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간지옥(1) >
나판은 다시 군대가 접수했다.
그리하여 다시 정상화에 접어든 개척도시 나판.
권열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그의 사촌 형인 제국 의회 의원도 뉴서울 경찰에 검거됐고, 오아시스 길드원들도 구속되어 합빈 교도소로 이송됐다.
나판이 발칵 뒤집혔지만 그 배후에 태주가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오아시스 길드원들을 제압하면서 길드 사무실 안에서만 틀어박혀 있었고, 전화로 군단장을 불러들였으며, 권차열도 사무실 안에서 잡았다.
밖으로 돌아다닌 건 일이삼백이뿐.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되자 태주는 나판 바깥으로 나갔다.
"이제 가볼까?"
"냐앙!"
목적지는 가장 큰 초원 개척도시 바룬으로 잡았다.
차를 이용하면 금방이지만 일부러 빙 둘러 가기로 했다.
도시와 가까운 지역은 마수가 깨끗하게 토벌된 안전 구역, 녹색의 밀 경작지가 초원을 가득 덮고 있었다.
하지만 안전 구역에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도 상황은 달라진다.
농경지는 보이지 않았다.
마수들의 사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개척사단이 쓸고 간 지역에 남은 잔존 마수들.
하지만 엘리트 마수가 없어서 레이드팀에겐 비교적 편안한 마수 사냥터.
지금도 사냥이 활발하다.
마수를 잡아야 한다는 건 다 똑같지만, 목적은 조금식 다르다.
군대는 마수 섬멸이 목적이기에 부산물 생각 안 하고 마수를 갈가리 찢어발긴다. 그 와중에 쓸만한 부산물이 나오면 채취하긴 하지만.
민간 레이드 팀은 부산물이 목적이기에 될 수 있으면 온전하게 잡아서 돈 되는 것만 골라서 채취한다.
반면 태주는 독(毒)이 주요 목적이라 아무리 돈 되는 마수라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킁킁거리며 초원을 거닐다가 냄새가 나면.
"오! 독초구나."
정확한 명칭은 초원 독쑥.
지리산에선 보지 못하던 거였다.
'쌉쌀하네.'
이로써 독정에 독 하나 더 추가.
비록 약하지만 상관없다.
새로운 독이라는 게 중요하다.
다양한 독을 맛보고 마나 거부증 치료의 단서를 찾아야지.
한 무더기 채취해서 무한공간에 담고.
독쑥 말고도 다양한 독초들이 있었다.
맛보고 담고, 맛보고 담고···.
순간!
"캬악!"
어느 한쪽을 노려보며 하악질하는 삼백이.
"응?"
드드드득!
흔들리는 지표면.
불쑥, 불쑥, 불쑥···,
땅 밑에서 길죽한 나뭇가지 같은 것들이 쑥쑥 튀어나왔다.
'···더듬이?'
뭔지 알겠다.
"에이, 독물이 아니잖아."
단단한 갑각으로 무장한 변종 톱니 개미.
무리 지어 다니는지라 한번 나타나면 최소한 50마리는 함께 나온다.
독은 없다.
그러나 잡긴 잡아야지.
마침 연습하고 있는 암기술도 있고.
스슷!
양손에서 나타난 얇은 사혈침 한 무더기.
태주는 하늘 위로 흩뿌렸다.
휘리리리릿!
그러자 포물선을 그리며,
피핏, 피피피피피피피핏!
푸푹! 푸푸푸푸푸푸푸푹!
폭우침(暴雨針).
수많은 침을 하늘로 날려 비처럼 떨어지게 하는 광역 암기술.
변종 톱니 개미들이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버렸다.
후두두두두둑!
사혈침들이 다시 태주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쯧, 아직 완전하지 않아."
"니앙!"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섞어 만든 사혈침이었다.
하지만 이 많은 침에 하나하나 강기를 주입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
머리로는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는데 몸이 안 따라준다.
"연습하면 늘겠지."
"니아아아···,"
독령(毒靈)이 있었다면 수천 수만개의 암기에 강기를 형성하고 원하는 표적에 자동으로 암기를 이끌어줄 텐데.
태주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동 도중에 마수 사냥 레이드 팀들과도 마주쳤다.
"이봐! 보아하니 적합자 같은데 이곳은 각성자도 위험해. 고양이까지 데리고 말이야. ···우리 팀에 합류할래?"
"괜찮습니다."
"분배 때문에 그런거면 우리 팀 적합자들과 같은 대우를 해줄게."
"고맙지만···,"
좋은 사람들 같다.
그래서인지 헤어지면서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하나만 조심해. 눈앞이 이상하게 일그러진다 싶으면 당장 도망가라고, 보호색 암살 전갈이니까."
"네, 고맙습니다."
암살 전갈이 와주면 오히려 고맙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만나는 레이드 팀들마다 이런 제안을 해왔다.
적합자 혼자로는 너무 위험하다.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줄 테니 따라와라.
각성자가 아니어서 그런가?
만약 얼굴에 문양이 있었다면 조금 덜 성가셨을 텐데.
'만들어 보자.'
태주는 스마트폰을 꺼내 셀카 모드로 전환했다.
역용술은 얼굴의 형태를 변화시키지만 숙련되면 피부색을 바꿀 수도 있다.
'색깔은 무난한 검정색이 좋겠지?'
각성자 흉내를 내는 것.
의외로 불법 문양 시술을 하는 사람이 꽤 있다.
그들을 문양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스으윽!
태주의 얼굴 한쪽 피부색이 일부 변했다.
그리고 마술처럼 가짜 각성 문양이 나타났다.
"어때? 각성자처럼 보여?"
"냐앙."
"감쪽같다고?"
"냥!"
진작 이럴 걸 그랬다.
문양을 새김으로써 더 완벽해진 변장.
태주는 다시 일백이와 함께 초원을 걸었다.
도중에 독초를 캐고, 전갈이나 방울뱀도 잡아 독정에 독도 추가하고.
엘리트가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어느덧 어두워진 밤.
"여기서 조금 쉬었다가 갈까?"
"야옹."
무한공간에 들어가 있는 캠핑 장비를 꺼내 텐트를 설치했다.
의자와 테이블도 꺼내고, 모닥불도 피우고.
"좋지?"
"야아아아···,"
초원에서 보는 별은 남다르다.
쏟아질 듯 많은 별.
태주는 의자에 앉아 선도 하나를 꺼냈다.
으적으적.
공유창고를 넓히기 위해 최상품 선도와 신선주는 모두 먹고 마셔서 남아있는 건 하품 선도들.
"너희도 줄까?"
"냥! 야옹! 니앙!"
일이삼백이에게도 하나씩 던져줬다.
그러고 나서 공기계 스마트폰을 꺼내 동영상 하나를 실행했다.
반가운 얼굴이 영상에서 흘러나왔다.
- 이게 우리가 만들고 있는 멀티플렉스야.
7층 정도의 나무 건물과 독선 당군악의 모습.
- 덕분에 이 무료한 선계가 꿀잼 넘치는 공간으로 변화했네.
요즘 당군악과는 서로 편지로 교류하지 않는다.
공기계 스마트폰을 가지고 서로의 일상을 찍어서 보낸다.
하고 싶은 말도 이걸로.
다른 신선들의 모습도 보인다.
- 오! 이거 지금 나가는 거요? ···진짜? 험험, 바, 반갑소이다 태주 대협, 난 단주 선인인데 내가 그려준 부적은 잘 쓰고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드라마 보니 운동화가 있던데, 진짜 그거 신으면 발이 편하오?
- 어허! 단주 선인! 추접하게시리···,
운동화 콜.
- 태주 대협, 잘 있으시오? 난 잘 있소. 다음에 같이 치맥이나 합시다.
치킨 맥주도 더 준비하고.
검선도 보였다.
- 할?
- 미친! 여기서도 할리 바이크 타령인가?
- 할?
- 그만해!
"크크크!"
무슨 뜻인지 알 만하다.
검선이 할리 바이크를 받기 전에 찍은 영상 같았다.
아마 다음 배송 때 검선이 할리 바이크를 타고 선계를 질주하는 영상을 볼 수 있을 터.
태주도 몇 개 찍어놨다.
이왕 찍는 김에 일이삼백이 자랑도.
"제 반려동물 소개해 드릴게요."
렌즈 초점을 고양이에게 맞춘 후.
"일백아."
"냥?"
"거기 모닥불 옆에 서봐."
"냐앙!"
"다음 이백이."
"야앙!"
"삼백이 나와."
"니아아···,"
그리고,
"백호로 변신."
"캬르릉!"
이렇게 말 잘 듣는 놈을 어떻게 자랑하지 않을 수 있나.
"뒤로 가."
"카릉?"
"뒤로 쭉쭉, 더더더,"
적당한 거리가 되자.
"본체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쑤우우우우욱!
집채만큼 커지는 일이삼백이.
"크르르르르르르···,"
고비 초원 지대에 거대한 삼두백호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 ※ ※
선계(仙界)에서도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유흥과 쇼핑을 하나의 공간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선계 유일의 멀티플렉스가 드디어 완공됐다.
멀티플렉스를 운영할 직원들도 고용했다.
머리 좋은 귀곡 선인과 갈홍 선인,
당연히 수많은 신선들의 부러움을 샀다.
"나는?"
"아니, 신입 사원은 더 안 뽑는 거요?"
"인턴이라도···."
"주 168시간 개처럼 일하겠소. 휴가 따윈 없어도 되오."
하지만 귀곡과 갈홍만큼 일할 수 있는 신선들은 별로 없다.
지구로 비유하면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최고의 IT 개발자들.
그들이 만들어낸 선계 신용패가 발급되기 시작했다.
신선들은 당군악에게 선도를 내고 선도코인을 적립 받았다.
소문을 듣고 도화궁 서왕모와 선자들도 신용패를 받아갔다.
뿐인가?
천계 신장들도.
황천계 차사도.
그리하여 선도가 들어온다.
마구마구 들어온다.
오랜만에 당군악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그려졌다.
거기에 더해서.
찌르르르르,
머릿속에서 울리는 배송 신호!
'떴구나!'
기분이 좋다.
들어온 선도를 공유창고에 넣고, 공기계 스마트폰도 빼먹지 않았다.
검선과는 화해했다.
보검이 필요한데 어쩔 수 없지.
