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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15% LASMONEDSEÑOR / Chapter 25: 25

Chương 25: 25

*

당연히 뒤셸은 모를 수밖에.

페론타 브란웰은 그가 생각하는 것 처럼 위대한 존재가 아니다.

페론타 또한 뒤셸이 자신에게 하 듯, 아니 그 이상으로 쩔쩔매는 대 상이 있었다.

"이번에도 달갑지 않은 소식만 한 보따리 들고 왔구나."

지하실에 설치된 수정구 구조물.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영상 안의 카산드라가 무릎 꿇은 페론타를 내

려다본다.

신기하게도, 눈빛이 보이지 않는데 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하나 물어보자. 내 인내심이 어디 까지인지 시험해 보려고 이러는 건 아니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이러는 건데? 그까짓 영지 하나 어떻게 못 해서 쩔쩔매고 있단 말이냐? 브란웰의 역량이 그거 밖에 안 돼'?"

고개 숙인 페론타의 입가가 일그러 졌다.

'그럼 뭐, 전쟁이라도 일으키란 말 이냐?'

브란웰의 기사단 스쿼드라면 스틸가드를 정벌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했다 치자.

그다음은?

전쟁 중이 아니라면 적국의 영지를 침공했다고 해도 비난을 피하기 어 렵 다.

"...명분이 없다 아닙니까. 지금

의 스틸가드를 무너뜨린다는 건 자 살 행위나 마찬가집니다."

"명분이 없다? 그럴 의지가 없는 건 아니고?"

'의지 같은 소리 하네. 아무 이유 없이 자국의 영웅 가문을 쑥대밭으 로 만든 케이스가 있으면 알려줘 봐 라. 그러면 시키는 대로 다 해줄 테 니까.'

페론타는 열불이 터지려는 것을 간 신히 참았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 가식적인 웃음이 들어찼다.

"상황이, 레바단이 실종됐을 때와 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쭉 그대로였 으면 3자작들과 크라이트 상회로 스틸가드의 목숨줄을 끊을 수도 있었 겠죠."

"그때만 해도 넌 자신만만 했었 지."

"에른 스틸가드가 돌아오기 전이었 으니까요."

"그때도 넌 걱정할 거 없다고 분명 히 말했어."

"그거야… 에른 스틸가드가 영지의 혼란을 수습할 줄 몰랐으니까요. 본

인부터가 각성급인 데다가 스쿼드를 보강할 재력도 충분하다는 걸 어떻 게 알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레히 테의 상권까지 장악하리라고는

"아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군?"

"인정할 건 해야 한다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서 영지전 을 한다거나 뭐 이런 거 아닌 이상, 계획대로는 어렵습니다."

과연 카산드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 까.

에른 그 어린놈.

애송이 영주의 저력을 본 페론타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스틸가드가 잡아먹기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카산드라 쪽에서도 무 리한 요구를 하지 않게 될 거니까.

"후작."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린다. 이 걸 빌미로 발 빼려는 속셈인 줄, 모 를까 봐?"

"전 그냥 현실을 말씀드리는 것뿐

입니다."

"현실? 진짜 현실이 뭔지 보여줄 까?"

사르륵.

카산드라가 눈가에 찬 천을 벗었다.

그녀의 맨 얼굴은 페론타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헉..

우선 엄청난 미인이라는 것에 한번 놀라고, 그녀의 커다란 눈이 백내장 이 낀 것처럼 뿌옇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번쩍!

그 혼탁한 눈동자에 신성한 광채가 감돈다.

카산드라가 기괴한 목소리로 읊조 렸다.

-스틸가드는…. 멸망자의 거대한 보좌. 기울어져 가던 명운이 멸망자 의 귀환으로 회복되고 있노라.

-드디어 멸망자의 이름이 밝혀졌 다. 그의 이름은 에른 스틸가드!

-멸망자를 멸망자의 보좌에서 쫓 아내야 한다. 또한 살려둬서도 안 된다. 이는 이뤄질 것이고 꼭 이루 어져야 한다. 나, 메테우스의 전언이 노라.

페론타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 말은?"

원래의 탁한 눈으로 돌아온 카산드 라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에른 스틸가드를 없애야 한다는 뜻이지.

우리 쪽도 절박하긴 마찬가지야. 쓸 수 있는 모든 패를 전부 동원할 작 정이거든."

'미, 미친...

카산드라는 진심이다.

브란웰에 얼마나 공을 들였건 말 건, 그딴 건 신경 쓰지 않을 기세.

에른 하나 없애기 위해 후작가를 장작으로 활용한다는 게 말이 되는 가 싶지만, 충분히 그럴 위인이었다.

"그, 그래도 전쟁은 안 됩니다."

"전쟁 말고는 답이 없다면서? 그럼

해야지. 싫어? 싫으면 비밀이 밝혀 지는 걸 택하든가."

카산드라가 히쭉 웃었다.

"브란웰 가문의 추악한 비밀이, 만 천하에 드러나면 어떻게 될까?"

그 말에, 페론타가 펄쩍 뛰었다.

"아뇨, 아뇨. 저야 당연히 시키는 대로 하지요. 전쟁은 최후의 카드란 얘깁니다. 제 말은."

"뭐 다른 수가 있는 모양이지?"

"명, 명분이요. 아까 말했던. 생각 해 보니까 명분을 만들 방법이 있긴

합니다."

페론타도 고민 끝에 폐기한 수였 다.

인간으로서 차마 못 할 짓이었으니 까.

그런데 당장 가문이 작살 나게 생 겼는데 도리를 따지게 생겼나.

페론타의 계획을 들은 카산드라의 만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거 괜찮은데? 일단 해 봐."

이번에는 비웃음이 아닌 진심으로 웃는 아름다운 미소.

그러나 페론타에게는 징그러운 벌 레가 기어가는 듯한 불쾌감만을 느 끼게 할 뿐이었다.

'미친…. 잠깐도 고민을 안 하네. 미쳤어. 저년부터 해서 전부 다 미 쳤다고! 왜 저딴 미친놈들하고 엮여 선...

땅! 땅! 따앙!

규칙적인 충돌음.

망치로 철을 내리치는 소리다.

에른은 눈을 감고 그 청아한 소리 를 즐겼다.

수화불침의 경지라 잘 느껴지진 않 지만, 그래도 후끈한 열기.

웃통을 벗은 남자들이 분주히 일하 는 이곳은 스틸가드에 새로 생긴 대 장간이 다.

지난 두 달간, 모든 일이 계획한 대로 술술 잘 풀렸다.

영지민들은 휴지와 비누, 칫솔 등 의 신문물을 의외로 빨리 받아들였

고.

수도에서는,〈에른 상회〉의 3번째 야심작〈두루마리 휴지〉가 대히트.

레히테의 상권과 밤거리는 〈율라 프 상회〉와〈블랙 스네이크〉의 레 히테 지부가 장악.

상권은 율라프가 다 먹었다고 하기 는 그렇고 다미안 상회와 양분하는 느낌이긴 한데, 전에 비하면 엄청난 성장이니까.

'그리고...

파직.

차원거래 메시지가 설레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마나 서클(7서클)' 흡수 진행,

87.12%- 87.13%....]

마법의 다음 경지 또한, 9할가량 흡수되어 에른의 손끝에 닿을 듯하 다.

"만족스러우신가 보군요."

같이 대장간을 시찰 중이던 칼로이 가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마 북부에선 최대 규모의 대장 간일 겁니다."

"그뿐이겠어? 아마 생산량도 최고 일걸?"

이곳의 용광로는 테아로스에서 가 장 큰 대장간의 것과 비교해도 화력 에서 밀리지 않는다.

거기에 에른이 설치해 둔 깨알 3 계 물품과 현대식의 라인 편성은 공 정의 효율을 극대화시킨다.

'수동 컨베이어 벨트하고 물류 장 비 몇 개만 줬는데도 이렇게 일을 잘하는데, 기계 설비를 주면...

기대감으로, 에른의 눈이 반짝거린 다.

"라발 산에서 채굴한 철광석으로 생필품과 무기를 자급자족하고, 더 나아가서 스틸가드의 주요 산업으로 발전시킨다. 말씀하신 대로 되고 있 긴 합니다만…."

칼로이의 얼굴에 걱정이 살짝 떠올 랐다.

"그래도 경작이 우선이지 않습니 까? 청년들이 전부 채굴하고 제철업 에 몰려 있어서. 파종기에 일손이 많이 모자라지 싶습니다만."

"하긴, 일손은 줄었는데 경작지가 늘어났지? 자작들한테 뜯어낸 땅을 놀리기도 그렇고."

"그래서 말인데…. 자작령의 일손 을 쓰는 건 어떨까요?"

[217 화]

칼로이의 조심스러운 제안.

에른은 의외로 선선히 대답했다.

"좋지, 쓸 수만 있으면? 나쁠 거 없 잖아."

3 자작들.

브란웰 후작과 짝짜꿍 맞은, 아버지 의 실종과 함께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 를 바꾼 그들이 괘씸하긴 하지만 자작 령의 영지민들에게는 미운 감정이 없 다.

"근데 자작들이 자기네 인력을 가져 다 쓰는 걸 용인할까?"

"실은 그쪽에서 먼저 요청을 해 왔습니다."

"광산 고갈 때문에 일손이 너무 남는 다고. 거기다가 그쪽은 경작지가 확 줄었지 않았습니까. 엎친 데 덮친 격 인 거죠."

에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걸 노린 합의였으니까.

"자작들 입장에선 굉장히 자존심 상

하는 일일 겁니다. 치욕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구요. 근데 뭐, 어쩌겠습니까. 백성들 입에 풀칠은 시켜야 하니까 요."

지난 두 달.

스틸가드 영지는 전에 없는 급격한 발전을 이루어 냈고,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칼로이는 새로 생긴 대장간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영지의 근 본은 농업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작지가 남는 문제에 대해선 에른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화학비료, 살충제, 제초제… 그리고 가만둬도 쑥쑥 자라는 슈퍼 품종. 이 거면 생산량 폭발이지. 일손이 부족하 면 기계로 대체하면 그만이다. 트랙터 같은 건 너무 티 나서 안 되겠고…. 소를 한 트럭 사서 우경을 시작해도 되겠군.'

대륙에선 농사에 잘 활용되지 않지 만, 힘세고 순한 3계의 품종들은 어지 간한 농기계 못지않다.

'농업은 중요해. 식량은 생존에 필수 고,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분야 이긴 하지만…. 모든 구성원이 여기에

만 매달리고 있으면 발전이 없지.'

나바로에서만 해도.

테아로스, 아카디오 등 대형 도시들 은 계속해서 발전해 가는데 지방 영지 는 항상 답보 상태인 이유가 있다.

영지민들은 오늘 내일의 양식을 위해 죽어라 경작만 하고, 영주들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기사단 스쿼드에만 투 자하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

올해의 수확으로 단번에 끊어낼 수 있다.

