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wnload App
APOCAPAGUAESTANCADA APOCAPAGUAESTANCADA original

APOCAPAGUAESTANCADA

Author: Kakao_Cuenta_4694

© WebNovel

1

< 황금고블린 - 2 >

나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죽일까?

내게 이 능력이 없었다면 순식간에 당했을 것이다.

세뇌건 기억조작이건 부하가 되어 끌려 다녔겠지.

하지만 여기서 사람을 죽이면 내가 곤란해진다.

아직까진 공권력이 살아있는 상태였다.

신고가 들어가면 경찰이 나를 주요 용의자로 지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거리에 널린 게 CCTV고, 웬 떡대가 PC방에 들어가는 것도 찍혔을 테니까.

경찰서 들락날락하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시간이 아까워···"

그렇다면 황금고블린의 주머니만 빼앗기로 하자.

필요한 것은 그동안 모은 개구리의 마비독과 창, 그리고 수건.

나는 딩고에게 손바닥을 보이고 재빨리 창날에 독을 발랐다.

그리고 장갑을 끼고 조심조심 차원문 밖으로 발을 디뎠다.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곧 있으면 더 시원해질 거야.

나는 창끝을 남자의 허벅지에 살짝 대고 눌렀다.

마비독이 스며들게끔. 하지만 큰 상처는 입지 않게끔.

솨아아아―

"끅!"

물 내려가는 소리에 비명이 묻혔다.

남자는 다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고통보다는 다리가 마비되는 기분이 아주 삼삼할 거다.

오랜만에 뉴비로 돌아간 기분이지?

남자가 바닥에 허물어졌고 나는 그의 얼굴에 수건을 던졌다.

"흐읍! 훅!"

나는 나이프로 순식간에 권총 홀스터를 끊어냈다.

그리고 품을 뒤져 지갑을 확인했다.

이름 권경준, 나이 38세.

바지주머니를 뒤지니 스마트폰이 있었다.

이건 나를 궁지에 몬 대가로 압수.

"끄흑!"

권씨의 입김으로 수건이 들썩들썩했다.

말하지 말고 숨 쉬는데 집중하라고.

어디···폰은 지문인식인가?

권씨의 손가락을 화면에 가져다대자 잠금이 풀렸다.

화면이 꺼지는 시간을 10분으로 설정하고, 스마트 스테이 기능을 활성화.

여기까지 하고 나니 구두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물품을 가지고 차원문에 뛰어들었다.

수트를 입은 떡대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기겁했다.

"팀장님!"

화장실에 떡대들이 우르르 들어와 난리가 났다.

"뭐야 이게? 왜 쓰러지신 거야?"

"모, 모르겠습니다. 와보니까 이렇게···"

"큭!"

"수, 숨은 쉬시는 것 같습니다!"

"바지가 피로···사, 상처입니다!"

"뭐 보고만 있냐? 빨리 옮겨!"

남자들은 여기에 있어선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권씨를 부축했다.

그리고 한 명이 무전기로 연락했다.

"벙커, 불의의 사고로 팀장님이 쓰러지셨다. 즉각 후송하겠다, 이상."

―수신완료.

나는 그들이 나간 뒤 잠깐 고민했다.

지금 저들은 보스를 잃은 상태였다.

즉 지휘할 놈이 없다는 뜻이다.

이대로 조용히 따라 나가는 편이 좋다.

권씨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고, 마비독도 2,30분 후면 풀린다.

잔뜩 화가 나서 여기로 쳐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이 낡은 PC방에는 CCTV가 없다.

알바의 증언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럼 나가야지."

나는 떡대들이 나가고 몇 분 후 일어섰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넥워머까지 올렸다.

"천 이백 원입니다."

알바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 특성 참 대박이네.

나는 오천 원짜리 하나를 알바에게 건네고 밖으로 나왔다.

떡대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적당한 곳에서 스마트폰을 뒤져야겠는데···

저기 상가건물 사이가 좋겠군.

적당한 곳에서 차원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니 PC방 앞이 훤하게 보였다.

나는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나를 못 본다.

이거 의외로 나쁘지 않네 그려.

"어디 보자···"

나는 권씨의 폰을 뒤졌다.

사업하나?

과장이니 부장이니 하는 사람의 연락처가 많았다.

여자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정보는 이런 게 아니었다.

"벙커야 어딨니···"

찾았다.

용정CC라고? 거기 골프 클럽 아닌가?

아마도 권씨는 클럽의 오너인 것 같았다.

"연예인도 있잖아?"

인맥 참 대단하구만.

이러니 콘크리트 벙커를 만들고 권총도 구하고 했겠지.

여자들과 나눈 낯 뜨거운 대사가 눈에 띄었다.

앨범을 뒤지니 이국적인 해변에서 비키니를 입은 미녀와 키스하는 사진이 나왔다.

"하···좋은 인생이다."

나하고 엮였으니 더 이상 좋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메시지를 뒤져 부하의 보고를 찾아냈다.

"벙커가 3개···3벙커는 다음 주에 완공···공업용 기름 입고···총기 입고···"

필요로 했던 정보가 술술 나왔다.

하지만 각성자들에 대한 것은 거의 없었다.

권씨도 거기까진 모르는 모양.

딩고에게 먹이를 주며 한참 폰을 뒤지고 있는데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검은색 밴 한대가 PC방 앞에 멈춰 섰다.

떡대들이 우르르 내린 뒤 권씨가 절뚝거리며 내렸다.

그는 한 남자의 폰을 빼앗아 급하게 눌러댔다.

"열심히 위치추적 해봐라, 찾아지나."

내가 있는 곳은 지구가 아니라 아예 다른 차원이다.

화가 폭발한 권씨는 기어코 폰을 집어던지고 말았다.

"이 개새끼 빨리 찾아와악!"

어디 사는 누군지는 알고?

아포칼립스가 오면 너는 나한테 죽는다.

벙커도 탈탈 털어주지.

나는 차원문을 닫았다.

밥이나 먹고 가자.

.

.

.

나는 집으로 돌아와 홀스터를 살폈다.

MP 335.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러시아에서 만든 자동권총이었다.

그것도 소음기가 달린.

"홀스터에 탄창도 있네."

탄창 두 개를 합치니 20발이었다.

권총을 만져보는 건 처음이지만 영화를 자주 봐서 뭘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안전장치를 풀고···슬라이드를 뒤로 제끼면."

찰칵.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슬라이드가 앞으로 당겨졌다.

이제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 이거지.

나는 미튜브를 참조해 파지법과 사격법 등을 눈으로 익혔다.

"하여튼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다 있다니까."

가끔 야매지식도 있지만 내게는 소중했다.

이론을 배웠으니 다음은 시험이다.

나는 딩고와 함께 숲으로 건너가 나무를 조준했다.

준비하시고···쏘세요!

퓩, 하는 희한한 소리가 났다.

"생각보다 좀 큰데?"

어떤 영화에선 조금만 떨어져도 소리가 안 들리는 걸로 나오던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소음기를 떼고 쏘면 권총다운 굉음이 터지겠지.

"계속 붙이고 있어야 돼."

원거리는 맞추기 어렵겠지만 근거리는 나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지법과 사격법을 충분히 연습한다는 전제 하에.

"···빈총으로 하자."

탄약이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며칠 후 있을 이벤트에서 대박이 터지길 기대하는 수밖에.

나는 빈총으로 계속 연습했다.

그 와중에 소식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러니까···정체불명의 괴물에 대한 것 말이다.

SNS에서 몇몇 사람들의 목격담이 줄을 이었다.

나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딩고를 안고 SUV에 탑승했다.

위치 확인은 가면서 하면 충분하다.

차를 출발시키고 보니 가야산이었다.

등산객들이 하산하다가 생전 처음 보는 괴물들을 발견하고 혼비백산했다고 한다.

―속보. 가야산에 몬스터 나타났음.

―뭐임뭐임? 진짜 몬스터임?

―들개같은 거 착각한 거겠져. 요즘 세상에 괴물은 무슨···

―ㅎㅎ 서바이벌 라이프 모름? 조금 있으면 세상이 멸망함. 괴물이 나타났다는 건 멸망할 징조임.

―헛소리도 거창하게 하시네.

―ㅋㅋㅋ 님같은 사람 많이 봤음. 나중에 좀비되면 억울해서 어째?

―그나저나 무슨 괴물임?

―모르겠음. 엄청 못생긴 난쟁이라고 하는데 큰 놈도 섞였다고 함.

―그럼 고블린인가? 근데 큰놈은 뭐지?

홉고블린이다.

"젠장. 벌써 퍼졌네."

소문 참 빠르기도 하지.

가야산까지는 아무리 서둘러도 두 시간이다.

딩고가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조는 동안 난 열심히 차를 몰았다.

그나저나 슬슬 저녁인데 녀석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경찰이 출동하면 총 맞아죽을 위험이···

오크를 잡을 때는 폭우가 내려서 나 혼자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등산객들의 민원이 계속되면 경찰도 결국 출동할 것이고, 나도 위험해진다.

"그래도 해야지."

레벨차가 많이 날 때 강한 몬스터를 잡아두는 게 좋다.

아이템은 기본이고 스킬을 주니까.

더불어 나에겐 특수한 차원문이 있다.

다른 사람보다는 훨씬 안전하다는 소리.

"그리고 딩고가 있으니까."

녀석은 다양한 동물과 몬스터의 냄새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어느 누구보다 빨리 찾을 수 있다.

다만 홉고블린 무리와 바로 맞닥뜨리는 건 사양이었다.

적당히 무리가 흩어지거나 해야 하는데···

나는 한 손으로 운전하며 다른 손으로는 최초로 목격된 지점을 찾았다.

황산저수지라면 거의 산기슭이다.

홉고블린이 포함되면 꽤 대규모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20마리 이상.

등산객이 놈들을 발견했다면, 놈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쯤은 습격이 있어야 한다.

"···없는데?"

쫓기고 있어서 SNS에 글을 못 올리나?

하지만 비명소리도 없다는 건 뭔가 이상한데.

계속 운전하고 있으려니 총소리가 들린다는 글이 몇 개 올라왔다.

벌써 경찰이 출동했나보다.

이거 운 나쁘면 내 몫은 없겠는데.

나는 초조하게 40분을 더 운전해 마침내 황산저수지 근처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꽤 몰려 있었다.

"딩고, 잠깐만 여기 있어."

주차하고 위로 올라가니 경찰 두 명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려가세요! 여기 위험합니다!"

등산객들은 비교적 말을 잘 들어 밑으로 내려가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몇몇 놈들이 문제였다.

각성자가 왔나?

서너 명이 경찰의 제지를 무시하고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기 내려오시라고! 위험하다니까요!"

경찰은 소리만 칠뿐 제지하지는 못했다.

사람들이 웅성댔다.

"근데, 두 시간이 지났는데 병력이 이거뿐이에요?"

"우리말을 못 믿어서 늑장대응 했겠죠. 뻔해요."

"그나저나 저 아저씨들 용감하네. 괴물들하고 마주치면 어쩌려고"

"혹시 그 괴물들하고 싸우려고 온 거 아닐까요?"

"걔네들하고 왜 싸워요? 경찰한테 맡겨야지."

"요즘 세상에는 각성자라는 사람이 있잖아요. 뉴스에 나와요."

"그게 뭐하는 사람인데요?"

"무슨 초능력이라던데···"

"말세네, 말세야."

그때 총소리가 들렸다.

탕! 탕!

"에그머니!"

"초, 총 쐈어···"

사람들이 크게 놀랐고 경찰들은 다급히 무전을 치다가 결국 산으로 올라가고 말았다.

이젠 내 차례군.

날이 어두워져 드론은 날리기가 어려웠다.

나는 SUV로 돌아가 하품하는 딩고의 등을 쓰다듬었다.

"딩고, 너만 믿는다."

옷을 갈아입고, 헬멧을 배낭에 올린 채 그대로 짊어진다.

활까지 걸면 완성.

다른 무기로는 권총이 있다.

경찰과 홉고블린이 싸우는 틈을 타 어부지리를 취할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권총으로 쏴죽이면 되는데 뭐 하러.

조금 버티긴 하겠지만 활까지 동원하면 충분히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정 뭣하면 차원문 열어서 창 꺼내면 되고.

문제는 경찰에게 포착되는 것이다.

총까지 쓴 상태에서 붙잡히면 빼도 박도 못하는 훌륭한 현행범이다.

차원문이 있으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방향에서 약간 벗어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딩고가 열심히 냄새를 맡으며 앞장섰다.

"고블린 냄새, 좀 나냐?"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움직였다.

녀석은 한 지점에 멈추더니 집중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제자리에 바짝 엎드렸다.

훈련의 성과가 이렇게 드러나는구나.

나는 딩고의 엉덩이를 툭 쳤다.

"가자."

왕!

딩고가 뛰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잽쌌지만 덩치가 작아서 그리 빠르진 않았다.

덕분에 내 발걸음과 비슷했다.

"이거, 의외로···"

가파른 산을 타는데도 예전처럼 숨이 가빠오지 않았다.

숲에서 구른 게 성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딩고는 달리면서도 고개를 돌려 내 위치를 확인했다.

몇 분 그렇게 뛰더니 별안간 딱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엇."

딩고의 시선 끝에 경찰들이 쓰러져 있었다.

나는 황급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설마 죽은 건···

"아냐."

거칠게 숨은 쉬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걸 봐서 고블린의 마비독에 당한 것 같았다.