검선에게 사들인 보검 10자루도 같이 넣었다.
그리고 지구에서 배송된 물건 확인.
엄청나다.
물건이 더 많아졌다.
2층의 쇼핑공간이 모자랄 정도로.
지구의 대형마트 정도는 아니지만 편의점보다는 훨씬 컸다.
남은 건 완공식 행사.
오색 끈이 멀티플렉스 입구를 막고 있었다.
"자, 이제 테이프를 자르겠소이다."
당군악이 오색 끈을 자르자 사방에서 축포가 터졌다.
펑펑펑펑!
"만세!"
"독선 회장님 만세!"
"이제 영화 볼 수 있는 건가?"
"흐흐흐, 먼저 한잔하고 시작하자고."
"어이, 주선(酒仙) 바텐더, 여기 하이볼 한잔!"
"난 물건 좀 보고 오겠소."
모두들 주머니가 든든했다.
처음부터 부자였던 자들도, 가난했던 자들도.
멀티플렉스를 건설하면서 일꾼 신선들에게 월급을 지급해줬기 때문이다.
실물 화폐로 줄 필요가 없었다.
신용패에 선도코인 숫자로 적립해주면 되니까.
그리고 멀티플렉스 벽면에 붙은 광고판.
내용은 바로.
<요마계에서 채집 가능한 각종 독물, 좋은 가격에 매입합니다.>
무림계 신선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아마 곧 있으면 독물이나 요괴 시체를 들고 오겠지.
그 돈도 선도코인으로 찍어주면 되고.
아아!
선계 가상선도, 선도코인의 발행인.
선계 기축통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그가 바로 독선 당군악이었다.
"다들 들어오시오!"
우르르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신선들.
모두 7층으로 된 건물.
맨 꼭대기 7층은 당군악의 거처로 정했다.
4층, 5층, 6층은 영화와 드라마를 상영하는 공간.
영상물들은 거의 300년 전 지구에서 제작된 영화와 드라마, 예능 쇼프로.
태주가 과거 가장 찬란했던 지구의 문명을 보여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3층은 게임실.
할리를 타고 온 검선이 이미 패드를 잡고 게임을 시작했다.
1층은 주선의 칵테일바가 있는 휴식 공간.
여기서 신선들은 함께 모여 친교를 나눈다.
당군악은 주선에게 1층 공간을 임대로 줬다.
물론 선도를 받고.
2층은 쇼핑공간.
지구의 갖가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나?
선계 최고 부자 중 한 명인 서왕모가 선자들을 데리고 2층 쇼핑몰에 들어섰다.
"어머? 이, 이건 옷이구나. 구두도 있고."
쇼핑몰 VIP 고객, 서왕모를 따라다니는 당군악.
여성복 코너는 오직 그녀를 위한 것.
"모두 신상들이오. 지구에서도 최고급 물건들이고."
서왕모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범상치 않은 물건들.
이전에 당군악에게서 엘메스 백을 산 후, 서왕모는 옷과 가방을 깔맞춤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선계에서 만든 지구풍 옷들은 어쩔 수 없는 가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여긴 천국이었다.
"이것도 담아라, 이것도, 거기 그것도."
서왕모의 무자비한 쇼핑이 시작됐다.
당군악이 펌프질을 시작했다.
"역시 안목이 남다르시오."
"그래요?"
"지구에 서왕모와 같은 영혼이 존재한다면 아마 패션 디자이너일 거요."
"흐음, 나도 그쪽이 끌리긴 하지만."
"아니면 모델이거나, 딱 봐도 사이즈가 나오지 않소? 지구에도 서왕모 같은 자태의 여인들이 드물 거요."
"호호호, 독선도 참!"
부끄러운 듯 입을 가리며 한 손을 당군악의 어깨로 휘둘러오는 서왕모.
퍼억!
상당히 아프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바로 죽었을 터.
"그런데 이건 뭐죠?"
"···아, 이, 이건, 가슴가리개 같은 건데, 브래지어라고."
"응? 아하. 이 양쪽에다 가슴을 담아 모아준다는 거구나."
"바, 바로 그거요."
하지만 서왕모는 들고 있던 브래지어를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착용하면 옷태가 살아나긴 하겠지만···, 내겐 너무 작아요."
작다니?
C컵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해요. 구해주실 수 있죠?"
"어, 구, 구해보겠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E컵 이상을 구해달란 말.
확실히 서왕모답다.
이름에 왜 '모'자가 들어가는지 알겠다.
순간!
당군악의 시야에 들어온 한 사람.
'응?'
황천계에서 구경 나온 강림 차사였다.
마침 잘 됐다.
'그렇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당군악은 슬그머니 강림 차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서 오시오. 강림 차사."
"오! 독선, 덕분에 좋은 구경 합니다. 으리으리하군요."
"뭐라도 사지 그랬소?"
"흐흐, 선도가 없어서···, 신용패도 못 받았습니다. 전 그저 탁탑과 함께 영화나 한 편 보려고."
"내가 선도코인 1만 개로 채워서 신용패 발급해 드리리다."
"엉? 어째서?"
선도 하나가 100코인, 1만 코인이면 선도 100개의 가치.
그걸 아는 강림 차사이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공짜일 리는 없겠고, 대가가 있는 거겠지요?"
당군악은 강림 차사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있는 천마 놈과 한번 만나고 싶소이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는 강림 차사.
"허어, 절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오."
"잠깐이면 되오. 그저 몇 마디만 나누고 오면 그만이니."
"안된다니까 그러네, 대왕께 들키면 큰일 나오! 못 들은 걸로 하겠소."
당군악은 무한공간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그럼 신용패와 이 물건까지."
"응? 이건···?"
"만년필, 이렇게 잉크를 채워서 쓰는 거라 벼루와 먹, 붓이 필요 없지. 명부책 적을 때 요긴하게 쓰일 거요. 내가 여분의 잉크도 챙겨줄 테니."
"···으음."
강림 차사는 고민하고 있었다.
M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만년필은 정말 멋져보였다.
품격이 절절 흐르는 필기 도구.
"정말 안 되는데···,"
"한 자루 더 드리면?"
"하아,"
그리고 결정을 내린 듯.
"길게 시간을 끌면 절대 안 되오."
"내 맹세하지."
"아는 사람도 없어야 하고,"
"우리 둘만의 비밀이요."
"좋소. 만나게 해드리겠소. 그럼 언제?""
"승낙한 김에 바로 해치웁시다."
곧 천마와 만나게 될 당군악.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신선 대 무간지옥 죄수로서.
< 무간지옥(1) > 끝
ⓒ 꾸찌꾸찌
=======================================
< 무간지옥(2) >
마공은 보통 흡정 계열의 기공인 경우가 많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은 상대방의 정혈을 빨아들여 자신의 내공을 키우는 방식.
익히기 쉽고 성취가 빠르다.
남이 이룬 걸 쏙 빼먹는데, 얼마나 편한가?
성취가 느린 정파의 무공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마공의 특성.
처음 익히기엔 쉽지만 일정 단계에 오르면 정체되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내공을 쌓는 속도가 빠르지만 모래성처럼 불안정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폭주를 일으킨다.
조금만 어긋나도 주화입마.
마기에 잡아먹혀 미치광이가 되어버린다.
반면 마교 교주만이 익히는 천마 신공은 흡정 계열 마공이 가지는 단점을 보완해 정파의 신공절학과 비견할 만했다.
하지만 천마 신공도 본질은 결국 마공.
그리하여 천마가 폭주했다.
정파와 마교와의 최후 결전이 벌어진 십만대산에서 말이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거대한 회색빛 반투명 장막이 마교 본단 전체에 씌워졌다.
그 안에서 휘몰아치는 마기의 폭풍.
장막에 존재하는 모든 무인이 미라처럼 바짝 말라갔다.
천마의 발걸음에 따라 장막도 함께 움직였다.
정파 무인, 마교도, 가릴 것이 없었다.
모조리 천마에게 내공을 갈취당하고 있었다.
그 흡기의 장막 안에 당군악도 있었다.
그도 독정(毒精)의 독기를 천마에게 거의 다 빨려버렸다.
10성 대성한 독공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군악아, 당군악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나. 네가 이렇게 먹이들을 이끌고 와줘서 내가 천마 신공을 대성했어."
"이런 개새끼가···,"
"진작에 다 먹어 치울 걸 그랬구나. 크하하하하! 좋구나! 너무 좋아."
천마가 먹어 치운 자들 중 놈의 아내와 자식도 있었다.
제 자식마저 잡아먹는 괴물.
뿐인가?
천마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며 충성을 다 바쳤던 충직한 신하들까지.
놈은 완전히 미쳐버렸다.
빨아들인 내공으로 온몸이 부풀었다가 다시 가라앉고, 또 부풀었다가 원래대로 돌아가고.
벌써 몇 번의 환골탈태.
놈은 인간이 아니다.
악마였다.
마귀였다.
뭐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암기는 천마에게 가까이 가기도 전에 바스러졌고, 당군악이 자신해 마지않았던 독도 통하지 않았다.
천마 신공의 대성.
비록 광인이 되었지만 놈의 육체는 멀쩡했다.
그 많은 종류의 내공을 빨아들이고도 말이다.
"난 마신이 될 것이다!"
"지랄하지 마! 누가 그렇게 놔둔다더냐?"
"킬킬킬, 어디 몸부림쳐 보아라. 가련한 독충아!"
절망적이었다.
마교 본단은 발 디딜 틈 없이 시체로 가득 찼다.
데리고 온 가솔들과 지인들을 피신시키지 않았다면 그들도 이런 신세가 되었겠지.
당군악의 육신이 미라처럼 빠짝 말라갔다.
흡정의 장막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아아아···,"
눈앞이 희미해졌다.
천마에게 죽어간 당가의 가족들을 위해 복수를 다짐하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젠 지쳤다.
'···그래, 여기까지구나.'
죽음이 두려울까?
그저 못다 한 복수가 아쉬울 뿐.
'할 만큼 했어. 좀 쉬자.'
그때였다.
꿈틀!
독정이 움직였다.
'···응?'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진 독정이었다.
그런데 움직이다니.
'착각인가?'
꿈틀, 꿈틀!
'아!'
착각이 아니다.
찌이이이이잉!
독정이 연신 반응했다.