10명의 농부가 100명의 식량을 생산 할 수 있게 되면, 90명의 남는 인력 자원이 발생한다.

폭발적인 농업 생산성 향상이 의미하 는 베는.

직종과 계층, 더 나아가서는 사회 분 화의 시작이다.

이미 대장간 설치와 장인 유치, 그리 고 그들의 도제로 들어간 영지의 청년 들로 기술자 계층이 생겨나고 있고.

다소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높은 보수를 받는 광산의 임금 노동자들도.

기존의 영지 구조에서 탈피하기 위한 방법론은 얼마든지 머릿속에 있다.

그러나 에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인구가 너무 적어. 백작령이 고작 1 만 남짓이라니…. 그나마도 넓은 땅에 흘뿌려져 있다시피 하고. 자체 경제가 형성되기에는 너무 열악한 조건이지.'

에른은 적어도 스틸가드의 중심, 저 택이 위치한 영주성만큼은 대도시급의 활기를 띠었으면 했다.

장기적으로는 스틸가드 전체가 그렇 게 되어야 하지만, 일단은 영주성부터.

다양한 물품을 파는 상점과 각종 서 비스를 제공하는 여러 업종.

전통적인 경작일에서 벗어난 영지민 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문제는 물건을 구매하고 서비스를 이용해 줄 사람이 턱없이 적다는 거. 수요가 없으면 가게가 있어 봐야 의미 가 없잖아.'

하지만 인구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님?"

"영주님?"

"어, 총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

에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대강 정리됐어. 얼마나 보낼 수 있 다고 하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하죠."

"자작령 하나당 한 500명씩 받을 수 있나?"

"그, 그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자작

들한테 받은 경작지 1750티르에, 대장 간으로 빠진 백여 명. 전부 해서 한

2, 300명만 받아도…."

"내 말대로 해. 경작은 됐고, 다른 일 시킬 거니까."

지톤, 로데인, 메드시안 자작령에서 파견한 인부들이 스틸가드에 도착했 다.

그들은 명부를 작성하고 몸수색과 간 단한 면담 절차를 거친 뒤, 성벽에 투 입되었다.

메드시안에서 온 전직 광부, 닐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같이 온 청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쿤보야. 아무래도 우리 X된 거 같 다...

" 왜요?"

"성벽 보수라잖냐. 하, 이거 왠지 불 구덩이에 뛰어드는 느낌인데."

"뭘 엄살이에요? 굶어 죽는 것보단 무조건 낫다고 한 게 누군데."

"지원자 모집? 칼만 안 들었지 그게 사실상 강제노역하고 다를 게 뭐냐? 그니까 마인드라도 좋게 가지자는 거 였지 뭐."

"뭐, 그건 그런 느낌이긴 했어요."

"근데 내가 듣기로 여기 신임 영주가 아주 악질이래. 악마가 따로 없다고. 봐라, 농사지으라고 불러 놓고 성벽으 로 보내는 거. 옛말에 이런 말이 있 어. 드높은 성벽은 백성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진 것이다. 공사 중에 여럿

죽어 나갈지도 몰라."

그 말을 들은 쿤보의 얼굴이 굳었다.

"어쩌냐, 나, 난 허리도 안 좋단 말 이야."

닐슨이 울상을 지었다.

"예감이 안 좋아. 불길한 게 그날 같 은 느낌이야. 광산이 고갈된 걸 최초 로 목격한 날."

"...아저씨."

쿤보가 그를 달랬다.

"알리나를 생각하셔야죠. 딸을 위해 서라도 마음 굳게 먹으세요."

"그, 그래야지."

"허리 아픈 건, 너무 걱정하지 마세 요. 제가 감독관한테 잘 말씀드려 볼 게요."

"...씨알도 안 먹힐 거 같은데."

"나만 믿어요, 아저씨."

쿤보는 닐슨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웃어 보였지만 사실 그도 자신이 없었다.

그의 몸은 닐슨과는 달리 튼튼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강철은 아니니까.

조인트를 까이거나 채찍으로 얻어맞

으면 솔직히 입 다물게 될 것 같다.

'하는 수 없어. 이를 악물고 일하는 수밖에…. 아저씨가 1인분을 못하면 내가 2인분을 해서 버텨야지. 기왕 축 복까지 받았으니까.'

쿤보가 주먹을 꽉 쥐었다.

"...너희들이 할 일은 간단해."

날카로운 인상의 감독관이 인부들을 훑어봤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채석장에서 깎 은 돌들이 놓여 있을 거야. 그걸 옮겨 서 성벽 앞에 세워두면 된다."

"맙소사! 난 죽었다."

펄쩍 뛰는 닐슨을 보고 감독관이 눈 초리를 치켜세웠다.

"...뭐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흠, 불평은 안 들리는 곳에서 하도 록."

"실은, 감독관님."

"아저씨가 허리가 불편하세요. 무거 운 돌을 옮기는 일은 무리가 있을 거 같아서요."

쿤보가 용기를 냈다.

"그래서?"

"덜 무리가 가는 일이 있으면 그쪽으 로 배정해 주십사"."

감독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안 가네. 땀 흘려 일하고 그 만한 대가를 받으려고 파견 온 거 아 니었나?"

"예…. 그렇긴 한데요."

"힘쓰는 일을 못 하면 파견을 나오지 말았어야지."

"죄, 죄송함니다. 이 친구는 나름 절

배려한다고...

"정 못하겠으면 집으로 돌아가."

"아... 아닙니다? 돌아가긴요!"

닐슨이 연신 불편한 허리를 숙여 댔 다.

"허리가 부서지도록 일하겠습니다."

감독관이 픽 웃었다.

"부서지면 큰일이지. 그냥 1인분만 하면 돼. 정 몸이 불편하면 끌차 끄는 일만 하든지. 단, 그러면 급여를 조금 삭감하긴 해야 할 거야."

"끌차요...?"

감독관이 한쪽에 세워 둔 장비들을 가리켰다.

메드시안의 인부들로선 처음 보는 신 기한 물건들이었다.

"그럼 뭐, 무식하게 몸으로 나르라고 할 줄 알았나? 아마 이번 현장에서 이보다 쉬운 일은 없을걸? 운 좋은 줄 알라고."

감독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광산 노동에 비하면 유압 리프트를 이용해 돌을 들어 올리고 끌차에 실어 옮기는 일은 정말 할 만했다.

닐슨이 후회할 정도.

"급여 깎는다고 하지 말걸…. 진짜 더 쉬운 일이 없어서. 그래서 집에 보 내려고 한 거였구나."

쿤보가 핀잔을 주었다.

"그냥 지금 하는 거나 계속하세요. 괜히 허리 쓰지 말고. 80% 받는 거도 잘 받는 건데요, 뭐."

일당 50실버.

더 힘들고 위험한 광산 일을 해도 이 절반 밖에는 못 받는다.

거기에 공짜로 지급되는 점심 식사와

간식까지.

새참으로는 달콤한 크림빵과 우유가 나왔다.

쿤보와 닐슨은 걸신들린 듯이 빵과 우유를 흡입했다.

"빵이... 무슨 솜털처럼 부드럽네요? 아저씨는 이런 거 드셔 보신 적 있어 요?"

"아니. 귀족들은 이런 빵을 먹는다곤 들은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직접 먹는 건 나도...

"왜 우리한테 이런 귀한 걸 줄까요?"

"그런 거 아닐까? 사형수한테 푸짐 한 식사를 제공해 주는 거 같은…? 곡소리 나게 굴리겠다는 거지."

"에이, 설마요. 오늘 일은 쉬웠잖아 요."

"내일부턴 지옥이 펼쳐질지도. 오늘 은 맛보기에 불과한 걸지도 몰라."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닐슨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나날들이 흘러갔다.

스틸가드의 영주성은 메드시안과는

너무도 달랐다.

번화한 상점 거리에서는 싼 가격에 맛있는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데다가, 생필품도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그것도 하늘 같은 자작령의 귀족들도 사용하지 못할 것 같은 신기한 물건들 을

닐슨과 쿤보는 일당으로 50실버를 받으면 숙소에 10실버를 지불하고 5 실버로는 식사를 해결했다.

영주성의 문물에 취해 흥청망청 다 써 버리는 인부들이 많았지만, 두 사

람은 무조건 35실버씩은 저축했다.

가끔 보너스로 몇 실버를 더 받을 때만 맥주를 사 마시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닐슨 혼자였다.

그리고 어제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릇을 들고 방으로 올라온 그가 침대에 웅크린 쿤 보를 걱정스러운 듯 보았다.

"라면 사가지고 왔어. 좀 먹자."

"...입맛이 없어요."

"야, 꼭 먹어보고 싶다고 했잖아. 이게 요즘 인부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면서."

"쿨럭… 쿨러 이저씨가 어쩐 일이에요, 꼬부라진 거 맛대가리도 없어 보이는 데... 비싼 돈 주고 먹어 뭐하냐고...…

"나도 먹고 싶었어. 비싸서 침만 삼 켰던 거지. 한 입이라도 먹어 봐."

몇 번을 권해도 쿤보는 몸을 일으키 지 못한다.

닐슨은 포크로 면발을 둘둘 말아 후 루룩 삼켰다.

"아〜 국물이 끝내주네."

과장된 리액션에도 쿤보는 식욕이 당

기지 않는 듯했다.

닐슨은 라면 그릇을 내려놓고 딱하다 는 듯 그를 내려 봤다.

"말처럼 건강하던 놈이 갑자기 무슨 일이냐.... 겨우 이틀 앓더니 시들시들 한 시금치처럼 됐네."

"내, 내일도 안 나가면 잘리겠죠? 겨 우 구한 일인데…. 내일은 나가야 하 는데...

"나을 거야. 그래야만 하고. 쿨럭!"

처음 먹은 라면의 자극적인 향과 맛 때문일까?

닐슨이 몇 번이나 콜록거렸다.

"갑자기 웬 기침…? 쿨럭! 쿨럭! 역 시 사람은 먹던 걸 먹어야 한다니까."

*

"...영주성 내에서 역병이 돌고 있 다고 합니다."

집사장의 목소리는 밝았다.

주군에게 할 수 있는 보고 중에서 이보다 최악이 있을까?

아마 성이 함락됐다거나 하지 않은 이상에는, 딱히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침울한 분위기가 아닌 이유 는 간단했다.

강 건너 불구경인 탓이다.

페론타가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유행인데?"

"벌써 수백 명을 넘었다고 하구요. 이 기세면 영지 전역으로 퍼지는 건 순식간이라고 합니다."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군."

"예. 안됐습니다."

그러나 페론타도, 밀튼도 그다지 안 타까운 표정이 아니었다.

"티칸이라고 했던가? 그 네크로맨서, 솜씨 하난 좋군."

