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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13ATRIBUT / Chapter 14: 14

Chương 14: 14

*

잊힌 신은 이름을 되찾았다.

"나의 이름은 히프노스."

모습도 건장해졌다.

비록 눈은 여전히 회색빛이었으나 고름이 나오진 않았다.

"한때 신이었던 꿈의 지배자이자, 멸망에게 패배하여 배신한 배신자······."

그리고 두 여신을 사랑했던 신이다.

아아.

모두 기억났다.

이름도, 과거도,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도.

히프노스는 몸을 떨었다.

그리곤 그를 바라보았다.

탐욕.

아니, 이제는 그렇게 부르면 안 되겠지.

히프노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당신을 따르겠소, 종말이여."

*

"'황금률의 기사단'이 세계수의 뿌리에 도착했습니다."

"모든 불가사의 업적이 완료됩니다."

"추가 불가사의 업적이 생성, 완료되었습니다."

"'명예의 세계수'가 온전하게 회복됩니다."

"획득하는 '온전한 황금률'의 양이 두 배로 증가합니다."

"'명예의 세계수'에서 뿜어지는 '황금률'의 배출이 증폭합니다."

"'세계수 커뮤니티'가 출현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6 - 파티 던전 클리어하기'가 완료됐습니다!"

"점수를 정산 중입니다."

"점수를 정산 중입니다."

"점수를 정산 중입니다."

······.

······.

설계자.

"내가, 아니, 제가 아는 전부를 얘기해드리겠습니다."

히프노스가 말했다.

그의 눈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전부 이야기한 게 아니었던가?"

탐욕의 악마가 나라는 사실을.

솔직히 놀랍지만, 듣다보니 왜인지 이해가 됐으니까.

하지만 히프노스가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종말께서 아셔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설계자."

"설계자라니?"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제 물음에 답해주십시오. 모든 조각을 이어보면 반드시 완성되는 그림이 있을 겁니다. ······아무도 들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이곳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히프노스의 표정은 한결 진지했다.

세계수의 던전. 그의 터를 벗어나면 마치 누가 들을 수도 있다는 듯.

더없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그리하지."

"우선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하프노스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

히프노스.

그는 꿈을 지배하는 신이다.

모든 것을 관찰하는 관찰자였다.

꿈은 그 존재의 모든 것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 나쁜 것, 되고 싶은 것, 되고 싶지 않은 것, 생각하고 상상했던 모든 게 꿈에서 나타나기 마련이었으므로.

하여 꿈을 관찰하면 그 존재를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악몽을 꾸게 하거나 좋지 않은 기억을 되살리게 만드는 등의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히프노스는 누군가를 관찰하는 걸 좋아했다.

'신들은 꿈을 꾸지 않아.'

그래서 백신전은 그에게 재미없는 곳이었다.

신은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을 꾼다는 건 필멸자에게만 주어지는 특혜.

이는 절대적인 진리다.

진리가 지정해놓은 규율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일까.

히프노스의 두 눈에 두 여신이 담기기 시작한 것은.

'레아, 피나······ 두 여신은 꿈을 꾼다.'

확실하게 볼 수는 없었으나.

히프노스는 두 여신이 꿈을 꾸는 것을 느꼈다.

먼 미래를 보는 예지와 같은 권능이 아니라 너무나도 순수한 '꿈' 그 자체.

'불멸자가 꿈을 꾼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히프노스는 궁금했다.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두 여신이 진정으로 꿈을 꾼다면.

'나도······ 꿀 수 있다는 말인가. 꿈을.'

자신도 꿈을 꿀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히프노스는 두 여신을 관찰했고, 그 호기심은 이내 연민처럼 변해버렸다.

하지만 이게 무슨 감정인지 당시의 히프노스는 몰랐다.

다만, 두 여신이 꿈을 꾸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탐욕의 악마. 그와 관련된 꿈을 꾸는구나.'

어찌하여 신이 악마의 꿈을 꾸는가.

다른 여신들이 말하는 '귀여움'은 말 그대로 애완동물을 대할 때의 이야기다.

결코 악마를 자신과 같은 격에 올려두어 말하지 않는다.

한데, 레아와 피나는 달랐다.

둘은 탐욕의 악마를 자신과 동급으로 여기고 있었다.

선망하며, 애틋한 감정을 담아 바라보았다.

왜?

너희는 어째서 악마 따위를 꿈꾸며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지?

'악몽을 꾸게 해주마.'

히프노스는 탐욕의 악마가 지독한 악몽을 꾸게 했다.

녀석을 찾아내는 건 쉬웠다.

제알아서 매일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므로.

신이 꿈을 꾸지 못한다면, 악마 역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는 게 규율이며 진리다.

그런데 왜 저놈은 세상이 정해놓은 진리를 어기는가?

매일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탐욕은 악몽을 꿨다.

악몽이 이어지면 미쳐버리기 마련.

감정을 먹고 사는 악마는 절대로 버틸 수 없다.

하지만······.

탐욕은 버텨낸 것이다.

아니, 그저 버텨낸 것만이 아니라.

"내가 악몽 따위에 질 줄 알고?"

"다음에도 꿈속에 나타나면 박살을 내버린다!"

······ 악몽을, 이겨냈다.

계속해서 발악하듯 악몽과 싸워서 승리하더니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악마가 깨달음이라니?'

미친 일이다.

간혹 신화적인 존재가 악몽을 이겨내고 깨달음을 쟁취해 신성한 신격을 얻는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이놈은 탐욕이다.

악마란 말이다.

깨달음이란 진심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뉘우치는 것.

그런데 악마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뉘우칠 수 있다고?

그딴 악마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나.

······ 확실히 탐욕은 다른 악마와 다를지도 모른다.

허나 히프노스는 인정할 수 없었다.

두 여신의 총애를 받는 악마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신이 꿈을 꾼다면, 악마가 아니라 마땅히 자신을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여신이 히프노스를 보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비뚤어진 관심은 이내 증오로 변질됐다.

'나는······ 후회한다.'

이후 멸망이 출현했을 때.

히프노스는 신들을 배신했다.

스스로 악신이 되고, 멸망의 눈이 되었다.

히프노스의 배신으로 인해 멸망은 더욱 빠르게 원하는 바를 찾아냈고, 이루어냈다.

신들이 숨겨놓은 시초의 인형들, 신의 상징물, 그 외의 지고하며 유일한 모든 것들을.

멸망은 순식간에 세를 불렸으며 기사들을 신적인 장비들로 무장시켰다.

뿐만인가.

끊임없이 악몽을 뿌려, 인간들이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악몽과 망상으로 하여금 매일 같이 그들은 배신했다.

멸망을 노리는 이들 또한 사전에 발견하여 분열시켰다.

'너무 늦어버렸지.'

히프노스는 자신의 행위를, 그릇된 분노로 시작된 모든 것을 후회했다.

탐욕이 멸망과 싸우는 모습을 보며.

끝내 여신 레아가 멸망에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의 대부분이 심연에 가라앉고, 멸망은 레아의 죽음을 끝으로 징벌의 행위를 끝냈다.

그 뒤 창공의 여신 피나가 남은 대륙을 하늘로 띄웠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히프노스는 결심한 것이다.

비록 늦었고, 한심했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

'악신들이 저 대지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

신이 사라진 세상.

저 창공의 대륙을 수많은 잡신과 악신들이 노릴 터.

주도권을 쥐고자 온갖 술수를 쓸 테다.

하여 히프노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악신들을 모두를 세계수 안에 가두었고, 함께 잊히고자 했다.

세계수의 던전은 히프노스가 그린 꿈의 세계.

히프노스의 터이자, 꿈과 함께 잊혀갈 장소였다.

그것만이 자신이`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으므로.

그렇게 잊힌 채 악신들과 함께 소멸할 예정이었으나.

"종말이여······."

운명의 장난처럼.

탐욕의 영혼을 지닌 자가 나타났다.

두 여신의 가장 위대한 축복과 함께하며.

모든 악신들을 소멸시키면서.

그리고 깨달았다.

'여신 피나. 그대도······ 그대가 지켰는가.'

여신 레아.

그녀는 멸망을 멈추게 만들었고, 탐욕의 영혼을 지켜냈다.

이후 탐욕의 영혼은 윤회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회의 고리란 창세의 신조차도 감히 건들 수 없는 '섭리'다.

섭리는 진리의 위에 존재하는 누구도 건들 수 없는 개념이기에 탐욕의 영혼이 언제, 어디서 다시 윤회할지 그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피나는 찾아냈다.

눈앞의 남자를.

'탐욕의 악마가 가진 업은 죽음뿐일진대.'

본래 악마는 윤회할 수 없다.

죽는 순간 소멸하는 게 그들의 운명이다.

그런데도 탐욕의 악마는 두 여신의 축복에 의해 윤회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업(業) 자체를 지울 수는 없다는 것.

필사(必死)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순간 죽음에 직면했으리라.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하건만, 그럼에도 살아있다면 그건.

'피나의 희생으로 죽음이 위장됐다.'

피나가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업을 끊어낸 것이리라.

아니, 끊어냈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업을 바꿔치기했다.

그제야 히프노스는 여신들의 품에 안긴 거대한 영혼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탐욕의 악마가 지닌 필멸의 업과 비슷할 정도의 크기를 가진 업을 지닌 존재.

그가 대신 죽으며 그의 업을 눈앞의 남자가, 종말이 대신 뒤집어썼다.

이런 게 가능하다니.

'이걸······ 이걸 대체 누가 설계한거지?'

전부를 속였다.

착하디 착한 피나가 이러한 설계를 했을 리 만무하다.

어쩌면 그녀도 정확히는 몰랐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설계자조차도 정확한 결말을 확신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종말.

그가 한 번, 최초로 죽었을 때의 이야기가.

*

히프노스의 말마따나, 나는 한 번 죽었다.

바알을 상대할 때 '멸망의 파편'에 의해 먹힌 것이다.

그리하여 부활했지만.

"그때가 아닙니다. 그 전, 피나가 영혼을 소모했을 때 죽었을 겁니다. 그때 진짜 죽음이 찾아왔겠지요."

······ 설마 빌헬름을 말하는 건가?

대원정의 끝.

마왕을 죽였지만, 버그 때문에 역으로 빌헬름이 게임오버를 당했다.

마왕이 빌헬름의 육체를 빼앗았으나 영혼만은 빼앗지 못했다.

"아아! 빌헬름.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의지가 빌헬름이라는 자의 것이었군요. 맞습니다. 아마 그때, 종말께서도······ 박현명님께서도 죽었을 겁니다."

"내가 그때 죽었다니. 말도 안 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게임일 뿐이었다.

나는 빌헬름의 죽음을 컴퓨터 화면으로 지켜보았다.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십시오. 자세하게."

전혀 생각도 못해본 방향이다.

하여 나는 그때의 상황을 모두 전달했다.

그러자 히프노스가 턱을 쓸었다.

"··· 과연. 마왕이 지닌 멸망의 파편은 멸망과 가장 근접해있는 것. 멸망의 파편이 탐욕의 영혼을 알아보았다면, 그가 노린건 빌헬름이 아닙니다."

"나를 노렸다고?"

"예. 탐욕의 영혼과 육체. 무한하게 강해질 수 있는 그 그릇을 원했겠지요."

"······ 하지만 피나가 막아냈다."

"맞습니다. 창공의 여신 피나도 그 사태만은 반드시 피하고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완전히 막지는 못했습니다."

"빌헬름이······."

빌헬름이 죽었다.

말명의 파편이 만든 버그 때문에.

하지만 그 버그로 죽어야할 사람은 빌헬름이 아니라 나였다는 말이다.

"피나가 희생으로 막자, 멸망의 파편은 빌헬름을 노렸습니다. 빌헬름의 육체와 영혼이 빚어낸 격 또한 탐욕에 못지 않았으니."

"나 대신 죽었다는 건가?"

"··· 부정하진 못하겠군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빌헬름. 그의 영혼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의 의지가 당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건, 그가 당신을 증오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빌헬름의 의지가 나와 함께하고 있다.

두 여신들의 의지와 함께.

자신의 죽음이 나로 인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문제는······ 마왕입니다."

"빌헬름의 육체를 차지해 더 강해졌을 테지."

"예. 그리고 빌헬름의 육체를 차지한 후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됐을 겁니다."

"맞다."

"종말이시여, 당신을 노리는 겁니다."

"······ 침략의 이유가 나 때문이다?"

마왕이 뜬금없이 지구를 침략한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말.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빌헬름이 죽은 뒤 모든게 뒤바뀌었다.

빌헬름이 죽어서가 아니라, 정확히는 나 때문이라는 것이다.

