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흑막 시점 24화
[쇼케이스].
스팅레이 vs 밀레테크.
1학기 첫날부터 벌어진 대형 이벤트에 아카데미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결투를 준비하는 양측 기업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업 관련 인물들도 이 모의전의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분주히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또한 언제 아카데미 외부까지 소식이 퍼진 것인지, 관련 주식들도 움직임이 심상찮다고 한다.
참고로 주식시장 관련 정보는, 내가 알고 싶어서 알게 된 게 아니었다. 통화로 하도 시끄럽게 구는 녀석이 있어서 말이지.
[형님! 제에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취소해 주세요!]
"시끄럽다. 이미 무르기엔 늦었다."
[이런 식으로 멋대로 하실 거면서 왜 제 자리를 완전히 뺏지 않으신 겁니까? 결국 짬처리와 다를 바 없잖습니까!]
"...."
아, 들켰네.
알아보니까 생각보다 재단 이사장으로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장난 아니게 많았단 말이지. 솔직히 내가 일하고 싶어서 이 세계에 온 건 아니잖은가.
같은 이유에서 재단 업무 외에 스팅레이 본사에서 나 개인에게 보내오는 무력 지원 요청도 전부 팽개쳐 놓고 있는 상태다.
'아직 병의 후유증이 남았다'라면서 차일피일 미루고는 있는데 이 핑계가 언제까지 먹힐지는 알 수 없다.
[제 말 좀 들으십쇼! 개강 첫날부터 이런 식으로 밀레테크하고 쇼케이스라뇨! 만약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기라도 한다면 진짜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러는 겁니까!]
"이기면 될 뿐이다."
[이겨도 그것대로 문젭니다! 밀레테크 쪽에서 이번 일을 어떻게 볼 거 같습니까? 안 그래도 요새 저쪽이랑 사이가 영 불안한 마당에...!]
"굳이 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터졌을 고름이다. 미리 좀 빼낸다고 해서 달라질 것 없다."
[그, 그건 그렇지만...!]
정곡을 찌르니 베네딕트도 반박하지를 못했다.
스팅레이와 밀레테크.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뉴 발할라 시티의 두 거인이, 갑자기 나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다고?
그럴 리가.
두 기업은 이 도시가 세워질 때부터 치열하게 패권 다툼을 해 왔다. 합법적인 수단부터 불법적인 수단까지 전혀 가리지 않고 말이다.
물론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스팅레이였고, 밀레테크는 어쩔 수 없이 2인자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여전히 밀레테크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며, 다른 기업들까지 끌어들여 스팅레이의 권력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경쟁사 중에 하나였다.
워낙에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한 두 기업이었기에, 이번 [쇼케이스]에 대한 다른 기업들의 반응도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이 대다수였다.
'실제로 원작 중반부를 넘어서면 관계가 틀어져서 결국 전쟁까지 벌어지기도 하고.'
결국 때가 왔다고 판단한 밀레테크는 다른 기업들과 힘을 합쳐 스팅레이를 여러 수단으로 압박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격한 무력 충돌까지 일어나게 된다.
'비유하자면 귀족들이 황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거라고 할 수 있겠지.'
그 에피소드의 제목이 '고래 싸움'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메가코프들의 전쟁에 아카데미의 주인공 일행이 휘말리는 내용.
그 전쟁은 간발의 차로 스팅레이가 승리하면서 끝나게 되지만, 그로 인해 뉴 발할라 시티 전체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베스트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때를 대비해서, 조금이라도 격차를 벌려 놓는 게 좋겠지.'
이번 사건의 나비효과가 얼마나 커질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아론이 된 지금.
독자였을 때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이 하나 있었다. 원작에서 왜 하필 그 시점에 전쟁이 터졌냐는 하는 부분이었다.
'아론이 전쟁을 막고 있었던 거야.'
아론과 블라디미르.
양 그룹의 후계자인 두 사람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고, 얼핏 최악처럼 보이는 둘의 관계가 어떻게든 폭탄이 터지지 않도록 막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쪽의 생각은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아론은 그에게 나름대로 친밀감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소시오패스의 친밀감이란 일반적인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겠지만. 어쨌건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아론이 거대한 전쟁억제제 역할을 했음은 분명했다.
그러다 아론이 죽으면서 급속도로 관계가 나빠졌고,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겠지.
'뭐, 지금 시점에 신경 쓸 내용은 아닌가.'
당장 중요한 건 [쇼케이스]의 결과다.
현재 첫 에피소드의 메인캐릭터인 '아이리 앨리스벨'에게 집중할 타이밍이라는 뜻이다.
"이만 끊도록 하지. 곧 시작한다."
[네?! 형님! 형니이-!]
뚝.
베네딕트와의 통화를 일방적으로 종료한 후, 나는 관람석에서 훈련장 쪽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리와 도노반.
양측 기업의 대표선수가 무기를 들고 [쇼케이스]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이리는 스팅레이의 검은 제복으로, 도노반은 밀레테크의 하얀색 제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생각보다 검은색이 잘 어울리는구나.'
후후, 우리 새끼 너무 이쁘다.
꼭 한번 입혀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주인공이 죽지 않았으면 절대 보지 못했을 모습이니 이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 때문에 이 고생을 하게 되었으니, 이 정도 덕질 정도는 괜찮겠지?
-전투 시작 1분 전.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도시의 모습을 재현한 듯, 자동차나 자판기 같은 여러 물건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복잡한 지형지물을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승부의 관건이 될 터였다.
-전투 시작 45초 전.
어느덧 관람석 쪽도 기업 관계자들로 가득 찼다.
표정들이 흥미진진한 것이 이번 [쇼케이스]를 유흥거리 정도로 여기고 있는 인간들도 많은 듯했다.
특히나 이목을 끄는 건 아이리.
폴른 출신임에도 어째서 내가 그렇게 감싸고 도는 것인지, 대체 어떤 점이 황태자의 총애를 산 것인지 궁금해하는 생각들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마리아."
내 옆에서 말없이 대기하는 중인 전속비서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느렸다.
"...예, 도련님."
"불안한가?"
"...."
마리아의 표정이 정곡을 찔렸다는 듯이 굳었다. 평소 포커페이스에 능숙한 그녀치고는 눈에 띄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네, 도련님.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걱정됩니다."
"아이리 녀석의 스펙을 확인해 본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전투 시작 20초 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라."
"그럼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번만큼은 도련님께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판단을 믿지 못하나?"
"그,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투 시작 10초 전.
"감히 여쭙겠습니다, 도련님."
-전투 시작 5초 전.
"어째서 앨리스밸 양에게...."
-전투 시작 3초 전.
"전투 모듈을 '전혀' 지급하지 않으신 겁니까?"
마침내 마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 현재 아이리는 완전히 퓨어 스펙 상태였다. 마리아나 다른 사람들은 내가 그녀에게 비장의 무기를 쥐여 줬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틀렸다.
나는 오히려 마리아에게 따로 지시까지 내렸다. 절대로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말라고. 그 어떤 전투 모듈이나 장비도 말이다.
"앨리스밸 양은 '고장 난 정체불명의 모듈' 하나만 장착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체 어째서...!"
마리아의 애사심은 무척이나 깊다.
그녀는 내가 그릇된 판단으로 스팅레이 그룹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만약 이번 결과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서슴없이 내게 비수를 꽂을 인간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이미 이전에도 말했다.
"저 녀석은...."
-전투 시작까지 3초.
-2초.
-1초.
"천재이기 때문이다."
-전투 시작.
[쇼케이스]의 개시.
그 알림과 동시에 폭음이 일었다.
콰아아아앙-!
폭발은 순식간의 모의 훈련장의 거의 절반을 집어삼켰다.
원래 그리 튼튼한 구조물이 아니었기에 배치된 모든 것들이 화염에 휘말려 사라졌다.
"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도노반.
녀석의 손목이 180도 뒤로 젖혀져 있었다.
그 팔목 끝에는 직경 3cm 정도의 포구가 달려 있었다. 포구가 새빨갛게 달궈져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Lv.4짜리 신비모듈, 화장포다! 빌어먹을 년아!"
조금 전의 폭발은 도노반의 팔에서 쏘아낸 에너지포탄이 원인이었다. 어찌나 화력이 강한지 아이리가 처음 대기하던 장소까지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게 왜 실력도 돈도 없는 년이 이런 곳에 와서 나대는 거냐! 너무 약해서 시체도 안 남고 한 방에 죽여 버렸잖아!"
보통 [쇼케이스]에서는 어느 정도 힘을 빼고 싸우는 편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서로 살육전을 펼치는 건 자제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도노반은 전혀 봐줄 생각이 없는지, 초장부터 상당한 걸 선보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구경꾼들의 반응도 상당했다.
-Lv.4 신비모듈?! 저 나이에 벌써 저런 물건을 다룰 수 있다는 건가!
-겉보기보다 대체율이 상당히 높은 모양이군요. 심장 대신 아크 리액터라도 달고 있을지 모릅니다.
-역시 모듈 쪽은 밀레테크인가....
-저 정도의 물건이라면 몸에 부담이 상당할 텐데... 저런 걸 인스톨한 저 학생도 상당하군요. 눈여겨볼 만합니다.
-반면 스팅레이 쪽은 실망스럽네요.
-첫날부터 [쇼케이스]를 벌인 만큼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줄 알았는데.
실시간으로 밀레테크의 주가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아는 나를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내게 할 말이 아주 많은 듯했다.
원망. 실망. 질책. 배신감.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인 얼굴로 할 말을 찾는 마리아.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한마디 던져 줄 뿐이었다.
"저게 끝난 걸로 보이나?"
그 순간이었다.
포격에 휘말려서 소멸한 줄로만 알았던 아이리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도노반의 바로 앞에서.
그녀는 자세를 한껏 낮춘 상태에서 도노반을 올려다보며 피식 비웃었다.
"그게 다야? 자신감 넘치더만."
"어, 어떻게...!"
철컥.
도노반이 채 반응하기도 전, 아이리가 손에 권총을 거머쥔다. 총구를 수직으로 세워 도노반의 턱에 갖다 댄다. 그리고 가볍게 손가락을 당긴다.
타아앙-!
도노반의 턱에서 불꽃이 튀었다.
총알이 부딪치며 일으킨 것이었다. 아무래도 뼈를 금속재질로 바꾸는 모듈이라도 끼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제로거리에서 아래턱에 정확히 탄환이 꽂힌 것이었다. 따로 모듈을 장착한 게 아니라면, 충격에 뇌가 흔들리는 것까지는 막지 못한다.
"으어어-!"
일시적으로 진탕 상태에 빠진 도노반의 커다란 몸이 기우뚱 뒤로 넘어진다. 그리고 그 틈을 아이리는 절대 놓치지 않았다.
아이리는 느리게 넘어지는 도노반의 몸 위에 다람쥐처럼 올라탄 뒤, 머리에 다시금 총구를 바짝 가져다 댔다.
"원망하지는 마."
한 마리의 들개가 중얼거린다.
"너도 나 죽이려고 했잖아, 개새끼야."
타앙! 타앙! 타앙!
아이리의 손에서 여러 차례 불꽃이 튄다. 한 발로는 도노반의 두개골을 뚫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답이었다.
반복되는 총격에 도노반의 이마가 조금씩 파이고 있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뼈가 점점 안쪽으로 휘는 것이었다.
이마 쪽 피부가 열리면서 피가 줄줄 샜다. 아이리가 총을 쏠 때마다 사방으로 붉은 액체가 튀어댔다.
타앙! 타앙! 타앙!
11발들이 탄창을 모두 쏟아부은 아이리는 도노반의 몸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훌쩍 뛰어내렸다.
"후우...."
이윽고 터엉, 하는 금속음과 함께 도노반은 바닥에 쓰러졌다. 아이리는 그 모습에 짜증 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얼마나 돌대가리길래 한 탄창을 다 쏟아부었는데도 죽질 않는 거야?"
아이리는 탄창을 재장전하면서 쓰러진 도노반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기 위함이었다.
도노반은 완전히 기절했는지 꼼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주, 죽은 건가?
-아, 아직 생체 반응은 느껴집니다.
-아니, 쓰러진 쪽은 아무래도 좋다! 저 여자애의 정체는 대체 뭐야? 저런 움직임은 대체 어떤 모듈을 써야 가능한 거지?
술렁거리는 관람석.
그러나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마리아일 것이다.
아이리의 저런 몸놀림이 어떠한 모듈의 지원도 받지 않은, 퓨어 스펙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
하지만 아직 놀라긴 이르다.
아이리가 보여 준 능력의 끝은 저게 아니고, 싸움 역시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까.
"도, 도련님...!"
"질문은 미루도록. 아직 볼 게 남았다."
"예?"
그 순간이었다.
철컥.
쓰러진 도노반의 팔이 난데없이 움직이며 아이리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마치 본체와 별개의 생물 같은 움직임이었다.
도노반의 몸과 시선은 여전히 천장을 향하고 있건만, 그의 서브머신건만큼은 정확하게 아이리를 노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변.
관람석에서 지켜보던 이들조차 너무 놀라 반응하지 못했던 찰나, SMG의 총구가 가차 없이 당겨졌다.
타다다다다다-!
무자비한 총탄의 세례.
그리고 기적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마, 말도 안 돼...!"
아이리가 몸을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총알들을 전부 피해 버리는 게 아닌가.
춤을 추듯 느긋한 동작.
왼쪽, 오른쪽 가볍게 스텝을 밟는 것으로 난사되는 총알들을 전부 피해 버리는 아이리.
마치 그 궤적들을 미리 읽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덜컥!
탄창이 떨어짐과 동시에 도노반이 갑작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순식간에 재장전을 마친 후, 이번에는 양손으로 SMG를 붙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다다다다다-!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
아이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서서히 좌우로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벌렸다.
놀랍게도 도노반이 쏘아낸 탄환들은 모조리 아이리의 몸체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그 모습에 도노반이 당황했다.
"대, 대체 왜 안 맞는 거지? 네년, 대체 무슨 모듈을 쓰고 있는 거냐!"
"모듈?"
그에 아이리가 답했다.
"돈도 없는데 그런 걸 어떻게 사?"
아카데미 흑막 시점 25화
"돈도 없는데 그런 걸 어떻게 사?"
"뭐...?"
아이리의 말에 다시 한번 주변이 술렁거렸다.
결투 상대인 도노반은 말할 것도 없고, 관람석 쪽의 기업 관계자들도 당황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저, 저 말이 사실인가? 지금 아무런 모듈도 장착하고 있지 않다고?
-관측되는 에너지 출력이 이상할 정도로 낮은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아니, 하지만....
-제기랄, 지금 눈으론 확인이 안 된다! 더 좋은 스캐너 모듈을 가져와! 적어도 Lv.4 급으로!
누군가는 다급하게 새로운 스캐너 모듈을 찾으러 달려 나갔고, 누군가는 다급하게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댔다.
또 누군가는 나와 블라디미르를 번갈아 보며 어느 쪽에 줄을 대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댔다.
'이것이 [쇼케이스]의 힘이지.'
쇼케이스는 인간병기 시연회다.
[신비]라는 도시 바깥쪽 괴물들로 인해, 이 세계에서는 사업을 확장하려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무력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도시 바깥의 생산 콜로니를 유지하든, 확장하든 할 수 있으니까.
뿐만 아니라 도시 내에서만 운영하는 서비스 사업자라고 해도, 경쟁사의 테러나 반기업 갱단과 테크위자드들의 깽판질을 막기 위해서라도 뛰어난 적응자 사병은 필수다.
'그런 곳에서는 더더욱 천재적인 적응자의 존재가 빛나는 법이지.'
그러니 다들 아이리를 보고 저렇게 소란을 피우는 것이다.
스팅레이 대표로 나온 인간병기가 모듈을 장착하지 않은 퓨어 스펙 상태라니. 게다가 그 상태에서 밀레테크 쪽을 완전히 밀어붙이고 있다니.
'머리가 꽤 복잡할 테지.'
기업 관계자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꼴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들이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퓨어스펙? 어째서 스팅레이는 저 애에게 아무런 모듈을 주지 않고 쇼케이스에 참가시킨 거지?
-스팅레이 계열사 주식을 사야 해! 스팅레이 전자랑 스팅레이 시큐리티 쪽부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상에 누워 있던 인간이 어디서 저런 녀석을 구해 온 거야?
-밀레테크 쪽과의 모듈 거래량을 재조정해야겠어. 저 아이가 졸업할 때쯤에는 완전히 손을 털 수 있도록.
-정말로 퓨어스펙이 맞긴 해? 의심스러워. 함부로 속단하지 말고 기다려야겠어. 양측이 짜고 치는 걸 수도 있어.
그야말로 혼돈이다.
단 한 명의 천재가 등장함으로 인해, 날고 긴다고 하는 뉴 발할라 시티 메가코프들이 털을 바짝 세우는 꼴이라니.
