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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 APOCMASCOT / Chapter 2: 2

Chapter 2: 2

***

차우진은 이선정을 주차장까지 바래다준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상황을 다시 분석했다.

"이선정이 사망하는 장소는 집은 아니야."

꿈속 미래의 뉴스에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여러 번 나왔다.

"상황이 조금 변했으니 미래도 좀 바뀌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집은 아니야."

그 연쇄살인마의 범행 수법은 집에 침입하는 방식이 아니다. 모든 피해자는 밖에서 당했다. 그것도 낮이 아니라 밤에 당했다.

오늘은 이선정이 차를 타고 퇴근했다. 뉴스에서 본 패턴대로면 내일 낮까지는 위험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의 확률로 범인이 패턴을 바꿀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계속 이선정의 옆에만 있을 수는 없다.

차우진이 막아야 하는 멸망급 재난은 하나가 아니다.

차우진이 거실 소파에 앉아 고민했다.

"예산이 많이 필요해."

이선정을 구할 때도 활동비는 들지만 그건 그가 가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막아야 할 다른 재난들은 다르다. 그중에는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막아야 하는 재난도 있다.

게다가 단기간에 그 모든 재난을 막을 수는 없다. 앞으로 계속 활동하려면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멸망을 막으려면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투자를 좀 해야 하나."

9. 투자

차우진이 그가 가진 돈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가진 돈이…."

일단 적금이 있다. 거기에 주식도 좀 하고 있다.

그가 치킨을 먹던 손을 물티슈로 닦고 스마트폰을 켜 주가를 확인했다.

"주식은 잘 오르던 것도 왜 내가 사기만 하면 떨어지는 걸까? 누가 나 주식 언제 사는지 감시하나?"

그의 주식은 이미 손실을 10%쯤 본 상태였다.

"자금을 어떻게 만든다…. 정말 많이 필요한데…."

그의 누나 차유리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소파에서 스마트폰을 보는 차우진을 보더니 푸념했다.

"아. 나도 너처럼 놀고먹고 싶다."

"공무원이 프리랜서를 부러워하면 어쩌자는 거야?"

차유리는 경찰 공무원이다.

"어쨌든 넌 지금 놀잖아! 난 일하는데!"

"왜 또 그러는데? 이번엔 뭐야?"

차유리가 소파에 털썩 앉더니 차우진이 먹고 있던 치킨에서 닭다리를 쏙 뽑아갔다.

"상장폐지가 예정된 망해가는 회사 때문에 바빠졌어."

"그게 왜? 누나는 경제 범죄를 분석할 머리가 안 될 텐데?"

"나 형사다?"

"응. 무술특채."

"너 지금 무술인 무시하냐?"

"그럴 리가 있나. 누나 지능만 무시하는 거지."

"너나 나나."

"난 전기 쌍기사야. 어디서 머리로 나랑 비교해?"

"대신에 넌 또라이잖아."

"그렇긴 하지."

차유리가 순식간에 깔끔하게 발라먹은 뼈를 통에 툭 던지며 말했다.

"그 회사 주식 샀다가 돈 다 날린 사람이 있는데, 그놈이 조폭이야. 아주 쪽박을 찼지."

"꼴 좋네."

"그런데 그 돈이 아무래도 그 조폭이 있는 조직의 자금 같아."

"그러면 그놈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네?"

"그렇지. 조직 돈을 빼돌렸으니 불구덩이에 던져지기 직전이지. 그래서 그놈이 증권사 직원을 찾아가서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협박을 했어."

"진짜로 돈을 돌려줬으면 이 사건은 누나가 아니라 다른 팀에 갔을 테고."

"듣기 싫으냐?"

"흥미진진하네? 그래서?"

"협박해도 안 되니까 그 조폭이 그 직원을 칼로 찌르고 도망쳤어."

"그래서 누나네 팀에 사건이 떨어졌구나."

"그렇지. 증권사에서 빨리 해결해달라고 민원을 엄청 넣나 봐. 위에서 그놈 빨리 잡으라고 난리인데 환장하겠다."

"칼에 찔린 사람은?"

"생명에 지장은 없는데, 많이 다쳤지."

"고생해라."

차유리가 두 번째 닭다리를 잡았다. 차우진이 말했다.

"다리 두 개는 선 넘지?"

"고생하는 누나가 불쌍하지도 않냐? 넌 집에서 놀잖아."

"나도 다시 일할 거라고."

그녀가 얼른 닭다리를 입에 대고 물어뜯으며 웅얼댔다.

"뭐? 뭐?"

"처먹어라."

차유리가 닭다리를 먹어치우며 말했다.

"아니, 그 회사 망하는 것 때문에 내가 소개팅을 포기해야 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매번 실패하는 소개팅을 또?"

"수연이가 이번에는 진짜 잘 생긴 남자라고 했단 말이야."

"내 친구 팔아서 나가는 소개팅이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그렇게 잘생겼으면 수연이가 직접 했겠지?"

"너 지금 내 꿈과 희망을 짓밟냐?"

민수연은 차우진과 같은 산부인과에서 하루 차이로 태어나 같이 자란 동네 친구다.

민수연은 차유리에게도 동네 친한 동생인 데다가 지금은 같은 경찰서에서 근무한다.

차유리가 뼈를 통에 던지며 푸념했다.

"그때 동생을 바꿨어야 했어. 널 넘겨주고 수연이를 동생 삼았어야 했는데."

"결국 닭다리 두 개 다 먹었네. 그러려고 집에 왔냐?"

"옷 가지러 왔지. 사덕리소스 사건 때문에 며칠 야근할 수도 있어서."

"그래. 옷 가지고 빨리 꺼…. 응? 어디?"

"당직실?"

"회사 이름이 사덕리소스?"

"어."

차우진은 당황했다.

"망한 회사라며."

"그랬지."

"사덕리소스가 왜 망해? 망할 리가 없는데?"

"없기는.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는 상태인데. 곧 상장폐지 될 거라니까?"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차유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너 혹시 그 회사 주식 샀냐?"

"아니. 그건 아닌데."

"휴우. 깜짝 놀랐네."

"그게 아니라…."

차우진이 꿈속 미래를 떠올렸다.

10년 후에 멸망급 재난들이 연달아 일어나면 현대 문명은 무너진다. 그때부터는 단순히 생존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아포칼립스 시대가 온다.

그런 상황을 현대적인 방식의 기업이 버틸 리 없다. 재난이 터지면 공장은 파괴되고 회사는 망했다.

그런데 재난이 본격적으로 터지기 전에는 당연히 회사들이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차우진의 꿈은 첫 번째 재난이 터지기 얼마 전부터 시작한다. 그 시기가 10년 후다.

적어도 그 꿈이 시작하는 때는 사회 인프라가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당연히 그때만 해도 멀쩡한 회사들은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이어갔다.

심지어 어떤 회사는 멸망 초기에도 버텼다.

차우진이 꿈속 미래에서 사덕리소스의 이름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

차우진과 박창수가 광산 근처에 쓸 만한 것이 있는지 수색했다. 그 광산은 이미 예전에 무너졌지만, 지상에 있는 기반시설에는 남은 게 있었다.

차우진이 활짝 웃었다.

"창수 형. 스팸 통조림 찾았다."

박창수가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어? 진짜? 이야아. 대박인데? 오늘은 스팸 찌개 먹자. 얼마 만에 제대로 된 찌개를 먹는 거냐."

차우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서진 간판이 보였다.

"여긴 뭐 하던 곳이지?"

박창수가 대답했다.

"사덕리소스의 광산이 있던 곳이야. 멸망 초기에 이쪽에서 작전 뛴 적이 있는데, 그때까지도 이 회사는 안 망하고 버티고 있더라고. 그래서 근처를 지나가는 김에 혹시나 하고 들렀더니, 잘 왔네."

"그러면 광산회사인가?"

"구체적인 건 나도 몰라. 관심도 없었고. 멸망 초기까지 살아남은 회사라는 거 하나만 알지."

***

차우진이 그 일을 생각하며 말했다.

"사덕리소스는 10년 후에도 안 망하는데."

꿈속 미래에서 사덕리소스는 멸망급 재난이 시작된 후에도 다른 평범한 회사보다는 오래 버텼다.

"그러니까 지금 시점에서는 망할 리가 없는데."

차유리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니야. 거기 거의 망했어. 곧 상장폐지 된다던데?"

차우진이 스마트폰의 증권 앱으로 사덕리소스의 주가를 확인했다. 주당 가격은 100원 정도였다.

"동전주가 됐네?"

꿈속 미래의 기억은 선명하다.

멸망 초기의 사소한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까먹은 것도 있다. 하지만 사덕리소스는 확실히 기억에 남았다. 그때 무너진 광산 앞에서 박창수와 나눠 먹은 스팸 찌개가 정말 맛있었다는 것도 생각났다.

차우진이 장담했다.

"여기 안 망해. 돈 있으면 이 주식 사."

차유리는 코웃음을 쳤다.

"이게 어디서 누나한테 엿을 먹이려고 들어? 이 회사 망하는 건 확정이야."

"살 돈이 없는 거 아니고? 아. 월급 받은 거 홀라당 다 쓰지?"

"박봉이라 그래. 박봉이라."

"형사 월급이 그 정도로 박봉은 아닐 텐데?"

"시끄러워. 나 옷 챙기러 왔다. 잔소리하지 마라."

차유리는 옷을 챙겨서 집을 나갔다.

차우진은 집에 혼자 남아 사덕리소스의 주가를 다시 확인했다.

"부도와 상장폐지가 확실하다고 알려져서 주식이 100원짜리가 된 거겠지. 그런데 이 회사는 10년 후까지 안 망하잖아."

활동 예산을 구할 방법이 생각났다.

"여기 몰빵해야겠다."

그가 은행 잔고부터 확인했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현금 잔고는 많지 않았다.

"적금은 당장 해약하고, 주식 다 팔고, 마이너스 통장도 한계까지 쓰면?"

적금은 스마트폰으로 당장 해약할 수 있었다. 마이너스 통장에 신용대출까지 추가로 받으면 2억 원 정도의 현금을 마련할 수 있다.

100원짜리 주식을 2억 원어치 사면 200만 주가 된다. 그러면 현재 사덕리소스의 총 발행주식의 10%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와…. 진짜 이 회사는 다 망해가는구나. 코스닥 상장사인데 2억으로 지분 10%를 인수할 수 있다니."

다른 사람들이 그런 싼 주식을 손대지 않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이렇게 빚을 내서 샀다가 그 회사가 망하면, 그냥 거지가 아니라 채무자가 된다. 인생이 망할 수 있다.

게다가 사덕리소스는 곧 망한다고 알려진 회사다. 이런 회사의 주식을 사는 건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다. 그것도 성공 확률이 매우 낮은 도박이다.

차우진도 안다.

"주식을 이런 식으로 샀다가 내 꿈속 정보가 틀리면, 한 방에 파산하는 건데…."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세상이 망하고 사람들이 다 죽는 것보다는 내 기억이 틀려서 나만 망하는 게 낫잖아. 그러면 개이득이지."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생하는 삶보다 현재의 거지 인생이 더 낫다. 경찰 공무원인 차유리에게 빌붙으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

게다가 차우진에게는 전기 관련 기술이 있으니 세상이 망하지만 않으면 돈은 다시 벌 수 있다.

"지르자. 미수 거래…만 빼고. 그런 단타는 주가가 잘못 움직이면 강제청산 당한다던데, 난 이 주식을 쥐고 있어야 하니까."

***

차우진은 이튿날 장이 개장하자마자 다른 주식은 다 팔고 사덕리소스의 주식을 사들였다. 은행 대출도 신청했다.

이미 상장폐지 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도 주식 거래는 꽤 있었다. 망하기 직전의 변동성을 노리는 단타 거래였다.

차우진은 주당 100원을 목표로 주식을 매입했다. 100원 밑으로 가격이 떨어지면 바로바로 사들였다.

그렇게 한참 주식을 사들였더니 변화를 눈치챈 사람들이 생겼다.

'누가 매집하나?'

'혹시 회사가 살아나는 거 아냐?'

그런 의심이 쌓이면서 매물이 줄어들었다. 가격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

사덕리소스 사장 서준석은 주가를 보고 당황했다.

"우리 회사 주식이 올라? 아니, 왜?"

현장팀장 유도진이 옆에서 말했다.

"호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우리 회사에 호재가 어디 있어?"

"안 망한다든지…."

"안 망할 방법이 있나?"

"없죠. 회사 사정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100원이 아니라 10원도 비싸다고 생각할 텐데."

서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주가가 올라?"

"아이고. 다시 내려갑니다."

"그러면 그렇지. 아. 이런. 주가 내려가는 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자괴감이 든다. 내가 그래도 사장인데."

***

차우진은 주가가 100원이 넘어가면 구경만 했다. 이리저리 알아보던 사람들도 아무런 호재가 없다는 걸 알고 주식을 다시 던졌다.

그러면서 주가는 다시 100원 아래로 내려갔다. 차우진은 그런 주식만 부지런히 모았다.

망하는 게 확정된 회사라 팔려는 사람은 많았다. 차우진은 단 하루 만에 가진 돈을 다 털어 넣었다.

"물 타다가 대주주가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제 은행 잔고는 당장 쓸 활동비밖에 없다. 마이너스 통장까지 탈탈 털었다.

은행 대출금이 나오면 그것도 사덕리소스 주식을 사는 데 써야 한다.

"누나가 이걸 봤으면 날 패대기쳤겠네."

그는 망해서 상폐 당하기 직전의 회사 주식을 대량으로 매수했다. 당장은 팔 생각도 없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은 여기에 다 썼으니까 밥은 얻어먹으면서 일해야겠다."

***

차우진이 저녁때 이선정을 찾아갔다.

이선정이 회사에서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오늘이요?"

차우진이 말했다.

- 밥 먹자고 했잖습니까?

"그러긴 했죠."

- 혹시 다른 약속이 있어도, 오늘은 나랑 밥 먹읍시다. 꼭 그래야 합니다.

그녀가 방긋 웃었다.

'오늘은 저번과 다르게 적극적이네?'

그녀가 오늘 저녁을 위해 미리 준비해놓은 하이힐을 책상 아래에서 슬그머니 꺼내며 말했다.

"네. 뭐. 어차피 저녁밥은 먹어야 하니까 나갈게요."

10. 연쇄살인마 II

차우진은 이선정을 회사 밖으로 불러내 식당으로 향했다.

이선정이 하이힐을 신고 그의 옆에서 걸어가며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주 찾아오시면…."

"부담스럽습니까?"

보호 대상자가 부담스러워하면 방법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 의심받지 않는다.

이선정이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일하시는 데 방해되는 건 아닐까 해서 그러죠."

"요즘은 백수라서."

"어머. 제가 어제 그렇게 말한 건 실수…."

"백수 맞습니다. 그러니까 고기 사시죠."

두 사람은 삼겹살집에 들어갔다. 차우진이 고기를 구우며 말했다.

"멧돼지보다 축산 농가에서 키운 이런 돼지가 훨씬 더 맛있습니다."

"멧돼지라니요?"

"물론 배고플 때 먹으면 고라니도 맛있지만."

"고라니를 먹어요?"

"야생동물을 구울 때는 이것보다 더 바짝 구워야 합니다."

미래의 야생동물은 기생충 문제 때문에 어설프게 구우면 안 된다. 현대 문명이 무너지면 기생충 약도 구하기 쉽지 않다.

차우진이 설명했다.

"기생충에 감염되면 야생 식물을 조합해 만든 구충제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거의 독초라서 먹고 싶지 않거든요."

"도, 독초요?"

"물론 고기를 구워 먹는 경우는 끓일 상황이 안 될 때이고, 여유가 되면 물을 많이 붓고 식용 식물도 넉넉히 넣어서 양을 불려…."

차우진이 신나게 설명하다 멈칫했다. 모두 꿈속 미래에서 경험한 일이다. 지금처럼 풍족한 세계의 서울 한복판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 이선정은 눈이 동그래져서 듣고 있었다.

차우진이 얼버무렸다.

"서바이벌 다큐멘터리 방송을 보니까 그렇다더군요."

"아. 다큐멘터리 좋아하시는구나."

"안 믿으시는군."

"믿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먹어요. 잘 구워졌네."

이선정이 삼겹살을 집어 먹었다.

"어머. 맛있어요."

"내가 좀 굽습니다."

"고기를 정말 정성을 다해서 구우신다 싶었는데, 장난 아니네요."

"정확한 온도를 측정해 굽는 게 포인트죠."

"온도계는 없었는데요?"

"제가 온도 변화를 좀 잘 느낍니다."

그녀가 살짝 웃었다.

"이러다 내일도 밥 먹자고 하시는 거 아녜요?"

차우진은 오물거리며 삼겹살을 먹는 이선정을 보며 생각했다.

'연쇄살인마를 오늘도 못 찾으면 그렇게라도 하려고 했는데.'

이선정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일은 뭐, 상황 봐서."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살짝 튕겼다.

"어머. 저 바쁜 사람이거든요?"

"바빠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죠. 그런데 상황 봐서는 또 뭐예요?"

차우진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일 이선정 씨 운세가 사나우면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네? 혹시 점도 쳐요?"

"점은 아닌데."

예지몽을 꾸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이고 생생한 예지몽이었다. 마치 그 시대를 실제로 살았던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감이 좋아서."

이선정이 웃었다.

"의외시다. 그럼 귀신도 막 쫓아내고 그래요?"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다고."

"앗. 농담인데."

"괴물이라면 내가 좀 잘 잡지만."

"네?"

"농담입니다."

차우진과 이선정은 식사를 마치고 고깃집을 나왔다. 둘 다 술은 마시지 않고 고기만 먹었다. 차우진이 고기를 훨씬 더 많이 먹었다.

식당 밖에서 차우진이 가볍게 경고했다.

"이선정 박사님. 몸조심해야 합니다."

그녀가 두 팔을 앞으로 쭉 펴고 몸을 비틀었다.

"아. 건강 챙기기가 쉽지 않네요."

"건강 말고요. 스토커가 있다면서요."

차우진은 그 말을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용은 무겁지만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했기 때문에 인사말로 들렸다.

"어머. 처음 만났을 때 제가 한 이야기를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시나 보다. 그거 다 제 착각이겠죠."

차우진이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당신이 걱정돼서 그럽니다."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이선정이 죽으면 10년 후에 치사율 50%의 오메가 바이러스가 세상을 덮친다.

그러니 그녀를 살려야 한다.

이선정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그, 그래요?"

그녀가 손바닥으로 얼굴에 바람을 부쳤다. 어차피 식사는 다 했다. 그녀가 급히 말했다.

"저, 이만 갈게요. 할 일이 남아서요."

차우진이 제안했다.

"회사까지 바래다줄게요."

그녀가 한 번 튕겨보았다.

"에이. 괜찮아요. 가까워요."

차우진은 이선정이 이 근처에서 살인마에게 당한다는 걸 안다. 다만, 날짜까지 기억하진 못해서 오늘이 아닐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앞에 닥친 위험을 구체적으로 경고하지는 않았다.

이미 김준배가 죽으면서 변수가 생겼다. 그녀가 그의 경고를 믿고 회사에 나가지 않으면, 그 살인마가 다른 장소에서 그녀를 다시 노릴 수도 있다.

그러면 상황이 어려워진다.

차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럼 그럽시다."

"네?"

"잘 가요."

그녀가 속으로 투덜댔다.

'예의상 튕긴 건데 왜 튕겨 나가?'

"웅…. 쳇. 알았어요."

이선정이 회사로 돌아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자꾸 찾아오는 거 보면 나한테 관심이 있나 싶다가도…."

그렇게 보기엔 차우진이 매번 고르는 음식이 좀 이상했다.

"국밥이나 김밥헤븐, 삼겹살. 맛은 있었지만…. 술이라도 같이 마셨으면 또 몰라. 그것도 아니잖아. 처음부터 이쪽 음식으로 밥만 먹는 건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걸까?"

차우진이 선을 긋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자꾸 찾아오는 이유가 궁금했다.

"혹시 나를 스카우트하려고? 아닌데. 난 언니네 회사에 있는데."

화선 바이오는 조그마한 회사이긴 하지만 사장이 그녀의 친언니다. 심지어 회사 이름도 이화연과 이선정의 이름을 따서 화선 바이오라고 지었다.

스카우트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회사를 옮길 수는 없다.

"진짜 왜지? 왜 자꾸 찾아와서 밥 먹자고 하는 거지?"

고민하는 그녀의 뒤를 박영호가 마스크를 쓴 상태로 따라갔다. 그가 사진을 본 후에 다시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확실하네."

이선정이 회사로 가는 길 중간에 이면도로가 있었다. 이미 남들은 퇴근했을 시간이라 그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가끔 이 길을 지나간다. 오늘처럼 고깃집에서 바로 회사로 가려면 이 길을 이용해야 빠르다.

오늘따라 이면도로의 가로등 불빛이 음산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조금 전에 차우진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차우진은 스토커 이야기를 꺼내며 몸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에이. 설마….'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느낌이 싸했다.

박영호가 마스크를 쓴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눈치챘나?'

차우진은 이선정을 조금 먼 거리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를 따라가는 남자를 발견했다. 박형호는 그녀와 차우진의 사이에 있었다.

이선정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오늘 꼭 저녁을 먹자고 했다.

'저놈인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박영호의 의도를 확인해야 한다.

이선정은 결정했다.

'설마 아니겠지만, 그래도 괜히 무서우니까….'

그녀가 갑자기 회사 쪽으로 뛰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하이힐을 신어 뛰는 속도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박영호가 그 모습을 보고 이선정을 향해 달려갔다.

"역시 눈치챘구나!"

박영호가 훨씬 빨랐다.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박영호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칼날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번뜩였다.

"그럼 여기서 처리해야지!"

이선정은 평소에는 운동화나 슬리퍼, 아니면 단화 위주로 신는다. 오늘은 차우진이 온다고 해서 특별히 하이힐을 신었다.

하이힐의 뒷굽이 너무 높았다. 뛰는 게 쉽지 않았다.

그녀가 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칼을 들고 달려오는 남자가 보였다.

겁이 덜컥 났다. 놀라는 바람에 발목이 삐끗했다. 이선정이 비틀거리다 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꺄악!"

차우진은 일부러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을 미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영호는 차우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문제가 생겼다. 이선정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박영호는 대놓고 돌진했다.

지금 뒤에서 뛰어서 쫓아가면 늦는다.

상관없다.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차우진은 이미 저번 자동차 사고에서 이선정을 구할 때 단거리 공간도약 스킬을 사용했다. 칼잡이 김준배의 함정을 피해 뒤를 잡을 때도 그 스킬을 썼다.

스킬은 깨달음을 통해 각성한다. 일단 깨달은 스킬은 지금 시대에도 사용할 수 있다.

차우진이 공간도약 스킬을 사용했다. 적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스크를 쓴 박영호가 바닥에 쓰러진 이선정을 향해 칼을 아래로 내밀었다.

"개인적인 유감은 없다."

갑자기 오른쪽 바로 옆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동시에 차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냐? 나는 유감이 많은데."

박영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오른쪽을 쓱 돌아보다가, 갑자기 칼을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칼날이 차우진을 노렸다.

"뒈져!"

차우진은 이미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적의 칼이 실제보다 느리게 보였다. 그 느린 손목을 발로 걷어찼다.

"컥!"

적의 손목에 발차기가 정확히 들어갔다. 적이 쥐고 있던 칼이 손에서 튀어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박영호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잡았다.

