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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9% SWMASTERCIBERPUNK / Chapter 6: 6

Chương 6: 6

* * *

"힘없는 약자를 공격하는 건 저질. 둘이 1:1해."

나는 데이지의 선언과도 같은 말과 함께 득달같이 다론에게 달려들었다.

"이 비겁한 놈!"

차차창!

칼날이 놈의 팔과 부딪치며 거친 비명을 지르고, 그 비명을 타고 불꽃이 튀긴다.

다시 이어진 공방 속에서 다론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해결사에게 비겁하다는 건 칭찬이지. 미처 네놈에게 조력자가 있었을 줄은 예상 못 했지만."

캉!

내뻗은 주먹과 칼끝이 부딪치며 둘의 거리가 멀어졌다.

벌어진 간격 사이로 다론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화륵!

순간 움켜쥔 주먹 사이로 새빨간 불꽃이 타올랐다. 손가락 사이로 어둠을 비추는 불꽃이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너희는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그가 광기 어린 포효를 내뱉은 순간, 주먹을 휘감았던 새빨간 불꽃이 팔 전체로 번졌다. 넘실거리는 화염이 마치 사자의 갈기털처럼 휘날린다.

"······핏빛 크롬 갈기."

왜 저런 이명이 붙었는지 보는 순간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칼날이 돋아난 팔이 아니라 거기에 플라즈마까지 뿜어내는 팔이라니.

"죽어라!"

불꽃에 휩싸인 다론이 쇄도했다.

단순히 불꽃만 뿜어내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사이버웨어의 출력 자체가 상승했는지 이전보다 훨씬 빨라진 움직임이다.

타앙!

달려든 놈이 양주먹을 내려쳤다. 비껴내듯 막아냈는데 그 충격으로 한쪽 다리가 휘청일 정도였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크읏!"

비껴낸 공격 위로 넘실거리던 불꽃이 순간적으로 나를 태울 듯 뿜어진 거다.

나는 반격을 포기한 채 뒤로 훌쩍 물러섰다. 잠옷으로 입고 있던 셔츠의 손목이 그새 검게 타버렸다.

"아깝군."

이를 드러낸 그가 다시 달려들었다. 플라즈마 불꽃으로 물든 양팔과 칼날이 다시 맞부딪쳤다. 그럴 때마다 넘실거리던 불꽃이 불씨가 되어 바닥에 흩뿌려졌다.

이번엔 나도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며 방어했다. 플라즈마 불꽃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무엇보다 근거리에서 뿜어진 불꽃으로 가려지는 시야 때문이었다.

"네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응?"

"네놈 목이나 걱정하시지!"

"집안이 불바다가 되는데 여유만만이로군?"

"불은 네놈 피로 꺼주마!"

나와 놈은 싸우면서도 서로를 자극하는 트래쉬 토크를 멈추지 않았다. 이게 해결사가 싸우는 법이었다.

카카캉!

팔과 칼날인 쉼 없이 교차했고, 서로의 목숨을 앗아갈 치명적인 급소를 노렸다.

한층 출력이 강해진 다론의 우격다짐은 나 역시 가볍게 볼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놈의 우격다짐 속에서도 다른 꿍꿍이를 느끼고 있었다.

'저놈. 나를 보는 척하면서 한쪽 눈으론 계속 로제를 보는군.'

놈의 양쪽 눈이 전부 사이버아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로제의 죽음도 의뢰를 받았어. 콜레오넬 가문도 그녀를 버린 건가? 하지만 왜?'

나는 꼬리를 무는 의문을 끊어내고 눈앞에 집중했다.

'뭐가 됐든 놈을 처리하는 게 먼저다. 콜레오넬 가문은 그다음이야.'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계산하기 시작했다.

놈을 처리하기 위해선 일반적인 공격으론 무리였다. 원래도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을 정도였는데, 플라즈마를 뿜어대며 출력이 올라간 놈의 힘과 속도는 나조차도 서서히 버거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놈의 말대로 더 지체했다간 불바다가 된다.'

계산이 섰다.

내가 제대로 힘을 쓰고 난 후 불어닥칠 역효과와 불바다가 된 아파트를 비교했을 때······ 차라리 역효과가 나았다.

'······무리해서라도 죽인다!'

순간 살기가 폭발하듯 뿜어졌다. 주먹을 내뻗는 놈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카캉!

주먹과 칼끝이 정확히 마주하며 서로 뒤로 튕겨나듯 물러났다.

내 분위기가 변한 걸 느꼈는지, 놈도 바로 달려들지 않고 자세를 바꿨다.

순간 놈의 손등에서 기다란 갈퀴 모양의 칼날이 튀어나왔다.

"제대로 상대해주마."

놈이 혓바닥으로 자신의 피가 묻은 칼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저놈도 정상은 아니었군.

"미안하지만, 네놈을 상대해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나는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칼날을 반대쪽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뚝. 뚝.

손바닥을 베고 지나간 칼날이 피로 물든다. 비릿한 혈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마치 이게 네 피냄새라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아찔하기까지 했다.

"미친놈! 미쳐버려서 자해라도 하겠다는 거······? 저, 저게 무슨?"

한껏 나를 비웃던 놈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시선이 거칠게 흔들린다. 놈은 내가 아니라 칼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는 칼날을.

"이 힘을 쓰게 만든 이상, 곱게 죽진 못할 거다."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놈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눈썹을 꿈틀거린 놈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건방진 놈! 그 재수 없는 입부터 찢어주마!"

콰직!

놈이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쿵!하는 놈의 발걸음이 아파트 전체에 울려댈 정도였다.

놈의 신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으로 쇄도했다. 한껏 허리를 뒤틀었던 놈의 허리가 반대쪽으로 휘돌았다.

순간 팽팽해진 고무줄이 튀어나가듯, 놈의 팔이 순식간에 내질러졌다.

쐐애애액!

손등에 달린 갈퀴 칼날이 바람을 갈랐다. 공간을 찢어대며 쇄도한 칼날은 그대로 나를 관통했다.

콰득!

"흐, 흐하하! 입만 산 놈의 최후다! 크하하! 크학! 크허헉! 컥!"

하지만 그건 놈의 착각이었다.

번쩍!

놈의 모든 공격은 나에게 닿기 전, 핏빛으로 타오르는 괴물을 먼저 마주했다.

모든 걸 불태우는 소멸의 칼날이며, 모든 걸 베어내는 허무의 칼날.

바로 검기라는 괴물을.

쿠쿠쿵!

얕은 진동과 함께 전면의 공간이 1자로 갈라졌다.

갈라진 공간은 바닥과 천장을 갈라내며 거침없이 뻗어 나갔고, 이내 창문이 붙어있는 거실 벽을 통째로 뚫어버렸다.

