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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5% 13ATRIBUT / Chapter 13: 13

Chương 13: 13

멸망은 모든 걸 파괴한다.

하지만 종말은 모든 것의 끝을 고한다.

신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불멸자들의 상극에 있는 자.

그것이 바로 '종말'이다.

멸망은 세상을 파괴할 순 있어도 세상 자체의 끝을 고하진 못한다.

그러나 종말은 가능하다.

'이곳은 또 하나의 세계다.'

란돌프로 변신하자 세계의 진실이 보였다.

세계수의 던전이 또 다른 '세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잊힌 신들의 세계다.

그들이 헝클어놓고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잘못된 세계였다.

'애초에 이곳에는 패배하여 잊혀진 악신들밖에 없다.'

명예의 세계수에 왜 잊힌 악신들이 깃들었나.

왜 그들은 명예로운 기사의 혼을 불러들여 잊히게 만들었나.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름을 되찾고, 악신이었던 과거를 지우며, 새롭게 신성한 시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명예의 세계수에 그들이 깃든 건 어찌 보면 예견된 결과였다.

'명예의 세계수가 시들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다.'

내가 던전을 열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명예의 세계수가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비로소 분명해졌다.

'내가 잊힌 악신들을 청소해주길 바랐구나.'

거짓된 명예를 들먹이며 명예의 세계수를 오염시킨 근본적인 존재들.

그들을 지워달라며 아우성친 것이다.

놈들이 사라져야, 진정으로 '명예로운 영혼'들이 헤매지 않게 되리라.

"내가 졌노라. 그러니 이제 그만······!"

잊힌 신이 패배를 선언했다.

어둠과 어둠의 대결에서 싸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 터.

하지만 늦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랬다면 끝을 보진 않았을 텐데.

내가 패배를 인정했을 때 수긍했다면 말이다.

잊힌 신의 선택은, 너무 늦어버렸다.

'승패의 조건 때문이라도 어쩔 수 없군.'

이미 승패의 조건이 '존재의 말살'이 되어버렸으니.

규칙을 마음대로 바꿔버린 잊힌 신의 잘못이다.

쫘아악!

나는 손을 뻗어 잊힌 신의 심장을 쥐었다.

"안 돼······!"

내가 무엇을 할지 아는 듯 잊힌 신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콰드득!

"아아아아아!"

나는 손에 잡힌 '그것'을 망설임 없이 부숴버렸다.

"'잊힌 신의 상징물'을 파괴했습니다."

"1의 '멸망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멸망 포인트'로 멸망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라진다.

잊힌 신이.

잊힌 신의 영혼이 릴리스의 위로 솟아나, 소멸해갔다.

-내가, 여신이, 될 수······!

끝까지 미련을 못 버린 자의 목소리.

하지만 미련은 미련일 뿐이었다.

이내 잊힌 신은 소멸했다.

툭!

동시에 릴리스의 신형이 거꾸러졌다.

그 순간.

"3층계의 시련으로부터 승리했습니다."

"'백왕의 기사단'이 획득한 모든 '잊힌 기사의 영혼'을 빼앗습니다."

"불가사의 시련 '13'개가 추가 완료됩니다."

"총합 121개의 '잊힌 기사의 영혼'을 지녔습니다."

"4층계의 '잊힌 신'이 대결을 거부합니다."

"5층계, '히든 룸'이 오픈됩니다."

"'히든 룸'에 걸맞은 상징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히든 룸'에선 입장자가 '잊힌 신'들을 상대로 규칙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멸망(종말)'이 모든 '잊힌 신'을 강제로 소환합니다."

······.

······.

"'지고의 혼(릴리스)'을 획득했습니다."

"'지고의 혼(릴리스)'이 영혼을 갈구합니다."

"1의 멸망포인트를 사용해 영혼을 부여합니다."

"'지고의 혼(릴리스)'에 영혼이 깃들며 '태고의 혼(두 번째 권속)'으로 진화합니다."

멸망 상점.

란돌프의 힘은 극으로 치달은 어둠이다.

저주를 남발하는 잊힌 신마저도 경악할 수준의 '더욱이 깊은 어둠'이며,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란돌프의 변신을 자제하고 있었다.

'아직은 완전하게 제어할 수 없는 힘이다.'

너무나도 강력한 탓에 나 스스로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신의 탑에서 '또 다른 란돌프'를 먹어치우며 란돌프의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애초에 '또 다른 란돌프'는 신의 섬에서 심연의 왕들과 태고의 존재들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존재.

그런데 그마저도 먹어치우고 더 강해졌으니, 이 어둠이 얼마나 깊고 짙은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수준이다.

그 증거로.

꿀렁! 꿀렁!

'··· 세계수 자체가 영향을 받고 있다.'

······ 물들고 있었다.

제어할 수 없는 어둠이 꿀렁대며 흘러나왔다.

그리하여 세계수 전역을 새까맣게 물들이는 와중이었다.

문제는 단순히 물드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득 소멸하기 직전 '잊힌 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또 다른 멸망, 종말이라.'

또 다른 멸망의 진정한 의미가 종말이라는 것.

지금 보니 실로 어울리는 단어다.

종말이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단어는 없을 듯싶었다.

세계수와 그 안에 있는 전부가 종말의 영향권 내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어디선가 울려퍼지는 비명소리.

어둠에 닿는 모든 것들이 마치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땅은 푸석해지고,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으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3층계의 콜로세움 전체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먼지화 되어 흩날렸다.

그럼에도 어둠의 탐욕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영역을 넓혀가며 모든걸 좀먹기 시작했다.

··· 이대로면 세계수 자체가 폐사할지도 모를 일.

'······ 어이가 없군.'

직접 란돌프의 어둠이 일으키는 현상을 보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일진대 이 모습으로 뿌리까지 갔다간 무슨 벌어질지 모르겠다.

그저 단순히 불길함의 수준이 아니다.

말마따나 란돌프의 어둠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종말을 일으키는 것이다.

조절을 할 수도 없다.

아직, 박현명으로서 긁어모은 빛성향은 란돌프의 어둠 성향에 비할 수가 없었으니.

균형을 맞춰야 비로소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될 터.

'신성의 효과가 더해진다면······ 약간은 조절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당장 변신을 풀 수는 없다.

아직 해야할 일이 남았으니까.

이곳을 청소하려거든 란돌프의 어둠을 극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조절할 수만 있다면,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나는 잊힌 신의 상징물을 파괴한 뒤.

끊임없이 떠오르는 문구들을 쳐다보았다.

'점수는 충분하다.'

3층계의 시련으로부터 승리했고, 도합 121개의 '잊힌 기사의 영혼'을 취했다는 메시지들.

영혼을 전부 품격으로 치환하면 자그마치 605점이다.

애초 목표한 500점을 훌쩍 뛰어넘는 점수인 것이다.

나는 즉시 모든 영혼을 단원들에게 부여했다.

그러자.

"'잊힌 기사의 영혼'을 부여하여 품격을 획득합니다."

