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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6% LASMONEDSEÑOR / Chapter 21: 21

Chương 21: 21

*

그러나 에른은 이 정도면 '크라페' 해버리진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실제 전황도 이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갔고.

7서클 대마법사 두 사람의 지원을 받으며.

사제 간이라 손발도 척척 맞는다.

"디스펠이 이빨도 안 들어가요. 8서 클이 맞긴 한 모양인데?"

"배리어 두 겹씩 쳐 주는 걸로 해. 어차피 공격은 기사들이 한다. 간간히 엄호 마법 날려 주고."

"알았어요, 스승님."

쏴아아아.

펑! 펑! 펑!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 아리엘 말로 는 '관리자'란 놈의 몸 근처에서 횡금 빛 강기 다발이 연이어 폭발을 일으

켰다.

강기의 주인은 다름 아닌 키포의 전 투망투를 두른 레바단.

'비행 기능'을 활성화시키니 공중에 서도 무리 없이 전투가 가능했다.

"하찮은 놈들!"

이 정도는 관리자가 코웃음 치면서 소멸시킬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반격까지도.

지잉.

[라이트 오브 디스트럭션].

8서클 파괴 마법의 위력을 감상하라!

관리자가 엄청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든 다 박살내는 파괴 광선.

7서클 따위들이 배리어 쳐 줘 봐야, 오러 실드로 막으려고 해 봐야 소용 없을 따름이다.

-아버지, '공허모드'를!

-걱정 마라!

콰아아아아-

에른은 레바단에게 전음을 던지고 관리자의 뒤를 노렸다.

쾅 쾅! 쾅

작렬하는 지옥의 화염탄.

마도기갑,〈헬파이어〉의 부가 기능 이다.

한 발, 한 발이 집채만 한 공간을 날려버릴 수 있는 공격이지만.

관리자는 멀쩡하기만 했다.

"어림없다고! 너도 이거나 먹어라!"

더블 캐스팅!

파괴 광선이 에른의 정면으로 날아 들어 왔다.

지잉.

블링크로 피해 낸 에른이 사리와 눈 짓했다.

"뀨엥!"

펑!

스톰브레이커로 변신한 사리, 에른, 레바단의 함공.

삼방향에서 들어오는 공격, 그리고 후방의 마법사들까지 생각해야 하니.

제아무리 천외천의 마법사여도 머릿 속이 어지러워지고 캐스팅이 꼬일 수 밖에.

'지금이다!'

빈틈을 놓치지 않은 에른의 출수.

파지지직!

뇌정검이 번득이며.

丄入,人,..人人,스,I

iririrTT*!

조검휘의 성명절기,〈유성비류검〉이

펼쳐졌다.

적막한 밤하늘에 빗금을 긋는 유성 우 같은.

가늘고 예리한 강기가, 소낙비처럼 관리자의 전신으로 쏟아졌다.

"크아아아아악!"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벌집처럼 변한 관리자의 몸이 땅으 로 추락한다.

'뭐, 뭐야 이 자들은...

아리엘은 안도감보다 황당함을 더 느꼈다.

관리자가 저렇게 처참히 당하다니.

너무 비현실적이라 상상도 해본 적 없 는 풍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어서.

"괜찮으세요, 아버지?"

"나야 뭐, 끄떡없다. 그나저나 이 망 토...? 정말 신기한 물건이구나. 모든 마법을 다 무시하다니."

"원리를 알면 공략법이 나와서, 다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요. 처음 상대 할 때는 답이 안 보이긴 할 거예요."

부상자 하나 없이 8서클을 잡고도 덤덤한 인간들의 태도도 어이없어서.

전설급 둘에 7서클 둘이 모였으니 8 서클 공략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 니긴 했다.

그래도 최소 한두 명은 죽고 한 명 은 재기불능의 부상 정도는 입는 게 정상적인 결과인데….

말도 안 되는 승전을 거뒀으면 서로 껴안고 울고불고해도 안 이상할 것 같은데.

'인간은 감정에 지배당하는 종족이라 고들 하더니… 그게 아니었나?'

어안이 벙벙한 아리엘.

시에라가 팔꿈치로 그녀를 툭 건드 렸다.

"봐, 조마조마할 필요 없었지? 혼자

서 7서클 여섯을, 아니 하나는 내가 보냈고…. 다섯이나 담근 몸이야. 상 식을 벗어난 애라니까? 내가 사람 하 나는 잘 봤어."

관리자는 산 아래 바위 턱에 몸이 꽂힌 채로 미약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 앞에 착지한 에른.

그가 관리자를 살피며 혀를 찼다.

"재수도 없지. 하필이면 이런 데에

떨어지냐?"

"닥… 닥쳐라. 미개… 하고 비겁한 인간 놈'!"

"미개한 건 잘 모르겠고. 비겁하기로 는 그쪽들만 하겠어? 1대 7 아래로는 정정당당하다는 마인드지."

"시에라 펠가스가 주동자가 아니었 어…. 네놈이 그년을 충동질했구나!"

"닥쳐, 좀."

에른은 관리자의 주둥이를 후려쳐 주려다가 말았다.

워낙 기식이 엄엄해 보여서 그런 짓

을 했다간 절명할지도 모른다.

에른은 먼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이거 봐."

품에서 꺼낸 것은 마나 리액터.

그걸 본 관리자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건 어디서 났지?"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파이오니어 협정 때문에 2계에서는 거래가 안 되 는 물건이라는데?"

"...파이오니어? 2계?"

"어떻게 한참 뒤에나 개발될 물건이

0계에 있는 거지?"

"뭔 개소리만 줄줄". 아, 그건 아르 엘도의 신갑에서 나온 거겠군."

"눈치 빨라서 좋네. 아무튼…. 그분 들? 관리자? 뭐, 호칭은 별로 중요하 지 않고."

에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당장 이보다 중대 문제란 없다.

관리자의 턱을 붙잡고 그의 눈을 바 라본다.

"너희들은 교류자인가?"

"교류자?"

"어디까지 올라갔지? 3계? 4계?"

"뭐... 라는... 거야...? 너야말로, 그 신물은 어디서 난 거지?"

"신물…? 연막 좋았다. 하긴, 숨기고 싶을 만도 하지."

교류자가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라면 모를까.

이곳, 1342호 지구 같은 곳에서는 나 혼자 차원거래자라는 사실이 엄청 난 메리트가 된다.

이 관리자 조직도 그 덕을 크게 봤 을 게 분명하다.

"일단 살려 놓고 고문을 할까? 서클 폐하고 여기저기 쑤시다 보면 언젠가 는 불겠지?"

"미친놈…! 뭔 말 하는 건지 모르겠 다니까?"

관리자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고통으로 뒤덮여야 정상일진대, 그게 아닌 고노]에 휩싸인 표정.

"모르긴 뭘 몰라. 증거가 이렇게 버 젓이 있는데."

마나 리액터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 도 에른은 같은 세계에 존재하는 교류

자의 가능성을 희박하다고 보았다.

그간 0, 1, 2계에서 이곳 1342호 지 구의 교류자를 본 바가 없으니까.

하지만 3, 4계 수준의 상위 차원에 올라간 교류자라면?

'그러면 말이 된다. 활동 중인 자이 온의 교류자.'

그러나 관리자는 계속 시치미만 뗀다.

"나, 난 모른다고! 신족이 대대로 내 려오는 신물을 사용하는 게 뭐가 어 떻단 말이냐!"

신족?"

"그래."

관리자가 무거운 입을 들어올렸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이 꼴 이 되고도 살 수 있겠느냐?"

"허언증인가?"

"우리는 이 땅에 함부로 본신을 내 비쳐서는 안 된다. 오늘 일은 넘어가 줄 테니…. 가라."

신족이 라.

정말 웃기는 소리다.

뭔 놈의 신이 할 짓이 없어서 세븐 아 이즈를 조종하고 레퀴엠을 운영하겠나?

"사실대로 말하면 곱게 죽여 주지. 차원거래에 대해서, 너희들에 대해서."

"...말이 안 통하는군."

일행들도 에른이 있는 곳으로 내려 왔다.

시에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얘기를 저렇게 나누는 거지?"

"앗, 안 돼!"

아리엘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눈에 잡힌 것은 관리자의 전 신에 돋아나는 비늘.

도마뱀의 그것과도 같은 징그러운 형상이었다.

"조심해!"

유성비류검에 당한 흔적, 온몸에 난 구멍이 전부 메워지며 순식간에 관리 자의 모든 상처가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완전히 낫기 전에.

뎅겅!

관리자의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인간이 아닌 건 맞는 거 같은데?"

일행을 돌아본 에른은 걱정하지 말라 는 듯 손을 휘젓고는 입맛을 다셨다.

"이대로 보내 버리면 너무 아쉽긴 하지만. 후환을 남기는 것보다는."

"조심하라니까! 본신은 그 정도로 죽지 않아!"

아리엘이 말한 대로였다.

후다다닥!

바위 턱에서 나온 목 없는 관리자의 몸이 머리 쪽으로 달려간다.

극도로 비현실적인 장면이지만, 현실 이었다.

"어딜!

에른은 허공섭물로 몸을 끌어당기곤 레바단에게 외쳤다.

"머리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알았다."

다행히 마법은 쓰지 못하는 듯.

서클과 마나 회로는 몸통에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캐스팅의 주체인 머 리가 분리되어 있어서.

서걱! 서걱!

에른은 강기를 끌어올리고 어렵지 않게 관리자의 비늘 몸을 토막 냈다.

꿈틀꿈틀….

그런데 내버려 두면 사지가 몸으로 가서 붙고, 또 토막 내면 또 가서 붙 고....

"이거 끝이 없는데? 아리엘. 뭐 어떻 게 해야 돼?"

아리엘이 고개를 흔들었다.

"불로 태워도 시간이 지나면 살아나 는 재생력인데…. 나, 나도 몰라. 관리 자를 어떻게 죽일 수 있는지."

그 말대로라면 정말 불사신이 아닌가?

스스로 신족을 참칭할 법도.

"나한테 방법이 있네."

입을 연 사람은 베모스.

"어떻게요?"

"세븐 아이즈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 다던가. 내가 실험 중에 아공간에 갇 혀 실종되었다고. 나름 성의가 있는 루머지. 내 주요 연구 분야는 아공간 활용이니까."

지잉, 지잉.

베모스가 캐스팅을 마치자 마법진 두 개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투명한 허공.

공간을 칼로 벤 듯한 자국이 둘 생

기더니 잘린 안쪽으로 시꺼먼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효과가 있을까요? 저 안 에서도 살아날 것 같은 재생력인데…. 아, 그래서 두 개를?"

"정답."

레바단은 관리자의 머리를, 에른은 몸을 각각 다른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스으으으

아공간이 옅어지고 이내 투명해지자 죽어도 죽지 않던 관리자는 이 땅에 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오늘 일을 말하면 믿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군."

레바단의 혼잣말에 모두가 공감한다.

"그러게나 말일세. 꿈을 꾼 것 같아. 8서클 마법에, 아까 그 기괴한 광경 은…."

레퀴엠에 대해 알고 있던 시에라와 베모스도 관리자의 존재는 전혀 몰랐 던 듯.

하지만 그 '모두'에서 빠져 있는 아 리엘.

에른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훑어봤다.

"아까는 급한 상황이라 못 물어봤는데."

"우리가 모르는 걸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 대체 관리자의 정체는 뭐지? 넌 왜 영생관에 갇혀 있었던 거고?"

[186 화]

이름 없는 무인도.

반은 푸르고 반은 하얀, 그림 같은 해변.

같은 섬이지만, 레퀴엠을 품은 알타 섬과는 수백km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에른은 찰박찰박 물장구치며 노는 사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뀨엥… 뀨에헹...

"그렇게 재밌냐?"

-응, 주인님! 차가워서 너무 신나!

"벌써 몇 시간짼데, 지치지도 않나 보네. 야, 어두워지려고 한다. 언제까 지 그러고 있을 거야?"

-계속, 계속!

"불 뿜는 이무기가 바다에 왔다고 신나하다니…."

뭔가 아이러니한 광경이다.

