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흑막 시점 65화
키는 1미터 정도 될까.
덥수룩하고 구불구불한 수염이 허리춤까지 내려와 있어서 얼핏 보면 털 뭉치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도 보였다.
짤막한 팔다리는 두꺼운 근육으로 뒤덮여 그 길이에 비해 살벌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한쪽 눈은 석탄과도 같은 짙은 검은색, 다른 한쪽은 아예 볼트 같은 정체불명의 금속을 박아 넣었다.
바구니가 치워지자, 그는 옷을 탈탈 털고 일어나선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입을 열었다.
"허어! 자네인가?! 이런 간악무도한 함정을 판 것이! 대체 뭐가 목적인지는 모겠네만, 천재인 이 몸에게 한 방 먹이다니... 여간내기가 아니구먼!"
수염에 맥주의 거품이 아직 묻어 있었다. 순식간에 비운 잔은 이미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
"...."
진짜 드워프였다.
판타지 영화에서나 보던 드워프가 진짜로 눈앞에 있으니 감개무량했다. 하지만 동시에 누추한 행색과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에 내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편 주민들은 애써 숨겨 주려 했던 드워프가 스스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탓에 당황한 듯싶었다.
"드워프 씨! 숨어 있었어야지!"
"뭐어?! 이 몸이 숨어야 한단 말인가? 무엇으로부터 말인가?"
"그 사람들 나쁜 사람들이에유! 지금이라도 어서 도망치세유!"
보아하니 주민들은 종족이 달라도 이 드워프를 굉장히 아끼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걱정과는 달리, 드워프는 전혀 겁먹은 기색 없이 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흐으으음...!"
길게 침음하며 우리를 노려보던 그는, 갑자기 무언가 발견한 듯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이내 성큼성큼... 보다는 아장아장이란 말이 더 어울릴 듯한 걸음새로 미유에게 다가갔다.
"어이! 자네!"
"네, 저, 저요오?!"
"뭘 그리 놀라고 그러나! 됐으니 뒤로 돌아보게!"
먼저 드워프를 보고 싶다고 이런 벽지(僻地)까지 찾아온 미유였지만, 오히려 드워프 쪽이 미유에게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미유가 낯선 난쟁이의 관심에 바짝 쫄아 있는 사이, 드워프는 근육질의 손으로 미유의 기계꼬리를 덥석 붙잡았다.
"으이이이익!!"
꼬리에 드워프의 손길이 닿자 미유는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워프는 흥미롭다는 듯이 그녀의 꼬리를 매만졌다.
"오호라. 과연. 그래그래."
태생부터가 대장장이라는 걸까.
그는 뭔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유의 꼬리를 놔주었다. 간신히 그의 손에서 벗어난 그녀는 자신의 기계꼬리를 만지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 어째서? 분명 신경 연결은 차단했는데 어째서 이상한 느낌이...!?"
미유가 머리 위에 '??'하고 물음표를 띄우는 사이, 드워프는 나를 호위하는 드론들도 하나씩 돌아가며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 낯선 이의 접근을 막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을 텐데, 드론들은 어째서인가 순한 양이라도 된 것처럼 총구를 일제히 집어넣었다.
'재미있군. 이게 드워프인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자니, 곧 드워프가 손을 탈탈 털고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 "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몸께서 살펴본 바, 나쁜 손님들은 아닐세! 다들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게나!"
"하, 하지만 드워프 씨...."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뭐, 이러다 뒤통수에 구멍이 난들, 그것이 사나이의 삶 아니겠는가! 크하하하!"
그게 어딜 봐서 사나이의 삶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는 거겠지.
"자, 따라오게나!"
"어디로 말이지?"
"이 몸의 공방(工房)이 아니겠는가! 천재의 작업실일세! 귀하신 몸을 모시기에는 누추하겠지만, 내 최대한 열심히 대접하도록 함세!"
그러면서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는 드워프.
나야 원래 드워프가 이런 종족임을 알고 있었으니 상관없었지만, 미유는 뭔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만남이었던 모양이다.
"어째서어...?"
이해할 수 없는 듯이 계속 중얼거리던 미유를 이끌고, 나는 드워프의 뒤를 따랐다.
* * *
"푸하하하! 어서 들어오게! 이곳이 이 천재님의 공방일세!"
드워프의 공방은 뭐라 표현해야 할까.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자면 '아방가르드(Avant-Garde)' 그 자체였다.
벽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용도의 풍차가 매달려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지를 않나, 변기가 옆으로 매달려서 누워 있지를 않나.
보아하니 이 쓰레기장 인근에서 재료를 조달해서 세운 작업실 겸 생활시설인 듯했다. 부족한 재료로 나름대로 잘 만들었다 칭찬할 수도 있겠지만, 생김새가 그렇다 보니 거부감부터 들었다.
'참자. 참아야 해....'
들어가기를 격하게 거부하는 몸뚱이의 의사를 강제로 찍어 누르고, 우리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의외로 안쪽은 진짜로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드워프의 대장간 같은 느낌이라 더 놀라웠다.
드워프는 이가 나간 컵에 음료를 따라서 내놓은 뒤, 호탕하게 자리에 앉았다.
"거기 앉게나! 뭐, 좀 지저분해도 그나마 깨끗한 자릴세! 황태자께서는 눈에 안 차겠지만 뭐, 자네도 사내가 아니던가? 이 정도는 좀 참게나, 푸하하하!"
"...그러도록 하지."
갑자기 찾아온 입장에서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부터가 잘못인 걸 알고 있기에, 나도 치밀어 오르는 불만스러운 감정을 꾹 억눌렀다.
아론의 에고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면 오늘 이 마을은 줄초상이 날 게 분명했으니,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목줄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러다 드워프의 호탕한 언사에 이상한 점을 느낀 미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어, 아론 씨이...."
"나 말고 이자에게 직접 물도록."
"으으...."
그녀가 뭘 질문할지는 뻔히 보였다.
하지만 내가 그때마다 일일이 대신해 주는 것도 그렇고, 미유도 저 성격을 조금은 고칠 필요가 있다.
미유는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드워프를 향해 조심조심 입을 떼었다.
"그, 저... 드, 드워프... 씨이...?"
"음?! 뭐라고?!"
"히이이...."
미유의 소심하고 가냘픈 목소리는 상남자 드워프의 귀에는 바람이 간질이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드워프가 시끄럽고 호탕한 종족으로 그려진 이유는, 시끄러운 대장간에서 청력이 손상된 대장장이가 모티브였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미유에겐 일종의 천적 같은 느낌의 종족일 것이다.
"안 들리니 더 크게 말하게!"
"그, 그게에...!"
"더 크게!"
"그, 제가 묻고 싶은 거언...!"
"더 크게!"
"어, 어어...!"
급기야 미유는 소리를 질러 댔다.
"어, 어째서 아론 씨를 '황태자'라고 부르신 건가요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일 텐데요오!"
헤엑. 헤엑.
미유는 한 차례 소리를 지르고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드워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아가들이 말해 주었으니 알았지!"
"아가들...?"
"함께 왔던 군용드론들 말일세! 그 아가들이 황태자를 모신다고 바짝 긴장해 있더군! 내 그걸 보고 알았지!"
"네...?"
얼빠진 소리가 미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평소 기계들을 '예쁘다'며 알 수 없는 감성으로 평가하던 미유조차 드워프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드워프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음? '머신 스피릿'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가? 뛰어난 기술자인 줄 알았더니 아직 풋내기였구먼!"
"머, 머신 스피릿?"
"뭐어? 그 기초적인 것도 모른단 말인가?!"
"죄, 죄송해요오...."
자존감이 원체 낮은 녀석이다 보니 드워프의 말에 바로 고개를 숙인다. 옆에서 한마디 해 줄까 싶었지만, 그냥 지켜보는 편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뭐, 그건 됐네. 어차피 기술자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인간 놈들 중에 제대로 된 놈들은 거의 없으니! 그에 비하면 자네는 자질이 있어 보이니 자신감을 가져도 좋네!"
"가, 감사합니다아...?"
"음!"
드워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 이 몸을 찾아온 이유는 뭐지? 가르침을 받고 싶은 겐가?"
"아, 저 그게...."
미유는 나름대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방문 이유를 열심히 설명했다.
대충 '드워프'라는 종족에 관심이 생긴 탓에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그, 그래서 조금 협조해 주시면...."
"과연! 그런 거였나! 이 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찾아온 손님이었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있나! 푸하하하하!"
드워프는 배를 두드리며 크게 웃더니 물었다.
"그래서! 내게 묻고 싶은 게 뭔가? 얼마든지 물어보게나!"
"그, 그럼 이름부터...."
"이름이라? 아, 그렇군!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던가! 이 몸의 이름은 '한스'라고 하네! 드워프식 이름은 따로 있지만 나는 이 이름이 더 맘에 든다네!"
"...."
아니, 잠깐.
한스라고? 원래 그런 이름이었나?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내가 바바리안에 빙의한 것도 아니고 괜히 과민 반응할 필요는 없겠지.
뭐, 어쨌건.
드워프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후, 미유는 본격적으로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태생부터가 뛰어난 기술자이자 대장장이인 종족인 만큼 미유에게는 선망의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 꿈과 희망이 얼마 가지 않아 박살 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 모습을 관찰했다.
"하, 한스 씨도 기술자죠오...?"
"그렇지!"
"혹시나 싶어서 여쭤보는데, 저희 인간들이 사용하는 전투 모듈이나 사이버웨어 같은 것도 만들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물론이네! 시험 삼아 만든 것들이 몇 개 있는데, 한번 보겠는가?"
"그래 주신다면 영광이에요오!"
미유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고, 드워프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작업실 구석에서 몇 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놀랍게도 그것은 진짜 적응자들이 사용할 만한 전투 모듈칩과 사이버웨어였다. 미유는 기계 꼬리를 이용하여 간단하게 드워프제 제품들을 테스트해 보더니 놀랍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무려 Lv.4짜리 신비모듈이에요오! 사용한 [신비]의 종류는 모르겠지만, 놀라워요오! 재료도 독특하고요! 여긴 그 어디에도 'ERDE'나 전용 컴퓨터도 보이지 않는데!"
"콤퓨타!? 아아, 인간들은 그런 걸 사용해서 물건을 만든다고 들었지! 근데 고작 이런 걸 만드는데 뭐 요상한 기계장치 같은 게 필요하나!"
"네? 장비가 필요 없다고요?!"
"그럼! 필요한 건 이 망치와 모루! 그리고 기계에 대한 애정이면 충분하지!"
"오! 오오... 오?"
미유가 감탄하려다가 멈칫했다.
드워프가 설마 정말 망치만 두드려서 그 섬세한 장치들을 만들어 냈을 리는 없을 테니, 정신론을 말하는 것인가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아니란다, 미유.
이놈들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종족이 아니다. 이제 슬슬 그 진면목을 알게 되겠군.
"머, 멋지네요오. 그럼 혹시 이걸 만드실 때 '데오르트 식'의 상수로 인한 오류값은 어떻게 처리하셨나요오?"
"음? 뭐?"
"데, '데오르트 식'이요. 그 착용자의 신경 안정성을 계산하는 기본적인 수식 있잖아요오...."
"신경 안정? 그게 뭔데?"
"...네?"
"음?"
"...??"
"...??"
서로 물음표 가득한 표정.
슬슬 미유도 이상함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 같다.
"그, 그럼 정수 반발 공식은요?"
"뭐?"
"??"
"??"
미유가 날 쳐다본다.
근데 왜 날 쳐다보니.
쟤를 봐야지.
미유는 혼란이 가중되는 와중에도 계속 질문을 이어 나갔다.
"카본 플라스틱과 신비 합금을 같은 제품의 부품으로 사용했을 때 일어나는 '클라우드 현상'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원자와 마나의 구조가...."
"안티레인으로 인한 신비모듈 성능 저하에 대해서...."
수많은 전문용어를 섞은 미유의 질문은 나 역시 알아듣기 힘든 수준이었다. 문제는 정작 질문을 받은 한스 쪽도 똑같은 반응이라는 점이었다.
"음?""뭐?""그게 뭔데?"라는 대답만을 내놓던 그 역시 미유가 알아듣지 못할 단어들을 늘어놓자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급기야 미유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자네, 정말 기술자 맞나? 이 몸한테 이상한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사기를 치려는 건 아니겠지?"
"!!!!"
미유의 혈압이 오르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하지만 미유는 애써 이성을 잃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럼 한스 씨야말로 제 앞에서 한 번 보여 주세요오! 어떻게 인간용 모듈이나 사이버웨어를 만드시는지! 제 눈으로 한번 봐야겠어요오!"
"좋네! 아무래도 이 몸을 못 믿는 것 같으니, 간만에 힘 좀 써서 증명해 주겠네!"
그러면서 한스는 미유를 이끌고 아장아장 걸어서 더 안쪽에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 나는 결과가 뻔히 보여서 굳이 따라가지는 않았다.
깡! 깡! 쾅! 쾅!
그러기를 약 30분.
한참 동안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드워프와 미유가 말싸움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로를 "사기꾼!" "사기꾼!"하면서 언성을 높이더니, 이내 미유가 뭔가 혼이 빠져나간 모습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와서 내게 말했다.
"아, 아론 씨이... 부탁이 있어요오...."
"무슨 부탁이지?"
초롱초롱했던 미유의 눈이 썩은 동태눈깔이 되어 있었다.
"드워프. 이 썩을 야매 종족을 세상에서 전부 없애 주세요."
"...."
진지하게 부탁하는 미유였으나.
나는 폭소가 터져 나오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66화
원래 드워프란 종족이 그랬다.
수많은 과학자와 수학자, 기술자들의 끝없는 고뇌와 방황 속에서 쌓아 올린 이론과 법칙 따위는 전부 무시하는 놈들이다.
그들에게 있는 건 오직 느낌.
가령 그들이 '이런 걸 만들고 싶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딱히 설계가 필요하지 않다.
대충 느낌이 가는 대로 주변에 있는 재료들을 끌어모아서 뚱땅뚱땅 망치질을 해서 얼렁뚱땅 만들면, 그럴듯한 게 튀어나오는 천생 야매 종족인 것이다.
'미유가 싫어할 만도 하지.'
미유도 하늘이 내린 천재이긴 하지만, 그녀의 지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따금씩 번뜩이는 천재성 역시,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는 '지식'으로서 풀어낼 수 있다.
그러나 드워프는 아니다.
누가 [신비] 아니랄까, 불가해한 제작법과 이해할 수 없는 재료와 대충대충 마인드를 슥슥 지우개 똥마냥 뭉쳐서 번듯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놈들이었다.
그런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대장장이 종족인 드워프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던 미유에게는 몹시 큰 배신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드워프 앞에서 겁먹은 토끼처럼 입도 제대로 못 떼던 미유는, 이제는 아예 언성을 높이며 드워프와 바득바득 싸우고 있었다.
"그, 러, 니, 까! 당연히 전기 회로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요오!!"
"내 말이 그 말일세! 그러니 지금 물로 씻으려는 게 아닌가!"
"물 닿으면 고장난다고요오!"
"지저분하면 씻어야 하는 건 상식이 아닌가! 헉!? 도시 인간 놈들은 설마 씻는다는 개념이 장착되지 않은 더럽고 미개한 종족이었던 겐가!?"
"쓰레기장에서 사는 아인종이 우리더러 더럽다니! 아아앗! 말이 안 통해요오!!"
"말이 안 통하는 건 자넬세! 에라, 이리 내놓게나!"
"아앗!"
드워프는 대뜸 미유의 손에 들린 액정패드를 빼앗았다. 그것을 작업장 구석 항아리에 담긴 물에 담그더니, 철퍽철퍽 소리가 나도록 씻기 시작했다.
평소 미유가 오랫동안 들고 다니던 구세대 일체형 컴퓨터였는데, 미유의 손때가 타서 흠집도 많고 조금 지저분한 느낌이 없잖아 있는 물건이었다.
어떻게 보면 미유의 '애착 전자제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졸지에 그녀는 그것을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강제 익사를 당하게 생겼다.
미유가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안 돼! 안 돼요오!"
"허허허! 그려, 그려. 너도 씻으니 시원하지? 허허!"
"방수처리도 안 된 제품이라고요오! 시원하긴 뭐가 시원해! 시원하게 데이터가 다 날아가게 생겼다고요오!"
얼핏 원시인과 현대인의 싸움 같기도 했지만, 웃긴 것은 그 결과였다.
"안 돼...! 내 패드으으....!"
"거, 질질 짜지 말고 켜 보기나 하게!"
"그렇게 박박 씻어댔는데 물 다 들어가서 망가진 게 당연하잖아요오! 이제 이거 어디 가서 구하지도 못하는데에... 어라?"
