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화]
세상에는 이길 수 없는 놈들이 있 다.
나보다 센 사람, 그리고 같은 등급 마검사.
둘 중 하나라도 상대하게 된다면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이상 줄행랑 치는 게 현명하다.
...기사들 사이에서 인생 실전팁 이라며 돌곤 하는 말이다.
앞 구절이야 당연한 말이라 해석할
것도 없다.
결국은 마검사에 대한 농담인데, 이 역시도 너무 당연한 말.
막상막하 실력에 마법 서포트를 받 으면 균형의 추가 무너지는 거야 삼 척동자도 아는 바였다.
1차원적으로만 활용한다 해도, [스 트렝스], [헤이스트], [플라이] 등등 을 걸고 붙으면, 버프 받은 쪽이 훨 씬 유리하고.
'그럴 정돈데, 적재적소에 적당한 마법을 쓴다면.'
마나 운용과 스펠 캐스팅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마검사는 동급 기사 세 명을 상대할 수 있다.
이게 정설.
그런데 문제는.
'다섯 배 노력해서 고작 세 배 강 해질 거면 뭐하러...
결국은 팁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마검사에 대한 조롱이다.
이것저것 손대다가 이도저도 아니 게 되지 말고, 그냥 한 우물을 파라 는 속뜻도.
하지만, 가끔 등장하곤 하는 높은 경지의 마검사는 꼭 한 번씩 세상을 놀라게 하곤 했었다.
'그런데 난.'
노력 없이 세 배 강해진다.
그걸 우I해 빠르게 2계에 올라온 것이다.
심장을 둘러싼 마나 서클을 내관하 니 선명한 고리 하나가 느껴졌다.
좋아.
에른은 살짝 입술만 움직여 미소를 그렸다.
고작 1서클일 뿐이지만, 의미가 크 다.
이어 내관의 범위를 넓히자 전신에 깔린 마나 회로가 감지되었다.
마나 서클과 마나 회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것들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 지만.
[해석학 개론]을 흡수한 지금은 예 전처럼 문외한은 아니었다.
'마나 서클은 단전, 회로는 혈맥이 라고 보면 되는 건가.'
물론 완전히 같다고 볼 수는 없다.
혈맥은 내공이 오가는 통로에 가깝 고, 마나 회로는 그 자체로 현상을 만들어 내는 창발성을 가졌기 때문 에.
마나 회로는 [위상진법학]에 근거, 인간의 몸에 그려진 마법진과도 같 다.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활성화시키 는지에 따라 그릴 수 있는 마법진의 개수는 무한대로 늘어나고.
엔진인 마나 서클에서 뽑혀 나온 마력이 특정 마나 회로를 활성화시
키면 거기에 대응하는 마법이 발현 된다.
'이 과정이 스펠 캐스팅...
[해석학]은 마법과 마나 회로 사이 의 관계를 밝히는 고급 학문.
개론에 불과한 지식이어도 전반적 인 마법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이거면... 기초 마법은 지금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에른은 마나 서클을 움직여 보았다.
쿠궁.
고리가 회전하면서 마력이 분출되었다.
심장과 이어져 있는 대회로를 통해 마력을 이끌어내고.
대회로와 이어진 소회로, 여기서 또 갈라지는 미세회로… 거미줄처럼 뻗은 회로들 중에서 일부를 활성화 시킨다.
마지막으로 다시 메인 회로로 돌아 가 마나 서클에 복귀하면.
파슷.
누워 있는 에른의 가슴 위로 작은
마법진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 다.
' 됐나?'
그와 함께.
두둥실, 작은 빛덩이가 눈앞에 떠 올랐다.
1서클에서도 기본 중의 기본 마법 으로 분류되는 [라이트].
에른은 얼른 베개로 빛덩이를 덮어 빛이 이불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 게 했다.
'진짜 되는군.'
겨우 생활 마법일 뿐이지만, 그래 도 마법은 마법.
마법을 쓸 수 있는 기사, 마나호흡 법을 익힌 마법사.
어찌 됐든 둘 중 하나만 충족하기 만 하면 마검사가 맞으니.
이 시간 이후부터는, 에른도 자격 이 있다.
마검사라고 불려도 부끄럽지 않을.
'그래도 1서클이면 살짝 부끄럽긴 하지… 어디, 수준 좀 높여 볼까.'
에른은 판매 게시판을 뒤져 봤다.
-베이브 : 마법 스태프 판매. 종 류; 올라운더, 전격, 빙결, 화염, 치 유계 특화. 가격은 협의 후 결정.
-허스트 : 버프 계열 스크롤 판매. 종류; 신체 강화, 마력 증폭, 탐지 계, 인지 능력 향상. (자동, 협상 불 가)
"누가 2계인 아니랄까 봐."
에른이 중얼거렸다.
이런 식의 성의 없는 판매글을 올
리면서 설마 손님들이 몰리기를 바 라는 건가?
'그건 지나친 욕심이지. 뭐… 별로 장사할 생각들이 없나?'
새로 받은 특전이 크게 달갑지 않 은 이유였다.
2계인들은, 대부분이 학자, 연구자, 마법에 미친 인간들....
그나마 차원거래에 뛰어든 마법사 들은 그중에서도 사회성이 있는 편 이다.
심한 사람은 마법에만 몰두하느라
대화하는 법을 잊기도 한다고 하는 데.
그런 이유로 멀쩡한 차원거래서를 썩히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고 들 었다.
'죽어라 하나만 파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맹하달지, 순진하달지...
에른은 노련한 교류자다.
노련하면서 노회했다.
박살 날 대로 박살 난 전생.
연이은 실패로 삶이 통째로 날아가 긴 했어도 얻은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 었다.
그때의 경험.
그리고 현생.
몇 달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지만 특전 버프를 받아 수많은 거래에서 이윤을 챙기며 승승장구했다.
0계, 1계의 능구렁이들에 비하면야 2계는 지렁이에 불과하다.
기존 특전과 협상 스킬만 가지고도 충분히 성공을 거두리라 자신하고 있었는데.
'굳이 [마음의 소리]가 필요할까
모르겠네. 다른 특전이었으면 더 좋 았을걸.'
마침, 적당한 교류자가 하나 보였다.
-마법만이내살길 : 마법 접습니다. 수고링.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었네 요. 3서클, 그리고 확장 마나 회로 까지 싹 다 해서 팔아요. 아무 때나 연락 주시길.
'괜찮네.'
조금 빠르게 2계로 올라오느라 잔
고가 많이 줄어든 상태다.
[보유 코인 : 11557]
내일 치 재고는 다 보충해 뒀으니 까 써도 되는 코인이긴 한데, 변수 를 아예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겨우 만든 사이클, 과소비로 궤도 에서 이탈하게 된다면 그보다 억울 한 일이 어딨나.
조근남에게 빌린 20만 코인의 압 박이 있기도 하고.
마음 같아선 5, 6서클까지 올려서 무공 수준과 균형을 맞추고 싶지만, 당장은 이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판매자에게 말을 걸어 봤다.
-에른 : 판매글 보고 메시지 드립 니다. 거래 가능하신지?
-마법만이내살길 : 아, 네네.
거래자의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절로 보게 되는 것은.
[닉네임 : 마법만이내살길.
종족 : 인간.
접속 장소 : 2계, 마도연방 라이미
온
거래 등급 : level 2
혼의 위상 : 견습 마법사
보유 코인 : 0]
이제는 프로필부터 우선적으로 확 인하게 된다.
이어질 거래소 리포트 때문에.
이 정도면 거의 습관성 [섭리의 눈] 사용 증후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래소 리포트 : 본명은 셜린. 제 8 마도대학 이론마법 학과 재학생. 학과 선택의 이유는 서클이 낮고 스 펠 캐스팅에 소질이 없어서. 매일 코피 터뜨리며 공부한 덕분에 이론 은 나름 빠삭한 편이나 매번 실기가 발목을 잡는다.
최근 치러진 공인 마법사 시험에서 5번째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맨날
탈락하다 보니 성격이 날카로워지고 떨어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 다.
'요즘 추세가 떨어지는 추셉니다.', '아직 결정이 안 떨어졌거든요.' 이 말에 폭발해서 거래를 파투 낸 전적 이 있다. 하강이 연상되는 단어 선 택은 피하도록 하자.]
'이거만 봐도 성향 나오고 어떤 처 지인지도 다 보이는데 뭐 굳이.'
그래도 밑져야 본전.
[마음의 소리]도 같이 써봤다.
-마법만이내살길 : 근데 글을 보 셨으면 알겠지만요.
-에른 : 넵.
-마법만이내살길 : 제가 상황이 상황이라서요.... >우울
-마법만이내살길 : 그냥 다 접고 끝내려고 하는데. 그래서 분할 판매 는 못 할 것 같아요. >씁쓸
-마법만이내살길 : 서클, 회로, 마 법 지식까지 다 구매하셔야 해요.
'진짜 쓰잘데기 없는 특전이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안다.
이 셜린이란 어린 마법사가 시궁창 같은 기분이라는 것 정도는.
'어떤 건 표시되고 어떤 건 표시되 지 않는 건, 감정이 부족해서겠지?'
-에른 : 아예…. 근데 판매글에는 서클하고 확장 회로만 판매한다고 되어 있어서요.
-마법만이내살길 : 그게, 팔까 말 까 고민 중이었거든요. 결국엔 파는
걸로 정했는데 깜빡하고 수정을 못 했네요.
-마법만이내살길 : (지식까지 팔면 완전 내다 버린 10년인데… 부모님 이 대학에서 뭐 배웠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아, 몰라 몰라. 그래도 당장 돈이 필요한 걸 어떡하라고!)
이번 메시지는 원래 보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시되었다.
평소보다 많이 흐릿해서, 집중하고 봐야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이게 그 속마음인가.'
에른은 못 본 척 질문했다.
-에른 : 그 마법 지식 말입니다. 정확히 어떤 건지요?
-마법만이내살길 : [룬문자 심화], [중급 진법학], [해석학 심화], [1 서 클 스크롤 제조], 뭐 이 정도요....
-에른 : 이론 말고 실전 마법 종 류는 없습니까?
-마법만이내살길 : 3서클이 그런 게 있을 리가요. 서클 있지, 회로
있지… 저 그래도 나름 해석학은 깊 이가 있거든요. 어지간한 3서클 마 법은 뚝딱 쓸 수 있어요. 응용도 다 되고. >확신!
'거짓말은 아니라는 건데.'
그렇다면 구매할 의향이 있다.
에른은 [흐름 파악]으로 시세를 따 져본 뒤 물었다.
-에른 : 가격은, 얼마 생각하십니까?
'다 합치면… 거래가로 1000코인
정도? 여기에 2, 300코인 더 얹어 서 부르겠지.'
-마법만이내살길 : 생각할 거 뭐 있어요. 남들 파는 가격에 팔 건데. 1000코인이요. >단호
-에른 : 어....
뜻밖의 제시에.
에른도 당황하고 말았다.
-에른 : 그, 그건 좀 아깝지 않나 요? 평생 공부한 걸 전부 파는 건 데 남들 파는 가격이면.
-마법만이내살길 : 아깝죠. 아까워 죽죠. >매우 진심
-마법만이내살길 : 그래도, 어쩌겠 어요. 시장 가격은 내 개인적인 사 정하곤 무관하게 결정되는 거잖아 요.
—에른 : ...?
전형적인 2계인답다.
이상할 정도의 합리성.
셜린의 속마음 또한 그러했다.
