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딱히 비명이나 칼부림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 보니 서텔은 들키지 않았다. 아니면 숫자를 보고 도망쳤거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수도사들을 바라봤다. 저들이 입고 있는 시커먼 로브 모두 홀딱 젖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한밤 중인데다 색까지 어두워 티가 덜 났지만 피로 절여진 게 분명했다.
방금 전까지 미약한 향 냄새가 풍기던 본당이 순식간에 쇠비린내로 가득찼으니 말이다. 나는 제단 앞에서 수도사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럭스 스텔라 앞에서 자제할 만큼의 신앙은 남은 모양이지."
"지금 내려오신다면 럭스 스텔라에게 맹세코."
"맹세코?"
"단 한 줌의 고통도 없이 보내드리겠습니다."
수도사 중 한 명이 그리 말하며 칼자루 위로 손을 얹었다. 핏발선 두 눈을 부릅뜬 채 깔짝대며 검을 뽑으려드는 모습이 정말 독실한 신앙인다워 보인다. 내가 봤을 때 이 친구들은 직종을 잘못 골랐다.
"죽음을 앞둔 이가 신에게 기도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는가?"
"공자. 허튼 수작을 부린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시간을 끌어봤자 공자가 살아남을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이제 그만 아시지요."
"내가 도망칠 게 염려된다면 그대들도 함께 기도함이 어떻겠나."
"공자...!"
"그대들에게도 이유가 있어 이러는 것일 테니 원망은 안 하겠다. 다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에 둔 자와 함께 기도하는 것쯤은 허락해주게. 물론..."
나는 푸줏간 주인이 됐어야 할 인재들을 돌아보며 뒷말을 이었다.
"그대들에게 아직 럭스 스텔라를 향한 신심이 남아있다면."
"허튼 수작을!"
"종이 칠 때까지만이라도. 새벽녘이 밝아올 때가 머지 않았다. 빛 아래서라면... 햇빛 아래서라면 죽어도 좋다."
어차피 죽을 거 햇빛만이라도 보고 죽자. 이리 말하니 저 칼잡이들 사이서도 묘한 분위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열두 살짜리 애기 하나 죽이겠다고 사람 저미던 놈들 가운데 그나마 사람다운 새끼들이 섞여 있던 모양이다.
칼자루 위로 손을 얹어놨던 수도사 중 적지 않은 수가 슬그머니 자세를 고쳐잡으며 럭스 스텔라의 제단을 올려다본 것이다. 그들은 이제서야 수치심을 느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결국 몇몇 이들이 가장 앞장선 수도사에게 말하기에 이르렀다.
"바티스 형제님. 마지막 유예라도 허락해줍시다."
"그게 무슨? 형제들을 베어넘긴 이유가 뭔데 이제 와서?"
"이미 너무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형제들이야 평소 신심 깊은 생활을 통해 럭스 스텔라의 빛에 귀의할 수 있겠지만, 저 소년은 그러기에 충분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
"정의를 위한 일이라도... 오직 인세만이 인간을 받아줄 수 있음을 상기해주십시오."
그제서야 바티스라 불린 수도사가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물론 눈빛을 보아하니 저딴 십소리에 마음 속 깊은 곳까지 탄복한 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이끌고 온 무리가 분열될 조짐을 보이니 한 걸음 물러서 억지로 봉합했을 뿐이다.
여기서 설득하는 걸 보고 쟤들은 착한 놈들 같은데... 라며 속으면 안 된다.
저 십새끼들, 날 죽이지 말자곤 한 마디도 안 했다. 칼을 내려놓은 수도사들은 그저 본인의 양심에 최선을 다했단 핑계를 대고자 위선을 떤 거다.
바티스도 이 사실을 눈치채고 역겹다는 눈빛을 드러냈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바티스는 동료들 대신 날 바라보면서 혐오와 증오를 고스란히 드러내줬다.
"종이 칠 때까지. 이후론 제 발로 나오셔야 합니다. 아니라면 저희가 끌고 내려가겠습니다."
"고맙다."
이후로 숨막힐 거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제단 앞에 무릎 꿇고서 살생부 명단에 이름을 하나 적어놨다. 서텔. 본래라면 이때 칼을 뽑아 혼란을 일으켰어야 할 칼잡이다.
그런데 시간을 이만큼이나 질질 끌어줘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서텔... 이 기회주의자 새끼가 예상보다 숫자가 너무 많으니 간을 보는 모양이다. 간 맞추다가 소금에 혀가 절여질 기세로 말이다.
이외에도 누구 살생부에 올릴 놈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
"!"
날카로운 가시가 양 손등을 찌르는 감촉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실수해서 단검으로 찔러버렸나 싶어 왼손을 살폈는데, 정작 단검은 어느샌가 땅바닥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그럼 뭐 때문에? 싶어 손등을 들어올리자.
"..."
손등 위로 찢긴 상처가 나타나 있었다. 어디 긁혔다기엔 마치 누군가가 표식을 남기듯 서로 교차된 형태였다. 정십자가 모양으로 찢긴 상처에서 스며나오는 핏방울.
그 핏방울들이 주르륵 흘러내리나 싶더니, 어느 순간 팔뚝을 도화지처럼 삼아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처음엔 뭔가 싶었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문장이다. 오른팔뚝을 굽이치며 타고 흘러내린 핏자국이 하나의 문장을 적어놨다.
[뜻대로 하라.]
혹시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반대편, 왼팔뚝에도 하나 적혀 있었다.
[네 뜻대로.]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올려 제단 위 십자성을 올려다봤다. 분명 황동으로 만든 것처럼 누리끼리한 색깔의 우상이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샛푸른 빛이 매끈한 부분을 타고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그 순간, 기다리던 종소리가 울렸다.
아직 밤하늘이 한창 어둑하던 도중이었다. 본래 해가 떴음을 알려야 할 종소리가 이제 울렸다는 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비로소 수도원 전체에 습격이 왔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잠자코 침묵을 지키던 수도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게 당연하다. 그들 중 몇몇은 본당이란 사실도 잊고 몸을 일으켜 이리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을 이끄는 자는 가장 앞장섰던 수도사 바티스였다.
"공자. 약속대로 종이 울렸습니다."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자 그리 말한 것인데."
"허나 약속은 약속이지요. 말씀하셨으니 하셔야겠습니다."
"그대는 말한 바를 반드시 지키는가?"
"...지키도록 도와드리지요."
일찍이 서텔이란 수도사가 말했다. 무분별한 살생은 사람의 마음을 좀먹는다고. 서텔은 본인이 직접 보여준 걸로 모자라 수많은 사례를 가져오며 이 말을 훌륭히 입증해보였다.
이미 동료 수도사들을 쑹텅쑹텅 썰어제낀 망나니 놈들답게 눈 깜빡이니 칼을 뽑아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대로 칼침 맞을 수 없으니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뭐, 시간은 이미 충분히 끌었군."
"?"
"공자의 헛소리에 넘어가지 말아라. 단순한 허세..."
의구심을 품는 동료들 상대로 일갈하던 바티스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거친 종소리 탓에 묻혔던 소리들이 비로소 귓가에 닿은 거다. 처음에 긴가민가하던 자들도 슬슬 이쯤 되니 두 눈을 휘둥그레 뜨기 시작했다.
수도사들은 나한테 신경쓸 여지도 없이 서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아직 살아남은 형제들이 이리 많았다고?"
"그럴 리가... 성공적인 계획이었네. 이제 와서 반격할 여지가 있을 만큼 살아남았을 리 없어!"
사람 썰었다는 소리를 저렇게 고풍스레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들의 한심함에 혀를 끌끌 차면서... 단숨에 땅바닥에 놓여진 단검을 쳐올렸다.
쨍강!
요란한 쇳소리가 들린 곳은 바로 지척이었다. 단검은 날아오는 칼날을 튕겨내고 손목에 박혀 있었다. 손목의 주인, 바티스는 아랫입술을 앙다물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고.
"추레한 망나니 새끼가 감히 럭스 스텔라의 신전에서 수작질을."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 딴 건 몰라도 날 바퀴 잡으려고 집에 불 지르는 놈으로 오해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아둔한 놈들. 내가 아니라 포위스 주교와 유바스다."
"또 헛소리를 늘어놓는다고 이 내가!"
"비밀을 숨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알고 있는 사람을 줄이는 것."
이제는 종소리로도 감출 수 없었다. 심지어 이번엔 생생한 비명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기습이 아니라 맞서다가 죽었음을 의미하는 정황 증거였다.
드문드문 칼부림 소리와 함성이 어우러지자 모든 게 명확해졌다. 날 죽이려던 바티스도 머리가 좀 돌아가는 놈인지 슬슬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나는 이 친구들에게 쐐기 한 번 박아줬다.
"짐승아, 먹이 준다고 넙죽넙죽 쳐먹으면 도살장에 끌려간단 걸 몰랐던 게냐?"
이제야 자기가 잡은 줄이 처음부터 끊어졌음을 눈치챈 모양이다. 바티스는 손목의 상처를 감쌀 정신도 없이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예상 못한 소란에 당황한 건 다른 수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 무슨."
"바티스 형제,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나?! 우... 우리가 어찌해야 하는가!"
"그... 그런. 설마 이렇게까지."
"형제!!!"
때로 가혹한 상황은 사람의 판단력을 앗아간다. 몰릴 데로 몰린 바티스의 선택은 비합리적이었다. 우왕좌왕하다 헤까닥 돌아버린 게 분명하다. 바티스의 목표는 다름 아닌 나였다.
"...네 놈이다. 네 놈과 네 놈을 보낸 공왕 탓이야! 너, 널 죽이면!"
"쯧."
방금 전과 사뭇 다른 엉성한 몸놀림으로 손에 쥘 걸 찾는 모습에 한숨부터 나온다.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지라 곁에 있던 수도사들조차 물러설 정도였다.
나는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수도사들을 바라보며 꿀팁 하나 전수해줬다.
"내가 왜 본당에 왔는지 아나?"
"고, 공자."
"입구가 넓어 방어하기가 무척 어렵다더군."
선명해진 비명, 서로 긁어대는 쇳소리들.
"살고 싶으면 힘내서 막아라."
나는 그 속에서 성흔이 새겨진 손등을 들어올리며 웃었다.
"그래야 나도 살지."
우린 이제 같은 편이다.
24. 종소리
우리는 아주 가끔씩 중요한 비밀을 약점 잡혀 휘둘리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너 진짜 이래도 괜찮겠어? 뒷일이 두렵지도 않아? 이 상투적인 말을 듣는 순간 억지로 외면하려 해도 닥쳐올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빵에 처박힐 미래가 보일 테고, 남들 몰래 저지른 엽색 행위를 덜미 잡혔으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미래가 보일 것이다. 대부분은 혼자서 끙끙 앓다가 돌아 버리거나 주변에 도움을 호소할 터였다.
평소 내가 즐겨하던 게임 [판타지 모나크]에도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 비밀을 눈치챈 놈들이 접근하더니 이거 안 해주시면 폭로해버리겠습니다, 하며 협잡질을 일삼곤 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비는 호달달 떨면서 그들의 요구에 순응한다. 게임하면서 쌓은 비밀이라 하면 보통 살인 같이 사회적 규탄받기 딱 좋은 범죄의 증거들. 뉴비는 그저 울면서 협잡질에 당해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금만 경험이 쌓여도 느끼는 바가 달라진다. 어느 날, 내가 누구네 일가족을 죽인 범행 증거를 갖고 있으니 순순히 따르라는 잡놈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새낀 뭔데 일가족 몰살시킨 살인마한테 이 따위 협잡을 일삼지?
만일 진짜 성군이었다면 애초에 책 잡힐 일도 안했을 거다. 그러나 나는 [판타지 모나크]를 플레이하는 유저들 가운데 폭군, 전제군주형 플레이를 즐기는 유저였다.
물론 일반적인 폭군과는 다르다. 나는 21세기의 발전된 도덕과 윤리의식을 지닌 선량한 현대인이기도 했다. 만일 협잡범이 바로 진실을 폭로했다면 너그러이 봐줬을 것이나 그걸 빌미 삼아 사익을 누리려 했기 때문에 처벌한 것이다.
그렇다고 목숨까지 앗아가는 건 지나친 처사. 처벌이란 건 앞으로의 인생을 주의하며 살라는 계도로써 내리는 것이다. 실로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이 복잡한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지 가닥을 잡았다.
내 비밀로 협박해오는 자, 꼬추를 잘라 본인의 주장에 진정성을 담아내라.
이후로 본래라면 죽어 마땅했을 수많은 범죄자들이 내 인도적인 결단 아래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어찌된 일인지 게임 속 사람들은 날 두려워하며 일가족 살인마란 호칭으로 불러댔다.
아마 폭정을 일삼던 시절의 업보이리라.
어쨌든 기나긴 폭정 끝에서야 뒤늦게 인간의 선한 힘을 믿은 이 휴머니즘 일화에 담긴 교훈은 이렇다. 사람을 믿는 자는 새 삶을 살아갈 기회를 준다. 그리고 사람을 못 믿는 자는 꼬추가 아니라 목을 자른다.
내가 볼 때 유바스와 포위스 주교는 사람을 못 믿는가 보다.
