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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57% 13ATRIBUT / Chapter 11: 11

Chương 11: 11

절대로 적대해선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마지막 이름.

당연히 자신이 불릴 줄 알았던 엘프여왕은 패닉에 빠졌다.

여태껏 호명된 다섯.

그들과 견줄 수 있는 존재는 자신 외엔 없으리라 확신했을 테니.

또한, 기겁하며 놀란 건 엘프여왕만이 아니다.

당사자인 아우릴도, 그 외의 모든 엘프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나 보군.'

나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아우릴을 고른 이유.

단순히 내가 아우릴을 알아서만은 아니다.

물론 영향이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집결된 엘프의 힘이 가장 성가시니까.'

이곳 세계수를 찾아온 '집단'은 엘프들이 유일하다.

집단의 경쟁이 되면 단연코 가장 신경 쓰이는 종족이 엘프였다.

여왕을 필두로,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거든 상당히 까다로울 터.

게다가 세계수로부터 온갖 혜택이란 혜택은 전부 받아온 종족이다.

그래서 그런지 엘프의 무력은 평균치가 높다.

이곳에 모인 하이 엘프들은 무려 평균 14Lv 수준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 정도로 강력한 무력집단을 나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다크엘프와의 전쟁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전쟁을 겪었다는 건 달리 말하면 그만큼 '위계'가 중요해졌다는 뜻.

그리고 이곳에 모인 엘프 중 가장 위계가 낮은 게 아우릴이었다.

"일개 엘프를······ 우리가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까?"

예상대로의 반응.

역시나 볼멘소리를 늘어놓는다.

여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엘프들.

평범한 엘프를 따르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남자 하이 엘프가 물었으나, 저 물음은 여왕이 한 것과 진배없다.

하여 나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게 싫다면 내가 앞서 호명한 이들 중 한 명을 따르면 된다. 물론, 상대가 받아줘야 하겠지만."

엘프가 아닌 다른 종족을, 다른 존재를 과연 저들이 따를 수 있을까?

아서라.

절대로 그럴 일은 없다.

타지, 타종족과 일체의 교류가 없는 엘프들.

저들은 아우릴을 따르든가, 아니면 던전에 들어가는 걸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할 따름이다.

더욱 당황한 채 하이엘프 한 명이 반박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시여. 아우릴의 자격은 여왕님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말하고 있으나 가시가 박혀있다.

아우릴의 명예는 엘프여왕과 비교할 수 없다는 의미.

세계수가 검증했으니, 그야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이곳은 세계수의 검증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다. 내가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를 따지는 자리이지."

"하, 하지만 '명예'로운 자라고 분명히······."

"나의 인정이 곧 명예다."

"······."

반박하던 하이엘프가 입을 꾹 닫았다.

내 인정만큼이나 명예로운 일은 없다는 뜻.

세계수의 검증보다, 나의 인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엘프여왕은 내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거고.

"대체··· 무슨 기준으로······."

끝까지 납득 못한 하이 엘프들이 중얼대자, 보다못한 대족장 알비노가 나섰다.

"그대들은 지금 황금률의 드루이드님을 의심하는 건가?"

"그, 그건 아닙니다. 다만······."

"엘프들은, 드루이드를 적대할 생각인가?"

"······!!"

듣고있던 엘프들 모두가 기겁했다.

드루이드와 엘프는 공생관계다.

숲을 만드는 자, 그리고 그 숲을 관리하는 자.

허나 '관리'의 역할은 다른 종족에게 위임할 수 있는 일이다.

예컨대 '드라이어드'들.

숲과 함께 살아가는 드라이어드들도 마찬가지로 숲을 관리할 줄 알았으니.

고로, 엘프는 절대로 드루이드를 적대할 수 없다.

알비노는 분노한 얼굴로 엘프여왕을 향해 말했다.

"멸망의 출현 이전부터 드루이드들은 엘프들을 존중해왔다. 엘프들은 세계 전역의 숲을 보살피고 신록과 세계수를 지키는 막대한 임무를 수행해왔으니. 하지만, 지금의 엘프들은 변질했다. '태초의 숲'에 모여 다른 숲을 신경 쓰지 않아."

"··· 말씀처럼 세계수를 지키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요."

"쯧."

"······?"

알비노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명백한 '무시'의 태도.

하지만, 알비노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선대 엘프의 여왕은 호기가 있었건만, 지금의 여왕은 형편없구나. 황금률의 드루이드께서 왜 그대를 호명하지 않았는지 알겠어."

"알비노··· 아무리 그대가 전설의 드루이드라 할지라도 쉽게 흘려듣진 못하겠군요."

"흘려듣지 못하겠다면?"

스윽.

알비노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쩌어어억!

알비노의 몸이 불어나고, 그의 뿔이 더욱 길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몸의 전신으로 화염이 이글댔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불의 날개가 십여 미터 길이로 피어났으며 한 손에는 어느덧 긴 화마(火魔)의 창을 쥐고 있었다.

압도적인 존재감.

불의 화신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곧이어 그의 머리 위로 떠오른 숫자.

[18Lv]

······ 모습만 압도적인 게 아니었다.

멸망 이전부터 존재해온 전설의 드루이드.

어째서 그가 '전설'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

'······ 18레벨?'

허나 아무리 그래도 불가해다.

대원정 이후 세계의 무력이 상향 평준화되었음을 고려해도 너무한 레벨.

완전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억겁의 세월.

오직 멸망을 죽이고자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 해왔을 터.

다시는 멸망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자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었을 것이다.

심연과 대륙을 통틀어서도 견줄 자가 거의 없는 최상위 포식자.

그게 바로 팔가의 대장로이자, 드루이드의 대족장인 알비노이리라.

명예의 세계수가 다시금 되찾아준 그의 본모습은 실로 경이로웠으니.

"······!!"

"으음······."

알비노의 격에 지배되고 제압된건 엘프여왕만이 아니었다.

그를 본 이들 대부분이 침음을 흘리고 삼키며 자신을 보호하고자 기운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한 발자국을 물러난 채 입술을 푸르르 떨어대는 자들도 부지기수.

'신기하군.'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내게는 별 영향이 없었다.

알비노가 나에게 향하는 기운 전체를 차단한 덕이다.

물론 그런 이유로 신기해한 건 아니었지만.

[고유 권능 '세계수 영역강화(32Lv)]

[고유 권능 '신성불가침(32Lv)']

[고유 권능 '적대 불가(32Lv)']

[고유 권능 '접근 불가(32Lv)']

"'알비노'가 '세계수 영역'에서 강화된 상태입니다."

"'무신의 심검(무장해제, 35Lv)'을 사용해, 고유 권능을 베어낼 수 있습니다."

알비노가 지닌 고유 권능들.

그것들은 '파괴불가'의 성향을 띤 절대적인 권한이었다.

접근 자체가 불가하며, 적대하는 마음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절대자의 권위.

그리고 그러한 권능들을 나는 베어낼 수 있다.

성역을 지키는 결계를 베어냈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신기한 점은 뒤에 표시된 '레벨'이다.

'불가(不可)의 성격을 띤 것들도 레벨이 존재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높은 레벨의 분포를 보이고 있었다.

한데 무신의 심검은 검술 숙련도, 레벨에 따라 더 낮은 '불가'의 성격을 가진 것들을 베어내고 파괴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 그런데 알비노의 레벨이 보이는 이유가 뭐지?'

다만, 알비노의 모든 '레벨'이 보이는 이유가 아리송했다.

본래 알비노를 비롯한 최강자들은 자신의 레벨을 숨기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이곳에서 '레벨'이 육안으로 파악되는 건 절반 정도.

히든 특성으로도 쉽사리 분별해낼 수 없는 장비, 혹은 도구나 스킬, 특성 등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걸 막은 까닭이다.

문제는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알비노의 레벨이 보인다는 것.

'특성 진화의 영향은 아니다. 그랬으면 진즉에 보였겠지.'

하이 드루이드의 히든 특성이 '황금률의 드루이드'로 진화하며 변화된 현상이라면 진즉에 보였어야만 한다.

지금 갑자기 보인다면 아예 다른 이유일 터.

아마도 지금 그가 내게 보이고 있는 태도와 관련이 있지 않을는지.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허드슨.

녀석이 카지노에서 자신의 전부를 내게 털어놓았을 때.

나는 그때 허드슨의 '전체 정보'를 열람할 수 있었다.

'······ 알비노가 온전히 나를 믿고 있다?'

즉, 알비노가 나를 믿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드루이드의 신이라는걸.

내가 자신을 이끌어줄 주인이라는 것을, 비로소 확실하게 인정한 것이었다.

'아마도 자리의 영향이겠지.'

가짜로 여기고 대한다면 티가 나기 마련.

이곳에 모인 모두가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

필사적으로 지키며 숭상해야 할 지고한 존재라고 스스로 세뇌하지 않으면 이곳에 모인 모든 종주에게 발각되는건 시간문제일 테니.

이유야 어찌 됐든, 좋은 현상이다.

팔가, 그리고 드루이드가 나를 진심으로 따른다는 방증.

곧이어 알비노가 흉신과도 같은 기세를 펼치며 말했다.

"전대의 여왕에게 '드루이드'를 적대해선 안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나?"

"그, 그 모습은······."

"특히 '세계수'와 가까이에 있는 '드루이드'는 절대로 적대해선 안 된다고 했을 터인데?"

"······."

엘프여왕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알비노'에 관한 전승을 들은 바가 있다.

-'알비노'는 가장 하이 드루이드에 근접한 자다.

-일곱 그루의 모든 세계수가 찬란하게 빛날 때, '알비노'는 전설이 된다.

-엘프는 결코 '알비노'를 적대해선 안 될지니.

전대의 여왕들이 남겨놓은 기록지.

그곳에서 알비노의 이름을 틀림없이 보았다.

드루이드들은 모두 강력하지만, 그중에서도 알비노는 전설이라고.

어째서 갑자기 사라졌는지 아무도 이유는 몰랐다.

설마, 이곳에서 '명예의 세계수'를 지키고 있었으리라곤 누가 알았겠나.

"······ 사죄드립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시여."

"여, 여왕님······!"

엘프여왕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본 하이엘프들이 기겁했으나.

순간, 알비노의 분노가 누그러졌다.

고개를 숙일 대상을 정확히 알아본 탓이다.

만약 알비노에게 자신에게 사과했다면 도리어 실망했을 것이다.

이어 엘프여왕이 계속해서 말했다.

"드루이드를 적대하고, 의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답니다. 엘프와 드루이드는 태초부터 시작된 동반자니까요. 마찬가지로 황금률의 드루이드님의 선택을 의심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간곡하게.

간절함을 담아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부디 세계수의 던전에 입장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태초의 숲에 기거하는 엘프들.

그곳의 정점으로 군림해온 엘프여왕이 누군가를 향해 이토록 애절히 요청한 적이 또 있을까.

균열의 탑을 클리어한 신록의 주인, 란돌프의 출현을 알았을 때도 아루웬 장로를 보낸 여왕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부리는 존재이지,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아니다.

신성영역의 주인들과 갖은 종주들이 모여있는 자리.

하물며 드루이드가 출현하고 그들의 신이 위치했으니.

이제야 목소리를 높이고 주장을 펼칠 입장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태초의 숲에서 하던대로 행한다면 풀 한포기 남지 않고 멸절하리란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된 것이었다.

"허락하마."

"··· 감사합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시여."

내 허락을 듣고 엘프여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까다로우리라 여긴 여왕이 굴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더 이상 내 선택과 의견에 토를 다는 자는 없을 터이므로.

또한, 자비를 베풀었으니 여왕은 더욱 나를 어려워할 것이다.

"그런데 13명씩 나누면 일곱 그룹으로 나뉘지 않소? 나머지 한 그룹의 대장 역할은 누가 맡을 생각이오?"

멸악의 거인이 다시 한번 말했다.

알비노를 염두에 두었느냐, 혹은 다른 자를 임명할 것이냐 묻는 것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답해주었다.

"나다."

"······ 12명은 직접 선택하는 것이오?"

"아니."

"그럼?"

"선택을 받는다."

"······?"

"나를 포함한 일곱 명 중, 따르길 원하는 자의 앞에 서라. 이후 모두가 정원을 채우면 출발할 것이다."

"13명을 넘으면 어떻게 해야 하오?"

"쳐내야겠지. 그리고 쳐낼 자는 대장이 선택한다."

"과연. 알겠소."

멸악의 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따르길 원하는 자의 주변으로 모이도록."

"예. 그리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대답하고 나선건 역시나 알비노다.

"음, 뭔가 모양새가 이상하긴 하다만······."

알비노를 이어 라이가가 섰다.

머지않아 일곱 그룹으로 속속들이 나뉘기 시작했다.

멸악의 거인을 따르는 별 수호자 그룹.

백왕을 따르는 괴수그룹.

광휘의 초인 카심을 따르는 인간그룹.

아우릴을 따르는 엘프 그룹.

그 외의 대부분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알비노, 라이가, 일각주와 이각주, 세렝게티, 세아 성녀, 허드슨, 아이작, 발테, 앤드류 사제까지. 이상 열 명은 고정이다.'

나를 포함하면 벌써 열한 명.

남은 공백은 겨우 두 명.

하지만 내 앞으로 모여든 건 스물에 가까웠다.

'에이션트 피닉스 알 라움, 빛의 수호자는 정체가 모호해서 그런지 따르려는 이가 없나보군.'

하기야 나라도 저 둘의 주변으로 모이진 않을 것 같다.

나는 고민했다.

둘을 누구로 채워넣을지.

대장의 자격으로 호명하진 않았으나, 그들과 비견할만한 자들이 대거 모여있었으니.

대장을 나눈 기준은 단순히 강함과 명예만이 아닌 '나와 섞일 수 있는가, 없는가'가 보다 중요하게 작용했다.

'저 둘이 좋겠군.'

나머지는 알아서 에이션트 피닉스과 빛의 수호자를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

나는 그중 가장 뛰어난 둘을 선택했고,

······ 마침내 던전에 입장할 준비를 끝마쳤다.

*

"'잊힌 명예의 던전'에 입장합니다."

"'황금률의 기사단(13)'이 전원 입장에 동의했습니다."

"91명의 정원을 모두 채웠습니다."

"던전 보너스 계수 200%+"

"주의하십시오. '잊힌 신들'이 등장합니다."

"일곱 개의 기사단은 '잊힌 신들'을 마주하며, 던전 내에 존재하는 '불가사의 업적'을 채워야 합니다."

"'잊힌 명예의 던전'에는 도합 370개의 '불가사의 업적'이 존재합니다."

"'불가사의 업적'을 달성하면 '잊힌 기사의 영혼'이 깨어납니다."

"'잊힌 기사의 영혼'으로 '기사단'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도달한 '불가사의 업적'의 숫자에 따라 '세계수의 뿌리'에 도달했을 때 받게 되는 보상의 규모가 커집니다(보너스 계수 적용)."

"가장 많은 '불가사의 업적'을 달성한 기사단은 '가장 찬란한 기사단'의 추가업적을 완료하고 추가보상과 효과를 받습니다."

"기사단장의 경우 '잊힌 자들의 왕(신성)'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

"Tip. 세계수의 '잊힌 신들'은 '악성향'을 혐오합니다. 만약 '악성향'을 보유하고 있다면, 철저하게 숨겨야만 할 것입니다."

"Tip. 세계수의 뿌리로 향하는 길은 상상 이상으로 복잡합니다. '잊힌 기사의 영혼'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십시오."

"Tip. 봉인된 구역은 그에 걸맞는 '신의 상징물'을 사용해 입장할 수 있습니다."

"Tip. 기사단은 명예로운 경쟁을 해야할 것입니다."

······.

······.

'규격외'가 무엇인지 보여주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몇 번을 보고 또 보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악의 속성'을 수치화하여 합산하는 것.

잊힌 신이 내건 조건은 본래 달성하는 게 불가한 시련이었으니.

드루이드 알비노의 말마따나 오로지 선한 힘만을 보유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또한, 힘과 무력이란 자고로 파괴를 위해 존재하며 더욱이 강력할수록 '악의 속성'을 띠기 마련이었다.

설령 건실한 신성 사제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악의 성향은 누구나 지니고 있기 마련이며, 0에 가까울 수는 있을지언정 0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건 명예의 수치와는 관계가 없다.

'단지 명예롭다고 악의 성향이 없을 수는 없으니.'

예컨대 명예가 높으면 악업을 지울 수 있다.

면죄부를 사용해도 악업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성향과 속성은 따로 구분되며 지워지지 않는다.

선의 성향이 100이라고 악의 성향 100을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선의 성향이 100이고 악의 성향도 똑같이 100일뿐.

서로 비슷하게 올려 균형은 맞출 수 있으나 그뿐인 게다.

또한 '명예'의 수치가 높다는 건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

클래스, 스킬, 장비, 신비나 재능, 특성, 혹은 보유한 도구 따위로도 오를 수 있는 게 '악의 성향'이었고, 그것들을 통틀어 얻어낸 무력으로 명예를 쌓았을 테니 말이다.

하여, 모든 존재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명예와는 다르다는 게 이러한 뜻이다.

