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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7% MALDITOPALADIN / Chapter 3: 20-30

Chương 3: 20-30

20화 성물 (6)

황제의 눈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제국의 격언이요, 기정된 사실이다.

제국의 황제는 적어도 수도에서만큼은 이를 현실로 만들었다.

그런 황제를 감탄하게 만든 존재가 바로 에릭이다.

'대단한 배짱이로군.'

에스페로자 로펜 아르만, 황제는 에릭을 보니 참으로 탐나는 인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래, 에릭, 일임]

황좌의 팔걸이를 두드렸을 때 전해져 온 메시지.

앞선 것과 시간차를 두고 전달되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성물의 거래를 앞둔 타이밍에 전달하라는 지시를 남겼다는 의미고.

그자는 곧 에릭일 터였다.

"폐하, 설마 아스티아 교단의 말에 혹하신 건 아닐 테지요?"

건방지게 반말을 늘어두던 알만정교회의 교주가 존댓말을 쓰는 것을 봐라.

황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교황 성하, 성물의 중개라 함은 판매를 말하는 것을 테지요?"

"예, 폐하. 그렇습니다."

두 집단의 수장은 교주를 내버려 둔 채 정중히 대화를 나눴다.

무신론자로 유명한 황제다.

제국의 지존이요, 만민의 아버지인 황제다.

그런 황제가 그토록 존중을 담는다는 것이....

'미치겠구나.'

알만정교회 교주의 입장에서는 정신이 나갈 노릇이었다.

"에릭 국장, 성물을 가져오거라."

교황과 대화를 마친 황제가 에릭에게 명했다.

에릭은 정중한 자세로 번쩍이는 황금 갑옷을 들고 황제의 앞으로 걸었다.

거대한 체구와 광활한 에릭의 등판을 바라보며, 대신들은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아스티아 교단 소속의 인물이, 제국의 국장이라니.'

이걸 기뻐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참으로 애매했다.

복잡한 대신들의 심정과 달리, 에릭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폐하, 알만정교회의 성물이옵니다."

에릭은 거대한 몸을 굽혀 황제에게 갑옷을 진상했다.

뚝.

황제의 투박한 손이 거대한 갑옷을 들어 올리자.

키이잉-!

황제의 손아귀에서 성물이 반짝거렸다.

"오오-! 알만-신이시여."

알만 정교회의 인사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조아리며, 성물이 내뿜는 신의 기척에 감동했다.

"저희의 품으로 돌아오소서!"

하늘 높이 신성을 쏘아 올리는 갑옷이다.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부상은 완치시켜 버리는 물건이 성물이다.

말 그대로 신이 쓰던 물건.

"쓸데없이 반짝거리기만 하는군."

한데, 황제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에릭만큼 커다란 황제가 갑옷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성물이라기에 기대했건만.... 대제국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물건이로다."

그러더니 황제가 에릭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가 가져온 물건이니, 직접 처분하는 건 어떻겠나?"

그에 에릭은 기꺼이 웃었다.

"예, 폐하."

알만정교회 교주는 이런 상황이 못마땅했다.

'마치 짜 놓은 판에 올라선 느낌이구나.'

그래서 항의라도 해 보려던 차에,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릭 경은 아스티아 교단의 순례자이되, 제국의 빙의자 관리국 국장이다."

"그, 그게 무슨...."

"에릭은 엄연히 제국 소속으로 이 거래를 주도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교주는 새파란 애송이와 성물을 두고 협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이대로 당할....'

그런데, 이 에릭이란 놈.

보통이 아니다.

"얼마까지 내실 수 있겠습니까?"

에릭이 대뜸 내지른 한마디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얼마...까지?'

시작부터 한계를 물어보는 질문에 교주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한 교단의 우두머리로서 이런 대우는 처음이었다.

"우, 우리가 지닌 아스티아 교단의 성물과-."

"저는 얼마까지라고 물었습니다."

말까지 끊어 대는 통에 교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열다섯이라 하지 않았나?

대체 어디서 배워 먹은 버릇이지?

'네놈이 이러고 무사할 것 같더냐?'

교주는 에릭을 향해 날카롭게 벼려 낸 신성력을 쏘아 냈다.

기척을 한계까지 줄였고 위력은 가능한 만큼 키웠다.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 정도면, 알아챌 법하겠지만....

'경고로는 충분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교주였는데.

"음."

정작 교황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에릭 또한 무뚝뚝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어째서 가만히 있는....'

죽으라고 내지른 건 아니다.

그러나 맞으면 위험할 정도는 되었다.

'설마, 이것 하나 눈치채지 못했단 말이냐?'

교주의 눈에는 신성력을 빚어내 만들어낸 금침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에릭의 몸에 적중할 상황인데....

'그냥 맞는다고?'

쐐애애액-.

교주가 벼려 낸 신성력은 에릭의 몸에 적중했다.

그리고 교주는 그들이 가만히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에릭의 몸에 교주의 금침이 닿자.

뚝- 하고는 금침이 반쪽으로 부러졌다.

'저게 사람의 몸이란 말인가?'

성기사라고 들었고 순례자라고 알고 있긴 했다.

근데 나이가 어리지 않았던가?

열다섯에 저런 몸을 어떻게 만들었다는....

교주는 머리를 털었다.

잡념을 비워 내며, 어머니 알만-을 부르짖었다.

끓었던 머리가 식었다.

'분명, 교황이 무언가 축복을 내려 줬던 게야.'

그게 아니라면, 신성을 부러트리는 몸뚱이는 말이 안 될 터였다.

무려 교주의 신성력이 아닌가?

교황이 수를 썼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결과는 명확했다.

'선수도 빼앗겼고 기 싸움도 밀린 게로구나.'

교주는 냉혹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제 남은 길은 하나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닌 아스티아 교단의 성물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면, 거래는 없던 걸로 하겠네."

배 째라.

* * *

'미친놈이군.'

교주가 내보인 반응에 에릭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알만정교회가 돈을 밝히고 신도를 늘리는 일에 혈안이 된 걸로 유명해도, 나름 신성의 의무는 지켜 주는 편이다.

그런데 저따위 신성력이라고?

'스승에 비하면 모기가 문 것 같구나.'

애초에 신성력의 강함을 논하기 전에 교주의 행동조차 말이 안 됐다.

'치졸하군.'

아무리 힘 조절을 했다손 치더라도, 새파랗게 어린 자신에게 교주가 저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렇게 추한 놈이 어떻게 한 종교의 수장이란 말인가?'

에릭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기선 제압부터 밀리고 신성력으로 위협해도 안 먹히니 하는 말이.

"절대, 교환이 아니라면 거래는 없을 걸세."

고작 이따위 말이라니.

그것도 강조까지 해 가면서 말이다.

"어차피 아스티아 교단 쪽에서 알만정교회의 성물을 쓸 수도 없지 않는가?"

에릭이 침묵을 유지하자 교주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나하나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얼마까지 생각했냐 물었지? 내 생각은 성물끼리의 맞교환이 끝이라네."

그에 에릭은 인내심이 다했다.

꿈틀거리는 에릭의 승모근을 보고 저 멀리서 '-흐익.' 하는 비명이 들려왔으나.

그 누구도 에릭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쿵. 쿵.

에릭이 몸에 힘을 한껏 주고서 교주를 향해 걸었기 때문.

늙은 교주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교주님."

에릭이 말하기를.

"저는 빙의자 관리국장입니다."

"그, 그게 무슨 상관-."

"빙의자들이 쓰는 상점이라는 것이 있다더군요."

알현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침묵을 깨는 것은 오직 에릭의 한마디뿐.

"거기에 이 성물을 팔면 10억 골드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에릭은 분명 '선제시'로 기회를 주었다.

이를 차 버린 것은 교주다.

즉, 이제부터는 에릭이 부르는 게 값이 될 터였다.

"교주께서 저희 아스티아 교단의 성물을 얻었을 때, 쓰지도 못할 것을 돈을 못 준다는 이유로 그대로 보관하고 계셨지요."

그때 알만정교회가 교황에게 요구했던 금액이 성물 한 점당, 십억 골드였다.

가난한 아스티아 교단은 이를 지불하지 못했다.

'결국, 교단의 성물이 타 종교의 품에 잠들어 있게 되었지.'

에릭은 무신론자였되, 교단의 은혜를 입은 몸이다.

그래서 같은 교인이라는 소속감을 가졌고, 이에 분노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렇게 정한 답이다.

"저희는 이번 거래가 아니면, 그냥 팔아 버릴 생각입니다. 쓰지도 못할 성물을 굳이 왜 들고 있겠습니까?"

교주는 말문이 막혔다.

저 굳건한 눈빛을 보아하니, 절대 빈말이 아닐 터였다.

"십억 골드에 저희 교단 성물 한 점. 이 이상 양보는 없습니다."

괜한 강짜를 부리려다 교주는 덤터기만 쓰게 생겼다.

보통 이 정도로 균형이 깨지면, 거래는 무산돼야 정상일 테지만.

'알만정교회에서 무구 형태의 성물이 나온 건 처음이지.'

에릭에게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

애초에 이를 믿고서 황제에게 부탁한 것이 아니던가?

그는 자신이 만든 정보 조직이 들킬 위협을 감수하고서, 직접 제국 정보부에 요청했다.

그런 위협을 무릅썼으니, 최대한 이윤을 뽑아내는 것이 당연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대답이 없는 교주를 향해 에릭이 재차 묻자.

"내, 하루 내로 연락을 주마."

교주가 꼬리를 내렸다.

다만, 눈빛에 독기를 품은 것이 아주 단단히 원한을 품은 느낌이었다.

"그럼 교주님,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

에릭은 그런 교주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어 줬다.

'아직 성물이 많이 남았습니다.'

에릭의 성물 상점에는 살 수 있는 성물이 많다.

'단골고객이 되시겠군.'

교주가 한을 품든 뭘 하든 결국 에릭이 가져온 성물을 사야 한다는 의미였다.

* * *

"크하하하하-!"

교주가 떠나자 황제가 폭소를 터트렸다.

'지엄한 황제의 체통은 어디 갔는지.'

에릭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멍-해진 눈빛으로 교황 성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달싹거리는 것이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어 보였다.

'맵구나.'

교황은 다시금 에릭이 리페로제의 제자임을 확신했다.

그녀보다 조금 더 매운 맛이었다.

"흐하하하하하-!"

무려, 저 황제를 폭소하게 만들지 않았나?

리페로제는 그냥 웃음 정도였으니, 미친 짓으로는 에릭이 한 수 앞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정말 빙의자들의 상점에 이걸 팔 수 있단 말이더냐?"

웃음을 뚝- 멈추고 황제가 묻자.

"성물을 가까이 가져가는 순간 빙의자들은 타 버릴 것입니다."

에릭이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답했다.

즉, 거짓말이라는 의미였다.

"흐하하하하하-!"

다시 황제가 폭소했고 교황은 아연실색했다.

'이놈이.... 사기를 쳐?'

아무리 관계가 좋지 못한 알만정교회라 해도, 거짓으로 가치를 부풀려?

교황이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던 차에.

"다만, 타 버리지 않는다면 10억에 팔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에릭이 교황을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애매하군.

교황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스승님이구나.'

에릭은 스승의 푸념을 들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같이 교황의 흉을 보던 스승이었다.

"거짓말 좀 한다고 신성력이 주는 것도 아닌데, 교황은 그런 거에 예민해."

에릭은 강하다.

한데, 아직은 약했다.

제게 순례자의 징표를 새겨 준 교황의 신성력을 느꼈을 때.

알현실에서 로얄가드와 검을 맞댔을 때.

분명히 최강자에는 못 미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우. 그래서 뭘 원하는가?"

웃음을 멈춘 황제가 물었다.

에릭은 더 강해질 수단을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4티어로 가면 터져 죽을 테니.'

당장 필요한 것은 '스킬' 혹은 '성물'이다.

현질을 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서 '억 단위'의 스킬과 성물을 사야 했다.

"얻은 돈의 반과 교단의 성물을 온전하게 돌려받고 싶습니다."

에릭은 담담하게 그리 말했고.

"돈?"

황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눈은 교황을 향해 있었다.

"아스티아 교단에서 돈을 바라는 건 또 처음 보는군."

황제는 기꺼웠다.

그 순례자 리페로제는 '무력'에 관심이 있었다.

북부 대공과 호적수였던 그녀는 대공을 이긴 직후 제국을 떠났었다.

한데, 그녀의 제자는 돈을 원한다라.

"십억을 다 주도록 하지."

제국의 주인에게 돈이란.

가장 쉽게 줄 수 있는 것이다.

"흐음."

황제의 고개가 조금 더 기울었다.

분명 에릭은 고개를 조아린 상태인데, 무언가 바라는 것이 더 있어 보였다.

등판이 들썩이는 것이, 그래 보였다.

"무언가 더 원하는 게 있는가?"

"혹시...."

에릭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에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광소였다.

* * *

"리페로제가 제대로 된 교육을 했을 리가 없지."

황궁을 떠나 르웰의 교회를 찾은 에릭은 교황과 일대일 면담을 시작했다.

"스승님을 욕보이시는 건-."

"틀린 말인가?"

에릭은 스승의 교육을 떠올렸다.

갑작스레 분쟁 지대에 던져 두고 전쟁을 끝내 보라고 했다거나.

흑마법사 소굴에 쳐들어가 누가 더 많이 죽이나 내기를 한다거나.

흠.

"그렇지만,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셨습니다."

"그렇겠지."

교황은 이래저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꾹- 눌렀다.

'아버지께 묻나이다.'

대답을 잘해 주시는 아스티아 신께서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교황은 이를 '참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순례자 에릭, 이번에는 너의 뜻에 어울려 줬지만. 매번 이렇게 될 거라 생각지는 말거라."

참긴 참았는데, 할 말은 했다.

무려 교황을 병풍처럼 써먹었는데, 그대로 가는 것도 웃기는 꼴이었다.

'약속은 지켰으니 장단은 맞춰 줬다만....'

결과적으로 교단의 성물을 되찾고 5억이라는 큰 돈을 얻었다.

남은 5억은 에릭이 가져가겠다는데, 교황은 거기까지 허락해 줬다.

"교황 성하의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에릭은 그것이 엄청난 특혜이자 배려임을 알았다.

"하면, 다음에는 기도회에서 보겠구나."

교황이 한가한 자리는 아니다.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은 대부분의 시간을 마경의 몬스터를 잡거나, 국가의 범위가 닿지 않는 곳의 사람들을 구원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교황은 재빠르게 떠나려 했다.

키이잉.

교황이 허공을 가르며 전이의 기적을 행하려던 차에.

"교황 성하, 혹시 개벽의 검을 아십니까?"

에릭이 물었다.

"그, 그것을 네가 어찌 아는 게냐?"

교황의 지고한 신성력이 흐트러졌다.

그만큼 놀랐다는 말이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어.'

에릭은 교황의 반응을 보며, 사야 할 스킬을 정했다.

스승이 숨긴 성물과 이름을 공유하는 스킬.

[개벽: 250,000,000골드]

21화 개벽(開闢) (1)

"리페로제가 찾으러 간 교단의 성물, 그것이 바로 개벽의 검이다. 태초부터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교단의 성물로-."

세상에 대륙이 태어나고 마나와 오러, 신성력이 뒤섞여 있던 시절.

자연의 섭리에 따라 대기에 마나가 자리 잡았듯이 악(惡) 또한 자연스레 나타났다.

"성서 첫 장의 내용이지."

악(惡)한 기운은 미궁이라는 형태로 세상에 등장했다.

미궁은 곧 몬스터를 낳았고 고대의 인류는 몬스터에 대항하기 위해 세력을 구축했다.

"그들은 무를 쌓고 기술을 만들어 몬스터와 싸웠다. 그럼에도 늘 인류는 위태로웠지."

교황은 덤덤하게 에릭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었다.

"미궁에서 몬스터가 태어나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누구도 미궁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본색원(拔本塞源)은커녕, 그 근원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몬스터가 대륙을 차지할 지경이 되었지. 인류가 설 땅은 더욱이 좁아졌다."

그때.

세상에 신이 강림했다.

"세 종교의 신은 성물을 사용해 미궁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중 아스티아 신이 사용했다는 검이 바로, 개벽(開闢)이다.

말 그대로 개벽의 검은 공간을 뒤틀고 세계의 순리를 뒤바꾸는 기적을 일으켰다.

"고대에는 국가라는 개념이 없었다. 하나 신들의 기적이 국가의 틀을 마련해 줬지."

신들이 열어 둔 미궁의 입구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악한 미궁은 달콤한 보상을 함께 주었고 인류는 미궁을 통해 무력을 키워 나갔다.

"그렇게 강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지금의 국가다."

거기까지 교황의 설명이 이어지자, 에릭은 감탄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의 입구를 열었다는 검과 개벽이라는 스킬.'

실로 만족스러운 이야기였다.

"리페로제.... 그녀가 괜한 고생을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구나."

다만, 문제가 하나 남았다.

교황이 장황한 고대 인류사를 읊은 이유는 바로, '개벽'이라는 말 때문이다.

교황이 사라졌다고 여겼던 교단의 성물 [개벽의 검]은 에릭의 손에 있다.

사실 리페로제가 떠난 것은 다른 이유였고.

'이걸 지금 자백해?'

스승이 봉인식으로 단단히 기척을 가려 두었지만, 언젠가는 성물의 힘이 봉인식을 부수고 삐져나올 터였다.

에릭은 교황을 바라보았다.

정직(正直)에 대가가 따들지 가늠했다.

"성물, 아버지께서 남기신 물건보다 아버지의 자식이 더욱 중하거늘...."

노인의 모습으로 교황은 울고 있었다.

우수에 찬 얼굴을 보아하니, 결코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말했다가는....

'들키면 죽는다.'

저만한 슬픔과 그리움이다.

그게 사실은 도둑질과 기만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교황의 분노를 마주할 터였다.

"교황이 화가 나면 어떻게 되냐고?"

에릭은 오래전 스승과 나눴던 문답을 떠올려 봤다.

"음.... 대륙 남쪽 끝자락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는데, 나 때문에 화가 난 교황이 마경을 통째로 불태우면서 생긴 구멍이란다."

그때 그 구멍의 중심에는 리페로제가 서 있었다고 들었다.

그녀는 어마어마한 강자다.

그래서 살았지만.

'나는 아직 부족하겠지.'

에릭은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절대 숨겨야겠군.'

에릭이 긴장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씹었다.

"너 또한 스승이 걱정되는구나."

그 모습에, 교황이 인자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머리 두 개만큼 커진 교황은 에릭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직이 기도문을 읊조렸다.

"아버지께서 함께하시니, 리페로제의 앞길에 위협은 없을지어다."

저기에 대고 어떻게 사실을 밝히겠는가?

'그냥 날름해야겠군.'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추후 스승을 찾게 된다면 그때는 또 모르겠지만....

줄줄이 이어지는 기도문을 듣자 하니, 당장은 시기상조였다.

에릭이 생각을 마치자.

"-하여, 아버지의 축복이 임하였으니. 리페로제 아스티아 또한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안온한 삶을 이어 나갈지어다."

때마침 교황의 기도도 끝이 났다.

"아직 어린 나이인 것을, 내 배려가 없었구나. 리페로제의 걱정은 말거라."

"감사합니다."

에릭은 고개를 조아렸다.

교황은 에릭의 머리에 얹었던 손을 뗐다.

그가 손을 휘젓자 허공이 쩍- 하고는 갈라졌다.

"슬슬 가 봐야겠구나."

아이처럼 작아진 교황이 찬연한 금빛 신성에 몸을 넣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개벽이라는 것은 비단 성물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오래전, 신께서 직접 행하시던 힘을 그리 부르기도 했지. 나는 믿는다. 분명, 언젠가는 그 힘을 잇는 자가 나타날 게야."