그리고도 한참을 더 하늘을 물들이고 나서야 핏빛 검기는 사그라들었다.

휘이이잉!

날아가 버린 벽으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거칠게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놈의 좌우 신체가 서서히 어긋나는 게 보였다.

"커헉······ 이, 이게 무슨······!"

놈은 타오르는 불길로 뛰어든 불나방이었을 뿐이고, 멸겁의 불꽃은 그런 불나방을 용서 없이 태워버렸다.

"다, 다시 가질 수 있었는데······ 여, 영광을! 명예를······."

놈이 닿지 않는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듯 허공을 향해 손짓했다. 필사적으로 내뻗었던 손이 이윽고 툭하고 떨어진다.

털썩.

놈이 쓰러진다. 미묘하게 어긋났던 좌우 신체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좌우로 갈라진 놈의 절단면엔 피부는 눌어붙었고, 크롬은 녹아서 쇳물이 흐른 흔적이 선명했다. 시체에선 피와 함께 거뭇한 오일과 끈적한 윤활유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신체보다 기계가 더 많았군."

뇌와 머리 일부, 그리고 소화기관 정도만 진짜였고 나머지는 전부 기계로 대체되어 있었다.

온몸에서 칼날을 뽑아낼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면 인간이라 부르긴 애매한 수준이다.

조금만 더 개조했더라면, 뇌 빼고 전부 기계로 대체한 진짜 사이보그였을 테니까.

나는 내려다보던 놈을 일별하고 로제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니, 정확히는 로제의 앞을 가로막고선 왜소한 체구의 소녀에게 향했다.

'특이한 이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저 정도로 특별할 줄은 몰랐는데.'

아까 전 움직임은 나조차도 감탄이 나올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은밀함, 속도, 파괴력. 그 어느 것 하나 모자란 게 없었다.

다론도 그걸 알아챘기 때문에 로제를 노리던 걸 바로 포기했던 거다.

'이름이 데이지였었나?'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고맙다. 이 은혜는 꼭 갚······"

"벽간 소음. 민폐. 주의 부탁."

"······그, 그러지."

"그럼 이만. 수고."

묘하게 말투가 이상해진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를 돌았다.

원래도 저런 말투였나?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로제가 달려와 끌어안았다.

······데이지를.

"정말 고마워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듯 안긴 데이지가 고장난 로봇처럼 바둥거렸다.

"으, 으아아아."

이상한 소리까지 냈다.

"어머. 괜찮아요?"

로제가 끌어안았던 데이지를 떼어내며 물었다.

로제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갑자기 화들짝 놀란 그녀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괘, 괜찮······"

"진짜 괜찮아요? 얼굴이 빨개졌는데 혹시 무리한 거 아니에요?"

"이, 이 정도는······ 그, 그럼 나는 이만!"

고개를 격하게 휘저은 데이지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본인이 뜯어놓은 출입문을 조심히 넘어가던 그녀는 뒤를 힐끗 바라보곤 사라졌다.

* * *

이 사실은 바로 알리오에게 전해졌다.

"오늘 새벽 로제가 공격당했습니다. 하마터면 죽을뻔했고요! 고모님께서 그러셨습니까?"

알리오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이자벨을 노려봤다.

오늘 이 보고를 받고 얼마나 화가 나던지, 그때 눈앞에 이자벨이 있었더라면 그녀 머리통에 총알을 박았을지도 몰랐다.

이자벨도 평소와는 다르게 격한 알리오의 반응에 작게 움찔하며 대답했다.

"제가 왜 로제를 공격하겠어요? 저는 분명 그 칼잡이만 노린다고 했을 텐데요?"

"그럼 그게 사고였단 말입니까?"

"당연한 소릴 하는군요? 잊지 마세요. 저는 가주와 로제의 고모에요! 같은 핏줄이라고요!"

"······."

핏줄까지 거론하는 이자벨의 발뺌에 알리오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저 고모라는 핏줄의 방패 때문에 의심을 의심으로만 끝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대체 언제까지 핏줄을 거론하는 걸 지켜보기만 해야 할까?

으드득!

이를 꽉 깨문 알리오가 살벌하게 경고했다.

"그 누구도 콜레오넬의 피를 본다면, 그자는 열 배, 백 배의 피를 보게 될 겁니다."

순간,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타올랐다.

"······그 누구라도요!"

정확히 대상을 말하지 않았어도, 그 경고가 자신에게 향한다는 걸 이자벨이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도 콜레오넬이야!"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만 낳은 그녀의 성은 여전히 콜레오넬이었다. 그녀가 가문 회의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알리오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모님께선 그러시겠죠. 하지만 카터는 아니지 않습니까?"

"······!"

카터는 이자벨의 아들이다. 그리고 카터의 성은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있었다.

즉, 알리오는 경고하는 거다.

다 알고 있으니 헛수작 부리지 말라고. 그리고 가문을 탐내지도 말라고.

"흐, 흥! 도와줘도 딴소리군! 그럼 난 손 떼겠어!"

당황한 이자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목소리는 성난 목소리였지만, 방황하는 눈빛만큼은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고모님. 저는 조금만 더 조심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일은 끝까지 마무리 짓는 게 콜레오넬 아닙니까?"

알리오가 일어선 이자벨을 붙잡으며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 콜레오넬을 거론하며 슬며시 자극했다.

평소였다면 그냥 코웃음 치며 넘어갔을 도발이건만, 앞서 얘기한 게 있어선지 이자벨이 발끈하며 대답했다.

"뭐? 좋아! 내가 이번엔 그 칼잡이를 확실히 처리하지! 누가 콜레오넬의 피가 더 진한지 두고 보자고!"

이자벨이 씩씩거리며 집무실을 나갔다.

그런 이자벨의 뒷모습을 알리오가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디까지 떨어질지 한번 지켜보죠, 고모님."

그가 탁자를 톡톡 두드리자 얇은 모니터가 올라왔다. 거기엔 이자벨이 오기 전까지 몇 번이고 돌려본 영상이 멈춰져 있었다.

칼잡이와 로제가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이.

알리오는 멈춰진 영상 속, 칼잡이와 로제를 바라보면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거절할 수 없는 의뢰 (1)

78화. 거절할 수 없는 의뢰

한편,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제는 충격에 휩싸였다. 사건이 있던 그 날 새벽부터 하루종일 기절한 듯 쓰러져있었으니까.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 정도까지 할 줄이야.'

이번엔 명백히 로제까지 노렸다. 여전히 그 이유는 의문으로 남았지만, 어쨌든 두 눈으로 확인한 이상 가만히 기다릴 때가 아니었다.

이제 먼저 손을 쓸 타이밍이다.

"아직도 너희 오빠의 죽음을 원하지 않나?"

