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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3% OSCURACADEMIA / Chapter 8: 8

章節 8: 8

* * *

['마법사'입니다! 마법사가 있습니다!]

"...…!"

무전으로 들려오는 정보.

아이리는 화들짝 놀라며 눈앞의 승려를 바라보았다. 아라야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믿고 있던 수가 이거였나?'

어쩐지 여유로워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분명 아론이 작전에 대해 설명할 때, 적에 '마법사'가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마법사 대비는 이미 마쳐 뒀었어.'

바깥 병사들의 상황을 모르는 아이리는 보란 듯이 아라야를 비웃어 주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내부 회선으로 마리아의 경고가 들려왔다.

[조용히 들으세요, 아이리 씨.]

[왜 그러세요?]

[현재 회사 내부사정으로 마법사에 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저희가 불리해요.]

[뭐, 뭐라고요? 분명 아론 이사장이....]

[침착하세요, 아이리 씨.]

[네, 넵!]

놀란 그녀를 마리아가 진정시켰다.

당황한 티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런 그녀에게 마리아가 지시를 내렸다.

[아마 이 '아라야'라는 승려가 마법사일 겁니다. 제가 이 사람을 맡을 테니, 아이리 씨는 그 '사일런스'라는 학생을 데리고 이곳에서 벗어나도록 하세요.]

[하지만....]

아이리가 무어라 반론하려는 찰나.

승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론 스팅레이. 당신이 이렇게 나온다면 저도 방법이 있습니다."

홀로 중얼거린 그가 허공에 손짓하자, 대웅전과 하수도가 이어지던 곳에서 무언가가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했다.

좀비였다.

정확히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좀비들의 무리가 뒤섞여 있었다. 살아 있는 이들은 마치 무언가에 조종당하듯 공허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아- 아악-!]

아이리가 방패로 깔아뭉개고 있던 사일런스 역시 갑자기 괴력을 발휘하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는 입에 게거품을 문 채 어떻게든 아이리의 구속을 벗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뭐, 뭐야?! 분명 행동제한 칩을 꽂았는데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아이리는 [천근추]를 이용하여 그의 움직임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사일런스의 육체가 견디지 못하고 망가질 게 분명했다.

"제길, 마리아 씨!"

아이리는 마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마리아는 곧장 체내의 병기들을 일제히 전개하여 아라야를 겨누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발포.

총성이 지하의 벽에 부딪치며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불꽃이 튀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탄피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허나 그 순간.

"마, 말도 안 돼...!"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아라야의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이번 작전에 투입된 스팅레이 증강자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몸 이곳저곳이 넝마조각처럼 찢겨 피를 흘리고 있었고, 시선은 흐리멍덩했다.

그들 역시 좀비로 변한 것이었다.

"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이리가 발밑에서 몸부림치는 사일런스를 누르며 소리쳤다. 그사이에도 점점 대웅전으로 몰려드는 좀비의 수와 조종당하는 인간의 수는 늘어나고 있었다.

마리아는 계속해서 탄환을 쏟아부었지만 아라야는 인간을 방패로 삼아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끝내 아이리는 사일런스를 놓치고 말았고, 마리아의 체내 화기 역시 탄약이 바닥나고 말았다.

"아이리 씨!"

마리아가 소리쳤다.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어서 여기서 도망쳐야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대답하려는 찰나.

따르르릉-!

누군가가 아이리와 마리아에게 동시에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도, 도련님...?!"

"당신은...!"

[다들 고전하는 모양이군. 현재 상황을 비춰 줄 수 있겠나?]

마리아가 곧장 주변 상황을 촬영해서 보여 주었고, 그를 확인한 아론의 얼굴이 불쾌하게 바뀌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자식. 역시 '그것'에 손을 댄 거로군.]

"뭐, 뭐라고요?"

아이리가 되물었지만 아론은 못 들은 것인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두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둘 다 듣도록. 내가 그곳으로 가고 있으니, 살고 싶으면 내 지시에 따라라.]

아카데미 흑막 시점 57화

[...이상이다.]

"저, 정말로 '그런 방법'이 통해요?"

아론의 짤막하고도 신박한 작전 설명에 아이리는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아론이 농담할 리는 없으리란 건 안다. 워낙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라 저도 모르게 물었을 뿐.

그러자 아론이 짧게 되물었다.

[다른 수가 있나?]

"...아뇨."

그래. 별다른 방법이 없잖은가.

밑져야 본전이니 따르는 수밖에.

"후...."

아이리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서 방패를 다시 들어 올렸다. 왼손 손잡이를 통해 전해지는 무게가 묵직하다.

좀비들의 무리, 비탈길, 부처상.

아래쪽 수로에서 몰려드는 놈들의 수가 상당했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공간을 잡아먹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부처상 앞에서는 모든 사태의 주범인 아라야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검은 웃음이 그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사일런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무기를 꽉 쥐고 있었다. 30㎝ 정도의 단도. 종잇장처럼 얇은 도신이 대웅전의 가스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도 전투기술은 남아 있는 건가.'

전술교전부 3학년의 기술이라.

쉽진 않을 것 같지만....

[한번 해 보죠. 입구 쪽을 맡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이리는 마리아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그와 동시에, 자리를 박찼다.

콰앙!

그녀가 발을 내딛자 지면이 무너질 듯한 충격파가 일었다.

그녀에게 장착된 전투 모듈 중에 근력을 상승시키는 종류는 없었다. 오직 본인의 퓨어 스펙만으로 일으킨 충격파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이미 아라야의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방패를 세워 정면에서 그대로 들이받아 버릴 생각이었다.

"흐읍!"

"...!"

충돌 직전, 힘을 싣고자 어깨로 방패 후면부를 지탱했다. 돌진을 통해 얻은 추진력에 한 번 더 힘을 더하여 그대로 방패를 내지른다.

다만 그녀의 공격은 닿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라야에게 조종당하는 사일런스와 스팅레이 병사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까드드드드득-!

사일런스가 내민 칼날에 그녀의 방패가 막혔다. 얇은 칼날과 방패의 장갑이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으으윽!"

팽팽한 힘싸움.

퓨어스펙이 뛰어난 아이리였지만, 전투 모듈을 장착한 사일런스에게 완력으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양쪽에서 다른 좀비들이 아이리를 덮치려 들었으니.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노리던 바였다.

"마리아 씨!"

타아아앙-!

아이리의 외침과 동시에, 마리아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아이리가 그에 맞춰 자세를 낮추었고, 그 위로 마리아가 쏘아낸 대구경 탄환들이 양쪽으로 달려들던 좀비들을 휩쓸었다.

[이게 마지막 탄이었습니다!]

[알고 있어요!]

신장의 차이.

아이리는 사일런스보다 낮은 위치를 점하여 사일런스의 몸체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그대로 방패에 사일런스를 매단 채, 좀비들이 몰려드는 수로로 뛰어들었다.

마치 전차(戰車)와도 같은 기세에, 비탈길을 기어 올라오던 좀비 무리가 치여 날아갔다.

촤아아아악!

정강이 높이까지 차올랐던 물이, 충격으로 높이 솟구쳤다. 물보라의 한가운데에는 사일런스와 아이리가 다시금 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제길...!"

이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버티다니,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균형 감각인가? 원래라면 넘어뜨린 뒤에 물을 한껏 먹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물을 먹이기는커녕 좀비들에게 포위당한 꼴이다. 이판사판으로 시도해 본 것이었는데, 사실상 최악의 상황에 처하고 만 것.

[시, 실패했어요! 어떡하죠?]

아이리가 내부회선에 소리쳤다.

본래 아론이 지시했던 작전은 이러했다.

* * *

-물을 먹여라.

-물이요? 마시는 물?

-지하 수로를 개조하여 만든 시설이라고 하지 않았나? 거기에 흐르는 물을 먹이면 정신을 차리겠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고 따지려는 아이리와 달리, 마리아는 곧장 아론의 의도를 이해한 듯했다.

-안티 레인이군요.

-그래.

아론이 긍정했다.

-놈의 능력은 '해킹' 기술에 '마법'을 응용한 거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마나'가 필요하지. 그리고 그 '마나'에 가장 효과적인 성분이....

-안티 레인이죠.

아론의 말을 아이리가 받았다.

[신비]들을 내쫓고 놈들이 일으키는 왜곡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흩뿌리는 인공강우. 그 안에는 '마나'를 흐트러뜨리는 성분의 화학약품이 섞여 있다.

당연히 인체에 좋을 리는 없을 거고, 또 희석된 성분이 얼마나 상대의 능력에 효과적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마법용 장비도 뭣도 없는 상황에서 이용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었다.

-지하 수로이니만큼 안티레인이 그곳으로 모일 거다. 그곳에 흐르는 물을 먹이면 사람들과 시체를 조종하는 마법이 풀릴 거다.

-그, 그거 확실한 거예요?

-모른다.

아론의 즉답에 아이리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모, 모른다니요?

-그 수로를 흐르는 물에 충분한 양의 안티레인 성분이 들어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니 효과는 확실치 않지.

-하지만 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아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일런스와 스팅레이 적응자들을 우선으로 처리해라. 그 녀석들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 수만 있다면, 분명히 큰 힘이 될 거다.

-알겠습니다.

-아, 알았어요. 해 볼게요.

아이리와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론은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절대 '아라야'의 본체와는 정면으로 맞붙지 마라. 내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것에만 집중해.

* * *

그런 작전회의를 나누었고, 아이리는 가장 가까이 있던 사일런스에게 걸린 마법부터 풀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일런스의 대응이 만만찮았기에,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설상가상.

"과연. 그런 거였습니까."

아무래도 아라야가 이쪽의 작전을 눈치챈 듯했다.

"수로에는 안티레인이 흐를 테니, 그걸 이용하면 된다라... 제 능력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당연하다 치더라도 그런 방법을 즉흥적으로 떠올리는 건 놀라울 정도입니다. 원작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왔다고는 해도 응용은 별개의 문제니."

[지금 저 자식이 뭐라고 하는 거죠?]

[무시해라.]

아이리의 질문에 짧게 답하는 아론.

그는 즉시 지시를 이어 나갔다.

[이미 이쪽의 수가 들킨 이상 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을 거다.]

아론의 말마따나, 놈은 즉시 전략을 바꾸었다. 아이리와 사일런스를 정면으로 맞붙게 하는 대신, 다른 좀비 무리 뒤로 물러나게 한 것이다.

"자, 잠깐! 어디 가는 거...!"

[뒤쫓지 마라. 이미 넌 포위상태다.]

무리 속으로 녹아들 듯 자취를 감춘 사일런스.

아이리가 다시금 달려드려는 것을 아론이 제지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다른 좀비들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아론이 재차 지시를 내렸다.

[마리아. 수로에서 시간을 벌어라. 아이리를 호위하면서 3분... 아니, 2분만 시간을 끌도록.]

[알겠습니다.]

그 말에 따라 바깥 복도에서 몰려오는 좀비들을 막던 마리아가 아이리에게 합류했다.

좁은 입구의 수문장 역할을 하던 마리아가 자리를 비우자, 대웅전으로 대규모의 좀비 무리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백업하기는 좋아졌으나, 병 주둥이를 막던 마개를 열어 버린 형국이었다.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좀비들.

아이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이 자리, 지대도 낮고 발밑의 물이 미끄러워요. 저 위 제단 쪽에서 공격하면 속수무책이에요. 어떻게든 높은 지대를 탈환해야....]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발소리에 신경을 집중하고, 등 뒤를 조심해라.]

[마, 말이야 쉽죠!]

영 미심쩍은 지시였으나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는 좀비들을 때리고 밀쳐 내며 어떻게든 시간을 벌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때.

자박자박, 물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좀비들과는 다른 기척이,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났다.

"윽...!?"

아이리는 반사적으로 방패를 뒤로 돌려 몸을 보호했다. 그와 동시에 섬뜩하고도 예리한 빛이 방패에 튕겨 나갔다.

채앵-!

새빨간 불꽃이 튀었다.

한순간 탄환이 날아온 것인가 싶었지만, 속도와 위력으로 봐선 아니었다. 아이리는 곧장 공격이 날아온 위치를 확인해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 대체 뭐야?'

의문을 품는 순간.

다시 한번 찰랑, 하고 물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바로 옆에서 들렸고, 아이리는 재빠르게 방어했다.

카아앙-!

다시 한번 방패에서 불꽃이 튄다.

하지만 이번에도 공격한 놈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리는 자신의 뒤를 맡긴 마리아에게 물었다.

[마리아 씨! 지금 봤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마리아 역시 몰려오는 좀비들을 날려 버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무래도 방금 일어난 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궁금증은 아론이 풀어 주었다.

[사일런스다.]

[뭐, 뭐라고요?]

[녀석은 기습과 은신에 능하다. 발소리를 놓치면 안 된다.]

[아...!]

이제야 깨달았다.

아론이 어째서 굳이 이렇게 물이 고인 자리에서 싸우라고 지시했는지. 그는 사일런스의 능력을 이미 꿰뚫고 있었고, 그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이 없었으면 전혀 눈치도 못 채고 당했을 거야...!'

이런 물속에서 움직이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인데, 평범한 바닥이었으면 어땠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사일런스의 능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이 자리가 싸우기 불리한 곳임은 변하지 않았다.

물 때문에 바닥이 미끈거려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고, 발을 움직일 때마다 저항에 걸려 힘이 배로 들었다. 또 지대가 낮은 탓에 비탈길 위에서 좀비들이 뛰어내리는 것을 막으려면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빠르게 지쳐 갔다. 호흡은 거칠어지고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달라붙어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끊임없이 빈틈을 노리고 날아드는 사일런스의 일격.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공격에 신경은 점점 마모되어 가듯 무뎌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리아가 먼저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윽...!"

"마리아 씨!"

마리아의 기계팔이 베였다. 어찌나 깊게 베였는지 피부장갑과 피하장갑까지 뚫고 안쪽의 기계 부품이 보일 지경이었다.

