"내가 골프 좀 치는 거 어떻게 알았지? 오늘은 여기서 놀다 가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온 사람이 정예지 혼자는 아니다. 배우 강수민도 같은 이유로 참석했다.

강수민이 말했다.

"예지야. 너 나랑 골프 실력이 비교될 텐데 괜찮겠어?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빠지는 거 어때?"

정예지가 피식 웃었다.

"웃기네. 오늘 행사가 골프 예능 방송이 아닌 걸 다행으로 알아. 방송이었으면 넌 시청자들 앞에서 나한테 발렸어."

"오늘 결과가 말해주겠지."

"결과를 볼 것도…. 아. 잠깐. 나 아는 사람 만났어."

정예지가 차우진을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우진 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

"대회에 참석하러?"

"우와. 오빠, 골프 칠 줄 알아요?"

"그냥 골프채만 며칠 휘둘러본 정도입니다."

"그래도 운동신경이 워낙 좋으니까 기본은 하겠다."

옆에서 강수민이 끼어들었다.

"어디서 뵌 분인가 했더니, 저번에 무슨 회사 연구소 앞에서 촬영할 때 본 분이네요?"

"그걸 기억합니까?"

차우진은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모르기를 바란다. 얼굴을 잘 기억하는 사람은 목격자가 될 수도 있다.

"민지랑 아는 분이잖아요. 예지가 그쪽을 자기 매니저인 척했고요. 나중에 알아봤더니 매니저는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기억하죠."

"아아. 그러면 기억할 만하지요."

곽민지는 강수민이 출연한 드라마에도 잠깐 출연했다.

강수민이 물었다.

"그런데 혹시 골프 초보?"

"그렇죠."

강수민이 정예지를 쓱 보았다.

'예지가 되게 반가워하던데?'

강수민이 일부러 제안했다.

"그럼 나한테 배울래요? 나 골프 좀 치는데."

정예지가 발끈했다.

"야. 너 가. 배워도 나한테 배우지 왜 너한테 배우겠어?"

"내가 더 잘 치니까?"

"오늘 나한테 지고 울지 마라."

"그럼 이기는 사람이 가르쳐주는 거, 콜?"

"코, 콜!"

***

SL 제약 사장 성기호가 골프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공을 치는 걸 보며 말했다.

"나도 그냥 공이나 칠걸, 괜히 심사위원을 맡아서."

옆에서 비서가 말했다.

"사장님이 이런 친목 대회에 끼시면 그냥 학살 아닙니까?"

"야. 지금 기분으로는 골프장에서 시원하게 다 쓸어버리고 싶다. 회사고 자식이고 뭐 하나 풀리는 게 없는데 이거라도 하고 싶다고."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냐."

***

정예지와 강수민의 비거리 경쟁은 강수민이 이겼다.

"훗. 역시 넌 내 상대가 안 된다니까."

정예지가 반박했다.

"내 공이 더 멀리 날아갔잖아!"

"넌 방향이 틀렸잖아. 공이 숲으로 날아가면 어떻게 해? 누가 선출 아니랄까 봐 힘만 세다니까."

비거리 경쟁은 공을 멀리 날릴수록 점수가 높아진다. 조건은 딱 하나, 그 공이 필드 위에는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예지는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공 하나를 숲으로 날렸다.

"이씨…. 아직 끝난 거 아니다. 퍼팅 시합에서는 내가 이기면 돼."

"퍼팅은 힘보다 기술이 더 중요한데 되겠니? 호호호."

차우진이 공을 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강수민이 말했다.

"저 초보자는 내가 데려가서 가르쳐야겠다."

"아직 승부 안 끝났다고!"

차우진이 골프채를 위로 들었다.

"오. 초보치고는 자세는 제법인데?"

골프채가 원을 그렸다. 헤드가 공을 때리는 순간 맑은소리가 났다.

공이 쭉쭉 뻗어 나갔다.

강수민의 시선이 공을 따라갔다.

"공이…. 어디까지 날아가는 거야?"

성기호가 커피를 마시려고 손을 내밀었다.

공 때리는 소리가 맑게 들렸다. 성기호가 고개를 돌렸다.

"음?"

공이 멀리 날아가는 게 보였다.

"어…. 저거 비거리가…."

비서가 뒤에서 감탄했다.

"엄청난데요?"

"프로 수준인데? 이런 대회에 아마추어를 학살하려고 낀 사람이 있나? 거 누군지 적당히 하지 말이야."

그가 공을 친 사람을 확인했다.

"젊군."

"배는 좀 나왔는데요?"

"그 배에서 나오는 파워겠지. 체형이 나랑 비슷하잖아."

"저기, 배는 비슷한데 다리 길이가…."

"너 요즘 월급이 남아도냐? 좀 깎아줘?"

"자세히 보니까 사장님이랑 정말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골프는 비거리가 다가 아니지. 중요한 건 정확성 아니겠어?"

"물론입니다. 근데 공이 깃대 방향으로 날아갔는데…."

"운이 좋았겠지."

정예지가 말했다.

"저 정도 비거리에 정확도면 프로 수준이네?"

강수민이 따지듯이 말했다.

"초보라며!"

정예지가 자랑했다.

"하긴. 저 오빠는 운동능력이 탁월하니까 저럴 수도 있지."

그녀가 강수민을 놀렸다.

"네가 가르칠 실력이 아닌 것 같은데?"

"아직 한 번밖에 안 쳤잖아. 너처럼 힘만 센 데 운이 좋았던 거겠지!"

차우진이 다시 공을 때렸다. 그 공은 비슷한 코스로 날아가 비슷한 곳에 떨어졌다.

정예지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운이 두 번이나 좋으면 그건 실력이지."

"야. 솔직히 말해봐. 저 남자, 골프 초보 아니지? 우리 놀린 거지?"

"원래 운동능력이 좋다니까? 그리고 우리가 아니라 너를 놀린 거야. 저 오빠랑 나랑 같은 편이거든."

***

차우진이 생각했다.

'역시 저격이랑 비슷한 감각이야.'

장거리 저격을 할 때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차우진도 지금 그러고 있었다.

지금 이 골프장은 풍속과 풍향이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람이 크게 바뀌지도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공도 비슷한 곳에 떨어뜨릴 수 있었다.

이 대회의 비거리 측정 부분은 공을 세 번 치게 되어 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차례였다.

'성기호 사장의 관심을 끌려면 좀 더 보여줘야겠지.'

차우진이 이번에는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한 상태로 스윙을 했다. 골프채 헤드가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공의 어디를 때려야 멀리 날아가는지 며칠 동안 속성 연습으로 파악했다.

차우진이 팔의 근육을 조절해 헤드의 방향과 타격 지점을 미세하게 조정했다. 하는 김에 전투보조 스킬인 공격력 강화까지 살짝 걸었다.

헤드가 공의 타점을 정확히 때렸다.

맑은소리와 함께 공이 쭉쭉 뻗어 나갔다. 그 공은 필드를 가로질러 한참을 날아가다가 깃대가 있는 그린 위에 떨어졌다.

갤러리와 참석자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졌다.

"우와아!"

"저 비거리가 가능한 거였어?"

"프로 중에서도 거의 없을걸?"

강수민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어버버…. 예지야. 공이 왜 저기까지 날아가? 저런데도 초보라고?"

"아니, 나도 저 정도일 줄은…. 힘이 센 건 알고 있었지만."

"골프를 힘으로 치면 역도 선수가 세계를 제패했게?"

"그치?"

비거리 경쟁이 끝났다.

다음 스케줄은 그중에서 상위권 열 명만 뽑아서 퍼팅 경쟁을 하러 가는 것이다.

오늘 대회의 남녀 참여자 수는 7대 3의 비율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7등, 여자는 3등이 커트라인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퍼팅 경쟁을 하는 건 열두 명이었다. 초대 연예인인 정예지와 강수민은 비거리와 상관없이 퍼팅 시합에도 참여했다.

사람들이 퍼팅을 위해 그린으로 걸어갔다.

정예지가 차우진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같이 걸으며 물었다.

"우진 오빠. 골프 초보라면서요."

"초보 맞아요."

"근데 그 비거리는 뭐예요? 특히 마지막에 친 거요."

"힘이 세서?"

"골프는 힘만 세다고 되는 운동이 아닌데요?"

"정확도도 높아서?"

"마지막 공은 프로 선수 중에도 그렇게 칠 수 있는 사람이 드물 걸요?"

차우진은 마지막 공을 칠 때 공격력 강화 스킬에 시간 가속 스킬까지 사용했다.

"그런데, 나랑 계속 걸으면 남들이 이상하게 볼 텐데?"

"알아요. 가려고 했어요. 이따가 봐요."

차우진이 정예지를 보낸 건 성기호와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일부러 성기호와 조금 가까운 곳에서 걸었다. 성기호가 다가왔다.

"혹시 사덕리소스 차 이사님?"

"성기호 사장님. 다시 뵙는군요."

"이야아. 멀리서 봤을 때는 혹시나 했는데, 가까이서 보고 알았습니다. 골프 좋아합니까?"

"즐기는 편입니다."

"하긴. 그렇게 잘 치는데 안 좋아할 리가 없지."

성기호가 정예지 쪽을 보며 말했다.

"연예인하고도 아는 사이입니까? 혹시 CF?"

"그냥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입니다."

"이야아. 부럽습니다. 좋을 때네요."

