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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3% BASTARDOMAESTRODELEMPERADOR / Chapter 3: 020-030

章節 3: 020-030

#020화. 소드 마스터 (1)

쿵!

검과 검이 맞닿았다.

하나, 칼리오스의 것은 챔피언의 그레이트 소드에 비해 너무 얄팍했다.

길이도, 두께도, 실린 힘까지도.

콰아앙!

투기가 짓쳐들어오는 것에 칼리오스의 몸이 일순 떠올랐다.

직후 챔피언의 주먹이 칼리오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검을 들어 방어.

하나, 모든 충격을 흩어낼 수는 없었다.

"쿨럭···!"

핏물이 토해져 나왔다.

칼리오스는 시야가 일순 새하얗게 물드는 경험을 했고, 겨우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었다.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팔은 부들부들 떨린다.

속? 이미 진탕이다. 핏물이 나온 시점에서 한동안의 요양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정신이 혼미해져 정상적인 판단은 힘든 상황.

하나, 칼리오스는 여전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백성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

그런 신념에 찬 발상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오로지 검이었다.

'볼 수 있나?'

길을 찾을 방법.

'뜻을···.'

헤아릴 방법.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몰랐다.

결투 구도까지 왔음에도 절대적 열세, 몸은 시시각각 망가지며 검로는 흐트러지기만 했다.

그걸 스스로도 느낄 즘엔 다급함조차 없었다.

그저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보일 듯 보이지 않던 유렌의 검식을, 그걸 스스로 사용하는 모습을.

천생 검수라 할 수 있을 발상.

하나 답을 찾지 못한다면, 미련한 사람으로 남아 죽을 뿐이다.

챔피언이 또 짓쳐 들었다.

칼리오스는 혼미한 정신을 붙잡으며, 기억 어딘가를 유영했다.

검이 들렸고, 그는 기억을 따라 검을 휘둘렀다.

시야가 겹친다.

고원과 여명궁의 연병장이, 챔피언과 유렌의 모습이.

-겁화식이 왜 겁화식인 줄 아십니까?

어떻게 답했더라.

···그래.

-마나의 흐름이 불길을 닮아 겁화식이 아닌가. ···아? 그럼 겁화식은 불길을 형상화한 검인가?! 뜨겁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마나가 핵심···.

-틀렸습니다.

회초리로 맞았다.

유렌은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며 그런 말을 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말했잖습니까. 제국 검술은 야만적이며 미학이 없는 검술이라고. 그저 생존하기 위한 발버둥이었을 뿐이라고.

-···건국 황제의 검이지 않나.

-예, 그 건국 황제께서 자존심을 내려두고 만든 검입니다. 오로지 이기기 위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으나, 그럼에도 칼리오스는 그 이야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겁화식은 오크를 이기기 위한 검입니다. 건국 황제께선 그 검에 증오를 담았지요. 전신의 혈도를, 마나를 불태워 어그러뜨리겠다는 증오를. 그러기 위한 방도를 이 검에 담았다는 말입니다.

이리 되니 생각하게 된다.

아마, 오크의 노예였던 건국 황제가 그들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이 검을 지었다면.

오크의 노예였던 건국 황제께 오크가 그리도 원망스러운 적이었다면.

그들을 쓰러트리는 데는 가장 비열하고 끔찍한 방법을 사용했지 않을까. 라고.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오크의 투기가 칼리오스의 마나를 집어삼켰다.

마나의 길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너무 뜨겁고, 괴로웠다.

그러니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왜.'

어찌하여 이리도 아파야 하는 것인가.

저들은 어찌하여 이 고통을 자신에게 주는 것인가.

살의였다.

칼리오스는 그것을 느꼈다.

이해한 것이 아니라, 느낀 것이었다.

그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썩을 오크 놈.'

으득, 이가 갈렸다.

핏발 선 눈은 오크의 눈동자를 정확히 응시했다.

인간은 생각보다 악의적인 종족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저 눈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봐야 겨우 만족이 될 것 같았다.

의지의 발현.

그것을 마나로서 표출.

검의에 필요한 모든 선결 조건이 칼리오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순간 만들어졌다.

이윽고 칼리오스는 그레이트 소드를 흘렸다.

힘의 차이 탓에 완벽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틈을 만들 수준은 되었다.

팔꿈치 안쪽이 드러났다.

저 두꺼운 살가죽을 꿰뚫을 수는 없다.

하나, 할 수 있는 일은 있었으니.

콱!

혈도에 검을 대고,

꽈드드득!

그 속으로 자신의 마나를 쑤셔 박아버리는 것이다.

그러자 변화가 일었다.

"그오오오오―!"

챔피언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팔꿈치 안쪽은 혈관이 불거져 있었다.

칼리오스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하여 겨우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웃기나 하는 현상이지만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오크의 투기와 인간의 마나는 다르다.

그 성질부터가 상충하여, 두 가지가 혼재되면 혼재될수록 그 자리에서부터 충돌이 충격으로 화한다.

보통 충격을 받는 쪽은 둘 중 힘이 더 약한 쪽이다.

오크와 인간의 상성이었고, 칼리오스가 전신이 타들어 가는 감각을 느끼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게 핵심이었다.

겁화식은 그 상성을 온전히 역이용하는 형태로 지어졌다.

상대의 검과 절대 부딪히지 아니하고, 상대의 혈로로 마나를 주입하여 일방적인 구도를 만드는 검.

거인을 갈아먹는 난쟁이의 검.

그리하여 타는 듯한 고통을 되돌려주니 결국 겁화.

칼리오스는 그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이 식을 완성하기엔 너무 미숙했다.

꽈아앙!

"커헉!"

절대적인 마나의 양은 비슷하다.

하나 그것을 다루는 솜씨나 실어낼 수 있는 근력의 수준이 너무나도 차이가 났다.

무엇보다도 그랬다.

검의란 결국 검에 의지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소드 마스터의 오러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걸 어찌 익스퍼트 중위급에서 온전히 이끌어 낼 수 있겠는가.

미완성의 검식은 결국 칼리오스의 마나까지 갉아먹었다.

칼리오스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조금만 더.'

단 몇 번이라도 더 이 식을 사용한다면, 그리한다면 무언가 보일 것만 같았다.

한데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죽음이 다가왔다.

분개한 오크가 그레이트 소드를 높이 쳐들었다.

빈틈이 저기 있건만 몸은 왜 움직이지 않는 건지, 마나는 어찌하여 말을 듣지 않는 건지.

허망함에 웃음이 다 나왔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 순간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에 괜히 속이 상해오는 순간이었다.

"70점."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오크의 그레이트 소드가 너무나도 익숙한 회초리에 막혔다.

칼리오스가 눈을 크게 떴다.

어느덧, 유렌이 그의 앞에서 오크를 가로막고 있었다.

"···자네?"

"70점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막는 게 아니라 흘렸어야지요. 그리고 노릴 거면 차라리 내장을 노리십쇼. 투기는 몸이 망가져도 통증을 지워 움직이게 합니다. 관절을 노리면 피해가 미미하단 말입니다."

유렌이 심드렁하게 칼리오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뭐, 검의가 뭔지는 알게 된 듯하니 잘하셨습니다. 그러니 총점은 70점입니다."

현실감이 없었다.

챔피언은 회초리에 검이 달라붙었는지 지금도 끙끙대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오크들은 대결에 난입한 그를 보며 분노하며 무기를 빼 들고 있었다.

한데도 그만이 여유로웠다.

마치 이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런 위기는 위기로 볼 수 없다는 듯.

칼리오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언제부터 있었나?"

"좀 됐습니다. 전하께서 피 토할 때쯤."

"진작에 좀 도와주지."

"실습이라 치십쇼. 그런 말이 있잖습니까. 잔잔한 배에선 훌륭한 조타수가 나올 수 없다고. 고난이 있어야 성장이 있는 법이지요."

이를 무어라 해야겠는가.

그의 여유로운 분위기 탓에 함께 긴장이 풀려버린다.

아니, 그럼에도 완전히 긴장이 풀리진 않았다.

챔피언 때문이 아니었다.

'마나가···.'

유렌의 마나가 공간 전체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 양이 절대 큰 편이 아님에도 위압감이 엄청났다.

이를 구태여 표현하자면 그랬다.

'···맹수의 아가리 속에 머리를 들이민 기분이군.'

거대한 늑대의 입속에 있는 듯한, 사방에 송곳니가 돋아나 있는 듯한 감각.

소름이 끼쳐왔고, 그것을 오크들도 느꼈는지 주춤했다.

오로지 유렌만이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금방 끝낼 테니 쉬고 계십시오."

유렌의 시선이 챔피언을 향했다.

* * *

심장이 뻐근하다.

허락되지 않은 힘을 끌어오는 대가다.

'아, 한동안 요양해야겠다.'

마나에 형상을 입히고 '성질'을 담는 것은 역시 이 시점엔 무리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챔피언을 수월히 잡으려면 그보다 높은 경지가 필요한 것을.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리하며 마나를 조율했다.

아, 이렇게 힘겨우니 옛날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딱 옥에서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뚫던 때가.

-자네는 소드 마스터가 익스퍼트와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나.

태자의 물음에 나는 대충 답했었다.

-대충 검에 오러 입히고 날리면 소드 마스터 아닙니까.

-흠···.

-또 뭘 그렇게 쳐다봅니까. 기분 나쁘게.

-역시 그렇게밖에 안 보이는 건가.

-다른 게 있습니까? 아, 오러를 만드는데 필요한 마나 흐름 얘기라면···.

-그건 됐네. 어차피 자네 눈엔 이미 보이고 있을 테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이걸 알려주어야 할 듯하여서.

소드 마스터란 무엇인가.

어느 날 해낸 담론이었고, 태자가 내린 답은 그러했다.

-검의 주인. 이름 그대로 그 뜻을 잘 헤아려야 하네.

-?

-손에 들고 있는 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네. 검을 사용하는 자네가 검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하여야 비로소 주인이 된다는 말이네.

꽤 오랫동안 나는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암만 봐도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보자면 그렇다.

그는 정말 옳은 말을 했다.

검의 주인 되어 모든 것을 통제한다.

즉,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해선 상상한 마나의 흐름을 온전히 현실로 끌어낼 통제력이, 그것을 감당할 육신이, 또한 검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이 선결되면 일어나는 현상이 있었다.

-모든 검에는 성질이 있네. 검을 수련한 자의 자아가 검에 담기게 되지.

성질이 생긴다.

검에 자아가 담기는 것이다.

의지를 휘두르고 뜻을 휘두르니, 그것을 주인이 아닌 무엇으로 표현하겠는가.

예를 들어 설명하길 태자의 경우는 그것이 '지배'였다.

태자의 검은 공간에 떠돌아 다니는 마나를 자신의 힘으로 이용했다.

태자가 강했던 이유이자, 대련에서 태자를 이기기가 끔찍하게도 힘든 이유였다.

나는 그것을 구태여 신경 쓰지 않았으나, 어느 날 경지를 뚫으며 태자와 같이 성질을 얻을 수 있었다.

내 검의 성질은 '파쇄'였다.

이유를 떠올리길, 검을 휘두른 까닭이 날 버린 가문에 대한 복수심이었으므로.

다 부숴 짓이기겠다는 부끄러운 마음이었으므로.

한 번 성질이 결정된 마나는 이후로도 잘 변하지 않는다.

지금 성질을 끌어올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이미 내 성질을 알고, 그걸 이용할 줄 알기에 아직 익스퍼트 초입인 이 시점조차 그 원리를 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당연히 온전하게는 불가능하다.

육신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심상의 경지만 끌어왔기에.

검의 주인으로서, 정신적인 통제력은 얻었으나 육신의 통제력은 얻지 못했기에.

지금의 나는 반쪽짜리 소드 마스터다.

그 반동은 시시각각 몸을 갉아먹어 왔다.

꽈드드득···.

그러니 오래 끌어선 안 된다.

챔피언의 눈이 날 봤고, 나 또한 챔피언의 눈을 봤다.

나는 회초리를 들었다.

"눈 깔아야지. 개새끼가."

출수했다.

그렇게 단 한 합.

전신의 마나를 다 태우고 심장을 쥐어 짜내서, 근육을 다 녹여내서 단 한 합을 휘둘렀다.

그 속에 겁화식의 묘리를 녹이니,

꽈드드드득―!

반발하는 투기와 마나의 힘, 분쇄의 성질이 회초리에 닿은 허리부터 시작해 놈의 전신을 터뜨리듯 갈아버렸다.

후두둑, 하고 핏물과 살점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 * *

드레노어가 자리에 도착한 것은 유렌이 챔피언의 목을 베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성질···?'

저것이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야만 깨달을 수 있는 '성질'의 검이었으며, 

'불완전···.'

그 경지를 몸이 따라오지 못해 유렌의 몸이 진탕이 되어버렸다는 것.

저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드레노어가 알고, 이 대륙의 모든 검수가 아는 사실.

육신이 완성되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불가능'이라는 벽에 도전하기 위해선 그를 버틸만한 육신이 선결되어야만 한다.

한데 저것은 너무 기형적이었다.

선결 조건을 무시한 채 결과만 나와 있었다.

아니, 저것뿐만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태자와의 대련 참관 때도 그랬다.

검에 대한 이해도를 몸이 따라오지 못했다.

태자는 모르는 듯했으나, 그는 대련 중 분명 육신에 부하를 받고 있었다.

왜, 어째서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충격적인 광경에 그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는 순간이었다.

"단장님!"

"···아, 일단 전하를 구하거라!"

챔피언이 죽은 순간부터, 오크들이 미쳐 두 사람을 향해 돌격했다.

그 광경에 드레노어는 일단 사건을 수습하기로 했다.

기사들이 나섰다.

드레노어 본인 역시 오러를 발휘하며 오크들 사이로 돌격했다.

콰아아앙!!!

삽시간에 오크들이 쓸려나갔다.

와중 드레노어는 유렌을 흘긋거렸다.

"···어우, 씨발."

그가 팔로 입을 막아 자세히는 볼 수 없었으나, 소드 마스터의 동체시력은 그 순간에도 확실히 포착했다.

유렌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린 것을.

그 순간 무심코, 드레노어는 머릿속 흐트러진 퍼즐을 완벽히 맞출 단어가 떠올랐다.

'···지병?'

그렇다면 다 설명된다.

소드 마스터 급의 이해도, 그걸 따라오지 못하는 몸.

평소의 망나니 같은 행적과 이제껏 봐온 유렌의 과격하고 빠른 교육 방식이라는 행적까지도.

'육신의 저주를 받은 재능···.'

유렌이 태자를 과격한 대련으로 몰아붙이는 이유 또한 자신이 죽기 전 그 깨달음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게 그의 충심이 아니었을까.

드레노어의 눈빛이 침잠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저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운명이 아니던가.

재능을 가지고도 스스로를 위해 쓰지 못하는 운명이라니!

기사 드레노어.

평생 검을 신앙하며 제국에 충성을 다하는 남자.

그는 어느덧 확신으로 굳어져 버린 추측에, 가슴이 옥죄이는 기분을 느꼈다.

이 순간 생명의 한계를 시험하면서까지 칼리오스를 지킨 유렌이 갸륵하게만 보였다.

'내 불찰이다···!'

어찌 막사를 떠나여 저 충심 깊은 재능을 위기에 빠트리고 말았는가!

그의 검이 더욱 거칠어졌다.

유렌에 대한 호의와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콰아아앙!!!

오해는 그렇게 깊어지고 있었다.

···이래서 편향적 사고가 위험했다.

< 소드 마스터 (1)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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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드 마스터 (2) >

#021화. 소드 마스터 (2)

에릴다는 탈력감을 느끼며 맨바닥에 무릎 꿇었다.

그녀의 시야에 오크의 시체가 가득한 막사 앞의 풍경이 보였다.

머릿속엔 그런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겼다···.'

어떻게든 막아냈다.

이쪽의 피해는 병사들의 경상 및 중상이 있으나,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수준이다.

이 정도면 완벽한 승리라 해도 무방할 터다.

그런 때였다.

"황녀 전하! 무사하십니까!!!"

드레노어가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며 나타난 것은.

에릴다의 고개가 들렸다.

그가 무사했다는 것에 일단 안도.

하지만, 뒤로는 환희가 떠올랐다.

"칼리오스!!!"

말에 실려오던 칼리오스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에릴다는 번쩍 일어나 그를 향해 달려갔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어딜 봐도 성한 구석이 없는 것이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어림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았고 이리 멀쩡하게 웃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참 다행스러웠다.

"진짜··· 몸조심 좀 하자고···."

그리 푸념을 토하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에릴다의 눈에 유렌이 보였다.

에릴다는 흠칫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으나,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였기에.

기색으로만 보자면 여기 있는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워 보였기에.

"···소가주?"

조심스레 묻자 유렌의 시선이 에릴다를 향했다.

유렌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그런 말을 남겼다.

"약속대로 데려왔습니다."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지만 그 모습이 도리어 에릴다의 마음을 움직였다.

떠나기 전 그의 말이 떠오른 까닭이다.

-태자 전하는 어떻게든 살려서 제도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그 약속을 위해 무리를 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해서 유렌은 확실히 보여줬다.

-그때까지만 태자 전하를 믿어주십시오.

칼리오스를 믿고 맡겨도 된다는 것을.

그는 그리 쉽게 죽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속이 왜인지 일렁이고, 노력한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를 나쁘게만 바라보던 게 괜스레 미안했고 이리 행한 말을 지키는 모습에 감사함이 떠올랐다.

에릴다는 얄팍하게 감동이란 단어로 이 기분을 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조금만 이를 다르게 인지했다.

"···고마워요."

겨우내 내뱉은 말은 감사다.

하지만 그에 담긴 것은 '신뢰'였다.

에릴다는 스스로 시인한 것이다.

유렌은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상대이며, 그가 자신보다는 많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진짜, 고마워요."

작게, 에릴다의 얼굴 위로 미소가 피어났다.

유렌은 손을 휘휘 저었다.

"됐습니다. 그보다 막사 정리나 합시다. 전 쉬어도 됩니까?"

"네, 그러세요."

그렇게 유렌이 돌아섰다.

에릴다는 무언가 마음속의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있는 우군의 존재는, 유렌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녀가 지고 있던 짐을 함께 지어주고 있었다.

* * *

근처 영지에서 차출한 병력은 일이 끝난 후에야 나타났다.

딱히 그들이 느린 건 아니었다.

그냥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게 문제였지.

허망한 눈으로 막사의 참상을 보던 녀석들은 이후 막사의 정리를 도왔다.

근처 오크의 시체를 모아 태우고 부상자를 관리하는 등 분주함이 이루 말할 데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마무리가 끝났다.

목적한 오크 토벌은 이미 목적한 양 이상을 달성했다.

하지만 곧바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잔당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강의 부상을 수습한 태자는 곧장 병력들을 이용해 챔피언 아래 모여있던 오크의 잔당들을 처리했다.

그런 일이 다 끝난 후였다.

"파, 파로스 소가주님···."

"나 말고 다른 사람 보러 가. 그냥 속이 울렁거리는 정도라서 치유까지는 필요 없어."