그리고,
파바바바바바바밧!
대폭발을 이루었다.
"끄윽!"
단전에서 느껴지는 독정 폭발의 충격.
왜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혹시 천지신명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건가?
독정이 부서졌다.
동시에 합쳐졌다.
꿈틀! 꿈틀! 꿈틀! 꿈틀···,
또 요동을 치다가.
파바바바바밧!
대폭발.
그때마다 전신으로 치달아 흐르는 충만한 독기.
독정이 폭발할 때 정수리도 뻥! 하고 터졌다.
쓰러져 널브러져 있던 당군악이 벌떡 일어났다.
기운의 소통.
하늘의 기운이 정수리를 통해 흘러들어와 발바닥을 통해 땅속으로 흐른다.
독정이 살아 숨 쉰다.
마치 자아를 가진 것처럼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게다가 느껴지는 신령한 기운.
'독정이 변했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독령?'
여전히 몰아치는 마기.
마기가 독정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분해되고 해석됐다.
당군악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스스스스스스!
마교의 본단, 십만대산.
시체와 함께 흩어져있는 온갖 종류의 무기들.
당군악의 손짓에 따라 쇠로 만든 날붙이들이 허공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쑤수쑥! 쑤수수수수수숙!
"음? 너···,"
천마가 놀란 눈으로 당군악을 바라보다가 뭔가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뭐지? 먹구름인가?'
하지만 구름이 아니었다.
죄다 무기들이었다.
검, 창, 칼, 도끼, 단검, 표창, 침, 비도···,
너무나 많아서 구름처럼 보일 정도.
"대체?"
순간!
콰콰콰콰콰콰콰콰!
그 무기들이 마치 폭포처럼 천마를 향해 쏟아졌다.
천마의 호신강기에 부딪히는 쇠붙이들.
파사사사사사사삿!
닿자마자 산산이 부서졌다.
"흐흐흐, 어림도 없다. 내 몸에 상처나 낼 수 있을 것 같더냐?"
그러나 떨어지는 쇠붙이들은 끝이 없었다.
심지어 부서진 무기의 금속 조각들도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
떨어졌다, 부서지고, 부서진 것은 다시 올라갔다가 떨어지고, 또 부서지고.
부서지면 부서진 대로, 조각이 나면 조각이 난 대로, 가루가 되면 가루가 되어서, 용오름처럼 솟았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남은 건 금속의 작디작은 조각들.
극독을 머금은 쇳가루.
비가 내렸다.
후두두두두둑!
그 작은 쇳가루 하나하나마다 강기가 입혀졌다.
강기가 입혀지니 은색의 꽃처럼 피어난다.
만천화우(滿天花雨).
그제야 천마의 안색이 변했다.
"이, 이런!"
강기의 폭우.
심상치 않다.
피피피피피피핏!
천마가 펼친 흡정의 장막이 부서졌다.
호신강기도 갈라졌다.
찌직! 찌지직!
그 틈으로 무수한 쇳가루 강기 꽃비가 내렸다.
피피피피피피핏!
강기의 비가 천마의 몸에 닿자마자.
치익! 치이이이익!
살갗을 파고 들어가 녹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마침내 천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을 들어 막으려고 했지만 그게 막아질까?
팔뚝부터 녹기 시작했다.
만독불침도 저항이 불가능한 독령(毒靈)의 독.
얼음이 녹듯 흘러내렸다.
팔이 녹아버리고, 몸통이 녹았으며 마침내 머리도 녹았다.
그게 독선 당군악이 기억하는 천마의 최후였다.
※ ※ ※
황천계의 지옥 중, 가장 극악한 곳이 바로 무간지옥.
이곳에 한 번 갇히게 되면 절대 탈출할 수 없다.
그래서 바닥이 없는 구덩이, 무저갱이라고도 물린다.
물리적 공간이지만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무한공간처럼 차원과 차원이 분리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 즉, 게이트를 통해 출입할 수 있다.
지이이잉!
강림 차사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능을 사용해 무간지옥의 문을 열었다.
"이리로 들어가면 되오."
불이 붙은 초 하나를 당군악에게 건네주며,
"여기 이 초를 받으시오. 이 초가 다 타기 전에 나와야 하오. 아니면 아무리 신선이라도 그곳에 갇혀버릴 테니까."
"알았소."
당군악은 게이트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물었다.
"천마는···, 형체가 있는 거요? 예전 모습 그대로인가?"
"형체야 있지. 고통을 주려면 육신이 필요해서, 하지만 그대가 알던 그 천마의 모습은 아닐 거요. 만들어진 몸에 갇혀있거든."
"그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들어가면 초가 해결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다음에 만나면 치맥이나 한잔합시다."
"치맥? 그게 뭐요"
"그런 게 있소."
당군악은 무간지옥 안으로 들어갔다.
스우웅!
컴컴한 어둠.
오직 빛을 발하는 것은 당군악이 들고 있는 한 개의 초.
촛불이 무간지옥의 영향에서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앞쪽으로 길이 보인다.
이쪽저쪽으로 뻗은 3개의 갈림길.
촛불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왼쪽으로 가란 말이군.'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오른쪽,
가만히 있으면 중앙.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막다른 길에서 기괴하게 움직이는 생명체 하나를 발견했다.
알몸의 비쩍 마른 몸뚱이, 몸엔 털이 하나도 없었다.
"히이익!"
촛불을 가까이 가져가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피하는 괴인.
"···천마?"
멈칫!
움직임을 멈추고 당군악을 바라보는 괴인.
"당군악···,"
"그래, 나다."
천마가 맞았다.
비록 만들어진 육신에 갇혀있지만.
놈은 한동안 말없이 당군악의 모습을 뚫어지라 관찰했다.
"···설마 너, 드, 등선했나?"
"맞다. 선계에 올라 독선이란 선명을 받았다."
"흐흐, 흐으으으으흐흐, 히히히히힉!"
기괴한 음성을 흘리는 천마.
"흐흐흐, 신선이라, 미치겠군. 너무 불공평해."
"뭐가?"
"무간지옥보다 신선이 된 널 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워."
당군악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불공평? 이보다 공정한 것이 어디 있나? 더러운 미치광이 살인마 새끼야!"
"그러는 넌? 나보다 더 많이 죽였잖아. 그런데 왜 넌 신선이고 난 무간지옥이지?"
"글쎄, 뭔가 법칙이라도 있는가 보지."
"···."
잠시 흐르는 침묵.
"이곳에 온 이유는? 날 비웃으려고 왔나?"
"그냥, 네가 무간지옥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잘 있는지 보러 온 거야."
"소감은?"
"무척 잘 지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군. 계속 와서 보고 싶을 정도로."
놈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이 얼마나 짜릿한 순간인가.
더 일찍 올 걸 그랬다.
"신선 주제에 잘도 돌아다니는구나."
"원래 신선이 그래, 놀고먹는 직업이라서,"
"그래 보여. 헌데 지금 몇 시인가?"
"시간? 무간지옥에서도 시간이라는 게 있나?"
"네 손목시계에 표시된 시간 말이다."
"···뭐?"
이게 무슨 소리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당군악은 깜짝 놀랐다.
"롤렉스로군. 비싸다던데, 저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아···,"
대체?
천마 놈이 롤렉스를 무슨 수로 알아?
'선계의 일이 무간지옥까지 전달된 건가?'
황천계 차사도 알고 있으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당군악, 너도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과 만났구나. 지구 말이야."
"···."
천마의 입에서 나온 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
그리고 지구.
"···너도?"
"그래, 나도, 그리고 너도,"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천마에게도 일어났다는 말이다.
"어, 언제?"
"꽤 됐다."
"···어째서 네가?"
"난들 아나? 너도 경험했으니 잘 알 거 아닌가. 막을 수도 없이 영혼과 영혼이 서로 연결되어버리는데."
"···."
"게다가 무려 두 번씩이나 마주했어. 참으로 엿 같더군."
이게 말이나 돼?
천마도 자신과 같은 영혼을 만났다니.
"신기한 세상이긴 했다. 비행기와 기차, 총과 미사일, 세상을 파멸시키는 핵무기, 게다가 시스템이라니, 끌끌끌."
확실하다.
다 알고 있었다.
"더 웃기는 건 뭔지 아나? 맙소사! 마기까지 존재할 줄 누가 알았겠나? 마인도 있었어. 비록 원시적인 방법으로 흡정을 하지만."
지구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
영혼과 영혼이 합일을 이루었다는 의미.
그렇다면?
"그자도 너의 모든 걸 다 가져갔나?"
"천마 신공 말인가? 당연히 가지고 갔지. 모든 마교의 무공도 함께."
큰일이다.
지구에도 천마 같은 놈이 탄생했다.
아니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천마와 자신뿐일까?
비슷한 경우가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진짜 내가 궁금한 것이 뭔질 아나? 너도 나와 같은 경우라는 건 이해하겠는데, 대체 손목의 그 시계는 어떻게 된 거지? 그쪽의 물건을 가지고 올 수도 있다는 말인가?"
이걸 말해줘야 해?
어림도 없다.
"술법으로 만든 거다."
"낄낄낄, 웃기지 마라. 어설픈 거짓말은 집어치워."
시계를 빼놓고 올 걸 그랬나?
아무튼 태주에게 경고할 준비를 해야 한다.
지구에 천마와 같은 영혼이 있다고.
"말해봐. 어떤 식이지? 물건이 무슨 수로 넘어온단 말이냐?"
"닥쳐라! 볼일 다 봤으니 그만 가겠다. 넌 이 안에서 영원히 썩어 문드러지길 바란다. 난 선계에서 노닐다가, 심심해지면 또 찾아오지."
아직 초가 다 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당군악은 미련 없이 뒤로 돌았다.
"잠깐! 당군악! 조금만 시간을 더 내다오."
"···왜?"
"부탁이 있다."
"우리가 서로 부탁을 들어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아니라 다른 세상의 너에게 하는 부탁이야."
"무슨?"
이 새끼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그에게 전해라. 지구의 천마를 반드시 죽여버리라고,"
"···왜?"
"흐흐흐, 천마가 둘이라니,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천마는 이를 부드득 갈며 말을 이었다.
"같은 영혼과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기분이 더러운 줄 알아? 악몽과도 같은 거야. 무간지옥보다 더 끔찍해. 넌 안 그런가?"
