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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1% APOCMASCOT / Chapter 3: 3

Chapter 3: 3

23. 빌런 해결방법 II

연쇄살인마 마상국이 이선정 박사를 살해하면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이 중단된다.

그래서 멸망 초기의 뉴스나 다큐멘터리, 여러 분석 기사에 마상국의 이름이 언급됐다.

"박재구는 이름조차 못 들어본 잔챙이인데."

미래가 조금 바뀌었다.

차우진이 주식을 샀더니 박재구가 나타났다. 멸망을 막는 데 써야 할 예산을 모두 빼앗으려고 들었다.

그래서 박재구는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빌런이 되었다.

"어차피 결론은 같지."

멸망에 개입한 빌런은 제거해야 한다. 살려주면 지구 멸망 위험이 커진다.

재구파는 3층 건물을 모두 사용했다. 2층에 있던 놈들은 3층에서 비명이 들려도 신경 쓰지 않았다. 3층에 두 명이나 잡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시끄러운 소리가 나도 그러려니 했다.

3층 출입문은 워낙 튼튼해서 약간의 방음 효과가 있었다. 고함을 치면 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2층에 있던 조직원들이 카드 패를 돌리며 잡담했다.

"오늘은 작정하고 패나 본데?"

"그러게 왜 큰형님 돈은 빼돌려서. 관리나 잘하지 말이야."

"동정하냐? 그러다 의심받으면 너도 큰형님이나 김 실장님 손에 죽는 거야."

조직원이 펄쩍 뛰었다.

"동정이라니! 저러다 죽으면 시체 처리하기 귀찮아져서 하는 소리지."

갑자기 위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어? 이거 무슨 소리야?"

"설마 총?"

"총이라니? 여기 총이 있어?"

"큰형님한테 권총이 있다던데 쏘신 건가?"

"씨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야! 일단 연장 챙겨! 늦으면 김 실장님한테 박살 난다!"

그들이 급히 칼이나 야구방망이를 챙겨 계단을 향해 뛰었다.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부비트랩을 많이 다뤄보았다. 적이 설치한 부비트랩을 찾아내 거꾸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게 가능할 만큼 부비트랩 설치 기술이 좋고 설치 속도도 빨랐다.

제일 먼저 뛰어가던 놈의 발목에 가느다란 줄이 걸렸다. 줄이 당겨지면서 딸각 소리가 났다.

"어?"

갑자기 계단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으아악!"

"부, 불이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불이 붙었다. 불의 크기가 꽤 크고 범위도 계단 바닥을 덮을 만큼 넓었다. 조직원 중에 불타는 계단을 뚫고 올라갈 놈은 없었다.

"소, 소화기 가져와!"

"119!"

"야! 119는 안돼! 큰형님이 총 쐈잖아!"

***

차우진이 이종수의 몸에 묶여 있는 끈을 회칼로 끊었다.

이종수는 의식은 있지만 심한 구타로 인해 몸을 가누지 못했다.

차우진이 몸이 축 처진 이종수를 사무실로 끌고 나왔다.

"이 사람은 무슨 일로 붙잡혀 있는 거려나. 사채 썼나?"

진소영이 대답했다.

"돈을 훔쳤다던데요. 앗. 제가 한 말이 아니고 저놈들이 한 말이에요."

차우진이 이종수에게 물었다.

"무슨 돈을 훔쳤다는 거지?"

이종수가 눈이 풀린 상태로 중얼댔다.

"나 그 돈으로 주식 샀어. 주가가 폭등하고 있잖아. 더 오를 거야. 그러니까 그만 패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주식?"

아까 재구파 조천상과 조직원 셋이 차우진의 주식을 노리고 동네로 찾아왔다가 박살 났다.

"무슨 주식?"

"사덕리소스 오늘 상한가 쳤다고. 계속 칠 거라고."

차우진이 이종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종수가 바닥에 넘어졌다.

"컥."

차우진은 박재구가 왜 하필 그 주식을 노렸는지 눈치챘다.

'시작은 이놈인가?'

진소영이 보챘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빨리 도망쳐야 해요."

차우진이 설명했다.

"복도에 불이 났으니까 저거 끌 때까지는 아무도 못 올라와."

진소영은 걱정했다.

"그래도 누군가 불길을 뚫고 올라오면…."

"한두 놈쯤이야 뭐 오든 말든."

진소영이 3층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여기 있던 다섯 놈은 순식간에 전멸했다. 두목은 총까지 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네요. 한두 놈쯤은 그냥 때려잡으시면 되겠네요."

불이 더 커지면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막힌다. 지금도 그쪽은 연기 때문에 나가기 좋은 상태는 아니다.

차우진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불투명 시트지를 붙여놓은 창문을 열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어두운 골목이 보였다.

이쪽에 CCTV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했다.

3층 사무실에는 사람을 묶는 데 쓰는 밧줄이 많았다.

차우진이 밧줄을 하나 가져와 3층 내부 철제 구조물에 감았다. 그런 후에 이종수를 창가로 질질 끌고 갔다.

이종수는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정신을 차렸다.

"어?"

조금 전에도 맛이 가긴 했지만 기절했던 건 아니다. 방에 묶여 있어서 사무실에서 일어난 일은 못 봤지만, 박재구와 3층 조직원들이 전멸했다는 건 알았다.

차우진이 이종수를 창가로 끌고 갔다.

이종수도 원래는 재구파의 조직원이었다. 그것도 자금 관리자였다. 겁이 덜컥 났다.

"서, 선생님? 저를 왜 창가로 끌고 가는 겁니까?"

"밖으로 던지려고."

차우진이 이종수의 몸에 줄을 묶은 후에 창틀에 얹었다.

이종수는 3층 바닥을 보고 새된 소리를 냈다.

"히익. 사, 살려주십쇼!"

"그러고 있잖아."

차우진이 진소영에게 말했다.

"장갑 껴."

사무실에 장갑이 굴러다녔다. 진소영이 장갑을 주우러 갔다.

차우진이 이종수를 창문 밖으로 툭 밀었다. 이종수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진소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꺅! 죽인 거예요?"

"아니."

밧줄의 반대쪽은 차우진이 잡고 있었다. 그 밧줄은 다시 철제 구조물에 감긴 후에 이종수의 몸을 묶은 상태였다.

덕분에 이종수의 추락 속도는 그리 빠르진 않았다.

이종수는 눈앞에 2층 창문이 휙 지나갔다. 저절로 비명이 나왔다.

"아악!"

그러다 골목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끄아아…."

3층 창문에서 바닥까지는 8m도 되지 않았다. 허리를 묶은 밧줄로 추락 속도를 줄여준 덕분에 아프긴 해도 어디가 부러지진 않았다.

차우진이 밧줄을 잘라버린 후에 진소영에게 말했다.

"이제 아가씨 차례야."

"네? 저, 저요?"

"내려가야지?"

진소영은 방금 주운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녀가 창밖을 보았다. 이종수는 살아있었다.

그래도 창밖으로 떨어지는 건 무서웠다.

"저는 오빠랑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난 아가씨 오빠가 아니야. 내가 가는 길은 못 따라와. 안 뛸 거면 여기 남아야 하는데."

차우진이 3층 내부를 보며 말했다.

"여기 그냥 있으면 불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아, 알았어요."

차우진이 그녀의 허리와 겨드랑이에 줄을 몇 바퀴 둘둘 감았다.

"그리 높지 않으니까 이려면 괜찮겠지. 손으로 밧줄 꼭 잡고."

"좀 더 안전하게 다리도 묶…."

차우진이 그녀를 창밖으로 밀어버렸다.

"꺄악!"

차우진이 밧줄의 반대쪽을 잡았다. 그녀의 몸무게는 이종수보다 가벼워서 속도를 늦추기 훨씬 쉬웠다.

진소영은 몸이 아래로 쑥 내려가는 걸 느꼈다. 2층 창문이 눈앞에 보였다.

사채업자 건물은 모든 창문에 불투명 시트지를 붙여놓아서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내부에서도 외부로 탈출하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곧바로 1층 바닥이 다가왔다. 그녀가 다리에 조금 힘을 주고 균형을 잡았다. 마치 계단 대여섯 개쯤을 한 번 뛰어내린 듯한 충격이 다리에 느껴졌다.

"아야."

그게 다였다. 다친 곳은 없었다.

그녀가 위를 보았다. 잡고 있던 줄이 아래로 주르륵 떨어졌다.

그녀는 차우진이 나오길 기다리며 위를 보았다. 그런데 차우진은 고개조차 내밀지 않았다.

그녀가 잠깐 기다리다가 깨달았다.

"아…. 저 오빠가 가는 길을 나는 못 따라간다더니. 옥상으로 가려나 보다."

거기서 어떻게 탈출하려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방법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종수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벽을 짚고 일어났다.

"아이고 허리야. 죽는 줄 알았네."

진소영이 이종수에게 말했다.

"아저씨. 우리 빨리 튀어요. 여기 있다가 저놈들에게 잡히면 큰일 나요."

"어? 그, 그렇지. 빨리 갑시다."

"전 경찰서로 갈 건데, 아저씨는요?"

"어? 경찰서?"

진소영은 억울했다.

"내가 빌리지도 않은 돈 때문에 납치돼서 많이 맞았거든요. 죽인다는 협박도 당하고요. 나를 술집에 팔아먹으려고도 했어요."

"조직이 그런 짓을 가끔 하긴 했지."

"그리고 3층이 어떻게 됐는지 봤죠? 일이 이렇게 됐는데 가만히 있으면 괜찮을 거 같아요? 신고라도 해야 보호받죠. 같이 갈 거죠?"

"아니, 나는 저기…."

그녀가 이종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경찰서 가면 안 되는 상황이구나? 그럼 여기서 찢어져요."

"그, 그렇지? 난 갑니다. 아. 그런데 날 구해준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압니까?"

진소영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도 알고 싶어요."

이종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도망쳤다.

진소영도 그곳을 빠져나갔다.

건물 안에서 소란이 심해졌다. 창문으로 연기가 나오는 게 보였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였을까?"

***

차우진은 3층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후에 건너편 건물 옥상을 보았다.

평범한 건물은 옥상에 CCTV를 설치하지 않는다. 골목의 폭도 그리 넓지 않았다.

"거리는 적당하네."

차우진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재구파 사무실에서 사라졌다가 골목 건너편 건물 옥상에 나타났다.

그가 그곳에서 사채업자의 건물을 돌아보았다.

사채업자들은 119에 신고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불을 끄려고 했다. 소화기도 가져와서 계단에 사용했다.

차우진이 3층 계단에 설치한 부비트랩은 기름을 사용해 만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소화기로는 화재 진압이 어려웠다.

건물에는 다른 소화기가 없었다.

"이 새끼들아! 구경만 하지 말고 물 가져와!"

"여기 있습니다!"

조직원이 세숫대야에 수돗물을 담아왔다.

"빨리 부어!"

조직원이 세숫대야를 크게 휘둘렀다. 물이 계단으로 넓게 퍼지며 날아가 불길 위로 떨어졌다.

기름을 먹은 불에 물이 어설프게 들어갔다. 겨우 몇 리터의 물은 수증기로 변하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물을 먹은 불길이 오히려 거세졌다.

"으아아! 이게 뭐야!"

"도망쳐!"

연기를 빼내려고 복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곳도 있었다. 그곳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가며 불이 더 잘 타올랐다.

차우진이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잘 탄다."

재구파 조직원들은 불이 났는데도 119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정도 화재를 주변에서 모를 수는 없다. 타는 냄새와 연기가 건물 밖으로 퍼졌다.

외부를 지나가던 사람이 그걸 보고 119에 신고했다. 곧바로 소방차가 달려왔다.

근처에 관측하기 더 좋은 5층 건물이 있었다.

차우진이 블링크 스킬을 사용해 5층 건물 옥상으로 이동했다.

***

1층과 2층에 있던 재구파 조직원들은 건물에서 도망쳤다.

소방관들이 장비를 착용하고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불은 계단에서 일어난 데다가 신고가 빨라 외부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계단에 불이 붙고 연기가 많이 나긴 했지만, 화재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다.

소방관이 작정하고 진화하자 화재는 순식간에 진압됐다.

계단의 불을 끄고 3층에 올라간 소방관들이 말했다.

"발화 지점은 계단이야. 2층과 3층 사이 계단이 주로 탔어."

"누가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른 거야. 방화다."

3층 사무실에 소방관이 진입했다. 화재는 복도만 태웠을 뿐 철문이 달린 사무실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거기서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발견했다.

"생존자다!"

"어? 화재 피해자가 아니잖아!"

다섯 명 모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재구파 두목 박재구는 책상 옆에 쓰러져 있었다.

"이 사람은 칼날이 몸을 관통했어!"

"손에 권총을 쥐고 있다!"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 중에는 군 특수부대 전역자도 있었다.

그가 김덕수의 상처를 발견했다.

"이건 총상이야. 이 사람이 저 총에 맞았어."

24. 조사

화재 현장에 소방차와 함께 도착한 구급차는 두 대였다.