"빌헬름과 연결된 존재가 탐욕임을 알아차렸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마왕이 탐욕을 어떻게 아는거지? 탐욕은 멸망의 시대에 존재했던 악마다. 그때 마왕은 없었을 텐데?"

마왕이 탄생한 것은 멸망의 시대 이후다.

판게니아가 창공으로 떠오른 뒤의 이야기였다.

히프노스가 말했다.

"마왕은······ 멸망의 자식이나, 실패작입니다. 하지만 탐욕의 육체와 영혼을 지배해 자신이 실패작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할 겁니다. 또한 틀림없이, 멸망을 넘어서고 싶어할 터이니······."

히프노스가 눈을 감았다.

빌헬름의 육체를 강탈한 마왕은 강해졌을 것이다.

빌헬름이 남긴 의지를 보건대, 그의 육체 역시 탐욕과 비슷한 본질을 지니고 있을 터.

강해지고자하는 무한한 욕망이 육체로 표현되었으리라.

히프노스는 사건의 순서를 회상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 대원정은 왜 일으키셨습니까?"

"처음부터 게임의 목표가 마왕을 죽이는 것이었다."

게임, 판게니아는 최종보스 '마왕'을 죽이도록 설계되어있다.

마왕을 죽이는 자에게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홍보도 했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왜 마왕을 죽여야 했을까요? 마왕을 죽여봤자 끝나지 않을 텐데."

판게니아의 구원은 마왕을 죽인다고 오지 않는다.

애초에 마왕이 판게니아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나.

마계와 관련된 자잘한 사건은 많지만, 판게니아의 가장 큰 위협은 마왕이 아닐진대.

······ 말을 듣다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히프노스가 마저 입을 열었다.

"모든 가능성이, 결과가 마왕으로 연결되게 한게 아닐까요?"

"모든 게이머가 최종적으로 마왕에게 닿아야만 했다는 말인가?"

"모두가 아닙니다. 당신이 마왕에게 닿도록 만든 겁니다."

결국 닿을 수밖에 없게끔 설계하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히프노스의 말은, 그러니까.

"······ 마왕이 설계자라는 말인가?"

히든 특성, 천상.

머리를 망치로 강하게 맞은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경우의 수.

마(魔)의 종주라 불리우며,

마계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유일무이한 왕.

마왕이 게임 '판게니아'를 설계하고 만들었다?

게임의 목표인 '마왕 살해'가 사실은 탐욕의 영혼이 자신에게 닿을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니.

'마왕이 코딩을······.'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내심 고개를 저었다.

어찌됐든 지구에서 '판게니아'는 게임으로 등장했다.

누군가가 게임으로 해석하여 출시했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껏 그와 관계된 인물로 전혀 다른 존재를 지목하고 있었다.

'민트초코맛있어요.'

게임을 만들어 출시한 자가 그가 아닐까 하고.

항상 명예의 전당 상위권을 석권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을 증명하지 않은 자.

누구도 정체를 모르나 그럼에도 항상 활동하고 있다.

하여, 나는 그가 '판게니아'를 코딩하고 만든 인물이라 짐작했다.

아무도 모르는 정보를 알고, 그를 활용하여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하지만, 그조차도 일종의 '테스트'마냥 확인하는데 그치는 느낌이었다.

한 마디로 제작자인 셈이다.

그리고 설계자가 마왕이라면.

"그럼 파랑새는 누구지?"

파랑새.

나도 최근에야, 이자벨라를 통해 알게 된 존재.

나는 파랑새가 설계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게임의 핵심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으니까.

판게니아의 틀을 만들어 민트초코맛있어요에게 넘긴게 아닐는지, 내딴에는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

그 추측이 틀렸다는 말인데.

이윽고 히프노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파랑새'라니요?"

"스스로를 운영자라고 칭하는 놈이다. 판게니아의 인물과 계약을 맺어, 죽기 직전 게이머들이 빙의하도록 만들었지."

"······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 '게임'이라는 건 제가 만든 '드림월드'와 유사한 듯합니다."

드림월드.

세계수의 내부에 히프노스는 꿈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악신들 모두가 무한한 꿈을 꾸어, 잊게 만든 것이다.

한데 게임 '판게니아'가 드림월드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유사하다?"

"꿈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자각하는 꿈, 자각하지 못하는 꿈, 상상속의 존재가 되는 꿈,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꿈······."

"하지만, 꿈이 아니다."

"예. 현실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꿈을 현실로 만든 거지요. 종말이시여. 제가 왜 세계수에 '드림월드'를 구성하고 터를 잡았는지 아십니까?"

"음. 모르겠군."

"'황금률' 때문입니다."

"······!"

아아!

그 말을 듣고서야 감히 잡히는 느낌이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으로 말미암아, 플레이어는 각성하고 변신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란돌프로 변신할 때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률의 조각이 소모되었으니까.

허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존재토록 하는 힘은 결국 황금률이었다.

"황금률은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매개체입니다. 태초의 세계에는 오직 세계수뿐이었음에도 여러 가지 종이 출현할 수 있었던 건 모두 황금률 덕분이었습니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힘.

종의 출현에도 황금률이 관여했을 주이야.

그렇다면 황금률이야말로 '창세'의 힘이요 권능이라 할 수 있었다.

히프노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이미 층계를 오르며 경험하셨겠지만, 세계수의 안에서 제 터는 꿈이자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게임'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이상하긴 하군요."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이지?"

"판게니아에선 계약을 통해 인형을 만들고, 지구에선 게임을 통해 인형을 통제할 접속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중간에, 각각의 역할을 맡은 '운영자'가 다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마왕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설계자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계자.

제작자.

그리고 운영자.

그들은 어쩌면, 히프노스가 만든 '드림월드'를 보고 게임 '판게니아'를 구상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있을텐데?"

"예. 목적은 모두 다른 것 같습니다만······ 맡은 바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는 건, 결국 그리는 그림이 비슷하다는 의미이겠지요. 그 완성된 그림을 누가 가져가느냐의 싸움일뿐."

각자의 목적을 위해 따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역할을 잊지는 않는다.

그림의 완성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

허나 누가 화룡정점을 찍고 그림의 주인이 될 지는 알 수 없다.

나는 턱을 쓸었다.

저들이 목표하는 것.

히프노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두 세계를 이으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황금률이 투입되었을 터, 그걸 대체 어디서······ 판게니아에선 육체를 지급하고, 지구에선 영혼을 공급한다······ 혼돈과 혼란을 가중시켜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건, 으음. 설마······!"

더없이 심각한 표정.

나도 얼추 알 것 같았다.

그들이 그리는 그림.

결국, 그것은.

"'천상'인가?"

내가 입을 열자.

히프노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맞습니다. 아무래도 열쇠를 만들어 '천상'을 강제로 열려는 것 같습니다. 잠깐······ 아아! 이제 이해가 되는군요. 마왕은 스스로 열쇠가 되려고 한겁니다! 만에 하나 탐욕의 악마가 멸망에게 상처를 입히며, 천상으로 향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면······!"

히프노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왕은 자신이 최종보스가 됨으로써 천상을 열 열쇠가 되려한 것이다.

하지만 마왕의 목적은 실패했다.

나를, 탐욕의 영혼과 육체를 빼앗지 못했으니.

그런데 묘하게 걸리는 게 있었다.

"··· 히든 특성, 천상."

"예, 바로 그게 열쇠입니다. 한데······ 아니, 잠깐."

"내가 갖고 있다."

"······!!!"

히프노스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허.

놀랍긴 나도 매한가지다.

설마 히든 특성 '천상'의 용도가 천상을 여는 열쇠일 줄이야.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겠으나.

꿀꺽!

"종말께서 '열쇠'를 지닌 걸 마왕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른 관여자들은 계속해서 열쇠를 만들고자 움직이고 있으니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그래서 마왕은 계속 지구를 침략하는 것입니다!"

멸망의 핏줄은 이은 마왕.

놈은, 놈만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탐욕의 악마가 지닌 영혼이, 천상으로 향할 열쇠임을.

단순히 탐욕의 무한한 성장가능성을 원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 마왕이 지구를 침략하기 시작한 건 나를, 탐욕의 영혼을 찾기 위함이다.

왜 마왕은 지구를 침략하는가.

그에 대한 해답을 마침내 알게 된 것이다.

"히프노스. '천상'에 대해 아는 게 있나?"

관련된 단어는 수없이 등장했으나, 나는 아직도 그곳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잠시의 고민.

이후 히프노스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마치 말을 꺼내는 것마저도 조심스럽다는 듯이.

"그곳은······ 신들의 이상향입니다. 모든 세계의 흥망성쇠를 쥐고있는 곳. 세계를 탄생시키고, 멸망시키는 게 가능한 절대신의 권좌."

"··· 절대신이라."

"하지만 강제로 열쇠를 만들어낸들, '문'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천상으로 향하는 문이 갑자기 뚝 떨어지지 않고서야······."

그때였다.

쉬이잉!

허공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음?"

히프노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탓이다.

세계수의 던전, 드림월드에 누군가가 강제로 들어오는 건 불가능한 일.

잠시후 균열이 더 커지며.

-캬캬캬캬캬캬!

······ 헬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헬을 본 히프노스는.

"무, '문'의 수호자······!"

기겁하며 기함을 내뱉었다.

저 반응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문의 수호자?"

"천상의 문을 수호하는 수호자가 왜 이곳에?"

"내 펫이다만."

"······?"

"헬. 뭐하다가 이제 나타난 게냐?"

-캬캬캬캬캬컄!

헬이 양손에 잔뜩 뭔가를 들고 있었다.

망토에 숨겨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곧 헬이 그중 하나를 냅다 먹었다.

아삭!

-캬캬캬캬!

그리고 맛있다는 듯 더 크게 웃음소릴 내질렀다.

"사과?"

"그, 그거 먹으면 안 됩니다! 아직 만들어지기 전의 '선악과'인데······!"

아삭! 아삭!

쩝쩝쩝!

꺼어어억~

순식간에 사라지는 미완성의 선악과들.

"맙소사······."

히프노스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곤 말했다.

"'문'의 수호자가 함께하고 있다는 건······ '문'이 천상에서 떨어졌나보군요, 판게니아에."

"헬만 있는 게 아니다. 비슷하게 생긴 형제들이 열한명 더 있다."

"문을 지키는 열 두 수호자입니다. 혹시 누군가와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잠들어있는 제국의 황제 말이냐?"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문'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정통의 알을 들고 판게니아에 불쑥 떨어진 자.

그가 바로 현 제국의 황제였다.

그런데 진짜로 천상에서 왔을 줄이야.

문을 열고 내려왔으니, 그가 문의 행방을 알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황제는 잠들어 있었다.

또한, '빌헬름'은 황제의 피를 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빌헬름이 천상의 존재에게서 태어났다는 말.

그를 증명하듯 빌헬름의 영혼은 방대하고, 아름다웠다.

무엇보다도 빌헬름의 육체는 끊임없이 성장했으니, 그가 천상의 존재에게서 태어난 핏줄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지금은 마왕이 지니고 있다.'

······ 생각보다 더 큰 일일 수도 있겠다.

마왕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서 가늠도 가지 않지만.

부활하여 강력해진 지옥의 군주들을 보건대, 결코 만만치만은 않으리라.

'결국, 이 모든 게 천상으로 향하려는 자들의 몸부림이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민트초코맛있어요도, 파랑새도, 마왕도.

그 외의 모든 관련자들은 천상이 열리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곳은 백해무익했으므로.

찰나의 순간.

나는 결론을 내렸다.

"황제를 죽여야겠군."

··· 황제를 죽이기로.

문의 행방을 아는 자가 사라지면, 천상이 열릴 일도 없을테니까.

*

2세대 각성자들은 빠르게 성장했다.

신의 섬에서 튜토리얼을 겪은 이후 거대 길드의 지원을 필두로, 누구보다 빠르게 메인퀘스트 돌파를 시작한 것이다.

'최강남'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수혜를 본 남자였다.

"'북부 신전'을 클리어!"

"'메인퀘스트 6 : 파티 던전 클리어하기'를 완료했습니다."

"내용을 정산합니다."

"백성전의 성좌들도 놀랄만한 압도적인 결과!"

"총점 370점!"

"'명예의 전당' 순위가 변동됩니다."

"으아아아아아!"

던전에서 나온 즉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최강남이 포효를 내질렀다.

마침내 넘어섰으니까.

란돌프. 그의 점수를!

오직 란돌프를 넘기 위해 악착같이 준비했고, 던전에 입장한 뒤로는 세세한 것 하나 빠트리지 않으려고 오매불망 노력했다.

비록 란돌프는 가장 까다로운 파티 던전인 '데미갓 특성 던전'을 클리어했지만, 최강남이 클리어한 파티던전인 '북부 신전'은 압도적인 천재성을 지니지 않으면 결코 깰 수 없는 곳이다.