"···."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놈도 나하고 똑같아. 나를 조롱하더군. 천마란 놈이 그깟 암기와 독술에 당해 뒈졌냐면서, 그러더니 진정한 천마는 자기라나?"
똑같은 놈들이다.
같은 영혼끼리 서로 비난하고 조롱하다니.
"이 무저갱에서 두 번의 영혼 연결이 이루어졌어. 그때마다 날 비웃었지."
마치 짐승처럼 네발로 기어 당군악에게 다가오는 천마.
"놈에 대한 모든 걸 알려주겠다. 그놈을 무조건 죽이라고 해. 천마는 하나로 족하다!"
정말이지 예상치도 못한 천마의 태도.
당군악은 처음 태주와 영혼이 연결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자신과 같은 영혼이 다른 세상에 있다는 건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고, 엄청 반가웠으며, 또 흐뭇했다.
그래서 뭐라도 주고 싶었다.
그저 잘 되길 바라는 마음.
그건 태주도 똑같았다.
"다른 세상의 널 만났을 때 반갑지 않았나?"
"크크크, 반갑기는 개뿔, 소름이 끼쳐 닭살이 올라올 정도였어. 눈앞에 있었으면 먹어 치웠을 거다. 그 개자식이 내 머릿속에 있는 걸 다 가져간 것도 분통이 터져 죽겠는데."
상상이 간다.
두 놈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 벌어졌을 상황이.
지독한 자기혐오.
누워서 침 뱉기.
서로를 증오하는 같은 영혼.
진짜 웃기는 놈들이다.
"그럼 읊어봐. 너와 같은 지구의 영혼이 누군지, 어디 사는지,"
"킬킬킬, 서둘러야 할 거다. 만약 또 한 번의 영혼 연결이 이루어지면 저쪽도 오늘 이 만남을 알아차릴 테니까."
< 무간지옥(2) > 끝
ⓒ 꾸찌꾸찌
=======================================
< 각인된 공포(1) >
초원에 가장 많이 분포된 독(毒) 마수는 전갈과 방울뱀 종류다.
특히 전갈이 가장 많다.
독겨자씨 전갈, 거대 맹독 철갑 전갈, 짧은 꼬리 톡톡이 전갈, 보호색 암살 전갈···,
작디작은 독겨자씨 전갈은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먹잇감을 유혹한다.
구덩이에 뭔가가 빠지면 수천 마리의 독겨자씨 전갈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독침을 찔러댄다.
태주는 속옷만 입고 일부러 그 구덩이에 빠졌다.
전신을 뒤덮은 노란 겨자색의 작은 깨알.
"어이쿠, 시원하다."
전갈 목욕이라고나 할까.
초원에서 맞이하는 힐링 같은 거.
이로써 독정에 독 하나 추가.
거대 맹독 철갑 전갈은 독침이 너무나 커서 직접 찔리는 것보다 꼬리를 잘라서 간접적으로 혈관에 박았다.
독정에 독 추가.
짧은 꼬리 톡톡이 전갈 또한 무리 생활을 한다.
저 앞에서 벼룩처럼 톡톡 튀어 올라 목표물을 공격하는 식이다.
이놈들은 암기로 잡아서 나중에 독 채취.
태주는 폭우침(暴雨針)으로 톡톡히 전갈을 쓸어버렸다.
피피피피피피핏!
푸푸푸푸푸푸푹!
제법 숙련이 되었다.
이젠 침 하나하나에 강기를 입히는 것이 가능해졌다.
남은 건 사혈침 숫자를 늘려나가는 것.
태주가 익히고 있는 암기술, 비폭일섬, 폭우침, 혈접, 그리고 암기 회수 기술 등은 모두 만천화우(滿天花雨)로 가는 사전 단계다.
특히 폭우침의 숙련이 중요하다.
제대로 숙련한 폭우침은 만천화우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
짝퉁 만천화우(滿天花雨)라고나 할까?
어쨌든 비슷하게나마 '비'가 내리듯 하늘에서 떨어지는 암기술이니까.
천마도 만천화우에 죽었다.
강기와 독기가 입혀진 암기의 꽃에 의해 녹아서 죽었다.
'이것만 익혀도···,'
걱정할 일이 없을 텐데.
설사 천마가 지구에 현신한다고 해도 말이다.
아무튼 짧은 꼬리 톡톡이 전갈 독도 추가.
보호색 암살 전갈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캬악!"
일이삼백이가 특정한 방향으로 꼬리를 세우며 경고하면,
덥석!
손으로 잡아서 독 추가.
보호색이라도 완전히 투명한 건 아니니까.
일이삼백이의 역할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초원을 여행하다 잠시 쉴 참이면 어디론가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면서,
툭! 하고 태주의 발 앞에 크고 길다란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변종 칠흑 방울뱀 한 마리였다.
"네가 잡았어?"
"냐앙,"
고양이의 보은인가?
덕분에 독 추가.
그러던 중 삼목 송골매도 만났다.
3개의 눈을 가진 공중 비행 마수.
독은 없지만 조심성이 많은 놈이라 다수로 움직이는 레이드팀에겐 접근하진 않는다.
태주처럼 홀로 다니는 사람이나 마수를 노리고 사냥하는 습성을 가진 놈.
쐐애애액!
하늘에서 태주의 머리를 노리고 하강하는 삼목 송골매.
"오!"
산 채로 잡으면 비싸다는 그 마수.
특히 암컷이면 부르는 게 값이다.
"···잡아서 키워봐?"
멈칫!
앞발로 연신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던 일백이가 태주의 말에 반응했다.
순간!
"크릉!"
파슛!
백호로 변한 일이삼백이가 공중으로 도약해 부리를 번뜩이며 내려오는 삼목 송골매를 잡아챘다.
까드드득!
뜯겨나가는 삼목 송골매의 머리.
"크르르르릉!"
그러고는 다시 고양이 이백이로 돌아와.
"야아앙."
태주에게 아양을 떨었다.
"···너만 키우라고?"
"야앙!"
"경쟁자는 용납 못 하겠다는 거냐?"
"앙?"
"앞으로 일주일간 선도 금지."
"···야아, 야아아옹."
"알았어. 취소할게."
"양!"
그렇게 며칠을 초원에서 생활했다.
많은 독을 추가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독정은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노란 겨자씨 전갈의 독물에서 마나 거부증 치료의 단서를 발견한 것 같기도 했다.
태주는 바룬시로 방향을 잡았다.
빨리 도시에 입성해야지.
개척도시 바룬은 고비 초원에서 가장 큰 도시, 저 멀리 보이는 수많은 고층 빌딩들, 구례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도시 운영도 군이 아니라 제국에서 직접 파견한 시장과 공무원이 담당하고 있었다.
'먼저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겠어.'
태주는 아침 일찍 바룬으로 들어갔다.
도시로 통하는 검문소가 태주의 앞을 막았다.
나판에는 이런 것도 없었는데.
태주는 즉시 머리를 숙이고 얼굴에 가짜로 그려둔 각성 문양을 지웠다.
현재 가지고 있는 신분증엔 각성자가 아닌 적합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짜 신분인 김군악으로 체크인하면 된다.
순간!
일백이가 품에서 코를 킁킁 거리며 나왔다.
"냐앙?"
"쉿! 나도 알고 있어."
태주는 검문소 앞에 섰다.
신분증을 내밀고.
"김군악씨? 바룬시에 오신 목적이···,"
"초원에서 사냥하다가 잠시 쉬려고 왔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편안한 관광 되시길 바랍니다."
바룬은 대체 어떤 도시일까?
검문소에서부터 마인을 만나다니.
마기의 악취는 검문소 공무원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각성자도 아니야.'
진마가 분명하다.
가슴에 단 명찰의 이름은 네르헉.
아마 몽골계인 듯 하고.
뜻하지 않은 소득이었지만 그러나 여기서 저 마인을 잡는 건 무리였다.
진마라면 금제에 걸려있을 가능성이 크다.
핸들러처럼 심문하다가 죽으면 어떡하나?
차라리 조용히 미행하는 것이 더 좋다.
마인 조직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 한 번에 소탕하자.
※ ※ ※
바룬시 외곽의 작은 밀 농장.
회(會)의 본부로 사용하는 장소.
부회주는 식량 창고 안으로 들어기 전에 목에 걸고 있었던 안면 변형 마법 아이템을 해제했다.
스르르륵.
그러자 드러나는 본 모습.
아랍계로 보이는 외모였다.
부회주의 본명은 하미르 자말.
지금은 사라진 시리아라는 국가 출신이다.
사실 200년 전에도 시리아는 거의 망해가고 있었다.
마나의 침략으로 가속화됐고.
자말은 200년 전에 이미 각성했다.
초기 각성자였다.
그러다 등급업 과정에서 마인으로 재탄생했다.
초기 각성 마인으로서 자부심이 있었다.
따르는 자들도 많았고 모아놓은 재산도 어마어마했다.
회주를 만나 들키기 전까지는.
지금은 빈털터리로, 금제를 당해 이 작은 농장에 묶인 신세.
회주.
이름도 모른다.
진정한 얼굴도 알 수가 없다.
마인의 마기를 지배하는 상위 계급의 마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만 알 뿐.
부회주 자말은 회주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그가 지시하는 사항은 무조건 따라야만 한다.
몇 년 전 황제를 습격한 것도 회주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후우,'
자말은 창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부터 했다.
회주가 중국땅 수련 행보를 끝내고 바룬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에게 핸들러 건을 보고해야 한다.
삐걱,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은 후.
"회주시여! 당신의 충복 자말이 왔나이다."
"그래."
"···회주의 성취를 감축드리옵니다."
"너도 느꼈구나. 가까이 오라."
자말은 무릎걸음으로 회주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자말의 머리에 손을 얹은 회주.
막대한 마기가 정수리를 통해 들어왔다.
"아!"
몸속 가득 차오르는 충만한 마기.
황제에게 당했던 내상이 치유되고 있었다.
"감사하옵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자말을 머리를 조아린 채 부르르 떨었다.
만날 때마다 강해지는 회주.
이제 자신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회(會)엔 별일 없었나?"
"그, 그게···,"
"말하라!"
"해, 핸들러가 행방불명 상태입니다."
"···자세히."
자말은 눈을 질끈 감고 회주에게 보고했다.
