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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1% LASMONEDSEÑOR / Chapter 9: 9

Chương 9: 9

[78 화]

퍼엉

사리가 연이어 재주를 넘었다.

변신으로 나온 것은 이번에도 똑같 은 붉은 마차였다.

그러나 에른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올라선 입가에는 만족감이 떠올라 있었다.

"역시, 되는구나."

어딜 가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붉은 마차를 끄는 붉은 유니콘.

"히히히힝!"

신난 사리가 앞발굽을 들어 올렸다.

사리의 몸은 붉은 마구를 통해 마 차와 연결되어 있다.

처음 변신한 유니콘의 형상에 아까 습득한 마차 구조를 추가한 것.

"타 봐도 될까?"

외관은 그럴듯하나, 직접 끌어 보 기 전에는 모른다.

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른은 마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안정적인데?"

가볍게 몸을 흔들어 보니 차체도 같이 흔들린다.

에른은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사리에게 말했다.

"천천히 움직여 볼래?"

따가닥.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사리의 변신 마차가 상회 뒷마당을 빙글빙글 돌았다.

'잘 작동하는군.'

승차감은 일반 마차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긴 한다.

하지만 완충 장치도 다 재현해 내 서, 타고 다니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최상급이 이래서 좋다.

전투 보조 외에도 써먹을 데가 많 으니.

틈틈이 다양한 도구와 기구를 먹여 둔다면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을 것 이다.

사리가 열심히 뒷마당을 도는 동안.

에른은 [제휴 상점] 카테고리의 [매입/판매]에서 구매할 물품을 고 르고 있었다.

제휴 상점은 거래소와 파트너십 관계다.

상점은 거래소에 일반 교류자보다 많은 거래 수수료를 지불한다.

재고가 부족해지거나 자금 사정이 나빠져 상점 수익이 급락한다면 거 래소도 손해인 것이라.

[매입/판매]는 제휴 상점을 위해 거 래소가 제공하는 일종의 서비스였다.

왼쪽에 뜬 매입창.

추천 물품이 주르륵 떠올랐다.

-검귀의 심득(무술)

- 내공 (100 년)

-지둔술(7성)

- 수라참마공 (비급)

-휘 영석 (상급)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정(중급)

-차갑게 얼어붙은 빙정(상급)

- 진무신검

-천마신단 (천급)

-진천벽력탄

무공서부터 해서 심득, 내공, 무공 그 자체와.

무기, 보석, 자연의 정수까지.

자연의 정수는 특정 기운을 특화하는 무공에는 영약보다 더 효과가 있다.

화정과 빙정이라면 화공, 빙공을

수련하는 무인에게는 최고의 보약.

'제대로 추천해 주긴 하네.'

매입창에는 제휴 상점의 성격에 맞 는 물품만 노출된다.

잘 모르는 사람은 저것들이 무슨 공통점이 있냐 하겠지만.

정확히 부함한다.

여긴 무림만물상이니까!

'진짜 상점 이름 바꾸고 싶어지는 군...

에른은 목록에 떠오른 물품들의 평 균 거래가를 살폈다.

당연히 거래가보다 조금씩 비쌌다.

검귀의 심득이 1만 코인.

내공은 100년 치가 3만 5천 코인 이니… 정가인 3만 코인보다 20% 가까이 더 나간다.

그 외 물품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비싸긴 하나.

[거래소] 카테고리에서 구매하는 것보다는 훨씬 합리적인 가격이다.

제휴 상점에서의 매입은 약간 망설 여지는 정도라면 [거래소]에서 판매 하는 물품은 숫제 날강도 수준.

에른은 제일 싼 물건부터 구매해 봤다.

'일단은 하나만.'

[270코인을 지불합니다.]

['휘영석(상급)'을 구매했습니다.]

[캐시백- 40.5코인을 받습니다.]

이러면 사실상 229.5코인에 구매한

것과 같다.

다시 거래소에 판매한다면?

판매창에서 휘영석을 선택하자 거 래소의 매입 가격이 표시되었다.

[230코인에 판매할 수 있습니다.]

가격을 확인한 순간.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입꼬리를 억누

르며

[판매하시겠습니까? (동의/거부)]

"미쳤어? 0.5코인 벌자고 이 짓을 한 게 아니라고."

[거부]를 쿡 누르는 에른의 만면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거다.

거래소 밑으로 들어온 이유.

휘영석의 평균 거래가는 250코인.

거래소 놈들은 제휴 상점 상대로도 손해 볼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

판매할 때는 약 20% 더 붙여서 넘기고, 매입할 때는 10% 정도 싸 게 구매.

당연히.

'이래야 거래소지.'

양심 챙겼더라면 도리어 놀랐을 것 이다.

에른의 계산은 이것이었다.

거래소와의 거래.

일반 교류자 신분으로는 가격 특전

을 동원해도 매입가와 판매가의 간 극을 없앨 수 없지만.

'제휴 상점이라면 가능하다…. 간 신히.'

이 정보를 알 수 있었던 것도 CM 묘암 덕분.

이렇게 되면, 에른은 리스크 없는 무한한 공급처를 얻게 된 것과 같았다.

검귀의 심득? 진무신검? 누가 사 겠냐고?

'안 팔리면 반품하면 그만이지!'

거래소에서 비싸게 사서 거래가에 만 판매해도 에른에겐 이득.

제휴 상점이 평균 거래가에 판다면 그 자체로 가격 경쟁력이 있다.

기존 방식보다 훨씬 안정적인 데 다, 고객은 더 늘어날 것이고, 무엇 보다 거래소라는 든든한 방패 뒤에 숨을 수 있어 좋다.

다마협 식의 협동 대응이나 5대 큰손 같은 방해꾼에 시달리지 않아 도 된다는 것.

물론 훼방 놓아도 역으로 뒤통수 때 려 주고, 함의금까지 톡톡히 받아내

왔지만… 귀찮은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은 온전히 차원거래에만 몰두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아무튼.

[판매]로 비용 없는 재고 처리가 된다는 걸 확인했다.

"사리야. 어지럽다. 멈춰도 될 거 같아."

끼이 익.

마차가 멈췄다.

퍼엉!

밖으로 나오자 원래 모습으로 돌아 온 사리가 달려왔다.

"뀨에에엥!"

에른의 무릎 위로 올라와서 눈을 깜박거리는 게, 나 잘했어? 라고 하 는 듯하다.

"혹시 그때 마법검 그거, 담아두고 있었던 거야?"

끄덕끄덕.

"뭘 그런 걸로."

에른은 눈높이를 낮춰 사리를 빤히 쳐다봤다.

"널 부화시킨 건 내 선택이고, 잠 재값하고 상관없이 사리는 사리지.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

같이 다닌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이제는 정이 꽤 들었고, 사리와 같 이 있는 데에 익숙해졌다.

물론 쓸모가 있다고 판단해서 비고 에서 알을 들고 나온 거긴 하다만.

자신을 어미로 인식하고 무조건적 인 애정을 나타내는 사리를 보면, 어쨌거나 끝까지 책임져야겠다는 생 각이 든다.

"...그러려면 벌 수 있을 때 벌어 둬야 하거든? 나 거래 좀 할게."

"뀨엥!"

에른의 좌안.

다시 피어난 불꽃이 의미하는 바는.

때가 왔다.

비축한 실탄을 쏟아부을 때가.

거칠 것이 없었다.

에른은 매입 리스트에 뜬 물품들을 닥치는 대로 사 댔다.

['검귀의 심득(무술)'을 구매했습니다.]

[내공(100년)을 구매했습니다.]

현재 에른은 내공 품목에 판매 제 한이 걸려 있다.

그럼에도 내공을 구입한 이유는.

제휴 상점은 일반 교류자와는 다른 제한량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이것도 큰 이점 중 하나.

'지둔술? 두더지처럼 땅속으로 들

어갈 수 있어? 뭔진 모르겠지만 사 두자.'

수라참마공은 이미 석현이 비급은 책임지기로 했으니까 넘어가고.

그 아래 물품들도 눈 튀어나오도록 비쌌다.

예전 같았으면 하나 사는데도 수많은 고민과 치열한 흥정을 벌였을 터 이나.

'구매, 구매. 다 산다…. 전부 다!'

15만 코인이던 잔고가 10만 아래 로 내려오고, 9만, 8만… 어느덧 5

만 선까지 깨지고 말았다.

천마신단을 10개 담고, 진천벽력탄

도 5개 구매한 순간.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황금왕 三 : 1계 채널에서 25만 코인을 사용하십시오.]

[달성 보상! 1만 5000코인을 받습니다.]

[보유 코인 : 51711.5]

' 왔다.'

세 번째 연계 업적 달성.

앉은 자리에서 14만 코인을 태운 덕분이었다.

더 구매해야 할까?

일단은 조금 지켜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무림만물상에 방문하는 고객들이 뭘 원하는지도 파악해 둬야 하고.

상황이 변해서 다른 물품이 필요해 질 수도 있으니까.

얼마간의 여윳돈은 남겨 두는 편이 좋았다.

"이 정도면 구색은 갖춰진 거겠지."

판매 리스트를 보니 꽤 괜찮아 보 였다.

다양성도 다양성이지만, 제휴 상점 치고 양심적인 가격이라는 게 구매 자들에게는 메리트.

에른은 [거래 설정]으로 들어가 판 매 방식을 [자동거래]로 변경하고

[상점 노출]을 터치했다.

즈우우웅!

처음 들어보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제부터 제휴 상점이 노출됩니 다.]

과연, 반응이 어떨까.

에른은 [거래소]-[판매]로 들어가

제휴 상점 리스트를 훑었다.

막 업데이트되어서인지 〈에른의 무림만물상〉이 최상단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다면 1계 채널에선?

-풍운가객 : 자작시 판매합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자라면....

-외공의 대가 : 철포삼, 금종조… 금강불괴를 목표로 하는 비법을 판 매합니다.

가장 위에는 일반 교류자들의 판매 글이 게시되어 있다.

아래로 내려 보니.

-태산보신원 (제휴)

-북두보신원 (제휴)

중간쯤에 딱 박혀 있는 두 업체가 보였다.

상단에 잠시 머물렀던 게시물들이 밀려나는 와중에도 꿋꿋이 그 자리 를 지키고 있다.

"빤쓰런 하더니 노출이라도 많이 해서 물건 팔아보겠다는 건가?"

[1시간마다 갱신]을 하더라도 거래 소 차원에서 밀어주는 이 방식을 이 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똑같이 할 수 있지. 아니, 그 이상으로.'

에른은 [이벤트/프로모션]으로 들 어갔다.

현재 가능한 프로모션은 이러했다.

[흥보 배너 등록 - 10000코인]

[추천 상점에 등록 - 2500코인]

[포인트 환급 이벤트 - 1000코인]

[쿠폰 배포 - 500코인]

"이것들이 미쳤나? 사리야, 거래소 가 제정신이 아닌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뀨에엥?"

배너나 추천 상점은 한정된 자리를 차지하는 거니까 코인 지불이 합당 하다고 본다.

그런데 환급이나 쿠폰은 어차피 모 든 비용을 판매자가 부담하는 건데.

'그래도 오픈했으니 채널 전체에 알리긴 해야지.'

에른은 할 수 있는 모든 프로모션 을 다 하기로 마음먹었다.

홍보 배너는 좀 비싸다고 느껴서 하루만.

추천 상점은 3일 유지, 환급 이벤 트는 5%를 적용하고....

용신구가 그랬던 것처럼 환급한 상 점 포인트는〈에른의 무림만물상〉 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쿠폰은 첫 거래 성사 시 랜덤 코

인이 지급되는 방식.

이 전부에 필요한 금액은....

'19000코인. 쿠폰까지 생각하면 2 만 코인 넘겠군.'

현재 잔고가 5만 코인이다.

홍보를 위해 2만 코인이나 쓰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

이걸 다 내야 한다면 당연히 에른 이 할 리가 없었다.

['프로모션의 프로'의 효과가 적용 됩니다.]

[1900코인을 지불합니다.]

간만에 써 보는 이 특전.

프로모션 비용의 무려 90%를 깎 아 버리니 할인율 면에서는 이 특전 을 따라올 게 없다.

흥보도 뭐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 지금까진 크게 체감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 같다.

'지겹도록 우려야겠어. 1계인들 뇌 리에 박혀 버리도록.'

이쯤 했으면 할 일은 대강 끝마쳤다.

거래를 종료하고, 에른은 실비아와 사리, 마쿠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상회를 떠났다.

돌아오는 마차 안.

'이거 원...

막상 개시를 하고 나니까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

끽해야 몇 분 지났을까?

그래도 몸이 달떠서 참을 수가 없 었다.

결국 차원거래에 접속해 봤는데.

-옥면금룡 조검휘 : 오랜만입니다.

조검휘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용자 리포트를 보내준 날 밤, 황 망히 사라진 뒤론 통 연락이 없어서 잊고 있었던 그.

-에른 : 어떻게, 좀 추스르셨나?

-옥면금룡 조검휘 : 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옥면금룡 조검휘 : 결심했습니다.

불완전한 복수라도, 하기로.

[79 화]

복수.

원수를 갚는 일.

나한테, 혹은 주변인에게 선빵 친 놈한테 받은 이상으로 되돌려 주는 행위.

마땅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람… 이-니 지적인 생명체라면.

살아 숨쉬는 이라면.

석현의 경우, 그리고 쿤츠의 경우.

아직도 떠올리면 그때의 감각이 되 살아난다.

벅차오르는 성취감과 충족감.

혈관을 타고 질주하는 쾌감.

물론 이것들은 꼭 복수가 아니더라 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술과 마약, 주색으로 도피 한다 해도… 절대 마침표를 찍을 수 없지.'

쿤츠를 죽인 뒤로, 잠시 허탈해지 기도 했지만.

끝내 에른은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꼭 해야 했던 일을 마친 것에.

전생의 과오를 바로잡은 것에.

가슴에 올라앉아 있던 돌덩이는, 가볍고 따뜻한 기운으로 변해 심장 곁에 자리 잡았다.

마치 마나처럼.

물론 가장 큰 바윗덩어리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적어도 하나의 종지부는 찍었다.

종지부.

조검휘도 그걸 얻고 싶었으리라.

-에른 : 그게 결심이 필요한 일인 지 모르겠는데.

-옥면금룡 조검휘 : 필요했죠. 물 론 그 두 사람은 죽어야 하지만… 주범만큼! 증오스럽진 않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만약 둘을 처 치한다면 주범은 복수자의 존재를 눈치챌 겁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풀숲을 건드 려 뱀을 놀라게 하는 격이랄까요? 더욱 조심할 테고… 몸을 숨길지도 모르죠. 아마 영원히 복수하지 못하 게 될지도 모릅니다.

-에른 : 그 세 사람이 아직도 연 락하고 지낼지? 세월이 많이 흘렀으 니까.

-옥면금룡 조검휘 : 그 둘은 강호 의 명숙이니… 시간이 지나면 어떻 게든 소식을 듣게 되겠죠.

-에른 : 하긴, 그 정도 위치긴 하지.

에른은 그들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덧붙인 말로.

조검휘의 원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넌지시 내비쳤다.

-옥면금룡 조검휘 : 혹시...?

-에른 : 음?

-옥면금룡 조검휘 : 어떻게 아셨 습니까?

-에른 : 너무 뻔해서. 한 명이 빠 져 있다고 하면 둘을 묶는 건 하나 밖에는 없으니까.

-에른 : ...난주혈사'.

-옥면금룡 조검휘 : 어쩐지… 눈 치채실 것 같았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아십니까? 난 주혈사에 대해서?