"상당히 정교하게 설계된 역병술입니 다. 잠복기가 꽤 길고, 초기에는 가벼 운 증상만을 겪어서 온갖 사방에 질병 을 뿌리고 다닌다고."

"역병은 군주의 부덕의 증표. 이걸 명분으로 에른을 내리려고 했는데…. 그러기 전에 그냥 영지가 없어지겠는 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러다 에른도 병 걸려 죽는 거 아 니야?"

*

환자들을 격리해 둔 간이 천막 앞.

방호복을 입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 누고 있었다.

"...보고해 총관."

"현재 환자 수 802명…. 791명은 자 작령의 인부들이고, 영지민은 11명, 그중 영주성의 영지민이 9명입니다.

사망자는 자작령 인부 30명, 영지민 중에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 적적인 수치입니다."

'한 주 내내 같이 부대끼고 살았는데 도 인부들은 걸리고 영지민들은 안 걸 렸다라…. 비누의 위엄인가?'

그러나 에른은 좋아할 수 없었다.

아직 안심할 수 없기에.

"긴장을 늦추면 안 돼. 환자 나오는 대로 다 격리하고, 영지민들한텐 계속 해서 위생 관리 철저히 하라고 해 줘."

"알겠습니다. 그런데 봄철에 갑자기 발생한 역병이라…. 원인이 뭘까요?"

"뭐겠어? 자작들이 어겨서는 안 될 금기를 어긴 거지. 이것들 진짜..…

피도 눈물도 없어도.

원칙도 신념도 없다 해도.

여기까진 에른도 남 말 할 입장이 아니라서 이런 거로 누굴 비난하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 의 도리라는 게 있는 법이다.

수도 빈민가의 잔인한 광경.

악마 소환 의식을 목격한 이후로 간 만에 느끼는 감정.

어떻게 자기 영지민들을 이딴 식으로 내버린단 말인가.

에른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선 넘네."

[218 화]

"그, 그게 말입니다. 크, 쿨럭!"

갑자기 튀어나온 기침에, 닐슨은 입 을 가리려 했으나 떨리는 손은 한참 늦게 도착.

피 섞인 가래가 에른의 정면으로 날아갔다.

닐슨의 눈이 커졌다.

"허억.…"!"

만독불침의 초고수도 모든 병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물론 환골탈태로 거듭난 육신은 내 기의 균형이 언제나 유지되어 항상 성이 잘 깨지지 않고, 면역력 또한 우월하지만.

내공심법이 건강심법이 아닌 까닭에 죽을병에 걸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신체의 강건함에 구애받지 않 는 감염성 질병은 조심하는 게 상책.

하지만 레벨 B 방호복을 입은 터라 좀 맞아도 상관없긴 한데.

화라락.

오러가 번쩍하자 가래침이 허공에

서 증발했다.

가리개 위라고는 해도 얼굴에 침 맞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죄, 죄송…."

닐슨은 사색이 되어 침대에서 일어 나려 했다.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위치인 스틸가드의 영주.

불손한 눈빛만 보여도 경을 칠 일 일 것 같은데 안면에 가래침을?

특히나 이 어린 영주는 성격이 개 차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닐슨이 아픈 와중에도 엎드려 빌려 고 하자 에른이 그를 다시 눕히면서 혀를 찼다.

"역병보다 내가 더 무섭다는 건가? 소문이 뭐 어떻게 났길래 그러나."

"아..*?"

"자작령에서 날 뭐라고 부르지?"

"말해. 그냥 알고 싶어서 묻는 거니 까."

닐슨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황금빛의 악마라고들."

"생각보단 순한 맛이군. 수식어가 좀 생략된 거 같은데?"

"아, 아닙니다."

"내가 자작령에 그렇게 잘못을 많이 했던가. 왜 악마 취급을 하는 건데?"

"백, 백작령의 지위를 이용해 자작들 의 땅을 빼앗아 갔다구요. 그, 그리고 마법으로 광산을 고갈시키기까지 했 다고…. 거기다가 항의하러 간 자작님 들을 무자비하게 쫓아내고...

"그 인간들은 그때부터 선 넘었지. 칼 차고 남의 영지에 군홧발 들이밀어 놓고 무슨 귀빈 대접을 받길 바라나?"

에른은 픽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네가 보기에 내가 악마 같 은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닐슨이 주위를 둘러봤다.

빼곡하게 배치된 간이 병상에 환자 들이 누워 끙끙대고 있었다.

방호복을 입은 치료사들이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 중이고.

그 절대다수가 자작령에서 파견한 일꾼들이다.

'메드시안에서 역병이 발생했다

면…. 병자들을 전부 영지 밖으로 내 쫓았겠지.'

아니, 아인스 메드시안 자작은 냉혹 한 인물이다.

전염을 막기 위해 환자들을 생매장 하고 주위를 불로 태운다고 해도 이 상할 게 없을 거 같다.

그런데....

"영, 영지민도 아닌 우리를 이렇게 극진히 돌봐 주시고…."

생각해 보면 가족들과 떨어졌다는 것만 빼면 파견 나온 지난 한주는

고단한 자작령의 생활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닐슨은 소문만 믿고 에른 영주를 나쁘게만 봤던 자기가 부끄러워졌다.

"잘은 모르지만, 제가 본 바로는 어 질고 좋으신 분이 아닐까...

"말이 통하는 친구라 다행이군. 얘 기가 잘 되겠어. 내가 왜 찾아왔을 거 같아?"

"그, 글쎄요…? 제가 그나마 상태가 좋은 편이라서?"

닐슨은 얼굴에 열꽃이 폈고 자주

기침을 하긴 하지만 다른 환자들에 비하면 증세가 가벼운 편이었다.

"아니. 요 며칠, 이 역병의 최초 발 병자를 찾고 있었거든. 초기에 걸린 환자들 위주로 접촉자를 찾아내고,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까."

"그쪽이 나오더군. 닐슨."

"아, 아닙니다… 전!"

닐슨이 또 펄쩍 뛰려고 했다.

에른은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지 않 기 위해 그의 어깨를 누르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니라면 누구지? 그 전부터 증상 을 보인 누가 있었나?"

닐슨이 멀리 떨어진 침대에 누운 쿤보를 흘끗 보았다.

"무슨 생각하는지 안다. 아는데, 겁 먹을 거 없어. 해코지하려고 찾는 게 아니니까."

"저, 저는...

"난 내 땅에서 역병을 몰아내고 싶 을 뿐이다. 또 왜 이런 일이 일어났

는지 알고 싶고. 최초 발병자라고 해 서 중벌을 내릴 거면 애초에 환자들 을 격리해 두지도 않았어."

에른이 방호복을 벗었다.

"앗? 아니, 영주님! 위험합니다. 전 염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근처에 있던 치료사가 달려와서 방 호복을 다시 입히려고 했다.

"괜찮아. 가서 하던 일 해라."

"그, 그렇지만."

에른이 닐슨을 내려다봤다.

놀라울 정도로 앳된 얼굴.

머리칼도, 눈동자도 황금빛인 것은 맞지만.

그 뒤에 붙은 '악마'라는 피수식어 를 무색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미소 였다.

"내 백성들만큼은 아니더라도, 파견 온 인부들의 목숨도 충분히 소중하 다. 난 네 친구와 동료를 살리려는 거야. 이건 내 각오다."

"영, 영주님...

미리 신성 주문을 걸고 와서 방호

복을 벗은 것뿐인데.

그걸 알지 못하는 닐슨의 눈이 감 격으로 젖었다.

"실, 실은 제 룸메이트가...

닐슨이 쿤보를 가리켰다.

"고맙다. 잠깐 쉬고 있어."

"예...? 끄윽."

수혈을 눌러 닐슨을 잠들게 하고, 쿤보의 침대로 향했다.

드림 머신을 꺼내 쿤보의 머리에 씌운 에른이 컨트롤러를 조종했다.

지잉.

에른은 [드림 다이브]로 쿤보의 꿈 속으로 들어갔다.

쿤보가 스틸가드에 파견되기 며칠 전의 기억이 재생되고 있었다.

*

'기억이 제대로 보관돼 있어서 다행 이군.'

극심한 고열 때문에 손상되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했는데.

정신세계가 자리 잡힌 성인 시절이 라 바리온의 꿈에 들어갔을 때와는 달리 현실적인 세계였고, 겨우 한 주 전 기억이어서 실제 있었던 일에 근 접한 영상이었다.

볼 만큼 본 뒤.

에른은 전신 소독을 하고 천막에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칼로이와 하파엘이 그를 맞이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메드시안 자작이 저지른 일이더군.

아주 깜찍한 짓을 했어."

" 예?"

"황금빛 악마가 지배하는 땅에 노 역을 나가게 됐으니 무지하게 구를 것은 뻔한 일…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서 가야 하지 않겠냐고. 마법 사를 불러서 축복을 걸어 줬다는데."

"황금빛 악마라니요?"

"자작령에선 내가 그걸로 통한다나 어쩐다나. 근데 그 축복이 실은 역병 을 일으키는 저주였던 거지. 그렇게 몸에 병원균을 담고 들어온 인부들이 최소 수십 명. 급속도로 번져나간

게 다 이유가 있었어."

"...돌았군요."

칼로이의 얼굴에 짙은 노기가 떠올 랐다.

하파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돌았다는 말로도 모자랍니다. 이건 미쳤어요. 그러고도 지가 영주라고 할 수 있어요? 영지민을 역병을 전 파하는 용도로 이용하다니...

전쟁 중에도 이런 짓을 하면 도덕 적으로 지탄을 받는다.

"그런 음흉한 계획을 세운 줄도 모

르고 일손을 빌리자고 했군요…. 제 가 경솔했습니다."

칼로이가 고개를 숙였다.

"이건 총관 잘못이 아니지. 아인스 메드시안이 그렇게까지 미쳤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전쟁이죠!"

하파엘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기사단을 이끌고 자작 령으로 쳐들어가기라도 할 기세였다.

"참아, 단장."

에른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역병을 잡는 게 우선이다. 기사단은 지금 맡은 방역 임무에 충 실해 줬으면 좋겠어."

"그럼 이대로 당하고만 있자는 말 씀입니까?"

"달리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단장 님, 그리고 영주님. 지금이야 잘 막아 내고는 있지만, 영지민들한테로 번지 기 시작한다면 스틸가드 전체가 위태 해집니다. 또 메드시안 자작이 한 짓 이라는 확실한 물증 또한 없구요."

두 측근의 의견이 양측으로 갈린다.

되갚아 주자는 매파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비둘기파.

에른의 입장은?

"총관의 말이 맞아. 긴장의 끈을 늦 출 수 없지. 근데 또 하파엘 단장 말 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어. 이 건 단순한 영지 분쟁 정도가 아니지. 인륜을 어긴 중대 범죄고 스틸가드 에 대한 도전이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둘 다 가능해. 내가 해결한다. 역 병도, 마땅한 응징도."

