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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5% 13ATRIBUT / Chapter 6: 6

Chương 6: 6

*

"'개미왕 페르몬'이 '영원의 란돌프'에게 지배됩니다."

"······."

긴장상황에서 떠오른 글귀를 읽고 락투샤는 인상을 구겼다.

패배는 패배인데, 단 한 번의 패배로 지배당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단순한 저주의 지배를 넘어서, 스스로 무릎을 꿇기라도 했다는 건가?

"멍청한 놈 같으니······."

결국 쓰게 한 마디 내뱉었다.

개미왕 페르몬.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지능 자체가 낮다.

아무리 어마어마한 재능을 지녔대도 머리가 멍청한 탓에 몸이 고생하는 부류다.

확실한 건, 놈의 독단으로 인해 난이도가 상승했다는 것.

'다 쓸어버려야겠군.'

락투샤가 흑천검을 들었다.

아직 '칼날용신'에게 당한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특히 주력들이 가장 문제다.

대토룡, 궁기, 메두사······.

그리고 아리아.

저들이 제일 먼저 타겟으로 설정할 건 흑왕의 최측근인 자신과 다크엘프 로드일 게 분명했으므로.

"오주력 란돌프는 인간인가?"

그때였다.

락투샤의 예상과 달리, 주력인 '궁기'의 얼굴은 인간들에게로 뻗어있었다.

허드슨을 비롯한 인간들.

하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허나 상관 없다는 듯 궁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오직 크람델에만 존재하는 신비의 탑. 오주력 란돌프가 최초로 돌파했던 신화의 시련. 그 시련이 이곳 투신의 탑에서 재현되었다."

신화의 시련은 오직 오주력 란돌프만이 끝을 보았다.

백왕도 같은 시련을 겪었으나, 끝을 보진 못했다.

그럴진대 투신의 탑에서 같은 시련이 진행됐다.

"······ 투신의 탑은 현재 '챔피언 란돌프'의 경험을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챔피언 란돌프는 인간이지."

물론 신화의 시련을 경험한 존재는 더 있다.

그러니 비슷한 시련일 수도 있겠지만 크람델의 주력인 그들은 확신했다.

이토록 똑같이 구현해놓았다면, 남은 결론은 하나라고.

"챔피언 란돌프와 오주력 란돌프가 동일한 존재인가, 묻는 것이다."

깊게 눌린 목소리.

허나 그 속은 배신감에 치를 떠는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크람델은 인간을 배척한다.

인간은 절대로 크람델에 들어올 수 없다.

주력이 되는 건 더욱 불가하다.

한데 동료라고 생각한 오주력 란돌프가 사실은 자신들을 속인 인간이었다는 게 확실시 된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듯.

궁기가 시선을 옮겨, 허드슨의 뒤에 선 자들을 향해 말했다.

"특히 너희 둘은, 반룡인이었을 텐데?"

아이작과 이자벨라.

둘은 미켈라 세트를 착용한 채, '반룡인'으로 둔갑한 뒤 크람델에 입장했다.

하지만 지금 둘은 미켈라 세트를 착용한 상태가 아니다.

인간의 모습 그대로 마주한 것이다.

스으으으!

메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람델 전역을 살피는 눈인 메두사는 아이작과 이자벨라 역시 확인한 탓이다.

저 외형과 특유의 기운은 반룡인으로 위장하여 크람델에 들어온 자들이 맞았다.

모든 걸 보고 기억하는 메두사가 착각할 리는 없었다.

반룡인으로 변신한 인간.

그들 모두를 속이고 크람델에 위장잠입한 인간.

그리고 그 인간들과 함께했던, 오주력 란돌프.

퍼즐이 맞춰져 간다.

"감히······."

처음에는 그저 의심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작과 이자벨라를 보고, 확신했다.

오주력 란돌프는 인간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들과 함께하는 자.

더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르르르.

궁기가 어금니를 드러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속였고, 속았다.

남은건 처절한 응징뿐.

저 인간들을 모조리 물어죽이고, 란돌프마저 죽일 것이다.

"멈춰라."

궁기가 공격하려던 찰나.

그의 앞을, 아리아가 막아섰다.

"비켜라, 아리아. 아니면 우리 모두를 배신한 놈의 동료를 감쌀 셈이냐?"

"······ 나는 지금 백왕님의 대행이다. 말을 삼가라."

"대행은 대행일뿐이다. 넌 백왕님이 아니야. 비켜라, 함께 물어죽이기 전에."

궁기의 분노는 이미 한계치를 넘었다.

고오오오오오.

궁기의 모습이 바뀌어간다.

순식간에 호랑이 같은 얼굴과 갈고리 모양의 발톱, 앞다리에 날개가 돋아있는 흉악한 존재로 탈바꿈했다.

이전보다 더욱 커지고, 마력의 농도는 비교할 바가 안 된다.

그야말로 야수왕이라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리아는 비킬 수가 없었다.

'란돌프가······.'

투신의 탑을 입장할 때부터.

아리아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련자의 산에서 보았던 그분이······ 오주력 란돌프라니.'

자신을 구했던, 자신을 넘어섰던, 바로 그 검사.

그 검사의 모습이 석상이 되어 탑의 입구에 우뚝 서있었으니까.

*

처음에는 잘못 본건 줄 알았다.

챔피언 란돌프의 석상.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이며 존재감을 드러낸 그 석상의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란돌프······?"

아리아는 석상의 아래 적힌 이름을 읽었다.

란돌프.

오주력 란돌프와 같은 이름이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수련자의 산에서 보았던 그 검사는, 분명히 오주력이 아니었으므로.

-······ 마음에 둔 자가 있습니다.

-잊어라.

-그는 락투샤를 뛰어넘는 강자입니다. ······락투샤에게서 저를 살렸으며, 어쩌면 사흉조차 제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백왕이 오주력을 소개할 때 아리아는 수련자의 산에서 만났던 그를 떠올리며 선을 그었다.

그를 마음에 두었다고 했다.

검강을 발현하고, 비석을 반으로 갈랐던 그 검사의 인상은 아리아의 뇌리에 깊숙하게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탑을 오를수록 조금씩 의문이 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25층에 도달했을 땐.

'창술사 발테가 왜 저곳에 있는 거지?'

허드슨과 인간들, 그 뒤에 숨어있는 창술사 발테를 보고 절망하고 말았다.

모두의 뒤에 숨어있는 듯 조용히 창을 쥔 자.

수련자의 산, 혼돈영역에서 숱하게 자신이 몰아붙였던 창술사 아닌가.

재능이 없으니 포기하라고.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창술사다.

왜 저자가 허드슨의 무리에 함께 있을까.

이유는 하나뿐일 것이다.

그 검사가 창술사 발테를 구하고, 동료가 된 것이리라.

허드슨은 오주력의 도시인 미궁도시를 관리하는 인간.

그러니, 만약 수련자의 산에서 만난 그 검사가 오주력 란돌프라면······.

'대체, 왜······.'

란돌프는 왜.

크람델에 들어와, 그들 모두를 속인걸까.

자신을, 주력들을, 백왕마저도.

모두를 속인 채······ 왜 시체 까마귀의 연기를 해왔단 말인가.

심지어 백왕이 소개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후 북천빙검을 소유하고, 함께 사막도시 파이살메르를 향할 때도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진정으로 처음 본 듯이 자신을 대했다.

설마, 처음부터 자신들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을까?

"··· 내가 확인해보고 오겠다. 그때까지, 우리의 목적을 떠올리는 게 좋을 거다 궁기."

그래서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확인을 해봐야겠다.

영원의 란돌프.

그의 모습을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테지.

그런 아리아의 발언에, 궁기를 비롯한 주력들 모두가 당황하고 말았다.

"아리아. 그가 맞다면 도전하지 않는게······."

대토룡이 급히 말렸다.

오주력의 두려운 점은 '신비 파괴'에 있었다.

만약 도전했다가, 아리아의 신비가 파괴당한다면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리아'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제국제일검

"다음 시련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까악?"

흉의 신, 그리고 재의 신을 향해 나는 항의하듯 외쳤다.

운명의 역설을 힘겹게 내디디며 '끔찍한 흉조'마저 멸했건만, 그 뒤의 시련이 없다고 말하는 모양새가 여간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재의 신이 난감하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음, '끔찍한 흉조'를 소멸시킨 건 예상 외였다, 까악.

아아.

'롱기누스의 창'을 이용해 자신들이 만들 벽을 뚫어내며 내가 끔찍한 흉조에게 닿으리란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음 시련의 준비가 늦거나, 혹은 준비를 못 했다는 의미였다.

하기야 나라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피드런을 지시했더니 경쟁하는 상대방을 죽여버린 셈이었으니.

나였어도 뭐 이딴 살벌한 놈이 다 있나 싶었겠다.

"그럼 내보내주면 되지 않냐, 까악."

-아직이다. 아직 완전한 '비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까악.

"고집을 피우는구나, 까악."

단순히 끔찍한 흉조를 잡아먹은 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내 딴에는 고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재의 신이 판정승인 걸로 해도 될 터인데.

이쯤되자 한 가지 의혹이 입가를 맴돈다.

"혹시 끝내기 싫은 게 아닌가, 까악?"

이 둘은 사실 싸움을 끝내기 싫은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억겁의 세월 간 싸워오며 정이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둘의 싸움이 끝나지 않으면, 나는 이곳 '틈새'를 빠져나갈 수 없다.

나는 재차 말했다.

"너희 둘은 사실 사이가 좋은 게 아닌가, 까악?"

동시에.

-까아악! 개소리하지 마라!

-까아악! 어린 까마귀가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크게 분노했다.

세상이 떨릴 정도로, 고막이 뚫릴 수준으로 육성을 내뱉었다.

극도의 혐오를 담아서.

'싫어하는 감정만큼은 진짜다.'

확실히 둘은 서로를 싫어했다.

하지만 이 싸움을 끝내기도 싫어했다.

일종의 계륵, 혹은 애증(愛憎)이리라.

"··· 너희가 서로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겠다. 진정해라, 까악."

정이 들었다는 걸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하여 적당히 둘러대자 분노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다시 그런 헛소리를 하면 잡아먹을 것이다, 까악.

-재의 아이야, 저런 흉물과 나를 엮지 말거라, 까악.

-흉물? 네 얼굴은 재앙 그 자체다, 까악.

-웬일로 칭찬을 하는 거냐? 까악.

-말을 말자, 까악.

-흉물스런 목소리 나도 듣기 싫다, 까악.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싸움이다.

나는 가만히 듣다가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런데 한쪽이 이기면 나머지 한쪽은 어떻게 되는 거냐, 까악?"

이 싸움의 결말이 궁금해졌다.

누가 강하느냐를 겨루는 싸움.

승자와 패자가 나뉘면 서로 얻고 잃는 게 있을 터였다.

-패자는 소멸한다.

-영원히 사라진다.

······ 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기껏해야 누가 더 강하니, 약하니 으스대는 정도로 끝날 줄 알았건만.

'이래서 끝내지 않으려고 하는 거였군.'

왜 이 싸움이 영원불멸하게 지속되고 있는지 이제는 좀 알겠다.

둘은 약속한 것이다.

패자는 소멸키로.

신의 말과 약속은 절대적인 것.

확실히 둘의 사정은 이해했다.

허나, 결판을 내지 않으면, 나 역시 이곳에 영원토록 갇혀있어야 된다.

계속되는 예상 외의 상황.

불가능한 시련을 끊임없이 깨나가는 걸 보며 저 둘은 당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대로 계속 시련을 주었다간 진정으로 '결판'이 날 수도 있었으므로.

하여, 내게 줄 시련이 꺼림칙하고, 마땅한 시련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흉왕을 소환해다오, 까악."

그 선택, 내가 대신 해줘야겠다.

*

"시답지 않은 대화는 이제 끝났나?"

툭.

적막을 깨고,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남자에게로 향했다.

아니, 처음부터 '그'의 행보를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다.

라이가.

제국 제일검이라 불리며 판게니아 전역에서 이름이 드높은 또 다른 기사왕!

'이곳에는 없군.'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고는 있지만, 라이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란돌프의 정체가 뭐가 됐든 간에 그와는 별 상관 없는 일.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어딘가에 있을 '아드리움의 현'이다.

팔가의 비원, 생사록을 보자마자 복구해낸 천재.

그 천재가 이 탑에 있다.

라이가는 반드시 아드리움의 현을 찾아내야만 했다.

물론, 란돌프의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았던 건 아니다.

정체를 숨기고 괴물의 도시 크람델에 잠입하여 오주력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게 퍽 재미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크람델에서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그 척박한 북부의 땅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제국 또한 마찬가지.

"대화가 끝났다면 슬슬 덤비거라. 지루해 죽겠으니."

하아암!

라이가가 진심으로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했다.

이곳에 모인 존재들은 능히 왕국 몇 개쯤은 멸할 수 있는 전력이다.

그럼에도 라이가는 모두를 도발하는 걸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생명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하나, 일평생을 쌓아온 무력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물며 그 정도 되는 격의 소유자라면 진짜 죽을 때까진 죽은 게 아니다.

고로.

"덤비지 않겠다면, 내가 가마."

라이가는 몸을 풀었다.

가장 먼저 박살 낼 대상을 찾고자 고개를 돌려 좌중을 살펴보았다.

이윽고 그의 눈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세렝게티. 기사왕 빌헬름의 최측근이자 순백의 기사라.'

최근 아이언 왕국의 패자인 프리드릭 왕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지.

그리고 프리드릭 왕은 교만의 악마다.

'교만을 뒤로 물렸다. 그만한 저력은 갖췄다는 의미일 터.'

교만.

그 장난을 좋아하고, 지기 싫어하는 악마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왜일까?

단순히 상대가 강하다고 쉽게 물러날 놈은 아닐진대.

'저 아이들, 용신이로군.'

과연.

순식간에 라이가는 상대의 전력을 파악했다.

두 아이는 용신의 격을 갖춘 괴물이다.

다른 용신들처럼 약점을 찾아내지 않으면 무적이리라.

칼날용신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교만의 악마와는 상극이다.

그것도 극상극이었다.

천적을 눈앞에 두었으니 교만도 쉽게 욕심을 부리진 못했겠지.

라이가가 작게 미소 지었다.

진짜 재밌는 조합이었으니까.

다른 괴물들보다, 저 모호한 군집이 훨씬 흥미가 인다.

그래서.

스윽!

라이가는 몸을 움직였다.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그 위명만큼이나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는지.

순식간에 세렝게티의 정면에 선 라이가가 가볍게 검을 뻗었다.

채엥-!

막는다.

막아냈다.

쉐에엑!

반동으로 라이가의 몸이 뒤로 젖히자 그 틈을 노려왔다.

세렝게티의 검에 치솟은 오라.

'검강이라.'

역시 재밌다.

검강이 이처럼 흔한 것이었나?

빌헬름의 최측근이라더니, 과연 제대로 배운 듯했다.

'허나.'

꽈아앙!

강은 강으로만 쳐낼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올곧고 강력한 강이 상대의 강을 잡아먹기 마련이다.

"흐읍···!"

머금은 호흡을 내뱉은 세렝게티가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돌려 타격을 분산하지 않았다면 몸 전체가 찌그러졌을 것이다.

단 한 번의 합으로 만들어낸 검강이 부서졌으니까.

"강의 경지에 이제 막 들어섰나보구나. 그래도 제법 훌륭했다."

훌륭은 했다.

하지만 살짝 실망이었다.

이게 빌헬름의 최측근이라는 자가 가진 무력인가?

한 번 검을 나눈 것만으로도 라이가는 세렝게티의 전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인간치고는 강하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마왕을 상대로 진격할 정도로 느껴지진 않았다.

'아니면 내가 너무 강해진 것이겠지.'

죽음의 경계에 이른 뒤.

라이가는 한단계 더 진일보 할 수 있었다.

막혀있던 벽을 부쉈다.

물론, 그럼에도 죽음을 극복할 수는 없었지만.

쉬익!

쩌엉!

다시 한 번 세렝게티의 전신이 흔들렸다.

아무런 소리와 기척없이,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어 도달한 검을 세렝게티가 다시 한 번 막아선 것이다.

채엥-!

채채채챙!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보이지 않는다.

잔상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빨라진다.

'강해······!'

세렝게티가 이를 악물었다.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는지 라이가는 자신을 시험하고 있을뿐이었다.

과연 제국제일검.

대륙 최강자라 불릴만 하였다.

위치를 바꾸는 별의 능력도 먹히지 않았다.

아예 발동을 안 한다.

'별의 능력을 막고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라이가는 별의 능력을 막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예 다른 괴물들과도 위치변환이 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세렝게티도 전장을 구를대로 구른 기사다.

쉽게 라이가의 검에 목을 내어주진 않는다.

'위험······!'

찰나지간.

세렝게티는 위험을 감지하고, 급히 물러섰다.

"오호라."

그걸 본 라이가가 미소 지었다.

지금, 세렝게티가 물러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었다.

"감지하는 능력 하나는 발군이로구나. 그것도 빌헬름이 가르친 건가?"

"······."

세렝게티는 답할 수 없었다.

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방금 전 느껴진 '즉사'의 위험.

그게 정확히 뭔지 지금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대로는 라이가를 당할 수 없다는 것.

촤악!

그때였다.

새하얀 채찍을 휘두르자 라이가의 전신이 순간적으로 구속되었다.

'뱀의 속박.'

강제로 상대를 속박하는 별의 권능.

그것도 일반적인 별이 아닌 네임드, 요르문간드의 능력이다.

하지만 라이가는 당황하긴커녕 더욱 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게 너의 원래 모습인가?"