나는 근처를 맴돌며 전전긍긍하는 신관 하나를 병사들에게로 보냈다.

해먹 하나를 만들어 볕을 받으며 누워 있었다.

이 썩을 놈의 몸뚱어리는 언제쯤이 되어야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움직여 줄까.

그런 생각 외에도 떠오른 것이 있었다.

괜한 의심.

그 수준에서의 추측에 가까운 발상이었지만 말이다.

'챔피언이 왜 나온 거지?'

아직도 미심쩍다.

지난 생을 떠올리면 그랬다.

회귀 전의 태자는 성인식 토벌을 나가지 않았다.

파로스··· 나를 건드린 것이 정치적으로 큰 흠결이 되어 점점 기반을 잃어가고 있었던 터라 그를 수습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게 핵심이었다.

태자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

즉, 챔피언을 수월하게 잡을 익스퍼트 최상위 병력도, 소드마스터 드레노어 경도 이곳에는 오지 않았다.

만약 그 상태로 오크 챔피언이 창궐하였다 치자.

그럼 남쪽 고원 인근부터 영지 몇 개는 박살 났을 거다.

이곳의 병력으로는 천 단위의 오크를 상대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했을 테니까.

희생자 수는 가뿐히 만을 넘었을 것이다.

그 정도 사건 소식이라면 누님도 알았겠지.

그리고 내게 그 사실을 말해줬겠지.

한데 나는 들은 게 없다.

즉, 오크 챔피언은 이번 생에만 발생했다는 추측이 더 신빙성을 얻지 않는가.

그 외에도 미심쩍은 점 하나.

'그놈들, 거의 자살 특공 수준이었어.'

본래 오크가 호전적인 종족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살 특공에 가까운 전략을 세울 정도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놈들 성정에 싸움을 걸었다면, 그냥 전군을 다 끌고 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더 그럴싸했다.

한데,

'분명···.'

그놈들은 태자를 노렸다.

오로지 태자 하나를 죽이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다 내려놓는 작전을 세웠다.

심지어 그 챔피언이 직접 나서서 말이다.

너무 미심쩍지 않나.

내 과민함일 수도 있으나, 전쟁에서의 경험은 사고를 대체로 이런 쪽으로 흐르게 만들었다.

'이건···.'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태자의 투옥이 무산되며 어떤 변화가 생겼고, 그것이 달갑지 않은 어떤 집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당장 내가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미미하겠지만 말이다.

괜히 찝찝해지는 중이었다.

"소가주."

"아, 드레노어 경."

드레노어 경이 나타났다.

나는 생각을 지우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래도 소드 마스터다.

누워서 답하는 건 영 예의가 아니지 않겠나.

하지만,

"되었네. 그대로 누워 계시게."

드레노어 경이 그를 막았다.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일어나기 힘들었다.

심장의 뻐근함 탓에 몸 전체가 제대로 작동을 안 하는 게 느껴져서.

냅다 해먹 위로 다시 누워버리자 드레노어 경이 날 빤히 쳐다봤다.

표정을 본 순간, 조금 징그럽다는 감상이 떠올랐다.

"···왜 그러십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꼭 죽을 병에 걸린 자식을 보는 표정이었다.

슬프고 안타깝고, 그런 감정이 얼굴에서 확 드러난단 말이다.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하여 눈을 좁히자 드레노어 경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봤다.

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네에겐 미안하네. 과한 짐을 맡기게 됐군."

"예? 아, 태자 전하 말입니까? 그거라면···."

"아니네. 아닐세. 그러지 말아주시게. 나는 알게 됐으니."

···이 아저씨 왜 이래?

"숨기고 싶다면 존중하겠네. 그것이 자네의 충의가 아니겠는가?"

경의 눈빛이 우수에 찼다.

뭔 개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 말을 듣진 않을 것 같았다.

괜히 입 아프게 씨름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 뭐···."

"자네는 누구보다 파로스다웠네. 하지만!"

홱! 경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부릅 뜨고 있는 것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런 중이었다.

"이제부터는 몸을 소중히 여기시게. 나 또한 제국에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으로서, 자네와 같은 인재가 미명에 사라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음이니!!!"

거 기사단장 아니랄까 봐 목청 한번 더럽게 크군.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적당히 맞춰줬다.

"유념하겠습니다."

"아암! 그럼 나는 병사들을 돌보러 가야겠네! 푹 쉬게나!"

쿵쿵!

드레노어 경이 육중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냥, 그 뒷모습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뭐야.'

저 아저씨, 머리라도 잘못 맞은 건가.

* * *

토벌의 뒤처리까지 모두 끝난 날.

즉, 이제 제도로 복귀할 때다.

위험한 사고를 겪었으나 결국은 전화위복.

 '저항의 의식'은 당초 계획했던 일반 오크 부락 처리가 아닌 챔피언의 사냥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며 태자의 정통성을 큰 폭으로 끌어올려 주게 됐다.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건국 황제의 후신, 재림이라 불리는 만큼의 성적을 보여준 게 되니 이로 하여금 얻는 것은 백성들의 지지였다.

하지만 태자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단서를 달았다.

"결국 잡은 건 자네지만 말일세."

"같이 잡은 거로 치면 될 것 아닙니까. 저는 공적이 필요치 않아서."

파로스는 명예직의 끝에 있는 가문이다.

파로스의 공적이 '얼마나 훌륭한 군주를 만들었는가'에 있다는 것만 봐도 그는 명백히 드러나지 않던가.

즉, 태자가 잘나가야 내가 잘나가는 게 된다.

이건 단순한 겸양이 아닌 이익의 판단이었고, 특히 내가 가르치는 것이 검술이라는 것을 따지면 내 대의 파로스는 이번 성과로 인해 큰 영광을 얻었다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을 설명하자, 태자가 기분 나쁘게 감성적인 표정으로 웃었다.

"자네는 참···."

"뭡니까?"

"···아니네,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네. 망나니처럼 굴더니 이럴 때만 진중해진단 말이지."

"망나니 맞습니다. 앞으로도 망나니일 거고."

정말 막 살겠다는 게 아니다.

그냥 지내보니 느끼는 게 있다.

'편하잖아. 뭘 해도 '망나니니까'로 설명이 되니까.'

이 망나니 이미지, 불명예스러운 것이긴 해도 내가 하는 언행에 있어 제약을 큰 폭으로 줄여준다.

패주고 싶은 놈들한테 막 대해도 '쟤는 원래 저런 애니까'라며 다들 수긍해준단 말이다.

이런 이점을 구태여 버릴 필요가 있겠나.

앞서 말했듯 태자만 조신하게 지내면 나는 순전히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위치다.

'역시 가문 하나는 참 잘 타고났단 말이지.'

그런 만족감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뭐, 알겠네. 하지만 공적을 온전히 혼자 가지진 않을 걸세. 그것만 알아두시게."

"제가 잡았다고만 하지 마십쇼."

"유념하지. 그보다 이거나 같이 고민해보지 않겠나."

태자의 말에 좋았던 기분이 다 날아갔다.

나빠진 건 아니고, 머쓱해졌다.

"토벌의 증거를 가져가야 하는데 말일세. 자네가 챔피언의 시체를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려서."

눈초리가 따갑다.

또 그놈의 '어떻게 한 것인가. 나도 할 수 있는 기예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겠지.

지난 며칠은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안 된다고 해도 '자네가 하는 걸 내가 못할 리가 없잖나!'라고 하며 기어오르길래 매로 다스렸다.

그래도 포기를 못하는 걸 보면 저놈의 고집을 어찌할까 싶다.

여하튼,

"···치장이나 무기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머리통도 반쯤은 멀쩡하고. 저걸 가져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뭐, 그래도 되긴 하지만···."

말을 돌렸다.

그렇게 토벌의 증거는 턱 아래가 없는 챔피언의 머리, 놈이 두르던 치장과 그레이트 소드로 결정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몸도 남겨둘걸.'

육신의 마나 통제력이 높지 않아 과하게 힘을 주입한 대가다.

그걸 이렇게 치르고 있었다.

끝까지 태자의 눈을 피했다.

복귀하는 순간까지 그랬다.

저 멀리 제도가 보인다.

집까지 왔다는 것에 새삼 뭉클한 감상이 떠올랐다.

그때, 떠나던 자리로 오자 에릴다가 행군을 멈춰 세우곤 말했다.

"자, 여기서 다시 예복으로 갈아입으세요."

떠날 때처럼 화려한 예복을 입고 들어가야 했다.

이미 제도 남문은 인산인해란다.

더럽게 입기 힘든 옷을 어떻게든 입고 오크 챔피언의 토벌 증거를 거대한 장대 위에 꽂았다.

그렇게, 입성 준비를 끝마친 후였다.

문득 에릴다가 그런 말을 했다.

"···한동안 볼 일 없겠네요. 우리."

"예, 아무래도 공사가 다망하시니. 곧 건국제 아닙니까. 준비 힘내십쇼."

건국제에 제일 바쁜 것은 태자 측이다.

연설도 연설이고, 황제를 대신해 다른 국가의 중요 손님들을 직접 맞아야 하고, 그 외에도 민간 시찰 등을 다니며 시간을 쪼개야 했다.

태자를 보좌할 에릴다 역시 바쁜 건 마찬가지일 터.

그런 말을 하자, 에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이 팍 좁아졌다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런 끝에 에릴다가 중얼거리는 수준으로 말했다.

"···도움 필요하면 찾아갈게요."

"그 정도로 바쁜 일은 없길 바라겠습니다."

"아리아는 어차피 그쪽으로 갈 거잖아요. 그냥 나오는 김에 제가 저택까지 데리고 가죠 뭐."

"그렇게까지야."

왜 이렇게 집요할까.

생각하던 중 문득 그런 추측을 떠올렸다.

"···치즈 버거 먹고 싶으신 거면 말씀하십쇼. 하나 정도는 만들어 드릴 수 있으니."

내가 밥을 먹을 때마다 흘긋거리던 게 치즈 버거를 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귓불이 붉어져 있었다.

'녀석.'

역시 몸은 솔직하군.

* * *

파로스의 저택, 제도가 내려다보이는 집무실의 창가.

가주 대리 세실리아 파로스는 흔들리는 눈빛을 한 채 남문 쪽을 바라봤다.

환호성이 이곳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유렌이 돌아온 것이겠지.

혹여 다친 곳은 없을까.

세실리아의 마음은 영 놓이지 않았다.

사실, 유렌이 떠난 그날부터 줄곧 이랬다.

근래 들어 유독 믿음직스러워진, 그리고 소임을 다하려 드는 동생이었으나 그것이 세실리아를 불안하게 했다.

그녀에게 유렌은 아직 철없고 곧 부서질 것처럼 약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걱정에 잠을 좀 설쳤다.

식사도 영 먹기가 불편했다.

덕분에 조금은 수척해진 상태.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아씨! 소가주님께서 복귀 중이시랍니다!"

세실리아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가다듬었다.

근래엔 유독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기 시작한 아우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깔끔하게 단장했다.

그리고 저택의 문 앞으로 나왔다.

제발 무사하길, 다친 곳은 없길.

그런 바람을 토해내며 먼 곳을 바라보길 한참.

인영이 보이고 있었다.

세실리아의 눈이 슬며시 커졌다.

삐딱한 자세로 말에 올라타 다가오는 것은 유렌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야위셨구나.'

식사를 잘하지 못한 걸까.

부상을 입은 걸까.

영 걱정이 스러지지 않는 중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유렌이 말에서 내렸다.

그러더니 불량스러운 이목구비를 부드러운 미소로 만들며, 그리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누님."

그에, 그제야 세실리아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게 이 얼굴을 보고서야 실감이 난 것이다.

"다친 곳은 없으신지요. 위험한 일을 또 없으셨는지."

"예, 누님의 아우 아닙니까. 걱정시킬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고 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세실리아는 유렌의 손을 꼭 잡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어서 들어가 편히 쉬시지요."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된 일이다.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로 동생을 보내는 일은 이다지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나 그런 걱정도 이제 끝.

세실리아는 기쁜 마음으로, 특유의 처연하게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유렌을 안으로 이끌었다.

그리도 평화롭게 귀환을 끝냈다.

다만, 그때만 평화로웠다.

"아씨! 그 소식 들으셨어요? 이게···."

"무슨 일이더냐?"

"···지금 제도에 소문이 파다해요. 태자 전하께서 잡으신 오크 챔피언이 사실 소가주님이랑 둘이서 잡은 거였대요! 태자 전하가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대요!"

다음 날 제도 전체에 퍼진 소문.

그게 세실리아의 귀에도 들어왔다.

세실리아는 거대한 오크에게 칼침을 맞으며 피를 흘렸을 유렌을 상상하고 말았다.

휘청―!

"아, 아씨!"

세실리아가 혼절했다.

그를 본 유렌은 머리에 피가 쏠렸다.

'태자 이 씨발 새끼.'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얘기 들었어? 파로스의 소공자의 검술 이론이 하늘에 닿아 있대."

"태자 전하가 챔피언을 이길 수 있었던 게 파로스 소가주님의 검술 지도 덕분이었대!"

"그 소문 사실 맞아?"

"태자 전하가 직접 그리 말씀하셨다니까?"

"아, 기사단장도 그러는데 파로스 소가주는 비운의 천재···."

건국제까지 2주도 채 남지 않은 시점, 제도는 그런 소문에 시끌벅적해지고 있었다.

< 소드 마스터 (2)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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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혼자 (1) >

#022화. 약혼자 (1)

칼리오스는 지금의 상황이 다분히 억울했다.

그의 상식으로 공적이란 마땅히 돌아가야할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오크 챔피언 역시 마찬가지.

자신은 겨우 버티기만 했을 뿐 그를 실질적으로 잡은 사람은 유렌이었다.

물론 그의 요구가 있었던 만큼 '함께 잡았다'로 소문을 냈고, 그리하여 유렌에 대한 인식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싶었다.

한데 그런 노력의 보상이 이것이라니.

"우욱···!"

평소보다 '대련'이 과격했다.

아직 챔피언과의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건만 전신을 골고루 두드려 맞으니 헛구역질이 절로 이는 지경이 됐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지 않나.

이 정도면 사적인 감정이 끼어있는 처사였다.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감정이 있었으니.

'이래도 털끝 하나 못 건드린다고?'

바로 압도적인 실력차에 관한 절망감이었다.

유렌의 상태는 암만 좋게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대련을 막 마친 지금은 새하얘진 안색으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챔피언에게 썼던 이해 밖의 일 합.

그 반동으로 저렇다고 하는데, 내상이 가득한 상태라 이번만큼은 한 대라도 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그럼에도 기술이 한참 모자라 스치지도 못했다.

유렌이 입매를 닦았다.

칼리오스는 그의 손등에 피가 묻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체 어찌 저 상태로 그런 검술이 가능한 것인지 의아해 미칠 지경.

그 순간 유렌이 말했다.

"전하, 입이 화를 부릅니다. 입이."

"···호의였네."

"누가 베풀어 달랬습니까. 어우, 속이야."

그리 말하더니 헛구역질 까지.

저런 꼴을 보이니 괜한 미안함이 치솟았다.

물론, 한순간이었다.

"자, 다시 갑시다."

"음···?"

저게 무슨 말일까.

단번에 이해하지 못해 되물으니 유렌이 희번뜩한 눈으로 선고했다.

"대련해야지요. 아직 덜 팼··· 아니, 교육을 덜 끝냈습니다."

칼리오스는 절망했다.

* * *

건국제가 코앞이다.

즉, 국내외적으로 온갖 중요 인사들이 제도에 몰려 난리를 쳐대는 시기이며 태자의 업무량이 평소의 열 배는 늘어나는 시기다.

그런 만큼 수업은 당연히 불가해질 테고, 나는 이 기회에 성질을 끌어 쓴 반동이나 수습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뭐냐.

웬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이 퍼져 누님이 쓰러지셨다.

그것만 해도 머리에 피가 몰리건만, 저놈의 소문 탓에 파로스로 자식 교육을 맡기고 싶다는 귀족들이 생겨나 나를 귀찮게 했다.

이 새끼들은 파로스가 과외 따위나 하는 가문인 줄 아는 건가?

그놈의 교육열이 뭔지, 위대한 가문을 아주 좆으로 보고 있단 말이다.

직접 깽판을 치고 싶으나 몸 상태가 이리하여 원흉인 태자를 조지는 선에서 끝낸 게 한스럽다.

그래도 귀족들 단속을 부탁했으니 같은 일로 시끄러워질 일은 없겠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련을 끝낸 직후, 나는 태자에게 아직 이해되지 않는 점을 물었다.

"그래서 그 비운의 천재니 뭐니 하는 건 또 뭡니까?"

"나도 모르네. 드레노어 경이 영 알려줄 생각을 안 해서."

"그 아저씨는 왜 그런답니까?"

"모르네. 그래도 이례적인 일이라네. 그거 아나? 드레노어 경이 다른 이의 검을 칭찬한 건 자네가 두 번째일세. 처음은 나고."

그렇겠지.

명색이 현 시점 제국 유일의 소드 마스터다.

마스터급까지 오른다는 건 태생부터 남다른 재능과 오성을 가졌다는 뜻인 만큼, 남들은 보지 못하는 심오한 묘리를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법이다.

드레노어 경이 본 내 검술은 그랜드 마스터인 미래의 태자가 창안한 검식이다.

어찌 그 가치가 낮을 수 있겠나.

내 검술이 특이하고 대단해 보이는 건 나도 이해한다.

다만, 그걸 평가하는 방식이 문제지.

"비운의 천재는 무슨. 손발 다 오그라들겠습니다."

"으음··· 제도의 귀족들이 나름 분석한 게 있는데 들어보겠나?"

"읊어보십쇼."

"비운의 천재라는 말을 '파로스가 아니었다면 다음 대 황실 기사단장이 되었을 재목'으로 해석하더군."

"······."

"···뭐, 일각에서는 시한부니 어쩌니 하는 말도 조금씩 들리는데 혹시 이쪽인가?"

"전하 때문에 수명이 줄고 있긴 합니다만."

뭐가 됐든 개소리라는 건 알겠다.

황실 기사단장?

줘도 안 먹는다.

가만히 태자만 키워도 무럭무럭 자라는 파로스를 두고 왜 그런 현장직을 뛰겠나.

무엇보다 시한부?

일단 몸만 만들면 소드 마스터가 확정이다.

마스터급까지 간다면 마나가 육체의 노화를 막고 수명을 큰 폭으로 늘려준다.

어느 지점까지 가면 신체가 전성기의 컨디션으로 역행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시한부가 되겠는가.

'해명해야 하나?'

잠시 생각했으나···.

'···됐다. 알아서 생각하라지.'

일일이 뛰어다니면서 아니라고 하는 것도 우습다.

애초에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동물이 아니던가.

내가 멀쩡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다들 이게 낭설이라는 걸 알 터다.

'당장은 정양이나 신경 써야지.'

그런 생각이나 하던 중이었다.

토도도도!!!

가볍고 급박한 발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직후 팔을 뒤쪽으로 뻗자,

탁!

"파로스야! 이제야 왔구나!"

아리아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를 보니 해맑게 웃는 아리아가 있었다.