-마법만이내살길 : (그냥 서클하고 회로만 팔까. 5수하면서 우리 집 기 둥뿌리까지 뽑았는데 이거 들키면 부모님이 죽이려고 할지도 몰라.)
-마법만이내살길 : (그래도 내 지 식이… 다 합치면 300코인은 된단 말이지. 뭐라도 하려면 그 금액도 크다고! 아… 이걸 고민하는 내 인 생이 매직이다.)
'잠깐, 이건 써먹을 수 있겠는데?'
셜린에게 제안해 봤다.
-에른 : 아까 그러셨죠. 마법 지식 팔지 말지 고민하셨다고.
-마법만이내살길 : 그랬죠. 왜요?
> 의문
-에른 : 제가 알기로, 2계에서 마 법 못 쓰면 인간 취급도 못 받는다 던데. 그래서 그런 겁니까?
-마법만이내살길 : 못해도 1서클 수준 생활 마법은 쓸 줄 알아야
죠.... 그 이하는 그냥 2등 시민, 아니 축생이에요. >한숨
-에른 : 그럼 이런 거래는 어떨까 요?
-마법만이내살길 : ???
〈거래 결과〉
지불 : 마나 서클(1서클), 마나 회 로(기본), 해석학 개론(지식), 810 코인
구매 : 마나 서클(3서클), 마나 회 로(확장), 룬문자 심화(지식), 해석
학 심화(지식), 1서클 스크롤 제조 (지식)
[캐시백- 121코인을 받습니다.]
두 사람 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셜린은 최대한 코인을 확보하면서 원하던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됐 고, 에른은 100코인 이득 봤으니.
'아니... 따지고 보면 이득은 아니 지. 추출해서 가지고 있으면 되는 거니까.'
그래도 의미가 있었다.
[마음의 소리]가 쓸모없는 특전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2계인도 사람이다.
속을 뒤집어서 다 내보이는 것처럼 보여도 숨기는 사실이 있기 마련이 다.
미처 활용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뻔한 협상 포인트도.
'하필 2계 특전이라고 실망할 게 아니었어. 그리고, 2계라고 해서 거 짓말쟁이가 없지는 않으니까.'
다른 세계에서 올라오거나 내려온 교류자들.
그리고 일반적인 2계의 성향이 아 닌 능구렁이들.
놈들에겐 더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겠지.
특히나.
에른은 닉네임 하나를 떠올렸다.
'샤일로크.'
1계에 석현이 있다면, 2계에는 샤 일로크가 있다.
그와 재회했을 때, [마음의 소리]
는 [섭리의 눈]과 함께 날카로운 한 쌍의 비수가 되어 줄 것이다.
놈의 약점, 더 나아가 펄떡이는 심 장을 푹 찔러 버릴.
'너 딱 기다려라. 이 새끼가 지금 도 차원거래를 하고 있어야 하는 데...
[94 화]
"나 좀 봐."
잠은 별로 못 잤지만 무척 상쾌했 다.
원래 잘 시간에 차원거래를 하거나 구결을 음미하고, 마무리 운기조식 으로 하루의 피로를 푸니까.
그런 뒤론 한 시간 정도만 눈을 붙여도 컨디션이 최고로 올라온다.
하지만 지금의 이 상쾌함은, 신체적 인 게 아니라 심리적인 이유에서다.
에른은 심장을 감싸는 세 개의 마 나 서클을 느꼈다.
그리고 추가로 깔린 확장 회로도.
이젠 에른도 어엿한 3서클 마법사.
3서클이면 어지간한 생활 마법은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고, 버프 계열은 물론, 간단한 공격 마법까지 도 캐스팅할 수 있다.
기사로 치면 한 4, 5급쯤 되는?
'그 정도면 어디 시골 영지 기사단 수준은 되고… 마법사도 3서클부턴 여기저기서 데려가려고 하니까. 얼
추 비슷하다고 봐야지.'
그래도 마법사는 기사보다 수가 적 고 다방면에 쓸모가 많아서 훨씬 귀 하신 몸이다.
직접 전투에 나서는 경우도 드물어 부상당할 일도 별로 없고.
전쟁만 없다면 평생 안락한 삶이 보장될 것이다.
물론 에른은 이런 소시민적인 발상 을 추구하진 않는다.
'누군가에겐 인생 최고의 가치일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2계 진출 하루 만에 밥 값을 하는 마법사가 됐다는 건 의미 가 있다.
"흐음〜"
한껏 업 된 기분으로 기숙사를 나 서는 중.
"나 좀 보자니까?"
입구에서 안을 흘깃거리는 붉은 머 리카락의 여학생.
에른은 그녀의 존재를 좀 전부터 알아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른 척 지나가려 했는데.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거지?"
셀리나가 성큼 다가와서 에른의 앞 을 가로막았다.
눈썹은 위로 치켜뜬 채.
최대한 날카로운 인상을 만들어 보 이는데도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그녀를 본 에른의 소감
O
'몇 년 어려졌다고 미친 듯이 상큼
하네.'
현재 그녀는 기억 속에 남은 모습 의 첫 조각보다 3년은 더 어리다.
사교계에 데뷔한 이후, 한창 이름 을 날릴 시기에, 그녀는 뭇 남성들 에게 이렇게 불렸다.
테아로스의 장미라고.
셀리나의 트레이드마크인 고혹적인 미소는, 많은 이들의 애간장을 녹이 고 몇몇에는 심장에 무리가 가게끔 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성숙함과 풋풋함의 경계에 서 색다른 매력을 발산.
클럽에서 봤던 연회복이 아닌 수련 복 차림이라 청초한 느낌까지도 든 다.
'또 이렇게 보게 되는군...
셀리나 루페브르.
이번 생의 첫 만남은 21클럽에서.
눈빛만 교환하고 곧바로 외면해 버 렸다.
그 뒤론 크게 접점이 없어서 만날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아예 무시하기로 한 거야? 내가
21클럽 회원이라서?"
셀리나가 몇 발짝 더 다가오자 얼 굴이 가까워지면서 청결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아닌 몸 냄새, 비누 냄새.
"왜 이래?"
"얘기 좀 해."
바위산 등반을 위해 새벽같이 나온 터라 아직 지나다니는 학생들은 없 었다.
그래도 누가 본다면 혹시 모를 오
해를 살까 우려된다.
에른은 몸을 뒤로 빼면서 물었다.
"무슨 얘기?"
"이런저런."
셀리나가 다시 다가왔다.
에른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뭐, 뭐야… 너야말로!"
"잠깐 따라와."
셀리나를 데리고 기숙사 뒤편으로 향했다.
여기는 인적이 거의 없어서 일단
보는 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이런 으슥한 데서 뭘 하려 고...?"
셀리나는 두 손을 꼭 모아 얼굴 앞에 붙이고, 흔들리는 눈망울로 에른을 올려다봤다.
뭘 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말투, 손짓, 순진무구 한 눈동자.
그러나.
"그거 하지 마라. 토 나올 거 같으 니까."
차가운 에른의 말투에 셀리나의 눈 빛이 더욱 흔들렸다.
"무,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해?
21클럽인 게 그렇게까지 싫은 거야?"
"아니."
에른이 셀리나의 턱을 쥐었다.
"이, 이거 놔!"
"언제까지 그 안에 있을 건진 모르 겠지만, 슬슬 나오지 그래?"
"...의미를 모르겠어. 나오긴 뭘 나와?"
"셀리나 루페브르. 네 본모습."
장미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날카로 운 가시를 품고 있기도 하다.
에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가시가 얼마나 날카롭고 위협적 인지.
또한 거기에 치명적인 독이 발려 있다는 사실도.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 다.
허물없는 친우를 만날 때의 얼굴과 하늘같은 주군을 대할 때의 얼굴이 똑같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셀리나의 가면은 너무 다양 해서 손에 꼽을 수조차 없다.
그녀는 청순하다가도 요염하고, 백 치미와 영특함이 공존하며, 순수한 아이처럼 보이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곤충의 날개를 뜯는 천진한 잔혹성 을 보이기도 한다.
"이번에는 맑고 깨끗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스타일? 그러면서 은 근히 빈틈도 보여 주고. 매력적이긴 하네. 잘 만들긴 했어."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셀리나의 눈.
맑은 호수 같은 하늘색 눈동자에 문득 교활한 빛이 떠올랐다.
"...너, 뭐야?"
눈빛에 여러 감정이 담겨 있다.
놀라움과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동요.
"몰라서 묻나. 에른 스틸가드, 1학 년."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참나."
셀리나는 에른의 손을 탁 쳐내고 팔짱을 꼈다.
"나도 녹슬었나…. 1학년 따위한테 간파당할 줄이야."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야 뭐."
에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 다.
한때는 그녀와 누구보다 가까운 사 이였으니까.
'얘하고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
2학년 말, 21클럽의 회원이 되면서 안면을 텄다.
물론 그전에도 서로의 존재 정도는 알고 있었다.
셀리나는 교내 최고 미녀로 유명했 고, 에른도 외모만 놓고 보면 남학 생 중에서 첫손가락에 꼽힌다는 평 이라.
단지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을 뿐.
정확히는, 중급반 하위권인 에른에 게 셀리나가 눈길을 줄 이유가 없어 서였다.
'그리고 그 일이 있었고… 급속도 로 친해졌었지?'
에른은 쓴웃음을 지었다.
셀리나는 마약 같은 여자다.
외모도 외모지만 사람의 마음을 쥐
락펴락할 줄 안다.
이 늪과 같은 매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몇 년을 끙끙댔는지.
"알지. 모를 수가 없지."
에른의 희미한 미소는 곧 자신만만 한 웃음으로 변해 갔다.
"어떡하라고. 훤히 보이는걸."
"그게 보여? 아, 알겠다."
셀리나가 교소를 터뜨렸다.
꺄르륵 웃고 난 그녀가 내놓은 답 O
"너, 나랑 동류구나?"
"그건 좀.... 어디 댈 데가 없어 서 드래곤을 뱀에다."
"시끄러워. 어쩐지, 음흉한 게 다 이유가 있었어."
"음흉? 내가?"
"그럼, 음흉하지. 어디에 쓰려고 실 력을 숨기고 계실까…? 그 비상이란
클럽? 아니지, 아직 오러는 보여 주 지도 않았으니까. 더 큰 걸 노리고 있는 거야."
"...테인이 보낸 건가? 내 클럽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아니?"
셀리나가 혀를 쑥 내밀었다.
"그건 테인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난 다른 걸 제안하러 왔어."
"뭔데."
셀리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에른의 어깨선
을 훑으며 말했다.
"원래는 천천히 공들여서 꼬시려고 했는데… 선수끼리 질질 끌 거 없잖 아?"
"충분히 질질 끌고 있거든? 나 아 침 훈련하러 가야 해."
"하나만 물어볼게. 미타하고는 무 슨 사이야?"
에른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사이도. 아, 이젠 비상의 회 원이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들리는
소문으론...
"무슨 말을 들었는진 몰라도, 그냥 회원이고 클럽 리더일 뿐이다."
"하긴, 둘은 너무 안 어울리지. 그럼 대신에, 나 한번 만나보는 건 어때?"
이렇게까지 훅 들어올 수 있는 건 가.
뜻밖의 구애 공세에 놀랄 법도 하 건만, 에른은 딱 잘라 대답했다.
"싫어."
"...왜?"
"만나기 싫은 데에 이유 있나. 그 냥 싫어."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셀리나의 작은 머리가 연신 갸웃거 려 졌다.
"왜지? 우린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남들의 부러움을 살걸?"
