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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MOORIMWEST / Chapter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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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RIMWEST

Tác giả: Kakao_Cuenta_4694

© WebNovel

Chương 1: 1

1화

[중원이 하나로 통일된 지 어느덧 천년이 훌쩍 지났다.

그것은 역대 황제들의 초월적인 무공과 막강한 황군을 통한 철권통치가 이 땅에 자리를 잡은 지도 천년이 훌쩍 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도탄에 빠진 백성과 세상을 위해 떨치고 일어섰던 영웅의 후예가 권력과 힘에 취해 타락하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던 시간이기도 했다.

시황제의 폭정을 막기 위해 새로운 제국을 새웠던 고조의 뜻은 이미 백성의 피, 그리고 가진 자들의 역겨운 땀과 탐욕에 절어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더럽혀졌다.

반대를 허락하지 않는 절대자 황제와 그 뜻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황군의 제국은 기나긴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피를 빨아먹고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막힘없이 뚫린 도로와 비대해진 도시들은 밤만 되면 저 하늘의 별들을 지상으로 끌어내린 듯 휘황찬란하게 반짝거렸으나 그 드높은 건물들의 진창에는 굶주린 백성들의 끈적한 피와 눈물, 벗겨진 살갗에서 흐른 진물로 지저분하게 질척거렸다.

그것을 보다 못한 수많은 기인이사와 무인들, 협객, 뜻있는 자들이 칼을 들고 일어선 것은 이 제국을 세웠던 고조의 신화를 듣고 자란 제국인들에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무수히 많았던 협객 중 황제와 황군을 깨부순 자는 없었다.

그것 또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몰랐다. 한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절세의 무공을 익힌 황군과 그 중의 가장 강한 자로 키워질 수밖에 없는 황제가, 어느 산골에 틀어박혀 오래된 옛 무공을 홀로, 혹은 서넛이서 익힌 자들에게 진다는 것은 쉬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일 터였다.

힘없는 백성들을 모아 백만의 군세를 일으켜도 일만의 황군이 몰려와 열 번씩만 칼을 휘두르면 모조리 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원에 있는 문파들이 무공을 익히는 목적은 황군이 되기 위한, 황제의 눈에 띄기 위한 무공이 되어가게 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끝내 제국의 수많은 백성은 많은 자본을 가진 상인들과 권력을 탐하는 탐관오리들에게 착취당해, 이 땅에 태어나 옅은 무덤에 몸을 누이는 순간까지 자신의 땅을 한 마지기, 혹은 자신의 공방 한 칸을 가져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저 제국의 자그마한 부품이 되어 머리 위에 앉은 자들의 배를 불리는 일에 평생을 바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것이 지옥의 또 다른 모습인가 싶던 절망의 나날. 그 어느 날.

새로운 땅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거대한 범선을 타고 동쪽 망망대해를 수십 일을 항해하면 나타나는 땅이었다. 드넓은 초원과 숲, 높은 산과 깊은 계곡, 무심한 황야와 도도한 강이 흐르는 거대한 대지였다. 더불어 중원의 것과 대동소이한 식물과 동물들, 그리고 역시 크게 다를 것 없는 요괴들과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막 제위에 올랐던 지금의 황제는 선대 황제가 심심풀이로 지원했던 사업이 정말 성공하자 놀라워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자의 기록에 따르면 탐험대가 가져온 신대륙의 동식물과 제국인과는 조금 달랐던 사람들, 황금과 은 등등을 본 황제는 정말 무덤덤해 보였더랬다.

그것은 천년이 넘게 건재한, 오히려 나날이 흐를수록 강대해져 가는 제국의 철혈 황제에게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심함이 그의 완전한 본심은 아니었는지 곧 신대륙을 탐험한 자들에게 많은 보물과 새로운 범선이 하사되었다. 신대륙과 제국 사이에 안정적인 항로를 구축하라는 명령과 함께.

황제의 전폭적인-비록 그것이 황제 입장에선 심심풀이 정도에 불과하더라도-지원을 받은 탐사대와 조선업계는 빠르게 항로와 지도를 완성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항로와 거대한 선박을 타고 수많은 제국인이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신대륙에 있는 원주민들은 기껏해야 백이 좀 넘는 부족 단위의 집단밖에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특별히 넓은 농사를 짓지도 않았다. 자연히 주인 없는 땅이 넘쳤고 제국의 신민들이 보기에 그것은 잔인한 탐관오리와 냉혹한 거부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자기 땅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보였다.

몇십 년에 걸쳐 수십, 수백만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너가는 상황에 황제는 그것을 말리기는커녕 도리어 황실 산하에 함대를 만들어 다른 상인들의 배와 경쟁하며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게다가 그곳에서 자기 손으로 일군 땅은 그 백성의 것이란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필자의 생각으로 황제는 이미 수억을 넘어가는 제국의 백성들이 한 줌 바다를 건너더라도 별문제가 없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라 짐작한다. 도리어 황실의 힘을 낭비해 새로운 땅을 개간할 필요도 없이 백성들이 알아서 밭을 갈아준다니 속으론 기뻐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는 수십 년 후, 자신의 치하 말기에, 혹은 제 아들 대에 이르러 그 땅이 무르익으면, 그 잔악무도한 황군을 보내 그것을 모조리 집어삼키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철혈 황제와 황군도 짐작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이 힘없는 백성들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황군의 눈을 피해 음지에서나마 힘겹게 끈을 이어가던 협객들, 깊은 산과 계곡에 숨어 기회를 보던 기인이사들, 죽어 사라진 줄만 알았던 옛 왕조들의 가문들과 황제의 권력에 몸을 숨기고 힘을 기르던 이들이 새로운 왕조와 새 세상을 꿈꾸며 바다를 건넌 것이다.

물론 뜻있는 자들만 바다를 건넌 것은 아니었다.

도시의 어두운 곳에서 죄를 지은 범죄자들, 신대륙에서 한몫 잡으리라 바라는 시답잖은 한탕주의자들, 사악한 마공을 익힌 미치광이 마인들 등등, 온갖 사악하고 이기적인 자들도 바다를 건넜다.

당시 식자들은 그 모든 사람이 한곳에 모여 마치 끓는 기름에 들이부은 물처럼 폭발하리라 염려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질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필자의 생각에 그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신대륙은 아주 넓었고, 그 넓이에 비하자면 사람은 아주 적었던 탓이리라 생각한다.

···작금의 현황을 보고 많은 식자들이 그 식자들의 수만큼 많은 서적과 글줄을 쏟아내는 것을 필자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변변치 못한 필자의 생각 한 줄기를 엮어 올리고 싶다.

그것은 이 땅을 집어삼키려는 황제의 의도가 실패하리라는 것이다.

천년도 더 전에는 비인부전이라 하여 마땅히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연이 닿지 않는다면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와 진시황의 폭정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선 이들은 대부분 협객이었다.

하지만 고조가 그 진시황과 패왕을 물리치고 난 이후 세워진 제국의 모습은 협객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고, 거기에 강대한 제국의 권력과 감시 아래선 힘을 키울 수 없어 하염없이 지하를 떠돌아야 했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이 제국, 황제, 황군과 멀디먼 새로운 땅은 달랐다.

이곳, 협객과 악인, 선인과 마인이 넘쳐날 이 땅은, 필자가 감히 말하건대 일천 년 전 옛 무림으로의 회귀라 할 수 있었다.

각자의 무수히 많은 신념과 뜻, 이기심, 욕심, 천하의 온갖 무공이 서로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거기서 튀는 불티와 땀은 새로운 무림의 생명력이 되어 꿈틀거릴 것이고, 황제의 생각과는 다르게 질기고 단단한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제국의 억압 없이 오직 무림인 각각의 믿음을 위한 투쟁은 옛 낭만의 실체가 되어 그들 마음속의 불꽃을 피워낼 것이다.

그렇게 천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피어난 무림의 불씨는 바다 건너에 있을 황제와 황군의 힘으로는 쉽게 꺼뜨릴 수 없는···]

서책의 뒤 내용은 피에 축축이 젖어 알아볼 수 없었다.

"이게 언제적 이야기야?"

쭈그리고 앉아 책을 뒤적거리던 남자는 손에 들린 그것을 의미 없이 두어 번 펄럭이고는 그대로 바닥에 툭 던졌다. 하늘을 보고 누운 시체의 가슴팍 위로 그 서책이 떨어졌다. 거기 크게 벌어져 있는 상처 덕분에 그나마 멀쩡하던 서책의 나머지 부분도 천천히 피에 젖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낭만은 이 양반아, 편안한 집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군것질거리 씹으며 무협지 보는 게 낭만이고. 원래 오백 년쯤 가는 유방 그 인간 나라가 천년을 넘긴 이유가 바로 그 무림, 무공 때문인데 왜 거기서 낭만을 찾아."

죽은 자를 향해 텁텁한 핀잔을 날린 남자는 이내 입매를 찡그리듯 길게 늘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찌르는 불그스름한 석양빛에 눈마저 찡그렸다.

길쭉한 지평선을 그리는 드넓은 평야 위로 기울어진 태양이 오늘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흘리고 있었다. 연한 구름은 그 평야 위에 넓게 늘어져 석양을 받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뚜렷하게 나뉘며 자신의 다채로움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건 남자 주변의 시체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와 여자, 노인 등 일고여덟 정도 되는 시체들이 몸 어딘가에 큼직한 상처 하나씩을 달고 자유분방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한쪽 바퀴가 부러진 마차가 기우뚱히 자빠져 있었는데, 그 안의 짐이 어지럽게 끄집어져 있는 것과 말의 사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도적질을 당한 듯 보였다.

쭈그려 앉아 있는 남자는 기우뚱한 마차만큼이나 삐뚜름한 눈으로 식어가는 시체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눈이 마차 주변에 너저분하게 풀어진 옷가지로 향했다. 남자는 뭔가 쓸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서 뒤적거렸으나 결국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엔 아직 작은 아이가 입을만한 옷가지가 몇몇 보였다.