수도원 곳곳에서 들려오던 온갖 불협화음들이 이제 본당 앞까지 닥쳐오고 있었다. 칠판 긁는 소리보다 더 소름끼치는 쇠 긁는 소리랑 쇠비린내가 사방에 깔린다.
기다리던 순간이다. 나는 제단 앞에서 뒷짐진 채 조용히 눈을 감고서 몸을 둠칫거렸다. 흥겨움을 주체하지 못해 어깨까지 으쓱이면서 말이다. 이런 내 모습이 수도사들 보기에 무척 꼬왔던 모양이다.
한참 후열에 남아있던 수도사 중 한 명이 이를 빠득빠득 갈며 외친 것이다.
"공자! 드디어 실성한 겝니까!"
"실성?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저희가 뚫리면 다 죽습니다!!!"
비명이 어우러지는 와중에도 똑똑히 들릴 정도로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또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나마 익숙했던 바티스 수도사는 정신이 나간 채로 땅바닥을 구더기처럼 굴러대는 중이었다.
이 수도사는 우리가 운명 공동체란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그럼. 내가 그대들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눈물 뚝뚝 흘려줘야 하나?"
"공자의 목숨이 달린 일 아닙니까?!"
"날 죽이려던 놈들과 날 죽이려는 놈들이 싸우는데 뭐 어쩌라고? 죽이려던 상대가 응원해주면 힘이 솟기라도 하고?"
같은 편이라고 굳이 친하게 지낼 이유가 있나 싶다. 말이 좋아 임시 동맹이지, 원래 내 계획은 양패구상이다. 날 죽여봤자 살아남지 못하리란 걸 안 수도사들이 개발악하는 걸 관음 중인데 무슨 피를 나눈 형제마냥 억울해하니 되려 어이가 없었다.
수도사는 이 말에 반박할 여지를 찾지 못하다가, 내 손등 위에 새겨진 상처를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럭스 스텔라의 성흔이 지닌 기적을 써주신다면."
"내 기적은 그대들의 면죄부일세."
이 놈들은 살인미수범 주제에 바라는 게 너무 많다. 자꾸 합의한 것보다 더 많은 걸 바라니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다 같이 살아남으면 그대들이 날 죽이려한 걸 말끔히 잊는 진짜 기적이지."
"..."
***
수도사들과 나는 들이닥친 위기 앞에서 단번에 거래했다.
성흔을 보고 놀란 수도사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수도사들이 날 보호하여 끝까지 살아남으면, 나는 수도사들의 회개를 받아들여 그들을 면죄한다.
물론 수도사들에게 기적을 써주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게는 성흔이 전부였다. 아직 나는 럭스 스텔라의 기적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이건 일종의 직감이다. 아직 넌 절대 못 쓴다는 모종의 감각이 머릿속을 간질이고 있었다. 럭스 스텔라... 서약과 관련해선 더럽게 깐깐하다는 세간의 평대로 진짜 순수하게 성흔만 띡 내려준 거다.
하지만 성흔을 처음 보는 수도사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굳이 사실대로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내가 대단한 기적을 쓰지 못한다는 걸 눈치채면 바로 칼을 거꾸로 쥘 테니까.
하나 더.
나는 본당 문 앞에서 힘겹게 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자들을 막아내는 수도사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힘껏 외쳤다.
"어, 어어. 어! 저저, 저기 뚫리지 않느냐! 일곱 명이서 막아야 하는데 한 놈이 내 앞에 와 있어서 뚫리고 있구나!"
"공자....!"
"정수리에 구멍낸 놈아, 뚫리면 다 죽는다 해놓고 왜 아직도 내 앞에 서 있는 게냐? 역시 내 기적을 노린 거짓말이었나?"
우리 수도사가 울그락불그락 거리는 게 참 재밌다. 아랫입술을 피 나올 정도로 깨물고서 바들바들 떠는데 정작 아무 짓도 하지 못한다. 날 건들면 어찌저찌 살아남아도 영영 끝장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유바스도, 포위스 주교도 다 썩은 동앗줄인 이상 놈들의 마지막 구명줄은 나 하나 뿐이었다.
그 사실이 꽤나 분했던 모양일까. 우리 수도사 눈동자가 뻘겋게 충혈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성흔이 새겨진 손등을 들어올리며 환한 미소를 지어줬다.
"우리 수도사님은 정직하기로 서약하셔서 면죄받느니 처벌받기로 다짐하셨나 본데."
"큿!"
그제야 등 돌리는 수도사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며 살아야 할 동기를 듬뿍 부여해줬다. 우리 수도사들이 사람은 참 순진하다. 순진하단 게 착하고 베풀 줄 알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더 안타까운 점은 수도사들의 무장 수준과 실력이었다.
본당까지 단숨에 밀린 걸 보면 알겠지만, 수도사들이 이번 습격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몹시 희박했다. 이유는 여럿이었다. 지들끼리 편 갈라서 서로 죽여댄 게 첫 번째다.
두 번째는 갑옷 하나 걸치지 않은 로브 차림이란 사실이다. 이는 기동성과 은밀함을 크게 늘려줬지만 반대로 방호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선택이었다. 고급지게 말해서 그렇지, 대충 어딜 맞아도 죽는다는 소리다.
마지막 세 번째는 훨씬 간단한 이유였다.
습격해온 자들이 수도사보다 더 잘 싸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형을 이루어 부딪히는 단체전에서 더 우수한 역량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어줍잖은 검술 실력으로 제지하지 못하게끔 질량으로 밀어붙이길 잘했다.
습격자들은 서로 촘촘히 어깨를 맞댄 채 연 모양의 방패를 들어올려 거대한 거북이처럼 움직였다. 그 상태로 방패를 들이밀며 우루루 밀어붙이니 수도사들이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형제들, 밀려나선 안 되네! 힘으로 가로막게!"
"그르르륵..."
분명 검술은 수도사들이 훨씬 뛰어나다. 1대1로 부딪혔다면 진즉에 수도사들한테 쓸려나갔을 거다. 그러나 습격자들은 결코 혼자 싸우지 않았다.
수도사가 검을 휘두르면 중앙에 있는 자가 방패로 가로막는다. 칼날이 방패에 막히고 나면 양 옆의 습격자가 방패 사이로 칼침을 콕콕 찔러왔다. 한 번 찔리면 그걸로 끝장이다.
습격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방패를 내리고서 달려들어 단숨에 난도질하기 일쑤였다. 수도사들이 동료를 구하러 달려들면 후열이나 옆에 있던 습격자가 나타나 방패를 들어올렸다.
숫자도, 진형도 저들이 우세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혀로 마른 입술을 핥짝이는 게 전부였다. 해안선의 약탈자들이 이 정도 수준일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발걸음 하나까지 맞춰가며 전진하는 저 제식은... 제대로 된 정규군만이 갖출 수 있는 기풍이었다.
21세기 현대 군대에선 쓸모가 정말 적지만, 적어도 중세틱 이세계에선 상황이 달랐다.
어느덧 본당을 사수하던 수도사들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쓸려나가 서서히 무너질 즈음. 나는 제단 앞으로 앞장서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봤다.
가면 달린 투구에 치렁이는 사슬 갑옷. 허리춤에 이국적인 칼을 찬 사내는 내 시선을 조용히 맞받아치고 있었다.
"유바스. 왜 이렇게까지 내 죽음을, 포위스의 땅과 권세를 바라는가? 대체 무엇 때문에?"
보통 암살이나 계책이 실패하면 조용히 잠수타기 일쑤다. 이건 [판타지 모나크]의 멀티 플레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의 보복을 염려하고 수비로 전환하는 거라 여기면 된다.
그런데 유바스는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아무리 교황청과 작별한 게 치명타라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바스는 무언가에 쫓기는 마냥 온갖 수작질을 일삼고 있었다.
치밀함으로 따지면 오래 전부터 꾸몄을 계획임이 분명한데, 마치 뜸 들이는 걸 기다리지 못해 어그러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들의 초조함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 궁금했다.
그러자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간단하게 의문을 일축시켰다.
"600년동안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하나로 모은다. 오직 유바스가 지닌 국력만이 600년 전 멸망한 왕국을 대신해 이 제도의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
"아. 통일."
뭐... 본인 대에 통일하고 싶다는 데에 딱히 할 말이 없네. 통일이란 게 평화적인 방법만 있는 게 아니긴 하다. 본인이 다섯 공국을 모두 무력 통일해서 새 왕조를 개창하겠다는 꿈을 꾸는데 타인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개인적인 이유로 유바스의 꿈을 응원할 순 없었다.
"참 멋진 꿈인데 안타깝게 됐군."
"포위스의 삼남. 네 피가 대의의 초석이 될 거다.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유바스의 가슴 따뜻한 위로 한 마디에 절로 가슴이 훈훈해진다. 아마 딱 열불 날 정도로 훈훈해졌을 거다. 나는 검을 뽑아드는 유바스의 주구를 향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 그 꿈, 못 이룰 거 같아서 안타깝다고."
"어린 놈이 몇 번 설쳤다고 못하는 소리가 없군."
습격자의 우두머리는 내 발언을 치기 어린 한 마디로 여기면서 다가왔다. 덕분에 유바스가 보낸 암살자가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지녔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기회를 엿보던 수도사가 자기어필을 위해 냉큼 달려든 것이다.
"럭스 스텔라시여! 제 방황을 이제야 끝내옵니다!"
수도사와 유바스 습격대장의 검무는 마치 뱀이 쉿쉿대는 소리를 연상시켰다. 서로 비늘을 쓸듯이 칼날을 교차하며 때때로 상대에게 발을 걸기도 했지만.
"어흑, 컥."
승자는 유바스가 보낸 습격대장이었다. 그는 칼끝으로 수도사의 목젖을 확실히 저민 뒤, 목을 움켜잡고서 피를 쏟아내는 수도사를 내려다보며 멸시어린 말을 토해냈다.
"갈대보다 연약한 심지로 유바스의 대의를 가로막으려 하다니."
살아남은 수도사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유바스가 보낸 습격자들에게 맞섰다. 단칼에 썰려나가는 바람에 무의미하게 보였지만, 의외로 아주 무쓸모한 희생은 아니었다.
승패가 결정되나 싶던 순간, 종소리가 울렸다.
서서히 잦아들던 비명 속에서 찌그러진 종소리가 일어선다. 여전히 해가 뜨려면 한참 남은 시간이었지만, 종소리엔 무심코 모두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모종의 마력이 있었다.
그 마력에 저항한 몇 안 되는 예외는 나랑 습격대장 뿐이었다. 유바스의 습격대장은 손목을 휘둘러 칼날에 묻힌 핏방울을 털어내며 말했다.
"별 거 아니다. 단순한 종소리에 불과하다. 마저 치워라."
"글쎄."
나는 습격대장의 발언에 웃음을 흘렸다.
"다시 생각해야 할 걸."
***
수도원의 망루 옆, 별당에 세워진 종탑.
그 곳에 살짝 찌그러진 종 아래서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피 묻은 로브에 이마 너머까지 물러난 앞머리를 지닌 사내, 개울가의 존.
존은 종을 울리는 순간 벌어진 일을 보고 눈물 콧물 죄다 쏟아내는 중이었다.
"어흐흑, 내 신세. 어쩌다 이렇게 됐대."
의심하는 수도사들에게 구멍 뚫린 머리를 보여주며 포위망을 돌파하길 한참. 간신히 종탑에 도착해 타종하자마자 밤하늘 아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처음엔 잘못 봤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과연 나르바 공자가 말한 대로였다. 종이 울리자마자 수도원의 육중한 철창 문이 그대로 올라갔다.
습격자 무리가 그 사이로 콸콸콸 쏟아진 건 예정된 일이었다. 존은 치열한 난전 속,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난 종탑 아래라 살아남았을 뿐이다.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다. 존은 습격자 중 단 한 명이라도 종탑으로 오는 순간 끝나버릴 얄팍한 목숨이었다. 누구보다 자기 위험에 민감했기에 이 사실을 단박에 눈치챈 존은 바닥을 뒹굴거리고 있었다.
"공자님... 저렇게까지 오면 못 살잖아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살 수 있다 하시더니...!!!"
원망할 대상도 이미 죽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존은 갸아악, 온갖 기괴한 신음을 흘려가며 온몸을 비틀어댔다.
만일.
[부우우우-.]
희미한 뿔피리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계속 그랬을 것이다.
"어?"
존은 질질 짜느라 퉁퉁 불어있던 눈을 억지로 떴다. 환청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뿔피리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달빛이 뿔피리 소리가 들린 곳을 비췄다.
"세, 세상에."
존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대신 다시 종을 울리기 위해 끈을 움켜잡았다. 이제 손바닥이 쓸리든 말든 죽어라 종을 쳐야 한다. 존은 기진맥진할 여유도 없이 끈에 온 무게를 실으며 힘껏 움직였다.
찌그러진 종이 울린다.
사슬이 부딪히는 소리를 감출 정도로 크게.
한 번 더, 찌그러진 종이 울린다.
이번엔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감출 정도로.
마지막.
[부우우우우-.]
