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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4% APOCMASCOT / Chapter 9: 9

Chương 9: 9

***

오후가 되자 한쪽에서는 드라마 촬영이 진행됐다.

차우진은 자기가 작업하는 쪽은 전기를 넣지 않고 알아서 작업했다.

유소진이 피디에게 물었다.

"저기서 전기 공사하는 분이요. 어떤 사람이에요?"

"아. 현장에서 급할 때 부르는 사람인데, 실력이 좋대. 빠르고 정확하게 해결해준다더라."

"그렇게 실력이 좋은데 왜 급할 때만 불러요?"

"방송국 직원이 아니야. 찾는 곳이 많나 봐. 시간이 맞아야만 와줄 수 있대. 오늘은 우리가 운이 좋았지. 사흘이나 해준다잖아."

***

이 드라마에는 오윤서도 출연한다. 그녀는 스케줄을 조정해서 영화와 드라마를 동시에 진행했다.

오윤서가 현장에 왔다가 차우진을 보고 반가워했다.

"이제 우진 씨도 우리 드라마에서 일한다면서요?"

"딱 사흘만 땜빵 하는 겁니다. 저는 그런데."

차우진이 옆을 보았다.

"예지 씨는 여기 왜 있습니까?"

정예지가 씩 웃었다.

"배우가 현장에 왜 있겠어요?"

"예지 씨는 드라마 하는 거 따로 있지 않나?"

"전에 드라마 세트장 하나 더 소개해준다고 했잖아요? 그게 이건데, 전엔 싫다더니 알아서 와서 하네요?"

"어쩌다 보니까."

"난 여기에 윤서 언니 상대역으로 나와요. 오늘 촬영분에는 안 나오는데 놀러 왔어요."

"너무 노는 거 아닌가 싶은데."

"어머. 우진 오빠보다는 많이 일하는 것 같은데요?"

"나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강태공이신가?"

차우진이 손을 흔들었다.

"일해야 하니까 가시죠."

"뭐 도와줄 거 없어요?"

"전기를 좀 압니까?"

"물에 넣으면 막 지지직 한다는 거?"

차우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근처에도 오지 말아요."

"아. 그럼 우진 오빠 일하는 동안 난 놀아야겠다. 옆에서 막 놀아야지."

"놀리러 온 거네."

"앗! 드디어 눈치챘네요?"

"꺼져요."

정예지는 오늘 여기 차우진이 일한다는 말을 듣고 놀리러 왔다. 그런데 그녀가 배우로 출연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피디에게 인사하고 유소진에게도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안녕하세요."

처음에는 오늘 촬영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피디와 유소진이 며칠 후의 촬영 콘셉트도 설명했다.

그 이야기가 끝난 후에 유소진이 정예지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분하고 아는 사이세요?"

"누구요?"

"전기 공사하는 분이요. 좀 전에 웃으면서 이야기하시던데."

"우진 오빠요? 제가 최근에 찍는 영화에서 만난 분이에요."

"거기서도 전기 공사 하시는구나."

정예지가 설명했다.

"전기도 보고 스턴트맨도 하고, 그리고 스태프 일도 하고. 그 영화는 이제 거의 다 찍었지만, 한동안은 거기서 안 하는 게 없었어요."

"아. 다양하게 하시는구나."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유소진이 차우진을 보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신경이 조금 쓰이네요."

피디가 끼어들었다.

"어? 유 작가. 혹시 취향이 저런 쪽이야? 나이는 비슷해 보이는데…."

유소진이 얼른 말했다.

"아닌데요? 전 날씬한 사람이 좋아요."

옆에서 정예지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구나. 난 배 나온 건 신경 안 써요."

"네?"

"그게 왜 문제예요? 운동시켜서 빼면 되는데."

"그게 어디 쉽나요?"

정예지가 싱글벙글 웃으며 차우진을 보았다.

"트레이너 붙여서 독하게 운동시키면 다 빠져요. 내가 급할 때 그렇게 빼봐서 알아요. 우리 트레이너 진짜 독해요."

차우진이 일하면서 말했다.

"내가 요즘 너무 바쁘게 일하나? 이러다 살 빠지겠다."

그는 빌런도 잡으러 다니고, 회사 두 곳에서 이사 자리도 받았다.

차우진이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건 아니다.

대신에 딥어스테크의 개발 쪽과 다른 부서 사이에 트러블이 생기면 차우진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했다.

사덕리소스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하는 회의가 가끔 있다.

오윤서와 정수찬에게 일어날 일도 해결해야 한다. 그것 때문에 지금 여기서 전기 공사를 하고 있는데, 현장 작업이라 몸을 많이 써야 한다.

"여기에 스킬까지 쓰니까 살이 빠지지."

스킬은 공짜가 아니다. 스킬을 쓰려면 대가가 필요하다. 보통은 체력부터 소모된다.

"몸을 유지하려면 역시 더 먹어야겠어."

저녁때가 됐다. 차우진이 일을 정리하고 현장을 나왔다.

촬영 배경은 낮이다. 건물에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는 상황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는 작업을 접었다.

차우진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정예지가 따라왔다.

그녀가 물었다.

"어디 가요?"

"김치 삼겹살 먹으러 갑니다."

"앗! 나도 그거 좋아하는데."

"배우가 삼겹살을?"

"여배우는 사람 아니에요?"

"배 나옵니다."

"밥이나 냉면만 안 먹으면 안 나와요."

"하고 싶은 말이?"

"고기 사줘요. 오늘 돈 번 거 알아요."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있는 년이라고는 안 하네요? 아싸."

"갑시다. 얼마나 먹는지 보게."

삼겹살을 먹으며 차우진이 물었다.

"예지 씨 다음 촬영은 어떤 겁니까?"

"며칠 뒤에 병원에서 촬영이 있어요. 그때 실수 많이 하는 레지던트 의사 역할이에요."

차우진은 전기 작업을 명분으로 이미 대본을 받아보았다.

"아. 그거. 잘 어울리겠네."

"그쵸? 제가 가운 입으면 잘 어울리겠죠?"

"아니. 레지던트 의사 역할 앞에."

"무슨 뜻이에요?"

"고기 먹어요. 맛있네."

낡은 건물에서의 촬영은 사흘 일정으로 진행됐다.

차우진은 이틀 만에 작업을 끝냈다.

조연출이 감탄했다.

"와. 이걸 이틀 만에 다…. 아니지. 실제로는 하루 반이지. 소문대로 진짜 빠르십니다."

"촬영 끝나고 배선 걷어내는 건 다른 사람 불러서 하시죠. 그건 제가 없어도 되니까."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에도 차우진이 현장에 방문했다.

그가 조연출에게 물었다.

"내일 병원 촬영에서 엑스트라 안 필요합니까?"

"누구 소개해주게요?"

"제가 하려고요."

"네? 차 기사님이요?"

오윤서가 근처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끼어들었다.

"우진 씨는 내가 요즘 찍는 영화에서 엑스트라를 자주 했어요. 단역도 가능해요."

영화 '운명의 풍차'는 촬영 도중에 대형 사고가 날 뻔한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정예지가 크게 다칠 뻔했고, 두 번째는 죽을뻔했다.

차우진이 그 사고를 막았다.

이제 윤성준 감독은 차우진이 온다고만 하면 원래는 없는 자리라도 새로 만들어준다. 대사가 있는 단역도 주려고 했는데 그건 차우진이 거절했다.

조연출이 말했다.

"이벤트 행사 직원 역할이 남는 게 있는데요. 그건 가면 쓰고 있어야 하는데…."

"딱 좋네요. 그 가면 제가 쓰겠습니다."

84. 병원 로비

조연출이 말했다.

"근데 그 가면 쓴 이벤트 직원 역할은 저글링을 할 줄 알아야 맡을 수 있습니다."

저글링은 공 몇 개를 공중에 번갈아 던지고 받는 기예다.

"할 줄 압니다."

해본 적은 없다.

조연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유. 그러면 말씀을 하시지. 이거 갑자기 빵꾸 나서 저글링은 빼고 찍어야 하나 했는데요. 피디님께 말씀드리고 바로 명단에 올릴게요."

조연출이 가고 나서 오윤서가 물었다.

"단역은 안 하는 거 아니었어요?"

"얼굴이 안 나오면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 그래서 오토바이 액션도 하셨지. 참. 내일 수찬 씨도 응원 오는데."

차우진이 생각했다.

'창수 형은 오윤서 씨가 병원에서 촬영할 때 사고가 난다고 했어. 정수찬이 그 모습을 직접 보겠구나.'

오윤서가 말했다.

"저번에 소개해준 그 탐지기 있잖아요."

"마그마 탐지기요."

"네. 수찬 씨가 그러는데, 그거 상당히 혁신적인 제품이라고 하더라고요. 무사히 완성될지는 모르겠다고도 했지만요."

"완성해야죠. 어떻게든."

***

차우진이 집에서 테니스공 세 개를 던지며 저글링을 연습했다.

"쉽네."

공을 다섯 개로 늘려봤다. 여전히 할만했다.

차우진은 칼도 피하고 총도 피한다. 그 전투 센스를 사용하면 공 몇 개 던지고 잡는 건 쉬웠다.

차유리가 소파에 누워 배를 긁으며 물었다.

"그런 건 언제 배웠냐?"

"내일 촬영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로 했거든. 거기서 이거 해야 해."

"어디서 하는데?"

"한국대병원 강남 분원."

"그 옆에 있는 백화점에 맛있는 거 많다. 간 김에 많이 사와라."

"돈 주면 시간 날 때 들러는 볼게."

"돈이라니?"

"사오라며?"

"있는 새끼가 더하다더니. 너 주식 부자에 두 회사에서 이사 겸직하잖아. 부자 동생이 불쌍한 누나를 위해서 맛있는 거 좀 사라."

"주식 안 팔았다고."

"그럼 지금은 거지야?"

"월급이 나오니까 거지는 아니고."

"두 회사에서?"

"어."

"그럼 사야지."

차유리가 스마트폰으로 톡을 보냈다.

잠시 후에 차우진의 스마트폰에 톡이 들어왔다.

민수연이 보낸 톡이었다.

- 내일 백화점에 간다며? 맛있는 거 사와라. 말로 할 때 많이 사와라.

차우진이 불평했다.

"왜 둘 다 이렇게 폭력적일까?"

***

이튿날 차우진이 한국대병원 강남 분원을 찾아갔다.

강남 분원은 1층 로비가 꽤 넓었다.

차우진이 맡은 건 병원 로비 한쪽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행사를 진행하는 이벤트 회사 직원 역할이다.

오윤서와 정예지는 먼저 와서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예지가 차우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왔어요?"

차우진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아. 힐링 된다."

"뭐가요? 어머! 내가 예뻐서?"

정예지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랑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나 정예지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폭력적이지 않아서요."

"네?"

"사람을 때리지도 않고."

"어머. 내가 사람을 왜 때려요? 뉴스에 날 일 있어요?"

차우진이 엄지를 세웠다.

"지금 그 생각. 아주 좋아요."

"뭐래."

근처에 오윤서가 있었다.

차우진이 오윤서에게 인사말처럼 제안했다.

"병원에 오신 김에 건강검진을 좀 받아보시죠."

오윤서가 미소를 지었다.

"올해 초에 받았어요. 괜찮아요."

"MRI 같은 것도 찍었습니까?"

"아뇨. 딱히 이상이 없어서요. 그런 건 한 번도 안 찍어봤어요."

"그러시구나."

정예지가 옆에서 물었다.

"나한테는 안 물어봐요?"

"예지 씨는 워낙 건강해 보여서."

"어? 뭐죠? 그 말의 의미는? 다이어트 하라는 건가?"

"지금 상태가 딱 좋으니까 다이어트는 하지 말아요."

정예지가 콧소리를 살짝 냈다.

"흐흥. 뭐 그렇긴 하죠? 건강미 있다는 말 많이 들어요."

"그거 칭찬일 겁니다."

"앗. 갑자기 칭찬 아닌 거 같아. 억양이 조금 이상했어."

차우진이 오윤서를 보며 생각했다.

'제대로 검사하면 몸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 텐데.'

그건 평범한 건강검진에는 나오지 않는다. MRI나 MRA가 필요하다.

하지만 강제로 검사받게 할 수는 없다. 자연스러운 방법이 필요하다.

차우진이 끌어들여야 하는 건 오윤서가 아니라 그녀의 남자친구 정수찬이다.

'여기가 병원이라서 신체의 상태 이상을 경고하기 딱 좋은데 말이야.'

그녀에게 심각한 병이 있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 후에야 알려진다.

차우진은 정확한 병명까지는 모르지만 머리를 검사하면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안다.

'지금 검사해도 나오면 좋겠는데.'

멸망한 세계의 정수찬은 그녀가 사망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은퇴했다.

박창수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버려진 잡지를 주워 읽던 박창수가 말했다.

"정수찬은 은퇴하지 않았어야 해. 멸망 전에 계속 연구했으면 마그마 폭발 사태 이전에 방법을 찾았을 거야."

"마그마 탐지기가 너무 늦게 나왔잖아."

"정수찬이라면 그 탐지기가 없어도 뭔가 찾아내지 않았을까? 멸망 직전에 복귀해서 결국 해결법을 찾아냈으니까."

"너무 늦었지만."

"맞아. 그때는 너무 늦었지. 여자친구가 죽었다고 해서 은퇴하는 게 말이 되냐고."

"그만큼 사랑했겠지."

"우진아. 네가 사랑을 아냐?"

"형은 알고?"

"난 알지. 옛날에 뜨겁게 사랑했잖아."

"그런 사람치고는 너무 자주 들이대더라? 매번 까이지만."

"야. 꺼져. 내가 까인 건 다 너 때문이야."

차우진이 잡지를 넘겨받아 뒤적이며 물었다.

"근데 정수찬의 여자친구는 왜 죽었대?"

"거기 안 나와?"

"뒷부분이 찢어져서 그 이야기가 안 보여."

"병원에서 촬영하다가 크게 다쳤어."

"그 상처 때문에 죽은 거야?"

"그건 아닌데, 그 부상이 방아쇠가 됐다더라."

***

차우진은 로비 한쪽에서 가면을 쓰고 공을 공중에 던졌다. 공 다섯 개가 번갈아가며 공중에 떴다가 내려왔다.

정예지가 감탄했다.

"와아. 다섯 개짜리도 할 줄 알아요?"

"여기 출연하려고 어젯밤에 연습했습니다."

"농담이죠?"

"물론이죠."

정예지는 실수를 많이 하는 젊은 의사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두 팔을 옆으로 펼치며 물었다.

"어때요?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나 의사를 할 걸 그랬나 봐요."

"공부는 잘하셨는지?"

"좀 했거든요?"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아니라던데."

"어머. 뭐죠? 윤서 언니 팬이라더니 나한테도 관심 있어요? 나는 왜 검색했을까?"

"오윤서 씨를 검색하다 보니까 그 이야기가 같이 나와서."

"쳇. 윤서 언니는 남자친구 있는 거 알잖아요. 내가 같이 만나게도 해줬는데."

"그냥 팬이라니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정예지가 방긋 웃었다.

"그쵸?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모르는 것 같은데."

정예지가 돌아섰다.

"일하러 가야겠다."

그녀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오늘 촬영은 병원 로비에서 한다. 장소가 병원이라서 대형 크레인 같은 장비는 사용하지 않았다. 스태프들은 카메라와 조명, 마이크만 준비됐다.

피디와 배우들이 먼저 모여 어떻게 촬영할지 리허설을 했다.

차우진은 오윤서가 어린이 환자 역할을 하는 아역 배우와 이야기할 때 배경에서 저글링을 하는 단역을 맡았다.

대사는 없다. 화면에 나오는 순간도 짧다. 그래서 차우진은 오늘 어느 위치에서 저글링을 해야 하는지만 들었다.

차우진이 촬영 동선을 확인하는 오윤서의 주변을 살폈다.

'오윤서는 병원에서 촬영하다가 크게 다쳐야 하는데.'

멸망한 세계의 정보로는 그것까지만 알 수 있다. 그게 오늘인지도 모르고 이 병원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다른 영화나 드라마의 병원 촬영에서 문제가 터질 수도 있다.

'그래도 대비는 해야지.'

차우진이 촬영용 장비들을 확인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장비나 넘어지면 배우가 다칠 만한 장비는 없었다.

'혹시 로비가 아니라 병원 밖에서 사고가 나는 건가?'

차우진이 병원 밖을 슬쩍 보았다. 외부 촬영 장소에도 문제가 될만한 건 없었다.

'그럼 이 병원이 아닌가? 아니면 오늘이 아닌가?'

***

박동식이 병원에 들어왔다.

그가 이 병원에 온 건 치료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환자를 만나기 위해서다.

문병을 온 것도 아니다.

'그 새끼가 입을 열기 전에 처리해야 해.'

박동식은 마약 딜러다. 전문적인 마약조직을 가진 건 아니다.

그는 예전에는 잔챙이 딜러로 활동했다.

그러다 신종 마약을 공급받을 수 있는 연줄이 생겼다. 그러면서 마약 장사의 규모가 커졌다. 그때부터는 이성훈을 심부름꾼으로 썼다.

처음엔 좋았다.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마약 거래 도중에 박동식이 살인을 저질렀다. 이성훈은 같이 있다가 상대가 휘두른 칼에 찔렸다.

박동식은 현장에서 도망쳤다.

심부름꾼 이성훈은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지금 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이성훈의 옆에서 칼에 찔린 시체가 발견됐다. 만약 이성훈이 끝까지 입을 다물면 혼자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박동식은 확신했다.

'그 새끼가 나를 위해서 뒤집어쓸 리 없어.'

살인을 저지른 건 박동식이다. 이성훈이 혼자라도 살기 위해 입을 열면 박동식은 즉시 수배된다.

'이미 한 놈 죽였으니까, 한 놈 더 죽여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성훈이만 없으면 짭새들은 내가 누군지도 몰라.'

그는 그래서 오늘 병원에 찾아왔다.

'잡히면 엿 되는 거고 안 잡히면 다 괜찮아.'

그는 단검과 약이 들어 있는 주사기를 하나씩 가져왔다. 그 약을 주사하면 사람이 죽는다.

'주사 한 방으로 끝내는 게 최선이야.'

그가 이성훈이 입원한 병실을 찾아 움직였다. 그러다 멈칫했다.

이성훈은 병실 침대가 아니라 복도에 서 있었다. 상태가 박동식의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런데 이성훈은 그곳에서 남자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

일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저 새끼가 왜 벌써 깨어났어?"

혼수상태라고 들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젠장. 이러면 일이…."

이성훈이 옆을 돌아보다가 박동식과 눈이 마주쳤다.

박동식은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이성훈이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가 남자들에게 뭔가 이야기했다.

박동식은 그 남자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짭새다.'

그는 즉시 돌아서서 걸었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러다 계단을 후다닥 뛰어 내려갔다.

***

차우진은 갑자기 싸한 느낌을 받았다.

멸망한 세계에서 이런 느낌을 받을 때면 주변에 꼭 위험요소가 있었다. 그 위험의 원인이 짐승일 때도 있지만, 사람일 때가 더 많았다.

그가 주변을 확인했다.

'뭔가 있다.'

지금 병원 로비에서는 드라마가 촬영 중이다. 그 촬영을 구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저쪽에 있다. 누구냐.'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로 새로운 놈이 섞여 들어왔다.

차우진이 상대의 눈을 확인했다. 눈동자에서 광기가 보였다.

'저놈.'

단순한 광기가 아니다. 광기에 살기까지 섞여 있었다.

결론이 나왔다.

'오늘 바로 이 촬영장이 맞아.'

오윤서가 다치는 곳이 여기라는 건 알았다.

차우진이 불평했다.

"창수 형. 병원에서 사고를 당한다며. 이건 사고가 아니라 습격이잖아."

이 병원 로비에는 그녀가 사고를 당할 만큼 위험한 시설이 없다. 그녀에게 일어날 일은 사고가 아니니까 없는 게 당연했다.

차우진이 오윤서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려다가 멈췄다.

'음? 광기의 방향이 오윤서가 아닌데?'

박동식은 오윤서 한 명만 보는 게 아니라 배우들을 둘러보았다. 그중에서도 의사 가운을 입은 정예지 쪽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예지?'

왜 타깃이 바뀌었는지 깨달았다.

'예지는 원래는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까.'

만약 정예지가 절벽에서 사망했다면 이 자리에는 올 수 없다. 그녀는 차우진이 목숨을 구해줬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미래가 변했다.'

박동식은 병실에서 도망쳐 로비로 왔다.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일단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인 곳에 끼어들었다.

그가 뒤를 확인했다. 형사들이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밖으로 튀어야 하는데.'

늦었다.

밖에서 병원 로비 출입구로 달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씨발. 이게 아닌데."

형사들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박동식을 찾기 위해서였다.

박동식은 며칠 전에 살인을 저질렀다. 그 전에는 마약을 팔았다.

마약상이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되면 다시는 바깥 공기를 못 마실 수도 있다.

박동식이 앞을 보았다. 정예지가 보였다.

그는 사람을 죽일 수는 있지만 체포되고 싶지는 않았다.

'유명한 연예인을 인질로 잡으면 빠져나갈 수 있나?'

85. 인질

마약 딜러 박동식은 오래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미 형사들이 구경꾼들 사이에서 박동식을 찾고 있었다.

박동식이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 앞에서 정수찬이 오윤서를 보고 있었다.

박동식이 정수찬을 옆으로 밀었다.

"비켜!"

정수찬은 별생각 없이 밀려났다.

박동식의 앞에 길이 열렸다. 그가 정예지를 향해 뛰었다.

정예지는 갑자기 달려드는 남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꺅!"

차우진이 순식간에 정예지의 옆으로 이동했다. 그가 그녀를 왼팔로 감싸며 박동식을 노려보았다.

정예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우진 오빠?"

이제 박동식은 정예지를 공격할 수 없다.

차우진만 달려온 게 아니다. 스태프 중 한 명이 상황을 깨닫고 정예지 쪽으로 뛰어왔다.

박동식은 정예지를 노리고 달리다가 옆에 사람이 늘어나는 걸 보고 급히 멈추었다. 그가 주변을 확인했다. 다른 배우가 눈에 들어왔다.

"오윤서?"

가까운 곳에 오윤서가 있었다.

그녀는 워낙 날씬해서 몸에 힘이 없어 보였다. 정예지보다 제압하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오윤서가 정예지보다 유명한 배우다.