나는 경찰들의 몸을 편하게 해주었다.

한 명이 침을 튀겨대며 뭐라 말하려 하다가 축 늘어졌다.

한 20분 푹 쉬면 될 겁니다.

나는 주위 나무에 수건을 묶고 딩고의 엉덩이를 툭툭 때렸다.

녀석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고블린 일곱 마리의 시체가 보였다.

"총···맞았군."

경찰들이 해치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경찰들에게 총은 없었는데.

황금고블린이 루팅했나?

내가 루팅할 게 없어서 아쉬웠다.

딩고에게 물을 마시게 하자 기운을 낸 녀석이 냄새를 맡고는 열심히 달려갔다.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다.

< 황금고블린 - 2 > 끝

< 황금고블린 - 3 >

순간 나는 갈등했다.

고블린 시체를 치워야 하나?

일일이 차원문에 던져 넣기엔 수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올라오나 보다.

"할 수 없지."

어차피 고블린이 노출된 이상 내일 아침뉴스는 그 주제로 도배될 것이 분명했다.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이를 멈추는 건 불가능했다.

챙길 거 챙기고 조용히 숨어서 종말을 지켜보는 수밖에.

나는 딩고를 쫓아 산 중턱으로 향했다.

고블린들이 경찰을 죽이지 않았다는 건 도망갔다는 소리다.

즉 멀쩡한 경찰들이 있다는 소리.

고블린과 경찰, 각성자에 더해 나까지 네 무리가 산을 헤매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마주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가능하다면···"

홉고블린 무리의 전력이 적당히 소모된 후 나와 마주쳤으면 좋겠는데.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숲길을 뛰었을까.

딩고도 나도 지쳤을 무렵,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딩고와 함께 나무 뒤에 숨었다.

그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몇 명이 고블린 무리와 싸우고 있었다.

"방검복에 활···사람 생각은 다 비슷하군."

놀랍게도 돌 하나가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염동력인가?"

대체 특성의 다양함은 어디까지인가.

고블린 한 마리가 뒤통수에 돌을 맞고 나동그라졌다.

다른 각성자는 연이어 시위를 튕겼다.

화살은 부정확했지만 고블린들을 움츠리게 하는 데에 효과가 있었다.

남은 사람은 근접전에 자신이 있는지 두 마리의 고블린과 싸우고 있었다.

마체테와 플라스틱 방패로.

"으하압!"

키엑!

괴상한 기합소리와 고블린의 고통어린 괴성이 섞여 나왔다.

마비독침과 함정을 못 쓰는 고블린은 전투력이 형편없다.

그나저나 다른 각성자는 안 왔나?

적당히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왔을 법도 한데···

사건이 너무 커져 경찰에게 붙잡힐 위험이 있어서 나서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은신계열이라면 붙잡히진 않겠지만 전투력이 좀···

"도와줄까···"

하지만 삼파전이라 자칫 나까지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뒤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젠장, 경찰이다.

"차원문 열어."

나는 딩고와 함께 숨어 정황을 살폈다.

탕탕!

경찰이 공포탄을 쐈다.

홉고블린 무리는 연이은 전투로 총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렸는지 흠칫했다.

그때 열심히 돌을 움직이던 염동력자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으억!"

"아저씨 조심해요!"

각성자들이 잠깐 한 눈을 판 사이, 고블린 무리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각성자들이 쫓으려 했지만 경찰이 뛰어오는 바람에 멈춰야 했다.

"거기 꼼짝 마세요!"

"대체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예?"

"아니 우리는···"

"진짜,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내려가세요, 일단 내려가세요."

"저기 지금 몬스터들 도망친다고요!"

"일단 내려가시라고! 군부대에서 출동했는데 총 맞아 죽을 일 있습니까?"

군부대가 출동했다는 말에 각성자들이 움찔했다.

"근데 과장님, 여기 누구 하나 더 있지 않았습니까?"

"아무도 없잖아! 하여튼 빨리 갑시다!"

내 형체를 보긴 한 모양이다.

경찰들은 기어코 그들을 설득해서 데리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방금 그거 진짜 초능력이에요?"

"예에, 뭐···염동력이요."

"우와···그게 진짜 있는 거였어요?"

"근데 저것들 잡아야 되는데···"

잠시 후 사방이 조용해졌다.

"딩고, 가자."

나는 차원문에서 나와 딩고를 쫓았다.

녀석은 조금 쉰 것만으로도 체력을 회복하고 열심히 뛰었다.

홉고블린 무리가 움직인 흔적이 보였다.

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

.

.

.

산의 밤은 매우 일찍 찾아온다.

덕분에 나와 딩고는 어두운 숲을 헤매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길을 잃지 않은 것은 딩고의 뛰어난 후각 때문이다.

녀석은 지쳤음이 분명한데도 앞만 보고 뛰어가고 있었다.

이번 이만 끝나면 호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소고기 잔뜩 먹여주마.

산 아래로 환한 빛이 아른거렸다.

군인들이 몰려와 사방을 수색하고 있는 것이다.

"쟤네들 금방 위로 올라올 텐데···"

그 전에 홉고블린 무리를 잡아야 한다.

주행성 몬스터 주제에 험한 산길을 잘도 이동하고 있었다.

"딩고, 힘내."

녀석의 엉덩이를 두드려주며 응원했다.

그걸로 힘이 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조금 더 뛰기로 한 것 같았다.

새끼라서 슬슬 잠을 잘 때인데···

한참 어두운 숲길을 뛰던 딩고가 갑자기 몸을 낮추었다.

나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인지가 높아진 덕분인가?

고블린 무리의 불쾌한 냄새가 코에 스며들었다.

"딩고, 차원문 안에 있어."

내가 차원문을 열어주자 녀석은 잽싸게 들어갔다.

이젠 나와 고블린 무리뿐이다.

하지만 내 눈은 이세계의 밤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높아진 인지가 주변 상태 파악에 도움을 주었다.

저 멀리 공터에 홉고블린의 형체가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야간투시경이 있었다면 참 좋을 텐데···이번 일이 끝나면 민수용이라도 사둬야겠다.

"둥지를 짓는 건가···"

고블린은 주행성 몬스터이고 둥지에서 떠났을지라도 복귀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여기엔 그네들의 둥지가 없으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홉고블린은 여기에 임시 둥지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을 것이고.

고블린이란 놈들은 함정을 파는 걸 보면 꽤 영악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상황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얼빠진 면도 있었다.

우리가 도망쳤으니 적들이 안 따라오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고블린들이 바삐 움직이는 게 보였다.

녀석들의 밤 시야는 나보다 더 안 좋은데 잘도 움직이는군.

이건 기회다.

"합해서 여섯 마리···"

황금고블린은 저 커다란 주머니 때문에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것이다.

마비독침은 수차례 전투에서 이미 다 썼을 확률이 높았다.

홉고블린도 먼저 나서지 않기 때문에 내가 싸울 상대는 고블린 네 마리였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어두워서 활은 못 쓸 것 같으니 패스.

나는 활을 차원문에 던져두고 마체테와 헬멧을 가져왔다.

권총탄은 최대한 아끼고 싶었다.

"젠장, 더 안 보이네."

마비독침을 머리에 맞는 것보다는 낫다.

목표는 저기 힘없이 걸어가는 놈이다.

단숨에 처치하고 차원문에 숨어야 한다.

놈이 무리에서 적당히 떨어졌을 때···

나는 발밑을 조심하며 놈에게 치달렸다.

내 발걸음소리가 들리자 녀석이 힘없이 대가리를 돌렸다.

바로 지금!

"합!"

나는 재빨리 고블린에게 달려들어 마체테를 휘둘렀다.

기교고 뭐고 없는 단순무식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게 효과가 있어 고블린의 어깻죽지가 쩍 갈라졌다.

녀석이 어깨를 감싸 쥐고 기괴한 소리를 냈다.

끼에엑!

"죽어!"

마체테가 고블린의 목을 반쯤 베었다.

고통스러운지 한순간 마체테를 잡고 버둥거렸다.

앙상한 팔이 쩌억 갈라져 피가 샘솟았다.

끼아아악···

나는 발로 녀석을 밀며 마체테를 뽑았다.

동시에 차원문을 열어 거기에 숨었다.

키아악!

내 존재를 눈치 챈 홉고블린이 길길이 날뛰었다.

빨리 저기 가서 확인하라 이거지.

덩치는 크지만 고블린 특유의 쫄보 기질은 어쩔 수가 없다.

황금고블린을 제외한 세 놈이 벌벌 떨며 차원문 근처로 다가왔다.

역시 마비독침은 다 썼나보다.

그렇다면 무서울 건 전혀 없다.

"흡!"

힘 있게 체중을 실어 창을 뻗자 그대로 고블린의 몸을 꿰었다.

놈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하필 거기가 심장이 있는 장소지?

창을 빼자 고블린의 몸이 차원문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졌다.

"아하."

내 전용이란 게 이런 의미였군.

인간과 몬스터는 내 차원문을 이용하지 못한다.

동물은 왜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타겟이 되지 않은 두 고블린은 겁을 먹었는지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차원문에서 뛰쳐나가며 창을 내찔렀다.

금속 창날이 고기와 뼈를 가르는 섬뜩한 감각이 창대를 타고 올라왔다.

불쾌하지만 참아야 한다.

이제 남은 고블린은 셋.

다시 차원문으로 숨으려 하는데 나머지 놈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 밑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이 벌써 여기까지 올라왔나?

"젠장."

마음이 급해진 나는 창을 차원문에 넣고 권씨가 선물한 권총을 꺼냈다.

19발.

슬라이드를 젖히고 놈들을 쫓았다.

황금고블린은 큰 주머니 때문에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놈을 겨냥하려 했지만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근거리까지 접근해야 하나보다.

"헉, 헉!"

급격한 움직임 때문에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겨우 황금고블린을 시야에 둘 수 있었다.

녀석은 대장을 따라가다가 뭔가에 턱 걸려 엎어진 상태였다.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푹, 푹!

권총탄이 고블린의 상체에 정확히 박혔다.

놈은 그대로 절명해 서서히 앞으로 쓰러졌다.

나는 뛰며 주머니를 낚아챘다.

"차원문 열어!"

나직이 외치고 던지자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딩고는 옆에서 쉬고 있었으니 괜찮겠지.

이제 남은 놈은 홉고블린과 그냥 고블린 하나뿐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하고 머리를 드니 검은 그림자가 눈앞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홉고블린이다!

쿠오옥!

놈의 포효와 공격, 그리고 내 회피가 동시에 이뤄졌다.

나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놈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구르다 보니 나무기둥에 처박혔다.

"훅!"

등줄기로 짜릿한 통증이 올라왔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생존갈망 스킬이 순식간에 활성화되었다.

나는 포효하는 홉고블린을 신중하게 겨냥했다.

카아아악!

몬스터와 싸우며 항상 생각한 거지만, 그놈의 포효만 내지르지 않으면 승률이 10% 정도는 상승할 것이다.

나는 녀석이 무기를 들고 포효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방아쇠를 연달아 당기자 둔탁한 총소리가 났다.

홉고블린은 막 달려오려던 자세 그대로 거꾸러졌다.

나는 녀석의 뒤통수에 두 발을 더 먹여주었다.

그리고 패닉에 빠진 듯한 마지막 고블린을 쏴버렸다.

···

그제야 상태창의 메시지가 갱신되었다.

「레벨이 6으로 올랐습니다」

「포인트를 18 획득했습니다」

「스킬 : 지형감지를 획득했습니다」

"지형감지?"

이 스킬을 여기서 먹을 줄이야.

눈으로 본 주변의 지형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여 행동하게 해주는 스킬이다.

이게 있으면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된다.

좀비 사체와 온갖 장애물이 넘치는 아포칼립스에서 참 좋다.

"나도 덕 좀 봤지."

홉고블린이 가지고 있을 만한 스킬은 아니지만 뭐 어때.

아이템은···오, 장갑이 아이템으로 변했다.

「장갑 : 재주+2」

서라에서 재주는 숨겨진 스탯인 명중, 크리티컬과 관계되어 있다.

재주가 높으면 그만큼 공격을 잘 할 확률도 올라간다.

"헛손질이 줄겠군."

그때 밑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깁니다!"

"조용히! 기도비닉 안 배웠나! 사주경계 철저히 하고! 뭐가 나타나면 일단 대기해!"

지가 더 시끄럽구만.

나는 나무그림자에 숨어 차원문을 열었다.

안에 들어가자 딩고가 내 옆으로 와서 손을 핥아주었다.

생존갈망 스킬이 꺼지자 극심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주머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지만···

"자고 하자···"

나는 매트리스에 몸을 던졌다.

딩고가 이불을 끌어올리는 게 느껴졌다.

기특한 녀석.

.

.

.

"흐으윽."

실컷 자고 일어나니 등이 아팠다.

나무에 처박힌 통증이지만 견딜 만했다.

"이 정도는 달고 살아야지."

주섬주섬 이불을 걷으니 딩고가 기지개를 켜고 나를 뚫어지게 올려다봤다.

뭔가 보상을 바라는 저 눈빛.

"잠깐만 기다려, 이것만 확인하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준 선물을 푸는 어린아이의 심정이 이럴까?

주머니를 거꾸로 들고 탈탈 털자 묵직한 것들이 쏟아졌다.

"크···역시 황금고블린!"

경찰용 리볼버가 두 정이나 있었다.

황금고블린이 또 반짝거리는 거 좋아하지.

약실을 여니 색이 다른 공포탄이 나왔다.