"크윽. 이 미친 새끼. 칼을 어떻게 발차기로…."

차우진이 앞으로 쭉 뻗은 다리를 내리며 말했다.

"성급한 놈이네. 누군지 묻지도 않고 칼부터 날리냐?"

"누구냐!"

"시킨다고 그대로 하냐? 너 공부 못 했겠다?"

"이 새끼가?"

차우진이 왼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아이고. 칼이 들어오는 높이가 낮길래 발로 찼더니 허리가…."

방금 박영호의 공격은 발로 걷어차면 칼을 막는 건 물론이고 적의 오른손에 타격까지 입힐 수 있다. 그의 전투 센스는 그걸 확실히 알았다.

그런데 그건 미래의 단련된 신체에 맞춰진 전투 센스다. 지금 그의 몸은 체중부터 달랐다.

그런 몸으로 갑자기 날카로운 발차기를 날렸더니 허리가 뻐근해졌다.

차우진이 말했다.

"내가 예전처럼 유연했으면 너 손목 날아갔다."

박영호가 손목을 주무르다가 왼손으로 칼을 하나 더 꺼냈다. 이번에는 작은 잭나이프였다. 그가 사납게 물었다.

"이 새끼가. 너 진짜 뭐야?"

"지나가던 사람."

"뭐?"

박영호와 차우진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적은 차우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차우진은 점퍼도 뒤집어 입었다. 겉과 속이 다른 색인 이중 구조 점퍼라서, 뒤집어 입으면 조금 전과는 옷차림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차우진은 목소리도 깔아서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들리게 했다.

아까는 나와 있던 배도 지금은 힘을 꽉 줘서 집어넣은 상태다.

차우진이 배에 힘을 주고 이선정에게 말했다.

"뒤로 물러나 있어요."

"네? 하지만…."

"그게 도와주는 겁니다."

차우진은 조금 전과는 목소리도 다르고 옷도 다르고 배도 다르다.

이선정은 그가 시키는 대로 뒤로 물러났다. 거리가 점점 멀어져서 작게 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멀리 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차우진이 칼을 든 박영호를 향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 새끼. 반갑다?"

11. 미끼

이선정 박사는 지금 제일 필요한 게 뭔지 궁리했다. 차우진은 그녀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했다.

그러면 전투에 방해되지 않고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 신고!'

그녀가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냈다. 스마트폰이 손에서 미끄러져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녀가 두 손을 휘저어 그걸 겨우 붙잡았다.

박영호의 타깃은 이선정이다. 그런데 중간에 버티고 선 차우진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박영호가 이선정의 행동을 보며 욕을 했다.

"씨발. 휴대폰부터 빼앗았어야 했어."

차우진도 이선정을 힐끗 보고 혀를 찼다.

"쯧. 신고할 필요는 없는데."

그렇다고 이선정에게 신고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 수상한 요구를 하면 이선정이 차우진을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녀와 신뢰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박영호는 초조했다. 이선정이 신고하지 못하게 막으려면 먼저 차우진을 뚫어야 한다. 그가 잭나이프를 차우진 쪽으로 겨누며 욕을 했다.

"이 새끼가. 기습 한 방 성공했다고 또 통할 거 같냐? 뒈지고 싶어?"

차우진이 욕하는 박영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그 반응을 보고 박영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쫄았냐? 뒈지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아니야. 너 이상해."

"뭐가! 이 새끼야!"

차우진이 박영호를 빤히 쳐다보다가 혀를 찼다.

"쯧. 너도 아니구나?"

"뭐?"

"살기가 약해."

현대 문명이 무너진 후의 세계에서는 살인이 수시로 일어났다. 차우진은 그 세계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다양한 감각을 키웠다. 특히 살기는 너무 익숙해서 쉽게 알아챘다.

박영호에게서 살기가 느껴지긴 했다. 그런데 약했다.

"사람을 칼로 많이 죽여본 놈이, 살기가 이렇게 약한 건 이상해."

지금처럼 일 대 일로 싸우는 경우라면 더 폭발적인 살기가 감지되어야 한다.

최근에 충청도 산에서 충돌한 김준배는 차우진을 죽이려 할 때 살기를 확실히 드러냈다.

그런데 박영호는 그런 강렬한 느낌이 없었다.

"이 새끼는 진짜가 아닌데, 그럼…. 아. 그거네."

"뭔 개소리야!"

"너. 미끼구나?"

박영호는 멈칫했다.

"어? 뭐?"

박영호의 눈알이 흔들렸다.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짚이는 게 있나 보다?"

"씨발. 아니야!"

"아니긴. 넌 이용당한 거야. 그 새끼는 미끼를 이용하는 타입이네."

멸망한 세계에는 미끼를 이용해 덫을 놓는 놈이 흔했다. 그런 놈들은 미끼를 먼저 적에게 보냈다가, 상대가 거기 반응하면 그걸 보고 대응했다.

사람을 미끼로 쓰는 놈도 흔했다. 어떤 미끼는 자기가 미끼인지도 모르고 이용당했다.

당연히 미끼는 쉽게 죽었다. 낚시 미끼가 쉽게 따먹히는 것처럼 사람 목숨이 쉽게 날아갔다.

차우진이 말했다.

"넌 이걸 단순한 청부라고 생각했겠지."

이선정이 뒤에서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가 신고하면 이곳에 경찰이 온다.

박영호가 연쇄살인마가 아니라면 경찰이 오는 상황에서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이놈은 아니야.'

차우진이 말했다.

"운 좋은 놈."

박영호가 인상을 구겼다.

"내가?"

"오늘은 살아남을 테니까."

"뒈지는 건 너야!"

차우진이 박영호를 보았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데도 살기가 약했다.

"겁먹은 개가 사납게 짖는구나."

"이 새끼가!"

누군가 미끼를 사용했다. 잡아야 하는 건 그놈이다.

차우진이 물었다.

"누가 시켰냐?"

"씨발. 내가 너 따위가 묻는대고 대답할 것 같아?"

"그래. 너도 모르겠지."

상관없다. 이 상황에서 미끼가 여기 있다는 건, 미끼를 보낸 놈도 근처에 있다는 뜻이다.

'놈은 이선정을 직접 죽이고 싶어 해. 이 미끼가 이선정을 죽이게 놔둘 리 없어.'

그런데 지금은 차우진의 감각에 걸리는 놈이 없다.

'놈이 여길 보고 있진 않아.'

그렇다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미끼가 일을 망치지 못하게 견제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겠지.'

차우진이 물었다.

"그놈이 너한테 저 아가씨를 죽이라고 한 건 아닐 거야."

이선정이 그 말을 듣고 급히 말했다.

"저를 찌르려고 했어요!"

"죽지 않을 정도만 찌르려 했을 겁니다."

차우진이 박영호에게 물었다.

"그러고 나서 보고하라고 했지?"

미끼가 보고하지 못하면 청부 폭행은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그것도 단순 실패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붙잡혀서 보고할 수 없는 형태로 실패했다는 뜻이다.

그 정도만 돼도 미끼는 역할을 충분히 한 거다.

박영호는 크게 당황했다. 차우진은 그가 받은 의뢰가 어떤 건지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박영호가 소리를 질렀다.

"너 어디까지 아는 거냐? 그걸 어떻게 다 알아!"

"이런 걸 추리라고 하는 거다."

이선정은 뒤쪽으로 물러나 있다. 차우진의 말은 안 들린 부분도 있지만, 박영호의 목소리가 커서 무슨 상황인지는 알았다.

이선정이 스마트폰을 내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놈이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온 거예요? 그냥 강도가 아니라 날 노렸다고요? 나쁜 놈!"

차우진이 정정해주었다.

"나쁜 놈이 아니라 개새끼."

"네? 아! 개…. 나쁜 새끼!"

"나쁜 개새끼라. 강조하니까 괜찮네."

"네? 아니, 제가 말한 건 그 정도는 아닌데…."

이선정이 뒤로 물러나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안전이 완전히 확보된 건 아니다.

차우진은 궁리했다.

'진짜 연쇄살인마의 의도? 이선정 박사와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을 때 그놈이 뒤에서 공격한다면?'

그의 기억에는 그런 식으로 습격하는 놈들이 곧잘 있었다.

그런데 그건 뒷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건 멸망한 세계의 이야기다. 지금은 경찰력이 멀쩡히 살아있는 현대다.

'그러면 그놈이 노출돼.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놈이면 애당초 미끼를 안 썼겠지.'

차우진은 그걸 알면서도 뒤를 대놓고 돌아보았다. 이선정의 뒤쪽이나 주변에 수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차우진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박영호의 눈이 번뜩였다.

'빈틈!'

박영호가 차우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오른손에 쥔 잭나이프의 칼날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번뜩였다. 칼날이 차우진을 노렸다.

이선정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뒤에!"

차우진도 안다.

그의 몸은 기억보다 체중이 무겁지만, 전투 센스와 감각은 기억과 차이가 없었다. 그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로 박영호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차우진이 옆으로 한 걸음 크게 이동하며 몸을 회전해 돌아섰다. 그의 몸이 박영호의 옆쪽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이제 박영호에게서 대화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캐냈다. 차우진이 일부러 빈틈을 대놓고 보여준 건 이 상황을 정당방위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다.

박영호가 황급히 칼을 내질렀지만 칼날은 허공만 찔렀다.

차우진이 옆에서 박영호의 팔과 목을 붙잡았다. 박영호는 아직 앞으로 돌진하던 힘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차우진의 체중이 박영호보다 무거웠다.

"읏차!"

차우진이 상대의 힘을 이용해 박영호를 집어 던졌다. 던지기는 완벽하게 들어갔다.

박영호의 몸뚱이가 옆으로 날아가 콘크리트 벽에 처박혔다.

"케엑!"

차우진은 방금 공격에 만족했다.

"역시 체중이 나가니까 던지기가 더 잘 들어가."

박영호가 벽에 충돌한 후에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등을 벽에 댄 채로 버둥거리며 일어나려고 했다.

차우진이 성큼 다가가 박영호를 발로 찍어 찼다.

그 발에도 체중이 실렸다. 뒤에는 단단한 벽이 있다.

발과 벽 사이에 낀 박영호가 비명을 질렀다.

"꾸엑!"

"응?"

차우진이 발을 내렸다. 박영호가 거품을 물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걸로 기절했냐? 이 새끼 이거. 살기만 약한 게 아니라 독기도 없네. 겨우 이 정도로 기절해?"

멸망한 세계에서는 이 정도 부상으로 기절하는 사람은 오래 못 산다. 독하게 정신을 차리고 버텨야 살아날 기회가 생긴다.

그가 박영호의 몸을 뒤졌다. 휴대폰이 하나 나왔다. 전원은 꺼져있었다.

"이건 대포폰이겠네. 일이 끝나면 보고하는 용도일 테고."

박영호의 주머니에서 이선정의 사진도 한 장 나왔다.

그가 그 사진을 박영호의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역시 의뢰를 받은 게 맞아. 이놈이 그 연쇄살인마라면 이선정 박사의 사진은 필요 없을 테니까."

차우진이 휴대폰과 사진을 박영호의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그 모든 작업을 가죽장갑을 끼고 했다. 지문은 남기지 않았다.

이선정이 다가왔다.

"끄, 끝난 거죠? 그놈 잡은 거죠?"

일단은 이선정을 안심시키고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음…. 일단 이놈은 잡았습니다."

"휴우. 아!"

그녀가 자랑했다.

"제가 방금 경찰에 신고했어요!"

"통화는 하려다 만 거 아니었습니까? 신고하는 말소리는 안 들렸는데."

"문자로 했죠! 문자로도 신고되거든요!"

"아."

어차피 그녀가 목격자라 신고는 해야 한다.

차우진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경찰이 오면 나에 관한 건 모른다고 대충 둘러대고 넘겨요."

"네?"

"내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걸 싫어해서."

그녀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구해준 사람이 그렇게 해달라는데 따질 이유는 없다.

"그럴게요!"

차우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쇄살인마는 여전히 그의 감각에 걸리지 않았다.

'멸망에 개입한 빌런이라 그런지 꼼꼼하긴 한데, 어차피 이 주변에 있겠지.'

***

경찰은 차우진이 그곳을 떠나고 나서 몇 분 후에 현장에 도착했다. 일단은 순찰차 한 대였지만 범인은 이미 제압된 상태라 그 정도면 충분했다.

경찰이 기절한 박영호를 보며 말했다.

"구급차 불러야겠는데?"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이선정이 옆에서 얼른 말했다.

"저놈이 저를 칼로 찌르려고 했어요! 저거 살인자예요! 아니, 살인미수인가?"

"설마 칼에 맞으신 건…."

"맞진 않았지만, 저기 바닥에 칼 보이잖아요. 저기도 보이고요. 칼을 두 자루나 휘둘렀어요."

경찰이 물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제압하신 겁니까?"

이선정이 얼른 대답했다.

"지나가던 사람이 구해줬어요!"

"네?"

"그분이 갑자기 나타나서 저놈을 때려잡고 그냥 가셨어요."

"그…. 그래요?"

"네. 그래요."

"혹시 아는 분…."

이선정이 조금 전 일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옷도 다르고 배도 다르고 목소리도 조금 다르지만, 짐작 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차우진 씨가 운동을 잘한다고 했잖아. 혹시….'

확신은 없지만, 차우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옆으로 크게 흔들었다.

"아니요! 마스크를 쓰고 계셔서 얼굴은 못 봤어요."

경찰이 도착하는 걸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였다.

"와. 저 사람 상태가 왜 저래? 차에 치였나?"

"이런 이면도로에서 차가 설마 속도를 냈겠어?"

"경찰이 가져가는 저거 칼이야?"

"찔렸나?"

"구급차에 실려 가는 거 봐. 피는 안 보이잖아."

현장은 경찰이 통제했지만 사람들은 꽤 가까이서 구경했다. 스마트폰으로 현장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차우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그놈이 저 중에 있으면 일이 편한데 말이야."

사람을 죽이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놈들은, 현대 문명이 멸망한 후에 더 쉽게 살인을 저질렀다.

차우진은 그런 놈들을 많이 보았다. 직접 처리한 놈도 많았다. 그놈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모인 구경꾼들은 흥미만 보일 뿐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것에 분노하는 놈은 보이지 않았다.

"이선정 박사를 보고 살기라도 살짝 흘리면 바로 알 텐데, 그러는 사람이 없네. 그럼 어디에 있나…."

차우진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는 현장이 아니라 구경꾼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놓았다.

"저 중에는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차우진이 사진을 찍은 후에 현장을 떠났다. 그는 그녀의 동선을 고려한 매복 예상 지점을 찾아 이동했다.

"연쇄살인마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꿈속 미래에서는 적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적의 관점에서 작전 계획을 짜곤 했다.

"미끼를 제거하고 이선정을 데려가려면, 이 범위 안쪽에 있어야 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그런 일이 가능한 지점은 한 곳이 아니었다.

현장을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중 일부는 차우진과 엇갈려 지나갔다.

남자 하나도 그런 사람들처럼 그를 향해 걸어왔다. 체형이 꽤 단단했다.

"음?"

표정은 평범했고 차우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얼굴이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본 느낌이었다.

차우진은 내색하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남자가 그의 옆을 지나갔다.

차우진이 그 남자를 지나간 후에 뒤를 돌아보았다.

꿈속 미래의 마지막 시점 기준으로는, 살인마의 얼굴이 나온 뉴스를 본 건 아주 오래전이다. 그나마도 뉴스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아서 그 얼굴을 잊어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마상국을 다시 보자마자 연쇄살인마의 얼굴이 생각났다.

"너구나?"

12. 마상국

차우진이 걸어가는 방향 오른쪽에 좁은 골목이 있었다. 차우진이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상국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 갔지?"

조금 전에 스쳐 지나간 사람이 사라졌다.

"나를 쳐다본 느낌이었는데 말이야."

그는 지금 사건 현장으로 가는 중이다. 이럴 때는 평소라면 그냥 넘어갈 사소한 것도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 뒤돌아봤는데 차우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날개가 달려서 날아간 건 아닐 테니까, 옆 골목으로 이동했을 텐데."

오른쪽에 좁은 골목이 보였다. 그와 지나친 후에 그 골목으로 들어갔다면 사라진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마상국이 인상을 쓰다가 옆을 보았다. 그쪽에 다른 골목이 있었다.

"느낌이 안 좋아."

***

차우진은 마상국과 스쳐 지나간 후에 일부러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골목이 아니라 가던 길을 계속 갔다면 의심은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 연쇄살인마를 잡을 기회도 날리게 된다.

'놈을 미행한다.'

그러려면 돌아가서 마상국을 찾아야 한다. 그가 골목으로 들어간 후에, 마상국이 가던 방향으로 이동했다.

"음?"

상황이 변했다.

사람이 움직일 때는 소음이 난다. 그런데 마상국이 지나가야 하는 곳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상대가 '고양이 발걸음'으로 걸으면 이동하는 소리를 숨길 수는 있다.

'지금 시기에 누군가 그 스킬을 각성했을 리는 없지.'

그러면 생각할 수 있는 건 둘뿐이다. 마상국이 움직임을 멈췄거나, 방향을 다른 쪽으로 틀었어야 한다.

차우진이 이 지역의 지도를 떠올렸다. 그를 쫓아온 것도 아니고 이 방향으로 간 것도 아니라면, 의심 가는 건 하나뿐이다.

"너도 내 뒤를 잡으려는 거냐?"

마상국이 다른 골목을 통해 차우진이 지나간 골목으로 접근했다.

그는 그러면 차우진의 뒤를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진입한 골목에 차우진은 보이지 않았다.

마상국이 혀를 찼다.

"쯧. 이미 지나갔나? 아니면 이 근처에 사나?"

이 골목을 빠르게 달려서 통과하면 이미 지나가서 안 보인 것인지는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남들 눈에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지."

마상국은 박영호가 붙잡힌 현장을 멀리서 확인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이 조금 찜찜했다.

"현장 확인은 포기해야겠어."

마상국이 사건 현장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통해 조금 걸어가자 주변 주택의 불이 모두 꺼진 조용한 곳이 나타났다.

아무도 없어야 하는 어두운 골목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마상국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둠 속에서 차우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우진이 삐딱하게 서서 물었다.

"야. 그냥 가면 어떻게 하냐? 현장은 보고 가야지."

마상국의 자세가 조금 변했다. 다리는 언제든 땅을 박찰 수 있는 상태로 변했다. 양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마상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골목에서 나를 쳐다본 사람이군."

"저지른 짓이 있어서 그런지 눈치가 빠르네."

"그런데 왜 나를 기다렸지? 난 그냥 지나가던 길인데?"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개도 안 믿을 소리를 하네."

그다음 말을 할 때는 웃음이 사라졌다.

"연쇄살인마 새끼가."

마상국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너 누구냐?"

"저승사자."

"뭐?"

"너한테 죽은 원혼들이 너 꼭 잡아달라고 부탁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

마상국의 표정이 굳었다.

"진짜냐?"

"진짜겠냐? 이 새끼 이거 살인만 잘하지 사기 잘 당하겠네?"

마상국의 얼굴이 걸레처럼 구겨졌다.

"감히 나에게 거짓말을 해?"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사실, 네가 아닐 가능성이 1%쯤은 있었단 말이야."

마상국의 얼굴이 꿈속 뉴스에서 본 것과 비슷하긴 했다. 거기다 현장 근처에서 목격됐다.

그게 다 우연이 겹친 것뿐일 확률이 있기는 있었다. 1% 미만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차우진은 그래서 직접 상대를 만나 떠보았다.

마상국의 반응은 예상 그대로였다.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넌 연쇄살인마 맞아."

이젠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상국은 차우진이 그의 얼굴을 안다는 걸 모른다. 그래서 즉시 반박했다.

"네 말에 맞장구쳐준 것뿐이다. 난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

"나한테 찾아온 원혼이 다섯이다. 넌 최소한 다섯 명은 죽였잖아."

꿈속 미래 기사에서는 이선정 박사가 여섯 번째 피해자라고 했다.

마상국의 구겨졌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저승사자는 확실히 아니군."

차우진은 그 반응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아직 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구나.'

차우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관없긴 하지. 지금까지 몇 명을 죽였든, 네가 연쇄살인마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마상국이 등 뒤에 손을 넣었다가 폈다. 손에 칼이 쥐어져 있었다.

칼날의 길이는 30cm였다. 두께는 레이피어처럼 얇았다. 칼의 두께가 얇고 폭도 좁아 외투 속에 숨기면 표가 나지 않았다.

마상국이 칼을 허공에 대고 빙글 돌렸다.

"네가 다섯 번째가 되어줘야겠다."

"아. 칼이다."

"이제야 현실을 깨달았나?"

"나도 칼이 있다는 게 생각나서."

아까 잡은 청부업자 박성호는 두 자루의 칼을 사용했다. 그건 경찰에게 넘겨줄 증거품이라 가져오지 않았다.

차우진이 꺼낸 칼은 손가락 길이의 작은 칼날이 달린 소형 나이프였다. 접으면 작은 막대기로 변하는 그 칼은 풍물시장에서 샀다.

그는 청부업자 김준배를 잡을 때도 그 칼을 썼다.

마상국이 30cm짜리 칼날을 천천히 흔들며 킬킬댔다.

"칼의 차이가 보이지 않나? 감히 내 앞에서 이쑤시개를 꺼내?"

"찔려보면 생각이 바뀔걸?"

마상국은 시간을 오래 끌 수 없다. 여기는 주변 주택의 불이 꺼진 곳이지만, 언제 누가 나타날지 알 수 없다.

마상국이 칼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죽기 전에 알려주지. 나는 진짜 칼잡이다."

"다른 놈들도 그렇게 말하긴 하더라."

마상국이 차우진을 향해 돌진하며 칼을 내질렀다.

"뒈져!"

마상국은 차우진을 단칼에 끝내기 위해 최단거리 경로를 골라 베었다. 칼날이 직선을 그리며 고속으로 날아갔다.

무기의 차이가 너무 커서 풍물시장에서 산 조그마한 나이프로는 그 칼을 받아치기 어려웠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을 발동했다. 스킬의 효과가 적용되는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았다.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마상국의 자세가 어떻게 변하고, 다리와 허리가 어떻게 팔에 힘을 보태는지 순식간에 파악했다.

'처음부터 목을 노리네?'

현대 문명이 멸망하면 모든 물자가 부족해진다. 총알은 총을 쏘면 소모되기 때문에 특히 더 부족했다.

수공업 방식으로 총알을 만드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막대한 수요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 세계에는 마상국보다 빠른 칼잡이가 여럿 있었다.

차우진이 몸을 뒤로 젖혔다. 적의 칼날이 그의 얼굴 위, 딱 한 뼘 떨어진 허공을 베고 지나갔다.

회피와 반격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차우진이 뒤로 몸을 젖히며 오른손을 위로 들었다.

풍물시장에서 산 작은 칼이 적의 손목을 훑었다.

시간 가속 효과가 끝나면서 마상국이 비명을 질렀다.

"끄악!"

마상국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힘을 잃은 손은 30cm짜리 칼날이 달린 칼을 붙잡지 못했다. 칼이 옆으로 날아가 골목 벽에 부딪힌 후에 떨어졌다.

마상국이 다친 오른손 대신에 왼손을 등 뒤로 돌려 새로운 칼을 잡으며 말했다.

"이 새…."