명예와 악업은 서로 보완되지만, 선과 악의 성향은 서로 보완되지 않는다.

각기 따로 계산해야 한다는 의미다.

설령 그것이 '신'이라 할지라도 이 틀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 합은 500을 한참 넘겼을 터인데.'

그러니까 당연히 모든 존재는 '악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신조차 벗어날 수 없는 틀.

절대적인 규칙인 셈이다.

그리고 잊힌 신의 눈앞에 있는 놈들의 '악 성향'은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모두 합쳐 925.

평균적으로 70이 넘는 '악 성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악의 종주'라 불리는 '마족'의 평균보다도 높은 수치.

물론 그만큼 이들이 강하다는 방증이겠지만.

··· 딱 한 놈.

잊힌 신의 기준으로도 이해가 안 되는 놈이 있었다.

'악성향이······ 0도 아닌 마이너스라고?'

0에 가까울 순 있으나, 0일 수는 없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닌 이상.

하물며 마이너스일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럴진대.

지금, 잊힌 신의 눈앞에, '악의 성향'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놈이 있었다.

심지어 그 수치는 도저히 이해도, 납득도 안 될 수준이었다.

[-2,000]

······ 대체 뭐 하는 놈이란 말인가?

이천에 다다른 악의 성향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그냥 악의 성향이 이천이었어도 말도 안 된다 했을 텐데.

어떻게 해야 마이너스를 기록할 수 있는 걸까?

'지워졌다?'

마치 억지로 지워낸 것마냥.

허나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갖고 있는 걸 전부 버린다고 해도 성향의 수치는 0을 기록할 따름이다.

그럼 저건 뭔가.

지금 잊힌 신의 눈에 보이는 저 수치는.

신의 권능이 잘못되었을 리 없다.

이곳 세계수의 안에서는 특히!

-아, 안 돼······!

잘못 본 게 아니다.

꿈도, 허상도 아닌 현실.

자신의 패배를 깨달은 '잊힌 신'이 비명을 내질렀다.

절대로 질 수 없는 조건에서 졌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당했다.

-너는 뭐냐. 어떻게 '진리'의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 거냐?

태초부터 존재해온 '진리'가 있었다.

모든 존재는 '진리'에 속해있으며, 거부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진리의 바깥에 있는 게 있다.

진리의 입장에서도 규격을 정할 수 없는 것.

흔히 '규격외'라 부르는 것들.

허나 '규격외'는 존재해선 안 되기에 언젠가 '진리'에게 잡아먹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놈은 틀림없이 '규격외'라 할 수 있는 존재임에도.

그 바깥에서 멀쩡히 살아있었다.

예외를 두지 않는 '진리'가, 이런 놈을 가만히 둘 리 없을 텐데도.

태초로부터 단 한 번을 제외하면 예외는 없었건만.

-그놈 같은 놈이 또 나타났다고······!

부럽다는 듯.

혹은 원망스럽다는 듯.

거칠게 말을 뱉어냈다.

허나 '그놈'조차 모습을 숨기며 다니고 있다.

절대로 드러나지 않으며, 세계의 뒤에서만 흑막으로 존재하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 이놈은 뭔가.

어떻게 이토록 당당히 '태초의 세계'에까지 발을 들일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잊힌 신의 사고는 거기서 멈췄다.

이곳에서의 패배는, 그냥 패배가 아니었으므로.

-나, 나는 이렇게 '끝'날 수 없다. 다시금, 찬란하던 그때로······!

먹구름의 형태가, 엉망진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없이 축소되며 존재감을 잃어간다.

비명 소리도 점차 수그러들었다.

이윽고.

"합계 '-1,075'로 '황금률의 기사단'이 '잊힌 신'을 상대하여 승리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3) - '잊힌 신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4) - '반박 못 할, 압도적 승리'를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5) - '잊힌 신의 상징물 획득'을 달성했습니다!"

"모든 기사단을 통틀어 현재 해결된 불가사의 업적은 6개입니다."

"달성한 불가사의 업적은 중복하여 다른 기사단이 달성할 수 없습니다."

"'잊힌 기사의 영혼'을 추가로 3개 획득합니다."

"'잊힌 신의 상징물'을 획득했습니다."

······.

······.

*

한꺼번에 3개의 '불가사의 업적'이 완료되었다는 문구.

이로써 총 다섯 개의 업적을 달성했다.

다른 기사단에서도 한 개의 불가사의 업적을 달성한 듯싶지만, 이 정도면 비교가 불가한 수준의 속도일 터.

꽈릉!

그 순간 내 앞에 번개가 쳤다.

이후 검게 그을린, 먹구름 모양의 작은 액세서리 하나가 놓였다.

'이게 신의 상징물인가 보군.'

나는 손을 뻗어 상징물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현재 '비활성 상징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비활성 상징물'에 5의 '성화'를 부여하면 '잊힌 신' 되살릴 수 있습니다."

"'잊힌 신'을 되살릴 경우 '신성 성향'이 200 상승하며, 상징물이 활성화됩니다."

"활성화 된 상징물을 땅에 심을 경우 '세계수'가 자라납니다."

"활성화 된 상징물을 연관된 '잊힌 신의 터'에 놓을 경우 '잊힌 신'이 이름을 되찾으며, 세계 각지에서 '이름을 되찾은 신'과 관련된 생명들이 잉태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잊힌 신의 터'에 '활성화 된 잊힌 신의 상징물'을 놓아 이름을 되찾아주면, '이름을 되찾은 신'은 당신에게 엄청난 호감도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름을 되찾은 신'과 긴밀하게 교감하며 교황의 직위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이미 존재하는 '활성화 된 상징물'에 성화를 부여하여 그 즉시 신과 소통하는 '교황'의 직위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신과의 호감도가 낮다면 '신의 저주'를 받을 가능성도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상징물과 관련된 내용들이 수도 없이 수놓아진다.

그리고 그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 활성화된 상징물을 땅에 심으면 세계수가 된다고?'

그렇다면 모든 '세계수'는 결국 신이라는 것이다.

신 그 자체가 상징물이었고, 신격을 지닌 상징물로 말미암아 세계수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명예의 세계수도 한때는 어떠한 신이었다는 뜻.

'잊힌 신이란 것도 결국 이름을 잃은 신들이라는 건데.'

먹구름 모양의 액세서리.

이 녀석도 이름을 잃은 신이었을 것이다.

활성화 시켜서 땅에 심으면 세계수가 되고, 이 녀석과 관련된 '잊힌 신의 터'에 놓으면 이름을 되찾는다는 의미.

'··· 딱히 이름을 되찾아주고 싶진 않군.'

이놈은 악질이다.

저질이고, 스스로 자비로운 놈인 줄 아는 괴짜였다.

이름을 되찾아줄 마음을 터럭만큼도 없었다.

아무래도 심어서 '온전한 황금률 셔틀'로 만드는 게 나을 듯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신의 상징물에 관한 용도는 이게 전부가 아닐 거다.'

이곳 던전에서 '봉인된 구역'의 문을 여는 용도라고도 했다.

그 외에도 아직 내가 모를 뿐인 용도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나는 신의 상징물을 주머니에 넣었다.

'남은 건······.'

이제 남은 건 한 가지.

'잊힌 기사의 영혼.'

무려 다섯에 해당하는 영혼들.

이것들로 기사단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영혼마다 이름이 있고, 어떤 방식으로 강화되는지가 궁금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작은 '빛'들.

저게 바로 '잊힌 기사의 영혼'일 테니.

곧이어 영혼들이 내게 조잘거렸다.

「답답하다.」

「사라지고 싶다.」

「······ 나는 누구지.」

「여긴 어디지?」

「······.」

각기 다른 말들을 중얼대는 영혼들.

모두 나가사 하나씩 빠진 듯했다.

그중 하나, '반얀'은 유일하게 말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말만 없을 뿐이었다.

"이, 이 빛은 왜 제 주변을 돌아다니는 겁니까?"

세렝게티의 주변을 마구 돌고 있었으니까.

말이 없을 뿐 확실하게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의아했다.

"그건 '반얀'이라는 자의 영혼이다."

"예? '반얀'······ 이요?"

"익숙한 이름인가?"

"······ '원탁의 기사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던 남자의 이름입니다. 그냥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애써 모르는 척을 했고, 세렝게티도 연기를 하며 받아들였다.

여기서 내가 '란돌프'이고 '빌헬름'이라는 걸 모두에게 공개할 수는 없었으니.

"그럼 그 영혼은 너에게 부여하도록 하지."

"··· 아, 알겠습니다."

세렝게티가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반얀의 영혼을 손에 쥐며, 그대로 세렝게티를 향해 밀어넣었다.

순간.

"'잊힌 기사의 영혼(반얀)'으로 기사단을 강화합니다."

"기사단의 '품격'이 5 상승합니다."

"'품격'이 높을수록 기사단에 추가효과가 부여됩니다."

"품격 10 : 기사단원 전원 모든 능력치 + 1"

"품격 20 : 기사단원 전원 모든 능력치 + 2"

"품격 50 : 기사단원 전원 숙련도 효율 + 50%"

"품격 100 : 기사단원 전원 경험치 획득률 + 50%"

"품격 200 : 기사단원 전원 모든 능력치 + 5"

"품격 300 : 기사단원 전원 전체 관통력 + 10%"

"품격 400 : 기사단원 전원 한계 레벨 상승 + 1"

"품격 500 : 기사단원 전원 신성 획득"

······.

"품격의 효과는 던전 밖에서도 지속됩니다."

"'가장 찬란한 기사단'은 품격으로 인한 효과가 2배로 적용됩니다."

"'반얀의 영혼'이 '세렝게티'에게 부여되며, 이름을 되찾습니다."

"'세렝게티'가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해 '반얀'의 기억과 기술을 일부 가져올 수 있습니다."

부르르르!

세렝게티의 신형이 잘게 흔들렸다.

그리곤 고개를 털더니.

"아······."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이후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반얀······ 만이 아닙니다. 빌헬름 님을 제외한 다른 '원탁의 기사단'의 단원들 전부가 이곳에 있습니다."

미친.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그녀의 말 그대로, 나의 예상대로 정말 그들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 그들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원탁의 기사들'이 이곳에 있는 건지.

세렝게티가 숨을 크게 몰아쉬며 답했다.

"'잊힌 신'은 '잊힌 자의 영혼'을 불러들입니다. 이곳에 있는 수많은 '잊힌 신'들이 '잊힌 기사의 영혼'들을 강제로 불러 모은 겁니다."

"그럼 원탁의 기사단이 단체로 잊혀졌다는 의미인가?"

"······ 잊히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왜?"

"자신들의 정체가······ 빌헬름 님에게 해가 될 거라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러자 내 눈을 본 세렝게티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원탁의 기사'들은, 저와 빌헬름 님을 제외하면 모두······."

세렝게티가 말을 아꼈다.

하지만 뒤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원탁의 기사들.

그들의 진짜 정체는.

"······ '금기'를 어긴 자들이지."

······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들뿐이었으므로.

내가 그리 두지 않을 것이다.

금기(禁忌).

해서는 안 될 일, 결코 위배해서는 안 될 규칙.

원탁의 기사들은 대부분이 그러한 '금기'를 어긴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조차도 싫어했기에 넘버링으로 호명되기 일쑤였다.

숫자를 부여하고 매겨지는 기준은 간단했다.

그저 무력이 강한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그만.

나로서도 그게 편했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 셈이다.

한데, 죽어서까지 '잊히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긴 '금기'라는 것도 본인의 의지에 의한 게 아니었으니.

'악신교에서 강제로 교잡되어 배양된 실험체들.'

악신교.

가장 강력한 4대 악신을 따르는 종교들을 일컫는 말이다.

발락가스, 앙그라 마이뉴, 가즈, 디아블로.

그들은 어둠 속에 숨어 비밀리에 활동하며 웬만해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악신을 세계로 소환하고자 온갖 파렴치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탁의 기사들 대부분이 그 목적으로 만들어진 실험체였다.

'아이작이 눈을 뜬 비밀 광산 도시와 이자벨라가 겪었던 사막도시 크람델에서 자행된 사막여왕의 실험, 기타 수많은 생존런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이 있었지.'

천여 번의 '생존런'을 통해 나는 그들에 대해 알게 됐다.

암암리에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악신교의 교도들을.

빌헬름을 플레이하며 나는 그들을 찾아낸 뒤 토벌하고, 수많은 '실험실'을 습격했다.

그리하여 11명의 실험체들을 구해냈으니.

그 실험체들이 바로 '원탁의 기사'의 토대가 된 것이다.

온갖 금기를 어긴 흑마법과 교잡 실험으로 태어난 금기의 아이들.

'처음에는 그냥 특수한 NPC인 줄 알았다만······.'

악신의 교단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실험체들은 나를 따르길 자처하며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솔직히 샘이 났다.

성장 속도가 말이 안 되게 빨랐고, 기초능력부터 차이가 심했으니까.

뿐만인가?

위험한 순간에서도 절대로 도망치지 않는다.

명령을 내리면 반드시 수행해낸다.

하여, 나는 기사단으로 묶어 제대로 키우기만 한다면 대륙최강으로 발돋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세렝게티를 13번째로 입단시킨 것은 일종의 가림막이다.

한없이 깨끗하고 올곧은 그녀를, 순백의 세렝게티를 기사단의 얼굴로 내세워 다른 단원들의 정체가 알려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악신교의 금기로 태어난 기사들이라는 게 알려졌다간 '원탁의 기사'는 존재부터가 위험할 터이므로.

······ 하지만, 결국 그들 모두 '대원정'에서 죽었다.

'원시정령을 다루는 삼군주 마몬, 무의 극치 칠군주 바사라. 그 둘을 죽이는데 가장 많은 희생이 필요했지.'

지옥의 군주들.

그들이 자신의 지옥 속에 있을 때,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일군주 망자왕 아흐람, 이군주 초열지옥의 이세라만 해도 얼마나 까다로웠던가.

하지만 지옥의 삼군주부터는 말도 안 되는 난이도를 자랑했다.

원탁의 기사들이 가장 많이 희생된 건 삼군주와 칠군주를 상대할 때였다.

원시정령을 다루는 마몬의 변칙성 앞에서 일차로 좌절을 겪었고, 칠군주 바사라에 다다랐을 땐 마음 같아선 그냥 포기하고 싶었으니까.

원탁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마왕에게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스스로 잊혀지길 바랐다고?'

마음이 착잡했다.

금기를 어긴 게 자신의 결정이 아니었음에도, 세간의 인식과 편견에 의해 스스로 잊혀지는 길을 택한 기사들.

빌헬름에게 누가 될까 봐 아예 지워지는 길을 택한 이들.

그 결과 망령이 되어 구천을 떠돌다가 '잊힌 신'에 의해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 잊힌다는 것은,

이름을 잃고, 떠돌며,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누구도 부르지 않고, 불리지 않으며, 그렇게 지워진다는 의미였다.

한없이 명예로우나, 스스로 명예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기사들.

그런 이들이 이곳에 모인 게다.

원탁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잊힌 기사의 영혼'이란 아무래도 악신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냐?"

세렝게티의 첨언에 내가 다시 묻자.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악신을 상대하다가 죽은 기사단과 기사들. 그들이 강제로 '잊혀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으로 향한 듯합니다."

"'잊힌 신'들은 그런 영혼을 끌어들여 뭘 하려는 거지?"

불가사의 업적을 해결할 때마다 얻게 되는 한 개의 영혼들.

370개의 불가사의 업적이 존재한다는 건, 다시 말해 370개의 영혼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방금 전 '잊힌 신'은 다음 층계로 나아가는 대신 얻은 영혼들을 전부 내놓으라고 언질했다.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세렝게티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옆에서 세아 성녀가 입을 열었다.

"······ 잊히고 잊혀진 위대한 기사들의 영혼. 그들의 영혼을 모아 '부활'하려는 게 아닐까요?"

"부활이라. 이름을 되찾는다는 건가?"

알비노가 되물었다.

그러자 세아 성녀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아예 다른 신으로 새롭게 부활하려는 것 같아요. 새로운 이름, 새로운 자격, 새로운 권능으로 새롭게 출발을 하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삐뚤어져 있었나 보군."

"아마도······ 영혼을 모으면 모을수록, 잊힌 신들은 저희를 노려 올 거예요."

아예 새롭게 태어나려 한다.

잊힌 신들이.

그들 또한 '악신'을 상대하다 잊혀진 신들일는지.

던전을 더 나아가야 알겠지만, 확실한 건 이곳에는 악신을 상대하던 위대한 370여 명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원탁의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악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존재들이었으므로.

그리고 불가사의 업적을 깨어 나가며 영혼을 많이 모을수록, 잊힌 신들의 견제 또한 심해질 거라는 사실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일곱 기사단의 출현이 방아쇠가 된 거로군.'

업적을 깨며 영혼을 모아줄 일곱 기사단들의 출현.

던전에 입장한 91명의 도전자들이 '잊힌 신'의 잠들어있던 의지를 깨운 것이다.

어쩌면 이건 단순히 기사단끼리의 경쟁만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다수의 영혼을 모은 기사단이 '잊힌 신'에게 패배한다면?

