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의 섬'에 입장한 것을 환영합니다."
"'튜토리얼'이 시작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1, '생존'에 들어가기 전에 각자 무기를 선택해주십시오."
"그리고 '요정'의 지시를 따라주십시오."
"'생존'은 30분 뒤 시작합니다."
수많은 워프와 함께 나타난 사람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신의 섬? 튜토리얼?"
섬의 해변가.
족히 수백명은 되어보일법한 사람들이 모여있었으니까.
-안녕? 나는 아이리스! '신의 섬'에 온걸 환영해!
뾰로롱.
귀여운 소리를 내며 요정 하나가 허공을 배회했다.
"여기서 뭘 어쩌라는 거야?"
"다, 다시 돌려보내 줘!"
요정의 출현에 몇몇 사람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하지만 요정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자, 시간이 없어! 나는 너희가 올바른 '각성자'가 되도록 이끌 의무가 있단다. 그러니 빨리 무기를 들으렴! '혼종 고블린'의 먹이가 되기 싫다면 말이야!
요정은 해변가 이곳저곳에 널브러져있는 무기들을 가리켰다.
그곳엔 검과 도, 사슬과 도끼, 활과 창 등등 온갖 종류의 무기가 놓여있었다.
"혼종 고블린?"
"설마 싸워야 한다고?"
"어, 어어······."
여전히 당황한 사람들.
툭.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검 한 자루를 든 남자를 보며 요정이 박수를 쳤다.
-잘했어! 너 제법 보는 눈이 있구나? 가장 좋은 검을 찾아낼 줄이야. 시작이 좋은걸~
남자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어이가 없군.'
······ 그냥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설마 내가 '비각성자' 취급을 받으며 튜토리얼을 진행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축복의 천사가 깃들자 신의 섬이 이런 식으로 바뀐거로군.'
란돌프와 나를 완전하게 구분지었기 때문일까.
어쨌든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겠다.
신의 섬은 어느덧 '비각성자의 각성을 위한 장소'로 변해있었다.
또한 아직 유아기인 페어리 드래곤들이 안내자로 둔갑했다.
'페어리 드래곤의 성장 방법.'
아마도 이게 페어리 드래곤이 설장할 방법일 터.
억겁의 시간을 먹고 자라야만하는 페어리 드래곤을 빠르게 육성하고자 '축복의 천사'가 선택한 방법이 아닐는지.
그뿐만이 아니다.
"섬의 중앙에 있는 저건 뭐지?"
나는 섬의 중앙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요정 아이리스가 답했다.
-거룩한 별! 이 섬의 주인이자 우리의 신께서 남겨놓으신 위대하신 발자취란다. 아름답지 않니?
내가 남겨놨다고?
섬의 중앙에 우뚝 솟은 채 빛나는 섬광.
-'천사'께서 저 안에 잠들어계셔. 튜토리얼에서 가장 훌륭한 점수를 낸 극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만이 '천사'님을 뵐 영광의 기회를 얻게 된단다! 혹시 아니? 히든 클래스를 얻을 지도?
아아.
신의 섬과 거룩한 별이 하나의 세트로 인식된 모양이다.
섬에 깃든 '축복의 천사'는 그 안에 있던 '거룩한 별'에도 함께 깃들어버린 것이다.
하기야 '신의 섬'만으로 이만한 이적(異蹟)은 불가할 터이니.
-자, 시간이 지나가고 있어요. 똑딱똑딱.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기를 쥐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기마련.
"나, 난 못해! 안해!"
"그, 그만둬. 그런 소리 하면 머리를 터트려버린다고!"
"맞아! 요정은 극악무도한 존재라고······!"
두려움에 떨며 발악하는 사람을 진정시키려는 사람도 많았다.
요정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
판게니아에 대한 지식은 이미 널리 퍼져있었으니.
특히 '요정'은 정말 잔인한 괴물이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은 죄다 머리를 터트려버린 뒤 나무의 거름으로 만들어버리는 종족.
한 치의 자비도 존재하지 않는 극악무도의 괴물!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너희 머리를 왜 터트리니?
그러나 요정 아이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뱉어냈다.
-나를 지성이 없는 하급 요정과 같은 취급하지 말아줄래? 위대한 '페어리 드래곤'을 마주한 걸 영광으로 여기진 못할망정······ 쯧쯧.
혀를 차곤, 고개를 저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자, 무기를 들었으면 이제 '상태창'을 외쳐보렴. 물론 생각만 해도 괜찮지만, 처음엔 입으로 '명령어'를 설정하는 게 이미지에 도움이 될 거야!
그제야 약간의 안정을 되찾은 사람들이 상태창을 떠올리곤 기겁했다.
"뭐, 뭐야?"
"설마 '각성'한 거야?"
"미친······ 이건 디맨션 워리어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그들 앞에 떠오른 상태창.
그건 분명히 각성자인 '디맨션 워리어'만 가능한 능력이었으니까.
"나도 각성자가 된 건가?"
"마, 만세!"
"내가 각성자라니······!!!"
환호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각성자라는 사실만으로도 귀족의 취급을 받는다.
부유하게 살 수 있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을 일년 넘게 보아왔으니 각성자가 됐다는 사실에 환호할 수밖에.
"튜토리얼을 클리어하면 나갈 수 있는 거겠지?"
-그럼! 이곳에서 클래스를 얻을 수도 있단다. 레벨을 올리고, 사냥을 통해 얻은 SP로 재능을 찍고, 더 강한 각성자로 발돋움 할 수도 있고 말이야!
부르르르!
요정의 대답을 듣자 남자는 온몸을 떨었다.
"아아, 역시! 우리형 말이 사실이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타차원 '판게니아'가 처음엔 게임이었다는 말! 나는 다 들어서 알고 있거든. 특별한 클래스를 얻기 위한 재능 테크트리나 히든 특성에 관한 것들도 말이야!!"
남자는 흥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몇몇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판게니아'를 어느정도 파악한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보가 힘이 된다.'
'더 많이 아는 자가,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이곳은 기회의 땅이다.
가지지 못했던 자들이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 기회를 결코 놓칠 수는 없었다.
튜토리얼을 더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해야만 한다.
모두의 눈에 두려움은 사라졌다.
이전에는 없던 열정이 솟아난 순간.
그렇게 30분이 지나자마자.
-그럼 무운을······ 응?
요정 아이리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레벨 10
혼종 고블린.
이제 막 각성한 초보자들이 사냥하기엔 버거운 괴물이다.
레벨도 3에 이르며 집단으로 행동하는 혼종 고블린 100마리를 처치하는 게 '생존'의 주 내용이었다.
그런데 워프가 열린 즉시 움직인 남자가 있었다.
"혼자서?"
"미친 거 아니야?"
사람들은 똘똘 뭉쳐 벽을 만들었다.
방패를 세우고, 창을 겨누고, 뒤에선 활시위를 당겼다.
고블린을 상대할 땐 흩어지면 죽는다는 걸 몇몇 사람들이 이미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혼자 나섰다간 개죽음 당하기 십상.
"삶에 미련이 없나보군."
"대형 유지! 저만 믿으십시오! 전원 생존도 가능합니다!"
혀를 찬 사람들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은 더 견고하게 벽을 쌓아 대비하는 게 먼저였으니.
하지만, 제한시간이 지난 뒤 워프에서 '혼종 고블린'이 튀어나오자 사람들은 남자에게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키악!
카아악!
······ 난무하는 비명소리.
워프를 나오는 족족, 혼종 고블린의 목이 댕강댕강 잘려나갔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이렇다할 기교도, 몸짓도 필요없다.
그냥 손을 뻗어 베어내면 그만.
아무리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데 면역이 된 사회라지만 남자의 손속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저게 무슨······."
"혼자 독식하는 건가?"
"이봐!"
결국 참다못한 도끼를 든 근육질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저토록 쉽게 죽일 수 있다면 자신 역시 그러지 못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분명히 모든 보상은 순위로 정해진다고 했다. 이대로면 한 마리만 잡아도 최소 2위는 확정이야.'
물론 그도 판게니아의 상식을 이해하고 있는 자였다.
모든 시련은 순위를 동반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순위에 따라 보상 역시 차등지급 된다는 사실도 말이다.
'저놈, 위험한 놈이다. 위험한 놈을 억지로 이기려고 들 필요는 없지.'
도끼를 든 남자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작금의 사회, 작금의 세계는 강자존이다.
아무리 몸을 키우고 단련해도 일반인이 각성자를 이길 순 없다.
강자를 상대할 땐 우선 숙이고 양보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선두에서 혼종 고블린을 댕강댕강 썰어대는 저놈은, 무지막지하게 위험한 부류의 인간이 분명했다.
저런 놈은 먼저 보내는 게 낫다.
저런놈들과 경쟁할 생각도 없었다.
2위면 충분하다.
이곳에서 군림하기엔.
키륵! 키르륵!
다른 워프를 통해 비집고 튀어나온 혼종 고블린.
크기는 1.3m 정도.
새까만 피부를 갖고 있다.
들었던 것보다 약간 크긴 하지만 별문제는 없으리라.
"죽어 이 새끼야!"
기합을 내지른 남자가 도끼를 내리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쪼개버릴 기세로.
까앙!
하지만 묵직한 손목의 통증과 함께 도끼가 튕겨나갔다.
'뭐, 뭐야?'
남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가죽이 아니라 강철을 때린 것만 같은 타격감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상한 일이었다.
'저놈은 종이처럼 쉽게 베어내던데······?'
그렇지 않은가.
이처럼 단단한 줄 알았다면 대열을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분명히 고블린의 방어력은 형편없다고 했잖아!'
마음만 먹으면 일반인도 상대할 수 있는 게 고블린 아니었던가.
그게 남자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어그적!
순식간에 몸에 올라탄 고블린이 입을 벌리더니 그의 머리를 통째로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 실로 기괴한 장면.
툭!
머리를 잃은 남자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꺄아아악!"
"저, 저게 고블린이라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기겁했다.
성인남성의 머리를 단번에 삼킬 정도로 입이 커졌으니까.
일반 고블린이 아닌 혼종 고블린.
이곳 심연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블린을 기존의 상식으로 대한 자의 말로였다.
이 역시 요정 '아이리스'가 의도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처음 검을 들고 나선 남자.
그는 달랐다.
강철처럼 단단한 혼종 고블린의 뼈.
그 사이, 약점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가장 약한 목을 베어내고 있었다.
사실 약점만 파악하면 어려운 상대는 아니지만 이들은 이제 막 각성한 초보자들이다.
하물며 심연의 괴물은 더더욱 상대해본 적이 없을 터.
우왕좌왕하며 당황하는 모습을 기대했건만.
키엑!
카아악!
정작 박살이 난 건 혼종고블린 쪽이었다.
-틀림없이 레벨 1일텐데······.
아이리스의 눈에는 레벨이 보인다.
이곳 신의 섬에 있는 요정들 모두가 레벨을 볼 수 있다.
남자의 레벨은 분명히 '1'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움직임은 그 이상이었다.
아무리 쉬워보인다고 해도, 고작 레벨 1에 불과한 자가 혼종 고블린 백 마리의 목을 전부 쳐내는 건 불가능하다.
······ 불가능해야만 했다.
칵!
단말마와 함께 쓰러진 마지막 혼종 고블린.
그 광경을 본 아이리스는 저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진짜 어이없어······.
*
"'생존'의 첫 번째 날이 지났습니다."
"참가자 100,000명 중 94,724명이 생존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생존자 전원에게 소정의 SP(Skill point)를 선물로 드립니다."
"생존 순위에 따라 추가 SP가 부여됩니다."
"SP를 사용하여 재능을 개화하십시오. 그 과정에서 특별한 스킬, 혹은 클래스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혼종 고블린을 죽이고 얼마나 지났을까.
위와 같은 메시지가 떠오르며 상황이 종료되었다.
'이런 식이었군.'
덕분에 '신의 섬'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내가 이해한 '신의 섬'에 대해 정보를 나열해보았다.
우선 첫 번째.
박현명과 란돌프는 완전하게 분리되었다.
아마도 나를 버리지 않는 과정에서 이런 식의 현상이 생긴 듯싶었다.
그래서 '신의 섬'은 나를 란돌프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페어리 드래곤이 나를 못 알아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리라.
두 번째.
이곳에서 변신하는 순간 다시 나는 퇴장당한다.
완성된 나의 기운이 페어리 드래곤의 성장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이미 한 번 경험해봤으니, 웬만해선 란돌프로 변신하는 걸 자제해야만 한다.
세 번째.
페어리 드래곤은 비각성자들의 시간을 먹고 성장한다.
신의 섬에 입장한 10만명분의 시간을 먹으며 급성장을 하고 있는 중이다.
네 번째.
이 섬은 아직 심연에 있다.
하여 심연의 괴물들을 소환하는 것이고.
마지막, 다섯 번째.
······ 나는 각성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땐 적잖이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이미 판게니아에서 란돌프로 각성한 내가 박현명으로 따로 각성을 한 것이니까.
본래 '신의 섬'엔 플레이어가 들어올 수 없다.
섬의 주인인 란돌프조차도 들어올 수 없게 했다.
그러니 내가 입장하고, 각성한 건 의도치 않은 결과일 터.
당황스러운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태창.'
