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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71% EMPERADORMAGICO / Chapter 6: 6

章節 6: 6

"또 누구? 에리카?"

"그래.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랜턴 가져와."

* * *

메리는 타오르는 심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장과 벽을 따라 울리는 소음. 아마도 저택을 새롭게 차지한 외부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남편인 데르가가 자신과 아들을 데리러 왔을 테니까.

빛 한줄기, 바람 한숨 들어오지 않는 땅굴에서, 메리 부인은 인생 최악의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엄마. 나 배고파."

"육포라도 먹어."

"여긴 이것밖에 없어?"

첼은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투정을 부려댔다. 그럴 나이가 아니면서도, 어찌 저딴 말밖에 못 하는 건지! 메리 부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아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뒤쪽 문이라도 옮겨볼까?"

"쇳물을 들이부어 막은 것이다. 괜히 손 다칠 일 하지 말고 앉아있어. 체력이라도 남겨둬야지."

지하 감옥과 비슷한 공간. 외부로 통하는 비밀 문은 침입 경로로 이용될 경우를 대비, 데르가의 아비가 막아버리고 말았다. 그때는 천려족과 분위기가 워낙 안 좋았으니 이해는 한다만, 자충수도 이런 자충수가 따로 없지 않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

"조금만 더 기다리자. 며칠 내로 기회가 있을 거니까. 폰트롤로 돌아가면 푹 쉴 수 있으니, 참아."

메리는 메렐로프 영지를 거쳐 자신의 친정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반역죄인이라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하겠지만, 가족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

메리는 손톱에 붙은 보석을 하나씩 떼어내며 드레스에 문질렀다. 싸구려로 치부했던 보석들이 귀한 노잣돈으로 쓰일 줄이야.

저벅저벅.

그때였다. 별안간 환청처럼 발소리가 들렸다. 메리는 반사적으로 등불을 껐고, 첼은 침대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저 멀리서 어렴풋이 누런 빛이 흔들렸다.

"허억!"

누군가 온 것이다! 저택의 비밀 공간을 알아채고, 그들의 흔적을 쫓기 위해! 메리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꾹 쥔 채 숨 쉬는 것도 멈추었다.

'데르가, 당신인가요? 빨리, 빨리....'

당신이라면 신호를 보내줘요.

하지만 메리의 절절한 바람에도 불구,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설고도 익숙한 자의 것이었다. 돌벽 위로 그림자가 질게 늘어졌다.

"거기 있습니까? 어머니, 첼 형님."

"…네, 네가 여길 어떻게!"

두어 달 만에 듣긴 했지만,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안이었다.

이안은 비밀 공간을 둘러보며 놀랍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사내들은 붉은 안료를 얼굴에 칠한… 천려족!

"이, 이게 대체 어떻게...."

"이야, 땅굴을 파놓고 있었네. 데르가도 참 대단해."

"원래 제국 귀족들은 이렇게 개구멍 하나쯤은 만들어 놓는다지 않나. 싸우다 죽을 바에는 도망가는 족속들이니까."

"근데 뒤쪽에 나가는 길이 없어 보이는데?"

"어어. 그러게."

메리는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분명 저택에 주둔하고 있는 건 조사단과 중앙군이라 짐작했는데 말이다. 이안과 천려족이 어찌 나타난 것인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아아아안!"

쉬이이익!

메리는 반사적으로 신경질적인 비명을 내지르며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뒤에서 몰린과 접선하여 데르가를 고발한 것도 이안이었고, 천려족을 꾀어 동맹을 파기한 것도 이안이라 믿는 그녀였다.

여인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천려의 전사가 서둘러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아악! 아파!"

손을 쳐내려는 듯 발버둥 쳤지만, 우악스러운 전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전사는 가볍게 단검을 뺏어 던져 버렸고 메리 부인을 결박하며 벽에 짓눌렀다.

쿵!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야! 천한 것들! 근본도 없는 것들!"

"어머니. 과격해지셨다고 얘기는 들었는데, 생각보다 더하십니다?"

"닥쳐! 닥쳐!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이안은 랜턴을 들어 메리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퀭해진 눈 밑, 거무죽죽해진 피부, 핏줄이 잔뜩 선 누런 눈동자. 게다가 각질로 엉망인 입술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반면 첼은 살이 좀 빠지고 먼지를 뒤집어쓴 것 외에는 별달리 달라진 게 없었다.

'…왜 이러지?'

이안은 메리 부인의 변화가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 인상을 찌푸렸다.

제46화. 브라츠를 떠나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

메리 부인은 거의 실성한 것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첼은 그런 어미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 받았는지, 침대 뒤쪽에 서서 꼼짝않고 굳어있었다. 이안은 그녀를 힐끔 보며 전사에게 전했다.

"카칸티르 족장님과 네르사른 님을 불러오라."

"네. 이안 님."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육신이 갈갈이 찢어 네가 세상에 나왔다는 것조차 잊혀졌으면 좋겠다."

"어머니. 그만 좀 다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저택에는 조사단이 남아있으니까요. 혹여 들키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어머니를 넘겨야 합니다."

그의 말에 메리가 멈칫거렸다. 머리에 피가 몰려서 그런가? 마치 이안이 자신을 살려주겠노라 말하는 것 같았다.

"이안. 우리 살려주는 거야? 아버지는?"

"첼 형님. 꼴이 말이 아니군요. 아버지는 이미 중앙군에 잡혀서 손 쓸 수가 없습니다. 챙길 짐이 있습니까?"

데르가가 중앙군에 잡혔다는 걸 듣자, 메리 부인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첼 역시 마찬가지.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충격 먹고 울먹이는 게 분명했다.

"내가, 내가 아버지를 구하겠어."

"네?"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 이안이 되묻기 무섭게 천려인들은 희미한 웃음만 흘려댔다. 대체 누가 누구를 구한다는 건지, 원.

"첼 형님. 정신 좀 차리십시오. 상황 파악이 그리 안 됩니까? 데오도 죽고 집사도 죽고 저택 사용인들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영지민들은 전투의 피해로 데르가 백작을 원망하고 있어요. 형님과 어머니가 브라츠에서 살아가려면 이곳, 비밀 공간밖에 없습니다."

신랄하게 쏟아지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첼은 연신 움찔거리며 제 어머니와 어두운 방 안을 돌아봤다. 이런 곳에서 평생을? 절대, 절대 그렇게는 못 살지.

이안은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이안 님. 카칸 님과 네르사른 님이 오셨습니다."

"그래. 곧 나가겠네. 어머니 그리고 첼 형님."

이안은 잠시 고민하더니, 목적지를 정했다는 듯 손을 튕겼다.

"아무래도 가실 곳은 친정밖에 없겠군요. 전사들과 함께 나갈 채비를 하세요. 새벽이 깊어지면 당장 출발할 것입니다."

"이안 님. 저 여자 친정이 어디입니까?"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저 여자라는 호칭에 한 번 충격, 이안의 별것 아니라는 태도에 또 한 번 충격 받은 메리 부인이었다. 말문이 턱 막힌 부인 대신 첼이 대답했다.

"…포, 폰트롤."

"폰트롤? 아아. 브라츠를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곳입니다. 메렐로프를 둘러가야 하니 보름 정도 걸리겠군요. 거리도 거리지만 험한 산맥이 있어서."

"메렐로프를 왜 돌아가? 거기에 들러서 옷이나 먹을 것 좀 얻고...."

"메렐로프는 성문을 완전히 닫았는데요? 집사를 죽인 것도 그쪽입니다. 엮이기 싫다고 상황 정리되기까지 자체 봉쇄령을 내렸습니다."

이안의 말에 메리 부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사실 중앙군과의 대치 상황 시 도와주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여차했다간 그들도 반역자로 엮여 들어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집사를 죽였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메렐로프가, 집사를 죽였다고...?"

"왜 그러십니까? 어머니."

"그년이, 그게 그러면 안 되는데.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손톱을 아득아득 씹어대며 중얼거리는 꼴이 기괴하다 못해 오싹했다. 전사들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이안을 돌아봤으나, 그도 연유를 알 턱이 없다.

"…메렐로프로 들어갈 거야."

메리는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브라츠를 떠나기 전, 본채 방에 들러야겠다."

"정신이 어떻게 됐습니까? 어머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 하라는 뉘앙스였다. 하지만 부인은 물러서지 않고 강력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가면 메렐로프도 우리를 쉬이 쫓아내지는 못할 거다. 가서 자금도 좀 빌리고, 이런저런 도움을...."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뒤죽박죽 엉망인 것은 자명했다. 이안이 팔짱을 끼며 어디 개소리 좀 더 해보라는 듯 지켜봤다.

메리 부인은 문득 말을 멈추며 되물었다.

"남편은, 데르가는 아직 죽지 않았지?"

"그렇습니다. 처형식이 어머니와 첼 덕분에 미뤄졌으니까요."

그 말에 메리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1황자 마리브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은 데르가와 메리만 알고 있었다. 황궁의 응답이 올 때까지 살아만 남으면 기회가 영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래, 그래...."

"알았으면 서둘러 준비하십시오."

"이안, 메렐로프로 가자! 메렐로프로...!"

"어머니. 다물지 않으면 재갈을 물리겠습니다."

이안은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등을 돌려버렸다. 본채에는 조사단들이 진을 치고 있지 않나. 거길 메리 부인이 어떻게 들어갔다가 나온다는 건지 원. 첼이 누굴 닮아 상황 파악이 저리 안 되나 싶었는데, 제 어미를 닮은 것이었다.

"여길 지키고 있게. 난 잠시 카칸을 뵙고 오겠네."

"예예. 천천히 일 보십쇼."

"어이, 거기 애새끼. 짐 정말 없어?"

"어, 어, 없는데…. 그리고 나는 첼 브라츠…다!"

뒤쪽으로 한심한 대화가 오가는 걸 들으며, 이안은 계단을 올라갔다. 연락을 듣고 달려온 카칸티르와 네르사른이 잔디로 위장한 입구를 들어주며 이안의 손을 잡아주었다.

"안쪽에 있던가?"

"아주 잘 있습니다."

조사단의 시선을 피해 애먼 쿠실레만 이쪽으로 옮겨대고 있었다. 마구간이 좁다는 구실이었는데, 다행히 조사단은 말을 차지할 수 있어서 별로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당장 오늘 새벽이라도 보내면 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지. 누가 말을 제일 잘 몰던가?"

카칸티르의 말에 전사들이 앞다투어 자신을 보내달라 요청했다.

"저입니다. 카칸."

"맡겨만 주십시오."

보란 듯이 중앙군을 홀려 영지 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것도 여인과 아이를 데리고서.

그뿐만 아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게 중앙군을 멀리 유인해야 하니, 말 모는 솜씨뿐만 아니라 상황 파악능력까지 좋아야 했다.

"슐과 나루. 둘이서 맡아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칸!"

"와아. 드디어 검 좀 드는 겁니까?"

"경거망동 말고, 최대한 멀리까지 가서 메리와 첼을 처리해. 하늘과 땅에 묻어 그 누구도 찾지 못하게 해야 한다."

중앙군에게 둘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에리카의 공이 될 것이며, 황궁의 긍정적인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메리와 첼을 은밀하게 처리한다면?

"중앙군 놈들, 어디 몇 년이고 변방을 떠돌아 보라지."

그들은 시체를 찾기 전에는 복귀할 수 없으리라. 메리와 첼은 반역자였기에 '놓쳤다'라는 이유만으로 포기할 수 없는 목표 대상이었다. 설령 작전이 중단되더라도 그들의 신뢰는 바닥을 치게 될 터이니, 일거양득도 이만한 게 없다.

"곧 해가 집니다."

카칸티르는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와 첼을 담당할 전사들은 물과 식량 따위를 챙기며 바리엘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것 참 불편한데, 왜 이런 걸 입는 거야?"

"그러니까. 찢어지겠어."

우락부락한 덩치로 인해 꽉 끼는 게 눈에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천려족의 전사임은 철저하게 숨겨야 했다. 혹여 천려족이 연관되어 있음이 알려진다면, 반역죄로 엮여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테니까.

"메리와 첼을 데리고 와라."

"네. 알겠습니다."

전사들은 지하로 내려가 두 사람을 끌고 나왔다. 두 사람은 며칠 사이에 완전히 변해버린 저택의 풍경에 충격 먹은 표정이었다. 바싹 타서 무너질 지경인 별채와 사방에는 쿠실레, 천려족들. 이곳이 정녕 브라츠가 맞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일세. 메리 부인 그리고 첼."

카칸티르의 인사에 두 사람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메리 부인의 눈매가 표독스럽게 가늘어지며 제 아들을 끌어안았다.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군."

"천려는...!"

욕설을 쏘아붙이려던 메리가 한숨을 삼키며 겨우 참아냈다. 아직 데르가가 살아있지 않나. 1황자 마리브의 답신이 올 때까진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했다.

이자들이 순수한 의도로 그들을 도와주는 게 아니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 수밖에 없다.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 잘 이해해 주리라 믿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호의라 알아두면 좋겠어."

메리 부인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먹었다. 함정이 있는 것을 알고서도 발을 내미는 기분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그녀는 아들의 손을 꼭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후드로 얼굴을 가리게."

"이쪽으로 오시오."

"서둘러!"

이안은 말 쪽으로 움직이는 메리와 첼의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전사들은 폰트롤로 안내해 주겠지만, 그대들을 위해 목숨 바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협조하고 납작 엎드리라는 뜻이었다. 본인의 안전이 위험하다 생각되면, 언제고 두 사람을 버릴 수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메리가 이를 아득거리며 노려보자, 이안은 웃기만 했다.

"싫으시면 지금이라도 관두십시오."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비밀창고에서 땅거미처럼 살다가 비참하게 죽을 것인지, 아니면 조사단에 붙들려 데르가와 함께 처형될 것인지.

첼은 서둘러 움직이자는 듯 제 어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이안, 네놈은...."

"저는 그간 부인의 따뜻한 사랑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딱히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을 것 같군요."

"...."

메리는 후회했다. 그냥, 존재를 알았을 때 죽여버릴걸. 아니면 팔다리를 자르고 눈과 귀를 불로 지져 천려로 보내버릴걸. 숱하게 지나온 기회 속에 후회가 이다지도 많았구나.

"자. 이제 떠나세요."

"저, 저기 이안. 아버지는...."

"첼!"

메리는 더 이상 이안과 말 섞지 말라는 듯 제 아들을 노려봤다. 메리와 첼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말에 올라탔다.

"조사단이 저녁 식사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이네. 정문을 열어두어라."

"네. 알겠습니다!"

히이잉!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저택 중앙을 거세게 가로질렀다. 말 울음소리에 몇몇 병사가 반사적으로 돌아봤으나, 그뿐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오가는 게 말 아니던가.

타닥타닥!

말 두 마리는 재빨리 마을로 진입해 한적한 길을 내달렸다. 어둠 속에서 영지민 몇몇이 인영을 힐끔거렸으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뭔 일이 있어서 저리 바쁘게 간담."

"그러게요. 날도 어두워지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어둠에 묻혀서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택에 남아있던 천려족들은 말이 문제없이 내달리는 걸 보고 서둘러 뒷정리에 몰두했다.

"잔디를 자연스럽게 세워라."

"바위라도 올려놓을까요?"

"아니. 그러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다. 이전과 달라진 것 없이 복구해."

"네. 알겠습니다."

한편, 이안은 불 켜진 별채 쪽을 쳐다봤다. 메리 부인이 이런 상황에서까지 제 방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하려는 것이었다.

'대체 뭐기에… 메렐로프가 저를 도와줄 거라 생각했을까.'

하지만 현재 그곳은 에리카 단장이 쓰고 있었으니. 조만간 메리 부인을 따라 조사단이 떠나면, 그곳을 뒤져봐야 할 것 같다.

제47화. 꺼져

"에리카 님!"

부하의 외침에 에리카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곳에 와서 부하의 호들갑으로 좋았던 경우가 거의 없는데....

"백작 부인 메리와 그 아들 첼이 발견되었습니다!"

"뭐?"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굉장히 뜻밖인 희소식 아닌가! 에리카는 환희로 물든 눈을 반짝였다.

"어디서?!"

"그것이, 북쪽 문입니다. 검문하려던 병사를 제치고 말 두 마리가 도주하였습니다. 모두 네 명이었고, 문을 나서자마자 두 갈래로 찢어졌다 합니다."

"네 명이라고? 메리와 첼이 맞긴 해?"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자세히는 못 봤지만, 성년 전의 남자아이 머리칼이 붉은 기를 띠고 있다 했습니다. 여인도 중년에, 메리 부인의 인상과 흡사하고요. 말을 몬 자들은 아마 생존한 기사들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에리카는 탁자로 성큼성큼 걸어가 지도를 펼쳤다. 북쪽 성문을 지나서 양 갈래 길로 찢어졌다면, 동쪽과 서쪽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이었다. 메리와 첼이 서로 떨어지려 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추격은?"

"일단 검문 병사들이 뒤쫓고 있긴 합니다만, 서둘러 지원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보고된 위치."

"현재 이곳까지 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잠깐잠깐...."

에리카는 양손으로 메리와 첼의 흔적을 천천히 짚었다. 둘은 좌우로 갈라지면서 동시에 계속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북쪽? 북쪽이라…. 에리카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메렐로프, 여기는 제외. 얽히지 않으려고 성문까지 걸어 잠갔으니...."

메렐로프 다음은 상업 도시로 유명한 셰이론이었다. 사실 다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육로로 가면 열흘 이상 걸리는 곳이었지만 말이다.

브라츠에서 중앙까지가 보름인 것을 생각하면 실로 어이없는 예상 시간이었다. 변경의 기준인 '덴바 산맥'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셰이론을 거점으로 찍을 것 같은데."

