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실 베일은 알고 있었다. 아니, 중간에 눈치챘다.
테크건의 탄환을 모조리 튕겨내고 전장 슈트를 그대로 갈라버리는 칼잡이를 보며, 얼마 전 들었던 그 소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소드마스터!'
도시전설로 불리기 시작한 그 소문엔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마주친 자는 모조리 목이 잘려 죽었다는 둥, 팔과 다리가 잘려 하수구에 버려졌다는 둥, 끔찍한 소문들 천지였다.
저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색 비옷을 보라.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 된 비옷은 움직일 때마다 끈적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그 소문의 정점엔, 「워 머신」을 갈라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전장 슈트를 무처럼 갈라버린 모습을 보고선 의심을 지웠다.
'도, 도망쳐야 해!'
베일은 홀린 듯이 도망쳤다. 그리고 그건 다른 갱들도 마찬가지였는지, 한꺼번에 반대편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때 창고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사실상 이 계획을 받아들인 이유가 육중한 몸을 이끌며 걸어 나왔다.
쾅! 쾅!
그들의 보스가 타고 있는 불법개조 워 머신이 전투망치를 휘둘렀다. 멋모르고 도망쳤던 동료들이 그대로 으깨져서 죽어버렸다.
-도망치는 놈은 모조리 이렇게 만들어주겠다!
그제야 베일은 도망치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다른 갱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보스이긴 하지만, 저 미친놈은 진짜 그러고도 남았다. 실제로 벌써 몇 놈이나 피떡이 되지 않았던가?
-건방진 칼잡이! 어디 이 몸도 그 잘난 날붙이로 덤벼보시지! 크하하하!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보스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소드마스터를 도발했다.
베일은 당장에라도 그 입을 막고 싶었지만, 그에겐 그럴 여력도, 자신도 없었다.
'씨, 씨발! 괜히 화를 돋워서 우리까지 쫓아오는 거 아니야?'
그런데 소드마스터의 반응이 이상했다. 찌푸린 얼굴로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 보스의 도발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보스도 자신감이 더 차올랐는지, 이번엔 비웃기까지 했다.
-쫄았냐? 푸하하! 살려주진 않을 테니 헛된 기대 말고 재주껏 덤벼보도록!
하지만 여전히 소드마스터는 조용했다.
그제야 베일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그래.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저런 괴물 같은 워 머신을 상대하긴 어려울 거야. 그가 상대했던 워 머신보다 보스의 워 머신이 몇 배는 더 강력할 테니까!'
불법개조 워 머신의 부작용이나, 결함으로 인한 폭발 같은 건 머릿속에 없었다. 어차피 그건 자신이 아니라 보스가 감당할 일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저 소드마스터가 진짜 보스의 워 머신에 쫄았다는 거다!
철컥.
본능적으로 테크건을 고쳐잡았다.
보스의 워 머신과 함께라면······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들불처럼 퍼져서 다른 갱들에게도 전염됐다.
다들 눈치를 보며 언제 내뺄까 고민하던 얼굴에서, '해볼 만하겠는데?'라는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 소드마스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더니 칼을 고쳐잡으며 말했다.
"잘됐네. 나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거든."
그 순간, 소드마스터가 눈에서 사라졌다.
'······! 뭐, 뭐지? 어, 어디를 간······!'
카가가강!
언제 나타났는지, 소드마스터의 칼날이 보스의 워 머신과 부딪쳤다.
거대한 도끼와 부딪친 소드마스터의 칼날에서 눈부신 불꽃이 튀었다. 사람만한 도끼날과 부딪쳤는데도 소드마스터의 칼날은 멀쩡했다.
그때부터 엄청난 공방이 이어졌다.
워 머신의 도끼날은 소드마스터를 쪼갤 듯 떨어져 내렸고, 전투망치는 피떡을 만들 것처럼 휘둘러졌다.
쿠콰콰쾅!
쩌적!
주변의 땅바닥이 갈라지고 터진다. 쿵쿵거리며 바닥을 가를 때마다 그 충격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대, 대단하다······'
어찌 일개 사람의 몸으로 저 거대한 워 머신을 상대할 수가 있지?
적임에도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보스가 우세하다! 이길 수 있어!'
보스는 소드마스터의 검격을 모조리 막아냈다. 물론 보스의 도끼와 망치도 소드마스터에게 닿지 못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과 기계의 대결이다.
사람은 지치지만, 기계는 지치지 않는다. 그건 만고불변의 법칙이었다.
그때, 갑자기 전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뒤로 훌쩍 물러난 소드마스터가 목을 좌우로 꺾더니,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
그리고 그 미소를 목격한 베일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지이이잉!
작은 종소리와 함께 소드마스터의 칼날이 빛으로 물들었다.
그건 마치 네온사인처럼, 아니, 플라즈마의 폭발처럼 찬란하게 타올랐다.
순간 뿜어지는 빛으로 눈이 멀 것 같다고 느낄 무렵, 그 빛 속으로 사라지는 소드마스터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그 입 모양만큼은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왔다.
재.밌.었.다.
'서, 설마······!'
베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칼날에서 뿜어지는 빛으로 인해 눈이 멀 것 같았지만,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서걱.
번쩍! 하며 사라진 소드마스터가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빛을 뿜어내던 칼날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뭐, 뭐지? 환상이었나?'
그 순간.
서거거걱.
쿠쿵!
정확하게 반으로 잘린 보스의 워 머신이 양쪽으로 쓰러졌다. 단 한 번의 칼질로 저 거대한 워 머신을 갈라버린 거다.
반으로 갈라져 빨갛게 달아오른 단면이 형편없이 녹아내렸다. 시뻘건 쇳물을 뚝뚝 흘리며 작은 불꽃을 태우던 워 머신은 이내 매캐한 연기와 함께 불타올랐다. 그 안에 타고 있던 보스가 어떻게 됐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괴, 괴물······!"
누군가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소드마스터가 갱들을 노려봤다. 시선을 마주친 그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오싹.
그 비틀어진 미소에 갱들은 소름이 돋았다. 당장에라도 저 칼날이 자신을 좌우로 갈라버릴 것만 같았다.
툭.
투두두둑.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총을 버렸다.
아무리 죽음의 경계 위에 사는 갱들이라도, 이렇게 개죽음당하는 건 사양이었다. 좆같은 삶이라도,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 * *
무기를 버린 갱들을 팬티 한 장만 남겨두고 모조리 벗긴 뒤에 쫓아버렸다. 팬티를 안 입은 놈도 있었지만, 그런 놈도 예외는 없었다.
대충 마무리를 하고 해안창고를 나서는데, 의아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 정도 전력을 가진 갱단과 합의를 하지 않았다고?'
이곳에 있던 갱들의 전력이라면, 한 구역을 평정할 정도의 전력이었다.
그 정도 강력한 갱과 부딪치려면 과거 <붉은 날개> 용병단과 해결사들을 고용했던 것처럼 어마어마한 전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심지어 그때도 갱들이 공장을 점거해버렸기에 기업이 칼을 빼 든 거였지, 이런 창고 시설이었다면 그냥 돈을 주고 끝냈을 거다.
'게다가 애초에 의뢰인이 알려준 정보대로라면 평범한 갱단 수준이었지.'
그리고 출력을 높인 불법개조 워 머신을 가진 갱단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평범한 해결사, 혹은 칼잡이였다면 오늘 이 자리가 내 무덤이 됐을 거다.
'역시 메인 에피소드가 가까이 다가왔음인가?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해안창고와 떨어진 도심지를 바라봤다. 떨어지는 석양을 뚫고, 벌써부터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과 홀로그램의 레이저가 하늘을 뒤덮었다.
마치 기계가 지배하는 SF영화 속에서나 볼법한 미래도시의 모습.
차가움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도시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 도시의 격정에 올라탈 준비가 되어있냐고 말이다.
장미화원의 정원사 (2)
65화. 장미화원의 정원사
로세툼으로 돌아온 나는 의뢰 중에 겪었던 일을 말했다.
놈들이 해결사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놈들의 무장이 의뢰인이 알려준 것보다 훨씬 강했다는 점과 불법 개조 「워 머신」이 등장했다는 것까지.
"뭐, 뭐라고요? 이거 완전 계약 사항 위반이에요! 그 정도 전력을 가진 대상이라면 해결사가 아니라 용병단을 고용했어야죠!"
흥분한 로제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찡그린 미간엔 불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걱정 마요! 제가 책임지고 추가 수당을 받아낼 테니까! 감히 누굴 상대로 장난질을!"
그녀가 찻잔을 신경질적으로 들어 올렸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는다.
미야옹.
로제의 발치에 앉아있던 떡순이가 슬그머니 내 쪽으로 기어왔다. 꼬리를 살랑이며 종아리에 머리를 부비던 녀석이 내 다리 위로 풀쩍 뛰어올랐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른하게 눈을 감은 녀석이 기분 좋은 울음을 내뱉는다.
"그래. 그 일은 네게 맡기지. 나보다 중개인이 이야기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이런 일은 네가 전문가잖아?"
"그럼요! 나만 믿어요. 로세툼의 주인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로제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 주위로 위험한 기운이 폴폴 풍겼다. 나만큼이나 열 받은 모습이라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 일에 내 오래된 방해꾼이 엮이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블랙스컬이 엮여있을 가능성도 있을까?"
"갑자기요?"
로제가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내게 이런 장난질을 할 놈들은 많지 않잖아?"
"아마 그건 아닐 거에요. 의뢰인이 비록 잘나가는 기업은 아니어도, 블랙스컬과 엮일 정도로 막 나가는 기업은 아니거든요."
"흐음. 겨우 갱에게 해안창고 하나 빼앗긴 걸 의뢰 넣었을 정도의 기업이라면, 블랙스컬이 충분히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소울 시티에서 무력은 곧 신분이며, 권력의 위치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도덕은 오히려 퇴보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 세계에선 '법은 멀고 폭력을 가깝다'라는 말은 여전히 통용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경찰은 돈을 원하니까.
일개 기업이 블랙스컬이라는 폭력의 끈을 잡을 수 있다면, 한 번쯤 도박해볼법하지 않을까?
그런데 로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규모나 힘의 문제가 아니에요. 블랙스컬 같은 용병집단을 이용해 중개인을 골탕 먹인 게 문제죠. 그건 중개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어요. 전 구역의 중개인들이 그 기업의 의뢰를 보이콧할 거고, 역으로 그 기업에 대한 적대 의뢰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일 거에요. 그럼 사실상 이 도시에서 장사하는 건 끝난 거죠."
"······중개인들이 꽤나 단합력이 있었군?"
로제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그 말은 사실 너무나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도시에서 장사할 수 없다는 건, 기업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놀라운 건, 한 기업의 사형선고를 무력이나 금력이 아닌 단합만으로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중개인들이 지금의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건, 다 이런 적극적인 단합 때문이니까요. 그게 아니면 의뢰인과 해결사들 등쌀에 뭘 할 수 있겠어요? 하다못해 갱들도 중개인들을 만만하게 볼걸요?"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무력이 없으니 그런 식으로라도 대응해야지."
"맞아요. 저도 당신처럼 '개소리하지 말고 덤벼! 다시는 그 혓바닥 못 놀리게 해줄 테니!'라고 멋들어지게 말할 수 있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턱을 치켜든 로제가 내 말투를 따라하며 어깨를 실룩거리더니, 소파 뒤로 푹파묻혔다. 작은 목소리로 '아~ 부럽다~'라고 하면서.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기억 안 나요? 하울에서 건방진 하울 헬퍼들에게 이랬잖아요. 와, 난 진짜 영화 보는 줄 알았다니까요? 다음엔 당황하지 말고 꼭 영상으로 찍어놔야겠어요. 우울할 때마다 돌려보게."
"······."
다음부턴 그녀 앞에선 싸우질 않던가, 입조심을 해야겠군.
나는 턱을 긁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블랙스컬은 어떻게 됐지? 아직도 흔적을 찾기 힘든가?"
"아, 그거요?"
눈을 반짝인 로제가 기댔던 소파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기대하시라고요. 조만간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같으니까."
"조직의 중간 라인을 찾은 건가?"
블랙스컬 같은 점조직은 말단 조직원을 잡아봤자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다. 바닷가에 흩어진 모래알갱이 중의 하나일 뿐이니까.
하지만 중간 라인 이상, 즉 간부급 정도가 되면 코끼리 다리 정도는 만질 수 있게 된다.
그럼 그때부터는 속도가 조금 붙을 거다. 그렇게 위로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몸통에 접근할 날이 온다.
그럼 사실상 끝이다.
나는 블랙스컬의 머리를 날리려는 게 아니라, 블랙스컬 자체의 힘을 꺾는 게 목적이니까.
'머리 대신 온갖 장기에 칼을 꽂아주는 거지.'
그럼 알아서 붕괴될 거다.
블랙스컬이 점조직으로 운영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특출난 중간관리 능력이다.
점조직으로 나뉜 조직의 점들을 필요에 의해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용인술.
그게 다 쓸려나간다면 그 아래는 알아서 모래성처럼 흩어질 거다.
그게 점조직이니까.
그런데.
"아니요."
나를 바라보는 로제의 얼굴에 그녀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떠올라있다.
"조금 더 거물이에요."
"거물?"
거물이라고 할 사람이······.
"당신이 찾았던 그 남자요. 혼자서 전투 안드로이드와 드론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던."
"아······! 그를 찾았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자를 먼저 찾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제 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아끼는 놈이라, 안드로이드 몸을 빌리지 않고선 절대 나타나지 않는 놈이니까.
"네. 당신이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조금 뒤져보니······ 대충 누군지 알겠더라고요."
"누구지?"
"이름은 마리오라고 알려졌는데, 뭐 이건 중요하진 않겠죠. 어차피 가명일 테니. 아무튼, 해결사로 몇 번의 의뢰를 했던 전적이 있는데, 당시 그가 맡았던 의뢰 대부분이 갱단끼리 전쟁이거나, 기업 간 전쟁인 경우가 많았어요. 즉, 해결사보단 전쟁용병에 가까웠던 인물인 셈이죠."
당연하지만 해결사는 여러 갈래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해결사는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지만, 어떤 특정한 분야에 뛰어난 해결사도 분명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전쟁용병은 가장 수요가 많고 수당도 쎄지만, 그만큼 오래 하긴 어려운 분야였다. 전쟁용병의 99%가 10번의 의뢰를 채우지 못하고 죽거나, 실종되니까.
"거기서 꽤나 유명했나 보군?"
"죽음의 인형술사 마리오. 당시 그의 이명이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전쟁용병으로 이명이 붙을 정도면······ 알죠? 만만치 않은 자에요."
"죽음의 인형술사라······ 어울리는 별명이군."
누군진 몰라도 별명을 잘 붙였다 싶었다. 혼자서 수십 대의 전투 안드로이드를 조종하던 그 모습은 분명 누군가에게는 공포였을 테니.
"그래서 그자는 지금 어딨지?"
"아직 어딨는진 찾지 못했어요. 사실 그가 소울 시티에서 모습을 감춘 게 벌써 30년 전이거든요."
"······30년? 그렇게 오래됐다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3년이 아니라 30년 전 사람이라고?
"네. 그래서 저도 그자를 찾는 게 오래 걸린 거예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했던 사람이니까요."
"그럼 대체 지금 나이가 몇이라는 거야?"
"그 당시에도 중년의 나이였으니, 지금은 못해도 70살은 되지 않았을까요?"
"흐음······ 그 어울리지도 않는 중절모와 트렌치코트가 취향인 이유가 있었군."
시대를 잘못 타고난 바바리맨인 줄 알았더니······.
"네?"
"아니, 별거 아니다. 그럼 언제쯤 그자를 찾을 수 있을까?"
직접 나를 찾아와 경고를 날렸을 정도면, 그의 위치가 블랙스컬에서도 결코 낮진 않을 거다. 로제의 말대로 거물일 확률이 높았다.
그 뜻은 놈을 잡으면 블랙스컬 내부에 단숨에 다가갈 수 있다는 뜻. 다른 잔챙이는 필요 없이 바바리맨만 잡으면 된다.
"일단 인물을 특정했고, 도시에 있다는 것도 알아냈으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물론 가장 확실한 건, 당신에게 또 다시 접근하는 거죠. 그럼 안드로이드가 됐든, 드론이 됐든, 어디서 출발했고, 어떤 경로로 도시에 들어왔고, 누구와 얽혀있고까지 역순으로 파고들면 되니까요."
"좋아. 너만 믿지."
"물론이죠!"
* * *
그 이후로도 몇 번의 의뢰가 더 이어졌지만, 그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됐다.
정보는 부정확했으며, 항상 예상하지 못한 적이나 함정이 숨어있었다.
로제는 번번이 미안하다고 했다. 자기도 알아보고 있지만, 그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본인 능력에 대한 의심 때문인가?'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여기기엔 의아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단 여태껏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곁에서 지켜본 그녀의 일 처리는 변수마저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꼼꼼했다. 이 이상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만, 이번엔 그 꼼꼼함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을 뿐이다.
'꼼꼼함을 넘어선 찜찜함이지.'
나는 작게 혀를 차며 오늘의 의뢰 지역에 도착했다.
공사가 중단된 폐쇼핑몰로, 이곳을 낙찰받은 의뢰인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은 갱을 쫓아달라는 의뢰였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군.'
갱들 거점이라면 분명 문지기나 파수꾼 역할을 하는 놈들이 있을 텐데.
저벅저벅.
나는 쏟아지는 태양을 피해 폐쇼핑몰 안으로 들어섰다.
흙먼지가 잔뜩 쌓인 건설 자재들과 곳곳에 버려진 정체불명의 쓰레기들. 지저분한 바닥엔 불장난을 한 건지 그을음이 잔뜩이었고, 페인트 스프레이로 낙서된 벽엔 온갖 저질스러운 문구와 그림이 가득했다.
-마스터. 인근에 생체 신호는 없습니다.
그때 주변 스캔을 마쳤는지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쇼핑몰 전체를 커버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근처엔 생명체가 없다는 뜻이다.
"이상한데······ 갱들이 도망이라도 친 건가?"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내가 의뢰를 맡았다는 정보라도 들은 건가? 아무리 그래도 똥을 찍어 먹어봐야 아는 갱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꽁무니를 뺐을 것 같지는 않은데······.
"으음?"
흔적을 찾아 폐쇼핑몰 중앙으로 걸어가는 도중, 만들어지다가 만 에스컬레이터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미간을 찡그려 확인하자, 오래된 구식 로봇 하나가 멀뚱히 서 있었다. 유리창이 없는 창문으로 기다랗게 늘어진 햇빛이 로봇을 비췄다.
"50년은 된 것 같은 비주얼이군.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로봇에게 다가갔다.
운영을 했었던 쇼핑몰이라면 오래된 안내로봇이라고 생각할 텐데, 이 쇼핑몰은 짓다가 공사가 중단된 건물이다. 이런 로봇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공사장에서 쓰는 건설로봇도 아니고.
그때 꺼져있던 로봇에 불이 들어오더니,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나는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녀석을 지켜봤다. 위험하거나 하는 상황은 아니다. 저 깡통로봇은 전투형도 아닐뿐더러, 제대로 움직이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낡고 오래됐으니까.
역시나 녀석은 몸을 움직일 생각도 안 하고 고개만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이내 나를 찾은 녀석의 시선이 고정된다. 눈 대신 달린 렌즈의 조리 개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
"넌 뭐······"
-죽기 싫, 으면 로세···툼을 떠, 나라! 다시···는 그곳에 접, 근하지 마라!
내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녀석의 오래된 스피커에서 변조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뭐?"
-죽기 싫, 으면 로세···툼을 떠, 나라! 다시···는 그곳에 접, 근하지 마라!
-죽기 싫, 으면 로세···툼을 떠, 나라! 다시···는 그곳에 접, 근하지 마라!
-죽기 싫, 으면 로세···툼을 떠, 나라! 다시···는 그곳에 접, 근하지 마라!
입력된 목소리가 재생되는지, 같은 말만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듣기 싫은 기계음이라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브야. 얘 온라인 아니지?"
-네, 마스터. 정해진 말만 할 수 있는 단순한 로봇인 것 같습니다.
이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메시지는 주고 싶은데, 직접 마주하기는 꺼려진다 이건가?
"······재밌군."
나를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걸로 여태껏 맡았던 의뢰에 전부 장난질이 있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솔직히 로제도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게 다인가? 겨우 이런 말을 하고 끝이라고?"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하는 로봇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이런 말을 전하려고 거창하게 의뢰까지 넣었다고?
그 순간.
-기억해라.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로봇에서 변조된 기계음이 아닌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리고······.
쿠구구궁!
콰콰쾅!
딛고선 땅이 흔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발이 외부에서 터졌다.
바깥에서 밀려온 충격파가 내부를 휩쓸었다. 내 몸이 저릿할 정도로 강한 충격파였다. 근처에 미사일이라도 몇 발 떨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나를 노린 게 아니다. 이게 내부에서 터졌으면 나도 곤란했어.'
대체 외부에서 터트린 이유가 뭐지? 단순히 실수라고? 이곳에 로봇까지 준비해 경고 메시지를 남긴 놈들이?
생각은 짧았다.
한 번의 충격파가 내부를 휩쓸고 지나가고, 조금 잠잠해졌다고 느낄 무렵.
끼이이익! 쿠쿵!
콰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하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쇼핑몰을 내 무덤으로 만들 생각이었나!'
나는 뻥 뚫린 쇼핑몰 중앙에서, 무너지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갈라진 천장으로 푸른 하늘이 드러나고, 자리를 빼앗긴 철근과 콘크리트가 쏟아지며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빠른 속도로 건물 전체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마스터! 피하셔야 합니다!