"'★' 표시는 현재 획득한 효과입니다."

"★품격 10 : 기사단원 전원 모든 능력치 + 1"

"★품격 20 : 기사단원 전원 모든 능력치 + 2"

"★품격 50 : 기사단원 전원 숙련도 효율 + 50%"

"★품격 100 : 기사단원 전원 경험치 획득률 + 50%"

"★품격 200 : 기사단원 전원 모든 능력치 + 5"

"★품격 300 : 기사단원 전원 전체 관통력 + 10%"

"★품격 400 : 기사단원 전원 한계 레벨 상승 + 1"

"★품격 500 : 기사단원 전원 신성 획득"

"모든 품격의 효과가 '황금률의 기사단'에게 적용됩니다."

"모든 능력치 8, 숙련도 효율 50%, 경험치 획득률 50%, 전체 관통력 10%, 한계 레벨이 1 상승했습니다."

"기사단원 전원이 '신성'을 획득합니다."

"'신성(Holy)' - 모든 축복과 기도의 효과가 2배 상승합니다. 또한, '어둠' 속성에 2배의 피해를 가합니다. 항시 '신성한 유대'가 발동됩니다."

"'신성한 유대' - '황금률의 기사단'은 뭉칠수록 신성해집니다. '단장'은 2배로 신성해집니다."

화아아아악-!

어둠 속에 빛이 번져간다.

황금률의 기사단 전원에게 부여된 신성 효과로 말미암아.

'신성한 유대!'

예상대로.

아니, 신성의 효과는 상상이상이었다.

모든 축복과 기도의 효과 2배.

말인 즉.

'여신의 축복도 더 강화되었군.'

빛의 성향이 강해진게 느껴진다.

이전과 비할 데 없을 정도로 커졌으나, 아직도 균형을 맞추려면 한참 멀었다는 게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허나, 신성 효과의 중요성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특히 '신성한 유대'는 어둠의 상극에 있었다.

어지간한 악신들은 감히 침범하지 못할 정도.

그렇다고 종말의 힘이 빗겨가진 않았지만, 단장은 2배의 효과가 더해졌고 이로 인해 내가 지닌 빛의 성향이 더더욱 강화되었다는 게 훨씬 중요했다.

'어둠의 방향을 트는 것 정도는 가능해졌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란돌프의 어둠을.

종말을.

그 방향을 트는 것 정도는 말이다.

가까스로 황금률의 기사단과 백왕의 기사단이 피해를 받는 건 모면할 수 있었다.

게다가.

"품격 500을 초과해 새로운 '품격 효과'가 추가됩니다."

"★품격 600 : 기사단원 전원 피해량 + 5%"

"품격 700 : 기사단원 전원 경험치 획득률 + 50%"

"품격 800 : 기사단원 전원 숙련도 효율 + 50%"

"품격 900 : 기사단원 전원 자연 재생력 + 2,000%"

"품격 1,000 : 기사단원 전원 정의 획득"

품격 점수에 따른 효과는 더 존재했다.

마음같아선 기사단과 함께하며 '불가사의 업적'을 더 달성하고 싶지만.

'란돌프의 모습으로 함께할 순 없겠어.'

대부분의 이들이 내가 란돌프인 걸 모른다.

또한, 종말의 힘을 바로 옆에서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잊힌 신들을 몰살시키고자 한다면, 여기서부턴 혼자 움직이는 게 맞다.

다만.

'멸망 상점.'

움직이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할 게 있었다.

멸망 포인트를 획득하자, 그 즉시 '멸망 상점'이라는 게 떠오른 탓이다.

['멸망 상점'이 오픈됩니다.]

['멸망 상점'에선 '멸망 포인트'를 이용해 '멸망'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현재 보유한 멸망 포인트 : 1]

"상점 목록"

[멸망의 대지(1Point) : 신이 없는 땅을 '멸망의 대지'로 설정합니다. 멸망의 대지에선 멸망의 힘이 가파르게 회복됩니다. 이 땅에선 모든 신의 축복과 권능이 무효화됩니다.]

[멸망의 탑(1Point) : 신이 있는 땅에 '멸망의 탑'을 세웁니다. 시련을 부여할 수 있으며, 정해진 시간 내에 시련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해당 구역은 강제로 '멸망의 대지'로 바뀝니다.]

[멸망의 기사(1Point) : 대상을 멸망의 기사로 지정합니다. 지정된 즉시 멸망의 권속이 되며, 그에 걸맞은 격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대상에게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격에 걸맞은 영혼을 획득합니다.]

[멸망의 게이트(1~???Point) : 멸망의 게이트를 불러옵니다. 사용한 '멸망 포인트'에 따라 등급이 정해지며 게이트에선 강력한 '멸망의 괴물'들이 소환됩니다.]

[멸망의 눈(1Point) : '멸망의 탑'에 '멸망의 눈'을 설치합니다. '멸망의 눈'은 '멸망'이 찾고자하는 모든 것을 찾아냅니다. 탑에 하나씩만 설치할 수 있으며, 설치된 탑과 눈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더욱 정밀하고 광범위하게 탐색할 수 있습니다.]

[멸망의 나팔(1Point) : 멸망의 나팔을 획득합니다. 나팔을 불면 숨어있는 신이 정체를 드러냅니다.]

······.

멸망 상점의 목록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았다.

'···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한 내용들뿐이로군.'

이것들의 핵심은 결국 '신'이다.

멸망의 대지를 설정하고, 그곳에 있던 신을 파멸시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땅을 넓혀나가 모든 문명과 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실제로 먼 옛날, 멸망이 출현했을 때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했다.

멸망이 출현하자 찬란한 문명은 쇠퇴했으며, 신들도 힘을 잃고 잊혀져갔다는 이야기와 말이다.

결국, 그 대부분은 심연에 처박혔다.

그나마 여신의 희생이 없었다면 판게니아 자체가 존속하지 못했을 터.

'멸망의 기사.'

나는 그중 한 가지를 두 눈에 담았다.

멸망의 기사.

그나마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침 괜찮은 그릇이 바로 앞에 있었으니까.

"'멸망 포인트'를 사용해 '멸망의 기사'를 구매했습니다."

"'릴리스'를 '멸망의 기사'로 설정합니다."

"'릴리스'의 육체에 걸맞은 영혼을 창조합니다."

"'지고의 혼(릴리스)'이 '태고의 혼(검은 달 릴리스)'으로 진화했습니다."

릴리스는 영혼을 갖게 되며, 혼 자체의 격이 상승했다.

이후 나는 릴리스와 함께 층계를 올랐다.

4층계에 도달하자 '잊힌 신'이 대결을 거부했으나,

5층계 '히든 룸'에서 나는 대결을 거부하고 도망친 '잊힌 신'을 포함한 모든 잊힌 신들을 소환할 수 있었다.

*

잊힌 신들은 생각했다.

무언가가 나타났다고.

상상 이상으로 어둡고, 두려운 존재가.