당연히 알아봤다.

앞으로 금룡, 금왕과 어떻게든 엮이 게 될 텐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 었는지쯤은 숙지해야 할 것 아닌가.

우선은 가장 만만한 정보원, 석현 에게 물어봤더니.

"끔찍한 시건이었죠…. 무인 수백 명이 죽고, 무공을 알지 못하는 이 들은 더 많은 떼죽음을 당한. 아직 도 흉수를 알아내지 못했다죠?"

"그래서 혈사라고 하는 거군. 자세 히 조사해봐. "

"알… 겠습니다. "

석현은 에른이 까라면 까야 하는 입장.

그는 휴가까지 내서 난주에 다녀왔다.

수소문 끝에 난주혈사의 생존자를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에른 님. 이거 범인들… 교류자인 거 같은데요?"

"어떻게 알았지?"

"이것들 수법에서 냄새가 납니다.

내공 작업장 냄새가. "

내공 작업장.

제갈성호에게 들었던 말이다.

보양인이라는, 차원거래만을 위해 내공을 모으는 이들.

그들을 수용한 곳이 바로 작업장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난주의 청룡장.

당시 청룡장은 난주에서 손에 꼽히 는 문파로, 지역의 패자라고까진 할 수 없어도 위세가 괜찮은 편이었다.

덕망 있는 장주는 씀씀이가 커서 폭넓은 인맥을 자랑했고.

그의 회갑 잔치에 사람들이 구름떼

처럼 몰려든 것은 모두가 예상한 바 였다.

참석자의 대부분은 무림인이었지 만, 그 외에도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운집했다.

그리고 일어난 혈사'.

-에른 : 대강은.

-옥면금룡 조검휘 : 역시 철저하 시군요.

-에른 : 청룡장에 부모님이 방문 하셨던 건가?

-옥면금룡 조검휘 : 예… 놈들은 처음부터 모든 걸 계획했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잔치 음식에 산공독이 들어 있었고, 그런 줄도 모르고 먹고 마신 방문객들은 내공 을 잃고 무기력한 상태가 되어 버렸 지요.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진 석현에 게 들어 알고 있다.

내공을 잃은 무림인은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이어 나타난 세 명의 무림인은 대 문을 걸어 잠근 뒤, 손쉽게 방문객 들을 제압하고 살육을 시작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청룡장 장주, 육해성은 통 큰 사람입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당시 증언만 들어 봐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잔칫상이 차려졌다고 하더군요.

-옥면금룡 조검휘 : 이상하지 않 습니까?

-에른 : 어떤 점이?

-옥면금룡 조검휘 : 그 많은 사람 들을 전부 중독시키려면 엄청난 양 이 필요합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음식에 몇 줌 뿌리는 정도야 누구라도 할 수 있지 만, 엄청난 양이 필요했을 텐데.

-에른 : 그런데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인벤토리. 여기서 교류자의 가 능성을 눈치챘던 거군.

-옥면금룡 조검휘 : 어, 어떻게?

-에른 : 뻔하지. 아마 몇 번이고 조사했을 테니까. 나도 단번에 알아 낸 사실을 놓칠 리가 없어.

-옥면금룡 조검휘 : 당신은… 도 대체.

그리 어려운 추측은 아니지만.

놀랍다.

에른이 0계인이라는 점 때문에.

다른 차원에서 일어난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한다는 게....

같은 1계인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차원은 달라도 얼마간 공유하는 부 분이 있으니까.

당연히 까맣게 모를 줄로 알아서 큰맘 먹고 털어놓으려고 했더니만… 이건 뭐 툭하면 탁하고 정답을 내놓 고 있다.

-에른 :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그래서?

-옥면금룡 조검휘 : 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아십니까?

-에른 : ....

-옥면금룡 조검휘 : 아시는군요. 놈들은, 금수만도 못합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으득. 으드 득...

이를 가는 소리다.

글자로 보니까 뭔가 좀 깨지만, 조 검휘가 분개하는 중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정호근과 이 난희, 그리고 주범. 세 연놈들은 공 포에 떠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주 인 없는 차원거래서를 꺼냈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그리고 한 명 씩 불러내 내공을 갈취해 갔습니다.

에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인간이 할 짓은 아니긴 하다만, 머리 하난 잘 썼어.'

수백 명의 내공을 빼앗기 위해 필 요한 차원거래서의 최소 개수는?

정답은 단 두 권이다.

내가 쓸 거 하나, 남들이 쓸 거 하나.

소유자가 죽으면 차원거래 계정은 소멸되며 차원거래서는 주인 없는

물건이 된다.

전생에 라제칸이 쓰던 차원거래서 를 에른이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음 사람에게 소유권을 넘 기고, 강제로 내공을 추출해 전송하 게 한 뒤 죽이고....

흉수들은 이런 식으로 청룡장에 모 인 무림인들의 내공을 전부 빼앗아 갔다.

'차원거래가 도입된 초창기에는 대 혼란이 일어난다지. 보양인도 제정 신 아닌데 이건 조금, 아니 많이 심

하군.'

난주혈사에 영감을 받았는지.

곳곳에서 혈사가 벌어졌다.

중원에 펼쳐진 생지옥은 얼마 안 가 종말을 고했다.

거래소에서 작업장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듯, 정책 변경으로 꼼수를 막 은 것이다.

내공 양도에 정신 나간 수수료를 부과했다던가.

'조근남이 차원거래를 거부하는 것 도 이해가 가. 미숙한 시스템 때문

에 아들 부부가 혈사에 휘말려 죽었 으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손 자는 복수를 위해 차원거래를 이용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옥면금룡 조검휘 : 지난 며칠, 곰 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세인들은 저 를 가리켜 행운아라고들 하죠. 뛰어 난 무공에 할아버지는 금왕이고. 외 모도 타고났다고 하더군요.

-옥면금룡 조검휘 : 음… 마지막 은 재수 없어 보이려나요?

뭘 그런 걸로.

-에른 : 나도 그래서 딱히. 태어나 길 그렇게 태어난 걸 어떡하라고.

-옥면금룡 조검휘 : ...?

—에른 : ???

잠시 침묵이 흐르고.

-옥면금룡 조검휘 : 흠흠… 아무 튼.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 았지만, 그다지 기쁘지 않았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모든 게 공허 했거든요. 무공에 재능을 보이면서 후기지수로 꼽히고, 만금상회는 날 로 번창해 갔지만 마음은 허하기만 했습니다. 텅 빈 그릇이었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복수를 달성 하면 공허함이 채워질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에른 : 둘을 단죄하면, 하나가 빠

져나갈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한 명이 주범이고.

-옥면금룡 조검휘 : 조금 더 때를 기다린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이게 제 결론이었어요.

-옥면금룡 조검휘 : 하지만, 도저 히 참을 수가 없더군요. 그따위 짓 을 저질러 놓고,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는 게… 문파를 이끌고, 여협이 란 가당찮은 칭송을 들으며.

-옥면금룡 조검휘 : 똑같이 느끼 게 해 줄 겁니다. 놈들이 저지른 그 대로.

-에른 : 잘 생각했군.

에른이 뭐라고 하겠나.

조검휘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수밖에.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가끔 말동 무가 되어 주고, 조검휘에게 필요한 물건을 제공해 주는 정도일 뿐이다.

♦ *

조검휘는 만금상회를 떠나 먼 길에

나섰다.

복수를 우]해, 인생을 되찾기 우]흐L

그러나 에른은 쳇바퀴 돌듯 반복되 는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바위산, 수업, 수업, 훈련, 수업… 다시 다음날 바위산.

그나마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 는 게 있다면 차원거래뿐이었다.

〈에른의 무림만물상〉은 1계 채널 에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건 미쳤다… 별거 별거 다 팔고 있는데 질도 좋다고?"

"귀찮게 채널 뒤지지 않아도 되고. 호구 잡으려는 새끼들하고 안 엮여 도 되고."

"왜 다른 제휴 상점은 이렇게 안 팔았던 거지?"

"그럴 능력이 안 되니까."

"거기다 가격도 착하다니까?"

"엄밀히 따지면 살짝 비싸긴 한데. 다른 제휴 상점에 비하면 양심 충만 이지."

"쿠폰 꺼억〜 적게 일하고 많이 파 세요."

구매자들은 찬양 일색.

"이건 반칙이지! 제휴 상점이면 제 휴 상점답게 비싸게 팔라고!"

"멍청한 것들. 큰손이 돈을 풀면 머리를 써야지. 환급 포인트하고 쿠 폰 코인으로 마진 남기고… 떼온 물 건 팔아서 남기면 개이득."

"용 원주 큰일 났소. 에른 그 자식 이...

"프로모션 몇 개를 돌리는 거야? 코인이 남아도냐?"

판매자와 다른 제휴 상점들은 강력

한 경쟁자의 등장에 사색이 됐다.

'너무 잘 돼서 무서울 정돈데?'

[재고 관리]에 물품을 올려놓을 때 마다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간다.

한창 이벤트 진행 중이라는 걸 감 안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이 라면 전망은 충분히 좋아 보였다.

'이 기세면 금방 빚 다 털고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겠어.'

금왕과의 만남은 에른의 사업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투자금, 20만 코인 덕분에 모 든 계획이 한 발씩 빨라졌고.

'이거 2년이나 필요할까 몰라.'

무력은 최소 영웅급을 달성, 거래 등급은 Level 2로 올려 2계에 진출.

2계 채널에서 기반을 쌓고 제국도 쉽 게 건드릴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한다.

스틸가드로 돌아가는 건 그 뒤다.

여기에 필요한 시간, 2년.

당초 예상은 이러했는데.

그 예상, 이 속도면 앞당겨야 할지 도 모른다.

'방해꾼만 없다면 말이지.'

사람의 기척.

점차 가까워져 오는 걸 느낀 에른 이 눈을 감았다.

파앗!

차원거래 종료.

툭툭.

발끝이 누워 있는 에른의 팔을 건 드렸다.

누군지는 알고 있지만.

눈을 뜨자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이런 데서 늘어져 있 어...? 게으른 건 여전하군."

익숙한, 그러나 기억에 있는 것과 는 너무도 다른 앳된 외모.

"빨리도 만나러 오네. 입학한 지 한 달이 다 돼 가는데."

"한 달'?"

소년? 아니 청년에 더 가까운 남 자다.

그가 이죽거렸다.

"너만 조용히 지냈어도 일 년 내내 볼 일 없었을 거다."

"진짜, 눈물겨운 형제애라니까."

에른이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 작은형?"

[80 화]

제이슨 스틸가드. 19세.

스틸가드 가의 차남이자 셋째.

현재 테아로스 기사 아카데미 졸

업반

기사 등급은 4등급이었다.

'나보단 낫고 큰형보단 못했지.

항상.'

17년 만에 다시 만난 제이슨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심지어는 키르안만 해도 처음 봤 을 때는 반가운 느낌이 있었는데.

"너... 그동안 뭔 일이 있었던 거 냐?"

제이슨은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동생을 훑어봤다.

미심쩍은 눈초리.

표정은 떨떠름하다.

에른이 물었다.

"뭐가?"

"무조건 하급반일 줄 알았지. 근 데 중급반에다 서열 72위?"

"72위가 놀랄 일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니까. 거 기다가 얼마 전 그 일도...

"흠."

하긴.

제이슨이라면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다.

작은형은 전생의 에른으로만 자 신을 기억할 테니까.

방학 기간에 스틸가드로 돌아왔 다면 그도 자기의 다른 일면을 봤 을 테지만.

올해 제이슨은 졸업반으로 올라 가는 터라, 수련에 매진하겠다고 쭉 수도에 머물러 있었다.

에른이 빙긋 웃었다.

"왜, 그래서 불안해?"

"...뭐가?"

"알면서."

묘한 눈빛의 에른이었다.

따지고 보면 제이슨도 스틸가드 의 기대치에는 훨씬 못 미친다.

[투마 숨]으로 졸업했던 키르안 조차도 아쉽다는 말을 듣는데, 이

제 4급이면.

그 또한 전생엔.

'오러 유저의 벽을 못 넘고 죽었 지. 나처럼.'

제이슨도 에른만큼이나 재능이 없었다.

그나마 그가 평가가 좋았던 건, 가문 내에서 얘가 성실은 해〜 라 는 이미지가 있었고.

최악인 막내 덕분에.

에른 때문에 한숨 푹푹 쉬다가 제이슨을 보면… 상대적으로 훨씬

나으니까.

칭찬까진 안 나와도 비난할 마음 도 들지 않는다.

제이슨은 항상 그랬다.

큰형을 오를 수 없는 나무로 여기 고, 막내인 자신은 욕받이로 이용.

어찌 됐든 에른보다만 나으면 된다.

암만 용써 봐야 키르안을 이길 수 없으니까, 중간만 가면 욕은 안 먹겠지.

이 마인드라, 형제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제이슨은 그 누구보다 에른을 무 시하는 동시에, 경계했다.

에른도 그걸 모르지 않았고.

"뭐, 뭐라는 거야?"

"못 알아듣는 척은."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런 재회.

아무리 소 닭 보듯 하던 사이였 다지만 친형제 간이 맞나 싶다.

"눈물의 형제 상봉을 하려고 온 건 아니겠고. 용건이나 말해."

제이슨이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 카시엔하고 대련했던 일. 그거 어떻게 된 거냐."

"어떻게 된 거긴. 순리대로 홀러 간 거지."

"순리? 웃기고 있네. 네가 카시엔 하고 무승부가 날 리가 없잖아!"

"그러면 안 되나?"

"안 될 건 없지만… 말이 안 되니 까. 서열 72위가 1위하고 어떻게!"

"다 방법이 있지."

"그래, 그 방법 말이다. 그거 때

문에 좀 보자고 하더라."

에른이 물음표를 띄웠다.

" 누가?"

"테 인."

고작 두 음절을 말하는 제이슨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테인이면, 테인 칼슨?"

끄덕.

위아래로 끄덕이는 얼굴에는 두 려움이 담겨 있다.

테인 칼슨.

에른도 아는 이름이다.

"웃기는 놈이네. 할 말 있으면 지 가 올 것이지 왜 형을 시켜?"

"쉿! 말조심해!"

제이슨이 한 걸음 다가와서 에른 의 입을 막으려 했다.

스읏.

에른은 가볍게 보법을 밟아 피하곤.

"웬 호들갑? 아무도 없구만."

다시 제이슨에게 물었다.

"지금 가면 되나? 어디서 보자는데?"

"그 차림으로 어딜."

제이슨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테인이 너하고 독대해줄 거 같냐. 저녁에 여기로 와. 연회 복 있지? 그걸로 갈아입고."

그가 쪽지를 건넸다.

내용을 읽은 에른.

"이거 혹시...r

"그 혹시가 맞다. 영광인 줄 알 아. 1학년이 클럽에 출입한다는 거, 보통 일이 아니니까."

"여과으 무스 "

시큰둥한 반응에, 제이슨은 고개 를 절레절레 저었다.

"넌 어째 가면 갈수록...

그가 떠난 뒤.

탁.

에른은 돌담을 넘어 아래로 뛰어 내렸다.

여긴 얼마 전부터 종종 찾곤 하 는 장소였다.

건물 뒤편이라 인적도 드물고 무 성히 드리워진 나뭇가지 덕에 바 로 옆을 지나가도 잘 보이지 않는

다.

교내에서 마음 놓고 차원거래를 하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가 없다.

여길 제이슨이 어떻게 알았을까.

*

"...내가 알려 줬어."

기숙사 방.

드미트리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에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급하다길래.... 친형이니까 가문 내부의 일인가 했지. 내가 뭐, 잘 못 말한 건 아니지? 미안해."