내게는 그 모습이 퍽 우습게 느껴졌다.
허나 남몰래 미소를 짓고 있는 나와는 달리, 내 옆에 있던 마리아는 믿기지가 않는다는 눈이다.
"도, 도련님... 이건...."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천재라고."
결국 참지 못한 나는 입꼬리가 조금 위로 올라가고 말았다.
"아이리 앨리스밸. 너도 확인했다시피 퓨어스펙에 가까운 상태다."
"'가까운'이라고 하심은 역시...."
"그래, 너도 봤겠지. 저 녀석은 현재 망가진 모듈 하나를 끼고 있지."
"네. 에러 때문에 이름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 모듈이 하나 있었습니다만."
마리아가 뭔가 떠오른 듯, 경악하며 말했다.
"서, 설마 그 모듈이...."
"저 녀석의 능력의 비밀이냐고? 아니, 전혀 반대지. 그 망가진 모듈은 녀석의 오라비가 남긴 유품일 뿐이다."
아이리의 전투에 방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절대 플러스가 될 요소는 아니다.
바꿔 말하자면 지금 아이리는 모래주머니 하나 달고서 싸우는데도 저 정도라는 의미.
"어디까지나 타고난 것이다. 원래부터 뛰어났던 소재가 적응자가 되면서 한층 더 강해졌을 뿐이지."
"하지만 아무리 퓨어 스펙이 강하다 해도 동체 시력만으로 총알을 피하는 것이 가능한 겁니까?"
"보면 알잖느냐."
다른 이는 몰라도, 아이리는 된다.
왜냐고?
메인 히로인이니까.
대놓고 이 세계 자체가 편애해서 태어난 누구보다도 특별한 존재니까. 작가의 애정이 듬뿍 들어간 캐릭터니까.
"저 녀석은 직감의 괴물이다. 상대방의 시선, 근육의 움직임, 호흡... 다양한 요소를 읽고 언제 어디로 총을 쏠지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린다."
"생각을 읽는다는 말씀입니까?"
"상대의 생각까지는 읽지 못한다. 그리고 100%도 아니고. 그러니 직감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지."
"...!"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재능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마리아 역시 충분히 이해할 터였다.
'동물로서의 감각.'
그것이 폴른의 들개라 불리던 아이리가 지니고 있던 재능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투 모듈만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직감, 그리고 재능.
만약 이것들이 중요하지 않았다면 굳이 이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기업들이 뛰어난 인재들에 목말라할 필요도 없었겠지.
저기 폴른 구역에서 고아들 잔뜩 데려다가 컴퓨터에 뇌 연결해 놓고, 인격을 지우고 전투기술만 잔뜩 인스톨한 뒤, 신체강화 모듈만 이것저것 맞춰 주면 될 테니까.
"그럼 도련님께서 모듈을 맞춰 주지 말라고 하신 것도...."
"저 녀석은 남들보다 몇 배는 뛰어난 감각에 의지해서 싸우는 스타일이다. 섣불리 모듈을 장착시켜 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지."
뛰어난 재능이 발목을 잡는 경우다.
선천적으로 감각이 워낙 예민하기에 달라진 신체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아무 모듈이나 호환성 맞는다고 끼웠다간 신발 신겨 놓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할 게 분명했다.
때문에 아이리에겐, 맞춤 제작된 모듈이 필수다. 아니면 적어도 그녀에게 맞게 정밀한 사양 조정이 필요하겠지.
거기까지 설명한 나는 확신을 담아 이야기했다.
"이 [쇼케이스]는 틀림없이 이기겠지."
"[결과에 따른 기업 및 주식시장 동향과 대응 전략 수립 보고서]... 당장 준비시키겠습니다."
마리아는 곧장 내 의도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역시나 유능한 녀석이다.
여러 가지로 놀라기도 했을 테고,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도. 계속해서 완벽한 비서의 모습을 유지한다.
과연 이 모습이 언제까지 갈까.
나는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이번 건도 결재권을 일임할 테니 오늘 내로 작성해서 베네딕트에게 넘겨라."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다."
소란 수습한다고 고생했으니 이 정도는 맡겨도 될 것이다. 권력 좋아하는 녀석이니 기꺼이 앞장서서 일하겠지.
사실 내가 일하기 싫다는 생각이 가장 크기는 했으나, 마리아와 그 녀석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려는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가 재단 이사장직에 복귀하면서 당장은 명분도 권한도 부족하니 얌전하게 지내지만.
만약 충분한 권한이 주어진다면 베네딕트는 어떻게 나올까? 또 마리아는 어떤 식으로 행동할까?
둘이 손을 잡고 내 뒤통수를 칠 가능성도 적지는 않아 보였다.
'물론 그렇게 되면 두 사람 다 가만두지 않겠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마리아를 완전히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원작에선 주인공이 아카데미 학생이었던 만큼, 등장하는 캐릭터 역시 대부분 학생이었다.
물론 그들은 세계와 인류의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중요한 인물들이긴 했지만....
'내가 아론 스팅레이인 이상 아직 학생들인 주조연들한테만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지.'
원작의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데에는 그들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아직 학생에 불과한 그들에겐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분야도 있다.
가령 대표적으로 스팅레이 내부의 정치문제라든가, 원작엔 등장하지 않은 정계·재계 쪽 거물과의 관계 문제 등등.
'주인공만 안 죽었으면 그냥 쥐 죽은 듯이 지내면서 덕질이나 하는 건데....'
스팅레이 재단 책임자로서 제대로 활동하기로 한 이상, 내 활동범위는 아카데미 내부의 일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원작 지식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과도 마주해야만 할 터.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그룹 내의 아군으로 안성맞춤이다. 그녀의 강직함과 충성심은 이미 충분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방향을 가문에서 나 개인에게로 돌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를 위한 첫걸음으로....
"이제 슬슬 끝나 가는군."
나는 훈련장 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쇼케이스]의 끝이 어떻게 될지, 슬슬 윤곽이 잡혀가는 중이었다.
'자, 어서 끝내 버리도록 해라.'
아이리 엘리스밸.
네 승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너는 틀림없이 이기겠지.
중요한 건 이곳에서 네가 뭘 얻느냐다.
여기서 너의 승리와 성장이.
내 성공과 목표와 직결된다.
어서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거라.
여기서 내가 도와줄 테니까.
* * *
도노반 폰 딜레이.
녀석은 거너(Gunner) 스타일의 전투에 익숙했다. 거리를 두고 강력한 화력을 쏟아부어 상대를 일격에 처리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났으니 이길 수 있을 턱이 없다. 자신의 체력이 다 떨어지기 전에 탄창이 다 비어 버릴 것이다.
"제기라아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필사적으로 총을 갈겨댔지만 아이리는 그마저도 가볍게 피해 버리고 놈과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타이밍이 완벽했다.
철컥, 철컥.
도노반의 SMG 탄창이 전부 비어 버리는 것과 동시에 아이리는 그의 눈앞에 도달했다. 그녀는 덥석, 상대의 멱살을 쥐어짜듯 잡았다.
"끝이야."
아이리는 상대의 몸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김과 동시에 총구를 배에 찔러 넣었다.
탕탕탕탕탕탕!
여섯 번의 격발.
충격에 도노반의 몸이 기역 자로 굽혀진다. 아이리는 놈의 고통으로 경직되어 있는 틈을 타 있는 힘껏 위에서 아래로 발차기를 먹인다.
쿠웅!
도노반의 우람한 몸이 앞으로 쓰러졌고, 아이리는 그 등을 밟고 놈의 팔을 뒤로 꺾어 제압했다.
도노반이 힘으로 밀쳐 내려 하자, 아이리는 놈의 기계 팔을 연결 짓는 어깨 관절부에 제로거리 사격으로 총알을 사정없이 때려 박았다.
어찌나 피하장갑이 두꺼운지 총알은 이번에도 관통하지 못했다. 하지만 충격으로 내부 부품을 조금 망가뜨리는 데에는 성공한 듯했다.
끼이이이, 이익-!
도노반의 왼팔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부르르 떨렸다. 아이리는 상대의 몸을 짓밟은 채 여유롭게 탄창을 갈아 끼운다.
"나가 뒈져!"
서슬 퍼런 욕설을 내뱉은 후.
아이리는 도노반의 뒤통수에 총구를 갖다대곤 남은 총알을 전부 쏴 버렸다.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있는 힘껏 발길질로 놈의 머리를 찍어 내렸다.
쿠웅, 쿠웅, 쿠웅!
수십 차례의 발길질이 이어졌고, 마치 망치로 못을 박듯이 도노반의 머리가 점점 바닥을 파고들어 갔다.
결국 바닥이 도노반의 면상을 집어삼키고 나서야 속이 후련해진 듯 이마의 땀을 훔쳤다.
"하아... 하아...."
천천히 숨을 가다듬던 중.
아이리는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람석 쪽을 올려다보자 수많은 시선이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기업 관계자들.
바꿔 말해 상류층들.
"...."
고요하다.
모두가 침묵했고, 오롯이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화약의 씁쓸한 향기가 코를 찔러 댔다. 그 잔향처럼 묘한 분위기가 전투훈련장을 맴돌고 있었다.
"...뭐야."
다들 왜 날 그딴 눈빛으로 보는 거야?
똑바로 봐.
내가 이겼잖아.
네놈들이 자랑하던 놈을 내가 철저하게 짓밟아 줬잖아. 뭐가 불만인 건데? 아, 당신네가 원하던 승자가 아니어서?
뿌득. 이를 갈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토해내고 싶은 감정을 짓누른 채, 가만히 양손을 들어 가운뎃손가락을 당당히 펴 보였다.
웅성웅성.
아이리의 돌발행동에 다시 한번 관람석이 술렁인다. 높으신 분들의 심기가 다소 불편해진 듯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알 바는 아니었다.
'다 엿 먹으라지.'
너희들이 얼마나 잘났냐고.
거기 위에서 내려다보는 내 싸움은 즐거웠느냐고.
그래, 내가 이겼다.
너희들이 그토록 괄시하던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내가 보란 듯이 승리했다.
두고 보도록 해.
'더 위로 올라가겠어.'
이것은 첫걸음에 불과하다.
지금은 겨우 모형 정원 속의 인형에 불과한 신세지만, 언젠가 너희들을 짓밟고 올라서겠다.
똑똑히 보여 주겠다.
아니, 딱히 전해지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든 말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대로 저들 멋대로 평가하라지.
아이리는 가볍게 콧방귀를 뀐 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훈련장과 어안이 벙벙해진 관람객들을 뒤로하고서.
그러던 그때였다.
-짝짝짝짝.
누군가의 박수 소리.
무심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에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청년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황태자, 아론 스팅레이.
그의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아이리는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에 휩싸였다.
참으로 이상하기도 하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다고 하던가?
그 많은 사람 중 한 사람만이, 오직 아론만이 그녀의 외침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것처럼 느껴졌다.
'뭐야...!'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눈을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모든 것의 원흉인 인간이.
그렇게 따지고 싶어진 것도 잠시.
아론으로부터 마치 전염되듯이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 명에서 두 명.
두 명에서 네 명.
이윽고 불규칙한 소음은 거대한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되어 아이리를 둘러쌌다.
물론 그녀 역시 그것이 진심이 담긴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저 황태자의 눈치를 보는 것뿐이겠지.
그런데 왜일까.
울컥하고.
가슴속의 무언가가 올라오려 했다.
'...머, 멍청이들!'
그 감정을 욕지거리로 간신히 억누르고 삭이며, 아이리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도망치듯 훈련장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그녀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관람석 쪽을 향했다.
정확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론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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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도 알림]
'아이리 앨리스밸'과의 관계 변화,
1부 1막 진행도: 0%→48%
현재 공헌도: 98%
*중간보상이 지급됩니다.
*공헌도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중간보상]
업적 포인트: +2000
'자색 사냥터 입장권' 1장
아카데미 흑막 시점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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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도 알림]
'아이리 앨리스밸'과의 관계 변화,
1부 1막 진행률: 0%→48%
현재 공헌도: 98%
*중간보상이 지급됩니다.
*공헌도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중간보상]
업적 포인트: +2000
'자색 사냥터 입장권'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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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이리의 [쇼케이스]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갑작스럽게 떠오른 알림창은 나를 고민에 빠트렸다.
'1부 1막의 진행도가 48%까지 진행되었고, 공헌도는 98%라?'
진행도가 상당히 빠르다.
이제 겨우 아카데미의 첫날이 밝았을 뿐이다.
[쇼케이스]니 뭐니 하면서 하도 소동이 많았던 탓에 시간이 한참 흐른 것 같아도, 실제로는 수업도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쇼케이스] 직후 1부 1막의 진행도가 거의 절반 가까이 올랐다는 것. 또한 내 공헌도가 98%까지 된다는 것.
그 정보들에 따르면 역시 결론은 하나뿐이다.
'아이리가 1부 1막의 핵심이야.'
1부 1막.
이 구간을 나누는 기준이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나 '이벤트'가 아니라, '인물의 성장' 혹은 '관계성'이라는 의미다.
'원작에서도 이번 [쇼케이스]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지.'
주인공과 아이리의 결투였다.
물론 기업 모의전인 [쇼케이스]가 아니라 일반적인 수업내용 중 하나로 벌어진 이벤트에 불과했다.
당시 아이리는 '스팅레이의 장학생으로 뽑혀야 한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라는 목적에 사로잡혀 상당히 날이 서 있던 상태였다.
게다가 그녀가 폴른 출신이라는 이야기까지 함께 퍼지며 모두가, 심지어 교사마저도 그녀와 같은 교실에 있기를 껄끄러워 했다.
'거기서 유일하게 손을 내민 게 주인공이었고.'
혼자 겉돌던 아이리는 주인공과의 결투를 통해 처음으로 진짜 능력을 선보인다.
'테크 위자드'로서 다양한 모듈의 능력을 구사하며 싸우는 주인공과 달리, 아이리는 순수한 피지컬, 퓨어 스펙만으로 주인공을 몰아붙인다.
'결국 주인공에게 패배했지만, 그 결투를 계기로 아이리의 능력이 주변에 인정받기 시작했지....'
그것이 첫 번째 계기.
그 직후 아이리는 자신이 충분히 능력을 선보일 수 있게끔 주인공이 판을 깔아줬다는 걸 깨닫는다.
내심 자존심이 상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주인공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부분.
'들개라 불리던 녀석이 주인공을 대할 때만 조금씩 강아지처럼 변해 가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중요한 건 앞으로의 계획이다.
시나리오 클리어의 기준이 '아이리'라는 캐릭터 자체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된 이상 더더욱 그녀에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공헌도.
그 단어로 미루어 보아 이 세계가 바라는 주조연 캐릭터들의 '성장 방향'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영향을 얼마나 끼쳤는지에 따라 빙의자들이 공헌도 비율을 나눠 갖는 거겠지.
말하자면 일종의 '퀘스트'인 셈이다.
내용은 [아이리를 성장시켜라]인 거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 퀘스트 공헌도에 따라 다른 보상을 받는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겠고.'
스토리 공략에 시간적 제약이 없다는 게 확실해졌다. 그러면 기존 계획을 조금 수정해서 다른 캐릭터들과의 관계성을 미리 발전시켜 놓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다.
다만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당연하게도 다른 빙의자 문제.
'정황증거를 보았을 때, 시엘 녀석이 빙의자라는 건 틀림없어 보인다.'
다만 원작에선 시엘 역시 아이리 못잖게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원래라면 이후에 '1부 3막: 시엘의 문제를 해결하라' 같은 퀘스트가 나올 게 거의 기정사실이었겠지만....
'시엘이 빙의자인 경우엔 어떻게 되는 거지?'
알 수 없다.
이 빌어먹을 특전은 정보를 너무 적게 준다. 다른 웹소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설명이 긴 것도 있던데 왜 이건....
그리고 이 특전 시스템에 관련된 정보부족은 두 번째 문제와도 직결된다.
'사냥터 입장권이란 건 또 뭔데?'
중간보상으로 '자색 사냥터 입장권'이라는 것을 한 장 얻기는 했는데, 도대체 이걸 어따 써먹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대충 짐작은 간다.
사냥터라는 이름답게 각종 [신비]들을, 혹은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 대로 사냥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겠지.
또 '자색'이라는 이름이 붙은 걸로 봐서 색깔로 등급이 나뉘는 걸 테고.
'보라색부터 시작하는 걸 봐서는 무지개색을 따라서 7단계로 구분되려나? 지금 시점에 자색을 얻은 걸 보면 적색이 가장 높은 등급일 거 같군.'
일단은 이 정도까지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사냥터라는 곳에서 어떤 것들이 등장하는지, 사냥 난이도가 어떻게 되는지, 사냥할 수 있는 기간은 어떻게 되는지.