―Ep. 5 개벽(開闢)

교황이 떠난 예배실에서 에릭은 허공을 응시했다.

직업 전용 상점창이 눈앞에 가득 찼다.

[별부름: 100,000,000골드]

[광휘의 날개: 555,555,555골드]

[개벽: 250,000,000골드]

에릭은 그중 탐나는 스킬 세 개를 나열했다.

선택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성기사가 쓰는 메테오.'

[별부름]이라는 이름은 최고위 마법사들이나 쓴다는 메테오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일종의 광역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다음은.

'이건 딱 봐도 룩딸용 스킬이겠지.'

[광휘의 날개]는 이름부터가 멋들어지는 이펙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신성의 날개를 펼친 성기사?

'참을 수 없....'

크흠.

일순 유혹이 들었지만.

'역시 개벽부터 사는 게 맞아.'

에릭은 우선순위를 기억해 냈다.

아무런 설명 없이 스킬 이름들만 나열되어 있는 상황에서, 선택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

'대략 효과를 아는 걸 사야지.'

무려 신이 미궁을 열었다는 기술의 이름이 [개벽] 아니던가?

여기서 다른 스킬을 사는 건 머저리나 할 법한 일이었고.

에릭은 머저리가 아니다.

"교황 성하의 설명을 들어 보니, 개벽이란 스킬이 좋아 보이더군요."

스킬을 고른 에릭이 텅 빈 예배당에서 입을 열었다.

"어어?"

요염한 자태로 허리를 잘록이며 다가오던 르웰이 섬칫 놀랐다.

길게 내려온 금발이 흔들렸다.

분명 [개성]을 한껏 발휘해 기척을 지웠는데....

"에릭, 어떻게?"

르웰의 목소리를 향해 에릭이 시선을 돌렸다.

예배실 단상의 좌우로는 기다란 의자들이 보였고 그 중앙에 르웰이 서 있었다.

커다란 에릭이 의자들 사이로 난 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그렇게 르웰의 앞에 다가섰다.

그가 말하기를.

"향수 냄새가 짙습니다."

에릭의 말에 르웰이 어깨를 들썩였다.

"하! 어째 향수를 왜 선물했나 했더니!"

며칠 전 에릭이 선물을 줬다.

뜬금없이 웬 향수?

이런 생각이었는데, 그 나름의 이유가 있던 모양이다.

'저 덩치로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네.'

에릭은 오우거 같은 덩치와 달리 펜릴과 비슷한 영리함을 가졌다.

자신의 기척을 못 잡으니까 바로 대비책을 준비한 걸 봐라.

르웰이 혀를 내두르고 있자니, 에릭이 입을 열었다.

"교황 성하께서 가시자마자 오신 걸 보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요?"

"그래, 에릭! 그 스킬이란 건 그렇다 치고...."

그제야 르웰은 본론을 떠올렸다.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그 검은 어떡할 생각이니?"

단호한 어조로 물었다.

그 검은 리페로제가 훔쳐 간 교단의 성물을 의미할 터였다.

에릭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크흠, 흠. 스승의 선물을 제자가 써야겠지요."

"감당할 수 있겠니?"

"감당될 때까지 돈을 많이 벌어 볼 생각입니다."

"...그래, 뭐 들킨다고 죽기야 하겠어. 교황 성하께서 자비로운 걸로 유명하신대."

말을 마친 르웰은 고아원과 연결된 통로로 종종- 걸었다.

'괜히 걱정만 끼쳐 드렸군.'

에릭은 어지간해서는 르웰에게 비밀을 만들지 않는다. 특히 스승과 관련된 것은 더욱 그랬다.

에릭이 내심 미안함을 느끼며 르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순간.

"에릭."

르웰이 뚝-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근데, 교황 성하 눈 밖에 나면 죽을 때까지 마경에서 청소부로 살게 된다더라고."

섬뜩한 말을 뱉고는 르웰은 그대로 통로를 지나쳐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마경의 청소부?'

미궁이 사라질 때까지 몬스터가 터져 나오는 구멍이 마경이다.

여길 청소하라는 말은, 미궁이 사라질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고.

그럴 바엔....

'그냥 죽이는 게 더 자비롭겠군.'

남겨진 에릭은 굳건하게 주먹을 쥐었다.

'절대 강해진다.'

르웰이 저런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우려가 깊다는 의미일 터.

대격변 패치.

빙의자 수의 증가.

안 그래도 강해질 이유는 차고 넘치는 상황이다.

거기에 이유 하나가 추가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660,300,050]

에릭은 상태창에 떠오른 잔여금을 확인했다.

황제에게 받은 3억, 그리고 추가금 5억과 에리카가 돌려준 시스템 상점의 아이템을 되팔았다.

성물을 사는 데, 1억 5천이 들었으니....

'그래도 돈은 차고 넘치는군.'

힘겹게 돈을 벌던 과거와는 다르다.

버는 돈의 액수가 차원이 달라졌다.

에릭은 주저 없이 [개벽] 스킬의 구매 버튼에 손을 얹었다.

그 직후.

휘오오오오오-

에릭의 거대한 몸 위로 웅혼한 신성력이 내려앉았다.

그를 중심으로 찬란한 신성의 빛이 회오리처럼 몰아쳤다.

그 위력이 엄청났다.

'미리 신성을 둘러 공간을 봉인해 뒀는데....'

쩌저적.

신성력째로 공간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좁은 예배당 안에서 황금빛 소용돌이가 일었다.

숫제 폭풍처럼 몰아쳤다.

콰직-쿠웅-!

신성력은 거칠었다.

예배실의 의자와 단상, 벽에 달린 촛대 할 것 없이 모두 산산이 부수고 나서야, 에릭의 몸으로 깃들었다.

[보유 스킬: 개벽(開闢)]

에릭의 텅 빈 스킬 칸에 하나의 문장이 새겨졌다.

그리고.

"에, 에릭?"

박살 난 교회를 바라보는 르웰이 보였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아하니, 고아원으로 향했다가 굉음을 듣고 급하게 뛰어온 느낌이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황망한 듯 개박살 난 교회를 바라보던 르웰, 그녀를 향해 에릭이 말하기를.

"르웰 사제님, 스킬 구경 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뻥 뚫린 교회 지붕으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그 아래에는 폐허 사이에서 찬란한 금빛을 내뿜는 에릭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에 르웰은 뒷목을 잡았다.

"-이이익!!! 이 정신 나간!"

* * *

르웰의 비명에 웬 절름발이가 교회를 찾아왔다.

반쯤 폐허처럼 변한 교회와 그 옆에 굳건히 서 있는 고아원을 보며 절름발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미친! 에리이이익-!! 흠, 흠. 오늘은 무료 배식이 없는 날인데요."

잔뜩 성을 내던 르웰이 교회 입구에 선 사내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평이한 어조였다.

"그, 그게...."

한쪽 얼굴이 흉터로 가득한 사내가 움찔거리며 에릭을 바라봤다.

'보스가 있는데 교회가 박살 나?'

잭슨은 이상 현상이 있기 전까지는 교회에 접근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교회가 무너진 건 이상 현상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보스가 있지?

"후우."

에릭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잭슨, 오러를 둘러라."

"예, 보스."

혼날 일은 아닌 모양이군.

익숙한 명령에 잭슨은 안도했다.

"...에릭?"

르웰은 얼떨떨했다.

약 일주일 전부터 나타난 거지가, 에릭과 아는 사이라고?

분명 에릭이 미궁에 들어간 뒤에, 나타난 거지였다.

직접 밥도 챙겨 주고, 말벗도 해 줬던 기억이 선명한데....

"제가 없는 사이에 교회를 지켜 달라고 부탁한.... 흠. 용병 같은 놈입니다."

박살난 예배당으로 화가 났던 르웰인데, 뜬금없는 상황에 머리가 식었다.

보이는 광경이 그러했다.

"저, 저거 소드마스터나 한다는 기막 아니니?"

웬 거지꼴의 절름발이가 투박한 철검을 휘두르더니 교회 위로 푸른색 돔이 생겨나는 게 아닌가?

흔히 소드마스터의 기막(氣膜)으로 유명한 기술이었다.

"제 수하입니다."

"그 두식이라는 깡패처럼?"

"...흠, 예. 비슷합니다."

르웰은 조금 놀랐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고작 열 살 때, 제3구역에 교회와 고아원 부지를 샀다며 이사를 종용하던 것이 에릭이다.

'비슷한 짓이라고 봐야겠지.'

르웰은 에릭이 에릭 했구나.

이렇게 타협했다.

아스티아 신마저 그냥 받아들이라고 계시를 내렸는데.

뭘 어쩌겠어?

"보스, 한 시간은 버틸 수 있습니다."

쿠우웅.

어느새 교회의 터를 오러의 기막이 완벽하게 뒤덮었다.

에릭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검집도 없고 검도 없는데.

키이이잉-

신성으로 빚어낸 칼날이 그의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성물을 꺼냈다가는 난리가 나겠지.'

[개벽의 검]으로 [개벽] 스킬을 사용하는 것은 잠시 미뤄야겠지만....

당장 스킬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무려 15년 만에 얻어 낸 스킬.'

걸레짝 같은 상태창으로 꾸역꾸역 살아온 대가였다.

스킬을 시전하기 전에, 에릭이 르웰의 귓가에 속삭였다.

"스킬 이름은 개벽이랍니다."

그러고는 교회의 폐허를 향해 검을 겨눴다.

르웰은 일순 움찔- 하며 말리려 했으나, 검에 서린 기운을 보고는 참아 냈다.

에릭이 신성력으로 만든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는데.

무게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지고한 신성력이구나.'

휘몰아치는 기운이 그러했다.

웅혼하면서 강대했고.

위대하다는 느낌마저 풍겨졌다.

마치.

'계시를 받았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야.'

진짜 신의 힘처럼 느껴졌다.

'아스티아 교단의 중검술.'

잭슨 역시, 에릭에게 뿜어져 나온 힘을 감지했다.

괴물 같은 검 솜씨를 지닌 에릭이다. 그런 그가 처음 느껴 보는 신묘한 기운을 풍겨 왔다.

소드마스터로서 흥미가 일었다.

'보스의 고유 기술인가?'

고작 열다섯에 검술을 창안했단 말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잭슨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검을 비스듬히 겨누고 왼쪽 다리를 굽혀 중심을 잡는 것까지는 흔한 중검술의 자세였지만, 무언가 미묘하게 달랐다.

빙의자들의 스킬 모션과도 비슷한 느낌.

'보스가 빙의자일 리가....'

저 힘은 신성이었다.

빙의자들은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지고한 힘.

잭슨이 에릭을 살피고 있자니.

스윽.

에릭의 검 끝이 서서히 움직였다.

하늘 높이 올라간 검날이 사선으로 내리치고.

쩌어어어엉――!!!

결코 검으로 낼 수 없는 굉음이 들려왔다.

분명 괴이한 소음인데, 이상하리만치 안정감이 들었다.

하나, 그 결과물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이, 이게 무슨-!"

소드마스터 잭슨은 경악했다.

에릭은 검을 쓰는 성기사다.

즉, 오러와 신성력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결국 검술을 다루는 검사(劍士)라는 의미다.

그 전제가 오늘 깨졌다.

'저게 검술은 맞나? 아니, 그 전에 사람이 낼 수 있는 힘인가?'

잭슨의 입이 쩍- 벌어졌다.

에릭의 검은 말 그대로 공간을 갈랐다.

[개벽(開闢)]

검의 궤적대로 허공이 일그러져 금빛 신성을 내뿜었고.

무너진 교회의 잔해들이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에릭, 지, 지금...."

허공에 그어진 검흔(劍痕)을 따라, 아스티아 교단의 조각상이 빨려 들어갔다.

"아, 안 돼! 우리 교회의 상징이!"

르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에, 에릭은 기꺼이 웃었다.

"개벽이란 결국 공간을 지배하는 힘이군요."

22화 개벽(開闢) (2)

"...아아, 내 교회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르웰이 교회가 있던 장소를 바라봤다.

눈을 비벼 봐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릭은 웃으며 르웰을 바라봤다.

"르웰 사제님, 폐허를 청소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개벽] 스킬이 끝나고 남겨진 것은 텅 빈 공터였다.

에릭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르웰과 소드마스터 잭슨은 멀쩡했지만, 스킬 범위 내에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마치 블랙홀 같군.'

[개벽]은 공간을 찢는다.

찢어진 공간에는 아주 무거운 신성력이 들어 있고.

그 힘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였다.

"내, 내가... 처음 사제가 되면서 받은 조각상이.... 으윽!"

그 말인즉슨.

르웰의 교회가 터만 남긴 채 사라졌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르웰이 교회의 사제로 임명받으면서 주어졌던 아스티아 교단의 조각상도 포함되었다.

"아, 아이들은!"

교회가 사라진 위력이었다.

르웰은 놀라서 교회와 연결된 고아원을 바라봤는데....

"와, 에릭 형 뭘 한 거지?"

"멋있어!"

옆에 놓인 거대한 고아원만 멀쩡한 모습으로 남겨졌다.

정남향을 향한 아이들의 방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어쩌면...."

거대한 소란에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났다.

모두가 에릭이 일으킨 기적을 목도했다.

뒤늦게 일어난 아이들 또한 대단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손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오빠가 설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달라졌으니까.

거대하고 웅장한 석조 조각들이 자리한 교회의 지붕은 온데간데없었다.

텅 빈 공터에 주저앉은 르웰과 그 옆에 서 있는 거대한 에릭이 보이는 전부.

아이들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에릭 혀어엉-! 또 새로운 건물을 지어 주는 거야?"

에릭이 무언가를 부술 때는 더 좋은 것으로 대체되곤 했다.

아이들이 자라나며 경험한 일들이다.

"이제 더러운 헛간에서 살 필요는 없다."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은 모두 에릭과 르웰의 손에 구해졌다.

제5구역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벌던 범죄 조직을 소탕했고, 에릭은 구해진 아이들에게 보금자리를 주었다.

"교회가 너무 좁구나. 고아원이라는 걸 지어 주마."

교회에서 지내던 아이들의 수가 늘어나자 에릭은 곧바로 이사를 준비했다.

"다섯 살이 넘었으니, 각자의 공간이란 걸 가져야겠지."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다.

살갑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에릭이 그들을 위한다는 것만큼은 모두가 알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이번에는 용 모양 조각상을 달까?"

"나는 개인 예배실을 지어 달라 해야겠다!"

에릭은 다양한 경험을 강조하며, 아이들이 건축 과정에 함께 참여하도록 도왔다.

방을 꾸미는 것 또한 개인의 취미를 고려했고.

"재밌겠다!"

자신들을 불편해하면서도.

누구보다 잘 챙겨 주는 에릭이다.

그런 에릭이 고개를 들어 고아원 창문을 바라봤다.

창문 앞으로 작은 머리통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잘 시간이 지났다."

엄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다정했다.

"조만간 더 크고 웅장한 교회를 지어 주마. 사제가 된다면, 곧 너희의 일터가 될 테지."

그러니까.

"푹 자라. 키 안 큰다."

2미터가 훌쩍 넘는 에릭이 그리 말하니까 이상했다.

아이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창문을 닫았다.

저만큼 커지는 건 좀....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는데.

"하하, 아이들이 참 잘 자랐습니다."

그 말에 에릭은 기쁘게 웃으며 르웰을 바라봤다.

바로 옆에서 르웰은 뒷목을 잡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내 신앙의 징표가...."

순박한 아이들과 다르게 르웰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교단의 상징도 순금에 보석을 박아서 새로 지어 드리겠습니다."

"당연한 소리를...."

"거기에 새로 들어설 교회에는 고아원에 준하는 방어 마법까지 둘러 두겠습니다."

르웰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그럼 지금까지 교회에 아무런 보호 장치가 없었다는 거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는 그냥 기도하는 곳이 아니었습니까?"

"그, 그게 무슨-."

"돈은 효율적으로 써야지요."

르웰은 에릭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냥 기도하는 곳이 십일조를 받는 장소로 변했다는 의미네.'

이 미친 에릭.

돈벌이가 안 되던, 기존의 교회 건축에는 자재값을 아꼈다는 의미였다.

르웰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인내심을 되뇌고 있을 때.

"걱정 마시죠."

에릭이 안도의 말을 건넸다.

환한 미소로 보아하니, 확실하게 책임지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순금 보석 십자가는 조금 보고 싶을지도?'

고민하는 르웰을 앞에 두고 에릭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잭슨에게 건축을 맡겨야겠군.'

이참에 더 크고 웅장한 모습으로 교회를 지을 생각이다.

마침 내일은 미궁이 열리는 날이 아니던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니....

에릭은 지난 한 주를 회상했다.

'고작 일주일 사이에 엄청난 일들이 있었군.'

르웰에게 집적거리던 공작을 쳐 내고, 황제에게 선금으로 3억을 받아 냈다.

그걸로 성물을 사서, 황제의 중개를 통해 알만정교회에 팔았다.

일어난 일만 보면, 수년에 거쳐 진행될 법한 규모였다.

'공작, 황제, 교황 성하, 알만교 교주까지 만났군.'

하나같이 대단한 존재들이었다.

힘을 드러낸 이후로 삶의 밀도가 달라졌음이 실감 났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에릭, 후우. 너무 무리하지 마."

르웰이 생각을 정리했다.

아주 산뜻한 말투로 보아, 화는 다 풀린 모양이었다.

에릭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르웰은 잘록한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는데, 시선을 낮추니 손목에 걸린 작은 명품 가방이 보였다.

'선물해 주신 건 꼭 써 주시는구나.'

향수도 마찬가지겠지.

감사하여 고개를 숙인 에릭과 달리, 르웰은 반쯤 체념한 상태였다.

'에릭이 에릭 한 거야.'

아버지, 아스티아 신의 계시가 실로 옳았다.

그런 르웰의 심정도 모르고 에릭이 대뜸 작별 인사를 고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사제님도 주무시지요."

"그래.... 내일이면 다시 미궁에 들어가겠구나."

르웰이 떠날 때까지 에릭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르웰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에릭은 예배당 구석에서 존재감을 죽이고 있던 한 사내를 바라봤다.

'저게 정녕 보스인가?'

잭슨이 넋이 나간 채 흉터를 꾸물거렸다.

쩍-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렀다.

'보스가 쌍둥이인가?'

제5구역, 빈민가의 암흑 조직을 전원 학살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낸 보스 마르코.

잭슨이 아는 에릭과 지금의 에릭은 너무나도 괴리감이 컸다.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에릭이 잭슨을 향해 다가섰다.

흉터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잭슨, 그 반지는 내가 미궁에 들어간 뒤에 경매에 올리고, 값은 한 열 배는 받아라."

늘 그렇듯 예민한 어조로 읊조리는 살벌하고 단호한 명령에 잭슨은 안도했다.

"예, 보스."

* * *

빙의자 수용소에서의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원형으로 둘러진 철창들 사이에서 거대한 성기사가 찬란한 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휘오오오오오.

몰아치는 신성의 향연에 철창 속의 빙의자들은 겁에 질렸다.

그들은 2평 남짓한 좁은 감옥 구석으로 몸을 욱여넣어, 최대한 신성의 빛과 멀어지려 들었다.

겁먹은 빙의자들을 향해 에릭이 말하기를.

"박창호, 니시다 료, 강풍호. 이번 주도 너희 셋이 미궁에 들어간다."

드르르륵. 철컹-!

호명된 빙의자들의 철창이 개방되었다.

유일한 동양인인 박창호가 레이피어를 들고 당당히 앞으로 나섰다. 그 뒤를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강풍호가 따랐다.

니시다 료는 뒤뚱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내가 왜!'

억울했다.

그러나 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성직자가 이런 사기를 쳐?'

니시다 료는 참을 수 없는 비통함을 느꼈다.

분명 에릭이 말하기를 이번 주에는 다른 빙의자를 데려간다고 했는데....

