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수금 (4)
강화란 무엇인가?
에릭에게 있어서는 박지훈 시절의 향수를 불러올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또한 박지훈 시절의 그는 강화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두 가지 규칙을 정했다.
이는 하나의 법칙 혹은 율법이라 불러도 될 만큼 절대적이었다.
'관중 그리고 찬사.'
인간으로서의 본능적인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동시에.
자신이 얻어 낸 아이템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 주는 그런 이벤트가 강화였다.
하여, 성자 에릭은 마경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거룩한 행사를 볼 준비가 되었는가?"
거룩한 휘광과 함께 하늘 높이 떠오른 에릭.
아래로는 교단의 성기사단이 모두 집결했다.
아이템 강화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의문이 들 법도 했지만.
"와아아아아아-!!!"
신실한 교단의 신도들은 성자의 행사에 오히려 기대감을 품었으니.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흑마그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상황.
마치, 축하 행사처럼 느껴졌다.
아아—————.
그 분위기에 성가대가 축복의 노래를 읊었다.
고아한 음율까지 곁들여지자,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에릭이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교황을 바라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교황 성하, 부탁드립니다."
"...그러마."
교황은 마경 한복판을 향해 우직하게 걸었다.
에릭보다 거대해진 교황.
그의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뚜벅, 뚜벅.
그 묵직한 발걸음에, 수천의 신도들과 빙의자들은 물론, 사로잡힌 흑마법사들의 시선까지 집중되었다.
교황의 발걸음이 멈췄다.
모두의 이목은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장두식, 네게 아버지의 은총과 은혜가 내려올지어니-."
그 중심에는 장두식이 있었다.
한 자루의 투박한 철검을 끌어안은 장두식은 눈을 감은 채 정좌(正坐)를 취한 상태였다.
"...그 거룩한 은총에 몸을 맡기고자 신실함과 순수한 마음을-."
거룩한 기도문 낭송이 시작되고.
장두식의 머리 위로 거센 신성의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양의 축복을 받으며 장두식은 고민했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요!'
아무리 장두식이라 하더라도, 수천의 신도 앞에서 아이템 강화를 하는 상황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이 또한 해내야 했다.
'리페 누님까지 왔으니....'
눈을 빛내는 리페로제.
에릭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곘다마는....
이거 실패하면 최소 반죽음이다.
장두식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장두식, 네가 강화라는 일에 임함에 있어 어떠한 두려움도 없을지어다."
때마침 교황의 기도가 끝났다.
대해와 같은 초고농도의 신성력이 장두식의 온몸을 휘감았다.
반삭 머리가 미친 듯이 반짝거렸다.
스륵.
교황이 장두식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시작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장두식은 [1티어 강화권]을 개벽의 검으로 밀어 넣었다.
싸아아아아아―
개벽의 검 위로 [아이템 강화권]이 스며들듯이 사라지고.
검날에 은빛 물결이 일렁였다.
강화 성공 이펙트였다.
미궁에서 한번 보았던 현상.
'기세.'
장두식은 에릭의 조언을 따라 거침없이 손을 놀렸다.
스르륵-스륵.
1티어 강화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미친-."
그 광경에 에릭이 침음을 흘렸다.
승모근이 들썩거렸고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에릭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개벽의 검 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개벽의 검 +2강]
[개벽의 검 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개벽의 검 +3강]
.
.
.
[개벽의 검 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개벽의 검 +10강]
논스톱 10강.
이걸 한 번에 해냈다.
'9연 강화?'
게임 속에서도 본 적 없는 일이다.
그리 놀라 있자니 에릭의 눈앞으로 백발이 스쳐 지나갔다.
"허!"
리페로제는 보지 못했으나 느꼈다.
"진정 성물의 성능이 더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홀린 듯이 개벽의 검을 향해 걸었다.
"역시, 신의 부름을 받은 존재가 빙의자였구나."
그녀의 광신은 증명되었다.
빙의자들이 온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소임을 다했을 때 이 세계에는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니라.
"어찌, 성물이-."
리페로제는 개벽의 검으로 손을 뻗었다.
툭-.
그러나 에릭이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스승님, 부정 탑니다."
"...지금 뭐라-."
리페로제가 발끈하려 하였으나, 에릭은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신의 부름을 받은 존재는 빙의자가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두식이죠."
"허어.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구나."
에릭은 부드럽게 리페로제를 장두식과 먼 곳으로 인도했다.
'강화 실패라도 떴다가는....'
대륙 온라인이 그렇게까지 악랄한 게임은 아닌지라, 아이템 파괴까지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나, 실패의 대가는 강화 수치의 차감이다.
아이템 강화권이 흔하지 않은 현실이다.
그러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괘씸하구나, 만져 보지도 못하게 하다니."
"이제 2티어 강화 차례입니다. 개벽의 검이 커지고서 실컷 만져 보시죠."
소란이 진정되자 장두식이 노란색 티켓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그것을 개벽의 검으로 밀어 넣었다.
"허어...."
이걸 바라보던 교단의 중진들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
그는 성자가 벌이는 웃기지도 않은 행사에 어이가 없던 차였다.
하나, 그 결과는 경악 그 자체였다.
"성하,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아버지께서도 당황한 기색이더구나."
교황은 물론, 아스티아 신께서도 이 현상에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이다.
"어떻게 성물이!"
교단의 성물, '개벽의 검'.
한때는 사라졌던 물건이나, 어느새 성자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 그것도 개벽의 검이."
미궁을 열었다고 전해지는 성물.
하물며, 신께서 직접 사용하시던 애장 무구라고 알려진 검이다.
그것이 강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현재 진행형.
"계속 강해진단 말인가?"
스르륵- 스륵.
반삭 머리 덩어리가 티켓을 밀어 넣을 때마다 성물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장두식.... 성자가 데리고 다니는 빙의자들도 아니거늘-."
빙의자가 아닌데, 빙의자의 물건으로 성물을 강화한다.
"그 또한 신의 뜻이 임한 자이니. 율리우스, 마음을 비우거라."
교황 역시 할 말이 없었다.
[세계의 변화를 받아들이거라.]
아버지의 뜻도 그렇고.
빙의자들이 일으키는 변화는 이제 순응해야 할 일이 되었다.
"빙의자들이 우리와 섞여 들고 있듯이, 그들의 물건들에도 익숙해져야 할 게다."
"이런 엄청난 일이 가능한데, 교단 차원에서 빙의자를-."
율리우스는 당장 빙의자 사냥이라도 떠나야 되나 고민이 들었다.
그걸 교황과 논의하고 싶었다.
하나, 이어지는 현상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쿠구궁————!
양반다리를 한 장두식.
그의 다리 사이에 꽂힌 개벽의 검 위로 거센 진동이 일었다.
노란색 티켓을 열 번째 밀어 넣은 시점이었다.
쿵! 쿵! 쿠웅-!
장두식을 중심으로 파동이 일었다.
교단의 인사들은 그 현상에 숨을 삼켰다.
거룩한 신의 힘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아아- 아버지시여."
그 힘이라 함은.
교단의 성소에서 느껴 볼 수 있는 진정한 아스티아의 신성력이었다.
"어어어!"
반면, 눈치껏 숨을 죽이고 있던 빙의자들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저, 저게 무슨!"
[개벽의 검 +11강]
[개벽의 검 +12강]
[개벽의 검 +13강]
.
.
.
[개벽의 검 +20강]
"확률이.... 1%짜리를 한 번에 다 성공해 버린다고?"
성직자들 틈에서 몸을 사리고 있었지만, 한번 입을 여니 그간 참았던 얘기들이 쏟아졌다.
"미쳤다, 미쳤어."
"야, 창호야. 저거 확률 조작 아니냐?"
니시다 료의 눈치 없는 질문도 여전했다.
하나, 이번만큼은 반응이 달랐다.
"에릭 오- 님께서 뭔가를...."
강풍호는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두식 형님을 이용해 확률 조작을 하는 거지. 세계 개변 이런 거 아닐까?"
박창호는 합리적인 추측을 내세웠다.
그리 떠들던 빙의자들도 결국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쿠웅—.
거센 진동과 함께 묵직하며 패도적인 기운이 사방에 맴돌았다.
[개벽의 검 +20강]
그 중심에는 빛무리에 감싸인 검 한 자루가 놓였고.
거침 없는 걸음걸이로 그것을 향해 다가서는 에릭이 보였다.
슥-.
에릭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검의 형태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고, 검을 뽑아 든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쿠웅- 쿵!
에릭의 손에 들린 개벽의 검.
금빛 신성을 흩뿌리며 형태가 점점 변해 갔다.
에릭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네.'
에릭은 설레었다.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한때 100명의 길드원과 함께 아이템 강화를 하던 추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또한, 은연중에 느꼈던 걱정거리도 하나 떠올랐다.
'길드장이나 길드원도 빙의했을 가능성이 있지.'
50만 명이 넘는 빙의자다.
게임에 오랜 시간을 쏟은 유저일수록 빙의 확률이 높다는 것은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니, 박지훈 시절의 길드원들도 빙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키지는 않지만....'
길드장을 떠올리자니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죽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지구의 삶을 살다가 이 야만 세계에 떨어진다는 것은 제법 힘든 일이다.
실제로 빙의자의 수는 급격히 줄어 가고 있으나.
'어스타운.'
황도 제5구역에 짓는 빙의자들의 도시가 그들의 생명을 지켜 줄 터였다.
제국군이 진군하면서 타국의 빙의자들까지 흡수해 준다면....
나름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지도 모르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키잉———!
쨍한 공명음과 함께 검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개벽의 검 +20강]
[특수 효과1: 공격 횟수 +1]
[특수 효과2: 공격 횟수 +1]
'이걸 현실에서 본다고?'
본래 투박하고 얇은 철검의 형태였던 검이, 금장이 둘러진 멋들어진 손잡이를 지닌 중검의 형태로 변했다.
형태는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추가로 붙은 옵션들이 조금 이상했다.
'공격 횟수 +1이 두 개라고?'
10강마다 추가되는 [특수 옵션].
[공격 횟수 +1]은 캐릭터의 공격을 2회로 쳐주는 설정이었다.
그게 두 개가 붙었으니, 이론적으로는 검을 한 번 휘두르면 세 번 내리친 것과 같은 효과가 된다는 의미다.
"호오, 그 얄쌍한 검이 이렇게 커질 수 있단 말이더냐?"
휙- 하고 다가온 리페로제가 감탄을 내뱉으며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성능 좀 보자-."
후웅-.
까까강!
에릭은 [개벽의 검]으로 리페로제의 검을 막았다.
한 번의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타격음이 세 번이다.
'이게 되네.'
에릭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그와 동시에.
"어,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리페로제가 경악한 듯이 [개벽의 검]을 바라봤다.
그에 에릭이 검의 손잡이를 내밀며 묻기를.
"한번 써 보시겠습니까?"
* * *
수천의 관중들 앞에서 이뤄진 강화.