이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피할 곳이 없다. 외부에서 터진 폭발로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모조리 막혔고, 그나마 나갈 곳은 위밖에 없는데 그곳은 빠르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
나는 이를 꽉 깨물며 양손을 위로 뻗었다. '지구인들아! 내게 힘을!'이라고 외치는 손오공과는 다르게, 나는 다른 것에 기댈 방법이 없다.
결국, 나를 구하는 건 나 스스로다!
"흐으으읍!"
온몸을 휘돌던 포스가 내부에서 변형을 일으킨다.
항상 적을 베고, 뚫고, 갈랐던 물리적인 힘이, 이번엔 현상계를 초월한 무형의 힘으로 뒤바뀐다.
쩌어어엉!
마치 무언가가 깨지는듯한 환청이 들림과 동시에 손끝에서 묵직한 파동이 뿜어졌다.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하늘로 솟구친 파동이, 중간에 홱 하고 꺾이며 한쪽 벽으로 몰려들었다. 밀집된 파동으로 그곳의 공간이 볼록렌즈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그 순간.
쿠우우웅!
하늘에서 낙하하던 철근과 콘크리트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상에 있던 폐기물과 쓰레기들도 둥실 떠오르더니 그곳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콰콰콰콰콰쾅!
그곳으로 날아든 철근과 콘크리트, 각종 폐기물이 그쪽 벽을 뚫어버렸다.
순식간에 모든 걸 집어삼킨 공간은 그걸 고스란히 바깥으로 내뱉었다.
핑―――
한쪽 벽에 깨끗하게 날아간 모습까지 확인한 나는 아찔한 현기증에 자리에 주저앉았다.
쿵쾅쿵쾅쿵쾅쿵쾅!
심장이 빠른 속도로 펌프질을 시작했고, 뜨거운 게 느껴질 정도로 달아오른 머리는 이내 어마어마한 두통을 가져왔다.
덜덜덜덜.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급히 품속을 뒤졌다. 힙 플라스크를 꺼내 마개를 돌려 보지만, 손가락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입에 물고 거의 뜯어내듯 이로 돌렸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도 없이, 그대로 플라스크에 담긴 술을 입에 쏟아부었다.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술이 그대로 내부에서 증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달아오른 몸과 독한 알콜이 만나 마치 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털썩.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저 멀리 고고하게 떠 있는 하울의 모습이 보였다.
"하, 하하하! 이런 뜻이었나?"
그제야 소피아가 했던 말의 진정한 의미가 떠올랐다.
「일단 살아남아.」
그때는 크게 생각을 안 했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방심하고 있었다. 스스로 힘을 너무나 과신하고 있었다.
소피아는 그런 나에게 경고한 거다. 그런 상태로 이 도시에서,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를 악물고 쓰러졌던 몸을 일으켰다.
온몸을 짓누르는 탈력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찔한 현기증,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르는 메스꺼움.
그 모든 걸 딛고 두 발로 일어섰다.
"······기필코 살아주지. 반드시 살아남아서······"
으드득!
"이 세계의 진실을 씹어먹고 말겠다."
* * *
간신히 몸을 추슬러서 로세툼으로 돌아왔다. 당장에 침대 위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이번 경고를 로제에게 알려주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아서.
바이크를 주차하고 뒤를 돌아서는데, 웬 꼬마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내가 피곤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자, 갑자기 밝아진 얼굴로 손에 쥐고 있던 종이쪼가리를 내게 내밀었다.
"······뭐냐?"
"몰라요. 어떤 아저씨가 전해주래요."
꼬마 아이는 그 말을 끝으로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얼마나 쥐고 있었는지,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종이를 펼쳤다. 그곳엔 유려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잘 생각해라.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것 봐라?'
장미화원의 정원사 (3)
66화. 장미화원의 정원사
"무슨 일이 있었어요?"
로세툼에 들어선 나를 본 로제가 단번에 그렇게 물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제야 내 꼴을 살펴보니 꼴이 말이 아니다. 먼지투성이로 뒤덮인 겉옷은 얼룩덜룩 더러웠고, 언제 찢어진 건지 팔꿈치와 옆구리엔 속살이 드러났다.
나는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그녀에게 다가가 쪽지를 건넸다.
"이번 의뢰도 함정이었다. 죽기 싫으면 로세툼을 떠나라는군."
쪽지와 함께 내 대답을 들은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넋 놓고 쪽지를 바라보는 푸른빛 눈동자엔 혼란이 가득해 보였다.
"어딘지 짐작 가는 데가 있나?"
경고를 받기 전까지는 나를 노린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건의 의뢰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적이 생겼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경고의 대상은 내가 아니라 로세툼······ 아니, 로제였다.
"아, 아직요.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게 있어요. 미안하지만, 당분간 의뢰는 멈춰야 할 것 같아요."
로제가 혼란스러운, 그리고 미안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도 이번 일들이 자신을 향한 공격이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부분도 있었다. 이 정도까지 꼬리가 나왔으면 당사자는 눈치채야 하는데······ 아직 더 알아봐야 한다고?
나는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며 잠시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도 그럼 당분간 쉬도록 하지. 그리고 로세툼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놈들인지 찾아내면 꼭 알려줬으면 좋겠군."
"······고마워요. 최대한 빨리 연락할게요."
로제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개를 푹 내리 숙이는 그 모습에 나는 말없이 로세툼을 나섰다.
딸랑딸랑!
등 뒤로 철문에 달린 종소리가 멀어진다. 그리고 천천히 로세툼을 돌아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거짓말을 하는군."
* * *
곧장 집으로 돌아와 하룻밤을 꼬박 잠들었다.
밤새 오르락내리락 반복했던 체열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카페인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거칠게 뛰던 심장도 잦아들었다.
기존에 포스를 무리하게 사용했던 피로감과 「중력제어」를 극한으로 사용한 후유증은 비슷하면서도 무언가 달랐다.
포스는 몸의 피로가 쌓여서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면, 「중력 제어」의 후유증은 정신적인 피로감이었다. 며칠은 잠을 자지 않은 몽롱한 상태랄까?
간신히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했다.
왜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혹시 로세툼을 노린 게 아니라 나를 노렸던 건가? 거기에 그녀가 협조하는 거고?
'······그건 아닐 테지.'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었다.
일단 그러려면 이유가 필요한데, 그녀에겐 그럴 동기도, 목적도 없다.
오히려 그녀가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던 로세툼엔 에이스가 필요했다. 그녀가 나를 배신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왜 모른 척을 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인질을 볼모로 한 협박이다. 그녀에게 먼저 협박이 갔다면, 성격상 혼자 끙끙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건 기각.
아버지가 죽고 가문에서 쫓겨난 그녀에겐 인질이 될만한 사람이 없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은 다름 아닌 그녀를 가문에서 내쫓은 장본인이니까.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그녀의 과거와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하다.'
내가 모르는 그녀의 과거. 왜 그 어린 나이에 험한 중개인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의문.
그럼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
'영감님을 만나야겠군.'
그녀의 과거를 알만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 * *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데,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가 내렸다.
처음엔 꼬마 아이인가 싶었다.
고개를 숙여서 봐야 할 정도로 작은 체구에 턱 끝으로 떨어지는 새빨간 똑단발.
유난히 커다란 눈은 머리색과 비슷한 주홍색이었으며, 무릎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흰색 박스티와 망사스타킹까지.
'······망사스타킹?'
뭘 잘못 본 건가?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던 시선이 나도 모르게 뒤로 향한다. 다시 확인해도 망사스타킹이 맞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걸음을 멈춘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으음! 너무 티 나게 쳐다봤나?'
이 세계로 떨어진 이후, 별의별 스타일을 다 봐서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선입견이 남아있었나 보다. 그래. 뭐, 망사스타킹이 어때서?
그리고 자세히 보니 꼬마 아이도 아니었다. 그냥 체구가 작고 동글동글한 이 목구비의 동안일 뿐이었다.
물론 과하게 동안이긴 했지만.
내가 머쓱한 표정으로 사과하려는 찰나,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감자 물래요?"
"······어?"
사투린가? 뭐라고 한 거지 지금? 감자?
예상조차 못 한 질문에 당황하고 있을 때, 그녀가 품고 있던 바구니를 열더니 내게 들이밀었다.
"감자."
그곳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진짜 감자가 들어있었다.
"······고맙지만, 감자는 별로 안 좋아해서."
내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했고, 무엇보다 감자는 진짜 안 좋아했다.
그러자 그녀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작은 파도가 일었다. 안 그래도 커다랬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감자를?"
그리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자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문이 부서질 듯 굉음을 내며 닫혔다.
"······."
감자를 거절당한 게 기분이 나빴는지, 아니면 감자를 싫어한다는 게 기분이 나빴는지 몰라도, 확실한 건 그녀의 첫인상에 내가 썩 좋게 남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군."
나는 작게 헛웃음 지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1층에 도착해 로비로 나가자, 관리인과 경비원들이 모여있었다. 다들 손에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감자를 쥐고 있었다.
"오늘은 데이지 씨가 인사를 받아주셨어!"
경비원 중 한 명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손에 쥐고 있는 감자를 신줏단지 모시듯 양손으로 붙잡는다.
반대쪽에서 감자를 까먹던 관리인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원래 그 여자가 인사는 다 받아줘. 대화를 칼같이 끊어서 그렇지."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니까? 나한테 감자를 주면서 웃어줬다고!"
"구라는 새끼야. 다 똑같이 받았는데 뭘 널 보고 웃어줘. 여태껏 그 여자 표정이 변한 걸 본 적이 없구만."
관리인이 '중증이네, 중증이야'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쯧쯧찬다.
"네가 몰라서 그래. 그 무표정한 얼굴 아래 얼마나 따뜻한 가슴이 있는지!"
경비원이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더니,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감자를 쳐다보면서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관리인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진다.
"따뜻한 가슴 같은 소리 하네. 네 취향이 그쪽이니까 그러겠지. 어딜 봐서 가슴이 보이냐?"
"이노옴! 네가 그녀에 대해서 뭘 안다고!"
"넌 뭐 얼마나 알고? 너도 모르잖아. 지난주에 이사 온 사람인데."
"내가 말한 건 외적이 아니라 내적 아름다움을 말한 거다! 이런 고급아파트에 살면서 우리한테 매일 음식을 챙겨주는 사람이 어딨다고!"
"뭐, 그건 맞지. 항상 감자 요리만 갖고 오는 게 조금 의심스럽긴 하지만. 어젠 감자 부침개, 그저껜 감자떡이었나?"
나는 천천히 그들을 지나가면서 이야기를 엿들었다.
'흐음. 음식을 나눠주는 게 취미인가? 그나저나 지난주에 이사 왔던 사람이 그녀였나 보군.'
그런데 조금 의아하긴 했다.
동안인 걸 감안해도 나이가 절대 많아 보이진 않던데, 이 아파트에 어떻게 이사를 온 걸까? 경비원의 말처럼 이곳은 고급아파트인데.
'금수저 뭐 그런 건가?'
감자를 좋아하는 금수저 아가씨라.
나는 새로 생긴 신기한 이웃에 작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30구역.
오랜만에 찾은 만물상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건 다른 의미로 여전히 이 도시의 밤은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만물상에서 주로 팔리는 건 대부분이 무기였으니까.
"오랜만입니다. 영감님."
나는 만물상 최상층에서 다이손을 마주했다.
"이번엔 정말 오랜만이군. 듣자 하니 하울까지 올라가서 거하게 사고를 쳤다던데?"
뻐끔뻐끔 태우던 연초를 내려놓은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얼굴엔 한껏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가득했다.
"그게 영감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까?"
대체 하울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다이손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마침 자네가 묵었던 호텔에 단골 손님이 있어서 말이야. 그 친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군. 하울 헬퍼를 들이박은 정신 나간 칼잡이를 봤다면서 말이야."
"······칭찬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다이손을 쳐다봤다.
혹시 그새 칭찬의 의미가 달라지기라도 한 게 아니라면, 정신 나간 것과 칭찬은 완전 정 반대 포지션에 있는 단어였다.
"그 친구 입에서 거론된 것 자체가 칭찬이라네. 시간이 아까워서 남 얘기를 하는 친구가 아니거든. 하물며 그 대상이 칼잡이 나부랭이다? 그 친구를 아는 사람이라면 전부 놀랄걸세."
"칼잡이 혐오는 멈춰주시죠. 대체 누구길래 그럽니까?"
"아, 그건 조만간 알게 될 걸세. 자네가 워낙 인상이 깊었는지, 없는 의뢰를 만들어서라도 찾아가겠다고 했으니."
뭐가 그리 웃긴지 킬킬거리며 웃던 다이손이 내려놓은 연초를 다시 뻐끔거렸다.
"아무튼, 그 난리를 치고 멀쩡히 돌아오다니, 자네도 참 대단하구만?"
"꼭 어디 한 군데라도 없어져서 돌아왔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만······."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다이손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흥미가 동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허?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지. 아니, 오히려 좋아!"
혼자서 중얼거리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롭게 번뜩였다. 달라진 시선이 내 온몸을 구석구석 핥듯이 스쳐 지나간다.
"어차피 자네 순수한 인간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참에 최신형 사이버웨어를 달아보는 게 어떤가? 내가 특별히 할인해줌세!"
다이손이 선심 쓰듯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면 당장에라도 수술실로 끌고 갈것 같은 묘한 열기까지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저한텐 영업하지 마시죠."
"쩝. 아깝군. 거의 다 넘어왔는데."
김이 샜다는 듯,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온 다이손이 연초를 새롭게 물었다.
이래서 장사꾼들은 항상 조심해야 했다. 넋 놓고 있다간 코만 베이는 게 아니라, 팔다리 전부 다 교체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진짜 무슨 일로 찾아왔나? 설마 그사이에 조기경보드론을 살 돈을 마련한 건 아닐 테고."
"돈을 꽤 벌긴 했는데, 아직 그 정돈 아닙니다."
"오호? 구두쇠 같던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꽤 벌었나 보군."
내가 말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울코인 1000개. 바꾸면 100억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돈이 생겼지만, 이 돈으로 조기경보드론을 사기엔 턱없이 모자라고, 그렇다고 다이손 앞에서 자랑하기에도 가당찮은 액수다.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로제에 대해서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음? 그 아이에 대한 걸 말인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 그가 뻐끔거리던 연초를 내려 놨다. 나와 다이손 사이로 넘실거리던 연기가 어딘가로 훅하고 빨려 들어갔다.
어느새 깔끔하게 비워진 재떨이를 옆으로 치워낸 다이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말해보게."
* * *
여태껏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하나씩 이야기했다.
언젠가부터 밀려든 이상한 의뢰, 번번이 잘못된 정보와 함정. 그리고 어제 있었던 직접적인 경고까지.
점점 심각해지던 다이손의 표정은, 이후 어제 로제와 나눴던 대화까지 말해주자 심각함을 넘어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얼굴로 변했다.
"영감님은 뭔가 알고 계시는군요."
내가 확신을 갖고 묻자, 언제 꺼내물었는지 연초에 불을 붙인 다이손이 회한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질 않길 바랐건만······ 기어코 일을 벌이는구나."
장미화원의 정원사 (4)
67화. 장미화원의 정원사
핵전쟁 이후, 세계는 붕괴했고 국가의 경계는 흐릿해졌다.
그건 기존의 질서가 파괴된다는 신호였으며, 체제의 붕괴였고, 기득세력의 몰락이었다.
그리고 그 중엔, 정상적인 세력이 아닌 어둠의 세력. 즉, 마피아 같은 조직도 존재했다.
이들은 크게 둘로 갈렸다.
한쪽은 원래대로 도시의 그림자를 자처하며 언더그라운드를 직접 장악하는 갱을 선택했고, 다른 쪽은 기존 세계가 뒤집힌 이상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며 직접 장악하기보단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게 시 정부와 기업의 민감한 사안을 중간에서 처리하는 일이었고, 중개인이라는 직업이 도시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잠시만요, 영감님. 그럼 로제가 말한 가문이라는 게······?"
"자네 생각대로라네. 과거의 마피아 세력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게지."
나는 입을 떡하고 벌렸다.
그냥 부잣집 아가씨라고 생각했더니, 마피아 가문의 금지옥엽이었다고?
"그럼 다른 지역의 중개인들도 전부 마피아 출신이라는 겁니까?"
"그건 아닐세. 시작이야 마피아들이 했어도, 이 도시가 워낙 넓고 복잡하고 사람도 많지 않던가? 마피아들 말고도 중개인을 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흐음. 그렇긴 하군요."
하긴 돈이 된다면 온갖 파리떼가 꼬이기 마련이니.
게다가 중개인은 단순히 돈이 되는 걸 떠나서 어느 정도의 권력과 신분까지 얻게 된다.
"그렇지. 마피아 말고도 삼합회니, 야쿠자니 하는 놈들이 많으니까."
"······?"
나는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영감님? 혹시 그 말은 중개인들 전부가 갱 출신이라는 소립니까?"
"전부는 아니고 아마 대부분이 그럴걸세. 지금이야 어림도 없는 얘기지만, 그 당시엔 갱들의 위세가 어마어마했으니."
여기까지 듣고 나자 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가 아는 바로 중개인은 무력과 동떨어진 존재였다. 얼마 전에 로제에게 들었던 중개인의 단합에 관한 이야기도 비슷한 뉘앙스였고.
그런데 마피아니, 삼합회니 하는 거대 갱 세력 출신이라고? 거긴 기업도 함부로 못 하는 곳 아니었던가?
이걸 물어보니, 다이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게 언제적 이야기인 줄은 아나?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이야기일세. 갱 출신이던 중개인들이 옷을 갈아입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어느 정도 경호세력은 남아있겠지만, 대부분 말단 조직원들은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지. 서로 싸울 일이 없으니 머릿수가 필요 없지 않겠나?"
그러니까 시작은 갱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원들 대부분이 흩어졌고 지금은 힘 좀 있는 일반인이라는 소리였다.
하긴, 듣다 보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갱들이 머릿수가 중요한 이유는 사업을 확장하고 경쟁세력과 전쟁을 위해서인데, 중개인은 그 모든 게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긴다.
"그럼 로제의 가문은 뭡니까? 거긴 다른 곳과 다른 것 같습니다만."
그들은 기업 의뢰를 통해 함정을 파고, 건설이 중단됐긴 했어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쇼핑몰을 통째로 날려버릴 힘을 가진 세력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힘 좀 가진 일반인이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다르지. 로제의 가문은 미국에서도 한 손에 꼽혔던 마피아 세력이었으니."
다이손이 복잡한 얼굴로 연초를 태우며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콜레오넬 가문은 한때 미국을 쥐락펴락했던 마피아 가문이었다. 정치권과 거대기업에서도 눈치를 봤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졌었다.
핵전쟁이 터지고, 미국을 떠나 이곳으로 넘어왔어도 그 힘은 여전했고, 한 때 소울 시티 뒷골목을 지배했던 강성한 마피아로 군림했었다.
"······마피아요? 중개인이 아니라?"
"그렇다네. 콜레오넬 가문은 마피아일세. 아니, 마피아였지."
그랬던 콜레오넬 가문이 방향을 튼 건, 로제의 아버지였던 마일로 콜레오넬부터였다.
그는 과학이 점점 발달하고, 로봇과 AI가 무력을 대체하기 시작하자 마피아의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뒤늦게 중개인 일에 뛰어들었다.
물론 가문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왜 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는 지금의 지위를 버리고, 밑바닥 놈들과 아웅다웅하는 중개인을 하냐고 말이다.
하지만 마일로의 수완은 생각보다 좋았다. 밑바닥에서 소울 시티 권력축의 하나인 「다섯 손가락」의 턱밑까지 올라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전히 마피아 세력을 유지하던 가문에서도 시선이 달라졌다.
만약 「다섯 손가락」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땐 마피아 가문이라는 불명예를 단숨에 씻어버릴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가문 내부에서도 마피아 세력을 축소하고, 중개인 쪽으로 재원을 집중 하자는 논의가 한창일 무렵······ 그 일이 벌어졌다.
이 세계가 뒤집힌 천지개벽.
바로 「기적의 서광」이 말이다.
"이후로는 알고 있겠지? 그 혼란 속에서 마일로는 죽고, 가문은 아들인 알리 오가 이어받았다네. 여기까진 큰 문제가 없었지."
다이손이 연초를 깊게 빨더니 한숨과 함께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후우······ 그녀가 가문에서 쫓겨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 * *
아주 심플하고도 흔한 이야기였다.
가문의 후계를 둘러싼 암투.
알리오는 가문에서 후계논의를 하기도 전에 번개처럼 밀어붙여 가문을 물려받았으며, 분쟁의 씨앗이 될 다른 후계인 로제를 가문에서 쫓아냈다.
가문에서도 그렇게 정리가 되는 듯싶었다.
다만, 최근 들어 변수가 발생했다.
"변수요?"
"그렇다네. 아까도 말했지만 콜레오넬 가문은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길 바라지. 그런데 최근에 「다섯 손가락」 중 한 자리가 공석이 됐다네.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거지."
"그 은퇴를 했다는 중개인은 후계자가 없는 겁니까? 그 대단한 자리를 그냥 공석으로 남기고 은퇴를 했다는 게 이상한데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울 시티의 상징과도 같은 「다섯 손가락」 의 위치를 그냥 은퇴로 포기한다? 그 자리까지 올라갔을 정도라면 야망이 어마어마했다는 뜻인데?
"안타깝게도 후계자가 없는 게 맞네. 자식이 둘이 있었는데, 한 명은 사이버웨어를 과다이식하다 못해 사이보그화를 하려다가 사망했고, 다른 한 명은 해결사를 하겠다고 돌아다니다가 도시 바깥에서 실종됐지."
"······."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네. 자식 농사만큼은 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연초를 물고 있던 다이손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남 부러울 것 없이 살 수 있는 그의 딸도 도시 바깥에서 작은 식당을 하고 있었으니······.
