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흑막 시점 43화
어두운 뒷골목.
저 멀리 네온사인 광고판들의 불빛이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좁은 골목길.
빗줄기가 힘없이 바닥을 두드렸고, 옷깃에 배인 안티레인 특유의 약품 냄새가 정신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피 냄새.
과연 이 현실에 존재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눅진하고 진한 피 냄새가 뒤통수를 타고 코로 흘러들어왔다.
그제야 깨닫는다.
아, 나는 도망치고 있던 것이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달린 것일까.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끔찍한 탈력감과 피로감이 쇠사슬처럼 팔다리를 옭아맨다.
뒤늦게 배가 미친 듯이 뜨겁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붉은 액체가 비에 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어두운 기운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또각또각.
낮은 구두소리가 송곳으로 찌르듯이 고막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도망쳐야 해...!'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동물로서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 강제로 몸을 움직인다. 그러나 그런 속도로는 '놈'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정신을 차렸을 때, 그자는 이미 등 뒤까지 도달해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무심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 순간 보이는 것은.
먹잇감을 바라보는 짐승의 노란 눈.
"아, 아아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 * *
"[크허어어억-!]"
"크하하하! 어떠냐? 끝내주지?"
그는 오랫동안 호흡을 참은 사람처럼 숨을 토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에는 턱과 코에 강철 프레임을 박아 넣은 남자가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사일런스는 소켓에서 칩을 제거하여 손에 쥐었다. 불법 SS칩, 일명 정크칩이라 불리는 것들 중에서도 독특한 생김새를 지닌 물건이었다.
하얀색 몸체에 붉은색 삼각형.
안쪽에는 붉은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그는 그 칩을 냅다 집어던진 후, 중지를 들어 보였다. 직후 그가 쓴 LED 마스크에 화난 얼굴의 이모티콘이 떠오르며 합성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닥쳐. 내가 찾던 건 2편이라고 했잖아. 1편이 아니라. 씨발.]"
"거 새끼, 까다롭네. 네가 전에 굳이 2편이 아니더라도 괜찮으니 더 '원본'에 가까운 거면 된다고 했잖냐."
"[조까. 저번 거랑 다른 것도 없잖아.]"
이 정크칩은 이전에 봤던 같은 것보다 더 속이 울렁거린다. 빌어먹을 제작자가 감정 편집을 자극적으로만 해 놓은 탓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칩인 건지....
"[우웨에에에엑!]"
결국 참지 못하고 한바탕 게워내고 말았다. 정크칩 중간도매상이 인상을 찌푸리며 "에헤이!" 소리를 냈다.
사일런스가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제기랄. 이 칩, 대체 뭔 짓을 해 놨길래 이 지랄이야?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고!]"
"엥, 이상하다. 그 사람 말로는 너한테 주면 틀림없이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누가?]"
"있어. 거기까진 말하기 좀 그렇고."
"[뭐? 이 새끼가.]"
철컥.
사일런스가 총구를 들이밀자 정크칩 상인은 손을 번쩍 들며 항복 의사를 표했다.
"아, 아니라니깐?! 좀 진정해!"
"[뭐가 아니야, 씨발 새끼야. 2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네 매출 올려 줬어. 수익 비율도 네가 반 이상 가져가게 해줬지. 그리고 거기서 내가 바란 건 딱 하나였어.]"
범인에 대한 복수.
자신의 죽은 연인의 기억이 담긴 정크칩을 찾아 범인을 밝혀내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한참 전에 죽은 나연이의 기억이 아직도 이딴 식으로 유통되고 있어. 아직 원본을 지닌 녀석이 어딘가 있다는 거야.]"
"그, 그거야 모르지. 정크칩은 한 번 만들어지면 같은 내용이 무제한으로 변형되거나 복제되어서 풀리니...."
"[아니? 적어도 너는 알아야지. 씨발, 2년 동안 함께 일했으면 내 부탁도 들어줘야지. 내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있었으면 오늘도 이딴 걸 들고 오지 않았겠지. 안 그래?]"
"자,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다,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우리 이러지 말고, 응?"
"[내 맘 바뀌기 전에 설명해.]"
사일런스는 총구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정크칩 상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서는 설명했다.
"아, 아니. 진짜로 나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단 말이야. 그거 2편 찾으려고 조금이라도 정보 아는 놈들은 죄다 찾아다녔어."
"[그래서?]"
"근데 이 새끼 뭔가 좀 알 것 같다~ 하는 것들은 죄다 2편 얘기만 꺼내면 싹 바뀐다니까? 좀 이상하지 않냐? 마치 누군가 협박한 것처럼."
"[그건 네 생각이겠지.]"
"그, 그뿐만이 아냐! 내가 계속 그걸 찾아다닌다고 소문이 나서 그런가, 최근에 이상한 일도 생겼다고!"
"[이상한 일?]"
"얼마 전에 내가 물건들에 문제 생겨서 못 준다고 했던 적 있지? 그때는 그냥 내가 보관하다가 실수로 망가졌구나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협박이었을 수도 있다 싶어."
"...."
협박이라.
되는대로 지껄이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현실감이 느껴지는 설명이었다. 뭣보다 이렇게나 계속 찾아다니는데 원본이 발견되지 않는 것도 좀 이상하고.
"[그러니까, 누군가 2편이 풀리기를 원치 않는다?]"
"그, 그래! 그거야!"
정크칩 상인은,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이건 내 추측인데, 높은 확률로 기업 새끼들이랑 연관된 게 아닐까?"
"[근거는?]"
"이 도시에서 이렇게 넓은 범위에 걸쳐서 입막음할 수 있는 게 기업 놈들 말고 있냐?"
"[과연....]"
기업한테 거스르는 놈은 죽는다.
그것이 이 바닥의 상식.
그렇다면 저렇게 다들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된다.
"최, 최근에는 지금 본 1편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잘 구하기 힘들어. 그것도 간신히 구해 온 거라고."
"[어디서?]"
"그것까진 말 못 해. 아마 '그쪽'에선 널 이미 알고 있는 거 같더라고. 그 칩도, 그쪽이 너를 직접 짚어서 '사일런스에게 보여 줘라. 기뻐할 거다'라고 말한 걸 듣고 가져온 거야."
"[그래서 2편이라고 생각한 거야?]"
"내용물이야 나도 모르니까...."
하기야 상인들 중에서도 직접 정크칩을 쓰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위험성을 알고 손도 안 대는 녀석이 있다.
지금 눈앞의 상인은 후자였다.
"아, 아무튼! 이렇게 된 거 내가 '그쪽'하고 조금 더 커넥션을 넓혀 볼게. 네 얘기도 중간중간 섞으면서 말이야. 대신 너도...."
"[더 많은 돈과 신용이 필요하단 거지?]"
"그래! 나도 너도 이 바닥에 머리 들이민 지 겨우 2년일 뿐이야. 스트리트 갱단이었으면 이제 간신히 중요한 일을 맡기 시작할 시기지."
"[쓸데없는 비유는 됐어.]"
사일런스는 혀를 찼다.
"[요컨대 더 많이 팔아달라는 거잖아.]"
"이그젝틀리(Exactly)! 그쪽에서도 가급적이면 아카데미 쪽에 물건이 좀 더 풀리길 원하는 것 같더라고."
"[어째서?]"
"그야 나는 모르지. 기업 새끼들한테 척진 인간이 한둘인가?"
"[그건 그렇지.]"
이 바닥에서 기업 물 안 받아먹은 놈이 없고, 기업한테 뒤통수 안 맞아본 놈이 없다.
기업을 싫어하는 놈 중에는 그들의 사병 육성소인 아카데미도 망가뜨려 버리고 싶은 이들도 있으리라.
"솔직히 아카데미는 기업을 위한 부화장일 뿐이잖아! 거 약 좀 친다고 해서 슬퍼할 새끼 없을걸. 그냥 팍팍 팔아 버려!"
"[그게 쉬운 줄 아나. 아카데미가 어떤 곳인데.]"
자기네 소중한 인재들한테 정크칩 팔아서 망가뜨리는 꼴을 기업들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겠냐고.
대다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데다가,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유통 난이도는 극상이다.
뭐, 그만큼 비싸게 팔 수 있다는 건 장점이긴 하지만.
"그런 곳에서 2년 동안 꼬리 한 번 안 밟히고 바가지 씌워서 잘 팔아온 게 너 아니냐? 믿고 있으니까 좀 부탁하자~."
"[에휴.]"
사일런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었다.
그러나, 이제야 조금씩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 듯했다.
범인은 기업 관계자.
어쩌면 매우 높은 신분의 인물.
'조금만 기다려, 나연아.'
곧 널 죽인 녀석을 찾아내서.
똑같은 식으로 죽여 버릴 테니까.
* * *
"영입에 실패했다니, 어째서...."
"모른다."
"사일런스한테 뭐라고 하셨길래요?"
"특별 장학생이 되는 조건으로 '연인 살해범 찾기에 힘을 보태 주겠다'라고 말했다. 그 녀석의 목표는 연인의 복수이니."
"그랬는데도 실패했다고요?"
"그래."
벌써 세 번째 반복해서 말했다.
어쨌든 간에 사일런스는 내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고, 나는 그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실패했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딱히 실수를 저지른 것도 아니다.
사일런스란 캐릭터에 대해 딱히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설마 저희랑 같은 빙의자일까요?"
"사일런스 본인이? 아니,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 같군."
"어째서죠?"
"아카데미에 온 이후로 계속 그 녀석에게 감시를 붙여 두었으니까. 전혀 이상한 낌새는 발견되지 않았다."
아카데미 수업 중이라든가.
주말마다 외출해서 몰래 정크칩 상인을 만나고 물건을 들여오는 모습이라든가.
정확하게 원작의 사일런스 그 자체였다. 녀석이 빙의자였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 1부 1막에서 어떻게든 미유나 아이리에게 접촉하려고 했겠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신분이니까.
"녀석이 빙의자일 가능성보다는, 나를 포함한 빙의자들이 일으킨 나비효과일 가능성이 크다. 혹은 다른 빙의자가 접촉했을 가능성도 있고. 일단은 정보가 더 필요하다."
"그, 그렇군요...."
"그리고 아까 대화할 때 반응을 보면 딱히 내가 범인인 걸 안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점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군."
"그렇... 네? 잠깐만요, 범인이라뇨?"
시엘은 이건 또 뭔 소리를 하는 거냐,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내 쪽이었다.
"사일런스가 복수하려는 대상 말이다. 그 범인이 아론 스팅레이, 다시 말해 나잖나."
"당신이 죽였어요?!"
"시끄럽다. 목소리 낮춰라."
나는 시엘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녀석의 반응을 봐선 아무래도 몰랐던 모양이다.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잖나. 사일런스의 연인을 죽인 범인은 아론 스팅레이다. 물론 내가 빙의하기 이전의 아론이지."
"그런 묘사는 소설에 없었는데...."
"있었다. 1부 4막에서 주인공과 싸움 도중 사망한 아론 스팅레이의 시체를 보고 사일런스가 묘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나? 복수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어떻게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들으니 그런 묘사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근데 저는 그냥 '힘든 싸움이었구나' 하고 감상에 젖은 걸로만 보였는데요."
"쯧."
네 소설 이해도가 딱 그 정도니까 장려상밖에 못 받은 거지.
물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녀석에게 그런 쪽의 능력을 기대한 건 아니었으니까.
"어쨌건 사일런스가 찾는 살해범은 나다. 그리고 녀석이 내 휘하에 들어오는 걸 거절한 이상, 사건의 진상을 알아낼 가능성도 커졌지."
원래는 내 밑에 두고 한동안 정보를 통제하면서 다룰 예정이었는데, 실패했으니 어쩔 수 없다.
조금 거친 방식으로라도 녀석을 영입하는 수밖에.
내 말에 시엘이 물었다.
"그 거친 방식이 뭔데요?"
"정크칩이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녀석은 아카데미에 정크칩을 유통하고 있다. 그걸 빌미로 협박을 할 생각이다. 특별 장학생이 되면 죄를 없애 주겠다고."
"와...."
시엘이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일런스에겐 좀 미안하게 되었지만,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 때문에 녀석의 원수가 되는 건 사양이다.
다른 빙의자들 때문에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기도 하고. 일단은 녀석을 특별장학생으로 만든 뒤, 시간을 벌면서 가짜 범인을 준비한다든가 해야겠지.
"그럼 어째서 제가 정크칩을 유통해야 하는 거죠? 그냥 다시 한번 만나서 바로 본론을 꺼내면 되잖아요."
"증거가 없다."
"아."
사일런스는 철두철미한 녀석이다.
녀석에게 추적자를 붙여놨음에도 녀석이 정크칩을 유통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손에 넣을 수 없었다.
물론 스팅레이 재단의 힘을 이용하면 증거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지만, 그러면 사일런스가 회유되기는커녕 내게 반감만 품게 되겠지.
내 궁극적인 목표는 녀석의 파멸이 아니다.
녀석을 앞으로 시나리오를 진행하며 다가올 다양한 위협을 헤쳐나가는 데에 도움이 될 훌륭한 동반자로 성장시키는 거다.
"그래서 다시 원점이다. 정크칩."
그래, 정크칩이다.
내가 처음에 시엘에게 부탁했던 것은 SS칩, 정확히는 정크칩을 아카데미에 유통해 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아카데미는 작은 시장이다.
현재는 사일런스가 완전히 독점하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 사업에 훼방을 놓으면 어떻게든 반응을 보이겠지.
"그렇게 사일런스 녀석이 네게 먼저 접촉하면, 너는 녀석이 자신의 범죄를 직접 털어놓게 유도하는 거다. 그리고 그때 내가 나서는 거다."
여태껏 불법 SS칩을 팔아온 것에 대한 죄를 묻어주는 대신, 스팅레이 특별 장학생이 되도록 협상하면 된다. 아이리 때와 비슷한 방식이다.
덤으로 다시 한번 범인을 찾아내는 걸 도와주겠다, 같은 얘길 덧붙여서 구슬리면 충분히 설득되겠지.
"이상이 내 계획이다. 질문은?"
"다 좋은데... 두 가지 걸리는 점이 있는데요."
"말해 봐라."
"그 계획대로라면 학생들한테 사이버마약을 팔게 되는데, 조금 그렇지 않나요?"
"뭐가 그렇다는 거지?"
"엑."
내 즉답에 시엘은 질색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어차피 내가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해도 사일런스가 판 정크칩이 학생들 사이에 유통될 텐데.
오히려 내가 개입하면서 판매되는 정크칩의 종류를 조절할 수 있는 게 학생들에게도 나은 일이다.
내 최애들이 고통받는 일도 아니고.
내가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시엘은 그 다음 이유로 넘어갔다.
"뭐, 일단 알겠어요. 그 점은 일단 넘어가고,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는데요."
"또 뭐지?"
"제가 정크칩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인데요...."
"그걸 알아내는 건 네 역할이다."
"네에?!"
내 대답에 다시 한번 시엘이 경악했다.
하지만 나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이건 일종의 시험이다. 설마 그 정도도 못하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시엘이 빙의자가 아니었다면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겠다만, 안 그래도 바쁜 상황에서 남는 손도 있는데 굳이?
시엘을 살려 두기로 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보호만 할 생각은 없다.
이 녀석도 제 몫을 하긴 해야지.
"하, 하지만...."
"폴른 구역의 안드로이드들도 정크칩을 종종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지. 안드로이드들은 정크칩을 시용(試用)해도 사람처럼 부작용이 없으니, 어떻게 보면 판매자로서 가장 안성맞춤이다."
"그건 그렇긴 한데요...."
"정크칩 초기 구매자금과 아카데미 외부 출입 권한 정도는 챙겨 주마.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음?! 여, 여기서 나가게 해주시는 건가요?"
"싫다면 없던 얘기로 하지."
"아뇨! 할게요!"
시엘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여기서 지긋지긋한 빨래만 하는 건 질렸어요! 할게요! 하게 해주세요!"
"좋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안드로이드인 탓에 어지간히 잡일에 시달렸던 모양.
나는 그러면서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다만 밖에 나갈 수 있게 됐다고 해서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지금쯤 바깥에서 네 몸에 추적기와 원격폭파기능을 심고 있을 테니."
"히, 히익...."
"설명은 이상이다. 한 달을 주지."
"아, 알겠습니다. 근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말이지?"
"만약에 제가 약속을 어기고 도망치려고 한다면 어떡하시려고요?"
그 말을 꺼낸 시점부터 넌 날 배신할 생각이 없다는 거 아니겠냐.
그렇게 대답해 줄 수도 있었지만, 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해 봐라."
의미심장한 웃음은 덤이었다.
"그 결과를 나도 보고 싶군."
"...절대 충성할게요. 믿어 주세요."
협박이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공포에 질린 눈이 되었다. 아마 몸이 있었다면 바로 납작 엎드린 자세를 취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44화
타이탄 습격 사건으로부터 시간이 흘러 월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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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생 공지 사항]
[정크칩(불법 SS칩) 특별 단속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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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날아온 메일에 아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SS칩?"