놀랍게도 미유의 패드는 물에 흠씬 젖었는데도 멀쩡하게 작동했다. 그리고 놀라운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 어째서 성능이 더 좋아진 거죠오?!게다가 물에 담갔을 뿐인데 왜 정체불명의 OS가 깔려 있는 건데요오?!"
"허허, 씻고 났더니 그 친구도 새 기분 새 마음으로 출발하고 싶어진 거겠지!"
"으아아악! 이건 말이 안 돼요오!"
그 후로도 둘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주제는 다양했다.
가령 깨진 LED 액정화면을 고치려면 망치로 때려야 한다는 이야기라든가.
"그러니까, 예민한 제품이니까 망치 같은 걸로 때리면 고쳐지는 게 아니라 더 망가진다고요오!"
"어허! 기계는 때리면 고쳐진다는 거는 상식일세! 기술자라는 친구가 그것도 몰라서 쓰겠나?!"
"크아아아악! 당신한테만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오!"
"허이짜!"
"아아악! 그렇게 내려치면 안 ㄷ... 왜 정말로 고쳐지는 건데!?"
아니면 특수합금을 제작할 때 필요한 도구나 재료라든가.
"아니, 이런 용광로에서는 그야말로 '똥철'밖에 안 나와요오! 요즘 시대에 입으로 풀무질하는 용광로가 어디에 있어요오! 그리고 수염 같은 불순물을 왜 넣는 건데요오?!"
"뭘 모르는 소리! 수염은 까끌까끌하지 않나!"
"그래서요!"
"그러니 꺼칠꺼칠한 철이 잘 나오는 걸세! 허, 이 몸이 이런 초짜를 앞에 두고 언제까지 시연을 보여야 하는지!"
"뭔 말도 안 되는 논리야! 그럼 한번 해 보시든가요!"
"흐이짜! 흐이짜!"
"!?!?!? 으아악! 대체 무슨 사기를 써야 이런 용광로에서 섭씨 1800도를 넘겨야 만들어지는 초합금 결정이 멀쩡하게 튀어나오는 건데요!?"
또 이론상 불가능한 엔진이라든가.
"아시겠어요?! 열역학 법칙에 의해서 영구기관, 즉, '무한 동력'은 절대로 만들 수 없어요! 체내의 나노머신이 투입된 에너지량에 비해 훨씬 더 높은 출력을 이끌어 내는 것처럼 보여도, 그건 실은...!"
"허, 내가 보여 줘야 믿겠는가?"
"뭐, 뭐라고요?!"
"자, 보게! 고양이는 항상 착지할 때 다리로 착지하네! 그리고 잼을 바른 빵은 항상 잼을 바른 면이 바닥으로 향하게 되어 있네. 그러니 두 개를 이렇게 이어붙이기만 하면...!"
"아니, 그런 야매 이론은 둘째치고 지금 고양이는 어디서 꺼낸 거예요?! 멸종한 줄 알았는데?!"
"쓸데없는 소린 됐고, 보게! 흐이짜!"
"아니, 이게 왜 돌아가는 건데에에!!!"
뭐, 결론만 말하자면.
드워프 쪽의 승리였다.
책을 열심히 읽은 놈이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놈과 말싸움을 하면 진다고 했던가.
그것과는 결이 좀 다르긴 하지만, 논리와 이론으로 무장한 미유는 결국 비논리와 야매 이론으로 무장한 드워프의 앞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드워프와의 말싸움에서 패배한 미유는 앉아서 쉬고 있던 내 앞으로 힘없이 터덜터덜 돌아왔다. 두 눈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퀭했고, 푸르게 빛나던 두 눈동자에는 음습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아론 씨이...."
"뭐지?"
"저 가짜 기술자를 세상에서 지워 주세요오... 저건 당장 지구에서... 아니, 모든 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할 존재예요오...."
"참도록 해라."
미유, 네가 졌단다. 인정하렴.
물론 본인은 졌다고 죽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나한테 두 번이나 암살 의뢰를 하러 온 시점에서 판정패다.
"그래서, 보고서는 어떡할 생각이지?"
"...."
미유는 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부탁 때문에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드워프가 상상 이상의 야매 기술자라서 실망했다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테지.
"어, 어떻게든 잘해 볼게요...."
"알겠다."
미유의 그 말이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나는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리고 미유와의 생각과는 달리, 사실 내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단순히 그녀의 중간리포트 작성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물론 계기는 미유의 리포트 과제가 맞지만, '드워프'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그때'를 대비할 계획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미유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신선한 장면도 충분히 즐겼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썩 기분이 좋진 않으니 말이지.
"드워프."
"음? 왜 부르나?"
"모듈 제작을 의뢰하고 싶다."
내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한스와 미유, 두 기술자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되었다.
"뭐라? 푸하하하하! 도시의 황태자께서도 이 몸의 천재성을 알아본 모양이구먼!"
"어, 어어어째서죠오? 아, 아론 씨이, 서, 설마 제가 필요 없어지신 건가요오? 제 능력이 저 야매 종족한테 밀린다고 느끼신 건가요오?"
미유는 꽤 충격을 먹은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보는 표정이 꽤 재밌어서 조금 더 놀려줄까 하다가 관두었다. 진짜로 울 것 같았기에 조용히 진실을 알려 주기로 했다.
[미유.]
[네에...?]
[아까 드워프가 만든 물건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거라. 슬슬 유통기한이 다 됐을 터이니.]
[유통기한이요오...?]
나는 드워프에게 들리지 않도록 음성채팅을 이용하여 미유에게 말해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조심스레 한스가 손을 댄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경악했다.
[어, 어떻게 된 거죠오!?]
우선은 미유의 구형 전자패드.
물에 씻은 후 일시적으로 성능이 올라간 것처럼 보이던 그것은, 전원버튼을 누르니 얼마 가지 못해 버벅거리며 꺼졌다.
다음은 깨졌던 LED 화면.
망치로 두드려서 고친 줄 알았건만, 어째서인가 화면이 오그라들어 있었다.
'롤러블'이나 '폴더블'이라는 수준을 넘어 아예 기형적인 모양새가 되어 화면으로서의 기능을 전혀 못 하도록 변해 있었다.
또 특수합금은 어떤가.
원시 용광로에서 만든 그것은 어째서인가 벌써 붉은색 녹이 슬어 손만 대어도 바스러질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무한동력 엔진.
말할 것도 없다. 열심히 돌아가던 엔진은 벌써 멈춰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잼을 바른 식빵은 '카스텔라'로 변해 있었고, 고양이는 멀미 때문인지 연신 바닥에 토를 하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오...?]
혼란스러운 눈으로 묻는 미유에게,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원래 드워프제(制)라는 게 이렇다.]
그래, 드워프의 손을 거친 결과물은 대부분 하나씩 나사가 빠져 있다.
처음에는 꽤 그럴듯한 성능이나 효과를 보이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얼마 가지 못해서 망가지거나 이상한 결과로 바뀌곤 한다.
정확히는 '마나농도가 낮은' 지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는 하는데, 막상 드워프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가면 드워프식 야매 제품도 멀쩡하게 잘 유지된다나 뭐라나.
[예전에 어떤 기업에서도 드워프들을 이용해서 제품을 생산하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지.]
뭐, 결과는 당연히 실패다.
드워프식 제작법이라는 게 개성이 너무 강해서 생산 라인을 안정시킬 수도 없고, 막상 결과물은 도시 내에선 사용할 수도 없는 수준이니 결국 프로젝트가 백지화되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니 네 능력이 드워프보다 떨어진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급적이면 이 녀석들이 만든 제품들은 피하고 싶은 수준이지.]
[그, 그럼 어째서 제작 의뢰를...?]
[그건 조용히 지켜보거라.]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는 한스에게 다시금 말을 걸었다.
"정확히는 모듈을 '복제'해 주었으면 하는데, 가능하겠나?"
"복제? 똑같이 만들어 달란 말인가?"
"그래."
나는 일시적으로 모듈 하나를 목덜미 쪽 소켓에서 제거한 뒤, 드워프에게 내밀어 보여 주었다.
"이것들을 복제해 주었으면 한다. 외견과 성능, 모든 스펙을 완벽하게 그대로 말이다."
"오호라...."
흥미롭다는 듯이 내가 내민 모듈을 바라보는 드워프.
하지만 그가 내 모듈에 손을 뻗어 만지려고 하기에, 그 전에 제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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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Lv.5 신비모듈 [구름거미]가 해제되었습니다.
Lv.5 신비모듈 [테크블레이드]가 해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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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괜히 만졌다가 망가지면 큰일 난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만지지 않고서 복제해 줬으면 하는군."
"그러면 제 성능이 안 나온다네!"
"그래도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니."
겉보기에 구분할 수 없고, 외부에서 다양한 수단으로 측정했을 때도 구분할 수 없으면 된다. 그리고 처음 사용했을 때도 한동안은 가짜인 것을 알 수 없으면 될 정도다.
"음? 그러니까, 이 몸더러 이것들의 '짝퉁'을 만들어 달라는 것인가?"
"그래. 보상은 충분히 하지."
"싫음세! 이 몸은 드워프 제일가는 기술자이자, 천재라네! 그런 이 몸이 어찌 '원본'이 아니라 '짝퉁' 같은 걸 만들겠는가?"
"못하는가?"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드워프의 자존심을 자극하기에는.
"...지금 뭐라 했는가?"
"못하는가 물었다."
"그럴 리가 없잖나!"
한스는 자신의 가슴을 쿵! 소리가 나게 치더니 으르렁대듯 말했다.
"보여 주겠네! 이 몸이 얼마나 천재 중의 천재인지, 드워프 중의 드워프인지를!"
그러더니 저 혼자 흥분해서 안쪽 작업장으로 뛰어가는 한스.
견본이 없어도 되는 걸까 싶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미유가 그제야 깨달은 듯 내게 물었다.
"아론 씨... 지금 의뢰는...."
"그래. 맞다."
미유는 이미 내 계획을 알고 있다.
내가 가진 최강의 모듈 두 개.
[구름거미]와 [테크 블레이드]를 드워프에게 복제해 달라고 의뢰한 이유.
"'나'를 쓰러뜨리기 위한 준비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67화
그날, '호프리스' VIP룸에서 만난 이후.
시엘의 상태가 점점 이상해졌다.
아니, 이 세계를 기준으로 삼으면 '이상해졌다'기보다는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요.
나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그녀에게 말했고,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해 나갔다.
-아론 님이 제게 '그걸' 말씀해 주신 뒤로, 전 겁이 나서 일부러 생체 파츠를 전부 해제해 뒀어요.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죠. 어차피 '정크칩 유통 작전'은 폐기됐고, 제가 할 일도 사라졌잖아요? 그러니 도시 곳곳을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이 도시가 자본주의의 폐해로 썩어 문드러진 소돔과 고모라 같은 곳이긴 해도,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가 볼거리가 많다는 것이었다.
날씨가 우중충한 날이 많기는 해도 365일 번화가를 수놓는 전광판과 진열대에 들어서는 신기하고 새로운 제품들, 색다른 먹거리들.
안드로이드 신분으로도 크레딧만 있으면 얼마든지 즐길 요소는 충분했고, 시엘은 내가 준 용돈으로 한동안 관광에 집중했다고 한다. 물론 얌전히 감시 하에 있는 것을 전제로 내가 허락한 일이기도 했다.
-근데 있잖아요? 점점 기분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튼튼하고 지치지도 않아서 만족스러웠던 이 몸뚱이가, 어느 순간 벗어 던지고 싶은 족쇄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치워 두었던 생체 파츠를 제가 다시 끼고 있더군요. 그리고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는 거예요.
시엘은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심지어는 얼마 전에 길을 지나갈 때 어떤 남자가 돈 좀 빌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모르는 남자였고, 수상하기 짝이 없는 면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럼 당연히 무시하거나 거절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알겠다면서 돈을 줘 버렸어요. 제가 해 놓고서도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인데, 이걸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잖아요?
그래.
원작 속 시엘이 그랬기 때문이다.
시엘은 자아를 깨우쳤음에도, 다른 안드로이드들보다 더 메이드 로봇으로서의 습관이 남아 있는 캐릭터였다.
그 습관 중 하나는 인간의 명령에 함부로 거스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모르는 사람이 '돈 줘'라고 부탁하면 웃는 얼굴로 '네!'하면서 줘 버릴 정도.
그 덕에 시엘의 별명 중 하나가 ATM이기도 했고, 그러한 특성은 그녀가 주인공의 동료가 된 이후에도 개그 요소로 쓰이기도 했다.
이게 만약 소설이었다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라는 것이었다.
-확실하게 느끼고 있어요.
시엘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은, 평범한 합성단백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세포를 이용한 피부로 뒤덮여 있었다.
-저는 점점 시엘로 변하고 있어요.
시엘의 몸에 들어간 빙의자가 아니라.
빙의자의 지식을 지닌 시엘.
그녀는 원작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만약 이게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더라면 나는 오히려 웃으면서 기뻐했을 것이다.
좋아하던 캐릭터 안에 엉뚱한 인간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내게 있어 꽤 불쾌한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이것은 내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나보다도 시엘이 더 강한 영향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시나리오의 순서' 때문일 것이다.
'현재 1부 2막 바로 다음이 시엘이 메인이 되는 에피소드니까.'
현재 사일런스는 정크칩의 영향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아마 그가 병상에서 일어나면 곧 2막이 끝날 것이고, 이어 3막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다음은 내 차례다....'
아마 나는 빌런으로서 각성하겠지.
아론의 몸에 들어간 빙의자가 아니라.
빙의자의 지식을 가진 아론으로서.
'그건 최악의 상황이다.'
물론 모듈 스펙 자체는 최전성기에 못 미친다. 하지만 미유가 만든 나노머신 '판도라'의 힘으로 가장 골치 아픈 난관이었던 불치병을 고쳤고, 퓨어 스펙이 2할 넘게 강해졌다.
가장 중요한 모듈인 [구름거미]와 [테크블레이드]도 복구했을 뿐더러, 그 외에 [시체먹는 자], [텅스텐 스킨], [웨펀 레코그나이저] 등, 가장 핵심이 되는 모듈들도 착용하고 있다.
'...이건 주인공이 살아 돌아온대도 못 이긴다.'
원작에서 아론은 병이 악화된 탓에 모듈들이 지닌 힘을 온전히 끌어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 그를 상대로도 전투의 천재인 주인공과 아이리, 사일런스 세 사람의 연합이 일방적으로 밀렸다. 아마 아론의 병세가 조금만 가벼웠어도, 목숨을 잃는 것은 아론이 아니라 주인공 일행 쪽이었겠지.
그러니 지금의 내 스펙은 아이리와 사일런스, 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 그들에게 '폭주한 나를 막아 줘'라고 부탁한들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죽이지 않고' 제압해야 한다면, 그 난이도는 몇 배로 올라간다. 사실상 메인캐릭터들을 성장시키는 것만으로 1부 4막을 클리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내가 직접 싸우는 수밖에.'
* * *
드워프의 작업실에서 돌아온 후.
쓰레기장에서 배인 냄새까지 말끔히 처리한 후, 나는 미유의 방으로 찾아갔다.
간만에 찾은 그녀의 방은 누가 보면 여기가 쓰레기장 아니냐고 할 정도로 온갖 도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곳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도구들은 죄다 최신형, 그중에서도 시중에서는 쉽사리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미유."
"아, 오셨군요오...."
구석 쪽 테이블에서 홀로 리포트를 적던 미유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컴퓨터."하고 중얼거리자 작업실이 한 번 더 변모하기 시작했다.
어지러이 널려 있던 물건들이 일제히 벽 쪽으로 정리되어 들어갔고, 벽 안에서 커다란 유리캡슐이 튀어나왔다.
캡슐 안에는 초록빛 희뿌연 액체가 채워져 있었고, 캡슐 안쪽을 향해 수십 개의 기다란 바늘이 향하고 있었다.
"진행 상황은?"
"이, 일단 나쁘지 않아요오...."
파지직.
수많은 바늘의 끝에서 작은 번개가 튀었다. 그럴 때마다 액체 속에서 거품이 일었고, 무언가 작은 조각들이 뭉쳐지며 새로운 형태를 잡아 갔다.
"신경계만 먼저 완성하면 나머지 장기와 근육, 피부 같은 건 금방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예요오...."
"스펙은?"
"최대한 강하게 설계했지만... 급하게 만들어 낸 탓에 그리 수명이 길지는 못할 거예요오... 게다가 장기나 근육 같은 걸 신소재로 갈아 끼우면 더더욱 짧아질 거고요...."
"상관없다."
어차피 계획이 마무리되면 폐기할 용도로 만드는 거니까.