"그런 사이는 아니고요."

차우진은 성기호와 오래 이야기하진 않았다.

괜히 말을 많이 붙이면 의심을 산다. 접촉은 자연스러워 보여야 하고, 성기호 쪽에서 먼저 접근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퍼팅 경쟁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

퍼팅 경쟁이 시작됐다. 공은 그린의 경계를 따라 열두 개가 놓였다. 누가 어느 공을 칠지는 추첨으로 정했지만, 공을 치는 순서는 비거리가 멀리 나온 사람부터 해야 한다.

이 퍼팅 경쟁은 나중에 할수록 유리했다. 먼저 친 사람의 공을 보고 그린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우진은 비거리 경쟁 때 제일 먼 곳까지 공을 날렸다. 그래서 퍼팅은 차우진이 첫 번째였다.

차우진에게 경쟁심을 보이는 남자가 세 명 있었다. 모두 젊은 남자였다.

그들은 차우진의 비거리를 보고 눈빛이 변했다가, 그가 정예지와 편안하게 대화하는 걸 보고 질투했다.

"퍼팅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지."

"어디서 힘만 센 곰 같은 사람이 와서는."

"몇 번 만에 들어가는지 내가 똑똑히 보겠어."

강수민도 말했다.

"힘이 센 대신에 퍼팅은 못 할 거야."

"난 우진 오빠가 잘할 거 같은데?"

"말이 되니? 그 비거리에 퍼팅까지 잘하면 골프 선수를 해야지."

차우진이 공 앞에서 그린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했다.

***

프로골퍼 송민정이 토요일 낮에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딥어스테크 비서실 직원 송미소가 물었다.

"언니. 무슨 생각해?"

"차 이사님 말이야. 이해가 안 가서."

"우리 차 이사님? 왜? 골프 가르쳐보니까 영 아니야?"

"아니. 너무 빨리 배워. 그게 이해가 안 가."

"차 이사님은 머리가 좋으니까 배우는 것도 잘하실 거야. 기술력이 엄청나시거든."

"너네 회사가 하는 기술하고 골프 기술이 같니?"

송미소는 골프를 쳐본 적이 없다.

"왜? 골프를 잘하셔? 공이 엄청 멀리 날아가?"

"비거리만 대단한 게 아니야. 공이 굴러가는 길을 보는 능력은 더 대단해."

***

멸망한 세계에는 제대로 관리되는 골프장이 없다.

사람들은 그런 평지가 남아있으면 밭을 만들어 식량을 키운다. 화학비료를 만들기 어려운 세상에서는 재배면적이라도 늘려야 식량을 확보할 수 있다.

차우진은 골프장이 아니라 지뢰밭에서 땅의 굴곡을 파악하는 법을 배웠다. 그건 누가 가르쳐줘서 배운 게 아니라, 목숨 걸고 싸우면서 배워야 했다.

박창수가 멸망 이전에는 골프장이었던 평지를 보며 말했다.

"우진아. 난 지뢰가 묻혀 있는 곳을 다섯 개 찾았다. 넌?"

"스무 개."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땅의 표면에 미세하게 굴곡이 있잖아. 저거 다 인공적인 거야."

"이 새끼들이 지뢰가 남아도나. 어떻게 스무 개를 심어?"

"그만큼 중요한 게 이쪽에 있겠지."

***

차우진이 땅의 상태를 살폈다. 지표면의 미세한 굴곡을 파악해 계산하면 공이 어디로 어떻게 굴러갈지가 보였다.

'길은 보이는데, 그대로 굴러갈지는 운에 맡겨야겠지.'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하며 공을 툭 쳤다. 하얀 공이 또르르 굴러갔다. 공은 홀을 조금 빗나가는 방향으로 가는 듯하다가 부드럽게 원을 그렸다.

힘도 적당했다. 하얀 골프공이 구멍에 쏙 들어갔다.

정예지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들어갔다아아!"

***

강수민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세 번 만에 공을 홀에 넣었다.

그녀가 정예지를 보며 자랑했다.

"봤어?"

"세 번이나 치고서 뭘?"

"너도 세 번에 넣으면 내가 이기는 거 알지?"

비거리 경쟁은 강수민이 이겼다. 공은 정예지가 더 멀리 보냈지만, 그녀의 공은 숲으로 날아간 것도 있기 때문이다.

퍼팅에서 비기면 승부는 강수민이 이기게 된다.

정예지가 공 앞에 섰다.

'최소한 두 번에 넣어야 해.'

그래야 동점이라도 한다.

그녀가 잠시 고민하다가 차우진에게 손짓했다.

"우진 오빠. 내 캐디 좀 해요."

강수민이나 정예지는 비거리 승부에서 커트라인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제 두 사람의 퍼팅은 대회 순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녀가 지금 하는 건 대회 이벤트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정예지가 차우진을 불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차우진이 다가왔다.

"배우가 스캔들 걱정을 안 하네?"

"지금 그거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114. 바다

정예지가 깃대를 노려보며 물었다.

"어떻게 쳐야 해요?"

그녀의 순서는 거의 마지막이다.

앞에서 이미 열 명이 친 공이 굴러갔다. 그걸 관찰하면 어떤 힘으로 친 공이 어느 코스를 얼마나 굴러가는지 파악할 수 있다.

차우진이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선을 그렸다.

"이 방향으로 치면 공이 이런 코스를 따라 이렇게 굴러갈 겁니다."

"와. 진짜요?"

"힘 너무 주지 마요. 경사가 약간 있어서 공이 생각보다 잘 굴러갈 테니까."

"이 방향으로 쳐요?"

"3도 더 옆으로."

"3도? 그런 걸 어떻게 조정해요? 각도기라도 있나?"

"그냥 살짝 옆으로."

"이렇게?"

"한 번에 넣는 건 욕심이니까 두 번에 넣어요. 힘 빼고."

정예지가 힘을 빼고 공을 툭 쳤다.

공이 또르르 굴러갔다. 차우진이 말한 코스 그대로 굴러간 공이 홀에 쏙 들어갔다.

정예지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꺄악! 한 번에 들어갔어요!"

"그게 되네?"

"진짜 우진 오빠가 말한 그대로 들어갔다고요!"

"나도 놀라는 중입니다."

***

차우진은 우승 상품을 받았다.

친목 대회라 상패가 중요했지 상금은 그리 크지 않았다. 현금이 아니라 호텔 숙박권과 호텔 뷔페 식사권, 그리고 이 골프장 4회 이용권이 따라왔다.

성기호 사장이 상을 준 후에 웃으며 작게 말했다.

"차 이사. 그냥 골프 선수를 하시지."

"취미로 치는 건데요."

"취미라고 하기에는 실력이 장난 아니던데?"

"운이 좋았죠."

"혹시 다른 취미도 있습니까?"

차우진은 특별조사팀이 조사한 성기호의 취미를 떠올렸다.

- 골프 외에도 낚시를 좋아합니다. 바다낚시를 선호합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남들 다 하는 거 좋아합니다. 등산이나 낚시 같은 거요."

"낚시 좋아해요? 내일 나 바다에 나가는데 생각 있어요?"

"내일은 일요일이라서 노는데 잘됐네요."

***

라이프레인 제약 백희선 이사가 전화로 보고를 받았다.

"성준혁은 이제 약을 탄 술을 충분히 마셔봤겠네. 그러면 다른 술은 맛이 없지."

- 어떻게 할까요?

백희선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약을 계속 먹여. 마약 검사에서 빼도 박도 못하게."

***

성기호 사장의 아들 성준혁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저번에 마신 술은 어디서 팔아요? 그거 좋았는데."

지난번에 성준혁을 유혹한 여자가 웃었다.

"어머. 그 술 말이구나. 그거 비싼데."

"얼만데요?"

여자가 핸드백 속의 알약을 떠올리며 말했다.

"됐어요. 휴가 나온 군인 월급에 어떻게 손대겠어요? 내가 살 테니까 오늘도 밤새도록 마셔요."

***

일요일 오전에 SL 제약 사장 성기호와 차우진이 인천 요트 선착장에서 배에 올랐다. 일반 낚싯배가 아니라 열 명쯤은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요트였다.

그 배는 성기호의 소유는 아니다. 그는 개인 요트가 없다.

성기호가 설명했다.

"고기를 잡으러 가는 곳이 매번 바뀌잖아. 그래서 그때마다 그 지역에서 요트를 렌트해. 그러면 그 지역을 잘 아는 선장이 고기가 잡히는 포인트를 콕 집어주거든."

"확실히 그게 더 편하겠네요."

"그렇지. 그래서 내가 요트를 안 사는 거야. 나 같은 낚시꾼은 이러는 게 최고지."

오늘 모임의 주최자는 성기호다. 그런데 그는 차우진만 초대한 게 아니다. 손님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성기호는 딸인 성혜리도 데려왔다. 차를 운전한 비서는 선착장 근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성기호가 배에서 말했다.

"차 이사는 참 부지런하고 능력도 좋아. 우리 아들놈도 좀 닮아야 하는데."

성혜리가 한마디 했다.

"준혁이는 아빠 닮았잖아요."

"어디가?"

"얼굴?"

"얼굴은 빼고 닮았어야지."

"그리고 군대에서 휴가 나왔으니까 놀 수도 있죠."

차우진은 정보를 얻었다.

"누가 휴가를 나왔습니까?"

성혜리가 대답했다.