박재구와 김덕수는 다음 구급차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부터 병원으로 보냈다. 설사 이미 죽었다 해도 일단은 병원에 보내서 의사가 확인해야 한다.

다른 조직원 셋은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다음 구급차를 기다렸다.

형사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화재는 완전히 진압된 상태였다.

형사팀장이 건물에 들어가며 말했다.

"여기 사채 사무실이네?"

"예. 박재구가 운영하던 곳입니다."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재구파 사무실은 여기가 아니잖아."

"우리가 아는 곳은 영업을 주로 하고, 여기는 본사로 썼나 봅니다."

"사채 하는 놈들한테 본사?"

형사가 설명했다.

"재구파를 담당하던 팀에 연락해서 들었는데요. 박재구가 최근에 사채업에 뭔가 큰 변화를 주려 한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자기들끼리도 사장이니 실장이니 하는 직책을 나눠 가졌답니다."

"남의 피 빨아서 돈 많이 벌었으니까 이제 슬슬 양지로 나가보겠다?"

"그런가 봅니다."

형사팀장이 계단을 올라가 3층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박재구가 칼을 맞고 김덕수가 총을 맞았다는 말은 이미 들었다.

그가 3층 사무실로 들어가며 물었다.

"그래서 이 새끼들이 본사에서 하는 일이 뭔…. 응?"

그의 눈에 활짝 열린 별실이 보였다.

"저거 고문실이냐?"

"자금 회수가 잘 안 될 때, 채무자를 납치해서 저기서 작업했나 봅니다."

"피해자는?"

형사가 바닥에 떨어진 잘린 끈을 가리켰다.

"누군가 화재 순간까지 묶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재로 혼란할 때를 틈타 탈출한 건가? 저 열린 창문으로?"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박재구 이 새끼 지금 어디 있어?"

"구급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보냈습니다. 칼이, 그것도 기다란 장검이 몸을 관통했거든요."

"가보자."

***

형사팀장이 병원에 도착했다. 의사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박재구는 어떻게 됐습니까?"

"사망하셨습니다. 여기 도착하셨을 때 이미 늦은 상태였습니다."

"구급차에서 죽은 겁니까?"

"글쎄요. 칼에 찔렸을 때 사망했을 확률이 높은데,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팀장이 혀를 찼다.

"쯧. 물어볼 게 많았는데."

형사가 옆에서 말했다.

"팀장님. 여기 김덕수도 있습니다. 재구파 넘버 투입니다."

팀장이 의사에게 물었다.

"김덕수도 죽었습니까?"

"총상 환자 말이죠? 아닙니다. 수술 중입니다."

"김덕수라도 살아야 할 텐데."

현장 상황을 보면 3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야 박재구와 김덕수가 왜 서로 총을 쏘고 칼로 찔렀는지 물어볼 수 있으니까."

***

차우진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냥 들어가다가 CCTV에 찍히면 공들여 빠져나간 보람이 없다. 그는 근처 아파트 옥상으로 이동해 다시 옥상을 타고 넘어왔다.

베란다 창문은 여전히 살짝 열린 상태였다.

차우진이 맞은편 아파트 건물 옥상에서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옥상에서 사라졌다가 베란다에 나타났다.

"오늘 스킬을 많이 썼더니 체력이 달린다."

건물 옥상을 연속으로 건너뛰었더니 체력이 많이 소모됐다.

"이럴 때는 역시 고기와 탄수화물이지."

차우진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을 들고 치킨을 배달시켰다.

"하필 이 시점에 혼자서 치킨에 짜장면까지 시켜먹으면 이상하게 보이려나?"

대체품인 짜장라면이 싱크대 찬장에 넉넉하게 들어 있었다. 찬장에는 그것 외에도 다양한 라면과 통조림들이 있었다.

"식량을 넉넉하게 쌓아두니까 뿌듯하다."

TV에서는 케이블방송국에서 보내주는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아까 나가기 전에 켜놓은 상태 그대로였다.

차우진이 복대부터 풀어 배를 편하게 했다. 그런 후에 짜장라면을 끓이고 달걀 후라이도 두 개 얹어서 허기부터 채웠다.

그걸로는 양이 부족했지만, 나머지는 치킨이 오면 해결하기로 했다.

짜장라면으로 허기는 면했으니 이제 전투 피해를 해결해야 한다. 근육통이 예상됐다.

차우진이 TV 아래 서랍을 뒤졌다.

"파스가 역시 많아."

그의 누나인 차유리는 파스는 물론이고 상처치료용 소독약과 연고 등도 종류별로 준비해뒀다.

차우진이 파스를 몇 장 꺼내 몸에 하나씩 붙였다.

"잔챙이 빌런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차우진의 전투 센스가 소프트웨어라면 그의 몸은 하드웨어다. 전투 소프트웨어는 멸망한 세계용인데 하드웨어는 배 나온 아저씨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스펙 차이가 너무 컸다. 그 차이를 고려하면서 싸우긴 했지만 한바탕 하고 나면 근육통은 피할 수가 없었다.

"인질만 없었어도 간단히 처리할 수 있었는데, 괜히 고생했다."

차우진이 진소영을 떠올렸다.

"그 아가씨는 집에 잘 갔겠지?"

***

형사팀장은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다.

"뭐? 목격자?"

- 예. 현장에 있었답니다.

"내가 지금 당장 간다! 잘 모셔두고 있어!"

팀장이 서둘러 경찰서로 돌아왔다.

"진소영 씨? 현장을 보셨다고요?"

진소영은 현장을 벗어난 후에 경찰서를 찾아가 직접 신고했다.

"네. 제가 신고했어요."

형사팀장이 시계를 보았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두 시간이나 지났는데 왜 이제…."

진소영이 붕대가 감긴 팔을 들어 보였다.

"제가 그놈들한테 많이 맞았어요. 그놈들이 기술적으로 때려서 표는 덜 나지만, 지금 안 아픈 곳이 없어요. 그래서 병원에 가서 치료부터 받고 오느라 늦었어요."

하려고 했다면 사건 직후에 바로 신고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신고를 너무 빨리하면 차우진이 피할 시간이 부족할까 봐, 일부러 병원에 들러 치료부터 받고 찾아왔다.

팀장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체포한 것도 아니고 직접 찾아와 신고한 사람한테 왜 이제 왔냐고 따지긴 어렵다. 그랬다가 나중에 평범한 피해자로 밝혀지면 욕만 먹는다.

"아. 그러시군요. 치료부터 받으셔야죠. 몸은 괜찮으신지…."

"타박상이 많대요. 진단서도 받아왔어요."

진단서를 받는 데도 시간을 조금 소모했다. 그런 식으로 두 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내고 나서 신고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혹시 폭행을 당하신 이유가…."

진소영은 억울했다.

"아는 애가 진 빚을 저한테 대신 갚으래요. 룸살롱에 가서 일하래요. 정 마담한테 저를 팔겠다고 했어요."

"아는 애라는 분은 어디 가고…."

"죽었거든요. 왜 죽었는지는 몰라요. 소식만 들었어요."

"박재구가 선을 많이 넘었군요."

진소영이 숨을 몰아쉬었다.

"고소할 거예요. 진단서 있으니까요."

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재구는 사망했습니다. 고소는…."

진소영이 멈칫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죽었구나."

"네?"

"하긴. 칼에 맞았으니까…."

"잠시만요.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봤으니까요."

진소영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못 본 척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생각을 바꾸었다.

'경찰이 조사하면 내가 거기 있었다는 거, 결국 알게 될 테니까.'

몰랐다고 하면 왜 숨기고 도망쳤는지 의심받게 된다. 그래서 아예 경찰서로 찾아왔다.

진소영이 자신이 본 걸 설명했다.

그런데 그녀는 차우진과 재구파 조직원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는 보지 못했다. 의자에 묶여서 창문 쪽으로 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본 건 차우진이 풀어준 후에 본 현장 상황이다.

팀장이 물었다.

"그러니까 습격한 사람의 얼굴은…."

"못 봤죠. 마스크에 모자까지 쓰고 계셨는데."

"박재구가 칼에 맞던 순간은…."

"그것도 못 봤죠. 그놈들이 의자에 묶어놓고 저를 때렸어요. 그때는 맞다가 넘어져 있던 상태였거든요. 그것도 창가 쪽으로요."

"아…."

대신에 그녀는 소리를 들었다.

"근데 김 실장이란 놈이 사장 놈을 찔렀을 거예요. 그 긴 칼, 그놈이 가지고 있던 거니까요. 그리고 총소리가 난 다음에 김 실장이 그런 말을 했거든요."

"그런 말이라니요?"

"개새끼. 내 입을 막으려고. 분명히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어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현장에서 파악한 것도 진소영이 말한 것과 비슷했다. 거기에 진소영의 말이 더해지니 현장 분석 결과가 더 그럴듯해졌다.

***

차우진이 소파에 드러누워서 영화를 보면서 치킨을 뜯어 먹었다.

"치킨이 너무 늦게 왔어."

먹다 보니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양념 안 시키길 잘했네. 나중에 치우지 뭐."

차유리가 집에 들어왔다가 그 꼴을 보았다.

"너 뭐 하냐?"

"소파에 누워서 치킨 먹으면서 영화 보는데?"

"나는 야근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왔는데 팔자 좋다?"

"지금 집에 들어왔잖아."

"며칠만인지 아냐?"

그녀가 불평했다.

"연쇄살인마 마상국 때문에 고생만 잔뜩 했다."

"그 연쇄살인 수사는 누나네 팀 담당이 아닐 텐데 왜 힘들어?"

"생존자를 우리가 맡았잖아. 피해자 주변에 마상국을 죽인 사람이 있는지 찾아봤지. 그러느라 나도 고생했다."

"경찰에서 뭔가 알아냈어?"

"전혀. 우리 쪽은 없어. 마상국 사건을 직접 담당하는 곳에서도 아무것도 못 찾았대."

차우진이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바꾸며 말했다.

"좋네."

"뭐가?"

"누나가 퇴근해서?"

"이 새끼가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지?"

"공무원이 말 좀 곱게 써라."

차유리가 치킨 상자에서 닭다리를 잡았다. 그러다 코를 킁킁댔다.

"근데 이거 파스 냄새냐? 너 내 파스 썼냐?"

"서랍에 많더라."

"네가 파스 붙일 일이 어디 있어서? 다시 일 시작했냐?"

"운동 좀 했더니 쑤시네. 너무 열심히 했나?"

차유리가 차우진의 배를 보았다. 짜장라면을 먹고 치킨까지 먹는 중이라 배가 더 나왔다.

차유리가 코웃음을 쳤다.

"넌 운동하는데 왜 배가 더 나오냐?"

"배 나올 수 있는 시대가 좋은 시대야. 풍요롭잖아."

"뭔 개소리야?"

차우진이 물었다.

"다른 건 뭐 없어?"

"다른 거 뭐?"

차우진이 TV에서 나오는 짧은 뉴스를 가리켰다.

"저기 불 난 거 같은 거."

재구파 사무실에 불이 난 이야기가 뉴스로 나오고 있었다.

"사채업자 조폭 건물에 불 난 거? 몰라. 두목이 죽었다고 듣기만 했다."

"잘됐네."

"뭐가?"

"나가서 밥 먹자고."

차유리가 치킨을 보았다.

"그럼 이건 뭔데?"

차우진은 오늘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여러 번 사용했다. 그만큼 체력도 많이 빠졌다. 빠진 체력을 채우려면 잘 먹어야 한다.

"간식?"

"밥 안 해놨냐? 집밥 먹고 싶어서 들어온 나한테 이럴래?"

"음…. 볶음밥 시켜."

"시끄러우니까 빨리 밥해라. 취사병 출신의 실력을 보여봐."

***

재구파 김덕수가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했다.

형사들이 찾아가 3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김덕수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재구. 그 새끼가 날 쐈다."

"박재구가 왜?"

"몰라. 씨발. 그 개새끼. 내가 나가면 죽여버리…."

김덕수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형사들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나중에 박재구를 죽였을 때 제일 먼저 의심받는다.

형사팀장은 그가 입을 다문 이유를 다른 쪽으로 생각했다.

'자기가 칼로 찔렀다는 게 생각났겠지.'

팀장이 말했다.

"박재구는 죽었어."

김덕수는 당황했다.

"어?"

"네 칼에 찔려서 죽었잖아."

"아, 아니야. 나는 찌르지 않았다."

팀장이 살살 구슬렸다.

"박재구가 네 입을 막으려고 총을 쏜 거라며?"

"그건 확실하지만, 나는 안 찔렀다고."

"박재구가 먼저 총을 쏘니까 넌 어쩔 수 없이 칼로 찌른 거야. 잘하면 정당방위가 될 거야.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아. 다 잘 처리해줄게."

김덕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총에 맞은 후에 기절했다. 박재구를 찌른 기억은 없다.

"아니야! 내가 아니라…. 끄으윽."