"아예 쏴보지도 못했나보네."

공포탄 한 발, 실탄 네 발.

아쉽게도 권씨의 자동권총과는 탄종이 달라서 호환이 되질 않았다.

뭐 나중에 경찰서에서 루팅하면 되고.

또 뭐가 있나···

나는 번뜩이는 은빛 나이프를 발견했다.

"오오···"

이걸 여기서 볼 줄이야.

「미스릴 나이프 : 영구불변」

영구불변 옵션은 말 그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심지어 철사병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물리적인 힘에도 변형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세라믹 칼날을 구현하지 않은 제작진들 덕분에 미스릴 나이프는 필수적이었다.

에메라스로 나이프를 만들어도 되지만, 내구도가 낮았다.

"이게 100포였나···더럽게 비쌌지."

아무튼 있으면 좋은 아이템이다.

근데 황금고블린은 이걸 어디서 구했을까?

녀석들의 문명을 생각하면 직접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묘하게 표면이 우둘투둘하네···"

뭐랄까, 작은 알갱이를 모아서 붙이고 다듬은 것 같았다.

인간이 만드는 나이프는 매끈해서 거울처럼 비치는데.

나는 전에 주운 늙은 고블린의 칼을 가져와 비교했다.

"비슷해."

들어간 정성은 다르지만 같은 제작자가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을까.

나머지는···태양사과 5개와 그늘포도, 과카 열매가루와 식물성 기름이 나왔다.

"오···이거 나쁘지 않아."

그늘포도는 야간시야를 높여준다.

야간에 잘 볼 수 있다는 이야기.

지형감지와 조합되면 밤에 넘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과카 열매가루와 식물성 기름은 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 정도면 5번은 써먹을 수 있겠어."

나머지는 썩어가는 고깃덩이와 말라비틀어진 과일 등 쓰레기뿐이었다.

"그래도 권총하고 나이프가 있으니 황금고블린 인정."

죽은 고블린이 좋아할지는 의문이지만.

"상태창."

「레벨:6 포인트:77

건강:12 근력:12 민첩:9 재주:11(+2) 인지:10(+2)

특성:전용 차원문 개방

스킬:생존갈망, 지형감지

효과:-」

"좋구만."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딩고가 왕, 하고 짖었다.

배고파도 차마 주인이라고 물지는 못했나보다.

나는 녀석을 쓰다듬었다.

"밥 먹자. 소고기는 집에 가서 사줄게."

밥을 먹고, 등산복 비슷한 걸로 갈아입었다.

이제 차원문에서 나가야 하는데 아직 병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차원문을 먼저 열자 이른 아침이었다.

"군인들은 없는 것 같고···"

홉고블린의 사체도 없는 것이, 전부 수거했나보다.

나는 산길을 타고 내려왔다.

아직 철수하지 않은 병력이 나를 붙잡았지만 야간산행객이라고 하자 간단한 수색 후 풀어주었다.

수상한 물품은 전부 동굴에 넣고 나와서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쳐둔 게 보였다.

그리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기자로 보이는 몇 명이 내게 달려들었다.

"실례지만, 어디서 내려오는 길이십니까?"

"혹시 간밤의 사건에 대해 아시는 게···"

"어, 저는 그냥 산행객인데요. 새벽에 산 타다가 지금 내려오는 길입니다."

내 말을 들은 기자들이 실망한 눈치로 되돌아갔다.

전형적인 등산복 차림이 그들의 의심을 덜어주었을까?

"휴우···"

나는 밑에 내려가 SUV에 몸을 싣고서야 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숲에서 헤맬 때는 정말 어찌되나 했는데, 그럭저럭 좋은 방향으로 끝났다.

하지만 고블린의 사체가 남았다.

집으로 돌아와 티비를 켜니 역시나.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 황금고블린 - 3 > 끝

< D - 10 >

―장원택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야당은 대통령이 무슨 일만 일어나면 지하벙커에 들어가는 것을 고쳐야 한다며,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고 반발했습니다. 김호종 기자입니다.

지하벙커의 회의실에 참석한 인사들의 면면이 묵직하다.

보아하니 고블린의 사체가 이미 낱낱이 까발려진 모양이었다.

각 채널이 모두 빨간 속보를 띄우곤 관련 영상을 내보내기에 바빴다.

"모자이크를 해놨네."

수술대 위에 놓인 고블린 사체가 워낙 끔찍해서인가···

화면이 바뀌자 의사와 기자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이형태 박사님, 이 녹색의 생명체는 과연 어떤 종입니까?

―현 시점에서 발견되지 않은 종입니다. 이 표본으로 말씀드리자면 키 136cm, 체중은 37kg으로서···

뭔지도 모를 설명이 한참 지나갔다.

아나운서가 중간에 의사의 말을 잘랐다.

―현재 인터넷에서 이 괴물의 이름이 고블린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추측한 고블린의 외형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는 지어내기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의 장난으로 여겨왔습니다만···직접 보니 알겠군요. 이건 우리 지구의 생명체가 아닙니다. 다른 세계의 생명체죠. 아무래도, 우린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준비 말씀이신가요?

―종말에 대한 준비 말입니다.

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의사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는 건.

"세계에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네."

물론 일부 사람들은 한국이 꾸며낸 날조, 선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증거가 나왔는데도 무시할 정부는 없다.

각국 주요 인사들이 방한할 게 분명했다.

"···이쯤 되면 나도 슬슬 위험한데."

일이 너무 커져버렸다.

정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서바이벌 라이프 제작사를 찾아내려 하겠지.

또한 각성자 커뮤니티도 면밀히 조사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초능력에 대해서만 신경을 썼겠지만···

"고블린이 튀어나온 이상 다 들통 났다고 봐야지."

···어쩌면 나에 대한 것도.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모든 것을 확 폭로해버려?

내가 김밥조아라고, 앞으로 닥쳐올 아포칼립스에 대한 영상을 갖고 있다고 알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며칠 전만 해도 일부 각성자 외에는 무신경했을 것이다.

종말이 다가온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고블린이 나타났다.

각성자들이 주장하던 게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부가 우선적으로 나를 확보하려 하겠지.

"차원문 너머의 세계에 관심을 가질 거야."

어쩌면 사진과 영상, 그리고 증거물을 가져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엔?

나 외의 사람은 이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종말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

며칠이 지나도 사람들을 구원할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시위···폭동···테러···"

부정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실제 결과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죽음을 며칠 남겨둔 사람들이 무슨 짓을 못할까.

각성자들로 시선을 돌리면, 처음엔 영상을 확보했다고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철사병이 퍼지는데 그걸 재생할 전자기기가 남아나야 말이지.

결국 내 곁에 있으려 유혈사태를 일으키고 나까지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모두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참 좋겠으나.

"5명 이상은 위험해···"

결론이 났다.

영상을 퍼트리는 것조차 위험한 상황이다.

익명으로 공략법을 알린다?

온갖 거짓 정보가 돌아다니는데 묻히지 않으면 이상하다.

김밥조아란 걸 밝히고 공략을 올리면 정부에서 나를 추적하겠고.

권씨가 내 위치를 알아낸 이후 이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

개인도 내 아이피를 추적할 수 있는데 그게 권력기관이 되면 더없이 수월할 것이다.

"안 되겠어."

이건 불가항력을 빙자한 이기심이었다.

하지만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자.

정부가 서바이벌 라이프 제작진을 찾아내는 건 글쎄, 의심스러웠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말 한마디 않는 양반들인데 무슨 비밀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꼭꼭 숨어있다는 얘기도 되고."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나오질 않으니 도리가 없다.

내 정보도 숨겨져 있길 바래야지.

나는 눈두덩을 비비며 인터넷을 검색했다.

여기도 난리 났네.

.

.

.

―홉고블린 나타난거 실화냐

ㄴ와 씨발 존나 크네.

ㄴ저거 누가 죽였을까? 고인물들?

ㄴ그 새끼.

ㄴ근데 사인이 총상이라고 하지 않았음? 김밥조아가 총으로 쏴죽일 이유가 있나?

ㄴ엄청난 특성 가지고 있을 텐데 그럴 이유가 없긴 함···

ㄴ근데 몇명 더 올라가지 않았음? 어케됨?

ㄴ경찰한테 잡혀서 조사 받고 있음.

ㄴ븅신ㅋㅋㅋㅋㅋㅋ

ㄴ홉고블린 포인트 말고 뭐줌?

ㄴ레벨차가 크면 뭔 스킬을 준다고 함.

ㄴ와씨 존나 부럽다.

ㄴ누가 죽였는지 짐작도 안가네.

ㄴ지금쯤 우리 글을 보고 있을지도 모름.

"그래, 보고 있다."

근데 니들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곧 검찰이 영장을 발부받아 서버 압수수색 할 텐데 싸지른 글 지워야지?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고블린 사진 등을 부지런히 나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누군가가 해외 반응이라며 해석본을 들고 왔다.

―녹색의 괴물 한국에서 나타나다···이봐, 친구들. 이 기사 어디까지 믿을만 한 거 같아?

ㄴ오늘 한국의 신문 1면이 모두 같은 사진이라고 하는데. 아침부터 티비가 난리 났다고도 하고. 신빙성이 있음.

ㄴ지금 장난해? 이거 게임에 나오는 고블린이잖아. 이게 진짜 나타났다고? 한국에?

ㄴ누구 한국 웹 잘 아는 사람 없어?

ㄴ내가 찾아봤는데, 지금 완전 혼란에 빠져 있어. 정부는 나름대로 대책 세운다고 침묵하고 있고, 웹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야.

ㄴ지저스. 이 사진이 진짜라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ㄴ친구들, 내가 들은 얘긴데 말이야···

여기도 꽤나 북적이는군.

한국이 각성자와 초능력으로 떠들썩해도 헛소문으로만 받아들였겠지.

하지만 고블린의 실체가 드러난 이상 상황은 달라졌다.

―도저히 못 믿겠지만, 지금 대통령이 트윗으로 국무부 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을 한국에 보냈다고 써놨어.

ㄴ둘이 지금 한국에 갈 일이 있나?

ㄴ아마 녹색의 괴물 때문이겠지···

ㄴ그걸 트윗으로 떠벌리는 대통령도 알만하군.

ㄴ그래서 결론은 뭐야? 이제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이 우리 땅을 침략하는 건가?

ㄴ비슷해. 한국 친구들에 의하면 좀비 아포칼립스가 열린다는군.

ㄴ걔네들 뒤통수에 22탄이라도 먹었나?

ㄴ이건 장난이 아니라고. 얼마 전에 목성 중력권에서 파편화된 은잠비 운석 알아? 그게 지구로 쏟아지고 있다고.

ㄴ지금 이 순간에도 운석이 쏟아지고 있다네.

ㄴ그 운석은 달라. 왜냐하면 우리를 좀비로 만들어버릴 뭔가가 포함되어 있거든. 바이러슨지 포자인지 세균인지···확실한 건 우리 대부분이 좀비가 된다는 거지.

ㄴ와우. 그거 멋진데.

ㄴ내 샷건이 불을 뿜을 때가 왔군.

ㄴ그래서, 언제 우리 생존주의자들이 빛을 본다는 거야?

ㄴ그건 아무도 몰라. 생존주의자들이 좀비가 안 되리란 보장도 없고. 확실히 말하자면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

ㄴ환상적이네.

그래, 환상적이지.

그나저나 꽤 놀랍다.

이번 사태에 대해 거의 까막눈일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철사병도 알고 있는 건가?"

외국 반응을 더 보고 싶었지만 나도 할 일이 많았다.

슬슬 종자도 구입해야 하고 원시시대로 돌아갈 것을 대비해서 여러 서적도 구비해놔야 한다.

의약품, 각종 영양제, 옷가지, 이불 등 살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안전하게 보관하려면 해자를 파야 한다!

"젠장."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티스푼으로 공사지만 어쨌든 진행하는 게 중요하다.

각성자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외국 반응을 보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일본 3ch유저들이 변함없는 한국의 날조라고 비웃자 그걸 역으로 비웃는 건 덤.

"이제 저런 짓도 못하겠지···"

그때 누군가가 일침을 가했다.

―님들 빨리 글하고 댓글 지우는 게 좋을 거예여. 정부가 고블린을 봤는데 여길 그냥 둘 거같음? 서버 압수할거임.

ㄴ아놔씨발.

ㄴ여기 사이트 후져서 일괄삭제도 없잖아.

ㄴ운영자들모함?

이제야 지운다고 난리부르스군.

보나마나 어딜 털자 같은 글이 대부분이겠지.

나는 신경을 끄고 필요한 목록을 갱신하고 주문했다.

그때 형준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성호야, 너 티비 봤냐?

"예···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영업장에 사람들 모여 있는데 너도 좀 와보면 안 되겠냐?

"저는 그쪽에 못 들어가는데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해보게. 너도 알잖냐···내가 답답해서 그런다.

옆에 각성자는 있겠지만 정보를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다.

"오면서 뭐라도 좀 사와야겠군."

이번에는 종묘사에 들를 예정이었다.

아포칼립스 후에도 루팅할 기회가 있긴 하겠지만 미리 준비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계획적인 삶, 얼마나 좋아.

나는 SUV를 타고 피트니스 센터에 도착했다.

4층에 올라가니 음악소리는 안 들리고 몇 명이 티비 앞에 모여 있었다.

형준 형이 내게 팔을 들었다.

"왔냐. 다들 성호 아시죠? 그 분식집."