베인 부분의 회로가 망가졌는지 스파크를 일으키며, 손이 부자연스럽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마 더 싸웠다간 기계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을 비탈길 위, 제단 쪽에서 아라야가 비웃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슬슬 한계가 오고 있는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시간을 끌수록 제게 불리하니 말이지요. 이제 마무리를 지을 때가 된 듯합니다."

딱!

그가 손을 튕기자 어디선가 한 무리의 군인들이 몰려왔다.

군용 파워드 아머와 대구경 소총으로 단단히 무장한 그들은, 비탈길 위에 자리를 잡고서 좀비무리를 상대하던 두 사람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은발 머리 쪽을 서둘러 생포해 주시길 바랍니다. 동양인 쪽은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철컥철컥.

지시에 맞추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총구가 불을 뿜는다. 아이리는 다급하게 방패를 들어 올리며 마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타다다다다다다다-!

"윽...!"

탄환들이 방패를 쉴 새 없이 가격했다.

강렬한 충격에 아이리는 방패를 놓칠 것만 같았으나, 그녀는 [천근추] 모듈을 활성화한 채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버텼다.

[젠장! 언제 오는 거예요! 2분만 버티면 된다면서!]

[이제 곧이다.]

[으아아아!]

내부회선으로 쉴 새 없이 비명을 지르는데도 아론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저렇게 담담할 수 있는 건 직접 현장에서 싸우고 있지 않기 때문일까.

얄밉기 그지없었지만, 그 담담함이 묘하게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그 말 좀 그만해요!!]

비처럼 쏟아지는 탄환에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이 이상은 서서 버틸 수가 없어서 무릎을 꿇었고, 그때를 노렸다는 듯이, 한 놈이 무언가를 쏘았다.

지지지직!

"윽?!"

바닥에 고인 물을 타고 강렬한 전류가 흘러들어왔다. 테이저 탄환인 듯했다.

순간 장착한 사이버웨어가 오작동을 일으키며 시야가 암전되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버린 탓에, 아이리는 끝내 방패를 놓치고 말았고, 두 사람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제야 끝났군요. 어서 회수해 오세요."

저벅저벅.

사일런스와 군인무리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이리는 어떻게든 다시 방패를 지팡이 삼아 일어나려 했지만, 의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제기... 일...!]

[아이리. 정신 차려라.]

[너... 무 늦었다고... 요...!]

아론에게 불평하듯 투덜거리는 아이리.

그녀의 팔을 사일런스가 뒤로 꺾어 제압했다. 무릎을 꿇린 채 수갑을 채우고, 소켓에는 행동 제어칩을 꽂기 위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치워 냈다.

아무리 해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이제 끝이다.

아론은 너무 늦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니, 늦지 않았다.]

쿠구구구구구구-!

어디선가 굉음과 함께 대웅전 전체가 흔들렸다. 사일런스와 군인들, 아라야까지 천장 쪽을 바라보며 멈칫했다.

"...?"

지진인가?

그런 의문을 품으려던 순간.

쿠구구구구구구구구-!

다시 한번 알 수 없는 진동이 지하 수로를 뒤흔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자니.

"제, 제기랄...!"

아라야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욕설을 내뱉었고, 동시에 아론이 내부회선을 통해 말했다.

[숨을 참고, 모듈을 활성화해라!]

[이게 무슨 일...!]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로의 물이 허리춤까지 솟아올라 있었다.

'이건!'

아이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힘을 짜내어 군인들을 밀쳐 냈다. 마리아 위로 자신의 몸을 겹치고, 숨을 힘껏 들이마신 후, 모듈을 활성화시켰다.

'모듈 온라인, [천근추]!'

그녀의 몸에 강한 인력이 발생하며 바닥으로 달라붙듯 가라앉았다.

사일런스가 아이리를 바닥에서 떼어 내려고 했으나, Lv.4짜리 신비모듈이 내는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윽고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작게만 들리던 소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져서 이내 우레와도 같은 기세가 되었다. 마지막 순간 아이리는 보았다.

하수도를 통해 밀려드는.

엄청난 격류를.

아카데미 흑막 시점 58화

"콜록... 커흑...!"

시야가 흐릿했다.

물을 좀 먹은 것인지 안티레인 특유의 이상한 냄새가 입안 전체에 맴돌았다. 기침을 몇 번 하자 주르륵 물이 새어 나왔다.

'여기는...?'

몸에 힘이 없다.

아이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자신이 깨어난 곳이 조금 전까지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양측 비탈길 아래 수로에는 물이 가득했다. 아까 전 정강이 높이까지밖에 물이 차지 않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을 되짚어 본다.

분명 어떻게든 수로 쪽에서 버티라고 아론이 지시했었고... 지금은 물에 잠긴 저 아래쯤에서 싸우다가....

"아."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갑작스레 흔들리기 시작한 지하 수로. 저 멀리 하수도를 타고 밀려드는 급류.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천근추]를 사용했더랬다.

"콜록... 버티라는 게... 이런 의미였냐고... 콜록!"

그 급류의 정체는 아마도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것일 테지. 어떻게 된 경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이 지역에만 안티레인 스콜을 뿌려 달라고 기상청에 요청하신 거겠죠."

"음?"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깨가 맞닿을 거리에 마리아가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사일런스가 기절한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마리아 역시 아이리와 마찬가지로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검은 머리칼과 옷이 흠뻑 젖어, 화학약품 냄새가 섞인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평소에 아카데미에서 보여 주었던 '완벽한 비서'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 아이리에게는 퍽 새롭게 느껴졌다.

"마리아 씨, 괜찮...."

"쉿. 목소리를 낮춰 주십시오."

아이리가 무어라 말을 하려 하자 마리아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마리아는 턱짓을 통해 어딘가를 가리켰고, 아이리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건...!'

아론이 그곳에 있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 장갑이 씌워져 있었고, 맞은편에는 아라야가 걸레짝이 되어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들의 주변으로는 아까 전 보았던 군용 파워드 아머로 무장한 이들의 몸이, 말 그대로 '반으로 갈라진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벌써 전투가 끝난 건가?'

잠시 정신을 잃은 사이, 아론이 도착해서 현장을 정리한 듯했다. 전투의 흔적이 많이 남지 않은 걸 봐서는, 그다지 치열하게 싸운 것 같지도 않았다.

'하....'

자신들이 그리 고전했던 상대를 이렇게 손쉽게 이겨 버리다니.

그가 전투에 곧장 가세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음을 알아도, 허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째서인가 아론이 곧장 아라야의 목숨을 끊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

자신들이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자기들만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잘 안 들려....'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 집중했다. 그러자 그들 사이에 오가는 말들의 일부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저항할 수... 같습니까?"

"어떻게든... 하면... 해결...."

저항? 해결?

대체 무슨 이야기지?

알아들을 수 있겠냐는 의미로 마리아 쪽을 슬쩍 바라보니 그녀는 이미 두 사람의 대화에 완전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리는 하는 수 없이 다시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 순간 아라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론에게 말했다.

"숨기는 것도... 한계가... 있을...."

"네놈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아론이 냉정하게 답했고.

아라야는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갔다.

"참으로 구멍투성이... 그게 당신의 전략입니까? 죽은 사람을 대신하는... 보호자 노릇을 하면서 환심을...?"

"못 할 것도 없다."

"허억... 본인이 어떤 입장인지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어디까지나 악당... 입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당신은 아이리까지 죽이게 될 겁니다."

* * *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얼추 정리된 상황이었다. 입구부터 대웅전까지 인간과 안드로이드 시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늘어져 있었다.

"안쪽은 나 혼자 살피겠다. 너희들은 이곳부터 정리하도록."

"옙!"

나와 함께 온 스팅레이 직원들에게 그것들의 뒤처리를 맡기고, 잔해를 피해 바닥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이리와 마리아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지원이 도착하기 전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급한 대로 이 근방에 강제로 안티레인 스콜을 내리도록 스팅레이의 이름을 내걸고 기상청을 압박했다.

다행히 작전 자체는 성공이었고, 좀비들 상당수가 격류에 휩쓸려 갔다.

좀비들 중에서는 시체를 되살린 것뿐만이 아니라 정신을 빼앗긴 산 인간들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안부까지는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이리에겐 [천근추]가 있으니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그녀의 스펙을 생각하면 무사하리라 생각이 들었지만, 100% 장담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대웅전 쪽으로 향하는 내 걸음은 점점 다급해졌다.

그렇게 더더욱 아지트 깊은 곳으로 들어가니 좀비 무리가 조금 남아 있었다. 나는 가볍게 [구름거미] 모듈을 활성화하여 그들을 치워 버리곤 대웅전으로 진입했다.

[누, 누구냐!]

[저건...!]

[아론 스팅레이다! 제기랄!]

대웅전 안에 있던 것은 파워드 아머로 무장한 안드로이드들이었다. 호텔에서 봤던 놈들과 비슷한 수준.

당연히 내 상대는 되지 않았기에, 일격에 그들의 허리와 목을 [구름거미]의 실로 베어 버렸다.

단 3초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적대하는 놈들을 쓸어버리고 나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리...."

아이리가 물가에 정신을 잃은 채 엎어져 있었다. 그녀의 옆에 마리아와 사일런스도 함께 있었다.

아마 조금 전 쓸어버린 안드로이드 녀석들이 이들을 물에서 건져 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행이다. 살아 있구나.'

세 명 모두 생명징후에 큰 이상이 없다는 것이 내 [트라우마 생체스캐너]에 잡혔다.

나는 [구름거미]의 실을 이용하여 그들을 한 명씩 구석으로 옮겼다.

얼추 안전이 확보된 후.

가장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부처상 앞에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승려였다.

'...저 녀석이군.'

마리아가 보낸 영상에 찍혀 있던 녀석이다. 얇은 주황색 승복에 삭발한 머리는 영락없는 승려였으나, 그가 종교인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라야....'

놈이 자신을 소개할 때 사용했던 이름.

나는 그 이름을 몇 번 입 안에서 굴려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원작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야.'

시엘과 마찬가지로 랜덤한 몸에 빙의한 케이스인가? 그게 아니라면 가짜 이름인가?

어느 쪽이든 지금 단계에선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네놈이로군."

"...아론 스팅레이."

저놈은 내 적이라는 것이다.

서로의 정체를 확인한 후,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다음 순간에 일어날 일은 뻔했다.

파아아앙-!

놈은 장법을 내지르듯 손바닥을 내게 향했다. 그와 동시에 검푸른 색의 기운이 총알처럼 내게 쏘아졌다.

"마법인가? 허접하군."

내 스펙은 이미 멀리서 날아오는 저격탄마저 막아 내는 수준이다. 놈이 쏘아낸 마탄(魔彈) 따위, 내 눈에는 굼벵이가 기어오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피할 필요도 못 느낀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며 마탄을 손으로 치워 버렸다. 검푸른 덩어리는 내 손날에 맞고 튀어 나가 벽면에 처박혔다.

마탄이 박힌 자리가 마치 산성용액에 맞은 듯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형체를 잃고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공간 왜곡이군.'

농축된 마력의 덩어리가 착탄 부분에 뒤틀림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스치는 것만으로도 괴이한 방식의 죽음을 맞이할 테지.

하지만 내게는 한낱 장난 수준이다.

"크윽...!"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는 녀석을 몰아넣듯이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놈은 분하다는 듯 탄식을 하더니 재차 마탄을 쏘았다.

이번엔 다섯 개.

마력을 더 담았는지 기운이 보다 흉흉했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쉬이이이익-!

날아오는 마탄들을 간단하게 손으로 쳐 냈다. 물론 나 역시 대마법(Anti-Magic)관련 모듈을 장착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내 손에 끼워진 장갑은 다름 아닌 Lv.5 신비모듈인 [구름거미]. '게임체인저'라고도 불리는 최상급 전투 모듈이다.

고작 단순한 마탄 정도야 마력을 좀 많이 담았다고 한들, 튕겨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과장을 보태서 차라리 날아오는 돌멩이가 내게는 훨씬 더 위협적일 것이다. 그건 최소한의 물리력이라도 지니고 있으니까.

"소용없다. 포기하도록."

"제기랄."

아라야는 또 다른 수를 꺼내려 했다.

이미 쓰러진 안드로이드들을, 마법을 이용하여 다시 깨우려고 시도한다든가. 지면을 마탄으로 변질시켜 내 발을 묶으려고 한다든가.

하지만 소용없었다.

전부 무의미한 짓이었다.

계속 살펴본 바, 놈의 능력은 기껏해야 '네크로맨싱' 기술을 막 개발한 원작의 주인공 수준에 불과했다.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뜻.

어느덧 나는 아라야의 앞에 도달해 있었고,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놈을 내려다보았다.

180cm를 넘는 내 신장에 비하면 놈의 몸은 굉장히 왜소한 편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놈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빌어먹을!"

이미 도망칠 곳은 없음을 알았을 텐데도, 놈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내 손을 거칠게 치워 내며 다시 반격하려 들었다.

그 사실이 내 심기를 거슬렸다.

"슬슬 짜증 나는군."

내겐 정보가 필요했다.

그러니 적어도 놈을 '말을 할 수는 있는' 상태로 남겨 두고 싶었지만, 그 태도가 내 안에 남은 일말의 인내심을 끊어 버렸다.

"쯧."

나는 혀를 찼다.

그리고 놈이 무언가를 시도하기 전에, 그대로 발로 걷어차 버렸다.

콰아아아아앙-!

놈의 몸이 포탄처럼 날아가 부처상의 안면에 박혔다.

"크헉!?"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구름거미]의 실을 이용하여, 놈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내 앞으로 다시 끌고 와 무릎 꿇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걷어찼다.

"크아악!!"

이번엔 부처상을 부수고 날아가 대웅전의 벽면에 박혔다. 그리고 중력의 영향을 받아 수로에 고인 물에 떨어졌다.

철썩-!

스스슥.

다시금 실을 조작하여 앞으로 끌고 온다. 그리고 걷어차고, 끌고 오고, 걷어차고, 다시 끌고 오고.

몇 차례의 반복과정을 통해 놈에게서 저항할 생각을 지워 버렸다.