에른은 겨우 사리를 물에서 나오게 하고, 섬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곧 눈에 들어오는 것은 멀쩡한 집 한 채다.

무인도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번 듯한 이층집.

테아로스 한복판에 내놓아도 어색함 이 전혀 없을 것 같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외딴 섬에 어떻게 이런 구조물이?

'차원거래자에 대마법사 둘… 그리고 힘 써줄 괴수 하나 있으면 뚝딱이지.'

여기서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있는 동안에는 쾌적하게 지내자는 마 인드로 지어 놓았다.

창문 아래를 지나가는데.

의도치 않게 대화 소리가 귀로 들어 왔다.

"스승님. 일부러 이러는 거죠? 왜 알 고도 모른 척 해요?"

"시에라, 우린 사제 간이잖아."

"그래서요?"

"그래….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 다. 하지만 세상에는 금기라는 게 있 고, 우리는 음."

"금기는 무슨 금기에요? 늙은이들 은 죄다 죽었고. 손가락질하는 놈 있 으면 다 분질러 버리면 그만이지."

"시에라...

"벌써 20년이 흘렀다구요. 스승… 아니, 베모스! 차라리 내가 싫으면 싫 다고 속 시원히 말을 해요."

"...내가 널 싫어할 리가 있겠니?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나 이 차이도 있고."

"우리 이제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 거든요? 나도 60 넘은 지 오래고."

"네, 네가 60이 넘었다고? 내 눈에 는 아직도 처녀 같은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에이, 빈말도."

"아니, 빈말이 아니라 기억보다 더 젊어 보여. 처음 봤을 띠], 그래서 환 상인 줄 알았다니까."

"스승님도 참."

"그런데 난. 쭈글쭈글한 늙은이잖아."

"뭘 그런 걸 걱정해요? 스승님도 얼 마든지 젊어질 수 있으니까."

덜컥.

문이 열리고 시에라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들, 들었니?"

"뭐…."

"늙은이들이 주책이지?"

"아니."

에른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두 사람이 이런 사이일 것이라고 짐 작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아무래도 느낌이 다르다.

"이제 알겠네."

"역노화 마법. 베모스 님 때문에 그토

록 매달렸던 거구나. 레퀴엠에 갇혀 있 는 동안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

"응…. 폭삭 늙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 O "

에른은 시에라의 보랏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수줍은 듯한, 그러나 앞으로에 대한 기대로 반짝이는.

'시에라는 목표를 이루었군.'

새삼 깨닫게 된다.

남부의 광녀라 불린 시에라.

그녀가 저질러 온 기행은….

물론 뒤틀린 성격 탓인 것도 있고, 왕족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마탑 주라는 지위를 믿은 것도 있지만.

결국은 대부분이 베모스를 다시 만 나기 위함이었음을.

'20년을 직진한 끝에...

뭐라고 해야 할까.

시에라라서 가능한 순정이라고 생각하 면서도, 베모스가 그녀에게 어떤 존재 이기에 그런 험난한 길을 택한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에른은 어떻게 생각해?"

" 뭘?"

"사제 간이 그렇게나 이상해? 막 꺼 림칙하고 그래?"

"음, 전혀? 내가 팍팍 밀어줄게."

"고, 고마워."

"고마울 것까진…. 사실 뭘 어떻게 밀어줄 수 있는지 모르겠거든."

시에라가 = 내리깔며 몸을 꼬았다.

"꼭 그거뿐만이 아니더라도 다. 네가 아니었으면 난...

생략한 말뜻은 에른이 더 잘 안다.

전생의 그녀는 쓰디쓴 실패를 맛보 았으니까.

'나만큼은 아니지만….'

[영웅의 증발]이 일어났고, 아르엘도 와의 대립 후 처참한 패배.

그 뒤로 10여 년이 또 흘렀고, 그쯤 해서 에른은 죽임을 당해 이후의 일 에 대해선 모른다.

'아마 잘 되지 않았겠지.'

시에라가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고 해도, 혼자서 세븐 아이즈 여섯을 상

대하고… 또 베모스를 무사히 구출했 다 쳐도 관리자까지 처치할 수는 없 었을 테니까.

애초에, 그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였 으면 세븐 아이즈에 의해 조기에 '배 제'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에른은 그녀에게 실현 불가능한 꿈 을 현실로 이루어 준 셈이었다.

여기까지 안다면 훠〜 얼씬 고마워하 고 매일 절을 해도 모자란다만.

시에라는 그 사실을 모르니.

그래도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전달 되어 왔다.

"고마워… 전부 다. 네 미식안도, 뭔 진 모르겠지만 그 이상한 능력도. 덕 분에 스승님과 재회할 수 있었고...

"나야말로 고맙지. 시에라가 레퀴엠 을 양보하지 않았으면 아버지께선 돌 아가셨을 테니까."

"그건 음…. 널 위해서라기보단."

"뭐, 결과가 중요한 거 아니겠어?"

"그래. 아무튼 다 잘 끝났으니 잘 된 거야."

그녀 말대로 되었다면 좋았으련만.

다 끝난 것만은 아니었다.

얼마 뒤.

일행은 1층 응접실에 모였다.

에른, 레바단, 사리, 시에라, 베모스 가 멀찍이 둘러앉았고.

안쪽에 선 것은 아리엘.

그녀는 윤기를 회복한 은발을 뒤로 질끈 묶은 수수한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온몸에서 빛이 나는.

하지만 왜인지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준비됐어?"

에른의 말에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 였다.

각오를 다진 듯한.

결연한 눈빛.

"그럼…."

에른은 인벤토리에서 못생긴 인형을 하나씩 꺼내 아리엘의 주위에 늘어놓 았다.

이걸로 아르엘도를 낚은 적 있는, 맹 세의 대가를 대신 치러주는 [대속인

형] 이다.

아리엘이 자신들보다 많은 것을 안 다는 건 분명했다.

존재조차 몰랐던 '관리자'가 불사의 몸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 었고.

'영생관에 수백 년을 갇혀 있던 엘 프…. 관계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 잖아?'

아리엘은 자신을 반균형주의자로 정 의하면서, 관리자와 세븐 아이즈식의 균형 유지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음을 확실히 하면서도.

그녀만이 아는 사실을 털어놓길 꺼 렸다.

"왜, 아직도 우리가 믿음이 안 가?"

"그건 아니야. 관리자까지 죽였으면

믿어야지. 다만…."

"다만?"

"말하지 않기로 맹세를 한 게 있어 서. 마나에 대고 한 맹세야. "

"맹세라. 그거 우회할 방법이 있거 든?"

실제로 대속인형의 효과를 보여 주 는 등, 거의 한 주 가까이 설득한 다

음에야 겨우 그녀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었고.

바로 오늘이 아리엘의 얘기를 듣기 로 한 날이었다.

"흠흠."

아리엘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우선 내 소개부터 할게. 알다시피 내 이름은 아리엘이고, 보다시피 엘프지?"

베모스가 손을 들었다.

"혹시 출신이?"

"대수림."

"순혈 중의 순혈이군요…! 혹시 나 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 봐도?"

"...300살이 넘었다고만 해 두지."

에른의 의문.

"영생관에 갇힌 기간은 뺀 거아r

"물론. 그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

"어...

모두 숙연해졌다.

무슨 달밤에 내려온 여신처럼 생겨 갖곤 300살이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나이, 거기에 에른의 전생을 더해도.

여기에 사리까지.

알 상태로 비고에서 방치된 기간을 쳐준다고 해도 아리엘에겐 미치지 못 한다.

그런데 이 300살이란 나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레바단이 짚어냈다.

"인간의 시대로 접어들 즈음이군요."

"그래. 아직 관리자들이 인간 마법사 들을 도구로 사용하기 전이지."

대강 그림이 그려진다.

"아!"

시에라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왠지 뒷내용을 알 것 같은데? 그땐 엘프가 인간보다 대륙에 더 큰 영향 력을 행사할 때였지. 엘프들을 모아서 세븐 아이즈와 똑같은 짓을 시켰구 나? 그 관리자란 놈들이."

"...맞아. 난 균형자가 되라는 제안 을 거부했고 그 대가로 레퀴엠에 갇 히게 되었지."

"왜 안 죽은 건데?"

"그건… 말할 수 없어."

시에라가 묘한 눈으로 그녀를 살핀다.

"수상한데…. 왜 말을 못 하지? 레퀴 엠 처분은 굉장히 이례적인 배제 방 식이거든? 회원이었던 적이 있거나 회원의 특별한 요청이 있어야만 흐}지. 너도 회원이었던 건?"

"그럴 리가! 나, 난 균형주의에 찬성 한 적, 단 한 순간도 없어!"

"그럼 어째서?"

"그, 그 당시의 관리자가 날 사모했

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펑!

시에라의 반문과 함께, 대속인형 하 나가 뱃속의 솜을 드러내며 터져 버 렸다.

"아니… 말이 됐었네. 겨우 그딴 걸 로 마나의 맹세를 한다고?"

"발설하지 않기로 목숨을 걸고 맹세 하면 영생관에 넣어 주겠다고 해서.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아리엘은 신기한 듯 대속인형의 잔

해를 보았다.

"이게 정말 되는구나…."

"의문점이라면 나도."

아리엘이 시선을 마주쳐 오자 에른 이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우린 손속을 나눠 봤잖아?"

"그랬지."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영웅급도 간당간당해 보였단 말이지. 근데 균형 자라고 했던가… 그거 하기에는 역량

이 좀 부족하지 않나?"

"나... 난."

아리엘의 얼굴이 빨개졌다.

"영생관에서 갓 나왔을 때였잖아. 컨 디션이 나빠서 그랬어. 원래는 전설급 정도는 되거든? 무슨 영웅급!"

"엘프라 그런지 회복력 엄청나던데. 몸도 전혀 굳은 것 같지 않았고. 컨디 셔 안이으 조 "

l_L 1브 I느 !— T그 .

"...아무튼 그날은 그랬어. 나중에 제대로 상대해 줄 테니까."

"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더 중요한 질문들이 남아 있어서.

"관리자에 대해서 말해 봐."

아리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대강은 눈치 채고 있을 거야. 균형 주의라는, 이해할 수 없는 이념을 숭 상하는 초월자들."

"그놈들은 몇이나 되지? 그 머리 붉은 놈은 그중에서 어느 정도 수준이고?"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죽은 관리자 를 빼도… 열 명은 넘을 거야. 섬에서 봤던 관리자는, 잘은 모르지만 평균

정도이지 않을까."

서걱!

대속인형의 잘린 머리가 떨어졌다.

이것도 진실.

최소한, 아리엘은 그녀가 아는 그대 로를 얘기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었다.

8서클이 평균에 불과한 집단이 있다니.

"그 정도면 제국도 무너뜨리겠… 아 니 마음만 먹으면 대륙 정벌도 하겠 네. 그런 놈들이 왜 굳이 세븐 아이즈 를 통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지?"

"이것도 잘은 모르지만…. 관리자들이 두려워하는 게 있어. 그것 때문에 대리인을 내세워서 대신 활동하게 하 는 거야."

사아아아!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바닥에서 솟아 나온 희끄무 레한 손길들이 대속인형들을 휘감아 왔다.

아르엘도의 생명력을 죄다 빨아 간 그것이다.

시에라가 베모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말했던 거예요. 뭔지 알겠 어요?"

"글쎄…. 나도 이런 건 처음 보}. 고 대의 맹세인가?"

에른이 물었다.

"그러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런 미친 집단을 적으로 돌렸으니… 이거 난감한데."

"관리자는 단독으로 행동하거든. 관 리 책임이 없을 때는 어디서 뭘 하는 지 아무도 몰라. 애초에 서로 신경도 안 쓰고."

"8서클이란 자신감? 하긴 자신할 만 도 하지만."

"정말 위험해지면 동료들을 부르긴 하겠지. 근데 그러기도 전에 아공간으 로 빨려들어 갔으니까."

"그 말은?"

"당분간은, 다음 관리자 차례가 오기 전까지는 괜찮을 거야. 아마도…."

"그게 언제지?"