"아. 그때 배달하시던 그분."

"김보라예요."

"반갑습니다."

남자는 내게 눈인사를 했고 나는 김보라라는 여자와 통성명을 했다.

운동기구에 앉아 있던 미경이 내게 쪼르르 다가왔다.

"아저씨 어디서 운동하고 오셨어요?"

"아뇨···집에 있었는데."

"얼굴이 되게 핼쑥해지셨어요."

"그래요?"

헬스장 전신거울을 보니 내가 봐도 놀랄 정도였다.

언제 이렇게 변했지?

형준 형이 강렬한 눈빛을 하곤 내 뒤에 섰다.

"성호 너 되게 수상타? 옷 좀 벗어봐라."

"에이, 여기서 옷은 무슨 옷입니까."

"헬스장 국룰 모르냐. 초보는 상의탈의하고 점검받자. 빨리 벗어."

"뭔 국룰이 매일 바뀝니까."

나는 투덜투덜하며 상의를 벗었다.

한 달 전만 해도 쪽팔려서 벗기 싫었다.

내 살덩어리를 남들이 다 보게 되잖아.

하지만 숲에서 개고생을 한 뒤에는 몸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상의를 벗자 미경이 와서 구경했다.

"오···"

"···"

형준 형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 몸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너 어디서 싸웠냐?"

"예?"

아차.

숲에서 구른 흔적이 몸에 남아있었지.

자잘한 상처는 기본이고 본 크리퍼 뼈가 팔목에 박힌 상처와 멍이 상당히 많았다.

밑을 내려다보니 무슨 추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뇨. 뛰다가 몇 번 엎어지긴 했는데."

"니 나이에 무슨 뛰다가 엎어져? 그리고 이건 멍이 아니잖아?"

형이 내 팔뚝을 잡았다.

본 크리퍼 폭발에 휘말린 흔적···

정말 아팠는데 아직까지 다 아물지 않은 걸 보니 마음까지 아팠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둘러댔다.

"별건 아니고요. 물건 나르고 할 게 많다 보니까. 저희 집에 또 계단이 있잖습니까."

젊은 놈이 물건 나르다가 계단에서 굴렀다는 처참한 변명을 과연 믿어줄까?

다행히도 형준 형은 그렇게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조심 좀 하지."

그 때 티비 화면이 바뀌었다.

청와대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관장님, 저기 기자회견 하는데요."

남자가 말하자 형은 티비 앞으로 달려갔다.

주섬주섬 옷을 입는데 미경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되게 멋있어요."

"···뭐가요?"

"그, 어깨하고 팔이요. 되게 막 남자답게 튼튼하구···넓으셔서 놀랐어요."

그래봐야 아직은 돼지랍니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티비를 지켜봤다.

안보회의인가 하는 결론이 벌써 나왔다.

대변인이 연신 입술에 침을 바르며 원고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한 정부의 판단과 향후의 지침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야산 국립공원에 나타난 일단의 괴물들은 고블린이라는 종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지구에 없는 생명체로···

뭔가 주절주절 서론이 길다.

고블린을 전혀 모르는 사람까지 이해시키려니 말이 길어지는 거겠지.

―···이하의 사실에 의거, 초능력을 가진 각성자들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입니다.

이에 대통령께서는 두 가지 지시사항을 전달하셨습니다. 첫째, 서바이벌 라이프 제작사의 거취를 확인할 것.

둘째, 이 사태의 진실을 알고 있을 각성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것. 이번 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국민 여러분과 관계기관의 협조와 관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상입니다.

대변인은 여기까지 말하고 물러났다.

따로 질문시간도 주어지지 않아서 기자들이 벙쪘다.

뭐야, 끝났어?

기자회견실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지켜보던 형이 말했다.

"난리 났네. 경훈씨 혹시 잡혀가는 거 아니에요? 각성자잖아."

통성명을 못한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도 저 못 잡습니다."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보라라고 자신을 밝힌 여자가 은근히 물었다.

"그럼 가야산에 가보지 그러셨어요? 고블린 잡으면 뭐 아이템도 준다던데."

"에이, 아이템은 무슨···포인트밖에 안 줘요, 걔네들."

아이템하고 스킬 주던데요.

아무래도 헬스장의 잘못된 정보 담당은 이 남자, 경훈인 것 같았다.

각성자 커뮤니티만 잘 뒤져도 정보가 나오는데 어디서 이런 소리를 들었을까?

미경이 벤치에 앉아 다리를 살랑거렸다.

"저 고블린들 잡은 사람···레벨 올랐겠죠?"

"이제 1아니면 2레벨이겠죠.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저만 믿으세요."

"네···"

6레벨이라서 미안합니다.

나는 시치미를 떼곤 티비에 집중했다.

< D - 10 > 끝

< 다 내 거야 >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좀비가 된다는 건가요?

―네. 확실합니다. 좀비 사태가 터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비가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 각성자들은 좀 달라요.

―어떻게 다를까요?

―힘이 있고, 정보가 있죠. 좀비와 몬스터들이 튀어나와도 살아갈 힘이 있는 거죠.

―좀비가 안 된다는 보장이 있나요?

―어, 그건···

인터뷰하는 남자는 확신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렇다.

기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새겨졌다.

―다음 질문입니다. 만약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뀔까요?

―일어난다니깐요. 아무튼, 그 때부터는 진짜 힘이 중요해지는 거예요. 싸워서 이기는 자가 승자인 거죠. 뭐 직장에서 일하고 돈 벌고 이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란 말입니다.

인터뷰이는 조금 흥분되는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종말이 기다려진다는 어조였다.

평소 사회생활에 불만이 많았나?

뭐 나도 20대 초반에 공장 나갈 때는 출근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세상이 멸망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인터뷰하는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형준 형이 한마디 했다.

"내가 보기엔 쟤 백숩니다. 그러니까 이딴 세상 확 망해버려라 하고 저주를 하죠."

다들 동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했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보라가 말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좀비로 변하는 조건 말이에요, 정말 아무도 몰라요?"

"지금까지 안 알려졌으면 모르는 거죠."

형준 형이 일반론을 말했지만 남자의 의견을 다른 모양이었다.

"그건 아니에요. 각성자 주위 사람은 괜찮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보라가 눈을 치켜뜨자 그가 낮게 웃었다.

"제가 왜 각성했겠습니까? 서바이벌 라이프를 플레이해서 그렇죠? 말하자면 접촉을 했다는 말이죠. 그럼 저와 접촉한 여러분들은?"

남자의 시선이 보라와 형에게 닿았다.

미경은 애초부터 각성자고, 나는 뭐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군.

하긴 여기에 속해있지 않으니까···

형이 그에게 물었다.

"저하고 보라 회원님은 좀비가 안 된다는 말입니까?"

경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확신은 못합니다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럼 경훈씨만 따라다녀야겠네요?"

보라가 그의 근육질 팔뚝을 쓰다듬자 그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하하, 저만 믿으세요. 좀비 그놈들 뭐, 으어어 거리면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도 못하던데요. 다 때려잡으면 그만이죠."

"튜토리얼 엄청 어렵던데···"

미경이 말하자 형준 형이 물었다.

"어렵다 어렵다 말은 들었는데 어느 정도로 어려운 거냐?"

"어엄청요. 저 튜토리얼 초반부 벗어나지도 못하고 죽었어요. 좀비가 엄청 빨라가지구."

보라가 경훈에게 눈을 흘겼다.

"좀비 느리다면서요?"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죠."

"그래서 어디까지 클리어 하셨어요? 튜토리얼은 깨셨죠?"

"예, 뭐. 오래 전이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깼을 겁니다."

깨지도 못했구만.

결국 잘난체하는 이 경훈도 튜토리얼 하나 못 깨봤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상한 정보를 주워들어선 형준 형을 헷갈리게 하지.

그는 좀비들과 싸울 때는 스텝이 중요하다며 시범을 보였다.

"좀비들이 막 몰려오잖아요? 걔네들 정상적으로 움직이진 못하니까 이렇게 움직이면 돼요. 뒤로, 뒤로."

얼씨구. 판 깔아주면 춤도 추겠네.

형준 형은 미심쩍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거 맞긴 맞아요? 전에 무기 얘기할 때 철물점에 가보라고 그랬었죠?"

"아, 그때는 제가 조금 헷갈렸었어요. 게임을 한지 오래되어가지고."

2년도 안 지났다 이 허세꾼아.

나는 형을 구석진 곳에 불러냈다.

"김밥조아 그 사람 방송 보면서 들은 건데, 좀비하고 맞닥뜨렸을 때는 옆으로 피하랍니다."

"왜? 무슨 이유라도 있냐?"

"아포칼립스가 되면 도로가 엄청나게 지저분하거든요. 건물하고 차 잔해, 사망자, 좀비, 파편···장난이 아닙니다. 뒤로 뺐다가 걸려 넘어지는 수가 있어요."

"···듣고 보니까 그러네. 그러니까, 옆으로?"

"예. 좀비가 닥쳐오기 전에 미리 주변 환경을 잘 살펴보고. 그러니까 발 한걸음 내딛는 것도 조심스러워야 한다 이거죠. 사실 좀비하고 싸우는 것도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피해야죠."

"그렇구만···피해서 달아나야 한다 이거지."

"우리 동네 인구가 몇 명입니까? 태반이 좀비가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싸우다가 포위될 겁니다."

"흐음···"

형은 보라와 미경에게 뭔가 자랑하는 경훈을 못 믿겠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저 아저씨 대신 니가 들어왔어야 하는 건데."

"이미 다 찼는데 어쩔 수 없죠. 근데 한 명은 어디 갔어요?"

"어. 저기 캠핑용품 할인점 있잖냐. 거기 갔다."

캠핑용품 할인점이라···솔깃한데?

당일 사태가 터지면 편의점보다 거기를 터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체크해두고 형에게 인사하려니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전에 봤던 의사···이젠 의사는 아니지. 하여튼 수연이다.

"수연씨 여긴 어쩐 일로?"

"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잠깐 괜찮죠?"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형준 형이 그녀를 안내했다.

그녀는 헬스장 멤버들과 인사를 나눈 후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붉은 십자가···구급함?

수연은 구급함을 열었다.

"이게 뭐냐면요. 진통제하고, 항생제, 소염진통제 팩이에요. 다치거나 했을 때 하나씩 까먹으면 돼요."

"헐, 대박."

나도 꽤 놀랐다.

이건 처방전 없으면 못사는데?

대체 누가 처방···아.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수연이 당당하게 말했다.

"처방전 위조했어요."

"수연씨 의사 그만두셨다면서···불법 아닙니까?"

형이 능글맞게 묻자 그녀는 구급함을 내밀었다.

"아직 의사 면허는 멀쩡해요. 그래서, 안 받으실 거예요?"

"아뇨아뇨, 받죠.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부터 티비 봤거든요. 난리도 아니더라구요. 고블린 때문에."

아하, 그거 때문에 결심한 거구나.

수연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세상 망하는데 처방전 좀 위조했다고 뭐랄 사람 있어요? 아무도 없죠?"

"거 화끈하시네."

"그럼 그걸로 끝. 참, 성호씨는 이 분들하고 같이 계시죠?"

"아뇨. 저는 따로."

"아. 그럼 이걸 드릴게요."

그녀가 건넨 건 작은 파우치였다.

열어보니 구급함의 것과 똑같은 약봉지가 몇 개 들어있었다.

"감사합니다. 언젠가 신세 꼭 갚겠습니다."

그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그 마음 꼭 잊지 마시고 다음에 일 있으면 저 한번만 도와주세요."

내가 위험에 처하지 않는 선이라면 얼마든지요.

나는 파우치를 배낭에 넣고 헬스장 멤버들에게 인사했다.

형준 형은 나를 꼭 멤버로 들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할 일이 많아서 안 되겠습니다, 형님.

사실 내 주위는 위험하다.

레벨이 높으면, 주위에 리젠되는 몬스터가 강해지기 때문.

초반에 나오는 좀비도 이들에겐 큰 위협인데 강화 좀비는 좀 그렇지.

트롤이 안 되려면 혼자 다니는 수밖에.

나는 SUV를 타고 종묘사로 향했다.

.

.

.

종묘사에는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씨앗들로 가득했다.

아주머니의 자랑에 의하면 여기가 부산에서 제일 크다고 한다.

나는 적당히 받아넘기며 진열대를 구경했다.

식방풍? 어수리? 개똥쑥?

이름도 못 들어본 씨앗을 구비하는 건 솔직히 낭비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먹은 적이 없으면 앞으로도 먹을 일이 없을 테니까.

나는 자주 접하던 씨앗 위주로 골랐다.

그렇게 수십만 원어치를 구입하고 나니 주인이 덤이라며 얹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또 오긴 올 겁니다.

그 때는 아마 여기 있는 걸 다 쓸어가게 되겠지만요.

나는 종묘사의 위치를 지도에 저장했다.

사실 여기보다 더 중요한 곳이 있다.

경북에 있는 종자보관소, 씨드볼트.

아시아 최대라고 하는데 씨앗 5만 종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그날이 되면 전기가 나가버리므로 더 이상 안정적인 보관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씨앗이니까 잘 버틸 거야."

철사병이 가라앉으면 쉘터에 보관해뒀던 오토바이로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20일 털 장소에서 편의점을 빼버렸다.

"더 중요한 곳이 많아."

편의점에 있는 거라고 해봐야 대부분 유통기한이 짧은 식량이다.

차라리 종묘사와 철물점, 캠핑용품 할인점 등을 터는 게 맞다.