"내가 해냈다-!!!"

파티원들의 노력과 희생.

그리고 최강남, 그의 천재성이 마침내 빛을 본 것이다.

2세대 각성자 중에서도 가히 최고임을 증명한 것이었다.

최강남은 떨리는 눈빛으로 전당을 다시 바라보았다.

"1위 - 최강남(370)"

"1위 - 아린(370)"

"3위 - 란돌프(350)"

"4위 - 빌헬름(345)"

"내가, 최강이다-!!!"

최강남은 환호했다.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겼던가.

족히 20번은 넘은 것 같다.

'너도 지금쯤이면 파티 던전에 도전하고 있겠지, 박현명.'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박현명은 절대로 자신을 넘어설 수 없다.

란돌프도, 빌헬름도 넘어선 자신을, 어찌하여 넘어서겠나.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 스승님. 하지만."

"하지말래도."

"······."

최강남은 입을 닫았다.

그가 스승님이라고 부른 여자.

영웅연합의 부연합장인 '아린'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강하며, 현명한.

사실, 이게 가능했던 것도 그의 스승 덕분이었다.

만약 아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절대로 저 점수를 낼 수 없었으리라.

그래도 기뻤다.

'내가 최강이다-!!!'

마음속으로 연신 외쳤다.

최강남은 이대로 계속해서 강해져, 아린의 총애를 받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연합장의 자리까지 오를 것이다.

최강남이 그토록 환호를 하거나 말거나.

'한번 경쟁해보자꾸나.'

아린.

아니, 칠군주 바사라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과연 박현명은 자신이 만들어낸 이 점수를 넘어설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바사라는 각성자의 몸을 차지했으나, 정작 메인퀘스트를 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란돌프, 빌헬름의 업적을 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바사라는 박현명과 경쟁하길 바랐다.

"어······?"

그때였다.

최강남이 비명을 내지른 건.

'······.'

바사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명예의 전당' 순위가 변동됩니다."

다시, 그들의 전당 순위가 변동됐으니까.

이는 누군가가 1위를 탈환했다는 의미.

그 이름과, 점수를 본 바사라는.

"······ 미친놈."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경쟁 자체가 안 됐으니까.

그리고 최강남은.

"뭐, 뭐야, 거짓말이지? 말도 안 돼에에에에엑-! 꺼어억!"

비명을 내지르곤, 뒷목을 부여잡으며 그대로 기절했다.

순수의 성좌.

바사라는 기절한 최강남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고작 이런 일로 기절하다니.

한심하기 그지 없다는 눈길조차 주는 게 아까웠으니까.

그보단 떠오른 메시지에 주목했다.

전당의 순위가 뒤바뀌었다는 말.

메인 퀘스트 6을 진행한 모두에게 저러한 메시지가 도착했으리라.

그리고 순위를 확인한 이들 전원이 그녀와 같은 반응일 것이다.

"1위 - 박현명(1,000+?)"

점수가, 정말 이상했으니까.

370점으로 1위를 거머쥔 게 조금 전이다.

한데 그 세배에 달하는 숫자가 나타났고, 그로도 모자라 물음표까지 붙었다.

말인즉슨.

'천 점 이상.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추산할 수 없다······.'

점수를 책정하는 시스템의 방식으로는 알 수 없을 만큼의 추정 불가한 업적을 행했다는 것.

하지만 바사라가 경험한 '점수의 책정 방식'은 꽤 합리적이었다.

항상 모든 이가 이해할만한 선에서의 점수를 도출해냈다.

절대로 물음표 따위를 내놓지는 않는다.

이는 곧 책정의 기준이 되는 정보가 산처럼 쌓여있다는 말이다.

'오랜 세월 쌓여온 시련과 그 시련을 해결한 영웅들의 업적을 모두 담아 기록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는 것일진대.'

바사라는 이 몸을 빼앗으며 '시스템'에 대해 파악했다.

그녀가 파악한 시스템은 아득히 오랜 세월부터 존재해온 정보들의 집약체다.

메인 퀘스트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영웅들의 발자취에 따라 설정되었으며, 그들을 기준으로 하여금 점수가 책정되는 방식을 택했다.

당연히 각각의 메인 퀘스트마다 부여되는 점수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미 억겁의 세월 누적되어온 정보.

해당하는 시련의 모든 종류와 해결방식이 담겨있을 터.

이 세상에 아예 없는 방식으로 시련을 해결한 게 아닌 이상에야,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없는, 혹은 여태껏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종류의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것.'

그런데 물음표가 나왔다는 건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 도입됐다는 뜻이다.

시스템의 정보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던전이 등장했거나, 도저히 불가능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던전을 해결했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뭐가 됐든, 정상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건 자명한 일.

바사라는 진정으로 궁금했다.

"······ 대체 무슨 던전을 클리어한 게냐?"

박현명.

그가 클리어한 던전이 무엇일지.

그리고······.

'무엇을, 갖게 되었느냐?'

받았을 보상이.

370점으로 한순간 1위를 탈환하며 받은 보상조차도 생각보다 엄청났다.

시스템과 백성전의 보상체계는 인류를 강화하는데 확실하게 일조하고 있었다.

또한, 점수에 따른 보상을 어떻게든 내놔야만 한다.

그런 시스템인 것이다.

하여,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 추산이 안 되는 업적을 해결한 자에게 과연 무엇이 주어질 것인지.

*

백성전.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어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여태껏 자신이 생각한 모든 관념이 박살난 느낌.

도저히 혼자서 감수할 순 없었기에, 그는 101번째 '순수의 성좌'에게 말했다.

"순수의 성좌여. ··· 백신전이 백성전의 전신인가?"

백성전이라 칭해지는 수많은 별의 보금자리.

그곳에는 성좌라 칭해지는 위대한 별빛들이 거주하며 인간들의 이야기를 엿본다.

하지만, 정작 백성전의 실체에 대해 아는 자는 없었다.

단 한 명.

절대 나타날 수 없는 101번째 성좌를 제외하면.

"오호라. '숨겨진 이야기'에 마침내 도달했나 보군."

얼굴에 거대한 물음표가 새겨진 순수의 성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란돌프가 이룩해낸 시련, '수련자의 산의 주인'으로부터 발생한 히든 퀘스트를 완성하자 나타난 존재.

검 숙련도 레벨 32에 도달한 즉시 '모든 산의 주인'이 만들어낸 '순수'다.

그가 등장하며 이곳 백성전의 성좌들은 다른 '백성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도 의문이었다.

백성전의 존립 이유에 대해.

한데······ 란돌프와 박현명을 두루 살피던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그의 이야기를 보며 알게 됐다.

"그렇다. 백성전은 먼 옛날 신들이 기거했던 백신전을 모방한 모방품이다."

순수의 성좌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신전의 신들은 필멸자들에게 시련을 부여하고, 보상을 내렸다.

그들이 자체적으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인류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멸망의 출현 이후 모든 게 불바다가 되어 사라졌다.

순수의 성좌는 백성전이 다시 만들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백성전은 백신전의 부활을 위해 만들어졌다."

"백신전의 부활······ 우리가 신이 된다는 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미 그대는 신이다."

"······!!!"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두 눈을 부릅떴다.

성좌란 무엇인가.

별이 될 정도로 위대한 족적을 남긴 존재들이었다.

한데, '순수의 성좌'는 그조차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신이며, 단지.

"다만, 잊혔을 뿐."

······ 잊혔을 뿐이라고.

"그대도 동의한 이야기다. 아니, 다른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동의했다. 잊히기로. 오직 한 곳,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 백성전의 성좌들만이 이름을 되찾기로. 그렇게 다시 온전한 신이 될 기회를 얻기로."

"······ 그게······ 무슨 소리냐."

"멸망을 마주한 신들은 후회한 것이다. 멸망의 직후까지 가서도 힘을 합치지 못했음에. 하지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들 결국 같은 결말이라는 걸 그들 모두가 알았다. 다시 분열되고 엉망이 되겠지."

이미 클대로 커버린 신들이다.

셀 수 없이 오랜 세월 쌓아온 편견과 고집은 버려지지 않는다.

게다가 신의 숫자도 너무 많았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름과 기억을 버렸다?"

이름을 버리고, 잊히기로 결정한 건 '처음부터' 만들기 위함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힘을 합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정해진 숫자의 신들만을 부활시켜 더 강한 유대를 맺을 수 있게끔.

황금기의 시대에는 신이 너무 많았으니까.

순수의 성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다시 처음부터, 완전히 처음부터 쌓아야만 힘을 합칠 수 있다고, 승산이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야만."

순수의 성좌가 어깨를 으쓱하며, 이어서 말했다.

"그래야만 '천상'을 박살 낼 수 있노라고- 생각한 게다."

피의 복수를.

그들의 아름다운 세계를 파멸시킨 천상을 역으로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스스로 이름을 버렸다.

모든 기억을 잊기로 했다.

찬란한 영웅의 성좌도 동의했다는 말.

"너는 그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말했지 않느냐. 나는 이미 한차례 '진리의 문'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설마 내가 보았던······ 그 '입'이 진리인가?"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

그는 한 차례, 모든 '별빛'을 잃고 소멸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어둠 속에서 '입'을 보았고, 그간 쌓아온 이야기들을 바쳐 그는 찬란한 영웅의 성좌에서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로 부활할 수 있었다.

이에 순수의 성좌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열쇠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진리의 문'을 열 수 있는 도구이지."

열쇠라고?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순수의 성좌는 자신의 입으로 '진리의 문'의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존재라고 말했다.

진실을 알게 된 지금, 자신조차 모르던 '비밀'을 알고 있던 그에게 절로 드는 궁금증이 있었으니.

"··· 누구냐, 네놈은."

"음. 안타깝게도,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알고 있다."

"무엇을?"

"박현명을 잡아야 100개에 달하는 백성전의 대결구도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란 사실을!"

이 세상에, 백성전은 무려 100개가 존재한다.

도합 일만의 성좌가 기거하며 수많은 필멸자에게 시련과 보상을 내리고 있었다.

이후 필멸자의 이야기를 보고 별빛을, 황금률을 획득하여 성좌는 힘을 기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박현명은 시스템으로도 추산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했고.

그의 이야기를 보고자, 모든 백성전이 달려들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자신들이 내리는 보상에 손을 내밀어주길 고대하고 또 고대하고 있을 터.

"우리 13번 백성전은 그에게 무슨 보상을 내밀어야할까? 수많은 보상의 선택지 중에서 박현명이 우리의 보상을 선택하게 하려면?"

"··· 이곳과 같은 백성전이 도합 100개나 존재한단 말이냐?"

"인간의 백성전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가 다르지. 다른 종에 배정되었던 백성전의 성좌들도 모두 박현명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란돌프와도 다르다.

시스템이 채점을 포기한 유일한 업적의 달성자다.

그동안은 어떻게든 점수를 내놓았건만.

당장 박현명이 란돌프라는 사실은 모르겠으나, 박현명이 선택하는 보상을 내놓은 백성전은 그에 대한 사실도 접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경쟁은 더 가열될 것이고, 박현명이 그들의 품을 떠나게 될 가능성조차 있었다.

순수의 성좌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 우리는 그에게 무슨 보상을 제시해야할까?"

*

숨겨진 비화를 듣고, 결론을 내린 나는 지체없이 던전을 나섰다.

그 순간.

"파티 던전 클리어!"

"267개의 '잊힌 기사의 영혼'을 획득했습니다."

"1천점을 초과한 품격은 100점당 '온전한 황금률' 1개로 전환됩니다."

"또한, 단장은 던전에서 잊힌 명예로운 기사단 중 하나를 선택해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과 의지가 '신성 기사'가 되어 깨어납니다."

"'신성 기사'는 '멸망의 기사'와 대비되는 존재이며, '신성의 대지'에서 더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신성의 대지'는 '잊힌 신'을 부활시킨 터에 자동으로 적용됩니다."

"혹은 1의 성화를 부여해 신이 있는 땅을 신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

······

"최초의 던전을 클리어한 자여."

"추산 불가한 시련을 달성한 지고의 존재여!"

"총점 1,000+?점"

"정확한 정산이 어렵습니다."

"업적 '태고 등급 던전을 돌파한 자'를 달성했습니다."

"3의 성화를 획득합니다."

"업적 '잊힌 신의 이름을 되찾아준 자'를 달성했습니다."

"1의 성화를 획득합니다."

"'온전한 황금률' 3개와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3,000h)'을 획득합니다."

"이권점수 5,000점을 획득했습니다."

"행운 주사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도합 101단계의 보상목록 등급이 올라갑니다."

"모든 백성전의 성좌들이 별빛을 모아 보상의 등급을 확정했습니다."