······ 처음부터.

25층에 입장할 때부터, 라이가는 이자벨라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왜 저들과 같이 있는지.

어찌하여 심연에서 염소와 함께 사라진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실로 궁금했으나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너에겐 듣고싶은 게 많다.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어차피 알아서 불게 될 터이므로.

*

아리아.

영원의 란돌프와 대결에 돌입한 그녀는, 입장한 즉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란돌프의 정체를 확인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바로 앞에 있는 '무언가' 때문이다.

툭.

투투툭.

그건 개미였다.

하지만 평범한 개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개미는 거대했으며, 진흙과도 같은 것이 전신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진흙과도 같은 게 무엇인지 아리아는 본 즉시 알았다.

'허물을······ 벗고 있어?'

개미는 지금 허물을 벗고 있다.

더 강력한 존재로 발돋움하고자 탈피하는 중이다.

하지만 탈피를 위해선 영양분이 필요하다.

스윽.

개미의 눈이, 아리아에게로 향했다.

"······!"

순간 아리아의 심장이 가라앉았다.

숨을 쉴 수도, 몸을 떨 수조차도 없었다.

고작 개미 따위에 아리아는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개미는 단순히 종으로서 규격할 수 없는 존재다.

저건······ 괴물이다.

끊임없이 먹어치우고 진화하는 괴물이었다.

개미왕 페르몬의 진정한 모습!

어찌하여 저런 모습으로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털썩!

아리아는 떨리는 무릎을 지탱하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주력들에게 알려야······.'

알려야한다.

도전해선 안 된다고!

저것은 너무나도 절망적인 존재다.

도전자를 잡아먹고 계속해서 진화하는 괴수였다.

하지만 머릿속이 하얘졌다.

탈출을 해야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쩌억.

개미가 입을 벌렸다.

아리아의 정신도 함께 흐릿해졌다.

그 순간.

툭!

무언가가 개미의 옆구리를 때렸다.

그러자 개미의 움직임이 멎었다.

개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개미를 멈춰세운 존재.

아리아는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그를 바라보며 경악한 표정으로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다, 당신은······!"

첫사랑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라이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저주받은 이름.

란돌프와 만나 '신병'의 진실에 대해 알게되며 이자벨라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라이가. 데르시안 가문의 불법 인체 개조와 복제에 관해 알고 있었나?"

데르시안 가문이 행하고 있는 끔찍한 인체실험.

이자벨라는 그곳의 아홉 번째 복제품이었다.

소노라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실험의 희생양이 되었다.

하여 묻는 것이다.

라이가.

제국 최강의 기사이자, 팔가 기사단을 이끄는 제국의 반쪽인 그가 과연 데르시안 가문의 불법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그 잔악한 행위를 눈감아주고 있었는지 말이다.

이에, 라이가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견습으로 있을 때에도 차갑긴 했으나, 그조차도 연기였다는 게 실감이 된 탓이다.

"그게 궁금했나?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있는 거냐? 빌헬름의 떨거지들과?"

빌헬름의 떨거지들?

이자벨라는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와 성녀 세아를 보고 지레짐작한 듯싶었다.

둘은 빌헬름과 함께 대원정을 진행했으므로.

라이가가 턱을 쓸며 이어서 말했다.

"빌헬름과 나, 둘 중 누가 더 강하느냐 물었을 때 너는 빌헬름이 더 강하다고 주저 없이 답했지. 그 올곧은 믿음과 신념이 어디서 나왔나 궁금했거늘. 이제 보니······ 이유가 있었군."

"······."

"아직도 그 생각은 유효한가? 빌헬름이 더 강하다고?"

"당연한 소리를-."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여, 그대도 같은 생각인가?"

라이가는 고개를 돌려 세렝게티를 바라보곤 물었다.

오랜 시간을 빌헬름과 함께한 세렝게티라면 보다 확실한 비교가 가능할 터.

끄덕!

일말의 고민 없이 세렝게티는 수긍했다.

방금 전 검을 부딪혀 보았음에도 한 치의 의심 없는 표정으로.

하지만 이런 물음 자체가 사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애당초 이자벨라도, 세렝게티도 빌헬름 쪽의 사람.

진정으로 확인하고자 한다면 직접 맞붙는 수밖에 없다.

"······ 진심으로 붙어보고 싶군. 그 빌헬름이라는 자와."

물론, 성사될 수 없는 대결이다.

빌헬름은 대원정에서 죽었으니까.

만약 사후세계라는 게 있다면, 그곳에선 가능할는지.

그렇다면 머지않았다.

자신의 남은 생명은 기껏해야 1년.

그것도 최근에 벽을 넘어서 겨우 수명이 연장된 덕이었다.

"데르시안 가문에 대해서 궁금하느냐, 이자벨라? 그럼 나를 꺾어라. 그리하면 모든 걸 알려줄 터이니."

"-그럴 생각이다."

촤악!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두르자 라이가의 전신이 강제로 속박되었다.

극히 짧은 시간.

쇄에엑!

그 찰나와 같은 순간을 노려 세렝게티가 쇄도했다.

"너희 둘로 충분하겠나?"

채엥!

허나, 속박당한 라이가의 육체에 세렝게티의 검은 닿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세렝게티의 검을 튕겨냈기 때문이다.

'검······?'

순간적으로 세렝게티는 검의 형태를 보았다.

하지만 검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력으로 형상되었다면 느껴졌을진대, 그조차도 아니었다.

'위험해······!'

다시금 느껴지는 즉사의 위협.

세렝게티가 재빠르게 물러났다.

허나 이번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쩌엉!

꽈앙!

다시금 보이지 않는 검을 쳐낸 이자벨라의 신형이 용수철처럼 튕겨졌다.

"크흡!"

이내 벽에 부딪힌 세렝게티가 바닥에 쓰러졌다.

"쿨럭!"

뭉친 피를 토해내며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섰다.

입가를 털어내며 검을 쥔 세렝게티를 보곤 라이가가 감탄했다.

격의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을 텐데도 기세는 전혀 죽지 않았다.

"역시 대단하군. 그걸 감지하고 막아낼 줄이야."

"··· 심검(心劍)?"

"최근에 깨달았지."

마음의 검.

마음을 형상화하는 검.

그것이 심검이다.

단순히 검을 띄우거나, 검강을 씌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형태의 무력이었다.

베고, 찌르는 걸 떠나, 원한다면 상대의 심장을 터트릴 수도 있고, 내장을 짓뭉개는 것도 가능한 게 심검의 경지였다.

그것을 알아본 세렝게티의 이마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반신반인. 괴물이 따로없군.'

심검 사용자.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서 반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었으므로.

지금 라이가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촤악!

······ 이자벨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3중첩.

'뱀의 속박'이 5중첩에 이르면 요르문간드가 라이가를 잡아먹는다.

아무리 라이가가 괴물이라 해도 요르문간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터.

"저 사람······ 무, 무서워······."

"루카리아. 제발 진정해. 제발."

두 아이.

이세라는 몸을 웅크리고 떠는 루카리아를 보듬어주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필사적으로 말이다.

도와줄 여력은 없어 보인다.

'젠장할.'

그리고 그건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투신의 탑을 오를 때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투신의 탑을 오르며 보게된 진실에 정신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 이름이······.'

아이작은 다시금 자신이 본 것을 떠올렸다.

박현명.

그 이름 세 글자를.

그 이름은······ 자신을 조종한 '죄인'의 이름이었으니까.

목 잘린 자의 별.

그 별을 먹고 초월할 때, 아이작은 박현명의 이름을 들었다.

이자벨라는 박현명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박현명은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조종해 광산 도시를 무너트리고, 평생을 도망자로 살게 만든 장본인이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한데, 그 이름이 왜 이곳에서 나타난단 말인가.

'죽여야 한다.'

죽인다. 죽일 것이다.

초월하며 그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아이작은 다짐했다.

박현명이라는 자를 찾아내어 반드시 죽이기로.

하지만, 최근 다시 만난 이자벨라는 죄인에 대한 '분노'가 없었다.

그토록 분노하며 '신병'에 걸린 자신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데르시안 가문으로 떠났던 게 이자벨라이건만.

대체 왜?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었기에?

무엇보다 이자벨라도 박현명의 이름을 알고 있다.

자신이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자벨라. 넌··· 괜찮은 거냐?'

하여 묻고 싶었다.

이자벨라.

넌 죄인의 이름을 보았는데도 어떻게 괜찮은 거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고!

자신은 도저히 맨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는데 말이다.

"큽······!"

"세렝게티!"

허드슨이 몸을 날려 허공에 떠오른 세렝게티를 겨우 받아냈다.

세렝게티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촤악!

5중첩.

"요르문간드!"

쩌어어어억!

이자벨라의 뒤에서 거대한 흰색의 뱀이 떠오른다.

세계를 집어삼킨 뱀, 요르문간드.

"··· 호오?"

그 모습을 라이가가 감탄하며 바라봤다.

그러나 요르문간드의 권능은 절대적인 것.

콰득!

요르문간드가 먹어치운 자리에, 라이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해치웠나······?"

아이작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키아아아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소리.

치이이익!

무언가가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균열이 생긴다.

툭!

"크흑!"

검 한 자루가 날아들어, 이자벨라의 복부를 찔렀다.

곧이어 한 남자가 허공에 발을 내디디며 모습을 드러냈다.

"재밌구나. 요르문간드의 아공간이라."

······ 라이가.

초록색 피를 뒤집어쓴 그의 모습은 흉신악살이 따로 없었다.

"아직 새끼인 주제에 날 잡어먹으려 하다니, 정말 욕심이 많은 녀석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이자벨라?"

"······."

이자벨라가 이를 악물었다.

회심의 일격.

5중첩의 뱀의 속박도 라이가에겐 통하지 않았다.

이제 세렝게티도, 이자벨라도 더는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터벅.

라이가가 한 발자국 더 다가가자, 허드슨이 그 앞을 막았다.

"멈춰."

"음? 아, 너무 약해서 있는 줄도 몰랐군."

약자에겐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허드슨은 라이가에게 지나가는 개미만도 못한 약자였다.

그래도 자신을 막아서는 의기만큼은 인정해줄 법 하지만, 그러기에도 너무 약했다.

라이가가 손을 휘저었다.

쿠웅!

"커헉!"

그러자 저 멀리 날아가 허드슨은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으으으······!"

두려움에 몸을 떨던 창술사 발테.

발테가 갑자기 발작을 하더니, 두 눈이 돌아가며 '버서커 모드'로 전환됐다.

"과연, 저주받은 버서커 세트라."

이번엔 약간의 관심을 가졌다.

버서커 세트는 착용자를 죽이는 저주받은 무구다.

오로지 광전사에 합당한 재능을 지닌 자만이 저 상태가 될 수 있다.

보통 저 상태가 되면 정신이 있을 때보다 수배는 더 강해지기 마련이었다.

쉬이익!

광속으로 휘둘러지는 창.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내며 라이가가 가만히 발테의 모습을 살폈다.

"꽤 탐나는 재능이다. 허나··· '팔가'와는 안 맞군."

정신을 잃고 오로지 피를 탐하는 상태.

저래서야 팔가의 의지를 이을 수 없다.

심연에 도전했다가, 도리어 심연이 되어버릴 놈이었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탐나는 재능의 소유자임은 분명했다.

'앞으로 5년 정도만 갈고 닦으면 능히 대륙제일의 창술사로 이름을 날릴진대.'

이 창술사는 원석이다.

버서커 상태임에도 균형을 잃지 않고 창을 휘두르는 능력.

창술을 더욱 끌어올리는 이 재능은, 밑바탕이 충분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창술사가 엄청난 노력가라는 의미다.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사나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준비된 밑바탕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더 개화할 것이다.

······ 이곳에서 자신에게 죽지만 않는다면.

"아쉽구나."

촤악!

촤르르륵!

라이가의 검이 고속으로 움직이며 발테의 힘줄을 전부 끊었다.

버서커를 잠재우려면 이 수밖에 없다.

아니면 죽을 때까지 덤벼들 터이므로.

세렝게티도, 허드슨도, 발테도, 모두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남은건 두 어린 용신들과 아이작.

그러나 라이가는 걱정하지 않았다.

'용신의 힘은 다른 신의 영역에서 약해지는 법.'

이곳은 투신의 탑이다.

다른 신격이 주인으로 있는 다른 세계다.

괜히 용신의 힘을 발휘했다간 두 세계의 신격이 충돌하며 자멸할 가능성이 높다.

"이자벨라. 이들을 살리고 싶다면, 말해야 할 것이다. '황금 염소'는 어디로 갔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지만, 아직 죽이진 않는다.

들어야할 게 있으니까.

그곳.

심연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들어야겠다.

알아야겠다.

자신의 지워진 기억과, 왜 자신은 5문을 개방하여 절대적인 죽음의 상태에 놓였는지.

이자벨라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

이자벨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라이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우선 세렝게티부터 죽여야겠군."

하나씩 죽여나가면 결국 입을 열게 되겠지.

그렇게 세렝게티의 앞에 라이가가 섰을 때였다.

꽈앙!

칼 한 자루가 그 사이에 박혔다.

"음?"

라이가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한 발자국만 더 다가가면 다음은 네놈의 목을 따주마."

"넌 누구냐?"

"······ 그라시아다. 제국 최강의 기사여."

그곳엔, 그라시아가 있었다.

세렝게티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저도 모르게 발이 나간 것이다.

일전, 심연 영역에서 그라시아는 바알에게 패배하고 정신을 놓았다.

그리고 세렝게티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물론 그건 허드슨이 제국에서 변신 물약을 통해 세렝게티로 변한 모습이었지만, 그라시아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 여전히 아름답군.'

두근! 두근!

다만, 심장이 요동칠 뿐이었다.

그라시아의 앞에, 천사가 있었다.

순백의 천사, 세렝게티.

그녀를 심연에서 본 그라시아는 생전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태어나서 정신을 차리라며 자신의 뺨을 때린 여자도 생전 처음이었거니와.

그런데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

평생 다시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다시 만나도 단순히 착각이라고, 다시 심장이 뛸 일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이게······ 이것이, 사랑이란 것인가?'

온다. '그것'이 온다.

그라시아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려서부터 강박적으로 엘리트의 길을 걸어왔던 그는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시간 낭비, 감정낭비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그는 다른 사람과 달랐다.

달라야만 했다.

유수의 기업을 이끌며 철인이라 불리는 아버지, 항상 최고만을 누려왔던 어머니로부터 그라시아는 항상 유능한 아들이어야만 했으므로.

그런 그의 아무도 모르는 유일한 여가는 게임, '판게니아'였다.

극악의 난이도.

게임을 클리어하면 어떠한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문구에 혹했다.

'내가 정복하지 못하는 건 이 세상에 존재치 않는다.'

그것이 게임이든, 무엇이든 간에.

한 번 손댄 것은 끝을 보며 언제나 최고의 기록을 세워온 그라시아다.

판게니아도 그럴 것으로 여겼다.

······ '팬텀'을 만나기 전까지는.

'······ 나는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길을,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던가.'

현실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판게니아에는 팬텀을 좇았다.

그러니 넘을 수 없다.

뒤를 따라가기만 해서는 절대로 앞지를 수 없는 것이다.

하여, 그라시아는 자신을 바꾸고자 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리라.'

더이상 연기하지 않겠다고.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그러니 계속해서 보고 싶고, 그립다면,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그라시아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여."

"······?"

"고맙다. 너의 한 마디가 나를 깨웠다."

"내가······ 무슨 말을 했나?"

세렝게티가 겨우 입을 열었다.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라시아에게 말을 건넨 기억이 없다.

애초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난 적도 없었다.

허나 그녀의 생소하단 반응에도 그라시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심연에서 나를 다그치며, 정신을 차리라며 내 얼굴에 얹었던 그 따스한 손길을. 그 미소를."

"··· 혹시 미친 건가?"

"너의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제 내가 너를 지키마."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얼굴에 손을 얹은 적도, 그라시아를 향해 미소지은 적도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라시아는 빌헬름의 대원정을 음해한 영웅회의 소속이다.

아무리 루시퍼와 다크스타를 비롯한 다른 놈들과 결별했다고 한들, 인상을 찌푸리고 욕을 하면 했지 그릴 일이 일어날 리 만무했다.

혹, 꿈이라도 꾼 건지.

"제국제일검, 최강의 기사 라이가여."

그라시아가 고개를 돌려 라이가를 마주했다.

그러자 라이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음. 사랑타령은 끝났나?"

"기다려줘서 고맙군."

"아아. 나는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니 개의치 말거라."

스릉.

그라시아가 검을 쥐었다.

"정식으로 소개하마. 나는 너희가 말하는 '죄인'이자, 검성(剣聖) 그라시아다."

숨기지 않는다.

하물며 상대가 제국 최강의 기사 라이가라면.

그러자 라이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검성? 처음 듣는다만."

"······ 모른척 하지 마라. '사신'을 붙여놓지 않았나?"

"사신? 아, 사신교에 찍혔나보군."

쯧쯧.

라이가가 혀를 찼다.

그리곤 독한 놈들에게 찍혀서 불쌍하다는 눈초리로 그라시아를 바라봤다.

사신교는 죄인을 죽어 마땅하다 생각하지만, 라이가는 죄인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검성이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면 그래도 한가락하는 놈일 터.

"한 번 놀아보자꾸나."

"··· 좋다."

지잉!

지이이이익!

그라시아의 등 뒤로 천 자루의 검이 떠오른다.

더욱 양질의, 더욱 강력한 검들이.

그라시아가 직접 얻은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 유니온의 인벤토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유니온의 인벤토리에 있는 무기들은 그 하나하나가 웬만한 신화등급 저리가라였으므로.