나는 침울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는 로제에게 물었다.

"······네."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는 눈빛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녀도 느낀 거다.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걸.

"뭔가······ 뭔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요. 중간에 다른 게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고요."

"흐음······."

로제의 말은 일리 있었다. 나도 다론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로제를 노릴 거였으면 처음부터 내게 경고를 날릴 이유가 없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로세툼을 공격하면 됐을 테니. 다론의 능력이었다면 소울 이터가 알아채기도 전에 로제의 목숨을 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게 경고를 하며 로세툼을 떠나라고 말했고, 공격의 대상도 명백히 내게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게 미묘하게 바뀐 건 최근, 정확히는 이번 일이었다.

'그래. 다이손 영감의 말대로라면 콜레오넬은 로제의 죽음을 원치 않아.'

아니, 오히려 로제가 살아서 가문으로 돌아오는 걸 바랄 거다. 그래야 원하는 대로 정략혼의 카드로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로제에게 말했다.

"네 의견은 알겠다. 하지만 놈들의 스탠스가 바뀐 이상,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 그게 오해든, 누군가의 개입이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시점이 아니다."

"······어쩌려고요?"

로제가 불안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에메랄드빛 바다에 격랑이 휘몰아친다.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그리고 걱정하는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그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알아볼 테니."

"······고마워요, 현재 씨."

"그럼 쉬고 있어."

그녀를 일별하고 방 밖으로 나왔다. 갈라지고 부서져 초토화된 거실과 급하게 차단 펜스로 가린 뻥 뚫린 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눈동자를 차갑게 가라앉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해보는 데까지 해보고 안되면, 피를 봐야지."

그게 누구의 피더라도.

* * *

집 밖으로 나간 나는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데 몇 번을 눌러도 초인종이 울리지 않았다.

초인종 알람을 꺼놓은 건가?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안에 사람이 없다고 느낄 정도의 적막만이 흘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전날 닫혔던 문이 그 이후로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는 걸.

"있는 거 다 아니까 대화 좀 하지. 부탁할 일도 있고."

그 순간 저절로 문이 열렸다.

띠리릭.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면서도 느꼈지만, 마침내 거실을 마주하자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만큼이나 휑하게 사는군.'

아니, 어떤 면에선 나보다 더한 수준이었다. 나는 그래도 소파와 TV 정도는 있어서 거실 느낌은 냈는데, 여긴 진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커튼을 쳐놓고 불조차 켜지 않아서 으스스한 느낌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런 실내에도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공간이 있었는데, 바로 주방이었다.

'뭔가······ 화려한데?'

어쩌면 휑한 집안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지만, 조명이 들어온 주방은 화려했다.

온갖 요리 도구가 걸린 싱크대와 정체 모를 조미료들로 가득한 유리 찬장. 한쪽엔 요리 보조용 로봇팔이 무언가를 휘젓고 있었으며, 다른 쪽엔 큼지막한 솥단지가 수증기를 모락모락 내며 끓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주방 앞쪽에 놓인 거대한 아일랜드 식탁 앞.

"무슨 일?"

헐렁한 앞치마를 맨 데이지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와중에도 손은 현란하게 움직이며 감자를 채 썰고 있다.

으음. 마이웨이로군.

나는 짧은 감상평을 내리곤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을 하지?"

"······?"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내려 채를 썰고 있는 도마를, 그리고 팔팔 끓고 있는 솥단지를, 마지막으로 다시 나를 말없이 바라본다.

'요리하는 거 안 보이냐?' 라고 하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거 말고. 어제 보니까 전투 임플란트를 했더군. 혹시 군인······"

이라고 말하려다가 헐렁한 앞치마를 맨 그녀의 모습을 보곤 빠르게 말을 바꿨다.

"······용병이었나?"

"아니."

그녀가 미동도 없이 대답한다. 다시 손은 감자를 썰기 시작했다.

"그럼 해결사?"

"아닌데."

"경호원?"

"아니."

나는 미간을 좁혔다. 혹시 귀찮아서 그냥 거짓말을 하는 건가?

전투 임플란트를 하고 있는데 군인도, 해결사도, 경호원도 아니라고?

"······뭐, 그럼 암살자라도 했었나 보지?"

"······."

탁.

그녀가 감자를 채 썰던 칼질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본다. 고저없이 평온한 눈동자엔 어떤 감정도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만으로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암살자였다고?'

내가 이 세계에 와서 놀란 적이 몇 번 없는데, 그중 한번은 오늘이 될듯싶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설마 진짜 암살자였다니.

'그나저나 저 얼굴로?'

그녀의 모습을 다시 살펴봤다.

누가 봐도 본인 사이즈보다 커서 헐렁한 앞치마. 머리엔 프릴장식이 된 요리사 모자를 눌러썼고, 커다란 아일랜드 식탁 위로 상체만 간신히 드러나는 모습까지.

이게······ 사이버펑크의 암살자?

'아니지. 오히려 이런 세계기에 더욱 어울리는 건지도 모른다.'

왜 무협소설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던가? 어린아이와 노인을 조심하라고.

물론 그녀가 어린아이는 아닌 것 같지만······.

나는 쓸데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걷어내고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혹시 아직도 그 일을 하나?"

해결사들보다도 더 괴팍하고 알 수 없는 존재가 소위 암살자들이다.

이 세계에서 암살이란, 해결사도, 용병도, 갱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즉, 다른 의뢰나 일을 하면서도 어쩌다 날아온 암살 의뢰까지 할 수 있는 막장 시대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암살자의 길을 걷는 자들이라면, 필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게 피치 못할 사정이든, 피를 갈구하는 사상을 갖고 있든 간에 말이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아직도 암살자로 살고 있다면, 지금부터 내가 할 부탁은 사라지게 된다.

암살자에게 사람을 지켜달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니.

"······아니. 은퇴."

나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잘됐군. 그럼 부탁 하나만 하지."

"부탁?"

"그래. 사람 한 명을 지켜줄 수 있겠나?"

"그 여자?"

처음으로 그녀의 눈동자에 작은 호기심이 깃들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더 말을 덧붙이려다가 다시 입술을 꾹 다문다.

나는 미묘하게 바뀐 데이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정식으로 네게 의뢰하지."

"······나는 지키는 건 자신 없는데."

데이지가 조심스레 손에 든 칼을 내려놓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 모습에 그녀가 반쯤 넘어왔다고 확신했다. 정확히 어떤 게 그녀의 관심을 끈 건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난번처럼만 해주면 된다. 보수는 넉넉히 지급하지."

"······."

그녀가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지만 나를 보면서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눈동자의 초점이 어딘가 맞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갑자기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내게 물었다.

"어디서 지키지?"

"바깥으로 돌아다닐까 봐 그런가? 그건 걱정하지 마라. 네 집에서 지낼 테니까."