"셰이론은 어지간한 타 영지로 길이 다 통합니다. 브라츠 백작 부인의 친정인 폰트롤도 말로 달리면 하루 안에 닿을 겁니다."

"폰트롤, 좋다. 전서구를 날려라."

"추격대는 얼마나 편성할까요?"

"일단은...."

에리카는 잠시 멈칫거렸다. 조력자의 등장이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데르가가 지하 감옥에 잡혀 있는 와중, 살아남은 기사가 있다는 게 의아했다. 변방 타지에 관해서는 사전지식이 별로 없었으니, 혹여 숨겨둔 병력이 따로 있다면 곤란하지 않은가?

메리와 첼이 산맥으로 그들을 유인하는 걸 수도 있다.

"일단 스무 명 정도 보낸다."

에리카는 창밖을 힐끔거리며 명령했다. 쿠실레인지 뭔지, 생소한 짐승 새끼들이 정원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전력을 다 뺀다면 천려족에게 저택 점유율을 빼앗길 수도 있다. 일단은, 그 정도가 최대다.

"기사라도 여인과 애를 데리고 스무 명을 상대하기에는 힘들 것 아닌가. 혹여 문제가 생긴다면 추격만 계속 붙이고 다시 전서를 날리라 해라."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살려서, 혹여 불가하다면 시체라도, 아니, 머리통이라도 가져와야 한다. 알고 있겠지?"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에리카의 명을 받은 부하가 서둘러 뛰쳐나갔다. 도망쳤다 한들,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

에리카는 지도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메리와 첼만 붙잡으면 성가시게 들러붙은 이안과 천려족을 단번에 눌러버릴 수 있으리라.

이때는 몰랐다.

고작 사흘 가는 웃음이라는 걸.

* * *

"이쪽입니다!"

"이쪽!"

"양쪽으로 나뉘어 달려!"

타닥타닥!

세상을 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말 두 마리가 달려나갔다. 그 뒤를 맹렬하게 쫓는 중앙군 추격대. 천려족 전사들은 뒤를 도는 여유까지 보이며 유유히 나무 사이를 빠져나갔다.

"젠장!"

그 모습에 중앙군은 더더욱 그들의 정체를 데르가의 기사들이라 여겼다. 초행길인 추격대와 달리 길을 잘 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쉬이이익.

하지만 천려족이 길을 잘 찾을 수 있었던 건, 하늘에서 신호를 계속 주는 매 덕분이었다. 바위와 이끼 온갖 억센 잡풀들로 엉망인 육로와 달리, 하늘은 그 어떤 것도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로웠으니까.

"이쯤 할까?"

"전체 다 해서 스무 명 정도 되는 것 같은데."

휘이익.

전사 한 명이 휘파람을 불며 작전 변경을 알렸다. 그들은 수풀 사이로 말을 보낸 다음, 훌쩍 뛰어내려 착지했다. 실로 인간의 몸놀림이라 볼 수 없을 정도다.

"표적이 멈췄다!"

"멈춰! 포위해!"

히이잉!

울창한 숲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정체 모를 짐승의 울음뿐. 추격대 전원이 활을 겨눈 채 소리쳤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정체를 밝혀라, 얼굴을 드러내!"

하지만 두 사내의 대답은 검을 꺼내는 것. 전투 의사 표시를 보이자, 추격대는 마른 침을 삼키며 활시위를 더욱 세게 당겼다.

"여기서 대장이 누구지?"

"뭐, 뭐라고?"

"대장이 누구냐고, 물었다."

추격대가 잠시 멈칫거렸다. 말투가 좀 어눌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추격 대장이 앞서 나오며 검을 빼 들자, 잴 것 없이 달려드는 두 사내 때문에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도망가는 놈은 다 죽인다!"

"쏴, 쏴라! 화살을 쏴!"

"맞서 싸우는 놈 중 딱 한 놈만 살려주겠어!"

"네 이노오옴!"

챙! 채앵!

전사 둘은 공중으로 날렵하게 뛰어오르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이내 화살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고, 그들은 검으로 쳐내며 앞으로 돌진했다. 전사 중 한 명의 팔뚝에 화살 두 개가 박혔다.

푸우욱!

촤아아악!

"으아아악!"

그와 동시에 나가떨어지는 추격대장의 머리통. 피가 분수처럼 터져 올랐지만, 그 누구도 이 현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저게 인간인가? 짐승인가? 부대장의 머릿속에 그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처...."

촤악!

천려족이냐는 말이 결국 뱉어지지 못했다. 전사들은 마치 닭장에서 뛰노는 늑대와 같았다. 그들은 칼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물을 소매로 닦으며 선언하듯 말했다.

"우리는 데르가의 기사들이다. 쉽게 이기지 못할 것이니, 적어도 백 명은 데리고 오거라."

"히익!"

촤아아악!

스무 명.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여겼던 전력이 부질없이 흩어졌다. 어느샌가 주변에는 짐승의 울음보다 인간이 죽어가는 소리가 더욱 시끄럽게 가득 찼다.

전사들은 엎드린 채 벌벌 떠는 추격대 한 명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둘은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한 놈은 보내야 한다고 그랬지?'

'그래. 그래야 2차 추격대가 붙을 것이다.'

휘이익!

"으익! 살려, 살려줘! 살려주시오!"

전사들은 매를 불러 말의 위치를 확인하곤,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패닉에 빠진 병사는 인기척을 느끼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손만 빌어댔다. 나중에 겨우 고개를 들었지만, 사내들은 바람처럼 사라진 지 오래.

"허...."

괴물도 저런 괴물들이 있나.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주변에 낭자한 동료들의 시체가 아니었다면, 병사는 분명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 * *

"지금 뭐라고 했나?"

에리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흙투성이에 피를 뒤집어쓴 병사는 계속해서 말을 더듬으며 그날의 전투를 묘사했다.

"추, 추격대가 궤멸하였습니다."

"대체, 어떻게...."

"데르가의 기사가 맞았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듯 몸놀림이 예사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마검사 계열 같았는데요. 그, 얼굴은 확인 못 했고, 동료들 시체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연신 헛웃음만 흘리며 차로 입술을 축였다. 자그마치 스무 명이었다. 제아무리 상대가 기사라고 한들, 어느 정도의 단서 정도는 얻었어야 하지 않나. 그토록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위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메리와 첼은 확실하고?"

"확실합니다. 추격하는 동안 후드가 두어 번 벗겨졌습니다. 첼이 맞고, 메리가 맞습니다."

"젠장. 2차 추격대를 편성한다."

"에리카 님,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편성으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전력으로 움직여야 될까 말까 싶어서...."

병사의 말에 에리카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누가 지금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나? 당연히 한번에 몰아쳐서 잡으면 쉽고 좋지! 하지만 저택을 비울 수 없는 상사들의 사정이란 게 있는 게다.

"죄, 죄송합니다."

"자네는 그만 나가봐."

에리카는 병사가 나가자마자 테이블을 쓸어 던져버렸다. 메리와 첼을 발견한 건 다행이다만, 생각보다 난전이 길어지면 곤란했다.

"씨발, 진짜! 중앙에서는 왜 이렇게 답신이 느려?"

"아무래도 육로로 오다 보니...."

보고와 명령 혹은 간단한 서신 따위는 전서구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황제의 직인이 찍힌 서신은 무조건 담당관이 마차를 타고 전달해야 했다.

하필이면 그중에서도 중요하다는 작위임명장이니, 효율성이라곤 개나 줘버린 금빛 마차로 오겠지.

"이안 무리 말일세. 어떤가?"

"별다르게 수상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마을 재건하는데 정신이 팔려있습니다."

"개 같은 새끼들. 지들 땅이나 잘 돌볼 것이지."

메리와 첼의 뒤를 쫓느라 정신없는 중앙군과 달리, 그들은 영지에서 전투의 흔적을 지우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무너진 담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렸으며, 부상자를 옮기는 것 등등. 천려의 힘은 생각보다 도움이 되었으며, 영지민들의 호응 역시 생각보다 괜찮았다.

지랄 맞게도.

에리카는 속으로 이안을 씹어대다 멈칫거렸다. 이상하게 촉이 곤두서는 기분이다.

"메리와 첼이 말을 타고 성벽을 뚫었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그 전에는 어디 있었는데?"

영지를 쥐 잡듯 뒤졌는데도,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력자를 등에 업고 도망쳤다? 말은? 다른 짐승이면 몰라도 지금 브라츠에서 말을 운용할 수 있는 자들은 한정되어 있지 않나.

'…설마.'

이안이 얽혀있는 걸까?

"지금 당장 마구 담당자를 불러라."

"네. 알겠습니다."

중앙군이 관리하는 말 외에는 브라츠에서 소유하던 말들이 있었다. 왜 그걸 진작 그걸 확인해 보지 않았을까. 에리카는 자신의 아둔함에 짜증을 부리며 머리를 헝클였다.

똑똑.

"에리카 님."

하지만 먼저 방에 들어선 것은 마구 담당자가 아니라 이안이었다. 부하가 마구간으로 달려가는 걸 확인하고서 올라온 참이었다.

"무슨 일이지?"

메리 부인의 방에 널브러진 서류 더미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소품들 아닌가. 이안은 방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메리 부인과 첼의 추격은 진전이 좀 있으십니까?"

"그걸 왜 물어보나?"

이것 좀 보소? 에리카가 등받이에 팔을 비스듬히 걸치며 고개를 쳐들었다. 제 발이 저린 것도 아니고, 이런 타이밍에 저런 질문이라?

"당연히 궁금하지요. 혹여 메리 부인과 첼이 살아남아 기회를 도모한다면, 저 역시 안전하지 못하니까요."

에리카는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둘 다 생글생글 웃으며 간을 보고 있었는데, 먼저 표정이 굳어버린 것은 에리카였다.

제48화. 데르가의 밀서

"그런데 그자들 정말 기사 맞는답니까?"

"뭐?"

이안의 말에 에리카가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금 이안이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다. 천려족을 의심하고 있는 지금! 이안이 저리 말하는 것은 자백이나 다름없지 않나.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나 있나?"

"그럼요. 물론입니다. 데르가를 잡아들일 때, 숲에서 그의 기사들을 모두 정리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기사라니."

"하!"

이것 좀 보게나? 에리카는 기가 차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혹시 에리카 님의 부하 중 변절자가 있는 건 아닐까요?"

순간, 에리카의 머리에 망치가 내려치는 기분이었다. 이안의 말대로 변절자가 있다는 걸 믿은 게 아니라, 그 말이 시사하는 바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메리와 첼이 살아남아 영지 밖으로 도망쳤다는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고, 옆에 조력자까지 있다 하니 다들 그들이 무사히 도망치고 있다 생각할 겁니다."

"너, 너...!"

"그런데 혹여, 조력자라 알려진 자들이 변절자라 에리카 님을 곤경에 빠트리고자 한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두 사람을 감추지 않겠습니까?"

황궁의 명을 받고 내려온 몸이다 보니, 에리카는 충실하게 두 사람의 뒤를 쫓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존재가 증발한다면?

그녀는 두 사람의 생존 확인 여부라도 보고서를 올려야 했다. 이해 가능할 만한 증거, 예를 들어 시체 쪼가리라도 첨부하여서 말이다.

"서둘러 최대한의 전력으로 두 사람을 쫓는 게 좋겠습니다. 그들이 언제 어떻게 될지 그 누가 안답니까?"

제삼자가 들으면 에리카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이었으나, 그녀의 귀에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당장 저택에서 병사를 빼지 않으면, 메리와 첼을 죽여서 숨겨버리겠다. 그렇다면 네놈은 몇 년이고 흔적을 찾아 산맥을 떠돌아야 할 것이다.'

"이 X발새끼가...."

스르릉.

에리카는 욕설을 지껄이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흥분하면 지는 거라는 말이 있지 않나. 완벽하게 이안의 덫에 걸려버린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왜 흥분을 하고 그러십니까. 저는 에리카 님을 걱정해서 드린 조언인데."

"메리와 첼을 어디서 찾았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이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나? 나는 황궁의 명을 받은 조사단장이다. 나를 방해하는 건 황궁의 지엄한 결정을 방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에리카가 씩씩대며 쏟아댔지만, 이내 실수한 걸 깨닫고 인상을 찡그려댔다. 제 입으로 되짚은 것이다. 황궁의 명을 받았노라고.

그러니 당장이라도 메리와 첼의 뒤를 쫓아 영지 밖으로 달려나가는 게 본연의 의무이자,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직무유기라 시인한 것이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서둘러 메리와 첼의 도주를 도운 자들을 잡아들이셔야겠네요."

이안과 그자들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에리카가 입술만 잘근 깨물며 이안을 노려보는 동안, 심부름 갔던 부하가 돌아왔다.

"에리카 님, 마구 담당이 말하기를 브라츠 소유 말 두 마리가 없어졌다고...."

이안이 와 있는 걸 보고 서둘러 말꼬리를 흐렸지만, 이미 다 듣고 말았다. 이안은 그것 좀 보라는 듯 환히 웃었다.

"맞네요. 저택의 말이에요. 변절자인 게 확실합니다."

"지랄하지 마라. 네놈이 천려족과 짜고 치는 걸 모를 줄 아는가? 어디서 뻔뻔하게 자꾸 연길 하는 거지?"

"제가요? 천려족과요? 어찌 생사람 잡으십니까."

"사람 같지 않은 실력자들인 것만 봐도 그러하다!"

"원하신다면 이쪽으로 들어온 천려족 전력을 확인해 보십시오. 두 명이 비는지 보면 되시겠네요."

"너, 너...."

"설마, 천려족 전력도 확인 안 하고 계셨습니까? 황궁의 조사단장은 생각보다 느슨하게 일을 처리하는가 봅니다."

이안의 말은 명백히 모욕이었으나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설령 파악했다고 한들, 밖에서 따로 붙인 자라면 그걸 어찌 알겠는가?

"넌, 너는 내가 죽인다."

"그러지 마십시오. 무섭습니다."

"진짜야. 넌 내가 죽일 거야."

저주에 가까운 선언이었다. 저 건방진 천민 자식을 언제고 직접 참수하리라. 에리카는 이를 바득거린 다음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콰앙!

혼자 남겨진 이안. 그는 어깨만 으쓱거리며 메리 부인의 방을 쓱 훑어봤다. 분명 부인이 여기서 가져갈 게 있다 했는데....

드르륵.

서랍 안쪽은 반쯤 비어있었다. 보석이나 장신구 따위의 값어치 있는 것들은 조사단이 몰수한 모양이었다. 누락된 세금이 만만치 않으니, 그걸 갚기 위해 저택의 귀물은 모두 황궁에 귀속될 터.

'뭘까. 대체....'

이안이 혀를 쯧 차며 고민하는 동안, 에리카는 부하와 함께 복도를 내달려 밖으로 나갔다. 천려족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일이 대응할 여유가 없었다.

"병사를 소집해라."

"어, 얼마나요?"

"최소한만 남겨놓고 모두 추격대로 편성할 것이다."

"하, 하지만 그리되면...,"

천려족인 것을 알았으니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한 번에 몰아쳐서 놈들을 족쳐야만, 이안과 천려가 브라츠 가문 사람을 빼돌렸다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그래. 내가 밟아주마. 네놈들의 덫.'

"이안과 카칸을 감시해라."

"아, 네. 알겠습니다."

"혹여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보고해."

뭐가 됐든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을 데르가의 기사라 호칭했던 천려족 두 새끼를 잡는 순간, 이안을 비롯해 저택의 이방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소집!"

에리카와 중앙군이 소란스러워지자, 분위기만 살피던 천려족도 은밀히 움직였다. 전사 한 명이 네르사른에게로 가 상황을 보고했다.

"네르사른 님. 이안 경의 말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슬슬 매를 날리심이 좋겠습니다."

"그러지."

전사의 언질에 네르사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격대의 전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으니, 이제 메리와 첼을 처리해도 된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다.

그는 천려어로 짤막한 쪽지를 써서 부하에게 넘겨주었다.

"험준한 산맥이라 하는데, 어찌 잘 하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모래바람만 맞던 애들이."

"그대는 식구를 믿지 못하는가?"

"그럴 리가요. 전사들 아닙니까. 그저, 걱정입니다."

전사에겐 패배란 없다. 패배는 곧 죽음이요, 죽고 나서는 패배했다는 걸 자각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설령 위기에 처한다고 한들,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스스로 심장을 꺼낼지언정, 적들에게 빌미를 줄 리 없다.

"매를 날려 보내라."

"네. 아참, 남은 매가 카칸의 것인데요."

전사는 네르사른의 뒤쪽 침대를 힐끔거렸다. 카칸티르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복숭아를 맛보고 있었다. 그는 허락한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제노를 보내겠습니다."

"보내기 전, 단 과일을 먹여라. 녀석이 요즘 성격이 이상해졌어."

"알겠습니다. 쉬십시오."

끼익.

부하가 나가자, 네르사른이 뒤를 돌아봤다. 카칸티르는 여전히 창밖만 멍하니 보며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으나, 사막과 비교하면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카칸. 이제 영지에서 중앙군이 빠져나가면, 슬슬 데르가를 죽이고 정리하시지요. 천려를 오래 비워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렇지."

부마트의 일도 그러하고, 지금 사막에는 주둔지를 지키는 병력이 모자랐다. 대사막의 가호로 크게 걱정할 것 없지만, 집을 오래 비우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한데, 네르사른. 이안이 마력운용자라 황궁의 눈에 들면 언젠가는 중앙으로 올라가야 할 터인데, 그때는 이곳을 관리할 자가 누구 있겠나?"

"글쎄요. 베릭은 데리고 올라갈 것 같습니다."