"그 부러움은 전부 널 향하는 거겠 지. 내가 왜 그쪽 좋은 일을 시켜줘 야 할까?"
"무슨 소리! 나 셀리나 루페브르
야! 더 말이 필요해?"
셀리나의 자신감은 근거 있는 자신 감이었다.
외모 되지, 가문 되지, 기사로서도 나름 나쁘지 않은 실력이고.
전생엔 여기에 혹해 흐물흐물 넘어 가고 말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그때의 자신이 아니 고 셀리나 또한 실체를 모른 채 마 냥 좋게만 보던 그녀가 아니다.
"응, 안 필요해. 할 말 다 했으면 가봐도 되지?"
돌아서자.
"잠, 잠깐!"
질끈 깨문 입술에서 분한 듯한 목 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왜 날 거절하는 건데?"
"이유를 알고 싶어?"
"그래! 오러 유저라고 유세 부리는 거야? 아카데미는 안중에도 없다 이 거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긴. 근데 그거 알아? 아카데 미가 아니라 수도 전체를 뒤져도 나
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어."
"글쎄...
에른은 셀리나에게 돌아가서 그녀 와 눈을 맞췄다.
거리가 파격적으로 좁혀졌다.
숨결뿐 아니라 서로의 코끝이 맞닿 을 것 같다.
"뭐… 뭔데?"
셀리나가 말을 더듬었다.
원래도 딱히 자기한테 밀리지 않는 외모 레벨인데, 가까이서 보니 인간 아닌 것 같은 미모가 체감되었다.
'무슨 남자 피부가 눈처럼 새하얗 지… 그것도 기사가.'
그렇다고 병약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건강하고 윤기가 흐르면서 백옥 같 다는 게 놀랍다.
환골탈태 덕에 완벽한 피부를 얻어 이렇게 된 거지만, 그런 사정을 셀 리나가 알 리 없다.
붉어진 그녀의 얼굴.
에른이 입을 열었다.
"너한테 연애 대상이라는 건 그저 널 빛나게 할 트로피에 불과할 뿐이지.
아니면 수발을 들어줄 노예이거나."
그런 점에서 카시엔은 현명했다.
다음 타겟으로 선택된 전생의 에른 은, 셀리나의 노예가 되어 버렸으니까.
"감정적 교류, 친밀감, 헌신… 넌 평생을 살아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애초부터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천성이 그런 걸 어떡하겠어. 거기에 대해선 안타깝게 생각한다."
"뭐, 뭐라는 거야!"
"아, 그리고 트로피 얘기 말인데. 생각해 봐. 그쪽이 먼저 찾아와서 이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알겠지?"
셀리나의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모 르는 것 같다.
에른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여 줬다.
"네 식대로 표현하자면, 우린 급이 안 맞는다는 거. 이거면 간단한데 괜히 길게 말했네. 그럼, 간다."
에른이 몸을 돌리자 셀리나의 얼굴 이 흙빛으로 변했다.
떠받들어지는 데에만 익숙한 그녀다.
남자라면 누구나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더 나아가 흠모와 동경의 대상.
이런 대우, 그것도 철저한 무관심 은 생전 처음인 셀리나였다.
"네… 네가 뭔데! 무슨 자격으로 그딴 말을 함부로 지껄여!"
물기 젖은, 분개한 목소리가 귓가 를 맴돌았다.
에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 성격이라면 이런 반응이 나올
거야 뻔했고.
"두고 봐... 지금이야 고고한 척 콧 대 세우고 있지. 너, 내가 꼭 울며 불며 매달리게 만들 거니까!"
'그러시든지.'
이것으로 확인했다.
셀리나에게 남은 감정.
...전혀 없다.
어떠한 설렘이나 떨림도, 재회의 애틋함도 없는 그저 무덤덤함.
뭔가 우습다.
한때는 그녀가 사무치도록 그리워 죽고 싶기만 한 적도 있었는데.
'그나저나 클럽 이름이 비상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이거 내부에 누 설자가 있나?'
[95 화]
"클럽장은 너희에게 실망했다."
지혜관 회의실.
에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자 회원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 다.
바리온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에른, 말투… 가 왜 그래?"
"지금 말투 따지게 생겼나? 클럽 장은 스스로에게도 실망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없 나 싶어서 말이지."
"자세히 말을 해 봐. 뭐 때문에 그 러는지."
"테인. 21클럽… 걔들이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더군. 이상하지."
바리온이 다시 의문을 표했다.
"이상할 건 없지 않아? 애들 다 보는 앞에서 나한테 클럽 들어오 라고 말한 적도 있었고. 회의실을 빌려 쓰고 있는 것만 해도, 눈에
띄잖아."
"그렇지. 근데 〈비상〉이란 이름을 알고 있더군. 이건 여기 회원들 말 고는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거든."
"그, 그건 이상하긴 하네."
에른은 괴상한 컨셉을 유지했다.
"우리 중의 누군가가 21클럽에 정보를 유출했다. 다 눈 감아."
회원들이 동시에 눈을 감았다.
왜 감아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클 럽의 절대적 카리스마인 에른이 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다.
"추궁하려는 건 아니야. 별것 아 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 우 리가 비상이라는 건 어차피 알려 질 거였잖아?"
딱히 비밀로 하라고 당부했던 것 도 아니고.
하지만 이건 신뢰의 문제다.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의도로 말이 새어 나간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거대한 제방도 작은 쥐구멍 때문 에 무너지는 법. 입단속 잘하자는 취지니까 나다 싶으면 조용히 손 만 들자."
말이 없다.
하긴, 채찍만 가지고 자백을 유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채찍으로 안 되면?
더 아픈 채찍으로.
"...버틴다 이거지? 이거 안 되 겠네."
에른은 모두에게 가벼운 살기를 쏘아 보냈다.
오싹한 느낌만 들 정도로 적당히.
견디려면 견딜 수도 있는 압박인 데....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휴인?'
다른 사람은 다 그럴 수 있다 쳐 도 왜 휴인이?
의외다 싶은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유출자라는 게 왠지 나인 거 같아서… 미, 미안해."
회원들이 눈을 떴다.
"뭐야, 휴인이었어?"
"휴인이 왜?"
"...잠깐 둘이서 보자."
에른은 휴인을 회의실 밖으로 불 러냈다.
휴인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테인한테 통보했거든. 21클럽에 서 탈퇴할 거라고. 그리고 클럽 이 름이나 회원 목록 이런 건… 어쩌 다 보니까 말이 나왔어."
"회원 목록까지?"
"테, 테인이 자꾸 캐묻길래...
"흠."
"내, 내가 크게 실수한 거야?"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별로 대단한 기밀도 아니고.
또 휴인이라서 별로 의심이 안 간다.
누구보다 테인과 21클럽에 적개
심 많은 녀석이니까.
말실수 정도로 보고 넘어가도 되는
사안이긴 한데.
"손만 들라니까. 이실직고를 하면 어
떡해? 괜히 회원들 다 알게 됐잖아."
"그게 나도 모르게… 덜컥 겁이 나서...
"그래도 나 다음으론 네가 비상의 얼굴인데, 유출자 이미지는 좀 그 렇지 않냐."
"나, 난 대체 왜 이럴까...
휴인이 자책했다.
"괜찮아. 다음부터 잘하면 되지."
"그, 그럴까?"
'아니... 널 어쩌면 좋겠냐.'
에른은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회원들은 얼마든지 밀어줄 방법이 있다.
우선 미타.
그녀가 가진 노력의 재능.
이 자체를 키워주진 못하겠지만, 더 노력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걸 위해 줬던 게 청죽환.
고약한 냄새를 꾹 참고 복용한 모양인지, 그 뛰어난 효능을 몸소 체험한 미타는 이제 새벽까지 훈 련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아, 라이트닝 안마기도.'
이게 또 물건이다.
겉모양은 무슨 휘어진 봉처럼 생겼다.
이걸로 뭘 하라는 건가 싶지만.
전원을 켜고 환부에 대면, 지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전류가 몸 안을 휘젓는다.
근육통뿐 아니라 감기, 몸살, 오 한 같은 병증도 호전이 되고.
멍이나 찰과상 같은 외상까지 치 료될 정도.
지금까지 실험 대상은 드미트리,
미타, 데이븐 등등.
효능보다도 부작용이 있는지를 더 유심히 살폈는데,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이, 이런 물건이 있어? 정체가 뭐야?"
"신성력 세례라도 받은 건가? 대 기만 해도 상처가 낫다니...
"계속 쓸 수 있는 건 아니지? 효 과가 점점 떨어진다거나. 아니면 너무 사긴데."
감탄하는, 그리고 이어지는 의문들.
에른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할아버님이 남기신 물건이야."
"아, 그래서...
나바로에서 라제칸은 거의 신격 화 되어 있다.
실제로도 신적인 무위를 보유했 고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들보다 나바로에 해준 게 더 많으니.
다들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미타는 이렇게 관리만 해주면 되 고...
벤자민과 데이븐도 딱히 손이 많
이 가는 편은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은 각각 뛰어난 행정 가와 전략가가 될 자질.
왕실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도록 로비 좀 하고, 혹 거기에도 읽고 싶 은 책이 없다면 외국에서라도 들여 올 수 있도록 마쿠스에게 지시해 두 면 그만이다.
여기까지는 무척 손쉽다.
'진짜'들은 이제부터인데… 휴인은 그 진짜 중에서도 진짜였다.
'사람이 너무 소심해. 테인한테
하도 당해서 그런가.'
이래서야 공작위를 물려받는다고 해도 물공작으로 남을 뿐이다.
"휴인, 내가 충고 하나 할게."
"으... 응?"
"가끔 보면 넌 네가 칼슨이라는
걸 종종 잊는 거 같다."
"나바로에서 그보다 드높은 이름이 어딨어. 왕성(王姓), 나바로를 제외 하고. 칼슨이라면, 칼슨답게 행동해 야지."
"그, 그런가. 내가 잘못했어."
"하...
에른이 이마를 짚었다.
이걸 대체 어디부터 뜯어고쳐야 할까.
"잘못했단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 잖아. 애초에 잘못을 안 하는 게 좋겠지만, 하더라도 칼슨이 바로 그렇게 머리를 숙이면 안 되지."
"그…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휴인이 자조 하듯 말했다.
"칼슨이면 뭐. 이름 빼면 내세울 거
하나 없는데. 내가 실력이 있어, 능 력이 있어?"
"그런 마인드부터가 문제라는 거야. 넌 진짜 공작 되려면 대개조가 필요하겠다."
하나부터 열까지.
낱낱이!
물론 휴인의 심정을 이해 못 하 는 바는 아니다.
칼슨이면 뭐하나, 칼슨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그래도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에,
앞으로 소공작이 되고 따르는 가 신들이 생기면 없던 위엄과 권위 도 생기기는 할 것이다.
'아니지.'
에른이 고개를 저었다.
'내 전생처럼 되는 수도?'
자격 없는 자가 높은 자리에 오르 면 언젠가는 밑천이 드러나고 만다.
에른이 스틸가드의 몰락에 책임 이 있듯, 휴인도 칼슨 가를 시원하 게 말아먹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
는 게 좋을 것 같다.
"휴인."
"응?"
"안에 들어가 있어. 애들한테 어 떻게 된 건지 설명하고."
"알, 알았어...
에른은 홀로 남은 복도에서 차원 거래를 시작했다.
그가 보는 휴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카리스마 제로. 절대 주군으로 모시고 싶은 타입이 아니야.'