······ 상태창의 상태가, 단순 각성자와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이름 : 박현명
레벨 : 2
힘 : 30
체력 : 28
민첩 : 30
지능 : 28
마력 : 46
란돌프와 확실하게 분리되었다는 증거.
란돌프가 아닌, 박현명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그것도 레벨 1부터 시작하는 형태로.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능력치의 상태였다.
'란돌프의 능력치를 승계하고 있다.'
보자마자 알았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능력치 증가율은 란돌프와 관계가 있다는 걸.
그것도 모두 '순수능력치'로서 말이다!
'란돌프의 장비나 별을 통해 얻은 추가 능력치도 모두 반영되고 있다.'
미친.
이게 사실이라면 상상 이상의 이점이다.
게다가 내 생각을 뒷받침할 증거는 많았다.
예컨대.
자연 재생력 : 11,200%
전체 경험치 획득률 : 200%
······ 자연 재생력과 경험치 획득률.
둘 다 '탈각'하며 얻은 능력이다.
저주 관통과 같은 능력이 없는 건 아쉽지만 이게 어딘가.
나는 눈길을 돌려 바로 다음 창으로 향했다.
1 : '무한의 그릇' - 능력치 상한 해제, 능력치 상한 해제에 따른 부작용 제거
2 : '탈각' - 자연재생력 대폭 상승, 경험치 획득률 2배
3 : '천마신공' - 마력 증폭 효과
4 : '승계' - '란돌프'의 능력치를 레벨에 따라 승계합니다.
5 : '공유' - '란돌프'와 경험을 공유합니다. (현재 란돌프의 레벨과 경험치 9Lv, 30%)
특이사항 1번과 2번은 능력치를 통해 반영되었다.
하지만 의아한 건 3번부터였다.
천마신공이 란돌프가 아닌 박현명, 내게로 전이되었다는 것.
혼종을 상대할 때 '천마군림보'가 발동된 게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승계'와 '공유'라니?
란돌프의 능력치와 경험 따위가 모두 내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숙련도도 그대로다.'
숙련도. 말 그대로 경험에 의해 오른 경지.
하지만 숙련도만 그대로인 건 아니었다.
활 10Lv, 달인의 경지
검 32Lv, 검강 해제(피해량+60%)
[건강 max][체질 max][지능 max][감각 max]
[검술 max][방패술 max][창술 max][도끼술 max][단검술 max][궁술 max]
[빛 max][어둠 max][공기 max]
[근원의 불 max][근원의 물 max][근원의 땅 max][근원의 바람 max]
[허 max]
[예술 max][학문 max][지도력 max][관찰력 max]
부르르르!
몸이 떨린다.
재능 역시도 그대로였다.
다시 보고, 또 봐도, 할 말이 없었다.
도저히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상태창.
······ '란돌프'를 생성하고 시작할 때의 그 상황보다도 몇 배는 더 좋았으니까.
'란돌프가 내게 영향을 끼치듯, 나도 란돌프에게 영향을 끼친다.'
지금 이 상태창의 대부분은 판게니아에서 란돌프로 내가 행한 경험을 고스란히 가져온 것이었다.
허나 지금 내 상태 또한 란돌프에게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있었다.
어쩌면 다른 사항들보다도 훨씬 중요한 부분이.
'레벨이 오르자 란돌프의 경험치가 10% 상승했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혼종 고블린 100마리를 사냥하고 레벨이 오른 순간, 상태창에 변화가 생겼다.
특이사항에 적힌 란돌프의 경험치가 갑자기 상승한 것이다.
그것도 무려 10%나.
내 레벨이, 나의 경험이, 란돌프와 공유된다는 증거.
나 박현명의 레벨 하나가 란돌프의 경험치 10%로 인정되는 모양이었다.
말인 즉, 내가 9레벨에 도달하면 란돌프의 레벨도 10레벨을 달성한다는 의미였다.
'10레벨에······ 오를 수 있다.'
아아.
주먹이 절로 쥐어진다.
메인 퀘스트 11을 클리어하며 얻었던 모든 보상을 통틀어도, 지금의 기쁨에 비하지는 못할 것이다.
도저히 올리는 게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10레벨의 벽.
영원히 9레벨에 머물러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그 벽을 깰 방법을 마침내 찾았다.
마침내 10레벨에 오를 길을 찾아냈다.
10레벨에 올라, 초월할 수 있다!
······ 하지만.
이렇게 많은 기적도, 전례 없는 기쁨과 환호도,
결국 전부 합쳐 이 마지막 창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었다.
[허무]
[손재주]
[올 마스터]
[웨폰 마스터]
[거인의 항마력]
[드루이드의 자연친화력]
[철혈군주의 심장]
[비스트 로드]
[황금의 은총]
[돌연변이]
[대식가]
[대현자]
[천상(天上)]
······ 바로 히든 특성 13개를 들고 시작한다는 것.
오직 나만이 가능한, 나 박현명만의 특전이었다.
무신(武神)
다그닥, 다그닥.
마차 한 대가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는 잠든 남자와, 그런 남자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 남편분께서 3일째 안 일어나는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걱정스러운 말투로 앞에 앉은 마부가 물었다.
잠든 남자가 벌써 3일째 눈을 뜨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괜찮습니다."
여인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마부는 어깨를 으쓱했다.
"으음. 뭐, 부인께서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요."
죽은 건 아니니까.
그냥 잠을 좀 많이 자는 양반이구나 싶었다.
숨도 쉬고 있고, 3일 동안 굶는데도 전혀 야위질 않는다.
그리고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참 특이한 부부구만.'
마부는 처음 두 남녀를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여인이 남자를 등에 업은 채였는데,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돈을 쥐어주며 위험지역으로 향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남녀 사이가 부부는 맞는 것 같다.
딱히 칭호에 대해 별 말이 없는 걸 보면.
"그나저나··· 파이살메르가 개방됐다는 말은 들었지만, 여행가기엔 아직 위험하지 않습니까?"
사막도시 파이살메르.
현재 그곳은 위험지역이다.
백왕과 흑왕의 전쟁에 큰 영향을 받는 곳.
워프가 개방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굳이 그곳에 발을 들이려는 간 큰 사람은 없었다.
"친구를······ 찾아야 해요."
"친구? 아아, 파이살메르에 친구가 있습니까?"
"예."
"하이고. 어지간히 걱정이 됐나 봅니다. 부디 살아있길 빕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어어······."
순간 마부는 당황하고 말았다.
이미 죽은 친구를 찾으러 위험지역에 발을 들이다니.
시체라도 수습하려는 걸까?
"확인하러 가는 겁니다. 아직도 그곳에 있는지."
"그, 그렇군요."
너무나도 담담한 말투에 마부가 다 곤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감정이 없어서 같은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여인, 이자벨라는 자신의 무릎 위에 있는 란돌프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해도 했고, 원망도 했지만.
전부 풀린 지금, 그 덕분에 알게된 진실이 많았으니.
그래서 지금 란돌프의 상태 역시도 이해하고 있었다.
현재 란돌프는 로그아웃하여 세계의 저편에서 '박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현명은 자신과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며,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니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자벨라가 란돌프를 지켜야만 한다.
물론, 박현명을 만나보고는 싶었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상상 그대로인지, 너무나도 궁금했으니까.
그러나 그와 자신은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다.
··· 둘이 만날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란돌프와 박현명.
둘 다 그녀에겐 같은 위대한 존재이므로.
'······ 소노라.'
또한, 알게된 진실 중에는 자신의 단짝이자 언니인 '소노라'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자벨라가 신병에 걸린 직후.
박현명은 자신의 몸을 움직여 혼종이 된 소노라와 싸웠다.
그리하여 생존했고, 사막여왕의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소노라'의 처리에 대해선 알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곳에 있는 거니?'
최소한 소노라의 시체라도 수습해주고 싶었으니까.
소노라가 아직도 그 지옥에 남아있다면······ 바깥으로 꺼내주는 게 이자벨라의 사명일 터.
그리고 그녀의 뼈로 검을 만들 것이다.
영원히, 자신의 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소노라도 그걸 바랄테니까.
그리하여 세상이 넓다는 걸 보여줄 생각이다.
아침이 오고, 새싹이 자라나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려줄 셈이었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세계는 아름답노라고······ 그보다도 더 아름답고, 고귀하며 숭결한 사람도 존재한다는 걸.
고작 사막여왕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빛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소노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이번엔 내가 널 찾으러 갈게, 소노라.'
빛과 같은 사람과 함께.
너를 그 지옥에서 꺼내줄게, 소노라.
-행복해야 돼, 이자벨라. 꼭. 약속이야.
이번엔 내가 너를 찾을 차례니까.
*
제국으로 돌아온 팔가 기사단의 단장, 라이가는 인상을 찌푸렸다.
'······ 신의 섬이 나를 포함한 참가자 전원을 튕겨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참가한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튕겨나갔다.
자신만이 아니라, 아마도 참가자들 전원이.
뿐만이 아니다.
'단원들 다수가 심연의 늪에 빠져 죽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함께한 팔가 기사단의 기사들 중 상당수가 돌아오지 못했다.
심연에 빠져 죽은 것이겠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연이라면 이골이 난 강자들 다수가 한꺼번에 실종됐다?
백보, 천보 양보해도 의아할 수밖에.
하지만 가장 의문인 건.
'내 몸상태가······ 왜 이런 거지?'
······ 자신의 몸상태였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육신은 천천히 말라가는 중이다.
마력이 말라붙고, 수많은 가호가 꺼져간다.
이런 경우는 한 가지뿐이었다.
'오문을 열었다. 내가?'
모든 봉인을 개방했을 때.
그때, 절대적인 '죽음'이 동반된다.
하지만 라이가는 오문을 개방한 기억이 없다.
기억이 없는데도 오문을 개방해야만 일어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말인 즉.
'··· 기억이 조작됐다.'
기억이 조작된 것이다.
신의 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튕겨나갔다는 '결과'만 알고 있을 뿐이다.
무엇이 조작되고, 어떤 식으로 왜곡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의심이 가는 이는 있었다.
'염소는 어딜 간 거고?'
······ 황금 염소.
분명히 함께 심연으로 향했을텐데, 놈이 없었다.
함께 튕겨나갔다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 있었어야하건만.
제국으로 돌아와 다방면으로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
심지어 '황금 가면'조차도 모르는 기색이다.
자신이 죽어간다는 상태 또한.
알았다면, 그 즉시 공격해왔을 터이니.
사신교와 팔가 기사단은 물과 기름같은 사이이니 말이다.
'아직, 시간은 있다.'
죽음은 멀었다.
신의 섬에서 튕겨나가며 죽음의 저주가 약간이지만 약화된 것이다.
덕분에 후계자를 찾고, 기사단을 보충할 여유가 남았다.
게다가 약화된 '죽음'을 무효화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마음을 먹은 라이가가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회'의 준비를 서둘러라. 그리고 규모를 확대하겠다. 제국신민만이 아니라, 모든 국가의 훌륭한 인재들이 전부 참가할 수 있도록!"
사신교는 반발하겠지만 개의치 않는다.
놈들과 신경전을 벌일 시간조차도 아까웠으니.
*
"아침이 밝았습니다."
"'생존' 챕터 2가 시작되었습니다."
"'혼종 고블린 우두머리'가 출현합니다."
"'혼종 고블린 우두머리'를 처치했습니다!"
······.
"저녁이 되었습니다."
"'생존' 챕터 3이 시작됩니다."
"'혼종 알바트로스'가 하늘에서 습격해옵니다."
"'혼종 알바트로스'를 전멸시켰습니다."
······.
"3일째 아침이 밝았습니다."
"다른 '무리'와의 합류가 이루어집니다."
'신의 섬'이 떠오르고 벌써 3일째.
참가자들 전원이 슬슬 체력의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각성했다지만 밤낮없이 이뤄지는 습격은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으므로.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었다.
"그러니까, 저쪽이 '다른 무리'라는 말인가?"
하지만 3일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강인했다.
선두에 선 남자, 김부장의 무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400명이었던 인원은 고작 3일만에 250명 가량으로 줄어있었으나, 그만큼 치열하게 싸운 결과 진짜 '전사'라 할만한 강심장의 소유자들만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3일째 아침을 맞이한 날.
투명한 한쪽의 벽이 허물어지며, 반대편에 있던 '무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김부장님. 우리보다 사람이 훨씬 많은데요?"
"처음부터 숫자가 많았던 거 아니야?"
허나, 묘했다.
투명한 벽이 허물어지며 나타난 무리의 인원이 얼추 자신들보다 두 배는 많아보였다.
묘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긴장감이 없어.'
뭐지?
생사를 넘어서 숱하게 전투를 벌인 사람이라면 마땅히 갖고 있어야할 긴장감이 없다.
도리어 표정이 너무나도 편해보인다.
전투를 벌인 흔적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혹시 이제 막 소환된 무리인 걸까?
"제가 말좀 나눠보고 오겠습니다."
김부장을 따르는 남자가 사신 역할을 자처했다.
그렇게 상대방의 무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온 남자는 턱을 쓸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 역시 처음부터 우리보다 숫자가 많았던 거냐?"
"아니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그게······."
"죽기 싫으면 빨리 말해봐, 뭔데?"
"처음 소환된 게 400명이고 습격받은 횟수도 저희와 같습니다. 그런데 저 무리에서 그동안 죽은 사람은 한명뿐이라고 합니다."