그렇다면 동선이 조금 길어지는데···

다섯 시간 안에 여기를 다 털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는 거니까."

당일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돈된 종말일까, 혼란스러운 파멸일까.

그건 정부의 행동에 달렸다.

"언제 일어나는지 정도는 알려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특종에 목마를 기자들에게 정확한 시간대를 가르쳐주는 방법이 좋을 것 같았다.

정부가 서바이벌 라이프의 서버를 확보한다면 쓸데없는 일이 되겠지만.

나는 캠핑용품 할인점에 들렀다.

무슨 주차장이 이렇게 크나 했더니 할인점 자체가 작은 공장만 했다.

"뭐가 이리 크냐···"

이거 당일에 털 수 있을까?

여기도 좀비가 바글바글 할 것 같은데?

안에 들어가니 손님들로 가득했다.

전부 등에 배낭 하나씩을 멘 젊은 사람들이었다.

이제 종말이 생활 깊숙이 침투한 것이다.

심지어 카운터의 직원도 스마트폰으로 고블린 뉴스를 보고 있었다.

곳곳에서 고블린, 좀비, 종말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로프가···여깄군."

나는 품질 좋은 파라코드를 찾았다.

요즘엔 팔찌로도 사용되는 모양이지만 주 용도는 낙하산 줄이다.

엄청 튼튼해서 한 줄로도 250kg의 하중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이거면 숲에서 엄청 다양하게 쓸 수 있다.

나중에 가면 덫으로 사냥도 해야 될 텐데 이 정도면 차고 넘치지.

그 외에도 탐나는 용품이 엄청 많았다.

멋진 세라믹 코펠과 식기세트를 본 순간 바로 살 뻔했다.

이거면 남들 앞에서도 꺼낼 수 있는데!

"젠장, 너무 비싸잖아."

무슨 젓가락 한 벌에 만원이나 하지?

나는 혀를 내두르며 각 용품의 위치를 익혀두었다.

사태 당일에는 철물점과 약국, 그리고 여기를 우선해서 털어야 한다.

나는 파라코드와 몇몇 용품을 구입한 뒤 밖으로 나섰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중장비 렌탈 업체가 보였다.

공터에 다양한 장비가 즐비했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앙증맞은 포크레인이었다.

"저렇게 작은 것도 있었네···"

잘하면 차원문 안에도 들어가겠는데?

차를 세우고 공터에 가서 줄자로 확인해보니 전폭이 80cm밖에 되지 않았다.

"충분하잖아."

업체 사장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나왔다.

"008 렌트할 겁니까?"

이만한 사이즈를 008이라고 부르나보군.

나는 계약을 원했지만 사장은 자격증을 요구했다.

이런 젠장. 자격증까지 필요하다니.

내가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자 사장이 귀띔해주었다.

"자격증 이틀이면 따요. 그걸로 중량은 못 하지만."

"그래요?"

10일 남았으니까 시간은 충분하다.

이틀 동안 해자를 파는 것보다는 자격증을 따서 렌트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사장을 따라 업체 내부를 둘러보는데 특이한 장비가 보였다.

"이건 뭡니까?"

"유압도끼. 땔감 만드는데 쓰지요."

"요즘은 이런 것도 자동으로 되네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요."

사장은 즉시 시범을 보였다.

통나무를 가져와 날에 끼우고 스위치를 올리자 굉음이 터지며 반으로 쪼개졌다.

"힘 좋네."

"힘 좋지요? 싸게 빌려드릴게."

나는 이계의 숲을 떠올렸다.

전력사정이 한정적이라 이런 무식한 놈은 쓸 수 없었다.

"휘발유로 작동하는 건 있습니까?"

"있긴 한데 그런 건 좀 비싸지요, 아무래도."

"한번 보여주십쇼."

과연 사장이 보여준 가솔린 유압도끼는 모터에 비해 훨씬 컸다.

무게만 해도 200kg이 넘었다.

바퀴가 있으니까 옮기는 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엔진톱과 엔진오일, 산소절단기 등을 추가로 주문했다.

물론 기간은 11일이다.

"이런 걸 몰랐다니 난 바보였어."

다음에 내가 들릴 곳은 서점이다.

사실 내겐 서적의 대용품이 존재한다.

미튜브에서 다운받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담은 영상이다.

하지만 영상은 제한적이었고 용어가 낯설어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역시 한국인은 한글이지."

수십 권이나 나열된 원예, 텃밭 관련된 책을 보고 있자니 속이 시원했다.

혹시 모르니까 전기, 전자 관련 서적도 한 권 구입하고, 기초건축도 필요하고···

"···아무래도 여기도 와야겠어."

사태 당일 나는 좀비가 되기 전에 지쳐서 죽지 싶다.

하지만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것들이어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나는 각 분야에서 잘 나가는 지식서적을 구입한 후 차에 실었다.

이제 제리캔을 사서 주유소에 휘발유 받으러 가야 한다.

"세상이 멸망하면 기름을 구할 수 있을까?"

글쎄,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기름 보관하는 탱크는 대부분 금속이니까.

철사병이 닥치면 탱크는 붕괴하고 몇 달만 지나도 끈적한 타르만 남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든 보관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나는 휘발유를 받아 다이서에 들러 4층부터 1층까지 필요한 것들을 구입했다.

치약, 휴지, 비누, 바느질세트, 식기 등등···

"생각해보니까 여기 완전 노다지잖아."

유용한 생필품이 많아 튜토리얼만 끝나면 약탈 1순위가 될 것 같았다.

여기도 체크.

짐을 잔뜩 싣고 집으로 돌아오자 장비업체 사장이 배달을 왔다.

"여기요, 일단 들여놓으시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예엡."

나는 차원문을 열어 장비와 짐을 숲으로 운반했다.

딩고가 과한 반응을 보이며 달려들었다.

"저리가, 저리가. 이거 되게 무서운 거야."

식초를 뿌려야겠군.

녀석은 엔진톱에 달려들었다가 식초냄새를 맡곤 깨갱하며 달아났다.

딩고 미안.

나는 메뉴얼을 정독하고 엔진톱에 시동을 걸었다.

부아아앙―

카랑카랑한 소리가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주위 몬스터들이 찾아오겠지만 윤형철조망님부터 넘어야 할 거다.

커서 치우기 힘들었던 나무에 대자 드득드득 잘려나갔다.

속이 다 시원하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 다 내 거야 > 끝

< D - 7 >

좀비 사태까지 7일 남았다.

놀랍게도 아무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다행스런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스럽기도 했다.

이 작은 나라에서 몇 명 찾아내는 게 그렇게 힘드나?

국가기관의 수사력이면 내가 오늘 입은 팬티 색깔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알아내고 싶진 않겠지만.

"뭐 이렇게 조용해?"

아침에 일어나서 씻는 동안 티비를 켜놔도 별로 볼 게 없었다.

외국의 높은 분이 방한하고 외신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는 건 더 이상 신선한 뉴스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가 궁금한데.

서바이벌 라이프의 제작진도 그렇고···

멍하니 앉아 티비를 보고 있으려니 시사토론이 열렸다.

"아침부터 시사토론이라니."

이런 무거운 프로그램은 밤에 하는 게 국룰이잖아.

사안이 워낙 심각해서 시도 때도 없이 이런 토론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딩고가 화장실에서 나와 하품을 하며 내 다리에 머리를 얹었다.

나는 차마 일어나지 못하고 티비를 주시했다.

―이번 사안, 굉장히 위중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말이지요. 정부의 판단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프로그램에서는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할 경우,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토론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분 반갑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발언권을 얻은 한 패널이 폭탄선언을 했다.

―두말 할 것 없습니다. 계엄령 가야합니다.

―아니 잠깐만요, 계엄령이 그렇게 쉽게···

다른 패널들이 이의를 제기하려 하자 그는 거칠게 어깨를 들썩였다.

―아직도 모르십니까? 공상으로만 여겼던 몬스터가 나타난 이상 다 끝난 겁니다. 우리는 결국 좀비가 된다 이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이겠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론 더 심해지겠죠?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계엄령 가야합니다.

―계엄령이 그렇게 쉽게 내려지는 조치가 아닙니다. 정권에 가해지는 부담이 어마어마할 거란 말입니다. 국회에서 용납하지도 않을 거고요.

―아니 지금 세상이 멸망하게 생겼는데 그깟 정권과 국회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몇 주, 혹은 몇 달 후에 우리 모두 좀비가 된단 말입니다. 답답하시네.

일주일 뒤입니다···

패널들은 갑론을박을 벌였다.

내 보기에 저 통통한 남자가 맥을 잘 짚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하나였다.

어차피 망했으니 정돈된 종말을 맞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말이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철사병이란 거 말입니다. 모든 금속을 무너뜨리는 아주 무서운 병이랍니다. 이게 좀비 사태 당일에 터지면 아주 볼만할 겁니다. 혹시 철사병이 발생할 경우의 일에 대해 설명하실 수 있으신 분?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 설명하라는 것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 공상이란 거지요.

두 패널이 말도 안 된다고 말하자 통통 패널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초능력자의 등장은 공상으로만 여겨져 오지 않았습니까? 어제 그 세계적으로 유명한 초능력자 사냥꾼이 방한해 완벽한 초능력이라고 인정했지요? 무려 100명이 인정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고요. 또 고블린은 어떻습니까. 정부에서 만들어낸 가짜일까요? 두 분께서는 이 모든 것이 공상으로만 보이십니까?

―아뇨, 아닙니다. 그러나···A가 사실로 드러났다고 해서 B와 C가 반드시 현실이 된다는 법은 없잖습니까.

―초능력자가 A, 고블린이 B, 공교롭게도 아프리카의 토속 신을 의미하는 은잠비 운석까지 C입니다. 한 Y까지 똑같아야 인정하시겠습니까? 살아 움직이는 좀비가 눈앞에 나타나면 가능성이 5%쯤 된다고 말씀하시겠어요?

이제 통통한 남자는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두 패널은 헛기침을 하며 눈에 띄게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사회자가 중재에 나섰다.

―자자, 분위기가 과열되고 있는데요. 오늘 주제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할 경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조금 다른 방향에서 바라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현수 위원님, 계엄령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가 어떤 거지요?

이현수라는 패널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저거 물 마시는 걸 못 봐서 장식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하여튼 그가 열변을 토했다.

―계엄령은 계산된 종말을 맞기 위함입니다. 좀비와 철사병, 그리고 몬스터의 침입. 이 비현실적이 요소들이 버무려지면 우리의 문명은 거기서 끝이 납니다.

그가 잠깐 말을 끊었을 때 두 패널이 헛기침을 했다.

앞서 언급된 거지만, 눈앞에 좀비가 튀어나와도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았다.

패널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생존자들이 있을 겁니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살아남을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위해, 후대를 위해 유산을 남기는 것입니다. 철사병 때문에 금속은 안 되니 플라스틱 같은 것으로 단단히 봉인하는 편이 좋겠죠.

―그러니까···유산을 남겨야 한다?

―예. 철사병이 몇 년 후에 사그라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겁니다. 몇 년 후에 열리도록 조작을 가해두면 됩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지요?

―철사병이 현실화될 경우, 우리 사회는 완전히 붕괴될 겁니다. 보니까 철근 콘크리트 건물도 다 무너진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포자가 그런 강력한 투과성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다른 패널이 나섰다.

하지만 통통한 패널이 바로 반박했다.

―왜 직접적인 접촉만 생각하시는 거지요? 우리는 그 포자가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것이 일종의 방사능 물질이고, 방사선을 조사한다면 어떻습니까? 입자선이라서 강력한 투과성을 가진다면?

―그건···

안경 패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논리로 밀린다기보다는 포자가 뭔지 모르니 얘기할 거리가 없는 것에 가깝다.

나는 노트북으로 서바이벌 라이프의 배경을 살폈다.

"얼룩덜룩한 반점이 있네."

게임을 할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지금 보니 조금 이상했다.

무너진 건물이며 차량 등이 심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진짜 방사선 같은 건가?"

스토리를 살펴보니 포자라는 것만 쓰여 있고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강력한 투과성을 지닌 입자선이라···

그럼 무슨 짓을 해도 철사병에서 벗어나긴 힘들다는 얘기가 된다.

지하 수km까지 파고들지 않으면.

승산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통통 패널이 사자후를 토해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획된 종말을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종말이 언제인지 모릅니다만 미국이 알아낼 것입니다. 계엄령을 발동하여 전국의 원자력 발전소를 셧다운 시키고, 위험한 화학물질을 정화해야 합니다. 도시가스도 끊어야 하고요.

―너무 나가신 것 같습니다. 그걸로 입을 피해가 얼만지나 아십니까?

―종말인데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다 죽는데요.

―만약 종말이 아닐 경우, 그 피해를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지금까지 이야기를 했는데도 이러시네요. 답답합니다, 답답해요.

―최소 서바이벌 뭐라는 게임의 제작진의 신병과 서버를 확보한 다음이어야 합니다.

―지금 찾고 있다고 보도가 났으니···

―그래선 늦는단 말입니다!

"흠···"

평행선이로군.

패널들의 견해가 워낙 첨예해서 간극이 좁혀질 것 같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계획된 종말이라···

확실히 계엄령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현재의 정부에게 그럴 용기가 있냐는 거지.

"좀비 몇 마리는 남겨둬야겠어."

이틀만 기다리면 러시아 어선 이벤트로 세상이 좀비를 목격하게 된다.