박동식이 즉시 오윤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차우진이 오윤서의 앞으로 가려면 단거리 공간이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

카메라도 많고 CCTV까지 있는 이곳에서 그 스킬을 쓸 수는 없다.

"젠장."

박동식이 오윤서의 팔을 왼손으로 꽉 붙잡았다.

오윤서가 팔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너무 단단히 붙잡혀서 팔이 아팠다.

"왜, 왜 이래요!"

박동식이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오윤서의 가슴에 댔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

"꺄악!"

스톤파인더 사장 정수찬은 여자친구인 오윤서가 일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구경했다.

그는 주로 미국에서 일하기 때문에, 한국에 들어왔을 때는 이렇게라도 그녀를 더 오래 보려고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측근들만 알기 때문에 촬영장에서는 아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촬영하다 중간에 눈을 마주치면 오윤서가 방긋 웃곤 했다. 그러면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더 좋아했다.

그러다 박동식이 그를 밀치고 앞으로 나갔다. 정수찬은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밀려났다.

박동식이 정예지를 향해 달려갔을 때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챘다.

"어?"

정예지의 옆으로 차우진과 스태프들이 모였다. 박동식이 그걸 보고 방향을 틀었다.

그쪽에 오윤서가 있었다. 정수찬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깨달았다.

"안돼!"

늦었다. 박동식이 오윤서를 붙잡고 칼을 들이댔다.

정수찬이 즉시 그쪽으로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놔!"

박동식이 왼팔로 오윤서를 붙잡고 오른팔을 사람들을 향해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에서 시퍼런 빛이 번뜩였다.

"씨발! 아무도 오지 마!"

그가 그 칼을 오윤서의 가슴에 대며 소리를 질렀다.

"다들 물러서! 나한테서 떨어지라고!"

정수찬은 급히 멈췄다. 상대가 칼을 들고 오윤서를 인질로 잡았다. 함부로 덤벼들 상황이 아니다.

정수찬이 협상을 걸었다.

"이봐요. 원하는 게 뭡니까? 돈 필요해요?"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지 알아?"

박동식은 살인을 저지른 마약 딜러다. 마약을 팔아서 번 돈이 있고, 아직 다 팔지 못한 마약도 많이 남아있다.

그는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다. 체포되면 끝장이다.

정수찬이 다급히 말했다.

"그럼 왜…. 윤서는 상관없잖습니까!"

박동식은 일단 인질은 잡았다. 가만히 있으면 체포될 것 같아서 그렇게 했지만, 제대로 계획을 세우고 저지른 일은 아니다.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해.'

그가 소리를 질렀다.

"병원장, 그래. 병원장 나오라고 해!"

차우진은 정예지의 옆에 서서 오윤서와 박동식, 정수찬을 보며 생각했다.

'상황이 내 예상과 달라졌다.'

박동식이 처음 노린 건 정예지다.

'내가 예지 씨를 살렸기 때문에 상황이 변한 줄 알았는데.'

만약 정예지가 영화 촬영 현장의 절벽이 무너질 때 사망했다면, 지금 이 드라마 촬영에는 다른 배우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차우진이 그녀를 구하는 바람에 지금 여기에 정예지가 있다. 박동식은 그런 정예지를 노렸다.

그는 그래서 미래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우진이 정예지를 보호하자마자 박동식의 목표가 오윤서로 바뀌었다.

'예지 씨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오윤서를 노렸겠지.'

지금 상황은 결국 그가 아는 미래대로 진행됐다.

'내가 개입한 건 변하고, 개입하지 않은 건 그대로 진행되는 건가?'

그건 차우진이 개입해서 막지 않은 재난은 결국 10년 후에 터진다는 뜻이다.

'내가 개입하더라도 원래대로 진행될 여지가 남으면, 그쪽으로 갈 수도 있고.'

지금 상황이 그랬다. 범인은 정예지를 노렸다가, 차우진이 개입하자마자 멸망한 세계에서처럼 오윤서를 붙잡았다.

'제대로 막지 않아서 원래대로 진행된 거라면, 멸망급 재난들도 그러겠지.'

오윤서는 인질로 잡혀 있다. 박동식은 그녀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오윤서는 반드시 살려야 한다.

지금 그가 생각한 이론이 정수찬에게도 적용된다면, 그녀가 죽으면 정수찬의 은퇴를 막을 수 없다.

차우진이 오윤서를 구출할 방법을 궁리했다.

목격자가 없다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박동식의 시선을 잠깐 돌려놓고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쓰면 그녀를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목격자도 많고 CCTV도 있고 심지어 촬영용 고화질 카메라까지 있다. 여기서 스킬을 쓸 수는 없다.

차우진의 스킬이 대놓고 공개되면 멸망급 빌런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지구 멸망은 10년 후에 시작된다.

10년은 일부 사람들이 차우진의 말을 의심하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이다.

많은 사람이 두려운 것은 일단 피하고 싶어 한다.

앞으로 10년 동안 두려워하고 겁먹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차우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쪽이 훨씬 쉽고 편하다. 그의 말을 믿지 않으면 멸망을 외면하고 무시할 수 있다.

차우진이 스킬을 보여주고 미래를 설명해도, 선동에 휘말려 오히려 그를 욕하고 의심할 사람은 반드시 생긴다.

이미 차우진은 빌런을 몇 놈 제거했다. 그걸 문제 삼으면 얼마든지 시비를 걸 수 있다.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해도, 10년이면 온갖 이권 다툼이 벌어지고도 남을 시간이다.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말했다.

"멸망 초기에 그걸 이용해서 돈을 벌려던 놈들이 많았지."

차우진도 안다.

"재난을 막을 돈으로 개인 재산을 불리는 놈들도 많았고, 나 하나쯤이야 하면서 돈을 챙긴 놈도 수두룩했어."

"그렇게 돈을 모아도 멸망이 닥치면 대부분 죽었어. 사람은 정말 눈앞의 욕심에 눈이 멀면 한 치 앞을 못 본다."

***

차우진이 생각했다.

'멸망 초기에도 그런 놈들이 많았는데, 멸망이 10년이나 남은 지금은 그럴 놈들이 훨씬 더 많겠지.'

그렇게 탐욕을 부리다 대응에 실패해 멸망급 재난 하나만 터져도 40억이 죽는다. 두 개가 터지면 현대 문명이 무너진다.

다른 문제도 있다.

멸망급 빌런들이 차우진을 제거하려고 할 수도 있다.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멸망급 빌런이 생겨날 수도 있다.

멸망한 세계에는 정체가 끝까지 알려지지 않은 멸망급 빌런들이 있다.

그런 놈들은 차우진이 멸망을 예고하면 더 깊이 숨어들어서 재난을 일으킬 수 있다.

'내가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되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니까 차우진이 직접 멸망을 막아야 한다. 당연히 방송용 카메라 앞에서는 스킬을 쓸 수 없다.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역시 쉽지 않네."

정예지가 차우진의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윤서 언니 지금 위험한 거죠? 구출이 쉽지 않은 거죠?"

"인질로 잡혔으니까요."

"어떻게 해요."

"꼭 구해야죠."

오윤서가 죽으면 정수찬이 은퇴하는 미래가 온다. 정수찬이 없으면 마그마 폭발은 막지 못한다.

"예지 씨가 가야겠네."

"네?"

"오윤서 씨를 구하려면 예지 씨가 대신 인질이 되겠다고 하는 수밖에 없어요."

정예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요?"

"내가 접근하면 저놈이 경계하겠지만, 예지 씨가 가면 만만하게 볼 겁니다. 처음 노린 게 예지 씨니까 인질을 교체할 수도 있고, 아니라도 잠깐 흔들 수는 있겠지요."

"그러니까 제가 미끼가 되는 거네요?"

"그렇죠."

정예지가 긴장한 얼굴로 차우진을 보며 물었다.

"그럼 저도 지켜줄 수 있어요?"

"오윤서 씨는 살리겠죠."

그녀는 당황했다.

"뭐, 뭐죠? 아무리 윤서 언니 팬이라지만, 진짜…."

"예지 씨가 긴장할까 봐 농담한 겁니다. 예지 씨가 위험하지 않게 지켜줄 테니까, 나를 믿고 가요."

"진짜죠?"

"이번엔 믿어요. 사실이니까."

"후우. 알았어요. 오빠만 믿을게요."

"우리 의도를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저 배우예요. 이런 연기 잘해요."

정예지가 숨을 들이마신 후에 박동식을 향해 걸어가며 외쳤다.

"야! 윤서 언니 대신에 나를 잡아!"

"정예지?"

"원래 나를 노렸잖아! 나를 잡아. 내가 갈게!"

박동식의 눈알이 흔들렸다. 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욕심도 생겼다.

'인질이 하나보다는 둘이 나은가? 둘 다 붙잡고 있기는 힘든가? 묶어두면 되나?'

차우진은 박동식이 정예지에게 집중하는 사이에 옆으로 빠졌다. 그는 로비를 길게 돌아 박동식의 뒤로 접근했다.

정예지는 박동식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손가락까지 세워가며 열심히 말을 걸었다.

"그럼 그냥 나도 잡아! 원플러스원! 이거 오늘만 특별히 되는 거야!"

차우진이 박동식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걷는 걸음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발소리만이 아니라 인기척 자체가 들리지 않았다.

고양이 발걸음은 적에게 조용히 접근할 때 쓰는 암살 계열 기술이다. 침투용으로도 쓸 수 있다.

박동식은 정예지에게 신경이 팔려서 차우진이 뒤로 접근한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런데 이곳에는 박동식만 있는 게 아니다. 방송 촬영을 구경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차우진은 소리를 죽이고 접근했지만, 그 사람들의 눈은 피할 수 없다.

몇 명이 차우진을 보며 소리를 냈다.

"어? 어?"

"저거…."

박동식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가 아니라 그의 뒤를 향했다.

정예지가 얼른 손을 들어 박동식의 시선을 끌려고 했다.

"야! 나를 봐!"

소용없었다.

박동식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차우진이 고양이 발걸음을 멈추고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그는 박동식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상대의 왼쪽으로 달렸다.

박동식은 그의 뒤에서 뭔가 움직인다는 걸 깨달았다.

그 움직임을 쫓아 고개를 계속 돌렸다. 고개를 따라 어깨도 뒤로 돌아갔다.

오른쪽 어깨가 돌아가면서 칼날이 오윤서의 몸에서 떨어졌다.

박동식이 뒤를 완전히 돌아보았을 때, 차우진은 이미 그의 왼쪽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차우진이 박동식과 오윤서의 앞으로 이동해 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칼을 쥔 오른손이었다.

"뭐야!"

박동식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박동식은 힘이 이상할 정도로 강했다. 자칫하면 오윤서가 다친다.

차우진이 박동식을 걷어차며 오윤서를 옆으로 밀었다.

박동석과 오윤서가 반대 방향으로 밀려났다. 정수찬이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윤서야!"

박동식이 차우진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칼날이 닿을 거리는 아니었다.

"이 가면 새끼가!"

차우진은 오늘 저글링 공연을 하는 이벤트 직원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

박동식이 황급히 오윤서를 쫓아가려고 했다. 차우진이 그 앞을 막았다.

박동식이 소리를 질렀다.

"비켜!"

"싫다."

박동식이 차우진을 향해 달려들며 칼을 휘둘렀다.

마약 딜러 박동식의 칼은 연쇄살인마 마상국에 비하면 한참 느렸다.

차우진이 몸을 젖혀 그 칼을 피하며 박동식을 걷어찼다. 박동식이 다시 뒤로 쭉 밀려났다.

차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체격에 비해서 힘이나 맷집이 묘하게 강한데?"

그동안 싸운 조폭이나 청부업자들은 이렇게 걷어차면 나가떨어지곤 했다. 그런데 박동식은 두 번이나 버텼다.

"스팀팩을 맞은 건 아닐 테고…. 마약인가?"

뒤로 밀려난 박동식은 새로운 인질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차우진은 인질로 잡기에는 너무 강해 보였다.

그는 항상 약한 사람을 선호했다.

그의 눈이 정예지를 향했다.

정예지가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나며 차우진을 향해 외쳤다.

"야! 이제 그 언니 말고 나도 좀 지켜줘!"

86. 요격

박동식이 오윤서가 아니라 정예지를 보았다.

곧바로 차우진이 움직였다.

"감히 누굴 쳐다보냐."

차우진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속도가 남들이 뛰는 것처럼 빨랐다. 박동식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게다가 정예지는 뒤로 물러나고 있다.

이제 박동식이 정예지를 인질로 잡으려면 차우진부터 해결해야 한다.

박동식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칼을 크게 휘둘렀다.

"카아악!"

칼날이 큰 원을 그렸다. 칼날의 속도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 공격에 담긴 힘도 강했다.

차우진이 즉시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칼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였다.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박동식의 힘은 비정상적으로 강했다.

시간 가속에는 근력 강화 효과는 없다.

근력이 강화된 것처럼 보이는 부수 효과는 있는데, 소리를 지르며 칼을 휘두르는 박동식의 팔을 쉽게 누를 정도는 아니다.

공격력 강화 스킬을 추가로 쓰면 제압은 가능하다. 그렇지만 스킬을 중복해 사용하는 것보다 피하는 게 훨씬 쉽다.

차우진이 날아오는 칼날을 보며 허리를 비틀고 상체를 젖혔다.

칼날이 그의 얼굴을 베었다. 얼굴에 쓴 가면에서 뭔가 잘리는 소리가 났다.

정예지가 그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꺄악!"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을 피하면 반격의 기회가 생긴다.

차우진이 박동식의 다리를 걷어찼다.

고수는 동작이 커도 몸의 중심을 유지한다.

반면에 박동식은 약의 힘으로 강해지고 빨라졌을 뿐 고수는 아니다. 몸의 중심이 안정적이지 않았다.

박동식이 옆으로 나자빠졌다.

"크악!"

그는 나자빠지면서도 칼을 휘둘렀다. 목표는 차우진의 다리였다.

차우진이 바닥을 박차며 뒤로 뛰었다. 칼날이 병원 로비 바닥을 거칠게 긁었다.

가면은 방금 칼날에 스쳤을 때 일부가 잘렸다. 가면 오른쪽 중간부터 왼쪽 아래쪽으로 기다란 선이 생겼다가 쩍 갈라졌다.

잘려나간 부분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차우진의 입과 턱이 가면 아래로 드러났다.

정예지는 그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카, 칼이 얼굴을…."

"안 죽었습니다."

"안 죽은 건 알아요! 괜찮냐고!"

차우진이 정예지와 박동식 사이로 이동하며 손끝으로 얼굴을 만졌다.

"베인 곳은 없군요. 가면만 잘렸습니다."

"휴우."

정수찬은 오윤서를 데리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형사들도 뛰어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박동식! 칼 버려!"

"다 끝났어, 이 새끼야! 칼 버리라고!"

박동식이 칼을 쥐고 일어났다. 그 칼을 허공에 휙휙 휘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새로운 인질을 물색했다.

인질로 잡았던 오윤서는 정수찬과 함께 멀어지고 있다. 정예지는 주변에 지켜주는 스태프가 여럿 생겼다.

'더 쉬운 인질이 필요해!'

그의 눈이 아이들을 향했다. 차우진이 저글링을 할 때 구경하는 역할을 맡은 아이들이었다.

"으아아!"

박동식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을 향해 뛰었다.

차우진도 뛰었다. 박동식과 차우진의 경로가 겹쳤다. 요격 기회는 한 번뿐이다.

차우진이 점프했다.

박동식도 차우진이 뛴다는 걸 알았다. 그는 달리는 속도를 늦추며 공중으로 칼을 크게 휘둘렀다. 그 방향에서 차우진이 날아오고 있었다.

"죽어!"

차우진이 공중에서 그 칼을 걷어찼다. 칼날이 신발을 베고 지나갔다.

차우진이 공중에서 회오리처럼 회전하며 박동식의 턱을 걷어찼다.

"케엑!"

박동식이 옆으로 튕겨 날아갔다. 몇 미터나 날아가서 바닥에 떨어졌다가, 다시 몇 미터 더 쭉 미끄러졌다.

이번에는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마약으로 강화된 맷집으로도 그 충격을 버티지는 못했다.

차우진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형사들이 나가떨어진 박동식을 향해 달려갔다.

"잡아!"

정예지도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꺄악!"

차우진이 말했다.

"시조새인가."

"지금 뭐라는 거얏! 다리 괜찮냐고!"

차우진이 오른발을 들어보았다. 칼날이 신발을 베고 지나갔다. 밑창 뒤쪽은 쩍 갈라지긴 했지만 두꺼워서 뚫리지 않았다.

밑창을 벤 칼날이 신발의 옆면도 베었다. 그쪽은 칼날의 힘이 좀 빠졌을 때 베여서 깊게 잘리진 않았다.

차우진이 손가락으로 베인 곳을 만져보았다.

"괜찮군요."

"미쳤어요? 칼을 왜 발로 차요!"

"다 계산하고 적당한 힘과 속도로 찼다고 하면 안 믿으려나?"

"믿겠어요?"

"칼에 맞아줄 수는 없으니까 걷어차기라도 해야죠."

정예지가 차우진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가면을 벗겨 보려는데 차우진이 말렸다.

"여기 지금 보는 눈이 많아서."

"그래서요?"

"내가 얼굴 알려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습니까?"

"알죠. 그래서 감독님이 임팩트 있는 단역이라도 주려고 하면 다 사양했잖아요. 엑스트라도 얼굴 안 나오거나 분장한 것만 하고요."

"그런데 여기서 가면을 벗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녀가 주변을 보았다. 방송용 카메라는 물론이고 구경꾼도 많았다.

"칫. 알았어요. 저쪽으로 가요. 남들 안 보는 곳에서 확인하게."

"기어이 확인하려고 하네."

"그럼 안 하겠어요?"

이 병원에는 오늘 촬영을 위해 스태프들에게 제공된 사무실이 있다. 차우진이 정예지와 그곳으로 이동했다.

걸어가는데 발 옆쪽에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신발만 베였다고 말했지만 피해가 조금은 있었다.

'피부만 살짝 베인 정도인데…. 조금 무리했나?'

급한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목격자가 많아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쓸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인질로 잡히게 놔뒀다가 나중에 구출하는 방법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상관없겠지.'

차우진이 사무실 의자에 앉아 발에 손을 댔다.

멸망한 미래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르다 보면 가벼운 부상은 피할 수 없다. 전투에서 승리해도 긁히거나 베인 상처 정도는 쉽게 생긴다.

차우진이나 박창수는 회복력 증가 스킬이 있다. 그것만 있어도 이런 가벼운 상처는 쉽게 낫는다.

현대 문명 사회에는 좋은 약이 많다. 회복력 증가 스킬이 없어도 이 정도는 약만 발라도 낫는다. 스킬과 약을 같이 쓰면 더 잘 낫는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처가 즉시 낫지는 않는다

신발을 벗었는데 상처가 보이면 정예지가 호들갑을 떨 게 뻔히 보였다.

직접 회복 스킬은 그럴 때 유용하다.

차우진이 신발의 갈라진 틈으로 손가락을 넣어 상처에 손끝을 댔다. 그 상태로 스킬을 사용했다.

피부만 살짝 베인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피곤하네.'

직접 회복 스킬은 체력을 많이 잡아먹는다.

오늘 촬영 장소는 병원이다. 응급실 의사가 당장 달려왔다.

정예지가 호들갑을 떨었다.

"빨리 좀 봐 주세요. 이 사람 얼굴하고 발에 칼을 맞았단 말이에요."

차우진이 행사용 가면을 벗었다. 의사가 얼굴부터 확인했다.

"얼굴은 다행히 괜찮으시네요."

"휴우. 아. 발은요? 우진 오빠. 왜 발에 손을 대고 있어요? 다쳤어요?"

"그냥."

차우진이 신발을 벗고 검은색 양말도 벗었다. 양말에도 칼자국이 나 있었다.

정예지가 또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양말도 잘렸어! 발 다쳤나 봐! 그러게 왜 칼을 발로 차냐고!"

의사가 차우진의 발을 확인했다.

"괜찮은데요?"

"네? 양말은 칼자국이 났는데요?"

"아슬아슬하게 양말만 잘랐나 보죠. 발에는 상처가 없습니다."

"와. 대박 운 좋았나 봐."

차우진이 말했다.

"양말 도로 주시죠. 그거라도 신게."

"기다려요! 내가 가서 새로 사 올게요!"

"어디 가서?"

"어…. 내 거라도 벗어줄까요?"

"스타킹을?"

"앗?"

"됐습니다."

오윤서와 정수찬도 임시 사무실로 찾아왔다.

오윤서가 제안했다.

"제가 매니저 시켜서 사 올게요."

"괜찮은데."

"꼭 사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마워요."

오윤서는 조금 전에 박동식에게 인질로 잡혔었다. 그때는 칼날이 그녀의 가슴에 닿는 상황까지 갔다. 차우진이 아니었으면 크게 다쳤을 수도 있다.

정수찬도 옆에서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멸망급 재난을 막으려면 정수찬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러려면 오윤서가 살아있어야 한다.

차우진이 멸망한 미래에서 박창수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오윤서가 병원에서 사고를 당하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죽은 건 아니야.'

차우진이 작게 말했다.

"창수 형. 역시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잖아."

***

박창수가 폐허에서 주운 잡지를 보며 말했다.

"오윤서가 병원에서 사고를 당하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죽은 건 아니야."

"그러면?"

"그 사고로 크게 다쳤는데, 그것 때문에 병이 더 심각해졌어."

"무슨 병인데?"

"나도 병명을 기억하는 건 아닌데."

박창수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더라. 사고로 다친 건 응급수술로 해결했는데, 그것 때문에 머리의 병이 악화됐대. 그래서 결국 죽었다고 들었어."

***

차우진이 생각했다.

'부상은 피했지만, 머릿속 문제는 아직 그대로 남아있어.'

그건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다. 그게 터지면 오윤서는 죽고 정수찬이 은퇴한다.

차우진이 오윤서에게 물었다.

"머리 쪽에 MRI를 찍어본 적 있습니까?"

"아뇨. 왜요?"

"진찰받는 김에 찍어보시죠."

"네? 머리를 다친 것도 아닌데 굳이…."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방금 오윤서 씨를 구할 때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무슨…."

모른다. 지어낸 이야기다.

하는 김에 이야기를 좀 더 지어냈다. 인터넷에서 찾은 뇌경색 전조증상을 적당히 각색해 떠들었다. 심각한 증상이 아니라 아주 가벼운 몇 가지만 언급했다.

"발음도 조금 이상하던데요."