"······? 내 집?"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그래. 처음엔 그럴 생각 없었는데, 네 집을 보아하니 그래도 충분할 것 같더군. 어차피 너도 방이 남지 않나?"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가구 하나 찾기 어려운 삭막한 실내를 봤을 때, 분명 본인이 지내는 방을 제외하고선 전부 비어있을 게 분명했다.

"······아."

눈을 동그랗게 뜬 데이지가 작게 탄성 아닌 탄성을 내뱉었다.

거절도 승낙도 아닌 애매한 반응.

나는 혹시나 거절할까 봐 빠르게 원래 조건을 덧붙였다.

"만약 그게 싫다면 네가 우리 집에서 머물러도 된다. 하지만 밀착 경호를 해야 하기 때문에 네 집에 머무는 게······"

그런데 갑자기 데이지가 고개를 젓더니 말을 끊었다.

"아니. 좋아."

"······?"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오는 거 좋아."

"아, 그러면 너희 집으로······"

"밀착 경호도 좋아."

"어?"

"다 좋아. 의뢰는 받겠어."

"······그, 그래."

탁탁탁탁!

내게서 시선을 뗀 그녀는 다시 감자를 채 썰기 시작했다. 한쪽에 놓인 볼에는 이미 수북이 채 썬 감자가 쌓여있었다.

* * *

깊은 밤, 달이 기우는 시간.

나는 콜레오넬 저택으로 잠입했다.

로제에겐 오빠를 그냥 놔둘 거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그러려면 전제되는 조건이 있었다.

'알리오가 그녀를 죽이려던 게 사실이 아니어야 하겠지.'

로제의 말대로 오해였거나, 중간에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면, 나도 콜레오넬과 굳이 척을 지고 싶진 않았다. 귀찮은 것도 귀찮은 거지만, 무엇보다 로제의 가족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알리오가 로제를 죽이려 했다면?

그럼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

'죽인다.'

로제가 힘들어하겠지만, 그리고 나를 원망할 테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일이 끝날 테니까.

그로 인해 또 다른 귀찮은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건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될 일.

'······그게 해결사가 살아가는 법이니까.'

닥친 일부터 완벽히 해결한다.

그게 해결사가 살아가는 법이다.

나는 전방에 펼쳐진 콜레오넬 저택 부지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예상은 했지만, 그냥 부잣집 수준이 아니었군.'

당장에 콜레오넬 저택이 있다는 곳의 담장을 넘었을 뿐인데, 그 안에만 10채가 넘어가는 건물이 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나 하늘을 감시하는 드론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가히 작은 규모의 마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다.

'콜레오넬이 이 정도라면 이것보다 더한 곳도 있다는 건데······ 정말 다른 세상이구나.'

나는 작게 혀를 차며 안쪽으로 숨어들었다.

로제에게 들었던 대로 길을 따라가자, 비탈진 언덕 위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저택이 눈에 보였다.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탓에 지역 전체를 다 내려다보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 반대말은, 모든 곳에서도 저택을 올려다볼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즉, 저택에 변고가 생기면 어느 곳에 있더라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뜻.

'머리를 잘 썼네.'

역시 이럴 땐 그보다 더 영리한 존재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톡톡.

나는 손목의 워치를 두드렸다.

-네, 마스터.

"이브. 확인했어?"

-상공에 펼쳐진 전파방해 때문에 상세 스캔은 어렵습니다. 다행히 카메라로 전부 추적은 가능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보이는 것만 알 수 있으니 100% 신뢰하지는 마십시오.

"그 정도만 돼도 충분해. 여길 파괴하려는 게 아니니까."

이곳에 들어오기 전, 드론을 미리 띄워놨다. 일정 구간 이상 접근하긴 어려웠으나, 그래도 드론 성능이 좋아서 저택을 살펴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럼 마크(Mark) 시작합니다.

이브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 한쪽이 알록달록 오색빛깔로 물들었다.

-빨간색은 감시카메라의 위치. 움직이는 노란색은 감시드론이며, 초록색은 안드로이드와 보안경을 착용한 가드들입니다. 시야범위는 옅은 색으로 표현했으나, 어디까지나 가정일뿐이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좋아."

나는 마치 맵핵을 쓴 것처럼 모든 감시망을 피해 언덕 주변까지 빠르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제 저 언덕 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되는데······.

"······드론이 말도 안 되게 많군."

단순히 감시드론뿐만 아니라, 전투드론까지 복합적으로 떠서 저택 주위를 휘휘 돌고 있었다.

그 숫자가 어느 정도여야 사각을 찾거나, 빈틈을 찾아볼 텐데 이건 애초에 그게 불가능했다.

"로제의 아버지가 암살을 당했다더니······ 그 때문인가?"

왠지 그래서 보안이 더 강력해진 것 같았다.

"흐음. 이걸 어쩐다······."

이걸 무시할 수도 없고, 강제로 뚫고 갈 수도 없다. 그럼 어떻게든 드론의 감시망은 피해야 한다는 건데······.

"하는 수 없군. 모조리 추락시키는 수밖에."

거절할 수 없는 의뢰 (2)

79화. 거절할 수 없는 의뢰

세계는 현상으로 존재한다. 물이 얼어붙는 현상, 불이 붙어 타오르는 현상, 그 불붙은 무언가가 재가 되는 현상, 그 재를 흩날리는 바람이 부는 현상 등등.

하지만 오롯이 스스로 존재하는 힘(物自體)이 있으니, 그게 우주를 구성하는 네 개의 힘이다.

나는 이 네 개의 힘 중 중력을 제어할 수 있다.

질량을 가진 두 개의 물체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 그리고 그 힘의 본질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引力)이다.

'그 말은 다른 한쪽의 힘이 크다면 그쪽으로 끌어당겨 진다는 뜻이지.'

지구 위의 사물이 지구에게 끌어당겨 지듯 말이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심장에 자리 잡은 포스가 꿈틀거리면서 혈류가 거세게 내달리기 시작한다.

이내 혈류를 따라 포스가 온몸을 거칠게 휘돌고, 머릿속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던 미지의 힘과 접촉했다.

지이잉!

순간 아찔한 감각과 함께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났다.

나는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원래는 없었던 미지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 감각으로 어떤 걸 할 수 있는지까지도.

"흐읍!"

양손을 내뻗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는 이내 폭발적으로 솟구치며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마치 괴물의 포효처럼.

나는 그 격렬한 울음을 손바닥으로 끌어모았다. 확장됐던 아지랑이가 압축되고, 흉포한 울음은 점점 실체를 가진다.

크허헝!

공간이 비명을 지르고 찢어지고 압축된다. 이윽고 그 모든 과정이 지나 하나의 세계에 담겼을 때, 공간은 칠흑의 우주가 담긴 유리구슬 모양이 됐다.