혹은 영혼을 '잊힌 신'에게 넘긴다면?

'우리는 부활한 잊힌 신을 상대해야 하는 건가?'

······ 아직은 추측일 뿐이다.

하여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구태여 불안을 조장할 필요는 없으니까.

"슬슬 움직이도록 하지."

허나, 그렇다고 멈춰 있을 수도 없었다.

도리어 더 빠르게 업적을 깨어 나가면 될 일.

무엇보다도······ 원탁의 기사들이 이곳에 방치되어 있는 걸 나는 바라지 않는다.

그들의 영혼 전부를 구원하고 싶다.

12번, 반얀.

녀석의 영혼이 이곳에 있다면 다른 녀석들도 전부 있을 테니까.

그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었다.

'너희들은 절대로 잊혀져선 안 된다. 내가 그리 두지 않을 것이다.'

··· 그러니, 기다려 달라고.

이로써 확실해졌다.

박현명과 란돌프의 구분.

선과 악의 성향이 확실히 나뉜 이유를.

그 뒤 내가 이곳, 명예의 세계수에서 '태고의 던전'을 열게 된 연결고리를 알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빌헬름을 플레이한 내게 남겨진 숙명이라는 것도 말이다.

앞으로 내가 해야할 일들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숙지했다.

잊힌 신들?

막는다면 모조리 부숴버릴 테다.

이제 남은 건 오직, 행동뿐.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도록.'

나는 지체 없이 문을 넘었다.

그러자.

['세계수의 뿌리'로 향하는 길의 선택지 3개가 주어집니다.]

[셋 중 한 가지 길을 택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1. 일반룸]

[2. 물음표(???)룸]

[3. 보스룸]

['일반룸'은 쉬운 난이도에 속하며, '물음표'룸은 난이도가 무작위입니다. '보스룸'의 경우 가장 어렵지만 공략하기에 따라 제일 많은 '불가사의 업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보스룸에선 간혹 '잊힌 신'이 등장해 대결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대결에서 승리할 경우 '상징물'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뿌리 지도'가 주어집니다.]

['뿌리 지도'를 보고, 시련을 깨어나가며 뿌리까지 도달하십시오.]

['물음표' 난이도에선 이따금 보너스 스테이지가 진행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5개의 길을 택하면 '상징물'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히든룸'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든룸'의 경우 '잊힌 신의 상징물'을 보유해야만 열 수 있습니다. '히든룸'을 여는데 필요한 상징물의 종류, 숫자는 모두 다릅니다.]

세 갈래의 길이 떠올랐다.

물론,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보스룸'에 입장합니다.]

*

['황금률의 기사단'이 보스룸에 입장했습니다.]

[다른 기사단의 입장을 대기중입니다.]

[다른 기사단의 입장을 대기중입니다.]

[다른 기사단의 입장을 대기중입니다.]

······.

['멸악의 기사단'이 보스룸에 입장했습니다.]

[지금부터 두 기사단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기사단은 힘을 합쳐, 상대 기사단의 단장을 쓰러트리십시오.]

[승리한 기사단은 패배한 기사단의 무작위 '잊힌 기사의 영혼'을 하나 빼앗고, 상대 기사단이 이곳 보스룸에서 달성하며 획득한 '불가사의 업적'과 '잊힌 기사의 영혼'을 모두 강탈합니다.]

[주의. 잊힌 기사의 영혼을 모두 잃으면 길을 잃게 됩니다. 이후 영원토록 잊혀진 채 던전에 갇히게 됩니다.]

[두 기사단이 대결할 전장이 '별의 대지'로 선정되었습니다.]

['별'마다 괴물이 존재하며, 괴물을 퇴치하여 '별'의 주인이 되면 특수 효과를 획득합니다.]

[대결 방식은 '난투'입니다.]

[제한시간은 1시간입니다.]

[제한시간 내로 결판이 나지 않으면 두 기사단 모두 '잊힌 기사의 영혼'을 하나 잃습니다.]

······ 보스룸이라 해서 진짜 '보스'가 나올 줄 알았건만.

설마 다른 기사단과 대결을 펼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상대 역시 '보스룸'을 택했다는 의미이며,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무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

그리고 나타난 상대는 다름 아닌 멸악의 거인과 별 수호자들이었다.

"별 수호자 그룹이라······."

"멸악의 거인만 쓰러트리면 되는 건가?"

"반대로 우리는 단장님만 지키면 된다는 소리로군."

모두가 떠오른 글귀가 규칙을 보며 중얼거렸다.

멸악의 거인.

그리고 별 수호자들.

그들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으니.

특히 멸악의 거인은 혼자서 망자왕 아흐람을 두드려 팬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허드슨과 세렝게티.

순간 둘이 내게 바짝 밀착했다.

'······ 뭐지?'

착각일까?

아기새를 보호하는 어미새가 이러할까.

뭔가 내 안전을 과도할 정도로 걱정하고 있는 눈빛들이다.

'제한시간 1시간. 그 안에 결판을 내야만 한다.'

어깨를 으쓱하며 시련에 대해 고민했다.

별의 대지.

이름 그대로 수많은 별들의 위에서 치러지는 대결.

따로 다니다가는 각개격파 당할 테고, 뭉쳐 다니다간 시간이 초과해 결판을 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섯 개의 '잊힌 기사의 영혼'으로 기사단을 강화시켰습니다."

"기사단의 품격이 현재 '25'입니다."

"품격의 효과 2단계가 발현됩니다."

"기사단원들의 모든 능력치가 +3 상승합니다."

"TIP : '기사의 영혼'은 전부 생전 자신이 활동했던 '기사단의 이름'을 숙지하고 있습니다. '기사단의 영혼'을 완성하면 추가효과가 부여됩니다."

당장은 이 정도.

1단계와 2단계의 품격 효과가 합쳐지며 모든 능력치 3이 올랐다.

적어 보이지만, 결코 적은 차이가 아니다.

특히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적은 차이로도 압도적인 결과를 낼 수 있었으니.

영혼을 모아 기사단을 강화시킬수록, 품격이 오르며 추가 효과가 생긴다.

그중 눈에 띄는 건 한 가지.

'품격 500. 영혼 100개로 기사단을 강화시키면 신성을 획득한다. 설마 신격을 획득한다는 건 아니겠지?'

품격의 수치를 높이면 받는 효과들.

단계가 높아질수록 효과와 효능은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특히 품격 500을 달성하면 얻을 수 있다는 '신성'에 관해선 미칠 듯이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한 시간 내로 승리만 해서 되는 게 아니야. 최대한 많은 불가사의 업적을 달성해야 한다.'

그러니 더 많은 업적을 깨고 품격을 획득하려면 우리편도, 상대편도,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불가사의 업적'을 달성해야 한다.

그중 가장 쉬운 건 아마도.

'별의 위에 있는 괴물들. 저것들을 소탕하면 업적을 깰 수 있나 보군.'

별의 대지.

수많은 별의 위에, 괴물들이 있다.

저 괴물들을 퇴치해 별을 먹고, 특수한 효과를 누리는 것.

일종의 땅따먹기다.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는 쪽이 유리해질 터.

"전원, 흩어져서 괴물들을 소탕하도록."

"······ 혹시 혼자 활동하시겠다는 겁니까?"

허드슨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다."

그런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드슨이 그게 무슨 망발이냐는 듯 전력을 다해 소리쳤다.

"절대 안 됩니다!!!"

"······?"

멸악의 거인 VS 박현명

결사반대를 외치는 허드슨의 눈빛엔 '결의'가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

허드슨의 저런 얼굴을 보는 건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결혼식에서였던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지금의 발언이 진지하다는 의미일 터.

"······ 단장님. 저도 허드슨과 같은 생각입니다. 혼자선 위험합니다."

세렝게티도 발 벗고 나섰다.

그러자 이자벨라도 말을 보탰다.

"멸악의 거인은 강력합니다. 다른 별 수호자들도 마찬가지이고요. 특히 몇몇 '별 수호자'들은 제 초월성인 '요르문간드'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이자벨라가 거머쥔 네임드의 별, 요르문간드.

세계를 삼킨 뱀이라는 별칭답게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그 뱀조차도 신경 쓰일 정도의 괴수들이 상대 그룹에 다수 포진해있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나 혼자선 위험하다'라는 눈빛들이 주류였다.

'멸악의 거인은 확실히 위험하지.'

'어머니 별'의 수호자, 멸악의 거인.

녀석은 혼자서 '망자왕 아흐람'을 먼지 나게 두드려 팬 괴물 중의 괴물이다.

크람델의 지하에서 마족들과 함께 침공을 준비하던, 지옥의 일군주 망자왕 아흐람!

부활한 뒤 강해진 망자왕조차 결국 패배를 확신하고 자폭하지 않았던가.

멸악의 거인은 혼자서 지옥의 군주를 때려잡을 만큼 강하다.

그 모습을 보며 전율했던 나다.

우리 편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게 엊그제 같건만.

설마 싸워야 하는 상대로 마주하게 될 줄이야.

하물며 처음 보는 '별 수호자'들도 있었으니.

'상대가 다수로 움직이면 위험하긴 할 터인데.'

잠시 고민했다.

각개격파 당할 위험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사방으로 덮쳐오면 나 역시 위험한 게 사실이다.

'드루이드의 신이자, 세계수의 주인인 나를 죽이려 들진 않겠지만······.'

물론, 머리가 있다면 멸악의 거인과 별 수호자들이 나를 죽이진 않을 것이었다.

입장하기 전에 확실하게 머릿속에 각인시켜 주었으니.

나를 죽이면 드루이드와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뿐만인가.

다른 세계수의 부활도 물 건너간다.

세계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별 수호자'가 그런 선택을 할 리 만무했다.

"······ 그럼 그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2인 1조로 움직이도록 하지."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그래도 둘 정도면 충분할 듯하였다.

너무 많은 숫자가 뭉치면 1시간 내로 결판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대신 조건을 하나 추가할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모두가 내 입으로 시선을 모았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조건을 입에 담았다.

"'별 수호자'를 죽여선 안 된다. 반드시 제압만 하도록."

"······ 그게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허드슨이 의문을 담아 말했다.

강자들을 상대로 과연 제압만 하는 게 가능하겠냐는 의미.

필사적으로 싸우다 보면 누가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으므로.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압할 수 없을 것 같다면, 도망쳐라."

"상대가 놔줄까요?"

"놔 줄 거다."

나는 확신했다.

멸악의 거인.

녀석이라면 도망치는 상대를 굳이 죽이려 들지는 않으리라.

이 대결은 누가 더 많은 상대를 죽이느냐의 데스매치가 아니다.

목적은 단 하나.

상대편의 우두머리를 제압하는 것!

······ 멸악의 거인을 어떻게 제압해야할지 막막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힘을 주어 말했다.

"명심해라. 우리는 '명예로운 경쟁'을 할 것이다."

이건 반드시 지켜야만하는 규율이다.

던전에 입장할 때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Tip. 기사단은 명예로운 경쟁을 해야할 것입니다."

······ 기사단은 서로 명예로운 대결을 해야만 한다고.

말인 즉.

서로 페어플레이를 하라는 것이다.

물어 뜯으며 죽고 죽이는 게 아니라, 힘을 합치라는 의미다.

아니라면 왜 저런 문구가 굳이 'Tip'으로 나타났겠나.

'더 많은 업적을 서로가 달성할 수 있게끔 하는 것. 그렇게 힘을 합쳐 가장 뛰어난 기사단이 뿌리에 도달하는 게 바로 이 던전의 확실한 클리어 방법이다.'

예전에 한 번 이런 비슷한 던전에 입장해본 적이 있었다.

파티던전 퀘스트를 클리어하고자 도달한 곳에서.

'··· 데미갓 특성 던전이 비슷했지.'

데미갓.

오염된 명예를 지닌 그 반신이 클리어를 끊임없이 방해해왔다.

서로 반목하게 만들고, 불신하게 하여 분열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하자 데미갓은 본심을 드러냈다.

스스로 모습을 보이며 대결을 청해온 것이다.

우리는 녀석의 방해해도 흔들리지 않았기에 클리어할 수 있었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분열시키고 방해하려는 '잊힌 신'들에 맞서,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클리어 방법일 터.

그때와 달라진 거라면 숫자뿐이다.

당시에는 4인으로 입장했지만, 이번에는 91인에 달한다.

그것도 각기 다른 종류의 그룹이 일곱이나 있었다.

힘을 합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 그래도 나는 그냥저냥의 클리어는 바라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건 딱 한 가지.

단순히 1위로 올라서는 것 뿐만이 아니라.

'퍼펙트 클리어.'

이 태고등급의 던전을, 완벽하게 클리어하는 것이다.

*

라이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2인 1조가 되며 자신의 파트너가 된 자.

당연히 제자인 현과 함께하리라 생각했건만.

"······."

"······."

무거운 침묵.

당연한 일이다.

설마 알비노를 자신과 붙여놓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

"서로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

한참의 침묵을 깨고 알비노가 말했다.

팔가의 대장로이자, 드루이드의 대족장인 그는 안 그래도 라이가와의 사이가 찝찝했던 탓이다.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나타나는 바람에 족보가 꼬일대로 꼬였다.

이런 상황은 태어나서 처음인지라, 어떻게 대해야할지 막막했다.

그러자 라이가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그냥 하던대로 하시오."

"······ 황금률의 드루이드께서 스승으로 모시는 분을 제 마음대로 하대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

"······."

"······."

"······."

"······."

"싸우기나 합시다."

결국 라이가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배분상 한참 위의 존재를 차마 마음대로 부릴 수는 없으니, 서로 말을 높이기로 합의안을 제시한 것이다.

가깝고도 먼 사이.

서로가 아직은 너무 어색했으니까.

다만, 해야할 일은 명확했다.

우주와 같이 까만 하늘.

곳곳에 놓인 '작은 별'의 위로 몇몇 괴물들이 서있었다.

검은 갑주를 입은 괴물들을 처치하고 영역을 차지하는 게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알비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게 낫겠군요."

"아니면, 뚫고 나가시겠습니까?"

"우리 둘이 끝까지 가자는 겁니까?"

"알비노. 멸악의 거인이 두렵습니까?"

"아닙니다. 바라던 바입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둘은 의견을 일치시켰다.

둘의 조합이면 멸악의 기사단 전체와 싸워도 자신이 있었으니까.

라이가와 알비노가 눈빛을 교환하며, 빠르게 달려나갔다.

*

기사단은 13명.

2인 1조로 짝을 이룬다면, 필연적으로 한 명은 남는다.

그렇게 혼자 남은 건 다름아닌 허드슨이었다.

"혼자서 뭘 어떻게해야······."

덩그러이 남게된 허드슨은 앞이 막막해졌다.

사실상 기사단 중 최약체는 허드슨 자신이다.

란돌프가 죽고 박현명만 남게 되었대도, 그보다는 강할 터이니.

허드슨은 자신을 돌아봤다.

'11레벨. 아직 초월은 못했다.'

란돌프를 처음 만났을 때 허드슨의 레벨은 9였다.

9레벨에서 1년넘게 정체된 상태에서 란돌프를 만났고, 지금은 한계를 넘어 11레벨에 도달하게 되었지만.

'내가 제일 느리다.'

그럼에도 성장속도가 가장 느렸다.

세렝게티는 물론, 이자벨라와 아이작은 진즉 자신을 넘어섰다.

세아 성녀는 어떤가.

이미 그녀는 본인과 비교 불가한 입지적 위치에 있었다.

앤드류 사제는?

오랜만에 본 그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해진 듯싶었다.

······ 심지어 마지막에 들어온 발테마저도 그를 넘어선지 오래다.

'전부 초월했거나, 초월한만큼 강해졌으니까.'

앞길이 막막한 이유다.

물론 변명할 거리는 있었다.

그는 상인이었고, 할 일이 태산보다 많았다.

미궁 도시를 일구고 현실에선 영국의 왕자로 활동해야했다.

그러나······ 그래도.

'······ 현명님을 뭐라할 처지가 못되는군.'

박현명.

그를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벌써 까마득한 위치까지 올라갔다.

제국최강자 라이가의 제자이자, 드루이드의 신이라니.

감히 엄두도 안 나는 존재들을 주변에 두루 두지 않았나.

'더 강해져야만한다.'

언제까지 도움만 받을 수는, 보호만 받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을 뛰어넘을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별 수호자들.

별을 지키는 그들을 대상으로 '초월'의 단서를 얻을 수만 있다면······.

"오호라. 맛있어보이는 먹잇감이로구나."

"······."

그때였다.

바닥을 딪는 소리와 함께 허드슨의 눈 앞으로 거대한 늑대가 나타났다.

신화 속 '펜리르'마냥 까마득히 큰 늑대.

벌써 여기까지 도달하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속도란 말인가.

늑대를 보자마자 허드슨은 생각했다.

'좆됐다.'

······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

"'불가사의 업적(6)' - '별의 대지 10구역 정복'을 달성했습니다."

"현재 '황금률의 기사단'이 '별의 대지' 10구역을 정복한 상태입니다."