"그건 제가 너무 긴장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들이 다친 곳을 확인하러 온 의사가 말했다.

"그런 증상만으로는 보통은 MRI까지 찍지는 않습니다만…."

"비용 문제로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오윤서 씨는 부자입니다.

스톤파인더 사장 정수찬은 더 부자다. 게다가 그는 조금 전에 오윤서를 잃을 뻔했다.

정수찬이 의사에게 말했다.

"머리 사진을 꼭 찍고 싶습니다. 이 기회에 아예 건강검진을 전체적으로 하면 더 좋고요."

차우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멸망한 세계의 박창수는 그녀의 정확한 병명까지 알지는 못했다.

'한국대 병원에서 머리를 검사하면 그게 뭐든 찾아내겠지.'

차우진이 말했다.

"이 문제는 우리 의견이 일치하는군요."

오윤서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촬영 끝나고 나서 스케줄에 여유 있을 때 찍을게요."

차우진이 반대했다.

"드라마 끝날 때면 너무 늦습니다. 이번 주에 찍으시죠?"

"네?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옆에서 정수찬이 차우진의 편을 들었다.

"그래. 이번 주에 찍자. 빨리 해치우면 좋잖아."

"굳이…."

"윤서야. 내 소원이다. 아까 난 정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웅…. 알았어. 그럴게."

옆에서 정예지가 물었다.

"우진 오빠. 난 뭐 이상한 거 없어요? 나도 검사받을까요?"

"예지 씨는 항상 이상하…."

"확 씨."

"건강해 보인다고요."

***

형사들이 박동식을 체포한 후에 몸을 수색했다. 그의 주머니에서 주사기가 나왔다.

"이거 뽕인가?"

"아니, 잠깐. 색이 다른데?"

"이거 설마…."

"이성훈을 약으로 죽이려고 했나 본데?"

"조심해서 만져라. 찔리면 네가 죽어."

"팀장님. 방금 진짜 위험한 상황이었네요. 칼은 물론이고 독이 든 주사기까지 가지고 인질을 잡았다는 거니까요."

인기 배우 오윤서가 인질로 잡혔었다. 범인이 나중에 인질로 잡으려고 한 건 아이들이다.

형사가 주사기를 보며 말했다.

"이걸로 오윤서 씨나 아이들을 찔렀으면, 우린 진짜 욕이란 욕은 다 처먹고 옷 벗었겠다. 운이 좋아도 무인도 파출소로 전출 갔을 테고."

"무인도에 파출소가 있어요?"

"한국에서 제일 안 좋은 자리로 쫓겨났을 거라고."

"아…."

"우리가 대처를 잘못한 게 있으면 감방 갈 수도 있었어."

***

유소진은 오늘 촬영 중인 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의 대본을 썼다. 그녀는 현장 책임자는 아니지만 촬영 현장에 나왔다.

그래서 그녀는 차우진이 정예지의 옆을 지키거나 오윤서를 구할 때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유소진이 물었다.

"마스크 쓰고 싸우신 그분 말이에요. 무술 고수예요?"

피디가 대답했다.

"나도 몰랐어. 무슨 전기 기술자가 저렇게 잘 싸워?"

"전기 기술자요?"

"이번에 그 폐건물에 촬영용 전기 공사 해준 사람이잖아."

"아…. 그분이구나. 가면을 쓰고 있어서 몰랐어요."

유소진은 저번에도 차우진을 어디서 봤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분 지금 어디 있어요?"

"병원에서 제공한 임시 사무실에서 다친 곳이 있는지 보고 있을걸?"

그녀가 임시 사무실로 찾아갔다.

차우진이 오윤서에게 MRI 검사를 권하고 정수찬이 찬성하는 중이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 문제는 우리 의견이 일치하는군요."

유소진이 사무실에 들어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뭐?'

그녀는 똑같은 말을 연쇄살인마에게 납치됐다가 구출될 때 들었다.

87. 기억

드라마 작가 유소진은 연쇄살인마 마상국에게 납치됐다가 창고에서 구출됐다.

그녀는 그때 차우진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한마디도 잊지 않고 모두 기억했다.

그런데 방금 차우진이 그때와 똑같은 말을 했다.

'이 문제는 우리 의견이 일치하는군요.'

그녀는 그 당시에 마상국에게 많이 맞아 눈 주변이 퉁퉁 부은 상태였다. 거기다 차우진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는 그의 얼굴을 정확히 보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전혀 못 본 건 아니다. 대략적인 모습은 봤다.

그녀는 며칠 전에 차우진을 봤을 때부터 어디선가 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중요한 사람 같은 느낌.'

그리고 지금 그때 들었던 그 말을 다시 들었다.

'똑같은 말.'

그녀는 방금 차우진이 병원 로비에서 칼을 든 박동식과 어떻게 싸웠는지도 봤다.

'무술 고수.'

그녀를 구해준 사람도 무술 고수였다.

'설마?'

그녀가 차우진의 배를 확인했다.

그때 본 모습과는 체형이 달랐다. 배가 나와 있었다.

'날씬한 줄 알았는데….'

배만 같았어도 확신할 텐데, 그 부분이 달랐다.

'배는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잖아. 난 그날 눈이 부어 있었으니까.'

유소진이 차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구출되던 날 봤던 사람을 다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맞나?'

차우진이 정예지와 이야기하다 유소진을 돌아보았다.

유소진이 얼른 자세를 똑바로 하고 공손히 인사했다.

"다들 괜찮으신지 보러 왔어요."

정예지가 호들갑을 떨었다.

"작가님. 우진 오빠 좀 보세요. 하마터면 칼을 맞을 뻔했어요."

"안 다치셨죠?"

"다칠 뻔했죠! 가면도 아슬아슬하게 잘리고, 신발도 칼을 걷어차다가 찢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안 다치신 거죠?"

"그렇…죠?"

유소진이 활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정예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반응이 왜 저래?'

어쨌든 상대가 웃고 있다. 그녀는 유소진이 좋은 의도로 한 말이려니 생각하고 자랑했다.

"우진 오빠가 휙휙 날아다니는 거 보셨죠? 쩔죠?"

"무술, 잘하세요?"

정예지가 대신 대답했다.

"고수예요. 액션 대역도 가능해요. 제일 처음 본 건 오토바이 액션이었는데, 그때 진짜 제 옆을 오토바이로…. 와. 그건 영화 나오면 꼭 보셔야 해요."

"어머. 출연이 가능하시구나!"

차우진이 끼어들었다.

"전기 기술자입니다만?"

"액션 대역도 하셨다면서요."

"알바 잠깐 한 건데, 이제는 안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이벤트 직원 역할을 하셨잖아요."

"오늘은 가면을 썼으니까?"

유소진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맞다! 가면 필요하죠! 아니면 마스크나…. 특수 분장을 하면 되겠네요?"

"어…."

"제가 배역 한 번 만들어볼게요!"

"대본은 완결까지 나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수정하면 되죠!"

정예지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앗! 작가님. 대본 수정이 가능한 상황이었어요? 저는요?"

"정예지 씨의 의사 배역은 이미 할 일이 다 정해져서 추가할 여지가 없어요."

"쳇. 차별당한 기분이에요."

차우진이 유소진을 보며 생각했다.

'나를 알아본 건가?'

그는 그날 유소진을 구출할 때의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배도 다르고, 얼굴은 가렸고, 그때는 눈이 부어 있어서 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노출될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아보는 눈치였다.

'싸우는 모습을 보고 혹시나 하는 거겠지. 확신은 없겠어. 잡아떼면 되겠네.'

병실에서 마약 딜러의 심부름꾼 이성훈을 담당한 형사는 차우진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그가 팀장에게 물었다.

"박동식이랑 싸웠다는 사람 말입니다. 인질이 있는데 아마추어가 함부로 나선 거니까 따끔하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 새끼가 지금 정신을 못 차리고."

"예?"

"잘 모셔서 예의 바르게 제일 기본적인 것만 여쭤봐라. 우리 안 잘리게 해주신 분이다."

"예?"

다른 형사가 맞장구쳤다.

"무인도나 감방에 안 가도 되고요."

"그게 무슨…."

팀장이 물었다.

"지금 어디 계시냐?"

***

오늘 촬영은 중단됐다.

이런 사고가 났는데 촬영을 계속 이어갈 수는 없었다.

난리가 난 건 병원도 마찬가지다. 배우가 병원에서 인질로 잡히는 사태가 벌어졌다.

병원은 사과의 의미로 나중에 다시 로비를 비워주기로 했다. 그러면 스케줄은 밀리지만 나중에라도 같은 장면을 촬영할 수 있다.

형사들이 차우진을 찾아와 인사했다.

형사가 몇 마디 질문하기는 했지만 차우진에게 혐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보고서에 적어넣을 질문 몇 가지만 했다.

촬영 현장을 멀리서 구경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찍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러다가 오윤서가 잡혔다가 구출되는 장면도 촬영됐다.

그 영상은 이미 인터넷 떴다.

형사가 너튜브 영상을 보여주었다.

"아까 오윤서 씨를 구하는 영상이 벌써 인터넷에 퍼졌습니다."

차우진이 댓글을 보았다.

- 장난 아니다.

- 앞에서 정예지가 시선 끌고 뒤에서 가면 쓴 사람이 덮치고. 손발이 척척 맞네요.

- 발차기로 칼 쳐내는 거 실화냐?

- 영상을 확대해보면 칼을 걷어찬 신발이 찢어진 게 보입니다.

- 이 화질에서 그게 보인다고요? 마음의 눈으로 보시나?

- 발 안 다쳤으려나?

- 멀쩡히 걸어 다니는 거 보니 괜찮은 듯.

- 근데 누구지?

- 경호원인가?

- 가면 쓰고 연기하는 거 보면 배우겠죠.

- 배우 액션이 쩌네요.

- 이 드라마 재미있나요?

- 아직 방영 안 했어요. 조만간 시작한대요.

- 액션 드라마인가 보죠?

- 제목만 봐도 그건 아닌데요?

- 제목이 뭔데요?

- 친구와 연인 사이.

댓글은 호의적이었다.

형사팀장이 제안했다.

"기자들에게 수사 상황을 브리핑할 때 같이 기자회견을 하시겠습니까?"

"아뇨. 연예인을 할 것도 아닌데 얼굴 팔리면 곤란합니다. 저에 관한 건 가명으로 처리해주시죠. 김 모 씨 같은 거로요."

팀장은 당황했다.

"어? 배우가 아니십니까?"

"전기 기술자입니다. 오늘은 사람이 모자라서 땜빵 온 겁니다."

"아니, 전기 기술자가 무슨 움직임이…. 번개라도 맞으셨나?"

***

정예지가 댓글을 보며 실실 웃었다.

"우진 오빠. 이거 봤어요?"

정예지가 보여준 영상에는 그녀에 관한 댓글이 주로 달렸다.

- 언니! 멋있어요!

- 범인이 칼을 휘두르는데도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나서잖아요. 보통 강심장이 아니에요.

- 이것이 여자들의 의리!

- 난 앞으로 정예지 팬 할 거다.

차우진이 말했다.

"반응이 굉장히 좋네요?"

"당연하죠. 제 팬클럽에서 멋진 부분만 편집해서 올린 거니까요."

"그래서 형사가 보여준 거랑 좀 다르군요."

"우진 오빠 것도 편집해달라고 할까요?"

"아니요. 네버."

"쳇. 멋있게 나올 텐데."

***

차우진이 병원을 나왔다.

정예지는 긴급회의 때문에 회사로 갔다. 오늘 일을 어떻게 홍보에 활용할지 의논하는 회의였다.

차우진이 혼잣말을 했다.

"오윤서 씨는 머리를 검사받겠다고 했으니까 됐고."

드라마 작가인 유소진이 의심하는 눈치지만 신경 쓰진 않았다.

"그 아가씨도 확신은 없을 거고."

유소진은 연쇄살인마 사건 때 누가 그녀를 구출했는지 모른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차우진에 관한 정보는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반면에 연쇄살인마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했다.

"짐작한다 해도 굳이 떠들고 다니진 않겠지."

유소진은 이선정 박사보다 먼저 납치된 피해자다. 그녀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멸망한 세계에서는 살해당했다는 건 안다.

차우진은 연쇄살인마 마상국을 처리할 때 그녀도 구출했다. 그래서 유소진은 지금도 살아있었다.

마상국의 타깃이었던 이선정 박사가 생각났다.

차우진이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녁 어때요?"

- 좋죠!

"국밥집?"

- 고기 먹고 싶어요!

"수육?"

- 불에 구운 두꺼운 고기요! 아! 잘라먹는 거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차우진이 이선정을 통삼겹살 식당에서 만났다.

이선정이 작게 말했다.

"요구사항에 디테일이 부족했어. 소고기 안심이랑 와인이라는 조건도 추가할걸."

그녀가 먹고 싶었던 건 분위기 좋은 곳에서 칼로 잘라먹는 스테이크였다.

이 통삽겹도 두꺼운 고기를 자르기는 한다. 그런데 칼이 아니라 가위로 잘랐다.

차우진이 어느 정도 구워진 두꺼운 고기를 가위로 자르며 말했다.

"여기 맛있습니다."

"네. 맛은 있어요."

'분위기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차우진이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 증류식 소주는 향도 좋고 숙취도 적어서 내일 출근할 때 부담이 덜할 겁니다. 이선정 박사님은 내일 또 열심히 일해야 하니까 이런 거 드셔야죠."

그녀가 술을 받아마셨다. 처음에는 아쉬움이 조금 있었지만, 술이 몇 잔 들어가니까 그런 게 싹 없어졌다.

이선정이 즐거운 표정으로 잔을 내밀며 말했다.

"진짜 이 술 마음에 들어요."

"마트에서 사면 만 원쯤 합니다. 집에 쌓아놓고 마시지는 말고요."

"우진 씨는 쌓아놓고 마셔요?"

"아뇨. 나는 종류별로 다양하게 즐기는 편이라서요. 소주는 지역별로 맛이 다르고 맥주도 또 맛이 다르니까."

"그러면 어느 술이 제일 맛있어요?"

차우진이 멸망한 세계에서 마신 술을 떠올렸다.

***

박창수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감탄사를 뱉었다.

"크으. 인선 씨. 이번에 만든 술은 독해서 참 좋습니다. 독한 술을 만들려면 식량이 많이 들어가서 이런 건 이제 구하기 어려운데."

생존 커뮤니티의 리더 도인선이 대답했다.

"식량으로 쓰기 애매한 신종 뿌리 식물이 있어요. 그걸 어떻게든 식량으로 만들려고 다른 거랑 섞어서 실험했는데 실패했어요."

"그럼 이건?"

"식량은 실패했지만 술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어요. 에틸알코올을 뽑아냈거든요."

"그래서 독하긴 한데 맛이 이따위구나."

"그만 마셔요. 귀한 거 챙겨줬더니."

"아닙니다!"

박창수가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술을 담았던 병이 비었다.

"인선 씨. 반했습니다!"

"뻥 치시네. 그렇게 말해도 술 더 안 줄 거예요."

"그럼 반하지 말아야겠다."

차우진이 옆에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은 반했다는 말을 이 마을에서만 다섯 명한테 했어."

"립서비스지."

도인선이 말했다.

"그래 봤자 창수 씨한테는 아무도 안 고마워하니까 그런 립서비스는 그만 좀 해요."

"왜 방금 사람을 살짝 차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술 좀 챙겨줄 테니까 갈 때 가져가고요."

박창수의 표정이 당장 풀어졌다.

"으흐흐. 우진아. 수통 하나 비워라. 술 꽉꽉 채워가자."

"이미 비워놨지."

도인선이 말했다.

"수통 꽉 채우려면 고기 더 내놔요."

차우진이 바깥쪽을 가리켰다.

"멧돼지 잡아온 거, 우리가 생고기를 가져갈 생각은 없으니까 다 가져요. 우리가 나중에 오면 육포나 훈제로 만든 거 좀 챙겨주고."

"역시 우진 씨는 시원해서 좋다니까. 우리 마을에 정착 안 할래요?"

"네. 안 할래요."

"쳇."

박창수가 투덜댔다.

"뭐지? 내가 느끼는 이 온도 차이는? 지금 여기서 나만 춥나?"

도인선이 말했다.

"억울하면 얼굴을 좀 관리하지 그랬어요."

박창수도 할 말은 있다.

"이 얼굴이 관리한다고 되겠냐고요."

***

차우진이 그 일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이선정이 물었다.

"술 이야기하다 왜 웃어요?"

"맛있게 마신 술이 기억나서요."

"뭔데요? 위스키? 꼬냑?"

"이것저것 섞어서 만든 술인데, 이제는 마실 수 없는 술이죠."

"어머. 그렇게 비싼 술이에요?"

"귀하게 만든 술입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술을 만들려면 그만큼의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도인선의 술 만드는 기술은 특별했다. 그녀는 식량은 소량만 사용하고 다른 재료를 섞어 술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만드는 곳이 없어서 못 구합니다."

"제조법이 사라진 전통주인가보다. 아쉽겠다."

"아쉽지는 않습니다."

멸망한 세계에도 즐거운 기억은 있다. 그 기억들은 그때는 맨정신으로 살아남게 해주는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메마른 사막에 있을 때 가치가 있다. 멸망한 세계는 지금에 비하면 사막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멸망한 세계 자체를 아쉬워할 리는 없다.

"난 이렇게 편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세상이 너무 좋거든요."

"네?"

"그러니까 밥은 꼭 먹고 다닙시다."

88. 정찰

차우진이 물었다.

"요즘은 주변에 수상한 놈은 없습니까?"

이선정 박사가 대답했다.

"없어요. 연쇄살인마는 죽었잖아요."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떤 후에 술을 마셨다.

"예전엔 스토커 때문에 신고도 했었는데, 그놈도 이젠 안 보이고요."

"그렇군요."

멸망한 세계에서는 이선정이 연쇄살인마 마상국에게 살해당했다. 지금은 마상국이 먼저 죽었다.

'연쇄살인마는 해결했는데, 스토커는 해결된 건가?'

오늘 병원에서 오윤서를 구출할 때가 생각났다.

마약 딜러 박동식은 원래라면 그 자리에 없었을 정예지를 먼저 노렸다. 그런데 차우진이 정예지를 보호하자마자 멸망한 세계에서처럼 오윤서를 인질로 잡았다.

'수연이한테 물어봐야겠다.'

***

차우진이 집에 가는 길에 동네 친구 민수연에게 전화했다.

"나와라."

- 어디로?

"너네 집 앞 편의점."

차우진이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았다. 캔맥주도 두 캔 올려놓았다.

민수연은 추리닝에 모자를 쓰고 머리는 뒤로 묶은 채로 나왔다.

그녀가 따지듯이 물었다.

"야. 안주는? 네가 만들어오는 거 아녔어?"

"내가?"

"너 요즘 음식 솜씨 쩔더라?"

"그냥 마셔. 아니면 맥주에 소주라도 타주랴?"

"그것도 괜찮은 옵션이긴 한데, 기다려봐."

민수연이 편의점에 들어가 새콤한 곰돌이 젤리를 한 봉지 사 왔다.

차우진이 물었다.

"넌 아직도 그걸 안주로 먹냐?"

"좋은 안주가 있을 땐 안 먹지."

"난 술안주로 젤리를 먹는 사람은 너밖에 못 봤다. 그리고 먹어도 꼭 곰을 먹어. 꿈틀거리는 것도 있는데."

"너도 불평하면서 잘 먹잖아."

"나는 먹을 게 없으니까 먹는 거야."

차우진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젤리를 씹으며 물었다.

"이선정 박사 스토킹 사건. 너네 팀에서 담당했었지?"

"네가 이선정 박사님을 어떻게 알아?"

"개인적으로 조금 아는 사이다."

"사귀냐?"

"네가 이선정 박사님이면 나랑 사귀겠냐?"

"다시 생각해보니까 불가능한 일이구나."

멸망한 세계에서는 연쇄살인마 마상국이 이선정 박사를 죽였다. 지금 시대에도 그렇게 될 뻔했다.

그런데 그는 마상국을 잡기 전에 살인자 김준배를 제거했다. 김준배도 이선정을 노렸기 때문이다.

그때는 김준배가 연쇄살인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현실에서의 첫 번째 진짜 전투였다.

그때는 다른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다.

오늘 이선정을 만났다가 스토커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민수연이 물었다.

"스토커 이야기는 또 어떻게 알았어? 그런 이야기까지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야?"

"전에 누나한테 들었어. 그러니까 너희 팀에서 맡았다는 걸 알지."

"아. 그러네."

차우진이 물었다.

"그 스토커는 잡혔어?"

"아니. 신고받고 조사하니까 사라졌어. 전에는 이선정 박사님의 착각일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연쇄살인마 사건이 터졌지."

"응. 그래서 재조사했어."

그녀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했다.

"이건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비슷한 시기에 충청도에서 죽은 살인자가 하나 더 있거든?"

"김준배."

"뭐야.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기사가 떴더라."

"시간이 남아도는구나. 그런 기사까지 읽는 걸 보면. 부러운 놈."

"그리고 전에 네가 김준배와 마상국이 같은 사람을 노렸다는 이야기도 했어."

"아. 그랬지."

"그래서 결론은?"

"김준배가 스토킹한 거 같아."

차우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김준배도 누군가의 지시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잖아. 그건 알아봤어?"

"그건 그 사건을 담당한 팀에서 알아봤다더라. 근데 김준배가 워낙 증거를 안 남기는 놈이라서 실패했대. 그러니까 왜 이선정 박사님을 미행했는지는 몰라."

차우진이 생각했다.

'이선정 박사도 자주 만나서 안전한지 체크해야겠다.'

***

이튿날 차우진이 딥어스테크에 출근해 개발 2팀을 찾아갔다.

곽수혁 팀장이 신형 탐지기의 개발 상황을 설명했다.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전문가들이 말했던 개선점을 알려주었다.

곽수혁이 말했다.

"차 이사님. 그렇게 되면, 그러니까 이게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면 말입니다. 지하 광물 탐색만이 아니라 마그마의 위치까지도 찾겠는데요?"

"우리가 보유한 충격파 발생기로는 안 되지만, 지진파를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난번 테스트 데이터에 그 정보가 들어 있을 겁니다."

"정말 그 기능까지 구현하면 화산 전문가들이 좋아하겠습니다."

"지질학자들도 좋아할 겁니다."

"지질학자가 마그마를요?"

"그런 지질학자도 있습니다. 스톤파인더 정수찬 사장이 그 분야 전문가이니까요."