지금 누워있는 시체 중 아이는 없으니 아마 도적들이 잡아갔을 것이다. 자신들과 같은 도적으로 키우던가, 아니면 싼값에 팔아치울 터였다.

"···거참 안타깝군."

혼자 중얼거린 남자는 왼손에 들고 있던 삿갓을 머리에 쓰며 가볍게 침을 뱉고는 휫 하고 짧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조금 떨어져 있던 그의 말 조조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허리에 찬 칼을 한번 추스른 남자는 거침없는 동작으로 말안장에 올라타고는 등자에 끼운 발로 말의 허리를 툭툭 쳤다.

말 조조는 그 동작에서 주인의 뜻을 알아듣고는 푸르륵 투레질 한번을 하며 곧바로 달려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붉은 평야 위를 말과 그가 달렸다. 남자의 옷과 삿갓 아래로 모래 섞인 건조한 바람이 불었고, 안장과 몸은 말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렸다. 죽은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을 시체들을 뒤로한 그는 그렇게 석양을 향해 달려 나갔다.

느지막한 신대륙의 오후였다.

2화

객잔 안은 가벼운 소음으로 가득했다.

2층짜리 사합원 모양의 객잔 1층에는 저녁 식사를 하는 자들과 술을 마시는 남자들, 구석 탁자에서 골패를 만지작거리는 사람들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보였다. 그 사이를 객잔 주인으로 보이는 배불뚝이 중년인이 국수 그릇이나 술병, 안줏거리들을 들고 바쁘게 오갔다.

그때 삿갓을 쓴 한 남자가 객잔의 주렴을 열고 들어섰다.

외지인이었다. 국수를 먹고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그를 훔쳐보았다. 칼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일 테지만, 신대륙에서는 개나 소나 창칼을 쥐고 무림인이라 지껄이니 그리 특이하달 것도 없었다.

뚜벅뚜벅 들어온 남자가 시선들을 느끼고 멈춰서자 객잔 주인이 다가갔다. 주인은 허리띠에 달린 수건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외지인이시군. 어서 오시오, 환영하외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쓰고 있던 삿갓을 슬쩍 밀어 올리며 객잔 주인을 바라보았다. 객잔 주인은 삿갓 아래 보이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숙박이시오?"

"식사도."

객잔 주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열 문이오."

남자는 별 말없이 품에서 동전 열 문을 꺼내 내밀었다. 객잔 주인은 그걸 받아들고 주방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편한 데 앉아 있으쇼. 국수 하나 금방 말아 올 테니까."

객잔 한쪽 구석으로 걸어간 남자는 허리춤의 칼을 칼집 그대로 뽑아 탁자 옆에 세워놓고 삿갓을 벗었다.

그가 특별히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 않자 조금 조용해졌던 객잔 안이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남자, 장건은 양손을 탁자 위에 올려둔 편한 자세로 앉아 천천히 객잔 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객잔 겸 식당 안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 마을 사람이나 인근 농부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도 그처럼 탁자 옆에 검이나 칼을 세워둔 사람들도 있기는 했으나 기껏해야 서넛이었다. 서부 해안 쪽 도시나 마을에는 무림인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이 평범한 양민들보다 많았지만 이곳은 그쪽과 거리가 좀 있는 지역이었다. 칼잡이보단 농부가 많았다.

그래서 기껏 있는 칼잡이들도 모두 떠돌이가 호신용으로 날붙이를 마련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꽤 손님이 많았으나 객잔의 일손은 주인이 전부인 것 같았다. 다른 객잔에선 흔히 한두 명씩 있는 점소이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주인의 부인이나 자식이 있지도 않았다. 장건의 생각에 이런 객잔 상황이라면 국수 한 그릇 말아오는 것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이런 염병! 너 이 새끼! 지금 사기 쳤지?"

"뭐? 사기? 지 손가락 병신인 건 생각 안 하고 뭐가 어째?"

그때 객잔 구석에서 골패를 만지작거리던 남자들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졌다.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 장건을 등지고 앉은 남자를 노려보며 사기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은 그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로 죽이겠다니 어쩌니 말싸움을 해댔다.

객잔 안 사람들은 흔히 보던 광경인지 고개를 살살 흔들거리거나 낄낄 웃으며 술을 마셨다. 소란을 들은 객잔 주인마저도 주방 주렴 밖으로 고개만 슬쩍 꺼내 보더니 픽 웃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긴장하거나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 없으니 아마 저렇게 서로 욕이나 하다가 끝날 모양이었다.

하지만 장건의 눈은 그들에게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그를 등지고 선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였다.

"이런 시발! 그럼 오늘 종일 너는 따고 나는 잃는 게 말이 되냐!"

"아니 글쎄, 그건 네 손가락 문제 아니냐고. 너 빼고 다른 사람들은 많이 땄잖아?"

"이 새끼가?"

사기를 주장하던 남자는 결국 화를 참지 못했는지 상대방을 두 손으로 툭 밀었다. 그를 비웃던 자는 주춤거리며 뒤로 두어 걸음 밀려났다가 이내 으르렁거렸다.

"뭐야. 진짜 해보자는 거야?"

"그래 이 새끼야! 그동안 당해주기만 하니까 내가 진짜 호구인 줄 알았냐?"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멱살을 쥐더니 거칠게 흔들어대며 못 알아들을 욕설을 외쳐댔다. 그리고 그때까지 소란을 주시하던 장건은 끝내 등만 보이던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저 새끼 여기 있었군."

짧게 중얼거린 장건은 가만 둘의 실랑이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가 그렇게 다가가는 동안에도 두 남자는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다시피 거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탁자의 다른 사람들은 둘을 말릴 생각이 없는지 슬슬 웃기만 했다.

"어이."

멱살을 잡고 난리를 피우던 두 남자가 장건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사기를 주장하던 자는 장건을 보고도 '이 새끼 뭐야?' 하는 얼굴이었지만, 다른 남자는 혼자 덜컥 놀라서는 스르륵 창백해졌다.

"···뭐요?"

사기를 주장하던 남자의 질문에 장건이 고개를 저었다.

"그쪽 말고."

얼굴이 창백해졌던 남자는 장건의 말을 듣고 이리저리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다가, 이내 비실비실 쪼개며 말했다.

"···장 형, 여기서 보네?"

"그래. 두 달 만이군. 잘 지냈냐?"

남자는 붙잡고 있던 상대의 멱살을 슬쩍 놓으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상대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의 옷깃을 놓아주었다.

"나야, 뭐. 자, 잘 지냈지. 그, 장 형은 잘 지냈소?"

장건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 잘 못 지냈다. 어떻게 된 것이 네 일당은 다들 잘 지냈다는 말만 하는군."

"···다른 친구들도 찾았던 모양이오?"

"그래. 네가 마지막이야."

남자는 슬쩍 뒤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그, 그게··· 사실 나, 난 하지 말자고 했었소. 그렇잖소? 골패로 칼 든 무림인 털어먹자는 게 말이 되나? 걸리면 그 칼 맞을 게 뻔한데?"

"하지만 너희는 결국 했지."

남자는 장건의 대답을 듣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하핫, 하고 웃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몸을 돌린 동시에 어떤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자신의 뒤통수를 붙잡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손아귀는 그대로 그의 머리를 골패가 늘어져 있던 탁자 위에 내리꽂았다.

"어억!"

남자의 이마가 탁자에 처박히며 골패와 동전들이 들썩거렸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움찔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얼굴을 박은 남자는 머리가 띵하고 고통스러운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장건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했으나 머리를 누르는 손은 바위라도 되는 것처럼 꼼짝도 하질 않았다.

"지, 진짜 난 하지 말자 했다고! 그리고 결국 그렇게 돈이 다 털리도록 앉아 있던 건 장 형이잖소! 우린 중간에 장 형이 일어나도 붙잡을 생각이 없었소! 진짜로! 좀 봐주시오!"

장건은 대답 없이 남자의 왼손을 붙잡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 소매에 숨겨져 있던 골패를 끄집어냈다. 장건은 그 골패를 남자의 얼굴에 들이밀고 가까이 붙어 낮게 속삭였다.

"그런다고 도박판에서 속임수 쓴 게 사라지냐? 지랄 말고 양굉, 내 돈 어딨어?"

양굉이라는 남자는 번들거리는 장건의 눈을 보고 꿀꺽 침을 삼키고는 대답했다.

"···그게, 무, 무림맹 현상금으로 냈소."

"뭐 시발? 그걸로 현상금을 냈다고?"

양굉은 찡그려지는 장건의 얼굴이 무서운지 벌벌 떨었다.

"그, 그럼 당장 여기에도 무림맹 지부가 있는데 내가 어쩌겠소? 나도 객잔에 들어와 밥은 먹어야 할 것 아니오···"

장건은 탁자에 처박혀있던 양굉의 머리를 붙잡아 일으키고는 멱살을 붙잡았다.

"그래서 한 푼도 없단 거냐?"

"그, 그건 아니고, 여기 와서 딴 게 있으니··· 그걸로 좀···"

양굉은 탁자 위에 깔린 동전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걸 본 장건은 붙잡고 있던 양굉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그가 앉아 있던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기 깔린 동전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양굉을 사기꾼이라 욕하던 남자와 그와 같이 앉아 도박하던 사람들, 그리고 객잔 안에 있던 손님들 모두 멍한 눈으로 그걸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저 양굉이란 자가 예전에 도박판에서 속임수를 치고 도망쳤다가 잡힌 모양인데, 그런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지금 장건의 행동은 거침없는 면이 있었다.

"자, 잠깐. 잠깐 멈추쇼!"

그때 양굉을 욕하던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장건에게 소리쳤다.

"멈춰보시오! 그거 다 속임수로 딴 돈이잖아! 그거 내 돈이야!"

장건은 그렇게 외친 남자를 흘끔 보고는 계속 동전을 챙기며 대답했다.

"그게 내 책임은 아니지. 나중에 이놈한테 알아서 받으시오."

"뭐, 뭐 시발?"