"아래 100개의 보상목록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아흐레의 밤", "마력의 근원", "외신의 깃털", "두 개의 달", "타나누쉬의 돌", "완성된 별의 지도", "쥬른의 보석", "우로보로스", "태초의 화살", "순결", "용기"······.

끝 없이 떠오르는 메시지들.

"······."

그를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것보다 마지막의 보상목록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쏟아지듯 나타난 100개의 보상목록.

이만한 숫자의 목록 자체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건 '이름'이다.

목록의 숫자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보상으로 주어진 것들의 이름에.

"······ 어이가 없군."

나는 순수하게 압도되었다.

세계수 커뮤니티.

여태껏 수많은 시련을 해결하고, 보상을 받았으나.

지금처럼 소위 '눈 돌아가는' 상황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이름들도 대단히 많았으나.

'마력의 근원, 우로보로스, 순결, 용기······.'

내가 아는, 혹은 유추할 수 있는 이름들조차도 가히 신세계였으므로.

확실한 것은.

'한 번도 판게니아에 등장한 적 없는 아이템들이다.'

관련된 이름이 등장한 적은 있어도, 직접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는 아이템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직관적으로 등급을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태고 등급'의 던전을 돌파하여 나타난 보상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유일 등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하고 고명하다는 것쯤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최소한 무(無) 등급!'

판게니아에 존재하는 등급 시스템.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 나타나는 등급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무 등급과 규격 외, 태고 등급은 게임상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다.

하여, 현재 내가 파악한 실존 등급은 '일반, 전설, 신화, 유일, 지고의 유일, 무, 태고, 규격외'의 순서였다.

'하지만 무 등급, 태고 등급, 규격외 등급은 그 성능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쓰임새에 따라서 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

무 등급 이상부터는 상상을 초월하는 옵션들을 담고 있다.

허나 그 이상의 등급으로 나아간다고 특출나게 좋아지진 않는다.

다만, '특화'되어 있다.

태고의 갑옷도, 흉과 재의 장갑도,

규격외의 신비를 파괴하는 신비 영원의 란돌프도, 무신도.

현재 내가 지닌 무 등급 반지 '찬란한 순혈자의 위상' 역시 모두 각각의 영역에서 말도 안 되는 성능을 발휘하는, 쓰임새가 확고부동한 아이템이다.

그러니 지금 목록에 떠오른 100개의 아이템은 전부.

'지금까지 등장한 적 없는 능력을 지닌 보구들이라는 말이다.'

감히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보물일 터!

던전을 깨며 이미 얻은 게 수두룩하건만, 해일처럼 쏟아지는 보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나타난 보상목록과는 분명히 다르다.

'모든 백성전의 성좌들이 별빛을 모았다······.'

말이 조금 이상하지 않나?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아니고, 모든 백성전의 성좌라니.

마치 여러 개의 백성전이 힘을 모았다는 듯한 어투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던 성좌들의 반응도 없다. 초월적인 성적을 내었을 때 보상을 내놓길 거부한 적도 있었건만.'

성좌는 자신의 별빛을 이용해 보상을 준비한다.

별빛을 모두 소모하면, 소멸했고.

시련의 결과에 따라 반응하며 내게 거래를 제안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도, 무언가의 제안도 없다.

저만한 보상을 준비하려거든 어마어마한 양의 별빛이 필요할 텐데 말이다.

그렇다는 건.

'백성전이 여럿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기는 하지.'

처음 보는 성좌들이 사도계약을 맺자며 달려든 적이 있었으니까.

백성전이 여럿이거나, 성좌가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유일등급 이상의 보상을 만들 때도 거래를 제안했을 정도인데, 그 이상 가는 보상의 목록이 무려 100개다.

'내게 보상을 제안하는데 모두가 혈안이 되어있다······.'

슬며시 턱을 쓸었다.

생각보다 보상의 선택이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침묵한 채 모두가 그저 '보상'만을 내놓고, 내 선택을 기다리자고 암묵적인 합의를 본 것이라면······.

아니, 어쩌면 테스트일지도 모른다.

나의 안목을 보는 시험 말이다.

그럴싸한 이름 속에 질이 나쁜 아이템을 섞어놨을지 누가 알겠나.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하기엔 너무나도 유일무이한 고유명사를 지닌 아이템들이었다.

'우로보로스. 여태껏 출현한 적 없는 별의 이름.'

특히 우로보로스.

나 역시 그와 관련된 낙인을 지니고 있었다.

체력과 자연재생력을 증가시키고, '불굴'의 효과를 주어 한계치를 넘어간 고통에서 인내하게 해주는 특이한 옵션을 지니고 있는 우로보로스의 낙인!

하지만 그 이름의 진짜 정체는 '별'이다.

조각난 레아의 32개의 별 중 하나이며, 지금까지 등장한 적 없는 극소수의 별이었다.

이자벨라가 보유한 '요르문간드'보다 상위의 격을 지녔으리라 짐작되는 초 네임드의 존재.

고유명사 그대로를 표현했다는 건, 우로보로스의 별 자체를 내게 양도한다는 뜻일는지.

'순결, 용기······ 죄악과 180도 반대되는 개념이다.'

뿐만인가.

다른 고유의 명사를 지닌 보상도 만만치않다.

그 하나하나가 허투루 대할 수 없을만큼.

내 고민은 더 깊어졌다.

'어렵군.'

도저히 고를 수가 없었다.

단 한 번의 선택.

하나의 보상.

엄청나게 대단한 것일지라도, 막상 내게 필요가 없다면 쓰레기와 다름이 없으니까.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 그라면 내가 필요로하고, 원하는 보상이 무엇일지 알고 있을 것이다.'

나와 가장 많은 교감을 나눈 성좌라면 당연히 그였다.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

내 이야기를 보고, 란돌프를 구독하며 수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성좌였다.

그가 '겨울(최후의 황혼)'을 보상에서 선택하도록 유도했을 때처럼, 어쩌면 이번에도 깊숙하게 개입해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와 소통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순간이었다.

[공지사항. '세계수 커뮤니티'가 개방되었습니다.]

['세계수 커뮤니티'에선 익명으로 성좌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습니다.]

['조각난 황금률의 조각'을 이용해 질문을 하면 성좌들이 답변을 달아줍니다.]

[더 많은 황금률 조각을 이용할수록 성좌들의 참여도가 올라갑니다.]

[원하는 답을 알았다면 답변을 채택하세요. 채택하지 않을시 신들의 참여도가 낮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념하십시오. 성좌의 대답이 모두 정답은 아닙니다.]

[또한, '세계수 커뮤니티'에선 오랜 세월 쌓인 노하우, '공략'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만의 '공략'을 적정가에 판매할 수도 있습니다.]

[공략은 비밀서약에 의해 오직 구매자만 이용 가능합니다.]

[서약을 위배할시 강력한 패널티와 함께 '세계수 커뮤니티'의 이용이 제한됩니다.]

느닷없이 떠오른 공지사항.

'뭐냐 이건······.'

······ 생각해보니 그와 관련된 내용을 본 것 같긴 했다.

워낙 많은 메시지가 떠올라 묻히긴 했지만, 설마 이런 용도일 줄이야.

나는 즉시 이것을 이용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세계수 커뮤니티'에 입장했습니다.]

[최초로 '세계수 커뮤니티'에 입장했습니다.]

[업적 '최초 입장자'를 획득합니다.]

[1의 성화가 추가됩니다.]

['세계수 커뮤니티'에서 사용할 닉네임을 정해야합니다.]

닉네임?

가명을 쓰고 참가하라는 말인가?

나는 턱을 쓸었다.

신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장소.

모든 각성자가 이용할 수 있다면······.

[닉네임 '킹왕짱'으로 하시겠습니까?]

"아······."

이건 아닌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수많은 캐릭터를 만들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닉네임을 짓는 거였다.

고민 끝에 다시 닉네임을 언급했다.

[닉네임 '팬텀'으로 하시겠습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야말로, 내 진짜 정체성에 가까웠으니.

['팬텀'님, 환영합니다.]

[목록을 불러옵니다.]

[1. 성좌들에게 질문하기]

[2. 답변자 순위 보기]

[3. 공략글 보기(0)]

[4. 공략글 쓰기]

의외로 심플했다.

당장 보이는 건 네 개의 게시판밖에 없었다.

나는 즉시 '성좌들에게 질문하기' 게시판을 바라봤다.

[최소 0부터 최대 제한이 없는 황금률의 조각을 조건으로 성좌들에게 질문을 올릴 수 있습니다.]

[질문글은 비밀이 보장됩니다.]

몇 시간 분량의 조각을 걸어야할까?

어깨를 으쓱하곤 질문에 사용할 황금률의 조각을 배정했다.

['팬텀'님이 0시간 분량의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하여 질문글을 작성합니다.]

······ 내 예상이 맞는다면, 걸 이유가 없다.

저들은 내가 자신의 보상을 선택하길 바라고 있으니까.

[질문글 제목 : 보상목록이 너무 많습니다. 보상으로 뭘 선택해야 좋을까요?]

[질문글 내용 : "아흐레의 밤", "마력의 근원", "외신의 깃털", "두 개의 달", "타나누쉬의 돌", "완성된 별의 지도", "쥬른의 보석", "우로보로스", "태초의 화살", "순결", "용기"······ 이중에 뭘 선택해야하고, 왜 선택해야하는지 이유도 적어주세요.]

보상목록에 떠오른 100개의 이름을 전부 적었다.

과연, 성좌들의 반응은 어떨까.

한동안 반응은 없었다.

'0시간은 너무 짰나?'

예의상 1시간이라도 걸걸 그랬나.

그 찰나였다.

[띠링! '불멸하는 아흐레의 성좌'로부터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아흐레의 밤.

그 보상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지닌 성좌가 등장했다.

나는 즉시 그가 보낸 답변을 살폈다.

[불멸하는 아흐레의 성좌(하수) : 무조건 아흐레의 밤을 집어라. 그것을 들고 아흐레의 밤을 지나면 너는 불멸의 권능을 지니게 될지니!]

친절하진 않지만, 나쁘지 않은 답변이다.

하지만 느낌이 싸하다.

'사도가 되라는 뜻이로군.'

보나마나 나를 사도로 만들 셈이다.

불멸의 권능은 굉장히 탐이 나지만, 이미 '잊힌 신'들을 보며 깨닫지 않았는가.

불멸만이 능사가 아님을 말이다.

'이름 뒤에 붙은 하수는 답변하는 신들의 등급인가?'

그럼 더 많이 채택될수록 더 높은 등급을 획득하는 걸까?

성좌들에게 등급을 부여하다니, 재밌는 발상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띠링! '가장 잔혹한 밤의 성좌'로부터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띠링! '깊이 성찰하는 기도의 성좌'로부터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띠링! '근원의 성좌'로부터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끊임없이 전해지는 답변들.

읽어볼 틈도 없이 숱하게 쏟아진다.

성좌의 이름들도 하나같이 심상치 않다.

그냥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은 존재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띠링!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로부터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 마침내, 내가 원하는 존재로부터 답변이 도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대로된 소통은 처음인 듯싶은데.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하수) : 반갑군, 팬텀.]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반가운 만큼이나, 그 역시 반가운 모양이었다.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하수) : 그리고 고맙네. 그대의 이야기는 항상 나를 전율케 만드니. 더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내게 할당된 지면이 많지 않아 길게 답할 수 없음에 미리 사과하겠네.]

답변을 길게 할 수는 듯싶었다.

하기야 다른 성좌의 답변을 보아도 죄다 다섯 줄을 넘지 않았다.

등급에 따라서 답변할 수 있는 길이도 다른 건지.

나는 계속 그가 전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물론, 남은 건 기껏해야 할 줄이었지만.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하수) : 외신의 깃털을 집게.]

······ 외신의 깃털이라.

제일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목록 중에서 한 번도 신경쓴 적 없는 그것을 집으라고 말한다.

나는 당연히 우로보로스나 마력의 근원일 줄 알았거늘.

허나, 더 고민하고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100개의 목록 중 '외신의 깃털'을 선택했습니다."

"모든 별빛이 '외신의 깃털'로 완성됩니다!"

결정을 하는 데에는, 저 말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외신의 깃털.

이변이 일어났다.

아니, 대격변이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수준의 거대한 변화가 들이닥쳤다.

"세계수 커뮤니티?"

"성좌가 직접 답을 달아준다고?"

"공략 글을 올려서 황금률의 조각을 얻을 수도 있나 본데?"

판게니아에 존재하는 수많은 희귀한 정보들.

혹은 기본적인 공략조차도 연합의 기밀로 분류되는 시대.

더 많은 정보를, 더 많은 공략을 지닌 연합들이 계속해서 커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정보의 담합에 있었다.

공유하지 않고,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는 것!