"체력 재생력과 전체 관통력이 10% 증가합니다."

"'10'의 능력치가 무작위로 배분되어 증가합니다."

불현 듯 떠오른 문장들.

열 개의 별을 정복해, 업적을 달성했다는 문구였다.

"나쁘지 않은 속도로군."

고작해야 십여분이 지났을 따름.

이 정도 속도면 꽤 출발이 좋다.

"······ 정말 가만히 있어도 되겠습니까?"

그때 옆에서 앤드류 사제가 물었다.

내가 그와 함께 말그대로 시작점에서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 있으면 안전하다."

"'단장'은 그렇긴 합니다만······."

출발점의 효과에 의해 '단장'은 이곳에서 어느정도의 안전을 보장받는다.

['시작의 별' - 이곳에 '단장'이 위치할 경우 '단장'의 모든 내성이 50% 증가합니다.]

바로 이 효과 때문이다.

이곳에 있으면, 내가 지닌 모든 '내성'이 증가한다.

물리와 마력, 혹은 수많은 이능의 공격이 반감된다는 말.

이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능력임에는 분명하지만.

'내겐 최소 물리내성이 존재하지.'

나는 '태고의 갑옷'에 의해 '최소 물리 내성 50%'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

적어도 물리력으로 죽거나, 큰 피해를 입을 일은 없다는 것이다.

순간 앤드류 사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역시··· '란돌프'의 모습을 잃으신 겁니까?"

"······?"

"대답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 뭘 이해한다는 거지?

설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단순히 '무서워서'인 줄 아는 걸까?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가만히 있는 건 다름이 아니다.

나는 저 멀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야 오는군."

저 멀리.

별의 끝 부분에.

"헙······!"

상대를 본 앤드류 사제가 경악했다.

쿵!

쿠르릉!

먼지를 흩날리며 나타난 거구의 괴물.

"'멸악의 거인'이 등장했습니다!"

녀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홀로.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나는 멸악의 거인을 바라보며.

'역시 직진밖에 모르는 놈이로군.'

······ 작게 웃어보였다.

전부 계획대로였으니까.

지고(至高)의 유일 등급

멸악의 거인.

한차례 크람델에서 마주한 적이 있었기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이라면 반드시 혼자서 이곳까지 쳐들어올 것이라고.

망자왕 아흐람을 두드려 팰 때도 그랬으니까.

적진 한가운데 핵폭탄처럼 떨어져 마족들을 짓밟은 괴물.

그 저력과 괴력은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 정도였으니!

"이치를 깨달은 드루이드와의 싸움을 원치 않소. 얌전히 포기한다면 험악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멸악의 거인이 재차 말했다.

놈이 두 번이나 항복을 권유했다는 건, 정말로 싸우기 싫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신이 포기하는 경우는 아예 생각하지 않은 듯싶었다.

하기야, 전장의 폭군인 멸악의 거인이 항복하는 그림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지만.

"혀가 길군."

스릉.

나는 두 자루의 검을 쥐어 보였다.

[루-마리아]

[극진 초월지검]

루-마리아는 조합형 성검이었고, 극진 초월지검의 경우 성장형 검이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초월지검이 성장하는 방식은 상대의 피를 머금는 것.

더 많은 피를, 더 강력한 피를 머금을수록 완성되었을 때 갖는 옵션이 달라진다.

멸악의 거인의 피는 단연코 아주 훌륭한 재원(財源)이다.

'빛의 길은 악에만 반응한다. 멸악의 거인을 상대할 때 좋은 선택지는 아니지.'

대회에서 우승하여 상품으로 받은 유일 등급의 무기.

빛의 길도 보유하고 있지만, 멸악의 거인을 상대하는데 그닥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지금은 이 두 자루면 충분하다.

"······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황금률의 드루이드여."

후웅.

멸악의 거인이 들고있던 몽둥이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콰르르릉!

몽둥이의 길이가 길어지며, 순식간에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촤릉!

즉시 검으로 흘려내려 하였으나.

'흡!'

······ 흘려낼 수 없을 지경으로 강력하다.

역시 힘의 정점에 있는 존재답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흘려내지 못했을뿐.

쿠르릉!

바닥이 움푹 파이며 나는 놈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과연, 허명만은 아닌가보군."

멸악의 거인이 다소 놀란 듯 말했다.

하지만 나 역시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관통력을 지니고 있구나.'

최소 물리내성 50%, 그리고 '시작의 별'의 효과로 모든 내성 50%를 더하면 단순계산만으로도 물리면역이여야 정상이다.

허나 완전한 면역은 아니었다.

저릿한 손, 전신의 근육은 비명을 질러댔다.

필시 높은 수준의 물리관통력을 지닌 것이리라.

'대략 20%.'

20%의 충격만으로도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다.

어떻게든 받아내긴 했지만 연달아 공격해오면 곤란할 것 같았다.

"앤드류 사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기겁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앤드류 사제.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눈만 깜빡이는 그를 향해 나는 말했다.

"나를 '추앙'하거라."

"······!!!"

동시에 앤드류 사제의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곧이어 그가 난색을 표했다.

"저, 저는 타락하여 여신의 권위를 잃었······."

"괜찮다."

"하오나······!"

"괜찮대도."

"······."

앤드류 사제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타락한 이유.

다크엘프에 의해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아루웬 장로 때문일 것이다.

복수를 꿈꾼 순간 타락하며 여신의 권위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타락한 자가 '추앙'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타락사제는 파면의 대상이다.

힘을 얻은 대신 다시는 신의 길로 들어설 수 없고, 여신의 품에 안길 수 없다.

'지금······ 추앙의 기도를, 외우라고?'

언제였던가.

앤드류 사제는 기시감을 느꼈다.

일전에, 란돌프를 만나고 그에게 '추앙의 기도문'을 외웠던 순간이 떠올랐다.

여신과 맞닿은 최고위급의 사제만이 사용 가능한 자기희생의 주문.

물론 여신을 찬양하면 자기희생이 아니지만, 여신이 아닌 다른 자를 추앙하면 그것은 자기희생의 기도문으로 바뀌어버린다.

최고위 사제에게 여신이 아닌 다른 자를 위한 추앙 기도문을 외우라는 건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특히 자격 없는 이를 추앙하면 죽음의 위험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그는 란돌프를 추앙했고, '구원'받았다.

여신이 아닌 다른 자를 추앙하는 건 극죄임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때와 달리 그는 타락했으며, 상대도 란돌프가 아니다.

또한 타락한 사제가 추앙했다간 저주를 덮어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앤드류 사제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은총이 가득하신 여신이시여,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영광할 성령이시여······."

그리곤 양손을 모으고 추앙의 기도문을 외웠다.

그저 열렬하게.

여신을 따르던 충실한 종의 마음으로.

순간.

'아······!'

앤드류의 심장에서 한 줄기 빛이 뻗어나왔다.

더없이 성스러운 기운.

다시는 되찾지 못할 줄 알았던 성자의 힘이다.

그것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어, 어떻게······."

양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보고도, 느끼고도,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단순히 성스러운 기운에 압도된 것이 아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박현명의 모습은.

이전, 란돌프를 '추앙' 추앙했을 때보다도 더.

"레아, 피나님?"

······ 선명했으니까.

멸악의 거인도 주춤할만큼 두 여신의 형상이 또렷하게 나타났으므로.

다름아닌 그의 등 뒤에서, 마치 날개처럼 말이다.

뿐만이 아니다.

추앙의 기도문이 진행되자, 두 여신의 형상은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를 본 멸악의 거인은 주춤일 수밖에 없었다.

"······ '창세의 가호'를 드루이드가 어찌?"

창세(創世).

땅과 하늘을 만든 두 여신이 동시에 인정한 자에게만 수여되는 가호의 이름.

허나 그 가호는 오직 한 명에게만 허락되었다.

가호를 지닌 자는 '여신의 의지'를 잇게 되며, 그렇기에 여신의 이름을 빌린 자들은 절대로 그를 적대할 수 없다.

두 여신에게서 힘을 얻고, 두 여신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자들은 결단코.

저건 여신과 감히 동급으로 여겨지는 '0규율의 가호'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창세의 가호'를 받은 게 드루이드라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황금률의 드루이드, 세계수의 주인이라 할지라도.

저 가호는······.

'나도 받지 못한 가호이거늘······.'

여신을 지키고, 그 별을 수호하는 별 수호자.

멸악의 거인조차 받지 못한 가호인 탓이다.그가 받은 가호는 '1규율의 가호'였다.

별 수호자라면 으레 갖고 있는 가호 중에서도 최고인 것.

그래서 감히 그 누구도 저 '창세의 가호'를 이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었건만.

그것을 별 수호자도 아닌 드루이드가 받았다?

'0규율. 지킬 규율이 없다. 그럼에도 모든 권리와 권위를 챙긴다.'

별 수호자들은 모두 여신의 가호를 받는다.

그리고 규율 앞에 붙은 숫자는 '가호'를 잇기 위해 지켜야하는 규율을 말함이다.

멸악의 거인이 지닌 '1규율의 가호'라는 건, 말 그대로 한 가지 규율을 절대적으로 지켜야만 가호가 유지 된다는 의미였다.

그 규율이란 바로.

'······ 1규율. 악을 멸할 것.'

그리하여 멸악의 거인이 되었다.

보이는 모든 '악'을 부수고, 파괴했으나, '창세의 가호'가 지닌 권위에는 비할 수 없는 가호를 이어받았을 뿐이다.

하여······.

"흥미롭군."

궁금했다.

창세의 가호를 이은 저 드루이드가, 얼마나 강할지.

무엇보다 멸악의 거인은 여신의 이름으로 힘을 얻고 강해진 게 아니다.

그 자체로 원래부터 강했다.

그러니 거리낌없이 박살낼 수 있다.

후웅-

멸악의 거인이 다시 한 번 몽둥이를 휘둘렀다.

쿠아아아아아앙!

··· 방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괴력으로.

*

추앙의 기도가 내려진 즉시.

조합형 성검인 루-마리아가 빛을 발했다.

"성자 등급의 추앙으로 인해 '루-마리아'가 찬란하게 빛납니다."

"'찬란한 루-마리아(유일급)'로 완성됩니다."

"찬란한 접두사가 붙은 '루-마리아'는 모든 '성력'을 일시적으로 증폭시킵니다."

"모든 내성이 10%, 전체 관통력이 5% 증가합니다."

"'자연 재생력'이 1.2배 증폭합니다."

"'자연 재생력'이 25,000%를 돌파했습니다."

"특이점, '초재생'을 달성합니다."

더 단단해지고, 더 빠르게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했다.

이 정도면.

'할 만하다.'

아까의 피해와 통증은 벌써 회복됐다.

적혀있는 그대로 '초월'적인 회복능력!

어차피 놈을 죽이거나 이길 생각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

'······ 시간만 끌면 돼.'

모두가 별을 '정복'할 때까지, 그리하여 다른 별 수호자들을 모두 제압할 때까지.

시간만 끌면, 나의 '승리'다.

*

싸우면 싸울수록.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멸악의 거인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공격력 자체는 크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거늘······.'

문제는 방어와 재생능력이다.

아무리 때리고 때려도 버티고 회복한다.

자신의 공격을 이토록 질기게 버텨내는 존재는 처음봤다.

'시작의 별'의 효과를 감안해도 이상할 수준이다.

그도 그럴 게, 자신 역시 내성을 뚫는 '관통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하게 타격이 전부 안 박히는 느낌이다.

'특정 이상의 타격을 줄 수가 없다.'

이건 뭐지?

뿐만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멸악의 거인이 입는 상처는 늘어만갔다.

이대로 자신을 쓰러트리려면 몇날며칠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멸악의 거인인 그가 주는 타격보다 놈에게 입는 타격이 더 큰 게 사실이었다.

마치 작은 꼬챙이로 계속해서 찔리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반면 놈은 타격을 입어봤자 그 즉시 재생한다.

'정말 괴물 같은 재생능력이로군.'

팔이 부서져도 3초면 원래대로 돌아온다.

아예 박살을 내놓는 게 아닌 이상 저 재생능력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 정도로 경이로운 재생능력은 멸악의 거인도 처음본다.

"······ 으음!"

늘어가는 생체기.

묘하게 약올리는 느낌이라, 멸악의 거인은 점점 화가 끓어올랐다.

그렇게 시간조차 잊고서 오로지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부숴버리겠다는 일념으로 대결을 펼치길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더 뚫리고 있다.'

어느덧 멸악의 거인은 부숴지고 있는 게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금률의 기사단'이 '별의 대지'를 모두 정복했습니다."

"기사단의 효과가 2배 증가합니다."

"체력재생력과 물리 관통력이 200% 증가합니다."

"'200'의 능력치가 무작위로 배분되어 증가합니다."

······ 모든 별의 대지를, 상대가 정복했기 때문이다.

갖가지 효과가 추가되며 증폭된 탓에 더 이상 놈의 공격은 '작은 꼬챙이'가 아니었다.

푸욱!

한 방, 한 방이 치명타로 적용되고 있다.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허나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 검이?"

······ 포기하긴 이를 터였다.

멸악의 거인은 시선을 내려, 가슴팍에 박힌 검을 바라보았다.

이어 손을 뻗어 힘을 줘 봤지만 자신의 몸에 박힌 검이 빠지질 않는다.

이건 성검, 찬란한 루-마리아 외에 녀석이 들고 있던 다른 검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도리어 몸에 박혀,

꿀꺽! 꿀꺽!

탐욕스럽게 자신의 피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극진 초월지검'이 '멸악의 거인'의 피를 머금고 한단계 강화됩니다."

"'극진멸 초월지검'이 '멸악의 거인'의 피를 머금고 한단계 강화됩니다."

"'극진멸참 초월지검'이 진화를 시작합니다."

"'초월지검'의 진화에는 검 두 자루가 필요합니다."

"'빛의 길(유일급)', '찬란한 루-마리아(유일급)'를 '초월지검'의 진화에 재료로 사용합니다."

"'인내(지고의 유일급)'가 완성되었습니다."

전부를 얻거나, 전부를 잃거나.

대부분의 게임이 그러하듯.

판게니아에도 조합형, 그리고 진화형의 아이템이 있었다.

하지만 판게니아에서 그러한 형태의 아이템은 극소수일 뿐이며, 설령 발견한다 하더라도 완성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루-' 와 '초월지검'은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롭다'라고 정평이 난 검이다.

일단 '루-'의 경우 조합형 '성검'이었고, 같은 신화등급의 '-마리아'와 같은 뒤에 이름이 오는 성검을 조합해야만 완성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성검을 구하기도 어려운데, 합까지 맞아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검이라니.

그것만으로도 난이도는 극상이다.

다행히 나는 '황금률 상점'에서 전부 구할 수 있었지만, 진짜 문제는 '초월지검'이었다.

'성장형 검. 사실상 완성하기가 가장 어렵지.'

초월지검 자체는 구하는 게 아예 불가능하진 않다.

용의 보물창고를 뒤지면 낮은 확률로 나타나는 물건이었으니까.

오랜 세월 용과 같은 신화종의 마력을 품고 변질한 검.

그게 바로 초월지검인 탓이다.

하지만 '완성'하는 난이도는 '루-'보다 훨씬 더 어렵다.

우선 극, 진, 멸, 참의 네 단계를 거쳐 성장하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피를 머금어야만 성장하고, 단계를 높일수록 조건이 붙는다.

'극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50명 정도의 피가, 진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100명 정도의 피가 필요하니.'

검의 성장을 위해선 '카오'가 될 수밖에 없다.

악업 수치가 높아져 자연적으로 '죄인'의 도장이 찍힌다.

100인 살해자는 정체를 숨기지 않으면 어지간한 도시의 입장도 불가하다.

대도시는 아예 들어갈 수 없다.

대도시의 입구, 혹은 워프의 앞에는 '악업'을 읽는 사제가 보통 함께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멸. 초월적인 신화종의 피. 마지막 참은 네임드 수호종의 피가 있어야만 한다.'

특히 뒤의 두 단계의 성장은 기가 막힐 지경이다.

초월적인 신화종은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그것도 혼자서 사냥해야만 인정된다.

네임드 수호종?

말 그대로 '이름이 있는' 별 수호자를 뜻하는 것이다.

멸악의 거인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했고.

결국, 뚫어내어 마침내 성장을 완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검은 또 다시 '조합형'이 되어, 다시 한 번 도약할 기회를 갖는다.

'이걸 다시 완성할 줄이야.'

과거에 딱 한 번 완성해본 적이 있다.

'거룩한 별'을 거머쥐고자 네임드 수호종과 싸울 때, 겨우 승리하여 완성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크게 후회했다.

'······ 전혀 구색이 안 맞는 조합을 시도했다가 대차게 망했었지.'

조합하는데 들어가는 두 자루의 검.

성격이 안 맞는 조합을 시도했다가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만 얻었으니까.

심지어 완성된 이름도 '대혼란의 검'이었다.

이름처럼 상대의 혼란을 유도하는 기능이 있기는 했지만, 검으로서의 효율은 조합하기 전보다도 더 그닥이었다.

결국 아까운 세 자루의 검만 공중분해된 셈이다.