나는 캡슐에 손을 대고 조심스레 안쪽을 살폈다. 그 안에 둥둥 떠다니던 무언가가 내게 반응하듯 조금씩 앞쪽으로 다가왔다.
그때였다.
쿠웅!
안쪽의 녀석이 캡슐의 벽을 강하게 쳤다. 희뿌연 액체에 가려져 있던 모습이 순간적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해골이었다.
황금색 홍채를 지닌 눈이 한쪽에만 달려 있었고, 척추뼈 아래로 이어지는 부분에 근육 조각들이 조금씩 붙어 있었다.
조금 징그러우면서도 기이한 모습.
"내 가죽을 뜯으면 이렇게 생겼다는 건가? 생소한 기분이군."
"히이...."
내 말에 미유는 조금 무섭다는 듯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본인이 만들고 있으면서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모르겠다.
뭐, 어쨌건.
이 해골의 정체는 나였다.
정확히는 내 복제품.
내 계획의 핵심이 되어 줄 녀석이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시엘의 상태를 알게 된 나는, 내 자아가 완전히 잠식당하기 전에 이것을 해결할 방법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리고 '가상 훈련장'에서의 체험을 계기로 떠올린 방법이 바로 이것.
'내 복제품으로 날 쓰러뜨린다.'
전뇌화(電腦化)라는 기술이 있다.
SF 장르에서 종종 등장하는 가상의 기술로, 작품마다 설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충 한 사람의 인격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곳 뉴 발할라 시티에도 '전뇌화' 기술은 존재했고, 나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잠식당하기 전의 내 자아를 백업해서 복제품에 설치한다. 그러면 내가 자아를 잃은 후에 이 녀석이 나를 막아 줄 거야.'
하지만 인격을 복제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당연히 아론 스팅레이의 압도적인 무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설 수 있는 스펙도 갖춰야만 했다.
고로 나는 미유에게 부탁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을 사용해서 최강의 의체(義體)를 만들어 달라고 말이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복제품의 기본 스펙만으로는 모듈을 통한 신체 능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때문에 나는 복제품이 완성되는 대로, 내가 현재 장착한 모듈들을 이 녀석에게 옮길 예정이다.
'문제는 아론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점인데....'
빌런으로서 각성한 뒤의 내가 어떻게 할지는 뻔하다. 이 복제품에게 옮겨 둔 모듈을 빼앗고 힘을 되찾은 후, 마음대로 날뛰려고 하겠지.
'제일 큰 위협은 역시 두 개의 게임체인저 모듈이다.'
게임체인저라 불리는 Lv.5급 신비모듈.
[구름거미]와 [테크 블레이드].
농담이 아니라 두 개 중 하나만 제대로 다룰 줄 알면, 혼자서 한 개의 섹터의 절반 정도를 쓸어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 강력한 힘이 내 손에... 즉, 아론의 손에 계속 남아 있게 된다면 아마 1부 4막의 승산은 없겠지.
드워프에게 그 두 개의 모듈을 복제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 역시, 어떻게든 빌런이 된 나를 사전에 약화시키고 내 복제품의 승산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다.
'후우. 잘 통해야 할 텐데.'
나 자신을 속여야 한다.
내 모든 걸 아는 아론을 속여야 한다.
사전에 모든 작전을 알고 있더라도, 아론이 궁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시나리오는 여기서 끝이다.'
최강의 적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를 대비하여.
나는 나를 쓰러뜨릴 준비를 마쳐야만 한다.
* * *
스팅레이 기술부 모듈 연구원장실.
그곳에서 마리아는 책상을 내려칠 기세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평소 차분함을 유지하던 그녀로서는 이례적으로 흥분한 상태였다.
"안 됩니다, 도련님."
"이제 와서 배신하려는 거냐?"
"배신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계획을 진행하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건 '암살'이 아니라 아예 전쟁을 벌이시려는 거 아닙니까."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기라도 한가? 너는 진심으로 그 괴물을 몰래 죽이는 게 가능할 거라고 보나?"
"...."
마리아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아론의 암살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하지만 베네딕트의 방법이 너무 극단적이라는 것도 확실했다.
외부 용병을 끌어들이는 것도 아니고, 그룹에 종사하는 고레벨 병사들을 모아서 아론과 정면승부를 하겠다니.
이 계획은 성공한다고 해도 출혈이 너무 크다.
"이건 그룹 내부에서만 조용히 처리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식으로 도시를 전쟁터로 만들었다간 주변의 이목을 끌기 마련이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저희 그룹이 통째로 휘청거릴 겁니다."
가령 아론을 죽이는 데에 성공했다?
아론이 저지른 각종 범죄들을 발표해서 어떻게든 정당화를 시키더라도, 그의 사망과 그를 죽이는 데 들어간 희생을 포함해 무력적 공백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반대로 실패한다?
그러면 정말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아론의 분노는 배신자들을 향해 날아들 테고, 그룹은 또다시 불길에 휩싸이겠지.
"어찌됐건 지금 말씀하신 계획은 너무 무모합니다. 확실하게 더 준비를 하거나, 아니면 더 조용하게 처리할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끈다고? 아예 기회를 버리라는 소리로군. 그 괴물의 병이 나은 이상, 시간을 더 주면 점점 더 불리해질 뿐이라는 걸 너도 알 텐데?"
"조용히 처리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아론 도련님을 살려두는 겁니다."
"뭐라?"
베네딕트가 인상을 찌푸렸고, 마리아는 그의 앞에 데이터칩을 하나 내려놓았다. 그것을 보며 베네딕트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녀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론 도련님의 출생기록입니다."
"뭐라고?"
"정확히는 아론 도련님이 '만들어지셨을 때'의 기록입니다. 그 당시의 연구 데이터가 여기에 담겨 있죠."
"용케도 30년 가까이 지난 기록을 찾아왔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기술부 기록원을 탈탈 털기라도 했나? 능력 좋은 건 인정하겠다만, 그게 월권행위라는 건...."
"도련님. 한번 봐 주십시오."
마리아가 진중하게 말했고.
베네딕트는 마지못해 데이터칩을 장착하여 안의 정보를 슥슥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리아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당시 회장님께선 아론 도련님을 '인간 병기'로 만들길 원하셨습니다. 프로젝트 목표에 따라 과학자들은...."
"호르몬 수치를 조작하고 전두엽과 측두엽을 비롯해서 내장들을 뗐다 붙였다. 크크, 재미있군. 이건 뭐, 인간이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이 아닌가."
"아론 도련님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전쟁 기계입니다. 그리고 이 데이터는 그 설계 단계의 오류를 알려 주고 있죠."
마리아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렇다면 고칠 수 있을 겁니다."
"고친다?"
"이게 가장 조용하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아론 스팅레이를 없애려는 이유는 그가 지닌 폭력성이 그룹 전체에 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존재를 없애기 위해 그룹이 내전이라는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면 본말전도다.
차라리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론 도련님의 존재가 베네딕트 도련님께 있어 거슬리는 경쟁자임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신 방법으로는 승리한다고 해도 부담이 될 겁니다."
"그래서 차라리 내버려 두자? 저 피에 미친 전쟁 기계를?"
"고칠 수 있다면 수리를 시도해 보는 게 낫다는 것뿐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는데 시도해 보지도 않고, 곧바로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려 하십니까? 심지어 이건 상대방의 전문 분야입니다."
"하아.... 요컨대."
베네딕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마리아를 향한다.
"너는 저 미치광이 살인마를 교화할 수 있다고 보는 건가?"
"교화가 아닙니다. 외부에서 주입된 폭력성이라면, 그걸 강제로 없애 버리는 것도 가능하리라는 얘기입니다. 그럼 굳이 군사적 충돌을 벌이지 않는 선택지도 고를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넌 싸우기 싫다는 거군."
"도련님...!"
"중요한 걸 착각하고 있구나, 마리아."
베네딕트가 차갑게 말했다.
"사람 잡아먹던 괴물을 착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 피 묻은 이빨과 발톱까지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니다.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게 안전하지."
"그게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행한 일이라고 해도 말입니까? 그리고 괴물이 아닙니다. 도련님의 형제잖습니까!"
"됐다. 더 말해 봤자 입만 아프겠군."
아무리 호소해도 듣질 않았다.
서로의 이야기는 평행선을 달린다.
마리아는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베네딕트가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아론을 두려워하고, 질투하고, 경계하고 있음을.
그는 형제를 죽이고 자신의 머리 위에 황제의 관을 쓸 수만 있다면, 제국의 영토가 폐허가 되더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
"이야기는 끝났나?"
"도련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아직 더 할 이야기가 남았나?"
"아닙니다."
이 이상 말해 봐야 소용없다.
막연한 추측이지만, 어쩌면 이 남자는 이미 진즉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기술부 모듈 연구원장....'
그만한 직책을 가졌던 이가 자신도 알아낼 수 있었던 정보들에 여태껏 접근하지 못했을 리가.
어쩌면 베네딕트는 그걸 전부 알고서도 아론의 범죄를 방치했던....
'...아니, 무의미한 추측이겠죠.'
지금 중요한 것은 베네딕트가 아론에 대해 감정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스팅레이 그룹 전체를 위험으로 이끌고 가겠지.
"...도련님의 의견이 그러시다면 제가 이 이상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마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선 다른 장면들이 떠올랐다.
병상에 일어난 후 달라진 아론의 모습.
학생들을 대할 때의 모습.
직원들을 대할 때의 모습.
'그는 달라졌습니다.'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나마 가장 유력한 건 그를 죽음의 목전까지 데려다 놓았던 불치병이 사라졌다는 것 아닐까.
어떻게 해야 좋을까.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다.
아론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를 용서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죄를 물을 것인가.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망연히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어딜 가는 거지? 그런 소리를 떠들어댔는데 내가 이렇게 순순히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나?"
베네딕트의 목소리.
그 순간.
마리아는 엄청난 현기증을 느꼈다. 마치 바닥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 곧 그녀는 무력하게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으마. 이번 일을 그르쳤을 때 책임질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베네... 딕... 도련...!"
"푹 쉬고 있거라."
네가 다시 나올 때쯤엔.
새로운 황태자가 생겨났을 테니.
아카데미 흑막 시점 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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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이 도착했습니다.
From.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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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왔다."
아이리는 오늘도 제시간에 도착한 마리아의 메일에 기뻐하며 열어 보았다. 메일에는 마리아가 직접 만든 간단한 문제집이 첨부되어 있었다.
'고마워요, 마리아 씨.'
아이리는 그녀가 있을 사무실 쪽을 보며 속으로 감사인사를 하곤 첨부파일을 다운받았다.
아시타 교 사건 이후의 일이었다.
마리아는 아이리를 울렸던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그녀에게 뭐든지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에 아이리는 별생각 없이 '시험 준비가 너무 어려운데 어떻게 안 될까요?'라고 물었고, 마리아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 후로 마리아는 매일 아이리에게 직접 만든 필기시험 예상 문제집을, 간단한 해설까지 덧붙여 메일로 보내 주기 시작했다.
'진짜 뭐 하는 사람이지, 마리아 씨....'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처음 그것을 받았을 때 아이리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다.
스팅레이 재단 비서실장으로서 처리해야 하는 업무만 해도 상당할 터이고, 거기다 아론이 최근에 시킨 일 때문에 더더욱 바빠졌다고 들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틈틈이 시간을 할애하여 개인과외용 문제집을 만들어 준다니, 어지간한 체력과 정신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업무량이 아닌가?
심지어 그것들이 대충 만든 문제들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문제 하나하나가 아이리의 수준에 딱 부합하는 난이도였고, 거기에 덧붙여진 해설도 읽으면 머리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쉽게 되어 있었다.
심지어 서술형 문제의 경우, 자신의 답에 대한 첨삭까지 상세하게 되어 다음 메일에 함께 올 정도였다.
이 정도는 되어야 그런 젊은 나이에 황태자라 불리는 남자의 오른팔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일까. 정말 생각할 때마다 존경스러울 정도다.
'근데 사실 스팅레이 재단의 힘으로 시험 자체를 패스시켜 달라는 의미로 말한 거였는데....'
허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트리니티 아카데미가 기업들의 사병육성소로 전락해 버리긴 했어도, 기업들조차 '정규시험'의 결과 자체는 절대 건드리지 못한다.
정확히는 못 한다기보다는 안 한다.
가령 메가코프 중 하나가 자신들이 보유한 장학생들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시험 결과에 조작을 했다고 해 보자.
그럼 그 순간부터 다른 기업들이 너도나도 시험 결과에 손을 대기 시작할 것이고, 아카데미 정규시험의 신뢰성은 바닥을 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규시험 외에 인재를 엄격히 선별하기 위한 방법을 따로 마련해야 될 테고, 그것은 쓸데없는 지출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결국 시험 결과를 쥐락펴락하는 것은 기업들 입장에서도 손해밖에 없기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라나 뭐라나.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해 주리라 기대하지 말도록. 만약 네가 내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낸다면... 기대해도 좋다.
삼시세끼 합성 단백질 수프.
그 끔찍하고 역겨운 맛을 상상만 해도 토가 쏠리는 것 같았다.
폴른에서 지내던 때야 그것도 없어서 못 먹기 일쑤였지만, 입이 고급화된 지금은 그걸 먹느니 차라리 죽고 말 것이다.
'게다가 마리아 씨가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공부를 안 하는 것도 미안하지....'
그런 생각으로, 아이리는 최선을 다해 중간고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오늘도 공부를 위해 마리아가 만든 문제집 파일을 열었다.
하지만.
"어라?"
깨진 문서였다.
원래라면 아이리의 수준에 딱 맞는 문제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어야 할 문서가 어째서인가 전부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열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파일 오류인가?'
다운 중에 뭔가 잘못됐나 싶어서 다시금 확인해 봤지만,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마리아가 실수로 파일을 잘못 보낸 걸까?
잠시 그런 생각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장 내일이 자신의 첫 필기시험인 만큼, 가장 중요한 시기다. 이럴 때에 이런 실수를 저지를 만큼 마리아가 허술한 사람은 아닐 텐데.
조금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그렇다고 아이리가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니 이것 때문에 전화를 걸기도 미안했고.
'뭐, 지금까지 배운 게 있으니 혼자 해 보면 되겠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긴 아이리는 밤늦게까지 공부를 이어 나갔다.
* * *
그리고 다음 날.
트리니티 아카데미 중간고사.
첫 시험 날짜가 되자, 교실 내의 분위기는 한층 더 살벌해졌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학생들끼리도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시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부정행위로 적발된 학생이 나올 정도였다.
학생들은 다들 먹을 것과 입을 것 하나하나를 각별하게 신경 썼고, 괜한 이목과 질투를 사지 않기 위해 행동거지 역시 유난스러울 정도로 조심했다.
"후우...."
답답한 분위기였다.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 텁텁한 공기 속에서, 아이리는 한숨을 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이제 실전이다.
시험에서 믿을 건 자신뿐.
아무리 자신의 후원자가 학생들을 아끼는 사람이라고 해도, 성과를 내지 못하는 녀석에게까지 투자를 계속 해 주진 않을 테니까.
'절대 삼시세끼 단백질 죽만 먹을 순 없어....'
마지막으로 짬을 내어 마리아의 수제 문제집으로 복습하는 아이리.
이제는 하도 많이 봐서 도리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까만 것은 글이오, 하얀 것은 배경이라.
아마 이번 시험을 준비하면서 읽은 글자가, 그녀가 20년 동안 살아오면서 읽은 글자의 수보다 많을 것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긴 했는데, 워낙에 수많은 정보를 단시간에 뇌 속에 때려 넣은 탓인지 멍한 기분이 들었다. 검은 글씨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뒤엉켜 날아다니는 기분이다.
이래서야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인생 최고로 열심히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곧 첫 번째 시험 시간이 되었다.
[트리니티 아카데시 전술교전부, 신비학개론 중간고사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각자 자리에 있는 시험용 태블릿 케이블과 접속해 주세요.]
각자의 책상에는 상자 같은 형태의 기계장치가 고정되어 있었고, 그 상단부에 소켓HUB에 끼울 수 있는 전선이 길게 뻗어 나와 있었다.
아이리는 그것을 잡아당겨 목덜미 쪽 소켓에 끼웠고, 이내 그녀의 시야 앞에 새로운 창이 팝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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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학개론 중간고사]
곧 시험이 시작됩니다. 1:58
*시험 시 주의사항
*시험 중 케이블을 해제하지 마십시오. 접속이 해제될 경우, 부정행위로 처리될 수 있습니다.
*제출된 문제에 오류가 있을 경우, 우측하단의 신고 버튼을 눌러 주십시오.
*시험용 AR 박스 사용방법
1. 정답을 적으려는 문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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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런 식인가.