그라시아와 유니온은 상성이 좋았다.

뿐만인가.

'지금의 나는, 강하다.'

그라시아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누군가를 따라가겠다는 욕망을, 열망을, 열등감마저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한 순간 변화가 찾아왔다.

-천벌(天伐)

치직!

치지지직!

천 자루의 검에서 청색의 검기(劍氣)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그라시아의 두 눈에서도 마치 번개와 같은 안광이 넘실댔다.

그라시아가 가진 최강의 스킬, 천벌(天伐).

천 개의 벼락을 꽂혀 상대를 소멸시키는 압도적인 공격!

촤르륵!

촤르르르륵!

단 한 번의 공격에 모든 마력과 체력을 소모하는 필살기다.

준비시간이 길다는 단점과 한 번 사용하면 근 일주일은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기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최후의 비기였다.

-만개(滿開)

허나, 그라시아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천벌의 너머에 있는 영역에 마침내 발을 디뎠다.

검이 복제된다.

모든 검이 서로를 투영하고 증가하여 2천개의 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리고 2천 자루의 검은 다시 한 번 더 분열해 4천 자루가 되었다.

환영의 별을 먹고, 한단계 더 초월하며, 각고의 노력 끝에 거머쥔 또 다른 천벌의 형태.

최강에게 최강이 전부를 쏟아낸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을, 죽음을!

쉬익!

콰콰콰콰콰콰콰콰쾅!

*

그 광경은, 분명히 압도적이었다.

4천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빗발치듯 쏟아지는 광경은.

하지만, 아무리 쏟아내고 또 쏟아낸다 한들.

"······ 진짜 괴물이 따로없군."

닿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것이다.

전투를 지켜보던 유니온은 경악하고 말았다.

제국의 초대 궁중마법사로서 오랜세월을 지내왔으나.

라이가와 같은 괴물은 그도 본 적이 없었다.

역대 팔가의 전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더 강하다.

본래 이 정도는 아니었을진대, 그 사이에 더 강해진 걸까?

"꽤 재밌는 놀이였다. 죄인··· 음, 이름이 뭐라고 했지?"

"······."

천벌 만개가 끝난 뒤.

멀쩡한 라이가의 모습을 보며, 그라시아의 두 눈이 격하게 떨렸다.

분명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한 최강에는 미치지 못했던 게다.

라이가.

저 인외의 괴물에게는 말이다.

모든 것을 쏟아냈기에 더는 싸울 체력도 남지 않았다.

촤악!

순간, 그라시아의 양 팔이 잘렸다.

푹!

"큽······!"

이어 라이가는 세렝게티의 복부를 깊숙하게 찔렀다.

쫘악!

검을 비틀자 피가 줄줄이 흘러내린다.

"대답해라, 이자벨라.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이냐?"

그날.

심연영역에 들어간 날.

라이가는 팔가 기사단원들을 잃고, 기억을 잃었으며, 죽음의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자신과 같은 격을 지닌 존재의 기억을 지울 정도의 일이다.

필시 엄청난 일이 그곳에서 일어났을 터.

"대답하지 않으면 너희는 전부 죽는다. 이자벨라, 너로 인해."

책임을 전가하며 대답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

신의 섬에서 발생했던, 괴물들과의 전투.

신의 살갗 혼종, 영원군주의 등장, 진리의 문, 그리고 또 다른 란돌프.

그 모든걸 이야기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한 가지만은 말할 수 있다.

"··· 너는 패배했다."

"······? 내가, 패배했다고?"

"5문을 개방해 전투에 나섰지만 결국 패배한 패자다."

"········· 5문을 개방하고도 내가 졌단 말이냐?"

라이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5문 개방은 죽음을 명제로 하기에 무적이다.

그 상태의 자신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

그런데 패배했다고 한다.

"대체 누구에게?"

"그건······."

······ 자신의 주인, 란돌프에게.

또 다른 란돌프에게 패했다.

그때였다.

촤앙!

라이가가 급히 몸을 틀어 검면으로 달려드는 상대를 쳐냈다.

궁기다.

쿠우우우우웅!

동시에 지면이 진동한다.

대토룡.

그 거대한 용이 마력을 모으고 있다.

라이가를 공격하기 위해.

주력들이 왜 인간을 돕는 거지?

아니면, 힘이 빠졌다 판단하고 자신을 견제하는 건가?

"······ 슬슬 귀찮아지는군."

멍청한 놈들 같으니.

라이가는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방해꾼이 많다.

이래서야, 제대로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을 듯싶었다.

도저히 5문을 개방한 자신이 패했다는 말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마침 잘 됐다.

"다 죽이면 덜 귀찮아지겠지."

*

쓰러진다.

궁기와 대토룡이.

아이작과 성녀 세아마저도.

도저히 라이가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절대자였다.

피를 흩뿌리고, 내장이 바닥을 저미며, 그들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절대자의 앞을 막은 말로.

저런 괴물을 대체 누가 패배시켰단 말인가?

"너희도 나를 막을 셈이냐?"

"······ 아니."

락투샤가 답했다.

다크엘프 로드도 고개를 저었다.

전 챔피언 산샤 역시 라이가와의 싸움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는 오직 현 챔피언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라이가는 피가 잔뜩 묻은 검을 한 차례 털어냈다.

"자, 이제······."

"으으, 으으으······."

"······?"

"으아아아앙!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다시금 이자벨라에게 향하려던 찰나.

웬 아이의 울음소리가 25층을 가득 채웠다.

용신, 루카리아.

그 작은 소녀가 두려움에 뚝뚝 눈물을 떨어트리면서 울기 시작한 것이다.

"아, 안 돼······."

우는 루카리아를 바라보며 이세라가 당황했다.

심지어 일어나 한 발 물러나기까지 하였다.

여태껏 두려움에 떨던 루카리아를 보듬던 태도와는 명백하게 다르다.

세상 무서울 것 없어보이던 이세라가 당황하고, 겁마저 먹고 있었다.

시시시시.

무언가가 웃는 것만 같은 소리와 함께.

루카리아의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이윽고 루카리아의 얼굴에 모자이크가 쳐지듯 새까만 어둠이 덮어씌워졌다.

그런 루카리아의 변화에 이세라가 다급하게 외쳤다.

"도, 도망쳐! '그것'이 온다······!"

*

쿠르르르릉!

탑이 흔들린다.

진원지는 탑의 상층부.

위태롭게 흔들리는 탑의 위에서, 검은 연기가 미친 듯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는 손의 형태로 만들어지며 탑 전체를 감싸갔다.

까악!

까아악!

커다란 까마귀들이 악을 지르며 다급하게 탑을 빠져나왔다.

탑의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것도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뭐, 뭐야?"

"저 검은색 연기는 뭐야?"

"투신의 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탑을 바라보던 모두가 몸을 떨며 말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지독한 저주.

저런건 여태껏 본 적이 없으니까.

저주 자체가 마치 형상화 된 듯싶었다.

거대한 저주의 인형.

아니, 저주의 신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허나, 더욱이 의아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세렝게티'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지배의 저주'가 발동하여 지배되었습니다."

"'이자벨라'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지배의 저주'가 발동하여 지배되었습니다."

"'락투샤'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지배의 저주'가 발동하여 지배되었습니다."

"'유니온'이······."

······.

······.

······.

"'라이가'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지배의 저주'가 발동하여 지배되었습니다."

가장 거룩한 존재

'그것'이 등장한 순간.

라이가를 비롯한, 탑의 모든 것들이 일순간 멈췄다.

'그것'은 악의 저주를 흩뿌리며 엄청난 속도로 탑을 장악해나갔다.

하지만 라이가는 '그것'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했다.

'용신이 아니었나?'

용신의 격을 가진 두 아이.

그중 루카리아라고 불린 소녀.

오로지 신성하고 오롯이 깨끗해야할 존재!

그런 존재가 저만한 '악의'를 보인다는 걸 섣불리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잘못보았을 리 없다.

저것은 '악의'의 집합체다.

허나 저 정도의 '악의'는 보통의 경우로 생기지 않는다.

'생살을 뜯어먹힐 때의 고통. 영혼까지 울부짖으며 끝내 타락한 자.'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절망을 맛봐야만.

그것조차 넘어서는 깊은 무력감에 좌절해야만 가능하다.

물론, 그리하여 타락했더라도 여전히 의문이다.

설령 신성한 신격이 넘쳐나는 악의에 타락한들, 저것은.

감히 그 수준마저도 압도하는 악의의 집합체였기에.

마치 악의 그 자체가 형상화된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을 한 단어로 비유하자면······.

"절망······?"

······ '절망'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용신의 격과 절망의 영혼을 함께 지닌 소녀.

그 불균형함이 낳은 '그것'의 형태는 실로 전율스러웠다.

마치 날개처럼.

검은 손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와, 닿는 모든 것들을 절망으로 물들인다.

닿는 모든 것들은 '그것'에게 지배되는 것이다.

현혹하고, 세뇌하며, 마침내 순종시키는 힘.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먹어치운다.

"흐흐, 히히히······!"

지배된 자는 악의에 물들며 이성을 잃는다.

여신교의 아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아, 여신이시여! 저 이단자들의 목을 베어 바치겠나이다!"

아론이 양 손을 모았다.

동시에 빛의 광명이 아론에게 쏟아졌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공할 성력이.

곧이어 아론은 성전사가 되었다.

그것도 최상위계의 성전사가.

절망의 힘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이식.'

미친.

라이가는 그 광경을 잠시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흔히 '사흉'이라 불리는 것들의 진정으로 무서운 점은 개체수를 늘려가는데 있었다.

탑에서 바알이 자신의 저주를 매개체 삼아 계속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소환하듯.

절망 역시도 스스로의 세포를 이식해 복제하는 힘을 지녔다.

그리고 현재, 사흉 중 하나인 '절망'은 흑왕이 갖고 있다고 제국은 판단했다.

그런데 왜······ '절망'의 능력이 이곳에서 발현되고 있는가.

자신의 세포를 강제이식해, 그 무한한 힘을 공유하여 한계를 넘게 만든다.

게다가 바알과 다른 점은, 바알이 저주의 인형을 만들고 소환한다면, 절망은 세포가 이식된 자가 본래 지닌 힘만을 극대화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력조차도 극대화시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용신의 육체에 깃들어서인가?'

뭐가 됐든간에 저것은 정면에서 대적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등장한 순간부터 탈출은 불가능하다.

"'긴급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탑'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 탑의 신격과 용신의 신격이 부딪히고 있다.'

예상대로였다.

하여, 결판이 날 때까지 이 탑은 아무도 나갈 수 없다.

탑이 무너지거나, 저 괴물이 사라져야만 정상화될 터.

아아아-

아아아아아아-

마치 노랫소리 같았다.

완전히 어둠에 잠식된 루카리아는 계속해서 묘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현혹의 목소리!'

검은 손에 닿지 않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라이가는 귀를 막았다.

모든 기운을 끌어올려, 한 치의 빈틈없이 막아섰다.

아아- 아아아-

허나, 계속해서 들려온다.

그 음성은 조금씩 감미로워지며 주변 모든 것을 현혹시킨다.

-라이가, 짐의 자랑스러운 기사여.

-황제폐하······!

-'팔가'의 보은, 절대 잊지 않겠느니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대에게 '성혈'을 하사하마. 이제 그대의 '피'가 천하다며 야유할 자는 없으리라.

-······!

황제가 깨어나 자신을 치하하는 모습이 보인다.

들린다.

라이가가 가장 원하는 상황이 눈앞에 비춰졌다.

'젠장할.'

이게 환상이라는 걸 알지만 현혹의 힘이 너무 강하다.

막아도 막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현혹이 끝나면 세뇌되고, 지배당하는 수순만이 남는다.

이 현상으로부터 멀어질 방법은 하나뿐이다.

"도망쳐!"

"란돌프님에게로······!"

영원의 란돌프.

놈에게 도전하는 것.

그리고 영원의 란돌프에게 지배당하는 것.

결국 둘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저 정체모를 '그것'에게 지배당하여 순종하느냐, 혹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하여 패배를 자처하느냐.

아무리 라이가가 초월적인 존재라고 한들, 이 '현상'에 휘말려버린 이상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늪에 발을 담궜다.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깊은 늪.

"빌어먹을······."

라이가는 이맛살을 있는대로 구기고 말았다.

예상대로 진행되고 흘러가는 게 하나도 없다.

제자를 구하고자 진행한 대회일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됐는가.

혹시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진행하는 깜짝 파티같은 게 아닐까?

그런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지금까지의 흐름에 정상적인 게 없었으니.

슈웅!

슈우우웅!

하나, 둘 사라져간다.

눈깜빡할 사이에 이미 지배된 자들을 제외하곤 라이가 그 혼자만 남았다.

시시시시.

그런 자신을 비웃듯 다시금 들려오는 웃음소리.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저것에 지배된다면, 후일은 없다.

설령 지배되지 않고 버티더라도 저것은 자신의 죽음을 더욱 빠르게 앞으로 당겨올 것이었다.

그리 된다면 이 '현상'이 끝나기 전에 죽을 수도 있었다.

사실상 선택지는 처음부터 하나인 셈.

꽈드드득!

"이런 개 같은······!"

"'라이가'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지배의 저주'가 발동하여 지배되었습니다."

*

보스룸.

페이즈 3, 영원의 란돌프가 존재하는 곳.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영원의 란돌프'의 지배를 받습니다."

"지배당한 이들은 서로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침입자를 격퇴하십시오."

"'영원의 란돌프'가 패배하면 '지배의 저주'는 '죽음의 저주'로 변화합니다."

몇 줄의 글귀가 눈앞에 떠올랐다.

주변에는 이미 도전했다가 패배를 자처한 이들로 넘쳐났다.

"페르몬······ 멍청한 놈 같으니."

그 중에는 페르몬도 있었다.

개미왕 페르몬.

그는 일전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락투샤는 쓰게 혀를 찼다.

상대를 안 가리고 달려드는 습성이 놈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시기가 너무나 빨랐던 탓이다.

''영원의 란돌프'는 어디있지?'

라이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영원의 란돌프'로 보이는 녀석이 없다.

대신.

"그가··· 그분이 '영원의 란돌프'다."

"······ 아리아?"

누군가가 나타났다.

란돌프의 정체를 확인하겠다며 도전했던 백왕의 딸, 아리아.

돌연히 나타난 그녀는 가만히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에 거친 숨을 헐떡이며 궁귀가 물었다.

"··· 개미왕 페르몬이 '영원의 란돌프'라니?"

"현재 개미왕은 탈피중이다."

그러고보니 이상했다.

개미왕 페르몬의 움직임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몸을 웅크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영원의 란돌프'는 탈피중인 개미왕에게 깃들었다. 이제 곧 탈피를 끝내겠지."

"깃들었다? 그럼 '영원의 란돌프'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냐?"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물론 아리아는 란돌프의 모습을 보았다.

······ 그 '검사'의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어찌됐든 '검사'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으므로.

무엇보다 란돌프의 상태가 무언가 이상했다.

그때였다.

쿠릉!

쿠르르릉!

"뭐지?"

"왜··· 흔들리는 거지?"

보스룸이 흔들린다.

허나 영원의 란돌프는 현재 개미왕의 육체에서 탈피중이다.

그렇다면 이 난데없는 현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곧, 그들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 따라왔다고?"

그 메시지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따라온 것이다.

'그것'이.

절망으로 점칠된 공포스러운 존재가!

슈웅!

슈우웅!

슈우우우웅!

그것도 어마어마한 숫자의 '도전자'와 함께 나타났다.

탑을 오르던 수십만의 인원이 '그것'에 지배당한 채, 그들의 눈앞에 동시다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나는 소환된 '흉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 나를 소환했나?"

내 눈앞에 있는 것.

그건 '흉왕'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놈의 이름을 말했다.

"투신 카라스······?"

왜 투신 카라스가 소환되었나.

투신 카라스는 투신의 탑을 지배하는 신격이며, 동시에 '재의 왕'이다.

흉의 왕이 아니라.

이것도 두 신이 의도한 것일까?

-까악?

-까악?

······ 아닌 것 같았다.

흉의 신과 재의 신 모두 고개를 갸웃하는 중이다.

하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라스. 지금 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너는······ 누구냐? 왜 '틈새'에 들어와 마음대로 시련을 진행 중인 것이지?"

카라스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되려 화를 내고 있었다.

"이 멍청한 주신들의 싸움을 끝내려고? 아서라. 절대로 그렇게 놔둘 순 없노라."

펄럭!

카라스가 날개를 펼쳤다.

"한쪽이 패하면 패한 쪽은 소멸한다. 주신을 잃은 까마귀들은 작아지고, 멍청해질 것이며, 탑의 권한을 잃게 되겠지. 그것을 알고 들어온 거냐?"

그래서 둘은 영원토록 싸우고만 있는 것이다.

멍청한 약속에 의해 패한 자는 소멸키로 했으니까.

그것이 흉의 종족이 되었든, 재의 종족이 되었든, 어느 한쪽이 완전히 사라지면 세계의 균형은 가파르게 무너진다.

그래서 '탑의 틈새'로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흉왕과 재왕이 모두 동의한 절대적인 규칙.

그 규칙을 깨고 웬 이상한 놈이 들어와있으니 화가 나는 것도 당연지사.

"······ 답해라. 너는 왜 소환된 거지? "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흉왕을 소환했는데 카라스가 소환된 사실을.

하여, 재차 말했다.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재의 왕, 투신 카라스."

"······ 비정상의 정상화. 모든걸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함이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확실한건 지금 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투신 카라스에 의한 일이라는 것이다.