그 순간, 칠흑의 유리구슬 안이 쩌억!하고 세로로 갈라지더니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마치 파충류의 눈동자처럼, 혹은 언제가 영화에서 봤던 사우론의 눈동자처럼 서서히 불타오른다.

"······가라."

의지는 목소리가 되고, 그것으로 모든 건 결정됐다.

팟!

압축된 유리구슬이 저택 상공으로 순간 이동하듯 날아갔다.

그리고 잠시, 이 세계를 감상하기라도 하듯 상공을 부유하던 구슬은······.

파지직!

퍼석!

산산이 깨졌다.

「중력조작」의 2단계 레벨.

광범위 조작 스킬 「춤추는 만유인력」

그 순간, 저택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모든 전기가 순간적으로 끊긴 탓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이내 다시 불이 켜지고 전력 공급에 대한 헤프닝으로 여겨질 때쯤.

슈우웅!

콰쾅!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슈우우웅!

콰쾅!

슈웅! 쾅!

드론이라는 별똥별이.

나는 모조리 지상으로 추락하는 드론들을 바라보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제 이곳에 온 목적을 해결하러 갈 시간이다.

* * *

콜레오넬 저택 내부는 갑작스러운 정전과 드론의 추락으로 비상이 걸렸다.

집무실에 앉아있던 알리오는 들려오는 소란에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십니까?"

집무실을 지키던 경호 대장이 물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소란스럽기도 하고."

"네. 그럼 모시겠습니다."

"아니, 됐네. 책 좀 읽다가 잘 테니 자네들도 쉬게. 아니면 밖에서 뛰어다니는 친구들을 도와주거나."

"······알겠습니다."

알리오는 휘적휘적 걸어서 집무실을 나섰다.

바깥이 시끄러우니 저택의 사용인들도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소란 떨 거 없네. 별일 아닐 테니."

"가, 가주님!"

"각자 자리로 돌아가도록. 쓸데없이 돌아다니면 괜히 불안한 법이니."

"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마주치는 사람마다 걱정할 필요 없다며 자리로 돌려보내던 알리오는 마침내 본인의 방으로 들어섰다.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을 가로질러 책상에 철퍼덕 앉은 그가 어둠에 잠긴 공간을 바라보며 말했다.

"온 것 알고 있다."

스르륵.

어둠의 장막이 갈라지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저벅.

그가 천천히 걸어온다. 절묘하게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지점에 걸음을 멈춰선 그가 고개를 들어 알리오를 바라봤다.

그 순간, 책상 뒤쪽에 난 거대한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졌다.

환하게 드러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알리오가 살짝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네가 소드마스터로군.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솜씨야."

그의 태연한 모습에 강현재의 눈빛에 이채가 맴돌았다.

"생각보다 침착하군. 혹시 그 책상과 천장에 매달린 무기들을 믿는 거라면 큰 실수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강현재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전에 네 목이 떨어질 테니까."

"······."

"못 믿겠으면 시험해봐도 좋아. 네 목이 하나 더 있다면 말이지."

철그럭.

강현재가 허리춤에 맨 검에 손을 올려놨다.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검이 뽑히는 일이 발생한다면, 강현재의 예언대로 그때가 알리오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이 될 거다.

알리오는 일련의 차분하고도 과격한 협박에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과격한 건 소문이 오히려 축소됐었군."

어깨를 으쓱한 그가 책상에서 일어섰다. 설치된 무기를 사용할 생각이 없다는 제스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서 왔겠지?"

알리오의 말에 강현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가 정확히 말하지 않은 생략된 부분이 어떤 걸 뜻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네가 지시한 일인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지."

"말장난하지 마라. 난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아."

강현재의 목소리에 서늘함이 서렸다. 듣는 것만으로 살갗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알리오가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가, 머쓱한 듯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이미 처음부터 유지했던 담담한 표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로세툼을 방해하고 너를 노렸던 거라면······ 맞다. 그건 내가 지시했지. 하지만 로제와 함께 있는 너를 노린 건 내가 아니다."

"좀 더 그럴싸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텐데? 그 하얀 살갗에 흉터가 남기 싫다면."

강현재의 살벌한 경고에 알리오가 입술을 꾹 다물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집안의 치부라 말해주기 싫다만······ 어쩔 수 없지. 로제를 노린 건 이자벨이라는 여자다."

"그게 누구지?"

새로운 이름에 강현재가 눈을 빛냈다. 이자벨이라는 이름은 다이손에게도, 로제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나와 로제의 고모님이지."

"······고모라고?"

알리오의 탄식 어린 대답에 강현재는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 고모라는 사람이 자신의 조카딸을 죽이라고 시켰다는 말인가? 아무리 천륜이 땅에 떨어진 미쳐버린 세계라지만, 대체 왜?

"왜 노렸는지 궁금하겠지? 이유는 간단해. 그 고모님께서 거창한 꿈을 꾸고 계시거든."

"꿈?"

"그래. 나를 밀어내고 자신이 가주에 앉으려는 꿈이지. 그 과정에서 다른 직계혈통인 로제가 있다면 당연히 방해가 되지 않겠나?"

* * *

"······."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복잡해진 느낌이다. 뭔가 중간에 일이 꼬이면서 복잡해졌다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얽혀있을 줄이야.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나는 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집안일이 꽤 막장인 건 알겠지만, 로제는 이미 가문에서 쫓겨난 몸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 마음도 없지."

"······."

"그러니 로제에게서 손 떼라. 그녀를 너희 가문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일은 그만둬."

내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알리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또 다른 일이라 그럴 수 없겠군."

"그럼 팔, 다리 하나 정도 떼어 놓고 다시 이야기를 해보지. 나는 별로 미안하지 않으니까."

스릉.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은색 칼날이 쏟아지는 달빛을 머금으며 푸른색으로 번뜩였다. 순간 서슬 퍼런 예기가 실내를 모조리 베어버릴 듯 뿜어진다.

눈앞에 칼날을 들이밀자 녀석이 다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잠깐!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

"로세툼을 방해한 건 정말 다른 일 때문이다! 녀석이 아버지의 살인범을 쫓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녀석이 악을 쓰듯 외쳤다.

나는 뭐라고 변명을 하려나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난데없이 튀어나온 새로운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뭐? 살인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후우! 몰랐나 보군. 녀석은 살인범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방해하면서 간신히 로세툼의 영향력을 줄여놨는데, 네가 나타나면서 일이 꼬여버렸지."

"······왜 방해한 거지? 설마 네가 범인······"

"무슨 미친 소리냐! 나 역시 범인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찾은 흔적 중에서 너무 위험한 걸 발견해서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었던 거야! 더 힘을 키워서 파헤치려고! 나도 위험했으니까!"

