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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 13ATRIBUT / Chapter 1: 1
13ATRIBUT 13ATRIBUT original

13ATRIBUT

Tác giả: Kakao_Cuenta_3951

© WebNovel

Chương 1: 1

루시퍼의 절규

여태껏 수많은 규격 외(外)의 업적을 달성했지만.

감히 단언하건대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문장들에는 미치지 못한다.

"'메인 퀘스트 11' 명예의 전당 순위가 변경되었습니다."

"1위 추산 10,000점. 란돌프"

"2위 780점. 루시퍼"

"3위 499점. 그라시아"

"4위 400점. 바르무슈"

"5위 360점. 민트초코맛있어요"

······.

모든 플레이어가 달성하고, 접하게 되는 명예의 전당.

하지만 바뀐 순위를 목도한 플레이어들은 몇 번이고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자리수의 점수가 공개됐으니까.

"일만점······?"

"추산? 이건 무슨 말이야?"

"설마 시스템도 확신할 수 없다는 건가?"

"······."

버그나 오류는 아니다.

여태껏 수많은 경험으로 말미암아 저게 진짜 란돌프가 이룩한 점수라는 건 확실했다.

하물며 '추산'이라는 단어는 이번일에 더욱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굳이 저런 단어를 붙여가며 전당에 내보였다는 건 그 정도의 일을, 상상을 초월하는 초과적인 업적을 란돌프가 달성했다는 뜻이므로.

문제는 이번 명예의 전당은 무려 '메인 퀘스트 11'이라는 것이다.

"심연 괴물 사냥, 맞지?"

"··· 루시퍼가 '허망의 왕자'와 잔당들을 사냥하고 780점이었잖아."

"그럼 란돌프가 지배자급 괴물을 최소 15마리는 죽였다는 거야?"

"그게 말이 돼? 메인 퀘 10 민지 얼마나 됐다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데?"

혼란의 도가니였다.

루시퍼의 점수를 열 배 이상 웃도는 건 정말 불가해한 일.

루시퍼조차 수많은 희생을 자처하며 만들어낸 점수이건만.

그리하여 다시는 깨지지 않으리라고 모두가 은연중 확신하고 있던 순위이건만!

그게 깨졌다.

신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아니, 설령 여신이 살아돌아온다고 할지라도 이게 과연 가능할까 싶은 수준의 업적이었으니.

"전원 소집하도록!"

"비상상황이다. 빨리 모여!"

"판게니아에 지각변동이 생길 거다. 뭐가 변하는지,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최대한 눈을 떼지 말고 살펴봐!"

"뭐라도 좀 알고 있는 놈 없어?"

"정보부 이 새끼들은 뭐 하는 거야!"

세계는 난리가 났다.

특히 지도자급의 플레이어들은 더더욱.

현재 지구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영웅회가 몰락하는 와중 힘 있는 자들은 자신이 왕임을 자처하며 세력을 일으켰다.

그동안 영웅회에 눌려있던 강자들.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 지금 이 '변화'는 막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킬 게 틀림없었다.

판게니아에도, 지구에도.

'영웅회는 그동안 은연 중 란돌프를 외면했다. 터부시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란돌프를 찾아라!'

'먼저 란돌프를 찾는 사람이 승리자다!'

영웅회는 그동안 '란돌프'의 이름 자체를 눌러버리고 있었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새로이 등장한 왕들은 필사적으로 란돌프를 찾아내, 연을 만들려고 했다.

란돌프는 세계의 왕이 되는 데 관심이 없는 게 확실했으니까.

적어도 '란돌프'의 이름을 등에 업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확실한 보증 수표는 없을 터.

그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란돌프의 선택을 받는 자가, 이 세계의 왕이 된다.'

그동안은 무언가의 착오, 혹은 오류로 애써 이해하려 했으나.

애당초 '란돌프'란 미지(未知)를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불신한 짓이었다.

미지와 신비, 이해할 수 없는 우주와 같은 진리.

그것은 배척하고 무시할 게 아니라,

경외하고 또 경외하며 떠받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란돌프는 그런 존재였다.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란돌프를 찾는 이유였다.

······ 신의 선택을 받는 자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세계를 이끌 황제가 될 터이니.

*

"······."

다크스타는 건물의 옥상에 올라 지상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래, 나도 팬텀교에 가입하도록 하지.

메인 퀘스트 11.

란돌프가 루시퍼의 점수를 넘어선다면, 팬텀교에 가입하겠다고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 어이가 없군."

다크스타는 어이가 없어서 웃어 버리고 말았다.

1만 점이라니.

명예의 전당에서 다섯 자리 숫자는 난생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진짜 심연왕이라도 사냥한 건가······."

심연을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만 같은 점수.

도저히 믿기지가 않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라시아는 거절했지만, 루시퍼도 천사상을 빼앗겼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로인해 다시 균형이 맞춰졌다는 것.

천사상을 빼앗긴 루시퍼는 이전처럼 나대지 못할 것이었다.

스윽.

다크스타가 품에서 두꺼운 서류첩을 꺼냈다.

'흑요가 내게 줄을 서며 준 것.'

구미호 흑요.

영웅회의 맴버이며 그동안 다크스타와 루시퍼의 사이에서 간을 보던 요망할 여자다.

그리고 전당의 순위가 바뀐 즉시, 흑요는 다크스타를 찾아와 이 서류첩을 건넸다.

'죽은 마스터의 일지.'

바로 죽은 '마스터'가 남겨놓은 일지.

그것도 루시퍼는 모르는 비밀일지.

100장이 넘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마스터 녀석. 그라시아보다 더 간절하게 란돌프를 찾고 있었군.'

······ 바로 란돌프에 관한 일지였다.

마스터는 집착하다시피 란돌프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라시아가 '히드라곤의 핵'을 얻으려는 것과는 달리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건 그라시아보다 더 란돌프에게 '근접'했다는 사실이다.

스르륵.

서류첩을 넘기며, 100장이 넘는 종이의 모든 내용을 천천히 읽은 다크스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 한국으로 가야겠군."

김하나를 다시 만나봐야겠다.

그리고 동시에 다크스타는 생각했다.

········· 어쩌면 진짜로 팬텀교에 입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

"안 돼······!!!"

루시퍼는 절규했다.

천사상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천사상에 깃들어 있던 빛이, 명예의 전당 순위가 바뀐과 동시에 사라진 탓이다.

"네가 어떻게 나를 떠나갈 수 있단 말이냐······!"

빛이 사라진 천사상.

더 이상 천사상에서 '축복의 천사'의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천사를 위해 이룩해놓은 업적이었건만.

수많은 희생을 각오하고, 달성한 메인 퀘스트였건만!

그게 한 순간에 뒤집혔다.

그것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점수의 차이로.

"으아아!"

콰직!

루시퍼는 천사상을 부숴버렸다.

안에 깃든 천사가 없는 이상, 이건 필요없는 껍데기에 불과했으니.

꾸륵! 꾸르륵!

곧이어 모든 축복이 사라지자 루시퍼의 육체가 변형하기 시작했다.

이마 위에 두 개의 뿔이 솟고, 꼬리가 길게 늘어나며 육체는 새까맣게 변화했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루시퍼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악마가······ 아니다. 나는······!"

존재의 부정.

그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었다.

천사는 그를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꿔주는 축복을 내렸다.

단순히 외형만이 아닌, 모든 인식과 사고마저도 바꿔 버리는 절대적인 축복.

허나 축복이 사라졌으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아니야, 아니야······!"

꾸르륵!

다시금 인간의 형태로 변한다.

하지만 그저 형태에 불과했다.

더 이상 루시퍼는 하늘을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악마라고 자각해버린 순간,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는 악마의 저주가 또 다시 발동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나는 자유다!'

얼마만에 맛본 자유던가.

그 자유를 이렇게 쉽게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이 세계의 정점에 서서, 절대자로 군림하는 꿈.

비록 원치않게 떨어졌으나 지구는 그에게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천사의 축복만 있다면 말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면서도······!"

게다가 루시퍼는 그 천사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천사는 없다.

란돌프에게, 빼앗겼다.

빠드드득!

루시퍼는 부서지도록 이를 갈았다.

'아직은, 괜찮다.'