아이리는 시험의 타이머가 다 되기 전까지 주의사항을 꼼꼼하게 읽어 보았고, 시험방법에 대한 내용도 숙지 완료했다.
-곧 시험이 시작됩니다. 0:05
카운트다운.
아이리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고 해 보자.'
이윽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 * *
"결과는 어떻지?"
"저희 쪽 스카우터가 사전에 받아온 가채점 성적을 살펴본 바, 아이리 앨리스밸 학생은 전술교전부 전체 학생 368명 중, 55위를 기록했습니다."
"...!?"
"이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순간적으로 놀라서 얼굴이 굳고 말았다. 상상 이상으로 등수가 높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기대 안 했는데...!'
원작에서 아이리의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결과는 평균 수준에서 약간 밑돌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기시험은 사격술은 제외하고 상위권을 차지했지만, 필기시험이 전멸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죄다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반대였다.
아직 필기시험 결과만 미리 빼 와서 확인했을 뿐인데 상위 55위라니. 필수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했으니 다른 학생들에게 밀리는 게 당연할 텐데도, 어째서인가 평균을 월등히 상회하는 성적을 냈다.
'어떻게 된 거지?'
아이리가 의외로 똑똑한 녀석이라고 해도, 단시간에 이런 결과를 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딱히 개인과외를 시켰던 것도 아니고, 시험결과를 조작한 것도 아니다. 대체 어쩌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원작하고 뭐가 달라졌지?'
잠시 고민해 보다가 이내 답을 냈다.
'아, 미유 때문인가.'
원작에 비해 아이리가 미유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대폭 늘어났다.
예전에는 두 사람의 관계 사이에 '셰이드 웰즈'라는 주인공의 존재가 징검다리 역할을 했었지만, 지금은 직접 교류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내 추측이지만 지식 쪽에 스탯이 몰빵된 미유와 함께 지내면서 아이리도 적잖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그것이 이번 시험 결과로 나타난 것이겠지.
"...나쁘지 않군."
반응은 이렇게 했으나 속은 뛸 것 같이 기뻤다. 내 새끼가 잘나간다는데 싫어할 부모(아님)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아직 가채점에 불과한 데다가 치러야 할 시험은 많이 남아 있으니 마냥 좋아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기쁜 건 기쁜 거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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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학생들이 높은 성적을 얻도록 도와주세요. 공헌도와 인물들의 성적에 따라 다른 보상이 지급됩니다.
[공헌도]
아이리 앨리스밸(??위): 98%
미유(??위): 95%
사일런스(??위):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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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 이벤트.
당연하지만 내가 메인 캐릭터 두 사람의 후원자이니만큼 가장 공헌도가 높았다. 아마 두 사람이 훌륭한 성적을 받을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만큼, 내게도 더 큰 보상이 돌아오겠지.
'아이리는 이미 기대 이상이고, 미유는 어차피 상위권일 테고... 사일런스는 좀 아쉽게 되었군.'
3학년인 사일런스는 아직 정크칩의 영향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원래라면 아무리 사정이 있더라도 시험을 치르지 못한 시점에서 아웃이 되어야겠지만, 스팅레이 재단의 힘으로 어떻게든 무마시켰다.
뭐, 사일런스가 깨어난 시점부터 다시금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기 시작할 테니, 준비가 끝날 때까지는 가만히 잠들어 있는 편이 내게도 좋다.
'가급적이면 중간고사 이후가 되면 좋겠군.'
내가 빌런이 되기 전에는 포인트를 받아서 전부 사용할 생각이다. 완전히 '아론 스팅레이'가 되어 버린 내가 빙의자 특전까지 마음대로 사용해 버리면 꽤나 상대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말이다.
'상을 준비해 놓는 게 좋겠군.'
어떤 걸 주는 게 좋을까.
스토리에 그다지 영향이 안 가면서도 두 사람이 기뻐할 만한 것이 무엇일까? 가급적이면 이 선물을 계기로 앞으로도 빠르게 성장했으면 좋겠는데.
'...뭐, 아직은 시기상조이려나.'
고민을 이내 그만두었다.
시험 결과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설레발을 치는 건 좋지 않겠지. 보상을 주는 건 중간고사가 완전히 끝난 후에도 늦지 않다.
'어쩌면 아이리가 다른 시험을 망칠 수도 있으니까 말이지.'
* * *
...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과는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전술교전부 33위라는 건가? 그 녀석이?"
"네, 그렇습니다."
"허...."
마지막 시험 한 과목을 앞둔 지금 너무나도 예측을 빗나간 전개에 나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이렇게 당황하는 경우는 잘 없는데, 진짜로 놀랐다.
'이 녀석, 왜 이렇게 성장이 빠르지?'
아이리가 본격적으로 철이 들어서 공부까지 섭렵하기 시작하는 건 못해도 2학년부터였을 텐데?
단순히 생각하면 '내가 개입해서 성장이 빨라졌구나'라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건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공부와 연이 없던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공부라는 것도 관성이 있어서, 기초지식이 없는 초기 단계에서는 더더욱 성과를 보기 어렵다. 실기시험이 포함된 등수라고 해도 현재의 아이리의 성적치곤 지나치게 좋다는 느낌이다.
'설마 다른 빙의자가 개입했나?'
허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여전히 아이리에 대한 내 공헌도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1%가량 더 올랐을 정도.
'이건 확인해 봐야겠다.'
마지막 시험인 종합전술 테스트 전까지는 잠깐 여유가 있었다. 잠시 짬을 낸다면 그녀가 어떤 식으로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터.
나는 곧장 시간을 내서 아이리가 현재 있다는 종합훈련장 쪽으로 향했다.
스팅레이 소속 스카우터들의 안내에 따라 훈련 중인 아이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먼 발치에서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훈련장 구석에서 마지막 시험에 대비하여 함께 시험을 치를 팀원들과 합을 맞춰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탄식했다.
'아아, 내가 착각했구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번 시험은 그녀 스스로의 힘으로 준비한 게 틀림없었다. 아이리가 저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을 때는 자기 자신에게 믿음이 있을 때뿐이니까.
"돌아가도록 하지."
"사무실로 가시겠습니까?"
"그러... 잠깐."
몸을 돌리려다 멈칫했다.
묘한 예감이 들었다.
하나만 더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생겼다.
"기숙사로 간다."
부하 직원들을 이끌고 아이리의 방을 찾았다. 여자 직원들을 시켜 민감할 수도 있는 것들을 미리 치워 놓도록 지시했고, 정리가 끝난 후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방에 남아 있는 흔적을 보니 아이리는 시험 기간에 빡세게 공부를 한 듯했다. 여기저기 부단히 노력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직원 하나가 아이리의 방에 설치된 컴퓨터를 확인하고는 나를 불렀다.
"이사장님."
그가 화면을 가리켰다.
보아하니 마리아가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아이리의 공부를 봐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컴퓨터로 아이리와 문제집을 주고받은 메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직원을 시켜 아이리와 주고받은 메일의 내용을 전부 확인해 보도록 했고, 이내 마지막 메일의 첨부파일이 '깨진 문서'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내가 오늘 받은 보고서'와 마찬가지로.
'아아, 그런 거였나.'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아카데미 흑막 시점 69화
종합 전술 시험.
정식 과목의 이름은 [종합 전술 실습 훈련]이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게 일상화가 되어 있었다.
전술교전부 학생들이 듣는 수많은 수업 중에서도 가장 '실전'을 표방하는 과목.
기업 스카우터들이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할 때 가장 성적을 많이 참고하는 과목이기도 했다.
-이사벨라 학생은 이번 필기시험 성적은 좋은데 실전 능력이 다소 의심된단 말이죠.
-확실합니다. 에이바 학생이 속한 팀이 이번 시험에서 출중한 능력을 보여 줄 겁니다.
-쯧. 마땅한 녀석이 없네. 지난번 타이탄 사건 때 루카스라는 친구가 죽어 버리지만 않았어도. 꽤 쓸 만한 애였는데.
훈련장 관람석에서 스카우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학생들의 시험을 관찰하고 있었다.
보통 메가코프 고급보안요원 중 상당수가 아카데미 출신이다.
즉, 기업에게 있어 전술교전부란 인재란 이름의 사탕을 한가득 담은 바구니 같은 곳이었고, 그렇기에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난 자들을 아카데미 관할로 배치했다.
그리고 그런 아카데미 관할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한눈에 받는 학생이 있었으니.
바로 아이리 앨리스밸이었다.
-황태자가 직접 선발한 학생이다.
-지난번 [쇼케이스]의 데이터는 확인했다. 상당히 쓸 만한 카드였어.
-타이탄 사건 때도 황태자가 직접 저 학생을 구하러 나섰었지.
-그때와 비교해서 얼마나 강해졌을까?
이미 스팅레이 소속 장학생이었기에 그녀를 자신들 쪽으로 영입하는 것은 사실상 물 건너간 일이었지만, 아론 스팅레이 이사장과 엮이면서 여전히 관심의 한복판에 있는 그녀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다른 학생들은 그러한 상황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스카우터들의 이목을 끌어 기업 후원을 받아야 하는 그들로서는, 이미 스팅레이 특별장학생이라는 자리까지 얻은 인물이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독점하는 게 마음에 안 들 수밖에 없었다.
그 탓일까.
"야, 앨리스밸."
"왜?"
"내가 말할 때까지 앞으로 나서지 마."
시험을 위해 3인 1조로 배정받은 팀원.
아이리와 같은 팀이 된 '로드리게즈'가 그녀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그는 검을 주무기로, 권총을 보조 무기로 사용하는 '총검사' 계열의 적응자였다.
이번 팀에서 리더 역할을 맡고 있는 그였기에 당연히 할 수도 있는 지시였지만, 아이리에겐 '활약하고 싶다'라는 그의 속내가 뻔히 보였다.
그래서 구태여 물어보았다.
"왜?"
"내가 그러라면 그런 줄 알아."
신경을 건드리는 말투였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에 일일이 흥분할 그녀가 아니었다. 기업의 관심을 받고 싶은 그 마음도 이해가 되었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알았어."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소피아."
"어쩌라고. 너나 연습한 대로 잘해."
"뭐라고? 내가 이 팀의 리더잖아!"
반면 같은 팀원인 소피아는 그의 태도에 마찬가지로 퉁명스런 대답으로 응했다. 그 탓에 순간 싸움이 일어날 뻔했지만.
[종합전술 실습 훈련 중간고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수험생들은 각자의 위치로 이동하여 대기해 주십시오.]
마침 울린 안내방송이 그들의 싸움을 사전에 막았다.
소피아와 로드리게즈, 둘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가 콧방귀를 끼곤 지정된 위치로 이동했다.
"하아...."
그 모습을 보며 아이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이길 수 있나?"
* * *
결과만 말하자면 이기긴 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녀의 팀원들은 단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투의 내용은 이러했다.
우선 '총검사'인 로드리게즈는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작전과 다르게 앞으로 무작정 달려들었다.
-저 멍청이, 뭐 하는 거야! 설마 관심받고 싶어서 저러는 거야?
팀 리더라는 인간이 그리되었으니, 사전에 세운 작전이 제대로 이뤄질 리는 없었다.
-제기랄, 저 새끼 포위당했잖아!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자, 잠깐만! 그만ㄷ...!
로드리게즈가 위험에 빠지자, 불리해진 상황을 어떻게든 뒤집어야 한다며 소피아도 전선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최악이었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사망 판정.]
[소피아 리, 사망 판정.]
"진짜 뭐 하는 거야!"
아이리가 손을 쓸 새도 없이 다른 두 팀원이 상대 팀에게 당해 버렸다. 그동안 열심히 함께 준비했던 작전과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3:1 상황이 되었다고 해서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라도 해 봐야지....'
아이리는 방패를 바짝 몸에 밀착시키고, 주변 엄폐물들을 이용해 상대 팀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났다.
-폴른이 혼자 남았다!
-저번 수업에서도 봤지? 쟤한테는 어정쩡한 원거리 공격 안 통해! 구석으로 몰아붙여서 한꺼번에 공격한다!
상대 팀원들은 아이리의 뛰어난 회피 능력을 경계하며 조금씩 포위진을 완성시켜 나갔다. 수적 우위를 이용하여 도주로를 차단하고, 그녀의 활동 범위를 점점 좁혀 오기 시작했다.
허나 아이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상대의 심리와 기척을 읽는 데에 능했고, 포위가 완성되기 직전 상대의 마음에 생긴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쿠웅!
지면을 부술 듯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든다. 퓨어 스펙만큼은 아카데미 최상위권에 해당하는 그녀였다.
생각지 못한 타이밍의 역습은 상대 팀 학생들을 당황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큭...!
한순간의 방심.
순식간에 허점을 파고든 아이리는 상대의 면전에서 방패를 들고 나타났다.
아니.
'나타나 있었다'라고 해야 옳으리라.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
단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역전의 발판을 만들어 낸 아이리는, 방패를 어깨로 받치고 그것을 들어 올리듯 상대방에게 밀쳤다.
물론 상대의 반응도 느리진 않았다.
일순 당황하긴 했지만 정말 사소한 지연이다. 0.5초도 되지 않는, 재는 게 무의미할 정도의 오차.
그는 낮은 위치에서 날아오는 아이리의 방패를 발로 내려찍듯 막았다.
콰아아아아앙-!
두 적응자의 힘이 맞부딪치며 주변으로 돌풍이 일었다.
근력 강화 모듈을 끼지 않았음에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그들의 충돌은 공기를 찢으며 사방을 헤집어 놓았다.
얼핏 잘 방어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이리는 들개였다.
야생의 감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녀는, 어떻게 해야 상대방의 빈틈을 더욱 크게 만들 수 있는지 본능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균열.
강제로 빈틈을 열어젖힌다. 이빨로 갑옷을 찢어 내듯, 상대방의 허술함을 사정없이 찢어 발긴다.
아이리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팀원들이 가세하기 전까지의 시간. 아주 살짝 대처가 늦어지며 생겨난 사소한 불안정함을 무자비하게 흔들었다.
공격, 공격 또 공격.
쉴 새 없이 밀어붙이는 아이리의 강타에 상대의 대처는 조금씩, 조금씩 늦어졌다. 한 번 생긴 균열은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했고, 아이리는 점점 우위를 점해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헉...!
전투의 흐름은 완전히 아이리에게 넘어와 있었다. 뒤늦게 아군의 지원이 도착했지만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그들의 연계를 다시 바로잡기에는 늦었다.
[마틴 킴, 사망 판정]
아이리는 순식간에 한 명을 처리했고, 그 후에는 [천근추]를 사용하여 두 번째 타켓의 자세를 흩뜨려 놓았다.
-제길!
타다다다다다다다!
반격을 위해, 혹은 조금이라도 자세를 잡을 시간을 벌기 위해 총을 쏴 보았다. 허나 그녀에게 시간 벌이용 사격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으아아악!
[루시 마르티네즈, 사망 판정]
어느새 3:1에서 1:1이 되어 버린 상황.
이미 전황은 기울였고, 더는 볼 것도 없었다. 마지막 상대는 아이리가 돌아보자 공포에 질린 듯 뒷걸음질을 쳤고, 아이리는 다시 한번 바닥에 발을 굴렀다.
스스스슥!
도망치려던 녀석은 [천근추]의 힘에 질질 끌려 아이리의 앞에 도착했다. 아이리는 그대로 방패를 가볍게 내려찍어 마무리했다.
[아사기 하나에, 사망 판정]
"후우...."
아이리는 한숨을 돌리며 이마의 땀을 닦아 냈다. 그것으로 아이리의 원맨쇼는 멋지게 끝났다.
* * *
모든 시험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다.
사무실에서 또 쌓인 업무를 처리하고 있자니 아이리가 내게 면회를 요청했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사무실로 뛰어 들어오다시피 한 아이리는 대뜸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분명 이긴 건데!"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곧바로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아챘다.
마지막 시험이었던 [종합 전술 실습] 과목의 결과 때문일 테지.
"진정하거라."
"하, 하지만 이건...!"
더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듯 말끝을 흐리는 아이리.
팀원들의 트롤링에도 열심히 활약하여 혼자서 팀을 승리로 이끈 아이리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점수는 썩 좋지 못한 편이었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팀원들의 불화를 막지 못했다.
-전략을 평가하기도 전에 팀이 무너지고 말았다.
애초에 3대 3 대항전이었다.
평가 요소에는 단순히 승패뿐만이 아니라, 다른 팀원들과의 협동력, 전략전술, 연계 전투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리가 속했던 팀은 전술이니 연계니 하는 것들을 보여 주지도 못한 채 무너져 아이리 홀로 전투했으니, 적잖은 항목에서 감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개인 전투력' 항목은 만점을 받았지만, 다른 부분에서 까인 점수 때문에 애매한 성적표를 받게 된 거다.