그런데 '세계수 커뮤니티'의 등장은 그러한 연합들의 방식을 정면에서 파괴해버린 것이다.

"'아일의 물방울'이 타칸 사막에 있어? 그러니까 못 찾았지!"

"'마른 불'이 진짜로 마른 불이 아니라 산길 이름이었다니······."

"진짜 성좌들이 답해주네. 와, 대박."

기본적인 정보들은 굳이 어렵게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이제 질문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성좌로부터 답변을 받을 수 있으니까.

질문의 중요도에 따라서 들어가는 황금률의 조각이 증가하는 건 당연지사.

물론 성좌가 항상 올바른 정답만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성좌마다 가진 지식이 다른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연합의 온갖 갑질로부터 해방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세계수 커뮤니티'는 싱글 플레이를 지향하는 각성자들에겐 금싸라기 땅이었다.

뿐만인가.

-다크호든 : '대상인' 클래스 획득을 위한 재능 테크트리(5h)

-에바세바 : 히든 특성 '허무'를 얻는 방법!(100h)

-호우 : 메인 퀘스트 10까지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루트는?(20h)

정체를 숨긴 채 공략을 판매할 수 있다.

여태껏 거대 연합과 길드들이 독점했던 정보들이 순식간에 게시판에 도배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이미 널리 알려진 정보도 많았고, 한 명만 낚이라는 심보로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책정해놓는 이도 많았으나.

"완전 새로운 공략은 없군."

"이미 '팬텀'이 작성해놓은 정보들뿐이잖아."

고인물의 입장에서는 크게 장점이 있는 정보는 없다시피 했다.

팬텀이 게이머로 활동하던 시절.

판게니아의 공식 홈페이지가 존재했을 때, 숱하게 그가 올려둔 공략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공략'을 제외한다면 제법 쓸만한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공략 게시판이지만, 진짜 공략글만 올라오진 않았기 때문이다.

-압도 : 핵폭탄급! 7영웅회의 비리목록(500h) [구매수 0]

-압도 : 비밀주의, 사신교에 대하여(100h) [구매수 0]

-압도 : 세상에 이럴 수가?! 팬텀의 실체(1,000h) [구매수 0]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가십거리들을 주로 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건 '압도'라는 닉네임을 지닌 각성자.

하지만 그 가격과 내용의 신빙성에 대해서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말 그대로 온갖 추측성 글이 난무했다.

영양가 있는 내용을 늘어놓는 공략자는 거의 없었다.

"죄다 사기꾼들뿐이로군."

"제대로 된 작성자가 없어."

막 '세계수 커뮤니티'가 개방된 만큼, 신뢰도 있는 작성자를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다.

애초에 익명으로 진행하니 누구인지 알 수조차 없지 않나.

그때였다.

"응?"

"뭐야, 닉네임이······."

"팬텀?"

갑자기 올라온 게시글 하나.

게시글의 제목은 별것이 없었다.

문제는 게시글을 올린 사람의 닉네임이 '팬텀'이라는 것.

"에이, 보나 마나 사칭이겠지."

"누가 먼저 선점했나 보군."

세계수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는 익명의 닉네임.

중복은 불가능하다.

아이디를 선점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성자 대부분이 닉네임을 '팬텀'으로 짓는데 도전해봤을 정도다.

실제로 게시판 곳곳에 팬텀1, 팬텀2 따위의 닉네임이 즐비했으니.

"사기야, 사기."

"가격이 싼데, 무슨 글인지 확인만 해볼까?"

"으음. 궁금하긴 하네······."

진짜 원조의 이름을 누가 선점했는가에 대한 궁금증.

사람들은 다시 한번 팬텀이 올린 게시판 제목을 확인했다.

-팬텀 : 크람델의 입장 방법(1h) [구매수 0]

"크람델. 북부 괴물의 도시?"

"인간이 들어가면 바로 척살 당하는 곳이잖아."

"거기 들어갈 수가 있는 거였어?"

크람델의 입장법에 대해선 현재까지 공략된 바가 없다.

인간들에겐 미지의 땅이며, 수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장소.

흥미로웠다.

기껏해야 1시간 분량의 조각으로 밝혀진 적 없는 입장 방법과 팬텀의 정체에 대해 확인할 수만 있다니!

이건 클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북쪽의 요새, 사시사철 눈보라가 불어오는 혹한의 대지 크람델. 가장 유명한 괴물들의 도시이며 아직은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땅. 백왕과 주력들에 의해 지배되는 이곳 크람델은 '백호의 대지'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철과 구리를 비롯한 수많은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을 방문해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신비의 탑'에 있다······.]

방대한 텍스트.

이어지는 글귀들.

"서론이 뭐 이렇게 길어?"

"잠깐. 이 익숙한 느낌은······!"

"누구보다 판게니아에 진심인 새끼!"

"패, 팬텀 맞는 거 같은데?"

사람들은 기겁했다.

특히 '팬텀'이 공식 홈페이지에 올렸던 공략글을 모두 일독했던 사람들은 더할나위 없이 경악하고 말았다.

······ 똑같았으니까.

그가 공략글을 올릴 때의 방식과.

말투도, 유독 서론이 긴 점도, 별로 알고싶지 않은 어원에 대한 설명조차도!

방대한 지식을 마치 자랑하듯 늘어놓는 팬텀 특유의 자세가 진짜 본인인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집중하여 공략글을 보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내 '유레카'를 외쳤다.

[천룡인 세트를 착용한 뒤 실시간으로 위치가 바뀌는 '워프'를 찾아야만 한다. 히든 특성 '돌연변이'를 지녔다면 한결 쉬울 것이나, 지니지 않았다고 해도 30일에 한번씩 고정으로 발생하는 워프로 향한다면 언제든지 크람델로 향할 수 있다. 참고로 고정워프는 죽은 자들의 도시 '네크로벨리'의 '까마귀묘지' 끝에 있지만, 가는 길목에서 아이들의 무덤 두 개를 발견한다면 조용히 명복을 빌어주자. 그럼 시체 까마귀들이 그대들을 인도할 것이다.]

"뭐야, 이거 진짜야?"

"상상이상으로 상세한데?"

방대한 내용과 상세함.

이 정도로 퀄리티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건 팬텀뿐이었으므로.

결국,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크로벨리에서 까마귀묘지를 찾아낸 것이다.

그렇게 '까마귀묘지 던전' 내부를 한참 방황하자.

"저, 정말 묘지가 있잖아?"

"무덤도 발견했어!"

"진하, 진우?"

정말로 무덤이 있었다.

진하와 진우라는 이름을 지닌 아이들의 무덤.

아이들의 무덤임을 알아본 건 무덤 위에 놓인 티셔츠 덕분이다.

작은 사이즈의, 코끼리가 수놓아진 파란색 반팔티와 안경 하나.

"명복을 빕니다."

"성지순례 왔습니다."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모두 합장을 한 채 명복을 빌었다.

티셔츠의 주인을 지구에서 찾으려는 움직임도 생겼다.

만약 지구에서 소환된 플레이어라면, 두 아이들의 부모 역시 찾고 있을 테니.

그렇게 일주일 뒤.

"아아······ 진우의 옷과 안경이 맞아요. 진하야, 진우야······!"

한국에서 아이들의 부모를 찾아낼 수 있었다.

생사도 모른 채 오랜시간을 지나온 탓에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각성자들이 옷과 안경을 전달해주어, 늦게나마 부모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팬텀이다!"

"팬텀이 확실해!"

"팬텀신께서 강림하셨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팬텀교가 따르는 신적인 존재라서가 아니다.

그가 홈페이지에 남겨놓은 공략글은 각성자들의 바이블이었다.

공략글 하나하나가 주옥같지 않은 게 없었다.

하지만 팬텀의 공략은 어느순간을 기점으로 뚝 끊기고 말았다.

애초에 전부 플레이어가 되어버린 탓에, 홈페이지를 확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가장 마지막까지 홈페이지에서 팬텀의 공략을 확인한 자가 더 빠르게 정보를 독점하여 강해질 수 있었다.

정보의 독점과 담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모두가 저 글의 작성자가 진짜 팬텀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팬텀이 다시 등장했다면, 그가 공략글의 작성을 마음먹었다면!

더 이상 강자의 전유물로 여겨진 정보의 독점은 없으리라.

그렇게 최초 게시글 작성으로부터 10일이 지났을 때.

[Best. 1]

-팬텀 : 크람델의 입장 방법(1h) [구매수 38,784]

팬텀의 공략글은 다시금 그들의 바이블로 자리매김했다.

*

세계수 던전의 공략으로부터 10일이 지났다.

그 시간동안, 나는 정비를 했다.

이곳, 명예의 세계수가 있는 곳을 '신성화'하기 위해서.

"'명예의 성소'가 꿈의 신 '히프노스'의 대지로 선포됩니다."

"땅이 신성해집니다."

"황금률의 조각(2,000h)을 사용해 '꿈의 신전'을 건설합니다."

-'꿈의 신전'을 찾아온 사람들은 달콤한 꿈(활력+10)을 꾸게 됩니다.

-또한, 대륙 곳곳에서 '히프노스'의 힘을 잉태한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신전에서 그들을 교육하며 양성할 수 있습니다.

"황금률의 조각(1,000h)을 사용해 '꿈의 탑'을 건설합니다."

-'꿈의 탑'에 올라 악몽과 대결하십시오.

-시련을 이겨내는 자에겐 특별한 능력이 부여됩니다.

"황금률의 조각(1,000h)을 사용해 '꿈의 동산'을 건설합니다."

-'꿈의 동산'에선 유니콘을 비롯한 꿈의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신의 건축물' 건축술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더 많은 종류의 '신의 건축물'을 올릴 수 있습니다."

"땅이 더욱 신성해졌습니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건물들.

신을 부활시키자 새로이 추가된 능력이다.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하여 신의 건축물을 만드는 것!

신의 건축물답게 어마어마한 분량을 필요로 하지만, 괜찮았다.

'황금률의 조각이 썩어 넘치는군.'

공략글 하나 올렸을 뿐인데 여태껏 경험해본 적 없는 분량의 조각을 확보했다.

수수료 30%를 제외하고 들어오긴 했으나, 그걸 감안해도 2만 7천시간에 달하는 양.

써도 써도 끝이 없었다.

'이 정도로 반응이 좋을 줄이야.'

크람델에 입장하는 방법.

이와 관련된 공략글은 적은 적이 없었다.

지금이야 구하기 꽤 쉬워졌지만, 예전만 하더라도 '천룡인' 세트 자체가 희귀했으니.

게다가 내가 오주력으로서 30일마다 등장하는 고정워프를 '까마귀 묘지 던전'에 설치해둬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일반적인 방법으로 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만하면 충분하다.'

대략적인 정비는 끝냈다.

명예의 성소를 완전히 탈바꿈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앞으로 이곳은 히프노스를 축으로하는 '신의 대지'로 자리매김할 터.

내가 이곳에 총력을 다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윽.

나는 품에서 '외신의 깃털'을 꺼냈다.

그러자.

"필요조건을 충족합니다."

"'외신의 깃털'이 활성화됩니다."

"'디맨션 워프'가 개방됩니다!"

쩌어어어억!

붉은 기를 띄며 허공에 생성된 거대한 웜홀.

디맨션 워프!

이 워프는 몇 가지 능력이 있었다.

우선.

"'디맨션 워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워프'와 연결됩니다."

워프가 있는 곳이라면, 연결되지 않은 땅에도 발을 디딜 수 있다.

그리고 판게니아에 워프가 없는 땅은 없었다.

고로, 내가 원한다면 어디든 향할 수 있다는 의미.

폐쇄적이고 도달하기 불가한 땅조차도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닐 터인데.

"'디맨션 워프'는 소유자의 조건부 입장불가의 성향을 띤 영지와도 연결됩니다."

"현재 '신의 섬'과 연결됐습니다."

"신의 섬에서 성장을 완료한 '페어리 드래곤'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또한, '디맨션 워프'를 통해 '외신의 왼팔'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불러낸 '외신의 왼팔'은 계약에 따라 신성한 땅을 보호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대목이다.

외신의 왼팔.

저게 무엇인지 실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즉시 '외신의 왼팔'을 불러냈다.

"'외신의 왼팔'이 '디맨션 워프'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 찰나.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대지 전체가 흔들렸고.

"······."

이어 나타난 팔의 형태를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여신교의 성도, 아드리움.

그 중심부에 있는 워프가 난데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야, 이 워프가 왜?"

"폐, 폐쇄한 워프인데?"

성도의 중심부에 있는 워프는 폐쇄하여 작동하지 않는 워프다.

급한 일이 생겼을 때만 가동시키는 게 허락된 것이었다.

그것도 교황만이 허락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허락받지 않은 자들이 워프를 타고 성도 중심부로 올 수 있으니까.