오랜 시간 쌓여 있던 축복이 단번에 사라질 일은 없을 테니.

허나 몸에 쌓인 축복이 완전히 증발하는 순간, 루시퍼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오로지 분노밖에 없는 악마로.

모든걸 부숴버리고 싶어하는 괴물로.

연민이나 사랑과 같은 감정 따윈 일절 없는 최악의 형태로!

"란, 돌, 프······!!!"

분노의 악마는 울부짖었다.

*

압도적인 보상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히든피스가 발동하며 '온전한 황금률 10개'를 얻은 것조차 상상을 초월하는 보상인데, '히든 탈리스만 큐브'와 함께 '신의 섬'과 '거룩한 별', 특수한 '탈리스만'의 선택지까지 얻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축복의 천사, 업적점수 일만 점,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1만 시간. 진짜 미쳐버렸군.'

역대급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보상이 쏟아지다 못해 넘쳐 흐를 지경이다.

하물며 보상 하나하나가 유일등급 뺨을 후려칠 내용들이었으니.

'참가자들의 이름이 들어간 탈리스만. 이런건 처음 보는데.'

무엇을 골라도 엄청난 옵션을 지니고 있을 게 분명한 탈리스만들.

하물며 나는 '태고의 갑옷'까지 지녔다.

'······ 태고의 갑옷은 탈리스만의 능력을 1.5배로 상향시키지.'

여기에 '히든 탈리스만 큐브'도 얻었다.

숨겨진 조합을 가능케하는 특수하고 특별한 큐브일 터.

사용하기에 따라 어마어마한 시너지의 조합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하여 고민이었다.

무엇을 골라야하나.

무슨 탈리스만이 나와 맞을까?

고를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니 신중해야만 했다.

'이름은 곧 증명이다. 탈리스만의 형태로 이름이 정제되었다는 건, 그 이름의 영향력을 장비가 강하게 받는다는 뜻이지.'

탈리스만은 장비를 강화하는 보석이다.

기존 장비에 없던 특수한 옵션을 새겨넣어 더욱 빛나게 해주는 보물.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 없는 옵션을 더해주는 경우도 많았다.

장비의 장착 옵션을 낮춰주거나, 같은 류의 탈리스만을 추적하는 능력이나, 장비가 가진 특정한 특성, 혹은 저항을 올려주거나, 장비의 모든 옵션을 바꿔주거나······.

제대로 조합하면 장비의 성능을 배로 올려줄 수 있는 게 바로 '탈리스만'이었다.

또한, 특정 이름이 붙은 탈리스만은 관련된 내용을 증폭시켜준다.

'참가자의 특징. 태고의 갑옷에 어울리는 이름.'

아마도 참가자의 특징이 담긴 탈리스만이리라.

그리고 내가 탈리스만을 박아넣을 장비는 태고의 갑옷이다.

태고의 갑옷의 성능을 극대화해줄 수 있는 탈리스만이어야만 한다는 소리.

6개의 탈리스만 홈, 장착한 탈리스만이 1.5배의 증폭된 능력을 지니고, 형태 변형 능력, 최소 물리내성 50%, 물리 피해 210% 반사, 레벨비례 전체 관통력과 태고의 절망 등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말도 안 되는 갑옷.

지금도 말이 안 되는데, 이 갑옷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탈리스만은 무엇이 있을까.

'확실한 게 하나 있기는 하군.'

기억을 떠올린다.

참가자들의 특징을, 그들의 능력을.

오로지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그들의 정보를.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천축의 고래' 탈리스만을 선택했습니다."

변형의 능력을 지닌 천축의 고래.

그녀의 탈리스만도 필시 비슷한 옵션을 지녔을 것이다.

그때였다.

다시금 내앞 떠오른 문구.

"'축복의 천사'가 깃들 기물을 선택하십시오. 기물에 따라 '축복의 천사'는 보다 강력한 축복을 내립니다."

"'축복의 천사'는 오랜시간 바깥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564초 안에 결정해야만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축복의 천사'는 영영 사라집니다."

재촉하듯 기물의 선택을 바라고 있다.

축복의 천사가 담길 그릇을 정해야만 끝이 난다는 듯이.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나타나선 10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정하라니, 이게 무슨 망발인가.

"499초 안에 결정해야만 합니다."

"387초 안에 결정해야만 합니다."

"284초 안에 결정해야만 합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나 역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란돌프'를 기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혹시나 몰라서 나 자신을 택하자 이와 같은 말이 떠올랐다.

··· 무엇을 그릇으로 삼아야 되지?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뛰어난 것.

역시 태고의 갑옷이나 겨울(최후의 황혼)에 깃들게 해야할까?

아니면 그릇으로 삼을 만한 또 다른 무언가가 나한테 있나?

"10초 안에 결정해야만 합니다."

고민하는 사이, 순식간에 시간은 10초 안으로 다가왔다.

"6초 안에 결정해야만 합니다."

"4초 안에 결정해야만 합니다."

"2초 안에 결정해야만 합니다."

"1초······."

"'축복의 천사'가 깃들 기물로 '신의 섬'을 선택했습니다."

"'신의 섬'에 '축복의 천사'가 깃듭니다!"

신의 섬

영국 런던,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

컬리지 홀엔 수많은 신사들이 자리하며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모두 영국에서 한가락하는 정재계의 인물들.

영국 왕실의 패권을 노리는 네 개의 파벌, 그중 핵심이 되는 자들이었다.

'저자가 그······.'

'올리버?'

'에딘버러의 왕자?'

하하호호 웃고 떠들며 즐기는 와중에도 그들의 눈은 한 남자에게 향해있었다.

연회장의 외곽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는 올리버에게로.

영국은 여왕이 서거한 뒤, 세 개의 파벌이 서로를 견제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올리버가 등장하자 판이 뒤집혔다.

물론, 등장할 땐 별다른 시선을 받지 못했다.

후계 순위도 막바지에 뭐 하나 뛰어난 점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순식간에 다른 거대 파벌들에게 경종을 울릴만큼 강력한 세력으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웃지 않는 남자··· 소문대로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군.'

'유리심장이라는 소문은 와전된 거였나?'

수려한 외모와 달리 무표정하기 짝이 없는 표정.

일견 병약해보이지만 올리버는 이미 '철혈의 왕자'로 영국에서 유명하다.

에딘버러를 요새화한 결정적인 인물로 말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에딘버러는 괴물에 의한 피해가 거의 없다시피했다.

올리버가 전면에 나서며 생긴 현상.

이미 에딘버러에서 올리버의 위상은 절대적인 지경이었으니.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결단력, 그리고 강철의 심장을 지닌 남자라던가.

"올리버님. 연회가 재미 없으십니까?"

"······ 아주 재밌다, 멜슨. 웃고 있지만 독을 품고 있는 모습들이."

집사 멜슨의 물음에 올리버는 차갑게 답했다.

허나 겉보기와 달리 진심어린 대답이었다.

본래 이곳은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다.

심장이 약해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과거.

현실을 포기한채 판게니아에서 허드슨으로만 활동하던 그때의 자신이라면 이 영국의 사자들 앞에 서는 건 어불성설 꿈도 못 꿀 일이었을 터.

하지만 란돌프를 만난 뒤 모든 게 바뀌었다.

'세렝게티와 재회하고, 심장을 고치고, 현실과 마주하게 만들어주셨지.'

판게니아에서 그는 상인 허드슨이나, 현실에서 그는 영국 왕실의 후계자 중 하나인 올리버다.

란돌프는 포기하고 있던 현실과 마주할 힘을 주었다.

그러자 모든 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멈춰있던 레벨이 오르고, 삶을 지속할 자신감이 생겼다.

앞으로 나아갈 확신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자리잡았다.

"그나저나··· 좀 덥군. 조금 떨어져 있으면 안 되나?"

하지만 올리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밀착해 있는 건 멜슨만이 아니었기에.

"안 된다."

"여왕께서 말씀하셨다. 지키라고."

거구의 남자들은 올리버의 호위였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들.

용신 하나의 수족이며 란돌프를 유일신으로 모시는 마혈종이다.

그들은 에딘버러의 요새화에도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문제는 과잉보호였다.

'저들은 내가 허드슨인 걸 모르니.'

마혈종이 올리버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정체 때문이다.