차우진이 성큼 전진했다. 적의 정체를 확인했으니 무기를 뽑을 시간을 줄 이유는 없다.

시간 가속은 이미 끝났지만 상관없었다. 마상국이 대응하기도 전에 차우진이 발을 앞으로 내질렀다.

마상국이 두 번째 칼을 뽑는 것보다 차우진의 발차기가 빨랐다.

"컥!"

마상국은 가슴을 걷어차이며 뒤로 밀려갔다. 하지만 자빠지지는 않고 버텼다.

차우진이 인상을 썼다.

"내 체중을 버티는 이 느낌은…."

발에 걸리는 감각이 사람의 몸과 조금 달랐다.

"방검복이네? 기성품은 아닌 것 같고, 개조했냐?"

마상국이 왼손을 앞으로 뿌렸다. 단검이 차우진을 향해 날아왔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던진 단검을 눈으로 보고 피하는 건 어렵다.

차우진에겐 쉬운 일이다. 그는 이미 마상국의 어깨가 움직일 때부터 단검을 던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반격은 워낙 많이 경험해 봐서 당해줄 수가 없었다.

차우진이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단검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담벼락에 맞아 떨어졌다.

마상국은 칼이 빗나가는 걸 보자마자 뒤로 펄쩍 뛰었다.

'저 새끼는 왜 저렇게 반응이 빨라!'

그는 이미 오른손목을 다쳤다. 칼도 두 자루 다 소모했다.

이런 상태로는 차우진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내가 불리하다!'

그런 결론이 나자마자 뒤로 뛰어 도망쳤다.

차우진이 말했다.

"판단이 빠른 놈이네."

도망치는 마상국의 앞에 골목의 벽이 나타났다. 방향을 오른쪽으로 꺾으려면 달리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마상국이 속도는 줄이지 않고 몸을 띄우며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발로 골목의 벽을 밀어 차며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차우진이 그걸 보며 불평했다.

"아. 나도 뛰어야 하는구나."

마상국은 새로운 골목에 진입한 후에도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차우진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칼에 찔린 손목의 고통을 참고 도망쳤다.

어느 골목으로 뛰어야 CCTV가 없는지는 이미 조사해 외워두었다. 그래서 도망치는데 거침이 없었다.

마상국은 숨이 헐떡일 때까지 뛰었다. 직선으로 뛴 것도 아니고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가면서 추적을 따돌렸다.

길가에 주차해놓은 낡은 1톤 트럭이 보였다. 마상국이 급히 운전석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트럭의 짐칸에는 삽과 마대 자루, 방수포로 덮어둔 잡다한 도구 등이 실려 있었다.

삽과 마대 자루는 그가 사람을 묻을 때 쓰는 것이다. 범행에 사용하는 그 도구들을 농사나 공사 장비처럼 싣고 다니면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마상국이 서둘러서 차의 시동을 걸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차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씨발! 그 새끼 뭐야!"

그가 사이드미러를 슬쩍 보았다. 쫓아오는 사람이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씨발."

그는 그 지역을 완전히 벗어난 후에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손목의 상처를 확인했다.

칼에 맞긴 했지만 관통되진 않았다. 차우진이 사용한 칼이 워낙 작아서 큰 부상은 아니었다.

그가 손목에 소독약을 뿌렸다. 고통이 밀려왔다.

"끄아아! 씨바알!"

그가 욕을 하며 상처를 붕대로 감았다. 차에는 간단히 처치할 수 있는 의약품들이 있었다.

그는 마약성 진통제도 꺼내 입에 넉넉히 털어 넣었다. 그런 후에 차를 몰고 그곳을 떠나며 이를 갈았다.

"다음에는 다를 거다. 너라는 새끼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사람도 더 쓰고 함정도 더 파서 확실히 죽여버릴 테다!"

마상국은 1톤 트럭을 몰고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로 이동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외진 곳에 튼튼해 보이는 창고가 하나 있었다.

마상국이 창고 옆에 차를 세웠다. 그가 창고 문으로 걸어가며 결정했다.

"그래. 새로운 미끼는 역시 이선정이 좋겠어."

창고의 문에는 두꺼운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그는 자물쇠를 확인하고 창고 문에 붙여둔 작은 테이프도 확인했다. 누가 문을 연 흔적은 없었다.

그가 열쇠로 문을 열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는 기름칠을 충분히 해둬서 열 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창고 안에는 잡다한 도구가 많았다. 한쪽 벽 앞에 설치한 장비 거치대에는 톱이나 칼도 있었다.

문제는 그 안쪽이었다.

안쪽 기둥에 쇠사슬로 묶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몸에는 상처가 많았다. 칼에 찔린 곳도 있었다. 얼굴도 너무 맞아 심하게 부어있었다.

마상국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씨발. 다음 타깃을 확보한 후에 이걸 즐기려고 했는데."

유소진이 맞아서 부은 눈을 억지로 떠 마상국을 보며 욕을 했다.

"미친 새끼."

"이제는 살려달라고도 안 하네?"

"어차피 죽일 거잖아."

그녀는 납치된 후에 한동안은 살려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다. 마상국은 그녀가 살려달라고 비는 걸 즐길 뿐, 그녀를 살려줄 리가 없다.

마상국이 말했다.

"오늘 비명을 질러줄 관객도 세팅하려고 했는데."

그는 이선정을 납치해 관객으로 앉혀놓고 그녀 앞에서 유소진을 죽일 계획이었다.

그런데 실패했다.

"그 새끼 때문에 틀어졌어."

그는 이선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계획이 실패하는 바람에 갈증이 더 심해졌다. 당장 피를 보고 싶은 충동을 참기 어려웠다.

마상국이 장비를 진열해 놓은 곳으로 가서 칼을 잡았다.

"이러면 재미가 떨어지는데. 네가 살려달라고 빌어야 내가 재미…."

창고 문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비는 건 어떠냐? 그건 재미있겠는데."

마상국이 뒤로 휙 돌아섰다.

차우진이 창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마상국의 눈이 커졌다.

"어? 너 이 새끼…."

"놀랐냐?"

"여기를 어떻게 따라왔지?"

"잘?"

마상국이 소리를 질렀다.

"그건 불가능해! 출발할 때는 물론이고 저 시골길을 지나올 때도 미행하는 차는 없었단 말이다!"

13. 고수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꼼꼼한 게 아니라, 눈으로 봐도 못 믿는 놈이었네?"

마상국이 소리를 질렀다.

"미행은 불가능하다! 내가 뒤를 철저히 확인하면서 왔단 말이다!"

차우진은 1톤 트럭을 미행한 게 아니다. 아예 마상국이 모는 1톤 트럭의 짐칸에 올라탔다.

그러니 마상국이 뒤를 아무리 봐도 미행하는 차가 있을 리 없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 불가능한 걸 내가 해냈지."

"도대체 어떻게!"

"너한테 가르쳐주겠냐?"

차우진은 마상국이 탄 1톤 트럭이 출발할 때 블링크 스킬을 사용해 짐칸으로 이동했다. 트럭이 급히 출발할 때의 흔들림이 짐칸에 사람 체중이 늘어날 때의 작은 흔들림을 숨겨주었다.

"네가 메뚜기처럼 뛰어서 도망치니까 내가 너 따라 뛰느라 좀 힘들었다."

근력은 평범한데 체중이 늘었기 때문에 좀 힘들긴 했다.

"그렇다고 아침마다 조깅을 하긴 싫은데…."

"무슨 개소리야!"

차우진이 손뼉을 쳤다.

"그러니까 결론은."

차우진은 아까 마상국을 놓친 게 아니다.

"내가 너 일부러 풀어준 거야."

꿈속 미래에서는 이선정 박사가 연쇄살인마의 여섯 번째 피해자로 알려졌다. 그러면 그녀가 살아있는 지금까지는 피해자가 다섯 명이어야 한다.

피해자의 숫자가 차우진이 아는 것보다 많을 수는 있다. 꿈속 미래의 수사기관이 마상국의 살인을 다 밝혀내지 못했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마상국은 차우진이 다섯 명이라고 말하자 '저승사자는 확실히 아니군.'이라고 말하며 구겨진 얼굴을 좀 폈다. 거기다 차우진에게 다섯 번째 피해자가 되라고까지 말했다.

그래서 아직 당하지 않은 생존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생존자를 찾으려고 일부러 마상국을 놓아준 후에 뒤따라왔다.

"너 따라서 뛰느라 힘들었다. 이러다 배 들어갈라."

마상국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를 어떻게 찾았냐고! 분명히 내 트럭을 따라오는 차는 없었단 말이다!"

"넌 아직도 거기 집착하네? 안 가르쳐준다니까?"

"씨바알!"

쇠사슬로 묶여 있는 유소진은 처음에는 차우진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녀를 납치한 살인마 마상국과 어떤 관계인지, 한패인지, 아니면 다른 범죄자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미 살려달라고 빌지도 않을 정도로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둘의 대화를 들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둘이 같은 편이 아니야?'

포기했던 희망이 갑자기 생겼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붙잡고 살고 싶었다.

유소진이 간절하게 외쳤다.

"살려주세요!"

차우진이 그녀를 향해 걸어가며 대답했다.

"그러려고 왔습니다."

"지, 진짜요?"

"네. 진짜로요."

유소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고마워요."

마상국이 화를 냈다.

"둘 다 죽여버릴 거야!"

"너 아까 나한테 얻어터지다 도망쳤잖아. 네 실력으로 되겠냐?"

"아까는 칼이 짧았지만!"

마상국이 진열대에 있는 장비 중에서 장검을 잡으려 했다.

그건 마상국이 일본도 사진을 보고 이곳에서 그라인더로 쇠를 갈아 직접 만든 칼이다.

차우진이 오른팔을 옆으로 휙 뻗었다. 손에 쥐고 있던 작은 나이프가 마상국의 팔을 노리고 날아갔다.

마상국도 이번에는 그냥 당하지 않았다. 급히 몸을 옆으로 비틀어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차우진이 던진 칼이 나무로 만든 거치대에 박혔다.

마상국이 장검을 뽑으며 소리를 질렀다.

"피했어! 피했다고! 이제 넌 이제 무기가 없단 말이다!"

"칼만 무기가 되는 건 아니지."

차우진이 왼손을 움직였다. 팔 뒤에 가려져 있던 짧은 쇠막대가 나타났다.

"네 차 짐칸에 좋은 게 있더라?"

"씨발. 겨우 그걸로 내 칼의 상대가 될 거 같아?"

"돼."

마상국은 오른손을 다쳤다. 그래도 아까 먹은 마약성 진통제 덕분에 그럭저럭 움직일 만했다.

유소진이 외쳤다.

"조심하세요! 그 새끼 검도 유단자라고 했어요!"

마상국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가 장검을 똑바로 세우며 말했다.

"크히히히. 이미 늦었다. 내 검도는 원래 이런 장검을 써야 진짜 위력이 나오니까!"

차우진이 말했다.

"새끼가 말 많네. 언제 들어오냐?"

"이 새끼가!"

마상국이 바닥을 빠르게 밟으며 차우진을 향해 전진했다.

검도 고수라는 말은 진짜였다. 마상국의 걸음에는 언제든지 전진과 후진,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보법 기술이 들어 있었다.

차우진은 그걸 보고도 그냥 제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마상국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게 서 있으면 칼에 맞을 수밖에! 넌 이제 죽는다!'

마상국이 바닥을 박차며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칼날이 차우진을 향해 날아갔다.

'이건 못 피해!'

차우진은 마상국이 공격하는 순간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마상국의 공격이 원래 속도의 절반으로 느려졌다.

차우진은 적의 발이 바닥의 어디를 어떻게 밟았는지, 다리의 각도는 어떤지, 체중은 어디로 이동하고, 어깨 근육이 어떻게 꿈틀거리는지를 모두 파악했다.

칼이 들어올 경로가 보였다.

'내 심장을 노리는군.'

멸망한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았던 그에게 이렇게 정면에서 들어오는 공격이 통할 리 없다.

차우진이 뒤로 슬쩍 물러나며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면서 왼손의 쇠파이프로 적의 칼날을 받았다.

쇠파이프가 칼날과 충돌했다. 칼날이 쇠파이프를 긁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차우진은 몸을 튼 방향의 반대쪽으로 칼날을 밀어냈다. 칼날이 밀려난 거리는 겨우 한 뼘이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칼날이 허공을 베었다.

마상국은 깜짝 놀랐다. 상대가 뭘 해냈는지 깨달았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내 칼을 빗겨내?'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한 단어로 불리곤 한다.

'고수다!'

마상국은 빨리 다음 수를 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수평 베기를….'

늦었다.

차우진이 왼발로 바닥을 밀어 차며 오른쪽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이 마상국의 얼굴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마상국이 황급히 머리를 젖히며 몸을 비틀었다. 그걸로는 부족했다. 마상국이 허리도 비틀었다. 그의 몸이 옆으로 크게 젖혀졌다.

그는 확신했다.

'됐다! 피했다!'

반격하기 어려운 자세가 됐지만, 일단 피하긴 했다고 판단했다.

차우진이 손바닥을 펴고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리며 마상국의 머리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 끝에 전투보조 스킬인 관통력 강화가 걸렸다.

장갑을 낀 손끝이 마상국의 귀를 긁고 지나갔다.

단지 스치듯 긁었을 뿐인데 귀가 쭉 찢어졌다. 차우진은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는데도 마상국의 귀가 뜯겨나가듯이 찢어졌다.

마상국은 마약성 진통제를 먹은 상태다. 그런데도 귀가 찢겨나가는 고통은 참기 어려웠다.

"끄아악!"

진통제 덕분에 귀가 뜯겨나가는 중에도 옆으로 뛸 수는 있었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칼을 아래로 내려 옆으로 휘둘렀다.

"죽어!"

차우진이 들어오는 칼을 쇠파이프로 쳐냈다.

"느리네."

그가 마상국에게 다가가며 발차기를 내질렀다.

마상국이 손으로 발을 막으려 했다.

발은 손보다 강하다. 게다가 이 발차기에는 차우진의 체중까지 실렸다.

체중을 실은 발차기가 마상국의 배에 꽂혔다.

"커억!"

마상국이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차우진은 쫓아가지 않았다. 쫓아갈 수가 없었다.

"아이고."

그의 전투 감각은 꿈속 미래에 맞춰져 있는데 지금 신체는 배가 나와서 유연성이 떨어졌다.

방금 공격으로 허리가 쑤셨다.

"나중에 파스 붙여야겠다."

게다가 그는 시간 가속 스킬을 쓰자마자 관통력을 높이는 전투보조 스킬까지 추가로 사용했다.

단련되지 않은 몸으로 스킬을 연달아 사용했더니 피곤했다.

"역시 고기를 더 먹어야겠어."

벽에 처박힌 마상국이 욕을 하며 일어났다.

"이 새끼가…."

그 와중에도 마상국은 칼을 놓지 않았다.

"죽인다!"

"살인을 많이 해본 새끼라 그런지 죽인다는 말은 참 잘한다. 그런데 능력은 되고?"

마상국이 눈알을 굴렸다. 정면 대결로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의 눈알이 옆으로 슬쩍 움직였다가 돌아왔다. 왼손으로는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작은 잭나이프였다.

마상국이 킬킬댔다.

"너 말이야. 저 여자를 구하러 왔지?"

차우진의 표정이 굳었다.

"이 새끼가?"

마상국이 갑자기 작은 칼을 유소진을 향해 던졌다.

검도 유단자가 던진 단검은 정확히 그녀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그녀는 몸이 쇠사슬로 묶여 있어서 피할 방법이 없었다.

차우진이 아무리 빨리 뛰어도 날아가는 칼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마상국은 유소진이 단검에 맞을 거라고 확신했다.

마상국이 그녀에게 칼을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절망해라!"

차우진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블링크 스킬을 사용해 공간을 건너뛰었다.

그는 날아가는 칼보다 먼저 유소진의 앞에 나타나 잭나이프를 쇠파이프로 쳐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창고를 울렸다.

유소진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꺅!"

마상국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입도 크게 벌렸다.

"뭐…."

그는 방금 본 게 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뭘 어떻게 한 거야!"

차우진이 마상국은 무시하고 유소진에게 물었다.

"봤습니까?"

그녀가 얼른 대답했다.

"봤어요!"

"어디까지?"

"저 새끼가 칼을 던졌는데 그걸 막아주셨잖아요. 야구선수가 배트로 공을 치듯이요. 제가 눈이 부어서 잘 안 보이는데, 그러신 거 맞죠?"

"맞습니다. 저놈이 칼을 던지려는 걸 눈치채고 달려와서 쳐냈죠. 부은 눈으로도 정확하게 보셨네."

"고마워요!"

"별말씀을."

마상국이 소리를 질렀다.

"너 뭐야!"

"저승사자."

마상국은 차우진이 공간을 건너뛰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건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차우진이 저승사자라고 한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너, 너, 분명히 저기서 저기로…."

차우진이 마상국을 향해 돌진했다. 이번에는 블링크가 아니라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마상국이 즉시 칼을 수평으로 그었다.

차우진이 그 칼을 쳐내며 칼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마상국이 뒤로 피하려고 왼발을 뺐다.

차우진이 더 빨랐다. 그가 주먹을 내질렀다. 무거운 체중에 달려온 속도까지 더해진 주먹이 마상국의 가슴을 타격했다.

"켁!"

마상국이 비명과 함께 뒤로 밀려나 벽에 충돌했다.

마상국은 개조한 방검복을 입고 있었다. 차우진의 주먹은 그 방검복 너머에 타격을 입혔다.

갈비뼈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마상국은 벽에 충돌했다가 앞으로 튕겨 나왔다. 차우진이 왼손으로 마상국의 목을 잡아 벽에 도로 밀어붙였다.

"컥!"

마상국이 왼손에 든 칼을 움직여 차우진을 베려고 했다.

"끄…."

차우진이 쇠파이프로 그 칼을 쥔 손을 후려쳤다. 쇳소리와 함께 칼이 옆으로 날아갔다. 마상국의 손가락도 부러졌다.

그러는 사이에 마상국이 오른손으로 차우진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차우진이 갑자기 손을 쓱 빼며 뒤로 물러났다.

마상국의 오른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 손을 차우진이 다시 쇠파이프로 올려쳤다.

"크악!"

마상국은 이제 두 손이 다 부러졌다. 그가 옆으로 빠져나가려고 다리를 움직였다.

차우진이 마상국의 다리를 걷어찼다. 걷어차인 발이 공중으로 뜨며 마상국이 옆으로 나자빠졌다.

"컥!"

차우진이 바닥에 자빠진 마상국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아까 마상국을 일부러 놓아준 건 납치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이긴 하다. 그런데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 골목에서 마상국을 잡으면 목격자가 나올 수 있다. 경찰이 뭔가 찾아낼 수도 있다.

마상국이 피해자를 가둬둔 곳은 인적이 드문 장소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정보는 꿈에서 본 미래 방송에 여러 번 나왔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왔다. 생존자를 구출하고 마상국도 끝내야 한다.

차우진이 유소진에게 말했다.

"눈 감아요."

"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안 보는 게 좋아서."

목격자가 있어서 좋을 건 없다. 정황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지만, 그래도 직접 본 사람은 없는 게 좋다.

유소진은 그 제안을 오해했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러시나 보다.'

"괜찮아요. 저는 두 눈 부릅뜨고 그 새끼가 처맞는 걸 보고 싶어요."

"내가 안 괜찮아요."

"네? 앗! 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고개만 돌려도 될까요? 눈 감는 건 좀 무서워서…."

"그렇게 해요."

"네!"

유소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몸은 묶여 있지만, 고개를 비트는 정도는 가능했다.

"손을 조금은 움직일 수 있지요? 귀도 막아요."

"네? 네!"

차우진이 옆으로 걸어가 마상국이 떨어뜨린 장검을 주웠다.

마상국이 몸을 일으키려고 바닥을 짚었다. 손이 부러져서 바닥을 짚을 수가 없었다.

마상국이 그 상태로 킬킬 웃었다. 그는 차우진이 유소진을 구하러 왔다고 판단했다. 유소진이 구출되면 살아있는 목격자가 된다.

"칼을 들어서 어쩌게? 그걸로 나를 찌르게? 그러면 너도 경찰에 체포되고 처벌받는다."

"내 생각은 다른데."

"그렇게 될 거다! 내가 너를 고소할 거니까!"

차우진이 물었다.

"죽은 놈이 고소를 어떻게 하는데?"

마상국이 멈칫하다 다시 웃음을 흘렸다.

"사람을 죽일 줄은 아나? 크크크."

차우진이 방금 주운 장검으로 마상국을 푹 찔렀다.

"끄아악!"

"아주 잘 알지."

14. 유소진

마상국은 마약성 진통제를 먹었는데도 칼에 찔리는 고통은 버티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는 차우진이 목격자가 있는 곳에서 찌를 줄은 몰랐다. 그래서 당황했다.

"끅. 이 새끼…."

차우진이 마상국의 몸에 박아넣은 장검을 쑥 뽑았다.

"끄아악!"

마상국이 비명을 지르면서 황급히 왼손으로 상처를 막았다. 왼손은 손가락만 다쳐서 손바닥으로 상처를 누를 수는 있었다.

마상국은 확실히 깨달았다.

'이 새끼는 진짜다!'

그는 차우진이 언제든지 그를 죽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저 여자가 목격자가 될 텐데 어떻게 나를 찌를….'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저 여자와는 상관없는 놈이라면? 내가 예전에 처리한 것들의 가족이나 애인이라면?'

원한을 갚으려고 찾아왔다면 그를 죽일 수 있다.

마상국이 손으로 칼에 찔린 상처를 누르며 사정했다.

"사, 살려줘. 내가 반성할게. 반성."

차우진이 마상국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마상국을 오늘 처음 본다. 가족이 마상국에게 당한 것도 아니다.

살려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연쇄살인으로 교도소에 들어가면 10년 이내에는 풀려날 리 없다.

오메가 바이러스가 터지는 건 10년 후다. 이선정 박사가 살아있으면 그 전에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다.

차우진이 마상국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경찰에 넘기는 것도 해결방법이긴 한데….'

마상국은 차우진이 반응이 없자 다른 이유를 찾으려고 머리를 굴렸다.

'혹시 복수하러 온 것도 아닌가?'

그는 최근에 다른 살인자가 죽은 사건이 떠올랐다. 김준배가 이선정의 주변을 맴돌다 충청도에 있는 산에서 누군가의 칼에 죽었다. 그 사건은 뉴스에 나왔다.

'그 새끼를 이 새끼가 죽였나?'

마상국도 김준배를 죽일 생각이었다. 김준배가 그의 타깃인 이선정 박사를 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준배는 그가 손을 쓰기 전에 누군가에게 먼저 죽었다.

'어? 그럼 이 새끼의 목적은 이선정인가?'

오늘 이선정에게 미끼로 보낸 청부업자는 누군가에게 당했다. 그러고 나서 마상국이 차우진과 마주쳤다.

마상국은 차우진의 목적을 깨달았다.

'이선정을 지키려는 거야! 그런데 난 이선정은 아직 안 죽였잖아!'

마상국이 다급히 제안했다.

"내가 이선정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할게! 그 여자는 그냥 보기만 했지, 건드린 적은 없잖아! 앞으로도 쳐다도 안 볼게!"

차우진이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까 결정하기가 쉽네."

마상국을 살려줄 수는 있다. 경찰에 넘겨 교도소로 보내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차우진은 아주 작은 리스크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체포된 후에 도망치거나, 교도소에서 탈출하거나, 납치 하나 외에는 증거가 없어서 너무 빨리 풀려나면 말이야."

