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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84% OSCURACADEMIA / Chapter 7: 7

Chương 7: 7

아카데미 흑막 시점 53화

트리니티 아카데미 150층 사이버 공원.

각종 귀여운 동물들과 아름다운 식물들의 모습을 고해상도 홀로그램으로 꾸며놓은 장소였다.

본래는 학생들의 정신 케어를 위해 150층을 통째로 이용하여 곳곳에 '진짜' 나무나 작은 동물들을 키웠다고 한다.

허나 현재는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전부 홀로그램 동식물 영상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냄새는 꽃의 냄새를 모방한 다중 디퓨저 기기로, 동식물들의 소리는 스피커로 바꾸어 공원의 역할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이런 곳을 용케도 좋다고 돌아다니네.'

하지만 아이리의 평가는 영 좋지 못했다.

뭔가 애매하게 디자인이 조악한 몇 세대 전 안드로이드를 보는 느낌이랄까. 어쭙잖게 자연을 모방하려는 모습이 묘하게 불쾌한 골짜기를 자극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학생들에게는 인기가 많은 공간이었다.

평면화면으로 보는 모습과 홀로그램에는 큰 차이가 있기에, 쉬는 시간마다 이곳을 찾는 학생들이 꽤 많은 듯했다.

-오, 여기 한정판 아이스크림도 판다.

-여기 처음 와 보는데 꽤 괜찮은 듯?

사이버 공원에는 매점과 벤치도 있었기에, 학생들은 저마다 간식거리를 사 들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리는 그런 그들이 조금 부러웠다.

아무런 생각 없이 속 편하게 쉬는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마 매점 가격이 바깥보다 3배쯤 비싸지만 않았어도 이 공간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 더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아, 아이리 씨이...."

"응?"

"손에 그... 아이스크림이 녹고...."

옆자리에 있던 미유가 아이리의 손을 가리켰다. 정신을 차려 보니 아카데미 바깥보다 3배나 비싸게 주고 산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녹아 손으로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악! 이게 얼마짜린데!"

아까운 마음에 허겁지겁 손등을 핥는 아이리.

미유는 그런 그녀에게 미유는 손수건을 건네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아이리 씨이... 괘, 괜찮으세요오...?"

"뭐가?"

"제 착각이라면 죄송한데에... 뭐, 뭔가 조금 안색이 안 좋아 보이셔서...."

"그렇게 보였어? 아냐, 그런 거."

아하하.

아이리는 애써 웃으며 넘기려 했으나, 미유의 지적은 사실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그래, 그녀는 긴장하는 중이었다.

다름 아닌 아론의 어젯밤 지시 때문에.

그가 했던 충격적인 이야기가 머릿속에 둥실둥실 쉬지도 않고 헤엄쳐 다닌 탓에, 그녀는 제대로 쉬질 못했다. 지금까지도 좀 멍할 정도로.

'사이비 종교에, 사람을 조종하는 정크칩이라니? 게다가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거절할 수가 없는 지시였기에, 그의 말대로 점심시간을 활용해 이곳을 찾아온 상황.

허나 아론은 이곳에서 기다리면 '목표'가 알아서 다가올 거라는 말만 했을 뿐, 더 자세한 이야기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그 탓에 아이리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타깃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빠르게 지쳐 가고 있었다.

그 피로가 얼굴에 드러난 것이겠지.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아?"

"아... 네... 저는 괘, 괜찮아요오...."

여전히 자신감이라고는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에 아이리로선 미유가 긴장한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무, 물론이죠오...."

아무래도 아닌 거 같은데.

이거, 나부터 자신감을 되찾지 않으면 될 일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리는 미유를 북돋아 주었다.

"괜찮아. 걱정할 거 없어."

걱정할 거 없어.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여태껏 폴른에서 개같이 구르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이딴 일에 겁먹을 필요도 없잖은가?

이렇게 바짝 쫄아 있어서야 이 애를 제대로 지켜 줄 수가 없다. 긴장을 풀고 온전한 컨디션을 되찾아야 한다.

"후우...."

심호흡을 몇 번 하니, 긴장이 조금 풀리며, 정신도 다소 맑아졌다.

아이리는 미유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래, 이제 정말 괜찮아."

그리고 그 순간.

마치 아이리가 긴장이 풀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타이밍에, 누군가가 그녀들을 향해 다가왔다.

[저기,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어요?]

LED 전광판이 달린 마스크.

그 위에 '(^_^).' 모양으로 웃는 이모티콘이 출력되고 있었고, 기계음으로 합성되어 만들어진 목소리에도 상냥함이 묻어 나왔다.

통칭 사일런스.

이번 작전의 '타깃'이었다.

'지, 진짜로 나타났잖아?'

아론이 말한 그대로였다.

점심시간에 사이버 공원 아무 곳에서나 죽치고 있으면 사일런스 쪽에서 먼저 다가올 거라고 했었다.

내심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가 말했던 그대로 상황이 일어나니 솔직히 조금 소름이 돋았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타깃이 나타났으니 할 일을 해야지.

연기에는 그다지 자신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 그 마스크."

[기억났어요? 그때는 바빠서 제대로 얘기를 못 나눴는데 여기서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요."

아이리는 슬쩍 웃었다.

그래, 이 정도면 사일런스도 의심하지 않을 거다.

연기에 자신이 없다고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폴른 출신들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이 늘게 되어 있었으니까.

[혹시 지금 시간 있어요? 얘기 좀 나누고 싶어서요.]

"죄송한데, 지금 친구랑 같이 시간 보내고 있어서요. 얘가 낯을 좀 많이 가려서...."

그러면서 미유를 슬쩍 감싸는 제스처를 취한다. 사실 거절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이럴 때는 원래 한 번 튕겨 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배웠다.

[그런가요? 저는 친구분도 함께해도 상관없을 거 같은데.]

"그래요? 넌 어떡할래?"

아이리는 태연하게 미유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미유와도 이미 입을 맞춰 둔 상태였기에, 그녀의 대답 역시 정해져 있었다.

"아, 아이리 씨가 괜찮다면...."

[하하, 괜찮아요. 겁먹지 마. 나 무서운 사람 아니야. 이 마스크도 사정이 있어서 쓰고 있을 뿐이에요.]

"그렇... 군요...."

미유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녀 역시 아론에게서 이 '사일런스'라는 인물이 아카데미에 사이버 마약을 유통하는 범인임을 전해 들었다.

사실은 이상한 마스크를 쓴 수상하고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이 정도면 미유로서는 혼신의 열연을 펼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좋아, 미유. 이제 내게 맡겨.'

미유가 애써 준 만큼, 이제 자신의 차례다. 그렇게 다짐하며 아이리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작전 시작이었다.

* * *

아론의 작전은 이러했다.

-작전의 목표는 사일런스 생포다.

상대는 정크칩을 학생들에게 판매한 범인임과 동시에 아시타 교의 계략에 휘말린 피해자이기도 하다, 라고 아론은 설명했다.