"아무튼, 그게 의미하는 게 뭐겠나?"
"······「다섯 손가락」 중 한 자리를 놓고 이미 경쟁이 시작됐다는 뜻이겠군요."
그 대단한 자리가 공석이 됐으니, 아마 피 튀기는 싸움이 될 거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다섯 손가락」이라는 권력을 쥐게 된 순간, 그 희생의 수십 배는 되돌려받을 수 있을 테니.
다만 의아한 점은······.
"그런데 그게 왜 변수라는 겁니까? 로제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미 가문에서 쫓겨난 로제와 「다섯 손가락」의 공석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다.
"자네는 로제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게 갑자기 무슨 질문입니까?"
"그냥 묻는 걸세. 대답해보게. 객관적으로 그녀의 외모에 대해서 말이야."
"어, 그거야······ 당연히 예쁘죠? 그녀 외모에 대해선 소문도 돌아다니지 않습니까?"
[장미화원의 장미는 너무나 아름답지만, 가시가 날카로워 누구도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도도하고 차가운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소문이다.
"그렇지. 그게 이유일세."
"······? 무슨 말입니까?"
그녀의 외모가 이유라고?
"아까도 말했지만 「다섯 손가락」을 놓고 경쟁은 시작됐네. 콜레오넬 가문도, 그 경쟁자들도 다들 만만찮은 힘을 가졌지."
"당연히 그렇겠죠."
"그럼 묻겠네. 다들 비슷비슷한 힘을 가졌을 때, 그 균형을 깨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균형을 깬다라······ 1:1 대결이 아니라면 자기편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닙니까? 「다섯 손가락」이라는 케이크가 혼자 먹기에도 모자란 조각 케이크도 아니고요."
소수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싸움에 참전한 다른 세력과 연대를 이루는 거다.
물론 여러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지금처럼 나눠 가질 보상이 충분히 클 경우다. 돈을 반으로 나누면 절반이지만, 권력은 반으로 쪼개도 거의 변함없으니까.
"그렇지! 역시 자네는 보기와 다르게 똑똑하다니까?"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클클클! 그럼 이건 어떤가? 자네 말대로 자기편을 만드는 방법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 어떤 게 가장 확실하고 서로 믿을 수 있겠나?"
"그거야 혈연으로 묶이는 게 가장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정략결혼이라는 게 있는 이유······ 아?"
나는 대답을 하면서 깨달았다.
그녀의 외모가 변수가 된 이유. 아니, 그녀의 존재 자체가 변수가 된 이유.
다이손이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연초를 뻐끔거리며 말했다.
"후우. 이제 알겠나? 콜레오넬 가문에선 로제가 다시 가문으로 돌아오길 원한 다네. 정략결혼 용도로 쓰려고 말이야."
나는 그녀를 둘러싼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에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다이손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연초만 뻐끔거릴 뿐.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리저리 산재한 이야기를 하나로 묶었다.
로세툼을 떠나라는 협박.
콜레오넬 가문의 비사.
「다섯 손가락」의 공석.
······그리고 정략결혼.
이 모든 걸 종합하면 결론이 나왔다.
"그럼 콜레오넬 가문과 그녀의 오빠가 범인이라는 뜻입니까? 로세툼을 망하게 해서 다시 가문으로 불러들이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
이제야 왜 로제가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가 됐다.
아무리 싸웠어도 자신의 가문과 혈육이다. 내가 얽혀서 서로 진짜 피를 흘려야 하는 상황이 오는 건 싫었을 거다.
"어쩔 생각인가?"
다이손이 은근한 눈빛으로 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떤 대답을 하길 바라는지 알만한 얼굴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대답했다.
"개인 가정사 아닙니까? 제가 멋대로 끼어들 순 없죠."
"······그런가?"
재떨이에 연초를 비벼서 끈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직접 물어보려고 합니다."
"······? 뭘 말인가?"
고개를 갸웃한 다이손이 미간을 찡그렸다. 은근한 근심이 차오른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나는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대답했다.
"제가 끼어들어도 될지 말이죠."
* * *
한낮의 따뜻한 햇살이 로세툼에 스며들었다.
티 테이블을 침대 삼은 떡순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낮잠을 잤고, 천장에서 회전하는 실링 팬의 바람 소리만이 실내에 감돌았다.
정적으로 가득한 그 속에서, 로제는 거의 파묻히듯 소파에 엎드려있었다.
'기어코 일이 터져버렸어.'
로제는 혼란스러웠다. 아니길 바랐지만, 결국 직접적인 경고까지 날아온 마당에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그 경고가 그녀를 향했더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거다. 그런 경고쯤, 가문에서 쫓겨났을 때부터 각오한 바였으니까.
하지만 그 악의(惡意)는 다른 사람에게 향했다.
그것도 그녀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에게.
'그 혼자서 가문을 감당하긴 어려워.'
아무리 그가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강자더라도, 그녀의 가문이 가진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려 100년 가까이 도시에서 축척한 그 힘은 정·재계를 넘어서 방산업체와 군사기업까지 뻗어있었다.
만약 그와 가문이 부딪친다면, 수많은 도시 전설 속 해결사와 암살자들이 그를 노릴 거다.
그럼 절대 혼자선 감당하지 못한다. 그녀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 돕더라도 말이다.
'아직 그를 잃고 싶지 않아······.'
그녀는 이 감정이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알지 못했다.
원래는 그를 이용해 높은 곳으로 올라설 생각만 했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복잡한 관계가 된 걸까?
'주저할 시간이 없어. 가문의 경고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일 거야.'
이제는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이 결정 끝에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팔려가는 신세가 되겠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정해진 운명은 결국 변하지 않았다.
'힘들고 아프더라도 이제 그만······'
그때 정적으로 잠들었던 로세툼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딸랑딸랑!
그녀를 세계와 단절시켰던 철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 문으로 또 다른 세계가 걸어들어왔다.
"······현재 씨?"
무표정하다 못해 냉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 얼굴의 사내.
강현재라는 세계가.
* * *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얼굴이다.
나는 우울한 그림자로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다 들었다."
"무, 뭘요?"
화들짝 놀란 그녀가 큼지막한 눈을 끔뻑거렸다.
"이번 일. 네 가문과 오빠가 벌인 일이라며?"
"그, 그걸 어떻게?"
데구루루 굴러가는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더니, 이내 불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혹시 다이손 할아버지가······?"
"그래. 영감님한테 들었다. 네 상황과 사정까지도."
"······."
"그렇게 불안한 눈으로 쳐다볼 것 없어. 네 집안일에 멋대로 끼어들 생각 없으니. 내가 골탕먹은 게 좀 화가 나지만, 그 정돈 뭐 넘어가 주지."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래요. 당신은 상관없는 제 집안일이니까······."
순간 그녀의 얼굴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은 당장에라도 무언가를 쏟아낼 것 같았다.
나는 젖어 드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봤다. 눈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 그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
"도와줄까?"
풀이 죽어 축 처져 있던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 분명 조금 전에 끼어들기 싫다고······!"
"멋대로 끼어들기 싫다는 소리였지. 네가 도와달라는 건 다른 일이잖아?"
내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순간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가 환히 비칠 정도로.
"그, 그럼······?"
"마침 중개인과 해결사가 함께 있군. 내게 의뢰를 해. 그럼 도와주지."
"하, 하지만! 상대는 콜레오넬 가문이에요! 당신이 여태껏 상대했던 적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요!"
로제가 거의 울먹이듯 소리쳤다. 필사적으로 꽉 깨문 아랫입술이 눈물을 틀어 막고 있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내가 이 도시에 온 순간부터, 난 이 도시와 싸우고 있었어. 상대가 메가코프든, 시 정부든, 도시전설 괴담이든, 그 누구라도 상관없지. 그게 설령 네 가문이라도 마찬가지야."
"······!"
"다시 묻지. 도와줄까?"
로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치맛단을 꽉 붙잡고 있는 손이 잘게 떨렸다.
미야옹.
주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티 테이블에서 폴짝 뛰어내린 떡순이가 로제의 종아리에 머리를 부볐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린 그녀가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세요, 현재 씨."
부드럽게 휜 눈꼬리 끝으로 투명한 눈물이 도로록 떨어져 내렸다.
"좋아. 의뢰를 받지."
장미화원엔 그 주인인 장미꽃 말고도 칼 든 정원사도 있다는 걸 알려주마.
교차하는 꿈들 (1)
68화. 교차하는 꿈들
제1구역.
소울 시티의 유일한 싱글 넘버링 구역으로 상류층 주거지와 대기업들이 위치한 곳이다.
최고급 서비스 시설들이 즐비한 곳으로 원래 부자든가, 전문직이나 대기업 임원들 정도나 돼야 거주할 수 있는 구역이었다.
도시에서 돈벼락을 맞아 갑자기 졸부가 된 이들이 가장 오고 싶어하는 곳이다.
그렇게 높다란 마천루들이 스카이라인을 뒤덮은 1구역에서도, 진짜 부호들이사는 곳은 따로 있었다.
노스 캐슬 스트리트.
십여 미터가 넘어가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초호화 저택과 최고급 부유자동차가 흔하게 보이는 곳.
그곳 중 한 곳에 콜레오넬 가문의 저택이 있었다.
"중개인들 단속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콜레오넬의 가주.
알리오 콜레오넬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고급스러운 거대한 원형 탁자엔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인물들이 앉아있다.
"수월하게 진행중입니다. 가문의 영향력 아래 있는 중개인들은 모두 가주님을 지지할 겁니다."
외눈 안경을 쓴 중년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외눈 안경에 비친 눈동자가 유난히 컸는데, 자세히 보니 단순한 외눈 안경이 아니라 시신경과 연결된 카메라 형태에 가까웠다. 흔히 선택하는 안구 전체를 임플란트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섭외는요?"
"중도성향의 중개인들에게도 접촉중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들은 승기가 확실하지 않은 한, 섣불리 누군가를 지지하진 않을 겁니다."
중년 사내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오로지 외눈 안경의 눈동자만 기형적으로 움직이며 알리오를 바라봤다.
기괴하다 느껴질 법하건만, 다른 이들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의 대답에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흥! 승냥이 같은 놈들! 콩고물이 떨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다는 거로군?"
알리오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기업가만큼이나 잇속에 밝은 게 중개인들이다. 아마 몸값이 더 올라갈 때까지 여러 곳에 발을 걸쳐놓고 간을 보겠지.
그때 알리오와 정반대에 앉아있던 중년 부인이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승냥이 같은 놈들도 결국 힘이 기울면 대세를 따르지 않겠어요?"
그리곤 알리오의 눈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결혼식이 잘 끝난다면 말이에요."
순간 알리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빠르게 회복됐다. 길게 숨을 들이켠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년 부인을 쳐다봤다.
"······결혼식은 예정대로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고모님."
"어머? 듣던 중 다행인 이야기로군요. 왓슨 가의 힘이 더해진다면 그들도 어디가 대세인 줄 깨달을 테니까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죠?"
과장되게 놀란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의견을 구했다. 원탁에 앉은 다른 인물들이 서로 눈치를 살짝 보더니 다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그녀가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제가 일이 좀 바빠서 가문 회의는 여기까지 참여하도록 할게요."
그녀가 일어서자 다른 인물들도 엉거주춤 엉덩이를 뗐다, 붙였다를 하면서 그녀와 알리오의 눈치를 살폈다.
살짝 눈을 감았다 뜬 알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시죠. 어차피 중요한 내용은 본격적으로 차기 「다섯 손가락」 의결권 투표가 시작된 이후가 될 테니."
"현명하신 판단이에요, 가주."
그녀가 싱긋 웃더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다른 인물들도 알리오에게 인사를 하고 삼삼오오 회의장을 빠져나간다.
모두가 빠져나간 회의장.
홀로 남은 알리오 옆엔, 그때까지 한쪽 구석에서 시립하고 있던 집사장이 자리했다.
"저 마녀의 위세는 꺾일 줄 모르는군요."
"아랫것들이 듣습니다, 가주님."
"흥! 들을 테면 들으라지.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내 욕보단 저 마녀욕을 하지 않겠습니까?"
"가주님."
집사장이 지그시 알리오를 부르자, 쳇! 하고 혀를 찬 그가 의자에 철퍼덕 앉았다.
"······로제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답답하게 조였던 셔츠의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집어 던졌다.
짧게 한숨을 내쉰 집사장이 넥타이를 주워들며 대답했다.
"그날 이후 로세툼이 당분간 쉰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가씨도 깨달으신 게지요."
"그럴까요?"
"그럴 겁니다. 그러니 멈추셨겠지요."
집사장의 느긋한 대답에 알리오도 조금은 안심이 됐다.
자신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그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게 집사장이었으니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청개구리 같았던 그 녀석 성질머리를 떠올리면 또 모르죠.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을지."
"그래서 그 칼잡이에게 직접 경고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으음! 그렇죠.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칼잡이는 어쩐답니까?"
"아마 아가씨를 통해 우리가 뒤에 있다는 걸 들었을 테니, 그가 정상적인 해결사라면 로세툼을 떠날 겁니다."
"정상적인 놈이 아니라면요?"
순간 사람 좋은 미소를 띄고 있던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하며 대답했다.
"······그럼 대가를 치러야지요."
* * *
감정의 격동을 가라앉힌 로제는 부끄러움에 안으로 도망쳤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미적미적 밖으로 나왔다.
눈치를 스윽 살피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홍차를 만드는데······ 내 눈치를 살피랴, 홍차를 만드랴 시선이 바빠서 티 테이블은 젖었고, 찻잔은 홍수가 난 것처럼 가득 차 찰랑거렸다.
나는 물끄러미 미지근한 맥주 색깔의 찻잔을 바라보다가 소파 뒤로 몸을 기대곤 물었다.
"네 오빠가 죽길 바라나?"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내가 어디까지 해주길 바라는지. 그녀가 어느 정도로 각오했는지.
내가 할 수 있냐, 없냐를 떠나서 일단 한계를 명확히 해야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수 있으니까.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그 정도까지는······."
역시 혈육이 죽는 것까지는 바라진 않는군. 하긴, 아무리 원수 같아도 천륜을 어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럼 가문은?"
"······거긴 상관없어요."
잠시 멈칫한 로제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꽤나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무, 물론 좋은 사람들도 있지만! 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당신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 평범한 사람까지 전부 죽이진 않을 거잖아요······?"
끝으로 갈수록 자신감이 없어지는 목소리다. 본인이 물어놓고도 확신하지 못하는지 내 눈치를 살핀다.
나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줄은 안다. 가문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용인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뜻이겠지.
내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너도 내가 떠도는 소문처럼 피에 미친 살인마라고 생각하나?"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당신은! 당신은······!"
내 질문에 발끈하듯 허둥지둥 대답하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곤 입술을 오물거리며 뒤이어질 대답을 머뭇거린다.
"······? 내가 뭐? 살인마까진 아니라고?"
그 모습에 반쯤 농담으로 말했는데.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눈을 질끈 감은 로제가 시뻘게진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이렇게 목소리가 컸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예상 못 한 대답에 잠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웃음이 터졌다.
"고맙군. 그렇게 생각해줘서."
"······."
로제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땅으로 처박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피어오르는 미소를 즐기면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넘칠 듯이 찰랑거리는 미지근한 맥······ 아니,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곤, 다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정해졌으니······ 계획은 단순하겠군."
"······뭔데요? 설마 가문으로 쳐들어갈 건 아니죠?"
슬그머니 고개를 든 로제가 물었다.
"나도 사람이야. 너희 가문이 어떤 곳인지 들었는데, 거길 혼자서 쳐들어가는 건 자살하겠다는 거지."
콜레오넬 저택은 무려 100년이 넘도록 한 자리에 머물면서 요새화된 저택이다.
거대 마피아 파벌의 수장이기도 할 테니, 사실상 군 기지와 다를 바 없을 거다.
그런 곳을 정면으로 쳐들어간다?
글쎄······ 내가 게임으로 따졌을 때 만렙 정도 수준으로 강해진다면 시도해 볼까, 지금은 미친 짓이었다.
"······그럼요?"
"싸움에서 이기는 첫 번째 방법이 뭔 줄 아나?"
"······? 갑자기요?"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냐는 표정이다.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대답해봐."
"으음······ 글쎄요? 이기는 싸움만 한다?"
"오? 비슷해."
나는 한쪽 입꼬리를 천천히 올리면서 말했다.
"바로 유리한 곳에서 싸우는 거야."
* * *
로세툼은 정상영업을 시작했다.
수많은 의뢰가 밀려들었고, 그 의뢰는 다시 해결사들에게로 뿌려졌다.
그 바쁜 일상 속에서, 나는 제외됐다.
"여기 또 당신에게 지명의뢰가 왔어요."
샹들리에 아래서 홀로그램을 바쁘게 휘젓던 로제가 소리쳤다.
"오케이. 살펴보지."
나는 뚱한 얼굴로 보고 있던 뉴스에서 시선을 뗐다. 화면에선 여전히 테러 혐의를 두고 정치인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쟤들은 지치지도 않나? 어쩜 저리 같은 말만 반복하고, 그 말들은 하나같이 개소린지 모르겠다.
"이브. 자료 확인하자."
-네, 마스터.
이브의 대답과 함께 한쪽 눈의 시야로 전송된 자료가 떠올랐다.
―――――――――――――――――
의뢰등급: 지명의뢰
종류: 암살
대상: 파비앙 루블린 파첸코
위치: 15구역 로케 빌딩 121층
내용: 파첸코 게임즈의 대표인 파비앙의 암살 및 자료탈취. 상세 자료는 의뢰수락시 첨부함.
―――――――――――――――――
의뢰를 살펴본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건 아니야. 패스."
"알겠어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로제가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아마 의뢰인에게 의뢰는 거절됐다고 메시지가 발송됐을 거다.
내가 하는 일은 간단했다. 내게 온 의뢰 중에서 콜레오넬 가문이 수작을 부린 것을 찾고, 거기서 또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미리 파악하는 거다.
놈들은 지난번처럼 다시 함정을 파기 위해서 의뢰를 넣었겠지만······.
'함정인 걸 알면 더이상 함정이 아니지.'
오히려 어떤 함정인지 알아낼 수 있다면, 역습으로 모조리 박살 내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콜레오넬 가문이 수작 부린 모든 의뢰에 어울려주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다.
나는 철저하게 내가 유리하다고 파악되는 전장만 골라 싸울 거다. 애초에 그런 의뢰만 받으면 되니까.
'몇 번 어울려주다 보면 그 잘난 콜레오넬 가문에서도 안달이 나겠지.'
그럼 함정만 파던 콜레오넬 가문도 직접 움직이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돈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걸 알려주마.'
그때 로제가 다시 소리쳤다.
"방금 하나 더 도착했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똥줄이 타나 보군."
연속된 거절에 급해진 건 그쪽이었다. 조금 전 거절했는데, 몇 분이나 지났다고 기다렸다는 듯 바로 새로운 지명의뢰가 들어오다니.
삐빅!
자료가 전송됐다는 단말기 소리와 함께 렌즈로 의뢰화면이 떠올랐다. 내 반응을 보고 이브가 알아서 화면을 띄운 거다.
나는 천천히 의뢰내용을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감이 왔다.
"좋아. 이건 할만하겠군."
"이걸로 선택할 거예요?"
홀로그램을 휘젓던 손을 멈춘 로제가 나를 돌아봤다.
"그래. 일단 그쪽에 상세 자료랑 이것저것 잡다한 거 첨부 요청해줘. 기왕이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로."
"······? 가문에게 시간을 주는 거예요?"
그녀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의뢰를 받고 급습해도 모자란 마당에 왜 오히려 시간을 주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나는 눈빛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기왕 할 거면 판을 키워야지."
놈들은 자신들이 미끼를 던졌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미끼를 문건 놈들이 될 거다.
아까도 말했지만, 함정인 걸 알면 더 이상 함정이다 아니다.
놈들의 함정은 내가 선택한 개미지옥이 될 테고······
'얼마든지 몰려와라. 모조리 잡아먹어 줄 테니까.'
나는 포식자로 놈들을 먹어 치울 거다.
교차하는 꿈들 (2)
69화. 교차하는 꿈들
콜레오네 저택.
"놈이 의뢰를 받았습니다."
슬며시 들어온 집사장이 말에 알리오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안경을 쓴 채 무언가를 보고 있던 그가 안경 너머로 대답했다.
"보여주세요. 콜레오넬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가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집사장이 나가고 알리오가 피곤한 듯 안경을 내려놨다.
잠시 미간 사이를 누르던 그가 톡톡 책상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 청개구리 녀석과 짝짜꿍이 맞는 걸 보니 놈도 헛바람이 들었나 보군."
처음엔 단순히 외부에서 들어온 칼 좀 쓰는 해결산가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소드마스터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칼잡이였다. 이제는 뒷골목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다.
[흑발흑안의 칼잡이를 만나면 조심해라. 언제 네 목을 가져갈지 모르니.]
다소 유치하게까지 느껴지는 소문이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실력으로 보여줬으니까.
다만, 그 정도로 뛰어난 해결사가 아직까지 그 아이 옆에 붙어있는 이유가 뭘까?
그 정도 솜씨라면 이곳저곳에서······ 아니, 기업에서도 탐을 낼 정도일 텐데.
돈을 위해 칼을 파는 놈이 기업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럼 분명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그 아이와 가까워져서 어떻게든 해보려는 음흉한 놈이 틀림없지."
나지막이 중얼거린 알리오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래. 그것만으로 놈이 죽을 이유는 충분하다.
* * *
40구역.
소울 시티 유일한 항구가 있는 지역인만큼, 이곳은 여타 40번대 구역과는 다른 점이 존재했다.