적들이 뿔피리 소리를 조금이라도 늦게 들을 수 있도록.
"살 수... 있다아아!!!!"
존은 힘줄이 울긋불긋 솟아날 정도로 끈을 당기며 외쳤다.
달빛이 비춰준 밤하늘 아래의 광경.
그 곳엔 포위스 가문을 상징하는 까마귀가 그려진 깃발이 있었다.
25. 공국 최강의 기사
포위스 공국의 삼남, 나르바가 그동안 저지른 패악질 때문에 수도원으로 추방당한 날의 일이다.
애설튼 공왕이 둘째 아들 테르베어를 집무실로 부른 건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리고 공왕의 부름에 응한 테르베어의 태도는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테르베어는 호방하고 씩씩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집무실 앞에서 머뭇거리며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다. 끙끙 앓는 이유는 단 하나.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 때문이다.
테르베어는 한숨을 토해내며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아버지가 이 시간에 부르셨으면 아주 혼쭐을 내시겠다는 건데."
애설튼 공왕은 아내가 살아있을 적부터 자식에게 정성을 다했다. 사별한 이후로는 자식들을 향한 존중과 애정이 더욱 깊어졌고. 다른 사람 앞에서라면 자식을 꾸짖거나 훈계하는 걸 최대한 삼가할 정도였다.
설령 자신의 권위와 체면이 조금 구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대신 남들의 시선이 적어지는 순간, 보통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 됐을 때 아랫사람을 시켜 잘못을 저지른 자식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당연하게도 형제들 중에서 가장 많이 불려간 건 차남 테르베어였다.
자식 상대론 채찍 한 번 들지 않았던 애설튼 공왕이 도저히 참지 못해 채찍을 들게 만든 문제아. 그게 테르베어의 아명이었으니까. 어린 시절의 기억이 테르베어를 머뭇거리게 만든 것이다.
결국 망설이던 테르베어를 움직이게 한 건 아버지, 애설튼 공왕의 낮은 목소리였다.
"테르베어. 내일이면 약탈자들을 상대하러 떠나야 할 텐데."
"...에에잇!"
테르베어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혹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슨 잘못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테르베어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애설튼 공왕이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테르베어를 부른 것이다.
"...테르베어 경을 뵙습니다."
테르베어는 실눈을 살짝 떠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자세를 고쳐잡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흐물거리는 미역같은 앞머리의 주인, 음침한 인상의 첩보관 오버트였다.
테르베어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애설튼 공왕은 절대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식을 물리적으로 처벌하지 않는다. 잘못을 저질러서 부른 게 아니라면 문제없었다.
테르베어는 첩보관 오버트를 의식해 예절을 갖추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전하?"
"나르바를 만나서 나눈 대화를 듣고 싶구나."
"나르바... 말입니까?"
테르베어는 두 눈을 끔뻑이다 이내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이미 테르베어 머릿속 애설튼 공왕은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버지로서 불퉁한 관심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별 다른 이야기는 안했습니다. 다만 수도원 내부의 텃세가 염려된 탓인지 저더러 면회 한 번 와달라 하더군요. 그렇다고 부르는 즉시 갈 생각은 없고, 나르바의 기 좀 세워줘야겠다 싶을 때 가려고 합니다."
사내란 시련 속에서 담금질되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테르베어는 평소 자신의 지론대로 나르바가 고생 좀 할 때까지 뜸 들일 계획이었다. 하나 뿐인 동생을 나약한 사내로 기를 순 없다는 생각이었다.
만일 애설튼 공왕과 첩보관 오버트가 묘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테르베어. 부르기 전에 먼저 가야한다."
"예? 전하, 무릇 사내란 징징 짜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해낼 수 있어야죠."
테르베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던진 주장은 애설튼 공왕을 고민에 빠트렸다. 애설튼 공왕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꾹꾹 짓누르며 침음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전하, 테르베어 경에게도 사실을 전해드려야 합니다. 이 중임을 수월히 해내려면 전후 사정을 모두 알고 계셔야 합니다."
"..."
"...비록 조금. 아니, 좀. 어쩌면 많이... 못 미더우시더라도 말입니다."
첩보관 오버트의 설득이 아니었다면 한참동안 이랬으리라. 결국 애설튼 공왕은 오버트의 말을 수용했다. 아주 오랜 침묵과 고통스런 장고 끝에, 그는 테르베어에게 모든 사정을 털어놓기로 다짐했다.
"테르베어, 잘 들어둬라. 우리 공국과... 네 동생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애설튼 공왕의 설명은 참 길었다. 그렇지만 테르베어는 공왕의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전부 새겨듣고 있었다.
포위스 공국이 처한 상황과 유바스가 걸어온 수많은 수작질들. 이 한가운데서 정치적 모략의 목표가 된 열두 살의 막내 나르바. 나르바가 수도원으로 추방당한 이유.
그리고 나르바의 목숨을 저당 잡고 실행된 무모한 도박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당장 따라가겠습니다."
얼빠진 차남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애설튼 공왕 앞에는 호리호리한 매를 닮은 강인한 전사, 테르베어 경이 결사의 각오를 마친 뒤였다. 하지만 애설튼 공왕은 테르베어의 발언을 제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르바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도원행을 자처한 이유는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다주기 위함이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시간? 전하... 자기 자식을 미끼 삼아 사지로 보내놓고서 하시는 말씀이 그겁니까?! 당장 군대를 소집해 저 무도한 무리를 쓸어버려야죠!"
애설튼 공왕은 그 말에 심부를 찔린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윽고 테르베어가 이 기세를 몰아 힐난하려던 찰나, 곁에 있던 첩보관 오버트가 대신 입을 열었다.
"테르베어 경, 저희에겐... 소집할 군대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전하를 섬기는 봉신들이 있는데."
"정녕 당신의 아버지께서 유바스의 군사적 위협에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으셨노라. 그리 여기시는 겁니까?"
테르베어는 첩보관 오버트가 자세한 정황을 설명해준 뒤에야 공국의 현실을, 유바스가 얼마나 강대한 권세를 지니고 있는지 깨달았다. 애설튼 공왕이 무례한 혼담에 강경 대응을 포기한 게 아니었다.
"테르베어 경. 유바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의 골자를 잡아두고 있었습니다. 시행 자체는 돌발적이었어도 초석을 깔아두는 건 오래 전부터 꾸며왔다는 뜻입니다. 휘하 봉신들은 전하의 소집에 불응했고, 태도를 보아하니 이미 오래 전부터 유바스에게 포섭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포섭되지 않은 자들도 낌새를 눈치채고 방관을 택했겠지요."
애설튼 공왕도 똑같이 군대를 소집해 유바스에 맞서려 했다. 어쩌면 전쟁까지 불사하겠단 각오로.
문제는 오직 공왕 혼자만의 생각이었단 사실이다.
애설튼 공왕은 유바스의 위협에 맞서 휘하 봉신들을 소집했지만 어느 누구도 응하지 않았다. 다들 유바스의 권세가 얼마나 강대한지 알기에 싸움이 벌어질 경우 승패가 분명하노라 지레짐작해 온갖 핑계를 대가며 시일을 미룬 것이다.
몇몇은 아예 소집령을 받지도 않았다며 무시하기까지 했다.
애설튼 공왕은 공국의 권위를 염려해 이 사실을 불문에 부쳤으나 이미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주변 공국들이 사태를 관망하는 데엔 이러한 이유도 있을 터. 사건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테르베어가 할 말을 잃자, 오버트는 앞머리를 만지작대며 애설튼 공왕을 마저 두둔했다.
"하지만 봉신들은 몰라도 가신들은 전하를 충직하게 보필하고 있습니다. 나르바 공자께서 적의 주의를 끄시는 동안 전하는 온 힘을 다해 내부의 세작들과 동조자들을 솎아낼 예정이십니다. 적이 상속권이나 명분 싸움에 주력하는 사이 태세를 재정비하는 것이 저희의 목표. 다만 유일하게 염려되는 부분은..."
"나르바의 안전이다."
오버트의 뒷말을 이은 건 괴로운 신음을 흘려대는 애설튼 공왕이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테르베어는 더 이상 애설튼 공왕을 비난하지 못했다.
유바스의 권세에 눈치 보는 봉신들, 이로 인해 무력하게 혼담을 강제당한 군주. 그리고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기 위해 자식의 목숨을 미끼로 삼아야 하는 비참한 아버지.
애설튼 공왕은 떠나보낸 자식의 안위를 염려하며 말했다.
"나르바는 유바스가 두 번에 걸친 습격을 꾀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가는 도중에 한 번, 수도원에 도착하고서 한 번 오리라 여겼지. 너무 많은 호위 병력을 붙여뒀다간 암살을 포기하고 주의를 이리 돌릴 수 있다면서 최소한의 호위만 대동했고."
"수도원을...? 전하, 그건. 아무리 유바스라 해도."
"약탈자들의 소행으로 꾸밀 가능성이 높다더구나. 습격이 이뤄진다면 수도원이 물건 거래를 위해 외부의 상인을 받아들일 때. 상인으로 위장한 세작을 침투시켜 방비를 무력화하리라 여겼어. 나르바는 유바스가 정기시를 노릴 거라 예측해 따로 신호를 보내겠다 말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유바스의 강대한 국력에 궁지로 몰렸다해도 어엿한 장년의 군주다. 애설튼 공왕은 노회한 군주로서, 그리고 자식을 염려하는 아버지로서 나르바가 짐작 못한 부분을 짚어냈다.
"유바스가 이토록 초조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르바가 서신이나 신호를 보낼 여유를 갖추기 전에 습격이 이뤄질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테르베어 경의 형님되시는 에덜레드 경께선 휘하 봉신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설득하시느라 따로 움직일 수 없으십니다. ...테르베어 경. 경은 지금, 공왕 전하의 명을 따르는 유일한 기사입니다."
테르베어는 장자 에덜레드가 귀환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제 알았다. 에덜레드는 소집에 불응한 봉신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시찰하느라 여유가 전혀 없었다.
만일 여유가 있었다면, 애설튼 공왕은 주저없이 장남을 이 일에 투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장남 에덜레드가 뛰어난 기사라서가 아니다. 그저 믿고 맡길 수 있기 때문에 맡길 뿐이다.
"테르베어, 해안선을 방비하기 위해 내려가는 척하면서 약탈자 몇몇을 놓아주어라. 그들이 내륙으로 도망쳤다며 소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진로를 자유롭게 바꿀 변명을 만들어. 그 다음에 나르바가 입회한 수도원 근처를 주시해라. 너무 멀리 있어 구원이 늦어서도 안 되고, 너무 가까이 있어 적이 시간을 끌거나 물러서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애설튼 공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테르베어를 또렷이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 동생을 구하는 일이다. 해낼 수 있겠느냐?"
테르베어는 애설튼 공왕의 고뇌어린 얼굴을 마주 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결코 짧지 않은 침묵 끝에 나온 대답은 더없이 간결했다.
"예, 아버지."
***
휘영청 달빛 받은 칼날이 살점 아래로 낭창거리며 스며들었다.
칼날은 처음엔 피부를 가르고, 다음엔 힘줄 하나 툭툭 끓다가 근육을 찢으며 생명을 앗았다. 피가 솟구치는 것보다 잘려나간 머리가 땅바닥을 뒹구는 게 더 빨랐다.
머리 잃은 몸이 쓰러지면서 느낀 건 차디찬 바람. 그리고 주변 땅을 쉴새없이 다지는 말발굽 소리였다. 사슬 갑옷에 서코트를 차려입고 말 위에서 칼과 플레일을 휘두르는 열 명의 기사들.
그들의 최선봉에 사납게 으르렁대는 테르베어가 있었다.
"신을 섬긴다며 헛짓거리하는 놈들이다, 쳐라!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으랴앗-!"
한 명이 사슬 달린 철퇴를 붕붕 휘두르다 내려친 순간, 사람의 머리가 퍽하는 소리와 함께 단숨에 으깨진다. 기사가 말 위에서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목을 베인 자들이 피를 쏟아내며 쓰러지길 거듭했다.
이윽고 철창 문 근처가 피로 얼룩질 즈음, 테르베어가 가장 먼저 하마하여 검을 움켜쥐었다.
"절반은 이 곳에, 나머지 절반은 나와 함께 간다."
"테르베어 경, 나가려 하는 자들은?"
"모두 쳐라."
함께 온 기사들도 잇달아 하마하며 테르베어의 지시대로 따랐다. 절반은 나가는 입구를 봉쇄하고, 나머지 절반은 테르베어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테르베어를 따라온 자들은 수도원 내부의 참상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사방에 난자한 핏자국. 복도를 빼곡히 메울 정도로 널부러진 시신들. 사자에 대한 예우를 갖출 새도 없었다. 기사들은 망토 끝자락이 피에 젖어드는 걸 감수해야만 했다.
"이것이 럭스 스텔라를 섬긴다는 자들인가."
"흥, 나보곤 술 좀 작작 마시라더니 본인들은 사람 피를 쪽쪽 빨아마시나 보지."
기사들의 염세적이고 냉소적인 말투는 곧 살기로 제련됐다. 피로 얼룩진 복도 너머에서 수상쩍을 만큼 잘 무장된 습격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의 규율을 발휘하며 기사 앞에서 방진을 갖췄다.