그 결과 20강을 한 번에 띄우는 대단한 성과를 이뤘다.
리페로제의 흥미를 잔뜩 끌어 준 덕분에 그녀를 멀찍이 보내는 것까지 한 번에 성공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에릭은 종종 주변을 맴도는 르웰을 찾아갔다.
르웰의 청록색 눈망울이 흔들렸다.
잔뜩 겁에 질린 모습.
"지, 진짜 멀리 간 거 맞지?"
"스승님은 교황 성하와 함께 마경에 길을 뚫으러 가셨습니다."
"갑자기?"
"그게 말입니다-."
에릭은 간략하게 설명을 곁들였다.
개벽의 검을 건네주며, 리페로제에게 길을 뚫어 달라고 요청했다는 얘기였다.
"그걸 그냥 해 주신대?"
"적당히 잘 설명했습니다."
제국군이 태양성국으로 향하려면, 마경을 관통하는 길이 필요했다.
신성력이 없는 사람들, 그것도 군대가 지나갈 길이다.
아주 넓은 면적을 정화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제국군? 호오, 제국에서 제법 높은 지위를 이뤘나 보구나."
리페로제는 흥미로워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물었고 에릭은 담백하게 사실만을 알렸다.
"그래도 전쟁을 위한 길은 내키지 않아 하셨을 텐데?"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도 르웰은 의아해했다.
"개벽의 검을 써 보고 싶으셨는지 선뜻 승낙해 주시더군요. 마침 교황 성하도 함께한다 하셨고요."
"하긴, 칼질 하나는 엄청 좋아하시니까."
르웰이 납득하자, 에릭이 대뜸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스승님이 5년 동안 기억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 그게.... 드, 들리지 않을까?"
이 정도로 르웰이 겁먹은 모습은 처음 보는 상황.
리페로제가 멀리 떠났음을 알면서도 말하기를 꺼리는 모습이었다.
'그 루시퍼가 만들어 낸 지옥에서도 당당했는데....'
세삼, 리페로제의 괴팍함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에 에릭은 허공을 그어 신전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여기라면, 스승님도 못 들으실 겁니다."
"휴우, 맞다. 여기라면 안전하겠네."
에릭의 손을 붙잡고 르웰은 신전의 공간으로 넘어갔다.
싸아아아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구름 위에 지어진 고즈넉한 신전.
절로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래서, 끝까지 비밀로 하실 생각입니까?"
구름 위를 거닐며 에릭이 묻자니, 르웰이 입을 꾹- 닫았다.
'이런 똥고집을....'
말하지 않겠다는 걸 캐묻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나?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녀가 말을 할 수 있게끔 자신의 얘기를 먼저 꺼냈다.
"르웰, 걱정거리가 좀 있습니다."
"네가?"
"...저도 사람입니다만."
르웰이 신전을 바라봤다.
"언제는 신이 됐다고 개종하라더니, 지금은 또 사람?"
"하아-."
"흥흥, 농담이야. 뭔데 그래?"
"그, 빙의자 놈들 말입니다."
에릭은 마음을 열고자 속 얘기를 꺼낸 것이지만.
그 내용은 진지했다.
"이놈들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에릭은 신전 시스템의 GP라는 개념을 설명했다.
"이런 대단한 전장 속에서 제가 얼마나 활약을 했는데.... 고작 230GP를 얻는 게 말이 되는 겁니까?"
"엥? 오른 건 100만이 넘게 올랐다면서?"
"그건 르웰과 잭슨, 두식이 세 사람 덕분에 오른 수치입니다."
그 뒤 에릭의 푸념이 이어졌다.
빙의자 놈들 버스 태워서 레벨 올려 줘.
감옥이 불편하다고 징징거려서 살 곳도 마련해 줘.
다 해 줬더니.
고작 230GP?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것도 20강 강화를 보고 나서야 올랐습니다."
"...강지나,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스럽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르웰은 격하게 공감해 줬다.
"창호랑 니시다랬나? 걔들도 애들이 글러 먹었다."
"그렇죠?"
"너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짜 그렇네. 단두대에 끌려갈 애들을 살려 줬더니 신앙심은 한 줌도 없다는 얘기잖아?"
"하아,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진짜 고민이었다.
그동안은 지나면 달라지겠지 했었는데, 20강 강화에서 230GP가 오른 걸 보고서 에릭은 확신하게 되었다.
"그게, 내 추측인데...."
신전 앞에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자니, 르웰이 조심스레 에릭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 패서 그런 게 아닐까? 애들이 무서워하는 거지. 그래서 신앙심이 공포에 잡아먹힌 거야! 어때? 일리 있지?"
"흐음, 두식이랑 잭슨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아, 그건 또 그러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르웰이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말이야-."
에릭은 귀를 활짝 열었다.
빙의자들이야 아무렴 어떠랴.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데.
그때였다.
찌지지직-. 찌직-. 찍!
갑자기 허공에 일어나는 굉음.
'뭔가 이상한 감각이....'
에릭은 신전 아래를 내려다봤다.
구름 앞의 허공이 찢어지더니, 새하얀 백발이 나타났다.
리페로제가 갑작스레 난입한 것인데....
"이, 이것들이-!!!"
그녀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소리쳤다.
"잘 키워 놓으라 했더니 여기다가 살림을 차렸구나!"
96화 수금 (5)
동부 대수림.
마경에 오염된 숲의 한복판.
"교황, 여전하네."
"허허, 이미 자식들은 최선을 다해 주었거늘."
교황과 리페로제, 두 사람은 제국의 군대가 지나갈 길을 뚫기 위해 손수 앞장서서 나섰다.
힘이라는 것은 소모되기 마련.
성기사단도 성가대도 모두 지친 상태였다.
"내 나름 교황이라 불리는데, 편히 쉴 수는 없는 노릇일세."
교황은 이를 배려라고 불렀다.
하나, 리페로제는 그런 걸 배려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나약함이라 여겼다.
"애들을 너무 약하게 키운 것 아니야? 고작 이 정도로...."
"너처럼 키웠다가는 성기사의 수가 반의반도 되지 않았을 게다."
"대신 에릭 같은 놈이 열 명쯤 되지 않았을까?"
"...."
교황은 말문이 막혔다.
성기사 수천보다야, 에릭급 교인 열 명이 훨씬 더 강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네 가르침, 아니 그 폭력성을 견디는 사람이 열 명이나 될 것 같진 않구나."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교황이 리페로제를 바라봤다.
그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외형만 보면 리페로제와 동년배로 보였다.
"쯧, 아무튼. 교황 너는 너무 착해 빠져서 문제야."
"허허! 리페, 네가 표독스러운 건 아니고?"
"뭐?"
리페로제가 개벽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그걸 본 교황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저쪽 숲을 통째로 밀어 버려야 하네."
엘프들의 고향이요, 세계수의 보금자리였던 동부 대수림.
지금은 마경의 어둠에 잡아먹혀 시꺼먼 나무들이 죽음의 기운을 흩뿌렸다.
발아래의 대지에도 어둡고 칙칙한 사기(死氣)가 가득했다.
"꽤나 넓네."
"군대의 길일세."
거대한 숲을 향해 검을 겨눈 리페로제가 교황을 향해 물었다.
"교황, 왜 제국군을 돕는 거야?"
교단은 국가 간의 분쟁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철칙이었다.
'저 고지식한 놈이 대체 왜?'
리페로제는 교황의 변화가 의아했다.
그에 교황이 답하기를.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또한 그 흐름의 중심에 에릭이 있기 때문이지."
교황 또한 리페로제에게 질문을 건넸다.
"이참에 나도 하나 묻지. 에릭, 그는.... 대체 무엇인 게냐?"
교황이 파악한 바로, 분명 에릭은 이질적인 힘을 다뤘다.
이질적이지만, 힘의 근원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육신으로 다루는 힘과 기술을 다룰 때의 힘이 다르다.'
에릭의 신성력은 신의 힘이라기보다는 순수한 에너지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커다란 검을 소환했을 때라든가.
태양신의 불꽃을 일으켰을 때라든가.
'마치 근원에 가까운 느낌이었지.'
분명, 신의 기운이 담기지 않은, 순수한 힘으로서의 신성력이었다.
일종의 에너지 덩어리.
혹은 자연현상에 가까웠다.
"에릭이 뭐냐고?"
교황은 지긋이 리페로제를 바라봤다.
그녀 역시, 에릭이 무어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울 터였다.
하나, 리페로제는 심플하게 답을 꺼내 들었다.
"나의 제자다."
교황은 그 단순한 대답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 또한 배움이었다.
교황은 리페로제의 단순함에서 큰 위안을 찾았다.
'신성의 힘을 다루는 한, 에릭은 에릭일 뿐이거늘.'
가슴의 미혹이 사라졌다.
교황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이제 정화 작업을 시작함세."
교황의 육신을 매개로 해 거대한 성법이 발동되었다.
광역 정화의 성법이었다.
쿠구구궁-.
어둠의 대지를 거룩한 신성이 보듬으며 죽음의 기운이 씻겨 나갔다.
리페로제는 교황의 힘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하암-."
나른하게 하품을 하면서 그녀는 시꺼먼 숲을 향해 검을 겨눴다.
작은 소녀가 한 손으로 든 대검.
검 끝으로 대륙을 가로지르는 압도적인 규모의 대수림이 보였다.
이질적인 모양새였다.
"아직이야?"
"성질 급한 건 여전하구나. 이제 되었다."
교황의 성법이 완성되자, 리페로제가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후웅-.
한 손으로 휘두른 검에서 압도적인 풍압이 일었고.
그 결과.
퍼엉——————!
시야를 가득 채웠던 거대한 나무들이 리페로제가 쏘아 낸 검기에 소멸해 버렸다.
횅하게 뚫린 길.
그 끝으로는 루-솔라스의 성벽이 보였다.
"허!"
리페로제는 경악했다.
그녀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압도적인 강자다.
그런 그녀가 놀랄 정도의 일이 벌어졌다.
"에릭, 이 미친 것."
"허어...."
교황이 침음을 흘렸다.
그건 힘이 아니었다.
일종의 현상과도 같았다.
"진정 신의 힘을 보는 것 같군."
"한 번 휘둘렀는데, 결과는 세 번의 참격으로 나타나는...."
리페로제가 대뜸 교황에게 칼날을 들이밀었다.
"교황, 막아 봐라."
후웅-.
그녀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어딜!"
교황은 순식간에 신성 방벽을 치고, 자신의 육신에 신성력을 덧입혔다.
서거걱!
일격에 방벽이 찢기고.
이격에 교황의 몸을 두른 신성력이 찢어졌다.
삼격은 교황이 입고 있던 교단의 성물과 맞닿았다.
옷자락 끄트머리가 찢어졌다.
"아스티아 님의 성물이...."
신이 입었다는 옷.
교황의 상징이 잘려 나갔다.
[성유물 – 아스티아의 소복.]
교황이 극히 노해 일갈했다.
"어찌! 감히! 성물을-. 그 정도 힘 조절도 못 하는 게냐!!!"