"······."

"그런데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고 곳곳에 흔적을 남기면서 흉수를 쫓고 있더군. 만약 흉수가 알아챘다면 녀석이 위험했어!"

쌓였던 울분을 토해내듯, 숨어있던 내용을 전부 쏟아낸 알리오가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쉰다.

붉어진 얼굴과 한껏 일그러진 표정.

그건 그가 복수심과 자존심을 구기면서까지 참아야 했던 굴욕이었기 때문일 거다. 힘이 모자라서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을 쫓는 걸 멈춰야만 했던 굴욕.

하지만 여기까지 듣고 나니 의아한 부분이 새롭게 생겼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내가 아는 것처럼 남매 사이가 엄청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지? 사실대로 말하고 멈추라고 하면 되지 않나?"

"그걸 들을 녀석이었으면 애초에 가문을 나가지도 않았을 거다."

어? 잠깐만?

"가문을 나간 건 정략혼 때문이라던데······."

"흥! 추적을 멈추지 않으면 정략혼이라도 시켜서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다니깐 녀석이 뛰쳐나간 거야!"

"······."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니까 그녀가 가문을 나온 배경엔, 가주 승계의 암투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살인범을 쫓는 과정에서 생긴 마찰 때문이었다는 뜻인가? 거기에 알리오는 사실 로제를 보호하고 있었고?

'이 무슨······.'

저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그녀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잣집 아가씨처럼 생긴 것과 다르게, 급박한 상황에서 발휘하는 담대함이나 결단력은 그녀의 똑 부러지는 성격을 보여줬으니까.

나는 조금은 김이 샌 얼굴로 알리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지? 타협을 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일 수도 있다. 네 집안일보다 내겐 로제의 안위가 더 중요해."

"나를 죽이면 고모님께서 아주 좋아하면서 로제를 죽이려고 들걸? 눈치 볼 사람도 없으니 말이야."

"그럼 이자벨이라는 여자도 죽여주지."

"오오? 이자벨도 죽이겠다? 그럼 가문의 추적이 시작될 테니 가문의 추적자도 죽이고, 명령을 내린 가문 사람들도 모조리 죽일 테냐? 좋군! 네 손에 콜레오넬 가문이 멸문하게 되겠어. 로제가 퍽이나 좋아하겠군. 가문이 쓸려나가는 걸 보면서 말이야."

"······."

나는 녀석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어떤 대꾸도 해줄 수 없었다.

정말 저렇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처음엔 단순히 로세툼을 노리는 것 같더니, 갑자기 로제를 노리고, 이제는 콜레오넬 가문의 후계자 다툼에, 배신을 노리는 친척과 전대 가주의 살인범까지 튀어나오다니.

"······빌어먹을. 일이 너무 복잡해졌군."

콜레오넬 가문의 비사가 엮이면서 간단하다고 여겼던 일이 한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꼬여버렸다.

그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리오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간단한 해결법을 알려줄까?"

"······?"

"너는 해결사지? 그럼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의뢰를 하겠다."

녀석이 어디서 꺼낸 것인지 갑자기 시가를 입에 물었다.

거절할 수 없는 의뢰 (3)

80화. 거절할 수 없는 의뢰

나는 녀석의 태도에 미간을 꿈틀거렸다.

'거절할 수 없는 의뢰?'

그 말은 본인이 내건 의뢰에 그만큼 자신이 있다거나, 혹은 내가 거절할 만한 상황이 아닐 경우를 뜻한다.

전자면 내게 이득이 되는 의뢰일 테고, 후자면 좋게 봐줘도 현상유지다.

이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전자의 의뢰가 나오길 기대한다. 돈과 이익을 좇는 건 인간의 본성이나 다름없으니까.

말 한마디로 협상의 주도권을 본인에게 가져온 영리한 언변이었다.

'하지만 녀석에겐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로군.'

나는 불도 붙이지 않은 시가를 질근질근 씹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무슨 수작인 줄은 모르겠지만, 들어나 보지. 그리고······"

스릉!

은빛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알리오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툭.

절반이 잘린 시가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반응조차 못 하던 녀석이 뒤늦게 흠칫 놀라며 물고 있었던 시가를 더듬었다.

"내 앞에서 건방지게 담배를 입에 무는 건 참아줬으면 좋겠군."

"······그, 그러지."

녀석이 절반만 남은 시가를 뱉어내면서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진짜 그거면 되나?"

알리오의 의뢰 내용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거창하게 밑밥을 깔았던 것과 달리 의뢰 내용이 허무할 정도로 쉬웠기 때문이다.

"왜? 설마 내가 이자벨의 목이라도 가져다 달라고 의뢰할 줄 알았나?"

"안될 건 없지 않나?"

나는 오히려 되물었다.

결국, 지금 사태의 원인에 가까운 인물이 이자벨이다.

알리오를 밀어내고 가문을 차지하려는 것도, 로제의 죽음을 의뢰한 것도,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가문을 배신한 배신자도 이자벨일 가능성이 컸다.

발본색원(拔本塞源).

뿌리를 뽑아버리면 간단한 해결책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알리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난 영원한 비밀은 믿지 않는다. 이자벨이 죽는다면 나부터 의심받을 테고, 그건 내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겠지. 가문의 직계 혈통마저 죽인 가주를 누가 따르겠나?"

"흐음. 네 말도 일리는 있군."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거대한 가문은 가주 혼자서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마치 중세시대의 귀족가문처럼 여러 가문이 모여서 콜레오넬이라는 제후를 지지하는 형태였고, 가주만큼이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이들이 모인 가문 회의였다.

"어때? 의뢰를 받겠나? 그것만 확실히 해준다면 로세툼을 방해하는 건 물론이고, 로제를 노리는 우리 고모님도 막아주지."

"······별수 없군. 의뢰를 받도록 하지."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말한 대로 거절할 수 없는 의뢰였으니까.

"좋아! 잘 생각했어!"

"그리고 네가 로세툼과 로제에게 하는 것과 별개로 의뢰 보수도 확실해야 할 거다. 그건 네가 벌인 일을 수습하는 거고, 나는 다른 일을 하는 거니까."

"의뢰보수? 푸하하하! 이 저택이 안 보이나? 걱정하지 마라. 네가 생각한 것 이상을 줄 테니."

알리오가 환하게 웃었다. 아마 녀석은 처음부터 이 의뢰를 하기 위해서 나를 기다렸던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흉수를 쫓는 건 막지 않을 생각인가?"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 중 하나가 바로 로제가 흉수를 쫓는 일이었다. 이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언제 알리오의 말처럼 위험해질지 몰랐다.

"아, 그건 내가 로제를 따로 만나서 얘기할 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이 나를 은근한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했다.