본래라면 '여신의 결계'를 너머에 있는 워프로만 들어올 수 있었다.

한데.

··· 작동시키라는 명령도 없었건만.

지이이잉!

"왜, 왜이래?"

"누가 가동시켰어?!"

워프가 개방됐다.

주변을 지키던 성기사들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가동된 게 십여년이 훌쩍 넘은 워프다.

그게 왜 갑자기 강제로 가동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 나온다!"

"저건······!"

······ 워프를 타고, 누군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다수가.

"뭘 타고 넘어온 거지?"

"용?"

"아, 아니야. 저건 페어리 드래곤이야······!"

"페어리 드래곤······?!"

하나같이 페어리 드래곤을 탄 채로 말이다.

일반 용종도 아닌 보다 상위의 종.

이미 멸절했다 알려진 신화 속의 드래곤이다.

그 숫자가 무려 열 마리를 훌쩍 넘겼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스럽다.

성기사들조차도 어쩔 줄을 몰라할만큼.

그때였다.

무리의 중심에 선 남자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원탁의 기사단이다. 나는 아벨로프이며 기사단의 부단장이니. 너희의 교황을 만나러 왔노라."

내가 원탁의 주인이다.

원탁의 기사단!

빌헬름을 필두로 한 명실상부 최강의 기사단.

하지만 정작 단장 빌헬름과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를 제외하면, 다른 단원의 이름이 알려진 예는 없다시피 했다.

마치 유령처럼.

수많은 전장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유령 기사단'이 바로 그들이었다.

약소국이었던 발란 왕국에서 탄생한 기적!

발란 왕국이 지금의 틀을 갖추게 된 건 사실상 '원탁의 기사단' 덕분이라 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그들이 발란 왕국 소속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용병이다.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나타나는 괴물들!

-이름도 없고, 출신성분조차 알 수 없는, 전장의 귀신.

그들이 성장한 곳은 전장이었다.

전쟁 중인 왕국에 돈을 받고 대신 전투를 치러주는 용병 기사단.

말이 기사단이지 용병단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일개 용병단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히 돈만 받고 싸우는 게 아니라 명분을, 명예를 따졌기 때문이다.

허나, 전장에 나서는 순간.

그들은 악귀(惡鬼)가 되었다.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 취급할 수 없는 악의 병기였다.

싸우고, 죽이며, 오로지 피를 보는 데 혈안이 된 흉악한 귀신들!

-원탁의 기사단은 빌헬름이 아니었다면 흉신악살의 소굴로 기억됐을 것이다.

오죽하면 이런 소리마저 심심찮게 나올 정도였다.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기에 도리어 빌헬름으로 아름답게 포장되었을 뿐.

전장에서 그들을 마주한 병사들은 하나같이 전의를 상실했다.

어디서 이런 놈들만 골라 모아둔 건지 신기할 수준이었으니.

"원탁의 기사단?"

"부단장 아벨로프······?"

그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당연히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원탁의 기사단은 사라졌다.

대원정과 함께 대다수가 명을 달리했을 터.

하물며 부단장의 이름 또한 처음 들어본 것이다.

애초에 빌헬름과 세렝게티를 제외하거든 부단장마저도 이름이 밝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원탁의 기사단이고, 부단장 아벨로프라고?

하지만 단순히 거짓말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우선 이 상황.

폐쇄된 워프를 어떻게 강제로 열고 출입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아벨로프라 칭한 남자의 기세가.

그 강렬함이, 성도 전체를 잡아먹는 듯했으니.

"잠깐. 저 여기사는 세렝게티 아닌가?"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어, 맞네!"

그때였다.

모두가 부단장 아벨로프의 뒤를 바라보았다.

아벨로프의 존재감에 묻혀 잠시 보이지 않았으나, 그 뒤에 있는 건 분명히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다.

투구를 쓰고 갑옷을 착용했대도 그녀의 빛나는 태는 숨겨지지 않았다.

세렝게티를 확인한 시민들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커졌다.

"맞아. 얼마 전에 발란 왕국에서 프리드릭 왕을 물러나게 했다는 그······!"

"순백의 기사가 함께한다는 건······ 정말 원탁의 기사단이라는 말이잖아."

"설마 원탁의 기사단이 부활했다는 거야?"

"그런데 그들이 왜 성도 아드리움에?"

세렝게티는 현재 판게니아의 가장 뜨거운 감자다.

폭풍처럼 주변국들을 점령해가던 아이언 왕국의 프리드릭 왕.

그가 세렝게티와 결전을 벌인 뒤 한발 뒤로 물러난 이야기는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었다.

"빌헬름의 목격담이 한 번씩 들어오던 게 그럼······."

"··· 소문이 사실이라는 거네?"

"말도 안 돼. 진짜로 전부 살아있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아는 용병이 분명히 몇 명은 죽는 걸 직접 봤다고 했어!"

"죽여도 죽지 않는 유령들······!"

꿀꺽!

사람들의 목울대가 너나 할 것 없이 울려댔다.

원탁의 악귀들은 죽여도 죽지 않는다.

그 소문이, 어쩌면 단순한 소문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들은 정말 죽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의아한 건 왜 그들이 이곳에 나타났냐는 점이었다.

여신교의 성도 아드리움에 말이다.

"······ 성스러운 성도에 무단으로 침입한 놈들이 누군가 했더니, 너희였나."

그 순간이었다.

마치 공기가 울리듯 사방을 진동케 하며 나타난 자.

"말론님이시다!"

"최강의 성기사!"

"와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교황의 직속이자, 가장 강한 성기사로 이름이 드높은 말론.

그가 성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절대무적.

무패의 괴물.

1년에 한 번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든 그가 나타났으니 환호할 수밖에.

그러나 말론은 말론대로 어이가 없었다.

"분명 대원정에서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는 알았다.

이름은 몰랐지만, 저들이 진정 '원탁의 기사'라는 것을.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원정에서 그들은 죽었다.

단순 목격담만이 아니라, 상당히 높은 신뢰성을 바탕으로 말론이 직접 조사하여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런데 버젓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교황을 만나러 왔다."

"성하께선 바쁘시다. 무단 침입자들을 만날 시간 따윈 더더욱 없으시지."

"그렇다면 강제로 찾아갈 수밖에."

"······ 나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말론은 피식 웃고 말았다.

부단장 아벨로프.

놈의 이름은 처음 들어도, 놈을 만난 건 처음이 아니다.

전장에서 한 번 아벨로프와 부딪힌 적이 있었다.

그리고.

"너는 이미 옛적에 내게 패하지 않았던가?"

아벨로프는 말론에게 패배했다.

소문처럼 괴물 같은 놈이긴 했지만, 말론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로 허망하게 목을 내줄 위기에 처했다.

세아 성녀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놈은 자신에게 이미 죽었으리라.

그런데 단장인 빌헬름이 직접 찾아와도 가소로울 판국에 아벨로프라니.

다시 싸워봤자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그 찰나.

스릉!

부단장 아벨로프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여신의 죽음을 은폐하고, 사도외신의 손을 잡은 교황에게 죄를 묻고자 우리 원탁이 직접 찾아왔으니, 막아선다면 한패로 보고 모조리 베어주마."

단호하게.

한 치도 떨리지 않는 음성으로.

그 말은 성도 전체에 퍼져나갔고.

"저, 저게 무슨 소리야?"

"여신께서 죽으셨······."

"어허, 그런 불경한 소리 말게!"

"성하께서 사도외신의 손으 잡을 리가 없지 않나!"

··· 사람들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여신이 죽었을 리 없다.

하물며 교황이 그 사실을 은폐하고, 다른 신과 손을 잡는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순간, 말론의 표정이 잔뜩 굳어버렸다.

"너는 정말 불경하군. 아벨로프······ 그리고 네놈들은 전원 참수형이다."

스릉!

최강의 성기사, 말론이 검을 들었다.

도저히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전부 토막을 내버리리라.

여신교 최강의 성기사 말론과 원탁의 기사단 부단장 아벨로프의 대결.

갑작스러운 최강자들의 싸움에 모두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

아벨로프는 긴 꿈을 꾼 기분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죽기 전까지의 수많은 기억이 반복되어 스쳐지나갔다.

-디아블로님의 선택을 받은 아이야.

-너는 선택받았다. 죽음을 받아들여야한다.

본래 그는 악신의 제물로 태어나 생을 마감할 운명이었다.

가장 강력한 악신이라 칭해지는 4대 악신, 그중 디아블로에게 먹히는 숙명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아벨로프는 희망을 모른다.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기사왕, 빌헬름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벨로프. 너에겐 썩히기 아까운 재능이 있다. 나와 함께 하겠느냐?

악신의 교단을 모조리 뿌리뽑은 빌헬름은 아벨로프에게 제안했다.

그만이 아니라 다른 단원들 모두에게 말했다.

비록 제자라 불리진 않았으나, 그들은 빌헬름의 제자와 다를 게 없었다.

그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동고동락하였으니.

검을 휘두르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해줬으니까.

이름 따윈 알려지지 않아도 좋다.

그저, 빌헬름과 함께 검을 휘두를 수만 있다면.

그가 써내려가는 전설을 옆에서 지켜볼 수만 있다면!

이 한 목숨, 바쳐도 상관 없었다.

'나는 죽었을텐데.'

대원정에서 아벨로프는 죽었다.

기사왕 빌헬름이 마왕에게 닿을 수 있도록 온 몸을 불살랐다.

하지만······.

살아난 것이다.

세계수는 그들에게 새로운 육체를 선물했다.

더할나위 없이 강력한 신체를.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보다 더 완성된 강인한 몸을!

"이, 이게 어떻게 된······!"

말론은 두 눈을 부릅떴다.

최강의 성기사라 칭송받는 그이건만.

그의 검이, 닿지 않는다.

도리어 아벨로프의 검이 말론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단순히 육체만 완성된 게 아니다.

기술적으로도 성장했다.

그것도 비교자체가 불가할만큼.

'제물로 길러진 탓에, 내 몸은 나의 재능을 따라오지 못했다.'

아벨로프는 언제나 아쉬웠다.

악신의 제물로 선정될만큼 그의 재능은 훌륭했으나.

악신에게 바쳐야 했기에, 그 재능을 어렸을 때부터 갈고 닦지 못했다.

빌헬름에게 발견되었을 땐 이미 온 몸이 굳은 뒤였다.

다른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

세계수에 의해 완성된 육체를 갖게 된 지금, 그의 재능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말론을 압도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스컥!

빛으로 이루어진 말론의 검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말론의 목에 아벨로프의 검이 닿았다.

"역시 약해졌군."

아벨로프가 실망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자신이 강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말론 자체가 약해진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성기사 역시 신의 힘을 부여받은 자.

여신이 죽은 지금, 성기사의 힘도 자연스럽게 약해질 수밖에.

"이 녀석이 죽는 걸 보기 싫다면, 길을 열거라."

"······ 감히 말론 단장님을······!"

성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길을 여세요."

그 사이를 막아서며 나타난 존재가 있었으니.

그녀를 본 사람들은 모두 기함을 터트렸다.

"세, 세아 성녀님?"

"성녀님께서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침입자들을 막는 일이다.

성녀가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세아 성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나서는 게 아닙니다."

그리곤 이어서 말했다.

"교황 성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원탁의 기사들이여."

*

교황청.

열 두명의 추기경과 함께, 그 가운데에 앉아있는 교황.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원탁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 이야기는 들었다. 나를 찾았다고?"

노쇠하며 피로한 얼굴.

검버섯이 잔뜩 핀 피부.

도저히 교황이라 생각할 수 없는 상태의 노인.

그를 바라보며 아벨로프가 말했다.

"교황. 여신의 죽음을 은폐하고 사도외신의 손을 잡은 자여. 그대에게 죗값을 물고자 우리가 직접 저승에서 돌아온 것이다."

"예의없는 놈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원탁의 기사단은 예의를 갖추어라!"

추기경들이 목에 핏대를 올렸다.

그러자 교황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

"빌헬름. 그도 살아있는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닐텐데."

"······ 살아있지 않나보군."

후우우.

교황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실망한 얼굴.

아벨로프의 대답을 듣고 즉시 빌헬름의 죽음을 인지한 것이다.

하기야, 그가 살아있다면 아벨로프를 보내는 게 아니라 직접 나섰을 터.

"그럼 지금 너희를 움직이는 건 누구지?"

다만, 궁금했다.

원탁은 오로지 빌헬름만이 움직일 수 있다.

빌헬름의 손과 발인 자들이었다.

살아있는 것도 놀라울진대, 직접 성도에 쳐들어올 정도라면 틀림없이 명령에 의한 것이겠지.

허나 빌헬름은 죽었다.