"아. 마이클 정. 저번에 화상통화로 미팅은 했는데, 관심은 보였지만 적극적이지는 않던데요."

차우진이 시계를 보았다.

"오늘 오후에 정수찬 씨와 약속이 있습니다. 만나면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

차우진은 정수찬을 만났다. 정예지도 함께였다.

오윤서는 병원에서 정밀 재검사를 받는 중이라 나오지 못했다.

정예지가 물었다.

"우진 씨. 윤서 언니가 아픈 거 어떻게 알았어요?"

"결과가 벌써 나왔습니까?"

"그거 검사하는 의사분이 윤서 언니 팬이라서 검사 결과를 먼저 확인했다가 발견했대요. 뇌혈관에 무슨 문제가 있대요."

"치료는 가능한 병이랍니까?"

"확실한 걸 알려면 정밀검사를 다시 해야 하는데, 설사 문제가 있다 해도 치료할 수 있을 거래요. 다행이죠?"

"다행이네요."

진심이다.

'이제 오윤서는 살고 정수찬은 은퇴하지 않겠네.'

정수찬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차우진 씨가 우리 윤서를 구해줬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인질로 잡혔을 때도 구출했고, 뇌혈관의 위험도 미리 알려줬다.

정수찬이 말했다.

"제가 도움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딥어스테크 개발 2팀과 미팅하셨죠?"

"아. 전에 차우진 씨의 이야기를 듣고 연락은 했습니다."

"거기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진지하게 참여해 주시죠."

"예?"

"도와주신다면서요. 그게 도와주는 겁니다."

정수찬이 물었다.

"혹시 차우진 씨도 그 개발 2팀 소속입니까?"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같이 일하긴 합니다만. 그나마도 풀타임은 아닙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차우진이 2팀 소속이 아니라, 2팀이 차우진의 밑에 있다.

정수찬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 그렇군요. 사실 저도 그 탐지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필요하면 제 개인 돈을 써서라도 일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오늘 시간이 어떻게 되십니까?"

"차우진 씨에게 식사라도 대접하려고 오늘 오후를 다 비웠습니다."

"그럼 가시죠."

"네?"

"딥어스테크에서 탐지기의 개선된 버전이 나왔거든요. 관심이 가실 겁니다. 마그마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마그마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전에 말했다시피 논문을 봤으니까요. 표 나던데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식사는…."

"회사 구내식당이 맛있습니다."

"구내식당이요?"

"불 한 번 나고 나서 정말 맛있게 바뀌었습니다."

정수찬이 당황한 얼굴로 엉거주춤 일어났다.

"좋은 곳에서 대접하려고 했는데…."

"가서 식권이라도 사시죠."

옆에서 정예지가 물었다.

"나도 같이 가서 먹어도 돼요?"

"예지 씨가? 안 바쁩니까?"

"오늘은 맛있는 거 먹는 줄 알고 여기 따라온 건데요?"

"음…. 그럼 갑시다."

***

차우진과 정수찬, 정예지가 딥어스테크 연구소로 이동했다.

차우진이 연구동과 아직 건설 중인 건물 사이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그가 두 사람과 연구동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아는 얼굴을 만났다. 이곳 건물 공사 때 같이 일하던 목공 기술자였다.

"어? 차 기사!"

"오랜만이네요."

"이쪽 일 다시 하러 온 거야?"

"아뇨."

"다시 오는 건 어때? 여기도 요즘은 분위기가 바뀌어서 할 만해졌어. 자재도 정상적으로 들어오고 일당도 잘 나온다니까?"

"요즘은 다른 일 합니다."

"그렇구나."

목공 기술자는 손을 흔들어주고 지나갔다.

정예지가 물었다.

"누구세요?"

"전에 같이 일하던 분입니다."

"저쪽에 공사장은 뭐예요?"

"회사 사무동입니다. 저기는 아직 공사가 안 끝났습니다."

"여기 상황을 잘 아네요?"

"저기서 일했으니까."

정예지가 공사 중인 사무동을 보았다. 그녀는 차우진이 전기 전문가라는 걸 안다.

"아. 그랬구나. 그럼 여기는요? 여기는 공사 안 하는 것 같은데요."

"이쪽 연구동은 먼저 완공돼서 이미 쓰는 중입니다."

"이쪽은 그러면 연구하는 분만 있는 거예요?"

"그건 아니고요. 회사 연구소 일부와 다른 부서 일부가 와 있습니다. 계속 옮겨오는 중이죠."

정예지가 차우진을 보며 물었다.

"우진 오빠는 그럼 여기서 뭐 해요?"

"가끔 나와서…."

"알바 해요? 알바비는 많이 줘요?"

"음…. 어떻게 보면 알바 비슷한가?"

그녀가 얼른 제안했다.

"차라리 내 매니저 하는 건 어때요?"

"안 할 겁니다."

"잘해줄게요."

"퍽이나."

그녀가 두 손을 허리에 댔다.

"설마 나 지금 신뢰를 잃은 거예요?"

"신뢰한 적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을 텐데."

"와. 단호박이다."

그들이 연구동 쪽으로 이동했다.

연구동 앞쪽에 촬영팀이 와 있는 게 보였다.

차우진이 말했다.

"회사에서 홍보에도 신경을 쓰나? 아니면 배경이 어울려서 그냥 와서 찍는 건가?"

정예지는 직업이 배우다. 그녀가 그쪽에 아는 얼굴이라도 있는지 보다가 손끝을 입술에 댔다.

"어머. 저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입니까?"

"우리 드라마의 경쟁 드라마잖아요. '황금빛 향기'요. 첫 회 방영일이 우리랑 똑같은 완전 경쟁작."

"그렇군요."

"우진 오빠는 왜 몰라요?"

"난 그 드라마는 전기 공사 몇 번 해준 거랑 가면 쓰고 엑스트라 잠깐 해준 게 다라서."

"아. 그렇지."

그녀가 슬쩍 제안했다.

"원하면 우리 드라마에 배우로 꽂아줄까요? 오빠라면 처음이라도 단역 정도는 가능할 텐데."

"난 연기를 못 해서."

"액션 대역?"

"됐습니다."

"내 매니저?"

"그게 본론이었네. 왜 아직도 포기를 안 하지?"

"탐나니까?"

"본인이 거절하는 건 탐내지 말아요."

정예지가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물었다.

"근데요. 제가 그 회의에 참석해도 돼요?"

"안 될 건 없는데, 개발팀 사람들이 당황하겠지요. 방해하러 온 사람 취급을 받으려나?"

"쳇. 저도 원래는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려고 했다고요."

"카페 추천해줄까요?"

"아뇨. 그냥 저 촬영팀에 가봐야겠어요."

"경쟁 드라마라더니?"

그녀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염탐을 해야죠. 우리보다 잘 만드는지, 촬영장 분위기는 어떤지. 우진 오빠는 지금 들어가야 해요?"

차우진이 시계를 확인했다.

"미팅까진 아직 시간이 있는데…."

"잘됐다. 같이 가서 내 매니저인 척 좀 해줘요."

"매니저 안 한다니까."

"그런 척만 하라니까요. 혼자 왔다고 하면 정찰하러 온 거 너무 표가 나잖아요."

정예지가 경쟁 드라마 '황금빛 향기' 촬영 현장으로 쳐들어갔다. 그곳에는 그녀가 얼굴 정도는 아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어머. 여기서 또 뵙네요."

모든 사람의 반응이 좋은 건 아니었다.

그 드라마에도 정예지와 비슷한 조연을 맡은 배우가 있었다.

조연 배우 강수민이 정예지를 삐딱하게 보며 물었다.

"네가 여기 어쩐 일이야? 나 염탐하러 왔니?"

정예지가 코웃음을 쳤다.

"훗. 내가 너 염탐해서 뭐하게? 내가 더 잘나가는 거 잊었니?"

"그건 네 생각이고. 넌 그냥 사고 났다가 구출돼서 기사가 뜬 거야. 그걸 인기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그 영화가 극장에 걸리면 내가 더 잘나가는 거 확실히 알 걸?"

둘은 잠깐 으르렁댔지만 보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싸울 수는 없다.

정예지가 말했다.

"지나가다가 들렀어."

강수민이 다른 건수를 찾으려고 차우진을 슬쩍 보며 물었다.

"누구?"

"내 매니저."

"그럴 거 같더라."

"응? 무슨 뜻이지?"

"배우 와꾸는 아니잖아."

정예지가 반발했다.

"배우가 꼭 날씬해야 하는 건 아니거든? 그냥 배만 살짝 나온 건데!"

강수민이 피식 웃었다.

"난 배 이야기는 안 했는데? 그리고 살짝?"

"뭐! 뭐!"

"그리고 왜 배만 이야기해?"

"얼굴이 어때서! 개성 있잖아!"

차우진이 말했다.

"지금 두 분이 나를 멕이는 거 같은데."

정예지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아니거든요? 편들어준 거거든요?"

89. 민지

정예지와 강수민이 있는 곳은 촬영장 바깥쪽이다. 여기는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 아니라서 촬영을 구경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얼마 안 되는 구경꾼 중에 곽수혁 팀장의 딸 곽민지가 있었다.

곽민지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언니! 팬이에요!"

정예지가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강수민이 끼어들었다.

"나한테 인사한 거야. 학생. 고마워."

곽민지가 슬그머니 다가오며 물었다.

"근데요. 아저씨랑 아는 사이에요?"

정예지가 물었다.

"응? 아저씨? 무슨 아저씨?"

차우진이 곽민지에게 물었다.

"넌 왜 학교 안 가고 여기 있냐?"

"힛. 개교기념일이에요."

"그 학교는 일 년에 개교를 몇 번이나 하는 거냐?"

"히힛. 몇 번이더라…."

강수민이 끼어들었다.

"어머. 너 귀엽다."

곽민지가 얼른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내 팬?"

"언니들 팬이에요!"

"쳇."

"네?"

"예지는 빼고 내 팬만 하면 안 돼?"

"네? 그게…."

차우진이 끼어들었다.

"수업은 끝나고 온 거냐?"

"당연하죠. 근데 요즘은 학원은 잘 안 가요."

곽민지는 지난번에 납치됐던 후부터 학원을 자주 빼먹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예전처럼 공부하라고 압박하지는 않았다.

요즘 곽민지는 학원에 가는 날보다 노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곽민지가 말했다.

"아빠가 난 어차피 공부해도 안 될 거 같다고, 하고 싶은 거 찾으래요. 히힛."

"그건 곽 팀장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는데?"

"에이. 들어보나 마나라니까요?"

"그래서 좋냐?"

"당연하죠."

정예지가 차우진과 곽민지를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학생. 연기 쪽은 생각 없어?"

곽민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제가 어떻게 배우를 해요?"

"고등학교가 배경인 드라마에 출연하면 될 거 같은데."

"앗! 청춘 드라마요?"

"고등학교 배경 좀비 드라마?"

곽민지가 두 팔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히힛. 좀비 역할이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차우진은 곽민지의 미래를 안다.

'나중에 연예인이 되던데.'

곽민지는 지금은 친화력이 좋고 잘 웃지만, 멸망 초기의 방송에서 곽수혁이 과거에 살해당했다고 주장할 때는 분위기도 다르고 웃음기도 전혀 없었다.

'곽수혁 팀장은 살아남았으니까, 민지도 앞으로는 웃으면서 살겠네.'

멸망급 재난은 아직 막는 중이지만, 그동안 그가 해결한 것만으로도 몇 명의 인생은 지킬 수 있었다.

곽민지가 물었다.

"근데 저는 배우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요? 그걸 제가 어떻게 해요?"

차우진이 그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연예인 민지. 지금부터 시작하면 더 잘하려나? 아니면 상황이 변해서 이젠 잘 안 되려나.'

멸망한 세계의 곽수혁은 방화 사건으로 사망했다. 그 사건을 겪고 자란 곽민지는 가수가 되고 배우도 됐다.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곽수혁은 살아있다.

'환경이 변했으니까 민지의 미래도 변하겠지만….'

집안 환경이 안정되면 미래가 바뀔 수도 있다. 곽민지가 계속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곽수혁처럼 연구원이 될 수도 있다.

'아니, 잠깐. 공부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학원도 맨날 째잖아.'

차우진은 곽민지가 걱정됐다. 그래서 조언했다.

"민지야. 너 재능 있어."

"제가요? 에이.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모르면 드라마 촬영장에 가서 직접 확인해봐."

"진짜요?"

"나도 엑스트라 정도는 가끔 한다."

"아저씨가요?"

"어. 지나가는 사람 1 같은 거."

"저도 학생 1 같은 거 하란 말이죠?"

"너한테 아직 1은 무리겠지."

"그럼 학생 7?"

"그건 네 보잘것없는 연기력으로도 가능하겠네."

"뭐죠? 아저씨 왜 막 띄워주는 척하다가 또 막 밟는데요?"

정예지가 말했다.

"너 그런 거에 관심 있으면, 우리 드라마에도 단역 자리 남는다고 들었는데 오디션이라도 볼래?"

"네? 엑스트라가 아니라요?"

"왜? 지금 보니까 관심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정예지가 차우진에게 물었다.

"얘 연기 할 줄은 알죠?"

차우진이 장담했다.

"잘하죠. 특히 양아치 연기를 잘합니다."

곽민지가 당황한 얼굴로 외쳤다.

"아저씨!"

정예지가 계속 질문했다.

"혹시 얘 노래도 좀 해요? 피디님이 그런 애 찾던데."

차우진이 대답했다.

"노래 엄청 잘합니다."

곽민지가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 노래 좀 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아빠한테 들었어요?"

"응? 어. 너 노래방 좋아한다더라."

"그럼요. 노래방 안에서만큼은 제가 가수죠."

"밖에서도 넌 가수야."

"에이. 그건 아니죠. 저 주제 파악 잘해요."

"지금 말고 나중에."

그는 곽민지가 10년 후에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는 가수 겸 배우가 되는 걸 봤다. 심지어 그녀는 싱어송라이터였다.

박창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민지의 노래에는 상처를 어루만지는 뭔가가 있다니까. 듣다 보면 힐링이 돼.

차우진이 곽민지를 보았다. 칭찬을 듣는 게 좋아서 헤헤거리고 있었다.

차우진이 작게 말했다.

"창수 형. 그때 그 노래들은 이제 안 나올 것 같아. 민지가 여기선 상처를 별로 안 받았거든."

곽민지가 물었다.

"뭐라고 했어요?"

"노래는 어떤 걸 좋아하냐고."

"로즈비트 노래요!"

로즈비트는 인기 걸그룹이다. 빠른 멜로디의 신나는 노래를 주로 부른다.

"그럴 줄 알았다."

강수민은 정예지를 이기고 싶어서 곽민지에게 제안했다.

"너. 예지랑 놀면 좀비 드라마밖에 못 찍어. 그냥 우리 드라마에서 한 번 해볼래?"

"네? 제가요?"

"우린 오늘 당장 단역 한 명 필요한데 빵꾸가 났거든. 그래서 촬영이 잠깐 중단된 거야. 이건 대사도 한 줄 있다?"

정예지가 눈을 부라렸다.

"너 지금 내가 찜 한 애를 빼앗으려는 거니?"

"어머. 사람이 무슨 물건이니? 빼앗긴 뭘 빼앗아?"

차우진이 개입했다.

"둘 다 하면 되겠네."

세 사람이 차우진을 쳐다보았다.

"민지가 오늘 이 드라마에 단역으로 들어가고, 예지 씨 드라마 오디션도 보고. 둘 다 시도하면 되겠네."

곽민지가 손을 들었다.

"저 학교 가야 하는데요?"

"땡땡이 잘 치잖아."

"와. 땡땡이 못 치게 막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본 게 있어서."

멸망 초기에 연예인 민지를 보았다.

곽민지는 차우진과 처음 마주쳤던 골목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그때 그거 진짜 아니라니까요? 아는 언니 따라간 거라니까요?"

차우진이 강수민에게 물었다.

"출연료는 나옵니까?"

차우진이 적극적으로 나오자 강수민은 당황했다.

조연이 함부로 캐스팅을 결정할 수는 없다. 그녀는 아직 그 정도 영향력은 없다.

그래서 급히 말했다.

"물론이죠. 설마 공짜로 부려먹겠어요? 근데요. 테스트도 통과해야 하고요. 이 학생은 미성년자니까 부모님 동의도 받아야 해요."

"동의는 바로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얘 아버지가 저 회사에 근무하시니까요."

"네?"

"곽 팀장님한테 바로 연락해야겠네."

정예지가 상황을 눈치채고 약을 올렸다.

"어머어. 수민아. 너 설마 능력도 안 되면서 뻥 친 거야? 나한테 이겨 먹고 싶어서?"

"뻥을 누가 쳤다 그래! 지금 당장 피디님한테 소개하려고 했어!"

곽민지는 강수민과 함께 피디를 만나러 갔다.

정예지가 그쪽으로 따라붙었다.

"우진 오빠 회의하는 동안 난 얘나 챙겨야겠다."

강수민이 가자미눈을 떴다.

"정탐하러 오는 거 맞지?"

"아니야. 내가 오늘은 얘 1일 매니저 하려고."

"네 매니저는 저 사람 아냐?"

"우진 오빠는 회의 있어서 어디 갔다 와야 해."

***

차우진이 정수찬과 함께 딥어스테크 연구동으로 들어갔다.

정수찬이 물었다.

"방금 그 학생하고 잘 아는 사이인가 봅니다."

"개발 2팀의 곽수혁 팀장님 딸입니다."

두 사람이 회의실에 들어갔다.

곽수혁은 조금 늦게 회의실로 들어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딸이 동의서를 써달라고 해서요. 갑자기 현장에서 캐스팅돼서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해서 말입니다. 하하하."

곽수혁이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사과가 목적이 아니라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하하하. 역시 우리 딸이 날 닮아서 그런지…."

차우진이 물었다.

"어느 부분이…."

"발가락?"

"아. 예."

정수찬이 감탄했다.

"아까 그 학생 아버님이시라고 들었는데, 젊어 보이십니다."

"결혼을 대학교 때 해서요."

"부럽습니다. 저는 이제야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데."

"처음엔 고생 많이 했죠. 하하하."

딸 이야기와 결혼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한 덕분에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기술적인 부분으로 넘어가도 여전히 분위기는 좋았다.

정수찬이 데이터를 보며 감탄했다.

"예전 미팅에서는 간단한 정보만 받았는데, 그동안 발전이 많았나 봅니다. 지진파를 이용해 마그마를 찾는 기능을 추가했군요."

곽수혁이 말했다.

"광물 탐지가 원래 목적이고 그건 사이드 이펙트입니다."

"제가 이쪽으로 관심이 많아서요."

"우리 탐지기가 마그마도 잘 찾습니다. 하하하."

"그런데 이 데이터를 측정한 때가…. 정예지 씨가 절벽에서 사고를 당할 뻔했던 그날이군요."

"예. 저희가 테스트하던 곳 옆에서 촬영하고 있더라고요. 그때 차 이사님도 그곳에 계셨습니다."

곽수혁이 물었다.

"차 이사님이 누구십니까?"

곽수혁은 당황했다.

"예? 같이 오셨잖습니까?"

정수찬이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차우진 씨요?"

"예. 차우진 이사님이요. 개발이사님이십니다."

정수찬이 놀란 얼굴로 눈을 껌뻑거리며 물었다.

"여기는 가끔 출근한다고 하셨잖습니까?"

차우진이 대답했다.

"가끔 출근합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방금 이사님이시라고…."

"파트 타임 이사입니다."

곽수혁이 끼어들었다.

"차 이사님께서 이 탐지기의 개발을 지휘하고 계십니다. 특히 직관적으로 개발 방향을 판단하는 능력은 정말 매번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차우진이 마그마 탐지기를 직접 개발할 수는 없다. 그건 정수찬과 개발 2팀이 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미래에 그 탐지기 기술을 분석한 영상은 많이 봤다. 그런 영상에서는 관련 기술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설명하곤 했다.

덕분에 어떤 기술을 적용해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정도는 말할 수 있었다.

차우진이 그걸 말해주면 곽수혁이 찰떡같이 알아듣고 탐지기 개발에 적용했다.

그가 지시한 대로 하면 항상 좋은 결과가 나왔다. 예측한 것도 매번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연구소 사람들은 차우진이 기술적인 부분을 모두 이해한 상태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믿었다.

정수찬이 물었다.

"윤서가 차우진 씨는 전기 기술자라고 했는데…."

차우진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전기가 본업이죠."

정수찬은 캐묻지 않았다.

'차우진 씨가 먼저 말해주지 않는데 캐묻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그래도 궁금한 건 있었다. 그가 차우진에게 물었다.

"혹시 이 사실을 정예지 씨도 압니까?"

"아니요."

"아…. 그렇군요."

정수찬이 결정했다.

'나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다. 윤서한테만 말해줘야지.'

곽수혁은 다른 생각을 했다.

'우리 딸은 잘하고 있나? 혼나고 있으면 어쩌지?'

***

강수민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너 왜 이 연기가 한 번에 되니?"

곽민지가 도로 물었다.

"그냥 언니가 시키는 대로 한 건데요?"

"그러니까 왜 시킨 대로 할 수 있는 건데? 너 연기 배운 적 있니?"

"에이. 제가 그걸 어디서 배워요. 학교랑 학원 다니기도 바빴는데."

"조사하면 다 나온다?"

"진짜예요. 제 말에 아빠 비상금 정도는 걸 수 있어요."

***

회의 분위기는 좋았다.

곽수혁은 차우진이 데려온 사람에게 시비 걸 생각이 전혀 없다. 상대가 지질학자로 유명한 스톤파인더 사장 정수찬이라서 더 불만이 없었다.

정수찬은 차우진에게 신세 진 게 고마워서 이 회의에 참석했다.

서로 상대에게서 뭔가 뜯어내려는 게 없다 보니 결론은 쉽게 났다.

정수찬이 말했다.

"우리 회사에서 테스트에 참여하는 걸 적극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흥미로운 점이 많은 장비군요."

곽수혁이 신나서 말했다.

"잘 돼서 우리 탐지기가 수출됐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확답은 못 드립니다. 스톤파인더는 제가 만든 회사지만 절차라는 게 있어서요."

회의가 끝난 후에 차우진과 정수찬이 연구동을 나왔다.

정수찬이 말했다.

"겨우 이걸로 되겠습니까? 윤서를 구해준 보답으로는 부족한 게 아닌가 싶어서…."

"부족하죠."

"예?"

90. 분석 의뢰

차우진이 물었다.