"저주를 건 놈의 얼굴을 봤거든."

*

-청안흑마 : 자네 부탁이니까 들어 준 거야.

-청안흑마 : 현실 문제 때문에 상 장에 문제 생기면 안 되니까.

-청안흑마 : 내 한평생 살면서 누 구한테 아쉬운 소리를 한 적이 없단 말이지. 단 한 번도!

-에른 : 알아요. 그런 분인 거.

라크드리알은 개성 강한 차원 교류 자들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캐릭터다.

어쩌면 그는 인간 혐오가 있는지도 모른다.

악령이 지배하는 유적, 카베클리에 서 홀로 살아가는 그.

8서클쯤 되면 0계보다 기준이 훨씬 높은 2계에서도 시대의 초강자 반열 이다.

라크드리알은 그 초강자 중에서도

추리고 추린〈흑마도 8존〉의 일인.

세력을 만들어 암흑 마도국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얼마든 지 할 수 있는 사람인데.

현실에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으면 서 가상공간인 차원거래 채널에서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청안흑마 : 재수 없는 놈이고 하 는 짓도 토나오고 말투도 토나오긴 하지만….

-청안흑마 : 실력 하나는 최고지.

그거까지 인정 안 하면 걔나 나나 다를 게 없는 거니까.

['청안흑마'님이 '묘안백마'님을 초 대하셨습니다.]

-청안흑마 : 오랜만이다.

-묘안백마 : 오랜만은 무슨 오랜만. 언제부터 우리가 안부 묻는 사이였 냥?

-청안흑마 : 아니지… 만. 예의상 한 거야 예의상.

-묘안백마 : 천하의 청안흑마도 부 탁할 일이 생기니까 예의를 차리는 구냥?

-청안흑마 : .... >부들

-묘안백마 : 아까 말한 그 교류자 는 어딨냥?

-에른 : (뭐지 이 괴상한 컨셉은?)

묘안백마의 말투.

확실히 정상적이지는 않다.

아니, 용서가 안 된다.

차원을 건너 화면 반대편에, 털 숭 숭 난 교류자가 앉아 있다고 생각하 면.

하지만 이쪽이 아쉬운 입장이라.

에른은 올라오는 욕지기를 꾹 참고 [섭리의 눈]으로 '묘안백마'의 프로필 을 보았다.

[닉네임 : 묘안백마.

종족 : 묘인족.

접속 장소 : 2계, 세피로스 성국

거래 등급 : level 3

혼의 위상 : 성스러운 영혼을 가진 자

보유 코인 : 83345

거래소 리포트 - 본명은 서라일리 아. 세피로스 성국에서는 칭호이자 별칭인〈세이크리드 소울〉로 더 유 명하다. 묘인족의 특성인 고양이를 의인화한 듯한 생김새에 낭창낭창 가냘픈 허리. 하지만 겉모습에 속으 면 안 된다. 서라일리아는 8서클 대 마법사이며 신성 및 치유 마법을 마 스터해 성국의 수많은 생명을 구해 온, 세피로스의 카리스마 그 자체.

성왕의 가장 총애하는 신하이며 수 억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그녀다. 하 지만 묘인족 특유의 말투 때문에 차 원거래 채널에서는 컨셉 유저 취급 을 받곤 한다. 이 말끝 처리는 묘인 족의 정체성이라 고칠 의향이 전혀 없다. 괜히 지적했다가 밉보이지 말 고 봐도 못 본 척 넘어가도록 하자.]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욕 나올 정 도까지는 아니군.'

아찔해진다.

스틸가드의 환란을 해결할 키맨이

컨셉충이었다고 생각하면.

에른은 서라일리아에게 상황 설명 을 했다.

-묘안백마 : 무, 무슨 그런 나쁜 지도자가 다 있냥! 성국에서는 상상 도 못 할 일이다냥!

-에른 : 이쪽 세계에서도 절대 정 상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어떻게 해 야 할까요?

-묘안백마 :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다냥. 청안흑마 지인이라면 별로

도와주고 싶지 않지만…. 역병에 고 통받을 백성들을 생각해 조언해 주 겠다냥.

-에른 : 감사합니다.

-묘안백마 : Level 3 교류자라고 했냥? 그럼 파이오니어 협정에 구애 받지 않고 디테일하게 말할 수 있겠 다냥.

-묘안백마 : 중요한 건 세균 감염 인지, 바이러스성 감염인지 알아내는 거다냥. 우선은 검체를 채취해 오겠 냥?

-에른 : 지금이요?

-묘안백마 : 역병과의 싸움은 시간 과의 싸움이다냥! 당연히 바로 가져 와야지!

-에른 : 당장은 곤란한데…. 혹시.

-묘안백마 : 냥…?

-에른 : 이 병을 만든 놈한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와장창창!

산속 깊은 오두막.

마도기갑을 장비한 에른이 창문을 뚫고 들어가자 벽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뭐, 뭐냐!"

침대에서 뛰쳐나온 네크로맨서 티칸.

당혹감도 잠시일 뿐이었다.

턱!

압도적인 힘에 숨이 막혀버린 뒤론.

"끄… 끄르륵…! 무, 무슨 일...

"네가 만든 역병에 죽은 환자들도 그런 소리를 냈었지. 더 괴로워하고, 더 고통스러워하면서."

"어, 어떻… 게...?"

[219 화]

"안면인식 시스템이라고 아나?"

에른은 역병을 만든 네크로맨서, 티 칸이 메드시안 근방에 숨어 있을 것으 로 추측했다.

'아인스 메드시안은 여기에 사활을 걸었겠지. 역병을 퍼뜨려 스틸가드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거나, 걸려서 멸족 을 당하거나.'

필살의 각오를 한 만큼, 역병술사에 게 끝까지 AS를 부탁했을 테다.

자작들은 할 일 없어진 청년들을 빼 앗긴 경작지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 고 요청해 왔다.

에른은 영주성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자작령의 일꾼들을 불러들였고, 그들에게 성벽의 보수를 명했다.

아인스 메드시안으로선 상당한 호재 였다.

덕분에 감염자가 영지민과 쉽게 접촉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걸 예상한다는 건 불가능해서.

네크로맨서는 백작령 인근, 자작령의

은신처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으리라 짐작했고.

보기 좋게 적중했다.

"알 리가 없겠지."

티칸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터.

에른이 [드림 머신]을 이용해 자기 얼 굴을 알아내고, 드론을 동원해 자작령의 의심 가는 모든 장소를 쫙 훑었을 줄은.

겨우 며칠 만에 넓고 드높은 라발 산맥 을 내부까지 샅샅이 뒤지는 탐지력이다.

오두막에 숨은 네크로맨서 하나 찾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콰앙!

에른은 티칸을 벽에 내던지고 마도기 갑을 벗었다.

'대비가 하나도 안 돼 있군. 완전히 안심하고 있었나 본데.'

하긴, 잡힐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말이 안 되긴 했다.

에른도 [드림 머신]을 떠올리지 못했 더라면 꽤나 애를 먹었을 테니까.

"컥, 켁켁

새빨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얼굴.

티칸이 목을 움켜쥐고 이쪽으로 손을

뻗었다.

지잉.

마법진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뼈로 만 들어진 날카로운 창이 정면으로 날아 들어 왔다.

스슷!

에른의 몸이 사라졌다.

" 헛?"

다시 그가 나타났을 때는, 아까와 똑 같은 구도가' 펼쳐졌다.

"크... 커억;"

또 목을 붙잡힌 티칸의 뒤통수가 나 무 벽과 충돌했다.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 오는 달빛.

은은한 빛이 에른의 얼굴을 비췄고, 티칸은 그를 알아봤다.

"영… 영주...!"

티칸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한다.

"젠, 젠장! 아인스가 날 넘겼구나!"

그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에른은 굳이 오해를 해소해 주지 않았다.

'어...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 각

성급이라 했던가. 보통 놈이 아니야.'

티칸은 하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평범하게 생긴 그의 얼굴이 악마화 되며 급격히 변해 갔다.

곧이어 들리는 소름 끼치는 음성.

-혹시 혼자 왔니...?

W O "

=

-잘 됐군...!

티칸이 삐죽 튀어나온 송곳니를 드러 내며 웃어 보였다.

그가 모시는 악의는 특급 기사의 의 지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는 위대한 격의 소유자.

'멍청한 놈. 내가 사령술사일 줄 몰랐 나? 그 정도는 생각했어야 하는 거 아 니야?'

그런데.

"나야말로 잘 됐지."

...?

티칸이 에른을 쳐다보니 새까맣게 변 한 눈이 이쪽을 훑어보고 있다.

-사령 감지

-이계의 악의

-영혼력 : 3300

"3300이면 꽤 하는 편이군."

-뭐, 뭐냐 너!

라이한을 지배한 사령이 영혼력 600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안달루시아의 파편은 2000 정도고.

갓 스틸가드에 귀환했을 때라면 좀 당황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가 소롭기만 할 뿐.

에른이 암흑군주의 지배 반지를 들이 밀자 드래곤의 사령이 오두막 안을 가

득 채웠다.

싸아아아아!

티칸을 덮칠 필요도 없이, 그대로 품 어 버린 압도적인 크기에.

영혼력 5만 대 3300.

라이한이 불꽃같이 굴복했다면 티칸 은 번갯불보다 빨랐다.

"주... 주인님...I"

무릎 꿇은 티칸을 내려다보는 에른.

그가 씩 미소 지었다.

"이거 악마 소환해 줘서 고맙다고 해

야 하나."

덕분에 일이 아주 쉬워졌다.

에른은 침대에 앉고는, 엎드린 그의 등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았다.

"프로필부터 쫙 읊어 봐라."

" 예?"

"프로필 몰라? 신상명세, 경력, 어디 서 뭐 하던 놈인지."

"아, 예…. 제 이름은 티칸이고 나이는 39세. 사령술사고, 역병술사고…. 아, 깜 빡했네. 언데드 술사이기도 합니다."

"자랑이다."

빡!

에른은 발뒤꿈치로 티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죄, 죄송...

"그리고 또, 뭐 없어? 아인스하곤 어 떻게 선이 닿은 거지?"

"제가〈검은 여명회〉회원이라…. 자 작령에서 역병술사가 하나 필요하다고 하길래 건너 건너 소개받았거든요."

"검은 여명회?"

이건 또 뭔지.

처음 듣는 이름이다.

"뭐… 대단한 곳은 이니구요 흑마법사 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세상이잖습니까."

"너 같은 놈들을 반기는 데가 있다면 거기가 현생에 펼쳐진 지옥이겠지."

"예… 에. 그래서 서로 정보 공유도 하고 돕기도 하는…. 그런 조직입니다."

"규모가 얼마나 되지? 회원 수라거나."