차이나타운을 맡고 있던 진마 핸들러, 그리고 제국의 마인 토벌 작전, 그 이후 끊긴 연락.
회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핸들러가 관리하던 마인들이 모조리 당했다니.
설마···?
"황제의 상황은?"
"건재합니다. 내상이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 보입니다."
"흐음,"
황제가 나섰나 보다.
언제 회복했지?
죽이기 귀찮아서 살려뒀는데, 그냥 죽일 걸 그랬나?
"하오나 이번 차이나타운 사태엔 황제가 아닌 다른 인물이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가 아니라고?"
"여기 제가 수집한 자료가 있습니다."
핸들러 실종 후,
부회주 자말은 차이나타운 사태에 관해 열심히 파보았다.
뉴서울에 존재하는 회(會)의 정보망을 움직였다.
조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가 현재 제국에서 마인 수사가 왜 이렇게 활발해졌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냈다.
자말에게서 태블릿을 넘겨받은 회주.
태블릿에는 젊은 남자 한 명의 사진이 있었다.
"누구냐?"
"태홍 바이오라는 제약회사의 회장, 김태주라는 놈입니다."
"김태주···, 각성자는 아니군."
"마스터보다 강한 적합자로 불리는 놈입니다. 여러 건의 마인 체포에 관여한 걸로 보입니다. 제정원 마인 파트와 함께 움직인다는 소문도 있고."
"핸들러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추측하고 있긴 합니다만···, 아무튼 만만한 놈이 아니옵니다."
"흥!"
회주는 코웃음 쳤다.
설령 그랜드마스터라도 상관없다.
다 거기서 거기지.
"특히 독과 암기를 잘 다루옵니다. 지금까지 놈이 마인들을 쉽게 잡았던 이유도···,"
"잠깐!"
회주가 자말의 말을 끊었다.
왠지 떨리는 듯한 목소리.
"···자말, 놈이 뭘 잘 다룬다고?"
"독과 암기입니다. 해독제도 잘 만들고, 아! 거기 태블릿을 넘겨보시면 놈이 사용한 걸로 추정되는 암기 사진도 있사옵니다."
회주는 서둘러 태블릿을 터치했다.
그러자 중간에 떡 하니 나온 사진.
'유, 유엽비도.'
확실하다.
이걸 어떻게 모를까?
'설마···, 저, 절대독마 당군악?'
회주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자말, 잠시 나가 있어라. 필요하면 부르겠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자말이 창고 밖을 완전히 빠져나간 걸 확인한 후,
"이런, 씨발!!!"
회주, 천경호는 서둘러 김태주에 대한 정보를 다시 살펴봤다.
유엽비도 말고도 놈이 사용하는 다른 암기의 사진도 있었다.
지구에선 없는 디자인.
오직 강호 무림에서만 사용하는 암기였다.
천경호는 손톱을 질끈 깨물었다.
당군악의 암기일까?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진짜라면?
'그 무시무시한 절대독마 당군악이?'
갑자기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7년 전,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기괴하게 생긴 괴물과 영혼이 연결되어 버린 것.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
동시에 놈이 가지고 있던 기억들이 천경호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천마!
강호 무림의 지배자이고 절세 고수였지만 지금은 죽어서 황천계 무간지옥에 갇힌 죄수 신세, 그냥 하찮은 모습의 벌레나 다름없었다.
그 거지 같은 새끼가 자신과 같은 영혼이라고?
어쩔 수 있나?
사실이 그런데.
놈도 자신을 못마땅해했다.
너 따위와 영혼이 같은 게 수치라며 제발 자결하란다.
당연히 자신도 비웃어줬고.
지옥에 떨어져 하루하루 고통받고 사는 벌레가 감히?
어쨌든 놈에게서 얻은 기억들.
마교 교주 천마로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무공과 경험,
천경호의 인생은 그 순간 바뀌었다.
세계를 지배할 힘을 얻었다.
그러나 천마의 경험과 기억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황천계로 잡혀가기 전 인간계에서 당했던 천마의 최후.
'제, 젠장 할.'
만천화우.
저 하늘에서 꽃비처럼 쏟아지던 끔찍한 암기들.
결국 천마는 녹았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천마를 죽인 이가 바로 절대독마 당군악이다.
천경호도 그 순간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몸이 녹아내린 기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다.
한 번씩 자다가 불쑥불쑥 악몽을 꿀 정도.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
지끈지끈 아파지는 머리.
각성자든, 마인이든,
마스터든, 그랜드마스터든.
모조리 자신의 발밑에 있었다.
무서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절대독마 당군악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
천마의 기억을 받음으로써 얻은 부작용.
뇌리에 단단히 각인된 공포였다.
'아직 천마 신공을 대성하지도 않았는데.'
천마는 대성하고도 죽었다.
그것도 폭주 상태에서로 몇 배나 강해진 상태에서.
그런데 그 절대독마 당군악과 똑같은 암기를 쓰는 자가 이 지구에 있다.
김태주.
이놈도 자신처럼 영혼 연결자가 아닐까?
절대독마 당군악과 같은 영혼.
의심할 여지는 충분하다.
자신처럼 각성자도 아니면서 마스터보다 강하고, 독에 능통하고···.
물론 지금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김태주가 진짜 절대독마 당군악이라면?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바룬, 아니 삼한 제국을 떠날 때가 됐군.'
※ ※ ※
선계 멀티플렉스.
이젠 모든 계를 통틀어 핫플래이스로 등극한 곳이었다.
그 앞마당은 항상 신선(神仙)과 선자(仙子), 신장(神將)들로 붐볐다.
곧 있으면 닫혔던 멀티플렉스가 열리는 시간.
24시간 영업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아쉽게도 여닫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독선은 언제 오오?"
"아까 강림 차사와 쑥덕대더니 같이 어디 가던데?"
"에이, 지금 몇 시야? 시간 됐으면 셔터 올려야지. 누구 시계 없소?"
"그 귀한 걸 누가 가지고 있다고, 검선이나 차고 다니지."
순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검선이 멀티플렉스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할리 바이크는 어디 가고 그냥 걸어서 왔다.
그것도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질질질질.
"···저, 저건 뭐야?"
"검선 같은데?"
"뭐, 뭘 끌고 와?"
"허허, 저런 흉측한 것을 선계에 들여?"
"저 양반도 맛이 같군. 위태위태하더니."
검선은 한 손으로 거대하고 징그럽게 생긴 요괴의 다리를 끌고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이 신성한 멀티플렉스 앞에 요괴 사체나 끌고 오고."
"신경 쓰지 마시오."
"아! 지금 신경 안 쓰게 됐소?"
"독선이 오면 큰일 날 테니 당장 치우시오."
그러자 태연하게 대답하는 검선.
"그대들은 광고를 보지 않았군."
"무슨 광고?"
"멀티플렉스 안에 붙은 거 말이오."
"음? 난 못 봤는데···,"
그때였다.
황천계 무간지옥에서 천마와의 면회를 마치고 돌아온 당군악이 검선이 가지고 온 요괴의 사체를 목격했다.
"이, 이게 무슨···,"
꿀꺽,
신선들은 기대했다.
요즘 독선의 사랑을 받아 선계에서 가장 기세등등한 자가 바로 검선 아닌가?
할리 바이크도 끌고 다니고.
그래서 질투가 났다.
신선들은 검선이 독선에게 혼쭐이 나기만 기다렸다.
검선이 독선에게 팽당하면 그 자리는 자신이 채운다.
그런데?
다다다다닥!
쏜살같이 달려온 당군악이 검선의 손을 덥썩 잡았다.
"거, 검선! 이 인면지주(人面蜘蛛)···, 날 위해 잡아 온 거요?"
"전에 요마계에 독물이 있느냐고 물었잖소. 그래서 필요하나 싶어 한 마리 잡아 왔지."
"허허허!"
당군악은 감격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누구보다 세심한 신선이 바로 검선이었다.
"독선이야, 이깟 인면지주 독은 필요 없을 테고, 아마 태주 대협이 필요할 듯 한데···, 맞소?"
"정확하오! 어쩜 이렇게 영민하시오!"
당군악은 무한 공간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자! 받으시오. 당장 인면지주 값을 치르겠소."
"오! 이, 이건?"
"시계 하나 가지고 되겠소? 양손에 하나씩 차야지. 이건 더 좋은 손목시계요."
"아, 아니, 뭐 이런 걸 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신선들.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되려 칭찬을 받아?
핏! 핏! 핏!
3명의 선인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모두 무림계 출신.
삼봉 선인, 매화 선인, 곤륜 선인.
그들의 목적지는 요마계였다.
< 각인된 공포(1) > 끝
ⓒ 꾸찌꾸찌
=======================================
< 각인된 공포(2) >
천마 신공은 다른 흡정 마공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난 기공이다.
어떤 종류의 기(氣)라도 마기로 치환할 수 있다.
심지어 결정체의 마기를 가지고도 공력을 높일 수가 있었다.
물론 같은 인간의 기를 흡정하는 것이 효과가 더 좋긴 하지만.
천경호가 시시때때로 중국 땅으로 넘어가는 것도 이 때문.
엘리트 마수를 잡아 결정체의 마기를 흡정하기 위해서였다.
중국 땅이 마수로 가득 찬 지옥 같은 곳이라지만 비욘드 엘리트 마수 영역만 침범하지 않으면 그보다 더 좋은 결정체 수급처가 없다.
천마 신공은 마기의 최정점.
마인이라면 강하든 약하든 천마 신공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천마가 나타나면 모든 마(魔)가 복종한다.
천마 신공은 그런 무공이다.
"후우우우우우우···,"
파사사삭!
천경호의 손에 들린 엘리트 마나 결정체가 빛을 잃고 바스러졌다.
천마 신공을 온몸으로 돌리자 두려움이 조금 가셔졌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자신은 강하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0살이 넘는 초기 각성자 부회주도 제압했다.
'이제 명료해지는군.'
김태주가 절대독마 당군악과 같은 영혼이라고 치자.
놈이 두각을 나타낸 시기는 1년이 채 안 된다.
게다가 그전엔 마나 거부자였단다.
하지만 자신은 7년이 지났다.
그 시절 동안 쭉 천마 신공을 수련하며 힘을 키웠다.
'내가 더 강해.'
김태주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한들, 세월의 벽은 넘지 못하는 법.