아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그게 몇 년일지, 몇 달 일지, 아니면 며칠 뒤일지."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분명한 건, 다음 관리자가 사 태를 파악하고 나면 우린 무사하기 어 렵다는 거야. 동료가 죽었으니 대륙을 다 뒤져서라도 복수하려고 하겠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대륙 최강 파티를 자부했고, 8서클 을 어렵지 않게 처치하면서 자부심이 하늘을 찔러 갔지만.

전설급-7서클 정도인 자신들이 관리 자 집단을 상대할 수 있을까.

'계란으로 바위 치기지.'

'관리자가 둘만 있었어도 죽는 건 우 리였을 거야.'

'아직도 한참 부족하구나.'

에른만 생각이 달랐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하겠네.'

다들 침묵만 지키는 가운데.

그래도 해야 할 질문은 해야 한다.

"관리자는 뭐지? 그 머리 빨간 놈이 말한 대로 인간이 아닌 건 맞은 것 같아. 정말 신족인가?"

에른의 말에 아리엘이 피식 웃었다.

"신이라…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럼?"

"그건… 말 못 해."

"왜, 그것도 맹세했나? 말하지 않기로?"

끄덕....

"아직 대속인형 남아 있잖아. 효과 확실한 거 봤고. 왜 그래?"

"이 맹세의 대가는, 인형이 대신 받 아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야. 그래서 말할 수 없어. 이것만은."

무슨 맹세를, 대체 몇 개나 한 건지.

뭐, 놈들이 무엇인지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제일 중요한 건...

죽어가는 관리자가 마나 리액터를 보 고 한 말, 이해할 수 없어 한 반응들….

에른이 입을 열었다.

"들어본 적 있어? 교류자라는 말."

[187 화]

덜커덕, 덜커덕.

넓은 가도 위를 마차 한 대가 질주 해 가고 있었다.

흐끄흐끄...

S X그 S T그 .

마부는 자꾸만 뒤로 돌아가는 시선 을 억제하지 못했다.

마차에 탄 승객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미모 때문에.

'마차와 함께한 인생도 어언 30년. 수많은 사람을 태워 왔지만, 저런 분 은 처음이야….'

지금은 저잣거리에 마차를 세워 두 고, 뜨내기들이나 태우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평생의 자랑거리.

한때는 귀족가에 고용되어 일한 적 이 있었다.

그때 뵈었던 레이디들… 지체 높은 귀부인들.

어찌나 사랑스럽고 기품이 넘치는지

그분들이 탄 마차를 몬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벅차오르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좋은 추억들을 삽시간에 빛바랜 기억으로 만들어 버리는.

비교하는 마음을 품는 것 자체가 실 례이고 모독이라고 느껴질 정도인, 차원이 다른 미녀였다.

휙.

은발의 미녀가 금발 미소년으로 바 뀌었다.

'아.…"

이 승객도 감탄이 나오는 외모였지만. 남자한테는 관심이 없어서 그냥 잘 깎

인 조각상을 감상하는 느낌일 뿐인데.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는 그때.

찌릿!

눈총과 함께.

"이봐요. 운전이나 똑바로 하죠?"

따뜻해 보이는 호박색 눈 안에서,

날카로움이 번득인다.

절로 등골이 차갑게 얼어붙는.

'무슨 저런 눈이...

"내 말 안 들려요?"

"네... 넵!"

마부는 번득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 았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눈빛이 어서 운전에만 집중했다.

"흐흠."

아리엘이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 으며 이쪽을 힐끔힐끔 보았다.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는 에른.

"...뭘 그렇게 봐?"

"마부가 자꾸 쳐다보는 게 거슬렸구 나? 자리까지 바꾸고."

"한눈 팔다 사고 내서 사이좋게 목 부러지고 싶진 않으니까."

"절벽으로 직진해도 털끝 하나 안 다칠 거면서."

뭐, 그 말은 맞긴 하다.

에른은 반박하는 대신 미간을 오므 렸다.

아리엘.

그녀는 너무 튄다.

그냥 튀는 정도가 아니라 흘끗 보기 만 해도 사람을 홀리는 수준이다.

주머니 속의 송곳 같은, 한밤중의 횃불 같은, 감출 수 없는 아름다움.

마법으로 뾰족한 귀를 숨기고, 인식 왜곡 아티팩트까지 걸고 다니게 해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미모 자체는 전혀 퇴색되 지 않아서.

'이 엘프를 데리고 나온 게 잘한 일 일까'?'

*

"교류자? 뭔지 모르겠어."

"정말이지?"

"숲의 종족은 거짓말 못 해. 아는데 말하기 싫었으면 대답을 회피했겠지. 말하기 싫다고 하거나."

"관리자가 비슷한 얘기 한 적 없어? 교류자, 차원거래자, 차원거래."

"전혀…. 전부 처음 들어보는 말이야."

아리엘은 딱 잘라 대답했다.

이렇게 되면….

'교류자는 있는 건가, 없는 건가?'

현재로선 알 수 없다는 결론만.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일행의 앞날 또한.

"그럼... 계속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네요. 슬슬 돌아가셔야죠? 스틸가드로."

에른의 말에 레바단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얘기는… 내일로 미루도록 흐}자."

"왜 내일?"

이미 무인도에서 충분히 많은 시간 을 보낸 것 같은데.

하루라도 빨리 귀환해야 하지 않나.

"...머릿속을 좀 정리해야겠다. 아 침까지 기다려 주겠니?"

"음, 그러시죠."

아버지도 자신만큼 혼란스럽긴 할 터 이다.

에른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며 넘어갔다.

어차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

*

다음 날 아침.

인기척에 눈 떠보니 아리엘이 침대 맡에 걸터앉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냐?"

"자는 모습 구경."

m

"농담이야. 레바단이 불러. 할 말 있

다고."

"아침부터?"

응접실로 나가자 레바단을 비롯, 베 모스와 시에라도 에른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구나."

레바단은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한 뒤로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무겁기만 한 공기.

"뭐에요? 중대 발표라도 할 것만 같 은 분위기는."

"중대 발표라면 중대 발표지. 에른….

어젯밤에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2"

"아무래도 난, 스틸가드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구나."

"예?"

어젯밤부터 뭔가 쎄하더라니.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다.

중대 발표가 아니라 거의 폭탄선언!

어째서 이런 결정을?

레바단이 이유를 설명했다.

"균형주의자인 관리자 조직이 있고

그들 개개인은 우리 모두를 합친 것 만큼 강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아리엘이 목소리를 높였다.

"몇 번을 말해야 하지? 숲의 종족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음… 뭐. 사실일 거라고 봅니다. 관 리자를 직접 봤고, 맞붙어 보기도 했 고, 어제 본 대속인형들도. 그런 강력 한 맹세를 꾸며낸 이야기에다 하지는 않겠지요."

레바단이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다음 관리자가 나타난다

면…. 놈들은 레퀴엠에 갇힌 천재들 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지? 세븐 아이 즈에 의해 배제당한 내가 버젓이 영 주직을 수행하고 있는 걸 아는 순간, 최우선 타깃은 내가 될 것이고. 그때 스틸가드가 입을 타격은...

신족을 자처하는 놈들이다.

뭐, 실은 동료가 죽은 것에 불과하 지만… 제정신들은 아닌 것 같으니.

신살(神殺)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 마! 참혹하게!

...이딴 식으로 나올 게 뻔했다.

신화급-8서클은 국가도 통제할 수 없는 레벨이다.

그들이 여럿 몰려온다면.

스틸가드가 잿더미가 되어 버린 광 경, 몰살의 현장....

이보다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기 어 렵다.

"그래서, 난 당분간은 실종 상태인 걸로, 이 섬에 남아 있는 게 좋을 거 같다."

"아뇨!"

이성적으론, 아버지의 판단이 옳다

는 걸 안다.

그러나 에른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면서.

"마, 말도 안 돼요. 아버지가 안 계 시는 스틸가드…. 있을 수 없어요!"

"스틸가드가 있기에 내가 있는 거지 내가 있어 스틸가드가 있는 게 아니다."

'모르셔서 그래요! 영웅의 증발 이후 스틸가드가 어떻게 망가져 갔는지…!'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

그런데 속마음이 전달된 것일까?

레바단이 에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 았다.

신뢰를 담뿍 담은 눈으로.

"그리고 네가 있지 않으냐."

"...무, 무슨 말씀이세요?"

"스틸가드를 부탁하마. 내가 없는 동안 영지를 다스려 줬으면 한다."

"제가요? 전 막내인데…. 이번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꼭 날 구해줘서만은 아니다. 지금 스틸가드는 비상 상황이지. 이럴 때 의 최우선 자질은 정통성보다는 능력

이라고 본다."

레바단이 말을 덧붙였다.

"검술뿐만이 아니야. 차원거래자이기 때문만도 아니고. 내가 높이 평가하 는 건 정신적인 부분이지."

여기에는 다들 동의했다.

특히 시에라.

"잔인무도하지 않으면 군주가 못 된 다고 했던가. 딱이야, 에른 성격이면."

베모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갓 깨어나서 무방비한 대마 법사들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 날려대

는 것만 봐도. 이 친구 범상치 않다 고 생각하긴 했지. 나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레바단이 단어를 골랐다.

"불굴의 의지, 빠른 판단력, 물론 때 로는 냉혹하다고 느낄 결정도 내려야 하지. 영주의 자질이다."

"아...

에른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피부 결을 타고 싸르르 돋는 소름.

공포로? 두려움으로?

아니, 이 전율은 감격이었다.

전생에도 영주직에 앉은 적은 있지만.

영웅의 증발 이후 형들이 죽어서 계 승 순서가 돌아온 것뿐이니.

이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인정받았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결 정을 지지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애써 가라앉히며.

"그래도 반대에요, 전."

"왜지?"

"시에라는 세븐 아이즈의 유일한 생 존자고… 베모스 님도 나바로로 돌아 가면 엄청 화제가 되겠죠. 20년 만에 돌아온 대마법사인데. 아버지 혼자 섬에 남는다고 추적이 안 되겠어요?"

"그래서 말인데."

시에라가 베모스 쪽으로 꼭 붙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 베모스.

"우리도 같이 남기로 했어."

아니, 어제는 자기 마음 못 알아주

니 뭐니 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이런 급진전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시에라가 배시시 웃었다.

"스승님은 우리 관계가 세인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지. 근데 여기 살면 남의 눈 따위 가 무슨 상관이야? 그렇죠?"

"뭐...

그렇다면 할 말이 없어진다.

두 사람, 내 눈에 훍이 들어가기 전 에는 안 돼!

...하고 머리에 흰 띠 매고 드러눕 기에는.

'내가 왜 밀어준다고 했었지?'

에른은 어제 그렇게 말한 걸 철회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논리.

"다음 관리자가 당장 며칠 뒤에 나 타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몇 년, 아니 거의 10년 가까이 될지도 모르 는 거 아니에요? 관리자는 10년 단위 로 바뀐다면서? 그렇지, 아리엘?"

"응. 거의 10년인데, 가끔은 길어질

때도 있다고 들었어."

"그럼 그 재난이 10년도 더 지난 뒤 에나 벌어질 수도 있겠네요. 그때까지 힘을 키우면서 준비하면 되잖아요. 그 동안 신분을 숨기면서, 이런 외딴 곳에 서 살아야 한다니… 안 될 말이에요."

"에른."

아버지의 손이 어깨로 내려왔다.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나는 스틸가드를 위험으로부터 보 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당장 내일

닥칠지도 모르는 재난임을 아는 이상, 그렇게는 할 수 없어."

"모습만 드러내지 않으시면 되는 거 잖아요. 변신 마법도 있구요. 스틸가드에 계셔도 돼요."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 수록 좋다. 그리고 전설급은, 어떻게 든 티가 날 수밖에 없어."

"나도 기약도 없이 숨어 살고 싶지는 않구나. 그러니, 신화급에 오르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두 분 대마법사는 8 서클을 목표로 하겠다고 하시고."

"그래도 뭔가 방법이…."