그리고 4층계의 잊힌 신은 그것이 3층계에서 등장했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3층계의 '잊힌 신'이 소멸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저주의 신을 소멸시켰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3층계에 존재하는 잊힌 신.

근원의 힘과 저주를 다루는 그 악신은 이곳에서도 손에 꼽힐만큼 강했다.

그런데 소멸했다.

멸망조차도 신을 소멸시킬 순 없건만.

하여 4층계의 잊힌 신은 그 즉시 대결의 제안을 거절했다.

-뭐, 뭐냐. 어떻게 나를 소환한 거지?

그러나 현실은 잔혹한 법.

4층계의 잊힌 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5층계, 히든 룸.

그곳은 잊힌 신이 규칙을 정하는 게 아니라, 입장한 도전자가 규칙을 정하는 장소다.

그런데 설마 그 규칙을 이용해 세계수의 던전에 자리잡은 모든 '잊힌 신'을 소환할 줄이야.

-감히 나를 소환해?

-미친 건가?

-누가 되었든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을텐데.

-어이가 없군.

3층계의 잊힌 신이 소멸했다는 걸 대부분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4층계의 잊힌 신은 바로 아랫 층계이니 자연히 깨달았을 뿐이었고.

그들은 서로에게 개입하지 않는다.

층계가 멀어질수록 다른 층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턱이 없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알려야하나?'

4층계의 잊힌 신은 고민했다.

3층계의 악신이 소멸했음을 알려야할지 말이다.

하지만, 이내 4층계의 잊힌 신은 고개를 저었다.

알려봤자 소란만 가중될 따름이다.

'아니, 차라리 잘됐다. 이곳에 모인 신들을 전부 상대할 수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아직 게임은 시작되지 않았으니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도 있을 테지만, 이곳에 모인 잊힌 신들이라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었다.

[히든 룸의 '마스터'가 등장합니다.]

[마스터, '또 다른 멸망'으로부터 살아남으십시오.]

순간 떠오른 간단한 메시지.

그런데 살아남으라니.

이건 또 무슨 해괴한 규칙이란 말인가.

허나 잊힌 신들은 당황했다.

무언가가 나타났음은 알았지만, 그 이름이 '또 다른 멸망'임은 지금 처음 안 탓이다.

-멸망이라고?

-멸망이 왜 세계수의 던전에?

-천상의 무기가 어째서······?

비록 또 다른 멸망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멸망은 멸망이다.

그리고 그들은 '멸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힘은 감히 신들조차 오시하므로.

투욱.

이윽고 등장한 '또 다른 멸망'의 모습을 본 잊힌 신들은.

-저놈이······ 멸망?

-한데, 무엇이냐. 저 어둠은.

-4대 악신. 그 이상이로군.

-하지만 아무리 거대한 어둠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이미 잊힌 우리들을 어찌 할 순 없을텐데?

하나같이 당황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멸망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게다가 이미 패배하고 잊혀져 이곳에 온 신들이다.

여기서 멸망이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멸망의 임무는 오롯이 세계의 파멸에 있다.

신의 땅과 힘을 빼앗을 순 있지만, 신 자체를 소멸시킬 순 없다.

그건 오직 천상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또 다른 멸망이 움직이기 시작한 즉시.

하나, 둘, 그들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파괴되고 소멸하자.

······ 잊힌 신들은 깨달았다.

-네, 네놈은 멸망이 아니었구나!

-모든 것의 끝을 고하는 자······!

-종말. 종말이다!

-도, 도망쳐라!

도망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탐욕의 악마.

하나, 둘, 기사단원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콜로세움이 사라졌어?"

"잊힌 신은?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아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런데 황금률의 기사단도, 백왕의 기사단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겪은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냥 눈을 감고 떴을 뿐인데 모든 게 달라진 상황.

'······ 패배했나.'

백왕은 자조섞인 미소를 지었다.

결과적으로, 패배한 것이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 의하면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상대로.

하물며 잊힌 신의 어둠에 잠식된 채 조종당했다.

'굴욕적이군.'

하지만 패배한 사실보다 조종당한 기억이 더욱 굴욕적이다.

또한, 아무리 떠올려도 떠오르지 않는 내용이 있었다.

분명히 빌헬름을 보고, 오주력을 보았으며, 또 다른 무언가를 마주했을진대.

"으음······!!!"

백왕은 몸을 잘게 떨었다.

마치 강제로 가로막힌 느낌.

그러나 그때의 전율만큼은 남아있는 듯싶었다.

이쯤되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 대체 놈은 뭐였을까.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지닌 어둠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오주력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불길함의 집합체였다.

아마도 자신이 맡았던,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더없이 불쾌한 냄새는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오주력의 기색과 냄새였다.'

그거 하나만은 기억난다.

놈에게선 오주력의 냄새가 났고, 심지어 영혼에서도 오주력의 기색을 느꼈다.

'잡아먹은 게 분명하건만.'

그 원한을 갚아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놈은 너무 정체불명의 존재였으니까.

이미 한 번 실패한 이상, 알비노와 라이가도 예의주시할 것이다.

두 번은 통하지 않으리라.

'미안하구나, 오주력.'

백왕은 철저하게 은원을 지키는 자였다.

그리고 백왕은 아직, 오주력에게 갚아야할 빚이 있었다.

그것을 갚지 못했음에 백왕은 후회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단장님이 어디 가셨지?"

"서, 설마 잊힌 신을 상대로······."

······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에 황금률의 기사단도 모두 당황하는 중이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잊힌 신을 상대하다가 죽은 게 아닐지.

콜로세움 전체가 사라진 것도 그 영향이 아닐는지.

백왕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직접 죽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황금률의 드루이드께선 살아계신다."

그때 알비노가 말했다.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데, 살아있다니.

알비노는 주변을 둘러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께 문제가 생겼다면 명예의 세계수 자체가 말라비틀어졌을 것이다."

"······ 세계수도 멀쩡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만."

쿠릉!

쿠우우우웅!

허드슨의 말대로였다.

세계수는 뿌리부터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세계수의 잔재들도 모두 말라 비틀어진 상태였다.

라이가가 말했다.

"······ 우리는 계속해서 계층을 나아간다."

"단장님을 찾는 게 우선······."

"찾을 필요 없다. 녀석이 우리를 놓고 먼저 간 것이니."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 모두에게 신성이 부여됐다. 녀석이 '잊힌 신'에게 승리한 뒤 우리 모두에게 '잊힌 기사의 영혼'을 부여했다는 뜻이다."

"아······!"

허드슨의 두 눈이 커졌다.

이후 상태창을 열고 '신성'이 부여된 걸 확인했다.

당황하여 기본적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신성을 얻기 위한 품격은 500점.

오로지 잊힌 신에게서 승리해야만 도달 가능한 점수다.

말인 즉, 박현명이 승리하고 품격점수를 올린 뒤 혼자 먼저 떠나버렸다는 의미였다.

"왜 먼저 가신 걸까요?"

"다른 이유가 있겠지. 어찌됐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움직여야한다."