만약 올리버가 판게니아의 허드슨임이 밝혀진다면 여러모로 파장이 커질 여지가 있었다.

괴물인 오주력의 미궁 도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인간.

대척자의 입장에선 물고, 뜯기 좋은 소재이지 않나.

수많은 위협으로부터 올리버가 허드슨으로 변신하는 일이 없게끔 만들어주는 게 그들의 사명 중 하나였으니, 이 과잉보호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올리버. 오랜만이에요."

그때였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서 등장한 여인.

"······ 메리 공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올리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여왕의 피를 진하게 이은 어린 공주.

올리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흥미로 가득했다.

"어릴 때 이후로 처음보는 것 같네요."

"예. 거의 13년만이로군요."

자세를 편 올리버가 무미건조하게 답하자, 메리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남자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너무나도 달랐기에.

아름답게 성장한 그녀를 그냥 지나칠 남자는 없었다.

하여 그녀는 당돌하게 물었다.

"제가 아름답지 않나요?"

"아름답습니다."

"빈말이로군요."

"······ 빈말이 아닙니다."

"그럼 왜 제 편지에 답장하지 않았죠?"

편지, 편지라.

그야 받기는 했다.

바로 휴지통에 구겨서 버리긴 했지만.

왜 답장하지 않았느냐고?

"저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결혼을 위한 편지였으니까.

올리버의 의사는 상관 없는, 일방적인 정략결혼을 위한 편지 말이다.

"제가 그 사람보다 못생겼나요?"

"······."

"······ 이제는 빈말조차 못하는 건가요?"

흘겨보는 눈빛.

지금 올리버의 태도는 확실히 신사의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올리버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세렝게티보다 못생겼군.'

사실이었으니까.

설령 메리공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할지라도, 올리버의 눈에는 세렝게티 외엔 전부 못생겨보였으므로.

그러자 메리 공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렇게 소녀의 심장에 대못을 박는군요."

"죄송합니다."

"결투를 신청해요, 올리버."

잠깐. 뭐라고?

"··· 제가 공주님과 말입니까?"

"서로 대리인을 내세워 치러도 상관없어요. 다만, 패자는 승자의 부탁을 한 가지 무조건 들어줘야만 해요."

"그 부탁이 결혼이라면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아니요. 저는 올리버, 당신의 진짜 정체가 궁금해요. '판게니아'의 정체 말이에요."

······ 과연.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나.

모두가 올리버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나은 것도, 사람이 달라진 것도, 모두 각성자이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있었다.

허드슨임을 밝혀내서 매장시키겠다는 건지.

올리버는 말했다.

"저는 각성자가 아닙니다."

그러자 메리 공주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올리버. 당신은 각성자가 맞아요. 당신의 성 아래에 장기간 타차원으로 향할 때를 대비한 '생명유지장치'가 있다는 것도 저는 알고 있어요."

생명유지장치는 플레이어의 필수품이다.

장기간 로그인을 한 상태에서 현실의 몸을 보호해줄 안전장치.

굳이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구매하지 않아도 되는 물건!

심장을 위해 구비해둔 것이지만 지금 그 말을 해봤자 믿지 않을 터다.

누가보더라도 올리버의 심장은 이미 다 나은 탓이다.

이윽고 메리 공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란돌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꽤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였죠. 그래서 저는 진실을 알고 싶어요."

"······."

이건 또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올리버가······ 란돌프?"

"판게니아의 그 란돌프라고?"

"미친!"

웅성! 웅성!

연회장에 모인 모든 이들이 소리를 높였다.

이곳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게 모두가 암암리에 '란돌프'를 찾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란돌프를 찾고, 그의 인정을 받는 자가, 세계의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

허나 그 누구도 란돌프를 찾지 못했다.

지구에서 그의 본체를, 진면모를 찾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이가 없군.'

자신이 란돌프라니.

어쩌다가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된 걸까?

허나 성 아래에 숨겨둔 생명유지장치의 존재까지 알고 있다면, 아마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메리 공주의 칼날이 내게 향했다는 건, 란돌프님에게도 향할 수 있다는 증거다.'

올리버는 어느때보다도 신중해졌다.

여기서 마냥 부정했다간 '박현명'이 수면위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제게 이만한 창피를 주고도 대결을 거절하겠다는 건가요, 올리버?"

"······ 알겠습니다, 공주님."

무엇보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올리버가 대결을 받아드리자, 메리 공주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걸려들었어.'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었다.

란돌프로 변신을 하지 않는 이상, 이 결투는 절대로 올리버가 이길 수 없는 탓이다.

"좋아요. 그럼 저를 대신해 결투를 할 제 대리인을 소개하죠. 아일론 경!"

"아일론?"

"초월자 아일론······!"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다시금 연회장은 시끄러워졌다.

초월한 각성자이며 수많은 침략에서 런던을 지켜낸 최강의 기사!

이미 최상위의 랭커로도 이름이 드높은 자였다.

'어지간히 내 정체가 궁금한가보군.'

올리버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아일론을 선보였다는 건 메리 공주가 결투에 진심이라는 의미.

허드슨으로 변신해봤자 이길 수 없는 진짜 초월자다.

"나선다. 내가."

"아니다. 내가 나선다."

동시에 올리버를 대신해 두 호위가 서로 나서겠다고 싸워댔다.

그 모습이 퍽 유치하지만.

둘의 정체를 알고 있는 올리버는 이 신경전을 마냥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이 둘은 마혈종들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들.

'열 개의 군단. 그 군단을 다스리는 군단장들.'

바로 일만 군집을 다스리는 마혈종의 군단장이었으니!

*

"······."

"······."

"······."

이윽고 벌어진 결투의 향방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아, 아일론 경······!"

메리 공주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쓰러진 아일론.

그 앞에는 올리버의 호위가 별 다른 상처 없이 서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아일론이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박살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올리버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초월자를 압도하는 무력이라니······!'

저 정도의 강자를 보유하고 있을 줄이야.

그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싹텄다.

'진짜로······ 란돌프인가?'

올리버가 진짜 란돌프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

나는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환경이 주변에 펼쳐졌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나의 방.

한데,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우매한 종이 위대하신 신을 뵙습니다."

그 이유를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집에 있던 것이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인간이 아님을 즉시 알아보았다.

마혈종이다.

하지만, 처음 보는 마혈종이었다.

"마혈종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여왕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신이시여,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서열 3위의 '검게 물든 알카르'라고 합니다."

칼날용신 하나가 나를 지키고자 보낸 마혈종인듯싶었다.

검게 물든 알카르라.

서열 1위와 2위는 이세라와 루카리아일 것이니, 그 둘과 하나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마혈종이라는 소리.

"올리버가 아니라 나를 호위한다?"

찰나, 알카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아······! 감히 저 따위가 위대하신 신을 호위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저는 그저 충실한 종일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저를 제물삼아주시옵소서!"

제물삼아 죽여달라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다. 강한 마혈종은 올리버를 호위하고 있어야 하지 않나?"

"현재 서열 9위와 10위의 군단장이 그를 호위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왕님께서 판단하셨습니다."

대답을 듣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나의 판단이 그렇다면 그게 맞을 것이다.

그동안 그 정도로 마혈종의 군세가 커지고 격이 올랐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보호벽이 필요없겠군.'

현실의 몸을 보호하는 이권.

그게 없어도, 검게 물든 알카르가 있다면 어느정도는 괜찮을 듯싶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알카르의 기운은 강성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것보다도 급한 일이 있었다.

검게 물든 알카르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을, 내가 로그아웃한 가장 중요한 이유.

'··· 신의 섬이 지구와 연결됐다.'

축복의 천사

상태창을 살폈을 때,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름 : 란돌프

직업(Class) : 별의 계승자

직업(Class) : 지고의 검성

레벨 : 9

힘 : 146(114+32)

체력 : 144(112+32)

민첩 : 145(113+32)

지능 : 144(112+32)

성력 : 233(190+32)

자연 재생력 : 11,200%

전체 관통력 : 34.3(23.3+11)%

저주 관통력 : 15%

저주 반사 : 30%

저주 유지시간 증가 : 30%

숙련도 효율 : 900(450+450)%

전체 경험치 획득률 : 200%

1 : '별의 계승자 - 별 4개(모든 능력치+20)' 보유

2 : '초월한 바알 세트'와 육체가 융합되어 관련 능력치가 추가되었습니다. 다시 해당하는 부위에 새로운 장비를 착용할 수 있습니다.