"아, 아니...."
리페로제는 황급히 변명을 늘어 두었다.
"이 검.... 성물이 이상해졌어. 그냥 휘둘러도 신성을 입힌 것처럼 참격이 강해진다."
그녀는 힘의 개성은커녕, 신성력도 제대로 담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교황, 너도 들어 봐."
서걱-. 서거걱.
리페로제와 교황은 번갈아 가며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개벽의 검]의 변화를 수치화 해 봤다.
"20배 정도 강해진 느낌이고 일격은 삼격으로 치부되는 기적."
공격력 증가 2,000%.
일격에 세 번 발동되는 공격.
"빙의자들의 물건이 성물을 강화시켰다라...."
두 사람이 수치화를 마쳤을 때.
동부 대수림에는 고속도로가 뚫려 있었다.
군대는 당연하고, 영지 단위의 이주민이 지나갈 수 있을 법한 길이었다.
* * *
"스승님, 어떻게 그리 빠르게 길을 내셨는지는 이해했습니다."
자신의 신전 한복판에서 에릭은 리페로제를 마주 봤다.
'역시, 아이템은 모두가 쓸 수 있는 거였어.'
'+20강'으로 강화된, 개벽의 검은 2,000% 공증에 타격 횟수 2회 증가라는 추가 옵션이 붙었다.
에릭은 현지의 사람에게도 아이템 성능이 먹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완벽하게 다른 공간인데, 여길 어떻게 찾은 거지?'
하나, 그보다 신전에 리페로제가 난입한 것이 더욱 의아하게 느껴졌다.
"어찌 이곳에 들어올 수 있으셨는지...."
에릭의 신전은 별개의 차원이라 봐도 되는 장소다.
신전에 들어온 직후, 에릭은 입구를 닫아 버렸다.
그런 곳을 어떻게 찾아냈단 말인가?
"구린 냄새가 진동을 하더구나."
"구린내라뇨?"
리페로제가 짙게 웃었다.
"에릭, 너는 모르겠지만 견습 성기사단의 훈련소에 가면 익숙히 맡을 수 있는 냄새다."
섬뜩한 미소와 살벌한 눈빛이 구름 위의 신전을 훑었다.
"정분내라고. 내 그것들을 갈라 두느라 어찌나 고생을 했던지."
그 뒤 말이 이어졌다.
"에릭, 어서 길을 내거라. 내 친히 올라가서 얘기하도록 하마."
에릭은 리페로제를 본 직후, 신전으로 향하는 다리를 죄다 끊어 버렸다.
자신의 신전은 곧 몸과 같았다.
구름의 위치를 옮긴다거나, 신전과 연결된 다리를 없앤다거나.
뜻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하필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을 베는 힘.
리페로제의 개성 또한 미친 수준이었다.
마치 자신의 스킬 [개벽]을 자유자재로 쓰는 느낌이 아니던가?
'냄새로 위치를 찾아서 여기까지 길을 뚫었다는 건....'
숫제 괴물이었다.
아득히 강해졌음에도 스승은 스승인지, 격이 달랐다.
에릭이 멍하게 있자니.
"히익! 에릭, 절대 안 돼!"
옆에서 르웰이 팔짱을 끼며 소리쳤다.
그 즉시.
"갈(喝)-!!!"
노성이 터져 나왔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였거늘!"
백발이 잔상을 그리며 구름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에릭은 당황했다.
'남녀칠세는 무슨 지랄인지-.'
그래도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구름을 조절했다.
"스승님, 전생까지 포함하면, 제 나이가 40이 넘습니다만...."
최대한 신전과 다가서기 어렵게끔 힘을 써 본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다 큰 성인들에게 쓰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리페로제를 막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결국 그녀가 신전에 내려앉았다.
쿠웅———!
묵직한 진동이 일고, 새하얀 여인이 잔상을 그리며 다가왔다.
그녀의 양손에는 각각 거대한 검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그녀가 원래 쓰던 대검과 에릭에게 받아 간 개벽의 검이었다.
"에릭, 제법 쓸 만하더구나."
리페로제가 에릭에게 '개벽의 검'을 휙- 집어 던졌다.
에릭이 검을 받아 들었다.
"탐이 나진 않으십니까?"
"하하! 에릭, 나는 남의 것을 탐낼 정도로 심사가 뒤틀리지 않았다.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지."
이내 리페로제의 시선이 에릭의 옆에 붙어 있던 르웰을 향했다.
"그래, 르웰. 뽈뽈대며 도망다니더니, 결국 이리 마주치는구나."
살벌한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내 분명 잘 키워 두라 하였는데, 어찌 이런 곳에 살림까지 차린 게냐?"
"흐익-!!!"
르웰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대로라면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에 에릭이 최선의 수를 꺼내 들었다.
"스승님, 저희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게 무슨...."
우뚝-.
리페로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에릭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은 제 신전입니다."
"빙의자의 힘이 아니더냐?"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저라는 신의 공간이죠."
"고작 그 수준의 힘으로 신을 논한단 말인가?"
그녀의 고개가 45도쯤 기울었다.
흥미가 일었다는 증거였다.
에릭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차차 강해지는 중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떨어질 수 없다는 건 무슨 소리더냐?"
에릭은 신전의 중심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조금 더 선명해진 르웰의 석상이 박혀 있었다.
전에는 뭉뚱그려진 형태였다.
하나, 지금의 석상은 보다 자극적인 몸매를 가진 모습으로, 누가 봐도 르웰의 실루엣이었다.
"영, 영역 표시까지 해 둔 게냐?"
이제 타인도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르웰, 네가 어찌!"
리페로제가 경악한 듯이 르웰을 노려봤다.
"르웰은 이제 제 신전의 사제입니다."
"그게 무슨-."
"스승님께서도 개종하실 생각이 아니시라면, 이 이상 간섭은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개, 개종이라 했느냐?"
리페로제가 당황했다.
저 말뜻을 헤아려 봤다.
'그러니까....'
르웰이 개종을 해서 에릭의 신도가 되었다는 말인가?
말이 안 됐다.
'배교자의 낙인이 새겨질 것을.'
아스티아 신은 배교를 허가하지 않으신다.
물론, 르웰은 허락을 받았으나, 이를 모르는 리페로제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법했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
그리 소리치고 있자니, 에릭이 대뜸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너무 집착하는 여자는 인기가 없는 법입니다."
툭-.
리페로제의 손에 들린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에릭은 제국을 향해 걸었다.
교황과 율리우스가 성기사단을 이끌며 앞장섰고, 에릭은 그 뒤를 따랐다.
'어지간한 일은 전부 마쳤다만....'
부담스러울 만큼 가까이 붙어 있는 르웰.
그녀는 에릭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붙어 있었다.
얇은 옷 한 벌을 걸쳐 입은 상태라 적나라한 감촉이 느껴졌다.
은근 거리를 두던 르웰이 가까워진 것은 달가웠다.
'문제는....'
그러나 그걸 온전히 기뻐할 수도 없는 상황.
'뒤통수가 뚫릴 것 같군.'
한 보 뒤에서 리페로제가 매서운 눈빛을 보내왔다.
숫제 잡아먹을 듯이.
'스승님이 나를 노리고 있을 줄이야.'
에릭은 당혹스러웠다.
"아주 내 취향으로 자랄 것 같구나."
어릴 적에 저런 말을 제법 많이 듣긴 했다.
하나, 그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나는 1미터 남짓한 꼬마였으니까.'
그런 작은 꼬마한테 진담으로 저런 말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저게 진심이었다니.
물론, 에릭은 어느 정도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으니, 한 번쯤 고민을 해 봤다.
'르웰이랑 나는 나이대라도 비슷하지, 스승님은....'
백 살 연상?
실로 부담스러웠다.
미궁의 시간까지 합친다면 족히 2백 단위로 늘어날지도 모른다.
외형은 아주 아름다운 리페로제라지만....
'게다가 얻어맞은 기억이 가장 많군.'
그 나이와 말투, 살아온 세월과 당한 폭행의 기억들이 거리감을 좁히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감히 스승을 어찌 떼 놓을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이미 지고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시지.'
여태껏 칼춤 한번 추지 않고 잘 참아 주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나름의 해결책을 생각해 봤다.
"저희는 엘프 자치령으로 갑시다."
"엘프?"
"그 왜, 스승님이 유렌을 시켜서 거길 개발해 두지 않았습니까?"
시종일관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던 리페로제가 조금 풀어졌다.
익숙한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교황 말로는 엘프는 엘프대로 잘 굴러가고 있다더구나. 굳이 들를 이유가 있느냐?"
에릭이 슬쩍 고개를 숙여 리페로제의 귓가에 속삭였다.
"세계수도 제 신전으로 거취를 옮기겠다더군요."
"엘프들이 발작할 게 뻔한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사실, 엘프 국왕이 제 밑입니다."
"그건 또 무슨 미친 소리냐?"
고작 5년이다.
그런데 에릭이 하는 말들은 하나하나가 이상했다.
허황된 망상 수준이었다.
리페로제는 잠시 사색에 잠겼다.
'성자의 지위는 빙의자의 힘으로 사기를 쳐서 얻어 낸 것이고....'
그 외의 것들은 도통 납득이 안 가는 수준이었다.
황제와의 만찬에서 영광을 얻었다거나.
황도의 일부분을 자신의 영지로 인정받았다거나.
'거기다가 엘프 국왕이 자신의 밑이라니....'
리페로제를 마주쳤을 때도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대들던 것이 엘프들의 왕이다.
에릭이 제게 거짓말을 쳤을 리는 없지만....
"도통 믿을 수가 없구나."
그리 놀라 있자니, 르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리페로제 님, 저희가 두식이 교육도 잘 마쳐서, 황녀 전하와 결혼까지 약조했-."
"하! 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그 장두식이가 누구랑 결혼을 해?"
리페로제가 일갈했다.
"그리고, 뭐? 저희가? 두식이가 네들이 낳은 애냐!"
그 호통에 '히익-!' 르웰이 에릭의 뒤로 숨어들었다.
"스승님, 진짜입니다."
"황녀가 광증에 걸린 게냐?"
"저와의 친분, 그리고 두식이의 특별함 때문이지요."
"대체 5년 만에 세상이 어찌 이렇게 변해 버렸단 말인가...."
리페로제는 진실로 세상이 망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수도 옮겨 심는 마당에, 두식이 결혼이 뭐 그렇게 문제겠습니까?"
한탄하던 리페로제를 향해 에릭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 세계수를 옮겨 심는 건 조금 궁금하구나."
자연스럽게 리페로제의 관심이 돌아갔다.
에릭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르웰과 리페로제가 치정 싸움을 하는 것도 곤란한 터였다.
'힘에서 밀린다.'
여차하면 스승이 강제로 자신을 취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에릭은 조금 복잡해질지언정, 심플하게 해결될 수 있는 비책을 꺼냈다.