물론 녀석의 겉모습만큼은 수도승인 탓에, 그에게 발길질을 가하는 나 역시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분노가 일말의 측은지심마저 앗아 갔다.

그렇게 놈을 '죽지는 않을 수준'으로 만든 후에야 분노가 조금 가셨다. 놈의 모습은 이미 걸레짝이 되어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다.

나는 놈을 다시 앞으로 끌고 왔다.

놈은 바닥을 기어 도망치려고 했으나, 비틀거리는 그의 팔은 몸을 조금도 나아가게 해 주지 못했다.

"후욱... 후욱... 씨바알... …!"

"다행이군. 말을 할 수 있어서."

너무 지나쳤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아직 혀를 놀릴 힘 정도는 남은 듯했으니.

"묻겠다. 거짓 없이 답해라."

"씨바알... 어째서... 이렇게...!"

"집중해라."

나는 이미 부러진 아라야의 허벅지를 지그시 밟아 주었다.

"끄아아악!"

놈의 절규가 왠지 퍽 듣기 좋게....

제기랄.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적당히 발을 떼었다.

"다시 한번 묻겠...."

말하던 중.

뒤쪽에서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마리아가 슬슬 정신을 차릴 듯했다.

'쯧. 민감한 얘기는 빨리 끝내야겠군.'

신중하게 대사를 골라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담담히 물었다.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든 삭이면서. 하지만 과연 이 인내심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묻겠다. 너는...."

아니, 아무래도 무리일 듯했다.

입을 떼면 뗄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질문이고 뭐고 그럴 상황이 아니다.

이 자식이.

이 빌어먹을 자식이...!

"...어째서 그런 짓을 했지?"

빙의자.

다시 말해 원작 소설의 독자라면.

그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퀴즈를 풀고, 이 세계에 들어온 이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던 걸까.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런 빙의자(팬)이 있으리라고는.

"어째서 마녀 에반젤린을 죽인 거지?"

스스로 이 세계를 망가뜨리려는 녀석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59화

고요하다.

인자한 부처상의 얼굴에 붉은 페인트를 흩뿌린 듯 피가 튀어 있다. 대웅전 바닥을 적신 혈액이 느릿하게 흘러, 수로 쪽으로 빠져나갔다.

"...."

아이리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론 스팅레이.

그 남자가 아라야라고 불리는 괴승과 한참이나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끝내 그를 죽이는 모습을.

어째서인가 아론은 분노에 차 있었다.

평소 좀체 냉정함을 잃지 않던 그였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는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로 아라야를 오직 '맨주먹'으로 때려죽였다.

아라야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이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아론은 겨울바람처럼 차가운 눈길만을 남기고는 그대로 아라야의 시체로부터 등을 돌렸다.

"...."

또각또각.

그의 구둣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여전히 고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걸음걸이로, 아론은 아이리와 마리아의 앞까지 다가왔다.

두 사람은 미처 다시 기절한 것처럼 연기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론은 그들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엎어져 있을 셈이더냐."

"...죄송합니다, 도련님."

마리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아이리 역시 뒤늦게 마리아를 따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마리아와 달리, 그녀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론과 아라야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반응이 그대로 드러나 버린 것.

"할 말이라도 있나, 아이리 앨리스밸."

아이리가 노려보자 아론은 황금색 눈동자만 돌려 그녀를 째려보았다. 그 기백에 눌려 아이리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평소 아론이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지어 보이던 짓궂은 미소. 그에 담겨 있던 묘한 온기와 대비되어 그의 태도가 더 쌀쌀맞게 느껴졌다.

"어...."

말을 꺼내기가 힘들다.

무언가가 목구멍을 막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이리는 쥐어 짜내듯 목소리를 내어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무... 무슨 얘기였던 거죠...?"

"앨리스밸 양."

옆에서 마리아가 말렸지만, 아이리는 그걸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상할 정도로 떨리는 손을 억지로 부여잡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거, 거짓말이죠? 이사장님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까 전, 드문드문 끊겨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 속 들려오는 한마디.

-당신은 아이리까지 죽이게 될 겁니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였을까.

아이리'까지'라니?

그렇다는 건 아론이 다른 학생들을 죽게 한 적도 있다는 소리일까? 혹시 그 죽은 학생이라는 것은 어쩌면....

피터 존스.

자신의 오빠가 아닐까?

"...."

하지만 끝내 아이리의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에 아론의 시선이 흥미를 잃고 아이리로부터 떠나갔다. 그는 마리아를 향해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마리아."

"예, 도련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놈은 죽지 않았다."

아론의 목소리가 조금 더 거칠어졌다.

"오늘 처리한 쓰레기는 인형에 불과했다. 본체는 아직도 어디선가 살아 숨 쉬고 있겠지."

곧장 아론이 말하는 의도를 눈치챈 마리아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하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추스르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빈 곳이 많아서 아이리로선 잘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재차 목소리를 내려는 찰나.

휘익.

아론은 아이리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걸음을 옮겨 떠나 버렸다.

"자, 잠깐!"

"앨리스밸 양."

그를 불러 세우려는 것을, 다시 한번 마리아가 제지했다. 아이리는 자신을 붙잡은 손을 거칠게 떼어 내며 항의했다.

"이거 놔요! 이사장한테 아직 말하지 못한 게 있단...!"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만 물어보면 돼요, 네? 아까 마리아 씨도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들으셨잖아요. 아론 이사장이 저까지 죽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는 건 우리 오빠도...."

"분명 뭔가 착오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착오가 뭔지 확인해 보려고 하고 있잖...."

"확인하면요?"

그 순간 마리아가 차갑게 물었다.

"확인한 뒤에는 어떡하실 겁니까?"

"어, 어떻게 하다니요. 그야...!"

"정말로 아론 도련님이 앨리스밸 양의 오빠를 죽였다면요? 복수라도 하실 겁니까? 아니면 확인만 하고 거기서 끝내실 겁니까? 반대로 만약 오해였던 거라면 어떡하실 거죠?"

"그건...."

속사포처럼 쏘아지는 마리아의 질문에 아이리는 단 한마디도 답할 수 없었다. 그런 아이리에게 마리아는 한층 더 차가워진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정신 차리세요. 앨리스밸 양."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냉기가 깃든다.

"아론 스팅레이가 누군지 잊지 마세요. 당신이 아무리 싸움에 능숙하다고 해도 상대는 시티 내 최강자입니다. 만약 정말로 황태자가 당신의 원수인들, 당장 총칼을 들고 달려든다고 해서 이길 수 있을 거 같습니까?"

"그, 그건 해 보지 않으면...!"

"애초에 그분과 당신이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입니다. 당신이 어린애처럼 굴어도, 사고를 쳐도, 무례를 범해도, 무사히 내일도 눈을 뜰 수 있는 건 오직 그분이 베푼 아량 덕분이라고요. 알겠습니까?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앨리스밸 양이 자살희망자가 아니라면 그냥 가만히 계시는 게 상책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방점을 찍듯 말한다.

"제발 철 좀 드시길 바랍니다."

쌀쌀맞은 한마디.

아이리는 이를 깨물었으나, 여전히 반박하진 못했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으니.

분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달라지려 노력하고 있는데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이. 그리고 실제로도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것 같은 자신이.

하지만 그럼 어쩌면 좋은가?

이대로 의문을 내버려둔 채 아무렇지 않은 듯 아카데미에서 일상을 이어 나가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답답하다.

분명 자신의 이야기인데, 자신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마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애인 양...!

"왜 나만...!"

작은 물방울 하나가 눈에서 미끄러진다. 아이리의 보랏빛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빛을 어지러이 산란시킨다.

눈물이 나오지 않도록 눈을 부릅떠보지만 야속할 정도로 쉽게 흘러나오고 만다. 하지만 그것을 닦아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앨리스밸 양. 아니, 아이리."

그 모습에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아이리를 품에 안았다.

상대는 갓 스무 살이 넘었을 뿐인, 자신보다도 한참 어린 동생. 그런 그녀를 너무 몰아세웠구나 싶었다.

"제가 실수했어요. 미안해요."

"이, 이거 놔요! 저는...!"

"아이리가 힘든 것 다 알아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도요. 다만 하나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건, 아이리가 착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착각... 이라고요?"

"네. 그러니 아론 이사장님을 너무 원망하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저분은 당신을 지키려는 것뿐이니까."

마리아는 이미 찾아봤었다.

아론이 그토록 싸고도는 아이리의 오빠라는 인물이 대체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떠한 연유로 죽음을 맞이했었는지를.

진실은 꽤 놀라웠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피터 존스는 그리 좋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아이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며 찾아 헤매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어째서 진실을 숨기시는 걸까요?'

물론 '그 사건'에 대해 스팅레이 재단 측에서 다소 과격하게 대처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함구하는 것은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좋을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던 마리아였으나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아이는 아직 연약합니다.'

천재적인 전투 센스를 가진 아이리였지만, 아직 마음은 여리다.

어쩌면 그 때문에 진실을 마주한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겠지.

그러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아이리가 정신적으로든 능력적으로든 진실을 알아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해지는 때를.

다만 여전히 의아한 것은....

'아론 도련님이 이런 분이셨던가요?'

이런 식의 대처는 마리아가 알던 아론과는 사뭇 거리가 먼 방식이었다.

그녀가 아는 아론은 안하무인에 타인의 감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폭군이었으니까.

'어쩌면....'

조금 전, 아라야와 나누던 이야기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의 대화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의지 따윈 중요치 않습니다. 당신이라고 해서 정해진 운명에 거역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어떻게든 할 거다.

-당신은 스팅레이의 생물병기이자 악당으로서 태어났습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게 본성이죠. 아무리 저항하려고 해도 바꿀 수 없을 겁니다.

'전제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론 스팅레이.

그 출생 배경이 최근 들어 갑자기 달라진 그의 태도와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그를 크게 오해하고 있던 것일지도.

'베네딕트 도련님을 설득해야 합니다.'

자신의 추측이 맞다면.

없어져야 할 것은 아론이 아니었다.

그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

* * *

E섹터, 브랜든 에버뉴 13th 스트리트.

나는 '호프리스'라는 이름이 붙은 바의VIP룸에 안내를 받아 들어섰다. 보통은 마피아 조직 간부들이 이용하는 곳이라는 모양이다.

그곳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CL-00245, 통칭 시엘.

내 지시를 받아 아카데미 내부에 정크칩을 유통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안드로이드이자, 나와 같은 빙의자였다.

못 본 사이에 이미지가 상당히 변했다.

아카데미에서 일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형적인 가정부 안드로이드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더 펑키한 느낌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마 저 차림이 요새 하층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옷이겠지.

당연히 목에 있던 안드로이드용 LED초커는 제거한 상태였기에, 얼핏 보면 안드로이드란 점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미리 와 있었군."

"늦으면 절 어떻게 하실지 모르니까요. 게다가 아론 님이 절 이런 식으로 다급하게 호출한 것도 처음이고."

시엘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중요한 얘기인가요?"

"중요한 얘기다."

내 대답에 시엘은 표정을 굳히더니, VIP룸에 설치된 사운드 캔슬러를 작동시켰다. 밖으로 이 대화가 빠져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말씀해 주세요."

"일전에 내가 했던 지시는 전부 취소다. 일단 전부 중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에반젤린이 죽었다."

내 한마디에 시엘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녀도 곧장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아라야라고 하는 놈이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빙의자였다. 그리고 놈은 지금 단계에서 '네크로맨싱' 능력을 얻었더군."

"그렇다는 건...."

"놈이 '마녀의 피'를 얻었단 거지."

"강제로 빼앗은 거군요."

"그래."

마녀 에반젤린.

원작 주인공 셰이드 웰즈의 동료이자, 서브히로인.

'마녀의 피'를 받는다는 것은, 그녀가 지닌 마법적인 힘을 빼앗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에게 반한 에반젤린이,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마법적인 능력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과정이 아라야라는 녀석을 상대로 일어났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아마 죽였거나, 그와 비슷한 상태까지 몰아넣었겠지.

"미친 새끼...."

"동감이군."

에반젤린은 '마녀'인 주제에 오히려 '성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행보를 보이는 캐릭터다.

특히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에서는 다시 한번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위기에서 구해 냈다.

그러니 그녀가 없다는 것은, 그 위기를 해결해 줄 핵심인물이 사라져 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대요?"

"자기는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았을 뿐이라더군."

이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힘이 필요했다던가. 작품 후반부의 위기보다도 당장의 자신이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던가.

뭔가 여러 가지를 떠들어댔지만, 돼도 않는 변명거리로 들렸다. 도중부터 열이 끓어올라 물리적으로 닥치게 했다.

"그, 그럼 이제 어떡하죠?"

"어떻게든 하는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아론 스팅레이라는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주요 캐릭터들을 충분히 성장시키고, 그룹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위기에 대비하면 어떻게든 기회는 생길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 단계는 아니었으나, 일단 그렇게 설명하니 시엘은 보다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그, 그렇죠. 그나마 아론 님이 계시고,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충분히 시간도 있으니...."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

사실 에반젤린 없이 맞이할 최후반부의 대위기보다도, 당장으로선 이쪽이 훨씬 더 문제였다.

"문제요?"

"일단 확인차 물어보마. 지금 보아하니 네 신체의 부품이 상당수 '생체제품'으로 바뀐 듯하군."

"네? 아, 그렇죠. 바꿀 수 있는 부분들은 갈아 끼웠어요."

"왜 그랬지?"

"그, 그야... 저는 원래 인간이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인간처럼 보이길 원했으니까요?"

"후우...."

그 얘길 들은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놈이 했던 '그 말'이 진실임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왜, 왜 그러세요?"

"그 '아라야'라는 녀석이 내게 변명하듯 얘기하더군. 자신의 의식이 서서히 '신체의 자아' 쪽과 동화되고 있다고. 그러니 이번 일도 반쯤은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이라고."

"그게 무슨 되지도 않는 변명을...!"

"나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다."

화를 내려는 시엘을 제지했다.

"허나 지금은 놈의 말이 맞는 듯하군."