"멍청한 신들의 싸움에 더는 휘둘리지 않겠다. 종족을 버린 신은 더이상 주신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내가 주도권을 갖겠다."

구아아아아아아!

투신 카라스의 전신에 신성이 맺혀간다.

······ 강하다.

더 강해졌다.

투신의 탑을 올라, 패배했을 때보다도 더욱 더.

란돌프의 몸으로도 졌는데 지금 상태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설마?'

그제야 드는 최악의 생각.

-흉왕의 인자와 섞였군.

-음.

내 생각을 뒷받침하듯 주신들이 입을 열었다.

섞였다.

흉왕의 인자.

그것을 갖고 있는 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명뿐이었다.

'란돌프를 흡수했다?'

란돌프.

끔찍한 흉조, 그리고 흉왕의 의지를 이은 존재는 그 외엔 없었으므로.

······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한들, 전부를 흡수한 건 아닐 테다.

카라스가 앞에 있는데도 '운명의 역설'이 발동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사라져라."

쿠릉!

꽈아아아아앙!

마른 하늘에서 신성을 머금은 벼락이 떨어진다.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죽음을 전제로한 벼락이.

"······ 그건 뭐냐?"

허나, 닿지 않는다.

소환된 건 '투신 카라스'만이 아니었다.

"설마 그건······ '태양신의 옥좌'인가?"

태양신이 앉았다고 전해지는 옥좌.

'빛의 옥좌'도 함께 소환되었다.

왜 빛의 옥좌가 함께 나타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빛의 옥좌'에 앉아 있으면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킨다.

카라스의 공격마저도 말이다.

하지만 카라스는 비웃었다.

"그 옥좌도 영원하진 않다. 태양이 저물면 무적도 풀리게 되어있지."

하늘 위에 떠오른 태양.

태양은 조금씩 져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태양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면 빛의 옥좌도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택해야한다.

"무엇을 바쳐, 무엇이 되려고 하느냐? 그래봤자 결과는 달라질 게 없을 터인데."

빛의 옥좌.

그것은 동시에 무한하게 '제물'을 먹어치워 무언가를 강림시키는 의자다.

육각의 검성 라일리도, 끔찍한 흉조도 모두 빛의 옥좌에 의해 소환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바칠 수 있는 제물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바친다고 한들, 더 강해진 카라스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고민했다.

'바칠 제물이 없다고?'

없기야 없다.

내가 가진 장비들로는 한없이 부족하다.

태고의 갑옷이나 롱기누스의 창은 불멸하는 것, 제물로 삼을 수 없는 종류의 물건이었으니.

'확실한 제물이 하나 있다.'

허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즉시 생각한 것을 제물로 삼았다.

"'빛의 옥좌'를 제물로 삼습니다."

"'빛의 옥좌'가 한순간 '가장 거룩한 빛의 옥좌'로 발현합니다."

"'거룩한 광명(50Lv)'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장 거룩했던, 영광스러운 자의 혼을 옥좌로 불러옵니다."

"불러온 혼의 규격에 따라 '온전한 황금률'이 소모됩니다."

무엇을 강림시켜야, 지금의 상황을 역전할 수 있을까.

빛의 옥좌로 삼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구제국 육각의 영웅이고 지고의 용이자 검성이었던 라일리.

혹은 끔찍한 흉조를 소환했을 때보다도 더욱 강력한 존재가 필요하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존재를 부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등장

처음엔 의아했다.

제국의 대회가 진행되는 곳.

왜 그 장소가 하필이면 '투신의 탑'이었을까.

"카라스. 대회의 장소를 이곳으로 낙점하려고 처음부터 계획한 건가?"

나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아직 카라스는 빛의 옥좌가 무엇으로 발현되었는지 모른다.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불러올지 예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저 내가 발악을 하고 있다고만 여기겠지.

나는 그 '틈'을 이용할 생각이다.

현재 탑에서 일어나는 일의 원인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으니.

그러자 카라스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내가 대답해야할 의무가 있나?"

"어차피 태양이 저물기 전까지 할 것도 없지 않느냐. 라이가와는 무슨 거래를 한 거지?"

"··· 웃기는 놈이로군. 그렇다면 내가 먼저 물으마. 너는 무엇이냐? 무엇인데 '틈새'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내 정체가 궁금하다는 말.

지구에서 온 박현명이라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아드리움의 '현'이다."

"아드리움의 현? 대회에 참가했던?"

"아아. 갑자기 층계가 무너지며 이곳으로 빨려들어왔다."

거짓말은 아니다.

물론 '천재지변'으로 층계를 붕괴시킨 건 나였지만.

내가 대회의 참가자임을 밝히자 카라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인간이 틈새로 빨려들어와 재의 종족이 됐다? 예상대로 주신들의 변덕이 시작됐나보군."

카라스가 힐끗 흉의 신과 재의 신을 흘겨봤다.

그런데 두 주신의 태도가 묘하다.

-······.

-······.

그저, 가만히 있다.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태껏 조잘조잘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나는 빛의 옥좌에 앉은 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자, 카라스. 이제 네가 답할 차례다."

카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처음보는 것일진대 투신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으니.

"······ 흠. 라이가와 거래를 했다. 재개장된 투신의 탑에 도전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굳이 그랬어야할 필요가 있나?"

가만히 있어도 많은 전사들이 알아서 투신의 탑을 올랐을 터다.

더 높아진 층고.

더 강력해진 챔피언과 탑의 주인.

이 탑은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요소밖에 없었으므로.

그럼에도 이토록 급하게 사람들을 끌어모은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에는 그저 많은 자들이 '투신의 탑'을 올라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오롯이 내가 가꾸고 만들어놓은, 예전과는 완전하게 달라진 이곳에."

질투의 악마에게 사로잡혔던 당시.

그때와는 완전하게 달라진 투신의 탑에 더 많은 이들이 오르고, 도전하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다.

반짝반짝하게 황금으로 빛나는 란돌프의 석상을 세워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탑의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을뿐.

다시 옛적의 찬란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을뿐이었다.

······ 처음에는 분명히 그러한 마음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은 처음과 의도가 달라졌다는 말인가?"

허나 현재에 이르러선 그 순수함의 의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뜻이다.

곧이어 투신 카라스가 입을 열었다.

"란돌프의 등장이 모든걸 바꾸어놓았다."

"······챔피언 란돌프가 나타난 게 문제다?"

카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돌프가 폭주한 채로 탑의 정상에 소환되었더군."

"······?"

란돌프가 폭주한 채로 소환되었다고?

설마 나 때문인가?

영혼이 없는 빈껍데기로 소환되어서?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카라스는 주신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후 탑에 소환된 란돌프는 분열하기 시작했다."

분열했다.

그의 서사가, 존재가, 수많은 '이야기'들이.

지금 탑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로 인한 것이다.

"흉의 신이 란돌프를 완전한 '흉왕'으로 만들기 위해 해놓은 짓거리다. 그리고 '재의 신'은 내가 아닌 너를 새로운 '재의 왕'으로 낙점한 것 같군."

"······ 그게 무슨 소리냐?"

잠깐.

일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카라스가 아니라 저 두 주신이란 말이었다.

란돌프와 나를 흉의 왕과 재의 왕으로 추대한 뒤 둘 중 하나만을 남기겠다는 계획.

란돌프가 탑에 소환된 직후부터 그러한 흉계를 꾸몄다는 뜻일는지.

카라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열변을 토했다.

내가 아닌 주신들을 향해.

"뿐만 아니라 저 변덕스러운 주신들은 내가 지닌 왕의 자격을 박탈하고, 투신의 탑에서 제외시키겠노라고 결정했다. 이제와서, 내가 모든 걸 되찾은 이 때에! '멸망'에게 멸망당할 그때처럼 또······!"

꽈드득!

카라스가 주먹을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저 주신들은 변하지 않는다.

멸망이 출현하고, 인간들의 주신인 쌍둥이 여신은 스스로를 희생하며 그들을 구원하고자 할 때.

저 두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로 싸우고만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일족이 몰살을 당하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이윽고 흉의 신과 재의 신이 입을 열었다.

-카라스. 너는 우리의 싸움을 멍청한 짓으로 치부하지.

-허나 걱정하지 말거라. 드디어 결판의 때가 다가왔으니.

-마침내 우리가 바라마지않던 완벽한 대적자가 등장했으니!

-······ 이 모든 게 천명이니라. 저 아집스러운 '천상'과 '멸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둘은 '흉왕'으로 탑의 정상에 있는 란돌프를 소환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나와 란돌프, 둘 중 하나만을 남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란돌프가 아닌 투신 카라스가 소환되었다.

-카라스. 한데 란돌프가 지닌 흉왕을 먹어치웠느냐?

-멍청한 짓이다. 자격을 박탈당한 너는 흉왕을, 란돌프의 존재를 감당할 수 없다.

-'투신의 탑'은 이제 너의 것이 아니야.

-새로운 흉의 왕과 재의 왕. 완벽한 두 대적자의 대결만이 우리의 승패를 결정지으리라.

란돌프가 분열하며 흉왕으로 거듭나기 직전, 카라스는 란돌프에게서 발현된 흉왕의 인자를 먹어치웠다.

바알도, 칼날용신과 연결된 신격도, 끔찍한 흉조도, 영원의 란돌프도 모조리 분리된 이유는 오직 흉왕의 발현을 위함이었으므로.

두 주신의 계획을 눈치챈 카라스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재건했다. 겨우 돌아왔단 말이다. 흉의 일족도, 재의 일족도 모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겨우 거머쥐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돌아가봤자다.

-어차피 '멸망'에게 멸망할 터.

-모든 탑을 다시 잃게 되겠지.

-재건하고, 수복해도, 쓰러지기 마련이다.

-그날이 머지 않았다, 카라스여.

-'멸망'의 부활이.

-'멸망'의 탄생이!

흉의 신과 재의 신은 우려하고 있었다.

멸망이 다시 나타날 그날을.

아무리 재건하고 복구한들 지금 이대로라면 어차피 멸종당할 따름이다.

그 전에 더 완전한 존재로 거듭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된 종족을 번성시키고 멸망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카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너희 둘이 합쳐진들 더 완전한 존재가 될 것 같은가?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냔 말이다, 겁쟁이 주신들이여!"

둘은 겁쟁이일 뿐이었다.

멸망에게 멸망당한 그때도.

어차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아니면 두 주신이 싸우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승자가 패자를 먹어치우고 하나가 된다고?

그리하여 완전한 존재로 거듭난다고?

멸망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보다 강력해진 주신과 일족으로?

······ 싸워보지도 않고서.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으면서!

일족들이 죽어나갈 때 마음대로 두 주신은 그리 결정지은 것이다.

"차라리 우리의 주신이 여신이었다면 자격을 박탈한다 해도 기뻐하며 받아들였으리라. 하지만 너희는 아니다. 너희는 내 주신이 아니야······!"

쌍둥이 여신은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도 몸을 던졌다.

비록 소멸했으나, 세계의 완전한 멸망만은 막았다.

패배가 확정되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판게니아는 멸망했을 터.

저 두 겁쟁이와는 확실하게 다르다.

그러니 거역한다.

"흉왕도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시 힘을 되찾으면 너희의 변덕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다.

이곳, 틈새의 접근을 막은 것은.

또한 란돌프가 분열할 때, 카라스가 흉왕의 인자를 먹어치운 것도 오직 이 때문이었다.

두 주신에게 끌려다니지 않고자.

그들의 계획대로 되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 동시에 카라스의 서슬퍼런 눈초리가 나를 향했다.

"그러니 너는 죽어야만 한다. 아드리움의 현."

그는 다짐하듯.

더욱 크게 외쳤다.

"다시 나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선. 저 멍청한 주신들의 결정을 번복시키기 위해선!"

펄럭!

카라스의 날개가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비정상의 정상화.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겠다는 말.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은 두 주신이 맞았다.

하지만 이 상황을 유발한 건 나였다.

나의 존재가, 두 신의 종결을 불러왔다.

란돌프와 나.

완벽하게 대비되는 우리 둘의 출현이 주신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 어둠이 온다.'

나는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양이 저물어간다.

"'재의 시련(6)' - '투신 카라스'와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이제는 결정할 시간이었다.

'왜 빛의 옥좌가 같이 소환되었는지 알겠군.'

이것이야말로 흉왕의, 란돌프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투신 카라스가 자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보낸 마지막 안배.

주신을 거역한 카라스의 말로는 너무나도 뻔했으니.

또한, 이 모든 시련의 돌파구는 이것 하나뿐이었으므로.

'내가 이 탑을 오른 순간부터 모든 건 시작됐다.'

탑의 정상에 란돌프가 소환되고, 내가 탑을 오를 때부터 이 모든 상황은 예견된 것이었다.

허나.

'계획대로 흘러가게 놔둘 수는 없지.'

흉의 신과 재의 신이 짜놓은 흉계에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

뻔뻔하게 모른척했지만 둘은 이미 모든 것을 설계해놓았다.

란돌프가 흉의 왕이 되도록.

내가 재의 왕이 되도록.

설령 '천재지변'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어떻게든 이곳 '틈새'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재의 왕이 되는 시련을 계속해서 이어갔겠지.

마침내 나와 란돌프가 만나면 둘 중 하나가 소멸하게끔.

나는 두 주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결국 이 모든 혼돈을 가져온 건 두 겁쟁이들이다.

"이제 슬슬 끝을 내야겠군."

"아드리움의 현.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나?"

"왜 버려야하지?"

"······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럼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도리어 당당하게 되받아치자 카라스가 눈을 빛냈다.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부딪히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의 격차.

재의 힘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녀석이 투신인 자신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건만.

이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오만하군."

"허, 오만이라. 그렇다면 반대로 물으마. 패배가 확정됐다 하여 포기한다면 저 겁쟁이들과 다를 게 뭐지?"

"······!"

카라스의 눈이 찰나 흔들린다.

이길 수 없는 싸움.

승리하지 못할 거라 지레짐작하여 포기한다면 두 주신과 다를 게 없었으므로.

은연중 카라스는 그들과 같은 논리를 펼친 것이다.

어차피 이길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여전히 어리석구나, 투신 카라스여."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어떠한 역경이 찾아와도, 불가해한 시련이 들이닥쳐도 포기한 적이 없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카라스의 눈이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넌······ 넌 누구냐?"

카라스는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기세가, 존재감이.

그의 모든 것들이.

"아직도 모르겠느냐?"

······ 전혀 다른 사람 같았으니까.

아드리움의 현이 아니다.

그 모습은 마치······.

존재만으로도 모든 이를 압도하며 따르게 만들던.

모든 역경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정점에 선 자.

한없이 오만하지만 그 오만함이 누구보다도 어울리던 남자.

"내가 너의 희망이다, 멍청한 까마귀."

-멍청한 까마귀. 내가 너를 구원해주마.

······ 마치 '그 녀석' 같았으니까.

*

"······ 혼돈이군."

라이가는 짧게 이 상황을 평가했다.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으니까.

이보다 더한 혼란을 그는 본 적이 없다.

'이제 지긋지긋하다.'

란돌프.

그와 엮인 모든 게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기에 이 정도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뭐 하나 정상적인 게 없고, 별 일 아닌 게 없다.

하나같이 머리가 아파오는 진행들밖에 없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로 엮이고 싶지 않은 이름이다.

허나 엮여서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있었다.

'···현혹되지 않는다. 지배당하지 않는다.'

저 절망이 가진 강력한 세뇌의 힘이 통하지 않았다.

아마도 '영원의 란돌프'에게 이미 지배되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답은 있다.

"흐흐흐!"

"키히히히!"

절망에 미쳐버린 자들.

하지만 그들의 힘은 진짜였다.

절망과 마력을 공유하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들은 우리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어보이는구나."

"그나저나······ 엄청난 숫자로군."

주력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빠르게 상황을 인지했다.

어차피 싸워야만 한다.

어느 쪽이 살아남느냐의 대결일 따름.

꿀꺽!

일촉즉발의 상황.

허나 전례 없는 규모였다.

이만한 전쟁은 여태껏 판게니아에 없었다.

이만한 규모의, 수많은 세력이 뒤얽힌 전쟁은.

그렇게 양쪽의 거대한 무력이 서로 부딪히기 직전.

"······?!"

"뭐······?"

"거, 거짓말이지······?"

모두가, 멈춰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믿기지 않는 눈초리로, 경악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부에.

양 측의 세력이 부딪히려는 그 중간에.

펄럭!

······ 누군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찬란한 광명과 함께.

은빛의 갑주를 입고,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빌헬름'이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 그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빌헬름

투신의 탑.

페이즈 1 사흉 바알을 소드마스터 락투샤가 토벌하고, 페이즈 2 칼날용신마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격퇴되자 사람들은 '희망'을 갖고 들떠있었다.

-의외로 할만할지도?

-이대로만 쭉쭉 가자!

-탑에 오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탑 자체의 난이도가 줄어드는 건 확실한 것 같아

-나도 곧 오르려고!

너나 할 것 없이 '투신의 탑'을 올랐다.

물론, 단순히 도전을 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저 어렵고 힘들기만 한 일이었다면 수십만의 숫자가 동시다발적으로 탑을 오를 리가 없으니까.

-와. 보상 장난 아니네

-특히 20층을 넘어가면 특수한 '신비'를 얻을 수 있는 모양이야

-신비만 얻겠어? 장비, 클래스, 기타 등등 전부 다 있음

-2세대 각성자들은 메인퀘도 같이 밀면 대박이겠다

-백성전 성좌들도 침을 질질 흘리는데? 제발 올라 달래

-SP 주는 거 실화냐?