"그… 그건 제가 마나에 맹세를 해 놔서...

드래곤의 사령은 티칸을 잠식한 이계 의 악의를 통째로 씹어 삼켜 버렸다.

이로써 티칸의 심령은 완전히 에른에

게 종속되어 버린 참.

굳이 알아내려 한다면 티칸은 실토할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은 일개 비밀결 사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네가 퍼뜨린 역병 말이야, 뭐냐?"

"무슨 말씀이신지...?"

"단순히 흑마법의 일종 같은 건가? 실험실 같은 거도 안 보이고. 하긴, 병 원균이라는 개념이 있을 리 없나?"

티칸의 눈이 커졌다.

"호, 혹시 병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병충?"

"병을 일으키는 작은 벌레들입니다. 아주 작아서 눈에 보이진 않지만… 몸 에 들어가면 신체 기능이 급격히 저하 되고 어떤 종류는 이번처럼 역병을 일 으키기도 하지요."

"그건 너무 협소한 작명이지. 벌레처 럼 보이는 애들도 있긴 하지만, 더 단 순하게 생긴 거도 많으니까."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몰라도 된다. 알면 다쳐."

티칸은 에른을 오두막 아래 지하실로 인도했다.

알고 보니 놈은 시대를 앞서간 역병 술사였다.

나름대로 실험실을 갖춰 놓았고, 배 지 비스무리한 곳에 배양해 둔 역병균 까지.

"조, 조심하십시오. 공기 중으로도 전 파되기 때문에 깨뜨렸다간 감염될 수 도 있습니다."

"조심하고 있어. 이건 뭘로 관찰했던 거지?"

"돋보기에 확대 마법을 중첩해서요…. 제 발명품인데, 최대 1000배까지 볼 수 있습니다."

티칸은 자못 자랑스러운 듯이 가슴을 쑥 내밀어 보이지만, 전자현미경의 존 재를 아는 에른은 피식 웃어 보일 뿐 이다.

-에른 : 잡았어요. 역병술사.

-묘안백마 : 벌써…? 빠르다냥!

-에른 : 놈이 역병균을 배양해둔 게 있더라구요. 이거 보내드리면 되죠?

-묘안백마 : 배양균을 확보했으면 상 당한 성과다냥. 그런데 0계 역병술사 가 어떻게 그런걸?

-묘안백마 : 혹시 차원교류자? 상위 차원 기술을 배워서 무고한 인명을 해 친 거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다냥…!

-에른 : 교류자는 아니에요. 혼자 연 구해서 역병균을 발견한 것 같던데요?

에른은 티칸의 실험실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묘안백마 : 그 재능을 올바른 곳에 썼으면 수많은 생명을 구했을 텐데…. 오히려 인명을 해치기만 했다니. 더더

욱 용서할 수 없다냥…! >분개

'가드 불능기였군. 뭐, 내 기준에서도 용납 못 하는데 세이크리드 소울이라면.'

-에른 : 역병술사하고 진솔한 대화를 나눴거든요.

-묘안백마 : ...냥?

-에른 : 다행히 흑주술 같은 걸 섞은 건 아니라고 함니다.

-묘안백마 : 그럼 그 축복이라는 건 뭐냥?

-에른 : 그건 진짜 축복이었던 모양 인데요. 마법으로 증상이 발현하는 걸 최대한 늦춰서…. 감염자들은 감염된 줄도 모르고 활발히 활동했던 거구요.

-묘안백마 : ...일이 쉬워지겠다냥. 그 배율이면 바이러스일 리는 없고.

-묘안백마 : 항생제로 환자를 치료하 고, 백신 만들어서 접종을 시작하면 예방까지 완벽하게 되겠다냥.

-에른 : 부탁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드는 비용은 물론이고 충분한 대가도 지불할 테니까요.

-묘안백마 : 인명을 구하는 일에 대

가는 필요 없다냥…! >숭고

-묘안백마 : 단, 부탁이 있다냥.

-에른 : ...?

-묘안백마 : 이런 짓을 한 놈을 살려 둬선 안 된다냥-! 알아낼 건 다 알아냈 으니 당장 단죄하도록 하라냥! >단호

'方..'

티칸을 보니 복종심으로 가득한 눈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심령을 지배당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 이다.

이 상태에서는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해내고, 죽음도 불사할 텐데.

-에른 : 그건 안 되겠는데요?

-묘안백마 : 왜냥…?

-에른 : 놈을 사주한 더 악질적인 놈 을 잡아야 하니까요.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요. 단죄는.

*

메드시안 저택, 영주의 침소.

부스럭.

인기척을 느낀 아인스 메드시안이 눈 을 떴다.

'...침입자?!'

소스라치게 놀란 아인스가 호위를 부 르려 하자 억센 손이 그의 입을 틀어 막았다.

"접니다, 티칸."

"으, 으읍!"

티칸이 손을 떼자 아인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졌다.

"뭐야 너! 미쳤어? 한밤중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럼 한밤중에 와야지 백주대낮에 방 문할까요? 작업 들어간 동안에는 최대 한 숨어 지내라고 신신당부하셨잖아요"

"그게 자고 있을 때 몰래 숨어들어 오라는 뜻은 아니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조심, 또 조심해야죠. 걸리면 저도 저지만 자작님도 이거 아닙니까?"

슥삭.

자기 목을 날리는 시늉을 해 보이는

티칸.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든다.

입가에 떠오른 냉소도 좀 이상하고.

그러나 아인스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운명 공동체니까.

"침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분명 중요 한 일이겠지? 뭔데?"

"그게…. 역병 전파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생각보다 전염이 잘 안 되고 있 거든요?"

"뭐야? 순조롭다더니! 벌써 사망자만 수십 명에, 천막을 꽉꽉 채울 정도라

고 했잖아!"

"알아보니까.. 역병에 걸린 건 대부 분 인부고 영지민들은 아직도 건강한 모양이라. 이거 작업 치는 이유가 스틸가드를 몰살시키기 위해서지, 파견한 인부들이나 죽이려는 게 아니잖아요?"

아인스가 심각해진 낯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건 그렇긴 한데. 왜 그렇게 됐 지…? 인부들이 영주성에 들어간 걸로 더 볼 것도 없어졌다면서?"

의심의 눈초리.

"자네 역병술에 문제 있는 거 이니 야? 이거 검은 여명회한테 잘못 소개 받았구만."

"문제는 제가 아니라 에른 영주 띠]문 에. 위생 관리를 철저히 하라는 명이 스틸가드 전역에 내려졌어요. 영지민들이 틈만 나면 씻어 대고, 비누로 살충을 하 는데 무슨 수로 역병을 퍼뜨립니까?"

"살충...? 비누하고 역병하고 무슨 상 관이야?"

"그게 말입니다. 병을 일으키는 작은 벌레들이 있거든요…."

"복잡한 설명은 집어치우고.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스케일을 키워야죠. 회에 연락해서 역병술에 능한 흑마법사들을 더 불러 와야 할 거 같은데."

아인스가 펄쩍 뛰었다.

"나한테 그럴 돈이 어딨어? 이미 지 금까지 쓴 골드만 해도 금고 탈탈 털 어서 마련한 거다."

"다른 자작들한테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떨까요?"

"미쳤어? 그 인간들이 응할 리가 없 지. 나만큼 절박하지도 않을뿐더러….

보수를 나눴다간 본전도 못 건진다고." 아인스가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든 지금 있는 걸로 스틸

가드를 무너뜨려야 한다."

그의 다짐.

일련의 사태 이후로 3자작들 중에서 가

장 아쉬운 처지가 된 것은 아인스였다.

어쩌면 파산하게 될지도.

평생 광산에서 나온 부 덕택에 호의 호식하며 살아온 그이다.

그런데 광산은 고갈되었고 경작지를 잃기까지 해서.

지금까지 누려 온 것들을 포기하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

그때 들어 온 은밀한 제의를, 아인스 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이거 의외네. 난 셋이서 합작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싹!

아인스의 몸이 굳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전신의 털이 곤

두서는 것만 같다.

왜 그깟 애송이 놈한테 두려움을 느

끼는지는 모르겠다.

이성은 그렇게 말하지만, 본능은 정 반대로 행동한다.

꿈에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고 환청으 로라도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

'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파앗!

환하게 밝아진 침소의 구석.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에른이 커 다란 수정구를 든 채로 이쪽을 쳐다보 고 있었다.

"...아인스 메드시안의 단독 행동이 었을 줄이야."

"어, 어디부터 들었지?"

"전부 다? 아, 그리고 녹화도 다 됐어."

"이거 갑자기 궁금해지네."

"뭐, 뭐가 말이냐?"

"알지? 나 데몬 슬레이어인 거. 악마 소환이 중죄일지 역병 전파가 더 큰 죄일지. 애매한데...

아인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락으로 빠져드는 듯한 절망감.

어떻게든 늪에서 기어 올라와야 한다.

"이... 이건 다 브란웰 후작이 시켜서 한 짓이야. 나, 난 잘못 없다고!"

"...잘못이 없다?"

에른은 수정구를 품에 넣고 아인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 그래. 전부 본의가 아니었어. 지 금까지 시비 걸고 그랬던 거. 다 후작 이 압력을 넣어서 억지로 해 왔던 거야. 놀, 놀랐지? 에른 영주?"

"아니, 전혀."

퍼억

에른의 정권이 아인스의 얼굴을 피떡 으로 뭉개 놓았다.

[220화]

에른은 대륙인들과는 조금 다른 자 기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수년 동안 지속해 온 차원거래의 영향인지, 아니면 두 번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인지.

그것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본인 내 부에 잠재한 성향 탓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게 잡탕처럼 뒤섞 인 복합적인 요인인지도.'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에른은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잔혹 했고 어떨 때는 이상할 정도로 너그 러워질 때도 있었다.

까마득한 대귀족에게도 그 인간이 뭐가? 하는 식으로 나가다가도 본받 을 만한 점이 있다고 여기면 지위와 상관없이 깍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자이온의 귀족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봉건적인 가치관.

조부인 라제칸 스틸가드를 존경하 긴 하지만, 왕과 왕실에 대한 충성심 같은 건 별로 본받을 생각이 없다.

1계는 무림문파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 관의 역할이 한정적이고 제후 와 황제의 자리는 허울뿐인 감투에 불과했다.

2계는 각각의 마도국가의 특성이 제각각인 터라 저마다의 정치 체계 를 발전시켰고.

3계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천부인권 사상을 숭상하며 시민에 의한 통치를 표방했다.

왕정이라는 게.

무슨 위대한 신이 내려준 숭고한 규범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여러 차

원을 겪으며 깨닫게 된 에른이다.

다양한 정치 체계 중의 하나일 뿐.

'할아버지께서 목숨 바칠 각오로 나바로를 지키셨는데, 왕실에선 돌아가 시는 그날까지 견제했지. 혹시나 반 역을 일으키진 않을까 하고.'