기사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 꼭 오러 유저나 특급 기사가 될 필요 는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이 사람은 내가 평생 모실 만하다는 확신은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부드러운 카리스마든, 테인과 같은 냉혹하기만 한 카리스마든.
휴인에게 그가 갖지 못한 것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른이 찾은 교류자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스스한 사술 공방 : 어이구. 오 랜만입니다. 화골산 사가신 뒤론 처음이죠?
-에른 : 아마도요?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스스한 사술 공방 : 아주 신수가 훤해지셨습니다. 그새 제휴 상점도 차리셨던데.
-에른 : 그걸 어떻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스스한 사술 공방 : 지금 1계 판매자 중에서 그쪽 모르는 사람
이 있어요?
-에른 : 뭐… 못 잡아먹어서 안 달이긴 합니다만....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스스한 사술 공방 : 대부분 그러 더군요. 시장 분석해 보니까.
그런데 어째 혈마존자의 태도는 호의적이다.
무림만물상에서 사술 관련 물품 은 취급하지 않아 그런지.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스스한 사술 공방 : 저도 거기서 물건 많이 사고 있습니다. 아주 도 움이 돼요.
-에른 : 그러면 혹시 서비스 가
능….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스스한 사술 공방 : 자자. 거래 나 합시다. 뭐 사러 오셨는지요?
-에른 : 그런 거 없나요? 아는 사람 성격을 좀 바꾸고 싶은데.
-에른 : 음… 그래도 사술이 만 능도 아니고 이건 아닌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스스한 사술 공방 : 아뇨, 아뇨. 제대로 찾아오신 거 맞습니다. 이 거 보시죠.
-뇌엽금침대법(지식): 두뇌의 특정 부분을 금침으로 자극해 피시술자의 천성을 변화시키는 대법. 이 방법으 로 각종 광증을 치료할 수 있고, 양 처럼 온순하던 성격을 불같이, 혹은 그 반대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에른 : 이건 좀…. 걔가 병이 있
는 게 아니고 자신감이 좀, 아니 많이 떨어질 뿐이거든요.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스스한 사술 공방 : 광증이란 단 어가 좀 세서 그렇지, 전혀 그런 술법이 아닙니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스스한 사술 공방 : 자신감이 떨 어져요? 금침 한 방이면 고개 숙 인 남성에서 바로 쾌남 변신입니 다.
이 말이 사실일까?
정말 그런지 [마음의 소리]를 사 용해 봤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스스한 사술 공방 : (부작용으로 광인이 될 수도 있긴 하지만… 그 거야 지가 알아서 할 일이지.)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스스한 사술 공방 : 어떻게… 구 매하실 거죠? 그럼 최고의 선택을 하시는 겁니다. 하하. >영업용 웃 으
_에른 : 수고하세요.
휴인은 귀중한 자산이다.
소중히 키워서 공작으로 만들고, 두고두고 써먹어야 한다.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는 전혀 없 지. 효과는 다소 약해도 안전한 걸 로 찾아야겠어.'
에른은 2계를 뒤진 끝에 적당해 보이는 물품을 찾았다.
-용기의 반지 : 착용하는 것만으 로 용맹함을 불러일으키는 반지. 두 려움과 공포가 억제되고 부끄러움을
덜 느끼게 된다. 첫 전투에 나가는 마법사에게 추천하는 물품.
일단 구매는 하긴 하는데.
'이걸로 될까 모르겠군.'
에른은 휴인을 다시 불러내 반지 를 착용하게 했다.
그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는다.
"웬 반지?"
"끼기나 해."
휴인이 반지를 검지에 끼워 넣자
에른이 그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왜… 왜 그래...?"
"뭐 달라진 느낌 없어?"
"글, 글쎄? 왠지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효과가 있긴 한 건데?'
에른이 제안했다.
"테스트해 보자. 욕 한번 해봐."
"욕? 누구한테?"
"누구겠어? 나한테지. 내 눈 똑똑 히 보면서 말해보}. 미친놈.아, 라고."
에른이 재촉하자 휴인의 입술이 떨렸다.
"너, 너한테 그런 말을 어떻게 해. 이걸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다 널 위해서다. 시키는 대로 하 기나 해."
"미… 미...
"좋아, 잘하고 있어. 뒷말은?"
휴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미... 미안해, 못하겠어!"
[96 화]
'내다 버린 9코인인가...
이제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지만.
한때는 1코인, 아니 0.5코인에도 울고 웃던 시절이 있었다.
'한때라고 쓰고 전생이라고 야겠지.' 읽어
차게 식은 수프를 들이키며 선 눈으로 시퍼런 차원거래 을 들여다보던 때. 핏발 화면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딱 한 번만을 외치며 비고로 향하 던 발걸음.
9코인이면 현재 계좌에 든 코인 의 0.001 %도 안 되지만, 에른은 가진 코인의 비중이 아닌 절대적 인 가치를 먼저 따졌다.
9코인=90골드=9000실버.
9000실버면 일반 백성들을 기준 으로 하면 큰돈이나, 귀족들의 금 전 감각으론 푼돈에 가까웠다.
그런데 에른은 한번 바닥을 찍어 본 경험이 있다.
아니, 지하실까지 파고 내려갔다 고 해야 하겠지.
영주직을 잃고 여관을 전전했던 말 년에는 단돈 10실버가 없어 쫄쫄 굶은 적도 있었다.
이때 형성된 돈에 대한 관념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확 머리통에 금침 찔러 넣어 버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지만… 돈 귀 한 줄 아는 것과 잔돈푼에 눈 멀 어서 더 큰 걸 놓치는 건 엄연히 다른 거다.
후자는 경계하고 피해야 하는 태 도고.
그런 이유로.
"뭐, 뭐가 잘못됐어?"
상황 파악은 못 해도 심경 파악 은 기가 막히게 하는 휴인이었다.
개들이 그렇다.
주인의 손짓, 발짓만 보고도 의미 를 읽어낼 정도로 눈치가 빠르다.
'생긴 것도 뭐 이렇게 순한 강아 지 같냐.'
겁먹은 듯한 눈과 곱슬진 푸른 머
리카락, 그리고 불안한 눈동자.
이목구비만 놓고 보면 테인과 크 게 다를 것도 없는데.
분위기와 표정, 그리고 눈빛이 냉 혈소공작과 소심한 서자라는 차이 를 만든다.
'이런 애가 상습 자해를 하고 목 숨을 끊을 생각까지 할 정도면 대 체 얼마나 괴롭혔다는 거야?'
에른은 한숨을 쉬었다.
따지고 보면 휴인에게 잘못이 있
는 건 아니다.
동생을 이렇게 길들인 싸패 테인 이 잘못한 거지.
"잘못된 거 없어. 들어가자."
"근데 이 반지 뭐야? 되게 이상하다."
"뭐가?"
"배꼽 아래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 라오는 거 같고… 반대로 머리는 차가워지는 느낌? 막 뭔가 자신감 같은 게 샘솟는 거 같아."
"그런 놈이 욕도 못 하냐. 엄청 심한 말도 아니었는데. 퍽이나 샘 솟겠다."
"그, 그런가?"
갸웃거리는 휴인을 회의실로 끌 고 갔다.
안에서 두런두런 목소리가 홀러 나오고 있었다.
대부분이 비상 클럽을 매개로 알게 된 관계라 바리온, 미타, 샤펠은 입 을 다물고 있는데 반해, 벤자민과 데이븐은 원래 안면이 있었는지 대 화가 오고 갔다.
데이븐의 목소리.
"휴인도 참, 생각이 짧단 말이지."
벤자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약해 보이긴 해. 듣던 것보다 더."
"아니, 이건 지능의 문제야."
"음?"
"그동안 21클럽은 학내에서 유일 한 사교 클럽이었지. 솔직히 말해 우리가 엘리트는 아니잖아?"
"'엘리트'는 아니라고, 누가 보면 상급반은 되는 줄 알겠다?"
"뭐… 그거도 못 되지. 아, 에른은 빼고. 아무튼, 21클럽의 라이벌이 된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외부에
서는 충분히 그렇게 볼 수가 있어. 두 개 있으면 양대 산맥, 세 개 있 으면 3대로 묶는 게 되는 게 사람 심리이니까."
"비상하고 21클럽이 양대로 묶이 면 테인 심기가 불편하긴 하겠네."
"그래. 앞으로 사사건건 우리 클 럽을 방해하고, 어쩌면 해체까지 시키려 할지도 몰라. 앞으로 적이 될지 모르는 사람한테, 어쩌다 보 니까… 가 말이 돼? 별것 아닌 얘 기였다곤 해도 조심을 해야지.
데이븐은 평소 읽던 군사학 서적
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적을 이롭게 한 것은 아군에게
두 배로 해를 끼친 것과 같다. 10
이라면 20, 50이라면 100만큼."
데이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이번엔 또 뭐가?"
"어떻게 냉혈공작의 핏줄에서 저
런 아들이 나왔을까?"
백이면 백 꼭 한 번씩은 던지는
질문.
벤자민이 주억거렸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좋은 건 형 쪽이 다 가져갔잖아. 외모, 실 력, 두뇌 전부. 성격은… 테인도 정상은 아니긴 하지만 물러 터진 것보다야 차라리 냉혹한 게 낫고."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다 틀 린 말이었어."
"저, 저기...
미타가 데이븐을 쿡쿡 찔렀다.
끼어드는 그녀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창백했다.
"왜 불러? 어? 어...
미타가 뒤를 가리키자 돌아본 데 이븐의 안색도 하얗게 질려 갔다.
"휴, 휴인?"
휴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뒷담화 중에 딱 걸린 웃지 못할 상황.
벤자민과 데이븐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데이븐은 겨우 표정 관리를 하면 서 물었다.
"어... 언제부터 와 있었어?"
"...처음부터."
휴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등에는 핏줄이 섰다.
그가 번득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빛을 물들이는 독기.
"미, 미안하다."
데이븐은 찔끔하며 손을 내밀었다.
"악감정을 갖고 말한 건 아니고. 개인 의견일 뿐인데… 기분 상했으 면 사과할게."
"넌 빠져.
휴인이 데이븐의 손을 탁 쳐냈다.
싸늘한 눈빛은 데이븐이 아닌 벤 자민을 향한다.
"너, 뭐라고 했어?"
"나… 나? 난 별로...
"별로? 그렇게 별로야? 하긴, 인 간말종 새디스트보다 물러 터진 내가 더 별로긴 하지?"
벤자민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뭔데? 주둥아리 놀리는 거 분명히 들었어. 좋은 건 테인이 다
가져갔다고. 나보다 테인이 낫다고."
벤자민은 쩔쩔매며 생각했다.
'왜 불똥이 나한테 튀어?'
물론 말을 좀 심하게 하긴 했어 도 그게 핏줄과 호부견자 운운에 비할 바인가?
왜 데이븐이 아니라 자기가 분노 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할 만 해서 당하는 거다… 네 가 모자라서 그렇다… 그게 싫으면 대항을 하지 그러냐… 라고."
흐느끼는 휴인.
중얼거림이 잦아드나 싶은 그때, 그가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 X이나 까 잡수라 그래!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스읏!
휴인은 벤자민에게 달려들어 그 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마나가 실린 움직임.
벤자민은 속수무책으로 들어 올 려 졌다.
"대답해! 내가 뭘 잘못한 거냐고!
이렇게 태어난 게 조I야?!"
"이… 이거 놔!"
"그만해, 휴인!"
"진정해요, 휴인 선배!"
때아닌 몸싸움에 회원들이 달라 붙어 말리려 했다.