총상에서 회복 중이던 김덕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의사가 형사들을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밖에서 형사가 팀장에게 물었다.

"정말 김덕수가 박재구를 찌른 게 아닐까요?"

팀장이 인상을 썼다.

"아니긴. 저런 새끼들은 다 똑같아. 지금 저건 살인죄 처벌을 피하려고 저러는 거야."

"용의자는 한 명 더 있잖습니까?"

누군가 3층에서 재구파를 처리했다. 조직원 셋은 중상이긴 하지만 목숨은 건진 상태였다.

그런데 그 조직원들은 초반에 기절해서 김덕수와 박재구 사이에 일어난 일은 보지 못했다.

"재구파를 습격하고 붙잡혀 있던 두 사람을 구해준 놈?"

"예."

"그놈도 용의자이긴 하지. 그런데 누군지 못 찾았잖아. 넌 맨땅에 헤딩하고 싶냐? 아니면 눈앞에 있는 유력한 용의자부터 먼저 조사하고 싶냐?"

"일단 저 새끼로 엮겠습니다."

"어차피 현장에 남은 증거나 정황을 보면 저 새끼가 제일 유력해."

"그렇긴 합니다. 박재구가 김덕수를 총으로 쏜 것도 확실하고, 칼에는 저놈의 지문만 있는 것도 맞으니까요."

형사팀장이 지시했다.

"저 새끼 통해서 재구파를 더 파 봐. 박재구가 괜히 넘버 투를 총으로 쐈겠어? 그 상황에서 입을 막아야 하는 이유가 있겠지."

25. 미완성 탐지기

며칠이 지났다.

차우진의 누나 차유리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구박했다.

"집구석이 왜 돼지우리가 됐냐?"

차우진이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면서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닌데?"

"소파에 돼지가 누워 있잖아."

"그건 인정."

"청소 좀 하고 살아라."

"했어. 누나가 할 거 남겨놓은 거야."

"응?"

"남겨놨다고."

"독한 놈. 넌 놀면서, 집에도 못 들어오는 나한테 꼭 이래야겠냐?"

차우진도 논 건 아니다. 연쇄살인마 마상국을 잡아 이선정 박사를 구하고, 재구파 두목 박재구를 처리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오늘은 들어왔잖아."

"로봇 청소기 고쳤냐?"

"그건 내 전문분야가 아니라고."

차유리가 들고 온 대형 스포츠가방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 또 나가야 해. 청소할 시간 없어. 옷 가지러 온 거야."

"잠깐. 그 가방은 왜 그렇게 무거워 보이지?"

"빨래도 좀 해 놔라."

"하겠냐?"

차우진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파에서 일어나 물을 가져왔다.

"마셔. 숨이라도 돌리고 가."

차유리가 의심했다.

"너 여기 뭐 탔냐? 네가 나한테 물을 떠다 줄 리가 없는데?"

"요즘은 누나가 평소보다 더 고생하니까 내가 양심이 살짝 찔리네?"

차우진이 연속살인마 마상국을 잡았다. 그것 때문에 차유리가 야근을 했다.

그녀가 마상국 사건을 직접 담당한 건 아니다. 그녀는 현장에서 구출된 유소진의 주변에 마상국을 죽인 사람이 있는지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그 조사는 성과 없이 마무리됐다.

"이번에는 바쁜 이유가 뭐야?"

차유리가 물을 마신 후에 냉장고를 열었다. 그녀가 맥주를 꺼내며 말했다.

"재구파라는 사채업자 조직이 있어. 그놈들 때문에 바빠. 그러니까 빨래해놔라."

"잠깐. 어디서 약을 팔아? 재구파는 누나네 지역에 있는 조직이 아니잖아."

차유리가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응?"

"네가 재구파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당연히 잘 안다. 차우진이 직접 찾아가서 박재구를 잡고 불도 질렀다.

"뉴스에 나온 불난 건물. 거기가 그놈들 소굴이라며. 궁금해서 인터넷에 찾아봤지."

"그렇구나."

"두목은 죽었잖아."

"죽었지. 경쟁조직이 보낸 킬러에게 당한 건지, 아니면 내분이 난 건지는 조사 중이야."

"그건 그 지역 경찰서에서 조사할 테고."

"그렇지. 그런데 그 건물에서 그놈들한테 두 명이나 살해당했어."

"응? 두 명이 탈출한 게 아니라?"

"그 사람들 말고 그 전에. 피해자가 더 있을 수도 있는데, 일단 찾아낸 게 두 명이다."

"잘 죽었네."

차유리가 인상을 확 썼다.

"너 미쳤니?"

"박재구 이야기야."

"아. 그렇지. 그놈은 잘 죽었지."

차우진이 박재구를 죽였다.

차유리가 맥주캔을 따며 말했다.

"그 피해자 중 한 명의 주소지가 우리 지역이야. 실종 신고도 접수돼 있더라. 그거 우리 팀이 맡았어."

차유리가 맥주캔을 입에 대며 말했다.

"그래서 다시 나가봐야…."

차우진이 끼어들었다.

"일하러 가면서 술 마셔도 되나?"

차유리가 한 모금을 꼴깍 마셨다.

"아. 몰라. 나 이미 근무시간 까마득하게 초과했어. 배 째라고 해."

"조사하려면 탐문도 다녀야 하지 않나? 술 냄새 풍기면서 피해자 주변 사람 만나게?"

차유리가 맥주캔을 들고 망설이다가 식탁 위에 놓았다.

"하여간 동생이라고 있는 게 도움이 안 돼. 이거 너 마셔라."

"더럽게 먹던 걸 마시겠냐?"

"저번에는 너 먹다 남긴 라면 나보고 먹으라더니?"

"그래서 지금 남긴 그 맥주는 요리에 쓰려고."

"또 먹게? 그러니까 배가 나오지."

차우진이 배를 툭툭 쳤다.

"난 내 배에 자부심이 있다고."

"장하다."

차유리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가방에 깨끗한 옷을 넉넉하게 챙겨 넣었다.

그러는 사이에 차우진이 식사를 준비했다. 차유리가 남긴 맥주와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해 소고기 요리를 금방 만들었다.

차유리가 물었다.

"뭐냐? 이건?"

"누나가 요즘 고생하니까 만들어봤어."

이번에도 차우진이 박재구를 잡았더니 차유리가 야근을 한다.

그래서 이 요리를 만들었다. 그냥 요리도 아니고 무려 소고기 요리다.

차유리가 의심했다.

"네가 나 고생한다고 이런 거 만들어줄 리가 없는데? 너 진짜 오늘 왜 이래? 무슨 사고 쳤냐? 너 나한테 뭐 잘못했지?"

"먹어나 보셔."

차유리가 고기를 한 점 집어먹었다.

"어?"

눈이 저절로 동그래졌다.

"맛있는데?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냐?"

멸망한 세계에는 부족한 게 많았다. 그나마 있는 것도 질이 떨어졌다.

차우진은 그런 재료라도 모아서 어떻게든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여러 생존자 그룹과 다양한 요리법도 교류했다.

차우진이 각성한 전투보조 스킬 중에는 맛과 냄새를 분석하는 것도 있다. 그 스킬의 원래 목적은 위험물질이나 독을 찾아내는 것이다.

차우진은 그 스킬을 요리에 써먹었다. 야생동물 고기, 잡다한 씨앗, 그리고 풀떼기로도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다 현대의 좋은 재료를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다. 멸망한 세계에서도 통하던 요리 실력과 분석 스킬이 현대의 질 좋은 재료와 만났다.

그랬더니 맛있는 음식이 나왔다.

차우진이 말했다.

"좋은 재료를 썼더니 더 맛있네."

차유리가 소고기 요리를 부지런히 먹으며 말했다.

"고기에서 맛있는 맛이 팡팡 터진다. 이거 진짜 장난 아니다. 너 이거 팔아라."

"식당은 아무나 하나."

차유리가 손을 흔들었다.

"밥! 이건 밥이 필요해!"

차우진이 전자레인지에 돌린 즉석밥을 내주었다.

"많이 먹고 돼지 돼라."

"너처럼 배 나올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차유리가 배부르게 먹고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남은 거 싸줘. 수연이도 오늘 야근이거든."

"그럼 나는 뭐 먹고?"

차유리가 프라이팬을 가리켰다.

"많이 남았잖아."

"난 많이 먹을 건데?"

"저거 다 먹으면 너 배 더 나온다?"

"그게 목적인데?"

"닥치고 밀폐용기에 담아라. 수연이한테 이르기 전에."

***

차유리는 남은 요리를 싹싹 긁어서 밀폐용기에 담아갔다.

차우진이 툴툴댔다.

"어떻게 그걸 다 가져가냐. 나 먹을 건 남겨줘야지."

민수연도 한 먹성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차유리가 가져간 양이 너무 많았다.

"하여간 우리 누나는 식탐이 너무 많아. 누굴 닮아서 저러나."

차우진이 자리에 앉아서 라면을 먹으며 현재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이선정 박사의 사망은 막았고."

그녀를 죽일 예정이던 연쇄살인마 마상국은 차우진이 직접 죽였다. 그 과정에서 그녀를 노리던 김준배도 제거했다.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 연구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나는 모르니까 손댈 수 없고."

10년 후 방송에서는 이선정 박사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치료제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도 많이 언급됐다.

하지만 뉴스나 다큐멘터리에 나온 개념만 보고 그 치료제를 직접 개발할 수는 없다.

"그건 이선정 박사가 알아서 해결하겠지."

막아야 하는 멸망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제 겨우 하나 막았다.

차우진이 주식 프로그램을 열었다.

"초기 예산은…."

사덕리소스의 주가는 연일 폭등 중이다.

"벌써 열 배가 올랐다. 와. 이게 돈이 얼마야."

차우진은 적금을 깨고 대출까지 받아 동전주에 2억 원을 몰빵했다. 평균 매수 단가는 주당 100원이었다.

그런데 사덕리소스의 현재 주가는 1,000원을 돌파했다.

"20억이면, 나 은퇴해도 되나?"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이 돈으로 놀고먹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면, 10년 후에는 지구가 멸망하겠지."

20억 원은 혼자서 먹고살기에 충분한 돈이지만, 지구 멸망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이걸로는 당장 활동할 자금이나 되려나."

앞으로 막아야 하는 멸망급 재난은 하나가 아니다.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예산을 더 불려야겠는데…."

착실하게 일해서 저축하는 방법으로는 충분한 예산을 모을 수 없다. 더 빠른 재산 증식 수단이 필요하다.

"사덕리소스처럼 투자하기 딱 좋은 게 생각이 안 나네."

차우진은 사덕리소스가 10년 후 멸망 초기까지 살아남는다는 걸 안다. 그래서 큰 부담 없이 몰빵했다.

멸망 초기까지 살아남는 회사 이름은 기억나는 게 좀 있다. 하지만 그 회사들이 사덕리소스처럼 100원짜리로 떨어졌다가 폭등하는지는 모른다. 게다가 몇 년 뒤에 폭등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예산은 방법이 생각나면 늘리기로 하고, 일단 다음 단계부터 가자."

생각나는 곳이 하나 있었다. 그가 인터넷에서 회사 이름을 검색했다.

"딥어스테크."

사덕리소스는 광산과 광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회사로, 원래는 멸망과는 상관없던 곳이다.

딥어스테크도 땅을 다룬다. 하지만 전문분야는 다르다. 그 회사는 땅속을 들여다보고 땅을 파는 장비를 개발하고 판매한다.

땅을 직접 파는 일도 많이 한다. 광산회사가 아니라 터널 같은 토목 관련 사업에 주력한다.

"그 멸망급 재난을 막으려면 딥어스테크의 탐지기가 필요한데…."

멸망급 재난 중 하나를 막으려면 이곳에서 특정 탐지기 개발에 성공해야 한다.

이선정 박사 때와는 다르다. 그 탐지기 하나만으로 재난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 탐지기가 없으면 멸망급 재난을 막기 어렵다.

"그 탐지기는 이미 개발이 중단된 상태겠지."

차우진이 개입하지 않으면 그 탐지기를 개발하던 팀은 사라지고 연구 자체가 폐기된다.

그 탐지기는 나중에 다른 회사에서 다시 개발된다. 그런데 그러면 너무 늦는다.

"이걸 여기서 완성하게 해야 하는데…."

차우진이 인터넷을 검색했다. 지금은 과거 분석 기사가 아니라 현재 상황을 직접 알아볼 수 있다.

"딥어스테크의 연구소 건설 공사…."

차우진은 미래 기사에서 이 연구소 건설 현장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아. 이게 그 연구소구나."

뭘 해야 할지 생각났다.

"이 공사판에 나도 들어가야겠다."

***

딥어스테크는 터널 같은 토목공사를 전문적으로 하지만, 건물을 만들지 못하는 건 아니다. 작은 건물이라면 만들 능력이 있다.

다만, 연구소를 그 회사 단독으로 짓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딥어스테크는 소규모 건설업체와 협업으로 연구소 건설 공사를 진행했다. 서류상으로는 협업이지만 실제로는 그 건설업체에 하청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공사 현장에 예산이 충분히 들어가지 않았다. 돈이 모자라니 당연히 사람도 부족해졌다.