-놈들을 확실히 뿌리 뽑기 위해서는 사일런스라는 녀석부터 살려서 회유해야 한다.

-하지만 다짜고짜 제가 가서 정크칩을 어디서 사는 거냐고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상관없다. 저쪽에서 너희를 노리고 먼저 접근할 테니.

그렇게 사일런스가 먼저 다가오면 그때 친분을 다지는 것이 작전의 첫 단계.

다만 아론은 어째서 사일런스가 아이리와 미유를 노리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어쨌건 아론의 말마따나 사일런스는 먼저 접근했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작전 1단계는 성공했다.

아이리는 미유와 함께 사일런스의 제안에 응해 함께 시간을 보냈다. 평소 다른 학생들과 그다지 교류를 하지 않는 두 사람으로서는 나름 색다른 경험이었다.

특히나 사일런스는 대화에 능숙해서, 만약 그가 타깃만 아니었더라면 그와 친해질 수도 있었겠다 싶을 정도였다.

[...정말 대단하네. 아직 중간고사도 치르지 않았는데, 두 사람 다 벌써 특별장학생으로 선발됐다니.]

"솔직히 저도 아직 이유는 모르겠어요. 선배도 E섹터 출신이면 알잖아요? 여기 녀석들이 자기보다 낮은 구역 출신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그래, 알지. 알다마다.]

대화를 나누면서 두 사람과 사일런스는 이미 서로를 선배, 후배로 부를 정도로 친밀도를 쌓았다.

아이리의 반쯤 진심 어린 불평에 사일런스는 격하게 공감해 주었다.

"그래서 여전히 이해가 안 돼요. 그 황태자라는 인간이 언제 어떻게 저를 알고 먼저 다가온 건지. 아마 저희 오빠와 뭔가 연관된 게 아닐까 싶은데, 절대 말을 안 해 주더라고요."

[네 후원자가 수상하다는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네. 그래요."

이건 100% 진심이었다.

분명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긴 하지만, 도대체 목적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이리의 그러한 대답에 사일런스는 LED 판넬 아래... 그러니까 턱 부분에 손을 대며 고민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내가 황태자에 대해 이야기 들은 게 있는데 말이야. 아마 너와도 관련되어 있는 얘기일 거 같아.]

"네? 그게 뭔ㄷ...."

[여기서는 말 못 해. 너도 알잖아.]

그러면서 슬쩍 천장 쪽으로 턱짓을 하는 사일런스. 그곳에는 CCTV가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조금 민감한 이야기거든.]

"여기서는 안 된다는 건...."

아이리가 조금 기대하는 눈빛을 하자, 사일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내가 아는 곳이 있어. 아카데미 밖에. 거기서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을 거야.]

드디어 나왔다...!

사일런스는 자신이 아이리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아이리야말로 사일런스가 그런 제안을 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론이 그럴 것이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일런스는 먼저 너희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할 거다. 아마도 네 오빠 이야기나, 나에 대한 이야기를 떡밥으로 내밀겠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녀석이라면 분명... 아니, 나라면 분명 그랬을 테니까.

마치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그의 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이쯤 되니 신기하다는 수준을 넘어서 무서울 지경이었지만, 아이리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리지 않기 위해 침착함을 유지했다.

"언제쯤 가능하죠?"

[당장 오늘이라도 가능해. 가급적 두 사람이 함께 해 주면 좋을 거 같은데, 미유는 괜찮겠니?]

그러면서 미유를 돌아보는 사일런스.

이 역시 아론의 예언대로였다.

-아이리, 너뿐만이 아니라 미유까지 함께 데려가려고 할 거다. 그때 거절하지 말고 알겠다고 답하도록.

"알겠어요. 오늘 저녁에 외출 신청을 해 둘게요."

[그래. E섹터까지는 거리가 있으니까, 미리 이동 수단을 준비해 둘게. 시간에 늦지 않게 오도록 해.]

모임이 파하는 분위기가 되자, 사일런스는 슬쩍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벌써 점심시간이 끝나 가네. 너희도 수업 늦지 않게 돌아가는 게 좋겠다.]

"알겠어요. 간식 맛있었어요, 선배."

"아, 안녕히 가, 가세요오...."

사일런스는 그렇게 떠나갔고, 두 사람은 자리에 남아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아론에게 보고했다.

그것으로 작전 2단계는 마무리되었다.

* * *

그리고 저녁이 되었다.

아이리는 미유와 함께 사일런스가 마련한 승용차를 타고 E섹터 쪽으로 향했다. 아론은 이때를 대비해서도 미리 시나리오를 준비해 놓았다.

"[용케 외출 허락을 받았네?]"

"못 받았어요."

"[응?]"

"몰래 빠져나온 거예요."

사실 허가 자체는 바로 떨어졌다.

다만 안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뒤숭숭한 일이 벌어진 마당에, 외출 신청을 아무런 제지 없이 허가해 주면 오히려 의심스러워할 것이라는 게 아론의 설명.

차라리 아카데미가 난리가 나든 어떻든, 몰래 빠져나왔다고 둘러대는 게 차라리 설득력이 있을 거라고 했다.

"미유 도움으로 입구를 뚫었죠."

"[나중에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괜찮아요. 어떻게든 될 거예요."

그렇게 둘러대자 사일런스 역시 크게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차에서 내린 이후는 난개발로 복잡해진 E섹터의 골목길들을 지나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끝에는 지하실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이쪽이야.]

딱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곳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간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선택지가 없었다.

지하실로 내려가자 꽤 넓은 공간이 나왔는데, 여기저기 만다라 문양이나 차륜모양 같은 종교적 상징들이 널려 있었다.

중간중간 달린 주황빛의 가스등.

긴 복도를 중심으로, 다양한 용도의 방이 아치 형태의 문을 통해 이어져 있었다.

내부는 상당히 습도가 높았다.

벽 너머로 수로에서 물이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무래도 먼 옛날에 쓰던 하수도를 정비하여 만든 공간인 듯했다.

'여기가 놈들의 아지트일까?'

생각보다 내부가 넓었고, 사람의 수도 많았다. 이 정도면 작은 마을 하나는 된다고 할 만한 정도.

기도에 집중하는 신도들을 지나, 아이리와 미유는 가장 안쪽에 있는 넓은 방까지 다다랐다.

이런 곳을 대웅전이라고 하던가?

그곳에는 커다란 부처상이 여럿 모셔져 있었고, 앞에는 조악한 제단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역시 지하 수로였구나.'

입구부터 부처상까지는 일직선.

양쪽으로는 20미터 정도 내려가는 비탈길이 존재했는데, 아마 원래는 물이 고이도록 만들어 놓은, 저수지 역할을 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복도에서 들었던 물길이 이곳으로 모여, 수도 시스템에 따라 저 아래 이어진 커다란 통로들로 배출되는 거겠지.

'지하 수로를 돌아다닌 적은 많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네.'

묘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리번거리던 중, 아이리는 뒤늦게 제단 앞에서 염불을 외던 승려를 발견했다.