SS칩이라면 분명 타인의 기억과 감정을, 그 사람이 된 것처럼 완벽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술이 아니던가.
그중에서도 정크칩이라 함은 극도로 자극적인 기억들... 예를 들어 '죽는 순간의 기억'이나 '마약에 취한 기억', '[신비]에게 홀린 이의 기억' 따위를 담은 것들을 말했다.
타인의 기억을 체험하는 것뿐이지만 지나친 자극성 때문에 체험자에게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때문에 뉴 발할라 시티 정부에서는 이런 불법 SS칩이 유통되는 것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지만....
'사실 유명무실한 법이란 말이지....'
아이리가 E섹터와 폴른을 넘나들며 생계를 이어 가던 시절, 그녀의 지인 중에 정크칩으로 용돈벌이를 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말로는, 대놓고 길거리에서 정크칩을 파는데도 경찰이 딱히 단속을 안 하더란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정크칩 불법 아니냐고? 야, 이거 이 도시에서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 찾기 힘들걸? 애초에 이런 거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기 A섹터 높으신 분들인데.
고위공직자나 유명인들도 다 몰래몰래 정크칩을 즐긴다고 한다. 더욱 위험하고 자극적인 칩을 찾기 위해 거액을 갖다 바친다고.
-이 바닥에서 정크칩이랑 안 얽힌 인간 없어. 경찰도 마찬가지고. 함부로 단속하면 줄줄이 다 잡혀 들어갈 텐데, 누가 열심히 잡아넣겠어?
그러면서 아이리에게도 '돈방석에 앉고 싶으면 도와주겠다.'며 사업에 참가해 보라고 권유했다.
'뭐, 거절했지만.'
당시 피터 오빠가 정크칩에 손대는 걸 절대 반대했거니와, 며칠 후에 그 지인이 죽으면서 없던 얘기가 되어 버렸다.
사인은 고자극 정크칩 부작용으로 인한 뇌 손상이었던가.
그 이후로도 정크칩 때문에 망가진 사람을 여럿 봐 왔기에 그쪽과는 절대 연관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근데 아카데미 녀석들도 정크칩을?'
아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카데미 학생들은 기업을 위해 키워지는 인간병기잖은가?
기업의 총애를 받으려고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는 녀석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겠지.'
그러면서 아이리는 메일창을 닫고, 마침 도착한 학생용 엘리베이터 문 쪽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띠링,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몸을 실으려 할 때.
안쪽에서 누군가가 갑작스레 나타나는 바람에 몸이 살짝 부딪쳤다.
"아, 죄송...."
아이리는 사과하며 상대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조금 놀라고 말았다.
'마스크?'
얼굴을 LED판넬이 달린 마스크로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뭔가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게다가 어깨를 중간중간 미세하게 떠는 모습. 그걸 보자마자 아이리의 머릿속에, 이전에 보았던 정크칩 중독자의 이미지가 확 살아났다.
'이 사람....'
아이리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아. 이 사람, 정크칩 중독자구나.
"멋진 마스크네요."
아이리는 상대에게 구태여 말을 걸었다. 정크칩 단속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굴러 온 호박을 놓치는 것도 아까웠다.
'분명 공지에 신고자에겐 포상이 있다고 했었고. 아카데미 내에 사이버 약쟁이가 늘어나는 것도 별로고.'
그런 속내를 숨긴 아이리의 말에, 상대의 마스크에 '{^_^}' 모양의 웃는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동시에 기계로 합성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마워요.]"
"저도 하나 갖고 싶은데, 어디서 구할 수 있죠?"
"[글쎄요. 파는 게 아니라서.]"
"자작인가요? 잘 만드셨네요."
아이리는 엘리베이터를 떠나보내고 그를 계속 붙잡았다. 수상함을 감지한 것인지, 상대는 자리를 얼른 벗어나려 했다.
"[죄송. 제가 좀 바빠서.]"
"길게 붙잡을 생각은 없어요. 그냥...."
그때였다.
아이리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아, 거기서 뭐 해 '사일런스'! 다들 너 기다리고 있다!"
"[미안. 지금 간다.]"
친구인 모양이었다.
사일런스라 불린 마스크의 남자는 아이리에게 살짝 고개를 까딱이며 사과했다.
"[그럼 실례.]"
그러면서 떠나가는 사일런스.
허망하게 끝나 버린 조우였으나, 아이리는 원하는 걸 이미 손에 넣었다. 그녀는 지난번 아론이 미유에게 SS칩에 관해 물어봤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일런스라고 했지?'
미안하지만 포상금이 되어 줘야겠다.
* * *
아카데미 종합 전투훈련장.
"...라는 일이 있었어요."
오랜만에 불러내자마자 대뜸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아이리.
본인은 전혀 자각이 없겠지만, 그 표정이 마치 사냥감 포획에 성공해 온 강아지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아직은 늠름하고 멋있다기보다는 귀여운 느낌이 훨씬 더 강했다.
'귀랑 꼬리를 달아 놓으면 딱이겠구만.'
상상으로 아이리의 얼굴에 귀를 겹쳐 보면서 흐뭇해하고 있자니, 아이리가 말을 이었다.
"그 '사일런스'라는 사람을 조사해 보면 틀림없이 뭔가 나올 거예요."
"그런가."
그야 나오겠지.
내가 권력을 이용해서 정크칩 특별 단속 기간을 선포한 이유가 그 녀석을 끌어내기 위함이었으니까.
'근데 세상에 이런 경우가 다 있군.'
아이리가 사일런스를 벌써 만나게 된 건 상정 외였다. 물론 딱히 내 계획에 영향을 줄 만한 사건은 아니지만.
완벽히 우연에 의한 조우.
이렇게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는 아카데미건만 새삼 좁은 세상이라고 느껴졌다.
또 사일런스를 보자마자 정크칩 중독자라는 걸 알아본 아이리의 직감도 놀라웠고.
"...그래. 나중에 조치하마."
"포상은 있는 거죠?"
"네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지."
일단은 그렇게 둘러대기로 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 뿐이었다.
조만간 사일런스를 장학생으로 포섭할 계획인데, 그에게 범죄자 낙인을 씌울 수는 없잖은가.
'애초에 지금 시점에서 녀석을 조사해 본다고 뭔가 나오지도 않을 테지.'
사일런스는 지난 2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사업을 벌여 왔던 놈이다.
그만큼 증거 인멸에는 철저했다는 뜻이다.
지금 갑자기 찾아가서 '다 알아! 순순히 잡히기 싫으면 특별장학생 서류에 사인해!' 하라고 해 봤자 통할 리가 없다.
오히려 사일런스 녀석은 '제가 범죄자라고요? 증거 있어요?'라며 당당하게 나오겠지.
'그러니 녀석이 꼬리를 드러내길 기다려야 한다.'
아카데미에 불법 정크칩이 퍼지는 일은 1부 3막 안드로이드 반란 사건과도 어느 정도 이어진다.
고로, 나는 충분히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동안에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 하니.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아이리. 지금 네가 신경 써야 할 건 그게 아닐 터인데."
"네?"
"조만간 중간고사지 않나."
"아하, 물론 준비하고 있어요."
오호라.
아직 중간고사 기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음에도, 아이리는 벌써부터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얘는 아직 손을 조금 더 거쳐야 한다.
나는 품속에서 홀로그램 장치를 꺼내어 허공에 출력했다.
한 차례 그것들을 읽어본 후, 종이 다발처럼 손으로 붙잡아 아이리에게 보이도록 흔들었다.
"하지만 보고서를 보니, 네 수업 실적이 영 좋지 않더군. 대다수 이론 수업에서 성취도가 평균 이하였다."
"그, 그건 처음 듣는 내용이 많으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까...."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걸로 만족할 것인가? 실습 과목들도 마찬가지다. 그만한 수준의 퓨어 스펙을 들고 어째서 이 정도밖에 못 하는 거지?"
"윽...."
아이리가 슬쩍 눈을 피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눈치.
뭐, 하기야 나로서도 이미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먹은 애한테 잔소리하는 것도 영 내키지 않는다.
그 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고 책상에 앉으면 귀신같이 엄마가 들어와서 '공부 안 하니?'라고 묻는 바람에 공부하기 싫어지는 느낌.
나 역시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너무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다.
'그러다 완전히 삐뚤어지면 안 되지. 줄타기를 잘해야 해.'
문득 머릿속에 이미지가 스쳐 간다.
퀭한 눈으로 게임에 빠진 아이리와, 옆에 자빠져서 '후원자도 사람이야, 사람!'하고 절규하는 나의 모습이.
물론 그런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테지, 사실 내가 이러는 것도 혼자 의욕이 앞서서 이것저것 익히며 달려가다가 이상한 습관이 들까 걱정되어서였다.
게다가 현재의 성취도가 낮은 것도 스펙이나 의욕 부족 때문은 아니었다.
자꾸 감에 따라 움직이려고 하는 습관이 있어서, 팀워크보단 개인주의 성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지.
아직 '야생의 감'은 살아 있지만, 인간과 함께하는 '사냥법'은 아직 익히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살아남는 방법'보다 '사냥하는 방법'을 몸에 익혀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것도 [정석]으로 말이지.'
이미 지난 성적은 지난 것.
아이리는 아직 원석 그 자체에 가까운 다이아몬드였고, 다른 학생들에 비해 아직 연마되지 않은 부분이 많을 것이다.
뒤늦게 따라잡으려면 이것저것 손을 많이 대야만 할 테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대로 가면 넌 중간고사에서 나쁜 성적표를 받아볼 게 분명하다."
"그건...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네 열정은 잘 안다. 허나 때로는 의지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이지. 그리고 이유야 어쨌든 네가 '결과'를 내지 못하면 나로서도 그에 따른 특별 조치를 할 수밖에 없다."
"버, 벌을 주겠다는 건가요?"
"필요하다면."
"구체적으론 어떤 벌인데요...?"
그야 뻔하지 않은가.
나는 현재의 아이리가 가장 두려워할 만한 벌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스팅레이 기숙사 식당 이용을 제한하겠다. 다음 종합시험에서 충분한 성적을 낼 때까지 합성 프로틴으로 만든 영양죽만 먹게 해 주지."
"헉...!"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하나?"
"그,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런 건 아니지만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아 보였다.
사람이 어떻게 치사하게 먹을 것을 갖고 그럴 수 있냐! 같은 내용일 것이다.
"후우."
나는 일부러 과장스럽게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준비해라, 아이리."
"주, 준비하라니, 뭘요?"
"아직 눈치채지 못했나? 과외다."
지금 이곳은 아카데미 전투훈련장.
내가 직접 아이리를 지도하기 위해서 아카데미에서 잠시 빌린 곳이었다. 따로 과외선생을 붙여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함께 시간을 보내겠는가.
"지금부터 훈련을 시작하겠다. 내 시간은 많지 않다. 너를 직접 지도하기 위해 간신히 만들어 낸 시간이다. 그걸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
"너는 아직 네 감을 과신하는 면이 있다. 지난번 도노반과의 결투에서 승리한 것 때문에 아카데미 학생들의 실력을 얕보고 있는 거겠지."
"...그럴지도요."
아이리 역시 어느 정도 자각은 있는지 순순히 내 말에 수긍했다. 역시 지난번의 사건이 그녀의 사고방식을 많이 바꾼 듯했다.
그런 변화에 나 역시 조금은 태도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그래. 지금 네 문제는 자만하고 있다는 거다. 위자드만 아니면 네가 충분히 이길 수 있고, 내 후원을 받아 모듈을 하나씩 인스톨하면서, 종합 출력레벨과 대체율을 높여 가면 되는 거라고 믿는 거겠지."
"...부정하진 않을게요."
"솔직해진 건 맘에 드는군."
나는 피식 웃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너의 그 생각은 착각이다. 분명 네 재능은 이 아카데미 누구보다도 뛰어나지만... 아직은 딱 그 정도일 그뿐이다."
제아무리 날카로운 칼도.
제대로 벼리지 않으면 녹슬고 망가져서 그 예리함을 잃게 될 뿐이다.
나는 그렇게 아이리를 질책하는 동시에.
철컥.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조준하는 대상은 당연히 아이리.
"이제부터 널 쏘겠다. 대비해라."
"...!"
그에 아이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짝 긴장했다. 그녀의 전신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 그녀도 확실히 느꼈을 것이다.
내가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리라는 사실을.
"정신 바짝 차리도록."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45화
타앙!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찢는다.
총성이 터지기 직전, 아이리가 반사적으로 스텝을 밟는 모습이 보였다.
내 총구가 향하는 방향, 내 호흡의 패턴, 근육의 움직임, 시선의 동선 파악.
그녀는 그 모든 정보를 순식간에 통합하여 즉시 결론을 이끌어 낸다.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지를 아는 것이다.
스윽!
아이리는 순식간에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녀가 그 결과를 도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전부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직감.
모든 과정을 느낌에 따라, 본능에 따라 몸이 따르는 것뿐이었다.
분명 여태까지 그래 왔을 것이고.
그녀의 직감이 틀린 답을 내놓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아직까진 말이다.
"흠."
철컥.
나는 별생각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정확한 조준 자세 따위는 필요 없었다. 내가 무엇을 노리는지 명확히 생각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윽!?"
비살상용 고무탄이 그녀의 어깨 끝을 살짝 스치며 탄두가 옷 끝자락을 조금 찢어 놓았다.
"...!?"
하지만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이리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비살상용 고무탄이라고 해도 잘못 맞으면 뼈가 부러지거나 멍이 들 수 있다.
'우리 새끼 다치게 할 일이 있나.'
아이리에게 피부 장갑 모듈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이 거리에서 맞으면 시퍼렇게 멍이 들 거다.
그녀가 여기저기 멍들어서 반창고를 붙인 채, 눈물을 글썽거리며 날 노려볼 걸 상상해 보면....
....
....
헉. 순간적으로 잠시 내 안의 변태성이 폭주할 뻔했다. 나쁜 생각을 지우고 냉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내 배려를 알 리 만무한 아이리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째서 지금 게 맞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그녀의 대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판단이 느렸던 것도 아니고, 느리게 움직인 것도 아니니까. 그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당황할 수밖에.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지, 지금 건 실수였어요."
"그래? 다시 한번 확인해 보지."
"이번에는 절대로...!"
"방심하지 마라."
나는 아이리의 말을 끊고 총을 발포했다. 이번에 노린 곳은 아이리가 입은 방탄조끼의 가슴부위였다.
이번에도 아이리의 대처는 같았다.
직감에 따라 판단을 내리고, 회피 동작을 취한다. 내가 노리는 곳을 재빨리 캐치하여, '정답'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두 번째 총격 역시.
아이리를 당황케 하기엔 충분했다.
"으윽...?!"
이번에는 조금 더 제대로 맞았다.
고무탄이 방탄조끼를 파고들다가, 이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야...."
아이리는 작게 신음했다.
총알에 맞은 곳이 살짝 얼얼할 것이다. 만약 고무탄이 아니었고, 보호 장비를 착용하지 않았더라면 끔찍한 결과가 나왔겠지.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아이리는 답을 구하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표정과 목소리를 관리하면서 대답해 주었다.
"네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원래라면 내가 쏜 총을 피하고도 남았을 테지."
"'원래라면'이라뇨?"
"너는 '내' 의도를 읽어 내는 것까진 성공했다. 하지만 '기계'의 의도까지는 정확히 읽지 못했지."
아이리는 그 순간 내 말의 의미를 곧장 깨달은 듯했다.
"설마 사격 보정 모듈인가요?"
"정답이다."
정확히는 [웨폰 레코그나이저].
내가 얼마 전에 장착한 Lv.4짜리의 통상모듈.
처음 보는 무기도 숙련된 솜씨로 다룰 수 있게 도와주는 물건이라, 기본적으로 '사격 보정' 기능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격 보정 모듈' 정답을 맞혔음에도 아이리는 영 석연찮은 듯했다. 나는 표정만으로 그녀의 생각을 읽고 설명을 덧붙였다.
"네가 지금까지 만나 온 적응자나 증강자 중, 사격 보정 능력을 인스톨한 녀석은 적잖았을 거다. 가장 최근에 만난 건 [쇼케이스] 때였을 거고."
도노반 폰 딜레이.
아이리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지난번 [쇼케이스]에서 제대로 본보기를 당한 밀레테크 소속 장학생.
녀석도 사격 보정 모듈을 장착하고 있었다. 본체와 다른 생물처럼 움직이며 총을 갈겨 대던 그 팔을 보면 틀림없다.
그에 아이리가 반박했다.
"근데 그때는 전혀 문제없었는데요?"
"수준의 차이다. 도노반 폰 딜레이가 밀레테크의 유망주라곤 해도, 이제 막 아카데미에 들어온 1학년일 뿐이다."
스팅레이의 기술력이 총망라된 고레벨 적응자의 모듈과 도노반의 모듈과는 기본 성능부터가 차이 날 수밖에.
"장착한 모듈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적응자의 사격 능력은 점점 더 정교하고 예리해진다."