방패벽을 갖춘 습격자들은 대치를 유지하고자 일부러 입을 열기까지 했다.
"별을 보는 까마귀. 포위스의 문장. ...이 이상은 갈 수 없다."
"이교도에 불과한 습격자 따위가 럭스 스텔라를 섬기는 귀족의 문장을 외우고 다니다니."
테르베어는 습격자의 말에 코웃음칠 수밖에 없었다. 테르베어는 정략에 무지할 뿐이지, 귀족으로서의 소양까지 아주 버린 건 아니다. 테르베어는 플레일을 붕붕 휘두르며 일그러진 미소를 띄웠다.
"꾸밀 거면 제대로 꾸며라. 습격자는 포위스의 문장이 아니라."
안면가리개 아래, 수많은 적들을 물리친 전사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나, 기사 테르베어를 두려워한다!"
테르베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돌진했다. 함께 온 기사들도 테르베어를 뒤따라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폭이 좁은 복도, 견고한 방패벽을 향한 돌격은 일견 무모하게만 느껴졌다.
습격자들은 방패벽을 향해 돌진하는 기사들을 내심 비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테르베어와 기사들은 인세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이교도 습격자들을 상대로 수없이 싸움을 거듭해온 전사였다.
사슬 달린 철퇴가 붕붕 휘둘러지다 내리쳐졌을 때, 습격자들은 박살난 방패 너머 으깨진 동료의 머리를 보고서야 그 사실을 실감했다.
"무슨...!"
"어딜 보는 거냐, 이교도!"
쾅!
테르베어가 거머쥔 사슬 달린 철퇴가 방패를 단숨에 부순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던 방패벽이 철퇴 앞에 두부처럼 으깨지고 있었다. 신의 이적이 개입하지 않은, 단련된 육체와 쌓아올린 경험이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전투기술.
물론 뒤따라온 기사들은 테르베어처럼 방패를 단숨에 부수진 못했다. 그러나 플레일을 휘두르다 내리쳐 방패벽을 흔들고, 그렇게 생겨난 틈새로 상대방의 머리를 으깨트리는 데에 이골나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기사들을 가로막던 습격자들은 어느 순간 뿔뿔이 흩어지며 목숨을 구걸하기까지 했다.
"자, 잠. 잠깐만! 저, 저는 이교도가 아닙니다!"
"럭스 스텔라를 모시는 수도원에서 살육을 저질러놓고 이교도가 아냐? 뻔뻔하기 그지 없구나! 태연하게 배교까지 일삼다니, 네놈은 신들을 볼 낯짝도 없는 거냐!"
"억, 커헉. 커커컥..."
쾅, 쾅, 쾅.
목숨을 구걸해도 예외는 없었다. 테르베어는 힘껏 사슬 달린 철퇴를 들어올리고 내리치길 거듭했다. 그렇게 머리를 곤죽낸 뒤에야 휘하 기사들과 함께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앞을 수많은 수도사들과 습격자들이 가로막았다. 물론 만용의 대가는 뼈저리게 돌아왔다.
"아흐아악?!"
"도, 도망쳐! 저건 포위스의 차남이다! 테르베어야!"
"바다 앞에 틀어박혀 있어야할 놈이 어떻게...!"
테르베어는 그럴 때마다 철퇴를 휘둘러 방패는 물론 머리까지 으깨며 외쳤다.
"나르바, 형이 간다! 버티거라!!!"
테르베어는 정략이나 모략 따위 몰라도 괜찮았다.
그는 공국 최강의 기사였으니까.
***
조용해지나 싶던 수도원에 새로운 활기가 찾아왔다.
사람들이 어찌나 활기차던지, 자다가 등골에 소름이 쫙 돋을 정도로 옹골차게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수도사들 상대로 양학하던 습격대장이 의아하게 여길 정도로 말이다.
습격대장은 잠깐 멈춰서서 병사들이 태세를 갖추길 기다리다, 가장 가까이 다가온 병사에게 질문했다.
"무슨 일이냐."
"...후위에서 뭔가 일이 생긴 거 같습니다. 그쪽에 있던 병사들이 다급히 몰려오는 중입니다."
순간, 나랑 습격대장이 눈을 마주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비록 습격대장이 염병할 놈은 맞으나 유바스의 충신임은 확실했다. 일이 틀어진 순간, 그는 살기 위해 도망치는 대신 날 향해 칼을 겨누길 택했다.
습격대장은 단숨에 몸을 내던져 이리로 향해왔다. 도중에 수도사들이 황급히 막으려 했지만, 칼침 몇 번 정도는 맞아도 된다는 듯 무시하고 달리는 모습을 보니 절로 박수가 나왔다.
저런 A급 인재가 유바스의 권세를 증명한다. 나는 유바스가 실로 강대한 세력이란 걸 다시금 느꼈다. 하지만 제아무리 A급 인재라 해도 폐급 장애물에 한 번쯤은 가로막히기 마련이다.
챙강!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칼날이 교차한다. 용맹하고 비장하게 날 노리며 달려오던 습격대장조차 자신 앞을 가로막은 상대를 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넌..."
"공자님, 지금이 말씀하신 적기일 테지요!"
푸짐한 인상에 듬직한 풍채에 걸맞지 않게 날렵한 솜씨였다. 인심 좋은 미소를 띈 수도사는, 제 칼날로 습격대장을 가로막은 채 이쪽을 흘깃거리며 억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확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서텔. 이 십새가 간만 보던 끝에 드디어 난입을 결정한 것이다.
26.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
안타깝게도 인성과 실력이 항상 정비례하는 건 아니다. 우리 서텔 수도사가 대표적이었다.
서텔은 재물에 침 흘리며 세속의 권세가 어디로 향하는지 귀를 쫑긋거리는 놈이지만... 강했다. 칼잡이 수도사는 습격대장이 휘두르는 칼을 하나하나 맞받아치고 있었다.
아래에서 올려치면 내려치고, 내리치면 횡으로 그어 튕겨냈다. 무모한 공격으로 틈을 쉽게 내어주지도 않았다. 서텔은 그저 버티고 시간을 끄는 데에 집중했다. 이는 영리한 판단이었다.
"허억, 헉."
습격대장은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지쳐갔다. 짧은 시간 내에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인내심과 호흡을 흐트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검을 휘두르기보다 검에 휘둘리고 있다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서텔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맹수가 목을 드러낸 사냥감을 물고 머리를 흔들듯이, 상대가 지쳐있을 때 단숨에 달려들어 검을 내질렀다. 차라락. 칼날에 사슬 긁히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그리고 승부가 결정됐다. 뜯겨나간 사슬고리 아래서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놀라운 충성심을 보여줬던 습격대장조차 상처난 육신을 이기진 못했다.
습격대장은 천천히 고꾸라지는 와중에도 억지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고선 맹렬히 타오르는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봤다.
"네... 승리가, 패배를. 패배를... 불러올 것이다. 인세에... 끝이..."
나는 습격대장의 유언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습격대장이 유언 남길 시간을 준 서텔 때문이다.
서텔, 이 녀석 내 생각보다 훨씬 못된 놈이다. 사람을 죽음의 고통과 공포 속에 몰아넣고 한 걸음 물러선 채 잠자코 지켜만 보다니. 헐떡이며 힙겹게 뭐라 웅얼대는 습격대장이 안타깝지도 않은 건가?
나는 참다 못해 서텔에게 한 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뭐하느냐, 칼 들고."
"공자님, 하오나 이 자의 발언에 뭔가 중요한 단서가 있는 듯해."
"너 같으면 널 썰어버린 새끼한테 술술술 불겠느냐? 헛소리만 지껄이다 끝내겠지. 그런 잡생각 하지 말고 후딱후딱 쳐라."
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 서텔을 바로 승복시켰다. 오히려 고통을 단숨에 끝내주겠다는 전장의 인도주의에 반대한 건 고꾸라진 습격대장이었다.
칼을 고쳐잡은 서텔을 보고서 다급히 팔을 들어올리더니 폐부에서부터 공기를 쥐어짜낸 것이다.
"유바스의... 대의! 정녕 알 생각 없는 것이냐!"
"스읍. 팔 내려. 어, 어어. 팔 내리래도."
"공자님. 어떡합니까?"
습격대장의 상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찌저찌 응급처치해도 시름시름 앓다 죽을 미래가 훤히 보였다. 어차피 살려줄 생각도 없겠다, 눈 한 번 딱 감으면 편히 보내줄 수 있는데 자꾸 어렵게 가자고 한다.
나는 어떻게 할지 물어보는 유사 심복 서텔에게 혀를 차며 답해줬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정신이 온전치 못하신 모양이군. 네가 두 번 쳐야겠다."
"옙!"
부웅, 붕.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바람이 되어 내 머릿결을 잔잔히 흔들었다. 거리가 좀 가까워 혹시 핏방울이 튀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기우였다. 미리 피를 빼서 재워둔 덕분일 것이다.
나는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습격대장은 비록 염병할 쓰레기였지만 주인을 진실된 마음으로 섬기던 충신이었다. 그래서 휘하 병사들을 하나로 이끌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제 다 지나갈 일이다.
나는 제단 앞 계단을 타고 내려와 습격대장을 발끝으로 툭툭 치며 외쳤다. 내 목숨을 앗아가려던 후레잡놈한테 돌려준 아주 소심한 복수였다.
"주목! 너희 대장이 죽었다. 이 말이 뭐냐!"
내 외침이 혼란스럽던 본당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진형을 이루어 악착같이 버티던 습격자들 모두 이쪽을 바라봤고, 덕분에 내 발끝에 걸린 자기네 대장도 볼 수 있었다.
"대장!"
"...어, 어떻게?"
습격대장의 죽음은 이 난리통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었다. 방금 전까지 굳건하던 습격자들의 진형이 술렁이고 있었다. 습격자들 모두 예상 못한 돌발상황에 전의를 잃은 채 어찌할 지 모르고 있을 때.
나는 손바닥을 내밀며 외쳤다.
"눈 딱 감고 얌전히 무릎 꿇어야 덜 아프다는 뜻이다."
"?"
의문을 드러내는 습격자들.
그들 등 뒤엔 이미 안면가리개 너머, 형형한 안광을 흘리며 사슬 달린 철퇴로 풍차를 돌리는 기사들이 있었다.
"놈들의 주의가 다른 곳에 끌렸다, 지금!"
잠깐 시선을 끈 게 유효했다. 기사들은 조직적인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단숨에 적들 사이로 뛰어들어 날뛰기 시작했다.
이리 되면 승패가 훤했다. 습격자들의 개인 기량은 결코 높지 않다. 만일 1대1로만 붙었다면 수도사들에게 제압당했을 정도로. 그런 놈들이 1대1 최강인 기사를 상대로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컥!"
"어, 어느 틈에!"
"잠깐, 저, 전 럭스 스텔라를 섬기는 자입니다!"
같은 종교 믿는다는 게 무슨 면죄부인 줄 아는 놈들이 간혹 섞여 있었지만.
"입은 꼬라지 보니 이교도거나 이교도 같은 놈들이다, 쳐라!"
우리 기사 나리들께선 명쾌한 해답을 보여주셨다.
사실 오답이었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겨우 여섯 명이서 수도사들을 애먹게 만든 습격자 무리를 쓸어내고 있었다. 뒤늦게 살아남은 수도사들이 가세했지만 누가 봐도 기여도가 명백히 차이났다.
결국 난장판을 확실히 정리한 건 도중에 난입한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구더기처럼 꿈틀대는 습격자들의 머리를 마늘 빻듯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곤죽낸 뒤에야 투구를 벗었다. 기사 전원이 나와는 선의 굵기부터 차이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한가운데에 익숙한 얼굴이 없었다면 또 다른 암살자인 줄 알고 순순히 목을 내놨을지 모른다. 호리호리한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 아래 각진 얼굴, 평균보다 1.5배 정도 더 듬직한 풍채.
그는 날 보자마자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곧 본당 전체가 울릴 만큼 호방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나르바,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구나!"
위기의 순간, 날 구해준 건 이 몸의 둘째 형 테르베어였다. 테르베어는 살아남은 수도사들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오기 전 아버지께 다 들었다. 목숨을 걸고 적을 무찌르려 하다니... 이 형은 감동했다!"
"형님."
"물론 네가 검술을 연마해 전장에 나가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나는 무어라 반박하려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바닥을 훑어보고 있었다. 사방에 머리 잃고 축 늘어진 시체들을 보고 있노라니 겸손이란 게 뭔지 좀 알 거 같다.
"나르바, 확실히 재치있는 대응이었다. 우리가 오는 줄 알고 적들의 주의를 그리 끌다니."
"오시는 길 조금이라도 편하시라고 몇 안 되는 잔꾀 좀 부려봤습니다."
"녀석. 말하는 건 기특하게 한단 말이지."
테르베어의 말에는 뿌듯함과 기쁨, 안도감이 뒤엉켜 있었다. 하지만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한 건 나와 테르베어 뿐이었다. 다른 기사들은 일부러 건들건들한 자세로 주변을 둘러보며 압박 중이었다.