"밤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이 섬만큼 좋은 수련 장소도 없는 것 같고. 우리 세 사람이 목표를 이루면, 관리자들 상대로 어느 정도 대응이 되겠지. 그때가 되면 세상으로 나가 면 된다."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한 채로 며칠 이 지났다.

"뀨에에에에엥!"

해변에 앉아 사리가 파도 타고 노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아리엘이 곁에 와서 앉는다.

"또 왜?"

"긴히 부탁할 게 있어서."

"음?"

여기서는, 걱정할 것도 부족할 것도 없다.

바다로 둘러싸인, 다섯 명과 사리 외에는 아무도 없는 아름다운 섬.

필요한 물자는 에른이 차원거래로 무지하게 쌓아 놔서.

어떻게 보면 모든 이들이 꿈꾸는 파 라다이스일지도?

그런데 부탁할 게 있다니.

그냥 부탁도 아니고 긴히 부탁을?

"뭐길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섬에서 나 갈 거잖아."

"그래야지."

"날 데려가 줘. 같이 가고 싶어."

"뭐, 그러지."

w..2"

너무도 선선히 대답하자 아리엘이 놀란 눈을 마주쳐 온다.

"왜, 거절하기를 바랐나?"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지. 앗… 눈, 눈이?"

"내 눈이 왜."

"안쪽에서 불꽃같은 거b-."

"아, 별거 아니야."

"이게 그 차원거래?"

에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메 시지를 보았다.

[흡수가 완료되었습니다.]

[오기조원 완성(아이템).]

[검강 응용, 그리고 그 너머의 경지

까지 (지식).]

[신화경의 실마리(지식).]

'결국 이렇게 되는군. 가능할지는 모 르겠지만, 어떻게든 대신 복수해 준 다… 조검휘.'

약속을 저버릴 생각은 없지만, 그에 게 미안해졌다.

그를 위한 흡수가 아니라 지극히 사

적이고 자신만을 위한 흡수이기에.

팟.

에른이 왼쪽 눈을 감았다 뜨자 붉은 빛이 사라졌다.

"...어디 가?"

"아버지한테."

"또 설득하려고?"

"아니. 그건 진작에 포기했어."

"그럼?"

"지금까지 아버지한테는 배우기만 했는데...

에른이 씩 웃어 보였다.

"이번에는 한 수 가르쳐 드리려고."

*

덜컹, 덜컹….

마부가 집중하고 앞만 봐서 그런지 마차의 덜컹거림이 체감될 정도로 줄 어들었다.

"...그래서 누가 이긴 거야? 전설 급 부자 대결은."

"대결이 아니라니까. 깨달음을 나눈 것뿐이야."

"깨달음 두 번 나눴다간 섬 반 토막 냈겠네. 그렇게 요란하게 겨루고도 대결이 아니라고?"

"아니지. 영웅급 턱걸이가 알면 뭘 얼마나 알겠나."

에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니 아 리엘이 발끈했다.

"나 그보단 세거든? 왜 맨날 영웅급 이래? 그것도 턱걸이?!"

"영응급도 대단한 건 맞아. 턱걸이라

도 일국에서 대여섯 손가락 안에는 넉 넉히 꼽히니까. 제국 정도만 빼면?"

"아니라니까! 확인해 볼래?"

아리엘은 정말 억울한 표정이었다.

그 실력으로 어떻게 관리자들한테 스카우트 될 수 있었나…?

에른이 제기한 의문을 마음에 담고 있었는지 격한 반응을 보인다.

"확인?"

"그래. 붙어 보면 알 거 아니야."

"굳이 확인까지야."

"이니! 이건 확실히 해야 해." 그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밤하늘에 휘영청 뜬 보름달.

"타이밍도 딱 맞네. 마차 세워…!"

[188 화]

"...세우라굽쇼?"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멀었는데?

마부는 재빨리 감속하고는 뒤돌아서 아리엘을 봤다.

"여기서 요?"

"그럼!"

"호, 혹시 말인데요."

"소... 소변이 급하셔서 그런 거라면."

"무슨 그런 질문을? 실례잖아!"

"다, 다른 뜻이 아니라요. 승객분들이 세우라고 하시면 대부분 그 이유라서."

"아."

"뒤쪽에 요강 있습니다. 가림막도 칠 수 있으니까 부끄러워하실 거 없구요."

"그런... 거 아니니까 세워 줘."

"...이런 데서 정차하면 위험한데요."

달빛이 커튼처럼 내리비치고 있다고 는 해도 엄연히 한밤중이다.

게다가 주위는 허허벌판.

강도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고 굶주림에 정신줄 놓은 몬스터가 어슬 렁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로서는 말리고 싶은데.

하지만 아리엘의 표정은 단호하기만 하다.

하는 수 없이.

"워워워워…."

푸르르르!

말이 투레질하며 멈춰 섰다.

"오늘, 날 잡았어. 에른…. 내려!"

'진짜 숨겨둔 뭐가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자신만만할 수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도 마부석에서 나왔다.

에른이 그에게 말했다.

"먼저 떠나도 좋아요."

"예...?"

마부는 엄청 수상하단 눈으로 에른 을 훑어보았다.

"이런 으슥한 데서 뭘 하시려고?"

"그건 알 필요 없고. 확실히 위험해 보이긴 해서. 걱정되면 가도 되니까요."

"마을까지 한참 남았는데…. 저, 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부의 눈이 몽롱해졌다.

'왜 이래?'

그의 시선을 쫓으니 달빛 아래 선 아리엘이 눈에 들어왔다.

마부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기, 공자님. 이게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어떻게 들릴 건진 들어 봐야 알겠

는데요."

"저, 저분… 혹시 여신님입니까?"

"신성모독 하시는 거예요?"

"아뇨...! 그럴 리가! 진짜로 인간계 구경하러 내려오신 거 아닌가 해서."

그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냐 는 듯이 쳐다보자 마부가 변명했다.

"도,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 각되지 않아서...

"제 일행이 여신이라고 치죠. 그럼 난 뭐일 거 같은데요?"

"...여신님의 시종?"

'?"

*

가도 근처의 공터.

주위에 뭐가 없기도 하고 사리에게 경계를 부탁해 둬서, 누가 볼 염려는 없었다.

A A A스 |

——— 어,.

"안 봐줄 테니까!"

아리엘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 왔다.

달빛을 받으며 휘날리는 은발과.

양손에 만들어 낸 은빛으로 이루어 진 칼날.

겉옷을 벗은 그녀는 검은 탱크톱에 편한 쇼츠를 입고 있었다.

신발도 굽이 낮은 부츠라 전투에 방해 안 되는.

아무래도 여신보다는 여전사에 더 가까운 차림인데.

'마부가 넋이 나갈 만하긴 해. 이러 니까 전쟁의 여신 같긴 하군.'

에른은 잡생각을 하면서 뇌정검으로

아리엘의 공격을 막아 냈다.

팅, 팅! 챙- 채앵-!

아리엘이 생성한 은빛 기운은 오러 가 아닌 전혀 다른 종류였다.

그게 특이하긴 하다만, 그것뿐이라 는 걸 알고 있어서 긴장감이 별로 없 었다.

자연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운은 강 기, 대륙 용어로는 오러 블레이드.

특히 무기의 도움까지 받아 더욱 날카롭고 튼튼한 검강.

정면으로 맞부딪히고도 견뎌냈으니

까 대단하다면 대단하지만.

버티는 그 이상이 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무딘 황동검으로 잘 제련된 철검을 상대하는 정도?

몇 번의 경합이 있은 뒤, 에른은 뒤 로 한발 물러나면서 내력을 끌어올리 고, 양 손바닥을 통해 발출했다.

월영장!

"흐앗!"

낯익은 동작에 아리엘이 다급히 반 응했다.

그녀 앞으로 은막 같은 방어벽이 생성되었고.

'어디.…"

저번에는 월영장에 박살 났던 은벽 이다.

그런데 이번엔.

'...버텼어?'

아니, 버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데 미지를 안 입은 것 같다.

강력한 장력을 맞았는데도.

벽은 여전히 계란 껍질처럼 매끈하 기만 했다.

실금조차 보이지 않는.

'뭐지?'

기사들 중에는 핑계쟁이들이 참 많다.

대련과 대결이 일상적인 직업군이 고, 패배는 평판과 자존심에 깊은 스 크래치를 남기는 것이라.

핑계쟁이로 소문나면 당연히 평판은 회복되기는커녕 곤두박질을 치지만, 그 래도 알량한 자존심은 지킬 수 있다.

"검에 기름칠을 했는데 손잡이에도 묻는 바람에 미끄러진 걸 어떡해?"

"저녁에 싸우는 게 아니었다니까! 난 아침형 인간이라고!"

"검술 스타일이 상성이라서..…

"엊그제 먹은 게 얹혀서..…

"오늘 습도가 높아서...

"구름이 내 별자리를 가려서..…

이런 변명들.

당연히 컨디션이 나빠서 졌다는 아 리엘의 말도 웃으면서 흘려 넘겼었다.

'핑계가 아니었어?'

진지해진 에른의 얼굴을 보고 아리 엘이 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놀랐어? 아직 놀라긴 이른데."

슈우우욱!

은빛 칼날이 길게 늘.어지더니 은빛 창으로 변했다.

그리고 왼손에는 그녀의 반신을 가 리는 은색 방패가.

"이제 영웅급 턱걸이라곤 못하겠지?"

챙! 챙! 채채채챙!

'엘프는 거짓말을 못 한다더니 진짠가?'

영생관에서 갓 나왔을 때보다 훨씬 강했다.

이상할 정도로.

아리엘은 리치의 이점을 살려 창끝 으로 급소를 노려 오고, 검강으로 대 응하면 방패를 들어 막는다.

각각이 영웅급이 최대한 끌어올린 오러 블레이드, 오러 실드의 파괴력 과 방어력에 비할 만해서.

빈틈이라곤 보이지 않는데.

영웅급일 때였으면, 검술만으로는 고전을 면치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설급 수준에서는 어떨까?'

天스,A A 스I

푸른 강기가 날카로운 가시를 세웠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쩌적, 쩌저저억-!

뇌전이 팍하고 튈 때마다 에른의 변형 강기가 아리엘의 방패에 깊은 금을 새겼다.

얼마 안 가.

와장창!

방패가 부서지자 아리엘이 방패를

또 만들었다.

"얼마든지 생성할 수 있거든!"

"나도 얼마든지 부술 수 있거든?"

은빛 기운의 정체는 여전히 뭔지 모르겠지만, 한번 박살 내 보니 감이 잡혔다.

무엇이 취약점인지.

쐐애액!

에른이 검강을 가시 박힌 채찍처럼 변형해 휘두르니 은빛 방어막이 속수 무책으로 깨져 나갔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피융! 피융!

왼손으로 월영지를 쏘아대자 아리엘 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이때부터는 공수의 완벽함이라는 것 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은창으로 월영지를 튕기면서 에른이 방패를 부수면 만들어 내고 부수면 만들어 내고....

어떻게든 막는 데에만 급급할 뿐인 데.

'아무리 전설급이라도 보름날 밤이 잖아... 이게 말이 돼?'

아리엘은 원망스러운 듯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소 짓는 둥근 달.

괜히 믿어 갖곤 풍선 같은 자신감 만 잔뜩 들어차지 않았나.

패배를 직감했지만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큰소리 뻥뻥 쳐 놓은 게 있는데!

아리엘이 입술을 깨물자 눈부신 은 빛이 그녀의 전신을 덮었다.

"아직 안 끝났어!"

그녀의 양손에서 은빛 구체가 쏘아

져 나왔다.

"이크!"

에른이 웃으면서 물러나자 공간이 생겼다.

퍼엉

곧 폭발이 일어났고.

'간다!'

급가속해 에른에게로 파고드는 아리엘.

곧이어 치솟는 은빛!

챙!

에른이 가볍게 쳐내자 아리엘이 피

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최후의 일격치고는 너무 매가리가 없지 않나?

의아해하면서 그녀를 살피는데 아리 엘이 웃음을 보였다.

"헤헤… 이건 쉽지 않을걸?"

"음?"

이상함을 느낀 에른이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에서 은빛 강침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음!"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르면서 시야

가 좁아졌다.