"미안할 것까진. 어차피 한 번은 만났어야 하는 거였고. 클럽도, 보 고 싶은 얼굴들이 있긴 하니까. 이 참에 들러 보는 것도 좋겠지."

"클, 클럽? 그 21클럽 말이야?"

드미트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거기 말고 교내에 다른 클럽이 또 있나?"

"와, 와...

드미트리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했다.

21클럽은 테아로스 아카데미의 비공식 사교 클럽이다.

회원 수가 21명만 유지된다고 하 여 붙은 이름.

당연히 높은 서열, 명문가 학생에 게만 가입 제의가 들어온다.

이때 만들어진 인맥이 평생 간다 고 하고, 졸업한 뒤에도 선후배들 끼리 밀어주고 끌어준다고 알려져 있기에.

일반 학생들은 가입 제의가 오기 를 꿈에서도 기다리지만, 절대다수 는 졸업할 때까지 클럽의 문턱도 밟지 못한다.

"하긴 넌 스틸가드고… 실력 좋 고... 인물도 좋으니까 탐내는 게 당연하겠지."

"뭘 풀죽어 있냐. 그게 뭐라고."

"이거나 봐. 어때, 어울려?"

예복으로 갈아입은 에른이 몸을 돌렸다.

"어

드미트리의 눈이 몽롱해졌다.

"너무하네. 야, 이건 아니지!"

"잘생긴 것들은 이래서 문제야. 대 충 다녀도 괜찮은데 꾸미면 꾸미는 대로 티가 나고. 불공평하잖아!"

그 말대로.

클럽에 들어서자 회원들의 시선 이 에른에게 꽂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격식을 갖춘 예복이다.

단정한 조끼는 호리호리한 상체 에 딱 달라붙어 있고, 위에 걸친 망토는 고급스러워 보인다.

안감은 물감처럼 파랗고 겉은 칠 흑과 같은 색.

그 위로 호박석이 박힌 흰 크라 바트가 일자로 뻗은 에른의 하얀 목선을 감싸고 있다.

덕분에 날렵한 턱선은 도드라지

의상, 표정, 몸짓과 걸음걸이에서 우아함과 세련됨이 뚝뚝 묻어났다.

이것만 해도 인상적인 등장.

그런데 조금 더 눈을 높이면, 절 로 넋을 놓게 되는 아름다운 얼굴 이 있다.

조각칼로 깎은 듯한 이목구비.

단점을 찾기 어려운, 그러면서도 조화를 갖춘 외모.

"쟤 누구야? 처음 보는데."

"1학년 아니야?"

"1학년에 저런 애가 있었나?"

"신입생 외모 탑은 카시엔인 줄 알았는데. 걔보다 낫지 않아?"

여학생들은 수군거리고, 남자 회 원들은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뭐야, 저거?"

"기생오라비같이 생겨갖곤."

위기감을 느낀 탓이다.

'귀여운 것들...

남자 회원들이 경계하는 것도 이 해가 간다.

21클럽이 대단하다고 해도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애들 모임일 뿐.

다들 뭔가 어설프고, 약간은 촌스 러워 보이기도 한다.

거기에 비하면.

한때 에른은 나바로 사교계의 별 로 통했다.

생태계 교란종이 클럽에 나타났 으니.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

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에른은 피식 웃으며 테이블을 둘 러봤다.

앉아 있는 회원들 대다수가 낯이 익었다.

몇몇 모르는 얼굴은 4학년인 것 같고.

에른도 한때는 21클럽의 회원이었다.

2학년 말에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던 거라, 4학년들은 잘 모르 지만 그 아래 기수는 빠삭했다.

'카플란, 윌리엄, 라디엘...

나중에 다 기사단에서 한 자리씩 맡게 되는 인재들이다.

이런 케이스가 있는 반면.

'드바인, 로트, 하르틴. 좋다고 웃 고 떠들고 있군.'

기대치만큼 못 커서 21클럽이 인 생의 고점인 회원들도 보인다.

그래도 어쨌거나.

현시점에선 나바로의 최고 기대 주들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음?'

구석 자리를 본 에른이 누군가를 발견했다.

붉은 머리의 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에른의 얼굴이 가면처럼 굳 었다.

그녀가 살짝 손을 들고 미소 지 어 보였다.

이슬을 머금은 꽃잎처럼 화사한 미소.

남자라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러나 에른은 아무런 반응을 보 이지 않았다.

오히려 외면.

'뭐야, 쟤?'

셀리나 루페브르의 미간이 찌푸 려 졌다.

도도하면서도 친밀감이 느껴지도록.

이 미소에 헤벌레 넘어가지 않는 남자를 본 적이 없는데.

아니, 가끔 있기는 하지만 이 정 도의 철저한 무관심은 처음이었다.

'얼굴값 하겠다는 거지? 두고 봐.'

셀리나가 다짐하는 동안.

"너, 에른 스틸가드지?"

덩치 두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이 누군진 알고 있다.

힐란과 듀란.

바란의 형들인 다리우스 형제였다.

'힐란이 첫째고 듀란이 둘째였던가?' 에른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문했다.

"그런데?"

"뭐어… 그런데에? 이 새끼가 돌

았나."

듀란이 얼굴을 구겼다.

"이게 위아래도 없나?"

힐란은 혀를 찼다.

"다 막내 때문이야. 저딴 놈한테 맞고 다니니까 우리까지 무시 받 는 거잖아."

바란이 형들에겐 사실대로 말한 모양이다.

형제들은 쪽팔려서 쉬쉬하고 있 었던 것 같고.

"그만들 해."

제이슨이 끼어들었다.

그가 에른과 눈을 마주쳤다.

"왔냐."

"어. 형 생각해서 특별히 와 줬지."

끄덕여 주고 다리우스 형제들을 보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힐란이 소리쳤다.

"뭘 그만해? 동생이라고 감싸는 거냐, 제이슨?"

듀란이 거들었다.

"동생으로 생각도 안 한다면서. 갑자기 우애가 샘솟기라도 하는 거야?"

바위산에서 얻어터지기 직전, 바 란이 이런 말을 하기는 했었다.

진위 여부는?

제이슨은 부인하지 않았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도.

에른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감싸는 게 이-니라. 테인이 불러 서 온 거야. 테인이 하는 일을 방 해하려고?"

"테, 테인이?"

"방해? 아, 아니...

다리우스 형제들의 눈빛이 흔들 렸다.

21클럽에서 테인 칼슨의 말은 곧 법이다.

놈들은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서 며 길을 터 줬다.

"테, 테인 때문에 왔으면 어쩔 수 없지."

"너… 운 좋은 줄 알아."

'누가 운 좋은 건지.'

에른은 코웃음을 치며 제이슨에 게 물었다.

"테인은 어디?"

"저기 안쪽에 혼자."

"똥폼은. 하긴, 미래의 공작님께 서 미천한 놈들하고 같이 어울릴 리 없지."

"말조심하라고 했다. 못 보던 사 이에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누가 듣는다고."

"다 들려…. 들리니까 좀 닥쳐!"

제이슨의 눈에 공포 비슷한 게 떠올라 있었다.

다리우스 형제도 그렇고 제이슨

도 그렇고 테인에 대한 두려움이 과도해 보인다.

하지만 에른은 이해했다.

이들이 왜 극도로 조심스러워하 는지.

전생에는 에른 역시 테인의 심기 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 니까.

테인 칼슨.

칼슨 가문의 장남.

나바로에는 비슷한 별명으로 묶 이는 귀족 세 사람이 있다.

이른바, 3인의 백후공.

철혈백작 레바단 스틸가드.

열혈후작 도리안 알브레트.

그리고, 냉혈공작 루터 칼슨.

모두가 나바로의 실세이거나, 대 륙 단위의 유명세를 자랑하는 대 귀족이 다.

그 루터 칼슨의 첫째 아들.

아버지를 빼다 박은 듯하다는 말 을 듣는 테인이다.

가문의 후광, 뛰어난 검술 실력.

그리고, 루터 칼슨을 연상하게 하 는 얼음장 같은 카리스마.

수련생들이 알아서 길 수밖에.

'궁금하군.'

이제는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안쪽으로 들어가자 테인이 다리 를 꼬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푸른 머리카락에 푸른 눈.

루터 칼슨을 똑 닮은, 그러나 훨 씬 젊다 못해 앳된 얼굴.

발치에는 학생 하나가 개처럼 엎 드려 있다.

양팔을 뻗고 무릎을 땅에 댄 자세.

테인은 그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 고 있었다.

" 음?"

에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를 발견한 테인이 고개를 까딱 거렸다.

"에른 스틸가드? 반갑다."

[81 화]

"괜찮게 생겼네."

테인은 에른을 위아래로 훑었다.

서늘한 눈길.

그가 단점을 짚어냈다.

"다만 키가 살짝 아쉬워. 그래도 아직 어리니까 더 크겠지?"

"아무래도."

"...아무래도?"

테인이 눈살을 찌푸리자.

'적당히 해라.'

제이슨이 옆구리를 쿡 찔러 왔다.

"형이나 작작 좀."

에른은 허리를 비틀어 피하고는 테인의 발걸이가 된 남학생을 뜯 어 봤다.

'다시 봐도 맞는데… 이 인간, 제 정신인가?'

테인에 대해선 꽤 잘 알고 있다.

그와는 기수 차이가 나는 편이다.

해서 아카데미에선 그리 오래 알 고 지내진 않았지만, 사교계에서

재회한 뒤론 자주 어울리곤 했다.

'옆에서 따까리짓 하는 것도 어울 리는 거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그런데 이 모습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에 테인이 의 아해 했다.

"왜 그러지?"

"저 애."

"아, 얘? 얘는 신경 쓰지 마."

테인이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나저나, 꽤 놀랐어. 스틸가드 에 진주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웬 진주? 북부에는 갯벌이 없는데."

"뭐, 갯벌? 이거 은근 재밌는 구 석이 있네. 제이슨, 긴장 좀 해야 겠어?"

제이슨이 화들짝 놀랐다.

"뭐… 왜...?"

"그렇잖아. 동생이 형보다 나아 보이니."

테인은 제이슨과 에른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에 제이슨은 발끈.

"이, 이 자식이 나보다 뭐가 나아?"

"그놈이 그놈이라고 해도 뭐. 장 식으로 데리고 다니기도 이쪽이 더 낫네."

"아무튼. 실력이나 볼까?"

테인은 엎드린 남학생의 머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받침대 다 썼다. 꺼져라."

"으 으응..."

몸을 일으킨 남학생이 에른을 봤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텅 빈 눈동자.

그 안에 담긴 것이라곤 체념 밖 에는 없다.

하지만 에른은 응어리진 절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가 옆으로 지나쳐 가자.

"새로 온 애 덕분에 오늘은 빨리 끝났네. 기분 째지겠어."

"쟤는 저러고 살고 싶을까?"

"나 같으면 벌써 혀 깨물고 죽었지." 곳곳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남학생은 벌게진 얼굴을 푹 숙이

곤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4 흐음...

테인이 싱글거리며 물었다.

"왜, 너무하는 거 같아?"

" 약간."

"사람을 받침대 취급하다니, 비인

간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어느 정도는."

"...그런데 너, 말이 짧다?"

순간, 클럽 내부가 찬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졌다.

모두 긴장하는 가운데, 에른은 태 평히 되물었다.

"여기 문화가 원래 이런 거 아니 었어?"

"힐란도 그렇고 그쪽도 그렇고. 3 학년이 졸업반한테 제이슨, 제이 슨.... 짧게 짧게 잘 끊더만. 나도 똑같이 토막 좀 내본 건데. 그게

문제가 되나?"

그 말에, 테인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급기야는.

"하핫! 하하하핫!"

호쾌한 웃음까지 터뜨렸다.

"이거 입담도 상당하네. 볼수록 물건이란 생각이 드는데? 실력도 입담 못지않았으면 좋겠어."

자꾸 실력 운운하는 걸 보면 대 련이라도 하자는 건가?

갸우뚱하는 에른에게.

"다른 건 아니고. 카시엔하고 했 다며, 대련?"

"그랬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거든."

테인이 턱짓으로 한쪽 방향을 가 리켰다.

구석 자리, 골똘히 생각에 잠긴 카 시엔이 보였다.

"카시엔하고 무승부라. 운이 좋았 어.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거 봐라."

" O "

"다들 왜 카시엔이 대련을 포기했

는지 궁금해하지. 고작 그 몇 마디 말 때문에? 그럴 리가 있나… 라고 들 하는데."

테인이 조소를 지었다.

"멍청한 것들. 그깟 대련이 뭐가 중요하다고. 철혈백작의 깨달음을 듣고도 느끼는 게 없다는 건…. 한 심한 거지."

'이거...

에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붕어 잡으려고 던진 떡밥을 잉어 가 냅다 집어삼킨 격 아닌가.

하긴, 테인이라면 느림으로 빠름 을 제압하는 묘리에 관심을 보일 법도 하다.

3학년 에이스이고 학교 전체로 봐도 최상위권에 속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테인이 그답지 않게 눈치를 봤다.

"또 뭔가 들은 거 없어?"

"내가 지금 갈림길에 서 있거든. 그런데 철혈백작께서 하신 말씀을 들으니… 이게 실마리가 될 거 같

아서 말이지."

"흠."

"고민하는 거 보니까 있긴 있나 보네? 이거 흔치 않은 기회야. 나 한테 신세를 지울 수 있다는 거."

부탁하는 입장이면서 무슨 선심 쓰듯이 말하고 있다.

이게 테인 스타일.

에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엔에게 했던 것처럼 하면 된다.

당장은 현묘함이 숨어 있는 것 같아도, 음미할수록 미궁으로 빠지

도록.

"들은 게 있긴 한데."

"말해 봐."

풀어 설명해 줬다.

유능제강, 이유극강의 원리.

이 무리는 상승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바탕과도 같다.

유약무실약허 (有君無實君虛).

있어도 없는 듯하고 꽉 차 있어도 텅 빈 듯한.

이 경지의 끝자락을, 1계인들은 반

박귀진이라고 부른다.

말을 마치자 테인이 무릎을 탁 쳤다.

"그게 그런 뜻이었어? 이거 머릿속 이 확 트이는 느낌인데?"

"그럼 다행이고."

에른은 속으로 웃음지었다.

'허세는. 그 나이에 이걸 어떻게 깨달아? 지가 건국황제인 줄 아나.'

테인이 제이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째 그쪽 말하고 다르다?"

"내, 내가 뭘'?"

"3남도 아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2남이 몰라? 이러면 누가 내놓은 자식이지?"

"뭐, 아무튼. 그쪽 집안에서 쓸만 한 놈은 키르안 이후로 끊긴 줄 알았거든. 아니라 다행이네."

제이슨이 입술을 깨물었다.

평생 깔보기만 했던 막내는 테인 에게 인정받고 자신은 푸대접.

굴욕도 이런 대굴욕이 없다.

하지만 참는 수밖에.

테인은 계속 제이슨의 신경을 긁 었다.

"아까 긴장하란 얘기는 장난이었 어. 근데 이젠 약간 진심이 되려고 한다. 에른 이 친구, 마음에 들어. 드는데… 인원이 다 차서 신규로 받을 수가 없네. 어때, 동생을 위 해서 형이 빠져주는 건?"

"뭐...?"

"그렇잖아. 이름값 말고 스틸가드 에 남은 게 뭐야. 굳이 둘이나 필 요할 건 없으니까."

이건 에른의 신경까지 건드리는

말이었다.

형제가 나란히 표정이 굳으니.