엄청난 물동량이 오가는 지역이다보니 항만노동자가 많았고, 일거리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인구가 몰리고 상업이 발달했다.
물론 근본적으로 상위 지역만큼 발전하진 않았으나, 최소한 유흥가만큼은 오히려 더 나은 부분도 존재했다.
이곳에선 그만큼 더 은밀하고 불법적인 것도 가능하니 말이다.
"오, 오셨습니까?"
유흥가로 진입하는 주차장에서 익숙한 얼굴이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 숀."
나는 웃으면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네, 넵! 그동안 강녕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부담스럽게 그래? 지난번엔 보자마자 도망치려고 그러더니."
"그, 그건······!"
"농담이야. 그냥 편하게 대하라고. 앞으로 종종 일하려면 그게 낫지 않겠어?"
"네, 넵!"
숀이 잔뜩 기합이 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표정엔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는 예전에 함께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숀을 기억하고, 이번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연락했다.
솔직히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녀석이 진짜 연락을 받을까? 내가 부탁을 했을 때 녀석이 승낙할까?
그런데 녀석은 통화음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로 기뻐했었다. 오히려 기다리다가 눈이 빠질 뻔했다고 투덜댈 정도였다.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지?"
"전부 준비했습니다! 제 전화 한 통이면 직접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믿어도 되는 거겠지?"
"그, 그럼요! 제가 들어가는 것까지 전부 확인했는데요!"
잠깐 망설이던 녀석이 자신 있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그 상반된 반응에 눈을 가늘게 뜨곤 물었다.
"뭐 걸리는 거라도 있나?"
"아, 아니요? 없습니다! 녜! 없을 거예요!"
"좋아. 그럼 함께 가도록 하지."
"······에? 저, 저도요?"
흠칫 놀란 녀석이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그래. 앞으로 종종 함께 일할 건데, 현장이 어떻게 되는지도 봐야지?"
나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끄러미 녀석을 내려다봤다.
"그, 그럼요! 함께! 함께 가야죠! 물론입니다요!"
녀석이 애써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녀석의 등을 팡! 하고 치곤 턱짓을 했다. 앞장서라는 뜻이었다.
녀석이 잔뜩 움츠러든 어깨로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 * *
목적지를 향해 길을 걷던 숀이 슬며시 뒤를 돌았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칼잡이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왜?"
"아, 아닙니다! 잘 따라오시나 해서. 헤헤!"
숀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로 얼굴 위로 초조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이건 내가 생각한 그림이 아닌데······.'
숀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떠올리면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어떻게 연락이 닿은 물주인데······ 그런(?) 모습을 보였다간 간신히 잡은 물주가 자신을 패대기칠 수도 있었다.
'그, 그래.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거야. 이런 건 이 바닥에서 흔하다고 하면서······.'
혼자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다가올 미래에 대비(?)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해안가와 가까운 스트립 클럽.
원래 오래된 방직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리모델링한 클럽으로, 이 유흥가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크고 거대한 클럽이다.
"한스! 오늘 물 어때?"
숀이 야릇한 음악이 새어 나오는 입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입구를 지켜서고 있던 사내의 고개가 돌아간다. 터질듯한 근육으로 입고 있는 정장이 작아 보이는 사내가 숀을 확인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숀? 네가 여긴 웬일이야?"
마치 여긴 네가 올 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팍팍 느끼게 해주는 말투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다가간 숀이 뒤를 힐끗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중요한 손님이 있어서 말이야. 내가 특별한 접대를 하려고 하거든."
"······네가? 접대를? 그게 뭔······"
가늘게 뜬 한스의 눈엔 이제 잔뜩 의심스러운 눈빛까지 더해졌다.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는 찰나, 숀이 잽싸게 한스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나랑 같이 온 사람 보이지?'
'······그게 뭐?'
'저 사람이 저래 보여도 알짜여행객이야. 하울에서 내려온 사람인데 언더그라 운드 문화를 즐기고 싶다나?'
'하울?'
눈이 휘둥그레진 한스가 하늘을 쳐다봤다. 그곳엔 화려한 조명으로 반짝이는 하울이 떠 있었다.
'그래. 그 하울.'
'그,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그럼 알려줘야지. 소울 시티의 언더그라운드를.'
큭큭 거리며 작게 웃음을 흘린 숀의 얼굴엔 음침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에 힐끗 강현재를 바라본 한스가 작게 속삭였다.
'그래도 괜찮은 거야? 잘못 털었다가 배탈 나면 어쩌려고?'
흔해 빠진 도시의 놈팡이가 아니라, 무려 하울에서 내려온 사람이다.
하울에서 거주하며 지낼 정도면 못해도 10구역대에서 지낼 수 있을 정도의 부자라는 뜻인데······ 잘못 건드렸다간 다음날 하수도에서 장기가 다 털린 시체로 발견될 수도 있었다.
'그건 내가 잘 처리할게. 내가 성공하면 확실히 쏜다!'
'······흐음. 나한테 피해는 없어야 해?'
'걱정 마!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잖아?'
한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서로 속닥이던 거리를 벌린 숀이 주변을 한번 스윽 둘러보곤 말했다.
"그럼 들어갈게?"
"그래. 접대 잘하고. 그······ 알지?"
"걱정하지 마라니까!"
숀이 자신만 믿으라는 표정으로 한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한스는 애써 못 미덥다는 얼굴을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시죠."
멀찌감치 뒤에 서 있던 강현재에게 다가간 숀이 한껏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강현재가 피식 웃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고, 야릇하고 몽환적인 클럽 음악이 뿜어져 나왔다. 듣는 것만으로 심장박동이 조금씩 빨라지고, 기분이 붕 뜨는 기분이다.
주파수를 조작하여 청각을 통해 뇌파에 영향을 끼치는 음악으로 명백히 불법으로 지정된 음악이었지만, 이곳에선 버젓이. 그것도 클럽이 떠나가라 들려오고 있었다.
나란히 걷던 중 강현재가 지나가듯 말했다.
"진짜 날 털어먹을 건 아니지?"
"흐, 헉! 드, 들으셨습니까?"
화들짝 놀란 숀이 입을 떡 벌리더니 황급히 말을 이었다.
"다, 당연히 아닙니다! 그, 어? 이렇게 자연스럽게해야 의심도 안 사고······."
허둥지둥 대답하는 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현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 장난이야. 연기 잘하던데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줘."
"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클럽 내부는 꼭 무협영화에 나오는 객잔과 같은 모습이었다.
1층 중앙엔 스트립 스테이지가 런웨이처럼 있었고, 그 메인 스테이지 주위로 4개의 작은 스트립 스테이지가 자리했다. 사이드엔 술을 파는 바와 스탠딩 테이블로 빼곡했다.
메인 스테이지에선 진짜 쇼걸이 헐벗은 몸을 흔들었다. 작은 스테이지에선 선명한 홀로그램으로 그 모습을 중개했는데, 대부분 사람은 그곳에서 스트립쇼를 관람했다.
불법으로 증축한 2층은 난간형식이었다. 1층의 스트립쇼를 볼 수 있게 설계됐는데, 대부분이 유리로 만들어진 룸이었다.
강현재와 숀은 그 유리룸에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유리룸의 문을 닫자 외부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바로 시작하지."
유리벽 너머로 클럽의 모습을 살펴보던 강현재가 숀을 돌아보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숀이 바로 어딘가로 전화했다.
"나다. 그래. 실행해. 아이, 진짜라니까? 나 못 믿어? ······그래. 그건 내가 미안해. 아무튼, 지금 바로 실행해줘. 아니, 안 떼먹는다니까!"
허공을 향해 조금은 격한 대화를 나누던 숀이 짧게 한숨을 내쉬곤 강현재를 쳐다봤다. 마침 강현재 역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하하, 하하하! 그, 그게 빚이 조금 있어가지고······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머리를 긁적인 숀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시각,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 셋이 나란히 일어섰다. 각자 자그마한 핸드백을 둘러매고 걸음을 옮긴다.
같은 방향으로 걷던 셋이 중간에 갈라졌다.
한 명은 화장실로, 한 명은 계단으로, 다른 한 명은 클럽의 더 깊숙한 곳으로.
그렇게 잠시 후······.
파지지직!
클럽 전체의 전자기기들이 한 차례 번쩍! 하며 전깃불을 토하더니, 일제히 전 원이 꺼졌다.
야릇한 음악이 쿵쾅대던 클럽이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물론 음악소리 대신에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야릇한 교성이 곳곳에서 들려오긴 했지만, 이내 혼란에 빠진 소음이 그 위를 덮었다.
"무슨 일이야?"
"한참 재미 보고 있었는데 왜 정전이 되고 지랄이야!"
두우우웅!
그때 비상전력이 가동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클럽의 전원이 들어왔다.
다만, 비상전력이라 헐벗은 춤을 추던 홀로그램도, 어둠을 꿰뚫던 레이저도, 야릇한 클럽음악도 나오지 않았다.
상황을 살피던 클럽 관리자가 주변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전력 상황 체크······!"
그 순간.
쾅!
어디선가 들려온 폭음이 클럽 전체에 울려 퍼졌다.
"······!"
클럽 관리자도. 직원들도. 헐벗은 스트립 쇼걸도. 멍하니 기다리던 손님들도 전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콰콰쾅!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또 한 번의 폭발이 일어났다.
이번엔 2층 난간에서 터진 폭발로 한순간에 그 주변이 주저앉았다.
쿠쿵!
눈앞에서 2층의 일부가 주저앉는 걸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폭탄이야! 누가 폭탄을 터트렸어!"
"대체 누가 폭탄을? 혹시 테러 아니야?"
"테, 테러!"
테러라는 누군가의 말이 유난히 컸고, 그 말은 금세 불안감을 싹틔웠다.
푸슉! 푸슈슈슉!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스프링클러까지 터지며 물이 뿌려졌다.
"씨, 씨발! 도망쳐!"
"여기서 죽긴 싫다고!"
"다들 꺼져! 내가 먼저 나갈 거야!"
갑자기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출구로 몰려갔다.
그때 전장슈트를 차려입은 용병들이 완전 무장을 한 채로 실내로 진입했다.
사람들은 달려나가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용병들이 총구를 들이밀며 소리쳤다.
"다들 엎드려!"
눈앞에서 총구를 마주한 사람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바닥에 엎드렸다.
이중엔 나름 전투 사이버웨어를 임플란트한 사람도 있었으나, 완전 무장을 한 용병의 지시를 어기는 자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선 저 총에 맞아 죽어도 아무런 저항을 못 할 테니까.
"어이! 거기! 엎드리라고!"
어딘가를 바라본 용병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룸에서 나와 2층 난간에서 1층을 내려다보던 강현재와 숀이 있었다.
숀이 불안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용병과 강현재를 번갈아 쳐다봤다. 신경질적으로 걸어오는 용병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나라도 움직여야 하나?'
쪼그라든 심장으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어느새 검은색 비옷을 뒤집어쓴 강현재가 숀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잘 지켜보도록. 앞으로 이런 싸움의 뒤처리를 하게 될 테니까."
"에? 그게······"
'······무슨 소립니까?' 라고 묻기도 전에, 눈앞에서 강현재가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숀이 뒷걸음질 치며 눈을 깜빡였다. 분명 방금까지 눈앞에 있었는데······?
황급히 시선을 돌리자, 성큼거리며 다가오던 용병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숀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그걸 쫓았다. 허공에서 회전하던 용병의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데구르르 굴러오더니······.
툭.
숀의 발치에 멈춰섰다.
지이잉!
순간, 용병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바이저가 내려가며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목이 날아갈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신경질적인 표정 그대로 죽어 있었다.
털썩.
뒤늦게 용병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이, 이게······?"
······소드마스터?
온몸으로 소름이 올라왔다. 이게 진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고개를 돌린 숀의 시선이 강현재를 찾았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두커니 선 채,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의 움직임을 필사적으로 쫓았다.
총구의 불빛이 현란하게 반짝일 때마다, 클럽의 내부는 역으로 어두워졌다.
빛을 내뿜는 전구와 전자기기가 모조리 터져나갔고, 실내는 벌집이 됐다.
강현재는 그 수많은 불꽃과 탄환을 모조리 피하며, 눈으로도 쫓기 어려운 속도로 용병을 썰어버렸다.
숀은 그 일련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움직임을 보면서,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씨발. 존나 멋있다."
교차하는 꿈들 (3)
70화. 교차하는 꿈들
사방에 갈겨대는 탄환으로 클럽 내부가 벌집이 돼간다.
실내를 비추던 조명과 전자기기들이 터져나가고, 바에 줄지어 늘어선 술병들이 줄줄이 깨지며 독한 알콜향을 풍겼다.
몇 안 남은 조명으로 어둑해진 실내를 그 대신 비춰주기라도 하려는 듯, 벌집이 된 곳곳에서 전깃불이 튀어 올랐다.
"커, 컥!"
또 하나의 용병의 목을 날리며 생각했다.
'시간을 줬는데 겨우 이 정도밖에 준비하지 않았다고?'
나에 대해서 조사를 안 했을 리 없다. 나를 몰랐더라면 지난번 폐쇼핑몰의 경고처럼 그렇게 거창하게 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겨우 용병들을 동원해서 함정을 팠다고?
'뭐, 장비야 좋아 보이긴 하지만······.'
확실히 지금 상대하는 용병들의 장비는 쉽게 보기 힘든 장비긴 했다. 전신을 커버하는 전장 슈트에 테크건. 과거 레드우드의 <붉은 날개> 용병단을 떠올려 보면, 압도적으로 좋은 장비가 맞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어쩌면 클럽 외부에 주력을 배치했는지도 모르겠군. 일이 터지고 용병들이 외부에서 진입한 걸 보면.'
아마 내가 정면에서 당당히 해결사라는 걸 밝힐 거라 생각했나 본데······.
'멍청한 판단이지. 내가 왜 뻔히 함정인 걸 아는데 정면으로 들어가?'
이렇게 원하는 전장에서 얼마든지 싸울 수 있는데 말이다.
티티팅!
나는 쇄도하는 탄환을 튕겨내며 이리저리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는 용병들을 바라봤다.
이 스트립 클럽의 스테이지가 넓긴 해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총과 칼의 대결은 기본적으로 거리의 싸움. 이 정도의 공간에선 총의 장점은 줄고, 칼의 장점은 극대화된다.
하물며 나는 탄환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있다. 게다가 가장 껄끄러운 저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야말로 내게 최적화된 전장이지.'
이곳에선 내가 개미귀신이고, 놈들은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들이다.
두우웅!
그때 무형의 파동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활성화된 포스가 바로 섬뜩한 감각을 전달하며 경고한다.
탓!
나는 그대로 바닥을 박차 몸을 뒤집었다. 파바박! 귓가에 들려오는 거친 소음. 스쳐가는 시야로 날카롭게 벼려진 철근이 땅바닥을 뚫고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건?'
그 순간 목표물을 놓친 철근이 한차례 몸을 뒤틀었다. 꽈배기처럼 몸을 꼬던 철근이 파앙! 하고 깨지더니, 그 조각들이 내게 쏘아졌다.
타타탕!
나는 날아드는 철근 조각을 막아내며 빠르게 뒤로 몸을 뺐다.
2층 난간까지 훌쩍 물러난 나는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각성자로군."
변화한 전장으로 잠시 총탄이 멈췄다. 각성자가 등장한 이후 용병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때 용병들 사이로 검은색 군복을 입은 사내가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무기 교체해."
사내의 명령에 곧바로 몇 걸음씩 뒤로 물러선 용병들이 철컥거리며 들고 있던 소총을 빠르게 분해, 재조립한다.
앞으로 걸어 나온 사내가 베레모를 들추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과연 소문대로군, 소드마스터. 진짜 코앞에서 총알을 피해낼 줄이야.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어. 임플란트도 별로 안 보이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사내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그의 얼굴 한쪽은 눈 대신 커다란 대구경 렌즈가 박혀있었다. 렌즈의 조리개가 기분 나쁘게 찰칵거리는 소리를 낸다.
"네가 한 짓만 할까?"
나는 턱짓으로 철근이 뚫어놓은 바닥을 가리켰다.
사내가 피식 웃더니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오랜만에 만나는 각성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아쉽군. 네 능력도 하나씩 뜯어봤으면 싶은데 말이야."
"다른 각성자를 만난 적이 있나?"
"뭐, 이 일을 하다 보면 가끔 만나지. 문제는 지금처럼 항상 반대쪽에서 만났다는 거지만."
"······그들을 어떻게 했지?"
내 질문에 사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런 질문을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는 얼굴이다.
"뭘 그런 걸 물어?"
사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그리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혀로 입술을 훔쳤다.
"······굳이 대답 안 해도 알잖아?"
"······."
결국, 모조리 죽였다는 뜻이었다.
그때 무기교체를 마친 용병들이 다시 전열을 정비했다. 전체적으로 소총의 크기가 커지고 총열도 길어졌다.
나는 놈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대로 물러서서 도시를 떠난다면 살려주지. 의미 없이 죽을 필요는 없지 않나?"
놈들과 나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그저 돈 때문에 엮인 의뢰 관계일 뿐이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일단 살아있어야 그 좋아하는 돈을 써보지 않겠나?
물론 나는 어떤 대답이 들려올지 알고 있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소울 시티였고, 놈과 나는 해결사와 용병이었으니까.
"······푸핫! 푸하하하! 뭐라고? 살려줘?"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린 사내가 한순간 정색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뭐해? 조져."
철컥!
물러섰던 용병들이 일제히 총구를 조준했다.
* * *
용병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진다.
하지만 명백히 이전과는 다른 소음. 그리고 다른 파괴력이다.
쾅쾅!
마치 교통사고라도 난 듯한 굉음이 클럽 전체에 울렸다. 쩌렁쩌렁한 소리만으로 위태롭게 달려있던 조명이 깨져나갈 정도다.
샷건.
용병들은 전열을 정비하며 기존 테크건을 샷건으로 개조했다.
총구에서 뿜어진 탄환이 공중에서 폭발하며 수백 개의 조각으로 해체된다.
한꺼번에 수십 발씩, 연이어서 발사된 탄환은 금세 전방을 빼곡히 뒤덮었다.
마치 쇳조각으로 된 그물망이 덮쳐오는 모양새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철의 그물처럼.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뻔히 대놓고 교체했는지 모르겠군.'
아마 첫 등장에 이런 퍼포먼스를 보였더라면, 아무리 나라도 깜짝 놀랐을 거다.
한낱 칼잡이라서 자신들이 뭘 하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각성자인 사내를 너무 믿은 건가?
이유야 어쨌든 나는 놈들이 뭘 하는지 봤고, 이미 아는 서프라이즈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다.
탓!
나는 2층 난간에서 그대로 뛰어올랐다. 오히려 철의 그물을 향해 뛰어드는 것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스릉.
쭉 뻗은 은빛 칼날이 잘게 떨렸다. 순간적으로 하얗게 물든 검 끝에서 미증유의 파동이 피어났다.
「중력제어」.
다마스강의 칼날을 거쳐 한층 강력해진 파동이 전장을 휩쓸었다.
쩌엉!
수면 위에 물결처럼 공간이 일렁인다. 그리고 그 공간의 물결에 닿은 철의 그물은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
빼곡하게 뒤덮었던 탄환 파편들이 땅바닥으로 거칠게 추락했다. 날아들던 속도보다도 오히려 더 빠른 속도였다.
파바바박!
바닥 타일과 시멘트가 스티로폼처럼 부서지고 터져나간다. 자욱한 먼지가 순식간에 전장을 뒤덮었다.
"뭐, 뭣!"
"이게 무슨!"
일제히 사격이 멎었다. 당황한 용병들이 당혹성을 내뱉으며 서로를 돌아본다.
그 짧은 순간, 나는 그대로 먼지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확히는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를 향해서.
'이런 싸움에선 대가리만 따면 끝이지.'
쐐애애액!
떨어지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검압이 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놈도 각성자였다.
"이 새끼가!"
놈이 뒤로 물러서며 손을 쭉 내뻗었다.
순간 놈의 주변으로 미증유의 힘이 뿜어지더니, 철근과 전선 다발이 바닥을 뚫고 위로 솟구쳤고, 사방에선 철로 된 구조물이 날아들었다.
타다당!
나는 튀어 오른 철근을 쳐내고, 채찍처럼 날아드는 전선 다발을 잘라냈다. 그리고 투척한 창처럼 등 뒤로 쇄도한 스트립 봉까지 마저 갈라버렸다.
이 모든 게 한 호흡 만에 이뤄졌다.
나는 그대로 물러서는 놈에게 재차 달려들어 거리를 좁혔다.
쑤우우웅!
놈도 그 짧은 사이, 철근과 잘린 전선 다발을 엮어 내게 쏘아냈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그 무게가 느껴지듯 묵직하다.
카카캉!
나는 달려드는 속도 그대로 칼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비스듬히 갈라진 철근이 45도 각도로 위로 튕겨 나간다.
그리고 그 갈라진 틈 사이로 놈의 당황하는 얼굴이 보였다.
"뭐, 뭐해 새끼들아! 쏴! 쏘라고!"
용병들이 머뭇거렸다.
사실 내가 놈에게 달려든 그 순간부터 용병들은 총구만 바쁘게 움직인 채 방아쇠는 당길 수가 없었다.
샷건 탄환은 폭발하여 퍼지는 탄이다. 나를 조준한다고 해도 사내가 맞을 위험이 크다는 뜻이었다.
내가 입꼬리를 올리자, 놈이 붉어진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씨발! 그냥 쏴! 쏘란 말이야!"
신경질적인 그 목소리에 용병들이 발작하듯 방아쇠를 당겼다.
쾅쾅!
다시 샷건 탄환이 공중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그 기세는 많이 죽었다. 아무리 그냥 쏘랬다고 처음처럼 전방을 뒤덮듯 샷건을 갈길 순 없었다. 그랬다간 놈도 벌집이 될 테니까.