기브 앤 테이크조차 제대로 안 해 준 나바로 왕실에 충성심이라.

차원거래로 견문이 넓어지지 않았 더라도 딱히 가슴에 품었을 것 같지 는 않다.

원래 좀 반골 성향"?

그런 그에게도 지키고자 하는 전통 적인 가치가 있었다.

"어, 어어억...

에른은 만신창이가 된 아인스 자작 을 내려다봤다.

"다른 건, 내가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니니까. 할아버지의 호의 덕분에 이렇게 호의호식할 수 있었던 건데 도 페론타 브란웰한테 가서 붙은 철 새 짓이나."

퍼억!

"크어헉!"

복부를 걷어차인 아인스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내장이 상하기라도 했는지 색이 검 었다.

에른이 손짓하자 티칸이 아인스를 일으켜 세우고 치유 마법을 걸었다.

"...적 영지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도. 마법사하고 손잡은 건 진짜 바 보 같은 짓이지만은…. 뭐라고 하겠 어. 본인 선택인걸."

빠각! 빠가각!

쉼표가 찍힐 때마다 무자비한 폭력 이 쏟아진다.

에른은 아인스의 주둥이를, 턱주가 리를, 목젖을, 가슴팍을, 양 무릎을, 쓰러진 등과 어깨를, 딱 죽지만 않을 정도로 후려갈기고 작신작신 밟아 댔다.

"치료해."

" 예."

"어흐... 어흐흐흑!"

아인스는 눈물, 콧물, 침과 핏물, 온갖 물이란 물은 다 쏟아내면서 양

손을 마구 내저었다.

티칸의 치유 마법이 아인스의 몸 상태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신체는 말끔해졌어도 고통 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인스의 귓가로 입을 가져다 댄 에른.

어허… 허억..!"

"근데 너도 영주고 나도 영주잖아. 이 정도는 말할 자격 있다고 본다."

"영주는 영지를 지배할 권한을 가

진 자. 허나 영지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 또한 두 어깨에 지고 있다. 의 무를 저버린 걸로도 모자라 백성들 을 역병술의 도구로 이용해?"

타오르는 듯한 눈빛.

비난으로 가득한 시선은 아인스의 온몸을 당장에라도 지져버릴 듯 강 렬 하다.

"으, 으어어...

쪼르르르.

아인스의 잠옷 바지가 축축하게 젖 어 드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물이 뚝

뚝 떨어졌다.

«으 »»

지린내를 맡은 티칸이 코를 움켜쥐 었다.

지나친 살기 때문인 것도 있고, 이 만큼 팼으면 됐지 여기서 뭘 더 하 려고...? 하는 공포가 아인스의 방광 을 풀어지게 만들어 버렸다.

"살, 살려주게…! 뭐, 뭐든 다 할 테니까!"

"안 그래도 살려 두려고 했어."

티칸을 확보했고 수정구 영상까지

확보한 이상, 아인스와 메드시안 자 작령을 짓밟는 것쯤이야 손바닥 뒤 집기보다 쉬운 일이다.

굳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아인스 를 사형대에 올릴 수 있는 데다가.

"...페론타를 잡으려면 필요하지. 죽이긴 왜 죽여?"

에른은 아인스의 수혈을 짚고 티칸 과 함께 메드시안 저택을 빠져나왔다.

침입해 왔을 때와 같이, 아무도 눈 치채지 못하게.

라발 산맥, 인적 없는 산골짜기.

척!

에른과 티칸은 흙바닥 위에 착지했다.

아인스를 티칸에게 넘기고.

"붙들고 있어."

" 예."

에른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티칸 이 고개를 돌렸다.

심령을 잠식당한 탓에 척하면 척

의도를 알아차리는데.

라이한 때도 느꼈지만 부하로 데리 고 다니기 편한 타입이기는 하다. 악 마 소환자는.

'영혼력 차이가 훨씬 압도적이라 그 런지 더 고분고분한 거 같기도?'

또 에른은 암흑군주 요나츠가 알려 준 방법을 쓰고 있었다.

티칸의 영혼에 드래곤의 사령, 일부 를 심어 놓은 것.

이러면 주인에 대한 복종심이 끊어 질 새가 없어서.

라이한과는 달리 뒤통수 칠 계획 같 은 건,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대신 영혼력이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티칸에게서 빼앗은 영혼력으 로 충분히 커버가 되기에.

'그래도 기억은 일부 지우긴 해야겠 어. 너무 많은 걸 봤지. 사령술도 그 렇고, 내가 마검사라는 것도 알고 있 으니까.'

그리고 이것도 말이다.

에른은 인벤토리에서〈디럭스룸〉을 꺼냈다.

"아인스 데리고 들어와."

'' o 으2"

갑자기 나타난 전화 부스같이 생긴 구조물에, 티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뭡, 뭡니까. 이건?"

"들어오기나 해."

에른이 문을 열고 안으로 향하자 넓은 실내가 펼쳐졌다.

널찍한 현관, 그 옆에 설치된 오밀 조밀한 수납공간.

심플하면서도 깔끔한 분위기의 거 실과〜 인테리어 전문가가 고심하며

배치한 최고급 가구들.

대리석 식탁은 홀로그램이 설치된 베란다와 마주 보는 위치라 다양한 경치를 즐길 수 있고.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침실과 옆 에 딸린 깔끔한 화장실까지〜

이 모든 공간이 고작 부스 하나 크 기에 압축되어 있는.

마법시공이 적용된 주거 혁신의 아 이콘!

...이라는 건 물품 설명을 그대로 따온 거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공간 하우스 였다.

3계로 올라오면서 선물로 받은 물 건 중 하나.

총기와, 세단, 헬기 같은 건 에른의 상식 밖에 있는 거지만.

아공간 거주지라는 건 대륙에서도 충분히 나올 법한 아이디어이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껏 마법사들이 구현해 내지 못했던 이유는.

"여, 여기 아공간 맞습니까? 너무

현실 같은데요?"

"맞지, 그럼."

티칸은 아공간이 그저 새하얗고 미 칠 것 같은 공간이 아닌 것에 우선 놀라고, 3계식으로 꾸며진 실내장식 에 두 번 놀랐다.

"이, 이렇게 안정적인 느낌일 수도 있군요. 집처럼 꾸밀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에른은 아인스를 소파 위에 던져 놓고 티칸에게 조리 기구와 화장실 사용법 등을 알려 줬다.

"지금 있는 식량이면 안 아껴 먹어 도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거다. 아인 스 감시 잘하고, 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 예…."

에른은 디럭스룸에서 나온 뒤, 같이 받은 만능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잠금], [보안 모드]

철컥! 우르릉!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두꺼운

철벽이 부스의 5면을 감쌌다.

이렇게 해 두면 안에서는 절대 나 올 수 없고, 밖에서도 지나가는 산짐 승들이 관심을 보인다 해도 걱정할 게 없다.

"언젠 휴가 갈 일 있으면 그때 쓰 려고 했는데 감옥으로 써먹게 될 줄

O....

*

에른은 저택으로 돌아와 간만에 가

족들을 만났다.

가족들이라고 해 봐야 제이슨과 카 렌뿐이었다.

키르안은 에른이 영주로 인정받은 뒤 로, 집을 나가선 돌아오지 않고 있고.

다렌은 실비아 등 상회 직원들과 함께 레히테의 임시 거처에서 지내 는 중이라 역병의 위험에서는 그나 마 안전한 편이었다.

물기 젖은 카렌의 목소리.

"대체 이게 며칠 만이니, 에른…!"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그랬지.

잠도 거의 못 잔 거 같네."

"그래도 소식은 알려 줘야지. 얼마 나 가슴 졸인 줄 알아? 총관님도, 단 장님도 지금 어디 있냐고 하면 알려 드릴 수 없다고만 하고."

카렌은 이상할 정도로 감정적이었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좀 미안해진다.

하지만 큰누나에게도 비밀로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특히나 지금 같은 비밀공작은.

에른은 아리엘을 보며 말했다.

"저택은, 별일 없지?"

"물론. 아직까지는 청정지대야."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른은 그녀에게 저택의 방역을 맡 겼다.

아리엘은 험난한 대수림에서 수백 년을 생존해 온 달의 일족.

정령사를 때려치고 치료사로 전업 해도 될 만큼 병과 약학에 대한 지 식이 뛰어나다.

에른이 알려 준 병원균의 전파와 감염 과정을 이해하고 저택을 통제 한 결과, 영주관은 영주성에서 안전

한 장소로 남아 있었다.

"고마워, 아리엘. 잘 해주고 있어.

엘루나는?"

"요즘은 내가 바빠서. 거의 사리가 봐주고 있긴 한데, 지내기야 잘 지내 고 있지. 근데, 음…."

아리엘이 말끝을 흐렸다.

" 왜?"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말하는 게 맞겠지?"

아리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에른은 순간 불길함을 느꼈다.

"제가 말할게요."

카렌이 입을 열었다.

"이젤이 쓰러졌다고 하더라…. 역병 때문에."

" 뭐?"

이건 무슨 모순이지?

저택이 청정지대라는 것과, 이젤이 쓰러졌다는 사실은 분명히 배치된다.

"실은 내가 며칠 전에 집에 보냈어."

" 누나가?"

"이젤의 부모님이 역병에 걸렸거든.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는 하 는데, 동생들을 챙겨야 한다고 해서."

에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말렸어야지."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처음에는 말 렸어. 저택 밖은 위험하다고."

"끝까지 말렸어야지. 이젤이 거기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잖아. 동 생들이야, 이웃한테 부탁할 수도 있 는 거고."

"그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무슨 소리야?"

"...영지민 감염자는 극소수니까. 그거 때문에 그 집이 린치의 대상이 됐었나 봐. 그래도 저택의 하녀인 자 기가 가 있으면 사람들이 덜 하지 않겠냐면서 꼭 가야겠다고 부탁하는 데…. 차마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었어."

얘기를 들어 보니 큰누나가 왜 그 렇게 행동했는지는 이해가 갔다.

특히나 위생 관리에 익숙한 저택의 고용인이니까, 이젤이 감염될 거라곤 생각하기 어려웠으리라.

"미안해, 에른…. 그렇게 될 줄 알 았으면 보내지 않는 건데."

"나한테 미안할 건 없어. 너무 죄책 감 갖지는 마. 운이 없었던 거지."

그녀에게도.

또한 페론타 브란웰에게도.

"...도련님. 여기까지 오실 건 없 는데."

에른은 울긋불긋 열꽃이 핀 이젤의 얼굴을 보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몸은 좀 어때?"

"저는 괜찮아요...

이젤 또한 사력을 다해 웃어 보인다.

각혈과 호흡 곤란.

티칸이 퍼뜨린 역병의 주요 증상이다.