[초대형 화분: 2,000,000GP]
마침 화분을 심을 GP가 모인 상황이 아니던가?
'이럴 때는 삼파전으로 끌고 가는 거지.'
97화 수금 (6)
살다 보면,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게 된다.
예고도 없이 시작된 대격변 패치처럼,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게 돼 있다.
무릇 삶이란 그런 법이다.
"그래, 그리 피해 다니더니, 결국 이리 얼굴을 마주하는구나."
리페로제가 마경의 구렁텅이에서 올라온 것도 마찬가지.
'결국 이렇게....'
끝끝내 그녀를 만나게 된 장두식 또한 그러했다.
교황과 에릭 일행의 행선지가 갈렸기 때문이다.
교황은 제국을 경유해 교황청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에릭의 일행은 라핀 마탑을 경유해 엘프 자치령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간 참으로 격조했습니다, 리페로제 누님."
그래서 장두식은 결국 리페로제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강산이 반쯤 변해 가는 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 장두식이는 누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사람같이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핀 마탑이 있는 언덕 앞에서 장두식은 리페로제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지, 지금 뭐라 했느냐?"
리페로제는 믿을 수 없는 현상을 목격했다.
'이게 환각이라는 건가?'
하여,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제국 남부의 대곡창 지대가 선명하게 보였다.
교황과 성기사단이 황금빛 곡식을 가로질러 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허어...."
이건 환상도 꿈도 아닌 현실.
리페로제가 경악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순박한 영혼....'
밤톨 같은 반삭머리.
그 아래로 보이는 흉악한 얼굴.
덩어리진 근육으로 똘똘 뭉친 전형적인 깡패의 상.
'...하물며, 생긴 것 또한 두식이가 맞거늘.'
왕만한 눈망울을 빛내는 것이, 분명 그녀가 알던 모습이다.
느껴지는 기운도 동일했다.
하나, 말투가 전혀 달라졌다.
"네가, 그 장두식이란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그녀의 물음에 장두식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는 마치 본능에 새겨진 공포에 대항하기라도 하듯, 사람이 변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누님의 가르침을 받은 그 장두식이가 저 맞습니다."
말을 마친 장두식은 몸을 곧추세웠다.
평소와 달리 짝다리를 짚지도 않았고,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껄떡거리지도 않았다.
아주 정갈한 차렷 자세였다.
"아무리 교정을 해도 그 시정잡배 같은 행실을 고치지 못했거늘, 어찌 이리 변했느냐!"
그 모습에 리페로제가 감탄을 내뱉었다.
장두식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누님께 배운 대로 아스티아 님의 가르침을 되뇌며 하루하루 정진했을 뿐입니다."
"그래! 옳구나! 지고한 아버지의 가르침이 결국 네놈까지 바꿔 놓았구나!"
정갈한 어조로 대화하는 장두식.
도통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에릭은 입을 쩍- 벌린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저 새끼 이중인격이었나?'
황제 앞에서도 껄렁껄렁한 태도를 유지하던 장두식이다.
황녀,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 앞에서도 시정잡배처럼 말하던 장두식이다.
'아무리 패도 고쳐지지 않던 말투가....'
장두식은 마치 다른 인격을 꺼내 든 것처럼 사람이 변했다.
그리 놀라 있자니, 팔에 매달린 르웰의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흐잇!"
르웰은 소름 끼친다는 듯이, 잔뜩 몸을 움츠러트렸다.
에릭 역시 같은 심경이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기분이군.'
그 장두식이가 어떻게 저런 말투를 구사한다는 말인가?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하지요. 앞으로도 누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보다 정진하겠습니다."
"허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였거늘, 보고도 믿기지 않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리페로제는 살면서 두 번 크게 놀랐다.
첫 번째는 에릭의 [상태창]이라는 것이 실존함을 확인했을 때였다.
세계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특이한 힘.
'그때만큼 놀랍구나.'
장두식의 변화는 그만큼 놀라웠다.
또한 이 변화가 장두식 하나에서 그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페로제는 자연스럽게 장두식의 옆에 있던 잭슨에게 시선을 돌렸다.
"잭슨, 벽을 넘어섰구나."
잭슨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말을 건넸다.
"리페로제 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에릭에게 듣기로, 죄를 용서받아 신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더구나."
"그렇습니다."
"한데, 왜 다리를 저는 게냐?"
절뚝-.
잭슨이 다리를 절며 리페로제를 향해 다가왔다.
"리페로제 님이 영혼에 새겨 주신 고통. 그것을 기억하며 삶에 더욱 정진하고자 합니다."
"둘 다 기특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구나."
장두식과 잭슨의 모습을 본 리페로제는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녀의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두식이가 저리 변한 걸로 보아.... 에릭의 말도 전부 사실이겠어.'
싸아아아아—
때마침 언덕 아래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저 멀리 세계수가 에릭을 환대하며 보내는 바람이었다.
"에릭, 네 말대로 두식이와 황녀의 혼약이 허언은 아닌 모양이야."
세계수가 보내는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리페로제가 몸을 돌렸다.
그녀는 지긋이 에릭과 르웰의 사이를 바라봤다.
그 즉시, 르웰이 '힉-!' 소리치며 에릭의 팔을 놓고 몇 발자국 뒤로 떨어졌다.
그제야 리페로제가 말을 이었다.
"에릭."
"예, 스승님."
바람이 리페로제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흐트러트렸다.
북부의 눈꽃처럼 아름다웠다.
"두식이가 저만큼 변했는데, 네가 세계수의 주인이 되었다는 말 또한 사실이겠구나."
선선한 바람과 황금빛 곡식들 그리고 새하얀 소녀.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보고도 에릭은 아무런 감상을 느끼지 못했다.
'미칠 노릇이군.'
에릭은 떨떠름한 기분이었으나, 마지못해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치정 싸움으로 험악했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 느낌이었다.
에릭이 무어라 대답을 하려던 차에, 이변이 발생했다.
"하!"
리페로제의 인상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스, 스승님?"
에릭이 당황해서 한 보 뒤로 물러서자.
후웅-!
리페로제가 등 뒤에 맨 대검을 뽑아 들더니 대뜸 에릭의 등 뒤로 검기를 날렸다.
퍼엉————!
저 먼 곳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에릭은 기적을 휘둘러 안력을 키웠다.
거대한 바위가 둥그렇게 뚫린 모양새였고, 그 주변으로 붉은 핏물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에릭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감지하지 못한 누군가가.
리페로제가 쏘아 낸 검기에 터진 모습이었다.
약 3킬로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하아-. 스승님. 그걸, 다짜고짜 죽이면 어떡합니까."
에릭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에 리페로제가 황급히 설명을 곁들였다.
"연합국의 세작인 것 같구나. 기척을 지우는 데 아주 능숙한 놈이야. 제국의 전쟁 때문인가? 혹은 우리가 마경으로 향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구나."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사체가 신성에 불타지 않았으니, 빙의자나 흑마법사는 아닐 테지."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직 의문이 남아 있었다.
'연합국은 제국이랑 너무 멀지 않나?'
제국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가르시안 왕국이, 동쪽에는 태양성국이 있다.
그리고 북동쪽으로 두 왕국을 지나쳐야 나오는 곳이 바로, 연합국이다.
에릭이 그리 의문에 잠겨 있자,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태양성국은 신성력을 주력으로 삼았으니 내가 몰라볼 리가 없지. 또한 가르시안 왕국은 저 정도로 치밀하게 훈련된 첩자를 운용할 능력이 모자라다."
"그걸 검기 한번 쏜 걸로 알아내시다니....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에릭은 내심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괴물 같군.'
고작 사람 하나를 터트린 걸로 저만한 정보를 알아냈다.
인간을 초월한 리페로제의 직감.
혹은 살아온 세월에 따라 쌓인 연륜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 터.
"그래서 에릭, 대체 세계수를 옮겨 심는 건 언제 보여 줄 생각이더냐?"
상황이 일단락되자, 리페로제가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세월은 연륜을 쌓아 줬지만 그만큼 세상만사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에릭은 능숙하게 그녀의 흥미를 이끌 만한 말을 내뱉었다.
"그 전에 제 마탑을 구경하시고 가시지요."
"네 마탑? 마탑이 다 거기서 거기지, 네 마탑은 뭐가 다르더냐?"
"제 마탑에는 빙의자 세계의 자동화 설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쓸모없어 보이는 지구의 문명 말이더냐?"
"쓸모가 없다뇨.... 제가 장담하건대, 스승님이 근래 본 어떤 것보다 신비한 광경일 겁니다."
에릭이 한껏 미소 지으며 그리 말했다.
싸아아아—
은근하게 독촉하듯 세계수가 연신 바람을 보내 왔지만, 에릭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적은 분명했다.
'신성 마도구.'
때마침 쓸 만한 재료를 얻지 않았던가?
* * *
연합국의 총회(總會)가 열렸다.
중소 왕국 11개가 연합해 만들어진 것이 연합국이다.
그들은 각각 왕국의 국명을 버리고 숫자로써 이름을 대체했다.
제국의 대륙 정복의 야망을 막고자 서로 국명까지 버려 가며 힘을 합친 것이다.
"2왕국 쪽에서 총회를 열었는데, 어찌 아무런 말이 없으신지요?"
"세작을 보낸 결과를 보고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총회에 참석한 11명의 수장들은 원탁에 둘러앉아, 2번째 자리에 앉은 사내를 바라봤다.
"그, 그게...."
총회를 개최한 2왕국의 대표는 도통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을 끙끙 앓는 모습이었다.
그에, 결국 연합국의 대표, 1왕국의 수장이 입을 열었다.
"칼리안, 대체 결과가 어떻길래 말을 잇지 못하는가?"
"크흠, 흠."
목청을 다듬은 2왕국의 대표, 칼리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깡마른 몸에 만성 스트레스로 짙은 다크서클까지.
영락없이 과로에 시달리는 회사원의 모습이었다.
"저희 쪽 세작의 보고에 따르면...."
시작은 성창 폭격으로 초토화된 동부 대수림에 대한 얘기였다.
마경에 오염된 동부 대수림, 그곳이 평지로 바뀌었다는 내용.
"이제 대수림이 아니게 되었군."
"마경에 오염되었어도.... 그 천혜의 방벽이 사라졌다니."
"이제 루-솔라스도 끝이겠군."
"그....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만."
보고가 이어졌다.
마경에서 미궁으로 도망친 흑마그룹과 9줄을 이룬 존재의 등장.
"어, 어떻게 그게!"
"1억 명을 제물로 바친 존재가 실존했단 말인가?"
"그냥 소문이 아니었다니...."
원탁이 혼란스러워졌다.
거기에 덧붙여진 말.
"흑마그룹은 구렁텅이로 도망쳤고, 때마침 리페로제가 구렁텅이에서 나타났습니다."
"허어...."
그저 침묵이 내려앉았다.
걸어 다니는 재앙,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자의 귀환은 그만큼 강렬한 충격을 가져왔다.
"그녀가 저희 정보원을 찾아내 죽였죠."