"오윤서 씨의 정밀검사 결과는 언제 나오나요?"

정수찬이 대답했다.

"내일 나올 겁니다. 안 그래도 지금 가보려고 합니다."

"그럼 먼저 가시죠. 저는 예지 씨와 민지를 좀 만나고 갈 테니까요."

"어? 구내식당은…."

"그건 농담이었습니다."

"아. 그럼 먼저 가도 될까요? 제가 마음이 급해서. 하하하."

***

차우진은 곽수혁을 다시 만나 정수찬에게 보낼 분석 데이터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지진 발생 순간에 수집한 데이터를요?"

"정수찬 박사는 지질학 중에서도 그 분야의 세계 최고 전문가입니다. 그런 사람이 데이터를 분석해주면 탐지기 성능 향상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야 그렇지만, 정식으로 계약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해줄까요?"

"해줄 겁니다. 그렇다고 지금 보내진 마시고요. 아직 이야기가 덜 끝나서."

"그럼 언제…."

오윤서의 정밀검사 결과가 나오는 건 내일이다.

"내일?"

***

차우진이 연구동을 나와 드라마 야외 촬영이 진행 중인 곳으로 갔다.

곽민지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 중이었다. 그런데 아까 들은 것과 상황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대사 한 줄이라더니?"

대사가 많아졌다. 어떻게 들어도 한 줄은 아니다.

정예지가 설명했다.

"피디님이 그 한 줄짜리 연기를 시켜보더니, '이건 아니야!' 라고 하데요?"

"연기를 못했을 리 없는데?"

"못하긴요. 너무 잘해서 그랬죠. 피디님이 당장 다른 대본을 주더라고요. 마음에 쏙 들었나 봐요."

"민지를 위해서 현장에서 대본을 새로 썼다는 겁니까?"

"아니요. 원래 대본이 두 가지 버전이 있었는데, 배역이 빵꾸가 나서 간단한 대본으로 때우려던 거래요."

"그러다 민지한테 시켜보니 잘해서 원래 대본을 다시 살렸다?"

"그렇죠."

"역시 재능이 있네요."

"어머. 쟤 재능을 알고 있었어요? 본인도 모르던데요?"

멸망한 세계의 민지는 연예인이다. 그때는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했다.

"딱 보니까 잘할 것 같아서."

"그걸 딱 봐서 알 수 있으면 캐스팅 디렉터 하면 딱이겠다."

"그건 아니고요. 그래서 연기는 어느 정도나 합니까?"

정예지가 곽민지를 보며 말했다.

"학생 배우치고는 꽤 잘해요. 얼굴도 뭐, 나만큼은 아니지만 귀엽네요. 지금 나이에는 학교 배경 드라마를 찍으면 딱 좋죠."

정예지가 설명하다가 입술을 삐죽였다.

"이러면 곤란한데. 쟤는 우리 드라마에 추천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수민이한테 당한 거 같아요."

"그럼 민지를 이 드라마에 넘겨주고 손 뗄 겁니까?"

"그럴 리가! 데려갈 거예요! 피디님이랑 작가님한테 소개해야지. 그 전에 밥부터 먹어요."

"구내식당?"

"그거 농담 아녔어요? 다른 데 가요. 내가 둘이 먹기 좋은 데 알아요."

***

이튿날 정예지가 촬영장에서 드라마 작가 유소진을 만났다. 옆에는 피디도 있었다.

정예지가 물었다.

"캐스팅에 문제가 생긴 그 배역 말인데요. 추천하고 싶은 애가 하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소진이 말했다.

"노래도 잘해야 하는데."

"노래방에서는 명가수래요."

"정예지 씨 소속사 연습생이에요?"

"아뇨. 어제 우진 씨랑 어떤 회사에 미팅 갔는데요."

유소진이 관심을 보였다.

"차우진 씨요?"

"네. 회사 이름이 무슨 스테이크 비슷했는데, 거기서 만난 학생이에요. 우진 씨랑 아는 사이라는데 잘한다고 추천하더라고요."

"차우진 씨가 추천하셨구나."

"네. 문제는 하필 우리 경쟁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한다는 건데…. 아. 딱 한 번 잠깐 나오는 아주 짧은 단역이에요."

피디가 인상을 찌푸렸다.

"동시에 방영되는 드라마에 나온 애를 굳이 써야 하나?"

유소진 작가가 말했다.

"그런 경우 많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꼭 데려와야 하는 배우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는…."

"테스트는 해보고 결정하시죠?"

"하긴 뭐, 테스트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예지 씨. 오늘 촬영장에 오라고 해봐요. 쉬는 시간에 잠깐 테스트해보게."

유소진이 말했다.

"저도 같이 있을게요."

"응? 유 작가는 잠깐 들른 거라며. 오늘 다른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취소했어요."

"응? 언제?"

"방금이요."

그날 오후에 곽민지가 촬영장에 도착했다.

오디션 장소는 촬영장 근처에 세워놓은 임시 천막이었다.

곽민지가 말했다.

"저쪽에 카메라 있는 곳에서 하는 줄 알았어요."

유소진이 설명했다.

"아무리 간단한 테스트라고 해도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그러는 건 아니지. 남들 시선도 부담될 거고, 실수하면 쪽팔리잖아."

"어제는 그냥 그렇게 했는데…."

유소진이 씩 웃었다.

"우리는 달라. 어제 거기가 양아치였나 보다."

정예지가 옆에서 당황한 얼굴로 설명했다.

"아니, 작가님. 그게 아니라 어제는 상황이 그래서…."

피디가 끼어들었다.

"자. 바쁘니까 테스트 얼른 합시다. 곽민지 학생. 출연해야 하는 부분의 대본은 받았지?"

"네. 좀 전에 받았어요."

"대사는?"

"몇 줄 안 돼서 그냥 외웠어요."

간단한 연기 테스트가 먼저 시작됐다.

곽민지는 명랑하고 발랄하지만 실수도 많고 사고도 곧잘 치는 고등학생 역을 연기했다.

"나쁘지 않네."

유소진도 동의했다.

"그러네요. 자연스러워요."

"그냥 평소 성격이 저런 것일 수도 있는데…."

"우리 드라마에서는 그래도 상관없잖아요."

"하긴. 우리 드라마에만 잘 찍히면 되지."

"그리고 저런 풋풋함이 더 어울릴 수도 있어요."

"그럼 연기는 됐다고 보고."

그 배역이 아직 비어 있는 건 적당한 연기력에 적당한 노래 실력에 얼굴까지 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그런 배우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피디가 원했던 사람들은 이미 스케줄이 차 있거나 캐스팅을 거절했다.

피디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이제 노래 좀 들어보자. 노래방의 명가수라고?"

곽민지가 웃었다.

"히이.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어디 불러봐. 아무거나 잘하는 거로."

곽민지가 스마트폰으로 MR을 재생한 후에 노래를 시작했다.

신나는 노래였다.

차우진은 임시 천막 밖에 있었다. 거기 있어도 목소리는 들렸다.

차우진이 그 노래를 들으며 말했다.

"창수 형. 형이 좋아하던 '그 하늘의 스타라이트'는 영원히 안 나올지 몰라. 그렇지만 잘하면 얘가 가수는 될 수 있겠는데?"

곽민지는 인기 걸그룹 로즈비트의 노래를 완벽하게 불렀다.

"이번엔 그때랑 다르게 밝은 노래를 잘하겠어."

피디가 벌떡 일어나 곽민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너 합격!

"앗! 진짜요?"

"진짜 그 배역에 딱이네. 연기도 어울리고 노래는 더 좋아. 유 작가 생각은 어때?"

"저는 처음부터 합격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약속도 취소하고 기다린 거예요."

"응? 어떻게?"

"추천한 사람을 신뢰해서?"

정예지가 활짝 웃었다.

"어머. 작가님. 저를 그렇게 믿으셨어요?"

"그런 거로 하죠."

"네?"

"아니에요."

***

오윤서의 정밀검사 결과가 나왔다.

정수찬은 의사의 설명을 듣다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 그렇게 위험한 겁니까?"

"위험하긴 한데…."

"우, 우리 윤서가 죽는 건 아니죠?"

"발견이 늦었으면 그럴 수도 있…."

정수찬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오윤서를 돌아보았다.

"윤서야!"

"오빠. 나 아직 안 죽었어."

"하지만 너 죽을 수도 있다고…."

"발견이 늦었으면 그렇다는 거지. 선생님. 안 늦었죠?"

"그럼요. 일찍 발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정수찬은 마음이 급했다.

"치료법은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뇌수술은 언제 하면 됩니까? 당장 할까요? 우리 윤서 머리 밀어야 하나요? 윤서야. 지금 영화나 드라마가 중요한 게 아니다. 밀자!"

그 의사는 오윤서의 팬이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밀자는 말에 깜짝 놀라 설명했다.

"그러는 거 아닙니다! 이 질환은 혈관을 통해서 치료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문제도 약물로 치료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머리를 깎을 필요는 없단 말입니다."

오윤서가 정수찬을 찰싹 때렸다.

"좀 가만히 있어 봐."

그녀가 의사에게 물었다.

"얼마나 급한 건가요?"

"음…. 며칠 전에 우리 병원에서 사고 났을 때 말입니다."

"제가 범인한테 붙잡혔었죠."

"그때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굉장히 위험했을 겁니다."

오윤서는 그때 칼에 찔릴 뻔했다.

"칼에 찔렸으면요?"

의사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바로 이 병원이다.

"어…. 직접 말씀드리기 그래서 말을 돌렸는데, 그랬으면 돌아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무사히 넘긴 거죠."

"그렇죠. 앞으로도 치료가 끝나기 전까지는 칼에 찔리는 건 피하셔야 합니다."

"그런 일이 설마 또 있겠어요?"

"아. 그렇죠.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 하하."

옆에서 정수찬이 말했다.

"윤서야. 안 되겠다. 경호원 쓰자."

"그건 좀 오버 아닌가?"

"치료가 끝날 때까지라도 써야지!"

오윤서가 의사에게 물었다.

"치료 기간은요?"

"넉넉히 잡아도 3, 4일 정도면 일상생활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오셔서 경과를 봐야 합니다만."

"제가 영화와 드라마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어요. 그 둘은 스케줄을 조정하고 다른 건 다 취소하면 시간을 낼 수 있어요."

정수찬이 옆에서 말했다.

"당장 치료해주십시오."

의사가 말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병원의 스케줄 때문에 며칠은 기다리셔야 합니다."

오윤서도 말했다.

"오빠. 나도 스케줄을 조정해야 해서 며칠은 필요해. 그러니까 좀 진정해. 내가 부끄럽잖아."

***

오윤서는 스케줄 조정을 위해 감독과 피디를 만나러 갔다. 혼자가 아니라 매니저와 로드 매니저, 코디네이터까지 데려갔다.

로드 매니저는 삼단봉부터 챙겼다.

정수찬은 차우진을 만났다.

그가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정밀검사 결과가 나왔나 보군요."

"예. 나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한테 이렇게 인사하실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아. 그렇죠. 차우진 씨의 말대로 검사해보길 정말 잘했습니다. 모르고 넘어갔으면 머릿속에 시한폭탄을 달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더군요. 그리고…."

병원에서 오윤서가 습격당했을 때 차우진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녀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윤서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셨습니다. 앞으로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차우진은 오윤서가 죽는 걸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그녀를 그냥 살리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정수찬이 멸망 방지 계획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

차우진이 말했다.

"어제 딥어스테크에서 탐지기에 관해 미팅하신 거 말입니다."

"예. 차우진 씨가, 그러니까 차 이사님이 주도해서 개발한 그 탐지기는 참 흥미로운 물건이더군요."

"제가 주도한 건 아니고, 전 그냥 좀 거든 것뿐입니다. 어쨌든, 지난번 강원도 지진 때 촬영장 근처에서 그 탐지기를 테스트했잖습니까? 그 데이터를 좀 분석해주시죠."

"예? 그건 회사의 기밀 데이터 아닙니까?"

"정수찬 박사님은 그 분야의 세계 최고 전문가시니까 의뢰하는 겁니다."

"제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세계 최고 맞습니다."

멸망 초기에 각국 정부는 은퇴한 정수찬을 불러내 해결법 연구를 맡겼다. 그는 그런 대우를 받을 정도로 마그마 감압 분야의 독보적인 실력자였다.

정수찬은 차우진의 부탁으로 탐지기 개발팀과 미팅한 후에도 그 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흥미로운 탐지기라고 생각했다. 미국에 있는 회사에 돌아가면 실무진 선에서 협조하라고 지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윤서의 목숨을 구해준 차우진이 부탁했다. 이제는 그걸 미룰 수 없다.

"저는 윤서를 지켜봐야 하니까 당분간 국내에 머물 겁니다."

회사 업무는 원격으로도 진행할 수 있다. 직접 가서 처리해야 하는 일들은 당분간은 미룰 수 있다.

"국내에 있는 동안 제가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그 데이터는 꼭 분석하겠습니다."

"빨리 분석해주시면 더 좋겠습니다만."

"물론 그래야지요. 그런데 그거면 되는 겁니까? 제가 도와드릴 일이 더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결과가 나오면 해결해야 할 일은 더 생긴다.

차우진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데이터가 나오고 나서 이야기하시죠. 바빠지실 테니까."

91. 분석

정수찬은 첫날은 오윤서를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바빴다. 원격으로 회사 업무도 처리해야 했다.

이틀째는 회사 업무를 당겨서 처리했다. 급하지 않은 일은 뒤로 미루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 오윤서가 물었다.

"차우진 씨가 부탁한 데이터, 언제 볼 거야?"

"오늘부터 보려고 했어. 이제 겨우 시간이 생겼거든."

그는 딥어스테크 곽수혁 팀장이 이메일로 보내준 데이터를 열었다.

날것인 측정 데이터도 있고, 분석 프로그램에서 쓸 수 있게 변환된 데이터와 그 결과를 정리한 문서 자료도 들어 있었다.

정수찬은 자신이 사용하는 분석 프로그램에 측정 데이터를 집어넣었다.

그는 곽수혁이 보내준 문서와 그가 직접 뽑아낸 결과를 번갈아 보며 비교하고 분석했다.

"이거, 탐지기 성능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그가 받은 데이터에는 회의 때 곽수혁이 말한 것 이상의 정보가 들어 있었다.

"아직 프로토타입 단계라던데, 나중에 완성되면 성능이 장난 아니겠어."

수집된 데이터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마침 지진이 발생했을 때 테스트를 진행하던 중이어서 이런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했지? 운이 좋았어. 그런데 이러면…."

그는 어느새 데이터가 보여주는 지하 상황에 빠져들었다.

"지각 깊은 곳의 마그마가…."

곽수혁은 한참을 데이터를 노려보다가 미국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서 데려간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 사장님. 한국 생활은 재미있으십니까? 저도 귀국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휴가 내서 들어오든가."

- 휴가. 듣기만 해도 좋은 말이군요. 마치 유니콘처럼 말로만 들어보고 본 적은 없는 뿔 달린 말 같습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악덕 보스 같잖아."

- 혼자 한국으로 휴가 가신 건 사실이죠.

"내가 데이터를 보낼 테니까, 이거 3D로 이미지 작업해."

- 어떤 데이터입니까?

"지각 아래쪽 마그마 데이터야."

- 맨틀은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일부가 지각을 좀 뚫고 올라오는 형태일 듯한데, 정확한 모양을 보고 싶어."

- 정확한 모양을 알려면 데이터도 정확해야 할 텐데요?

"그런 데이터가 생겼어. 꽤 좋은 지저 탐지기를 알게 됐거든. 탐지기 성능도 확인할 겸 겸사겸사 이미지를 만들어봐."

- 데이터 보내주시면 작업 맡기겠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다들 하는 일이 있어서 바로는 안 될 겁니다. 급한 일이면 다른 업무 중단하고 진행하라고 할까요?

"그 정도로 급한 건 아니야. 결과 나오면 이야기해."

- 알겠습니다.

***

3D 이미지는 이틀 후에 나왔다.

정수찬은 오윤서의 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전화를 받았다.

"나 지금 병원이다.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전화해."

- 사장님. 이틀 전에 말씀하신 3D 이미지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볼게."

- 지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윤서가 수술실에 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냐?"

- 사장님께서 직접 칼 잡고 수술하시는 게 아니라면, 이거 보셔야 합니다.

지금 통화 중인 직원은 정수찬과 오윤서의 관계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데이터부터 확인하라고 했다.

정수찬의 표정이 굳었다.

"심각해?"

- 저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사장님이 봐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안 좋은 쪽이면…. 심각합니다.

"보내봐."

정수찬이 노트북을 켰다. 직원이 3D 데이터를 보내주었다.

정수찬이 3D 이미지를 확인했다.

"어?"

지각을 뚫고 올라오는 게 있다는 건 짐작했는데, 그 형태가 예상과 달랐다.

그가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거 확실한 거야?"

- 보내주신 데이터 그대로 만든 3D 이미지입니다.

"강원도 지하에 왜 이런 게 있어?"

- 사장님. 심각한 거 맞습니까?

"이 형태면…. 강원도 지각 깊은 곳에 마그마가 폭탄처럼 쌓여 있다고 봐야 하는데…."

- 거기에서 마치 파이프처럼 좁은 영역으로 마그마가 위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마치 도화선처럼. 그럴 확률은 낮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터질 수도 있겠는데?"

- 터진다면 언제쯤….

"이것만 봐서는 모르지. 백 년 후가 될 수도 있고, 천 년 후가 될 수도 있어."

직원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 그럼 빨라도 백 년 후네요?

"가능성은 극히 낮지만, 십 년 후도 불가능한 건 아니야."

- 어…. 사장님. 그게 터졌을 때의 위력은 얼마나 됩니까?

정수찬이 단언했다.

"핵폭탄급이지."

***

이튿날 정예지가 오윤서에게 톡을 보냈다.

- 언니. 저 문병 가도 돼요?

- 아니. 오늘은 어려워.

오늘은 가족이나 전담 매니저처럼 특별히 가까운 사람 외에는 문병을 받지 않았다. 정예지가 그녀와 가까운 편이긴 하지만 가족처럼 친한 건 아니다.

- 우진 오빠가 오늘 시간이 된다고 해서 같이 가려고 했는데, 그럼 저는 다음에 갈게요.

- 오늘 와.

- 네?

- 오늘 보고 싶네.

차우진이 정예지와 함께 병실에 방문했다. 그녀가 호들갑을 떨었다.

"언니. 나쁜 병을 빨리 발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러게. 차우진 씨 아니면 큰일 날 뻔했어."

"우진 씨가 왜요?"

"나 머리 검사해보라고 했잖아. 그래서 찾아낸 거야."

"아. 그때 그런 말을 했죠. 난 인터넷으로 증상을 공부한 선무당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어."

차우진이 말했다.

"선무당 맞습니다. 그냥 주워들은 것과 증상이 비슷해서 말한 것뿐이니까."

차우진은 인터넷을 검색해서 오윤서를 설득할 증상들을 찾았다.

그게 정확할 필요는 없었다. 정확한 병명을 알아내는 건 의사가 할 일이다.

그 계획이 잘 먹혀서 오윤서는 검사를 받았고 머릿속의 폭탄을 발견해 치료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정예지가 물었다.

"그럼 이제 괜찮은 거예요?"

"앞으로도 관리는 계속 받아야 하지만 위험한 일은 없을 거래."

"다행이다."

오윤서가 차우진에게 제안했다.

"혹시 연예계에 뜻이 있으면 내 소속사에 소개해줄까요? 차우진 씨 같은 능력자라면 회사에서도 환영할 거예요."

"연기 할 줄 모릅니다."

"아는 것 같던데."

"오해입니다."

정예지가 옆에서 말했다.

"우리 소속사에 들어오면 내가 팍팍 챙겨줄 수 있는데."

"그러기엔 예지 씨의 힘이 좀 모자라지 않나?"

"챙겨주려는 마음이 중요한 거죠."

"됐습니다. 난 지금 하는 일이 있어서."

"전기 공사요?"

"다른 일도 있습니다."

정수찬이 병실로 들어오다가 그 이야기를 들었다.

"어…. 차우진 씨는 이미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오윤서가 정수찬을 보며 불평했다.

"예지야. 저 사람 봐라. 내가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는데 일만 하고 있다. 어제도 한숨도 안 자고 일했대."

정수찬이 급히 변명했다.

"아니, 그건, 이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

"내가 중요해? 회사가 중요해?"

"어? 물론 네가 중요하지."

"거짓말."

차우진은 정수찬이 진실을 말했다는 걸 안다.

정수찬은 오윤서가 사망하면 회사를 정리하고 은퇴한다. 그에게는 회사보다 오윤서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그의 은퇴를 막으려면 오윤서를 살려야 했다.

그건 일단 고비를 넘겼다.

차우진이 말했다.

"진심일 겁니다."

"어머. 편들어주나 보다."

정수찬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우진 씨. 저번에 보내준 데이터 말입니다. 그것에 관해서 이야기할 게 있습니다."

"잘됐네요. 저도 결과가 궁금했는데."

정예지가 물었다.

"무슨 데이터요?"

차우진이 대답했다.

"딥어스테크 연구팀에서 보낸 데이터입니다."

"복잡한 이야기인가보다. 그런데 그걸 우진 오빠가 왜 들어요?"

차우진이 말했다.

"내가 소개해서?"

"아. 저번에 미팅 갔던 그거요? 이야기 듣고 그쪽에 다시 전해줘야 하나보다."

"대충 비슷합니다."

정수찬이 말했다.

"예지 씨는 윤서를 좀 부탁해요. 나는 우진 씨랑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

정수찬은 병원 옥상 정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환자나 보호자들이 앉을 수 있는 벤치와 테이블이 여럿 있었다.

정수찬이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켜며 말했다.

"여기서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이렇게까지 조심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은 무슨 내용인지 모릅니다."

"그래도 조심하게 되는군요. 워낙 심각한 문제라서요. 일단 보시죠."

정수찬이 노트북에 3D 이미지를 띄웠다.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지하 깊은 곳에서 특이 형태의 마그마가 발견됐군요."

정수찬의 표정이 굳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 탐지기의 원래 목적은 광물 탐사지만, 별명은 마그마 탐지기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 마그마의 위치와 형상까지 예상하신 겁니까?"

예상이 아니라 알고 있었다. 딥어스테크에서 알아낸 게 아니라 멸망 초기의 방송에서 여러 번 보았다.

차우진이 대답했다.