그도 아이리 일행의 기척을 느꼈는지, 염불을 멈추고는 뒤돌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양손을 모아 합장하며 허리를 숙이는 승려는 자신을 소개하기를.

"소승은 '아라야(阿羅耶).'라고 합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54화

G20 기업총회 이틀 차.

"...그래. 알겠다."

아이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작전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나는 탐탁잖은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기랄.'

내가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갑작스럽게 계획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건 내 지시대로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현재 아이리와 미유는 사일런스를 속여 미끼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조금 후면 본격적으로 '적'의 위치도 알 수 있을 테지.

'캐릭터를 통해 포인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직접 만나야 하니까.'

분명 조급해진 빙의자는 어떻게든 아이리나 미유와 안면을 트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과 빙의자가 조우하는 순간이 기회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스팅레이 본사 사병(社兵)들이 현장을 덮쳐 그 빌어먹을 빙의자 놈을 빠르게 제압한다.

그리고 나머지 인력들은 E섹터 곳곳에 주둔한 아시타 교 신도들을 깡그리 청소해 버릴 계획이었다.

그래, 그럴 계획이었다.

근데 갑자기 일이 꼬였다.

'작전 실행 직전에, 갑자기 요청 인력의 절반 이상을 줄여 버리다니...!'

내가 요청한 것은 종합 모듈출력 최소 Lv.70 이상의 고레벨 적응자와 증강자 병사들 도합 100명, 그리고 최소 장로급 위자드 3명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것은 중레벨 적응자 8명, 고레벨 증강자 32명, 마도사급 위자드 2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원래 지급되기로 했던 대(對)마녀용 장비들도 취소되었다.

'겨우 이걸로 어떡하라고?'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처음 계획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병력에 숨이 턱 막혀 올 지경이었다.

'나노머신' 대신 '사이버웨어 이식수술'을 통해 신체를 강화시킨 증강자 병사들은 보통 같은 레벨의 적응자보다 한 수 아래의 취급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모듈을 즉석에서 교체하며 다양한 환경과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적응자에 비해, 증강자들은 그 대응 능력이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고레벨' 증강자라고 해도 일부 상황을 제외하면 사실상 Lv.20~Lv.30 정도 아래의 적응자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제기랄, 망할 늙은이.'

누가 범인일지는 뻔하다.

황태자인 내 요청을 이렇게 묵살할 수 있는 인물은 한 명뿐이니까.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

뉴 발할라 시티의 황제.

내 아버지.

이 도시에서 편하게 살고 싶다면 절대로 거역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자, 원작의 최종 보스이기도 한 그 인물 말이다.

'보안부장이 직접 문제없다고 했던 걸 이렇게 갑자기 훼방 놓는 이유가 뭐야?'

분명 이번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했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내가 직접 현장에 나서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갑자기 일정을 변경해서 지금 당장 만나자니? 이래서야 그 초라한 병력만으로 토벌 작전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대체 무슨 꿍꿍이지?'

황제의 생각을 읽어 보려 했지만, 그 능구렁이 같은 속을 읽기란 쉽지 않다.

차라리 직접 만나서 설득하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수행원들의 안내를 받아 스팅레이 회장이 머무는 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제길. 미치도록 긴장되는군.'

비단 내 정신뿐만이 아니라, 육체의 에고 역시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도 자신이 만들어 낸 괴물의 힘을 경계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론 역시 아버지의 지배력을 두려워했다는 거겠지.

'이럴 때가 아닌데....'

마음이 초조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황제께서 직접 날 보자는데.

"이쪽입니다, 도련님."

"그래."

다시 한번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아버지의 수행원들을 따라 이동했다. 나는 그때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수행원들이 전부 적응자들이로군.'

그것도 상당히 고레벨, 고대체율의 적응자들이었다. 아마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내 목에 칼을 들이밀 녀석들이겠지.

회장의 방에 들어가기 전, 나는 수행원들의 손에 이것저것 보안검사를 마쳐야만 했다.

과연 이게 자기 아들을 맞이하는 분위기가 맞나 싶었지만, 이 역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래도 전투 모듈까지는 건들지 않는군. 나름 아들에 대한 신뢰의 표시라고 해야 하려나?'

전투 모듈을 전부 해제한다든가, 모듈 착용 상태까지 확인하는 식으로 내게 족쇄를 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 원래 모듈 상태를 아직 100% 복구하지는 못한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부분이었다. 뭐, 필사적으로 생각해 온 변명거리가 무용지물이 된 건 아쉽게 되었지만.

검사를 마치자 내 앞을 가로막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청자와 백자, 수묵화나 소나무 분재 등 동양풍으로 고급스럽게 꾸며진 공간 너머로 확 트인 도시의 전경이 보였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분주히 움직이는 대형 홀로그램 전광판, 노이즈 낀 TV 같은 색깔의 하늘, 끝이 보이지 않는 고층 빌딩 사이를 벌들처럼 떠다니는 비행선과 비행 자동차들.

그런 영혼을 빼앗겨 버릴 듯한 광경을, 창문에 바짝 붙어 내려다보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슬그머니 내 쪽으로 몸을 돌린다. 아니, 정확히는 휠체어를 돌렸다.

"왔느냐."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은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었다.

그에게 붙은 재계의 늙은 여우라는 별명은 어딘지 모르게 노익장을 떠올리게 만들곤 했으나, 그의 진짜 모습은 목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시체에 가까웠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알기론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은 이 도시가 세워질 때 이미 노년에 접어들 나이였다.

대충 계산해 보자면 못해도 200살 내외라는 거다. 원래라면 진즉에 세상을 뜨고도 남았을 몸을 각종 최첨단 노화방지 치료로 유지하고 있는 거니까.

"...아버지."

아버지란 단어의 울림이 이렇게나 어색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와 볼 안쪽에 닿는 이 소리의 떨림이 이리도 불쾌할 수가.

'정말로 콩가루 집안이구먼.'

나는 이 불쾌감이 아론 본연의 것임을 알고 그런 평가를 했다.

원작에서 아론과 드레이크 회장의 관계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으니 새롭게 확인하게 된 사실이었다.

하기야 나라도 이런 언데드와 구분조차 잘 되지 않는 인간을 아버지로 모시고 싶지는 않았다.

뭣보다 드레이크 스팅레이는 나를 직접 낳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스팅레이 그룹을 이끌어 갈 '철인'을 원했고, 자신의 유전자를 기반으로 실험실에서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만들어' 냈다.

그러니 어떤 의미로는 나를 포함하여 스팅레이 가(家)의 사람들끼리, 서로를 '아버지'나, '형님', '오라버니' 따위의 칭호로 부르는 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건강을 되찾았다고 들었다. 참으로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구나."

"아버지의 은혜 덕분입니다."

진심이라고는 1밀리그램도 담겨 있지 않은 의례적인 말이 서로 오갔다.

아론의 기억을 헤집어 봤지만 이 아버지란 인간... 아들이 죽어 가는 동안 한 번도 아들을 직접 찾은 적이 없었다.