거기다 적응자 본인의 단련된 전투센스까지 합쳐지면 사실상 총격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물론 그에 맞춰서 방어하는 쪽도 장갑을 두껍게 두르거나, 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을 개조하는 식으로 대처할 수는 있다.
내 설명에 아이리는 조금 삐진 듯했다.
템빨 차이로 진다고 느낀 거겠지.
"그러면 나한테도 전투 모듈을 주면 되잖아요. 총을 잘 쏠 수 있게 되는 모듈이라든가. 더 잘 피할 수 있게 되는 모듈이라든가."
"이미 주지 않았나."
"아."
지난번 [천근추]를 말하는 것이다.
아이리에게 건네준 이후로 딱히 신경 쓴 적은 없지만, 그녀가 그걸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지는 안 봐도 훤했다.
"그걸 제대로 활용하고 있나?"
"아...."
역시나.
아이리는 아직 [천근추] 모듈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미유가 아이리에게 맞추어 모듈을 손봐주었기에 호환성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모듈을 활성화하니까 묘하게 발끝이 무거워지는 느낌이더라고요... 잠시 봉인해 뒀어요."
좋은 거라는 건 알겠는데, 묘하게 몸에 익지 않아 일단 방치해 뒀다는 것이었다. 예상하던 바였기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했다.
"너는 다른 이들처럼 모듈을 쉽게 받아들이는 체질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예민한 탓에 익숙해지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하지."
"...."
내 말에 아이리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감이 사라진 표정.
"그럼 제 능력은 별로인 건가요...?"
여러 감정이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그녀에겐 스팅레이 특별장학생이란 타이틀이 딱히 기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느 정도 자부심의 근간이 되어 주기도 했겠지.
자신의 재능이 다른 학생들보다 뛰어나다 믿었고, 그 믿음은 도노반과의 결투에서 승리하며 더욱 굳어졌으리라.
그러나.
지난번 타이탄 습격 사건 때의 경험과 지금 훈련에서의 결과 탓에 자신의 실력에 의문이 들기 시작한 거다.
"감각이 예민하다고 해 봤자 전투 모듈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흠."
내 설명이 짧았구나.
곧장 녀석의 말을 반박해 주었다.
"뭘 실망하고 있나."
"...예?"
"네 재능이 고작 모듈에 의존하는 수준이었다면, 나는 애초에 널 영입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조금 전에는...."
"전투 모듈은 검과 마찬가지다."
나는 단언하듯 말을 이었다.
"충분한 근력만 있으면 검을 쥐고 휘두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무기가 없는 이에게는 그자가 괴물처럼 느껴지겠지."
무기가 있으니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거뜬히 해낼 수 있다.
"하지만 검의 달인이 되는 과정은 다르다."
어떻게 검을 쥐어야 휘두를 때 안정적일 수 있을까?
어떤 검로를 그려야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까?
발의 위치는?
호흡의 페이스는?
무릎의 굽힘 정도는?
시선은 어떻게 처리하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딛고 나아가기 전에 가장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뭔지 아나?"
"뭔데요?"
"적을 관찰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리를 가리키며 답했다.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관측하고, 이해하고, 올바른 대처를 하는 것. 네게는 어딘가 익숙한 과정이 아닌가?"
관측과 대처.
아무리 성능 좋은 모듈을 장착하더라도, 사용자의 판단이 구리면 제 성능을 내지 못하는 법이다.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다.
단순히 기계적인 성능만으로 승패가 갈린다면, 그냥 전투 드론에 이것저것 달아서 싸우게 하면 될 뿐.
"결국 전투 센스라는 것이지.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은 아카데미 4년 동안 끝내 얻지 못하고 떠나고 말지. 너와 같은 '직감'을 말이다."
"'직감'...."
"너는 선천적으로 감이 좋다. 다른 이들처럼 쉽게 검을 쥐지 못하는 것 역시, 자신의 미숙함으로 인한 '비효율성'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은 무기를 들고.
본능적으로 틀린 사용법임을 깨닫고.
이게 아니라며 불편함을 느낀다.
그 불편함에 익숙한 방법으로 돌아간다.
"그 불편함을 너 스스로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게 원인이겠지. 새로운 무기를 들었을 때의 일시적 미숙함이 너를 위험하게 만든다고 느끼는 거다."
"...."
아이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는 듯.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감탄하듯이 중얼거렸다.
"어째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네요... 듣고 보니 진짜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멋쩍은 듯이 목덜미를 만지던 아이리는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농담이 아니라 연습만이 살길이다.
그렇게 대답한 직후, 문득 나는 슬슬 '그것'이 도착할 시간이 살짝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늦는군."
그때였다.
훈련장의 문이 매우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시, 시, 실례합니다아...."
자신감이라고는 1밀리그램도 함유되지 않은 목소리. 집중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인기척을 내며, 미유가 나타났다.
"아, 아론 씨. 완성했어요오...."
"그래, 수고했다."
그러면서 미유는 카트를 양손으로 질질 끌면서 다가왔다.
카트의 크기에 비해 상당히 작은 물체가 담겨 있었다. 직사각형 형태의 철제 케이스 같았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겉보기만으론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리는 지난번 내가 미유에게 제작 의뢰했던 물품이 무엇이었는지 곧장 떠올린 듯했다.
"설마 이거, 내가 사용할 방패야?"
"네, 맞아요오! 바로 알아보시네요오!"
미유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결과물이 꽤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아론 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작했어요오! 탄화텅스텐, 열화우라늄이랑 폴리머 매트릭스에다가 타이탄의 정수를 조금 추가했거든요오?"
"그렇군...."
...미안한데 그게 뭐니.
내가 의뢰한 건 아이리가 쓸 수 있을 만한, 튼튼한 소재로 방패를 만들어 달라는 거였는데.
어쨌건 미유는 또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선 신나서 설명을 주르륵 늘어놓기 시작했다.
장갑 전면부는 어떤 소재를 사용했다느니, 구조적으로 어떻게 한 덕분에 접어서 들고 다닐 수 있게 했다느니.
"크기는 아이리 씨의 신장에 맞추어서 조금 짧게 했고, 3단으로 접어서 휴대성을 높였고요오! 장갑 후면부에는 총기 부착대를 달고, 손잡이는 그립감을 높이기 위해서...!"
"거기까지면 됐다, 미유."
적당한 선에서 그녀를 제지했다.
내가 제지하지 않으면 홈쇼핑 쇼호스트처럼 1시간 내내 떠들어댈 게 분명했거든.
아이리도 함께 지내며 그 사실을 알았는지, 미유에게 보이지 않게 '다행이다'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제야 미유 역시 제정신으로 돌아와선 아이리에게 물었다.
"아, 그렇죠. 하, 한번 써 보실래요오?"
그러면서 미유는 카트에서 방패를 내리려 했으나, 상당히 무거운지 혼자서 들질 못했다. 낑낑대며 기계꼬리까지 거들어서야 간신히 품에 안아 들었다.
"자, 어, 어어어서요!"
"아, 알았어!"
저러다 다칠까 싶었는지 아이리가 황급히 방패를 건네받았다. 하지만 막상 받아보니 의외로 가벼웠던 모양인지, 한 손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곤 물었다.
"어떻지?"
"이거, 크기보다는 상당히 묵직하긴 한데, 그렇게까지 무겁지는 않은데요? 미유 너 운동 좀 해야 할 거 같아...."
"힝...."
미유에게 슬쩍 잔소리를 하며, 아이리는 방패를 펼쳐 보았다. 접혀 있던 부분이 전개되며 아이리의 몸이 8할 정도 가려지는 넓이가 되었다.
"오오...."
아이리가 감탄했다.
"잘은 몰라도 좋은 거 같아요."
생각보다 손에 잘 맞고, 또 묘하게 든든한 느낌이 든다는 게 아이리의 감상이었다.
"'내 거'라고 생각하니 이 화학 도료 냄새도 묘하게 좋은 거 같네요. 중독될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아, 그, 그거 진짜로 중독성이 있으니 다 마르기 전엔 너무 들이마시면 안 돼요오...."
"헉...!"
방패를 들고 살짝 킁킁대던 아이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뭐, 원래 페인트 종류라는 게 그렇지.
어쨌건.
아이리는 미유가 만들어 준 방패가 꽤나 마음에 든 듯했다.
혹여나 원작과는 다른 엉뚱한 결과물이 튀어나올까 싶어 걱정했는데, 별 차이가 없어 나 역시 안심했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겠지만 자주 쓰다 보면, 언젠가 없는 게 허전한 수준이 될 거다."
"상당히 장담하시네요."
"그래."
나는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네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를.
"흠...."
아이리는 잠시 내 말의 의미를 가늠해 보는 듯하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방패로 돌렸다.
구조를 살피려는 건지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슬쩍 내게 물었다.
"근데 왜 하필 방패예요? 총도 아니고."
"그 사격 실력으로 총을 얘기하나?"
"윽...!"
대꾸할 수가 없겠지.
자신의 처참한 사격 실력은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
"그, 그런 게 아니라, 굳이 방패일 필요가 있었냐는 거죠. 다른 무기나 도구들도 많았을 텐데."
"이유라면 이미 말해 주었다."
"네. 팀워크에 필요하다고 하셨죠. 근데...."
"뭐가 문제라도 있나?"
"네? 뭐가 문제냐라니요, 당연히-."
아이리는 따지고 들려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냥 말해 주기 싫은 거군요."
"잘 아는군."
슬슬 나란 인간에 대해 파악해 가고 있는 아이리였다.
"흥. 그래도 전 굳이 물어볼래요. 왜 그 '팀워크'라는 거에 방패가 필요하냐는 의미였어요."
"지금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오히려 네게 방해가 되면 되었지."
"어째서요?"
"곧 스스로 깨달을 거다."
난 그렇게만 대꾸하고서 입을 닫았다.
여기서 그것까지 알려 주면 아이리의 성장에 방해가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자주성을 남겨두는 것이 내 방침이었다.
내 단호한 태도에 아이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요. 안 물을게요."
"잘 생각했다. 그럼 훈련을 계속하지. 미유?"
"그, 그럼 저는 잠시 피해 있을게요오."
미유는 다시금 카트를 끌고 부리나케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훈련장에서 완전히 나가기 전에 아이리를 돌아보며 손짓으로 "힘내세요!"하고 응원해 주었다.
아이리는 미유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조금 어색한 손놀림으로 전개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친해 보여서 좋네.
아이리가 준비를 마친 걸 확인하고, 나는 다시금 총구를 들어 올렸다.
"그럼 시작하지."
주어진 시간은 마냥 넉넉하지 않다.
아이리는 더 빠르게 성장해 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훈련을 몸에 새겨 두도록."
아카데미 흑막 시점 46화
베네딕트의 사무실.
마리아는 가볍게 노크만 하고 자연스레 사무실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알려 드릴 소식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래, 책상 앞까지 오도록."
베네딕트도 태연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이제 그의 사무실을 찾은 횟수도 제법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놓고 드나들어도 그녀를 의심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게 다 아론이 자신의 업무 상당 부분을 베네딕트에게 위임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아론을 대신해서 베네딕트가 처리할 서류들을 '직접' 들고 온 마리아였다.
다만 원격으로도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마리아가 찾아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음을 베네딕트는 알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나 보군. 그나저나 그 인간은 뭘 하고 있지?"
"특별장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또? 상당히 애정을 쏟는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베네딕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알던 아론은 어디까지나 사무적으로 장학생들을 대하던 인물이었다.
아니, 사무적이라기보다는.
기계적으로. 무감정하게.
그리고 원래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 기업 스폰서가 그렇겠지만, 그들에게 있어 아카데미 학생들이란 그저 살아 있는 병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가끔 얼굴을 내비쳐서 상태를 점검하고, 불량한 건 고치거나 쳐 내고, 쓸 만한 건 더 단련시키고.'
그렇게 자사(自社)에 쓸 만한 인적 자원을 충분히 공급하는 것이 아론 같은 기업 후원 책임자의 일이었으니.
그러나 아론은 어째서인가, 자신이 직접 뽑은 특별장학생 두 사람에게만큼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아이리 앨리스밸과 미유 그 두 사람이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재능의 소유자임은 분명했다.
특히나 미유는 하급 악마의 정수를 갖고 순식간에 신비모듈을 뚝딱 만들어 내는, 하늘이 내린 천재가 아니던가?
그만큼 애정을 쏟고 신경을 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러는 사람이 '아론 스팅레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굴러다니는 돌멩이로밖에 보지 않던 인간이, 왜 그 두 여학생에게는 다른 걸까?"
"이걸 보시겠습니까."
그 궁금증에 답하는 대신, 마리아는 베네딕트의 앞에 칩을 하나 내밀었다.
"흠...."
베네딕트는 마리아의 얼굴과 데이터칩을 번갈아 보며 뜸을 들이다가, 이내 자신의 관자놀이 쪽 소켓에 칩을 삽입했다.
그러자 데이터칩에 있던 정보들이 증강현실이 되어 베네딕트의 시야에 떠올랐다. 그리고 수많은 정보 파일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영상이었다.
그는 곧장 영상을 재생했다.
쏴아아아아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지난번 타이탄 사건 당시의 영상입니다. 저희 쪽 정찰 인공위성이 촬영한 것을 편집한 것이죠."
"그렇군."
영상은 계속되었다.
멀리 거대한 타이탄의 등이 보였고, 놈이 나아가는 방향에 작게 사람의 형상이 비쳤다. 아론이 그토록 아끼는 아이리 앨리스밸이란 여학생이었다.
타이탄에게 노려지던 그녀는 이윽고 나타난 아론에게 구해지고, 아론은 채 몇 분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타이탄을 도륙해 버렸다.
그렇게 종료된 영상.
이미 알고 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 베네딕트는 짜증 가득한 눈으로 마리아를 노려보았다.
"이게 뭐 어쨌단 거지? 이것 때문에 찾아온 건가?"
"영상의 끝 부분을 봐 주십시오. 정확히는 아론 도련님의 손을 확대해서."
"흠."
영 탐탁잖았지만 속는 셈 치고 다시금 영상을 재생했다. 아론의 모습이 비교적 또렷이 잡힌 장면에서, 그는 아론의 손을 쭉 확대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네. 그렇습니다."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을 입었습니다."
영상 속 아론의 손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변이 어두운 데다가 검은색 장갑을 끼고 있어서 눈에 잘 띄지는 않았다. 촬영 도중에 부상이 나아 버려서, 영상에 잡히는 시간도 극도로 짧았다.
하지만 아론의 손가락은 확실하게 모양이 이상했고,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즉, 다친 것이다.
다름 아닌 그 '아론 스팅레이'가...!
베네딕트는 놀라움을 숨기지 않으며 마리아에게 물었다.
"이거, 확실한 건가?"
"확실합니다. 회복력 강화 모듈 때문에 순식간에 회복했으나, 다친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하...!"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네딕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내 미소는 폭소가 되어, 그는 미친 듯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약해졌군요, 형님! 약해졌어! 심지어 병으로 고생했을 때보다도 더!"
아론은 병상에 누워 있었을 때조차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론이 끔찍한 불치병에 걸리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의 모듈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의 전매특허인 [구름거미]와 [테크 블레이드]는 무려 Lv.5짜리 신비모듈.
일명 '게임체인저'라 불리는 모듈이 두 개씩이나 있었기에, 아무리 병으로 다 죽어 가는 인간이라고 해도 그를 함부로 건드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구름거미]는 여전히 쓸 수 있는 모양이지만, [테크 블레이드]는 못 쓰게 된 모양이군."
아마 아론이 그 괴물 같은 검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굳이 손을 다치지 않고서도 타이탄을 쓰러뜨릴 수 있었을 터.
"어쩌면 병을 고치는 과정에서 모듈 상당수를 못 쓰게 된 걸지도 모르겠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둘도 없는 기회다.
"잘했다. 잘해 주었어."
베네딕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출신을 그토록 따지던 형님이 너만큼은 곁에 두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리라곤 생각도 못 했겠지만 말이야."
"...."
마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에 베네딕트는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칭찬으로 하는 말이니 기분 나빠하지 마라. 너는 우리 그룹을 구할 기틀을 마련한 거니까."
"그렇... 습니까?"
"그 괴물이 지금은 '황태자'라 불리지만, 정말로 차기 '황제'가 되었다간 이 도시가 어떤 꼴이 나겠어?"
"...네."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마리아의 표정은 영 밝지 못했다. 물론 기분이 한껏 좋아진 베네딕트의 눈에 하급자의 기분 따위가 들어올 리 만무했다.
"어찌 됐건 수고했다. 이만 돌아가 보도록.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지면 나중에 연락하겠다."
"베네딕트 도련님."
"왜 그러지?"
마리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로 아론 도련님을 없앨 계획이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그녀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베네딕트의 인상이 구겨졌다.
"네가 제안했고, 네가 알려 준 정보지 않나? 이제 와서 발을 빼겠다고?"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만...."
마리아는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았다. 아론만큼은 아니지만, 베네딕트 역시 상당히 폭군 기질의 소유자였으니.
지금 그의 신경을 거스른다면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하리라.