남자는 장건의 대답을 듣고 다시 확 열이 오른 얼굴로 두 손을 뻗었다. 양굉을 밀쳤던 것처럼 밀어버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장건을 밀어붙이려는 순간, 장건은 남자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기며 슬쩍 비켜섰다.

"어이쿠!"

확 끌려간 남자는 그대로 앞으로 자빠져 굴렀다.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지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박기까지 했다. 장건은 그가 얼굴이 갈리든 말든 다시 탁자로 다가가 양굉의 동전을 챙겼다.

금세 자리에 있던 동전을 모두 집은 장건은 그것을 품에 챙겨 넣고 돌아서 다시 주저앉아 있는 양굉의 멱살을 잡았다.

"어엇, 왜, 왜 이러십니까, 장 형!"

"왜긴 자식아. 한참 모자라니까 그렇지."

"그, 그게··· 이젠 저도 가진 게 없는데···"

양굉은 정말이라는 듯 비시식 웃으며 비어있는 두 손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마치 정말 이젠 가진 게 없다고, 못 믿겠으면 몸을 다 뒤져보라는 듯했다.

그걸 본 장건이 정말 이놈 옷이라도 싹 벗겨야 하나 생각할 때였다.

"너, 너 이 새끼!"

바닥에 넘어졌던 남자가 코를 부여잡고 일어나 장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코를 부여잡은 손 사이에서 줄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시발! 내 코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넌 뒈졌어!"

장건은 그 흉한 꼴을 보고 멋쩍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다치게 한 건 미안하오. 하지만 나도 이놈한테 뜯긴 돈이 한두 푼이 아니라···"

장건은 말끝을 흐렸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보이던 남자가 그대로 객잔 밖으로 도망가버린 탓이었다.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장건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으며 다시 양굉에게 눈을 돌렸다.

"저놈은 또 뭐 하는 병신이야?"

"그··· 그게··· 일단 저 녀석 이름은 진양석인데···"

장건은 양굉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고. 너 어쩔래?"

"예, 예? 뭘 어쩝니까?"

옷깃을 잡은 장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든 내 돈 내놓을래, 아니면 단전이 박살 나볼래."

그 말에 양굉은 왼쪽 눈과 두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 제 눈곱만한 공력 흩어보셔야 장 형에게 무슨,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장건은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에도 동정심 하나 느끼지 못하는지 말없이 돌처럼 굳게 쥔 왼 주먹을 양굉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 주먹과 장건의 눈을 불안하게 번갈아 보던 양굉은, 이내 푹 한숨 한번을 내쉬더니 축 처져서는 눈까지 내리깔며 말했다.

"···그럼 일단 이것 좀 놔 주십시오. 품에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장건이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아주자 양굉은 앞섶을 조금 풀더니 가슴팍 쪽 옷자락 한구석을 쥐어뜯어 그 안에 교묘히 숨겨져 있던 작은 헝겊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느릿한 손놀림으로 헝겊을 풀어 헤쳐 작은 옥가락지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는 그 옥가락지를 보며 다시 한숨 한번을 내쉬곤 장건에게 내밀었다.

"···저기, 뭐냐. 예전에 신사천에서 얻은 겁니다. 진짜 옥이니까 적당한 구매처만 찾으면 값이 꽤 나올 겁니다."

장건은 그걸 받아 들고는 눈앞에서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곧장 자기 품속에 집어넣었다. 양굉은 그런 장건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어, 어떻습니까? 그 정도면 되시겠지요?"

"그래. 이 정도면 되겠군."

장건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어설프게 따라 웃는 양굉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주방 밖으로 나와 있는 객잔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객잔 사람들이 보내는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의 객잔 주인에게 덤덤하게 물었다.

"내 국수는 언제 나오는 거요?"

3화

양굉은 가지고 있던 돈과 옥가락지를 뜯기고 금방이라도 도망칠 듯하던 기색과는 달리 후루룩후루룩 국수를 먹는 장건 앞자리에 앉아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장 형, 지금 장 형 국수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요."

장건은 대답 없이 국수만 먹었다. 면을 잔뜩 빨아들여선 두 볼 가득 채우고 우물거리는 모양이 보통 먹음직스러운 게 아니었다. 양굉은 괜히 침만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 장 형. 그래도 내가 장 형이랑 식사도 하고 같이 골패도 만지작거리던 기억이 있으니 말해주는데, 얼른 이 객잔을 뜨는 게 좋을 것이오."

장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수를 우물거리다가 그릇을 들어 후루룩 국물까지 마셨다. 그 후 그릇을 내려놓고 입 안에 있던 것을 모두 삼킨 다음, 옆에 놓여 있던 찻물까지 한 모금 목으로 넘기고 나서야 양굉에게 눈을 주었다.

"왜?"

"···아까 도망친 놈 있지 않소?"

"진양석?"

양굉이 자기 턱을 긁적거렸다.

"안 그런 척 하더니만 다 기억하시는군. 뭐 어쨌든, 그 친구가 좀 위험한 친구요."

"너 같은 사기꾼한테 털리던 놈이?"

장건의 말에 양굉은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거참 말을 해도 사기꾼이 뭡니까?"

"사기꾼이 싫으면 도적놈이라 불러주고."

"에헤이. 방금 내가 한 말 기억 안 나는 거요? 무림맹 현상금 다 냈다니까."

"그걸 내면 피해자가 사라지냐?"

양굉은 두 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현상금 일부는 그 인간들 보상금으로 나간다지 않소? 그럼 됐지 뭐. 게다가 난 가난한 양민들을 털어본 적 없소이다."

"네가 홍길동이냐?"

"···홍길동이 누구요?"

장건은 다시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활빈당의 당주."

"···활빈당?"

"말해주면 아냐?"

양굉은 헤죽 웃었다.

"아니. 모르지. 내가 배움이 좀 부족해서."

장건은 그런 양굉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놈이 왜 위험한데."

양굉은 탁자 구석에 엎어둔 찻잔 하나를 집어와 자기도 그 잔에 찻물을 채우며 말했다.

"진양석 그놈은 뭐 없는 놈이오. 무공도 배우질 않았고, 그렇다고 가진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지. 배운 게 많아서 똑똑한 것도 아니고. 그냥 호구지, 호구."

"그 호구가 위험하다?"

그는 따른 찻물을 한 모금 홀짝거렸다.

"호구는 그냥 호구지. 문제는 그 호구한테 형이 하나 있다는 것이오. 그것도 꽤 고수인 형."

양굉의 말을 듣던 장건은 피식 웃으며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나도 무공 좀 한다."

"아 그건 나도 알지. 저기 암주골에 장 형 주먹 솜씨 모르던 사람이 어디 있소? 다들 칼 뽑는 거 보기 전엔 그게 장식품이 분명하다고 했지."

그 말에 장건은 젓가락 든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럼 뭐가 문젠데 새끼야. 말 돌리지 말고 빨리 해."

"···호구의 고수 형도 문제인데, 그 형놈 소속 문파는 더 문제요. 사상파라는 사파거든."

장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림맹 지부가 있다며? 근데 사파가 어떻게 있어?"

양굉은 실실 쪼개며 대답했다.

"궁금하시오?"

장건도 실실 웃었다. 그는 꽉 쥔 왼 주먹을 보여주었다. 주먹을 본 양굉의 안색이 조금 하얘졌다.

"그, 뭐냐. 말할 테니까 주먹은 좀 내리시고··· 당연히 겉으로는 사파가 아니오. 그런 집도 없이 떠도는 부랑자들은 아니지. 거기 두목이랑 여기 무림맹 지부장이랑 어떻게 엮여 있다는데, 그래서 적당한 선만 지키면 아예 건들지를 않는다는 모양이오. 그리고 호구의 형 진청석은 거기 최고수고."

"그런 놈 동생을 털어먹고 있었냐?"

양굉은 다시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했잖소. 그놈들도 선을 지켜야 한다고. 방금 있던 일은 어제도 있던 일이었고, 아마 장 형이 오지 않았다면 내일도 있었을 일이외다."

"무림맹 참 잘 돌아가는군."

"여기 주민들도 다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오. 평소 불만이 많았는지 외지인인 나한테 입을 쉽게 열더라니까."

장건은 양굉에게서 눈을 떼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럼 그만 떠들고 그 주민들한테 꺼지든가."

"···그건 좀 곤란하오만."

이놈이 무슨 말을 하나 싶었던 장건은 방금까지 양굉이 앉아있던 탁자를 돌아보고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아까까지 웃으며 양굉과 도박을 하던 사람들은 이제 그와 장건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진양석을 도발한 것과 속임수를 썼다는 것 때문일 터였다.

거기에 몇몇 주민들은 겁을 먹었는지 슬금슬금 객잔을 떠나고 있었다. 장건이 남은 국수를 우물거리며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객잔 주인이 다가와 굳은 얼굴로 말을 걸었다.

"손님."

장건은 객잔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주인장의 얼굴은 굳어있을 뿐만 아니라 파르르 떨리고 있기까지 했다.

"국숫값이랑 숙박비는 돌려드리지요. 그러니 내 객잔에서 나가주시오."

양굉은 그걸 보고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자, 이런 상황이니 나갑시다. 사상파 놈들이 오기 전에. 놈들이 오면 나나 장 형이나 무사하기 힘들 것이오."

그러나 장건은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도 느긋하게 국수의 면을 다 건져 먹고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셨다. 꿀꺽거리며 국수 그릇을 바닥까지 모조리 비운 그는 빈 그릇을 내려놓고 가볍게 트림까지 하며 짧게 말했다.

"무사할 것 같은데."

"···장 형이 무슨 황군고수요? 사상파 놈들이 스물은 된다는데 어쩌려고?"

"도망치려면 날 붙잡고 떠들 게 아니라 냉큼 떠났어야지. 이미 늦었어."

양굉과 객잔 주인이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순간 객잔 문 주렴 너머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지."

객잔 주인과 양굉에서 싸악 하고 핏물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대충 봐도 우락부락해 보이는 그 남자는 몸무게가 꽤 되는지 객잔의 나무 바닥이 끄드득끄드득 하는 소음을 냈다.