숨 쉴 때마다 폐를 찌르는 듯한 고 통이 느껴지고, 고열로 제정신이 아닐 텐데.

"어서 가세요…. 옮으시면 어쩌시려고."

그런 상태인데도 이쪽 걱정부터 하 는 이젤이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전생의 모습이 겹 쳐 보였다.

"거짓말하지 말고. 죽을 만큼 아픈 거 다 알아."

"헤헤… 들켰나. 이렇게 될 줄 알았 으면 아가씨 말 들을 걸 그랬어요."

"누나랑 똑같은 말을 하는군."

에른의 왼쪽 눈에서 빛이 번쩍인다.

-에른 : 이 스크롤이면 확실히 치 유되는 거 맞죠?

-묘안백마 : 배양균이 사멸되는 걸 확인했다냥. 효과는 확실하다냥.

-에른 : 그 말, 믿도록 하죠.

에른은 서라일리아와의 거래를 마 치고 스크롤을 북 찢었다.

화아아앗!

성스러운 광채가 온몸을 감싼다.

그 빛이 어찌나 눈부신지 치료사들 과 의식 있는 환자들의 시선이 전부 에른 쪽으로 향했다.

"저, 저기 봐!"

" 영주님...?"

광휘를 머금은 손이 이젤의 이마를 쓸었다.

"이제 아프지 않게 해 줄게. 이젤."

[221 화]

"오늘 날씨 한 번 더럽게 좋네. 햇볕 따뜻하고 바람 솔솔 불고. 이제 완연 한 봄이라니까."

"아, 소풍 가고 싶다. 이런 날씨에 성 벽이나 쌓고 있어야 하다니."

"바깥에서 햇볕 쬐면서 일할 수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 광산에서 돌가루 맡는 것보다야 이 일이 낫지."

"비교 불가긴 흐fl, 그치?"

삼삼오오 둘러앉은 인부들이 간식을

나눠 먹으면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 고 있었다.

스틸가드에 드리워졌던 죽음의 그림 자도 어느덧 물러가고, 그 자리를 봄 볕이 대신한 지금.

인부들은 생지옥 같았던 지난날들이 마치 흘러간 꿈결처럼 느껴졌다.

"...이봐; 형씨. 그 자리에 있었다면서?"

" 무스2"

"기적의 현장."

인부의 말에 곁에 앉은 다른 인부가 의아히 여겼다.

"그 자리에는 많이들 있었잖아. 역병 은 우리들 대부분이 걸렸으니까."

"현장을 목격했다던데 그것도 멀쩡 한 정신으로."

"정말? 열이 펄펄 끓었을 텐데 어떻게?"

인부가 형씨라고 부른 사람을 가리켰다.

"운 좋은 형씨지. 열도 거의 안 났고 격리 천막에서도 제일 팔팔했다던데? 그러니까 다 봤겠지."

"아저씨. 또 그 얘기 하는데요."

쿤보가 닐슨의 팔을 툭 건드렸다.

인부들의 시선이 쏠리자 닐슨이 뒤통

수를 긁적였다.

"뭐, 그 말대로긴 한데."

닐슨이 인정하자 인부들이 눈을 반짝 인다.

"애기 좀 해 주쇼. 말한다고 닳는 것 도 아니고."

"영주님이 손을 스윽〜 하니까 하녀가 바로 병이 나아서 자리를 툭툭 털고 일 어났다던데. 소문이 정말 맞아요?"

"난 이 말도 들었어. 영주님의 몸에 서 신의 광채 같은 게 막 쏟아져 나왔 다고."

"에이, 그건 너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우린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잖아."

"소문이 사실이에요? 아무래도 섞인 거 겠죠?"

"...과장이라고?"

닐슨이 말문을 열자 인부들은 전부 그의 입만 쳐다봤다.

"오히려 축소된 편이지. 환자들 중에 선 나보다 자세히 본 사람 없을걸."

닐슨의 눈동자가 왼쪽 위를 향했다.

기억을 더듬는 그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꽤 시일이 지났고, 앵무새처럼 몇 번

이고 반복했던 그라 이제는 무덤덤해 질 만도 한데.

여전히 경외감과 놀라움이 목덜미에 소름을 돋게 한다.

'기적의 현장'을 떠올릴 때마다.

"...무슨 일이 있었냐면."

*

성광이 이젤의 반쯤 감긴 눈, 콧속과 귓속, 모공 안쪽으로 스며들어 갔다.

원래 마법이라는 게, 상식을 뒤엎고 현실을 개변하는 수단이기는 하지만.

신성 마법은 신이 내린 권능인 탓인 지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다.

'유피아르의 은총이라고 했던가.'

신광은 이젤의 몸에 퍼진 역병균들을 일거에 녹여 버리고.

혈관을 타고 흐르면서 모든 염증 반 응을 가라앉혔다.

또한 겸사겸사 잃었던 체력을 회복시 켜 주고, 내친김에 그녀의 평생 지병이 었던 편두통의 근원까지 제거해 버렸다.

"...영, 영주님?"

"그래, 이젤."

"뭔... 뭔가 이상해요."

정상적인 혈색으로 돌아온 이젤이 상 체를 일으켰다.

몸 상태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

의문과 갸웃거림이 이어지다가….

"저, 저...!"

억지로 지어 보이는 게 아닌 진심에 서 우러나온 웃음이 활짝 피었다.

"왠지 다 나은 거 같아요 앗.

에른에게서 흘러나오는 광휘를 본 이 젤이 눈을 크게 떴다.

"멋있지? 이게 또 오러하곤 느낌이 다르네."

기사의 위압감이 아닌 성인을 마주했 을 때나 느낄 법한 숭고한 감정.

"맞, 맞는 거 같지? 영주님께서…."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주위로 몰려든 치료사들이 탄성을 발 하며 한 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역시 너무 눈에 띄는군.'

에른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젤이 역병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3계 의 의학으로 해결했을 텐데, 그녀는 확 률 싸움을 걸기에는 너무도 소중한 사람 이었다.

3계의 소위,〈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전했다고는 해도 모든 환자를 100% 낫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점에서 신성 마법은 확실한 치 료 수단이기는 했다.

너무 비싸고, 또 눈에 많이 띈다는 게 단점이지만.

에른은 넘치는 광휘로 눈가를 가리고 대화창을 보았다.

-묘안백마 : 치료는 잘 됐냥…?

-에른: 네, 다행히. 음, 좀 신기하네요 신성력도 모든 병을 다 고치는 게 아니 고, 먹히는 병이 있고 아닌 병이 있다니.

-묘안백마 : 당연한 거 아니냥…? 은 총, 축복, 심판…. 다양한 카테고리가 있고 거기서도 수많은 갈래로 갈라지 는 것이다냥.

-묘안백마 : 신성력은 무한히 빌려 쓸 수 있는 게 아닌 한정적인 자원. 3 계 의학의 힘을 빌려 어떤 은총이 어 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정리해낸 것 은 정말 값진 일이었다냥…! >자부심

-에른 : 그렇군요. 근데 이거 어떻게 안 됩니까? 환자는 말끔히 나았는데 광채가 사라지질 않는데요?

-묘안백마 : 냥"? 그거 군중 치료용 으로 쓰이는 거다냥. 대용량^라도 상관 없고 당장 쓸 수 있는 거면 된다고 해서 준 건데, 문제 있냥?

-에른 : 아뇨, 음…. 그럼 몇 명이나 치료할 수 있죠?

-묘안백마 : 농도를 잘 조절한다면 천 명도 너끈하다냥 어떻게 하는 거나면....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끝을 내?'

길게 끌어 좋을 거 없다.

다들 병석을 툭툭 털고 일어나게 하고, 서라일리아가 백신 개발을 완료하면?

역병 사태는 종식된 거나 마찬가지다.

에른은 광휘를 휘감은 채로 천막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 영주님...?"

"뭘 하려고 저러시지?"

"서, 설마?"

에른이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젤, 치료사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던 닐슨은 똑똑히 보았다.

사아아아-

그의 몸을 감싼 눈부신 광채가 은은 히 빛나는 실처럼 올올이 풀려 나와 천막 전체를 뒤덮는 것을.

치료사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오, 클레오스 님이시여...!"

"스틸가드를 가엽게 여기셨군요!"

닐슨 역시 벅찬 감동으로 고개를 조 아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감히 저런 분을 황금빛 악마라

고 했던가.

*

"...그 모습은, 황금의 성자라고밖 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어."

닐슨이 말을 마치자 인부들은 입을 헤 벌렸다.

그만큼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에이, 뻥이 심하다. 너무 첨가한 거 아니야'?"

"아냐. 난 저 형씨 말에 한 표. 나도 그때 뭔가 따뜻한 기운 같은 걸 느꼈 거든. 영주님께서 다녀가신 뒤로 열이 내려가고 기침도 덜 하기 시작했지. 며칠 뒤엔 싹 다 나았고."

"영주님이 우릴 치료해줬다는 거야 의심의 여지가 없지. 감사한 일이고. 근데 뭐, 치유 마법 스크롤을 대량으 로 사 왔다거나… 그런 거 아닐까? 성 자까지는 모르겠다."

"영지민도 이니고 고작 인부 따위인 우리 고치려고 그 귀한 걸 막 쓴다고?"

"모르지. 여긴 모든 게 상식 밖이잖

아.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간식만 해 도 자작령에선 꿈도 못 꾸는 건데."

"그래도 스크롤 천 개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출혈이 너무 크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많은 인부 들인지 나름 그럴듯한 추측을 내놓고 있었다.

"하여간 도성 안 가본 놈들이 가본 놈 보다 더 잘 안다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 뭐?"

닐슨의 말에 인부들이 발끈한다.

하지만 닐슨은 개의치 않고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치유 마법 같은 게 아니었어. 내리비치는 지금 이 햇살보다 더 따사 롭고, 자애로우면서도 신성스럽고…."

"그래도 난 못 믿겠다. 증거 있어?"

"증거? 있지."

닐슨이 확신하는 까닭이 있었다.

그가 인부들을 둘러보았다.

"여기 지병 있었던 사람 있어? 가벼 운 거라도."

인부들이 하나둘 손을 들었다.

대부분 광산 노동자이거나 농부였으 니, 만성 질환이 없는 게 이상하리라.

"난 관절염."

"만성 속 쓰림."

"난 재채기가 심하지. 돌가루를 많이 마셔 그런가."

닐슨이 끄덕거렸다.

"근데 지금 다 괜찮아지지 않았어?"

"그, 그러네?"

인부들의 고개가 갸우뚱 움직인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병이 나은 뒤론, 마치 기적처럼.

"난 허리가 내내 밀썽이었는데… 그 빛 을 마주한 뒤론 씻은 듯이 나았어. 치유 마법일 뿐이라면, 우리 모두가 이렇게 좋아질 수 있겠어?"