"잠깐만요. 그러니까 아론 님 말씀은, 제가 생체 파츠로 신체 부품을 교체한 것도 제가 '시엘'이기 때문이라고요? 원래의 인격이 영향을 미친 거라고요?"

"원작에서 시엘은 '인간이 되고 싶은 안드로이드'였다. 그러니 지금의 너 역시...."

"그럴 리가요!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원래 인간이었으니, 그에 따라서 더 편한 몸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시엘."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너는 내게 이리 말한 적이 있었지. '이 몸의 유일한 장점은 지치거나 아프지 않다는 점'이라고. 생각이 바뀐 건가?"

"...."

순간 시엘이 한 방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얼굴을 감싸고 충격 받은 얼굴로 "그,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내가?"하고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치 않게 자아가 바뀌고 있다니, 그런 소름 끼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당장은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시엘이 신체의 자아와 동화되었다면.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진 것이라면.

원작의 악당인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카데미 흑막 시점 60화

다음 날 아침.

뉴스에서 앵커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첫 보도를 시작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XXX년 4월 XX일. 금일 아침 9시 뉴스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소식입니다.]

[오늘 아침, 뉴 발할라 시티 경찰국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했습니다. 바로 들어 보시죠.]

이윽고 화면이 전환되더니 배가 불룩한 경찰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화면에 나왔다.

어딘가 무능해 보이는 남성의 얼굴 아래쪽으로 VCPD 경찰국장이라는 자막과 그의 이름이 출력되고 있었다.

[에... 이번 조사에 따르면... 아시타 교에서는 불법적인 시냅스 서퍼칩... 통칭 '정크칩'을 생산 및 유통하던 것으로 보이는....]

'...인터뷰 너무 못하는데.'

물론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분명 새벽에 갑작스럽게 불려와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기자회견에 나선 것일 테니까.

경찰국장도 아마 이게 뭔 날벼락인가 싶을 거다. 대본을 읽어 가던 중에 시시각각으로 표정이 바뀌어 가는 모습이 꽤 드라마틱했다.

뭐, 어쨌건.

'드디어 시작되었군.'

본격적으로 아시타 교 사냥이 시작됐다.

앞으로 경찰은 물론, 수많은 기업들이 협력해 이 도시에서 완전히 '아시타 교'라는 이름을 뿌리 뽑으려 할 것이다.

'원래부터 필요한 건 명분이었지.'

원래부터 기업들은 그 반기술주의 사이비 놈들을 전혀 좋게 보지 않았다.

기술과 제품을 팔아먹는 인간들에게 '검소함'과 '자연 회귀' 따위를 주장하는 놈들이 어디 예뻐 보였겠는가? 장사판 뒤엎으려는 양아치들로밖에 안 보였겠지.

다만 이런 세상이니만큼 그런 극단적인 사상에 물드는 놈들은 차고 넘쳤고, 스팅레이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정크칩은 그 선을 넘어 버렸지.'

놈들이 불법으로 사이버마약을 유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업들은 이때다 싶어 너도나도 이번 토벌에 가세할 것이다.

하물며 그것도 평범한 정크칩이 아니라, '마법'과 '기술'을 결합하여 '사람을 조종하는' 무서운 칩이 아니던가?

아무리 기업 관계자 중에 아시타 교의 뒤를 봐주는 놈이 있다고 한들, 이쯤 되면 꼼짝없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걸로 아시타 교 쪽은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물론 그 '아라야'라는 놈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고작 한 달여 만에 기초적인 수준의 '네크로맨싱' 능력을 습득하고, 그만한 군용장비들을 모았을 정도니까.

'심지어 내가 어제 죽였던 놈도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이야.'

어쩌면 이 세계에 빙의한 인물 중,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할 놈일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모든 능력을 동원해 확실하게 없애두어 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인 스토리.

현재 진행 중인 것은 1부 2막.

'이번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에 최대한으로 애들을 성장시켜 놔야 한다.'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아론 스팅레이.

이 도시의 황태자이자, 살인귀이자, 1부 4막의 메인 빌런이었던 이 육신의 본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시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육체의 영향을 받았다. 이대로 1부 4막을 맞이하면 나 역시 시나리오에 맞춰 폭주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그 전에 해결 방법을 찾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최대한 준비를 해야겠지.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군.'

대비해야 하는 위험한 적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 자신이라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아론의 '살인충동'을 체험해 본 적이 있기에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건 시간이 많지 않아.'

프롤로그부터 1부 4막까지.

각 에피소드에는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프롤로그는 미유.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그녀를 세상 밖으로 끌고 나오는 것으로 프롤로그는 종료된다.

1부 1막은 아이리 앨리스밸.

외로운 들개였던 아이리의 마음을 열고 동료로 영입하는 것으로 1막은 종료된다.

1부 2막은 사일런스.

악행을 저지르던 사일런스를 제압하고 설득하여 동료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2막은 종료된다.

1부 3막은 시엘.

인간이 되고 싶어 학생들의 돈을 훔쳐 생체 파츠를 구입하던 시엘의 범죄를 멈추게 하고, 그녀를 계기로 일어난 안드로이드 폭동을 제압하는 것으로 3막은 종료된다.

그리고 1부 4막.

'1부 4막은 중간 보스전이다.'

지금까지 성장시킨 능력들.

지금까지 모아 온 소중한 동료들.

그 모든 것들을 걸고, '아론 스팅레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악(巨惡)에 맞서 싸우는 스토리.

'굉장히 치열한 싸움이었지.'

천재 위자드인 주인공, 셰이드 웰즈.

최고의 기술자인 미유.

든든한 탱커인 아이리 앨리스밸.

뛰어난 암살자인 사일런스.

그리고 생활을 서포트하는 시엘.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사투를 펼쳤지만, 아론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주인공만이 쓰러지지 않고 간신히 싸움을 이어 나갔고, 실시간으로 성장하는 주인공의 능력을 아론 역시 칭찬한다.

그리고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과 아론은 서로의 무기를 맞부딪쳤고, 그 순간 주인공은 패배를 직감한다.

하지만 아론의 무기가 주인공을 베어 버리기 직전, 아론은 급속히 악화된 병마에 잡아먹혀 목숨을 잃는다.

그렇게 주인공이 힘겨운 승리를 얻어 내기까지가 1부 4막의 내용이다.

'참으로 가슴 뜨거워지는 전개였지만, 문제는 그걸 주인공 없이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게....'

짜증 나고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성을 잃었다가 되찾고 보니 내 손으로 내 최애들을 죽인 후였다... 같은 전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녀석들을 미리 충분히 성장시켜 둬야 한다.

'물론 이 살인충동을 미리 차단해 버리는 게 베스트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다시 말하지만.

현재는 1부 2막, 사일런스의 에피소드.

지금 사일런스는 스팅레이 소유의 종합병원 VIP룸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아라야가 시전했던 '네크로맨싱'에 노출된 것을 치료하기 위함이자, 동시에 다른 빙의자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1부 2막이 끝나면 바로 시엘의 에피소드다. 시엘은 인간이 되어 자유로워지는 게 목표였으니, 지금 상태에서 3막에 진입하면 바로 스킵되고 4막으로 넘어가게 되겠지.'

일단은 2막이 진행되지 않게 놔둔 채로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려는 것이 내 계획.

'2막의 종료를 늦추면서 최대한 시간을 벌었으니,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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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달성]

'1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됐다.

업적 포인트: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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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

우리 애들 중간고사부터 챙겨야 한다.

* * *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신규 메일 13건.

일괄 확인하시겠습니까? YES/NO

"보나마나 그거겠지."

아이리는 쓰게 웃었다.

자신에게 메일을 보낼 만한 사람은 도시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메일 주소를 보니 아카데미에서 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아카데미에서 온 메일이라면 내용이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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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모듈 관리법' 중간고사 공지]

시험 일자: 2XXX년 04월 XX일. 2시

시험 장소: 전술교전동 158층 15805호

시험 방식: 서술형

평가 기준: 절대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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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학 개론' 중간고사 공지]

시험 일자: 2XXX년 04월 ○○일. 3시

시험 장소: 전술교전동 11층 1101호

시험 방식: 서술형

평가 기준: 상대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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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트의 역사' 중간고사 공지]

시험 일자: 2XXX년 04월 **일 11시.

시험 장소: 전술교전동 2층 211호.

시험 방식: 객관식 평가.

평가 기준: 상대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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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교전 이론' 중간고사 공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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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교전 실습' 중간고사 공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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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 공지.

"하아아아아...."

메일을 열자마자 밀려드는 시험의 압박에 아이리는 잠시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안 그래도 어제의 일 때문에 심란해 죽겠는데 시험까지 겹치다니. 마치 온 세상이 자신을 억까하는 것 같다.

"나보고 어쩌라고...."

울적해진 기분에 아이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녀와는 달리 다른 동기들은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드디어! 드디어 시험이야!

-내 실력을 보여 줄 때가 된 거야!

-이번 시험만 잘 보면 나도 기업 장학생으로 선발될 수 있을 거야!

뭐? 시험이 좋다고?

미친놈들인가?

흥분하는 동기들을 바라보며 잠시 그런 생각을 품었지만, 이내 그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나도 첫날부터 특별장학생이 되지 못했다면 저랬으려나?'

트리니티 아카데미 전술교전부에 들어온 학생 대부분은 기업의 보안요원으로 입사하길 원한다.

그리고 기업의 장학생이 되기까지, 학생들은 세 가지 난관을 거쳐야만 했다.

첫 번째 난관은 돈.

학생들은 비싼 돈을 들여 나노머신과 전용 사이버웨어 이식수술을 받고, 전투 모듈을 구입하고, 학비까지 마련해야 한다.

이것만 해도 수백만 크레딧이 깨지는데, 만약 재수가 없어서 나노머신이 단번에 체내에 자리 잡지 못하면 돈이 몇 배 더 깨진다.

두 번째 난관은 입학시험.

만약 입학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강제로 나노머신의 기능을 '민간용' 수준으로 제한당한 뒤 쫓겨나게 된다. 당연히 Lv.3 이상의 군용급 모듈을 사용하는 것도 제한된다.

프로그램을 돌려서 스펙제한을 풀어 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당연히 중범죄.

그리고 본인에게 그럴 맘이 없다고 해도 마피아나 갱단 쪽에서 입시 탈락자들을 노리고 먼저 접근해 온다.

그들은 아카데미 입시 과정 중에 학생들의 재정이 궁핍해진 것을 이용하여 자신들 쪽으로 꾀어낸다. 그렇게 범죄의 길로 빠져드는 학생들이 많다.

마지막 세 번째 난관은 정규 시험.

아카데미에 어찌어찌 들어오긴 했어도 기업에 눈에 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입학 직후 종합능력 테스트에서 기업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한 학생들은, 필연적으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비롯한 정규 시험들에 매달릴 수밖에 없어진다.

졸업까지 4년, 총 8학기.

총 16번의 정규시험.

그 한정된 기회 안에 기업 장학생이 되지 못하면 사실상 출셋길이 막히는 셈이기에, 궁지에 몰린 학생들은 더욱 독기를 품고 악을 쓰면서 경쟁한다.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스터디그룹을 짜는 것은 물론, 동기생들의 컨디션을 나쁘게 하기 위해 음식에 장난질을 한다든지, 잘못된 정보로 시험을 망치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온갖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것이 아카데미 시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말이지....'

돈. 돈. 돈.

결국 돈이 문제였다.

입시를 치르기 위한 돈.

아카데미를 계속 다니기 위한 돈.

살아남기 위한 돈.

그 돈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할 방법이 장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기업의 애완견이 되면 여태까지의 손해를 전부 메우고도 남을 이득을 얻게 되니까 말이다.

'아, 이런....'

그런 생각을 하니 또다시 '그 사람'이 떠오른다. 그 사람이 자신을 눈여겨봐 준 덕분에 자신은 저런 무한 경쟁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었으니.

'어째서 그 사람은 날... 아니지.'

생각해 봤자 답도 안 나오는 상황이다.

마리아가 말하지 않았던가?

설령 아론이 정말로 자신의 원수라고 한들, 지금의 힘으로는 덤벼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거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아.'

만약 아론이 무고하다고 하면 은인인 그를 위해 강해지면 되는 것이다. 만약 반대라면, 지금의 상황을 이용해서 그에게 복수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기르면 되는 것이고.

'그러려면 일단은 시험을 잘 봐야겠지.'

언젠가 그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최고가 되어라, 라고.

황태자의 총애와 투자를 계속 받기 위해서라도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현재로선 그가 자신을 편애한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그 상황이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어디 보자... 이론 수업은 밤새워서 공부한다고 치고... 나머지 전투 실습은 문제없고.'

차근차근 시험 준비 계획을 세워 가는 아이리.

공부 머리도 없는 자신이 이 치열한 점수 경쟁에서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해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이 시험'만 어떻게든 하면 돼.'

바로 [종합 전술 실습 훈련.]

다른 수업들보다도 배정된 학점이 높은 과목이라,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시험 내용.

'풀 모듈링 상태에서 모의전투를 치른다고 했었지?'

평소 수업에서는 퓨어스펙 상태로만 진행했으니 큰 문제가 없었지만, 중간과 기말고사에서는 풀스펙 상태로 전투 실습을 한다고 했다.

'전투 자체는 자신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조금 그렇지....'

현재 아이리가 갖고 있는 모듈은 Lv.4 [천근추] 하나뿐이었다. 여기에 미유가 만들어 줬던 방패까지 더하면 전투 자체는 무난하게 치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쉽게도 이건 '종합 전술' 훈련이었다. 단순히 전투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의 활약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보니, 조금 불안한 면이 있었다.

혼자서 방패를 든 채 계속 근접 전투만 고집하는 건 아무래도 불리한 상황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니까.

'나도 색적이나 원거리 공격 모듈이 있으면 훨씬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새로운 모듈을 사 달라고 부탁해 볼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감정 상태로는 아론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치르는 건 영 불안했고.

'어떡하지....'

고민해 봤지만 결국 답은 하나였다.

그래, 미유.