"...아직 지난번 타이탄 습격 사건의 여파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다시 한번 큰 사건이 일어나면 저희 그룹에도 좋지 않으리라 판단됩니다."
"그렇군. 그건 네 말이 맞다."
그제야 노여움을 푸는 베네딕트.
"콜로니 하나도 날아간 판에 계속 사건이 터지면 그림이 이상해지겠지. 그럼 언제쯤이 좋을까?"
"적어도 이번 주 G20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야 문제없다. 그 점까지 고려해서 계획을 짜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아니다. 역시 우리 그룹을 제일 생각해 주는 건 너밖에 없군."
마리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그녀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베네딕트가 대충 결재를 마친 전자서류들을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만족스럽게 웃는 베네딕트를 뒤로하고 마리아는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면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정말 이게 맞는 건가?"
기회가 왔다.
괴물을 사냥할 기회가.
괴물이 약해졌다는 증거를 포착했다.
그러나 어째서인가 마리아의 머릿속에 의문이 맺혔다. 정말 이것이 정녕 그룹을 위한 길인가 하는 의문이.
정말로 아론 스팅레이는 구원할 여지가 없는 살인귀인가? 정녕 갱생할 수 없는 끔찍한 피의 괴물인 것인가?
모른다.
정말 모르겠다.
그녀는 계속 아론을 옆에서 보좌해 왔고, 누구보다도 아론과 긴 시간을 보내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리고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론은 죽어야만 하는 괴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달라졌다.
베네딕트에겐 말하지 않았으나.
아이리나 미유를 대할 때 보이는 아론의 미묘한 표정이라든가, 주변 이들을 대하는 태도라든가.
이전과는 달라진 그 사소한 차이들이 아론이 예전의 그 끔찍한 괴물이 아니게 된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아니, 이제 와서 돌이키기엔 늦었어.'
이미 선을 넘었다.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점을 다시금 가슴속에 깊게 새겨보려 했으나, 마리아의 몸에서 다시금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질문한다.
'정말 이게 맞는 걸까?'
* * *
G20 기업총회.
뉴 발할라 시티 내의 다양한 메가코프들 중에서도, 시가총액 20위 안에 드는 초거대기업들이 모여 벌이는 연회였다.
3월의 마지막 날에 시작하는 이 기업들의 연회는, B섹터에 위치한 '그랜드 리전시(The Grand Regency)' 컨벤션센터에서 나흘 동안 이어진다.
'G20 기업 총회'라고 불리지만, 단순한 최상위 기업가들의 사교의 장일 뿐만이 아니라, TOP20 기업들이 내놓은 새로운 제품을 만나볼 수 있는, 말하자면 박람회에 가까운 이벤트이기도 했다.
"벌써부터 소란스럽군."
나는 비행용 세단을 타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랜드 리전시 컨벤션센터 역시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는 듯했다.
내 중얼거림에 마리아가 답했다.
"올해는 작년보다 규모가 커졌다더군요. 외부 광장에서 예술계 인사들을 초청해 성대한 공연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 달라진 점은?"
"공연을 제외하면 작년과 비슷합니다. B홀에서는 학술포럼이 개최되고, C홀에서는 제품박람회와 전시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그렇군."
원작에서는 G20이 개최되는 당일에 타이탄이 습격했었다.
한창 주인공과 아이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던 탓에, G20 자체에 대해서는 나도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마리아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묘하게 흥미가 일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 와서 맨날 스팅레이니, 아카데미니, 시나리오니, 하는 것들에만 신경 쓰지 않았나?
보아하니 민간인들이 사용할 만한 다양한 제품들의 전시와 체험도 진행한다는 것 같은데...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가 보고 싶었다.
"도련님. 일정을 조율해 볼까요?"
그새 내 생각을 읽었는지 마리아가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다음을 기약하지. 아버지를 만날 걸 생각하면 즐길 기분이 아니군."
"알겠습니다."
황제, 드레이크 스팅레이.
그룹의 총수이자, 내 아버지.
동시에 원작에서는 최종 보스급으로 주인공 일행을 막아서던 악당 중의 악당이 아니던가.
'이렇게 일찍 만나고 싶진 않았는데.'
이번 G20 기업총회 도중, 나는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의 호출로 그를 만나게... 아니, '알현'하게 되었다.
전혀 상정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가운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핵심인 Lv.5 신비모듈 2개를 복구하긴 했지만, 아직 힘이 불완전한 상황에서는 영 꺼림칙하단 말이지. 게다가....'
나는 슬쩍 마리아를 곁눈질했다.
요 며칠 우리 애들이랑 시간을 열심히 보내느라 눈치채는 게 늦었는데, 마리아의 상태가 묘한 느낌이었다.
정확히 '무엇이 어떻다'라고는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다.
'1부 1막도 끝났으니, 마리아의 거취도 확실하게 해 둬야 하기는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가 탄 비행형 자동차가 컨벤션센터를 지나 근처의 호텔 주차장으로 향했다.
듣자 하니 컨벤션홀은 대중에게 보여 주기 위한 공간에 가깝고 '진짜' VIP들을 위한 모임 장소는 이곳이라고 했던가.
B섹터에 있는 것치고는 상당히 호화스럽게 꾸며진 곳인 듯했다.
나는 주차장에서 내려, 마리아의 안내를 받으며 호텔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던 그때, 우리보다 조금 늦게 비행형 자동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이곳을 이용한다는 것은 저쪽도 상당한 VIP라는 것이겠지. 슬쩍 곁눈질만 하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 잠시 대기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자마자 수많은 경호원들을 대동하여 내리는 여성은....
"아, 여기서 뵙네요, 오라버니."
"칼리아."
칼리아 스팅레이.
내 여동생이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47화
악역 영애, 칼리아 스팅레이.
황가(皇家), 스팅레이의 2남 1녀 중 막내딸이자, 원작 소설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의 페이크 히로인.
메인 히로인이나 서브 히로인도 아니고 구태여 '페이크 히로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원작 속 그녀의 애매모호한 포지션 때문이었다.
언뜻 주인공의 적인가 하면.
어떨 때는 주인공을 앞장서서 돕고.
주인공을 이용해먹는가 하면.
또 어떨 때는 주인공에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들고양이마냥 좀처럼 확실한 마음을 알 수 없는 태도에, 독자들은 그녀가 '히로인이냐 아니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쳐 대기도 했다.
'칼리아가 무슨 히로인이냐! 라고 댓글 달았다가 키보드배틀을 펼치기도 했었지....'
내가 보기에는 칼리아는 지극히 계산적인 인물이었다.
주인공에 대한 애정보단 자기애가 훨씬 더 강한 인물이었고, 이득을 얻기 위해 교묘하게 남심(男心)을 흔드는 악녀였다.
뭐, 실제로는 어찌 되었건 독자들 사이에서 그런 논란을 일으킬 만큼이나, 칼리아가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 칼리아를 히로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었지, 칼리아란 캐릭터 자체를 싫어한 건 아니었고.
허나.
'이거... 곤란하게 됐구만.'
칼리아를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내 신경에 살짝 거슬렸다.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첫 번째 이유는.
'이 녀석은 내 아군이 될지 적이 될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는 인물이다.'
원작 칼리아의 비중이 전혀 적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그렇다. 그녀는 줄곧 종잡을 수 없는 태도로 주인공과 독자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고는 했다.
칼리아의 미스테리함을 강조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을까? 그녀의 시점으로 서술된 장면 역시,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극단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나조차도 속내를 확실히 알기 어려운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적이냐, 아군이냐. 그것이 확실치 않은 녀석만큼 위험한 상대도 없다.'
내가 빙의하기 전 아론은 나름 여동생과 사이가 좋았던 듯하지만, 그건 그만큼 아론이 자신의 무력을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100% 온전한 스펙을 되찾지 못한 지금의 나로선, 그녀를 조금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 더불어.
칼리아가 꺼려지는 두 번째 이유.
그것은 바로....
'얘 화장이 왜 이래...!?'
누가 유전자 조작의 산물이 아니랄까, 원작에서의 묘사대로 칼리아는 아이리 뺨칠 수준의 미인이었다.
예쁘게 웨이브를 넣은 검은 머리칼.
찬란한 황금색 눈동자.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목덜미의 피부.
원작에서 주인공 일행을 포함한 몇몇 남성들이 칼리아의 미모에 반해 헤벌쭉해하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화장 상태만 빼면 말이다.
"칼리아, 얼굴이 왜 그러지?"
"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입술이랑 눈두덩이가 시퍼렇군."
"...오라버니. 오랜만에 뵙는데 굉장히 재미없는 농담을 하시네요. 그런 분이 아니셨잖아요."
칼리아가 기분이 상한 듯이 투덜거렸다.
제기랄.
차라리 얼굴을 다친 거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예쁜 원판을 망치는 저 괴상한 색깔의 정체는 '화장품'인 듯했다.
"그... '그게'... 지금 유행하는 화장법인가?"
너무 충격이 커서 나답지 않게 말이 꼬이고 말았다.
"...."
칼리아가 나를 째려보았다.
"오라버니. 그런 걸 여성에게 묻는 건 굉장히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으신가요?"
"그건 미안하군."
뒤늦게 내 불찰을 깨달았다.
하지만 솔직히 이건 어쩔 수 없는게....
소설로 읽을 때는 그렇게 예쁘다고 칭찬이 자자했던 애가, 갑자기 얼굴에 화장인지 전투 분장인지 구별이 안 되는 걸 하고 왔는데. 덕분에 첫 만남의 감동을 깨뜨려 버렸는데 안 물어보고 배기겠냐고.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녜요.
어쨌든 내 사과에 금방 노기를 누그러뜨린 칼리아는 한숨과 함께 답했다.
"곧장 사과하시니 다행이네요. 뭐, 일단 질문에 굳이 답하자면... 네, 맞답니다."
칼리아가 설명하기를.
이게 요새 상류층 인간들 사이에 유행하는 일명 '마코(Macaw)' 화장이라는 모양.
오늘 같은 '힘을 줘야 하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화장이라나 뭐라나.
"그렇군...."
"혹시 오라버니는 지금 제 얼굴이 맘에 안 드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잘 어울리는구나."
설명을 들은 나는, 태연한 대답과는 달리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면 쌍욕을 했다.
'시발. 빌어먹을 사이버펑크. 빌어먹을 세기말 감성.'
진짜, 이놈의 세계는 다 좋은데, 패션 감각만큼은 당최 이해되질 않는다.
이렇게 예쁜 애 얼굴을 이딴 식으로 망가뜨려 놓고 뭔 개성표현이냐고. 마코 화장이고 호랑말코 화장이고, 아무리 봐도 독화살 개구리로밖에 안 보인다.
우리 아이리나 미유가 이런 화장에 관심이 없는 녀석들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내 조만간 이 화장법을 없애 버리든지, 유행을 바꾸든지 해야지. 에휴.'
그렇게 충격받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나는 호텔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 옆자리는 자연스레 칼리아가 차지했고, 그녀의 경호원들과 마리아가 우리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본인의 무력이 강력한 덕에 경호 인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나와는 달리, 칼리아는 어디로 이동할 때마다 상당한 인원을 대동해야 했다.
10명이 넘는 인원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은, 언뜻 패싸움하러 가는 갱단 같기도 했다.
내심 그 시커먼 남정네들의 존재를 거슬려 하고 있으려니, 칼리아가 내 맘을 읽은 듯이 핀잔을 주었다.
"이게 다 오라버니 탓인 건 아시죠?"
"무슨 소리지?"
"경호원 수 말이에요. 오라버니께서 얼마 전에 일주일 정도 실종되셨잖아요."
"그랬지."
"그 이후로 경호 인력이 2배 가까이 늘어났어요. 아버님이 얼마나 시끄러우셨는지."
...내겐 그런 거 전혀 없었는데?
하기야 가문의 시한폭탄인 나와는 달리, 칼리아는 정말로 스팅레이 회장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막내딸이다.
취급 차이가 날 수밖에.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께서도 아버님과 곧 단독으로 대면하신다고 들었어요."
"맞다."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오라버니께서 병에 걸리셨던 이후로는 처음 아닌가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만큼 심각한 병이었으니까요."
제네틱 오버캐스트.
나노머신의 폭주가 원인인 불치병.
겨우 사흘만 겪었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빙의 전후를 다 합쳐도 그만큼 고통스러웠던 때는 없었을 거라고.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나 속으로 진저리를 치고 있자니, 칼리아가 묘한 눈빛을 하며 나를 흘겨보았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저희 스팅레이의 모든 의료기술을 총동원해도 손 쓸 수 없었던 오라버니의 병을 고친 게... 겨우 어린 여자아이라면서요?"
그게 사실이냐는 듯 묻는 눈빛.
이제 와서 숨길 수도, 그럴 이유도 없는 사실이었기에 나는 순순히 털어놓기로 했다.
"나이는 너와 별 차이 없다."
"오, 그런가요? 과연 놀랍네요. 동시에 안타깝기도 하고."
"안타깝다니, 무슨 뜻이지?"
뼈가 있는 듯한 발언.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고, 칼리아는 나를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비록 어리지만 그런 천재적인 모듈러를 오라버니 혼자 독차지하시다니, 좀 치사하다고 생각지 않으시나요?"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딱히 뭘 바라고 말씀드리는 건 아니에요. 그저 이런 생각을 저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아버님과의 대면이 언제라고 하셨죠?"
"...."
과연, 일종의 경고인가.
지금은 미유를 내가 만든 울타리 안에서만 지내게 하며 보호하고 있으나, 그런 상황이 언제까지고 계속 이어질 수는 없으리라.
혹여나 나조차 거스르기 어려운 누군가가... 가령 스팅레이 회장이 미유나 아이리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면?
어쩌면 예정된 대면에서도 그러한 이야기가 나올지 모른다. 그러니 적절히 대비해 두는 게 좋을 거라는 조언인 것이다.
"충고는 고맙다. 하지만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좋겠네요. 저도 우리 집안 남자들한테만 너무 신경을 쏟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 대화 후 다시금 우리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오랫동안 대화가 없었고, 끝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도련님. 이쪽입니다."
"아가씨는 이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아, 그렇군요. 잠시만요."
서로의 숙소로 갈라설 때가 되었을 때쯤, 칼리아는 다시금 나를 불렀다.
"오라버니. 이따 예정된 파티에는 참여하실 생각인가요?"
"그럴 생각이다."
"작은 오라버니도 곧 도착하신다고 하셨는데, 거기서 간만에 저희 모두 모이겠군요."
"...."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으시면 상처받는답니다. 뭐, 아무튼."
칼리아는 까치발을 세우고는 내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시선이 은근슬쩍 마리아 쪽을 향했다.
"요즘 마리아가 작은 오라버니를 많이 찾아간다고 하더군요.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후훗.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며 싱긋 미소를 짓는 칼리아.
내용과는 별개로, 그녀의 표정은 마치 짓궂은 장난을 친 그 나이대의 소녀 같았다.
나를 향한 표정이 꼭 '이런 건 몰랐겠지?'라고 말하는 듯 의기양양했다. 그에 나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 알고 있다."
"네? 그, 그게 무슨...?"
칼리아가 다소 당황한 듯이 되물었으나, 나는 거기까지만 말해 주고는 자리를 떴다.
슬쩍 어깨너머로 본 칼리아의 표정은,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얼이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엔 오빠의 승리인 듯했다.
* * *
"칼리아 아가씨?"
"응?"
"이제 가셔야 합니다."
"아, 그렇지."
비서의 채근에 칼리아는 잠시 가출해 있던 정신을 되찾았다. 비서의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칼리아는, 문득 질문을 던졌다.
"정 실장."
"예, 아가씨."
"큰 오라버니, 뭔가 달라지지 않았어?"
"아론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정 실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정형화된 대답을 내놓았다.
"오랜만에 뵌 탓에 그리 느끼신 건 아닐지요. 지난번 마지막으로 뵀을 때 아론 도련님은 병상에 누워 계셨으니까요."
"음...."
칼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확실히 달라졌어. 뭔가가...."
"아가씨?"
"...."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인상, 잠시 간의 대화를 통해 느꼈던 분위기만으로는 그 정체를 명확히 짚어 낼 수 없다.
이전의 아론은 독선의 칼날이었다.
매우 날카롭고,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제멋대로 헤집어 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칼날.
사실 아론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자부하는 칼리아에게도, 아론은 상당히 골치 아픈 존재였다.
만약 그녀가 아론의 여동생이 아니었다면, 혹은 그녀에게 오빠의 비위를 잘 맞추는 능력이 없었다면 얼마나 위태로운 관계가 되어 있었을지.
하지만 반대로 야수를 길들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칼리아였다.
오빠가 아무리 안하무인으로 오만하고 난폭하게 날뛴다고 해도, 자신만큼은 그의 등 위에 올라타서 여유를 부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을 알게 되셨군요, 오라버니.'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던 야수.
자신의 날카로운 이빨과 우악스러운 힘만을 믿는 야수는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한다. 약자에게는 '지략'이라는 약자만의 강력한 무기가 있으니.
하지만 야수가 사람을 알게 된다면.