-대박. 경험치 수급 미쳤다!

투신의 탑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한도 끝도 없었다.

시련과 비례하여 그야말로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탑.

하물며 인간은 얻을 수 없는 특수한 '신비'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오르지 않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주변 모두가 탑을 오르도록 독려하는 지경이었다.

특히 성장이 정체된 이들일수록 더욱 필사적으로 탑에 도전했다.

예컨대 한계 레벨이 올랐지만 경험치를 수급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 SP가 부족해 재능 테크트리를 올리지 못하고 있던 이들 등등.

심지어 백성전의 성좌들마저 앞장서서 탑을 오르길 종용하고 있었으니 안 오르면 손해인 지경이었다.

하지만.

-'영원의 란돌프'한테 전부 지배 당했다고...?-이건 진짜 못 깨겠는데...?

-미친. 라이가까지 지배됐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25층에 올랐던 최강자들.

그들 모두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지배됐다.

아마도 탑의 이상현상과도 관계가 있을 터.

탑 전체를 감싼 '검은 손'에 의해 도망치듯 지배된 모양새였다.

-탑으로 입장이 안 돼

-빠져나올 수도 없나본데?

-설마 전부 미끼였다고?

-그 많던 도전자들이 전원 지배된 건가?

50만이 넘어가는 도전자들.

그들과 최강자들이 한꺼번에 지배되었다면 칼날용신에 도전하던 때보다도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더 이상 도전할 사람 자체가 없었으니.

-이제 이틀 남았잖아

-이대로 2일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설마 도전자들 전부가 적으로 돌아서는 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두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탑이 쓰러지고, 저주 받은 란돌프가 튀어나오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막을 수 없다.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다.

막아야만 하는 사람들 전부가 적으로 돌아선 탓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남은시간 47시간 43분."

"시간이 모두 소모되면 탑이 지상으로 쓰러지며, 저주가 방출됩니다."

"탑이 쓰러지면 탑에 존재하는 '저주를 뒤집어 쓴 모든 존재'가 '판게니아'와 '지구'를 습격합니다."

이틀도 채 남지 않은 시간.

-아...

-뭐 어쩌라는 거야? 더이상 도전할 수도 없잖아!

-어떻게, 어떻게 해야 돼...?

-탑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되나?

-지금이라도 사람들 대피시켜야 하는 거 아니야?

모두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탑이 쓰러지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도전을 할 수도 없다.

설령 도전을 하더라도, 저 최강자 연합과 란돌프를 누가 이길 수 있겠나.

그때였다.

"탑의 이상현상에 의해 규칙이 수정됩니다."

"지금부터 '보스룸'이 실시간으로 '중계'됩니다."

"보유한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혹은 '온전한 황금률'을 사용해 도전자, 혹은 영원의 란돌프를 응원할 수 있습니다."

"응원의 규격이 커질수록 응원의 대상자에겐 더 강력한 축복이 부여됩니다."

모든 각성자의 눈 앞에.

동시다발적으로 투명한 화면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TV의 화면처럼 생생하게 '중계'가 되기 시작했다.

-이게 뭔....

-너희도 이거 보이냐? 지금 보스룸 상황?

-미쳤네

-전쟁?

-도전자 전부가 보스룸에 있는데?

척 보기에도 수십만에 다다르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물결.

거대한 평원에 두 세력이 서로를 바라보는 상황.

아직 탑을 오르지 않은 각성자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화면을 예의주시했다.

-...압도적인 양이냐, 질이냐의 싸움이네

-그런데 누굴 응원해야 돼?

-루카리아?

-두쪽 다 깨름칙한데

-우리가 응원하면 지배의 저주가 풀리는 거 아닐까? 축복이 부여된다잖아. 그럼 저주도 풀 수 있다는 말 같은데?

-맞네. 저주랑 축복은 완전히 반대되는 힘이니까

-그럼... 라이가?

-라이가는 탑에서 대회를 연 주최자잖아. 탑이 이렇게 되는데 일조했을 수도 있지

-세렝게티는?

-강하긴 하지만, 안 될 거 같은데...

-그냥 영원의 란돌프를 응원하면?

-미쳤냐?

-가능성이 있기야 한데... 어지간한 황금률의 조각으로는 티도 안 날듯

플레이어 톡을 비롯한 수많은 각성자 커뮤니티에서 설왕설레가 오갔다.

하지만 좀처럼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확실하게 이렇다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

-부딪힌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다.

두 진영은 서서히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이대로 부딪히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으리라.

··· 그 찰나였다.

-?

-???

-??????????????????

'그'의 이름이 등장한 즉시.

달려들던 두 진영은 거짓말처럼 모두 멈춰섰다.

곧이어 그들의 중앙부에 나타난 남자를 보며 모두 물음표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뭐?

-...빌헬름?

-이름만 같은 거 아니야?

-아니, 진짜 빌헬름 맞는 거 같은데....

······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단순히 이름만 보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동명이인으로 취급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난 그 남자는.

분명히, 기사왕 빌헬름이 맞았다.

-하지만 빌헬름은 대원정에서 죽었다고...

-황금률 상점에 빌헬름 장비 다 분해돼서 나왔잖아?

-맞아. 분명히 그랬는데...

-아니, 잠깐만. 란돌프랑 빌헬름 둘 다 팬텀 아니었어?

-어... 그러니까. 뭐지?

-어떻게 둘 다 같이 존재할 수 있는 거지?

-죽은 줄 알았던 빌헬름이 살아있고, 빌헬름은 사실 팬텀의 주캐가 아니었다?

-란돌프랑 빌헬름이 별개의 캐릭터라고???

-와 씨 소름

빌헬름은 죽었다.

대원정에서.

세렝게티가 공언하며 빌헬름의 정확한 서사가 밝혀진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그가 부활이라도 한 듯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빌헬름은 팬텀의 '주캐'로 예상되던 존재다.

판게니아에 소환되는 조건은 게이머가 보유한 가장 강력한 캐릭터, '주캐릭터'가 사망할시였고, 실제로 빌헬름이 죽자 란돌프가 나타났다.

빌헬름이 보유한 장비는 모두 황금률의 상점에서 분해된 채 등장했으니, 누가봐도 빌헬름이 팬텀의 주캐였음은 확실했다.

··· 확실했을 터였다.

-가짜 아니야?

-그러기엔 세렝게티의 반응이....

-성녀 세아도...

-최측근인 저 둘이 진짜랑 가짜를 구분 못할 리가 없잖아

-만약 빌헬름이 죽은 게 아니라면 아직 팬텀은 소환 안 됐다는 뜻이야?

-그럼 란돌프가 팬텀이 아니라는 건데?

-란돌프는 누구야?

-혹시 빌헬름도 저주로 소환된 거 아닐까?

-그럼 보스로 등장해야지 왜 도전을 해?

-진짜 맞다니까. 저 반응들 안보여?

-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혼돈이고 혼란이었다.

그동안 그들이 여겼던 모든 개념이, 사실이 복잡하게 뒤얽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확한 진실은 존재했다.

어찌됐든 빌헬름이 등장했고, 란돌프에게 그가 도전하고 있다는 것.

또한 곧이어 이어진 장면에.

-아...!

-아아...!

그들은 더 이상 혼란해 하지 않았다.

혼란해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고민, 상념 따위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 누군가가 빌헬름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

-가, 가십시오. 앞으로 계속 가십시오. 제 목숨을 바쳐 축복하겠습니다!

-허나!

-멈추면 안 됩니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셔선 안 됩니다! 이 구간은 '파리 지옥'! 마왕의 마기가 가장 강렬한 곳! 뒤를 도는 자들을 모두 썩게 만듭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지옥이었다.

성녀 세아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사왕 빌헬름을 인도했던, 바로 그곳의 기억이었다.

"아······."

잊었던, 잊고 있던 기억들이 마치 홍수처럼 쏟아진다.

성녀 세아는 그동안 기억을 잃고 있었다.

마왕에 의해 강제로 잊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본 순간.

빌헬름이 나타난 그때부터.

"아아······."

······ 떠오르고 있다.

빌헬름과 함께한 원정.

시작과 끝, 그 외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나는······.'

그녀는 계속해서 기사들이 마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희생문을 외우고 있었다.

깨끗하고 아름다웠던 얼굴과 몸에는 온갖 마기를 품은 종기가 자라났고, 두 눈은 악마의 그것처럼 검은자위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성녀 세아. 그녀는 자신의 몸이 썩어가는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마왕의 격퇴를 위해 모든 걸 내던졌다.

하지만 그녀가 바란 건 그런 게 아니다.

진정으로 그녀가 절망했던 이유는.

모든 걸 잊게 된 계기는.

"기사왕, 빌헬름이시여······."

··· 바로 빌헬름의 죽음이었다.

그의 육체가 마왕에게 지배되었음을 깨닫고 모든걸 포기했다.

그러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히 그 육체는 마왕에게 빼앗겼을진대.

"진정 그분이십니까?"

"······ 맞다. 그분이."

세렝게티가 온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오만하기 짝이 없는 기세.

여유와 표정 하나까지도.

그녀가 오랜시간 옆에서 지켜보았던 그분이, 빌헬름이 분명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를 따라할 순 없었다.

빌헬름만이 가진 고유의 분위기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여, 세렝게티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왕을 뵙습니다."

"··· 나의 유일무이한 분이시여."

성녀 세아도 마찬가지였다.

세아는 곧이어 저 육체가 빌헬름의 것이 아님을 알아보았지만, 분명한건 빌헬름이 '강림'했다는 사실이다.

저 영혼과 격은 틀림없이 빌헬름이었다.

육체는 마왕에게 빼앗겼으나, 그 찬란한 영혼까지 빼앗긴 건 아니었던 것이다.

"빌! 헬! 르으으음!!"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빌헬름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전 챔피언 산샤.

투신의 탑에서 오랜시간 군림했던 최강자!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너와의 대결을!!"

빌헬름.

그는 한 번, 투신의 탑을 오른 적이 있다.

하지만 산샤와의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샤는 빌헬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나 빌헬름이 탑의 정상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질투의 악마가 둘의 대결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그 기회가 느닷없이 찾아온 것이다.

"너도 나와의 대결을 고대하고 또 고대했을 터!"

빌헬름. 너도 나와의 대결을 기대하지 않았더냐?

일전 란돌프를 빌헬름의 전인, 혹은 본인으로 여겼으나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 진짜 빌헬름이 있으니까.

이제 방해꾼은 없다.

온전한 둘의 대결만이 있을 따름이다.

스릉!

산샤가 검을 쥐었다.

동시에 산샤의 전신으로 강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모든 고유 기술을 사용했다.

청룡각, 사룡의 검, 신검합일, 파이널 스트라이크, 파천무, 스톰 윈드, 피의 살육자······.

100개의 기술을 합쳐 완성한 단 하나의 고유 기술.

산샤의 스킬로 승화된 완전체의 공격.

더 퍼펙트!

스으으으으으!

강이 하나로 집약되어 푸른 환을 만들었다.

산샤의 검에 송골송곳 맺힌 강환들은 이내 각기 다른 색깔로 변하며 모든 원소를 품기 시작했다.

수, 풍, 지, 화의 4원소를 품고 다시 하나로 합쳐지며.

구오오오오오오!

굉음과 함께 거대한 황금 용의 형상이 완성됐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닿는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공격이 빌헬름을 덮쳤다.

이내 자욱한 연기가 조금씩 걷혀가자.

"······!!!"

"······!!!"

그곳엔 한 남자만이 서 있었다.

산샤는 아니다.

공격을 가했던 산샤는 어느덧 목이 잘린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 빌헬름은 그런 산샤를 쳐다도 안 본 채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다음."

누가 최강인가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지도 않았다.

언제 산샤의 목이 잘렸는지.

분명한 건 산샤 정도로는 저 기사왕의 시선을 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샤가 누구던가.

"전 챔피언이······."

"저 괴물이 한칼에······!"

산샤를 경험했던 자들이라면 모두가 경악할 대목이었다.

그의 움직임과 기술은 모두 완벽에 가까웠으니까.

별을 먹고 초월한 이들조차도 산샤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버거웠으니까.

한데, 모두에게 벽으로 작용했던 산샤가 허망할 정도로 쉽게 목이 잘린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완벽에 가까우나, 완전하진 않다.'

라이가는 산샤를 짧게 평했다.

투신의 탑에서 오랜 시간 군림해온 산샤.

그에 대한 소문은 숱하게 접해보았다.

수많은 기술을 원본에 가깝게 사용한다고.

놈은 분명히 강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다.

투신의 탑에 얽매어 최강을 자처한들 한계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보아하니 자신보다 강한 자와의 싸움이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떠한가.

만약 산샤가 아니라 라이가 본인이었다면?

'검을 휘두르자 공간이 장악됐다.'

일정 공간 안의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빌헬름의 검술은 공간이 자연스레 공간을 장악한 것이다.

뿐만인가?

'산샤의 힘을 그대로 반사했다.'

산샤가 만들어낸 황금의 용.

그 무력은 제법 대단한 것이었다.

어지간한 성 하나쯤은 간단히 날릴 위력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빌헬름은 산샤의 힘을 부드럽게 휘감고 튕겨내 반대로 타격을 입혔다.

손가락 하나로 호숫가에 거대한 파장을 만들 듯.

그야말로 최대의 효율을 자랑하는 극상승의 무공임을 라이가는 단번에 알아봤다.

'··· 기사왕의 명성이 헛되진 않았던가.'

판게니아에 존재하는 두 기사왕.

빌헬름, 그리고 라이가.

하지만 둘은 만난 적이 없다.

간혹 무력의 비교가 이루어지곤 했지만 정확한 대조는 불가능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어찌 확실하게 비교할 수 있겠나.

만난 적도 없고, 검을 맞대어본 적은 더더욱 없는 둘의 강함을 단순한 내뇌망상만으로 우열을 가리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럴진대.

'죽은 자가 살아돌아왔다.'

모두가 죽었다고 확신했던 자.

그의 유품마저도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다.

당장 제국도 빌헬름의 유품 중 두 개를 지니고 있었다.

이번 대회의 우승 상품으로 내건 '빛의 길'과 '거룩한 길' 말이다.

상식 밖의 일.

하지만 산샤의 목을 벤 걸 보면 틀림없이 저 녀석은 기사왕 빌헬름이 맞았다.

후우우웁.

숨이 가빠지고, 손에 절로 땀이 쥔다.

당장이라도 겨루고 싶다.

검을 나누고 싶다!

"저의 검을··· 받아주시겠습니까?"

허나 앞으로 나선건 다른이였다.

······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그녀는 격정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이 따르던 기사왕에게 검을 겨눴다.

그러자 산샤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빌헬름이 말했다.

"너의 검이라면 언제든지."

세렝게티의 눈빛이 일순간 더욱 흔들렸다.

인자하다.

예의 그때처럼.

언제나 자신의 검을 받아주던, 그 당시의 빌헬름을 보는 것만 같았다.

수많은 의문과 의혹이 있지만 구태여 입에 담진 않았다.

기사는 검으로 말하는 법.

"······ 그럼, 갑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쉬이이익!

세렝게티는 몸을 활처럼 휘게 한 후, 일순간 탄력을 이용해 쏘아져나갔다.

채엥!

검과 검이 부딪힌다.

초근거리에서 세렝게티는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채엥! 채엥! 채에엥!

한참이나.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허억! 허억! 허억!"

세렝게티는 격하게 숨을 내쉬었다.

닿지 않는다.

하기야 닿을 리가 없었지만.

"검에 감정을 담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을 터인데?"

"······."

"여전히 말썽꾸러기로구나, 너는."

"······."

아아.

세렝게티는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아냈다.

검을 마주하자 이제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이 자는, 이 남자는······.

언제나 든든하게 그들을 지탱해주고, 그늘을 만들어주던 거목(巨木)이자.

한결같은 충성을 맹세했던 기사왕 빌헬름임이 분명했으므로!

또한, 세렝게티를 '말썽꾸러기'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알게 되었다.

"그 몸은······."

혹여나 마왕이 차지한 육체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이 몸은 빌헬름의 몸이 아니다.

빌헬름의 격과 외형을 지니고 있으나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마치 누군가의 몸을 빌려쓴 듯한.

오랜시간 수도없이 보고, 대련을 해본 세렝게티만이 알 수 있는 차이.

"'신'과 내기를 했노라."

······ 신과 내기를 했다?

빌헬름은 신을 싫어한다.

여신의 기사라고 떠받들어지지만, 빌헬름은 지독한 불신자였다.

이 역시 그의 최측근이었던 기사들만이 알고 있던 사실.

하여 세렝게티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내기를······?"

"10시간 이내로 이 탑을 내가 정복할 수 있는가, 없는가."

"······!"

"그리고 이건 나의 '신'이었던 자의 몸이니라."

"예······?"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과의 내기, 그리고 자신의 '신'이었던 자의 몸이라니.

신의 육체를 빌어 잠시 소환되었다는 말일는지.

더 묻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한숨 자거라. 많이 피로해보이는구나."

툭!

실 끊긴 인형처럼, 세렝게티의 육체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아, 안 돼······!'

세렝게티가 급히 빌헬름을 올려다보았으나 어느덧 정신이 멀어졌다.

빌헬름은 그런 세렝게티를 바라보곤,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짓더니 이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굳히며 시선을 옮겼다.

"······ 그대와는 오래전부터 한 번 겨뤄보고 싶었지."

시선의 끝에, 라이가가 있었다.

제국제일검이자.

25층에서 모두를 압도했던 괴물!

인간의 정점이자, 판게니아 최강자라 불리는 존재.

그가 검을 들어 빌헬름을 겨누었다.