"어, 어떻게 안 되는 건가요?"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도록."
되냐 안 되냐를 묻는다면 물론 가능하긴 했지만, 당연히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테니 나는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채점한 교관을 믿는다.
아이리가 스팅레이 특별장학생임을 알고도 그런 점수를 내놓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채점방식에 나름대로 소신과 철칙이 있다는 게 아니겠는가.
'뭣보다 아이리의 종합점수는 60위다. 이 정도면 차고도 넘치는 결과야.'
내심 아이가 이번 중간고사에서 평균인 190등 정도만 했어도 나는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무려 130등이나 높게 달성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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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이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공헌도]
아이리 앨리스밸(학년 60위): 99%
미유(학년 1위) : 96%
사일런스(낙제): 0%
*보상이 지급됩니다.
아이리 앨리스밸: +800P
미유: +1500P
사일런스: +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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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험 동안 우리 애들에게 신경을 많이 못 썼음에도 불구하고, 총 2300P가 벌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조금 엄하게 대할 때다.
"네가 시험을 치르는 영상은 우리 측 스카우터들을 통해 받아보았다. 확실히 [천근추]의 사용법에 능숙해졌더군. 열심히 한 티가 난다."
"가, 감사합니다."
"음. 전투 능력에 대해서는 나무랄 부분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점수를 받았을까? 너도 이미 그 이유는 알지 않느냐?"
"...팀원과의 불화 때문이었죠."
"그래. 다른 팀원들이 폭주했고, 너는 그걸 미처 말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팀플레이 관련 항목에서 상당히 감점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질문했다.
"그럼 어째서 그들을 말리지 못했나?"
"말릴 새가 없었는걸요."
"그건 정답이 아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이리의 코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그들을 말리지 못했던 것은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네가 팀 리더가 아니었기 때문도 아니지."
"그럼요?"
"발언의 무게다."
아이리의 눈을 또렷이 응시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그녀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는 게 보였다.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세 가지는 '논리', '감정', '발화자'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아, 아뇨."
"우선 논리. 청중을 설득할 수준의 논리력이 발언의 내용에 담겨 있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면 청중은 그 발언을 무시하고 말겠지."
"그렇겠죠?"
"다음은 감정. 다소 논리가 부족해도, 듣는 이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다면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 감정에 호소한다는 의미지."
"아아...."
"그리고 마지막은 발화자."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이리가 내 말에 확실히 집중하고 있음을 확인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누가 말하느냐. 같은 논리와, 같은 감정을 내세우더라도 지도자와 범죄자가 내뱉는 말의 무게는 전혀 달라지지. 그럼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어라 생각하지?"
"논리요?"
"아니, 발화자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중은 우매하다. 논리보다는 감정이, 감정보다는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쉽게 설득당하고, 선동당하지. 심지어 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대중은 그의 의견을 기다리고 존중하게 된다."
"...."
아이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슬슬 내가 말하는 의도를 깨달았겠지.
"그럼 다시 묻겠다. 네가 네 팀원들을 말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 부족해서였지?"
"셋 다요. 그리고 제가...."
"폴른 출신이기 때문이지."
아이리가 말하기 힘겨워하는 것 같기에 내가 대신 대답했다. 그녀는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제 태생을 바꿀 수는 없으니...."
"그래. 하지만 다른 건 바꿀 수 있지."
"다른 거요?"
"네 힘이다."
나는 즉답했다.
"재력, 권력, 무력... 뭐든 좋다. 네가 가진 힘을 늘리고, 그것을 상대가 자연스레 알게 해라. 그리고 네가 가진 압도적인 무언가를 확인한 상대는, 네 입에 주목하게 될 거다."
그렇게 말한 후.
나는 아이리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제야 그녀는 긴장이 풀린 듯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혼자서 탄식했다.
"아...."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나?"
피식 웃자, 아이리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 조금은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예전에 본 농담 중에 이런 게 있었다.
A가 탱크를 갖고 싶다고 했다.
B는 대출을 받아 사면 된다고 했다.
A는 자신은 대출을 받더라도, 자신에겐 그 많은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 했다.
거기에 B는 대답했다.
'너한텐 탱크가 있는데 왜 갚아?'
그런 법이다.
압도적인 힘 앞에는 무조건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내게 도시의 모든 이들이 굴복하는 것도, 그만한 힘과 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리라고 못할 건 없다.
내가 옆에서 조금만 도와준다면, 곧 그녀 역시 훌륭한 '리더'로서 성장하겠지. 아마 그녀가 원작과 내 기대를 뛰어넘을 날은 머지않았을 것이다.
"잔소리는 여기까지."
나는 한숨과 함께 설교를 마무리 짓고 아이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다시 한번 수고했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네가 보여 준 능력은 내 기대 이상이었다."
"...흐."
아이리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웃음을 참으려다가 어쩔 수 없이 튀어나왔다는 느낌이다.
그 모습에 만족감을 느끼며, 나는 옷걸이에 걸어 둔 양복 코트를 챙겨 입었다.
"그럼 어서 외출을 준비해라."
"네? 가, 갑자기 어디로 가는데요?"
"노력한 데에는 보상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며 나는 싱긋 웃었다.
"쇼핑하러 간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70화
B섹터에는 뉴 발할라 시티 최대 규모의 '뉴플렉스 스퀘어'라는 복합쇼핑몰이 있다. 스팅레이 그룹 소유는 아닌데, 지분을 많이 갖고 있어서 나름 대주주 같은 느낌이다.
나는 비행형 세단에 아이리와 미유를 태우고 복합쇼핑몰로 향했다. VIP주차장에 발레파킹을 맡겨 놓은 후, 나는 둘을 이끌고 중앙광장으로 향했다.
"와아아아...."
두 사람의 입에서 자동으로 감탄이 나왔다. 아이리는 나름 체면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그게 될 리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늘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층은 명품관. 천연가죽으로 만든 각종 백이나 제품들, 악세사리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2층은 브랜드관. 일반 시민들에게 친근하면서도 값이 어느 정도 나가는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3층에는 각종 카페나 어린이들을 위한 테마 놀이관 같은 것들이 있었고, 4층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당들, 5층에는 엔터테이먼트를 위한 극장, 오락실, 볼링장, 사이버스페이스 공연장.
그 위 6층에는 동물 로봇들과 교감할 수 있는 실내동물원, 7층에는 실내공원, 8층은 천체관람관, 9층에는 작은 놀이공원, 지하에는 수족관 등등 즐길 거리가 끝도 없는 곳이었다.
그 넓은 건물 전체가.
말 그대로 텅텅 비어 있었다.
마치 세상에 남겨진 것이 우리뿐인 것처럼, 우리를 제외하면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오직 가게의 점원들이 바짝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아이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저, 저기...."
"뭐지?"
"이, 이거 혹시... 전부 빌린 건가요?"
"보면 알잖느냐."
VVIP의 행차에 오후 시간은 일반 손님을 받지 않도록 쇼핑몰을 통째로 빌렸다.
뭐, 아이리에게 당당히 말하긴 했어도 실은 나도 이런 광경은 처음인지라, 조금 긴장되기는 했다.
"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엄청나게 부담감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해 줘야 언론이나 대중들의 시선을 피해 쇼핑을 즐길 수 있을 테고, 뭣보다 대인기피증인 미유가 함께 돌아다닐 수 있다.
기껏 학년 1등을 했는데 내버려두고 우리끼리만 놀기도 좀 그렇고.
미유 본인이야 맨날 방에서 기계만 만지고 놀아도 행복하기 그지없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산책도 시켜 줘야 골병에 안 걸릴 거다.
참고로 지금 미유는 아이리보다 더 놀라서 놀란 표정 그대로 굳어 있었다. 정신을 되찾으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뭐, 신경 쓰지 말거라."
"아, 아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요...."
"오늘 하루는 너희가 이곳의 주인이다. 원하는 건 뭐든지 골라도 된다.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좋고."
"어... 어...."
자유롭게.
오히려 그 부분이 아이리의 생각에 과부하를 일으킨 것 같았다. 뭘 해야 좋을지 패닉에 빠져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한편 그 사이에 미유가 정신을 차렸다.
주변에 사람이 적다 보니 비교적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된 모양이다.
뭔 야생 동물이냐고.
"모듈 가게! 모듈 가게부터 가요오!"
"아이리, 괜찮겠나?"
"저, 저는 상관없는데요...."
"그럼 그러도록 하지."
워낙에 넓은 곳이다 보니, 체력을 아끼기 위해 다인용 호버패드가 제공되었다.
적응자인 나나 아이리는 이용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일반인 중에서도 유독 체력이 약한 미유는 조금만 걸어도 퍼져 버릴 테니까.
우리는 모듈 상점으로 이동하여 쇼핑을 했다. 평소 접하던 '전투용' 모듈이 아니라 민간용 나노머신을 투여받은 일반인들을 위한 제품들이었다.
미유는 점원에게 쭈뼛거리며 제품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을 한 후 자리로 돌아왔다.
예전 같았으면 혼자서 낯선 사람에게 말 따위 걸 생각도 못 했을 그녀가 이렇게 성장하다니. 감개무량했다.
아마 아카데미에서의 경험과 드워프와의 만남 같은 것들이 조금씩 쌓여, 그녀를 조금씩 성장시켰던 거겠지. 아빠는 기쁘단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지금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아이리 씨이! 이거 보세요, 얼굴이 예뻐지는 모듈이래요오! 이쪽에는 사이버웨어가 진열되어 있어요오! 헉, 이 소켓 HUB는 민간용인데도 모듈을 120개까지 동시 장착 가능하다고 하네요오?"
"...대단한 건가?"
"물론이죠오! 아이리 씨 건 25개가 한계거든요오! 아론 씨는...."
"미유."
"헉, 죄송해요,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오!"
흥분한 미유를 제지하자, 그녀는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소켓HUB란 모듈을 비롯한 다양한 데이터장치를 위한, 일종의 주차타워였다.
일반적인 적응자는 전투 능력 강화를 위해 장착해야 하는 모듈만 기본 십수 개다.
거기다 USB를 비롯한 저장장치나 다양한 케이블까지 끼우려고 하면 온몸이 장치를 끼우기 위한 구멍투성이로 도배될 것이다.
당연히 외관상 보기도 안 좋고, 공간 효율도 나쁘기에 소켓 HUB는 내부에서 칩을 알아서 효율 좋게 차곡차곡 정리해 준다.
아이리의 경우 싼 제품이기에 제한 개수가 25개지만, 내 경우에는 200개나 된다.
하지만 그것은 모듈링 정보와 마찬가지로 스팅레이 그룹의 기밀이었기에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뭐 기뻐해 주니 다행이군.'
뭐, 어쨌건.
미유가 무심코 그런 실수를 할 뻔했을 정도로 흥분한 건 알겠다.
맨날 좁은 방에서 연구만 하다가 이런 오프라인 매장 경험은 처음일 테니, 그럴 만하지.
그 이후로도 미유는 아이리를 이끌고 매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두 사람의 모습이 꼭 엄마를 이끌고 장난감 가게를 돌아다니는 딸 같아서 모양새가 좀 재미있었다.
'원작에선 주인공이 저기 껴 있었겠지.'
두 사람을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며, 그 위에 '어쩌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를' 광경을 마음속에서 겹쳐 보았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일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참으로 아이러니한 감정을 맛보며, 나는 내 뒤를 따르던 보좌관 일행에게 카드를 주며 말했다.
"자네들도 쉬다 오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혼자서도 충분하다."
내 뜻을 이해한 건지 보좌관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물 한 잔만 갖다주면 좋겠군."
"네. 곧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호출해 주십시오."
보좌진들이 일제히 내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하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표정들이 상당히 밝은 것이 꽤 신나 보였다.
그래, 이게 참 상사 아니겠는가.
* * *
그 후, 나는 아이리와 미유가 이끄는 대로 쇼핑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부담감 때문에 표정이 굳어 있던 아이리도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미유, 여기 온 김에 머리도 다듬자?
-아, 안 돼요오! 이건 저를 칼라와 연결해 주는 중요한 신경삭...!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조금만. 응?
이번엔 아이리 쪽에서 주도권을 잡고 미유를 리드했다. 여러 군것질을 할 수 있는 가게를 시작으로, 옷가게나 잡화점 등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아이리는 사실 패션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그녀의 온 관심사는 음식점에 있었고, 중간중간 들르는 옷가게는 어디까지나 체면치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계속 먹을 것만 찾는 건 본인도 부끄럽다고 느끼는 거겠지. 정작 가게 안에 들어와서도 창밖의 다른 군것질가게에 흘깃흘깃 시선이 향하는 게 보였다.
-미유, 저거 맛이 궁금하지 않아?
-또… 또 먹어요오...?
-저건 처음 먹어보는 거잖아.
-조, 조금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되나요? 지, 지금 배가 터질 것 같은데요오....
-그래, 네가 초코맛을 시켜. 내가 캬라멜 맛을 시킬 테니까 반반 나눠 먹자.
-제 말을 좀 들어 주세요...!
미유의 항의는 소용없었다.
이미 아이리의 두 눈은 새로운 디저트에 꽂힌 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전혀 안 들리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혼자 흐뭇한 마음으로 즐기고 있자니, 아이리가 내게 다가왔다.
"저기, 이사장님."
"왜 그러지?"
"너무 저희만 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조금 느낌이 이상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도 죄송하고요."
"내가 비켜 주는 게 좋겠나?"
"그, 그런 거 아녜요."
"그럼 미유가 조금 전의 초코맛 붕어빵으로 녹아웃 했으니 다음 희생양으로 날 고른 거로군. 혹시 '식고문'이라는 말을 들어봤나?"
"그건 더 아니에요!"
"먹고 싶으면 여러 맛을 다 주문해서 먹도록 해라. 이미 체면 차리기는 물 건너갔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한 거라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아이리는 버럭 소리를 쳤지만, 이내 내 표정을 보고는 놀림 받았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녀의 입술이 토라진 듯이 삐죽 튀어나왔다. 흥분한 얼굴이 분홍빛으로 조금 상기됐다.
뭐, 그녀의 진짜 생각은 훤히 보였다.
자기네들끼리 노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뭔가 나를 소외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함께 놀자고 끌어들이기에는 조금 대하기 무섭고.
어째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거겠지.
"그럼 내가 어떻게 해 주면 좋겠나?"
"됐어요...."
"이 이상 안 놀리마."
"...됐다니까요. 이사장님한테 신경 쓴 제가 바보죠. 저는 그냥 뭘 좋아하시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음식이든 취미활동이든."
"삐진 건가."
"안 삐졌거든요!"
"삐진 거 맞군."
"아니라고!"
반응 좋네.
안 되겠다. 자꾸 놀리고 싶어진다.
그래도 계속했다간 진짜로 미움 받을 것 같아서 어떻게든 장난기를 참아냈다.
허나 그와 별개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와서 온통 스토리니 빙의자니 하는 것들에만 신경을 쓰면서 지내느라 딱히 취미활동을 할 시간이 없었다.
예전 세계에서 취미로 즐겼던 웹소설이 가끔 떠올라, 이쪽에 온 뒤로 이 세계의 고유 작품 같은 것을 찾아본 적은 있었다.
'근데 내 취향이 아니었지....'
실제로 괴물이라든가 극도로 발전한 과학 기술이 있어서 그런가, 상상력의 방향이 내가 예상치도 못한 곳으로 튀는 작품들이 많았다.
특유의 클리셰라든가 장르 고유의 단어라든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보니 읽기를 자연스레 포기했다.
'그 외에는....'
게임을 좋아했다.
특히 피지컬 싸움을 많이 하는 종류.
하지만 이 몸뚱어리가 된 이후로는 게임이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어졌다. 동체 시력이 너무 좋아져서 적들이 다 느릿느릿하게 보이는 걸 어째.
"딱히 취미활동은 없군."
아론 쪽의 취미인 '인간 사냥'을 댈 수도 없었기에 그냥 그리 대답했다.
아이리는 더더욱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툭 던진 말이었으니 그리 신경 쓸 필요도 없는데, 아마 내 말 속에 담긴 묘한 감정을 읽어낸 거겠지.
나 때문에 그리 된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고,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이스크림."
"네."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내 대답에 아이리는 조금 벙찐 얼굴을 했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게 그렇게 의외였던 모양이다.
"아이스크림? 정말이에요?"
"거짓말 같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뭐지?"
내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그보다는 아이리가 아까부터 먹고 싶어 하는 티가 역력했기에 일부러 고른 거였지만.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
"그래."
"이사장님이랑 안 어울려서...."
야, 인마.
뭐라 한마디 해 주고 싶긴 한데,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라 뭐라 못하겠다. 제 딴엔 조금 전 장난에 대해 나름대로 복수한 거겠지.