사람이란 무엇인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이해하고, 예측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정말 위험한 존재로 거듭난다.
'저답지 않게 식은땀이 나네요. 이거야 원....'
기껏 고양이... 아니, 사자에게 달아 놓은 방울이 떨어지려고 한다. 그 방울을 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투자해 왔는데, 이제 와서 그걸 잃는다면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뭔가 수를 써야겠군요.'
그렇게 판단한 칼리아는 곧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짧은 대기시간 후, 상대가 통화에 응답했다.
"네. 저예요.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그렇게.
상황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48화
"오늘 점심에는 아카데미 관계자들과 식사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알겠다."
"오후에는 그분들과 함께 A홀에 있는 '스팅레이 밀리터리' 부스에 방문하셔야 합니다. 이번에 출시가 중단된 V시리즈 모듈 대신 다른 걸로 어필해야 합니다."
"그렇군."
"3시부터는 내년부터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지급될 새로운 제복 계약 관련 회의에 참가하셔야 합니다."
"그래...."
"마지막으로 저녁에는 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가하셔야 합니다."
"...."
듣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일정이었다.
...일하기 싫다.
"꼭 해야만 하나?"
나 말고 베네딕트 자식 있잖아.
걔한테 권한 이것저것 다 넘겨줬는데 왜 내가 이걸 다 해야 해? 시나리오 관련된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이름만 올려놓고 꿀 빨고 싶은데.
그런 마음으로 마리아에게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꼭 하셔야만 합니다."
...였다.
이것도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게 보여서 최소한으로 줄인 거라나 뭐라나.
하기야 이런 대외적인 활동까지 맡겨 버렸다가는 내 위상이 흔들리고 말 테니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만 했다.
걔네가 권력을 잡으면 날 가만히 두지 않을 게 뻔하니까.
"알겠다."
나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일정을 소화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내게 남은 아론의 기억 파편과 더불어, 마리아와 다른 직원들의 보좌 덕분에 큰 탈 없이 첫날 일정은 마쳤다.
이후 참석한 저녁 만찬.
도시 최상류층의 사교모임.
전생에선 한 번도 겪어 볼 일이 없었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게.
'저쪽에서 알아서 다가오는군.'
불치병에 걸렸던 황태자의 화려한 복귀라는 게, 저 양반들한테는 퍽 흥미로운 이슈였던 모양이다.
내가 아카데미에 복귀하자마자 이것저것 일을 터뜨리기도 했고, 그들은 어떻게든 내게 이야기를 듣기 위해 생글생글 웃는 얼굴들로 접근해 왔다.
그러면 나는 평소대로 상대에 따라 차갑고 오만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참이나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나를 평가하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론 씨, 상당히 부드러워지셨군요.
-죽다 살아나면 사람이 바뀐다잖아요?
-어쩌면 이전에 날 선 태도는....
-네. 어쩌면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폭주했었던 걸지도요.
-황태자도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 거 아니야, 이 양반들아.
원래 아론 성격이 그랬던 거야.
다른 이들을 모두 아래로 깔아보는 듯, 냉소적이고 거만하게 구는 것이 '아론 스팅레이'라는 인물이었다.
나는 그저 각계 고위층들을 상대로 그런 아론의 기존 태도를 계속 유지하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했을 뿐인데.
'이 새끼... 공식적인 석상에서 대체 얼마나 깽판을 쳐 온 거냐.'
조금 '정상적'인 태도를 취했을 뿐인데 평가가 휙휙 바뀔 정도라니. 물론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인간들은 겨우 이걸로 나에 대한 인상을 바꾸진 않겠지만 말이다.
더 기가 차는 부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내가 저지른 만행들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말인즉.
정작 본인에겐 잘못했다는 자각이 없다는 거겠지. 아론에겐 진심으로 아웃 오브 안중인 일이었던 거다.
'징하다, 진짜....'
나는 그렇게 속으로 질려 하는 한편.
겉으로는 캐릭터를 너무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시티 최대 규모 종합병원의 외동딸, 차기 시장으로 거론되는 유력 정치가, 법조계의 거물 등등.
한 명 한 명이 어쩌면 메인 시나리오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물들이었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응대했다.
다만 도중에 곤혹스러운 일도 있었다.
한 무리가 나에게 호감을 사려는 건지,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어머, 아론 스팅레이 씨. 병상에서 일어나셨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네요? 건강은 좀 어떠신가요?"
"스팅레이 씨! 지난번 타이탄 사건 뉴스에서 영상을 봤어요! 학생 한 명을 위해 직접 나서는 모습이 정말이지...!"
"...."
뭐지, 이 독화살 개구리들은....
그나마 칼리아 같은 애들은 외모가 받쳐주니 마코니 뭐니, 이상한 화장을 해도 어느 정도 커버가 됐었는데, 평범한 이들이 하니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남자도 몇 명 독화살 개구리 무리에 섞여 있다는 게 더 소름이었다. 아무래도 여자, 남자 안 가리고 유행하는 화장법이었나 보다.
수컷 개구리 무리엔 예술계 인물이 상당수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특히나 강한 맹독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유독 무서웠다.
'일해라, [천독불침] 모듈아...! 날 맹독에서 지켜 줘...!'
아니, 근데 진짜 제발...!
너희 돈 많잖아...!
아름다움도 돈이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세계관에서 사는 주제에, 다들 왜 그렇게 파격적인 걸 넘어서 안구 파괴적으로 사는 거냐.
시바 신이라도 믿으시나.
결국 참다못한 나는 방침을 내렸다.
그 어떤 잘나신 분이 와도 독화살 개구리 분장을 한 녀석은 완전히 투명인간 취급하기로.
그런 태도를 몇 시간 정도 유지하다 보니 무척 다행히도 '황태자는 마코 화장을 싫어한다.'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 나 그거 싫어하니까 제발 유행 끝내라. 연예인이든 뭐든 그딴 식으로 화장한 새끼는 방송 출연 못 하게 만들 거다.'
그렇게 다짐하던 찰나.
어딘가 익숙한 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결국 왔군요. 아론 스팅레이...!"
뿌득 이를 갈면서 말을 걸어오는 인물, 바로 블라디미르였다. 참 재수 없는 목소리이긴 해도, 이런 독화살 개구리 천국에서는 차라리 그가 낫다.
"할 얘기가 있으니, 나 좀 보시죠."
"그래, 물ㄹ...."
고개를 돌리며 녀석의 요구에 응하려는 찰나, 나는 그곳에 서 있던 새로운 종의 독화살 개구리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블라디미르'라는 신종(新種)을 말이다.
"...."
"뭐죠, 아론 스팅레이?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죠? 아하, 이 얼굴을 보고 놀랐나 보군요? 아무래도 당신은 유행에 뒤떨어진 듯하니 제가 설명해 드리자면-."
"후우...."
나는 한숨을 크게 쉬어서.
블라디미르의 헛소리를 끊고서.
선언했다.
"...죽여 주마, 블라디미르 하리토노프."
"예?!"
내 눈을 썩게 만들다니.
이 새끼 죽여 버릴 테야.
* * *
그런 우여곡절 끝에 어떻게든 첫날의 연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시간은 오후 9시.
공식적인 만찬은 끝났어도, 아직 사람들은 남아 교류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구태여 일찍 방으로 돌아가는 참이었다.
"먼저 빠져나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다. 아침부터 일정을 소화하느라 피곤하군. 너도 어서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마리아."
"알겠습니다. 방까지 모셔다드린 후, 퇴근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대로라면 나는 아직 병상에 누워 있느라 이번 G20 자체에 참가하지 못했겠지.
상황상 참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걸로 인한 나비효과는 최소화하고 싶었다.
'뭐, 이미 원작 시나리오는 꽤 멀어졌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마리아와 함께 복도를 걸어가던 도중, 저 멀리 뒤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앳된 목소리였다.
'어린애들...?'
수는 대충 네댓 명.
전부 남자.
나이는 십 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쉽게 말해 중고등학생들 정도.
옆에서 곧장 설명이 들어왔다.
"'뉴라이프 사(社).' 사장의 외손자와, '퓨어리티 서비스' 회장의 손자, 그리고...."
"누군지 설명은 됐다."
"알겠습니다."
요컨대 재벌가 3세들이라는 거다.
아까 연회에서 살짝 본 것 같기도 했었는데, 공식적인 일정도 끝났으니 저들끼리 밤새워 놀러 가는 모양이었다.
"방향을 보니 호텔 풀빌라를 빌린 모양이군요."
"그렇군."
신나게 놀 생각에 흥분한 것인지, 그들은 내가 옆에 있는데도 알아보기는커녕 큰 목소리로 잡담을 떨어댔다.
덕분에 녀석들이 오늘밤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 계획인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쯧. 어린놈들이 더럽게도 노는구만.'
술과 마약, 여자.
보아하니 저쪽 컨벤션 센터에서 공연을 마치고 온 여자 연예인들을 불러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모양.
예전에는 상상이나 매체로만 접했던 상류층의 문란한 문화에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불러서 주의를 시킬까요?"
"됐다."
뭐, 저놈들이 어떤 주지육림을 즐기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 도시 상류층들이 썩을 대로 썩었다는 사실은 E섹터 하층 노동자까지 다 아는 사실이니.
뭣보다 내가 주의시킬 자격도 없다.
내 몸뚱이만 하더라도 취미가 살인이 아니던가?
그에 비하자면 중학생밖에 안 된 꼬맹이들이 여자 끼고 노는 건 양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구태여 깊게 관련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애써 외면한 채 내 갈 길을 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녀석들 무리에서 한 녀석이 무언가를 바닥에 흘렸다. 새하얀 색에다가, 묘하게 눈을 잡아끄는 생김새까지 절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들, 뭔가를 흘렸군."
"이건... 정크칩인 것 같군요."
마리아가 주워서 손에 올려놓더니 내게 보여 주었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바탕.
붉은색으로 삼각형 안에 붉은 점 두 개가 찍혀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크칩이라고?"
"네."
"멍청한 놈들."
이런 걸 할 생각이면 흘리고 다니지나 말든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의 어설픈 행동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합니까?"
"쯧. 난 홀로 돌아갈 테니, 전해 주고 퇴근하도록. 적당히 하라고 주의도 주... 잠깐."
갑작스레 전화가 와서 말을 끊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
누군지 곧장 알아채고 응답했다.
"지금은 바쁘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끊겠다."
[여보세요? 네?! 아, 아뇨. 급한 일이에요. 드디어 정크칩 입수루트를 확보했어요!]
한동안 아카데미 밖에 내보내 놨던 시엘의 보고였다. 솔직히 큰 기대를 안 하긴 했지만, 그걸 티내지는 않았다.
"그건 잘 됐군."
[잠깐만요. 따질 게 있는데, 확인해 보니까 진짜로 제 몸에 폭탄을 심어 놓으셨더라고요?! 진짜 제정신이에요?!]
"확인해 본 모양이군?"
[확인하고 말고요! 그것 때문에 거래 트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했더니, 다들 '스팅레이' 마크에 쫄아서 해 주지도 않고!]
"그럴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어차피 못 했어요. 아무튼 운 좋게 루트는 확보했으니,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계획하신 대로 2막 시나리오를 진행할 수 있을 거예요.]
"수고했다. 그럼...."
통화를 끊으려는 찰나.
시엘이 다시 붙잡았다.
[잠깐만요. 더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중요한 얘기?"
[요새 이 바닥에서 갑자기 이상한 정크칩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해서요....]
"질질 끌지 말고 말해라."
[아시타교.]
시엘이 말했다.
[아시타교 아시죠? 그 사이비 종교. 1부 3막에 일어나는 '안드로이드 반란'과 연관된 녀석들이요.]
"알고 있다."
[최근 유통되는 '특별한 정크칩'들 중에, 녀석들이 만들어서 유포하는 게 있대요.]
"뭐라...?"
또 아시타교다.
그놈들의 이름이 또 등장했다.
[원작 소설에선 그놈들 나올 때 정크칩 얘기 없었잖아요? 그쵸? 제가 기억이 잘 안 나서 확인해 보고 싶어서 전화한 건데....]
"전혀 없었다."
그놈들은 어디까지나 순수주의자 사이코들이 모인 골치 아픈 집단이지, 사이버 마약까지 유통하지는 않았다.
원작에서는 그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자그마한 힌트조차 등장한 적 없다. 사일런스가 유통한 정크칩의 배후에 있던 것 역시 '아시타교'가 아니라, '신비'들이었고.
그에 시엘이 말했다.
[그럼 확실하네요. 당신이 아시타교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게 아니라면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다."
또 다른 빙의자.
아카데미 내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그 존재가, 현재 나로선 상대하기 제일 골치 아픈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
"일단 알겠다."
[네.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한 거라 확실하진 않지만, 주의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와 관련된 정보는 더 없나?"
[글쎄요... 놈들이 제작한다는 그 '특별한 정크칩'을 구해 보고 싶었는데, 아직 저로선 신용이 부족한 거 같아서요.]
시간과 정보가 더 필요했다.
아직 섣불리 무언가를 판단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알았다. 필요한 게 있다면 그때마다 보고하도록."
[그럼 제 몸에 있는 폭탄 좀 없애주시면 안 될까요? 저 이거 때매 요새 잠 못 자는데.]
"...."
너 원래 안 자잖아, 이 안드로이드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얼굴만 보고서 기절하던 녀석이 이렇게 당당히 요구한다고?
아무래도 내가 준 임무 때문에 블랙마켓을 전전하면서 상당히 담력이 좋아진 듯했다. 아마 이것저것 몹쓸 경험을 많이 한 거겠지.
"이번 계획이 끝나면 고려해 보지."
[그렇게 답하실 줄 알았어요. 아, 그리고 그 '특별한 정크칩' 말인데요. 듣자 하니....]
그 순간 어째서인가.
문득 아까 주운 정크칩 쪽으로 저도 모르게 시선이 향했다. 그와 동시에 시엘이 설명하기를.
[하얀색 몸체에 붉은색 삼각형이 그려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삼각형 안에는 점이 찍혀 있고.]
"과연.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시엘이 뭔가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열심히 떠들어댔으나, 나는 듣지 않고 곧장 끊어 버렸다.
그리고....
"마리아."
"예, 도련님."
나는 마리아를 돌아보며 지시했다.
"아까 그놈들 잡아 와라."
아카데미 흑막 시점 49화
더 럭스 호텔의 풀빌라.
하루 빌리는 것만으로도 수백만 크레딧의 비용이 필요한 방을 나흘 연속으로 빌린 이들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뚜껑을 열지 않은 술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호화스러운 안주들이 온기를 유지한 채 주인들을 기다렸다.
이윽고 한 무리의 소년들이 거실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테이블 앞 고급 소파에 점프하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듯한 청년이 상석에 앉았고, 나머지가 적당히 떨어져서 자리를 잡았다.
G20 기업총회에 참가한 기업가(家)의 재벌 3세들이었다.
"하여간 우리 꼰대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니까? 오늘 온종일 착한 아들 연기하느라 토할 뻔."
"지난번에 놀다가 걸린 것 때문에?"
"어. 그 뒤로 내가 뭐만 하려고 하면 지랄을 떤다고. 자꾸 그러면 할아버지가 경영권을 어쩌니... 오늘도 여기 오느라 ㅈ뺑이 쳤음."
"나도 경호원들 떼어 놓고 올 구실 찾느라 힘들었다."
"여긴 그나마 호텔 본관이랑 떨어져 있어서 들킬 염려는 없겠지. 수행원들도 고자질 안 할 만한 녀석들로만 데려왔으니까."
그렇게 그들이 은밀한 자리를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서로 푸념하던 그때였다.
"아, 그보다 형님들!"
가장 막내인 뉴라이프사(社) 사장의 외손자, 에드워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올해 16살이 된 그의 손에는 이미 자연스레 술잔이 들려 있었다.
"정말로 오늘 진짜로 '핑키핑키즈' 멤버들 부른 거 맞죠? 그 '컴백 뉴런' 부른 애들!?"
"진짜로 불렀다니까, 씨발. 몇 번을 물어보냐? 아까 리허설 끝나고 온댔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오오오오오오오!"
"새끼야, 그렇게 좋냐?"
"좋고말고요! 아, 진짜 내가 걔네 얼마나 좋아하는데! 특히 멤버 중에 '아키라'라는 애가 있거든요? 나 걔 TV에서 처음 본 순간에...."
"아, 이 오타쿠 새끼 또 흥분했다."
다른 형들이 비웃자, 막내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대꾸했다.
"하여튼 진짜 한번 보면 다들 알 거라고요. 형들, 진짜 부탁하는데 딴 애들은 몰라도 우리 '아키라'만큼은 저한테 양보해 주셔야 해요."
"그건 알겠는데, 인마. 네가 그리도 좋아 죽는 애를 불러 준 우리한테 예의를 갖추는 게 먼저 아니냐?"
"앗, 죄송합니다, 행님!"