"야, 농담, 농담."

테인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정색하긴. 라제칸 님 덕분에 이 모든 걸 누리고 있는 건데. 감사해 야지."

묘하게 뼈가 있는 말이다.

"걱정하지 마. 제이슨. 넌 언제까 지나 21클럽의 회원이니까."

"어, 고… 고마워."

"고맙지? 그러면 부탁 하나만 들 어 줄래?"

"당, 당연히 들어 주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테인의 얼굴이 사악해졌다.

"방금 느낀 게 있어서 그런데, 가 볍게 대련 한 번?"

"여... 여기서?"

"뭘 쫄고 그래. 가볍게 하자고, 가볍게. 되나 확인만 해 보려는 거 니까."

테인은 우물쭈물하는 제이슨을

끌고 클럽 중앙으로 향했다.

"뭐야, 대련이야?"

"테인하고 제이슨?"

"...이번 샌드백은 제이슨이냐."

"쟤도 간당간당했지. 언젠간 저렇 게 될 줄 알았어."

모욕적인 말들이 오고 갔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덤벼."

테인이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망설 이던 제이슨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으아아압!"

대련장에 비하면 너무도 비좁은 실내.

제이슨이 보인 움직임 정도로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테인은 한 발짝도 발을 떼지 않았다.

퍼억!

주먹만 휘두를 뿐.

"크악!"

제이슨은 외마디 소리를 내며 바

닥을 뒹굴었다.

명치를 정통으로 맞은 탓에 숨쉬 기조차 어렵다.

"이런 게 느림으로 빠름을 제압하 는 건가?"

그보다는 그냥 실력 차 같은데.

테인이 제이슨을 일으켜 세웠다.

"좀 잘 해봐.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으니까."

2차 시도.

"커헉!"

쓰러진 제이슨의 코에서 피가 흘 렀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흐음...

그렇게 세 번, 네 번.

부어오른 제이슨의 얼굴이 시뻘 겋게 물들었다.

이런 치욕이.

3학년들한테 반말 듣고, 무시 받 기 일쑤이긴 했어도.

지금처럼 대놓고 얻어터진 적은 없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부들부들 몸이 떨리고, 회원들의 비웃는 시선이 전신을 난도질하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만하지?"

둘 사이에 끼어든 사람은 에른이다.

테인이 의아한 듯 물었다.

"뭐냐?"

"이게 무슨 대련이야? 일방적으로 패는 건데."

"첫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까. 차 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하지 않겠어?"

"양아치짓 해서 벽 넘을 수 있으 면 개나 소나 오러 유저겠지."

"...양아치? 이게 봐줬더니…. 비 켜라."

에른은 비키지 않았다.

테인은 어이없어하며 회원들을 둘러봤다.

"스틸가드 놈들은 이게 문제라니 까. 쥐뿔도 없는 것들이 지들이 뭐 라도 된 줄 알아. 지들 할아버지가 세운 업적에 언제까지 빨대 꽂을 건지."

다들 와하하 웃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에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반응… 익숙하다.

화가 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스틸가드가 예전의 그 스틸가드 가 아님을.

워낙에 대단했었고, 영웅으로 추 앙받았던 곳이기에 조금만 무너져 도 반발 작용이 나오는 것이다.

"가자, 형."

에른은 제이슨에게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던 제이슨.

턱.

그가 에른의 손을 잡았다.

"가려고?"

테인이 비아냥댔다.

"난 은혜와 원수를 확실히 갚는 사람이야. 아까도 봤겠지만...

이대로 나가면 너도 인간 받침대 꼴로 전락하고 말 거라는 은근한 협박.

제이슨의 몸이 움찔거렸다.

"...웃기고 있어."

에른은 제이슨을 끌고 클럽 밖으 로 나왔다.

"이...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제이슨이 원망에 찬 눈으로 노려 봤다.

"다 틀렸어. 클럽에서 쫓겨나고 반에서도 린치당하고 말 거야."

"테인이 그렇게 무섭나?"

"무섭지! 스틸가드고 뭐고 안중에 도 없는 놈.인데."

"딱하다 참."

"뭐, 뭐가?"

"스틸가드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 까'?"

"우리 때문이지. 적어도 키르안은 이런 대접을 받진 않았을 테니까."

제이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에서 다양한 감정이 엿 보였다.

본인 처지에 대한 비관과 좌절.

막내에게 못 볼 꼴을 보인 민망 함과 부끄러움.

어떻게 할까.

에른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 뭐.'

클럽 쪽으로 몸을 돌리자.

"어디 가?"

제이슨이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에른이 뒤를 돌아봤다.

"알지? 나 형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그래도 형은 형인데. 모른 척 하 기가 그러네. 이건 스틸가드에 대 한 모욕이기도 하고."

차원거래가 급물살을 타지만 않았 어도 조용히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이대로 넘어가지 않아도 된다.

에른은 제이슨을 내버려 두고 클 럽으로 돌아갔다.

"뭐야, 다시 왔네?"

"이제는 테인도 볼일 다 봤으니

까...

할란과 듀란이 손가락을 뚜둑 꺾 으며 앞을 가로막았다.

에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네 바란한테 다른 말 못 들었냐?"

"이쪽도 딱하긴 마찬가지군. 동생 이 제대로 안 알려줘서 이렇게 되 는 건 줄 알아라."

"뭐라는 거야? 미친놈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빡! 빠각!

에른의 주먹이 할란과 듀란 형제 의 면상에 연달아 틀어박혔다.

"뭐, 뭐야?"

회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인도 놀란 눈으로 에른을 쳐다 봤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에른은 피떡이 되어 쓰러진 다리 우스 형제를 발로 밀어내곤 테인 을 향해 씩 웃었다.

"뭐긴. 대련이지."

"다짜고짜 주먹질해놓고 무슨 대련!"

"그럼 정식으로 신청해 볼까? 어 때, 그쪽도 가볍게 대련 한 번?"

[82 화]

놀라운 일의 연속이다.

다리우스 형제는 아카데미를 대 표하는 엘리트라곤 할 수 없지만… 2, 3학년에선 나름 힘 좀 쓰는 편 이다.

둘 다 상급반이고.

1학년 중급반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 람은 에른이 아닌 다리우스 형제.

이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한술 더 떠 테인에게 시비까지 걸다니.

'은근 실력이 있는가 보네.'

셀리나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 랐다.

'그래도 테인한테 대드는 건… 아 직 뭘 모르는구나.'

그럴 만도 하다.

열여섯.

세상에서 무서울 게 없는, 가장 무서운 나이.

게다가 스틸가드니까.

재상 가문의 위용에 바짝 쫄아버 린 자신들과는 입장이 다르기는 했다.

'근데 제이슨은 잘만 기었잖아. 얘는 뭐지?'

비슷한 생각들.

21클럽 회원들은 침을 꼴깍 삼키 며 테인의 반응을 주시했다.

"꽤 강단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지."

테인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일그러진 입 모양은 웃는 건지, 화난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약간 버릇없긴 해도… 너그럽게 봐주려고 했는데."

지금까지는 테인이 호기심을 느 낄 만한 정도였다.

설설 기는 무리에만 둘러싸여 있 다가, 간만에 톡 쏘는 느낌을 주는 신입생이 들어왔으니.

"근데 그냥 개념 없는 새끼였군."

방금 한 짓은 용납할 수 없다.

클럽 회원을 때려눕힌 것으로도 모자라.

"...대련? 너 제정신 아니지?"

얼음처럼 굳은 표정과.

냉기가 흐르는 목소리.

테인은 아카데미에서 존재감을 내 보이고, 21클럽을 장악한 이후로 내 내 이렇게 불려 왔다.

냉 혈 소공작이 라고.

단지 칼슨 공작의 첫째 아들이라 서 듣는 말이 아니었다.

이 눈빛을,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감당할 수 있는 수련생은 없었다.

오늘까지는.

그러나.

'냉혈공작 본인도 아니고… 테인 이 뭐라고.'

에른은 픽 웃으며 받아쳤다.

"왜? 작은형한테는 거리낌 없더만."

테인의 말문이 막혔다.

제이슨은 숱한 따까리들 중 하나 일 뿐이고, 테인 칼슨은 21클럽의 왕이다.

걔랑 내가 같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사실.

그렇기에 대놓고 말한 적 없었고, 이걸 지적하는 놈도 처음이었다.

"돌았군. 오냐… 해 주지, 대련!"

테인이 눈짓하자 회원들이 테이 블을 치웠다.

"처맞고 싶다는데 무슨 수로 말 려."

클럽 한가운데, 넓은 공간이 만들 어 졌다.

테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와라."

"아니, 네가 와."

에른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아까 알려준 거. 애프터 서비스

라는 걸 해주지. 덤벼."

움직일 생각을 않는 에른.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테인은 한숨을 쉬며 다가갔다.

스슷!

에른의 몸이 순간 사라지자 테인

이 두리번거렸다.

" 이쪽."

어깨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테인은 몸을 돌리며 팔을 뻗었다.

휙!

에른이 뒤로 물러났고 테인의 손 은 허공만 갈랐을 뿐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바보 꼴이 된 것에 분노가 타올 랐다.

"네가 자초한 거다!"

테인은 마나를 끌어올리며 몸을 날렸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턱주가리를 깨뜨려 주고 말리라.

퍼억!

시원한 타격음.

너무도 뻔한 결말이었다.

그런데, 바닥을 뒹구는 사람은....

'테인이야? 에른 스틸가드가 아니 고?'

회원들의 눈이 커졌다.

엎드린 채로 고개를 든 테인의 얼굴에도 믿을 수 없다는 빛이 떠 올라 있었다.

"좀 잘 해봐. 시범을 보여 주려고 해도. 이거 뭐 합이 맞아야지."

"...이 새끼가!"

목소리가 높아졌어도 테인의 눈 빛은 가라앉는 중이었다.

분노가 차게 식어 간다.

아까 자기가 제이슨에게 말한 것 과 거의 비슷한 말.

구도도 거의 똑같다.

"...그래도 형제는 형제라 이건 가?"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지."

흐읍,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인이 튕기듯이 몸을 일으키며 에른에게 로 쇄도해 갔다.

제이슨이 보인 움직임은 여기에 비하면 거북이라고 해도 좋을 정 도!

하지만.

컥!"

테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볼이 눈에 띌 정도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 예상 못 한, 그러나 무슨 재연 같은 양상에 21클럽 회원들은 벙 찐 채로 눈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완전히 테인 대 제이슨의 재판이 다.

차이점이 있다면.

"하수들이 오해하는 게 있어. 빠 름은 언제나 느림보다 옳다고. 정 말 그런가?"

"꼭 그렇지만은 않지. 코fl(快)와 만(慢)은 각각이 유리함과 불리함 을 모두 가지고 있다."

에른의 특별 과외다.

"쓰읍! 뭐라는 거야?"

테인이 손등으로 볼을 식히며 귓등 으로 홀려 넘기자 에른이 고개를 절 레절레 저었다.

"...이래서야 애프터 서비스는 안 되겠군."

상승의 무리를 이해하진 못했지

만, 그래도 테인은 클럽 회원들보 단 머리가 잘 돌아갔다.

에른이 왜 이러는지도 알겠고, 놈 이 제이슨과는 다르다는 것도 알 겠다.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부나방 이 아니라.

'발톱을 숨긴 매였어.'

근데… 숨겼으면 뭐?

테인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감히 칼슨 가를 건드리고도 무사 할 줄 알아?'

그가 회원들을 쓱 둘러봤다.

다행히 오늘은 에이스들이 많았다.

"윌리엄, 카플란, 하르틴! 저거 밟

아 버려!"

테인이 뒤로 쑥 빠졌다.

에른은 그러도록 내버려 두었다.

호명된 회원들이 에른을 둘러쌌다.

"이거 대련 아니었나? 갑자기 다 구리라고?"

3대 1이면 부끄러워할 만한데도 놈들은 철판 깐 반응이었다.

"천둥벌거숭이 새끼."

"언제 한번 날 잡겠다 했는데 그 게 오늘이었네?"

"누가 누굴 잡는다고."

에른이 피식 웃는 순간, 코앞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쉬익!

파공음이 귓가를 스친다.

에른의 시선은 주먹이 아니라 주 먹 쥔 놈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윌리엄. 준남작 집안에서 왕실 기사 배출했다고 난리도 아니었 지.'

솔직히 대단한 놈이다.

여기선 테인의 몸종 노릇이나 하 곤 있지만… 미래의 왕실 기사.

그런데 전생처럼 위엄 있는 기사 는 못 될 것 같다.

휘잉

가볍게 주먹을 피하고.

빠각!

윌리엄의 턱이 홱 돌아갔다.

강력한 충격에, 왼쪽 어금니가 견 디지 못하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 다.

'앞으로 발음 줄줄 샐 테니까!'

그와 함께 잇몸에서 솟구치는 피!

"카악!"

카플란이 눈을 비볐다.

하필 피가 튀어도 그쪽으로.

"에휴."

에른은 카플란의 명치를 후려갈 겨 주곤 하르틴을 맞이했다.

'얘가 제일 답이 없지?'

21클럽의 회원이 됐다고, 테인의 마음에 들었다고.

뭐라도 된 마냥 굴다가 노력하는 범재들에게 줄줄이 밀려 버린 놈 이다.

'넌 자비도 아깝다.'

에른의 주먹이 하르틴의 인중에 정통으로 꽂혔다.

앞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테인 의 따까리들이 전부 쓰러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테인의 수족이 라는 것.

별 볼 일 없는 출신인 그들이라 줄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이다.

그래도 고르고 고른 아카데미의 수재들.

다 고학년 상급반인데 어떻게 이 럴 수가?

테인이 놀라 소리쳤다.

"파, 파르스! 어떻게 좀 해 봐!"

그 말에, 팔짱 끼고 멀찌감치서

지켜보고 있던 학생 하나가 에른 의 앞으로 걸어왔다.

에른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키 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긴 팔다리.

그리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

1학년에 카시엔이 있다면 3학년 에는 파르스가 있다.

둘 다 한눈에 들어오는 비주얼이 란 공통점고}.

차기 수석 졸업자.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내년에

[카르 숨]을 따게 될 파르스다.

"재밌는 놈이네. 2급 문턱쯤 되 나?"

파르스의 눈은 정확했다.

에른은 딱 그 정도 출력을 내고 있었으니까.

"글쎄?"

"까불고 다닐 만한 실력이긴 흐fl. 그래도 우리 졸업할 때까진 참지 그랬냐."

테인은 3학년 이하 에이스들을 전부 손에 쥐고 있고, 졸업반 학생

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제이슨을 막 대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교관들도 테인이라면 한 수 접어 주는 편이고.

"솔직히… 카시엔보다 나아 보이 는군. 그건 대단하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스틸가드의 이름 값이 칼슨에 모자라지 않는 것도 사실이나, 일개 1학년 따위가 흔 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21 클럽은!

파르스의 주먹이 붉게 빛났다.

"붉은 오러다!"

오러 자체도 쉽게 보기 어렵지만, 이 적광은 무척 희귀했다.

회원들이 눈을 빛내며 모여들자 파르스가 짜증을 냈다.

"물러나라, 다치기 싫으면!"

후웅!

어느새 파르스가 거리를 좁히고 긴 오른팔을 뻗어 왔다.

쾅! 쾅! 콰앙!

붉게 일렁이는 파르스의 주먹.

에른의 가드를 후릴 때마다 폭발 음이 울린다.

'그 유명한 적월광륜이라.'

오러의 색이 어떤 요인에 의해 결정되나.