쓸데없는 풍경은 전부 쳐내고 중요 한 장면만.

극도의 집중력이 사고를 빠르게 회 전시키고 있다.

'어떻게 할까…. 호신강기? 음… 하 나하나가 바늘처럼 가늘고 날카로워. 찢어질 수도 있겠다. 이건 아니야.'

영웅급-절정은 오러-검기 마스터라 고는 해도 강기공에 있어선 초짜에 불과하다.

강력한 힘을 손에 넣고, 그 힘에 취

한 단계일 뿐.

물론 그것도 얻지 못해 평생을 염 원하는 기사들이 수두룩하긴 하다만, 전설급-초절정에 비하면 낮은 수준 인 것은 사실이었다.

현재 에른은 강기의 디테일을 들여 다보는 한 차원 높은 경지.

'강기를 얇고 넓게 펴면 될 것 같은 데. 단번에 쓸어 담아서 분리수거해 버리면.'

특히나 신화경의 실마리를 쥐었던 초절정무인, 조검휘의 지식을 얻은 지금은.

전설급 중에서도 특히나 좋은 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야.

'충분하겠네. 문제는.'

에른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아리엘도 범위 안이라는 것.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 참…!"

에른은 어이없어하며 내력을 세 갈 래로 나눴다.

반으론 은침들을 쓸어 내고, 나머지

반의 대부분은 호신강기를 두텁게 두 르는 데에.

남은 내력은 양발의 용천혈로 쏘아 보내며 아리엘 앞에 나타났다.

"..으응?"

"엎드려!"

그녀를 넘어뜨리고 등으로 강침들을 받아 냈다.

"아, 안 돼!"

아리엘이 엄청 당황하며 품속에서 바둥거린다.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왜 이러나 싶다.

300살이 넘었다면서 스킨십 한번 안 해봤나?

"놔..!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겨우 벗어난 아리엘이 황급히 에른 의 등을 살폈다.

그런데 옷에 숭숭 구멍이 뚫리긴 했어도, 신체가 상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놀란 은색 눈동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무렇지도 않네?"

"아무렇지 않긴. 간만에 마음에 드 는 옷이었는데. 못 입게 됐잖아."

"농, 농담할 기분 아니야! 오러 실 드를 찢어발기는 기술인데…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는 거지?"

"그러니까 이게 전설급 클래스라고."

"전설급도 그렇게 아무런 타격이 없 을 순 없어. 영생관에 오래 갇혀 있 었더니 감이 무뎌진 게 분명해. 운이 죻았던 거야."

"...마음대로 생각해라."

에른은 곧이 설명해 주지 않았다.

1계에선 호신강기를 깨뜨리기 위한 기술이 많이 개발된 만큼, 그에 대응 해 호신강기 또한 발전에 발전을 거 듭했음을.

라제칸의 미스터리 블레이드는 가고 없지만, 유일한 후계자인 자신이 남 았음을.

"말이 안 되는 건 그쪽이지. 무슨 대결에 목숨 걸었어? 나 아니었으면 온몸에 바람구멍 났어."

«..2"

"나한테 목숨 빚진 줄 알아. 그리고 내상 입은 것 같던데… 이거."

에른이 인벤토리에서 내상약을 꺼내 주자 아리엘은 넙죽 받아먹곤 해명했다.

"위험을 무릅써준 건 고마워. 너 은 근 괜찮은 애였구나?"

"은근..?"

"...그래, 꽤 괜찮지. 나였어도 그 런 판단을 내리긴 어려웠을 거야. 근 데 너무 무모했어. 결과적으로, 목숨 을 구해준 것도 아니었고."

"아니긴. 그러고 보니까 영생관에서 꺼내준 것도 나네? 나중에 두 배로 받아야겠다."

"아니라니까. 봐!"

아리엘이 은빛 칼날을 만들어 손등 을 그어 보였다.

웬 자해를…?

제지할까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는 걸 깨달았다.

"...아무렇지도 않네?"

"그래."

아리엘의 손등은 하얗고, 푸른 핏줄 이 선연하기만 할 뿐, 그 외에는 전 혀 변화가 없다.

"확실히 오러는 아니군. 처음 봤을

때부터 신기하긴 했어. 그 은빛은 대 체 뭐지?"

"...궁금해?"

"알고 싶긴 하지."

"그럼 이걸로 퉁치자. 옷값이라고 쳐."

"옷값치고는 비싸긴 하군. 뭐, 좋 아."

에른이 기대하며 쳐다보자 아리엘이 흠흠하고 헛기침을 했다.

"사실 난... 대수림에서도 몇 안 되 는 달의 일족이야. 그중에서도 선택

받은 달의 정령사지."

자못 자랑스러운 듯이 턱을 치켜들 어 보이는 그녀.

그런데 에른은 별 반응이 없다.

달의 일족? 달의 정령사?

'...그게 뭔데?'

몰라서 시큰둥한 반응을 불신으로 받아들인 걸까?

아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못 믿는구나? 하긴, 그럴 법도 하 지. 워낙 희귀한 재능이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보여 줘야 믿겠지? 인사할래, 엘루

나?"

에른의 표정이 변했다.

자신과 아리엘, 멀리 떨어져서 망을 보는 사리 외에는 어떠한 기척도 없 는 공터였다.

그런데 아리엘의 뒤에서, 허공에서 생겨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척이 나타 났다.

빼꼼.

손바닥만 한 사람.

흰옷을 입은 소녀가 아리엘의 등에 붙은 채로 고개를 내밀었다.

"꺄아…?"

" 아니...

에른의 잠깐 자기 숨이 멎은 줄도 몰랐다.

'...정령이 원래 이렇게 귀엽게 생 겼었나?'

[189 화]

-뉴미 지트론 : 달의 정령이라…. 이 론상으로는 가능할 수 있죠. 근데 이 게 현실적으로 굉장히 가능성이 떨어 져서 요.

-뉴미 지트론 : 희박하다고 보}야. 정 령이라는 게 뭡니까.

'그 희박한 가능성이 여기 있다니까?'

에른이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꺄+"

엘루나가 방싯거리며 이쪽을 쳐다보 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오밀조밀한 코, 입, 유달리 큰 눈.

통통한 볼살은 멀리서 봤을 땐 보름 달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크림치즈가 생각난다.

'잡아당기면 쭉쭉 늘어날 거 같군…. 얼굴도 하얗고, 머리색도 하얗고, 옷 도 흰 원피스고.'

죄다 달이 연상되기는 한다.

결정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은빛은 오러가 아닌 이상에는 달의 기운이라고밖에는.

-에른 : 정령이라는 게 뭔데?

-뉴미 지트론 : 자연과 생명체의 상 호작용, 그 자체죠.

-뉴미 지트론 : 자연 현상에 생명력 을 부여하는 것은 마나이고, 그렇기에 정령이 생겨나는 거지만. 그 발현 형 태는 생명체들의 관념과 인식 수준에 의해 결정됩니다.

-뉴미 지트론 : 예를 들면, 불이 재

난이고 통제하기 어려운 현상이었을 때의 불의 정령은 위협적인 마수의 형 상으로 나타났다…. 반면 유용한 도구 인 요즘은 대개 불도마뱀의 형태인데. 이게 계속 보다 보면 정들 정도로 귀 엽단 말이죠.

-뉴미 지트론 : 물론 반대 방향으로 영향을 받기도 함니다. 한번 이미지가 도마뱀으로 고정되고 나니까, 신규 정 령사들이 도마뱀 외의 형태를 잘 생각 해 내질 못하거든요. 그래서 상호작용 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럼 엘루나가 엘프들이 생각하는 달 의 이미지라고?'

뭐…. 달은 흔히 태양의 동생, 혹은 자식으로 비유되기도 하니까.

작고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거야 그렇다 치는데.

"꺄아…'?"

엘루나가 살금 다가와 까치발을 들더 니.

'윽…. 흠흠:

에른은 호흡을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 은 척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초롱초롱한 엘루 나의 눈동자.

그녀가 양손을 뻗어 에른의 엄지를 감싼다.

그 보드라운 감촉에 에른의 동공이 와르르 흔들렸다.

'이, 이건... 반칙 아니아7 그리고, 달하 고 귀여운 거 하고 대체 뭔 상관인데?'

두 번째 삶을 살면서 에른은 자기가 아름다움에는 상당한 면역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전생에 워낙 미남미녀들을 많이 만나

봐서 일까?

그들도 사람일 뿐이고, 그 내면은 겉 보기와는 달리 추하기도 하다는 걸 수 도 없이 느껴서.

당장 아리엘만 해도.

마부는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기세로 푹 빠져 있지만, 에른은 별다른 마음 의 동요가 없었다.

그녀의 미모가 정신 나간 수준이라는 거야 볼 때마다 느끼고는 있지만….

그뿐이었다.

그런데.

'귀여운 거엔 면역이 이예 없군. 하 긴 내 전생이...

작고 사랑스러운 것들과는 거리가 먼 삶이지 않았나.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로는 사교계에 서 날렸고, 나이가 들어 스타 자리에 서 밀려난 뒤로는 기사단에 들어가 구 르고 또 굴렀다.

30대에 접어들어선 스틸가드로 돌아 왔고, 차원거래에 빠져 지내다가 암살 당해 죽었다.

어쩐지 유독 사리에게만 마음이 약해 지는 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이게 일관성 있는 성향이었군.'

"캬르르르…!"

엘루나가 자꾸 관심을 보이는 게 불 만인지, 사리가 에른의 어깨에서 내려 와 으르렁거렸다.

"꺄핫!"

쓰담쓰담.

엘루나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어린 고사리보다 더 작은 손으로 사리의 머 리를 쓰다듬었다.

"...肝 엥?"

인간이고 괴수고, 가리지 않는 친화력.

에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달의 정령은 낯을 많이 가린다 고 하지 않았나?"

아리엘이 풋 하고 웃는다.

"이럴 거 같긴 했지…. 진작 소개해

줄걸."

"생각해 보E 달의 정령이 왜 숲의 종 족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달의 일 족을 선택했는지."

"달은 외모지상주의라는 얘긴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고 해 두자.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엘루나가 부끄러 움을 이겨낼 정도의 미모라는 거니까."

« O "

이 얘기를 엘라딘에게 해 주니.

-뉴미 지트론 : 흥미롭군요. 달은 따 지고 보면 개체 아닙니까? 자연 현상 이나 광범위한 물질이 아닌 개체의 정 령이 실재한다니. 그런 건 본 적이 없 는데.

-뉴미 지트론 : 정말 달의 정령이 맞는 겁니까?

-에른 : 맞는 것 같아. 달이 차면 정 령술도 강해지고, 기울면 약해지는 모 양이라.

-뉴미 지트론 : 신기하네….

-에른 : 그쪽은 하이엘프라며. 정령 술에 조예가 깊을 텐데도 몰라?

-뉴미 지트론 : 조예가 깊다고는 할 수 없죠. 재능이 있긴 했는데, 도중에 진로를 틀어서.

아리엘의 정령술.

꽤 괜찮아 보이긴 한다.

원래 에른이 알던 정령술이라는 건.

불과 바람, 얼음과 물 등의 자연계 종류에 한정되어 있어서.

'마법 하위호환 아닌가? 서클만 있으 면 전부 사용할 수 있는데, 굳이 한 우물만 팔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아리엘이 사용하는 달의 기운 은 그런 비판에서 자유로웠다.

얼핏 보면 오러 같으면서도 활용도만 따지자면 훨씬 뛰어나다.

정령사는 스스로 만든 기운에는 영향

받지 않는다는 것도 좋고, 변형도 쉽

고 자유로워서.

게다가 몸 안의 마나 하트나 단전에 서 비롯된 힘이 아니라 하늘의 천체인 달이 빌려주는 것이니.

만약 이것까지 갖춘다면 다섯 번째 무기가 생기는 셈이다.

마나, 내공, 마력, 사령술에 이은 달 의 힘.

'그래도 초하루에 약해지고 보름날 밤에 강해지고… 밤낮과 주기에 따라 강약이 바뀌는 건 별로긴 하군.'