"...그래.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언뜻 인자해 보이는 반응.

하지만 영혼이라고는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고, 드레이크 스팅레이는 창문 쪽으로 다시금 휠체어를 돌렸다.

"곁으로 오너라."

"...."

나는 스팅레이 회장의 지시를 따랐다.

그의 옆으로 다가가자 그가 대뜸 물었다.

"듣자 하니 지금 E섹터 쪽에서 묘한 일을 벌이고 있다더구나. '내' 병사들을 대동해서 말이지."

"역시 아버님께서 직접 병력 축소를 지시한 것입니까?"

"그랬다. 뭐가 문제더냐?"

"결정을 취소해 주십시오.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번 작전은 단순히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닌...."

"되었다. 적당히 해 두거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는 내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무시했다. 그러고는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이 광경을 말이다."

"...?"

일종의 시험일까.

솔직한 마음으로는 멋지다고 생각한다.

원래 세계에서는 매체를 통해서나 접할 수 있는 멋들어진 광경. 이제 내게 현실이 된 이곳에는 분명, 내가 아직 접하지 못한 것들이 잔뜩 있겠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과거의 기억이 샘솟는다. 자신의 비참함에 울부짖을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고통스런 경험들이.

이곳에 와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그러니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않는다.'

앞으로 이곳은 내 세계다.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었고, 원하는 것을 뭐든지 손에 넣을 자격을 얻게 되었다.

빼앗기지 않을 테다.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는다.

그렇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차분히 추스르며 담담히 대답한다.

"그냥 풍경일 뿐입니다."

이게 옳은 대답이리라.

스팅레이 회장에 대한 나의 이해도는 높지 않다. 괜한 모험을 해서 이 약아빠진 늙은이가 묘한 생각을 품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장 아론답다고 생각되는 대사를 선택했고, 정답을 확인하듯 스팅레이 회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한때 나와 같은 황금색으로 빛났을 눈동자는 이제 흐리멍덩한 노란빛으로 변해 있었다.

온갖 탐욕과 죄악으로 얼룩져 노년이 된 지금에는 생기를 잃어 가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일순 보았다.

잿더미 사이에서 황금을 찾아낸 것처럼, 스팅레이 회장의 눈에 묘한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나는 그렇게 물었지만, 스팅레이 회장은 답하지 않고 한참이나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자, 마침내 그의 고목처럼 갈라진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음... 한 가지만 묻자꾸나...."

스팅레이 회장의 강렬한 눈빛.

마치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뒤늦게 속으로 후회의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얘야, 너는 누구더냐?"

재계의 늙은 여우.

역시 이 남자와 만나기엔 너무 일렀다고.

* * *

아시타 교의 대웅전.

그곳에서 아이리와 미유를 맞이한 남자는 합장하며 인사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아이리 보살님, 미유 보살님. 저희 아시타의 품에 잘 오셨습니다."

"...."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 난다.

주황색 승려복을 입고 머리를 밀긴 했는데, 스님이라는 느낌보단 사기꾼이란 느낌이 더 많이 났다.

아이리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

"여긴 종교 시설이죠? 우린 딱히 당신들 종교에 가입하려고 온 건 아닌데."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러 오셨을 뿐이겠지요. 정확히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

진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단어 선정이었다.

"그럼 우릴 보자고 한 사람이 댁인 거겠죠? 그... 이름이 뭐라고요?"

"소승은 '아라야'라고 합니다."

"흠. 독특한 이름이네."

아이리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솔직히 땡중이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한다고 해도 의심부터 드는데? 우리 오빠에 대해 당신들이 어떻게 아는 거고?"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아이리 보살. 저희는 다만 속세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하여...."

"시끄럽고."

아이리가 말을 끊었다.

"소올~직히. 조금은 기대하고 왔거든? '그 사람'은 나한테 절대 우리 오빠에 대해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여서, 혹여나 여기서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었거든."

"호흡이 가빠졌습니다. 진정하시지요."

"난 이미 진정한 상태야. 당신네 꼬락서니들을 보고서 확 진정이 되더라구. 딱 봐도 그냥 딱 사이비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어."

철컥, 철컥!

아이리는 품에 숨겨 왔던 접이식 방패를 꺼내 전개했다. 이미 익숙해진 손동작은 누구보다도 신속했고, 미처 대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아이리는 전개한 방패를 밀쳐 바로 옆에 있던 사일런스부터 깔아뭉개듯 제압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온 '원격통신 차단용 칩'과 '범죄자용 행동 제한 칩'을 차례로 그의 목덜미 소켓에 꽂아 넣었다.

"후. 일단 이쪽은 됐고."

사일런스를 간단히 처리한 아이리는 뒤이어 권총을 꺼내어 아라야에게 겨눴다.

"댁들이 이상한 정크칩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조종한다는 걸 알고 왔어. 가만히 있으면 죽이진 않을 테니, 얌전히 항복해. 여긴 이미 포위됐거든."

조금 전 스팅레이 측으로부터 아이리에게 교전 오케이 사인이 들어왔다. 이제 거리낄 것이 없다.

"자. 뭐 해? 어서 무릎 꿇고 손 머리 위로 들어."

"이건 조금 놀랐군요. 아이리 보살, 당신이 그토록 사악한 스팅레이 기업에 가담했을 줄은 몰랐어요."

"조금 생각이 바뀔 계기가 있었거든."

"아무래도 상상 이상으로 아론 스팅레이가 명석한 인물이었던 듯하군요. 당신을 이렇게나 잘 길들였을 줄은 예상치 못했어요."

"닥쳐."

타앙!

아이리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딴 식으로 지껄이지 마. 길들이기는 누가 누굴? 내가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한 사람이야."

"길들여졌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겁니까? 안타깝게도 아론 스팅레이는 당신을 속이고 있어요. 당신을 충실한 종으로 만들기 위해 연기를 할 뿐, 그 본모습은...."

"사람 조종하는 위험한 칩을 만드는 사이비 땡중이 할 말인가?"

아이리는 으르렁대며 아라야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그는 합장하며 곤란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미 마구니가 눈을 가리고 귀를 먹게 만든 모양이군요. 그쪽 미유 보살의 생각도 마찬가지인가요? 아론 스팅레이는 믿을 만한 인물이라고?"

"아, 그쪽은 미유가 아니야."

"...뭐라고요?"

아라야의 놀란 표정.

아이리가 비웃듯 대답했다.

"네가 뭐라든 아론 스팅레이는 학생들을 매우 아끼는 사람이거든. 이런 위험한 곳에 비전투원이 오게 놔둘 리가 없지. 안 그래요, 마리아 씨?"

아이리의 그 말이 신호였는지, 미유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작은 키와 소심해 보이는 인상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어느새 거기에는 동양계의 미녀가 나타나 있었다.

마리아는 재빠르게 몸에 내장된 무기들을 꺼내어 아라야에게 겨눴다. 그 모습에 아라야는 이내 놀람을 가라앉히고 탄식했다.