"3킬로 거리에서 우리 측 첩자를 찾아냈다는 게.... 황제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을!"
충격적이었다.
연합국의 첩자가 그냥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을 갈아 넣어야 겨우 한둘이 성공하는 그런 존재였다.
"그, 그리고...."
연합국의 대표는 굳건한 눈빛으로 2왕국의 수장을 바라봤다.
"칼리안, 뭐가 또 남은 건가?"
"후우-."
마지막 보고가 조심스레 이어졌다.
성자 에릭에 대한 얘기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비정상적인 무위라든가.
그의 수하가 최초로 신성 마법사가 되었다는 얘기라든가.
특별할 것도 없는 알던 내용.
"그 성자 에릭에 대한 건 익히 조사해 왔지 않던가?"
"놈이 강한 것도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것도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네만."
연합국은 에릭을 특급 대상으로 지정해 철저하게 조사해 왔다.
무력은 물론, 제국과 교단에서 압도적인 입지를 다지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인지한 상황.
에릭의 무력이나 지위 따위보다, 연합국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따로 있다.
"놈이 빙의자자라는 증거는 아직인가?"
성자 에릭은 빙의자인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에 대해서도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연합국의 정보를 아우르는 것이 바로, 2왕국의 수장이다.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성자 에릭은 절대 빙의자가 아닙니다."
"신성력을 다룬다는 이유 때문인가?"
"아닙니다! 그 폭력성과 과감한 행동력은 절대 빙의자들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세작의 보고는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2왕국의 수장은 세작이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에릭은 아주 극단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일례로, 흑마그룹의 대표 마키아의 등장을 얘기했다.
"그 교황조차 대화에 응하려 들었지만, 성자 에릭은 싹 다 무시하고 창부터 내리꽂더군요."
"종교쟁이들이 기습을 했다는 건 좀 의아하지만...."
고작 그걸로 확신하기에는 에릭의 행보가 심상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빙의자들을 이용해 미궁을 공략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빙의자들의 도시를 만들고 있다지? 그런 에릭이 어떻게 빙의자가 아니란 말이지?"
그에 2왕국의 수장은 확실하게 증거를 내밀었다.
"제가 확신컨대, 빙의자는 성자의 오른팔로 알려진 장두식입니다."
원탁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왈패, 장두식이 빙의자라고?"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지워 왔습니다."
장두식이 리페로제를 만났을 때 보였던 지적인 모습이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맙소사! 그 장두식이 빙의자였다니...."
"하면, 그놈이 에릭이나 리페로제를 말로 구워삶았다는 말이 되겠군."
"장두식 그놈은 희대의 모략꾼이 분명하다!"
* * *
마탑 앞에서 기다리길 어느덧 삼십 분.
"그 공장이 대단해 봤자 얼마나 대단하겠느냐?"
기다림에 지친 리페로제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기사보다 느린 자동차를 만드는 문명에서 뭘 기대하라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가는구나."
지구의 문명은 대단하다.
하나, 이를 보지 못한 현지의 존재들은 아주 보잘것없는 수준이라 여겼다.
"에릭, 네가 말하기로는, 전이 기술조차 없어 하늘을 나는 물건을 만들어야 먼 나라로 갈 수 있다지 않았느냐?"
"저는 대단하다는 의미로 말씀드린 건데...."
이 인식의 괴리는 에릭의 과업과도 같았다.
이 야만적인 세계에 지구 문명의 편리함과 위대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말로만 뱉고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이긴 하겠지.'
뛰는 것보다 느린 차는 물론, 전이 대신 굳이 비행기를 탈 이유도 없다.
하나, 두 세계를 살아 본 에릭의 입장에서는 지구의 문명이 분명 더 대단하긴 했다.
이를 설명하자니, 도통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 고민하고 있자니.
"대체, 탑주라는 놈은 뭘 하길래 나를 이렇게 세워 둔단 말인가?"
리페로제가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탑을 반으로 부수겠다며 성질을 부리기 직전.
마탑의 정문이 개방되었다.
우웅-.
마법진을 흩뿌리며, 라핀 공작의 후계자가 나타났다.
그는 마도병단의 철저한 호위를 받으며 조심스럽게 에릭을 향해 다가왔다.
"새, 새로.... 공작위를 물려받게 될, 자, 자보르 라핀이라 합니다."
우물쭈물하는 말투.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마도병단의 뒤에 숨어 있는 치졸한 모습.
심지어 거리도 아주 멀었다.
마탑 코앞에 붙어서 언제라도 도망칠 준비가 된 모습이었다.
"거참, 뭐 저리-. 흐읍. 차, 참. 답답한 모습입니다."
장두식이 무심코 본모습을 내보일 뻔할 정도였다.
"오오!"
"호오-."
하나, 에릭과 리페로제는 달리 반응했다.
에릭의 눈에는 선명한 상태창의 모습이 보였으며, 리페로제는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했다.
"실로 웃기는 놈이로구나."
리페로제가 대뜸 검을 내 들려던 차에, 에릭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리페로제가 멈칫했다.
"스승님, 잠시-."
"에릭,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착한 빙의자는 자수한 빙의자뿐이라고."
"저놈은 좀 다른 느낌입니다."
라핀 공작의 후계자는 빙의자다.
그리고 라핀 공작은 빙의자가 아니다.
'공작이 왜 그렇게 빙의자들을 숨겨 줬나 했더니....'
에릭은 한 가지 의문이 해소된 느낌이었다.
왜 제국의 사주라 불리는 공작이, 그토록 빙의자들을 싸고돌았는가?
그 이유가 밝혀졌다.
'자식이 빙의자였군.'
마도연합의 3인자, 아론 후작부터 시작해서 마탑의 공장 설비를 만든 협력자들까지.
공작이 숨겨 준 빙의자만 한 트럭에 달한다.
공작은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전장으로 향했다.
'신성 마도구에 집착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겠지.'
그 이유는 하나.
공작의 아들이 빙의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공작이 그런 빙의당한 자식을 친자식처럼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고.
'황제는 단칼에 삼황자를 없는 자식 취급했는데....'
황제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에릭은 흥미로운 얼굴로 마도병단 틈에 숨은 공작의 후계자를 바라봤다.
"라핀 공작은 자식의 영혼이 바뀌었음에도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해 사랑을 베풀었군."
에릭은 진정으로 공작에게 감탄했다.
그래서 한 가지 질문을 건넸다.
"빙의자 김중혁, 너는 어떻지? 너 또한 제네딕 라핀 공작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나?"
98화 수금 (7)
에릭이 박지훈이던 시절.
존경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존재가 몇몇 있었다.
'친자식이 아닌데도 가족이 된 사람들.'
어쩌면 부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오랜만에 지구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가족의 사랑이라....'
박지훈은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기업, 광명그룹의 삼남이었다.
'그리고 셋째 마누라의 자식이었지.'
그의 어머니는 서류상 부인이 아니었지만, 박지훈은 명실상부한 친자였다.
그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가 어머니께 요구한 것이 친자확인증명서였으니까.
'노친네는 끝까지 정정했지.'
첫째 마누라와는 이혼.
둘째 마누라와는 재혼.
셋째 마누라인 어머니와는 불륜.
박지훈 시절의 친부는 화려한 이력을 자랑했다.
'자식한테 관심이 아예 없었지.'
광명 그룹의 회장은 사업가로서는 대단했을지언정, 가족으로서는 인간 말종에 가까운 자였다.
'그래도 나름 자식 취급은 해 줬나?'
셋째 마누라와 그 자식이 함께 참석하는 가족 식사라든가.
박지훈을 해외로 유학 보낸 후, 애물단지 같은 해외 지사를 담당하게 만들었다던가.
'가족 식사에서는 온갖 모욕을 겪었고.... 해외 지사에서는 낙하산 취급이었지.'
굴욕적인 나날들이었다.
가족 식사에서 정실은 어머니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괴롭혔다.
그에 대항해서, 어머니는 빼어난 외모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본처를 비웃었다.
그 사이에서 어린 시절의 박지훈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가족 같지 않은 가족들.'
하나, 그런 고통의 나날도 유학을 간 이후로 해결되었다.
미국에서의 삶은 달랐다.
물질적인 것은 충만했고, 어머니를 닮아 외모도 빼어났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조금 방탕하게 살았던 것도 같다.
하나, 그토록 많은 여자를 만났음에도 그는 만족이란 걸 느껴 보지 못했다.
세상만사에 지루함을 느꼈다.
박지훈은 늘 공허했다.
'그러다 게임 폐인이 돼 버렸지.'
그 결과 이 세계에서 에릭의 몸으로 태어났다.
'여기서도 부모님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지.'
참 가족 복이 박한 인생이었다.
그런 복잡한 심경에 빠져 있자니, 옆에서 르웰이 팔을 붙잡았다.
에릭은 고개를 돌려 르웰을 바라봤다.
"에릭, 왜 그래?"
청록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쓰읍! 르웰 또 손을!"
그 뒤, 르웰의 팔을 잡아떼며 새하얀 백발이 흐드러지듯이 나타났다.
'그래도....'
에릭은 리페로제와 르웰을 바라봤다.
'나는 여기서 위안을 찾았다.'
두 사람을 보아하니, 복잡했던 생각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고난과 역경이 있었을지언정, 에릭에게 있어 이곳은 진정한 고향이었다.
"후,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랬습니다."
감정을 추스른 에릭은 자연스럽게 라핀 공작의 아들을 바라봤다.
'라핀 공작의 자식이 하나뿐이라곤 하지만....'
제국의 공작이 모든 걸 잃어 가며 지킨 것이 눈앞의 남자였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친자가 아니다.
하물며 입양도 아니고 영혼이 뒤바뀐 자식이었다.
에릭을, 그답지 않게 감상에 젖게 만든 존재가 마도병단 사이에 숨어 있었다.
"도, 도련님!"
"괜찮다."
온갖 마도구로 무장한 마도병단 사이로 호리호리한 사내가 나타났다.
에릭이 생각에 잠겼던 사이, 그 역시 마음을 다잡은 모양이었다.
"김중혁.... 분명, 지구에서 쓰던 제 이름이 맞습니다."
에릭은 공작의 후계자, 빙의자 김중혁을 살펴봤다.
'죽어 가는 모습이군.'
병약한 듯이 창백한 얼굴.
살이 붙지 않은 뼈가 보일 만큼 마른 몸.
하물며, 목소리도 죽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자보르 라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조만큼은 굳건한 것이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게 가능한가?"
에릭은 마저 말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옛 추억을 떠오르게 만든 존재에게 나름의 존중을 담아 본 것이다.
에릭을 바라보며, 빙의자 김중혁이 입을 열었다.
"제 몸의 출생부터 얘기를 해야겠죠."
그의 육신은 30년 전, 전장에서 태어났다.
마도병단의 군단장인 모친과 총사령관인 제네딕 라핀 공작의 사이에서 태어난 독자였다.
"본래, 이 몸의 주인은 태어난 직후 생을 마감했습니다."