놈은 당군악의 성취를 반의반도 따라잡지 못했을 것이다.
'만천화우?'
턱도 없지.
절대독마도 죽기 전에 체득했는데.
'놈이 여기 직접 들이닥친다고 해도 상관없어.'
죽이면 그만이다.
자신의 무공이 천마 신공뿐인가?
지구의 마교 종사이자 교주.
천마 천경호, 그게 바로 나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공력을 더 높이자.
잘 키워놓은 진마와 마인들도 먹어 치우고.
또한 만에 하나.
김태주가 진마 핸들러의 금제를 풀어냈다고 가정해봐야 한다.
마공에 대해 눈치채고, 핸들러의 행적을 추적해 이곳 바룬까지 왔다고 염두에 둬야 한다.
'대비 정도는 해야겠지?'
바룬은 큰 도시지만 서쪽 변방에 위치한 도시라 유동 인구가 별로 많지 않다.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정해져 있고.
천경호는 전음을 통해 자말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주."
"진마들에게 최근 바룬시에 낯선 자들이 들어왔는지 조사해 보라고 해라."
"알겠사옵니다."
"되도록 빨리, 그리고 황궁이나 제정원의 움직임이 어떤지 알아보고."
자말이 나가고 난 뒤.
천경호는 중국에서 채집해온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하나 더 꺼냈다.
우우우웅!
다시 천마 신공의 운기를 시작했다.
결정체가 순식간에 빛을 잃어갔다.
동시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마기.
"후우,"
충만해지는 마기만큼이나 자신감도 함께 차올랐다.
※ ※ ※
개척도시 나판에선 마인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바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마인과 만났다.
게다가 공무원 신분인 검문소 직원이었다.
얼굴과 이름을 알았으니 선계의 보패, 추적부를 사용하면 놈이 어디 있던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아까운 걸 이런데다 써?
조용히 있다가 놈이 집으로 퇴근할 때 조용히 뒤따라가면 그만.
또한 혼자 잡을 생각도 없다.
태주는 스마트폰으로 금수호에게 연락했다.
- 차, 찾았다고? 또? ···자넨 무슨 인간 마인 탐지기인가?
"아니, 그냥 얻어걸리는 걸 어떡하란 말입니까?"
- 허허, 진짜 당황스럽군. 어디든 가기만 하면 사건을 만들어내니, 옛날 일본 만화에 나오는 탐정 같군.
뭐? 코난? 김전···, 뭐시기?
"그래서 잡지 말라고요?"
- 허어, 사람 참! 하도 놀라서 그랬네. 미안해.
"여튼 잡아야죠. 저 혼자서도 되지만 혹시라도 놓칠 수도 있으니까 제정원 출동시켜요."
- 어···, 자, 잠깐, 폐하께서 통화하고 싶다네. 잠시만.
황제가?
- 날세. 지금 바로 잡을 건가?
"아뇨. 조직이 있는 게 분명하니까 소굴을 찾아서 한꺼번에 잡을 겁니다."
- 그럼 기다리게. 내가 바로 가지.
"···네?"
- 헬기를 이용해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 타면 금방이야.
"너무 떠들썩하면 놓칠 수도 있는데."
- 걱정 말게, 비밀리에 움직일 거니까.
황제가 온다는데 어쩔 수 있나.
기다려야지.
태주는 정연희에게도 연락했다.
계약 조건 중 하나가 마인 잡을 때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
"연희씨?"
- 네.
"수련은 잘 되고 있나요?"
- 50%까진 도달했어요. 하지만 그 이상은 제가 아직 재능이 모자라···,
기가 찰 노릇이다.
동영상 넘겨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초식 5개를?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지금 마인 잡으러 갈 생각입니다."
- 아!
"그런데 조금 멀어서."
- 어, 어디 계십니까?
"고비 초원 개척도시 바룬이요."
- ···.
조용히 흐르는 침묵.
이윽고.
- 조금이 아니라 많이 머네요. 언제 잡으실 건데요?
"오늘 안에?"
- 하아.
멀긴 하다.
황제야 자기 전용기 타고 오면 금방이지만, 정연희는 공항도 없는 파주에 있을 텐데.
그래서,
- 이번은 빠질게요. 하지만···,
"네, 혹시라도 전에 보여주신 마인 만나면 절대 안 죽이고 생포만 해두겠습니다."
이제 기다리면 된다.
그나저나 아직 공무원 퇴근 시간이 한참 남은 것 같은데.
모처럼 바룬에 왔는데, 여기 죽치고 앉아있는 것도 그렇고.
황제도 오려면 멀었고.
"삼백아."
"니앙?"
"너 여기서 저놈 감시 좀 해라."
"니아!"
"움직이면 따라가서 어딘지 알아두고."
"니아아앙!"
마인 추적도 급하지만 선계로 보낼 물건을 준비하는 건 더 중요한 일.
마침 여기도 대형 마트가 있다.
가서 운동화도 좀 사고, 스마트폰 공기계도 몇 개 더 사고.
그런데 공기계만 잔뜩 보내면 뭐 하나.
신선들도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해주고 싶었다.
인터넷 연결 없이 무선 모바일 사용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선계 자체 네트워크를 구축하면 될까?
그건 차차 생각해보고.
마트로 가서 쇼핑하고, 일이삼백이에게 줄 고양이 음식도 사고, 돌아오려는 참에.
찌르르르르.
배송 신호가 느껴졌다.
'떴구나.'
언제나 기다려지는 시간.
하루에 한 번씩 뜨면 얼마나 좋아.
하지만 그건 욕심이다.
지구에선 얼마든지 물건을 가득 보낼 수 있다.
반면 선계는?
안 그래도 당군악이 요즘 형편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안 보내도 된다고 영상도 찍었다.
'일단 물건 확인부터.'
태주는 공유창고를 확인했다.
순간!
'헉!'
창고 가득 들어있는 선도.
그리고 호리병 안에도 약간의 선도와 함께 검 10자루가 들어 있었다.
'···하하하.'
엄청나게 많았다.
지금까지 받은 양으로만 보면 제일 많은 양의 선도.
거기에 대충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보검도.
'형편이 풀렸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기쁘지는 않았다.
당군악이 영혼까지 끌어모은 게 아닐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받은 것만으로도 평생 갚지 못할 텐데.
공유창고가 싹 비워졌다.
당군악을 위해 준비해둔 물건을 집어넣자,
스르르릇.
빛이 꺼졌다.
'보검은 하나씩 나눠주면 되겠네.'
제자들 몫으로 8자루, 정연희에게도 1자루.
스마트폰 영상은 나중에 확인하고.
태주는 다시 검문소 주변으로 돌아왔다.
일백이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까운 커피숍에 앉아 시간을 보내며 기다리니,
띠링!
금수호에게 전해진 메시지.
<곧 도착할 걸세. 한 시간만 기다려주게.>
그 정도면 얼추 공무원 퇴근 시간과 맞출 수 있겠다.
놈이 차량으로 이동할 줄 모르니까 근처 렌트카 업체로 가서 미행용 트럭 한 대를 빌렸다.
이윽고 바룬시 공항에 황제가 탄 비행기가 내렸다.
황제의 바룬 입성은 그 누구도 몰랐다.
공항으로 나오지 않고 공항 활주로에서 바로 밖으로 빠져나왔으니까.
황제와 만난 태주.
그리고 금수호 비서관도 함께.
"저놈인가?"
"네."
"각성 문양이 없군, 그럼···,"
"아마 전에 말씀드렸던 진마일 겁니다."
"쯧, 제국의 공무원이 마인이라니."
퇴근 시간이 다 된 모양.
검문소 교대자가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이용해 빠져나가는 마인.
태주 일행도 미행을 시작했다.
※ ※ ※
부회주 자말은 요즘 회주의 태도가 미심쩍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태도.
얼굴에도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과연 무엇이 그를 저렇게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자말이 생각하기론 핸들러 사안 보고 직후였다.
핸들러가 잡혔다고 한들 어쩌라고.
회주의 금제로 인해 입을 열지도 못한다.
게다가 바룬으로 출입하는 사람의 명단을 조사해 오란다.
황궁과 제정원의 움직임을 언급하면서.
아니, 놈들이 온다고 해도 무슨 상관일까?
황제 정도야 자신의 선에서 정리 가능하다.
다만 위협이 되는 건 제국군.
그래도 1개 사단 가지고는 턱도 없다.
제국의 전 병력을 끌고 온다 해도 회주에겐 큰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조사는 해오라고 했으니까.'
바룬은 회(會)에게도 매우 중요한 도시.
회주가 그동안 해오던 수련을 완성하면 이 바룬은 제국을 상대할 거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진마들을 바룬시 곳곳에 집어넣었다.
시청에도, 경찰에도, 공항에도, 검문소에도.
저녁이면 모두 퇴근해서 농장으로 돌아올 터,
아직 그들에겐 회주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다 오면 이야길 해야지.'
일단 진마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바룬시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출입 명단과 수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는지 알아 오라고.
이윽고 퇴근 시간.
자말은 진마들이 가져온 정보를 취합해서 회주가 기다리는 식량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회주시여!"
"어서 오라. 자말."
평상심을 회복했구나.
그 전의 불안한 듯한 표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전한 회주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진마들이 정보를 가져왔지만 특별한 일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
"혹시 몰라 바룬시 출입 명단을 최근 것부터 정리해서 가져왔나이다."
"수고했다. 어디 보자꾸나."
"여기···,"
부회주 자말은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회주에게 종이로 된 명단을 바쳤다.
"흐음."
천경호는 천천히 명단을 살폈다.
사실 별 의미도 없었다.
아까는 절대독마 당군악에 대한 공포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그랬을 뿐, 바룬 입성 명단 확인한다고 뭐가 나오기나 할까?
황궁이나 제정원에서 온다고 해도 신분을 숨기고 올 텐데.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움찔!
천경호의 눈썹이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갔다.
'잘못 봤나?'
한 번 더 확인했지만,
'···김군악?'
군악? 군악이라고?
대체?
갑자기 재발한 절대독마에 대한 각인된 공포.
만천화우에 대한 끔찍한 공포.
그때였다.
콰콰콰콰콰쾅!
밀 농장에 굉음이 들렸다.
※ ※ ※
선계(仙界).