*

'강해졌군. 여전히 올곧고.'

빌헬름은 방금 전 나눈 세렝게티와의 검격을 떠올리며 내심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세렝게티.

그 말썽꾸러기가 여전히 살아남아 자신의 의지를 잇고 있었다.

기사단에서 함께할땐 언제나 사고만 쳤다.

기사단의 홍일점이자 막내이기도 했거니와 유독 자신에게만 말이 많아서 곤혹스러웠던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특히 검에 대해서 떠들면 하루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여 조금 더 놀아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빌헬름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개 같은 신이여! 네가 만든 모든 세계를 불살라주마!

개 같은 신.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점거하고 움직이던 빌어먹을 신!

그 신의 육체가 현재 자신의 몸이었다.

태양신의 옥좌와 막대한 황금률로 인해 잠시 빌헬름의 영혼이 이 몸에 정착한 것이다.

'피나. 네가 내 영혼을 보듬어주고 있었구나.'

쌍둥이 여신 레아와 피나.

레아는 멸망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32개의 별로 나뉘었다.

그리고 피나는 마왕에게서 빌헬름의 영혼을 지키고자 스스로를 던졌다.

덕분에 빌헬름의 영혼은 피나의 의지 속에 남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강림할 수 있었으나, 내키지는 않았다.

왜 자신이 개 같은 신의 시련을 대신해주어야 하는가?

-너는 란돌프를 이길 수 없다. 내가 가장 심혈을 다해 키웠으니.

······ 뻔히 보이는 도발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현명.

한때 자신의 몸을 움직이던 신.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게 자신이 아니라, 란돌프라는 말에 왜인지 짜증이 솟구쳤다.

하지만 부족했다.

박현명의 육체는 아직 미완성이었고 빌헬름이 움직이기엔 형편없었다.

제아무리 황금률로 보완되었다한들 마찬가지다.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지. 부디 우리를 도와다오, 빌헬름.

카라스.

그 멍청한 까마귀가 자신이 지닌 모든걸 내놓은 것이다.

그래달라고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음에도.

제멋대로 맡기고, 제멋대로 기대한다.

-이놈들, 까악!

-여신들······ 또 방해하는구나, 까악!

흉의 신과 재의 신.

두 까마귀의 신들은 빌헬름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빌헬름도 그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기를 수락했다.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10시간.

그 안으로 탑을 돌파해보겠노라고.

그렇게 빌헬름은 여신들의 의지를 이용해 '틈새'를 빠져나와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군.'

덕분에 말썽꾸러기와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

말썽꾸러기 세렝게티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허드슨이라는 자도 이곳에 있었다.

'저자가 네가 선택한 자냐, 세렝게티?'

솔직히 그다지 믿음직해보이진 않지만.

남자라면 자고로 강해야하는데 허드슨은 굉장히 유약해 보였으니까.

그래도 세렝게티가 선택한 남자다.

다른 면모로 강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 세아. 여전히 아름답군.'

성녀 세아도 그대로였다.

여전히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외면만이 아닌 내면이 더욱 아름다운 여자였다.

많은 게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자신이 지켜왔던, 지키고자 했던 가치들.

'······ 개 같은 신이여.'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러니 화해라도 하자고?

아서라.

빌헬름은 단지 개 같은 신에게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끔 하고싶을 뿐이었다.

스스로의 몸이 누군가에 의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경험은 결코 달갑지 않을 터이므로.

'지켜보아라. 그저 지켜만 보아야 할 것이다. 너의 몸이 어떻게 사용되고, 너의 의지가 어떤 식으로 뭉게지는지.'

그건 정말 지독한 경험이 될 테니.

그리고 보여주마.

빌헬름.

그 자체를.

*

라이가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수많은 심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셀 수 없이 많은 심상 속, 무의식의 영역에 존재하는 검 한 자루를 꺼내쥐었다.

그것이 그가 최근에 깨달은 심검영역.

곧이어 그의 심상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지배한다.

촤앙!

하지만, 막혔다.

빌헬름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을 터인 심검을 쳐냈다.

허나 이미 예상했던 바다.

라이가는 오로지 죽일 생각으로 심검을 더욱 전개해나갔다.

상대를 죽이고자하는 의지 자체가 검이 되어 심장을 벤다.

촤르르륵!

······ 그럼에도 튕겨나간다.

아니, 튕기는 게 아니라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심검이 녹아내리고 사라졌다.

심장에 채 닿기도 전에.

'순환이라.'

순환은 곧 자연이다.

빌헬름은 자연적이지 않은 것들을 모조리 배제시키는 힘을 지닌 게다.

설령 그것이 심검이라 할지라도.

직접 닿지 않으면, 저 순환의 방벽을 뚫는 건 불가하다.

하기야 이제 막 깨달은 심상 따위에 당했다면 도리어 실망했을 터.

'일문(一門).'

라이가는 전력을 내기로 다짐했다.

인간을 상대로 팔가의 비기를 사용하는 건 본래 불문율이다.

제국에서 황금 염소를 상대할 때조차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미 죽은 자인 빌헬름은 예외였다.

화아아아악!

라이가의 전신이 붉게 물들며 봉인해둔 첫 번째 문이 열렸다.

꽈릉!

발을 내딛자 땅이 움푹 파인다.

이어 번개처럼 달려나간 라이가의 검이 빌헬름의 어깻죽지를 베었다.

촤악!

허나, 베여나간 건 자신의 오른팔이었다.

미리 대비했음에도 반격을 당했다.

검을 쳐내고 반격한 게 아니라, 검격을 흡수하듯 부드럽게 순환시켜 역으로 공격한 것이다.

"··· 허."

어이가 없었다.

이토록 부드러운 검은 처음이다.

일문을 개방한 라이가의 힘은 압도적이다. 거인조차도 당해낼 수 없다.

그 강력하며 단단한 힘이 부드러움에 제압당했다.

하지만,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라이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가 이겼다.'

······ 이 싸움, 절대로 질 수가 없노라고.

천지개벽

부드러움은 강한 것을 이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강함에는 한계가 없지만 부드러움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한 것을 유지하는 것보다 부드러움을 유지하는데 더 많은 노력과 수고가 들어간다.

빌헬름의 검술이 그랬다.

영역을 지배한 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작용.

'절대적인 강함은 존재하나, 절대적인 부드러움은 존재치 않는다.'

때리고 부수면 닳는다.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건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상대하는 최상승의 무공이 맞지만, 그 한 번의 반사를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집중력을 사용한다.

또한 비정상적으로 관절을 사용하기에 계속 싸우다보면 결국 무엇이 되었든 닳아 없어지기 마련이었다.

반면 자신은 어떤가.

한계가 없는 강함이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욱 강해진다.

승리를 확신하는 이유다.

그 외에도.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못하는 거다.'

고작 한 합을 겨뤘으나 그 정도면 충분하다.

더 큰 부상을 입힐 수 있는 상황임에도 빌헬름은 그의 가죽을 조금 베어냈을 뿐이다.

상대가 들어오는 면적 의외의 움직임 자체를 자제하고 있다는 방증이리라.

한 마디로.

'맞받아치는 것. 오로지 그 하나에 모든 신경을 몰고 있다.'

놈은 움직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다.

오로지 들어오는 공격만을 되받아칠 따름.

처음부터 자신의 모든걸 쏟아넣은 산샤는 스스로 죽음을 자처한 셈이다.

한데, 왜일까.

어째서 놈은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그저 '받아치기'만 하고 있는 걸까?

"몸을 움직이는게 익숙하지 않은건가?"

"······."

빌헬름은 답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박현명의 육체와 온전한 황금률 10개. 그리고 카라스의 신격 등을 담아 움직일 수 있는 10시간을 확보했다지만.

'부족하군.'

남의 몸을 움직이는 건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천하의 빌헬름에게도 말이다.

하물며 사용하던 장비 하나 없는 상황.

이건 제대로된 부활이 아니었다.

모든 게 부족하고,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황금률로 말미암아 빌헬름의 모습으로 변신하긴 했다지만 결국 이 몸조차 자신의 몸이 아닌 게다.

그래서일까.

무엇보다도, 부족했다.

육체가 의지를 따라가지 못한다.

미묘한 신장의 차이, 근육과 신경의 전달속도 등이.

그의 초정밀한 검술을 구사하기에는 기대에 못미치는 것이다.

'아니, 핑계일 뿐이다.'

허나 빌헬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건 핑계에 불과하다고.

개 같은 신은 자신의 몸을 마치 본인처럼 움직였다.

단 한번의 실수 없이 오롯이 행하여 수많은 업적을 일궈냈다.

그가 할 수 있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

개 같은 신의 도움 따윈 없어도 된다.

"적응할 시간을 주마. 나도 그대가 최상의 상태로 싸우길 바라니."

"필요 없다."

라이가의 제안을 빌헬름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 정도의 역경은 역경조차 아니었으므로.

이어 빌헬름은 고개를 들어, 라이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제국제일검.'

그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심연을 탐사해 제국의 영토를 넓힌 일등공신이자 최강자로 언제나 자신과 함께 언급되고는 했으니.

그도, 자신도, 이 싸움을 지켜보는 모두가 궁금할 것이다.

누가 더 강한가.

누가 최강인가?

"그럼······ 어쩔 수 없군."

휘익!

쿠르르르르!

라이가의 전신에 깃든 붉은 기운이 마치 활화산처럼 폭발하듯 튀겨댄다.

"이문(二門) 개방."

일문은 패도적인 힘을.

이문은 빛과 같은 속도를 낳는다.

허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후우우우우웅!

"삼문(三門) 개방."

활화산처럼 치솟던 기운들이 다시 라이가의 몸에 깃든다.

삼문의 개방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육체를 만든다.

이 상태의 라이가는 무적에 가깝다.

심연의 주인들마저도 무차별하게 학살할 수 있는 상태였다.

쫘아악!

몸을 접자 근육이 압축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피이잉-!

찰나지간 라이가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조차도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쩌엉!

라이가의 검이 빌헬름의 자세를 흩트렸다.

라이가의 검은 고속으로 진동하며 단번에 빌헬름의 목을 노렸다.

시이이익!

검의 면과 면이 맞닿으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었다.

빌헬름은 이 힘 역시 받아치려고 하나, 초진동으로 움직이는 검을 받아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받아친다고 한들 라이가의 육체를 타격하는 건 더욱이 불가하다.

도리어 자신의 체력만 닳겠지.

허나 받아내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삼문을 개방한 자신의 검을 이 정도로 받아낸 자는 여태껏 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속도를 감당하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라이가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꾸나, 빌헬름.'

*

-뭐가 보여?

-아니... 아무것도 안 보여

-빌헬름이 밀리고 있는 것 같은데?

-라이가가 진짜 최강이었다고?

커뮤니티는 다시 한 번 난리가 났다.

기사왕과 기사왕의 대결.

도저히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빌헬름이 밀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자 몇몇 옹호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빌헬름이 밀리는 게 당연하지. 라이가는 최상의 상태인 반면에 빌헬름은 자기가 착용하던 장비가 하나도 없잖아

-아, 맞다. 전부 분해돼서 황금률 상점에 전시됐었지?

-유일급 모으면 적용되는 컬렉션 효과를 하나도 못 받고 있을 텐데. 약할 수밖에 없음

-그럼 라이가는 유일급을 몇 개나 착용한 거야?

-보이고 알려진 것만 대충 5개? 당연히 더 많을 듯

-와 템빨 살벌하네

-템빨은 어쩔 수 없지

-템빨이 저렇게 차이나는데도 막상막하인 게 오히려 더 대단한 거 아니냐?

유일등급 장비의 유무는 전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물며 그 차이가 압도적이라면 순수한 실력만으로는 뒤집는데 한계가 있었다.

-뭐가 됐든 나는 빌헬름 응원한다

-다 말리는 대원정 혼자 꾸리고 돌격한 상남자 빌헬름

-솔직히 판게니아에서 빌헬름만큼이나 명예로운 사람 난 본 적 없음

-팬텀 부캐라고 생각했는데... 빌헬름이야말로 팬텀교의 근간 아니었나?

모두가 궁금해하는 존재, 팬텀.

그 팬텀이 전설이 된 중심에는 모두 '빌헬름'이 있었다.

만약 대원정이 성공했다면 영원토록 화자되는 전설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마계의 원정을 주장하고 실행한 건 빌헬름뿐이었다.

마계의 위험성을 인지하며 용기있게 나선 자.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했던 그에게 많은 플레이어들이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 될 줄 알았다면....

-팬텀 찾기, 빌헬름 방해하기를 컨텐츠처럼 여기지 않았을텐데

-미안하다. 빌헬름

지구로 괴물이 소환되고 마족들이 침공해올 줄 알았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짓이다.

팬텀의 부캐로 보이는 캐릭터를 찾아서 죽인다던가.

혹은 빌헬름의 시련을 방해한다던가 하는 짓 따위는 추호도 하지 않았으리라.

도리어 그의 용기있는 도전을 함께하려 했겠지.

하지만 대원정 당시만 하더라도 그들에게 판게니아는 특이한 게임 그 이상의 감각이 아니었다.

모든건 대원정이 끝난 직후 시작되었으니.

-빌헬름! 꼭 이겨라!

-지지마!

그렇게 하나, 둘, 사람들은 빌헬름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

축복이 모인다.

가호가 쌓인다.

조금씩, 조금씩, 밀려오던 물길은 이내 거센 헤일이 되었다.

"'오늘밤뭐해'님이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50m)'으로 '빌헬름'을 응원합니다."

"'뚜스딴스'님이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1h)'으로 '빌헬름'을 응원합니다."

"'나오늘절에안갈래'님이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3h)'으로 '빌헬름'을 공양합니다."

"'팝핀현준'님이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21m)'으로 '빌헬름'을 응원합니다."

"'야수의심장'님이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2h)'으로 '빌헬름'을 응원합니다."

······.

······.

끊임없이 도달하는 메시지들.

순식간에 1,000시간 분량의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 모였다.

그렇게 모이는 시간만큼이나.

"'영혼의 기억'에 따라 장비의 형상이 잠시간 소환됩니다."

"1,000시간의 황금률 조각이 모여 '빛의 길'을 형상화합니다."

화아아악!

검의 형상이 바뀐다.

빛의 길.

마왕의 심장에 꽂아넣었던, 빌헬름 자신의 검으로.

잠시나마 황금률의 조각으로 형상을 빚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적어도 탑을 오를 10시간 정도는 유지될 터이니.

'이제 좀 움직일만하군.'

손에 익은 검을 쥐자 마침내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진다.

몸을 제어하는게 더욱 쉬워지고 있다.

의지와 육체가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 현상이 어쩌면 단순한 축복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저들은 온전하게 자신을, '빌헬름'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된 검술을 펼칠 수 있을 것 같다.

'천.'

천지개벽의 천(天).

영역을 지배하여 상대를 제어하는 검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는 곧 상대를 읽고 상대가 되는 것과 다름이 없는 능력이다.

'지.'

천지개벽의 지(地).

모든 공격을 공명하여 파훼하는 검술.

하지만 이 역시 그저 공격을 무효화하는 게 전부인 검술은 아니었다.

상대가 되고, 상대의 모든 것과 공명하며 이해하는 것.

그게 골자인 기술이다.

'개.'

천지개벽의 개(開).

세상을 여는 검.

상대의 공간과 모든 걸 넘어서서 마침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권능이다.

이 단계부터는 주변 모든 만물과 소통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벽.'

다시금, 세상을 창조한다.

*

'빛의 길'이 형상화한 순간부터.

빌헬름의 움직임이, 기세가, 그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하지만 가장 확고하게 변한 것은.

'검술.'

검을 움직이는 길.

허나, 검로는 그대로일 터인데.

검에 담긴 위세가 달라졌다.

검의 격이, 빌헬름의 존재 전부가.

'······ 뭐냐, 이건.'

틈은 사라지고, 어떠한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읽히고 있다.

전부 읽히고 있는 것이다.

밝은 대낯에 발가벗겨진 기분이 이러할까.

마치 미래를 보듯이 자신이 움직일 경로를 모조리 예측해낸다.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빌헬름은 정확히 자신과 공명하고 있었다.

'미친놈인가?'

절로 욕지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상대와 공명한다는 건, 상대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치 물길도 모르는 게 세상이랬다.

다른 인간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파악하는 건 신조차도 불가능하다.

자신을 포기하고, 모든 정신을 항상 주변을 이해하는데 사용하는 게 아니라면······.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초월적인 정신력이 소모되는 일.

오로지 '정신'으로만 구성된 존재가 아닌 이상에야!

육체가 없는, 혹은 바위처럼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저 평생을 주변을 이해하고 파악하며 살아온 존재가 아닌 이상에야 시도 자체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로, 이놈은 정상이 아니다.

이놈은······.

"끄으윽!"

압도된다.

압도되고 있다.

제국제일검이라 불리는 자신이.

역대 팔가의 전인들 중 가장 뛰어나다 평가받던 그가.

검을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벽을 느끼고 있었다.

있을 수 없다.

평생을 검만을 갈고 닦으며 살아온 자신의 검술을, 어찌하여 남이 이해하고 파훼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자신 이상의 노력을 해온 자만이 가능할 터.

하지만 그만한 노력을 해왔다면 스스로에게 애착이 있어야 정상이었다.

다른 것과 완전하고 완벽하게 공명하는 일 따윈 절대로 할 수 없는 게 맞다.

··· 비틀려 있다.

이놈은, 빌헬름은 심각할 정도로 비틀려 있었다.

'사문 개방.'

결국, 라이가는 네 번째 문을 열었다.

여기서부턴 자칫 잘못하면 자멸할만큼 위험한 단계.