"제 동생이요. 휴가 나온 사람한테 공장에 들어가라는 게 말이 되냐고요. 아빠가 너무하죠?"

손님은 차우진 외에도 네 명이나 더 있었다. 성혜리는 다른 손님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이 모임에 처음 참석하는 건 차우진뿐이었다.

성기호가 그때그때 다른 배를 빌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배나 빌리는 건 아니다.

그는 인천과 대부도 사이 바다로 갈 때는 보통 이 배를 빌렸다. 선장이 이쪽 바다의 낚시 포인트를 잘 알기 때문이다.

배가 바다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낚시가 시작됐다.

오늘 손님 중에 성혜리와 비슷한 나이는 차우진밖에 없었다. 그녀가 말을 걸었다.

"낚시해봤어요?"

"좀 합니다."

차우진은 낚시라면 많이 해보았다.

멸망한 세계에서 식량을 확보하려면 수단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낚시도 좋은 식량 확보 수단이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낚싯줄은 쓸모가 많았다.

그런데 그건 다시 만들 수 없다. 고기를 잡다가 낚싯줄의 중간이 끊어지면 피해가 너무 크다.

그래서 차우진은 낚싯대와 낚싯줄을 직접 만들어 썼다.

그런 수제품으로도 물고기를 잡았는데, 현대의 최신 기술이 들어간 낚싯대와 낚싯줄을 쓰면 더 쉽게 잡을 수 있다.

커다란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차우진이 낚싯대를 잡아챈 후에 릴을 감았다.

고기의 힘이 강했다. 하지만 상대는 멸망한 세계에서 대형 상어도 잡던 차우진이다.

커다란 물고기가 얼마 버텨보지도 못하고 배 위로 올라왔다.

성기호가 물고기의 크기를 보며 감탄했다.

"오늘 1등은 차 이사겠는데?"

어느새 점심때가 됐다. 그 요트에는 작은 주방이 있었다.

차우진이 제안했다.

"점심은 제가 만들어도 될까요?"

성혜리가 물었다.

"해물 라면이요?"

"그것도 좋지만, 오늘 잡은 고기를 써야죠."

차우진이 생선살로 몇 가지 요리를 만들었다. 즉석 어묵부터 튀김, 매운탕 등이 순식간에 나왔다.

"맛 좀 보시죠."

성혜리가 어묵을 먹어보고 감탄했다.

"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이렇게 탱글탱글하면서도 감칠맛이 나는 어묵은 진짜 처음이에요."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요리 자체는 특별할 게 없는데 왜 이렇게 맛있죠?"

"마법의 가루?"

"어머. 재미있는 이론이네요?"

"재료도 좋으니까 맛있는 겁니다."

성기호도 매운탕을 먹어보고 감탄했다.

"크으. 진짜 얼큰하고 시원하다. 차 이사. 혹시 요리도 취미야?"

"먹는 걸 좋아해서요."

성혜리가 물었다.

"혹시 회도 뜰 줄 알아요?"

멸망한 세계에서는 날생선은 잘 먹지 않는다.

고기를 먹을 때는 다른 식재료를 넣고 끓여서 양을 늘리는 방식이 선호된다.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어묵이나 튀김처럼 사치스러운 요리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회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멸망한 세계에는 약이 부족하다. 기생충 감염 리스크 때문에 회는 즐기는 음식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도 회를 안 먹는 건 아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먹는 사람도 있다.

대신에 회를 뜰 때는 기생충을 확실히 제거하는 기술을 썼다.

차우진이 낚시로 잡은 생선 한 마리를 꺼내 순식간에 회를 떴다. 손이 빨랐다.

그는 생선살이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얇게 썰어서 넓은 접시에 꽃잎 모양으로 깔았다.

성혜리가 감탄했다.

"빨라!"

성기호가 회와 매운탕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크으. 내가 이 맛에 바다에 나온다니까."

성혜리가 물었다.

"차 이사님은 술은 안 안 마셔요?"

"마시려고 차를 안 가져왔습니다."

"어머. 그냥 대리를 부르시지."

"여기 올 때는 전철이 빠르더군요."

바다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셨다.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적당히 술이 들어간 후에 차우진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회사 상황을 질문하면 경계만 산다. 그는 다른 걸 물었다.

"동생이 휴가 나왔다고요?"

"네. 군대 갔거든요. 며칠 더 있다가 복귀해요."

그녀가 툴툴댔다.

"휴가 기간 내내 집에서는 잠만 자고 밤에 나가서 아침까지 논다니까요. 체력도 좋지. 아니, 원래 그렇게 체력이 좋은 애가 아니었는데 군대 가서 좋아졌나?"

"특수부대라도 갔나요?"

"에이. 아니에요. 의무대에 있어요."

차우진은 의심이 들었다.

'체력을 당겨 쓰는 약물은 보통 마약이나 각성제인데.'

차우진은 그중에 최신 기술로 만든 것을 안다.

'레드 크리스털.'

그걸 쓰면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이라도 체력을 당겨 쓸 수 있다. 오래, 많이 당겨쓸수록 몸은 망가지지만 가능은 하다.

'성준혁이 타깃인가?'

그 배에는 여덟 명이 타고 있다. 선장 한 명, 성준혁과 성혜리 부녀, 그리고 차우진을 포함한 손님 다섯 명이다.

다른 손님은 남자만 넷이다. 그중에 성혜리나 차우진처럼 젊은 사람은 없었다.

성혜리는 오늘 낚시가 마음에 들었다.

'아빠 낚시 친구들 사이에 끼는 건 불편했는데, 오늘은 되게 좋다.'

평소에는 성기호가 같이 낚시를 가자고 해도 거절할 때가 많았다. 나잇대가 안 맞아서 재미없다는 이유를 대곤 했다.

오늘 따라온 건 성기호가 이번에는 젊은 사람을 구해놨다고 자랑해서였다.

'골프를 굉장히 잘 치는 사람이라고 해서 얼굴이라도 보려고 왔더니, 낚시도 잘하네? 요리도 잘하고.'

이미 다들 낚시는 뒷전이고 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안주가 너무 맛있었다.

그녀가 맑은 탕을 끓이는 차우진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이사님이 요리를 이렇게 잘해요?"

"누나랑 친구가 먹는 것만 잘해서요. 그건 아주 잘하죠."

"네?"

"아. 농담입니다. 부족한 식량을 어떻게든 맛있게 만들어 먹는 법을 연구하다 보니까, 먹을 만하게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식량이 부족하다면…. 어느 나라에 계셨는데요?"

"한국에서요."

"아. 그것도 농담이시구나."

"그렇죠."

"골프도 잘 치신다면서요."

"그냥 멀리 치는 거랑 홀에 넣는 걸 잘하는 것뿐입니다."

어제 대회는 드라이버로 멀리 치는 것과 그린에서 퍼터로 공을 잘 넣는 것 두 가지 잘하면 됐다. 차우진은 지난 며칠간 그 두 가지만 속성으로 배웠다.

"어머. 그게 골프를 잘하는 거잖아요."

"어…. 실전에서는 의외로 허당일 수도 있습니다."

"뭐예요. 프로골퍼 수준이라고 들었는데, 겸손하시다."

"사실인데."

그녀가 오늘 낚시에 나온 이유 중에는 차우진이 어제 골프 행사의 우승자라는 것도 있었다.

그녀도 골프를 친다. 그래서 낚시가 재미없으면 골프 이야기나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낚시는 굳이 골프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즐거웠다.

'이런 낚시라면 다음에도 따라와도 재미있겠는데?'

그녀는 오늘 하루가 참 좋았다. 다만, 딱 한 가지가 아쉬웠다.

'배만 안 나왔으면 딱 좋았을 텐데.'

그녀는 손님을 초대한 쪽이라서 차우진만 상대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녀가 다른 네 명과도 말 상대라도 해주러 움직였다.

바람이 불었다. 요트 끝에서 술을 마시고 두 팔을 쫙 벌리며 바람을 맞는 사람이 있었다.

문제가 생겼다. 배가 흔들렸다. 남자의 몸이 난간에서 휘청였다.

"어? 어?"

성혜리가 황급히 남자를 잡아당겼다. 비틀거리던 남자가 배 안쪽으로 들어왔다.

"어우. 혜리야. 고맙다. 죽는 줄 알았네."

"아저씨. 조심 좀 하세요."

"헛짓하지 말고 앉아서 술이나 마셔야겠다."

그는 술 마시는 자리로 걸어갔다.

성혜리가 난간에 걸터앉았다.

"휴우. 나도 술을 좀 마셨나?"

배가 다시 크게 흔들렸다. 성혜리의 엉덩이가 미끄러졌다. 방향은 난간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이었다.

"어맛!"

그녀를 잡아줄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몸이 뒤로 뒤집혔다. 하늘이 빙글 돌아가는 게 보였다.

그녀의 몸이 그대로 바다에 떨어졌다.

"꺄악!"

그녀는 당연히 배가 멈출 줄 알았다.

'구해줘….'

배에는 자동차 같은 브레이크가 없지만 그래도 감속을 하면 표가 난다.

그런데 배가 계속 멀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떨어질 때 갑판에 아무도 없었어.'

급히 소리라도 지르려고 했다. 입에 물이 들어왔다.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성혜리는 수영은 할 줄 안다. 그런데 물에 떨어질 때 받은 충격 때문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뒤늦게 후회했다.