"네가 녀석 곁에 있다면 그리 위험할 것 같진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 * *

알리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강현재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다 일이 꼬여서 여기까지 왔지만,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 될지도 모르겠군.'

처음 로세툼을 방해하고 점점 영향력이 사라지는 로제를 지켜보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안타깝다는 생각이 공존했었다.

그녀의 고집을 알고 있는 알리오이기에 방해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녀의 안위를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여동생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에게도 쉽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하늘 아래 유일한 혈육이 된 그녀였다. 죽는 것보단 차라리 조금 힘들어하는 게 나았다.

그랬던 로세툼에 강현재가 찾아오면서 많은 게 달라졌다.

'처음엔 그저 솜씨 좋은 칼잡이 정도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아마 강현재가 칼잡이가 아니라 보통의 해결사였다면 그전에 회유했을 거다. 더 큰 중개인 사무소로.

그런데 칼잡이라는 점에서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 도시의 칼잡이라고 껄렁대는 놈들 중에 제대로된 놈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그게 실수였지. 설마 「워 머신」을 갈랐다는 헛소문이 진짜였을 줄은.'

강현재는 의뢰를 거듭하며 그 능력과 강함을 증명했고, 어느 순간부터 뒷골목엔 '소드마스터'에 대한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흑발흑안의 칼잡이를 만나면 조심해라.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니······ 였나? 로제 녀석 작품이겠지.'

그때부터 로세툼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다시 커졌고, 로제의 중개인 랭킹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제가 멈췄던 아버지의 살인범을 다시 쫓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누굴 닮아서 그렇게 고집불통인지. 덕분에 일이 꼬이고 꼬여서 여기까지 와버렸군.'

알리오가 다시 로세툼을 방해하면서 강현재와 부딪치고, 결국에 그가 칼을 들고 여기까지 찾아왔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오히려 이 모든 사실이 기꺼웠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검증이 끝났기 때문이다.

'강현재. 그 남자라면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나보다도 로제를 더 지켜줄 수 있는 존재다.'

바로 강현재에 대한 검증이.

강현재의 강함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소문은 차치하더라도, 그동안 자신이 팠던 함정을 모조리 격파하고 심지어 가문 차원에서 다뤘던 살인마 잭더리퍼와 오래전 은퇴했다곤 하지만 한때 도시 전설로 군림했던 핏빛 크롬 갈기의 다론 마저 강현재의 손에 쓰러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단순히 강한 걸 떠나서······ 그 남자는 진심이었다.'

바로 로제를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건진 모르겠으나, 알리오가 아는 그 어떤 해결사도 중개인을 위해 이렇게까지 행동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궁지에 몰린 중개인을 마지막까지 털어먹거나, 상대 쪽에 붙어서 팔아넘기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도구로만 생각하는 관계.

그게 이 도시에서의 중개인과 해결사의 관계였다.

하지만 로제와 강현재의 관계는 달랐다. 대체 둘 사이에 어떤 유대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둘의 관계가 특별한 건 확실했다.

"왜 그 녀석이 한낱 이름 없는 칼잡이를 선택했는지 예전엔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 이제는 알 것 같군."

알리오는 생각했다.

그 남자라면 믿을 수 있겠다고. 이제 로제를 지켜보던 시선을 조금은 떼도 괜찮겠다고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에 알리오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둘이 아직도 안 자지 않았나? 대체 신체 건강한 남녀 둘이 뭘 하는 건지 모르겠군."

* * *

어둠이 내린 실내.

은은한 조명만이 반짝이며 희미한 실루엣을 비춘다.

"하응······ 아앗······!"

"하아! 하아!"

얇은 휘장이 쳐진 거대한 침대 위로 한바탕 격정이 휘몰아쳤다.

달뜬 신음과 헐떡대는 숨소리. 후끈한 열기와 흘러내리는 땀.

푹신한 침대가 출렁일 정도로 격한 움직임 속에서 희미한 두 개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위에서 헐떡대며 거칠게 허리를 흔들고 있는 남자는 실루엣으로도 비칠 정도로 근육질의 사내였다.

곳곳에 베이고, 뚫린 상처 자국이 가득했고, 무엇보다 양어깨와 이어진 양팔은 인조 피부를 덧댄 사이버웨어였다. 가슴팍의 일부분, 그리고 양쪽 허벅지도 사이버웨어를 이식한 흔적이 있었다.

반대로 새하얀 나신으로 사내 아래에 깔린 채 달뜬 교성을 내지르는 여인은 순수 인간에 가까웠다. 최소한 겉보기엔 그랬다.

"이, 이제 한계······ 크읏!"

"앗······ 아아······ 흐응!"

마침내 거칠었던 교미가 끝났다. 한껏 달아오른 실내 공기는 묘하게 텁텁했고 습했다.

"듀렉스. 오늘은 조금 실망이야."

여인이 자신 위에 올라탄 사내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 말에 듀렉스라 불린 사내가 눈을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자벨님! 어젯밤 드론이 모두 추락했던 사건 때문에 경호팀 전체가 야근하느라······"

"됐어. 이번은 넘어갈 테니까 이따가 다시 힘을 내보라고."

"노, 노력하겠습니다!"

듀렉스가 침대 위로 머리를 박았고, 이자벨은 묘한 눈빛으로 그런 듀렉스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그렇게 조금 전 섹스에서 보였던 침대 위의 상하관계는, 섹스가 끝나자마자 바로 뒤집혔다.

그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피타임은 잘 끝내셨나?"

"누구냐!"

난데없이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흠칫한 듀렉스가 몸을 일으켰다.

"글쎄.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게 좋을 텐데? 살고 싶다면 말이야."

여전히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남자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다시 한번 들려온 목소리에 위치를 특정한 듀렉스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거기냐!"

쿵쾅쿵쾅!

허벅지에 달린 사이버웨어가 거칠게 작동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어둠을 뚫고 불청객에게 다다른 그가 양주먹을 불끈 쥐더니 그대로 후려쳤다.

지이잉!

양팔에 달린 모터가 회전하는 소음과 함께 주먹이 폭발하듯 쇄도했다.

마치 트럭이 돌진하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저 크롬 주먹에 맞는 순간, 돌진하는 트럭과 부딪친 것 이상의 충격이 있을 테니까.

코앞까지 다가온 주먹에 반응조차 하지 못하는 불청객의 모습에 듀렉스의 입꼬리가 살벌하게 올라갔다.

안 그래도 이자벨의 구박에 남자의 자존심이 구겨졌었는데, 이놈의 피와 살로 그 자존심을 다시 새우리라!

그런데 그 짧은 찰나의 순간.

듀렉스의 귓가에 들릴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려."

서걱!

그리고 그게 이 세상에서 듣는 마지막 목소리가 됐다.