"뭐? 그게 가능해?"
김부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밤낮없이 이루어진 습격이다.
사망자가 수십, 수백 단위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습격이 이틀 내내 이루어졌는데 고작 한 명이 죽었다고?
"전부 '무신님' 덕분이라고······."
"무신(武神)?"
"예. 엄청나게 잘 싸우는 사람이 한 명 있나봅니다."
"······ 그래?"
김부장은 내심 긴장했다.
그간 어쨌든 무리의 리더로 활동했는데, 다른 무리와 합쳐지면 충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데 다른 무리의 리더가 '무신'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놈이라니.
'그래도 내가 더 강할 거다.'
김부장은 강하게 부정했다.
이틀간 사람들이 모은 특전을 거의 몰빵하다시피 갈취했으니까.
뿐만인가.
'나는 성좌의 선택을 받았다고!'
SP로 수많은 재능을 찍고, 시크릿 클래스 '검투사'를 개화시켰으며, 위대한 성좌의 선택을 받아 그 누구보다도 앞서나가고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건 김부장이 원래부터 '판게니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기업의 임원만이 접속할 수 있는 '타차원 커뮤니티'의 VIP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우연찮게 알게되었고, 거기서 엄청난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다.
당연히 '검투사'가 되기 위한 '재능 테크트리'도 숙지한 상태.
지구로 돌아가면 영웅연합에서 안달나서 모셔가려는 귀인이 될 게 틀림없었다.
또한, 무력의 척도인 레벨도 벌써 5였다.
힘 능력치만 50을 찍은 괴력의 사나이!
"그 무신이라는 놈이 누군데?"
다시 침착함을 되찾은 김부장이 물었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남자가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 어디? 하늘?"
남자가 가리킨 곳은 하늘 위였다.
이에 김부장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알 수 있었다.
하늘 위에 무언가가 떠 있다는 것.
"······ 알바트로스?"
분명히 반나절 전에 자신들을 습격한 새 종류의 괴물, 혼종 알바트로스다.
아직 사냥하지 않은 게 남아있던 걸까?
'아니, 누군가가 타고 있군.'
어이가 없었다.
혼종 알바트로스를 타고 날아다니는 놈이 있을 줄이야.
머지않아, 혼종 알바트로스가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
그리고 김부장은 여느 때보다도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혼종 알바트로스를 타고 나타난 남자.
"······ 박현명?"
얼마전 보았던 박현명이었기 때문이다.
퇴사한 예전 직장 동료이자, 영웅연합 부연합장인 이아린이 직접 스카우트했던.
'그때 각성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혼종을 한방에 날려버렸던 그놈.
정말로 각성하지 않았던 상태였나보다.
지금 이곳에서 마주한 걸 보면 말이다.
'··· 이놈이 무신이란 말이지.'
얼추 이해는 되었다.
그 상태에서 각성까지 했으니 '무신'이라 불려도 이상할 게 없긴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김부장이 어깨를 폈다.
예전의 힘없고 볼품없던 자신이 아니다.
"반갑다.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면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해줄 생각으로.
작금의 세계는 강자존이다.
비록 이전에는 자신이 힘이 없어서 숙였지만, 이번엔 놈이 조아릴 차례였다.
기껏해야 테이머 계열.
알바트로스를 길들인 걸 보면 전사계열의 클래스를 얻진 않은 것 같았으니까.
"세상 참 좁아. 그렇지 않나?"
김부장의 입가가 비틀렸다.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필 골라도 테이머 계열이라니.
뭘 몰라도 저렇게 몰라서야.
이게 바로 정보의 차이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재능이 특출나도 아는 게 없으면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게 테이머는 최악으로 분류되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클래스였다.
시크릿 클래스인 검투사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능력함 그 자체의 부류 말이다!
"······."
박현명이 손을 마주잡았다.
김부장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어디 한 번 죽어봐라.'
꽈아아악!
거룩한 별
나는 나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나를 얻었다.
나 자신을 알게 되고, '박현명'으로서의 삶을 깨닫게 됐다.
지금 일어난 이 현상은 그로 인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저주라고 봐야 할까?
두 번째 각성.
일반적인 플레이어는 불가능한 각성을 나는 해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나, 세상 누구와 견주어도 절대로 꿇리지 않은 압도적인 조건으로.
하여, 고민이었다.
'나의 행보(行步).'
내가 딛는 나의 길.
이 역시 미개척지다.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걸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굳이?'라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었다.
도리어 신중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었다.
'나를 드러낸다. 그래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뭐지?'
우선 란돌프와의 관계가 사라진다는 것.
아무도 나를 란돌프라고, 팬텀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리라.
이곳 '신의 섬'에서 각성할 수 있는 건 플레이어가 아닌 비각성자들 뿐이니까.
완전히 선을 그어 자유를 취할 수 있을 터.
란돌프는 항상 베일에 싸여있었으니 말이다.
플레이어, 백왕, 제국 등의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은연중 그렇게 행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박현명은 지구의 일만 신경 쓰면 된다.
다른 관계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말인즉슨.
'마음대로 행한다. 나쁘지 않군.'
마음 가는 대로 행해도 된다는 의미.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압박을 느낄 이유도, 심지어 원한다면 성별을 고집할 필요도······ 아니 이건 아닌가.
어쨌든 그야말로 완벽한 부캐.
'··· 내가 부캐라니.'
본의 아니게 부캐릭터가 되어버렸다.
허나 개의치 않았다.
아니, 너무 좋았다.
'부캐가 본캐를 뛰어넘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니.'
메인 퀘스트와 명예의 전당이 함께 공유되고 연계된다면 박현명의 이름 세글자가 란돌프의 위에 박히는 날도 틀림없이 올 것이다.
1위와 2위가 나란히 내 기록으로 점철되는 것.
상상만으로도 흥분된다.
기록을 중시하는 나 같은 게임폐인에게 이건 역대급 기회였다.
내가 세운 기록을, 내가 넘는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미 한 번 경험한 길 아닌가?
일종의 '스피드 런'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
'전부 갈아치운다.'
마음을 먹었다.
내가 가야할 행보가 정해졌다.
정한 즉시 나는 '생존'의 모든 내용물을 독식하기 시작했다.
혼종 알바트로스를 길들인 건 순전히 '날아서 섬의 중앙까지 갈 수 있나?'하는 궁금증의 발로였다.
물론 실패했지만.
아쉽다.
히든피스일 수도 있다고 여겼는데.
"여기서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한데, 인생사에 히든피스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극악의 확률을 뚫고 아는 사람을 만난 걸 보면 말이다.
'김부장.'
그것도 불과 며칠전에 만났던 김부장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급할 정도로 능력이 좋은 사람.
물론 진짜로 능력이 좋을 리는 만무했다.
극에 다른 눈칫밥과 처세술, 개밥으로 던져준 자존심과 자존감, 회사의 일이라면 간이고 쓸개고 빼어다줄 희생정신, 그리고 아랫부하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무자비함이 그를 부장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갑자기 얻은 힘에 취해 나사가 빠졌나보군.'
아니면 지난 이틀간의 시련이 그를 자포자기로 만든걸까?
확실한 건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슬쩍 김부장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Lv.5]
레벨 5.
고작 삼일째에 달성할 수 있는 레벨치곤 상당히 높다.
'막타를 전부 빼앗는 식으로 레벨을 올렸겠지.'
예전 '허드슨'이 용병들을 고용해 막타를 치는 식으로 레벨을 올렸다가 문제가 됐다.
레벨은 높은데 능력치가 낮아서 혼자 사냥이 불가능해진 탓이다.
하지만 고레벨일수록 혼자 사냥해야만 경험치를 얻을 수 있게 된다.
특히 9레벨에선 그 경향이 더욱 심해진다.
김부장이 혼자 사냥해서 5레벨을 달성했을 리는 없고, 틀림없이 사람들을 희생양삼아 막타를 빼앗아먹으며 성장했을 터.
뻔뻔한 김부장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꽈아아악!
별안간 힘을 주며, 으스대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김부장.
'······ 어이가 없군.'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가 나를 무시하는데 별 생각이 없었다.
속된말로 같잖았으니까.
이제 막 회사를 퇴사했을 때라면 몰라도, 그 뒤로 수많은 일을 경험하고 달성한 내 입장에서 김부장은 바닥에 꿈틀대는 지렁이만도 못한 자였다.
하물며 지렁이가 꿈틀댄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지 않나?
그보다 못한 족속이 나를 비웃어봤자 웃기기만 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 지렁이가 지금 내 발등 위에 올라탔다.
그러면서 으스대는 중이다.
자기가 더 잘났다며.
자신을 두려워 하라는 듯이.
예전처럼 회사에서 나와 사원들을 대할 때마냥 겁을 주는 것이다.
이쯤되자 김부장이 고마워진다.
'나는 성장했다.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내가 이토록 성장했음을 알려줘서.
예전의 박현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어줘서.
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꽈드드득!
"······ ?!"
꽈득! 꽈지직!
뼈가 부서지고, 부서진 뼈가 살점을 뚫고 튀어나온다.
심각한 격통에 김부장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치료받지 않으면 오른팔을 영원히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겠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괴물의 밥이 되든, 원한을 산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든, 그건 앞으로 김부장이 감내해야할 일이다.
"아아악! 내손! 내 소오오온-!!!"
손이 아작난 김부장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화아악!
그와 동시에 김부장의 어깨 위에서 황금빛의 물결이 쏟아지더니 내게 잠시 머물렀다.
"실망하여 떠난 '무자비한 성좌'가 당신에게 역으로 제안합니다."
"자신과 계약한다면 '시크릿 클래스'와 함께 가호를 내려주겠노라고."
무자비한 성좌.
처음보는 이름이다.
내가 아는 백성전의 성좌 중에, 저런 이름을 가진 존재는 없었다.
나는 백성전 백 명의 성좌 대부분의 칭호를 알고 있다.
하지만 '무자비한 성좌'와 같거나 비슷한 이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건 내가 알던 백성전의 성좌들이 아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 또 다른 백성전이 등장했음을.
백성전은 하나가 아니었다.
단순히 관할구역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출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이들 역시 내게 큰 도움을 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중지를 치켜들었다.
"꺼져라."
그리고 말했다.
김부장과 저 '무자비한 성좌'에게.
고작 저딴 보상으로 날로 먹으려는 심보가 아주 고약했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성좌'가 눈을 비빕니다."
"'무자비한 성좌'의 얼굴이 붉어집니다."
"'무자비한 성좌'가 분노합니다."
어차피 분노해봤자 놈이 나를 어찌할 순 없었다.
나는 그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성좌가 바라는 건 결국 이야기다.
보다 압도적이며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
내가 써내려가는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 헐레벌떡 뛰어오게 되어있었다.
"몇몇 성좌들이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습니다."
······ 이곳 백성전은 사이가 좋나보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요정을 바라보았다.
마침 두 요정이 사이좋게 허공을 날아다니며 외쳐대는 중이었다.
-여러분! 레벨을 올릴 절호의 기회에요!
-'신의 섬'에 불법 침입자들이 나타났어요!
-저 '추종자'는 그중 한 명!
-'천산신교'의 추종자!
-저 추종자로부터 '생존'하세요!
좌아악!
곧이어 워프를 찢어발기며 나타난 인물.
"인간······?"
"뭐야, 괴물이 아니잖아?"
그건 누가봐도 사람이었다.
나는 놈의 머리 위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Lv.8]
레벨 8!
이제 막 이틀차가 된 각성자들이 상대하기엔 굉장히 버거운 수준의 강자.
두 개의 무리가 합쳐진 건 오로지 저 '천산신교의 추종자'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단순히 레벨만 높은 게 아니라 능력 또한 출중할 게 분명했으므로.
'······ 천산신교?'
게다가 불법 침입자라.
기억이 사라진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천마가 보낸 정찰대인걸까?
화르륵!
추종자의 전신에 화마(火魔)가 깃들었다.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아 광역 스킬이다.
후우웁!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콰아아아!
발로 바닥을 구르며 사람들의 정신을 깨웠다.
동시에 추종자가 준비하던 화염이 거칠게 떨리며 무효화됐다.
그것을 본 추종자가 경악성 어린 외침을 토해냈다.
"처, 천마군림보······?!"
*
신의 섬에 잠입한 건 '야차'들이다.
천산신교의 주인이 명한 명령에 따라 그들은 신의 섬에 들어가 비밀을 캐오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 왜 못 들어가는거지?"
한데, 들어갈 수가 없다.
야차단의 단주이자 혈교의 부교주인 '혈월신녀(血月神女)'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워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특정 이상의 무력을 지닌 자는 입장하지 못하는 듯싶습니다, 단주님."
옆에서 따르는 남자의 말을 듣고 혈월신녀가 이맛살을 구겼다.
"그래서 이제 일류도 되지 못한 아이들만 들어갔나보군."
"어찌하시겠습니까?"
"나찰단······ 빙월신녀 그 빌어먹을 년보다 내가 더 빨리 들어가려 했다만, 이래서야······."
혈월신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마의 명을 받은 건 자신만이 아니다.
경쟁자들이 있었다.
명문가의 후기지수들.
그중에는 자신의 대적자로 떠오르는 빙월신녀도 포함된 상태였다.
하지만 일류 이상의 경지는 입장할 수 없다고 하니, 그저 기다릴 수밖에.