"허. 어쩐지 이상하더군요. 포인트가 안 벌리더라니...."

"포인트?"

"뭐, 그거까진 알 필요 없습니다. 어쨌거나 이건 정말로 한 방 먹었네요. 이렇게까지 강단이 있는 상대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론 스팅레이."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 아라야.

도저히 총구를 눈앞에 둔 상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밝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저도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랍니다. 시작이 나빴던 만큼 더 필사적으로 준비하고 머리를 굴려야 했거든요."

"이봐. 허튼짓하지 마."

타앙!

아이리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아라야의 옆쪽 바닥에 총탄이 튀었다.

"내 사격 솜씨는 그다지 좋지 않아. 다음번엔 머리에 맞을지도 몰라."

그에 아라야가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뭐?"

"소승도 이런 때를 대비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55화

"얘야, 너는 누구더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

150살을 훨씬 넘긴 노인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총기 넘치는 눈빛에,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체 어떻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어떤 부분을 실수했기에 이 노인네에게 내 정체를 들키고 만 것일까?

'설마 이 노인네도 빙의자?'

아니, 그럴 리가.

만약 그랬다면 진즉에 경쟁자인 나를 죽이고도 남았을 터. 비슷한 이유로 아시타교의 짓일 가능성도 크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무언가 정체를 들킬 만한 다른 짓을 했다는 의미.

고민해 봤지만 짐작 가는 부분이 너무 많은 동시에, 또 하나도 없었다.

빙의 이후의 내 전체적인 행보가 아론답지 않기는 했지만, 언제나 주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완벽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스팅레이 회장에겐 통하지 않았을 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2세기 가까이 이 도시를 지배했던 황제가 단순히 돈만 굴릴 줄 아는 노인네였을까? 그럴 리가.

스팅레이라는 대제국을 만든 그의 통찰력. 내가 그것을 너무 간과한 거겠지.

혹은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사람의 감정을 캐치해 내는 과학 기술력을 갖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정체를 들켰으니 어떤 식으로든 대처를 해야 했다. 도망을 치든, 공격을 하든, 시치미를 떼든 말이다.

찰나의 순간 동안 정말로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도망친다?

과연 내가 여기서 도망친다고 한들 스팅레이 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그리고 도망치면 아카데미는? 아이리와 미유는? 사일런스는?

빙의 이후 고생하며 쌓아 온 관계가 단숨에 무너져 내린다. 절대 택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그럼 공격한다?

지금 내 스펙만 해도 전성기의 아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고레벨 적응자도 씹어 먹을 수 있는 수준이다.

종합 모듈 출력레벨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게임 체인저급 모듈을 2개나 장착하고 있고, 신체 스펙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뭣보다 스팅레이 회장 본인은 적응자가 아니었으니, 정말로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하나만으로 저 가느다랗고 주름진 목을 비틀어 버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떡한다는 말인가?

스팅레이 회장을 이 자리에서 죽이면, 나는 황제 살해범이 될 뿐이다.

그 이후엔 베네딕트나 칼리아가 차기 회장직을 꿀꺽하고는 나를 죽일 때까지 계속해서 암살단을 보낼 테지.

'애초에 이 노인네가 아무런 안전장치도 마련해 두지 않고 나를 일대일로 만났을 리도 없다.'

그 외의 이런저런 선택지를 따져 보았지만, 결국 현실적으로 내가 고를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 모든 생각의 과정을 5초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마친 후, 나는 계속 아론을 연기하기로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본래 아론 스팅레이처럼, 언제나 당당하고, 고고하고, 오만하게.

내게는 육체의 에고 역시 남아 있었으니 이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도 이런 식으로 아론과 가까웠던 인간들에게 내 정체를 들키지 않고 넘겨 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 방식이 통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

스팅레이 회장은 흐리멍덩한 연노란빛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움푹 파인 눈두덩이가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얘야."

무슨 말이 나올 것인가.

"시험해 봐도 되겠느냐?"

그 순간.

천장에서 다섯 개의 일렁거리는 형체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마치 공기로 이루어진 슬라임 같았다. 눈에 거의 보이지는 않았지만, 빛의 굴절을 통해 무언가가 그곳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정체를 깨달았다.

'스팅레이의 닌자(忍者)들이다...!'

이 세계의 원작 소설부터가 오리엔탈리즘의 강하게 받은 사이버펑크 장르였던 만큼, 기업이 전문적으로 길러 낸 전문 암살자들을 '닌자'라고 부르고는 했다.

5명의 닌자들은 내게 서서히 다가오며 서 은신상태를 해제했다.

내 [Lv.3 트라우마 스캐너]로도 간파하지 못했던 클로킹 모듈이 작동을 정지하며, 투명에 가까웠던 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은 옷, 얼굴이 보이지 않는 금속 마스크, 살벌한 붉은빛을 발산하는 초열(焦熱) 블레이드.

한 명은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사슬낫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고, 또 한 명은 양팔에서부터 커다란 칼날들이 사마귀처럼 뻗어 나와 있었다.

수리검을 든 녀석도 있었고, 단도를 든 녀석도 있었다.

각각 무기에서 특징적인 붉은색, 푸른색, 초록색, 보라색, 주황색 불꽃이 일렁거렸다.

'제기랄.'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내 연기가 스팅레이 회장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는 거겠지.

'씨발, 언젠가 한 번 보고 싶었던 놈들이긴 해도, 이런 식으론 아니었는데...!'

정말이지, 이 닌자부대의 디자인만큼은 장르 골수팬들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속으로 전율하며 사진을 잔뜩 찍어 뒀겠지.

하지만 지금 그럴 여유는 없었다.

나는 곧장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모듈 온라인, [구름거미]

모듈 온라인, [테크 블레이드].

양손에 검은 가죽장갑이 덧씌워지고, 내 왼손에 기다랗고 검붉은 몸체의 환도가 나타났다.

'여유 부릴 틈은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특화된 스팅레이의 닌자 부대를 상대로 방심했다간 순식간에 목이 달아나리라.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 한다. 가죽장갑과 실, 그리고 검의 전개가 완료되는 동시에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촤아아아악-!

눈에 보이지 않는 실들이 적들을 향해 칼날처럼 휘둘러졌다. 하지만 여태까지 만나 왔던 적들과 달리, 그들은 너무나도 능숙하게 그 실들을 막았다.

"쯧."

혀를 차고선 다시금 손가락을 튕긴다.

실들이 살아 있는 촉수처럼 그들의 목을 노리며 날아든다. 그러나, 닌자들은 내 공격을 가볍게 흘려내며 서서히 나와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몇 녀석이 클로킹 모듈을 전개함과 동시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검을 역수로 쥔 채 뒤쪽을 향해 칼날을 찔러 넣었다.

[크흙...!]

보라색 놈의 은신상태가 풀렸고, 내 검에 가슴을 꿰뚫린 상태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머리 위로 높게 들었던 검을 놓치며 축 늘어졌다.

'이럴 줄 알았다...!'

당연하지만 원작 소설에서도 이 닌자 부대가 등장한 적이 있었다.