물론, 그 덕분에 깨달은 건 있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

초월지검을 완성시키는 데에는 조합되는 검의 '성향'이 중요하다는 걸 말이다.

'빛의 길, 루-마리아. 둘 다 성검이다. 그것도 극에 다다른.'

두 자루 다 유일등급이며 성향마저 같다.

하여, 거리낌없이 조합의 재료로 사용한 것이다.

어느정도의 확신도 있었다.

'초월지검은 유일급 이상으로 완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

오랜세월 신화종의 마력을 머금고 탄생한 검.

말인 즉슨.

'초월지검은 에고를 가질 가능성이 있다.'

자아를 지닌 검으로 완성될 가능성이 존재했다.

예컨대 '겨울'처럼.

그래서다.

내가 '겨울'을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

겨울을 사용했다가 정체가 발각될 위험도 있기는 했지만,

그 외에도 초월지검의 완성이라는 도박에 성공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떨리는 눈초리로.

······ 멸악의 거인에게 박혀 완성된 '검'을 바라보았다.

[인내(지고한 유일등급)]

-태초의 죄악, '분노'와 반대되는 성격을 띈 '인내'의 검입니다.

-오로지 '인내의 성혈자'만이 착용할 수 있으나, '겨울('지고'의 이름을 가진 모든 것 사용 가능)'에 의해 착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자연재생능력이 2배 '증폭'됩니다.

-모든 감각이 2배 '증폭'됩니다.

-모든 내성 + 20%

-체력 + 20

-피해량 + 20%

-'보스 몬스터' 공격시 추가 피해량 + 20%

-경험치 획득률 + 200%

-숙련도 효율 + 200%

-모든 숙련도 레벨 제한이 5Lv 만큼 해제됩니다. (현재 최대 50Lv)

"'지고' 등급은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이름을 지닙니다.""현재 두 개의 '지고' 등급을 지녔습니다."

"컬렉션이 추가됩니다."

"'빛의 옥좌' + ★'겨울(최후의 황혼)' = '눈부시게 시린 자리(전체 관통력+2%)'"

"'최초의 불을 옮긴 자' + ★'겨울(최후의 황혼)' = '최초와 최후(모든 능력치+2)'"

"'빛의 길' + '거룩한 길' = '빛 위를 걷는 자(저주 반사+10%)'"

"'빛의 옥좌' + '빛의 길' = '찬란한 권좌(빛 속성 친화력+100%)'"

"★'겨울(최후의 황혼)' + ★'인내' = '끝없는 인고의 시간(공허 획득)'"

끝없이 떠오르는 문구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건 바로 다음에 떠오른 문장이었다.

"히든 특성 '허무'가 '공허'로 진화합니다."

히든 특성의 진화!

여태껏 한 번도 이변을 일으킨 적이 없던 '허무'가, 두 자루의 '지고' 등급 검을 획득하자 '공허'로 진화한 것이다.

나는 잘게 전율했다.

인내의 옵션도, 히든 특성의 진화도, 그 무엇 하나 버릴 게 없었으니!

"······ 이게, 왜 안 뽑히는······!"

꽈아아악!

멸악의 거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있는 힘껏 '인내'를 뽑으려하였다.

하지만 가슴팍에 박힌 '인내'는 놈의 괴력에도 뽑히지 않았다.

도리어 그럴수록 살점을 파먹으며 체력을 깎았다.

"끄으응!"

전신이 붉어질 정도로 온 힘을 다해 검을 뽑으려 들었다.

허나 여전히 뽑히지 않는다.

쿠웅!

결국 멸악의 거인이 바닥에 드리누웠다.

힘을 너무 많이 준 탓에 균형을 잃은 것이다.

타닥-!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즉시 멸악의 거인에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가슴팍에 서서 '인내'의 검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역시 에고를 지녔군.'

지르르르!

인내가 떨렸다.

'겨울'처럼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의지가 느껴졌다.

검이 나만 알 수 있게끔 진동을 하는데 그게 마치.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드는 것만 같군.'

······ 강아지가 기분이 좋아서 꼬리를 흔드는 것만 같은 기색이었으니까.

그때였다.

"황금률의 드루이드시여! 괜찮으십니까?"

"··· 오호라."

때마침 멀리서 알비노와 라이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며, 멸악의 거인을 쓰러트린 겁니까?!"

"허억······!"

그를 시작으로 다른 기사단원들 전원이 나타났다.

약간의 오해가 있기는 했지만.

힘을 주다가 혼자 쓰러진 멸악의 거인 위로 내가 올라탄 것뿐이었건만, 그 모습이 내가 멸악의 거인을 쓰러트린 걸로 비춰진 모양이다.

허나 문제는 이 장면을 본 게 우리 기사단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며, 멸악의 거인이······!"

"대,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다른 별 수호자들도 함께 하는 자리였다.

그것도 모두 '인질'로 잡힌 상태였다.

몇몇 별 수호자는 전투불능으로 보였고, 그리고 몇몇 별 수호자는 다른 '별 수호자'의 생존을 위해 자처하여 전투를 포기한 모양새였다.

"······ 미안하다, 멸악의 거인. 저 둘에게 잡힌녀석들이 너무 많아서 전투를 속행할 수가 없었다. ··· 그런데 너도 꼴이 말이 아니로군."

그중 하나.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한 별 수호자가 멸악의 거인을 향해 사과했다.

그리고 '저 둘'이란 알비노와 라이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최강의 조합.

감히 적수가 없으리라 판단한 알비노와 라이가가 내가 시간을 끄는 사이 예상대로 압도적인 결과를 내온 것이다.

내가 '별 수호자들을 죽이지 말라'고 해서일까.

인질을 내세워서 전부 전투를 포기하게 할 줄은 몰랐지만.

'다행히 사상자는 없다.'

다친 이들은 있지만, 죽은 자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발 아래서 널브러진 멸악의 거인을 바라보았다.

"계속 할 건가?"

"······."

"그다지 좋은 선택지 같아보이진 않은데."

"······."

멸악의 거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싸우려면 충분히 싸울 수 있다.

체력은 거의 소모되지 않았으니까.

저들 전원을 상대해도 버틸 자신이 있었다.

제한시간을 넘겨 무승부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멸악의 거인이 살아있는 별 수호자들을 바라보았다.

전부 죽일 수 있었을 텐데도, 전부 살려두었다.

서로 싸우는 대결 구도에서조차.

황금률의 드루이드.

그가 그러길 바랐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보다 더 기사단원을 믿고 운영한 까닭이었다.

멸악의 거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 우리의 패배를 인정하겠소."

······ 생에 처음으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 순간.

[제한시간 내에 결판이 났습니다.]

['황금률의 기사단'이 승리했습니다!]

['별의 대지'에 존재하는 '불가사의 업적' 10개를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전원 생존'을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명예로운 대결'을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2층계 보스룸 퍼펙트 클리어'를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너와 나의 눈높이'를 달성했습니다.]

['별 수호자 기사단'으로부터 '잊힌 기사의 영혼'을 하나 빼앗아옵니다.]

[총합 15개의 '잊힌 기사의 영혼'을 획득합니다.]

['황금률의 기사단'이 불가사의 업적 '19개'를 완료한 상태입니다.]

[던전 내 불가사의 업적 진행률 38/370]

······.

······.

*

[3층계에 도착했습니다.]

['세계수의 뿌리'로 향하는 길의 선택지 3개가 주어집니다.]

[셋중 한 가지 길을 택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1. 일반룸]

[2. 물음표(???)룸]

[3. 보스룸(잊힌 기사의 영혼 5개 이상 보유시 선택 가능)]

문을 넘자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떠오른 선택지.

더 볼 것도 없었다.

['3. 보스룸'을 선택했습니다.]

['황금률의 기사단'이 '보스룸'에 입장했습니다.]

['백왕의 기사단'이 '보스룸'에 입장했습니다.]

[두 기사단에겐 괴물을 소환할 수 있는 '몬스터 혼(0등급)'이 주어집니다.]

[제한시간 내에 '혼'의 등급을 최대한 올리십시오.]

['몬스터 혼'의 등급을 올리는 방법은 소환한 몬스터를 길들인 뒤 사냥을 통해 진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외의 여러 요인에 의해 '몬스터 혼'의 등급을 올릴 수 있습니다.]

[소환된 '몬스터 혼'이 죽으면 0등급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제한시간은 72시간입니다.]

[제한시간이 지나면, 양쪽 기사단에 소환된 '몬스터 혼'들이 서로 대결을 펼칩니다.]

[패배한 기사단은 '잊힌 기사의 영혼' 3개를 빼앗깁니다.]

[또한, 3층계에서 달성한 모든 불가사의 업적을 승리한 기사단에게 강탈당합니다.]

['잊힌 신'이 참전합니다.]

보스룸의 정의를 대략 알겠다.

전부를 얻거나, 전부를 잃거나.

그리고 이번엔 처음부터 '잊힌 신'이 참전했다.

물론, 오히려 좋았다.

'나를 위한 스테이지로군.'

몬스터를 길들이고, 진화시키는 것.

그 분야에서 나는 스페셜리스트였으니까.

베이비 히드라곤

"······ '별 수호자'들의 꼴이 말이 아니로군."

황금률의 기사단이 떠나간 자리.

별의 대지에 머무르던 거대한 늑대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명색이 '별 수호자'라 불리던 신화종의 괴수.

그 자존감과 자존심이 여지없이 박살 나버린 탓이다.

"'검은 늪의 늑대'여, 그대가 전력을 다했다면 이토록 쉽게 모든 별을 빼앗기진 않았을 텐데."

몸을 재정비한 멸악의 거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검은 늪의 늑대.

그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을 꿰뚫은 것이다.

하지만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우리 중 누군가는 죽었겠지. 그리고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멸악의 거인 그대도 같지 않나? 아니, 애초에 이길 생각이 있긴 했던 건가?"

"······ '드루이드'를 죽일 수는 없지 않느냐."

죽일 생각으로 임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멸악의 거인은 처음부터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세계수가, 모든 자연이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수많은 짐승이, 우리 신화종의 힘마저도 대를 이어갈수록 약해져만 가고 있지."

천공으로 떠오른 대륙.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땅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땅이 약해지자 자연이 죽어가고, 자연이 죽어가자 짐승들은 작아져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향에서 신화종들도 자유롭진 못하다.

멸악의 거인은 참담한 심점을 담아 말했다.

"······ 이대로면, 우리는 언젠가 한낱 멍청한 짐승처럼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드루이드'가 땅의 힘을 회복시켜주지 않는다면······."

흔히들 드루이드는 '씨앗을 피우는 자'라고 알고 있지만.

그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땅의 힘을 복구하는 것'에 있었다.

하여, 멸악의 거인은 처음부터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멸족했다 알려진 그들이 돌아왔을진대 두 팔 벌려 환호해주진 못할망정 어떻게 생과 사를 나누겠나.

다만······ 본 것이다.

그의 가능성을.

그의 의지를.

"어때 보이던가?"

늑대가 묻자, 멸악의 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와 결이 달라 보이진 않더군."

"음. 하기야, 처음부터 '제압'만 하려던 게 목적 같아 보이던데. 그 점에선 우리와 같았지."

필요없는 살생을 하지 않는다.

'별 수호자'가 존재하는 이유와, 서로의 필요를 잘 알고 있다는 의미다.

또한, '별 수호자 기사단'도 마찬가지로 '황금률의 기사단'과 반목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제압하여 결판을 지으려던 건데.

"다만······ 비상한 자다."

"비상하다니?"

비상(非常).

예사롭지 않다는 말이다.

멸악의 거인은 방금 전의 상황을 상기하곤 입을 열었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고 있다. 마치 미래를 읽은 듯, 더없이 많은 상황을 겪어본 듯······."

"'미래시'를 갖고 있다는 건가? 그럼 예언자인가?"

간혹 있다.

미래시를 갖고 태어나는 자가.

신의 축복을 부여받은 존재가.

확실한 미래를 읽지는 못하지만 열중 일곱 정도는 결과를 맞추는 자들.

그들은 예언자로 불리우며 수많은 기적을 행하곤 한다.

하지만 멸악의 거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미래시처럼 보일 정도로 수많은 상황과 경험을 해봤다는 게다. 모든 행동과 선택이 능수능란하더군. 단순히 미래시를 갖고 있다면 그 정도로 빠르게 수많은 선택을 할 수는 없을 터인데."

결단이 빠르다.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그 모든 결과가 오로지 자신에게 유리하게 나타난다.

검을 성장시키고 조합하는 것.

그리하여 나타난 격이 다른 무기까지.

뿐만인가.

멸악의 거인, 그가 어떻게 나올지까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기사단의 인원을 배치하고, 분배하여, 모든 상황을 자신이 유리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멸악의 거인은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처음본다.

경험한 적 없음에도, 경험한 것처럼 확신하는 자.

이걸 뭐라고 해야할까.

늑대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하긴······ 선택에 의해 미래는 바뀌곤 하니, 미래시를 가진 자들은 도리어 '선택'을 망설이는 경향이 있지. 한데 그런게 아예 없다?"

"전혀 없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차이가 무엇인지 알겠나?"

"······ 진짜 신이라 이건가."

신.

단순히 '신격'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반신격이든 준신격이든, 신격을 지닌 자들이 이 세계에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당장 멸악의 거인만 하더라도 반신격을 지닌 성스러운 존재였다.

그들이 말하는 '신'은 말 그대로의 '신'이다.

태초, 천지가 창조될 때 존재하던 신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멸망에 의해 소멸하거나, 이름을 잃고 '잊혀져'갔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두 여신 레아와 피나였다.

"'창세의 가호'를 두르고 있더군."

"······!!!"

늑대가 기겁했다.

듣고 있던 별 수호자들 모두가 믿기지 않는 눈초리를 지어보였다.

드루이드의 신이 어찌 여신의 가호를 잇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0규율의 가호를!

"그뿐만이 아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에게 가슴팍을 관통당했을 때, 느껴진 또 다른 '신'들이 있었다."

"······ 그래서 움직이지 못한 건가?"

"아아."

멸악의 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빼려고 했으나, 빠지지 않던 검.

그가 넘어진 이유는 단순히 다리를 헛디뎌서가 아니었다.

그만한 존재가 고작 발을 헛디뎌서 자리에서 넘어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찰나와 같지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죽고 잊혀진 신들. 그는 그런 존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더군."

신들의 의지가.

존재가.

그래서 그가 자신의 가슴팍 위에 발을 올리고 올라왔을 때도,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죽은 두 여신.

그리고 먼 옛날 소멸했다 알려진 드루이드의 신뿐만이 아니라.

'더 있다. 더 많은 신들의 흔적이 그의 안에 있었다.'

어머니 별의 수호자인 멸악의 거인만이 알 수 있는 사실들.

그는 수많은 신을 겪어보았으며, 스러지는 걸 지켜본 자.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태초부터 존재하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사라진 신들······.'

어째서 그들의 흔적이, 그의 안에 남아있는가.

어째서 그들이 그에게 그런 흔적을 남기고 있는가.

마치 제발 자신을 알아달라는 듯.

자신의 한을 풀어달라는 듯이.

신들이 그에게 열렬하게 구애를 하고 있는 것만 같지 않은가.

심지어 여신들마저도 말이다.

그러니, 그는 단순한 '드루이드의 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

도리어 '드루이드의 신'이라는 자격은, 그가 지닌 수많은 '자격' 중 하나일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 적대해서 좋을 건 없어보이는군.'

그가 '악'만 아니라면, 멀리하는 것보단 가까이하는 게 훨씬 이로울 듯했다.

"제대로 붙어볼 걸 그랬나?"

늑대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멸악의 거인이 피식 웃었다.

"제대로 붙었어도 이기기 쉽지 않았을 게다."

"하긴······ 그놈, 알비노라고 했던가? 쉽지 않아 보이더군."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괴물이었다.

만약 서로가 죽고 죽이는 전쟁을 했다면 결국 전멸하는 건 '별 수호자' 쪽이었을 것이다.

알비노. 놈이 혼자 절반은 죽였을 터이니.

멸악의 거인 또한 알비노를 상대로 승리할 확신이 없었다.

죽음을 상정하고 싸워도 잘 쳐줘야 6:4······ 아니, 7:3 정도일까.

그가 패배할 수가 더 많을 듯하다.

"'라이가'는 어떻던가?"

"······."

멸악의 거인의 물음에 순간 늑대가 입을 닫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간인 그도 알비노 못지않게 괴물이었으니까.

인질이 잡혀서 어쩔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실상은 둘의 조합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멸악의 거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간들은 빠르게 강해진다. 우리가 잠시 눈만 깜빡여도 어느새 앞서가곤 하지. 여신들께서 괜히 그들을 어여삐 여기셨던 게 아니다."

"우리가 뒤떨어진다는 거냐?"

"늑대여, 우리도 움직여야한다는 뜻이다. '별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너무 고여있긴 했으니.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이다."

멸악의 거인이 슬쩍 시선을 틀어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을 마주친 거대한 뱀, 드라무트가 몸을 잘게 떨었다.