3 : '영원의 란돌프' 효과로 순수능력치가 보정되었습니다.

4 : '바알의 핵(멸망의 조각)'을 심장에 보유하고 있습니다.

5 : '망자의 왕' 스킬로 순수능력치 힘(2)과 민첩(1) 성력(3)이 오른 상태입니다.

6 : 지고의 유일급 '겨울' 사용자(모든 능력치 10상승, 모든 패널티가 50% 경감)

7 : '태고의 갑옷' 레벨비례 전체 관통력 +9%

8 : '무한의 그릇' - 능력치 상한 해제, 능력치 상한 해제에 따른 부작용 제거

9 : '탈각' - 자연재생력 대폭 상승, 경험치 획득률 2배

"'빛의 옥좌' + '겨울(최후의 황혼)' = '눈부시게 시린 자리(전체 관통력 2%)'"

"'최초의 불을 옮긴 자' + '겨울(최후의 황혼)' = '최초와 최후(모든 능력치+2)'"

활 10Lv, 달인의 경지

검 32Lv, 검강 해제(피해량+60%)

+'겨울(최후의 황혼)'에 의해 검 숙련도 레벨상한 35Lv까지 증가

* 30레벨 이후 피해량 5%씩 증가

"······."

몸이 떨렸다.

전율이 오르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의 말조차 필요 없을 만큼,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모든 게 그대로였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나의 상태.

능력치를 비롯한 옵션들마저도 변한 게 없다.

··· 문을 열어 무한의 그릇을 얻고, 탈각에 이른 사실마저도 말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딱 하나.

'천마신공을 익혔다는 사실만 사라졌다.'

······ 에 적혀 있어야 할 문구 한 줄이 사라졌다.

천마신공이 6성에 다다라 1.6배의 성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글귀.

심지어 1.6배가 오른 성력은 '순수능력치'로 분류되어 앞자리에 더해져 있었다.

이 역시 '영원군주'의 말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모든 게 사라진다고 하였지만 막상 사라진 건 '천마신공'을 익혔다는 내용 하나뿐.

'영원군주도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영원군주도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는 자기자신을 버렸다.

하지만 나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내 자리를 되찾았을 따름이다.

그 과정에서 버려지지 않은 부분들이 남고 합쳐지며, 필요없다 여겨지는 부분만이 떨어진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천마신공을 익힌다면?'

설마 지금의 성력을 기준삼아 능력치가 증폭하는 걸까?

190의 배율로?

1성만 익혀도 무려 19가 오른다.

10성에 다다르면 380이 되는 것이다.

나를 지웠던 란돌프가 '신의 살갗 혼종'에게 힘을 부여받은 상태일 때도 그 수준까지 미치진 못했을 터인데.

'나는 구결을 알고 있다.'

천마신공의 구결을.

기대 반, 설렘 반의 느낌으로 다시 한 번 외워보았다.

그러자.

"'천마신공'을 익힐 수 없습니다."

······ 아. 역시 안 되나.

몸 자체가 거부하는 것 같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그런 기분.

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을 확인했다.

[허무]

[손재주]

[올 마스터]

[웨폰 마스터]

[거인의 항마력]

[비스트 로드]

[황금의 은총]

[돌연변이]

[탐욕]

[진리의 눈]

[하이드루이드의 대자연]

[마혈종의 신]

[영원의 신]

[천상(天上)]

본래 '영원군주 란돌프'가 있어야할 자리에.

군주와 란돌프가 사라지고, 대신 '신'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마혈종의 신과 같이.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자리에 올랐다는 의미.

하지만, 이러한 일들도 '신의 섬'에서 벌어진 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축복의 천사'가 '신의 섬'에 깃듭니다."

천사(天使).

천사란 무엇인가.

신의 사자, 대변자 정도로 정의되는 게 '천사'라는 존재다.

하지만 그간 판게니아에는 천사가 등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악마나 마족 따위는 무수히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천사'가 모습을 보인 적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가 어떠한 형상을 하고 능력을 보일지 다소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다.

한데.

"'신의 섬'에 잠든 '영원족'이 깨어납니다."

"'영원족'에게 '축복'의 효과가 부여됩니다."

"'신의 섬'이 '지구'와 연결됩니다."

영원족(永遠族).

영원히 살아가는 불멸의 종족.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생명체가 아니었으므로.

섬 전체에 퍼져나가는 씨앗들.

산과 나무, 돌과 풀에 얹혀진 새하얀 씨앗은 곧이어 풍성하게 스스로를 부풀리며 주먹만 한 어린아이의 형상을 만들었다.

"······ 요정, 이군요."

함께 신의 섬에 들어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자벨라가 말했다.

이자벨라가 보기에도 저 모습은 분명히 '요정'이었을 테니.

판게니아에도 일찍이 존재하여 '몬스터'로 분류되는 것들.

-우리를 일반적인 '요정'으로 취급하지 마라. '영원족'은 '페어리 드래곤'으로도 진화할 수 있다.

신의 살갗 혼종이 말했다.

'페어리 드래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페어리 드래곤'은 가장 강력한 용족으로 취급받는 신비의 종이다.

그러니까 요정족이 아니라 용족이라고 봐야한다.

그것도 용족 중에서도 전설이나 신화로만 회자되었던, 일반 용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강력하고 현명했던 존재.

한 마디로 저 씨앗들 전부가 '페어리 드래곤'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저 숫자가 전부 '페어리 드래곤'이 된다면 제국조차 압도할 수 있으리라.

'영원군주가 왜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이곳을 지키려 했는지 알겠군.'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

감히 '신의 섬'이라 불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멸망에게도 위협이 될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해 있는 곳이 이곳이었다.

본래 '철혈군주의 심장'으로 히든 특성화 하였던 것.

다른 '문'들도 이만한 가능성을 지녔다면, 상상만으로도 아득했다.

그때였다.

-그런데··· 이상하군. 우리 '영원족'은 오래도록 시간을 먹고 자라야만 하는데······.

신의 살갗 혼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축복의 천사 덕분일까.

영원족의 성장 속도가 이상하리만큼 빠르다.

물론 전부 빠른 건 아니다.

나와 가까운 영원족일수록 성장이 더뎠다.

게다가 내 주변으로는 왜인지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견디기 힘들어하는 느낌.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축복의 천사'가 그대들을 퇴장시킵니다."

"'영원족'의 온전한 육성을 위한 특단의 조치입니다."

"'완성된 자'는 섬에 출입할 수 없습니다."

······ 섬의 주인인 내가, 섬에서 강제로 쫓겨난 것이다.

*

내가 퇴장 당한 이유.

그리고 신의 섬과 연결된 지구.

두 사이에 연관관계를 찾고자 나는 로그아웃했다.

"······ 굉장한 적응력이로군."

후루룩!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 바로 옆에 있는, 예전 여자친구인 김서연과 김하나를 만났던 그곳이다.

카페는 여전히 사람으로 붐볐지만 위치만 같을 뿐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확장공사를 했는지 내부가 커지고 인테리어도 바뀌었다.

카페 이름은 '신의 커피'가 되어있었고, 카페에서 일하는 내부인들 전부가 인간이 아닌 '마혈종'으로 대체된 상태였다.

"예. 위대하신 신의 의지에 따라 저희는 모두 '인간'과 동화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검게 물든 알카르가 내 옆에 서서 정중히 답했다.

오로지 나 때문에 모든걸 바꾸었다는 말.

백보 양보해서 모습과 어투, 양식 등이 인간처럼 변한건 이해하겠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무슨 돈으로 건물을 산 거냐?"

이 건물 전체가 마혈종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아니, 이 건물만이 아니다.

내가 사는 곳 주변 건물들 전부가 마혈종의 관리하에 들어가 있었다.

"'용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팔았습니다."

"······ 그렇군."

용맥의 안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일종의 마력핵이다.

원체 강대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용맥이니, 그 안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조차도 마력을 띠는 물건이 된다.

게다가 판게니아의 마력핵은 현실로 가져올 수 없다.