주인공과 전투를 펼치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는데, 여러 명이 은신을 풀었다가 다시 은신하는 식으로 상대를 교란하는 방법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런 내 소설적 지식과 아론의 타고난 육체와 전투 센스, 그리고 [Lv.4 웨폰 레코그나이저] 모듈의 능력이 합쳐져 초장부터 한 명을 가볍게 탈락시킬 수 있었다.

"오호라...!"

내가 닌자들에게 집중하는 사이, 스팅레이 회장은 나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첫 수부터 부하가 하나 죽었는데도, 어째서인가 그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분명 그는 '시험'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싸움을 벌인 목적이 있다는 건데, 현재로서는 그 속내를 파악할 근거가 없었다.

단순히 아들의 몸을 빼앗은 날 죽이려는 게 아닌 걸까?

하지만 그에 대한 판단을 마치기도 전, 다른 닌자가 주황불꽃의 맨티스 블레이드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나는 첫 번째 닌자의 몸에 꽂혀 있던 칼날을 그대로 휘둘러 날아오는 칼날들을 막아 냈다.

까드드드득!

테크 블레이드의 칼날과 맨티스 블레이드의 칼날이 부딪치자 무서운 기세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검의 성능은 월등히 내가 앞서고 있었다.

처음에는 언뜻 힘이 비등비등한 듯했으나, 어느 순간, 내 칼날이 상대의 주황빛 칼날을 그대로 쪼개 버렸다.

까아아앙-!

상대의 칼날들이 썰려 나감과 동시에, 나는 오른손으로 [구름거미]의 실을 조종했다. 그 짧은 찰나에 사라진 다른 세 녀석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날아오던 초록불꽃의 수리검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미리 거미줄처럼 펼쳐두었던 실에 가로막혀 일제히 잘린 것이다.

한 차례 기습을 막아 냈다고 안심하는 것도 잠시, 난데없이 왼손의 검이 무언가를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

조금 전 무기를 잃은 주황색 녀석이 스스로 내 칼날에 몸을 쑤셔 넣은 것이다.

칼날이 놈의 옷과 피하장갑을 가볍게 뚫고, 근육과 내장을 헤집어 놓는 감각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덥석!

놈이 쿨럭 피를 토하며 내 팔을 잡는다. 녀석의 악력은 내장을 찔린 인간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강했다. 손아귀에 붙잡혀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길!'

1초?

아니, 0.25초 정도일까.

나는 순식간에 놈들의 의도를 파악해 냈고, 재빠르게 [구름거미]를 조종했다.

거미줄처럼 펼쳐두었던 실들로, 아직 바닥에 채 떨어지지도 않고 동강 난 채로 날아오던 수리검들을 한꺼번에 감쌌다.

실들이 녹색 불꽃의 수리검 조각들을 감싸며 순식간에 누에고치를 형성했고, 그 고치 안쪽에서 엄청난 기세로 화염이 솟구쳤다.

'역시 수리검은 폭탄이었나...!'

다행히 폭발은 고치에 감싸여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허나 아직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

소리 없는 기합과 함께.

또 다른 닌자 한 명이 내 머리 위로 뛰어내렸다. 놈의 양손에 푸른 불꽃을 뿜는 사슬낫이 그 굶주린 이빨을 뽐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전 수리검을 날린 것으로 보이는 초록색 녀석이 초록색 수리검들을 번뜩이며 등 뒤로 달려들었다.

'제길...!'

왼팔은 아직 주황색 놈에게 붙잡혀 있었고, [구름거미]의 실들을 고치 형태에서 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심지어 나머지 붉은색 초열블레이드를 들고 있던 닌자의 모습은 아예 보이질 않았다. 이 녀석에 대해서도 신경 써야 한다.

체크메이트.

이 이상 수가 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하고 마는 건가? 그런 절망감이 밀려들던 찰나.

-시험해 봐도 되겠느냐?

다시금 재생되는 목소리.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내 앞을 가로막은 닌자의 어깨 너머로, 스팅레이 회장의 히죽거리는 얼굴이 들어왔다.

그래, 어쩌면...!

"흐읍...!"

모듈 오프라인, [구름거미].

나는 내 주력 무기를 해제하고, 왼손의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체내의 모든 에너지를 팔과 다리, 그리고 모듈 출력에 쏟아부었다.

그에 맞추어 나를 붙잡은 녀석도 힘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손목을 조금씩 이리저리 비틀어 칼날로 녀석의 몸 안을 더욱 헤집었다.

근력은 아슬아슬하게 내가 위.

닿기만 해도 베이는 칼날이니 그리 많은 힘이 필요치도 않았다.

[끄윽...!]

놈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미약하게나마 상대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꼬챙이처럼 그 몸을 꽂은 채 앞으로 돌진했다.

목표는 스팅레이 회장.

바닥을 더욱 강하게 박차고, 순식간에 스팅레이 회장의 휠체어 앞까지 도달했다. 그대로 팔에 힘을 주어 칼날을 찔러 넣었다.

스스스스스슥!

마치 두부를 찌르듯이 칼날이 주황색 닌자의 몸을 더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이대로라면 스팅레이 회장의 머리도 함께 뚫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때.

계속 몸을 숨기고 있던 마지막 붉은 녀석이 스팅레이 회장의 앞에서 나타났다.

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 불꽃이 일렁이는 칼날로 동료의 등을 찔렀다. 그 너머에 있는 나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역시나.'

뻔히 보이는 방식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젖혔다. 고기 타는 냄새와 함께 초열 블레이드가 내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밀어붙였다.

그대로 주황색에 이어, 붉은색 녀석의 몸까지 꼬치처럼 차례로 꿰뚫는다. 그리고 인간꼬치의 마지막 재료는 스팅레이 회장의 이마가 될 터였다.

허나 그 순간.

그리고 스팅레이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만."

칼날 끝이 스팅레이 회장의 코앞에서 정확히 멈추었다.

동시에 내 목덜미를 노리던 사슬낫과 수리검의 움직임도 정지했다. 아마 0.5초만 더 늦었어도 내 목이 달아났겠지.

나는 회장을, 회장은 나를.

서로가 조금만 움직여도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먼저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빼며 [테크 블레이드] 모듈을 해제했다. 그에 따라 사슬낫과 수리검 역시 내 급소에서 거두어졌다.

뒤를 돌아보자 닌자들은 허리를 숙이며 어둠 속으로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

모듈을 해제함에 따라 환도가 공기 중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고, 거기에 꿰여 있던 닌자들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팅레이 회장은 휠체어를 움직여 내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나는 흐트러진 양복을 추스르며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런 내게, 스팅레이 회장은 말했다.

"쓸 만하구나."

"...감사합니다."

안도의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시험은 통과입니까?"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이로구나."

"다행이군요."

내 대답에 스팅레이 회장은 껄껄 웃고는 말했다.

"용케도 내 의도를 알아챘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정말로 우연이었다.

전투 중에 스팅레이 회장의 얼굴을 보는 순간, 위화감을 깨달았을 뿐이다.