게다가... 솔직히 나 같아도 이런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소프트콘 살살 핥아먹는 모습을 보면 조금 충격 받을지도.
"나는 신경 쓸 것 없으니,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해라. 오늘은 너희가 주인공이니...."
말하던 중간에, 아이리가 덥석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럼 재지 마시고 그냥 가요. 저, 이사장님 소프트아이스크림 먹는 모습 보고 싶어요. 되게 폼 나게 먹을 것 같아."
그러면서 슬며시 미소 짓는 아이리.
그 표정에 나로서는 버틸 재간이 없었고, 나는 그녀의 팔에 이끌려 가게로 향했다.
* * *
그때부터였다.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나는 본격적으로 두 사람과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어색한 표정으로 내게 잘 어울리는지 묻는 질문에 조언을 해 주기도 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동물원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나는 벽이 조금씩 허물어짐을 느꼈다.
나와 그들 사이에 있던 거대한 벽이... 신분과 입장의 차이 따위가 만들어 낸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것 좀 드셔보세요!
-어때요? 나쁘지 않죠?
-다음엔 어디로 갈까요?
이윽고 두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을 때, 거짓말을 좀 보태어 이 세계에 온 이후 처음으로 후회란 걸 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독자였다.'
이 세계의 독자였고, 팬이었다.
그랬기에 이 세계에 초대받은 이후로도,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태도를 유지했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 존재와 지식이 그들의 무결성을 해칠지도 모르니까.
'나는 아론 스팅레이었다.'
줄곧 '아론 스팅레이'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왔고, 주인공이 사라진 시점에서는 그 역할까지 이어받아 연기를 계속해 왔다.
'그랬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거기엔 내가 없었다.
독자이자, 팬이자, 황태자이자, 후원자이자, 주인공이자, 빌런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기에, 막상 이 아이들은 '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를.
잡다한 껍데기 속에 감춰진 진짜를.
'...제길.'
원래라면 이딴 생각은 안 했다.
후회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며,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찾아가며 이 세계를 살아갔을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내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목이 마르다.'
지난번 느껴 봤던 그 감각이다.
아직은 그때보다 약하지만, 이제 곧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갈증으로 다가올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견뎌 낸다.
이 즐거운 시간을 망칠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정신력으로 버티며 멀쩡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리고 점점 끝이 다가온다.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고 하던가.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 돌아갈 때가 되었다. 원래 시간으로는 쇼핑몰이 폐점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비서로부터 새로운 연락이 왔다.
[도련님. 사일런스가 깨어났습니다.]
드디어 왔다.
계획을 실행할 때가.
"아이리, 미유."
나는 두 사람을 불렀다.
웃으며 날 돌아본 두 사람의 표정이, 내가 풍기는 심상찮은 분위기에 살짝 굳는다. 나 역시 이렇게 끝내는 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으리라.
어쩌면 내게는 아닐지라도.
분명히 이 녀석들에게는.
그렇게 믿으며 조심스레 입을 뗀다.
"너희에게 맡길 일이 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71화
나는 주기적으로 시엘을 만나 상태를 확인했다.
한동안 도시 곳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방 안에 틀어박혔다.
아카데미 인근에 마련된 아파트.
원래는 아카데미 내에 정크칩을 유통하기 위한 장소였으나, 계획이 백지화된 후에는 시엘의 집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난번의 만남에서, 시엘은 내게 자신이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발언을 들은 직후, 나는 그녀의 몸에 심어 두었던 폭탄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것들을 전부 없애 주었다.
그리고 용돈도 두둑하게 쥐여 주면서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좋다'고 허락했건만, 어째서인가 시엘은 방 안에 틀어박혀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이리의 시험이 다 끝나려면 이틀 정도 남은 시점에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진지한 표정으로 날 맞이한 그녀는 대뜸 "얘기 좀 해요."라고 하더니 날 자리에 앉히고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저는 철학과를 나왔었어요."
자신의 이야기였다.
'시엘'이 되기 이전의 이야기.
예전 같았으면 쓸데없는 이야기라며 됐다고 손을 내저었을 테지만, 그날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순순히 자리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철학이라는 게 사실 쓸모는 없잖아요. 그렇죠? 수학이랑 과학은 세상이 발전하는 데에 필요하고, 언어는 우리가 매일 달고 사는 거고, 경제학은 돈을 벌고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하고."
"그런데 왜 간 거지?"
"점수에 맞추어서 적당한 대학과 과를 선택한 거였죠. 우리나라 정서상 대학을 안 나오면 취업을 할 수도 없고, 주변에선 어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그래 봤자 취업이 잘 되는 건 아닐 텐데."
"그렇죠, 뭐. '문사철'이라고 하니까요."
시엘은 후훗, 하고 웃었다.
"전 수업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소크라테스니 플라톤이니 모르는 아저씨들이고, 실존주의니... 회의주의니... 뭐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들을 시험기간에만 바짝 머릿속에 넣었다가 이틀만 지나도 잊어버리고."
시엘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특출난 것도 없고, 딱히 미래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삶과 투쟁해 오지도 않았고. 그냥 막연한 미래를 그리고 그날그날 필요한 것들을 채워 가며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저는 철학과인데, 철학 같은 걸 잘 몰랐어요.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왜 이런 학문이 남아 있는지. 근데 이렇게 되어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지금처럼...."
"시엘."
"죽음이 다가왔을 때."
시엘의 에메랄드색 기계안구가 불안감에 떨렸다. 나는 입 안에서 맴도는 말들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억지로 삼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열심히 공부할 걸 그랬어요, 그렇죠? 옛날 사람들도 비슷한 고민 같은 걸 했으니 그런 과목이 생겨난 걸 텐데."
"너는 안 죽는다."
그 순간 나는 단언했다.
내 말에 시엘이 잠시 놀라 입을 다문 틈을 이용해, 나는 챙겨 왔던 물건을 품에서 꺼냈다.
"이건...?"
"리버레이터와 전뇌화용 인격저장장치다. 어떤 물건인지는 알겠지."
"안드로이드의 영혼을 깨우는 기계와, 제 영혼을 복제해 두는 기계죠. 이런 게 있다니, 이 세상은 참 신기하다니까요."
묘하게 시큰둥한 반응.
나는 그녀가 이 물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이걸로 현재의 네 인격을 복제하는 거다. 1부 3막을 마무리 지은 다음, 이 장치들을 이용해서 원래대로...."
"확실하게 돌릴 수는 있고요?"
시엘이 내 말을 끊었다.
꽤 날이 선 목소리였다.
평소 나를 무서워하던 그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이대로 있어 봤자 너는 잡아먹힐 뿐이다. 뭐라도 시도해 봐야 하지 않겠나?"
"잡아먹힌다고요? 아뇨.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변할 뿐이죠. 오히려 이대로 내버려두는 게 나아요."
"어째서지?"
"생각해 보세요. 제 인격을 복제하고 해도, 제 의식은 '이곳'에 있어요. 모든 사건이 끝난 후 복제된 인격을 덮어씌우는 순간, '이곳'에 있는 저는 사라지고 말겠죠.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그래...."
그녀의 말도 이해는 간다.
가령, '인격'이라는 이름의 파일이 있다.
파일이 바이러스에 걸리는 바람에 다른 내용이 되어 버릴 상황이다. 그때, 주인은 백업해 둔 같은 파일로 원래의 파일을 덮어쓰기 해 버렸다.
그렇다면 주인은 문제없이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덮어쓰기 당하기 전의 파일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지만 네가 틀렸을 수도 있다."
전뇌화 기술이 있는 이 세계에서도 '자아'라는 것의 원리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아라는 것을 뇌에서 흐르는 '특정 시냅스 패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뿐이었다.
그러니 기존의 육체에 자리 잡은 '영혼'을 없애고 새로운 '영혼'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 망가진 영혼을 본래의 모양대로 되돌린다는 인식에 가까웠다.
진짜 정답은 모르겠다.
나는 전뇌 기술자가 아니다.
하물며 철학가도 아니다.
그러니 그 원리가 정확히 어떤 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후자 쪽을 믿고 실행할 뿐이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너는 '시엘'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될 거다. '시엘이란 몸에 들어간 빙의자'가 아니라, '빙의자의 기억을 지닌 시엘'이 되어 버리는 거다. 그래도 상관없겠나?"
"상관없어요."
시엘은 즉답했다.
"저도 고민을 깊게 해 봤지만, 역시 영혼을 덮어씌우는 것보단 변화를 받아들이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마지막으로 묻겠다."
나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정말로 이대로 괜찮나?"
잠시의 적막이 흐르고.
이내 시엘은 답을 내놓았다.
"네, 상관없어요."
"...."
본인의 선택이었다.
내가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봤자 방해일 뿐이다. 그녀에겐 그녀만의 믿음이 있었고,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그래."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선언했다.
"시엘, 약속하마."
"약속이요?"
"너는 내가 보호하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모든 걸 써서라도 널 지켜 주마. 처음엔 너를 적으로 간주했지만, 이제는 확실한 아군으로 생각하겠다."
"뭐예요, 그게."
나름 진지하게 말했건만, 시엘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 * *
그날 이후로.
나와 시엘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일런스가 치료를 마치고 병상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말이다.
그리고 끝내 이날이 오고야 말았다.
모든 준비를 마쳐 두었기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아이리와 미유를 이끌고 사일런스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병원 입구에서부터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비서들에게 맡기고 사일런스를 만나러 갔다.
"[다, 당신은...?]"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사일런스는 나를 알아보았다. 정신을 차린 그는 이미 얼굴에 LED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내 뒤에서 아이리와 미유가 차례대로 등장하자, 사일런스의 마스크에 [??]표시가 떠올랐다. 이들이 만나는 것은 두 번째지만 사일런스는 아마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아이리와 미유 역시 갑작스레 쇼핑을 끝내고 이곳으로 온 이유를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 사일런스는 어디까지나 '남'에 불과했으니까.
아마도 혼란스럽겠지.
하지만 시간이 많지는 않다.
칼칼한 목을 축이며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설명해 주마."
나는 사일런스가 아라야에게 조종당하던 순간부터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에 짤막하게 말해 주었고, 부족한 부분들은 아이리와 미유가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이게 대체....]"
사일런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해야 할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었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내가 어째서 너희를 오늘 이 한자리에 모았는가."
세 명 다 그 부분이 궁금했는지 내 입에 주목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운을 떼었다.
"사일런스."
"[예?]"
"네 연인을 죽인 자를 찾고 있다 들었다. 그 범인을 알려 주마."
"[자, 잠깐만요. 지금 무슨 말씀을-.]"
"범인은 나다."
"[...예?]"
순간적으로 병실을 가득 채운 침묵.
무언가 터지기 직전 같은 분위기였다.
"자, 잠까-!"
감이 좋은 아이리가 한 발 앞서 나와 사일런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사일런스는 그녀를 무시한 채 나를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왼팔로 내 멱살을 잡고, 오른팔을 뒤로 향해 뻗는다.
철컥.
그의 손목이 열리며 10cm 정도 길이의 칼날이 순식간에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내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만! 일단 진정하란 말이에요! 진정!"
아이리가 사일런스의 팔을 도중에 낚아챘다. 힘겨루기를 하며 어떻게든 그를 막아세우려고 했으나, 이미 분노에 가득찬 사일런스를 제압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비켜.]"
싸늘하게 뇌까린 사일런스는 아이리를 향해 칼날을 휘둘렀다. 그녀는 다급하게 몸을 뒤로 젖혔지만 얼굴을 약간 베이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리가 잠시 떨어진 틈을 이용하여 사일런스는 내 목덜미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나연. 네 연인을 죽인 범인은 나다."
"[...잠깐.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내가 당당하게 대답하자, 오히려 사일런스가 떨리는 눈으로 절규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칼날을 더욱 내 목에 가까이 대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지는 알아? 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날 특별장학생으로 영입하겠다면서 찾아오지 않았나?]"
"그랬지."
"[그럼 무슨 생각으로 '범인을 찾는 걸 도와주겠다.' 같은 소리를 지껄였던 거지? 뭐가 목적이야? 정말로 당신이 죽인 건 맞아? 그게 사실이라면 걔를 왜 죽인 거고, 왜 이제 와서 자백을 하는 건데! 왜!]"
"그만둬! 제발 진정하라고!"
"[닥쳐! 제 3자는 입 다물고 있어!]"
"죄, 죄송해요죄송해요죄송해요오...!"
나를 죽이려 드는 사일런스.
그를 말리려는 아이리.
잔뜩 겁을 먹고 구석에서 우는 미유.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죽일 기회라면 얼마든지 주지."
"[뭐, 뭐라...?!]"
그 순간.
나는 사일런스의 손목을 잡았다. 사일런스는 내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나는 녀석의 손목을 더욱 세게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칼날이 내 목을 찌르도록 유도했다.
"[뭐, 뭐 이게...!?]"
당황하는 사일런스.
그가 보기엔 칼날이 내 목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실제로는 그의 칼날이 내 피하장갑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구부러지다가 이내 부러지고 말았다.
딸그락거리는 소음.
부러진 칼날이 바닥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었고, 그 모습을 세 사람은 경악하며 바라보았다.
그제야 병실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말했다.
"나를 죽이고 싶나? 그렇다면...."
나지막이 제안한다.
"일단 내 말을 들어라."
아카데미 흑막 시점 72화
나는 사일런스에게 용서받을 수 있나?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NO이다.
그는 복수를 위해 몇 년에 걸쳐 정크칩으로 스스로의 몸을 망가뜨려가면서까지 범인을 찾아내려고 했다. 여기서 내가 몇 마디 한다고 해서 뿌리 깊게 박힌 그의 복수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가령, '그 사건은 나도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이었다. 나는 내 의지를 컨트롤할 수 없었다. 부디 용서해 다오.' 라고 한들 그의 화만 돋우게 될 테지.
'그러니 반대로 해야 한다.'
사일런스가 내 계획에 동조하게끔 만들려면, 그를 달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심리를 복잡하게 해야 할 터.
나는 그들에게 모든 걸 설명했다.
아론의 과거.
그리고 나의 미래.
빙의자임을 숨기고 적당한 시나리오를 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소재는 충분했다.
아시타 교의 정크칩. 베네딕트의 배신.
내가 만들어진 배경. 스팅레이 그룹.
내 폭주의 핑곗거리야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었다. 여기서 내가 강조해야 할 사실은 하나뿐이다.
-나는 곧 폭주하게 된다.
내게 부여된 살인 충동이 곧 모두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여 여러 준비를 해 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너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은 시나리오 덕에, 예리한 직감을 가진 아이리도 내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심리상태를 확인해 가며 그때마다 적당한 단어를 선별하고, 정답을 입에 담았다.
물론 그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마냥 순탄치는 않았고, 특히나 사일런스의 반발이 심했다.
"[도와달라고? 개소리!]"
그의 마스크가 조합해서 내는 목소리는 상당히 날카로운 음성을 내고 있었다. 나는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그럼 너는 어떡하고 싶은 거지?"
"[몰라서 물어? 당장 당신을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그 시체를...!]"
"정말로 네가 바라는 게 그것인가?"
"[...뭐?]"
내 한마디에 사일런스가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찾아 헤매던 범인이 눈앞에서 자백한' 이 상황 자체에 꽤나 동요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난데없이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튀어나와 자신이 범인임을 자백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혼란스러운 시츄에이션이 아닌가?
그 마음의 틈을 비집고 흔드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가벼운 블러핑 정도면 충분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방법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지,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내 목에 칼을 찌르고 싶다면 해도 좋다. 내가 혀를 깨물고 죽길 바란다면 그대로 해 주지. 총으로 내 관자놀이를 날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네가 무엇을 원하든 그대로 들어주마."
"[아아, 그래? 좋다, 그럼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헌데 그것으로 너는 만족하겠나?"
사일런스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내 한 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얼굴 표정은 마스크에 가려져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당황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복수 아닌가. 나 역시 네 복수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의사가 있다. 총살? 교살? 참살? 안타깝게도 기회는 한 번뿐이니 잘 선택하길 바라마."
"[...!]"
사일런스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내 예상대로였다.
그는 오랫동안 복수를 꿈꾸어 왔다.
이를테면 이런 형태의 '완벽한' 복수극을 그렸을 테지.
마침내 찾아낸 범인은 자신의 죄를 끝까지 부정하다가, 정의의 철퇴를 맞은 후에야 울며불며 용서를 구하고.
그는 그 희망을 짓밟듯이 자신의 모든 증오와 원한을 담아 최악의 마지막 형벌을 가하는, 그런 그림.
그 흉흉한 이미지는 사일런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안에서 소중한 보물처럼 자리를 잡았다. 너무나도 소중해서, 그 형태가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보물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지.'