체질과 마나 연공법의 영향을 받 는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정확히 어떠한 메커니즘을 따르 는지에 대해선 명쾌한 답이 나오 지 않았다.

그런데 파르스를 보면, 체질설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만큼 신기한 체형이고 신기한 색이었다.

'명성만큼 되려면 아직 멀었군. 음, 이거 어떻게 할까...?'

에른은 잠시 고민했다.

내공을 쓰면 유형화된 기를 내보 이지 않고도 어렵지 않게 제압 가 능하다.

하지만, 오러 없이 오러 유저를 이긴다는 게 더 경악스러운 거 아 닌가?

차라리....

지잉

에른의 양팔에서 은빛이 흘러나 왔다.

조명...?

아니, 몸에서 나오는 기운 같은 데?

오러! 오러다!

어떻게 오러를 만든 거지?

회원들은 동일한 사고의 흐름을 따랐다.

그리고 동시에 떠올린 생각.

'...에른 스틸가드가 오러 유저?'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갑작스런 과전류가 뇌리에 과부 하를 일으켰다.

'미친! 1학년이 어떻게?'

그러나 아직 놀라기엔 일렀다.

더욱 믿을 수 없는 일.

"크... 크아아악!"

파르스는 깨진 주먹을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데다, 넋이 나가 있었다.

콰당!

뒤에 테이블이 놓인 것도 모르고 같이 쓰러질 정도.

"어, 어떻게 이런...

파르스까지 당했다.

저 건방진 1학년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에른이 슥 둘러보니 다들 흔들리 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들 보니까 멀미 나려고 한

다. 눈깔아."

회원들이 시선을 내렸다.

누가 강자인지 확실히 깨달은 것.

그때.

짝, 짝, 짝.

정적을 깨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테 인이었다.

"신입생이 오러 유저라니, 정말 대단해. 거기다 파르스까지 이길 정도면.... 스틸가드, 아직 죽지 않았네?"

그 말에 회원들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후 나바로의 정국을 주도하게 될 그들이다.

갈수록 예전만 못해진다는 스틸가드.

특히나 답이 없다는 3대에서 선 대 못지않은 천재가 나타났다?

에른 스틸가드.

앞으로 이 이름, 그의 행보를 주 목해야 한다.

"무의미한 신경전은 이쯤에서 끝

내자."

테인이 손을 내밀었다.

"우리 클럽으로 들어와라."

"파르스의 말이 맞아. 2년만 기다 리면 그때부턴 네 시대다. 조급할 게 뭐 있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테인이 씩 웃었다.

"세상은 아카데미 밖에 있으니까. 뭐가 너한테 더 이로울지 생각해 봐라."

사실 이것만으로도 파격 제안이었다.

테인이 먼저 숙이고 들어오다니.

아쉬운 소리를 해본 적도, 할 이 유도 없는 그다.

그런데.

트누.

에른이 테인의 손을 쳐냈다.

"너한테나 이롭겠지."

"이게 호의를 베풀어 줘도...

"뭔 호의? 결국은 아버지 바짓가 랑이나 붙드는 주제에. 내세울 게 가문 말고는 없나 봐?"

"닥쳐라!"

챙!

분개한 테인이 품에서 단검을 꺼 내 들고 달려들었다.

스읏!

가볍게 피하고 목울대를 가격한 다.

죽으면 안 되니까 적당히 힘 조 절 하고.

"끄억!"

동시에 지풍이 테인의 손목뼈를 때렸다.

단검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턱!

에른이 테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너... 가만... 안 둬 캐... 캑! 나,

테인… 칼슨이라고…!"

쥐어 짜내듯 말하는 그의 귓가에.

"넌 항상 특별한 존재였겠지."

싸늘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꽂힌다.

"언제나, 어딜 가든…. 쭉 그랬을 거야. 날 때부터 지금까지. 근데 그거 알아? 나한테 넌, 전혀 특별 하지 않아."

[83 화]

일그러진 테인의 얼굴.

목을 쥔 채로 들어 올리자 얼음 장 같기만 하던 피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무슨 토마토 같군."

수려한 이목구비는 잔뜩 일그러 져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호흡 곤란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처음 겪는 굴욕감이다.

나, 테인 칼슨이 이런 꼴이 됐다고?

그것도 애들이 다 보는 앞에서?

'너도 똑같군.'

에른은 무표정한 눈으로 테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칼슨이란 이름, 뛰어난 실력고}.

그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수련생들.

테인이 구축한 철옹성이다.

전생에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던.

그런데 지금 받는 느낌은.

'...철옹성? 웃기고 있네. 그냥

모래 위에 지은 집이지.'

에른은 테인이 자랑하는 모든 것들 을 그의 눈앞에서 짓이겨 버렸다.

"이, 이거… 놓지… 못해...

"싫은데? 넌 칼침 놔도 되고, 난 멱살도 잡으면 안 되냐?"

단검을 뽑고 달려드는 테인에게 서 살기를 느꼈다.

홧김에 휘두르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찌르려고 한 것.

받은 만큼 돌려주려면 테인의 얼 굴을 뭉개고 이빨 몇 개쯤 부러뜨

려 줘야 계산이 맞겠지만.

그래도 칼슨 공작가를 아예 무시 할 수는 없긴 하다.

윌리엄과 하르틴에게 했던 것처럼 하는 건 무리수 중의 무리수였다.

"앞으로 조심해. 똑같은 경험하기 싫으면."

에른은 테인을 벽으로 던져 버리고 21클럽 회원들에게도 경고했다.

"날 귀찮게 하지 마라."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

회원들이 무슨 말을 하겠나.

파르스가 당하고 테인까지 저렇 게 됐는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대답 안 해'?"

"알... 알았어 "

미약하게 살기를 흘리자 회원들이 우물우물 대답했다.

다들 패배한 장수들처럼 어깨가 축 내려가 있다.

그러나 약간은 다른 반응.

눈을 빛내는 두 사람.

한 명은 흥미로움이고.

'이런 신입생은 처음이야…. 한번 꼬셔 볼까?'

다른 한 명은 무언가 깨달은 듯한.

'에른 스틸가드는 오러 유저였다. 그것도 파르스를 이길 정도인. 그렇다는 건...

카시엔의 눈이 크게 떠졌다.

'쩝.'

에른이 입맛을 다셨다.

하필 녀석이 여기 와 있을 줄은.

그가 카시엔에게 심은 심마는 착 각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화접목과 차력타력.

맛만 보여준 게 주효했다.

중급반이 펼친 묘리이기에 늪처 럼 빠져드는 것.

에른도 하는데! 왜 난 못하지?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스스로에 대한 책망과 집착을 멈 출 수 없다.

그런데 에른이 자기보다 위에 있 음을 알게 됐으니.

카시엔은 한층 홀가분해진 표정 이었다.

'에이.…"

에른은 회원들을 뒤로했다.

클럽 입구.

후다닥!

기척 하나가 갑자기 멀어져 갔다.

에른이 입을 열었다.

"작은형."

우뚝.

그 말을 들은 제이슨의 뒷모습이

석상처럼 곧었다.

에른이 그의 앞으로 가자.

"어… 어어.…"

제이슨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른이 비죽 웃었다.

"다 봐놓곤. 못 본 척할 거야?"

"아, 아니… 난...

제이슨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 하고도 믿기지 않았다.

에른이 어떻게.

윌리엄, 카플란, 하르틴을 가볍게 때려눕힌 걸로도 놀랄 일이다.

그런데 3학년 최강자 파르스까지 꺾다니.

머리 전체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 한 기분이었다.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에른이 물었다.

"그냥 가지 뭐하러 돌아왔어?"

"그냥 갈 수가 없어서...

"왜, 테인한테 밉보이면 아카데미 생활이 고달파지니까?"

"얻어터진 걸로도 모자라서 빌기 라도 하려고? 원하는 만큼 맞아 주지 못해 미안해〜 뭐 이런?"

제이슨은 에른의 눈을 똑바로 쳐 다보지 못했다.

"형, 많이 변했네."

"내, 내가 뭘?"

"자존심 빼면 시체인 캐릭터 아니었 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이슨이 발끈했다.

"네가 뭘 알아! 나라고 죻아서 후 배한테 굽실거리는 줄 알아?"

'알지.'

테인의 마수에 걸려든 것이다.

칼슨 가의 스틸가드에 대한 열등 감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함부로 대 하지 못했던 스틸가드를 내가 수 족으로 부린다!

이걸 위한 21클럽 영입.

그것도 모르고, 와달란다고 좋다 고 들어갔으니.

물론 제이슨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전생엔 자기도 똑같이 행동했으 니까.

"그, 그리고 변한 건 너지! 대체 뭘 한 거야? 악마한테 영혼이라도 팔기라도 한 거냐? 어떻게 오러 르..«

웬 악마?

'뭐 비슷은 하다만.'

그래도 웃기긴 웃기다.

에른은 배를 잡고 웃었다.

"재밌어 죽겠네. 이런 거 보려고

일부러 남몰래 수련했지."

"말이 되는 소리냐!"

온갖 감정이 제이슨의 얼굴을 스 치고 지나갔다.

놀라움과 불신, 수치심, 불안감… 그리고 마지막은 여태껏 본 적 없는.

"...하나만 묻자. 너, 왜 그런 거냐?"

"뭐가?"

"알면서 왜 물어?"

"모르겠는데?"

"굳이 테인하고 척 질 것까지는

없었잖아. 왜 그렇게까지."

"그걸 몰라서 묻는다고."

에른이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우리 형제가 이렇게 됐을까?"

"원수만도 못한 형이지. 집에서 도, 여기 아카데미에서도."

제이슨은 에른의 시선을 피했다.

원망도, 화난 감정도 엿보이지 않 는 무구한 눈.

그 눈을 보니 부끄러워졌다.

자기가 했던 말, 행동이.

에른을 동생으로 생각하지도 않 는다고.

테인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묶어서라도 데리고 와야지!

그렇게 입학 후 처음으로 막내를 보러 갔던 오늘 일도.

"아니, 솔직히 말해 개쓰레기 같 은 형이야. 동생이 내놓은 자식 취 급을 받든 말든. 웬 허섭쓰레기 놈 들한테 린치를 당하든 말든 안중 에도 없는."

반박할 수 없다.

"그런 형이지만, 말했잖아. 그래 도 형은 형이라고. 핏줄인 걸 어떡 하겠어."

"패도 내가 패. 테인이 무슨 자격 으로?"

에른은 손가락을 세워 좌우로 흔 들었다.

"그건 용납 못 하지. 근데… 생각 해 보니까 열 받네. 형 좀 맞을래?"

뜻밖에도.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래? 부탁이니까 세게 후려갈

겨 줘라. 죽지만 않을 정도로."

"...고맙다."

작은형이 진짜 미쳤나?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에른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 이래?"

"그냥… 갑자기 눈이 뜨이는 것 같네. 지금까지 난 누굴 믿고, 대 체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제이슨이 허허 웃었다.

허탈한, 그러나 미망에서 깨어났 음을 보여주는 웃음이었다.

"그나저나. 어떡할 거냐?"

" 뭘?"

"오늘은 네가 압도했다고 할 수 있겠지. 근데 테인이 이대로 꼬리 내릴 놈이 아니야. 파르스도 어떻 게든 갚아주려 할 거고."

진지하게 충고하는 제이슨이었다.

역시 돌아선 아군이 가장 무섭다 더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테인의 충신 처럼 굴던 그가 벌써부터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어떡할 거냐고? 그건...

다 생각이 있다.

하지만.

"알려주기 싫네."

"왜...'?"

"형, 결말을 알고 보는 연극이 재 밌어?"

"없… 지?"

"내 말이. 지켜보면 알게 될 거야."

*

"이런 젠장! 젠장맞을!"

테인이 폭주했다.

그는 클럽의 집기를 부수고 애꿎 은 회원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이 머저리 새끼들아! 셋이 덤벼 서 하나를 못 이겨? 그리고 너네

들도!"

눈에서 냉기가 풀풀 흐른다.

회원들은 찍소리도 못했다.

"웬 미꾸라지 하나가 물을 흐리고 있으면, 합심해서 때려잡아야지! 손 가락만 빨고 있어?"

"진정해."

파르스가 테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거 놔! 너도 잘한 거 없어. 학년 탑이라는 놈이 부끄럽지도 않냐?"

파르스의 표정이 굳었다.

테인이 숨을 골랐다.

"후우.... 주먹은 좀 어때?"

"난 괜찮아."

어린애 머리통만큼 퉁퉁 부어오 른 걸 보면,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지만.

오러 유저의 회복력을 생각하면 적절한 치료만 받는다면 금방 낫 기는 할 것이다.

"그 새끼, 어느 정도인 거 같아?"

"...방심했어."

"방심도 실력 아닌가?"

"오러 유저인 줄 몰랐으니까. 그 건 크지. 잘 쳐줘도 2급 초입에서 갓 벗어난 수준이야. 다시 붙으면 이길 수 있다."

"정말?"

"무조건!"

"그렇다면 다행인데. 정 안 되면 선배들한테 도움을 청해야 해. 그 러고 싶진 않지만… 쪽팔려서 원."

신입생한테 탈탈 털린 사실이 알 려진다면 앞으로 고개 들고 다니

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너네… 입들 말이야. 간수 잘해."

테인이 회원들을 쓱 둘러봤다.

"오늘 일이 밖에서 들리기라도 한 다면. 누구 입에서 나온 건지 어떻 게든 색출해 낼 거니까."

회원들은 무거운 낯빛으로 고개 를 끄덕였다.

분명 놀라운 일이고 화제가 될 만 한 이야기지만, 클럽의 치부를 동네 방네 떠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친구는 물론이고 가문, 가족한테 도 알려선 안 도1 이 일은 내부에 서 해결한다."

'하여간 자존심들은.'

클럽 바깥.

백리지청술로 안에서 오가는 대 화를 전부 들은 에른의 입에 미소 가 감돌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들 생각한 대로 행 동해 주는지.

'한동안은 입 다물고 있겠어.'

오러를 사용한 이유다.

오러까지는 보여줘도 된다고 판 단한 것도 있지만, 알아서 함구하 는 분위기가 될 것도 예상했다.

테인에게 더없는 굴욕을 맛보여 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야 그가 입단속을 할 테니까.

물론 영원한 비밀은 없다.

언제까지고 지켜지지는 않겠지만, 알려진 뒤에는 알려져도 상관없는 시점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다음 만날 사람은...

21클럽은 수도 뒷골목, 으슥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나름 비공개 클럽이라고 이런 장 소를 고른 것 같은데.

화려한 내부와는 달리 밖으로 나 오면 정반대인 황량한 분위기가 펼쳐져 있다.

그 뒷골목, 개미 새끼 하나 보이 지 않는 사잇길.

한 소년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 손에는 날카로운 비수를 든 채다.

으… 으윽...

비수 위로 떨어진 눈물이 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으윽...

소년은 비수를 흔들어 남은 눈물 을 튕겨 내고, 양손으로 비수를 고 쳐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을 겨누었다.

"흠흠."

소년의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 렸다.

잔뜩 찡그린 인상과 대비되는, 즐 거운 듯 보이는 얼굴.

인기척을 낸 사람은, 환한 웃음을

가득 머금은 에른이었다.

"나랑 내기할래? 너 그거 못 찌른다."

"뭐, 뭐야 너'?"

소년이 뒤를 돌아봤다.

그도 에른을 알아보는 눈치였다.

"너... 너는 아까 그."

"맞아, 에른이라고. 기억하나?"

"어, 스틸가드..."

"음, 근데…. 신기하네."

"...뭐가?"

에른이 소년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받침대가 말도 해?"