공사 기술자 채용 업무를 맡은 직원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기술자가 모자라."

이미 여기저기 연락도 돌려보고 단기 채용공고도 올렸지만 그래도 모자랐다. 특히 실력 좋은 기술자가 부족했다.

"실력 있는 기술자를 쓰고 싶으면 돈을 더 줘야지 이게 뭐냐고."

그가 이메일을 확인했다. 지원 이메일이 몇 개 와 있었다.

그중에는 차우진이 보낸 것도 있었다.

"다른 데가 급하지, 전기 기술자는 안 급한데…."

그래도 훑어는 봐야 한다.

담당자가 차우진의 이력서를 확인했다. 자기소개서는 간단했다. 보유 자격증과 함께 이전에 어디서 일했는지가 적혀 있었다.

"응? 마지막에 일한 곳이 하이스카이 긴급 복구 현장?"

그건 직원도 들어본 적이 있는 현장이다.

그가 현장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차우진의 이력서를 간단히 불러주었다.

"소장님. 어떻게 할까요?"

- 주변에 전화 돌려서 하이스카이 복구 때 일한 사람이 맞는지 확인했어?

"소장님한테 전화부터 드린 건데요."

- 그때 그 복구 현장에는 전기 고수들만 투입됐어. 진짜면 당장 데려와.

"하지만 전기 기술자는 다 찼잖아요."

- 아니야. 여기 지금 난리 났어.

"네? 무슨 일 있어요?"

- 또라이가 배선 지나가는 길을 잘라놔서 난리 났다. 이거 복구하려면 실력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해.

"아. 또 사고가 난 거예요?"

현장 소장이 짜증을 냈다.

- 그러니까 이런 공사는 전문 건설업체에 맡기자니까! 왜 나한테 이것까지 맡기는 거야?

"왜 저한테 뭐라고 하세요? 제가 결정했나요? 사장님이 결정했죠."

- 어쨌든 그 사람 오늘 당장 데려와. 빨리 현장에 투입해야 돼.

26. 조사 II

재구파 사건 담당 형사팀과 형사과장이 회의실에 모였다. 다른 팀에서 지원 나온 두 명도 같이 있었다.

형사가 재구파 조직원들의 사진이 붙어 있는 화이트보드 앞에서 보고했다.

"박재구는 재구파 넘버 투인 김덕수의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김덕수는 박재구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형사과장이 물었다.

"그날 거기 쳐들어간 놈도 있잖아."

"칼에는 김덕수의 지문만 나왔습니다."

"범인이 장갑을 꼈을 수도 있지."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형사가 회의실 대형 모니터에 국과수 분석 보고서를 띄웠다.

"박재구의 오른손에는 총기 발사 흔적이 확실히 남아있습니다. 발사된 총탄은 딱 한 발입니다. 김덕수도 박재구과 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김덕수가 박재구를 찌를 이유가 충분히 있다?"

"그렇습니다."

과장이 손뼉을 짝 소리가 나게 쳤다.

"오케이. 다음 항목으로 가자."

재구파 사건은 그것 말고도 확인할 게 많았다.

"과거에 재구파의 폭행으로 사망한 피해자들은?"

"현재까지는 두 명입니다. 다른 장소에서 비슷한 사건을 더 저질렀는지 조사 중입니다."

다른 형사도 보고했다.

"박재구가 회사를 인수해서 양지로 올라가려고 했답니다."

"돈만 많으면 조폭 새끼도 멀쩡한 기업가로 변신하는 세상이구나. 그래서 어느 회사를 노렸어?"

형사가 서류를 내밀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회사 정보였다.

"사덕리소스입니다. 그 회사는 최근에 주가가 폭락했다가 반등했는데, 그 시기에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박재구가 주식을 잘해?"

"아닙니다. 이종수라고, 재구파의 자금을 관리하던 놈이 있습니다. 그놈이 자금을 횡령해 사들인 주식이 많습니다. 거기에 박재구가 작전 전문가를 동원해 매집하고, 사채 시장을 통해서도 긁어모았습니다."

"이종수 지금 어디 있어?"

"현장에서 탈출한 생존자 두 사람 중에 사라진 한 명이 이종수입니다."

"아…. 그놈을 잡았어야 했는데."

형사과장이 인상을 쓰다가 물었다.

"그럼 박재구가 그 회사 인수에 성공한 거야?"

"아니요. 지분이 한참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주식을 많이 보유한 개인에게 사람을 보내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과장이 서류를 확인했다.

"그 일을 맡은 놈이… 조천상?"

"예. 재구파 넘버 쓰리 조천상이 바로 그날 부하들을 데리고 그 사람을 찾아갔다더군요."

"운 좋은 놈. 그때 같이 있었으면 박재구나 김덕수처럼 됐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조천상은 아직 못 찾았어?"

"예. 잠수를 타서 쉽지 않습니다."

과장이 재구파 수사 서류를 뒤적이며 물었다.

"조천상이 그날 누구한테 간 거야?"

"박재구가 죽어버리고 김덕수는 상태가 나빠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짐작 가는 사람은 있습니다."

형사가 주식 보유 명단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사덕리소스 주식이 제일 많은 사람은 서준석 사장입니다."

"사장한테서 넘겨받을 수 있으면 주식을 매집할 필요가 없었겠지. 그다음은?"

"박재구도 제외하면."

형사가 그 명단에서 이름을 하나 짚었다.

"이름은 차우진. 개인인데, 10퍼센트나 보유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부자야?"

"그게 아니라, 주가가 100원까지 떨어졌을 때 2억을 몰빵 했답니다."

과장은 당황했다.

"응? 내부 정보를 이용한 건가?"

"아닙니다. 사덕리소스에서 금광을 발견하기 며칠 전부터 매집했습니다. 금광이 발견된 후에는 한 주도 안 샀습니다. 동전주에 몰빵 도박을 했다가 성공한 거죠."

과장이 감탄했다.

"운 진짜 좋네. 부럽다."

팀장이 옆에서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 자료 보고 뭐 이런 강심장이 있나 싶었습니다."

과장이 명단을 보며 말했다.

"이 사람 좀 알아봐. 하필 박재구가 죽은 날 조천상이 찾아갔잖아."

"용의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야 모르지. 그러니까 알아보라고."

***

다른 경찰서의 형사과 2팀장 박정훈이 차유리를 회의실로 따로 불렀다.

차유리가 물었다.

"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어…. 이게 일이 참…."

"저번에 팬 놈 때문인가? 그놈이 저를 칼로 찌르려고 했다니까요?"

"종이 자르는 칼인 데다가, 그놈은 팔이 부러졌….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고."

"그럼 예전에 다리 부러뜨린 그놈…."

"야. 나 말 좀 하자."

"넵."

박정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차 형사. 재구파 사건 담당 수사팀에서 협조 요청이 들어왔다. 우리 지역에 사는 사람을 재구파 놈들이 찾아갔다더라."

"돌아가신 분 말고요?"

"어. 이번에는 살아있어."

"좋은 일로 간 건 아니죠?"

"아니지."

"혹시 사건 당일에요?"

"그렇지. 척하면 척이구나."

차유리도 재구파 사건의 개요는 알고 있다.

"아. 그럼 그 사람이 재구파를 도로 찾아갔을 가능성이 있네요? 혹시 그날 재구파를 습격한 의문의 킬러가 그 사람인가?"

박정훈은 당황했다.

"어….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네?"

"일단 재구파가 노린 건 그 사람이 보유한 회사 주식이야. 주식이 많아. 그걸 빼앗아서 회사 경영권을 장악하려고 했지."

"타깃이 부자구나. 그걸 빼앗으러 오니까, 오히려 쳐들어가서 반격한 건가?"

"답답하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니까?"

"왜요?"

"그 사람 집 주소가 너무 익숙해서 다시 보니까…."

박정훈이 차유리를 보며 말했다.

"너희 집이더라."

차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너희 집이라고."

"그러니까 제가 주식 부자라고요? 저 돈 없는데요? 물론 제가 잘 치긴 하지만, 그렇다고 재구파를 혼자 쳐들어갈 정도는 아니고요."

팀장이 서류를 회의실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 사람, 너랑 성이 같더라."

차유리가 서류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응? 차우진? 우리 집 뚱땡이, 아니, 제 동생인데요?"

박정훈이 살짝 긴장하며 물었다.

"네 동생, 혹시 특수부대 출신이니?"

"취사병 출신인데요?"

"혹시 취사병으로 위장한, 정보 조회가 안 되는 특수부대…."

"걔 군대 있을 때 면회도 갔는데요? 취사병 맞아요."

"그럼 격투기나 무술 고수야? 막 날아다닐 정도로?"

"배가 이만큼 나왔는데 어떻게 날겠어요? 운동 싫어해요."

"그럼 지금 하는 일이 혹시 지하세계의 은밀한…."

"전기 기술자예요. 밝은 지상에서 일해요."

박정훈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프로파일하고 맞는 게 왜 하나도 없냐?"

이번에는 차유리가 물었다.

"팀장님. 혹시 제 동생을 박재구의 사무실에 그날 쳐들어간 킬러로 의심하시는 거예요? 서운해요."

"차 형사. 네가 먼저 네 동생을 킬러라고 의심했잖아."

"걔 이야기인 줄 몰랐으니까 그랬죠."

팀장이 조금 편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럼 네 동생한테는 네가 물어봐."

"네가 킬러냐? 그렇게요?"

"그게 아니라 뭐 아는 거 있나 물어보라고. 어쨌든 네 동생 주식을 그날 재구파에서 노렸을 확률이 꽤 높으니까."

차유리가 서류를 뒤적였다.

"아니, 그 백수가 주식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다고 노리…."

주식 수량이 적혀 있었다.

차유리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나중에는 눈에 힘을 주고 숫자를 확인했다.

"200만 주요? 이거 주당 가격이…."

"100원일 때 샀다던데 지금은 1,000원쯤 하지?"

"그럼 2억? 와. 이 새끼. 어쩐지 요즘 놀고먹더라니. 돈 벌었는데도 나한테 비밀로 했구나."

"0이 하나 빠졌다. 20억이야."

"네?"

"네 동생이 그 회사 전체 주식의 10퍼센트를 가지고 있다더라."

차유리가 입을 떡 벌렸다.

"어버버…."

"숨 쉬어."

"하악. 하악. 우리 뚱땡이가 로또를 맞았어!"

차유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 돈에 관해 물어보면 되죠?"

"응? 아니. 돈이 아니라 재구파 간부 조천상을 만난 적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그 주식은 정상적인 투자로 취득한 거야. 그건 이미 담당 수사팀에서 확인했다더라."

***

차우진이 집에서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확인했다. 딥어스테크 공사 현장에 빨리 와달라는 문자였다.

"처리가 빠르네. 역시 연구소 현장에 문제가 많나 보다."

아파트 현관이 벌컥 열리며 차유리가 들어왔다.

차우진이 물었다.

"이번엔 퇴근 맞아?"

"너 이 새끼."

"왜 오자마자 욕을 박는데?"

차유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돈 많이 벌었더라?"

"응?"

"사덕리소스 주식 200만 주."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경찰이 선량한 민간인 뒷조사 하나?"

"정상적인 수사 과정에서 나온 정보야. 그런데 진짜구나?"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그럼 쏴야지?"

"거 몇 푼이나 된다고 쏘라는 거야?"

"20억이 몇 푼이냐?"

지구 멸망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차우진이 물었다.

"치킨?"

"산악 주행이 가능하게 개조된 SUV."

"꺼지셈."

"야! 내가 수사할 때 필요하다고!"

"어디서 또 약을 팔아? 누나는 서울에서 일하잖아. 그 차로 남산이라도 올라갈 거야?"

차유리가 가격을 좀 낮춰서 다시 제안했다.

"그럼 레이저 방식 도청장치?"

"공무원이 도청? 돌았구나?"

차유리가 가격을 더 낮추었다.

"방검복 풀세트?"

"음…. 그건 콜. 병원비보다는 싸게 먹히겠지."

차유리가 신나서 스마트폰에 사진을 띄웠다.

"이거 미국 애들이 만든 건데, 옷 속에 입어도 표가 안 나. 미국 정치인들도 입는 거…."

"얼마?"

"산악 주행이 가능하게 개조된 SUV보다는 조금 싸."

"꺼져."

차유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야! 너는 내가 어디 가서 칼 맞고 다니면 좋겠냐?"

"어디 가서 패고 다니던 사람이 그런 소리 하니까 어색하네?"

"내가 칼 맞으면 엄마 아빠한테 전화해서 다 이를 거다!"

차우진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국산 방검복 사줄 테니까 그거 입어라."

꿈속 미래 세계는 멸망 초기까지는 산업이 살아있었다. 그 시기까지 개발된 무기나 방어 장비는 다양했다.