"딥어스테크의 전문분야는 마그마가 아닙니다. 지하 광물 탐지기는 개발했지만, 이 데이터를 이런 단계까지 분석하지는 않았습니다."

"차 이사님이 저한테 분석을 맡긴 이유가 이것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정수찬이 차우진을 쳐다보다가 혼란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데이터를 보내준 곽수혁 팀장에게 이메일을 보내 물어봤습니다. 곽 팀장은 왜 저에게 이 분석 의뢰를 맡긴 건지 전혀 모르고 있더군요. 차 이사님이 시켰다던데요."

상대가 거기까지 알고 있는데 차우진이 전혀 모른다고 말하면 앞뒤가 안 맞게 된다.

"음…. 개인적으로 짐작은 했습니다."

"역시 차우진 이사님이 혼자 분석하고 저한테 의뢰한 거군요. 이건 우리 회사의 전문분야이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마이클 정, 정수찬 박사님의 전문분야이죠."

"맞습니다. 그것도 알고 계셨군요."

정수찬은 차우진과 만나고 데이터까지 받게 된 이유를 생각했다.

'윤서가 아끼는 후배 정예지 씨가 지진으로 붕괴하는 절벽에서 떨어졌어. 그걸 차 이사가 구해줬고. 그래서 내가 차 이사를 만났는데.'

그 지진을 예상하고 절벽에서 추락하는 사태까지 예측해서 대응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생각해보았다.

'불가능하지. 지진 예측도 불가능한데, 설사 예측했다 해도 하필 그때 그 절벽이 붕괴하고 하필 예지 씨가 추락할 줄 어떻게 알겠어.'

정수찬이 딥어스테크의 데이터를 분석한 건 오윤서가 목숨 빚을 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인이 병원에서 윤서를 습격한 것도, 윤서의 머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미리 알 수는 없어. 그건 윤서 자신도 모르던 일이니까.'

그래서 차우진이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 일들을 했다는 의심은 들지 않았다. 그의 상식으로는 모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요."

"아, 예."

정수찬이 모니터에 띄워놓은 3D 이미지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 마그마의 형상이 아주 안 좋습니다. 언제든지 지상으로 치고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가 다른 3D 이미지를 하나 보여주었다.

"이건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 아래에 있는 마그마입니다. 강원도 밑에 있는 건 이 마그마의 소형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형 버전의 위력은 어떻게 보십니까?"

"핵폭탄급이죠. 이게 분출하면 핵폭탄이 지상에서 터졌을 때처럼 큰 피해가 생길 겁니다."

차우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음…."

"왜 그러십니까?"

"핵폭탄 하나 수준이 아닐 겁니다."

"거기까지 이미 예상하셨군요."

"짐작만 한 겁니다. 정확한 데이터는 아닙니다."

이게 터지면 때 어떤 피해가 발생하는지는 실시간으로 봐서 안다.

정수찬이 물었다.

"그럼 이 폭발이 어느 정도 규모라고 보십니까?"

차우진이 대답했다.

"강원도의 삼 분의 일이 용암으로 뒤덮일 겁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 마그마 폭발이 괜히 멸망급 재난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정수찬이 말했다.

"저도 대략적인 예측만 한 겁니다. 더 정확한 피해 규모는 추가로 계산해야 알겠지요. 그나마도 확률로 따져야 하겠지만요. 그래서 일단 핵폭탄급이라고 한 건데…."

"더 크게 터질 겁니다."

정수찬은 다른 것도 우려했다.

"이게 언제 터질지도 계산해봐야 합니다. 어쩌면 천 년 후의 일이라 지금 당장 걱정하지 않아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언제로 예상하십니까?"

차우진은 정확한 시기를 안다.

"10년."

정수찬은 당황했다.

"예? 아니, 저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10년일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차우진이 진지하게 말했다.

"전 굉장히 높다고 봅니다만."

92. 의뢰

정수찬이 물었다.

"10년 후에 터진다고 판단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멸망한 세계에서 마그마 폭탄이 터지는 걸 눈으로 봤다고 말할 수는 없다.

차우진이 말을 돌렸다.

"정수찬 박사님과 스톤파인더라면 왜 10년 후에 마그마 폭탄이 터지는지 계산할 수 있을 겁니다. 분석과 계산을 위해 새로운 수리 모델을 만들어야 할 수는 있지만."

그가 정수찬에게 말했다.

"이 문제를 분석하고 대응할 수 있는 전문가는 지구 전체에 정수찬 박사님 딱 한 명밖에 없습니다."

그건 확실하다.

멸망 초기에는 은퇴한 지 10년이 지난 정수찬을 도로 불러낸 후에야 대응 방법을 알아냈다.

정수찬이 물었다.

"차 이사님도 분석하셨잖습니까?"

"저는 그냥 감으로 눈치챈 것뿐입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할 능력은 없습니다."

"이게 감으로 되는 건 아닙니다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이게 10년쯤 후에 터진다는 게 문제죠."

그는 일부러 10년이 아니라 10년쯤이라고 말했다.

정수찬은 심각해졌다.

"만에 하나지만 정말 그렇게 되면…. 심각하군요. 강원도의 삼 분의 일이 용암으로 덮이면, 그걸로 끝나지 않고 한반도 전체에 피해가 갈 텐데요."

"그러니까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마그마의 진행을 막고 압력을 낮출 방법을 찾아야지요."

"그게 가능합니까?"

"그 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

"누가 어떻게요?"

차우진이 정수찬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박사님이 하셔야지요."

"예?"

"이미 그쪽 이론을 가지고 계실 텐데요?"

멸망한 세계의 정수찬이 감압 이론을 완성한 건 은퇴를 접고 세상에 다시 나온 후였다. 그 이론이 마그마 폭탄의 유일한 해결법이었다.

다만 그때는 해결법이 너무 늦게 나왔다.

정수찬이 도로 물었다.

"그 이론은 아직 미완성인데, 어디서 보셨습니까?"

"딥어스테크의 개발이사 명함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볼 기회가 있더군요."

"하지만 그건 아직 이론 단계입니다."

"딥어스테크의 탐지기 성능을 높이고, 정 박사님의 이론을 더 발전시켜서 적용한다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그 이론대로면 마그마의 압력을 천천히 감소시킬 수 있잖습니까?"

"강원도 지하의 마그마 폭탄이라면, 몇 년에 걸쳐서 압력을 감소시키면 안정화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실제로 제 이론대로 된다면 말이지요."

"될 겁니다."

"그런데 그 이론을 그 정도 수준으로 발전시키려면 여러 대학과 연구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설득하면 도와줄 겁니다."

"이론을 완성하고 관련 장비를 개발하는 데만 몇 년이 걸릴 테고, 설사 장비 개발에 성공한다 해도 몇 년은 감압 작업을 해야 안정화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들겠지요. 우리 회사나 딥어스테크의 자금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정수찬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차 이사님은 회사 돈으로 해결하려는 게 아니군요."

"국가 예산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증명되지도 않은 이런 일에 한국 정부가 예산을 쏟아붓겠습니까?"

차우진이 말했다.

"한국 정부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사업입니다. 국제사회가 움직여야 합니다."

정수찬이 헛웃음을 지었다.

"UN이 한국의 재난에 얼마나 힘을 쏟겠습니까?"

차우진이 도로 물었다.

"이게 왜 한국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이건 지구 전체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10년쯤 후에 지구 전체에 동시다발로 마그마 폭탄이 터질 수 있습니다. 산에서도 터지고, 평지에서도 터지고."

정수찬이 당황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지구가 멸망할 겁니다."

"멸망급 재난이긴 한데, 지구 전체가 멸망하진 않을 겁니다. 대충 반쯤 망하겠죠."

정수찬은 웃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더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틀 동안 데이터를 분석했다. 차우진의 확신에 찬 말도 들었다.

그가 아는 지식과 이 상황을 종합하면 10년 후에 대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정수찬이 물었다.

"설사 그게 사실이라 해도, 누가 믿겠습니까?"

"그렇지요. 증거가 없으면 국제사회가 믿을 리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이런 범지구적인 대규모 사업은…."

"그러니까 증거를 찾아야지요."

정수찬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데이터도 마침 그때 강원도에 지진이 발생해서 측정이 가능했던 거잖습니까? 지구 전체에 장비를 깔아놓고 지진이 나기만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스톤파인더에는 지진이 발생하지 않아도 비슷한 타입의 파동을 발생시킬 수 있는 장비가 있을 텐데요?"

"그건 지금 개발 단계인데 그걸 어떻게…."

"소문을 들었습니다."

멸망한 세계의 방송에서 봤다.

지금 시대에도 장비에 들어가는 기술이 비밀이지 개발 자체는 비밀이 아니다.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소문쯤은 들을 수 있다.

정수찬이 말했다.

"설사 그게 완성된다 해도, 그리고 딥어스테크의 탐사기와 결합해서 조사한다고 해도,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마그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기술로는 그 정도가 한계입니다."

"기술이야 더 개발하면 됩니다. 정수찬 박사님은 예상 지역을 높은 확률로 찾아내는 기술도 개발할 겁니다."

"그럴 예산이 없습니다."

차우진이 일부러 손뼉을 쳤다.

"아. 마침 적당한 곳이 생각났습니다."

"예?"

차우진이 스마트폰에 지도 앱을 실행했다. 그가 세계지도를 띄웠다.

"개인적으로는 이곳이 의심스럽습니다."

차우진은 마그마 폭발이 일어난 지점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그중에 특히 유명한 몇 개는 기억한다.

정수찬은 의심했다.

"지형만 보고 그걸 안다고요?"

"의심하는 겁니다. 아는 게 아니라. 그리고 이 의심 지역을 찾아내는 방법도 정수찬 박사님이 알아내셔야 합니다."

"제가요?"

차우진이 장담했다.

"해내실 수 있습니다."

정수찬이 미심쩍은 얼굴로 지도를 보았다.

"그래서 여기가 어디…. NewYork?"

"뉴욕시 내부는 아니고 바깥쪽 땅입니다. 도시에서 멀지 않지요."

"여기가 왜 의심스럽다는 겁니까?"

멸망한 세계의 정수찬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차우진은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일부러 진지하게 말했다.

"정수찬 사장님. 오윤서 씨를 구해준 대가로 뭐든 도와주겠다고 하셨지요?"

"제가 가진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스톤파인더가 딥어스테크의 탐사기를 사용해서 이 지역을 조사해 주십시오. 제 말을 믿고 싶지 않으면, 오윤서 씨를 구해준 대가라고 생각하고 진행해주십시오."

정수찬은 망설였다.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농담이라고 치부하고 넘길 수 있다.

미국에서 누군가 같은 이야기를 했다면 사기꾼 취급을 했을 수도 있다. 그만큼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는 이미 마그마 데이터를 분석했다. 강원도 지하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차우진의 말처럼 그 마그마가 10년 후에 터질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건 안다.

'차 이사가 뉴욕 근처에서 그 탐지기로 테스트를 진행한 적이 있나?'

방법은 모르지만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우진 이사라면 어떻게든 진행했을지도 몰라.'

정수찬이 결론을 내렸다.

'그래. 윤서의 목숨 빚은 갚아야지. 비용이 많이 들긴 하지만, 그걸 돈으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 회사에서 개발 중인 충격파 발생기를 같이 테스트하는 거잖아. 그러면 회사는 손해가 아니야.'

손해를 보는 건 정수찬의 개인 돈이다.

회사 구성원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테스트를 진행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실험에 필요한 자금을 그의 개인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는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정수찬이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이번 탐사는 제가 제 돈으로 회사에 의뢰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뉴욕시 옆에서 마그마 폭탄을 찾아내면 미국 정부에 비용을 청구하시죠. 미국 정부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걸 알게 되면 예산을 내놓을 겁니다."

"그러면 되긴 하는데, 돈을 날리더라도 땅속에서 아무것도 못 찾아내고 싶군요."

"아무것도 없으면 더 좋긴 하지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차우진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다.

정수찬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런 부정확한 의심 지역보다는 차라리 옐로스톤 지하를 조사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차우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 거기는 안 터집니다."

"네? 그걸 어떻게…."

"그냥 느낌입니다."

***

딥어스테크 곽수혁 팀장이 박수를 쳤다.

"역시 차 이사님! 영업까지 직접 뛰셨군요. 그럼 이제 우리 탐지기를 스톤파인더에 수출하는 겁니까?"

"아직은 개발 협업 단계입니다."

"협업이 잘 되면 되잖습니까? 스톤파인더에서 인정하면 외국으로 판로가 열릴 겁니다."

"일단은 뉴욕 인근에서 진행하는 테스트부터 성공해야겠지만요."

"당연히 성공할 겁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실패해서 거기서는 아무것도 안 나오면 좋겠습니다."

"예?"

"아닙니다."

옆에서 박효정도 한마디 했다.

"그 테스트를 할 때도 탐지기값은 제대로 받을 테니까 수출 맞지 않아요?"

곽수혁 팀장이 웃었다.

"그렇지. 맞지. 하하하."

"그런데 우리 탐지기는 아직 프로토타입 단계인데요? 양산까지 가려면 멀었는데요?"

"어…."

차우진이 말했다.

"곽 팀장님. 분발하셔야겠습니다."

"네?"

***

오윤서는 병원에서 필요한 치료를 모두 받고 건강을 회복한 후에 촬영 현장에 복귀했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사과했다.

"저 때문에 촬영 스케줄이 지연돼서 죄송해요."

피디가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무슨 그런 말을. 다른 배우들이 스케줄을 조정해줘서 윤서 씨 나오는 부분은 다 뒤로 미뤘어요. 괜찮아요. 괜찮아."

"그렇게 꼬여버린 스케줄을 복구하려면 힘드실 텐데…."

"윤서 씨한테 그거 따지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지. 죽다 살아난 사람한테 말이야."

피디가 그렇게 말한 후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윤서 씨. 이게 괜찮은 거 맞지?"

"네.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촬영 스케줄도 무리만 안 하면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럼 홍보팀에서…. 부상 투혼, 아, 부상은 아닌가? 어쨌든 이 상황을 우리 드라마 홍보에 쓰고 싶어 하던데…."

"그러셔도 돼요. 저 때문에 손해 본 건 복구하셔야죠."

"하하하. 홍보팀에서 좋아하겠어."

***

정수찬은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차우진을 만났다.

"차 이사님. 회사로 돌아가면 뉴욕시 옆에서 마그마 탐지 작업을 최우선으로 진행하겠습니다."

"탐지기는 우리 쪽에서 보내겠습니다. 아직 양산 단계는 아니지만, 그걸로도 테스트는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딥어스테크와 스톤파인더는 담당자들끼리 필요한 장비 수량과 일정을 조정하고 있다.

정수찬이 말했다.

"차 이사님이 말한 위치에서 아무것도 안 나올 수 있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다니까요."

"그런데 저기."

"말씀하시죠."

정수찬이 어색한 얼굴로 물었다.

"예지 씨는 아직도 차 이사님을 전기 기술자로 알고 있던데요."

"전기 기술자 맞습니다만? 전기 쌍기사입니다."

"아. 그렇죠. 하, 하하."

차우진은 멸망급 재난 중 하나인 마그마 폭발 문제는 정수찬에게 맡겼다.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은 아니다.

먼저 탐지기로 뉴욕 인근의 마그마 폭탄부터 찾아야 한다.

그걸 찾아내면 미국의 자금과 기술을 끌어다 쓸 수 있다. 뉴욕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차우진이 정수찬에게 말했다.

"박사님은 기존에 연구하시던 이론도 완성해야 하고."

멸망한 세계에서처럼 여러 대학과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도와주면 이론의 완성은 빨라진다.

"그 이론이 적용된 감압 장치도 개발해야 하는데."

그 장치를 개발하고 실제로 현장에 적용하려면 막대한 지금을 소모해야 한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의심 지역에 설치하는 것까지 하려면 몇 년은 걸린다.

그러려면 엄청난 예산이 필요하다. 그 많은 돈을 스톤파인더 혼자 해결할 수는 없다.

"사태의 심각성이 알려지면 각국 정부가 돈을 내놓을 겁니다. 마그마가 터지면 정부 고위층도 똑같이 죽을 테니까요."

정수천이 동의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각국 정부는 그 돈을 스톤파인더가 마음대로 쓰게 두진 않을 겁니다. 그 일을 전담하는 회사를 따로 만들어야 합니다."

"새 회사는 스톤파인더가 주도해서 만들겠지요. 앞으로는 정 박사님만 믿겠습니다."

"예? 저는 차 이사님만 믿는데요?"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만?"

정수찬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알려주신 게 있는데 무슨 그런 농담을."

93. 마그마 에너지

차우진이 말했다.

"저는 감에 의존한 거라서 예상 지역 탐색이나 감압 장치 개발을 도와주지는 못합니다. 그건 정수찬 박사님만 할 수 있습니다."

정수찬은 멸망한 세계에서 학자들의 도움을 받고 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감압 장치 개발에 성공했다.

다만 그때는 기술은 개발했어도 너무 늦었다. 그래서 멸망급 재난을 막지 못했다.

멸망한 세계의 전문가들은 몇 년만 빨리 감압을 시작했으면 모든 마그마 폭발을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차우진이 설명했다.

"우선 뉴욕시 옆에서 마그마 폭탄부터 찾아내고."

그러면 미국의 자금과 기술을 끌어다 쓸 수 있다.

"3년 안에만 감압 장비 개발을 끝내면 됩니다. 그 후에는 예상되는 지점에 탐사기를 깔고, 도화선 부분의 압력을 낮추어야지요. 그때부터는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시간만 버는 게 아니다.

"그러면 그 마그마 폭탄 감압 장치 위에 발전소를 지어서 전력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 점을 강조하면 각국 정부에서 투자금을 뜯어낼 때 반발이 덜할 겁니다."

정수찬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마그마 발전소라니…."

"가능하죠. 마그마로 물을 끓이면 되니까."

"하하하. 거기까지 가려면 10년은 걸리지 않을까요?"

"딱 좋군요. 10년."

정수찬이 진지하게 말했다.

"만약 이번에 뉴욕 외곽에서 정말로 강원도 지하에 있는 것과 같은 마그마 폭탄이 발견되면, 앞으로의 일은 차 이사님도 도와주십시오."

"정 박사님이 다 해결할 수 있다니까요."

"차 이사님은 사덕리소스와 딥어스테크에서 이사로 계시잖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정수찬이 제안했다.

"새로 만드는 마그마 회사에도 기술 이사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다른 회사들은 필요해서 그 자리를 받은 거지만, 마그마 회사까지 굳이?"

"이 일을 시작한 사람도 차 이사님이고, 가야 할 길을 알려준 사람도 차 이사님입니다. 저한테 이 일을 맡기시려면 주식회사 마그마 에너지의 이사 자리를 거절하시면 안 되죠."

"회사 이름도 벌써 정한 겁니까?"

정수찬이 웃었다.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앞으로는 제가 딱히 도와드릴 건 없는데."

"에이. 앞으로 많이 도와주셔야죠. 물론 그럴 일조차 없는 해프닝으로 끝나는 게 최선입니다만."

"그럼 그냥 이사 명함이나 파 주시죠."

차우진이 생각했다.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마그마 발전소의 개념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네. 발전소의 기술적인 부분은 알아서 해결하겠지.'

***

정수찬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차우진은 드라마 촬영장으로 갔다.

곽민지가 촬영장에 있다가 차우진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아저씨!"

"날라리 왔냐?"

"날라리 아니라고요. 그때 처음이었다고요. 아는 언니 따라간 거라고요."

"그러기엔 그때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던데."

"그때도 타고난 연기력이 좋아서 그런 거예요."

"자랑질이냐?"

"히히."

곽민지는 조연인 데다가 출연 장면도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직접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임팩트는 제법 있었다.

차우진이 곽민지가 촬영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정예지가 다가왔다.

"우진 오빠가 오늘 민지 일일 매니저예요?"

"촬영장에 아는 사람이 없다면서 전화로 하도 부탁해서요."

"하긴. 우진 오빠는 요즘도 놀죠?"

"노니까 좋군요."

"나도 영화는 끝났으니까 좀 놀아야겠다."

"이미 노는 거 같은데?"

"오늘 민지 첫 촬영이라고 해서 놀러 온 거예요. 이렇게 제가 뒤에 서 있어줘야 민지가 구박 안 받죠."

"그런 거라면 윤서 씨가 더 도움될 텐데."

"저도 인기 꽤 있거든요?"

"스케줄 없어 보이는데."

"좀 쉬고 싶어서 노는 거거든요?"

차우진이 슬쩍 웃었다.

정예지가 따져 물었다.

"지금 그 웃음 뭐죠? 같이 밥 먹으면서 따져봐요."

"지금은 점심때가 아닌데?"

"당연히 저녁 먹으면서죠. 민지 것까지."

"누가 사는 겁니까?"

"내가요. 민지가 우리 드라마 출연하는 걸 축하하려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요."

"좋은 데 가야겠네요."

"고기? 회? 어떤 장르를 좋아해요? 말만 해요."

"국밥은 어떻습니까?"

"회로 해요."

차우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회 싫어요?"

"이상한 놈이 보여서요."

정예지가 차우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 용구, 아니, 최용구 부장님. 우진 오빠 때문에 나도 용구라는 말이 입에 붙었잖아요."

"그래도 됩니다."

"그러다 남들 있는 데서 말실수하면 뒷감당이 안 돼요."

최용구 기자는 KMTV 보도국 부장이다. 그는 보도국 소속이지만 연예인들의 일에 개입하는 걸 즐긴다.

만약 미래가 변하지 않는다면 최용구는 멸망한 세계에서 빌런이 된다.

'이미 훌륭한 빌런이지.'

인터넷 언론사 '소리언덕'의 도인선 기자가 최용구를 추적하다가 교통사고로 위장한 청부살인을 당할 뻔했다.

그 후에는 청부업자 두 놈이 그녀를 노렸다.

최용구가 피디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피디가 어색하게 웃는 게 보였다.

정예지가 물었다.

"피디님 표정이 안 좋은데, 뭐라고 하는 걸까요?"

"적어도 피디가 용구와 같은 편은 아니라는 건 알겠군요."

***

최용구가 피디에게 말했다.

"여기 작가가 유소진이라고 들었는데. 연쇄살인마 마상국 사건의 피해자."

"그건 우리도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만?"

"난 기자야. 기자. 기자가 말을 가리면 쓰나."

피디가 어색한 얼굴로 물었다.

"최 부장님.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최용구는 대답은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촬영 중인 곽민지를 찾아냈다.