"크… 크흑..

아까 일이 떠올랐는지.

소년의 눈에 다시 수막이 차올랐다.

"아, 미안, 미안. 장난이야. 그거 때문에 죽으려는 건가 해서."

"너, 너도 봤잖아! 더는 못 참아! 이렇게 사느니...

"하긴, 너네 형이 좀 심하긴 하더 라. 아무리 배다른 형제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동생을 가구 취급 하는지."

"그, 그걸 어떻게?"

"휴인 칼슨하고 테인 칼슨이 형제 라는 걸 모르는 수련생도 있나?"

휴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내, 내가 서자라는 건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에른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어떻게 아냐고?"

그야 미래 지식 덕분이다.

그가 아는 것은 휴인 칼슨은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는 것과.

요절한 테인 대신 천덕꾸러기 휴인 이 소공작 지위를 물려받는다는 것도.

테인과 21클럽이 안중에도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안 알려줌."

"어차피 찌르지도 못할 거면서 뭘 그러고 있냐. 이리 내."

"내, 내가 못할 줄 알고?"

휴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푸욱!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 자기 가슴에 검을 박아넣었다.

"앗!"

휴인이 죽으면 계획이 어그러진다!

'...이건 생각 못 했는데.'

에른이 얼른 몸을 날렸다.

[84 화]

고수의 시간은 남들보다 느리게 흐른다.

상황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휴인의 움직임이 슬로 모션으로 보였다.

피륙이 뚫리고, 살갗을 찢으며 들 어가는 비수.

날 끝이 피를 머금기 시작한다.

심장에 닿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1초면 충분하다.

'안 돼!'

휴인의 팔 관절이 천천히 꺾이고 시퍼렇게 선 날이 붉게 물들어 갔다.

심장이 뚫리기 전에 막아야 한다!

단전에서 빠져나온 내공이 발을 향해 쏘아져 갔고, 천변보가 펼쳐 졌다.

파앗!

에른의 신형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는 휴인과의 거 리를 전부 좁힌 채였다.

"어...

휴인의 손목을 움켜쥔 에른의 손.

비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 이거 안 치워?"

에른은 무연한 눈으로 휴인의 눈 을 들여다봤다.

테인에게 했던 것처럼.

두 사람에게서 받는 느낌은 너무 도 달랐다.

"형은 기가 세서 문제고, 동생은 너무 약해서 문제라.... 둘이 합쳐

서 반으로 나누면 딱 좋아질 텐데. 그래도 다시 봤어."

"뭐, 뭘?"

"진짜 찌를 줄은 몰랐거든. 좀 욱 하는 성격인가?"

"이거 놔."

"죽지 않기로 약속하면."

"알았어. 안 죽어."

김이 새 버렸는지.

휴인은 비수를 뽑으려 했다.

에른이 그를 제지했다.

"또 왜?"

"그러다 진짜 죽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칼을 뽑는 게 찌르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차라리 이 상태는 비수가 출혈을 막아 괜찮기라도 하지.

"가만히 있어."

에른은 휴인의 가슴에 자리한 혈 도 몇 개를 점해 피가 흐르는 것 을 막았다.

그리곤, 몸을 돌려 차원거래를 활 성화.

인벤토리로 들어가 아이템을 꺼내 자 허공에서 금창약이 튀어나왔다.

휴인에게 가서.

"뽑으면 바로 이거 발라. 그렇게 깊게 들어가진 않았으니까, 봉합이 될 거야."

"뭐, 뭔데 이건?"

고약한 냄새에 코가 찡그려진다.

에른은 대답하지 않고 비수에서 휴인의 손가락을 떼어냈다.

그의 손바닥 위에 금창약을 올려 놓으며.

"셋 세면 뽑는다. 하나, 둘."

푸왓!

고인 피가 튀어 올랐다.

휴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셋… 셋 센다며...

"약이나 발라."

휴인은 허겁지겁 가슴을 풀어헤 쳤다.

'역시.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어.'

백 년을 산 노인도 늙으면 죽어 야지… 하면서 삶의 의욕을 불태우

는 게 인간.

더러워도 끝까지 참고 견딘 끝에 소공작까지 된 휴인이다.

쉽게 죽을 리 없다.

...라고 생각하는데, 휴인의 가 슴에 난 상처들이 보였다.

방금 입은 자상이 아니라 찢기고 갈라진 뒤 아문, 시간의 흔적이 느 껴지는 융터였다.

"원래 종종 자해하고 그러나?"

휴인은 대꾸 없이 가슴 한가운데

에 금창약을 치덕치덕 발랐다.

걷힌 소매 위로 드러나는 팔뚝도 아문 상처와 흉으로 가득했다.

'훈련이 아니라 자해로 생긴 거 다. 참고 견딘 게 아니었어. 죽지 못해 살았던 거야.'

그럴 만도.

클럽에서 보지 않았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휴인.

테인이 확실히 머리가 좋다.

나쁜 쪽으로 잘 돌아간다는 게 문제지만.

이런 식의 괴롭힘이 폭력보다 더

괴롭다는 걸, 영혼에 가장 큰 직격

타가 된다는 걸 아는 것이다.

으... 으윽.

휴인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래?"

"사,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았어!"

"근데 왜 우냐?"

"살… 살이도 죽은 거나 다름…

없으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흑!"

휴인이 닭똥 같은 눈물을 홀렸다.

에른은 딱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3혈이라 불리는 가문 후계자들이 죄다 뭐 이래?'

우선 철혈백작가 스틸가드.

전생의 처절한 실패를 생각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열혈후작가 알브레트도.

얼마 전까지 쿤츠가 후계자였고 전생에는 실제로도 후작위를 물려 받았으니.

냉혈공작 가문도 만만치 않다.

말이 카리스마지, 어딘가 성격이 뒤 틀려 있는 테인.

'교류자들이 뭐라고 하는 말이 있 는데...

감정이 없는 것 같은 미친놈과 변태들.

거래 파기 및 구매한 물품에 트집 잡는 건 일상이고 판매 글마다 따라 다니면서 악평을 남겨 댄다.

그걸 넘어 저격용 대화방까지 파 서 같은 부류들을 모으는, 사람 돌

아버리게 하는 놈들.

대체 왜 그러냐고 물으면 뻔뻔하 기 짝이 없는 태도로 일관할 뿐.

'뭐였더라…. 그래, 싸패. 동생을 발 받침대로 쓰는 건 싸패 수준이 맞지.'

테인은 몇 년 뒤, 불치병에 걸려 죽는다.

그 뒤를 잇게 되는 휴인은… 에른 이 봐도 답이 없어 보였다.

외모는 형제라 그런지 테인과 비 슷하지만.

자신감 없는 표정과 태도, 전반적

으로 유약한 인상 때문에 위엄이 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가문에선 좀 덜했지?"

"아무래도… 내가 서자이긴 해도 아버님께선 차별 없이 나와 테인 을 대하셨어."

"공작님답군. 모두에게 차갑다는 건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말도 되 지. 그래서 테인이 널 그렇게 싫어 하나?"

"그럴지도…. 그래도 가문에서는 어느 정도 선을 지켰어. 근데 아카 데미에 와 보니까 여긴."

"테인의 왕국이지."

"그래. 난 왕의 미움을 받는 죄수고."

에른이 혀를 찼다.

"죄 중에서 가장 중하다는 괘씸죄 로군. 탈옥할 생각은 안 해봤어?"

"그건 안 도H! 지, 지금도 사람 취 급 못 받는데. 아카데미에서까지 튕겨져 나오면...

휴인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손가락 질받고 말 거야. 아버님도 날 내치 실 테고."

"테인은 그걸 잘 알아서 죽어라 괴롭히는 거고. 그래서 죽으려고 했던 거군?"

"이, 이렇게 살아 뭐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말이 오락가락하는군. 죽기 싫다 고 했다가 죽는 게 낫다고 했다 가… 내가 보기에."

에른이 팔을 뻗었다.

부드러운 손으로 휴인의 푸른 머 리카락을 덮으며.

눈높이를 조금 낮춰 그의 눈을

다시 들여다봤다.

"넌 죽기는 그른 것 같다."

휴인은 이상함을 느꼈다.

죽다 살아난 뒤라 멘탈이 흔들려 서 그런가?

왜 안도감이 드는 거지?

에른의 말에,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그의 눈빛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진정됐다.

"그,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날 만났으니까."

"버티고 또 버텨라. 지금 겪는 수 모와 굴욕은 아무것도 아니야. 나 중에 떠올려 보면 우습지도 않았 다고 느껴질 테니."

"...겪어 보지도 않은 주제에!"

"안 겪어봐? 내가? 장담하는데, 너만큼 잘 알아. 그리고, 내 말이 맞아."

«..2"

"넌 공작이 될 거니까."

싸악.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다.

뭔 개소린가 싶으면서도.

"갑, 갑자기 뭔...

"어때? 테인 칼슨이 아닌 휴인 칼 슨이 차기 가주가 된다!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지."

"아...

전율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꿈에서도 바란 적 없는 일.

잠시 동안, 고통도 괴로움도 느껴 지지 않았다.

그러나.

휴인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개, 개소리 집어치워!"

"난 진심인데."

"진심이면 뭐? 그리고 신입생 주 제에 건방지긴! 나 2학년이거든? 어디 선배한테."

휴인은 자기 머리 위에 얹어진 에른의 손을 쳐내고 그를 지나쳐 갔다.

잠깐이나마 혹했던 자기가 바보 처럼 느껴졌다.

"살려준 건 고마워. 나도 내 마음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고 싶기는 하니까. 이 빚은 꼭 갚도록 할게."

"그러든지."

"근데… 공작은 진짜 아니지 않 냐? 나 따위가 무슨 공작. 웃음 밖 에 안 나온다."

에른은 휴인을 잡지 않았다.

단지 그의 뒤에다 이렇게 말할 뿐.

"내가 테인을 어떻게 했는지나 알 고 웃는 게 좋을 텐데."

"...테인을 어떻게 하다니?"

휴인이 돌아섰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한테 들어 봐야 어차피 못 믿 을 테니까… 하나도 없진 않지? 친 한 클럽 회원."

"로트라고 가끔 인사 나누는 동기 는 있는데."

"구석탱이에 있던 애군. 걔한테 물어봐. 너 없을 때 무슨 일이 있 었는지."

입장이 바뀌었다.

이제는 휴인이 멍하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고.

"입장 정리한 후에 찾아와라. 난 널 도와줄 수 있어."

먼저 자리를 떠난 것은 에른이었다.

'거의 넘어온 거 같지?'

100%… 아니, 한 99% 확신했다.

테인 때문에 죽을 결심까지 하는 처지.

거기에 공작이 될 수 있다는 달 콤한 속삭임까지.

에른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휴인은 공작위를 물려 받게 될 거니까.

말하지 않은 것은 그게 숨만 쉬 어도 가능하다는 사실.

"휴인 말고도 꽤 있지? 백조가 되 는 미운 오리새끼들."

머릿속에서 명단이 만들어졌다.

'생각할수록 괜찮단 말이지.'

칼슨 형제를 보고 떠오른 아이디 어다.

왕처럼 행동하는 테인과, 그의 발 아래 깔린 휴인.

모두가 테인에게 꼼짝 못 하는 동시에 그를 부러워하고, 휴인은 무시하고 깔보기 일쑤이지만.

최후 승자가 되는 건 휴인이다.

'그래서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

21클럽만 봐도 잘 풀리는 회원이 있는 반면, 어떻게 저렇게까지 망 가지나 하는 회원도 있다.

잘 될 것 같은 수련생들을 모아 서 인맥을 형성하는 게 21클럽의 방침이라면.

"성공률… 반타작이나 겨우 되려

나? 그걸로 만족 못 하지. 난 미래 에 성공할 애들만을 골라낸다."

단지, 지금은 여러 이유로 그다지 빛나지 않는 원석들.

종류는 다양하다.

대기만성형, 진로 설정을 잘못해 서 빛을 못 본 케이스, 다른 건 다 완성형인데 멘달이 문제 등등.

그리고.

'...억세게 운 좋은 놈.'

휴인이 대표적인 마지막 사례에 속했다.

에른은 마차를 불러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수준 안 맞는다고,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고. 아카데미에 너무 소홀 했었어.'

상회를 세워 골드를 긁어모으는 것도 좋고, 암흑가를 장악하는 것 도 앞으로의 행보에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더 길게 봐야 한다.

아카데미에 모인 수련생들은 나바로의 미래 그 자체다.

'공작가의 차기 가주, 광시곡의 주 인공, 마탑주가 될 자질, 천재 행정 가...

현재 수련생 신분인 원석들만 해 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둔다면 나중에 쏠쏠하게 써먹을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인지도를 좀 높일 필요가 있지."

*

다음날.

상급반에 들어가자 사방에서 달 갑지 않은 눈초리가 쏘아졌다.

"...중급반이 여긴 웬일이냐?"

행동을 취한 것은 머리를 빡빡 민 덩치였다.

그가 에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

"너, 이름 뭐지?"

"알아서 뭐 하게."

"하긴, 이름은 알 거 없긴 흐fl. 서 열이?"

"...30위다!"

"안됐네."

"뭐, 뭐가?"

"인생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사라 지게 될 텐데. 어떡하냐."

30위는 상급반 마지막 순위다.

여기서 밀려나면 중급반으로 떨 어질 테니.

무슨 소린지 몰라 얼굴 가득 물음 표를 띄우는 30위는 내버려 두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카시엔과 눈이 마주쳤다.

'넌 너무 높고.'

적당한 서열은....

에른이 한 명을 골라냈다.

"맥스 유니어."

기억에 남는 이름이다.

비운의 수재.

카시엔 때문에 만년 2등만 하다 가 [투마 숨]으로 졸업한 이번 기 수의 최대 피해자.

에른의 호명에 맥스가 고개를 갸

웃거리며 이쪽을 쳐다봤다.

"스틸가드가 날 왜 찾지?"

"너 서열 2위지?"

"그래. 그래서, 불만 있냐?"

"아니, 아니.... 불만이 있을 건 없지."

에른이 손을 내저었다.

"너 계속 2등만 하잖아. 그게 좀 지겨울 거 같아서. 다른 등수도 해 보고 그럴래?"

"...지금 시비 거는 거냐?"

맥스가 씩씩거리며 일어났다.

[85 화]

퍽! 퍽! 퍼퍼퍼퍽!

목검이 맥스의 전신을 찜질했다.

날이 서 있지 않아 베이고 찢길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안전성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맞으면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진 다.

충분한 살상력.

거기에 마나까지 실린다면?

"크아악!"

맥스가 목검을 떨어뜨렸다.

"그만."

교관이 둘 사이로 들어와 대련을 중지 시 켰다.

누가 봐도 이미 승부는 났다.

믿기 어렵지만.

"에른 스틸가드 승리!"

"이게 뭐야...r

학생들의 눈이 커졌다.

상급반을 찾은 에른은 맥스를 도

발, 발끈하는 그에게 대련 신청을 했다.

맥스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고.

2위 대 72위의 대결.

원래 같으면 기대치가 없어서 구 경꾼도 없겠지만.

서열전을 신청한 사람이 그냥 중 급반 학생이 아닌 에른이라는 점 에서.

정상적인 대결이라고 볼 순 없어 도어째 됐든 카시엔과 무승부를 낸 적이 있으니.

꽤 많은 학생들이 대련장으로 몰 려 왔다.

당연히 다들 내심으론 맥스의 승 리를 점쳤다.

다짜고짜 상급반에 와서 대련을 신청해도 유분수라고.

2위를 이기겠다는 건 과한 욕심 이라고.