'구명조끼 입을걸.'

오늘 저 요트에는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머리까지 물속에 완전히 잠겼다. 멀어지는 배가 일으키는 포말만 보였다.

차우진은 성혜리가 물에 떨어질 때 낸 소리를 들었다.

그가 요트 내부 주방에서 갑판으로 뛰어 올라왔다.

성혜리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차우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성혜리 씨!"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해서 차우진을 쳐다보았다. 성기호가 물었다.

"차 이사? 혜리는 왜?"

"안 보입니다."

"에이. 어디 있겠…."

"바다에 빠졌을 수 있습니다."

"어?"

조금 전에 난간에 있다가 떨어질 뻔한 남자가 말했다.

"어? 혜리는 저기 난간에 있었…."

성기호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배, 배 빨리 돌려! 빨리 돌리라고!"

차우진은 바다를 보았다. 성혜리가 보이지 않았다.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배를 돌릴 시간이 없다. 당장 구조하지 못하면 그녀가 죽는다.

차우진이 배 위에서 바다로 다이빙했다.

115. 바닷속

차우진은 오늘 이 배에 정보를 수집하러 왔다.

누군가 바다에 빠지는 사건은 예정에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죽는 걸 구경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갑판 뒤쪽으로 달려가 바다로 다이빙했다.

성기호가 배 위에서 소리를 계속 질렀다.

"빨리 배 돌리라고!"

성혜리의 몸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수면 위로 비치는 햇빛이 점점 멀어졌다.

그녀가 배가 멀어지는 방향을 보았다. 그 방향에서 다가오는 게 있었다.

'물개? 상어? 돌고래?'

사람이었다.

'빨라?'

차우진은 성혜리의 위치를 찾을 때 전투 센스를 사용했다.

그의 전투 센스는 적의 은밀한 움직임을 잘 포착한다. 그 감각을 써서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을 찾았다.

배의 스크류와 선체가 일으키는 파동이 탐색을 방해했다.

성혜리가 어디쯤 떨어졌는지는 안다. 차우진이 그 위치를 목표로 잠영하며 이질적인 움직임을 계속 탐색했다.

배와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다른 움직임이 잡혔다.

'찾았다.'

차우진이 가라앉는 성혜리를 향해 물속에서 돌진했다.

성혜리는 사람이 그녀 쪽으로 헤엄치며 다가온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급히 손을 휘저었다. 소리도 지르려다가, 실수로 물을 먹었다.

"켁."

숨을 참기 더 힘들어졌다. 기침이 나오려고 하는데 폐에는 뱉어낼 공기가 없었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팔다리에 힘이 빠졌다.

차우진이 빠른 속도로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왼팔로 감싸 안았다. 그런 후에 수면을 향해 이동했다.

잠시 후에 두 사람의 머리가 바다 위로 올라왔다.

성혜리는 공기를 만나자마자 숨을 몰아쉬었다.

"하악. 켁! 하악. 콜록!"

물속에서 물을 잘못 마셔서, 숨을 쉬어야 하는데 자꾸 기침이 나왔다.

차우진은 그녀의 얼굴이 물 위로 확실히 나오게 하려고 허리를 꽉 안았다.

그녀는 숨을 쉬고 기침하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진정됐다.

"하악. 하악. 우에엑!"

맛있어서 많이 먹은 점심까지 토해낸 후에 그녀가 물었다.

"여, 여기가 어디예요?"

차우진은 그녀를 뒤에서 안고 있었다. 그가 대답했다.

"용궁은 아니죠."

"나 심청이 된 거예요?"

"공양미가 아쉬운 집안은 아닐 텐데, 바다에는 왜 뛰어든 겁니까?"

"난간에 걸터앉았다가 미끄러졌어요."

멀리까지 갔던 요트가 선회하는 게 보였다. 그 배가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설사 이 위치에 도착한다고 해도 그녀가 빠진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성혜리를 찾아낼 때까지 그녀가 물속에서 숨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빠졌었는지 깨달았다.

"나 진짜 죽을뻔했구나."

"어쨌든 살아있습니다."

차우진은 뒤쪽에서 성혜리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성혜리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속삭여도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살려줘서."

차우진은 의도를 가지고 배를 탔다. 그랬더니 성혜리가 바다에 빠졌다.

차우진이 설명했다.

"내가 오늘 저 배에 안 탔으면 성혜리 씨도 바다에 안 빠졌을 겁니다. 하필 배가 크게 흔들릴 때 그 난간에 앉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살려준 거면 살려준 거지."

배가 다가왔다. 그 배는 뒤쪽 문을 열면 바다에 닿는 계단이 생긴다.

성혜리가 말했다.

"저기, 나 그거 못 본 거로 해줘요."

"토한 거요?"

"아니, 진짜, 못 본 거로 해달라니까요?"

"어…. 못 봤습니다."

두 사람이 계단을 밟고 배 위로 올라갔다.

성기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혜리야! 괜찮아?"

"괜찮아요. 바닷물은 좀 마셨지만요. 물이 짜요."

"다, 다행이다."

"나 구명조끼부터 좀 줘요. 배에서 내릴 때까지 입고 있을래요."

"어? 그렇지. 선장! 조끼 좀 가져와!"

성혜리가 진정된 후에 성기호가 차우진에게 말했다.

"차 이사. 진짜 고마워. 내 딸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잖아."

"수영을 잘하니까 목숨을 건 것은 아닙니다."

"진짜 고마워."

배는 항구로 방향을 틀었다. 낚시를 더 할 상황이 아니었다.

차우진은 아까 만들던 맑은 탕을 마저 만들어서 국물만 가져왔다.

"마셔봐요."

성혜리가 두 손으로 그릇을 받았다.

"어머. 고마워요. 안 그래도 좀 추웠는데."

그녀가 국물을 조금 마셨다.

"맛있다."

"배고파서 그럴 겁니다. 속이 비었으니까."

그녀가 눈을 살짝 흘겼다.

"못 봤다더니."

"못 봤습니다."

성혜리가 물었다.

"골프만 잘 치는 게 아니라 수영도 잘하던데요?"

멸망한 세계에서 고기를 잡을 때 낚시만 한 건 아니다. 직접 물에 들어가서 작살로도 잡았고, 바닥에 있는 조개나 게도 잡았다.

"식량이 필요해서."

"네? 아. 해루질이요?"

"어. 그렇죠."

"물속에서 진짜 빠르던데요. 처음에는 사람이 아니라 돌고래인 줄 알았어요."

"돌고래보다는 느립니다."

성혜리가 차우진을 힐끗거리며 생각했다.

'이상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었다.

'차 이사님은 골프도 프로처럼 잘하고, 수영도 선수처럼 잘하는데, 어떻게 배가 나올 수 있지?'

그녀는 살려준 사람에게 그걸 물어볼 만큼 예의가 없지는 않았다.

배가 요트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육지에 있던 비서가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다.

성기호 사장이 비서에게 말했다.

"병원부터 가자."

성혜리가 말했다.

"나 괜찮다니까요?"

"괜찮은지 아닌지는 병원에 가서 확인해야지. 네가 의사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그치만…."

성혜리가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성기호가 얼른 말했다.

"차 이사. 다음에 내가 꼭 인사할게. 오늘 정말 고마워."

"뭘요. 구할 수 있어서 구한 건데."

"아. 차 불러줄게. 그 차 타고 가."

"괜찮습니다."

"그럼 병원에 같이…."

"성혜리 씨가 물 많이 먹었는데 얼른 가시죠."

"그, 그래도 될까? 그럼…. 진짜 고마워."

성기호와 성혜리는 인천 지역 종합병원을 찾아 출발했다.

차우진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정보를 얻고 필요하면 공동의 적을 상대하자고 제안할 생각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접근할 계획은 아니었는데."

성혜리가 바다에 추락해서 죽을 뻔한 건 예정에 없던 일이다.

"내가 일상에 개입해서 일어난 일인데 말이야."

***

차우진이 집에 돌아왔다.

차유리가 소파에 누워 있다가 코를 킁킁댔다.

"어디서 바다 냄새가 난다?"

"시원한 냄새?"

"뻘 냄새?"

"꽤 맑아 보이는 물에 빠졌는데?"

"너 물에 빠졌냐?"

"어. 샤워부터 해야겠다."

"씻고 나면 네가 밟은 자리 싹 다 닦아놔라."

"그럴 거야."

"요리도 좀 하고. 너 기다리느라 굶었어."

"누나가 아니라 원수라니까."

"얼른. 민중의 지팡이가 배고프다."

"동생을 착취하는 탐관오리겠지."

***

하루가 지나 월요일이 왔다.

성혜리가 회사에 출근했다.

그녀는 부서를 돌아가면서 일한다. 올해는 홍보부가 그녀의 근무지였다.

직급은 아직 대리였다. 그렇지만 그녀가 계속 대리로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사에 없었다.

성혜리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홍보부장이 손을 흔들었다.

"어. 그래. 급한 일이면 천천히 와도 돼."

그녀는 사장인 성기호를 찾아갔다.

"아빠. 차우진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차 이사? 사덕리소스라는 금광 회사의 이사지."

"난 대리인데 그 나이에 어떻게 이사예요? 사장님 아들이에요?"

"그건 나도 모르는데? 명함만 받은 거라서."

성혜리가 즉시 스마트폰으로 사덕리소스를 검색했다.