허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왜 아무도 안 나오는 거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그렇게 장장 3일 정도가 지난 시점에.
슈아아악!
누군가가 워프를 타고 나타났다.
야차의 모습이 새겨진 검은 두건을 착용한 자.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잘리고, 뭉게지며, 살아있는 게 기적과 같은 모습.
"어찌된 일이냐? 안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게야?"
"처, 천세, 천세, 천천세······!"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
천마에게만 허락된 그 구호를 외치며 남자는 끝내 목숨을 잃었다.
이에 혈월신녀의 미간은 더욱 깊게 파일 수밖에 없었다.
대관절 무슨 일을 겪었기에 혹독하게 수련받는 야차단의 일원이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죽는단 말인가.
뚝!
그때였다.
옆에서 항아리를 들고 있던 고독술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단주님. 섬에 입장한 야차들은 모두 전멸한 것 같습니다."
항아리 안에 있던 벌레들.
고독들은 배를 까고 죽어있었다.
고독들 전부가 죽었다는 건 입장한 야차들도 전부 죽었음을 뜻했다.
"······ 전멸?"
"예. 헌데,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몇몇 고독들의 모습이······ 마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고독이 자살이라도 했다는 말이냐?"
이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벌레가 스스로 죽어?
하물며 고독이 스스로 죽는 경우는 없다.
고독 자체가 끈질기게 살아남은 마지막 벌레를 뜻했으므로.
그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혈월신녀가 신경질적으로 묻자, 고독술사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고독을 품은 야차단의 단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게 아닐지······."
"대체 왜?"
"모, 모르겠습니다."
혈월신녀가 다시금 죽은 야차단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천세, 천세, 천천세.
마치 천마를 마주한 듯 부르짖으며 죽은 녀석.
'안에서 누구를 만났기에?'
······ 설마 천마라도 뵈었단 말인가?
천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종용이라도 했다고?
아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강력한 환각을 본 것일 터.
'찝찝하군.'
하지만 해소되지 않는,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찝찝한 기분이 계속해서 혈월신녀의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
심의 섬에 입장하고 정확히 7일째가 되는 날.
아침이 밝아오자 변화가 생겼다.
"'생존'이 완료되었습니다!"
"상위의 성적을 거둔 10명은 '천사'를 마주할 기회를 획득합니다."
"섬의 중앙에 위치한 '거룩한 별'로 인도됩니다."
신의 섬, 그 중앙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세대교체
광명이 비춘다.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루고, 성과를 낸 10인의 인물에게서.
십만 명의 도전자.
그중 고작 열 명만이 '거룩한 별'로 향할 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경외 어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이룩한 발걸음 하나하나가 대단치 않은 것이 없었으니까.
기존 지구의 '디맨션 워리어'와는 분명하게 다른, 차세대를 이끌어갈 리더(leader)들.
세계는 저 10인에 의해 대격변을 맞이할 것이다.
"아······."
김부장은 탄식을 내뱉으며 자신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광명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허하디 허한 찬바람만이 무던하게 지나갈 뿐.
누구보다 앞서 나가 이 시련의 중심이 되겠다는 욕심은 그저 욕심으로 끝나 버렸다.
오른팔이 박살 난 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중심은커녕 천 길 낭떠러지 끝에서 겨우 발만 딛고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저 자리에 섰어야 하는데······.'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김부장은 허공에 떠오른 열 개의 광명을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들이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라는 걸.
모든 포커스는 저 10인에게 맞춰질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될 수도 있었는데······!'
분명히 본인에게도 기회가 있었다.
무리를 이끌며 더 높은 위치로 도약할 기회는 몇 번이나 존재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실수로 그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비켜, 돼지 새끼야. 안 보이잖아."
쿵!
거구의 남자가 김부장을 발로찼다.
그러자 볼품없이 바닥에 쓰러진 김부장은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꼽냐? 꼬우면 덤비든가. 확 묻어버릴라니까."
하지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른팔이 박살 난 뒤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 김부장의 성장을 따라잡자 생긴 일이다.
처음 이틀간 그가 모든 성장요소를 독식한 탓에 김부장에게 원망을 가진 사람은 많았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그 위에 서려고 했으니, 아무도 김부장을 동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지금 모습을 보며 꼴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인과응보.
자신이 저지른 업을 그대로 돌려받고 있는 셈이었다.
꽈득!
거구의 남자가 김부장의 머리를 짓밟았다.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다.
그러나 김부장은 땅만 바라보았다.
비록 '상위 10위'에는 들지 못했지만, 이 거구의 남자는 그에 거의 근접한 강자였기에.
자칫 잘못했다간 진짜로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저분 이름이 뭐라고?"
거구의 남자가 선망 가득한 눈빛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에 닿는 곳엔 빛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광명을 받는 자.
그리하여 천사에게로 향하고 있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남자!
"바, 박현명······ 입니다."
꽈아아악!
그 순간 거구의 남자가 김부장의 머리 위에 올려놓은 발에 힘을 주었다.
"아악!"
"'님'자 붙여야지. 저분이 네 친구냐?"
"바, 박현명 님입니다···!"
"그래, 돼지 새끼야. 박현명 님 아니었으면 너도 뒤졌어. 나도 뒤졌고. 우리 다 뒤졌을걸? 그러니까 앞으로도 꼭 '님' 자 붙이라고."
"네, 네······! 꼭 붙이겠습니다!"
"쯧."
거구의 남자가 혀를 작게 찼다.
죽일 가치도 없는 버러지.
하지만 저 남자는 다르다.
박현명.
그가 지난 6일간 보여준 기적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테니까.
열 명의 괴물.
하지만 나머지 아홉 명을 전부 합쳐도, 박현명 하나만은 못 하리라 확신했다.
그는 기존의 상식을 깨고 뒤흔드는 룰 브레이커였으므로.
'그 추종자라는 것들도 기세만으로 압도하셨지.'
연이어 나타난 '천산신교의 추종자'들은 박현명을 만나는 족족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추종자'들은 하나같이 항거불가의 강자였다.
웬만한 디맨션 워리어와 맞붙어도 모조리 씹어먹을 완성형의 강자를, 이제 막 각성한 풋내기들이 상대하는 건 어불성설 꿈도 못꿀 일.
한 명을 상대하는데 족히 수백명은 죽었으리라.
한데 그러한 강자들이 박현명의 앞에만 서면 모두 같은 태도를 보인 것이다.
심지어 자결(自決)로 끝을 맺었다.
그 광경은 뭐라고 해야할까.
'······ 경외감, 이라고 해야겠지.'
경악하고, 경외하며, 스스로의 생명을 제물로써 바쳤다.
바친 것이다.
박현명에게.
지금 광명의 빛과 함께 나아가는 저 남자에게!
신에게 공양하는 인간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지켜보는 이들도 당황했으나······ 같은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모두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 박현명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결코 평범한 인간일 수 없다.
-우매한 종이 결례를 범했나이다!
-목숨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 추종자들이 추종하는 신과 같은 지고한 존재.
어쩌면 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발을 한 번 구르고, 눈빛을 쏘아내는 것만으로도 추종자들을 굴복시켰으니까.
그가 보았던 걸 말한다면 그 누가 믿을까.
그러니까 기적이다.
기적을 마주한 것이다.
'기세만이 아니야.'
허나 박현명의 무서운 점은 추종자들을 자결시킨 기세만이 아니었다.
6일째가 되는 날 진행된 마지막 시련에서.
······ 박현명이 보여준 모습은.
"으음!"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며 거구의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거룩한 별.
신의 섬과 함께 보상으로 주어진 별.
나는 마침내 그 앞에 섰다.
그리고 깨달았다.
'성운을 마시는 별······!'
빌헬름이 가지고 있던 별들 중에서도 가장 특출났던 별.
레벨 10을 찍어야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 별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별에는 '축복의 천사'가 깃들어 있었다.
치아아악!
손을 가까이 대자, 강렬한 통증과 함께 살갗이 타들어갔다.
'아직 취할 수 없다.'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 별이 내게 도달하지 않았던 건지.
레벨 10을 찍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레벨 10이 되지 않았기에,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게 '거룩한 별'?"
"이 안에 천사가 있다는 건가?"
나를 제외하고도 별의 주변엔 아홉 명의 인물이 더 있었다.
메인 퀘스트 1, 생존에서 상위의 점수를 낸 열 명.
하지만 왜 이곳으로 모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의아해하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반가워요.」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모를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음성으로.
「제 이름은 '가브리엘'」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위대한 전사들이여, 부디 투쟁하십시오.」
갑자기 투쟁(鬪爭)하라고?
설마 여기 모인 열 명이 모두 싸우기라도 하라는 말일까?
「가장 위대한 전사에게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전승'을 선물드리겠습니다.」
「또한, 가장 위대한 전사만이 저를 볼 자격이 있습니다.」
······ 맞나보다.
천사 가브리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가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이곳에 모인 건 십만 명 중에서도 가장 특출난 열 명.
그 실력은, 당연히 말이 필요 없으리라.
하물며 그중에서도 최강자를 가리는 자리.
"미안하지만, 다 내 밑밥이 되어줘야겠어."
"덤벼, 이 새끼들아!"
몇몇 사람들이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의기롭게 소리쳤다.
'가장 위대한 전사라.'
오직 나만은 '거룩한 별'의 옆에서 발을 떼지 않고 있었다.
최종결산.
이 전투를 끝으로 아마 모든 '생존'이 완료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한 뒤, 결론을 내렸다.
'제대로 보여줘야겠군.'
제대로 끝을 봐야겠다고.
*
"신의 섬. 대체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최소 수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실종되었습니다!"
"실종된 사람들은 모두 '신의 섬'이 강제소환되었다는 이야기가 현재 가장 유력하죠."
"몇몇 전문가들은 저 신의 섬에서 '각성'이 이루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각종 매스컴은 난리가 났다.
신의 섬이 출현한 이후 사라진 사람들을 조명하며 온갖 기사를 쏟아냈다.
본래라면 플레이어만 볼 수 있는 '메시지'를 그들 모두 보았기 때문이다.
튜토리얼이 시작되었다는 말.
신의 섬에 입장하겠느냐는 그 선택창을.
"만약 일반인도 각성이 가능하다면, 현재 '디맨션 워리어'는 대체될 수도 있을까요?"
"······ 가능하다고 봅니다. 오로지 비각성자, 그러니까 '디맨션 워리어'는 '신의 섬'에 입장할 수 없는 걸 보면 세대의 완전한 교체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여겨지고요."
"그럼 '디맨션 워리어'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겠군요!"
"사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그들이 부리는 행패를 우리는 눈감아줬습니다. 하지만 지구인의 각성은 앞으로 많은 변화를 야기할 겁니다."
"단발성 이벤트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어찌 됐든 2세대 각성자가 등장한다면 그 자체로 엄청난 가능성입니다. 그간 1세대 각성자들이 누렸던 혜택들에 대해서도 다시 점검해 봐야 하겠지요."
소위 '전문가'라 칭하는 사람들이 등장해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마치 그간 쌓인 울분을 풀어내듯이.
디맨션 워리어.
그들을 벌써 1세대 각성자라 칭하며, 신의 섬에 입장한 사람들을 2세대 각성자로 구분 짓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한 건 1세대 각성자 중에 '신의 섬'에 입장한 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세대를 교체하라는 신의 계시가 아니겠나.
그래서일까.
1세대 각성자, 디맨션 워리어에게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연히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어느덧 신의 섬에 도전한 사람들은 눈엣가시가 되어버렸다.
'어차피 막 각성한 놈들이 뭘 할 수 있겠어.'
'그래봤자 판게니아를 경험한 우리보단 약할 거다.'
'플레이어를 대체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쯧쯧.'
설령 진짜 각성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제 막 시작하는 초보자일 뿐이다.
판게니아를 접하지 못한 그들과 자신들간의 차이만 명확하게 비출 터.
그래서 비웃는 플레이어들도 많았다.
이후 신의 섬이 등장한지 7일차가 된 시점,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됐다.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신의 섬.
그곳의 튜토리얼이 끝난 순간.
모든 플레이어의 앞에 튜토리얼이 끝났다는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다.
"도전자들이 귀환합니다."
"2차 튜토리얼의 개시까지 앞으로 720시간"
감쪽같이 사라졌던 사람들이 하나, 둘 재등장했다.
다만, 예전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각성(覺醒).
디맨션 워리워와 같은 괴력을 지닌 상태로 그들은 귀환했다.
그것도 변신을 통해 힘을 얻는 1세대 각성자와는 사뭇 다른, 본인 스스로가 각성한 채로.
놀라운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명예의 전당' 순위에 변동이 생겼습니다."
전당의 순위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닌 대량의 변화가.
대체 왜?
플레이어들은 당황했다.
어째서 신의 섬에서 이제 막 시련을 겪은 저들과 자신들이 같은 명예의 전당을 공유하는지 알 길이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러한 당황은 곧 더욱 큰 경악으로 변해버렸다.
명예의 전당을 공유하며, 순위가 변한 것들 모두가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질 정도의 일이 생긴 것이다.
"뭐, 뭐야?"
"미친!"
"란돌프의 기록이 깨졌어······?!"
메인 퀘스트 1에서부터 11까지.
모든 전당의 1위를 거머쥐었던 란돌프.