뻐억-!

"마-! 얼굴 안 푸냐?"

잔뜩 찡그린 니시다 료의 머리 위로 투박한 나무 몽둥이가 내리쳐졌다.

"죄, 죄송합니다."

니시다 료는 눈을 질끈 감고 깡패를 향해 고개 숙였다.

문신과 형광 반바지가 없다 뿐이지 숫제 초롱이랑 다를 게 없는 존재였다.

"두식아, 애를 왜 패고 그러냐?"

"거, 형님. 이 빙의자 놈들 얼굴 좀 보수. 누가 보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진 줄 알겠수다."

자세히 보니, 박창호와 강풍호도 조금 불편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에릭은 빙의자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억울하긴 하겠지.'

어릴 적 미궁 속 몬스터의 위압으로 공포를 느껴 본 에릭이다.

그들에게는 미궁이 지옥처럼 느껴질 터였다.

'그런데 어쩔 거야?'

에릭은 빙의자 관리국장이요, 지고한 아스티아 교단의 순례자다.

"불만이 있다면, 아버지의 품으로 보내 주마."

까라면 까야지.

어딜.

"아닙니다! 불만 없습니다!"

군기가 잘 잡힌 빙의자들을 보고 나서야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눈을 떼면 미친 짓을 벌여 대니....'

빙의자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에릭이다.

빙의자 수용소로 오기 전에 르웰에게 듣기로, 옆 나라 가르시안 왕국에서 대규모 부동산 사기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 범인은 빙의자였다.

영주를 속여서 전세금이라는 걸 만들고, 전세금을 돌려 가며 엄청난 재산 피해를 만들었다니....

'여기가 제국이라서 다행이군.'

제국은 왕국과 다르다.

영지법 위에 제국법이 존재한다.

영주란 황제의 위임 하에 영지를 관리하는 대리인에 불과한,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자리다.

'타국은 망했다고 봐야겠네.'

하나, 왕국의 영주란 영지 내에서만큼은 왕처럼 군림하는 존재로.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제국과 달리 빙의자에 더욱 취약할 터였다.

국교가 있는 다른 두 왕국은 낫겠지만....

"거, 형님 가르시안 왕국 얘기 들었수?"

마침 장두식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에릭에게 저렇게 물었고.

에릭은 끄덕였다.

"빙의자들을 보니, 그 생각이 먼저 들었수다. 놈들의 수가 너무 늘어서.... 왕국들도 제국처럼 써먹으려 들 텐데."

"그래서?"

"아니, 그게 관리가 되겠수?"

빙의자를 보면서 빙의자들이 친 사고를 떠올리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대제국이 하는 짓을 왕국들이 따라 하는 것도 당연할 터.

'사람 생각이 참.'

적어도 제국에서 만큼은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된다.

부동산 사기?

어딜.

쿠웅-!

에릭이 발을 구르자, 사방으로 신성의 기운이 몰아쳤다.

"아그들아-! 집하아압-!!"

장두식의 외침까지 이어지자, 빙의자들은 순식간에 몸을 움직였다.

철창 앞으로 모여, 각잡힌 자세로 차렷 했다.

모두의 시선을 느끼며 에릭이 입을 열었다.

"제국의 모든 빙의자들은 빙의자 관리국의 관리를 받아야 하며, 그렇지 못한 빙의자들은 즉결 처형 대상이다."

에릭은 목소리를 내리깔며 강렬한 어조로 제국법을 읊었다.

"금주부터 개정된 제국법이다."

황제가 굳건하다는 전제하에, 제국에 위협은 없을 것이다.

에릭은 그렇게 생각한다.

'지엄한 황실과 귀족의 의무가 있으니까.'

* * *

제3구역의 미궁광장.

서슬 퍼런 단두대가 반짝이는 단상 위에서 에릭은 간단한 출병식을 진행했다.

처음과 달리, 분위기는 가벼웠다.

"니시다 료, 미궁 1층에 또 그런 공간이 있나?"

"그, 그런 공간요?"

처음에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니시다 료였다.

툭-툭-

장두식이 몽둥이로 자신의 손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박창호가 니시다 료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아, 보물 상자랑 몬스터룸이 같이 있는 장소 말씀이시군요."

"대답은 짧고 간결하게."

"아, 압니다!"

아무리 쓸모가 있다 해도 에릭의 입장에서 니시다 료만큼은 내키지 않는 존재였다.

'저걸 태워 버릴 수도 없고.'

금지어 호감작을 당사자인 르웰 앞에서 지껄인 것은 그만한 분노를 일으켰다.

그러나 에릭은 참아 냈다.

"몇 층이지?"

"1층에 하나 더 있습니다!"

히든피스.

순수 레벨링을 즐기던 그와 달리, 니시다 료는 게임 내에 숨겨진 기믹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으니까.

'다른 놈들은 니시다 료에 못 미친다.'

로얄가드의 협력으로, 빙의자들을 조사해 본 에릭이다.

제국 정보부로부터 건네받은 자료 또한 그랬고.

아직까지는 니시다 료의 대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얘기하지."

에릭은 빙의자들을 이끌고 미궁 입구로 향했다.

광장 끝에는 낡은 벽돌 계단이 보였고 계단 앞으로 기다란 줄이 늘어 서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그에 장두식이 소리쳤다.

"아그들아-!"

고작 2회 차 미궁인데.

미궁 입장을 기다리던 모든 인파가 갈라졌다.

"거, 뭐가 이렇게 심심해."

인파 사이로 생긴 길을 걸으며, 장두식이 중얼거렸다.

사방이 고요했다.

소문에 민감한 모험가 길드가 이미 에릭에 관한 정보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황제와 교황의 총애를 받는 놈.'

마냥 우호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하나, 에릭의 입지만큼은 실감하는 모험가들이었다.

"충-!"

일사천리로 미궁입구에 도달하자, 병사들이 경례를 올리며 길을 터 줬고.

에릭은 가벼이 미궁으로 향하는 낡은 나무 문 위로 손을 얹었다.

끼이이익.

스산한 소음과 함께 어두운 미궁이 드러났다.

에릭은 성큼성큼 앞장섰다.

빙의자들이 그 뒤를 따랐고 몽둥이를 든 장 두식이 최후열을 맡았다.

―인간 다섯, 미궁의 시련을 받는다.

미궁이 환영 인사를 건넸다.

에릭의 일행은 묵묵히 어둠 속을 걸었다.

쿠웅-쿠웅-쿵!

진동과 함께 어둠 속에서 시작 지점인 동굴이 나타났다.

벽면에 달린 횃불이 일렁이며, 여섯 개의 통로가 보였는데.

'저번처럼 저 깡패가 길을 고르려나?'

빙의자들의 대표자 격인, 박창호는 차분하게 이어질 상황에 대비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졌다.

"이번 탐사의 목적은 두 개다."

길을 고르는 대신 에릭이 빙의자들을 세워 두고 연설을 시작한 것이다.

"하나는 너희들의 레벨링, 빙의자식 표현을 하자면, 쩔을 해 주는 거다."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이네.'

산뜻한 에릭의 얼굴을 보며, 박창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째 목표는 니시다 료가 말했던 1층의 또 다른 히든피스 탐색이다."

둘 다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박창호는 불안했다.

'제육감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런 느낌.

제육감은 절대적이었다.

[개벽(開闢)의 검(儉) - 아스티아 교단의 성물]

키이이잉-!!

에릭이 갑작스레 번뜩이는 성물을 꺼내 들었다.

'흐익-!'

빙의자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데, 에릭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장두식에게 말을 걸었다.

"두식아, 개벽의 검으로 개벽을 쓰면, 어떻게 되겠냐?"

"거, 뭐냐. 죄다 빨아들인다 하지 않았수?"

장두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빙의자들을 바라봤다.

그에 에릭이 말하기를.

"여섯 개의 통로에서 고블린들이 죄다 빨려 오지 않겠냐?"

23화 개벽(開闢) (3)

"거, 뭐냐. 빙의자들 레벨을 올려 준다고 고블린을 끌고 오겠다는 말이요?"

저게 정녕 성직자가 할 수 있는 발상인가?

장두식은 몽둥이로 머리통을 벅벅- 긁으며 에릭을 바라봤다.

빙의자를 키운다고 몬스터를 모아다 줘?

"그게 대체 무슨 말이요? 형님, 그러면 빙의자들도 끌려가 죽지 않겠수?"

끔뻑, 끔뻑.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장두식이 묻자니.

"두식아, 그거 쓸 수 있겠냐?"

에릭이 뜬금없는 질문을 건넸다.

그 말에 장두식이 당황하여, 뒷걸음질 쳤다.

"허어.... 그 마법을 지금 공개해도 되는 거요?"

장두식은 에릭에게 '스킬'에 대한 얘기를 미리 들었다.

'거참, 대체 그 빙의자들의 스킬이 뭐라고 이러는 건지....'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가질 않았던 장두식인데.

"그만한 가치가 있다."

"알겠수다."

에릭의 굳건한 눈빛을 보아하니, 대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놈들한테 신성력을 심어 뒀으니, 이걸 써도 괜찮긴 하겠수다.'

장두식은 에릭과 리페로제의 부탁으로 오래전부터 한 마법을 연구해 왔다.

마탑이나 학파도 없이 장두식 혼자 독자적으로 개발한 탓에,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그렇지만.

"오 분이 한계요."

그 에릭의 부탁에 불가능이란 존재할 수 없는 말이다.

적어도 장두식에게는 그랬다.

"시간이 제법 늘었군, 오 분이면 충분하다."

"잠시 준비 좀 하겠수다."

장두식은 빙의자들을 몽둥이로 툭툭- 밀쳐 줄을 세웠다.

에릭의 뒤에 장두식이 있고 장두식의 등 뒤로 빙의자들이 일렬로 늘어선 모양새가 되었다.

"으라차-!"

그러더니 대뜸 몸을 풀듯이 몽둥이를 들고 체조를 하는 게 아닌가?

빙의자들이 볼 때는 영문도 모르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 것과도 다름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배제하고 이뤄지는 대화에 불안감을 느꼈다.

정체불명의 힘을 쓰겠다는 에릭과 장두식.

'너무들 하네! 기차놀이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강풍호는 심히 불만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

강풍호가 손을 들고 설명을 요구하려던 순간.

턱-.

기다란 손이 강풍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단발을 찰랑이며 강풍호가 뒤를 돌아봤고.

'박...창호?'

미남 펜싱 선수 박창호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설마 나를?'

박창호가 차분한 건 당연했다.

자신이 남자였다는 걸 안 뒤로도, 유일하게 친절함을 유지해 준 남자가 아니던가?

'어어?'

한데, 그 뒤에 선 뚱뚱보마저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는 건 명백한 이상 현상이었다.

'니시다 료까지?'

[즉사 감지] [제육감]

두 사람의 고유 특성을 떠올려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죽을 위협은 아니네. 어쩌면 좋은 일이 있을지도?'

[빠른 성장] 특성을 지닌 강풍호는 감각적인 능력이 조금 떨어졌다.

그래도 상황을 보는 눈은 조금 있었다.

박창호가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고 니시다 료가 드물게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강풍호가 올리려던 손을 서서히 내려놓자.

"잘 참았습니다."

박창호의 칭찬이 들려왔다.

헤헤.

베시시 미소가 새어 나왔는데.

빠악-!

"꺄악-!"

머리 위로 쏜살같이 몽둥이가 내리쳐졌다.

"변태 같지 웃지 마라. 집중하는 데 방해되게."

거참.

원래 남자였다는 놈이 뭐 저리 생글생글 쪼개는 건지.

강풍호의 머리통에서 몽둥이를 회수하며 장두식이 중얼거렸다.

"끄윽."

퉁퉁 부어오른 이마를 문지르며, 강풍호가 볼을 부풀렸다.

고개를 치켜들며 눈물을 흘리려던 차에.

"어?"

몽둥이의 궤적을 따라 일렁이는 푸르른 마력의 선이 보였다.

그 선은 빙의자들의 머리 위를 감싸듯이 이어졌다.

'마법진이구나!'

스킬과 시스템으로 힘을 다루는 빙의자들도 알아볼 만한 크기였다.

몸을 풀듯이 몽둥이를 휘저었을 뿐인데....

'언제 저렇게 크게?'

빙의자들과 장두식을 감싸고 돔 형태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거대한 방패 같았다.

마법진 너머로는 드넓은 에릭의 등이 보였고.

그 등판을 향해 장두식이 몽둥이를 겨눴다.

"형님, 준비됐수다."

그에 에릭이 짙은 웃음을 지었다.

* * *

'스킬을 제대로 써 봐야지.'

르웰의 교회에서 시험했을 때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충동적이기도 했고.

그도 그럴 것이 무려 15년 만에 얻은 스킬이 아니던가?

'신성력으로 위력을 정할 수 있고 최소치는 정해져 있어.'

에릭은 일전의 경험을 떠올리며 감각을 예리하게 세웠다.

[스킬]이 있되, 소모 자원에 대한 정보가 일절 없었다.

그 말인즉슨.

순수하게 경험으로 익혀야 한다는 의미다.

에릭은 [개벽의 검]을 들고 서서 미궁 1계층 동굴의 정중앙으로 걸었다.

스르륵.

검날을 곧게 세우고 정면을 응시했다.

동굴 벽면에 붙은 횃불이 여섯 개의 통로를 비춰 줬다.

그 안으로 보이는 것은 시꺼먼 어둠뿐이었지만.

"고블린이 끌려 오겠지."

에릭은 확신했다.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스킬이 [개벽]이다.

게다가 미궁의 지형지물은 [파괴 불가]였다.

'히든피스라는 예외가 있지만....'

시작 지점에 히든피스는 없을 터였다. 니시다 료의 말이니 아마 사실일 테지.

에릭은 준비를 마쳤다.

"두식아, 시작한다."

우우웅-!

에릭의 등 뒤에서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에릭 또한 신성력을 일으켰다.

키잉-!

짧은 공명음이 동공을 뒤흔들고.

투박한 철검 위로 찬연한 신성이 내려앉았다.

얇고 가는 신성이었다.

'힘을 더 줄여야겠군.'

성물과 신성력의 조합으로 사용하는 힘이니,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터.

빙의자들이 타 죽을 위험이 있었기에, 에릭이 장두식에게 방어 마법까지 지시한 거다.

'이 정도로 신성력을 낮췄으니 충분하겠어.'

에릭은 [개벽] 스킬을 사용했다.

키이잉-!

성물 [개벽의 검]이 신성력에 공명해 사방으로 금빛을 흩뿌렸다.

그러자 검날 위로 아주 무겁고 지고한 신성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최소치의 신성력을 사용했고.

스킬의 위력도 가능한 한 최대한 줄였다.

스윽-.

에릭이 검을 아주 살짝 휘둘렀다.

쩌저저적. 쩌저적-!

그 작은 궤적을 따라 공간이 찢어졌다.

처음보다 찢어진 공간의 크기는 더욱 작았는데....

안으로 보이는 금빛은 찬란하다 못해 눈이 멀어 버릴 지경이었다.

휘오오오오오-!!!

작은 구멍 속으로 강풍이 몰아쳤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바람이었다.

고작 3초가 지났다.

"거, 형님. 1분은커녕, 앞으로 15초가 한계요!"

장두식이 비명을 내질렀다.

손끝에 들린 몽둥이가 덜덜- 떨렸다.

"10초!"

에릭이 있는 동공에는 여섯 갈래 길이 있다.

"5초."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됐는데.

에릭의 미간이 좁혀졌다.

휘오오오오오.

분명 모든 통로에서 엄청난 양의 바람이 빨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 끝에는 고블린이 있을 터.

"2초!"

"1초!"

째앵-!

장두식의 방어막이 깨졌다.

그러고 1초가 지났고.

"흐이이익-!"

"끄아아- 끄악!"

"사, 사, 살려 줘어어-!"

빙의자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치익- 하며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성력이 빙의자들을 뒤덮으려 드는 소리다.

이대로라면 빙의자들이 소멸할지도....

뚝.

갑자기 찢어진 공간이 사라졌다.

사방을 감싼 신성력도 마찬가지.

"후우."

에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등판이 들썩였다.

강제로 스킬을 해제한 탓에 힘이 제법 많이 소모됐다.

"거, 형님. 실패요?"

덜덜 떨리는 몸으로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장두식이 힘겹게 걸어왔다.

에릭은 [1만 골드]를 사용해 바닥난 신성력을 채웠다.

실패냐는 물음에 답하는 대신 에릭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왔다.

"-치료."

건성으로 내뱉는 기도문으로 에릭이 손을 뻗자.

쿠웅-!

장두식의 위로 금빛 기둥이 내리쳤다.

쏟아지는 신성력에 몸을 맡기며 장두식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떻수?"

싸아아-

빛의 폭포요, 신성의 기적이다.

그리고 그 힘은 아주 기뻐 보였다.

에릭이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그가 말하기를.

"안 들리냐?"

"대체, 뭐가 들린다는.... 어?"

귀를 기울여 보니, 들려오는 소리가 선명했다.

약간, 비명 같기도 하고.

괴성 같으면서도....

"크르륵? 진짜 고블린이요?"

"봐라."

2미터를 훌쩍 넘는 크기의 고블린들이 얽히고설켜 통로를 향해 들이닥쳤다.

크르르륵- 크르륵.

"하하, 이거 참 재밌는 능력을 얻었군."

에릭은 그 광경에 웃음을 터트렸다.

* * *

"언제까지 구경만 할 생각이지?"

에릭이 그리 묻는데, 빙의자들은 여전히 고장 나 있었다.

정신이 망가진 것도 아닌데, 미친 사람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눈앞의 불가해한 현상을 바라봤다.

"형님, 빙의자 놈들 영혼이 죄다 빨려 들어간 것 같수다."

장두식이 진지하게 걱정했다.

개소리 말라며 머리통을 때렸어야 할 에릭인데.

'진짜 맛이 가 버렸군.'

이번만큼은 반응이 달랐다.

에릭이 빙의자들의 상태를 뜯어본 결과, 장두식의 말이 상당히 일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어...."

"으으?"

"끄익."

각기 성향에 따라 다른 괴성을 낸다는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정신이 나갔다.

진짜로.

'빙의자는 왜 존재하는 거지?'

박창호는 존재론적인 의문에 빠져 버렸고.

'기껏 여자가 됐는데, 파리만도 못한 신세라니.'

강풍호도 비슷한 걱정에 눈을 질끈 감았으며.

'즉사 감지가 왜 망가졌지?'

니시다 료는 자기의 스킬이 이상해졌다는 의문에 빠졌다.

그만큼 겪은 경험이 충격적이었다.

'신성력을 막아 내는 베리어.'

우선 장두식의 방어 마법.

신성력이란 말 그대로 신의 힘을 빌린 것으로, 마법으로 방어를 한다고 되는 힘이 아니다.

'블랙홀?'

그리고 무슨 성직자가 게임 내 최강자나 쓸 법한 기술을 사용했다.

박창호가 볼 때, [마왕] 같은 존재가 써야 할 법한 힘이었다.

그 결과물이 어떤가?

크르르르륵.

끄르륵.

미궁 1계층의 시작점에는 여섯 개의 통로가 존재한다.

현재, 그 모든 통로가 고블린으로 꽉 막혀 버린 상태다.

'공간을 찢더니....'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고블린을 끌고 오는 기술을 쓰는 성기사라고?

저게 마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빨리 가서 숨통을 끊어라."

박창호는 두려웠다.

고블린들이 주는 위압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즉, 에릭의 힘이 그 이상의 두려움을 줬다는 말이다.

'도저히 못 움직이겠는데....'

정말 두렵고 무서워서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박창호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이곳의 세 빙의자들 중에는 자신이 가장 쓸 만한 존재라는 것을.

한데, 몸이 말을 안 듣네.

그때 에릭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강풍호, 빨리 쏴라."