그 외에 내가 해줄건 정확한 시간대를 알려주는 것 정도다.

나머지는 운석인데.

"NASA도 있고 하니···"

은잠비 운석이 목성 근처에서 파편화되어 추적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대규모 운석군이 지구에 근접하면 관측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미사일 같은 걸로 요격하면 안 되나?"

지구방위대 미군이라면 혹시···

다들 마음 졸이고 있는데 미션 성공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건 아니겠지.

"뭐, 나쁠 거 없지."

종말이 다가오지 않는다면 나는 더 좋다.

나는 혀를 빼물고 자고 있는 딩고를 조심스레 안아 숲으로 들어갔다.

쉘터 안에는 렌탈한 미니 포크레인을 비롯한 여러 장비가 놓여 있었다.

어디 공사할 거냐고 끈질기게 물어봐서 참 난처했지.

다들 잠든 새벽에 인근 공터에서 차원문을 열고 포크레인을 집어넣는데 성공했다.

교육도 받았고 다 좋은데, 연비가 상당히 나빴다.

"하루에 제리캔 하나씩 먹겠네."

일을 잘하니까 봐주도록 하자.

좌석에 앉아 조심스럽게 레버를 움직여 흙을 떠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일은 이렇게 하는 거지.

내가 수십 번 할 삽질을 단숨에 해내니 역시 문명의 이기가 참 좋아.

반대급부로 숲이 시끄러워졌고 동네 몬스터들이 한 번씩 와서 이빨을 드러냈다.

은신처가 아니라 쉘터로 확장하려 마음먹었을 때 각오한 거지만, 그래도 심장이 덜컥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윤형철조망 때문에 쉽게 덤비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사고를 칠 것 같았다.

화살 맛을 보여주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와라. 전부 박살을 내줄 테니.

.

.

.

"이상하네."

나는 목록과 비축물자를 비교했다.

왜 젤리 하나가 비지?

난 딱히 젤리를 즐기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다양한 식량을 비축한다는 의미에서 100개의 젤리를 보관했다.

맹세코 지금까지 먹은 적은 없었다.

"딩고 니가 먹었어?"

녀석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묻는다고 알아듣지 마.

그건 그렇고 빈 공간을 자세히 보니 말라비틀어진 포도 한 알이 보였다.

이게 여기 왜 있지?

"혹시 교환이라고 놔두고 간 거 아냐?"

대체 어떻게?

동굴은 감지기와 CCTV등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쥐 크기 이상의 동물이라면 절대 놓칠 리가 없다.

그럼 도둑의 크기가 작다는 말이 되는데.

나는 간밤의 CCTV 영상을 확인했다.

너무 길어서 1분씩 넘기긴 했지만 특이한 건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이 도둑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나중에는 젤리가 아니라 통조림, 비상식량을 훔쳐갈지 어떻게 알고.

포도 한 알을 놔둔 건 나름 교환의 의미인 것 같지만 나한테 허락을 받아야지.

"굳이 젤리를 훔쳐갔다는 건 좋아한다는 말이겠지."

나는 CCTV 하나를 안쪽으로 설치했다.

녀석이 은신 능력을 가진 게 아닌 이상 반드시 포착될 것이다.

나는 딩고를 옆에 태우고 포크레인으로 해자 공사를 이어나갔다.

땅을 파내는 것 자체는 재미있지만 가끔 섬뜩할 때가 있다.

몬스터들이 빤히 쳐다보고 가기 때문이다.

특히 고블린 놈들은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흘리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공사를 멈추고 활을 쏴서 녀석들을 쫓아냈다.

"위험해···"

고블린은 함정을 팔 줄 아는 몬스터다.

즉 주위 환경을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고칠 줄 안다는 것이다.

땅을 파고 들어오면 대책이 없다.

그리고 밤에는 코볼트들까지 기웃거렸다.

당장 큰 움직임은 없지만···

"내가 먼저 사고를 쳐주지."

방어만 하다간 답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해자 공사를 진행하며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7월 14일 아침.

여느 때처럼 동굴에 들어가 달라진 게 없나 점검하는데, 있었다.

"요놈들 봐라?"

또 젤리 하나가 사라지고 포도가 한 알 놓여 있었다.

고구마 맛이 취향인가?

"대체 뭐하는 녀석이야···"

CCTV를 돌려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웬 곤충들이 으쌰으쌰 젤리를 들고 나가는 게 아닌가.

"뭐야. 검은 풍뎅이?"

자두 정도로 제법 큰 녀석들이었다.

뿔과 집게가 다 달려 있었고 앞다리가 꽤 길었다.

그나저나 희한하네.

보통 풍뎅이가 저렇게 협업이 잘 되는 곤충이었나?

이 영상만 보자면 지능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마지막에 멋진 뿔을 가진 녀석이 포도알 하나를 젤리 위에 놓았다.

훔치는 게 아니라 교환이라 이거지.

"난 허락한 적 없는데 말이야."

보아하니 작은 덩치를 이용해서 문틈으로 젤리를 들고 나간 것 같았다.

그늘포도도 아니고 그냥 포도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나는 미튜브 영상을 참조해서 트랩을 만들었다.

고구마 맛 젤리만 훔쳐가는 걸 보면 그게 취향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선 젤리를 빼는 순간 함정이 작동되는 걸로 하면 되겠지.

"젤리를 따로 빼놓고···실을 연결하면···"

젤리를 훔치는 순간 실과 연결된 포획틀이 풍뎅이들을 덮칠 것이다.

튼튼한 플라스틱 케이스면 문제없이 녀석들을 가둬두겠지.

나는 트랩을 몇 번 작동시키면서 보완했다.

젤리를 뺄 때마다 위에서 케이스가 내 손을 덮쳤다.

"이 정도면 됐어."

풍뎅이들이 케이스에 갇혀 있는 걸 상상하니 절로 흐뭇해졌다.

죽이진 않겠지만 도둑질은 포기하라고.

나는 온종일 해자 공사를 하고 저녁에 딩고와 함께 2층집에 건너갔다.

"시위하네···"

서울 광화문과 몇몇 곳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시위자들의 인터뷰와 침묵하는 정부의 성토 등으로 시끄러웠다.

"이제 6일 남았나?"

며칠 후에 좀비 사태가 터진다는 사실을 알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바뀔까.

···어쩌면, 그 통통한 패널의 말대로 계엄령이 답인지도 모르겠다.

계획된 종말···

원자력 발전소를 셧다운 시키고, 화학공장 등을 폐쇄해주면 생존자들에겐 참 좋겠지.

대통령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내일 나온다.

러시아 어선 이벤트.

인류는 좀비 사태가 허황된 것이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잘하면 총기와 탄약을 얻을 수 있겠고.

나는 배경 스토리를 다시 훑고 머릿속으로 행동을 시뮬레이션했다.

"이거 나밖에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어지간한 고인물이면 일어난다는 것 자체는 알고 있을 것이다.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서.

혹시 내일 누구와 만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가능성은 낮지만 토끼공듀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난 그를 무시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평소 바닥에 등만 대면 곧장 잠에 빠지던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딩고가 품에 기어들어 왔다.

귀엽긴 한데···좀 덥지?

우리 동굴에서만 같이 있고 여기선 좀 떨어져서 지내자.

< D - 7 > 끝

< D - 5 >

7월 15일.

그동안 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정부의 침묵을 보다 못한 야당 의원들이 청와대에 진입을 시도했다가 경비부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국회는 거의 마비상태였고 언론은 자극적인 뉴스를 양산했다.

인터넷에선 좀비와 고블린이 싸우면 누가 이기냐는 참신한 개소리가 인기를 끌었다.

많은 사람들은 좀비가 승리한다고 봤다.

누가 내게 묻는다면 때에 따라 다르다고 답하겠다.

"마비독침만 봉쇄하면 좀비의 승리인데."

유감스럽게도 좀비와 몬스터는 서로 싸우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몬스터 측에서 좀비 무리를 피하는 쪽에 가깝다.

수가 워낙 많거든.

"외국도 꽤 시끄럽네."

국외로 시선을 돌려보면 뭔가 분주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낄 수 있다.

UN에서 긴급회의가 열리고 미국 대통령이 모든 스케줄을 취소, 급히 방한한다고 한다.

NASA에서는 전 세계의 우주관련 연구기관 및 천문대, 아마추어들에게 호소해 지구근접천체의 감시에 나섰다.

그 와중에 지방 각지에선 종말론자들이 대규모 예배를 벌였다.

"또 휴거냐···"

90년대 이후로 사멸된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남아 있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미튜브를 비롯한 방송 플랫폼에서도 종말이란 주제가 뜨거웠다.

요즘은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이렇게 방송을 통해 정보를 공유한다.

물론 그 정보가 맞으리란 보장은 전혀 없지만.

"그나저나 대통령은 대체 뭘 하는 거야."

고블린이 출현한지 벌써 닷새나 지났는데 대국민담화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이번 대통령은 그렇게 무능하지는 않다는 평가였는데 이상한 일이다.

"하긴, 외국도 마찬가지니까."

이미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방한해 고블린의 사체를 확인한 상태였다.

아마 각성자들의 초능력과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는 국가는 없었다.

서바이벌 라이프 제작진을 찾는 건 어떻게 됐을까?

정부가 침묵 일관조라 제대로 된 정보가 별로 없었다.

"혹시 뭔가를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결정적인 증거.

각성자들 수백 명과 인터뷰를 했을 테니 좀비 이벤트가 있다는 건 알아냈을 것이다.

어쩌면 정부는 좀비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국회의원들이 청와대 앞에 몰려가 격렬히 항의하자 비서실장이 나와 정확한 판단을 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놈의 정확한 판단! 증거가 이리도 많은데 무슨 증거가 또 필요합니까?

―양해 부탁드립니다.

비서실장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음에도 국회의원들의 비방은 더 심해졌다.

―대통령이 여기에 있는 건 확실해요?

―혹시 도망간 거 아닙니까? 해외로.

실제로 상당수의 기업가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해외로 나가 있는 상태였다.

각성자와 몬스터가 한국에서만 나왔다는 것 때문에 지금 세계에선 한국이 멸망 1순위라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

그 말은 틀렸다.

운석이 일본 근해에 떨어지기 때문에 일본과 대만이 1순위고 한국은 2순위다.

비서실장이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는 게 보였다.

―전세기는 뜨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족도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모를 일이지. 두고 혼자 도망갔는지도.

비아냥이 거기까지 이르자 비서실장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솟았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어허이, 이 사람. 진정 좀 해요.

사람들이 비서실장과 국회의원을 뜯어말렸다.

저 태도를 보면 대통령은 아직 한국에 있는 것 같았다.

"좀비를 확인한 후에 계엄령을 발동할 생각인가?"

원자력 발전소 등 기간시설의 작동을 중지시키는 건 한국에 막대한 부담을 가져온다.

확실한 증거와 결단력이 없으면 어려울 것이다.

그럼 내가 증거를 드리지요.

"좀비 몇 마리만 남겨놓자."

나는 작은 고무보트를 한 대 마련한 후 쉘터에 패널로 창고를 만들며 때를 기다렸다.

점심 때 딩고와 함께 티비를 보고 있는데 폰이 울렸다.

「긴급 재난 문자 : 7월 15일 12:21 부산광역시 남쪽 30km 지점 해일 경보. 해안가 일대 주민들은 즉시 대피바람」

거의 동시에 각 커뮤니티에서 운석이 낙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좀비가 왔다.

.

.

.

나는 급히 차를 몰고 감천항으로 향했다.

재난 문자를 본 사람들이 대피하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늦으면 안 되는데."

요리조리 차를 피해 운전해서 멀찍이 주차해놓고 동네 빌딩에 올라갔다.

수차례 러시아 어선 이벤트를 확인한 바, 들어차는 바닷물의 수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기껏해야 2층?

물론 그것만 해도 큰 재난이지만, 내겐 고무보트가 있다.

어선이 부두에 올라앉고 바닷물이 들어차면 즉각 바람을 넣고 돌격할 예정이었다.

선외기가 있어서 움직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경찰이 오기 전에 빨리 끝내야 돼."

발각될 것 같으면 고무보트는 버리고 도망가야겠지.

나는 해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다 대피했는지 감천항 일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가끔 차가 빠져나가는 소음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앞으로는 이런 적막 속에서 살게 되겠지.

"뭐 좀비 으어어 거리는 소리가 있으니까 다행인가."

그걸 다행이라고 봐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심심하진 않을 것이다.

애애애앵―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저 멀리서 해일이 다가오는 걸 목격했다.

"우와···"

바다가 통째로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거 여기에 있어도 괜찮은가?

나는 급히 차원문을 열었다.

해일이 너무 높으면 이벤트고 뭐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딩고는 겁에 질려 왕왕 짖다가 꼬리를 말고 내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 있어."

녀석을 차원문 안에 넣고 나니 수평선 너머에 장난감 같은 배가 보였다.

망원경으로 확인하니 세상에, 커다란 어선이었다.

러시아 깃발을 단, 수백 톤은 될법한 어선이 해일에 밀려오고 있었다.

"장난 아니네···"

나는 초조하게 해일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사이렌 소리도 어느덧 멈췄고 주위는 고요해졌다.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빌딩에서 은은하게 진동이 느껴졌다.

안전하다고 확신하고 있는데도 무서웠다.

인간이 손을 쓸 수 없는 재난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5일 후면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세계적인 재난이 일어난다.

몸은 버틴다 해도 정신은 버틸 수 있을까?