그러나 휴인은 놓아줄 생각을 않고.
'오호라.'
에른은 회의실이 난장판이 되어 가는 걸 지켜만 보고 있었다.
'용기의 반지가 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닌가 본데? 그건 그렇고… 진 짜 모욕적으로 말한 건 데이븐 아 닌가? 왜 벤자민한테 난리지?'
두 사람의 대화를 되새겨 봤다.
'...데이븐은 테인의 테자도 꺼 내지 않았군. 이거 재밌네.'
갑자기 깨달아 버린 것 같다.
온순한 강아지를 맹견으로 탈바 꿈시킬 방법.
에른은 손가락을 딱 튕기고 회의실 로 범위를 좁혀 사자후를 날렸다.
'그만들 해!"
멈칫.
혼을 뒤흔드는 낮은 포효에 회원 들이 우뚝 굳어 버렸다.
"방, 방금 뭐가...
에른은 어리둥절해 하는 회원들의 시 선을 흘려 넘기고 휴인의 앞에 섰다.
"적당히 해라."
"으… 응
에른은 휴인의 손에서 용기의 반 지를 빼냈다.
그러자 살기등등한 기세가 가라 앉으며 평소의 쫄보 휴인으로 되
돌아왔다.
"내, 내가 무슨 짓을?"
*
회의실 소동은 해프닝으로 일단 락되었다.
벤자민과 데이븐은 뒷말한 것에 머리 숙여 사과하고, 휴인은 곡해 해서 받아들여 격분한 것에 유감 을 표했다.
에른의 중재에 불만 있는 회원은
없었다.
어쨌거나 휴인은 칼슨 가의 차남.
먼저 잘못한 것은 두 사람이라, 가문을 앞세워 책임을 추궁한다면 할 말이 없다.
휴인도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폭발할 일은 아니었다고 느끼는 것 같았고.
"음, 대강 정리된 것 같네."
에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약속 있어서 먼저 나가볼 건 데... 또 싸우고 그러진 않겠지?"
"아, 아니야. 내가 잠깐 돌았었나 봐."
"좀 돌긴 했지. 잠깐 밖에서 볼까?"
복도에서.
에른이 용기의 반지를 건네자 휴 인이 손사래를 쳤다.
"이, 이건 안 끼는 게 좋겠어."
"왜?"
"그게… 뭔가 내가 아닌 것처럼 돼 버리는 느낌? 살면서 그 정도 일 가지고 그렇게 화내본 적이 없 었는데."
"잘됐네. 당분간 끼고 다녀. 벤자
민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야."
"응?"
"물러 터진 것보다는, 차라리 폭급 한 게 나아. 애들 달라진 거 봤어?"
"어... 말투가 깍듯해졌지. 눈빛도."
"그래. 착해 빠진 거, 남들이 알 아주지 않는다니까? 아까는 좀 피 해망상 같긴 했지만… 그래도 한번 내지르니까 태도가 달라지잖아. 이 참에, 회원들 확 휘어잡아 봐."
"그게 될까? 내가 워낙 모질지 못 해서...
"어려우면, 상대방을 테인이라고 생각해. 저 얼굴은 테인 얼굴이다… 움직이는 건 테인의 입술이고, 깜박 거리는 건 테인의 눈꺼풀… 이런 식 으로. 테인한테는 얼마든지 모질어 질 수 있잖아?"
"그, 그건 가능하지."
"자리 비운 동안 잘 해봐. 나 없으 면 네가 클럽 책임자인 거 알지?"
"...노력해 볼게. 칼슨이니까, 칼 슨답게."
그 말에, 에른이 피식 웃으며 휴 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원래 두 사람의 눈높이는 비슷했 는데, 이제는 환골탈태로 에른이 한 뼘은 더 커진 상태였다.
"왜… 왜 이래? 선배한테!"
"선배'?"
"맞잖아. 이래봬도 내가 한 학년 위라고!"
"그러십니까? 선배님이 기특해서요."
"말투만 바꾼다고 뭐가 달라져? 진짜, 누가 선배고 누가 후배인지 모르겠다니까."
휴인의 역린은 그의 형이다.
가장 증오하는 사람도 테인이고.
테인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수시 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소심남 휴 인에게 카리스마라는 걸 장착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길게 보}야지. 하루아침에 해결될 만한 건 아니니까.'
에른은 휴인에게서 손을 떼면서 말했다.
"뭐… 됐고. 샤펠 좀 불러다 줘."
"샤펠 클라우스? 걔는 왜?"
"같이 갈 데가 있어서."
*
기사명가의 마법천재.
샤펠 클라우스는 딱 봐도 기사 타입은 아니었다.
갑주보다는 로브가, 검보다는 수식 을 쓰기 위한 깃펜이 더 어울리는.
달리는 마차 안.
샤펠을 살펴보던 에른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2학년이라고 했지? 서열은, 몇 위?"
"21 위."
"생각보다 높네?"
"...지금 시비 거는 건가?"
샤펠의 표정이 굳었다.
말석이라도 상급반으로 졸업만 하면 괜찮은 삶이 펼쳐진다.
그러나 클라우스 급 가문에서 21 위면....
에른도 맥스를 꺾고 차석을 먹었 기에 스틸가드에서 간만에 인물 나왔단 소리를 듣는 거지, 한 10 위쯤 됐으면 여전히 아쉽다는 말
이 나왔을 터이다.
클라우스 역시 스틸가드 못지 않는 기대를 받는 가문.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샤펠의 서열도 아쉬운 감이 있었다.
"아니. 진심. 대단하다고 생각해. 본인 재능은 따로 있는데 그거랑 병행을 하면서 상위권을 유지한다 는 게, 보통 쉬운 일은 아니지."
"뭐... 뭣?"
샤펠이 벌떡 일어났다.
하마터면 마차 지붕에 머리를 박
을 뻔했다.
"조심!"
"어, 어떻게 알았지?"
"누굴 바보로 알아? 맨날 중얼중얼 거리면서 수식 계산하고 두꺼운 책 읽고 다니고… 누가 봐도 검술 교재 는 아니지, 그건."
"그… 그래도 나름 조심했는데."
에른은 씩 웃으며 놀란 샤펠을 올려다봤다.
"마법사들은 이게 문제야. 기사라 고 해서 지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계산식만 보면 핑 돌아서 정신 잃는 것도 아니란 말이지."
"...내 주위는 다 그러던데. 그러 고 다녀도 아무도… 몰랐어. 이렇 게 간파한 건 네가 처음이다."
"뭔 까막눈들만 있나."
샤펠은 놀라움을 진정하고 자리 에 앉았다.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 거지?"
"보면 알아."
에른이 옆을 가리켰다.
창밖으로 수도의 풍경이 지나갔다.
밀집된 건물과 주택가.
멀리 귀족들의 대저택도 언뜻 보 이는 듯하고.
더 멀리서도 선명한 왕궁의 실루엣 은 그 웅장함을 능히 짐작하게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검은 오벨리스크.
창공으로 도도히 솟아오른 방첨 탑은 후손들이 이룩한 문명을 비 웃고 있는 것만 같다.
"서... 설마?"
샤펠의 물음에 에른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 설마가 맞아. 마탑으로 간다."
[97 화]
마탑은 동전의 양면을 모두 보여 주는 특이한 상징물.
그 양면이란 바로 [인간의 시대] 와 [신화의 시대]다.
[인간의 시대]를 이루는 두 기둥, 검술과 마법.
검술은 마나호흡과 연공법의 꾸 준한 발전으로 현재의 위상을 갖 게 되었다.
그야말로 인간 스스로 이룩한 업적.
그와는 반대로, 마법은 인류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
세인들은 말한다.
마탑이 세워지지 않았다면 마법 은 여전히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 었을 거라고.
마법의 대중화, 매직 아이템과 스 크롤의 일상화.
물론 여전히 마법사들은 귀하신 몸이고 매직 아이템은 아무리 낮 은 급이어도 구입하려면 보통 큰 맘 먹지 않고선 불가능하지만.
귀족이나 대부호가 아니고선 그 마음조차 감히 품지 못하던, 또 마 법사가 구름 위의 존재처럼 받아 들여지던 때에 비하면 엄청난 변 화였다.
"건국황제의 최대 업적 중 하나 지… 저런 걸 대륙 각지에 세울 생 각을 했다는 게 대단해."
샤펠이 혼잣말을 했다.
그에 에른은.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 까. 그걸 실행에 옮겼다는 게 대단 한 거지."
드높은 오벨리스크.
국력을 동원해 대규모 공사를 진 행하면 현재도 수십 년에 걸쳐 건 설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해 봐야 그냥 커 다란 장식물일 뿐.
마탑의 놀라운 점은 규모보다도 그 내부 구조, 그리고 기능에 있다.
페이웨어는 제국을 건국하고 이 종족과 신화속 존재들의 도움을 받아 대륙 곳곳에 마탑을 세웠다.
[신화의 시대]의 일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의 시대]의 한 축.
이후 대륙의 주역은 인간이 되었 고 이종족들은 변방으로 밀려났으 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없다.
샤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건국황제 대단한 거야 말해 봐야 입 아프지. 위인전만 수십 종 류인데."
최근 백 년 간 제국과 나바로의 관계는 이보다 험악할 수 없었다.
전쟁도 있었고… 그럼에도 건국황 제는 다들 존경했다.
그는 자기가 건립한 제국이란 틀 에 매여 있지 않았고, 자이온 전체 를 위한 정책을 펼쳤다.
마탑이 제국뿐 아니라 대륙 전체 에 각국에 퍼져 있는 이유다.
"인간 대표, 인간의 시대의 문을 연 선구자이자 혁명가...
샤펠의 중얼거림에 에른이 호칭 하나를 더 붙였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강의 인간."
그 뒤에 바람 섞인 예상을 추가 해 본다.
'언젠간 그 자리에서 내려오겠지. 나로 인해.'
페이웨어를 넘어선다.
기필코!
이런 말을 하고 다니면 미친놈 취 급받겠지만, 에른은 자신이 있었다.
현재 그는 같은 나이의 페이웨어 보다 더 강하다.
환골탈태 이전만 해도 그랬는데, 완전히 탈바꿈한 지금은 시시각각 성장하는 걸 체감하고 있다.
거기에 이제는 마검사까지 됐고,
앞으로도 습득할 다른 능력들이 많으니.
'검술 재능은 건국황제에 비해 떨 어질지 몰라도 내 고유의 재능으 로 커버하면 되니까.'
그 재능이란 코인 모으는 재능.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만든 코인 을 거래로 불려 나가다 보면 언젠 가는 도달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게 다 돈으로 산 능력 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몇몇은 비 난할지도 모른다.
남이 노력한 걸 구매했을 뿐이면 서 뭐 그렇게 자랑스럽냐?
...라고 한다면?
에른은 당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눈을 들여 다보면서.
'이거도 실력이야.'
건국황제는 세상에 나온 뒤로 한 동안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다들 너무 약해서.
간단한 오러도 못 만드는 사람들
이 너무 많아서.
한마디로 하면.
-검술이 제일 쉬웠어요.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타고난 재 능에는 찬사를 보내면서, 특전이란 재능을 활용해 능력을 사는 게 뭐 가 어때서?
에른은 다를 거 하나 없다고 생 각했다.
"저, 저기?"
샤펠이 눈앞에다 손을 휘휘 젓고 있었다.
" 음?"
"목적지는 알았어. 마탑… 근데 거긴 왜 가는 건데?"
"...왜겠냐?"
갸우뚱거리는 그에게 싱긋 미소 를 지어 보인다.