마력핵을 구하는 방법은 침입한 괴물을 죽여 그 핵을 빼앗는 것뿐이었다.

당연히 지구에서 마력핵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을 수밖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판매한 돈으로 주변 일대의 건물을 모조리 사들였다는 말이다.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로군.'

의도는 뻔하다.

오로지 나 한 명을 지키려고 전부 이곳으로 온 것이다.

검게 물든 알카르의 군단 전체가 은평구로 들어왔다.

인간과 동화되어, 전혀 의심받지 않은 채.

"어떻게 한 거지?"

하지만 분명히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강력한 관찰계나 간파의 능력을 지닌 플레이어가 본다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전혀 의심받지 않고 있는 이유가 있을 터.

"모두 루카리아 님 덕분입니다. 지상에 나온 마혈종 전부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환각계'의 축복을 걸어주셨습니다."

아아.

비로소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다.

루카리아의 능력이라면 초월한 플레이어도 간파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검게 물든 알카르'는, 척 보기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지녔을 것만 같다.

지금에야 평범한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아니······ 평범하진 않나?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마, 마음에 안 드십니까? 위대하신 신이시여, 눈을 어지럽혀 죄송합니다. 이 불신한 놈은 당장 제물이 되겠나이다!"

······ 왜 대머리지?

차마 묻지 못했다.

그러기엔 이놈의 반응이 너무나도 격렬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멋있다는 소리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반응 하나하나가 격한 놈이었다.

'그나저나.'

나는 시선을 돌려 바깥을 바라보았다.

반대편 건물에 걸려있는 현수막.

-우리의 영웅, 대한민국의 영웅, 박태우 님 사랑합니다!-

-경) 유적도시 룬델라, 대한민국과 함께합니다! (축-

국회의원 선거라도 하는 줄 알았다.

박태우가 은평구에 후보로 나와서 선전하는 줄 말이다.

박태우.

한국 최강의 플레이어이자, 영웅연합의 연합장.

이세라가 침략했을 당시, 박태우가 루카리아를 데려오는 조건으로 유적도시 룬델라를 선물한 적이 있다.

나는 턱을 쓸었다.

'신의 섬과 연결된 워프를 찾아야만 한다.'

지구와 연결된 신의 섬.

하지만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완성된 자'는 출입을 할 수 없다는 문구.

신의 섬에 입장하기 위한 조건이 있는 것이다.

'···특정 레벨 이하, 혹은 특정 조건을 아직 만족하지 못한 자.'

당장 떠오르는 조건은 이 두 가지였다.

그리고 그러한 이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은 당연히.

'저곳으로 가봐야겠군.'

박태우가 연합장으로 있는 영웅연합 주변일 것이다.

*

한국, 영웅연합의 본부.

건물 내부에 위치한 넓은 사무실 안에서, 한 여인이 권태로운 눈빛으로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압!"

"히야아압!"

두 남자가 겨루는 모습.

애들 장난과도 같은 대련을 보며 여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참하군.'

칠군주 바사라.

일곱번째 마계의 군주인 그녀는 현재 지구에서 유희를 즐기는 중이었다.

영웅연합에 가입한 뒤 박태우의 명령에 따라 신입들을 대상으로 심사를 보는 심사위원직을 맡고 있었다.

한데, 이 일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무료했다.

수준미달.

심사는커녕 한숨만 나올 처참한 재능의 소유자들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빌헬름이여. 너의 세계도 보잘 것 없구나.'

판게나아가 아닌 지구.

전혀 다른 생태를 가진 이곳의 인간들에게 약간의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나.

······ 빌헬름과 같이 빛나는 존재는 그 어느 세계에도 없는 듯싶었다.

만남

스읍, 하아.

갈색 후드를 눌러쓴 채, 나는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거리를 거닐었다.

'강남은 오랜만이로군.'

세상이 요지경이 된 이후로 사람들은 서울로, 강남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일까.

다른 지역의 도시가 안쓰러워질만큼 강남의 치안은 세계최고 수준이었다.

24시간 돌아가는 네온사인이 가득한 밤거리도 여전했으며, 범죄율은 더 줄어들었다던가.

특히나 영웅연합의 본사 사옥이 강남으로 옮겨진 이후엔 완전 철옹성이 되었다고.

-신이시여. 제가 옆에 붙어있는 게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순간 검게 물든 알카르가 나의 그림자 안에서 말했다.

그림자에 숨어있는 것보다 옆에 붙어서 호위하는 게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탓이다.

그러나 알카르는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

덩치와 머리가 상당히 눈에 띄여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거리를 거니는 수많은 사람들.

저중에는 플레이어도 다수일 터.

특히 영웅연합의 근처이니만큼, 알카르의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예 없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를 대하는 알카르의 태도에서 문제가 비롯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에 하나 사고라도 쳤다간 여간 골치가 아플 테니.

'이곳엔 영웅연합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세계각지의 강자들도 서울로 모여들었다.

아직도 인프라가 멀쩡한 한국과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서, 유적도시 룬델라의 주인이 된 영웅연합과의 동맹을 위해서, 기타 등등의 이유로.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용맥'이겠지만.

이세라의 진격을 막아내며 용맥의 주인이 된 한국!

당연히 세계적인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연구차 들어온 이들도 상당하리라.

'이곳 어딘가에 신의 섬과 연결된 워프가 생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입장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들이 이곳엔 다수였으므로.

완성되지 않은 자들 말이다.

"마셔라!"

"마시고 죽자!"

"크하하하!"

새벽이 되어가는 시간.

거리는 여전히 붐볐고, 여전히 활기가 넘쳐났다.

'여전하군.'

그러한 모습들을 보며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온 실감이 이제야 난다고 해야할까.

판게니아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들.

란돌프가 아닌 박현명이어야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이 교류감.

이게 바로 한국의 밤이다.

-신이시여. 기분이 좋아보이십니다.

"··· 나쁘진 않다."

-한국의 치안은 감히 세계 최고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특히 박태우가 지키는 이곳 서울은 사명감을 띤 각성자들로 넘치지요.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사람들 사이로 거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다.

경찰은 아니지만, 언제 어디서든 괴물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각성자다.

그 수준도 꽤 범상치않아보였다.

-허나 신이시여. 아무리 단단하다고는 하나 틈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만에 하나의 일이 벌어졌을 경우, 제가 그림자에서 다시금 소환되는데 3초 정도가 걸립니다.

3초.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데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검게 물든 알카르는 자나깨나 내 걱정뿐이었다.

칼날용신 하나도, 다른 마혈종들도, 모두 필요 이상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충분히 인지는 한 상태였다.

'황금률의 조각으로 변신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3초.'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대략 3초 동안 무방비가 된다는 뜻이다.

15레벨에 다다른 수호벽은 로그아웃한 신체를 지키는 용도.

엄밀히 따져보면 지금 나는 '박현명'으로 로그인한 상태이니, 수호벽은 오로지 '란돌프'의 몸을 지키는 데에만 작동한다.

고로, 습격당하면 3초 안에 죽을 수도 있다.

그 공백을 방지하고자 알카르가 계속해서 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강남이다.

무엇보다 나는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조금 달랐다.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하지 않아도, 일반인보다 강한 무력을 낼 수 있었으니까.

"오오, 저게 누구야? 박현명 아니야?"

"헐, 진짜네. 야, 박현명! 오랜만이다!"

그때였다.

이제 막 술집을 나온 한 무리.

어쩐지 눈에 익은 남자들.

"오랜만입니다, 김과장님."

"하하! 임마, 나 이제 부장이야."

배불뚝이 김부장이 배를 떵떵 치며 다가왔다.

··· 예전 회사 사람들이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김부장이 술냄새를 풍기면서 어깨를 툭 쳤다.

"이야, 이놈. 그래도 살아있는 거 보니까 반갑다. 너 그렇게 나가고 완전 폐인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 사는 거야?"

"여기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김부장이 입맛을 다셨다.

"하긴··· 강남은 이제 세들어 살 곳도 없다니까. 나나 우리 사원들이야 회사에서 마련해준 아파트 산다지만, 에휴. 이 충성심 없는 놈. 좀 진득하게 버티지 그랬냐?"

"······."