"예? 아니, 옙!"

강풍호는 재빨리 활을 꺼내 잡았다.

'왜, 나를?'

손끝이 덜덜 떨려 왔지만,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힐끗 올려다보니, 엄청나게 잘생긴 에릭이 보였다.

'절세미남....'

아니, 잘생겼다는 표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신성한.'

이게 더 어울리는 수식어겠지.

그런데도 두려움이 느껴졌다.

마치 사람을 대하지 않는 듯한 말투.

무덤덤하고 무관심한 표정.

쓸모가 없다면 당장 없애 버릴 것 같은 태도였다.

쐐애애액-!

그런 생각을 하며 강풍호는 연신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길 한참이었다.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강풍호가 고개를 치켜 올렸다.

단발머리는 땀에 절어 들러붙었고, 두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대, 대체 얼마나?"

조심스레 강풍호가 묻자니.

"박창호와 레벨을 맞출 때까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답이 들려왔다.

* * *

'개벽은 말도 안 되는 힘이다.'

에릭은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확신했다.

게임과 달리 현실의 미궁의 공략이 더딘 이유는 여럿 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전장이 너무 크다는 거다.

2미터가 넘게 거대해진 고블린처럼, 미궁의 크기 또한 확장되었다.

'막아야 할 범위가 너무 넓지.'

미궁 특정 계층부터는 계층주라 불리는 보스를 공략해야, 미궁의 다음 층을 갈 수 있다.

한데, 계층주를 공격하면 해당 계층의 모든 장소에서 몬스터들이 몰려든다.

'압도적인 딜컷으로 보스를 잡거나, 몬스터를 막아 줄 군대가 필요하지.'

게임 속에서는 맵의 크기도 작고 몬스터의 크기도 작았다.

그렇기에 '길드' 단위로 통제가 가능했는데, 현실에서는 달랐다.

'압도적인 자원이 소모되고 태반은 죽어 버리는....'

세 왕국과 교단의 협력하에 이뤄지는 것이 바로 미궁의 계층주 공략이다.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

엄청한 손해를 감수하고도 크게 얻을 게 없었기 때문에, 제국을 제외한 세 개의 왕국에서 잡음이 발생하던 차였다.

'그래서 황제가 빙의자를 써먹으려는 거고.'

그렇기에 스승 리페로제가 빙의자들을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여기는 거다.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풍호를 바라봤다.

띠링-띵!

[레벨 업]

에릭의 눈에는 강풍호 머리 위로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가 보였다.

빙의자답게 피범벅 된 손이 자동으로 회복되었다.

레벨 업의 효과다.

"이, 이제 다 됐어요오."

게임과 달리 현실의 고블린은 30레벨로 책정되어 있다.

에릭은 확인하지 못한 일이지만, 빙의자들의 말로는 그랬다.

'정말 사실이었군.'

고작 한 시간 만에 29렙인 박창호를 따라잡았다는 말이 아닌가?

'미궁은 빙의자들이 필요한 곳이 맞아.'

확실히 가능성이 느껴졌다.

'빠른 성장 특성으로 2차 전직을 시키고, 특성 가챠를 돌려서 원딜 쪽으로 바꾸는 거지.'

에릭은 박지훈이던 시절을 떠올렸다.

자신이 썼던 공략을 참고해서 빙의자의 육성 방식을 정하고 있자니.

"...그, 저도 박창호보다 레벨이 낮은데요?"

니시다 료가 퉁퉁거리며 물었다.

그에 에릭의 눈매가 활처럼 휘었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대체 왜?'

에릭이 니시다 료를 혐오하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두 빙의자가 고개를 갸웃했는데, 장두식은 달랐다.

'또 저 미소를.... 이번엔 대체 뭘 얻으려 그러는 거요?'

에릭의 뒤틀린 입매가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에릭 형님이니 당연한 일인가?

"니시다 료, 네놈 레벨링은 1계층에 남은 히든피스를 찾고서 시작할 생각이다."

24화 개벽(開闢) (4)

세상만사 다 운이라고.

"그, 그게.... 1계층 두 번째 히든피스는 운이 좋아야 찾을 수 있습니다."

니시다 료의 말에 따르면.

두 번째 히든피스를 찾으려면 운이 필요하다.

"여섯 갈래 길에서 랜덤으로 나오는 특수 지형에서 얻을 수 있는 거라서.... 저, 저도 수없이 반복하면서 알게 된 히든피스인데...."

그것도 엄청나게 운이 좋아야지 가능한 일이란다.

니시다 료가 우물쭈물거리면서 설명을 늘어 두자, 에릭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래서 얼마나 걸렸지?"

"한, 200번 정도 하다가 발견한 거라서요."

"200번?"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좀 있군.

니시다 료의 말을 듣다 보니, 에릭에게 의문이 생겼다.

하여, 묻기를.

"니시다 료, 네놈이 키운 만렙 캐릭터가 한 개라고 하지 않았나?"

"그, 그렇습니다."

추궁하는 에릭의 말에 니시다 료가 뒷걸음질 쳤다.

'또 무슨 말실수를 했나?'

미궁 벽에서는 횃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에 따라 에릭의 그림자도 휘어져서, 마치 악마와도 같은 형상을 취했다.

어두운 동굴에 주황빛 광원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자.

니시다 료는 겁에 질렸다.

"그."

"에? 예? 아니, 넵!"

에릭이 입을 엶과 동시에 니시다 료가 재빠르게 몸을 바로 세웠다.

뱃살이 출렁였다.

평소라면 인상을 찌푸렸을 에릭이 이를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니시다 료, 너는 게임 속에서 미궁 1계층 공략을 하며, 수백 번을 죽었다는 말인가?"

에릭은 니시다 료가 히든피스에 빠삭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죽어 가며 배운 거였군.'

박지훈 시절의 기억을 되새겨 보니, 확실해졌다.

히든피스의 비결은 경험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고.

니시다 료, 그만의 특별함이겠지.

"예. 그, 제가 주먹, 아니, 손이 좀 커서...."

현실에서야 2미터짜리 고블린이 나온다지만....

게임 속에서는 1미터도 안 되는 작은 몬스터고, 미궁의 5계층까지는 튜토리얼과 초보자 구간으로 통한다.

즉, 죽고 싶어도 어지간해서는 죽지 못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200번을 넘게 죽었다라.'

어떤 의미로 보면, 참 대단한 놈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1계층이 아닌가? 빙의자들이 하던 게임 속에서는 죽을 일이 거의 없다고 들었다만."

에릭은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니시다 료가 빙의한 몸은 흔한 대륙 중부인의 외형으로, 지구의 백인과도 비슷한 인종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퉁퉁한 배와 잔뜩 살이 올라 포동포동해진 얼굴 그리고 새하얀 피부가 도드라졌는데.

'본래의 몸이 더 뚱뚱하다 했던가?'

에릭은 [빙의자 외형 변경권] 사태로 알게 된 니시다 료의 본 모습을 생각해 봤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손이 저것보다 퉁퉁하면, 마우스 누르는 것도 실수할 수 있겠지.

"크흠, 그럴 수도 있겠어."

아무튼.

히든피스의 비결, 그것은 지루한 튜토리얼 구간을 수백 번 반복할 수 있다는 축복(?)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고작 한 번밖에 발견하지 못했으니....

'결국 운이 문제란 말이지?'

에릭은 가장 쉬운 답을 안다.

"200번을 넘게 경험해서 한번 만났던 행운이랬나?"

"그, 그렇죠. 그게, 현실에서 미궁은 한 주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어서...."

니시다 료가 말끝을 흐렸는데,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주의 첫날 개방되는 미궁.

히든피스를 찾는 데 정말 200번의 횟수가 필요하다고 가정하면, 약 200주가 걸린다.

대충 '연' 단위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웃어?'

그런데도 에릭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언가 답을 알고 있다는 느낌.

"장두식에게 축복을 내린다면, 한 번이면 족하다."

"거, 형님. 또 그 간질간질한 걸 하겠다는 거요?"

장두식이 화들짝 놀라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모습을 본 박창호는 괜히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한데?'

박창호가 미궁 구석으로 몸을 피하자, 강풍호가 총총- 따랐다.

니시다 료는 아무렇지도 않게 에릭과 장두식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저 덩어리한테 축복을 내려서 해결하겠다는 게 무슨 말인지....

얼빠진 얼굴이었다.

"두식아, 간질간질은 아니고 번쩍번쩍한 걸 할 생각이다."

에릭은 빙의자들을 내버려 둔 채 장두식에게 말을 덧붙였다.

장두식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고, 그에 따라 에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허어. 그, 그건 내가 좀 싫...."

"두식아?"

"큼. 뭐, 형님 말이니 따르겠수다."

장두식이 납득하자 에릭이 산뜻하게 빙의자들을 바라봤다.

그가 말하기를.

"축성된 장두식의 위력을 보여 주지."

* * *

'축성이라니....'

축성(祝聖)이라 함은, 신성력을 다루는 성직자가 '물건'에 막대한 신성을 담는 행위다.

검이라든가 갑옷이나 의류 혹은 저주받은 땅이 될 수도 있겠지.

뭐가 되었든 생명체에 축성을 한다는 건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사람의 몸은 감당 못 할 신성력을 받으면 터져 버리니까.

'그런데 사람한테 축성을 해?'

박창호는 사람에게 축성을 한다는 말을 처음 들어 봤다.

빙의자라 해도, 다년 차 빙의자들은 현지의 상식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아니, 애초에 게임에서도 성직자 NPC들은 아이템에만 축성을 해 줬던 걸로 아는데....

"두식아, 준비됐냐?"

대체, 저 광경은 뭐란 말인가?

거대한 성기사 에릭이 장두식의 머리 위로 투박한 철검을 얹으며 물었는데.

'저걸 진짜 한다고?'

그 모습을 본 박창호의 머릿속에 유명한 격언이 떠올랐다.

과도한 신성을 탐하는 자, 그 육신이 화(火)하여 소멸할지어다.

대륙의 세 종교가 내세우는 하나의 원칙이다.

과도한 축복과 신성은 인체에 독이 된다. 이를 '독'으로 표현하면 신성모독이 되니.

저런 격언을 퍼트려 신성력의 과용을 막은 것이다.

'그런데도 성유물로 축성을 해 준다고?'

빙의자 박창호의 눈에는 낡은 검 위로 떠오른 네임태그가 선명하게 보였다.

[성유물(聖遺物): 개벽의 검]

"와아...."

박창호가 상황을 지켜보자니, 옆에서 질척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꿀꺽.

옆에서 침을 흘리며 아이템을 탐내는 니시다 료가 보였다.

그때 툭- 하고는 팔꿈치에 물컹한 감각이 느껴졌다.

박창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창호 씨, 저거 졸업 템 맞죠? 저번에는 무서워서 자세히 못 봤었는데...."

아름다운 단발머리 미녀가 박창호에게 팔짱을 끼며 물었고.

박창호는 끼워진 팔짱을 정중하게 풀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속으로는 온갖 욕설을 내질렀다.

'미친놈들.'

근처에 가면 타 죽는데도 아이템을 욕심내는 니시다 료에.

여자가 됐다고 여자 행세를 하는 강풍호라니.

이런 폐급들과 파티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박창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우열을 메길 수 없는....

아니지.

'그래도 강풍호가 더 낫지.'

"흐으, 서, 성유물...."

만지는 즉시 소멸할 텐데, 게임적 사고방식을 못 버리고 아이템을 탐내는 니시다 료의 모습에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그때였다.

털썩.

"축성은 오랜만이요."

장두식이 미궁 정중앙에 양반다리를 하고 주저앉았다.

동굴 벽을 둘러싼 횃불이 사방으로 그림자를 퍼트려 신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후-. 준비됐수다."

장두식은 다리 사이에 커다란 나무 몽둥이를 꽂아 넣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에릭이 성큼성큼 장두식을 향해 다가섰다.

반삭 머리 위로 철검을 얹더니.

"-축성."

툭, 두 글자 단어를 내뱉었다.

건성인 태도요, 대충인 말씨다.

'저, 저게 무슨 기도.... 어어?'

한데, 저딴 기도문에 부응해 거대한 신성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쿠우웅.

미궁의 횃불이 흔들리며 사방으로 신성한 금빛 물결이 솟구쳤다.

신성의 바람은 후욱- 횃불을 꺼트리고 그 자리에 찬연한 휘광을 내세웠다.

마치 장두식을 중심으로 거대한 축복이 이뤄지는 모습이었다.

"크으-."

장두식의 머리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에릭을 둘러싼 금빛 신성이 성물의 검날을 타고 반삭 머리 위로 스며들었다.

'진짜 축성인데?'

박창호는 소름이 돋았다.

제국에 끌려오기 전, 박창호는 모험가였다.

그때, 미궁을 가려고 사제에게 무기를 축성받는 모험가의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 아스티아 신께서는 말하셨다. 세상에 악한 것들이 어둠을 드리웠으니, 이를 이겨 낼 횃불이 필요할지어다."

저러고도 한 십 분은 기도가 이어졌었지.

같은 축성인데, 시작부터 결과까지가 말도 안 되게 달랐다.

고작 두 글자짜리 기도문으로 무려 축성을 해내다니.

"끝났다."

에릭이 철검을 때며 읊조리는데, 박창호의 입이 쩍- 벌어졌다.

'30분은 걸렸을 일인데....'

축성에 걸린 시간조차 말도 안 됐다.

하면, 그 결과물은 어떤가?

"으어- 취한다."

미궁 중앙에서 장두식이 몸을 일으켰는데....

'저게 왜 되지? 터져 죽는다 하지 않았나?'

정말로 축성이 된 모양인지, 반삭 머리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진짜 신성을 사람한테....'

모험가 시절 보았던, 축성된 검처럼 장두식의 머리통은 황금빛을 머금었다.

이게 무슨 게임 빙의야?

비단 박창호뿐만 아니라, 다른 두 빙의자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미친, 창호 씨! 현실에서는 사람한테 축성을 할 수 있나 봐요!"

'에릭 국장이 대단한 존재라서 그런 거겠지.'

박창호는 생각과는 다르게 단답으로 무심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게요."

그 무심한 말투에 호응하듯이, 장두식이 몸을 일으켰다.

"거, 형님. 대충 아무 데나 고르면 되는 거요?"

"그래."

그러고는 몽둥이로 머리를 툭툭- 치면서 첫 번째 통로로 발을 옮겼다.

"여기가 좋겠수다."

* * *

미궁 1계층의 여섯 갈래 길.

처음 시작의 동굴에서 어느 길을 고르냐에 따라 2계층까지 가는 거리가 달라진다.

보통은 운이 좋아야 하며, 게임 속 통계에 따르면 중앙의 통로가 무난한 선택지로 여겨졌는데.

"허. 니시다 료의 말이 맞았군."

에릭이 눈이 커졌다.

장두식을 따라 도착한 장소는 기존의 1계층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빙의자 니시다 료가 묘사했던 히든피스가 나온다는 특수 지형.

싸아아아아아―

바람이 향긋한 꽃 내음을 몰고 에릭의 일행을 반겼다.

사방이 만개한 들꽃이요, 하늘에는 청명한 푸르름이 가득했다.

미궁이되 미궁이 아닌 느낌으로.

'신비롭구나.'

모두가 그 광경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거, 형님 이게 미궁이 맞수? 저거 하늘 아니요?"

동굴, 숲, 호수 등등.

미궁의 저층은 하나의 테마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숲이든 호수든 바다든, 미궁 저층의 하늘에는 무조건 투박한 바위로 이뤄진 천장이 보인다.

"그래. 여기도 미궁이다. 다만, 상층과도 비슷한 느낌이군."

하나, 상층은 다르다.

바다 위로 하늘이.

하늘 속에는 별들이.

구름에서는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곳으로.

상층에는 하나의 세계가 있다.

"미궁 상층에는 층마다 고유의 세계가 존재한다지."

게임 속에서도 그랬듯이.

지금은 단순히 흥미를 높이기 위한 컨셉이 아닌, 현실이지만.

에릭은 이 공간을 파악하기 위해 신성력을 퍼트렸다.

오색찬란한 들꽃이 흔들리고 샛노란 꽃가루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

'공간의 크기는 작군.'

보이는 것은 세계이나, 실제 파악된 영역은 작은 마을 규모였다.

에릭의 입장에서 이런 장소는 게임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빙의자들을 바라봤는데.

"와아.... 창호 씨 보여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박창호와 그에게 팔짱을 낀 강풍호가 보였다.

산뜻한 공간에서 보니.

"제법 잘 어울리는군."

에릭이 덤덤하게 그리 말하자, 박창호가 훌쩍 거리를 벌렸다.

'아-.' 서운하단 듯 강풍호가 에릭을 바라보자, 에릭은 슬쩍 시선을 돌려 니시다 료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히든피스는 어디 있다는 거지?"

"따, 땅을 파야 하는데...."

드넓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니시다 료가 말끝을 흐렸다.

"게, 게임에서는 이렇게 넓지 않았습니다. 아니, 대체 어느 세월에 이걸 다!"

노동을 하게 되어 심히 불만인 모양이었다.

조금만 느슨해져도 불만을 토로하는 빙의자에게 경각심을 심어 줄 법도 했다마는.

에릭은 관대함을 내세웠다.

빙의자들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신성을 일으켰다.

"흐익-!"

쿠구구구구궁-!!!

대지가 흔들리며 땅이 솟구쳤다.

만개한 들꽃을 해치지 않고서 흙만 똑- 도려낸 듯이 화사한 꽃밭이 공중에 떠 있었다.

오색찬란한 꽃들이 하늘 위를 수놓은 풍경.

'신이 세상을 만드는 것 같수다.'

웅혼한 금빛 신성이 대지를 떠받들고 있는 모습에, 절로 신의 기적이 떠올랐다.

장두식이 장엄한 광경에 감탄하고 있자니.

"미치겠군."

에릭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입가에는 함박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아주 큰 돈을 벌었을 때나 짓는 미소였다.

장두식은 흙더미 사이를 자세히 살폈다.

"거, 대체 저 병 쪼가리가 뭐라고 그러는 거요?"

툭-투두두둑.

솟구친 대지의 흘러내리는 흙더미 아래로 영롱한 보랏빛을 품은 유리병이 보였다.

"레, 레벨 업!"

빙의자들도 아이템을 알아챘다.

'미친!' 소리치며 놀라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 사람의 눈에는 아이템 네임태그가 보였다.

"스, 스무 병이나?"

"저게 현실에서...."

에릭의 눈에도 네임태그가 선명하게 보였다.

[레벨 업 영약]

한 가지 궁금증이 피어났다.

'레벨이 없는 내가 이걸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25화 깨달음 (1)

세상사에 요행을 바랄 순 없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흘러가며, 쌓아 온 노력에 대비해 보상이 주어지는 법.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빙의자는 다르지만.'

에릭은 보랏빛 포션을 들고서 사색에 잠겼다.

사방에 만개한 들꽃도 청명한 하늘도 더 이상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완전한 시스템 탓에, 빙의자다운 혜택은 크게 누리지 못했지.'

에릭의 아쉬움이요, 어쩌면 지난날의 회한일지도 모른다.

빙의자와 현지인에 반반 걸쳐진 존재가 에릭으로.

시스템 덕분에 막대한 신성력을 얻을 수 있었으나, 육신의 강함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에릭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스승과 르웰이 자신의 고통을 나눠 가진 기억이 떠올랐다.

무지함과 자만심이 가득했던 어린 날의 자신이 한탄스러웠고.

조건 없는 헌신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함을 느꼈다.

'지독하게 힘든 나날이었지.'

신성력이란 힘을 다루려면, 이를 견뎌 줄 몸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사제와 성기사들이 면벽 수련이니, 고행이니 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며.

에릭이 어린 몸을 이끌고 분쟁 지대를 전전하는 잔혹한 삶을 살아왔던 것인데.