"사장은 서 씨니까 아들은 아닌가 본데요?"

"그런가 보네."

성혜리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제 낚시에는 차우진 씨를 어떻게 초대한 건데요?"

"이미 말했잖아. 지난주에 세미나에서 명함 정도 교환했다가, 토요일 대회에서 골프 실력에 감탄해서 초대했다고."

성혜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어떤 사람인지 알고는 싶은데,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뒷조사할 수는 없다.

"그 명함 좀 보여줘요."

성기호가 명함을 꺼냈다. 성혜리가 스마트폰으로 명함 사진을 찍었다. 명함관리 앱이 차우진의 이름으로 정보를 정리했다.

성기호가 물었다.

"차 이사는 왜?"

"바다에서 살려줬는데 어떻게 모른척해요? 인사는 해야죠."

성기호가 당부했다.

"인사만 해야 한다?"

"당연하죠."

***

차우진은 딥어스테크 특별조사팀의 보고를 받았다.

"이사님이 말씀하신 성기호 사장의 아들을 조사했습니다."

화면에 성준혁의 학력과 SNS 정보, 현재 군 복무 상황 등이 떴다.

"인터넷에 공개된 정보와 주변 평가를 통합해 정리했습니다."

"사고 친 적은 없습니까?"

"그런 이력은 찾지 못했습니다. 전과도 없습니다."

"술이나 약물은?"

"술은 좋아하지만, 약물로 문제 된 적도 없습니다."

"대학은 국내에서 다니는군요."

"예. 한국대 바이오생명공학과에 재학 중에 입대했습니다."

"바이오생명공학이라…. 공장에도 출입했습니까?"

"SNS에 본인이 공개한 정보를 바탕으로 추측하면, 재학 중에는 연구소에 자주 방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험을 쌓는 차원이었을 겁니다."

차우진이 다시 물었다.

"공장은요?"

"공장에서 찍은 사진도 여러 장 있습니다."

"이 정보를 얻는 게 어려웠습니까?"

팀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SNS에 공개된 사진이 많아 손쉽게 파악했습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럼 이 정보는 라이프레인 제약 쪽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확보할 수 있겠군요."

"예. 이 정도는 이미 가지고 있을 거라고 판단됩니다."

"역시 그러네."

"예?"

"아닙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 지금 성준혁은 어디 있습니까?"

"지금은 휴가 중입니다. 휴가 기간 내내 밤에는 압구정 클럽에서 술을 마신다고 합니다."

"클럽 이름은?"

"하이랜드입니다."

***

성혜리가 차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 이사님. 저 혜리예요."

- 네. 몸은 괜찮으세요?

"그럼요. 구해주신 덕분에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 저녁에 시간 어떠세요? 제가 밥이라도 사고 싶은데요."

- 좋죠.

성혜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래요? 그럼 장소는…."

- 압구정동으로 하시죠.

"좋네요. 압구정. 제가 거기 잘 알거든요."

- 제가 좋은 곳으로 안내하죠.

"기대되네요."

- 시간이 좀 늦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전화를 끊은 후에 성혜리가 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게 뭐라고 긴장되냐. 그냥 밥이나 사는 건데."

***

성혜리는 당황했다.

"국밥집이네요?"

"밥을 산다고 해서."

차우진이 안내한 곳은 압구정 골목 안쪽에 있는 국밥집이었다.

"여기가 24시간 운영하는 식당이라 밤새워 놀다가 새벽에 나온 사람들이 해장하기 딱 좋은 곳입니다."

"아니, 우리는 밤이 새도록 놀아보지도 못했는데…."

"오늘 놀면 되죠. 밤새도록은 아니지만, 이거 먹고 나서."

그녀가 국밥을 한 숟가락 떴다.

"어머. 이 집 국밥 잘하네요? 수육도 시킬까요?"

"어차피 성혜리 씨가 사는 겁니다만?"

"술은 뭐 드실래요?"

"술은 이거 먹고 나가서 마실 겁니다."

"어디로요?"

"클럽 하이랜드."

"오늘 코스 조합이 좀 이상하지만, 전 좋아요."

성혜리는 국밥은 반만 먹었다. 점심을 쫄쫄 굶고 와서 평소라면 한 그릇 다 먹었겠지만, 오늘은 배가 나오고 싶지 않았다.

'배의 평균치라도 낮춰야지.'

두 사람은 클럽 하이랜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성혜리가 물었다.

"클럽은 어떻게 들어가는 거예요? 그냥 입장권 사서 들어가면 되나?"

"왜 모르는 척하실까?"

"표 나요?"

"많이 납니다."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사실 클럽은 백만 년 만이라서 요즘 시스템은 낯설긴 하거든요? 그리고 저는 옛날에는 홍대 쪽에서 활동했다고요."

그들이 클럽 근처에 도착했다.

문제가 생겼다. 입구 컷을 당했다.

성혜리가 대신 발끈했다.

"이봐요. 사람이 배 좀 나올 수도 있지!"

"손님. 여기는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닙니다."

"차 이사님은 아무나가 아니에요!"

차우진이 성혜리의 팔을 끌었다.

"그냥 저 앞 술집으로 갑시다."

"아니, 그래도…."

"나만 컷 당한 게 아닌 것 같아서."

"내가 뭘!"

"의상이 너무 차분하잖습니까?"

"그쵸? 의상 때문이죠?"

"어…. 그렇죠."

***

백희선이 대포폰에 대고 말했다.

"위치는?"

- 하이랜드에서 작업 중입니다.

"얼마나 먹였어?"

- 몸을 제대로 못 가눌 정도입니다.

"좋네. 데려가서 좋은 거 시켜줘. 중요한 날이니까 날파리 안 붙게 신경 쓰고."

116. 디데이

차우진과 성혜리는 클럽 하이랜드의 길 건너편 술집으로 이동했다.

차우진이 그곳에서 맞은편에 있는 클럽을 보며 말했다.

"사실 클럽은 가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 저도 그런데."

"홍대는?"

"거긴 여기랑 분위기가 달라요. 강남 클럽을 안 가봤다는 말이에요."

"분위기가 다른 건 어떻게 아실까?"

"어머. 술 마셔요."

두 사람은 그곳에서 한 시간쯤 술을 곁들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우진이 클럽 앞을 가리켰다.

"시간이 아직 이른데도 술에 떡이 된 사람이 나오는군요."

"그러게요. 도대체 몇 시부터 달린…. 응?"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길 건너편을 보았다. 비틀거리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뭐야? 쟤가 왜 저기 있어?"

"아는 사람입니까?"

실루엣만 보면 그녀의 동생 성준혁이었다.

"잠깐만요."

그녀가 전화를 걸었다.

성준혁이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그냥 끊어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게 죽고 싶구나?"

그녀가 제안했다.

"우리 장소 옮기죠? 그 전에 저 새, 녀석 좀 만나고요."

성준혁은 같이 술을 마시던 여자와 함께 골목으로 들어갔다.

성혜리가 성준혁을 쫓아갔다. 차우진이 동행했다.

그녀가 설명했다.

"쟤가 제 동생인데요. 술 너무 많이 마신 거 같죠?"

"전문용어로 꽐라가 됐다고 하죠."

"휴가 나와서 매일 술만 먹고 있다니까요? 처음에는 군대에서 고생하다가 나왔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한 거 같아요. 모래에 부대 돌아가야 하는데, 잔소리 좀 해야겠어요."

문제가 생겼다.

골목을 따라 들어가자마자 남자 둘이 그들의 앞을 막았다.

성혜리가 말했다.

"좀 지나갈게요."

남자가 실실 웃으며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그게 공짜로 되나."

"뭐죠?"

"여긴 못 지나가."

"이 골목 전세 냈어요? 난 꼭 지나가야겠는데?"

남자가 인상을 쓰며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위로 들었다.

"이년이. 너 누군데 나를 무시…."

차우진이 그 손을 잡아 비틀었다.

"어디서 욕이야?"

"어? 으아아! 팔! 팔!"

그가 상대를 툭 밀었다. 팔이 꺾였던 놈이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이 새끼! 너 뭐야!"

"자기소개는 너부터."

두 놈이 서로 눈짓을 하다가 갑자기 잭나이프를 꺼냈다.

"너 이 새끼! 어디서 보냈냐!"

"너희들이 왜 길을 막는지부터 말하라니까."

성혜리는 두 놈이 칼을 꺼내는 것을 보고 얼른 차우진의 팔을 건드리며 말했다.

"그냥 가요. 여기 아닌가 봐요."

"난 괜찮은데."

"아뇨. 저도 괜찮아요. 그냥 여기서 나가요."

"그럼 뭐."

팔이 꺾였던 놈은 차우진과 성혜리가 칼을 보고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다.

한 놈이 잭나이프를 앞으로 내밀며 걸어왔다.

"이 쌍년이 가긴 어딜 가! 당장…."

차우진이 상대의 손목을 탁 쳤다. 적의 손가락이 풀리며 잭나이프가 옆으로 날아가 골목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어?"

차우진이 상대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적이 뒤로 나자빠졌다.

"커억!"

차우진이 말했다.

"선 넘네?"

뒤에 있던 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넘어진 놈이 가슴을 붙잡고 겨우 일어났다.

"튀, 튀자."

두 놈이 허겁지겁 골목에서 사라졌다.

차우진이 성혜리에게 말했다.

"이제 길이 열렸습니다. 방향을 결정하시죠. 앞? 뒤?"