"지금은 대 충성시대야. 기업에 충성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럼 이렇게 집도 주고, 보디가드도 붙여주고, 나는 예전보다 삶의 질이 더 올라간 것 같다니까? 명확하게 계급이 나뉘어버린 지금 시대가 말이야."

딱히 좋은 기억은 없지만, 나쁜 기억도 없던 곳.

하지만 기억 속 김과장과 지금의 김부장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김부장은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쯧쯧, 힘내라. 그리고 조만간 회사로 한 번 찾아와. 본사도 이곳으로 옮겼으니까··· 오면 밥이라도 한 끼 사줄 테니."

"······."

"받아, 임마. 자존심 부리지 말고. 먹고 살기 힘들잖아?"

어이가 없었다.

살면서 이런 취급은 또 처음이었다.

거지부랑자에게 적선하듯 지폐를 쥐여 주려는 상황은.

그것도 오만원도 아니고 만원이다.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다.

나를 빗대어 회사에 더 강한 충성심을 강요하려는 건 뻔히 보였다.

회사를 나간 나와, 남아있는 사람들 간의 간극을 보여주고자 이런 쇼를 하는 것이다.

-아아아! 신이시여! 허락만 하신다면 저 불신한 놈의 몸을 토막 내고 목을 잘라내어 개 밥으로 던져주겠나이다!

알카르의 분노 어린 음성.

이래서 알카르를 그림자에 숨겨둔 것이다.

혹시나 사고 칠까봐.

그때였다.

쿠릉!

땅아래에서 시작된 지진.

위이이이이이잉-!

사이렌 소리가 도시 전역을 수놓았다.

허나 사이렌 소리보다도 침략은 더 빨랐다.

쿠릉! 쿠르르릉!

순식간에 지면을 뚫고 나온 괴물들.

"뭐, 뭐야?"

"혼종이다!"

허나 평범한 괴물은 아니었다.

심연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잃어버려 괴물화한 혼종이다.

······ 어째서 심연의 괴물이 지구를 침략한거지?

이런 적은 처음이다.

판게니아의 괴물이 침략해온 적은 있어도, 심연의 괴물이 침략해온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지나가기도 전에.

"아아아악!"

가장 먼저 김부장을 지키던 가드의 목이 물렸다.

그는 플레이어였으나, 변신을 하기 전엔 일반인에 불과했으므로.

"사, 살려······!"

김부장을 비롯한 사원들 모두가 몸을 떨어댔다.

'뒤.'

그리고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본능적으로 바닥을 딛고 주먹을 뻗었다.

쿠릉!

쾅!

동시에 지면이 미세하게 떨리며 혼종의 얼굴이 박살났다.

공기 빠진 풍선처럼 날아가 바닥에 처박힌 것이다.

'방금 그건······?'

막상 주먹을 뻗은 나도 약간은 놀라고 말았다.

생각한 이상의 위력이었기에.

게다가 방금 바닥의 그 진동은 왜인지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진압해!"

"경계레벨 3, 경계레벨 3!"

"시민 여러분께오선 최대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주십시오!"

다행히 일반적인 혼종들이라 진압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황금률의 조각들이 사방에서 빛나며, 곧이어 쏟아지듯 플레이어들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영웅연합.

그들의 선두에 선 남자는······.

'박태우.'

박태우가 나서자 상황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그들은 겁에 질린 시민들을 다독이고, 퇴치한 혼종을 구석에 밀어넣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 안팎.

엄청난 반응 속도다.

수백의 혼종이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 시민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사망자는 처음 목을 물린 보디가드 한 명이 전부.

수습이 되는 상황을 보며 등을 돌리려 할 찰나였다.

"넌······?"

가녀린 목소리와 함께 내 시선에 들어온 여인이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그 여인이 나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다는 걸 본 즉시 알았다.

누굴까.

처음 보는 여자.

그런데 왜인지 위화감이 드는 존재.

그녀는 정확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신이시여, 제가 나서는 걸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위험한 여자입니다.

검게 물든 알카르가 경고했다.

확실히 이상한 여자였다.

인간임에는 분명한데 묘하게 이질감이 들었다.

그녀를 본 사람들이 숙덕거렸다.

"아린 님이다!"

"오오, 아린 님!"

"저분이 아린 님이야?"

"그래, 영웅연합 최연소 부연합장!"

··· 부연합장이라고?

영웅연합엔 박태우 연합장과 두 명의 부연합장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저 여인, 아린이라는 말이다.

아린이라 불리며 칭송받던 여인은 순식간에 나와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숨결마저 느껴지는 지근거리까지 다가오자.

그녀는 나를 아래에서 위로 스윽 훑으며 말했다.

"너냐? 천마군림보를 사용한 녀석이."

"······."

내심 당황했다.

단번에 알아본 것도 모자라,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천마는 태고의 존재.

같은 태고의 존재나 심연의 주민이 아닌 이상 알아보는 건 불가한 일이다.

그럼에도 한눈에 알아봤다는 건 이 여자가 그들과 맥락을 같이하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 누구지?'

천마신공.

란돌프는 익힐 수 없으나, 박현명은 익힐 수 있다.

그게 방금 전에 증명되었다.

그리고 증명된 순간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한데, 신기하구나. 각성은 안 한 듯한데. 본능적으로 사용한 건가? 아니면······."

······ 놀라기는 아린, 아니, 칠군주 바사라도 마찬가지였다.

바사라의 눈이 흥미로 빛났다.

그녀는 확신했다.

이 남자는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하지 않았노라고.

말인 즉, 변신한 상태에서 밟은 진각(震脚)이 아니다.

각성조차 하지 않은 상태.

다른 각성자들과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게 가능한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순수 무력의 사용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부류.

적어도 이곳 지구에서 여태껏 그녀가 못 보았던 부류의 인간이다.

뿐만인가.

진각을 밟을 때의 느낌은 분명 천마군림보였다.

허나 천마신공은 오로지 천마만 익히고 사용할 수 있는 것.

그녀가 알기로 현재 천마는 심연에 있고, 제자 역시 두지 않았다.

그렇다는건.

'간혹 그런 인간이 있지. 천살성(天殺星)을 타고난 인간.'

수만 년에 한 번 정도 그러한 기질을 타고나는 인간이 있다.

빌헬름이 그랬다.

하지만 이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기질은 결코 빌헬름이 아니다.

빌헬름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정 반대의 인간이었다.

하물며 겉으로 보이는 육체의 완성도도 제법이다.

'갈고닦으면 나쁘지 않은 보석이 되겠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대어를 낚은 기분이 이러할까.

빌헬름을 마주했을 때의 찬란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이 남자도 갈고닦으면 나쁘지 않은 보석이 될 것 같았다.

적어도 심심풀이는 될 것이다.

"영웅연합에 들어와라. 넌··· 소질이 있어 보이는군."

마계의 칠군주 바사라.

지구에 온 뒤 처음으로, 그녀는 인간에게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대격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김부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괴물들의 침략이 시작되고, 박현명이 한방에 괴물을 박살냈을 때도 놀랍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아린.

그녀가 누구던가.

-영웅연합 최연소 부연합장!

-최단기간만에 영웅연합의 두 번째 얼굴이 된 여걸!

-박태우를 뛰어넘는 압도적인 카리스마!

-가능성을 보는 눈, 수많은 강자를 만들어낸 한국의 희망!

등등등.

그녀를 수식하는 단어는 셀 수 없이 많다.

혜성처럼 등장해 모두의 뇌리에 단번에 박혀버린 뜨거운 감자.

하지만 실제로 그녀의 실력을 본 사람은 없다.

그녀는 단지, 키워낼 뿐이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가려내고, 그들을 순식간에 강자로 키워내는, 영웅연합 내에서는 이미 '대사부'라고 불리는 게 이아린 부연합장이었다.

그런데 이아린은 지금 박현명에게 분명히 말했다.

소질이 있어보이니, 영웅연합에 들어오라고.

'누군가를 직접 스카우트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김부장이 전신을 떨었다.

한국 영웅연합.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기업이며, 그곳의 2인자라는 건 한국에서 두 번째 권력자라는 의미다.

게다가 박현명이 이아린도 탐낼 재능을 가진 '디맨션 워리어'라면······.

그야말로 천룡인(天龍人) 그 자체!