"하하-! 에릭, 네 몸은 완성되었다. 키가 자라는 건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지."

지금에 와서는 그마저도 벽에 가로막힌 상황이다.

그의 스승 리페로제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이제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몬스터를 죽이고 세상을 구원하여 스스로의 벽을 깨야지!"

빙의자들은 레벨과 전직으로 강함을 증명한다.

하나, 진짜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몸과 정신을 가다듬고 힘을 쌓아서 스스로의 벽을 마주한다.

그런데 이 벽이란 게 만만치 않더라고.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

에리카 페르나시아의 오빠.

공작가의 장남이 미궁 속에 들어가 있는 걸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벽이란 것은 수백 년을 쌓아 온 귀족의 재력과 인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황실 또한 마찬가지고.

그래서 에릭도 묵묵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분명 그랬었는데....'

보랏빛 영롱한 유리병을 보자니, 점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이걸로 벽을 깰 수 있지 않을까?'

반쪽짜리 빙의자.

그래서 그런지 희망이 솟구쳤다.

교회와 고아원을 내버려 둔 채 벽을 깨자고 미궁에 수년씩 처박혀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뽀옹.

에릭은 생각을 마침과 동시에 [레벨 업 영약]의 병을 열었다.

매캐한 석유 냄새가 몰려왔다.

"거, 형님 그게 뭔 줄 알고 먹으려는 거요? 냄새가 무슨 고블린 똥 같수다."

처음 맡는 역한 냄새에 장두식이 코를 틀어막고 뒷걸음질 쳤다.

사방에 만개한 들꽃이 고개를 내리깔았고 아리따운 꽃잎이 거뭇하게 물들었다.

병에서 나온 냄새에 오색찬란한 화원은 칙칙하게 빛바래 버렸고.

그런 회색빛 세상에서 에릭은 찬란한 금빛으로 빛났다.

그가 말하기를.

"두식아, 이건 내 벽이다."

―Ep. 6 깨달음

레벨 업 영약.

말 그대로 캐릭터의 레벨을 '+1' 올려 주는 아이템으로, RPG 게임의 후발 주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선발대와의 아득한 간극을 조금이라도 메꾸라고 생긴 요소다.

"맛이 아주 끔찍하군."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레벨 업 영약]을 마신 에릭인데.

"형님, 안 뜨겁수? 사람이 숯덩이도 아니고 연기가 무슨...."

치이이익.

거대한 육신 위로 샛노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에릭은 눈을 질끈 감고 물컹하며 질척이는 끔찍한 식감과 코를 찌르는 악취를 참아 냈다.

아니, 참아 낼 수밖에 없었다.

레벨이 없는 에릭에게도 효과가 나타났으니까.

'이게 되네.'

감탄한 에릭의 주변 풍경이 일그러지더니, 투박한 동굴로 변해 있었다.

뜨거운 보라색 액체가 식도를 넘어 위장에 닿음과 동시에 에릭에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진짜였어.'

깨달음.

벽을 깨면 깨달음을 얻는다.

깨달음을 얻었기에 벽을 깼을 수도 있겠지.

순서가 뭐가 되었든 세상의 지고한 강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명확했다.

"벽을 넘으면 깨달음이 따른다."

에릭 또한 깨달음을 얻었다.

지독한 고난과 강대한 적을 물리쳐야 겨우 깨달음의 편린을 얻을 수 있다는데.

'난 물약 한 방에 해결됐고.'

개꿀이군.

피식- 웃음이 새 나왔다.

에릭이 얻은 깨달음은 간단했다.

[신체(神體) 1/100]

신(神)의 몸.

고작 편린이었지만,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은 그에게 명확한 목표를 제시했다.

"벽을 깼을 때 뭐를 봤냐고? 나는 세상만물을 베는 검을 보았다."

벽을 깼을 때 어떤 존재로 거듭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초월자가 된다는 것만은 명확한 사실이다.

'상태창을 베어 낸 스승님도 그렇듯이.'

에릭 또한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아주 편하게 말이야.'

'1/100'이라는 수치로 보아, 100병 혹은 100레벨에 준하는 무언가를 이뤘을 때 '신체(神體)'를 얻게 될 터였다.

'아마도 4티어 신성력에 버틸 몸을 얻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스승이 찢어 놓은 상태창을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릴 수도 있을 거고.

'무엇보다 힘을 얻는다.'

대격변 패치를 앞둔 위태로운 세계.

자신과 소중한 것들을 지켜 낼 힘이요, 멸망이라는 예정된 현실을 피해 갈 가능성이다.

에릭이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고 미래를 가늠하고 있자니.

"...저, 저게 뭔지 알고 드신 겁니까!"

니시다 료가 발끈하여 소리쳤다.

웬 무식한 현지인 놈이 귀하디귀한 [레벨 업 영약]을 처먹었으니, 빙의자 입장에서 배알이 꼴릴 법도 했겠지만....

에릭의 입장에서 보면, 하극상이 따로 없었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에릭이 얼굴을 구기며 주변을 둘러봤다.

반짝이는 머리통으로 눈을 껌뻑거리는 장두식과 넋이 나간 세 명의 빙의자가 보였다.

빙의자들은 마치 한 몸이라도 되는 양 서로 딱 붙어 있었다.

에릭이 성큼 다가서자.

툭-.

"아, 눈치 더럽게 없네."

단발머리의 미녀 강풍호가 작게 중얼거리며 니시다 료를 밀쳤다.

"흐익-!"

니시다 료가 거대한 에릭의 앞으로 데굴 굴렀다.

에릭의 발에 툭- 부딪히고 나서야 움직임이 멈췄다.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군."

에릭이 니시다와 강풍호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어째 셋 중 둘이 저 모양인지.

숫제 정신이 나간 수준이었다.

고블린을 모아서 폭렙을 시켜 줬더니, 저따위로 군다고?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에릭이 말하기를.

"두 사람 다 축복을 내려 주마."

지금의 에릭은 '빙의자 관리국 국장'이다.

황제 폐하와 만찬을 걸고 내기까지 한 입장이고.

저렇게 기강이 해이한 빙의자들을 데리고 미궁을 공략한다는 것은 불가능과도 다름없을 터.

'사람 다루는 건 쉽지.'

현대와 달리, 이 세계에서는 사람을 다루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있다.

이름하여 '무력과 공포'.

그 장두식도 팼더니 개과천선하여 마법사가 되었는데.

빙의자라고 다를까?

"-축복."

툭- 뱉은 두 글자 말이 아지랑이처럼 신성력을 피워 냈다.

"허어, 형님 언제부터 축복을 멀리까지 날릴 수 있게 된 거요?"

에릭의 축복을 보며, 장두식이 감탄하여 물었다.

"얼마 안 됐다. 차차 익숙해져 가는 중이지."

에릭이 2티어 신성력을 얻었을 때, 그는 타인을 축복하거나 축성할 수 있게 되었고.

3티어 신성력을 얻으면서 사거리에 제한이 사라졌다.

눈앞의 니시다 료와 박창호 뒤에 숨은 강풍호에게 [신성축복]이 내려진 것은 그런 원리다.

싸아아아아.

선명한 금빛 물결이 니시다 료와 강풍호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어둠을 밝혀 주고 자연 회복력을 늘려 주는 [신성 축복]이다.

"끄아아악-!!"

"꺄악-! 꺗!"

에릭이 힘 조절을 해서 빛의 크기는 작았지만, 두 사람이 느끼는 고통은 강렬했다.

[고통 내성] 스탯을 무시하는 고통이니까.

'앞으로는 잘하겠지.'

아주 미약한 축복이었으니, 당연히 두 사람의 생명에 지장은 없을 터였다.

'그나마 하나는 정상....'

두 빙의자가 폐급이라고 남은 한 사람이 그러라는 보장도 없지.

에릭이 홀로 남은 박창호를 바라봤다.

"이런 씹-."

그러고는 곧장 관자놀이를 질끈 눌렀다.

박창호는 니시다 료와 강풍호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정신병자들만 빙의를 하는 게 확실하구나.'

에릭은 홀로 징벌을 피한 박창호가 희미하게 웃는 걸 보며, 그리 생각했다.

* * *

당근과 채찍.

모진 채찍질로 혼쭐을 내 주었으니, 이제는 달달한 보상을 안겨 줄 시간이다.

'빙의자는 일회용품이 아니니까.'

황제가 빙의자를 쓰는 이유.

그것은 지고한 황실의 사명과 귀족의 의무를 대체하기 위해서였다.

"강풍호, 너는 레벨 1이었다. 30레벨을 찍었으니, 스킬 포인트가 60개 정도 있겠지."

[신성 축복]의 잔향이 동굴에 가득했다.

"활 실력은 제법이야, 아마 그 몸의 주인이 활을 제법 잘 쐈던 모양이군."

고통을 겪은 덕에 빙의자들의 머리는 냉정함을 되찾았고 자신들의 처지 또한 절실하게 실감했다.

그런데.

"명중 보정, 고통 내성과 같은 보조 스킬은 찍지 말고 전부 공격력 관련 스킬로 찍어라."

게임을 모르는 에릭이 빙의자들의 육성법을 정해 주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2차 전직을 하고 스킬이 초기화될 테니, 당장은 몰이사냥에 최적화된 스킬트리를 타는 게 좋을 테지."

1레벨당 두 개씩 주어지는 스킬 포인트를 극한으로 활용한 [스킬셋]이 에릭의 입에서 나왔다.

"지금부터 내가 알려 주는 스킬을 찍어라."

에릭의 말이 이어지면서 빙의자들의 입이 점점 쩍- 벌어졌다.

'저걸... 어떻게?'

특히 니시다 료가 크게 놀랐다.

에릭이 알려 준 스킬셋은 말 그대로 몰이사냥에 최적화된 빌드였다.

[화염 화살 - Max] [화살 세례 - Max] [관통의 대가 - Max] [화살 폭파 – Max]

'불화살을 비처럼 뿌려 두고 관통력을 올려서 폭파시킨다고?'

[연쇄 확산 - Max] [파열 – Max]

'폭파된 화살촉이 필드에 파열 효과를 일으키는 덫처럼 깔리겠구나.'

공격 한 방에 동시에 적용할 수 있는 스킬이 네 개에, 그 공격의 여파로 상처를 악화시키는 페널티를 부여하는 스킬이 두 개.

'방어랑 회피를 버려서 그렇지, 딜은 미친 듯이 나오겠어.'

조합 자체는 평범했다.

게임 속 [스킬트리]가 평범하다는 의미는 아주 효율적이라는 뜻이며.

즉, 랭커들의 공략집에서 볼 법한 그런 스킬셋이란 말이다.

'저런 조합을 현지인이 안다고?'

그런데 그걸 빙의자도 아닌 에릭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대, 대체 저런 스킬 조합은 어떻게 아시는...."

니시다 료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신성 축복]을 받아 놓고서는 그새 고통의 기억은 잊어버린 모양이다.

하나 에릭은 자비로웠다.

"어떻게 아느냐고?"

한껏 웃으며 세 빙의자를 바라보았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지만....

'아.'

그토록 많은 빙의자가 있는데, 그 제국에 아스티아 교단이 정보 하나 못 캐냈을까?

빙의자들은 손쉽게 답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빙의자한테 캐낸 정보를 빙의자한테 써먹는다고?'

저런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빙의자들은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에 에릭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배어났다.

'신성력을 쓰니 의심을 받을 일도 없구나.'

최초로 전 직업 만렙 업적을 달성해 [성기사] 클래스를 개방한 에릭이다.

스킬셋 또한 그가 독자적으로 찾아낸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분명 마지막에 유저들도 제법 많았어.'

언젠가는 알아챌 놈들이 나올 수도 있을 터.

박지훈 시절 성기사 캐릭터를 개방했을 때, 그를 잡자고 수백의 유저가 달려들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뭐, 안다고 달라질 건 없겠지만.

아무튼.

슬슬 본론에 들어갈 때다.

"자, 그럼 준비는 다 됐군."

에릭이 한껏 여유롭게 기지개를 켰다.

그의 등 뒤로는 투박한 나무문이 보였는데.

'보스룸?'

빙의자들은 스킬트리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에릭의 스킬 설명을 들으며 걸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보스룸 앞이었다.

계층주라 불리는 괴물이 도사리는 장소로, 이곳 또한 게임과 달리 난이도가 괴랄해졌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저걸 30렙으로 잡으라고?'

당혹감에 빙의자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거, 형님. 저게 계층주 방이란 말이요?"

그때 장두식이 질문을 건넸다.

스킬트리니 뭐니 알 수 없는 말들이 나오던 차에, 자신도 알아들을 법한 말이 나온 셈 아닌가?

한데, 빙의자들은 장두식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어졌다.

이어지는 말이 살벌했기 때문.

"빙의자들 말로는, 계층주 공략 직후 파티원을 다 죽이면 보상이 극대화된다더군."

"허어.... 원리가 뭐요?"

"미궁이 계층주 단독 공략 판정을 내려 준다."

"거, 뭐냐. 갈 거면 나는 빼고 가슈. 나는 뒈지기 싫수다."

장두식이 몽둥이로 어깨 찜질을 하며 그리 말하자, 에릭이 크게 웃었다.

보스룸 앞의 동굴이 쩌렁쩌렁 울렸다.

"두식아, 내가 그런 치졸한 짓을 하겠냐?"

정적이 일었다.

에릭의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승모근이 꿈틀거리려던 차에.

"...그, 그럴 리가 없수!"

장두식이 재빠르게 소리쳤다.

'거, 수배범 팔아먹고 빙의자들 잡아다 족치는 걸 생각해 보면....'

왠지 에릭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빠악-!

"끅. 거, 왜 때리고 그러는-."

"그냥 뭔가 얄밉더군."

에릭이 짓궂은 얼굴로 투박한 나무문을 향해 다가섰다.

말이 문이지, 그 크기가 숫제 작은 성의 외벽을 방불케 했다.

그런 거대한 나무문 앞에서 에릭이 말하기를.

"단독 공략을 하면 보상을 준다는데, 나 혼자 공략하면 그만 아니겠냐?"

끼이이익.

미궁 1계층, 계층주가 도사린 거대한 문이 개방되었다.

"두식아, 계층주 공략 시에는 몬스터 웨이브가 쏟아진다."

그 안으로 에릭이 성큼 발을 밀어 넣었다.

"축성된 장두식이가 잘해 보겠수다!"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며 에릭이 보스룸에 들어섰다.

미궁이 에릭을 반겼다.

―인간 하나, 1계층의 주인 고블린 킹에 도전한다.

26화 깨달음 (2)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되는 듯이.

마치 듣지 않아야 할 말을 들었다는 느낌으로.

세 빙의자가 동시에 입을 닫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보스를 잡은 직후 파티원을 죽이는 것은 일종의 버그성 플레이였다.

단독 공략에는 극대화된 보상이 따른다.

보스 공략 직후 생존자가 하나면, 그 공략은 단독 공략으로 치부된다.

게임의 버그는 현실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했는데.

'우릴 다 죽여서 보상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계층주를 혼자 잡겠다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이었으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농담...일 리가 없지.'

무려 그 에릭이 직접 내뱉은 말이 아니던가?

말 그대로 순수하게 혼자서 계층주를 잡아 최대 보상을 얻어 내겠다는 의미다.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에릭은 혼자서 계층주가 있는 거대한 나무문 너머로 사라졌다.

"흐익-!"

"어, 어떡해...."

그걸 본 니시다 료와 강풍호는 겁에 질려 주저앉았다.

'결국 들어가 버렸구나.'

박창호도 마찬가지.

빙의자들을 제물로 삼는 것도 아닌데 왜 절망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아그들아, 몬스터 웨이브 준비 안 하냐?"

계층주가 일어나면, 몬스터 웨이브가 몰려온다.

즉, 몽둥이를 든 장두식과 세 빙의자만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잠시만요! 잠시 생각을...."

박창호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이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모색했다.

수억이 바라보는 올림픽에서 활약하던 이답게 침착하였으나.

'도망칠 방법은 없어.'

침착함이 오히려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젠장.'

하나뿐인 입구에는 몬스터 웨이브가 몰려오는 상황이요, 반대편에서는 에릭과 계층주의 싸움이 벌어질 것이니.

게다가 등 뒤에서는 반짝이는 장두식이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거참, 문 한번 시원하게 열리는구나! 다들 안 일어나냐?"

쿵-쿠구구궁-!

계층주의 방.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렸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찬란한 휘광에 박창호가 정신을 붙잡았다.

'총대 멜 사람이 나밖에 없구나.'

그는 주저앉은 니시다 료와 강풍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몬스터 웨이브는 우리끼리 잡아야 해. 쓸모를 증명해야 산다고!"

니시다 료, 강풍호.

둘 다 박창호의 투지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으으.... 쓸모."

"가, 같이 해 봐요!"

장두식은 세 빙의자를 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거, 뭐.

저런 한심한 놈들이 다 있는지.

우웅-.

"아그들아, 내가 축성을 받아서, 마법을 쓰면 신성력이 같이 나가거든?"

장두식이 몽둥이 끝으로 마력을 일으켰는데, 그 형태가 사뭇 이상했다.

푸른색 마나 덩어리 사이로 금빛 신성력이 뒤섞인 형태로.

'마나랑 신성이 섞여?'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마나와 오러, 신성력은 상호 불가침한 힘이다.

그러니까 기사들이 무기나 갑옷 따위에 축성을 받는 것이고.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신성력의 보조를 받지 못하는 건데....

"저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축성된 장두식은 가능했다.

박창호는 결국 참고 참았던 질문을 꺼냈다.

어차피 몬스터 웨이브는 장두식과 함께 처리해야 하니까.

쿵쿵쿵쿵!

때마침 보스룸 너머의 외길에서 거대한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장두식이 통로를 향해 거대한 마력 덩어리를 쏘아 내며 말하기를.

"그걸 내가 어찌 알겠냐? 그런 건 형님한테 물어라."

* * *

"미친 크기군."

에릭은 미궁 1계층의 주인을 마주했다.

축구장보다 넓은 방 안에 5미터는 되어 보이는 고블린이 보였다.

개체명 고블린 킹.

놈은 에릭의 정반대편 벽 앞에서 대검을 들고 서 있었다.

화륵- 화르륵.

어두운 벽을 따라 횃불이 켜지자, 벽돌로 가득한 보스룸의 내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투박하고 매끈거리는 바위로 이뤄진 동굴과 달리, 계층주의 방은 거대한 벽돌로 가득한 돔 형태였다.

'피라미드에 쓰던 벽돌 같군.'

에릭 또한 계층주 공략은 처음이다. 그래서 흥미로운 듯이 사방을 훑어봤다.

게임과는 달리 아주 압도적인 크기였다.

크르르르륵.

에릭이 보스룸을 살폈듯이, 고블린 킹 또한 에릭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서서히 에릭을 향해 다가섰다.

쿵-쿠웅. 쿵!

괴성을 지르며 악취를 풍기는 추악한 녹색 피부를 지닌 괴물.

그게 고블린이다.

미궁에서는 일반 고블린도 2미터였기에, 계층주는 더 커다랗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마는.

'목이 뻐근하구나.'

그게 소형 빌딩 크기가 되니, 실로 당혹스러웠다.

공포?

두려움?

아니, 그냥 올려다보는 목이 뻐근했다.

기기긱-기긱.

고블린 킹이 대검을 질질 끌며 에릭을 향해 다가서는데, 그에 따라 에릭의 고개도 점점 위로 올라갔다.

'내가 올려다봐?'

고작 몬스터 따위를 올려다본다는 사실이....

에릭의 승모근이 꿈틀거렸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다.

"몬스터 따위가."

그는 곧장 아공간 주머니에서 [개벽의 검]을 꺼내 들었다.

키이잉.

검날이 신성을 머금고 쨍-한 공명음을 흩뿌렸고.

그에 고블린 킹이 몸을 움직였다.