등장한 이래 단 한 번도 1위를 놓친 적 없던 그 이름이, 처음으로 2위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천사의 정체
메인 퀘스트 1, 생존.
급박한 상황, 극악의 생존환경에 놓인 캐릭터를 어떻게든 생존시키는 게 목표인 퀘스트.
레벨은 1로 고정이며 주어진 장비와 도구는 한숨나올 정도로 형편없다.
당연히 아무리 잘 헤쳐나가도 점수의 상한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
오랜시간 '명예의 전당' 1위가 195점의 그라시아였으니 높은 점수를 달성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절대로 깨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라시아의 아성도 란돌프의 이름 아래 무너졌다.'
란돌프.
그가 등장하기 전까진.
영웅연합의 연합장, 박태우는 눈을 감았다.
명예의 전당에 란돌프라는 이름 석자가 올라왔을 때의 전율.
당시만 하더라도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220점.
플레이어 모두가 메인 퀘스트 1에서 그러한 점수가 가능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으니까.
물론 그 뒤로 더 말도 안 되는 점수대들을 연이어 달성하긴 했지만, '생존'의 점수는 전체적인 '실력'과도 맞물린다.
당장 란돌프만 해도 200점대를 처음으로 돌파하며 전설의 서막을 알리지 않았나.
'냉철함과 순발력, 그리고 무기를 다루는 기술 등등······ 그 모든걸 합친 순수한 실력만이 발휘되는 장이 메인 퀘스트 1이니.'
하여, 메인 퀘스트 1의 점수를 보면 얼마나 대단한 놈이지 알 수 있다.
오로지 순수한 실력으로 인정받는 게 '생존'의 내용인 탓이다.
실제 랭커를 보면 이 '생존'의 점수대로 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하이랭커는 순위는 생존의 순위와 얼추 비슷하게 맞물려있는 것이다.
그러니······ 생존의 점수와 순위는 그 사람의 잠재력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맥스 레벨을 찍고, 초월을 하려거든 혼자서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순수한 실력 자체가 성장고점이, 잠재력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얼마나 좋은 장비를 착용하고, 특수한 클래스나 스킬을 얻어도, 실력이 없는 자는 한계를 맞이하기 마련이었다.
애초에 '판게니아'는 싱글플레이를 지향했다.
9레벨을 넘어서면 경험치의 획득 자체가 '압도적인 경험' 혹은 '혼자서 사냥과 시련'을 해결해야만 가능했으므로.
한데.
'······ 명예의 전당 순위가 대폭 바뀌었다. 심지어 200점대를 넘어선 사람이 세 명 늘었어.'
200점대를 처음으로 넘겼던 란돌프.
그 다음으로 200점대를 넘어서는 자가 한꺼번에 세 명이나 나타났다.
메인퀘스트 1의 점수가 잠재력과 직결된다면, 그라시아를 넘어서는 성장가능성을 지닌 사람이 무려 세 명이 더 등장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한 명은 란돌프보다도 점수가 높았다.
화악!
화아아악!
박태우는 귀환자들이 내뿜는 빛을 바라보았다.
세계 곳곳에서 빛과 함께 돌아온 수만 명의 사람들.
'저중에··· 있다. 그라시아를, 란돌프를 넘어서는 괴물들이.'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눈치챘을 터.
저 빛은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처럼.
적어도 플레이어들에게 저 빛은 최초의 불과도 같았다.
박태우는 명예의 전당 순위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중 200점이 넘는 사람만을 집중적으로 보고, 또 봤다.
쿠에쿠, 그리고 최강남.
글자만 봐도 국적이 그려지는 이름들이다.
신의 섬에서 진행된 튜토리얼이 그들이 경험한 '생존'과 비슷한 내용이라면, 저들 역시 순수 실력만으로 이만한 점수를 거머쥐었다는 이야기.
1세대 각성자와 2세대 각성자의 상황이 다소 다르다고는 해도 점수는 절대적이다.
'최강남······ 한국인이 아닐 수 없는 이름이로군.'
그러니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
누구보다 빠르게 영웅연합으로 데려와야만 했다.
그라시아를 넘어선 가능성을 지닌 저 예비 괴물을 말이다.
최강남!
이름만 봐도 느껴지는 강렬함.
그가 지방세력들에게 넘어갔다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서울이 불바다가 될 수도 있다.
그 무법자들에게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동시에 궁금증이 생겼다.
플레이어들이 메인퀘스트 1의 순위에서 얻은 보상은 단순한 장비만이 아니다.
'최초의 로그아웃.'
상위 성적의 열 명은 로그아웃을 가능케 해주는 이권을 쥐여 주었다.
나중에야 거의 대부분 플레이어가 로그아웃 가능하게 됐다지만, 메인 퀘스트 1을 깨자마자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이점이 많다.
정보의 취득을 훨씬 더 빠르고 많이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니.
'2세대 각성자들은 판게니아의 캐릭터와 빙의되지 않는다.'
예상컨대 2세대 각성자는 오직 지구에서만 활동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과연 상위 순위를 거머쥔 2세대 각성자는 무슨 '이권'을 갖게 되었을지.
또한······.
궁금했다.
란돌프를 넘어선 한 사람.
1위에 도달한 괴물은 어떤 보상을 받았을지!
'··· 한국인이 두 명이라.'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한국인은 최강남 한 명만이 아니었다.
1위.
그 빛나는 이름에, 박태우의 눈은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다.
······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점수였으니까.
*
"내용을 정산합니다."
"압도적이며 경이롭습니다. 결단코 초보자는 이룩할 수 없는 영역!"
"총점 300점. 메인 퀘스트 - '명예의 전당'에 업데이트됩니다."
"백성전의 성좌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입니다."
"'잔악한 성좌'가 턱을 쓸어내립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됩니다."
"'불길한 성좌'가 혀를 낼름거립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됩니다."
"'냉혹의 성좌'가 눈을 빛냅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됩니다."
"'무자비한 성좌'가 아닌 척 슬그머니 관심을 드러냅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됩니다."
······.
"보상이 초월합니다."
"SP 1,000점을 획득합니다."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을 획득했습니다."
순간 눈앞에 떠오르는 수많은 글자들.
전부를 꺾고, 전부를 얻어, 유일무이한 점수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보상은 차차 확인하면 될 일.
나는 그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거룩한 별'에 더 관심이 갔다.
「위대한 전사여, 위대한 섬의 주인이시여.」
···역시나.
요정들은 나를 못 알아봤지만, 축복의 천사는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제야 대화를 할 마음이 생겼나 보군."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처음부터 강제로 나를 퇴장시킨 게 바로 눈앞의 '천사'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 천사였다.
문제는 그게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천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순백의 날개와 인간의 몸을 지닌 그런 천사가 아니었다.
내 눈앞에 있는 천사는, 아무리 봐도 '천사'와는 거리가 멀다.
'이게 천사라고?'
하여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던 것도 사실이다.
여태껏 한 번도 판게니아에 등장한 적이 없던 천사.
적어도 나는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본 적이 있다.'
···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긴 걸 나는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제국의 사신교에서.
거대한 노란색의 구슬.
용이 지닌 일반적인 '염원구슬'보다 족히 백 배 이상 큰 크기.
당시 사신교는 그 구슬로 말미암아 판게니아에 접속한 플레이어의 숫자 따위를 알고 있었다.
사신교가 플레이어에 대해 모조리 꿰뚫고 있던 건 모두 그 구슬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노란색 구슬이 천사였다고?
'미친.'
이제야 이해가 됐다.
왜 판게니아에 악마도, 마족도, 괴물도 많은데 천사만 없었는지.
'천사가 있어도 없다고 할 만하군.'
누가 이걸 천사라고 생각하겠나.
나라도 생각 못 한다.
구슬이 직접 자신을 '천사'라고 칭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제 모습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는군요.」
의외라는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놀라고 있다. 다만, 예전에 사신교에서 한 번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서."
환상이 깨진 기분이다.
동심 파괴도 이런 파괴가 없었다.
곧이어 가브리엘이 말했다.
「천사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선택받은 자가 아닌 이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면 아마도··· '가호'를 잃은 천사를 보셨겠군요.」
"뭐가 다른 거지?"
「천사는 현상을 변화시키는 '가호'를 내리는 존재입니다. 제 능력과 섬의 특이성이 합쳐지며 사람들을 각성시키듯이.」
한 마디로 기적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기적을 가져오는 자. 그게 천사였다.
가호를 잃은 천사는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
나는 그간 궁금했던 바를 물었다.
"천사는 천상에서 내려온 건가?"
「예.」
즉답.
천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천상은 뭐 하는 곳이지?"
「'거만하고 오만한 자들의 이상향' 같은 곳입니다.」
애매모호한 대답.
허나, 천국은 아닌 것 같았다.
더불어 그들이 인간사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겠다.
거만하고 오만하다는 말을 천사마저 사용하는 걸 보면.
"··· 란돌프가 아닌 이 몸으로 입장한 건 내가 섬의 주인이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란돌프와 박현명 사이의 '특이성'에 의한 이례적인 경우입니다. 섬의 축복은 이미 각성한 자들에게 닿지 않습니다.」
축복의 천사 가브리엘도 의도하지 않은 상황.
말인 즉, 나 같이 두 번 각성하는 경우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다는 뜻이다.
「위대한 섬의 주인이시여, '전승'과 저의 '가호'를 드리겠습니다. 부디 영원하시길.」
"잠깐. 설마?"
순간 나는 이맛살을 구겼다.
왜인지 다음 일이 상상이 됐으니까.
이윽고 가브리엘이 묘한 말을 남겼다.
「더 대화를 나누면 '기록'이 남게 됩니다.」
「제가 '기록'되는 걸 막을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성장한 페어리 드래곤들과 함께.」
「······ 부디, 저희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시옵소서.」
그 말을 끝으로.
"'대천사의 가호'가 부여됩니다."
"히든 클래스의 '전승'이 도착했습니다."
"'축복의 천사 가브리엘'이 당신을 퇴장시킵니다."
*
시간이 없다는 듯 다급히 나를 퇴장시킨 가브리엘.
기록이 남는다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처음 사신교에서 '천사'를 봤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천사는 일종의 정보집약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게임의 플레이어가 '로그'를 남기듯이.
만약 그렇다면 나와 가브리엘이 나눈 대화 자체의 '로그'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나를 퇴장시켰다는 것이다.
'나를 감추기 위해서.'
그 의도는 뻔했다.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길 원하지 않아서.
내가 신의 섬의 주인이고, 란돌프라는 사실을 굳이 다른 이들이 알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도 지금 나의 충격에 비할 바는 못됐다.
'여기는······.'
눈을 뜨자, 내가 신의 섬으로 입장한 지하 수도가 아니었다.
지하수도 특유의 퀘퀘한 냄새도 없고, 심지어는 주변이 어둡지도 않았다.
어딘가로 이동한 건가 싶었으나 적어도 이곳이 '지구'는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비켜! 깔려 죽기 싫으면 전부 비켜라!"
"으랴!"
말을 타고 지나가는 행렬.
수많은 은빛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도심 한가운데를 내달리고 있다.
어깨엔 '여신교'의 표식을 단 채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여신교의 성도(聖都) 아드리움.'
이곳은 여신교의 심장과도 같은 도시이며,
나는 박현명인 상태로 판게니아에 들어왔다는 걸.
롱기누스의 창
어이가 없었다.
내가 박현명인 상태로 판게니아의 땅을 밟게 될 줄이야!
'상상초월이군.'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아니, 그야 상상은 해봤지만 현실이 되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하여 빠르게 정신을 다잡았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으니까.
'판게니아의 존재는 침략의 워프를 통해 지구로 향할 수 있지.'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이다.
지구의 존재가 판게니아로 향했다.
문제는 '침략의 워프'를 통해 지구로 향한 판게이나의 존재를 시스템은 '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 모든 플레이어에게 메시지를 뿌려 '처치'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주변을 살피며 경계했다.
우웅!
그때였다.
가슴팍을 울리는 진동.
'이건?'
고개를 숙여 확인하자 가슴팍에 목걸이가 걸려있다.
그리고 목걸이의 중심부에 있는 '창끝'이 거칠게 울리는 중이었다.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이 기능하고 있습니다."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을 통해 '차원도약'을 할 수 있습니다."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을 완성하십시오."
"창의 조각이 근처에 있습니다."
신의 섬에서 받은 보상.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이 이 현상의 원인이라는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롱기누스의 창을 완성하라······ 가브리엘이 원하는 게 이거였나보군.'
대천사 가브리엘.
그녀가 나를 퇴장시킨 이유가 이것인 듯 싶었다.
무려 차원도약을 가능케해주는 물건.
완성하게 되면 어떤 기능을 할지 예상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쿠릉!
쿵! 쿵!
굉음을 내며 성도의 중심을 달리는 긴 행렬.
"'루'의 기사단이 어딜 다녀 오는 겁니까?"
나는 옆에 있는 상인에게 물었다.
루의 기사단.
여신교를 대표하는 가장 강력한 기사단 중 하나이자 오로지 '성전'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그들이 다급히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래서 묻자, 상인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 성도 사람이 아닌가보군."
"예. 시골에서 성지순례를 위해 상경한지 얼마 안 됐습니다."
가장 무난한 대답이었다.
이곳 아드리움은 여신교의 성도.