그런데 그냥 승리도 아니고 이건.

"...압도잖아?"

다양한 반응들.

"기묘한 애라고만 들었는데. 그냥

검을 잘 쓰잖아?"

"그러니까 더 기묘하지. 이럴 거 면 왜 중급반에 가 있던 거야?"

그리고.

"이, 이렇게 되면 난...?"

상급반 말석, 1학년 서열 30위 글래빈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중급반에서 한 명이라도 위로 올 라오면 순위가 하나씩 밀려 그가 중급반으로 내려가게 된다.

드래곤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 가 되자!

...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말 석이라도 상급반은 상급반.

상급반 소속이면 어딜 가도 폼이 나고, 애초에 학교로부터 받는 혜 택 자체가 다르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데.

"아, 맞다!"

글래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교관에게 쪼르르 달려가 물 었다.

"2승… 서열을 뺏으려면 2승 흐fl야 하잖아요. 이것만으론 아직 바뀌는

거 없는 거죠?"

교관은 무슨 뻔한 소리냐는 듯 글래빈을 봤다.

"그렇겠지. 교칙이 그러니까."

"하핫!"

글래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아직 희망이! 설마 맥스가 2 패를 하겠어? 할 수 있을 거야, 앞 으로 2연승!"

"음… 너 눈이 삔 건 아니지?"

" 네?"

"방금 대련을 보고도 2연승 소리 가 나와? 당장 다음 대련에서 2위 가 바뀌겠는데."

"설, 설마요. 맥스가 얼마나 독종 인데요. 이 갈고 수련하면 뭔가 다 른 결과가 나올 거예요. 아니, 그래 야죠!"

"바짝 훈련해서 좁힐 차이가 아니다."

교관이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이렇게 끝날 스틸가드가 아 니지. 맥스면, 카르 숨도 가능한 재능인데...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수호 가문의 저력이 막내에 이르 러서야 발휘되려는 건가. 다행히도."

혼잣말이 에른의 귀로 들어왔다.

놀라 교관을 봤다.

참관을 요청하는데도 전혀 알은 체를 하지 않아서 딱히 주의 깊게 보지 않았는데.

다시 봐도 잘 기억 안 나는 낯선 교관이었다.

그렇다는 건.

'스틸가드의 숨은 지지자…. 아직

곳곳에 있구나.'

나바로의 백성들은 아직도 가슴 에 품고 있다.

스틸가드에 대한 부채감, 고마움 과 미안함.

라제칸 사후로도 세월이 많이 홀 러서 한창때의 그 추앙하는 마음 일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희석되었다 해도 17년 뒤 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때는 손가락질과 책망을 듣는 게 더 익숙했는데.

교관에게서 시선을 돌리니 수련 생들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평정을 유 지하는 눈빛은.

'카시엔.'

그는 그럼 그렇지, 라는 듯한 얼 굴이었다.

카시엔은 에른을 물끄러미 쳐다 보더니 몸을 돌려 훈련장을 빠져 나갔다.

이에 수련생들은.

"카시엔 봤어?"

"완전 멋있지 않냐?"

"얼빠는 저리 가시고. 저거 똥 씹 은 표정이야."

"전혀. 자신만만해 보이는데. 카 시엔도 맥스는 그냥 이기잖아."

"아, 그러고 보니까 그때 그 무승부!"

"진짜 이상했잖아. 왜 그랬는지 급 이해가 간다. 카시엔도 에른의 실력을 알아봤던 거야. 최상위권들 의 불꽃 튀는 신경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

그렇게들 오해해 주면 이쪽이야 좋지만.

훈련장에서 나오자 누군가가 에른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인이었다.

"...아, 안녕?"

'예상대로군.'

그래도 약간은 놀란 척을 해 줬 다.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저거 봐.

멀찌감치서 이쪽을 흘끗거리는 학생들.

21클럽 회원들이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정 궁금하면 들어와서 구경하지, 뭘 밖에서. 저기, 결과 알고 싶어?"

"말 안 해도 다 알걸."

휴인이 훈련장 입구를 가리켰다.

"저거만 봐도."

맥스가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휴인이 바짝 다가와서 속삭였다.

"너... 오러 유저라면서. 로트한테 들었어."

에른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거 때문에 찾아왔나?"

"그, 그건 아니고… 곰곰이 생각 해 봤거든. 네 말."

"여기선 좀 그렇고. 조용한 데 가 서 얘기하지."

인적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휴인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휴인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

은... 존경의 빛이다

"대체 어쩔 작정으로 그랬어? 테 인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속으론 좋으면서."

"좋냐고? 내가?"

휴인의 입꼬리가 위아래로 씰룩 거렸다.

"당연히 좋아 죽겠지! 아주 깨소 금 맛이다. 뭐, 테인이 얻어터지고 멱살까지 잡혀? 자존심 접고 먼저

숙이고 들어왔는데도 개무시 당하 고? 하하하핫!"

그는 에른의 양손을 붙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숙였다.

"고맙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 으마. 그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야 하는 건데...

«..2"

목숨을 구해준 것보다 더 고마워 하고 있다.

'진짜 막장이네. 칼슨에 비하면 스틸가드는 우애 깊은 거잖아?'

테인이 한 짓을 감안하면 이런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만족감을 즐기는 것도 잠 시일 뿐.

휴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걸로 이긴 거라고 생각하면 오 산이야. 테인은… 진짜 미친놈이라 고! 날 독살하려고 한 적도 있어."

"뭘 그거 가지고."

"내, 내가 다섯 살 때 일인데?"

"그건... 진짜 싸패가 맞네."

"싸패?"

"그런 게 있어."

휴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통쾌함,

그러나 여전히 불안해하는 감정.

"그래서, 아직도 테인이 무섭다?"

"무, 무섭기야 무섭지! 그치만 이

렇게 널 만나러 왔잖아."

"그러게. 왜 왔냐?"

"궁금해서. 그때 한 말 있잖아.

그거... 진심이야?"

"차기 공작? 물론 진심."

"쉬잇!"

휴인은 입에 검지를 대고 주위를 둘러봤다.

"뭘 그래. 반역 모의도 아니고."

"남들이 알면 비웃음거리가 될걸. 말이 안 되잖아. 나 따위가 어떻 게...

"물론 어렵긴 하지. 하나씩 볼까? 정통성? 없음. 검술 실력? 테인보 다 훨씬 못하지. 그렇다고 세력을 이끌 카리스마나 인망이 있길 하 나… 전혀. 그러면 공작님의 총애 라도 받는지? 그것도 아니고."

조목조목 뼈 때리는 말에.

"야!"

"왜, 틀린 거라도?"

"없지… 없는데 너무하잖아."

"사실을 말한 건데."

"그래… 사실은 사실이지. 근데 그렇게 모자란 내가 어떻게 공작 이 된다는 거야?"

"그래서 만들어 주겠다는 거 아니 냐. 장사의 기본 아니겠어? 저평가 된 종목에 투자한다."

에른이 미소를 지었다.

어제도 보았던.

쿵.

휴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역시, 이 애한테는 뭔가가 있다.

첫 만남부터 비범함을 느꼈고, 단 신으로 21클럽을 뒤엎어 놓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전율에 휩싸이 기도 했다.

그렇다곤 해도.

"말도 안 돼. 나 따위가 공작이라 니… 가능성 0이라고!"

"나 참."

에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썩어 빠진 마인드부터 고쳐야

겠어."

"생각해 봐라. 만에 하나 잘 안 

된다고 해도, 그쪽이 뭐지?" 손해 볼 게

"너하고 손잡았다는 걸 알게 되

면... 테인이 가만히 있지 않을걸? 아무리 네가 대단해도 21클럽 전 체를 상대할 순 없어."

"그래서, 개나 다름없는 취급 받는 걸, 달게 받아들이겠다?"

"...더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

"물론 더 나빠지겠지. 테인은 2년 뒤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테 고, 소공작 자리를 완전히 굳힐 테 니까.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테인 이 공작이 되면, 그땐."

에른의 목소리가 스산해졌다.

"...넌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되겠지."

"어...

"평생토록 남을 후회와 함께. 그 때 가서 오늘 일을 떠올리지나 마

라. 최소한, 시도는 해볼 수 있었 다고,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 다고 말이야."

휴인은 석상처럼 굳었다.

잠깐 동안, 숨도 쉬지 않는다. 눈동자만 이리저리 방황할 뿐.

'된 건가?'

"그, 그 말이 맞아."

휴인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금까지 테인이라면 무조건

피하고 양보하기만 했지. 그래서 이런 꼴이 된 거야!"

'된 거 맞군.'

휴인은 전생의 자신과 너무도 비 슷하다.

내면화된, 너무도 익숙해진 패배감.

에른도 겪어본 베' 있기에 휴인을 자극할 수 있었다.

"나… 뭘 하면 되는 거야?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휴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처음이야, 뭔가를 해볼 생각이

드는 건!"

"일단은 기다려. 그래도 제대로 짚은 게 하나 있긴 했어."

"음...?"

"혼자 힘으로 21클럽 전체를 상 대할 수는 없다는 거."

에른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나도 하나 만들어 볼까 하 거든. 클럽을."

*

딱! 딱! 따닥!

목검과 목검이 부딪혔다.

바리온은 수비에만 급급했다.

쌔액!

얼굴을 긁는 날카로운 검풍.

바리온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상대방이 이 틈을 놓칠 리 없다.

퍼억!

검 끝이 관자놀이를 찌르자 바리

온은 정신을 잃고 픽 쓰러졌다.

"흐어어억!"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자 이 제는 낯익은 천장이 그를 반겼다.

"...회복실인가."

"그래, 회복실이다."

침대 옆에 앉은 담임 교관이 혀 를 쯧쯧 찼다.

"져도 곱게 질 것이지 넌 어째 매 번 회복실 행이냐. 너 찾으러 여기 오는 것도 이젠 지겹다."

"죄송합니다. 자꾸 실망스러운 모

습만 보여 드려서."

"아니야. 네가 무슨 잘못이 있냐. 뛰어난 재능인 줄 착각하고 상급 반에 넣은 내가 등신이지."

교관이 허허 웃었다.

"아직도 교관들 사이에서 놀림거 리야. 이따가 또 한 소리 듣겠네. 상급반이 하급반으로 떨어진 건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이라지?"

"하, 하급반이요? 제가?"

"아까 그게 2패째였어. 중급반 말 석이었으니까 이제 하급반으로 내

려가야지."

"아, 아니… 잠깐만요, 교관님!"

교관이 일어났다.

"더 할 말 없어. 쉬어라. 내려가 서는 좀 극복해 보고. 너 계속 이 런 식이면 퇴학당해."

교관은 그 말을 끝으로 회복실에 서 나갔다.

바리온은 멍하니 그의 등을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의지해 왔던 교관이었다.

이거만 극복해 내면, 이겨내기만

하면 언제라도 치고 올라갈 수 있 다고 격려해 주던.

'이젠 포기할 법도 하지.'

지난 2년, 바리온의 대련 성적은.

0승 64패.

압도적인 최저 승률!

대련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역사 를 써나가는 그는 아카데미의 유 명인이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또 졌다며? 응원한다, 바리온!"

회복실에서 나와 터덜터덜 걷는 그 에게 2학년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그래도 졸업 전에는 첫승 하겠지?"

"아니, 그때까지 0승 100패 예상 한다."

"바보냐. 그 성적이면 그 전에 쫓 겨나지."

대꾸할 말은, 없다.

'검이 무서운 걸 어떡하라고...!'

[86 화]

어린 시절의 기억.

떠올려 보면 춥고 배고프고 외로 웠던 것 말고는 없었다.

세상을 자각하기 시작한 뒤부터 늘 혼자였고 구걸로 삶을 이어 나 가야만 했다.

그래도 운이 아주 나쁜 편은 아 니라고 생각한다.

남들에게 없는 희귀한 '재능'이라 는 게 있었으니까.

이 재능은 눈에 띄는 종류다.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숨기 려고 해도 삐죽 튀어나오기 마련.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은 갑자 기 호의적인 눈으로 변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잘 곳이 해결 된 것은 물론.

'심지어 미래까지도...

다들 잘 대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재능만 선물해 준 게 아니었다.

상자 안에는 저주도 함께 들어

있었다.

그 선물은 마나의 재능, 검술의 재능이고.

저주란....

'왜 검만 마주하면 몸이 굳어 버 리는 걸까.'

뱀 앞의 개구리처럼, 눈 내린 날 의 동상처럼.

손발을 꼼짝할 수 없고 머릿속은 백지처럼 새하얘진다.

아카데미에 입학해 상급반에 들 어갔을 때만 해도, [카르 숨] 재능

이라며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 았는데.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한 시선을.

믿었던 담임 교관마저 자길 포기 한 것 같으니.

'2년인가.'

바리온이 수를 헤아렸다.

햇수로는 그렇지만 만으로는 1년 이 겨우 넘었을 뿐이다.

이대로라면 올해까지 버틸 수 있 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의 눈빛이 정반대

로 변하겠지.

매몰찬, 차갑고 무관심한 눈.

완전히 거지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

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 절대로!' 바리온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짐은 해 보지만, 자신은 없었다. 그때.

"우와아아아!"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

교정을 뒤흔드는 함성이 바리온 의 귀로 들어왔다.

'뭐지?'

가까이 가 보니 근처 대련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대련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듯.

이 정도 반응이면 초대박 매치란 얘긴데.

'가 볼까?'

목검 끝이 상대의 목을 찌르고 있다.

진검이었으면 생사가 갈렸을 한

수다.

"그만. 대련 끝!"

맥스가 고개를 떨궜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그가 인정하건 않건, 이미 승패는 갈렸다.

참관한 교관이 선언했다.

"에른 스틸가드 승!"

이것으로 2연승.

에른은 미소를 지으며 교관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제가 서열 2위인가요?"

"얘랑 붙어서 저번에도 이겼다며. 그러면 바뀌는 거 맞지. 상급반으 로 이동하게 될 거고."

"그렇군요."

"뭐 하나만 물어보자. 왜 발로 본 거냐, 입학시험?"

에른은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대강 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발로 본 정도까지는 아니구요. 최 근에 성취를 좀 많이 봐서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기록 세

우고 스타 되려고."

"에이, 그랬으면 하급반으로 갔죠."

"그건 그렇군."

교관은 납득하는 듯했지만, 지금 에른이 세운 기록도 한동안 깨지 지 않을 업적이었다.

서열전에서 72위가 2위를 꺾다니.

중급반 레벨에서는 당일 컨디션 에 따라 3, 4위 차이는 언제건 뒤 집힐 수 있다.

약점 분석을 철저히 한다면 10위 격차까지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지 모른다.

정말 벽을 넘는 경험을 했을 경우엔 그 이상도 노려볼 수 있겠지 만... 현실적으로 2, 30위 차이 정 도가 최선.

수련생들의 반응은 크게 두 분류 로 갈렸다.

"미친 거 아니냐… 한 번에 70위 를 뛰어넘어?"

"진짜 중급반 레전드다. 카르 숨 도 따겠는데?"

"그건 봐야 알겠지만, 대단은 하네."

찬사와 부러움을 보내는 한편.

"강철의 숨결 빨이지. 나도 스틸가드 가에서 태어나서 신화급 비 법을 전수 받았으면 뭐."

"혈통 수저, 땅 수저, 재산 수저… 여러 수저들이 있지만 그중에 제 일은 연공법 수저라더라."

시기와 질투의 시선도.

이런 눈길을 보내는 건 대부분 1 학년 상급반 수련생들이었다.