또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이 뭔지, 사냥 중에 현실 시간이 흐르는지. 사냥터에서의 행동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등.
고려할 게 너무 많아서 짜증 난다.
웹소설마다 설정이 너무 다르니 리스크를 생각하면 함부로 사용하기도 겁난다. 기나긴 웹소설 편력과 관련 지식이 오히려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겁 없이 사용하고 봤을 텐데.'
보상이랍시고 줄 거면 좀 직관적으로 알아보고 쓸 수 있는 모듈 같은 거나 던져 줄 것이지, 괜히 골칫거리만 늘어난 기분이다.
'당장은 보류할까.'
당장은 돈이나 정수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아이리 에피소드도 끝나지 않았다. 또 빙의자 문제도 남아있다.
입장권에 사용기한이 정해져 있진 않았으니 일단은 그것들부터 끝내고 시도해 봐도 늦지 않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크흠. 음?"
갑자기 입 안이 건조해졌다.
아까 [쇼케이스] 끝난 직후부터, 묘하게 갈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을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증세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물을 마시면 당장은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목구멍 깊은 곳에부터, 물이 아닌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다.
'당뇨인가?'
혹시나 해서 바이오 모니터를 확인해 봤지만 건강 상태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갈증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한 달 정도 됐던가?
'아무래도 이거....'
큰일 났다.
이건 평범한 갈증이 아니다.
그리고 설상가상.
띠리링-!
그 순간 개인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스팅레이 보안부 쪽에서 온 메일이었고, 나는 그 내용을 찬찬히 읽어 본 후 이를 바득 깨물었다.
제길.
타이밍이 너무 나쁘다.
* * *
아이리의 눈앞에 옛날 집이 보였다.
그녀의 오빠인 피터가 아카데미에서 운 좋게 스팅레이 장학생이 되면서 선물 받은 집이었다.
비좁고, 녹슬고, 깨진 천장에서 비까지 줄줄 새어 곰팡이가 핀 낡은 집.
선물 치곤 영 상태가 좋지 못했지만, 이 도시에선 집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시민권이 없어 폴른 구역 폐허를 전전하던 그들로서는 처음 가져 본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그런 그들의 집 앞에.
갑자기 스팅레이 놈들이 찾아왔다.
말단 사무직원으로 보이는 여자는 아이리에게 작은 플라스틱 상자 하나를 건넸다.
-피터 존스의 유품이야.
-자, 잠깐만요! 오빠의 유품이라니?
-분명히 전했다. 어후, 폴른 출신이라 그런가? 이런 구질구질한 E섹터에서 용케도 좋다고 사는구나.
-뭐, 뭐라고요?
-아, 그리고 네 오빠가 사라진 탓에 네 시민권 발급도 취소됐다. 집도 회수하기로 했으니까 일주일 내로 나가렴.
갑작스런 통보.
아이리는 커다래진 눈으로 직원들을 바라봤으나, 그들은 추가 설명도 없이 등을 돌려 떠날 뿐이었다.
-야, 이 개년들아!!
아이리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팔이 짧아서 공격이 전혀 닿질 않았다.
고개를 숙이니 작고 허약한 몸이 눈에 들어왔다. 팔다리도 훨씬 짧았다. 그 탓에 그녀는 이렇다 할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흠씬 얻어맞고 길바닥에 쓰러졌다.
이내 스팅레이 직원들은 그 자리를 떠났고, 아이리는 얻어맞아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떠서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그럴 리가 없어. 오빠가 죽었을 리가....
상자 안에는 칩이 들어있었다.
전투 모듈이라고 불리는, 적응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특별한 데이터칩. 그것을 보자마자 아이리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오빠의 물건이었다.
이윽고 장면이 전환되었다.
갑자기 아이리는 한 무리에게 쫓기고 있었다. E섹터 거주지구에서 활동하는 양아치들이었다.
-씨발! 거기 서라, 꼬맹이!
-그것만 주면 안 건든다니까!
아이리의 품에는 오빠의 유품인 전투 모듈이 들어있었다. 제대로 모듈 감정을 의뢰하기 위해 뒷골목 모듈러를 찾아가던 중 놈들의 눈에 띄고 말았다.
적응자용 전투 모듈은 기본적으로 비싼 값에 거래된다.
양아치들은 불온한 의도를 감춘 채, 선량한 얼굴로 위장하여 아이리에게 설렁설렁 접근했던 것이다.
아이리는 그들이 말을 걸기도 전에 그 검은 속내들을 눈치챘다. 그래서 곧장 등을 돌려 E섹터 뒷골목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양아치 사이에 증강자가 섞여 있었던 탓에 얼마 가지 못해 막다른 길에 몰리고 말았다.
-거, 개 같은 꼬맹이. 사람 존나 피곤하게 만드네. 서로 더 힘 빼지 말고 줄 거 주고 끝내자.
-절대 못 줘, 망할 새끼들아!
-하하, 다시 지껄여 봐.
양아치 하나가 바지를 걷어 올렸다. 흉흉한 검은색으로 빛나는 기계 다리가 드러났다.
-퓨어리티 서비스의 야심작, '오스트리치 래그 Mk.5'다. 나 이거 이어 붙인다고 꽤 아팠다? 근데 그만큼 성능은 좋아. 거의 어지간한 전투 모듈 저리 가라거든.
명백한 협박.
아이리 역시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증강자가 섞여 있다면 얘기는 달랐다. 저 다리에 얻어맞으면 멀쩡할 리가 없을 테니.
그러나 아이리는 굴하지 않았다. 오빠의 유품을 눈 뜨고 빼앗길 수는 없었다.
-못 들었어? 다 꺼져! 못 준다고!
-허! 매를 벌어요, 들개 같은 년이.
양아치들은 그녀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왔고, 아이리는 반격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절대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의 뒷덜미에 모듈을 꽂아 넣으려 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경이로운 움직임으로 양아치들을 전부 묵사발 내버렸다.
부지불식간에 사태를 종결시킨 남자는 손을 탁탁 털며 양아치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등 뒤로 아이리에게 묻는다.
-괜찮아? 다친 덴 없고?
그리운 목소리.
절대 다시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아이리는 울컥하는 마음에 사내를 향해 달려가 껴안았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피터 오빠, 대체 어디 갔었어...! 나는 틀림없이 오빠가 죽은 줄 알고...!
그러자 피터가 대답한다.
-오빠? 무슨 소리지?
-뭐?
아이리가 당황하는 사이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것은 피터 존스가 아니라....
-아론 스팅레이!? 어, 어째서!?
황금색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복장도 깔끔한 검은 양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이리가 당황하자 아론이 재차 묻는다.
-다친 데는 없느냐고 물었다.
-어, 없는데... 요....
-그래. 다행이군.
우물쭈물 대답하는 아이리.
그런 아이리의 머리 위로 아론의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자신을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뭐, 뭐, 뭐 하는 거예요!?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처음 보는 아론의 모습에 아이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요동쳤다. 결국 참지 못한 아이리는 아론의 손길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다, 다행은 개뿌우우우울!!
* * *
"다행은 개뿌우우울-!!"
허억, 허억.
아이리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최신식 가구들로 도배된 깔끔한 방이 보였다. 언뜻 여기가 어딘가 싶었으나, 이내 자신의 기숙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 방금 그건...?'
아무래도 꿈이었던 모양이다.
[쇼케이스]를 포함한 오늘 일과를 마치고 방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었던 게 뒤늦게 기억났다.
이 빌어먹을 아카데미는 오늘 전투를 벌였다고 해서 학생을 쉬게 놔두지 않더라.
아니, 그보다.
"대체 뭔 꿈이 이딴 식이야!"
그렇게 외치는 아이리의 얼굴은.
마치 장미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27화
"형님이 나한테 결재권을 맡겼다고?"
"그렇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마리아는 베네딕트의 책상 위에 전자문서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거기에는 밀리테크와의 [쇼케이스]에서 승리했다는 내용과, 관련기업들의 행동 예측, 또 그에 따라 앞으로 스팅레이 재단이 취할 전략에 대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보고서 마지막 부분, 전략을 이대로 시행해도 좋을지 결정을 내리는 서명란은 아직 비어 있었다.
베네딕트는 그것을 곁눈질로만 슬쩍 훑어보고는 다시금 마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탁탁거리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자세가 퍽 불만스러워 보였다.
"넌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르는 척 마라. 오랫동안 형님 옆에서 보좌해 온 너라면 무슨 뜻인지 알 거 아니야?"
베네딕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면, 그때 내게 협력하겠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었나? 생각이 바뀌기라도 했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대답해 보라고. 그 인간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나오는지."
원래라면 아론은 이런 일에 절대 동생이 관여하게 둘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얼핏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초인이지만, 그 속은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뱀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사실을 베네딕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원래의 아론이었다면 복귀한 직후 베네딕트의 '이사장 대리' 직함을 빼앗고 내쫓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최근 아론은 베네딕트를 재단에 남겨 두었을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외부 인재 영입 관련 건은 온전히 그에게 맡겨 두고 있었다.
"단순히 아직 몸이 아프고 귀찮아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꽤 많은 권한을 남겨 줬단 말이지. 이건 마치 정말로 내게 자리를 넘겨주려고 준비하는 것 같잖나."
"...."
마리아가 침묵하는 의미를 단번에 깨달은 베네딕트는 혼자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아직 아프다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건강해 보이고. 또 후계자 싸움에서 손을 떼고 싶어진 건가 싶으면 특별반이니 [쇼케이스]니 이런저런 일을 벌인단 말이지. 그러니까 모르겠다는 거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마리아는 담담히 대답했다.
"최근 들어 아론 도련님의 생각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가도, 종종 다른 사람이 아닐까 싶은 행동을 하시니까요."
"자세히 말해 봐."
"저나 다른 분들을 대하는 태도나 언행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하지만 미유나 앨리스밸 양을 대할 때는...."
"이번에 형님이 뽑았다는 특별장학생들 말이지. 걔네한테만 유독 너그럽다 그건가?"
"그렇습니다."
아이리의 건만 봐도 그렇다.
아론 스팅레이는 하층민들, 특히 폴른 구역의 인물들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그러나 어째서인가, 아이리나 미유에 한해서만은 한없이 인자한 모습을 보인다. 아무리 그녀들이 천재라고 해도 예전의 아론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래서 이유는 너도 모르겠다?"
"그렇습니다."
"쯧. 뭐냐고, 대체.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겼더니 사람이 바뀌기라도 했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뭐?"
"지난번에 말씀드린 셰이드 웰즈 말입니다. 어쩌면 그 죽은 청년이 아론 도련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지도-."
"푸, 푸흡!"
마리아가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베네딕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한참을 웃어젖히던 베네딕트는 이내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는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 터인데."
"...."
"설마 이제 와서 정이라도 들었나? 사람이 바뀐 것 같으니 기회를 좀 더 줘 보자고?"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사족은 됐다."
베네딕트는 손짓을 하며 마리아의 말을 끊었다. 그러곤 보고서에 대리로 서명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딴 서류에 서명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 손가락 몇 번 놀리면 되는 문제니 귀찮기는 해도 별 건 아니지.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아직 '대리직'에 불과하다는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물론입니다, 도련님."
"주인을 문 개는 얼른 새로운 주인을 찾지 못하면 도살장에 끌려갈 뿐이지."
너는 주인을 문 개다.
나는 널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내 신뢰를 얻고 싶다면 제대로 성과를 보여라.
베네딕트는 그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러나 취급에 불만을 품지는 않는다.
이미 각오한 바였다.
설령 잠깐 배신자의 낙인이 찍히더라도, 이 모든 것은 스팅레이 그룹의 번영을 위해서니까.
언젠가 이 희생이 인정받을 때가 오리라고 믿었다.
"그 괴물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증거를 가져와. 그래야 나도 사냥꾼들을 풀 수 있다."
아론이 충분히 약해져 있다는 증거.
아직 병이 완벽히 낫지 않았다는 증거.
노리려면 지금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져오라는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돌아가 봐."
"실례하겠습니다."
마리아는 꾸벅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후 베네딕트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증거라....'
심증이라면 여럿 있다.
자신이 미유를 절대 만나지 못하게 하는 점이라든가. 이따금 자신을 향하는 눈빛이라든가.
그러나 그런 불확실한 것들만으로 베네딕트는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잠자는 괴물의 코털을 건드린다는 위험을 짊어지려 하지 않겠지.
'무언가 확실한 게 필요하다.'
아론의 힘이 건재한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아낼 방법이 필요했다.
어떤 방법을 써야 의심을 사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마리아였으나, 그녀의 마음속에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미는 불안이 하나 있었다.
'만에 하나....'
베네딕트는 자신을 비웃었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아론이 개과천선했다면? 불치병을 계기로 스팅레이의 존속을 위협하는 시한폭탄이 아니라, 진정한 후계자로서 각성한 거라면?
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하지만 어쩌면 스팅레이 그룹의 미래를 빛낼 인물의 등을 자신이 찌르게 된다면... 그것은 견딜 수 없다.
'아이러니하군요.'
한때는 아론이 스팅레이 그룹을 위해 그 끔찍한 성정을 버리고 정신을 차리길 바랐건만, 지금은 여전히 살인귀인 채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니.
역시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사람 일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모양이다.
입안에 맴도는 씁쓸한 감정을 간신히 삼키며, 마리아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 * *
'조, 졸려 죽겠어....'
다음 날.
수업을 위해 교실로 향한 아이리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꿈 때문에 새벽에 깬 이후로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한 탓이었다.
아이리는 평소에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만큼 패턴이 무너지면 맥을 못 추는 스타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카데미에서의 책상 수업은 대부분 사이버스페이스(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었다.
뇌를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하면 AI가 개개인의 교육 상태나 IQ수치에 맞추어 내용을 적절하게 수정한다나 뭐라나.
이렇게 피곤한 몸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이거고 저거고 다 그 인간 탓이야...!'
괜한 마음에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론 스팅레이, 그 양반은 왜 꿈에서까지 멋대로 오빠 포지션을 빼앗는 걸까? 닮은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주제에.
'하, 하여간 도움이 안 돼.'
오래간만에 꿈에서 오빠와 재회할 기회였는데 꿈속의 아론이 다 망쳐 버리고 말았다, 하고 아이리는 누가 들으면 기가 찰 원망을 몰래 쏟아 냈다.
-다친 곳은 없느냐.
'으악! 으아가아아! 아악!'
안 그러려고 노력하는데, 또 그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발작하듯이 자신의 머리를 쾅쾅 쥐어박다가, 사이버스페이스 접속용 캡슐에 몸을 눕혔다.
'아, 진짜 나 왜 이러는 거야!'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으니.
하나 그것도 잠시.
이내 자신의 뒷덜미에 꽂혀 있는 모듈칩의 존재를 인식하자 차갑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꿈이라....'
기묘한 형태로 끝나 버리긴 했지만.
그 부분만 제외하면 어젯밤 꾸었던 꿈의 내용 중 대부분은 현실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다.
스팅레이 직원으로부터 퇴거명령을 통보받은 일.
오빠의 유품이라면서 모듈칩을 받았던 일.
모듈러에게 그것을 감정받으러 갔다가 양아치들에게 찍혀서 쫓겼던 일.
거기까지가 전부 사실.
다만 딱 하나.
다른 사실이 하나 있다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그녀를 구해 주러 왔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현실에서는 결국 혼자 양아치들과 싸워야 했다.
그러다 궁지에 몰리는 바람에, 어떻게든 빼앗기지 않으려 하다가 급한 대로 자신의 소켓에 모듈을 끼워 넣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우...."
아이리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뒷덜미 모듈 소켓을 만지작거렸다.
그곳에는 오빠의 유품인 전투 모듈이 박혀 있었다. 어찌나 자주 만져댔는지 끝 부분이 살짝 닳아 있었다.
'이걸 어떻게든 문제없이 제거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번 [안전한 모듈관리법] 강의를 맡은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그는 교실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대뜸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앨리스밸 양."
"...."
"아이리 앨리스밸? 여기 없나요?"
"아? 아아, 네! 여기 있습니다!"
갑작스레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반응이 조금 늦어지고 말았다.
아이리는 바짝 긴장하며 머릿속으로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나 필사적으로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사였다.
"후원자님이 급히 부르시는군요. 다녀오도록 하세요."
"...네? 왜요?"
"난들 알겠나요? 출석에는 이상 없도록 처리해 둘 테니 얼른 다녀오세요."
음?
이렇게 멋대로 수업을 빠져도 괜찮은 걸까? 이 아카데미의 시스템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교수는 물론 다른 학우들까지 어서 안 가고 뭐 하고 있느냐는 식으로 아이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렇지....'
자신의 뒷배는 이 도시를 지배하는 황족의 일원이었지.