미유라면 쓸 만한 전투 모듈 하나쯤이야 뚝딱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미유는 학생 겸 아론의 전속 모듈러니 다른 사람에게 맘대로 모듈을 만들어 주긴 힘들지도 모르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한번 말이라도 해 보자.'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리는 수업이 끝나는 대로 미유의 방을 찾았다. 이제 그녀와의 교류도 나름 길어진 터라 방을 찾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미유. 방에 있지?"

자연스레 문을 따고 들어가는 아이리.

최근에 여벌 열쇠를 만들어 둔 참이었다. 교칙상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뭐 큰 문제야 있겠는가.

"후후후...."

"미유?"

아니나 다를까, 안쪽에서 미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평소와는 분위기가 묘하게 달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조금 불안한 마음을 안고 미유의 작업실 안쪽을 들여다보는 아이리.

그리고 그곳에는...

"흑흑...! 이 전설의 만능툴을 제가 살아 있을 때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오! 감사합니다, 아론 씨이!!"

...이상한 물건을 들고 기쁜 듯이 홀로 덩실덩실 춤을 추는 미유가 있었다.

아이리는 미유가 손에 든 물건을 한참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모양이 이상한데, 저건 아무리 봐도, '그거' 아닌가? 그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

그때였다.

서로 눈이 마주친 것은.

"어...."

"아."

짤막한 각자의 생각의 로딩이 끝난 후.

아이리는 황급히 등을 돌렸다.

"즈, 즐기는 중에 미안. 나중에 올게."

"아아앍! 즐기는 거 아녜요오! 가지 마세요오! 착각이에요오! 이거 그런 거 아니에요오오오오!"

"내, 내가 방해했네...."

"아, 아니라니까요오오!!"

으아아아아앙!

미유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61화

"...."

"...."

침묵이 맴돈다.

아이리와 미유는 마주 보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예의 '그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리의 시선이 그 물건에 못 박혔다.

공영방송이라면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김새. 보면서 얘기하기엔 뻘쭘해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그 대단한 도구... 아니, 용품... 아, 진짜 뭐라고 불러야 하나...."

도구와 용품.

일반적인 단어를 쓰는데도 어감이 이상하다. 전혀 이상한 의미로 왜곡되고 만다.

"만능툴이요오... 만능툴...."

"그래, 만능툴."

그렇게 들으니 그렇게 외설적으로 생기지도 않은 것 같았다. 망치를 뒤집어 놓고 머리 부분을 구체로 바꿨을 뿐이랄까.

"아니, 생김새 얘긴 됐어! 암튼 대단한 거라는 거지? 나도 오해하고 싶지는 않거든!"

"아, 네! 이상한 거 아녜요오!"

아이리는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해 버럭 소리를 쳤고, 미유 역시 덩달아 목소리가 높아졌다.

"모듈 제작부터 튜닝 및 제거까지 모든 작업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예요오! 이게 이렇게 생기긴 했어도, '이 부분'을 이렇게 열면 각종 계측기를 포함해서...."

"미, 미안한데... 그거 만지작거리는 건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될까. 눈앞에서 보는 건 좀...."

"아... 네...."

다시금 침묵.

미유는 조심스럽게 만능툴을 정리하고서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원래 창백할 정도로 새하얬던 얼굴이 조금 발그스레해진 것이, 본인도 부끄럽다는 자각이 있는 모양이다.

뭐, 아무튼.

크흠.

아이리는 헛기침을 하고서 화제를 전환했다.

"실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온 거거든."

"부탁이요?"

"응. 혹시 내 전용 전투 모듈을 만들어 줄 수 없을까 싶어서."

아이리는 조만간 치러질 시험의 내용에 관해 설명했다. 그것을 잠자코 듣고 있던 미유는 얘기가 끝나자 대답했다.

"요컨대... 원거리에서 적을 타격하거나, 아니면 다른 유용한 기능을 갖춘 모듈이 있으면 좋겠다는 건가요오...?"

"응. 정확해."

"음. 유틸리티... 유틸리티...."

미유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장 만들 수 있는 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하지만?"

"아론 씨의 허락이 필요해요오...."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는 미유.

"그게... 실은 아이리 씨가 찾아오기 전에 아론 씨께서 신신당부하셨거든요오...."

"뭐라고 했는데?"

"아이리 씨가 오셔서 모듈 같은 걸 만들어 달라고 하면, 먼저 자신의 허락을 맡으라고요오...."

"뭐? 언제?"

"한 세 시간 전쯤예요오...."

진짜 대체 그 인간은 뭐지?

어떻게 내 행동을 완벽히 읽고 있는 거지?

조금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요컨대 아론 이사장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지? 뭐, 그럴 거라 예상은 했었어...."

"그, 그래도 제가 부탁하면 들어주시지 않을까요오? 아론 씨도 아이리 씨를 되게 각별하게 여기시는 것 같던데에...."

"음...."

아이리는 잠시 고민했다.

하기야 직접 부탁하는 게 어려워서 망설이고 있는 것일 뿐이지, 거절당하는 게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아론 역시 시험에서 자신이 후원하는 학생이 높은 점수를 받길 원하지 않을까?

"그럼 좀 부탁해도 될까?"

"네. 맡겨만 주세요오!"

자신 있게 대답하는 미유.

그녀는 곧장 아론에게 메일을 보냈다.

* * *

"불허한다."

"네?! 어, 어째서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아이리에게 쓸데없는 모듈을 추가하면 역효과만 날 뿐이니까.

나는 아이리와 미유, 두 사람을 내 사무실에 직접 불러 놓고 이야기했다.

"스스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이런 생각을 한 건 기특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네겐 Lv.4나 되는 신비모듈이 있지 않나?"

"[천근추] 말이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서 말씀드린 건데요...."

"아니, 충분하다."

불만스레 답하는 아이리.

하지만 나는 단언했다.

"당장 [천근추]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추가 모듈 장착은 방해가 될 뿐이다. 이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너는 감각이 예민한 만큼 새로운 모듈에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더 걸리고, 적응하지 못하면 거북하게 느낀다고."

중간고사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새로운 모듈을 만들어서 장착한다고 한들, 다른 시험까지 준비하다 보면 그것에 익숙해질 시간은 한참 부족해진다.

"그러니 불허한다."

"그치만...!"

"번복은 없다. 이럴 시간에 연습을 더 하는 게 네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윽...!"

내 대답에 아이리는 분하다는 듯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엔 미유를 질책했다.

"그리고 미유."

"ㄴ... 네!?"

"내가 이미 말했을 텐데. 아이리가 그런 부탁을 해 오더라도 딱 잘라 거절하라고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아...."

고개를 푹 숙이는 미유.

아마 내가 선물해 준 '네오 암스트롱' 어쩌고 만능툴을 받고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던 거겠지. 아이리를 핑계로 새로운 도구를 시험해 볼 생각에 흥분했던 것이리라.

"후우...."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마음 같아서야 내 새끼들 좋은 거 예쁜 거 다 주고 입히고 싶지 않겠는가? 또 스스로 강해지고 싶어서 애쓰는 모습은 얼마나 기특한가.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역효과만 날 것 같은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데, 아빠 된 입장... 아니지, 후원자 된 입장으로서 말릴 수밖에 없다.

"내 이야기는 끝이다. 이만 돌아가서 시험 준비를 하도록. 특히, 미유."

"네?"

"만능툴에 익숙해지기 위해 혼자 다양한 실험을 해 보는 건 좋다. 나는 네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분명 너는 조만간 무척이나 대단한 결과물을 내놓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일전에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하나?"

"허락이 없는 한 제가 가진 것들을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고 하셨어요오...."

"그래. 잊지 않았구나."

몇 번이나 말하지만.

미유의 천재성은 무척이나 위험하다.

잘만 이용하면 남들보다 훨씬 앞서 나갈 수 있겠지만, 까딱하다간 시나리오의 근간을 통째로 뒤틀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미유의 관리에는 특별히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특히나 본사 기술부 쪽에서 보내는 탐욕스러운 눈길을 다 쳐 내며, 미유는 '내 사람'이라는 내외부로 걸 확실하게 인식시키는 중이다.

"'그때'의 일을 잊지 않으면 좋겠구나."

프롤로그.

혈랑과 관련된 사건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해 두면 미유도 앞으론 행동을 조금 더 조심하겠지.

"네에...."

미유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히잉'이라는 의성어가 잘 어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나는 미유에게 충분히 주의를 시킨 후, 다시금 아이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제부터 어떡할까.

전차(戰車), 아이리 앨리스밸.

이 작품의 메인 히로인.

그녀는 내가 '아라야'와 나누었던 대화 때문에 나를 오빠의 원수로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1부 4막을 대비하여 나에 대한 의존도를 조금 낮춰 놓으려는 의도였다.

아이리는 더 강해져야 한다.

나에 대한 적개심이든, 아니면 존경심이든. 그것들을 양분으로 삼아 더욱 스스로 일어설 힘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시험만 잘 보게 하려면 미유에게 자금이랑 재료를 제공해 주고 아이리가 쓸 만한 모듈을 만들어 내라고 하면 되겠지만....'

그건 말하자면 사상누각인 방식이다.

물리적인 강함만을 추구하자면 효율적이겠지만, 나는 아이리를 주인공을 대신하여 팀의 중심으로 성장시킬 계획이다.

말하자면 내가 꾸릴 팀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신비]를 상대하려면 단순히 종합 출력레벨이 높은 거에 만족해서는 안 되지.'

마나는 왜곡현상을 일으킨다.

왜곡현상은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면, 제아무리 뛰어난 무기가 있어도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요컨대 아직 초보자 단계일 때, 일찌감치 버릇을 들이려는 것이다. 단순히 모듈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이용하여 싸울 수 있는 방식을.

'그걸 스스로 깨달아 주길 바랐지만... 조금 등을 밀어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결심하고서, 나는 마리아가 아닌 다른 비서를 호출하여 내 일정을 확인했다. 마리아는 현재 내 지시에 따라 아시타 교 토벌 작전을 지휘하느라 바쁜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아카데미 내에 뻗치는 아시타 교 놈들의 손길을 막아 내기 위해 조금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당장 원작 지식을 통해 민중파 쪽 학원장이 아시타 교 신도라는 걸 알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놈을 말끔하게 지워 버릴 수 있을지 고민 중이라고 할까.

녀석들이 없어져야 우리 애들이 아무런 문제 없이 중간고사를 치를 수 있을 테니까.

-2시 일정을 뒤로 미루면 괜찮을 듯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 그리고 교무부 쪽에 연락해서 사이버스페이스 훈련장 하나를 대여할 수 있겠나?"

-곧장 마련하겠습니다.

일정을 조정하고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거라."

"어디로 가는 건데요?"

"아직 이해하지 못한 듯하니 직접 보여 줄 생각이다."

네가 가진 게 무엇인지.

네가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말이다.

* * *

사이버스페이스 훈련장.

간단히 말해, 가상현실 속에서 실제 전투를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설계된 곳이었다.

컴퓨터에 접속자의 바이오데이터와 모듈링 정보를 입력하면 가상공간 속에서도 현실과 거의 다름없는 상태로 전투 훈련을 진행할 수 있다.

적이나 지형도 다양하고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고, 운영비도 많이 들지 않아서 전교부 소속 학생들 수업에 많이 이용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현실의 힘'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리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이곳을 훈련장소로 골랐다.

...물론 내가 한 번 체험해 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원작에서도 종종 묘사되던 곳이었거든.

"미유."

"ㄴ, 네?!"

"훈련장 메인 컴퓨터에 앉아라. 접속 아바타 설정을 부탁하지."

"어, 어떻게 설정할까요오...?"

"이 녀석은 현 스펙 그대로. 나는 이 녀석의 수준에 맞춰서 하향 조정을 부탁하마. 모듈링 데이터 보안도 잊지 말도록."

내 모듈링 정보는 스팅레이의 기밀이다. 아카데미 쪽에 기록이 남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

"아, 알겠습니다아...."

그렇게 지시한 후, 나는 아이리와 나란히 접속캡슐에 몸을 맡겼다. 딥 다이브용 포트에 전극을 연결하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5. 4. 3. 2. 1. 접속.

한순간 멀어졌던 의식이 다른 곳에서 눈을 뜬다. 마치 옛 정신 병원 감금실을 연상시키듯, 새하얀 정육면체의 방에 오직 나만이 서 있었다.

'이런 느낌이로군.'

묘하게 색다른 감각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자니, 이윽고 아이리의 아바타가 내 옆에서 소환되었다.

현실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으나, 미묘하게 해상도가 낮은 탓에 이곳이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분 다, 이상 없이 접속됐어요오....]

허공에서 미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바깥의 설정 컴퓨터로 이곳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 어떡할까요오...?]

"그럼 일단 인간형 적을 한 명 소환 부탁한다. 그리고 배경도 눈이 아플 지경이니... 아이리, 원하는 설정이 있나?"

"전 상관없어요."

[그, 그럼 기본 설정으로....]

스르륵.

수많은 도트의 집합체가 빠르게 공간을 훑었다. 새하얬던 풍경이 평범한 훈련장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우리의 앞에 인간형 더미로봇의 아바타가 출력됐다.

나는 더미로봇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뭐 하시려는 건데요?"

"직접 보여 주마."

현재 내 스펙은 아이리와 완벽하게 일치할 것이다.

근력, 반사 신경은 물론 모듈링 상태까지. 아바타의 신장 차이 때문에 시선의 높이나 팔다리의 리치가 다른 정도?

"확인차 물어보마. 네가 지금 장착한 모듈은 Lv.4 [천근추]뿐이다. 그렇지?"

"네. 그렇죠...?"

"나노머신과의 상성이 좋아 신체 능력이 극단적으로 높아지긴 했으나, 따로 근력 강화 모듈을 장착하지도 않았을 테지."

"맞아요."

"그럼 이 더미 인형을 아무리 세게 친다고 한들 망가뜨리진 못할...."

나는 설명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쿠웅!

내 주먹과 맞부딪치는 순간, 더미인형은 HP를 완전히 잃고 소멸했다.

...아니, 이러면 안 되는데.

"...미유."