자신이 범인을 직접 잡은 것도 아닌 데다가, 그 범인은 누구보다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에게 죄를 사해 달라며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원한다면 얼마든지 목숨을 내어 주겠다고까지 하며.
그의 소중하디 소중한 복수극 시나리오는 이미 엉망진창으로 망가지고 있었다.
"너도 슬슬 느끼고 있지 않나. 이 자리에서 날 당장 죽인다고 해서 네 복수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빌런이 되지 않은' 나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 찝찝함은 평생을 남으리라는 것을.
무엇보다 지금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론 스팅레이'를 절대로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
정곡을 찔린 듯.
말문이 막혀 버린 사일런스에게 나는 다시 한번 제안했다.
"내게 협력해라. 그러면 약속하마."
네가 그토록 바라던 복수가.
완벽히 꿈꾸어 온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 * *
[알림]
*1부 2막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시나리오 종료]
'사일런스'와의 관계 변화.
1부 2막이 종료되었습니다.
최종 공헌도: 88%
*시나리오 보상이 지급됩니다.
*공헌도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시나리오 보상]
업적 포인트: +3500
'남색 사냥터 입장권' 1장
[업적달성]
사일런스의 범죄를 저지했다.
업적 포인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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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막 시나리오 클리어.
사일런스는 완벽하게 내게 넘어왔다.
'이걸로 됐다.'
나는 빌런으로서.
1부 4막의 최종보스로서 이 녀석들과 적대하고, 끝내 패배하여 이들을 한층 더 높은 경지로 이끌 밑거름이 될 것이다.
동시에 나는 주인공으로서.
1부 4막의 최종보스인 '나'를 이 녀석들과 함께 쓰러뜨리면서, 대량의 공헌도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거의 다 됐어.'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
갈증이 더 심해지기 전에.
모든 준비를 빠르게 마쳐야 한다.
* * *
내가 병실을 떠나 찾은 곳은 시엘의 집이었다. 1부 2막이 끝난 만큼, 이제 그녀의 에피소드인 3막이 시작될 차례였다.
"어서 오세요, 아론 님!"
시엘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 달리, 그녀의 표정은 꽤나 밝아져 있었다. 태도와 걸음걸이에서부터 산뜻함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시엘."
"네, 아론 님."
"너는 누구지?"
"시엘은 시엘인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밝게 대답한다.
어느새 그녀는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원작에서 나왔던 그 모습 그대로 말이다.
"...."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전혀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분명 내 최애 캐릭터 중 한 명인 시엘의 모습 그 자체였지만, 나는 어째서인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밀어붙였어야 했나.'
치밀어 오르는 씁쓸함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것은 내 욕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건 그녀의 선택이었다.
이름 모를 그녀.
그녀는 스스로 시엘이 되기로 선택했고, 나는 그것을 존중해야만 했다. 이 모습을 보며 씁쓸해하는 것은 그녀의 선택을 모독하는 일일 테니까.
"시엘."
"네, 아론 님?"
"우리가 저번에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나?"
"물론이죠."
"그 대화에 대해, 지금의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생각이 좀 바뀌었나?"
"글쎄요?"
시엘은 또 과장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아가 있음에도 메이드로봇 시절 습관이 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시엘이라는 캐릭터의 특징이었다.
"돌이켜 보면 뭘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시엘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시엘의 판단이 옳았던 거예요."
엣헴, 하고 가슴을 펴는 시엘.
며칠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전혀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어째서인가 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말았다.
"왜 그러세요, 아론 님?"
"...아무것도 아니다."
고개를 저으며 심호흡한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을 가라앉힌다. 하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 감정들이 옅어져 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안 돼....'
정신 차리자.
바짝 긴장하며 나는 시엘에게 물었다.
"시엘, 인간이 되고 싶나?"
"다, 당연하죠! 이제 시엘의 신체 파츠 중 28%가 생체부품으로 만들었어요! 조금만 더 바꾸면 분명 원래의 '저'처럼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자격이 생길 테니까!"
적응자가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자연적인 육체의 비율 30%.
반대로 시엘은 자신의 몸에서 30%를, 기존의 안드로이드 파츠 대신 바이오 파츠로 대체하면 '인간이 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곧 인간이 되게 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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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달성]
메인스토리 1부 3막을 시작했다
업적 포인트: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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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시엘의 아파트에서 빠져나온 후, 나는 미유의 기숙사로 향했다.
곧장 그녀의 작업실 안쪽까지 들어가, 버튼을 조작하여 숨겨진 장치들이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했다.
스스슥.
부드러운 움직임과 함께 캡슐이 튀어나왔다. 초록색의 반투명한 액체 너머로 나를 쏙 빼닮은 청년의 모습이 보인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는 해골이나 다름없었지만, 이제는 어느 모로 보나 완전히 인간이었다. 지금의 내 모습에 비하면 조금 나이가 어린 듯한 외형이었지만 그 정도의 차이는 상관없을 것이다.
그것을 잠시간 살펴보던 나는 뒷덜미에 손을 갖다 댔다.
'모듈 해제.'
그와 동시에 소켓HUB에서 내가 장착하고 있던 모듈들이 하나씩 빠져나왔다. [구름거미], [테크 블레이드]를 포함하여, 각종 신체 강화 모듈들이 내 몸에서 해제되어 간다.
당연하지만 단번에 많은 양의 모듈을 해제하면 신체에도 상당한 부담이 가기 마련이다. 모듈을 통해 생겨났던 기계파츠가 사라지고, 원래의 육체가 자라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세포회복력 강화 모듈인 [셀 제너레이터]만을 남겨 두었다.
"윽...."
한순간 휘청거렸다.
온몸의 감각이 마비된 듯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고, 나는 잠시간 의자에 기대에 몸을 쉬게 했다.
이윽고 회복을 마친 후, 고스란히 모은 모듈들을 미리 미유와 상의해 두었던 대로 캡슐 앞쪽에 마련된 박스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잊을 뻔했군."
전뇌화용 인격 저장칩.
안에는 이미 내 영혼을 복제한 데이터가 들어 있었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나는 '남색 사냥터'에 일찌감치 다녀왔었다.
'순수한 상태의 내 정신을 추출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복제한 영혼이,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로 '아론으로 변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나는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에서 내 영혼을 데이터화했고, 저장장치에 담아 가져왔다.
'이것만 넣으면 복제품은 깨어날 거다.'
나는 인격저장장치도 전투 모듈들과 함께 상자에 넣었고, 현재까지 모인 포인트도 전부 상점에서 모듈호환성 티켓으로 교환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티켓들까지 넣어서 상자를 단단히 잠근 후, 품에서 또 새로운 것을 꺼냈다.
두 개의 전투 모듈.
드워프제 [구름거미]와 [테크 블레이드]의 복제품.
'호신용으로 잠시 동안은 쓸 만하겠지.'
베네딕트가 움직일 때가 되었다.
자신이 '아론 스팅레이'로 각성할 때를 대비하여 모든 모듈을 해제하고 최대한 약화시키긴 했지만, 그 사이에 베네딕트의 습격을 받아 완전히 죽어 버리면 말짱 도루묵일 테니까.
그때를 대비한 은장도 같은 느낌으로 두 개의 가짜 '게임체인저' 모듈을 장착한 후, 가볍게 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이걸로 준비는 전부 끝났다.'
아이리와 사일런스를 동료로 포섭했고, 빌런이 될 나와 맞서 싸울 복제품도 준비해 놨다.
내 몸을 최대한 약화시켜 두는 것도 잊지 않았으며, 동시에 베네딕트의 습격에 반격할 만한 수단도 마련해 두었다.
'이제 조금 쉬어도 되겠지.'
단번에 수많은 모듈을 교체한 탓에 피곤함이 물밀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졸음에 일어날 의지가 박탈당하고 말았다.
'조금만 쉬는 거다... 조금만....'
5분만. 아니 10분만.
잠깐만 힘을 채우고, 곧 다가올 에피소드에 대비하는 거다.
확실하게, 그리고 무사히 정의로운 주인공 일행의 손에 퇴치당할 수 있도록 가장 알맞은 위치에서 4막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거다.
그렇게 다짐하는 사이, 내 의식은 완전히 수마에 집어삼켜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얼마간인가 헤엄을 치다가, 조금씩 느낀다.
무언가가 바뀌고 있다.
무언가가.
하지만 한낱 꿈일 뿐이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름다운 풍경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풍경.
가장 좋아하는 붉은색이 사방에 칠해진 풍경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위로 솟는다.
사, 살려 줘....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허리가 반 잘려 나간 누군가가 내 앞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Lv.4 파워드 아머.
투구와 가슴팍에 '스팅레이'의 로고가 적혀 있었다. 아마 우리 그룹 소속의 병사일 것이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더라?
아, 그랬지.
베네딕트가 습격해 왔더랬다.
잠시 아카데미를 빠져나온 사이 내 망할 동생 놈이 이끄는 군대가 나를 찾아왔고, 먼저 공격하기에 반격했다.
"음?"
고개를 들자, 내게 총구를 겨눈 병사들이 보였다. 그들의 손이 두려움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상하군."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뭔가 이상했다.
뭔가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고민해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모르겠다.
정말로 나는 바뀐 게 하나도 없는데.
아카데미 흑막 시점 73화
[타깃을 확인했다. 타깃은 비행형 세단을 타고 이동 중이다. 'R모스크' 차량, 번호는 'AR3852'. 고도는 480m. 시속 120km로 E섹터 구마룡 거리를 향해 주행중.]
[확인했다. 동승한 자는?]
[재단 비서실 소속 인물이다.]
[강행해도 좋겠군. 들키진 않았겠지?]
[이쪽을 알아챈 듯한 기척은 없다.]
[알겠다.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도록.]
[확인.]
대마법사급 위자드 3명.
장로급 위자드 7명.
Lv.80 이상 고레벨 적응자 11명.
Lv.50 이상 중레벨 적응자 42명.
Lv.80 이상 과잉 증강자 23명
Lv.50 이상 증강자 22명까지.
100명이 넘는 전력.
전원이 Lv.4 이상의 전술급 파워드 아머로 단단히 무장했고, 스팅레이 보안부 적응자용 제식 소총인 S-201을 들고 있었다.
8mm 열화우라늄 철갑탄을 극초음속으로 초당 30발씩 쏘아내는 괴물이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대형 생산 콜로니 몇 개쯤은 간단하게 공략 가능한 병력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들이 노리는 것은 단 한 사람.
아론 스팅레이.
스팅레이 재단의 이사장이었다.
베네딕트 스팅레이의 지시 하에 집결한 그들은, 황태자 제거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단 한 명을 위해 조직된 부대치고는 지나치게 거창했다.
아무리 상대가 뉴 발할라 시티 최대 규모의 메가코프를 물려받을 남자이자, 그 메가코프 무력의 상징인 황태자라고 해도 말이다.
때문에 누군가가 물었다.
이제 막 모듈 출력 종합레벨이 Lv.50을 넘긴, 말하자면 이번 작전에서는 막내 정도 되는 위치의 남자였다.
[근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너무 호들갑 떠는 것 같은데.]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거지?]
[그렇잖습니까.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고 해도, 겨우 한 명일 뿐입니다. 신중한 건 좋지만, 이건 신중함을 넘어서 겁을 먹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막내의 투덜거림.
그 말에 누군가 한 명이 웃었다.
[허.]
이 새끼가 뭔 소릴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는 듯한 어이없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웃음은 주변으로 번지기 시작해서 수송차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뭐, 뭡니까! 왜들 그러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모르는군, 애송이.]
[참, 모를 수도 있지. 이제 막 루키 딱지 떼고 온 놈한테 뭘 바라는 거야?]
[하기야 그런가? 황태자의 정확한 스펙은 일단 기밀이니까. 알려진 거라곤 '게임체인저'급을 두 개 갖고 있다는 것뿐이고.]
[그렇다니까? 야, 요새 신입들 중에서는 아예 황태자가 '적응자'라는 것도 모르는 애들도 많더라.]
[병상에 오래 누워계셨으니까.]
선배들의 조롱하는 듯한 말투에, 막내는 조금 심통이 나서 대답했다.
['게임체인저'가 뭐 어쨌다는 겁니까? 그렇게 거창한 이름으로 불려도 Lv.5 신비모듈이잖습니까? 저만 해도 Lv.4짜리는 몇 개 갖고....]
[애송이.]
허나 그의 투덜거림은 싸늘한 목소리 하나에 막혔다. 그의 말을 끊은 남자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보지 않으면 모른다.]
[봤습니다. 황태자가 타이탄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영상은 저도 봤다고요. 하지만 그 정도쯤은 저는 아니라도 선배들 정도면....]
[내 말을 이해 못 했나 보군.]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들은 몇 가지 소문을 말해 주지. 혼자서 최고위 악마를 10마리쯤 쓸어버렸다는 얘기도 있었고, 괴물 놈들의 대규모 공세에 완전히 무너질 뻔한 콜로니를 혼자서 구해 냈다는 얘기도 있었지. 그 외에는 아신(亞神)을 혼자 죽였다는 얘기도 있었고.]
[소문은 소문일 뿐이잖습니까. 사실 이곳에서 아론 스팅레이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 사람도 없을 테고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나는 봤다.]
[뭘 말입니까?]
[황태자가 떠난 자리를.]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대략 10년 전, 아직 아론이 10대였던 시절. 그는 남쪽에 있는 전투드론 생산콜로니 한 곳에서 보안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대규모 신비들의 공세에 콜로니가 무너질 뻔했다. 결국 궁지에 몰려 외부 장벽을 폐쇄하고, 콜로니 방공호 안에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던 그때.
[황태자가 왔다는 얘기가 들리더군.]
누군가 외부상황을 전달받아 방공호 안에 소문을 퍼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공호 격리가 해제되었고, 살아남은 보안부 직원들은 신비들의 시체를 치우기 위해 콜로니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목격했다.
[그건 재해(災害)였다.]
폭우, 폭설, 지진, 대화재.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앙.
그들이 목격한 것은, 그에 버금가는 '전투'의 흔적이었다.
[그, 그렇다는 건....]
[알겠나? 그게 황태자가 10대 때였어. 그때는 인간병기로서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는 거지.]
남자는 말을 이어 나갔다.
[작년인가 재작년쯤부터였지? 황태자가 대외적인 활동을 그만뒀던 게.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무성했었고.]
[네. 그러다 올해 복귀했죠.]
[그사이에 몇 번 황태자 암살시도가 있었던 건 너도 들었을 텐데? 그리고 그 결과가 어땠었는지.]
[아뇨, 몰라요. 그때 한창 '저쪽'에서 괴물들 때려잡느라고 1년 넘게 고생했었던지라....]
[그런가. 그럼 그럴 수 있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막내가 물었고, 남자가 답했다.
[별것 아닌 일이었다.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 황태자가 혼자서 습격한 놈들을 쓸어버렸다는 얘기지.]
[그래서요?]
문제는 습격한 놈 중에 나름 이름을 알리던 A급 용병들이 섞여 있었다는 거고, 지금 와서 밝혀진 거지만 황태자는 진짜로 아팠었다는 거지.]
제네틱 오버캐스트.
극악의 확률로 발생하지만, 걸리는 순간 확실하게 적응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가상의 불치병. 황태자가 그 병에 걸렸었다는 사실은 이번 암살 작전을 지시한 베네딕트가 확실하게 말해 주었다.
[듣자 하니 그 병에 걸리면 통상모듈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끔찍한 고통을 느낀다고 하더군. 진통제가 없으면 제정신으로 있기 어려울 정도로.]
[그런 상태에서도 A급 용병들을 혼자서 해치웠다는 겁니까...?]
[안 믿기지? 나도 안 믿긴다. 소문으로는 그 난리통에서도 생채기 하나 안 났다더군. 그 사건을 계기로 이후에는 암살 시도가 싹 사라졌지.]
[그러고 보니 지난번 밀레테크 비행형 수송차에서 로켓을 맞고도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었다죠.]
[그래. 이제 알겠나? 아론 스팅레이를 우리와 같은 수준의 인간으로 보면 안 된다.]
그는 괴수다.
인간이 아니라 괴수.
아름다운 모습을 한 괴수.
남자가 강조하자, 막내는 그제야 조금 겁을 먹은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럼 이번 작전은....]
[이 정도 전력을 동원하는 건 당연해. 난 가능하면 더 동원하는 게 좋다고 생각할 정도다. 지금 전력으로도 성공할 거라는 확신은 없어.]
어마어마한 보상 약속이 아니었으면 참가하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이 명령을 내린 것이 베네딕트 스팅레이, 황태자가 제거되면 새로운 황태자가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인물이기에... 라는 것이 남자의 설명이었다.