쿵-쿠구구궁-!

소형 빌딩 크기의 고블린이 대검을 세우더니 쏜살같이 에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웅-.

거대한 에릭보다 커다란 대검이 휘둘러지고.

까앙-! 에릭의 투박한 철검과 맞부딪쳤다.

치지지직-!

맞닿은 검날끼리 불똥을 토해 내며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5미터의 고블린 킹과 2미터가 넘는 성기사의 힘 대결.

검을 맞댄 상태로 에릭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

'1층의 계층주는 50레벨에 준한다고 하지?'

에릭이 미궁에 들어설 결심을 한 데에는 크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빙의자의 활용.

황명이라고는 하나, 에릭 또한 만 단위로 늘어난 빙의자를 다 죽일 생각은 없다.

둘은 리페로제의 흔적 찾기.

에릭이 생각건대, 리페로제 아스티아는 미궁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지막 셋.'

채앵-!

에릭은 고블린 킹의 대검을 쳐 냈다. 그 여파로 후웅- 풍압이 일며 고블린 킹이 뒤로 쭉 밀려났다.

쾅-콰광-쾅!

고블린이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몬스터 주제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에릭을 노려봤다.

순수한 힘의 대결로 인간에게 밀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이 고블린 킹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릭은 고블린 킹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계층주도 별거 아니었구나.'

미궁에 들어온 마지막 이유.

'나는 얼마나 강한가?'

바로, 자신의 무력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다.

게임과 비교해서.

그리고 앞서 미궁을 공략하는 이 세계의 강자들과 비교해서.

스스로의 위치를 냉정하게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한참을 부딪쳐 봐도 힘에 부치는 느낌이 없군.'

고작 고블린 따위로 자신의 한계를 가늠할 수는 없더라고.

그도 그럴 것이 킹이든 퀸이든 뭐든 어차피 '고블린'이 아닌가?

악랄하며, 영악하고, 인간을 탐하며, 취하려 드는 악종(惡種).

말이 그렇지 현실은 달랐다.

키이이이이―!

에릭이 신성력을 일으키며 [개벽의 검]을 고블린 킹에게 겨눴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스킬을 발동시켰다.

[개벽(開闢)]

첫 시도에 르웰의 교회를 없앴다.

이때는 스킬의 기본 소모값만큼 신성력이 사라졌다.

두 번째 시도에는 미궁 1계층의 고블린들을 빨아들였다.

여기서는 힘을 최대한 아껴서 신성력의 10분의 1만 사용했다.

그리고 세 번째.

쿠우우웅.

검 위로 묵직하며 찬란한 신성이 내려앉았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을 느껴지게 하는 그런 힘이었다.

에릭이 후웅- 검을 내리치자.

쩍- 하고는 허공이 찢어졌다.

전과는 달리 찢어진 공간은 검날의 궤적만큼으로, 아주 깔끔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끼예에에엑-!!!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주변 모든 것들이 찢어진 공간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안으로는 알 수 없는 인공물들이 얼핏 보였다.

"이게 진짜 개벽이군."

대체 검으로 미궁을 열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했더니.

'말 그대로 다른 공간과 연결되는 거였어.'

에릭은 스킬과 성물이 만들어 낸 현상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 * *

"저, 저게... 축성된 사람."

장두식이 마법을 쏘았고 마나의 잔향이 은은하게 피어났다.

박창호의 팔이 저릿저릿했다.

'신성력과 마력의 조화라니.'

드넓은 통로를 장두식의 화염 마법이 가득 메웠다.

푸른 불꽃에 금빛 불꽃이 뒤섞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불꽃은 달려드는 몬스터를 전부 태워 버렸다.

끼옉-!!

외마디 비명과 동시에 고블린이 활활 타 죽었다.

열 마리째 고블린이 잿더미로 변하고 나서야, 장두식의 마법이 사라졌다.

마법진에 담긴 마력이 소진된 것이다.

"반짝반짝 모드는 마나 소비가 너무 많구만."

장두식은 그리 말하며 빙의자들을 바라봤다.

계속 가만히 있길래 장두식이 몽둥이를 겨누며 물었다.

"뭐 하냐?"

그제야 세 사람이 움직였다.

그들은 통로 앞에 일렬로 나란히 도열했다.

"빙의자들은 원거리 딜러가 탱커랑 나란히 서는 게 맞냐?"

장두식의 눈으로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포지션이었다.

반삭 머리 덩어리가 눈을 끔뻑이며 보는데....

아무래도 누군가가 나서서 오더를 내려야 할 것 같았다.

그 상황에 박창호는 아랫입술을 씹었다.

'씹새끼들.'

니시다 료와 강풍호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대학교 조별 과제의 버스 기사를 바라보는 느낌으로, 아주 엿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니시다 료 저 새끼가 운전대 잡으면 전복할 거고, 강풍호는 정신이 나갔으니까....'

박창호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료, 맨 앞에 서서 입구를 틀어막아 줘. 강풍호, 료한테는 고통 내성 스탯이 있으니까 광역기 주저 없이 쏘고."

"웅-!"

힘차게 대답하며 뒤로 빠지는 강풍호와 달리 니시다 료는 뚱한 얼굴이었다.

"뭐가 문제 있어?"

탱-근딜-원딜, 순으로 포지션을 잡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데 뭐가 이상한 거지?

히든피스에 빠삭한 놈인 만큼 신묘한 정보가 있을지도....

"니시다, 함께 싸우는 전우면 친구 아닌가? 일본인은 친한 사이끼리 이름을 부른다. 니시다라고 불러 줘."

"씹-. 후우. 그래, 니시다. 탱 잘 서 주면 된다."

세 빙의자를 보며 장두식이 껄껄- 웃었다.

'거참, 재밌수다.'

빙의자들의 전투를 기대하던 장두식이었는데.

막상 전투는 싱겁기 그지없었다.

쐐애애애액-!

"에잇-!"

강풍호가 쏜 화염 화살들이 수 갈래로 나뉘어 동굴 바닥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화살촉이 펑- 터지며 고블린들에게 [파열] 페널티를 부여했으며.

바닥이나 천장으로 빗나간 화살들은 [화살 폭파]와 [연쇄 확산]의 시너지를 받아 지속형 덫처럼 사방을 뒤덮었다.

"오, 온다!"

지나치게 강력한 공격력은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기 마련.

2미터 크기의 고블린 십여 마리가 강풍호를 덮치려 들었다.

그 순간.

"도바아알-!"

니시다 료가 붉게 물들었다.

그 즉시 고블린들은 방향을 꺾어 니시다 료를 향해 달려들었다.

2포인트밖에 투자하지 않은 [도발]은 미약했다.

그래서 상위종 홉고블린 두 마리는 도발의 영향을 피해 강풍호를 향해 몸을 던졌다.

크르르르륵.

3미터의 홉고블린.

녹색 피부의 괴물이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왔다.

화염 화살과 파열에 당해 전신에서 진득한 핏물까지 흘려 대니 공포가 따로 없었다.

그에 강풍호가 외치기를.

"으잇-! 창호 오빠!"

"씹-."

박창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허공을 딛고 달렸다.

두 자루의 레이피어가 빛을 발하며 번뜩였다.

푹푹푹푹-!

박창호는 서슴없이 홉고블린의 머리통을 난도질했다.

그렇게 전투가 끝났다.

"후욱-후욱-후우욱."

니시다 료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그의 사방으로 피범벅된 고블린들이 널브러졌다.

"멋있어요!"

강풍호는 떨리는 눈빛으로 박창호를 바라봤다.

땀에 젖은 단발이 볼에 들러붙었고 동그랗고 예쁜 눈망울이 촉촉해 보였다.

강풍호는 진짜 예뻤다.

'아아....'

그에 박창호는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됐는지....

잠시 현실 도피라도 하고 싶었는데, 툭- 하고 몽둥이가 박창호의 머리를 건드렸다.

"빙의자야, 몬스터가 왜 이렇게 적냐?"

고개를 올려보니 반짝이는 장두식이 보였다.

그에 박창호가 빠르게 대답했다.

"에, 에릭 국장님이 몹 몰이... 아니, 몬스터를 다 빨아들이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까 그 버슨지 뭔지-."

대답하던 장두식이 말을 멈춘 채 활짝 열린 보스룸을 바라봤다.

"허."

세 빙의자도 조심스레 장두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헉!"

장두식과 마찬가지의 반응이 나왔다.

아까부터 검을 맞대고만 있던 에릭인데, 갑자기 고블린 킹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릭이 고블린을 힘 싸움으로 밀어 붙이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네놈들도 저렇게 되는 거냐?"

장두식이 눈을 끔뻑이며 묻는데, 빙의자들은 말문이 막혔다.

"대답 안 하냐?"

니시다 료와 강풍호가 박창호를 바라봤다.

'...이런 병신 같은.'

박창호가 관자놀이를 질끈 누르며, 장두식에게 말하기를.

"2차.... 아니, 3차 전직을 하면, 아니 4차 전직을 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게 뭔 개소리냐?"

대충,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돌려 말한 거였다.

4차 전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3차가 최대이며, 3차 전직은 100레벨에 가능하다.

괴랄하게 어려워진 미궁의 난이도를 감안하고, 이대로 버스를 탄다는 가정하에 생각해 보면.

"몇십 년이 걸리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박창호는 덤덤하게 사실을 읊조렸다.

한 대 맞을 각오까지 했는데.

"그러냐? 생각보다 금방이구만."

장두식이 별문제 없다는 듯이 툭- 말하고는 에릭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빙의자들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미궁 심층에 들어가면, 시간 비율이 말도 안 되게 커진다.

귀족이 귀족으로 살 수 있는 이유가 이러한 고난을 이겨 내고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크르르르륵-!

내동댕이쳐진 고블린 킹이 몸을 일으켰다.

에릭의 기도가 바뀌었다.

"아그들아, 잘 봐 둬라. 개벽인지 깨벽인지 형님이 그걸 하신다."

[개벽] 스킬의 모션을 알아챈 장두식이 말했고.

그 순간 허공이 찢어졌다.

끼예에에엑-!!!

고블린 킹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소멸했다.

"가루로 변해 버리는구만...."

말 그대로 소멸.

입자처럼 변해 버린 고블린 킹은 삽시간에 허공에 떠오른 검흔(劍痕) 속으로 사라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툭, 투둑. 쿵!

세 빙의자가 허물어지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분명 방어막을 둘렀는데?

장두식이 눈을 말똥거리고 있자니.

―인간 하나, 단독으로 계층주를 죽였다.

미궁의 찬사가 보스룸에 진동했다.

―가장 좋은 걸 주지.

27화 깨달음 (3)

'지난 두 번의 좌절은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서였군.'

에릭은 5살 때와 6살 때 스승을 따라 미궁에 들어갔다.

몸은 약했고 몬스터의 위압은 두려웠다.

게다가 빙의 전 박지훈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목숨을 건 괴물과의 사투를 이해하지 못했다.

"굳이 목숨을 걸고 괴물을 죽여야 합니까?"

하여, 스승에게 항명했다.

2미터짜리 고블린과 싸우라는 '교육'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때의 에릭은 리페로제가 야만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현지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사람을 죽이는 게 더 편하다고?"

스승은 저딴 식으로 에릭의 말을 멋대로 곡해했다.

뭐라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에릭은 제국 국경 밖 분쟁 지대에 던져졌다.

"빙의자의 감각은 도통 이해를 못 하겠구나. 몬스터보다 사람을 죽이는 게 더 좋다니...."

그리하여 에릭은 피육이 난무한 전장에 놓였다.

그것도 아이의 몸으로.

'그러고는 진짜 버리고 갔지.'

아무리 빙의자라 해도, 다섯 살짜리 애를 전쟁터에 던져?

에릭은 힘을 써야 했다.

그래야 살았다.

사람과 사람이 전쟁을 벌여 대는 세계에서 살아서 그런지, 미궁보다 쉽게 적응했다.

아니, 그보다 사람의 잔혹함과 같은 빙의자들이 만들어 낸 참상에 각오를 다졌을 뿐일지도.

'사실은....'

어린 날의 에릭은 2미터가 넘는 고블린보다 사람이 덜 무서웠다.

분명 그랬었는데.

"거참, 계층주도 좁밥이구려."

이제는 달라졌다.

일반 몬스터뿐만 아니라 계층주를 상대하면서도 일말의 두려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한층 더 성숙해졌음을 느끼며 에릭이 보스룸 문 밖을 바라봤다.

감탄하는 장두식과 퍼질러진 세 빙의자가 보였다.

'그래, 여기가 내 집이다.'

상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두식아."

에릭은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었다.

한껏 밝은 미소요,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쓰러진 빙의자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체 뭘 얻었길래.... 아니, 그보다 형님 팔이 왜 그렇수? 거, 뭐냐.... 그 상자는 또 뭐요?"

장두식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할 말을 한 번에 다 내뱉었다.

그만큼 에릭의 모습이 이상했다.

"대체 어떤 원리로 형님이 상처를 입은 거요?"

에릭의 손에는 시꺼먼 상자가 들려 있었는데, 상자를 든 한 팔에 균열이 가득했다.

마치 메마른 대지를 보는 느낌으로.

장두식에게 '원리'라는 단어가 나올 만큼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에 에릭이 답하기를.

"자격 없는 몸뚱이로 과한 신성을 탐한 대가다."

그의 팔처럼 갈라진 목소리였다.

하나, 분명 얼굴은 기뻐 보였다.

"아픈 거요? 기쁜 거요?"

"둘 다겠군. 조금 쓰린 정도다."

"거, 뭐야. 형님이 쓰라림을 느낀다고-."

빠악-!

"끅!"

에릭이 꿀밤을 내리쳤고 밤톨 같은 장두식의 반삭 머리가 반짝거렸다.

에릭이 장두식에게 시꺼먼 상자를 건네며 물었다.

"두식아, 아직 축성 효과 남았지?"

"그, 그렇수다."

장두식은 눈을 끔뻑이며 상자를 건네받았다.

'거, 대체 무슨 영문인지....'

에릭은 분명 부상을 입었다.

팔에 금이 갔다.

사람의 몸에 금이 간다고?

게다가 상자를 건네줄 때 후두둑- 피부 조각이 떨어지지 않았나?

목소리도 갈라진 것이, 분명 힘에 부쳐 보이는 느낌인데.

'얼굴이 무슨....'

마치 교회를 3구역으로 이전했을 때의 얼굴이었다.

그토록 기쁜 미소라니.

오소소- 장두식의 반삭 머리가 쭈뼛쭈뼛 섰다.

'대체 이 상자가 뭐길래?'

장두식이 조심스레 상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상자깡 좀 하자."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상자깡? 그게 무슨 개소리요."

"...후. 기분이 좋으니 참으마."

계층주를 공략하면 보상으로 상자가 주어진다.

계층주를 죽일 때까지 걸린 시간과 파티원의 협동심, 피해 규모 등을 종합해 보상의 등급이 나뉜다.

[노말-갈색 상자]

[레어-적색 상자]

[레전드-흑색 상자]

상자 입구에는 숫자가 쓰여 있는데, 이는 상자를 중복해서 개방할 수 있는 횟수를 의미한다.

하여, 미궁의 꽃이 보물 상자라면, 미궁의 정수(精髓)를 일컬어 상자깡이라 불렀다.

이는 게임 용어였으나.

"지금은 모험가들도 계층주의 보상을 여는 걸 상자깡이라 부르지."

여기까지 설명이 이어지자, 장두식이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내가 이 검정 상자를 다섯 번 열어라 이 말 아니요?"

"그렇지!"

에릭이 [개벽의 검]을 탁- 치며 감탄했다.

자신이 빙의자임을 알려 준 뒤로 장두식의 이해력이 급격하게 올라간 느낌으로.

'불필요한 질문도 줄었고.'

상당히 편해졌다.

에릭이 축성된 장두식에게 축복을 걸어 주려던 때.

"형님, 이것들은 그대로 둬도 되는 거요?"

장두식이 빙의자들을 보며 물었다.

"일단 상자깡이 먼저다."

에릭에게는 우선순위가 명확했다.

* * *

[故-박창호]

"아들아.... 금메달 따서 호강시켜 준다더니! 먼저 가 버리는 게 웬 말이냐!"

아들의 사진을 부여잡고 찢어져라 우는 어머니가 보인다.

금메달을 깨문 채 활짝 웃는 미남의 사진 위로 눈물방울이 촉촉하게 내려앉았다.

[故-강풍호]

"아이고.... 풍호야! 그렇게 여자로 살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그래서 온라인에서라도 여자로 살겠다며 게임 중독자가 되고는!"

[대륙 온라인] 사망 사건 합동 분양소에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국 게임을 하다 뒈지는 게 대체 무슨!! 아이고, 풍호야!"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휩쓴 전대미문의 재앙.

일본에도 합동 분양소가 열렸다.

"니시다 료.... 방에 틀어박히더니 결국 방 안에서 그렇게 가 버렸구나. 쯧."

[대륙 온라인]을 즐기던 수십만 명의 유저가 갑자기 죽었다.

실종된 몇 명이 시작이었는데, 그때는 게임이 특이점으로 지목되는 일은 없었다.

그 누구도 게임을 하다 사람이 죽었을 거라는 추측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공통점이 발견되었는데.

[죽음의 게임 - 대륙 온라인]

전 세계 1억 명이 넘는 유저를 보유한 게임이었기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남은 1억 2천만 유저, 각국 정부가 나서 보호 조치를 내리다.]

불행 중 다행으로, 희생자 수가 66만 명에 근접하자 추가적인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륙 온라인 사건, 전염병과 무관. 사망에 어떠한 특이점도 없어.]

사망 원인은 불명.

심정지도 아니고, 뇌사도 아니며, 어떠한 징조도 없이 자연사한 상태였다.

[대륙 온라인 본사가 텅 빈 유령 건물?]

세계에는 커다란 의문이 남았다.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가 남겨졌다.

그것도 다른 세계에.

"아아. 어머니!"

박창호는 합동 분양소에서 오열하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희뿌연 허공에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피어났고, 안개 속으로 빙의자들의 죽음이 드러났다.

"형.... 아니, 오빠...."

박창호의 옆에서는 단발머리 미녀 강풍호가 중년 사내의 사진을 보며 글썽였다.

그리고 강풍호의 옆에서는....

"에잇, 씹새끼들. 자기들이 유산 다 빼돌리고 방구석 폐인으로 만들어 놓고는. 퉷!"

중얼중얼 욕지거리를 내뱉는 니시다 료가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자신의 죽음이란 걸 받아들였을 때쯤.

"이거, 원래의 우린 죽은 거죠?"

강풍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영정 사진에 보이는 머리가 빈 중년 남성과 달리, 강풍호의 모습은 아리따운 미녀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 그렇겠지요?"

니시다 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사진과 다른 모습으로, 조금 덜 뚱뚱한 체형이었고.

얼굴은 아주 후련해 보였다.

"창호 오빠는.... 아아."

한데, 박창호는 아니다.

"지랄 마! 평생 운동한다고 뒷바라지해 준 어머니 호강도 못 시켜 주고 죽어? 내가? 씨발, 왜 이딴 게임을 했지? 메달 따고 좀 쉰다는 생각을...."

다시 침묵이 일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어쩌면 연 단위로 시간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있는 장소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한국에서의 나는....'

그런 불가해(不可解)한 현상 속에서 박창호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박창호가 고개를 돌리니, 물끄러미 자신을 지켜보는 두 사람이 보였다.

'기다려 줬구나.'

격해진 감정이 잦아들자, 어느새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동질감 혹은 동료애.

뭐가 되었든, 그들은 돌아갈 곳을 잃었으니까.

"기다려 줘서 고맙습니다."

박창호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강풍호와 니시다 료가 머쓱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헤헤, 뭘요."

"동료끼리 이 정도야."

모두가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고 현실을 직시했다.