또한 본래 살아 있을 수 없는 몸이었다.
흑마법사들이 죽음을 뿌리던 전장이었다.
태어난 직후 어머니와 함께 생을 마감했어야 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몸만큼은 되살리셨습니다."
한 조력자가 있었다고.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는 존재가, 죽은 아이의 몸을 기능하게끔 만들어 줬다.
"이 몸은 영혼이 없이 텅 빈 상태로 자라났습니다."
거대한 마력 수조에서 육체의 성장만이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 빙의라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제 아버지는 저를 진정 자식으로 여기고자 하셨습니다."
죽은 자식을 수십 년 동안 육체만 되살린 채 키웠다니....
이쯤 되면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생겨날 법도 했다.
'9써클 마법사의 광기라....'
에릭 또한 이를 이해했다.
하나,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너는 어떻게 그를 아버지라 여기게 된 거지?"
"김중혁, 저는 천애 고아였습니다."
시설에서 자라 입양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김중혁.
"너는 내 아들이다. 절대 이 사실을 의심하지 말거라."
그는 텅 빈 육체에 빙의했다.
그리고 가족을 만났다.
"알바를 전전하며 사 평짜리 월세방에서 살던 제가, 대공작의 아들이 된 것도. 그 공작님이 저를 친자식으로 여기며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도...."
공작은 수년간 빙의자 김중혁과 부자의 연을 쌓으려 노력했다.
"공허한 삶에 구원을 받은 기분이더군요."
여기까지 설명을 듣자, 에릭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구원받은 기분이라.'
그 역시 공감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중혁 아니, 자보르 라핀은 진정으로 공작의 아들과도 다름없었다.
'르웰과 스승님은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군.'
하여, 에릭은 옆에 있던 두 여인에게 질문을 건네려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거, 형님! 피도 섞이지 않은 우리가 형과 아우가 될 수 있는데! 어찌 부모는 안 되겠수? 이 감동적인 얘기를 듣고도 가슴이 동하지 않는다면, 사내가 아니오!!!"
에릭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장두식이 대뜸 소리쳤다.
그에 르웰은 안쓰럽다는 듯이 '저 깡패가 그럼 그렇지.'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리페로제의 눈매가 활처럼 휘었다.
"이놈이! 나를 속여 먹었구나!"
* * *
에릭은 간만의 사제간의 시간을 가졌다.
장두식과 잭슨은 치유 불가의 중상을 입어 공작과 함께 응접실에서 대기하는 중이며, 르웰은 지레 겁먹고 기척을 숨긴 채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머지 일행들은 마탑 밖에 대기시켜 뒀다.
'자동화 공장을 빙의자들한테 보여 줄 순 없지.
에릭은 리페로제와 함께 공장 내부 견학을 시작했다.
"제 공장이 어떠십니까?"
"허! 탑주 없이 마탑을 거니는 것도 진귀한 일이지만.... 정녕, 이게 현실이란 말이더냐?"
위이이잉-. 철컥! 쿵!
온갖 자동화 설비들이 제국군을 위한 공격 마도구를 제작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리페로제가 감탄했다.
"사람 한 명 없이 마도구가 만들어지고 있다니...."
"제가 누누이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위이잉-.
자동화된 설비에서 기다란 스크롤이 뽑히고 칼날이 박힌 기계가 일정한 간격으로 스크롤을 재단한다.
"그래도 마법을 새기는 건 사람이 해야 하지 않느냐?"
"저쪽을 보시죠, 마법진도 자동으로 새겨집니다."
스크롤이 기다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옮겨졌다.
그 뒤, 지팡이가 설치된 기계가 마석의 마력을 이용해 자동으로 마법진을 새겨 넣었다.
"평민들에게 여기서 만들어지는 공격 스크롤만 들려줘도 백만 대군이 탄생하겠구나."
"오오! 드디어 이해를 하셨군요."
리페로제의 말에 에릭이 아주 기뻐했다.
'역시, 보면 이해를 하는구나.'
그간, 지구의 문물을 설명할 때마다 병신 취급을 받은 것이 여간 서러웠던 게 아니었다.
드디어 대화다운 대화가 가능해진 느낌이었다.
"지구에서는 제가 말했던 총이 비슷한 기능을 했습니다. 총이 등장하고 기사니 뭐니 하는 것들은 죄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죠."
"흐음. 그 철조각을 쏘는 물건은 백만 대군이 쓴다고 치더라도 무용할 것 같다만."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렇지만, 에릭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렇게 차차 이해시켜 나가는 거지.'
지금은 총의 성능 따위를 논하려는 게 아니니까.
에릭의 목적은 분명했다.
"백만 대군이 신성 마도구를 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호오.... 최소 재앙급의 강림 정도는 일반 병사들로도 해결이 가능하겠구나."
리페로제 또한 에릭의 진의를 파악했다.
'실로 독특한 발상이로다.'
에릭은 지구의 것을 이쪽 세계를 기준으로 대입한 것이지만, 스승은 제자의 유능함이라 여겼다.
하여, 나름의 조언을 건넸다.
"캡슐이란 물건의 재료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예."
"비슷한 재질의 것을 미궁 20계층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 척살자 루크라는 놈을 처음 만났던 장소지."
에릭이 고개를 기울였다.
"최상층에서 잡아 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놈이 최상층까지 도망을 친 거다."
"고생 많으셨군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20계층이면, 빙의자들로도 충분히 해 볼 만하겠군요."
에릭은 빙의자들의 본격적인 활용법을 떠올렸다.
미궁 공략은 공략조를 따로 만들어 운영하고, 물자를 파밍하기 위한 광부 팀을 별개로 꾸리는 방식이었다.
'광질 잘하면 공략에 끼워 주고 이러는 거지.'
과거 길드에서 하던 것처럼, 유사 작업장을 돌리려는 생각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자, 리페로제가 한마디 덧붙였다.
"루크 그놈은 공략조로 써먹어라. 아주 미친놈이다. 네가 말하던 탱커에 아주 적합한 녀석이지."
"그놈은 교황 성하가 데려갔지 않습니까?"
척살자 루크는 교황이 데려갔다.
최초의 빙의자라는 사실 때문에 성서와 대조해 확인할 것이 있다고 들었다.
"몇 가지 조사만 마치면 다시 돌아올 게다."
"자세한 건 놈이 돌아온 뒤에 생각해 봐야겠군요."
오랜만에 가진 사제 간의 즐거운 시간이었다.
"뭐, 구경은 이만하면 되셨지요?"
"몹시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수금.
'이놈들 마도구를 얼마나 팔아먹은 거야?'
에릭은 리페로제에게 공장 구경을 시켜 주면서, 창고에 쌓였던 수북한 양의 물자들을 확인했다.
태반은 텅텅 빈 상자였다.
지금 생산되는 것들이 빈 상자를 채워서 제국으로 보내질 테지.
아무튼, 그만큼 팔아먹었다는 의미였다.
"스승님, 타시죠. 이게 제가 말했던 엘리베이터 같은 겁니다."
에릭은 새로이 공작의 위(位)를 잇게 될 자보르 라핀을 만나러 마도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우우웅-.
초고속으로 이동하는 승강기.
도착한 창소는 마탑의 최상층이자, 한때 라핀 공작이 사용하던 집무실이었다.
절뚝-.
"오, 오셨습니까."
다리가 부러진 잭슨이 정중하게 에릭과 리페로제를 맞이했다.
식물인간처럼 소파에 누운 장두식이 눈을 끔뻑거렸다.
두 사람의 전신을 감싼 지고한 신성력이 그 어떠한 치유 현상도 일어나지 않게 만들었다.
장두식의 몸에는 막대한 양의 신성력이 깃들었다.
한데, 회복을 못 한다고?
"두식이는 몸에 신성을 품었는데,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에릭은 그 비결을 물었다.
그에 리페로제가 한껏 웃으며 비결을 알려 주었다.
"더 강한 힘으로 사지근맥을 막아 버리면 된다."
"그렇군요."
이 또한 배움이었다.
수하들의 안전을 확인한 에릭은 집무실 안쪽에 있는 자보르 라핀을 향해 다가섰다.
"흐으...!"
그는 아주 겁을 먹은 상태였다.
장두식과 잭슨이 얻어맞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직관했기 때문이다.
'잘됐군.'
에릭은 구구절절한 과정을 건너뛸 수 있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그래서 싱긋 웃으며 자보르에게 물었다.
"그동안 판 마도구에 대한 수익 분배를 요구하겠네."
시세대로, 아니 가장 저렴한 시장가를 기준으로 고려해 봐도.
'최소 10억은 넘는다.'
공장의 생산량이 보통이 아닌 것이, 족히 수십억은 벌어들였을 테지.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제국군이 그 고객이 아니던가?
* * *
에릭은 일을 마친 직후, 마탑을 나섰다.
다음 행선지는 제국 남쪽 끝자락에 있는 엘프 자치령으로, 마탑과는 제법 가까운 위치다.
수천의 기사단과 출정했던 것과 달리, 엘프 왕국으로 향하는 일행은 수가 적었다.
"잭슨, 앞으로 며칠간은 그렇게 지내거라."
절뚝-.
잭슨은 다시 절름발이가 되었다.
부러진 다리를 휘감은 신성력이 어떠한 치료 현상도 거부했다.
그래도 그는 안도했다.
'두식 형님처럼 반신불수까지는 안 됐지.'
장두식은 에릭의 어깨에 걸쳐진 상태였다.
죽은 듯이 미동도 없었다.
눈만 끔뻑거릴 뿐.
그는 리페로제를 농락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에릭도 마찬가지였다.
"끄윽-."
"에릭, 장두식을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라 했더니, 잔머리만 는 오우거 같은 펜릴을 만들어 놨구나."
"제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에릭은 간만에 지독한 고통을 느꼈다.
꿀밤을 연달아 두 대나 맞았더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 이마를 문지르고 있자니, 슬쩍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르웰? 대체 얼마나 개성이 짙어진 거지?'
그 스승도 긴가민가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전부였다.
"르웰 이 도둑년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도통 모르겠구나."
정작 그녀는 에릭의 어깨를 타고 앉아 있었지만, 에릭 본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
"조금만 더 하면 감을 잡을 것 같기도 하건만...."
리페로제가 집중해서 르웰을 찾아보려던 차에, 뒤에서 덜덜 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 에릭을 패는 존재라니.'
박창호, 니시다 료, 강풍호.
세 명의 빙의자였다.
셋 다 창백한 얼굴에 잔뜩 겁먹은 모습이었다.
그들을 본 리페로제가 한심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리 약해 빠진 것들을 어떻게 써먹겠다고...."
"스승님이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빙의자들도 신의 뜻이 있어 불려 왔다고."
"그게 먹히지 않는 놈들 같아 보이니 하는 소리다."
니시다 료가 '흐억!' 비명을 내질렀다.
그에 에릭이 한숨을 내쉬며 리페로제에게 나름의 설명을 곁들였다.