차우진은 그런 장비들을 다양하게 구해서 알차게 썼다. 약탈자를 잡아서 획득하기도 하고,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에서 찾아내기도 했다.

그렇게 써본 장비 중에 국산이면서 방검 성능이 좋은 게 있었다.

차우진이 멸망한 시대의 일을 회상했다.

***

차우진이 물었다.

"창수 형. 안 죽었지?"

박창수의 가슴에는 칼자국이 날카롭게 나 있었다.

"안 죽었어. 방검복은 망가졌지만."

차우진이 손상 부위를 확인했다.

"이거 관통력 강화가 적용된 칼자국이야. 방검복이 용케 버텼네."

박창수가 방검복을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야. 내가 그래서 방검복은 유진쉴드 제품이 좋다고 했잖아. 게다가 이건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 만들어진 명품이라고. 다시는 이런 명품 안 나온다."

"그 회사에서 더 예전에 나온 건 안 좋나?"

"예전 것도 꽤 좋지. 클래식 모델 중에 얇아서 옷 속에 입어도 표가 안 나는 게 있어. 그렇게 얇은데도 일반 단검 정도는 충분히 막아."

"잘 팔렸겠네?"

"아니. 안 팔렸어. 많이 비싸거든."

이번에는 박창수가 물었다.

"나 찌른 새끼는 잡았냐?"

"튀었어. 난 형이 죽었나 확인하러 와야 해서 쫓아가진 못했어."

"추적 가능하지?"

"지금부터 쫓아가면 찾아낼 확률이 대충 50퍼센트 정도?"

박창수가 권총의 탄창을 확인했다.

"그럼 잡으러 가자. 새끼가 감히 기습을 해? 잡으면 뒈졌어."

"근데 복면 벗겨졌을 때 보니까 여자더라?"

"예쁘냐?"

"어. 상당히."

"쫓아가서 무슨 사연인지부터 들어봐야겠다. 나를 나쁜 놈으로 착각하고 실수했나 봐. 이런 세상인데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칼에 관통력 강화 스킬까지 걸고 찌르는 게 실수냐? 잘도 그런 소리가…. 잠깐."

"왜?"

차우진이 숲을 가리키며 작게 말했다.

"이쪽으로 접근하는 놈들이 있어. 약탈자일 수 있겠는데?"

"거봐. 그 아가씨가 나를 저놈들로 오해한 거라니까."

"아가씨라고 부르기엔 나이가 좀 있던데?"

"어느 정도?"

"나 정도?"

"잡으면 뒈졌어."

"이 형이 드디어 돌았구나."

***

차우진이 생각했다.

'걔도 지금은 알아서 잘 지내고 있겠지.'

다른 것도 생각났다. 그는 재구파를 습격할 때 복대를 써서 배를 가렸다.

'창수 형이 말한 그 방검복이 복대보다 낫겠는데?'

그가 차유리에게 말했다.

"유진쉴드라고 국내 중소기업이 있어. 거기 방검복이 꽤 좋아. 그거 사줄게."

"야! 돈 많이 벌었던데! 난 수입 명품 방검복을 원한다!"

"시끄럽고, 내가 주식으로 돈 벌었다는 걸 왜 경찰에서 알게 된 거야?"

차유리가 멈칫했다.

"아차! 원래는 그거 물어보러 집에 온 거였지!"

"바보냐?"

"내가 방검복이랑 명품 가방에 눈이 멀어서 다른 소리만 했네."

"잠깐. 거기에 가방이 왜 추가되는데?"

차유리가 종이 한 장을 꺼내 소파에 누워 있는 차우진의 배에 던졌다.

"네 주식을 재구파에서 노렸대. 경찰에서 재구파를 조사하다가 알아냈지."

"아. 그래서 누나도 알게 됐구나."

"너 혹시 재구파 놈들한테 무슨 일 안 당했는지 물어보러 왔다. 그런데…."

차유리가 소파에 누워 배를 긁는 차우진을 보았다. 그 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아무 일도 없었나 보다. 다행히 그놈들을 못 만났구나."

"만났는데?"

27. 연구소 건설 현장

차유리의 표정이 굳었다.

"어? 재구파 놈들이 너를 찾아왔었다고?"

차우진이 대답했다.

"저번에 왔더라고."

경찰은 장님이 아니다. 재구파 긴부 조천상이 이 동네까지 찾아왔던 건 언젠가는 밝혀진다. 지금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면 나중에 탈이 크게 난다.

그러니 그건 인정하는 게 낫다.

차유리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너…. 뭐 아는 거 있어?"

"처음에는 혼자 우리 동네까지 찾아와서 주식 싸게 내놓으라고 협박하더라. 그래서 꺼지라고 했지. 그랬더니 부하 몇 놈 데려와서 또 협박하더라."

차유리의 목소리가 커졌다.

"야! 넌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아니, 뭐, 잘 해결됐으니까."

차유리가 인상을 썼다.

"잘 해결돼? 어떻게? 그놈들이 그냥 물러갈 놈들이 아닌데?"

"안 가더라고. 그래서 좀 싸웠지."

"네가? 어디 다친 데는? 너 혹시 멍들 거나 찔린 거 옷으로 가리고 있니?"

"무슨 소리야? 내가 이겼는데?"

차유리는 당황했다.

"응?"

"내가 이겼다고."

"찾아온 게 재구파 넘버 쓰리에 조직원 셋이었을 텐데?"

차우진이 손가락을 꼽았다.

"하나, 둘, 셋, 넷. 맞아. 넷이 왔더라."

"그런데 네가 어떻게 이겨?"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 나를 모른다. 내가 싸움 좀 해."

차유리가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차우진이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지는 모른다. 남매는 서로의 바깥 생활은 관심 없다.

"너 언제 운동했냐?"

"전에는 몰랐는데 내가 격투기에 재능이 있더라."

그녀는 그럴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나를 닮았으면 나만큼은 아니라도 재능은 있을 텐데…."

차우진은 싸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멸망한 세상에서 자신의 전투 재능을 깨달았다.

"내가 그거 되게 잘해."

차유리는 심각해졌다.

그녀는 동생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결백하다는 증거를 찾고 싶었다.

그녀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 후에는?"

"당연히 집에 왔지. 수연이랑 저녁 먹고 집에 오던 길에 그놈들을 만났거든."

그녀가 이 집의 현재 위치를 생각했다. 여기는 아파트다. 그것도 꽤 고층이다. 1층 출입구와 엘리베이터에는 CCTV가 있다.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제안했다.

"야. 나 이거 그대로 보고하면, 우리 직원들이 아파트 CCTV 조사해서 네 알리바이 확인할 거야. 그렇게 됐을 때 문제가 되는 게 있으면 지금 말해."

차우진이 실실 웃었다.

"말하면 뭔가 해주나?"

차유리가 화를 벌컥 냈다.

"이 새끼가 장난하나. 걸리는 거 있으면 내가 알아야 미리 어떻게 해볼 거 아냐!"

"됐으니까 그냥 확인하라고 해. 난 그날 집에 와서 소파에 누워 TV 보다가 잠들었어."

차유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알았어."

"근데 누나가 나한테 욕했으니까 방검복은 안 사줘야겠…."

"이 새끼가 장난하나."

"와. 같은 욕을 두 번이나 한다. 빡쳤나 보다."

"빨리 내 방검복이랑 가방 사놔라."

"거기에 가방이 왜 슬쩍 추가되냐고."

***

차유리는 차우진에게 몇 번이나 더 물어서 확인받은 후에 경찰서로 돌아왔다.

그녀가 박정훈 팀장에게 보고했다.

"제 동생은 아니래요. 동네에서 그놈들하고 마주친 건 맞는데, 집에 와서 잤대요."

박정훈이 의심했다.

"그놈들이 그냥 갔다고?"

"안 가서 싸웠는데 이겼다는데요?"

"응? 차 형사 동생은 싸움 못 한다며?"

"그거야 상대적인 거 아니겠어요? 걔가 나 닮아서 좀 치더라고요. 그리고 재구파 놈들도 시끄러워지면 목격자가 나오니까 대충 시비나 붙었다가 일단 물러났겠죠."

박정훈이 물었다.

"차 형사. 난 네 말을 믿지. 그런데 우리가 형사인데 네 동생 알리바이를 확인은 해봐야 하잖아? 그 아파트 CCTV를 봐도 되겠냐?"

차유리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하셔야죠. 제가 일부러 아파트 관리실에는 말 한마디 안 하고 그냥 왔어요. 다른 직원들이 가서 확인할 때 문제 안 생기게요."

차유리는 형사과 2팀 소속이다.

CCTV는 1팀에서 차유리의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찾아가 확인했다.

1팀장이 돌아온 후에 두 사람에게 말했다.

"차 형사네 아파트 CCTV 확인해봤는데."

박정훈이 물었다.

"어떤데?"

"깨끗해. 그 시간에 차 형사 동생이 집에 들어가는 것만 찍히고, 나오는 건 안 찍혔어."

"다른 길은 없어?"

"엘리베이터, 1층 현관, 거기다 아파트 정문, 후문, 공용공간 CCTV까지 다 확인했다. 그거 다 피해서 빠져나갔다가 들어갔다 하면 사람이 아니라 루팡이지."

박정훈이 활짝 웃으며 차유리를 돌아보았다.

"하하하. 차 형사. 난 믿고 있었…. 차 형사?"

차유리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휴우."

"뭐야. 넌 안 믿었냐?"

차유리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믿었죠. 제 동생이 똘마니 몇 놈이라면 모를까, 재구파를 쓸어버리고 불까지 지를 고수일 리 없으니까요."

"그런데 왜 그렇게 안심한 표정이야?"

"방검복이랑 가방 받을 수 있게 돼서요."

"응?"

"그런 게 있어요."

1팀장이 말했다.

"차 형사 동생이 재구파 놈들과 충돌했다는 곳도 가봤어. 거기는 CCTV가 없더라."

"그놈들이 일부러 그런 장소를 골라서 협박했겠지."

"그런데 말이야."

1팀장이 스마트폰에 담아온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 근처 다른 CCTV에 재구파 조천상이 부하들과 차를 타고 그 지역을 떠나는 장면이 찍혔어."

"역시 조천상이 거길 찾아갔구나."

"그런데…."

"왜?"

"조천상 패거리가 많이 다친 것 같더라고. 차 유리도 좀 깨져 있고. 여기 봐봐."

"아. 그거야 차 형사 동생하고 싸우다가…. 응? 차 형사 동생은 혼자 싸웠을 텐데 왜 걔들이 많이 다쳐?"

차유리가 얼른 둘러댔다.

"우진이가 나 닮아서 좀 쳐요."

"특수부대가 아니라 취사병 출신이라며?"

"취사병은 뭐 운동 못 하나요?"

"아까랑 말이 다른데?"

"상황을 전달하는데 약간의 오해가 있었달까?"

박정훈도 이 문제를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팀원의 동생 일인 데다가 맞은 놈들은 조폭이다.

게다가 차우진의 알리바이는 확실해 보였다.

박정훈이 물었다.

"상대가 넷인데 동생이 정말 잘 치나 보다. 혹시 차 형사 동생은 형사 특채 생각 없대?"

"걔 전기 전문가예요. 그것도 놀고 싶으면 놀고 일하고 싶으면 오라는 데 많은 고수라고요. 형사 월급 받으면서 이 고생을 왜 해요?"

"하긴. 월급도 그렇고 주식도 그렇고."

이 경찰서에서 차우진의 주식 보유량을 아는 사람은 박정훈과 차유리뿐이다.

차유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쵸."

***

차우진은 재구파를 습격한 날 아파트를 벗어날 때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단거리 스킬로 앞 동 아파트 옥상으로 이동했다. 아파트 동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아 가능했다.

그렇게 몇 번 다른 아파트 옥상으로 징검다리 넘듯이 공간을 이동한 후에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후에는 한동안 CCTV가 없는 지상으로만 이동했다.

그러느라 시간이 꽤 걸리긴 했지만, 집 근처의 CCTV를 모두 피하려면 그렇게 해야 했다.

"내가 혹시 실수로 찍힌 게 있진 않나 했는데."

그때는 마스크를 쓰고 모자도 쓰고 배에 복대까지 했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카메라에 찍혔어도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이었다.

그런데 경찰에서 그날 어떤 CCTV에도 찍히지 않았다고 확인해주었다.

"누나가 도움될 때가 다 있네. 앞으로 집에서 빠져나갈 때는 이 코스로 이동해야겠다."

차우진이 출근 준비를 했다. 내일부터는 연구소 건설 현장에 나가야 한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나한테 협박하러 왔던 재구파 넘버 쓰리는 어디로 튀었으려나."

***

조천상은 그날 차우진에게 얻어맞고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차를 타고 도망치듯이 떠났다.

가져간 대포폰은 차우진이 다 부숴버려서 연락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넷 다 다친 곳이 많았다.

조천상과 부하들은 일단 병원에 들러 응급처치를 받았다. 그렇게 붕대를 감고 여기저기 고정대를 댄 패잔병 모습으로 재구파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재구파는 이미 박살이 난 상태였다. 소방차와 경찰차도 모여 있었다.