파스스스스―

그 순간, 주변 풍경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안개로 가득한 공간이 점점 샛노랗게 변하더니.

쿠웅-!

묵직한 신성력이 내려앉았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금빛 물결이 서서히 형태를 이루었다.

"시, 신성력이...."

"구름 위에 건물?"

"어어? 그보다, 여기 무슨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전 같지 않아요?"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신전.

그들은 거대한 신전 중앙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황금빛 기둥 여덟 개가 거대한 삼각형 지붕을 떠받드는 모양새로, 신전 끝에는 단상이 보였다.

"여기는 어딜까요?"

그 무엇보다 찬란한 빛.

그럼에도 밋밋한 모양새였다.

"뭔가 디테일이 빠진 느낌인데-."

"끄윽-!"

"꺗!"

신전을 보던 세 빙의자가 갑작스러운 두통에 머리를 질끈 붙잡았다.

그 직후.

―너흰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묵직한 미궁의 음성이 빙의자들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들이 눈을 떴을 때.

"두식아, 미쳤냐?"

"형님이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수!"

"아니.... 그렇다고 상자를 연속으로 네 번을 열어? 그게 무슨 미친 짓이냐!"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에릭이 장두식을 겁박하고 있었다.

"나, 나도 연속으로 빈 상자가 나올 줄은 몰랐수다."

"두식아, 신성 축복을 그렇게 내려 줬는데 대체 무슨.... 허어."

"거, 형님 마지막 한 번 남았는데 여기서 좋은 게 안 뜨면 어떻게 되는 거요?"

에릭의 승모근이 꿈틀거렸고.

세 빙의자는 눈을 질끈 감고 기절한 척했다.

* * *

축성된 장두식에게 신성 축복을 내렸다.

그런데도 4연속 꽝이라니.

'한 번 남았군.'

에릭은 조금 후회했다.

평소처럼 장두식에게 알아서 상자를 열라고 지시했던 자신의 안일함.

'애초에 계층주 보상은 처음이었는데.'

연달아 상자가 네 번 열렸는데, 연속해서 내부가 텅 비어 있었다.

'두식이가 운이 없는 날도 있을 줄이야.'

상자 위에 쓰인 5라는 숫자는 어느새 1로 줄어들었다.

"거, 형님. 내가 파이팅 넘치게 다시 한번 해 보겠수다!"

에릭은 슬쩍 실눈을 뜨는 빙의자들을 애써 무시하며, 장두식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축복."

투박하고 짜증 섞인 기도문에 웅혼한 축복이 내려졌다.

또다시 찬란한 빛이 장두식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반짝이는 반삭 머리가 더욱이 빛나며 신성함을 뽐냈다.

끼이익.

장두식은 천천히 검은색 상자를 열었다.

뚜껑이 열리며 서서히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네 번의 꽝은 한 번의 대박을 위해서였군."

상자 틈으로 보이는 아이템 네임태그에 에릭이 감탄했다.

툭.

상자 뚜껑이 젖혀지고.

"형님, 조막만 한 종이 쪼가리가 또 뭐라고 그렇게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거요?"

에릭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안에서 나타난 물건이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그런 것이었기 때문인데....

[1티어 아이템 강화권 - 10장]

'아니, 이게 현실에서 나온다고?'

빙의자들이 늘어 감에 따라 미궁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확실해졌다.

본래 작년까지만 해도 미궁의 보상은 '아이템', '엘릭서', '광물'처럼, 실물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형님? 침 떨어지겠수다."

"두식아."

"거, 왜 그러슈?"

"이게 아이템 강화권이라는 거다."

"그게 뭔 소리요?"

아이템의 종합 성능을 10% 늘려 주는 것이 [강화권]의 효과다.

처음에는 100% 확률인데, 강화 횟수가 늘어 감에 따라 확률이 점차 줄어드는 구조다.

'10강은 1% 확률이었지, 아마?'

아무튼.

에릭이 뭉뚱그려 [아이템 강화권]의 효과를 읊조리자.

"거, 뭐야. 이미 완성품의 성능이 올라간다는 게 진짜요?"

장두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말로는 이해를 했다마는....

게임 시스템으로 아이템이 강력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느낌이었다.

에릭 또한 장두식을 백분 이해하는 바.

'나 혹은 빙의자들이나 쓸 법한 것들이 보상으로 나올 줄이야.'

에릭은 도무지 현실 감각이 들지 않는 기분이었다.

아이템 강화권이 웬 말인가?

'저번에는 빙의자 외형 변경권이 나왔었지.'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벌써 두 번째다.

즉, 이는 세계의 의지라고 봐야 할 터.

"두식아, 아무래도 빠르게 미궁을 올라야겠다."

파티별로 배정되는 미궁 1계층과 달리, 2계층부터는 오픈형 필드가 나타난다.

에릭은 모험가들을 만나 그들이 뭘 얻었는지 일일이 확인해 볼 생각이다.

'느낌이 싸하단 말이지.'

게임 속 배경이었던 세계에 게임적 요소들이 자꾸만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다.

"지금 바로 가겠다는 말이요?"

"아니."

그 전에.

"개벽의 검, 성물에 강화권을 써 보고 갈 생각이다."

한때 박지훈이었던, 게이머로서의 충동은 해결해야겠지.

'강화'

이걸 어떻게 참아?

[개벽의 검 +1강]

못해도 이건 봐야지.

에릭이 개벽의 검을 꺼내 들고는 [아이템 강화권]을 그 위에 얹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박창호, 강풍호, 니시다 료. 자는 척은 그만해라."

무릇, 아이템 강화에는 구경꾼이 필요한 법.

28화 재림(再臨) (1)

"두식아, 검에 붙은 종이를 힘껏 밀어라."

상자깡을 할 때, 4연꽝이 있었다지만 마지막 한 번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릭은 장두식의 성능을 믿었다.

"거, 형님 처음은 100% 성공이라 하지 않았수?"

"혹시 모르지 않냐."

"...100%라는 건 실패할 확률이 없다는 의미요."

에릭의 승모근이 꿈틀거렸다.

"내가 그걸 몰라서 그러겠냐?"

"그냥 혹시나 해서 한 말이요. 내게 산수를 가르친 게 형님인데, 설마 내가...."

"됐고, 빨리 해라."

장두식이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개벽에 검 위에 얹어진 종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위대한 신성을 품고서도 형님은 운이 더럽게 없는 편이었수다.'

생각해 보니, 그 에릭이라면 100% 확률을 무시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역시 신은 공평하오!

장두식이 지켜본 에릭에게 운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먼 얘기였다.

장두식은 종이를 힘껏 밀어 넣었다.

그 즉시.

싸아아아아아―

개벽의 검 위로 [아이템 강화권]이 스며들듯이 사라지고.

검날에 은빛 물결이 일렁였다.

거대한 빛이 검을 감싸고 개벽의 검날이 반짝거렸다.

마치.

"저, 저거 강화 이펙트잖아?"

"우와, 이쁘다."

게임 속에서 아이템 강화를 했을 때와도 비슷했다.

그 빛은 서서히 검으로 응집되듯 모여들었다.

세 빙의자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아니, 1강 따리가 뭐 저렇게 화려해?'

불평불만이 가득한 니시다 료.

그 역시 아이템 강화 이펙트를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1강 따리이지만, 그 효과는 아주 찬란했다.

"저러니까.... 현질을 그렇게 해 댔지."

강화로 날린 돈이 얼마던가?

빙의 전 게임 속의 일이었다마는.

모니터로도 현란하던 강화 효과가 현실에서 보이니....

"거참, 효과 한번 지랄맞수다."

눈이 부시다 못해 아릴 지경이었다.

유일한 현지인 장두식은 처음으로 보는 아이템 강화 효과에 눈을 찌푸렸다.

파스스―.

검을 감싼 빛이 서서히 흩어지고 [개벽의 검] 위로 밝은 금빛이 떠올랐다.

황금빛의 효과는 간단하다.

"1강 떴다!"

"현실에서 보니까 더 예뻐요!"

"이펙트가 벌써부터 저러면...."

세 빙의자는 게임에서 그랬듯이 축하의 말과 감탄을 내뱉어 줬다.

'+1강'에 할 말은 아니다만....

에릭이 저토록 기뻐하니, 눈치껏 찬사를 내뱉은 것이다.

"형님, 근데 강화가 되면 뭐가 달라지는 거요?"

다들 기뻐할 때, 장두식만큼은 기뻐할 수 없었다.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두식아, 강화란 말이지."

여느 게임이 그렇듯이, 아이템 강화에는 총 세 가지 단계가 존재한다.

[아이템 강화권]

지금 사용한 것은 1티어 강화권으로, 10강까지 강화를 마치면 부가 효과가 주어진다.

거기까지 가면, 미궁 상층에서 파밍할 수 있는 고등급 강화권을 얻어야 한다.

[2티어 아이템 강화권]

[3티어 아이템 강화권]

게임 속 무기의 졸업이란, 최강 무기를 3티어 강화까지 마쳤을 때 이뤄지는 일이다.

여기까지 설명이 이어졌다.

"종이 쪼가리 하나로.... 무구가 강화되는 게 참이었단 말이요?"

장두식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끔벅거렸다.

그에, 에릭이 웃으며 말하기를.

"더 많이 얻으면, 두식이 네 몽둥이도 강화해 주마. 직접 써 보면 확실히 느껴질 거다."

"몽둥이도 강화가 되는 거요?"

"아이템 강화권은 세상 만물에 사용할 수 있다."

게임 내에서나 존재하던 것이 현실에 등장했다.

게임에서는 설정으로만 존재하던 [성물]들이 현실에서는 버젓이 세상에 풀려 있는 상황.

'두 세계가 합쳐지는 느낌이 드는군.'

[개벽의 검 +1강]

어쩌면 이제 미궁은 더욱 게임처럼 변하지 않을까?

현실에 그런 요소가 나타난 건 제법 달가운 소식임은 틀림없다.

그만큼 공략이 쉬워지겠지.

에릭은 성물 위로 떠오른 네임태그를 보며 그리 생각했다.

"뭐, 1계층의 일은 끝났으니."

이제 위로 올라갈 시간이다.

―Ep. 7 재림(再臨)

삐이이이이이이―

미궁 2계층.

고블린 숲에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험가 길드에서 제공하는 비상용 아이템으로, 보통 저층에서는 사용할 일이 없는 물건이다.

그런데도 호각이 울렸다.

"빠, 빨리! 뛰어!"

"젠장, 로엔이 죽었어...."

모험가 파티 '강철'은 미궁 2계층에서 위험에 봉착했다.

"흐, 흑마법사가 왜?"

미궁의 칙칙한 천장 아래로 푸릇푸릇한 녹림이 우거진 곳이 바로 2계층 고블린 숲이다.

푸쉬익-.

하늘을 바라보던 이파리가 바닥으로 고개를 내리깔았고 푸르른 녹색은 눅눅한 갈색으로 물들었다.

흑마력은 생명을 해하는 힘이다.

"저번에는 웬 성기사가 고블린을 다 증발시키더니...."

"차라리 성기사가 낫지. 저 개같은 흑마법사들이 왜 나온 거야?"

삐이이이이이이―

모험가 길드의 비상 호각.

호각의 길이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데.

"제임스, 다리는?"

"후욱-. 버틸 만하다."

긴 호각은 집결을 의미한다.

미궁 내 이변이 발생했을 때, 고위 모험가들이 있다면 긴 호각이 들려온다.

하늘 위로 거대한 방패 문양이 떠올랐다.

"이쪽으로 가면 집결지가 나온다. 조금만 더 뛰어!"

이는 집결지의 위치를 알려 준다.

상정 외 위험으로부터 저급 모험가들을 보호하기 위한 길드의 조치다.

"첫날이라 그런지 고위 모험가들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끅. 그러게...."

모험가 파티는 집결지를 향해 최대한 몸을 움직였다.

하나, 흑마력은 생(生)을 화(火)하는 힘.

제임스는 검게 물든 다리가 아려 왔다. 감각이 무뎌지고 점점 움직이기 힘들어졌다.

뚝. 제임스가 멈춰 섰다.

"제임스?"

"존, 나는 버리고 가라. 길드... 아니, 제국에 꼭 알려!"

"젠장."

존은 아랫입술을 씹었다.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제임스의 다리가 흑마력에 침식되어 거뭇하게 말라비틀어졌다.

모험가 파티 강철.

리더를 잃었고 든든한 탱커는 주저앉았다.

어릴 적부터 모험가를 꿈꿔 온 친우요, 미궁을 등반하는 동료다.

"서, 성수를 쓰면 돌릴 수-."

존은 제임스를 두고 갈 생각이 없었고.

스걱.

"미련은 버려."

제임스가 다리를 잘라 냄으로 그의 미련을 지워 줬다.

원딜이 탱커를 둘러메고 뛰어갈 수는 없는 노릇.

존이 눈을 질끈 감고는 가슴에 주먹을 얹었다.

모험가들의 인사로.

"꿈에서는 모험의 끝을 보기를."

"-그대의 여정이 무사히 끝나기를."

작별 인사였다.

존은 고개를 돌려 집결 장소를 향해 달렸다.

눈물이 바람을 타고 흩어지고.

집결지가 점점 가까워졌다.

"후욱- 훅."

거센 숨을 몰아쉬며, 존은 집결 장소에 도달했다.

'다들 여기 모였어.'

절망 속에 희망이 피어났다.

미궁 2계층 숲속의 공터가 모험가들로 가득했으니까.

'다들 뭘 보는 거지?'

그들은 다들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고 존 역시 그쪽을 쳐다봤다.

그런데.

"윽-!"

존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역시 다른 모험가들처럼 공터의 중앙을 향해 뚝뚝- 끊기는 걸음걸이로 걸었다.

"끄흐흐, 약자들이 무슨 모험을 논한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집결지 중앙에서는 로브를 두른 흑마법사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허공에서 꾸물거리는 검은 액체가 서서히 형태를 취하더니.

거대한 악마의 형태를 이뤘다.

흑마법사가 말하기를.

"2계층에는 저급 모험가가 아주 많군요. 흐음, 질은 좀 떨어지지만, 양으로 만족하시겠어요."

존은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당황했고 눈앞의 흑마법사에 절망했다.

'어, 어떻게 흑마법사가?'

제국 내의 흑마법사는 멸종되었다.

리페로제 아스티아, 그리고 그의 직선 제자 에릭이 어릴 적 이룬 업적이었다.

'근 몇 년 사이 흑마법사가 나온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흑마법사가 나타났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모험가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톱은 빠져 없었고 빈 자리는 시꺼먼 검정으로 물들었다.

흑마법사의 상징.

검은 힘을 다루는 자, 그 끝이 검게 물들지어니.

두 개의 거대한 뿔이 달린 커다란 괴물의 얼굴.

마법진이 입을 쩍- 벌렸다.

"차례대로 들어가시지요."

흑마법사는 정중하게 손을 뻗어 괴물의 아가리를 가리켰다.

하나, 둘.

모험가들은 홀린 듯이 그 안으로 걸었다.

"흐흐, 앞으로 몇 구역만 더 돌면 2계층에서 사람은 사라지겠어요."

저급 모험가들은 수가 많다.

몬스터와의 싸움에 숙련되어 모험가 길드에 인정을 받기 전까지는 상층을 공략할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먹고 살 만큼 벌이가 되어 공략을 포기하고 생업에 종사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수가 가장 많다.

'제, 젠장.'

그 수많은 저급 모험가들 중 하나가 존이다.

어느새 존의 차례가 다가왔다.

시꺼먼 액체는 입이 툭 튀어나온 악마의 형상을 취했고.

뚝-뚝.

존의 머리 위로 검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악마의 이빨에서 떨어진 물방울.

마치 군침이 돈다는 듯, 점점 물방울이 짙어져 갔다.

그때였다.

이곳으로 집결해라-!!!

세상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에 흑마법사가 몸을 흠칫 떨었다.

* * *

"에릭, 흑마법사는 존재만으로도 죽어야 하는 것들이다."

리페로제가 말했다.

어린 날의 에릭은 신성을 다루지 못했고.

몸을 비집고 무한정으로 새어 나오는 신성을 휘두르기 위해 전장을 전전했다.

힘은 쓰다 보면 는다는 것이 스승의 지론이었으니.

"흑마력은 모든 생을 앗아 간다."

그때의 주적은 흑마법사였다.

"하면 산 자들은 어찌합니까?"

에릭이 물었을 때.

스승은 '하하' 짙게 웃으며 하늘 높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대한 신성을 일으켜 기둥을 세웠다.

"지침을 만들어 주는 거야."

생존자들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강건한 신성의 기둥을 세워 주고.

"그리고 함성을 내지르는 거지."

스승 리페로제는 짓궂은 얼굴로 에릭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그때의 에릭은 아주 작았다.

그런 작은 에릭의 귓가에 대고 스승은 소리쳤다.

"이곳에 집결하라-!!!"

순례자 리페로제가 여기에 있노라.

내 너희를 지켜 줄 것이니.

그런 의미가 담긴 외침이었다.

"더러운 흑마력이 가득하구나."

에릭은 미궁 2계층에 도착한 직후 스승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만큼 공기가 역겨웠다.

"눅눅한 게 무슨 찜통 같수다."

"익숙하지 않더냐?"

"아, 맞수. 형님을 처음 봤을 때 뒷골목이.... 허어. 설마, 이거 흑마력이요?"

"그래."

에릭의 얼굴이 굳었다.

그토록 찬란하고 수려한 얼굴인데, 아주 무서웠다.

'형님이 진짜 빡쳤구만.'

장두식의 머리털이 삐쭉- 섰다.

에릭은 기분이 언짢으면, 얼굴이 흉신악살같이 일그러지곤 한다.

한데, 화가 나면 다르다.

"이 씹새끼들이 어디서 기어 나왔지?"

아주 무뚝뚝한 얼굴이 되고.

눈빛이 살벌해진다.

숫제 사람 하나 잡아 족칠 얼굴이었다.

에릭이 그렇게 되면, 앞뒤 물불 안 가리고 불도저처럼 나선다.

"제국군이 있는데, 나설 거요?"

장두식이 차분하게 에릭에게 물었다.

"그, 흑마법사 문제로 형님이 날뛰면 또 문제가 생기지 않겠수?"

미궁 저층은 제국군이 관리한다.

그런 제국군을 제치고 나서는 건 교단과 제국군 간의 알력을 키울 우려가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나설 땐 나서야겠지. 제국군 소속은 아니어도 나는 빙의자 관리국장이 아니더냐?"

"그, 그래도 황자를 터트린 일로 제국군의 시선이...."

장두식은 말끝을 흐렸다.

이미 에릭은 움직이고 있었다.

쿠우우우웅.

에릭은 손을 뻗어 신성력을 가득 담았다.

기둥을 세워 생존자들을 위한 지침을 만들어 준 것이다.

거대하고 찬란한 황금 기둥이 고블린 숲 한복판에 생겨났고.

우웅-우웅-우웅.

아름다운 금빛 물결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마치 이곳에 신성이 있노라.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대체 뭘 하려고....'

신성력으로 빚어진 기둥을 세우더니 에릭이 대뜸 하늘 높이 고개를 치켜올리는 게 아닌가?

두 손을 입가에 모으더니 소리칠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이곳으로 집결해라-!!!

숫제 대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저게 사람의 입에서 나온 소리란 말인가?

싸아아아아―

사방을 감싼 수풀이 뒤흔들리고.

웅장한 중저음이 숲에 내려앉았다.

'저게 성기사.'

세 빙의자는 멀찍이 숨어서 에릭을 바라봤다.

도망친 건 아니고.

신성력의 기둥으로부터 몸을 떨어트린 것이다.

백여 미터는 넘게 떨어졌는데도 몸이 저릿저릿했다.

니시다 료가 연신 불만을 토로했을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지금은 멈췄다.

"저, 저게 사람이 낸 소리라고요?"