"황녀님, 그리 뛰어다니면 옷에 흙 묻습니다."

"괜찮단다! 황녀는 자고 일어나면 새 옷이 나와 있단다!"

이 순진한 꼬맹이는 밤새 빨래 요정이 옷을 빨아주는 줄 아나 보다.

뭐 어쩌겠나, 그보다 저 부담스러운 눈빛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예예, 챙겨 왔으니까 그만 쳐다보십시오."

배낭에서 잘 포장된 치즈버거 하나를 꺼냈다.

토벌을 다녀오며 개량한 레시피였다.

아리아의 뺨이 붉게 타올랐다.

"오, 오오···!"

눈물까지 글썽이는 게 그동안 이 맛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하기야 정체성이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인 꼬맹이이지 않던가.

"전보단 나아졌을 겁니다. 드셔보십쇼."

"알겠단다! 발전한 치즈버거라니··· 아리아는 심장이 두근거려 버틸 수가 없구나!"

번쩍 치즈버거를 들어 올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순간 태자가 말을 걸어왔다.

"내 건 없나?"

"없습니다만."

"어째서지?"

그야 만들어달라고 조를 게 뻔하니까 그러지.

나는 아직 야밤에 여자 막사로 쳐들어가 한나를 납치해 오던 이 인간의 행태를 잊지 못한다.

하루에 버거를 다섯 개씩이나 처먹던 돼지 같은 인간이 이 맛을 알면 얼마나 나를 괴롭히겠나.

"섭섭하군."

태자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한 대 쥐어박고 싶네. 진짜.

"으잉···."

아리아가 나와 태자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봤다.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아.'

줘야 하는지 고민하는 걸까.

그럴 필요는 없는데.

"드십시오. 황녀님. 태자 전하는 괜찮습니다."

말하고 있건만 태자의 시선이 영 거슬렸다.

안광이 아주 아리아의 손에 들린 치즈버거를 꿰뚫을 정도.

이윽고 그 눈빛에 아리아가 항복했다.

"오, 오빠버니 전하가 먹으세요···!"

보통은 그렇다.

눈치가 있는 인간이라면 아리아의 덜덜 떨리는 손을 보거나, 글썽거리는 표정을 보거나, 목울대를 움직이며 애타게 버거를 향하는 눈빛을 보고 '아, 저 아이가 배려심이 깊어 양보하려 하는구나.' 하고 흐뭇함과 기특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곤 '나는 괜찮으니 먹거라'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태자가 어떤 족속이던가.

태어나면서부터 만인의 추앙을 받고, 주변에선 언제나 떠받들어주는 환경에만 있던 인간이다.

충언하려면 주먹을 들어 패면서 해야 하는 인간이다.

저런 양보? 너무 당연하기에 기특함을 느끼지 않는다.

"오! 내게 주는 것이냐!"

"으응···."

내가 말릴 틈도 없었다.

태자가 버거를 낚아챘다.

아리아의 입술이 댓발 튀어나와 떨렸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물었다.

"황녀 전하, 진짜 괜찮습니까?"

아리아가 울먹거리며 웃었다.

"괘, 괜찮단다. 오빠버니 전하는 공사가 망한 분이셔서 많이 드셔야 한단다···! 그리고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 행복해진단다! 아, 아리아는 치즈버거 공주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에게 이 맛을 알려서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할 의무가 있고오···!"

울먹거리는 게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와중에도 아리아는 태자가 버거의 포장을 까는 모습을 흘긋 거리고 있었다.

말에 '앗, 아아···' 하는 추임새까지 끼어버리니 사뭇 안타까운 모양새가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잘 먹으마!"

태자가 환한 얼굴로 버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눈을 번쩍 떴다.

"이, 이 맛은···!"

이윽고 허겁지겁 버거를 흡입하기 시작한다.

예견된 결말.

하지만 달라는 대로 만들어줄 생각은 없다.

내가 고개를 돌려버리자 태자의 화살이 아리아에게로 꽂혔다.

"정말 맛있구나! 혀에 자극이 강하여 맛이 확연히 느껴지며 터지는 육즙과 치즈의 조화가···!"

"으응···."

"이런 맛이 있다니··· 이럴 수가···!"

"히잉···."

아리아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또한 곧 울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었다.

태자가 맛을 설명할수록 아리아의 얼굴에선 시시각각 원망이 짙어지고 있었다.

한데도 태자는 싱글벙글이다.

애 걸 빼앗아 먹고 그게 맛있다면서 빼앗은 본인한테 맛을 설명하기까지 하는 행태가 얼마나 보기 흉한가.

저게 아리아랑 친해지고 싶다는 인간이 할 짓인가?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어휴, 저 병신···.'

친해지긴 글렀다.

* * *

결국 아리아에게는 새로 치즈버거를 만들어줬다.

차마 궁에서 요리할 수는 없어 우리 집까지 데려왔다.

오는 내내 히끅거리는 걸 달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따끈따끈한 치즈버거를 먹게 됐으니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하니 그제야 알아듣더라.

"마, 맛있단다···! 역시 파로스는 치즈 버거의 용사가 분명하단다!!!"

눈물의 치즈버거를 먹은 아리아는 그대로 만족하여 드러누웠다.

환궁은 언제 할 생각인지, 그런 중 누님이 나타나 날 살피셨다.

"소가주도 어서 들어가 쉬시지요. 황녀 전하는 제가 모실 터이니."

그놈의 태자가 뿌린 소문 탓에 내 증세를 알아버리셔서 이리 극성맞게 날 돌보고 계시다.

그것 아는가.

상대를 억압하는 일에 굳이 화를 내거나 위압감을 조성할 필요는 없다는 것.

어떤 사람은 조곤조곤 말을 흘리는 것만으로더 상대의 의사를 강제할 수 있고, 그게 바로 누님이셨다.

그래도 아리아를 떠맡기는 게 영 미안해 말을 흘려보았다.

"누님께서도 바쁘실 텐데 어찌 그런 일을 맡기겠습니까. 격한 놀이를 할 생각은 없으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안 됩니다."

누님이 곧장 반격했다.

드물게 강경한 태도.

그에 의아함까지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곧 영애와의 식사 날이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도 건강한 모습을 보여야지요."

이상한 말이 들렸다.

"약혼자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한 일입니다. 소가주."

덜컥, 몸이 멎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생각하고 정신을 차려봤지만···.

"세실리아야, 약혼이 무엇이더냐?"

"예, 황녀님. 혼약을 약조한 사이를 이르는 말이랍니다."

"혼약이 무엇이냐!"

"···결혼입니다. 전하. 소가주께선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있는 사람이랍니다."

···아, 잘못 들은 게 아니구나.

* * *

사흘이 지났다.

식사 날이 됐다.

그동안 나는 내가 잊고 있던 사실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나 유렌 파로스는 위대한 가문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당연히 귀족으로서 후계 생산의 의무를 지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약혼도 했었다.

그래, 그걸 까먹은 것이다.

구태여 변명하자면, 옥에 들어가며 약혼이 무산됐고 이후엔 나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 있었다는 것 정도.

여하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약혼 상대가 참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게 핵심이다.

"소가주님! 영애께서 오셨어요!"

"거짓말이라고 해줄래?"

"에, 진짠데."

이젠 날 보고도 쫄지 않는 엠마가 확인 사살을 해줬다.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고 나서야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방을 나서 저택 홀로 향했다.

그제야 보이는 게 있었다.

"···소가주를 뵙습니다."

여자가 있었다.

어깨까지도 닿지 않는 짧은 물빛 머리칼, 예쁘다는 말보다는 잘생겼다는 말이 어울리는 날카로운 이목구비, 푸른색 눈동자와 붉은 입술.

그리고, 마탑의 인장이 박힌 마법사의 로브까지.

누군가 이르길 이 여자를 장인이 세공한 얼음 조각이라 한다.

그래, 겉모습만 보면 그럴 수 있겠지.

실제로 지금 당장만 해도 여자의 기색에선 조금의 호의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냥 미친년인데. 이거.'

나는 이 여자가 정말 싫다.

이유? 아주 명확하다.

"···위자드 베아트리스를 뵙습니다."

베아트리스 폰 길푸어.

길푸어 남작가의 장녀이자, 이 시대에서 가장 찬란한 재능을 부여받은 마법사.

그런 여자가 내게 말했다.

"파로스 소가주, 일단 묻죠."

"예."

"레베카의 뺨을 때린 건 저 때문인가요?"

어이가 없는 질문.

하나, 태자를 상대해본 덕에 익숙하다.

누군가는 어렴풋이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

그래, 맞다.

이 여자가 바로 태자와 함께 황금시대의 기수 중 하나라 불리던.

하늘이 내린 재능을 타고난 주제에 고작 평민 계집 하나에 목매달다 자멸한.

"대답해 주실래요?"

···차기 마탑주 후보이자 내 약혼자다.

< 약혼자 (1)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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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혼자 (2) >

#023화. 약혼자 (2)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래,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선 '파로스의 혼인'이란 것에 관한 이해가 필요할 터다.

앞서 일렀듯 파로스는 여타 귀족들과 다른 특이한 위치에 서 있는 가문이다.

어떤 가문보다도 위대하고 명예로움에도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또한 가문의 위업이 온전히 황실의 위업에 귀속된다.

즉, 파로스와의 혼약은 정계에서 무기로 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파로스는 대대로 혼인에 있어 여러 애로사항을 겪었다.

그러나 그게 아무 사람이나 데려와 안주인으로 앉혀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곧 죽어도 위대한 가문이다.

상대는 일단 귀족가의 자제여야만 하고, 그 능력이 출중해야만 했다.

동시에 정치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집안이어야 했다.

이쯤 말하면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럼 대체 누가 파로스랑 혼인을 하냐고.

그 이점이 뭐냐고.

딱 하나가 있다.

절대로 대체될 수 없는 명예.

정통성.

황실에 재고와 반려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그 이름값 말이다.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귀족들은 언제나 있었고, 내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후보가 있었고, 개중 최고로 꼽힌 게 바로 길푸어 남작가의 베아트리스였다.

길푸어 남작가는 가문이 생겨난 지 겨우 100년에 정통성은 턱없이 부족한 가문이었다.

언제나 정통성에 대한 공격을 받아왔으며, 그걸 해소할 든든한 결혼 동맹이 필요했다.

그런 와중 그 가문에서 베아트리스 폰 길푸어가 태어난 것이다.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평해질 정도로 경이적인 마법적 재능을 안은 채 말이다.

그녀가 마탑에 소속된 것이 겨우 6세의 일.

범부의 벽이라 불리는 3위계를 뚫고, 4위계로 올라간 것이 고작 16세의 일.

세간은 말했다.

다음 대의 마탑주는 그녀가 될 것이며, 그녀가 이끄는 시대는 가장 찬란한 마법의 시대가 되리라고.

그러니까 베아트리스는 파로스와 썩 어울리는 여자였다.

혼인의 이점은 명확했다.

파로스는 마탑의 주인으로 지목될 재능을 후계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점이 이득이다.

길푸어는 파로스의 권세로 하여금 정통성을 얻고, 후견인인 마탑은 황실의 압박을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이득이다.

그런 계산적인 약혼이었다.

서로에게 적당한 이익을 주며, 조그마한 손해만 감수하는.

하늘이 그리 점지해줬다 할 정도로 딱 맞아떨어졌던.

귀족의 결혼은 당사자들의 일이 아닌 만큼, 나와 이 여자 역시 구태여 반발하지 않았다.

그런 베아트리스와 내 관계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그렇다.

'동맹 정도지.'

이익을 위해 손을 잡고 나아가는 관계.

사적인 감정을 지운 채 오로지 이익만을 생각한 관계.

식사 자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혼약이 아직 진행 중인 이야기임을 서로에게 주지시키는 일종의 관례와도 같았다.

그런 혼약이 무산된 것은··· 그래, 내가 평민 계집의 뺨을 친 것 때문이다.

그 일로 미쳐있던 태자에게 공격당하고, 우리는 나란히 옥으로 갔으니 혼인 동맹이 유지될 리가 있겠나.

하지만 이제 와 말한다.

"대답, 안 해주실 건가요?"

"맞다면 어쩔 겁니까?"

"뭐가 그리 당당······."

"그 계집을 만나겠다고 약속된 식사 자리에 불참하는 건 당당합니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삐딱하게 답했다.

흠칫하는 게 눈에 보이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다.

솔직히, 이 여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니 말이 곱게 나올 수가 없었다.

왜 그 계집의 뺨을 때렸느냐.

그건 이 여자가 그 계집을 만나느라 나와의 식사 자리를 말도 없이 불참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날은 세 시간이 넘게 식탁에서 식어가는 식사를 바라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게 슬펐냐고?

가슴 아팠냐고?

지랄, 그냥 좆같았다.

애초에 저 여자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걸 서로가 아는 상태로 이익을 위해 유지해온 관계다.

나야 빨리 식사를 끝내고 술이나 퍼마실 생각이었고, 그게 안 되니 화가 잔뜩 나버린 것뿐이다.

굳이 더하자면 평민계집에게 밀렸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는 그랬지.

물론 아녀자의 뺨을 친 것은 잘못된 일이 맞다.

이제 와 그런 일을 굳이 해명하고 이해받고 싶지도 않다.

겨우 뺨 한 번으로 평생 옥에서 썩었으니, 죗값은 넘쳐 터지도록 치렀다고 본다.

더불어 내가 옥에 들어간 건 날 소박 맞게 한 저 여자 때문이라고, 겨우 뺨 한 번으로 옥에 처넣은 태자 때문이라고, 원흉인 그 여자 때문이라고.

그런 유아적이고 피해의식에 찌든 발상은 이미 투옥 1년 차에 끝냈다.

그러니 시간을 되돌린 지금.

나는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을 알고 있으니, 그를 따라 움직일 뿐이다.

"여기서 이러지 맙시다. 피차 잘한 일 없고··· 아니, 적어도 우리 둘 사이에서는 위저드께서 하신 일이 더 실책이지. 내가 평민 계집을 때린 게 당신한테 사과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등을 돌렸다.

"식사나 합시다. 배고파 죽겠으니까."

얼굴을 보니까 화가 난다.

저 여자가 날 소박 놓은 게 이유는 아니었다.

그런 감정을 털어내고서, 그것보다 근본적으로.

'저 여자만 살아있었어도······.'

전쟁기의 제국이 그리 처참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내가 저 여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다만 하나.

제국의 마탑을 무너뜨린 장본인이 저 여자이기 때문이다.

* * *

전생에 내가 알던 대부분의 사건은 옥중에서 누님께 들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세세한 내부 사정을 아는 일은 그다지 없었고, 다만 명징한 원인과 결과만이 내 판단의 근거다.

그런 맥락의 이야기였다.

내가 투옥되고 혼약이 파기된 이후의 이야기는.

―영애가 악마 소환을 시도했답니다.

저 여자는 가까운 미래에 악마를 소환하는 일을 벌인다.

그것도 마탑의 중심부에서, 수많은 마법사를 제물로 바쳐서 말이다.

물론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애초에 제국 역사 이래로 악마 소환이 성공한 일은 300년 전 한 번뿐이었다.

될 리가 있었겠나.

소환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다.

베아트리스의 재능이 모자라서는 아니었다.

소환되려는 악마를 막기 위해 마탑의 마법사들이 이를 악물고 맞섰기 때문이다.

저지엔 성공했으나 희생이 없을 수는 없었다.

마탑 수호의 대가는 최상위 마법사들의 몰살이었다.

중위계 마법사들 또한 마찬가지.

악마의 마력에 오염되어 앓다가 모두 1년이 안 되어 죽어버렸다.

베아트리스가 그런 일을 벌인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당사자밖에 모른다.

정말 마법사들을 제물로 바칠 의도가 있는지조차도.

다만, 훗날 밝혀진 것으로 그녀가 소환하려 했던 악마가 무언가의 '호의'를 강제하는 악마였다는 것.

그로 하여금 저 여자의 행적이 다시 주목받았다.

그녀가 호의를 강제하려 했던 대상이, 그 평민 계집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정론으로 떠오른 것이다.

끝끝내 진의는 알 수 없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영애가 자결했습니다.

저 여자는 그런 사고를 벌여놓고 자살했다.

옥에 구금된 지 약 2주 만의 일이었다.

―발견 당시의 영애는 전신이 자해의 흔적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정신적으로 몰려 있었던 듯합니다. 죄책감이었을까요. 아니면······.

누님조차 베아트리스의 진심은 몰랐다.

나는 그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그렇구나··· 하는 정도.

그리고 그것이 내게 실질적인 피해로 돌아온 것은 제국 전쟁 때였다.

'마법 사단만 있었어도 그렇게 처발리진 않았어.'

다시 말하길 저 여자가 벌인 사고로 중위, 고위계 마법사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 공백은 전쟁기 때까지도 메꿔지지 않았다.

애초에 검술 보다도 재능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이 마법이다.

쓸만한 싹이나, 이미 꽃피운 재능들이 뿌리째 뽑혀버린 마탑이 어떻게 단숨에 재기할 수 있었겠나.

제국이 부강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지식과 힘이었다.

그걸 잃은 제국은 팔 한 짝이 날아간 병사나 다름없었으며, 그로 하여금 제국은 수많은 전략적 수단을 상실하고 말았다.

야만인과의 전쟁 초기, 놈들의 '주술'을 막을 수단이 하나도 남지 않으니 일방적 열세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그랬다.

나나 태자는 본신의 무력 탓에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우리 군을 가장 괴롭힌 것은 야만족의 왕이 아닌 그놈의 주술이었다.

정신 방어 마법.

그것 하나만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마법 병단이 있었다면, 우리가 그렇게 처참하게 지지는 않았다.

그 필요성이 절실해질수록 나는 이 여자에 대한 원망이 날이 갈수록 커짐을 느꼈다.

그게 이유였다.

'태자는 적어도 죽는 순간까지 책임지고 제국을 지켰지.'

이 여자는 자살로 편히 도망갔다.

아직은 없는 일.

일어날 것이라면 무조건 막아야만 할 일.

하지만, 그런 공적인 일을 떠나서 이 여자가 싫었다.

그 감정이 식사를 이어가는 지금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

시선이 느껴진다.

호의는 한 톨도 없다.

같은 마음인 게 그나마 다행이다.

나도 이 여자가 어서 식사를 끝내고 꺼져줬으면 좋겠다.

"드시지요. 그쪽 행차하신다고 우리 주방장이 새벽부터 소란 피우면서 만든 겁니다."

"······."

"안 먹을 거면 저 주고. 밥 남기는 꼴 남들 보여주는 건 좀 그렇잖습니까."

우리 주방장이 많이 감성적이다.

혹여 손을 안 댄 식사가 있으면 '맛이 없었나···' 하며 울적해 하는 소심한 중년이다.

이 여자 때문에 울적하게 만들 수가 있겠나.

내 위장이 더 노력해줘야지.

생각하고 손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정말, 저한테 더 할 말은 없으신가요?"

그런 질문이 건네져 왔다.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저 여자의 눈빛에 깃든 것이 적의임을 단번에 알 수 있어서.