수업을 충실하게 듣는 일 따위보다야, 높으신 분들의 지시에 따르는 게 여기 사람들에겐 당연한 일이리라.
"...네. 다녀오겠습니다."
아이리는 미련 없이 교실을 나섰다.
* * *
아카데미 249층.
스팅레이 장학재단 사무소 아카데미 지부 가장 안쪽에 있는 방 앞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들어오도록."
낮게 울리는 미성.
아이리는 조심스레 사무실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하지만 한 발짝 옮기자마자 시선에 담긴 광경에 긴장감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스팅레이 장학생 기숙사도 충분히 호화스럽다고 생각했거늘, 아론의 사무실은 차원이 다른 부유함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저 그림 TV에서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분명 팔면 B섹터의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던데 분명 가격이....'
"B섹터가 아니라 A섹터에 집을 구할 수 있는 수준일 거다."
"네?! 뭐라고요?!"
갑작스러운 아론의 발언에 아이리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지금 나도 모르게 생각을 입 밖으로 낸 건가?
"아니,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더군. '이걸 팔면 B섹터에 집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
그렇게 말하며 아론은 짓궂은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완벽하게 생각을 읽혔기에 아이리는 차마 반박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저, 그, 그게...."
"됐다. 그쪽 소파에 앉아라."
"아, 아뇨. 지금 수업 중에 나온 거라서요. 금방 돌아가야 해요. 빨리 용건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다른 이가 들었으면 경악할 만한 무례함이었으나 아이리는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제 선에선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론 역시 그 사실을 아는 듯이 그녀를 딱히 나무라지는 않았다.
"[안전한 모듈관리법] 강의 말이지. 오늘 수업은 완전히 빠진다고 지금 막 전달해 두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네? 그, 그래도 되나요?"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잖나. 밤잠이라도 설친 거겠지. 그런 컨디션으로 수업을 듣느니 여기서 쉬다 가는 게 네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
누, 누구 때문에 피곤한 건데!
차마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고 아이리는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상상 이상으로 편안해서 깜짝 놀랐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잠들어 버릴 듯했다.
그런 아이리의 반응을 즐기듯, 잠시간 바라보던 아론은 이윽고 본론을 꺼냈다.
"오늘 너를 불러낸 이유는 네게 꽂혀 있는 그 고장 난 전투 모듈 때문이다."
"아, 설마...?"
그제야 이해가 갔다.
모듈 관리법 강의인 만큼 수업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레 이 전투 모듈에 대한 것도 알려졌을 테지.
당연히 아이리로선 딱히 그게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기에, 이번만큼은 아론의 혜안과 배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걸까? 아무리 스팅레이 가문 사람이라고 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그렇게 내심 감탄하는 동안, 아론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조만간 볼일이 있어 한동안 자리를 비울 예정이다."
"출장이라도 가시나요?"
"그런 셈이지. 그 전에 네게 이것저것 일러둘 것이 있어서 말이다. 말하자면 '미션'인 셈이지."
"미션?"
"설명을 위해 일단 보여 줄 게 있다."
아이리의 되물음에 아론은 대답 대신, 손을 아래로 뻗더니 무언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내 그 물건의 정체를 깨달은 아이리는 또다시 경악했다.
"자, 잠깐 그거...!?"
물건 같은 게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긴 머리칼에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여자애.
그녀는 아론의 손에 대롱대롱 붙잡혀 있다가 책상 위로 꺼내졌는데, 그 운반 방법이 마치 새끼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아, 아론 씨이...."
울먹거리며 아론을 원망스레 바라보는 여자아이.
그러나 아론은 그 눈길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미유라고 하는 녀석이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을 이었다.
"앞으로 네가 돌봐 주거라."
아카데미 흑막 시점 28화
결국 살인충동이 도졌다.
뭔가 이렇게 말하니 굉장히 중2병 말기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웃어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미치겠군.'
목이 계속 마르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묘한 갈증이 식도를 괴롭히고 있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강렬하고도 새로운 자극을 바라는 듯했다.
'이 몸이 살인귀가 된 이유는 단순히 삐뚤어진 성격 때문만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나는 과정 중에 뭔가 에러가 있었던 걸지도.
소설에서야 금방 퇴장하는 빌런이니 당연히 그런 부분까지 세세하게 묘사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이딴 몸에 빙의한 것을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그리고 뭣보다 지난번 블랙마켓에서 한바탕 한 이후, 이럴 때를 대비해 계획을 마련해 두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 전에.
미리 몇 가지 문제를 처리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것도 가급적 정신이 말짱할 때에 말이다.
* * *
아이리와 미유를 한 자리에 모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앞으로 네가 돌봐 주거라."
"자, 잠깐 왜 그런 곳에서...?!"
아무래도 아이리는 엄한 생각을 하는 듯했지만 오해였다.
미유는 사무실에 먼저 도착했다가, 인기척이 나자마자 내 책상 뒤에 숨은 것뿐이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다시 밖으로 끄집어냈을 뿐이고.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아이리는 황당무계한 소리를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직 이 상황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거겠지.
"그, 그보다 돌봐 주라는 건 대체...?"
"말 그대로의 의미다."
나는 차분히 설명했다.
"이 녀석도 너와 같은 스팅레이 특별장학생이다. 하지만 보다시피 지나치게 낯을 가리는 성격이다 보니 조금 관리가 필요하지."
"특별장학생이라고요?"
그게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는 듯한 아이리.
미유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히익! 하고는 또다시 도망치려 들었다.
몸에 배어 있는 아이리의 거친 태도에 겁을 먹은 거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구름거미]의 실로 다시금 꽁꽁 붙잡아 책상 위에 되돌려 놓은 후에 말을 이었다.
"과학기술부 1학년, 너와 동기다. 내 전속 모듈러이기도 하지. 단언하건대, 내가 아는 최고의 기술자다."
"모듈러라면... 아!"
내가 하려던 말을 바로 알아챈 듯했다.
우리 아이리가 고된 어린 시절 탓에 상식이 부족해서 그렇지, 눈치가 느린 애는 절대로 아니다.
"그래. 이 녀석이 네 모듈 문제를 해결해 줄 거다. 친하게 지내면 좋겠군."
"하지만 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요? 게다가 그게...."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지?"
"윽...."
내가 짓궂게 묻자 아이리는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쇼케이스]를 관람하던 각 기업 높으신 분들을 상대로 손가락 욕을 날려댄 건 평범한 배짱으론 저지르지 못하는 일이다.
내가 나서서 수습하지 않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처벌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나야 아이리가 원래 그런 성격임을 알고 있으니 별로 신경 안 쓰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안 되는 건 아니므로.
"이번 건은 그때의 처벌도 겸하는 것이다. 내가 없는 동안 이 녀석을 케어해 준다면 지금까지 네가 저지른 여러 문제도 없던 일로 해 주지."
"저, 정말 그걸로 괜찮나요?"
처벌치고는 너무 가볍지 않나 하는 얘기다. 하지만 애초에 그리 무거운 처벌을 내릴 생각도 없었다.
이번 [쇼케이스]를 통해 얻은 이득이 만만찮았고, 밀레테크 쪽에도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또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아이리를 길들이는 것 자체가 내 진짜 목적이기도 했다.
'일단은 신뢰를 쌓는다.'
아직은 나에 대한 호감 이상으로 스팅레이에 대한 경계심이 크기에 이후 계획의 빌드업을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다.
앞으로 졸업할 때까지 '아이리 앨리스밸'이라는 인물 자체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에피소드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쉬워 보이는 모양이지? 이 녀석을 돌보는 게."
"아, 아론 씨이...."
그렇게 묻자, 책상 위에서 새끼고양이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던 미유가 나를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표정이 겁을 먹은 건지 불만스러운 건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사, 사람을 그렇게 무슨 골칫거리 같은 식으로 말씀하시며어언...."
"벌써 이틀째 무단결석을 하는 중인 녀석이 할 말이 아니지 않나?"
"히이...."
내가 대꾸하자 미유는 반박할 수가 없는지 뭔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를 내며 울먹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는 내 마음도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작고 연약한 녀석을 내버려두고 떠나는데 어떻게 즐거울 수가 있겠는가. 집에 가스불 켜 놨는데 갓난아기 혼자 놔두고 나온 기분이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가장 믿을 만한 인물인 아이리에게 미유의 케어를 맡기는 거다. 둘이 친해지면 더 좋고.
"돌봐 주라고 해도 어떡하라는 건데요? 설마 아기처럼 옷 입히고 밥까지 떠먹여야 하는 건 아니겠죠?"
"이미 그건 담당 안드로이드들에게 맡겨 뒀으니 필요 없다."
"아니, 진짜 필요한 거냐고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돌봐 주라는 이야기다. 새로 생긴 동생처럼."
"...네. 뭐 일단은 알겠어요."
여러모로 혼란스러워 보이는 아이리.
하지만 내 지시이기도 하고, 미유가 뛰어난 모듈러라고 하니 불만이나 의문은 제기하지 않는 듯했다.
자, 그럼.
이쪽 두 사람 쪽 문제는 해결됐으니, 슬슬 출발해야겠다.
"둘 다. 이곳에서 조금 휴식하다가 다음 수업에는 출석하도록. 한동안 자리를 비울 예정이니 그동안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트러블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내 예상이 맞다면,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아이리는 무척이나 '괴로운 경험'을 하게 되겠지.
그 과정을 상상만 해도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스슥.
옷걸이에 걸쳐둔 코트를 챙겨 입으니 창밖 주차장 쪽에 타이밍 맞게 비행형 수송차가 도착했다. 평소에 타던 세단이 아니라, 장갑차처럼 무장이 되어 있는 물건이었다.
곧장 연락이 들어왔다.
-어서 타시죠.
"그래. 지금 가도록 하지."
상대의 연락에 가볍게 답하고서 테라스 쪽을 향했다. 그러던 그때, 아이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를 불러 세웠다.
"자, 잠깐만요."
"왜 그러지?"
"그, 그게...."
내가 돌아보자 아이리는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마음을 굳히고는 이렇게 물었다.
"언제 돌아올 거예요?"
"복귀 일정은 일주일 뒤다."
"아... 일주일... 그렇구나...."
"다만 조금 더 늦어질 수도 있다."
"왜, 왜요?"
아이리가 물었으나.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조차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불확실한 요소가 많았기에.
"혹여나 내가 없는 동안 도움이 필요하거든 시엘을 찾도록 해라."
"그 안드로이드 말이죠?"
"그래."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마지막 보험까지 들어 놓은 후, 나는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수송차로 향했다.
* * *
비행형 수송차 외부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어떤 기업 소속 차량인지 알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두꺼운 특수 플라스틱 재질의 장갑이 외부를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고, 겉면에는 에너지 계열 탄환을 튕겨 내기 위한 도료까지 코팅되어 있었다.
-이목이 쏠리기 전에 타시죠.
"재촉하지 마라."
수송차에 다가가자, 수송차의 뒷문만 살짝 열리며 내부가 드러났다.
투박하고 거칠어 보였던 외부 디자인과 달리, 내부는 상당히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VIP용 미니바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대단한걸.'
슬슬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이건 또 차원이 달랐다.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해 힘을 바짝 주었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허나 거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아론 스팅레이답지 않다. 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검은 차폐막 너머의 누군가가 말했다.
곧바로 수송차는 부드럽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옆면의 패널이 밝혀지며 창문처럼 외부의 광경을 비추기 시작했다.
어느덧 수송차가 정상궤도로 올라섰고, 나는 자연스럽게 쿠션에 몸을 기대며 짤막하게 말했다.
"물."
[탄산수로 드릴까요?]
"그냥 생수."
[알겠습니다.]
내 요구에 차량에 설치된 AI 바텐더가 응답했다. 내 팔걸이 컵홀더에 물이 담긴 생수잔이 스르륵 솟아올랐다.
계속 목이 탄다.
좀처럼 가시지 않는 갈증을 물로 달래고 있자니, 차폐막 너머의 상대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뻔뻔하군요, 아론 스팅레이. 자기 집 안방처럼 행동하는 게 말입니다."
"겨우 물 한 잔을 요구했을 뿐인데 뻔뻔하다는 소리까지 듣게 됐군. 아니면, 고작 이 정도도 제공하기 힘들 만큼 밀레테크의 상황이 힘들어졌나?"
"잘 아는군요. 누군가의 덕에 말이죠."
"그것 참 미안하게 되었군."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차량 중간을 나누고 있던 차폐막이 스르륵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사이버웨어로 개조한 족제비형 얼굴이 나타났다.
블라디미르 하리토노프.
밀레테크 재단의 이사장이었다.
"그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죠. 언제부터 당신이 사과 같은 걸 하는 위인이었다고."
"난 진심이다만."
"뻔뻔하군요."
블라디미르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어제의 [쇼케이스]의 결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죠."
"모른다."
진심이었다.
그야 보고서는 읽지도 않고 전부 베네딕트 쪽에다가 넘겼으니까. 대충 밀레테크가 휘청거렸겠거니, 하고 짐작만 할 뿐 자세한 상황까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 진솔한 대답이 블라디미르의 귀에는 크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이 인간이 진짜!"
철컥.
블라디미르의 손에 권총이 나타났다.
"당신 때문에 내 지위까지 위험해졌어. 어제 이사회가 날 징계하겠다고 난리 피우는 걸 아버지가 간신히 설득했지."
"먼저 시비를 걸었던 건 그쪽 아닌가?"
"애들 싸움으로 대충 덮을 수 있던 걸 그런 식으로 키웠던 건 당신이죠."
원래 [쇼케이스]란 게 그런 식이다.
중세 귀족의 결투와 같이 걸어온 싸움을 받지 않는 것도 상당한 불명예로 취급된다.
하지만 일단 시작되면 어느 한쪽이 확실하게 피를 보게 되니 [쇼케이스]는 전통처럼 내려오면서도 그 빈도가 점점 줄어들어 왔다.
결국 [쇼케이스]는 모의전이다.
한때 병사들을 갖고 벌이던 흥미 위주의 내기가, 어느 샌가 진짜 전쟁을 벌이기 전 서로의 전력을 가늠해 보는 모의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마음 같아선 이 자리에서 그 잘난 미간을 쏴 버리고 싶군요."
"내게 그런 장난감은 안 통한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물론이죠. 대신 이 수송차를 통째로 폭파시켜 버리면 당신도 무사하진 못하겠죠."
그럴 수도 있겠지.
지난번에 보았을 때, 블라디미르에겐 Lv.5짜리 실드 모듈이 있었다. 어지간한 폭발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으리라.
반면 나는 위험하다.
전성기 때의 스펙이라면 모를까, 지금 상태로는 높은 확률로 죽는다.
폭발을 견뎌 낼 만큼 튼튼한 상태가 아닐뿐더러, 폭발까지는 어떻게든 막아도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무사하진 못할 테지.
그러나 나는 안다.
"넌 그러지 않겠지, 블라디미르."
"...."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 있었으면 기습적으로 저질렀을 거다. 애초에 자폭만으로 날 확실하게 끝장낼 자신도 없을 텐데, 미리 알려 준다는 건 대비할 시간까지 주는 셈이니까."
"...뭐, 그렇죠."
블라디미르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는 총을 다시금 집어넣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이런 양측의 관계가 험악해진 상황에서 굳이 제안할 게 있다니... 누구라도 궁금해지지 않겠습니까?"
"좋은 판단이로군. 네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터이니."
"그건 듣고 나서 판단하겠습니다. 아직 자폭 버튼은 유효하니까요."
어떻게든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거겠지.
"뭐,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내 요구를 하나 들어주는 대신 쓸 만한 물건을 하나 제공하도록 하지."
"먼저 그쪽이 뭘 원하는지부터 말씀하시죠. 터무니없는 걸 요구한다면 바로 여기서 내려야 할 겁니다."
"...그래, 좋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즉답했다.
"이틀 뒤, 내가 탄 차량을 습격해 주길 바란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29화
"당신이 탄 차량을 습격해 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블라디미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야 앞뒤 맥락 전부 다 자르고 얘기했으니 황당할 만도 하겠지. 하지만 이것으로 그가 내 이야기에 확실하게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데에 성공했다.
나는 생수잔을 비우면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조만간 시찰을 나가야 한다."
"시찰이요?"
"우리 생산 콜로니 중 한 곳이다. 최근에 [신비] 무리가 그 근방에 모이고 있다더군."
"아, 당신이 평소에 하던 그거군요."
블라디미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내가 빙의하기 전부터, 아론 스팅레이는 그 압도적인 무력 덕분에 스팅레이 재단 이사장직 외에도 보안부 활동을 종종 겸하고 있었다.
즉, 아카데미 내외부에서 쓸 만한 인재들을 발굴하고 관리하는 것이 평소의 일이라면.
이따금 최종병기처럼 위험한 지역에 투입되어 적들을 쓸어버리는 게 부가적인 일이었다.