"쟤도 여기 있네? 쟤는 딥어스테크 사건 때 납치됐던 애잖아."

"예?"

"뭐야. 몰랐어? 그럼 내가 알려줬으니 나한테 빚 하나 진 거다?"

"아니, 그게 무슨 빚이라고…. 그리고 저는 그런 거 신경 안 씁니다."

최용구가 히죽거렸다.

"김 피디는 신경 안 쓰지만 시청자들이 그러겠어? 연쇄살인마에게 납치됐던 유소진 작가에, 저 고딩에, 오윤서도 최근에 병원에서 습격당했지? 범죄 피해자들만 모아서 드라마를 찍는 이유를 시청자들이 의심하지 않을까?"

"어떻게 의심한다는 겁니까?"

"시청률을 위해서 일부러 피해자들을 출연시킨다는 의심. 기사 몇 개만 부정적으로 나가도 아주 불이 활활 탈 걸?"

피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최 부장님. 소속은 다르지만 같은 회사에서 방송되는 드라마잖습니까? 회사에서 그런 기사가 나가는 걸 허락하겠습니까?"

"내가 안 쓰면 되지."

"네?"

"나 상부상조하는 기자 많아. 다른 언론사에 대신 써줄 기자 많다고."

피디가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그 주먹을 휘두를 수는 없다.

"최 부장님. 원하는 게 뭡니까?"

"별거 아냐. 적당한 배역 두 개만 마련해 봐.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젊은 배역으로."

"그런 자리는 이제 없습니다. 다 찼습니다."

"대본 수정해서 만들면 되잖아."

"끄응."

최용구가 협박했다.

"왜? 기사 그냥 나가게 해?"

"유 작가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배역 빨리 마련하는 게 좋을 거야. 기사는 신속이 생명이니까."

"신속 정확이겠지요."

"지금 기자 가르치냐? 요즘은 신속이 맞아. 사실 10년 전에도 그랬어."

최용구가 피디의 어깨를 툭 친 후에 현장을 떠났다.

피디가 한숨을 쉬다가 유소진을 찾아갔다.

"유 작가. 우리 대본 수정 가능해?"

"어머. 가능하죠."

"응? 정말로?"

"남자 배역 하나 추가할까 하는데요. 젊은 배역으로요."

"아. 다행이다. 여자도 한 명 추가할 수 있어?"

유소진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왜 그러세요?"

피디가 최용구의 요구를 전했다.

유소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돼요."

"남자 배역에 힘 좀 주고 여자 배역은 원 플러스 원으로 붙이면…."

"그 배역 이미 주인이 있어요."

"응?"

"차우진 씨 생각하고 고치려는 거예요."

"어? 차우진 씨는 배우가 아닌데?"

"지난번에 이벤트 직원 역할 잘했잖아요. 그리고 본인의 평소 모습에 딱 맞춰주면 돼요."

피디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나도 이번에 들은 이야기인데, 차우진 씨는 윤성준 감독님의 영화에 배역 준다는 것도 거절했다더라."

유소진은 당황했다.

"네? 왜요?"

"자기는 배우가 아니라서 안 하겠대. 그런 사람이 우리 드라마에 나오겠어?"

유소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쉬운 남자는 아니네요."

"응?"

"하여간 안돼요. 차우진 씨는 필이 와서 쓰려고 했던 거지만, 청탁을 받고 억지로 끼워 넣을 수는 없어요."

작은 배역 한두 개 끼워 넣는 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유소진은 장편 드라마는 처음이지만 주변에서 주워들은 건 많았다.

"최용구 부장은 그거 받아주면 또 요구할 거예요."

피디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당연히 또 요구하겠지. 원래 그런 거 많이 하는 사람이니까. 아. 이거 어떻게 하지?"

유소진이 말했다.

"그런 기사 나가면 제가 반박 기자회견이라도 할게요. 이슈를 키우면 시청률은 올라가겠네요."

"아니, 그게…. 휴우. 나도 답답한데, 우리가 대응해도 안 좋은 기사가 계속 나올 테니까 그러지."

***

차우진이 정예지에게 말했다.

"오늘 회 먹을 때 사람 하나 더 부릅시다."

"네? 누구요?"

"도인선 기자."

"남자예요?"

"여자."

정예지는 어이가 없었다.

"어머. 나. 참. 흥. 쳇."

"왜 그럽니까?"

"회는 제일 싼 거 먹어야겠다."

***

도인선 기자는 시간 날 때마다 최용구 부장을 조사했다. 그러다 트럭이 덮치거나 칼잡이가 습격하는 사건을 당했다.

둘 다 최용구가 시켰다는 증거는 없다.

트럭 기사는 살인미수가 아니라 졸음운전이라고 주장했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그녀를 납치하려던 두 놈은 단순 강도였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도인선은 그 두 사건의 뒤에 최용구가 있다고 확신했다.

차우진이 도인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녁 먹읍시다. 시간 안 돼도 오죠."

- 어머. 이거 혹시 데이트 신청이에요? 너무 갑자기 아닌가?

"그럴 리가."

- 농담이에요. 밥은 누가 사나요?

"회 먹어요."

- 앗. 내가 회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차우진이 멸망한 세계의 일을 떠올렸다.

***

박창수가 도인선을 타박했다.

"아니, 총알 그까짓 거를 왜 못 피합니까?"

도인선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아파 죽겠으니까 시비 걸지 마요. 사람이 총알을 어떻게 피해요?"

"우진이는 피하던데."

도인선은 용구의 부하들과 싸우다 옆구리에 총을 맞았다.

차우진이 바늘을 움직이며 한소리 했다.

"상처 꿰매는 중이니까 좀 가만히 있어요."

"우진 씨는 의사가 아닌데도 잘 꿰매네요? 그런데 이러면 나 살아요?"

"회복력 증가 스킬 있다면서요."

"내 몸에만 적용되는 게 있는데 레벨이 낮아요."

"나한테 회복력을 전달해주는 스킬이 있습니다. 내부 장기는 다행히 피했고 총알도 제거했으니까, 상처 꿰매고, 소독약 바르고, 소염제랑 항생제 먹고, 본인 스킬에 내 스킬까지 쓰면 살 수 있습니다."

"우진 씨는 도대체 각성한 스킬이 몇 개예요?"

대답하지 않았다. 캐묻지도 않았다. 대답을 기대하고 질문한 것도 아니다.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스킬에 대해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다.

도인선이 말을 돌렸다.

"소염제랑 항생제는 기성품이에요? 아니면 대충 만든 수제?"

"손하은 특제."

"와. 제약 명인이 만든 거네요. 그거 귀한데 어떻게 구했어요?"

"제작자를 개인적으로 조금 알아서."

옆에서 박창수가 말했다.

"도인선 씨가 만드는 술도 귀한 겁니다."

"박창수 씨는 술 때문에 내 걱정해주는 거예요?"

"에이. 설마요. 하, 하하."

차우진이 그녀의 총상을 봉합하고 약을 사용한 후에 회복 스킬을 사용했다.

도인선이 말했다.

"멸망 전에 그 회복 스킬이 있었으면 병원 차려서 대박 났겠어요. 상처가 정말 빠르게 낫는 명의의 병원으로 소문났겠죠."

"그러다 무면허 의료 행위로 곤란해지겠지요."

그녀가 옆구리를 보며 말했다.

"이 총상을 회복하려면 잘 먹어야 할 텐데."

박창수가 물었다.

"뭐 먹고 싶습니까? 내가 구해올 테니까 말만 해요."

"광어회에 소주?"

"어…. 소주는 뭐, 찾아보면 폐허 사이에서 발견될 때가 있는데…."

여기는 내륙이다. 광어를 잡아서 여기까지 가져오는 건 어렵다.

"겨울이라면 몰라도 요즘 날씨에…."

도인선이 총상의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그냥 추억을 이야기한 거예요. 옛날이 그리워서. 그땐 그게 참 흔했는데."

"같이 바닷가로 가시죠. 우진이가 회 하나는 기가 막히게 뜹니다."

도인선이 웃었다.

"아야. 창수 씨. 웃기지 마요. 아파."

"우진이가 회 떠준다는 말만 들어도 웃음이 나와요? 와. 진짜 사람 차별하네."

***

차우진이 물었다.

"광어회 어때요?"

- 내가 광어회를 제일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차우진 씨가 사는 거죠?

"정예지 씨가 살 겁니다."

- 배우 정예지요?

"거기에 고딩 신인배우도 한 명."

94. 나인세븐

도인선 기자가 물었다.

- 그런 자리에 저는 왜 부르세요?

차우진이 대답했다.

"연예계 기사도 쓰잖습니까? 그러니까 와서 먹고 기삿거리 좀 받아가요."

도인선이 웃었다.

- 어머. 이거 설마 청탁이에요? 무슨 청탁을 광어회로 해요?

"오늘 드라마 촬영장에 용구가 왔더군요."

도인선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 지금 갈게요.

"지금 말고 저녁때."

- 알았어요. 시간하고 장소 보내줘요.

***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곽민지가 흥분한 상태로 떠들었다.

"피디님이 진짜 저 연기 괜찮다고 했다니까요?"

차우진이 말했다.

"사람들이 너 기 살려준 거야. 연기 안 해본 거 티 났어."

"작가님이 노래도 진짜 잘한댔어요."

"아직 멀었어."

차우진이 아는 꿈속 미래의 민지는 노래를 훨씬 더 잘했다. 그 수준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곽 팀장님이 살아있으니까, 그때 들은 민지의 노래는 이제 안 나올 수도 있어.'

그렇더라도 지금의 삶이 나았다. 멸망한 세계의 민지는 이렇게 밝고 행복한 모습이 아니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네가 원래 해야 할 수준까지 가려면 한참 멀었다."

"뭐죠? 왜 아저씨가 날 디스하지?"

"냉정하게 평가한 거다."

"저는 자라나는 청소년이라 평가가 아니라 칭찬이 필요하거든요?"

"날라리가 이만큼 왔으면 잘하고 있는 거 맞아."

"설마 그거 옜다 칭찬 같은 거예요?"

"어."

"와. 내가 밥이 맛있어서 참는다."

정예지는 일식당의 별실에서 다양한 해산물과 요리가 나오는 밥을 샀다.

그녀는 원래는 광어회만 사려고 했다. 그런데 차우진이 드라마 작가인 유소진까지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유소진은 술을 마시면서 대놓고 최용구를 욕했다.

"이상한 기사를 쓰겠다고 협박까지 하면서 남녀 배역을 새로 만들어내라는 거예요. 이미 다 쓴 대본을 수정해서요."

도인선이 눈을 반짝이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중간중간 맞장구도 쳤다.

"어머. 화 많이 나셨겠다. 저도 그 기분 알죠."

유소진이 도인선에게 물었다.

"그런데 도 기자님은 어떻게 차우진 씨하고 아는 거예요?"

"아. 강원도 촬영 현장에 취재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그날 차를 잠깐 태워줬다가 같이 교통사고도 당했죠."

유소진이 걱정했다.

"어머. 안 다치셨어요?"

"네. 저는 괜찮아요. 차만 폐차했죠."

"아뇨. 차우진 씨요."

"네? 물론 안 다쳤죠. 그런 일로 다칠 것 같은 사람은 아니라서."

"그건 그래요."

도인선은 여전히 최용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차우진도 그걸 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차우진이 도인선을 따로 만났다.

"오늘 들은 거 기사로 쓸 거면 유소진 씨 이름은 빼고 써요."

"당연하죠. 제가 또 취재원 보호 하나는 확실히 해요."

"최용구가 어떤 기획사에 줄을 댄 건지 알겠습니까?"

"최용구가 받아먹는 곳은 한둘이 아니에요."

"짐작하는 곳이 있는 표정인데?"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몇 번 본 게 다인데 어떻게 내 표정까지 파악하실까?"

"그래서 어디입니까?"

도인선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생각했다.

"최용구도 이렇게 대놓고 들이대는 짓은 자주는 안 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나올 정도면…. 나인세븐 엔터?"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조폭 출신이 만든 기획사거든요."

"규모가 큽니까?"

"아뇨. 규모는 평범해요. 그런데 말이죠. 자금력이 좀 이상하단 말이에요."

"구체적으로?"

"그 회사, 연예계 실적은 부실한데 돈이 수상할 정도로 많아요."

"돈세탁?"

"저는 그렇게 의심하고 있어요."

차우진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그 기획사를 만든 조직 이름은?"

"상칠파요. 두목 이름이 천상칠이라서 다들 그렇게 불러요. 나인세븐 엔터 사장이 천상칠의 동생 천중칠이에요."

"나인세븐 엔터라…. 구와 칠이면 용구와 상칠이의 합작인가?"

"어? 그런가? 하지만 최용구는 뒤에서 움직이지, 이름을 걸어놓고 해먹지는 않는데…."

"그건 적당히 받아먹을 때나 그럴 겁니다. 용구가 그 기획사에 정말 큰 걸 걸었다면 이름을 따서 지을 수도 있습니다."

차우진이 아는 최용구는 멸망한 세계의 빌런이다. 그의 부하 중 일부는 멸망하기 전부터 조폭이었다고 들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아니면 최용구가 그 조직을 먹을 생각이던가."

"에이. 그래도 기자인데 설마 조폭 조직을…."

"하는 짓을 보면 양아치인데?"

도인선이 즉시 반성했다.

"그건 그렇죠. 내가 최용구에게 지키는 선이 있다고 생각하다니. 난 아직 멀었네요."

"도 기자님이 알아내는 정보 좀 공유합시다."

"최용구를 잡는 데 필요하다면 모르는 것도 알아올 테니까 말해봐요. 뭘 알아다 주면 돼요?"

***

차우진은 최용구가 미래에 어떤 빌런이 되는지 안다. 몇 번이나 싸운 경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미래는 차우진이 지구 멸망을 막으면 오지 않는다. 멸망한 세계에서 빌런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최용구를 제거하려면, 그가 멸망급 빌런이어야 한다.

최용구는 빌런이 되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거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최용구가 빌런이 아닌 건 아니다.

이미 도인선 기자가 최용구가 보낸 킬러에게 습격당했다.

차우진 덕분에 도인선은 다치지 않았지만, 그가 없었다면 그녀는 꿈속 미래에서처럼 한쪽 눈을 잃고 기자도 그만둘 뻔했다.

공격을 당했으면 반격해야 한다.

그는 그동안은 최용구 같은 잔챙이는 잠시 처리를 미뤄뒀다.

그런데 최용구가 자꾸 거슬렸다.

나인세븐 엔터는 영등포구에 있는 5층 건물을 사용했다.

차우진이 그 건물을 보며 말했다.

"저건 자기네 건물이려나."

도인선이 옆에서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건물을 감시하며 대답했다.

"임대예요. 건물주와 무슨 커넥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회사 소유는 아니에요."

"건물 이름도 회사와 같은 나인세븐인 걸 보면, 건물 쪽에도 용구의 지분이 들어가 있겠군요."

"돈을 내지 않고 건물 지분만 차명으로 받았을 수도 있죠."

"용구 스타일을 생각하면 그쪽이 더 유력합니다."

도인선이 타깃에 관한 정보를 늘어놓았다.

"나인세븐은 연예 기획사인데, 소속 연예인들은 주로 영화나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해요. 조연 배우도 두 명 있어요."

"그 두 명이 이번에 드라마에 꽂으려는 사람들인가요?"

"아니요. 다른 단역급 두 명을 조연급으로 끌어올리려는 거예요."

"그렇게만 보면 방법이 문제이지 노력은 많이 하는 기획사처럼 보이는데."

"목적이 순수하다면 그렇죠."

도인선이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그렇게 억지로 급을 올린 배우들은 접대 목적으로 이용돼요. 나인세븐 엔터는 정상적인 기획사가 아니에요. 연예계 활동이 목적이 아니라, 연예인이라는 간판만 이용하는 회사인 거죠."

"기획사로 위장한 포주 회사네."

"그렇죠.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배우가 접대하면 좋아할 사람이 많으니까요."

"접대 대상 중에 권력 좀 있는 놈들은 용구가 연결해줄 테고."

"맞아요. 보도국 부장급 기자라서 기업은 물론이고 권력기관이나 정치권에도 줄을 잘 댄대요."

"용구가 출마라도 하려고 그러나?"

"이렇게 인맥을 쌓다 보면 불가능한 건 아니죠. 기자증을 이마에 붙이고 돈을 뿌리면 공천은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최용구가 국회의원이 되는 대한민국이라니."

도인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의 빌런 용구가 국회의원 출신이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창수 형은 용구가 기자 출신이라는 말만 했는데….'

기자보다는 국회의원의 간판이 더 크다. 국회의원 출신이라면 박창수가 그 이야기를 안 했을 리가 없다.

결론이 나왔다.

"용구는 국회의원은 못 될 겁니다. 설사 총선에 나간다 해도 떨어지겠지요. 스캔들이 터지든, 강력한 상대를 만나든."

'아니면 10년 후를 보고 준비하다가 멸망급 재난이 먼저 터지든.'

도인선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최용구는 약점이 많아서 선거판에 나가는 건 피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거 무시하고 출마하는 사람도 꽤 많아요."

"언론에 보도되지만 않으면 유권자는 모를 테니까?"

"맞아요. 최용구는 방송국 기자잖아요. 언론계에 아는 사람이 많고 영향력도 있겠죠."

"하긴. 돈과 권력. 둘 다 노려야 용구 답죠."

차우진이 물었다.

"용구가 약을 쓴다는 말은 없던가요?"

도인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약이요? 그럴 수도 있겠죠. 확인된 건 없지만요."

***

차우진은 그날 밤에 나인세븐 엔터를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도인선은 데려오지 않았다.

그는 낮에는 지상의 승용차 안에서 그 건물을 관찰했다.

지금은 근처 7층 건물 옥상에서 5층 건물인 나인세븐 엔터를 내려다보는 중이다.

"용구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놈이지. 욕심도 많아서, 저 회사를 건물 채로 먹고 싶어 할 텐데…."

오윤서가 출연하는 드라마에 최용구가 조연 배우를 꽂는다고 해서 그게 멸망에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다. 오윤서를 직접 공격하지만 않으면 정수찬은 은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찜찜했다.

"용구는 이미 문제를 일으켰고 앞으로도 문제를 일으키겠지."

그렇다고 의심 가는 놈을 다 죽이고 다닐 수는 없다. 최용구는 미래에는 위험한 빌런이 되지만, 세상이 멸망하지 않으면 그 상태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다.

건물을 내려다보던 차우진의 눈에 그곳에서 나오는 차가 보였다.

연예인들이 스케줄이 있을 때 타고 다니는 차였다.

"조연급 배우는 두 명이라고 했으니까, 그중 한 명이 저기 있겠네."

***

나인세븐 엔터에서 차가 한 대 나왔다.

그 차에는 배우와 매니저가 한 명씩 타고 있었다. 배우는 드라마나 영화에 조연으로 가끔 출연하는 김상훈이었다.

김상훈이 손을 내밀었다.

"약 좀 줘봐."

매니저가 운전하면서 말했다.

"약은 일을 하고 나서 먹어야지."

"약을 먹으면 정신이 말똥말똥해져서 일이 더 잘된다니까?"

"지금은 참아."

"더럽게 비싸게 구네."

김상훈이 투덜대다가 물었다.

"이번 신작 드라마에 자리 만든다며. 그거 나 주나?"

"사장님이 그건 준호 준다더라."

김상훈이 욕을 했다.

"씨발. 나 줘야지 왜 그 새끼를 줘? 그 새끼는 급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준호도 급을 좀 올려줘야지. 그래야 너도 일을 좀 덜 하고 편해지잖아."

"고양이 쥐 생각하고 있네. 사장님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사장님을 위해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럴 여유가 있으면 당연히 나부터 주연급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거 아냐?"

매니저가 손을 안주머니에 넣었다가 꺼냈다. 하얀 약통이 나왔다. 표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매니저가 그걸 흔들며 말했다.

"약은 받아왔으니까 일하고 나서 받아가."

두 사람이 탄 차는 건물에서 나와 조금 달리다가 작은 건물 앞에 멈췄다.

매니저가 운전석 문을 열며 말했다.

"가자."

"문 안 열어줘?"

"우리가 여기 스케줄 하러 온 줄 아냐?"

김상훈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며 투덜댔다.

"사장님 지시니까 스케줄인 건 맞지."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는 남자 둘이 있었다.

안쪽에 있는 소파에는 젊은 여자가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매니저가 남자들에게 물었다.

"왜 아직도 이러고 있어? 설득이 안 돼?"

"죄송합니다. 실장님."

진소영이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저기요. 그 빚은 내가 진 거 아니에요."

매니저가 실실 웃었다.

"누가 빚을 졌든 아가씨가 갚아야지. 차용증이 있으니까."

"친구가 나쁜 년이라고요! 걔가 나 몰래 차용증에 도장 찍은 거라고요!"

"그 친구는 죽었잖아. 그럼 도장 찍은 아가씨가 일해서 갚아야지."

"진짜 나쁜 년. 도대체 차용증을 몇 장이나 뿌린 거야!"

"그거야 우리가 알 바는 아니고."

진소영이 겁먹은 눈빛으로 물었다.

"날 어디에 넘기려는 건데요? 또 정 마담이에요?"

"연예인 시켜준다니까?"

"그런 말을 누가 믿어요!"

김상훈이 뒤에서 그걸 보면서 말했다.

"옛날 생각나네. 나도 처음엔 이렇게 시작했는데."

"네?"

김상훈이 마스크를 내렸다.

"아가씨. 연예인 시켜준다는 거 진짜야. 나 드라마에서 자주 봤지?"

"어? 그…. 김상훈 씨?"

"연예인 시켜준다는 말을 안 믿는다고 해서 내가 직접 왔지."

매니저가 말했다.

"봤지? 우리는 룸살롱 마담한테 팔아먹는 그런 짓 안 해. 아가씨를 배우로 만들어준다니까?"

"지, 진짜예요?"

"그럼. 그러니까 계약서에 도장 찍고 우리 회사에서 일해."

"그럼 계약서 좀 읽어보고…."

"읽어보게?"

"당연히…."

매니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봐. 진소영 씨.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되나?"

"네?"

"정 마담한테 팔려가는 것보다는 연예인이 낫지 않아?"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 무슨 짓을 시키려는 거예요?"

95. 성분 분석

나인세븐 엔터 매니저가 말했다.

"배우로 만들어준다는 건 진짜라니까?"

진소영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진짜라니요? 그럼 다른 건…."

문이 스르륵 열리며 차우진이 말했다.