"저희는 약혼 관계 아니던가요? 이익을 위해 뭉쳤다곤 하지만, 서로의 감정에 대한 앙금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에 나오지 못한 건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아, 못 들어 주겠네.

"야."

"···야?"

"그래, 너."

사실, 오늘까지 사흘간 계속 고민해봤다.

이 여자의 전략적 가치는 둘째치고, 더 넓은 관점에서 내 궁극적 목표인 '파로스의 부흥'에 이 여자가 필요한지.

이 여자가 파로스의 안주인 자리에 어울리는 여자인지.

'지랄.'

암만 생각해도 아니란 말이지.

이 여자? 필요하다.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이 여자의 재능은 지금의 마탑주조차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니까.

단순한 방어가 아닌 역공에 이 여자의 재능은 필수불가결하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쟁의 이야기다.

'대체 그년이 뭐가 그리 대단한진 모르겠는데······.'

레베카인지 뭔지, 그 계집이 뭐길래 난다 긴다 하는 놈들이 하나같이 빠져서 헐떡대는지 난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아는 것 하나는, 그딴 계집에게 미쳐서 목까지 매다는 여자는 파로스의 안주인 자격이 없다.

그러니까,

"그냥 파혼하지. 너도 나랑 결혼하기 싫잖아."

존대도 더 써줄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 * *

베아트리스는 표정을 가다듬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파로스의 저택에 들어온 후,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그녀가 가장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당황이었다.

'···이런 사람이었나?'

품위 없는 말투도, 시큰둥하고 배려 없는 행동도 여전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이르길 깊이감이었다.

스스로도 왜 이런 감각을 느끼는지 의아했으나, 분명 유렌은 베아트리스가 알던 망나니와 달랐다.

유렌이 태사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것일까.

그도 아니면 원래 저런 사람이었고, 자신이 몰랐던 것일까.

이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베아트리스는 한 번도 유렌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저 말이 속을 긁었다.

베아트리스는 왜인지 자신이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무심코 해버리고 말았다.

하나 그걸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 말, 진심인가요."

베아트리스의 기색이 더욱 차가워졌다.

살얼음 같은 기도는 은연중에 공기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유렌은 놀라울 정도로 그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무던함이 베아트리스를 압박했다.

"내가 이런 말도 아무 생각 없이 할 정도로 멍청해 보이나?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건가?"

흥이 식었다는 듯, 혹은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베아트리스의 손끝이 떨렸다.

그의 눈빛에 깃든 아득한 무관심, 혹은 경멸의 기색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마법사 나리라고 다 머리가 좋은 건 아닌듯해. 아니면 정상적인 사고 판단이 안 될 정도로 맛탱이가 간 건가?"

"그 말 취소······."

"못하겠는데."

화아악―!

순간 유렌의 기도가 드러났다.

베아트리스의 몸이 굳었다.

'···?!'

태생적인 축복인 마나와의 동화.

그 능력이 일러주고 있었다.

그의 마나는 참으로 날 서고 흉악한 형태를 하고 있다고.

'왜?'

지금에 와서?

바로 저번 만남까지도 보잘것없던 기도가 갑자기?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말이 정신없이 베아트리스를 흔든 까닭이다.

"잘 들어. 그 평민 계집? 관심 없어. 당신한테도 마찬가지고. 내가 당신에게 듣고 싶은 답은 하나야. 예, 파혼합시다. 왜인 줄 알아?"

"······."

"자격이 없기 때문이야. 고작 개인적인 감정으로 파로스의 행사를 뒷전으로 두는 그 쪽한테는 안주인 자격이 없어."

언어란 본디 화자에 따라 그 무게감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직전 드러난 기도를 아직 잊지 못했다.

이 순간조차도, 신경질적인 기도에 왜인지 혼이 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저 말은 베아트리스를 이루던 진리 하나를 까뒤집어 부수려 하고 있었다.

위기감.

그것이 들었다.

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앉아. 말 안 끝났으니까."

그의 말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물리적인 무언가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진한 마나 친화력이, 베아트리스로 하여금 그의 말에 강제성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듣고 싶지 않아요."

"나도 한풀이는 해야지. 한 번은 기회를 주려고 했어. 어떻게 변명하는지 구경이나 하고 싶어서. 그런데 이게 뭔가 싶네. 주제에 네가 갑인 줄 알아. 건방지게."

유렌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며 말했다.

"조금만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나? 너에겐 그 계집보단 식사가 우선이었어. 네 병신같은 판단 덕에 마탑도, 너희 가문도, 나도 곤란해졌어. 그게 분별이 안 되나? 아니면 그 계집 발닦개 노릇이 그렇게 재밌나?"

울컥,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기분이 들었다.

베아트리스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유렌이 혀를 차며 말했다.

"네가 여색을 즐기는 건 내 알 바 아닌데, 사리 분별은 했었어야지."

"그 말은 취소해요."

여색이 아니었다.

베아트리스가 레베카에게 느끼는 감정은 이성적인 사랑이나 육욕과는 엄연히 달랐다.

이건 그것과는 다른, 변치 않는 다른 가치를 지닌 감정이었다.

맞다.

자신은 공적인 모든 것을 뒷전으로 했고, 그리하여 사달을 냈다.

하지만 레베카에게는 그럴 가치가 있었다.

그녀만이 줄 수 있는 충만함은 어떤 금은보화, 명예와 권력으로도 얻을 수 없는 종류였다.

적어도 베아트리스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여 단 하나, 레베카를 욕보이는 말 만은 참을 수 없어 반박했다.

그러나 그 일은 무용했다.

"한심하네."

유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에서 힘이 빠졌다.

베아트리스는 또 직전과 같은, 꼭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을 무어라 해야 할까.

"전하도 전한데··· 네가 더하다. 적어도 전하는 듣는 척이라도 했거든."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듯한 눈.

그것이 심상을 흔들었다.

베아트리스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시선으로 그를 쫓았다.

하지만 유렌은 더 이상 그녀를 보지 않았다.

"쩝, 주방장은 어떻게 달래야 하나."

말하며 손으로 음식을 주워 먹었다.

그리하며 말했다.

"가라. 파혼은 알아서 진행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아, 거기에 하나 더."

이어진 말은, 베아트리스의 등골을 섬찟하게 만들었다.

"멍청한 짓거리는 그만둬라. 뒤처리하기 귀찮으니까."

분명 지나가듯 건넨 말.

하지만 구태여 그 말에 깊이 박히는 이유는 있었다.

'···알고 있어?'

찔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이 계획하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뭐해? 안 꺼지고."

베아트리스는 혼란을 느꼈다.

< 약혼자 (2)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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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혼자 (3) >

#024화. 약혼자 (3)

하루가 지났다.

베아트리스는 왜인지 속이 답답한 기분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유렌이 했던 말은 쐐기가 되어 베아트리스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이걸 뽑아내야만 했고, 베아트리스가 알기로 그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아, 베이!"

공원에 그녀가 있었다.

파스텔톤의 연분홍 머리칼, 동그란 눈, 그 속에 진 녹음의 빛.

구성하는 모든 것이 평온을 형상화하는 듯한 아이가 자신을 보며 웃었다.

그에 베아트리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누군가 본다면 가장 완벽한 얼음조각상이라 불리는 그녀가,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터였다.

이는 그녀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이제까지는 세상 누구도 베아트리스의 입가에 미소를 꽃피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아트리스의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이윽고 레베카의 앞에선 그녀는 반가움이 한껏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내가 늦었지."

사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왔다.

하지만 레베카보다 늦게 도착했으니 늦은 게 맞았다.

속을 짓이기는 듯한 답답함이 사라졌다.

레베카의 손을 잡을 때면, 쐐기가 빠진 흉에 꽃잎이 차올라 치유되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에야 베아트리스는 유렌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었다.

―네가 여색을 즐기는 건 내 알 바 아닌데, 사리 분별은 했었어야지.

아니었다.

이것은 역시 성적인 감정이나 육욕이 아니었다.

이는 온전한 정신적 충만함을 주는 관계였으며,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호의였다.

그러니까 레베카는 자신의 유일한 친구란 말이다.

"베이, 일은 잘 마쳤어요? 건국제에 출품할 마법이 있다고 했잖아요!"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자신의 일을 물어와 준다.

그에 베아트리스는 싱그럽게 웃으며 답했다.

"응, 순조로워. 준비도 얼추 갖춰졌고."

"다행이네요. 아, 그래도 무리하면 안 돼요! 베이는 성취욕이 강한 사람이라 걱정이에요. 또 무리하는 건 아니죠?"

베아트리스는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기분을 느꼈다.

아, 이것이었다.

성과가 아닌 자신의 건강을 걱정해주는 모습이 좋았다.

그 어떤 이들과도 다르게 베아트리스라는 인격을 온전히 응시해주는 것이 특별했다.

레베카는 자신이 실패해도 위로해줄 것이다.

저 동그란 눈망울에 한가득 걱정을 담아 자신을 끌어안아 주겠지.

그리고 말할 것이다.

―괜찮아. 못해도 괜찮아. 제가 옆에 있잖아요. 지금은 울어도 돼요.

처음 만난 그날처럼 자신을 긍정해줄 터였다.

가문? 마탑? 혼약?

다 필요 없다.

그런 것들은 레베카를 만나는 일을 가로막을 뿐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베아트리스는 더 이상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레베카의 미소만 있다면 영원히고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순간이었다.

덜컥, 베아트리스의 손끝이 떨렸다.

레베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못 보던 목걸이네."

"아! 이거요!"

레베카가 헤프게 웃었다.

"성자님이 주셨어요! 잠을 푹 자게 해주는 목걸이래요! 헤헤··· 효과는 잘 모르겠는데, 생긴 게 너무 이뻐서 걸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녀가 목걸이를 자랑하며 의견을 물어왔다.

꽈악, 베아트리스의 심장이 조여왔다.

애써 미소를 지어봤지만, 전처럼 환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아니야. 그 인간이랑 가까워지지 마.'

하나 말은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감히 레베카의 행동을 강제하려 했다가 미움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을 추스를 수도 없었다.

여러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성자와 대공자, 그리고 그림자의 주인.

그들은 레베카에게 해로웠다.

자신처럼 순수하게 레베카를 친애하는 것이 아닌, 그녀의 몸을 목적으로 하는 것들이니까.

언제고 레베카를 묶어둘 생각이나 하는 버러지들이니까.

베아트리스는 레베카가 그자들과 멀어지길 바랐다.

혹여 곁에 둔다 한들, 눈길을 주지 않길 바랐다.

베아트리스는 생각했다.

그들에게 쓸 시간과 마음, 언어와 눈짓이 모두 자신에게로 향했으면 좋겠다고.

이는 분명한 독점욕이었다.

베아트리스는 혹여 레베카가 그들을 이성으로서 친애하게 되는 순간이 두려웠다.

분명 연인의 관계로 묶이는 순간 레베카가 자신에게 쏟는 시간과 정성은 줄어들 테고, 우선순위 또한 밀려날 테니.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는 온전히 레베카만을 담았다.

꼭, 그 속에 그녀를 가두겠다는 듯 절실하게.

그 순간이었다.

"베이, 왜 그래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레베카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베아트리스의 뺨에 손을 얹었다.

베아트리스는 뺨에서부터 온기가 퍼져나감을 느꼈다.

다시금 충만함이 왔다.

정상 궤도를 벗어나던 신체의 활동이 이윽고 되돌아왔다.

레베카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차오르는 안도감에 베아트리스는 웃었다.

"아니야.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베아트리스는 그 순간, 흔들리던 결심을 확고히 했다.

―멍청한 짓거리는 그만둬라. 뒤처리하기 귀찮으니까.

웃기지 마.

멍청한 짓거리가 아냐.

이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레베카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내가···.'

지키고, 알려주어야 했다.

일을 진행하자.

'레베카를 가져야해.'

그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게 분명했다.

* * *

"파로스야, 파로스야. 죽었느냐아~?"

"예에···."

아리아가 침대에 널브러진 날 콕콕 찔렀다.

그 작은 충격에도 속이 다 울렁거린다.

이놈의 반동은 왜 아직도 다 치유가 되지 않은 건지.

이젠 슬슬 괜찮겠지 싶다가도 근육통이나 울렁거림은 영 멎을 생각이 없다.

···그래, 남탓해서 뭐하겠나.

내가 행실을 바로 하지 않은 까닭이다.

가만히 누워서 요양이나 하면 될 걸 구태여 나서 뻘짓거리를 했다.

태자를 팬다고 마나를 쓴 게 첫 번째 원인.

진탕이 되어있던 속이 다시금 뒤집어졌다.

그 상태로 베아트리스를 만났다.

위압감 좀 주겠다고 마나를 풀어 헤쳤으며, 주방장 생각에 뒤집어진 속에 기름진 음식을 가득 쑤셔 박았다.

그러니 몸도 마음도 걸레짝이다.

억울한 점은 나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것.

'태자 일은 그렇다 쳐도 그 여자는···.'

베아트리스를 생각하니 쯧 하고 혀를 차게 된다.

딱 봐도 그 평민 계집에게 단단히 홀려 있는 꼴이었다.

본인을 욕보이는 건 참으면서도 그 여자 욕은 못 참는 꼴이 특히 그랬다.

하여 위압감을 조성했다.

마음 같아선 그 자리를 뒤집고 악마 소환과 관련한 압박을 넣고 싶었으나, 당장 행동에 나서지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악마 소환이 언제인지를 알아야 말이지.'

생각해보라.

미래를 안다 한들 현 시점엔 시작도, 어쩌면 생각조차 안 하고 있을 일을 두고 '너 이거 할 거 다 안다'라고 해 봐야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나 할 것이다.

또한 괜히 마탑의 유망주를 악마 소환이랑 엮는 불한당 소리나 듣겠지.

정치적인 영역으로 가면 더 복잡해진다.

악마는 금기 중의 금기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례 있었던 사고들만 봐도, 그것을 언급하는 것부터가 부정으로 여겨지는 수준이다.

괜히 벌집을 쑤셨다가 내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일.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그 여자를 들쑤시는 것 하책이란 말이다.

그런 이유로 그냥 파혼만 했다.

주어를 뺀 경고로 주시하고 있다는 뜻을 전해 그 여자의 행동을 한 번 더 제지했고.

'아, 파혼하니까 또 화나네.'

파혼 이야기를 전한 날, 누님의 시무룩한 얼굴이 떠올랐다.

―소가주의 선택이라면 존중합니다. 평생의 반려를 찾는 일인데 신중해야지요. 좋은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혹, 원하는 사항이 있으신지요?

말을 내뱉는 누님은 고개가 평소보다 조금 더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고, 어깨는 처져 있으셨다.

얼마나 미안하던지 괜히 얼굴이 다 뜨거워질 지경이었다면 이해가 되겠나.

여하튼, 그렇게 그날의 정리는 끝.

오늘은 요양에 좀 집중하려 했건만···.

"파로스야~."

이 망할 꼬맹이가 오늘도 날 괴롭히는구나.

"···저 아픕니다."

"으응, 파로스는 아파 보인단다···!"

이해해주는 건가.

흘긋 아리아의 안색을 살폈고, 나는 내가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그, 근데 그거 아느냐 파로스야? 아플 땐 치즈 버거를 먹어야 빨리 낫는단다···!"

아리아가 내 눈치를 살살 보며 설명을 이었다.

"들어보거라. 원래 아플 땐 기분이 좋아져야 빨리 낫지 않더냐! 그리고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선 맛있는 걸 먹어야 하며··· 꼴깍, 치즈버거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니까 극상의 보약이란다! 그러니까 힘내서 치즈버거를 만들고 먹어야 한단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냥 자기가 먹고 싶으니까 억지 논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말을 하다가 침을 꼴깍꼴깍 삼켜대는 꼴을 보면 더 그렇다.

버거는 먹고 싶고, 그 와중에 걱정하는 척은 해야겠고.

이 영악하지 못한 꼬맹이는 참 바쁘게 사는 듯했다.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만들어주고 싶지만··· 오늘은 영 움직이기가 싫단 말이지.

도움을 요청했다.

"1황녀 전하."

시선을 돌리자 내 방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던 에릴다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들었다.

전에 말한 대로, 아리아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함께 와 있는 중이시다.

"왜요."

"슬슬 3황녀 전하를 보내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죄송한데 제가 아직 서류를 덜 봐서."

"제가 보모는 아닌 듯한데."

"그냥 하나 만들어주세요. 애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그 말을 들은 순간 깨달아버렸다.

'한통속이군.'

오랜 격언이 있다.

돈이고 권력이고, 그 외의 어떤 욕망이든 초탈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을 제일 경계하라던가.

저 지독한 인간은 아리아를 방패로 삼아 본인도 버거를 먹을 생각인 게 분명했다.

···어쩌겠나 싶다.

더 시끄러워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빨리 이 인간들을 보내는 수밖에.

"···예, 예예. 만들어 드립죠."

끄응,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아리아가 화색을 띄워냈다.

"그, 그래! 아픈 거 아픈 거 다 날아가게 어서 버거를 먹자꾸나!"

"좋습니까?"

"웅!"

아리아가 폴짝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에릴다도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좁히며 에릴다를 보자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이 돌아온다.

'내 팔자야.'

고개를 떨구는 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니 이제야 책상 위의 서류가 보여 물어봤다.

"···그런데 그 서류는 뭡니까? 건국제 관련?"

웬 그림이 잔뜩 박힌 게 물건 관련인 듯하다.

진상품이면 태자한테 하나 받아먹을까 싶어 운을 띄우니 그런 답이 돌아왔다.

"네, 이번 대경매 품목 정리요."

우뚝, 몸이 멎었다.

'아, 대경매.'

그리운 울림이다.

대경매는 황실에서 건국제마다 주최하는 제국 최고 규모의 경매다.

올라오는 품목으로는 유물과 아티팩트, 그리고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 여러 귀물.

하나하나가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녀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하는 것들을 딱 그날 하루의 경매에선 팔아준다.

'예전엔 여기서 술도 많이 샀었는데.'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술들을 사 나발로 불었던 기억이 있다.

그땐 맛도 잘 모르면서 왜 돈지랄을 그렇게 했을까.

"흠···."

"왜요. 관심 있어요?"

"아닙니다. 그냥 좀."

생각해보면 회귀 후엔 첫날에 먹은 것 이후론 술을 먹은 일이 없었다.

하지만 대경매에 나오는 고급주라면 하나 정도는 사두고 한 잔씩 홀짝거려도 좋지 않을까.

구미가 당겨 물어봤다.

"카탈로그, 잠시만 봐도 됩니까?"

"네, 뭐 비밀도 아니니까요."

"오, 감사합니다."

"파로스야, 치즈버거는?"

"기다리십쇼."

"힝···."

그렇게 카탈로그를 넘겼다.

그 순간이었다.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엥?"

"음? 그 페이지는 유물이네요. 이번엔 좋은 게 없어요. 아무 능력도 안 깃든 악세사리 몇 개가 올라오고 끝났거든요. 그것보단 아티팩트 쪽을 보는 걸 추천해요. 이번엔 좋은 게 몇 개 들어와서."

뭔 개소리지?

유물이 시원찮다니.

'이거 고대 아티팩트잖아.'

내 시선은 한 악세사리에 콕 박혔다.