샤펠은 그동안 영 맞지 않는 옷 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꽤 괜찮은 실력을 보여 왔지만, 역시 사람은 맞는 옷을 입 어야 한다.
"옷 갈아입으러 간다."
*
제14 마탑.
열네 번째로 완공된 마탑이라 이 렇게 불리는 거다.
연구 실적과 마법 물품 생산량, 보유 마법사 라인업…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7위 안에는 너끈히 들어 간다.
수장은 7서클 대마법사 시에라 펠가스.
"우와.…"
코앞에서 보니 오벨리스크의 위 용이 더 제대로 체감되었다.
감탄을 흘리는 샤펠에게.
"마탑 처음 와 봐?"
"어… 이런 거리에서 보는 건 처 음이다."
"마법사 지망하는 거 맞긴 해? 수 도에 왔으면 마탑부터 방문해야 지."
"들여보내 줄 것도 아닌데, 굳이 뭐하러. 설마, 이거 구경하자고 온 건 아니지?"
"그럴 리 있겠냐."
에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탑의 입구.
거인족이 드나들어도 넉넉할 것 같은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어..?"
입구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에른이 반색하며 손을 들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
길게 늘어뜨린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오랜만이다."
남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한 3년 됐죠, 숙부님?"
"그쯤 됐지? 못 본 사이에 다 컸 구나."
"더 커야죠. 이게 다면 곤란해요."
"하하, 그거야 그렇지. 근데… 옆은?"
" 아."
에른이 서로를 소개해 줬다.
"샤펠, 이분은 캔달 리스케르 경. 숙부님, 이쪽은 샤펠 클라우스에요.
아카데미 수련생인."
"뭐?"
" 음?"
상반된 반응이 나왔다.
캔달은 눈초리가 살짝 올라갔고 샤 펠은 휘둥그레한 눈으로 되물었다.
"정, 정말 캔달 리스케르 경입니 까? 최연소 6서클! 다음 대마법사 1순위이신...?"
칭찬 세례에 캔달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흠흠. 최연소 6서클은 맞지만,
대마법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 지. 평생 6서클로 살다가 늙어 죽 을 수도 있는 거고. 너무 그렇게 보지 말게. 부담되니까."
"아, 아닙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 는 세 분 중 한 분이신데요. 정말 영광입니다!"
"뭘 영광씩이나. 다른 두 명은 누 구지?"
"시에라 님, 그리고 아르엘도 님
"정석 중의 정석 대답이군."
아르엘도는 제5 마탑주다.
대마법사인 것으로 유명할 뿐 아 니라, 각종 구휼과 몬스터 퇴치 활 동 등으로 자이온 전역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었다.
캔달이 말했다.
"서 있을 게 아니라 일단 들어가 서 얘기하지. 가자, 에른. 그리고 그쪽 학생도."
캔달은 존재 자체로 출입 증명서 였다.
6서클 마법사와 함께라 아무 제
지 없이 마탑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캔달 님하고 어떻게 아는 사이 야? 숙부님이라니?"
샤펠이 옆에 붙어서 귓속말을 해 왔다.
"아버님 친구분이니까 숙부님이 지. 종종 스틸가드에 놀러 오고 그 러셨어."
"신기하네… 영웅급과 6서클 마법 사가 친구였다니. 천재끼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건가?"
"아무래도? 분야는 다르지만 뭐."
안쪽으로 들어가니 드넓은 홀이 펼쳐졌다.
그 한가운데에 위치한 것은.
"와...
샤펠의 입에서 또 탄성이 흘러나 왔다.
하늘에서 빛이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푸른 광휘.
별처럼 반짝이는 작은 빛들이 그 안에서 부유했다.
"이게 마나 폭포구나...
그건 정말로, 빛으로 만들어진 폭 포처럼 보였다.
마탑은 광범위한 구역의 마나를 한곳으로 밀집시키는 일종의 마나 흡입기와도 같다.
이 마나 폭포는 마탑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해도 좋다.
마나 폭포가 있어 인공 마나석을 제조할 수 있고, 손쉽게 인챈트하 거나 낮은 제작비로 스크롤을 제 조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 그런 반 응이 지."
캔달이 말을 덧붙였다.
"장관 아니냐. 도도한 마나의 흐름 도, 옹기종기 둘러앉은 마법사들도."
아닌 게 아니라 마나 폭포 주위 에서는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푹 빠 져 있었다.
"서클에 마나를 채우고 있는 거란다."
캔달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 며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말소리 정도는 괜찮은데, 큰소리 를 내면 집중이 깨질 수 있거든. 겨울잠 자다 깬 곰보다 사나운 게 명상을 방해받은 마법사야. 주의하 는 게 좋아."
그건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마나호흡 중에 방해하는 놈은 칼 로 찔러도 무죄다.
당연한 얘기라 당연히 받아들이 는 에른.
'근데 왜 저런 구닥다리 방식을?'
근처에 마력선이 있으면 마력유
도공식을 적용해 한큐에 충전하면 되는 거 이-닌가.
'뭐... 다른 이유가 있겠지?'
연구실은 크고 넓었다.
옆에 붙은 실험실까지 하면 어지 간한 영주의 집무실 못지않았다.
"오셨습니까."
캔달을 본 도제 마법사들이 일제 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같이 퀭한 눈이었다.
어지럽게 널린 책과 각종 기구들.
캔달이 손짓했다.
"어... 일들 흐fl 이 친구들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
캔달의 방.
에른과 샤펠은 응접 테이블에 앉 았다.
"우리 조카가 날 만나러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대접을 해야겠지?"
캔달은 말하는 동시에 마법을 사 용했다.
지잉.
그의 손 위로 마법진이 떠올랐다.
화르륵.
캔달의 손바닥 위에서 불꽃 하나 가 피어올랐다.
그는 그 불로 차를 끓였다.
이것만으로도 흔히 보기 어려운 광경.
지잉.
또 마법이 발동되었다.
캔달은 찻잔을 각자의 앞에 놓고, 스푼을 꺼내 찻잎을 덜어 넣었다.
그럴 때마다 둥둥 떠다니는 주전 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뜨거운 물 을 따랐다.
쪼로로록.
향긋한 차 냄새.
샤펠이 감탄을 발했다.
"동시 캐스팅에 [파이에, [파이 어 레지스턴스] 더블 캐스팅...
"음? 자네 마법 좀 아는군? 기사 지망생이라 하지 않았나?"
"그, 그렇긴 합니다만....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 뭘?"
"물 따르는 마법. 단순히 띄우기 만 해서는 그렇게 안 되는 건데."
"내가 워낙 차를 좋아해서 말이야. 나름 다도 마법이라 할 만한 걸 몇 개 개발했지. 한번 짐작해 보게, 어 떻게 한 걸까?"
"부유 마법에 추가로 찻잔으로 유 도되도록 움직임 지정… 일정 각도 기울어지게 하는 명령을 추가하고, 잔이 차는 시간을 계산해 적당한 때 에 주전자가 다시 세워지도록 해야 겠죠. 안 그러면 넘치니까."
"정답."
캔달이 씩 웃었다.
샤펠에게는 처음으로 보이는 웃 음이었다.
"클라우스에는 다 돌대가리만 있 는 줄 알았는데… 자네는 결이 좀 다르군?"
"...칭찬입니까, 모욕입니까?"
"음, 반반?"
샤펠이 물었다.
"그런데 정답이 아닌 거 같은데 요? 주전자가 찻잎이 있는 잔을
어떻게 알고 따르게 한 건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 친구 재밌군."
캔달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실은 반만 정답이 맞아. 근데 눈 높이 교육이라는 게 있단 말이지. 문외한에게 거기까지 맞추라는 건 120%를 요구하는 거니까."
'웬 120%?'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단한 거 아니에요? 쉬운데."
"뭐?"
샤펠이 의문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나도 모르는 걸 네가?"
"주전자가 찻잎이 있는 잔을 찾아 가게 하는 게 아니라 물을 따를 순서를 정해 놓고, 거기에 먼저 찻 잎을 넣으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하신 거 아니에요, 숙부님?"
"어… 맞다, 에른."
캔달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지?"
수많은 신입 도제들의 골머리를 앓게 한 난제다.
여태까지 그 자리에서 풀어낸 사 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
차가 식기도 전에 정답을 알아낼 줄이야.
"너무 티 나잖아요. 보통 물을 다 따른 다음에 차를 나눠주지 않나?"
"단지 그 이유로?"
"그것도 있구요. 일개 생활 마법 에 고차원적인 수식을 넣는다는 게 너무 비효을적이잖아요. 순서를
정하면 단번에 가벼워지는걸."
캔달은 속으로 생각했다.
'에른이 효율화 원리를 안다고? 나도 10년 전에야 겨우 깨달은 건 데. 에이… 그럴 리가.'
[98 화]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게 있다.
문외한이 오히려 신선한 시각을 보여주는 케이스가 존재하고.
원래 제삼자가 되면 시야가 넓어 지는 게 일반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훈수도 많이 두고 손모가 지도 많이 잘리고 한다.
'뭐, 그런 거겠지. 근데 에른이 원 래 저렇게 총기가 있었던가?'
캔달은 기억을 더듬어 봤다.
친구 아들이니까 별생각 없이 잘 대해주긴 했는데, 객관적으로 평가 해 보면.
'스틸가드의 골칫거리, 기대치 제 로.... 얻어걸린 거라고 봐야겠지.'
에른도 에른이지만, 이 샤펠이란 친구도 특이했다.
클라우스 가는 마법의 마자도 모 르는, 검술만 죽어라 파는 가문.
가주부터가 평소에 마법 비하 발 언을 자주 해서 마법사들의 미움 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캔달은 적당히 식은 차를 한 모 금 삼키며 물었다.
"안부나 물으러 온 건 아니겠고…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에른의 대답.
"그게, 부탁할 게 있어서요."
"역시 그래서겠지. 왜, 용돈이 떨 어지기라도 했느냐?"
캔달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스틸가드 3형제 중에서 에른을 가장 좋아했다.
아들로서야 첫째가 가장 낫겠지
만, 키르안이 자기 뒤를 이어줄 것 도 아니고.
막내 혼자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게 안쓰럽기도 해서 챙겨주다 보니 에른도 그를 많이 따른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조카 입학 선물도 못 줬네. 잠깐만."
캔달이 금고로 향하려 하자 에른 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용돈 필요해서 온 건 아니에요. 돈 말고 다른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어떤 부탁?"
"이 친구요."
에른이 샤펠을 가리켰다.
그는 샤펠이 마법사를 지망하고 있고, 현재도 수련에 매진하고 있 다는 사실을 말했다.
"클, 클라우스의 적통이 마법사를 지망한다고?"
캔달이 숨을 골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뭘 그렇게 놀라세요? 그럴 수도 있죠."
"안 놀라게 생겼어? 에른, 네가 검
을 버리고 내 밑에서 마법을 배우게 됐다고 치자. 레바단이 그걸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숙부님 멱살 잡으러 스틸가드에서 한달음에 달려오시겠죠."
"내 말이. 클라우스 백작도 완고 하기론 네 아빠 못지않은데. 아주 폭풍이 몰아칠걸."
"샤펠을 도제로 받아 달라는 게 아니에요. 남는 시간에 마탑을 이 용할 수 있게만 해 달라는 거죠."
샤펠이 아무리 재능 있다 해도, 마 탑을 이용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
마탑에 보관된 방대한 연구 자료 와 실험 설비… 무엇보다 마나 폭 포에 접근할 수 있고 없고가 엄청 크다.