가장 먼저 인질로 잡히고, 별 수호자들 중에서도 약체로 분류된 게 드라무트였으므로.

멸악의 거인이 계속해서 말했다.

"세계수의 던전에서의 경험을 계기로 우리 '별 수호자'는 더 높이 도약할 것이다. 자격 없는 자들은 자격을 잃을 것이며, 대신 자격 있는 자들이 그 자리를 꿰찰 터."

황금률의 기사단.

그들을 보고, 맞붙자, 확실히 알겠다.

이대로면 '별 수호자'라는 이름은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모든 '별'의 자격을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별 수호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별을, 여신의 신체를 지켜내는 것에 있었다.

사사로운 자가 여신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마왕과 같이 악한 자들의 손에 닿지 못하도록 말이다.

'심연이 떠오르고, 마왕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지.'

별을 노리려는 자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

별 수호자는, 자격을 지닌 자들에게만 여신의 힘을 내어주어야한다.

그러니······ 당연히 더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후대의 신화종들 중 꽤 가능성이 있는 이들이 많다는 점.

던전에서 나가는 순간 본격적인 세대교체가 진행될 것이었다.

'모든 기사단이 우리와 같진 않겠으나······.'

다만, 걱정인 건 황금률의 드루이드와 그의 기사단이다.

던전에 입장한 일곱 개의 기사단.

그들이 모두 자신들과 같지는 않을 테니까.

필연적으로 부딪힐 테고, 필연적으로 소모되리라.

특히 몇몇 눈에 거슬리는 놈들이 있었다.

백왕 역시 그중 하나.

녀석이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몸 조심하시오.'

멸악의 거인이 무운을 빌었다.

*

문을 넘자 너른 초원이었다.

깡충대며 뛰어다니는 토끼들이 인상적인 곳.

그러나 기사단원은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팀전을 가장한 솔플이라.'

의도는 알겠다.

각자가 '몬스터 혼'을 키워, 마지막 대결의 장에서 만나는 것이다.

여러 장치가 있기는 하겠으나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목적은 같다.

'이게 몬스터 혼이로군.'

돌멩이.

그 위에 룬어가 적혀있는 그것.

나는 바로 앞에 떨어져있는 '몬스터 혼'을 내려다보았다.

[몬스터 혼(0등급, 無)]

-'혼'을 사용하면 사용자의 속성에 맞는 0등급 몬스터가 소환됩니다.

사용자의 속성에 맞는 소환물이라.

혼을 사용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툭!

칼날로 손가락에 작게 상처를 내어, 떨어지는 피를 룬어 위에 펴발랐다.

그러자.

스으으으!

['베이비 히드라곤(0등급, 짐승, 화속성 일반)'이 소환되었습니다!]

베이비 히드라곤?

내게 보유하고 있는 '히드라곤의 혼'이 영향을 준 모양이다.

돌멩이 위에 아예 같은 룬어가 떠오른 걸 보면, 확실했다.

곧이어 내 앞으로 3살짜리 어린아이와 같은 크기의 '히드라곤'이 소환되었다.

아홉 개의 머리, 드래곤의 하체를 합쳐놓은 모습.

뒤뚱 뒤뚱!

크기가 작아서 주변을 걷는 모습이 퍽 웃겼다.

"히든 특성 '비스트 로드'가 발현됩니다."

"소환된 '몬스터 혼'이 소환자의 영향을 받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베이비 히드라곤'의 상태창을 확인하십시오."

히든 특성의 발현.

비스트 로드는 이름 그대로 펫을 길들이는 데 특화되어 있는 특성이다.

한데, 그게 전부가 아닌 듯싶었다.

나는 베이비 히드라곤의 머리 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동시에.

이름 : 베이비 히드라곤(0등급)

힘 : 10

체력 : 6

민첩 : 4

지능 : 3

마력 : 8

능력치만 보았을 땐 별 볼 게 없다.

토끼나 사냥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허약하기 그지 없는 능력치.

하지만, 그 뒤에 붙은 단락에서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자연 재생력 : +51,400%

모든 자연 속성 능력치 : +514%

빛 속성 능력치 : +100%

모든 내성 : +20%

최소 물리내성 : +50%

전체 경험치 획득률 : +500%

숙련도 효율 : +2,100%

피해량 : +120%

보스 몬스터 추가 피해량 : +20%

전체 관통력 : +34.3%

저주 관통력 : +15%

저주 반사 : +40%

저주 유지시간 증가 : +30%

감각 공유 : +200%

"······."

끝없이 펼쳐지는 부가 능력치의 향연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저 부가능력치 전부가, 내가 가진 부가능력치와 같았으니 말이다.

특히 '인내'를 얻어 증폭된 자연 재생력을 보자 전율이 일 정도였다.

동시에 이놈을 어떻게 성장시켜야 할지도 감이 왔다.

낑?

깨엥!

뭔가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베이비 히드라곤.

아홉 머리 전부가 머리를 뒤로 젖혔지만, 어림도 없다.

'일격에 죽지만 않으면 돼.'

즉사만 안 하면 압도적인 자연재생 능력으로 재생할 수 있다.

즉.

'초보자 사냥터를 굳이 거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나는 미련없이 토끼들이 뛰어다니는 초원을 떠났다.

그리고 이 날, 베이비 히드라곤은 지옥을 맛보았다.

격이 다르다.

판게니아에 존재하는 '펫' 시스템.

하지만 제대로 '펫'을 육성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약한 데 키우기도 까다로우니까.'

일단 테이밍이 가능한 몬스터도 제한적이다.

이는 판게니아의 특성 때문이었다.

천공에 떠 있고, 모든 맵이 워프로 통하며, 그 탓에 폐쇄적이다.

폐쇄적이라는 건 그만큼 외부를 배척한다는 의미.

어느 정도 성장한 상태의 괴물을 테이밍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기껏해야 새끼나 알 따위를 훔쳐 시도해야 하는데.

'환경이 달라지는 순간 열에 아홉은 죽어버리니.'

문제는 여전히 환경이다.

오랜 세월, 특정 장소에서만 성장하던 종의 몬스터.

워프를 넘어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면 모든 게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마력의 농도와 같은 자잘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결국 대다수가 죽고 만다.

살아남는다고 해도 원래대로의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그래서다.

들인 노력과 정성에 비해 나오는 결과치가 형편없어 '테이밍'을 주력으로 캐릭터를 육성하는 게이머는 거의 없었다.

물론 테이밍에 성공한 뒤 브리딩(Breeding)을 통해 혁신적으로 종의 개종을 완료한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봤자 하위 종족에 한한다.

상위 종족, 더 나아가 신화종을 테이밍해 브리딩한다?

그냥 불가능한 일이다.

하여, 사람들은 테이밍보단 '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혼으로 소환한 원형의 몬스터는 진화시킬 수 있다.'

사냥을 하면 아주 극악한 확률로 등장하는 아이템, 혼.

탈 수도 있고 소환해서 전투를 돕게 할 수도 있는데 그 희소성 탓에 매물조차 없었다.

혼의 쓰임새는 그뿐만이 아니다.

유일등급 장비의 재료가 되거나, 특수한 퀘스트의 해결에 필요하기도 한다.

때문에 정작 혼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통 유일등급 장비를 만드는 재료로 쓰는 게 훨씬 이득이었으므로.

'내가 시도하기 전까진 혼을 진화시킨다는 개념이 없었지.'

혼으로 소환된 몬스터는 일반적인 성장의 개념이 없다.

다만, 진화, 혹은 변이(變異)를 한다.

아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꼭 같은 종의 성체가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진화의 여부에 따라 낮은 확률로 아예 다른 종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이걸 처음으로 밝힌 게 나였다.

덕분에 '혼'의 진화를 시도하는 이들이 늘었고, 몇몇은 신화종의 진화에도 성공했다 전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큼 '혼'의 진화에 빠삭한 이는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사실상 인간이 신화종을 길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

이었다.

과거형이다.

내가 게이머였을 시절의 이야기.

플레이어가 된 지금은 황금률 상점에서 신화종의 알을 구매하는 방법도 추가되긴 했지만,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만약 '혼'이 아닌 '알'을 준 뒤 부화시키는 대결이었다면 자신하지 못했겠지.

허나, 오직 '혼'의 성장과 대결이라면 나는 스페셜리스트다.

다만.

'그런데 성장이 가능한 혼이라.'

······ 등급을 올려 성장하는 혼이라니.

이런건 나도 처음봤다.

'혼'은 말 그대로 죽은 몬스터의 영혼이 각인된 소환 매개체다.

제대로된 생명체가 아니니 성장 또한 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혼의 격을 올려 변이하고 진화하는 것 외에는 더 강해질 방법이 없다.

하지만, 세계수의 던전에서 주어지는 시련이라 그런걸까?

태고의 이름으로 잊힌 신들과 대결하는 주제이다보니, 확실히 평범한 시각에서만 바라보면 큰 코 다칠 듯싶었다.

'성장, 그리고 진화가 둘 다 가능하다고 봐야할 터.'

··· 그렇다면.

이 '혼'은 아주 특별한 매개체일 것이다.

지금껏 세계에 등장한 적 없는 종류의.

등급을 올려 성장을 도모하고, 더 나아가 진화까지 가능하다면······.

'충분히 키울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감히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내가 과거 히드라곤의 혼을 얻고도 크게 욕심을 내지 않은 이유는 거기에 들이는 노력과 결과보다 그냥 란돌프를 키우는 게 훨씬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히드라곤의 혼을 키우는 가치가 더 낮아서였다.

하지만 이 '혼'은 다르다.

본격적으로, 사력을 다해 키울만하다.

무엇보다.

'······ 교감도 가능하다니.'

혼은 소환물이다.

죽인 괴물의 영혼을 실체화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소환자를 따를 뿐 당연히 교감은 할 수 없다.

그런데······.

끼잉!

깨에엥!

컹컹컹!

사냥을 끝마치고, 내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베이비 히드라곤.

이 녀석을 단순히 혼이라고, 소환물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누가봐도 생명체 그 자체일진대.

"잘했다."

나는 녀석의 머리 아홉 개를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교감'에 성공했습니다."

"'베이비 히드라곤'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베이비 히드라곤'이 3시간의 사투 끝에 '무쇠 산양 보스'를 사냥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불가능한 사냥'을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죽기살기의 투쟁'을 달성했습니다."

"전체 경험치 획득률 500%가 추가됩니다."

"'베이비 히드라곤'의 등급이 6등급으로 격상합니다."

"숙련도 효율 2,100%가 추가됩니다."

"스킬 '물어뜯기'가 맥스레벨을 달성했습니다."

이름 : 베이비 히드라곤(6등급)

힘 : 37

체력 : 55

민첩 : 31

지능 : 29

마력 : 33

스킬 : 물어뜯기(Max)

예상대로 한꺼번에 등급이 폭등했다.

'무쇠 산양 보스'는 방어력은 높지만 공격력이 낮은 몬스터였고, 초보 사냥터에서도 벗어난 중급종의 보스몬스터였다.

그것을 3시간의 사투 끝에 기어코 쓰러트린 것이다.

'체력이 유독 많이 올랐군.'

자연 재생력을 믿고 죽기살기로 싸워서인가.

다른 능력치에 비해 체력이 높다.

이는 곧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 성장의 방식과 결과가 달라지다는 의미다.

나는 더 열심히 베이비 히드라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고생을 한 건 베이비 히드라곤만이 아니었다.

'감각 공유라는 게 진짜로 서로의 감각을 공유한다는 뜻일 줄이야.'

녀석이 공격을 당하면, 내게도 고통이 따라왔다.

그것도 무려 2배로.

대신 내 의지로 녀석의 행동을 약간씩 교정시킬 수 있었다.

주로 위험한 상황이나, 급소를 찔러야하는 상황에서.

'녀석이 죽으면, 나도 위험하다.'

문제는 2배의 감각공유에 의해 내 목숨도 위험하다는 것.

하지만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보다 잘 '이해'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친밀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고민했다.

어지간하면 여기서 안전하게 사냥을 이어가는 게 낫겠지만.

컹컹!

스르르르!

베이비 히드라곤.

녀석도 싸움에 자신이 붙은 듯 주변을 돌아다니는 '무쇠 산양'들을 먹잇감 보듯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은 '데저트 울프 보스'인가······."

···끼잉?

샤아아악!

베이비 히드라곤의 경악하는 목소리.

다음은 초식이 아닌 육식동물의 구역이었다.

산양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공격력을 지닌 몬스터.

허나, 저기서도 나는 일반 '데저트 울프'를 노릴 생각이 없었다.

내 목표는 하나.

'보스 몬스터만 사냥한다.'

구역별로 하나씩만 존재하는 보스 몬스터.

나는 오직 그 하나만을 주구장창 팰 생각이었다.

이 또한 이유가 있었다.

'혼의 격은 오직 격이 높은 괴물을 사냥할 때만 오르니까.'

눈에 보이는 등급만 올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혼의 격'을 함께 올리려거든 고난과 역경이 필요한 법!

"나를 믿어라. 절대로 너를 죽게 놔두진 않을 테니."

그러자 감격한듯 나를 바라보는 베이비 히드라곤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데저트 울프 보스.

회색빛의 털이 감도는 2m 크기의 늑대.

베이비 히드라곤보다 두 배는 더 큰 괴물을 상대로, 승리할 수단은 없을 것 같았다.

당연히 내가 도와줘야겠지만.

"힘내라! 너는 할 수 있다!"

나는 멀리 떨어져서 열심히 '응원'했다.

절대로 너를 죽게 놔두진 않는다는 게, 꼭 위험할 때 도와준다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나를 믿는 만큼 너 자신을 믿어라!"

크아아아아!

시익! 시익!

깨겡!

잔뜩 겁을 먹고 움츠린 베이비 히드라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제대로 찍혔다는 눈빛.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었다.

하지만 응원의 효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히드라곤의 머리 두 개가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히든 특성 '비스트 로드'로 인한 높은 수준의 교감이 발생했습니다."

"응원의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5분간 5% 증가합니다."

"감각 공유! '베이비 히드라곤'이 '데저트 울프 보스'의 급소를 물어뜯었습니다."

"스킬 '물어뜯기'가 '급소 물어뜯기'로 진화합니다."

데저트 울프 보스의 공격은 매서웠다.

할퀴고, 물어뜯는 공격을 당할 때마다 나 역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히드라곤을 한 번의 공격으로 즉사시킬 정도는 아니다.

이후 압도적인 자연재생력에 의해 회복하길 반복하며 끊임없이 데저트 울프 보스의 급소를 노렸다.

계속해서 위험한 상황이 이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나는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혼의 격을 올리는 방법 두 번째는, 절대 도와주지 않는 것이지.'

오로지 소환된 '혼' 혼자서 사냥해야 된다.

기본적으로 '혼'은 캐릭터를 서포트하는 역할이다.

같이 싸우는 게 베이스라는 말이다.

하지만 '혼의 격'을 올리려거든 절대로 같이 싸워선 안 된다.

혼자서 해결하게 놔둬야만한다.

혼의 진화를 아무도 밝혀내지 못한 까닭이었다.

소환물이 보다 격이 높은 몬스터를 혼자서 사냥해야만 하니까.

상식을 벗어난 플레이만이 혼을 진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 그렇게 장장 몇 시간을 더 싸웠을까.

"'베이비 히드라곤'이 5시간의 사투 끝에 '데저트 울프 보스'를 사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연달아 보스몬스터만 사냥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격이 다른'을 달성했습니다."

"전체 경험치 획득률 500%가 추가됩니다."

"'베이비 히드라곤'의 등급이 10등급으로 격상합니다."

"숙련도 효율 2,100%가 추가됩니다."

"스킬 '급소 물어뜯기'가 맥스레벨을 달성했습니다."

후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베이비 히드라곤을 바라보았다.

헥헥!

스으으으!

마찬가지로 격한 숨을 내쉬는 베이비 히드라곤.

그 순간이었다.

휘잉! 휘이이잉!

녀석의 전신에서 푸른 빛이 환하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몸집이 더욱 커지고, 모습이 변해간다.

혹시 변이일까?

어쩌면 성체로 발돋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질 것이다.

내 방식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방증.

나는 집중한 채 녀석의 변화를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혼의 격'이 일정수준을 넘어섰습니다."

"'베이비 히드라곤'이 진화를 시작합니다."

"가장 희귀한 보석으로 이루어진 지하광산의 주인."

"'다이아낙스(10등급, 광물, 땅속성, 보스)'로 진화를 완료했습니다."

"'급소 물어뜯기(Max)'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보석 광선(1Lv)' 고유 스킬을 보유했습니다."

"······ 허."

녀석의 진화한 모습을 보며 나는 작게 감탄했다.

히드라곤이 아니라, 아예 다른 종이 되었다.

그것도 그냥 종만 달라진 게 아닌 더 높은 상위의 격을 손에 넣었다.

다이아낙스.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몬스터.

나도 본 적이 없고 이름만 아는 그런 전설적인 종이었다.

당연히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알려진 히드라곤의 혼보다 더 구하기 어려운 놈이라는 뜻이다.

나는 멍하니 다이아낙스를 바라봤다.

'전설대로군.'