객잔으로 들어선 우락부락한 남자는 겁먹은 객잔 주인과 양굉을 거쳐 장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차를 마시는 장건을 잠시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놈들이냐?"

"어, 어. 맞소, 형님. 저놈들이 속임수를 써서 내 돈을 뜯고는 항의하자 코를 이 모양으로 부숴놓았소. 꼭 좀 혼쭐을 내주시오."

"···네 돈?"

남자 뒤에서 나타난 진양석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얼른 덧붙였다.

"그, 사람들 돈을 뜯고 있었지. 내 돈, 그건 그러니까, 그 일부에 불과하고."

우락부락한 남자는 코에 붕대를 두르고 떠듬거리는 진양석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다시 양굉과 장건에게 눈길을 주었다.

"다 나가시오."

장건은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객잔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간 것이다. 객잔 주인도 그 뒤를 따라나서다가 남자 옆에서 멈칫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그, 새 탁자를 산 지 얼마 안 됐는데···"

남자는 말 없이 도끼눈으로 객잔 주인을 바라보기만 했고, 주인장은 그 눈빛에 놀라서 얼른 주렴 너머로 달려 나갔다.

불안한 표정을 짓던 양굉은 나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나갈 생각으로 슬며시 일어섰다.

"앉아라. 너부터 뒈지기 싫으면."

그는 장건의 건조한 목소리를 듣고는 자연스럽게 다시 자리에 앉아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음? 무슨 소리요, 장 형? 나 여기 앉아있는데?"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장건은 그 말에 대답은 안 하고 피식 웃기만 했다. 그때 객잔 안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밖에서 험상궂은 남자 일고여덟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객잔 구석자리에 앉아있는 장건과 양굉을 반원을 그리며 포위했다.

그때까지 장건을 노려보던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반갑소, 친구들. 난 진청석이라고 하외다. 부끄럽지만 이 마을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고 있지. 그래봐야 평화로운 곳이라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놀고먹는 와중이었소만."

그는 장건과 양굉이 앉은 탁자 앞에 멈춰 섰다.

"그런데, 오늘 여기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군."

장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진청석을 바라보다가 찻잔을 들어 마셨을 뿐이다. 진청석이 그걸 보고 눈썹을 꿈틀거리자 눈치를 보던 양굉이 냉큼 일어나 두 손을 모아서 포권을 하고 말했다.

"하, 하하. 이거 뭔가 서로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반갑습니다. 전 양굉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 이 마을에 왔는데, 그 잠깐에도 진 형이 의협심 넘친다는 이야기를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니라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요즘 같은 때에 협객이라니요? 그런데 정말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아, 그리고 이쪽은 장 형, 장건 형님인데, 이 마을에 온 지는 얼마 안 됐고···"

그러나 양굉의 말은 갑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진청석의 오른손 검지에 끊어졌다. 양굉이 그 갑작스러운 삿대질에 당황하는 순간 진청석이 입을 열었다.

"사기꾼."

"예, 예? 사, 사기꾼?"

그 검지는 그대로 움직여 이번엔 장건을 가리켰다.

"불량배."

진청석은 손을 내리고 양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거만하게 말했다.

"이 평화로운 마을에 갑자기 나타나선 가난한 양민들 등을 처먹고, 그걸 보다 못한 내 동생의 항의는 주먹질로 대답하다니. 보통 무뢰배들이 아니구나. 협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이 일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내 너희를 모두 체포해 무림맹 지부로 끌고 가야겠다. 부디 바라건대, 저항해봐야 다치기만 할 뿐이니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치 재판관이라도 되는 듯 죄를 확정 짓는 말과 당당한 태도에 양굉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입만 뻥긋거렸다. 두 사람을 포위하던 남자들은 진청석의 말이 끝나자 허리춤에서 두툼한 몽둥이 하나씩을 빼 들며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양굉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시발···'하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냅다 쳐 죽이니 어쩌니 하진 않는군."

조용히 있던 장건의 갑작스러운 말에 포위를 좁혀오던 남자들이 멈칫거렸다.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진청석을 바라보며 눈치를 봤다. 진청석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장건을 노려보았다.

"어찌 대낮 객잔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느냐?"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 핍박하는 건 괜찮고?"

진청석은 장건이 앉은 탁자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마을을 어지럽히는 불량배를 체포하기 위함이니, 강호 동포들 모두 상황을 이해해 줄 것이다."

"여기 그쪽 건달들 말고 강호 동포가 어디 있다고. 자의식이 비대하시군."

장건의 비꼼에 진청석은 한 걸음을 더 다가와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 새끼가 정말 뒈지고 싶어서 꼬박꼬박 말대꾸하는구나. 적당히 하지 않으면 무림맹에 넘기기 전에 그 주둥아리를 찢어놓는 수가 있다."

장건은 그 험악한 말에도 피식 웃었다.

"멀쩡히 보내주진 않겠다?"

"내 동생 얼굴에 저 지랄을 해놓고, 내 마을에서 사지 멀쩡히 빠져나갈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적어도 팔 병신, 다리 병신을 만들어주마. 뭐, 그게 싫다면 그 다리 사이 물건 하나로 봐주지."

진청석의 마지막 말이 뭐가 웃기는지 포위하고 있던 건달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낄낄거리며 몽둥이로 자기 허벅지를 툭툭 치는 놈도 있었다. 그걸 본 양굉만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두 손을 모으며 다리를 움츠렸다.

그리고 장건은 그 건달들과 진청석, 실실 쪼개는 진양석 등을 모두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말했다.

"무협지에선 보통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면 이 새끼 뭔가 있지 않을까 조심하지 않냐? 혹시 황군은 아닐까, 떠돌던 고수는 아닐까 하는, 그런 걱정은 안 해?"

장건의 말을 들은 진청석의 안색이 싹 굳었다.

"뭐요? 황군? 황군이시라고요?"

장건은 멀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건 아닌데."

"···뭐야, 이 미친 새끼? 장난하냐? 뒈지고 싶어서 황군을 사칭하는-"

그 순간 자리에 앉아있던 장건이 아무런 준비동작 없이 의자에서 튕겨 올라 손으로 탁자를 짚고 뛰어넘으며 진청석의 얼굴에 발차기를 꽂아주었다.

그 발차기 한 번의 힘이 얼마나 셌던지 우락부락하고 커다란 덩치의 진청석이 그대로 객잔 입구까지 나가떨어졌다. 쓰러진 그의 두 눈은 맹하니 풀렸고, 앞니는 위아래 할 것 없이 모조리 부러져 나가 피가 질질 흘러 보기 흉했다. 객잔 안에 있던 건달들과 양굉은 멍청한 얼굴로 쓰러진 진청석과 장건을 번갈아 보았다.

진청석을 걷어찬 반동으로 그 자리에 깔끔히 내려선 장건은 삐뚜름한 눈으로 그 시선을 마주 보며 말했다.

"황군 아니면 고수가 없냐?"

4화

멍청한 얼굴로 진청석과 장건을 번갈아 보던 사상파 건달 중 누군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저 새끼 쳐!"

그들 중 어느 정도 이상의 무공을 익힌 자가 있었다면 그렇게 무작정 공격하란 말이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건달 중 최고수인 진청석은 이미 나가떨어져 있었고, 건달들은 방금 장건의 움직임을 읽을 정도로 안법을 수련한 적이 없었다.

"이 시발! 뒈져!"

장건과 제일 가까이 있던 건달이 손에 쥔 몽둥이를 휘둘러왔다. 어떤 현묘함도 느껴지지 않는 사선 공격. 평범한 양민의 머리를 깨버릴 적엔 충분했을 움직임.

장건은 오른발을 뒤로 한 발짝 빼고 슬쩍 허리를 젖혀 가볍게 몽둥이를 피했다. 그리고 곧바로 젖혔던 허리를 펴며 오른 주먹으로 건달의 턱을 후려쳤다. 쩍-하는 소리가 울리고 건달은 뻣뻣해지더니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놈이 완전히 쓰러지기도 전에 놈을 지나 앞으로 나아간 장건은 그대로 오른발을 들어 건달 한 놈의 얼굴에 찍어주었다. 동시에 반발력이 실린 그 오른발을 끌어 뒤돌려차기로 다른 한 놈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그 움직임에 놀란 건달 한 놈이 반사적으로 장건에게 달려들며 몽둥이를 높이 치들었다. 장건은 재빠르게 그놈에게 몸을 돌리고는 왼 주먹으로 훤히 열린 옆구리를 끊어쳤다. 숨이 턱 막혀 멈춘 놈의 얼굴에 오른 주먹을 꽂아준 장건은 쓰러지는 놈을 두고 오른쪽으로 크게 발을 내디디며 팔꿈치를 들었다.

그 팔꿈치 끝에 건달 한 놈의 명치가 있었다. 그놈이 우웩 토하는 순간 이미 몸을 뺀 장건은 왼발 돌려차기로 다른 놈의 턱을 스쳤다. 턱이 스친 놈의 눈이 맹하니 풀리며 앞으로 자빠졌다.

몸을 바로 한 장건은 평범한 걸음으로 남은 두 놈에게 다가갔다. 그 두 놈은 다른 건달들이 픽픽 쓰러지는 모습에 멍청한 얼굴이 되어 입을 벌리고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건은 그 두 놈 앞에 삐딱 서서 한심스러운 얼굴들을 확인하고는, 턱에 한 주먹씩 꽂아주었다. 둘은 켁 하는 소리 한 번씩 내고 쓰러졌다.

아주 잠깐 사이에 진청석을 포함해 건달 아홉을 쓰러뜨린 장건은 두 손을 탁탁 털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진양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놈은 약삭빠르게 자기 형이 쓰러지자 곧장 도망친 것이다. 피식 웃은 장건이 양굉에게 돌아섰다.

양굉은 방금 턱을 맞은 건달처럼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으시네?"