조천상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부하들과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뉴스를 보고 재구파가 습격당해 두목인 박재구가 죽고 넘버 투 김덕수도 총에 맞았다는 걸 알게 됐다.

조천상이 모텔방에서 부하들에게 말했다.

"분명히 다른 조직에서 친 거야."

의심 가는 조직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경쟁 사채업자이고, 다른 하나는 조폭 조직이다.

"상구파 새끼들이 돈 안 갚으려고 쳤을지도 몰라. 아니면 돈을 노리고 쳤든지. 거기 자금난이라던데 이런 식으로 빚을 털어버리나?"

상대가 누구든 박재구를 제거하고 김덕수도 반쯤 죽였다. 그는 상대가 조직의 넘버 쓰리인 자신도 죽이려 들 거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경찰도 조천상을 찾고 있다. 조천상은 재구파가 저지른 짓을 많이 안다. 직접 저지른 것도 있다.

그래서 조천상은 튀었다.

"마침 일 때문에 나와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지. 휴우. 나까지 죽을뻔했네."

같이 도망친 부하가 물었다.

"혹시 우리를 두들겨 팬 그 새끼가 킬러 아닐까요? 그 새끼 실력이 장난 아니던데요."

"그놈이 우리 사무실 위치를 어떻게 알고?"

차우진은 그들이 타고 온 차의 내비게이션 주행 기록을 보고 사무실 위치를 알아냈다.

"그놈은 우리가 누군지도 몰라. 내가 주식 넘기라고 했지 내가 누군지는 말 안 했거든."

"아! 저도 말 안 했습니다."

"그리고 말이야. 그놈이 범인이면 우린 더 신경 쓸 거 없어. 우리를 패고 나서 사무실로 쳐들어간 거면 경찰이 쉽게 찾아낼 거야. 그럼 이미 체포했겠지."

***

이튿날 아침에 차우진이 딥어스테크 연구소 건설 현장에 도착했다.

전기공사책임자가 물었다.

"하이스카이 사태 때 전기 응급복구에 투입됐다고요?"

"예. 뭐. 그때 단가가 좋아서요."

"그때 거기는 진짜배기 전기쟁이들만 불렀다고 들었는데, 실력 좋나 보네."

"좀 만집니다."

"하하. 좋네요. 우리도 마침 그런 실력자가 더 필요했는데."

차우진은 곧바로 전기 공사에 투입됐다. 이미 일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차우진이 현장을 보며 말했다.

"와. 이 배선을 다 잘라났네. 빌런인가?"

같이 일하는 전기 기사가 설명했다.

"초짜가 확인도 안 하고 여길 통째로 잘랐더라고요. 이거 언제 다 복구하나."

"이런 자리에는 보통은 경력자 쓸 텐데요?"

"이 회사가 공사에 돈을 너무 아끼더라고요. 인건비는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계속 사고가 났구나."

"소문 들으셨나 보네."

"들었죠."

미래에 발표된 기사에서 이 공사 현장에 문제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보았다.

차우진이 옆을 보았다. 그쪽에는 불이 켜진 건물이 있었다.

"저기는 이미 가동 중인가 보네요?"

전기 기사가 불평했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공사 끝나기도 전부터 저러는지. 저쪽 건물부터 만들긴 했는데, 저기도 추가로 작업할 게 많아요."

차우진은 잘린 배선의 복구 작업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휴식 시간에 밖으로 나와 가동 중인 연구동을 보았다.

차우진이 원하는 탐지기는 현재 개발이 중단된 상태다.

"저 건물에서 그 사고가 나겠네."

조만간 이 회사의 연구소에서 사고가 발생한다. 그 사건 때문에 탐지기 개발 프로젝트는 완전히 끝장난다.

그 탐지기는 아주 나중에 다른 회사에서 다시 개발된다.

"그러면 너무 늦지. 여기서 해결해야 해."

28. 대주주

이선정 박사의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는 그것만으로도 멸망급 재난 하나를 막을 수 있다.

차우진이 찾는 탐지기는 그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다. 그건 두 번째 재난을 막기 위한 시작 아이템이다.

시작 아이템이라는 건, 그게 없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저 연구소 건물 사고는 이선정 박사 사건이 일어나고 그다음 달에 터지니까…."

이선정이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할 뻔한 사건은 이번 달에 일어났다. 그러면 연구소 사고가 터지는 날은 다음 달이다.

이번 달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당분간 여기로 출근해야겠다."

***

차우진은 전기 공사 기술자로 딥어스테크의 연구소 건설에 참여했다.

현장의 문제를 파악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공사 현장은 자재가 왜 다 이따위일까요?"

전기 자재만 문제가 아니다. 다른 자재들도 상태가 나빴다.

근처에서 점심을 먹던 목공 기술자가 대답했다.

"다 빼먹은 거지 뭐."

"누가요?"

"현장이 이 지경인 걸 사장이 몰랐다면 무능한 거고, 알면서 한다면 사장이 돈에 눈이 먼 거지."

차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이러니까 나중에 연구소가 터지지."

목공 기술자는 그 말을 자기 나름대로 알아들었다.

"하긴. 다른 것도 이런 자재로 만들면 나중에 불이 나든 장비가 터지든 할 거야."

기술자가 주변을 슬쩍 본 후에 말했다.

"그래서 여기 관두고 다른 곳으로 빠져나간 사람이 많아. 나중에 탈 나면 우리한테 책임지라는 소리 나올까 봐."

"나라도 그러겠네요."

"차 기사는 기술 좋잖아. 얼른 여기를 탈출해."

"아저씨는 왜 계속 여기서 일하는데요?"

"돈 벌려고. 나도 다른 자리 나면 빠질 건데, 자리가 잘 안 나네. 요즘 건설 경기 망했잖아."

그가 계속 이곳에서 일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재 썼다고 다 터지면 전국에 터지는 건물이 어디 한두 개겠어? 진짜 운 나쁜 건물이 터지는데, 당첨되는 게 나만 아니면 되잖아."

"안 터질 거라고 보신다?"

목공 기술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터진 곳은 벼락 맞는 거지만, 그 벼락이 설마 여기 떨어지려고."

"떨어져요. 그 벼락."

그 사고는 여기가 아니라 이미 가동 중인 연구동에서 터진다.

점심을 다 먹은 기술자가 낮잠이라도 잠깐 자러 갔다.

차우진은 그 시간에 주변을 돌아다니며 현장을 점검했다.

"심각하다. 개살구는 빛깔이라도 좋지, 이건 진짜 어쩌자는 거냐."

그러다 덩치 두 명이 수군거리는 걸 발견했다.

그들은 차우진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 장소를 조금 이동했다.

"어라?"

차우진이 그들이 수상했다.

"양아치가 마음 고쳐먹고 공사 현장에 올 수는 있는데."

저 둘이 일은 제대로 안 하고 건들거리는 건 이미 여러 번 보았다. 정체가 양아치라는 건 전투 센스가 없어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차우진이 나타나자 먼저 자리를 피했다.

"쟤들이 알아서 비켜줄 성격은 아니니까, 나를 피해야 하는 이유가 있겠네?"

차우진이 벽 뒤로 걸어갔다가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위치가 순식간에 건너편 벽 뒤로 바뀌었다.

그 벽 너머에서 덩치 두 명이 대화하고 있었다.

아직 문을 달지 않은 상태라 벽 너머의 목소리가 충분히 들렸다.

"형님. 자재를 너무 빼먹은 거 아닐까요? 지금 시멘트가 부족하다고 난리인데."

"우리가 그 걱정을 왜 해? 일하는 척하면서 수당 빼먹고, 물건 빼돌릴 때마다 바람이나 잘 잡으면 되는데."

"그러다 들키면 우리만 독박 쓰는 거 아닐까요?"

"안 들켜. 시멘트가 없으면 다른 걸 더 섞고 물을 더 타면 돼. 아무도 몰라."

덩치가 장담했다.

"형님하고 이 회사 사장하고 이야기 다 끝났어. 그거 검사할 회사도 말 통하는 곳으로 골라서 사장이 약 다 쳐 놨다더라."

덩치가 벽을 툭툭 쳤다.

"그러니까 건물이 무너지지만 않으면 아무도 몰라."

두 놈이 그곳을 떠났다. 차우진이 벽 뒤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쥐새끼들이 기둥을 갉아먹고 있었네."

쥐가 생겼으면 잡아야 한다.

"이 연구소가 안 망하게 하려면 저것들부터 정리해야겠다."

그런다고 끝이 아니다. 덩치들은 딥어스테크의 사장도 언급했다.

"사장놈이 돈을 빼먹으려고 연구소를 직접 짓는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모래성은 좀 아니잖아?"

덩치가 말한 것처럼 싸구려 자재로 지은 건물이 모두 무너지는 건 아니다. 당첨된 건물만 무너지거나 터진다.

그런데 이 연구소는 당첨된다. 그게 중요했다.

차우진이 현재 가동 중인 연구동 건물을 보았다.

"그럼 다음 달에 나는 사고를 막는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나중에 다른 곳이 또 터진다.

"이러니까 회사가 망했지."

꿈속 미래에서 본 딥어스테크는 망했다.

문제는 또 있다.

"여기 사장놈이 연구개발비는 제대로 쓸 생각이 있나?"

차우진이 원하는 탐지기는 현재 개발이 중단된 상태다. 그러다 조만간 터지는 연구동 사고로 인해 프로젝트 자체가 사라진다.

차우진이 그 사고를 막는다 해도 예산이 투입되지 않으면 개발은 재개되지 않는다. 그러면 멸망급 재난이 터진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돌겠네. 진짜."

***

차우진이 그날 퇴근 후에 동네 편의점 앞에 앉았다. 캔맥주도 하나 샀다.

차우진이 편의점 오징어포를 씹으며 말했다.

"그 쥐새끼들은 내가 잡으면 되는데, 사장은 어쩐다…."

제일 간단한 방법은 사장이 교체되는 것이다.

"내가 사장만 잘라낸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야. 사장 혼자 해먹은 건 아닐 테니까."

멸망한 세계의 약탈자 조직들은 보통 끼리끼리 모인다.

사장이 바뀌어도 지금 경영진이 그대로면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새로 오는 사장이 그 탐지기 개발을 완전히 끝장낼 수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하나뿐이다.

"딥어스테크를 내가 장악해서, 탐지기 개발을 시키는 수밖에 없어."

그런데 딥어스테크는 중견기업이다. 차우진이 가진 주식을 다 팔아도 딥어스테크를 살 수는 없다.

차우진이 캔맥주를 마셨다.

"창수 형. 이번 일은 왜 이리 복잡하냐. 이선정 박사 때는 해결법이 단순했는데."

그때는 연쇄살인마만 찾아서 제거하면 해결됐다. 그런데 이번엔 회사 자체가 문제다.

"이러다 세상이 망하면 우린 또 무너진 편의점에서 참치캔이나 찾으러 다녀야 하나?"

오징어를 씹고 맥주를 마시는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스팸 표시는 뜨지 않았다.

차우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차분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 차우진 선생님이십니까?

"제가 선생님은 아니지만 맞습니다."

- 나 서준석입니다.

"네. 그러시군요. 그래서 누구신지?"

상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 어? 어…. 사덕리소스 사장 서준석입니다.

"아아. 사장님이시구나."

- 모르셨습니까?

차우진이 사덕리소스가 망하기 직전에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인 건, 그 회사가 10년 후인 멸망 초기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서다.

어차피 그 정보를 믿고 주식을 샀기 때문에, 기업 실적이나 내부 상황 등은 조사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장의 이름조차 몰랐다.

"네. 뭐."

- 우리 회사 주식을 많이 사셨던데….

"주식 차트만 보고 샀습니다만?"

- 네?

"내가 차트를 잘 봅니다."

사덕리소스는 차트를 보고 산 게 아니다. 미래 정보를 알고 있어서 샀다.

- 아니, 우리 회사의 그때 상황은 차트로 알 수 있는 게 아니….

"그래서 전화하신 이유가?"

전화기 너머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잠깐 뵐 수 있겠습니까?

차우진은 내일도 딥어스테크에 출근해야 한다. 거기서 연구소 사고 원인부터 찾아야 한다.

"내일은 바쁩니다만."

- 지금 뵙고 싶습니다. 급한 일입니다. 혹시 댁에 계시면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음…. 그러시면 집 말고 여기로 오시죠."

***

서준석이 차우진을 만나러 가면서 말했다.

"가까운 곳이니까 금방 도착하겠어. 그런데…."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이름조차 모르면서 우리 회사 주식을 200만 주나 산다는 게 말이 되나?"

유도진 팀장은 회사가 망하기 직전에도 서준석과 같이 현장에서 일했다. 그는 지금 비서실장까지 겸업하는 중이다.

지금은 중요한 투자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그래서 유도진이 차를 운전했다.

유도진이 말했다.