"두고 간다 해도 그놈으로는 무리다."

카칸티르가 네르사른을 힐끔거렸다. 워낙에 오래 곁에 있었던 터라, 시선만으로도 그가 말하는 바를 알아챌 수 있었다. 네르사른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싫습니다."

"무엇이?"

"지금 저보고 여기 남으라는 말 아니십니까."

"오. 그렇게 느껴졌나?"

"제가 있으면 천려에게도 여러모로 이득이겠지요. 하지만 이안 경이 허락할지도 미지수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네르사른은 카칸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추워서 싫습니다."

"아하. 그거 중요하지."

"눈이 내리는 곳입니다. 혹한이라고요."

카칸티르는 낄낄대며 남은 복숭아를 마저 베어 물었다. 겨울까지 갈 것도 없다. 앞으로 두어 달, 가을바람이 차가워지면 천려 전사들의 향수가 깊어질 것이다. 그 전에 모든 걸 매듭지어야 했다.

"지금쯤 작위임명장이 내려오고 있겠지요?"

"그럴 것이네."

"카칸께서는 정녕 이안을 믿으십니까?"

"믿다니? 그가 마력운용자라는 것 말인가? 자네도 보지 않았나. 베릭이 기사와 싸우던 모습."

"제 말은, 마력운용자라는 것이 작위임명장을 뒤집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겁니다."

제국인들의 마법 숭배는 들어본 적이 있다. 그들이 윈첸을 믿고 따르듯 바리엘 사람들은 마법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지.

하지만 직접 겪은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변방. 마법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영지민들이 천지였다.

"글쎄다.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는 않아. 황궁에서 사람이 내려온다면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게다."

"그나저나 확실히 좀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네르사른이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며 중얼거렸다. 이쯤 하면 와야 할 때가 되었는데, 여전히 아무런 기미도 없었으니 말이다.

'대체 황궁에서는 뭘 하고 있는 건지 원.'

* * *

똑똑.

제1황자, 마리브 베로시온의 집무실은 밤중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황자는 가벼운 옷차림에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적막을 깨는 인기척에 그가 안경을 내려놓았다.

"들어오시오."

"마리브 저하. 보실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밤중에."

마리브가 식은 차로 입을 축이며 물었다. 보좌관이 내놓은 것은 구겨지고 더러운 서신 한 통이었다. 그가 먼저 내용물을 확인했는지, 입구는 열려 있었다.

"변방의 데르가 브라츠 백작이 보낸 밀서입니다. 일부러 황자님이 아닌 제 쪽으로 돌아서 왔습니다."

"브라츠 백작?"

마리브가 가볍게 눈을 깜빡였다. 브라츠라면 최근에 황제께서 탈세 혐의로 조사단을 보낸 곳 아닌가? 데르가 또한 가끔 국가 행사가 있을 때나 몇 번 봤던 인물이지, 사적으로는 전혀 친분이 없는 자였다.

그런데 거기서 서신이?

의아하면서도 미심쩍고,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인장이 안 찍혀 있군."

"대신 브라츠의 가보임을 증명하는 글귀가 안쪽에 새겨진 반지가 들어있었습니다. 10캐럿으로 추정되는 다이아몬드 반지입니다."

"흐음."

마리브는 탁자 위에 놓인 반지를 보고서 탄성을 내질렀다. 보석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라, 그걸 내놓을 만큼 백작의 처지가 다급하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이다.

"선처를 구하려면 아버지께 보내는 게 맞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 다른 내용이겠군."

"맞습니다."

보좌관이 곱게 접힌 종이를 내려놓았다.

잠시 후, 흥미롭게 글을 읽어가던 마리브의 눈매가 날카롭게 휘었다.

"이게 지금...."

제49화. 황궁 회의

-마리브 1황자 저하, 저는 데르가 브라츠 백작입니다. 급하여 길게 쓰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서자의 입적 결정을 위해 수도에서 내려왔던 행정부 소속 몰린 경이 제게 게일 2황자 저하의 의중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저하와 귀족 간의 동맹조합이 있는데 가입하는 것이 어떻겠냐고요. 저는 황궁을 위해 사는 자로서, 이것이 마리브 황자 저하께 부담되는 것을 알고, 거절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위험에 빠졌습니다. 황궁으로 돌아간 몰린과 서자가 저를 음해하여 탈세 혐의를 썼습니다. 억울합니다. 브라츠가 멸문된다면, 필시 황궁에서는 이곳을 다스리기 위해 사람을 보내겠지요. 그리고 높은 확률로 브라츠를 방문한 적 있는 몰린과 그의 측근들이 지배하게 될 겁니다.

이는 마리브 저하께 분명 해가 될 것입니다. 부디 수 대째 변경에서 야만족을 막아낸 브라츠 가문을 가엽게 여겨주소서.

사락.

마리브는 서신을 읽고서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안경테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거 생각지도 못 한 내용이었다. 보좌관 역시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연신 바깥 기척을 주시하는 중이다. 황궁에서는 작은 숨소리조차 시끄럽게 떠도는 법인지라.

"보좌관, 자네도 읽어보게."

서신을 건네받아 읽은 보좌관의 얼굴 역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네는 이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이라 생각하는가?"

"너무 적절히 섞여 있어 가리기 어렵습니다."

"우선, 하나씩 짚어보지. 게일이 지방 귀족들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은 확실해. 명명하진 않았지만, 그들만의 모임이 있는 것도 맞아."

중앙과 지방은 서로 견제하는 관계.

1황자는 차기 황제였기에 당연히 귀족을 누르려는 입장이었고, 2황자는 후계에서 밀려났기에 더욱 자유로이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브라츠 백작이 나를 위해 거절했다는 건 믿을 수 없군. 우리가 뭐 그리 특별한 사이라고."

"저도 그러합니다. 백작 입장이라면 게일 저하의 제안을 반기는 게 자연스러우니까요. 하지만 결국에는 거절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렇다면, 게일과 거리를 두고 싶은 이유가 있다 봐야 할 거야. 탈세 혐의로 밀고가 들어왔고, 조사단이 내려갔으니 아마 그 문제 때문이라 보는 게 맞겠다."

조용히 중얼거리며 정리하는 것이 참으로 영민했다. 앉은 자리에서, 한정된 정보와 서신만으로 멀리 떨어진 브라츠 영지의 속사정을 꿰뚫은 것이다.

"그렇다면 억울하다는 말은 기각하는 게 맞고, 브라츠가 멸문하면 그쪽 담당이었던 몰린 경이 주도하여 뒤처리하는 것도 맞다. 조사단장이 누구지?"

마리브의 질문에 보좌관이 잠시 멈칫거렸다. 황궁에서 하루에 거론되는 이름만 해도 수백 명이었다. 그런 자들을 일일이 어찌 기억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내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을 내놓았다.

"…에리카라는 자입니다."

"관계는?"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몰린 경의 친척 중 불법 토지 개발 건으로 고발된 자가 있었는데, 그때 무죄 증언을 해준 것이 에리카였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확인해 보겠습니다."

"됐네. 중요한 건 아니니."

"…하면 게일 저하께서 반역을 모의하고 있음도 신빙성이 있다는 거군요."

몰린은 게일의 사람이 맞으니까.

보좌관의 말에 마리브가 어깨를 장난스레 으쓱거렸다. 그것까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애매할 때는 미리 손을 써두는 것이 나았다.

한 수 한 수가 어지럽게 얽혀가는 황궁에서, 아주 작은 실수는 곧 밑바닥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내일, 아니지. 오늘 오전인가? 장관 총회의에 나도 참석한다 전해라."

마리브는 안경을 쓰며 나지막이 지시했다. 오전 중으로 신하들끼리 안건을 정하고 표결하는 국무회의였다. 마리브는 오후에 황제와 함께 그 보고를 듣는 역할이었기에, 참석한 적이 거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침에 소식 들으면 놀라서 뒤집어질 터다.

"네. 저하."

"그리고 다시 돌아온 김에, 일 처리 좀 하지."

"…각오하고 왔습니다."

"고맙네."

밤중에 출근한 보좌관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리브는 데르가의 서신을 서랍에 잘 넣어둔 다음, 지시했다.

"최근에 올라온 브라츠 영지 관련한 자료를 모두 가져오게. 특히 몰린 경이 제출한 보고서를 중심으로."

"네. 저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끼이익.

천천히 닫히는 문. 마리브는 다시 보던 서류에 집중했다. 하지만 서랍 속에 넣어둔 데르가의 편지가 영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일….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할 텐데.'

그리고 해가 떠올라 오전, 황궁 대회의실.

각 부처의 장관들이 하나둘씩 모여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새로운 자리가 마련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오늘 누가 오시는가?"

"1황자 저하께서 참석하신다 하십니다."

"마리브 저하께서?"

"못 들으셨습니까?"

"아아니! 왜 나는 안 알려주는가?"

"아침에 하인을 보냈습니다만."

장관 총회의는 매일 오전마다 열리는 자리였다. 마리브가 올 수도 있는 자리지만, 황제에게 안건을 올리기 전 신하들끼리 의견을 조율하는 자리였기에 영 불편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무슨 일인지 아시는 분 있소?"

"글쎄요. 저도 들은 게 없어서...."

마리브와 긴밀한 관계인 자들도 의아해서 고개를 내저었다. 하물며 게일의 편으로 돌아선 자들은 아침 댓바람부터 속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게일 저하에게 연락을 넣어볼까 했지만, 회의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미치겠군. 벌써부터 체하는 기분일세."

"저도 그럽니다. 오늘 안건이 대체 뭐기에 직접 오신단 말입니까? 어차피 오후 되면 또 볼 것을."

"그러고 보니 하루에 두 번 뵙게 생겼구먼."

"꿈자리가 안 좋더라니...."

"마리브 저하 드십니다."

이리저리 들리지 않게 씹어대던 장관들이 하인의 말에 벌떡 일어서며 예를 갖췄다. 마리브 역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아침부터 얼굴 보니 반갑습니다들."

"저하, 어쩐 일로...."

"그러게요. 어쩐 일일까요? 하하하."

돌발 행동을 한 것 자체가 의중이 따로 있다는 방증이었다. 돌려 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진짜 속내를 보이지도 않았다. 수상은 봉을 두드리며 회의 시작을 알렸다.

땅땅땅!

"크흠. 그러면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먼저 저부터...."

분명 뜨거운 여름날의 아침인데, 어찌 살얼음 걷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권력 다툼과 관련 없는 몇몇 부서의 장관들이 서둘러 발언을 이어나갔다. 힐끔힐끔, 다들 마리브의 눈치를 보긴 했으나, 정작 당사자인 그는 웃고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한창 회의가 무르익을 때.

"아참. 그리고 어제저녁 브라츠에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에리카 단장이 보낸 것입니다."

법무부 장관의 말에 마리브가 고개를 들었다.

"데르가 브라츠의 탈세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았으며, 저택 재산 중 일부분을 몰수했다 알렸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백작의 저항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항이요?"

"조사단 및 중앙지원군과 데르가 사병 및 영지민들간의 전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는 승리하여 데르가를 구금하였고, 수습 중이라 전했습니다. 다만, 백작의 직계인 부인과 아들은 추적 중입니다."

"탈세도 모자라 병사로 저항이라니! 참수 중에서도 참수를 적용하는 게 합당합니다."

"황제께 안건을 올리지요."

서기들이 장관들의 말을 받아적으며 정신없이 펜을 놀렸다. 마리브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뚝- 멈췄지만.

"…한데요."

"예. 저하. 말씀하시지요."

"처형 대상에는 백작과 그 부인, 그리고 아들 하나가 답니까? 이안이라는 서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자는 몰린 경의 보고서로 인해 입적부적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천려족과 화친을 맺으면서 이미 국경을 넘은 상태입니다."

"물론, 엄격하게 따진다면 노예로 강등하는 게 맞겠습니다만, 들어보니 밀고장을 서자가 낸 것이라 하더군요. 정상참작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사단장의 보고서에 서자 언급은 없습니까?"

"…아. 있었습니다."

"보고서를 보여주시죠."

마리브의 말에 법무부 장관 부하가 서류를 선별하여 앞으로 내밀었다. 마리브가 빠르게 훑어나가자, 장관이 말을 덧붙였다.

"국법에 따르면 멸문하는 성에 부합하는 자만 처형될 것입니다. 서자에게는 노예형이 맞습니다."

"장관, 저도 장관을 신뢰합니다.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저 확인을 하려 했어요."

몰린과 서자가 합심하여 데르가를 밀고하였다면, 서자 역시 게일의 선을 탄 것인가? 그러면 천려족과의 관계는 어찌 되는 것일까? 혹여 게일 세력에 야만족까지 끼어들면 곤란한 참인데....

마리브는 톡톡, 테이블만 두드린 채 침묵했다.

장관들 역시 자연스레 입을 꾹 다물며 눈동자를 굴려댔다. 한참이 지나서야 마리브의 입이 열렸다.

"브라츠를 멸문하면, 그 영지 관리는 어찌할 것입니까? 탈세임이 밝혀졌으니, 브라츠에서 올라오는 조세 양이 늘어날 텐데요."

"황궁에서 사람을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변방은 안 그래도 자치권이 강하여 이웃 영지에 흡수되면 힘이 너무 커질 것입니다."

"그렇지요. 당연히 황궁에서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세금을 더 걷을 수 있습니다. 그간 걷지 못했던 조세도 내라 하고요."

"하지만 상황이 이런지라, 밀린 조세는 새 영주가 세워지면 그때 기간을 정하여 내라 하는 게...."

"행정부의 몰린 행정관이 브라츠를 전담하지 않았나요? 장관께서 그자와 의논하여 적합한 자를 선별하는 게 좋겠소."

의견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그리고 그걸 막아선 것이 마리브의 고갯짓이었다.

"저는 조금 우려스럽습니다."

"무엇이 그러하신지...."

"보고서를 보아하니 전투가 꽤 격렬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나중에는 영지민들까지 합류했다 하지요. 데르가의 죄와는 별개로, 중앙군이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차기 영주가 그쪽 출신이라면 영지민들이 어찌 반응하겠습니까?"

"농민들의 눈치까지 봐야 할 필요가...."

"눈치가 아니라, 생산량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특히 브라츠는 대사막과 접경하고 있어요. 여기 앉으신 분 중, 브라츠 영지의 특성을 모르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조금 까다롭다. 척박하고, 넓으며, 사막과 접하였지만, 또 제국 쪽 방향으로는 가파른 산이 즐비하지 않나.

"그리고 천려족. 브라츠와 관계를 이어오던 자들입니다. 이곳에서 천려어를 할 줄 아는 분, 계십니까?"

"그것이, 야만족들은 공용어를 곧잘 쓴다 합니다."

"그러면 주도권이 그쪽으로 가는 겁니다."

단순히 '영주를 새로 세우자'로 의견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이거 파고들다 보니 더 복잡했다.

"그러면, 해결 방도가 무엇 있겠습니까?"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구석에 앉아있던 마법부 장관, 웨슬리였다. 2황자 게일의 숨겨진 연인이라 소문이 떠도는 여인. 유일하게 이곳에서 마리브의 시선을 받아칠 수 있는 여인.

이에 마리브는 싱긋 웃었다.

"영주 임명을 좀 미룹시다."

제50화. 멸문의 밤

"영주 자리가 비어있으면 혼란이 가중될 것인데요."

수상의 조심스러운 반박에 마리브가 대안을 내놓았다.

"대신 임시직으로 자문관을 파견하면 됩니다. 성과를 보면서 민심을 챙기고, 후에 영주를 세움이 마땅합니다."

"이미 에리카 조사단장이 가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수습을 진행하고 있을 겁니다."

웨슬리의 의견에 마리브가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노골적인 무시에 웨슬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사단장은 영지민 처지에서 그들 가족을 죽인 자입니다. 게다가 고작 세 명 잡아들이는데 두 명은 파악도 못 하고 있지요."

타악.

그는 서류를 던지며 조사단장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걸 애써 숨기지 않았다. 반박할 거리 없이 모든 게 사실이었으니까. 장관들은 고개만 주억거리며 동의한다는 뜻을 표했다.

"황명으로 일어난 일이니, 제국 차원에서 빠른 수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곧 황제이신 제 아버지와 바리엘의 명예이겠지요."

"…이견 없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구구절절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게다가 브라츠 영지는 타지와 비교하면 생산량이 월등하게 떨어졌다. 수도에서는 좀 먼가? 뒷생각이 없는 장관들은 그런 곳을 누가 다스리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럼 자문관을 파견한 후 경과를 지켜보겠습니다. 영주 임명은 그 후에 다시 논의하는 것으로 하지요."

"브라츠는 거리가 머니 회의가 끝나는 즉시 서신을 먼저 내려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게끔, 전서구를 날립시다."

"동의합니다."

마리브는 혹여 게일이 끼어들 틈조차 주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은 합리적인 제안이었으니, 수상은 안건을 확정 짓기 위해 봉을 들었다.

웨슬리의 발언에 허공에서 멈추었지만.

"재건을 위한 자문관이라 하신다면-"

그녀는 재빨리 끼어들며 물었다.

"누구를 생각하시는지요?"

"글쎄요. 아무래도 로만드로가 제일 적임자겠지요. 그자는 얼마 전 백색 신전 근처의 지진 피해 지역에서도 활약을 보여줬으니."

"하면 몰린 경도 함께 내려보내겠습니다."

"몰린 경을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끈덕진 의도였다. 마리브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몰린 경은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요."

"하지만 황궁에서 그 영지에 관해 제일 잘 아는 것은 확실하지요. 본인에게 물어, 괜찮다면 같이 파견함이 마땅합니다."