"이런 건달들한테 지려고 배운 무공이 아니니까. "

양굉은 쓰러진 사상파 놈들을 내려다보며 자기 턱을 쓰다듬었다.

"아니 그래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내가 골패를 내 무공의 절반만큼만 했어도 네 일당한테 털릴 일은 없었어."

장건은 쓰러진 건달들을 피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와 탁자 옆에 세워두었던 칼을 집어 허리에 매고, 삿갓을 손에 들었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고 다시는 얼굴 볼 일 없도록 하자, 사기꾼."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져있던 양굉은 장건의 말에 슬그머니 몸을 움츠리며 비실비실 웃었다.

"아니, 장 형! 이렇게 헤어지자니? 그렇게 박정한 말이 어디 있소? 그러지 말고 우리 술이나 한잔합시다."

"뭐 시발, 뭐가 아쉬워? 돈 더 뜯기고 싶어?"

양굉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이대로 떠나려고?"

장건은 대답 없이 객잔의 창밖을 턱짓했다. 창 가장자리엔 방금 도망쳤던 객잔 주인과 손님들이 믿기 힘들단 눈으로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양굉도 그 얼굴들을 확인했다.

"···아, 그래. 확실히 이 객잔에서 술 먹기는 글렀구먼."

양굉의 중얼거림을 들은 장건은 가볍게 웃고는 객잔의 문을 나섰다. 창밖을 바라보던 양굉은 얼른 그 뒤를 따라붙으며 말했다.

"에이, 장 형! 그러지 말고 같이 갑시다. 이 사상파 놈들이 아직 열은 더 남았다니까? 그 중엔 저 진청석 위에 있던 사상파 문주놈도 있소! 게다가 진청석보다 반 수 처진다는 놈이 문주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겠소? 그건 바로 여기 무림맹 지부와 끈이 있는 것이 바로 그 자식이기 때문에···"

양굉은 객잔 주렴을 걷고 나가던 장건이 걸음을 멈추자 그 등에 얼굴을 박을 뻔하고는 움찔 멈춰 섰다.

"뭐요? 왜 멈춰?"

장건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양굉은 슬쩍 그의 어깨 너머로 머리를 빼 객잔 밖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그곳엔 말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건장한 중년인 하나와 검을 뽑아 든 무사 다섯이 객잔 입구를 포위하고 있었다. 양굉은 슬그머니 다시 객잔 안으로 뒷걸음질 쳤다.

말 위에 앉아있는 중년인은 풍성한 자신의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장건이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탄 말 옆에는 장건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진양석이 있었다.

중년인이 말했다.

"그리 당황스러워 보이진 않는군. 내가 누군 줄 아는가?"

질문을 받은 장건은 팔짱을 끼며 중년인의 가슴께를 향해 턱짓했다.

"무림맹 지부장이시겠지."

장건이 바라보는 중년인의 상의에는 조그마한 육각형의 금속이 꿰여 있었다. 무림맹에서 각 지부의 지부장들에게 지급하는 무림맹 표식이었다. 중년인은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고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이 마을 무림맹 지부장이네. 그리고 지금 자네가 내 마을 사람들을 폭행했단 신고가 접수되었는데 말이야."

"그냥 폭행 정도가 아니오! 내 형님이 인사불성이 되셨단 말이오! 이빨도 나가셨으니 이제 식사도 제대로 못 하겠지!"

지부장 옆에 있던 진양석이 고함을 질렀다. 지부장은 그 모습을 보곤 정말이냐는 듯 다시 장건에게 시선을 주었다.

장건은 팔짱 낀 그대로 퉁명스레 말했다.

"정당방위였소."

"정당방위?"

지부장의 반문에 장건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그럼 구 대 일 싸움이 정당방위가 아니면 뭐겠소? 아홉 명 중 여덟은 몽둥이까지 들고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 객잔 밖으로 나오는 건 자네뿐이군."

"그 아홉이 좀 병신이었소."

지부장은 어째선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누구 죽었나?"

장건은 말없이 느릿하게 고개만 가로저었다. 지부장은 더 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양석은 그걸 보곤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지부장! 당장 저놈을 체포하지 않고 뭐 하는 게요? 내 형님이 쓰러졌다니까! 나도 코가 부러졌고!"

진양석의 외침을 들은 지부장은 천천히 안색을 굳히며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진양석은 그 시선에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뭔가 깨달았는지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지부장이 그를 향해 말했다.

"진청석을 포함해 사상파 아홉이 쓰러졌다? 그럼 내가 너희들을 계속 참아줄 이유가 뭐지? 너희 중에서 그나마 무공 흉내라도 내는 건 그 진청석과 문주뿐이지. 그리고 둘 중 하나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나머지 건달들은 내 부하들 선에서 끝이고."

"그, 그··· 내, 내 형님이 깨어나면, 가, 가만있지···"

"그가 깨어나서 보는 건 감옥 창살뿐이다."

지부장은 검을 뽑고 서 있던 무사들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검을 집어넣고 허리에서 포승줄을 풀어서 진양석을 묶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말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한 얼굴로 끌려갔다.

지부장은 여전히 말을 탄 그대로 장건에게 조금 다가와선 말했다.

"자. 이제 거기서 비켜서게. 마을을 어지럽히던 건달들을 체포해야 하니까."

상황을 가만 지켜보던 장건은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객잔 입구에서 나와 말이 묶여있던 말뚝 쪽으로 걸어간 것이다. 무림맹 무사들이 우르르 객잔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지부장은 고삐를 푸는 장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바로 떠날 생각인가?"

장건은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 하지도 않았다. 지부장은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생각했네. 아무리 정당방위였다지만 자네가 계속 여기 머무는 것은 좀 곤란하지.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할 테니까."

그가 말하는 잠깐 사이에 객잔 안으로 들어갔던 무사들이 기절한 건달들을 끄집어 길가에 늘어놓고 있었다. 지부장은 그 중 얼굴이 엉망이 된 진청석을 확인하고는 다시 장건에게 물었다.

"무공은 어디서 배웠나? 진청석 저놈이 고수는 아니어도 싸움질을 꽤 하는데."

장건은 여전히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말안장 위로 올라앉았다. 푸르륵 거리는 말의 고삐를 대충 한번 끌어당긴 그는 그제야 지부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삿갓을 쓰며 마을에 들어설 적과는 반대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과묵한 친구군."

지부장은 그가 돌아서고 나서야 표정을 굳혔다. 마음 같아선 무림맹 지부장의 지위를 이용해 그를 겁박하고 싶었으나, 혹시나 무림맹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수면 어쩌나 하는 거리낌도 있었다. 지부장은 결국 천천히 떠나는 장건을 붙잡지 못했다. 그는 싯누런 침을 바닥에 찍 뱉어내며 멀어지는 장건의 등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객잔 안에서 양굉이 튀어나오며 외쳤다.

"장 형! 같이 갑시다, 장 형! 나 여기 혼자 두지 마시오!"

그는 그렇게 무작정 외쳤다가 다른 무림맹 무사들과 지부장의 찌푸린 눈살을 받고 움찔거리더니, 재빨리 자신의 말 위에 타 장건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얼른 장건 옆으로 따라와서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염병··· 무림맹 지부장이라는 양반이 저렇게 기회주의자여서야···"

장건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이 그 작은 개척 마을의 대로를 가로지르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서, 창문으로, 혹은 문 앞에 서서 그들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양굉은 그런 사람들을 씁쓸한 눈으로 마주 보다가 말했다.

"이거 참, 그래도 장 형이 이 마을 문젯거리를 해결해준 것인데 다들 보는 눈이 좀 그렇구먼."

그는 장건에게 눈을 돌리며 물었다.

"장 형, 저 지부장 양반이 왜 저런 건줄 아시오?"

"왜 저러긴 뭐. 무림맹 소속이니 범죄자를 잡는 거지."

"자기 의무를 그렇게 잘 지키는 놈이었으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뒷담화가 나왔겠소? 보시오, 장 형. 내가 소문 하나를 들었는데, 이 일대에 지금 무림맹 순찰자가 돌고 있다더구먼. 내가 봤을 때 저 양반도 그 소문을 듣고 불안해하다가 장 형이 나타나자 좋은 기회다 하고 나선 것 같단 말이지."

장건은 대답도 없이 말안장의 흔들림에 그대로 몸을 싣고 있는데 양굉은 마을을 벗어나는 동안 계속 나불나불 떠들었다.

"그럼 덕분에 자기 치부를 가렸으니 뭐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오? 돈이라도 몇 푼 주던가, 아니면 숙식이라도 해결해주는 게 맞는 이치지, 이렇게 쫓아내는 건 아니라는 말이외다. 하여간 내가 본 무림맹 지부장 중에선 제대로 된 놈이 없었소. 어딘가 모자라거나, 아니면 저기 저 양반만큼 기회주의자들이지. 하긴 일 좀 할 줄 아는 놈이면 무림맹 안 들어가지. 저기 그래서 말인데, 장 형. 뜬금없지만 혹시 나하고 일 하나···"

양굉의 말이 멈췄다. 조금 앞서가던 장건이 멈췄기 때문이었다. 양굉이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그들은 어느새 동쪽으로 마을을 벗어나 갈림길 앞에 서 있었다. 한쪽은 북쪽으로, 한쪽은 계속 동쪽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작은 나무 표지판이 갈림길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왜 멈추셨소?"

장건은 그 말에 양굉을 바라보았다.

"넌 어디로 가냐."

"그, 글쎄? 장 형은 어디로 가시오?"

장건은 피식 웃었다.

"난 도박판에서 속임수 쓰는 놈하곤 같이 일 안 한다."

"···난 하지 말자고 했다니까? 정말이외다. 그리고 내가 무슨 일을 하자고 할 줄 알고?"

양굉의 대답에 고개를 살살 저은 장건은 동쪽 길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앞으로 다시 보는 일 없도록 하자, 사기꾼. 혹시나 따라오면 다리를 분질러 줄 테니까 알아서 해."