불가사의 업적을 마무리해야된다.

다른 기사단과 경쟁을하고, 뿌리까지 가야만 끝나는 시련이다.

결국 이 모든걸 끝내기 위해선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어, 라이가가 백왕을 바라보았다.

"계속할 텐가, 백왕?"

"······."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너를 살렸다. 모두의 명예를 위해."

"······ 나를 살렸다고?"

백왕이 복잡한 눈빛을 지었다.

죽이려 했건만, 그런 자신을 살렸다니.

"맞다. 백왕, 너를 살린 건 황금률의 드루이드다."

폭군 그리즐 리가 증언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눈빛도 대동소이하였으므로.

"녀석이 너를 살린 이상, 나 역시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 판단되는군. 그럼에도 싸우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으나······."

라이가가 서슬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나를 살려?'

왜?

백왕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놈의 영혼까지 말살하려 한 백왕이다.

그럴진대 자신을 봐주고, 살려냈다.

오주력을 먹어치운 게 놈이 아니었단 말일까?

아니면 갑자기 죄책감이라도 들었나?

"이견이 없다면 우리는 떠나겠다."

무언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라이가가 발을 옮겼다.

넓고 빠른 보폭으로.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으나, 내심은 불안한 것이리라.

빠르게 뿌리까지 닿는 것만이 이곳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었다.

'······ 어찌하여?'

그러거나 말거나.

백왕은 여전히 복잡한 눈빛으로 멍하니 있을 따름이었다.

*

잊힌 신들 사이에선 농담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곳에 모인 '잊힌 신'이 모두 부활하면, 천상조차 위협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들이야말로 '멸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멸망'을 겪어본 잊힌 신들은 허무맹랑하다며 일축했다.

-멸망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진리와 같다.

-그것은 신의 눈으로도 볼 수 없고, 재단할 수 없는 무한(無限)의 극치다.

그들은 치를 떨었다.

다시는 생각하기 싫다는 듯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물론, 그들의 말에 반박하는 잊힌 신들도 있었다.

-정말로 멸망이 무한한 힘을 지녔다면 판게니아는 파괴되어야 하지 않았나?

-여신이 희생했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쌍둥이 여신 '레아'의 희생으로 멸망은 판게니아 전부를 멸망시킬 수 없었다.

레아가 죽자 멸망의 파괴행위가 멈춘 탓이다.

땅 대부분은 심연에 가라앉았지만, 덕분에 다른 쌍둥이 여신 '피나'가 남은 대륙을 창공을 떠올려 존속하는 데 성공했고.

하지만 '멸망'의 힘이 진정으로 무한하다면, 멸망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레아의 희생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당연한 의문이지만, 또 다른 반박도 즉시 나왔다.

-모두가 같은 멸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상'이 내보내는 멸망에는 종류가 있다.

-파멸, 절멸, 그리고 멸망.

-그들은 천상이 제시하는 일종의 형벌이지.

-또한 모두 같은 '멸망'으로 불리나, 쓰임새가 다르다.

-전부 세계를 파괴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후의 처리에 차이가 있노라.

-예컨대 파멸은 영혼을 부수고, 절멸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며, 멸망은 심연으로 몰락시킨다.

-이중 가장 지독한 형벌은 당연히 '멸망'의 형벌.

-가장 지독했어야 하건만, 판게니아를 대하는 '멸망'은 뭔가가 달랐다.

-······ 마왕을 낳았지.

-그럼, 마왕을 낳은 건 누구였을까?

-우리는 그것이 여신 레아라고 판단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하지만 몇몇 악신들은 그게 아니고서야 멸망이 갑자기 멈출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애초에 그저 무기일 멸망과 여신이 함께한다는 건 상상조차 불가했으니.

-갑자기 '멸망'이 태도를 바꿔 여신과 함께했다고?

-소설을 쓰는군. 멸망에겐 그런 자의식이 존재하지 않아.

-오래된 신들이여. 이름을 잊고 기억을 상실하여 마침내 왜곡된 모양이구나. 쯧쯧.

-망각의 늪에 빠지는 건 필멸자들만 가능한 건줄 알았거늘.

잔뜩 비웃었다.

헛소리를 내뱉는 건 죄다 오래된 신들뿐이었으니까.

실제로 오랜세월 잊힌 채 존재하다보면 망각의 현상이 일어나곤 했다.

망각은 왜곡을 일으키고, 왜곡은 이상한 믿음과 신념을 갖게 만든다.

저들의 행태가 딱 그러했다.

애초에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왕은 여신의 성스러움도 지녔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더 이상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이후 종결되는 듯싶었으나.

조용히 있던 가장 오래된 '잊힌 신'이 입을 열었다.

-···'멸망'은 만들고 싶어했다.

-창세의 힘과 멸망의 힘을 합쳐 '종말'을 탄생시키고자 하였노라.

-허나, 실패한 것이다.

-그로 인해 멸망은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대죄를 지었다.

-하지만 천상은 실패를 가만히 놔두지 않느니.

-새로운 멸망이 나타날 것이다.

-어쩌면, 이미 나타났을 지도 모르지.

멸망이 '종말'을 탄생시키고 싶어했다는 말.

하지만 모두 믿지 않았다.

멸망의 이야기를 전하던 오래된 악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가장 오래된 잊힌 신만이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도 그럴게, 종말이란 신들 사이에서도 마치 신화나 전설처럼 치부되는 존재.

종말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의 종말을 뜻하며, 불멸을 꺼트리는 유일한 수로 여겨졌다.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힘.

진리를 벗어난, 또 다른 진리.

바로 그것이 '종말'이다.

그들도 종말이 천상에 있을 것이라고 '예상'만 할 따름이었다.

멸망이 세계를 파괴하는 신이라면.

종말은 신을 파괴하는 신이다.

천상을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하여 천상에서도 꽁꽁 숨겨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종말이여······.

······ 나타났다.

종말이.

천상을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가장 오래된 '잊힌 신'은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에.

파멸도, 절멸도, 멸망도, 신의 상징물을 직접 파괴할 순 없다.

하여 그들은 신들의 이름을 빼앗고, 강제로 잊히게 만든다.

그렇게 억겁의 세월이 지나면 잊힌 신의 상징물은 퇴화하고, 사라지며 그때 비로소 신이 소멸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신의 소멸 방법이었다.

그럴진대.

-아, 안돼!

-멈춰라!

-나, 나는 아직······!

-원통하다!

콰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신의 상징물이 파괴되어간다.

'종말'은 신의 상징물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예상대로 불멸을 꺼트리는 힘을 지녔다.

이곳의 '잊힌 신'들은 대부분 이름을 잊고 퇴화되어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1,000분의 1의 힘도 제대로 쓸 쑤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기껏해야 '규칙'을 정해 그 틀 안에서 싸우는 게 전부다.

그러니, 갑자기 나타난 '종말'을 대처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물며.

-인형 따위가 감히 신의 발목을 잡아?

-놔라, 놓으란 말이다!

그들이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었다.

릴리스.