[죄, 죄송해요오... 실수로 원래 스펙 그대로 입력하는 바람에... 다, 다시 설정할게요오...!]

허둥지둥하는 목소리.

미유가 수정작업을 끝낼 때까지 나와 아이리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

"...."

아이리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나한테 들릴 거라 생각 못 한 것 같은데, 내 청력이 너무 좋아서 잘 들렸다.

"이 사람... 진짜 같은 인간종 맞나...?"

"...."

응.

나도 가끔 아닌 것 같긴 해.

아카데미 흑막 시점 62화

하여간 미친 스펙이었다.

애당초 아론 스팅레이라는 인물의 태생부터가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무력의 상징'이지 않은가.

아이리 역시 창조주의 사랑을 듬뿍 받아 태어난 천재 중의 천재였지만, 작정하고 만들어 낸 먼치킨 캐릭터한테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가 미유가 가진 기술의 정수인 '판도라'를 주입받으면서 퓨어 스펙이 20%가량 강해졌다.

적응자의 퓨어 스펙이 높으면 높을수록 모듈의 성능도 시너지를 얻기 마련이니, 조금 전의 이런 괴물 같은 힘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이론적으론 이상하지 않다.

이론적으론 말이다.

"...."

문제는 아이리가 날 바라보는 눈빛에 아주 조금이지만, '두려움'이 섞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껏 열심히 올려놓은 호감도가 조금 깎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뭐, 어쨌건.

미유의 사소한 실수로 벌어진 해프닝을 뒤로하고, 내 아바타의 스펙이 재조정되었다.

허수아비가 되어 줄 더미로봇도 다시금 말짱한 모습으로 소환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크흠."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한 후, 본론으로 돌아갔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래. 스펙."

"저랑 같은 스펙이 되었다고요?"

"그래."

나는 다시 더미로봇에게 주먹을 휘둘러보았고, 이번에는 제대로 설정되었는지 로봇은 소멸되지 않고 조금 망가질 뿐이었다.

"그럼 네가 지금 가진 수단만으로, 이 상대를 단번에 파괴할 방법은 무엇이 있겠나?"

"음. 글쎄요. 어렵진 않을 거 같네요."

"떠오른 게 있는 모양이군. 한번 시험해 봐라."

"좋아요. 보여 드리죠."

내가 자리를 비켜 주자, 아이리는 더미로봇 앞에서 격투 자세를 잡았다.

가볍게 발을 놀려 몇 번 토끼처럼 통통 뛰더니, 이내 제자리 앞 텀블링.

콰아아앙-!

공중에서 회전력이 더해진 그녀의 뒤꿈치가 더미로봇의 정수리에 작렬했다. 바닥으로 내리꽂히다시피 한 더미로봇은 이내 데이터 파편이 되어 사라졌다.

"발을 내려찍는 순간 인력을 발생시켜서 발차기의 위력을 증가시킨 건가? 꽤 훌륭하군."

"흐...."

가벼운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이리의 입가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나름대로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 뺨이 살짝 꿈틀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을 절단하듯이 말했다.

"다만 아직 서투르다."

"...뭐, 뭐라고요?"

"응용이 일차원적이라는 말이다."

미유에게 더미로봇을 소환하게 했다.

이번엔 내가 보여 줄 차례겠지.

"[천근추]란 본래 중국무술 용어다. 몸 안의 기운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몸무게를 수십 배로 늘리는 기술이지. 하지만 이름이 같다고 해서 같은 원리일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소환된 더미로봇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

"Lv.4 신비모듈 [천근추]는 '무게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인력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인력(引力)이란? 미유, 대답하지 말거라."

[앗, 네에....]

정답을 말할 기회를 빼앗긴 미유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아이리는 다소 떨떠름한 기색으로 조심스레 답했다.

"잡아당기는 힘, 맞죠?"

"그래. 잡아당기는 힘이다. 그러면 그 힘의 방향을 굳이 계속 지면을 향해서만 사용할 필요는 없지. 가령."

더미로봇에게서 몇 걸음 물러선다.

가볍게 다리를 들어, [천근추]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쿵!

그 직후, 더미로봇이 바닥으로 쓰러지더니 내 발아래로 머리를 위치했다. 마치 스스로 내게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대로 다리를 내리찍어 더미로봇의 머리를 밟았다. 부품을 찍어 내는 프레스 머신처럼,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로봇이 파편화되어 소멸했다.

"이렇게 말이다."

"...!"

아이리는 굉장히 놀란 눈치였다.

[천근추] 모듈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수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겠지.

그 표정에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며 설명을 이었다.

"[천근추]의 인력이 발생하는 부분은 명치 아래부터 발끝까지. 아래쪽으로 향할수록 힘이 강해진다."

"활용방법이 무궁무진하겠군요."

"그래. 특히나 너에겐 더 그렇겠지. 미유, 거기 있나?"

[네에...?]

"방패를 소환해라. 네가 아이리에게 만들어 준 것과 최대한 비슷한 물건으로. 또한 적대적인 개체로 로켓보병을 소환해라."

미유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이윽고 아이리가 평소에 사용하던 방패와 비슷한 물건이 내 손에 생겨났다. 나는 그것을 바닥에 쓰러뜨려 놓고 발로 차서 멀리 밀어 버렸다.

"혹여나 방패를 놓쳤을 경우."

다시 한번 땅에 발을 구른다.

그러자 멀리 있던 방패가 지면을 따라 보드처럼 미끄러져 오더니, 내 발끝에 부딪히며 바로 세워졌다.

방패가 세워진 타이밍에 맞추어 나는 손잡이를 낚아챘다. 그것을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혹은 적의 공격을 방어할 경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켓런처를 든 더미로봇이 소환되며 포탄을 쏘아냈다. 날아오는 방향에 맞추어 방패를 세웠고, 착탄과 동시에 뒤쪽으로 인력을 발생시켰다.

내 몸이 뒤로 미끄러지듯 화염의 범위에서 빠져나왔다. 폭발의 충격을 충분히 흘려보낸 후, 나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방패를 내리자 로켓이 날아온 방향과 꽤 거리가 벌어진 상태였다.

"혹은 적이 멀리 있을 경우."

나는 걸음을 옮기며 두 다리에 교차로 인력을 발생시켰다.

타이밍에 맞게 발생된 힘이 나를 앞으로 잡아당기는 듯한 효과를 내었고, 순식간에 나는 로켓보병이 있는 위치까지 도달했다.

방패를 휘둘러 로켓보병의 머리를 박살 낸 후, 손잡이를 놓아 버렸다. 그러곤 그대로 몸을 틀어 가상 훈련장 벽 쪽으로 향했다.

"혹은 새로운 발판을 마련해야 하는 경우."

발을 내디뎌 벽면을 걸어 올라간다.

한 걸음 한 걸음.

여유로움을 잃지 않으면서 훈련장의 천장까지 걸어올라간 후, 다시금 [천근추]를 해제하여 아이리가 있는 쪽으로 뛰어내렸다.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선물한 전투 모듈이 이렇게 다양하게 쓸 수 있을 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묻는다.

"이래도 내가 네게 준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나?"

따악!

놀라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리의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밤을 맞고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아이리는 얻어맞은 이마가 아픈 듯 양손으로 감쌌다.

"...아뇨."

그렇게 대답하는 아이리의 인상이 확 구겨지는 것이 우스웠다. 조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 * *

아이리를 조금 더 훈련시킨 후, 나는 먼저 사이버스페이스를 빠져나왔다.

남은 시간 동안은 바깥에서 모니터로 아이리의 훈련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아이리는 [천근추]의 사용법을 익히는 데에 꽤 애를 먹었다. 모듈을 통해 인력을 발생시키는 그 감각을 익히는 것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모듈 사용법이라는 것이, 없던 꼬리가 하나 새로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이버웨어 의수든 모듈이든, 새로 장착할 때마다 조금 익숙해지는 기간이 필요한 법이다.

아마 나 역시 아론 스팅레이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 [구름거미] 같은 모듈을 그리 능수능란하게 다루지는 못했으리라.

"...."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불안과 의문.

조금 전, 아이리에게 모듈 사용법을 선보이면서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주먹을 조심스레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해 본다.

'아까도 느꼈지만 역시나....'

역시 이상할 정도로 강했다.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가상공간에서도.

아니, 정확히는....

'계속 강해지고 있다... 고 해야겠지.'

아이리를 지도하며 확실히 느꼈다.

나는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가상공간 속에서 한 번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한 번 발을 내디딜 때마다 점점 더 높은 경지로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마치 게임 속에서 치트를 쓴 것처럼, 별것도 아닌 행동을 취했는데 끊임없이 경험치를 얻어 레벨 업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미유."

나는 컴퓨터를 조작하던 중인 그녀를 불렀다.

자기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싶었는지, 미유가 흠칫 몸을 떨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아까 사이버 스페이스에 입장할 때 스펙 설정을 실수했던 것 때문에 의기소침해져 있는 것이다.

"ㄴ,네에...?"

"사이버스페이스에 관해 물어볼 게 하나 있다."

"죄, 죄송해요오... 사이버스페이스는 저, 전문이 아니라서 정확한 답변이 어려울지도요오...."

"괜찮다. 어차피 그리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니."

"제, 제가 아는 선에서는 최대한 대답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오...."

말은 그렇게 해도 나보다야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겠지.

내가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해 아는 건 수박 겉핥기 정도에 불과하니까.

뭐라 말해야 내 의문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바타-니르바나(Avatar-Nirvana).'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 그, 그게...."

미유는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재빠르게 머릿속을 뒤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종교이론 용어가 아닌가요오...?"

"맞다."

아바타-니르바나.

아바타, 즉,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한 육체와 정신의 완전한 분리를 통해 니르바나, 즉, 열반의 길에 들 수 있다고 믿는 이 세계 고유의 불교이론이었다.

"죄, 죄송해요오... 제가 종교적인 부분은 잘 몰라서어... 부처가 된다는 개념이라든가 그런 건 잘...."

"그런 걸 물으려는 게 아니다. 나는 단지 기술적인 관점에서, 정말로 가상공간을 통해 정신과 육체를 완벽하게 분리할 수 있는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어...."

미유의 눈빛이 좌우로 흔들렸다.

잠시 고민 끝에 그녀의 입이 열렸다.

"...네, 가능해요."

가냘픈 목소리였지만, 어째서인지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다시 물었다.

"설명해 줄 수 있나?"

"음... 오래전 있었던 실험을 예시로 들자면... 팔이 절단된 두 사람이 사이버스페이스에 정신을 업로드한다고 하면요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 다 사고로 팔이 절단되었다.

다만 A는 계속 팔이 없는 채로 생활해 왔고, B는 사이버웨어 의수를 달고 생활해 왔다.

두 사람의 신체 조건은 같다.

이때, 만약 A와 B가 가상공간에 접속하여 팔을 잃지 않은 아바타를 조종하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정답은 별 상관없다예요오...."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사이버웨어를 착용하여 사용한 경험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문제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만약 A가 가상공간에서 '팔을 되찾았다'고 생각한다면 아바타는 문제없이 움직일 거예요오... 반면 '의수를 잃어버렸다'는 점에 집중하면 아바타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겠죠오...."

B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팔을 되찾았다'고 생각하면 아바타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고, '이 팔은 가짜일 뿐이야'라고 생각하면 자유롭게 다루지 못할 것이다.

"결국 생각의 문제라는 건데요오...."

육체와 관련 없이.

생각, 즉, 정신이 어떻게 인지하느냐.

그것이 가상공간에서의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미유는 대답했다.

"자신이 물고기라고 믿는 정신질환자에게 스스로 아바타를 가상공간에 구현해 보라고 했더니, 인어와 비슷한 아바타를 만들어 낸 사례도 있었고요오...."

"그건 어떻게 됐지?"

"놀랍게도 잘 움직였어요... 반면 그 아바타를 그대로 복제해서 다른 사람에게 조종해 보라 했더니 한 걸음도 못 움직였구요...."

"과연. 재밌는 얘기로군."

정말로 재미있는 얘기였다.

만약 미유의 말대로 사이버스페이스가 '정신'과 '육체'의 완전한 분리가 가능한 공간이라면, 나는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이유라면 뻔하다.

'내 정신마저 실시간으로 아론 스팅레이라는 존재에 가까워지고 있는 거겠지.'

잠식당하는 것이다.

세계의 의지에.

'빌런'으로서 존재해야만 하는 아론 스팅레이이기에.

세계는 내게 '빙의자'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악당'으로서의 역할도 종용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말인즉.

'범인이, 육체가 아니라는 거지?'

아론의 자아가 아니라.

세계의 의지가 범인이었다.

그렇다는 건....

'해결책이 생겼다.'

만약 내가 아론의 '육체' 그 자체에만 영향을 받고 있었던 거라면 답이 없었겠지. 하지만 그 범인이 이 세계라면 차라리 해결하기가 쉬워진다.

'사냥터로 가면 된다.'

자색 사냥터.

그곳에서 사냥을 이어 갈수록 살인 충동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냥터는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겠지.'

그곳은 보너스 스테이지다.

메인스토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기에, 그 세계는 내게 '아론 스팅레이'로서의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티켓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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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 사냥터 입장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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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아이리의 1부 1막을 해결하면서 보상으로 얻은 물건이었다. 아마 이것이 있으면 내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테지.

'아껴 두길 잘했어.'

자색 사냥터에서 고생했던 경험도 있고, 딱히 급하게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내버려 뒀다. 그랬던 게 이제 와 중요한 물건이 된 것이다.

'하지만 당장 가 봤자 소용은 없어.'

정말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준비를 몇 단계 더 거쳐야만 했다. 나는 다시 한번 세계관 최고의 기술자를 불렀다.

"미유."

"네?"

그녀에게 묻는다.

"전뇌화(電腦化)를 알고 있나?"

아카데미 흑막 시점 63화

계획은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것뿐. 그때까지 최대한 준비하고 또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계획의 핵심은 미유와 아이리.

그리고 지금은 스팅레이 소유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사일런스와 아카데미로 복귀한 시엘.