그리고는 그대로 말을 달려 떠나버렸다. 양굉은 다리를 분지르니 어쩌니 하는 험악한 말에 뭐라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며 그의 등과 말 엉덩이만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후 장건이 좀 멀어지고 나서야 푹 한숨을 내쉬었다.

"···거 겁나 비싸게 구네. 저놈 정체가 뭐지? 암주골 토박이는 아니었는데. 제대로 조사해 봐야겠군."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린 양굉은 북쪽 길로 말머리를 돌리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제길. 해가 다 지는데 마을에서 쫓겨나다니. 염병."

북쪽으로 출발하려던 그는 잠시 말을 멈춰 세우고 멀어진 장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해가 지며 동쪽은 검푸르게 물들어가고 있었으나, 그 어둑한 세상으로 달려가는 장건과 그가 탄 말은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지 거침없었다.

그걸 바라보며 묘한 감상을 느끼던 양굉은 이내 자신도 북쪽으로 길을 잡고 떠났다. 말발굽에 자욱하게 피어난 먼지가 그 뒤를 따랐다.

5화

삭정이를 끌어모아 피운 모닥불이 자그마한 불빛을 흔들거렸다.

장건은 길쭉한 삭정이를 반으로 부러뜨려 모닥불 안에 집어 던졌다. 그래도 태울 것이 많지 않은 모닥불은 작고 불안하게 흔들거렸고, 빛도 그리 밝지 못했다. 밤 동안 계속 타기를 원한다면 어디서 다른 장작을 더 구해와야 할 듯싶었다.

정작 장건은 신경 쓰지 않았다. 흐릿한 빛이었지만 기감을 깨우친 그의 감각 속에선 대낮처럼 충분한 빛이었다. 그가 굳이 불을 피운 것은 옆에 묶여있는 말 조조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그리고 본인이 마실 차를 끓이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그마한 쇠 잔을 들어 조금 텁텁한 찻물을 홀짝였다. 맛이 별로 좋지 않아서 입맛을 다셨다.

"맛이 엿 같네."

말 조조는 바닥에 드러누워 뭔가를 우물거리다가 그 중얼거림을 듣고 장건을 바라보았다. 장건이 그 시선을 느끼고 조조를 마주 보았다.

"뭐. 너도 먹고 싶냐?"

조조는 궁상맞게 앉아서 홀짝이는 장건이 한심스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푸르륵 투레질을 하곤 머리까지 바닥에 눕혔다. 장건은 다시 입맛을 다셨다.

"너처럼 눕기 좋아하는 말은 세상에 둘도 없을 거다."

조조는 그의 핀잔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투레질하며 코로 바닥을 긁었다. 덕분에 피어난 먼지가 장건 쪽으로 날렸다.

"아이 씹."

장건은 손을 휘저어 날린 먼지를 대충 뿌리쳤다. 그는 가끔 조조가 그처럼 다른 사람의 환생이 아닐까 생각했다. 짐승치고 너무 똑똑하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나마 자신의 비밀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환생. 불교에서 말하길 죽었던 존재가 형상을 바꾸어 다시 살아나는 것.

이 무림이니 천년 제국이니 하는 곳에서 그가 겪은 가장 믿기 힘든 현상이자, 결국 믿어야만 했던 일이었다. 비행기가 음속을 돌파하고 사람이 달에 날아가는 시대에 살던 청년은 사고로 죽어 이 땅에 환생했다. 정확히는 이 신대륙이 아니라 중원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염병."

애써 감정을 지운 장건은 들고 있던 잔을 홀짝였다. 그리곤 얼굴을 찌푸리며 머금었던 찻물을 뱉었다. 그는 누워있는 조조를 노려보며 먼지 섞인 찻물을 옆으로 휙 뿌려버렸다. 조조는 진짜 사람처럼 그걸 보고 재밌다는 듯 푸히힝 소리를 냈다.

장건은 언젠가 저놈을 팔아버리고 새 말을 구하리라 생각하며 뒤로 비스듬히 누웠다. 그리고 모닥불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라 지상의 모든 것들이 시커먼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와중에, 반짝이는 별들과 은하수는 자신들이 생생히 살아있다 주장하듯 크고 작은 빛으로 온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건 마치 깊은 물 속에서 보석들이 반짝이는 것만 같아서 장건은 지금이라도 일어나 그 별의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별들과 장건 사이의 거리는 머릿속 숫자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멀었다. 남는 삶을 모두 태워 하늘 한 방향으로만 날아가도 그 빛 중 어느 하나와도 만날 수 없을 터였다.

누군가는 그 사실 때문에 슬픔을 느낄지 몰랐지만, 적어도 장건은 아예 손댈 수 없는 일에 대해선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깊은 숨결을 한 번 내쉬고는 바로 누우며 얇은 모포를 목 아래까지 끌어당겼다.

이제 자야 할 시간이었다.

* * *

장건은 아침에 일어나 가볍게 칼을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그 후 모포와 모닥불 등을 정리하고 아직도 누워있는 조조를 일으켜 세워 풀어두었던 안장을 씌웠다. 조조는 안장을 피하고 싶은지 푸르륵 투정을 부렸으나 장건의 손을 피할 순 없었다.

대강 정리를 끝낸 그는 짐가방에서 작은 건빵 하나를 꺼내 우물거리며 조조의 위에 올라탔다. 오늘 중으로 마을을 만날 수 있을지 약간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밤중의 하늘 풍경이 아름다워도 편안한 여관 침대와 따듯한 식사보다 좋을 순 없었다.

이왕이면 큰 마을이 나왔으면 했다. 양굉에게 뜯어낸 옥가락지를 처리해야 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뭔가 돈이 될만한 일을 찾아야 하기도 했다.

"내가 다시 골패를 만지면 사람이 아니다, 진짜."

그는 천천히 조조를 달려 나가며 괜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름 무공을 익히며 손놀림과 안법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골패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저 눈이 빠르고 손이 은밀하다고 상대를 털어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호구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가 작당을 했느냐 아니냐였다. 그는 그걸 가진 돈을 다 털리고 난 이후에야 깨달았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말을 달리던 장건이 갑자기 고삐를 당겼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조조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거렸다.

"가만있어 봐 자식아."

단련과 내공으로 예리해진 그의 귓가에 어떤 비명이 들렸다. 비명은 오른쪽에 있는 언덕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장건은 곧바로 조조의 고삐를 그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조조는 주인의 뜻을 이해하고 거침없이 언덕을 향해 내달렸다. 뿌연 흙먼지가 그 뒤를 따랐다.

언덕 위에 올라선 장건과 조조는 들판 한가운데 멈춘 마차와 쓰러진 사람들, 그리고 마차를 부수다시피 하며 털고 있는 도적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적으로 보이지 않는 인물 중 그나마 멀쩡한 사람은 하나였는데,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누군가에게 굽실거리며 빌고 있었다. 그 앞에 선 도적은 칼 하나를 빼 들고 거만한 자세로 실실 쪼개고 있었다.

무릎 꿇은 자는 살고 싶었는지 흙바닥에 엎드려가며 빌었으나, 다음 순간 그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 것은 도적의 칼날이었다. 도적놈은 칼에 피가 묻은 것이 좋은지 사람을 죽이고도 여전히 실실 쪼개는 얼굴이었다.

그가 그렇게 마지막 사람을 죽이자 나머지 도적들 모두가 손에 든 무기를 높이 치켜들며 기쁘다는 듯 고함을 질러댔다. 장건은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찡그렸다.

신대륙에서 완전히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인 지역은 아주 적었다. 기껏해야 도시 서너 곳 정도였다. 그 외의 땅에선 한 문파가 그 지역의 치안을 정리하거나 무림맹 지부를 통해 무사들이 파견되었다.

자연히 온갖 곳에서 법과 규칙을 무시하고 날뛰는 도적과 악당들이 넘쳐났다. 똑똑한 놈들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모자란 놈들은 들판과 황야에서 양민들을 등쳐먹었다.

하지만 그런 놈들도 결국 천년 제국의 견고한 도덕률 아래 살던 사람들이라 살인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다. 막무가내로 학살을 벌이는 놈들은 많지 않았다. 거기엔 무림맹에서 살인죄를 최우선 현상범으로 두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어딜 가나 결국 정신 나간 또라이가 한둘은 꼭 있듯, 현상금이고 도덕이고 신경 쓰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놈들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둘 중 하나였다. 정말 살인에 미친 놈이거나 마공을 익힌 마인. 그리고 둘은 대개 하나인 경우가 많았다.

그때 실실 쪼개던 도적놈이 번뜩 장건에게 고개를 돌렸다. 구질구질 때에 찌든 얼굴과 유리알처럼 번뜩거리는 두 눈알이 장건을 노려봤다.

놈은 들고 있던 칼로 찌르듯 장건을 가리키며 뭐라 소리 질렀다. 그러자 시체를 털던 다른 도적놈들이 빠르게 일어나 각자의 말 위에 올라탔다. 놈들은 무슨 초원 마적단처럼 기괴한 고함을 질러대며 장건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장건의 입가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해보자는 거지."

그는 말 위에 탄 채 허리에 매고 있던 칼을 뽑았다. 길쭉한 칼날이 시퍼렇게 반짝였다. 곧 그가 조조의 옆구리를 가볍게 치자 녀석은 거친 숨 한번을 내쉬고 언덕 아래를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도적 열댓 명과 장건이 서로를 향해 질주했다.

놈들은 도적놈들답게 뭔가 대형을 만드는 연습 따위는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냥 일렬로 주르르 달려온 것이다. 덕분에 장건과 직접적으로 마주 본 것은 둘 정도였다.

그 둘과 장건이 서로를 스쳐 지나갈 때, 몸을 잃은 머리 둘도 둥실 허공을 날았다.

장건은 곧바로 고삐를 잡아 조조의 몸을 돌렸다. 평소엔 망아지처럼 구는 녀석이 싸움에 들어가자 무슨 고급 승용차처럼 매끄러운 회전을 선보였다.

"뭐야! 저 새끼가 상연이랑 구문이를 죽였어!"