세계 수십억 인구중 고작 수십만밖에 없는 디맨션 워리어.

대체 불가한 그들은 이미 귀족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

기업이 고용하여 붙여준 보디가드는 한없이 격이 낮은 디맨션 워리어뿐.

현재 세계의 계급도를 본다면, 이아린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순간 박현명의 가치와 계급은 아득히 올라간다.

당장 영웅연합 말단 연합원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계급을 지니거늘.

자신같은 머글(muggle)은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하는 게 박현명인 것이다.

'내, 내가 무슨 짓을······.'

김부장의 안색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버렸다.

일개 기업의 부장 따위, 영웅연합의 입김 한 마디면 줄 잘린 연 신세다.

조금만 힘을 줘도 잘리는 그 얇은 실 하나만을 믿고 박현명에게 치욕을 주었으니, 아무리 충성을 맹세한 기업이라 할지라도 김부장을 감싸안진 않으리라.

잘리기만 하면 다행이다.

없던 죄도 만들어내어 재판을 받게하거나, 변방으로 쫓아내 괴물의 먹이로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영웅연합에 잘못을 저지른 사원들은 모두 비슷한 결과를 맞이했다.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연합의 도움은 언제든 절실했으므로.

"연락하거라. 기다리고 있으마."

털썩.

이아린이 박현명에게 명함을 넘기는 모습을 보며 김부장은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싹둑. 싹둑.

연의 실이 잘리는 소리가 귓가에 계속해서 들려왔다.

'꾸, 꿈이야. 꿈이 분명해. 박현명 따위가 이아린에게 스카웃 제의를 받다니.'

김부장이 기억하는 박현명은 지극히 평범한 평사원이었다.

어느날 돌연히 사표를 내고 나간 괘씸한 녀석.

특출난 능력도 없고, 든든한 백이 있는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하디 평범한 일반인.

자신이 욕해도 굽신거리고 언제나 무시했던 그 박현명이······.

-연락하거라. 기다리고 있으마.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아린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박현명은 받은 명함을 주섬주섬 품에 넣었다.

영웅연합의 부연합장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으면 기뻐할만도 하건만, 박현명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이런 놈이 더 무서운 법이다.

기쁜 일에도 쉽게 들떠하지 않는 사람이.

김부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보고······."

"······?"

김부장은 겨우 자세를 고쳐잡고, 절을 하듯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요, 용서해주십시오! 유망하신 전사님에게 저 따위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부디 회사에 이야기만은······!"

작금의 세계는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

일반인 위에 디맨션 워리어가, 그 위에 자신의 기업을 이룬 일반인이, 다시 그 위에 강한 디맨션 워리어가, 그보다 위엔 더 강한 디맨션 워리어가 존재할 뿐이다.

강자가 밟으면 죽어만하는 게 김부장의 위치였다.

그러자 박현명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받았던 만원 한 장을 김부장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중에 다시보면 밥 한끼 사주지."

"······ 여, 연합으로 찾아가면··· 될까요?"

자존심, 버렸다.

지금은 그런걸 찾을 때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탓이다.

"글세."

툭, 툭.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박현명이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용서를 해준다는건지, 안 해준다는건지.

"아······ 아아······."

명확한 대답이 아니어서 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

"······ 그 정도로 뛰어난 자였습니까?"

본사로 돌아가는 길.

이아린을 향해 한 남자가 물었다.

하지만 궁금증을 느낀 건 남자뿐만이 아니다.

주변 모든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연합에 들고자 면접을 보고, 그들 중에서도 발군의 성적을 내어 이아린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

미래의 별이라 불리며 빠르게 레벨 10을 달성한 강자들이었다.

개중에는 별을 얻어 초월한 초월자마저 있었건만.

······ 그럼에도, 이아린이 직접 스카우트 제의를 한 적은 없었다.

그녀가 이만한 흥미를 가진 사람은 처음보았다.

하여 그들은 질투 아닌 질투를 느끼는 중이었다.

곧이어 선글라스를 낀 이아린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두 번째."

"무엇이······ 두 번째라는 말입니까?"

"내가 본 자들 중 두 번째로 뛰어났다."

"··· 그럼 첫번째는 누구였습니까?"

"글세."

이아린.

마계의 칠군주 바사라는, 방금 명함을 준 남자를 두 번째로 뛰어난 자질을 가진 자라고 판단했다.

첫 번째는 당연히 빌헬름이었고.

빌헬름이 찬란한 빛이었다면, 그는 뭐라고 해야할까, 음습한 어둠에 가깝다.

빌헬름은 오롯이 빛나는 존재였다.

반면 그 남자는 마치 심연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천살성.

악신의 기질을 가진 자가 이 지구에 있을 줄이야.

'물과 기름같군.'

빌헬름과는 너무나도 다른 기질.

절대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이 따로없다.

그러니, 그 남자가 빌헬름의 본체일 가능성은 결코 없었다.

"부연합장님. 두 번째로 뛰어났다면 왜 명함만 건네주신 겁니까?"

"어차피 찾아올 게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천살성은 힘을 갈구하기 마련이었다.

이 지구에는 천살성의 재능을 가진 자를 키워낼 강자가 없다.

죄다 플레이어뿐.

판게니아의 힘을 빌릴 뿐인 머저리들이었으니.

변신하지 못하면 평범한 인간과 다를 게 없는 반푼이들.

그 남자는 결국 자연스럽게 자신을 찾아오게 될 것이다.

'어떤 보석으로 완성될지 기대되는군.'

그녀가 눈을 빛냈다.

물론 가장 기대되는 건 역시 '빌헬름을 조종한 본체'였다.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고, 비견될 수 없는 찬란한 존재!

과연 그는 지구에서 얼마나 고귀하게 빛나고 있을 것인지가 말이다.

그리고 만날 수만 있다면, 반드시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 너는 내 약점을 어떻게 알아낸 것이냐?'

이세라.

돌연변이 용신의 혈육인 그녀에게도 약점이 있다.

하지만 이세라와 달리, 마왕조차도 그녀의 약점을 알아내진 못했다.

마왕만이 아니다.

그 누구도 몰랐다.

심지어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빌헬름을 조종한 그 본체는,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심지어 바사라 자신도 몰랐던 약점을 찾아내어 공략했던 것이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자신의 약점을 찾아낸 것이냐고.

어떻게 약점을 공략한 것이냐고.

그 약점은 다름아닌.

'··· 내게, 사랑을 느끼게 하다니.'

살면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사랑'이었으니.

*

"너희들은 진짜 영웅이 아니다!"

"거짓말로 점철된 가짜 영웅들은 물러가라!"

세계연합인 영웅회의 건물들 앞에선 기습적인 시위가 연달아 일어났다.

이미 그들은 과거 찬란했던 영웅이 아니었다.

거짓된 영웅들.

오로지 거짓말로 올라선 위선자들!

그들을 향한 시위는 세계 전역에서 날마다 계속되고 있었다.

'김하나······!'

그 사옥 안에서, 시위대의 외침을 들으며 루시퍼가 이를 갈았다.

원래 이 정도로 적대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김하나가 '영웅회'와 관련된 기밀이나 비밀 따위를 폭로하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다크스타. 이 개새끼가 기밀을 죄다 넘겼다.'

놈의 별명이 왜 '런크스타'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메인퀘스트 11이 완료된 즉시, 명예의 전당 순위가 뒤바뀌자 다크스타는 한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김하나를 만나고 기밀문서들을 전해준 게 틀림없었다.

덕분에 영웅회는 와해되고 있었다.

판게니아에서도, 이곳 지구에서도.

하지만 판게니아보단 상황이 낫다.

"어차피 너희들은 우리를, 나를 외면할 수 없다. 대체할 수 없다."

플레이어는 한정된 자원이다.

그들의 지구를 지켜주는 영웅이어야만 한다.

이렇게 욕하고 삳대질해도, 어차피 대체는 불가능하다.

지금은 비록 시기가 좋지 않아 욕을 먹을지언정 침략한 괴물들만 잘 처리해주면 언제 욕했냐는 듯 돌아설 것이다.

'영웅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가 만든 자부심이다.

결코 이대로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이 세계의 정점에 서겠다는 다짐은 아직도 유효했다.