[목걸이/출처 불문]

두 개의 은색 곡선이 서로 꼬이며 맞물리는 형상의 목걸이.

모양새가 특이함은 물론이오, 그 효과까지 특출났기에 착각일 리가 없었다.

나는 이걸 본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닌 회귀 전의 내 부하가 가지고 있던 목걸이다.

―아, 이거 말입니까? 예전에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목걸입니다. 받았을 땐 몰랐는데, 이게 엄청난 물건이더라고요.

저 목걸이의 효과는 심플하다.

―마나를 주입하면 그걸 몸의 회복력으로 바꿔주덥니다. 숙취 해소엔 아주 끝장이죠.

마나를 회복력으로 치환하는 것.

그러니까, 쉽게 표현하자면 그런 말이었다.

'···찾았다.'

몸을 회복할 방법.

< 약혼자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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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 (1) >

#025화. 조우 (1)

리암이라는 놈이 있었다.

내가 부리던 죄수 부대 소속의 십인장으로, 성격은 쾌활했고 입버릇은 조금 더러웠다.

특징이라면 원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부대에서도 남과 어울리길 즐겼다는 것과 술을 좋아했다는 것 정도.

그게 내가 놈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였다.

-부관님! 오늘 한 잔 어떠십니까?

-술이 있나?

-저기 무너진 집을 좀 뒤져봤습죠. 지하실에 담금주가 있지 뭡니까.

-오.

녀석은 전투가 끝나면 인근의 무너진 민가를 뒤적여 어디선가 술을 찾아왔다.

보통은 그럴 때 날 찾아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는데, 나 역시 술을 즐기는 부류가 아니던가.

그게 아니더라도 전쟁기다.

전쟁터는 그런 재미라도 없다면 사람이 미쳐버리는 곳이었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함께 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녀석에게 의아함을 느꼈었다.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숙취가 없냐. 나야 마나로 밀어낸다 쳐도.

리암은 술을 토할 때까지 마셔대도 절대 숙취에 앓는 법이 없었다.

인간이 말술이라 그런가 싶다가도, 그 정도가 이해를 벗어나는 수준이니 의아함이 치솟는 게 아닌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건넨 질문에 녀석은 그런 답을 줬었다.

-이 목걸이가 비결입니다.

워낙 자랑하듯 보여줬기에 아직도 그 모양새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놈이 이름 붙이길 '숙취 해소의 목걸이'. 그것은 마나를 치유력으로 치환해 몸을 활성화시키는 고대의 유물이었다.

물론 그 치환의 양이 무한하지는 않고, 변환 효율이 높은 편도 아니었지만 치유력을 민간인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신물임은 분명하지 않나.

나조차도 탐나는 물건이었다.

아무렴, 전쟁터에서 저걸 사용한다면 체력 온존에 큰 도움을 받을 게 분명하지 않던가.

하여 언젠가는 녀석에게 그걸 얻어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끝끝내 받아내지는 못했다.

-안 됩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물건이거든요.

유쾌하기만 한 녀석이다.

하나,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라.

죄수 부대.

그곳에서 동고동락했던 모든 이들은 죄인이었다.

다들 마음의 그늘 하나는 있는 법이다.

리암의 아버지는 황실 기사단에 근무하는 평기사였으며, 2황자의 숙청기 때 명을 달리한 운 나쁜 사내였다.

당시 기사 생도였던 리암은 아버지의 죽음을 겪곤 황실의 행사에 분노하여 단신으로 검을 들고 궁에 침입했다.

뭔가를 할 수는 없었다.

암만 암흑기였다고 하나 제국의 황성이다.

기사 생도 하나 따위에게 보안이 뚫릴 리가 있겠나.

분노에 미쳐 복수를 꿈꾸던 생도는 그렇게 죄수가 되어 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라 죄수 부대에 합류하게 됐다.

-아버지는 저랑 다른 진짜 기사셨습니다. 신념이 있고, 정의로우셨죠. 그냥··· 그런 분을 잊고 싶지 않습니다.

가족을 잃는 순간의 무력함이 얼마나 뼈에 사무치는지를 안다.

그런 말까지 듣고 더 목걸이를 탐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놈은 끝까지 목걸이를 지켰다.

결말이야 죽음이긴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전투까진 살아있었지.'

내가 회귀했던 제도 공방전까지 살아남은 노련한 놈이었다.

끝끝내는 익스퍼트 중위계까지 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녀석을 떠올리니 문득, 그것도 생각났다.

-부관님은 전쟁이 끝나면 뭘 할겁니까?

-가문 다시 일으켜야지.

-오! 저 그럼 그 가문에 기사로 넣어주십쇼!

-안 돼. 파로스는 기사를 둘 수 없거든. 정치적인 위치 때문에 무력 수단을 가지고 있으면 곤란해.

-엥? 그런 게 어딨습니까? 그럼 가문은 누가 지키라고?

-황실 기사단이 당번 정해서 가문 기사 노릇 해줬지. 넌 모르냐? 파로스 정원 아래 쪽에 기사단 막사 있었는데.

-제가 제도 남쪽에 살았던 지라···.

-뭐야, 부자 동네 살았네.

뭐라더라, 가문 일으키면 기사로 넣어달라기에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줬다.

그리하니 녀석이 건네온 답이 꽤 재밌었다.

-그럼 제가 황실 기사단이 되어서 파로스를 전담하겠습니다!

-허락해줄지 모르겠네. 그냥 배배 꼬아서 개인 병력 만들겠다는 거랑 같은 말이라.

-안 되면 문지기나 합죠. 부관님이랑 있으면 재밌거든요.

여러모로 유쾌한 녀석이었다.

다른 부대원보다 유독 친하게 지냈던 만큼 애착도 있는 편이었고.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놈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다.

같은 제도 안에 있으니 만나기도 쉽겠지.

물론 그게 지금은 아니다.

산재한 문제가 있으니 그것부터 처리해야지.

그런 면에서의 이야기다.

'미안하다. 리암.'

목걸이, 이번 생에는 내가 가져야겠다.

아버지도 살아있고 2황자가 날뛸 일도 없으니 저게 아버지 유품이 될 리도 없지 않나?

그렇다면 기물은 더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가져야지.

마음의 짐은 그런 발상을 거쳐 덜어낼 수 있었다.

* * *

다른 무엇보다 저 목걸이의 습득이 최우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 또 몸을 혹사하게 될지 모르는 만큼 안전장치보다 중요한 게 없다.

그런 이유로 여러 가지를 고민했다.

확실하게 목걸이를 얻을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경매에 참여해야 하나?

하지만, 이내 고개가 저어졌다.

'리스크가 있지.'

리암의 아버지는 황실 기사단의 평기사였다.

자식 선물로 저 목걸이를 사줬다는 걸 생각하면 가격이 그리 비싸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경매이지 않나.

변수가 너무 많단 말이다.

일단 경매 참여자가 지난 생과 같을 가능성? 0에 수렴하지.

아주 작은 것에도 뒤틀리는 것이 미래라는 놈이다.

당장 태자가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는 지금, 국소적인 부분에서부터 내가 알던 것들과 괴리가 일어나고 있다.

그런 상황에 내가 경매에 참여해서 저걸 사려고 들었다 치자.

혹여 돈 많고 시간 많고 지는 걸 싫어하는 놈이 나타나 훼방을 치면 곤란하지 않겠나.

바람이 간절한 만큼 방법은 더 확실하길 바란다.

하여 떠올린 방법이 있었다.

여명궁으로 왔다.

"그래서 날 불렀다? 경매품 하나만 빼돌려 달라고?"

"예, 전하."

"···될 거라고 생각하나?"

"안 될 거 뭐 있습니까. 황실이 주관하는 경매에, 물품 담당자는 태자 전하 휘하에 있는 1황녀 전하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 물건. 메인 물품도 아니던데."

나름의 계산이란 게 있다.

일단 지금 시점에 목걸이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목걸이는 경매 초반, 흥을 돋구기 위한 물품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그 목걸이가 출품되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 내가 나름 태자 직속이다.

이럴 때 권력 힘 좀 빌려야지, 쓸 수 있는 수단을 구태여 외면할 이유는 뭔가?

태자는 내 말에 흐음, 하며 눈을 좁혔다.

"···그 목걸이에 무슨 신묘한 힘이라도 있나? 자네가 아는 물건이라거나."

"그냥 갖고 싶어서 그럽니다. 카탈로그 봤는데 취향이라."

"자네가 악세사리에 관심이 있었나?"

"생겼습니다."

의심하는 기색이다.

그래, 그럴 수 있다.

태자의 머리가 좀 비상하던가.

이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 정도 영민함은 발휘하는 게 맞지.

괜찮은 물건이라는 판단이 서면 평가를 다시 하려 들 터다.

어쩌면 빼돌려 직접 쓸 생각도 하겠지.

그 정도 대비도 없이 왔을 리가.

"맨 입으로 달라는 건 아니고."

"호오."

태자가 씨익 웃었다.

이 인간도 알고 나도 안다.

우리 협상에서 유효하게 먹힐 카드가 무엇인지.

나는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레시피, 필요하지 않습니까?"

"버거의 레시피가 맞나?"

"다른 레시피라면 이렇게 협상 카드로 꺼낼 리가 없지요."

유효한 카드였다.

실제로 치즈버거를 처음 먹은 후, 태자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을 보내 내게 버거 레시피를 달라고 졸라댔다.

이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으니 언젠간 협상 카드로 쓸 수 있으리란 생각에 귀찮음을 버텨왔는데 이런 기회가 온 게 아닌가.

'거절 못하지. 이건.'

협상의 핵심은 결국 상대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 있었다.

내가 바라는 건 목걸이.

하지만 태자가 바라는 것은 더 큰 이익이다.

태자의 기준에서 생각해보자.

유물이나 아티팩트? 당장 여명궁에 널려 있는 게 유물이고 태자가 걸친 것들 중 아티팩트가 아닌 게 없다.

설령 그것의 가치가 드높다 치자.

그게 뭐 어쨌다고.

태자는 황위에 오르면 국보급 아티팩트들이 다 본인 것이 된다.

그에 반해 이 레시피는 세상에 나밖에 모르는 것이고 태자는 이를 강렬히 원한다.

나는 태자가 강제할 수 없는 사람이다.

가치적으로 봤을 때, 레시피는 '유일함'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내가 네 머리 위에 있다 이마.'

태자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주시게."

"받으면 끝입니다."

"난 한 입으로 두말 안 하네."

"따로 목걸이 조사하지 마십쇼. 이거 건네드리는 순간 제 거니까."

"약조하지."

그래도 인간이 거짓말은 안 한다.

그놈의 신조가 있고,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성도 못 느끼는 삶을 살아온 인간이라 이런 면에선 신뢰할 수 있다.

약조를 받아내고서야 레시피를 건넸다.

태자는 그걸 소중히 품에 넣고 싱글벙글한 낯으로 말했다.

"좋은 거래였네. 자네는 역시 내 최고의 우군이로군."

"아무렴요."

내가 이 인간하고 마주 보며 함께 웃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그런 생각이나 하던 중이었다.

"그럼 바로 받으러 가겠나? 물품은 이미 경매장 쪽으로 옮겨져 있네. 함께 가서 수령하는 게 어떤가."

"오."

이 무슨 시원스러운 일 처리.

아주 흡족하다.

* * *

거리로 나왔다.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는 태자의 의견을 따라 로브를 뒤집어쓴 채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활기였다.

건국제가 사흘 앞으로 다가온 오늘, 축제가 열릴 제도 남쪽은 다가올 행사를 위한 준비로 분주했다.

그리운 풍경이었다.

"둘째 날 밤이던가요."

"음? 아, 야시장 말이군."

"예, 그때 술이 참 잘 나오지요."

"···자네는 참 술을 좋아하는군."

옥에 갇히기 전에는 이 축제 때마다 나와 거리에서 술을 먹었다.

길을 가던 행인과 시비가 붙어 싸운 일은 잠시 머릿속에서 지워주자.

웃음소리와 고함 소리, 그리고 화려한 빛이 밤새 거리를 수놓는 순간은 분명 축제에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럴 때면 사람이 꽤 감성적으로 변한다.

갓 회귀한 순간처럼, 이 모든 것이 과거의 꿈이라 생각하며 제도를 바라봤을 때처럼.

평온하고 안락했던 순간은 왜인지 모를 기분 좋은 감상을 자아내고 마는 것이다.

하나, 감상의 끝맛은 역시 씁쓸했다.

'이런 풍경이 망가졌단 말이지.'

거창한 대의라곤 할 수 없다.

내가 이뤄야 할 대의는 가문의 부흥뿐이다.

하지만, 감상에 취해 바라자면 이 풍경이 스러지지 않았으면 한다.

더 오래 이런 활기를 보고 싶다.

그러다 깨닫길, 어쩌면 나는 이 제도를 꽤 좋아했을지도 몰랐다.

헛웃음이 나왔다.

시선은 태자에게로 향했다.

'이 인간이 잘해줘야 하는데 말이지.'

물론 최악은 피했으니 어련히 잘할 것이다.

태자의 존재만으로도 제국의 암흑기는 사라지며, 전쟁이 발발한다 하여도 그 양상은 절대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방비는 든든한 게 좋다.

태자는 기반이다.

건물로 치면 단단한 지반과 기둥이었다.

그러나 집은 그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둥을 필두로 세울 벽과 지붕, 그리고 담벼락 따위나 집 안의 기자재가 필요한 법이다.

그에 해당하는 게 황금시대의 기수들.

지금은 평민 계집에게 홀려 있는 머저리들이다.

'어떻게 막아야 하나···.'

무슨 사고를 치는지는 안다.

시기를 모르는 것뿐이지 잘 주시하고 있다가 전조만 발견하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

그 과정은 태자가 있다면 더욱 쉽다.

전처리나 후처리까지 이 인간의 힘을 빌린다면 최대한 깔끔하게 해낼 수 있을 터다.

'가장 먼저 베아트리스.'

순서상으로는 그 여자를 어떻게든 해야겠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웬 여자의 목소리가 작게, 그러나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들려왔다.

"···전하?"

우뚝―

태자의 발걸음이 멎었다.

나 또한,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고개를 돌렸다.

이 목소리는 나 또한 익히 알고 있기에.

직후 태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베카."

내 눈앞에 분홍 머리칼의 여자가 있었다.

무구한 얼굴로 태자를 바라보는.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곤 흠칫해버리는.

경국지색.

나라를 무너뜨린 여자가 눈앞에 있음에, 내 가슴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 조우 (1)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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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 (2) >

#026화. 조우 (2)

소란스러운 거리의 한가운데, 우리 셋이 있는 자리만이 적막이다.

나는 태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 순간 절로 혀를 차게 됐다.

'어휴, 이 새끼야.'

태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그 여자를 살피고 있었다.

눈빛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냥, 이런 모습을 보니 깨닫고 만다.

미래의 태자는 옳았다.

그 인간은 본인이 과거로 회귀했다면 또 같은 실수를 벌였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저건 그냥 어딜 가나 보이는 여자일 뿐이다.

생김새가 특출나게 이쁘지도 않았고, 동글동글하고 얇은 게 한 대만 툭 쳐도 쓰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약하다는 생각만 든다.

그나마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분홍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끝.

그조차도 아리아나 가지고 놀 여자애들 장난감 인형 같아서 영 마음에 안 든다.

대체 왜?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태자부터 해서 그 잘난 인간들이,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저 여자에게 미쳐버리는 건가.

이어진 행동은 그 의문의 연장이었다.

스으으―

은밀하게 마나를 퍼뜨렸다.

지난 생부터 의문이 깊어질수록 꼭 한번 검증해보고 싶었던 게 있었다.

'저 여자가 마녀는 아닐까.'

혹은 야만인의 사주를 받은 주술사가 아닐까.

꽤 신빙성 있지 않나.

저 여자에게 그 어떤 특별함도 느낄 수 없는.

도리어 뺨을 한 대 후리고 싶을 정도의 불쾌감밖에 느낄 수 없는 나로서는, 황금시대의 기수들이 저 여자에게 목매는 이유를 알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 제국의 파탄을 위해 저 여자를 보냈다.

그런 추측이라면 그나마 인과를 설명할 수 있지 않겠나?

마나를 퍼뜨려 계집의 몸을 훑었다.

그래도 주술과 마법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맞아본 사람이다.

사소한 흔적만 있어도 능히 그를 찾아낼 수 있을진저, 하여 꽤 꼼꼼하게 살폈으나···.

'···깔끔한데.'

딱 일반인 정도의 마나, 일반인 정도의 신체 능력, 일반인 정도의 활력.

마법이나 오러, 혹은 주술로 개조된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검증에 실패는 있을 수는 없다.

내 '눈'은 미래의 태자조차 끝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유일한 장기였으니까.

이리되니 어쩔 수 없이 내리게 되는 결론이 있었다.

'진짜 순수한 호의?'

황금시대의 기수들은 그저 감정의 이끌림을 따라, 저 계집을 옹호하게 된 건가.

생각했고,

'···지랄.'

이내 부정했다.

그렇게 편의주의적인 일이 있을 리가 있나.

세상 모두가 사랑에 빠질 정도로 매력적인 것이 아닌, 딱 그 인간들에게만 매력적인 인간이 존재할 수가 있냔 말이다.

그렇다 쳐도, 하필 그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는 결말이 당위성이 있냔 말이다.

그런 생각까지 치미는 순간이었다.

'죽일까?'

한순간이면 된다.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마나를 벼려 날리는 것만으로도 저 여자의 모가지를 날려버릴 수 있다.

그리한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어지겠지.

하지만, 좋지 않은 생각임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었다.

'뺨을 친 걸로 옥에 갇혔다.'

나는 저 계집에게 홀려 있던 태자가 어땠는지를, 옥에 들어온 직후 내게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놈 탓이다. 네놈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나는 레베카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단 말이다!!!

미치광이 그 자체였다.

약 몇 주간을 그랬다.

태자가 미련을 버리는 게 며칠이라도 늦었다면, 약해빠졌던 그 순간의 나는 태자의 마나에 짓눌려 죽었을 것이다.

물론 태자야 이제 이성을 차렸다지만 나머지는?

그 인간들은 내가 이 자리에서 저 계집을 죽인다면 어찌 행동할까.

정신을 바로 차리겠나?

그 확률이 얼마나 되지?

만약,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원한 관계.'

나 뿐만이 아닌, 내가 모시고 있는 태자와도 원한 관계가 된다.

최악의 경우 감정에 휘둘려 야만족 편에 붙어버릴 수도 있다.

이에 관한 신빙성을 더할 추측이 하나 더 있었다.

'미래의 태자는 죽는 그 순간까지 저 계집을 미워하지 않았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20년 이상이다.

저 계집 탓에 자신이 이성을 잃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끝끝내 저 계집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살해는 실패로 수렴할 게 분명한 도박수다.

구태여 그를 시도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검증은 필요하다.

"···오랜만이군."

"네."

"미안하네. 내가 일이 많아 자네를 찾을 기회가 없더군."

"아니요···! 전하는 책임감이 필요한 자리에 있으신 분이니까··· 그, 바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건강은 챙기셔야···."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말이 이어질수록 태자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계집 역시 그 모습에 헤픈 미소를 흘리기 시작한다.