그리고 이거야말로 내가 노린 수였다.
이깟 소극적인 탄환쯤, 나는 눈감고도 막을 수 있었지만······.
'이놈은 아니지.'
쾅쾅!
"어억! 이런 썅! 제대로 조준 안 해?"
철근과 구조물을 끌어와 부지런히 쏘아대던 놈이 버럭 소리쳤다. 본능적으로 놈의 시선이 총을 갈겨대는 용병들을 향해 빠르게 이동한다.
그 찰나의 순간.
'지금이다.'
나는 놈이 쏘아낸 철근을 비스듬히 비껴내곤 그대로 그 틈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열 걸음 정도로 유지됐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길게 내뻗은 칼날이 놈의 목에 닿기 충분할 정도로.
"흐헛!"
기겁한 놈이 몸을 움츠리더니, 양손을 가슴으로 가져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쿠구궁!
순간 녀석이 쏘아대던 팔뚝만 한 크기의 철근과 구조물들이 놈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덕지덕지 붙은 철들이 찰흙처럼 뭉치더니 벽이 세워졌다. 땅바닥에선 새로운 전선 다발이 솟구치며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마치 철과 전선으로 만들어진 누더기 골렘과도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번쩍!
기다랗게 늘어진 은빛 궤적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3차원 평면을 레이저로 도려낸 것처럼, 은빛 궤적은 가로막는 모든 걸 비틀며 지나갔다.
그리고 갈라진 공간의 비틀림이 정상으로 되돌아온 순간, 궤적이 지나간 공간은 깨끗하게 도려진 허공(虛空)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틈새로 검을 찔러넣었다.
푸욱.
손끝으로 피륙을 꿰뚫는 감각과 거칠어진 심장의 맥동까지 선명하게 느껴진다.
"크, 크흑······!"
놈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정확히 심장을 꿰뚫은 은빛 칼날은 서늘한 예기를 토하고 있었다.
쿨럭.
피를 토한 놈이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 살려······."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뻐끔거렸다. 쌕쌕거리는 호흡이 점차 얕아진다.
나는 놈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살려준다고 할 때 떠나지 그랬어."
그리곤 그대로 검을 휘둘러 목을 날렸다.
툭. 데구르르.
털썩.
굴러떨어진 목 위로 놈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잠시 쓰러진 놈의 모습을 내려다본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엔 잔뜩 당황한 용병들이 나와 목이 날아간 시체를 번갈아서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덤빌 건가?"
"······."
내 물음에 용병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눈치를 본다. 여긴 부대장이나 이런 게 없나? 왜 눈치를 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놈들을 향해 칼끝을 내밀며 말했다.
"들고 있는 무기를 버리고 떠나면 살려주지."
"······!"
"10초 주겠다. 10, 9, 8······"
철컥! 철컥!
용병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무기를 내던지고 우르르 도망갔다.
허둥지둥 빠져나가는 용병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피맺힌 칼날을 털어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개판이군."
설마 건물의 철근과 전선을 뽑아쓰는 능력자가 나타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때 난장판이 된 어디선가······
짝. 짝짝짝! 짝짝짝짝짝!
고독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니 먼지를 뒤집어쓴 숀이 넋이 나간 듯 손뼉을 치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하긴, 이 정도 싸움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정확히는 목격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그런데······
짝짝! 짝짝짝짝짝짝!
짝짝짝짝짝!
박수소리가 다른 곳에서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여럿이 치는 박수소리가.
전투가 벌어지고 구석으로 몰려갔던 스트립 클럽의 손님들이었다. 그들 역시 숀처럼 뭐에 홀린 얼굴로 손뼉을 쳐댔다.
그들의 눈빛에선 뭐라 정확히 콕 집을 수 없는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 * *
콜레오넬 저택.
"아이언 용병단?"
홀로그램에 떠 있는 정보를 살펴보던 알리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최근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용병단입니다. 장비도 업계 최상이고, 무엇보다 대장이 각성자라고 하더군요."
태블릿으로 홀로그램을 조종하던 집사장이 대답했다.
"각성자라······ 그 신비한 힘을 사용한다는 자들 말이로군요."
"맞습니다."
각성자라······.
잠시 기억을 더듬던 알리오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들어보니 갱이나 부랑자 출신들이 특히 많다던데······ 그러면 꽤 흔한 거 아닙니까? 아큐마 제약에서 은밀히 실험하는 내용도 조금 들었는데, 아직까지 기대 이하라고도 하고요."
"그자는 조금 다릅니다. 각성자가 대장노릇을 하던 경쟁 용병단을 몇 개나 잡아먹었을 정도니까요."
"흐음. 능력은 된다 이거로군요."
홀로그램에서 시선을 뗀 알리오가 의자 뒤로 몸을 기울인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그가 불쑥 물었다.
"뭐, 좋습니다. 그런데 용병단 하나로 되겠습니까? 명색이 소드마스터라는 거 창한 이름으로 불리는 놈 아닙니까?"
"칼잡이 혼자서 용병단 전체를 상대하긴 어렵겠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발생한다 해도 차선책을 준비했습니다."
집사장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차선책이라? '그'를 쓰는 일은 당연히 아닐 테고요?"
"물론입니다. 그건 최후에 결정할 일이죠."
"차선책이 뭡니까?"
알리오가 흥미가 생겼다는 듯 물었다. 눈빛을 번뜩인 집사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마침 그가 가진 소드마스터라는 이명을 탐탁지 않아 하는 칼잡이들이 있더군요."
교차하는 꿈들 (4)
71화. 교차하는 꿈들
콘트리트 골조는 부서진 벌집처럼 파헤쳐져 있었고, 바닥과 기둥 곳곳엔 철근이 뽑힌 흔적으로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게다가 지하를 지나는 전선들이 창자마냥 흘러나와 곳곳에 흩어져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 된 클럽 내부.
숀은 무언가 홀린 듯한 얼굴로 강현재를 쳐다봤다.
"앞으로 네가 담당할 일이다. 40번대 구역의 공작부터, 의뢰 지역 뒷정리까지."
강현재가 턱짓으로 쓰러진 용병들을 가리켰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숀은 그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그제야 강현재의 턱짓을 따라 시선을 돌린다.
사지가 멀쩡히 붙어있지 않은 용병 시체들. 팔, 다리가 잘려나가고, 가슴이 갈라지고, 머리가 떨어진 흉측한 몰골들.
하지만 숀의 시선은 그런 몰골에 닿아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용병들이 걸치고 다녔던 피 묻은 장비들을 향해 있었다.
"지, 진짭니까?"
숀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되물었다.
기껏해야 40분 구역에서 일을 도와주고 일당이나 받는 정도를 기대했는 데······ 뒤처리까지 맡겨주겠다고?
"그래. 네가 처리하면 용돈 벌이라도 되지 않겠어?"
"그, 그럼 수익금은 어떻게······?"
숀이 떨리는 눈으로 용병 시체들과 강현재를 번갈아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피와 살이 난무한 전장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그 모든 게 노란 황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강현재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절반을 주지. 대신 일 처리는 이번처럼 잘해줘야 한다."
순간 숀은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뻔했다. 그는 바짝 기합이 든 얼굴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무,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 * *
숀에게 전장 뒤처리를 맡기고 클럽을 나섰다. 처음보다 훨씬 의욕적으로 변한 숀의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클럽이 위치한 골목길을 나서는데, 부랑자와 취객이 넘쳐나는 이곳이 유난히 조용하다.
그때 일단의 무리들이 골목 앞뒤로 들이닥치며 길을 막아섰다. 복장은 제각각이었으나 하나같이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나를 노려본다. 마치 떼인 돈을 찾으러 몰려온 놈들처럼도 보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곤 그들을 바라봤다.
"뭐냐?"
딱 보기에도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갱이나 용병이라고 보기도 애매하다. 굳이 따지면 해결사에 가깝다고 할까?
그중 가장 인상이 더러운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뭐긴 뭐야? 건방지게 소드마스터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는 놈을 참교육하러 온 선생님들이지."
놈이 허리춤에 매달린 칼의 손잡이에 손을 올려놨다. 그러자 다른 놈들도 저마다 허리춤을 드러내며 손잡이를 쥔다.
전부 칼잡이들이었다.
'이건 또 뭐하는 놈들이야?'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게 불만이라서 찾아온 건가?"
"그래! '소드마스터'라는 이명은 네놈이 함부로 달고 다닐 정도로 가벼운 이름이 아니다! 어디 협회에 인증도 못 받은 칼잡이 따위가!"
"협회? 무슨 협회?"
"흥! 소울시 칼잡이협회를 모른다고 할 셈이냐? 칼잡이라면 모를 수가 없거늘!"
코웃음을 친 사내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칼잡이협회라고? 내가 게임을 했었을 적에도 없던 설정이고, 이 도시에서 활동하면서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곳이었다.
'흐음. 그러니까 간판만 달아놓고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우르르 몰려가서 삥을 뜯는 놈들이다, 이건가?'
"모르겠는데······. 그리고 그런 곳을 왜 알아야 하지? 내가 칼잡이로 활동하는 거에 그 협회라는 게 뭘 했다고?"
"이익! 가입비도 아까워서 못 낸 칼잡이 따위가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거냐! 시끄럽고! '소드마스터'라는 위대한 이름을 함부로 쓴 대가를 치러라!"
사내가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 이명은 내가 붙인 게 아니다만?"
나는 팔짱을 낀 채 뚱한 얼굴로 녀석들을 바라봤다.
이 도시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이명'은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 그렇게 부르고, 그게 일반적으로 통용될 때 그게 진정한 '이명'이 된다.
사내가 비릿한 얼굴로 입매를 비틀더니 능글거리는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흥! 어디서 구라를! 그럼 기업에서 소드마스터라는 네게 스카웃 제의라도 했나? 아니면 <소울이터> 같은 군사기업에서 칭송하기를 했나? 뭐, 그것도 아니면 설마 <블랙스컬>이 소드마스터를 피해 다니기라도 했나? 푸하하하하!"
"······."
······뭐지, 이 새끼?
전부 알고 하는 말 같은데?
"푸하하! 왜 말이 없냐?"
"푸하하하!"
사내의 웃음에 전염된 다른 칼잡이들도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린다.
대체 뭐하는 새끼들일까?
"······전부 사실이라면?"
나는 녀석들을 삐딱하게 쳐다봤다.
그러자 사내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소리쳤다.
"뭐? 이런 미친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어디 우리의 칼날 앞에서 팔다리가 모조리 떨어져도 그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지."
스릉.
스르릉.
녀석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한꺼번에 발도하는 소리가 골목길에 서늘하게 울려퍼졌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나도 천천히 검을 뽑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라고 말하지 그랬어."
"······조져!"
칼잡이들이 달려들었다.
* * *
"······조져!"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소리친 사내가 바로 소울시 칼잡이협회의 부회장이었다.
저마다 칼을 뽑은 칼잡이들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간다. 사내는 칼잡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슬그머니 속도를 줄였다.
'괜히 앞섰다가 칼침이라도 맞으면 무슨 개망신이야? 그래도 나름 가락이 있으니 헛소문이라도 붙었겠지.'
사내를 그런 합리화를 하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너무 멀어도, 너무 가까워도 문제니까.
사내는 이제 막 칼잡이들과 부딪히기 시작한 강현재를 보며 혀를 쯧쯧찼다.
'불쌍한 놈. 무슨 짓을 했길래 콜레오넬 가문에게 밉보였는지 모르겠군.'
처음 콜레오넬 가문에서 칼잡이 하나를 사냥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땐 어떤 멍청한 놈이 사고를 쳤나 궁금했었다.
그런데 그게 최근에 소드마스터라는 이명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방진 칼잡이라는 걸 안 순간, 사내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감히! 칼잡이협회 부회장인 나조차도 그런 이명으로 불리지 못했건만! 어디 근본도 없는 놈이!'
사내가 살기 어린 눈빛을 뿜어내며 손에 쥔 칼에 힘을 줬다.
안 그래도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에 참교육을 시켜줘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워 머신을 갈라? 갱단을 도륙해? 어디 오늘 사지가 잘려나가도 그딴 소문이 도는지 두고 보자!'
그때 이윽고 칼잡이들과 강현재가 부딪혔다.
현란한 칼잡이들의 칼날이 사방에서 날아든다.
누군가는 플라즈마 커터를, 누군가는 일렉트릭 소드를, 누군가는 회전톱날을 장착한 칼로, 강현재를 찢고 가르기 위해 쇄도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완벽하게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럼 그렇······ 아, 아니!'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사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카캉! 캉!
가볍게 내민 강현재의 칼날과 부딪친 칼잡이들의 칼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하늘로 튕겨 오른 부러진 칼날들이 거칠게 회전하며 골목에 처박힌다. 칼잡이들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지만, 이내 이를 악물곤 반만 남은 칼을 재차 휘둘렀다.
그건 그들이 이런 상황에 익숙하기도 했지만,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리가 비슷한 칼잡이들의 대결에서 숫자의 우위는 절대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강현재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
"헛!"
칼잡이들이 칼이 허공을 베고 지나간다. 눈앞에서 사라진 강현재를 찾아 빠르게 시선이 이동한다.
하지만 그들은 강현재를 찾는 것보다, 비명을 지르는 게 먼저였다.
"끄, 끄아악!"
"내, 내 팔! 내파알!"
"끄윽! 다리가! 다리가!"
흐릿한 무언가가 지나갔다고 느꼈을 뿐인데, 칼잡이들이 하나씩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쓰러진 옆에는 자신의 팔이나 다리가 흙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시냅스 가속 시술을 한 놈이다! 거리를 벌려!"
사내가 버럭 소리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전방으로 던졌다. 투박하게 생긴 그것은 빛을 내뿜으며 하늘로 날아가더니 이내 퍽! 하고 터졌다.
그 순간, 미세한 전류가 사방을 뒤덮었다.
소형 EMP 충격파 수류탄.
EMP 방어능력이 있는 대부분의 사이버웨어엔 영향을 주진 못하지만, 시냅스가속 같은 뇌파컨트롤을 하는 민감한 사이버웨어엔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
"푸하하! 그게 소드마스터의 비밀이었구나! 그깟 시냅스 가속 따위에 의지한 실력이 얼마나······ 엉?"
확신에 찬 웃음을 터트리던 사내의 얼굴이 구겨졌다.
"끄악!"
"씨, 씨발! 나와! 나와아악! 내, 내 다리가!"
여전히 칼잡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강현재의 칼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부, 분명 EMP가 터졌는데?"
사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사이, 순식간에 칼잡이들의 대부분이 팔, 다리 중 하나가 사라진 채 바닥을 굴렀다.
아직 멀쩡한 칼잡이도 이제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애먼 허공만 칼로 휘저으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리고.
번쩍!
후두두둑!
한순간에 기다란 궤적을 그리며 칼잡이들을 지나간 강현재가 사내 앞에 우뚝섰다.
"끄아아악! 내 파알!"
"끄, 끄허헉!"
그 뒤로 강현재의 궤적이 지나간 자리에 있던 칼잡이들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힐끗 어깨너머로 뒤를 바라본 강현재가 시선을 돌려 사내를 바라봤다.
이제 이 골목에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어, 어, 어떻게······? 부, 분명 EMP가······."
사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쓰러진 칼잡이들과 강현재를 번갈아 쳐다봤다.
"EMP를 터트렸으니 그렇지. 차라리 유도형 수류탄을 까지 그랬어?"
"그, 그게 무슨? 그럼 그 움직임이 시냅스 가속 시술이 아니라고?"
"시냅스 가속이라······ 네 눈에 정말 그렇게 보였나?"
강현재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마치 정말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냐는 비웃음이었다.
사내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제야 강현재의 움직임을 다시금 복기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말도 안 돼. 그런 움직임을 인간의 몸으로 어찌······?"
시냅스 가속 시술 따위론 강현재의 속도의 절반도 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한심한 눈빛으로 사내를 쳐다본 강현재가 칼끝으로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왜 내가 칼잡이협회를 몰랐는지 알겠군. 이제 칼을 들어라, 거짓 칼잡이야."
* * *
"아······."
바닥에 쓰러진 사내는 엎어진 시선으로 보이는 강현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을 포함한 칼잡이들을 모조리 썰어버리곤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사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무의식적으로 품속에 담배를 꺼내려던 사내가 헛웃음을 지었다. 담배를 꺼낼 팔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쪽씩만 날아간 다른 칼잡이들과 다르게, 자신은 양팔을 잘라버렸다.
"허, 허허허!"
사내는 몰려오는 현기증에 다시 골목 벽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이제 사라져 보이지도 않는 강현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소드마스터가 실존할 줄이야."
사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둠으로 뒤덮인 눈꺼풀 위로 아득한 과거의 어떤 편린이 필름처럼 영사됐다.
그가 검을 잡기로 결심했던, 그날의 기억이.
"보고 싶소······ 회장."
사내의 숨이 서서히 얕아졌다.
* * *
"실패했다고?"
"눈으로부터 소식이 왔습니다. 용병단과 칼잡이들 모두 실패했다고 합니다."
"······."
알리오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집사장을 바라봤다.
설마 했건만 진짜 용병단을 혼자서 상대하고, 그 몸으로 칼잡이들마저 상대하다니? 단순히 이명뿐만 아니라, 정말 「마스터」급 해결사라도 된다는 건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집사장의 물음에 알리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를 사용하면 항상 그만큼의 파장이 뒤따른다. 다행히도 최대한 억제하고는 있지만······.
"······'그'에게 남은 의뢰가 이번이 마지막입니까?"
"네. 마지막 계약입니다."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후우······ 그를 이대로 풀어주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군요."
"어차피 점점 컨트롤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들어보니 이미 동쪽 지역에서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을 규합하고 있더군요."
"추종자들이라······. 조만간 억지를 부릴지도 모르겠군요."
"네. 이참에 그를 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집사장의 말에 알리오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쩔 수 없죠. 게다가 동쪽 지역이라면 어차피 타오렌 놈들 지역 아닙니까? 폭탄을 껴안고 있느니, 그쪽으로 넘겨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진행하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세요. 그 살인마가 다시 도시에 나타나는 건 안타깝지만······
그 또한 이 도시의 운명이니."
* * *
철컥. 철컥.
쿵!
온몸을 옥죄던 전신 구속구가 하나씩 풀어진다.
보기만해도 숨이 막힐 것 같은 강철 프레임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자리에 숨어있던 맨살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침내 구속구가 전부 떨어져 나간 사내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기형적으로 커다란 눈동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하게 만들었다. 가장 이질적인 것은, 이마 정중앙에 박힌 뱀처럼 길쭉하게 찢어진 눈동자였다.
"잭. 마지막 의뢰다."
세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움직인다.
방탄유리 너머로 보안관리자가 움찔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목표는 한 명이다."
"······죽이면 되나?"
"그래. 목표를 달성하면 돌아올 필요 없다. 우리도 쫓지 않을 거다."
"흐······ 좋군."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치 맹수의 이빨처럼 전부 날카롭게 벼려진 치아다. 그가 푸른빛이 도는 혓바닥으로 입술을 훔치며 물었다.
"그래서······ 목표는 누구지?"
"칼잡이다."
"······칼잡이라? 간만에 별미를 맛보겠어. 큭큭!"
교차하는 꿈들 (5)
72화. 교차하는 꿈들
잭 더 리퍼.
소울시티 최악의 살인마인 그는 '식칼을 든 살인마'로도 불린다.
물론 진짜 식칼로 사람을 죽이는 건 아니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팔꿈치정도 길이의 초진동 분자커터로 알려졌는 데, 그 칼로 적의 시체를 포 떠서 인육을 씹어먹었다. 그가 사라진 범행현장엔 항상 뼈와 살이 해체된 시체뿐이었다.
그래서 '식칼'을 든 살인마다. 진짜 포를 떠서 먹어버리니까.
그랬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증발이라도 된 듯 사라졌다.
한때 뒷골목에서 공포로 군림했던 그의 증발은 많은 소문을 낳았다.
누군가는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 SCPD의 대대적인 작전이 그를 잡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말하며 지금쯤 지하감옥에 갇혀있을 거라 말했다.
누군가는 소울 시티의 전설 중 한 명과 부딪혀 죽었다고도 말했고, 누군가는 메가 코프 사람에 스카웃되어 기업전쟁에 뛰어들었을 거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전부 소문만 무성할 뿐, 그에 대한 근거가 부족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그의 존재를 더욱 신비하게 만들었고, 역설적으로 그의 싸이코적인 행태를 추종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그러던 와중, 그의 흔적이 최근들이 하나씩 발견되고 있었다. 그를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은 없었지만, 몇몇 지역에서 벌어진 살해현장에서 그와 유사한 흔적이 발견된 거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그 최악의 살인마가 다시 돌아오다니! 죽을 때 죽더라도 멀쩡하게 죽고 싶지, 포가 떠져서 남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그들은 간절히 바랐다.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그 살인마를 죽여주기를. 그렇게만 해준다면 그가 시정부의 더러운 개여도, 메가 코프의 비열한 하수인이어도, 얼마든지 그를 추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 둘이 아니면 더 좋겠지만.
* * *
로세툼으로 복귀하는 길.
바이크를 주차하고 천천히 로세툼으로 다가가는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멈칫.
본능적으로 걸음을 세웠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로세툼이 있는 골목의 풍경은 언제나와 같다. 비교적 번화가 쪽에 위치한 골목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각종 배달드론들은 쉼없이 하늘을 오갔다.
항상 봐왔던 이상할 게 없는 평범한 모습.
내가 과민한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돌리는 그 순간, 스쳐가는 시선에 어떤 인물이 덜컥하고 걸린다.