"테르베어 경, 그래서 이 자들은 뭡니까?"
"퉷. 수도사란 놈들이 사람 피나 묻히고 다니고."
싸움은 끝났지만 아직 모든 게 끝나진 않았다. 수도사들의 존재를 비로소 인지한 테르베어의 표정은 시시각각 굳어가고 있었다.
"나르바. 자세한 사정을 모두 이야기해줄 수 있겠느냐."
"흠."
이런 이야기하는 순간만을 고대해왔다.
슬쩍 눈을 굴리자 시야 바깥에서 푸근한 미소 뒤로 식은 땀 뻘뻘 흘리고 있는 서텔이 보였다. 서텔은 내 시선을 눈치채자마자 소리나지 않게 입만 뻐끔댔는데, 그 의미를 대충 짐작하면 이랬다.
'공자님, 믿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려야 비로소 공정하다는 평가를 얻는다. 나는 서텔의 발언이 과연 합당한지 머리를 굴려보기 시작했다.
'공자님? 저, 많이 도와드렸습니다.'
흠...
그 정도였나?
"고, 공자님."
슬슬 내가 똥 닦고 손 씻었다는 걸 눈치챈 서텔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사실 변심이란 말도 웃긴다. 서텔 저 새끼가 처음부터 마음 똑바로 먹고 살았으면 이 고생도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텔의 공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 나는 제 3의 선택지를 골랐다.
"형님, 이 자들을 어찌할지 논하려면 먼저 구해야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해야할 사람들..."
테르베어의 눈동자에 살기가 깃든 건 결코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한 내 수행원은 딱 네 명이었다.
그 중 가장 정감 가는 데다 혁혁한 공로까지 세운 자를 꼽자면 역시 우리 개울가의 존이었다. 기사들의 압도적인 무용 앞에 겁 먹은 수도사들이 병든 병아리처럼 골골대는 사이, 나는 테르베어, 그리고 서텔과 함께 종탑 아래로 향했다.
"존! 다 끝났다! 내려와도 된다!"
높은 계단을 직접 타고 올라가느니 그냥 목 좀 박박 긁고 말지. 이런 생각으로 외쳤을 때였다.
"고, 공자님. 인질로 잡히신 건 아니지요?!"
"존..."
우리 존이 영특하나 싶다가도 이런 식으로 실망시킨다. 이 놈은 날 죽이려고 악착같이 달려든 친구들을 봐놓고 인질 타령이네. 그렇지만 거듭된 설득 끝에 알아서 내려온 존을 보니 분노와 실망도 싹 사라졌다.
"끄윽, 꺽. 이젠, 이젠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욕 봤다."
나는 내려오자마자 엎어져서 서럽게 우는 존을 토닥여줬다. 테르베어는 이 모습을 영 아니꼽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런 겁쟁이 같으니라고. 모시는 주군이 인질로 잡혔다면 구하려는 시도는 해야지!"
"너무 책 잡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비록 울보지만 이래보여도 시키면 다 하는 시종입니다."
"나르바... 알겠다. 맡은 역할에 충실하다면야. 쯧, 일 다해놓고 저러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가 있나."
다행히도 내 변론 덕분에 내리갈굼 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존은 눈물 짜내느라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우리 일행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이 감동적인 상봉을 반기지 못한 자는 단 한 명, 우리 푸짐한 인상의 서텔 수도사 뿐이었다.
하긴 동료들이 싹 다 무장해제 당하고 엎드려 있는데 기분이 싱숭생숭할 만하다. 나는 걱정으로 입을 꾹 다문 서텔을 위해 따스한 위로 몇 마디 전하기로 했다.
"안심하거라. 내 너를 머나먼 이국의 명망 높은 기사와 동등하게 여기고 있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많이 둔 여포 정도면 충분히 높은 평가라고 생각한다.
"허니 헛짓거리 말고 얌전히 안내하거라."
그제서야 조금 안심되는 모양이다. 축 늘어졌던 발걸음이 묘하게 활력을 되찾았다. 서텔은 잠자코 우리 일행을 안내했고, 머지 않아 수도원 내부에서도 가장 서늘하고 음침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코를 쿨쩍이던 존이 킁킁대다가 환한 미소를 지은 건 이때였다.
"키야! 향긋한 포도주 냄새! 여기가 말로만 듣던 수도원의 지하 저장고!!!"
"..."
"공자님, 승리의 축배를 들려고 찾아온 것이죠?! 하긴, 수도원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포도주를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말 한 마디 안 했는데 알아서 북치고 장구친다. 존은 언제 울적했냐는 듯이 생글생글한 웃음과 함께 술통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존처럼 환한 분위기를 유지하지 못했다.
특히 전장에서 갈고 닦인 테르베어의 반응이 격했다. 테르베어는 낌새를 눈치챈 즉시 투구를 쓰고서 이를 빠드득 갈아댔다. 그제야 존도 무언가 이상하단 걸 눈치챘다.
"저... 공자님?"
"존. 안 보는 게 나을 거다."
"예?"
호기심은 장단점이 명확했다. 새로운 시도를 하게 만들거나 끔찍한 기억을 머릿속에 새긴다. 수도원의 지하 저장고, 거기서도 가장 어둡고 구석진 곳에 우리가 찾는 자들이 있었다.
날 호위하던 토파 경과 살아남은 병사 둘 모두 나란히 뉘여져 있었다. 사슬에 묶인 채 박피당해 시뻘겋게 물든 모습으로 말이다.
처음엔 누구도 정체를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심하게 난도질당해 얼핏 보면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유일하게 멀쩡히 남은 부분은 사슬 아래, 손발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날붙이에 훼손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금방 깨달았다. 주저없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우웁, 공자님... 저, 실례 좀. 우웁!"
뒤늦게 실체를 파악한 존이 헐레벌떡 뛰쳐가 토악질하는 사이, 나는 외투로 시신을 덮었다. 나머지 시신 두 구는 테르베어가 맡았다. 테르베어는 아무 말 없이 망토와 서코트를 벗은 뒤 그들에게 덮어줬다.
"격리하겠다고 데려갔을 때부터 다시 볼 때 멀쩡한 모습은 아닐 거라 짐작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서텔을 바라봤다.
서텔은 평소의 미소와 여유 모두 잃은 지 오래였다. 그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달달달 떨며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했을 줄은 몰랐지만."
***
나는 책임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토파 경과 병사 둘의 죽음은 책임을 따질 수밖에 없었다.
전사의 직감이란 게 진짜 있긴 하나보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내게 승마를 가르쳐주던 토파 경의 말이 옳았다. 기사로서 사명을 다한 그는 피묻은 망토에 감싸인 채 다른 병사들과 함께 본당의 제단 앞에 놓여졌다.
당연하지만 이 모습을 본 기사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이, 이이익!"
"신을 섬기다면서? 신을 섬겨야할 자들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이게 정녕 수도사들이란 말이냐!"
기사들은 칼만 쓰지 않을 뿐 수도사들을 강철 군화로 뻥뻥 차대기 시작했다. 날아간 수도사들은 끅끅 앓으며 널부러졌고 말이다. 사실 저렇게 죽어나가도 비난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기사들이 죽이려 들자 눈 돌아간 수도사들이 있었다. 동앗줄 끊긴 걸 뒤늦게 눈치챈 서텔이었다. 서텔은 어차피 죽을 거 할 말 다 하자는 듯 악에 받쳐 외치기 시작했다.
"그놈의 수도사 타령. 수도사가 뭐 대단한 줄 알아?"
"뭐?"
"오."
저급 수도사가 주장하는 수도사가 별 거 아닌 이유라. 이건 꽤 흥미로운 의견이었다. 서텔은 핏발선 눈동자로 기사들을 노려보며 아득바득 외쳐댔다.
"약탈자가 휩쓸고 지나가면 세금 거두러 온 도적떼들이 설치는 세상이다. 돈 없고, 인맥 없고, 천한 신분에 땅도 없고! 그래서 굶어죽기 직전까지 가면 그대로 굶어죽거나!"
"..."
"...애 까는 걸 포기하고 제발 받아달라며 무릎 꿇고 빌빌 기어서 이 곳에 들어오는 거다. 대단한 뭔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심 깊은 기사들은 이 말에 충격먹은 모양이다. 방금 전 사납게 일던 분노의 불길이 온데간데 없이 당혹스러워하며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그 모습이 군인에 대한 환상이 깨진 소년처럼 보였다.
나는 초등학교 수련회로 가게 된 판문점, 통일 전망대에서 마주친 군인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왜 군인이 되셨어요?'
'나라가 끌고 와서.'
이제 보니 거짓 하나 안 보탠 정직한 청년이었다. 이 뜻깊은 추억을 떠올리게 해준 서텔을 위해 보다 관대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아무리 악독한 범죄자들이라 해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현대적 윤리의식의 발로이기도 했다.
나는 침묵한 기사들을 대신해 서텔에게 말을 건넸다.
"서텔, 너희 패거리가 굳이 박피라는 고문법을 택한 점이 미심쩍구나. 사람을 썰면 썰었지 가죽 벗기는 걸 잘할 놈들은 아닐 텐데 말이다."
"..."
"아마 이번 습격을 계획하고 이세의 유물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바스, 그들의 이단 행위에 관여됐을 테지. 물론 이 일이 알려지면 너희 모두 화형이다. 그렇지만 네가 날 구명해준 것도 사실이니."
나는 그리 말하며 기사들이 가지런히 모아놓은 검 무더기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검 한 자루는 서텔에게 던지고, 다른 한 자루는 내가 직접 움켜쥐었다.
"이건...?"
"공과를 인정해 스스로의 무고를 증명할 기회. 나를 상대로 하는 신명재판을 허락한다."
이 말이 본당에 남아있던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가장 많이 놀란 건 역시나 둘째 형 테르베어였다. 테르베어는 살벌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헐레벌떡 이쪽으로 뛰어오기까지 했다.
"나, 나르바! 그게 무슨!"
당연하지만 다 생각이 있다. 나는 테르베어를 향해 안심하라는 뜻이 담긴 미소를 보낸 후, 내가 가지고 있는 비장의 패를 선보였다.
"십자성 모양의 상흔? 설마?"
"...성흔이잖아!"
"성흔이라고? 공자께서?"
이미 내 성흔을 알고 있던 수도사들과 달리, 기사들은 성흔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 예상하고 기대했던 바다. 나는 칼끝으로 이 성흔을 툭툭 건드리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물론 신명재판 도중 성흔을 지닌 내게 상처 하나라도 내면."
축구가 없는 이 중세틱 이세계에서.
"너희 모두 처형이다."
목숨 걱정없이 접대 칼싸움 한 번 받을 절호의 기회였다.
27. 신명재판
신명재판. 놀기 좋아하던 몸주인조차 선명히 기억한 이름이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 진실로 무고한 자라면 신께서 도와주시리란 무지막지한 논리로 자행되던 사법 절차였다. 혐의를 벗으려 하는 용의자에게 여러 시련을 내려서 극복하면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다.
현대인이라면 이 논리와 절차에서 묘한 익숙함을 느낄지 모른다. 아마 그 익숙함과 추측이 맞을 거다. 근세에 돈 많은 미망인 상대로 자행된 마녀사냥도 신명재판 중 하나였다.
물론 내가 제안한 신명재판은 마녀사냥처럼 속물적이고 추잡하지 않았다. 이 곳이 진짜 중세 시절 지구도 아니고, 상대는 신이 실재하는 중세틱 이세계인데 이단 혐의를 저지른 놈들이었다.
당장 땔감 위에 얹어서 노릇노릇 구워도 모자랄 판에 무고를 증명할 기회를 준 거다. 이 야만의 시대에 항소를 허락해준 셈이니 현대인이 아니고서야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용의자들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자신 앞에 던져진 마지막 구명줄을 꽈악 움켜잡아도 모자랄 판에 다들 쭈뼛거리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아예 내가 칼까지 던져준 서텔이 대표적이었다. 방금 전까지 기사들 앞에서 발악하던 놈이 살아남을 길이 보이자 순식간에 고분고분해진 것이다.
서텔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검을 쥐긴 커녕 몇 걸음씩 물러서 헛기침해댔다.
"공자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중요한 기회, 다른 이들에게 먼저 베풀겠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족합니다."
딴에는 선심쓰듯 말했지만 그 속내를 짐작하긴 쉬웠다. 애초부터 굶어죽기 싫어서 수도원에 투신한 놈이다. 다른 이들이 먼저 날 상대하게 냅두고 내 체력이 다하길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이 속셈을 눈치챈 다른 수도사들의 눈빛이 날서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찔려서 고개라도 숙였을 텐데 서텔은 그러지 않았다. 철면피답게 당당히 이 쪽을 바라보면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서텔의 제안을 받아줬다. 제 꾀에 제가 빠지겠다는데 말릴 생각 따위 없었다.
"좋아. 그리해라. 단,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면 유죄를 인정한 걸로 간주해 전원 즉시 처형하겠다."
이렇게까지 엄포한 뒤에야 수도사들의 망설임이 끝났다. 답지 않게 쭈뼛거리던 몸놀림들이 딱딱하게 굳어간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서텔을 대신해 앞으로 나선 수도사가 땅에 떨어진 검을 들었을 때,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수도사가 지을 표정이 아니구나. 정녕 네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 여겨 그 검을 쥔 것이냐?"