나는 끼어들어 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움직이지요. 할 말 있으면 가서 하고."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생각에 말하자, 계집의 시선이 날 향했다.

계집이 흠칫했다.

태자는 그제야 침음을 흘렸다.

"···아, 괜찮네. 그때의 일은 순전히 내 탓이었으니. 이 친구는 이제 자네를 해하지 않을 걸세."

"그···."

"괜찮네. 마침 만난 것도 우연인데 목적지까지 함께 움직이겠나? 못다 한 얘기도 하고."

태자가 환호하며 말했으나, 계집이 여전한 두려움을 담은 채 날 본다.

그래, 시점으로 따지면 아직 내가 이 계집의 뺨을 갈긴지 얼마 안 된 때다.

저 계집도 맞아본 기억이 있으니 날 두려워하겠지.

하지만.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그런 계산으로 이리 겁을 집어먹고 있다면?

의심이란 놈이 그렇다.

하나에서 괴리를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점점 전염되어 다른 것들을 물들인다.

내가 저 여자의 의도에 불순함을 느끼니, 지금에 와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의심스러운 것이다.

계집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움직였고, 마침 경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접견실, 자리엔 우리 셋뿐이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한데, 자네는 어찌 거기에 있었나."

"아··· 축제 준비 기간이니까. 구경이나 하고··· 도우려고···."

"아아, 그랬지. 자네는 이런 축제를 참 좋아했어."

나는 틈을 봐 태자에게 말했다.

"잠시 이분과 담소를 나누어 봐도 되겠습니까."

"음?"

"지난 일을 사과드리고 싶은지라."

말하자 태자가 반색했다.

"아, 그리하겠나? 그럼 난 잠시 경매품을 가지러 다녀오지. 레베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게나!"

태자가 방을 나섰다.

둘만 남았다.

새삼스러운 기분이다.

내가 이 여자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일은 또 처음인 것 같아서.

가만히 계집을 응시했다.

그러자 계집이 심호흡하곤 웃었다.

"그, 지난 일은···."

"아, 사과해야지."

"아,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그냥 저도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어서··· 저 때문에 약속이 파투 나셨다고···."

정말로 송구하다는 표정.

이내 계집이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그 일에 대해선 먼저 사과를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그리고 혹시 앙금이 남지 않으셨다면, 앞으로는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고개를 든 계집이 헤프게 웃으며 날 봤다.

반짝거리는 초록색 눈동자가 왜인지 기분 나빴다.

'···그래.'

정말 그저 그 인간들 마음에만 드는 착한 여자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말이다.

'보통 자기 뺨을 갈긴 사람한테 저렇게 바로 친해지자고 할 수가 있나? 본성이 어떤지도 생각하지 않고?'

암만해도 의심스럽다.

그러니 검증하지 않고선 속이 안 풀릴 것 같았다.

하여 입을 열었다.

"근데 내가 궁금한 게 있거든."

"네?"

"오늘은 전하한테 왜 말 걸었냐. 바쁜 거 알아서 연락 안 했다면서."

"네? 그건 길가다 우연히···."

"넌 좋겠다. 우연이면 다 설명할 수 있어서."

화악!

마나를 풀어 헤쳤다.

"흣···!"

쿵!

계집이 목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겁먹은 얼굴이었다.

나는 말했다.

"살짝만 쪼았잖아. 왜 벌써 겁먹고 그러냐."

죽이는 게 아니다.

겁박만 할 것이다.

동물이라는 것은 본디,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비로소 본성을 드러내는 법이 아니던가.

혹여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위협적인 모습이 생존을 위해 발현될 수도 있단 말이다.

"사, 살···."

"대답해주면 생각해볼게."

조금 더 강하게 쪼았다.

"말해봐. 전하한테 왜 말 걸었냐. 그거 말고도 궁금한 게 있는데,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냐? 내 머리로는 네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읍···!"

계집의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무심하게 그 모습을 내려봤다.

'자, 어떡할래?'

겁만 주려는 것으로 보일까?

아니, 의도적으로 마나에 살의를 섞었다.

압박 자체를 강하게 하진 않았으나, 당하는 입장에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끔.

시간이 흘러간다.

한데도,

"사, 살려주···."

계집은 덜덜 떨기만 하면서 애원한다.

그 순간이었다.

쾅!

"유렌!"

마나의 기운을 느끼고 온 건가.

나는 곧장 계집의 목을 죄던 기운을 수습했다.

"켁! 쿨럭···!"

계집이 가쁘게 숨을 들이쉰다.

그러다 헛구역질을 했고, 이내 벌벌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 죄송···."

혼란스럽다.

'진짜 아무것도 없다고?'

그 모든 사고가 그냥 호의에서 비롯된다는 말인가?

인상이 찌푸려졌다.

"레베카!"

태자가 계집을 부축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태자의 기색이 진중해졌다.

태자는 곧장이라도 폭발할 듯 분노한 표정으로 날 쏘아봤다.

근처의 마나가 중압감을 품은 채 일렁인다.

"···죄송합니다."

일단은 사과했다.

태자는 이를 악 물며 날 노려보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계집에게 말했다.

"···미안하네. 레베카."

"아, 아니요···."

계집은 겁에 질려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밖에 안 보였다.

* * *

칼리오스는 레베카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유렌만 둘만 남아, 정적 속에서 그를 노려봤다.

하나 그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칼리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자네 얘기를 먼저 들어보겠네."

칼리오스가 본 바로 유렌은 생각 없이 움직이는 자가 아니었다.

특히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 나름의 의도가 있으리란 판단인 것이다.

그런 추측을 떠오르게 만드는 자신의 실책도 있었다.

"그래, 자네의 눈으로 보기에 충분히 화가 날 상황이었음을 아네. 내가 그녀와 멀어져야 함을 이른 건 자네였고, 그에 수긍한 건 나였으니까. 그런 주제에 신나서 떠벌거렸지."

레베카를 본 순간 흔들렸다.

그녀의 눈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기분을 느껴 그에 허우적대기 바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대의를 위해 포기했다곤 하나, 그럼에도 첫사랑이었으므로.

하지만 결과만 보자.

자신은 약속을 져버렸다.

지난 업보가 있었다.

칼리오스는 레베카의 뺨을 때렸다는 이유로 유렌을 납치해 옥에 처넣을 계획까지 했었다.

추한 모습이란 모습은 다 보여놓고 그가 자신을 믿길 바라는 건 참으로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이건 유렌 나름의 경고일 것이다.

실제로 레베카를 부축하며 살핀바, 그녀의 몸엔 어떤 위해도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질책은 필요했다.

"레베카 역시 제국의 신민이네. 그 처사는 과했어. 자네는 태사의 자리에 오른 이야. 그녀가 나와의 정을 생각지 않는다면 이것은 소문이 되어 자네와 나의 목을 졸랐을 수도 있네."

위험한 시도였다.

유렌이 그를 생각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을진대, 대체 왜 그런 과격한 방법을 선택한 것일까.

아니꼬운 감정만큼은 이유가 아니길 바랐다.

그리고, 다행히 건네진 답은 칼리오스가 납득할 수 있는 형태였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음?"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까? 그 계집에게 왜 빠진 건지. 왜 그 계집을 좋아라 하는 인간이 하필 다음 시대의 지도자들인 건지."

유렌은 무표정했다.

하나, 그 목소리가 꽤나 신경질적이었다.

의견을 묻는 눈이 반항적이다.

칼리오스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쪽인가.'

칼리오스는 실제로 레베카를 이르는 말 중, 사술로 남자를 홀리는 탕녀라는 말이 있음을 알았다.

꽤 많은 이들이 그런 가능성을 점쳤고 겉으로 보이는 상황이 그런 추측에 신빙성을 더함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칼리오스는 단호히 부정했다.

"의심할 만큼 공교롭긴 하나. 적어도 내 경우엔 어떤 이질감도 없었네. 그녀와의 만남부터 이후의 모든 순간, 그리고 내 행동은 온전히 내 의도였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는 가능성은?"

"없네. 우연한 첫 만남이었고, 이후 그녀를 찾아간 것은 날세. 맴돈 것도 나였고, 다른 이들에게 경쟁심을 느끼며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한 헛짓거리를 한 것도 내 선택이었네."

그렇기에 칼리오스는 스스로의 방만을 부정하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된 지금도 그랬다.

"첫사랑이라 특별한 걸지도 모르지. 그뿐이네."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유렌은 한숨을 내쉬며 기색을 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예민했던 것 같습니다."

"조심해주게. 방금은 간담이 다 서늘했다네."

"유념하겠습니다."

"레베카와는 만날 일이 없도록 하겠네. 우연히 만나더라도 피하도록 하지."

"그리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유렌은 끝까지 어딘가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칼리오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 * *

베아트리스는 레베카에게 물었다.

"어디 안 좋아?"

"으, 응?! 아니!"

"거짓말."

베아트리스의 손이 레베카의 목을 쓸었다.

"호흡이 불편해 보여. 몸도 떨리고 있고. 무엇보다 눈빛이 흔들려."

베아트리스가 아는 레베카는 절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든 밝게 웃으며, 누굴 만나도 겁먹는 일이 없으며 고민이 있다면 솔직하게 남에게 말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상 반응을 보인다.

꼭,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말해줘.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려."

애절하기까지 한 애원의 목소리가 나왔다.

레베카는 잠시 머뭇거리다, 베아트리스가 슬픔을 짙게 띄우자 결국 있었던 일을 실토했다.

"그, 사실···."

이야기는 꽤 길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들은 순간.

빠지직!

베아트리스의 마나가 주변의 기물들을 짓이겨버렸다.

레베카가 기겁하며 외쳤다.

"베, 베이! 난 이제 괜찮아!"

하나 베아트리스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 정도의 분노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우습게도 희열을 느꼈다.

그녀는 찾아버렸다.

자신이 레베카를 옭아매야 할 또 다른 이유를.

베아트리스는 레베카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그리고 걱정하지 마."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다시는 누구도 널 해칠 수 없게 만들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바깥은 너무 위험했다.

구태여 그 남자들이 아니더라도, 레베카를 위험하는 것들이 이다지도 많았다.

보아라, 이 작고 헤픈 아이는 그중 무엇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베, 베이. 난 진짜 괜찮다니까···."

"아니야. 넌 너무 조심성이 없어."

"정말이지···."

레베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베아트리스의 등을 토닥였다.

하나, 베아트리스는 함께 웃지 못했다.

그녀는 레베카를 품에 가둔 채로, 그렇게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눈을 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만 기다려줘.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레베카를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는 날이, 그리고 그녀를 비로소 안전하게 만들 수 있는 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베아트리스는 조바심을 느꼈다.

< 조우 (2)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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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물지 않는 노을 (1) >

#027화. 저물지 않는 노을 (1)

저택의 정원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내일이면 건국제던가.

그 계집을 만난 이후로도 벌써 며칠이 후루룩 지나가 버렸다.

계집에 관해서는 여러 고민을 해봤지만, 무엇도 시원스럽지 않았다.

내가 예민한 건가 싶다가도 혹시 그 계집이 의도한 바가 있으리란 생각이 좀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그사이 특별한 일은 없었다.

하나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태자에게 얻어낸 목걸이로 몸을 회복하게 됐다는 것.

목에 건 목걸이를 매만졌다.

'기물은 기물이란 말이지.'

효율은 안좋다.

약 10의 마나를 넣어야 겨우 1의 치유력이 되돌아와 몸을 회복시킨다.

하지만 이만해도 어디인가.

먹고 자란 게 있어서 마나통 하나만큼은 튼실하다.

퍽이나 상성이 맞는단 말이다.

좋은 물건 하나를 얻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파로스야. 파로스는 노을을 참 좋아하는구나."

내 옆에 앉아 있던 아리아가 그런 말을 했다.

"갑자기 뭔 소립니까."

"그렇지 않느냐! 파로스는 매일 저녁만 되면 노을을 보러 나오지 않았더냐? 아리아는 그 기분을 안단다."

아리아가 빵떡같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노을이 질 때 하늘을 보면 딸기 솜사탕 같은 구름이 몽실몽실 떠다닌단다. 저걸 먹는 상상을 하면 참 행복져서 아리아는 솜사탕 왕국의 공주라는 걸 실감하게 되는 게 아니더냐!"

"치즈버거 공주로 전향하지 않았습니까?"

"둘 다 하고 있다!"

이중간첩이란 말인가.

지조 없는 모습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하나를 덧붙이자면, 나는 그런 하찮은 이유로 하늘을 보는 게 아니다.

"저는 전조를 찾고 있습니다."

"웅? 전조?"

"노을을 보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거든요."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냥, 내가 아는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일 뿐이다.

-그날은 노을이 참 길었습니다. 건국제 전날이라 많은 사람이 그 사실을 깨달았지요. 다들 대수롭게 여겼습니다. 그저 그런 날도 있구나··· 그리 생각했을 뿐이었죠. 저를 포함한 모두가 그랬습니다.

누님은 옥에 있던 내게 베아트리스가 일으키는 사건의 전조를 그리 일러주었었다.

-사건이 다 지난 후, 조사 후에야 밝혀진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날의 하늘은 노을에 의해 붉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악마가 이 땅에 강림하며 그 흉악한 기운이 제도의 상공을 덮은 것이었지요.

회귀 후, 황금시대의 기수들을 막아야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그걸 조사해봤다.

파로스의 서재나 황실 서고의 고문서들을 중 악마에 관한 것들을 파헤쳤는데, 그리하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금지된 섭리.'

악마의 마나를 그리 부른단다.

그것은 노을의 붉은 빛을 띠며, 악마가 현세에 강림할 때면 주변 대기에 퍼져 악마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던가.

'노을이 지는데 태양이 안 보이면 악마가 강림한 것이다.'

그게 고문서의 설명이었다.

하여 나는 조사를 마친 이후 매일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가 사고를 치는 것이 어느 해인지까진 모르지만, 자그마한 변화라도 있다면 당장 찾아갈 생각으로 이 시간대의 일정만큼은 모두 비워두는 편이다.

여하튼, 그건 그거고.

"그런데 황녀 전하. 환궁 안하십니까."

"오늘은 늦어도 된다!"

"엥."

"궁에 손님들이 많이많이 놀러 온단다! 그래서 웅성웅성한데, 아리아가 그때 나가 있으면 오빠버니 전하가 곤란하단다! 아리아는 착한 어린이이기 때문에 오빠버니 전하께 오늘은 파로스랑 저녁밥을 먹을 거라고 말도 했단다!"

어이쿠, 기특해라.

하기야 내일부터 건국제에 황성은 매일 무도회가 열린다.

그냥 근처 국가에서 찾아오는 게 아니다.

'이종족들도 왔지.'

천 년 전에야 죽자고 싸웠다곤 하지만 이제는 국경을 마주하는 땅의 이종족들 정도는 화평을 맺고 있었다.

본격적인 우애 같은 건 아니고 '우리 서로 살 깎아 먹지 맙시다' 정도의 협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건국제에 참여하는 건 그런 의례의 연장이다.

아직 동맹이 유지되고 있다는 걸 서로에게 주지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는 날이니까 뭐.'

아직 아리아에 관한 건 소문이 안 좋은 편.

태자의 입장에서도 아리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리도 사람이 몰리는 곳보다 내 곁이 좋다는 판단이 있었을 거다.

뭐, 할 일도 없으니 기꺼이 해줄 수 있다.

"흠, 저녁밥은 뭘 먹는 게 좋겠습니까."

"아리아는 치즈버거가 먹고 싶다!"

"점심에 드셨잖습니까."

"앗, 그, 그럼 솜사탕···!"

"그건 밥이 아닙니다."

"이익! 파로스는 심술을 그만 부리거라!!!"

"억!"

아리아가 내 머리채를 붙잡았다.

요 발칙한 꼬맹이는 날이 갈수록 손버릇만 안 좋아지는구나.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덜컥!

내 몸이 멎었다.

"응?"

"······!"

"파로스야···? 호, 혹시 많이 화났느냐? 미안하다··· 아, 아리아가 잠시 나쁜 어린이가 되어서 그런 거냐···?"

아리아가 조심스레 건네는 말이 귀에 바로 꽂히지 않았다.

그저 내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것은 하늘, 눈앞의 광경이었다.

당황이 차올랐다.

노을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 하늘에서 태양이 보이지 않았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자그마한 색채의 변화도 없이, 그저 어느 순간 하늘을 보니 노을이 사라져있었다.

조바심이 차올랐다.

그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이미 사고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긴장됐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진정해. 대비했잖아.'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파로스야···?"

"황녀 전하, 지금 당장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웅?"

고개를 갸웃하는 아리아를 똑바로 바라보고,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치즈버거 왕국의 위기입니다. 저희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위기."

아리아가 덜컥 멎더니 안색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무, 무엇이냐! 어떤 적이 온 게야!"

"그걸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보다 어서 환궁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솜사탕 용사와 동료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아, 알겠다!"

아리아가 튀어 나가려고 하기에 뒷목을 붙잡았다.

"···어디로 부르는지는 들으셔야지요."

"앗! 어디로 부르면 되느냐?!"

"마탑으로 불러주십시오."

"알겠다! 오빠버니 용사를 마탑으로! 오빠버니 용사를 마탑으로! 오빠버니 마탑을 용··· 아니! 용사를 마탑으로!"

혹시라도 까먹을까 봐 입으로 외치며 아리아가 사라졌다.

나는 허리에 회초리를 매만졌다.

'마탑은 제도 북쪽.'

뛰어가면 얼마나 걸리지? 시간을 맞출 수 있나?

'···아니.'

쿠구궁!

전신의 마나로 몸을 일깨웠다.

'달리는 게 더 빨라.'

쾅!

결정을 내린 후엔 그대로 마탑을 향해 뛰었다.

* * *

마탑의 대강당.

베아트리스는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수많은 마법사를 바라봤다.

대규모 수면 마법.

꽤 급하게 준비한 것이지만, 공간 자체에 미리 새겨놓은 덕에 실수는 없었다.

시기도 다행스러웠다.

당장 내일부터 발표가 있어 마탑의 핵심 인력이 모두 리허설을 위해 이곳에 와 있었으며 마탑주는 자리를 비운 상황.

거기에 시전자가 자신인 만큼, 그 마나에 누구도 경계하지 않았다.

그들을 훑는 베아트리스의 눈엔 한치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떠올리는 생각 역시 그랬다.

'아쉬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더 완벽한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본디 악마와의 계약이라 함은 강렬한 혼과 그들의 절망과 비명이 양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준비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소환진이 완벽하지 않아, 그 과정에서 저들이 공격해온다면 막을 수 없었다.

차라리 재워서 전투 없이 혼이라도 온전히 헌납하는 게 이로운 것이다.

'시간이 없어.'

당장 내일이 건국제다.

레베카를 노리는 사내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함께 축제를 보자며 그녀를 보챌 것이다.

레베카는 워낙 축제를 좋아하는 아이이니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겠지.

그런 불안감은 언제나 있어 왔으나, 지난 일은 거기에 또 다른 조바심을 더했다.

'파로스 소가주.'