저것은 시초의 인형이다.

절대로 멸망에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그릇 중 하나였다.

영혼을 되찾고, 멸망의 권속이 되는 순간 신에 대항할 힘을 얻기 때문이다.

스아아아아!

릴리스에게서 퍼져나온 수많은 그림자가 잊힌 신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신의 감옥.

릴리스가 각성한 절대권능!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살아남으라는 게.

-끝까지 해보자는 거냐?

-진정으로 네놈이 '종말'이라 할지라도, 이곳은 우리의 세계다.

-감히 나를 상대로 이딴 장난질을 해?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잊힌 신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잊힌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정도 권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신들을 중심으로.

족히 이십이 넘어가는 숫자.

각개격파당한다면 절대로 이길 수 없을 터이나, 뭉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에인션트!

-진짜 노망이라도 난 건가? 어째서 무릎을 꿇고 가만히 있는 거냐?

하지만 단 한 명.

에인션트라 불리는, 가장 오래된 '잊힌 신'은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아무런 저항도,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은 채.

무릎을 꿇고 가만히 '절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잊힌 뒤 너무 오랜세월을 살아서일까.

기억도 나지 않는 시간 동안 고통을 받아서인지.

그는 그저.

-나의 종말이여······.

마침내 찾아온 종말을, 그저 받아들이고 싶을 따름이었다.

*

"'잊힌 신의 상징물'을 파괴했습니다."

"1의 멸망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잊힌 신의 상징물'을 파괴했습니다."

"1의 멸망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24의 멸망 포인트를 보유한 상태입니다."

"남은 잊힌 신 : 1"

전투가 끝나고, 나는 가만히 눈앞에 꿇어 앉은 '잊힌 신'을 바라보았다.

이곳 세계수의 던전에서 유일하게 나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신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하여 의중을 물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러자 노인의 모습을 한 '잊힌 신'이 말했다.

-나를 끝내주시오. 이제 안식을 얻고 싶소.

가만히 자신의 상징물을 꺼내어, 넘기려고 했다.

그리곤.

-탐욕의 악마. 가장 오래된 악마이자······ 멸망을 변화시킨 존재여.

탐욕과 멸망.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탐욕의 악마.

멸망을 변화시킨 존재?

··· 혹시 착각한 걸까.

그의 모습을 보면 충분히 착각할 수도 있을 듯했다.

우선 노인의 모습을 한 잊힌 신의 두 눈동자는 회색빛으로 죽어있었다.

두 눈에선 고름이 나왔고, 피부는 마른 장작처럼 갈라졌으며, 백발의 머리도 풍성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푸석푸석했으니까.

심지어 잊힌 신의 상징물 역시 관리 안 된 골동품처럼 해지고 곳곳에 균열이 간 상태였다.

이곳에서 본 어떤 잊힌 신들과 비교해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자.

'가장 오래된 존재.'

그건 아마도 세계수의 던전에서 가장 오래 잊힌 채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다른 잊힌 신들이 그를 일컬어 '에인션트'라고 부른 것만 봐도 얼추 알 것 같았다.

그러니, 착각일 것이다.

내가 탐욕의 악마라니.

'지금 내 모습은 란돌프다.'

7대 악마 중 한 명이 란돌프라는 건 말이 안 된다.

만약 그러했다면, 투신의 탑에서 '질투의 악마 산샤'를 마주했을 때 놈이 나를 알아봤을 터.

질투의 악마 역시 7대 악마 중 하나였으므로.

하지만 산샤는 란돌프를 보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는 탐욕이 아니다."

탐욕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탐욕의 악마일 수는 없다.

그러자 잊힌 신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려.

"부정하진 못하겠군."

-확실히 나는 볼 수 없는 신이오. 하지만 그건 내가 보이는 형태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오.

"그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말인가? 무엇을?"

-나는 영혼의 형태를 본다오.

영혼의 형태라.

영혼을 쥐고 흔드는 존재들은 몇 번 보았으나, 영혼의 형태 자체를 보고 읽는 이는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내 영혼의 형태가 '탐욕의 악마'와 비슷하다는 말인데.

나는 여전히 어떠한 이해도 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내가 해왔던 행동들 모두가 명예롭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 한들 악마적인 행태를 보인 적은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 그저 형태를 보는 것일 뿐이라면, 비슷해서 착각했을 수도 있지 않나?"

-착각할 리 없소. 탐욕의 악마는 내가 만나본 그 어떤 존재들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지니고 있었기에.

잊힌 신은 확신했다.

하지만 나는 부정했다.

악마가 아름답다고?

그러나 이 노인 역시 악신이었다.

악신의 관점에서 아름답다는 말이 좋게 들리진 않았다.

결국, 세계수를 좀먹는 악자일 따름이다.

악신의 달콤한 말에 유혹되어선 안 된다.

-너무 오래 잊혔던 탓에 다른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음에도, 유일하게 탐욕의 악마에 관해서만은 기억이 난다오.

"나는 악마가······."

-아아, 그대는 악마가 아니오. 이는 전생의 이야기일 뿐이니. 본래 악마는 윤회할 수 없으나, 아마도 여신들이 지켜낸 것이겠지. 그대를 사랑하던 두 여신이.

"······."

-아직도 어제의 일 같이 선명하구려. 레아, 피나······ 그리고 나는······ 나는······ 나는 누구였더라? 나, 나는, 나나나나는, 나는는는······!

그때였다.

두 여신의 이름을 입에 담은 늙은 잊힌 신이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양쪽 눈알이 미친 듯이 돌아가며, 신형이 흐릿해지고 다시 뚜렷해지길 반복했다.

'이게 잊혀진 신의 말로······.'

잊힌 신이 소멸하기 직전에 보이는 현상인 듯싶었다.

이름을 잊혀진 신은 결국 이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 최후 치고는 너무나도 비참하지 않나.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영영 사라진다는 게.

그렇게 5분여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 못 볼 꼴을 보였구려. 미안하오.

"괜찮다. 꽤 인상적이었으니."

-······ 내게 안식을 주겠다 약속한다면, 내가 기억하는 전부를 말해주겠소. 탐욕의 악마와 멸망에 관해서.

"내가 직접 상징물을 파괴해주길 바라는 건가?"

-맞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뿐이오.

과연. 손해볼 게 없는 제안이다.

그가 바라는 건 어차피 내가 하려던 행위에 불과했으니까.

멸망에 관한 이야기는 특히나 궁금하던 것.

다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내가 란돌프로 계속해서 변신해있는다면 세계수 자체가 침식되어 폐사할 지도 모른다.

"짧게 요점만 부탁하지."

-걱정마시오.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오.

잊힌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탐욕의 악마는,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소.

······ 다소 과격한 표현과 함께.

*

문명의 황금기.

신들의 힘이 가장 강력하던 시대.

모든 악마가 고래를 숙이며 하늘을 쳐다볼 수 없던 시대.

그 시대에,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마가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길 주저하지 않으며, 자신을 찾아온 신들과 매번 싸우면서도.