머릿속으로 무대와 인물을 설정하고, 시나리오를 정리한다.

어떻게 해야 내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 면밀하게 검토한다.

그렇게 1부 보스인 나.

아론 스팅레이 전(戰)을 무사히 끝마칠 작전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한편, 나는 며칠 동안 아카데미 관련 업무로 상당히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직 어지간한 업무는 베네딕트에게 짬처리를 하고 있긴 한데, 이제 슬슬 그런 편법도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아마 동생 짬통을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은 짧으면 1학기, 길어 봤자 올해까지가 한계겠지. 다만 요새 녀석의 움직임이 심상찮은 걸 고려하면 그것보다 더 빨리 유통기한이 끝날 것 같았다.

뭐, 그건 그거고.

'놀고 싶다....'

마음 같아서야 진짜 다 때려치우고 베네딕트에게 통째로 이사장직을 넘기고 쉬고 싶다.

그냥 우리 애들만 케어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제는 내가 병상에서 일어나 복귀했다는 것을 세간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고, 모든 일을 베네딕트에게 맡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이쪽은 아시타 교와 관련하여 마리아 비서실장이 보낸 보고서입니다. 오늘 안에 확인하고 결정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오늘 오후 1시에 넥서스 대학 학장과 미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건설하는 스팅레이 산학협력관에 관련한 얘기가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 하반기에 열리는 뉴 발할라 시티 취업박람회 부스 예산 편성 보고서입니다.

-최근에 진행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한 모집 광고의 효과가 예측과 다르게 상당히 미흡했습니다, 그래서 마케팅 팀에서 새로운 기획안을 올렸는데, 검토를....

'일하기 싫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장난이 아니다.

누가 전무이사급 직책 아니랄까, 처리해야 하는 안건들이 하나같이 굵직굵직한 것들이었다.

쉴 새 없이 도시 VIP들과 만나고, 보고서를 검토해서 결재하고, 시찰 삼아 뉴 발할라 시티 곳곳의 대학을 돌아다니고.

그나마 유능한 비서진들과 아론의 기억 덕분에 처음 겪어 보는 일들도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었다.

'힘들다....'

원래의 아론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일들을 미뤄 두고 적당히 여유를 즐기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망할 영감탱이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르니 괜히 책잡힐 일은 안 하는 게 좋아.'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

유일하게 내 진짜 정체를 알아본 그 늙은 여우가 아직 회장직에 앉아 있는 이상, 내게 원래의 아론처럼 농땡이를 피우는 행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말로는 '너는 이제부터 내 아들이다'라고 했지만,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원래의 아론보다 낫다'라는 인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

하지만 나 역시 숨통이 트일 구멍은 필요했기에, 종종 [미믹] 모듈을 달고 모습을 바꿔 돌아다니며 한숨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고 있다 보니 재단 직원들이 나누는 얘기도 간간이 들려왔다. 내 앞에서는 절대 하지 못할 얘기 말이다.

-아론 이사장님, 복귀하시더니 완전히 사람이 달라지셨는데?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야.

-그러게 말이에요.

-원래는 어떠셨는데요?

-무서웠지. 권위적이고, 냉정하고, 깐깐하고. 일 자체는 무난하게 잘 해도, 조금 뭐랄까. 사람이 꼬여 있다고 해야 하나,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고 해야 하나?

-신입 비서 한 명이 애가 갑작스럽게 아파서 바쁜 시즌에 연차를 썼거든? 그랬더니 '그렇게 가족이 소중한가? 라고 하시면서 '그 부서'로 보내 버리시더라.

-와....

그런 짓까지 했던 건가.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었구나.

-하여튼 그런 걸 보면, 지금은 천사지 천사야. 한 번 사람이 아프고 일어났더니 온화해졌다고 해야 하나? 일도 되게 열정적으로 하시고.

-우리 쪽으로 사무실 옮긴다고 했을 때, 솔직히 퇴사까지 각오했는데 안 하길 잘했어요.

-그러게. 조금 조심해야 할 건 늘었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고. 오히려 복지시설은 훨씬 좋아졌고.

-그리고 잘생겼잖습니까.

-너 남자 좋아했냐....

내가 지낼 사무실이기도 하고, 우리 애들도 사무실 종종 찾아오니까 한 달 사이에 이것저것 마련해 두긴 했다.

휴게실 비품이라든가, 간식이라든가.

하지만 대놓고 '내가 편해지려고.'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으니, '직원복지' 명목으로 포장해서 이것저것 겸사겸사 추가했다.

그게 직원들한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었던 듯했다.

...그리고 저 남직원은 조만간 다른 부서로 보내 버려야지.

* * *

그렇게 며칠간 업무와 사투를 벌이고 나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물론 휴가를 낸 것은 아니기에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지만, 내게는 적당한 명분이 있다.

"장학생들을 보러 가겠다."

"알겠습니다."

학생실태 파악이라는 핑계를 대고 내 최애들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중간고사가 한창이라 아이리나 미유도 바쁘겠지만,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기쁜 일이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특별동 스팅레이 학생기숙사를 찾았다. ID 체크를 하고 기숙사 안쪽으로 들어가니, 로비에서 풍겨 오는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과연, 이게 아카데미의 중간고사인가.

지나다니는 학생들의 눈이 다들 독기로 가득했다. 그나마 일반학생들에 비하면야 조금 나은 형편이긴 했는데, 성적이 나쁜 학생은 후원이 끊겨 버리는 일도 있기에 다들 바짝 긴장하고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점심시간인데도 식당에서 공부하는 과학기술부 학생들.

식단관리랍시고 커다란 회색 가래 덩어리 같은 합성단백질을 쌓아 놓고 입에 욱여넣는 전술교전부 학생들.

'옛날 생각나네.'

마치 고3 수능시험 직전을 방불케 하는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긴장이 될 정도였다.

학생들 몇 명이 내 얼굴을 알아보곤 어필을 위해 내게 인사를 해 왔고, 나는 그것을 적당히 받아넘기며 우리 애들의 모습을 찾았다.

'저기 있군.'

식당 구석.

나란히 앉아 식사 중인 아이리와 미유의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그들에게 자연스레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시험 준비는 잘 되고 있나?"

응? 뭐지, 이 오랜만에 자식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아버지 같은 대사는.

왠지 모르게 밥상머리에만 앉으면 잔소리를 하는 아버지들의 기분이 이해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아, 이런 감정이었구나.

"어라, 아론 이사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 아론 씨이!?"

두 사람이 날 반겼다.

다행이다. 밥상머리에서 잔소리하는 아버지 취급은 안 당했다.

"간만에 여유가 생겨 얼굴을 확인하러 왔다. 별일은 없었나?"

"저는 딱히 없었어요."

"저, 저도요...."

담담히 답하는 아이리.

이번 시험에 꽤나 자신이 있는 듯했다. 아마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천근추] 사용법을 열심히 익힌 모양이다.

미유 역시 시험 자체에는 별 어려움이 없는 듯했다. 이미 혼자서 쌓은 지식량이 상당하니, 1학년 중간고사 수준의 문제야 그녀에게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두 사람 다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란다. 혹여나 필요한 게 있으면 곧장 말하도록. 금방 마련해 줄 터이니."

그렇게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한 뒤, 나는 미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얼마 전에 부탁한 '그것'의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고 물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미유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미유."

"ㄴ, 네에?"

"부탁하고 싶은 게 있나 보군."

"어, 어떻게 아셨어요오...?!"

화들짝 놀라는 미유.

그렇게 표정에 다 드러내고 있는데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지 않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가 못 알아볼 리는 없다.

"말해 봐라. 일단 들어 보고 결정하지."

"그, 그게에...."

"중간고사에 관련된 문제인가?"

"어, 그, 그렇긴 한데요오... 엄밀히 따지자면 시험에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할까... 그냥 이건 제 욕심이라고 할까... 그, 그냥 무시하셔도 좋아요오...."

"...."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전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반응은 분명 뭔가 갖고 싶은 게 생겼다는 것이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며 재차 물었다.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라. 새로운 컴퓨터가 필요한가? 아니면 구해주었으면 하는 '정수'가 있나?"

"그, 그게에...."

후우.

답답해서 못 견디겠는지, 결국 참다못한 아이리가 옆에서 대신 말했다.

"중간 리포트를 써서 제출해야 하는데 그게 고민이래요."

"아, 아이리 씨이...!"

"왜? 그냥 솔직히 말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아, 아무것도 아녜요오...."

계속 얼버무리려는 미유를 대신해 아이리가 부연 설명했다.

"미유네 과기부 모듈과 수업 중에 하나가, 시험을 대체해서 [신비]의 생태에 관해 레포트를 제출해야 한다나 봐요."

"계속해 봐라."

"조사하던 중에 어떤 [신비]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것들한테 꽂혔다나 봐요. 그냥 자료 조사로 끝내는 게 아니라 꼭 한번 보고 싶은데, 혹시 방법이 없을까 고민 중이라네요."

"...."

내가 바라보자 미유가 부끄럽다는 듯이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용기를 내어서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스팅레이 그룹에서도 신비모듈을 생산하기 위해 괴물들을 적극적으로 사냥한다고 들었는데요오... 혹시 거기에 참관할 수 없을까 하고...."

"안 된다."

나는 즉답했다.

"너도 알잖느냐.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그, 그렇겠죠오...."

미유는 침울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미유는 적응자가 아니다.

제아무리 격이 낮은 [신비]라도, 놈들을 상대하는 일들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그런 일에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라는 이유만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들어주지 못할 부탁이군."

"귀,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오...."

쭈글쭈글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잔뜩 움츠러드는 미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에휴. 이 호기심을 어찌할꼬.'

뭔가에 한 번 꽂히면 앞뒤 안 가리고 탐구하려고 달려드는 미유의 성격을 모르지 않는다. 아마 지금도 굉장히 내 입장을 생각해서 절제하고 있는 거겠지.

사실 미유의 부탁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제일 걱정되는 건 그녀의 안전이었다.

[신비]를 만나려면 도시 밖으로 향해야 하는데, 놈들의 영역에선 여러모로 예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곤 하니 리스크가 너무 크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이럴 때는 단호하게 끊어야 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그 꽂혔다는 [신비]가 뭐길래? 원작에서도 미유가 그렇게 관심 보일 만한 괴물이 있었던가?'

혹시 모르니 물어보기로 했다.

"네가 한번 보고 싶다는 [신비]가 뭐지?"

"그, '드워프'라고 하는 종족인데요오...."

"드워프?"

그 난쟁이들 말인가?

그렇게 묻자 미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뛰어난 기술력을 지닌 종족이라고 들었어요오... 지성도 갖고 있고, 인간과 언어도 통하고, 어떤 기업은 그들과 협력해서 특별한 제품을 생산하는 계획까지 세운 적이 있다고...."

"...?"

뭐지?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

원작에서 미유는 드워프를 굉장히 싫어하는 모습으로 묘사가 되었는데?

엘프나 요정 같은 종족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미유가 '드워프' 얘기만 나오면 치를 떠는 장면이 있었다.

잠시 고민해 보다가 금세 답을 알았다.

'아, 그 사이의 이야기가 생략된 거군.'

작가의 서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미 한 차례 미유는 드워프라는 종족과 만난 적이 있었던 거다. 그 경험으로 드워프의 실체를 알게 된 미유는 놈들을 극도로 혐오하게 된 것이고.

"음...."

어떡할까?

다른 종족이라면 몰라도, '드워프'라면 만나게 해 주는 게 가능했다.

다른 괴물들을 보려면 도시 밖으로 나가거나 기업의 비밀 연구소를 방문해야겠지만, 드워프만큼은 별다른 위험 없이 만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해 보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별로 추천은 하지 않는다. 아마 네게는 그리 좋은 경험이 되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만나 보고 싶으냐?"

"네!? 괘, 괜찮은 건가요오?!"

"잘 됐네, 미유."

옆에서 아이리가 함께 기뻐해 주었다.

나는 옆에 있던 비서에게 '괜찮지?'라고 물어보는 눈빛을 보냈고, 일정에 문제가 없다는 OK사인이 떨어졌다.

"정 신경이 쓰인다면 당장 가 보도록 하지. 어서 채비해라."

"아, 알겠습니다아! 얼른 다녀올게요오!"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미유는 외출할 준비를 위해 호다닥 방으로 달려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선 방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던 녀석이 저렇게 재빠른 움직임을 보이다니.

나름대로 이곳에 적응한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들뜬 거겠지.

다만 흥분해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음식들이 그대로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이리는 그녀가 테이블 위에 남긴 음식을 한숨을 쉬며 먹었다.

내가 물었다.

"그냥 버려도 된다만."

"아깝잖아요. 이거 다 돈이고. 어차피 제 거 다 먹고 더 가져오려고 했으니 상관없어요."

"그런가."

이 녀석 성격도 많이 유해졌구나.

근데 그녀의 모습에 자식들이 남긴 잔반으로 배를 채우는 엄마의 이미지가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뭐, 내가 그런 감상을 품거나 말거나 미유가 남긴 음식을 오물오물 입으로 가져가던 아이리가 내게 되물었다.

"근데 정말 괜찮겠어요?"

"상관없다."

사실 나도 드워프가 보고 싶었으니까.

아카데미 흑막 시점 64화

나는 시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드워프를 기억하나?]

[드워프요?]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묻는다. 분명 도시 근처서 살고 있는 드워프 난쟁이 하나가 원작에서 지나가듯이 언급된 적이 있었을 텐데.]

[아아, 듣고 나니 기억나네요. 종종 주인공이 혼자서 찾아가곤 했었던....]

[기억나는 대로 전부 말해 주면 좋겠군.]

[음... 어디 보자....]

그렇게 시엘에게 정보를 얻어 모호했던 기억을 정비한 후, 드워프를 찾아갈 준비를 했다.

원작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온 적이 있었다.

주인공 일행이 우연히 드워프들의 영역에 초대받은 에피소드였는데, 거기서 미유가 보인 반응이었다.

-드워프들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종족이에요. 만약 그들을 우주에서 완전히 지워 버릴 수만 있다면, 저는 스팅레이 그룹에도 협력할 거예요.