다이아낙스는 세상에서 가장 구하기 힘든 광물로 이루어진 존재라 했다.

그 광물은 용의 비늘보다 더 가치가 있는 보물이라고.

한데, 전설 속 이야기가 맞았다.

다이아낙스를 이루고 있는 광물.

그것은.

'······ 초금속(超金屬) 오리하르콘.'

만들 수 없다고 알려진 유일 등급 장비의 필수 재료였으니까.

어디까지 진화할 생각이냐?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누구도 구했다는 말이 없는 광물들.

그것을 사람들은 '초금속'이라 불렀다.

오리하르콘은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광물이며, 구하는 게 불가능해 모두가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다.

수많은 모험가가 목숨 걸고 손이 닿지 않는 음습한 늪지나 던전을 탐방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고.

초금속이 존재하는 광맥을 찾기만 한다면 그냥 대박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초대박'일 테니까.

또한, 초금속을 갈구하는 이유는 단순히 희귀해서만이 아니다.

'재료가 없어서 제작할 수 없는 초고등급 장비의 재료. 마력의 전도율이 뛰어나 마도구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데에 혁신적인 역할을 하리라 확신하는 것들이 바로 초금속이지.'

그야말로 만능의 광물이다.

대장장이들에게 갖다 주면 눈물을 흘리며 쇠질을 할 것이고,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갖다 주면 오금을 저리며 1년 365일을 연구실에 틀어박힐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초금속 오리하르콘이 있었다.

그륵. 그르륵.

마치 뱀과 같이, 탈피를 끝낸 뒤 내 주변을 맴도는 다이아낙스.

네 개의 다리와 긴 꼬리를 가진 형태였다.

베이비 히드라곤의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지만, 녀석에겐 없던 위엄이 있었다.

녀석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곧이어 창 하나가 떠올랐다.

이름 : 다이아낙스(10등급)

특징(1) : 베이비 히드라곤에서 특수하게 진화한 형태

특징(2) : 보스몬스터는 일반개체보다 추가 특징을 2개 더 보유합니다.

특징(3) : 파워업(전투 돌입 시 5분간 힘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특징(4) : 아머브레이크(광물갑옷이 파괴되면 일정시간 체력과 방어력이 떨어지고 민첩이 상승합니다.)

힘 : 61

체력 : 83

민첩 : 44

지능 : 35

마력 : 52

스킬 : 급소 물어뜯기(Max), 보석 광선(1Lv)

한눈에 보기에도 급이 달라졌다.

특징이 생겼고, 능력치 전반이 올랐으니.

진화라는 말이 실로 어울리는 변화.

그륵?

내 눈빛을 읽은 다이아낙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화하여 기뻐하는 감정보다 욕심이 우선되고 있다는 걸 읽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 누가 탐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 육체를.

걸어다니는 초금속 오리하르콘을!

'······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열가지는 된다. 오리하르콘으로 만들 수 있는 초고등급 장비가.'

그것도 만드는 순간 '유레카!'를 외칠 수 있는 주옥같은 장비들뿐이었다.

하여, 궁금한 것이다.

궁금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광석도 재생이 되나?'

다이아낙스의 피부가 곧 광석 오리하르콘이다.

나는 5만 퍼센트를 넘는 자연재생능력에 의해 오리하르콘이 재생될지가 진정으로 궁금했다.

순수한 탐구심······ 아니, 아니다.

인정한다.

지금 내게 존재하는 감정은 온전한 탐욕뿐임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만약 재생이 가능하여 오리하르콘의 파밍이 가능해진다면?

그리고 오리하르콘으로 제작된 장비를 착용한 기사들이 출현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

그 광경은 그저 전율적일 것이었기에.

오직 내게 필요한 장비만 제작하여 착용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될 터다.

물론 다른 재료들도 필요하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초금속이 눈앞에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대놓고 저걸 뜯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냥 뜯었다간 교감도가 낮아지겠지.'

펫을 키우는데 교감도는 중요하다.

일반적인 '혼'이 아닌 이상 신경쓸 필요가 있었다.

또한 감각 공유 200%의 효과로 나 역시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되리라.

하지만 그러한 고통으로 내 탐욕을 막을 수는 없다.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그륵! 그르륵!

"자, 그럼 바로 다음 '보스'를 처치하러 떠나볼까?"

그륵?

"걱정 마라. 우리는 하나다. 위험할 건 하나도 없으니 나만 믿고 따라오거라."

너의 것은 내 것이고, 내 것도 나의 것이니 진정한 일심동체라 할 수 있겠다.

*

그어어어어!

다이아낙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한꺼번에 두 단계를 뛰어넘어 '메탈 맨티스 보스'에게 도전한 직후의 일이었다.

은빛으로 감도는 거대한 사마귀.

괴랄한 공격력으로 순식간에 다이아낙스의 방어력을 꿰뚫는 괴물!

찰랑! 찰랑!

동시에 찰랑대며 바닥에 다이아낙스의 피부가, 초금속 오리하르콘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메탈 맨티스 보스(17등급)'에게 치명상을 입습니다."

"'초자연재생'에 의해 뜯겨나간 피부가 재생합니다."

"파워업! 5분간 힘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아머브레이크! 5분간 민첩이 5 상승합니다!"

그리고 다이아낙스의 피부가 뜯겨나갈 때마다, 나의 피부 역시 찢어지고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으음······."

웬만한 고통은 우습게 넘기는 나도 2배로 직렬되는 아픔에는 장사가 없었다.

하지만 신음만 흘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조용히 다가가, '오리하르콘'을 주워나갔다.

그러어어어어!

그 사이 파워업과 아머브레이크의 효과로 한층 더 강해지고 빨라진 다이아낙스가 반격을 가했으나.

키아아아!

메탈 맨티스 보스의 날카로운 발톱이 다시금 다이아낙스의 피부를 때렸다.

찰랑!

고아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다시금 떨어지는 오리하르콘.

"'초자연재생'에 의해 뜯겨나간 피부가 재생합니다."

"아머브레이크! 5분간 민첩이 5 상승합니다!"

나는 오리하르콘을 주우며 눈을 크게떴다.

'······ 아머브레이크가 중첩이 되는 거였어?'

광물갑옷이 파괴되면 걸리는 추가 버프.

한데, 파괴와 재생이 동시에 진행되자 버프가 중첩됐다.

보통 이런 종류의 버프는 중첩되지 않기 마련인데 다이아낙스가 '혼'의 형태로 소환된 소환물이라서 그런걸까?

일반적인 제약의 대상이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기껏해야 5분이지만.

'이길 수 있겠는데?'

솔직히 이기려고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오리하르콘 파밍을 위해 잠시 겪는 고난에 가까웠다.

중간에 두 단계를 훌쩍 건너뛰었으니, 다이아낙스와 비교해도 말도 안 되는 격차의 보스인 탓이다.

같은 보스의 규격이라지만 무려 7등급이나 차이가 나니까.

하지만······ 버프의 중첩이 가능하다는 건 다시 말해.

'조건에 따라 말도 안 되는 차이도 극복이 가능하다는 것.'

······ 일종의 '버그 플레이'다.

나는 다이아낙스와 교감을 시도했다.

'견뎌라!'

그르?

내 의지를 느끼곤 기함을 내뱉은 다이아낙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촤륵! 촤륵! 촤아악!

"'메탈 맨티스 보스(17등급)'에게 치명상을 입습니다."

"'메탈 맨티스 보스(17등급)'에게 치명상을 입습니다."

"'메탈 맨티스 보스(17등급)'에게 치명상을 입습니다."

···

"'다이아낙스'의 정신력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다이아낙스'와의 교감도가 낮아집니다."

거어어어억!

연달아 비명을 내지르는 다이아낙스.

고통스럽긴 나도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재생이 가능하다 해도, 그걸 무한정 반복하면 정신이 나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확실하게 얻은 건 있었다.

"아머브레이크! 5분간 민첩이 5 상승합니다!"

"아머브레이크! 5분간 민첩이 5 상승합니다!"

"아머브레이크! 5분간 민첩이 5 상승합니다!"

순식간에 15중첩.

단순 계산으로도 민첩 75이 상승했다.

'됐다.'

민첩은 빠른 움직임과 보정효과, 그리고 크리티컬 확률을 발생시킨다.

당연히 100이 훌쩍 넘는 민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동력을 갖다주기 마련.

그르르르!

찰나지간, 다이아낙스가 메탈 맨티스 보스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곤 배 이상 빨라진 속도로 맨티스의 몸을 칭칭 감았다.

이후 맨티스의 몸을 타고 올라 머리까지 뻗은 다이아낙스가, 맨티스의 얼굴을 마주한 채 입을 크게 벌렸다.

고오오오오-!

"'보석광선'을 발사합니다."

"크리티컬(Critical)!"

"'관통력'이 작용합니다."

"피해량+120%!"

"보스 몬스터에게 추가 피해량 +20%!"

"'메탈 맨티스 보스'가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샤아아아!

메탈 맨티스 보스의 피부가 서서히 녹아내린다.

머지않아, 놈의 비명도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이아낙스'가 '메탈 맨티스 보스'를 사냥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5등급 이상 격차나는 보스 몬스터 1시간 안에 사냥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초고속질주'를 달성했습니다."

"전체 경험치 획득률 500%가 추가됩니다."

"'다이아낙스'의 등급이 14등급으로 격상합니다."

"숙련도 효율 2,100%가 추가됩니다."

"고유스킬 '보석광선'이 8레벨을 달성했습니다."

"'다이아낙스'가 '고통감내' 스킬을 획득합니다."

"'다아이낙스'와의 교감도가 2단계 상승했습니다."

휘유!

나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떨어진 '오리하르콘'의 양이 최소 20kg은 되어보였으니까.

'미쳤군.'

그냥 시장에 내다팔아도 도시 하나쯤은 가볍게 살 수 있을 터.

경매에 내놓으면 얼마를 받을지 감도 안 잡힌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 무한파밍이 가능하다.'

나는 두 눈을 빛냈다.

이 정도로 만족할 내가 아니었으므로.

버프 중첩을 이용한 사냥을 구실로, 오리하르콘을 긁어모으는 것이다.

그, 그르?

다이아낙스가 순간 원인 모를 한기에 온몸을 떨어댔다.

*

파밍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

하물며 그것이 절대로 구할 수 없다 알려진 초금속 오리하르콘의 파밍이라면 더더욱.

고통도, 슬픔도, 모두 쌓여가는 오리하르콘 앞에선 무용(無用)하다.

하지만 즐거움에는 언제나 끝이 있는 법.

'점점 떨어지는 오리하르콘의 양이 적어지는군.'

수백 번의 광물갑옷 파괴.

그에 따라 생성되는 광물의 양이 적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이것 역시 진화의 일환으로 보였다.

허나, 괜찮다.

지금까지 모은 양만으로도 충분했다.

무한한 용량을 담을 수 있는 '마법 가죽 주머니'의 안에는 벌써 톤 단위에 가까운 오리하르콘이 적재되고 있었으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이런 식의 파밍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마치 순수했던 시절의 게이머로 돌아간 기분.

이게 진정한 롤플레잉 게임의 진수 아니겠는가.

나는 오랜만에 흘러가는 시간도 잊은 채 다이아낙스와의 사냥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사냥을 계속했을까.

"'다이아낙스(25등급)'와의 교감도가 최대치를 달성했습니다."

"'영혼의 교감'이 시작됩니다."

"'몬스터 혼'에 새겨진 룬어가 사용자의 육체에도 함께 새겨집니다."

"현재 '다이아낙스의 혼'의 희귀도는 '극상'입니다."

"'다이아낙스'가 사용자의 성향에 맞춰 진화를 시작합니다."

"희귀도 '초극상'의 신수(神獸), '엔젤 베헤모스'로 진화했습니다!"

"'엔젤 베헤모스(25등급, 신수, 빛속성, 레이드 보스)'는 4개의 추가 특징을 갖습니다."

쿠르르르릉!

다이아낙스의 몸집이 수십 배로 늘어나며, 족히 5m 크기의 베헤모스가 되었다.

'엔젤 베헤모스?'

하지만 베헤모스는 대표적인 '어둠 성향'의 몬스터.

고릴라 같은 몸, 검은 털과 코끼리의 얼굴을 지녀 모든 것을 닥치는대로 찢어발기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엔젤 베헤모스'는 하얀색 털과 머리 위에 빛으로 이루어진 링이 떠 있었다.

처음 보는 종이다.

저런 종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내 눈길을 끈 건 코끼리 같은 엔젤 베헤모스의 거체만이 아니었다.

'저건······.'

······ 또 있었으니까.

'설마 별의 상아?'

파밍할 재료가.

엔젤 베헤모스의 존재는 몰랐지만, 저 상아로 만들어진 물건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성물(聖物)의 주재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재차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단순히 별의 상아를 발견해서만은 아니었다.

다이아낙스, 그리고 엔젤 베헤모스까지.

찾을 수 없고, 존재 자체도 모르던 모습으로 진화했다.

초금속과 더이상 만들 수 없는 성물의 주재료를 찾아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진화할 때마다 계속해서, 점점 더 희귀도를 올려간다면······.

'대체 어디까지 진화할 생각이냐?'

······ 그 끝에 무엇이 될지 좀처럼 상상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멸망이 나타났다.

백왕.

북부에 군림하는 제왕이며, 괴수들의 도시인 크람델의 실질적인 주인인 존재.

비록, 빌헬름에게 패배한 뒤 어금니를 잃고 한동안 은둔하였으나.

전성기의 그는 본래 적수가 없을 정도의 괴물이었다.

미래시에 가까운 본인의 위협을 감지하는 능력, 그리고 본체로 변신했을 때의 속도는 감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원래라면 빌헬름에게 패배하지도 않았을 터.'

무승부로 이끌어나갈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빌헬름이 강하다고 해도, 정면에서 부딪히지만 않는다면 영원토록 승부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빌헬름은 크람델과 사주력 전부를 볼모로 잡았다.

백왕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때, 살면서 처음으로 백왕은 패배를 맛보았다.

이후로 긴 은둔에 들어간 건 그 패배의 여파 때문이다.

하지만.

백왕의 진정한 능력은 단순히 미래시와 속도 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더 강해져야만 했다. 나도, 크람델도, 주력들 또한.'

은둔했다고, 진짜 가만히 숨어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백왕은 변화를 꾀했다.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사용하고자 마음먹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 백왕에겐 그들 모두를 '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흑왕이 자신의 측근들에게 힘을 나누어 강화하듯이.

백왕은 그들을 '육성'할 수 있는 권능과도 같은 힘을 지닌 게다.

아니, 애초에 오랜 세월 정점에 올라 괴수들을 이끈 '백호족'은 그러한 '고유 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히든 특성 '비스트 로드'를 시작으로, '백호의 은혜'라 불리는 '성장과 진화'에 관여하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수많은 괴수가 백호족을 따랐던 이유 중 하나.

하지만 백왕은 은둔하기 전까지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백호족의 은혜는 본래의 모습을 잃게 만든다.'

진화한다는 것.

그리하여 '고유의 특성'을 잃게 된다는 게 줄곧 좋지만은 않다.

물론 올바른 방향으로 진화한다면 더할 나위 없으나 백호족의 은혜는 오로지 '힘'만을 좇게 만드는 형식으로 진화케 하였으므로.

결국 그러한 진화는 폭주만을 낳는 법.

고유의 모습과 특성 모두를 잃고 힘에 취하게 만든다.

여태껏 은혜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이유다.

이걸 조절하는 방법을 백왕은 몰랐다.

하지만.

'힘을 잃고 방황한 오랜 은둔생활 끝에, 마침내 깨닫게 되었지.'

비워지면 채우는 게 당연한 이치다.

어금니를 잃고 힘을 잃은 백왕은 은혜를 조종하는 법에 통달하게 되었다.

도리어 이전보다 더 정교하며 완벽한 형태로 진화하게끔 하는게 가능해졌다.

사주력이 급속도로 성장한 배경이다.

그러니, 이번 대결은.

'질수가 없다. 나의 승리다.'

······ 승리를 자신했다.

확정적인 그의 승리와 다름이 없다.

이 특이한 '몬스터 혼'의 진화도 같은 맥락이었으니까.

백호족의 은혜를 부여하고, 끝없이 성장과 진화를 반복하여 승리하게 만드는 것쯤이야 지금의 백왕에겐 쉬운 일이었다.

도리어 제한없이 마구 은혜를 풀어 완성체로 만든다.

'몬스터 혼'은 생명이되 생명이 아니기에, 그게 가능했다.

'한계가 없는 진화의 돌. 이건······ 확실히 물건이로군.'

세계수의 던전.

잊힌 신이 참전한만큼 주어진 도구는 실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태고의 이름에 걸맞은, 그야말로 최초 '혼'의 원형과도 같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집합체!

이런걸 대결의 도구로 뿌린 신의 정체가 실로 궁금할 지경.

그러나 아무리 '신'이 참전했다 한들, 패배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먹어치워라, 멸왕 모크."

크르르르릉!

백왕의 앞.

쓰러진 레이드 보스 몬스터 '히드락 맘모스'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괴이한 괴수.