"시발! 죽여! 저 새끼도 목을 잘라버려!"

우르르 장건을 스쳐 지났던 나머지 도적놈들은 저들끼리 악을 질러대며 말을 돌렸다. 놈들은 각각 말을 돌리는 속도가 달라서 의도치 않게 순차적으로 장건에게 달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장건의 칼에 목이 잘려 나갔다.

다섯 놈쯤 목을 베어냈을 때, 한 놈이 들고 있던 칼을 입에 물고 안장을 박차며 장건에게 덮쳐들었다. 장건은 왼손으로 놈을 잡아 뒤로 넘기며 대충 칼을 가져다 댔다. 가슴팍부터 사타구니까지 주욱 갈라진 놈이 왈칵 피를 쏟으며 땅을 굴렀다.

자신의 동료들이 너무 쉽게 죽어가자 남은 놈들이 놀라서 말을 멈췄다.

"엿 됐다! 고수다!"

"뭐야 시발! 저런 놈이 왜 여기서 나타나!"

한 놈은 고개를 돌려 마차 주변에 홀로 서 있는 도적놈을 보고 외쳤다.

"대장! 도와주쇼, 대장!"

하지만 그가 정말 살고 싶었다면 장건에게서 눈을 떼지 말았어야 했다. 어느새 다가온 장건의 칼날이 놈의 상체를 사선으로 갈라버렸다.

"시발! 튀어!"

겁을 집어먹은 도적놈들이 우르르 달아났다. 그런데 그 방향이 자기들 대장이 서 있는 쪽이었다. 무작정 도망치지 않는 걸 보니 그 대장의 실력에 믿음이 있는 모양이었다.

장건은 굳이 쫓지 않고 잠시 말을 세워 놈들이 우두머리 뒤로 도망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장건을 도적들의 대장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대장은 이후 천천히 다가오는 장건의 모습에서 피 한 방울 튄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옆으로 늘어뜨린 칼날에서만 피 한 방울이 웅크려 떨어졌을 뿐이다.

칼날을 바라보던 대장은 고개를 들어 삿갓 아래 보이는 장건의 눈을 마주쳤다. 시큰둥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두 눈은 차가운 쇠처럼 냉혹했다.

대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무림맹이신가?"

"아닌데."

장건은 조조를 멈추고 대답해주었다. 대장은 그 대답에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아하. 그럼 지나가던 협객이시군? 그럼 지나가던 길 계속 가시지?"

그 어딘가 놀리는 듯한 말투에 장건은 찡그리듯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미친 새낀가. 지들이 먼저 칼질해놓고 그냥 가라고?"

"아, 그건 어쩔 수 없었소. 이게 우리 일이거든."

"사람 죽이고 돈 주워가는 게 일이라. 참 훌륭한 개새끼셨군."

대장은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뭐 어떻소? 신대륙이 개척된 지 벌써 백 년이 넘었소. 그 시간 동안 이 대륙에서 패권을 잡은 것이 결국 누구요? 힘 있는 자들 아니었소? 제국의 지원을 받는 무림맹, 옛 왕조의 고대 세가, 돈 놓고 돈 먹는 상행조합, 등등등. 그들이 백 년 동안 해온 짓거리도 결국 신대륙에 뿌리내리는 사람들 등을 치고 돈을 줍는 거 아니겠소?"

놈은 웃는 낯 그대로 혀를 내밀어 자신의 이빨을 핥았다. 누렇게 썩은 이빨이 보기 흉했다.

"나도 거기 한 발 보탰을 뿐이외다. 그러니 일이라고 할 만하지. 그들도 자신들이 한 짓을 일이라고 할 테니까."

장건은 찡그린 얼굴로 그의 헛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조금 들어 그의 뒤에 쓰러져있는 시체들을 보았다. 그중 마차에 기대 죽은 젊은 여인의 시체 하나가 있었다. 생전에 무사였던 듯 칼 한 자루를 꼭 쥐고 있는 그녀는, 도적들이 희롱하기 위해서였는지 품을 뒤지기 위해서였는지 앞섶이 풀어 헤쳐 맨살이 보이고 있었다.

어째선지 장건은 그 탁하게 풀려 건조한 시체의 눈이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바라보던 장건은 훌쩍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걸어 대장 놈과 이 장 정도 되는 자리에 멈춰 섰다.

"날 보고 무림맹을 찾았지."

그는 휙, 칼을 털어내곤 느릿한 동작으로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걸 본 대장 놈이 어째선지 흥분된다는 듯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럼 현상금이 걸렸단 말이군."

"맞소, 맞지! 내 목에 현상금이 걸렸지! 요즘 한 짓거리가 밝혀지면 아마 더 뛸걸?"

어째서인지 흥분한 대장 놈은 거칠게 숨을 내쉬더니 양손으로 자신의 칼을 잡아 허리춤으로 끌어당겨 수평을 그리고는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자세를 웅크렸다. 마치 폭발이 일어나기 전 힘을 모으는 듯한 모습이었다.

장건은 칼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풀며 생각했다. 이거 참 웃기는 일이라고.

한 제국의 황군이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집단이 되면서, 무공의 발전 방향은 상대를 빠르게 죽이는 것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다 보니 현실의 무공은 그가 알던 무공과는 다르게-그게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라도-굉장히 한쪽으로 치중된 모습이었다.

경공술, 천리지청술, 혹은 전음이나 격공섭물 같은, 무공의 자락에서 그나마 실생활에서 쓸 수 있는 것들은 아주 기초적인 이론만 있거나 아예 없었다. 무공은 오로지 당장 마주 선 상대를 죽이는 것에 집중되었다. 최대한 빠르게, 최대한 간결하게.

그 결과, 어느 정도 이상의 고수가 일 대일로 서로를 마주 본 순간의 장면이 바로 지금이었다.

대장 놈의 두 눈이 검붉은 빛으로 번들거렸다. 넓게 벌린 두 다리의 허벅지는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고, 점점 더 낮게 웅크리는 몸에선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힘이 꿈틀거렸다. 내기가 잔뜩 담긴 칼날에서 검붉은 빛이 흐릿하게 반짝였다.

그에 비해 마주 보고 있는 장건은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저 오른발을 앞으로 한 발짝 디디고 왼발은 오른발과 직각이 되도록 했다. 왼손은 칼집을, 오른손은 칼 손잡이를 가볍게 잡고 있었다. 살짝 기울어진 삿갓 때문에 대장 놈과 도적들의 눈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턱만 살짝 보일 뿐이었다.

사람과 말이 일고여덟은 모여있는데 사방이 고요했다. 바람마저 불지 않았고, 어디서 짖는 짐승이나 벌레도 없었다. 아니, 그들도 침묵하고 있었다.

그때 긴장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도적 한 놈이 훌쩍 코를 삼켰다.

동시에 두 빛줄기가 서로를 스쳐 지났다.

"···빠르군."

대장 놈이 짧게 중얼거렸다. 그와 장건 모두 앞으로 칼을 뻗은 자세 그대로 서로를 등지고 있었다. 장건은 그의 중얼거림을 들었음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삿갓의 앞부분이 세로로 살짝 갈라진 것이 그가 입은 피해 전부였다.

그러나 도적들의 대장은 이내 허리 부분이 쩍 갈라지며 쓰러져 죽었다. 장건은 갈라진 삿갓의 틈으로 남은 도적놈들이 기겁하는 것이 보였다.

놈들은 곧장 말을 돌려 달아나려 했으나 그보다 빠르게 다가온 장건이 놈들의 허리쯤을 갈라 내장을 쏟아주는 것이 더 빨랐다.

도적들을 모조리 끝장낸 장건은 칼을 털어내곤 자신이 만든 시체 밭을 바라보다가 휫, 짧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조금 멀어졌던 조조가 어슬렁어슬렁 그에게 다가왔다. 방금까지 전쟁마처럼 달리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녀석의 시큰둥한 모습에 피식 웃은 장건은 안장을 잡고 올라타려 했다. 그때 어떤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 쪽이었다.

6화

"···저기요? 내 말 들리시나요···?"

장건은 조조의 안장에 올라타려던 것을 멈추고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조조가 푸르륵 거리며 천천히 뒤를 따라왔다.

여기저기 쓰러져있는 시체들을 피해 걸어간 장건은 곧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남자 하나를 발견했다. 피를 많이 흘려서 창백한 안색이었다.

그는 태양을 등지고 선 장건의 삿갓 속 얼굴을 올려다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장건은 말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는 듯 살짝 웃었다.

"저기, 초면에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만 하겠습니다. 저 마차 안에 제 아들이 숨어있어요. 마차 아래 작은 공간을 만들어두었죠."

그의 말에 장건의 시선이 마차로 향했다. 마차 벽의 두께가 상당한 듯 여기서는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미 도적들을 물리쳐주신 은인께 이런 것까지 부탁해서 죄송하지만, 제 아들, 제 아들놈을 좀 구해주시겠습니까? 이제 열 살 난 녀석인데··· 혼자서는 여기서 굶어 죽을 겁니다. 애가 똘똘하긴한데 겁이 많으니까요."

"아이 엄마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는 장건의 물음에 죽어가는 남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이 엄마는 벌써 옛날에 세상을 등졌습니다··· 아이를 낳고 얼마 못 갔죠. 외가에서는 그게 아이 때문이라고··· 그래서 세간살이 다 등지고 이 신대륙으로 왔던 것인데··· 아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는데···"

남자는 점점 정신이 흐려지는지 횡설수설했다. 장건은 마차를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남자에게 돌렸다.

"난 애 보기 잘 못해. 난 좋아하는데 애들이 재미가 없다더군."

"···그래도 부탁합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사흘 떨어진 곳에 마을 하나가 있습니다. 청산곡이라는 곳이죠. 거기에 아이 이모가 삽니다. 다른 외가 사람들이랑 다르게 우리 아이를 좋아하던 사람인데, 무공도 익혔고 수완도 좋아서 아이를 데려다준 보상을 잘해줄 겁니다. 그러니···"

"그쪽은 같이 안 가나?"