-에른 : 정령에 대한 건 됐고. 내가 말한 건?

-뉴미 지트론 : 아, 구해 왔습니다. 총 3500코인 썼구요.

-에른 : 투자금에서 제하도록 해.

-뉴미 지트론 : 예, 뭐…. 그러지 말 라고 하셔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에른 : ...?

-뉴미 지트론 : 농담입니다.

엘라딘이 부탁한 지식들을 보내왔다.

〈마도공학 개론(지식)〉

〈마도공학 응용(지식)〉

〈마도공학 심화(지식)〉

〈기본 마력역학(지식)〉

〈마도기계 설계 및 제작(지식)〉

〈마법금속에 대한 이해(지식)〉

-에른 : 고마워. 이 정도면 대화에 낄 수 있겠나?

-뉴미 지트론 : 엔지니어로 현역에서 활동해도 될 만하죠. 근데 어차피 공

방에서 알아서 할 건데, 투자자님이 굳이 엔지니어링에 참여하실 필요는….

-에른 : 투자자라고 해서 돈만 대면 그만인 건 아니잖아. 기본 지식은 있 어야지.

-에른 : 우리가 개발하는 게 보통 물 품인가? 개발자들 죽여서라도 어떻게든 4세대를 막아 보려고 하는 정도인데.

-에른 : 나도 도울 수 있는 선에서 는 최대한 돕고 싶어.

-뉴미 지트론 : 아.... >감동

-뉴미 지트론 :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개념 박힌 투자자였네? 최소한 공밀레는 안 당하겠군.)

'지식 흡수하는 거 가지고 감동한다 고?'

투자자들이 쥐뿔 아는 것도 없이 무 리한 요구로 엔지니어들을 마구 갈아 넣는다는 거야 알고는 있었지만.

겨우 이 정도에 이런 반응이라는 건 얼마나 기대치가 바닥이라는 건지?

조금 미안해진다.

솔직히 말하면, 지식을 사모아 달라

고 한 것은 공방의 엔지니어들을 위해 서가 1순위인 건 아니어서.

에른은 손바닥에 쥔 마나 리액터를 보았다.

'사실 완성품이 내 손에 있다...

후래곤 공방은 규모가 작긴 해도 실 력 있는 엔지니어들이 뭉친 터라, 충 분한 기술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마나 리액터의 개념을 떠올려 낸 로 니, 마도공학 천재 하이엘프, 후래곤 과 암오캣도 좋은 엔지니어고.

완성품을 준다면 금세 원리를 파악해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애초에 쓰지 말 고, 쓴 사람은 끝까지 믿으라고 했지.'

공방 교류자들의 4세대 마도기갑에 대한 열정과 진실성에 대해서.

에른은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는다.

검은 속내가 있었다면 [마음의 소리] 특전으로 잡아냈을 터.

그랬기에 모니터 요원 및 그 배후 세력과 척질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공 방 사람들을 살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마나 리액터를 고스란히 넘긴

다는 것은 역시 거부감이 든다.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심장을 내주 는 건 좀. 그건 아니지.'

차라리 이쪽이 마나 리액터의 구조를 파악해 원천기술을 틀어쥐는 편이 낫 겠다는 판단.

에른은 모든 지식을 선택하고 [흡수] 버튼을 눌렀다.

[흡수가 시작됩니다.]

['내 머릿속의 스펀지'의 효과가 적용

됩니다.]

퍼센트가 조금씩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걸릴 것인지 대략 각 이 잡혔다.

'...며칠이면 되겠군.'

차원거래를 종료하고 창밖을 보니 슬 슬 마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에른은 아리엘에게.

"엘루나 말이야."

"응?"

"달의 정령은 엄청 희귀하다면서. 애 초에 정령 자체가 쉽게 보기 어렵지만 그보다 더."

"그럼. 달의 일족부터가 대수림에서 도 극히 일부인데… 거기서도 선택받 은 정령사만이 소환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같이 다니면 눈에 띄지 않을까?"

엘루나가 달의 정령이라는 건 말해주 지 않으면야 알 수 없겠지만, 저렇게 작은 여자애가 날아다니는 모습은 흔 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니.

지금도 마부가 보지 못하도록 앞쪽 창문을 닫아 둔 채다.

"엄청 띄겠지."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루나, 다른 사람들 있을 땐 모습 을 드러내면 안 될 것 같아."

"꺄이아…'?"

"여긴 대수림이 아니잖아. 우릴 해치 려 하는 나쁜 놈들이 있을 수 있고. 그러니까 나나 에른이 보고 싶어도 숨 어 있어야 해."

"흐, 흐으응...

엘루나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 댔다.

"너무 싫어하네. 오랜만에 세상에 나

와서 그런가? 아니면 네가 정말 마음 에 들었거나."

"역소환 하면 되잖아."

"정령술은 소환술하곤 달라. 엘루나 는 내가 마음대로 불러내고 돌려보낼 수 있는 하수인 같은 게 아니야."

단호한 표정.

뭐, 이쪽도 사리를 그렇게 생각하니 아리엘의 태도가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잖아. 네 정체가 알려져선 안 된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테고."

"알지. 근데 엘루나를 설득해야지 강 제로 뭘 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거야."

"음… 일단 이 빛나는 거라도 어떻게 했으면."

"꺄아?"

사앗.

엘루나의 몸을 감싸던 은빛이 삽시간 에 사라졌다.

"음? 이게 된다고?"

아까보단 덜 눈에 띄지만, 그래도 신 기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상태로 내 허리쯤 오는 크기였으

면 그냥 좀 특이한 어린애로만 보일 텐데."

"꺄아.}?"

스스 A 스

----人,.

에른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엘루 나의 몸이 커지기 시작했다.

아리엘의 품에 쏙 들어오는 5, 6세 여아 정도의 크기.

"이러면 괜찮지 않아, 에른?"

"어… 뭐. 정령 같지는 않네. 진작 이렇게 하면 됐을 걸 왜 실랑이했지?"

아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루나가 인간 형태를 한 건 나도 처음 봐."

"음, 거의 모녀지간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두 사람은 정말 닮 았다.

흡사할 정도로.

'이러면 오히려 괜찮을 수도 있겠네.'

안그래도 아리엘이 너무 튀는 게 신 경 쓰이던 참이었다.

마을 어귀.

마차에서 내리니 마부가 아쉬운 듯한 얼굴로 에른을 배웅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버렸네요…. 결국."

"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고하셨어요."

"저기, 공자님. 실례가 안 된다면 두 분, 이제 어디로 가시는지 여쭤봐도…?"

"그걸 알아서 뭐 하게요?"

"아니 뭐…. 마을에 잠깐 들리시는 정도면 저도 볼일 좀 보고 또 태워 드리면 좋을 거 같아서. 이런 작은 마 을에서 마차를 구한다는 것도 쉽지 않 잖습니까? 음… 근데 그 여자애는?"

아리엘이 엘루나를 안고 내리자 마부 가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웠다.

못 보던 아이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아, 그게...

"딸이에요."

에른이 아리엘의 말을 잘랐다.

"예... 예? 어, 언제?"

"밤에 잠깐 세웠을 때, 얘를 데리러 갔었죠. 어때요, 닮았죠?"

"네, 뭐… 호, 혹시 부부이신?"

에른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마부는 충격 먹은 낯빛으로 우두커니 굳어 있다가.

"즐…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주춤주춤 마부석으로 돌아가더니만, 곧 마차를 몰고 떠나 버렸다.

"에른, 왜 그렇게 말한 거야?"

"봤잖아. 바로 꼬리 내리고 사라지는 거. 앞으루두 엄마와 딸로 가자. 그러면 귀찮게 구는 놈들 1할은 사라질 테니까."

"아, 인간한테는 결혼 제도라는 게 있

구나. 결혼한 사람한테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위지?"

이어지는 아리엘의 의문.

"근데 왜 7할만? 나머지 3할은 뭔 데?"

"그건…. 나중에 얘기해 줄게."

에른은 곤란한 대답을 회피하고 앞장 서서 마을로 들어갔다.

조금씩 빨라지는 발걸음.

왜인지, 여기부터는 공기부터가 다르 게 느껴진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마을이지만,

에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자리아 마을.

이곳부터 스틸가드의 땅이기에.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가문의 영 지,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백작령.

'대체 몇 년 만이지?'

2년? 아니… 그렇게 계산하면 안 된 다.

문득, 영지에서 쫓겨나던 전생의 기 억이 떠올랐다.

더없이 굴욕스러웠던.

'기어코 돌아왔다 다시 이 땅의 주 인이 되어...

비록 임시 주인이지만.

에른의 두 눈이 감격으로 젖어들어 갔다.

[190 화]

"...마을 분위기가 왜 이래?"

"여기 분위기가 어때서?"

갸우뚱거리는 아리엘과는 달리 에른 은 모르겠다는 투였다.

그럴 수밖에.

영주가 되어, 그것도 전생에는 확보 하지 못한 정통성을 지닌 채로 스틸가드로 돌아왔으니.

'이번에는 다를 거다. 당연히 달라 야 하고.'

현시점까지의 성적표.

완벽하다곤 못해도 준수한 수준은 된다.

전생은?

'완전 낙제점. 비교한다는 자체가

철저히 실패했다는 거지.'

반면 두 번째 열여덟은.

능력 면에서나 지위나 명성이나… 모든 게 전생과는 비교 불가였다.

그것도 그렇고.

[영웅의 증발]을 막은 사실이 그에 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연회가 끝난 두].

에른은 순간 마음을 놓았다.

주어진 소임을 다했다고 느꼈고, 그 것으로 가문에 진 마음의 빚을 청산 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아버지에게 자신이 차원거래자임을 밝히면서, 일말의 가책도 같이 떨쳐 버렸고.

'미처 알지 못했지. 아니, 알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전생에 가문을 덮은 암운은 기억보 다 훨씬 어둡고 깊이 드리워진 것이

었음을.

현재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다.

석 달 전, 아버지의 실종을 또다시 맞이했을 때.

에른은 꽉 쥐고 놓치지 않았다고 확 신한 무언가가 뜨거운 모래알처럼 손가 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 무언가란 희망, 품게 된 근거가 된 현생에 대한 자부심, 그리하여 찾 아오게 될 밝은 미래, 망가진 인생과 최악의 죽음에서 이 악물고 돌아온 근본 원인이기도 한 해피엔딩.

다행히… 전부 잃어버리진 않은 채 로 스틸가드에 왔다.

'나머지는, 되찾을 수 있어. 나만 잘 한다면.'

안도, 기대, 약간의 불안감, 결심.

휘몰아치는 감정 탓에 분위기 파악 이 어렵다.

"원래 이런 곳인가 보}? 다들 활력 이 없고. 표정들도…."

"농한기니까. 수확이 끝나서 할 일도 없는데 활력 넘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음, 그런가?"

아리엘은 의문을 품으면서도 이내 수긍했다.

"하긴 나보다는 스틸가드 사람이 더 잘 알겠지."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어릴 때는 저택에만 박혀 지냈으니까.

영주가 된 뒤로는 스틸가드의 모든 땅을 다스리게 되긴 했지만, 자리아 마을은 드넓은 백작령에 비하면 극히 일부일 뿐이라서 여전히 잘 몰랐다.

외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라 아무 래도 중요도도 떨어지고.

'흠, 확실히 뒤숭숭한 느낌이긴 한데.'

백성의 삶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나 싶은데.

고달프고 고단하고….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살아가기에는 삶의 걸림돌이 너무 많은 이들이다.

"그래도 너무 그늘져 있긴 하네. 뭔 일이 있긴 한가?"

"영주가 학정을 저질러서 그런 거 아니야?"

"학정? 그런 말은 또 어디서...?"

"인간은 같은 종족이라도 그 안에서

계급을 나누고, 아래 계급은 윗 계급 에 생산물과 노동력을 바쳐야 한다고 하던데 아니야?"

굉장히 거친 표현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라곤 못 하겠군."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영지에 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랬거든. 그 정도가 심하면 학정."

"학정일 리가 있나. 오히려 선정을 베풀었으면 베풀었지."