막내는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양주병을 열더니 나이순으로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한 차례의 건배가 이어졌고, 모임에 후끈한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잠시 근황이나 추잡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제일 연장자인 퓨어리티 서비스사(社) 회장의 아들 '에단'이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이돌 그룹 '핑키핑키즈'의 멤버들이 도착할 때가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확한 시간에, 수행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도련님. 손님이 왔습니다.]
"그래, 왔으면 들여보내."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원래 만나기로 하셨던 분들이 아니라....]
"됐으니까 들여보내라고."
[...알겠습니다.]
수행원은 뭐라 말하려 했으나, 에단은 듣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행원은 에단의 지시에 따라 도착한 손님을 받았다.
또각또각.
복도를 걷는 구둣소리에 소년들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오늘 그 TV에서나 보던 아이돌 그룹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란 기대였다.
그러나 그 '손님'의 얼굴을 본 소년들의 마음은 순간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원래 도착하기로 했던 걸그룹 멤버들이 아니라, 엉뚱한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뭐야, 당신?"
"실례합니다. 스팅레이 인적자원개발 재단 비서실장, 마리아라고 합니다."
스팅레이.
그 이름에 소년들은 한순간 긴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대가 일개 비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곤 졸였던 마음을 풀었다.
가장 연장자였던 퓨어리티 서비스사(社) 회장의 손자, '에단'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스팅레이 쪽 비서가 우리한텐 무슨 일로?"
"제가 모시는 분께서, 여러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게 누군데."
"아론 스팅레이 이사장님이십니다."
"아, 아론 스팅레이라면...!"
그 역시 유명한 이름이었다.
당연히 매우 좋지 않은 의미로 말이다.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인물....'
스팅레이 그룹의 인간병기.
성정이 난폭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던가. 상대가 누구든 간에 심기를 거스른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잔인하게 복수를 한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폭군의 자질.
오늘 파티에 참가하기 전에 부모님께 몇 번이나 주의사항을 반복해서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와는 절대로.
절대로 연관되지 말라고 말이다.
"흠. 그 스팅레이 재단 이사장님씩이나 되는 사람이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혹시 아까 파티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라도 저지른 것일까.
걱정부터 들었지만 에단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마리아는 그의 태도에도 여전히 깍듯하게 예를 갖추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저희 이사장님께서 여러분을 뵙길 원하십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람을 오라 가라 할 거면 용건부터 확실히 알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볼일이 있는 사람 쪽에서 찾아오든가."
상대가 저자세로 나오자 오히려 그는 더더욱 강세를 취했다. 동생들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맞추어 나머지 멤버들도 '맞아, 맞아!'하며 동조했다. 스팅레이라는 이름과 자신들의 비행을 들킨 점에 지레 겁먹었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그리고 동생들의 응원에 힘입어 맏형 역시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래, 마리아 씨.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선을 넘은 것 같은데. 스팅레이가 '황가'라고 불린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행동해도 되는 건 아니지."
"기분을 상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론 스팅레이 이사장님께서도 그럴 의도는 아니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기분 잡치게 만들어 놓고 뭔 소리를 하는 거래? 솔직히 스팅레이가 지금 같은 힘을 갖게 될 수 있었던 게 뭐 때문이야? 결국 우리가 당신네들의 나노머신과 무기를 구매해 줬기 때문이잖아?"
뉴 발할라 시티에서 생산콜로니를 늘리고, 기업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에는 그에 걸맞은 무력이 필요하다.
즉, 적응자나 증강자로 이루어진 무력조직이 필수인 상황이 군수기업이었던 스팅레이를 최정상으로 이끌었다.
나노머신 '아담'과 적응자를 처음으로 만들어 낸 것이 다름 아닌 스팅레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팅레이 그룹이라고 해도 타 기업에게 함부로 갑질을 하기는 어려웠다.
압도적인 점유율과 앞선 기술을 갖고 있다고 해도 다른 나노머신 생산 회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딴 식으로 굴면 스팅레이보단 밀레테크나 다른 기업 쪽에 마음이 갈 수밖에 없지."
대표적으로 밀레테크 역시 자체적으로 나노머신을 생산하는 기업이었다. 시장 점유율은 스팅레이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악착같이 버티며 나노머신 시장에서의 부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 기업들이 존재하는 한, 스팅레이는 다른 기업들과 어느 정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즉, 구매자인 이쪽이 갑이다.
저쪽이 심기를 거스르면 얼마든지 다른 거래루트를 트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소년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정도로 제가 여러분의 기분이 상하게 했다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분명히 자존심이 상할 만한 내용과 태도였음에도, 마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년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상대가 원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 프로의 경지에 이른 마리아에겐 이미 숨 쉬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기에.
마리아의 그러한 태도에는 묘할 정도로 마음을 만족스럽게 하는 힘이 있어서, 소년들도 다소 기분이 누그러졌다.
"...알아먹었으면 됐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쳐줄 테니 어서 돌아가라고. 손님이 올 예정이니까. 당신은 그 손님이랑 착각해서 들여보내 줬을 뿐이야."
"그렇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는 이만 됐으니 어서 돌아...."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간단히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허나.
마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상대의 기분을 맞추는 것 이상으로, 그녀는 상급자의 무리한 지시를 완수하는 데에 도가 튼 인물이었다.
그녀의 태도에 그는 다시금 역정을 내려 했다.
"뭐? 지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당장 여기서 꺼지란...!"
"이걸 한번 봐 주시겠습니까?"
마리아는 품에서 물건을 꺼냈다.
아까 전 소년들이 떨어뜨린, 하얀색의 수상한 정크칩이었다. 그걸 본 소년들의 시선이 당황한 듯 일제히 막내 에드워드에게로 쏠렸다.
-멍청한 새끼야!
-저게 왜 저 여자 손에서 나오는데?!
-저, 저도 모르겠다고요!
오가는 시선 속, 소리 없는 대화.
그에 답하듯 마리아가 대답한다.
"아까 여러분께서 복도에서 흘리신 물건입니다. 매우 중요한 물건으로 보였기에 돌려 드리러 왔습니다."
"그, 그럼 아론 이사장이 우리를 보자고 했던 이유도...."
"네. 이 물건에 대해 물어보고 싶으셨던 겁니다."
소년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풀빌라를 빌려서, 걸그룹을 불러서, 함께 알코올을 빠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다. 세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정크칩은 아니다.
완벽하게 사이버 마약으로 분류되는 정크칩은 아무리 천만금을 쓰더라도 덮을 수 없는 문제였다.
특히나 그 하얀색 '특별한' 정크칩은....
"최근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선 저희 스팅레이 재단의 주도로 정크칩 특별단속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요컨대 아론 이사장님께선 여러분께 딱히 책임을 물 생각은 없으시단 겁니다. 그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카데미 내의 문제니까요."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다소 주제넘은 말씀입니다만, 여러분께 선택지가 있나요?"
마리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은 소년들의 얼굴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고, 소년들은 그녀의 얼굴을 직시할 수 없었다.
입장이 180도 뒤바뀐 것이었다.
"네. 어쩌면 여러분은 어떤 계략에 휘말린 걸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이 정크칩을 사용하는 모습을 본 게 아니니까요."
"그 말은 눈감아줄 수 있다는...?"
"누군가 악의적인 의도로 정크칩을 여러분의 몸에 몰래 붙여 놨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사실은 주머니에서 숨겨 두었던 물건이 여러분 중 한 분의 부주의함으로 떨어진 걸 수도 있고요."
"대, 대체 얼마를 원하는 거지? 천만?"
"아뇨.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그걸 판단하는 건 제가 아닙니다."
나는 돈에 관심이 없다.
다만 자기가 모시는 사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하라는 의미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에 운명이 결정될 테니까.
"그, 그럼 우리가 어떡하길 원하지?"
"이사장님께서는 이 물건의 출처를 궁금해하고 계십니다. 되도록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듣길 원하시죠."
"출처...."
그 말에 다시 한번 소년들의 시선이 막내에게 쏠렸다.
애초에 그가 이 모임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게, 처음으로 정크칩을 공수해 온 게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16살짜리 꼬맹이를 이런 자리에 끼워 줄 리도 없었을 테고.
"왜, 왜 형들 날...!"
"야, 무슨 말 좀 해 봐! '그것들' 전부 네가 가져온 거잖아!"
"아니, 이건 그러니까...!"
시선과 목소리에 점점 칼날이 깃든다.
네 책임이잖아. 네가 가져왔잖아.
우리는 모르는 일이잖아.
자신을 압박하는 분위기에 막내는 점점 궁지에 몰렸다. 눈동자가 떨리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쑥.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 나는...!"
"잠시 기다려 주세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단순히 물건의 출처를 물을 뿐...!"
상황이 묘해지는 것을 감지한 마리아는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허나 패닉에 빠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나는...!"
이상했다.
분명히 출처만 말해 주면 눈감아주겠고 말했다. 딱히 그에게 큰 압박을 준 적도 없었다. 정크칩을 걸린 사실이 두려워서 떠는 것치고는 지나친 반응이었다.
무언가.
무언가 더 있다.
"부디 진정하세...!"
"으아아아아아아아! 꺼져! 꺼지라고!"
그 순간.
에드워드는 자신의 품속에 있던 정크칩을 모조리 꺼내 짓밟아 부숴 버렸다. 그러곤 쿵! 쿵! 쿵! 테이블 모서리에 자신의 이마를 박아 댔다.
"야, 야! 에디, 에디! 왜 이래!?"
"이 새끼 말려! 말리라고!"
"카! 카하하하하하!"
다른 소년들이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한 에드워드를 뜯어말렸다. 허나 이미 찢어진 그의 이마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명히 눈물이 날 만큼 아플 텐데도, 에드워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절대 안 돼. 절대 안 된... 아."
그러곤 뭔가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야! 정신 차려! 야!"
"얘 머리에서 피가 너무 많이 나! 이거 어떡해!?"
당황하는 소년들.
마리아는 다급히 에드워드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바이오모니터를 확인하기 위해 손목 내장 케이블을 뽑아냈다. 그렇게 에드워드의 소켓에 연결하려고 그의 고개를 살짝 돌렸을 때.
마리아는 이상한 걸 발견했다.
'정크칩...?'
아까 아론이 주웠던 것과 같은 색깔의 칩이 이미 에드워드의 목덜미 소켓 허브에 끼워져 있었다.
마리아는 소켓에서 정크칩을 제거하려 했으나, 어째서인가 빠지질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우우우우웅!
어디선가 큰 소음이 들려왔다.
하늘을 바라보니 '뉴라이프 사'의 마크가 그려진 수송형 비행차가 도착해 있었다.
드르륵! 덜컥!
수송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Lv.3 파워드수트와 대구경 플라즈마 라이플로 무장한 사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사방을 경계하며 거실까지 점령한 그들은 마리아를 거칠게 에드워드의 품에서 떼어 냈다.
[손을 머리에 올리고 물러서!]
[VIP 확보. 돌아가겠다.]
병사들의 갑주에도 뉴라이프 사의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소년들은 순순히 그 지시에 따랐다.
에드워드의 이상 생체신호를 감지한 기업 경호팀이 출동한 거라고 생각하고서.
그러나 그때.
"잠깐."
갑작스레 들려오는 중저음의 목소리.
목소리만으로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그곳에 있던 모두가 절로 숨을 삼켰다.
고개를 조심스레 돌리자 훤칠한 키에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미남자가 유령처럼 나타나 있었다. 남자의 황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그곳의 면면들을 훑는다.
"이거 너무 늦는다 싶어서 직접 와 봤건만...."
소년들은 남자의 기백에 눌려 숨조차 쉬지 못했다. 어째서인가 그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거대한 쇳덩어리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자의 안중에는 소년들 따윈 없었다는 것이다.
그 남자, 아론 스팅레이의 시선은 오직 '뉴라이프' 사의 군인들에게만 쏠려 있었다.
군인들 역시 그가 내뿜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그를 경계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아론 스팅레이가 물었다.
"...네놈들. 정체가 뭐지?"
아카데미 흑막 시점 50화
양아치 재벌 애송이들을 데리러 마리아가 자리를 떠난 직후, 나는 다시금 시엘과 연락을 취했다.
[여보세요?]
"아까 이야기를 다시 이어서 하지."
[조금 전에 멋대로 끊으셨으면서....]
투덜대는 시엘.
하지만 해 봐야 그게 고작이라는 걸 알기에 딱히 지적하지는 않았다. 나는 통화를 연결한 상태에서 새로운 프로그램 창을 시야에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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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00245 활동 로그]
-영상기록: 262건
-대화로그: 125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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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엘을 자유롭게 풀어 준 이후, 계속 가동되고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단순히 몸에 폭탄을 심어 놨다는 것만으로는 확실하게 목줄을 채워 놨다고 할 수 없으니.
매일 내용을 간단하게 훑으며 녀석이 내가 없는 곳에서 허튼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번엔 녀석이 말하는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해 볼 용도로 쓸 생각.
"그래서, 그 '특별한 정크칩'이라는 게 정확히 뭐지? 아시타교와 정확히 무슨 관련이 있는 거고?"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해요. 거래 루트를 이제 막 튼 참이라서, 저한테 그다지 많은 정보를 주지는 않더라구요. 어디까지나 이렇다 카더라~ 하는 내용인데....]
"상관없으니 설명해 봐라."
[알았어요.]
시엘은 설명을 시작했다.
[소문으로는 그 하얀색 독특한 문양이 그려진 정크칩을, 아시타교에서 만들어서 유통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누구에게 언제 들은 얘기지?"
[중간 거래상한테서요.]
사실이었다.
슬쩍 뒤져 보자 시엘의 활동 로그와도 내용이 정확히 일치했다.
"그럼 무엇이 특별하다는 거지?"
[쉽게 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죠. 또 다른 정크칩에서 맛볼 수 없는 '극상의 기억'을 체험할 수 있다고도 하고....]
"뭔가 더 있는 모양이로군."
[네.]
시엘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관련해서 좀 이상한 얘기들이 많아요. 부작용이 전혀 없다든가, 사용하고서 전투 능력이 향상되었다든가, 피부가 좋아졌다든가, 깊게 잠들게 됐다든가, 머리가 좋아졌다든가.]
"...."
뭐냐, 그게.
게르마늄 팔찌나 육각수 같은 건가.
사기라는 느낌이 풀풀 풍긴다.
내가 미심쩍어하는 티를 내자, 시엘이 당황하며 말을 덧붙였다.
[거, 거짓말 아녜요! 진짜로! 소문이!]
"그래. 믿는다."
[전혀 안 믿으시는 목소린데요....]
"믿는다."
개인적으로 믿고 말고를 떠나서, 시엘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로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진짜로 뒷세계 사이버 약쟁이들 사이에서는 저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소리다.
[아, 아무튼 그래서 그 특별한 정크칩은 없어서 못 구한대요. 다들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만 혈안이 되어선, 종교단체가 그걸 만든다는 점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더라구요.]
"그렇군."
[뭐, 일단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예요. 더 알아내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그래, 수고했다."
[아무렴요. 그리고 그 정크칩은 높으신 분들이 더 찾는다던데, 아론 님이라면 뭔가 더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알았다."
거기까지 대화를 마치고 통화를 마쳤다.
나는 시엘의 행동로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없는지 조금 더 살펴보다가 이내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고, 슬슬 마리아가 비행 청소년들을 몰고 올 때가 되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여전히 그녀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늦는군."
그러다 문득 떠올렸다.
아까 시엘이 말한 아시타교가 만든 특별한 정크칩의 효능 중에 '전투 능력의 향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정크칩을 사용했는데 강해진다라?'
여전히 수상쩍은 이야기인지라 딱히 사용해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정보로는 아시타 교에 또 다른 빙의자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허무맹랑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만에 하나, 녀석이 나나 시엘과 다른 방식의 '빙의자 특전'을 가지고 그것을 이용한 거라면?
'이건 마리아한테만 맡겨 둬서는 안 되겠군.'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은 것도 있고.
여러 모로 직접 나서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곧장 녀석들이 있을 풀빌라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체불명의 집단과 마주했다.
* * *
"...네놈들, 정체가 뭐지?"
아론의 목소리가 낮게 거실을 울린다.
중저음의 목소리에 담긴 살벌한 기운이 공기를 바짝 메마르게 했다. 알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공간을 집어삼킨다.
허나 군인들은 함부로 아론에게 총구를 향할 수 없었다. 그들도 상대가 어떤 지위와 힘을 가진 자인지는 잘 아는 듯했다.
그리고 리더로 보이는 군인 한 명이 위압감을 이겨 내고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우린 뉴라이프 경비팀이다. VIP의 이상 바이오 신호를 수신하여....]
"마리아."
아론은 대뜸 군인의 말을 끊고는 마리아를 불렀다.
"예, 도련님."
"물어볼 것이 있다."
"네."
"혹시 '뉴라이프'에서는 VIP 경호팀으로 '안드로이드'들을 쓰나?"
"...!"
마리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안드로이드라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기업 VIP 경호팀은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고레벨 적응자를 쓰는 게 상식이다. 당연히 뉴라이프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순식간에 모든 생각들이 이어졌다.
그래, 지금 아론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군용 스캐너 기능이 달린 안구를 지닌 그에게는.