"엘프 유렌이나 척살자 루크처럼, 얘들도 빙의한 몸에 오러나 마법을 가르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말이 쉽지.... 그놈들은 빙의한 지 수십 년은 지나지 않았더냐? 하물며 잭슨도 20년에 걸쳐 그 경지에 이르렀지."
"잭슨 때와는 다릅니다. 저놈들은 신성력이 먹히잖습니까?"
"호오-."
리페로제의 눈빛에 흥미가 짙어졌다.
좀 전까지만 해도 폐기해야 할 무언가로 보던 눈빛이었는데.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변했다.
'조, 좋은 건가?'
'그런 듯?'
'휴유-.'
세 빙의자가 눈짓을 주고받았다.
에릭은 그들을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한번 뭐 빠지게 굴러 봐라.'
에릭이 그토록 강해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신성력에 배척받지 않는 몸을 지녔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전에서 신도가 된 빙의자들은 전부 에릭처럼 훈련을 받게 될 것이다.
'무한 회복 훈련.'
에릭은 자신이 어릴 적 했던 수련법을 떠올렸다.
작은 몸으로 죽을 만큼 굴렀다.
그 직후 다친 몸과 지친 정신을 회복당했다.
회복된 직후 다시 죽을 만큼 구르고, 이를 밤이 될 때까지 반복했다.
그렇기에 회복당했다는 표현이 매우 적절했다.
'지독한 수련의 시간이었지만, 성과는 압도적이었지.'
그런 고난한 시간을 거쳤기에 지금의 괴물 성기사로 거듭난 것이 아니던가?
효율은 기본이며, 결괏값도 말도 안 되게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에릭은 스승 리페로제를 빙의자들의 교관으로 붙여 보고자 운을 떼 봤다.
"스승님이 저를 가르쳤듯이, 빙의자들의 길을 끌어 주신다면.... 그들 또한 제 몫을 하는 세계의 구성원으로 거듭나겠지요."
"에릭, 너처럼 훈련받는 빙의자라니.... 몹시 재밌겠구나!"
리페로제 역시 달가운 기색이었다.
"역시, 스승님이 최곱니다!"
"하하하하-!
사제가 합심해 한껏 웃었다.
그리 웃으며 걷자니, 어느덧 세계수가 아주 커다랗게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가 제법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세계수에 더 가까워지기 전에 리페로제는 신성을 둘러 사방의 소리를 차단했다.
"그래, 에릭. 도합 60억을 벌었는데 대체 어디에 쓸 생각이냐?"
에릭은 흑마그룹이 두고 간 탑에서 30억 골드를 챙겼고 라핀 공작에게 30억 골드를 받아 왔다.
파앗-!
[에릭 - 4티어 신성력]
[보유 스킬: 개벽, 광휘의 날개, 유성우, 심판]
[보유 골드: 13,581,888,500]
기존에 가진 자금과 합치면, 도합 130억에 달하는 거금을 거머쥐었다.
거기에 더해.
[신성 관리]
[보유 GP: 2,133,230]
초대형 화분을 심을 수 있는 200만 GP까지 모은 상황.
"일단 크게 두 가지 계획이 있습니다."
에릭은 덤덤하게 제 계획을 읊조렸다.
"그래, 세계수를 네 신전으로 분갈이 하고, 빙의자 신도 수를 늘려 본격적인 미궁 공략에 나서겠다는 말이로구나."
에릭이 생각건대, 분명 세계수는 GP 획득에 큰 이점을 줄 요소였다.
'그럴 게 아니라면 신선 시스템 창에 존재할 이유도 없지.'
가장 큰 근거는 자신이 에릭의 것이라며 미친 소리를 내뱉던 세계수의 모습이었다.
물론, 해 봐야 정확한 걸 알 수 있겠지만....
그때였다.
휘익-.
리페로제가 대뜸 에릭의 어깨 위로 손을 내질렀다.
"으읏! 리, 리페로제 님!"
기척을 지웠던 르웰이 몸을 버둥거리며 리페로제에게 붙잡혔다.
"그래, 르웰. 네게도 듣고픈 말이 참으로 많았었지. 내 에릭을 봐서 참고 참았으나-."
잔뜩 화가 난 모양새였다.
그에 에릭이 재빠르게 두 사람을 갈라 놓으며 화제를 돌렸다.
"저쪽을 보시지요."
싸아아아아아―.
세계수, 대지모신(大地母神)이 온몸을 뒤틀면서 에릭을 향해 거센 바람을 보내왔다.
거대한 나무가 뒤틀린 모습은 괴상했으나....
"저 세계수, 뭔가 몸짓이 요염한 것 같은 게...."
"그, 그죠? 뭔가 불쾌한 기분이 드는데요?"
두 사람의 시선을 끄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다만, 에릭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남았다.
'과연 삼파전으로 끌고 가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99화 삼파전 (1)
"폐하,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제국의 1황자, 레오나르도 로펜 아르만.
그는 십 년 만에 미궁에서 귀환했다. 미궁 속 시간까지 합친다면, 족히 수십 년이라는 세월을 제국 밖에서 살아온 셈.
"그래, 고생이 많았다. 자세한 얘기는 잠시 후에 하지."
그런 레오나르도에게 황제는 매몰찬 반응을 내보였다.
대신 관료들은 십 년 만에 복귀한 황태자를 보고도 곧바로 회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국란 회의라니....'
서운함이 들 법도 했으나, 레오나르도는 현 상황의 시급함을 이해하고 자리에 착석했다.
1황자 역시, 미궁에서의 재앙을 리페로제를 통해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대격변 패치의 여파로.... 황도의 수원이 말라 버렸습니다."
"당장은 옆의 루펜강에서 물을 전이시키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손실이 발생할 예정입니다!"
레오나르도 역시 변한 정세를 듣고자, 귀를 기울였다.
하나하나 제국의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갑자기 지하수가 말라 버렸다니.'
황도 밑에는 끝이 보이질 않는 지하수가 흐른다.
그게 갑자가 사라졌다.
앞으로 200만 수도민의 생활에 큰 지장이 생길 터였다.
게다가 문제는 더 많았다.
"북부 대공이 전쟁에 선봉으로 서는 만큼, 마경을 경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제국의 재상, 페르난시아 공작이 물끄러미 레오나르도를 바라봤다.
그에 레오나르도가 크게 당황했다.
'방금 미궁에서 돌아온 나를?'
그제야, 황제가 레오나르도를 바라봤다.
"황태자, 예정보다 10년이나 빠르게 공략에 성공했군."
"사실은...."
황제를 바라보며 레오나르도가 미궁에서의 일을 읊조렸다.
최상층에는 난이도의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이라든가.
때마침 척살자를 데리고 온 리페로제가 합류해서 계층주를 공략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던가.
가감 없는 솔직한 보고였다.
"허어-."
그 말을 들은 황제는 크게 놀랐다.
심지어 그 리페로제는 결국 미궁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그러는데.
"그분 덕에 이리 돌아왔지만...."
"그녀는 살아 있을 테니, 걱정 말거라."
정직함이 미덕이라고, 그토록 긴 세월을 밖에서 보냈음에도 레오나르도는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녀석, 제 공을 부풀리지도 않고 정직하구나.'
대제국의 군주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달빛 아래 부끄러움이 없어야 할지어다.
황가에 전해지는 말 중 하나다.
예정보다 일찍 미궁에서 나온 탓에 성취는 조금 더뎠다.
그런데도 황제는 자식의 모습에 만족했다.
지금은 세계의 혼란이 도래한 시기다.
'부족한 경지야, 전쟁이건 언데드를 상대하건 해결할 방법이 수두룩하거늘.'
황제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레오나르도가 믿기지 않는 말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리페로제 님께서는 계층주의 모든 정보를 알고 계셨습니다."
계층주의 움직임과 패턴은 물론, 약점과 공략법까지 훤히 꿰고 있었다.
심지어는 나타날 보상의 종류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제자에게 이걸 건네주라더군요."
"허어-. 신의 힘이 계층주의 정보까지 헤아린다는 말인가...."
황제는 일순 리페로제가 '빙의자들의 공략법'을 참고했을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그 광신도, 하얀 마녀가 그랬을 리는 없겠군.'
나름 그녀를 잘 아는 입장으로서, 그 가능성을 지워 냈다.
알만정교회의 교주처럼 미래의 편린을 본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계시의 형태로 계층주의 정보가 내려졌을지도 모른다.
신의 힘이라는 것은 그토록 부조리한 것들이니까.
'어차피 그들은 이제 제국의 우군이 아니던가?'
에릭이라는 존재 덕분에 아스티아 교단과는 단단한 연결 고리까지 생긴 상황.
'마침 황녀도 그 두식이라는 수하를 마음에 들어 하니.'
머지않아 혼인 동맹까지 이뤄질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황제는 물끄러미 레오나르도를 바라봤다.
황제로서 들어야 할 것들은 모두 들은 상황.
"레오, 정말 고생이 많았다."
이제 남은 것은 부자(父子) 간의 대화였다.
황제는 고생한 자식을 향해 치하의 말을 건넸다.
"아, 아버지...."
레오라는 호칭은 레오나르도가 어릴 적에 부르던 애칭이다.
그 두 글자에 레오나르도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엄한 황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정한 아버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간의 고생이....'
미궁에 잘 맞는 체질이라 하여도, 수십 년의 시간을 몬스터 틈바구니에서 보내는 것은 제법 고된 일이었다.
지엄한 황실의 의무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었다.
"허어-. 폐하께서."
"역시, 어릴 적부터 총명하시더니-."
황제의 치하에, 대신 관료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감탄사를 읊조렸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레오나르도가 진중하게 질문을 꺼내 들었다.
″폐하, 여쭙고자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는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참으로 많았다.
'밖에서는 고작 10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것들이 변했지?'
제국이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는 사실부터, 빙의자란 존재가 50만 명에 달한다는 것에, 흑마그룹이 부활했다는 사실까지.
대격변 패치라는 것을 들었음에도 너무 큰 변화였다.
하나, 레오나르도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따로 있었다.
'장군의 말이 진짜일까?'
바로, 미궁 광장에서 자신을 마중 나왔던 장군의 말이었다.
"황도군 장군께서...."
장군의 말로는 황제가 에릭에게 후계자의 증표를 내려 줬다고 그랬다.
"-또한 그가 제국 내에 불손한 세력을 지니고 있으며, 폐하의 편애를 받아 제멋대로 빙의자를 이용해 도시 건설을 추진하는 중이라고...."
"그 모든 것은 사실이나, 장군의 우려는 그의 망상에 불과하니라."
황제는 진실을 알려 주었다.
에릭이 황위를 욕심낼 존재도 아닐뿐더러, 그저 돈을 좀 밝히는 어린놈이라는 얘기였다.
"걱정 말거라. 에릭 그놈은 황위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으니. 애초에 너 또한 그리 생각하지 않더냐?"
그에 레오나르도는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레오나르도 또한 장군의 말이 헛된 과장이라고 여겼다.