신조차 죽일 수 있는 힘!

상단전을 개방하면 신력과 함께 비로소 모든 현상을 읽는 관찰력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내가 이길 수······ 없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이다.

이미 그는 빌헬름에게 잡아먹힌 뒤였다.

전혀 눈치못챈 사이에, 그저 검을 부딪히던 그 찰나와 같은 순간에.

허나 아직 끝이 아니다.

마지막 문이 남았다.

오문.

그것을 열면, 비록 생명은 대폭 단축되겠지만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라이가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온몸이 떨린다.

라이가는 고개를 올려, 자신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을 바라보았다.

이 검술은······.

빌헬름의 검은.

아직 전부를 펼쳐낸 게 아니다.

놈의 전부가 담겨있는 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의 검을 뛰어넘었다.'

······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이자벨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누가 더 강하느냐 물었을 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기사왕 빌헬름.

이놈이야말로 최강이다.

개 같은 신

최강(最强).

검을 휘두르는 사내에게 그보다 더 달콤한 단어가 또 어디있을까.

-라이가. 너는 인세에 다시 없을 천재다.

-제가 더 강해질 수 있을까요?

-암. 너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내가 될 거다!

라이가가 눈을 뜬 곳은 노예시장이었다.

전쟁 고아가 향할 장소는 그 외엔 없었으므로.

이곳저곳에 팔리며 전전하다가 전대 팔가의 주인을 만났다.

이후 라이가는 최강이 되고자 단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휘둘렀고 마침내 제국제일검으로 인정받았다.

라이가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그를 위해, 제국을 위해 헌신했다.

심연의 탐사라는, 목숨이 몇 개가 있어도 부족한 일을 그는 숱하게 해내곤 했으니까.

-더러운 피.

-그래봤자 전쟁고아 아니야?

-어딜 근본도 없는 놈이······.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도 끔찍해!

그러나 라이가를 인정하지 않는 무리도 있었다.

하여 '성혈'이 필요한 것이다.

황제가 직접 성혈을 하사하거든 누구도 그의 출신을 책잡지 못할테니.

그게 아니라면······ 압도적인 무력이.

감히 대적조차 불가능한 힘만이 그들을 굴복하게 하리라.

그러니 그는 최강이어야만 한다.

'내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나는 언제나 최강이어야만 한다.'

오직 재능만 있다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세상.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노력만으로도 성과를 이룰 수 있는 세상!

모두가 그것을 인정하고, 인정 받는 이상적인 제국.

라이가는 제국을 그렇게 바꾸고 싶었다.

그가 '최강'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집착하는 이유다.

"오문(五門), 개방."

······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슈우우우욱!

붉은 기운이 솟구친다.

송골송골 피부로 올라와 맺힌 피가 증발하며, 마력과 함께 산화하는 과정.

이 상태에서 라이가의 신체능력과 마력의 농도는 수십배 증가한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힘을 얻는 대신 죽음을 담보로 하는 필살의 기술이었다.

허나, 오문 개방의 유일한 약점은 지속성.

길어야 수분.

상대가 억지로 시간을 끌거나, 그 안에 결판을 내지 못한다면 자신의 패배다.

"도망쳐도 이해하마. 지금의 나는 최강이니."

"······."

스릉.

빌헬름이 검을 들었다.

그를 본 라이가의 입가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도망치지 않는다.

정면에서 전부를 받아내겠다는 호기다.

'역시.'

예상했다.

절대로 피하지 않으리라고.

검을 부딪히고 라이가는 빌헬름을 어느정도 알게 됐다.

빌헬름이 자신을 파악한 것처럼, 그도 빌헬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게다.

'우리 둘 다 뒤틀려있다.'

빌헬름은 뒤틀려있다.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라이가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동질감을 느꼈다.

비정상과 비정상의 대결.

하지만 둘 다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을 전제로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성실을 겸비한 괴물들.

이런 기분을 또 언제 맛보았던가.

더 강한 적을 상대할 때마다 느꼈던 쾌감.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대적할 존재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럼에도 이런 전율과 쾌감은 처음이었다.

··· 그래, 처음이다.

처음으로 라이가는 자신의 모든 걸 보여주고 싶은 상대를 만났다.

그러니 부디.

'서로 실망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

-······.

-······.

본격적인 피날레가 시작되자, 플레이어 톡은 끊임없이 점만을 눌러대고 있었다.

다른 내용을 적을 정신이 없었다.

다른 내용 자체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종류의 충격을 받고 있었다.

-저게...

-최강과 최강의 싸움...

-미친. 입이 안 다물어지네...

빌헬름과 라이가.

그 외에도 수십만의 인파가 함께 있는 자리.

하지만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

양쪽의 진영은 그저 전율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둘의 대결은 주변을 모조리 초토화시키고 있었으니.

둘의 제대로된 무력을 모두가 처음 목도하고 있었던 탓이다.

-누가 빌헬름이 라이가보다 약하다고 했냐?

그 순간 든 의문 하나.

빌헬름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한 논의는 항상 있어왔다.

어떤 이는 감히 비교 대상이 없는 최강자라 하였으나.

또 어떤 이는 생각보다 고평가 받고 있다며 허풍선이라 주장했다.

빌헬름이 제대로 검을 휘두르는 걸 본 이가 거의 없는 탓이다.

오직 시련과 승부할 때만 빌헬름은 전력을 다했으므로.

-8영웅회 애들 때문에 과소평가 된 감이 있지

-대원정 실패를 그렇게 선전했으니까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처음, 판게니아에 빙의한 플레이어들은 의도적으로 정보를 은폐하고 독점했다.

때로는 왜곡하며 수많은 공작을 해왔다.

정보는 힘이었고, 독점할수록 더 많은 이윤을 취할 수 있었으니까.

당연히 그 과정에서 빌헬름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팬텀으로 추정되는 그는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홈페이지에 풀었고, 수많은 이들이 그 정보로 말미암아 벽을 허물었다.

그래서다.

8영웅회를 비롯한 몇몇 힘있는 플레이어들이 은연중 '팬텀 찾기'와 '빌헬름 방해하기'를 컨텐츠로 내세운 것은.

그리고 빌헬름의 업적을 축소하며 과소평가하게 만들었다.

누구도 그를 우상하지 않도록.

하지만 그러한 공작들도 현실 앞에, 진실 앞에 무력했다.

-빌헬름!

-빌헬름!

모두가 하나되어 빌헬름의 이름을 외쳤다.

이제는 알겠으니까.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 누가 최강인지.

*

전쟁이었다.

둘로 구성된 대결은 가히 대규모 전쟁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둘의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순간.

지금, 모두의 눈앞에서.

"······."

"······."

빌헬름의 검이-

라이가를, 무너트렸다.

투욱.

바닥을 향해 던져진 검.

제국 최강이라 일컬어지며 모두를 압도하였던.

도저히 대적자가 없을 것만 같던 라이가가 스스로 검을 바닥에 던졌다.

전신을 웃돌던 피처럼 붉은 기운은 어느덧 사그라졌다.

모든걸 바쳐 전부를 보였으나 끝내 닿지 못한 것이다.

"······ 어이가 없군."

라이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터질 듯 부풀어올랐던 몸은 쪼그라들고, 목소리는 천길로 갈라지며 쇄약해졌다.

그는 지금 죽음의 문턱 앞에 있었다.

그럼에도, 닿지 못했다.

··· 이러한 괴물을 라이가는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하나만 물으마. 마왕은 그대보다 강한가?"

마왕의 무력에 대해.

저런 빌헬름도 패배시킨 괴물이 존재했으므로.

대원정의 실패, 그리고 빌헬름을 죽인 장본인이 아직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최강에게 패한 게 아니게 된다.

하여 긴장한 채 묻자.

빌헬름이 답했다.

"약하다."

"······!"

마왕이 그보다 약하다고?

그렇다면 왜 패배한 것인가.

혹, 발란왕국에서 발표한 것처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는지.

그래도 다행이다.

라이가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는 듯.

빌헬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이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비해야할 것이다. 앞으로의 마왕은 이전과는 다를 터이니."

······ 무슨 말일까.

빌헬름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충분하다.

라이가는 표정을 굳힌 채 가슴을 폈다.

"팔가 기사단의 단장이자 제국제일검이라 불리우던 나, 라이가가."

··· 비록 자신의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이런 비틀린 놈을 만나서, 최후를 함께해서 다행이다.

어쩌면 이런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천재를 만나, 패배를 인정하게 되는 날을.

어깨가 가벼워진 기분.

도리어 홀가분했다.

이런 놈이라면 분명히 바꿀 수 있을 테니까.

"빌헬름을 최강으로 인정한다."

······ 지금의 빌어먹을 세상을.

*

라이가가 패배선언을 함과 동시에.

털썩-!

그는 쓰러졌다.

빠르게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중이다.

스아아아아!

곧이어 거대한 절망의 그림자가 전역에 펼쳐졌다.

그림자는 이내 빌헬름과 라이가의 앞에 멈춰섰다.

빌헬름은 그런 절망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 착한 아이로구나."

인자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림자 속에서 울고있는 루카리아를 빌헬름은 알아차린 것이다.

빌헬름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모두를 지키려고 한 것이었느냐?"

뻗은 손이 그림자에 닿았다.

동시에 수많은 검은 손들이 움찔대며 멈춰섰다.

절망을 피워내어 수십만의 인파를 지배한 것.

이곳까지 따라온 것도 라이가로부터 모두를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그는 눈치챈 것이다.

빌헬름은 루카리아의 그림자를 토닥이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다. 너를 울게한 나쁜 아저씨는 내가 쓰러트렸으니. 이제 이 앞은 내게 맡겨다오."

스으으으으······.

순간, 검은손이 연기가 되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탑 전체를 감싸던 연기가 거짓말처럼 증발해간다.

"역시 착한 아이로구나."

빌헬름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모두를 절망케하고, 전율케 하였던 그림자.

하지만 빌헬름에겐 귀여운 투정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동시에 지배되었던 이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렸다.

족히 오십만에 이르는 인파가 당황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저건······."

"저건 또 뭐야?"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영원의 란돌프'가 탈피를 완료했습니다."

쩌적!

개미의 표피가 갈라지며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영원의 란돌프!

개 같은 신이 자신보다도 더욱 큰 공을 들여 키웠다는 존재.

어디 한 번 이겨보라며 도발했던 그 존재가 자신의 앞에 있다.

'비틀려있군.'

또한, 저 영원의 란돌프라는 녀석도 상당히 비틀려 있는 듯싶었다.

하지만, 익숙하다.

같은 아픔을 공유했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자신처럼 미치도록 뒤틀려있어서인지.

빌헬름은 숨을 가다듬으며 검을 쥐었다.

'지켜보아라. 개 같은 신이여.'

*

어둠 속이었다.

너무나도 어두워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곳.

늪에 빠진 듯 허우적대지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나는 그곳에서 저 멀리 있는 빌헬름을 지켜보았다.

'이런 느낌이었나.'

육체를 조종당한다는 게.

빌헬름이 내게 조종 당할 때의 느낌을 이제는 알겠다.

한없이 무력한 이 상태에서 빌헬름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력감만이 아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불쾌한 기분들.

모든걸 포기하게끔 만드는, 그리하여 다 잊어버리고 싶게끔 만드는 우물 같은 곳이었다.

'내가 사용하던 천지개벽과는 궤가 달라.'

그래서 나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가만히 빌헬름의 일대기를 지켜보고자 하였다.

그의 움직임을 보고, 깨달으며, 더 단단한 기반을 만들고자 했다.

"······ 대단하군."

하지만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단순히 기억속에 존재하던 검술과는 격이 달랐다.

빌헬름이 온전히 사용하는 빌헬름의 검술은.

직접 이렇게 본 것은 처음이다.

하여, 알겠다.

이곳에서도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또 다 했는지를.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음에도 포기하지 않은 건 바로 나 때문이다.

닿지 않는 목소리를 내게 닿게 하기 위해 부던하게 애를 쓴 것이다.

그럼에도 알아주지 않았으니 개 같은 신이라 불리며 욕을 먹을 수밖에.

"한 번 날뛰어봐라. 제대로 봐줄 테니."

나는 집중했다.

그의 움직임 하나, 숨결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온전하게 '빌헬름'이라는 존재를 마주하기 위해서.

서로가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순간.

······ 이제야 비로소 빌헬름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됐으니까.

빌헬름 VS 란돌프

영원의 란돌프.

규격 할 수 없는 종류의 '신비'는 개미왕 페르몬의 육체를 강제로 점거했다.

동시에 탈피하며 나온 그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다.

"··· 흑왕의 은혜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군."

개미왕의 살가죽을 찢어발기며 튀어나온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곤 짧게 감탄을 흘렸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불가할 정도로 완성되어 있었으니까.

정교하게 빚어놓은 조각처럼 아름다운 육체.

새까만 피부와 고밀도로 집약된 근육의 파노라마!

"페르몬···? 부활한 거냐?"

그를 바라보는 락투샤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영원의 란돌프에게 당해 지능을 잃고 퇴화한 줄 알았건만.

허나 페르몬은 고개를 저었다.

"락투샤. 부활이 아니다. '진화'한 거다."

그것도 종의 규격을 넘어서는 진화다.

그야말로 규격 외.

이 신비는, '영원의 란돌프'는 감히 흑왕의 신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함을 담고 있었으니.

힘이 흘러넘친다.

지금이라면 칼날용신에게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다.

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진화시킨 이 '신비'의 가장 무서운 점은.

하여, 페르몬은 자신있게 말했다.

"흑왕은 이제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 페르몬.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흑왕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었나?"

"은혜? 벌레들을 모아놓고 모두 죽고 죽이게 한 은혜 말이냐?"

락투샤의 말을 페르몬이 가볍게 되받았다.

그것은 은혜라기보단 원수에 가까웠으므로.

또한, 흑왕의 은혜는 동시에 족쇄에 가까웠다.

한순간 신비를 잃은 페르몬이 지능을 잃고 퇴화했듯이.

흑왕은 자신이 건넨 은혜를 마음대로 거둬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락투샤. 너의 굴레를 내가 벗겨주마."

페르몬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뭣······?!"

락투샤의 동공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흑왕의 은혜가, 히든 특성이 담긴 '신비'가.

··· 한순간 파괴된 탓이다.

"아, 안 돼······!"

락투샤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파괴된 신비는 히든 특성 '손재주'를 담고 있었다.

손재주는 무엇을 익히든 쉽고 빠르게 달성토록 해주며, 모든 경지의 지수를 한단계 높여준다.

락투샤가 소드마스터라 불리우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한 히든 특성이었다.

그것이 고작 손짓 한 번에 파괴된 것이다.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정한 자유를 되찾게 해주었거늘."

하지만 페르몬은 락투샤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흑왕의 지배로부터 완전무결하게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모처럼의 자유를 얻었건만, 좋아하진 못할망정 왜 몸서리를 치는가.

이윽고 락투샤의 두 눈에 살기가 서렸다.

"네놈이, 감히······!"

화아아악!

락투샤의 흑천검에서 검강이 치솟아올랐다.

더 이상 페르몬의 만행을 두고볼 수는 없었으므로.

흑왕의 은혜를 입었으면서, 흑왕을 적대하는 자.

이는 무조건적으로 멸해야할 존재다.

콰칭!

검과 손이 닿는다.

손쉽게 잘라버리리라 판단했으나, 잘리지 않는다.

'경지가 올랐다···?'

한 번의 합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개미왕 페르몬.

단순히 육체와 마력만 강해진 게 아니다.

경지마저 올랐다.

검강을 발현하지 않았음에도 검강을 쳐냈다.

육신 자체에 마력을 입히고 휘두룰 줄 아는 것이다.

허나 흑천검에 입힌 검강을 맨손으로 받아낼 줄이야!

그것도 그냥 받아낸 게 아니라, 검신을 그대로 잡아버렸다.

"······!"

검을 움직일 수 없다.

검을 낚아챈 페르몬의 힘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멍청한 락투샤여. 흑왕이 전한 힘은 진정한 히든 특성이 아니다."

··· 이젠 알 것 같았다.

지금 페르몬 자신이 얻은 히든 특성이야말로, 진정한 왕의 힘임을.

이것은 모든 것의 정점에 있는 신비다.

한 존재의 증명이자, 진화이고, 초월인 히든 특성이었다.

애당초, '히든 특성'이란 무엇인가.

"히든 특성은 자신을 증명해낸 자들이 이룩해낸 경지의 이름."

종(種)의 정점에 선.

그리하여 완성된 존재만이, 그 경지에 걸맞은 '이름'을 얻을 수 있다.

당연히 그러한 '이름'을 얻으려거든 필사의 노력과 천운, 그리고 재능이 필요하다.

허나 그들이 일반적으로 얻는 히든 특성은 날것이다.

그보다 상위의 격을 쌓아 완성해야만 비로소 제대로된 '히든 특성'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영원의 란돌프처럼.

그리고 '영원의 란돌프'는 그러한 이름들 중에서도 능히 규격 외의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흑왕에게 부여받은 것으로는 결코 '극의'를 이룰 수 없다, 락투샤여."

흑왕의 은혜.

그로 인해 발생한 히든 특성은 날것 그대로 끝이다.

그 이상 진화할 수 없다.

격을 넘어 한계를 돌파하는 건 불가능하다.

강해질 순 있지만, '극의'를 보는 건 포기해야만 한다.

이미 한계가 정해진 힘만을 부여받은 탓이다.

고로.

"너는 내게 고마워해야하는 게다. '극의'를 볼 가능성이 생겼으니까. 신비는 파괴되었으나 이미 한 번 맛보았으니 더 빠르게 달성할 수 있을 테지."