"...아뇨. 아닙니다."
"과연."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고.
"역시 수상한 놈들이 맞군."
[제기랄!]
상황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아론의 손에 검은 장갑이 덧씌워진다.
군인들의 총구가 일제히 아론을 향한다. 마치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아론 쪽이 더 빨랐다.
군인들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가느다란 섬광이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그와 동시에 군인들이 들고 있던 총이 단번에 반으로 갈라졌다. 한 발 늦게 방아쇠가 당겨지며 소총들이 내부폭발을 일으켰다.
퍼퍼퍼퍼퍼엉-!
플라즈마 소총에서 시작된 푸른색 화염이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하지만 Lv.3 파워드아머의 장갑에는 별다른 흠집을 내지 못했고, 군인들은 화염으로 일순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작전을 속행했다.
[VIP를 데리고 후퇴!]
[아론 스팅레이다! 녀석에게 붙잡히면 골치 아파진다! 후퇴!]
내부 회선으로 재빠르게 통신을 마친 소속 불명의 군인들은 교전을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Lv.3 군용 파워드아머의 등에서 푸른 불꽃이 분출되었다.
하이테크 갑옷의 힘을 빌린 군인들이 순식간에 일제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상공에서 대기하고 있는 비행형 수송차에 탑승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그들이 올라타기 직전, 난데없이 수송차의 장갑이 폭발을 일으키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 충격으로 수송차는 균형을 잃고 빙글빙글 돌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제길, 뭐야?!]
[아론 스팅레이... 아니야, 다른 놈이다!]
군인들은 눈앞에서 탈출 수단을 잃고 바닥으로 착지했다. 어느새 화염이 사그라지고, 스멀스멀 풍기는 연기 사이로 거대한 포구가 드러났다.
마리아였다.
그녀의 어깨에 거대한 구경의 유탄발사기가 솟아올라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신체가 빠른 속도로 변형하기 시작했다.
"모듈 온라인, [패스트 리로드]."
"모듈 온라인, [오토 락다운]."
"모듈 온라인, [킬링 플로어]."
"모듈 온라인, [피스 메이커]."
"모듈 온라인...."
십수 개의 전투 모듈들이 일제히 전개된다. 어깨와 팔, 허벅지와 종아리가 열리며 수많은 총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철컥철컥철컥!
순식간에 경찰 특공팀 하나 정도는 간단히 압도할 만한 화력이 갖추어진다. 이내 일말의 지체도 없이 모든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는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
그러나 군인들의 반응 역시 빨랐다.
그들은 파워드 아머의 기동력을 살려 재빠르게 엄폐물을 찾아 산개했다. 대부분 간발의 차로 총탄을 피해 숨는 데 성공했다.
물론 몇 명은 그대로 탄환에 적중했으나 Lv.3 군용 파워드 아머의 장갑은 상당히 튼튼했다. 조금의 겉껍질에 조금 흠집만 입혔을 뿐 유효한 타격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아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는 꼴이 꼭 바퀴벌레 같군."
그는 일렁이는 화염의 한가운데에서 손가락을 가볍게 한 번 튕겼다.
그 순간.
세상이 가로로 절단되었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가느다란 섬광이 번쩍인 직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잘려 나갔다.
아니, 그것 역시 결과를 확인하고서 알아챈 것에 불과했다.
기둥, 가구, 유리, 철근, 콘크리트.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것이 평등하게 양단된 이후였다. 물론 엄폐물 뒤에 숨었던 군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아아아악!]
파워드 아머의 두꺼운 장갑조차 아론 앞에서는 한낱 종잇장에 불과했다. 가슴이나 허리춤을 통째로 베인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 절단면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붉은색'이 아니라 '파란색'의 피와 온갖 기계장치들.
그들이 안드로이드임을 의미하는 증거였다.
[제기랄! 지원! 지원요청!]
안드로이드들이었기에 그 정도로는 고통을 느끼지도, 숨이 끊어지지도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필사적으로 상황으로 저항을 계속해 나가려 했다.
당연하지만.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누가 대장이지?"
또각또각.
순식간에 소강상태를 맞이한 전장의 한복판으로, 아론이 구둣발 소리를 내며 느긋하게 나아갔다.
그 모습은 마치, 패션쇼의 런웨이에 선 모델을 연상케 했다.
"이, 이게 뭐야...?"
그들의 전투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소년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겨우 30초.
아니, 어쩌면 더 짧을 수도 있다.
군용 파워드 아머로 무장한 안드로이드 병사 1개 소대가, 스팅레이 보안부도 아닌 재단 소속 인물 두 명에게 무참히 썰리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이게 황태자...?'
그제야 소년들은 깨달았다.
어째서 자신들의 부모님이 절대로, 절대로 아론 스팅레이의 심기만은 거스르지 말라고 당부했었는지.
'이, 인간 맞아...?'
물론 그들도 고레벨 적응자라는 게 어떤 존재들인지 알고 있었다. 기업마다 사병부대가 있으니, 그들의 훈련을 직접 관람한 적도 있다.
그러나, 아론 스팅레이는 궤가 달랐다.
소년들은 과연 자신들이 보유한 최강 전력을 꺼낸다고 해도, 과연 아론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게 소년들이 아론과 마리아의 활약에 아연실색하고 있던 사이, 인근에서 대기하던 경호원들이 뒤늦게 거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도,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
이런 빌어처먹을 것들!
대체 당신네 월급으로 얼마가 들어가는데 이딴 식으로밖에 일을 못해? 일이 다 끝나고 나서 오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라고 한바탕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전투가 워낙 순식간에 끝나 버렸으니 그들을 탓할 것도 없다.
애초에 안쪽에서 무슨 소란이 있든지 간에 허락하기 전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지시했던 것은 이쪽이었으니.
그보다.
지금은 물어봐야만 할 것이 있었다.
가장 연장자인 에단이 스팅레이 소속 두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클라크 실장."
"네, 도련님."
"아론 스팅레이가 여기에 온 건 알고 있었어?"
"네?"
그제야 수행원들은 풀빌라의 거실이 난장판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리아와 아론 스팅레이의 존재까지도도.
클라크 실장은 자신이 제대로 사고를 쳤다는 걸 깨달았는지 창백해진 얼굴로 곧장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몰랐다는 거지?"
"며, 면목 없습니다!"
아무래도 아론은 정문을 통해 들어온 게 아닌 듯했다. 아니, 사실 지금은 그런 책임 소재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만약 우리가 스팅레이랑 전쟁을 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지? 우리가 보유한 전력으로 저 인간을 이길 수 있어?"
"예?"
상당히 뜬금없는 질문.
그러나 클라크 실장은 곧장 자신의 도련님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지 눈치챘다. 이 거실에 벌어진 참상을 보면 뻔한 일이었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불가능합니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절대 불가능합니다. 현재 스팅레이를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세력은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꼽히는 밀레테크조차도 버티는 게 한계일 겁니다."
"어, 어차피 나노머신 원툴인 기업 아니야? 다른 기업들하고 연합해서 자금줄을 막아 버리면...."
클라크 실장은 단호히 말을 끊었다.
"도련님. 황가(皇家)를 얕보시면 안 됩니다."
단순히 자본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스팅레이에겐 현실의 무력이 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당장 자신을 보호할 무기와 군대가 없으면 날아오는 포탄에 산산조각이 날 뿐이다.
"뭣보다 아론 스팅레이는 괴물입니다."
정확한 그의 전투력이나 모듈링 스펙은 스팅레이의 기밀사항이라 파악하기 어렵다. 허나, 그와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는 적응자는 없을 것이다.
아니, 버틸 수 있는 자도 없을지 모른다.
"그, 그게 사실이야...?"
"예. 그러니 아무쪼록 스팅레이의, 특히 황태자의 심기는 거스르지 않는 게 좋습니다."
목숨을 오래 부지하고 싶다면요.
그렇게 설명하는 수행원의 진지함에.
소년들은 말없이 공포에 떨 뿐이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51화
전투가 일단락된 후.
나는 천천히 전장을 살피며 물었다.
"누가 대장이지?"
물론 거기에 순순히 대답하는 녀석은 없었다. 곧장 [Lv.3 트라우마 생체 스캐너] 모듈이 전개된 안구를 통해 쓰러진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스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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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안드로이드
시리얼 넘버: FT-12592
제조사: 로먼 코퍼레이션
특이사항: 상태 분실신고 접수됨.
대상: 안드로이드
시리얼 넘버: FT-58212
제조사: 로먼 코퍼레이션
특이사항: 소유자 살해 혐의. 경찰 수배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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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안드로이드. 누가 리더 역할인지는 특정하기 힘들군.'
외적인 요소로는 이 사건의 주동자를 가려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다만 스캐너와 연동하여 네트워크로 정보를 찾아보니 재밌는 정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분실신고에 주인 살해 용의로 경찰 수배라.'
그 말인즉, 오작동 개체.
다시 말해, 이 녀석들 전부 '자아'를 깨우친 안드로이드들이라는 소리였다.
시엘은 안드로이기 이전에 빙의자였으니, 녀석을 제외하면 처음 조우하는 '진짜' 자아를 가진 안드로이드라는 것이었다.
사건의 경위를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흥미가 솟구쳤다. 하지만 마냥 미래 세계관을 만끽하고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긴 했다.
"마리아."
"예, 도련님."
"이번 건은 조용히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이번 사건의 실체야 어쨌든, 결과만 놓고 봤을 때는 VVIP들이 머물던 곳을 안드로이드들이 습격한 것도 모자라 납치까지 시도한 것이다.
안 그래도 안드로이드들의 권리 따위는 개나 줘 버린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알려진다면, 아예 수습할 수 없는 수준이 되겠지.
물론 안드로이드의 인권 따위야 내 알 바는 아니다.
다만 안드로이드 관련 이벤트는 지금이 아니라 조금 후에 일어나야만 한다. 그 흐름까지 꼬이기는 원치 않는다.
'게다가 요새 내가 연속해서 문제를 너무 많이 일으켰단 말이지.'
뒷골목 용병들을 이용해서 습격 자작극을 벌이고, 타이탄 습격 사건을 막아 낸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안 그래도 미디어의 주목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이번 건까지 추가된다면 찌라시 언론사들이 얼마나 신나 할까.
뭐, 아무튼.
일단 조용히 수습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자.
'1부 2막 정크칩 사건. 1부 3막 안드로이드 반란. 그리고 배후에는 사이비 종교인 아시타교....'
안드로이드와 정크칩.
아마 이번 사건도 배후에 아시타교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빙의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목적을 모르겠군.'
1부 3막에서 아시타교가 아카데미 내에서 안드로이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자신들의 순수주의, 반(反)기계주의 사상을 퍼뜨리기 위함이었다.
기술과 과학의 지나친 발전은 되려 인류를 멸망으로 이끈다는 허무맹랑한 믿음을 말이다.
그러나 이번 건은 그러한 목적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였다.
'정크칩을 팔고 안드로이드를 기업 경호팀으로 위장해서 VIP를 납치한다? 놈들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대체 뭐지?'
돈이 필요해서?
아니, 그랬다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현장에 나타날 필요가 없다. 기업 VIP를 건드리는 건, 결국 자신들의 입지를 좁히는 짓일 뿐이다.
사상을 퍼뜨리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아니, 그랬다면 애초에 더 철저하게 정체를 숨겼겠지. 이제 막 거래를 튼 초짜딜러인 시엘이 소문이라곤 하나 '아시타교'라는 이름을 바로 들었을 정도다.
불법 마약을 제조하는 종교라니, 대체 누가 좋다고 그런 곳에 귀의하겠는가?
'게다가 정말로 빙의자가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1부 1막에서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지?'
포인트를 벌기 위해 다소 무리해서라도 아이리나 다른 주조연들에게 접근하려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1부 1막의 공헌도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가 독식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이런저런 가설을 세워 보았지만 당장 확실하게 '이거다!' 하고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결국, 정보가 더 필요하다.
"마리아. 이 녀석들이 그 정크칩을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 확인해 보았나?"
"죄송합니다. 설득하던 중에 습격을 받은지라...."
마리아는 내가 도착하기 전 벌어졌던 일들을 간단히 요약해서 설명했다.
비행청소년 멤버들 중에서 아마 가장 어린 에드워드라는 녀석이 정크칩을 구해 온 것 같다는 이야기.
녀석이 갑자기 보인 이상 행동.
그리고 경호팀 행세를 하며 갑자기 들이닥친 안드로이드들까지.
"흠. 에드워드라고?"
"그렇습니다."
현재 녀석은 정문 쪽을 지키던 경호원들에게 응급처치를 받고 있었다.
꽤 부상이 심각해 보이긴 해도, 이 세계의 기술력이라면 그리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아마 내일쯤이면 호○맨마냥 새로운 얼굴로 갈아 끼워서 나타나겠지.
"일단 병원부터 데려가는 게 좋겠군."
"네. 보호자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덤으로 뉴라이프 쪽에 최근에 장비를 도난당한 적이 없는지 확인해 봐라. 그게 아니라면 녀석들이 저런 물건을 어디서 났는지 추적해 보고."
"알겠습니다. 위자드를 붙이겠습니다."
개체마다 다르긴 해도 안드로이드들은 인간과 달리 고문이나 협박이 잘 통하지 않는 편이다. 쓸데없이 힘을 빼느니 위자드로 머릿속 메모리를 뜯어보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그리고 남은 건...."
다른 단서를 찾는 것.
나는 스캐너를 통해 소강상태가 된 현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쩌면 놓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나타났다.
"이, 이건 뭐지?"
에드워드라고 했던가.
쓰러진 녀석들 돌보던 경호원들이 중얼거렸다. 그의 머리 쪽 소켓에 박힌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었다.
"...."
"제가 한 번 보겠습니다."
내가 눈치를 주자, 마리아가 다시금 에드워드에게 다가가 그의 소켓을 확인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다가섰고, 경호원들이 겁을 먹은 듯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군요."
"그 정크칩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아까 주웠던 정크칩을 주워, 에드워드의 목덜미에 박힌 물건과 모양을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아니... 미묘하게 다른 종류군요."
"제대로 확인해 보고 싶군."
"알겠습니다."
마리아는 에드워드의 다른 소켓에 케이블을 연결해서 무언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딸칵! 소리를 내며 수동으로는 빠지지 않던 칩이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두 개의 정크칩을 바로 옆에 놓고 비교하자 마리아의 말마따나 모양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처음 주웠던 정크칩이 빨간색 삼각형에 점이 '두 개'였다면, 이건 점이 '한 개'였다.
아마도 같은 시리즈의 정크칩.
점의 개수로 1편과 2편을 표시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내용을 직접 확인해 봐야만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내 머리에 이런 수상쩍은 칩을 꽂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은 두 개 다 회수해서 분석을...."
그때였다.
마리아에게 지시를 내리며 정크칩을 두 개 다 건네받은 순간.
"널 알고 있다, 아론 스팅레이."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
내게만 들린 것이 아니었다.
난데없이 울려 퍼진 목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를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이 목소리, 대체 어디서...?"
그리고 곧 범인을 찾아냈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다름 아닌, 에드워드가 내는 것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를 흘리며 기절해 있던 소년에게서, 믿기 어려울 만큼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련님!"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야! 너 왜 그래!?"
각자의 방식으로 놀라는 사람들.
그러나 에드워드는 아랑곳 않고 나만을 바라보았다. 피가 흘러내리는 이마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눈을 내게 고정한 채 말했다.
"이 이상 내게 관여하지 마라. 이건 경고다."
"경고?"
내가 의문을 품는 것과 동시에.
퍼엉-! 퍼엉-! 퍼엉-!
내 손에 쓰러져 거실 곳곳에 널브러져 있던 안드로이드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머리가 날아간 것이다.
"아, 아론 도련님... 이건 대체...?"
"진정해라."
마리아가 보기 드물게 당황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냉정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당연하지만 이건 메인스토리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사건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빙의자의 짓.
'몸을 조종하고 있는 건가?'
조종한다고?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가는 이미지가 있었다. 원작 주인공 셰이드 웰즈의 능력.
"...넌 누구지?"
"알 필요 없다고 했을 터."
그때였다.
내 안구 스캐너가 멀리서 무언가 번쩍이는 것을 포착했다. 그에 따라 내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팔로 이마를 가로막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창문을 깨뜨리며 내게 날아들었다.
쿠웅!
묵직한 충격이 팔에 전해졌다.
뒤늦게 멀리서부터 총성이 따라왔고, 내 피하장갑을 뚫지 못한 탄환이 바닥으로 금속성을 내며 떨어졌다.
"저, 저격수?!"
"다들 엄폐해!"
경호원들이 황급히 소년들을 피신시켰다. 마리아 역시 내게 피할 것을 권고했지만, 그걸 들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에드워드... 아니, 정확히는 놈의 몸을 차지한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냉정하게 뇌까렸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나?"
"하하하. 네 패배다...."
놈은 음침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연결이 끊긴 듯이 다시 기절해 버리는 에드워드.
'패배...? 잠깐!'