그 남자가 레베카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레베카를 밖으로 빼돌리다니, 그런 위험한 일은 있어선 안 된다.

베아트리스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혼은 있어. 비명과 절망은 영창으로 대체할 수 있다. 거래 자체는 성사될 거야.'

이 계획에 문제는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꽤 오랜 시간 이 일을 준비하며 수많은 자료와 사례를 수집했다.

인간 시대 이전의 것도 그에 포함되어 있었다.

'악마는 계약으로 완성되는 존재야. 계약 조건이 치밀하다면 술수를 부릴 수 없어.'

즉, 그들의 정체성이 계약이 있기에 완벽한 계획이 있다면 그들은 온전한 소환자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런 사례도 있었다.

그러니 베아트리스는 소환 자체가 불안하진 않았다.

그저 앞으로의 찬란한 미래만을 고대할 뿐이었다.

'이제 다 끝이야. 드디어 함께할 수 있어.'

베아트리스의 눈빛이 떨렸다.

입가엔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시선은 마탑의 원로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말이 떠올랐다.

-베아트리스, 네가 마탑의 미래란다. 너는 네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게다.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하거라. 최대한 도와줄 터이니.

-네가 자랑스럽다.

베아트리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거짓말.'

그들의 미소는 이익을 위해 지어낸 거짓 미소였다.

그들의 말은 결과적으로 마법의 영광이라는 소명을 위한 것이었으며, 자신에게 보이던 호의는 도구를 향한 애착이었을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어째서, 누구도 자신을 위로해주지 않은 건가.

기대만을 품어온 건가.

그녀만이 달랐다.

오직 레베카만이, 숨이 조여오는 압박감 속에서 자신을 위로하며 안아줬다.

―괜찮아. 못해도 괜찮아. 제가 옆에 있잖아요. 지금은 울어도 돼요.

베아트리스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별이 빛나는 밤이었어. 나는 테라스에 있었고. 레베카는 내 머리를 끌어안아 줬어.'

차라리 하늘이 어둡길 바랐다.

무엇도 자신을 비추지 않길 바랐다.

그런 순간에, 하늘을 가려준 것은.

'고깔모자···.'

그 순간이었다.

욱씬―!

머리가 아려왔다.

베아트리스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털어 생각을 지워냈다.

'나중에 생각하자.'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무렴,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지 않던가.

베아트리스는 준비한 것들을 꺼냈다.

소환 의식에 필요한 재료들은 대강당에서 서서히 조립되기 시작했고, 그리 만들어진 것들은 생명을 재료로 한 거대한 원형의 문이었다.

치직―

마나가 달라붙자 노을색의 기류가 원 안쪽에 맺히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스는 미소 지었다.

'됐다.'

계약의 거울.

쉽게 완성되었고,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베아트리스는 마나를 발했다.

일찍이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평가되던 위대한 통제력은 한 톨의 낭비도 없이 소환에 필요한 마나 배열을 이뤄냈다.

이윽고 준비를 마친 베아트리스는 쉬지 않고 수인을 맺으며 영창했다.

"갈애를 품은 자야. 내 계약을 원하노니 이리 부름에 답하라."

찌지직―

원 안쪽으로, 뒤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노을빛이 떠올랐다.

목소리가 울렸다.

[어떤 이름을 찾느냐.]

머릿속에 때려 박히는 목소리.

고막을 통하지 않았음에도, 이 언어를 들은 일이 없음에도 의미를 절로 깨우치게 되는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마였다.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지성체.

세계를 관조하는 초월적 정신체.

성공에 대한 찌릿함이 물밀듯 몰려왔다.

베아트리스는 곧장 답했다.

"갈애라 하였다."

[갈애를 무엇이라 칭하느냐.]

악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었다.

베아트리스는 알았다.

이곳에서 악마의 진명을 달리 부른다면, 육신을 빼앗기고 만다는 것을.

하여 또박또박 답했다.

"···아모리오. 지극한 사랑을 맺는 자야. 내 너를 안다."

그 순간이었다.

꽈과광!

불길한 기운이 번개치듯 공간을 휩쓸었다.

시각으로는 무엇도 볼 수 없다.

다만, 거울 앞으로 노을의 기운이 인간의 형상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형상이 스스로의 몸을 더듬었다.

그리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오랜만이구나. 현계는.]

베아트리스는 긴장감을 느꼈다.

암만 준비가 완벽했다곤 하나 악마.

초월에 가까운 존재였다.

'실수는 안 돼.'

베아트리스는 목울대를 넘겨 침을 삼킨 후 말했다.

"···아모리오. 계약을 위해 널 불렀어."

[그래, 너희 필멸자들이 우리를 부르는 이유가 달리 있겠니. 그 계약이 아니라면 쳐다도 보지 않는 것을.]

"사담은 거기까지야. 난 현혹에 당할 정도로 서투르지 않아."

[후후, 아쉬워라.]

간드러지는 여인의 음성이었다.

낱말 하나하나마다 소름 끼치는 기운이 퍼져 베아트리스의 몸을 간질였다.

베아트리스는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레베카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를 참아냈다.

악마 아모리오는 물었다.

[자, 너는 무엇의 마음을 가지고 싶니? 네가 원하는 자의 이름을 알려주렴 그 마음속에 네 이름을 새겨줄 테니.]

"대가는?"

[준비해왔구나. 강렬한 혼. 비명과 절망은 없지만 괜찮아. 그건 저 혼을 가지고 뽑아내도 되니까. 오랜만에 찾은 손님이니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지.]

계산대로였다.

비명과 절망은 부속품, 혼을 가져간다면 후처리로도 뽑을 수 있는 게 맞았다.

짧은 환희, 그 끝에서 베아트리스는 레베카의 얼굴을 떠올렸다.

"레베카, 레베카의 마음에 내 이름을 새겨줘."

[보자··· 분홍머리에 초록 눈동자. 네 머릿속에 있는 그 아이가 레베카가 맞니?]

"틀림없어."

[네가 바라는 건 그 아이의 마음에 널 새기는 게 맞니?]

"정확해."

[이 모든 사안에 틀림은 없는 것이고?]

"없어. 단 하나도."

[계약이 성립되었구나.]

그 순간, 노을의 기류가 베아트리스의 심장에 파고들었다.

자연스러운 계약의 현상이다.

무서워할 것 없었다.

'곧 만나자. 이젠 정말 함께야.'

베아트리스의 얼굴 위로 눈부신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부턴 함께다.

무엇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미래가 그려졌고,

꽈직!

"끅?!"

무너져내렸다.

쿵!

베아트리스가 쓰러졌다.

가쁜 숨을 내뱉으며 아모리오를 올려다봤다.

[···후후.]

이해할 수 없었다.

악마는 절대 계약에 있어 소환자를 해칠 수 없다.

단 하나의 경우, 계약 조건이 틀리지만 않는다면.

"어, 째서···?"

그에 들려온 답은, 베아트리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묻지 않았니. 네가 바라는 일에 틀린 것이 없냐고. 한번 기회를 줬는데, 너는 받아먹질 못해서 어쩌니.]

노을색의 기류가 가까워졌다.

악마는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리 웃다가 이내 짐짓 익살스럽게 화를 내며 말을 더했다.

[너는 거짓말을 했구나. 계약 조건을 속였어.]

"무슨···."

[네가 내게 내건 조건은 그 아이의 마음에 너를 새기는 것이었지. 나는 그에 응한 것일 뿐이고.]

맞다.

그런 조건이었고 대가도 모두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데, 어째서 이리 자신을 압박해오는가.

분노가 차오르는 순간, 답이 돌아왔다.

[잘 들으렴. 나는 이름을 써주겠다고 했지, '다시 써주겠다'라고는 하지 않았단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베아트리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다시 쓴다.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나를 속였으니 대가를 받아 가마.]

직후 베아트리스가 본 것은, 기류 속에서 튀어나온 새까맣고 야릇한 손이었다.

< 저물지 않는 노을 (1)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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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물지 않는 노을 (2) >

#028화. 저물지 않는 노을 (2)

칼리오스는 내일부터 있을 무도회를 위해 최종 점검차 대연회장을 찾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당장 손님들을 하나하나 만나 인사를 나누고, 귀족파들을 견제하고 행사의 전체적인 총괄까지 하려니 손이 부족했다.

그나마 에릴다가 곁에서 도와주는 게 다행스러운 지경.

"이쪽 진행은···."

그녀의 보고를 들으며 칼리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창밖을 향했다.

칼리오스의 눈빛이 침잠했다.

'유난히 노을이 길군. 이제 슬슬 해가 저물어야 할 시간인데.'

뭐랄까,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저리 하늘이 붉다고 한들 자신에게 손해가 오는 것은 없을진대, 께름칙함이 영 지워지질 않는 것이다.

그런 와중이었다.

토도도돗!

"오빠버니 전하!!!"

"···아리아?"

저 멀리서 아리아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였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냐."

분명 유렌과 저녁을 먹고 늦은 시간에야 돌아온다고 들었다.

아니, 일정이 바뀌더라도 오늘만큼은 바로 궁으로 돌아가라 일렀다.

한데 어찌 아리아가 준비 중인 대연회장으로 온 건가.

무릎을 꿇은 채 다가온 아리아를 맞이한 칼리오스는 물었다.

"왜 그러느냐. 혹여 변고가 있는 것이냐?"

유렌에게 일이 생긴 건가.

그런 생각에 묻자, 아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그리 외쳤다.

"마탑용사 전하를 오빠로!"

""

"어···? 전하마탑 오빠를 용사로···?"

아리아가 머리를 갸웃하며 눈을 끔뻑였다.

"이, 이게 맞나···?!"

혼란스러운 듯 아리아의 눈이 핑핑 돌았다.

그 꼴이 참 앙증맞아 웃음이라도 나올 상황이건만, 칼리오스는 그러지 못했다.

상황의 조립은 칼리오스의 장기 중 하나였다.

평소 아리아의 언행을 바탕으로 단어를 분해했다.

'오빠버니. 용사. 마탑.'

오빠버니는 자신이다.

용사도 자신을 지칭하는 말임을 안다.

그리고 마탑.

"나를 마탑으로 보내야 한다?"

"마, 맞습니다!"

아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칼리오스는 웃지 못했다.

"유렌이?"

"웅! 파로스가!"

"급한 일이더냐?"

"대위기!!!"

유렌은 자신보다도 아리아를 아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에게 지극한 남자였다.

그런 유렌이라면 오늘 같은 날, 범상한 사안으로 아리아를 이곳으로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칼리오스는 그것을 알았다.

"마탑에 무슨 일이 생긴 게냐? 내가 직접 가야 하는 정도의?"

"웅! 파로스가 그렇게 말했어요란다!"

아리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칼리오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보통 사안은 아닌 듯한데.'

하지만 확인되지도 않은 일로 직접 움직이기엔 일정이 너무 밀려있다.

'이건···.'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그다음에 움직이는 게 맞았다.

"에릴다."

"어?"

"드레노어 경을 마탑으로 보내줄 수 있겠나?"

"아리아가 장난치는 거 아냐?"

"아무래도 아닌 듯해."

장난이라면 유렌의 입에서 자신을 불러오라는 말이 나왔으면 안 된다.

아리아 또한 그를 안다.

그는 자신이 태자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에 꽤나 진심인 사람이었다.

"부탁하네."

"···알겠어."

에릴다가 사라졌다.

칼리오스는 정신을 다잡았다.

'다른 일정은 미루자.'

일이 몰린 상황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지도자에게 필요한 역량이었고, 칼리오스는 그 역량이 차고 넘쳤다.

외교적인 인사치레도 물론 중요하지만, 마탑과 유렌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그곳에 미증유의 위험이 있으리란 생각이 영 지워지질 않았다.

내일이 건국제다.

안 그래도 새로운 마법을 시도한다는 명목으로 항상 사고를 쳐대는 게 마탑이 아닌가.

유렌이 그 전조를 발견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칼리오스의 시선이 다시금 창밖을 향했다.

저물지 않는 노을은 아직 칼리오스에게 불온함을 주고 있었다.

* * *

베아트리스는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드는 고통을 느꼈다.

우두둑!

"으극···!"

악마의 기류가 몸을 범한 순간부터, 전신의 뼈와 근육이 죄다 뒤틀리고 있었다.

육신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하나, 아직 완전히 뺏기진 않았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음, 저항이 거세구나. 꽤 괜찮은 몸을 얻은 듯해.]

그에 베아트리스는 전력을 다해 저항했다.

그 순간 베아트리스의 눈에 비친 것은 쓰러진 마탑의 마법사들.

눈빛이 흔들렸다.

으득―

이가 악 물렸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몸을 돌려 대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어디로 가니? 뭐, 상관은 없지. 저것들은 네 몸을 빼앗은 후에 천천히 음미해도 되니까.]

듣지 않으려 했다.

아직은 괜찮았다.

'아, 악마는···.'

[그래, 육신이 없다면 현계에서 어떤 힘을 쓸 수도 없단다. 그렇기에 계약이 필요하지. 우리는 계약의 가장 취약한 점을 찾아내 그 대가로 너희의 육신을 받아내야 하거든.]

'···!'

[이미 하나가 되고 있잖니. 네 생각 정도는 볼 수 있지.]

공포에 머릿속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행동은 하나하나가 너무 힘겨웠다.

베아트리스는 그런 상태로 계단을 올라갔다.

우두둑―!

오른쪽 관자놀이를 뚫고 뿔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우두둑―!

오른팔의 관절이 한마디 더 늘어났다.

피부가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우두둑―!

날개뼈 쪽에서부터 무언가가 돋아나고 있었다.

"꺼억···!"

숨이 막힌다.

시야가 흐려졌다.

모든 것이 고통스럽고 끔찍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베아트리스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다시 써?'

계약의 조건을 완수했음에도 실패했다.

내용을 틀렸다는 이유로.

쓰는 게 아닌, '다시' 쓰는 것이라는 이유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 거부감엔 강제성까지 떠오르고 있었으나, 외면하기엔 베아트리스가 너무 똑똑했다.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도리어, 너무 쉬운 말이 아니던가.

이건 레베카의 마음에 누군가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악마의 '강제성'이 '다시' 쓰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미 악마와 엮어있었어. 레베카는···.'

아니, 엮여있다 뿐일까.

의구심이 있고서야 되짚게 된다.

돌이켜 보면 레베카의 행동은 항상 주체적이었다.

항상, 그녀의 말과 행동은 자신과 그 사내들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었다.

'그렇게···.'

[음음, 이 땅에 균열이 일길 바라는 게 맞겠구나. 재밌어. 인간들은 이리 짧은 역사에도 참 다채롭게 사는구나.]

소환자는 아닐 터다.

레베카는 어떤 마력적 지식도 없으니.

하지만, 직접 소환하지 않아도 악마를 부릴 방법은 있었다.

'···소환을 꼭 본인이 할 필요는 없지.'

레베카의 의도엔, 그녀 외에도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그를 깨닫고 허망하게 웃었다.

"하, 하하···."

놀아났다.

그에 절망이 차오르자 악마 또한 기껍다는 듯 웃었다.

[아, 흔들리는구나.]

'···아니야.'

[숨길 필요 없단다. 우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아니야···.'

[그래, 나도 안타깝게 생각한단다. 너는 꽤 잘 준비했어. 이제껏 나를 소환한 이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그런데 어쩌겠니. 우리는 동족에 대한 존중을 안단다. 그러니 서로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계약을 덮는 행위에 대해선 조금 더 많은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니? 그게 하필 그 아이인 건 불운이구나. 동정하마.]

베아트리스는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저것이 현혹이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모든 상황이 저 말의 진실됨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의문이 떠올랐다.

'어디서부터?'

[글쎄, 동족이 언제부터 개입했는지는 나도 모르지.]

'무엇 때문에?'

[하나는 확실하잖니. 누군가에겐 필요한 일이었던 것이지.]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리하여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우뚝―

베아트리스의 몸이 멎었다.

어느새 옥상, 마탑주에게만 허락된 천상 정원.

그녀는 붉게 물든 하늘 아래에 닿아 있었다.

딱 한 번 이곳에 온 일이 있었다.

한데 그때의 그 기억이 너무 흐릿했다.

'여름? 겨울?'

[저런, 거기까지도 고장 나 있었구나. 여러 악마의 협력이 필요한 일인데, 과연 누구였을까. 레임달? 크로이츠? 흐음, 이런 일이 가능한 동족은 너무 많아서. 정말이지··· 다들 나만 두고 즐기는 중이었다니. 섭섭해서 어쩐담.]

'나는 여기서···.'

[저런, 기억하기 힘들 텐데.]

베아트리스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모든 것이 불확실함에도 하나는 확실했다.

―괜찮아. 못해도 괜찮아. 제가 옆에 있잖아요. 지금은 울어도 돼요.

이젠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레베카가 아니었다.

그날 자신을 위로해준 사람은··· 자신을 품에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랬던 사람은 절대 레베카가 아니었다.

애초에 레베카는 한 번도 고깔 모자를 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통 누구인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아···.'

조작됐구나.

감정도, 기억도.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망가져 있었구나.

추측도, 판단도.

그것이 스스로 해내는 것이라면 베아트리스는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이 명징해졌다.

와중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나는 뭘 한 거지?'

악마를 소환했다.

그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꼭, 악마를 소환해야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으로.

'왜?'

그 대가가 그리도 컸음에도 조금도 크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레베카를 제외한 모든 것이 미웠다.

미워할 이유가 없음에도 그랬다.

베아트리스는 스스로의 손을 바라봤다.

왼쪽은 아직 변하지 않았으나, 오른쪽은 인간의 것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형태였다.

돌이킬 수 없다.

어떤 이유로든, 스스로 그 일을 행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았기에.

베아트리스의 눈빛에 독기가 차올랐다.

이가 앙 물렸다.

'바꿀 수 없다면···.'

[끝내려 하는구나. 그게 될까.]

해야만 한다.

목숨으로라도,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좀 편할 것 같았다.

더 숨을 쉬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차마 부끄러워, 자괴감이 들어 그럴 수가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스스로의 목에 손을 얹었다.

힘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검게 변색된 손이 그를 막아섰다.

[난 허락 못한단다. 아직은. 더 즐기고 싶거든.]

그런 때였다.

"어휴, 씨발. 더럽게 높네."

홱!

베아트리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의 의도가 아니었다.

악마가 몸의 통제를 가져가 해낸 행위였다.

이윽고 베아트리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뭐야, 꼬라지가 뭐 그래?"

유렌 파로스.

그가 땀에 절은 꼴로, 특유의 짜증스러운 표정을 한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마탑에 온 직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이곳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었다.

하여 내부로 들어왔다.

마나를 흩뿌려 생명 반응이 몰린 곳을 찾았고, 그곳에서 쓰러져 있는 마법사들을 발견했었다.

'숨은 붙어있었다.'

아직 어떤 위해가 가해지지는 않은 듯했다.

그러니 사건의 원흉을 먼저 찾아야겠지.

그런 발상으로 흔적을 추적했고, 이곳에 닿았다.

"유, 렌···."

마탑의 옥상.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눈앞에는 베아트리스가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이미 몸의 반절이 악마의 형상으로 뒤틀려 있었다.