"······!"

신비가 파괴되어 손재주를 잃었다지만.

다시 얻으면 되는 것이다.

도리어 본인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면 그때야말로 끝을 보는 게 가능하리라.

이미 한 번 경험해봤으니 다시 얻는 건 더 쉬울 터.

"물론, 다음이 있다면 말이다."

콰직!

흑천검이 부러진다.

그리고.

"크흡······!!"

락투샤의 가슴팍을 페르몬의 손이 꿰뚫었다.

두근! 두근!

팔팔하게 뛰는 심장.

어그적! 어그적!

페르몬은 강탈한 락투샤의 심장을 그대로 씹어먹었다.

"페··· 르몬······!"

"역시 오크의 심장은 맛이없군."

퉤!

반쯤 먹다 만 심장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털썩!

동시에 락투샤의 신형이 바닥에 쓰러졌다.

즉사.

심장을 잃은 락투샤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어 페르몬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락투샤의 심장은 맛이 없었지만.

빌헬름의 심장은 무척이나 맛있어보였으므로.

'내 먹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사냥감이다.

탈피를 막 끝낸 자신의 영양을 보충해줄 먹이들.

무려 수십만이나 모여있으니 이곳을 벗어나면 더 이상 자신을 적대할 수 있는 존재는 존재치 않으리라!

그중에서도 빌헬름에게선 단연코 가장 달콤한 냄새가 났다.

놈은 먹이다.

다른 먹이들과 마찬가지로.

스슥!

페르몬의 신형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빌헬름의 지척으로 발걸음하자, 빌헬름이 검을 움직였다.

'보인다.'

보인다. 그의 검로가.

동시에 느껴진다.

그의 검이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기술.

마력 자체가 기름처럼 미끄럽다.

그렇다면 반대로 빌헬름의 힘을 역이용하면 어떨까?

다른 이의 힘을 역이용할 줄은 알지만, 자신의 힘을 역이용하려는 존재는 쉬이 경험하지 못했을 터.

지금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페르몬은 마력의 성질을 변환시켰다.

더없이 미끄럽고 매끄럽게.

이 상태에서 부딪힌다면 당연히 서로 빗나가리라.

빗나간 공격은 엉뚱한 곳을 타격하기 마련이다.

푸욱!

'역시!'

페르몬의 손이 빌헬름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예상대로였다.

무적으로 보이던 이놈의 약점!

'빗나감을 전제로 한 무작위 타격. 그게 약점이구나!'

바로 부드러움이었다.

서로 빗나감을 전제로한 공격을 하며 체력을 소모시킨다.

무작위로 타격하여 재생력의 싸움으로 간다면, 페르몬은 패배할 자신이 없었다.

이제 남은건 빌헬름의 공격이 어느 지점을 타격하느냐.

완전히 빗나가거나, 혹은 엉뚱한 곳을 공격할 것이다.

······ 허나.

'음?'

페르몬은 자신의 목이 허공으로 띄워진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뭐지?

처음부터 빌헬름은 자신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빗나가야 정상이다.

심장을 노렸으나 가슴팍을 꿰뚫은 것처럼.

그런데 빗나가지 않았다.

툭!

털썩!

페르몬의 신체가 시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자.

"다음."

빌헬름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페이즈 3, '영원의 란돌프'가 '빌헬름'에 의해 토벌되었습니다."

마침내 토벌되었다는 메시지.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은 페이즈 3가 막을 내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끄, 끝인가?"

"설마 페이즈가 더 있는 건 아니겠지?"

"으으으!"

제발 이게 끝이길.

모두가 빌고 빌었으나.

"챔피언, '영원의 신 란돌프'가 등장합니다."

"탑을 오르십시오."

"30층에 도달하면 챔피언의 권좌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과정의 끝.

투신의 탑을 정복한 챔피언이자.

완전체인 진짜 란돌프가 남아있었다.

*

빌헬름은 탑을 올랐다.

26층.

그곳에 등장한 건 '천마'였다.

하지만 천마는 란돌프와 관련되어 분열된 존재가 아니다.

흉의 신, 그리고 재의 신이 만들어놓은 합작이었다.

더 이상 빌헬름이 탑을 오르지 못하게끔.

그리하여 30층에 도달하지 못하게 방해하고자 만들어낸 괴물.

"다음."

하지만 빌헬름은 그조차도 이겨냈다.

왼쪽 어깨에 큰 부상을 입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27층.

기사단이 등장했다.

빌헬름을 따르던 원탁의 기사단.

"어째서 저희를 버리셨습니까?"

"단장님······!"

그들은 빌헬름을 원망하며 검을 휘둘렀다.

허나 허상이다.

빌헬름의 죄책감을 유도하려는 허튼 수작.

빌헬름은 그들을 베었다.

옆구리에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이 역시 개의치 않았다.

28층.

마왕이 등장했다.

자신이 죽였던, 하지만 패했던.

"이제 너는 잊혀지리라. 영원토록. 패배의 역사를 끌어안은 채."

빌헬름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건 명예, 혹은 승리의 역사와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잊혀져도 좋다.

사라져도 괜찮다.

단 한 명.

개 같은 신에게 자신을 제대로 선보일 수만 있다면.

놈과의 내기에서 승리하고, 놈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오른쪽 귀가 날아가고, 온몸이 너덜너덜해졌지만.

빌헬름은 계속해서 탑을 올랐다.

29층.

흉의 신, 그리고 재의 신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왜 포기하지 않는 거냐, 까악?"

"네가 탑을 오른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진대, 까악?"

변하는 건 없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빌헬름은 검을 들었다.

신들을 상대로.

앞을 막아선다면,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베어버리리.

"너는 오를 수 없다, 까악."

"이곳은 너에게 허락된 장소가 아니다, 까악."

곧이어 그들의 앞으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끔찍한 흉조, 그리고 카라스!

두 존재의 그림자를 그들이 직접 조종하기 시작했다.

오랜 격돌이었다.

하지만 결국 끝에 남은 건 빌헬름이었다.

비록 온 몸이 너덜너덜해졌으나.

"그 상태로 올라봤자 이기지 못할 것이다, 까악."

"패한 순간 너는 영원토록 소멸한다, 까악."

"영광된 아이야. 왜 다른 이의 시련에 혼을 불사르느냐, 까악?"

"너의 혼을 바칠만한 일이 아니다, 까악."

30층에 오르지 못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은 걱정하고 있었다.

빌헬름의 행위.

그의 도전은 영혼을 불사르는 짓이다.

패배한다면 기껏 여신이 남겨둔 영혼의 불씨는 소멸할 것이고, 승리한다 해도 그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전혀 없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도록 방해했으나.

"··· 다음."

빌헬름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챔피언, '영원의 신 란돌프'에게 '빌헬름'이 도전합니다."

······ 30층.

그곳에서 '란돌프'를 마주한 순간.

'으음.'

빌헬름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한시간 남짓.

시련도 이제 끝을 보이고 있건만.

'한계로군.'

몸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도리어 온전치 않은 상태로 여기까지 온 게 대단한 일이지만 빌헬름은 아쉬웠다.

자신의 몸이었다면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을텐데.

허나,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숨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때였다.

"'박현명'님이 '빌헬름'을 응원합니다."

······ 개 같은 신이 자신을 응원하기 시작한 건.

내 전부를 다해

게임 '판게니아'를 시작하고 캐릭터 빌헬름을 생성했을 때.

나는 시작하자마자 진지하게 빌헬름의 삭제를 고려했다.

"······ 난이도 미쳤네. 접을까?"

깨어난 빌헬름의 상황과 상태가 너무나도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동굴의 안.

며칠을 제대로 못 먹었는지 '허기'와 '쇠약' 그리고 '탈수' 증상을 갖고 있었다.

캐릭터를 만들다 보면 간혹 그런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몸을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중증인 경우는 처음이었다.

뿐만인가.

"스타팅포인트가··· '나벨룽의 숲'? 최소 9레벨 사냥터잖아?"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

나벨룽의 숲은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곳.

온갖 종류의 괴물들이 설치는 고레벨 사냥터다.

제대로 육성한 최소 9레벨 이상의 전사만이 겨우 이곳에서 사냥할 수 있지만, 괴물의 종류가 워낙에 많고 변수도 많은 탓에 아무도 오지 않는다.

이곳에서 생존하라니.

동굴을 나가면 5분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변변찮은 무기도 없었다.

가진 거라곤 악과 깡밖에 없는 상황.

"··· 그나마 내가 나벨룽의 숲 지리를 잘 알아서 다행이지."

광활한 숲.

이곳은 적응만 되면 꽤 괜찮은 사냥터였다.

좋은 사냥터는 경쟁이 심한 법이고, 단일 종류의 괴물만 출현해서 재미가 없다.

반면에 이곳은 경쟁도 없고,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하기에 쉴 틈이 없었다.

하여 내게는 제법 괜찮은 사냥터였지만.

'진짜 삭제할까?'

문제는 캐릭터의 레벨이 1이라는 것.

차라리 삭제하고 새로 키우는 게 나을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낭비였다.

어떻게든 산다고 해도 사냥 자체가 불가능하며, 나벨룽의 숲을 빠져나가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 모른다.

내가 아무리 신적인 컨트롤의 소유자라한들 1레벨의 캐릭터로 9레벨 이상의 괴물을 사냥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어떻게 할까.

지울까, 말까.

나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흠. 어떻게든 되겠지."

우선 해보기로.

바닥을 기어 동굴을 빠져나온 뒤, 주변에서 자생하는 풀을 뜯어먹었다.

대부분 독초지만 먹어도 되는 풀의 종류가 몇 있었던 덕이다.

풀잎에 맺혀있는 이슬을 핥아먹고, 기어다니는 벌레 따위를 주워먹으며 몸상태를 회복하는데 전념했다.

가끔 운이 좋게 괴물이 먹다남긴 사체를 발견하면 한 입이라도 베어물었다.

그렇게 3일.

몸을 회복하는 데에만 무려 3일이 소요됐다.

이것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만약 게임이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됐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판게니아는 인칭전환이 자유로운 게임이었고, 나는 3인칭으로 진행하며 멀리서 출현한 괴물의 움직임을 일일이 계산한 뒤 움직여왔다.

나벨룽의 숲에 출현하는 괴물은 모두 '선제공격'을 하는 성질이 나쁜 놈들 뿐이지만, 시야각이 좁아서 움직이는 패턴만 어느정도 숙지하면 어떻게든 피하는 것 자체는 가능한 것이다.

"진짜 헬 난이도네······."

하지만 몸을 회복했다한들 여전히 상황은 최악이었다.

우선 숲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다른 캐릭터로 원조를 해보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해봤지만, 지금 이 캐릭터가 있는 구역은 '나벨룽 숲의 왕'이 있는 곳이었다.

판게니아가 시작되고 단 한 번도 정복된 적 없는 레이드 보스 몬스터.

자칫 잘못 들어왔다간 그대로 죽는다.

이딴 똥망캐를 위해 겨우 키운 고레벨 캐릭터를 위험으로 몰아넣을 순 없는 노릇.

최소한 이 구역이라도 벗어나면 모를까.

허나 조심에 또 조심을 한다고 한들, 한 마리의 괴물도 사냥하지 않고서 벗어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할 수 있는게 동굴에서 검 휘두르는 것밖에 없잖아.'

게다가 무기라곤 조잡하게 만든 나무로 된 검 한자루뿐.

이 동굴조차도 언제 괴물이 침입해올지 모른다.

그런데, 왜일까.

이런 최악의 상황이 도리어 내 도전욕구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휙! 휘익!

나는 검을 휘둘렀다.

몇날며칠을 계속해서.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 나벨룽의 숲을 빠져나온 건 그로부터 장장 한 달이 지난 뒤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이 캐릭터, '빌헬름'에 애착을 갖게 된 건.

*

욕심이 났다.

제대로 키워보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명예로우며 불굴의 의지를 가진 기사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상징으로.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기본기가 탄탄했기에 성장속도도 빨랐다.

하여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시련들을 연거푸 깨나갔다.

어느덧 기사왕이라 불리며, 수많은 이들의 희망이 되었을 때.

나는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대원정.'

마왕을 잡고 싶다고.

마왕 사냥은 게임 판게니아의 최종목표.

놈을 잡는 순간 게임은 종료되고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 기사단을 키우고, 각국을 돌며 병사를 모았다.

모든 캐릭터의 좋은 장비란 장비는 모조리 몰아와 완전무장도 시켰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버그'로 인해 빌헬름은 사망하고 말았다.

분했다. 화가 났다.

완벽했을 터인 대원정이 고작 버그 때문에 실패하다니!

'사실 내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 완벽하다 자부했으나.

빌헬름의 검을 본 순간부터.

빌헬름이 휘두르는 검을 직접 마주했을 때부터.

나는 생각을 달리했다.

사실은 내가 부족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고.

투신의 탑을 오르기 시작한 빌헬름의 모습은 내가 직접 플레이했던 캐릭터와는 모든 게 달랐으므로.

나는 어둠 속에 잠긴 채 검을 들었다.

휘익!

휘둘러본다.

하지만, 빌헬름의 검에는 미치지 못한다.

검 숙련도 32레벨.

검강을 피워내고, 그 이상의 무위에도 도달했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빌헬름의 검은 틀림없이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빌헬름을 플레이했을 때보다도 더 상위의 경지다.

이는 곧 빌헬름이 홀로 이룩한 경지라는 뜻이다.

이곳,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늪과 같은 어둠 속에서 빌헬름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러왔던 것이다.

휘익!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

무겁게, 더욱 무겁게.

하지만 한없이 부드럽게.

빌헬름은 이곳에서 오롯이 자신만의 검을 만들어냈다.

천지개벽.

하늘과 땅을 열고, 다시 만드는 검을.

새로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싶었던 빌헬름의 소망이 담긴 검.

나 역시 제대로 사용했다고 자부했으나 천지개벽의 진정한 묘리는 담지 못했다.

그가 사용하는 천지개벽은 내가 사용하던 천지개벽과는 그 격이 달랐으니.

'하늘을 열고.'

천(天).

상단전을 연다.

보통의 무인은 배꼽에 위치한 하단전을 열고 단련하며 내공을 쌓는다.

머리에 존재하는 상단전은 초능력과 같은 능력에 기반하며, 이를 연 인간은 신선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나 수명이 극도로 짧아지는 등의 부작용이 생긴다.

하여 하단전을 연마한 뒤 상단전을 여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빌헬름은 달랐다.

그의 검은 먼저 하늘을, 상단전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땅을 연다.'

지(地).

땅은 받아들인다.

하늘의 기운을 하단전에 담는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이치를 본다.

보고, 느끼며, 마침내 한 걸음 내딛는 것.

그렇게 세상으로 나아가면.

'세상을 연다.'

개(開).

비로소 세상을 알게된다.

빌헬름은 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벽(闢)에는 이르지 못한다.

'나를 연다······.'

세상 전부를 알아도.

오직 하나, '나'를 아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은 없었다.

휘익!

나는 검을 휘둘렀다.

빌헬름을 좇아서.

그의 궤적을 그리면서.

닿고 싶었으니까.

그가 내게 바랐던 것처럼.

어느덧 나도 그에게 바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검 숙련도' 레벨이 상승합니다."

"검 숙련도가 33Lv을 달성했습니다."

"'수련자의 산의 주인'으로부터 발생한 히든 퀘스트 '숙련도 레벨 초월(9)'을 완성했습니다!"

"이곳은 자아의 무저갱. 그렇기에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도 감탄하지 않습니다."

"달성하고 이룩했으나, 남은 것은 오로지 공허함뿐입니다."

"보상 '알 수 없음'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

성과를 이뤘음에도.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에 발을 디뎠음에도!

그럼에도 빌헬름은 그저 계속해서 나아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빌헬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너를 응원한다.'

진심으로 나는 빌헬름을 응원했다.

그가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갈채를 쳤다.

하지만 30층에 도달하여 란돌프와 마주한 빌헬름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마치 '나벨룽의 숲'에 막 떨어졌을 때처럼.

꿈도 희망도 없는 최악의 상황.

하지만 적어도 그때의 한달만큼은 빌헬름과 내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빌헬름과 하나가 되어 검을 휘두른 유일한 순간이 아니었을는지.

후아아앙.

그 당시의 마음을 상기하자 내 주변으로 '황금률'이 떠올랐다.

그렇게 나로부터 발생한 황금률의 실선은 빌헬름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게 무엇인지 본 순간 알았다.

'내 전부를 다해, 오직 너만을 응원하마.'

"모든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6,000h)'을 사용해 '빌헬름'을 응원합니다."

실선이 더욱 환하게 빛난다.

나와 빌헬름이 연결되었다는 증거.

하지만 부족하다.

모두 사용했음에도 아직 완전하게 닿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한 상황.

물론, 방법이 없진 않았다.

"'메인 퀘스트 2, 클래스 얻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3, 탑 오르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4, 암흑공간의 틈새를 메워라'가 완료되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메인 퀘스트'의 완료를 한꺼번에 진행했다.

클래스를 얻고, 투신의 탑을 오르는 것.

하지만 '암흑공간의 틈새'를 메우는 것도 함께 진행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내가 서있는 이곳을 '암흑공간'으로 판명한 걸까?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상으로 얻은 모든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14,000h)'을 사용해 '빌헬름'을 응원합니다."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도리어 좋았다.

메인 퀘스트 달성 점수에 의해 받은 황금률의 조각.

그리고 모든 보상을 황금률의 조각으로 전환해 나는 빌헬름을 응원했다.

내 진심을 녀석에게 전하기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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