웨슬리의 시선에 장관들이 서로를 힐끗거렸다. 이게 이렇게 길게 갈 문제인가? 돌봐야 할 국정 문제는 산더미다. 분위기를 읽은 수상은 봉을 내려치며 대답했다.

"이견 없습니다."

땅땅땅!

"자, 다음 안건은...."

"블라스터해로 통하는 뱃길이...."

'젠장. 뭐지?'

그녀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서류로 시선을 내렸으나,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진 못했다. 오전 회의까지 참석해서 저럴 정도면 분명 마리브의 의중이 따로 있을 것이다.

'일단 자문관 혼자 보내는 건 막았다만....'

웨슬리가 힐끔 쳐다보자, 마리브는 눈썹만 까딱거리며 웃었다. 문제는, 그가 웃으면 꼭 저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거다.

"…하면 오늘 총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소."

"수고하셨습니다."

"오후에 폐하와 뵙겠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마리브는 미련 없이 회의장을 나섰다.

그의 뒤로 허리를 숙이는 장관들. 혹여 차라도 해야 하나 싶어서 긴장하던 차이다. 마리브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하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로만드로를 불러라."

"로만드로요?"

부하는 살짝 난감해하며 되물었다. 로만드로는 백색 신전을 수습하고 겨우 중앙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깨가 잔뜩 쏟아질 신혼에, 벌써 두어 달째 아내와 생이별을 시켜놓았거늘. 다시금 마리브가 부른다는 걸 알면 사표를 낼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왜 그리 보고 서 있나?"

"아닙니다. 그, 음.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쩌겠나. 까라면 까야지.

로만드로를 설득하여 데려오는 것도 부하의 능력. 마리브는 부하의 새까만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웨슬리 쪽을 힐끔거리며 등을 돌렸다.

* * *

"괜찮으시겠습니까? 저희가 없어도."

"내 걱정일랑 말고 서둘러 출발하시오."

에리카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중앙군 대장을 안심시켰다. 저택에 남아있어야 하는 최소한의 전력 중, 에리카가 포함된 것이다.

"짐승 소굴에 두고 가는 기분입니다."

"조사단을 해하면 중앙에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이안이라는 놈이 재수는 없어도 계산은 빠릿빠릿하니, 서투르게 험한 짓을 하진 않을 겁니다."

에리카를 포함해서 정예 다섯 명만 저택에 남기로 했다. 이름 모를 말단 백 명보다 에리카 한 명이 지키고 서 있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으니까.

실제 전투에서는 그리 중심되는 실력자도 아니어서, 이것이 최선인 전략이었다. 그들을 제외한 모든 병력은 메리와 첼의 뒤를 쫓아 브라츠를 떠날 참이다.

"그럼 서둘러 다녀오겠습니다."

"꼭, 꼭 시체라도 회수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출발한다!"

"출발!"

병사들은 대열을 정리하며 저택을 빠져나왔다. 아이들이 구경 삼아 길거리를 뛰어다녔고, 영지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중앙군의 철수 아닌 철수를 입방아에 올렸다.

"마님과 첼 도련님 찾으러 간다지? 얼마 전에 살아서 성문을 나갔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봐."

"이 사람아, 말조심해. 반역자들 아닌가."

"아이고! 속이 다 시원하다! 가서 영원히 오지 마시구려! 그대~로 중앙, 너네 집까지 가버려!"

"가버려! 다시는 오지 마!"

"썩 꺼져!"

전투에 휘말려 가족과 터를 잃은 영지민들이 돌멩이 따위를 던지며 소란을 피워댔으나, 중앙군 병사들은 언짢게 쳐다만 볼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들 사이사이에 버티고 서 있는 천려족들 때문이다.

"잘 가라. 멀리 안 나간다."

"저놈들 나가면 성문에 쇳물을 부어버리자!"

"그럼 우리는 어떻게 나가나, 이 사람아."

"밥이나 축내고, 개쌍놈의 새끼들."

"어허, 듣겠어."

출정하자마자, 그것도 영지를 벗어나기 전에 물의를 빚을 순 없었다. 주둔하는 동안 영지민들의 식량을 털어낸 것도 사실이긴 했다.

흥분한 자들과 달리 순수하게 기뻐하며 내달리는 자도 있었으니. 바로 아이들이다.

"와아아! 중앙군이 돌아간다!"

"엄마, 엄마! 병사들이 다 돌아간대요!"

패전한 이국의 병사들 같다. 전투로 인한 영지민들의 인식이 그러했고, 현실이 그러했다. 거리상으로 따지면 중앙보다 천려족이나 하완 왕국이 훨씬 더 가깝지 않나.

"다들 신났군."

에리카는 저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혀를 차댔다. 그녀는 일단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문으로 돌아섰다. 하나, 그 앞을 가로막은 천려의 전사들.

"뭐, 뭐야?"

"본관은 앞으로 우리가 쓰겠소. 그대들은 인원수도 적으니, 앞으로는 천막을 이용하도록 하시오."

"이것들이 미쳤나! 지금 누구보고!"

"불만이 있다면 카칸티르에게 고하시오."

에리카는 황당하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아직 중앙군이 영지를 빠져나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척을 지겠다고?

한 시각 전까지만 해도 자유롭게 드나들던 본채인데, 이게 대체 무슨 처지인지 모르겠다.

"그래, 한번 보자. 네놈 대장. 내 따져야겠다."

"…따라오시오."

에리카는 전사의 안내를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카칸티르와 이안이 함께 있었다.

콰앙!

"장난 까나? 엉?"

"무슨 일 있습니까? 중앙군은 떠났고요?"

"닥쳐. 네 알 바 아니니까. 본관을 네놈들이 쓰겠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네놈들이야말로 밖에서 천막 치며 사는 놈들 아니냐?"

고함 지르며 날뛰는 꼴이 가관이었다. 이안은 한숨을 삼키며 에리카를 빤히 쳐다봤다.

카칸티르도 이골이라도 난 것처럼 혀를 차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동거 아닌 동거로 얼굴 맞댄 지 오래지만, 당최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이봐. 본관을 쓰고 싶다면 식구 수를 더 줄이지 그러나. 원한다면 너 혼자 정도는 방을 내줄 수 있어. 복도 끝방에 창고가 남아있거든."

"…이봐, 너…?"

"참고로 식구 수 줄이는 게 힘들다면 도와줄 수 있다. 검이 녹슬 것 같으니, 고깃덩이를 썰 때가 되었거든."

노골적인 협박질에 에리카의 얼굴이 희게 변했다. 야만족은 확실히 야만족이다. 중앙군 빠져나가자마자 이리 태도가 바뀌는 것으로 보아, 절대 상종하면 안 될 자라는 걸 새삼 깨달은 터다.

이안은 둘 사이에 끼어들며 주제를 환기했다.

"어쨌거나 잘 왔습니다. 조사단이 황궁으로 보낼 보고서와 자료 따위는 묶음으로 정리해서 내놓았으니 들고 가시면 되겠고, 이제 데르가의 처형을 진행하려 하는데요."

갑자기 훅 들어온 데르가의 처형식. 에리카는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손으로 엑스자를 그렸다.

"모든 건 절차라는 게 있어. 데르가의 처형은 메리와 첼의 신병 확보 이후에 진행될 것이다."

"메리와 첼의 신병이 확보되지 않는다면요? 언제고 여기서 눌러앉아 있을 겁니까?"

못을 박으려는 속셈이었다. 일주일이면 일주일, 한 달이면 한 달, 정해진 기간 안에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영지를 확실히 떠나라는 종용.

에리카가 입술을 깨물었다.

"…말이 과하군."

"죄송합니다. 식충이라는 표현보다는 덜 기분 나빠하실 것 같아서."

이안의 말에 에리카가 무어라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카칸티르가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단검을 까딱거렸다.

"일주일. 그 안에 처형식을 진행하지 않으면 데르가의 숨은 우리가 끊어놓을 것이다."

여기엔 두 가지 의도가 담겨있었다.

하나는 황궁에 보내는 천려인들의 입장 표명이다. 조사단과 중앙군과 대적하여 그들을 몰아내긴 했으나, 이는 황명에 반하여 데르가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진실로 영지를 위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에리카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계속 버틴다면 데르가의 숨과 함께 그대의 숨도 끊어질 것이라는. 그게 어떤 방식이든 말이다.

"하아."

에리카가 이를 갈며 무어라 받아칠까 고민하던 때였다.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에리카 님! 에리카 님!"

조사단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노크도 없이 응접실 문을 확 열어젖혔다가, 살벌한 기운을 느끼고 움찔거렸다.

"에리카 님, 드디어 도착, 헉!"

"…도착? 무엇이?"

그와 동시에 이안과 카칸티르 역시 고개가 돌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부하에게 집중되었다. 제일 막내인 것 같은데, 상기된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에리카는 저도 모르게 마음 한편에서 희망이 퐁퐁 솟아나는 걸 느꼈다.

혹시, 설마, 젠장, 드디어?

"…중앙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

"...!"

"이 X발새끼들, 다 죽었다!"

"에리카 님,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에리카가 쾌재를 부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뒤에 버티고 있던 부하들 역시 의기양양하게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호재 중의 호재요, 이안과 천려를 단번에 쫓아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카드!

영주 임명이 진행되면 공식적으로 이곳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저 천박하고 재수 없는 천민 서자와 짐승족을 단번에 눌러버리리라.

"중앙 서신! 어디, 당장 내려가마!"

"아, 네! 내려가실 필요 없습니다. 전서구로 와서."

그 말에 한껏 고조되었던 분위기가 파사삭 식는 것 같았다. 중앙 서신이 '전서구'로 왔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카칸티르와 조사단 부하만 이 영문 모를 분위기를 헤아릴 뿐이다.

제51화. 꺾인 깃대

조사단원은 쭈뼛쭈뼛 어색하게 주위를 돌아봤다. 에리카를 비롯한 동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탓이다. 한순간에 끓어오르던 열기가 파삭 식어버린 것 같았다.

에리카는 마른 침을 삼키며 되물었다.

"전서구로 왔다고? 사실인가?"

"아. 네네. 여기 있습니다."

타앗!

에리카는 단번에 서신을 낚아챘다. 비둘기를 타고 왔으니 황제의 인장은 당연히 없다. 대신 뚜렷하게 찍혀있는 총회의 인장.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반응이 왜 이런지 모르겠군."

카칸티르는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이안이 웃음을 띠며 시선을 던졌다.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상당히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건 분명했으니.

"황명은 전서구로 날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중앙에서 내려왔다고 한들, 작위임명장이 아니라 다른 전언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작위 임명이 미뤄지거나 취소된 것 같은데. 에리카가 곤란해질수록 이안에게는 기회이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서신을 읽어가는 에리카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아니, X발, 미친...."

이안은 에리카의 손에 들린 것을 재빨리 낚아채 뺏어왔다. 그녀를 비롯해 조사단이 반사적으로 덤벼들었으나, 천려의 전사들이 한 발 더 빨랐다.

"가만히 있지?"

"…이, 내놓지 못해?"

"가만히 있으라 경고했다."

무기를 든 조사단과 달리 천려 전사들은 맨손이었지만,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머리통을 으깨버리겠다는 살기가 넘쳐 흘렀다. 중앙 서신까지 확인한 에리카로서는,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

카칸티르는 여유롭게 잔을 들어 보이며 요청했다.

"읽어주시게나. 이안 경."

"네. 카칸."

이안은 목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데르가 브라츠의 반란으로 영지의 피해가 큰 것으로 추측한다. 이는 곧 내년의 생산량과 조세에 영향이 있으니, 황궁에서는 재건을 담당할 임시 자문관을 파견할 것이다.

파견자는 로만드로와 몰린, 맥, 드고르이다. 권한은 로만드로에게 있으며 데르가 브라츠의 처분 권한 역시 로만드로에게 일임한다.

영주 임명은 안정화 이후에 진행할 것이다. 브라츠 영지 전역에 알려 협조를 당부하라. 또한 조사단장 버티 에리카는 속히 브라츠의 멸문을 완수하라. 이상.

"자문관이 온다는군요."

"자문관이라. 그자의 역할은 어찌 되겠는가?"

"서신에 적혀있듯이, 영지의 전반적인 재건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황궁으로 올라갈 저와 천려족의 평가 역시 그에게 달려있겠지요."

"흐음. 눈앞의 이자보다 중요한 자라는 뜻이군."

카칸티르가 에리카를 턱으로 지목하며 웃었다. 전사들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고, 에리카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분노도 분노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이럴 수는 없는데....'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서신을 황망히 쳐다보며 되뇌었다. 그런다고 이미 적혀있는 글자가 바뀔 리는 없지만 말이다.

"에리카 조사단장님."

이안은 우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데르가의 처분 권한이 로만드로라는 자문관에게 일임된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아시지요?"

말로는 영주 임명을 미루겠다고 하였지만, 후보에서 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데르가의 처형 집행도 못 하고 그저 반역자의 뒤꽁무니만 뒤쫓는 개' 신세가 적당하겠다.

"처형식의 진짜 주인공은 죄수가 아니라 조사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아쉽게 됐습니다."

목 잘린 죄수를 세상에 보여주며 황제의 영광과 조사관의 유능함을 드높이는, 일종의 쇼 아니던가. 에리카는 잠시 얼이 빠진 것처럼 굳어 서 있었다.

"자. 그럼 얘기를 한번 해볼까요? 다른 건 몰라도 처형식만큼은 에리카 단장님이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

"…뭐?"

"서신을 읽은 자들만 입을 모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황제의 명도 아니고 총회 지시인데, 변방에서 융통성 있게 일 처리할 수도 있지요."

"어떻게?"

"로만드로 조사관이 오려면 보름 정도 남았습니다."

간단하다. 이른 시일 내에 데르가의 목을 매달고, 로만드로가 오면 서신을 받기 전에 일을 치렀노라 전하면 된다. 크게 문제 될 것 하나 없는 일이었다.

"대신 처형식에서 데르가의 숨통을 끊는 것은 천려족에게 맡겨주십시오. 어차피 지금 인력이 모자라서 준비하려면 천려족이 도와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봤을 때는 서로에게 좋은 기회라 생각됩니다."

"그래, 에리카. 수고를 덜어줄 수 있네. 데르가를 공중에 매달면 창으로 심장을 꿰뚫어버리지. 그만큼 인상 깊은 처형식도 없을 걸세."

이건 제안이 아니었다. 거절할 수 없는 선택지를 어찌 제안이라 부르겠는가. 에리카가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망설이는 순간이었다.

똑똑.

이내 밖에서 천려의 전사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칸. 이안 님. 문제가 좀 생겼는데요."

"잠시 기다리지."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일까. 지금으로는 문제를 일으킬 만한 요소가 없다. 굳이 고르자면 메리와 첼 쪽의 문제인데, 중앙군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 일은 아닐 것이다.

이안은 에리카를 종용하며 상황을 대충 마무리했다.

"아무튼, 에리카 단장님. 서둘러 데르가의 처형식을 준비해 주십시오. 공표문 쓰는 동안, 나머지는 저희가 준비하도록 하지요"

저 새끼가, 처형식을 본 적이나 있나? 공표문이 필요한 건 또 어찌 알았지? 에리카가 의뭉스럽다는 듯이 이안을 노려봤으나, 노골적으로 나가 달라는 분위기에 물러서고 말았다.

"…고민 좀 해보지."

"오래 걸리면 서로 피곤해집니다."

"…가자."

콰앙!

말은 저렇게 해도,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펜과 종이를 꺼내 들 것이다. 우선 몰린에게 따지는 편지를 먼저 쓰겠지만 말이다.

포도주를 마시던 카칸티르가 밖에서 대기하던 전사를 불렀다.

"들어라."

"…카칸, 어떡하죠?"

"무슨 일이지?"

전사는 주춤대며 뒷주머니에서 죽은 새 사체를 꺼냈다. 목에 감긴 흰색 천이 새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거, 혹시 중앙에서 보낸 전서구입니까?"

"맞는 것 같네만."

"아. 이런. 그것도 모르고 죽여버렸네. 어쩝니까? 돌 던졌더니 바로 맞아버렸습니다."

"잠깐 보게나."

천이 묶은 형태로 보아 전서구가 맞긴 했다. 하지만 황궁에서 온 것은 아니었다. 그 모습에 카칸티르가 전사를 가볍게 꾸중했다.

"애먼 새에게 돌은 왜 던지느냐?"

"죄송합니다. 창문에서 계속 부리만 쪼고 있길래, 시끄러워서 그만."

"창문?"

"조사단장 방이요. 4층, 이전에 메리 부인 방이라는 곳 말입니다. 맞을 줄은 저도 진짜 몰랐습니다. 아, 내가 제구력이 이렇게 좋았나?"

"쓸데없는 소리."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에리카에게 갈 전서구가 확실했다. 이안은 재빨리 비둘기 옷 안쪽, 잘 박음질 된 주머니에서 종이를 발견했다.

부스럭.

"먼저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오늘이 날이긴 날이군. 중앙군은 떠났고, 매와 비둘기가 날아드니 말일세."

카칸티르는 어이없이 중얼거리며 다시금 포도주로 입을 축였다. 빠르게 편지 내용을 파악하던 이안은 하, 하고 알 수 없는 탄성을 내질렀다.

-단장 버티 에리카는 들으라. 문제가 생겼네. 데르가가 마리브 1황자 저하에게 편지를 쓴 모양이야. 내용이야 짐작 가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네.

어쨌거나 덕분에 마리브 1황자 저하가 갑자기 총회에 참석하여 영주 임명을 날려 버렸어. 수습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기다리게. 나도 곧 자문관과 함께 브라츠로 내려갈 것이니.

"무어라 적혀있는가?"

"이제 좀 알겠습니다. 에리카 조사단장의 영주 임명이 왜 불발되었는지 말입니다. 그래 어쩐지, 이리 쉽게 손바닥 뒤집듯 바꿀 일이 아닌데...."