성혜리는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아, 아니, 저기. 차 이사님은 무술도 해요?"

"실전 무술 쪽으로 조금?"

"도대체 못 하는 운동이 뭐예요?"

그녀의 눈이 순간적으로 차우진의 배로 향했다.

"아…. 달…."

"달리기?"

"아, 아니에요."

그녀가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앞으로 가도 될까요?"

"원한다면."

"그러다 다른 패거리가 있으면요?"

"몇 놈이 있든 성혜리 씨 하나 빼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녀는 조금 전에 칼을 든 놈을 보고 겁을 먹었다. 이 골목을 빠져나가고 싶긴 했다.

그런데 동생이 이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차우진이 상대를 쉽게 제압하는 것도 봤다. 든든했다.

이 골목은 외진 곳이 아니라 번화가 한복판에 있다.

그녀가 결정을 내렸다.

"그럼 살짝만 들어갔다가 바로 나올까요?"

차우진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원하시는 만큼."

두 사람은 골목 안으로 조금 들어갔다. 오래 들어갈 것도 없었다. 조금 걸었더니 반대편 도로가 나왔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괜히 긴장했네요."

"그러게요."

문제는 아직 남았다. 그들은 성준혁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이 새…. 녀석은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어디 갔는데 벌써 사라졌어?"

***

차우진은 성혜리를 집에 바래다주었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 정말 고마워요. 국밥 먹으러 갔다가 별일을 다 겪네요."

차우진이 말했다.

"고마우면, 다음에 내가 사과하면 한 번은 그냥 넘어가 줘요."

"네? 어머. 당연하죠. 근데 무슨 사과인데요?"

"곧 알게 될 겁니다."

차우진이 돌아갔다.

성혜리는 멀어지는 차우진을 보며 작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다음이 있구나?"

그녀가 방실방실 웃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성기호가 물었다.

"너 뭐 좋은 일 있니?"

"차 이사랑 저녁 먹고 왔어요."

"어? 뭐? 차우진 이사? 저녁을 왜? 어째서?"

"바다에서 살려준 게 고마워서 인사는 한다고 했잖아요."

"그 인사가 선물이 아니라 저녁이었어?"

"그냥 식사만 한 거예요."

"식사는 어디서 뭘…."

"압구정에서 국밥?"

"아. 국밥."

성기호가 마음을 놓으며 말했다.

"거 좀 좋은 거 사주지. 국밥이 뭐냐?"

"술도 샀어요."

"술도 마셨냐? 어디서?"

"압구정 개방형 호프집?"

성기호가 끄덕였다.

"뭐, 그 정도면 건전하게 놀았구나. 잘했다."

"그런데 거기서 준혁이를 봤어요."

"호프집에서?"

성혜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요. 그 앞에 클럽에서요. 꽐라가 돼서 골목으로 들어가길래 쫓아갔는데 놓쳤어요."

"꽈, 꽐라? 그런 말은 어디서…."

"전문용어잖아요."

"그, 그래?"

"근데요."

성혜리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준혁이를 쫓아가다가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이상한 일이라니?"

"칼을 가진 놈들이 길을 막더라고요."

성기호 사장의 표정이 변했다.

"어? 뭐?"

***

백희선이 얼굴을 구겼다.

"진행에 문제가 생겨? 무슨 문제?"

- 골목에 들어온 남녀가 있었는데, 시비가 좀 붙었습니다.

"그게 다야?"

- 저희가 졌습….

"뭐?"

- 남자의 싸움 실력이 대단했습니다.

"얼마나 싸운 거야?"

- 그냥 한 대 맞은 정도입니다.

"그래? 그 정도는 그냥 작은 트러블이잖아."

- 계획은 어떻게 할까요? 혹시 문제가 생기면….

백희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겨우 그런 사소한 일로 포기하려고 작업 친 거 같아? 강행해."

***

성기호 사장은 서재에 앉아서 고민했다.

"내 아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갔더니 시비를 거는 놈들이 있었어? 그게 우연일까?"

그는 회사를 경영하면서 공격도 많이 당해보고 누명도 여러 번 써봤다.

공격이나 누명은 외부에서만 들어온 게 아니다. 내부에서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가끔은 함정을 파는 놈들도 있었다.

그는 일단 당하면 보복은 확실히 했다. 그렇게 싸우면서 SL 제약을 지금처럼 키웠다.

"정보가 더 필요해."

그가 망설이다가 차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 이사. 시간이 늦어서 미안한데, 괜찮으면 차라도 한잔 마실 수 있을까?"

-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알겠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이 앞에 조용한 찻집이 있는데, 거기서 보자고."

***

차우진과 성기호가 찻집에서 만났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차 이사가 오늘 우리 혜리를 구해줬다면서? 벌써 두 번째잖아. 고마워."

"배에서는 고마워하셔도 되는데, 이번에는 굳이 안 그러셔도 됩니다."

성기호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음…. 내가 차 이사를 보자고 한 건 말이지."

"아드님 일이지요?"

"어. 그래. 혜리한테 듣긴 했는데, 이게 괜찮은 상황인지 의심이 가서."

"안 괜찮습니다."

성기호는 당황했다.

"어?"

"아드님 상태가 안 좋아 보였습니다."

"어떻게?"

"술만 가지고 그런 상태가 되긴 쉽지 않습니다. 약물이 사용됐을 수 있습니다."

성기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이 자식을!"

"아직 설명이 안 끝났습니다."

"약물이라며!"

"아드님 잘못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뭐?"

성기호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차 이사 말은, 누가 내 아들을 노리고 설계를 했다는 거야?"

"예."

성기호가 자리에 앉았다. 그의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차 이사가 그걸 어떻게 알아?"

차우진이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제가 일하는 곳입니다."

"그래. 사덕리소스 이사…. 응? 딥어스테크 이사? 뭐야? 그럼 사덕리소스는?"

"두 회사에서 이사를 겸직하고 있습니다."

"아. 대단하네. 그런데 딥어스테크면…."

"최근에 뉴스에 여러 번 나왔지요."

"전임 사장의 비리 문제로 뉴스가 많이 나왔지? 무슨 탐지기를 미국에 수출한다는 것도 들었는데…."

"그 탐지기 개발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단하네."

성기호가 명함을 내려놓고 차우진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게 내 질문의 대답은 아니지 않나?"

"최근에, 딥어스테크 전임 사장의 횡령 사건에서 사라진 장비가 마약 공장에서 발견됐습니다."

"어? 마약?"

"레드 크리스털이라는 신종 마약입니다."

성기호는 방금 아들이 마약으로 설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그래서?"

"마약 공장이라니. 회사에서는 기겁할 일이지요. 전임 사장이 저지른 짓 때문에 이미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또 욕을 먹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야 그렇겠지."

"그래서 그 사건 조사 책임도 제가 맡았습니다. 그걸 조사하다가…."

성기호가 긴장하며 물었다.

"내가 수상한가?"

"아니요."

"그럼?"

"백희선이 수상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기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라이프레인의 백희선 이사?"

"예. 잘 아시죠?"

"그 여자가 우리 뒤통수를 몇 번 쳤지. 우리 기술도 훔치고, 연구원도 빼가고, 우리 회사를 상대로 작업도 걸…. 설마 우리 아들도?"

"계속 들으시죠. 백희선을 조사하다가 SL 제약을 대상으로 한 테러 의심 상황을 발견했습니다."

성기호는 깜짝 놀랐다. 마약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놀랐지만 이건 더 놀라웠다.

"아니, 잠깐. 테러라니?"

백희선을 잡으려면 성기호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 그러려면 성기호가 차우진을 신뢰해야 한다.

그에게 접근한 이유를 숨겼다가 나중에 성기호가 진실을 알게 되면 일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차우진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모든 걸 말하진 않았지만, 오해를 피할 만큼은 이야기했다.

"그래서 성기호 사장님께 접근했습니다. 일부러 접근한 거 맞습니다. 백희선의 계획이 뭔지 알아내려면, 정보가 필요했거든요."

성기호는 혼란스러웠다.

"그런 거면 나한테 협조해달라고 했으면…."

"성 사장님의 성향을 모르는데, 어떻게 함부로 이야기하겠습니까? 이 일의 최종 보스가 백희선이라는 보장도 없는데."

"그, 그렇지."

"성 사장님이 저를 믿을 이유도 없었고요."

"아. 믿을 이유. 그러면…."

성기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 우리 혜리가 배에서 추락한 사건도…."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돌발상황이었습니다. 그곳에 계셨으니까 아시잖습니까?"

성기호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상황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맞아. 차 이사는 우리 딸이 떨어질 때 주방에 있었지. 내가 엉뚱한 의심을 해서 미안해."

"괜찮습니다."

"그럼 우리 아들은?"

"일요일에 배에서 아드님이 휴가를 나왔다는 말을 하셨잖습니까? 그 말을 듣고 백희선이 작업을 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마침 따님이 저녁을 먹자고 연락을 주더군요. 그래서 직접 보여줬습니다."

"내 딸에게 직접 보여준 이유가 있나?"

차우진이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잖습니까?"

"아…. 그래. 차 이사 말이 맞아. 그래서 내가 고민을 한가득 안고 차 이사를 불러냈지."

차우진이 말했다.

"오늘 밤에 본 아드님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습니다."

성기호는 걱정이 들었다.