어찌해야할까.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침략의 시기를 당기는 방법······.'

침략이 시작되면 대중은 다시금 자신의 힘을 바라겠지.

제발 도와달라고 울부짖을 것이다.

플레이어는 절대로 대체가 불가능한, 한정된 자원.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빌고 또 빌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신의 섬'이 떠오릅니다."

"'튜토리얼'이 시작되었습니다."

루시퍼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위에, 거대한 섬이 공중을 부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튜토리얼?'

··· 무언가가 잘못됐다.

여태껏 멈춰있던 일들이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란돌프······ 네놈, 설마······.'

루시퍼는 단번에 눈치챘다.

저 변화의 중심부엔 란돌프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거기······ 있는 것이냐?"

축복의 천사가······ 저곳에 있다는 것이다.

느낄 수 있다.

알 수 있다.

저곳에 그녀가 있음을.

루시퍼는 신의 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완성된 자(플레이어)'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

지면을 뚫고 나온 혼종.

심연의 괴물이 왜 침략을 했는지 알아보고자 한창 지하를 살폈던 게 유효했다.

'심연과 연결되어있다.'

지하수도에서 심연과 연결된 워프를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워프는 비활성화 상태였다.

지이이잉!

내가 손을 대자, 비로소 활성화를 시작했다.

동시에.

"'관리자(란돌프)'를 확인했습니다."

"연동을 허가하시겠습니까?"

나를 확인했다는 말.

아마도 내가 촉매가 된 모양이다.

양쪽 세계를 이어주는 중개자.

또한, 내 허가 없이는 연동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허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내 모든 의문을 해소하려면 연동시킬 수밖에 없다.

"허가되었습니다."

"'신의 섬'의 연동이 시작됩니다."

"연동이 완료되었습니다!"

"'튜토리얼'이 시작됩니다."

"'완성되지 못한 자(박현명)'가 '신의 섬'으로 입장합니다."

쉬이잉!

튜토리얼

현재 세계를 나누는 기준은 단 한가지뿐이다.

각성자와 비각성자!

타차원에서 침략해오는 괴물에 대항할 유일한 수단.

총탄과 핵으로도 타격을 입지 않는 괴물들은, 고작해야 수십만에 이르는 '디맨션 워리어'만이 타격을 줄 수 있다.

하여 사람들은 디맨션 워리어를 '영웅'으로 여겼으나······.

"······ 그건 희망사항, 꿈에 불과했지."

박태우는 사무실에 앉아 작게 중얼거렸다.

항거할 수 없는 강력한 무력을 휘두르는 낯선 존재들.

전설이나 신화에서나 등장할법한 괴물과 대적자들.

먼 옛날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지를 '신'이라 불렀다지.

부디 평범한 사람들을 감싸안아주는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나길 바라면서 말이다.

"연합장님. 무엇이 희망사항이고 꿈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옆에서 자료를 배포하던 연합원이 묻자 박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저었다.

"자네는 어쩌다가 '판게니아'를 접하게됐나?"

"음. 게임을··· 좋아해서요. 이것저것 찍먹해보다가 하게 됐었습니다. 클리어하면 '꿈'을 이뤄준다는 말에 혹해서······."

"그래. 나도 그랬다."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모두가 영웅이라 추앙하며 신처럼 떠받드는 존재는, 전직 게임폐인들 많다.

박태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구석폐인.

사회부적응자.

수많은 게임을 플레이하고 접기를 반복하면서 삶에 무료함을 느끼던 와중.

―게임을 클리어한 사람에게 한 가지 꿈을 이뤄주겠다.

신작 게임의 소개치고는 지극히 짧은.

고작 이 한 줄이 전부인 게임 '판게니아'를 만났다.

꿈을 이뤄주겠단다.

그게 무엇이든.

딱히 꿈은 없었지만, 저 도전적인 문구가 마음에 들어서 박태우는 판게니아를 플레이했다.

예상대로 게임은 말도 안 되는 난이도를 자랑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판게니아'에 소환되어 있었다.

"··· 난데없이 힘을 얻은 게임중독자들이 과연 정의를 위해 살아갈까?"

"그래도 사회규범속에서 자라온 사람들이니 어느 정도의 선은 있지 않겠습니까?"

"처음엔 있었지."

박태우는 눈을 감았다.

초기의 플레이어들은 모두 소극적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살아갔다.

하지만 괴물이 등장한 그날 이후, '대체불가'의 영역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알게된 플레이어들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따로없었다.

그럴 수밖에.

사회에 대한 불신과 적의로 가득한 플레이어도 많았으니까.

한데, 제재는커녕 순식간에 플레이어는 법 위에 선 존재가 됐다.

플레이어가 온갖 범법행위를 저질러도 어느정도는 용인이 되어버린 사회.

이게 현 지구의 실상이다.

"한국은 연합장님이 계셔서 괜찮지 않습니까?"

박태우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내 힘이 미치는 것도 기껏해야 서울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각성자의 숫자가 너무나도 부족해······."

숫자가 적으니, 더 날뛰는 것이다.

지방 도시들의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정부 차원에서 애써 은폐하고 있지만 지방 플레이어의 범죄율이 80%가 넘어선다는 통계도 있었다.

그것도 경범죄는 빼고, 중범죄의 비율만.

마음만 먹으면 플레이어가 증거를 남기지 않고 범죄를 저지를 방법은 너무나도 많았으므로.

설령 증거를 남겨도, 그를 처리할 사람이 없다.

영웅연합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방은 특히 그랬다.

패거리에 불과하던 것들이 슬슬 조직화를 이루고 있다는 보고도 들었으나 서울의 인원을 뺄 수는 없는 노릇.

연합의 힘이 약해지면 놈들은 그 즉시 서울로 치고 들어올 것이다.

'무겁군.'

박태우.

그 역시도 흔한 게임폐인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책임질 수 없던 남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수천만의 우상이 되었다.

아무리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슬슬 버거운 것도 사실이다.

'나는 영웅 같은 게 아닌데.'

수많은 기대의 눈초리가 부담스럽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긴 했으나 이곳이 자신이 있을 자리가 맞는건지 항상 의구심이 든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인가.

확실한 건 자신은 아니다.

괴물이 등장한 첫째날.

대원정에서 빌헬름이 사망한 그날.

판게니아의 모든 '게이머'가 마침내 '플레이어'가 되었을 때.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가, 자이언트 맨티스를 우연치않게 사냥했을 따름인데.

주변의 환호와 칭송에 한순간 취해버렸다.

유명세에 사람들이 몰렸고, 정신을 차렸을 땐 연합이 만들어져 있었다.

'흘러, 흘러, 여기까지 온 것에 불과하지.'

그러니 진정으로 영웅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면, 그건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박태우가 생각하는 영웅은 한 명뿐이었다.

팬텀.

홈페이지에 수많은 공략글을 남긴 자.

그 정도로 판게니아에 몰두한 이는 애초에 없었다.

당연히 지금도 그보다 판게니아를 더 잘 아는 사람은 단언하건대 없다.

몬스터의 공략법, 아이템의 숨겨진 옵션이나 특이한 조합식, 온갖 퀘스트의 진행방법이나 재능 테크트리, 그리고 히든 특성을 가장 먼저 알아내어 공유한 것도 그였다.

'메인 퀘스트를 말도 안 되는 점수로 돌파하고 있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만약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대도 자신이 그 점수를 넘어서긴 힘들겠지.

허나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도전해보고 싶긴 하다.

더 완전하고 완벽하게.

그렇게만 된다면, 어쩌다보니 만들어진 영웅이 아니라 진짜 영웅으로 발돋움할 수 있지 않을까?

이대로면 세계는 머지않아 균형을 잃고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여, 연합장님······ 저게 뭐죠?"

그때였다.

순간 세상이 소란스러워졌다.

연합원이 가리키는 손가락의 방향을 따라 박태우는 고개를 돌렸다.

'섬?'

그러자 하늘 위에 떠오른 거대한 섬이 시야에 들어왔다.

"'튜토리얼'이 시작되었습니다."

"참가를 원하시면 '신의 섬'을 바라보고 양손을 합장해주십시오."

"'완성된 자(플레이어)'는 입장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 문장들.

각성자와 비각성자의 경계가, 마침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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