"근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요? 복귀했으니 당신은 할 일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번엔 거절할 생각이다."
"네?"
블라디미르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당신을 부른 시점에서 예삿일은 아닐 것 같은데요. 그런데도 거절할 생각이라고요?"
"그렇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외동아들인 너와 달리, 내겐 형제가 두 명이 있다."
"...."
그것만으로 블라디미르는 곧장 상황을 이해한 듯이 보였다.
"사내 정치 문제군요."
"음."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블라디미르의 머릿속에선 이미 내가 긍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의 족제비 같은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당신답군요, 아론 스팅레이. 회사가 조금 타격을 입더라도 후계 싸움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감내할 만한 희생이다, 이건가요?"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한 적 없다."
"그래, 그렇겠죠. 당신은 최선을 다해서 괴물들과의 싸움을 준비했겠죠. 다만 이동 중 불의의 습격을 당해서 피치 못하게 전선에 합류하지 못하게 될 예정이고요."
"이해가 빨라서 좋군."
나는 물 한 잔을 다시 주문하여 잔을 손에 쥐었다. 그러곤 칼칼한 목을 축이면서 말을 이었다.
"노려지고 있는 우리 쪽 생산 콜로니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 이용할 수 있는 가치는 충분할 거라고 본다만."
어떤 제품을 제작하고 있던 곳인지.
위치는 어디인지, 규모는 어떤지.
그런 정보들을 조금 더 일찍 입수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이익을 얻을지 생각해 보면 결코 적은 판돈은 아니었다.
가령 단기적으로는 주식이 미리 떨어질 것을 감안하여 미리 고점에 팔아 치워 버린다든가. 혹은 특정 제품 생산 라인이 마비되었을 때를 이용하여 시장을 장악한다든가.
활용할 방향은 무궁무진했다.
블라디미르 역시 그 점을 이해하고 있기에 내 제안에 상당한 흥미를 보이는 듯했다.
"의뢰비로는 차고 넘치는군요."
"받아들이는 건가?"
"아뇨.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신용의 문제로군."
"그렇습니다."
간단히 말해, '지금 네 말을 어떻게 믿어?'라는 거다. 하기야 이미 [쇼케이스]를 통해 밀레테크에 한 방 먹인 남자의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솔직히 말하지요. 전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아론 스팅레이."
"그건 참 친구로선 안타까운 일이로군."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설령 그 웃기지도 않는 친구 타령은 넘어간다 치더라도, 스팅레이의 잠재적 후계자의 차량을 습격하는 건 장난으로 벌일 만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가령 내가 준 정보가 거짓이라면?
내 말을 믿고 작전을 준비해 뒀다가 내가 배신한다면? '밀레테크가 스팅레이의 황태자를 죽이려 했다!'라며 전쟁을 벌일 명분을 주는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설령 당신의 말이 100% 사실이고 제가 받아들인다고 해도, 습격 자체가 성공하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황태자를 태우고 전장으로 향하는 수송 장갑차가 어디 평범한 비행형 자동차겠는가?
어지간한 철갑탄이나 에너지탄 따위는 가볍게 씹어 먹을 두꺼운 장갑에, EMP 대책, 최신식 미사일 방어시스템도 기본.
차량이 지나는 인근 지역에는 사람을 쫙 배치해서, 차량이 도시를 벗어날 때까지 거동이 수상한 사람은 없는지 샅샅이 확인할 것이다.
"어쭙잖은 연기로는 그 경계망을 뚫지도 못할 테죠. 그렇다고 힘을 지나치게 실었다간 당신이 진짜로 죽어 버릴 테고요."
거기까지 말한 블라디미르는 양손을 들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저는 이번 일에서 손 떼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리스크가 크군요."
"그런가. 안타깝게 되었군."
"이거야 원. 죄송해서 어쩌지요?"
전혀 미안함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차라리 솜씨 좋은 뒷골목 용병단이라도 알아보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면 마피아 놈들과 거래하시든지요. 안 그래도 요새 그런 밑바닥 인생들이 부쩍 늘어서, 조금만 품을 들이면 당신 혼자서도 그것들과 접촉할 수 있을 텐데요."
블라디미르의 비아냥에도 나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재미있군. 너는 벌써 네가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무슨?"
"그렇지 않은가? 나는 이미 우리 생산 콜로니 중 한 곳이 위험하다는 정보를 넘겼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았으나, 밀레테크라면 금방 유추해 낼 수 있을 테지."
"...."
정곡을 찔렸는지 블라디미르의 미간이 다시금 좁혀졌다.
"설령 내 말이 전부 거짓이었다고 해도 너는 이 대화의 녹음본을 통해 내 약점을 하나 쥘 수 있다. 왕좌를 위해 그룹을 위험에 빠뜨리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후계자 경쟁에서는 크게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테니."
"지금 와서 눈치채는 건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아론 스팅레이?"
코웃음을 치는 블라디미르.
"나쁘게는 생각하지 마시지요. 어제 [쇼케이스]로 저한테 제대로 엿 먹이지 않았습니까? 그 대가라고 생각하십시오."
"물론이다. 친구끼리 이 정도 티격태격 할 수도 있는 거지. 이미 같은 배를 탄 상대에게 이러쿵저러쿵 따질 생각은 없다."
"자, 잠깐만요."
내 대사에 블라디미르가 흠칫 몸을 떨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같은 배라니요? 제안은 거절한다고 했을 텐데요? 지금 무슨 소리를...."
"블라디미르."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네겐 거부권이 없다."
"뭐, 뭐라고요?"
"언론에 어떻게 해명할지 선택하는 수밖에 없을 거다. 우리가 정체불명의 이에게 습격을 당했던 것인지, 아니면 네 손으로 나를 납치 후 살해한 것인지."
"지금 대체...!"
그때였다.
위잉-! 위잉-! 위잉-!
갑작스레 차량 내부에 붉은 경고등이 켜지며 사이렌이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는 당황하며 운전사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조, 조심하십쇼! 적습입니다!"
"뭐, 뭐라?!"
그 순간.
무언가가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더니 나와 블라디미르가 탄 차량 조금 옆에서 폭발했다.
날아오던 중에 차량 내장 미사일 방어 시스템에 요격당한 것이었다.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차량이 크게 휘청거렸다. 차량에서 좀 떨어진 거리에서 요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가 미친 것이다.
블라디미르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미, 미사일이라고? 미친! 대체 어떤 미친놈들이 감히 우리한테...!"
"네 조언대로 쓸 만한 용병을 구했다. 네 말마따나 조금 뒤져 보니 금방 나오더군."
솔직히 나 역시 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혼자 뒷세계 용병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한참을 조사하다가 결국 포기할까 하던 중이었는데, 우연히 원작에서도 몇 번 언급되었던 용병 중개상의 이름이 광고에 뜨는 게 아닌가?
나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놀랐다. 돈만 충분히 쥐여 주면 스팅레이와 밀레테크의 후계자들이 탄 차량도 목숨 걸고 습격해 주는, 정신 나간 놈들이 생각보다 많더군."
계획 자체는 스팅레이 보안부로부터 메일이 도착했을 때 곧장 준비했다. 개인 계좌에 금액도 충분했으니, 작전을 실행하는 데에 아무런 차질이 없었다.
"다, 당신 짓이었어?!"
블라디미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그러나 나는 단번에 그 손길을 내치며 말을 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실드를 미리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이다. 조만간 이 수송차는 추락할 테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시죠! 아직 장갑과 미사일 방어 시스템은 건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당신도 절대 멀쩡하지는...!"
"블라디미르. 너는 너무 섣불리 입을 놀리는 버릇이 있다."
모듈 온라인 [구름거미].
내 손에 겁은 장갑이 씌워짐과 동시에 나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촤르르륵!
사방으로 실이 쏘아졌고, 차량 내부의 인테리어가 전부 썰려 나가며 불꽃을 튀겨댔다.
쿠우우웅-!
내부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는지 자체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운전사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미, 미사일 방어 시스템 에러! 에너지 실드도 한꺼번에 날아갔습니다! 다음 공격을 막을 수 없습니다!"
"무, 뭐?! 으아악! 아론 스팅레이, 이런 미친 새끼야아아아아!"
블라디미르가 흔들리는 차체에서 손잡이를 불끈 붙잡은 채 절규했다. 아니, 사태가 사태다 보니 반쯤 울고 있었다.
"이, 이런 미친 인간을 다 봤나!? 어디 숨어서 잠적하고 싶은 거면 혼자 도망치면 되지 왜 날 이용하려 하는 겁니까!?"
"조금 골치 아픈 문제라 말이지. 조금 거칠어도 이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제기랄!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압니까!? 지상에 내려가는 순간 녹취록 싹 다 까발려 버릴 테니... 아니, 잠깐! 손에 그건 또 뭡니까!?"
"이 차량의 블랙박스지."
"그건 또 어떻게 찾았대!?"
조금 전에 차량 내부를 난도질하던 중 발견해서 뜯어냈다.
사방으로 실을 쏘아냈을 때 유독 잘리지 않는 물건이 있어서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제 블랙박스 쪽은 해결했고, 실시간으로 대화를 외부로 전송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없으니, 이제 남은 건 사람의 기억뿐이다.
나는 블라디미르에게 통보했다.
"네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살아서 내게 협조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죽어서 협조하는 방법."
콰아아아앙-!
마치 자로 잰 듯한 타이밍에 미사일이 한 발 더 날아와 수송차를 타격했다.
방어시스템이 무력화되었기에 이번에는 직격. 다만 장갑이 두꺼웠던 탓에 한 발 정도는 문이 조금 찌그러지는 정도로 버텼다.
"...이런 제기라알!!"
블라디미르가 분노를 터뜨렸다.
당연히 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테지. 선택지는 사실상 하나뿐이다.
"혀, 협조하겠습니다! 협조할 테니까 저 빌어먹을 미사일 좀 그만 날리라 해요!"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군."
"...뭐?! 어째서?!"
"이 차량은 확실하게 없어져 줘야 한다. 그래야 증거가 남을 확률이 적으니."
"뭐라고?! 야, 이 개새끼야!!"
"네겐 Lv.5짜리 실드 모듈이 있지 않나. 네 몸 하나는 확실하게 지킬 수 있을 거다."
"왜 맨날 나한테만 이러는 겁니까! 예?! 내가 만만해?! 내가 호구로 보이는 거냐고, 씨바아알!"
"네가 가장 믿음직스럽기 때문이다."
"지랄하지 마!"
블라디미르는 역정을 냈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나는 그가 힘에 굴복하는 인물임을 믿고 있다.
블라디미르라면 내가 복수할 것을 두려워해 함부로 약속을 어기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 설령 이곳에서의 대화를 까발린다고 해도 '밀레테크의 후계자'라는 명패 때문에, 그 진실성이 흐려지겠지.
적어도 내가 잠적을 끝낼 때까지 혼란이 계속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 혼자 자작극을 벌이는 것보다야, 이 녀석을 끌어들이는 편이 여러모로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 내게 협력하는 대가로 조금 전에 말했던 생산 콜로니에 대한 정보를 보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네가 알아서 판단하도록."
"으아아, 미친 새끼가! 사람 말 좀 하면 들으라고오오!"
"주의해라. 또 한 발 오는군."
미사일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차체와 미사일이 충돌하며 재차 폭발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이 조금 더 찌그러졌을 뿐이었다.
"지나치게 튼튼하군."
역시 밀레테크의 기술력인가.
생각보다 잘 버텨서 이러다간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힘을 주어 덜렁거리던 차량의 문을 [구름거미]로 잘라 냈다.
서걱.
두껍기 그지없었던 문이 떨어져 나가며 차량 외부가 훤히 보였다.
세찬 바람이 차량 내부로 들이치자, 안 그래도 불안했던 차체가 더욱 흔들리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잡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추가 미사일이 지상에서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온다. 준비해라."
1초 남짓한 시간.
그렇게 짤막한 말만 남기고, 주머니 안쪽에 있던 물건을 쭉 찢었다.
"으아아아아아악-!"
블라디미르의 절규와 함께.
큰 폭발이 일었고.
세상이 뒤집혔다.
* * *
"어... 그러니까...."
"...."
"이름이 미유라고 했었지?"
"...."
"나는 아이리라고 하는데."
"...."
"아이리 앨리스밸."
"...."
"너는 그냥 미유야? 성은 없고?"
"...."
"...."
"...."
숨이 턱턱 막혔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도통 대답하지 않는 상대 때문에, 아이리는 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이건 낯가림이 심하다는 정도가 아니잖아...!'
아론이 있을 때는 그나마 나았는데, 아이리와 단둘만 남게 되자 미유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것이 사람인지 전원이 나간 안드로이드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걸 어째야 해?'
무시당한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것이, 미유가 겁을 먹은 것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말을 씹고 싶어서 침묵하는 게 아니라, 너무 겁을 먹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다.
맹수를 만나면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굳어 버리는 것 같은 느낌.
아이리는 미유를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일단 굉장히 몸집이 작았다.
자신도 그리 키가 큰 편이 아니었지만 미유는 머리 하나는 더 작았다.
아카데미는 분명 20살 이상부터 들어 올 수 있을 텐데, 어떻게 봐도 성인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피부는 창백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하얬고, 팔다리도 굉장히 가늘었다.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방에서만 지내는 모양이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유난히 긴 머리.
얼굴 대부분을 가리는 것은 물론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다. 굉장히 불편할 것 같은데 먼지가 묻어도 상관없다는 걸까.
그 기다란 앞머리 사이로 눈이 살짝 드러났는데, 겁에 질려 지금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 거람....'
나름 산전수전 다 겪어 온 아이리조차 미유를 어떻게 상대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과장 좀 보태서 주인한테 잔뜩 고문당하다가 폴른 구역으로 도망쳐 온 안드로이드조차 미유보다는 상태가 좋았다.
'...뭐, 나름대로 상처가 있는 거겠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무신경하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미유에게 꾸준히 말을 걸었다.
"언제부터 그 사람이랑 알게 된 거야?"
"모듈에 대해서 잘 안다고?"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니?"
그러나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미유.
아이리는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열불을 터뜨렸다. 아론이 '벌'이랍시고 이 아이를 돌봐 주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말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결국 포기했다.
이런 애를 어떻게 달래라고.
더 힘을 빼다간 수업을 듣기도 전에 지칠 것 같았다.
다만 둘이서 아무 말 없이 멍 때리는 것은 너무 어색하니 TV라도 틀기로 했다. 아이리는 아론의 사무실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간신히 TV전원을 켰다.
그리고....
[속보입니다. 조금 전 밀레테크의 수송차가 습격을 당해 추락했습니다. 탑승자는 '블라디미르 하리토노프' 씨와 '아론 스팅레이' 씨로....]
"뭐, 뭐야 이건...!?"
조금 전.
아론이 타고 갔던 수송차가 추락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론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30화
"여기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아동만화에서 튀어나올 듯한 유치한 디자인의 로봇.
처음에는 조금 놀랐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살짝 뒤가 비쳐 보인다.
아무래도 홀로그램인 듯했다.
로봇 홀로그램은 나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자색 사냥터에 어서 오세요.]
[저는 자색 사냥터지기입니다.]
[궁금한 점이 있다면 물어봐 주세요.]
'질문이라고?'
빙의자 특전과 관련된 녀석치곤 드물게도 친절했다.
뭐, 나도 물어보고 싶은 점이 산더미 같았다. 정보라면야 얼마든지 환영이었기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어떤 식으로 질문을 해야 하나?"
[사냥터와 관련된 모든 질문은 OK입니다. 구두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단 말이지?
시험 삼아 이것저것 던져 보자.
"이 사냥터를 만든 사람은 누구지?"
[답변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이 사냥터의 주인은 누구지?"
[답변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너를 만든 건 누구지?"
[답변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뭐, 애초에 대답해 주리라고 대답하지 않았던 질문들이기에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이제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질 때다.
"이 사냥터에서는 뭘 할 수 있지?"
[사냥터 입장자들은 사냥터에서는 인간, 신비, 기계 등 다양한 대상을 사냥하고 드랍 아이템을 얻을 수 있습니다.]
"드랍 아이템이라는 것은?"
[메인 스토리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물품입니다. 돈, 무기, 정수 혹은 더 특별한 물건이 드랍될 수도 있습니다.]
"바깥이 메인 스토리의 무대라고 하면, 여기는 보너스 스테이지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사냥터다.
RPG 게임의 던전과 비슷한 시스템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곳의 시간은 외부와 같게 흐르나?"
[이곳에서의 하루는 메인 스토리에서의 하루와 같습니다.]
"이곳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지?"
[사망합니다. 목숨을 소중히 여겨 주세요.]
"사냥을 끝내고 나가는 방법은?"
[사냥 도중 사냥터지기를 불러 말을 걸어 주세요.]