오른쪽이 악마의 것이었다.

관자놀이엔 뿔이 돋아 났고, 흰자위는 검게 물들었으며 피부도 흑색 위로 붉은색의 힘줄 따위가 돋았고, 팔은 세 개의 관절로 나뉘어 있었다.

생김새가 퍽이나 괴이했고, 그보다 심적인 거부감이 더 컸다.

나도 왜 그런 건지 모른다.

그냥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나빴고, 구역질이 나온다.

벌레를 보면 이는 혐오감처럼 본능의 영역에서 그리되고 마는 것이다.

"개좆같이 생겼네."

"아아···."

"야, 정신 차려라."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황을 정리했다.

'피해자는.'

정신을 잃은 마법사 몇 명.

실질적 피해 없음.

'보는 눈은.'

없음.

이 여자가 악마와 융합 중인 것?

잘은 모르겠지만 마법사들이 그 과정까지 보지는 못했을 터다.

수습은 아직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찌해야겠는가.

그 부분은 명쾌하다.

'일단 패야지.'

가능성을 점친다.

악마는 현계에서 육신을 갖출 수 없다.

육신을 입기 위해서는 현계의 생물에게 기생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갓 현계로 온 악마의 무력은 숙주의 무력과 동등하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비명과 절망.

하지만 기절해있는 인간들에게서 그것까지는 뽑아내지 못한 듯했다.

결론, 악마의 무력은 베아트리스의 무력과 동등하다.

즉 악마는 마법 하나만 다루는 종잇장이다.

[뭐니, 너는?]

악마의 목소리가 뇌리에 파고들었다.

나는 흰자위가 검게 물든 눈을 봤다.

한쪽 눈만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 있는 게 기괴하다.

[음, 마법사는 아닌 듯하고. 이 시대의 아이구나. 몸이 튼튼해. 차라리 네가 날 소환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뭐라는 거야?"

[도망가지 않는구나. 겁을 먹지도 않아. 참으로 탐스러워. 너 같은 아이를 쥐어짜야 더 질 좋은 절망이 나오거든.]

"지랄하고 있네."

회초리를 뽑아 들었다.

마나를 풀어 헤쳤다.

그리하며 말했다.

"야, 마법싸개."

"···?"

"아직 정신 남아있는 거 같은데, 그대로 붙들어 매고 있어라."

"나, 는···."

"됐다. 네 얘기 궁금하지도 않고 알아도 바뀔 거 없으니까. 그냥 정신만 붙잡고 있어."

그래야 악마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제약될 것 아닌가.

기수식을 취했다.

악마가 웃었다.

[이겨 먹으려고? 그래, 할 수야 있겠지. 그다음은 문제가 되겠지만.]

설마 방법도 없이 왔을까.

자신도 없는데 이곳을 혼자 왔을까.

저런 새끼들이 제일 문제다.

져본 적이 없어서 위기감을 못 느끼는 새끼들.

우월감에 취해서 위기의식을 못 느끼는 새끼들.

미래의 태자 같은 놈들 말이다.

"그거 아냐? 후달리는 새끼들이 말이 많더라."

[재밌는 아이구나.]

쿠구궁!

노을빛의 기류가 베아트리스의 몸을 휘감았다.

이윽고 노을색의 마법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위계 마법. 단계는 올랐나?'

내가 아는 베아트리스는 4위계다.

하지만, 꼴을 보아하니 그것보단 높은 위계의 마법이 분명했다.

악마와의 융합이 억지로 그릇을 늘려버린 거겠지.

'근데 뭐.'

암만 생각해도,

'질 수가 없는데.'

더 늦기 전에 와서 다행이었다.

[잘 가렴. 아니, 다시 보자꾸나. 내 뱃속에서겠지만.]

꽈아아앙!

노을빛 전류가 나를 향해 쏘아진다.

나는 눈동자에 마나를 몰아넣었다.

치이익―

눈알이 타들어 가는 기분.

그리고 고양감, 시야의 변화.

공간이 무채색으로 변하며 이형의 기류만이 색을 띤다.

'오랜만이네.'

하지만 어색함은 없었다.

양손으로 회초리를 쥐고 그 속에 마나를 담았다.

회초리를 몸쪽으로 당겼다.

 '결'이 가까워진다.

근육을 팽창시킨다.

호흡을 멈춘다.

완벽히 조준.

그리고,

촤아아악―!

마법을 베었다.

콰과과광!

쪼개진 마법이 내 양옆으로 흉측한 자국을 남기며 사라졌다.

호흡을 정련했다.

목걸이가 빛나며 직전의 반동을 수습해준다.

악마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

"뭘 놀라. 마법은 못 벨 줄 알았냐?"

사실을 말하자면 못 베는 게 맞긴 하다.

나를 제외하면 누구도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자네 눈깔만 쏙 뽑아서 가지고 싶군.

-좆같은 소리 하지 마십쇼.

이 기예는, 이 '눈'은.

그 미래의 태자조차 얻지 못한 나만의 재주였다.

< 저물지 않는 노을 (2)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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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물지 않는 노을 (3) >

#029화. 저물지 않는 노을 (3)

특별함은 남들과의 비교가 있어야만 비로소 가치가 드러나는 명제다.

내 눈에 관한 것도 그랬다.

언젠가, 그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한데 전하, 저한테 제국 검술은 왜 가르치십니까. 이건 황실 적자에게만 내려오는 검술이 아닙니까.

암만 옥중이라지만 이 인간이 내게 제국 검술을 가르치는 이유가 영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던가, 혹여 이 사실이 다른 곳으로 퍼져나간다면 옥살이가 아니라 사형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건넨 의문, 그에 태자는 그리 답했었다.

-자네는 눈이 좋거든. 내가 안 가르쳐줘도 훔쳐 배웠을 걸세. 그럴 바에 차라리 내 손으로 다듬는 게 낫지.

당시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검술이 어디 보고 베낄 수 있는 종류의 기예던가.

내 상식에서 검술이란 몇십 년에 걸친 꾸준한 수련과 참오가 있어야만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심오한 학문이란 말이다.

특히 제국 검술이다.

초대 황제를 제외하곤 누구도 대성하지 못했다는 그 끔찍한 난이도의 신공 말이다.

내가 어떻게 그걸 눈으로 보고 베끼나.

하여 나는 그 사실을 부정했으나, 태자는 끅끅 웃고 말았다.

다만, 그걸 핑계로 내게 끔찍한 여러 일을 자행할 뿐이었다.

-마나의 흐름을 봐주시게.

-마나의 흐름을 봐서 피하게.

-마나의 흐름을 끊게.

-보이면 활용을 좀 하시게.

그놈의 '마나의 흐름'.

태자는 내가 그것을 온전히 보고 이용하길 바랐다.

그리하여 '신 제국검술'의 완성에 도움을 주길 원했다.

지독한 인간이었다.

결국 사람은 고난 속에서 성장한다나 뭐라나.

위기 상황에 몰리면 눈의 영역도 넓어질 거라면서 마나의 파도 속에 날 가둬두질 않나, 하나하나가 살초인 검식들을 내게 쏘아대질 않나.

하지만 그 끔찍한 과정은 분명 도움이 됐다.

소드 마스터에 이르기까지, 태자가 보여줬던 것들은 내 참오의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줬으니까.

물론 꼬운 감정이 없진 않았다.

언젠간 저 인간 면상에 주먹을 갈기고 말리라.

당시의 내 목표는 그것 하나였다.

내 눈의 진짜 기능은, 전쟁터에 나가고 나서야 알게 됐다.

-저걸 왜 못 피합니까?

-주술은 은밀···.

-은밀은 무슨, 날아오는 궤적이 보이잖습니까. 결대로 칼만 갖다 대면 부수는 것도 되던데?

-···경,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처음 나선 전장.

야만족의 주술에 대열이 무너지는 게 답답해 지휘부 회의에서 그런 말을 했다.

돌아온 반응을 느끼고서야 나는 태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들이 다 자네같진 않네.

그랬다.

내 눈은 남들과 달랐다.

나는 남들도 나처럼 허공을 흐르는 마나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집중하면 마나의 색이 보이고, 결이 보이고, 그 구조적인 짜임새가 보이는 줄 알았다.

심지어 각 마나가 가진 온기도 보이는 줄 알았다.

그걸 이용하거나, 회피하는 게 당연히 될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제국의 남은 인재가 모두 모여있던 그 전장 속에서도, 나와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 특별함은 비교를 통해서 그 가치가 드러난다.

그날 이후 전장에서의 내 역할은 크게 뒤집혔다.

-죄수부대는 특무대로 편성할 거예요. 적진의 지휘관 및 주술 병력을 암살해주세요.

에릴다는 나를 사용하는 법을 알았다.

그리고 태자는, 나를 완성시키는 법을 알았다.

-주술까지 보일 줄은 몰랐군. 생각보다 더 대단허이.

-헛소리 말고 방법이나 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방법이 달리 뭐가 있겠나.

나는 검수다.

태자도 검수다.

우리는 같은 검을 다루며, 같은 길을 나아간다.

다만 태자가 태자만의 무기가 있었듯이, 나 또한 나만의 무기가 있었다.

태자는 그걸 다듬고자 했다.

-신 제국검술에 하나의 검식을 더하지.

-뭡니까. 또.

-이름은··· 그래, '주술 베기'가 어떤가.

-어쩌구 식, 저쩌구 식. 그런 식으로 안 짓습니까?

-안 지을 것이네. 이건 자네만이 다룰 수 있는 번외 검식이니.

그날의 태자는 꽤 신나 보였다.

내가 보는 세상을 설명하자, 그에 걸맞은 여러 응용법을 함께 강구해줬다.

나는 태자의 이론을 실전으로 보완했다.

내가 아는 제국검술의 묘리와 마나의 결이라는 성질, 그리고 그것을 한데 엮어 결국 검의.

아직 소드마스터에 이르지 않은 때부터 태자의 가혹한 교육 아래 검의를 다루던 나다.

검식 하나를 더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잡았습니다.

여기까지가 '주술 베기'의 탄생 배경이다.

악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떻게···?]

"보이니까 벴지."

다시 기수식을 취한다.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킨다.

안력을 돋운다.

그리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무채색으로 회귀한다.

가장 많은 주술사를 죽인, 그 무엇보다 내가 자신 있는 하나의 검식.

주술 베기가 있는 한 모든 이능적 행위에 대해 나는 명백한 우위를 얻는다.

결국 그런 말이다.

빠지지직!

[이건!]

전류가 아무리 매섭다 해도, 화염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사술로는 날 이길 수 없다.

내게 상성적 우위를 점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단 한 명.

"이것도 보이네."

검술 자체로도 완벽했던 태자밖에 없었다.

촤아아악!

번개를 갈랐다.

* * *

천궤안.

아모리오와 의식이 얽힌 베아트리스는 그녀의 사고 속에서 그 단어를 읽어냈다.

악마는 당혹을 느끼고 있었다.

다름 아닌 그의 눈을 보고서 말이다.

[저게 아직도 남아있다고?]

타인의 의식이 스며드는 일은 불쾌하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정신 붙들어 매고 있어라.

유렌이 그리 말했기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수습해줄 이는 당장 그밖에 없기에.

그러니 그 말을 충실히 따르며 틈을 보는 것이다.

베아트리스는 간절했다.

인과를 깨달은 지금 그녀의 속에 남아있는 것은 후회와 죄의식뿐이었다.

배신감조차 없었다.

그런 것을 느끼기엔 저지른 일이 너무 끔찍한 까닭이다.

그런 순간이었다.

[하핫···!]

반가움이 아모리오의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꽈과광!

마법이 난사된다.

아모리오는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어 사용할 수 있는··· 그리고 언젠가 사용하려 했던 상위 위계의 술식을 미친 듯이 구현해 나갔다.

그녀의 연산속도는 정상 범위를 아득히 넘어 있었다.

악마를 이르러 초월적 정신체라 하는 이유를, 마법사의 몸을 차지한 악마가 그리도 끔찍했던 이유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유렌은 그런 마법을 차근차근 부수며 다가왔다.

거리를 좁히려 했고, 그게 안 될 때면,

파아앙!

이해하지 못할 방법으로 마법을 튕겨냈다.

그러다 어느덧 유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모리오의 팔이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꽃봉오리 형상의 방어막이 베아트리스의 몸 위를 덮었다.

꽈아아앙―!

에이드리아의 봉오리.

물리적 충격을 반사하는 막이었다.

하나 완전한 반사는 아니었다.

실질적인 공격은 막아냈으나 베아트리스는 안쪽에서부터 마나가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마법이 시전 중 깨어지며 내상이 인 것이다.

유렌이 말했다.

"더럽게 끈질기네."

유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털었다.

베아트리스는 희망을 느꼈다.

'···압도하고 있어.'

아모리오는 막아내는 게 고작, 유효타는 한 번도 먹이지 못한 채 마나를 낭비하고만 있었다.

자신의 몸이기에 알았다.

그릇이 넓어져 위계가 끌려 올라갔다고 한들 마법사의 육신일 뿐이다.

유렌의 경지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승부에서 우위를 점할 정도는 충분히 되는 듯했다.

그게 무슨 말이겠나.

'이겼···.'

이겼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푸흡···!]

아모리오는 그 확인을 비웃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참 반가운 눈이야. 이래서 하계가 재밌어! 놀라운 놀거리가 이렇게 많거든!]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겐 그저 유흥일 뿐이었다.

당황도, 열세도.

악마를 흔들 수는 없었다.

한데 유렌은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이제 끝 좀 보자."

[흠, 그건 곤란하구나.]

"네가 곤란하면 어쩔 건데."

끼기기긱!!!

귀를 찢어발기는 거친 쇳소리가 울렸다.

유렌의 몸에서부터 마나가 폭사하며 이는 소리였다.

베아트리스는 흠칫했다.

'저건···!'

그 느낌이다.

파혼의 의사를 말하던 순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운의 정체.

짐승의 입속으로 들어와 있는 기분.

사나운 송곳니가 공간 전체에 드리워져 있는 기분.

"쿨럭···!"

[어머, 무리하는구나.]

유렌이 피를 토했다.

그리하며 잔뜩 성난 눈초리로 아모리오를 노려봤다.

사냥감을 노리는 눈이었다.

하나,

[음, 그럼 나도 맞춰서 놀아주어야겠지.]

아모리오는 그 사실조차 기쁜 듯 변화를 일으켰다.

꽈드드득!

"아, 아악···!"

베아트리스는 이미 그녀에게 잠식된 오른쪽 눈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직후 시야에 들어온 것에 경악했다.

'···이건?'

[감정의 색채란다. 자, 보이니? 저기 피어있는 붉은 게 살의야.]

오른쪽 눈으로부터 총천연색의 세계가 펼쳐졌다.

개중 가장 강렬한 것은 자신을 향해있는 붉은 파도.

유렌의 살의였다.

[이게 있으면 편하지. 저 눈만큼은 못해도 읽을 수 있는 게 생기거든. 하여튼 지독한 살의구나. 어지간히 성격이 더러운 아이인 듯해.]

위험했다.

의식이 섞인 상태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보는 게 끝이 아니지.]

콰앙―!

유렌이 쏘아져나왔다.

정확히, 그의 살의가 펼쳐진 길을 따라서.

아모리오는 느긋하게 손을 뻗어 살의를 건드렸다.

그러자 유렌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

[우리가 왜 악마겠니.]

마법진이 펼쳐진다.

그 위로 아모리오가 색채를 담았다.

마법진의 색이 노을빛으로 물들고, 다시 푸른색으로 점멸했다.

[감정은 본디, 우리로 생겨난 것이었단다.]

등골이 섬찟해지는 마력.

베아트리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고,

"조시···."

그 말은 생각보다 늦었다.

피슛!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피했으나, 유렌의 뺨에 긴 자상이 생겼다.

유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모리오의 첫 유효타였다.

이리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직전의 공격은 유렌이 보지 못했다.

위기가 찾아왔건만, 끝이 아니었다.

[더 본격적으로 해볼까.]

아모리오가 그리 말한 순간이었다.

"···!"

베아트리스는 통제력을 잃어갔다.

정신 또한, 천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안···."

시야가 점점 검게 물들고 있었다.

이를 악 물었다.

"조심···!"

어떻게든 입을 움직이려 했다.

하나, 경고의 말을 끝으로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금 차오르는 절망감은 아모리오의 힘을 강화했다.

[그래, 그러고 있어주련?]

화아악!

노을빛이 짙어졌다.

아모리오가 허공을 톡 두드리자 그곳으로부터 파문이 일었다.

파문이 술식으로 변했다.

술식 자동 완성.

베아트리스가 직접 개발하고 보완 중인 체계였다.

비전까지 흉내내기 시작한 것이다.

진이 붉고 푸르게 점멸한다.

하나가 아니었다.

그 수가 일곱 개.

일곱 술식을 한 번에 연산하고 있었다.

전처럼 읽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공격이라면 유렌은 죽는다.

베아트리스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아, 씨발."

유렌이 욕지거리를 흘렸다.

베아트리스는 흠칫했다.

그의 눈이, 아모리오가 아닌 자신을 향해 있었으므로.

"야."

그리 말을 걸어온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모리오가 완성된 술식을 발했다.

하늘에서 일곱 개의 쇠사슬이 각기 다른 기운을 품은 채 떨어졌다.

6위계, 신벌의 사슬.

촤르르륵!

전방위적인 공격은 유렌이 막을 수 없었다.

악마의 힘이 베인 만큼 파훼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쾅!

유렌이 땅이 갈라질 정도로 강하게 발을 굴렀다.

그가 아모리오에게 자신에게 다가왔다.

사슬이 그의 길을 막는다.

'막힌다.'

생각하는 순간, 유렌이 회초리를 휘둘렀다.

채애앵―!

사슬이 깨졌다.

베아트리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유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어깨를 밟았고, 회초리를 돋아난 뿔에 가져다 댔다.

베아트리스는 느낄 수 있었다.

[아···?]

악마가,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이건, 볼 수 없을···.]

"흐릿하긴 했는데, 집중하면 보이더라고."

[그게 무슨···.]

"알 거 없고."

유렌이 회초리 위로 마나를 휘감았다.

꽈지지직!

[꺄아아악!!!]

뿔에서 통증이 퍼져 나왔다.

전신이 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베아트리스는 눈앞이 번쩍거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때였다.

"야."

짜증이 잔뜩 서린 속삭임.

직후 베아트리스의 눈에 보인 것은 그랬다.

"정신 붙들고 있으라는 말 못 들었나?"

창백하게 질린 채 신경질이 잔뜩 나 있는 유렌.

그리고 흉악할 정도로 강하게 타오르는···.

'···오러?'

어찌 소드마스터도 아닌 자가 오러를 사용하는가.

의문을 토할 새도 없었다.

들려온 말에 급박함이 차오른 베아트리스는 전력을 다해 아모리오의 마나 운행을 방해했다.

직후였다.

꽈드드드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와 함께,

빠득!

뿔이 부러졌다.

< 저물지 않는 노을 (3) > 끝

ⓒ papapa.

=======================================

< 저물지 않는 노을 (4) >

#030화. 저물지 않는 노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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