놈이 떠나기 전 내뱉은 묘한 대사에 뒤늦게 눈치챘다.
내가 쥐고 있던 두 개의 정크칩에서 작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플라스틱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전기 탄환이었나?'
내 본체에는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지만, 내 팔을 전선 삼아 흐른 강한 전류에 칩이 타 버린 것이다.
'쯧. 처음부터 목적은 정크칩이었군.'
이제야 앞뒤가 맞는다.
애초에 납치극을 벌이려고 했던 것도, 사람이 아니라 정크칩이 목적이었다. 아마 다른 이들에게 들켜선 안 되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던 거겠지.
'이건... 골치 아프게 됐군.'
어쩌면.
아니, 매우 높은 확률로.
범인은 '주인공의 능력'을 손에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리아. 비상사태다."
물론 내 상상의 비약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나쁜 예감은 보통 빗나가질 않기에.
나는 곧장 지시를 내렸다.
"현재 아카데미에서 진행되는 정크칩 단속을 강화해라. 다른 후원기업에도 이 사실을 알리고, 협력해서 이딴 물건이 절대로 유통되지 못하게 해라."
"물론입니다, 도련님."
"단속에 걸린 학생이 있다면 한 녀석도 빠짐없이 모아서 따로 관리하도록.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는 실시간으로 원작의 스토리가 퍼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캐릭터와 복선, 사건들이 유기체처럼 얽혀서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 냈다.
"사일런스라는 녀석을 찾아서 잡아라. 본명은 박태준, 전술교전부 3학년이다. 혐의가 없다면 만들어 내서라도 구속해."
"알겠습니다."
원래는 시간을 들여서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일단은 녀석을 붙잡고 봐야 한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무리한 방식을 쓰진 않았을 텐데. 아쉬움이 다소 남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일런스를 잡는 대로 내게 연락해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카데미 밖으로는 못 나가게 하도록. 그리고 특별반 두 명에게도 따로 감시역을 붙여서...."
"...도련님."
내 이야기를 듣던 마리아의 눈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미 아카데미에서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52화
소설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품에서는 주인공 셰이드 웰즈가 '네크로맨서'로서 성장하는 모습이 주로 비춰지고는 했다.
처음엔 [시체먹는 자]를 통한 모듈포식, 다음은 해킹관련 모듈 습득을 계기로 '테크 위자드'로서 각성.
그렇게 위자드로서 폭발적으로 능력을 성장시키던 주인공은, 본격적으로 [신비]사냥에 나서기 시작한 중반부부터 다른 누구에게도 없는 특별한 능력을 얻는다.
바로, 마법.
그는 마녀 에반젤린의 마법과 미유의 기술을 접목시켜서, '네크로맨싱'이라는 매우 특별한 기술을 창조해 낸다.
가령 괴물들의 시체에 특별한 칩을 박아 되살려서 종으로 부린다든가. 상대의 신비모듈을 해킹하여 일시적으로 능력을 복제한다든가.
그야말로 '네크로맨서'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능력으로 승승장구해 나가며, 끝내는 만악의 근원인 '스팅레이 그룹'을 박살 내고 세상을 구하는 것이 엔딩까지의 내용.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주인공의 '네크로맨싱'을 모방한 듯한 능력을 지닌 놈이 나타난 것이었다.
다름 아닌 내 '적'으로.
* * *
"집단 자해 시도라고?"
"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학생 십수 명이 단체로 이상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각자의 방에서 같은 시각에 말입니다."
"단순한 해프닝일 가능성은?"
"아마 그럴 가능성은...."
너도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알잖느냐.
그런 뉘앙스를 풍기며 마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혀를 차며 상황을 정리했다.
칩에 감염된 사람을 조종한다.
아마도 해킹과 관련된 기술.
그리고 어쩐지 그 능력은 주인공이 중후반부에나 습득하는 '네크로맨싱'을 연상시켰다.
우연일까?
아니, 그럴 리가.
'놈은 [그것]을 손에 넣은 거다.'
최악의 시나리오.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계속해 보도록."
"아마 그 하얀색 정크칩에 감염된 학생들로 보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타이밍을 생각해 보았을 때 아마 그리 생각하는 편이 앞뒤가 맞을 듯합니다."
제기랄.
그렇게 특별단속을 했는데도 학생들과 정크칩을 완전히 떼어 놓지는 못한 듯했다.
원인은 정확히 모르겠다.
실무자들의 태만으로 인한 허점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단속이 시작되기 전부터 정크칩에 감염된 녀석들이 있었던 건지.
'어디에나 구멍은 존재한다는 건가.'
아무리 아카데미 내부에서 쥐 잡듯이 들쑤셔도, 학생들이 외부에서 직접 헛짓거리를 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한다.
아마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녀석들도 그런 식으로 구멍을 빠져나갔던 거겠지.
그나마 특별단속 시행 덕에 피해자를 줄일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원래 목적은 그게 아니긴 했지만.
"아카데미 측의 대응은?"
"...일단 학생들을 의무실에서 치료 중이라 합니다. 과기부 학생들 중에서는 상처가 꽤 심한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으면서 나와 대화하고 있는 것인지, 마리아가 대답하기까지는 조금 뜸이 들었다.
전교부의 적응자 학생들은 어지간한 상처쯤이야 초인적인 회복력으로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나겠지.
하지만 평균적인 신체 능력을 지닌 과기부 학생들 중에선, 조금만 대처가 늦어졌어도 목숨이 위험할 뻔했던 녀석도 있었다는 듯했다.
"피해자에 우리 쪽 장학생들도 포함되어 있나?"
"네. 두 명이라고 합니다."
"설마 특별반 소속인가?"
"아뇨. 일반 장학생입니다."
그렇겠지.
아이리는 사이버 마약쟁이들의 끔찍한 말로를 보며 자랐고, 미유는 정크칩의 기술적 위험성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녀석이니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상 행동을 일으킨 학생들은 하나같이 자해 시도 전에 어딘가에 글귀를 남겼다고 합니다."
"글귀?"
"'아론 스팅레이'라고 말입니다."
"내게 보내는 경고로군."
"그런 듯합니다."
이건 내게 보내는 경고다.
자신들의 활동을 이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
학생들은 인질이었고, 섣불리 해결하려고 덤벼들었다간 그때는 자해만으로는 끝나지 않겠지.
'곤란하게 됐군.'
놈의 계획과 상황이 뻔히 보인다.
범인의 생각이 훤히 읽히는데도, 당장으로선 손을 쓸 수가 없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려야겠지.
나는 심호흡을 하며 머릿속으로 현재까지 파악된 상황을 차근차근 정리해 보기로 했다.
'우선은....'
첫 번째.
아시타교에는 빙의자가 있다.
녀석은 '모종의 방식'으로 원작 주인공의 능력을 흉내 내는 데에 성공했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중이었다.
'아카데미와 메가코프 쪽 인물들을 감염시켜서 복속시킬 생각이었던 거겠지. 그리고 미묘하게 차이는 있지만 정크칩을 이용한 조종방식을 보면....'
틀림없다.
정확한 과정까진 알 수 없으나.
놈은 '그것'을 손에 넣은 거다.
아마도 내가 매우 싫어할 방식으로.
두 번째.
우연히도 놈은 계획을 진행하던 중에 내게 그 사실을 들켰다. 어쩌면 놈에게는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에게 말이다.
세 번째.
놈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을 이용한 경고. 그 방식에서 놈의 당황스러움과 초조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내게 대항할 수단을 완벽하게 준비했다면, 이렇게 무리할 필요도 없었겠지.'
즉, 이렇게 무리하게 나오는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인질을 통해 내가 함부로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처음 세웠던 계획을 실행하려는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나 역시 놈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빠르게 추적해서 경쟁에서 탈락시켜야 한다.
네 번째.
사일런스가 정크칩에 감염되었다.
아직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아카데미에 정크칩 판매상은 사일런스가 유일했고, 그는 물건을 팔기 전 자기가 써 보는 습관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사일런스는 진즉에 적의 수중에 넘어갔었다는 거겠지.'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아마 내가 영입을 제안하기 이전부터 그는 정크칩에 먹힌 상태였으리라. 그래서 내 제안을 거절했던 거고.
'이렇게 보니, 너무 아카데미 내부 상황에만 몰두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정리하자면.
첫 번째, 아시타교에 빙의자가 있다. 놈은 '그것'을 획득함으로서 주인공의 능력을 모방하고 있다.
두 번째, 놈은 계획을 진행시키던 도중에 그것을 내게 들켰다.
세 번째, 다행히도 아직 그 계획은 완성되지 않았다. 현재 놈은 힘이 부족하다.
네 번째, 놈은 부족한 힘을 키울 시간을 벌기 위해 사일런스를 인질로 내세웠다.
'자, 이제 어쩐다.'
우선 사일런스 외의 학생들이 인질로 잡힌 부분은 별문제가 안 된다.
어차피 아카데미야 기업의 사병 육성소였으니 몇 명쯤 더 죽어 나간대도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다른 기업들도 아닌 척하면서 학생들을 실험쥐나 총알받이로 쓰곤 했으니.
'엑스트라들이야 뭐 내가 일일이 신경 쓸 바 아니고, 뭔 일이 나더라도 내게 불똥이 튈 일은 없지. 문제는....'
문제는 사일런스다.
1부 2막의 핵심 인물.
이 이후로도 없으면 스토리 공략 난도가 대폭 상승하는 중요한 조연 캐릭터.
만약 내가 어쭙잖게 이 사태에 대처하려고 한다면 사일런스가 위험해진다.
어차피 나와는 정면으로는 맞붙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인질을 붙잡은 것일 텐데, 여차하면 같이 죽자는 심산으로 사일런스를 없애 버릴 수도 있다.
'...마음에 안 드는군.'
이곳은 내 세계다.
내 정원에서 멋도 모르고 모든 게 제 것인 양 날뛰어 대는 꼴이 마음에 안 든다.
어디선가 자꾸 끼어들어 내 계획에 훼방을 놓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꾀를 내면 내게 이길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더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히 우리 애들을 건드려?'
방식 자체가 맘에 안 들었다.
놈의 방식에선 원작과 스토리에 대한 아무런 존중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놈의 방식이 과격할지라도, 혹은 나와 정반대의 방향성을 추구하여 내 계획에 방해가 될지라도.
만약 놈의 방식에서 작품에 대한 일말의 애정, 작가가 만든 플롯에 대한 한 줌의 존중이라도 느껴졌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으리라.
'앞으로 이 세계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어떻게 되든 별로 신경 안 쓴다는 거지?'
누구는 멋대로 죽어 버린 주인공의 빈틈을 메우느라 미칠 지경인데, 자기 혼자 살겠다고 멋대로 '그것'에 손을 댄다고?
"...용서 못 한다."
"도, 도련님?"
나는 이를 바득 갈았다.
그리고 곧장 마리아에게 지시했다.
"준비해라, 마리아."
"무, 무엇을 말입니까?"
"전쟁... 아니, 사냥이다."
내 말에 마리아가 놀랐다.
"설마 아시타 교와 맞붙으실 겁니까?"
"회장님께 전할 변명거리는 내가 생각해 두지. 모든 건 내가 책임질 테니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사냥을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내 진심을 느꼈는지, 마리아는 군말 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각오를 다졌다.
가만히 두지 않는다.
내 정원에서 뭣도 모르고 날뛰고 있는 쥐새끼에겐, 죽음이 어울린다.
* * *
트리니티 아카데미 학생교무관.
특별동 스팅레이 특별장학생 기숙사.
준비된 방은 10개가 넘지만, 주인이 있는 방은 단 두 곳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곳의 복도는 언제나 한적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훈련을 끝마친 아이리는 그곳을 홀로 터덜터덜 걸어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도 힘들었어...."
수업 자체는 일찌감치 끝났지만, 따로 전투 시뮬레이션 훈련실에서 연습한 탓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론의 주도로 훈련이 이루어졌지만, 그는 현재 G20이라는 도시 최대의 이벤트에 참가하느라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그는 떠나기 전 아이리에게 홀로 훈련을 계속하기를 당부했다.
사실 누가 감시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 지시를 어겨도 나무랄 사람은 없겠지만, 아이리는 착실히 그의 말에 따르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아론이 제안한 방패를 이용한 전투 방식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는 것을 점점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전투 실습에서 확실히 느꼈다.
-3: 3 팀 대항전을 하겠습니다.
교관의 말에 따라 아이리는 다른 학생들과 팀을 이루어서 모의전투에 나섰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방패를 들고 훈련 준비를 받던 아이리에게 다른 학생들이 시비를 걸어댔다.
-방패? 뭔 방패야, 중세시대도 아니고.
-모듈을 인스톨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지. 무겁게 들고 다닐 필요도 없고.
-너도 피부 장갑 모듈을 하나 사 달라 하지 그러냐. 재단 이사장이 너 총애한다면서. 왜 그런 기본적인 모듈 하나 안 사주신대?
-아, 혹시 '다른 의미'로 총애하는 거 아니야? '기업 사병'이 아니라 '러브돌'로 옆에 두고 싶어 하는 걸지도.
저급한 질투와 유치한 시비였다.
예전의 아이리 같았으면 곧장 면상을 짓뭉개 줬을 테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지난번의 그 사건도 있었고, 평소 아론이 자신을 은근히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 싫어, 조금 더 성숙해지자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응. 멋대로 지껄여.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시비를 넘기고서, 어느덧 아이리가 속한 팀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방패를 앞세운 채 적 팀에게 돌격했고, 결과는 놀라웠다.
미유의 특제 방패는 적 팀의 모든 공격수단을 거뜬히 막아 냈고, 아이리의 전문인 근접전으로 돌입하기 쉽게 해 주었다.
원래라면 총알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느라 체력 소모가 심했을 텐데, 방패 하나로 돌파력이 남달라졌다.
결국 방패의 활약으로 모의전투의 결과는 아이리의 속한 팀이 수월하게 승리를 가져갔고, 아이리는 아론의 조언이 옳았음을 다시금 피부로 느꼈다.
'이게 내 새로운 스타일이라는 거지?'
처음에 어색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했던 방패였지만, 어느 순간 그 묵직함이 든든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직 다소 어설픈 면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거야 반복 훈련과 새로운 전투 모듈로 보충하면 되겠지.
그러면 더 강해질 수 있다.
더 강해지면 출신 때문에 무시하는 놈들도 깡그리 사라지겠지.
그리고 아론에게도 인정받아서, 오빠의 죽음에 대한 정보를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으로 밤늦게까지 자율 훈련을 충실히 하다가 방으로 돌아온 아이리였다. 그녀는 깔끔하게 샤워를 마치고 내일을 위해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방어자세... 모듈... 사격....'
아론이 강조한 요소들을 머릿속으로 되짚으며 서서히 잠에 빠지려는 찰나.
따르르르릉-!
갑작스레 머릿속에 벨소리가 울려댔다.
전화가 온 것이었다.
"아이씨, 누구야 이 시간에...."
짜증을 내던 그녀였으나, 전화를 건 상대의 이름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여, 여보세요~?"
자, 잠깐 뭐냐고, 이 목소리는.
왜 이리 밝은 소리를 내는 건데.
평소처럼 말하라고, 평소처럼.
순간 자기가 해 놓고도 여우짓처럼 느껴졌다. 딱히 그에게 애교를 부릴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들뜬 반응을 내놓고 말았다.
'이게 아니야, 아이리! 정신 차려!'
아이리는 그날의 기억을 되새겼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도, 그날 아론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는 여태껏 그녀가 스스로 외면하고 억지로 감춰 두었던 진심마저 사정없이 파헤쳐 드러냈던 것이다.
처음으로 마주한 자신의 진짜 모습이란, 어찌나 그리도 유약하고 한심한 것이었는지.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더는 그날처럼 질질 짜지 않을 거다. 그리고 아론 앞에서도 더더욱 떳떳할 수 있도록 평소의 행동부터 고쳐야겠지.
"크흠."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금 말투를 고쳐서 말했다. 군기가 바짝 들은 것을 보여 줄 수 있게끔.
"예, 전화 받았습니다."
[....]
"저, 전화 받았습니다?"
아이리가 재차 응답하자, 아론이 조금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물어왔다.
[...말투가 왜 그러지?]
"저, 저는 원래 이랬습니다만."
순간 뜨끔했지만 아이리는 꿋꿋이 연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자 아론의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몇 초간의 시간이 더 걸렸고....
[...미안하다. 너무 늦은 시간에 피곤하게 했군. 내일 얘기하도록 하겠다.]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거든요?!"
물론 피곤한 건 사실이긴 한데!
쩝.
점잔을 좀 빼려고 했는데 아론에겐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어김없이 평소의 모습대로 돌아온 아이리는 한숨과 함께 통화를 이어 나갔다.
"휴. 저는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정말 괜찮은가.]
"그럼요. 중요한 얘기일 거잖아요."
아론이 밤중에 먼저 이렇게 전화를 걸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뭣보다 막연한 느낌이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묘한 초조함이 묻어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죠?"
[부탁할 게 있다.]
아론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네가 쓰러뜨려야 할 녀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