이선정이 살해당하면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도 없다.

"네가 살아서 이선정 박사를 죽이면, 너 때문에 40억 명이 죽어."

오메가 바이러스의 치사율은 약 50%다. 전염력도 굉장히 높다. 멸망급 재난인 오메가 바이러스가 제대로 터지면 40억 명이 죽는다.

꿈속 미래에서 오메가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는 그것보다는 적었다. 그런데 그건 다른 여러 멸망급 재난으로도 워낙 많은 사람이 사망하기 때문이다.

마상국은 차우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40억이 죽다니? 내가 40억이나 죽일 리가 없잖아!"

그건 마상국이 아직은 저지르지 않은 죄다.

"그게 네가 앞으로 저지르려 했던 짓이다."

상대는 살인을 즐기는 연쇄살인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이런 살인마를 살려주면 내가 죽는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또 죽는다. 그 교훈은 피를 대가로 바치고 얻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네가 교도소에서 너무 일찍 탈출하면 멸망급 빌런이 될 테고, 10년 후에 교도소가 무너지고 나서 탈출하면 하이에나가 되겠지."

마상국이 다급히 말했다.

"내 말을 들어봐! 나를 살려줘야 너도 빠져나갈 수 있…. 커억!"

차우진이 마상국의 가슴에 장검을 꽂았다.

"그리고 말이야."

차우진이 칼에서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역시 악마는 다 뒈져야지."

마상국은 팔을 앞으로 뻗은 채로 죽었다.

차우진이 손을 보았다. 꿈속 미래에서는 죽고 죽이는 일이 일상이었는데, 현실에서는 이제 두 번째로 적을 죽였다.

하지만 충격은 없었다. 꿈속 미래의 치열한 경험과 멸망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멘탈에 단단한 정신 방벽을 세워주었다.

전투가 끝났다. 날카롭게 강화됐던 감각이 평소 상태로 돌아왔다.

차우진이 현장을 보며 말했다.

"또 저질렀네. 이번엔 목격자도 있…. 아! 목격자."

차우진이 유소진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상태였다. 몸을 조금 떠는 게 보였다.

'조금은 들렸겠지.'

차우진의 말은 목소리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듣지 못했어도, 마상국이 외친 소리는 들었을 수 있다.

차우진이 창고 내부를 확인했다. 한쪽에 스마트폰 다섯 대가 진열되어 있었다. 평범한 최신폰도 있고, 예쁜 액세서리로 장식된 스마트폰도 있었다.

"이 새끼는 피해자들의 휴대폰을 트로피로 삼았구나."

그가 유소진에게 다가갔다.

"이제 귀에서 손 떼도 됩니다."

"네? 그래요? 그럼…. 앗! 아무 소리도 안 들렸어요!"

"손 떼라는 말은 잘 듣던데요."

"그, 그거야 옆에서 말을 하시니까."

그녀가 옆을 보다가 움찔했다. 마상국이 가슴에 장검을 꽂은 채로 죽어 있었다.

"죽은 거예요?"

"네."

그녀는 이곳에 묶여서 마상국에게 얻어맞고 칼에 찔리면서도 살려달라고 빌었었다. 그러다 차라리 죽이라고 악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 괴물 같던 마상국이 죽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잘하셨어요! 저 새끼는 죽어야 해요! 나쁜 새끼! 지옥에나 떨어져라!"

"이 문제는 우리 의견이 일치하는군요."

"당연하죠!"

차우진이 진열대를 가리켰다.

"저 중에 본인 휴대폰이 있습니까?"

"네? 네! 있어요! 저기 저 분홍색 고양이 케이스요!"

차우진이 그 스마트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가 전원을 켰다.

부재중 문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나를 걱정한 사람이 이렇게 많아…."

차우진이 말했다.

"경찰에 신고해요."

그녀는 깜짝 놀랐다.

"네? 그래도 돼요? 하지만 그러면 곤란해지실…. 아! 이미 돌아가신 피해자분들과 가족분들을 위해서…."

유소진은 희망을 잃었을 때도 가족 생각은 났다. 그래서 피해자들의 가족이 어떤 심정일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연락하라고 하시는 거구나."

차우진이 단서를 달았다.

"신고는 내가 여길 나가고 10분쯤 후에 해요. 나도 빠져나갈 시간이 있어야지."

유소진이 얼른 제안했다.

"그럼 아예 한 시간 후에 할까요?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10분이면 충분합니다. 너무 늦으면 우리가 공모했다는 의심을 받아요."

"아…. 알겠어요. 저기 그럼, 저 좀 풀어주세요."

그녀는 쇠사슬로 기둥에 묶여 있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 상태로 묶여 있는 게 나을 텐데."

"네?"

"그럼 그쪽이 의심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

유소진이 마상국의 시체를 보았다.

"아! 이렇게 묶여 있으면 제가 저 새끼를 죽인 건 확실히 아니죠!"

"누가 그랬는지는 못 봤지만요."

"그럼요!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저기, 그런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를 구하러 오신 거 맞죠? 제 이름은 유소진이거든요?"

"네. 유소진 씨를 구하러 왔습니다."

갑자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고마워요."

차우진이 그녀가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10분 후입니다. 딱 10분 후에 신고해요."

"네! 정확히 10분 기다릴게요!"

차우진이 던진 작은 단검은 나무로 만든 장비 거치대에 꽂혀 있었다.

차우진이 그 단검을 뽑은 후에 창고를 나갔다.

유소진은 이 공간에 혼자 남는 게 무서웠다.

그렇다고 차우진을 붙잡을 수는 없다.

"나를 구해주신 분이 체포되게 할 순 없잖아."

그녀가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마상국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꼴 좋다. 퉤."

떨림이 조금 사라졌다.

차우진은 창고에서 나온 후에 주변을 보았다. 이 주변은 물론이고 여기까지 오는 길에도 CCTV는 없었다.

"그놈이 일부러 추적이 어려운 곳에 살인 시설을 만든 건 알고 있는데."

미래의 마상국은 이선정 박사 이후에도 네 명을 더 죽인 후에 잡혔다. 이 주변에는 CCTV가 아예 없어서 그 시기의 경찰은 이곳을 보름 만에 겨우 찾아냈다.

"그래도 뭐, 확실한 게 좋겠지."

어차피 밖으로 나지는 길을 걸어서 빠져나갈 수는 없다. 그 길에 CCTV는 없어도 드물게 지나가는 누군가의 차에 목격될 수는 있다.

차우진이 옆을 보았다. 창고 옆에 산이 있었다. 그 뒤로도 계속 산이었다.

블링크는 단거리 공간이동에 사용하는 스킬이다. 스킬 발동 시간이 짧아 전투에 쓰기 좋지만, 장거리를 이동하는 건 어렵다.

그런 블링크 스킬이라도 차우진이 쓰면 추적자가 쫓아오지 못하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차우진이 블링크 스킬을 정밀하게 사용했다. 첫 번째 이동 지점은 창고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밟아도 흔적이 남지 않는 돌 윗부분이었다.

***

유소진은 정확히 10분 후에 112에 전화를 걸었다.

"살려주세요! 살인마에게 납치됐어요!"

젊은 여자가 살인마에게 납치됐다고 신고했다.

그 지역 경찰에 즉시 비상이 걸렸다. 가장 가까운 파출소에서 경찰 두 명이 순찰차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순찰차에서 순경이 물었다.

"진짜 신고일까요?"

운전하던 경사가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차라리 장난 전화면 좋겠다. 살인사건보다는 장난인 게 낫잖아."

"그래도 아직 살아있으니까 신고한 거잖습니까? 아직은 살인사건이 아니죠."

"그러니까 더 빨리 가야지. 장난이 아니라 진짜 신고인데 우리가 늦어서 살인사건으로 바뀌면, 너랑 나도 엿 되는 거야."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순경이 보고했다.

"아! 범인은 제압된 상태라는데요?"

"휴우. 그나마 다행이다."

그들은 차를 창고 앞에 세웠다. 둘 다 차에서 내려 창고 안으로 진입했다.

경사가 멈칫했다.

"어? 이건…."

그가 본 건 죽어 있는 마상국과 쇠사슬로 기둥에 묶여 있는 유소진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순경이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 시, 시체!"

경사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서 도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거지?"

유소진이 경찰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여기예요!"

경사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유소진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 이거 좀 풀어주세요."

그녀는 쇠사슬에 묶여 있다. 그 쇠사슬에는 튼튼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경사가 그녀의 몸에 있는 상처들을 보고 순경에게 외쳤다.

"야! 빨리 차에서 이거 자를 장비 가져와! 지원 요청하고, 구급차 오고 있는지도 확인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오라고 해!"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도착했다.

관할 경찰서 형사들은 실제 상황이라는 연락을 받자마자 형사과 승합차는 물론이고 개인 차량까지 동원해서 달려왔다.

형사들은 현장부터 확인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저 도구들 말입니다. 피가 묻어 있는데요?"

"범인은 누가 찌른 거지?"

"팀장님. 여기 스마트폰 좀 보십쇼."

형사들이 현장에서 네 대의 스마트폰을 발견했다. 그 네 대는 마치 전시라도 하듯이 받침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팀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건 설마…."

유소진은 한쪽에서 119 구급대원의 도움을 받아 상처를 확인하던 중이다. 그녀가 당황한 형사들에게 설명했다.

"저 살인마 새끼가 죽인 피해자들의 휴대폰일 거예요."

팀장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녀가 손에 꼭 쥐고 있는 스마트폰을 흔들었다.

"저 새끼가 제 스마트폰도 저기 놔뒀었거든요."

"그럼 다른 피해자들은 이미…."

"제가 다섯 번째였죠. 곧 여섯 번째를 잡아오겠다고 했어요."

마상국의 여섯 번째 살인 타깃은 이선정 박사였다.

"물론 저렇게 죽기 전에 한 말이죠."

15. 형사

형사가 심각한 얼굴로 팀장에게 말했다.

"팀장님. 이거 연쇄 살인사건입니다. 피해자가 많습니다."

"나도 눈이 있으니까 알아. 휴대폰이 네 대니까 피해자도 네 명이겠지."

형사팀장이 유소진을 보았다.

"다섯 명이 될 뻔했어."

그녀의 얼굴은 맞아서 퉁퉁 붓고 온몸에도 피멍이 들었다. 칼에 찔린 상처도 있었다.

구급대원이 유소진에게 제안했다.

"이제 구급차에 타시죠. 병원부터 가셔야 합니다."

형사팀장도 그래야 한다는 건 안다. 그래도 이곳 상황이 워낙 심각해서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팀장이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유소진이 구급대원에게 양해를 구한 후에 대답했다.

"저 살인마가 저를 여기로 납치했어요. 때리고, 찌르고, 죽인다고 겁주면서 웃었어요. 칼로 찌를 때는 진짜 죽이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납치된 후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계속 설명했다.

"그러다 오늘 겨우 구출됐죠."

그녀의 설명은 꽤 구체적이긴 했다. 하지만 빠진 게 있었다.

형사팀장은 그녀의 설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누가 구해줬다는 겁니까?"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비틀거렸다.

"아야. 저 아파요. 구급차 타야겠다. 병원에 빨리 좀 데려다주세요."

"아니, 그래서 누가…."

"구급대원님. 여기 누워서 가면 돼요?"

***

유소진은 119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형사 한 명이 병원으로 따라갔다.

다른 형사들은 현장을 계속 조사했다.

"팀장님. 여기 좀 보시죠."

나무로 만든 공구 거치대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이게 뭐지?"

형사가 그 구멍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한 후에 사진을 확대해 보여주었다.

"좀 작지만, 칼자국 같은데요?"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자국 같지?"

"예."

"과수대 오면 이거 무슨 칼에 찍힌 건지 꼭 알아내라고 전해라."

"팀장님은요?"

"난 병원에 가서 피해자 좀 만나야겠어."

***

유소진은 달리는 구급차에서 전화를 걸었다.

"아빠아!"

- 소, 소진아! 너 지금 어디야!

"병원 가는 중이야. 엄마는?"

그녀의 어머니가 달려와 휴대폰을 빼앗았다.

- 나도 여기 있어! 너 어디야! 다들 너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엄마아! 나 죽을 뻔했어!"

- 주, 죽….

"지금은 괜찮아! 병원 가고 있어. 별로 안 다쳤어!"

- 어느 병원이야!

***

형사팀장이 뒤늦게 병원에 도착했다.

팀장이 유소진과 함께 이동한 형사를 찾아서 물었다.

"피해자를 누가 구해줬는지 좀 알아봤어?"

"구급차에서는 병원에 오는 내내 부모님하고 통화하던데요. 그 상황에 끼어들 수가 없어서…."

"그럼 여기 와서는?"

"의사가 피해자를 보자마자 당장 치료부터 받아야 한다고 데려가서요. 제대로 물어볼 틈이 없었습니다."

"상태가 심각해?"

"아무래도 살인마한테 붙잡혀 있었으니까…. 아. 저 의사가 피해자를 데려갔습니다."

의사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팀장이 질문했다.

"선생님. 피해자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의사가 인상을 쓰며 도로 물었다.

"이거 누구 짓입니까?"

"수사 중인 사건이라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상태는…."

의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환자분이 너무 많이 맞은 것도 문제이지만, 칼에 세 번이나 찔렸습니다. 그런데 세 번 다 찌른 시기가 다릅니다."

"그 말씀은…."

"일부러 고통을 주려고 한 번씩 찔렀단 말입니다. 진짜 누구 짓입니까?"

팀장이 욕을 했다.

"와. 그 개새끼가…."

"그 개새끼 잡았지요?"

"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걱정하실 상황은 아닙니다."

"놓친 건 아니란 말이네요."

"그렇죠."

시체 상태이긴 하지만 놓친 건 아니다.

팀장이 물었다.

"그러면 환자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환자분은 칼에 세 번이나 찔렸다니까요?"

"이게 워낙 급한 사건이라서요.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

유소진은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 진통제 들어오니까 살 것 같다."

여기 올 때까지는 온몸이 아팠는데, 진통제가 꽤 강력해서 통증이 많이 줄어들었다. 아직 아프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다.

게다가 계속 쇠사슬로 묶여 있다가 편안한 침대에 누우니 살아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나 진짜 살아있어."

아까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 차우진이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고 사라졌다.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계셨지만,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 있겠지?"

그녀가 차우진의 체형이나 키, 눈매 등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내가 눈이 부어있어서 자세히는 못 봤지만…."

차우진은 그녀와 마지막으로 대화할 때 배에 힘을 준 상태였다. 그래서 그때는 배가 별로 나오지 않았었다.

"날씬한 체형이었나?"

형사팀장과 형사가 병실 문에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그들을 알아보았다.

"아. 형사님."

형사팀장이 간단한 인사 후에 질문했다.

"아까 거기서 하던 이야기 말인데요. 그래서 유소진 씨를 구해주고 그놈을 죽인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녀는 구급차에 탈 때부터 지금까지 경찰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궁리했다. 결론은 나왔다.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몰라요."

"네?"

"제 얼굴을 보세요. 눈이 퉁퉁 부어있잖아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아니, 못 봤다고 하기엔…. 아까 현장에서는 상황을 꽤 자세히 설명했잖습니까?"

"너무 무서워서 중간에 눈을 감고 있었어요. 그래서 싸우는 건 못 봤어요."

"그럼 신고는요?"

"그분이 저한테 휴대폰을 주면서 신고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신고한 것뿐이에요."

"그분?"

유소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려고 했다. 아직 눈이 부어있어서 동그래지지는 않았다.

"어머. 제 생명의 은인인데 그럼 그분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요?"

"어…. 그건 그렇죠."

***

형사팀장은 별 소득 없이 병원을 나왔다.

"아무래도 본 것 같은데…."

죽다 살아난 피해자가 좀 잡아뗀다고 해서 체포할 수는 없다. 체포는커녕 따져 묻기도 어렵다.

"생명의 은인이니까 못 본 척하는 이유는 이해가 가지만…."

팀장이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래도 우리는 범인을 찾아야 한단 말이야."

***

형사팀장이 현장으로 돌아왔다. 현장에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과수대도 도착해서 조사하는 중이었다.

형사가 보고했다.

"팀장님. 그 새끼가 다른 피해자들도 여기서 살해한 것 같습니다. 오래된 혈흔을 여러 개 찾았습니다."

"그럴 것 같더라니…."

팀장이 물었다.

"연쇄살인마를 죽인 사람에 관한 단서는?"

"아직은 나온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이 장소에서 외부로 빠져나가려면? 그건 찾아봤어?"

형사가 바깥쪽을 가리켰다.

"저 길을 통해 나가거나, 아니면 저 산으로 들어가야 하는데요."

"그런데?"

"저 길에는 CCTV가 없습니다."

"쯧. 산에는?"

"찾아봤는데 최근에 사람이 이 창고에서 산으로 이동한 발자국은 안 보입니다."

"안 보인다고 없는 거겠냐? 못 찾은 거겠지."

"당연히 그렇겠죠. 사람이 하늘을 날아서 빠져나갔을 리는 없으니까요."

팀장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찾기가 쉽지 않겠어. 살인마가 일부러 추적이 어려운 장소에 거점을 만들었으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제대로 수색하겠습니다."

"만약 산으로 들어갔으면 입구 쪽에는 발자국이 남아있겠지?"

"산 아래에 발자국이 있다 해도, 산을 이동한 경로를 찾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지. 알아.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

차우진이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스킬을 너무 많이 썼더니 피곤하다."

차우진은 산의 초입에서는 발자국이 남지 않는 장소만 찾아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연쇄살인마를 제거했으니까 이제 이선정 박사가 살해당할 일은 없겠지. 고생해서 살려줬으니까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나 빨리 개발했으면 좋겠다."

오늘은 덤으로 유소진도 구출했다.

"그 아가씨는 경찰이 왔으니까 괜찮겠지."

산에서 단거리 이동 스킬을 쓰면 남들은 한참 돌아가야 하는 계곡을 단숨에 건너갈 수 있다. 그런 방법을 쓰면 상식을 벗어난 속도로 산악 지역을 이동할 수 있다.

차우진은 10분 만에 산 중턱까지 이동해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는 걸 확인했다.

그 후에는 현장을 빠르게 벗어났다.

멸망한 세계의 경험 덕분에 그냥 걷기만 해도 산악 이동 속도가 빨랐다. 흔적도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다 가끔 단거리 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면 누군가 산에서 발자국을 찾았다 해도 계속 추적할 방법이 없어진다.

차우진이 현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산을 빠져나온 후에 말했다.

"이러다 살 빠질라. 24시간 국밥집에 가서 배도 채우고 체력도 채워야겠다."

***

현장 수사팀이 상황을 정리해 윗선에 보고했다. 연쇄살인 사건이라 관할 경찰서 서장이 직접 보고를 받았다.

서장이 보고를 듣고 나서 말했다.

"그 사람이 피해자를 구한 건 알겠는데, 범인을 죽였잖아. 그것도 칼로 가슴을 찔러서 확실하게. 그러면 잡긴 잡아야지."

"그래서 그 사람도 더 조심해서 빠져나갔나 봅니다. 주변을 다 수색했는데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용의자 범위는 좁힐 수 있어. 범인에게 원한을 가질 사람 중에 있겠지."

"예. 그래서 기존 피해자들의 주변 인물 위주로 알리바이를 확인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언론에는 당분간…."

"이미 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

서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간단하게라도 발표하는 수밖에 없겠네."

***

연쇄살인범 마상국에 관한 뉴스는 공중파 TV로도 방송됐다. 그 뉴스는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로도 볼 수 있었다.

이선정 박사가 회사에서 배달 짜장면을 먹으며 말했다.

"어머. 연쇄살인마라니. 세상이 진짜 너무 험하다."

이화연이 말했다.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만 피해자들이 너무 불쌍하잖아."

이선정은 어제 박영호에게 습격당했다. 차우진 덕분에 무사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나오는 뉴스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어제 일은 이화연에게 말하지 않았다. 알면 걱정할 게 뻔해서였다.

이화연이 잔소리했다.

"남의 일에 신경 쓸 시간에 일이나 해. 너 할 일 많아."

"점심시간이잖아. 언니는 역시 악덕 사장이야."

"야. 네 개인 연구에 회사 자원 소모하는 거 내가 눈감아주는 거 몰라? 네가 쓴 거는 네가 일해서 채워."

"역시 짠순이 마녀…."

점심시간인데도 방문객이 찾아왔다.

"이선정 씨 계십니까? 아. 계시군요."

그녀의 언니 이화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시죠?"

마상국 연쇄살인 사건 담당 형사가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이선정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이화연이 이선정을 돌아보았다.

"너 사고 쳤니?"

"아니?"

어제는 사고를 당했지 친 건 아니다.

이화연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내 동생을 체포하러 온 건가요?"

형사는 연쇄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중이다. 그가 도로 물었다.

"체포될 만한 일이 있습니까?"

"어…. 아뇨! 없으니까 묻는 거예요."

"수사 중인 사건에 관해 여쭤볼 게 있어서 찾아온 겁니다."

"뭔데요?"

형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이라 회사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사진을 이선정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십니까?"

어젯밤에 그녀를 습격한 건 박영호다. 이선정은 형사가 박영호의 사진을 보여줄 줄 알았다.

"당연히 알…. 응?"

형사가 보여준 건 마상국의 사진이다.

그런데 마상국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생각하다가 손뼉을 쳤다.

"아! 이 사람!"

"아십니까?"

"지나가다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지나가다 몇 번…. 그럼 스쳐 지나갔다는 건데, 그런데도 보자마자 알아보신다고요?"

"제가 기억력이 좋거든요."

이번에는 이화연이 맞장구쳤다.

"맞아요. 우리 선정이는 한국대 박사예요. 우리 회사 연구 책임자고요. 머리 엄청 좋아요."

이선정이 물었다.

"이 사람을 찾으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이미 우리가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이 사람의 집에서 이선정 씨에 관한 자료가 많이 나왔습니다."

"네?"

형사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뉴스에서 연쇄살인마 마상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저 뉴스에 나온 살인마가 바로 이놈입니다."

이화연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럼 내 동생이 저 연쇄살인마의 다음 목표였다는 거예요?"

16. 몰빵

화선바이오를 찾아온 형사는 두 명이다.

고참 형사가 대답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 아직 수사 중입니다."

이선정 박사의 언니인 화선바이오 사장 이화연의 말이 빨라졌다.

"방금 연쇄살인마의 집에서 내 동생에 관한 게 많이 나왔다면서요? 그러니까 어떤 거요? 사진 같은 거예요?"

마상국의 집에서 이선정 박사의 사진이 다수 발견됐다. 길을 걷는 모습을 촬영한 동영상도 있었다.

"사진도 있고, 어떤 식당을 이용하는지 같은 개인정보들이…."

"그럼 진짜로 내 동생이 살인마의 다음 표적이란 거잖아요!"

이선정이 흥분한 이화연의 팔을 잡았다.

"언니. 범인은 죽었다잖아."

"응?"

이선정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연쇄살인마가 시체로 발견됐다잖아."

"아!"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다행이다. 죽었으니까 괜찮…. 잠깐. 범인이 죽었는데 형사님들이 왜 내 동생을 찾아와요? 혹시 공범이 있나요?"

"그런 정황은 안 보입니다만."

누가 마상국을 죽였는지 알아내기 위해 조사하는 중이다.