스틸가드는 아주 풍요로운 영지는 아

니지만, 그렇다고 쪼들리지도 않았다.

북부의 척박한 토양 탓에 농업 생 산성이 떨어지는 편이긴 해도.

'스틸가드는 면세 영지지. 왕한테 바쳐야 할 세금이 없으니까 영지민한 테 거둬들여야 할 소출도 그만큼 여 유가 생기고.'

산을 불태워 밭을 일구는 화전민들이 왜 생기는가.

몬스터보다 세금이 무섭고 학정을 저지르는 영주, 관료가 더 무섭기 때 문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애초에 재물을 탐 하는 성향도 아닌데다가, 흉년에는 저택의 살림을 줄이고 기사단 예산을 감액해서라도 영지민들의 부담을 줄 이고자 했다.

그렇게 그럭저럭 돌아가는 영지였 다. 스틸가드는.

에른이 화제를 돌렸다.

"마을에 왔으니까 뭐라도 먹어야지?"

"좋지."

"꺄아!"

아리엘은 물론이고 아장아장 걷던

엘루나까지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왜 좋아하지? 정령이 식사를 할 수 있나?'

하긴, 그동안 마차 안에서만 있었으니.

그냥 뭔가를 한다는 거 자체가 신 나는 건지도?

그런데 얼마 뒤.

마을 여관.

와구와구!

안그래도 빵빵한 엘루나의 볼이 다람쥐처럼 볼록해졌다.

저 안에 들어간 것은 부드럽게 구 워진 빵, 양념을 바른 돼지고기, 갓 구운 애플파이, 닭고기 수프 등등.

"꺄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숨도 안 쉬고 씹어 삼키는 건.

맛있게 먹는 거 같아서 보기 좋기 는 한데.

에른이 아리엘에게 물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정령이 소 화를 한다고? 아니, 애초에 맛을 느 낀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

"글쎄… 그렇게 치면 엘루나가 커진 것도 말이 안 되지. 인간처럼 보이기 를 원해서 인간이 되어준 거고. 원래 달은 그런 존재잖아. 염원을 담아 소 원을 비는."

'이것도 그 상호작용인 건가.'

에른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리엘이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걸 보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닌 거겠지.

"잘 먹네, 우리 엘루나. 더 먹으렴."

아리엘은 접시에 담긴 고깃덩어리를 건져서 엘루나 앞으로 옮겨 주었다.

'음'?'

에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저 접시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역시, 숲의 종족은 육식을 하지 않 는 건가?"

"안 하는 건 아니고. 정확히는 못 하는 거야."

"우린 지방을 소화할 수 없거든."

"아, 신념 때문인 게 아닌 거야?"

"인간들이 많이들 하는 오해지. 그 랬으면 내가 오믈렛을 먹었겠어?"

그러고 보니 달걀 요리는 전부 깨 끗하게 비워져 있다.

"뭐... 그런 엘프도 있긴 하겠지 근 데 있어도 극소수일 거야. 숲은, 인 간 세상보다 더한 약육강식의 세계 지. 특히 내가 있었던 곳은…. 나의 생존은 다른 생명을 앗아가며 유지되 고 있는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수림에선 살아남을 수 없어."

"대수림이 그렇게 위험한 곳이었군."

"뭐...

'그래서 고향에 안 가는 건가?'

아리엘이 자길 따라가겠다고 했을 때, 에른은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수백 년을 레퀴엠에 갇혀 있었으면 당연히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 섬에서 은둔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런데 이 복잡한 표정은…. 말 못 할 과거사가 있는지도?

에른은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도록 내버려 두고, 계산대로 향했다.

"3골드 30실버입니다. 손님."

«..2"

에른은 농담하는 줄 알고 다시 물 었다.

"0 하나 더 붙인 거죠? 33실버?"

"이봐요. 장난칠 기분 아뇨."

주인은 에른보다 30살은 더 먹은 듯한 남자였다.

맥주통 들고 나르느라 단련된 우락 부락한 실전 근육은 충분히 위협적으 로 보인다.

그에 반해 에른은 옷 벗기 전에는 호리호리한 청년 같기만 하니까.

주인의 말이 점점 짧아졌다.

"3골드 30실버. 빨리 내쇼."

"아니, 이건 너무 바가지잖아요."

수도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어도 이렇게는 안 나온다.

'파란약이 3골드가 안 되는데.'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에른은 물정 모르는 뜨내기도 아니 고 귀찮다고 골드 펑펑 뿌리는 졸부 도 아니다.

싸게 사는 건 참아도 비싸게 주는 건 못 참지!

그게 단돈 몇 골드에 불과할지라도.

"뭐어? 바가지?"

주인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메뉴를 여섯 개나 시켜 놓고. 많이 먹으니까 그렇게 나온 거지! 바가지 는 무슨 바가지!"

"양이 적어서 그렇게 시킨 건데."

에른은 거의 손대지 않은 자기 접시 를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보여 줬다.

"감자 스튜에 감자가… 네 개 들어 있네? 내가 하나 먹었으니까 다섯 개. 그러니까 이게 50실버쯤 되는 음 식이다?"

"남길까 봐 그러지.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장사하나?"

날카로운 눈빛에 주인이 움찔했다.

찔리기도 했던 모양인지.

"그, 그래, 봐줬다. 3골드 내. 안 그 러면...

"안 그러면?"

주인이 뒤를 쳐다보자 한쪽 테이블 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주먹 뼈를 뚜 둑거리며 계산대로 다가왔다.

"이거 참… 뭐 하자는 거지?"

영지민들이 단체로 바가지를 씌우려 한다라.

어이없는 상황이다.

에른이 헛웃음을 홀리고 있는데, 남 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한 마디씩 툭 툭 뱉었다.

"음식을 먹었으면 돈을 내야지. 당 연한 거 아니야?"

"어린 친구가 가정교육을 못 받고 자랐나. 어디서 무전취식이냐?"

"좋은 말로 할 때 내지? 일행 앞에 서 개쪽 당하기 싫으면."

"허허…. 참."

에른은 계속 흐르는 웃음을 겨우 멈추고 남자들에게 물었다.

"말로 해서 안 되면?"

"별수 있나. 잡아!"

무리에서 가장 젊어 보이는 남자가 에른의 멱살을 노리고 달려들어 왔다.

휙!

가볍게 상체를 뒤로 빼서 피하자 남자가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그가 잡은 것은 허공뿐.

"어쭈? 좀 날랜데? 전부 잡아!"

남자들이 일제히 에른의 앞섶을, 목덜 미를, 허리춤을 잡기 위해 덮쳐 왔다.

'진짜 어이가 없군.'

움직임들이 하품 나도록 느린 게, 남자들은 마나라고는 심장에 한 올도 쌓지 않은 듯 보였다.

쉭! 쉬익!

"뭐, 뭐야? 어디 갔어?"

"여기 있다."

에른은 어느새 남자들에게서 빠져나 와 식탁 쪽에 서 있었다.

"음, 뭐가 좋을까...

파삭.

그가 탁자 다리를 잡고 한 손으로 부러뜨렸다.

몽둥이 크기의 나무토막을 무슨 과 일 꼭지 따듯이 따 버린다?

기민한 움직임도 그렇고 보통 사람 이라곤 생각할 수 없지만.

안타깝게도 남자들 중에는 그런 판 단이 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미친놈이! 우릴 갖고 놀아!"

빠각!

"흐어 억...

식탁 다리에 이마빡을 맞은 남자가 허물어져 내렸다.

"이 새끼가 우리 덱스트를!"

파바바박!

"크헉...

그냥 맞으면 뇌진탕이고, 팔다리를 들어서 막으면 영락없이 복합골절.

순식간에 세 명이 더 쓰러졌다.

싸움 자체가 안 되는 수준.

아마 마나를 쓰지 않고 있어서 헷

갈렸던 것 같은데.

이쯤 되니 남자들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기, 기사님이십니까? 혹시?"

에른은 들은 체도 않고 탁자 다리 를 요리조리 살폈다.

"원목이라 그런지 은근 튼튼하네. 좀 과했나?"

영지 민들이 니까.

그래도 남들보단 관대하게 대해야 할 것 같고, 팔다리 죄 부러뜨려 놓으 면 귀한 노동력만 잃게 되는 셈이라.

남자들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더듬더 듬 입을 열었다.

"하하… 기, 기사님. 말로 하시죠? 음식값은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치 주인장?"

"물, 물론이죠."

"...왜? 내야지. 음식을 먹었으면 돈을 지불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렇게 배워 왔거든."

"그, 그럼 33실버만."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예, 예에...

에른은 나무토막을 내려놓고 식탁 위에 놓인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근데 너희들만 봐주면 기절한 친구 들이 섭섭해 하지 않을까? 우정에 금이라도 가면 어떡해."

"아, 아뇨! 그런 걸로 금이 갈 만큼 저희 우정이 가볍지 않거든요?"

"아니야.. 내가 노파심이 들어서 그래."

A I

tt^t!

에른이 포크를 거꾸로 잡고 휘두르 기 시작하자 남자들이 죄다 목을 움

켜쥐고 쓰러졌다.

"히에엑!"

믿었던 남자들이 전부 기절해 버린 것에, 여관 주인은 저항을 포기하고 등을 돌려 도망쳤다.

막 문을 열려고 하는데.

콰악!

쏜살같이 날아온 포크가 문짝 깊숙 이 박혔다.

그와 함께,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허억...!"

주인이 움직이지 않는 팔을 곁눈질 했다.

손잡이까지 박힌 걸 보면 상식을 벗어난 힘이었다.

손목이 관통된 것은 아닌가 싶어 식은땀까지 흘리는데, 고통은 없었고 다행히 옷깃만 상했을 뿐이었다.

"휴우…."

하지만 공포스러운 상황은 아직 끝 나지 않았다.

저벅저벅.

가까이 온 소년? 청년?

아까는 코웃음도 안 나오는, 젖비린 내 나는 놈으로만 여겼지만.

지금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온다.

"스틸가드가 원래 이런 곳이 아닌 데… 그새 많이 바뀌었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학정을 저질렀던 거 아니야? 에른은 레바단하고 많이… 는 아니더 라도 닮았으니까. 얼굴을 알아보고 일 부러 비싼 가격으로 복수한 걸 수도?"

"미치지 않고서야. 스틸가드인 걸 알았으면 절대 이렇게 못 해."

'에른? 에른 스틸가드?'

그러고 보니 듣던 그대로였다.

금발에 금빛 눈.

누가 봐도 미소년인 외모도 그렇고.

"에, 에른 도련님이십니까?"

"빨리도 알아보네."

"...돌아오셨군요!"

에른의 얼굴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나라 잃은 반 응이어야 하지 않나?

기사한테 시비를 걸었다는 것만으로 도 후환을 두려워해야 한다.

영주 가문이면 그보다 더하니 낯빛 이 흙빛으로 변해 가야 맞는 건데.

그와는 정반대로, 여관 주인의 얼굴 이 환해지는 게 이상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도련 님을…."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저희라고 외지인들 바가지 씌우고 돈 뜯어내고 싶었을까요. 이게 다 데 킨스 패거리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젠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으니."

데킨스?

데킨스 스틸가드!

그 말을 들은 에른의 표정이 변했다.

'숙부가 벌써 돌아왔단 건가? 어떻 게 알고?'

[191 화]

스틸가드.

남쪽의 귀족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북부의 불모지잖아? 영 못 써먹을 땅이지."

"불모지까진 아니지 않나? 경작이 되긴 한다고. 그래도 그런 땅, 줘도 안 가져."

"스틸가드니까 선대왕이 면세권까지 주면서 인심 쓴 거지. 기름진 땅이었 으면… 뭐, 땅을 덜 줬거나 면세권까

진 안 얹었거나 했을걸?"

이런 반응들.

에른은 미래를 겪어 봤기에 이게 그 들이 이 악물고 깎아내리는 것임을.

시큰둥해 보이는 건 그런 척하는 것 임을.