보름을 내달려 변경으로 와서 목숨 내놓고 전투를 치렀다. 그것도 반역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저지른 일. 에리카에게 약속했던 보상이 주어지지 못한다면, 후환을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편지를 건네 받은 카칸티르도 혀를 찼다.

"뭔가 했더니 권력 다툼이었군. 그나저나 데르가가 편지를? 어느 틈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꼴이 우습게 됐습니다. 눈치 빠른 1황자가 모두에게 한 방 먹인 셈이지요. 덕분에 저희는 이득이요, 데르가는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이안은 초 위에 서신을 올려 태워버렸다. 어찌 됐든 한배를 탄 몰린과 에리카의 관계가 어긋날수록 일이 쉽게 돌아갈 것이다.

"자문관인 로만드로가 도착하면 필히 대접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마리브 1황자는 저와 몰린이 결탁했다는 걸 짐작하고 있을 테니, 2황자의 세력이라 여길지도 모릅니다."

"정작 몰린은 우리를 거슬려 할 것인데?"

특히 이안을. 데르가의 고발은 그렇다 쳐도, 이안이 천려족을 업고 들어오는 것은 몰린의 계획에 없었던 일 아닌가. 그로 인해 영지 점령이 어려워진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입장을 보다 정확하게 정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여차했다가 양쪽에서 뚜드려 맞으면 곤란하니까요."

"그대는 1황자에게 기우는 것 같군."

"…적자이며 후계자이지 않습니까. 또한, 황궁에서 정식으로 영주 재건을 위임한 인물입니다. 그자의 판단에 따라, 천려족의 철수 시기가 정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안은 황제 출신이다. 비록 몇 년 안 되는 짧은 임기였으나 나름 정통으로 즉위한 몸이었다. 황궁의 생태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뜻이다. 게일 2황자의 득세를 감안하더라도 적통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슬슬 그 얘길 할 참이었지. 데르가가 죽으면 우리는 목적을 다 이룬 셈이네. 가을이 오기 전에 조금씩 전사들을 사막으로 돌려보낼 것이네."

"네. 염두 하고 있겠습니다."

"중앙을 살살 꾀어 영주 자리 차지하는 건 전적으로 이안 경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세."

잘 해내라고, 그렇지 않으면 전사의 도움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거라고, 카칸티르는 숨겨 말하고 있었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서둘러 데르가의 처형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처형식을 끝내자마자 에리카 단장과 남은 인력들도 브라츠 밖으로 내보낼 것이며, 시신 처리 권한은...."

"됐네, 썩어빠진 고깃덩어리 받아 무엇 하려고. 우리는 그저 우리 손으로 데르가의 목숨을 끊고 싶을 뿐."

능청스러우면서도 여유로운 카칸티르의 눈매가 서늘하게 변했다.

* * *

그리고 보랏빛으로 물드는 그날의 저녁. 카칸티르의 매 제노가 브라츠로 무사히 귀환했다. 카칸은 천에 싸인 붉은 머리칼과 금발을 확인 후, 만족스럽게 매의 목덜미를 긁어주었다.

"메리와 첼이 죽었다."

"오, 그렇습니까?"

"잘 됐군요."

그림자가 드리웠기에, 그 말에 이안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사들은 한 발자국 나아간 임무 완수에 서로 축하하며 주먹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밤 귀환할 것 같다."

"데모샤!"

"데모샤!"

카칸티르는 바람에 그들의 머리칼을 날리며 손을 털었다. 영원히 찾지 못할 시체처럼, 머리칼 역시 흩어지며 사라졌다.

동료의 무사 귀환을 기뻐하는 전사들의 탄성이 터졌고, 이안은 반쯤 꺾인 브라츠의 깃대를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며칠 후면, 역사로 사라질 문양이었다.

제52화. 처형

광장에 모인 영지민들이 수군덕대며 교수형틀을 쳐다봤다. 한평생 변방에서만 살아왔던 그들인지라, 저렇게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사형 기구는 처음 본 셈이다. 그 뒤로, 언덕 위의 브라츠 저택은 언제나처럼 고즈넉하게 서 있었다.

"교수형이라고?"

"탈세도 중죄인데 저항까지 했잖은가."

"세상에. 어쩌다 이렇게 된 거람...."

"아니, 그러면 우리한테 세금은 그렇게 걷어가 놓고, 위쪽에는 올리지도 않았단 말이야? 그럼 그 돈들은 어디 갔어?"

"뱃속에 들어가서 그리 불룩한 거겠지."

"미친 새끼네, 진짜! 세금 내려고 우리는 집까지 팔았어. 딸아이는 걸음마 떼자마자 밭일 배우느라 허리가 굽었다고!"

"이이가, 소리 좀 죽이게. 큰일 나려고 그래?"

"뭐 어떤가! 이제는 귀족도 아니고, 그저 죄인인데. 어차피 죽을 거 혼자 곱게 죽지! 병사들은 왜 일으킨 거야?"

"그러니까.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애들을 저택으로 안 보내는 건데...."

"애초에 백작님이 그 짓만 안 했으면 모두 좋았다고. 우리만 피해 봤어. 돈은 돈대로 뺏겨, 전투로 집도 박살 나...."

그들에게 교수형이란 실로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 귀족으로서, 특히나 변경에서 야만족과 대치하던 군주로서는 검으로 삶을 마감함이 마땅했다.

특히나 아랫것들 보는 앞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발버둥 치는 꼴이라니. 교수형은 위엄까지 함께 죽이는 처벌이었다.

"그런데 교수형틀을 천려족이 만드네?"

"안 그러면 저만한 통나무를 누가 옮겨?"

데르가의 처형대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리엘인이 아닌 접경한 야만족이었다. 물론, 교수형대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조사단의 지시에 따르고 있었지만, 어째 분위기가 영 지휘 당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었다.

"아, 거참 한번에 말하라고. 두 번 가게 하지 말고."

"미, 미안하오. 기둥을 세워 박은 다음, 끈으로 꽉 묶어 고정하면 될 것 같소."

형틀이 정면으로 보이는 높은 단상. 카칸티르는 광장의 영지민들과 조금씩 뼈대를 갖춰가는 교수형틀을 보며 새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동맹과 적국 사이의 묘한 관계를 이어가던 데르가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수장이 아랫것들 보는 앞에서 목이 매달리고, 자신은 높은 위치에서 그걸 구경할 예정이지 않나.

'삶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한편, 저택에서는 에리카가 머리를 쥐어 싸매며 공표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데르가의 죄목을 평민들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 황궁의 위엄과 자신의 위업을 만천하에 알리는 중요한 작업이다.

드르륵.

그 아래, 이안은 지하 감옥에 당도했다. 맨 끝 감옥에 갇힌 데르가는 자갈을 문 채 천으로 시야를 차단당했다. 퉁퉁 부은 사지는 족쇄에 끌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문을 열어라."

달깍.

이안의 지시에 천려가 별다른 의문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데르가는 이안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귀를 쫑긋거렸다. 그에게서 오물과 핏물의 썩은 내가 진동했다.

"데르가 백작. 이안일세."

"으으...."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호칭까지 다 떼고 부를 정도다. 데르가가 반응하듯 움찔거리자, 연결된 족쇄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댔다.

끼리리릭.

"처형식 날짜가 정해졌다."

"...!"

"그 짧은 새에 황궁으로 서신을 보냈던데, 마리브 황자에게 밀고라도 한 모양이지?"

데르가가 이안을 올려다봤으나, 눈이 가려져 있어서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천 아래 그의 눈빛이 심히 흔들리고 있음을 짐작했다.

"덕분에 고맙게 되었네. 에리카가 영주임명장을 받지 못하게 됐거든. 그로 인해 서둘러 브라츠를 떠나야 할 이유가 생겼고, 자네의 처형식도 당겨진걸세."

데르가가 있는 힘껏 주먹을 뻗으려고 했으나, 결코 닿지 못했다.

후회스러웠다. 처음 사창가에서 데리고 왔을 때, 메리의 말대로 허튼짓 못 하게끔 어디 하나 불구로 만들어 놨어야 했다. 그깟 대외적인 시선이 무엇이라고!

"…읍읍!"

"메리와 첼 역시 죽었다."

"...."

"브라츠라는 이름을 가진 자 중, 그대가 제일 마지막 생존자야. 축하하네.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영광을 가졌어."

데르가의 얼굴이 붉어졌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게 여실히 보일 정도였다. 이안은 그의 머리채를 붙잡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시게. 다 자네의 업보 아니던가."

사창가의 여인을 겁탈하여 만들어낸 아이. 그것도 모자라 제물로 팔아버리기 위해 생모와 생이별시키고 학대를 밥 먹듯 했던 것. 욕심이 지나쳐 천려족 몰래 술수를 부린 것. 과다한 세금 놀음으로 중앙과 영지민 둘에게 외면당한 것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자초하지 않은 게 없었다.

"이안 님. 카칸께서 찾으십니다."

"나가지."

이안은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지르는 데르가를 뒤로하고 지하 감옥을 나섰다.

바깥엔 성인 남자의 키를 훨씬 웃도는 창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어어. 이안 경. 이것 좀 보시게나."

"무슨 일이십니까?"

"창 길이는 괜찮을 것 같나?"

이안은 데르가의 심장을 뚫을 창들을 쭉 훑어봤다. 그리고 에리카 조사단장이 있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힐끗거렸다.

"처형식의 꽃이니, 에리카 단장에게 얘기해서 공표문에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음. 그래. 그거 좋겠어."

무심결에 쳐다본 것인데, 에리카 단장은 초췌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쳐냈지만.

촤악!

'개 같은 상황.'

에리카는 머리를 짚으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몰린에게 한 통의 해명 서신조차 없었다. 총회의 결정을 알고 있음이 분명하니, 분명 비슷한 시기에 전서구가 도착해야 했다.

"X발, 영감탱!"

몰린과 직접 만나면 문제가 얼추 풀리겠으나, 데르가의 처형이 끝나면 분명 브라츠 영지를 떠나야 했다. 이안과 천려족이 한시라도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서신과 함께 출발했다 하더라도, 이제 절반쯤 내려왔을 텐데....

'안 되겠군. 나도 대책을 하나 세워두어야겠다.'

에리카는 골똘히 고민하더니, 이내 새 종이를 꺼내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몰린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것과 더불어 마리브 1황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듯,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그쪽으로 물길을 대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스윽.

에리카는 인장 대신 자신의 엄지를 베고서 피를 찍어 넣었다. 마법 물약으로 신원을 파악할 수 있을 터다.

"에리카 님. 말씀하신 자료를 찾아왔습니다."

"이안 놈이 아주 야무지게도 싸 놓았구나."

"바로 나가면 될 정도로 꼼꼼합니다."

"재수 없는 새끼. 쯧! 거기 두어라."

조사단원은 데르가의 탈세를 혐의할 중요 자료를 취합하여 에리카에게 넘겨주었고, 그 내용은 상세하게 공표문에 써 내려졌다.

데르가가 죽는 날, 그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영지민들에게 일러주기 위해서.

* * *

드디어 날이 되었다. 교수형대가 만들어진 바로 다음 날이었다. 저택의 모든 이들이 밖으로 나와 지하 감옥 입구에 모여있었다.

"데르가를 꺼내와라."

"네. 이안 님."

이안의 명령에 천려 전사 두 명이 내려가 데르가를 질질 끌고 왔다.

"데르가 브라츠. 이제 그대를 처형할 시간이 왔소."

에리카의 말에 데르가의 몸이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사지가 풀린 것 외, 눈과 입이 가려진 것은 똑같았다. 에리카는 부하들에게 눈짓하며 그를 광장으로 이끌었다.

"서둘러 움직인다."

"어어? 꾸물대고 있네?"

그는 맨발로 브라츠의 땅을 밟으며 속죄의 행동을 보여야 했다. 터덜거리며 걸을 때마다 쇠사슬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아주 느릿하게, 도살장 끌려가는 짐승처럼 그는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데르가 브라츠. 움직여라."

짜악!

"…으읍!"

조사단원은 어쩔 수 없이 채찍을 휘둘렀고, 데르가는 신음하며 한 걸음씩 발을 떼었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밀려나는 수준이다.

"브라츠 백작님이다...."

"세상에나, 저 꼴이 뭐람."

"가죽 벗겨놓으니 우리보다 더하네!"

"죽어라! 죽어! 우리 피 빨아먹고, 결국에는 가족까지 죽었어! 너 때문에!"

"정말로? 정말 저게 데르가 님이라고?"

광장으로 가는 도중, 영지민들의 기함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난생처음 보는 가주의 처참한 모습. 실로 충격적이었는지, 광장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비슷한 말만 들려왔다.

저게, 정말로, 데르가냐. 이 정도가 핵심이다.

"올라가라."

"흐윽...."

쉬익! 쿵!

"데르가! 정녕 이게 최선이었나?"

"나쁜 자식아! 그러니까 잘 좀 하지이!"

"고통스럽게 죽어! 제발!"

그간의 업보가 한번에 터지는 순간이 왔다. 주춤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데르가에게 돌이 날아온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아내가 데르가에게 희롱당했다며 분통을 터트렸고, 누군가는 세금을 못 내서 얻어맞는 바람에 절름발이가 되었노라 호소했다. 메리와 첼의 이름도 언뜻 들렸다.

"메리와 첼은 잡았대?"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근데 둘이 살아있으면 멸문이 아니지 않아?"

"처형식 이후 남은 조사단 역시 추격대에 합류할 거란 소문이 있어."

"그래? 그럼 진짜 이방인들이 다 돌아가는 거네."

"천려족이 남았지만, 저들도 겨울 되면 못 버티지."

"아! 드디어, 일상이 돌아오는구나."

부우우-

조사단원이 물소뿔을 불었다.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구경꾼들이 점차 목소리를 줄였다. 이내 에리카 단장이 데르가의 옆에 서며 공표문을 들어 올렸다.

"나는 황궁 조사단장 버티 에리카다. 지금부터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죄인 데르가 브라츠 백작의 죄목을 알리겠다."

그리고 그들이 조사한 데르가의 혐의와 그 증거를 낱낱이 읽어내렸다.

사실 평민들이 듣기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으나, 그 내용이 길어질수록 데르가가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는 분노만큼은 깊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저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은 대가라는 것도.

"특히 몬느에 탄광의 생산량은 6만 톤에 달했으나, 중앙 신고는 절반에 그쳐 그 차익은 자그마치 금화 8,000개에 달한다. 이것은 지난 몇 년간 누락되었던 재산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고...."

"뭐? 금화 8,000개?"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아래에서 듣고 있던 이안은 점점 일어나는 열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수확량이 얼마고, 수익은 몇 할이니 따위는 하등 의미 없었다. 그저 평민들에게는 금화 몇 개라 칭해주는 것이 명확했다.

"야, 이 나쁜 놈아! 어떻게 그래?"

"죽여! 당장 죽여!"

아래에서 다시 돌멩이와 쓰레기 따위가 날아왔다. 에리카 단장은 발치에서 쌓여가는 것들을 무시하며 마지막 문장을 낭독했다.

"이로 인해, 바리엘 제국에서 브라츠 성(姓)을 가진 자들에게는 영원한 죽음만이 있을 것이다. 황제의 명으로, 브라츠 가문을 멸문한다."

따악!

그와 동시에 돌멩이 하나가 데르가의 관자놀이를 세차게 때렸다. 에리카는 단원들에게 식을 거행하라는 뜻으로 눈짓했다.

"안대를 벗겨라."

제53화. 밧줄을 걸어라

하지만 여전히 입에 재갈은 물려있었다. 세상의 마지막을 보며 수치를 느끼고, 마지막 말 한마디 남길 수 없는 답답함을 안고 가라는 처사였다.

데르가는 붉게 터진 눈을 깜빡이더니 차마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죽어어!"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부르짖었다. 옷을 벗겨놓으니 그저 초라한 인간에 불과하건만, 대체 무엇이 그를 추악하게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

"밧줄을 걸어라."

"밧줄을 걸어라!"

데르가의 목에 줄이 걸렸다. 아래에서 단원 다섯 명이 두툼한 밧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조금씩 떠오르는 데르가의 몸뚱이.

"으어어어...."

"누구든 이자에게 불만이 있는 자는 돌을 던지라. 그대들이 던지는 돌은 바리엘의 중심추가 될 것이며 황궁의 위상을 견고히 쌓는 담이 될 것이다."

그가 발버둥 치며 몸을 흔들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세게 조일 뿐이었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백작은 마치 잘 벗겨놓은 돼지와 같았다.

사람들이 비웃음을 터트렸고, 카칸티르를 비롯한 천려족 전사들은 무표정으로 그의 마지막을 위해 일어섰다.

"와아아아!"

"던져! 죽여!"

퍼억! 퍽!

돌멩이 수십 개가 한꺼번에 처형대로 날아들었다. 에리카는 조사단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뒤로 물러섰고, 공중에 떠올라 돌팔매질 받는 데르가를 지켜봤다.

그때였다.

쉬이익! 푸욱!

창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와 데르가의 옆구리에 박혔다. 천려족 전사 중 한 명이 내던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잠시 멈칫거리긴 했으나, 한번 끓어 오른 열기가 쉬이 식지는 않았다.

"데르가!"

쉬익! 쉭!

수십 개의 창이 흔들리는 데르가의 몸뚱이로 날아들었다. 천려 전사의 복수가 담긴 응징이었다. 대부분 그의 허벅다리나 등에 박혔고, 이내 창을 차고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쉬이이익!