상대는 나한테 단검으로 손목 찔린 바티스였다. 바티스는 로브 끝자락을 찢어 상처를 칭칭 동여맨 뒤 멀쩡한 한 손으로 검을 쥐고 있었다.
수축된 동공,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눈동자, 퀭하고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 처리.
그러나 마음이 혼탁하게 물든 와중에도 살의는 분명했다. 바티스, 이미 사람을 죽인 자는 아무 거리낌없이 칼끝을 내게로 겨냥했다.
"신께서 인정하신다면 승리한다. 신명재판이란 게 그런 거 아닙니까?"
"그래."
긴 말은 필요없었다. 어차피 날 상처 입히는 순간 바로 테르베어와 기사들이 움직일 것이다. 하나 더, 성흔을 내미니 옴짝달싹 못한 걸 보면 성흔 보유자가 종교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닌 건 분명한 바.
진짜 이겨도 넌 파문이다.
"그럼 신명재판을 개시한다."
나는 검을 양손으로 움켜잡고서 왼발을 뒤로 물렸다.
***
나르바의 신명재판 선언은 모두를 당황시켰다.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테르베어는 물론, 나름 칼 솜씨에 자신있는 서텔까지 말이다. 더군다나 나르바는 아직 열두 살에 불과한 소년이었다. 모략이야 간교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면 갈고 닦을 수 있지만 무예는 다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해도 육체가 완성되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다. 대단한 기술조차 완성된 육체를 토대 삼아 쌓아올리는 것이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건 바로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수도사들을 둘러싸고 멸시어린 경계를 계속하는 한편, 테르베어를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테르베어 경, 여차하면 저희가 가세하겠습니다."
"고맙네."
누구보다 나르바를 아끼는 자들이 이럴 정도다. 유일한 예외는 존이었다. 테르베어와 기사들이 난입을 결정했을 때, 오직 존만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르바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자님... 실력이 평범한 건 아니신 거 같던데.'
나르바와 검을 맞대게 된 바티스도 얕잡아보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비록 손 하나를 제대로 못 쓴다지만 상대는 덜 자란 어린 아이였다.
더군다나 싸워야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티스는 가슴에서 타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나르바를 노려봤다. 정확히는 손등에 새겨진 십자성 모양의 성흔을 말이다.
'저 오만한 철부지 녀석이 럭스 스텔라의 성흔을 받았다고?'
바티스. 비참한 인생이었다.
농노의 사남으로 태어나 물려받을 땅은 커녕 한 끼 식사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어 스스로 집에서 도망쳤다. 이후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날품팔이로 연명하다 사람을 보고 식욕이 생길 즈음 차마 식인은 할 수 없어 자진해 수도원에 들어왔다.
그리고 고난과 역경, 굶주림으로 가득찬 삶 끝에 럭스 스텔라를 섬기며 희망을 얻었다. 서약을 통해 럭스 스텔라의 총애를 받는다면 더 나은 삶이 기다릴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자애롭고 위대한 럭스 스텔라조차 서약에서만큼은 단호했다. 절제의 서약 이후 십수 년 가까이 수도사로 살아온 바티스에게조차 무병장수 이외의 기적은 허락치 않았다.
이제 바티스는 더 이상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을 직시할 뿐이다.
'럭스 스텔라시여, 이것이 당신의 정의입니까? 당신께선 당신을 위해 봉사한 자를 끝내 쳐내시는 겁니까?'
천한 농노 태생 출신의 바티스는 10년 넘게 수도사로 살았어도 성흔을 받지 못했다. 반면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 나르바는 서약하자마자 성흔을 내려받았다.
이 냉엄한 현실이 바티스로 하여금 이빨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바티스는 나르바를 향해 칼끝을 겨눈 채로 천천히 옆걸음치며 멤돌기 시작했다. 마치 맹수가 사냥감의 방심을 기다리듯이.
그러자 나르바도 바티스를 바라보며 차분한 발걸음을 옮겼다. 몸을 웅크리고 털을 세운 짐승과 달리 산책이라도 나가는 듯 사뿐한 발걸음이었다. 나르바는 마치 칼끝 하나 자신한테 닿지 못하리라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바티스는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챙강!
첫 번째 울림이 서로의 칼을 타고 흘렀다.
바티스의 검은 나르바가 아닌 엉뚱한 바닥을 내리치고 있었다. 살짝 불티가 일 정도로 말이다. 반면, 나르바는 바티스의 검을 여유롭게 튕겨내고서 다음 공격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바티스는 이를 악물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상대는 양손, 나는 부상 입은 데다 한 손이다. 무게 중심이 쉽게 흐트러질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야!'
두 번째 울림은 가느다랗게 이어졌다.
바티스가 검을 휘두른 순간, 나르바는 단숨에 칼끝을 내지르는 걸로 반격했다. 하지만 목젖이나 급소를 겨냥한 찌르기가 아니었다. 나르바는 찌르기와 동시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리고 바티스의 검은 자석처럼 그 원에 착 달라붙어 가로막혔다.
"!"
날에 가로막힌 날은 본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었다. 바티스의 검은 처음의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무기력하게 끌려가기만 했다. 결국 바티스는 손목의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검을 놓쳤다.
쨍강.
세 번째 울림. 검이 땅바닥에 부딪히며 울린 소리가 모두의 경악을 대신했다. 나르바는 검을 회수해 끄트머리로 바닥을 짚으며 오만한 미소를 띄웠다.
"상처 입히면 죽는다니까 두려워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냐?"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이 바티스를 움직였다. 바티스는 흐느적거리며 땅에 떨어진 검을 다시 주웠다. 하지만 스스로를 다독일 핑계거리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바티스는 그대로 무릎 꿇으며 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럭스 스텔라,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서약을 지키며 살아온 제가 아니라!"
그 때, 비릿한 냉소가 본당을 지배했다.
"정말 지키며 살았을까?"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이번에도 나르바였다.
"...네 놈은 모를 거다."
"무슨 서약을 했는데. 절제? 정직?"
"어린 놈이... 럭스 스텔라의 총애를 얻었다고 조롱하는 거냐?"
"아니. 신에게 하는 맹세잖아. 그런데도 절제랑 정직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거 같길래."
"이, 이...! 내가 얼마나 아끼면서 살아왔는데!"
"정말 위대한 신이라면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 정도는 구분할 터. 아까 전에 돈 없고 뭐 없어서 수도원에 들어왔다던데. 그래서 절제의 서약을 했나? 나 참."
나르바는 바티스의 마지막 절규를 단숨에 끊고서 검을 고쳐들고 있었다.
"없이 살아서 못한 건 절제가 아니지."
창살 틈새로 깃든 달빛이 꺾인다. 핏방울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달빛이었다. 나르바는 굴러 떨어지는 바티스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그건 그냥 가난한 거야."
이윽고 목 잃은 시체가 허물어졌을 때, 나르바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한 뒤였다.
"다음."
"..."
"신에게 자신의 무고를 증명할 자, 나와라."
나르바는 그리 말하면서 자신의 왼손을 들어올렸다. 손등에 새겨진 성흔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방금 전, 피가 줄줄 흘러나오던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참고로 나는 서약을 충실히 이행 중이다."
성흔에 미미하게나마 샛푸른 빛이 머물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수도사들은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를 빠득빠득 갈며 앞으로 나섰다.
"같잖은 조건을 붙인 주제에 잘난 척은!"
"럭스 스텔라시여, 당신의 은총을 받은 자를 해한다 하여 벌하지 마소서!"
꼬맹이가 가르치려는 태도에 격분해 앞다퉈 검을 쥐겠다 나선 것이다. 서텔만이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다급히 나르바를 바라봤을 뿐이다.
서텔은 검을 쥐겠다며 난리난 수도사들을 제치고 나서며 입을 열었다.
"나, 나르바 공자님. 이제 제가 나서겠습니다."
"어허."
그러나 나르바는 매몰차게 서텔을 내쳤다.
"서텔, 네 능력을 높이 샀다. 충분한 기회도 있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기회를 미룬 건 너 자신이지 않느냐?"
"공, 공자님."
성전의 서약.
이세의 옛 신과 그 힘에 홀린 자들을 멸절함으로써 럭스 스텔라 신앙을 공고히 다진다.
'내 신명재판을 마지막으로 미루겠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신 게 날 살리려함이 아니라...!'
서텔은 이제서야 나르바의 진짜 의도를 깨달았다. 이조차도 나르바가 럭스 스텔라에게 무엇을 서약했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 처음부터...!!!"
짐작컨데 나르바는 수도사들이 이세의 힘을 사용했다는 의심한 순간부터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고발하는 대신 신명재판을 주최한 까닭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 서텔은 그 이유를 죽는 그 순간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끝까지 간만 쳐보면 이리 되는 것이다."
의문에 답해줄 유일한 존재는 서텔을 향해 조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
성전의 서약.
참 간단한 서약이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단점이 있었다. 인세에도 살아남은 강력한 이교도 무리와 목숨을 건 혈전을 벌여야 한다는 단점이 말이다.
머리가 안 따라주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다.
"다음. 신에게 무고를 증명할 자, 나와라."
굳이 끝까지 살아남은 독종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족칠 수 있으면 족치는 게 좋겠지만, 쉬운 길을 마냥 거부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여기에 서약을 이루게 해줄 제물들이 널려 있는데 말이다.
"어거걱."
"다음."
놈들은 후환이 두려워 날 상처입히지 못한다.
"히, 히익!"
"신에게 무고를 증명하라."
반면, 나는 자유롭게 검을 휘두를 수 있다. 이로써 내 헌신은 쉽게 증명된다.
그 증거가 샛푸르게 빛나기 시작한 내 성흔이었다.
"성흔이... 빛나잖아..."
"럭스 스텔라께서 누가 옳노라 말해주고 계신다!"
테르베어와 기사들은 이 광경에 환호했다. 반대로 수도사들은 슬슬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시체가 수십 구씩 쌓였을 즈음, 나는 칼끝으로 마지막 남은 한 명을 겨누며 고했다.
"나와라."
"...."
"신 앞에서 무고를 증명해라."
"공, 공자님...! 제, 제발!"
"아니면."
토파 경. 아버지께 충성하며 끝까지 날 돌봐준 기사였다. 살아남은 병사 둘도 이름은 모르지만 끝까지 충직하게 내 곁을 지켰다. 이런 놈들과 달리 열심히 살던 수도사들도 분명 있었다.
"네 죄를 인정하는 거냐?"
결국 서텔은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칼을 움켜잡았다. 잘난 칼솜씨 믿고 날뛰던 개백정 새끼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신실한 기도를 외웠다.
럭스 스텔라님, 한 놈 더 올라갑니다.
28. 종자여 내게 오라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럭스 스텔라 신앙을 믿는다.
외계에서 도래해 고통스런 이세를 끝내고 인간의 시대, 인세를 열어줬다는 신화를 고스란히 믿는 것이다. 하지만 경전을 읽지 못하는 대다수 신도들은 럭스 스텔라가 어떻게 인간을 승리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교회가 의도한 바였다.
사람들은 이세가 끝난 줄 알지만 교회의 지도층은 현실을 알고 있었다. 이세의 황혼, 인세의 여명이란 수식어 이면에 드리워진 공포를 말이다.
비록 권력을 놓고 다툴 지언정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은 항상 똑같았다.
아직 이세의 종족들은 자신들의 황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인세의 별빛이 비추지 않는 곳에서 힘을 길러 옛 신들의 복권을 꾀할 것이다.
그리고 옛 주인들이 돌아오는 날, 인세의 가느다란 여명은 다시 새벽 어둠 속에 잠기리라.
교회는 이런 가르침을 신봉하며 럭스 스텔라에 관련된 기록을 대부분 말살시켰다. 오직 성직이나 수행에 뜻을 두고 독실함을 인정받은 소수만이 지워진 신화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서텔도 그 소수 중 하나였다.
수도원장의 측근으로 온갖 일을 거듭해온 끝에 간신히 들을 수 있던 이야기.
'교회는 옛 신을 섬기는 무리가 되돌아올 걸 염려해 럭스 스텔라의 기적이 분석당하는 일을 막고자 관련된 기록을 말살시켰다.'
모든 면에서 열등하고 나약했던 인간이 모든 면에서 상위호환인 이세의 종족을 물리칠 수 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서텔 형제, 헌신 1단계가 무병장수의 기적인 건 알 테지. 자네가 궁금한 건 2단계일 테고.'
'...아직 부족합니까?'
'사실 무병장수의 기적이 아무 서약이나 공물없이 베풀어지는 헌신 0단계의 기적이라면 믿겠나?'
럭스 스텔라의 기적은 다른 신들을 압도할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럭스 스텔라는 그 강대한 기적을 결코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얼마나 진실된 서약인지, 서약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지켜본 뒤에야 비로소 기적을 베푼다.
'헌신 1단계의 기적은 성흔일세.'
'성흔? 1단계가? 하지만.'
'그래. 자네와 내게는 성흔이 없지. 서약하고 시간이 이리 흘렀는데도.'