"상황을 파악해야 해서 몇 가지 여쭤보려고 찾아왔습니다. 괜찮으시면 수사에 협조해주시겠습니까?"

이화연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공범이 있다면 경찰이 빨리 잡게 도와줘야지!'

"네! 협조할게요."

"언니?"

"형사님. 뭐든 다 물어보세요. 우리 선정이가 다 대답해드릴 거예요."

"내가?"

"응. 네가. 이런 건 빨리 털어버려야 안 찜찜해."

이화연의 형사들에게 제안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면 제 방으로, 그러니까 사장실로 가실까요? 직원들이 점심 먹고 돌아오기 전에요. 이런 건 우리만 아는 게 좋잖아요."

***

차우진은 집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았다. 손은 과자봉지를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차유리가 바삭한 감자 칩을 먹는 차우진을 보며 한소리 했다.

"넌 계속 그렇게 놀 거냐? 그러다 배 더 나온다?"

차우진이 추레한 추리닝에 손을 닦으며 대답했다.

"논 거 아니야. 나도 일했다고."

"언제?"

"요 며칠 계속."

차유리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무슨 일을 했다는 거야?"

이선정 박사를 살려서 멸망급 재앙 중 하나를 막는 중이다.

"지구를 구했지."

"쓰레기 분리수거?"

"그런 거랑은 다른 쪽으로."

"하긴. 넌 지금 쓰레기를 생산하는 중이지."

차우진이 누워 있는 소파 옆에는 빈 과자봉지 두 개가 더 굴러다녔다.

차우진이 소파에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비번이라더니 어딜 가? 또 소개팅?"

"놀리냐? 죽고 싶어?"

차유리가 TV를 가리켰다. 연쇄살인마 마상국이 시체로 발견됐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저거 때문에 비상 걸렸어. 연쇄살인마가 잡혔으니까. 아니, 죽었으니 잡힌 건 아닌가? 하여간 나 오늘 못 들어온다."

"응? 저 사건은 누나네 관할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데?"

마상국의 창고는 경기도에 있다. 차우진이 직접 가서 마상국을 제거한 데다가 거기서 산을 타고 빠져나오기까지 했는데 모를 리가 없다.

차유리가 설명했다.

"구출된 피해자가 우리 관할에 살아. 실종신고까지 된 상태였더라. 오늘부터 우리 팀이 맡았어."

"응? 이쪽 동네 주민이야?"

뉴스에는 유소진의 이름이나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이름 대신에 A씨라고 불렀다. 피해자를 보호하려는 조치였다.

"이 동네는 아니고 저쪽 동네야."

"어…. 에이. 괜찮겠지."

"뭐가?"

"어차피 길에서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할 텐데 상관없다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 할 시간이 있으면."

차유리가 잔소리했다.

"재활용쓰레기 꼭 분리수거 해라. 집 청소도 해놓고, 로봇 청소기 고장 났으니까 네가 청소기 직접 돌려."

"내가 요즘 지구를 구하느라 바쁘다고."

"내 동생이 소파에 누워서 과자나 처먹으면서 개소리를 하네?"

"멍?"

"닥쳐!"

***

형사들이 화선바이오 사장실에서 이선정 박사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피의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될 뻔한 사람이라 경찰서로 무리해서 데려가지는 않았다.

형사가 질문을 하나씩 하면 이선정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러다가 형사가 멈칫했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김준배가 죽었을 때 그 근처에 있었다는 겁니까?"

김준배는 충청도 산에서 죽은 살인청부 칼잡이다.

"네. 가끔 방문하는 그 지역 약재상에 실험 자재를 사러 갔거든요. 희귀 식물도 그날 샀어요."

"뭘 사셨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날 거기에…."

"그날 그 근처 산에서 살인자가 죽었다는 건 나중에 뉴스 보고 알았어요."

"그러면…."

형사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혹시 김준배도 이선정 씨를 노리고 거기 간 건가?"

"네?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면서요?"

"마상국이 마지막으로 노린 사람이 이선정 씨입니다. 그런데 마상국은 죽었습니다."

형사가 잠시 망설이다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이선정 씨가 신고한 사건을 보면…."

형사가 그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박영호는 밤에 회사로 돌아오던 이선정 씨를 습격했다가, 지나가던 사람에게 제압됐더군요."

"그랬죠. 저를 구해주고 그냥 가셨어요."

"박영호에게 이선정 씨를 습격하라고 청부한 사람이 마상국일 수 있습니다."

"네?"

"어젯밤에 확보한 마상국의 대포폰에 박영호의 대포폰으로 연락한 기록이 있습니다."

"아…."

"만약 셋 다 동일인물이 저지른 일이라면…."

형사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럼 누군가 이선정 박사님이 있던 곳 근처에서 청부업자 김준배를 죽이고, 박영호는 제압하고, 마상국을 죽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이선정의 눈이 커졌다.

'어제 그 사람이 나를 전부터 지켜주고 있었어? 충청도에 갔을 때부터?'

형사가 물었다.

"이걸 다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혹시 경호원을 고용하신 겁니까?"

"그런 경호원을 어디서 찾아요? 저는 평범한 과학자인데요."

"스토커 신고를 하셨잖습니까?"

"그건 예전 일이에요."

"그럼 혹시…. 요즘 주변에 새로 나타난 사람이 있습니까?"

그녀는 차우진을 떠올렸다. 그는 차 사고 때도 그녀를 구해주었고, 어제 습격당했을 때도 구해주었다.

어제 구해준 사람은 얼굴을 제대로 못 봤지만, 차우진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어. 충청도에 갔을 때도, 그리고 어젯밤에도 내가 없는 곳에서 살인마와 싸움을….'

그녀가 손을 가슴에 얹고 숨을 골랐다.

'우진 씨는 차 사고에서 나를 구해준 후부터 내 주변에 자주 나타났어. 그때부터 지켜준 걸까?'

자신이 연쇄살인마에게 노려졌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살인마를 죽인 것 자체는 그녀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건 어쩔 수 없었겠지.'

형사가 물었다.

"생각난 사람이 있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크게 한 번 흔들었다.

"아니요. 없어요."

"확실합니까?"

"저는 요즘 회사와 집만 오가면서 연구만 해요.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어요."

그녀는 사실대로 말하면 경찰이 차우진을 연쇄살인마를 죽인 사람으로 의심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이선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제 주변에는 그런 사람 없어요."

***

형사들이 회사를 나왔다.

"어떻게 생각해요?"

고참 형사가 인상을 쓰며 건물을 올려보았다.

"다 알려준 게 아니야. 뭔가 말하지 않은 게 있어."

"마상국은 이선정 박사만이 아니라 김준배도 체크하고 있었잖습니까?"

김준배의 사진은 마상국의 집을 수색해서 찾아냈다.

"김준배는 살인사건 두 건의 범인이야. 김준배도 이선정 씨를 노렸다면, 마상국은 그놈을 경쟁자로 판단했겠지."

"마상국이 알 정도면 우리가 찾는 그 사람도 김준배의 정체를 파악했겠죠. 그래서 제거한 거 아닐까요?"

"연쇄살인마를 연쇄살인 하는 놈이 있다? 그런 놈이 실제로 있다면 뭐라고 불러야 하지?"

"다크 히어로?"

"그게 형사가 할 소리냐?"

"그럼 빌런 학살자?"

"재밌냐?"

"별명 정도는 붙일 수 있잖아요."

고참 형사가 머리를 긁었다.

"어쨌든, 이거 외부에 알려지면 시끄러워지겠어."

"모르게 해야죠."

***

차우진이 노트북으로 주식 차트를 확인했다. 그는 얼마 전에 사덕리소스에 돈을 몰빵했다.

"주가가 더 떨어졌네?"

그가 주식 토론방의 글도 찾아보았다.

- 여긴 망했습니다. 확실히 망했습니다.

- 사덕리소스는 보유한 자산을 모두 팔아도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부도가 나면 휴지 한 장도 안 남을 겁니다.

- 이런 회사 살리겠다고 구제금융이 들어오지는 않겠죠. 여기가 뭐 은행도 아니고.

- 상장폐지도 코앞에 닥쳐 있습니다.

- 이런 회사 주식이 왜 아직도 거래되는 겁니까? 지금 이 주식 사는 분들은 다들 야수의 심장인가?

- 그러게요. 거래량이 늘었어요. 잠깐 반짝 반등도 했었고요. 지금은 더 떨어졌지만.

- 회사가 사라질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이 주식 가진 분들은 어서 빨리 파세요. 저는 저번에 반짝 반등할 때 다 털었습니다.

차우진이 그 반짝 반등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사덕리소스의 주식은 차우진이 샀을 때보다 더 떨어졌다. 이제는 100원짜리 하나를 내면 한 주를 사고도 10원짜리가 남는다.

차우진은 지난번에 주식에 몰빵할 때만 해도 자신이 있었다.

"이 회사는 앞으로 10년은 물론이고 지구 멸망 초기까지도 버티는 곳인데."

토론 게시판의 글을 읽어보니 좀 불안해졌다.

"주가랑 게시판만 보면 왜 회사가 당장 망할 거 같냐."

그는 멸망 이후에 박창수와 사덕리소스의 광산에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까지는 꿈에서 알아낸 정보와 현실 정보가 대충 일치했다.

"창수 형이 멸망 초기에 이 회사를 봤다고 했는데…."

박창수는 멸망 초기에 사덕리소스의 광산 근처에서 작전을 뛰었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그 회사는 망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런데 주가는 그가 지난번에 샀을 때보다 더 떨어졌다. 토론 게시판에는 비관적인 이야기만 가득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창수 형 말 들었다가 잘못돼서 고생한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

박창수의 말을 들었다가 적의 함정에 빠지거나, 약탈자 집단과 마주쳐서 예정에 없던 전투에 돌입했던 일이 생각났다.

"또 창수 형이 틀린 거 아냐?"

문득, 사덕리소스가 망하는 경우가 하나 생각났다.

"설마 이 사덕리소스는 망하고, 몇 년 뒤에 누가 같은 이름으로 회사를 다시 만드는 건 아니겠지?"

그것까지는 모른다. 그런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 몰빵할 때는 적금을 깨고 마이너스 통장까지 털었다.

지금은 은행에서 신용대출이 나왔다. 그는 이 대출금을 쓸지 고민하는 중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것까지 몰빵하는 건 미친 짓인데…."

만약 박창수가 아는 사덕리소스가 이름만 같은 별개의 회사라면, 차우진이 주식에 몰빵한 돈은 모두 날아간다.

그러면 그냥 은행 잔고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빚도 잔뜩 생긴다.

고민은 좀 했지만, 결론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다.

박창수의 말을 들었다가 개고생한 적은 많지만, 결국은 함정도 빠져나왔고, 약탈자 집단도 박살 냈다.

"아. 됐어. 지구 멸망을 막지 못하면 어차피 10년 후에는 돈 따위는 의미가 없어."

그때는 5만 원짜리 현금 100장 한 묶음보다 참치 통조림 하나가 더 가치가 있다.

게다가 돈을 저축하고 은행 이자만 받아서는 필요한 예산을 확보할 수 없다. 멸망급 재난 중에는 기업을 움직이거나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야 겨우 막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선정 박사를 구할 때야 돈이 거의 안 들었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달라. 저축으로는 지구 멸망을 막을 수 없으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차우진이 주식 차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즈아!"

어차피 이 돈을 날려도 굶지는 않을 자신이 있다.

"돈 다 날리면 당분간 누나한테 빌붙어야지. 공무원이 설마 동생을 굶기지는 않겠…. 오늘은 분리수거도 하고 청소도 해야겠다."

17. 금

차우진은 대출금을 사덕리소스 주식에 몰빵하기로 결정했다.

그 주식은 주당 가격이 100원도 안 되지만 거래는 제법 활발했다. 망하기 직전에 단타를 치러 들어온 사람이 많아서였다.

차우진은 주가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지난번보다 더 천천히 주식을 매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식을 던지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다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차우진이 인터넷 주식 게시판의 글을 다시 확인했다. 새로운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 사덕리소스 또 밑에서 누가 받는 거 같은 느낌 안 드나요? 이거 진짜 호재가 있나?

- 호재가 아니라 호구가 있겠지.

- 어차피 지금 시점에 이 주식을 거래하는 사람은 다 막판 단타 노리고 들어온 거 아닙니까? 누가 받아줄 때 수익 내야죠.

- 저번에도 이러다가 도로 내려갔습니다.

-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이 회사는 망해. 아무튼 망해.

- 부도까지 앞으로 최대 사흘 봅니다.

- 사흘은 무슨. 이거 막차네요.

- 오늘은 100원 근처에 있지만, 내일은 60원이 될 수도 있는 게 이 주식입니다.

분위기가 나빠지면서 던지는 사람은 더 많아졌다.

차우진은 그날 주식시장이 끝나기 전에 모든 돈을 사덕리소스에 털어 넣었다. 장이 마감된 후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얗게 불태웠다."

그가 주식 잔량을 보았다. 그동안 적금을 깨고 마이너스 통장에 신용대출까지 사덕리소스 주식에 쏟아부었더니 엄청나게 큰 숫자가 찍혀 있었다.

"200만 주라니. 물 타다가 대주주가 된 기분이다."

200만 주의 주식을 사는 데 들어간 돈은 2억 원쯤이다. 사덕리소스의 총 주식 발행 수는 약 2천만 주다. 그는 2억 원을 써서 망하기 직전인 회사의 주식을 10% 가까이 보유했다.

차우진이 돈을 다 털어 넣은 후에 증권 게시판의 글을 다시 확인했다. 회사가 망하는 건 확정된 것처럼 보였다.

- 당장 내일이라도 망할 회사를 오늘도 개인이 많이 샀네요. 기관은 다 던졌어요.

- 이거 상폐 단타쟁이들끼리 서로 잡아먹으려고 싸우는 겁니다.

- 진짜 벼랑 끝에서 단두대 매치라도 하는 건가? 승자는 돈을 벌고, 패자는 망하고?

- 끝까지 쥐고 있는 사람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거죠.

차우진은 그런 주식을 200만 주나 쥐고 있다.

"이 회사, 설마 진짜 망하나? 창수 형. 또 형 말이 틀린 거 아니지?"

***

사덕리소스 사장 서준석이 광산 밖으로 나와 안전모를 벗었다. 바람이 불어 머리는 시원해졌는데 가슴은 답답했다.

"우리 회사가 이렇게 망할 줄은 몰랐다."

이미 직원 상당수가 회사를 떠났다. 신규 광산 개발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회사의 자금난만 더 심해졌다.

서준석의 옆에서 현장을 맡은 팀장 유도진이 물었다.

"사장님. 혹시… 자금을 더 끌어올 곳은 없으십니까?"

"없어. 나 집까지 저당 잡혔다. 이젠 나한테 돈을 빌려주는 곳이 없다. 우리 회사는 오늘까지야. 내일이 오면 망해."

유도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사장님. 탐사팀 철수할까요?"

"그래. 마지막으로 다 같이 삼겹살에 소주나 하자. 내일부터는 나한테는 소주 살 돈도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유도진이 지하로 내려간 팀과 연결된 통신기를 켰다. 남은 현장 인원을 모아 만든 팀이 아래에서 마지막 탐사를 하고 있었다.

"그만하고 다들 나와요. 여기까지만 합시다.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통신기를 통해 대답이 돌아왔다.

- 유 팀장님. 여기 뭐가 있는데요?

"있다니요? 뭐가요?"

- 지금 여기 광석에…. 이게 우리가 찾던 광물은 아닌데요. 지상에 나가봐야 확실히 알겠습니다. 일단 광석 샘플을 들고 나가겠습니다.

현장팀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가져온 샘플을 보여주었다.

"지하에서는 어두워서 확실하지 않았는데요. 이거 아무래도…."

서준석은 그 광석 표면에 박힌 게 뭔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광산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는데 모를 수가 없다.

"금?"

"역시 그렇죠?"

"이게 저 밑에 있었다고?"

"예."

"우리 광산이 알고 보니 금광이라고?"

유도진 팀장은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려고 애썼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때문이다.

"사장님.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다른 광석을 캐다가 금 부스러기가 나오는 경우는 가끔 있잖습니까?"

서준석은 냉정할 수가 없다. 그는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진짜 금맥이 발견된 것일 수도 있잖아. 다들 장비 챙겨. 다시 들어간다!"

***

서준석이 직접 들어가 금이 함유된 광석이 발견된 곳을 확인했다.

"이건 진짜다. 진짜 금맥이다."

유도진도 이번엔 진짜로 흥분했다.

"사장님. 이거 매장량이 얼마나 될까요? 채산성은 있을까요?"

"몰라. 이것만 보고 그걸 어떻게 알아? 그렇지만! 일단 금맥이 발견됐으니까 우리 회사 파산은 막을 수 있을 거야."

"회사에는 지금 이 금광을 개발해서 돈으로 바꿀 때까지 버틸 자금이…."

"이걸 보여주고 돈을 끌어들여야지! 사진 찍어! 샘플도 더 챙겨! 내가 당장 만날 사람들이 있어!"

"사장님. 기자들에게 연락해서 기사부터 내겠습니다."

"그렇지! 그래야 돈 끌어오기 더 쉬워지지! 아직 연락되는 기자 있으면 당장 이 사진 보내!"

***

재구파는 사채업을 주력으로 하는 조직이다.

두목 박재구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왼손에는 양주잔이, 오른손에는 담배가 있었다.

"종수야. 내 돈을 훔치고도 괜찮을 줄 알았나?"

이종수는 피떡이 된 채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형님. 살려주십쇼."

"내 돈을 훔친 새끼를 내가 왜 살려주는데?"

"저는 훔치려던 게 아닙니다. 주식 투자를 했습니다. 돈을 따서 도로 채워놓으려고 했습니다!"

"그 주식 얼마나 있냐?"

"사덕리소스 200만 주입니다!"

박재구가 옆을 보며 물었다.

"김 실장. 그러면 지금 얼마야?"

김덕수가 스마트폰으로 주가를 확인한 후에 대답했다.

"오늘 종가는 주당 90원. 200만 주면 1억8천만 원입니다."

"와. 씨발. 종수야. 네가 빼돌린 돈이 20억인데, 남은 게 겨우 2억도 안 돼?"

주식은 이미 10분의 1토막이 난 상태였다.

김덕수가 기사를 검색하며 설명을 보충했다.

"며칠 안에 회사가 망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러면 그 2억도 날릴 겁니다."

"젠장. 이 새끼를 더 일찍 잡아서 내 돈을 회수했어야 했는데."

박재구가 술잔에 남은 양주를 입에 털어 넣은 후에 욕을 했다.

"씨발. 김 실장. 이 새끼 드럼통에 넣어서 던져버려!"

"혀, 형님. 살려주십쇼!"

"살고 싶으면 내 돈을 내놓던가!"

김덕수는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관련 기사를 찾다가 멈칫했다.

"사장님. 이것 좀 보셔야겠습니다."

"뭔데?"

김덕수가 스마트폰에 새로 뜬 기사를 보여주었다.

"사덕리소스에서 금광을 발견했답니다."

"씨발. 어떤 새끼인지 좋겠네. 돈벼락을 맞았겠어. 나한테는 저런 거 안 떨어지나?"

"사장님. 종수가 산 주식 말입니다."

"그 주식 내일 아침에 당장 다 팔아버려!"

"그 주식회사가 사덕리소스입니다."

"어?"

"지금 이 금광을 발견한 회사입니다."

박재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잠깐만. 이게 그러면…."

이종수가 의자에 묶인 채로 소리를 질렀다.

"형님! 금광이 터졌습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제 돈 다 갚을 수 있습니다!"

박재구가 이종수에게 물었다.

"네가 산 거, 회사 지분의 몇 퍼센트야?"

"10퍼센트입니다! 저 금광 지분의 10퍼센트가 우리 겁니다!"

"우리 거라니. 내 거지."

"예?"

"내 돈으로 샀잖아."

"그, 그게…."

박재구의 눈알이 번들거렸다.

"김 실장. 그거면 그 회사 내가 먹을 수 있냐?"

김덕수가 대답했다.

"10퍼센트로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주식이 더 필요해? 그럼 더 사들여야지. 지금 싸다며?"

박재구가 손바닥을 비볐다.

"내가 대주주가 되면 금광도 먹고 코스닥 상장사도 내 거가 된다. 김 실장. 우리도 이제 양지로 나가야지? 흐흐흐."

김덕수가 이종수를 보며 물었다.

"사장님. 그러면 종수는 어떻게 할까요? 드럼통은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이종수가 소리를 질렀다.

"형님! 살려주십시오! 제 덕분에 금광을 먹으시잖습니까? 제발 살려주십시오!"

박재구가 히죽 웃었다.

"종수야. 대포 신분증이랑 통장이 몇 개 없어졌더라? 너 그 주식 차명으로 나눠서 샀지? "

"예? 그, 그게…."

"그럼 넌 이제 필요 없으니까."

박재구가 드럼통을 가리켰다.

"죽어야지."

"히익!"

옆에서 김덕수가 말했다.

"사장님. 종수는 증권사 직원을 찌르고 도망쳐서 수배된 상태입니다."

"알아."

"회사 인수라는 큰 그림을 그리시는데, 종수만 사라지고 그 주식은 우리 쪽으로 넘어오면 탈이 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지. 역시 우리 김 실장은 스마트해."

"감사합니다."

박재구가 이종수를 향해 담배 연기를 뿜었다.

"이 새끼는 살려뒀다가, 문제가 생기면 다 뒤집어씌워."

"알겠습니다."

"주식은 내일 아침 장 열리자마자 사들이고."

"금광이 터졌는데 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박재구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지금은 단타쟁이들만 몰려 있을 거야. 그중에서 보유량 많고 만만한 놈들을 찾아내서 팔고 싶게 만들어야지."

***

차우진은 이튿날 오전 늦은 시간에 일어났다. 그가 집안을 둘러보았다.

"누나는 결국 안 들어왔네? 이럴 거면 분리수거랑 청소는 오늘로 미룰걸."

차우진이 허리를 긁으며 스마트폰을 켰다.

"어디 보자. 오늘 주가가…."

사덕리소스 주가를 확인하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차유리의 전화였다.

차우진이 전화를 받았다.

"새벽부터 왜 전화야?"

- 팔자 좋은 놈. 집이냐?

"당연하지."

- 내 옷 좀 챙겨와라. 풀세트로. 도시락도 싸오고.

"내가 왜…."

전화가 뚝 끊어졌다.

"역시 성격만 나쁜 게 아니라 성질도 급하다니까."

차우진이 도시락을 대충 싼 후에 차유리의 속옷과 갈아입을 옷을 대충 챙겨 가방에 쑤셔 넣었다.

"난 연쇄살인마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나 물어보러 가는 거야. 주식 망하면 누나한테 빌붙으려고 심부름하는 게 아니야. 암. 그렇고말고."

차우진이 옷이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밖으로 나가며 차유리에게 톡을 보냈다.

- 점심은 사라.

잠시 후에 답이 돌아왔다.

- ㅇㅇ

***

차우진이 경찰서 앞에 도착한 후에 차유리에게 나오라고 연락했다.

그런데 차유리보다 먼저 나온 사람이 있었다.

"어? 우진아!"

민수연이 차우진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도 이 경찰서에 근무한다.

"우진아. 여긴 어쩐 일이야? 너 뭐 사고 치고 경찰서 온 거야? 누나가 도와줄까?"

"생일은 내가 빠르다. 오빠라고 불러봐라."