'기사 명가로 잘못 태어난 것 때 문에 10대와 20대 대부분을 날리 고도 대마법사의 자질이라는 말을 들었지. 지금부터 마탑에서 수련한 다면...
최연소 대마법사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캔달이 턱을 괴었다.
"그래도 클라우스 백작이 가만있
지 않을 텐데...
"왜, 백작님이 무서우세요?"
"무서워? 내가?"
캔달이 발끈했다.
"나 6서클 마법사야. 무서울 게 뭐 있어?"
"백작님은 영웅급인데요?"
"전설급도 아니고, 영웅급 정도로 뭐? 마탑에선 마법사가 왕인 거 몰라?"
"그럼 좀 도와주세요. 배움을 구하 는 꿈나무를 외면하시면 안 되죠."
"...정말 마법사가 되고 싶으냐?"
캔달이 시선을 돌리자 샤펠이 고 개를 끄덕였다.
"예. 마법은 제 인생입니다."
"뭘 인생씩이나. 말을 너무 쉽게 하는군."
"정말입니다! 포기하려고 수백 번 을 노력해 봤어요. 그런데 마법이 너무 좋은 걸 어떡합니까. 눈 감으 면 수식이 떠오르고 검을 휘두를 때면 대체 뭘 히-고 있는 건가 생 각이 듭니다. 이건 내 길이 아닌데 하고...
샤펠이 비통한 심정을 토해냈다.
정체성의 고민.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문 제일지 몰라도.
누군가는 이 때문에 식음을 전폐 하기도, 심지어는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 O "
캔달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클라우스 가를 싫어하기에 샤펠이 란 이단아의 존재가 흐뭇한 것은 사 실이었다.
"가문에서 알게 되면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들키지 않도록 조심 해야죠…. 그 리고 각오는 돼 있습니다."
"좋아, 알았다."
샤펠의 눈이 커졌다.
"감, 감사함니다!"
에른 또한.
"고마워요, 숙부님.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감사 표시는 조금 뒤에 하는 게 좋을 거 같구나."
"네?"
"마탑은 진리의 상아탑이자 지혜 의 등대지. 어중이떠중이를 막 받 아 주는 곳이 아니야."
"확인해 봐야지. 이 친구가 마탑 에 머무를 자격이 되는지. 에른, 따라오렴."
캔달은 연구실로 나가서 제자 한 명을 불렀다.
"예, 스승님."
"며칠 전에 테스트 본 시험지 있지?"
"네... 여분으로 남겨둔 거 몇 장 있습니다."
"가져와 봐."
도제가 서랍을 뒤지는 동안 캔달 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에른이 물었다.
"전 왜 나오라고 하신 거예요?"
"네가 옆에 있으면 객관적인 평가 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런다. 여기 서 기다려."
"그러죠, 뭐."
그때, 다른 마법사가 와서 캔달에
게 종이를 내밀었다.
"말씀하신 마법진 고쳐 봤습니다."
"어디 보자."
내내 웃음기를 띠고 있던 캔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라프엘."
"예... 예?"
"자네 머리에는 뇌 대신 똥이 들
어차 있나?"
"아,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이렇게 똥 같은 마
법진만 고안해올 수 있는 거지? 참, 이거도 재능이다."
"죄송합니다."
라프엘은 눈가가 잠깐 파르르 떨릴 뿐, 그 외에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다시 해 와. 이번에도 쓰레기 같 은 거 들고 오면...
캔달의 목에 선 핏대가 가라앉았다.
묘한 에른의 눈빛을 본 탓이다.
"흠흠, 내가 원래는 이러지 않는 데… 요즘 프로젝트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나 봐."
'퍽도 그렇겠다.'
도제들 설설 기는 것만 봐도 평소 연구실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에른은 캔달을 이해했다.
열여섯이 아니니까.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다.
또, 캔달쯤 되는 위치면 여러 가지 로 압박받는 것도 있긴 할 것이다.
"뭘요. 테스트나 빨리 봐주세요."
" 알았다."
도제가 시험지를 가지고 왔다.
캔달은 거기서 한 장을 빼서 자 기 방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에른.
'이런 분위기면… 하고 있어도 되 려나?'
다들 초집중 상태라 옆에서 검무 를 춘다 하I도 눈길도 안 줄 것 같 은데.
에른은 고개만 살짝 숙여 안광이 보이지 않게 하고, 차원거래를 시 작했다.
종료 전에 마지막으로 머무른 채
널은.
〈0계 채널〉
'어디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왕밤빵맛있어님으로부터 400코인을 받았습니다.]
[치약맛사탕님으로부터 550코인을
받았습니다』
[레우스님으로부터 600코인을 받았
습니다.]
자동거래로 올려둔 물건이 판매 되어 있었다.
'다 해서 2000코인...
만족스러운 동시에 약간 실망했 다.
0계 기준으론 초대량 거래지만, 1계에서 발생하는 매출에 비하면 1/10도 안 된다.
'0계인들의 구매력을 너무 과대평 가했나.'
에른은 2계로 올라가면서 한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건 바로 채널 간 중계 거래!
'0계하고 1계는 가깝지. 거래량만 채우면 어쨌든 올라가니까.'
그조차도 평생 해도 안 되는 교 류자가 있긴 하지만… 업적에, 적
절한 혼의 위상까지 갖춰야 하는 1계의 등급업 조건은 0계보다 훨 씬 난이도가 높다.
두 채널의 간격을 1계〉0계라고 한다면.
2계〉〉〉1계라고 봐야 햐지 않을까?
그 말인즉.
'2계에서는 싼데 0계에서는 비싸 게 거래되는 물건을 떼와서 팔면… 꽤 이득 보지 싶은데?'
1계만 뚫어 놨을 때는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1계 물건이 필요한 0계인은 1계 에 가서 거래를 할 테니까.
그조차 안 되는 0계인은 애초에 개털이라서 몇 백 단위 코인을 턱턱 낼 수가 없다.
하지만 2계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에른은 [흐름 파악]으로 2계에서 는 풍부한데 0계에서는 희소한 물 품들을 찾아서 자동거래로 올려놓 았다.
결과는, 예상대로 짭짤하게 건지
긴 했는데… 2000코인으로 만족하 기엔 에른이 너무 커 버렸다.
'아니지. 어차피 놀리는 채널이었 는데, 자동거래로 버는 금액이면 나쁘지 않다.'
0계 체크도 끝났으니 2계에 올라 가 볼까 하는데.
"후우.…"
근처에서 깊은 한숨이 들렸다.
'어디서 바닥 뚫나?'
한숨을 내쉰 사람은 라프엘.
축 처진 그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별로 어려운 진법도 아니던데, 아 까부터 뭘 저렇게 고민하지?'
에른은 차원거래를 종료하고, 라 프엘에게 가서 어깨를 톡톡 건드 렸다.
".…"뭐냐?"
"아까 슬쩍 봤거든요. 마법진."
"그래서?"
"좀 자세히 봐도 될까요?"
"못 보던 얼굴인데. 마법사?"
"마법사는 아니구요. 마법 지식은 살짝."
라프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면 뭐 알아?"
"살짝만 고치면 될 거 같아서 그 럽니다. 보기 안쓰러워서요,"
"나 참. 살다 살다 별 희한한 경우를 다 보네...
라프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밖에.
캔달은 위대한 마법사다.
그에게 폭언 듣는 거야 참을 수 있지만, 웬 처음 보는 애송이한테 훈수 듣는 건....
그가 분노를 다스리는 동안, 에른 은 마법진을 살펴보고 있었다.
"쉽네요. T값을 좀 늘리고 여기 이 난잡한 부분만 싹다 쳐내면 괜찮은 마법진이 되겠는데요."
"허튼소리. 저리 안 가?"
"허튼소리 아닌데."
"...스승님 손님이라 참는다. 좋 은 말로 할 때 가라."
문득, 주위 시선이 느껴졌다.
도제들이 살벌한 눈빛으로 이쪽 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들 저러지?'
의아해하는 차.
에른의 눈길이 라프엘의 책상 한 부분, 명패가 놓인 곳에서 멈췄다.
〈선임 마법사 라프엘〉
'뭐야... 도제가 아니었어?'
그 쉬운 것도 해결 못 해서 쩔쩔 매길래 도와준 건데, 선임 마법사 라니.
선임 마법사는 연구실 이인자다.
도제들이 불쾌해할 법도 했다.
"미안합니다. 괜히 참견했네요."
에른이 물러나자 도제들이 다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선임이면 최소 4서클은 될 텐데.
3서클인 나도 보는 걸 못 본다고?'
에른은 의아함을 느꼈다.
마탑에 온 뒤로 계속 들던 이질감.
간질간질한 느낌의 정체는.
'확인해 봐야겠어.'
에른은 도제가 놔두고 간 시험지 를 가지고 와서 문제를 풀었다.
1번 문제.
Q. 제시된 회로는 잘못된 마법 회 로다. 경로를 수정해 올바른 회로가 되도록 고치시오.
스스
=『=『.
에른은 망설임 없이 선을 그었다.
'쉽네.'
2번 문제.
Q. 다음 마법진에는 비효율 구간
이 3개 존재한다. 전부 찾아서 표시 하시오.
'3개라고? 5갠데?'
에른은 계속해서 풀어나갔다.
보는 즉시 답이 떠오른다.
문제를 푸는 시간보다 읽는 시간
이 더 걸릴 정도.
'쉬워, 쉬워! 쉬워도 너무 쉽잖아!' 종 30문제를 다 푸는 동안 한 2
분 정도 지나간 것 같다.
이게 말이 되는가 싶은데.
'혹시 난이도 엄청 낮고 그런 건?'
에른은 맨 앞장을 확인했다.
-표준 마법사 시험(고급), 제한 시
간 90분.
" 아."
의문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마나 폭포에서, 비효율적인 명상 을 하는 마법사들.
간단한 문제를 난제라고 자랑하 는 캔달, 풀지 못하는 샤펠.
그리고 라프엘과 이 시험지.
'그냥 내가 대륙 수준보다 높은 거였군.'
1계의 무공은 대륙의 무술을 압 도한다.
검기〉오러이듯이.
마찬가지로, 2계의 3서클을 대륙 의 3서클과 동급으로 보면 안 되 는 거였다.
'그래도 그렇지. 5수에다 마법 포
기한 놈한테 흡수한 지식인데.'
어이없어하는 그띠!.
"뭐, 뭐야! 이게 말이 지...
라프엘이 자리에서 벌떡
그가 이쪽으로 뚜벅뚜벅
"너! 마법사 아니라며? 짓말을!"
도H! 아니
일어났다.
다가왔다.
어디서 거
[99 화]
"그만하면 충분하다. 더 볼 것도 없어."
뛰어난 마법 지식, 훌륭한 스펠 캐스팅 실력.
캔달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이게 다 독학으로 갈고 닦은 거 라 이거지?"
"뭐...
샤펠이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 다 기사 밖에는 없으니까 요. 누구한테 배우고 싶어도."
캔달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에른은 어디서 이런 천재를 물어 온 거지?"
"천재라뇨. 제가 무슨…. 겨우 2서 클이고."
"서클은, 어차피 본인 한계치까지 는 어떻게든 늘릴 수 있어. 중요한 건 서클을 받쳐줄 기초지."
어지간하면 등급을 뛰어넘기 어려 운 기사와 달리 마법사는 서클이란
잣대로 전부를 평가할 수 없다.
"기초 없이 서클만 높아 봐야 유 명무실 그 자체거든. 하… 재능만 보면 당장 내 제자로 들이고 싶은 데."