"안 되겠지. 사실 마법으로 역병을 고친다는 것도 처음 들어 봤어."

닐슨의 반박에, 다소 냉소적이던 인 부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인부들은.

"그럼 황금의 성자가 맞구만?"

"말 되네. 돈도 엄청 많다고 하니

까... 딱딱 맞아떨어지잖아."

"솔직히 영주님 아니었으면 우린 다 죽었지. 앞으론 그렇게 불러 드려야겠 어. 자작령으로 돌아가면 가족하고 친 구들한테도 알려 주고."

"그래, 널리 퍼뜨리는 게 좋겠어. 오 해 풀어 드리는 거 말곤 딱히 은혜 갚 을 방법도 없지?"

곧 약속 시각입니다."

기사단장 랜디스의 말에 페론타 브란 웰이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만 믿으십시오."

나바로의 영향력 있는 대귀족답게, 브 란웰 스쿼드의 리더는 특급 기사였다.

각성급이긴 하지만, 거의 영웅급에 근접한.

그뿐 아니라....

수풀 쪽을 곁눈질한 페론타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 것이 버릇이 없군. 감히 지각을.," 불쾌한 심사도 잠시.

페론타의 시선이 저 너머를 향했다.

"옵니다…. 주군."

"보고 있어."

저벅.

금발에 금안.

듣던 대로 감탄이 나오게 잘생긴 소

년〜 청년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남자.

페론타가 손짓했다.

"...가까이 오게. 자네가 시킨 대로,

호위 하나 빼고는 나 혼자야."

"뀨엥

페론타의 눈동자를 가득 채운 물음표.

"헷"

에른의 얼굴에는 놀란 빛이 떠올랐다. 황급히 자기 입을 막은 에른.

페론타는 의아해하면서도 더 중요한

것을 물었다.

"물건은…. 가지고 왔겠지?"

에른의 손이 자기 품으로 들어갔다.

상의 안쪽에서 나온 것은 수정구였다.

아인스 자작의 자백이 담긴.

거기에는 역병 전파를 지시한 장본인 이 브란웰 후작이라는 내용이 있어 페 론타로서는 꼭 회수해야만 하는 물건 이었다.

녹화된 영상을 확인한 페론타가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그래, 잘 가지고 왔어. 대가로 뭘 원 하지?"

"어지간한 건 다 맞춰줄 수 있네. 막

대한 돈? 따뜻한 중남부의 땅? 뭐든

말해 보라고."

"말을 해야 들어줄 것 아닌가."

"이 자리를 마련했다는 건, 협상을 하고 싶다는 뜻이겠지. 얻고 싶은 게 있으니까 여기까지 나온 거 아니겠나."

페론타가 짜증을 냈다.

아쉬운 쪽은 자기다.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접선을 하고 있는 거지만.

근데 묵묵부답으로만 일관하는 건 뭐 하자는 건지.

"얘기가 길어질 것 같군. 일단 가까 이 오게."

"자네도 각성급, 내 호위도 각성급. 난 뭐, 오러 유저도 아니니까 밸런스가 딱 맞아.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만나서 얘기하자는 에른의 서신을 받 았을 때.

페론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폭로가 아닌 협상을 택한다라.

그렇다면 일이 커지기 전에 수습할 기히가 생기는 셈이다.

물론 에른이 원하는 걸 줄 생각은 추 호도 없었다.

"...주군. 눈치 챈 모양인데요?"

랜디스가 에른의 발을 가리켰다.

가까이 오기는커녕 조금씩 물러나는 걸 보면.

페론타가 소리쳤다.

"놈을 잡아...!"

"옛!"

그 말을 들은 기사들이 풀숲에서 튀 어 나왔다.

은신 마법을 건 채로 대기하고 있던 그의 가신들이다.

"뀨엥…!"

몸을 돌린 에른이 속도를 높였고, 브 란웰의 기사들이 그 뒤를 쫓았다.

"절대 놓쳐선 안 된다! 어떻게든 생포 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사살하도록!"

기사단장 랜디스, 부기사단장 론바디, 그리고 전용 호위 하올.

브란웰의 3대 특급 기사를 전부 동원

했고, 거기에 더해 추리고 추린 기사 단의 에이스들.

에른이 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라고 해도 저들을 당해낼 수는 없으리라.

...라고 생각하는 그때.

길게 뻗은 손가락이 페론타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뭐, 뭐냐?"

"반가워, 후작."

페론타는 자기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본 남자, 도망치며 멀어져 간 남자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이쪽을 쳐 다보고 있었으니까.

"에, 에른 스틸가드?! 호위! 어딨나, 하올!"

"...이 사람 찾아?"

에른은 하올의 잘린 목을 들어 보였다.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본 페론타의 등 골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 언제...?"

"이제야 우리 둘 다 혼자가 됐군. 그 럼 협상을 시작해 볼까?"

[222화]

"크, 크헉… 말, 말할게.... 그러니 제발...

페론타 브란웰은 나바로에서 손꼽히는 권력자다.

그는 전생…. 나이 먹고 알브레트의 영주가 된 쿤츠와는 달리 후작위에 걸 맞은 능력을 가졌다.

나름 카리스마도 있는 거 같고, 15년 뒤에는 후작령을 지금보다 더 번성하게 만들었으니, 꽤 비범한 사람이라고 봐

야 하리라.

그렇지만 제아무리 비범한 사람도 정 신력에는 한계가 있다.

입을 열게 할 수단이야 에른에게는 얼마든지.

-각종 자백제

-정신계 마법

-분근착골 (무림계에서 구매)

-가시촉수 고문 마법 (시에라가 쓰는 거 보고 좋아 보여서 배웠다)

-사령술( 심령을 지배하면 혀에 기름 칠한 듯 술술)

-고독 (쏠쏠하게 사용해 왔지만 가장 악독하다)

뒤쪽으로 갈수록 견디기 어려워지고 성공률 또한 수직 상승한다.

"분근착골로 끝내다니 잘 생각했어."

"...미친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해? 나 브란웰 후작이다!"

"후작 가지고 뭘."

에= 더 대단한 사람들에게도 더

막나가는 짓을 해 왔다.

페론타 정도면 암흑가 조직원들이나, 제국 스파이에 비하면 까마득히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겠지만.

'나바로 최고 거부 타이틀의 라이한, 세븐 아이즈 회원들, 수장 아르엘도….'

어지간한 후작도 몇 수는 접어줘야 하는 인물들.

에른은 페론타에게 그간 궁금했던 것 을 물었다.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다. 이… 이젠 정말 때려죽여도 모르니까."

"흠."

에른의 금안이 페론타의 불안한 눈빛 을 잡아냈다.

"분명히 더 알고 있어. 마나의 맹세를 했나?"

"했네, 했어. 그래도 괜찮지. 이것만 있으면."

몸을 돌린 에른이 인벤토리에서 아주 못생긴 인형을 꺼냈다.

아르엘도를 속였던 그 물품, 대속인형 이었다.

얼마 뒤.

"마나의 맹세까지 깼어. 이젠 정말 정 말로 모른다. 이 이상은 직접 가서 물 어봐야 할 거야."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

"이, 이제 어떻게 할 거냐...?"

페론타의 목소리가 떨렸다.

원하는 걸 얻어냈으니 아무래도....

"이-, 그거…."

에른이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굉장히 안타깝지. 이젤을 생각하면."

"너도 똑같이 역병에, 아니 더 무시무시 한 걸로 구울화, 좀비화 뭐 이런 거 걸 리게 하고 온갖 곳에서 박대당하면서 떠 돌이다니게 하고 싶은데. 마음 같아선…!"

"끅! 흐끅!"

"딸꾹질까지 할 것까진. 마음만 그렇다고, 마음만."

"아...

페론타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하긴, 난 후작인데.

한 지방의 지배자이며 브란웰 가문의

수장인데.

아무리 그래도 쉽게 죽이기야 하겠어?

나 페론타 브란웰이야!

...라고 생각하는 참.

에른이 갸웃거렸다.

"뭘 좋아하고 그러지?"

«..2"

"그냥 죽여야 해서 안타깝다는 건데."

푸악!

에른의 손에서 흘러나온 오러가 페론

타 브란웰의 몸통과 머리를 분리시켰다.

"그쪽이 나라고 생각해 봐라. 그 짓들 을 당하고도 살려 주겠니?"

배후에서 3자작을 조종해 전대의 망 나니, 데킨스를 스틸가드에 화려하게 복귀시키고.

무력과 경제력이라는 스틸가드의 두 약점을 들쑤신 건 그렇다 치자.

일단 조지기로 했으면 앞뒤 사정 봐 주지 않고 찔러대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선 그래야 하니까, 그 방법에 대해선 비난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역병을 퍼뜨린 일은, 그 때문 에 이젤이 겪은 고통은.

"...그건 정말, 아니지. 용납할 수 없는 짓이다."

마음 같아선 수천 배, 아니 수만 배로 되돌려 주고 싶지만, 어리석은 행위라 는 걸 알기에.

또한 지금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명 확하기에, 분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페론타 브란웰이 아무 이유 없 이 움직인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그리고, 복수를 꼭 산 사람에게만 하 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우득! 우드득!

꽈악! 꾸윽!

에른의 뼈와 골격이 줄어들고, 얼굴은 마치 찰흙을 빚기라도 하는 듯이 비상 식적으로 변형되었다.

축골공(6성)과 역용술〈5성)을 동시에 사용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페론타 브란웰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웬만해선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하는데…. 그쪽이 넘은 선, 나도 갇이

넘는 거니까 이의 없겠지?"

죽어서도 원통함을 느끼게 해 주마!

아마 억울해서 성불도 못 할 것이다.

중북부에서 가장 부강한 영지가 실시 간으로 망해가는 걸 혼백이 되어 지켜 보고 있는다면.

말아먹는 것도 한 번 해본 놈이 잘하 는 법.

에른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한다.

입가에선 미소가 감돈다.

"사리는 잘 도망 다니고 있으려나-?"

양동 작전을 펼치기 위해, 사리에게 먹인 것은 [폴리모프] 마법이 각인된 매직 아이템.

원래도 둔갑에 능한 변신수였지만, 이 것으로 원하는 외형으로 자유자재로 변 신 가능해졌다.

수정구를 보여주고 도망치면 된다는 되는 그리 어렵지 않은 역할을 줬는데.

잘 해내긴 했으나…. 갑자기 울음소리 를 내는 바람에 조금 식겁하기는 했다.

치이이익!

에른은 페론타의 시체에 화골산을 뿌

려 한줌 누런 물로 만들어 버리곤.

찰칵, 찰칵.

그보다 먼저 죽은 호위, 하올의 사진 을 찍었다.

혹시 모르니.

'사리한테 변신해 달라고 해야 할 수 도 있으니까.'

그런 두], 하올의 시체에도 화골산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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