"놀고 있으십니다. 진짜 무슨 일인데?"

"누나 심부름."

"아하. 유리 언니네 팀은 비상 걸렸지."

"너는 안 바쁘냐?"

"난 팀이 다르잖아."

둘이 잠깐 잡담하는데 차유리가 경찰서 1층 현관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내놔."

차우진이 가방을 흔들며 말했다.

"이걸 원하면 점심 사야지?"

차유리가 가방을 탁 잡아채며 말했다.

"점심을 살 거면 도시락을 왜 가져 오라고 했겠냐? 바보냐?"

"와…. 내가 믿을 사람을 믿었어야 하는데."

"증권사 직원 찌르고 도망친 놈 사건에 이번 사건까지 아주 사건 복이 터졌다. 밥 먹으러 나갈 시간도 없으니까 넌 수연이랑 먹어."

차유리가 가방만 가로채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차우진이 말했다.

"무슨 경찰이 맨날 사기를 치냐."

옆에서 민수연이 웃었다.

"훗."

차우진이 민수연을 돌아보았다.

"너랑 밥 먹으라네?"

"네가 사면 먹어는 줄게."

"집에 가서 라면이나 먹어야겠다."

"넌 또 라면이야? 가자. 누나가 국밥 정도는 사줄게."

차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국밥 좋지. 그리고 자꾸 누나라고 하지 마라. 생일은 내가 빠르다."

"하루 차이잖아."

그들은 산부인과 병원 동기다. 차우진이 하루 먼저 태어났다.

두 사람은 경찰서 근처 국밥집으로 걸어갔다.

"경찰서 옆 국밥. 창수 형이 이거 참 그리워했는데."

"그리워하다니? 그럼 지금은?"

"지금은 물려서 잘 안 먹을 때지."

"뭐야. 그게."

차우진이 길을 걸으며 가볍게 물었다.

"연쇄살인마가 죽은 사건은 어떻게 됐어? 경찰에서 뭐 좀 알아냈어?"

18. 가라

민수연이 물었다.

"연쇄살인마 누구? 김준배? 마상국? 아. 김준배는 살인자는 맞아도 연쇄살인마라고 부르긴 애매하겠다. 청부업자니까."

민수연이 한 마디 더했다.

"어차피 상황은 똑같지만."

차우진이 물었다.

"왜? 뭔가 증거가 나왔어?"

"청부살인 용의자 김준배와 연쇄살인마 마상국이 같은 사람을 노렸다는 소문이 있어. 피해자가 예전에 우리 쪽에 스토커 신고를 한 적이 있거든. 그래서 좀 알아."

그녀가 두 손으로 X자를 만들었다.

"근데 이 이상은 말 못해. 궁금해도 참아."

이미 알고 있다. 둘 다 이선정 박사를 노렸다가 차우진에게 당했다.

"같은 사람에게 당했다는 거잖아."

"앗! 그걸 어떻게 알았지?"

"어차피 상황은 똑같다며."

"그 말만 듣고 알았어? 뭐야. 너 왜 이렇게 똑똑해졌어. 놀라운데?"

"난 네가 경찰 시험에 합격한 게 더 놀랍다. 아무리 특기 가산점이 있어도 너한테는 어려웠을 텐데."

"맞고 싶냐?"

"하긴. 네가 원래 사람은 잘 팼지. 내 주변 여자들은 왜 다들 사람을 잘 팰까?"

"꺼져."

차우진이 제일 중요한 걸 물었다. 원래는 이걸 차유리에게 물어보려고 옷과 도시락을 가져왔다.

"누가 그 살인마들을 처리했는지 경찰에서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민수연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니. 마상국 사건 생존자는 아무것도 못 봤대. 단서는 현장 창고에서 발견한 작은 칼자국 하나뿐이야. 범인이 그 창고에서 어떤 경로로 빠져나갔는지조차 전혀 모른대."

"그래?"

차우진은 편안해졌다.

'블링크를 피곤해질 때까지 쓰면서 산을 이동한 보람이 있네.'

두 사람이 식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식당 TV에서는 경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주식시장 이야기였다.

민수연이 뉴스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 내가 산 주식만 떨어지는 걸까?"

"나도."

차우진이 스마트폰을 켜 주가를 확인했다.

'사덕리소스가 망하면 누나한테 빌붙….'

"응?"

주가가 이상했다. 그가 눈을 깜빡였다.

'상한가를 쳤네? 왜? 갑자기? 망한다며? 어째서?'

식당 TV의 경제 뉴스에서 사덕리소스가 금광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덕리소스는 어제 금광을 발견한 덕분에 자금 수혈에 성공하고 부도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주가는 상한가를 기록했습니다.]

[기사회생한 거지요. 망하기 전날 금광이 터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회사에서도 모른 겁니까?]

[그렇죠. 어제 저녁때, 그러니까 장 마감 후에 금광을 발견했다더군요.]

[그래서 오늘 상한가를 친 거군요.]

차우진이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주식 게시판을 확인했다.

- 동전주에 이런 호재가 있으면 상 치는 건 당연한 겁니다. 상한가조차도 얼마 안 하니까요.

- 당분간은 사려는 사람만 있고 팔 사람은 없을 겁니다.

- 지금 가격이 상을 쳐도 100원을 겨우 넘는 수준인데 누가 팔겠습니까?

- 그렇죠. 최소한 1,000원은 가야 파는 사람이 나온다고 봅니다.

차우진이 스마트폰을 보며 활짝 웃었다.

"역시 안 망했어. 창수 형. 믿고 있었다고!"

민수연은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뭐 먹을래? 순대국밥 특?"

"수연아. 수육도 시켜."

민수연이 손을 흔들었다.

"야. 공깃밥만 먹고 싶냐?"

"내가 살게."

"진짜?"

차우진이 큰소리쳤다.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팍팍 시켜. 오늘 내가 다 쏜다."

민수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나가자."

"응?"

"네가 산다며? 소고기 좀 먹어보자."

"어? 아니, 나는 국밥도 좋은데…."

"냉큼 일어나라."

차우진이 스마트폰으로 주식 잔고를 확인했다. 200만 주가 들어 있었다.

주가가 1,000원까지만 올라도 그의 증권 계좌 잔고는 2억에서 20억 원으로 바뀐다.

차우진이 자리에서 쓱 일어났다.

"범인 잡느라 고생하는데 꽃등심 정도는 먹어라."

민수연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래? 콜."

"콜이라면서 왜 자리에 앉아?"

"점심시간에 먹어봐야 몇 점이나 먹겠어? 저녁때 사. 고기 썰어 먹는 곳에서 와인도 같이. 오늘 너한테 대접받는 느낌으로 먹어보게."

"점심 꽃등심보다 비싼 거겠네?"

"어."

"공무원이 그런 거 얻어먹으면 걸리지 않냐?"

민수연이 손을 들었다.

"여기 순대국밥 특 두 개요."

그런 후에 차우진에게 말했다.

"괜찮아. 비싼 거 얻어먹다가 걸리면 너랑 사귄다고 둘러대면 돼."

차우진이 코웃음 쳤다.

"우리가 사귀기에는 평생에 걸쳐서 서로 더러운 꼴을 너무 많이 봤는데?"

민수연은 당당했다.

"일단 그렇게 둘러대서 급한 불을 끄고 나면 헤어졌다고 하지 뭐. 그럼 돼."

"경찰이 꼼수를 쓰네?"

"원래 법을 아는 놈들이 꼼수도 더 잘 쓰는 거야."

차우진이 툴툴댔다.

"이번에도 나는 급할 때 쓰는 땜빵이구나?"

"넌 지금 그게 중요해?"

"아니지. 밥이 중요하지. 빨리 수육도 시켜. 이 점심도 내가 쏜다."

민수연이 엄지를 세웠다.

"오! 차우진. 오늘 멋있어!"

"밥 사줄 때만 멋있지?"

"당연한 거 아냐?"

***

사덕리소스는 직원이 많이 퇴직한 상태라 유도진 팀장이 비서실장 역할까지 했다.

유도진이 보고했다.

"사장님. 제가 확인해봤는데 회사 지분에 변화가 꽤 있습니다."

"어떻게?"

"기존 대주주들은 금광을 발견하기 전에 지분을 모두 팔았습니다."

서준석은 납득했다.

"하긴. 그랬겠지."

지분을 많이 보유한 사람들이 서둘러 팔아치웠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사덕리소스가 망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전에, 미리 내부 정보를 입수하고 주식을 팔아치웠다. 그래도 손해를 봤지만, 동전주가 됐을 때 판 사람들보다는 손실이 적었다.

서준석은 지분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회사가 망하는 게 확실해졌을 때는 이미 동전주가 돼서 팔아도 의미가 없었다. 그 주식은 은행에서 대출 담보로도 잡아주지 않았다.

서준석이 물었다.

"내가 여전히 대주주 맞지?"

"예. 사장님께서 25퍼센트로 1대 주주입니다.

***

재구파 두목 박재구가 물었다.

"20퍼센트?"

김덕수가 설명했다.

"종수가 차명 계좌에 흩어놓았던 10퍼센트를 넘겨받았고, 주식시장에서 5퍼센트를 확보했습니다."

"왜 겨우 5퍼센트 밖에 못 샀어?"

"그것도 작전 전문가를 동원해서 밤새 약 치고 장이 시작하기 전부터 움직인 덕분에 겨우 샀습니다."

"상한가에 매수를 걸어놓으면?"

"이제는 다들 상한가에 걸어놓은 상태라서, 물량이 조금씩 풀려봤자 손에 넣기 어렵습니다."

"나머지 5퍼센트는 전화 돌려서 모은 그거지?"

5퍼센트는 사채 시장을 통해서 긁어모았다. 다른 사채업자도 부하가 제법 있어서 강제로 빼앗지는 못하고 돈을 많이 줘야 했다.

"예. 맞습니다."

박재구가 물었다.

"김 실장. 그러면 내가 그 회사 먹은 거야?"

"아닙니다. 서준석 사장의 지분이 아직 5퍼센트 더 많습니다."

"조금만 더 모으면 되겠네. 한 10퍼센트 정도만. 물량 많고 만만한 단타꾼 찾으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

유도진 팀장이 보고했다.

"그런데 우리 회사 주식을 20%나 매집한 곳이 있습니다."

서준석은 당황했다.

"뭐? 어떻게?"

"비공식적으로 알아본 거라, 정확히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블록딜이 있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서준석은 심각해졌다.

"누군가 우리 회사를 먹으려 하는구나. 내 지분보다 많아지면 회사를 먹고 금광까지 먹을 계산이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서준석이 살짝 기대하며 물었다.

"그럼 나머지 55퍼센트는 개인에게 잘게 흩어진 거고?"

"아니요."

"응?"

유도진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주식시장에서 직접매수로 10퍼센트를 확보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주가가 상한가에 고정됐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사?"

"오늘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금광이 발견되기 직전까지 매집했습니다."

서준석은 당황했다.

"그때는 회사가 망하기 직전이었는데?"

"예."

"금광이 터진다는 걸 미리 아는 건 불가능하잖아."

"불가능하죠. 우리도 주식시장이 끝나고 나서 금맥을 발견했으니까요."

"그 사람은 망하는 회사 주식을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이 산 거야?"

"동전주니까 초단타를 치려고 산 거 아니겠습니까?"

서준석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면…. 누군지 몰라도, 돈만 많이 주면 그 지분을 팔겠군."

서준석의 개인 자산은 이미 다 담보로 잡혀서 더 대출받을 수 없다.

"환장하겠네. 산 넘어 산이구나. 이러다 회사 빼앗기겠어."

***

재구파 두목 박재구가 히죽 웃었다.

"10퍼센트를 가진 놈을 찾았어? 그것도 개인이?"

김덕수가 대답했다.

"매집한 시점을 보면 단타꾼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확보한 20퍼센트에."

박재구가 손가락을 꼽았다.

"그 10퍼센트를 더하면 금광도 회사도 내 거네?"

"사장님.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사들여."

"얼마까지…."

"10퍼센트면 지금 주가로 총액이 얼마야?"

"2억5천쯤 됩니다."

"5억, 아니, 10억 준다고 해. 금광이랑 코스닥 상장사 먹는 값으로 10억 정도는 써야 자연스럽잖아."

"일단 10억을 주고, 나중에 약이나 도박으로 반쯤 회수할까요?"

"그래야지."

재구파 간부 조천상이 나섰다.

"형님. 제가 가서 그 주식을 받아오겠습니다. 나중에 회수하는 것도 제가 하겠습니다."

"그럼 조 실장이 애들 데려가서 그렇게 해."

"아닙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조천상이 큰소리쳤다.

"형님이 회사를 인수하셔야 하니까, 저 혼자 가서 인텔리하게 처리해야 그림이 깨끗해지잖습니까?"

"그런가? 그럼 조 실장이 가서 받아와."

***

차우진이 민수연과 오늘 저녁에 와인을 곁들여 고기를 썰기로 했다.

그가 집을 나와 골목을 걸으며 말했다.

"주가가 폭등하니까 안 먹어도 든든하다. 수연이한테 고기 사주면서 새로운 수사 정보 나온 거 있나 물어보…."

전화가 걸려왔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는 모르는 번호도 받아야 한다. 그 습관이 남아 있어서 전화를 받았다.

- 차우진 씨?

"누구십니까?"

- 잠깐 만날 수 있겠습니까? 차우진 씨에게 큰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차우진이 앞쪽을 보았다. 맞은편에서 양복을 입은 조천상이 전화를 하고 있었다.

차우진이 걸음을 멈추고 조천상의 장비나 복장부터 확인했다.

'겉모습은 멀쩡한데 어쩐지 앞잡이 느낌이 나는 놈이네.'

생산 위주의 생존자 그룹도 기본 전투력은 있다. 멸망한 세계는 사람만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니라서 무기가 없으면 생존자 그룹도 유지되지 못한다.

그래서 약탈자들은 습격하기 전에 생존자 그룹의 전투력을 미리 파악하려고 스파이를 침투시키곤 했다.

차우진은 그런 스파이를 잘 찾아냈다. 그런데 조천상이 그런 놈들처럼 보였다.

조천상은 전화를 하다 차우진을 발견했다. 그가 급히 전화를 끊고 차우진에게 다가왔다.

"차우진 씨?"

"그렇습니다만?"

"사덕리소스 주식 200만 주 가지고 계시죠?"

"그건 어떻게 알았을까?"

조천상이 둘러댔다.

"주주 명부에 다 나옵니다."

"내가 그거 산 지 며칠이나 됐다고 명부가 공개됐을까?"

"그건 알 거 없고."

재구파 간부 조천상이 소매를 걷었다. 팔에 문신이 있었다.

"그 주식 전부 넘기시지. 오늘 시세가 2억5천인데, 넉넉하게 8억 드리지."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싫은데?"

박재구는 지분 10퍼센트를 받는 대신에 10억 원을 쳐주라고 지시했다.

연속 상한가가 예상되는 주식 200만 주를 10억 원에 사겠다는 건, 사정을 모르면 할 수 있는 제안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10퍼센트는 금광을 보유한 회사의 경영권 싸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지분이다. 그걸 10억에 사겠다는 건 값을 후려치겠다는 소리다.

그런데 조천상은 거기서 다시 2억 원을 깎았다.

'2억은 내가 먹어야지.'

그는 중간에 2억 원을 빼먹으려고 굳이 혼자 차우진을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차우진이 거절했다.

조천상이 문신을 더 보여주며 말했다.

"금맥을 발견했다는 뉴스 때문에 그러나? 그거 실제 매장량이 얼마인지 아무도 몰라. 금이 별로 없으면 그 회사는 당장 망해. 내일 당장 주식이 휴지가 될 수도 있다고."

"그러는 당신은 휴지를 사서 뭐하게?"

"그건…."

"나 밥 먹으러 가야 하니까 비켜."

조천상은 당황했다. 주식을 받아오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차우진은 팔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금액을 높여 제시했다.

"9억. 더는 못 준다."

"아직도 안 갔냐?"

조천상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후우. 이거 말귀를 못 알아먹는 친구네?"

"난 네 친구가 아니다만?"

조천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격자는 없었다. 그가 셔츠 단추를 풀었다. 몸통에 용과 잉어, 도깨비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9억 받고 떨어지라고."

"도화지에 그림은 그렸는데 퀄은 왜 그리 낮아? 어디서 야매로 새겼냐?"

"이 새끼가!"

조천상이 성질대로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차우진은 시간 가속 스킬을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조천상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할 때 차우진도 발을 내질렀다. 주먹보다 발이 먼저 조천상의 배에 꽂혔다.

"꾸엑!"

조천상이 뒤로 나가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한 대 맞았을 뿐인데 배에 쇠몽둥이가 꽂힌 것 같았다.

조천상이 배를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 이게 아닌데…."

"가라."

"저기, 그러면 10억…."

차우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보내줄 때 가라고."

19. 재구파

재구파 두목 박재구가 골프채를 흔들며 말했다.

"음지에서 번 돈을 양지로 끌어올리려면 돈을 세탁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비용도 많이 들고, 나중에 걸릴 수도 있어."

그런데 방법이 생겼다.

"내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지. 사덕리소스를 먹고 금광을 이용해서 돈을 세탁하는 거야. 장부에 금을 더 캤다고 적어놓기만 하면 되잖아?"

재구파 간부 김덕수가 말을 보탰다.

"우리 애들을 금광 현장 직원으로 등록하면 금으로 만든 장물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거 좋네. 그러니까 그 금광에서 황금이 충분히 나오지 않아도, 일단 금이 나오기만 하면 가치가 있단 말이지."

"그렇게 회사 규모를 키우면 나중에 팔아치울 때도 돈이 될 겁니다."

"장부가 가짜인데 그러면 사기잖아."

"예. 수백억, 어쩌면 천억 이상의 큰 사기가 될 겁니다."

박재구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캬아. 듣기만 해도 좋다. 천억. 소리가 아주 울림이 있어. 그래서 내가 그 주식을 매집하려고 돈을 들이붓고 있는데."

박재구가 조천상을 돌아보더니 골프채로 가슴을 쿡쿡 찔렀다.

"주식을 안 판다고?"

조천상이 똑바로 서서 대답했다.

"예. 제가 설득했는데…."

박재구가 갑자기 골프채로 조천상을 후려쳤다.

"야 이 새끼야!"

"컥!"

"왜 설득만 하다가 그냥 와! 팔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협박했어야 할 거 아냐!"

협박은 차우진이 주식을 안 판다고 했을 때부터 했다.

처음에는 팔을 걷어 문신을 보여주었다. 그게 안 통해서 상체의 문신까지 보여주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혀, 협박은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새끼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그럼 몇 대 쥐어박던가!"

조천상이 주먹도 먼저 날렸다. 그리고 처맞았다.

"이번 일은 인텔리하게 처리하려다가…."

조천상은 차우진에게 맞았다는 걸 보고하지 않았다. 맞은 곳이 배라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새끼 이거 왜 이렇게 물러터졌어?"

차우진의 기세가 살벌해서 겁먹고 도망치듯 돌아왔다는 것도 숨겼다.

"죄, 죄송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애들 데려가라고 했잖아!"

"뒤탈 안 나게 대화로 잘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진짜입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대화를 왜 해!"

박재구가 화를 내다가 골프채를 던졌다.

"그 새끼 말이야. 내가 좋게좋게 돈 준다고 했는데도 싫다? 그러면 우리가 잘하는 걸 해야지. 애들 데려가서 돈 던져주고 주식 받아와!"

재구파의 본업은 사채업이다. 사덕리소스를 먹고 양지에서 활동하게 되어도 본업인 사채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 그만두기는커녕 돈세탁까지 할 생각이다.

조천상이 큰소리쳤다.

"이번에는 확실히 받아오겠습니다!"

"김 실장이랑 같이 가."

김덕수는 조천상의 조직 내 경쟁자다.

조천상이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제가 또 돈 받아내는 거 하나는 잘하잖습니까? 애들 데려가서 주식을 확실히 받아내겠습니다."

"뭐해? 빨리 가서 내 10퍼센트 전부 다 받아와!"

"알겠습니다!"

조천상이 일단 대답은 해놓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형님. 그런데 주식값 말입니다."

처음에 제안했던 건 10억 원이다. 그런데 조천상은 차우진에게 얻어터지고 앙심을 품었다. 어차피 부하들을 데려가면 중간에 떼어먹을 수도 없다.

"애들까지 데려가는데 돈을 줄 필요는 없잖습니까?"

김덕수가 끼어들었다.

"회사를 인수하는 일인데 공짜로 주식을 받아오면 탈 난다. 지금은 넉넉히 주고 나중에 약이나 도박으로 설계 쳐서 도로 회수하면 돼."

"단타꾼 새끼한테 10억이나 줬는데 주식으로 다 날리면, 나중에 회수할 돈이 없잖아."

박재구가 말했다.

"조 실장 말도 맞아. 그냥 오늘 시세로 던져줘. 2억5천. 나중에 싹 다 회수하고."

조천상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

차우진이 고기를 먹으며 말했다.

"야. 여기 생각보다 안 비싸다?"

민수연이 스테이크를 썰면서 대답했다.

"너 요즘 백수잖아. 그래서 여기로 골랐지."

"그런데 이 와인은 비싸다?"

"그래서 2차는 소주로 하려고. 2차는 내가 살게."

"네가 살 땐 소주냐? 마늘이랑 쑥 좀 시킬까? 너 사람 되려면 그거 많이 먹어야겠는데."

"여기 스테이크 옆에 구운 마늘 있잖아."

"넌 그걸로 안돼. 마늘밭을 털어야 해. 쑥도 꼭 챙겨 먹어라."

차우진이 그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가 사는 와인이라서 많이 따랐다.

"이거 맛있네."

"네가 먹어본 와인 중에 제일 맛있지?"

"아니."

"어디서 좋은 와인 마셔봤어?"

"내가 마신 건 포도 주스와 에틸알코올을 섞은 맛이었어."

"그게 맛이 있냐?"

"진짜 맛있었지."

***

차우진은 저녁을 잘 먹고 2차에서 한 잔 더 한 후에 집으로 향했다. 민수연은 같은 동네에 살지만 집은 달라 중간에 헤어졌다.

차우진이 집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때 창수 형은 귀한 거니까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셔야 한다고 혀로 핥았는데. 지금은 안 그러…. 그 형은 지금도 그러겠지."

차우진이 CCTV가 없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까 여기서 조천상을 걷어차 쫓아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어이. 차우진 씨."

차우진이 조천상을 쓱 보았다.

"넌 뭐 각설이냐? 또 왔네?"

조천상이 여기 있다는 건 이 골목에 들어설 때부터 알고 있었다.

조천상이 실실 웃었다.

"집에 찾아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길에서 만나네?"

"집에 찾아왔으면 선 넘은 거지."

"흐흐흐. 내가 선 넘으면 뭐 어떻게 하게?"

차우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럼 뒈져야지."

생존 커뮤니티 내부까지 쳐들어온 적은 먼저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그게 멸망한 세계의 상식이다.

조천상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헉. 무슨 눈빛이…. 김 실장 그 새끼도 눈빛이 이 정도는 아닌데.'

조천상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아까 맞은 배가 다시 아팠다.

그러다 뒤를 보았다. 덩치 좋은 부하 셋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서 있었다. 그들을 보니 다시 기가 살았다.

조 실장이 부하들처럼 어깨를 으쓱한 후에 말했다.