쫘아아악!

족히 세 배 이상 차이나는 크기임에도 거침없이 찢어발긴다.

회색의 피부, 비대한 상체와 거대한 양팔, 등에 난 작은 날개 두 장과 신체 곳곳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눈'들.

모크는 먼 옛날, 멸왕(滅王)이라 불리었던 이종의 괴물이다.

모크가 지나가는 곳에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고 하여 마왕, 혹은 멸왕으로 불리었다.

어느 순간 사라졌으며,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 기원에 대해서도 아무도 모르지만.

백왕은 알고 있었다.

'모크는 백호족이 만들어냈던 최강의 작품이다.'

가장 위대했던 백호족이 완성한 괴물.

힘을 갈구하며 진화한 끝에 완성된 걸작!

문제는 너무 위험했고, 제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강성했던 백호족은 사력을 다해 모크를 제압하는데 성공했으나 그 결과 백호족은 멸족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은혜로 모크가 탄생했다는 건, 다시 말해.

'백호족이 제어하는데 실패했던 모크를, 내가 제어한다.'

······ 실패의 역사를 새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최강의 백호임을 인증할 절호의 기회라는 뜻이었다.

이건 운명이다.

종족의 비원을 풀고, 더 나아가 성공의 역사를 쓰라는.

'몬스터 혼'은 그것을 소환한 사용자를 증명하는 물건이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모크를 이길 상대는 결코 없으리라.

백왕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세계수의 던전에 들어온 이유를,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으니.

*

다이아낙스의 초금속.

그리고 엔젤 베헤모스가 가진 별의 상아까지.

나는 미친 듯이 그것들을 쓸어모았다.

그리고 다시금 '진화'의 때를 엿보았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게 끝이 아님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역시!'

그리고 한 순간을 기점으로 엔젤 베헤모스가 진화하기 시작했다.

"'엔젤 베헤모스(50등급)'가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몬스터 혼'에 새겨진 룬어가 사용자의 육체에도 함께 새겨집니다."

"현재 '엔젤 베헤모스'의 희귀도는 '초극상'입니다."

"'엔젤 베헤모스'가 사용자의 성향에 맞춰 진화를 시작합니다."

"희귀도 '무극 초입'의 신수(神獸), '십미호'로 진화했습니다!"

"'십미호(50등급, 신수, 빛속성, 레이드 보스)'는 4개의 추가 특징을 갖습니다."

십미호라니.

이름 그대로 열 개의 꼬리를 단 거대한 여우로 진화했다.

무극(無極), 끝이 없는 세계의 초입에 도달했다는 말.

나는 멍하니 십미호를 바라보았다.

'미치도록 신성하군.'

지금 내 성향을 대변하는 종이라서 그런걸까.

한없이 우하하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여우였다.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야할까.

구미호의 이름을 가진 자들은 주로 '매혹'의 힘을 지녔는데 반해, 십미호는 아예 차원이 다른 신성불가침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고대, 원형의 신수다.'

애당초 신수란 무엇인가.

신령스러운 짐승.

격을 얻고 초월하여 마침내 영험함을 지닌 개체를 뜻함이다.

만년을 산 거북이, 용이 된 이무기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한 신수들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지고함을 지녔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 판게니아에는 그런 '신수'가 없다.

멸망이 출현한 뒤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존재하는 신수는 원형의 신수들의 후손일 뿐.

멸망이 나타나고, 대륙이 떠오르며, 짐승들은 한없이 작고 약해져갔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난 십미호는 진짜 신수다.

멸망의 이전, 본래 존재했던 신령스러운 동물이었다.

'세계수의 던전. 이곳은 모든 원형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태고의 보물창고'에서 '최초의 불'을 찾았던 것처럼.

이곳에도 수많은 '원형'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원형을 찾아나가, 다시 되살리는 게 진정한 목표임을 말이다.

잊히고, 사라진 것들을 되찾아나가는 과정인 셈.

그렇다면.

'······ 이것 또한 끝이 아니겠지.'

원형의 신령한 짐승.

이건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이보다 더욱 오래된, 모든 신수의 원형.

최초로 등장한 신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궁금했다.

그 신수가 무엇인지.

파밍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우선순위가 생겼다.

주어진 시간동안 나는 오로지 진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십미호(75등급)'가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몬스터 혼'에 새겨진 룬어가 사용자의 육체에도 함께 새겨집니다."

"현재 '십미호'의 희귀도는 '무극 초입'입니다."

"'십미호'가 사용자의 성향에 맞춰 진화를 시작합니다."

"희귀도 '무극 완숙'의 신수(神獸), '열 한 개의 성천'으로 진화했습니다!"

"'열 한 개의 성천(75등급, 신수, 빛속성, 레이드 보스)'는 4개의 추가 특징을 갖습니다."

열 한 개의 성천(聖天)?

열 한 개의 성스러운 하늘을 지닌 자라는 뜻인가?

이어 나타난 모습은 확실히 그 이름처럼 거룩했다.

이름처럼 11개의 꼬리를 지닌, 하늘까지 맞닿은 백룡의 모습.

11개의 꼬리 위에는 둥그런 옥과 같은 보석이 달려있었는데.

'전부 염원구슬이다.'

······ 그 전부가 염원구슬이었다.

11개의 염원구슬을 지닌 용을 나는 본 적이 없다.

하나만 지닐 수 있는 게 염원구슬 아니었나?

이세라처럼 다른 용들을 죽이고 빼앗아도 기껏해야 두 개에서 세 개에 지나지 않건만.

염원구슬의 크기도, 영롱함조차도 전혀 뒤처지질 않았다.

십미호에 이어, 십일성천이라.

혹시 꼬리의 개수에 따라 진화의 정도가 다른 걸까?

확실한 건 여태껏 듣도 보도 못한 존재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다이아낙스, 엔젤 베헤모스와는 감히 비교가 불허한.

그렇다면 이 다음은 어떨지.

"'열 한 개의 성천(75등급)'이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몬스터 혼'에 새겨진 룬어가 사용자의 육체에도 함께 새겨집니다."

"현재 '열 한 개의 성천'의 희귀도는 '무극 완숙'입니다."

"'열 한 개의 성천'이 사용자의 성향에 맞춰 진화를 시작합니다."

"희귀도 '무극 극'의 신수(神獸), '십이천자'로 진화했습니다!"

"'십이천자(99등급, 신수, 빛속성, 슈퍼 레이드 보스)'는 6개의 추가 특징을 갖습니다."

대결의 제한시간을 한 시간가량 남겨놓은 시점에서.

또 다시 마지막 진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십이천자는 12개의 꼬리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용이 아닌 거대한 새의 형태였다.

하얀 까마귀의 형태.

꼬리가 열 두 개고 머리 위에선 태양과 같은 열기가 지글거렸다.

'미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신령스러움에.

앞선 신수들보다 더 강력하기에 6개의 추가특징을 갖는, 진정한 완전체였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현상에, 나는 더욱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십이천자'의 신령함이 잠들어있던 또 다른 '???'를 깨웁니다."

"'???'이 '십이천자'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이 '십이천자'의 존재 강탈을 시도합니다."

끼에에에엑-!

십이천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내부에서 전쟁을 하듯 온 몸을 비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후아아악!

동시에 하얀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한다.

날개와 깃털 모두가, 심지어 머리 위에서 지글대는 작은 태양조차도.

모두 회색빛으로 물들어간다.

그리고.

"'십이천자'의 존재가 덧씌워집니다."

"'또 다른 멸망'의 첫번째 권속, '멸망의 까마귀'의 소환조건이 만족되었습니다."

"'멸망의 까마귀'가 '십이천자'의 신령함을 먹어치웁니다."

"'멸망의 까마귀'가 '원형'의 힘을 되찾습니다."

"'멸망의 까마귀'가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완성시킵니다."

"'이름 없는 수리(100등급, 태고의 신수, 태초속성, 올드원)'"

멸망이 나타났다.

이름 없는 수리.

십이천자를 뒤집어쓰며 나타난 존재, 멸망의 까마귀.

란돌프가 '또 다른 멸망'의 클래스를 획득하며 소환할 수 있게 된 첫 번째 권속!

허나, 멸망의 까마귀를 소환하는 방법을 나는 몰랐다.

섣불리 란돌프로 변신할 수도 없었고, 단순히 소환하고자 하여서 소환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소환될 줄은.'

조건을 만족해야만 소환되는 방식.

자신이 뒤집어쓸 완성된 껍데기가 있어야만, 그 껍데기를 먹어치우고 나타나는 게 바로 '권속'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멸망의 권속들도 완성된 채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던가.

게다가 껍데기를 먹어치운 멸망의 까마귀는 내 상상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길게 뻗은 회색의 날개는 대해도 가를 듯했고, 날카로운 부리는 꿰뚫지 못할 게 없어 보였다.

12개의 꼬리 끝은 마치 연꽃이 봉우리를 피운 듯 활짝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며, 양쪽 머리에 나 있는 기다란 깃은 태양과 같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또 다른 멸망의 권속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찬란하지 않은가.

곧이어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름 없는 수리(100등급)]

특징(1) : '또 다른 멸망의 권속', '멸망의 까마귀'가 '잊힌 성천'의 존재 '십이천자'를 먹어치우며 새롭게 태어난 형태.

특징(2) : 올드원이라 칭해지는 태고의 신수이며, 최초로 탄생한 세계수의 꼭대기에 앉아있던 새,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 '이름 없는 수리'입니다.

특징(3) : '태초 속성'은 빛과 어둠을 포함한 모든 속성에 50%의 내성을 갖습니다.

특징(4) : 본래 또 다른 멸망의 권속이나 '별의 군주'가 가진 신비한 힘과 '잊힌 성천'의 신령함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귀속됩니다. 대신, 모든 '특징'이 신비하게 강화됩니다.

특징(5) : 12개의 꼬리 끝에 달린 '태양의 꽃'에는 자신이 진화했던 형태의 힘이 저장되어있습니다. 현재 저장된 형태는 다섯 가지(다이아낙스, 엔젤 베헤모스, 십미호, 열한 개의 성천, 십이천자)입니다.

특징(6) : 이름 없는 수리는 상대의 이름과 형태를 먹어치우며 무한하게 진화합니다.

특징(7) : '흉과 재의 장갑(태고)'에 의해 투구의 형태로 변해 착용할 수 있습니다. (연결)

특징(8) : '태양의 꽃'에 저장된 형태의 성향에 따라 신성, 혹은 암흑성을 획득합니다. (현재 강신성)

힘 : 100~???

체력 : 100~???

민첩 : 100~???

지능 : 100~???

마력 : 100~???

스킬 : 형태변화시 보유한 스킬이 달라집니다.

······.

주르르륵 이어지는 상태창의 내역들.

도합 여덟 개의 특징을 읽으며 나는 깊게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형식의 소환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진정한 '혼'의 모습.

하지만 '이름 없는 수리'로 진화한 게 단순히 우연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름 없는 수리는 나를 대변하는 존재다.'

이 녀석이야말로 나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존재다.

내 영혼에 깃들고 육체에 새겨진다는 게 이런 의미인 듯싶었다.

끝없는 진화 끝에 마침내 '나'를 만난 느낌이다.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 계속해서 도전하길 잘했군.'

너무 무리하게 진화시키는 게 아닌지 걱정도 했다.

잘못된 방향으로 진화한다면, 진화시키지 않는 것만 못할 터.

하지만 나 자신을 믿고 뚝심 있게 밀어붙인 결과는 최상이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정도로.

'내 경험치 획득률과 숙련도 상승률을 이어받았으니, 성장 자체는 누구보다도 빠를 수밖에.'

이만한 성장이 가능했던 까닭은 단순히 '더 높은 단계에서의 사냥'을 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지닌 부가능력치를 그대로 이어받아 어마어마한 성장력이 밑바탕되었기 때문이다.

500%가 넘는 전체 경험치 획득률.

2,000%를 넘기는 숙련도 효율.

그 외에 갖가지 부가적이나, 강력한 옵션들까지.

물론 그 외에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기는 했다.

'······ 흉과 재의 장갑.'

흉신과 재의 신이 최종보상으로 건넨 태고의 장갑.

단순히 박현명과 란돌프의 스위칭을 가능케하는 능력 외에도 또 다른 능력이 숨어있었다.

'두 장갑은 링크의 기능을 갖고 있다. 변신이라 칭했지만, 진실된 이름은 링크. 연결이다.'

변신.

혹은 스위칭.

여태까지 그리 불렀으나, 이는 내가 장갑의 기능을 절반만 이해한 것이다.

흉과 재의 장갑은 서로 연결되는 속성을 지녔다.

그리고 나는 소환된 개체와 '감각 공유'를 통해 연결되었고, 어느 순간 '흉과 재의 장갑'이 가진 본연의 기능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연결(Link).

혼과 일체가 되며, 녀석이 내가 되고 내가 녀석이 되는 합일(合一)의 형태.

진화할 때마다 나는 '혼' 그 자체가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합체다.

그래서 더욱 높은 단계의 사냥이 가능해졌고, 더욱 빠른 진화가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직접 사냥했으니까.

마찬가지로 이름 없는 수리가 '투구'로 변해 착용할 수 있게 된 건 모두 장갑의 영향이었다.

'혼의 진짜 쓰임새······.'

깨달음이 찾아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혼'의 진짜 쓰임새가 아닐는지.

단순히 소환하고, 진화시키는 것을 넘어, 혼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대로 내게 적용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불가사의 업적 '혼의 의미'를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합일(合一)'을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무한한 진화'를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올드원'을 달성했습니다.]

[불가사의 업적 '홀로 수많은 업적을 이룩한 자'를 달성했습니다.]

······.

끝없이 이어지는 불가사의 업적들.

하지만 이건 나 혼자 깬 업적에 불과했다.

['황금률의 기사단'이 불가사의 업적 '54개'를 완료한 상태입니다.]

[던전 내 불가사의 업적 진행률 118/370]

어느덧 50개가 넘는 업적이 완료된 것이다.

이는 전체 달성률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

일곱 기사단이 경쟁하는 구도임에도 압도적인 차이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단원들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방증이리라.

'이번 층계에서 70개는 넘겠군.'

최소 70개 이상을 노려볼 법했다.

그리고 최대한 품격을 올려 '신성 획득'에 도전할 것이다.

'품격 400과 500, 그 이상······.'

잊힌 기사단의 영혼 하나에 5의 품격이 오른다.

80개를 획득해 400에 도달하면, '기사단 전체의 한계 레벨 1 상승'이라는 말도 안 되는 추가효과가 부여된다.

한계 레벨은 '균열의 탑'에서만 올릴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뿐만인가.

500에 도달하면 '신성'을 획득하는데 이 역시 절대로 놓칠 수 없는 효과였다.

그러려면 승리해야한다.

압도적으로, 모든 불가사의 업적을 강탈해야만 했다.

하지만 문제는 백왕과 '잊힌 신'이었다.

백왕도 육성에 최적화 된 능력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잊힌 신'이 시련을 준비한만큼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시작했을 터이니.

··· 그래서일까.

나도 한 가지, 불안한 점은 있었다.

'만약 멸망의 까마귀가 혼의 자아마저 먹어치웠다면.'

나는 녀석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도 누군가가 나를 다루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지 않던가.

여태까진 베이비 히드라곤의 인격을 그대로 이어가서 마음편하게 다루었지만, 만약 진정으로 '멸망의 까마귀'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면······.

끼아악!

순간 '이름 없는 수리'가 우렁차게 소리를 내지르며, 얼굴을 내 뺨에 부볐다.

······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멸망의 까마귀가 혼의 자아를 먹어치우진 못한 듯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첫 번째 권속인 멸망의 까마귀 정도면 잡아먹고도 남았을 텐데.

'별의 군주가 가진 신비한 힘.'

나는 특징을 재차 살피다가 그 대목에 집중했다.

별의 군주는 내가 지닌 클래스의 이름이다.

란돌프와 성향이 나뉘며 '별의 계승자'가 진화한 것이었다.

한데, 또 다른 멸망의 권속이 '별의 군주'가 가진 신비한 힘에 의해 또 다른 형태로 귀속되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렇다는 건.

'별의 군주가··· 사실 또 다른 멸망 못지 않은 클래스라고?'

물론 '잊힌 성천, 십이성자'의 신령함도 도움을 주었겠지만, 아무리 봐도 '별의 군주'가 가진 클래스 자체의 능력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듯싶었다.

'별의 군주'가 '또 다른 멸망'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별의 군주가 지닌 제대로된 능력을 나는 아직 모른다.'

그나마 '무신'은 이름 그대로의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별의 군주'에 대해서 나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 더 유념하면서 알아봐야겠군.'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상상 이상의 효과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이름 없는 수리'를 바라보았다.

순간 한 가지 호기심이 들었다.

이름 없는 수리에게 이름을 지어주면 이 녀석은 이름 있는 수리가 될까?

끼아악?

"아니다. 남은 시간도 알차게 써보자꾸나."

피식 웃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1분의 시간조차 낭비하긴 싫었으니.

슈아아악!

동시에, 이름 없는 수리가 투구로 변했고.

"'······."

나는 다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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