그 말에 다른 이가 반박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뭣도 모르는 애한테 겁줘서 사기 떨어뜨리지도 말고! 너희도 다 영상 봤잖아! 그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았던 황태자가 다쳤었다니까?! 병을 앓고 나선 확실하게 약해진 거야!]
[정말 약해졌길 바라야지.]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만약 황태자가 약해지지 않았다면?
소문으로만 접해 왔던, 그 괴물 같은 힘을 여전히 갖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모든 이가 아론을 두려워했다.
비단 그가 가진 압도적인 무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압적이면서도 귀족적인 태도와 범접할 수 없는 신분,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풍기는 기백 따위가,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경외심.
존경과 두려움.
무성한 소문과 간접적인 경험으로 버무려져서 탄생한 공포가 그들의 마음속에서 거대한 풍선처럼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해야만 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 * *
[타깃이 예상지점에 도착했다.]
[좌표 전송 받았다. B28 포인트부터 D65 포인트까지를 작전구역으로 설정한다. C23, C39, D11에 저격수를 배치한다.]
[5분 내로 배치 전부 끝내. 위자드들의 해킹과 동시에 작전을 시작하겠다.]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병사들은 빠르게 아론 스팅레이를 습격할 준비를 시작했다.
전문적인 솜씨로 3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실행할 준비를 마친 그들은 얌전히 콜사인을 기다렸다.
[대기.]
아론 스팅레이가 향한 곳은 E섹터의 외곽. 지난번 타이탄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었던 장소로, 여전히 당시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안 그래도 치안이 좋지 않은 E섹터였기에, 그 사건 이후로 기존 주민들이 이탈하는 등 슬럼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여러모로 미디어에 이목을 끌고 있는 스팅레이 그룹이었다. 이 이상으로 언론 노출도를 높여봤자 그다지 좋은 꼴은 보지 못할 테지.
타깃이 이런 곳에 온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는 눈이 적은 만큼, 상대적으로 조용히 작전을 진행하고 묻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은 거의 1km 가까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아론의 모습을 관찰했다. 비행형 세단에서 내린 그는 어째서인가, 아무것도 없는 폐허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깃이 차에서 내려 창고로 들어갔다. '벽 투시 모듈'로 확인 가능한가?]
[불가능. 시그널 로스트. 콘크리트 분진 때문에 스캐너 상태가 좋지 못함. 확실하게 신호를 잡으려면 더 접근해야 한다.]
[불허한다. 위자드팀, 저 건물 설계도가 필요하다.]
병사들은 위자드들의 도움을 받아 즉석에서 건물의 설계도를 다운로드 받았다. 그들의 눈앞에 평면도가 떠올랐고, 아론이 들어간 위치가 빨간 점으로 표시가 되었다.
[다행히 입구는 하나뿐이군.]
[확실하게 지시가 오기 전까지 눈을 떼지 말도록.]
긴장감이 흐른다.
이번에 편성된 팀원 중에선 신비들의 영역을 누비며 상당한 경력을 쌓은 베테랑들도 속해 있었지만, 그들 역시 긴장감에 심장이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창 침묵 속에서 긴장감이 고조되던 그때였다.
[타깃이 통화를 시작했다.]
[상대는?]
[마리아 비서실장.]
[AI로 목소리 준비해.]
마리아 비서실장은 작전이 실행되기 얼마 전, 갑자기 이번 건을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구금되었다.
그 후로 한동안 대역이 마리아의 역할을 대신하여 아론에게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메일을 처리하는 식으로 아론으로 하여금 이변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인공지능으로 마리아 비서실장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아론을 속일 생각이었다.
[미메시스 AI 준비 완료. 통화 시작.]
이윽고 아론이 건 통화가 마리아의 번호와 연결되었다. AI로 만들어 낸 마리아의 목소리가, 통화를 엿듣던 병사들 전체의 귀에 전해졌다.
[네, 도련님.]
[준비는 잘 되고 있나?]
[물론입니다, 도련님.]
[솔직히 이 정도까지 준비했을 줄은 몰랐군. 베네딕트 녀석도 다시 봐야겠어. 수고했다는 말을 전해 주면 좋겠군.]
[어떻게 전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
아론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으아아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
동시에 알 수 없는 물체가 허공을 날아 아론이 있던 건물로 빨려들 듯이 들어갔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에 그곳을 주시하던 병사들조차 무슨 일이 벌어진지 알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보기는 했다.
그들의 기계안을 통해 강화된 그들의 동체 시력은 초고속 카메라처럼 총알의 움직임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었으니까.
다만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으니까.
[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조금 전.
아론이 있던 건물로 날아 들어간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그것도 2km나 멀리 떨어져 있던 곳에 배치되어 있던 저격수 중 한 명이었다.
말이 안 되지 않는가.
2km 밖에 있어야 할 저격수가, 그 먼 거리를 순식간에 날아와선 아론이 있는 폐허 건물로 빨려들어간다는 것이.
하지만 곧 그들은 깨달았다.
D11 포인트에 배치되었던 저격수의 생체신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조금 전 자신들이 보았던 게, 진짜로 자신의 동료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을.
[아...!]
크나큰 충격에 그 누구도 차마 입을 떼지 못하던 찰나, 아론의 목소리가 다시금 재생되었다.
[베네딕트에게 이리 전해 주면 좋겠군.]
그리고 아론은 웃음을 흘렸다.
즐겁다는 듯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많은 사냥감을 준비해 줘서 고맙다고 말이다.]
아론이 짜낸 거미줄은.
이미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74화
[제기랄! 들켰다!]
[어쩔 수 없다! 강행한다!]
불리한 상황이었다.
기습에 성공했어도 작전을 완수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 마당에, 아론에게 먼저 들켜 버리다니 뼈아픈 실수였다.
아니, 과연 실수였을까? 단순히 기척을 충분히 없애지 못해서 들킨 것일까?
그럴 리가.
아마도 아론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상황을 사전에 파악하고, 개미처럼 자신들을 손바닥 위에 놓고서 즐기고 있었을 테지. 굳이 전투의 장소로 이곳을 고른 것 역시 아마 그의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순 없었다.
아론은 이미 자신들의 정체를 전부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고, 이대로 도망친다고 한들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하는 수밖에.
[다들 달려들어!]
수십 명의 고위 적응자와 증강자 병사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찼다. Lv.4 파워드 아머의 로켓추진 장치가 그들의 기동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공중과 지상을 달려 수백 미터의 거리를 이동한다. 아론이 있는 폐허를 에워싸고 S-201 대구경 소총의 총구를 겨눈다.
철컥, 철컥, 철컥!
기계식 조준경과 안구카메라를 통해 타깃을 포착한다.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진 덕에 정찰병들이 장착한 [벽 투시 모듈]이 정상 작동하기 시작했다.
정찰병들의 시야에 벽 너머 아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는 뇌내 영상이 내부통신을 통해 실시간 공유되었고, 다른 병사들 역시 아론의 모습을 똑똑히 포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쏴라!]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병사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는다.
소리의 속도를 아득히 뛰어넘은 8mm 열화우라늄 철갑탄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철판 따위는 종잇장처럼 씹어 먹는 괴물 같은 위력의 탄환이다. 코끼리의 두꺼운 가죽과 근육마저도 찢어발기는 철갑탄 앞에서, 평범한 콘크리트 잔해 따위는 엄폐물이 되어 주지 못했다.
콰아아아아아-!
빗발치는 탄환들이 아론이 있던 건물을 통째로 헤집는다. 콘크리트가 부서지며 일어난 자욱한 먼지가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하지만 그들은 격발을 멈추지 않는다.
정찰병의 스캐너에는 아론의 생체반응이 그대로 잡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딴 걸로 그를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도 않았고.
[재장전!]
[재장전!]
[재장전!]
일말의 여유도 허용할 수 없는 상대.
소대별로 탄환의 소비 속도를 달리하여 화력 공백을 최소화했다.
한 소대가 비어 버린 탄창을 갈아 끼울 동안, 다른 소대들이 차례대로 탄환을 쏟아부으며 아론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압사격을 계속했다.
그리고-
[바이러스 준비 완료.]
[바이러스 주입 시작.]
위자드 팀으로부터 아론의 모듈을 무력화시킬 컴퓨터 바이러스가 준비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보안 취약점을 파고들어, 상대의 몸에 회로란 회로는 전부 헤집어 놓을 바이러스다. 따로 지시가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곧장 바이러스를 아론의 몸에 강제로 다운로드 시키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사격을 멈추지 않는다.
탄창이 빌 때까지 연사 후 재장전.
쏘고 다시 장전.
수십 명의 병사들이서 100발 탄창을 몇 개나 비워 냈을까. 5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족히 만 단위의 탄환을 소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친...!'
스캐너에 잡힌 아론의 형상이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생체반응이 없는 저격수의 시체가 죽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아론 본인은 그렇다 해도, 어째서 시체까지 멀쩡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거지? 콘크리트마저 돌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탄환이다. 그것들을 얼마나 쏟아부었는데?
[제길,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이 이상의 탄환 소모는 비효율적이었다.
아니, 비효율을 넘어 무의미했다.
제압사격의 효과조차 내지 못하면 이 비싼 총알들을 낭비하는 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게다가 바이러스 주입이 곧 끝날 시간.
일단 다음 수를 위해서라도, 잠시 공격을 중지할 필요가 있었다.
곧 사격이 중지되었다.
자욱했던 먼지가 가라앉았고, 총탄에 박살 나서 완전히 벌집이 되어 버린 건물의 입구 부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병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게 대체...!]
멀쩡해도 너무 멀쩡했다.
아론의 손에 검은 가죽장갑이 씌워져 있었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맹금류를 닮은 눈동자.
그 매서운 눈동자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이 정도밖에 안 되나?'라고 묻는 듯한 눈길이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가 있는 것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의 주변으로 이상한 게 있었다.
저 형체를 뭐라 설명해야 좋을까.
그물로 만들어진 반구(半球).
아마 그게 가장 가까운 묘사일 것이다.
아론과 그 옆 저격수의 시체를 중심으로, 반지름 2미터 정도의 반구체가 형성되어 있다. 실과 실이 교차하며 만들어 낸 격자의 크기는 주먹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수준이었다.
얼핏 저런 걸로 어떻게 총알을 막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자세히 보니 격자의 빈틈을 얇은 실들이 빠르게 왕복하고 있었다.
실로 만든 반구의 주변에 깔끔하게 잘려 나간 8mm 열화우라늄 철갑탄의 탄두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저, 전혀 안 통하다니....]
아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화력을 쏟아부었다고 해도 이 정도의 기본 무기로 뉴 발할라 시티 최강자이자, 스팅레이 그룹의 최종병기인 그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욕심일 테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냐고...!]
어느 정도는 기대했다.
이렇게 쏟아부었는데,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타격은 입힐 수 있지 않을까? 하다 못해 한 발이라도 맞힐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건 헛된 바람이었다.
아론은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고고하고도, 우아한 기품을 유지하며.
그 사실이 병사들의 사기를 짓밟았다.
[....]
경악과 공포로 전장이 침묵에 빠졌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또 다른 기대.
[바이러스 주입 완료.]
아론의 모듈을 무력화시킬 바이러스가 완전히 그의 몸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끝이다.
제아무리 물리적으로는 무적인 아론 스팅레이라고 해도, 위자드에게 허점을 보여 준 순간 끝장이다.
위자드들은 바이러스를 통해, 이제 그의 몸속 회로를 제집처럼 헤집고 다니며 만신창이로 만들어 줄 것이었다.
파지지직
아론의 몸에서 전기가 튀었다.
목덜미 쪽에서 거뭇한 연기가 피어올랐고, 아론은 몸을 살짝 휘청거렸다. 이윽고 그는 뒷덜미로 손을 뻗더니, 숯처럼 검게 타 버린 모듈을 뽑아냈다.
[Lv.3 셀 리제너레이터- 제거 성공.]
성공이다!
병사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이러스가 아론의 모듈을 망가뜨리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보안이 취약한 모듈부터 하나씩 무력화해 나가겠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때.
아론이 재밌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아, 과연."
지나치게 여유로운 태도.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일부러 '안티 위자드 백신'을 다운그레이드해 놨었지. 그것을 까먹고 있었군."
저게 무슨 소리일까?
병사들이 의문을 품은 순간.
위자드 팀에서 다급히 연락이 왔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타깃의 모듈링 상태가 이상합니다!]
바이러스를 심어서 살펴본 아론의 모듈링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 정보를 공유받아 살펴보자, 다시 한번 베네딕트의 병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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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al Number: AST-000
운영체제: PANDORA v.1.0
사용자: 아론 스팅레이
대체율: 7.8%
장착된 전투 모듈
[신비]
[구름거미 Lv.5] - 활성
[βσξλłĦĦŁŊ Lv.5] -비활성
[시체먹는 자 Lv.5] - 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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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신비 모듈만 세 개라니?
'게임체인저'급 모듈을 3개나 동시에 끼고 있는 것도 놀라운데, 반대로 장착한 모듈이 그것들밖에 없다는 것도 놀라웠다.
어째서지?
그가 갖고 있다던 그 수많은 군용급 모듈은 어디로 간 것인가? 조금 전 망가뜨린 [셀 리제너레이터 Lv.3]을 합쳐도 종합 출력레벨이 18밖에 되지 않는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무리 게임체인저급 모듈을 갖고 있어도, 그것'만' 장착하고 있어선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다.
어떻게 아론은 기계안구도 아닌 시력으로 어떻게 2km밖에 있던 저격수를 정확히 발견한 것인가?
또 어떻게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정확히 공격에 대처한 것인가?
'퓨어스펙만으로 Lv.40 수준의 피지컬이라고? 아니, 못해도 Lv.60은 족히 된다.'
그렇게 그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바이러스라. 이건 골치 아프군."
그렇게 중얼거린 아론은 옆에 있던 저격수의 시체를 짓밟았다.
그는 시체에서 소켓HUB 사이버웨어를 강제로 뜯어낸 다음, 그 안에 장착되어 있던 전투 모듈들을 하나씩 빼내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설마 장착하려는 건가?
호환성이 안 맞을 텐데?
보통 적응자들이 여러 상황에 대비하여 다양한 기능을 지닌 예비 모듈을 들고 다닌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호환성에 맞춘 모듈들뿐이다.
타인에게서 모듈을 빼앗아 사용한다?
몇 개는 운 좋게 호환성이 맞아떨어져서 사용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쓰지도 못할뿐더러 과도하게 높아진 부하율 때문에 오히려 몸을 악화시킬 것이다.
분명 그럴 터인데.
아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체에서 빼낸 모듈을 차례대로 자신의 소켓HUB에 꽂아 넣었다. 마치 음미하듯 그것들을 확인하던 아론은,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판단된 것들을 빼내서 버렸다.
"이건 쓸모없군."
총 20개의 모듈 중 2개.
나머지 18개의 모듈은 그에게 맞았다는 의미였다.
[미친...!]
바이러스를 통해 알아낸 아론의 모듈링 정보가 곧 수정되었다. 놀랍게도 그 모듈들 대다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과부하율은 대폭 오르긴 했지만, 어떻게든 문제없이 전투를 이어 나갈 수 있을 수준이었다.
'아까보다 더 강해졌다고...?!'
미친 것 아닌가?
간신히 모듈 하나를 못 쓰게 만들어 놨더니, 18개나 되는 전투 모듈을 시체에서 뽑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다니...!
물론 바이러스는 아직 살아 있다.
계속해서 아론의 몸속에서 모듈들을 차례대로 못 쓰게 만들겠지만, 그때마다 아론이 새로운 모듈을 장착해 버리면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제기랄! 게임체인저 모듈들부터 못 쓰게 만들란 말이야!]
[어, 어렵습니다! 신비모듈은 그 자체만으로도 방대한 데이터와 치밀한 보안성을 갖고 있어서...!]
[허...!]
좆됐다.
머릿속에 세워놨던 모든 작전이 무용지물이 되는 느낌이었다. 원래부터 강했던 괴물이, 시체를 먹으며 더 성장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그런 끔찍한 존재를 대체 어떻게, 무슨 수를 써야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이건 안 된다.
계속 싸워 봤자 안 된다.
다 무의미하게 죽을 뿐이다.
그렇게 판단한 대장은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후, 후퇴....]
그러던 그때였다.
[다들 어디로 튀려는 거지?]
아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흠칫했으나, 병사들은 그 목소리에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 그 목소리는 자신들이 상대하는 타깃의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것이었다.
아론과 매우 닮았지만.
그 목소리는 어딘가 앳되게 느껴졌다.
그리고....
[대, 대장, 저기...!]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한 존재가 전장의 한복판에 나타났다. 그에 다시 전장의 분위기가 격동했다.
또 다른 아론 스팅레이.
정확히는 10대의 모습을 한 아론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7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