"차우진 씨. 사덕리소스 주식 가진 거 모두 우리한테 팔아야겠어."

"안 판다니까."

조천상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아. 조건이 변했어. 아까는 10억이었는데."

"8억이라며?"

"마지막에 10억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지금은?"

조천상이 실실 웃었다.

"오늘 종가 시세대로 쳐줄게. 2억5천이면 되겠지?"

"몇 시간 만에 너무 많이 줄었네?"

"오늘 시세 그대로라니까?"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오늘 상한가를 쳤고, 앞으로도 상한가가 몇 번은 예약된 주식을, 거래량이 별로 없어서 매수 주문을 넣어도 살 수가 없는 주식을 오늘 종가에 사겠다?"

"바로 그거지."

"너 산수 할 줄 모르는 등신이냐?"

"이 새끼가! 후우."

조천상이 숨을 크게 몰아쉰 후에 손가락을 뒤쪽으로 흔들었다.

"자꾸 이러면 집에 찾아간다니까? 우리 무서운 사람들이야. 집에 찾아가면 그때부터는 감당 안 될걸? 가족들은 겁에 질리고, 이웃들은 색안경 끼고 봐. 사는 게 지옥이 되는 거지."

조천상이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물론 그때는 가격이 2억5천에서 더 아래로 내려갈 거야. 너무 오래 버티면 한 푼도 못 건져."

차우진이 진지하게 경고했다.

"집에 들어오면 뒈진다고 했을 텐데?"

조천상이 4대 1이라는 머릿수 차이를 믿고 화를 벌컥 냈다.

"이 새끼가 지금 분위기 파악이 안 되나! 주식 싹 다 내놓으라고!"

멸망급 재난 중에는 충분한 예산이 있어야 겨우 막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돈이 부족해서 그 재난들을 막지 못하면 지구가 멸망한다.

차우진은 이제 겨우 필요한 예산의 씨앗이나 될까 싶은 돈을 모았다.

그런데 아직 싹도 제대로 안 난 그 돈을 헐값에 넘겨달라는 놈들이 나타났다.

"너희들은 그러니까."

차우진이 조 실장과 그 뒤의 셋을 정의했다.

"빌런이네?"

조천상은 움찔했다.

'이 새끼 눈빛이 더 무서워졌는데?'

그렇다고 부하들 앞에서 움츠러들 수는 없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결국 잡아먹히는 게 조천상이 사는 세계다.

조천상이 일부러 더 강하게 협박했다.

"주식을 내놓지 않으면 다 죽는 수가 있다."

차우진이 말했다.

"야. 나도 그거 잘하는데."

"뭘?"

"다 죽이는 거."

"이 새끼가 아직도 구라를 쳐? 안 되겠다. 얘들아. 이 새끼 잡아다가…."

차우진이 왼발로 땅을 쓱 밀었다. 공간이동 스킬은 아니다. 그저 한 걸음 크게 전진한 것뿐이다.

그런데 빨랐다.

둘 사이에 있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조천상의 눈이 커졌다. 그가 급히 두 팔을 들어 앞을 막았다.

"이 새…."

차우진의 오른발이 바닥에 닿았다. 그대로 땅을 밀며 주먹을 내질렀다. 쭉 뻗은 다리부터 시작해 회전하는 허리를 통해 올라온 힘이 주먹에 깃들었다. 거기에 체중이 실렸다.

차우진의 주먹이 조천상의 팔뚝 사이를 뚫고 들어가 가슴 한복판에 꽂혔다.

"케에엑!"

조천상의 가슴이 푹 꺼졌다. 몸뚱이가 뒤로 날아갔다.

재구파 조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어?"

"조 실장님!"

차우진이 왼발로 바닥을 박차며 위로 솟아올랐다. 순간적으로 하늘을 날았다. 조천상과 제일 가까이 서 있던 조직원이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차우진이 공중에서 오른발을 뻗었다. 오른발이 팽이처럼 수평으로 회전하며 조직원의 턱을 갈겼다.

"켁!"

조직원의 고개가 휙 돌아가고 몸도 따라서 옆으로 돌았다. 차우진은 걷어찬 반동을 이용해 공중에서 조금 이동한 후에 바닥에 내려섰다.

남은 조직원 두 놈은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기습이다!"

그들이 서둘러 잭나이프를 꺼냈다. 칼날이 튀어나왔다.

"이, 이 새끼…."

넷이 왔는데 둘이 너무 순식간에 당했다.

조천상은 가슴이 움푹 꺼졌다. 다른 하나는 고개가 돌아갔다. 겉모습만 봐서는 둘 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분되지 않았다.

조직원들은 칼을 쥐고 있는데도 겁에 질렸다.

"오, 오지 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뒤쪽이 벽이라 도망칠 수도 없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너희는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다."

"우, 우리는 조 실장님이 가자고 해서…."

"보내줄 때 가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우, 우리는 여기 처음 왔다!"

차우진이 갑자기 허리를 손으로 짚었다.

"어? 허리가…."

"뭐?"

"쯧. 무리했나."

미래에서 쓰던 전투 기술을 현재의 단련되지 않은 몸뚱이로 썼더니 몸에 부담이 갔다. 점프와 공중회전 발차기가 다 문제였다.

"허리가 아프려고 하네."

그래도 발차기의 위력은 충분했다. 신체의 유연성과 정교함은 꿈속 미래에서 싸우던 때보다 못하지만, 그때보다 체중이 더 무거운 덕분에 타격력이 올라갔다.

"또 파스 붙여야 하나?"

그가 허리를 짚은 걸 본 조직원 하나가 눈을 번뜩였다.

'배 나온 놈이 방금처럼 날아다니는 게 가능한 일인가? 당연히 무리해서 한 거겠지? 허리가 아파? 허리가 나가서 못 움직이는 상태야?'

조직원이 즉시 차우진을 향해 달려가며 동료에게 외쳤다.

"저 새끼 허리 나갔다! 지금 제끼면 돼!"

차우진이 허리에서 손을 뗐다.

"그건 네 생각이고."

상대가 덤벼주면 그것도 좋다. 그만큼 차우진이 움직임을 줄여도 된다.

조직원이 달려들었다. 손에 쥔 잭나이프의 칼날이 차우진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왔다.

"느리네."

칼잡이 김준배는 칼을 잘 썼다. 연쇄살인마 마상국은 김준배보다 실력이 좋았다. 청부업자 박영호조차도 칼솜씨가 나쁘지 않았다.

그놈들에 비하면 재구파 조직원의 칼은 형편없었다. 칼의 속도도 느리고, 어디를 찌를지도 훤히 보였다.

차우진이 적의 칼을 슬쩍 움직여 피했다. 피하는 건 쉬웠다.

붙잡는 것도 마찬가지로 쉬웠다.

차우진의 칼을 피하면서 적의 팔을 잡아 바깥쪽으로 꺾었다. 그러면서 몸을 옆으로 돌렸다.

적의 팔이 그의 몸을 타고 휘어지다가 뚝 부러졌다.

칼을 휘두르며 덤벼든 조직원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으아악!"

잭나이프가 적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차우진이 적의 뒤통수를 팔꿈치로 후려쳤다.

"켁!"

팔이 부러진 놈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마지막 조직원은 동료가 공격할 때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씨, 씨발. 허리 다쳤다더니 아니잖아."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만."

조직원이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뛰었다.

"으아아!"

차우진은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래. 한 놈은 남아 있어야 길잡이를 하지."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하이에나들과 싸울 때 한두 놈을 살려 보내는 방법을 쓰곤 했다. 몰살이 가능한데도 일부러 조금 살려두면, 남은 놈은 알아서 본거지로 돌아갔다.

차우진이 도망치는 조직원을 따라가며 말했다.

"널 보낸 놈이 책임을 져야 하니까."

20. 재구파 II

재구파 간부 조천상과 조직원 둘이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한 놈은 도망쳤다.

조직원이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계속 뛰었다. 멈추면 차우진이 쫓아와 다른 조직원들처럼 박살 낼 것 같았다.

'죽었을까?'

어쩌면 한 놈쯤은 죽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람이 없는 외진 곳에 승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가 그 차를 향해 뛰어가 문에 손을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살았다."

너무 숨이 차서 잠깐 그러고 쉬었다. 하지만 오래 쉴 수는 없다.

"여기서 도망쳐야 돼."

그가 운전석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손잡이만 덜컹거렸다.

"아! 씨발. 차 키!"

그 차는 스마트키로 시동을 거는 방식이다. 그런데 스마트키는 다른 놈이 가지고 있었다. 그놈은 지금 팔이 부러지고 뒤통수까지 맞아 고꾸라진 상태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용기는 없었다.

"거기 가면 그놈이 있을 거야."

그가 주머니를 뒤졌다. 차 키는 없지만 휴대폰은 있었다.

그가 급히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눌렀다. 상대는 재구파 간부 김덕수였다.

"김 실장님한테 전부 다 연장 챙겨서 와야 한다고 말해야…."

스마트폰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누군가 그의 스마트폰을 잡아챘기 때문이다.

"어?"

조직원이 옆을 보았다.

차우진이 씩 웃고 있었다.

"히익!"

차우진이 빼앗은 스마트폰으로 적의 손목을 내리쳤다. 조직원의 손목이 뚝 꺾였다.

"으아악!"

"너 때문에 또 운동했잖아. 이거 어쩔 거냐?"

"어, 어떻게 여길…."

"뛰어왔지."

표나지 않게 조용히 따라가다가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블링크 스킬로 간격을 줄였다. 그래서 도망친 조직원은 차우진을 발견하지 못했다.

조직원이 뒤로 물러나며 왼손으로 잭나이프를 꺼내 차우진을 겨누었다.

"이, 이 새끼…."

"겨우 그걸로 되겠냐? 아까 봤잖아. 비벼보려면 총이라도 꺼내야지?"

조직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 우리는 그냥 협박이나 하러 온 거야! 너를 죽이려고 온 게 아니라고!"

"그래서 너희가 아직 살아있는 거다. 아니었으면 벌써 다 뒈졌어."

조직원의 표정이 살짝 펴졌다.

"좀 전에 거기서 아무도 안 죽…."

"아. 죽은 놈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내가 세심하게 조절해서 패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히익!"

셋 다 살아있다.

조금 전에 싸운 장소는 사람들이 가끔 지나다니는 골목이다. 골목에 CCTV는 없어도 목격자는 생길 수 있다. 마상국 때도 비슷한 이유로 골목에서는 잡지 않았다.

차우진이 말했다.

"나한테 협박을 하긴 했지. 내가 가진 주식을 다 내놓으라며?"

"그, 그건 내가 달라고 한 게 아니라, 조 실장님이…."

"그게 어디에 쓸 돈인지 알아?"

"어디에…."

"너 따위가 알아서 뭐 하겠냐."

조직원이 차 옆에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차우진이 그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도망치게 놔둘 생각이 없다.

조직원도 그걸 눈치챘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왼손에 쥔 칼을 크게 휘둘렀다.

"씨발!"

칼날의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고 궤적도 단순했다. 칼날이 언제 어디를 지나갈지 훤히 보였다. 심지어 그쯤에서 조직원이 그렇게 휘두를 줄 알고 있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놈이 겁먹었을 때의 뻔한 움직임이네.'

멸망한 미래에서 실전경험이란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투를 말한다.

차우진은 조금 전에 조직원 셋을 잡을 때 화려하게 몸을 쓰다가 근육통이 생길 뻔했다.

이번에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충분했다.

차우진이 스마트폰을 단검 대신 쥐고 적의 공격을 받아쳤다. 적의 칼이 아니라 그걸 쥐고 있는 손을 후려쳤다.

"끄아악!"

적의 손가락이 부러지며 칼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날아간 칼은 벽에 부딪혔다.

차우진이 비명을 지르는 적의 턱을 후려쳤다.

"켁!"

"사람들 자야 하는데 시끄럽게. 새끼가 매너가 없어."

조직원의 눈이 풀렸다. 힘을 조절해서 때린 덕분에 기절하진 않았지만 다리도 힘이 빠졌다.

조직원이 털썩 주저앉았다.

차우진이 그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직까지 살려둔 걸 고맙게 생각해라. 옛날 같으면 죽여놓고 생각…. 음."

그건 옛날이 아니라 꿈속에서 본 미래의 상식이다.

"그럼 옛날이라고 하면 안 되나?"

차우진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본 조직원이 겁을 집어먹었다.

"사, 살려주십쇼!"

"싫다."

"히익!"

조직원이 어떻게든 도망쳐보려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차우진이 일어나는 놈의 다리를 툭 차며 상체를 잡아당겨 옆으로 던졌다.

조직원이 차 운전석 유리와 충돌했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켁!"

조직원은 기절했다.

이번 일은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연쇄살인마를 죽였을 때와는 다르다. 경찰 수사라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놈을 죽일 이유가 없다.

"이 새끼들. 좋은 시대에 사는구나. 이렇게 습격했다가 실패했는데도 안 죽고."

목격자는 없지만 차우진이 이 시간대에 이곳을 지나갔다는 기록은 남는다. 이놈들이 죽으면 알리바이를 만들어도 의심받는다.

그래서 살려뒀다.

차우진이 기절한 조직원을 옆으로 밀친 후에 부서진 운전석 창문에 손을 넣고 문을 열었다.

이 차는 스마트키 없이 시동 버튼만 눌러도 전기는 들어온다. 그러면 차에 달린 사제 내비게이션도 켜진다.

차우진의 차의 전원을 켠 후에, 내비게이션의 최근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가장 최근 목적지는 여기였다.

"출발지는 중랑구네?"

이놈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기 위해서 좀 전에 한 놈만 일부러 놓쳤다. 그놈은 여기까지 도망 왔다가 지금 옆에 널브러져 있다.

차우진이 출발지의 주소를 보며 말했다.

"여기에 너희들을 보낸 놈이 있겠지."

이제 필요한 정보는 확인했다. 사채업자가 쓰는 차라서 블랙박스는 없었다.

차우진이 차의 전원을 끄고 문을 도로 닫았다.

"확인했으니까 집에 가자."

차우진은 좀 전에 지나가던 골목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차우진와 차유리 남매가 사는 곳은 아파트다. 그 아파트는 입구는 물론이고 엘리베이터에도 CCTV가 있다.

차우진이 집에 들어갈 때 몇 대의 CCTV에 그의 모습이 확실히 찍혔다.

차우진이 집안에 들어와 불을 켰다. 스마트폰은 거실 탁자에 내려놓았다.

차우진이 상의를 완전히 벗고 거울 앞에 섰다.

"난 이 넉넉한 배가 좋다만."

오늘 밤에는 이 배를 좀 감춰야 한다.

차우진이 일단 배에 힘을 줬다. 배가 들어갔다.

그 위에 재킷을 입었다. 것과 속이 다른 디자인으로 되어 있는 이중 재킷이었다. 뒤집어 입으면 완전히 다른 옷처럼 보였다.

그 옷을 입으니 배가 사라지고 체형도 다르게 보였다.

"이러면 살을 안 빼도 배가 들어가잖아. 여기에 전투보조 스킬을 좀 쓰면 체형까지 날렵…. 후우우."

차우신이 숨을 몰아쉬었다.

"근데 이러면 내가 힘들잖아. 안 편해."

잠깐 싸울 때는 배를 집어넣어 체형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계속 배를 집어넣고 다니는 건 어렵다. 불가능한 건 아닌데 힘들다.

차우진이 옷장을 뒤졌다.

"수연이가 예전에 나 놀리려고 그걸 선물로 줬…. 찾았다."

차우진이 복대를 찾았다. 그걸 배에 강하게 감았다. 배가 쏙 들어갔다.

그 위에 셔츠를 입고 다시 재킷을 걸쳤다.

"그래. 이거지."

넥타이도 걸쳐보았다.

"완벽해."

차우진이 거실의 TV를 켰다. 광고가 나왔다.

리모컨을 눌러 방송을 영화 채널로 바꿨다. 요즘 조금씩 뜨는 배우 정예지가 신인일 때 찍은 영화가 나왔다.

TV에서 뭐가 나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TV를 켰다는 게 중요했다.

차유리는 오늘 야근이다.

"집안은 이 정도면 세팅이 됐고."

차우진이 손에 입김을 분 후에 냄새를 맡아보았다. 술 냄새는 이미 사라졌다. 그의 해독 능력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

"컨디션도 확인했으니까."

차우진이 베란다로 갔다. 창 너머로 아파트 다른 동 옥상이 보였다.

"이제 가야지."

블링크는 단거리 이동 스킬이다.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는 발동 시간이 짧아 전투에 사용하기 좋다.

그 스킬은 이동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 오래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장거리 이동용으로 쓰기는 어렵다.

그래도 15층 아파트의 12층에서 다른 동 옥상으로 이동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차우진이 베란다 창문을 조금 연 후에 건너편 옥상을 잠시 보다가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집 베란다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다른 동 옥상에 나타났다. 옥상에 바람이 불면서 차우진이 그곳에 착지했다.

발바닥에 차가운 옥상 바닥이 느껴졌다.

"아차. 신발."

신발을 신고 공간이동을 해야 하는데 그걸 깜빡했다.

멀리 점프할수록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은 길어진다. 좀 무리하면 쿨타임을 당길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차우진이 옥상에서 잠깐 기다린 후에 12층 베란다로 다시 이동했다.

이번에는 운동화를 챙겨 신고 그곳에서 아파트 옥상까지 다시 공간을 건너뛰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더니, 그게 난가?"

아파트 옥상에는 CCTV가 없다. 차우진이 옥상 끝까지 걸어갔다.

길 건너에 다른 아파트 단지 옥상이 보였다.

"저긴 조금 머네."

차우진이 잠시 기다렸다가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다시 사용했다. 옥상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길 건너 아파트 옥상에 나타났다.

이렇게 몇 번 더 이동한 후에 지상으로 나가야 추적이 불가능하고 알리바이가 완성된다.

오늘 밤 목적지는 재구파 사무실이다.

***

재구파 간부 김덕수가 전화를 걸려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에 부재중 알림이 떠 있었다.

"뭐지?"

벨이 제대로 울리기 전에 끊어져도 부재중 통화 기록은 남을 수 있다.

두목 박재구가 물었다.

"뭐야?"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가 끊어졌습니다."

재구파 조직원들은 사람을 협박하러 갈 때는 대포폰을 가져간다. 개인 휴대폰을 가져가면 문제가 생겼을 때 조직원이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가 남는다.

김덕수는 대포폰 번호는 휴대폰 주소록에 등록하지 않았다. 체포됐을 때 그 번호가 증거가 될 수 있어서다.

그는 부하의 개인 휴대폰 번호도 직속 부하나 조장의 번호 정도만 주소록에 남겨놨다.

그래서 조천상 밑에 있는 조직원이 전화를 걸었을 때 김덕수의 폰에는 이름이 아니라 모르는 전화번호가 떴다.

박재구가 투덜댔다.

"보이스피싱이네. 짭새들은 그런 새끼들은 안 잡고 뭐 하는 거야?"

"조직이 중국 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국내파에 신경 쓸 시간에 그 새끼들을 잡아야지. 내가 번 돈은 내가 국내에서 쓰는데, 그 새끼들이 챙긴 돈은 중국으로 넘어가잖아."

"그렇게 말입니다."

"나처럼 내수를 살리는 사람이 애국자 아냐? 하여간 짭새 새끼들은 경제를 모른다니까."

옆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끄아악! 형님! 살려주십쇼! 이 개새끼들아! 나 이종수야!"

박재구가 그쪽을 힐끗 보았다.

"목소리가 기운찬 거 보면 아직 죽지는 않겠네."

"숨겨둔 차명 주식이 더 없는지 철저히 확인하겠습니다."

"어쨌든 살려는 둬. 종수가 살아있어야 나중에 문제 생겼을 때 다 뒤집어씌우지."

"그때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달면 어떻겠습니까?"

"강에 투신하는 게 낫지 않아?"

"시체를 못 찾으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하긴. 예전에 그래서 골치 아파졌던 적이 있지. 그날은 비가 너무 많이 왔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데려왔습니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젊은 여자가 끌려와 박재구 앞에 있는 의자에 강제로 앉혀졌다.

재구파 두목 박재구가 그녀를 보며 히죽 웃었다.

"왔어?"

21. 시작

재구파 두목 박재구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의 앞 의자에 젊은 여자가 강제로 앉혀졌다. 조직원들이 그녀의 팔을 뒤로 돌리고 의자에 묶었다.

"얘 이름이 뭐더라?"

옆에서 김덕수가 대답했다.

"진소영입니다."

"그래. 진소영. 얼굴도 예쁘고 이름도 예쁘네."

옆방에서 이종수의 비명이 들렸다.

"으아악!"

진소영이 그 소리를 듣고 몸을 움찔 떨었다.

박재구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저 새끼가 말이야. 내 돈을 훔쳤어. 그리고 튀었지. 그런다고 내가 못 찾나? 찾아내서 잡아왔지. 그래서 저렇게 처맞는 거야."

그가 손가락으로 진소영을 가리켰다.

"너도 마찬가지야. 어디로 도망치든 내가 찾아낸다. 내 돈은 아무도 못 떼어먹어."

박재구가 손가락을 두 개 세웠다.

"아가씨가 빌린 돈 2억 원. 살고 싶으면 갚아야지?"

그녀가 항의했다.

"그건 내가 빌린 돈이 아니잖아요!"

"네 친구가 빌렸잖아."

"그럼 걔한테 받아야죠!"

"그년은 죽었고 차용증에 네 지장이 찍혀 있으니까, 네가 갚아야지."

진소영이 머리를 흔들었다.

"난 그 돈 구경도 못 해봤어요! 지장도 내가 술 취해서 잘 때 걔가 몰래 찍은 거예요!"

"그럼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지."

"네?"

박재구가 실실 웃었다.

"아. 너도 하던 일이 일이라서 안 마실 수는 없었나?"

그녀가 두 팔이 묶인 채로 몸을 비틀었다.

"난 룸에 안 나가요! 그때 나갔던 것도 속아서 몇 번 한 거예요! 지금은 안 한다고요!"

그녀가 술에 취했을 때 지장을 몰래 찍은 친구는 그 룸살롱에서 알바를 할 때 만났던 사람이다. 차용증에 지장이 찍힌 것도 그 룸살롱에서였다.

박재구가 말했다.

"어쨌든 경력자잖아. 처음이 어렵지 다음부터는 쉬워. 평범한 회사에서 월급 받아서 언제 2억을 다 갚겠어?"

박재구가 룸살롱 마담 명함을 흔들었다.

"네가 일 다시 하면 정 마담이 나한테 네 빚을 갚을 거야. 그러면 너는 정 마담 밑에서 일해서 그 빚을 갚아."

박재구가 그녀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너 정도면 말이야. 내가 따로 보내는 VIP 상대로 2차 팍팍 나가면 2억 그거 갚을 수 있어."

진소영이 소리를 질렀다.

"안 해! 안 할 거야!"

"하여간 말로 하면 못 알아듣는다니까."

박재구가 옆에 서 있던 조직원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말 들을 때까지 패라. 얼굴은 건드리지 말고. 얼굴이 돈이 되니까 다른 곳을 패. 빨리 일 시작해야 하니까 멍 안 들게 신경 써서 만져라."

조직원이 손가락을 꺾으며 실실 웃었다.

"형님. 제가 또 흔적 안 남게 패는 거 전문이잖습니까?"

박재구가 피식 웃었다.