그리고 마지막. 날카로운 창끝을 매만지던 카칸티르가 궤적을 확인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데르가의 몸이 점점 쳐져 가기 시작했다. 카칸티르는 망설임 없이 창을 내던졌고, 그것은 다른 전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며 가슴팍을 뚫어버렸다.

정확히 심장일 것이라고, 이안은 생각했다.

"끄억...."

흰자로 뒤집힌 데르가가 숨을 토해냈다. 이내, 밧줄의 떨림이 완전히 멈춤으로써 데르가의 죽음을 모두가 목격했다.

"데르가 브라츠는 죽었다."

"데르가 브라츠는 죽었다!"

부우우-

끝을 알리는 물소뿔 소리. 사람들은 환호하며 죽은 데르가의 시체에 모욕적인 말을 뱉어냈다. 그들은 단장의 선언을 선창 삼아 축제를 즐겼다.

이안은 그저 광경을 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안 경은 좀 괜찮소?"

"…네? 저 말씀입니까?"

"아무것도 안 던지던데. 사실 저 밧줄 대신 그대의 손이 데르가의 목을 졸랐어야 맞지 않겠나."

카칸티르는 넌지시 이안을 힐끔거렸다. 목을 대신 조른다라, 썩 유쾌한 짓이 아니다.

"글쎄요. 하지만 죽었다 하니, 확실히 기분이 이상합니다. 못 했던 말도 생각나고."

"못 했던 말?"

서자 이안에게 꼭 용서를 빌라는 것.

황제 이안이 아닌, 서자 이안 말이다.

이번 생에서는 역사가 바뀌었지만, 원래대로였다면 이안은 국경을 넘어가서 모래 한 줌이 되었을 터였다. 어린 나이에, 그저 백작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안이 죽고 나서는 아이의 생모인 필리아도 죽었을 것이다. 메리 부인이 가만둘 리 없을 터이니.

"끝나니 시원하지는 않소?"

"그렇긴 합니다만, 이게 시작이란 걸 알아서요."

이안은 바람에 흔들리는 데르가의 몸뚱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순간 부로, 세상에서 브라츠라는 이름은 영영 사라졌다.

* * *

데르가의 시체는 며칠 동안 광장에 걸려 있을 예정이었다. 바리엘에 거스르는 자의 최후를 확실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교수형대 뒷정리를 하며 부하에게 물었다.

"중앙지원군에서 연락은?"

"왔습니다. 그게, 근데...."

"왜, 또 뭔데?"

"메리와 첼의 흔적이 사라졌답니다."

"하아. X발. 어디서부터?"

"보아하니, 숲에 들어서는 표적을 아예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불 때운 흔적 따위로 수색을 계속하고 있긴 한데, 그게 계곡 인근에서 뚝 떨어진 터라. 난항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제발 거지 같은 소식이 아니길.

에리카의 눈빛을 읽은 부하가 상당히 곤란하게 대답했다.

"그쪽도 총회의 전서구를 받았다고 합니다."

"…뭐?"

"메리와 첼의 추격이 지체되면 병사들은 중앙으로 올라오라고요. 지방으로 파견된 병사들을 모두 소집한다는 명이 있다고 하는데, 이건 총회의 결정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리브 1황자였다. 게일 2황자가 지방 영지에 병사들을 주둔시킨 걸 알아챘으니, 마땅한 대응책이었다. 하지만 이걸 모르는 에리카는 눈만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진짜 새됐네."

중앙지원군을 때려 박아도 찾지 못하는 메리와 첼이거늘, 조사단 인원만으로 그들을 어떻게 뒤쫓는단 말인가? 쫓아간다 한들 천려족 두 놈한테 갈가리 찢길 게 분명했다.

"그런데 에리카 님. 몰린 경에게 서신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뭐가?"

"지원군 대장이 말하기를 몰린 경에게 총회의 결정을 일단 따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데요. 그러면서 우리는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는데, 뭐 들은 게 없어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몰린한테 연락이 왔었다고?"

에리카는 놀라서 고개를 휙 돌렸다. 몰린이 중앙군 대장에게 보냈는데 자신에게 안 보냈을 리가 없다. 에리카는 그제야 전서구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챘다.

"마력석이 있으니 길을 헤맸을 리는 없고."

브로치와 같은 원리로, 한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던 마력석끼리는 마성이 생겨 비둘기의 목표 지점을 더욱 세밀하게 이끌었다. 창문 앞까지 와서 꼼짝 않고 기다릴 정도였으니까.

부하는 고민하다가 의견을 내놓았다.

"저택에 매가 많지 않습니까. 혹시 잡아먹힌 건...."

일리가 있다. 에리카는 인상을 팍 쓰고서 바로 말을 끌고 나왔다. 광장 뒷정리를 하던 부하들이 그녀를 불렀지만, 에리카는 직진해서 저택으로 내달렸다.

콰앙!

"이안! 이안!"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있는 매 새끼들 배를 전부 갈라봐야겠다."

느닷없이 나타나서 매의 배를 갈라야 한다니. 이안은 서류를 내려놓았고, 천려족 전사들 역시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진심이라는 걸 알아채고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지랄하지 마라. 매의 배가 갈리기 전에 네놈들 배를 갈라주지."

"털 하나라도 뽑히면 알아서 해. 데르가 옆에 매달리고 싶나 보지?"

"매들이 전서구를 먹은 것 같다고!"

"아아, 전서구."

이안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데없이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걸 본 에리카가 멈칫거리며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었나?"

"정확히는 매가 먹은 게 아니라,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전서구는 잘 묻어주었고, 천 안에 마력석도 따로 빼두었습니다."

"감히 황궁의 전서구를 빼돌려? 중죄다, 이안!"

"황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몰린이 개인적으로 보낸 것이던데요?"

그 말을 듣자, 에리카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몰린이 뭐라고 썼을까? 아둔한 자는 아니니 그들의 계획을 글자로 남겼을 리는 없다. 하지만 훗날 돌아봤을 때 모반의 증거로 보일 수도 있다.

에리카의 태도가 누그려졌다.

"돌려주게나."

"물론입니다. 에리카 님이 브라츠를 떠날 때, 선물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데르가의 시체를 효시하는 건 사흘 안으로 정리하시죠."

사흘 안에 떠나라, 그러면 편지를 돌려주겠노라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그것과 별개로 쫓겨나긴 할 건데 에리카가 선택하기 좋게 구실을 만들어 준 참이었다.

"몰린 경께서 꽤 급히 보낸 편지 같더라고요. 사흘이 아니라 당장 떠난다 하면 저희는 더 감사하겠지만요."

편지 내용이 무엇일지 짐작하는 에리카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사실상 영주 임명에 문제가 생겼고 곧 자문관과 함께 내려간다는 게 전부였지만, 그걸 에리카가 알 리가 없었다. 소식 전달보다는 상심했을 에리카를 달래기 위해 쓴 서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리카는 손을 부들거리며 한마디, 한마디를 읊조렸다.

"좋다. 당장 내일, 시체를 회수하고 떠나겠다."

"듣던 중 반가운 결정입니다."

"이안, 내가 떠나듯 너 역시 자문관이 내려오기 전 떠나야 할 것이다. 네놈이 브라츠의 이름을 잇지 않았다고 해서 자유로울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최대한 간절하게, 염원을 담아 저주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안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말이다. 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에리카는 천려족 전사들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자문관은 공식적으로 영지의 관리를 임명받은 자다. 사창가 출신 서자 놈이 야만족을 등에 업었다고 귀족 놀이할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지."

"야만족이라는 말은 취소하는 게 좋겠습니다. 에리카 단장님. 자문관이 와서 그대의 행방을 물을 때, 내가 곤란해질 수도 있어서요."

깝치면 죽이겠다는 말을 이리도 품격있게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작위도 빼앗겨, 기한 없이 변경을 돌며 메리와 첼의 뒤를 쫓아야 할 에리카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았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때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대사막의 모래를 싹 다 갈아엎어 줄 테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헛된 꿈 꾸지 마라. 이안. 추하다."

에리카의 말에 이안이 가슴에 손을 올리며 귀족의 예를 보였다. 그리고 이내 흘러넘치는 마력의 기운. 녹안이 금안으로 물들며 알 수 없는 힘의 흐름이 느껴졌다. 에리카는 벙찐 표정으로 홀린 듯 쳐다볼 뿐이다.

지이잉.

"에리카 님이야말로 돌아올 수 있다는 헛된 희망 품지 마시고, 메리와 첼의 시체나 찾아서 중앙 갈 생각이나 하십시오. 재수 없으면 객사하실 운명입니다."

"…마력운용자?"

"그럼 가십시오. 멀리 배웅은 못 드리겠습니다."

"...."

전사들도 실제로 본 건 처음인지, 흥미롭게 이안을 구경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별것 없이 돌아온 이안의 모습을 보며 김이 팍 새고 말았다.

"마법이라는 게 그런 겁니까? 끝?"

"아아. 그때 베릭이 보여줬던 거 맞네."

"마법사가 되면 좀 달라진다지요?"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나도 몰라, 그냥 그렇게 주워들었어, 인마."

서로 떠들어대며 즐거워하는 천려족을 뒤로하고, 에리카는 멍하니 문을 나섰다.

마력운용자.

어떻게 이안이 천려족을 꾀었고, 영주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을지 알 수 있었다.

"에리카 님, 괜찮으십니까? 뭐라 합니까?"

"마력운용자라니."

노예로 강등은커녕 중앙에서 올라오라고 난리일 터다.

에리카는 브라츠에서 자신이 완벽하게 패배했음을, 처음 깨달았다. 부하가 다가와 안색을 살폈으나 대꾸할 정신이 없다.

"에리카 님?"

"…짐을 싸라."

"네?"

"영지를 나설 것이다. 가서, 데르가의 시체를 중앙군에게 넘겨주고 우리는 메리와 첼의 뒤를 쫓을 것이다."

죽은 사람을 쫓는 것만큼 허망한 일이 있던가. 어차피 고생할 거, 최대한 빨리 착수하여 황궁에 성의라도 보이는 편이 나았다.

한편, 전사들의 장난을 들으며 서류를 확인하던 이안. 그는 저 멀리 푸른 숲을 보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제 슬슬...."

필리아를 볼 때가 되었다. 숲 어딘가 숨어있을 이안의 생모. 데르가와 일가가 죽고, 아들이 돌아왔으니 계속 숨어있을 필요는 없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안이 어찌하여 화분을 갖게 되었는지.'

그 단서를 아는 유일한 자 아니던가.

제54화. 필리아의 귀농

사박사박.

이안이 걸음을 뗄 때마다 마른 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벌레들이 목청 떨어지라 울어대는 지금. 그는 땀을 닦아내며 베릭을 불렀다.

"베릭, 정녕 이 길이 맞는가?"

"…맞을걸?"

"맞을걸? 그걸 말이라고...."

"맞아맞아. 여기 검은 돌이 있네. 어어. 맞아."

외진 숲이라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을 탈 수가 없어 직접 발로 걸어가는데, 벌써 몇 시간째란 말인가. 체감상으로는 영지 경계를 넘어간 것 같았다.

베릭 저놈은 분명 옆구리 구멍이 채 아물지 않았을 터인데, 컨디션을 완전히 찾은 것처럼 보였다. 며칠 동안 놀고먹으면서 치료라는 이름으로 휴식했던 게 효과가 좋은 모양이다.

"확실히 숨어야 한다 했잖아. 진짜 어지간해서는 아무도 못 찾지 않겠어?"

자연의 색으로만 이루어진 사방에서, 문득 낯선 색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가지에 걸려 널려있는 연보라색 치마. 베릭은 손을 튕기며 찾았노라 외쳤다.

"여기네. 좋아!"

베릭이 검으로 풀을 헤치며 앞장섰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조금 걸으니 평지가 나왔다. 낡은 오두막과 그 앞에는 자그만 밭이 갈려있었다.

"이런 곳을 용케도 발견했군."

"꽤 예전에 어떤 나무지기 할배가 혼자 살던 집인데, 나무 팔러 왔다가 정신병이 와서 돌아가는 길을 까먹었다지 뭐야? 사실이라면 근방에 세워둔 집이 있을 거라고 주점 주인장이 일러준 적이 있거든. 내가 집도 뭣도 없으니까."

오두막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쓰러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계신가?"

베릭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필리아를 찾았다. 주전자가 끓고 있었으므로, 그리 멀리 간 것 같지는 않다. 이안 역시 오두막을 천천히 살폈다. 혹여 붉은초, 실라스크가 더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없군.'

마을에서 가져온 짐 자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하긴, 가져봤자 그녀가 무얼 그리 가졌겠는가.

"누, 누구십니까?"

그때, 문밖으로 달달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문을 열었고, 이내 저와 똑 닮은 금발의 녹안 여인과 마주했다.

"아!"

필리아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품에 가득 껴안은 꽃을 팽개치며 이안을 끌어안았다. 작고 가냘픈 몸에서 어찌 이런 힘이 나오나 싶을 정도로 강하게, 아주 강하게.

"이안! 이안!"

"…잘 계셨습니까?"

"이안! 아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필리아는 울부짖으며 이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미친 듯이 오열했다. 미래를 기약하지 못했던 자식이 이리 눈앞에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이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응?"

필리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안의 어미라기보다는 누이에 가까운 모습.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여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겼다.

"설명하자면 좀 깁니다. 어머니. 일단 앉아서 얘기 나누시지요."

"배는? 먹을 것은 잘 먹니?"

"주인 때깔, 딱 봐도 곱지 않습니까?"

베릭이 어이없이 대꾸하며 의자를 빼주었다. 필리아 역시 안색이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정갈하고 단정한 집을 보며 중얼거렸다.

"산속 생활이 잘 맞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반지하 그곳에만 있다 보니… 아침에 해 보며 일어나는 것도 좋고, 시원한 계곡도 좋단다. 조금만 헤집고 다니면 온갖 열매가 가득해."

이안은 필리아의 손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금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변장까지 해가며 겨우 만났던 아들을, 이리 제 눈으로 담아내는 게 감격스러웠다.

"이안. 이제 네 얘기를 좀 해주렴. 대체 어떻게 된 거니?"

이안은 그간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몰린과의 거래, 대사막으로 건너가 천려족과 지낸 것, 데르가의 단죄와 전투 그리고 처형까지. 브라츠가 멸문했다는 걸 들은 필리아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브라츠 백작님이 죽었다고?"

"메리와 첼 역시 그럴 것입니다."

"세상에, 이안. 어서 신께 기도를 올려야겠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그리고 이안이 무사히 이곳에 있는 이유를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하여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아가."

이안은 안쓰럽게 웃었다. 그녀는 천사 같은 제 아들이 황제 이안임을 알지 못한다. 그 순박함에 묘한 감정이 일었다.

"데르가의 깃발은 꺾였으나, 아직 남은 일들이 많습니다. 중앙에서 다시금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어요."

"그래. 그렇구나."

"저는 나중에, 그자들을 따라서 중앙으로 올라갈 계획입니다."

쯧. 베릭은 차를 따르다 혀를 차댔다. 필리아의 얼굴에 다시금 절망이 내려앉은 탓이다.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그녀는 아들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기다렸다.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필리아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안을 쳐다봤다.

"그래도 원한다면, 너를 볼 수는 있는 거지?"

"…물론이지요."

"위험하지도 않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되었다. 나는 되었어. 사실 내려가고 싶은 마음도 없단다. 숲속 생활이 너무 만족스러워. 네가 죽지 않고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면, 그것만으로 되었어."

자식이 선택한 길이라고 하니, 어미 된 자로서 어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나.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상황이 금방 정리되면 어머니도 자유로이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아요. 떠나기 전, 마을에 자리를 마련해 두겠습니다."

"괜찮아. 이안. 나는 정말 괜찮아."

데르가가 죽고, 이안이 살아 돌아왔다.

그 이상을 바라면 신께서 벌을 내려줄 것만 같다.

"그리고 여쭐 게 있습니다."

"응. 무엇이?"

"공원에서 제게 주셨던 붉은 화분 말입니다."

실라스크라 불리는, 절대 지지 않는 붉은 꽃. 그것만으로도 비범한데 아래에는 보석 목걸이까지 묻혀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지. 상단 심부름하고서 받아온 삯 아니니?"

"상단이요?"

이안이 되묻자, 오히려 필리아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거늘 어찌 기억을 못 한단 말인가.

"꽤 큰 상단이었어. 이름은 기억 안 난다만, 손이 모자란다고 하여 너까지 달려갔었지. 근데 상단주가 품도 넉넉히 주고 화분까지 주었잖아."

"더 상세히 기억나는 건 없으세요?"

"음.... 아! 상단에 엄청 귀한 분이 있다 했어. 마, 마...."

필리아는 목이 턱 하고 잠긴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 속에 잠긴 그날의 일을 더듬거렸다.

"마 뭐였는데. 아무튼, 그날따라 네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군요."

확실한 건 없지만, 실라스크를 비롯해 보석의 주인이 그 의문의 상단과 관계있는 건 확실했다.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아마 마을에서는 기억하고 있는 자가 있을 터.

이안은 이만하면 됐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벌써 가려고?"

"할 일이 좀 밀려있습니다."

필리아는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차가 아직 식지도 않은 시간. 이안은 조금 안쓰러움을 느끼며 덧붙였다.

"베릭을 통해서 닭이라도 보내겠습니다. 숲에서 혼자 적적하실 텐데 길러보세요."

"어머. 그러면 너무 좋지!"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요."

"아! 이안, 굴라는 필요 없니?"

뜻밖의 말에 이안이 멈칫거렸다. 필리아는 가뿐한 발걸음으로 안쪽 창고 문을 열더니, 커다란 포대자루 두 개를 꺼냈다.

"네가 그랬잖니. 시간이 나면 굴라 씨앗을 모아두라고. 이것 말고도 밖에 두 자루가 더 있단다."