당연히 성지순례를 위해 매년 찾는 신도의 숫자도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상인이 이해한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으음. 최근 '발로그 교단'과 '여신교'가 전쟁을 시작한 건 알고있나?"
"알고있습니다."
모를 리가.
판게니아를 뒤흔드는 뜨거운 감자 중 하나가 발로그 교단과 여신교 간의 전쟁이었다.
모두가 '발로그 교단'이 참패하리라 생각했지만 반전이 일어난 탓이다.
1차 접전에서의 대패.
여신교는 수많은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추기경과 성녀를 잃었다.
그만한 무력을 신생교단이 어떻게 지니고 있는건지 모두 의견이 분분했다.
덕분에 대대적인 성전을 준비하고자 여신교는 풀었던 돈을 모조리 회수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8영웅회도 함께 몰락한 것이다.
어쨌거나.
'발로그 교단은 사신교의 후원을 받고 있다.'
나는 안다.
이곳에서 오직 나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죽은 추기경과 성녀의 영혼이 사신교의 만찬에 나왔지.'
······ 황금 여우.
여우가면을 쓴 그 여자가 둘의 영혼을 만찬식에서 꺼냈다.
그녀가 아마도 발로그 교단의 전폭적인 지원자이리라.
아니면 그녀 외에도 다른 사신교 간부도 지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저주받은 놈들이 추기경님과 성녀님을 해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은 모양이야."
"해할 수 있었던 이유라면?"
"나야 모르지. 하지만 이제 막 발돋움한 발로그 교단 따위가 어떻게 여신교를 상대할 수 있었겠나? 분명히 악마와 거래한 거겠지."
악마와의 거래.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배후가 사신교라면, 왜 사신교는 발로그 교단을 앞세워 여신교와 전쟁을 일으킨걸까?
여신교의 견제 차원일까?
'저게 그 이유인가보군.'
확실한 건 저 행렬의 중간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오오, 성녀님들!"
"라의 성녀님이야!"
"아이에님!"
"아아! 너무 아름다우셔!"
동시에 모두가 바닥에 머리를 찧고 양 손을 들어올렸다.
경외한다는 의미다.
행렬의 중심, 천을 씌워놓은 '무언가'와 함께 두 성녀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성녀 라, 아이에.
현재 여신교의 간판격인 두 성녀가 함께 있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으니까.
나도 자세를 취하며 슬쩍 시선을 들어올렸다.
우웅! 우우웅!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이 더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 저 천의 안쪽에, 창의 조각이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창의 조각을 가진 '무언가'겠지만.
'저 안에 있는 게 뭐지?'
모르겠다.
족히 5m는 될법한 크기.
하지만 천에 가려져 알 수가 없다.
그것도 관찰과 투시가 불가능한 특수한 능력을 지닌 천이었다.
한데······.
뭐라고 해야할까.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거지?'
천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안에 있는 게 나와도 관계가 있는 것일는지.
그 찰나였다.
추가적으로 눈앞에 떠오르는 글자들.
"'대천사 가브리엘의 가호' - 다른 대천사를 찾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전승' - 히든클래스를 '연성'할 수 있습니다."
"'운명의 역설(1)' - '란돌프'와 가까울수록 '박현명'의 존재력이 희미해집니다."
"'운명의 역설(2)' - 누군가가 당신이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님'을 알아차리거나, 인지할 경우, 존재력이 희미해집니다."
대천사의 가호가 발동됐다.
외에도 현재 적용중인 것들이 표시되고 있었다.
'운명의 역설······ 아주 대놓고 활동할 수는 없겠군.'
이래서야 란돌프는커녕 부캐릭터와 접촉하는 것도 위험하다.
아니, 란돌프와 관계된 모든 존재가 위험했다.
존재력이 희미해진다는 건 곧 소멸을 의미했으니.
이것이 차원도약의 대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보다도 더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성도에 대천사가 있다.'
난데없이 가브리엘의 가호가 발동된 이유가 무엇이겠나.
이곳 성도 아드리움에 가브리엘과 같은 대천사가 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상컨대 대천사는 각기 지닌 '가호'의 능력이 다를 터.
그렇다면.
'멸망의 파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대천사의 가호다.'
어느정도 확신이 들었다.
라이가에게서 느껴졌던 그 가호의 기운이, 어쩐지 가브리엘의 가호와 닮아있었던 탓이다.
'라이가는 대천사의 가호를 받았다.'
그리고 사신교에서 보았던 그 가호를 잃은 대천사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퍼즐이 하나, 둘 맞춰져가는 기분.
그제야 비로소 목표가 정해졌다.
'모든 대천사의 가호를 받고, 롱기누스의 창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나, 박현명이 해야할 일이었다.
*
사막도시 파이살메르.
그곳에 이자벨라가 발을 들였다.
"여, 여왕님?"
바바리안들은 당황했다.
사막여왕의 후계자인 그녀가 기별없이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쉿. 조용히 들어가고싶구나."
이자벨라가 검지를 들며 침묵을 요구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곤 조용한 호송이 시작됐다.
이자벨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돌아오는 느낌.
돌고, 돌아, 결국 이곳 사막도시였다.
어쩌면 그녀가 진정으로 있어야할 곳은 그녀의 가문인 데르시안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곳 파이살메르였을지도 모른다.
'란돌프님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내 뿌리를 찾고 싶었는데.'
란돌프를 처음 만났을 당시를 떠올린다.
대원정을 실패하고 흩어진 패잔병들.
그 가운데 란돌프가 있었다.
처음에는 죽이려고 했다.
사막 여왕이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니까.
사막 여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니까.
하지만 란돌프가 자신의 풀네임을 부르고, '성각자'임을 밝히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를 통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탈출하고자하는 욕망이 자라난 것이다.
'만약 그때 란돌프님과 탈출하지 못했다면······.'
아서라.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사막여왕의 목적은 '마혈왕'을 소환하는 것.
그 의식만을 위해 도시 전체를 '오염' 시키지 않았나.
오염원이 되어 마혈왕을 소환하려는 제물로 사용됐겠지.
뿐만인가.
'내 뿌리를 찾고자 하는 욕심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겠지.'
뿌리.
그녀의 근원.
제국의 데르시안 가문!
애초에 그곳엔 그녀가 서있을 자리가 없었다.
서 있기도 싫은 곳이었다.
그곳보단 차라리 이곳이 낫다.
이곳 역시 거짓과 가식으로 가득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추억이 있다.
'소노라.'
소노라와의 추억이.
그녀와 함께 지냈던 나날들이.
이자벨라가 잠든 란돌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분.'
란돌프는 생명의 은인이다.
하지만 단순히 '은인'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분이었다.
이 모든 게 그와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그와 만나지 않았다면, 혹은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면······ 우물안에 갇힌 채 영원토록 후회만 했으리라.
"궁에 도착했습니다, 여왕님."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
이자벨라가 말했다.
"내가 도착했음을 알리고, 모두 궁을 비우도록. 만남의 의식은 내일 따로 진행하겠다."
"명을 따릅니다!"
마차를 호송안 바바리안들이 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머지않아 사람들이 궁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궁을 나온 뒤, 이자벨라는 조심스럽게 란돌프를 등에 업었다.
그리곤 계단을 올랐다.
침실까지 천천히 올라간 그녀는 란돌프를 침대에 눕혔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돌아오겠습니다."
이불을 덮어주고 한참 란돌프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린 이자벨라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이제··· 현실과 마주할 시간이었다.
이전 사막여왕이 숨겨놓은 비밀의 방.
심연과 연결되어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도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이 궁의 지하에 있어.'
궁의 아래에 봉인된 문이 있다.
그 문을 열면 심연과 연결된 장소가 나온다.
소노라와 아이들이 갇혀있던 끔찍한 장소가.
이자벨라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서재.
그곳 외벽에 놓인 석상들.
모두 다른 방향을 보는 석상들의 얼굴을 한쪽 방향으로 일치시켰다.
쿠릉!
그러자 숨겨진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로 향하는 길이다.
이자벨라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갔다.
끝없는 통로를 계속해서 내려가자, 그 끝에 거대한 문 하나가 나타났다.
'이 문 너머에······.'
소노라가 있다.
지금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재차 숨을 크게 들이마신 이자벨라가 석문에 손을 댔다.
그리고 천천히 밀었다.
쿠르릉!
바닥을 끌며 석문이 움직였고, 곧이어 이자벨라는 문의 건너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동시에 이자벨라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었다.
'이곳이야. 이곳에서··· 우리는 함께 있었어.'
끔찍했던 기억속의 공간과 일치하는 모습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었다.
이자벨라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억을 되새기며 발을 옮겼다.
"소노라?"
하지만 이자벨라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가기만 했다.
어두운 공간의 그 어디에도, 소노라가 없었으니까.
혼종이 되어 이자벨라를 습격했던 소노라.
그 시체라도 있어야 하건만.
어디에도, 없었다.
"소노라!"
이자벨라는 목놓아 외쳤다.
그러나 여전히 들려오는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외마디 이자벨라의 목소리만이 울려퍼질뿐.
'제발.'
발걸음이 빨라진다.
혹시나 자신이 놓친 곳이 있을까봐.
'어디 있는 거니, 소노라?'
하지만 한참을 돌아다녀도 마찬가지였다.
털썩!
결국 이자벨라는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이자벨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무 늦게 온 것이다.
시체조차 남아있지 않다니.
이래서야 죽어서도 소노라를 볼 면목이 없다.
'이 표식은 뭐지?'
물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건 아니다.
이상한 표식이 그려진 천조각이 있었다.
커다란 흑색의 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알 겨를이 없었다.
"······ 발로그 교단의 특수한 표식이다. '흑점'을 뜻하는 거지."
"란돌프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자벨라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껏 잠들어있던 란돌프가 돌연히 나타난 것이다.
'이제 알겠군.'
······ 그리고 이곳에 와서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천으로 가려진 무언가.
왜인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그것.
'소노라.'
소노라가, 여신교의 성도 아드리움에 있다.
······ 롱기누스의 창을 품은 채로.
소노라
로그인과 로그아웃.
로그인을 하면 나는 란돌프가 되고, 로그아웃을 하면 다시 박현명으로 돌아온다.
이 명제는 바뀌지 않았다.
남겨진 쪽은 잠들며 공격받으면 '수호벽'이 발동되는 것도 같았다.
동시에 두 육체를 인식하여 움직이는 건 역시나 불가한 모양.
"왜 발로그 교단의 표식이 이곳에······?"
이자벨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곳은 그녀와 아이들이 갇혀있던 심연의 외곽.
사막여왕에 의해 서로 죽이고 잡아먹던 살육의 현장.
왜 이곳에 전혀 연관이 없는 '발로그 교단'의 표식이 대놓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발로그 교단이라.'
게임에서 접해본 적은 몇 번 있다.
실제로 접해본건 '균열의 탑'에서 마스터를 죽일때였지만.
그 팔라딘 녀석.
발로그 교단의 '흑점'과 여신교의 '빛의 폭발'을 동시에 사용했다.
분명히 '멸천자'에게 자신의 성혈을 바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 발로그 교단이 다루는 흑점은 '오염'과 닮았다."
일전 사막여왕이 도시 전체를 오염시켜 '마혈왕'을 소환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
이자벨라는 스스로를 희생하여 그 의식을 막아섰다.
물론 마혈왕은 내 안에서 죽었고, 히든 특성으로 발현되었다.
하지만 나는 사막여왕이 어떻게 인위적으로 '오염'을 일으켰는지 궁금했다.
오염은 도시에 생겨나는 오염원을 통해 우연히 일어나는 걸로 알고 있었으니까.
판게니아가 천공으로 떠오르며 생긴 부작용이라고 알려졌으므로.
한데, 그 궁금증이 이제야 풀렸다.
'흑점의 속성.'
발로그 교단이 다루는 '흑점'은 기존의 속성과는 궤가 달랐다.
어둠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돈도 아니다.
'흑점'은 계속해서 중첩되고 번지며 파괴되는 속성이 있다.
마치 오염원처럼.
어쩌면 '흑점'은 '오염'의 속성을 지닌 걸지도 모르겠다.
한 마디로 발로그 교단은 세계의 오염과 관계되어 있다.
"사막여왕이 발로그 교단과 교류를 했었단 말씀입니까?"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말하는 이자벨라.
뱀공주로 활약하던 당시에도 발로그 교단과 사막여왕이 교류하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아한 게 당연하다.
하지만 발로그 교단은 원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곳이다.
여신교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는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발로그 교단이 여신교와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 아는 바가 없다.
본래 전쟁이 벌어지면 호사가들에 의해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게 전쟁의 양상이건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곳이, 흔적을 남겨놨다.'
그런데 대놓고 흔적이 남아있다.
표식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며 입을 열었다.
"높은 확률로 교류했겠지."
"그럼 발로그 교단 이 표식을 남겨놓고······ 소노라를 납치해갔다는 말씀입니까?"
처음으로 이자벨라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발로그 교단이 남겨놓은 표식이 아니다."
"그럼 대체 누가?"
"소노라가 남겨둔 표식이다."
"······ 예?"
"그 천을 자세히 봐라."
세월이 묻어나는 해지고 누래진 천.
천 위에 그려진 표식에 정신이 팔려, 이게 누구의 천인지 간과하고 있었다.
"이건······ 아!"
동시에 이자벨라의 눈동자가 조금씩 확장되기 시작했다.