"버텨야 돼···"

나는 이를 악물고 어선이 밀려오는 광경을 똑바로 쳐다봤다.

감천항 일대의 바닷물이 쑥 빠져나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높이의 해일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런 씨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거대한 해일이 부두를 휩쓸고 거대한 어선을 위에 올렸다.

막대한 양의 바닷물이 부두에 부딪쳐 하얀 장벽을 만들어냈다.

"헉!"

정신을 차린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바닷물이 빌딩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높이는 대략 2층 정도?

차량들이 바닷물에 밀려나갔고 곳곳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바로 지금이다.

나는 차원문을 닫고 3층 사무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지?"

창문을 통해 내다보니 2m밑에 바닷물이 급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고무보트에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젠장, 이거 엄청 힘드네.

겨우 바람을 다 넣고 유리창을 완전히 깨버렸다.

그리고 바닷물의 속도가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선외기가 있긴 하지만, 자칫 떠밀려갈 위험이 있다.

10여분 정도가 흐르자 바닷물의 속도가 완만해졌다.

"이쯤이면 언론에서 나올 때가 됐는데···"

그 전에 나가자.

나는 보트에 로프를 연결하고 기둥에 묶었다.

휙 집어던지고 바로 뛰어내리자 가까스로 보트를 잡을 수 있었다.

"이런 썩을!"

간신히 보트 위에 올라가서 차원문을 열고 선외기를 꺼냈다.

여기 브라켓에 고정시키는 거였지···

선외기를 작동시키고 로프를 끊으면!

부아아앙―

보트가 꿈틀대더니 경쾌하게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바짝 엎드렸다.

빌딩 사이를 빠져나가자 부두에 좌초된 러시아 어선이 보였다.

"똑같네···"

배경설정의 삽화와 완전히 동일했다.

심지어 기울어진 각도도 비슷하다.

"저기 사다리가 있구만."

어선에 접근하자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까진 배경설정과 똑같다.

내가 우려하는 건 여기서 좀비 포자에 감염되느냐였다.

아무래도 포자가 배를 덮쳤으니 나도 위험하지 않을까.

"각성은 했으니까 괜찮겠지."

숲에서 계속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각오는 했지만 조금 무서웠다.

포자에 오염되어 있을 게 분명한 배 근처에서 숨을 크게 들이켰는데도 이상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각성자들은 좀비가 안 되나보군."

그 외에도 따로 조건이 있는 것 같지만 현 시점에서는 파악불가.

나는 보트를 사다리에 묶어놓고 배 위로 올라갔다.

군대시절 유격이 생각나는구만!

간신히 갑판에 올라서고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방수복을 입은 러시아인 둘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저 엉거주춤한 자세. 오랜만이군.

"반갑다. 좀비들."

둘이 나를 돌아봤다.

얼핏 보기엔 정상 같지만 눈이 뒤집어지고 얼굴 피부가 얼룩덜룩했다.

포자에 뇌가 잠식당해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다.

모든 생명체를 공격하며, 충분한 에너지를 섭취하면 더 강력해지는 두려운 존재.

좀비가 나타났다.

그때 데크 하우스 쪽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총을 쏜 사람과 동일인인가?

좀비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게 이를 드러냈다.

카아아악!

늘 생각하는 거지만 저렇게 포효할 시간에 공격하면 좋을 텐데.

나는 침착하게 차원문을 열고, 메이스와 방패를 꺼냈다.

좀비들이 절뚝거리며 걸어왔지만 희한하게도 긴장은 되지 않았다.

게임의 느낌과 완전히 같았기 때문이다.

"뉴비라면 모를까···"

나는 서바이벌 라이프에 5,541시간을 바친 미친놈이다.

좀비의 공격 따위는 눈을 감고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목숨은 하나니까 그래선 안 되겠지.

카악!

좀비들이 공격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옆으로 슬쩍 비켰다.

녀석들이 헛손질을 하는 동안, 나는 오토바이 헬멧까지 꺼내 쓴 상태였다.

"차원문 닫아."

나는 가까운 좀비의 대가리를 메이스로 후려갈겼다.

뻑!

두개골이 일격에 박살나는 이 경쾌한 감각, 오랜만이군.

메이스에 얻어맞은 좀비는 머리가 함몰되어 주저앉았다.

"어? 이걸로 죽어?"

다른 좀비가 두 팔을 뻗으며 나에게 접근했지만 방패로 밀어내니 휘청거렸다.

"저리 가라고."

오지마 킥으로 배를 밀어내자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상한데. 원래 이렇게 무력했나?

초보존의 좀비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패치로 난이도를 낮춘 버전인가?

초반에 등장하는 좀비는 포자에 완전히 장악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멈칫거리곤 한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생각과 몸이 따로 놀았다.

좀비가 다시 달려들었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메이스를 휘둘렀다.

그리 강하게 휘두른 것 같지도 않은데 좀비가 허물어졌다.

「포인트를 4 획득했습니다」

"확실히 쉬워졌어."

서비스 종료 직전에 난이도를 낮춘 버전이 적용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야 내가 활동하기에 편해지지.

생존자들이 버틸 가능성도 높아졌고.

그나저나 생각지도 않았는데 몸이 반응하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숲에서는 이렇게까지 움직이지 못했는데.

"낯선 환경이라서 그랬나···"

살이 빠져서 몸이 가벼워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움직여야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다.

나는 서둘러 데크 하우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좀비 두 마리가 시체 하나를 놓고 먹고 있었다.

쩝쩝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젠장."

피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구역질을 참으며 전진하자 가까이에 있던 좀비가 일어섰다.

카아아악!

"잠깐 기다리라고."

나는 녀석을 방패로 막고 철문을 열었다.

여긴 식당 겸 창고인가?

커다란 마요네즈 통이 눈에 띄었다.

저거 우리나라 메이커인데!

러시아인들이 오뚝이 마요네즈를 많이 사간다는 건 사실인가보다.

대용량 식자재가 눈에 아른거렸지만 시간이 없다.

빡!

좀비의 머리가 움푹 꺼졌다.

녀석이 쓰러지고 나자 다음 타자가 까꿍 하며 나를 반겼다.

"복도가 참 좁다, 그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라 앞만 막으면 근심이 없다.

그리고 녀석이 주춤한 틈을 타 메이스를 내리치면 그만이지.

바로 이렇게.

칵!

두개골이 박살난 좀비가 천천히 쓰러졌다.

철사병이 닥치고 나면 이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워 클럽, 흑단목 몽둥이가 아무리 튼튼해도 철에 비교하지는 못한다.

"한대 때릴 거 두 대 때리면 되지."

「포인트를 4 획득했습니다」

나는 좀비를 밟고 전진했다.

선장실이 어디쯤 있을까···

이런 어선에선 조타실과 합쳐져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복도를 지나다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좀비 몇 마리가 문에 쾅 부딪치는 게 아닌가.

보아하니 선실에 있다가 좀비가 되어 갇힌 것 같았다.

꾸어어억!

좀비 세 마리가 자기들끼리 밀고 쥐어뜯고 난리가 났다.

기괴한 풍경이지만 조금 웃기기도 했다.

서바이벌 라이프에선 이게 일상이었으니.

"···그냥 가자."

6포인트보다는 빨리 총기를 루팅하고 도망가는 게 더 중요하다.

좀비라는 증거도 남기고 싶었고.

복도 중간의 문을 여니 시체 한 구와 좀비가 쓰러져 있었다.

작업복이 아닌 걸 보면 선장인 것 같았다.

그의 옆에는 토가레프···비슷한 자동권총이 떨어져 있었다.

방금의 총소리와 비명은 이 사람에게서 난 거겠지.

"이것보단 실탄이 더 중요한데."

근처의 문을 열자 조타륜과 침대가 보였다.

보통 러시아 어선들은 침대 밑에 뭘 숨긴다고 하지.

손을 넣고 뒤지자 과연, 상자 하나가 만져졌다.

"오호."

꺼내 확인하자 놀랍게도 실탄 한 박스가 나를 반겼다.

"100발쯤 되겠네."

근데 이거 9mm가 아닌 것 같다?

루팅한 권총 세 종류가 전부 탄이 다르다니 이런 환장할 일이 있나.

나는 바로 차원문을 열어 권총과 실탄박스를 넘겼다.

"딩고, 아직 아니야, 넘어오지 마."

추가로 선장실을 뒤졌으나 특이한 건 없었다.

이제 슬슬 도망갈 때로군.

복도를 지나치다보니 그 마요네즈 통이 나를 유혹했다.

옆에 커다란 통조림도 있잖아?

과연 러시아의 기상이라 할만 했다.

"에라 모르겠다."

다른 건 참아도 저 대용량은 못 참겠다.

나는 식당으로 들어가 마요네즈와 케첩, 통조림과 기타 식량을 차원문에 넣었다.

수십 개를 그렇게 옮기고 나니 어디선가 헬기소리가 들렸다.

방송국 헬기인가?

이젠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나는 부리나케 갑판을 달려 사다리를 타고 보트에 올라탔다.

로프를 끊고 선외기를 작동시키자 멀리서 뭔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어?"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니.

고무보트에, 방검복과 오토바이 헬멧까지 동일했다.

그는 나를 보더니 흠칫했다.

우리 둘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며 지나쳤다.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끝내 실드를 열지 못했다.

나는 선외기를 이리저리 움직여 부두에서 벗어났다.

헬기 로터소리가 크게 들렸다.

.

.

.

그날, 갑작스런 해일과 부두에 올라탄 러시아 어선이 국민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방송국에선 무슨 말을 들었는지 드론을 날려 영상을 송출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인간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중계되었다.

그들은 한동안 갑판을 방황하다가 헬기가 접근하자 이를 드러내며 난리를 쳐댔다.

현장에 파견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 지금 보시다시피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미튜브의 라이브 채널에선 좀비들 빨리 죽이라는 댓글이 수백 개나 쏟아지고 있었다.

"저게 좀비인지 확신이 서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비에 대해 모른다.

거슬리니 그냥 죽이라는 것이다.

잠시 후에 또 다른 헬기가 출동해 어선 주위를 빙빙 돌면서 러시아어로 방송했다.

이 과정이 생중계되다 보니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대통령이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부산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근데 가까이 가면 안 될 텐데."

좀비 포자가 어떤 식으로 사람을 오염시키는지를 모르니···

요즘에는 뭐 로봇 같은 것도 많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나는 루팅한 물자를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런데···어라?

풍뎅이 잡으려고 설치한 포획틀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CCTV 영상을 확인하니 풍뎅이들이 벽을 조금씩 갉는 게 보였다.

다른 놈이 합세해서 벽을 갉자 사각형 구멍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풍뎅이들이 질서정연하게 탈출했다.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지?

"황당하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녀석들이 훔쳐간 건 역시나 고구마 맛 젤리였다.

포도 한 알은 나를 놀리는 건가?

"이 녀석들 내가 잡고 만다."

꼭 잡아서 고구마 맛 젤리로 줬다 뺐다 하며 놀려야지.

2층집으로 나와 뉴스를 보며 있으려니 대통령이 부산에 도착했다는 보도가 떴다.

무슨 명령이 내려졌는지 헬기에서 경찰특공대가 저격으로 갑판의 좀비들을 사살했다.

드론이 갑판 가까이 다가가는 게 보였다.

대통령의 표정이 음울하게 바뀌었고 옆의 사람들에게 뭐라고 물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각성자로 추측되는 사람들의 입모양을 보면 뭐라고 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마 이랬을 것이다.

―좀비가 맞는지 확인해주십시오.

―맞습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이 정해졌다.

< D - 5 > 끝

< D - 4 >

7월 16일 새벽.

나는 새벽부터 택시를 타고 포항으로 향했다.

대책본부에 디데이와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좀비를 봤으니 알아서 행동하겠지만···"

그래도 대통령의 결심에는 그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밤까지 기다렸으나 별다른 정보는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서바이벌 라이프의 제작진 신병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정보를 줄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거라도 해야 남은 4일 동안 정부가 최소한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나는 아무도 오지 않을법한 해안에 나가 권씨의 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간 뒤 거의 죽을 것 같은 목소리의 남자가 받았다.

―대책본부 행정관 이우범입니다.

"디데이의 정확한 시간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그런 전화를 한 3백통 정도 받은 것 같은데요···혹시 서바이벌 라이프에서의 아이디가 김밥조아십니까?

할 일 없는 놈들이 이렇게 많았었나.

나는 빠르게 말했다.

"7월 20일, 오후 1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7월 20일, 오후 1시입니다. 며칠 전 가야산에서 수습한 홉고블린 뒤통수에 구멍이 두 개 있을 겁니다."

이걸 아는 사람은 저지른 나와 부검의, 그리고 핵심 관계자뿐일 것이다.

비서실에 연락을 해보면 바로 드러난다.

―자, 잠시만요.

나는 전화를 끊고 폰을 바다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최대한 동선을 꼬고 숲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등 추적방지에 노력했다.

사실 나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디데이의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 정부가 나를 쫓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부가 추적한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적이라고 간주하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물론 형준 형이나 미용실 아가씨, 수연 등에게는 도움을 주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들과는 친분이 있고, 또 나를 도와줄지도 모르니까.

나는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 즈음의 영상을 찾았다.

"패치노트가 어디 있나···"

이제 며칠 후면 세상이 마경으로 변한다.

인구 태반이 좀비로 변하고 소수 생존자들도 그리 오래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제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좀비의 내구력이 내가 알던 초반과 비교해 상당히 약해졌다는 것.