"혹시 우리 아들이 위험한가? 그러니까 건강이…."

"그건 아닐 겁니다. 백희선이 이용하려면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어야 하니까요."

그 말이 성기호를 불안하게 했다.

"사지 멀쩡하게?"

"오늘 밤까지는 괜찮습니다. 내일이 디데이니까요."

"어? 디데이?"

117. 디데이 II

SL 제약 사장 성기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디데이가 내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차우진이 설명했다.

"혜리 씨가 아까 그러던데, 모래는 아드님의 휴가가 끝나서 부대에 복귀한다면서요?"

"아! 그래서 내 아들을 이용해 테러를 저지르려면 내일밖에 없다는 건가?"

"그렇지요."

성기호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으음…."

차우진은 그가 결론을 내리길 기다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성기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 이사. 내 아들 일은 몇 명이나 알아?"

"저만 압니다."

"딥어스테크에서 조사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아드님에 관한 건 제가 그 자료를 분석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자료를 수집한 사람들은 아드님이 휴가 내내 클럽에서 술만 마셨다고 알 겁니다."

성기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번 사태에서 그나마 다행인 게 하나쯤은 있구나."

성기호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당장 내 아들을 그 위험한 곳에서 끌어내야겠어."

"전화해도 받지 않을 겁니다. 혜리 씨가 집에 오면서 다시 전화해 봤는데 꺼져있었거든요."

"그럼 실종신고를 내서라도…."

"안 그러시는 게 좋습니다."

"어?"

차우진이 조언했다.

"백희선이 눈치채면 곧바로 아드님 안전에 문제가 생깁니다."

"아. 그건 그래."

"그리고, 백희선이 눈치채면 테러도 연기됩니다."

"아니, 그렇다고 내 아들을 이용할 수는 없지!"

"이미 이용당했습니다."

"아니, 차 이사…."

차우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미뤄진 테러는 나중에라도 다시 터집니다. 우리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지금이 그 테러를 막을 기회입니다."

"그럼 내 아들은…."

"아드님은 이미 마약에 중독됐습니다. 이게 아드님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이튿날 아침에, 휴가 첫날 클럽에서 성준혁에게 약을 탄 술을 먹였던 여자가 웃었다.

"그러게 여자가 준다고 다 먹으면 어떻게 해? 안 가리고 먹으니까 탈이 나는 거야."

성준혁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정민수가 탁자 위에 밀봉된 은색 서류가방을 올려놓았다. 금속 재질로 만든 단단한 가방이었다.

"네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이 가방을 너희 공장 중앙통제실로 가져가는 거. 간단하지?"

성준혁이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여기 뭐가 들었는지 알고…."

"네가 알 필요는 없지."

"뭐가 들어 있냐고!"

"대단한 건 아니야. 그냥 흔한 통신장치 정도?"

"혹시 중앙통제실에서 정보를 빼내려는 거야?"

"이 도련님이 너무 캐묻는데? 넌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성준혁이 반항했다.

"싫어! 안 해! 내가 왜 하는데!"

"그래야 국군교도소에 안 갈 테니까."

"어? 뭐?"

정민수가 협박했다.

"군인이 휴가 나와서 마약중독자가 됐지? 이거 뉴스에 나오면 넌 국군교도소로 직행이야. 너희 집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이건 못 막는다?"

"내가 그런 말을 믿을 것 같아?"

정민수가 실실 웃으며 스마트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확인해봐."

화면에는 기사가 떠 있었다.

실명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휴가를 나와 클럽에 다니며 마약을 하는 병사가 있을 수 있다는 가십성 기사였다.

문제는 그 가십성 기사의 내용이 성준혁이 휴가 내내 했던 일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정민수가 말했다.

"봤지? 그거 다 네 이야기야."

"이, 이걸 어떻게…."

"우리가 언론에 연줄이 많아. 네가 반항하면 네 마약 기사를 9시 뉴스로 터트릴 거다."

성준혁은 손을 덜덜 떨었다.

"내, 내가 알고 약을 먹은 게 아니잖아. 너희가 속여서 먹였잖아."

"나중에는 네가 약을 탄 술을 달라고 하더라? 그러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놨다. 9시 뉴스에 그 영상이 같이 나가면 어떻게 될까? 군 복무 중인 제약회사 사장 아들이 마약을 달라고 하는 영상이라니. 누가 그 회사의 약을 먹고 싶겠어?"

***

그날 오전에, 성준혁이 다 죽어가는 얼굴로 SL 제약 공장에 나타났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건 아니야. 아닌데…."

전화가 걸려왔다. 성준혁에게 그 가방을 준 놈의 전화였다.

- 우리가 너를 보고 있다.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하고 깔끔하게 잊으라고. 성 일병.

성준혁이 공장으로 들어갔다. 공장 내부의 모습은 외부에서 볼 수 없다.

성기호 사장이 성준혁의 앞에 나타났다.

"준혁아!"

"어? 아버지."

"넌 또 밖에서 잔 거냐?"

"예?"

"그래도 복귀하기 전에 공장은 들러보고 싶나 보구나. 이쪽으로 와라. 휴게실에서 라면이라도 하나 먹고 해."

"아. 예."

성준혁이 성기호를 따라 휴게실로 들어갔다.

성기호 사장이 휴게실 탁자 위에 A4 용지를 한 장 올려놓았다. 거기에는 궁서체로 글씨가 출력되어 있었다.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 알고 있다. 놈들을 잡을 때까지 여기서 라면을 먹으면서 시간을 끌어.]

"어?"

"왜? 사발면이라서 실망이냐? 이게 해장에 좋아."

***

성혜리가 회사 보안팀 요원 네 명과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보안팀에서 성기호 사장이 직접 고른 사람들이다.

그녀가 말했다.

"놈들이 어디 있는지 빨리 찾아야 해요."

차우진도 같이 있었다. 그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 승합차. 아까부터 저기 서 있더군요."

"저 차에 놈들이 있는 건가요?"

"틴팅이 짙어서 내부가 보이지도 않으니까, 사람이 가서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차우진은 공장 경비원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내가 가겠습니다."

보안팀장이 말렸다.

"우리 회사 일이니까 우리가 하겠습니다. 초보자가 나서다 실수하면 다칩니다."

"내가 초보자는 아니라서."

성혜리가 옆에서 보안팀장에게 말했다.

"차 이사님이 오늘 작전을 모두 기획했어요. 그냥 믿어주세요."

"알겠습니다."

차우진이 승합차를 향해 걸어갔다. 걷는 모습이 영락없이 귀찮은 일을 하러 가는 경비원처럼 보였다.

성혜리는 성기호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경찰에는 아직 신고할 수 없어. 준혁이가 마약에 중독된 건 사실이니까. 신고는 증거부터 확보하고 한다. 차 이사가 도와줄 거다.'

***

정민수가 승합차 뒷자리에서 한쪽 귀에 헤드폰을 댄 채로 말했다.

"아들 사랑이 눈물겹네. 밤새 술 먹고 들어왔는데도 해장하라고 라면을 준다."

그는 지금 성준혁이 시킨 대로 일하는지 감시하기 위해 도청하고 있었다. 도청기는 성준혁의 옷에 숨겨두었다.

갑자기 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민수가 무선 기폭장치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뭐야?"

운전석에 있던 부하가 대답했다.

"공장 경비원입니다."

"적당히 둘러대고 돌려보내."

부하가 운전석 유리를 내렸다.

"뭡니까?"

차우진이 인상을 썼다.

"이 차 지금 사유지에 주차한 겁니다. 당장 차 빼요."

"급한 일이 있어서 잠깐 세운 겁니다. 곧 뺄 겁니다."

"그래요? 알겠으니까 빨리 빼요."

차우진이 돌아갔다.

부하는 차우진이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 말했다.

"별 의심 없이 갔습니다."

"의심할 게 뭐 있겠냐."

"그런데 저 경비원, 어디서 본 것 같…. 어? 어?"

대형 화물 트럭이 승합차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사이드 미러에 보였다. 부하는 그걸 너무 늦게 봤다.

트럭이 승합차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강력한 충격이 정민수를 덮쳤다.

"크아악!"

승합차는 아예 튕겨 나갔다가 옆으로 넘어졌다. 안에 있던 정민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끄으으. 뭐, 뭐가…."

승합차의 옆문 유리가 박살 났다. 차우진이 그 사이로 들어가 차 안에서 정민수를 내려다보았다.

"야. 차 빼라니까."

"너, 너 방금 그 경비원 새끼…."

"너는 내가 아직도 경비원으로 보이냐?"

"누, 누구…."

"알면 어쩌게?"

눈알을 굴리던 정민수가 무선 기폭장치 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차우진이 그 손을 콱 밟았다.

"으아악!"

"이거 생각이 없는 새끼네."

차우진이 설명했다.

"네 계획은 실패했어. 현장에서 잡혔다고. 그런데도 네가 그걸 눌러서 뭐라도 터트리면, 넌 죽을 때까지 감방에서 못 나와."

정민수도 뒤늦게 그걸 깨달았다.

차에 들이받힌 충격 때문에 판단력이 떨어져 무선 기폭장치에 손을 뻗었지만, 그걸 누르면 처벌만 더 크게 받는다는 걸 깨달았다.

정민수도 할 말은 있었다.

"이, 이건 뭘 터트리는 게 아니라, 교란장치야!"

"너도 속았구나?"

"뭐?"