'재계의 늙은 여우.'

스팅레이 회장은 계략에 능하고, 철두철미한 인물이다. 만약 그런 그가 내 정체를 알아채고 곧장 제거하려 했다면, 더욱 철저하게 계략에 빠뜨렸을 것이다.

'시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만에 하나의 위험이라도 없애기 위해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겠지.

그런 인물이 어째서 계속 남아서 싸움을 지켜보았는가? 그거야 당연히 시험해 보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럼 무엇을 시험해 보는가?

아들의 몸을 빼앗은 상대의 무엇을?

'정답은 후계자로서의 자격.'

그렇다면 어째서?

언젠가 원작에서 스팅레이 회장이 주인공을 향해 읊은 대사가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 도시를 지배하기 위해선 설령 부모라도 서슴없이 벨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주인공과 철저히 돈과 명예를 중시하는 스팅레이 회장의 이념이 대립하는 연출이었으나, 그게 내게 도움이 되었다.

'스팅레이 회장은 내 열망을 본 거야.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황제의 자리를 노릴 만한 패기가 있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지만 원래 그런 인물인 거다.

애초에 후계자랍시고 키운 자식들은 보면 전부 유전자 조작으로 실험실에서 태어난 놈들이 아닌가?

결국 스팅레이 회장에게 중요한 것.

그건 단순히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중에서도 황제로서의 '정신'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자격은....

"내가 너희 세 오누이를 '만들었을 때', 각각 무슨 의도를 담았는지 아느냐?"

"각각 '무력'과, '기술력'과, '인맥'이겠지요."

"잘 아는구나. 누가 알려 주더냐?"

"혼자 깨우쳤습니다."

A. Aaron.

아론 스팅레이는 무력의 상징이다.

스팅레이 그룹에는 조직을 지킬 압도적인 전투력, 위험이 닥쳐왔을 때 그것을 부술 원시적인 '힘'이 필요하다.

따라서 아론은 전투병기로서 키워졌다.

B. Benedict.

베네딕트 스팅레이는 기술의 상징이다.

스팅레이 그룹에게 부(富)를 벌어다 주는 것은 다양한 상품개발에 기반이 되는 '기술'이다.

따라서 베네딕트는 다른 형제들보다 기술자로서의 재능이 뛰어난 편이다.

C. Calia.

칼리아 스팅레이는 인맥의 상징이다.

스팅레이 그룹이 황가로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기업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리아는 타인과의 관계를 조율하고 사랑받는 데에 능하다. 아론 같은 소시오패스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본디 너의 가치는 '힘'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단력과 충분한 무력을 갖추고만 있다면, 네게도 도전한 자격은 충분하니라."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다."

스팅레이 회장은 즉답했다.

"어차피 내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

"200년 가까이 살아오며 온갖 것들을 접해 왔으나, 이런 일은 처음이구나. 대체 무슨 마법을 썼는고?"

"...."

"됐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왜인 줄 아느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

아론 스팅레이는 병에 걸렸었다.

바꿔 말하자면 그의 아이덴티티를 잃을 위험에 처했었고, 황제가 인정한 후계자 도전 자격을 잃기 직전이었다.

그러다 내가 빙의했다.

나는 아론의 병을 치유했고,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한 무력을 갖추었다. 앞으로 원작의 아론보다 훨씬 더 강해지는 것도 가능하겠지.

강한 힘.

회장이 내게 기대하는 건 하나뿐이다.

"필요한 건 확인했으니, 더는 간섭하지 않겠다. 할 수 있을 만큼 해 보거라."

그리고 스팅레이 회장은 세상에 선언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너는 이제부터 내 아들이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56화

"너는 이제부터 내 아들이다."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의 발언.

그 한마디에 줄곧 붙잡고 있던 긴장의 끈이 단번에 풀릴 뻔했다. 빙의 이후로 여태 나를 괴롭혀 왔던 가장 큰 위협이 사라졌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제 날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라면, 더는 빙의 사실을 들킬 염려 없이 마음껏 일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바꿔 말하자면 조금 더 느긋하게 이 세계를 즐기고, 캐릭터들을 성장시킬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니지. 아직 방심해서는 안 돼.'

그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이성이, 내 정신이 완전히 해이해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아직 방심해선 안 된다.'

속에 천 년 묵은 구미호를 키우는 스팅레이 회장이니만큼 단순한 호의로 내뱉은 말은 아닐 것이다.

현재의 내 전력은 '아론 스팅레이'의 전성기에 미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니까.

바꿔 말하자면 스팅레이 회장이 원하는 '무력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지는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이 순간에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아직 시험은 끝난 게 아니로군요."

"뭐라? 허허허!"

내 말에 스팅레이 회장은 잠시 놀라더니,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내 나를 돌아보며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녀석이 한결 낫구나."

"예?"

"내 아들 아론은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지나친 축복 덕에 좋은 머리로 깊게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한 게지."

"...."

"걱정 말거라. 칭찬이니라."

스팅레이 회장이 말을 이었다.

"요컨대 녀석은 배고팠던 적 없는 사자였다는 게지. 지금 너는 배를 곯아 본 사자인 게고."

"그렇습니까...."

나는 대답하면서 아론이라는 인물에 대해 내가 아는 바를 되짚어 보았다. 스팅레이 회장의 의중을 짐작해 보기 위해서였다.

세계관 최강의 무력.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신분과 재력.

황태자로서 갖춰야 할 교양은 갖췄으나, 기본적으로 성정이 오만하고 난폭했다.

그러다 보니 잔혹한 취향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는 했다.

그런 아들을 스팅레이 회장은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자신이 지닌 최고의 전투병기가, 제어하기 어려운 살인 충동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 실체를 알면서도 인적자원개발 재단의 이사장 자리를 준 이유는? 그가 원하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래, 그런 점이다."

내가 생각에 마침표를 찍기 전에, 스팅레이 회장이 말했다.

"네 말대로 아직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알겠습니다."

이 사람이 그리 말한다면, 그런 것이다.

완전히 방심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은 조금 숨 돌릴 틈 정도는 생겼다 볼 수 있겠지.

"음. 슬슬 시간이 되었구나."

이걸로 볼일은 끝났다는 듯이 스팅레이 회장이 휠체어를 돌렸다. 그러자 갑자기 팝업이 주르륵 뜨며 시야를 가렸다.

부재중 연락, 읽지 않은 메일.

전투에 신경 쓰느라 눈치채는 게 늦어졌는데, 아마 이 방에 통신이 차단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까딱하면 어디 도움도 요청하지 못하고 죽을 뻔했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는 한편, 새로이 도착한 메일의 내용을 몰래 확인해 보았다.

아시타 놈들과 관련된 상황 보고였는데, 나는 그 내용을 읽자마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토벌작전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슬슬 가 봐야 하지 않겠느냐?"

마지막까지 이렇게 나오다니.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건 상관없지만, 그룹의 전력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안 된다는 건가.

'개 같은 늙은이.'