마치 총천연색으로 물든 세상에 혼자 무채색으로 스케치된 듯, 주변과 어우러 지지 못하는 모습.
그때 눌러쓴 후드 사이로 유일하게 보이는 그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간다.
입꼬리 끝이 턱밑을 지나 귀까지 닿을 정도.
꿈틀.
폭발하듯 비명을 지르는 위화감.
나는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저자가 결코 호의적인 목적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설마 여기서 일을 벌이겠다고?'
아무리 도시의 치안이 망가졌다지만, 이런 번화가에서 전투를 벌이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하물며 이곳은 유동인구도 많다. 민간인 피해가 벌어지고 신고가 들어가면 SCPD도 그 무거운 엉덩이를 뗄 수밖에 없다.
'어쩌면 경고를 하러 온 걸지도 모르겠군.'
이미 40구역에 설치했던 함정을 역으로 깨부숴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테니.
그 순간, 나와 그의 시선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이어졌을 때.
'······!'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엔 누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본능이 강한 경고를 울렸다. 뒷머리를 누군가 잡아당기는 기분이다.
'이런 미친!'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 하늘을 향해 휘둘렀다.
챙!
위에서 찍어내리는 강한 충격과 함께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시야로 검과 맞닿은 2개의 짧은 칼날이 보인다. 팔꿈치 정도 길이의 군용단검이다.
그 뒤로 두 자루의 칼을 움켜쥔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후드가 벗겨진 그의 얼굴은 누가 낙서라도 한 것처럼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다.
순간 내리누르는 무게가 사라지고, 사내의 모습이 시야에서 없어졌다. 그리고 이어서 옆에서 들려오는 파공음.
채챙!
한 번에 찔러온 두 개의 칼날이 단번에 막았다.
그의 눈빛에 이채가 맴돌았다.
"너 굉장히 재밌는 놈이구나? 선이 보이지 않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사내가 한껏 찢어진 입꼬리를 혓바닥으로 날름거렸다. 길쭉하게 늘어진 푸른 색 혓바닥이 뱀처럼 춤을 췄다.
나는 그 기괴한 모습에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무슨 미친 소린진 모르겠지만, 함부로 칼을 휘두른 대가는 치러야 할 거다."
타탕!
나는 놈의 어깨를 노리며 검을 찔러 들어갔다.
놈은 양손에 든 단검으로 한 번에 검을 튕겨내더니, 바로 거리를 좁혔다.
한 손으론 튕겨나간 검을 쫓고, 다른 한 손으론 내 가슴을 노린다.
나와 거리를 좁히는 적이라니. 굉장히 오랜만이라 신선했다.
바로 옆으로 보폭을 옮겨 놈의 거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튕겨 나간 검을 그대로 올려쳤다.
전광석화처럼 승천하는 검. 그대로 놈의 몸을 갈라버리려는 찰나, 두 개의 짧은 칼날이 낙뢰처럼 내려친다.
챙!
위아래로 부딪친 칼날이 서로 튕겨 나간 그 순간, 놈은 마치 내게 달려들 듯 뛰어들었다.
터치다운 하듯 쭉 뻗은 손. 힘껏 쥔 칼날이 날카롭게 심장을 찔러오고 있었다.
움찔할 정도로 매서운 돌진이었으나, 나는 오히려 45도 정도로 비스듬히 앞으로 이동했다.
찔러오는 칼날을 부드럽게 막아내며 걸음을 옮기자, 순식간에 놈과 나의 포지 션이 역전됐다.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놈의 눈동자 위로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뒤집힌 듯 희번득한 눈동자엔 짙은 광기가 느껴졌다.
"크흐흐! 재밌구나! 재밌어!"
미끄러진 몸을 다시 뒤집은 놈이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푸른색 혓바닥이 날카로운 이빨을 스칠 때마다 끈적한 푸른색 액체가 입 주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정상인처럼 보이진 않는데······ 너 뭐하는 놈이냐?"
"큭큭! 이 몸은 인체를 탐구하는 자, 재클레어 드 에뷔뉴다."
놈은 정상이 아니라는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인체를 탐구하는 자?"
일단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지만, 스스로를 소개한 수식어부터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풍겼다.
인체를 탐구해? 팔다리 정도는 마음대로 뗐다, 붙였다 하고, 뇌만 살아있으면 사이보그화까지 가능한 이 세게에서 새삼스럽게?
그때, 무슨 구경거리가 났나 곳곳에 숨어서 구경하던 사람 중 몇 명이 경악에 가까운 비명으로 소리를 질렀다.
"재, 재클레어! 설마 살인마 잭?"
"잭 더 리퍼! 그 최악의 살인마라고?"
"도망가야 되는 거 아니야? 나는 먹히기 싫다고!"
"비, 비켜! 난 여기서 떠나겠어!"
누가 죽어 나자빠져도. 심지어 코앞에서 총알이 빗발치고 폭탄이 터져도 도망치지 않는 사람들이, '잭 더 리퍼'라는 이름에 다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망쳤다. 놈은 사람들이 도망가는 모습에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잭 더 리퍼. 가만히 이름을 되새기자 지나가듯 들었던 소문이 떠올랐다.
"네가 살인마 잭이냐? 인육을 먹는다는 미친놈?"
"크큭! 나를 두려워하는 놈들이 그렇게 부르긴 하지. 하지만 그건 알아둬라.
이 몸 앞에서 그렇게 부른 놈들은 전부 잘게 떠진 육포 신세가 됐으니까."
순간 놈의 이마가 작게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또 하나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처음엔 이마에 박아놓은 카메라 렌즈인 줄 알았다. 이 세계에서 신체개조는 너무나 흔했고, 이마에 카메라 하나 박는 것쯤은 미관에 신경 쓰지만 않는다면 시도하는 놈들이 있을법했으니까.
그런데······.
'미친! 진짜 눈이잖아?'
갈라진 이마에서 나타난 눈동자는 명백히 사람의 눈동자였다.
핏발이 선 3개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노려봤다.
'이마에 눈을 이식하다니. 진짜 미친놈이었군.'
드래곤볼을 인상 깊게 봤나?
'하지만 미친놈인 것과 별개로 칼솜씨는 진짜다.'
'식칼을 든 살인마'라고 해서 그냥 싸이코패스 살인마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상대해보니 바로 직전에 만났던 칼잡이협회인지 하는 것들보다도 칼솜씨가 좋았다.
양손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강약조절까지 능숙한 쌍수류는 상대하기 매우 까다롭다.
"······좋아. 살인마 잭. 너도 의뢰를 받고 온 건가?"
나는 음침하게 나를 노려보는 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물었다. 눈동자가 3개라서 약간 헤매긴 했지만.
"그렇다면?"
"그렇다면 더더욱 너는 살인마 나부랭이겠지. 잭 더 리퍼(Jack the Reaper)라니? 돈이 궁해서 살인청부나 받는 살인마 따위에게 '사신'이라는 이명이 가당키나 해?"
"······이 버러지가 감히!"
버럭 소리를 지른 놈의 눈동자 위로 은은한 열기가 감돌았다. 시종일관 여유와 광기를 보여줬던 놈이 처음 화를 내는 모습이었다.
'역시 관심종자 끼가 있었군.'
나는 놈과 대화를 하면서 은연중 눈치챌 수 있었다. 놈이 미친 짓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미친놈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어 하는 욕구 때문이라는 걸.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나를 공격한 거나, 이름을 묻는 질문에 당당히 성까지 합친 풀네임을 공개한 것. 그리고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것을 즐기듯 쳐다보는 것까지.
그 모든 게 관심병 말기 증상이다.
아마 놈이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인 사람을 먹는 것도 전부 관심병 때문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내가 틀린 말 했나? 그러고 보니 그냥 미친 살인마에게 너무 과한 이명과 공포가 생긴 것 같군? 인육을 먹었다는 것도 사실 먹은 척만 한 거 아닌가?"
"······."
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마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없겠지.
"사실 별거 아니었던 놈이었잖아? 마침 이곳에 증인들도 많으니 잘됐군. 살인마 잭은 사실 겁쟁이였다! 싸우는 게 무서워서 죽은 시체만 갖고 놀았다!"
"······크흐! 크크크크! 크하하하!"
내 말에 이윽고 놈이 입을 한껏 찢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반쯤 돌아간 3개의 눈동자는 이미 흰자만 보일 지경이었다.
"크하하하하하하! 끄하하하하!"
놈이 떠나가라 웃는다. 마치 '나를 봐주세요! 내게 눈을 떼지 말아주세요!'
라고 외치는 것 같다.
그렇게 한껏 웃으며 침인지, 뭔지 파란색 액체를 입가에 질질 흘리던 놈이 갑자기 칼을 역수로 쥐더니······.
콰직!
자신의 양쪽 손목을 잘라버렸다.
"······!"
나는 잠시 이 충격적인 모습에 움찔하며 미간을 좁혔다.
'너무 놀려서 진짜 미쳐버린 건가?'
생각보다 내 말빨이 너무 강력한 거 아닌가? 란 생각을 하는 사이, 양쪽 손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놈이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네놈 심장은 꼭 씹어먹고 말 테다!"
그 순간.
차앙!
잘린 손목 안에서 피로 범벅이 된 기다란 칼날이 튀어나왔다.
뚝뚝.
칼끝에 맺힌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진다.
치익!
핏방울이 떨어진 곳에서 독한 연기와 함께 바닥이 검게 타올랐다. 피가 아니라 강한 산성을 띤 독극물에 가까웠다.
"흐흐······ 어디 발버둥 쳐봐라."
나지막이 중얼거린 목소리가 흐려짐과 동시에 놈의 신형도 신기루처럼 서서히 사라졌다.
'광학미채!'
광학미채(光學迷彩).
빛을 굴곡시켜 투명화하는 위장기술.
이윽고 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흔한 말소리조차 사라진 정적이 내려앉은 골목.
말이 없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홀로그램만이 가득한 거리 위로 소름 끼치는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교차하는 꿈들 (6)
73화. 교차하는 꿈들
잭은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걸 느꼈다. 한껏 각성된 뇌와 폭주하는 교감신경은 그를 흥분에 젖게 만들었다.
그 누구도 자신과 이렇게 칼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저 처참히 찢겨나갈 뿐이었다.
'그 능력이 생긴 이후부터였지.'
하늘이 백광으로 뒤덮였던 그 밤 이후, '선'을 보는 능력이 생겼다.
처음엔 시신경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 위로 흐름과 결이 보였고, 그 흐름과 결을 따라 '선'이 만들어졌다.
주변에선 또 관심을 끌려고 거짓말을 하냐면서 혀를 찼다. 차라리 '선'이 아니라 도망간 네 전 여자친구의 헐벗은 몸이 보인다고 하지 그랬냐며 비웃음을 터트렸다.
잭은 자신도 모르게 비웃음을 흘리던 놈의 얼굴을 그어버렸다. 그 위에 덧씌워진 '선'대로.
평소였으면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을 놈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저 두부처럼 머리가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피로 뒤범벅이 된 손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잭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빌어먹을 삶에서 드디어 한줄기 축복이 찾아왔노라고.'
그날부터 소울 시티 뒷골목을 공포에 떨게 한, 잭 더 리퍼. 살인마 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선대로만 자르면 모든 게 두부처럼 갈라졌다.
평소 자신을 괴롭혔던 갱을 전부 썰어버리고, 재수 없었던 해결사를 부위별로 해체했다.
동료의 복수를 하겠다며 습격한 갱단을 모조리 죽였고, 중재를 한다며 찾아온 용병단도 죽였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인간의 허약한 신체는 물론이고, 방탄조끼든, 전술슈트든, 심지어 강철로된 안드로이드 역시 자신의 칼 앞에선 평등하게 갈라졌다.
그때부터 모든 게 시시해졌다. 인육의 맛을 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 정도가 아니었으면 그 어떤 것도 그에게 흥미를 주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저 건방진 칼잡이는 달랐다.
그에겐 '선'이 보이지 않았다. 안드로이드 같은 무생물에게도 보이는 '선'이, 사람인 그에게선 마치 지우개로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흥분이 될 지경이었는데, 심지어 칼솜씨가 예술이다.
이제껏 마주쳤던 모든 칼잡이가 쓰레기나 다름없었는데, 이놈은 자신을 몰아 붙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칼솜씨만큼이나 뛰어난 혓바닥을 놀리는 기술까지.
'저 칼잡이의 심장을 뜯어먹고 싶구나! 크히히히!'
흥분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가 군침을 뚝뚝 흘리며 칼잡이에게 쇄도 했다.
채챙!
광학미채에 숨어 분명 보이지 않을 텐데도, 칼잡이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냈다.
손목에서 돋아난 쌍검이 튕겨 나간다. 뒤로 튕겨 나가는 몸을 양발로 교차해 하체에 무게를 싣고,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양팔을 쭉 내뻗었다.
회오리처럼 몸이 돌며 쌍검이 수평을 그렸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은밀하지만 섬뜩하게 들린다. 칼날은 그대로 칼잡이의 허리를 양단할 것처럼 짓쳐 들었다.
차차창!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내민 놈의 검에 쌍검이 부딪친다.
한 바퀴 반의 회전으로 세 번의 칼날이 부딪치고, 연이어 찔러가는 검을 단 두 걸음만 물러서며 회피한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광학미채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건가!?'
잭은 또다시 막힌 검격에 혀를 내둘렀다.
독아(毒牙)를 이식한 후 직접 사용한 건 몇 번 있었지만, 여기에 광학미채까지 사용한 건 처음이다.
대부분 독아의 엄청나게 빠른 공격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강한 독성에 무너지기 마련이었는데, 이 칼잡이는 심지어 보이지도 않을 텐데 모든 공격을 막아내다니?
'독설(毒舌)도 사용해야 하나?'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회심의 한 수.
보는 눈이 많을 이곳에서 사용하면 더 이상 회심의 한 수가 되긴 어렵겠지만, 이 이상 시간을 끌기엔 슬슬 부담되는 시간이었다.
그때 칼잡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게 네놈 재주의 끝이냐?"
"······뭐?"
"숨긴 게 있다면 더 보여봐라. 구경은 해줄 테니."
"이 새끼가!"
으드득!
잭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감히! 감히 내게 저렇게 오만하고 건방지게 말을 해? 미개하고 하찮은 칼잡이 주제에!
"더 없나? 그럼 슬슬 끝내지."
"이런 건방진 새끼!"
버럭 소리를 지른 잭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치켜든 양팔에서 독아의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
챙!
검과 칼이 맞부딪친다.
순간 번지르르하게 칼날을 타고 흐르는 푸른색 액체가 팡! 하고 터져나간다.
치이익!
독극물이 닿은 곳이 검은 연기와 함께 녹아내린다.
칼잡이의 검이 둥그렇게 호선을 그리더니, 잭의 양팔을 퍽하고 밀어냈다.
저절로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나는 잭.
칼잡이가 구멍 난 소맷단을 힐끗 바라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또 독극물인가? 정말 그게 끝인가 보군. 더 볼 것도 없으니 진짜 끝내야겠어."
"이 개새······!"
눈이 뒤집힌 잭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찰나.
"······!"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던 칼잡이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카캉!
본능적으로 들어 올린 양팔로 칼잡이의 묵직한 검격이 내리꽂힌다. 순간적으로 무릎이 굽혀질 정도의 충격량.
"크윽!"
온몸을 타고 흐르는 충격에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카각카각!
교차한 독아의 쌍검과 내리누르는 칼잡이의 검이 힘싸움하며 서로의 몸을 긁어댄다. 칼날이 비명을 지르며 날붙이가 갈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꽤 튼튼하군. 단순히 크롬 뼈로 만든 칼은 아닌 것 같은데."
"크학! 닥쳐!"
솟구치듯 몸을 일으킨 잭이 그대로 쌍검을 찔러넣었다. 마치 내가 무릎을 꿇은 이유는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라고 외치는듯했다.
하지만 칼잡이는 코앞까지 쇄도한 쌍검을 부드럽게 하나씩 쳐냈다. 직접 보면서도 하기 어려운 일을, 보이지도 않는데 해버린 거다.
칼잡이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얼마나 버티는지 보지."
팔이 튕겨 나가며 열린 가슴으로 이번엔 칼잡이의 검이 찔러져 왔다.
재빨리 팔을 회수해 검을 막았다.
차앙!
칼날이 부딪친다. 칼잡이의 검을 간신히 막았지만, 오히려 그걸 노렸다는 듯 자신의 짧은 칼날을 타고 칼잡이의 기다란 검날이 파고들었다.
"헛!"
기겁한 잭이 반대쪽 손으로 파고드는 검날의 중간을 쳐냈다. 뱀처럼 파고들던 검날이 빗겨났고, 잭은 간신히 뒤로 물러섰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잭은 칼잡이의 검날이 타고 올라왔던 오른팔을 바라봤다. 그새 놈의 칼날이 헤집어 가죽이 찢기고 내부의 근육과 뼈가 드러났다.
'대체 광학미채를 어떻게 꿰뚫어 보는 거야?'
처음엔 반신반의였지만, 이젠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보이지 않고서야 조금 전 공격은 절대 불가능하다. 저 칼잡이는 분명 광학미채를 꿰뚫어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고민도 잠시였다.
이만 끝내겠다는 말대로 칼잡이는 곧바로 다시 검을 찔러왔다.
차차차창!
칼잡이의 패턴이 바뀌었다.
거리를 좁혀 안으로 파고들려는 공격에서 이번엔 철저히 거리의 우위를 점한 채 정확히 칼의 첨단으로만 전신을 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속도가 점점 빠르고 거세졌다.
'크윽!'
속도에 자신이 있는 잭이었지만, 칼잡이가 휘두르는 검은 그 궤가 달랐다. 단순히 속도만 빠른 게 아니라, 그 모든 궤적이 철저하게 계산된 공격이었다.
하나를 막으면 바로 다른 공격으로 이어지고, 그걸 피하면 다른 곳의 허점을 노려왔다.
아무리 막아도 놈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살을 주고 뼈를 취하기엔 그 검격에 담긴 힘이 너무나 강했다. 자칫 살이 아니라 머리가 날아갈지도 몰랐다.
양팔이 뻐근했다. 대체 어떤 조화를 부린 건지, 속도도 따라갈 수 없었고, 힘으로도 밀어붙일 수 없었다.
'빌어먹을! 저놈 칼은 하난데 어째서!'
분명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분명하건만, 잭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사신은 절대 인간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다!'
채앵!
그때 내려찍는 칼잡이의 검을 양팔로 받아냈다. 쿵! 하고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량이 온몸을 찍어누른다.
'크으으아!'
양팔은 물론이고 온몸을 타고 흐르는 충격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순간.
파지직!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광학미채의 투명화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서로 마주치는 시선.
칼잡이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군?"
* * *
톨레도는 소울 시티 모닝 포스트(SCMP)의 기자다.
그는 최근 33구역과 그 주변 지역의 흉악범들과 갱단이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토벌되고 있다는 제보를 취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도시엔 바퀴벌레보다 많은 범죄자와 갱이 있었고, 하루에도 수백명씩 죽어 나가는 게 일상이었다.
조사할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 오늘도 힘없이 카페에서 카페인을 충전하는 도중,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
'사, 살인마 잭!'
톨레도는 잭을 보는 순간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 한때 취재에 열을 올렸던 흉악범 중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잭이라는 인물은, 흉악범을 숱하게 봐왔던 그조차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살인마였다.
식칼을 든 살인마. 잭 더 리퍼.
그가 남긴 범죄현장을 취재한 이후, 톨레도는 잭을 쫓는 걸 멈췄었다. 그 끔찍한 참상을 또다시 취재할 자신이 없었던 탓이다.
'쯧쯧. 그런데 어찌 저런 살인마와······!'
톨레도는 잭과 마주한 사내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하필 저 살인마와 척을 지다니. 오늘 또 끔찍한 범죄현장을 목격하겠구나!
하지만 안타까움은 안타까움.
톨레도는 기자였다. 그리고 기자는 특종이라면 영혼까지 내던질 각오가 된 종자들이다.
급하게 커피를 들이붓고, 부랴부랴 카페에서 튀어나갔다. 어느새 그의 손엔 큼지막한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키만큼 쌓인 쓰레기더미 뒤에 몸을 숨긴 톨레도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디 갔지?'
그 사이 잭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내 혼자서 허공에다가 칼춤을 추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의아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이내 칼날이 거세게 맞부딪친 소리와 함께 쿵! 하는 충격이 느껴졌다.
톨레도는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라보는 카메라 렌즈 너머로, 서서히 공간이 녹아내리며 잭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의 칼을 받아낸 듯한 모습.
'이건 특종이야! 특종이라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톨레도의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그가 다급히 모습을 드러낸 잭을 향해 줌을 당겼다.
한순간 커다랗게 확대된 잭의 얼굴.
흉측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톨레도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공포로 군림했던 살인마가 저런 몰골이라니!
그 순간.
'헉! 저게 뭐야?'
사내와 대화를 주고 받는 것 같던 잭의 입이 크게 찢어지며 그 안에서 뱀과 같은 무언가가 쏘아졌다.
* * *
"······감히!"
칼잡이의 비틀린 웃음을 본 순간, 잭은 눈이 뒤집혔다.
'네놈 머리에 구멍을 내고 뇌를 파먹어주마!'
찢어진 입에서 푸른색 혓바닥이 쏘아졌다. 한껏 당겨진 무언가가 쏘아지듯 번개같은 속도로 칼잡이의 얼굴로 쇄도한다.
그건 이미 혓바닥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으나, 튀어나온 그 순간 혓바닥은 송곳처럼 날카롭고 단단하게 변했다.
순간 표정이 굳은 칼잡이가 고개를 비틀더니, 쏘아진 혓바닥을 피해내고 그 혓바닥을 왼손으로 잡아챘다.
치이익!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다.