"사냥 시간의 제한은?"
[없습니다.]
"전리품을 소지할 수 있는 제한은?"
[없습니다. 입장 시 가방 등의 물품을 소지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전리품은 실제 물건으로 나온다는 거다.
무제한으로 사냥할 수 있다는 점은 좋지만, 무작정 쓸어 버리기만 해도 의미는 없다. 게임과 다르게 이 세계에서는 경험치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니까.
필요한 만큼만 잡고 나가는 게 상책이겠지. 여전히 질문할 건 많이 남아 있었다.
"다른 이와 함께 입장할 수 있나?"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은 티켓 소지자로 한정됩니다.]
"같은 티켓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함께 입장할 수 있나?"
[가능합니다. 또한 같은 티켓을 사용한 사람이 사냥 도중 난입할 수 있습니다.]
음.
혼자만의 사냥터가 아니라는 점은 아쉽게 됐지만,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이용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슬슬 질문도 막바지다.
"사냥터 입장 위치는 항상 같은가?"
[그렇습니다.]
"사냥터의 난이도 설정은?"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해 주세요.]
"입장자의 전투력에 따라 사냥감들의 전투력도 바뀌어서 설정되나?"
[아니오. 사냥감들의 스펙은 메인 스토리에서의 스펙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입장자 역시 본편의 능력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냥 후 복귀 시에 좌표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원하시는 위치를 설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 외에 내가 숙지해야 할 규칙은?"
[없습니다.]
제한 없음.
결국 이곳은 메인 스토리에서 다른 빙의자들을 앞서 나가기 위한 아이템을 파밍할 수 있는 장소인 듯했다.
나쁘지 않다.
대부분의 내용이 내 예측대로 들어맞았다는 점에서 더더욱.
"질문은 이상이다. 필요하면 부르도록 하지."
[즐거운 사냥 되시길.]
로봇 홀로그램은 다시금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사라졌다.
그와의 문답을 끝내고, 조금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나는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인간이 사라진 지 몇백 년 정도 흐른 후의 대도시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 사냥터라는 게 먼 미래의 공간인 건가? 아니면 단순히 다른 공간인 건가?'
녹음에 지배당한 폐도시.
하늘을 향해 똑바로 솟은 빌딩은 여기저기 거대한 뿌리에 침식당했다. 세기말 감성을 뽐내던 네온사인 간판들은 잔뜩 녹슬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곳곳이 깨지고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 위에는 초원이 자리 잡았고, 어떤 거목은 아예 자동차 프레임 위에 뿌리를 내렸다.
이따금 동물들도 휙휙 덤불 사이로 뛰어다녔다.
'진짜 동물이 있네?'
이 세계에 빙의한 이후로 애니매트로닉스나 바이오미메틱스... 그러니까 동물 형태의 로봇들 외에는 본 적이 없다 보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는 우중충했던 하늘까지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상태로 바뀌었으니, 이게 사냥터인지 자연휴양림인지 구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뭐, 잠적하기엔 딱 좋겠군.'
이곳이라면 몸을 숨겨도 발각될 염려는 없겠지. 한동안 휴양한다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했다.
'뭐, 정말로 여기가 안전한 곳이라면 말이지.'
이곳은 원작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미지의 장소다. 사냥터지기에게 여러 가지 물어보기는 했으나 확실하게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진 완전히 마음을 놓아선 안 되겠지.
'후우. 처음엔 이렇게 급하게 입장권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는데....'
원래 계획대로라면, 충분히 대비한 후에 사용했을 테지만... 예측을 벗어난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이놈의 살인 충동.'
갑자기 도져 버린 피에 대한 갈망을 막을 방법이 급하게 필요했다. 그대로 억지로 참으면서 아카데미 활동을 계속했다간 사고 칠 게 분명했으니까.
'둘째론 타이탄족의 발견.'
블라디미르에게는 전하지 않은 정보였는데, 내 생산 콜로니 시찰 일정이 갑작스레 잡힌 이유이기도 했다.
타이탄족.
평범한 몸집 큰 인간이 아니라, 신화의 일면을 장식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거신(巨神)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원작 1부 1막의 클라이맥스를 담당하는 괴물들이기도 했다.
바꿔 말하자면 주인공과 일행들의, 특히 아이리의 성장에, 특히 정신적인 성장에 가장 중요한 발판이 되어 주어야 할 놈들이란 뜻.
뭐, 이놈들이 나타난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니 놀랄 것도 없지만, 문제는 그 시점이다.
'...이놈들도 너무 일찍 나타났어.'
원래라면 놈들이 주인공 일행을 위협하는 건 약 한 달 후... 즉, G20 기업총회가 열리고 있는 도중이다.
도시의 최대전력이 그 이벤트에 몰려 외부에 대한 방어가 소홀해진 틈을 타, 도시 바깥쪽인 폴른 구역과 E섹터로 놈들이 쳐들어오는 게 사건의 발단.
'원작에서는 아카데미 학생들이 소집되어 지원을 나갔다가, 되려 일방적으로 학살만 당할 뿐이었지.'
그리고 함께 지원을 나갔던 아이리 역시 타이탄의 손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고,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주인공의 활약으로 구해진다는 게 본래의 스토리.
그렇기에 나 역시 그 시점에 맞추어 여러 계획을 세워두었는데... 갑자기 놈들이 일찌감치 나타나면서 그게 어그러지고 말았다.
'지금 시점에 놈들이 등장했다는 건 그쪽 생산 콜로니는 포기해야 한다는 소리야. 그래야 조금이라도 원작과 사건의 흐름을 비슷하게 맞출 수 있을 테니까.'
내가 가서 놈들을 막아 버리면 이후 에피소드 연출에 차질이 생겨 버릴 터.
'그렇다고 대놓고 생산 콜로니가 무너지는 걸 내버려 두고 있으면 스팅레이 그룹은 나한테도 책임을 물을 테지. 그렇다면 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컨디션 핑계를 대면서 미룰 수도 없고, 무작정 잠적할 수도 없다.
무언가 그럴듯한 핑곗거리가 필요했기에, 블라디미르와 뒷골목 용병들을 이용하여 그런 자작극을 벌인 것이었다.
물론 전쟁 위험도를 높임으로써, 그룹의 전력을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스팅레이라면 콜로니 하나 파괴되는 편이 도시에서의 지배력을 잃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하겠지.'
거인이 확실하게 콜로니 쪽을 파괴한 뒤 뉴 발할라 시티 쪽으로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가 나서지 않았는데도 타이탄이 전부 죽어 버리면 안 되니까.
'대충 일주일 정도인가.'
보고받은 [신비] 무리의 규모.
생산 콜로니의 크기와 방어 병력.
뉴 발할라 시티까지의 거리 등등을 고려하여 계산해 봤을 때, 약 일주일 정도면 놈들이 뉴 발할라 시티에 나타날 것이다.
'넉넉잡아 나흘만 있다가 나가야겠군.'
나흘. 시간으로는 96시간.
그동안에 이 사냥터에서 최대한 본전을 뽑고 가는 게 내 목적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듈 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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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착된 전투 모듈]
[신비]
[구름거미 Lv.5]-비활성
[시체먹는 자 Lv.5]- 활성
[천근추 Lv.4] - 활성
[통상]
[스트렝스 Lv.3] - 활성
[헤이스트 Lv.5] - 활성
[호크아이 Lv.5] - 활성
[셀 리제너레이터 Lv.2] - 활성
[뉴럴 부스터 Lv.3] - 활성
·
·
·
활성화된 전투 모듈: 8개
비활성화된 전투 모듈: 1개
과부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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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장착한 모듈은 총 8개.
'스트렝스'는 근육 강화.
'헤이스트'는 반사 신경 강화.
'호크아이'는 시력 강화.
'셀 리제너레이터'는 회복력 강화.
'뉴럴 부스터'는 신경 시냅스 강화.
그중 5개의 처음 장착했었던 통상 전투 모듈들은 기본 신체 능력을 높이는 패시브 스킬인 셈이다.
-병이 나았다고는 해도, 혹시 모르니 대체율이 높지 않은 것들부터 적응해 나가는 게 좋을 듯해요오....
미유의 조언에 따라 한동안 대체율을 10% 미만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천근추는 원작에서도 워낙에 대체율이 낮고 사용자도 가리지 않는 개사기 모듈이었으니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러다 아까 아이리가 오기 전 그녀와 짧게 대화를 나누었고, 이제는 모듈을 몇 개 더 장착해도 괜찮겠다는 조언을 받았다.
'일단 내가 가진 티켓이랑 모듈들은....'
지금 남은 특전 티켓은 총 3장.
[모듈 호환성 상승 티켓] 2장과.
[과부하율 -10% 티켓] 1장이었다.
어느 정도 포인트에 여유가 생긴 만큼 미유에게 연구해 보라면서 한 장 정도 넘겨줄 수도 있겠지만, 이번엔 그냥 내가 쓰기로 했다.
그 후 남은 모듈의 목록을 확인해 본 나는 다시 한번 감탄을 터뜨렸다.
'...몇 번을 봐도 씹사기캐야.'
대다수가 통상 모듈이라고는 해도 기본이 군용급인 Lv.3짜리 이상만 갖고 있다.
당연히 Lv.4짜리도 수두룩하고, 심지어 Lv.5 통상모듈에다가 '게임체인저'라 불리는 Lv.5 신비모듈들까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핵무기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스펙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모듈을 대체율 제한치 내에서 전부 장착하고 있었다는 게 정말 괴물 같구만....'
스팅레이가 얼마 만큼의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했을지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 과정 동안 실험쥐 신세를 견뎌 냈을 이 몸뚱이도 대단하고.
뭐, 어쨌건.
'지금 필요한 건 방어나 생존에 도움이 되는 능력.'
지금 것들로도 공격에는 무리가 없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려면 그것들이 낫겠지.
'미유의 추천은 [텅스텐 스킨]에 [천독불침]이었던가.'
나는 곧장 두 가지 모듈을 장착했다.
[시체먹는 자] 모듈에 의해 호환성을 무시하고 무사히 장착이 끝났다. 하지만 그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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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과부하율 78%(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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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쉽지 않군.'
체온이 확 높아졌다는 게 느껴졌다.
이래서야 '구름거미'를 사용하기는커녕, 전투 중에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퍼져서 일어나지 못할 거다.
'미유가 계산했던 그대로구나.'
역시 세계관 최고의 모듈러답게, 그녀는 이 상황을 미리 예견했었다. 티켓을 전부 사용해야 할 것이라는 조언까지 덧붙이면서.
'[시체먹는 자]만으론 역시 감당이 안 되는구나. 미유의 말을 따라야겠어.'
곧장 티켓 세 장을 단번에 찢었다.
티켓이 공기 중으로 녹아 사라졌고, 시스템 UI에 표시되던 과부하 수치도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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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하율: 21%(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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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진 과부하율에 따라 빠르게 뛰던 심장이 다시금 진정되었다. 호환성을 충분히 올린 후, 티켓으로 다시 한번 과부하율을 낮춘 덕이다.
모듈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며 내 몸이 세포 단위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중 가장 와닿는 변화는 역시 피부였다. 겉보기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으나, 손으로 꾹꾹 눌러보니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피하장갑 모듈인 [텅스텐 스킨]의 효과였다. Lv.4짜리 모듈인 만큼 어지간한 대구경 총알 정도는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이걸로 공격 대비는 마쳤고.'
그 외에 식도가 조금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천독불침] 모듈의 효과로 식도와 호흡기에 정화기능이 달린 필터가 자라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걸로 어지간한 독은 무리 없이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신비]들이 만들어 내는 특수한 독은 몰라도, 인간에게 독살당할 염려는 없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부하율이 허락하는 선에서 모듈을 하나 더 장착한다. 티켓은 다 떨어졌지만 [시체먹는 자]를 이용하면 커버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한 것은 [트라우마 스캐너].
Lv.3짜리 스캐너로, 평범한 군용 레이더에 생체스캐너, 열화상 카메라, 마나감지 등 몇 가지를 더한 제품이다.
기능을 이것저것 합쳐 놓은 탓에 각각의 성능은 조금 떨어졌지만, 범용성으로 따지면 이 모듈만 한 것이 없었다.
양쪽 눈이 간질거리면서 기계안(機械眼)으로 대체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시야가 급격하게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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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하율: 29%(안전)
대체율: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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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허용범위 내로군.'
모듈을 장착한 후에는 어느 정도 적용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나노머신 '판도라'의 성능과 내 신체 능력이 뒷받침되는 만큼 앞으로 10분 정도면 충분히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일단은 여기까지....'
1부 1막 시나리오 중간보상으로 받은 포인트가 남아 있었지만, 일단 그건 남겨 두기로 했다.
당장은 그렇게 급하게 장착해야 할 모듈도 없었고, 도중에 상점 레벨이 올라갈지도 모른다. 어쩌면 티켓이나 '암스트롱 어쩌고' 만능툴보다도 쓸 만한 게 뜰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충분히 시간을 들여 전투 모듈을 완전히 장착하고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상태 체크까지 마친 다음.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사냥을 시작하기로 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31화
아론 스팅레이의 실종.
황태자가 갑작스레 자취를 감춰 버림에 따라 뉴 발할라 시티는 격하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론과 블라디미르가 평소 그다지 언론에 자주 언급되는 인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식시장은 크게 요동쳤고, 정치가들은 얼굴을 알릴 기회라며 언론을 향해 자극적인 말들을 쏟아 냈다.
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해 대대적으로 수사망을 펼쳤다. 그 탓에 전혀 이번 사건과 전혀 연관되지 않았음에도 평소 뒤가 구린 일에 연관되어 있던 자들은 연일 숨을 죽이고 지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 가장 깊게 연관되어 있었던 밀레테크의 후계자, 블라디미르 하리토노프가 수사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면서 사건의 해결은 지지부진했다.
-하리토노프 씨! 이번 사태에 밀레테크가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저 역시 피해자입니다!
-아론 스팅레이 씨는 어디 있죠?
-저도 모른다니까요!
-당신이 죽였지! 당신이 죽인 거야!
-뭐?! 내가 그 인간을 죽인다고?! 그게 가능할 거 같으면 니들이 해 보든가!
울분에 차서 외치는 블라디미르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의 진짜 의미를 놓고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갈렸으며, 인터넷에서는 음모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여댔다.
여타 기업들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해 봤지만 더 밝혀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렇게 점점 사건은 미궁에 빠져들어.
결국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 * *
-아론 스팅레이는 죽지 않았습니다.
-황태자는 어디에 있을까요?
-황가(皇家), 스팅레이의 미래는? BNS채널 특별기획!
"...."
아이리는 기숙사 TV를 꺼 버리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벽부터 전문가랍시고 떠들어 대는 작자들의 몰골이 사기꾼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신물이 났다.
"슬슬 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그 전에 데려가야 할 사람이 있다.
아이리는 아카데미 제복을 걸치고서 문을 나섰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걷다가, 방 하나 앞에서 멈췄다.
똑똑.
"미유, 나가자. 슬슬 일어나."
"...."
처음에는 반응이 없어 걱정했지만 이내 문이 열리더니 자그마한 머리가 틈새로 쏘옥 나타났다.
미유였다.
"아, 아이리 씨이...?"
"다행히 일어나 있었네. 자, 얼른 나와."
"저, 죄, 죄송한데 아직 마, 마음의 준비가아...!"
"마음의 준비는 무슨!"
"히에야아악!?"
아이리는 당당하게 미유의 기숙사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렇게 문이 닫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함께 복도로 나왔다.
미유는 발목까지 내려오던 머리칼을 위로 올려 묶은 상태였다. 그리고 겁을 잔뜩 먹은 아기 코알라처럼 아이리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아이리는 다소 귀찮아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유가 달라붙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이것 참...."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아이리는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아론이 아카데미를 떠난 직후, 뉴스에서 흘러나온 아론의 실종 소식에 미유는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졌다.
보다 못해 패닉에 빠진 미유를 껴안아 진정시켜 줬는데, 그 이후로 이렇게 어디로 갈 때마다 새끼 코알라처럼 달라붙어 왔다.
'솔직히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애를 어떻게 혼자 내버려 두겠는가? 안 그래도 아론이 사라지면서 힘들어하는 아이를 차갑게 쳐낼 만큼 매정하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 모듈 문제를 꺼내는 건 좀 그렇겠지...?'
팔자에도 없는 언니 노릇을 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울 오빠도 이런 느낌이었으려나.'
문득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철이 들기 전까지 오빠가 어디로 가든 곤란해할 정도로 끈덕지게 따라붙었던가.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다.
그렇게 회상에 잠겼던 것도 잠시.
"아, 아이리 씨이...."
"응? 왜, 왜 그래?"
아이리는 조금 떨떠름하게 답했다.
아직 이 미유라는 여자애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잘 알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러자 미유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오...."