"머리가 좀 뭉개져도 주저앉지는 않는데···난이도를 내렸나?"

여기 있군.

나는 마지막으로 정리한 패치노트를 확인했다.

―튜토리얼 난이도 패치(좀비 내구도 하락, 유기물 추적능력 저하, 10포인트 무기 제공) 

―포인트 획득방법 다양화

"아, 맞아. 이런 게 있었지."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어서 스크린 샷만 찍고 넘어간 적이 있었다.

"내구도 하락은 내가 확인했고."

유기물 추적능력 저하와 10포인트 무기 제공은 눈이 확 뜨일 정도였다.

전자는 좀비가 사람을 잘 찾지 못한다는 뜻이고.

후자의 10포인트 무기는 흑단목 몽둥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내구력 하락과 합쳐지면 튜토리얼에서 살아날 가능성이 꽤 올라간다.

포인트 획득방법 다양화는 사냥 외에 얻을 방법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나저나 서비스를 종료하는데 이런 패치를 하다니.

"거 참 되게 성실한 양반들이네."

할 수만 있다면 제작진을 찾아서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정체가 뭐며 어디에 숨었고 왜 게임과 현실이 합쳐지냐고 말이다.

뭐 다른 사람도 나를 그렇게 찾겠지만.

"일이나 하자."

포크레인으로 해자를 파고 있으려니 또 고블린들이 얼쩡거렸다.

전보다 규모가 더 커진 상태여서 나도 바짝 긴장하고 활을 날렸다.

녀석들은 기겁하고 도망갔지만 결코 포기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블린 놈들은 집요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내가 박살나든지 놈들이 박살나든지 둘 중의 하나다.

나는 드론으로 녀석들을 쫓았다.

역시. 북쪽으로 3km정도 떨어진 곳의 둥지 소속이었다.

확 쳐들어가서 권총으로 다 쏴죽이고 싶었지만 일단 종말의 날까지는 참기로 했다.

"튜토리얼도 좀 깨고 안정화가 되어야···"

여기서 안정이란 말은 더 이상 큰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 남은 일정이···"

러시아 어선 이후로는 튜토리얼까지 스토리가 없다.

루팅할만한 것으로는 부산시에서 21일 주최하는 불꽃축제 정도.

지역뉴스를 보니 중지된다는 보도는 나와 있지 않았다.

"보자···선외기는 못 쓰니까···"

노를 저어서 바다로 나가야 한다.

튜토리얼을 끝낸 뒤일 테니 그렇게 어렵진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은 천천히 돌면서 쇼핑이나 하자."

왠지 빅뉴스가 터질 것 같아 해자 공사를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딩고를 조수석에 태우고 낚시용품점에 들렀다.

통발과 작살 등을 고르고 있는데 머리 희끗한 할아버지가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뭔가 해서 카운터에 가보니 티비가 속보를 줄줄이 토해내고 있었다.

―속보. 청와대에서 육군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 전원 호출.

―속보. 청와대에서 서울대학교 교수진 호출.

―속보. 청와대에서 한국건설 임원진 호출.

―속보···

그러다가 갑자기 검열이라도 받은 듯 뚝 끊겼다.

사장 할아버지가 투덜거렸다.

"아니 왜 보여주다가 마냐고?"

"검열 당했나 보네요."

"검여얼?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좀비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시대죠."

내가 그리 말하자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요즘은 그냥 장사도 안 되고 죽겠어요. 어제오늘 손님이 처음이요. 대체 위에선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좀비건 뭐건 다 쏴죽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요. 그나저나 이건 얼맙니까?"

나는 평소에 사고 싶었던 낚시용품을 잔뜩 골랐다.

캠핑용품점은 사람이 많아 눈치가 보였지만 여긴 나 혼자뿐이거든.

할아버지는 안경을 슬쩍 들어 올리더니 손을 저었다.

"뭐 그리 많이 삽니까?"

"이번이 마지막이라서요. 앞으로 낚시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니···"

"저런···젊은 나이에."

나는 철사병 때문에 릴 등이 바스러지는 의미로 말한 거지만 이 할아버지는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반값으로 해줄 테니 싸게 가져가요."

"그럼 더 골라도 될까요?"

내가 희희낙락하자 할아버지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낚시에 맛을 들이면 그 지경이 되어도 못 끊지. 세상도 곧 망할 것 같은데···얼마든지 가져가요."

"옙. 감사합니다."

나는 SUV트렁크가 꽉 찰 정도로 낚시용품을 구입했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나와서 낚시용품점을 지도에 기록했다.

"여긴 나중에 와도 되겠지."

좀비들에게 쫓기고 있는 와중에 낚시용품점을 터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해안가는 숨을 곳이 별로 없어서 매우 위험하거든.

하지만 나는 이계의 바다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몬스터만 안 나오면 그야말로 천국인데.

"다음은 뭘 사야 되나···"

나는 진시장에 들러 수동 재봉틀과 침구, 옷감 등을 다량 구입했다.

그리고 구석진 곳에 가서 차원문을 통해 넘겨버리고 정리했다.

동굴 앞에 창고를 만들어놔서 다행이었다.

반대급부로 몬스터의 시선을 끌게 되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신발도 사야 되고 대야도 사야 되고···"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체크리스트가 점점 채워지고 있었다.

물론 이게 파밍의 끝은 아니다.

당분간 생존에 집중하기 위한 준비일 뿐.

좀비는 식량 외에는 관심이 없고 고블린을 비롯한 몬스터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그 사이에 쉘터를 요새로 만들어서 물자를 더 비축하는 게 내 계획이었다.

"그 때 살아남은 사람이 있으면 슬슬 도움을 줘도 괜찮겠지."

내게 도움이 되고, 호의적인 사람에 한해서만.

나는 마트 여기저기에 들러 식량과 생필품, 옷 등을 왕창 구입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창고 정리를 해나갔다.

비축물자가 어찌나 많은지 그 넓던 쉘터가 제법 좁아보였다.

나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항아리와 김장거리를 잔뜩 구입했다.

쉘터 공터를 파내고 항아리를 묻는 것만 해도 대공사였다.

적당히 정리만 하는데도 하루가 다 지나갔다.

저녁이 되어 나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쟤들은 뭐지?"

부산 시내에 뭐 저리 육공트럭이 많이 돌아다니는 걸까?

트럭마다 병력이 한 가득이었다.

의아해하며 집에 돌아오니 큰일이 터졌다.

전쟁이란다.

.

.

.

"이게 무슨 개소리야."

좀비 사태를 며칠 앞둔 이 시국에 전쟁이라고?

북한이 쳐들어 온 건가?

―지금 전쟁터짐?

―포천 쪽에 전차하고 장갑차 줄줄이 지나가고 있음. 분위기 장난아님.

―님들 우리 방송국에 헌병대 들어옴ㅋㅋ

―여기 여천공단 업체인데 육공트럭 우르르 들어왔어요!

온갖 커뮤니티에서 급보가 올라왔다.

더 알아보려 하자 인터넷이 툭 끊겼다.

거의 동시에 휴대폰이 권외로 바뀌었고 티비 채널도 1개밖에 나오지 않았다.

라디오를 틀어보니 노이즈만 들렸다.

창문 밖을 보니 사람들이 나와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미경이 머리를 쏙 내밀었다.

"아저씨 티비 안 나오시죠?"

"네. 인터넷이고 뭐고 다 끊겼네요. 무슨 군부대가 출동했다 어쨌다 하는데···"

"저, 전쟁 터진 거 아니에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북한이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선 대규모 포병사격으로 전방을 녹여야 한다.

즉 경기 북쪽이 포격을 뒤집어써야 비로소 전쟁이 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소식은 없었다.

거기다 특작조가 후방침투를 한다손 치더라도 국가통신망을 쉽게 장악하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한국의 석유화학 중심부인 여천공단에 한국군으로 위장한 특작부대가 침투한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아마도 대통령이 최종결심을 해서 계엄령을 명령한 것 같았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공표하지는 않고.

미경은 불안한 얼굴로 여기저기 둘러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미경씨 헬스장에 가보세요. 멤버잖아요."

"아저씨는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뭐 여기서는 같이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

아직 좀비 사태가 터진 것도 아니니까.

"그럼 갑시다."

나는 미경과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골목길을 벗어나니 작은 군용트럭이 다니면서 방송하는 게 눈에 띄었다.

―부산시민 여러분, 생업을 접고 집으로 귀가하십시오! 사흘간의 식료품과 물을 챙긴 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이번 사태는 곧 진정될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경이 내 팔을 잡는 게 느껴졌다.

군인들이 저 방송을 하는 건 사흘간 집에 있으면서 가족이나 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 다음에는 태반이 좀비로 변하니까.

길을 걷다보니 아줌마들의 대화가 들렸다.

"아니 글쎄, 이 양반이 갑자기 집에 돌아왔지 뭐예요?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모른데요. 위에서 그냥 가라고 했다던데."

"아저씨가 무슨 일 하시는데요?"

"그냥 공무원이에요."

"어쩜 세상에···"

주변의 가게가 셔터를 내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현장에서나 쓸법한 거대한 트럭들이 도로를 점유하고 달렸다.

헬스장에 가보니 멤버들이 초조하게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성호 왔냐."

"옙. 괜히 온 건 아니죠?"

"괜히는 무슨. 참 인사해라. 여기 유현이."

"아, 제가 동생이겠네요. 형님 안녕하세요."

젊은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왔다.

나이는 미경과 비슷한 것 같은데 굉장한 미남이었다.

아이돌이라 해도 믿겠는데.

"혹시 각성자세요?"

"맞긴 한데 제가 게임은 잘 몰라서···VR방에서 해봤다가 무서워서 바로 껐거든요."

그는 근처 대학에 다니는 공대생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전공을 물어보는 건 좀 그렇겠지.

전기나 전자 쪽이면 나중에 도움을 받을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형준 형에게 물었다.

"형님 혹시 소식 들은 거라도?"

"없어. 나 와이프···아니지. 전 와이프하고 통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폰이 끊기더라."

"전 마트에서 뭐 사고 있는데 갑자기 군인이 들어오더니 빨리 사고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완전 강압적이야."

보라의 증언.

경훈과 유현이도 각각 경험을 털어놓았다.

다들 뭐가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답답해했다.

나는 알면서도 침묵했다.

형준 형은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지은이한테 가봐야지. 성호야, 니가 잠시 있어주면 안 되겠냐?"

"관장님 제가 있는데요?"

경훈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형준 형은 대충 알았다는 제스쳐를 취하곤 밑으로 내려갔다.

여기 있어봐야 별거 없을 것 같아 나도 뒤를 따랐다.

조금 걸으니 군인 두 명이 운동용품점 주인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내가 장사를 하겠다는데 니들이 뭔 상관이야? 돈 보태줬어? 어?"

"아뇨 사장님 그게 아니라요. 저희도 윗선에서···"

군인이라 해봐야 20대 초반이라 그런지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형준 형도 그걸 깨달았는지 뭔가 이상한 표정이었다.

"쿠데타면 쟤들 정신무장 단단히 받았을 것 같지 않냐? 저렇게 물렁하진 않을 텐데."

"그러게요."

"전쟁도 아니고 대체 뭐냐? 답답해 죽겠네. 참, 나 먼저 간다."

"옙. 형수님하고 지은이한테 안부 전해주세요."

"이제 형수 아니라니까."

"참. 형님 여기로 돌아오실 거죠?"

"당연하지."

형이 간 다음 군인 둘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신속히 사흘 치 식량을 확보하고 귀가하시기 바랍니다."

안경을 낀 유순한 얼굴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발음이다.

옆의 군인도 웃긴지 입을 씰룩거렸다.

"지금 마트에 가는 길인데요. 사흘 치 식량을 사야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위에서 시킨 대로 할뿐입니다."

병력을 동원하는데 바빠서 설명을 못한 모양이다.

여기서 굳이 충돌할 필요는 없지.

"예에. 금방 들어가겠습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나는 마트에 들러 북적거리는 인파를 제치고 양초와 성냥을 잔뜩 사고 귀가했다.

그리고 노트북을 펴고 그동안 다운받았던 영상 목록을 확인했다.

"···이거면 됐어."

보존식량의 제조법과 텃밭 가꾸기, 수동 재봉틀의 작동법 등 생활에 유용한 영상이 하드디스크에 저장되어 있다.

괜찮아 보이면 무조건 저장을 눌렀기에 뭐가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수백 개나 되는 만큼 나중에 확인해볼 수밖에.

"이런 것도 있었네."

커다란 나무를 자르고 운반하는 방법과 안을 태워서 카누를 만드는 영상까지 있었다.

똥으로 거름 만드는 건···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밤이 되자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차량까지 통제를 했는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예행연습이야 뭐야."

나는 투덜거리며 촛불을 켰다.

아포칼립스가 성큼 다가온 느낌이었다.

< D - 4 > 끝


Load failed, please RETRY

Weekly Power Status

Rank -- Power Ranking
Stone -- Power stone

Batch unlock chapters

Table of Contents

Display Options

Background

Font

Size

Chapter comments

Write a review Reading Status: C1
Fail to post. Please try again
  • Writing Quality
  • Stability of Updates
  • Story Development
  • Character Design
  • World Background

The total score 0.0

Review posted successfully! Read more reviews
Vote with Power Stone
Rank NO.-- Power Ranking
Stone -- Power Stone
Report inappropriate content
error Tip

Report abuse

Paragraph comments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