제일 먼저 도착한 선인은 삼봉이었다.
인면지주(人面蜘蛛) 가격이 손목시계 하나.
그렇다면 최소한 인면지주와 비견될만한 독물 요괴를 찾아야만 했다.
요마계를 샅샅이 뒤졌다.
그래서 잡아온 것이 바로 만년오공(萬年烏蚣).
무려 만년이나 묵은 독지네.
만년을 산 놈이다.
쉬울 리가 있나?
삼봉 선인은 만년오공을 멀티플렉스 앞마당까지 질질 끌고 와서.
"도, 도옥서언,"
애타게 당군악을 불렀다.
"왜 그러시···, 아! 만년오공이군."
솔직히 당군악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도대체 요마계는 어떤 곳인가?
인면지주도 놀라운 판국에 만년오공까지 있어?
사실 요마계 또한 일종의 유배지.
초월급에 이른 마물들을 인간계에서 분리해 가둬두는 장소.
그런데 그 요괴들이 곧잘 탈출한다.
어떤 방법을 쓴 건지 모르지만 꽤 많은 요괴들이 요마계를 벗어나 인간계로 숨어든다.
덕분에 신선들이 탈출 요괴를 잡기 위해 인간계로 나들이할 수 있고.
"삼봉 선인, 수고했소이다."
"허어어···,"
바닥에 쓰러진 채, 벌벌 떨리는 손길로 독선 당군악을 향해 손을 뻗는 삼봉 선인.
이렇게나 힘들었나?
측은한 마음에 당군악은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아줬다.
스윽,
하지만 삼봉 선인은 슬며시 손을 빼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게 아냐?
그럼···, 아!
당군악은 무한공간에서 손목시계 하나를 꺼냈다.
"이거?"
"채, 채워주시오."
"···."
어쩔 수 있나?
고생했는데 해줘야지.
철컥!
시곗줄 금속 버클을 눌러 손목에 착용시켜주자,
벌떡!
"으하하하! 본선도 드디어 시계 오너로구나."
뭐지?
다 죽어갈 때는 언제고···,
'안 줄까 봐 설레발 떨었군.'
만년오공은 전설에서나 나오는 요괴.
잡기 힘들다.
하지만 그건 일반 무림인으로서의 관점이다.
무당파 개파 조사로서 등선한 선인이 만년오공을 잡는 것이 뭐가 힘들까? 찾는 게 어렵지.
그래도 잡아 왔으니까 봐준다.
두 번째로 앞마당에 도착한 이는 매화 선인이었다.
거대한 이무기, 독각화망(毒角禍蟒)의 꼬리를 끌고.
"하아, 하아, 도, 독서언, 크헉! 허어억!"
"···."
독각화망을 잡아 온 건 고맙지만.
"엄살 피우지 마시오. 삼봉 선인이 이미 써먹었소."
"엥?"
"여기 손목시계요."
"오!"
마지막은 곤륜 선인이었다.
그런데 다른 두 선인과는 달리 여기저기 찔린 듯한 상처투성이.
선인이 상처를 입었어?
대체 뭘 잡아 왔길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빈손으로?
"여, 여기 있소."
곤륜 선인은 당군악에게 나뭇잎으로 곱게 싸서 넝쿨로 묶은 물건을 내밀었다.
"이건?"
"선학(仙鶴)의 머리 가죽이요. 죽이지 않고 머리만 벗겨가겠다는데 어찌나 반항을 하던지."
"···선학?"
선학은 영물이다.
신선, 특히 태상노군이 타고 다니는 걸로 유명하다.
그런데 머리 가죽을 벗겨와?
원래 학의 머리에 있는 붉은 부분을 학정홍(鶴頂紅)이라 부른다.
인간계에서도 극독에 속하는 독물.
당군악도 매우 애용했었다.
하지만 곤륜 선인이 가지고 온건 일반 학이 아닌 선학의 학정홍.
이거 문제될 것 같은데, 뭐, 아무튼.
"고, 고생했소."
"···시계는?"
"당연히 드려야지."
"흐흐흐,"
독물이 확보됐다.
지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물들.
당군악은 기분이 좋았다.
이로써 태주는 혼원무상독령공 10성에 오를 확률이 높아졌다,
아니, 거의 올라간다고 봐야지.
'손질이나 해볼까?'
통째로 보낼 수는 없으니까.
독단만 빼내서.
이것들 말고도 태주에게 보낼 물건이 또 있었다.
바로 천마와 영혼 연결자.
지구에 있는 천마와 같은 영혼의 인간의 정체.
무간지옥의 천마가 반드시 죽여달라며 놈의 정체를 술술 불었다.
이름과 나이, 고향, 출신학교, 가족관계···.
이 정도면 단주 선인의 추적부로 놈이 어디 있는지 쉽게 찾아낼 수 있을 터.
하지만 천마다.
비록 같은 영혼이긴 해도.
그래서 처음엔 이걸 전해줘야 하나 고민했지만.
'클클클, 천경호, 그놈은 너와 같은 영혼의 인간을 절대 이길 수 없을 거야.'
'···왜?'
'두려워할 것이 뻔하거든. 생각해봐. 내가 어떻게 죽었지?'
'아!'
'아마 보자마자 벌벌 떨걸?'
그렇다는 말은?
'너도 내가 무서운가?'
'···.'
'무섭구나!'
당군악은 씨익 웃었다.
마지막까지 짜릿한 복수였다.
< 각인된 공포(2) > 끝
ⓒ 꾸찌꾸찌
=======================================
< 각인된 공포(3) >
밀 농장에 굉음이 울리기 30분 전.
태주 일행은 금수호 비서관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검문소 마인을 미행하고 있었다.
"들키지 않을까요?"
"괜찮아. 우리 수호, 예전에 제정원 최정예 요원이었어."
"냐아?"
칭찬 같았지만 왠지 뾰로통한 금수호의 표정.
"제정원뿐 아니라 제국군에서도 근무했지요."
"맞아."
"감사원에도 있었고,"
"그, 그렇군."
"제국 경찰청에서도 잠깐 직급을 맡았었죠."
"···기억이 나."
"행정기획부도,"
"···."
"건설부, 교육부, 황궁 비서실에···,"
"그만하지?"
"네."
금수호는 강인한 군인이었고, 민첩한 정보요원이었으며, 유능한 관료이기도 한 사람, 한마디로 다재다능했다.
이러니 황제가 안 놓아주지.
미행은 순조로웠다.
어느새 도착한 최종 목적지, 대산(大山) 농장이었다.
"밀 농장이군."
"네."
"마인들이 농사짓고 살 리는 없을 테고···."
황제가 태주를 보며 물었다.
"어떤가? 냄새가 나나?"
"당연히 납니다. 아주 짙은 악취가."
"냐아아아!"
일백이도 동의했다.
"그래?"
킁킁, 냄새를 맡는 황제.
"···이 똥꾸릉내 같은 건가?"
"그건 비료 냄새지요. 폐하."
"냐앙!"
"흐음."
황제는 스르르렁, 칼을 뽑았다.
번뜩이는 칼날.
제국 최고의 장인들이 모여 만든 황제의 검.
"몸을 풀 때가 왔군. 그동안 얼마나 무료했는데, 황궁에서 나와 콧바람 쐬니 기분이 끝내줘."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사실 여기 온 것도 거하게 싸움 한판 하시려는 목적 아닙니까?"
"어, 맞아. 그거 아니면 내가 왜 밖으로 나왔겠나?"
"하아, 이러다 또···,"
"냐아아아아아···,"
황제는 금수호의 걱정이 뭔진 안다.
또 부상 당해 누워지낼 수도 있다는 말.
"그런데 수호, 자넨 왜 빈손으로 왔나? 무기도 없이?"
"···경황이 없어서."
"쯧쯧, 싸우려고 왔는데 무기를 빼먹어? 노망이 들었군. 하나밖에 없는 친우가 노망이라니, 하긴! 그럴 나이가 됐지."
빠득!
금수호는 이빨을 악물었다.
"네, 노망 맞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비서관 그만두겠습니다."
"응, 안 돼!"
가볍게 무시하는 황제.
"저기 작대기라도 들어! 싸움하는 데 방해되지 말고."
"···."
"냥!"
순간!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몰래 꺼낸 검 한 자루를 금수호에게 내밀었다.
당군악이 보내온 보검.
10자루지만 당장 필요한 건 9자루, 한 자루 남는다.
"이거라도 쓰세요."
"응? 이, 이거···."
금수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보기만 해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손에 착 감기는 검자루.
"대단하군."
스르렁.
부드럽게 뽑히는 검.
싸늘하게 느껴지는 예기.
"이런 검은 평생 잡아보지도 못했어."
스우우웅!
강기를 주입하자 아무런 거스름 없이 마나가 쭉쭉 들어간다.
검신이 우윳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내가 사용하던 검보다 몇 배는 좋아."
사실 태주는 금수호에게 빚이 있었다.
서필명을 파주 행정관으로 영입하면서, 황제에게서 벗어나려던 그의 노후 계획을 망쳐 놓은 것 말이다.
검이라도 줘서 기분을 풀어줘야지.
"마음에 드세요?"
"들다마다! 고마워. 잘 쓰겠네."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금비서관."
"네?"
"내 검하고 바꾸세."
"싫은데요?"
"황명이네."
"어기겠습니다. 기분 나쁘시면 귀양이라도 보내시던가."
"···."
황제는 포기하지 않을 눈빛이었다.
두고 보자는 식으로 금수호를 힐끗 흘겨보고는,
"자,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조용히 움직여서 한 놈씩 처리할까, 아니면···,"
순간!
화아아아악!
높게 지어진 마수 감시 초소에서 강한 서치라이트가 태주 일행을 비췄다.
"이런! 너무 오래 노닥거렸어."
맞다.
적의 소굴을 앞에 두고 잡담이나 해댔으니.
황제가 갑자기 서치라이트가 있는 초소를 향해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말릴 새도 없었다.
콰콰콰콰콰쾅!
대부분 나무였지만 제법 단단하게 지어진 초소가 황제의 검기 한 방에 무너졌다.
"···."
"참나!"
"냐아아아!"
아무리 무대포라지만.
다짜고짜 검기를 날려?
심지어 일백이까지 뭐라고 한다.
참다 못한 금수호가 성난 목소리로 황제를 다그쳤다.