"너 좀 강한데? 그 기술 어떻게 쓰는 거야?"

"······."

"좀 알려주라!"

"······ 그냥 미친놈이었군. 내 영역에서 꺼져라."

"야, 비싼척 하지 말고 좀 알려주라!"

신들은 놈의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승리해도, 패배해도, 놈이 바라는 건 오직 싸움뿐이었으니.

심지어 누군가를 죽이지도 않는다.

불살(不殺)의 악마.

그래서 탐욕은 악마계의 이단아였다.

다른 악마들도 탐욕의 행동거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악마라면 응당 지배권역을 늘려나가며 필멸자들을 농락해야 정상이거늘.

생명체의 어두운 감정을 받아먹고 힘을 키워야 마땅하거늘.

"탐욕의 처리에 대해 슬슬 결정해야할 듯싶소만."

"악마는 멸해야합니다."

"하지만 탐욕은 태생이 악마일뿐, 악한 행동을 하진 않았습니다."

"악마 주제에 하늘을 올려다 보는 걸 전혀 무서워하지 않소. 이는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 그 이유만으로도 죽여 마땅하외다."

백신전의 신전.

최상위계 백 명의 신들이 기거하는 그곳에서는 연일 회의가 열렸다.

오늘의 주제는 '탐욕의 처리'에 관한 것.

하지만 좀처럼 결판이 나지 않는 주제였다.

악마인 그를 혐오하고, 그의 행태를 지적하는 신들도 있는 반면에.

"귀엽지 않나요? 악마인데 악마답지 않아서."

"맞아. 어제는 시들어가는 꽃에 물도 주던데?"

"아, 그거 나도 봤어. 물 마시고 힘내라고 덕담도 해주더라."

"견뎌 임마! 그래야 더 강해진다!"

"푸핫! 진짜 귀엽다니깐."

그를 애정하는 신들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주로 여신들이었다.

"어쩌다가 백신전의 기강이······."

"하아아아!"

오늘도 이 주제는 흐지부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았으니까.

특히 여신들 중에서도 가장 권위있는 두 쌍둥이 여신이 문제였다.

탐욕에 관해서라면 무조건적으로 편을 들어주는 두 쌍둥이 여신에 의해, 탐욕은 일종의 면죄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세계는 황금기를 맞이했으며, 신들의 힘은 더할나위 없이 강하던 시대.

그런 악마 하나쯤은 있어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스스로의 힘에 대해서만 탐욕할뿐, 놈은 다른 해악을 끼치지 않았으므로.

설령 문제를 일으킨다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 '멸망'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멸망'의 출현 이후.

모든 건 뒤바뀌었다.

황금기의 세계도, 백신전조차도.

화르르륵!

··· 전부 불에 타, 없어졌으니까.

"천상이여! 우리 세계를 어찌하여 불사르려 하는가?"

"우리에게 '멸망'의 형벌을 내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으리라!"

필멸자들과 불멸자들이 한데 뭉쳤다.

가장 강력한 시대의 힘이 뭉치면 충분히 멸망도 이길 수 있으리라.

하지만, 현실을 깨닫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멸망은 너무나도 강했다.

세상 곳곳에 멸망의 탑이 솟아났고, 수많은 대지와 신들이 순식간에 힘을 잃은 채 멸망에게 지배되었다.

허나 가장 큰 문제는 착각이었다.

하나로 뭉쳤다는 착각.

서로가 너무나도 위대했기 때문일까.

겉으로는 하나인 척 하였으나, 뒤로는 모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결국 사흉과 내전으로 제국이 무너지며 인간들은 가장 큰 구실점을 잃었다.

드루이드들도 서로 반목한 탓에 제거되어갔다.

세계수는 시들었고, 하늘은 어둠에 잠겼다.

악마들은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악신들의 힘은 나날이 커져 신들로서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신령한 신들이 악신으로 타락하는 일들마저 비일비재했다.

"끝이야."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신들은 후회했다.

자신들의 힘에 취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지난 날들을.

진즉에 모든 악을 소탕하였다면 이토록 허망하진 않았을텐데.

악마들이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

악마의 힘이 너무나도 방대해진 탓에 이제는 건들 수도 없다.

도리어 놈들은 신을 사냥하고, 타락시키고 있었다.

악신들?

차라리 악신들이 신사적일 지경이었다.

그들 역시 세상의 멸망을 바라진 않았으므로.

자신이 세계의 주도권을 쥐길 원했지, 멸망 자체를 반기진 않았다.

하지만 악마들은 아니었다.

놈들은 기다렸다는 듯 오직 자신의 배를 채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세계가 통합되지 못한건 악마들의 영향도 크게 한목했다.

멸망은 그런 악마들을 방관했으며, 덕분에 악마들은 나날이 강해지는 중이었다.

"악마들이 드디어 본성을 드러냈군."

"백신전이 존재할땐 하늘 한 번 못 쳐다보던 놈들이······."

"······ 그런데 탐욕은 어디갔지?"

"놈도 악마다. 탐욕도 힘이 생겼을테니 본성을 드러냈겠지."

"하기야. 사실상 가장 큰 힘을 쥐었을테니. 과연 이전처럼 자신의 강함만을 욕구하겠나?"

남은 신들은 비관적이었다.

어느날 탐욕은 사라졌다.

하지만 멸망의 출현 이후 가장 큰 득을 본 건 악마들이다.

큰 힘이 주어지자, 미친 듯이 활개를 쳤다.

한데, 탐욕이라고 다를까?

도리어 탐욕은 더할 것이다.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을수록 인간들의 '탐욕'은 강해져만 갔다.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가지려고 마구잡이로 서로를 죽여댔다.

신들도 탐욕했으며, 악신마저도 갈구하던 시기.

탐욕의 악마가 얼마나 강한 힘을 쥐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 그리고 머지않아, 탐욕의 악마가 나타났다.

쿠르르르릉!

이름없는 산이 무너지며.

"뭐, 뭐야. 세상이 왜 이렇게 됐어?"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 눈살을 찌푸리고, 이맛살을 구겼다.

탐욕의 악마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간 싸운 모든 신들의 기술과 힘을 이해하고자.

깨달음을 체득하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겨우 체득하고 나왔는데 세상이 망해가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저놈이구나. 세상을 망가트린 놈이."

저 멀리서 느껴지는 멸망의 기척.

강하다.

여태껏 싸운 신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렬한 악의 기운이었다.

그래서일까.

"오오오! 저정도로 강한 놈이 이 세상에 아직도 존재할 줄이야!"

탐욕은 기뻤다.

순수하게.

놈과 싸우면, 자신 역시 더욱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

'······ 생각보다 자세하게 알고 있군.'

이야기를 듣던 도중, 나는 궁금해졌다.

눈앞의 잊힌 신이

악신임이 분명할진대, 어떻게 신들의 상황마저 알고 있다는 말인가.

'타락한 신이로구나.'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잊힌 신은 타락한 악신이다.