익숙했으니까.
이 천은, 어떤 옷에서 떨어진 것이다.
"제가······ 제가 입었던 옷의 한 부분입니다."
바로 이자벨라의 옷이었다.
이자벨라가 입고 있었던 옷의 한 조각.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
"소노라는 죽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이 칠흑같은 곳에서 너를 추억하고 있었던 게다."
마지막 전투.
내가 이자벨라의 몸을 빌어, 게이머로 플레이했을 당시.
나는 혼종이 되어가는 소노라를 상대로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승리했다는 게 죽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 혼종은 일반적인 혼종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들고 있던 조잡한 무기로 그 변종 혼종을 죽이는 건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죽지 않은 소노라는 이자벨라의 대결에서 찢어진 이자벨라의 옷 한쪽을 손에 넣었고, 그 추억을 간직한 채로 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오랜시간을 버텨온 것이다.
"아······."
이자벨라가 가슴팍을 부여잡고 손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심장이 아프기라도 한 듯이.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너무나도 슬프고, 너무나도 놀라면, 도리어 눈물은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소노라.
자신의 친구가 이곳에서 혼자 계속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외로웠을텐데.
사무치도록 외로웠을텐데.
혼자 어둠속에 놓인 소노라의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이 무너질 듯이 아려왔다.
발로그 교단에 납치되기 직전, 소노라는 필사적으로 이 천에 그들의 표식을 그려놓은 것이다.
소중하게 간직하던 이자벨라의 옷 조각을 사용해서.
스스로의 피로 표식을 새겨놓았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장소에 굳이 남겨둔 건··· 아마도 이자벨라가 찾아주기를 바란 것이 아닐는지.
"제가········· 너무 늦었군요."
"아직 늦지 않았다."
"······?"
"소노라는 살아있다."
허나 늦지 않았다.
소노라는 살아있다.
여신교의 성도 아드리움에.
발로그 교단과의 전쟁에서 여신교가 직접 소노라를 포획한 게 분명했다.
왜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을 품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발로그 교단의 무기로 사용된 건 틀림없어보인다.
그리고 생포했다면 한동안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곧이어 이자벨라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소노라가······ 진정 살아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 알고 계신 겁니까? 어디에 있는지?"
"성도 아드리움."
"······!!!"
내 대답을 듣고 이자벨라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윽고 이자벨라가 몸을 추리고 일어섰다.
가만히 뒀다간 아드리움으로 곧장 향할 것만 같은 기세.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막무가내로 달려든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드리움에 닿기 전에 네가 해야할 일이 있다."
"······ 말씀해주십시오."
그게 무엇이든, 무슨 일이든, 해내겠다는 표정과 눈빛.
"'태초의 숲'으로 향한 앤드류 사제를 데려오도록. 그가 있어야 소노라의 신병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다."
앤드류 사제를 데려오라는 말에 이자벨라가 의아해했다.
"란돌프님. 앤드류 사제가 정규사제이긴 하지만······ 여신교에 큰 영향력은 없지 않습니까?"
"물론 혼자서는 힘들겠지. 당연히 성녀 세야도 함께해야한다."
"아······!"
"성녀 세야와 앤드류 사제를 이끌고 '아드리움'으로 향해라."
대원정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성녀 세야.
그녀가 앤드류 사제와 함께 귀환하는 그림이 그려져야 일이 수월해진다.
이자벨라가 말했다.
"란돌프님께선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나는······."
말을 꺼내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박현명으로의 내가 아드리움에 있음을 이자벨라에게 알려줘야할까?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아선 안 된다.'
운명의 역설.
인식하거나, 인지하기만 해도 내 존재력은 얕아진다.
나, 박현명이 지구가 아닌 판게니아에 있다는 걸 이자벨라가 알아차린다면, 그 즉시 소멸할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는 이자벨라가 내 얼굴을, 박현명의 얼굴을 알고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서로의 기억이 어디까지 공유되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란돌프의 몸으로 성도에 들어가는 건 어렵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란돌프가 성도에 들어서면 필연적으로 정체를 들키게 될 것이다.
내가 여태까지 '여신교'와 접촉하지 않은 이유다.
성도에 직접 들어가면 200% 걸리게 되어있다.
'여신의 결계.'
성도에 새겨진 고유 결계, '여신의 결계'는 '멸망'과 관계된 것들을 막는다.
문제는 란돌프의 안에 '멸망의 파편'이 있다는 것이었다.
흉신 바알을 먹어치웠을 때 멸망의 파편이 심장에 박히지 않았던가.
들어서는 순간 발각될 것이고, 그 순간 소노라를 안전하게 데려올 방법은 요원해질 터.
'투 스텝으로 갈 수밖에.'
그러니 란돌프를 대신해 움직여줄 손과 발이 필요하다.
박현명으로서의 나는 따로 움직이며 소노라의 행방과 '대천사'의 위치를 찾아내고 특정해야만 했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따로 해야할 일이 있다."
"잠들어 계시는 겁니까? 아니면?"
"······ 잠들어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우선 발란왕국으로 향해야겠군요."
이자벨라의 눈에 의지가 지펴진다.
소노라가 살아있다는 나의 말을 철썩같이 믿는 것이다.
다시금 굳건해진 모습.
역시 이자벨라는 슬퍼하는 것보단 이런 모습이 어울린다.
"··· 왜 웃으시는 겁니까?"
"정말 소중한 친구인가보군."
그러자 언제 슬펐냐는 듯 이자벨라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예. 정말 소중한 친구입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짓게 하는 친구라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신분세탁이다.
그럴싸한 신분이 있어야 성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외지인의 신분으로 성도를 마구 들쑤시고 다녔다간 제 목숨 간수하기 힘들 터이니.
소노라와 대천사의 행방을 동시에 찾으려거든 아무도 쉽게 건들지 못할만한 특별한 신분이 필요했다.
예컨대······.
"모집관?"
"뭘 모집한다는 거야?"
웅성웅성.
광장의 중심,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사람들은 모두 한쪽을 바라보며 거칠게 입을 열었다.
"제국놈들이 왜 아드리움에 있어?"
"못 들었어? 무슨 무술대회를 연다던데."
"그러니까··· 제국에서 열리는 무술대회에 참가할 사람을 왜 아드리움에서 찾아?"
이상한 일이었다.
오직 사신교를 믿는 제국과 여신교.
둘의 사이는 물과 기름 같이 섞일 수 없다.
그런데 제국의 모집관들이 성도에 버젓이 있다.
여신교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모든 도시와 나라에서 찾고있다던데? 입상하면 팔가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고, 우승자는 라이가 기사단장의 제자로 받아준다더군. "
"팔가기사단, 라이가······?"
그 이름을 듣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제국 제일 기사단의 이름과 그 기사단을 이끄는 최강자의 이름이 한데 나온 탓이다.
"뿐만인가? 기사왕 빌헬름이 다루던 성검 '빛의 길'을 비롯한 엄청난 보상까지 걸려있다고!"
"허억!"
"미쳤군."
단순히 신분만 상승하는 게 아니라 부상까지 완벽하다.
성검의 주인은 여신교에서도 쉽사리 대하지 못하므로.
이윽고 옆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푸하! 성도에서 입상하는 사람이 나오면 웃기겠는걸."
여태껏 전례가 없었던 일.
만약 성도에서 입상자가 배출된다면 그야말로 웃기는 그림이 그려질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에서 사람을 모집한다?
한가지 확실한 건 성도의 사람이 입상하게 된다면 제국과 여신교 양쪽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하물며 우승이라도 한다면?
"아아, 그래서 성도에서 사람을 모집하는걸 허락해준 거겠지. 그리고 이미 성도의 명망있는 분들의 자제도 꽤 많이 참가한 걸로 아는데."
"명망있는 분? 누구?"
"요한슨 예하의 아들이라거나······."
"뭣······ ?!"
여신교의 입장에선 나쁠 게 없다.
도리어 권장해도 부족할 판국.
이는 곧 제국을 여신교로 교화할 천금같은 기회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 대회를 여신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요한슨 추기경의 아들이 대회에 참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이름 높은 사람들이 대거 참가한 대회.
이미 대회는 여신교만이 아니라 판게니아 전체의 축제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넌 뭔데 그렇게 잘 알아?"
"··· 나도 참가할까 해서."
생각보다 참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많았다.
바람잡이로 보이는 사람도 많았고.
수상할 정도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으며, 나불대는 자들.
그들은 모집관에게 돈을 받고 포섭된 바람잡이일 것이다.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이름은?"
"현."
"접수자는 오른쪽 막사에서 대기하도록. 간단한 시험을 볼 것이다."
이름 외에는 물어볼 것도 없다는 태도.
모집관의 말에 따라 오른쪽 막사로 이동했다.
휘유.
나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막사의 안에는 이미 수많은 참가 희망자들이 있었다.
새로 막사로 들어온 나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뭐야, 저놈은?"
"비실비실하게 생겼군."
"진짜 별의별 놈들이 다 들어오는구만."
서로가 경쟁자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신분세탁을 위한 첫걸음.
예컨대······.
'라이가의 제자가 된다.'
······ 성도 아드리움에서 탄생한 라이가의 제자라거나.
이보다 더 확실한 신분은 또 없을 테니까.
히든 탈리스만 큐브
황궁.
연무장에서 검을 쥐고 있던 라이가를 찾아온 황금 가면은 대뜸 욕설을 내뱉었다.
"라이가, 미친 거냐?"
"너야말로 미친 거냐? 신성한 연무장에서 욕설이라니?"
빠득!
표정 한점 변화없는 라이가의 태도에 황금 가면의 이를 갈았다.
"······ 왜 대회에 여신교를 참가시킨거지?"
필시 제국신민만 참가할 수 있도록 하는 대회였다.
그런데 갑자기 관련규정이 바뀌더니, 참가 가능한 범위도 대폭 늘어났다.
아무런 상의도 없이.
판게니아의 인간이라면 모두 참가가 가능하도록 라이가가 손을 쓴 것이다.
심지어 규모도 배로 커졌다.
이는 필히 회의를 통해 승인되어야만 하는 안건.
"내가 적어놓은 모집요강을 잘 읽어보거라. 재능이 있는 쓸만한 인재라면 두루 등용한다. 대회의 취지는 처음부터 그랬다만?"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황금 가면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이놈, 라이가와 대화하면 항상 이야기가 겉돈다.
매번 혈압이 오르는 기분이다.
여신교와 사신교는 절대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
하물며 제국은 상상이상으로 폐쇄적인 곳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황제는 잠들어있고, 온갖 잔악한 실험도 버젓이 행하고 있으며, 오로지 그들만 알아야하는- 판게니아의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수많은 비밀들을 품고 있었다.
당연히 제국과 황궁 내로 다수의 사람이 들어올 경우 비밀이 발각될 수도 있었다.
그럴진대······ 라이가는 사신교의 간부 대다수가 '황금의 정령왕'을 찾으러 제국을 떠난 사이에 이런 사단을 벌일 것이다.
"말이라고 하는 거다. 도저히 이 제국에는 나를 이을만한 쓸만한 놈이 없으니까."
하지만, 라이가도 양보할 수가 없었다.
양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가까스로 티는 안 내고 있지만 라이가는 서서히 죽어가는 중이었다.
'내상을 치료할 길이 없다.'
모든 가호와 오문의 개방으로 인한 부작용.
필사(必死)의 저주다.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근원지기는 말라만 간다.
피해갈 길 없는 이 저주로부터 팔가를 계승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 나라와 종교를 불문하고 팔가의 계승자를 찾겠다? 오로지 재능만 있다면 모든걸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
"황금 가면.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군."
"설령 그게 여신교의 사제라도 말이냐?"
"아아, 상관없다."
빠드득!
"네놈······ 당장 대회를 중단······."
"받아라."
툭!
라이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황금 가면에게 던졌다.
순간 던진 것을 받아든 황금 가면의 눈빛이 묘하게 뒤틀렸다.
"··· 이건?"
"교만의 심장이다."
교만의 악마.
놈과 내기를 통해 얻은 심장이다.
교만의 악마를 컨트롤할 수 있는 이 심장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보물!
정상적으로 대회를 열려거든 라이가도 소중한 걸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황금 가면도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목이 마르니까."
"······?"
"미치도록 갈증이 난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닫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생사의 벽.
그 벽을 넘어서고 싶다는 목마름.
라이가는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도저히 그 벽을 넘고 길을 뚫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武)를 갈고 닦고자 모든 수련을 해봤으나 딱 한 가지 안 해본 게 있었다.
'제자를 키운다.'
그건 바로 제자를 키우는 것이다.
모든 걸 아낌없이 베풀고, 가르치며 다시금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뛰어난 제자가 필요했다.
제자를 키우는 게 라이가의 마지막 '한(恨)'인 것이다.
교만의 심장까지 내놓으며 대회를 강행하려는 이유였다.
"황금 가면. 여신교가 입상하는 게 싫다면 쓸만한 놈을 대회에 내놓거라. 네놈들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재능만 있다면 품을 터이니."
"······ 오냐, 그리하마."
라이가의 의지에 황금 가면은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강제로 멈추려 든다면 제국이 분열될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멈출 수 없다면, 라이가의 말마따나 다른 이들이 입상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면 그만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사람이 우승하여 팔가의 계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팔가만 손에 쥘 수 있다면, 제국을 가진 것과 진배 없을 테니까.