"나중에 네 입도 막았겠네."

"그게 무슨…."

멸망한 세계에는 이 사건이 사고로 기록되어 있다.

범행을 누설한 사람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입막음을 당해서 누설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 일단 교란장치라고 치자. 왜 통제실을 교란하겠냐? 그 틈에 뭘 하려고? 불이라도 지르려고?"

멸망한 세계에서는 이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그걸 범인에게 알려줄 이유는 없다. 정민수가 체포된 후에 경찰에 차우진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차우진은 방화를 의심하는 척했다.

정민수가 변명했다.

"난 몰랐…."

"공장 사람들을 죽이고 나서 몰랐다고 하면 참 잘 통하겠다. 그치?"

"사, 살려…."

"하는 거 봐서."

차우진이 정민수의 턱을 걷어찼다.

회사 보안팀 요원들이 달려왔다. 보안팀장이 차량 내부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차우진이 차에서 빠져나오며 대답했다.

"둘 다 안 죽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트럭으로…."

보안요원들이 기절한 두 놈을 끌어냈다.

"차 안에 원격으로 뭔가 조작하는 장치가 있습니다. 경찰이 올 때까지 손대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보안팀장의 태도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차우진이 말했다.

"성 사장님한테 연락해서 가방을 빨리 안전한 곳으로 치우라고 하세요. 터져도 괜찮은 곳으로."

"예? 터져요?"

"혹시 모르니까요."

"즈, 즉시 연락하겠습니다"

성혜리의 눈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차 이사님!"

"어우. 왜 무섭게 보실까?"

"트럭을 준비해달라고 해서 뭐하려고 그러나 했더니…. 차로 받으면 어떻게 해요!"

"조금 전에 운전석 창문으로 안쪽을 봤더니, 저놈이 무선으로 뭔가 조작하려고 하더군요. 그걸 막으려면 한 방에 잡아야 했습니다."

"트럭은 미리 준비했잖아요."

"만약을 대비해서 준비한 거죠. 준비해 달라고 한 게 트럭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물론 전파방해장치 같은 것도 준비해달라고 하셨죠. 하지만 트럭은 처음부터 대형을 요구하셨는데요?"

"내 계획에 참 빈틈이 없죠?"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위험했잖아요."

"들이받아도 나는 안 위험하려고 대형 트럭을 달라고 한 건데."

"거봐요. 지금 실토했어."

차우진이 말을 돌렸다.

"아. 저 트럭으로 이 차를 받은 거, 문제 안 생기게 처리할 수 있지요?"

"트럭은 보안팀장님이 운전한 거로 처리할게요."

"저 팀장님이 귀찮아지시겠네."

"우리 회사가 힘을 쓰면 비상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처리할 수 있어요."

"하긴, 뭐. 죽은 사람은 없으니까."

성혜리가 차우진을 째려보다가 눈에서 힘을 풀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 사람들이 범인이라고 확신했어요? 만약 오해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냥 잠깐 주차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운전석에 있던 놈이, 어제 골목에서 우리 앞을 막고 칼을 휘두르던 그놈이더군요."

성혜리도 그놈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머! 어제 그놈! 그럼 범인이 맞네요."

"그래서 들이받았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냥 들이받는 건…."

"이제 공장 안쪽 상황을 정리합시다. 가죠."

"아, 네. 차 이사님은 트럭 근처에 오래 계시면 곤란하니까요."

차우진이 공장 안쪽으로 이동했다.

성기호 사장은 이미 보안팀장의 연락을 받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차 이사. 정말로 놈들이…."

차우진은 경비원 제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제는 평범한 회사 직원처럼 보였다.

"들켰다는 걸 알자마자 스위치를 누르려고 하더군요. 무선으로 저 가방에 신호를 보내려고 했을 겁니다."

그 가방은 공장 한쪽 공터에 옮겨놓았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럼 저 속에, 그놈들 말처럼 통제실 교란장치 같은 게 있다는 건가?"

"그놈 말이 사실이면 그럴 텐데, 그놈도 속았으면 더 위험한 게 들어 있을 겁니다."

"어? 더 위험한 거?"

"독가스나 폭탄? 아니면 공장 전체를 오염시킬만한 생물학 무기?"

"허…."

차우진이 경고했다.

"저 가방에 뭐가 들어 있을지 모르니까, 경찰이나 군 해체 전문가에게 맡겨야 합니다."

"당연하지!"

118. 차 이사

SL 제약 보안팀장이 경찰에 사건을 신고했다.

경찰은 즉시 SL 제약 공장에 출동했다.

보안팀장은 자신이 직접 트럭을 운전해 범인들이 타고 있던 승합차를 들이받았다고 주장했다.

"놈들이 우리 공장을 폭파하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저 트럭은…."

"마침 우리 트럭이 보이길래 그걸 타고 돌진했습니다."

"계획적인 건 아니었다는 겁니까?"

"당연하지요."

"그래도 트럭으로 들이받는 건 좀…."

"제가 안 그랬으면 우리 공장에서 사람이 죽었을 겁니다."

그럴듯한 근거들도 마련해두었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근거는 성준혁이 가져온 은색 개방이었다.

경찰은 폭발물 처리반의 지원을 받아 가방을 열었다.

처리반 요원이 말했다.

"가방 내부에서 폭탄을 발견했습니다. 무선 원격 신관도 있습니다."

"위력이 어느 정도나 될 것 같습니까?"

"이게 건물 내부에서 터졌으면 통제실이 아니라 그 바깥쪽까지 날아갔겠는데요?"

폭발물이 발견된 후에 SL 제약의 전문가들이 경찰에 공장 도면을 보여주며 정보를 제공했다.

"통제실은 공장 안쪽에 있습니다. 그 정도 위력이면, 주변 생산 시설들도 폭발에 휘말렸을 겁니다. 그중에는 인화성 물질이 들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터졌으면,"

공장 전문가가 도면을 손가락으로 그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공장 절반이 불길에 휩싸였을 겁니다."

형사가 질문했다.

"이런 공장에는 다양한 안전장치가 있을 거 아닙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전장치 중 상당수를 중앙에서 제어하는 곳이 통제실입니다. 통제실 내부에서 강력한 폭탄이 터지는 상황을 누가 대비하겠습니까?"

"아. 그러면 범인은 공장 전체를 노리고…."

"우리 회사 판단은 그렇습니다. 이건 완전히 계획적입니다."

성준혁이 폭탄을 옮겼다. 폭탄이라는 건 몰랐지만, 그 가방이 문제를 일으킬 거라는 건 알았다.

차우진이 성준혁을 보며 생각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폭발사고의 원인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박창수는 사건이 아니라 사고라고 말했다.

'그때는 통제실 주변이 불에 다 타서 증거가 없어졌겠지.'

그렇다고 해서 경찰이나 소방에서 폭발 흔적을 못 찾는 건 아니다.

'성기호 사장이 공장은 잃었어도 아들은 지키려고 증거를 지웠겠지.'

군 복무 중인 성준혁이 배달한 폭탄이 터지고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면, 그는 중형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게 미수로 그쳤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성혜리가 옆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준혁이의 마약중독은 원해서 한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당한 거예요. 그건 충분히 무죄를 받을 수 있어요."

"압니다."

"협박을 받고 가방을 배달했지만,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몰랐어요. 통제실에서 정보를 빼내려 한다는 말에 속았죠."

"통제실에서 빼낼 수 있는 정보는 제약 관련 핵심 기술은 아닐 테니까, 피해가 크지 않을 줄 알았겠죠."

"맞아요. 폭탄인 건 몰랐대요. 그러니까 그것도 무죄를 받아내거나, 처벌을 받더라도 집행유예로 넘길 수 있을 거예요."

"다행이네요."

성혜리가 조금 더 다가왔다.

"차 이사님이 제 동생을 살려주신 거예요. 동생이 통제실에 있을 때 폭탄이 터졌으면…."

차우진이 그 말을 정정했다.

"동생이 공장을 나온 후에 터트렸을 겁니다. 그러려고 범인들이 무선 기폭장치를 가져온 거니까."

"예? 왜요?"

"동생이 살아있어야 성 사장님이 이 사건을 덮을 테니까."

멸망한 세계에서는 성기호 사장이 이 사건을 덮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넘어간 건 아니다. 성준혁이 체포되는 건 막았지만, 결국 회사가 망했다.

성혜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범인들은 아빠까지 이용해서 이걸 사고인 것처럼 만들려고 제 동생을…."

"그렇죠."

***

성혜리는 차우진에게 들은 이야기를 성기호에게 전했다.

"차 이사가 그렇게 말했다고?"

"네. 만약 폭탄이 터졌으면, 아빠가 준혁이를 구하려고 사건을 덮었을 거래요. 정확히 말하면, 차 이사님이 아니라 놈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거래요."

성기호는 만약 폭탄이 터지고 공장의 절반이 날아가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을지 생각해보았다.

군 복무 중인 군인이 폭탄테러와 살인을 저지르면 높은 확률로 사형 판결을 받는다.

"아…. 덮었겠구나."

"진짜요?"

성기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내가 이렇게 쓰레기인 줄은 나도 몰랐는데, 그랬을 것 같다."

"차 이사가 그러는데, 범인은 오늘 붙잡힌 두 놈도 죽여서 입을 막으려고 했을 거래요. 그러면 꼬리가 잘렸을 거라고…."

"차 이사를 만나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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