"그때는 주가가 100원밖에 안 했으니까, 2억이면 살 수 있었습니다."

"차트를 보고 우리 주식을 샀다는데?"

"말도 안 됩니다. 금광이 발견된다는 건 현장에 있던 우리도 모르던 일입니다."

"어쨌든 내 이름도 모른다는 건 회사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니까."

서준석이 기대했다.

"값만 잘 쳐주면 그 사람이 가진 주식을 모두 넘겨받을 수 있겠지?"

***

차우진은 캔맥주는 치워버렸다.

술은 전투가 없을 때만 마셔야 한다. 그게 생존의 기본이다.

그는 대신에 컵라면과 볶음 김치, 냉동만두, 비엔나소시지를 먹었다.

"크으. 이 푸짐한 조합. 진짜 좋다."

서준석 사장은 이 편의점 앞으로 오라는 말만 들었다. 그가 그곳에 도착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주주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편의점 앞에는 허름한 옷을 입고 컵라면을 먹는 차우진만 있었다.

서준석이 전화를 걸었다. 컵라면을 먹던 차우진이 받았다.

"여보세요."

서준석은 당황했다.

"차우진 씨?"

"아. 서 사장님이시구나. 앉으시죠."

"예?"

"뭐 드시겠습니까? 제가 살 테니까."

서준석이 편의점을 돌아보았다.

"여기서요?"

"물론이죠."

멸망한 미래에 편의점 음식은 없어서 못 먹는 진미다.

차우진이 파괴된 지역에서 무너진 편의점을 찾았을 때를 생각했다.

***

"창수 형. 여기 참치캔이 있어!"

"대박! 다른 건? 국수 같은 건?"

"국수는 안 보여. 누가 거의 다 털어갔나 봐."

"생존자 그룹이 이미 예전에 이 지역을 파밍했겠지."

차우진이 잔해 사이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여기는 못 뒤졌나 본데?"

"왜? 뭐가 더 있어?"

차우진이 손을 빼냈다.

"설탕 한 봉지?"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설탕이라 봉투 크기는 작았다.

박창수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만세! 설탕이라니! 설탕이라니!"

설탕은 유통기한이 없다. 물에 녹여 먹으면 빠르게 칼로리를 보충할 수 있다.

그리고 달다.

"형은 뭐 찾았어?"

"크크크. 소금!"

염분 확보는 생존에 중요한 요소다.

차우진이 활짝 웃었다.

"한 건 했구나! 음식은 역시 소금을 쳐야 맛있지!"

"오늘은 고기에 소금 팍팍 칠까?"

"내가 오랜만에 짭짤한 쥐고기 요리 맛을 보여줄게."

***

차우진이 비엔나소시지를 보았다.

"그때 거기에 이것도 있었는데."

그때는 먹지 못했다.

통조림은 보존 기간이 무척 길다. 10년이 지난 후에 먹어도 문제가 없었다.

반면에 냉장 보관 음식은 너무 쉽게 썩었다. 무너진 편의점에서 썩어버린 소시지가 담긴 봉투를 발견하고 정말 안타까워했었다.

차우진이 서준석에게 말했다.

"싫으면 마시고. 이거 맛있는데."

"아닙니다. 저도 먹겠습니다."

지금 아쉬운 건 서준석이다. 그가 야외 테이블 의자에 앉아 나무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예전에는 광산 현장에서 라면과 참치캔, 그리고 이런 소시지를 참 많이 먹었습니다.

"요즘은 안 드시나 봅니다?"

"요즘 다시 많이 먹었습니다. 현장 뛰느라고요. 하, 하하."

회사가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을 때는 탐사 현장에 식당을 운영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는 이런 것을 먹으며 광산을 개발했다.

차우진이 라면을 먹으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차우진 선생님이 보유하신 주식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서준석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제안했다.

"지금 시세의 1.5배를 드릴 테니까, 다 넘겨주십시오."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사장님은 그 돈이 갑자기 어디서 나셨을까?"

29. 경영권

차우진이 스마트폰으로 사덕리소스 주가를 검색했다.

"오늘 주가가 주당 1,200원. 이제 상한가는 안 가네요."

서준석 사장이 얼른 말했다.

"그렇죠. 그만큼 올랐으면 많이 오른 겁니다."

"200만 주 24억에 50퍼센트를 더 얹어주시면 36억? 돈이 없어서 회사가 망해가던 거 아니었습니까?"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금광을 발견했으니까…."

"금광을 담보로 산 주식은 사장님 개인이 아니라 회사로 들어갈 텐데, 그게 목적이신가?"

"아. 거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회사가 아니라 제가 받아야 하니까 할부로…."

"아아."

차우진은 서준석이 어디서 돈을 만들겠다는 건지 알았다.

"서 사장님 몫의 미래 수익을 담보로 대출을 내주겠다는 곳이 있나 봅니다? 그 돈으로 주식부터 사겠다?"

서준석은 이야기가 잘 통한다고 생각하고 표정이 밝아졌다.

"맞습니다. 대출해주기로 한 곳이 있습니다."

"이야아. 서 사장님. 대단하시네."

"감사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성공…."

차우진은 칭찬한 게 아니다.

"회사가 망해가다가 금광이 산소호흡기가 돼서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됐는데, 그러자마자 하는 게 주식 매집입니까?"

서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 어, 그게…."

"실망인데요."

서준석이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회사가 지금은 살아났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금광에서 금이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고요."

막상 파 봤더니 채산성이 낮거나 금이 별로 없으면 회사는 빚만 더 많아진 상태로 다시 망할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파시는 게 이익입니다."

그런데 차우진은 그 금광에 대해 남들이 모르는 걸 안다.

'창수 형이 10년 후에도 망하지 않은 걸 직접 봤다고 했어. 금 매장량이 많으니까 그게 가능했겠지.'

차우진이 다시 피식 웃었다.

"나만 좋고 서 사장님은 손해 보는 제안을 하신다는 거네요? 믿을 말을 하셔야지요."

"그게 아니라, 나는 회사의 창업자로서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

차우진이 선언했다.

"난 이 주식을 최소한 10년은 보유할 겁니다."

"예? 단기 차익을 노리고 들어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장기 전망을 보고 들어왔습니다."

"아까 전화로는 차트를 보고 들어오셨다고…."

"주식 차트에 장기 전망이 보이더라고요."

서준석은 차우진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차우진이 거절했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서준석이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는 여기 오기 전만 해도 차우진이 단타 주식투자자라고 생각했다. 상승하던 주가가 주춤하는 이때 좋은 조건을 걸면 지분을 인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만나보니 어림도 없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그러니 다른 걸 말해보시죠."

"무슨…."

"이렇게 야밤에 달려오신 걸 보면, 뭔가 급한 일이 있겠죠. 그게 뭡니까?"

어차피 주식 인수는 실패했다. 그러니 다른 것이라도 기대봐야 한다.

서준석이 물었다.

"그…. 재구파라는 조직을 아십니까? 사채업을 전문으로 하는 조직입니다만."

당연히 안다. 차우진이 두목 박재구를 직접 제거했다.

"재구파 이야기는 뉴스에서 봤습니다. 거기 망했다던데요."

"예. 망했죠. 그런데 재구파에서 우리 회사의 주식을 매집하던 중이었습니다. 꽤 많이 모았습니다. 경영권이 위험해질 정도로."

차우진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재구파는 망했지만 주식은 어딘가에 남아있다?"

"예. 그렇죠."

서준석이 한숨을 쉬었다.

"재구파의 주식 매집을 대행한 작전 기술자가 있습니다. 재구파에서 사채를 썼다가 목줄을 잡힌 사람입니다."

그런데 박재구가 죽었다.

"그놈은 재구파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주식을 다 팔아치웠습니다. 주식시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금광을 노리는 세력에게 다이렉트로요."

"자기 것도 아닌 주식을 팔아요? 불법일 텐데요?"

"지금 당장은 합법으로 위장되어 있을 겁니다. 그게 불법이라는 걸 밝혀내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놈들은 그 전에 회사 경영권을 차지한 후에, 금광을 헐값에 팔아버릴 겁니다."

차우진이 인상을 썼다.

"확실한 겁니까?"

"이미 그쪽에서 경영권을 내놓으라고 대놓고 요구했습니다. 곧 임시 주총도 열 겁니다."

"재구파의 주식만으로는 회사 인수가 어려울 텐데?"

재구파의 주식만으로 경영권 인수가 가능하면 박재구가 차우진의 주식을 먹으려고 덤빌 필요가 없었다.

"그쪽에서도 따로 좀 모았나 봅니다. 거기에 재구파의 주식이 더해지면, 저보다 지분이 많습니다."

"회사 인수 후에 그 금광을 헐값에 파는 게 가능합니까?"

"아직 금광의 채산성이 얼마나 되는지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냥 금이 조금 나오다 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장량을 정확히 알아내기 전에 팔아치울 겁니다."

"금광에서 금이 많이 나오면 판 놈과 산 놈이 뒤에서 적당히 나눠 먹겠네요?"

"맞습니다. 다 짜고 치는 거지요."

지금 사덕리소스에서 금광이 없어지면 남는 건 빚만 쌓여 있는 껍데기뿐이다.

그러면 차우진이 가진 주식은 휴지가 된다.

차우진은 사덕리소스가 필요해서 주식을 산 게 아니다. 활동 예산이 필요해서 뻥튀기가 가능한 주식을 샀다.

그러니 주가만 높이 올라간다면 누가 사장이 되든 상관없다.

그런데 상대 세력이 회사의 자산만 빼먹고 빠지려고 들어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우진이 서준석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재구파가 모은 주식을 먹은 놈이라….'

서준석이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저를 지지해 주시면 제가 책임지고 회사를 지키겠습니다."

차우진이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궁리했다.

'딥어스테크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데, 마침 둘 다 땅을 파는 회사네?'

"서 사장님. 딥어스테크라고 아십니까?"

"예? 물론 압니다. 그 회사 장비를 사용할까 했으니까요."

"어떤 장비를 쓰려고 했습니까?"

"땅속을 탐색하는 장비 중에 좋은 게 있습니다. 예산이 부족해서 사다 쓰진 못했습니다만."

지금 딥어스테크에서 파는 탐지기는 멸망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개발이 중단된 다른 탐지기는 다르다.

"그거라도 있으면 좋지요?"

"물론입니다. 그 회사의 탐지기 개발팀 실력이 괜찮다고 들었습니다."

차우진은 딥어스테크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생각났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겠군요."

서준석 사장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럼 주식을 넘겨주시는 겁니까?"

"안 판다니까요."

"방금 파트너가 된다고…."

"그리고 말입니다. 내 주식 사려고 대출받는다는 거, 사채입니까?"

"예? 아. 그게 은행은 더 확실한 담보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그러다 그나마 가진 지분까지 홀라당 털립니다. 그놈들하고 거래하지 마세요."

"하지만 경영권이…."

"제가 서 사장님의 우호지분이 되어서 주총에서 사장님을 지지하겠습니다."

서준석이 벌떡 일어났다.

"고맙습니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경영권은 확실히 방어할 수 있습니다!"

차우진이 조건을 걸었다.

"서 사장님도 해주실 일이 있는데요."

"말씀만 하시죠."

현대 문명이 멸망하면 돈이나 금보다 참치캔의 가치가 더 높아진다. 소염진통제 약통 하나면 부자 놀이도 할 수 있다.

항생제는 더 귀하다. 항생제를 빼앗기 위해 생존자 그룹 사이에서 전쟁이 터지기도 한다.

그런 미래가 오지 않게 하려면 돈을 사덕리소스 주식에 묵혀둘 게 아니라 잘 활용해야 한다.

차우진이 제안했다.

"딥어스테크 사장을 갈아치우는 데 협조하시죠."

서준석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예? 어디요?"

"그대로 놔두면 그 회사는 망해요. 일단 사장이라도 갈아봐야죠. 거기다 경영진도 절반쯤 날리고요. 그런다고 회사가 살아날지는 모르겠지만."

서준석은 당황했다.

"아니, 딥어스테크는 우리보다 훨씬 큰 회사인데 어떻게…."

차우진이나 서준석이 가진 현금으로는 딥어스테크의 지분을 필요한 만큼 살 수 없다.

하지만 딥어스테크 주식을 개인이 아니라 사덕리소스 소유로 사들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 회사에는 현금을 만드는 금광이 있잖습니까?"

"매장량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차우진은 10년 후에도 사덕리소스가 광산을 운영한다는 걸 안다.

"제가 촉이 좋습니다. 그 금광에는 금이 많이 묻혀 있을 겁니다."

***

이튿날 차우진이 딥어스테크 연구소 건설 현장에 출근했다.

"이제 여기 사장놈을 어떻게 날려버리냐가 문제네."

탐지기 문제는 연구소 사고만 막으면 웬만큼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 보니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일단 연구소 사고는 막아야지."

그걸 못 막으면 사장을 갈아치우든 말든 멸망급 재난을 막는 일은 실패한다.

앞쪽에 덩치 둘이 일은 안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게 보였다.