*
"이 바위에 흠집을 내면 통과다!"
막사에 모인 수백명의 참가 희망자들을 바라보며 모집관이 외쳤다.
곧이어 두 남자가 끙끙대며 커다란 바위를 가져왔다.
일견 평범한 바위로 보이지만 본 즉시 저 바위가 뭔지 알았다.
'기천석.'
수련자의 산에서 보았던 기천석과 비슷한 바위다.
저주받은 기천석을 부수며 바알을 부활시키지 않았던가.
하지만 저주받은 기천석에 흠집을 내려면 '관통력'이 필요하다.
그럼 관통력을 지니고 있는지 시험하는 자리인가?
곧이어 떠오른 정보를 보며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한 기천석]
-일정 능력치 이하의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돌.
-능력치 총합 350 이하의 타격을 무시한다.
능력치 총합에 따라 흠을 낼 수 있다는 뜻이다.
힘, 민첩, 체력, 지능, 마력.
다섯 개의 능력치가 평균 70 이상은 되어야만 합격할 수 있다.
말인 즉, 능력치를 꽉 채운 7레벨 이상의 참가자를 원한다는 소리.
7레벨이면 정예기사 수준이었다.
"이 정도 쯤이야!"
가장 앞에 선 근육질의 남자가 자신있게 나섰다.
이어 있는 힘껏 정권을 내질렀다.
쿵!
"아악!"
묵직한 음색과 함께 남자가 바닥을 굴렀다.
바위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 생각보다 단단한 모양인데?"
"저놈이 약골인 건 아니고?"
뒤에 선 사람들은 꼴사납게 바닥을 뒹구는 남자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그리곤 자신있게 나섰지만.
"커헉!"
"뭐, 뭐야! 왜 이렇게 단단해!"
탈락자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애초에 능력치총합 350은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순하게 계산해도 레벨 7이 필요하지만, 능력치를 꽉 채워서 레벨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으니까.
"역시 성도도 별 볼일 없나보군."
"오십명에 한 명 정도인가."
모집관들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미 실력있는 사람들은 진즉에 참가의사를 밝혔고, 막바지에 모집하는 건 시간떼우기나 다름이 없었다.
기껏해야 50명 중 한 명 정도만 바위에 흠집을 남겼다.
"다음!"
이윽고, 내 차례가 됐다.
나를 바라보는 모집관들의 눈빛엔 별다른 기대감이 없었다.
아니, 이곳에 모인 사람들 전부가 비슷한 눈빛이었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비키지."
"저렇게 말라서야."
"결과는 보나마나군."
실패를 확정한 듯한 모습.
확실히 그럴만 했다.
'나도 능력치가 조금 부족하군.'
내 능력치 역시 부족했으니까.
현재 나의 능력치 총합 역시 350이 안 된다.
신의 섬에서 시련을 통해 올린 레벨은 4.
능력치 총합은 324였다.
레벨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압도적인 능력치지만, 마찬가지로 350에는 미치지 못한다.
'순수 능력치가 조금 부족하군.'
물론, 어디까지나 레벨에 따른 '순수능력치'가 부족하다는 말이었다.
장비나 도구 따위로 추가적인 능력치가 붙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부족한 능력치 26을 메꿀 장비나 도구.
웬만한 신화나 유일등급이 아니고선 꿈도 못 꿀 일이다.
란돌프의 장비는 당연히 공유할 수 없는 상황.
'······ 공유 되는 게 있었지.'
그런데 공유 된 장비가 하나 있었다.
바로 이 목걸이.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을 달고 있는 이 목걸이가 란돌프와 공유하는 장비다.
'태고의 갑옷.'
목걸이로 형태를 바꾼 태고의 갑옷!
하기야 차원을 넘나드는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을 지탱하려거든, 태고의 갑옷 정도 되는 장비가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히든 탈리스만 큐브를 비롯한 또 다른 이권들.'
수호벽이 공유되듯.
또 다른 '이권' 역시도 공유되고 있었다.
황금률 상점이나 이권 상점 같은 상점들.
탈리스만 큐브는 메인 퀘스트 11에서 얻을 수 있는 이권이기에 공유되는 건 당연지사.
그리고 '태고의 갑옷'과 '히든 탈리스만 큐브'가 공유되는 시점에서, 큐브 안에 넣어놨던 '탈리스만'역시 함께 연동되고 있었다.
'천축의 고래 탈리스만!'
메인 퀘스트 11의 보상 중 하나.
어쩌면 가장 중요한 보상일지도 모르는 천축의 고래 탈리스만!
태고의 갑옷에 장착하자 1.5배의 증폭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곤 바위 앞에 선 채, 가볍게 정권을 내질렀다.
꽈아아앙!
*
라이가는 자신이 쥔 검을 바라보았다.
숨을 쉬는 것도 괴롭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휘두르는 걸 잊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선 지극히 평범한 일과.
본래라면 아무런 잡생각도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에 빠져야하지만.
'기대되는군.'
대회의 시작이 머지 않자 좀처럼 잡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떤 인재가 나타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한데, 과연 자신이 만족할 만한 인재가 나타날까?
여태껏 소위 말하는 천재들을 수없이 봐왔지만 단 한 번도 그 재능에 이끌린 적은 없었다.
전부 자신보다 못했으므로.
뛰어난 점은 있었지만 전부 만족하는 완성형 천재는 자신을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판게니아 전체에서 모집하는 이상 약간의 기대가 되는 건 사실이다.
인재를 위한 조건도 전부 정해두었다.
예컨대 '단단한 기천석'에 흠집을 내는 일.
'단단한 기천석에 흠집을 내는 건 쉬운 듯 어려운 일이지.'
최저한의 능력치를 본다.
최저한의 레벨을 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이는 조건'에 불과했다.
'능력치 총합 350. 혹은 특수한 조건에 따라 흠집을 내는 것도 가능은 하다.'
그보다 능력치가 적어도, 레벨이 낮아도, 단단한 기천석에 흠집을 내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특정 관통력을 지녔거나, 반사 능력을 지녔거나, 혹은 땅과 대비되는 물의 속성을 이용하거나······.
방법은 많다.
딱히 흠집을 내는 방법에 제한을 두지도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재능이다.'
레벨도, 능력치도, 상관 없다.
조건이 부족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유연성을 보이면 된다.
어떻게든 해결하고자하는 능력 자체가 재능인 게다.
그 '재능'을 찾아내고자 하는 시험.
대회 또한 마찬가지다.
단순히 '강함'만을 찾는다면 초월자가 무조건 우승할 테니까.
그가 원하는 기준은 단 하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재능!'
정해진 한계를 넘어서는 천재를 원한다.
그래서 대회도 나누었다.
특정 레벨에 따라 치루도록.
레벨은 사신교의 '대천사'가 알아서 보고 나눠줄 터이니, 과연 자신이 원하는 재목이 나타날지만 판가름하면 되는 일이었다.
무력의 강함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부족한 레벨이나 능력치는 그가 충분히 채워줄 수 있으므로.
"제자라······."
라이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저릿저릿한 심장.
비록 죽음이 머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무나 제자로 받지는 않을 것이다.
혹여나 마음에 드는 인재가 없다면, 과감하게 팔가의 대를 끊으리라.
어중간한 놈이 팔가를 잇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대 팔가의 주인들도 같은 마음일 터였다.
죽어서도 그 꼴은 볼 수 없다.
다만.
자신이 만족할만한 재능을 지닌, 압도적인 천재가 등장한다면.
'나의 모든 것을 넘겨주리라.'
··
챔피언 란돌프
"와!"
"저 사람들이 2세대 각성자야?"
"너무 멋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위해 한 건물 앞으로 몰려들었다.
바로 영웅연합의 본사.
설치된 단상의 위에는 약 20여 명의 사람들이 나란히 도열해 있었고, 그 앞에서 연합장인 박태우가 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최강남.
명예의 전당 3위에 이름을 올린, 2세대 각성자 중 가장 뜨거운 감자!
"부연합장님. 어떻습니까? 2세대 각성자들은."
"흐음."
부연합장인 이아린이 팔짱을 낀 채 단상 위를 바라봤다.
마계 칠군단장인 바사라의 입장에서 2세대 각성자들은 아직 볼품없는 어린아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직 갈지 않은 보석.
그러나 '잠재력'만 따져본다면 제법 훌륭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는 1세대 각성자들과 달리, 자체적으로 각성한 2세대 각성자들은 훨씬 더 높은 성장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걸까.
'아무래도 환경의 차이겠지.'
지구인이 지구에서 활동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판게니아인이 지구에서 활동하려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정령들이 정령계를 빠져나와 중간계에 소환되면 온전히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상과 같았다.
하지만······.
'2세대 각성자는 판게니아로 로그인할 수 없다.'
그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성장 잠재력이 높다뿐이지, 성장을 위한 환경 자체는 판게니아가 압도적으로 좋으니까.
지구에는 제대로 된 던전도, 탑도, 오랜 전승을 품은 무기도 없다.
반면에 판게니아는?
그 모든 게 갖춰져 있다.
뿐만인가.
시도때도 없이 일어나는 전쟁.
지구와 달리 직접 몸을 움직이며 칼과 활 따위를 다룬다.
수많은 괴물들을 사냥하고 탐험하며 업적을 이루는 시스템 자체는 판게니아가 훨씬 더 잘 갖춰져 있었다.
허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그 모든 걸 초월할 정도의 '가능성'을 지닌 육체라면.
"나쁘지 않군."
그녀가 최강남을 바라보며 가볍게 평했다.
직접 갈고닦으면 어느 정도의 보물은 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오오······!"
"부연합장님께서 그 정도로 좋게 보신다니!"
"올해는 풍년이군."
그 말을 들은 연합원들의 경악했다.
부연합장인 그녀가 '나쁘지 않다'고 말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사는 최강남이 아니었다.
"박현명은 어디 있는 거지?"
"그, 그게······ 아직 못 찾았다고 합니다."
쯧.
짧게 혀를 찼다.
신의 섬에서 높은 성적을 낸 상위의 10명.
그 안에, 박현명이 있다.
아마도······ 그날, 자신이 명함을 건네줬던 그 남자.
천살성을 지닌 그 남자가 박현명일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증발한 듯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모든 인력을 총동원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 있는 '박현명'은 전부 찾아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마치 지워진 듯.
누군가가 고의로 지워놓은 듯 사라진 상태.
-신의 섬에서 상위 성적을 낸 10명. 그중 아홉 명을 혼자 상대했습니다.
-놈은······ 괴물입니다. 그 남자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최강남을 비롯한 아홉명이 '박현명'의 존재를 증언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홀로 모든 걸 성취해낸 남자.
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바사라는 당시의 상황을 눈앞에 재현해냈다.
마지막 대결을 말이다.
'8초.'
상위 성적의 아홉 명을 박살 내는 데 걸린 시간.
고작, 8초.
아무리 천살성을 지녔대도 너무 강하다.
비슷한 성취를 이뤘을 텐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격차라.
휙!
휘익!
그녀의 눈앞에서 박현명이 전광처럼 움직인다.
전각을 밟고 주먹을 내지르자 속수무책으로 달려들던 남자 한 명이 고꾸라진다.
즉시 반대편 팔을 직각으로 뻗어 반대편의 공격을 막아낸 뒤 그대로 얼굴에 한 방.
머리로 받고, 무릎으로 턱을 날리고, 주먹으로 가슴뼈를 박살낸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모든 동작이 이뤄졌다.
'타고난 전사로군.'
바사라의 '재현능력'은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야기만 들어도 9할 이상 비슷하게 재현해낼 수 있었다.
후우우.
8초 만에 상위의 9인을 꺾은 박현명의 숨소리는 너무 고요하다.
그 몸짓이, 눈빛이, 세포의 활동 하나하나가.
마치 숱하게 전장을 경험한 노장과 같지 않은가.
아니, 아니다.
노장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다.
'아니, 타고난 투신(鬪神)인가?'
그냥 강했다.
출발선 자체가 다른 차원에 있었다.
마치 싸움에 미친 신이 되고자 태어난 인간마냥.
도저히 같은 튜토리얼을 경험하며 얻은 무력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게다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투신 카라스······ 기사왕 빌헬름······.'
기세도 다르고, 사용하는 기술도 다르며, 그릇도 다를진대, 어찌하여 그 두 존재의 존재감이 박현명에게서 느껴지는 걸까.
그들과 같은 눈부시는 재능의 소유자라서?
'··· 탐나는구나.'
탐이 난다.
이 정도로 탐나는 인간은 오랜만이다.
그는 자신이 갈고닦지 않아도, 어쩌면 완성될지도 모르는 그릇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의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어떤 보석으로 완성될지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기대된다.
짝짝짝짝!
"차세대 영웅연합을 이끌어갈 영웅들에게 박수를!"
"최강남! 최강남!"
"와아아아!"
요란한 박수소리.
임명장을 수여하며 연합에 들어온 것을 축하해주고 있다.
번쩍이는 플래시와 함께 카메라들도 바삐 돌아가는 중이다.
대대적인 홍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실시간으로 저들을 보고 있을 터.
그러나 그녀의 눈과 귀는 이미 다른 걸 보고 듣는 중이었다.
박현명.
그의 움직임과 숨소리를.
······ 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