카시엔, 맥스라는 강력한 수석/차 석 후보가 있긴 했지만 확고한 3

위 자리는 공석.

삼석 졸업이라도 노려볼까 했는 데 에른이 맥스를 꺾어 버리니.

이렇게 되면 한 칸씩 밀려서 [데 어 숨]도 물 건너간 것이다.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에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수 련생들을 헤쳐 나갔다.

4년을 채울 생각이 없으니까.

다양한 입장인 남학생들과 달리 여 수련생들은 통일된 반응을 보였다.

"가문도 좋고 눈호강 외모에… 실

력까지 좋으면 완전체 아니야? 오 늘부터 에른으로 갈아탈래."

"카시엔이 최고라며? 잘생겨도 중 급반은 싫다고 안 했니?"

"이젠 중급반 아니잖아!"

여학생들은 서로를 밀쳐 가면서 가까이에서 에른을 보려고 야단이었다.

피식.

절로 웃음이 나온다.

견제하는 남학생들도 우습지만 갑작스런 인기 폭발도 쓴웃음이

나오기는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건 서열 72위가 2위가 됐 다는 것뿐인데.

'하긴 여긴 아카데미니까...

여학생들도 기사를 지망해 수련 생으로 들어온 것이다.

여기서는 검술 실력이 가장 큰 매력 요소.

그럼에도 갈수록 외모에 물이 오 르면서 인기인이 되었던 게 전생 의 에른이었지만.

사교계에서는 외모와 화술이 다

라 더 만개했었고.

어쨌거나 주목받는 일에는 익숙 하다.

"지나가게 좀 비켜줄래?"

에른이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이자 여 수련생들이 단체로 쓰러지려 했다.

"꺅! 에른하고 눈 마주쳤어!"

"너 아니고 나거든?"

' 음?'

그때 여학생 한 명이 눈에 들어 왔다.

멀찌감치에서 동경 어린 눈빛을 보내는.

에른이 다가가 물었다.

"너, 왜 여기 있어?"

"어, 그, 그게...

미타라는 수련생이다.

에른과는 중급반 동기.

원래 좀 존재감 없는 캐릭터라 주변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자 그 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왜 여기 있냐고 묻잖아."

"아, 아니… 난...

"내 제안이 별로였나?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 그런 건 아니야."

미타가 손을 내저었다.

"그냥... 나한테 너무 과분한 거 같아서."

"흠."

에른은 손으로 턱을 받히고 그녀 를 요리조리 살폈다.

여학생치고도 작은 체구.

소심해 보이는 인상에 실제로도 그런 편이다.

하지만 에른은 그녀의 잠재력을 알고 있다.

'노력과 끈기의 재능을 타고났지. 지금은 뒤처져 있는 것처럼 보여 도... 느린 발걸음으로 모두를 추월 한다.'

나중엔 카시엔까지 위협했을 정 돈데,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지 모 른다.

이것만으로도 클럽의 취지에 부 함하는 인재.

"아니, 넌 자격이 있어.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애가 아 닌데...

"일단, 가서 얘기하자."

에른은 미타의 손목을 잡고 대련 장을 빠져나갔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방,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마 에른이 미타한테?"

잔뜩 오해한 여학생들이 두 사람 을 따라나섰다.

남학생들은 급 호감을 보였다.

"은근 순정파인가? 저 여자애가 뭐가 좋다고?"

"누군지도 모르.겠네. 이름이나 아냐?"

"몰라… 어떻게 되는지 따라가 보자."

구경꾼들은 고스란히 인파로 변 해 에른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지?'

대련장 근처로 온 바리온의 얼굴 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나란히 걷는 남녀.

그리고, 뭔가 들뜬 듯, 초조한 듯 한 일단의 무리.

'...에른 스틸가드?'

금발 남학생을 본 바리온의 어깨 가 축 내려갔다.

'요즘 제일 화제인 1학년이잖아. 결국 맥스를 이겼나 보네.'

왠지 모르게 착잡해진다.

이쪽하곤 완전 정반대라서.

끝없이 추락하는 자기와는 달리 날 이 갈수록 몸값이 높아지고 있으니.

바리온은 비참함을 느꼈다. 슬그머니 돌아서려는 순간.

"거기 잠깐."

에른과 눈이 마주쳤다.

"너 말하는 거 맞아. 바리온."

1학년에게 반말을 들었지만 뭐라 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닥까지 초라해지는 기분만 느 껴질 뿐.

"나... 나 왜?"

"잘됐군.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이런 데서 다 만나네."

무슨 뜻일까.

말에 뼈가 있는 것 같다.

기분 좋은 듯한 웃음도 고깝게 느껴지고.

바리온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1학년이 2학년한테 서열전 신청이라도 하려고? 나라면 안전 빵이니까?"

자학과도 같은 말에, 구경꾼들이

와하고 웃었다.

바리온도 에른만큼이나 유명했다.

비웃는 눈들이 일제히 말하는 것 같다.

서로가 서로의 과거를 비추는 거 울 같다고.

"내가 뭐하러? 피해 의식이 좀 있나?"

"뭐? 이게 선배한테!"

벌컥 화를 내는 동시에 후회했다.

선배고 뭐고.

새롭게 떠오르는 1학년 에이스,

게다가 가문까지 좋으니 그냥 존 재 자체로 깡패다.

바리온은 흠씬 두들겨 맞을 각오 까지 했다.

그런데.

"알아, 네 심정."

"절대 알 리 없다는 눈빛인데. 나 도 너 못지않게 많이 느꼈지."

"느, 느끼긴 뭘?"

"무력감, 그리고 갈 길 없는 분노."

바리온은 그제야 깨달았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각의 정체를.

그건 열등감도, 피해 의식도 아닌 분노였다.

모든 걸 갖춘 영웅 가문의 후예 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가진 바 없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자신.

그리고 유일한 희망의 끈이 썩은 동아줄이라는 사실도.

당연히 화가 난다!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 지. 일종의 속박이고."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가자."

아직도 뭔 뜻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널, 속박에서 해방시켜 줄 테니까."

에른이 손을 내밀었다.

"내 클럽에 들어와라."

*

지혜관, 2층 회의실.

학생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가서 앉아."

바리온과 미타가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들을 둘러보는 에른은 흡족한 표정이었다.

'모을 만큼 다 모았군.'

훗날 백조가 되어 나바로를 놀라

게 할 현재의 미운 오리들.

바리온과 미타가 추가되어 리스 트가 꽉 채워졌다.

이 두 사람은 다음 세대를 대표 하는 기사로 성장하게 될 것이고.

'1계 용어로 하자면 후기지수겠지.'

"...왔어?"

휴인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칼슨 공작가의 차기 가주가 된다.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될 거라곤 생각 안 하지만.

"어."

"대련 결과가… 아, 괜한 질문인가." 에른이 고개를 끄덕이자 학생들

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진짜 숨은 실력자였구나...

가장 놀라는 회원은 벤자민과 데

이븐.

이 두 사람은 아카데미가 놓치고

만 천재들이었다.

최연소 아카디오 시장, 천재 행정

가라 불리게 되는 벤자민.

그리고 군사학의 지평을 넓혔다

고 평가받는 무패의 야전사령관 데이븐.

둘 다 서열전으로는 측정되지 않 는 재능이다.

그리고 서열전이고 뭐고 관심 없다 는 듯 종이에 뭔가를 끄적이며 연신 중얼거리는 샤펠 클라우스도 보였다.

'얘가 제일 불쌍하지. 마탑에 가 야 할 놈이 여기 와 있으니.'

다들 에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이 모두를 불러모은 게 그라.

"대강 얘기는 들었지? 21클럽 못

지않은 명문 클럽을 만든다고. 여 기 앉아 있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 야 할 거야."

"과, 과연 그럴까...?"

다들 옆에 앉은 면면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도 그렇고 쟤도 그렇고 영 아 닌 놈들밖에 없는데?

예상대로의 반응.

에른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번데기다. 우화를 기다리 는. 지금은 번데기도 아니고 구데기

취급을 받고 있지만… 장담하지."

«..2"

"곧 아름다운 날개를 자랑하며 날 아오르게 될 거라고."

반신반의하는 눈빛들.

하지만 에른은 자신이 있었다.

앞으로 누구보다 잘 될, 이들의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필요한 것은 그 과정을 단축시켜 주는 약간의 도움 정도.

"그래서 우리 클럽의 이름도〈비 상〉이다."

[87 화]

비상

저 멀리, 창공으로 날아오르고 싶다.

모두가 꿈꾸는 바이나, 아무나 할 수 없다.

특히나 에른이 모은 미운 오리들 은 칭찬보단 질책에 익숙한 터라.

무슨 실없는 농담을 다 하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날긴 뭘 날아… 여기서 더 추락 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난 퇴학이라도 면했으면.'

바리온이 한숨을 쉬었다.

에른의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걸 느끼고 따라 왔건만, 서열전 하위 권들만 있는 걸 보니 과연 가능한 얘긴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에른에게 물었다.

"저, 저기...?"

"음?"

"들어 보니까 취지는 좋은 거 같 아. 그런데, 잘 될까?"

"물론.

"난 잘 모르겠어."

"그렇잖아. 너야 실력에, 가문에… 다방면에서 뛰어나다는 건 굳이 말 안 해도 알지."

바리온이 휴인을 봤다.

"저쪽… 도 뭐 그렇고. 근데 솔직 히 말해 우린 내세울 게 하나도 없 잖아. 아, 너희들 기분 상하게 하려 고 하는 말은 아니야. 내가 제일 구 제불능인걸."

데이븐이 동의를 표했다.

"기분 나쁠 게 있나? 사실인데."

다른 회원들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에른이 입을 열었다.

"애벌레는 자기가 나비가 될 것을 알 지 못하지. 그건 이해하겠는데...

벤자민이 한마디 툭 던졌다.

"모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건 아 니지. 날지 못하는 딱정벌레가 되거 나 날아봐야 파리 따위가 될 수 있 는 거고."

21클럽이 꿈의 클럽인 것은 구성

원 전부가 엘리트이기 때문이다.

테인 같은 리더가 이끌지 않는다 고 해도 21클럽은 인맥을 만드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 비상이란 클럽은....

'에른하곤 친해질수록 좋아. 음… 굳이 한 명 더 끼자면 휴인까지도. 그 외엔 딱히 다른 애들이랑 알고 지낼 이유가.'

다들 같은 생각.

에른이 미소를 지었다.

"본인들한테 그렇게 확신이 없나?

결국은, 클럽의 메리트가 없다 이 건데."

"굳… 이 따지자면 없는 편이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사람은 미 타뿐이다.

그녀는 홀린 듯이 에른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긴 속눈썹, 아래에서 바라봐도 굴 욕 없는 미모.

'눈 호강 자체로 메리트인데.... 아, 아무래도 난 남는 게 좋겠어.'

기왕이면 둘만 남게 되면 더 좋

을 것 같기도.

에른이 웃으며 말했다.

"그 메리트라는 걸 보여줄 때가 됐군. 들어와."

회의실로 중년 남자가 걸어들어 왔다.

약간 피곤해 보이는 인상.

충혈된 두 눈 때문에 더욱 그렇 게 보인다.

그는 에른에게 목례를 하곤 학생 들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필라프 상회 부회주 마쿠스라고 함니다."

"아… 안녕하세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상회 이인자라 고 하니 일단 깍듯이 인사는 한다.

"혹시 들어 보셨나요, 저희 필라 프 상회?"

"글쎄, 잘...

당연한 반응이다.

필라프 상회는 쭉쭉 성장해 나가 고 있었다.

블랙 스네이크와의 거래로 꾸준

한 수익을 내는 확실한 자금원을 확보했고.

슬슬 사업 확장에도 나서고 있어, 수도의 상회들은 긴장 상태.

하지만 업계의 최신 동향을 학생 들이 파악하고 있을 리가.

당장 서열전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가 중요하지 무슨 상회가 떠오 르고 지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냥 작게 몇 가지 사업을 벌이 는 상회입니다. 근데 요즘 호황이 라 그런지 갑자기 장사가 잘돼서 요. 골드 좀 만졌거든요. 하하."

웬 돈 자랑?

의아해하는 차.

"그래서 말인데… 학생분들께 정

기적인 후원을 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샤펠이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는 클라우스 백작가의 차남이다. 클라우스는 스틸가드 만큼은 아

니어도 유명한 기사 명가.

임팩트로는 스틸가드에 비빌 수

없겠지만, 백 년 넘게 이어온 전통 이 있어 어찌 보면 이쪽이 더 뼈 대 있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집안의 둘째.

스틸가드와 마찬가지로 가문 구 성원으로 인정받으려면 기사가 되 어야 했다.

문제는.

'기사 명가에서 뛰어난 마법 재능 이 나왔다는 거지.'

에른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사 를 잘 알고 있다.

클라우스 가의 이단아.

방황하는 마법 천재.

수식어만으로도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

해서 꼬박꼬박 그의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

결국 샤펠은 가문을 저버리고 마 탑에 들어가 마법사의 길을 선택 하게 되지만.

그 과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쓸만한 기사 한 명을 육성하기 위해 필요한 금액을 10이라고 한 다면 마법사는 최소 50에서 60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물론 기사도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연공을 도와줄 마나석 값만 해도.

그런데 마법사는 마나석은 기본 이고 각종 마법서 구매, 실험에 필 요한 마법 재료 등등....

돈 샐 구멍이 몇 배는 더 많은데, 고서클로 올라갈수록 비용이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터라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해서 독학 중인 샤펠을 가장 고 민하게 만드는 것은 돈이었다.

돈, 돈, 돈.

그놈의 골드.

가문에서 보내주는 용돈으로는 마 법서 몇 권 사고 나면 바로 동나고 만다.

그런데 웬 상인이 찾아와서 후원 을 해주겠다고 하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마쿠스가 말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들을 지원하고 싶어요. 정확히는, 장학금을 드리고 싶습니다."

샤펠의 질문.

"얼, 얼마인데요? 장학금?"

"일률적으로 얼마씩 드리겠다… 이 런 건 합리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필요한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현재 금전적으로 여유로운지 아닌지. 종 합적으로 고려하려고 하거든요."

"전 많이 필요한데. 지금도 당장 500골드쯤 구해야 하거든요. 실 험… 아니 수련에 필요해서."

"지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사용 처만 증명하신다면요."

그 말에 휴인을 뺀 모두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5, 500골드나 되는 큰돈을 이렇 게나 쉽게?'

샤펠과 휴인을 뺀 나머지는 평민 이거나 하급 귀족 출신.

수도의 물가는 살인적이라 아카 데미 밖에서 뭔가를 할 엄두도 못 내는 처지다.

당장 5골드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은데.

바리온이 손을 들자 마쿠스가 그

를 가리켰다.

"네, 거기 학생?"

"왜 굳이 우리한테 금전 지원을."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저도 여 러모로 알아봤거든요.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솔직히 장학 금 받을 성적들은 아니더군요."

"그런데 왜?"

"여러분들이 아니라 에른 님에게 후원하는 겁니다. 정확히는 에른 님의 클럽이요."

"스틸가드니까요."

마쿠스의 눈이 아련해졌다.

"전 어릴 때부터 기사가 되고 싶 었죠. 라제칸 님의 영웅담을 들을 때마다, 특히 간악한 제국놈들을 무찌르는 부분에서 항상 전율을 느꼈습니다."

뒷말은 안 들어도 뻔하다.

기사의 꿈을 키웠지만 재능이 없었 고, 다른 분야에서 성공한 지금은 자기가 못다 이룬 꿈, 후배들이 이 루도록 도와주고 싶다… 뭐 그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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