빌헬름이 죽었으니, 그들 역시 와해되어야 정상이거늘.

그 순간이었다.

"나다."

스륵!

원탁의 가장 뒤에 서있던 남자.

여태껏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존재.

"내가 원탁의 새로운 주인이다. 교황이여."

그가 투구를 벗으며 앞으로 나서자.

"다, 당신은······!! 아아아아아아-!!!!"

누군가가 돌연 비명과도 같은 곡성을 외쳤다.

온 몸을 비틀고, 두 눈으로 눈물을 흘려대며.

무릎을 꿇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상식밖의 반응.

"여신의 의지 그 자체인 분이시여!!!"

그는 아론이었다.

이번에 새로이 추기경으로 등극한 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다해 경건하게 여신의 의지 그 자체인 자를 맞이한 것이다.

오랜만이야.

"여신의 의지를 잇는 자······?!"

"설마 저 자가······!"

경기를 일으킬 수준의 반응을 보인 건 아론만이 아니었다.

다른 추기경들도 아론의 호들갑에 무언가를 짐작한 모양.

그나저나.

······ 아론.

녀석이 왜 이곳에 있는 걸까?

교황청의 중심.

오직 교황과 추기경만이 모여있는 자리.

'투신의 탑에서 마지막으로 봤었지.'

투신의 탑을 오르기 전만 해도 녀석은 오만이 하늘을 찔렀다.

이후 몇 가지 교육을 통해 교정되었지만, 설마 교황청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을 줄은.

'그새 승격한건가?'

파격을 넘어 파멸적인 진급이다.

여신교의 추기경들은 하나같이 오랜세월 사제로서 인정받은 사람들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론은 젊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애송이였다.

요한슨 추기경의 자제라는 점을 제외하면, 사제의 자격으로 이룩한 업적 따윈 터럭만큼도 없을텐데.

"교황성하! 바로! 저분입니다! 제게 여신의 사랑을 일깨워주신 분! 두 여신님의 사랑을 받는 유일무이한 분이시자, 여신교의 희망이요 등불이 되실 분이!"

"저 자가······."

교황은 잠시 당황한 듯했다.

누가봐도 아론의 모습은 광신도 그 자체였으므로.

하지만 이내 정신을 수습하곤 교황이 되물었다.

"······ 아론 추기경에게 성력의 불을 일깨워준 자가, 그대인가?"

성력의 불.

아무래도 신성력이 강해진 걸 그리 표현한 듯싶었다.

나를 믿고 추앙하기 시작한 아론의 신성력은 확실히 예전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으니.

'아론이 추기경이 된 이유가 이거였군.'

그제야 아론이 추기경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짐작이 갔다.

두 여신의 죽음 이후, 여신교는 정체되어 있었다.

여신의 이름을 잇는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았고, 여신을 따르는 사제와 기사들의 성력은 더 이상 강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해서 작아지고 약해져만 갔다.

하지만 투신의 탑을 나온 아론의 성력은 더없이 충만했다.

오랜시간 정체된 여신교에서 유일하게 신성력의 강화를 겪은 자.

'잘됐군.'

보나마나 아론은 여신교로 돌아온 뒤 나의 이야기를 미친 듯이 설파했을 것이다.

교황과 다른 추기경들의 반응을 보건대 그 내용은 실로 신화적이었을 터.

그렇다면,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나는 두 여신의 부름을 받은 자다."

"아아······!!!"

그 순간.

뚝! 뚝!

교황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원하는 대답을 해줬을 뿐이건만.

······ 생각보다 격한 반응이다.

'예상과 다르군.'

여신교는 변질됐다.

두 여신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고, 사도외신과 손을 잡았다.

그를 확신하게 된 것은 히프노스에 의해서다.

이미 한 차례 '멸망의 눈'이었던 자.

그의 터를 발전시키고, 히프노스의 신위(神威)를 일깨우자 그는 이 세계의 변질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재 판게니아는 과거 신들의 공백을 악신, 혹은 외신(外神)의 존재로 채우고 있는 것 같다고.

특히 두 여신을 따르는 자들의 성질이 많이 변질됐다고 말이다.

이는 여신의 제일 사도인 교황이 사도외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신의 공백을 다른 신으로 채웠으니, 그 사실을 모른 채 따르는 자들의 성질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앤드류 사제가 타락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재.

여신교는 타락한 사제들이 연거푸 튀어나오고 있었다.

앤드류 사제 역시 그중 하나였다.

단순히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여신교의 사제가 타락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자애와 용서의 아이콘인 여신.

그런 여신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타락이라는 단어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했다.

교황은 진실을 숨겼고, 그래서 나는 '징벌자'로서 모습을 드러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정체를 드러내자 나타난 교황의 반응이 의외다.

"그대가······ 그대가······!"

"교, 교황성하?"

"갑자기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추기경들이 기겁하며 만류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교황은 애써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동시에 드러난 진실.

"······ 타락했군요."

세렝게티가 작게 중얼거렸다.

교황의 의복 사이로 살랑이는 검은색 꼬리.

더 이상 교황은 신성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기듯이 내게 다가와, 울부짖었다.

"내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였네. 여신께서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사사로운 외신을 받아들이고 말았어."

"······ 누굴 받아들인거지?"

"발로그 교단이 던져놓은 미끼! 그 힘에 유혹되어선 안 됐는데······!"

교황은 좌절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온 탓이다.

"이름을 말해라, 교황."

여신교를 변질시킨 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발로그 교단이 튀어나온 이상 결코 묵과할 수 없었다.

곧이어, 교황은 뜻밖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것'의 이름은······ 틀림없이 '소노라'라고 하였네. 아아아······!"

*

발로그 교단과 여신교는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여신의 힘을 잃은 여신교는 패배했다.

수많은 성기사가 죽고, 성녀가 죽었다.

발로그 교단의 압도적인 무위에 교황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힘이었기에,

교황은 그들이 발휘하는 힘의 진원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알아낸 것이다.

발로그 교단이 숨겨놓은 실체를 찾아냈다.

······ 소노라를.

"'그것'은 그릇이었네. 오직 신만을 담기 위한 그릇. 텅 비어있기에, 어떠한 신도 담을 수 있는 최강의 그릇! 발로그 교단은 그것으로부터 힘을 얻고 수많은 기적을 발휘했네."

신을 담기 위한 제물, 그릇이라.

나는 아벨로프를 비롯한 원탁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본래 그들 역시 '악신의 그릇'으로 바쳐질 아이들이었다.

만약 빌헬름을 플레이하며 뿌리뽑지 않았다면, 악신의 그릇이 된 아이들에 의해 세상의 균형이 뭉개졌으리라.

······ 그런데 전부 뽑히진 않았던 모양이다.

소노라.

데르시안 가문에서 태어난 복제품.

그녀는 사막여왕에 의해 심연의 경계에 갇혀있었다.

이자벨라의 단짝이자, 언니이나, 결국 폭주했다.

나는 게이머일 당시 이자벨라의 '생존' 퀘스트를 맡으며 소노라를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 심연의 경계에 산채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발로그 교단이 찾아내어, 그릇으로 썼다······.

'사막여왕 역시 이자벨라와 소노라를 그릇으로 쓰려고 했으니.'

도시를 오염시키고, 멸망한 타차원에서 '마혈왕'을 소환하는 그릇으로 사용하려고 하였다.

더없이 오랜시간 심연의 경계에 남아있던 소노라의 육체는 이미 완전한 그릇으로 완성되어있었을 것이다.

하여 발로그 교단은 소노라의 육체에 신을 강림시켰다.

사도외신을.

이름조차 모르는, 사사로운 것을.

하지만 발로그 교단은 외신을 강림시킨 그릇, 소노라의 육체를 일부러 여신교에게 던졌다.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거나, 혹은 여신교를 타락시키기 위해서.'

내가 처음 성도에서 본 소노라의 변질된 육체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의 육신은 롱기누스의 창 조각을 품은 채 이송되고 있었다.

교황은 그 매혹적인 힘에 유혹되어버렸고,

절대 해선 안 될 잘못된 선택을 해버렸다.

허나 이미 타락한 것을 되돌릴 순 없었다.

비록 앤드류 사제의 신성력을 회복시키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타락한 채였으니까.

"이대로면 여신교는 존속하지 못할 것이네. 이미 수많은 타락자가 발생하고 있으니······ '그것'이 여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교황은 말을 아꼈다.

하지만 뒤에 올 말이 예상은 갔다.

끝이라는 뜻이겠지.

판게니아는 혼란 속에 잠길 것이다.

여신의 자리를 차지한 외신. 모든 여신교의 신도와 사제가 타락한 채 변질되리라.

이미 한 번 보았지 않은가.

세계수의 던전에서 저주의 악신을 만났을 때.

'그 악신도 여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지.'

이름을 되찾고 부활하여 여신이 되려고 했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악신은 악신일 따름이다.

만약 악신의 의도가 성공했다면 저주가 축복으로 둔갑한 채 세상은 멸망가도를 달렸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것'에게 나를 안내해다오."

"하, 하지만 '그것'의 앞에 선 자는 결코 '그것'의 말을 거역할 수 없네. 아무리 그대가 원탁의 새로운 주인이고 여신의 의지 자체인 자라 하더라도······."

"괜찮다."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교황도 유혹시킨 존재.

다른 이들을 타락시키고, 여신의 영역을 넘보는 절대자!

하지만, 괜찮았다.

나는.

아니, 우리는 모두 '세계수의 던전'에서 신에 대한 저항을 얻었다.

품격 점수 500점일 때 얻은 '신성'과, 천점을 달성하며 얻은 '정의'는 모두 필멸자가 불멸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능력이었으니.

나는 교황을 바라보며, 다시금 무겁게 말했다.

"내게 맡기거라. 내가 너희 모두를 구원할 테니."

*

교황청의 깊은 곳.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하를 얼마나 내려갔을까.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의 너머에서.

"소······ 노라······?"

덜덜덜!

그 존재를 마주한 순간, 이자벨라의 온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녀도 이곳에 참관할 자격이 있었으니까.

무언가의 그릇이 된 소노라의 상태.

어쩌면, 변해버린 소노라를 죽여야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타락한 여신교'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소노라의 마지막을 마주할 사람은 당연히 이자벨라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현실을 마주하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노라. 네가, 어떻게······."

말도 제대로 나오지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의 너머에 있는 존재.

"오랜만이야, 이자벨라."

기억속 그대로의 모습으로, 소노라가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털썩!

온몸에 힘이 빠진 이자벨라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 정말, 정말 살아있었구나, 소노라······!"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멀쩡한 상태로 대화가 가능하다니!

"그럼 내가 죽은줄 알았어?"

"하, 하지만 분명히······."

"죽을뻔했지. 하지만 죽지 않았어. 잠들어 있었을뿐."

툭. 툭.

소노라가 다가와 이자벨라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 친구, 내 동생 이자벨라. 보고싶었어. 많이."

"나도야. 나도······ 미치도록 보고싶었어."

"이제 우리를 방해할 건 아무것도 없어. 그치?"

"그런데 넌 분명 신의 그릇이 되었다고······."

"아니야. 그들의 거짓말이야. 그들은 나를 이곳에 가둬두고 있어. 만약 정말 내가 신이 되었다면 왜 이런 어두운 지하에 갇혀있겠어?"

맞는 말이었다.

소노라가 있는 이곳 지하는 수많은 결계가 쳐져있었다.

안에 있는 게 절대로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끔.

허나, 교황은 '다른 신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미 받아들인 신을, 보통 이렇게 가두어 두는가?

갇힌 신을 두려워할 이유 따윈 없을진대.

소노라가 귓가에 속삭였다.

"교황의 거짓말에 속지마. 그가 받아들인 건 내가 아니라 악신 발락가스야."

"그럼······ 너를 왜 가둔거야?"

"나는 악신의 힘을 거부하는 힘을 지녔으니까. 이자벨라 너로 하여금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겠지. 네가 나를 죽이겠다면, 나는 거부하지 못할 테니."

"내가······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나와 함께 이곳을 나가자. 너라면 이곳의 빗장을 풀어줄 수 있을 거야."

"빗장?"

"저거야. 저게 나를 가둬두고 있어."

소노라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그곳에는 어둡게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별······."

"멸망의 파편. 저게 나를 가둬두고 있단다. 저건 신성을 잡아먹는 힘을 지니고 있어. 저걸 만질 때는 모든 신성의 힘을 풀어야돼."

신성의 힘을 풀어라.

이자벨라가 '황금률의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지닌 신성을 버려야만 저 파편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자벨라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를 구해주기 싫은거야?"

"내가······."

"그럼 빨리 신성의 힘을······."

쫘아아아악!

그 순간이었다.

공간이 찢기며, 동시에 나타난 우람한 손 하나가.

"커, 커헉······!"