강풍호의 말마따나.

세상 대지를 뒤흔드는 고함이 말이나 되는 것인가?

귀가 저릿저릿했다.

"그 뭐냐. 이쪽으로 오는데요?"

세 빙의자가 몸을 숨긴 나무를 향해 갑자기 에릭이 다가왔다.

성큼성큼 걷는 에릭이 점점 커다랗게 보였다.

그에 니시다 료와 강풍호가 박창호를 바라봤다.

"도, 도망치려는 게 아니라-."

코앞을 스쳐 가는 에릭과 장두식에게 박창호가 변명을 늘어 두려던 차.

"두식아, 얘들 데리고 잘 숨어 있어라."

에릭이 외마디 명령을 남겼다.

그는 빙의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숲속으로 사라졌다.

쿠웅.

쿠웅.

거대한 성기사의 발걸음을 따라 숲이 진동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분노.

검은 힘을 다루는 마법사들에 대한 증오.

털썩.

"히끅-!"

그 위용에 강풍호의 다리가 풀렸다.

에릭이 숲속으로 사라진 뒤.

"빙의자들아, 정신 차려라! 이제부터 저 기둥으로 생존자들이 몰려올 거다!"

장두식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하려 들었다.

'형님, 언제 이렇게 됐수?'

과거, 리페로제가 기둥을 세우면, 에릭과 장두식이 생존자들을 모았다.

'거참,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한데, 이제는 에릭이 기둥을 세우고 장두식이 홀로 생존자들을 규합하는 상황이다.

'그립지만.... 다시 경험하고 싶진 않았수다.'

흑마법사의 재림(再臨).

그 의미는 추억 따위로 포장하기에는 너무나도 거창했다.

29화 재림(再臨) (2)

강조되고 반복되는 소리는 흑마법사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것도 경험을 기반으로 했다면, 더더욱 그렇고.

이곳으로 집결해라-!!!

흠칫-.

흑마법사가 몸을 소스라치게 떨었다.

저 말이 들려오면, 순식간에 신성을 흩뿌리는 검귀(劍鬼)가 나타난다.

단순히 소문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다.

흑마법사들에게는 뼈에 새겨질 만큼 유명한 말로.

'리페로제 그년 때문에 우리가 반쯤 멸종되었었지....'

근 몇 년간 흑마법사들을 숨어 살게 만든,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격언이다.

"그 계집의 목소리가 아니야."

하나, 저 목소리는 달랐다.

흑마법사는 괜한 불길함을 느꼈다.

"오 년도 넘게 실종되었다."

흑마법사 수뇌부의 판단이니 확실할 터였다.

이미, 제국 밖의 흑마법사들은 한참 전부터 수확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흐음, 아니겠지."

저 멀리 보이는 빛의 기둥도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는 작았다.

리페로제가 있었더라면....

벌써부터 흑마법사들의 곡소리가 들려왔으리라.

"마저 들어가시지요."

흑마법사는 안도했다.

잠시 멈췄던 마법진에 검은 흑마력이 공급되었다.

우어어어어―

섬뜩한 괴성을 지르며 검은 악마가 아가리를 열었다.

모험가들은 홀린 듯이 거대한 입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삐이이이이이―삐익.

고장 난 인형처럼 연신 호각을 불던 모험가도 악마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백 명가량의 모험가가 삼켜지고.

'제, 제발 누가-!'

어느덧 마지막에 도착한 존의 차례가 다가왔다.

모험가 파티 강철.

리더는 죽었고 탱커인 제임스까지 잃었으며, 마지막 생존자 존은 조만간 죽을 예정이다.

그것도 제 발로 걸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제임스의 곁을 지키다 함께 죽었어야 했어.

존의 가슴이 미어졌다.

몸은 말을 듣지 않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렸다.

"호오, 꽤나 양질의 절망이군요."

흑마법사가 그의 눈물을 보며 감탄했다.

절망과 고통은 흑마법사의 양분이었으니.

쩌어억-.

침을 뚝뚝 떨어트리는 악마의 입 앞에서 존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을 때.

쿠웅.

쿠웅.

숲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으음?"

미묘한 진동이었으나, 흑마법사가 마력 공급을 멈춘 채 시선을 돌릴 만한 변화였다.

존은 코앞에서 멈춘 악마의 입을 보며 덜덜- 떨었다.

그때 존의 귀에도 선명한 울림이 들려왔다.

쿵-쿵-쿵-쿵!

거대한 몬스터가 낼 법한 발소리였다.

그 발걸음을 따라 숲이 흔들렸고 흑마력에 물든 나뭇잎들이 바닥을 수놓았다.

"어떤 미친놈이냐?"

바닥에 깔린 나뭇잎들은 생명력을 빼앗는 하나의 덫이 되어 줄 테니.

흑마법사는 손을 휘둘렀다.

존을 집어삼키려던 악마의 얼굴이 발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콰직- 미궁의 나무가 부서졌다.

그 사이로 거대한 사내가 나타났는데, 그가 입은 제국의 제복 위로 은은한 신성이 피어나고 있었다.

"2계층에 성기사가 있군요?"

흑마법사가 여유롭게 거대한 성기사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덩치가 좀 크다만, 얼굴은 앳된 것이 갓 성기사가 된 어린것에 불과할 터.

"좋네요, 좋아! 양질의 제물을 얻은 셈이니까요."

흑마법사의 로브가 흘러내리고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평범한 중년 사내였다.

특이한 점은 머리숱이 적고 피부에 주름이 조금 많다는 것 정도.

그리고.

"이마에 네 줄이 그어졌군."

흑마법사의 이마에 두꺼운 검정색 수직선 네 개가 그려졌다.

"오오- 이 줄의 의미를 아십니까?"

얼굴 어딘가에 새겨진 검은색 선은 흑마법사의 상징이다.

검게 물든 손가락이 죽음을 뿌리고 얼굴의 검은 선이 영혼을 수확한다.

"성기사라면 알겠지요. 네 줄의 의미를?"

"잘 알지."

흑마법사의 경지는 수확한 생명의 수에 따라 달라진다.

한 줄이면 한 자릿수.

두 줄은 두 자릿수.

세 줄은 세 자릿수며.

"알면서도 그렇게 건방진 태도입니까? 일개 성기사가."

네 줄은 천의 생명을 수확했다는 의미다.

'쓰레기가-.'

에릭의 눈썹이 구겨졌다.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승모근이 춤을 췄다.

그러나 에릭의 눈은 텅 빈 공터에 머물렀다.

"생존자는 한 명이군."

에릭은 몸을 덜덜- 떠는 존을 바라보며 말했고.

"끄흐흐-. 미친 성기사도 제물로는 아주 적합하겠지요."

흑마법사는 기꺼이 웃어 젖혔다.

그걸 본 에릭이 말하기를.

"미쳤다니, 내가 볼 때는 고블린을 모시는 네놈이 더 이상하군."

"...고블린?"

평소 흑마법사는 즉살하는 에릭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대화를 시도해 봤다.

'저 새끼들이 어디서 나온 거지?'

5살 때부터 10살까지.

쉴 틈 없이 흑마법사를 잡아다 족친 에릭이었다.

적어도 르웰의 교회가 있는 제국만큼은 안전지대로 만들었는데.

"끄응. 몰-탈 님을 고블린이라 비하하면 안 되지요."

"마법진을 보면 뿔 달린 고블린이 맞는데, 왜 거짓말을 하지?"

에릭은 고개를 기울였다.

"몰-탈이라는 고블린이 있나?"

"끄흐흐, 미친 성기사가...."

종교인이 신을 모시듯이.

흑마법사는 악마를 모신다.

차이점은 하나.

'악마는 생명이라는 대가를 받지.'

신은 믿음에 부응하여 힘을 내려 주는 존재다.

반면 악마는 제물을 대가로 하여 힘을 제공하는 존재다. 게다가 악마는 믿음까지 강제한다.

그렇기에.

"몰-탈이시여, 백의 생을 바치니, 저 가증스러운 성기사를 죽여 주소서-!"

저런 병신 같은 주문을 쓰는 것이며.

우어어어어어―

제대로 된 형태가 없는, 악마의 형상 따위를 마법진으로 사용하는 거다.

악마가 입을 쩌억- 벌렸다.

"죽어서- 양분이 되어라!"

휘오오오오―

거대한 인력이 발생하고 에릭을 향해 바람이 휘몰아쳤다.

'단단히 긁혔군.'

몰아치는 바람에 에릭의 입매가 뒤틀렸다.

흑마법사를 긁는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그들이 모시는 존재를 모욕하는 것.

"잡종 고블린의 마법진으로 뭘 하겠다는 거냐?"

눅눅한 바람이 자신을 끌어당기는데, 아주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개벽처럼 빨아들이는 힘이나, 턱없이 약했으니.

'격의 차이를 알려 주마.'

에릭 또한 검을 꺼내며 [개벽]으로 맞대응을 하려고 했는데.

'응?'

스킬 모션을 취해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상태창을 바라보니.

[개벽- %^$]

찢어진 상태창의 화면 사이로 깨진 텍스트가 떠올랐다.

번뜩- 에릭의 머릿속에 깨달음이 찾아왔다.

'스킬이니까 쿨타임이 있는 게 당연한가?'

그간 긴 시간차를 두고 스킬을 써서 몰랐던 부분이다.

스킬에는 쿨타임이 있는 게 당연했다.

신성력과는 다르게, 스킬은 [시스템]의 혜택이었으니까.

"끄흐흐- 뭐가 잘 안되나 봅니다? 오오-! 검에서 신성이 일어나지 않는군요!"

흑마법사는 그런 에릭을 보며 도발하였다.

끔찍한 비아냥조로 웃음을 흘려 댔다.

"어린것이 혼자서 수확을 어찌 막겠다고! 끄흐흐, 얌전히 창놈의 성서나 읽고 있어야죠."

그 천박함에 에릭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고는 대뜸 [개벽의 검]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 주머니째로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사실.

"흠, 때려 죽이는 게 더 좋겠군."

에릭은 흑마법사를 패 죽이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그쪽이 신성력을 더 강하게 빚어내고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어 줬으니까.

에릭이 우뚝 서서 한쪽 손을 내밀고 있자니.

"왜죠? 검까지 집어넣고 포기하신 건가요?"

흑마법사가 의문을 느꼈다.

한껏 비아냥댔는데, 아직도 저놈이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저거 왜 안 빨려 가죠?'

분명 5층을 등반하는 모험가까지 빨아들였던 몰-탈의 힘이었다.

"고블린 따위로 뭘 하겠다고."

에릭이 손을 뻗었다.

눈앞의 마법진은 더러운 흑마력이다.

에릭은 흑마법사를 패 죽이되 손을 안 대고 패 죽일 생각이다.

"검까지 집어넣고 무슨 수작을...."

저 멀리 떨어진 성기사가 자신을 손끝으로 겨눈 모습에 흑마법사는 말끝을 흐렸다.

"몰-탈이시여-."

불길했다.

흑마법사는 주문을 외워 보호를 요청하려 들었다.

하나, 주문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쿠웅-!

거대한 성기사가 손을 불끈 쥐었기 때문.

"커헉-!"

흑마법사가 있는 장소는 에릭과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거대한 숲의 공터였으니.

족히 백여 미터는 넘을 터였다.

게다가 에릭의 앞에는 고블린 킹을 셋 이상 합쳐 놓은 것만큼 커다란 악마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에릭보다 커다란 뿔이 그 존재의 증거였다.

그랬는데.

퍼엉-!

"-끅."

갑자기 흑마법사의 심장이 터졌다.

뇌를 부수고 사지를 망가트려도 흑마법사는 되살아날 수 있다.

심장만 멀쩡하다면.

툭-.

"네 줄 따리가 건방지군."

에릭은 그 모든 것을 잘 알기에, 심장을 터트려 죽였다.

'들을 건 다 들었으니까.'

수확이라는 흑마법사의 목적도 알아냈다.

영혼을 모아서 뭘 하겠다는 건지, 이건 듣지 않아도 된다.

역겨운 흑마법사 놈들이 할 일은 뻔하니까.

'더러운 흑마력.'

어릴 적에는 직접 팔을 쑤셔 넣었다만, 지금은 주먹을 쥐면 끝.

흑마법사가 터진 직후 흑마력으로 가득한 악마의 얼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에릭은 두 손을 모아 경건한 자세를 취했다.

"-정화."

짧고 대충인 기도문에 부응해 아주 웅혼하고 거대한 신성력이 에릭에게 뿜어져 나왔다.

이는 물결치듯 악마의 잔여물을 뒤덮었다.

파스스- 검은 흑마력이 새하얗게 변하고는 입자처럼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악마에게 갇힌 영혼들이 해방되는 것으로.

"신의 품에서는 편안하시기를."

에릭은 이번만큼은 진중한 어조로 기도를 읊조렸다.

빙의자가 존재하듯이.

영혼은 실존하며, 실재한다.

신의 존재는 믿지 않는 에릭이었지만, 마음만큼은 그들이 편한 곳으로 떠나기를 바랐다.

"에릭, 넌 다 대충 툭- 뱉으면서 마지막 배웅은 왜 그렇게 정중한 거냐?"

"모두를 구하지는 못해도 명복은 빌어 주고 싶습니다."

옛 기억이 머리를 스쳐 간다.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죽었던 전장에서, 에릭이 정한 최선이었다.

미궁은 엄청나게 넓다.

이곳에서도 모두를 구할 수는 없을 테지만, 흑마법사에게서 해방된 영혼의 명복만큼은 빌어 줄 것이다.

"정신이 좀 드나?"

에릭은 바닥에 쓰러진 흑마법사 시체를 챙기며 그리 말했다.

덜덜 떨던 존이 눈을 떴다.

* * *

"성기사 나리, 이쪽입니다!"

에릭은 모험가 존을 따라 움직였다. 흑마력에 당한 동료를 숲 한복판에 두고 왔다는 것이 존의 주장이었다.

에릭은 존에게 신성 치유를 내려 줬다.

'신성을 잘 받아들였군.'

빙의자나 흑마법사의 하수인은 아니겠어.

에릭은 한 발 뒤에서 존을 따라가며 사방을 훑었다.

'최소 열 이상이군.'

흑마법사의 기척이 미궁 2계층 곳곳에서 느껴졌다.

"끄으으으윽."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흑화 중인 한 모험가가 보였다.

"조, 조날드!"

"이 검정 덩어리가 네 동료라고?"

에릭의 기도가 날카로워졌다.

흑마법사를 베며 신성력이 벼려졌다.

보다 날카롭고 흉포하게.

무릇 찬란한 신성은 더러운 흑마력을 잡아먹는 법이니.

"지, 진짜 조날드입니다. 다, 다리 자른 게 저기 있잖습니까!"

한쪽 다리가 없는 검은색 액체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이 부식된 흑마력 덩어리가 네 동료 조날드의 다리란 말이지."

에릭의 기운이 더욱 흉포해졌다.

'빙의자는 아니군.'

빙의자의 흑마력은 저렇게 더러운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빙의자가 아닌 현지인 흑마법사는 상대하기 쉬운 편이다.

"안심해라."

에릭이 손을 휘두르자.

꾸드득-.

검은 진액을 흩날리며, 다리였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그의 얼굴은 분명 흉포하며 화난 모습인데, 신성력의 움직임은 아주 정중했고 안정적이었다.

'예의.'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존에게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그때 에릭이 조날드의 위로 진중하게 손을 얹었다.

"-정화. -회복. -안정. -보호."

툭툭 내뱉는 기도문이 읊어지고.

"아아, 아스티아 님이시여...."

존이 동료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검은 덩어리가 조금씩 인간의 형체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에릭은 검은 덩어리에 정화 주문을 걸고 그 위에 회복과 안정의 기도를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신성의 돔을 둘러 존과 조날드를 가두었다.

"동료가 일어나면, 저 기둥을 향해 뛰어라."

에릭은 그리 말하며 시꺼먼 어둠 속으로 향했다.

어느새 고블린 숲은 마경처럼 거뭇하게 변해 버렸고.

'감히.'

에릭의 분노는 깊어져 갔다.

* * *

"거참, 모험가 놈들아! 빨리빨리 움직여라!"

장두식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생존자들을 안내했다.

거대한 빛의 기둥을 보고도 반신반의하는 탓에, 애를 먹었다.

사실 모험가들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제국군이지.

"그... 호각처럼 기만일 수도 있다. 다들 경계 태세를 취해라!"

제국군이 호각에 낚여서 제법 큰 병력이 잡아먹혔다고 한다.

한번 기만질에 당했다가 탈출한 제국군이다.

그들은 신성력을 보고도 지레 겁을 먹었다.

"그딴 개소리를 할 거면 애초에 왜 이리로 온 거요?"

장두식은 아슬아슬한 신성력의 경계 면에 빙의자들을 세워 두고 몽둥이로 툭툭 밀쳐 가며 제국군을 설득했다.

"...저 빙의자들을 보슈. 기둥 가까이에 가면 몸에 불이 붙지 않수?"

"꺗-! 뜨거!"

효과음이 뛰어난 강풍호가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거참, 매번 저렇게 지랄맞은 반응이 어찌 가능한 건지....'

그런데도.

"파에도 준남작의 삼남, 몰론 살 파에도다. 제국 미궁군 2계층 순찰대 12부대의 부장을 맡고 있지."

어중간한 귀족을 설득하기란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강풍호의 비명에도 그는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모험가들은 다 믿고 넘어갔는데.

"빙의자라고?"

준남작의 뭐시기는 오히려 더 의혹이 든다는 듯이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거, 나 모르오? 빙의자 관리국장 에릭 형님의 오른팔 장두식이요."

"에릭 국장님 같은 유명인을 누가 모르겠소? 삼황자 전하를 터트리신 분인데-."

그 말투도 어딘가 언짢은 느낌이었다.

"애초에 에릭 국장은 이런 비상사태에 빙의자를 버리고 어딜 갔단 말이오?"

"저어-기 숲이 터지는 곳이 보이지 않수?"

콰아아앙-!

저 멀리 보이는 검은 숲에서 금빛 폭발이 일어났다.

그걸 보니 더욱 믿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빙의자랑 같이 있는 그쪽이 에릭 국장의 오른팔이고, 미궁의 숲을 터트리는 괴물이 에릭 국장이라는 말이오?"

"그렇수다!"

"그걸 누가 믿겠소?"

어느덧 부장의 뒤에선 병사들까지 검을 뽑을 준비를 마쳤다.

웬 뒷골목 왈패가 빙의자를 거느리고 순례자이자 빙의자 관리국장의 이름을 논한다고?

애초에 저런 폭발을 열다섯짜리 성기사가 만든다는 것도 이상했다.

미궁 2계층의 순찰대로서는 장두식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거참, 뭐가 그리 의심이 많은지.'

장두식이 몽둥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때 번뜩 드는 생각이 있었으니.

"내 머리 보이오? 만져 보슈."

"금발.... 허어."

상자깡을 할 때 하도 축복을 받은 탓에, 아직도 축성의 효과가 남아 있었다.

"시, 신성력이.... 미, 믿겠소."

백 미터도 넘게 떨어진 기둥은 가짜일 수도 있지만.

신성력이 주는 효과는 절대적이다.

"지, 진짜 아스티아 교단의 신성력!"

그 따스함과 안정감.

상처를 치유해 주는 포근함.

어떠한 것도 신성의 효과를 흉내 낼 순 없다.

그렇기에 신성이다.

'저러면 나는 왜 이 지랄을?'

물론 강풍호에게는 의문이 조금 남았지만....

어느새 다음 생존자가 찾아왔다.

"저 뒤에 서 있는 게 빙의자요."

장두식의 강조되고 반복된 말에 어느덧 적응해 버렸다.

강풍호는 장두식이 말하기 전에 스스로 몸을 움직였다.

"앗-! 뜨거."

30화 재림(再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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