제기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나 하다니. 마음 같아서야 뒤통수를 힘껏 까 버리고 싶지만... 어떻게든 참았다.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거라."

하여간 좋아할 수 없는 캐릭터다.

나는 자존심을 굽히고 그에게 허리를 숙여 예의를 갖추었고, 이내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왔다.

'드레이크 스팅레이....'

원작 소설의 최종 보스.

그만큼 절대 얕볼 수 없는 인물이자, 현재로서는 내가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나중엔 아닐 것이다.

...아니, 곧 아니게 될 것이다.

* * *

[토끼 팀. 시그널 재머(Signal Jammer) 준비 완료.]

[순록 팀. 지역 봉쇄 완료.]

[늑대 팀. 전원 진입 준비 완료.]

황태자의 직접 지시였다.

스팅레이 보안팀들은 E섹터 50-34번가, 일명 '큐브 거리'라고 불리는 환락가 인근 창고에 모여 작전을 진행했다.

중레벨 적응자 병사 8명.

고레벨 증강자 병사 32명.

마도사급 테크노 위자드 2명.

아론의 지시대로라면 원래 이보다 더 많은 인력을 대동했어야 하지만, 어째서인가 회장이 직접 작전 인력을 축소했다고 한다.

-VIP 전달사항으로는 마법사가 있을 거라지 않았어? 왜 대(對)마법 장비들이 안 보이는 거지?

-상부 승인이 갑자기 취소되었다는군.

-또 윗분들 사내 정치문제인가.

-아마 그렇겠지.

-시발, 개 같은 거. 이러다가 만약 정말 요술쟁이들 있으면 죽는 건 우리잖아.

보안부 병사들은 저들끼리 욕을 해 댔다.

마법사(Warlock)와 마녀(Witch).

테크 위자드(Tech Wizard)가 사이버 스페이스에 다이브할 수 있는 고능력의 해커들을 일컫는 말이라면, 이쪽은 '진짜' 마법을 다루는 인간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소설이나 매체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계약을 맺고서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부릴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손에서 불을 일으키거나 하늘에서 번개를 치게 만들고, 야생 동물 혹은 괴물들과 대화를 하거나 인간의 심장을 연금술의 재료로 삼는다.

말 그대로 중세시대에 사람들이 믿던 마녀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이 '마법사'와 '마녀'였다.

인간과 닮고 대화가 통하지만, 철저히 인외의 존재... 다시 말해 [신비]로 간주되는 이들이었다.

-에이, 설마 이런 곳에 정말 마법사가 있겠어? 듣자 하니 사이비 부처쟁이들 모여 있는 곳이라던데.

-어서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신비]들은 기본적으로 호흡하는 것만으로 미지의 에너지인 '마나'를 흩뿌려서 현실 왜곡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인체에는 일종의 방사능처럼 작용하여 세포를 붕괴시킨다.

따라서 격이 높은 [신비]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게 나노머신을 통해 마나에 면역이 생긴 적응자가 필요했다. 고레벨 증강자라도 따로 장비를 맞추지 않는 이상 [신비]를 상대로는 상당히 무력한 존재였으니까.

특히나 마법사나 마녀들은 마법을 사용하면서 마나를 대량으로 흩뿌리는 특성을 갖고 있다.

거기다 인간과 동급의 지성과 감정을 지니고 있으니, 그들을 사냥하기 위해선 그만큼 고레벨의 적응자 병사가 필수였다.

당연하지만 현재 이 현장의 병력으로는 마법사는커녕 조금 격이 높은 [신비]만 튀어나와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윗분들이 자기네들 사정에 따라서 장비와 인력을 못 내주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그렇게 병사들은 저들끼리 투덜거리며 명령을 기다렸고, 이내 사인이 떨어졌다.

[콜 사인 떨어졌다. 진입해!]

[늑대팀, 진입한다!]

각각 적응자 1명과 증강자 4명씩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팀이 대오를 갖춰 지하로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위자드의 맵리딩을 통해 지형을 빠르게 파악하고 순식간에 이동하는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지하실 곳곳에는 방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었고, 곳곳에 승려복과 일상복을 입은 아시타 교의 신도들이 모여 있었다.

총과 갑옷과 사이버웨어 등으로 단단히 무장한 병사들이 갑작스레 들이닥치자, 안쪽에 있던 신도들이 혼비백산하기 시작했다.

스팅레이 병사들은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무릎 꿇고, 손 머리 위로 들어!]

"허억! 다, 다, 당신들 누구요!"

"우, 우리는 여기서 기도하고 수행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다 입 닥쳐.]

사병들은 지휘부와 연락하여 신도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물었다.

[내부인원이 생각보다 많다. 무장 인력은 전혀 없는 듯하다.]

아시타 교의 기초적인 교리 중 하나가 '기술과의 단절'이었다.

신도 중엔 적응자나 증강자는커녕, 뉴 발할라 시티에서 살아가기 위한 기초적인 사이버웨어조차 제거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신도들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내버려 둬도 좋을 듯싶었으나, 지휘부의 판단은 달랐다.

[안쪽에 얼마나 있을지 모른다. 포로를 확보할 인력이 부족하니 후환을 남기지 마라.]

[라저.]

철컥.

병사들의 총구가 일제히 일반 신도들을 향했다. 신도들의 얼굴이 놀라 일그러지기도 전에, 총구가 불을 뿜었다.

타앙! 타아앙! 타다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금속의 비가 쏟아졌고, 차마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한 붉은색이 사방에 낭자했다.

순식간에 탄알집을 비워 낸 병사들은 재장전을 마친 후, 시체들을 총구와 발로 이리저리 건들며 확인 사살을 진행했다.

그들은 이동하며 보이는 족족 신도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미리 총성을 듣고 도망치거나 숨어도 소용없었다.

팀을 지원하는 테크 위자드들이 복잡한 내부를 속속들이 파헤쳐 병사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고레벨 군용 스캐너로 무장한 병사들은 숨은 신도들까지 샅샅이 찾아내어 처리했다.

[클리어. 안쪽으로 나아가겠다.]

마침내 생존자 제로, 도주자 제로라는 확인을 받고서야, 그들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이 신전 더 깊은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때.

쿠구구구구-!

알 수 없는 진동.

그와 동시에 외부에서 스캐너를 확인하던 테크 위자드가 통신을 해 왔다.

[정지. 늑대팀 후방 50미터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그게 무슨 소린가?]

[스캐너에 움직임이 잡힌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겠다.]

그럴 리가.

분명 숨은 녀석들까지 깡그리 찾아내서 처리하고 왔을 텐데? 혹시 비밀의 방 같은 거라도 있었던 걸까?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 병사들은 조심스레 진행 방향을 틀었다. 그들은 빈틈없이 사방을 경계하며 나아갔고....

"끄어어어...!"

이내 발견했다.

기괴하게 움직이는 무언가.

사람의 형체를 닮은 그것은 틀림없이, 조금 전 병사들이 쏘아 죽였던 신도들이었다.

시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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