"죄송하다니, 뭐가?"
"저, 처음에... 아이리 씨가 나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오... 예전에 저를 괴롭히던 애들이랑 분위기가 비슷해서...."
"아."
괴롭힘.
아이리는 그 단어를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마 그런 기억이 지금의 이런 미유를 만든 것이겠지.
뭐, 솔직하기 짝이 없는 첫인상 평가에 다소 기분이 상할 뻔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기로 했다. 자신이 그리 부드러운 인상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자각 정도는 있었으므로.
"히, 힘들었겠구나."
"그 여자애들은 매일 같이 저를 괴롭혔어요오... 말투가 어눌하고 음침하다고... 때리고 발로 차고... 제가 만든 물건들을 부수고... 머리를 가위로 자른 적도 있고요오...."
"어...."
그건 알겠는데… 갑자기?
이게 아침에 밥 먹으러 가는 중에 꺼낼 얘기가 맞나? 아무래도 미유는 그런 쪽에 관해선 눈치가 영 부족한 듯했다.
하지만 분명 본인에게는 그만큼 큰 상처였던 거겠지.
뜬금없는 이야기라는 것과는 별개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저는 여성분들이 무서웠어요오... 남성분들보다 훨씬 더...."
"그래서 나를 처음 봤을 때 무서워했던 거야?"
끄덕.
미유가 고개를 숙여 긍정했다.
"하지만 아이리 씨는 괜찮아요오... 아론 씨께서 말해 주셨던 그대로예요오...."
"그, 그 사람이 나에 대해 뭐랬는데?"
"그러니까...."
꿀꺽.
대체 왜일까?
아이리는 미유의 다음 대사를 기다리며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얼핏 거칠어 보여도 실은 굉장히 좋으신 분이라고 하셨어요오...."
"오... 오오...."
아이리는 자신의 뺨이 조금 붉어진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허나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
"저도 아이리 씨가 엄마 같아요오...."
"...응? 엄마?"
"네."
"언니가 아니라?"
아이리가 되묻자.
미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엄마."
단호한 목소리였다.
어째서인가 그 부분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듯, 굳건한 의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
아이리 앨리스밸.
스무 살에 엄마 같다는 평가를 듣다.
그것도 동년배의 여자아이에게서.
이 녀석이 은근슬쩍 놀리는 건가 싶었는데 미유의 눈동자는 한없이 진지하고 순진무구했다.
그야말로 진심이다.
그런 점이 더 기분 나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아이리는 그러면서 은근슬쩍 미유를 떨쳐 내려 했으나, 미유는 그럴수록 더욱 힘껏 아이리의 팔에 매달려 왔다.
"에휴...."
정말, 팔자에도 없는 엄마 노릇을 하게 된 아이리였다.
* * *
아론 스팅레이의 실종 사건 이후.
아카데미 내에서의 분위기도 사뭇 바뀌었다. 특히 표면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스팅레이 장학생들 간의 신경전이 더더욱 심해졌다.
딱히 스팅레이 장학생이란 것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 아이리로선 골치 아픈 일일 뿐이었다.
-저기 두 사람 왔다.
-특별 장학생 두 명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론 이사장의 총애를 받는다고 할 수 있는 특별 장학생 두 사람이 나타나자 스팅레이 기숙사 식당의 공기가 달라졌다.
'눈알들 굴리는 거 봐.'
아직 아카데미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의 생태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올해, 아론이 재단 이사장에 복귀하면서 장학생들의 입장은 대충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쪽은 아론 파였고.
다른 한쪽은 베네딕트 파였다.
-아론 님이 돌아오셨으니 아론 님 쪽에 줄을 서야 해.
-뭣도 모르는 소리. 아론 님이 요새 업무 대부분을 베네딕트 님에게 맡기고 있다는 거 못 들었어?
-그게 무슨 상관인데! 복귀 직후 특별반까지 만드셨다는 건 절대 자리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의미지!
-멍청아! 그게 오히려 그게 동생한테 밀리고 있다는 증거라고!
어찌나 다들 그리 스팅레이 그룹의 세력 구도에 빠삭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다들 어떻게든 졸업 후의 진로를 위해 황가의 눈에 들려고 애를 써댔다.
그리고 특별장학생인 아이리와 미유는 확실하게 아론 파의 인물들이라고 간주되어 일반 스팅레이 장학생들의 부러움 혹은 질투를 받곤 했다.
그러다 아론이 사라지면서 장학생들 간의 정치 상황은 다시금 변했고, 일반 학생들은 특별장학생 두 사람을 어찌 대해야 좋을지 간을 보는 상황이었다.
'놀고 있네.'
아이리에겐 그런 그들의 모습이 한심하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자기들끼리 가면을 쓰고 치고박는 거야 신경 쓸 거 아니지만, 자신들까지 거기에 끼워 넣는 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고 가자, 미유."
"네, 네에...."
아이리는 미유를 잡아끌었다.
뷔페식 식당이었기 때문에 먼저 배식대로 향했다.
토스트와 햄, 시리얼과 주스, 우유, 치즈 같은 기본적인 서양식 아침 식사 메뉴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쌀밥과 국이라고 불리는 동양식 수프 종류 등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과일이나 디저트까지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나 유제품이나 계란, 가공육은 '식용 플라스틱'이 아니라 '진짜'의 함량이 높은지 때깔부터가 달랐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 때문에라도 계약서에 사인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보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메뉴 구성에 아이리의 입에서 또다시 침과 감탄이 흘러나오려 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보는 눈이 많은데 촌티를 내고 싶진 않아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릇에 음식들을 담았다.
옆에 딱 달라붙은 미유가 제대로 음식을 담았는지 신경을 쓰면서 이윽고 비어 있는 테이블 자리로 향했다.
"대충 여기쯤 앉자."
"네."
아이리가 먼저 착석했고, 미유가 바로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이윽고 두 사람이 식사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
"과학기술부 모듈과 미유?"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이름 모를 여학생이었다. 아마도 스팅레이 일반 장학생들 중 한 명이겠지.
낯선 이의 등장에 미유는 아이리의 소매를 질끈 붙잡았다.
이 애는 내가 지켜 줘야 한다. 그런 생각에 아이리는 미유를 진정시키며 여학생 쪽을 노려보았다.
"누구야, 너."
"어머, 왜 눈을 그런 식으로 뜨니? 누가 보면 내가 얘한테 해코지라도 하려는 줄 알겠다."
"맞는 거 같은데."
아이리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여학생은 절대 순수한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니다. 웃는 얼굴 뒤에 칼을 숨기고 있는, 전형적인 악당의 느낌이다. E섹터와 폴른을 오가며 활동할 때, 이런 녀석에게 당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미안한데, 과기부 학생들끼리의 일이거든? 제 3자는 빠져 주면 좋겠어."
"미안한데 그딴 건 네 사정이고. 무슨 용건인지부터 확실히 말하지 그래? 애가 무서워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어머나, 내가 한 말이 안 들렸니? 아니면 전술교전부 출신이라 멍청해서? 아아... 혹시 폴른 출신이라?"
"이게...!"
아이리는 순간 주먹을 쥐었으나.
이내 화를 삭이며 주먹을 풀었다.
이미 한 차례 비슷한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이 이상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 내가 못 배워 먹은 여자인 건 인정하는데 말이야. 겨우 '일반' 장학생한테 그런 소릴 들을 정도로 어수룩하진 않거든?"
"뭐, 뭐라고?!"
한 방 먹여 주는 데에 성공했다.
이렇게 반격을 당할 줄은 몰랐는지, 여학생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의 곁에 다른 학생들이 합류하며 상황이 바뀌었다. 여학생 둘과 남학생 둘이 추가되며 총 다섯 명.
그중 여학생과 남학생 한 명은 전술교전부 적응자인 듯했다. 얼굴 피부가 거북이 등껍질 같은 모양인 걸 봐서, 피부 장갑 모듈을 장착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처음 여학생에게 가세하듯, 아이리와 미유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을 말없이 둘러쌌다.
아이리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아침부터 이게 뭐 하자는 짓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딱히 뭘 한 건 아니잖아? 그냥 그쪽에 있는 미유라는 애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니 자리를 좀 비켜 줬으면 좋겠는데."
"분명 말했을 텐데. 그 전에 무슨 용건인지부터 확실하게 말하라고. 우르르 몰려와서 기세 싸움하지 말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니까."
"...말이 안 통하네."
벌컥, 아이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기부 학생들은 겁을 먹은 듯 뒤로 몇 걸음 물러났지만 전교부 학생들은 그에 대항하듯 아이리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아이리 앨리스밸. 여기가 아직 네 세상인 줄 아나 본데, 정신 좀 차려."
"...뭐?"
"아론 스팅레이는 죽었어. 이제 네 녀석의 뒤를 봐줄 상냥한 키다리 아저씨는 없단 말이야."
"허."
아이리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야. 뭣 좀 알고 떠들어."
아이리는 이런 대사를 본인이 입에 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마치 아론 스팅레이를 비호하는 것 같은 대사가 아닌가.
"어쨌건 아침 댓바람부터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시비 걸지 말고, 밥이나 처먹고 돌아가지 그래?"
"하, 아직도 그 사람이 살아 있다니. 그런 착각에 빠져 있어서 그렇게 담담하게 있을 수 있는 거구나. 뭐, 좋아. 믿는 건 자유니까."
그룹의 리더로 보이는 남학생이 아이리를 압박하듯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아이리 역시 체격이 큰 편은 아닌지라 그의 얼굴을 마주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
"...한판 해 보자는 거야?"
"누누이 말하지만, 너한테는 용건 없어. 우리가 대화하고 싶은 건 저쪽의 미유야."
그러면서 남학생은 품에서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로 던졌다. 이내 카드 위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내 이름은 레온 알베르트. 미유, 네 모듈러로서의 능력은 들었어. 네가 우리 스터디그룹을 조금 도와주면 좋을 거 같은데."
"...스, 스터디 그룹?"
미유가 아이리의 뒤에서 쥐어짠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그러자 남학생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래, 스터디그룹. 아카데미는 사방이 적이니 졸업할 때까지 우리끼리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
"물론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아니야."
레온은 미유가 완전히 굳어 버린 모습을 보고서야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의 그 안타까운 사고로 상황은 바뀌었어. 너희 두 사람끼리 물고 빨고 하다간 이곳에선 도태될 뿐이야."
"...무슨 의미로 말하는 거지?"
"줄을 제대로 서라는 말이야. 아론 님이 돌아가신 이상 너희들의 소중한 특별반이 얼마나 유지될 거 같아? 길어 봐야 1학기까지야."
묘한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라도 입수한 것일까?
"그러니 미리미리 대비하도록 해. 내 조언은 여기까지."
레온은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그러자 다른 일당들도 슬그머니 그를 따랐다.
하지만 갑자기 레온이 등을 돌리더니, 아이리와 미유를 보며 말했다.
"아, 참고로 여기 있는 다섯 명이 전부가 아니야.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스터디그룹은 훠얼씬 더 크거든."
"세력 과시라. 마치 거절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들리는 걸?"
"정답이야, 폴른 출신."
아이리에 말에 레온이 씨익 웃었다.
"오늘까지 네가 미유를 잘 설득해서 우리 쪽으로 보내 주도록 해. 그럼 오늘 네가 저지른 무례는 너그러이 눈감아 주도록 할게."
"...."
묘한 자신감.
대체 그 자신감의 근원은 어디인가?
"만약 우리가 거절한다면? 집단구타라도 할 생각인가?"
"아니, 누가 그런 난폭한 짓을 할까? 딱히 아무것도 안 해."
"퍽이나 믿겠군."
"진짜야. 다만 그저 우리 같은 친구가 없으면...."
레온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었다.
"스스로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싶어지겠지."
아카데미 흑막 시점 32화
레온 일행이 떠나간 후.
아이리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투덜댔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뚝을 툭툭 건드려댔다. 머리끝까지 솟은 화가 몸짓으로 나오고 있었다.
"...하여간 쓰레기 같은 놈들이야."
스스로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싶어진다고?
그런 마음이 들게 해 주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웃기지도 않는 협박이었다. 그걸로 겁먹을 줄 아나?
과장을 좀 보태자면, 놈들이 얼마나 멋들어진 괴롭힘을 선보여 줄지 돈을 내고서라도 보고 싶은 기분이다.
그래 봤자 자신이 폴른 구역에서 겪었던 것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을 테지.
'너희는 상대를 잘못 골랐어.'
속으로 한껏 비웃어 주었다.
안타깝게도 기껏 받아 온 음식들이 조금 식어 버렸다. 아이리는 화풀이라도 하듯 입에 음식들을 마구 때려 넣었다.
그러던 중.
미유의 상태가 묘하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저기... 그게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
그녀의 엉덩이에 달린 기계 꼬리 역시 풀이 죽은 것처럼 고개를 픽 숙이고 있었다.
"하여간...."
아이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론처럼 사람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능력은 없지만, 미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저런 놈들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아침이나 먹어. 어차피 저놈들 아무것도 못 해."
"하, 하지마안...."
"무시하라니까? 생각해 봐. 저놈들이 그리 대단한 놈들이었으면 저렇게 우르르 몰려왔겠어?"
떼로 몰려다니는 놈들치고 실력 좋은 놈을 본 적이 없다. 능력에 자신이 없으니 숫자에 의존하는 것이다.
"게다가 선택권은 너한테 있는 거잖아. 만약 네가 다른 그룹에 들어가 버리면 어쩔 거야? 그러니 너한테는 함부로 못 대할 거야."
"으음...."
아이리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제야 미유는 조금 안심한 듯 표정이 풀어졌지만, 여전히 걸리는 게 남아 있는 듯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저는 괜찮다고 해도 아이리 씨는...."
"나? 난 상관없어. 지들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지. 내가 가만히 있나."
자기들이 욕하던 폴른 출신의 성깔이 얼마나 더러운지 제대로 보여 줄 것이다.
"알겠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평소대로 지내면 돼. 우릴 뽑은 사람이 돌아오면 저것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앞에서 벌벌 기어 다닐걸?"
그때였다.
아이리의 시야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메일이라도 도착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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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에러]
[그래? 참 대단한 자신감이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 같은데.]
[맛만 조금 보여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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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갑작스러운 상황.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기도 전, 엄청난 양의 경고 메시지들이 아이리의 시야 가득 도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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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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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으아아아앗!"
파지직!
아이리의 뒷덜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오빠의 유품인 전투 모듈이 꽂혀 있는 곳이었다. 소켓에서 매캐한 연기가 풀풀 피어올랐고, 아이리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아이리 씨이!"
웅성웅성.
갑작스런 소동에 기숙사 식당이 시끌벅적해졌다. 아이리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주변을 빠르게 훑으며 범인을 찾으려 애썼다.
'부, 분명 그 자식들이야...!'
이건 분명 해킹이다.
그 스터디그룹에 속한 놈들 중에 솜씨 좋은 '테크노 위자드'가 속해 있는 것이리라.
'빠, 빨리 위자드를 찾아야...!'
어서 범인을 찾아내서 제압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야는 엄청난 양의 시스템 경고 메시지에 가려진 상태였다. 앞을 분간할 수가 없을 정도.
그리고-
"꺄아아아아아아아앗!"
이번엔 온몸이 뜨거워졌다.
피가 끓는 것 같았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 호흡이 점점 가빠졌고,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시야는 여전히 시스템 경고 메시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제일 위에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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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너야말로 잘못된 상대를 건든 거야.]
[처음부터 잘 했어야지.]
[아카데미 생활이 참 즐거워지겠네.]
-----
"제, 제기... 랄... 당, 자앙...!"
"아이리 씨이! 아이리 씨이!"
미유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어딘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아이리의 의식은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 * *
"슬슬 돌아갈 때인가."
사냥터에 입장한 지 사흘 차.
나는 이제 돌아가야겠다고 판단했다.
원래라면 이곳에서 조금 더 시간을 끌 생각이었지만, 그래 봤자 더 얻을 만한 이득이 없을 것 같았다.
'등장하는 [신비]의 종류도 그렇고, 보상도 그렇고. 애초부터 내 스펙에는 맞지 않는 사냥터였던 것 같군.'
원작의 지식을 활용할 수 없는 곳이란 점 때문에 지나치게 긴장했었는데, 막상 입장해 보니 어려움을 겪기는커녕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난이도가 너무 낮았다.
"키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엑!"
"시끄럽다."
서걱.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옆에서 울부짖던 숲고블린의 목이 날아갔다. 내게 뭔가 전하려고 했던 거 같은데 말이 안 통하니 내게는 소음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고블린들은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넙죽 엎드렸다.
이곳, 자색 사냥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숲고블린 무리였다.
처음 놈들과 마주쳤을 때 바짝 긴장하며 전력을 다했더니 무리의 80% 정도를 단번에 죽여 버렸다.