"좋은 일을 시킬 거면 이런 분위기에서 계약서를 쓰게 하겠어?"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매니저가 먼저 와 있던 남자들에게 물었다.

"저거 누구냐?"

"모르겠습니다. 실장님을 따라온 거 같습…."

"이 새끼가. 내 잘못이라는 거야?"

"아닙니다!"

매니저가 차우진을 보며 물었다.

"어디서 오신 분인가?"

"생각나는 곳 없냐?"

"혹시 나랏일 하는 분이신가?"

"경찰이냐고?"

"그러시면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셔야지."

차우진이 혀를 찼다. 상대가 넘겨짚어 말하기를 기대했는데 성과가 별로 없었다.

"그런 게 있으면 마스크를 썼겠냐?"

"뭐?"

진소영은 차우진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앗!"

차우진은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그녀는 그의 분위기를 잊어본 적이 없다.

'혹시 사채업자의 사무실에 불을 지르고 나를 구해준 그분?'

증거는 없다. 얼굴은 그때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그때와 비슷했다. 그걸 생각하면서 보니까 분위기가 비슷해 보였다.

차우진이 그녀를 쓱 쳐다보며 말했다.

"저 아가씨는 누구지? 처음 보는데 새로운 피해자인가?"

그녀는 처음 본다는 말을 듣고 확신했다.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야. 틀림없어.'

그녀가 얼른 말을 받았다.

"그렇죠? 우린 처음 보죠?"

"사채 썼어?"

"네? 네. 친구가 쓴 사채 차용증이 이놈들한테도 있어서요. 연예인이 돼서 갚으라고…."

"몇 번 출연시켜주고 접대부로 써먹을 거야. 원래 그런 일 하는 놈들이거든."

"여, 역시! 나 이 계약서 안 쓸래요!"

매니저가 진소영에게 화를 벌컥 냈다.

"친절하게 말해주니까 내가 우습나! 너 지금 저 새끼 믿고 이러는 거야?"

진소영이 받아쳤다.

"그래요! 저분을 믿고 이러는 거예요!"

그녀는 차우진이 사채업자 박재구와 부하들을 쓸어버릴 때 그 현장에 있었다.

그때는 의자에 묶인 채로 넘어져 있어서 싸우는 모습을 눈으로 보진 못하고 소리로만 들었다.

나중에 형사를 통해서 일방적인 전투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녀는 차우진의 실력을 믿었다.

'그 사채업자 놈들도 일방적으로 이겼는데 이놈들쯤이야…. 근데 이번에도 나를 구해주시겠지?'

확신은 없었다.

그녀가 차우진의 눈치를 살피며 매니저에게 제안했다.

"저기요. 목격자가 있는데, 이쯤에서 이 이야기는 그만두는 게 어때요? 그냥 보내주기만 하면 아무 말도 안 할게요."

매니저가 욕을 내뱉었다.

"씨발. 우리가 신사적으로 나가니까 신사인 줄 아냐? 그만두긴 뭘 그만둬! 넌 이미 사장님이 찍으셨어!"

"내가 뭘 어쨌다고 찍어! 내가 빌린 돈도 아닌데!"

"그러게 도장은 잘 찍었어야지."

"내가 안 찍었다고!"

매니저가 이 건물을 지키고 있던 놈들에게 손짓했다.

"일단 저 새끼 잡아! 도망 못 치게 빨리! 뭘 알고 찾아온 건지 알아내!"

차우진이 말했다.

"이야아. 그건 나랑 의견이 일치하네?"

"뭐?"

"도망 못 치게 하는 거. 뭘 아는지 궁금한 거."

"뭐해? 잡아!"

건물에 먼저 와 있던 두 놈이 차우진을 향해 움직였다. 한 놈은 앞에서 먼저 뛰어오고 다른 놈은 그 뒤에서 천천히 접근했다.

차우진은 성큼성큼 걸었다.

뛰어오는 놈이 차우진의 멱살을 잡으려고 왼손을 앞으로 내밀며 오른손을 뒤로 당겼다. 멱살을 잡으면 얼굴에 주먹을 내지를 생각이었다.

차우진이 상대의 왼손을 툭 쳐내며 계속 전진했다. 그러면서 팔꿈치를 들었다.

팔꿈치가 적의 턱에 걸렸다.

"켁!"

적이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그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놈은 동료가 너무 쉽게 당하는 걸 보고 당황했다.

"어?"

차우진이 바닥을 차며 점프했다. 상대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차우진이 공중에서 발을 쭉 뻗었다. 체중이 실린 발차기가 적의 가슴에 박혔다.

"케에엑!"

체중 차이도 크고 발차기에 담긴 힘도 강했다. 걷어차인 놈은 뒤로 날아가 소파에 처박혔다.

매니저는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배우 김상훈도 옆으로 후다닥 물러났다.

진소영은 주먹을 쥐며 활짝 웃었다.

"예쓰!"

차우진이 매니저에게 걸어갔다.

"야."

매니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 예?"

"주머니에 든 거 다 꺼내봐."

"카, 카드 씁니다."

"돈 말고."

매니저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어, 없…."

차우진이 매니저를 걷어찼다. 매니저가 나자빠졌다.

"켁!"

그가 상대의 주머니를 뒤졌다.

"칼은 없는데."

다른 게 나왔다. 하얀 약통이 나왔다.

차우진이 물었다.

"약이네? 너 아프냐?"

옆에서 김상훈이 손을 내밀었다.

"그, 그거 좀 남겨…."

"뭐?"

"아, 아닙니다. 난 그런 거 안 합니다. 진짜입니다."

"그냥 약은 아닌가 보다?"

"가, 감기약입니다."

"퍽이나 그러겠다."

차우진이 진소영에게 물었다.

"이거 먹었어?"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열심히 흔들었다.

"아뇨!"

"그럼 너한테 먹이려고 가져왔겠지."

"네?"

"이거 각성제 아니면 마약이다."

진소영이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그걸 저한테 먹이면, 제가 저절로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나요?"

"계약서가 문제가 아니야. 네가 약에 의존해야 너를 마음대로 부려먹지."

차우진이 김상훈을 가리켰다.

"저놈처럼."

김상훈은 들켰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급히 손을 흔들며 변명했다.

"나, 나도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닙니다. 저놈들이 약으로 날 길들인 겁니다."

"경찰에 신고는 했어?"

"신고한다고 해결되겠습니까? 회사에서 접대하는 손님 중에 VIP들이 있습니다. 신고해봤자 그 VIP들이 다 덮을 겁니다."

"개판이네. 이러니 세상이 망했지."

"예?"

"아니다. 망한 이유 중 하나일 뿐이구나."

김상훈이 머리를 굴리며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지금 세상은 도덕과 인륜이 망했죠. 저도 인정합니다. 도시는 화려하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온갖 지저분한…."

"시끄럽고."

"넵!"

"그래서 이 약 이름이 뭐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주니까 먹는데, 제가 직접 산 건 아니라서."

"효과는?"

"그…."

"뭔데?"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워지고, 근심 걱정도 사라지고, 기운도 나고, 잠도 잘 오고, 그리고 밤에 할 때도 좋고. 그냥 다 좋습니다."

"음?"

차우진은 그런 효과가 있는 약을 안다.

"생각도 좀 짧아지지 않냐?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지?"

"그, 그렇긴 합니다."

김상훈이 변명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마약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그냥 각성제나 비아그라 같은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중독성이 있다?"

"예. 그게 없으면 재미도 없고, 잠도 안 오고, 몸도 아프고, 괜히 화가 나서 싸움도 하고…."

차우진이 인상을 쓰며 약을 주머니에 넣었다.

"각서 어디 있어?"

"예? 무슨 각서…."

"저 아가씨 차용증."

"그건 매니저가…."

차우진이 매니저의 몸을 뒤졌다. 각서가 나왔다.

차우진이 탁자 위의 라이터를 켜 각서에 불을 붙였다. 그런 후에 불붙은 각서를 매니저의 몸에 떨어뜨렸다.

불이 옷에 옮겨붙었다.

"잘 타네."

매니저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앗 뜨거!"

그 정도로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매니저가 바닥을 굴렀다.

"으아아! 내 몸이 탄다!"

"주둥이는 안 타나 보다."

차우진이 진소영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가.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네? 네!"

진소영이 급히 배꼽 인사를 하고 나서 밖으로 도망쳤다.

매니저는 아직도 바닥을 구르며 발광하고 있었다.

차우진이 발광하는 매니저를 밟았다.

"그래도 불은 꺼줘야지."

"켁!"

"이거 왜 이렇게 안 꺼져?"

차우진이 불이 꺼질 때까지 매니저를 밟았다.

김상훈은 그 모습을 보고 더 겁을 집어먹었다.

불이 꺼졌을 때는 매니저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차우진이 김상훈을 불렀다.

"너."

"네!"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싶지?"

"네! 저는 피해자 맞습니다!"

"이 바닥에서 빠져나오고 싶냐?"

"네? 네! 그, 약도 끊고 싶고…."

"약은 네가 끊어야 하는데, 빠져나오는 건 도와줄 수 있겠다."

"어떻게…."

"나인세븐 엔터. 기획사로 위장한 그 포주 회사가 망하면 되잖아."

"아…. 그렇죠."

"내부에서 정보 좀 빼내 봐."

김상훈이 눈알을 굴렸다.

그는 다른 세 놈처럼 바닥을 구르고 싶지 않았다. 몸에 불이 붙었다가 밟히는 것도 싫었다.

'일단 이 상황만 넘기고 보자.'

"알겠습니다! 제가 그런 거 잘합니다. 그런데 연락은 어떻게…."

"내가 너 찾아간다."

김상훈이 침을 꼴깍 삼켰다.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야. 잠깐."

"네?"

"너만 멀쩡하면 이상한데…."

김상훈이 주변을 보았다. 매니저와 직원들은 얻어맞고 기절해 있었다.

김상훈이 급히 말했다.

"저 배우입니다! 맞고 기절한 척 잘합니다!"

"그래?"

"예!"

"잘해라."

"예!"

차우진이 건물을 나가려 했다.

김상훈이 물었다.

"저기, 그…."

"뭐?"

"약 그가 다 가져가실 겁니까?"

"끊고 싶다며?"

"그, 그렇긴 한데…."

"참아."

차우진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가 옆을 보았다. 골목에서 익숙한 얼굴이 살짝 보였다.

진소영이 고개만 살짝 내밀고 기다리다가 얼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차우진이 그 골목으로 들어가 한숨을 쉬었다.

"너를 왜 또 이렇게 만나는 걸까?"

그녀가 얼른 말했다.

"죽은 친구가 차용증을 또 썼더라고요."

"몇 장이나?"

"몰라요. 이젠 더 없었으면 좋겠어요."

"저놈이 갖고 있던 건 불붙여서 태웠다."

"앗! 고맙습니다!"

차우진이 그녀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연기는 좀 해?"

"어머. 저 배우예요. 모르셨구나."

"TV에서 못 봤는데?"

"저 이번에 드라마에 들어갔어요. 조연으로요. 그러니까, 단역보다는 자주 나오는 조연이에요. 대사도 있어요."

"저놈들을 통해서 얻은 자리야?"

진소영이 고개를 옆으로 크게 흔들었다.

"아니요! 제힘으로 들어갔어요! 내일 첫 방 시작해요. 그걸 알고 저놈들이 차용증을 구해서 저를 찾아온 거예요."

차우진은 나인세븐 엔터가 어떤 곳인지 안다.

"힘들게 조연 자리까지 끌어올리지 않아도 당장 써먹을 수 있다는 건가?"

"네? 어디 써먹어요?"

"좋은 곳은 아니라니까. 알았으니까, 우리 다시 보진 말자."

***

이선정 박사는 오늘도 남들이 다 퇴근한 한밤중에 개인 연구를 하고 있었다.

"왜 내가 예상한 거랑 실험 결과가 다를까?"

그녀가 논문을 검색했다.

"오늘 밤에는 새로 올라온 논문이랑 비교를…."

전화가 걸려왔다. 차우진이었다. 그녀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머. 차우진 씨."

- 바쁘세요?

"아니요. 하나도 안 바빠요. 퇴근하려고 했어요."

- 저녁은요?

"안 먹었어요."

- 잘됐네요. 내가 도시락을 좀 만들었는데.

"네? 도시락이요? 혹시 여기로 오시려고…."

- 어려울까요?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

"아뇨! 괜찮아요. 오세요."

이선정이 전화를 끊고 사무실을 보았다. 난잡했다.

"다 치우는 건 불가능. 그럼 가능한 걸 하자."

그녀가 그녀의 책상만 깨끗하게 정리하고, 사장실 탁자도 물티슈로 닦았다.

차우진이 회사에 도착했다. 그가 도시락이 담긴 가방을 들어 보였다.

"도시락 배달 왔습니다."

"이쪽으로 주세요. 사장실이 탁자가 좋아요."

"사장실에서 밥을?"

"언니가 사장이니까 괜찮아요."

"하긴."

차우진이 탁자 위에 음식을 깔았다. 그런데 한식이 아니었다.

이선정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파스타에 리조또에. 우진 씨는 한식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특히 국밥을 좋아하시던데…."

"원래 안 가리고 먹습니다."

파스타 면은 건조상태에서는 굉장히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멸망한 세계의 생존 커뮤니티에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요리 전문가가 여럿 있었다.

그들은 멸망한 세계의 부실한 식재료에서 어떻게든 맛을 뽑아내려고 노력했다.

차우진은 그 사람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조리법을 배웠다. 그들은 구하기 어려운 향신료를 쓰지 않고도 맛을 끌어내는 법을 많이 알았다.

이선정 박사가 파스타를 먹으며 감탄했다.

"맛있어요! 요리 잘하신다."

"마법의 가루의 힘이죠."

"새우도 정말 맛있어요."

"오늘 새우가 물이 좋더라고요."

"이 마늘은 왜 이렇게 맛있어요?"

"좋은 올리브 오일로 구웠으니까요."

이선정이 음식을 예쁘게 먹으며 물었다.

"그런데 뭘 물어보신다는 거예요?"

"약 성분을 좀 알고 싶어서요."

"약이요? 처방전에 적힌 이름이 뭐예요?"

"약국에서 파는 약이 아닙니다."

96. 레드 크리스털

이선정 박사가 물었다.

"무슨 약인데…."

차우진이 대답했다.

"마약 아니면 각성제일 겁니다."

이선정은 깜짝 놀랐다.

"마, 마약이요? 우진 씨가 설마 마약을…."

"내가 할 리가."

"그쵸. 그럼 설마 마약을…."

"팔 리도 없고요."

"휴우."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린 후에 물었다.

"그럼 왜 마약을…."

"수상한 놈들이 가지고 있던 건데, 성분이 궁금해서요."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안 돼요?"

"그러면 일이 좀 복잡해져서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죽이진… 않으셨죠?"

"설마요."

"휴우."

"뭐지? 도대체 날 어떻게 보는 겁니까?"

"아니에요. 믿고 있었어요."

"아닌 것 같은데."

차우진이 하얀 약통을 꺼냈다.

그녀가 물었다.

"우리도 이거 조사한 기록이 남으면 안 되죠?"

"물론이죠. 박사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겁니다."

이선정은 차우진이 준 약을 분석기에 넣고 돌렸다.

결과는 식사를 마칠 때쯤 나왔다.

그녀가 데이터를 보면서 말했다.

"성분만 보면 암페타민도 아니고, 펜타민도 아니고. 생약 쪽인가? 하지만 아편도 아닌데."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시체를 보며 말했다.

"블러드 크리스털 중독자다."

차우진이 옆에서 말했다.

"블러드는 생산 시설이 다 파괴돼서 이제 없는 줄 알았는데."

"세상이 멸망할 때 마약 생산 장비부터 챙긴 곳이 있겠지. 그 많은 장비가 전부 다 파괴된 건 아닐 테니까."

"장비가 있다 해도 원료를 구하기 어렵잖아."

"마약 조직들이 쓰던 방식을 사용하면 제일 구하기 어려운 원료는 확보할 수 있어."

차우진이 인상을 썼다.

"그러려면 사람 피가 더 많이 필요하겠네."

"그렇지."

블러드 크리스털을 만들려면 중독자의 몸에서 생성되는 특수 물질이 필요하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는 그 물질을 공장에서 합성할 수 있었다. 그러려면 정밀장비가 설치된 시설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멸망한 세계에는 그런 시설이 없다.

예전에도 그 물질을 쉽게 만드는 방법은 있었다. 중독자의 피에서 특수 물질을 직접 추출하면 된다.

멸망 전에도 공장을 만들기 어려운 마약 조직들은 중독자를 생산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런데 그 물질은 중증 중독자의 몸에서는 추출하기 어려웠다. 중증 중독자는 몸에서 그 물질을 급속히 소모하기 때문에 남는 게 없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신규 중독자를 만들고 있겠네."

블러드 크리스털에 새로 중독된 사람의 피에는 그 특수 물질이 많이 생성된다. 중독이 일정 단계 이하일 때는 추출 효율이 높고 품질도 좋다.

그러다 중증 중독자가 되면 피에서 특수 물질이 제대로 추출되지 않는다.

그러면 또 새로운 중독자를 찾아야 한다.

블러드 크리스털이 팔리면 팔릴수록 마약 조직과 중독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중독자를 만들어냈다.

그러면서 마약이 전 세계에 미친 듯이 퍼졌다. 마약이 퍼질수록 수요가 늘고 신규 중독자도 더 많이 필요해졌다.

마치 피라미드 구조처럼 중독자가 끝없이 늘어났다.

그래서 블러드 크리스털은 멸망급 마약으로 분류됐다.

박창수가 물었다.

"우진아. 블러드 크리스털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지?"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레드 크리스털, 아이스 레인, 스파크. 그 세 가지 마약에 옵션을 추가해서 칵테일한 게 블러드 크리스털이잖아."

"그중에 첫 번째가 레드 크리스털이야."

"알아. 그게 시작이지. 그래서 최종단계인 블러드의 이름에도 크리스털이 들어가는 거고."

"그럼 성분표도 아냐?"

"방송에서 간단히 나온 걸 본 적은 있는데 까먹었지."

박창수가 종이를 가리켰다.

"이거 여기서 찾은 건데."

종이는 쓸모가 많은 자원이다. 벽에 붙이면 벽지 대신에 쓸 수 있고, 조금만 찢으면 불쏘시개로 쓰기 좋았다.

"레드 크리스털 성분표가 적혀 있더라."

차우진이 그 종이를 보며 물었다.

"우리가 이걸 보면 알아? 제약 기술자인 손하은 씨나 알아보겠지. 물론 이걸 전해주진 않을 거지만. 아무리 종이가 귀해도 이런 건 태워버려."

"우진아. 너 그럼 그거 아냐? 레드 크리스털은 합성 마약인데도 자연산 느낌이 난다더라."

"알고 싶겠냐?"

***

차우진이 분석된 표를 보며 혀를 찼다.

"쯧. 이게 이 시기에 이미 있었네."

"네?"

"신종 마약입니다."

"아. 신종…. 이것만 보고 그걸 어떻게 아세요? 우진 씨는 전기 전문가이지 마약 전문가는 아니잖아요."

"이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자료를 봤지만 레드 크리스털의 성분이 다 기억나진 않았다. 그래도 특정 성분 한두 개는 생각났다.

이 약의 특성에 관해 박창수가 했던 말과 이선정이 했던 말이 비슷하다는 것도 기억났다. 생약 느낌의 합성 마약이라는 말도 방송에서 몇 번 들었다.

결정적으로, 형태는 달라도 약의 색깔이 익숙했다.

"레드 크리스털이 벌써 세상에 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 마약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최초로 만들어진 곳도 모른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멸망 초기에는 어느 것이 진짜인지 조사하러 다닐 여유가 없었다.

"이건 이삼 년 뒤에나 확인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미 돌고 있었네."

멸망한 세계의 레드 크리스털은 한국에만 퍼진 게 아니다. 시기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결국 전 세계에 팔려나갔다.

그 후에 아이스 레인과 스파크라는 이름의 신종 마약도 만들어졌다.

박창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레드 크리스털만 없었으면, 다른 둘은 문제가 안 됐을 거야.'

아이스 레인과 스파크는 그 자체로는 위험도가 높은 마약이 아니다. 마약 점유율도 레드 크리스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용자가 적어서 그대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블러드 크리스털이 나오면서 상황이 변했다.

레드 크리스털에 아이스 레인과 스파크를 섞고 특별한 처리를 하면 멸망급 마약인 블러드 크리스털이 만들어진다.

그 기술이 알려지면서 그 마약들은 블러드 크리스털의 원료용으로 대량생산되었다.

한국은 레드 크리스털이 초기에 퍼진 나라 중 하나다.

"이미 이렇게 퍼지고 있었으니 나중에 못 막았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번 일은 용구를 좀 치워놓으려고 시작한 건데.'

조사하다 보니까 용구도 멸망급 재난과 관계가 있다.

"그래. 용구 넌 역시 그냥 잔챙이는 아니었구나."

이선정 박사가 물었다.

"네? 누가 잔챙이예요?"

"아니요. 오늘 분석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뭐라도 좀 사요."

"밥은 다 먹었는데…."

"사람이 밥만 먹고 사나요?"

"뭘 원합니까?"

"위스키?"

"독한 거 드시네."

"배불러서 안주 없어도 되는 거 마시려고요. 근처에 안주 필요 없는 바가 있어요."

"이선정 박사님은 밤에는 개인 연구를 하는 거로 아는데."

"오늘은 퇴근하려고 했어요."

차우진은 그녀의 연구가 필요하다.

'연구를 열심히 해서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해야 할 사람이 지금 술이나… 마실 수도 있지.'

이선정 박사의 치료제는 시간 여유가 꽤 있다.

마그마 폭탄은 정수찬이 이론을 완성하고 감압 장비를 개발한 후에, 몇 년에 걸쳐 압력을 감소시켜야 한다. 그것도 세계 곳곳에서 그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니 정수찬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반면에 이선정의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는 병이 퍼지기 몇 년 전에만 치료제가 생산되어 충분히 보급되면 된다.

오메가 바이러스는 10년 후에 퍼진다.

치료제의 임상시험까지 생각하면 시간이 무한정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마감에 쫓기는 상황은 아니다.

'그래. 체력과 의욕이 있어야 치료제를 계속 개발하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니까 쉬어갈 필요는 있어.'

차우진이 말했다.

"가시죠. 오늘은 우리 둘 다 놉시다."

"우진 씨는 맨날 노는 거 아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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