방울토마토 크기의 작은 씨앗이 가득했다. 어림잡아 수백 개는 될 것이다. 아마 인근의 모든 굴라를 캔 듯 싶은데....

"씨앗을 뺀 굴라는 어디 있습니까?"

"절벽에 가져다 버렸지."

베릭 역시 손으로 한번 쓸어 보더만,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쓸모없는 굴라 씨앗을 이리 많이 모은 것도 그러한데 여인 혼자의 몸으로 했다 하니 믿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원예 쪽으로 재능이 있네요."

"하루 세끼 먹고 나면 남는 것이 시간이라, 소일거리 하듯 하다 보니 이리되었다."

하긴, 이안이 국경을 넘기 전부터 필리아는 모습을 감추었다. 워낙 정신없이 사건이 휘몰아치느라 몰랐지만, 여기서는 평화롭고 적적한 시간이 수개월이나 지난 것이다.

"필요 없니?"

필리아는 조심스럽게 아들의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 분명 모아두라 하여 그리했건만,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찮아 걱정되는 듯했다.

"아니요. 어머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이안은 자루 입구를 묶으며 필리아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저 스쳐 지나가듯 언질 준 것인데, 이리 기억하고 행했다니. 아들의 칭찬에 필리아는 보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시기가 아주 적절합니다."

"그래? 정말 다행이다."

농민들이 밭에서 땀을 흘려야 할 여름. 하지만 그들은 마을 재건으로 인해 다른 곳에서 힘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봄철에 뿌려 싹이 튼 작물들은 군화에 밟혀 죄다 나뒹굴지 않았던가.

"어머니. 사실은요. 이 굴라, 먹을 수 있는 거랍니다."

"응? 무슨 소리니?"

"독 성분이 씨앗에는 없거든요. 볶아 먹어도 좋고, 구워 먹어도 좋고, 끓여 먹어도 좋습니다."

혹여 아들이 장난하는 것인가? 필리아가 이안의 얼굴을 살폈으나,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베릭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에게 물었다.

"더위 먹었나?"

"생으로 먹어도 맛이 좋지."

이안은 대답 대신 씨앗 하나를 들어서 입에 쏙 넣었다. 베릭과 필리아가 동시에 기겁하며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어머, 이, 이안!"

"뱉어! 빨리 뱉어어! 뭐 하는 거야?"

와드득. 까득.

하지만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고소한 풍미를 느끼며 씨앗을 씹었다. 그는 자루 속 씨앗 수를 가늠해 보며 지시했다.

"베릭. 고생 좀 해야겠는데."

"뭐, 뭐를…. 뭐를요?"

"존댓말을 쓰는 걸로 보아, 눈치챈 것 같구나."

"이걸 아래로 옮기라고…요?"

"그래. 남몰래, 은밀히. 저택 창고 안에 숨겨두거라."

"하...."

까득.

이안은 그렇게 대답하며 다시 굴라 씨앗을 집어 먹었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에 우왕좌왕하는 필리아. 그리고 엎드려 좌절하며 욕설을 삼키는 베릭.

이안은 씨익 웃으며 능선 아래 저 멀리, 브라츠'였던' 영지가 훤히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 * *

한편, 재건전문가이자 자문관으로 파견된 로만드로는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인상만 찡그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밖으로 뛰어내려 수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미치겠네. 진짜.'

워낙 먼 거리인 변방인 것도 그러하지만, 아무래도 현장이 일반적이지 않아서 그렇다. 자국민끼리의 전투는 둘째치고 무엇보다-

"속이 안 좋으신가?"

"아닙니다. 허리가 배겨서요."

바로 저자, 행정부 몰린 경의 동행이 제일 문제였다.

직속 상관은 아니지만, 계급으로 보나 직급으로 보나 로만드로보다 상급자 아닌가? 로만드로의 변경 적응을 위해 따라왔다고는 하나 차라리 없는 게 낫지.

'마리브 저하도 참으로 너무하시다. 신전 대지진 복구하고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나를 이리…. 흐윽…. 집 가고 싶어....'

그리고 몰린의 동행이 예사가 아니라는 듯, 마리브 저하는 은밀히 그의 동태를 따로 감시하여 보고하라는 명까지 내렸다. 아직 도착도 안 했건만, 벌써 수도로 돌아가고 싶다.

"전(前) 브라츠 영지 상황은 어떨 것 같소?"

"예? 뭐…. 에리카 단장이 올린 보고로 봐서는 좀 심하더군요. 수습이 어찌 된지 모르겠으나, 가서 돌이라도 안 맞으면 다행입니다."

로만드로는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현재 브라츠 영지에 이안이 천려와 주둔하고 있다는 건 몰린 경만 알고 있었다. 혹여 이게 알려지면 황궁에서 대규모 병력을 파견, 반란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게 물거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가서 놀랄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몰린은 지난날의 브라츠를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품에 넣어둔 에리카의 서신을 만지작거렸다.

제55화. 로만드로

-서자 이안이 천려족을 업고 들어와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브라츠와 동맹이라는 명분으로 영지를 점유하고 수습하는데…. 저로서는 어쩔 방도가 없습니다.

몰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원래라면 자신이 내려갈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에리카가 영지를 정리하고 다스려서 사병 이전을 시켜놓으면 되는,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계획 아니었나?

한데 영주 임명은 무기한 보류되었고, 대사막에 있어야 할 이안이 버젓이 들어서 있다?

'지금쯤이면 에리카에게도 전서구가 닿았겠군.'

마리브가 훼방을 놓는 것이 영 심상치 않았다. 분명 이안의 계략이 있었을 거라 짐작한 몰린은 직접 그를 처단하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었다.

데르가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노예로 삼아 마땅한 몸뚱이. 영특하다고는 하나 멋모르고 까불면 그 최후가 어찌 될지 단단히 일러주어야 했다.

'천려족이 어찌하여 이안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

달콤한 혀가 어디까지 짐승족들을 홀려 놓았을까. 어미가 살아있음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그 천출 출신이라는 건?

몰린은 계속해서 이를 바득거리며 날카로운 시선을 번뜩였다. 에리카와 서신이 엇갈렸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다그닥다그닥-

"거의 다 왔습니다."

마부의 말에 로만드로는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저 멀리, 브라츠의 저택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보였다. 겉으로 봤을 때는 전투가 일어났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화로워 보였다.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건만.

"생각보다 활기가 있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로만드로는 희망에 차서 중얼거렸다. 이런 분위기라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수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몰린에게 자신의 직위를 상기시켰다.

"자문관으로서 혹시 주의해야 할 전 브라츠 영지의 풍습이 있습니까?"

"글쎄올시다. 야만족과 접경하고 있으니 그 성정 머리들이 대부분 더럽고 거칠다네. 그리고 척박하고, 먹을 것이 늘 부족해."

몰린은 기억에 잠긴 단편들을 끄집어내며 중얼거렸다. 불쾌한 감정이 잠식하다 보니, 입에서는 고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멈추시오! 소속과 목적을 대시오!"

저택으로 내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영지 입구까지 도착한 것이다. 마부는 문지기에게 황궁에서 왔노라 전하였고, 그들은 이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을 열었다.

끼익.

마을을 가로지르는데, 로만드로는 순간 헛것을 본 건가 싶어서 눈을 비볐다. 이국적인 옷차림의 사람들이 곳곳에 녹아있는 게 아닌가?

바리엘인이 아닌 타국인이라? 여기서 타국인이라 하면 접경하고 있는 야만족 외에 또 누가 있나?

"저, 저, 천려족 아닙니까?"

"그러게요. 천려족이 주둔해 있군."

"이게 무슨! 말을 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건 보고받지 못했는데요!"

기함하는 로만드로와 달리 몰린은 차분했다. 당연한 사실이다. 황궁에서는, 특히 마리브 1황자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니 그대도 모르는 것이지. 시간 문제다만, 그 안에 해결을 보면 되는 일이기도 했다.

"조사단이랑 중앙군은 어딜 가고...."

"저택에 도착했나 보오."

"무, 문을 열까요?"

로만드로가 마차 문을 꼭 붙잡고 있자, 마부가 당황스럽게 물었다. 이내 손 틈 넓이로 살짝 열리는 문. 그가 마주한 것은 생각보다 어린 사내였다.

"그대는...?"

"이안 브라츠."

대답한 것은 몰린이었다. 그가 문을 벌컥 열며 한 글자씩 씹어 먹을 듯 중얼거렸다.

"데르가의 서자일세."

"안녕하십니까, 몰린 경. 오, 맥과 드고르 경도 함께 하셨군요. 그때 인사도 없이 중앙으로 돌아가시어 상당히 아쉬웠습니다."

이안은 가슴 쪽에 손을 올리며 격식 있는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단단히 정정했다.

"조심해 주십시오. 이곳에는 브라츠 성을 쓰는 자가 없거든요."

몰린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으나, 로만드로는 안도감을 느꼈다. 야만족들 사이에서 그나마 격식을 차리는 자가 있으니까. 그것도 저들 사이에서는 꽤 중요한 위치인 것 같다.

"거리가 멀어 서신 닿는 시기가 상당히 어긋났을 겁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흠흠. 그러면...."

이안이 앞장서서 손님들을 안내했다. 인원이 줄어 조용해진 저택은 그 따스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안과 로만드로 그리고 몰린 일행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달깍.

"카칸티르 님. 황궁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먼 길 오셨습니다."

"아. 그래. 뭐...."

"이분은 천려족 족장인 카칸티르 님, 그 동생인 네르사른 님입니다."

로만드로는 그들과 가볍게 손을 맞잡았지만, 몰린은 대꾸 없이 소파에 몸을 뉘었다. 감히 변방의 천한 것들이 중앙 관리인 자들과 한자리에 있는 것부터가 건방졌다.

로만드로는 워낙 많은 전쟁과 국경을 넘나들었기에, 신분에 관해서는 그리 거부감이 없었다.

"브라츠와 천려족은 화친을 맺은 우방입니다. 제가 대사막에 있을 때, 영지에서 큰 전투가 일어나 곤란하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천려족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들어섰고, 전 브라츠 백작의 죄를 알게 되었지요."

설명은 로만드로에게 하되, 이안의 시선은 몰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들으라는 듯.

"국가의 처단이니 어쩔 수 없었으나, 영지의 아픔은 다른 문제 아니겠습니까? 조사단은 조사의 임무만 이행할 터, 수습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이에 천려족이 이웃으로서 도와주었지요."

"그런…. 확실히 변방이 멀긴 멀군. 보고서에는 없는 내용인지라."

"그렇습니까? 중요 사안이라 분명 에리카 단장이 바로 올렸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아. 에리카 단장은...."

"데르가의 부인과 아들이 도망쳤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추격하고 있습니다."

타악.

그때, 몰린이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이안의 처분을 지시하는 명령서였다. 황제의 서신이 찍힌 것은 아니고, 담당 부서가 발행한 것이었다.

"자네 역시 데르가의 자식 아닌가? 에리카 단장이 그대를 그대로 두었나? 국법에 의한다면 노예로 전락할 것을, 이리 호의호식하고 있다니. 단장의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그대들이 무력을 썼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네."

이안은 명령서를 슥 훑어본 다음, 가볍게 테이블로 던져 내려놓았다. 그걸 본 맥과 드고르의 눈썹이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저는 국경을 넘은 자입니다. 마음은 바리엘에 있다만, 공식적으로 대사막에 기거하는 자이지요. 혹여 저를 처단하시겠다 하시면, 저는 어쩔 수 없이 사막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 누구 마음대로?"

"대사막의 주인 마음대로요. 영지 생활은 어느 정도 정상화 되었고, 천려족은 서서히 그들의 주둔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두고요."

최소한의 인원, 대체 무엇을 위한 최소한인가? 이안을 무사히 저들의 구역으로 데려오기 위한 인력이었다.

달리고 달린다면 고작 사흘 안에 닿을 거리. 하지만 사막이라곤 그림으로만 본 자들이 따라올 길은 아니다.

"저기, 너무 급하게 일을 결정할 필요는 없네."

그러자 로만드로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에리카 단장이 없는 지금, 이들이 영지를 수습했다면 자문관의 입장으로 그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몰린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일단 반대하고 보는 게 옳다. 암.

'마리브 저하께서 몰린을 경계하라 하셨으니. 몰린이 경계하는 이안이라는 자는 적어도 쓸모가 있을 게다.'

"자문관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요."

이안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이 일행에서 주축은 어디까지나 로만드로라는 걸 짚고 넘어가는 인사였다.

"황궁에서 재건전문가를 보내주신다 하여 참으로 고대하고 있던 차입니다."

"오면서 보니까 생각보다 상황이 좋더군."

"모두 희망으로 뭉쳐 이겨냈습니다."

"이보게, 로만드로!"

콰앙!

무시당한 몰린이 분을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 순간, 이안은 눈치챘다. 몰린과 로만드로는 상반된 입장에 놓여 있다고.

"이게 지금 차분히 볼 문제인가? 천려족을 바리엘에 들여온 것 자체만으로 반역의 여지가 있어! 어찌 영지를 외세, 그것도 야만족의 영향 아래 둘 생각인가?"

"반역이요?"

몰린의 말에 이안이 실소를 터뜨렸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만, 그대들이야말로 하려는 짓이 반역 준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안이 이걸 말해도 되겠냐는 시선을 보냈다.

로만드로가 끼어들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인데 천려족 도움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습니까?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자문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천려족은 이전 브라츠와 동맹 사이였습니다. 우호적인 관계에 따라 호의를 베푼 것인데 이리 말씀하시면 듣기 섭하실 겁니다. 명백한 외교적 결례지요."

이안의 말에 두 남자가 카칸티르를 주목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지만, 확실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로만드로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돌렸다.

"그, 그래. 힘 써주어 고맙네."

"그런데 여쭙고 싶은 것이, 혹 로만드로 님께서 차기 영주 후보이십니까?"

이안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곤 보름 동안이나 품어 들고 온 서신을 꺼냈다. 총회의 직인이 찍힌 임명장이었다.

"영지 재건이 주된 임무일세. 민심 수습을 비롯해 올해 겨울 안에 작년 조세 양을 맞추는 게 목표지. 힘들 거라 예상했건만, 오다 보니 가능성이 있어."

민심 수습이라.

황궁에서는 변방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이곳이 수도와 가까웠으면 민심이고 나발이고 적임자를 바로 세웠겠지.

외세 침입이나 영지민들의 반란을 즉각적으로 진압할 수 없었기에, 바리엘 국민이라는 인식으로 다독이는 게 중요했다.

'마리브는 영주 임명을 보류하고, 게일은 몰린을 끼워서 보냈다라....'

이안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1황자 저하의 뜻입니까?"

"오. 어찌 알았나? 마리브 저하께서 이곳에 관심이 많으신 듯하네."

마리브 1황자. 게일 2황자가 꺾고 넘어야 할 산.

이안에게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무릇 모든 힘에는 균형이 있어야 조화로운 일이니까.

"그렇군요. 영광입니다. 황궁의 은총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희는 성심성의껏 로만드로 님을 돕겠습니다."

"아니."

단박에 부정한 것은 몰린이었다.

가만 보아하니 이안의 꾀임이 만만치 않았다. 영지 수습이 조금 힘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안을 일단 몰아내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에리카가 돌아올 게 아닌가?

"이안. 바리엘의 땅에 있으려면 바리엘의 법을 따라야 할 것이다. 네가 당장 대사막으로 돌아간다 하여도, 나는 지엄한 국법을 이행할 수밖에 없다."

"몰린 경."

"로만드로! 자네는 자네의 일을 하게! 나는 나의 일을 할 것이니!"

이안은 팔짱을 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톡톡, 뭔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하다가 이내 웃었다.

"제가 사막으로 돌아가면 좀 곤란하실 겁니다."

"카칸티르라 하였나? 천려족의 도움은 내 확실히 황궁에 전함세. 천한 서자의 간사한 계략질에 넘어가지 말고 여기서 물러나는 게 서로에게 좋겠어. 로만드로가 말했듯이, 재건은 상당 부분 진행되었으니까! 더 이상 그대들이 있을 이유도...!"

흥분해서 외치던 몰린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맞은편에 앉은 이안의 눈과 마주한 탓이다.

지이잉.

녹안에서 서서히 번져가는 금빛. 이안은 팔짱을 풀며 다시 되새겨주었다.

"제가 사막으로 돌아가면 곤란하실 거라고, 분명 말했습니다."

제56화. 지원금

베릭처럼 마법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도에서 마법부와 부대끼며 나랏일을 하는 자들 아닌가. 순식간에 빛나는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몰린과 일행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이안을 쳐다봤고, 침묵은 로만드로의 딸꾹질로 깨졌다.

"히끅, 그, 그러니까, 자네가...."

"이런 저를 마력운용자라 부른다 하지요."

"아니, 대체 언제부터...."

"모르겠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함께 한 힘인지라."

낭패였다. 몰린은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른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분명 일전에 보았던 게 허상이 아니었던 게다. 맥과 드고르 역시 놀란 나머지 입가를 가렸다.

"지금은 마력의 흐름을 느끼고 내보내는 정도에 그치지만, 언젠가는 바리엘의 힘이 되고 싶습니다."

"무, 물론이지! 물론이고, 말고. 세상에나!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군. 마법부 밖에서 마력운용자를 볼 줄이야! 하하!"

그것도 처형당한 백작의 서자가!

로만드로는 본능적으로 모든 일의 중심이 이안임을 알아챘다. 고발과 처단 그리고 입성 후의 행보까지. 어린 나이에 비해 비범해 보인다 싶었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손 한번 잡아보아도 되겠나?"

"네? 하하. 영광입니다."