본래 백신전의 신이었으나, 멸망의 출현 이후 악신으로 변한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탐욕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계속 염탐이라도 한 듯이.

······ 잠깐. 설마 여신 중 하나인가?

그러기엔 너무 남자 노인의 모습인데.

-탐욕은 멸망을 공격했소.

"어떻게 됐지?"

-어떻게 됐겠소? 깔끔하게 졌소이다.

"······."

-하지만 멸망은 탐욕을 살려주었소. 이미 모든 악마가 '멸망'에 일조하고 있었으니, 봐주기로 한 것이오.

"이해가 일치해서 봐주었다?"

-그런 셈이지. 문제는······ 이후로도 탐욕의 공격이 계속됐다는 것이오. 정말 정신이 나갔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지 않소?

"······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긴하군."

부정하고 싶지만, 탐욕은 왠지 나와 닮았다.

누가 보아도 정신이 나간 짓이지만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그저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그래서인지 두 여신들도 탐욕을 돕기 시작했소. 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그녀들만이 탐욕과 함께했지. 그리고 탐욕은, 멸망의 출현 이후 처음으로 그에게 상처를 남기는데 성공했소. 기껏해야 생체기에 불과했지만, 틀림없이 처음있는 일이었지.

"그래서 멸망이 멈춘 건가?"

-아니오. 멸망은 여전히 세계를 멸망시키고 있었소. 다만······ 멸망은 궁금했던 것 같소. 두 여신과 악마가 서로 힘을 합치는 모습을 보며. 절대로 조화할 수 없는 존재들이 조화한 모습을 보면서······ '종말'의 구상을 한 게 분명하오.

그 순간이었다.

잊힌 신의 몸이 점차 흐맅해져갔다.

쿠릉! 쿠르르르릉!

세계수의 떨림도 심화되었다.

그러자.

-그 뒤로 멸··· 망은······ 으느으아르으으으!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제, 제발, 내게 안식을······!

잊힌 신은 애원했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 싫다며 몸부림쳤다.

하여, 나는 결정했다.

"'재'의 장갑에 담긴 '박현명'의 모습으로 전환됩니다."

"'비활성 상징물'에 '5'의 성화를 부여합니다."

"'상징물'이 활성화합니다."

"활성화 된 상징물을 땅에 심으면 '세계수'가 자라납니다."

"활성화 된 상징물을 연관된 '잊힌 신의 터'에 놓을 경우 '잊힌 신'이 이름을 되찾으며, 세계 각지에서 '이름을 되찾은 신'과 관련된 생명들이 잉태하기 시작합니다."

눈앞에 있는 잊힌 신을 살리기로.

-무, 무엇을······!

잊힌 신은 당황했다.

-이 힘은··· 별을 만드는 자의 힘!

설마 내게 이런 능력이 있으리라곤 예상도 못했다는 듯이.

-하지만 나의 터를 모르면 소용없는 짓이오. 나도 내가 어디에 터를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거늘······.

"여기다."

-여기······ 라니?

"이곳이 너의 터다."

잊힌 신.

에인션트라 불리운 자.

그의 형상이 흐려지자, 이 세계 자체가 흐려지고 있었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세계수의 던전에,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한 존재가 누구인지.

바로 눈앞에 있는 노인이다.

그가 자신의 터를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당연히 이 세계 자체가 그의 터다.

나는 활성화된 상징물을, 즉시 바닥에 꽂았다.

"'잊힌 신의 터'에 '활성화 된 상징물'을 놓았습니다."

동시에.

"'잊힌 신'이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나의 이름은.

잊힌 신.

너무나도 오래되어 모든 걸 잊고, 잃어버린 존재.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얄팍한 기억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먼 옛날의 기억.

가장 찬란했으며, 가장 번화했던 시절의 단편적인 일면만이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항상 의문이었지.'

궁금했다.

자신의 기억도 아닌 남의 기억을 그는 왜 추억하고 있던 걸까.

어째서 두 여신과 탐욕에 관련된 기억만을 부여잡은 채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나.

이제 곧 소멸을 맞이하는 이때에도 말이다.

여태껏 그러한 궁금증 탓에 그는 안식할 수 없었다.

다른 잊힌 신들도 모두 시간이 지나며 사라졌건만.

'나는······ 누구인가.'

미칠 듯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알 수가 없었다.

자신과 관련된 기억만이 송두리째 증발한 탓에.

떠올리려 노력해도 남는 것만 공허함 뿐인지라.

잊히게 된 이유도, 이곳에 있는 원인도 모른다.

계속해서 무한한 굴레 속에 갇힌 기분.

이대로 소멸한다면 너무나도 비참한 것만 같았다.

하여, 종말이 나타났을 때.

'오오! 나의 끝을 고하려고 종말이 왔구나!'

그는 환호했다.

종말은 끝을 고하는 자.

끝을 정해주는 존재였기에.

고통의 굴레도 끝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종말이 지닌 영혼의 형태는 기억 속의 누군가를 닮아있었다.

'······ 탐욕이여. 그대가 왜?'

탐욕의 악마라니.

이미 죽음을 맞이했을 터인 그가 종말이 되어 나타났다.

상상을 초월하는 어둠을 지녔으나, 그 안에는 분명히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광명을 담았음이라.

'아아. 레아, 피나. 너희는 여전히······.'

잊힌 신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들은 여전히 함께하고 있었다.

모든 게 달라진 현재에도, 애틋하게 탐욕을 감싸는 중이다.

허나 세상이 심연에 잠기기 직전까지 레아와 피나를 제외한 다른 신들은 탐욕을 돕지 않았다.

악마라는 이유로.

그의 태생과 본질이 악할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오직 두 여신만이 그에게 헌신한 것이다.

만약······ 그러하지 않았다면, 탐욕의 악마는 멸망으로부터 세계를 구원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름답구나.'

자신과는 다르다.

잊혔으며, 추하게 변한 그와는 달리, 굳건한 믿음으로 서로가 유대를 맺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 잊힌 신은 가슴이 먹먹했다.

저리고, 아팠다.

왜일까.

입가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원인 모를 슬픔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대를 넘어서는 저 유대가,

저 강렬한 믿음이.

'멸망조차 실패했던 종말의 완성을 탐욕, 그대는 완성했는가.'

마침내 종말을 완성한 것이리라.

하기야 탐욕이라면 가능했을 터다.

탐욕은 포기를 몰랐으니까.

신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끈질긴 놈.

끝내 백신전의 모든 신과 싸우고, 승리했던 유일한 존재.

멸망과의 대결에서는 비록 패배했으나······.

잊힌 신은 안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세상이 진정으로 통합되었다면.

신들이 탐욕을 배척하지 않았다면.

멸망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건 탐욕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멸망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멸망은······.

멸망은······ 어떻게 했더라?

'기억이······.'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그런데 끊겼던 기억이, 다시 이어지고 붙기 시작했다.

원인은 하나.

······ 탐욕의 악마.

어둠을 씻어낸 그는, 전혀 다른 인물로 변해있었다.