포도를 따먹지 못한 여우가, 맛도 보지 않은 채로 '저 포도는 어차피 신 포도였을 거야!'라고 투덜대는 심 리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알고 보니 엄청 달달한 땅이었지. 남부 귀족들은 라발 산맥의 광물 자원

을 탐내고, 북부에선 면세권이 있는 토지라는 게 상당한 메리트가 된다.'

그리하여 [영웅의 증발] 이후로 각 지의 영주들은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 를 들고 달려들었다.

스틸가드라는 달콤한 케이크를 한 조각이라도 잘라 가기 위해서, 꿀꺽 집어삼키기 위해서.

이 날로 먹으려는 인간들에 의해 스틸가드는 뼈만 남은 채, 맛 좋은 살 은 전부 발려지고 말았지만.

에른은 그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다만 경계하고, 각오를 다질 뿐이다.

탐욕의 빛을 내비치는 순간, 철저히 응징할 것이라고.

다들이빨 빠진 스틸가드를 어떻게 대했는지, 그 한명 한명을 모두 똑똑 히 기억하고 있다.

'주인 없는 보물에 흑심을 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잘못한 사 람이 있다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 지 못한 형들, 그리고 나겠지.'

하지만 데킨스 스틸가드는.

스틸가드를 배신한 혈육은.

'숙부는 그랬으면 안 됐어.'

에른은 여관 주인을 앉혀놓고 그간 의 사정을 들었다.

레바단이 실종된 지도 어느덧 3개월 이 훌쩍 넘어갔다.

가을 연회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 겼고 어느덧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계절이 찾아왔다.

거기에 해까지 넘긴 상황.

시간이 꽤 흐르기는 했다.

"거의 한 달쯤 되었나? 큰 도련님께 서는 영주님이 행방불명되신 사실을

밝히고 나바로의 영주들에게, 그리고 국왕 전하께 수색을 부탁하는 호소문 을 보내셨습니다."

"...멍청하긴, 키르안! 겨우 석 달 을 못 기다려서?"

수색을 촉구하기 위한 호소문이라는 건 명분에 불과하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온 영주직 승계 기회에, 입이 근질거리고 엉덩이 가 들썩거려서 견디지 못한 것일 테지.

'입 꾹 다물고, 남들이 의심하기 시 작할 때까지 최대한 시간 끌었어야 지! 누가 물어도 두루뭉술하게 대답

하고… 실종 사실은 자립할 수 있다 는 확신을 가진 다음에 밝혀도 늦지 않다. 아니, 늦으면 늦을수록 좋은데.'

아, 키르안.

큰형을 어찌하면 좋을까.

올해로 24세.

아직 덜 여문,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충동과 행동이 앞서는 나이라고 하기 에는 좀 많이 먹지 않았나?

"그래서?"

"기사님들도 큰 도련님을 지지하셨 고 말입니다. 결국 스틸가드의 새로

운 얼굴이 되셨죠. 그런데… 얼마 지 나지 않아서 데킨스가 패거리를 이끌 고 나타났습니다."

"그 인간이 뭘 믿고?"

데킨스 스틸가드는 가문의 원조 망 나니 였다.

따지고 보면 이쪽 전생보다 대단했 던 게, 에른은 그래도 아카데미는 별 탈 없이 졸업했는데.

그의 인생사를 대강 정리해 보자면.

'어릴 때부터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녔고, 아카데미에선 강제

퇴학 처분, 할아버지의 진노를 피해 잠적했다가… 돌아가시자마자 아버지 를 찾아와 유산을 요구했다지?'

그 상당한 재산을 축첩, 도박, 술에 빠져 죄 탕진했다는 소문이 스틸가드 로 흘러온 뒤로도 4, 5년이 지난 어 느 날.

데킨스가 가문으로 돌아왔다.

"듣기로는...

여관 주인이 고개를 기울이고 관자 놀이를 긁었다.

"타국에서 꽤나 성공했다고 하던데

요? 무슨 사업인가를 벌여서 대박을 쳤다고."

"그 말을 믿으라고? 숙부가 무슨 능 력이 있어서?"

얼어붙는 듯한 눈빛에 주인이 움찔 했다.

"모, 모르죠. 제가 아는 건 기사님들 도 함부로 못 하는 호위들을 잔뜩 데 리고 왔다는 거. 형님의 빈 자리를 채우겠다면서 큰 도련님을 보좌하기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들으니 대강 그림이 그려 진다.

"말이 보좌고, 실제로는 쥐고 흔들 기 시작했군."

"예.... 데킨스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보호비랍시고 막무가내로 징수해 대 는데, 이미 올해 세금은 다 내서 제 일 쪼들리는 시기란 말입니다. 가진 비상금을 다 털어도 도저히 요구 금 액을 맞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외지인들 주머니 터는 걸로 충당하기로 했다?"

"...정말 죄송함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서."

"으으음.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기절한 남자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내, 내가 왜 쓰러져 있지?"

"그 기사는…? 헉!"

에른을 본 남자들은 일어날 엄두도 못 내고 양팔을 쓰면서 뒤로 슬금슬 금 물러났다.

어떻게든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뿐.

여관 주인이 그들을 제지했다.

"이분이 누군 줄 알아? 막내 도련님 이셔!"

«..2"

막내 도련님, 막내… 셋째 아들?

남자들의 눈이 커졌다.

"에른 도련님?"

"그래. 회복 스크롤까지 써 주셨어."

그러고 보니 골절상을 입은 남자들 도 멀쩡히 팔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도, 도련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저희 좀 살려 주십시오!"

남자들이 울먹이며 에른 앞으로 모 여들어 왔다.

w..2"

엘루나를 안은 채로, 옆에 서 있던 아리엘이 이 모습을 보고 에른에게 말을 걸었다.

"엄청 인기 좋네. 은근 선행을 베풀 고 그랬던 모양이지?"

'전혀.…"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다.

2년 전, 영지를 떠날 시점엔 얼마간 평판이 올라오고 있긴 했어도, 이런 외 곽 마을까지 알려질 정도는 아니었고.

'그때도 기대주로 봐줬던 거였지. 근 데 이건 뭔… 구세주급으로 보는데?'

에른이 그들에게 물었다.

"내가 돌아오면 뭐가 달라지는 게 있다고?"

"그… 무슨 졸업자라고 하지 않으셨 습니까? 뭐였더라? 있잖아. 카, 카…."

"카레 섬'?"

"멍청아, 카르 흠!"

남자들은 옥신각신했다.

정답이 나올 기미가 없어서 에른이 입을 열었다.

"카르 숨 말하는 거지?"

"예… 그, 그거!"

"카르 숨이면 뭐?"

"실종된 영주님도 카르 숨이셨잖습니 까! 해서… 백작님의 뒤를 잇는 진정한 계승자는 막내 도련님이란 얘기가 파다 하게 돕니다. 도련님만 계셨어도 영지 꼴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고작 그 이유로? 카르 숨이 뭐라고."

"예에…?"

"아카데미 수석이라고 해 봐야 20세 이하에서 가장 뛰어날 뿐. 데킨스 패 거리가 기사단 스쿼드를 제압할 정도

라고 하는데, 그 한 명이 추가된다고 해 보}'야 뭐가 달라지겠어?"

"그, 그럼...?"

남자들의 눈동자에 절망감이 떠올랐다.

유일하게 믿었던 에른에게서 이런 말 을 들으니 희망회로가 단번에 와장창!

마주하기 싫었던 냉혹한 현실이 직 시되기 시작한다.

"이 마을에선 추가로 얼마를 내야 하는데?"

"삼, 삼천 골드입니다...

"30호쯤 될까 말까 하는 마을에

뭔…. 확실히 숙부가 제정신이 아니 긴 하군."

마을 사람들도 참 딱하다 싶다.

3골드씩 바가지 씌워서 어느 세월에 징수액을 채운단 말인가?

"집어치우도록 해."

"네...?"

"돈 뜯고 싶어서 뜯는 거 아니라고 했지?"

여관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 물론입니다… 저도 사람이고 제값만 받을 수 있으면 그 이상 바라

지 않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라고. 앞으로도."

"그렇지만 골드를 마련하려면...

"아니. 데킨스한테 뺏길 일 없을 테 니까."

"하, 하지만 방금 도련님께서 달라 질 거 없다고 하셨...

"내가 언제?"

에른이 빙긋 웃었다.

장난기 섞인 웃음이었다.

"일반적인 카르 숨일 경우에 그렇다

는 거지."

«..2"

"무지했기에 오히려 제대로 예측할 수 있었다라… 재밌네."

에른의 중얼거림에 여관 주인은 물 론이고 남자들도 전부 고개를 갸웃거 렸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알겠냐?'

'모르겠지만… 그냥 끄덕이고 있어. 도련님께서 어떻게든 해주시려는 거 같으니까.'

*

스틸가드 저택.

무릎을 모으고 침대에 웅크려 앉은 카렌은 몇 달 전보다 수척해진 모습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이렇게 나빠지기만 할 수 있는 걸까…?'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왕궁 연회를 떠올리면 아직도 입가 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접견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조마 조마해 하며 심장이 꽉 조여 드는 기 분을 느꼈지만.

뒤늦게 등장한 아버지를 보고 얼마 나 안도했던지.

그리고 같이 나타난 막내.

연회가 끝난 두], 사교계 인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날의 에른에 대해.

열일곱 최연소 카르 숨의 미소가 어 찌나 눈부시고 싱그러운지, 거기에 검술만 뛰어난 게 아니라 예술적 재

능까지 갖추었다고.

애간장을 녹이는 그런 바이올린 연 주는 들어본 적 없다고.

여기에 더해서.

드로얀을 꺾으며 라제칸의 아들이 드디어 전설급에 올랐음을 모두에게 알리지 않았나.

하지만 너무 높게 떠올랐던 것일까.

그만큼 추락의 시간이 길게만 느껴 진다.

아버지가 실종되고, 에른도 뒤이어 사라진 뒤로는.

해서 스틸가드로 돌아온 이후로는.

끝없는 추락만이, 바닥없는 수렁만 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도 카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빼꼼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이젤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약간 떨리는.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생각 없어."

"데킨스 님께서 꼭 모시고 나오라고."

"데킨스 님?"

카렌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이젤은 실수했음을 알아채고 얼른 정정했다.

"죄, 죄송함니다. 말버릇이 돼서… 데킨스가 가족들이 다 모여 식사해야 한다고 성화라서요. 내키지 않으시면 드시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스르르.

문이 닫히는데.

"잠깐, 이젤."

"예… 아가씨?"

"왜 얼굴을 안 보이는 거야?"

"그, 그것이...

"이쪽으로 와."

"조금 바빠서요. 식사 준비 때문에."

"이젤. 나도 기사.k 속일 사람을 속

여야지."

이젤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한다.

카렌이 문밖으로 나가 보니, 한쪽

볼이 벌겋게 부어오른 이젤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이젤."

카렌도 할 말을 잃었다.

"나 때문에 맞았구나."

"아, 아니에요… 아가씨. 제가 불손

하게 행동해서."

그럴 리가.

이젤이 그랬을 리가 있나.

'숙부는 예전부터 비열한 성격이었 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주위 의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는.'

카렌이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내가 나오지 않으면 네가 다칠 거

라고… 전하라고 했겠지?"

"왜 말하지 않았어?"

"그, 그러면 제가 아가씨의 약점이 되잖아요...

"이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넌 약점 이 아니라 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야. 에른이 돌아올 때까진."

카렌은 이젤을 가볍게 한 번 안아 주고는 황금빛 눈동자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다시는 이러지 마."

"하, 하지만."

"난 막내와 한 약속을 지키고 싶으니까. 날 마지므r 부탁도 제대로 들어주지 못한 무능한 누나로 만들고 싶진 않겠지?"

"...명,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오면요."

"막내 도련님께서 돌아오시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지겠죠, 아가씨?"

" O "

요즘 영지에서 이런 신앙과도 같은 믿음이 돈다는 사실은 카렌도 알고 있었다.

'혼자서는 어려워. 아버지를 모시고 돌아온다면 모를까.'

그러나 기대를 품은, 순진무구한 눈 을 보고 어떻게 사실을 말하겠나.

카렌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이지. 가자, 이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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