놀라움은 곧 아쉬움으로 변해 갔다.
본격적인 마법사의 길을 걸으려 면 심장의 마나 하트를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그랬다가는 클라우스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어디 시골 남작가 정도였으면 친
히 찾아가 제자로 삼게 해 달라고 했을 텐데.
캔달이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여 도 백작가 자제를 막무가내로 자 기 밑에 둘 수는 없었다.
"아쉽군. 아무튼… 출입증 얻어다 줄 테니까 오고 싶을 때 언제든 방문하도록 하게."
"감,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 조카한테 흐fl. 자네의 진가를 알아본 건 에른이니까."
"예... 그래야죠."
샤펠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꿈에도 그리던 마탑에서 공부하 고, 실험하고, 마나 폭포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캔달 말대로 에른 덕분이다.
그가 발 벗고 나서줘서 한 단계 도약... 아니 비상할 수 있는 기회 를 얻었으니.
거기에 상회를 통한 장학금 지원 까지 물어다 주지 않았나.
그래서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긴 한데....
'왜 나한테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 는 걸까? 자기가 얻는 게 뭐길래?'
캔달은 샤펠을 앞세우고 방에서
나왔다.
"테스트 끝났어. 이 친구 완전 물
건이야."
그런데 연구실 도제들의 시선은
다른 곳에 못 박혀 있다.
바로 에른과 라프엘.
"너 뭐야! 어디 마탑에서 왔냐고!" 라프엘은 에른에게 삿대질을 하
며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확실히 이쪽에서 눈길을 떼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딴 식으로 사람 놀리면 재밌 어? 재밌냐니까!"
"내가 뭘...?"
라프엘은 눈이 돌아가 있고 에른 은 영문을 몰라 황당해한다.
캔달이 호통을 쳤다.
"뭣들 하는 거야!"
"스, 스승님...
"뭔진 모르겠지만 그만들 해."
이곳은 캔달의 연구실.
연구실에서 대표 마법사는 거의 신과도 같다.
아무리 눈이 돌아갔어도 신의 명 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
라프엘이 숨을 골랐다.
그러나.
"자네, 마법진은 다 고치고 이러고 있는 건가?"
"그, 그게...
"하여간, 선임이란 놈이 책임감이
없어. 확 갈든가 해야지."
re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가끔, 아주 가끔은, 인간이 신에 게 도전하는 순간이 있다.
그런 무모함이 인간의 위대한 점.
"스승님!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닙 니까?"
"...내가 뭐?"
"절 내치시겠다구요? 내가 지금까 지 해온 게 얼만데!"
라프엘이 자기 몸을 가리켰다.
"보세요. 저 일주일째 집에 못 갔 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 하고. 사람 꼴이 아니라구요!"
"그건 선임 마법사의 숙명이야. 나도 그 과정을 거쳤고… 알고 자 원한 거 아니었나?"
"예, 아주 잘 압니다! 근데 그렇 게 부려 먹었으면 끝까지 책임지 셔야죠! 어디서 천재 소년 영입해 와서 선임 자리 덥석 넘기는 게 맞는 경웁니까!"
"...천재 소년? 아, 이 친구?"
캔달이 옆에 선 샤펠을 쳐다봤다.
"선임도 도제도 아니고 그냥 청강 생 개념으로 드나들게 될 거야. 그 러니까 얼토당토않은 소리는 그만 하지."
"걔 말구요!"
라프엘의 손가락 끝이 에른을 향 했다.
"저 자식!"
"뭐?"
캔달은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에른? 그 애는 내 친구 아들일 뿐이다."
"뭔가 했더니 인맥이었군요! 저한 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프엘... 참는 데도 한계가 있 다. 애초에 에른은 마법사도 아니 고."
"마법사가 아니라구요? 이 마법진 보시죠."
캔달은 라프엘이 건넨 종이를 넘 겨 받았다.
"...고쳤으면 고쳤다고 할 것이
지. 잠깐, 이 개선 방식은 훌륭한 데? 어떻게 이런 발상을?"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럼 누가?"
원망 가득한 라프엘의 눈동자가 바라보는 것은.
"또 에른 물고 늘어지는 겐가? 아 까부터 자꾸 헛소리하는데...
"헛소리 아닙니다!"
라프엘은 에른의 앞에 놓인 시험 지를 집어 들었다.
그가 에른에게 물었다.
"이거 조금 전에 풀기 시작한 거지?"
"뭐...
"한 5분 걸렸나? 아니… 그새 끝 까지 다 풀었네."
라프엘이 채점을 시작했다.
"정답, 정답… 정답, 다 정답! 만 점이야! 아주 대단해! 이러고도 마 법사가 아니라구요?"
캔달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떠 올랐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진
짜 이상한 일이군."
"예?"
"내 친구 말이야."
"친구 분이 뭐요!"
"그 친구 이름이 레바단이거든."
"레바단이라고 하면 제가 압니까?"
"모르면 간첩이지.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아버지를 뒀으니까. 물론 그 친구 자체로도 유명하고."
"예...?"
라프엘의 생각이 어딘가에 미쳤
다?
"레바단? 그 레바단?!"
"소개가 늦었군. 내 친구 아들인 에른 스틸가드다. 이만하면 해명이 됐나?"
스틸가드에서 마법사가 나올 리 가 없다.
그러니 새로운 선임 마법사일 수 도 없고.
라프엘이 새된 소리로 되물었다.
"지, 지금 거짓말하시는 거죠?"
"거짓말 아닌데요."
에른은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가서 라프엘의 어깨를 가볍게 움켜쥐어 줬다.
으드득.
"컥!"
어깨가 뽑혀 나가는 것만 같은 고통.
마법사가 낼 수 있는 악력이 아 니었다.
"이, 이거 [스트렝스]지? 스승님 하고 짜고 이러는 거잖아!"
"참... 사람 말 못 믿는 성격이네.
이분 원래 이래요?"
에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험지를 돌돌 말았다.
막대기 모양으로 만들고.
후웅!
마나를 실어 휘두르니 살벌한 파 공음이 들렸다.
"이래도?"
"[블레이드 샤프]의 응용. 그건 나 도 할 수 있거든?"
퍼석!
하는 수 없이 내리치자 나무로 된 책상이 반으로 부러졌다.
"이래도?"
이건 마법으로 설명이 안 되는 듯.
에른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마나 를 더 실었다.
파사삭.
마나 주입을 견디지 못한 시험지 가 잘게 부서지며 낙화처럼 흩날 렸다.
이래도?"
"어... 어어
라프엘의 눈에 이성이 돌아왔다.
'마나 호흡을 익힌 게 맞는 건가? 기사면 진, 진짜 스틸가드...?'
무모하기에 아름답지만, 그렇기에 어리석기도 하다.
'내,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신에게 반기를 든 자의 말로.
라프엘의 몸이 덜덜 떨렸다.
스승의 노여움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네.…"
캔달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폭풍전야를 연상시키는 은은한 분노.
"흐어 억!"
라프엘은 덜컥 겁을 먹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조], 죄송함니다, 스승님!"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도제들이 연구실을 정리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에른이 머리 를 긁적였다.
"일이 왜 이렇게 꼬인 건지… 책상 값은 제가 변상할게요. 숙부님."
"변상은 무슨. 여기까지 와 줬는 데 못 볼 꼴 보여 줘서 미안하다."
"부탁드리러 온 건데요, 뭐. 미안 해하실 거 없어요."
"라프엘... 요새 너무 굴렸나. 스 트레스 때문에 맛이 간 모양이야. 이해 좀 해 줘라."
"단단히 오해한 것 같던데… 찾으 러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가 가면 어딜 가겠어. 금방 돌
아오겠지. 아, 그건 그렇고. 아까 라프엘이 한 말 말인데...
캔달이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마법진과 시험지에 대해서 알고 싶은 눈치.
에른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변명을 대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
천장에 달린 마법 스피커에서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보안과에서 알려드립니다. 12층 에서 노숙자로 짐작되는 괴한이 출몰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만… 라프엘 선임 마법사인 것으로 확 인되었습니다. 악취와 불결한 외관 은 철야 작업의 영향일 뿐이니 신 경 쓰지 마시고 연구에 매진해 주 시기 바랍니다.
"흠흠. 거참, 좀 씻고 다니라니까."
*
에른은 2계에 도달한 뒤로 쭉 정 석 루트를 탔다.
여기서 말하는 정석 루트란?
0계와 1계에서 연속으로 검증된 방식.
'가장 먼저 채널의 인기 품목을 찾는다.'
비싸기도 하면서 거래량도 많은, 채널을 대표하는 물품.
그걸 한도까지 사고팔고 하면서
시드머니를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 로 거래 규모를 차츰 확장시킨다.
0계에서는 그게 중급 마나석이었 고 1계에서는 내공과 영약.
2계에선?
'상급과 최상급 마나석, 그리고 마력 촉매제.'
마나석은 마법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물건이었다.
마나 하트를 키우는 용도로만 써 먹는 기사와는 달리, 마법사는 마 력 충전과 마법진 가동 등 마나석
을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어서.
2계의 마법 수준은 0계의 그 어 떤 세계보다 높아 대부분의 교류 자들이 상급 이상을 선호했다.
그리고 마력 촉매제.
이건 대륙에서는 존재 자체를 모 르는 물질이다.
극소량만 사용해도 마력의 질과 양이 동시에 상승해 구현되는 마 법의 스케일을 대폭 키워 준다.
고도로 발전된 마법학과 함께 2 계 마도 국가들의 마법 문명을 지
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
물론, 그런 만큼 비싸기도 했다.
상급 마나석의 평균 거래가는 개 당 200코인, 최상급 마나석은 500 코인을 넘어서는데.
'마력 촉매제는 하급이 4코인
4코인이면 싼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다.
하급 마나석이 개당 3코인 정도 하니 까.
그런데 하급 마력 촉매제는 개수
가 아니라 용량을 기준으로 한다.
그 기준 용량은 겨우 lg!
같은 무게의 금보다 50배도 넘게 비싼 것이다.
[품목 : 마나석(상급) 판매 제한까 지 (120/2000)]
[품목 : 마나석(최상급) 판매 제 한까지 (80/3000)]
[품목 : 마력 촉매제(하급) 판매 제한까지 (18/1000)]
[섭리의 눈]으로 남은 제한량을 살펴보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역시, 2계에 올라오기를 잘했지.'
[보유 코인 : 45423]
0계에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하 루 300코인 수익이 생기고.
1계 거래로는 매일 2500코인이 계좌에 쌓인다.
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매일 올라오는 거래소 물품을 고스란히 무림만물상의 재고로 바꾸 기만 하면 되는데, 차 한 잔 마실 시간만 투자해도 충분!
반면 2계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야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일일이 교류자와 접촉해야 해서.
'오늘은 한 5000코인 벌었나… 채널 세 개 다 합치면 8000코인 가
까이 되겠군.'
아직 정석 루트만 밟고 있는데도 이 정도다.
더 좋은 건 제한량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
당분간은 안정적인 거래로 따박 따박 코인이 꽂힌다는 게 가장 마 음에 드는 부분이다.
에른은 하루의 거래를 마무리하 고 친구 목록에서 그를 찾아 메시 지를 보냈다.
-에른 : 아직도 발견 못 했어?
-마법만이내살길 : 예… 오늘은 진짜 온종일 쉬지도 않고 채널만 뒤졌어요. 그랬는데 샤일로크라는 사람은 안 보이던데요?
[100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