그 모습은 분명 탐욕의 악마와 다르지만.

'똑같구나. 너의 영혼은.'

영혼의 형태가 더 확실하게 두드러졌다.

정말······ 아름답다.

탐욕의 악마가 지닌 영혼은 별의 모양을 하고 있다.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아름다운 별.

그가 본 어느 존재도 저토록 뚜렷한 별의 영혼을 지닌 존재는 없었다.

게다가 그가 사용한 능력은 '별을 만드는 자'의 권능.

창세의 힘이다.

어떻게 창세와 종말이 함께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여신의 가호가 있다 한들 불가한 일.

'또 있구나. 다른 영혼이. 너무나도 찬란한 자가.'

그제야 잊힌 신은 알 수 있었다.

저들과 함께하고 있는 영혼이 하나 더 있음을.

그 영혼은 잊힌 신도 전부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아마도 저 영혼에 의해 탐욕은 창세의 힘을 같이 지니게 된 것이리라.

누굴까.

잊힌 신은 곧 그 거룩한 영혼과 눈을 마주쳤고.

'기억이······ 돌아왔다.'

······ 잊히고 사라졌던 기억이, 드디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잊힌 신은 떨리는 눈동자로 탐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

"너는 진짜 강하구나!"

만신창이가 된 탐욕의 악마가 몸서리를 쳤다.

상상이상이었으니까.

자신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멸망에게는 상대가 안됐다.

"어떻게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거야? 좀 알려주라!"

"······."

"아, 아니다. 내가 직접 알아내야지. 내일 다시 올게!"

패배를 인정한 탐욕의 악마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

권좌에 앉은 채 한치의 미동도 없는 멸망.

그는 가만히 탐욕의 악마가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탐욕을 상대하는데 자리에서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물론 멸망의 기사들을 물리치고 여기까지 당도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지만.

"······."

멸망은 권태로운 눈빛을 짓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임무는 오직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

이 세계를 심연에 가라앉히는 게 그가 할 일이다.

그리고 악마들은 그의 멸망에 일조하고 있었다.

멸망을 가속화하고 있는데, 구태여 원죄의 악마들을 죽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악마들은 서로 반목하는 듯하지만, 은근히 서로에게 협조적이다.

또한 겁이 많고 눈치가 빠르다.

만약 탐욕을 죽인다면 나머지 악마들 전부가 숨어버릴 터.

그러니 살려두는 게 더 이득이었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

"나 왔다! 한 판 붙자!"

······ 진짜로 또 왔으니까.

하는 수 없이 멸망은 압도적인 힘으로 탐욕의 양쪽 팔을 잘랐다.

하지만 탐욕의 악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다음날도.

"다시······!"

그 다음날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힘의 차이를 실감했을 텐데도 탐욕은 계속 도전했다.

그렇게 몇날며칠이 지나서야, 멸망은 알 수 있었다.

탐욕의 회복속도가 묘하게 빠른 건 뒤에 두 여신이 있기 때문임을.

여신이라는 것들이 악마를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들이 힘을 합치고 있다.

인간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신들조차도 서로 배신하는 판국에.

"······."

하지만 그뿐이었다.

멸망은 그저 권태로울 뿐이었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놈의 도전은 그저 약간의 흥미가 생기는 정도였다.

가장 강한 네 명의 기사를 부른다면, 놈은 여기까지 도달하지도 못하겠으나······ 그들은 제국을 괴멸시키는데 바빴으니까.

"······."

그런데.

"으아아! 드디어 일어났구나!"

······ 이변이 일어났다.

멸망이 권좌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것이다.

정확히 52번의 도전이 있은 뒤였다.

탐욕의 악마는, 싸울 때마다 강해지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성장중이었다.

여전히 멸망에는 못 미치지만, 그리하여 권좌에서 움직이게하는데 성공했다.

"으아아악! 아파! 아파! 머, 멈춰!"

멸망은 탐욕을 조각조각내었다.

겨우 생명만 유지하게 만들었다.

여신들도 쉽게 회복시킬 수 없게끔.

족히 몇 년은 고생해야할 수준으로 말이다.

세계가 멸망한 다음에야 다시 나타나리라.

한데.

"멸망! 나 왔다!"

탐욕은 7일만에 다시 나타났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그 사이에 깨달음을 얻어, 탈각한 것이다.

그것도 몇 번이나 탈각하여 극의에 이르렀다.

가장 강한 멸망의 기사인 사흉을 넘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멸망에는 이르지 못했다.

멸망은 가장 강력한 형별.

당연히 멸망에 미칠 수는 없다.

허나······.

"오? 이제 제대로 싸워보려고?"

"······ 넌."

"뭐야. 너 말도 할 줄 알았어?"

"재밌는 놈이로군."

처음이었다.

수많은 세계를 멸망시켜온 그가,

누군가에게 이러한 흥미를 갖게 된 건.

왜 여신들이 저놈을 돕는지, 사랑하는지 알겠다.

오로지 순수하게 힘만을 탐욕하는 놈이다.

그 이면이 멸망과 닮은 것이다.

하지만 멸망은 지금껏 제대로된 대적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최고위의 신이라고 할지라도 멸망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무료하고, 권태로웠건만.

탐욕의 악마는 싸울수록 강해졌다.

강해지는데 한계가 없었다.

하여, 멸망은 놈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223번의 싸움 끝에 멸망은 자신의 무기를 들었다.

569번을 싸웠을 때 멸망은 권능을 사용했다.

1,201번을 싸우자 10합을 겨룰 수 있게 됐다.

2,650번에 다다르면서 놈은 마(魔)를 초월했고.

5,110번의 대결을 하며 우주의 진리에 대해 깨달았다.

그리고 11,247회를 지난 순간.

"닿, 닿았다······!"

처음으로, 탐욕은 멸망에게 닿을 수 있었다.

큰 상처는 아니지만.

바로 회복될 수준의 생체기에 불과하지만.

··· 그 이후였다.

놈이 진화하는 과정을 보며 멸망도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이 세계를······ 완전히 끝장내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심연에 가라앉는다는 건 모든 가능성을 잃는다는 것이다.

잉태하지 않고, 윤회하지 아니하며, 모든 순환이 소멸한다는 의미다.

대륙 전체가 심연에 가라앉으며 영원토록 고통받는 형벌, 멸망.

당연히 저 탐욕의 악마도 더 이상 강해지지 못하리라.

하여.

멸망은 그의 뒤에 선 자에게 명했다.

"탐욕의 모든 것을 보고, 기억하거라."

처음부터 이 전부를 뒤에서 지켜보았던 자.

멸망의 '눈'을 관리하며, 세계의 모든 걸 지켜보는 존재.

"탐욕이야말로 '종말'을 만들어낼 단서이니."

멸망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 보이지 않고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천상.

이토록 강력한 멸망도 결국 천상의 도구일 따름이지만.

종말을 만들어낸다면,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멸망은 고개를 돌렸고.

뒤에 선 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히프노스, 꿈의 지배자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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