칼잡이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혓바닥과 잭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이 세계 놈들은 별 희한한 짓거리는 다 하는군."
마치 귀찮은 모기라도 본 것 같은 목소리다.
자신을 모기 취급하는 모습에 화가 날 법도 하건만, 잭은 오히려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멍청한 놈! 그걸 맨손으로 잡다니!"
단순히 산성독이 묻은 암기라면 회심의 한 수로 준비하지도 않았다.
독설이 혓바닥처럼 보여도 엄연히 사이버웨어다. 피륙 따위는 단번에 찢어발길 수 있는······!
"······커억! 컥컥!"
그 순간 혓바닥이 통째로 뽑혔다.
칼잡이가 피와 살점, 그리고 특수합금신경섬유와 전선다발이 덕지덕지 붙은 혓바닥을 쥔 채 말했다.
"이게 뭐?"
교차하는 꿈들 (7)
74화. 교차하는 꿈들
톨레도는 전원이 끊긴 로봇처럼 쓰러지는 잭을 보며 경악에 휩싸였다.
'저 흉악한 살인마를 맨손으로 죽이다니!'
바로 눈앞에서 모든 일이 벌어졌다. 그저 번쩍, 쿵!하면서 몇 번 칼을 휘두르더니, 나무에서 과일 따듯 잭의 혓바닥을 뽑아서 죽여버렸다.
톨레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특종! 아니, 이건 특특특! 특종이다!'
찰칵! 찰칵찰칵!
카메라가 은밀한 셔터소리를 내며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댔다.
그때 사내가 고개를 들더니 정확히 카메라 렌즈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흐, 허억!'
피와 살점, 그리고 전선 다발이 덕지덕지 붙은 혓바닥을 든 채 서늘한 눈빛을 번뜩인다.
톨레도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과 함께 턱을 덜덜 떨었다. 저 흉악한 살인마를 죽였을 정도라면, 자신쯤은 손가락만으로도 찢어 죽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어?'
뭐라고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사내가 손에 들린 혓바닥을 땅바닥에 버리곤 뒤돌아서 사라졌다. 거리엔 푸른색 피로 범벅이 된 잭의 시체만 버려져 있었다.
톨레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사내가 뭐라고 한 건지 곰곰이 기억을 되새겼다.
'귀찮은 일은 없겠군······ 이라고?'
이게 무슨 뜻이지? 이 사진으로 자신을 귀찮게 하면 죽이겠다는 뜻인가······?
그때 하늘에서 요란한 굉음과 함께 SCPD의 부유경찰차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그제야 톨레도는 사내의 말을 이해했다.
'증인과 영상이 있으니 SCPD가 자신을 귀찮게 하진 않을 거라는 뜻이었군!'
실적에 혈안이 된 SCPD라면 살인마 잭을 죽인 공로를 날름 집어삼키고 싶어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저 사내가 간과한 게 있다. 그건 바로 사진을 찍은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기자라는 거다.
'후후후······ 귀찮은 걸 싫어하는 모양이지만······ 이 도시를 위해선 저런 사내는 유명해져야 해!'
이 도시는 너무나 망가져 있었다. 강력범죄만 수십 년을 취재했던 톨레도는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부와 기업이 도시를 방치한다면, 이제 도시 스스로가 자생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사내의 등장은 소울 시티를 변화시키는 특이점 될 수도 있다.
'좋아. 어디 보자······ 어둠 속에서 악을 처단하는 칼잡이라?'
기사의 타이틀을 골똘히 생각하던 톨레도가 무릎을 탁치며 외쳤다.
"다크 나이트! 이게 좋겠군."
* * *
홀로그램 너머로 「소울이터」의 보안요원이 정중히 경고했다.
-레이디.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레드급 상황이니 절대 외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알았어요."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건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종종 벌어졌다.
하지만 레드급 상황이란 말에 그녀는 호기심이 생겼다. 여태껏 레드급 상황은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레드급 상황이라면 수백 명 단위로 맞붙은 전쟁이거나, 중화기 이상이 동원된 전투, 혹은 그에 준하는 상황이다.
아무리 30번대 구역의 치안이 떨어졌어도 거리에서 대놓고 전투를 벌이는 일은 없었다. 썩어서 부패했더라도 SCPD가 허수아비는 아니었으니까.
"대체 어떻게 싸워야 레드급이라는 거야?"
귀를 기울여봐도 폭탄이 터진다거나, 총탄이 빗발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히 이 근처라고 그랬는데 거리가 꽤 되는 걸까?
"안 되겠다. 확인을 해봐야겠어."
물론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로제가 태블릿을 조작하자 벽면에 붙어있던 책장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러자 작은 패널들이 수십 개가 붙은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꽤 오랜만이네."
처음 이곳에서 로세툼을 열었을 때, 혼자서 불안한 마음에 설치했던 CCTV 패널들이었다.
과거엔 하루에도 몇 번씩 CCTV를 확인했다. 인적이 드물어지는 저녁엔 수시로 체크했고, 뭔가 마음이 불안한 날에는 자기 전까지 확인하다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이 CCTV 패널을 열어보지 않았다.
'······그래. 현재 씨가 로세툼을 찾아오면서부터였지.'
왜인지는 그녀도 몰랐다. 그냥 어느 순간 불안해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지이잉.
CCTV 화면이 켜지고 로세툼 주변 거리의 상황이 하나씩 비춰진다. 화면 하나하나를 확인하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조용한데? 이 근처가 아닌가?"
그 순간 작은 CCTV 화면으로 희끗한 무언가가 지나간다. 카메라 앞으로 드론이 지나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런데 이어진 옆 화면에서 또다시 희끗한 무언가가 정신없이 움직이더니 사라졌고, 그 옆 화면에서 또다시 움직임이 이어졌다. 마치 귀신들이 날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제야 로제는 그 희끗한 움직임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무언가를 카메라 프레임이 쫓아가지 못해서 벌어진 현상임을 알아챘다.
"뭐, 뭐지? 드론? 아니, 안드로이든가?"
사람의 속도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빨랐다. 최소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멈춰 서기 전까진.
"어? 사람이다."
로제가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빠르게 멈춰선 두 명의 인물을 훑었다.
한 명은 양팔에서 칼날이 돋아난 사내였다. 그 해괴한 모습 때문에 사이버웨어를 착용한 사람인지, 아니면 안드로이든지 정확히 파악할 순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내는 그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아챌 수 있었다.
"······현재 씨?"
로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떤 미친놈들이 싸우는 건가 했더니, 강현재였다고?
하지만 강현재가 대체 왜?
코끝을 찡긋한 로제의 생각이 이어졌다. 해결사인 강현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과 싸우는 이유.
그건 단 하나뿐이었다.
"설마 가문에서?"
바로 콜레오넬 가문에서 보낸 암살자. 그녀의 오빠인 알리오의 성격이라면, 준비한 함정이 실패했을 경우까지 대비했을 가능성이 컸다.
"······내가 도와야 해!"
로제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안에서 낑낑대며 실버박스를 꺼내 가동시켰다. 순식간에 여행캐리어에서 촉수가 달린 전투로봇으로 변신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녀는 티 테이블 아래를 훑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옆이 튀어나왔다. 은밀한 공간이 열리고 잠시 그곳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길쭉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초경량 테크 샷건이다.
"후우! 좋아.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작게 떨리는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마피아 집안 출신답게 그녀 역시 어려서부터 사격술을 배웠다. 심지어 꽤 소질이 있기까지 했다. 한때 어린 마음에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적도 있었으니까.
그녀의 손이 빠르게 샷건을 훑었다. 위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샷건의 몸통에서 작은 불빛이 들어왔다.
철컥! 하며 탄창을 확인한 그녀가 은밀한 공간에서 남은 물건을 마저 꺼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문밖으로 나서려는 찰나.
딸랑딸랑!
언제나처럼 애처로운 종소리와 함께 로세툼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다름 아닌 강현재였다.
"······."
"······."
말없이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로제는 당황한 얼굴로 강현재를 살펴봤고, 강현재는 황당한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는 로제를 훑어봤다.
"······어디 은행이라도 털러 가나?"
강현재가 샷건을 들고 방탄조끼에 고글까지 착용한 그녀를 보며 물었다.
로제의 얼굴이 구겨졌다.
* * *
콜레오넬 저택.
가주 집무실 뒤쪽으로 난 커다란 창으로 떨어지는 태양이 길게 늘어졌다.
황혼으로 붉게 물든 실내에 알리오와 이자벨이 마주 앉았다. 갑자기 찾아온 그녀가 알리오에게 독대를 청한 탓이다.
이자벨이 느긋하게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의뢰 비용으로 지출이 꽤 크더군요."
"······."
그녀가 커피잔의 향만 맡고 다시 내려놨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알리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이자벨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다. 누가 봐도 푸근하고 자애로운 미소다.
"게다가 잭. 그에게 남은 마지막 의뢰까지 사용하셨다지요?"
순간, 무표정했던 알리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쪽은 질문을 던지고, 한쪽은 대답을 하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질문을 던진 이자벨이 불쾌할 법한 상황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이런 침묵이 더욱 기꺼운 듯 눈꼬리마저도 휘어지며 웃음을 지었다.
조금 더 침묵을 즐기던 이자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주. 그렇게 침묵을 지킬 게 아니라 설명이 필요합니다. 저도 그냥 넘어가고 싶지만, 잭. 그를 사용한 건 다른 문제잖아요?"
그녀의 추궁에 알리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살인마 잭은 가문 차원에서 시 정부와 흥정해 받아온 죄수였다.
아무리 가주에게 전권이 있다고 해도, 가문회의에서 꼬투리를 잡고 늘어진다면 그에 합당한 대답은 있어야 했다.
만약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가문회의에서 명분을 잃게 되고, 그 잃어버린 명분만큼 가주의 권위는 추락하게 된다.
가주의 권위는 곧 가문의 힘을 동원할 수 있는 역량과도 같다.
콜레오넬 가문은 권위를 잃은 가주를 절대 따르지 않는다.
"······로제 때문입니다."
천천히 눈을 뜬 알리오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녀 말대로 정보가 이미 센 이상 대응을 해야 했다. 그녀가 쥐고 흔드는 가문회의가 정말 물고 늘어지기라도 한다면 귀찮아질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로제를 다시 불러들이려 한다는 게 가문회의 늙은이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럼 전부 한발씩 걸치려 할 텐데,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걸 빌미로 어떤 요구를 할지 모르니 말이다.
"로제요?"
순간 이자벨의 얼굴에 놀람이 깃들었다.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름을 들은 얼굴이다.
"녀석이 바깥에서 중개인 사무소를 한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거길 망하게 해서 가문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습니다. 녀석도 겉돌 게 아니라 가문의 일원으로써 가문을 위해 일해야 하니까요."
알리오는 진실은 감추고 드러난 부분만 확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직 아버지의 흉수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다. 가문의 보안을 뚫고 아버지를 암살했다는 건, 높은 확률로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 가문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오직 한 명. 로제를 제외한다면.
"흐음~ 그래요? 그럼 제가 돕도록 하죠."
놀랐던 얼굴을 가다듬은 이자벨이 흥미가 생긴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말에 알리오가 미간을 꿈틀거렸다.
"······고모님께서 말입니까?"
"고모된 입장에서 조카가 가문으로 복귀하는 일에 당연히 손을 보태야죠?"
"······."
뭔가 꿍꿍이가 느껴지는 대답이다. 그렇게 조카를 생각하는 고모가 로제가 가문을 떠날 때 가장 적극적으로 자산동결에 앞장섰었나?
아니나 다를까 바로 본론이 이어진다.
"이참에 로제의 혼인 상대로 찾아보는 게 어떻습니까? 서두르면 일정에 맞춰서 보낼 수 있지 않겠어요?"
"······그건 제가 하는 거로 끝난 이야기입니다만?"
알리오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사실 알리오와 왓슨가의 정략혼 이야기가 나오기 전, 먼저 로제를 불러들여 정략혼을 시키자는 게 가문회의의 의견이었다. 마침 로제를 마음에 들어 하는 가문이 있다고 말이다.
문제는 정략혼 상대가 로제보다 30살 가까이 많다는 것과 그에게 로제보다 2살 많은 딸이 있다는 거였다.
그걸 직접 잠재운 게 알리오였다. 본인이 왓슨가와 정략혼을 선언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걸 다시 끄집어내겠다고?
"어머나, 우리 조카님? 그렇게 쫓아내고도 여동생을 끔찍이 아끼시는구나?"
이자벨은 알리오의 싸늘한 눈빛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뭐, 가주께서 싫다고 하니 별수 있나?"
싱긋 웃은 이자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리오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일어선 그녀를 말없이 쳐다봤다.
집무실 창밖 너머의 해는 어느새 저물었고, 스카이라인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마천루의 불빛들로 가득했다.
잠시 집무실 너머의 불빛들을 바라보던 이자벨이 밖으로 걸어나가며 말했다.
"그래도 도와줄게요.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진 몰라도, 괜히 사고 치면 가문에 피해만 되잖아?"
또각또각.
그녀가 남긴 마지막 대답과 함께 아찔한 하이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말없이 소파에 앉아 이자벨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노려보던 알리오가 작게 중얼거렸다.
"물었군."
* * *
이자벨이 돕겠다고 한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선한 의도 역시 아니었지만.
그녀가 힐끗 뒤를 돌아봤다.
이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에서도 가장 특별한 곳. 콜레오넬 가문을 넘어, 관계된 수많은 방계와 패밀리를 지배하는 심장.
콜레오넬 가주의 집무실.
'이참에 로제 고년도 치워야 해.'
자신의 아들이 저곳의 주인이 되려면 마일로의 핏줄은 없어져야 했다.
만약, 마일로의 핏줄이 전부 사라진다면 가장 가까운 직계는 바로 그녀가 될 터. 그럼 가문을 승계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거다. 그녀는 명분도 있고, 그녀를 돕는 조력자도 있으니까.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그녀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 이자벨이에요."
교차하는 꿈들 (8)
75화. 교차하는 꿈들
-사부인께선 무슨 일로?
단말기 너머로 중년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시 대답을 듣고 싶어서요."
-······어떤 걸 말씀이십니까?
잠시 머뭇거린 사내의 목소리에 작은 근심이 묻었다. 앞부분의 짧은 침묵엔 '혹시 무슨 일이 터졌나?' 하는 의문이 녹아 있었다.
"카터가 콜레오넬 가문을 지배할 때까지 지원하겠다는 거, 잊지 않으셨죠?"
이자벨의 말을 듣고 나서야 단말기 너머의 사내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물론입니다, 사부인. 그런데 카터가 나서기엔 아직 시기가 이르지 않습니까?
"마일로의 딸년을 치웠으면 해요."
-······흐음. 그건 곤란합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사내가 거절을 표현했다.
"왜죠?"
-사부인도 아시잖습니까? 아무리 콜레오넬이 찢어졌다지만, 가주의 핏줄을 노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긁어 부스럼 될 일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
사내의 말은 단호했고 그 이유 또한 타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내가 얘기했던 것처럼 이자벨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때를 기다렸던 거고.
그런데 왜 갑자기 일을 서두르려 하는 거지? 그러다 공든 탑이 무너지면 어쩌려고?
단말기 너머의 사내가 뒤에 덧붙인 '긁어 부스럼 될 일'이라는 게 바로 이런 의미였다.
하지만 이자벨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엔 다르니까.
"아니에요. 이번엔 달라요. 적당한 이유가 있거든요."
-······적당한 이유요?
사내의 목소리에 탐탁지 않아 하는 감정과 호기심이 혼재했다.
때를 기다려야 하는 건 맞지만, 이자벨의 말대로 적당한 이유가 있다면 못할 것도 없으니까.
다만, 그 이유가 얼마나 타당하고 그럴싸하게 포장되느냐인데······.
"사실 조금 전, 가주와 독대를 하면서······."
이자벨이 천천히 조금 전 집무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에 왜 그런 대화가 오갔고, 어떤 비하인드가 있는지까지.
마침내 모든 이야기를 들은 사내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처음에 가졌던 탐탁지 않은 감정은 사라졌다.
-그러니까 사고사로 위장하자 이 말씀입니까?
"맞아요! 그 정도로 강한 해결사와 부딪힌다면 '우연히' 사고사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어요?"
-흐음······.
고민을 하는 사내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이 계획에 끌리고 있는 거다.
이유도 타당했고, 포장하기도 편했다. 심지어 실패하는 과정에서 콜레오넬은 상대의 무력까지 확인한 상황.
이자벨의 말대로 그토록 강한 상대와 맞부딪치는 와중에 벌어진 사고사라면······ 설득력은 충분했다.
-괜찮은 방법 같습니다, 사부인. 그럼 제가 힘을 써보지요.
단말기 너머로 사내의 긍정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때 이자벨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상대가 꽤 강해요! 살인마 잭도 실패한 일이니까요. 어중간한 사람을 붙이는 것보다 확실한 사람을 붙여주세요."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게 아니다. 이번 일도 어쩌다 변수가 생겨서 만들어진 일이었지, 지난 반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 어디에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녀는 이번 기회로 반드시 얻고 싶었다.
조카딸의 죽음을.
-하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사부인.
사내가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마침 도시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전설을 한 명 알고 있으니까요.
* * *
한편, 잭과의 전투가 벌어진 이후, 업계에선 로세툼과 거대세력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다.
이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었다.
'설마 그 남자가 기자였을 줄이야.'
바로 소울 시티의 대형 언론사 중 하나인 SCMP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려버렸기 때문이다.
[싸이코패스 살인마 잭, 어둠 속에서 악을 처단하는 다크나이트의 손에 심판당하다!]
나는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 기사의 제목을 떠올리며 얼굴을 구겼다.
그래도 내가 무섭긴 한 모양이었는지 기사에 쓰인 사진엔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다. 사진 구도 역시 나보다는 잭의 시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물론 알만한 사람은 한눈에 알아볼 정도여서 큰 의미는 없었다.
덕분에 '소드마스터'에 이어서 '다크나이트'라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명이 또 하나 생겨버렸다.
'여기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또 터졌지.'
바로 살인마 잭의 악명이 생각보다 대단했다는 거다.
평소 뉴스와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조차 살인마 잭이 내 손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뉴스로 시작된 이야기는 입과 입을 타고 빠르게 퍼졌다.
문제는 사람들이 살인마 잭의 배후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였다.
한때 도시의 밤거리를 공포로 물들였던 살인마 잭이, 대낮에, 그것도 30번대 구역의 대로변에서 다크나이트와 싸웠다?
의혹은 그대로 소문이 됐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구체화됐다. 온갖 썰들이 달라붙으면서 산으로 가던 소문은 어느 순간 실체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최근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소문은 이랬다.
'살인마 잭을 동원할 정도로 거대한 세력이 다크나이트가 있는 로세툼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이지.'
이를 노리고 어중이떠중이들이 로세툼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판단이라면 살인마 잭을 죽일 정도로 강력한 해결사가 있는 로세툼을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하겠지만, 이 빌어먹을 세계는 이성보다 본능이 지배하는 사이버펑크 세계다.
그 정도로 거대한 세력과 맞붙었으니, 자신들도 한 손 거들어 털어먹을 수 있을 거라 여긴 거다.
물론 대부분은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소울이터> 선에서 정리됐다.
하지만 로세툼은 근본적으로 상가 건물에 있었기에 보안을 지키기 어려웠고, 거리의 유동인구도 많은 편이라 숨어드는 놈들을 전부 커버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세툼 자체의 보안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중개인 사무소였으니까.
그래서 로제는 결정했다.
이 건물 전체를 사버리기로.
* * *
"······이렇게 부자인 줄은 몰랐군?"
나는 한창 리모델링이 진행되는 상가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 높지 않은 5층짜리 건물이지만, 그래도 번화가에 가까운 상가 건물이다.
이걸 건물 보안이 문제라는 말을 듣자마자 통째로 사버리다니. 부잣집 아가씨인 줄은 알았지만, 대체 얼마나 부자라는 거야?
"······? 제가 가난해 보여요?"
나란히 건물을 올려다보던 로제가 코끝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리곤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본다.
어깨가 드러난 흰색 홀터넥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빨간색 플레어스커트. 종아리를 가리는 검정 반 스타킹과 애나멜 재질로 반짝이는 검은색 구두까지.
로세툼에선 드레스만 주로 입는 그녀가 오랜만에 캐쥬얼하게 입고 나왔다. 그녀의 외모 자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워낙 도도하고 이지적이기에 느낌이 색달랐다.
그런데 그녀의 질문이 이상했다.
"아니······ 이건 가난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가난한 것과 건물을 통째로 구매하는 건 전혀 연관성이 없다. 가난하지 않다고 누구나 건물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건 아니다.
"으음!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제 이름으로 된 재산이 좀 있어요. 풍족하진 않아도 불편하진 않게 살 수 있을 정도죠."
"······."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하는 로제의 말에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건물을 통째로 사는 게 풍족하지 않은 거면 대체 뭐가 풍족하단 거야? 도대체 어느 정도로 부자인데?
그때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진짜 당신 아파트에 머물러도 돼요? 불편하면 제가 호텔에서 지내도 되는데······."
로제가 힐끗 내 눈치를 본다.
로세툼이 있는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하면서 그곳에서 머물던 그녀도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처음엔 다른 곳에 집을 얻거나, 그것도 아니면 호텔에서 머무는 것도 검토했지만······.
"아니. 별로 좋은 생각 같진 않군."
호텔이 외부침입에 대해선 보안이 확실하지만, 해결사나 암살자들처럼 마음먹고 숨어들면 절대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콜레오넬 가문에서 로제를 노리진 않을 거다. 하지만 어중이떠중이들은 다르다. 소문이 돈 이상, 로세툼의 중개인 자격을 노리는 놈들은 로제를 노릴 가능성이 크다.