그리고 정말로 진실된 각오와 다짐이라면 서약을 이행하기 전에 성흔을 내리기도 하니.
서텔은 수도원장이 이 말을 하던 순간을 도저히 잊지 못했다. 사리사욕만 쫓는 줄 알았던 수도원장이 처음으로 내비친 회한 어린 얼굴을 말이다.
'신께서 보시기에 우리가 다짐한 서약이 진실되지 않았다는 걸세.'
'하지만... 그럼, 성흔이 귀한 까닭은.'
'럭스 스텔라께서 보시기엔 헌신 1단계조차 인정 못할 자들로 수두룩하단 거겠지.'
럭스 스텔라는 단호한 신이었다.
어차피 가진 재산이 없으니 절제의 서약을 하면 이득이다, 그리 여기는 얄팍한 생각 따위 용납치 않았다. 서텔은 경전과 가르침에 수도 없이 적힌 말을 그제서야 떠올렸고 비로소 온전히 이해했다.
절제란 스스로 행함에 의미가 있다. 욕망을 잘라냄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림이다. 하지 못함은 절제가 아니라 제한임을 명심하라.
그대, 신에게 삶을 공양하려는 자여.
서약하기 전에 이 말을 기억하라.
'그걸... 누가 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
그 날, 수도원장은 포도주 담긴 잔을 들어올리며 냉소를 흘렸었다.
'그래서 나는 이러고 있고, 자네는 사람 피 묻히고 다니지 않나.'
불행히도 현실은 보다 냉혹했다. 검을 움켜잡은 서텔은 고개를 들어올려 제단 앞을 바라봤다. 죽여야 할 대상에서 지켜야 할 대상으로, 그러다 올려다봐야 할 대상이 된 소년을 말이다.
'그럼 성흔은 생각보다 대단치 않은 겁니까? 헌신 1단계의 기적이니?'
'흠. 내가 알 수 있던 건 성흔이 지닌 효과 중 하나네.'
'원장의 지위로도 겨우?'
'원장이라서 딱 하나라도 알 수 있었던 걸세.'
얇은 셔츠 차림에 흑요석처럼 매끈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사람을 조롱하고자 끌어올린 입꼬리. 잔잔한 수면보다 투명하게, 연마된 대리석보다 하얗게 보이는 피부.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건 손등 위에 새겨진 샛푸른 빛깔의 성흔이었다.
'성흔 보유자는.'
나르바는 샛푸른 빛을 흘리는 성흔으로 칼자루를 감쌌다. 도저히 열두 살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악력과 자세를 보이면서 칼끝을 서텔에게로 겨눴다.
서텔은 그 앞에서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러자 나르바가 먼저 다가와 검을 휘둘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수 차례의 검격이 잇달아 날아온다.
나르바는 다른 수도사를 상대하며 보였던 기교적인 모습을 전부 버렸다. 대신 힘과 속도에 의존해 검을 휘두르며 쉴새없이 서텔을 압박했다.
서텔은 이 난격에 맞서 뒤로 물러서다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강철끼리 부딪힌 순간, 서텔의 얼굴은 삽시간에 굳었다.
'서약을 이행한 만큼 강해지고.'
저릿한 감각이 칼자루를 타고 흐른다. 묵직한 울림이 손가락을 뻣뻣하게 굳히며 어깨를 두드렸다. 뒤늦게 옆걸음치려 했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서텔이 충격에 흐트러진 사이, 나르바는 벌써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서약을 이행하고 있는 동안은 지치지 않는다.'
후두둑. 마대 자루가 터졌다. 서텔은 흘러내리는 밀알을 막고자 터져나간 자국을 움켜쥐었다. 어느샌가 쥐고 있던 검을 내팽개친 채로 말이다.
"허억, 억. 어억."
고통은 느끼지도 못했다. 그저 쏟아지는 내용물을 다시 줏어담아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서텔은 쏟아지는 내장과 핏물을 다시 담으려 했지만, 그것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흘러내리기만 했다.
날카로운 칼끝이 목을 쿡 찌른 건 이때였다.
"찢긴 상처 하나만으로도 그리 벌벌 떨면서."
"고, 공자님."
"사람 목숨은 그리 썰고 다녔더냐?"
살려줄 리 없다. 살고 싶다. 이성과 감정이 서로를 가리키며 삿대질했다. 이제 나르바의 멸시와 조롱섞인 미소를 보면서도 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텔은 대신 머릿속에서 떠오른 대로, 마구잡이로 꺼내놨다.
"살려주십시오. 고, 공자님. 성흔을. 성흔을 받으셨으니 부, 부디."
"음."
"살생 자제의 교리를..."
그 순간, 나르바는 검을 고쳐잡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 행동이 피가 흘러 정신이 혼탁해진 서텔의 눈에는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보였다.
서텔은 살 수 있다는 감격에 차올라 환희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텔은 칼날이 목에 박히는 와중에도 기쁘게 웃고 있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까지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선처를 바라지 말고."
그 얼굴에 조금이라도 경악이 깃든 건 몸에서 굴러 떨어진 다음.
"무고를 증명하라니까?"
나르바가 땅바닥을 구르는 머리에 칼끝을 내리꽂았을 때였다.
***
피비린내로 진동하는 본당 밖으로 나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니 참 감회가 새롭다.
정말로 지긋지긋하고 다사다난한 밤이었다. 어디 잠깐 앉아서 쉬고 싶은데, 뒹구는 거라곤 시체 밖에 없어서 그냥 포기했다.
물론 해가 뜨면서 수도원의 참상이 여실히 드러난 덕분도 있었다.
원효대사님의 해골물 일화랑 비슷하다. 그, 원효대사님도 어두운 밤이라 해골물 드셨지 밝은 대낮엔 토악질하지 않으셨던가. 안 보일 땐 괜찮았는데 슬슬 눈에 뵈니까 속이 영 더부룩하다.
이런 곳에서 앉아 쉬다가 눈 부릅뜨고 죽은 시체랑 눈 마주치면 자다가 까무러칠 게 분명했다. 하물며 신도 있는 세상인데 귀신이 없으랴. 딱히 귀신을 무서워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계기를 줘서 어울리고 싶진 않았다.
친하지도 않던 초등학교 동창이 갑자기 연락 오면 으레 보험팔이나 정수기, 혹은 사이비 권유인 법. 살아서도 데면데면하게 지내놓고 죽고 나서야 낯짝 보러 오는 놈들은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리 다짐하고 있노라니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공자님! 멋진 승리셨습니다! 역시 믿고 있었다니까요!!!"
고개를 돌리자 존이 커다란 맥주잔 하나를 건네주고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받자 그윽한 과일 향이 코를 찔러온다. 수도원에서 빚어낸다는 고가의 포도주가 분명했다.
"내가 신명재판 하는 동안 지하 저장고를 털어온 것이냐?"
"에이. 어차피 다 죽일 놈 아니었습니까. 공자님 승리가 확실한데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다 이렇게 뭐라도 챙겨드려얍죠."
녀석... 우리 존이 아둔하고 눈치없이 굴어도 가끔씩 보여주는 이런 모습 때문에 미워할 수가 없다. 나는 주군을 챙기는 존의 마음 씀씀이에 울컥하고 말았다.
"사실은."
"쩝. 모처럼 구경거리 생겼다 싶어서 요깃거리 챙겨왔는데 그새 다 썰어버리셨슴다."
이제 보니 입에 육포를 물고 우물거리며 말대답하는 중이었다. 존은 아쉬움에 가득찬 눈초리로 본당 안쪽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되려 내가 질색할 정도로 말이다.
"토파 경 시신을 보고선 그리 구역질하더니?"
"어후. 전 징그러워서 사냥감 도축하는 것도 못 봅니다."
"?"
하도 어이가 없어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신명재판도 목 자르는데?"
"예? 그거 뭐 번개치는 거 아니었습니까?"
나는 현대에 있을 적에도 순박한 사람들의 꿈을 지켜줬다. 산타 클로스나 집요정이 실재한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짖궂은 말 몇 마디로 순박한 존을 괴롭히느니 그냥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 번개가 목을 갈라버렸다."
"와. 어쩐지. 번쩍번쩍하던 게 그래서였구만요."
존은 흥미를 느낀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이며 이것저것 떠벌리기 시작했다. 나는 존이 건네준 포도주를 홀짝이며 적당히 맞장구쳤다.
그러다 문득 의문 하나가 생겨났다.
"그러고 보니 기사님들껜 드렸느냐?"
"아."
존의 멍청한 반응을 본 나는 슬그머니 잔에서 입을 뗐다. 그리고 주저없이 잔을 거꾸로 들어 포도주를 땅바닥에 쏟아버렸다.
"아이고, 공자님! 그 귀한 걸 어찌!"
"난... 포도주를 마신 적이 없다. 그렇게 알아라."
"예? 방금까지 벌컥벌컥 드셔놓고선."
"스읍. 너도 뱉어. 테르베어 형님과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겠다."
무언가 캥기는 게 있으면 현장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라.
나는 존의 등짝을 후려갈기며 포도주를 토해내게 한 뒤 다시 본당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밥 먹고 싸움만 하다 술 마시는 기사들의 후각은 남달랐다.
"음. 킁킁."
"왜 그러나? 사냥개처럼 킁킁대고."
"수도사들이라서 그런가? 이 피비린내 속에서도 포도주 냄새가 나는군. 꽤나 고급진."
"정말로?"
기사 둘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킁킁대는 모습에 어깨가 다 쭈뼛거린다. 존이 기사님들도 챙겨드렸으면 눈치 볼 거 없이 시원하게 마셨을 텐데 말이다.
속으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건만, 정작 나보다 더 크게 아쉬워하는 사람은 달리 있었다. 아니. 아쉽다기보다 집착에 가까웠다.
본당에 들어가자마자 둘째 형 테르베어가 사납게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르바. 넌 역시 기사가 되어라."
"형님."
"내 말했지. 네 재능은 천부적이라고. 오늘 보여준 그 놀라운 기량, 다른 이라면 몰라도 나와 내 동료들은 다 알아봤다. 네게는 어쩌면 날 넘어설 재능이 있어."
"수도 기사를 노린다 하지 않았습니까."
"수도사란 놈들이 벌인 짓을 보고도 그리 여기느냐? 적어도 난 아니다. 수도 기사에 얽매일 이유가 없어. 네 실력이라면 지금부터 내 종자로서 전장을 전전해도 합당한 전공을 세울 수 있다."
확신할 수 있었다. 테르베어가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라고 말이다.
애초에 귀족이라면 응당 기사를 해야 한다는 테르베어였다. 내 실력을 본 이상 어떻게서든 퍽퍽한 전장으로 끌고 가겠단 집념이 질척이는 언행과 눈빛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내 대답도 정해져 있었다.
"형님, 제가 성직에 뜻을 둔 건 순전히 가문에 도움이 되기 위함입니다. 겸사겸사 수양도 하고요."
"기사일 때도 충분히 공헌할 수 있다. 그건 이유가..."
"허나 교황청의 비호는 받지 못할 테지요."
기사들 때문에 학을 떼서 왕도 안 하려는데 내가 기사가 된다?
벌써부터 강철 빤스 입고서 돌격 밖에 못하는 놈들 보며 복창 터질 미래가 보인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야만적인 모지리들과 같이 사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이 모든 일들은 결국 유바스와 맞설 세력을 꾸리기 위함입니다. 형님, 그 사실을 기억해주십시오."
"...후우, 모처럼 괜찮은 종자가 들어오나 싶었는데. 요즘 놈들은 실력도 없고 재능도 없고 둘 다 있으면 의지가 없고..."
"형님."
"하. 알았다. 원... 나르바, 내 패배다. 내가 졌다, 졌어."
테르베어는 한참동안 그리 탄식했다. 탄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테르베어는 그대로 축 늘어지나 싶더니, 돌연 두 눈을 부릅뜨며 오른손의 검지를 치켜들었다.
"졌으니까 한 수, 아니 세 수 물러주마. 이 형님과 한 판 붙어서 이기면 네가 말하는 대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
"형님, 그게 열두 살 상대로 할 제안입니까?"
"끄으응..."
테르베어는 뛰어난 종자를 얻고 싶다는 욕망과 열두 살배기 소년이랑 결투해서 얻을 수치심을 사이에 놓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슬아슬하게 승리한 건 후자였다.
테르베어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래서.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냐? 이 수도원은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여기 살던 이들 대부분이 죽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게다."
그 말대로다. 수도원에 뭐 남아있는 게 없다. 정신나간 놈들이 재물에 눈이 멀어 같은 형제들을 죽이고, 나중에 도착한 유바스의 습격대가 다 죽이다 마지막엔 테르베어가 정리했다.
물론 성물이나 재물 같은 게 있긴 있을 테지만... 그걸 찾는답시고 낭비할 시간이 더 아까웠다. 이런 놈들만 모아놓은 곳에 특별한 성물이 있을 거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오히려 수도원의 재산을 노리고 약탈하는 무리가 많아질수록 더 좋다. 그들이 우리의 흔적을 지워줄 테니까. 나는 여기까지 판단한 후 결정을 내렸다.
"습격자들을 정리했으니 이제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여야지요."