소노라의 목줄기를 부여잡았다.

"소, 소노라!"

이자벨라가 놀라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현명님······?!"

박현명.

분명히 같이 있었는데.

왜 갑자기 공간을 찢으며 나타난단 말인가.

그럼 같이 있던 박현명은······.

'없어?'

······ 사라졌다.

잠시 사고가 멈췄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어, 어떻게 내 '결계'를······!"

소노라가 외쳤다.

결계를 찢고 경계를 넘는 자.

하지만 신의 힘이 가미된 것이다.

절대로 넘볼 수 없는 힘을 넘보았다.

소노라의, 아니, 외신의 눈이 돌연히 나타난 남자의 왼쪽 팔로 향했다.

찰나, 그녀의 눈이 더없는 경악으로 가득찼다.

"자, 잠깐. 그, 그 왼팔의 '힘'은······ 네가 어찌 그분의 권능을!"

개처럼 기어서라도.

필멸자는 결코 신의 결계를 찢을 수 없다.

이는 더욱 상위의 격을 지닌 신만이 가능한 것.

멸망의 출현 이후에도 성도 아드리움에 여신의 결계가 남아있는 이유였다.

여신의 결계는 악하고 사사로운 것이 출입할 수 없게 막는 용도.

하지만 외신은 다르다.

외부의 신.

전지적이며 우주적인 존재들.

그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상에서 내려왔다는 말도 있고, 멸망한 세계에서 태어난 신이라는 속설도 있었다.

분명한 건, 그들은 일반적인 세계의 규율을 적용받지 않는다는 것.

나타나는 순간 더 많은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

사사로운 외신이 여신의 결계 안으로 들어와 성도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말도 안 된다. '그분'께서 인간 따위가 자신의 힘을 휘두르도록 허락할 리가······!"

하지만 그들에게도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예컨대 외신은 세계의 혼돈이 일정치 이상에 도달했을 때, 자신을 담아낼 그릇이 있어야만 존재를 드러내는 게 가능하다.

소노라의 공허한 육체를 그릇삼아 외신이 나타났듯이.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그릇삼아······ '그분'이 나타난 것이다.

하물며 '그분'은 남자의 왼팔에 자신의 권능만을 심었다.

이는 남자가 '그분'을 담기에 적합한 그릇의 크기를 지녔으며, 그 권능조차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격을 소유했다는 의미.

"진짜 '소노라'는 어디있지?"

남자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동시에 외신의 두 눈이 미칠 듯이 흔들렸다.

그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영혼이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으니까.

우주의 진리가 담겨있는 것만 같았으므로.

어찌하여 필멸자의 영혼이 이토록 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외신은 생각했다.

이자가 가진건 '그분'의 왼쪽 팔에 깃든 힘뿐이다.

'그분'은 이름을 말해선 안 되는, 말할 수도 없는 높은 존재.

왼팔에 깃든 권능은 모든 결계를 찢고, 넘어서는 힘을 지녔다지만.

"······ 나를 해칠 수 있겠느냐?"

외신은 다시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죽이면 진짜 소노라도 죽는다.

하물며 결계를 찢을 뿐이라면 패배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스으으윽!

마치 유령처럼 외신의 형체가 투명해졌다.

곧이어 현명이라 불린 남자의 손을 벗어난 외신의 등 뒤로 거대한 두장의 날개가 솟아올랐다.

"나는 이미 여신의 권위를 손에 넣었느니라."

화아아악!

빛의 입자가 쏟아진다.

자애로운 여신처럼 성스럽다.

광명의 힘을 다루는 자들은 침범할 수 없는 절대영역!

신성을 지닌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감히 자애의 여신을 해칠 수 있겠는가?

인간들은 결코 여신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여신이시여!"

"우리의 여신을 지켜라!"

순간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바로 저것이 여신의 신위를 가졌다는 증거.

이미 소노라의 육체가 성도에 도착했을 때부터, 성도의 모든 이들은 외신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가 권위를 그러냈으니 성도의 모든 이들이 여신을 지키고자 달려들 터.

"꿇거라. 너희는 나를 결코 이길 수 없다."

여유를 되찾은 외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저 남자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

그러려거든 소노라도, 성도의 모든 사람들도 전부 죽여야 함이다.

그 수라의 길을 그가 걸을 수 있을까?

그 순간이었다.

"외신이란 것들은 전부 기생신(寄生神)인가보군."

외신을 정의한 남자, 박현명이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었다.

허.

기생신이라니.

마치 기생충이 된 기분이다.

게다가 남자가 짓는 저 미소를 외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시간이다.

곧 들이닥쳐올 해일을 그는 버텨낼 수 없다.

그럼에도 저런 여유라니?

혹, 결계를 찢고 넘어서는 권능으로 도망이라도 칠 셈인가?

"여신의 권위를 손에 넣었다고 했나?"

"나는 이미 너희가 따르고 모시는 여신 그 자체이니라."

외신은 이미 여신이었다.

두 여신의 공백.

외신이 성도 아드리움에 들어와, 최고사도인 교황이 받아들인 순간부터 결정된 사항이었다.

자, 어찌할 것이냐.

자신을 죽이면, 여신교는 더 이상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다.

여신교는 해체되고 악은 더욱 번성하리라.

이 몸의 주인도 살아남지 못할 테지.

그러자 그가 무겁게 말했다.

"그렇다면 여신의 힘부터 빼앗아야겠구나."

빼앗는다?

말에 어폐가 있다.

여신의 힘은 빼앗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 하지만, 머지않아.

외신은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쿠르르르릉!

땅이 흔들리고, 대지의 위에 무언가가 솟아난다.

"······."

거대하며 압도적인 어둠을 품은 무언가가.

*

꿈의 신 히프노스가 고개를 들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있는 땅 어딘가에서, 솟아나선 안 될 것이 솟아났음을 직감했으니.

"······ 멸망의 힘을 사용하기로 결심하시었나."

히프노스는 박현명의 진짜 정체를 안다.

그가 멸망의 힘을 지녔으며, '종말' 그 자체인 존재임을.

비록 세계수의 안에서 '종말'이 되어 멸망의 힘을 부렸다지만 이곳은 판게니아다.

숨길 수 없다.

아니, 숨길 생각조차 없는 했다.

지금쯤이면 몇몇 존재가 멸망의 출현을 눈치챘을 터.

히프노스가 고개를 저었다.

'백신전이 사라지니 외신이 판을 치는구나.'

아드리움에는 외신이 있다.

아드리움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외신이 등장하고 있었다.

등외신들은 기존에 존재하던 '신의 신위'를 먹어치우며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중이다.

지금 판게니아는 외신들이 자리 잡기 가장 좋은 세계인 탓이다.

'거센 혼돈과 신들의 공백이 그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백신전은커녕 그들을 방해할 정도로 격 높은 신도 없다.

이미 한차례 멸망이 쓸고 지나간 대지이니, 천적이라 할만한 존재가 전무하다.

외신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꿈의 낙원이다.

하지만 '외신'은 소환자가 없으면 소환되지 못한다.

'발로그 교단. 그들이 마구잡이로 외신을 소환하고 있다.'

히프노스는 이미 한 차례 멸망의 눈이었던 자.

그는 이곳 '명예의 성소'에 세워진 자신의 탑을 통해 세계를 관찰했다.

그 결과, 외신을 소환하는 주체 대부분이 '발로그 교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로그 교단.

정말 묘한 집단이다.

마구잡이로 외신을 소환해 판게니아를 정복할 셈인걸까?

실제로 그들은 수많은 신들의 대지에 침입하고, 외신의 그릇을 반입시켜 '신 잡아먹기'를 하는 중이었다.

애당초 '신의 신위'만 남은 땅이기에 신을 대처하는 일은 너무 쉬웠다.

여신의 죽음을 끝으로, 판게니아엔 멀쩡한 주신이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신위가 남아있는 땅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외신은 그 신을 대체하게 된다.

아드리움에서 여신을 대체한 저 외신처럼.

히프노스가 턱을 쓸었다.

'발로그 교단은 급속도로 세를 확장 중이다. 뒤에 누가 있다는 뜻일진대.'

허나, 외신을 소환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외신을 담을 그릇을 만들거나 찾아야하는데, 그만큼의 방대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곳은 대륙에 몇 없다.

하물며 '발로그 교단'은 '심연의 땅'에도 접촉하는 중이었다.

천마를 비롯한 심연의 괴물들과 힘을 합칠 작정인지.

저 정도로 가파르게 세를 확장함에도 조용하다.

아주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제국이 관여하고 있다. 하지만 제국이 전부는 아니야.'

이 모든게 가능한 곳은 한곳뿐이다.

아르혼 제국.

하지만, 아르혼 제국만이 발로그 교단의 성장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게 아니다.

히프노스는 관찰 반경을 늘렸다.

이 부분만큼은 더 자세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했으니.

이윽고, 히프노스의 눈이 '누군가'에게 닿았다.

"으음······!"

히프노스가 침음을 흘리며 재빨리 눈을 감았다.

허나, 다시 눈을 떴을 때, 히프노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틀림없이 발로그 교단의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를 보았다.

문제는.

"다크엘프 로드······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히프노스가 본 '다크엘프 로드'는 황금기의 시대를 살아간 존재다.

그로부터 억겁의 세월이 지났다.

이미 백토가 되고 먼지가 되었어야 정상이건만.

하물며 히프노스가 쳐다보자, 다크엘프 로드 역시 그를 바라보았다.

신들조차도 감지할 수 없었던 히프노스의 능력을 말이다.

그것을 감지해냈다는 건, 그가 일반적인 다크엘프가 아니라는 증명이었다.

외신일까?

아니면, '운영자'인가?

그렇다면 왜 발로그 교단에 도움을 주고, 흑왕의 밑에서 수하를 자처하는 걸까.

'악이 몰려오는군.'

······ 악이 몰려온다.

생각보다 거대한 악이다.

그것도 빛으로 둔갑한, 혼돈 그 자체가.

여태껏 등장한 적 없을 정도로 질 나쁜 악.

아무도 모른다.

조용하게, 은밀하게, 악은 빛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들에게 대항하기엔 빛의 힘이 너무 약하다.

'하지만 모르는 건 너희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또 다른 멸망, 종말인 박현명이 이곳에 있다는 걸.

그가 '신 지우기'를 시작한다면, 모두 긴장해야 하리라는 사실을.

다른 신의 신위를 뒤집어쓴 외신은 멸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인가.

세계수의 던전을 나오며, 박현명이 얻은 것.

그 '외신의 깃털'은.

······ 히프노스는 멸망에게 직접 들어서 알고 있다.

멸망이 전해준 이야기 중에, 저 깃털과 관련된 존재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니.

'······ 그것은 한때, 천상을 몰락시키기 직전까지 갔던 자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파랑새······ 그 운영자가 설마 외신들이 말하는 그분인가?'

어쩌면 저 깃털이 '파랑새'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히프노스는 생각했다.

*

만약, 세계수의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았다면.

그 뒤에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신으로 둔갑한 외신을 어찌하지도 못했으리라.

게다가 '잊힌 신'의 상징물을 부숴 멸망 포인트를 다수 획득한 덕에 '신을 지우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되지 않았던가.

'망설일 이유가 없어졌군.'

란돌프의 힘을 완전하게 제어하지 못하는 이상, 섣불리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허나 란돌프로 변신하는 것만이 멸망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다.

나는 멸망의 힘 자체를 사용하는 걸 망설이고 있었다.

멸망의 출현이 판게니아에 득이 될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아니었다.

히프노스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결국 '멸망'의 힘을 사용하는 것만이 확실하게 외신들을 없앨 방법이었으므로.

"내가 너희의 멸망이니."

멸망은 빛도, 어둠도 아니다.

그 둘 모두에게 천적인 존재였다.

괜히 악신들도 두려움에 떨던 게 아닌 것이다.

하여, 나는 스믈스믈 올라오는 악과 어둠에게 경종을 울릴 셈이었다.

강렬한 착각을 주어 감히 넘볼 생각을 하지 못하게끔.

"뭐, 뭐냐, 이건 '멸망'의 힘······?!"

내가 자신의 천적임을 알아본 외신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기세가 역전됐다.

더 이상 외신의 얼굴에 미소는 피어나지 않았다.

성도 아드리움에 드리운 멸망의 그림자.

그것은.

"'아드리움'에 '멸망의 탑'이 나타났습니다."

"48시간 내에 '멸망의 탑'을 정복하지 않으면 '아드리움'은 '멸망의 대지'로 변질되며 '여신(외신)'은 힘을 잃습니다."

솟아오른 멸망의 탑을 바라보며,

나는 느긋하게 말했다.

"어디 한 번 개처럼 기어서 올라보거라. 이름 모를 잡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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