남자는 순간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저는 지금 피도 너무 많이 흘렸고··· 배에 구멍도 나서··· 물론 같이 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테지만···"

장건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남자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남자의 의아한 눈을 무시하며 상처 부위를 살폈다. 배에 구멍이 뚫린 것 치고는 말을 잘한다 싶었더니 중요한 장기들은 피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래도 피는 많이 흘렸고, 지금도 줄줄 흐르는 와중이었지만.

"저기··· 혹시 의원이십니까?"

"아니."

남자의 얼굴이 요상하게 일그러졌다. 장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혹 아이를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기 귀찮은 것일까? 남자는 가슴 속에서 참담한 기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장건은 그의 표정을 보곤 무슨 생각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피식 웃은 그는 곧바로 빠르게 손을 뻗어 상처 부분을 점혈했다. 이미 흘린 피는 어쩔 수 없어도 이 정도면 지혈이 될 것이고, 그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약이랑 붕대 있나?"

남자는 장건이 자신의 배를 투툭 때리는 것과 피가 멎는 걸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아, 예. 그, 마차에 있을 겁니다. ···근데 지금 뭐한 겁니까? 설마 점혈을 한 겁니까? 맨손으로?"

장건은 말없이 웃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마차를 향해 걸어가며 생각했다. 맨손 점혈이 놀라운 재주가 되는 무림이라니.

이 땅에서 점혈은 숙련된 의원이 천천히 혈을 찾아가며 굵은 침을 박아넣는 행위다. 게다가 배우고 숙달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려 경력이 많은 의원만 쓰는 기술이었다. 내공을 익히는 무림인들 또한 자신의 몸을 통해 혈도를 잘 알지만, 점혈을 하는 것은 의원들이 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상식처럼 퍼져 있었다.

맨 손가락에 자신의 내공을 담아 상대의 혈도를 막거나 이상 현상을 일으킬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무림인들 머릿속에 혈도를 막을 내공으로 상대의 살을 찢고 부술 생각만 가득하기 때문도 있었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라 장건은 처음 점혈을 익힐 때 의원 선생이 보내던 의아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짧은 생각을 하며 마차로 다가간 장건은 활짝 열린 문짝과 그 안에 나자빠져 있는 시체를 확인했다. 시체를 끄집어내 마차 밖에 눕혀두고 도적의 손에 어지러워진 마차 안을 둘러보고 붕대와 가루약, 멀쩡한 상의 하나를 꺼내 다시 남자에게 돌아갔다.

남자는 돌아온 장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은인의 이름도 듣지 못했군요. 난 이윤이라고 합니다."

"장건."

장건은 이윤의 갈라진 옷을 벗겨내고는 가루약을 뿌려 붕대를 감았다. 그가 가져다준 옷을 입은 이윤은 비틀거리면서도 애써 몸을 일으켰다.

"아이에게, 환이에게 가봐야겠습니다."

가만 보고 있자니 그대로 자빠질 것만 같아서 장건은 가벼운 한숨을 쉬면서도 그를 부축해 주었다. 비틀비틀 마차로 다가간 이윤은 마차 한쪽 구석 바닥을 주먹을 툭툭 때렸다.

"환아, 괜찮니? 환아?"

잠시 후 뭔가 덜컥거리더니 바닥 일부가 스륵 열렸다. 그 안에서는 남자아이 하나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윤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와락 달려들어 안겼다.

"아이고, 화, 환아! 아비 죽는다! 아퍼!"

이윤의 곡소리에 놀란 아이가 화들짝 물러섰다. 녀석은 그제야 아비의 붕대를 보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빠, 뭐야? 왜 이래?"

"크, 큼. 나도 한 칼 맞았다."

"뭐? 칼을 맞아? 아빠 괜찮아?"

이윤은 그제야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아들 얼굴을 다시 보았다는 것이 실감이 나는지 슬슬 웃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빠!"

깜짝 놀란 아이가 얼른 아비를 부축했다. 감긴 그의 눈을 본 녀석이 왈칵 터지려 했다. 아이가 우는 건 싫었던 장건이 얼른 녀석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기절한 거다. 긴장이 풀려서."

"에, 예? 안 죽었어요?"

"안 죽었어."

"···아저씬 누군데요?"

"장건."

아이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기절한 아비와 장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알아요?"

장건은 순간 녀석의 당돌한 말에 멍해졌다가,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똘똘하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을까?

"챙길 짐이 있나?"

"···짐이요?"

"마차를 끌고 갈 순 없을 것 같군. 바퀴가 나간 것 같은데. 너와 네 아빠가 탈 말 하나를 끌고 올 테니 짐을 챙기고 있어라."

녀석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장건은 몸을 돌렸다. 도적들의 말은 제 주인들이 죽으며 대부분 여기저기 멀리 도망간 이후였으나 시커먼 놈 하나가 남아있었다. 죽은 도적 우두머리 주변을 맴도는 것을 보니 그자의 말이었던 듯했다.

그 말의 고삐를 잡아끌던 장건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죽은 우두머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있던 죽은 자의 큰 칼 하나를 집어 들어 우두머리의 머리를 베어내려 했다. 현상금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잠시 멈칫하고 말았는데, 방금 아이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사흘이라. 썩겠는데."

중간에 마을이 있을까? 애도 있는데 잘린 머리를 가지고 다니기 뭣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돈이 궁한 것도 사실이었다. 고개를 살살 내저은 장건은 칼을 내려쳐 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우두머리의 옷과 주변에 있던 도적들의 옷으로 머리를 칭칭 감았다. 그렇게 머리의 부피는 거의 두 배가 되었다.

머리를 챙긴 장건은 우두머리의 몸을 뒤적거렸다. 가난한 여행자들이나 털어먹던 놈답게 돈은 없고 웬 직사각형 동패 하나가 나왔다. 거기엔 삼호대장이라는 글자가, 반대쪽에는 감순덕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감순덕 씨셨군."

삼호 대장이라. 어쩌면 일호와 이호가 있을지도 몰랐다. 동료의 복수를 한다고 찾아올지도. 장건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찾아오면 좋았다. 이런 놈의 동료면 그놈들도 현상금이 걸린 쓰레기들일 터였으니까.

동패를 챙기고 머리를 조조의 안장에 걸어둔 장건은 말을 끌고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이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봇짐 하나를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 쓰러져 죽은 사람들을 본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이윤이 녀석 옆에 서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장건은 고삐를 내밀며 말했다.

"가자."

"···간다니요? 저희를 데려다주시려는 겁니까?"

"돈 준다며? 청산곡의 수완 좋은 이모는 거짓말이었나?"

이윤은 조금 멍한 얼굴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어찌 된 것인지는 잘 몰라도 이 시큰둥하면서도 뛰어난 실력의 검객은 적어도 악인은 아닌 것 같았다. 도적들을 물리친 것과 상처를 감싸 준 것만 쳐봐도 당장 재물을 요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닙니다. 환이 이모는 능력이 좋았으니 그간 모아둔 재물이 많을 겁니다. 거긴 예전에 제가 투자한 돈도 있고요."

"그럼 가지. 이 시체 밭에 더 있고 싶진 않군."

말 위에 올라타는 장건을 보며 이윤은 잠시 망설였다. 이왕이면 이 사람들을 묻어 주고 싶었다. 여정이 같아 잠시 함께한 사람들이라고는 해도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몸이 상했고, 이환은 아직 아이였으니 결국 묻을 사람은 장건뿐이었다.

"아빠."

그때 이환이 아비의 옷깃을 툭툭 끌어당겼다. 흠칫 놀라 고개를 내려 아들의 얼굴을 마주 본 이윤은 잠시 그 맑은 눈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환을 먼저 말에 태운 그는 그 뒤에 올라타 아이를 붙잡았다. 고삐를 잡은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예, 가지요. 어서 갑시다."

하늘을 보고 방향을 잡은 그들은 금세 말을 달려 그곳을 벗어났다. 아이는 자꾸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이윤이 그걸 막았다.

이제 바람과 비가, 그리고 들판의 짐승들이 그들을 지워줄 것이다. 장건은 그들이 한을 품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될지, 아니면 평안한 하늘로 갈지, 그것도 아니면 그처럼 환생이라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왕이면 삶의 고통과 힘겨움을 잊을 수 있는 곳으로 갔으면 했다. 그 짧은 상념이 그가 이 황야에서 보낼 수 있는 조의 전부였다.

장건과 이윤, 이환 부자는 처음에 거침없이 말을 달린 것 치고는 오래 달리지 못했다. 이윤이 힘겨워한 탓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배에 구멍이 나선 피를 질질 흘리던 양민이 말을 탄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결국 그들은 해가 석양을 물들이기도 전에 말을 멈추고 작은 야영지를 차려야 했다. 간단한 건조식량으로 저녁을 때우고 나자 그들은 모포를 펴고 누웠다. 장건은 이환에게 가벼운 장난이라도 치고 싶었으나 녀석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대신 배의 상처가 불편해 보이는 이윤을 보며 물었다.

"그 청산곡이라는 곳에 가기 전 마을이 있나?"

"어, 예. 하나 있습니다. 남작호라는 호숫가 마을이 하나 있지요. 작은 곳입니다. 객잔도 하나 없다고 하더군요. 원래 저희 일행이 들렀다 가려던 곳이기도 합니다."

"거긴 언제쯤 도착하지?"

이윤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요. 원래 말만 타고 간다면 내일 정오 전에 도착해야겠지만···"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무리 이윤의 상태 때문에 늦어도 저녁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객잔은 없어도 응급약 정도는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장건이 살폈을 땐 그리 위험하지 않았으나 그는 의학을 점혈 하나를 익히려 배운 돌팔이였다. 기의 순환만 보고 모든 건강 상황을 알 수는 없었다.

애써 데려다줬더니 며칠 뒤 갑자기 털썩 쓰러져 죽으면 아이에겐 뭐라 할 말도 없을 터였다. 장건은 그렇게 여정을 잡기로 했다. 이윤과 이환으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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