"본래 목적이라 함은."
"교황청과 접촉하는 겁니다. 본래는 포위스 주교를 통하려 했지만, 하는 짓을 보아하니 그럴 생각이 없을 터. 포위스 교구에 머물러봤자 암살의 위험에 상시 노출될 게 분명합니다."
유바스가 아니라 포위스의 신자들이 잠재적 적이 되는 셈이다. 유바스의 계책은 움직임이 커서 파악하기 쉽지만 앞서 말한 특징 탓에 포위스 주교의 계책은 막기 어려웠다.
교회나 수도원이 지닌 폐쇄성과 배타성, 거기에 정보력을 우습게 여기면 안 된다. 외부의 조력자가 개입하기 어려운 환경인 데다 교회는 어딜 가나 깔려 있으니 이목을 피하기도 어려웠다.
다시 애설튼 공왕 곁으로 돌아가 머무는 것도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이미 포위스의 영역 내에서 유바스의 습격이 수 차례 이뤄진 이상 마냥 안전하다고 단언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말하니 테르베어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르바. 차라리 내 곁에서 종자로 활동하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느냐?"
어쩌면 이해한 게 아니라 그냥 날 종자로 데려가고 싶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전장보다 더 안전한 곳이 하나 있긴 합니다."
"나르바, 네 꿈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나는 네 안전을 걱정해서."
"정말로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유바스와 반항하는 주교로부터 절 지켜줄 세력이 말입니다."
"...그 곳이 어디냐."
테르베어는 마치 내가 머물 곳을 부수려는 듯한 기세였다. 그렇지만 테르베어도 듣고 나면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교황청 직할, 일레니풋 주교령입니다."
과연 내 예상대로였다.
테르베어는 잠깐 골똘히 생각하나 싶더니, 이내 입을 쩍 벌리며 무릎을 탁 쳤다.
"일레니풋은 유바스의 영역이지 않느냐!!!"
29. 등잔 밑이 어둡다
정말 귀찮고 듣기 싫은 이야기여도 가끔은 경청해야 할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남은 자리가 앞자리 밖에 없어 강제로 교수님과 눈 마주치며 온갖 질문 받아내야 하는 강의 시간이 그랬다. 이외에도 대충 흘려들으면 섭섭한 티 팍팍 내며 삐져버리는 사수라던지, 지 여친이랑 싸워놓고 나한테 하소연하는 새끼라던지 말이다.
테르베어도 그 중 하나였다.
"교황청의 비호가 충분히 가치있음은 인정하마. 그래도 일레니풋으로 가기 전에 당장 우리를 둘러싼 정세가..."
어째서 뛰어난 재능을 갖춘 내가 기사가 되어야 하는가. 이 주제를 놓고 장황한 설명을 시작한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이야기부터 꺼내는 모습을 보고 촉이 왔다. 이거 안 듣고 딴청 부렸다간 분명 잔뜩 삐칠 거다.
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 붙인 결과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포위스와 유바스를 비롯한 다섯 공국이 자리잡은 이 곳은 아침녘 제도라고 불린다. 말 그대로 커다란 섬과 비교적 자잘한 섬들로 이뤄진 곳이었다.
또한 럭스 스텔라의 강림 이후 수많은 인간들이 세력을 모았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응답한 곳이었댄다. 이 곳 사람들이 럭스 스텔라 신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게 불과 500년 전이라니 말 다했다.
당연히 비교적 최근에 개종된 지역인만큼 럭스 스텔라 신앙에 적대적인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토착 신앙을 신봉하며 저 멀리 떨어진 다른 이교도와 연합해 럭스 스텔라 신앙을 몰아내길 시도했다.
결국 수백 년에 걸친 싸움 끝에 다섯 공국이 세워지며 럭스 스텔라 신앙이 지배적인 믿음으로 거듭나기에 이르렀으니.
"하지만 이교도 습격자들은 나날이 세를 불리고 있다. 다섯 공국이 서로 적대하며 분열하는 동안 울창한 숲이나 대해를 건너 몰려오고 있지."
"혹시 뿔 달린 투구를 씁니까?"
"?"
"아닙니다. 그냥 해본 말입니다."
뭐 이리 주절주절대나 싶더니 그냥 판타지 국룰 배타고 다니는 야만인들이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야만인보다 더 미개한 족속들 말이다. 그래도 전투력 하나만큼은 대단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들을 가볍게 여긴다 느낀 건지, 인간흉기 테르베어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꾸짖을 정도였다.
"나르바, 그들을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그들이 섬기는 악마는 여전히 강대하다. 뿐만 아니라 싸움에 이골이 난 자들. 어지간한 실력의 검사는 단숨에 살해당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오른손의 검지로 바닥을 뒹구는 습격자를 가리키며 뒷말을 덧붙였다.
"이런 가짜들과 달리 말이다."
"이들도 대단한 실력이던데요. 방패벽을 짜고 대항하는 규율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흥. 유바스의 찌꺼기들이 어줍잖게 흉내냈을 뿐이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야만인 새끼들이 싸움질도 못하면 그냥 병신이지. 국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자 테르베어가 내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힘든 전장이다. 나르바, 우리에게는 너처럼 뛰어난 종자나 기사가 한 명이라도 더 절실한 상황이고. 일레니풋까지 가서 비호를 받느니 그냥 나와 함께..."
"그럼 이젠 제가 변론하겠습니다."
칼밥 아니면 아무 것도 안 먹는 테르베어답게 구멍이 숭숭 뚫린 주장이었다. 적어도 날 데려가고 싶다는 마음 하나는 여실히 느껴졌지만 말이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킨 뒤, 테르베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레니풋은 유바스의 영역이되 교황청 직할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가진 곳으로, 거기서 무언가 변고가 생긴다면 자연히."
"그만!"
테르베어는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양팔을 들어올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걸로 모자라 두 눈까지 질끈 감더니 고개를 휘휘 내젓기까지 했다. 이 모습을 보고도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졌다. 가자, 일레니풋으로."
테르베어는... 말싸움을 더럽게 못한다.
***
내가 일레니풋으로 가고자 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 포위스를 다스리는 애설튼 공왕의 지배력이 크게 흔들렸다. 유바스와 그 동조자들이 수도원 습격이라는 강수까지 둬가며 날 죽이려들 정도면 말 다했지.
이런 상황에서 더 머물러봤자 제대로 된 대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심지어 테르베어조차 애설튼 공왕의 곁에 머물라는 권유를 삼가할 정도였다. 사심이 한 8할은 섞여 있어도 2할은 이런 판단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유바스의 영역 안이라서 더 안전하다. 만일 이 안에서 무슨 일이 터질 경우 책임 소지가 명확했다. 아무리 유바스가 권세로 찍어누른다 해도 의심을 없애진 못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교회와 유바스의 분열을 더욱 가속화시킬 터. 교황청이 유바스로부터 완전히 등 돌릴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유바스도 이 사실을 아는 만큼 이번 수도원 습격처럼 눈에 띄는 초강수는 두지 못할 것이다.
세 번째는 성흔과 럭스 스텔라의 기적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자들이 교황청이라서였다. 이번 신명재판을 통해 성흔의 힘을 느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신은 믿는 게 압도적으로 이득이다. 뭐 선한 의지니 악신이니 모순이니 이딴 거 다 알 거 없고. 그냥 내려주는 기적이 압도적이었다. 어린 나이에 덜 자란 육신으로 온갖 지랄을 다했는데도 몸에 피로가 느껴지지 않았다.
헌신 2단계의 기적이 이 정도라면 다음 단계는 얼마나 대단할까?
나는 차오르는 신앙심을 느끼며 이교도 무리들을 모조리 척살하리란 의분으로 가득찼다. 밥그릇 때문에 지 혈육을 죽이는 놈들도 있는 판에 나 정도면 무척 선량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앞서 말한 이유들로 다음 행선지는 일레니풋이 됐다. 다만 목적지를 정해놨다 해서 바로 짐싸든 건 아니고, 최소한의 뒷수습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다.
비록 가망없는 일이라 해도 말이다. 테르베어와 기사들, 그리고 존과 나는 수도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아나섰다.
물론 결과는 보다시피.
"잔혹한 놈들."
"...이 곳엔 더 이상 없습니다."
깔끔한 꽝으로 끝났다.
이리 보니 서텔과 그 무리가 이끈 습격은 무척 성공적이었다. 어찌나 은밀하고 치명적이었던지 살아남은 수도사를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나마 아주 꽝은 아니어서 조그마한 성상 뒷편에 숨어있던 자들을 발견했지만, 다들 상태가 영 아니었다.
두 명. 그조차도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죽어가거나 상처에 덧난 감염 탓에 펄펄 끓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테르베어 경."
"알고 있네. ...차라리 베어주는 게 나을 테지."
"형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르바?"
때때로 삶보다 죽음이 더 나을 때가 있다. 생활이고 뭐고 다 작살난 중세틱 이세계에선 존엄사가 횡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딱 하나 뿐이었다.
나는 죽어가는 자의 얼굴 위로 왼손을 얹고, 오른손으로 죽어가는 자의 손을 마주잡았다.
"신이 아니라서 살려줄 순 없다."
"..."
"허나 넌 돌바닥이 아니라 사람의 품에서 죽을 것이다."
서텔은 자기네 패거리를 구분짓기 위해 허리춤에 칼을 차고 칼자루를 안쪽으로 향하게끔 유도했다. 그리고 이들은 칼을 차고 있지 않았다. 재물이나 지위에 눈이 멀어 함께 지내온 동료들을 썰어제낀 놈들과는 다르단 소리다.
평소에 어찌 살았을진 모르겠고. 서텔 패거리가 아니란 사실 하나만으로 내게 위로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어쩌면 성상 뒷편에 웅크려 죽어가던 자들은 이런 말을 기다렸을지 모르겠다. 힘겹게 앓는 소리내던 자의 얼굴이 순간 편안하게 누그러졌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다 그대로 숨을 거뒀다.
나는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대했고, 그도 마지막엔 표정을 풀며 편안히 숨을 멈췄다.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몸을 일으키자 날 바라보는 시선들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테르베어는 진중한 분위기로 물어오기까지 했다.
"평소 알던 자들이냐?"
"아뇨."
"그럼 어째서?"
테르베어는 이번 일로 수도사들에게 아주 뿌리깊은 편견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조금 날선 듯한 테르베어의 질문에 느긋이 답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이리로 와 변고를 당한 자들입니다. 비록 생전에 얼마나 개자식이었을진 모르겠지만."
힐긋, 눈동자를 굴리자 방금 죽은 자들이 보인다. 편안히 눈을 감은 두 명의 모습은 고통과 경악에 물든 얼굴로 가득 찬 수도원에 어울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인, 정말 괜찮은 친구들이었을 수도 있겠죠."
사람에게 좋은 면만 있다 여기면 호구가 되고 나쁜 면만 있다 여기면 싸이코패스가 된다. 나는 이 수도원이 칼 들고 설치는 정신병자들만 모은 곳이 아니라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부대끼고 살던 곳이라 여기기로 했다.
테르베어는 이 말을 듣고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관심거리를 바꿨다.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아나서는 일을 마쳤으니, 이제 혹시 모를 단서를 찾을 때였다.
이번에 뒤적거린 건 유바스가 보낸 습격자 무리였다.
하지만 우리 유바스, 하는 짓거리가 더럽고 질척이는 만큼 본인들이 책 잡힐 구석은 결코 내어주지 않았다. 정황 증거야 차고 넘쳐 누가 봐도 이 새끼 아니면 답이 없지만, 가장 중요한 물적 증거가 전혀 없었다.
이런 부분에서 전문가일 테르베어의 말이니 확실했다.
"이 갑옷은 럭스 스텔라를 신봉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다. 명백히 이교도, 그것도 대해 너머에 있는 이교도 무리의 양식이야. 가져온 검들도 하나같이 폭이 좁고 장식이 구슬 형태로 한정되어 있다."
"유바스의 것은 하나도 없는 겁니까?"
"없다. 유바스의 문장인 검을 문 사자는 커녕 럭스 스텔라의 우상인 청십자성도 보이지 않아. 만일 내가 직접 이 놈들 언행을 보지 못했다면 영락없이 이교도 습격자 무리로 짐작했을 거다."
이제 보니 이 새끼들 럭스 스텔라를 섬긴다며 이빨 털어도 죽을 만 했다. 이교도처럼 꾸며놓고 럭스 스텔라를 상징하는 우상은 하나도 없으면서 뭘 믿고 럭스 스텔라 신도라 했던 건지 모르겠다.
수 시간에 걸친 수색이 별 다른 성과없이 끝나자 테르베어도 살짝 생각을 바꿨다.
"이리 됐다면 차라리 이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을 성물함이라도 우리가 터는 게 어떻겠느냐?"
"형님, 터는 게 뭡니까."
"음. 역시 좀 그렇나?"
나는 실망감에 혀를 내두를 뻔했다.
테르베어가 아무리 말재간 없다지만 저렇게 부적절한 어휘를 사용할 줄 몰랐다.
"터는 게 아니라 이교도들의 습격으로 자기 방어 능력을 상실한 수도원을 대신해 저희가 성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