"그, 그럼 신세 좀 질게요."
내 단호한 대답에 로제가 움찔하더니, 이윽고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말했다.
"집이 크니까 불편하진 않을 거다. 필요한 물건은······ 네가 사도록."
······네가 더 부자인 거 같으니까.
물론 뒷말은 삼켰다.
* * *
"드, 들어갈게요?"
로제는 긴장으로 한껏 곤두선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강현재의 아파트에 들어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방문한 그녀였다. 심지어 그냥 방문도 아니라 이곳에서 당분간 '함께' 지내야 했다.
첫 방문과 동시에 시작된 첫 동거라니. 그것도 자신이 편하게 생각하는 첫 남자······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문턱을 넘어서던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난데없이 산으로 가는 생각의 꼬리를 잘라냈다.
앞에서 먼저 들어가던 강현재가 뒤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뭘 새삼스럽게. 당분간 지낼 곳이니까 그렇게 불편해하지 마."
"부, 불편하지 않은데요?"
홱 하고 고개를 든 로제가 뚜벅뚜벅 걸어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복층구조로 된 고급 아파트답게 층고가 높았고,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창문으론 도시의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하얀색 대리석이 깔린 거실엔 대형 소파만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다른 가구나 장식장 같은 물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깔끔하다 못해 휑한 느낌마저 드는 공간이다.
'이렇게 휑한 공간에서 산다고?'
로제가 고개를 돌려 강현재를 바라봤다.
마침 그는 반쯤 열린 창문의 커튼을 완전히 열며 그녀를 뒤돌아봤다. 그의 등 뒤로 저물기 시작한 태양 빛이 낙조를 그리며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붉게 음영진 강현재의 모습과 휑한 거실 공간이 겹쳐졌다.
그 모습이 꼭 이 커다란 공간에 홀로 버려진 채, 드리워진 그림자에 갇혀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녀처럼.
멍하니 강현재를 바라보던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외로워 보여."
"어? 뭐라고?"
갑자기 들려온 강현재의 목소리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 아니요! 야경이 멋지다고요!"
"야경?"
뒤를 돌아 떨어지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린 강현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야경이 멋질 것 같다고요! 봐요! 벌써 예쁘잖아요!"
"음. 그렇긴 하지. 여기가 야경이 또 죽여주거든. 이따가 보면 놀랄걸?"
"그, 그렇죠? 어······ 제 방은 어디에요?"
황급히 말을 돌린 로제의 반응이 이상하긴 했지만, 강현재는 이해하기로 했다.
남의 집에서. 그것도 남자 집에서 지낸다는 게 결코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내가 쓰는 방 빼고 아무 곳이나 써도 돼. 보여줄까?"
"네!"
그녀의 대답에 강현재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방을 정하고, 간단히 침구를 깔고, 저녁을 먹고 나니 밤이 깊었다.
* * *
"······."
이불을 목 끝까지 올린 채 침대에 누워있는 로제는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새벽 2시.
그녀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감고, 명상 음악을 듣고, 몸을 비틀어도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아직도 아까 강현재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느낌이 든 걸까?'
그녀가 아는 강현재는 강한 사람이다. 그건 무력을 뜻하기도 했지만, 사람 자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걸까?
'후우······ 답답해.'
그녀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바로 옆방이 강현재의 방이라 혹시나 깰까 조심스럽게 거실로 걸어 나왔다.
창밖엔 강현재가 자신 있어 하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과연 그의 말대로 화려하고 현란하게 반짝이는 불빛의 물결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불빛만 가득했던 창문에, 가깝게 반짝이는 커다란 불빛 두 개가 번뜩였다.
로제의 시선이 불빛과 마주친다.
그 순간, 두 개의 불빛 아래로 하얀색 호선이 그려졌다.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웃음이었다.
교차하는 꿈들 (9)
76화. 교차하는 꿈들
오래전 과거.
처절한 기업전쟁 끝에 살아남은 메가코프도 없고, 말솜씨보다 사격솜씨가 뛰어났던 정치인들만 살아남았던 그 시절.
소울 시티엔 도시 전설로 불리던 괴물들이 존재했다.
그들이 가진 능력은 각기 달랐다.
누군가는 암흑가를 공포에 떨게 한 암살자였고, 누군가는 맨손으로 안드로이드를 찢었다는 용병이었으며, 부질없는 정의를 위해 투쟁을 했던 형사도 있었고, 앉은 자리에서 도시 시스템을 붕괴시킬 수 있는 사이버러너도 있었다.
하나의 공통점도 없어 보이는 이들이 도시 전설로 불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개인의 능력이 하나의 세력보다 뛰어나다는 것.
그들은 모두 전장의 판세를 뒤집을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괴물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
17번 구역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의 외벽을 기어 내려가는 사내 또한 한때 도시 전설로 불렸던 괴물들 중 하나였다.
핏빛 크롬 갈기의 다론 에일러.
모종의 사건으로 은퇴한 이후, 20년 만에 도시로 돌아온 노회한 전설이었다.
'이 짓도 오랜만에 하니까 재밌군.'
다론은 마치 거미처럼 아파트 외벽을 타고 내려갔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둥그런 압착판이 매끈한 벽에 달라붙었다.
'좋아. 여기로군.'
그는 다시 한번 위치를 확인하고 들어갈 곳을 찾았다.
제거 대상이 나름 뛰어난 칼잡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고층 아파트 창문으로 침입할 거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을 거다.
'요즘 이름을 날리는 놈의 실력이 궁금하긴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역시 암살이지.'
그래야 귀찮은 뒤처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무엇보다 암살을 알아채지도 못하는 놈이라면 실력을 볼 필요도 없었다.
그 순간, 누군가 거실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벌써 알아차렸나?'
다론이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소리도 나지 않았을 테고, 왜곡 은신으로 카메라나 레이더도 피했을 텐데 어떻게?
그런데 거실로 나온 누군가가 걸음을 멈춰 서더니, 멍하니 바깥을 바라본다.
순간 구름에 가린 달빛이 길게 늘어지며 거실을 비췄다. 푸르도록 시린 백색의 월광이 여인을 감싸 안았다.
길게 늘어진 금발이 달빛에 물들어 하얗게 반짝였다. 잠옷으로 입은 하얀색 슬립이 은은하게 달빛을 반사했다.
마치 달의 여신이 강림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
다론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때 무언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한 여인의 눈동자가 다론을 향했다.
서로 오가는 시선.
그 순간 다론의 새빨간 시야로 여인의 얼굴이 확대됐다. 빠르게 스캔 되는 얼굴 위로 그녀의 인적정보가 나열된다.
[목표물 확인]
[대상: 로제 콜레오넬 –일치-]
[의뢰: 사고사 위장]
다론의 입꼬리가 쭉하고 찢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은색으로 빛나는 크롬 치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꺄악!"
여인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더니,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다론은 그대로 양팔을 내질렀다. 그의 주먹이 아파트의 강화유리를 뚫고 들어왔다.
와장창창! 하며 한쪽 벽을 대신하고 있던 강화유리가 박살 났다. 웬만한 소총탄도 뚫기는커녕 흠집조차 안 나는 강화유리건만, 그의 주먹 앞에선 과자처럼 부서졌다.
저벅저벅.
다론이 박살난 유리창을 통해 거실로 들어섰다.
어느새 비명을 질렀던 여인 앞엔 새까만 머리를 나풀거리는 사내가 가로막고 있었다.
다론의 시선이 사내를 향했다.
[목표물 확인]
[대상: 강현재 –일치-]
[의뢰: 제거]
'둘 다 찾았군.'
그것도 죽이기 좋게 함께 있지 않은가?
다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강현재의 얼굴은 구겨지다 못해 한껏 찌그러져 흉신악살과 같은 얼굴이 됐다.
신경질적으로 내뻗은 강현재의 손으로 거실 한쪽에 세워진 칼이 날아들었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를 잡아챈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너 이 새끼······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론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신비한 재주로군. 너도 각성잔가 뭔가 하는 놈이냐?"
"글쎄. 그것보다 네놈 목이 어떻게 떨어질지 궁금해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스르릉.
은색 칼날이 서늘한 예기를 토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달빛 덕분에 표면에 새겨진 파도 무늬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다론은 자신에게 거침없이 이를 드러내는 젊은 칼잡이를 보며 큭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젊음이란 좋지. 사랑 앞에선 불구덩이 속이라도 뛰어드니까. 하지만 그거 아나?"
"뭔 개소리냐?"
강현재가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다.
다론의 웃음이 진해졌다. 크롬으로 임플란트된 은색치아가 모조리 드러날 정도로 입꼬리가 찢어졌다.
잠시 후 벌어질 이 처량한 도시 커플의 처절한 절규를 상상하자니 벌써부터 흥분이 됐다.
"나같이 노회한 사람에게 젊은이의 사랑만큼 이용하기 쉬운 것도 없지."
그가 구부정한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2미터에 달하는 거구로 변한 그가 양팔에 힘을 줬다.
콰드득!
그의 양팔에 붙은 외피가 찢어지며 수백 개의 은색 칼날들이 튀어나왔다.
마치 크롬 사자의 갈기털처럼.
"어디 재주껏 지켜봐라."
다론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강현재에게 달려들었다.
* * *
나는 내 뒤에 몸을 숨긴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로제의 몸을 뒤로 살짝 밀치곤, 달려드는 놈을 마주했다.
카캉!
거대하게 덮쳐오는 놈의 주먹과 칼날이 맞부딪쳤다.
'크윽! 이 정도 힘을 낸다고?'
순간 칼끝으로 느껴지는 아찔한 반동에 하마터면 칼을 놓칠 뻔했다.
상대의 공격을 받으면서 이런 느낌을 받았던 건, 예전에 상대했던 우루사뿐이었다.
하지만 우루사는 곰이 각성한 각성종이었고, 놈은 사람이었다.
외관을 보아하니 신체개조를 극한으로 한 것 같긴 한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도 충격을 주다니?
"오호? 보기와 달리 힘이 꽤 좋군? 단숨에 곤죽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놈이 은빛 치아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그 여유가 언제까지 갈까?"
나 역시 놈을 향해 마주 웃어주면서 칼을 회전시켰다.
순식간에 칼끝이 반대쪽으로 움직이며 놈의 머리를 노렸다. 놈은 주먹을 들어 올려 간단히 칼끝을 튕겨냈다.
나는 튕겨 올라간 칼날의 중력을 잡아챘다. 칼끝이 허공에서 기다란 호선을 그리더니 이번엔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드가 올라가며 빈 허리를 노리는 허를 찌르는 공격.
하지만 놈은 익숙한 패턴이라는 듯 팔꿈치를 가슴께로 붙였다.
그 순간, 팔꿈치 끝으로 뾰족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캉!
칼날과 부딪치며 불꽃을 튀겨낸다. 튀어나온 것 역시 크롬으로 된 송곳날이었다.
"이런? 막혔네?"
능글맞은 목소리로 이죽거린 놈이 이번엔 먼저 달려들었다.
한껏 당긴 주먹을 내뻗는다. 놈의 바깥쪽으로 주먹을 회피하는데, 갑자기 팔꿈치가 튀어나오며 송곳날이 가슴을 노렸다.
나는 허리를 뒤로 접으며 송곳날을 피하고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놈!"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놈이 득달같이 몸을 날렸다.
양팔을 내민 놈의 몸통 박치기.
2미터에 육박하는 신체와 크롬으로 뒤덮인 양팔. 그리고 그 양팔에서 튀어나온 수백 개의 칼날까지.
공격을 허용하면 치명상으로 이어지는 공격이다.
하지만 나 역시 이 정도 변칙적인 공격은 항상 대비하고 있었다. 특히, 몸을 띄우는 결정을 할 땐 무조건이라 할 정도로 말이다.
나는 뒤집힌 시야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순간 체내를 휘돌던 포스가 칼끝으로 뭉텅 빠져나갔다.
교차한 놈의 양팔과 내가 내지른 칼끝이 정확하게 마주했다.
쾅!
마치 교통사고라도 난듯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먼저 공기가 터져나가더니 뒤이어 엄청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쩌저적! 쩡!
파바바박!
놈이 딛고 있는 대리석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천장에 매달린 전구가 터져나가며 전깃불을 토했고, 벽에 걸려있던 TV가 산산이 조각나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 반동을 이용해 멀찌감치 뒤로 떨어져 내렸다.
"······놈! 숨겨둔 재주가 있었구나!"
얼굴을 가로막고 있던 양팔을 천천히 내린 놈이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너야말로 그걸 버티다니. 평범한 인간은 아니로군?"
나는 놈의 등 뒤로 피어오르는 미세한 수증기를 쳐다봤다.
놈이 가진 무언가가 충격을 흡수한 모양인데······ 온몸을 관통하는 그 충격량을 흡수했다는 건, 놈이 외관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신체개조를 했단 걸 의미했다.
그때 뒤에서 로제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기억났어요! 저자! 다론 에일러에요! 핏빛 크롬 갈기의 학살자!"
"다론 에일러?"
나는 힐끗 로제의 위치를 파악하곤 다시 다론이라 추정되는 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놈이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이 모습만으로 나를 알아채다니. 핏덩이 같은 계집이 제법이구나."
"분명 은퇴한 지 20년도 넘었다고 들었는데······!"
로제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적당한 이유만 있다면 은퇴란 언제나 번복될 수 있는 거란다, 계집애야."
"대체 우릴 공격한 이유가 뭐죠?"
"해결사에게 이유를 묻는 거냐? 큭큭!"
"하지만 의뢰를 받을 수 없을 텐데요? 당신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요!"
나는 여전히 과장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로제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놈의 말대로 로제가 저런 걸 모르진 않을 텐데?'
다론 에일러가 정확히 어떤 놈인 줄은 몰라도, 해결사라는 존재가 어떤 종자들인지 그녀가 모를 리 없다.
그녀가 언급한 은퇴든, 블랙리스트든, 해결사는 의뢰인만 원한다면 언제든 의뢰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설마 시간을 끄는 건가?'
대체 왜?
그런 내 의혹은 바로 뒤이어진 다론의 말에 풀렸다.
"나를 알면서 블랙리스트 따위를 언급하는 거냐? 이 핏빛 크롬 갈기가 그깟 블랙리스······ 오호? 꽤 재미난 짓을 하는군?"
다론이 빨간색으로 빛나는 사이버아이를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외부와 통신은 되지 않는단다, 계집애야."
"어, 어떻게?"
이번엔 진짜 당황한 목소리로 로제가 중얼거렸다.
"해결사란 그저 깨부수고 죽이는 직업이 아니란다.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게 해결사지. 그런 의미에서 외부 변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놈이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외부와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나?'
굉장히 현명하고 그녀다운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외부와의 연락은 그리 바라지 않았다.
'저자의 능력을 봤을 때 보안팀이 온다고 해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만 되겠지.'
안 그래도 박살 난 집이 총탄으로 초토화되는 건 덤이고 말이다.
"로제. 무리하지 말고 몸을 숨기도록."
"하, 하지만 저자는······!"
"괜찮아."
"······!"
"저놈이 뭐하던 놈이었는지 그건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내 집에 무단침입해 나를 열 받게 했다는 거지."
나는 놈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냈다. 벌써 저놈이 해먹은 게 대리석 바닥과 TV. 유리창과 전구. 소파와 실내장식까지. 돈으로 환산하면 수천만 케이달러다.
없었던 살의도 들끓을 가격인데, 하물며 우리를 죽이겠다고 찾아온 놈이다.
보아하니 신체개조를 극한까지 한 모양인데, 뼈마디 하나하나 해체해서 돈 되는 부위는 모조리 빼다 팔아주마.
"알았어요!"
힘차게 대답한 로제가 재빨리 반대쪽 벽 끝까지 달려갔다.
나는 그와 동시에 놈에게 짓쳐들어갔다.
탐색전은 끝났다.
이제 본격적인 대결이다.
채앵!
칼날과 놈의 주먹이 맞부딪치며 불꽃이 튄다. 오른쪽을 베던 칼날이 순식간에 휘며 반대쪽을 향했다. 이번엔 반대쪽 팔꿈치가 튀어나와 칼날을 막는다.
그대로 달려들어 손잡이 끝에 달린 폼멜로 놈의 대가리를 찍었다.
탕!
한걸음 뒤로 물러난 놈이 손바닥을 들어 막았다. 그 순간 놈의 반대쪽 주먹이 내 옆구리를 향했다.
이번엔 내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눈앞으로 놈의 우락부락한 은색 팔뚝이 스쳐 지나갔다.
그 상태로 근접거리에서 공방전이 이어졌다. 칼날이 쇄도하면 놈이 막고, 역공하는 주먹을 나는 피했다.
서로 유효타는 내지 못한 채 빠른 공방이 쉼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도 알고, 놈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런 공격들은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에 불과하단 것을.
상대의 허를 찌르는, 치명적인 기회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쾅쾅!
"······!"
"······!"
나와 놈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쾅쾅!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
그건 누군가 문을 격하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누구지?'
의문은 짧았다.
쾅쾅! 콰드득!
또다시 문을 두드리던 정체불명의 인물이 강철로 만들어진 출입문을 통째로 뜯어버리고 들어왔으니까.
거뭇한 실루엣이 천천히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작은 체구의 실루엣이다.
절묘하게 달빛이 걸친 경계선에서 걸음을 멈춘 실루엣이 듣기만 해도 힘 빠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벽간 소음. 민폐."
교차하는 꿈들 (10)
77화. 교차하는 꿈들
다론은 갑자기 들이닥친 인물에 크게 당황한 상태였다.
'분명 외부 통신은 전부 끊겼을 텐데?'
조금 전 로제가 시도했던 외부 통신 역시 그가 옥상에 설치한 전파방해단말기로 인해 실패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외부에서 이리 빠르게 지원이 온 거지?
다론의 시선이 빠르게 강현재의 눈치를 살폈다. 함께 놀랐던 강현재는 이내 가까이 접근한 실루엣을 보고 누군지 눈치챈 모습이었다.
'아는 사이로군. 변수가 생겼어.'
다론이 얼굴을 구겼다. 이렇게 빠르게 조력자가 온 것도 모자라서, 심지어 그 조력자가 강철문을 맨손으로 찢고 들어올 정도의 강자였다.
이건 변수다. 그리고 그는 변수를 굉장히 싫어했다.
'어쩔 수 없군. 해치울 수 있는 것부터 하는 수밖에.'
다론은 우선순위를 수정하기로 했다.
원래 눈앞의 칼잡이를 죽이고, 그 칼잡이가 로제를 죽인 것처럼 꾸미려고 했었는데 그게 여의치 않게 됐다.
'그렇다면 먼저 죽일 수 있는 것부터 죽인다!'
우드득!
다론이 바닥에 손을 박아넣었다. 거칠게 손을 휘저은 그가 손을 다시 뽑았을 땐, 수박만 하게 조각난 콘크리트 바닥이 들려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강현재가 칼을 상단으로 가져오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빨간 눈을 번뜩인 다론의 목표는 강현재가 아니었다.
"네년 운명을 탓해라!"
쐐애애액!
다론이 힘차게 던진 콘크리트 조각이 바람을 찢는 파공성과 함께 로제에게 쇄도했다.
* * *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차리지 못한 로제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무언가 날아온다는 걸 느꼈을 때, 그녀는 죽음이 코앞에 닥쳤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녀가 힘없는 탄성을 내뱉었다.
아니, 정확히는 속으로 생각했다. 코앞까지 치달은 콘크리트 조각은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에 머리를 박살낼 기세로 쇄도했으니까.
'이대로 죽는 건가?'
로제는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죽음을 앞두면 삶의 파노라마가 스쳐 지나간다거나, 오래전에 죽은 가족이 보인다거나, 신을 마주한다거나 한다는데······ 그녀는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억울했다. 어차피 죽을 거면 보고 싶었던 장면이라도 보여줘야지,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건 너무 허무하잖아?
그 순간, 꺼져가던 삶에 대한 의지가 탁! 하고 켜졌다.
쾅!
푸스스스!
쇄도하던 콘크리트 조각이 무언가에 부딪히며 그 파편들이 가루처럼 부서졌다.
콘크리트 가루가 충격파에 휘날리며 로제가 있던 자리를 뿌옇게 뒤덮었다.
로제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고, 누군가 그녀 앞에 드리워져 있는 걸 느꼈다.
'현재 씨?'
고개를 든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눈앞에 누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야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의 시선보다 조금 더 아래에서, 귀찮음이 풀풀 풍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없는 약자를 공격하는 건 저질. 둘이 1:1해."
흠칫한 로제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먼지로 뿌연 시야로도 느껴지는 아담한 체구의······ 소녀?
'에이, 설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로제는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순간 바람이 휙하고 불며 먼지를 쓸어간다. 그러자 그녀의 앞을 당당히 가로막은 소녀의 뒷모습이 드러났다.
'······진짜네?'
간신히 턱 끝에 오는 똑단발과 푸르른 달빛에도 선명한 새빨간 머리. 허리가 훤히 드러나는 타이트한 탱크탑과 짧은 반바지.
쭉 뻗은 손은 사이버웨어인지 부분부분 은색 크롬으로 반짝였고, 싸늘하게 전방을 노려보는 눈빛은 푸른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텍스트로만 나열하면 굉장히 터프한 언니가 떠오를법했지만, 그 알맹이는 그녀보다도 머리 하나가 작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누, 누구······?"
"쉿!"
뒤를 돌아보며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가져가는 소녀의 모습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입을 다문 로제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전방을 향해 턱짓했다.
"이제 조용히 저들 싸움을 지켜보면 돼. 네 목소리는 방해될 거야."
로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가 가리킨 전방을 바라봤다.
그곳에선 어느새 다론과 강현재가 다시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둘의 격전이 이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분위기가 변했다.
특히, 강현재의 분위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