나중에야 고블린 로드? 챔피언?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 신분이 높아 보이는 것들이 시체 중에 섞여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우두머리를 없애고 나니 놈들은 내게 복종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는 놈들이다 보니,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키기엔 매우 좋았다.
아, 게다가 살인 충동도 가라앉았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첫날부터 고블린들을 왕창 쓸어 버려서일까?
하지만 괴물들 좀 죽였다고 해서 그 충동이 가라앉을 정도면, 원작의 아론은 어째서 인간들만을 사냥했던 거지?
현재로선 알 수 없었다.
뭐, 어쨌건.
'그러다 보니 금방 지루해졌지....'
고블린들은 내버려 두면 알아서 음식도 구해 오고, 주변에 보이는 다른 [신비]들을 족족 사냥해 오고는 했다.
첫날 마주쳤을 때 내가 머리를 일제히 잘라 버렸던 탓에 놈들은 내가 동물의 머리를 즐겨 먹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음식을 구해 오라고 시켰더니 동물의 머리를 가져왔기에 그 녀석들을 본보기로 죽였다. 그 후로는 제대로 음식을 가져오더라.
물론 반항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자는 사이에 창으로 내 심장을 찌르려고 들었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텅스텐 스킨]이 있었고, 놈들의 무기는 내 피하장갑을 뚫지 못했다.
내 잠자리를 방해한 녀석들을 죽였고 덤으로 몇 마리를 더 죽였다. 그 후로 무기를 들고 설치는 놈들은 사라졌다.
'그러니까 방법이 바뀌었지.'
둘째 날에는 자기들은 먹을 수 있는데 인간은 먹지 못하는 독초 같은 걸 음식이랍시고 진상하는 놈들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미를 시켜봤더니 본인들은 잘 먹었다. 그에 안심하고 먹었더니 시스템 메시지로 '독'이라는 경고가 떴다.
다행히 [천독불침]의 필터 덕분에 이상은 없었지만, 혀가 얼얼해졌다. 본보기로 또 한바탕 죽여 버리자, 무리의 1할도 채 남지 않았다.
'여기는 내가 올 곳이 아니었다.'
하급 [신비]들밖에 없어서 파밍도 할 게 없었고, 고블린들이 다른 [신비]를 사냥하고 주워오는 모듈들도 전부 쓰레기였다.
'얼마나 수준이 낮으면 왜곡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 거냐.'
[신비]가 방출하는 '마나'라는 물질엔 인간을 미치게 하고 현실을 뒤트는 힘이 있다.
마나는 세포 단위로 영향을 미치는 터라, 체내에 나노머신이 없는 일반인이 마나에 그대로 노출되면 온몸이 끔찍하게 변형되어 버린다.
그것이 괴물들을 상대할 때 적응자가 꼭 필요한 이유였지만, 이곳의 농도는 너무 희박해서 내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아마 민간용 나노머신을 달고 와도 멀쩡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제일 끔찍한 것은 음식과 잠자리였다. 군대에서 혹한기 훈련도 겪어본 나로선 견딜 만한 수준이었지만, 고상하신 아론 님의 육체 쪽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쨌건 아무리 잠적해서 시간을 끌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해도, 이런 생활을 더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빈손으로 돌아가진 않겠군....'
이곳에서 내가 얻은 건 두 가지.
하나는 모듈이고, 하나는 특별한 장치.
우선 모듈 쪽을 꺼내 확인했다.
고블린들이 동굴에 있던 '미믹'이라는 괴물에게 날 먹이로 바치려고 했던 오늘 아침에 얻은 물건이었다.
미믹과 고블린들을 전부 쓸어버리고 나니 미믹이 모듈을 하나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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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Lv.2 미믹(Mimic)]
외견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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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있으면 굳이 사냥터에서 죽치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외견을 바꿀 수 있다면 내가 아론 스팅레이인 것을 숨기고 마음껏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민 ID를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서 행동해야겠지만, 적어도 이런 야생생활은 하지 않아도 될 터.
'그리고 이 물건....'
이걸 여기서 얻게 될 줄은 몰랐다.
내 손 위에는 금속 재질의 장치가 올려져 있었다. 원판에 벌레 다리를 붙인 듯한 생김새.
첫날부터 계속 고블린들을 마구 죽이다 보니 한 녀석이 떨어뜨린 물건이었다.
독특한 디자인 덕분에, 처음 보는 물건임에도 이 물건이 어디다 쓰는 것인지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리버레이터(Liberator)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리버레이터.
다른 말로는 해방자.
1부 3막의 '아카데미 안드로이드의 반란' 에피소드를 일으키는 핵심 아이템이다.
'여기 있어선 안 될 물건인데....'
원래라면 이건 지금 내 손이 아니라 '아시타교(明日敎)'라고 불리는 반기술주의 사이비 종교인들의 품에 있어야 한다.
'시나리오 순서를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 있는 물건을 왜 고블린들이 들고 있던 거지?'
이곳이 플레이어들의 메인 시나리오 대비를 위한 던전이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일단 나가서 확인해 보면 될 일이야.'
일단은 1부 1막, 아이리와 타이탄족의 문제부터 신경 써야겠지.
'돌아가자.'
그렇게 결정하자마자.
나는 사냥터지기를 불러냈다.
아동만화에서 나올 듯한 로봇의 형상이 내 앞에 송출되었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고블린들이 시끄럽게 굴길래 죽였다. 도망치는 것들은 내버려 두었다.
[반갑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돌아가고 싶다."
[좌표를 말씀해 주세요.]
"트리니티 아카데미. 인적 드문 곳."
[아카데미 내부, 인적이 드문 곳 중 랜덤 좌표로 전송됩니다. 괜찮습니까?]
"그래."
[사냥을 종료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사냥터지기의 인사말과 함께.
시야가 전환되었다.
* * *
다시 눈을 뜨자, 어두컴컴한 복도가 나를 반겨 주었다. 벽면에 적힌 표시를 보아하니 일반 기숙사동 근처인 듯했다.
'마침 잘 됐네.'
겨우 사흘 만에 돌아왔을 뿐인데 아카데미의 이런 폐쇄적인 인테리어가 이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허나 감상에 빠지는 것도 잠시.
'이럴 때가 아니지.'
외부에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내가 이곳에서 나타나면 상당한 소란이 일 것이다.
'아직은 내가 등장할 때가 아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고는 이번에 새롭게 얻은 [미믹] 모듈을 장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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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율: 57%
과부하율: 69%(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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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쓰지는 못하겠군.'
외견 전체를 갈아엎는 것만큼 대체율이 확 올랐다. 과부하율도 만만치 않게 상승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적에게 습격당할 위협은 거의 없을 테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모듈 온라인, [미믹]."
[미믹] 모듈을 활성화하고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리자, 심장 주변부에서부터 빠르게 피부가 덧씌워진다. 키도 조금 줄어들었고, 얼굴의 골격이 달라진다.
인근 화장실로 이동해서 거울을 보자, 아론 스팅레이와 사뭇 닮은 미남이 그곳에 서 있었다. 옷차림도 평소 입던 새카만 양복 대신 조금 더 멋부림이 들어간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과 황금을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는 두 사람이 형제임을 증명해 주는 듯했다.
'나쁘지 않군.'
체격이 바뀐 만큼 다소 어색한 감이 있었다. 이리저리 팔다리를 움직여 보며 몸에 적응해 나갔고,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내 보았다.
"아, 아."
목소리도 바뀌어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삑사리가 났지만, 이내 굵직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내 이름은 베네딕트 스팅레이."
스팅레이 가문의 차남이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33화
베네딕트 스팅레이.
내 동생이자, 스팅레이 기술부 모듈연구원장. 동시에 스팅레이 재단 이사장 대리까지 겸하고 있는 사내였다.
'이 모습이라면 아카데미 내부를 돌아다니더라도 들킬 염려는 적겠지.'
아카데미에 아예 새로운 사무실을 열어 자리를 잡은 나와는 달리, 베네딕트는 평소 기술부 연구원 건물과 스팅레이 재단 사무실만 오가며 활동하는 편이었다.
동선이 겹칠 확률이 낮으니 신분을 빌린 상태에서 본인과 마주칠 일이 없다. 누가 내게 다가온다고 해도 고압적인 태도로 밀어내 버리면 그만이고, 반대로 이쪽에서 대화를 원한다면 누구든 응해야만 하겠지.
'정보 수집에는 최적인 얼굴이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지금쯤 A섹터 모듈연구원 쪽에서 일하고 있을 베네딕트의 귀에 묘한 소문이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또 다른 자신이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면서 묘한 짓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리면 곧장 부하들을 시켜 진상을 조사하려고 들겠지.
하지만 그리 되더라도 큰 상관은 없다.
'나라는 걸 안 들키면 그만이지.'
소문이 녀석의 귀에 들어갈 때쯤이면 나는 이미 할 일을 전부 끝마쳐 둔 상태일 것이다. 아니면 베네딕트가 아니라 다른 얼굴로 변신해 버리면 그만이고.
또 만에 하나 내가 '아론 스팅레이'라는 것을 들킨다고 해도 돌파하는 건 어렵지 않다.
네가 날 죽이려고 한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강하게 나서면 오히려 당황할 것이다.
녀석은 나를 두려워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을 테니까. 그때의 반응을 봐서 녀석의 속내를 떠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마지막으로 베네딕트의 신분을 빌린 가장 큰 이유는, 녀석이 이 아카데미 내에서 벌이고 있을 꿍꿍이를 파헤치기에 가장 좋다는 점이었다.
내 예상이지만.
베네딕트는 내가 사라지자마자 다시 아카데미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녀석이라면 우선....'
아이리와 미유.
두 사람을 어떻게든 하려고 들겠지.
베네딕트는 내가 데려온 특별장학생들의 능력을 익히 들었을 것이다. 특히나 미유의 천재성은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연구원장으로서는 탐을 낼 수밖에.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회유를 시도하겠지만, 내가 미리 미유에게 주의를 시켜 둔 것도 있고, 그녀의 성격상 99% 거절하겠지.
그러면 베네딕트는 곧장 다음 수단을 꺼낼 것이다. 협박이든 뭐든, 이사장 대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 하겠지.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레온 알베르트다.'
전술 교전부 2학년.
내가 병마와 싸우는 사이 베네딕트가 뽑은 장학생이고, 친(親)베네딕트파 학생의 대표 격인 녀석이기도 했다.
'원작에서도 쩌리 악역으로 자주 등장하는 편이었지.'
화려한 언변과 외모.
스팅레이 직원의 아들이란 배경.
거기다 협박과 회유를 넘나드는 뛰어난 선동력으로 스팅레이 장학생들을 모아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스터디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놈이 모은 무리에는, 비단 스팅레이뿐만이 아니라 밀레테크, 로먼 코퍼레이션, 퓨어리티 서비스 등등 다른 기업 장학생들까지 속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원작 주인공 일행들과도 부딪치기 일쑤였고, 사사건건 주인공에게 시비를 걸다가 털리는 역할을 맡은 악역이라 할 수 있었다.
'자세한 상황은 직접 확인해 봐야겠지만, 베네딕트는 그 녀석을 이용해서 우리 애들을 겁박할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아이리나 미유가 내 이름 아래에서 단단히 보호받고 있다고 해도, 내가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지금에는 그 울타리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겠지.
처음에는 아이리가 나름대로 격하게 저항하겠지만, 결국 꺾이고 말 것이다. 상대는 수도 많고 다양한 놈들이 모여 있으니까.
"쯧...."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져서 나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그 상황을 막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내가 잠적을 그만두고 바로 세간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곤 자리에 복귀해서 베네딕트에게 으르렁 이빨 한번 드러내 주고, 공식적으로 학생들의 파벌 싸움을 금지하고 싶다고 하면 이런 것들을 싹 다 없애 버릴 수 있다.
특히나 주동자인 레온 녀석은 당장 아카데미에서 내쫓은 후, D섹터 이내로는 접근조차 못 하게 나락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녀석들이 저지르는 만행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계획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물의 성장엔 역경이 필요한 법.
아마 내가 계속 싸고돌기만 한다면, 아이리는 지금의 어수룩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이리는 혼자에 익숙하다.'
독립성이 강하다고 할까.
아니, 정확히는 '독단적'이다.
믿고 의지할 곳이 없기에 항상 날이 서 있다. 야생동물처럼 다가오는 모든 존재에 이빨을 드러내고, 결과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아이리는 길들여질 필요가 있다.'
원작에서도 그러했다.
그녀는 궁지에 몰려 다른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나서야 바뀌었다.
다만.
이 계획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벌써부터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
원작에서도 벌어졌던 일이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임을 알고 있어도, 내 새끼가 고통 받을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편치가 않다.
지금만 해도 당장 미리 다 족쳐버리고 싶은 것을 참는 중이다. 언제 어떻게 눈이 회까닥 뒤집힐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지.'
내 계획은 이러했다.
일단 베네딕트의 얼굴을 빌려 아카데미 내부 상황과 시나리오 진행을 살피고, 아이리나 미유가 위기에서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아이리는 학생들의 사이에서 점점 고독해질 것이고, 점점 힘겨운 경험을 할 것이다. 그리고 거인들의 습격이 이번 에피소드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해 줄 테지.
'...역시 내키진 않는군.'
결국 가스라이팅이다.
내가 지시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을 막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 역시 공범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아이리와 미유가 내게 더욱 의존하게 만들려는 계획이니 썩 달가울 리가 없다.
아무리 애정이니, 본인의 성장을 위해서니 하는 말로 포장해 봤자 그 추악한 본질을 가릴 수는 없다.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허나 이러지 않으면 훗날 아이리는 틀림없이 '진실'을 마주했을 때 완전히 무너지고 말 테지.
'그러니 필요악이다.'
주인공만 살아 있었다면.
그 멍청한 빙의자 자식이 나대다가 죽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면 내가 이런 씁쓸한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었을 텐데.
"후우...."
죽은 이에게 죄책감을 떠넘긴다.
마음의 무거움을 조금이나마 덜어 낸 후,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이번 1부 1막 에피소드를 마무리 짓기 전에, 확실하게 정리해야 할 녀석이 있다.
일반 학생기숙사 근처에서 자주 배회하는 걸 확인했으니, 이 근방에서 조금 기다리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시간은 10시 23분.
지금쯤이면 아카데미 메이드 안드로이드들이 일반기숙사 정리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시간이다.
"...…."
벽에 등을 기댄 채 시간을 죽였다.
몇몇 메이드 안드로이드들이 청소도구카트를 질질 끌면서 복도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내가 찾는 녀석이 아니었다.
그러다 몇 분 후.
마침내 나타났다.
눈에 띄는 금발 말총머리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녀석은 청소 카트를 밀면서 기숙사 쪽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 에메랄드색 눈동자에는 묘한 피곤함이 깃들어 있었다.
안드로이드답지 않게 말이다.
'찾았다.'
CL-00245. 통칭 시엘.
원작소설의 서브 히로인 중 한 명이자, 현재 빙의자임이 거의 확실시되는 캐릭터.
나는 곧장 시엘을 좇기 시작했다.
들키지 않도록 충분한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를 밟았다. 녀석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한참이나 걸어가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슬쩍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로를 이탈했군.'
녀석이 향한 방향은 과학 기술동 방향.
일반 기숙사 메이드 로봇이 향한 이유가 하나도 없는 장소였다.
학생교무동과 과학 기술동을 잇는 기다란 복도를 한참이나 걷던 녀석은, 중간에 나타난 작은 철문 앞에서 슬쩍 멈추었다.
아마 들어갈 생각이리라.
'지금이다.'
녀석이 문을 반쯤 열었을 때쯤.
자리를 박찼다.
내 외형은 베네딕트의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펙이 떨어진 것이 아니다. 순식간에 몇십 미터의 거리를 좁혀 녀석의 뒷덜미를 움켜쥐는 건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으아악?!"
녀석이 비명을 지르려 했다.
허나 내 손이 더 빨랐다.
입을 힘껏 틀어막고 반쯤 열린 문을 완전히 열어젖힌 후, 그대로 녀석의 몸을 안쪽으로 밀쳤다.
쿠우웅!
갑작스런 충겨에 녀석이 앞으로 크게 고꾸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녀석의 목덜미를 움켜쥔 후, 양 다리를 이용하여 녀석이 발버둥 치지 못하도록 깔아뭉갰다.
"다, 당신 누구...!"
"찾았다, 빙의자."
"...."
녀석이 놀라며 숨을 삼키는 게 보였다.
에메랄드색 안구카메라 렌즈가 크게 열리며 나와 시선이 교차되었다.
허를 찌르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내게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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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달성]
해방자(解放者) 'CL-00245'를 만났다.
업적 포인트: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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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빙의자라고 여겼건만.
... 어째서 업적이 달성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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