"새끼. 그래. 네가 술집 여자 패는 건 전문가지. 역시 우리 회사는 전문가들이 많아서 좋다니까."

박재구가 옆을 보았다.

"김 실장. 넌 얼굴이 왜 그래?"

김덕수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조 실장이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일하는 중이니까 꺼놨겠지."

재구파 조직원은 협박하러 갈 때는 평소에 쓰는 휴대폰은 꺼놓고 대포폰을 사용한다. 그래야 본인 휴대폰의 위치 기록이 남지 않는다.

대포폰은 그때그때 바뀌기 때문에 번호를 모른다.

"예상보다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그건 그러네."

박재구가 불평했다.

"조 실장 그 새끼. 요즘 배에 기름이 꼈나. 일하는 게 영 느려졌어. 내 주식 가진 새끼를 아직도 못 찾았나 보다."

***

차우진이 재구파 조직원 차량의 내비게이션에 남아 있던 출발지 주소에 도착했다.

그 주소에는 3층 건물이 있었다.

"여기냐."

건물 크기는 작은 편이었다. 위치도 조금 외진 장소였다.

주변에 철공소나 가게 등이 조금 있지만, 지금은 시간이 늦어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차우진이 건물 외부부터 확인했다. 3층 건물의 모든 창문에 불투명 시트지가 붙어 있어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이놈들이 건물 전체를 쓰나 본데."

일반적인 가게라면 건물에 간판이라도 붙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건물에 있는 건 돈을 빌려준다는 대부업 표시뿐이다.

1층 창문에는 방범용 철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알루미늄이 아니라 스테인리스로 만든 튼튼한 철창이었다.

1층 출입구는 두꺼워 보이는 철판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현관 바로 위와 옆에는 CCTV 카메라가 보였다.

"누가 오든 내부에서 먼저 얼굴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준다는 거니까, 저 안에 있는 놈들은 다 한통속이란 뜻이네."

이러면 건물 정면으로는 들키지 않고 침투하기 어렵다.

차우진이 위를 보았다. 3층 건물 위에는 옥상이 있었다.

그가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확인한 후에 말했다.

"이 정도 거리면 뭐."

차우진이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며 딱 한 걸음 움직였다. 그냥 걸은 것이 아니라 블링크 스킬을 사용했다.

지상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옥상 출입구의 지붕에 나타났다.

수직 공간이동은 수평 이동보다 제약이 많다.

예전 생각이 났다.

"이 스킬을 처음 익혔을 때는, 수직 이동을 하다가 떨어져 죽을뻔했는데. 그런데 이걸 옛날이라고 해도 되나? 자꾸 헷갈리네."

꿈속에서 이미 경험한 일이긴 한데, 정확히 따지면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차우진이 이동한 곳은 옥상 출입 계단의 지붕이다. 혹시 CCTV가 옥상에도 있을까 싶어 처음부터 여기를 목적지로 삼았는데, CCTV는 없었다.

차우진이 옥상으로 가볍게 뛰어내리며 말했다.

"이 건물이 통째로 사채 사무실인 걸 보면 여기서 나한테 그놈들을 보낸 건 확실하니까."

이제 처분을 결정해야 한다.

"그냥 확 불이나 지를까?"

아래층에서 비명이 작게 들렸다.

차우진이 창문이 있는 옥상 구석으로 걸어갔다.

3층은 창문에 방음유리를 썼다. 그런다고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는 건 아니다.

차우진의 전투 센스가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소리가 좀 더 확실히 들렸다.

"남자 비명 하나. 여자 비명 하나. 인질이 최소 두 명."

차우진의 전투 판단 기준과 가치관은 현재와 미래가 섞여 있다.

미래 방식으로는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도 좋은 해결법이다. 그런 후에 불길을 피해 튀어나오는 놈들을 하나씩 처리하면 된다.

그런데 건물 내부에 사람이 잡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현대 기준으로는 그 사람들을 놈들과 같이 죽일 수는 없다.

"인질이 있으니까 불은 못 지르겠네."

구출하려면 쳐들어가야 한다.

***

진소영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그녀가 의자에 묶인 채로 옆으로 넘어졌다.

박재구가 짜증을 냈다.

"이 새끼가. 멍들지 않게 때리라니까."

"죄송합니다. 기술적으로 잘 때렸는데, 의자가 낡아서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제대로 해라. 2차 보냈는데 몸이 멍투성이면 어떻게 될 거 같냐? 그것도 손님이 VIP면?"

"자기도 때리지 않을까요?"

"VIP가 다 변태냐? 그리고 아무리 변태라도 남이 먼저 패다가 넘겨준 거로 놀고 싶겠냐? VIP니까 당연히 클레임을 걸겠지. 그러면 정 마담이 나한테…."

사장인 박재구가 있는 곳은 건물 3층이다. 3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야?"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배달 왔습니다."

"배달? 누가 뭐 시켰어?"

김덕수의 표정이 굳었다.

"아닙니다. 배달을 시켰어도 1층에서 받을 겁니다."

박재구가 얼굴을 구겼다.

"습격인가?"

그의 부하들이 무기에 손을 댔다.

박재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만. 이상해. 습격이라기엔 너무 조용한데?"

누가 이 건물을 습격했다면 1층에서 이미 소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밖이 너무 조용했다.

외부 창문에는 방음유리를 썼지만 건물 내부까지 그런 건 아니다.

3층 사무실로 들어오는 출입문에는 CCTV가 하나 붙어 있었다.

박재구가 책상으로 걸어가 소형 모니터를 확인했다.

3층 현관 앞에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마스크는 쓰고 있지만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있어도 옷 속에 회칼 한 자루 정도겠군.'

그는 차우진이 어떻게 3층까지 올라왔는지 궁금해졌다.

박재구가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한 놈이다. 손님 맞을 준비 해라."

3층에 있던 부하들이 무기를 챙겼다. 쇠파이프와 회칼이었다.

옆방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있던 놈도 나왔다.

김덕수는 왼손으로 장검을 들었다.

박재구가 말했다.

"문 열어."

부하가 문을 열었다. 문앞에는 차우진이 서 있었다.

차우진이 내부를 쓱 쳐다보았다. 박재구와 김덕수, 조직원 셋이 보였다.

"다섯."

바닥에는 진소영이 두 팔이 묶인 채로 의자와 함께 쓰러져 있었다.

"인질 하나."

그가 옆방을 보았다. 열린 방문 너머로 의자에 묶인 채로 얻어맞은 사람이 보였다. 조직의 자금을 빼돌려 사덕리소스 주식을 샀다가 도망친 이종수였다.

"인질 둘."

차우진이 3층 사무실 안으로 쓱 들어왔다.

"그런데 여기는 뭐 하는 곳이냐?"

박재구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찾아왔냐?"

"밖에 보니까 돈 빌려준다고 적혀 있더라? 그러면 사채나 하지 왜 선을 넘어?"

"뭐?"

"현대 문명의 혜택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냐?"

차우진이 가진 사덕리소스 주식은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한 예산의 시드 머니다. 그 돈을 만들려고 차우진이 전 재산을 털어 넣고 대출까지 받았다.

그런데 박재구가 그 주식을 노렸다.

박재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미래를 모르면 차우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무슨 헛소리야?"

"네가 빌런이라는 소리지."

박재구가 진소영을 돌아보았다. 그는 차우진이 현대 문명을 언급한 걸 다르게 이해했다.

"여자 때리는 것 때문에 그러나? 순진한 놈이군."

박재구가 책상 앞에서 말했다.

"문명인이 되고 싶으면 말이야. 빚을 졌으면 갚는 것부터 배워야지. 빚을 안 갚는 저런 것 때문에 나 같은 문명인이 살기 어렵다니까. 그래서 좀 때린 거다. 빚 갚으라고."

진소영이 넘어진 채로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진 빚이 아니잖아요! 난 그 돈 구경도 못 해봤어!"

차우진이 말했다.

"아니라는데?"

박재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누군가는 빚을 졌으니까 누군가는 갚아야지. 그러게 친구를 잘 사귀든가."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역시 개새끼들이네. 기대한 대로야."

박재구는 혹시 CCTV가 잘못되었나 싶어 차우진의 뒤쪽을 보았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차우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새끼구나. 어디서 왔냐?"

"지옥."

"뭔 개소리야? 공무원이냐고. 내무부나 법무부 소속이냐?"

"저승사자는 염라 직속이니까 공무원으로 쳐야 하려나."

박재구는 차우진이 미쳤나 싶었다. 그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짭새나 검새는 아닌가 보다. 잡아서 끌고 와라."

이 방에는 박재구의 부하가 넷이나 있다. 그중 셋이 회칼과 쇠파이프를 흔들며 차우진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에 문을 열어준 놈이 회칼을 차우진의 목을 향해 내밀었다.

"어이. 꿇어. 그러면 목숨은 살…."

차우진이 앞으로 툭 튀어나갔다. 마치 회칼을 향해 목을 들이미는 것 같았다.

"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겪으면 당황하고 몸이 굳기 쉽다. 회칼을 든 놈도 마찬가지였다.

차우진이 회칼을 향해 전진하다 몸을 옆으로 슬쩍 기울어졌다.

그 조직원은 칼날 앞에서 그렇게 위험하게 움직이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다 목에 칼을 맞으면 죽기 때문이다.

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칼을 차우진 쪽으로 휘두르려 했다.

늦었다.

차우진의 손에서 잭나이프가 튀어나왔다. 그 칼은 아까 협박하러 왔다가 자동차가 있는 곳까지 도망친 놈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차우진이 회칼을 든 놈의 오른쪽 어깨에 잭나이프를 푹 꽂았다.

"으아악!"

차우진이 말했다.

"시작하자."

22. 빌런 해결방법

조직원이 어깨에 칼을 맞고 비명을 질렀다. 오른팔 전체가 아래로 축 처졌다. 손에도 힘이 빠졌다.

쥐고 있던 회칼이 손에서 빠져나왔다.

차우진이 떨어지는 회칼을 잡아챘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첫 번째 조직원이 당했다.

뒤에 있던 조직원이 황급히 쇠파이프를 위로 들었다.

"이 새끼가!"

차우진의 대응이 더 빨랐다. 적이 파이프를 다 들기도 전에 방금 빼앗은 회칼을 던졌다.

거리가 워낙 가까워 빗나갈 수가 없었다. 조직원의 동체 시력과 민첩으로는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날카롭게 갈린 칼날이 적의 몸통에 깊게 박혔다.

"끄아악!"

조직원이 쇠파이프를 떨어뜨리며 고꾸라졌다.

오른쪽 어깨에 잭나이프를 맞은 놈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오른팔은 마비됐지만 다른 곳은 아직 움직일 수 있었다.

조직원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차우진을 향해 왼쪽 주먹을 휘둘렀다.

"우와악!"

차우진이 몸을 슬쩍 젖혔다. 그러면서 적의 어깨에 박아놓은 잭나이프를 잡아 뽑았다.

주먹은 허공만 갈랐다. 적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적의 허리가 돌아가면서 옆구리와 등이 차우진의 정면에 노출됐다.

차우진이 적의 옆구리와 등에 잭나이프로 한 방씩 푹푹 꽂았다.

"커컥!"

조직원은 어깨까지 포함해 칼을 세 번이나 맞았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다리가 풀렸다.

차우진이 왼손으로 그놈을 옆으로 밀었다. 적이 옆으로 나자빠졌다.

사무실에는 회칼을 든 조직원이 하나 더 있었다.

"어? 어?"

그는 공포에 질렸다. 동료 둘이 순식간에 당했다.

그 조직원의 뒤에는 덕구파 간부 김덕수가 있었다.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김덕수가 왼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오른손으로 뽑았다. 시퍼런 칼날이 스르릉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김덕수가 말했다.

"단검 쓰는 솜씨가 제법이구나."

"보는 눈이 없는 놈이네. 이걸 겨우 제법이라고 하면 되겠냐?"

"어디서 보낸 칼잡이냐?"

"지옥에서 왔다니까."

차우진은 지금은 작은 잭나이프 하나만 쥐고 있었다.

김덕수는 장검을 두 손으로 잡았다. 칼날의 길이만 보면 김덕수가 훨씬 유리했다.

그런데도 김덕수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먼저 빈틈부터 만들어야 해.'

그가 하나 남은 부하에게 지시했다.

"덮쳐!"

"예?"

김덕수의 눈이 번뜩였다.

"이 새끼가! 조지라고!"

그 조직원은 차우진도 무섭지만 김덕수가 더 무서웠다. 그가 차우진을 향해 돌진했다.

"이야아아!"

차우진이 달려오는 놈에게 잭나이프를 던졌다. 나이프가 작살처럼 날아가 적의 다리에 푹 꽂혔다.

"끄아악!"

그 다리가 힘을 잃으며 적이 앞으로 엎어졌다.

바로 앞으로 넘어지는 놈의 턱을 차우진이 걷어찼다. 적의 고개가 돌아갔다.

김덕수의 눈이 번뜩였다.

'저 새끼는 이제 무기가 없다!'

그가 기대한 것보다 상황이 더 좋았다. 김덕수가 즉시 차우진을 향해 전진했다. 장검은 위로 들었다.

'단칼에 벤다!'

그의 눈에 차우진이 연습할 때 쓰던 허수아비처럼 보였다. 허수아비는 김덕수가 베면 사선으로 잘려나간다.

차우진이 바닥을 발로 툭 건드렸다. 바닥에 떨어진 쇠파이프가 위로 튀어 올랐다. 그가 그 파이프를 잡았다.

김덕수가 장검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차우진이 쇠파이프로 받아쳤다.

차우진은 체중이 무거운 만큼 힘이 좋았다. 한순간에 힘을 쏟아내는 기술도 있었다. 순간폭발력은 김덕수보다 월등했다.

게다가 전투 센스는 멸망한 세계에서 수많은 실전을 거치며 쌓은 것이다.

김덕수가 내리치는 칼의 위력은 지금 시대에는 강한 축에 들지만, 차우진이 너무 쉽게 받아냈다.

김덕수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즉시 검을 위로 들어서 다시 내리치려고 했다.

차우진이 더 빨랐다. 그는 적이 칼을 들 때 파이프로 밀어 칼날을 제쳤다.

김덕수는 실수를 깨달았다. 칼을 위로 들지 말았어야 했다. 힘 싸움을 했으면 1초 정도는 더 버틸 수도 있었다.

김덕수의 앞쪽이 활짝 열렸다.

멸망한 세계의 검술은 적을 목검으로 때려 포인트를 얻지 않는다. 그 세계의 검술은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싸울 때 검만 쓰지도 않는다. 실전은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손이든 발이든 쓸 수 있는 건 뭐든 다 사용해 적을 공격해야 한다.

그게 멸망한 세계의 검술이다.

차우진이 김덕수에게 달라붙으며 왼손을 가볍게 뻗었다. 손바닥이 적의 어깨를 때렸다.

김덕수는 당황했다. 맞은 충격은 크지 않았지만, 어깨가 밀리면서 위로 들던 칼이 더 젖혀졌다.

"이 새…."

차우진이 앞으로 뻗었던 손을 옆으로 휙 움직였다. 손가락이 김덕수의 목을 노렸다.

김덕수가 황급히 몸을 젖혔다. 중심을 잃었지만 목이 손아귀에 붙잡히는 것만 겨우 피했다.

그렇다고 다 피한 건 아니다.

차우진의 손바닥이 김덕수의 따귀를 때렸다. 쩍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김덕수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컥!"

김덕수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장검을 휘두르며 싸우다가 따귀를 맞을 줄은 몰랐다.

화가 치밀었다. 김덕수가 차우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욕을 했다.

"이 새…."

욕할 틈이 없었다. 차우진이 바짝 접근하며 김덕수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이미 자세의 중심이 무너져 옆으로는 피할 수 없다. 김덕수가 뒤로 더 물러났다. 그런데도 차우진의 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차우진이 접근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차우진이 김덕수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동시에 다리도 걸었다. 김덕수의 몸이 중심을 잃고 옆으로 기울어질 때 어깨를 콱 눌렀다.

김덕수의 몸이 바람개비처럼 옆으로 휙 돌아가다가 바닥에 처박혔다.

"켁!"

김덕수는 바닥에 머리가 부딪치는 충격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장검은 놓지 않으려 했다.

차우진이 김덕수의 손을 툭 찼다.

장검이 손에서 빠져나가 사무실 바닥을 미끄러졌다.

두목 박재구는 부하들이 당하는 동안 책상 서랍에 손을 대고 있었다.

한국에서 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뒷일이 많이 복잡해진다. 그래서 그는 김덕수의 칼솜씨를 믿고 일단은 기다렸다.

'저 새끼가 대단하긴 하지만, 김 실장 실력이면충분히….'

그의 예상이 틀렸다. 김덕수가 너무 빨리 당했다.

"어떻게 김 실장이 저렇게 쉽게…."

차우진이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향해 걸어갔다.

박재구는 바짝 긴장했다.

'저 새끼가 쇠파이프를 가졌을 때도 저렇게 강한데, 장검까지 들면?'

박재구는 더 망설이지 않고 서랍을 벌컥 열었다. 서랍 안에는 6연발 권총이 장전된 상태로 들어 있었다.

박재구가 손을 뻗어 권총을 잡았다.

권총을 쏘려면 안전장치를 먼저 해제해야 한다.

차우진이 장검을 발로 툭 차서 세운 후에 손으로 잡았다.

박재구가 허겁지겁 권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손가락이 떨려 레버가 잘 젖혀지지 않았다.

차우진과 박재구의 거리는 몇 걸음만 걸어오면 칼날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됐다!'

박재구가 안전장치를 해제하자마자 차우진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권총의 조준선 한가운데에 차우진이 들어왔다.

'이 거리에서는 빗나가지 않아!'

박재구가 소리를 지르며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죽어!"

갑자기 박재구의 눈앞에서 차우진이 사라졌다.

"어?"

권총이 발사됐다. 요란한 총성과 함께 총탄이 차우진이 있던 공간을 지나갔다. 그 뒤에는 김덕수가 있었다.

현실의 싸움터는 경기장이 아니다. 누워 있으면 당한다. 김덕수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났다.

그때 총소리가 났다. 김덕수의 몸통에 총탄이 박혔다.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따라왔다.

"끄아악!"

김덕수가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그는 박재구가 권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박재구가 죽으라고 외치며 총을 쏘는 소리도 들었다. 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박재구가 쐈다는 건 안다.

그리고 총에 맞은 건 김덕수다.

"왜 나를…."

처음에는 박재구가 차우진을 쏘려고 하다가 빗나갔나 싶었다.

총에 맞으며 몸을 숙였던 김덕수가 고개를 겨우 들었다. 차우진이 보였다. 차우진은 박재구의 뒤쪽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박재구의 권총 총구 방향은 김덕수를 향하고 있었다. 차우진이 있는 곳의 정반대였다.

지금 상황만 보면 박재구가 일부러 김덕수를 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김덕수가 박재구를 노려보며 욕을 했다.

"개새끼. 내 입을 막으려고…."

총에 맞은 김덕수가 더 버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박재구가 권총을 앞으로 겨눈 채로 덜덜 떨었다.

"어, 어디 간 거야? 어디 있는 거야! 귀신이냐!"

그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승사자라고 했잖아."

박재구가 화들짝 놀라 뒤로 돌아섰다. 차우진이 보였다.

"놀랐나 보다?"

박재구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는 차우진이 눈앞에 있는 걸 똑똑히 보고 권총을 정확히 조준해 발사했다. 그런데 차우진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저, 정말로 저승사자…."

"그렇다니까. 지옥에 네 자리 준비해 놨다."

박재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방금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을 봤다. 평소라면 믿지 않을 저승사자 이야기인데, 지금은 두려웠다.

권총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왜, 왜 하필 나를…."

"그야 네가 멸망에 관여하는."

차우진이 칼끝을 들었다.

"빌런이니까."

박재구가 황급히 권총을 들었다.

느렸다.

차우진이 박재구의 몸에 칼을 푹 꽂았다.

"컥!"

박재구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김덕수가 조금 전에 떨어뜨린 장검이 박재구를 관통했다.

차우진이 칼을 옆으로 툭 밀며 손에서 놓았다.

박재구의 몸이 팽이처럼 반 바퀴 돌다가 책상 위에 엎어졌다. 그렇게 잠깐 엎어져 있다가 책상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이제 이곳에 서 있는 사람은 차우진 외에는 없었다.

차우진이 진소영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의자에 묶인 상태로 넘어져 있었다. 넘어진 방향이 창문 쪽이라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는 건 소리를 듣고 알았다.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도 연달아 들렸다.

진소영은 겁을 집어먹고 덜덜 떨었다.

그녀는 의자에 묶여 사채업자 박재구의 부하에게 얻어맞을 땐 그래도 죽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그녀를 팔아먹으려면 사지 멀쩡하게 살려놔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누군가 쳐들어왔는데 총소리와 비명이 들렸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침입자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또박또박 들렸다.

그녀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사, 살려주세요! 저는 아니에요! 저놈들이랑 한 편 아니에요!"

차우진의 의자를 세워 그녀가 똑바로 앉게 해주었다. 그녀는 몸이 흔들리자 비명을 질렀다.

"꺄악! 살려줘요!"

"살려주려고 이렇게 번거롭게 일한 거야."

"꺄…. 네?"

이 건물에 인질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불을 질러버리는 게 아니라 직접 쳐들어와서 싸웠다. 단련되지 않은 몸으로 격렬하게 움직였더니 근육통이 올 조짐이 보였다.

'오늘 밤에는 파스 더 붙이고 자야겠다.'

차우진이 그녀의 몸을 묶은 끈을 굴러다니는 회칼로 잘라내며 말했다.

"아가씨랑 저 방에 한 명. 두 명은 피해자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구하러 왔다. 아니라면 지금 미리 말해."

그녀가 다급히 외쳤다.

"마, 맞아요. 저는 피해자예요!"

그녀를 묶고 있던 줄이 모두 잘려나갔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비틀거렸다.

차우진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가죽장갑을 낀 손이었다.

그녀가 차우진을 보았다. 얼굴은 마스크로 가리고 모자도 쓰고 있어서 눈만 보였다.

손을 잡아준 그의 손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고맙습…."

차우진이 손을 빼냈다. 그녀가 잠깐 휘청였다.

"앗."

무안해진 그녀가 3층 내부를 둘러보았다. 총에 맞은 놈과 칼에 맞은 놈들이 있었다. 저절로 짧은 비명이 나왔다.

"꺅?"

차우진이 손가락으로 김덕수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두목이 저놈을 총으로 쏘고, 저놈은 두목을 칼로 찔렀어."

"아. 그렇게 된 거예요?"

"그렇게 된 거야. 두목 손을 조사해보면 총 쏜 흔적이 있을 거야. 칼에는 저놈 지문이 있을 거고. 경찰이 오면 그 이야기를 꼭 하라고."

발사된 총탄은 한 발뿐이다. 경찰이 조사하면 김덕수를 누가 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갑자기 아래층에서 조직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총소리 뭐야!"

"빨리 올라가!"

진소영은 차우진이 왜 손을 빼냈는지 깨달았다. 적이 더 몰려오기 때문이다.

그녀가 급히 말했다.

"밑에 다른 놈들이 많아요. 여기 끌려오면서 봤어요. 도망쳐야 해요!"

진소영은 3층으로 끌려 올라올 때 그녀를 훑어보며 실실 웃던 놈들이 여럿 있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놈들은 여기까지 못 올라와."

"네?"

23. 빌런 해결방법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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