"애초에 보지 않았더냐? 황궁보다 먼저 교회에 들렀다지?"
"그렇습니다. 그 고아원 아이들의 학습 자료들...."
레오나르도는 황실에 들르기 전에, 황도군 장군과 함께 에릭의 고아원을 찾았다.
"황태자 전하, 놈이 더 크기 전에 진실을 보셔야 합니다."
그들은 리페로제가 건네주라고 한 계층주의 보상을 명분으로 삼아, 르웰의 교회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곳에서 레오나르도는 보았다.
[대제국의 황제 폐하를 칭송하라. 제국은 아르논 황실의 치세하에 영원불멸할 것이다.]
그 광신에 가까운 교습서를.
"장군, 이게 역도가 할 짓입니까?"
"어어, 그, 그럴 리가 없는...."
에릭은 황실을 찬양해야 할 무언가로 묘사해 놨다.
황제는 대륙의 최강자이며, 이 세계를 하나로 이끌 지도자라는 식의 말들.
"나 또한 재상의 보고로 그것들을 보았지. 처음에는 재상이 허위 보고를 올린 줄 알았다. 한데, 레오 너는 순순히 납득을 하는구나."
"리페로제 님을 보지 않았더라면, 저도 모종의 의도가 있지 않을까 의심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의 광신을 직접 보고 느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에릭이 만들었다는 교육 자료를 보고, 미궁 속 리페로제의 광신을 떠올렸다.
그 제자인 에릭이 그런 면모를 지녔다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법했다.
또한, 그에게는 제 나름의 근거도 있었다.
'1미터 남짓한 열다섯짜리 꼬마가 무슨 황위를 논한다고....'
성자의 지위니.
빙의자 관리국장이니.
온갖 휘황찬란한 수식어들이 붙은 에릭이지만, 레오나르도는 그를 작은 꼬마라고 알고 있다.
그 누구도 에릭의 거대한 체구를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황좌를 노리기에는 그는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하나, 그를 마냥 어리게 봐서는 안 된다."
에릭이 거대하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
그래서 황제는 물론, 이 자리에 모인 대신 관료들도 따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지만....
레오나르도는 알 방도가 없었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에릭은 리페로제 그녀와 비슷한 존재다."
"역시...."
소녀의 모습을 취한 리페로제.
꼬마의 모습을 지닌 에릭.
레오나르도는 멋대로 납득해 버렸다.
―Ep. 21 삼파전
에릭은 제국 황실을 찬양한다.
처음 정착할 국가를 고를 때부터, 제국을 고른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는 명확한 근거도 있다.
'이 세계에서 국가의 수장이란 가장 강한 존재여야 한다.'
무력이 전부인 세계.
거기서 한 나라를 책임지는 존재란 그만큼 강력해야 했다.
에릭은 끔찍한 상황을 상상해 봤다.
'가령....'
예컨대, 리페로제와 같은 존재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나타났다는 가정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차별적인 테러를 일으킨다고 생각해 봤다.
'끔찍하군.'
총알은 모조리 신성 방벽에 막힐 것이며, 대포건 뭐건 무용해질 것이다.
결국 여러 국가의 조력을 받아 전략핵 수십 발을 서울 한복판에 떨어트리게 되겠지만....
'방사능이건 뭐건 곧바로 재생하시겠지.'
에릭은 확신했다.
리페로제 단독으로 지구의 전 인류를 멸할 수 있다고.
하다못해, 제국 남부에 강림했던 흑룡만 해도 몇 개의 나라는 멸망시킬 수 있으리라.
'제국은 다르다.'
하나, 에릭이 믿는 제국엔 황제가 있다.
리페로제와 같은 일종의 전략 병기 같은 존재가 수도를 오감에도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황제의 존재다.
하물며, 제국은 지고한 강자들이 국가 수호의 의무를 맡는다.
'황도군 장군처럼.'
리페로제가 제국 수도에 테러를 일으킨다고 가정해 보면, 서울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황도군 장군이 그녀를 붙잡아 시간을 벌 것이며, 그사이 황제와 황실마탑주 혹은 북부 대공 등이 나타나 그녀를 상대하게 될 것이다.
'역시, 돈을 더 벌어야겠어.'
아무튼,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력이다.
에릭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에, 엘프들이 너무 불쌍해."
"그러게 말입니다."
리페로제에게 멋대로 휘둘리는 엘프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저렇게 약하면 한 명의 강자가 집단 전체를 뒤흔들 수밖에 없지.'
엘프들은 겁에 질린 채로 리페로제가 왕국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유렌! 어찌 이런 짓을 벌인 게냐? 내 이러라고 제국에 땅을 내어준 것이 아니건만!"
특히, 세계의 두 번째 빙의자 엘프 유렌이 가장 큰 고초를 겪는 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에릭에게는 불손하게 굴었던 유렌이, 아무 말도 못 한 채 연신 사과를 반복하는 모습.
"네 지식을 활용해 엘프들의 꽉 막힌 문화를 개선하라고 했는데, 웬 붉은 도시를 지어 두는 게 말이나 되는 짓이냐?"
리페로제는 유렌이 지어 둔 차이나타운을 보고 극히 노했다.
새빨간 홍등이 가득한 거리.
그 위로 나름 자금성 비슷한 멋진 건물들이 있으나, 리페로제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저것이 에릭이 말하던 차이나타운이로구나!'
그녀는 차이나타운이 지구 곳곳을 테라포밍 하던 악랄한 도시라고 들었다.
청결 문제는 기본이며, 크게는 장기 매매와 같은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는 도시라고.
"당장 철거하거라!"
"아, 알겠습니다."
강자의 한마디에, 도시 하나가 철거되게 생겼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 저! 세계수는 어찌 저런 모습이란 말이더냐?"
거기에 더해, 그녀는 엘프 국왕을 불러와 일갈하기 시작했다.
배배 꼬인 세계수의 기묘한 모습 때문이었다.
"따박따박 대들면서 엘프들은 세계수의 수호자니 뭐니 떠들던 놈이!"
그 광경을 보던 에릭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이나타운의 철거는 조금 꼬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엘프 국왕이 처한 상황은 안타깝게 느껴졌다.
'세계수는 아마도.... 나 때문이겠지.'
까마득한 나무가 세계수다.
한데, 그 세계수가 거대한 가지로 몸을 감싼 채 기둥을 뒤틀고 있었다.
게다가....
부르르-.
에릭을 향해 선선한 바람을 뿌리며 진동하는 것이, 영 불손한 느낌이었다.
그에 리페로제가 발끈했다.
"세계수는 무릇 세계의 기둥이건만, 그 수호를 맡은 엘프들이 관리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으니...."
"그, 그래도 에릭 님께서 오신 뒤로 세계수께서 푸른 기운을 되찾으셨습니다!"
참다못한 엘프의 왕이 항명했다.
그간 노랗게 시들시들하던 세계수였는데, 에릭을 본 직후 푸릇푸릇한 잎이 돋아나고 저렇게 활기를 되찾았다는 말이었다.
하나, 리페로제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엘프들이 단체로 미친 건가? 무슨 세계수가....'
리페로제가 단체 계도를 통해 참엘프를 만들고자 다짐하려던 순간.
"스승님, 참으시지요."
에릭이 다가왔다.
그는 부드럽게 리페로제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세계수의 앞으로 이끌었다.
자연스레 이끌리는 스승을 보며, 에릭은 생각했다.
'분명 유해지셨다.'
어릴 적 보았던 스승과 지금의 스승은 사람이 바뀐 수준.
심지어 이 상황을 조금 부끄러워하나? 싶기도 했다.
"크흠, 흠. 에릭, 그리 갑자기 붙잡는 이유가 뭐냐?"
에릭은 떨떠름한 동시에 안도를 느꼈다.
'제어가 된다.'
황제도 골치 아파 하던 존재를 자신의 손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하물며, 르웰이 옆에 붙어 있음에도 리페로제가 인내하는 모습이었다.
"흐음...."
르웰이 '힉!' 놀라긴 했으나, 이 이상 무언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에 에릭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르웰과 리페로제의 사이에서, 자신이 뭘 해야 할지 감을 잡은 것이다.
'편애로 힘의 균형을 잡는 거지.'
무력으로 따지면 한없이 뒤처질 것이 분명했다.
하나, 자신이 조금 더 르웰의 편을 들어 준다면 두 사람의 균형이 맞아질 터였다.
에릭은 이를 통해 평화를 이룩하겠다는 마음이었다.
또한.
"세계수, 같이 만나 보고 얘기하시죠."
당장은 공공의 적을 만들어 주면, 되겠지.
에릭이 두 여인과 함께 성큼 발을 내딛자.
쩍- 하고는 세계수의 기둥이 갈라졌다.
* * *
"그렇게 빤히 보면, 부끄러워요."
나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 세 사람.
그들의 앞에는 인간의 형태를 취한 세계수가 보였다.
"으읏!"
"허!"
리페로제와 르웰은 경악해서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에릭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곡식의 갈색을 닮은 머리칼을 지닌 여인은 세계에 사랑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세계수다.
"저, 저 가슴은 뭐란 말이냐!"
"나보다... 더 커?"
그런 세계수는, 존재만으로도 르웰과 리페로제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당신의 세계수랍니다."
놀란 세 사람 앞에서 오직 세계수만이 에릭을 바라보며, 입을 놀리고 있었다.
그녀는 팔로 몸을 감싸며 소리쳤다.
"아아-! 진도가 너무너무 빨라요...."
작은 나뭇잎으로 몸의 최소한만을 가린 여인이 에릭을 향해 걸어왔다.
풍만한 몸이 잔뜩 부각되었다.
"고작 두 번째 만남에서 다른 여자를 데려오시다니."
그녀의 말에 에릭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저거 취향이 진짜 미쳤네.'
세계수의 반응이 정말 특이했다.
숫제 정신 나간 수준이었다.
그 과한 반응에 리페로제와 르웰이 동시에 에릭을 째릿 째려볼 정도였다.
"그래, 제자야. 내 세계수가 이런 여인의 모습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구나. 백 년을 넘게 세계를 돌아다닌 내가 처음 보는 일이 있을 줄이야.... 그러니, 설명을 좀 해 보지 않겠느냐?"
리페로제가 등 뒤의 검을 짚으며 물었다.
구구절절 말이 길었다.
"에릭? 대체 무슨 사이야?"
르웰이 팔꿈치를 꼬집었다.
그녀는 단 한 문장으로 물었으나, 그 눈빛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어째 리페로제보다 더 무서운 느낌이었다.
"두 분 다 진정하시지요."
그에 에릭은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긴급한 상황이었으나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아무런 사이가 아닙니다. 그저, 제 신전에 옮겨 심을 나무일 뿐이죠."
그리 말하며 에릭은 재빠르게 [신전 관리]창에서 초대형 화분을 구매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아아!!! 분갈이라니!"
짜릿한 탄성이 울려 퍼졌다.
100화 삼파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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