평소 자신감이 없어 항상 빙빙 돌려서 자신의 말하던 미유치고는 명백한 의사 표현이었다. 어찌나 살벌하게 표현하던지 글로 읽는데도 흠칫했을 정도였다.

그 후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던 탓에, '아, 예전에 드워프랑 뭔가 일이 있었구나' 라고 어림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드워프를 싫어한 게 작품상에서도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미유의 반응이 궁금하다.'

어쩌다가 그녀가 드워프를 싫어하게 되었는지. 또 판타지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드워프를 직접 이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신비]들과는 달리,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도 만날 수 있긴 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도시 밖'으로 취급되는 곳이긴 하지만.

다름 아닌 폴른 구역.

아이리의 고향... 이라고 하기엔 워낙 넓어서 애매하다. 지난번 타이탄이 부쉈던 그 장벽 라인 밖은 전부 '폴른'이란 식으로 뭉뚱그려서 취급되곤 했으니.

때문에 원작에서 나왔던 '녀석'이 정확히 어떤 곳에 있는지는 약간의 조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스팅레이의 정보력은 30분 만에 내게 원하는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폴른구역 중에서도 인근 주민들이 '기묘한 사이버웨어'를 달고 돌아다니는 지역으로 한정시켜서 조사를 지시하자 금세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나와 이 녀석 둘만 가겠다."

"위험한 곳입니다, 도련님."

"그렇다면 드론을 몇 기 대동하도록 하지."

나 혼자였다면 무시했을 테지만, 이번엔 미유가 함께였다. 만의 하나에 사태에 대비해서 군용드론 몇 기를 대동해서 가 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도시 방위대 쪽에 연락을 취해 두었습니다. 검문소를 지난 후, 지상용 험비를 타고 이동하시면 됩니다. 밖에 사람을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비서의 말에 따라 나와 미유는 검문소를 프리 패스로 통과했다.

장벽 아래에 긴 터널처럼 이루어진 검문소를 지나 밖으로 나서자,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 주는 것은 엄청나게 역한 냄새였다.

"으윽...!"

"...."

미유는 즉시 코를 감싸 쥐었고, 나도 인상을 팍 썼다. 그 원인은 바로 장벽 너머에 태산처럼 쌓여 있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이었다.

빈병, 플라스틱 용기, 정체 모를 녹슨 금속 등등... '환경오염'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쓰레기 산이 거대한 산맥처럼 늘어서 있다고 할까.

기름을 부어서 불을 붙이더라도 다 타려면 아마 못해도 몇 개월은 걸릴 법한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이었다.

보아하니 여기저기서 AI를 탑재한 덤프트럭이 쓰레기를 치우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새롭게 쌓이는 양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내, 냄새 나요오...."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장벽 너머에서부터 묘한 냄새가 나더라니. 그냥 E섹터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외부에서 공기가 벽 너머로 들어오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어쨌건.

우리는 외부 도로에서 기다리고 있던 험비에 몸을 실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자, 험비는 커다란 바퀴를 굴리며 쓰레기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덜컹덜컹.

좋지 않은 승차감에 벌써부터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비행용 자동차를 타고 올 것을 그랬다.

비행용 자동차는 폴른 구역 주민들의 이목을 지나치게 끌기 마련이라 참았던 거였건만, 조금 후회가 되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나의 튼튼하기 그지없는 몸도 슬슬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쯤, 험비가 조용히 이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우리 앞의 좌석이 스르륵 열리더니 검은 플라스틱 재질의 무언가가 나타났다.

[마스크입니다.]

방독면처럼 생긴 마스크였다.

냄새를 막아 줄 거라는 설명에 나와 미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착용했다. 얼굴에 마스크를 뒤집어쓴 모양새는 솔직히 폼이 영 안 살았지만, 그래도 냄새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아론이 폴른 구역 출신을 극혐하는 이유를 알겠군....'

한 번 겪어 보니 원래는 없던 혐오감도 생겨날 것만 같았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험비를 세워 둔 곳에 군용드론 몇 대를 대기시켜 두고, 나머지는 호위로 따라오도록 했다.

차가 멈춘 지역은 다른 곳보다 쓰레기가 다소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폴른 주민들의 거주구역까지 가려면 아직 쓰레기 동산을 몇 개쯤인가 더 건너야 할 듯싶었다.

방구석 생활에 익숙한 미유는 벌써부터 지쳤는지 결국 드론 위에 짐처럼 실려서 이동했다.

"뭐, 뭔가 생각한 것하고 너무 달라요오...."

그러게나 말이다.

드워프라 함은 대장장이의 종족이 아니었던가. 원작에서도 드워프 마을은 금속과 불, 연기가 피어오르는 대장간 그 자체로 묘사됐는데 말이다.

아니, 뭐.

사실 나야 지금 만나는 드워프가 이런 곳에서 산다는 걸 알고 있긴 했다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않던가.

원래부터 그 드워프에 대한 내용이 조금 가물가물하기도 했거니와, 직접 콧속으로 찔러 들어오는 냄새에는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느 정도 이럴 줄 알고 평소의 양복 대신 비교적 캐쥬얼한 옷을 입고 왔다는 것이었다.

일단 폴른에는 양복쟁이만 봤다 하면 발작하는 녀석들이 많아서 조금이라도 예방하자는 차원이었는데, 그 덕에 비싼 옷에 냄새 밸 염려는 사라졌으니까.

그렇게 쓰레기 언덕 2, 3개쯤을 넘어서니 미유는 드론에 타고 있는 것도 힘들었는지 완전히 퍼져 버렸다.

"어, 얼마나 더 가야 해요오...?"

"다 왔다."

내 예민한 귀에 물소리가 잡혔다.

도시에서 흘러나온 하수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물이 필요하니 아마 물길을 따라가면 될 거다.

아니나 다를까, 물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조금 더 이동하자, 꽤 번듯한 마을이 하나 나왔다.

말 그대로 판자촌.

쓰레기 더미에서 쓸 만한 자재를 구해서 얼기설기 엮은 집들이 모여 있었다. 나름대로 규모도 상당해서 못해도 1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있는 듯했다.

지저분하지만 어쩐지 도시와는 다르게 자유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곳곳에 아이들이 마을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고, 어른들은 나름대로의 여유를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난 여기선 안 살 거다.

"차, 찾았어요오!"

미유가 좋아서 소리쳤다.

그러다 멀리서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는 이상한 점을 발견한 듯 떨떠름하게 물었다.

"저, 저 사람들... 이상한 걸 끼고 있는데요? 대체 저게 뭐지...?"

여타 폴른 주민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행색이었지만,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주로 머리 쪽과 목덜미 부분.

이상한 나무 각목을 얼기설기 엮어 목도리처럼 둘러매고 다닌다든가, 아니면 머리 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TV를 얹고 다닌다든가.

쉽게 말하자면, '이게 제정신인가' 싶은 차림들이 몇몇 보였다. 농담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을 마주쳤을 때보다도 몇 배는 더 겁을 먹은 모습이다.

"저, 저희 그냥 돌아가면...."

"...."

"...안 되겠죠오. 죄송해요, 죄송해요."

이 고생을 해서 찾아왔는데 드워프의 '드'까지만이라도 확인하고는 가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주민들이 저 이상한 취향의 오브제를 달고 다니는 꼴을 보니,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 근처에 드워프가 있다고.

"일단 가 보자. 드론에서 내려라."

"아, 아앗...!"

주민들이 이런 비싼 군용드론을 보면 경계할 게 분명하니 일단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곧장 튀어나올 수 있도록 준비시켜 둬야겠다.

미유를 데리고 쓰레기 언덕을 내려가 마을로 조심스레 들어섰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낯선 인간이 나타나자, 주민들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시선이 집중되자, 미유는 바짝 움츠러들어선 내 팔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던 주민에게 다가가 물었다.

"드워프를 찾고 있다."

"...당신들 누구야?"

머리에 UFO 접시 같은 걸 얹은 주민이 신경이 곤두선 목소리로 물었다. 당장 칼이라도 휘두를 기세였지만, 솔직히 머리 위의 UFO 때문에 하나도 안 무서웠다.

"뭐, 뭐가 목적이냐! 사실대로 말해!"

"드워프를 만나러 왔다."

"뭐라고?"

우리를 둘러싼 주민들이 조금 술렁거렸다. 태도를 보아하니 바로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미끼를 던질 수밖에.

"이곳에 드워프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딱히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으니 안내해 주었으면 한다."

언뜻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태도였지만, 나도 최선을 다해서 예의를 갖추려고 하는 것이었다. 다만 시민조차 아닌 '아랫것'들에게 예의를 갖춘다는 것에 이놈의 몸뚱이가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도치는 않았는데 강하게 나가니, 주민들이 도리어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 어쩌지? 뭔가 대단한 사람인가 봐!

-옷차림도 말끔하고, 그... 기분 나쁘게 하면 위험해지는 거 아니야?

이런 곳에서 힘든 생활을 보내는 것치고는 순박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오히려 생존본능이 극도로 발달해서 내 정체를 무의식적으로 눈치챈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주민들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이, 이런 곳에 드워프 같은 게 어디 있슈! 우린 그런 거 모르니께! 냉큼 돌아가슈!"

"맞어어! 당신 도시 쪽 사람이잖어어! 여긴 우리 구역이니까 당장 나가아아! 우리는 드워프 같은 거 모르니까아아!"

"흠."

드워프든 뭐든 [신비]를 허락 없이 도시 내로 반입하여 함께 생활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폴른 구역 사람들에게 도시의 법이 적용될 리도 없었고, 설령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따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 드워프 같은 건 모른다?"

"그려! 몰러!"

"감당할 수 있겠나? 그 발언."

"...!"

내가 내뱉은 한마디에 주민들이 단번에 숨을 삼킨다.

얼굴이 새파래지는 사람도 있었고,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으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안 되겠군.'

그리고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인근에서 대기하던 드론이 하늘을 날아 순식간에 내 옆에 도달했고, 그 모습에 주민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 혼비백산했다.

-드, 드론이다! 군용 드론이야!

-심지어 스팅레이 제품이야! 제기랄!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주민들이 겁먹은 얼굴로 우리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몇몇 남자들이 몽둥이나 총 같은 것을 들고 나타났다.

"아, 아론 씨...!?"

"겁먹지 마라."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민들에게 경고했다.

"살고 싶으면 비켜라."

"그, 그럴 수 없슈!"

"그런 장난감으로 뭘 할 수 있지? 귀찮게 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비켜라. 방해된다."

이들을 상대로는 [구름거미]를 사용할 가치조차 못 느꼈다. 나는 주민들 중 한 명이 들고 있는 칼을 맨손으로 부러뜨려 버렸고, 그대로 그를 대충 아무 곳으로 던졌다.

"헉! 저, 적응자!"

"이 자식이!"

"다, 다들 한꺼번에 덤벼!"

하지만 군용드론들이 총구를 들이밀자 다들 기겁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히익!"

"사, 살려 주세유!"

"쯧."

그들의 반응에 나는 혀를 찼다.

"그러니까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너희가 날 위협하면 자동으로 공격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제발 가만히 좀 있도록."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군용드론들이 총구를 일제히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중 한 기가 내 옆으로 스르륵 날아와 모습을 변형시켰다.

"뭐, 뭐지?"

"저게 뭐 하는 거여?!"

겁을 먹은 주민들.

심지어 미유도 내 옆에 달라붙어서 나를 말리려 들었다.

"아, 아론 씨이... 이만하면 됐으니 그만 돌아가는 건...."

"너도 가만히 있거라."

뚜껑이 열린 드론의 안쪽에서 냉기와 함께 '어떤 물건'이 튀어나왔다.

냉동고에서 차갑게 식힌 맥주잔과 고급 병맥주였다.

뻥!

나는 가볍게 맥주병의 뚜껑을 따고서 졸졸졸 잔에 따랐다. 황금빛 액체가 커다란 잔을 채우기 시작했고, 크림 같은 거품이 몽실몽실 부풀어 오르더니 잔 끝에서 살짝 흘러넘쳐 작고 하얀 폭포를 만들어 냈다.

꿀꺽.

내가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뜬금없는 기행이었지만, 축복받은 황금빛 액체는 주민들의 그 이상으로 주민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에 성공했다.

몇 명이 무심코 침을 삼키는 게 보였다. 심지어 이걸 준비한 나조차 군침이 도는데 오죽하겠는가. 여기가 쓰레기장만 아니었으면 이미 시원하게 들이켰을 것이다.

술에 전혀 취미가 없는 미유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뭐, 뭐 하시는 건가요오...?"

"함정을 판다."

나는 적당히 넓은 자리에 맥주를 가득 채운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함께 가져온 커다란 바구니를 덮고, 나뭇가지 모양의 플라스틱 작대를 이용하여 살짝 열리도록 해 두었다.

그리고 [구름거미]를 활성화시켜, 플라스틱 작대 끝에 실을 연결해 두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완성이다."

"하, 함정이라니 이게요...?"

미유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서, 설마 이걸로 드워프를 잡으려고 하시는 건가요오...?"

"그렇다만."

"어...."

미유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 '우리 후원자가 드디어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보면 나도 상처받는단다.

결국 제아무리 소심한 미유라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죄, 죄송한데요, 아론 씨이...."

"뭐지?"

"이, 이런 원시적인 함정에 지성이 있는 생명체가 잡히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데요오... 아무리 드워프가 맥주를 좋아하기로 유명해도, 이런 함정에는 동물도 안 걸리는...."

[으아아악! 잡혀 버렸다아아아아!]

미유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

내가 판 함정에 신호가 왔다.

[대체 누구냐! 이런 사악하고도 간악한 함정을 판 것은!? 무척이나 머리가 좋은 녀석이 분명하다아아아! 이렇게 분할 수가아아아!]

바구니 안쪽에서 들려오는 굵직한 목소리.

미유는 반쯤 입을 벌린 채 영혼이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 역시 그녀를 마주 보며 표정으로만 답했다.

거봐. 잡혔잖아.

아카데미 흑막 시점 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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