"폐하! 정신 나가셨습니까? 라이트 비춘 놈만 처리하면 되지···."
"성미에 맞지 않아."
"설마 검 안 바꿨다고 그런 건 아니겠지요?"
"···."
그렇구나.
삐진 게 맞았다.
그러나 이것이 황제의 스타일이다.
패도의 황제.
앞을 막아서는 건 무조건 부수고 보는.
그때!
부스럭, 부스럭.
무너진 마수 감시 초소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마수화로 변한 마인이었다.
황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인이군.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초소를 먼저 친 거야."
"허어!"
"니앙?"
굉음이 울려 퍼지자, 농가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인들.
그리고 그중 하나.
중년으로 보이는 각성자, 부회주 자말이었다.
황제의 눈빛이 빛을 발했다.
너무나 반갑다는 표정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부회주 자말도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황제?"
부회주 자말은 저들이 누군지 알았다.
금수호, 황제 류태현, 그리고 김태주.
저 고양이는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지만.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어디긴! 쥐새끼처럼 숨어지내는 마인 소굴이지."
우우우우웅!
황제가 기세를 뿜어냈다.
마인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가 나타났다.
두 번째로 강한 금수호도 나타났다.
도망가야 하나?
마인들은 부회주 자말의 눈치를 슬쩍 봤다.
그러나 그는 황제를 보고도 태연하기만 했다.
"알고 봤더니 부회주라며? 네 주인은 어디 갔느냐?"
"흐흐흐."
비릿하게 웃음 짓는 자말.
"멍청한 놈들, 알아서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노망이 들어 상황판단이 안되는 모양이지?"
황제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나? 내가 노망들었다고? 우리 수호가 살짝 들었긴 했지."
"노망이라뇨, 저 폐하보다 어린데요?"
"나잇값 못하면 그게 노망이지. 검도 깜박 잊고 다니는 주제에."
"···."
자말은 황제와 금수호가 나누는 농담 짓거리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놈들은 이 자리에서 죽는다.
삼한 제국은 든든한 버팀목을 잃고야 말 것이다.
자밀이 자신하는 이유.
바로 회주 때문이다.
이미 황제와 손속을 겨뤄본 자말.
황제 10명이 와도 회주에겐 안 된다.
물론 회주가 계시지 않았다면 완전 달랐을 터.
죽는 건 저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순간!
스으으윽!
회주가 기척도 없이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인들이 그를 목격하자 모두 감격에 떨었다.
"오!"
"아아!"
"회주님!"
"회주시여! 만마의 지존이시여!"
"종복이 인사 올립니다."
"겁도 없이 회를 침범한 하룻강아지들을 벌하여 주옵소서."
하늘을 찌르는 마인들의 사기.
태주는 회주를 관찰하고 있었다.
'저놈이 회주구나.'
얼굴에 마기가 모여있는 걸로 보아 역용술로 얼굴을 변화시킨 듯 했다.
진면목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어째 익숙한 느낌.
'확실히 강하네.'
아니 강한지조차 알 수 없었다.
기세의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
또한 회주를 보자마자 든 기분, 절대독마 당군악의 기억이 떠올랐다.
'천마 신공.'
거의 확실하다.
다만 문제는 여긴 지구.
천마가 여기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역시 영혼 연결이었어.'
퍼즐이 풀린다.
진마의 존재, 그리고 200살이나 먹은 초기 각성 마인을 수하로 두고 있는 점.
태주는 영혼 연결이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일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왜 또 없을까?
땅도 넓고 사람도 많은 지구에서.
'그런데 왜 꼭 강호 무림이어야 하지? 다른 세상은 없나?'
예를 들어 마법과 오러가 난무하는 판타지 세상 같은 거.
아무튼 저놈은 강호 무림의 마교 교주 천마와 같은 영혼, 자신은 절대독마 당군악과 같은 영혼.
참으로 지긋지긋한 악연이다.
'뭐, 여기서 끝내면 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죽이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현재 팽팽한 대치 상황.
우우우우웅!
마치 서로 간이라도 보는 듯 기세를 주고 받았다.
회주도 그렇고, 부회주도 그렇고.
만만치 않았다.
황제, 금수호, 자신,
삼한 제국 최정예가 모였다고 해도 장담 못 할 정도로.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태주에겐 강호의 절대독마 당군악도 가지지 못했던 것들이 있다.
무한공간에 들어있는 부적들, 호신부, 벽마부, 구속부, 선기가 어려있는 신령비도, 비욘드 엘리트 마나 결정체로 신선이 만들어준 암기.
그리고 이미 태주의 지시를 받아 밀밭으로 사뿐사뿐 걸어가는 이백이.
'일단 숫자부터 줄여놓고.'
태주는 몰래 무한공간에서 사혈침을 꺼냈다.
정정당당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싸움은 선빵.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공격.
그전에 눈돌리기부터.
이백이는 이미 밀밭에 있었다.
'가자!'
태주가 신호를 하자.
"야아아앙!!!"
쑤우우우우우욱!
이백이의 몸집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집채만큼이나 계속 커졌다.
우지끈!
커진 몸에 밀려 농가 하나가 무너졌다.
"헉!"
"미, 미친!"
"···세상에."
"사, 삼두백호?"
고비 초원 밀 농장에 나타난 거대한 삼두백호
동시에.
"크르르르르르르르···,"
가슴을 후벼파는 저음의 포효가 농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비욘드는 턱도 없지만 엘리트는 확실히 넘어선, 초엘리트 마수의 피어.
삼두백호의 무시무시한 피어는 마인들의 마수화를 강제했다.
우득! 우드드득! 우드드득!
여기저기서 변신하는 마인들.
태주는 이때를 노려 초원을 다니며 숙련한 암기술을 시전했다.
'폭우침.'
츠리리릿! 츠리리리리리리리릿!
사혈침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무한공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용오름처럼 치솟아 올랐다.
만천화우보다 숫자도 적고 위력도 그닥 강하지 않다.
하지만 시각적 효과만은 비슷하다.
괜히 짝퉁 만천화우라고 부를까?
지이이이이잉!
사혈침 하나하나에 강기가 맺힌다.
맞으면 수초 안에 사망하는 극독과 함께.
정점에 오르자 마치 투망처럼 퍼지는 사혈침.
촤아아아아악!
사혈침이 농장의 하늘을 덮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부회주 자말.
그는 저 작은 침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저건 맞으면 안 돼!!! 피해!!!"
자말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후둑, 후두두둑! 후두두두두두두···,
분노한 자말.
비겁하게 기습을 해?
그리고 회주를 바라보면서,
"회주시여! 불충한 제가 직접 저들을···,"
그런데,
"···어?"
없었다.
"무, 무슨?"
회주가 사라졌다.
방금까지 옆에 있던 회주였다.
"···회주님."
천경호는 이미 농장 밖에 있었다.
파파파파파파파!
엄청난 속도로 고비 초원 서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회주가···, 도망을?'
남아있는 마인들도 마찬가지.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도망?'
'정말 도망이라고?'
'마, 말도 안 돼.'
'왜?'
회주가 달아났다.
만마의 지존, 자신들의 주인, 그토록 존경해마지 않았던 마인들의 든든한 버팀목, 마음의 기둥, 삶을 이끌어주시는 정신적 지주.
그 회주가 꽁지 빠지게 줄행랑쳤다.
자신들은 내버려 두고 말이다.
어찌나 빠른지 이미 까만점으로 변했다.
그리고 폭우침이 마인들을 덮쳤다.
푸푸푸푸푸푸푸푹!
"피,피해!"
"악!"
"커헉!"
"끄아아악!"
기가 막히는 건 태주도 마찬가지.
황당함도 황당함이지만, 회주란 놈이 달아나면서 사용한 보법.
익히 알고 있던 무공이었다.
이걸 지구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천마군림보를 도망치는 데 사용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 ※ ※
각인된 공포.
영혼과 영혼이 연결될 때부터 새겨진 것이었다.
육체에 새겨진 흉터는 환골탈태하면 사라진다지만, 영혼의 흉터는 지우기가 불가능하다.
천경호는 하늘 위로 솟아오른 사혈침을 목격한 순간,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야 말았다.
촤라라락!
펼쳐지는 강기의 꽃.
확실하다.
만천화우다.
공포에 질린 천경호.
저게 진짜 만천화우인지 판단이나 할 수 있었을까?
파파파파파파파!
천경호의 몸이 빛처럼 쏘아졌다.
지금 당장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았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고 나서.
천마이자 회주, 천경호는 제국 남부 대전 출신의 일반인이었다.
그래도 일명 금수저 출신.
그의 아버지는 꽤 잘나가는 군수업체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경호는 집안의 둘째 아들.
회사는 형님이 물려받게 예정이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회사 지분이 형에게로 갔다.
그래서 형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천경호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였으니까.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자신.
이익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양심의 가책?
그게 뭔데? 먹는 건가?
사고로 가장해 형을 죽이고, 형의 죽음을 의심해서 자신을 추궁해오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함께 죽였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의 수사망이 자신에게 좁혀왔다.
제국의 경찰들이 이렇게 유능했나?
결국 자살을 택했다.
아니, 자살로 위장해서 도망가려고.
적당한 시체 하나 구해 방에 놓고,
집안과 방 구석구석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인 후, 도망치려 했지만 탈출하지 못했다.
기름을 너무 많이 뿌렸다.
방에서 시작된 불길이 순식간에 집안 전체로 옮겨붙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 가득 찬 유독가스.
기를 쓰고 나오려고 했지만 정신은 희미해지고.
바로 그때!
다른 세상의 자신, 천마와 마주했다.
덕분에 죽음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의 일이었다.
천경호는 천마로 다시 태어났다.
역용술로 얼굴을 바꾸고, 이름은 숨긴 채, 숨어 살았다.
그 누구도 자신이 천경호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자신이 포섭한 부회주도, 각성 마인도, 공들여 키운 진마도.
따라서 제국만 벗어나면 완벽하게 안전해진다.
'일단 유럽제국으로 가서···,'
바다를 건너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신분.
천경호는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하지?
아무리 숨어도 결국 들킬 것 같은 예감,
'대체 왜?'
< 각인된 공포(3) > 끝
ⓒ 꾸찌꾸찌
=======================================
< 또 한 명의 VIP, 혹은 호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