"일단 저놈들하고 말이라도 섞어보자. 여기 사장하고 무슨 관계인지 알아내야 하니까."

***

박광수와 김상중은 일은 제대로 안 하고 연구소 공사 현장을 어슬렁거렸다.

차우진이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박광수가 인상을 썼다.

"어제도 본 놈 아냐?"

"저 새끼가 우리를 의심하는 거 아닐까요?"

"야. 좀 건드려봐."

"예. 형님."

김상중이 차우진 쪽으로 걸어가 어깨로 어깨를 툭 쳤다. 그런 후에 욕을 뱉었다.

"이 새끼. 안 비켜?"

"와. 아직 말을 걸어보지도 않았는데 반응이 예상 이상이다?"

김상중이 차우진의 어깨를 손으로 밀었다.

"너 이 새끼 어제도 우리 보고 있었지?"

"둘이서 어슬렁거리기만 하는 게 신기하긴 하더라. 그렇게 놀아도 일당을 주나? 여기 좋은 현장이었네."

"이 새끼가!"

김상중이 차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근처에 다른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박광수가 다가왔다.

"야. 야. 그만해. 그리고 너. 넌 나한테 찍혔다."

박광수가 차우진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김상중이 말했다.

"너 이 새끼. 나중에 보자."

김상중도 차우진을 툭 치고 지나갔다.

차우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저것들하고 대화는 무슨. 내가 너무 관대했네. 난 너무 부드러워서 문제야. 시간 끌 거 있나. 저것들 문제는 그냥 오늘 밤에 물리적으로 해결해야겠다."

***

박광수가 공사 현장을 어슬렁거리며 말했다.

"오늘 좋은 거 많네."

"그러게 말입니다. 시멘트가 많이 들어와서 평소보다 더 빼먹어도 되겠습니다."

"저쪽에 전선 박스 봤냐? 그것도 좀 챙기자."

"형님이 좋아하시겠습니다."

그들은 현장을 돌아다니며 뭘 빼먹을지 확인했다.

***

근무 시간이 끝났다. 공사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두 사람도 일당을 받고 공사장을 나왔다.

박광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 그 새끼는 벌써 갔네. 영 건방져서 밖에서 손 좀 봐주려고 했는데."

김상중이 얼른 말했다.

"내일 제가 구석으로 불러내서 손 보겠습니다."

"아예 이 공사장에서 쫓아내라. 거슬리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흐흐."

그들은 그곳을 따나 술집으로 갔다. 거기서 소주 두 병에 삼겹살을 먹고 나왔다.

그런 후에 차를 타고 이동했다.

차우진이 그들을 미행하며 말했다.

"음주운전이 일상인 놈들이구나."

그들의 목적지는 서울을 벗어난 곳에 있는 공터와 가건물이었다.

공터에서 세 명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박광수가 두목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형님. 저희 돌아왔습니다."

김태욱이 손을 들었다.

"왔냐? 오늘은 뭐 좋은 거 있어?"

"시멘트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지게차는?"

"그 옆에 세워놨습니다. 트럭 끌고 가서 그냥 싣고 나오면 됩니다."

"야. 철근은 없냐? 철근이 돈이 된다던데."

"형님. 시멘트는 물이라도 탈 수 있는데 철근을 빼먹으면 들킬 수도 있어서…."

"야. 괜찮아. 그 회사 사장이랑 이야기 다 끝났다니까? 그게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대놓고 지게차까지 써서 빼내겠어?"

"대신에 전선이 많이 들어왔으니까 좀 빼돌려도 될 겁니다. 그게 단가가 꽤 괜찮습니다."

"그래? 하긴. 오늘은 철근 실을 차는 준비 안 했으니까 전선이나 넉넉히…."

갑자기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 쥐새끼들이 전기 사고 무서운 줄을 모르네."

다섯 명의 고개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휙 돌아갔다.

차우진이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김태욱이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어디서 보낸 놈이냐?"

"짐작 가는 데가 있을 텐데?"

"상식이냐?"

"잘 아네. 상식이가 안부 전하라더라."

김태욱이 차우진의 뒤를 확인했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차우진 혼자였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새끼구나. 야. 저 새끼 끌고 와. 상식이한테 답장 보내야겠다."

박광수와 김상중은 공사장에서 바로 오느라 칼이 없었다. 그들은 옆에 세워져 있던 각목을 하나씩 들었다.

김태욱과 같이 있던 두 명이 잭나이프를 꺼냈다. 그 네 명이 차우진을 향해 어깨를 흔들며 걸어갔다.

차우진이 갑자기 앞으로 툭 튀어나갔다. 그는 제일 앞에서 걸어오는 박광수부터 걷어찼다. 체중이 실린 발차기가 박광수의 가슴을 콱 찍었다.

"켁!"

박광수가 각목을 놓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차우진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각목을 오른손으로 잡아채며 말했다.

"야. 나 바쁘다. 빨리 끝내자. 살려는 줄게."

30. 도시락

한 놈이 나가떨어졌다.

이제 넷이 남았다.

두목 김태욱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뭐해 이 새끼들아! 빨리 조져!"

김상중이 차우진을 향해 돌진했다.

"이 새끼가!"

김상중은 덩치는 큰데 속도가 느렸다. 차우진이 각목을 대각선 위로 크게 휘둘렀다.

각목 끝이 느리게 달려온 김상중의 턱을 정확히 때렸다. 김상중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케엑!"

한 방으로 충분했다. 김상중은 다리가 풀리며 차우진의 왼쪽으로 엎어졌다.

그 틈에 잭나이프를 쥔 놈이 차우진의 오른쪽으로 빙 돌아 달려들었다. 박광수나 김상중과는 달리 몸이 날렵했다.

짧지만 날카로운 칼날이 차우진의 옆구리를 노렸다.

차우진이 긴 각목을 오른쪽으로 쭉 뻗었다. 각목 끝의 궤적이 완벽한 직선이었다. 양아치가 피하기엔 너무 빨랐다.

뭉툭한 나무 끝이 적의 목에 꽂혔다. 적의 상체가 뒤로 휙 밀렸다.

"켁!"

목을 맞은 놈은 무릎이 굽혀지면서 뒤로 넘어갔다.

칼을 든 놈은 하나가 더 있었다. 그놈이 반대쪽에서 소리를 죽이며 접근했다.

그런다고 차우진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다.

차우진이 엎어진 김상중을 밟고 넘어갔다. 왼쪽으로 접근하던 놈은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차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성큼 걸어가며 각목을 크게 휘둘렀다.

적이 황급히 몸을 젖히며 뒷걸음쳤다.

소용없었다. 뒤로 뺀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차우진의 각목이 적의 머리를 후려쳤다.

각목이 뚝 부러지면서 적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차우진이 부러진 각목을 툭 던졌다.

김상중과 양아치 둘은 바닥에 쓰러져 꿈틀댔다.

제일 먼저 걷어차여 뒤로 날아간 박광수의 상태가 그나마 나았다. 덩치가 좋아서 걷어차일 때의 충격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박광수가 허겁지겁 일어나며 욕을 했다.

"이, 이 새끼가! 죽여버린…."

차우진이 박광수 쪽으로 한 걸음 크게 걷고 점프했다. 높이 뜰 필요도 없었다. 공중을 낮게 날아 박광수를 다시 걷어찼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발차기에 체중이 더 확실히 실렸다. 들어간 충격도 두 배로 강했다.

박광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케에엑."

차우진이 말했다.

"나한테 욕을 하네? 살려는 준다고 한 거, 마음이 바뀌려고 하네?"

이제 남은 건 이놈들의 두목인 김태욱밖에 없다.

차우진이 두목인 김태욱에게 물었다.

"넌 왜 안 오냐? 빨리 끝내자니까?"

김태욱은 이미 의자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가 더듬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사, 상식이가 보냈다며!"

"맞아. 상식이가 너한테 인사 하라더라."

김태욱은 쉽게 믿던 조금 전과는 달리 차우진의 정체를 의심했다.

"상식이 부하 중에 너 같은 고수가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없지."

"뭐?"

"상식이가 돈을 주고 나를 고용했어. 내가 상식이 부하면, 대놓고 상식이라고 부르겠냐?"

"처, 청부업자?"

"어. 킬러라고 해도 되고."

김태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눈이 부하들을 훑었다. 차우진 한 명에게 넷이 덤볐는데 순식간에 전멸했다.

김태욱 혼자 덤벼봤자 상대가 될 리 없다. 그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내, 내가 돈 줄게! 돈 줄 테니까 살려줘!"

차우진은 이놈들을 죽이러 온 게 아니다. 먼저 해결 가능한 것부터 치우러 왔다.

"얼마나 주게?"

"천만…."

"상식이는 더 준다던데?"

"1억! 1억 줄게!"

차우진이 가건물과 트럭을 보았다.

"저거 다 네 거냐?"

"내 거야! 맞아! 다 내 거야!"

"지랄하네. 트럭은 폐차 직전이고, 이 땅은 네 땅이 아닐 테고."

어차피 돈이 필요해서 질문한 게 아니다.

"현금이 없겠는데?"

"구해줄 수 있어! 지금은 없지만 돈을 구해줄 수 있다고!"

"누구한테?"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해먹었는지는 여기서 알아내면 된다.

김태욱은 차우진이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가 급히 설명했다.

"내 뒤에 쩐주가 있어! 공사장에서 자재를 빼돌려서 넘겨주면 쩐주가 수당을 챙겨준다고! 쩐주한테 말하면 1억쯤은 빌릴 수 있어!"

"파는 게 아니라 수당이라…. 그 쩐주가 누구냐?"

"그, 그건…."

차우진이 김태욱에게 성큼 다가갔다. 겁먹은 김태욱이 뒤로 물러나며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거리가 맞지 않았다. 김태욱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차우진은 김태욱이 앉아 있던 의자를 잡아 크게 휘둘렀다. 나무 의자가 김태욱의 몸통과 충돌하며 박살 났다. 나무 파편이 옆으로 날아갔다.

"끅!"

김태욱은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차우진이 한 걸음 더 다가가 김태욱의 다리를 걷어찼다.

김태욱은 옆으로 자빠졌다.

"켁!"

차우진이 바닥에 나자빠진 김태욱에게 말했다.

"누구냐고."

김태욱은 차우진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어차피 그에게 의리나 신용 따위는 없다. 목숨이 제일 소중하다.

"우리가 물건 빼내는 공사장의 사장…."

"건설 사장?"

"그, 그래. 그 사장…."

차우진이 기대한 대답이 아니다.

"내가 속는 걸 싫어해."

차우진이 발을 내질렀다. 김태욱의 갈비뼈가 나갔다.

"케엑!"

"또 개수작 부리면 다음엔 목이 부러진다."

김태욱이 다급히 말했다.

"그 공사장에서 짓는 건물의 사장! 그 회사가 공사 회사에 하청 준 거니까 다 거짓말은 아니야!"

"회사 이름."

"디, 딥어스테크!"

"사장이랑 직접 만나서 거래했냐?"

"이런 일을 하는데 사장이 우리를 만나줄 리가 없잖아. 당연히 사장의 비서…."

"거래 내용은?"

"공사장에서 자재만 빼내서 사장한테 넘기면, 그 사장은 그 자재를 다른 자재와 섞어서 다시 공사장에 집어넣어."

"재활용한 자재는 새로 산 거로 처리하고 비자금을 만들겠네?"

"아마 그렇…."

"그럼 넌 중간에서 수수료나 좀 먹겠는데?"

김태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니야.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거야! 동업이라고! 그러니까 돈 받아올 수 있어!"

"동업은 무슨. 잔챙이네."

"아니야. 살려줘. 내가 1억…."

"그냥 상식이한테 돈 받아야겠다. 잘 가라."

김태욱이 바닥을 기며 도망치려고 했다. 갈비뼈가 나갔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히익. 살려…."

차우진이 김태욱의 턱을 걷어찼다.

"켁!"

김태욱은 한 방에 기절했다.

차우진은 이놈들을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다. 그러기엔 턱이나 갈비뼈가 부러진 놈들이 많았다.

"살려는 줬다."

소규모 조직 하나가 전멸했지만 죽은 놈은 없다.

차우진이 다섯 놈을 놔두고 그곳을 벗어났다.

"저놈들은 이제 공사장이 아니라 상식이랑 싸우느라 바쁘겠지."

차우진이 걸어가며 말했다.

"그런데 상식이가 누구야?"

***

이튿날 차우진이 공사장에 출근했다.

같이 일하는 목공 기술자가 말했다.

"그놈들이 오늘은 안 오네?"

"누구요?"

"어제 차 기사랑 시비 붙은 놈들 말이야. 일을 안 하니까 회사에서 드디어 잘랐나?"

"자르진 않았는데."

자르지는 않고 좀 부러뜨렸다.

"그만뒀나 보죠."

"그런가?"

차우진은 그날 일하면서 연구동 쪽의 정보를 수집했다.

"먼저 지은 연구동에 구내식당이 없어요?"

"그렇다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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