하찮은 미신이었다. 마법사 호칭을 얻기 전인 마력운용자와 만나면 행운이 있을 거라는. 로만드로와 이안은 다시금 악수하였고, 그럴수록 몰린의 표정은 썩어들어만 갔다.

'이거 어쩐담.'

이안의 어미가 천민이니 뭐니, 더는 상관없어졌다. 카칸티르의 꼴을 보아 그도 이미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로만드로 앞에서 보란 듯이 보여주는 작태로 보아....'

절대 대사막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바리엘에 머물 듯한데, 그가 마력운용자인 것을 알게 된 이상 모든 주도권은 이안에게 있었다.

보아라, 저 헤벌쭉하니 상기된 로만드로의 낯짝을.

"자세한 얘기는 저녁 식사하면서 다시 나누시죠. 먼 길 오시지 않았습니까. 피로부터 푸심이 낫겠습니다."

"아. 그래도 되겠나?"

"부하분들에게 방을 내드리죠."

"고맙네. 마차를 보름씩이나 타는 게 쉽지 않거든."

우선 전반적인 상황을 확인한 로만드로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의 일정과 서자의 처분에 관해서는 천천히 논의하면 될 것이다.

사실 논의랄 게 있나? 오히려 재건 상황을 전달받게 될 터.

"그대는 잠깐 나 좀 보세."

자리를 파하려고 할 때, 몰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안은 카칸티르에게 눈짓하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로만드로 님. 식사 때 뵙겠습니다."

"어어. 그래. 그러지...."

"이쪽으로...."

끼익.

몰린 일행만 남은 응접실. 적막만 감돌았다. 몰린은 지금이라도 당장 이안이 해명하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길 바랐지만, 그는 그럴 기색이 없었다. 보다 못한 맥이 끼어들었다.

"자네. 대체 무슨 짓인가?"

"무엇을요?"

"무엇을요? 어찌하여 이리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인지 묻는 걸세."

"무엇이 그리 복잡하십니까? 저는 몰린 경에게 밀고장을 주었고, 그 대가로 몰린 경은 저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습니까? 이후의 일에 관해서는 합의된 것이 없는데요."

달그락.

몰린이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반박했다.

"분명 그때 묻지 않았나! 마력운용에 대해 아는 바가 있냐고. 그때 자네는 전혀 모른다 하였어. 보아하니, 브라츠 영지를 탐하는 듯한데, 그때 솔직히 말했더라면 일이 이리 꼬이지는 않았을 게야."

이안이 마력운용자인 걸 알았다면 당연히 허수아비 영주로 에리카 대신 그를 세우려 들었을 것이다. 서자이긴 하나 밀고장을 준 공로도 있고, 무엇보다 핏줄은 천하지만 능력이 귀하니 어떻게 해서든 길을 만들 수 있었다.

"제가 솔직히 말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이안이 반박했다. 시건방지다 느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다.

"과거의 제 판단은 당시 최선의 선택이었어요. 이제 와 몰린 경께서 뭐라 하셔도, 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저들은 게일 2황자를 따르는 자들 아닌가. 반란의 발판으로 변경을 먹으려는 수작질인데, 정통 혈계로 바리엘을 이끌었던 이안이 동조할 리 없다.

그들은 이해 못 하겠지. 반역을 꾀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하지만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다.

"뭘 원하는가?"

"제가 묻고 싶군요. 뭘 원하십니까?"

대화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우선권을 갖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서문을 떼서 나오는 대화였다.

"…나는, 아니. 우리는 에리카 단장을 영주로 만들걸세. 정녕 자네가 영주 자리를 포기할 수 없다면 합의점을 찾아서-"

"영주 임명은 황제의 소관이거늘, 어찌 불경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차라리 다른 사람을 찾는 게 좋을 겁니다. 에리카 단장은 영지 내에서 평판이 영 부정적인 터라."

똑똑.

"이안 님. 메렐로프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그래. 나가지."

이안은 더 이상 몰린과의 대화가 비생산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바깥에서 하인이 부르는 소리에 미련 없이 일어섰다.

"세 분도 고단하실 테니 여독을 푸십시오. 그래도 황궁에서 오신 분들이니, 내 부족함 없이 준비하라 이르겠소."

끼익, 쾅!

"하!"

몰린 일행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그가 나간 방문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 누구도 상황을 타개할 만한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그만큼, 이안의 공격과 수비가 견고하게 들어서 있는 상황이었다.

* * *

-마리브 황자 저하께. 로만드로입니다.

이제 막 도착하여 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예상외로 상태가 좋습니다. 아직 재건할 민가가 남아있지만, 길에서 자는 자가 거의 없으며 사람들은 자주 웃습니다.

한데, 놀라운 일입니다. 영지에는 에리카 단장 대신 데르가의 서자라는 이안이 천려족과 함께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당황했으나, 황궁에 우호적이고 무엇보다 재건에 진심으로 애쓴 듯 보입니다. 자세한 건 보고서로 따로 첨부합니다.

전반적인 진행에는 문제가 없겠습니다. 또한 특별히 덧붙이자면, 서자 이안이 마력운용자입니다. 몰린은 국법에 따라 노예로 전락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말이겠습니까? 제가 우선

똑똑.

로만드로는 거기까지 적다가 멈칫거렸다. 문이 열리며 사용인의 얼굴이 보이자, 음식 냄새가 훅하고 퍼졌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러지. 내려가겠네."

로만드로는 바로 아래층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은쟁반에 담겨 나오는 정갈한 음식들. 그는 앉아서 눈으로 먼저 살폈는데, 싱싱한 채소와 과일 따위는 거의 없었고 오래 저장할 수 있는 저민 고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식재료 공급은 정상화 되지 않은 모양이군.'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이었다. 영지민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시기였으나, 많은 이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망가진 밭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그뿐인가? 중앙군과 조사단이 주둔하면서 저장해 두었던 식량은 빠르게 바닥을 보였으리라.

"저택의 모두가 이리 먹는가?"

"아…. 원하시는 게 있으실까요? 자문관님 부하분들도 같은 음식으로 나갔습니다만."

"아닐세. 그저 궁금해서 그런 것이야. 이안은?"

"먼저 드시라 하였습니다. 이웃 영지에서 서신이 온 터라."

반응으로 보아 다들 이리 먹는 것 같군. 로만드로는 일단 허기를 달래기 위해 포크를 들었다. 상황이 최악이었다면 바닥에서 식사했을 수도 있었다. 전투의 피바람이 닿은 곳은 그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리 테이블에서 먹는 따끈한 저녁 식사라!

'운이 좋다. 음. 좋아!'

그가 식사를 거의 마무리할 때쯤, 이안이 방으로 들어섰다.

"로만드로 님.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오. 어서 오시게나. 몰린 경은 어떻게 하고 계시오?"

"마찬가지로 방에서 식사를 드신다 합니다."

로만드로는 그의 손에 들린 두꺼운 서류를 짐짓 모른 척 인사했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그의 가까이 앉았다. 하인들이 빈 식기를 빠르게 치워갔다.

"앞으로 진행하실 때 이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보자. 음. 지도와 상황보고서군."

"보수가 진행된 목록과 지역 정보를 상세히 취합하였습니다."

자문관은 지도를 한번 쭉 훑어보다가 되물었다. 아까 하인이 말하기를 이웃 영지에서 서신이 왔다지?

"혹시 여기 이웃과 교류가 있는가?"

"전투가 한창 진행될 때는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얽히지 않으려고 외곽 문을 굳게 걸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씩 서신을 나누고 있지요."

"다른 것보다 겨울이 오기 전에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을 얻는 게 좋을 것 같네. 식량 보급 진행 현황은?"

"중앙지원군이 주둔하면서 그 소모가 컸습니다. 일단 저택의 창고를 모두 털고 있지만, 머지않아 바닥을 완전히 보일 것입니다."

이안은 그리 말하며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하여, 건의드립니다. 이번 겨울 중앙조세는 평작의 3할 정도만 걷는 게 좋겠습니다."

"말했다시피, 내 목표는 평작과 같게 하는 걸세."

로만드로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현재 저택 일을 돌보고 있다 하나, 그가 할푼리 개념으로 조세를 논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고작 열여섯, 변경의 서자가 알 만한 개념은 아니었다.

"현재 영지민들이 신고한 재산 목록을 확인해 봤을 때, 작년과 비교하여 반타작입니다. 또한 지금 저택에는 소수의 사용인 임금 외 천려족에게 지급할 보상금이 필요합니다. 계산하였을 때 3할 정도가 알맞습니다."

이안은 그렇게 설명하면서 뒷장을 넘겨주었다. 명확한 근거로 내린 결정이니라. 수십 개의 문장과 공식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표를 조정할 수는 없네."

"아쉽군요. 혹여 중앙에서 이번 한 해만 세금은 면해준다면 5할까지는 가능할 것 같은데...."

"모두 자네가 계산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자네, 천민 출신 서자라 하지 않았나?"

"대사막을 건너기 전, 화친 격에 맞게끔 담당 교사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건....

당장 실무에 투입하여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로만드로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계속해서 꼼꼼히 서류를 확인했다. 사용인이 따라준 와인을 한 모금 마실 때였다.

"…어쩔 수 없군요. 차선책이 있습니다. 메렐로프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읽어 보시지요."

"음?"

서신을 건네받은 로만드로는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웃 영지에서 식량을 수급하는 방법이었다.

로만드로는 빠릿빠릿하고 시원한 이안의 일처리에 입꼬리가 찢길 지경이었다. 잘만하면, 올해 바리엘의 첫눈을 수도에서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메렐로프 백작에게 식량을 팔아달라 전했더니, 가능한 목록과 금액을 정리해서 보내주겠노라 하였습니다. 필수품인 밀과 옥수수는 그쪽 사정도 넉넉지 않아, 가격이 평년보다 좀 비쌀 것으로 예상되고...."

로만드로는 이안의 설명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그쪽과 거래는 필요합니다. 저택 자금도 바닥이 난지라, 영지민들이 일주일 정도 버틸 치만 구입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아. 그건 걱정 마시게."

민심을 수습하려고 중앙에서 내려온 자문관이다. 형평상 세금을 조율해 줄 순 없지만, 자문관이 쓸 지원금은 지참한 상태. 그는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두 달 치까지는 가능할 걸세. 그러하면 겨울까지 정상화가 가능하겠지?"

"혹 금액이 얼마인지...."

이안의 물음에 로만드로는 와인을 마시기만 했다. 알려 줄 수 없다는 무언의 대답이다. 로만드로가 유일하게 쥐고 있다시피 한 권력이다 보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럼 메렐로프에 의사를 전달하겠습니다."

"그러게나."

"잠시 정리를...."

이안은 사용인에게 눈짓하며 식당을 나섰다. 복도를 꺾으니 카칸티르와 네르사른, 그의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릭 역시 마찬가지.

이안이 입을 열었다.

"문제가 생겼다."

제57화. 메렐로프

"무슨 문제?"

"목표치 조절이 어렵다는군."

"그야 예상한 거잖아?"

"아니길 바랐지.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택해야 할 것 같다."

카칸티르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릭이 되물었다.

"지원금이 있긴 있대?"

"그래. 확실히 대답하진 않았지만, 있긴 있다. 예상으로는 금화 3,000개 정도 될 듯 싶어."

"와, 씨. 미쳤다!"

두 달 치를 지원할 수 있는 금액이라 하니, 어림짐작하여 그 내외일 것이다. 황궁에서 재건을 돕는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라면 든든한 운용자금은 필수이니.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메렐로프와 접선할 것 같으니 준비를 잘 해두어야겠습니다."

"흐음. 그래."

로만드로의 금화. 메렐로프의 식량. 그리고 그 가운데서 중개하는 이안이라. 조금만 기회를 엿본다면 꽤 만족할 만한 거래가 이루어지리라.

카칸티르는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로만드로라는 자문관 말일세. 확실히 우리에게 우호적인 것 같네만. 자네가 보기에도 그러한가?"

"맞습니다. 마리브 황자가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보낸 자이니 게일 쪽과는 반대의 성향일 것입니다."

게다가 처음 만나자마자 보인 몰린의 적대가 큰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데르가의 밀고가 몰린과 이안의 합작이었으니, 둘이 한편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분위기로 보아 날을 세우다 못해 뜯어 먹을 기세니. 로만드로는 이안이 게일 쪽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했다.

"로만드로를 우리 편으로 끌어당긴다면, 모든 게 계획대로 될 것입니다."

"그래. 솔직히 좀 놀란 참이긴 하네."

"어떤...."

이안의 영문 모를 되물음에 카칸티르가 장난스레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아까 로만드로가 보인 반응을 따라 한 것이다.

"마력운용자가 제국에서 이런 대우일 줄이야."

"신과 가장 닮아있는 자라 불릴 정도니까요."

변방인들은 마법의 존재를 신화 속 존재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카칸티르와 네르사른 역시 개중 하나 아니던가. 베릭의 경우를 봤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큰 힘으로 나아갈지 모르는 것. 마력의 줄기는 거대한 바다로 나아가는 강물의 흐름과 같은 것이라는 걸 말이다.

"가주가 되는 것이 진실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어."

카칸티르의 말에 이안은 웃기만 했다. 로만드로의 반응을 직접 보고 나서야 확신이 서는 모양이었다.

"가을이 오기 전에 서둘러 쐐기를 박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몰린과 그 일행의 감시를 철저히 하라."

"네. 카칸."

"베릭, 시킨 대로 했겠지?"

"마력석 숨겨 놓는 거? 당연당연."

"좋다. 다들 움직여라."

카칸티르의 명령에 부하들이 기척을 숨기며 계단을 내려갔다. 이안 역시 베릭과 함께 로만드로의 방으로 되돌아갔고, 복도는 언제나 그랬듯 어둠만이 내려앉았다.

한편, 그 바로 아래층.

"선생님. 어쩌면 좋겠습니까?"

저녁을 마무리한 맥과 드고르가 몰린을 돌아봤다. 그들의 스승은 창가에 앉아서 하염없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맥은 담배를 꺼내 물며 머리칼을 우악스럽게 잡아 뜯었다.

"이거 도저히 방도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맥. 일단 진정을 좀 하세."

"난 드고르 자네처럼 평정심이 뛰어나지 않아. 에리카, 아니지. 사실 누구든 상관은 없겠다만 영주는 우리에게 협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런데 아까 이안의 태도 보지 않았나?"

맥의 외침에 드고르 역시 한숨을 삼켰다. 천려족과 합세한 마력운용자를 대체 어떤 방법으로 꺾는단 말인가. 게다가 중앙도 아닌 저들의 본거지인 변방에서.

"차라리 우리 쪽으로 우호적으로 나온다면 말이 달라졌겠다만...."

"그럴 것 같지는 않네. 아주 턱을 뻣뻣하게 들고서 로만드로 옆에 딱 붙어서는...."

눈치는 또 좀 좋은가? 저택에 도착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몰린 일행과 로만드로가 견제하는 사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 뒤에 각각 마리브와 게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제 생각에는 에리카 단장보다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누구를?"

"얼마 전에 록산 전투에서 마법부 헤일이 큰 공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황제께서 작위를 내릴 것 같으니, 영지를 이곳으로 권함이 어떻겠습니까?"

"헤일은 황궁의 주요 전력일세. 황제께서 그의 휴가도 반려하는 마당에 어찌 변방 땅을 주시겠나? 수도에서 나갈 빌미를 안 주실 터."

맥은 말도 안 된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의 손끝에 걸린 담배 연기가 어지러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드고르 자네, 에리카 단장 성격 모르는가?"

"…알지. 알아도 너무 잘 알지."

"그녀 성격에 일이 이렇게 넘어가면 어찌 나올지는, 나는 감히 예상할 수도 없네."

드고르는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으로 침묵했다. 서민 출신으로 조사단장의 자리까지 오른 집념 그 자체. 게일 저하에 대한 충성심으로 함께 한다기보다, 그로 인해 떨어지는 확실한 부와 명예에 더 관심이 있는 자다. 이번 브라츠 행차에 자원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스윽.

계속 창밖을 보고 있던 몰린이 테이블로 다가와 와인을 따랐다. 그는 밤공기처럼 무거운 목소리로 말문을 떼었다.

"앞을 막아선 자가 비킬 생각이 없고, 돌아갈 수도 없으며, 다른 길도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삶의 흔적이 녹아있는 눈빛.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막아선 자를 치우고 갈 수밖에."

"선생님."

"언제나 방법은 있다네."

이안을 죽이자.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제일 확실하고 깔끔한 방법이었다. 이곳이 변방이라서 난감한 것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래서 다행이다. 중앙이라면, 그리하여 마법사라는 칭호를 받았다면 처치하기 더 힘들 테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력운용자가 우리에게 적대적이라면, 더 자라기 전에 잘라내는 것이 마땅하지."

"옳은 말씀입니다. 혹여 마법사가 된 이후 걷잡을 수 없이 성장하면 곧 게일 저하께 부담이 될 것입니다."

이안만 없으면 되는 일이다.

이안만 없으면 천려족 짐승들이 이곳에 있을 명분도 없고, 로만드로 역시 의탁할 세력이 없으니 힘을 쓰지 못할 터.

에리카는 제 목숨이 두려워 행하지 못했지만, 몰린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실패였다. 고작 천민 출신 사생아 한 놈 때문에 위대한 게일 저하의 위업에 문제가 생기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며칠 동안은 기거하며 상황을 살펴보지."

"네. 선생님."

틈을 노리며 기회를 엿보자.

몰린 일행이 저택에 내려오자마자 세운 계획이었다. 그들은 내뱉은 말이 사라지길 원하는 것처럼, 와인으로 입을 헹구었다.

침대 아래, 마력석인 붉은색 브로치가 달려있다는 것도 모르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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