툭.

데구르르.

듀렉스의 몸이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거꾸러지며 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뒤늦게 동그란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데구르르 굴렀다.

그건 살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듀렉스의 머리였다. 그는 자신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채지 못했다.

"······후우."

어느샌가 듀렉스 반대편에 나타난 남자의 손엔 서늘한 은빛으로 물든 칼이 들려 있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남자가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강현재였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아주 평온하시군. 심지어 조금 전까지 물고 빨면서 살을 섞었던 상대인데 말이야."

강현재가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있는 이자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몸을 가릴 생각도,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강현재를 쳐다볼 뿐이었다.

"별로 잠자리가 만족스럽지가 않았거든. 너도 지켜보다가 나온 거잖아?"

이자벨이 본인의 나신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여유가 넘치시네. 역시 조카를 죽이려는 사람답다고 해야 하나?"

"······너, 누군지 알겠네."

강현재의 말에 묘한 미소를 띄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로세툼의 소드마스터. 그게 너구나? 흑발흑안이라더니······ 진짜네?"

"뭐,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강현재가 이윽고 천천히 걸어서 이자벨에게로 다가갔다. 한 손엔 듀렉스의 목을 날려버린 칼을 들고서.

공포에 질릴법한 광경이었으나, 이자벨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잠깐만 들어봐, 소드마스터."

"······?"

"어차피 넌 돈 받고 일하는 해결사잖아? 내게 갈아타는 건 어때? 로제 고년보다 돈도 많이 줄 수 있고······ 무엇보다 나는 보너스도 줄 수 있는데."

침대에 앉아 강현재를 바라보던 이자벨이 다리를 벌렸다. 천천히 다가오던 강현재가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어때? 네가 원하면 당장 줄 수도 있어."

이자벨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나신을 더듬는다. 흰 목덜미, 어깨, 가슴, 배꼽, 그리고······.

"하응······ 어때?"

달뜬 목소리로 은근하게 묻는다. 은은한 열기가 깃든 얼굴과 눈빛이 강현재를 바라본다.

강현재의 무채색 시선이 이자벨의 전신을 훑었다. 그 모습에 이자벨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왔다.

그런데 갑자기 허공을 향해 손을 내뻗은 강현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잡기술은 통하지 않아."

쿵!

천장 한쪽이 무너져내리며 무언가 떨어졌다. 비상시 사용할 수 있도록 따로 설치된 통신 단말기였다.

"······칼잡이라더니 이런 쪽으로도 눈썰미가 좋네?"

"뭐, 다행히 좋은 파트너가 있어서."

강현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눈빛을 가라앉힌 이자벨이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내 말은 사실이야. 내게 와. 그럼 네가 원하는 모든 걸 주겠어. 어차피 너는 해결사일 뿐이잖아?"

"해결사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데, 그럼 알겠군. 해결사는 의뢰인을 배신하지 않아."

강현재의 단호한 대답에 이자벨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순간 그녀의 얼굴 위로 악독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거야 의뢰인이 살아있을 때 이야기지 않을까?"

"······그게 무슨 소리지?"

이번엔 강현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이자벨의 악독한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건, 로제 고년이 혼자 있다는 뜻이겠지? 지금 시간이······ 아? 지금쯤 이미 죽었을지도?"

태연히 로제의 죽음을 말하는 이자벨의 모습에 강현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암살자라도 보냈다는 거냐?"

"그래. 네 실력을 감안해서 보낸 암살자들이라 아마 죽었을 거야."

"어찌! 어찌 같은 혈육을 죽이는데 그렇게 진심일 수가 있는 거지! 그렇게까지 조카를 죽이려는 이유가 뭐야! 이미 가문에서 나간 사람을!"

강현재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 이자벨이 기분 좋은, 아니 살짝 흥분마저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흐응~ 방해가 되거든. 내가 이 가문을 접수하는데."

"역시 너는 처음부터 가문을 노렸던 건가?"

"사람이 야망이 있어야지? 기회가 없다면 몰라도, 눈앞에 먹어치울 기회가 생겼는데 포기하긴 아깝잖아? 뭐, 그 과정에서 조카들이 죽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미쳤군. 설마 마일로를 죽인 것도 네 짓인가?"

"아아~ 그건 아쉽지만 내가······ 으음? 그런데 그걸 네가 왜 묻는 거지?"

달뜬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던 이자벨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거다. 대체 해결사 따위가 가문의 일을 어찌 알고?

그 순간, 조금 전까지 분노로 일그러졌던 강현재의 얼굴 위로 비릿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거야 지금 네 모습을 전부 텔레그램 비디오로 녹화하고 있거든."

"뭐, 뭐라고!"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술술 다 실토하다니. 야망이 아니라 욕심 같은데? 덕분에 일이 쉬워져서 고맙긴 하지만."

"······!"

거절할 수 없는 의뢰 (4) [삽화]

81화. 거절할 수 없는 의뢰

여유가 넘쳤던 이자벨의 얼굴이 매섭게 일그러졌다.

"이런 씹어먹을 새끼가! 당장 지워! 안 그러면 진짜 로제 그년을 죽이라고 시키겠어!"

"미안하지만 네 협박은 통하지 않아. 그녀는 안전한 곳에 있거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녀의 자백을 받기 위해 했던 연극 아닌 연극이 끝났다. 알리오가 의뢰했던 내용도 모조리 담았으니, 이제 그녀의 불장난에 어울려줄 이유가 없었다.

이자벨도 그걸 느꼈음일까? 이대론 안 되겠는지 본인이 가진 패를 하나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연 안전할까? 내가 보낸 암살자가 누군지나 알고?"

"글쎄? 적어도 지난번에 보냈던 다론이라는 자보다 강해야 할 텐데······ 그런 자가 겨우 가녀린 여자 한 명을 암살하는 일을 받진 않을 것 같은데?"

내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내 추론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타당했다. 이 도시의 명성은 단순히 의뢰를 많이 한다거나, 어려운 일을 한다고 해서 올라가는 게 아니었다.

명성이란 마치 왕관과도 같다. 쌓이면 쌓일수록 그에 걸맞은 일을 해야 한다. 도시의 사람들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일을 말이다.

격투기 선수가 유치원 꼬마들과 싸운다면 누가 그걸 일이라고 인정하겠는가? 오히려 명성이 깎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따라서 암살자로 등장할 수 있는 인물 중 맥시멈이 다론과 같은 자다.

한때 강했으나, 지금은 잊혀진 존재들.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사라졌거나, 스스로 떠나길 선택한 존재들.

'하지만 그런 존재가 흔한 것도 아니니 사실상 또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하지. 그럼 기껏해야 숫자로 밀어붙이는 수준일 텐데······.'

그럼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난번에 데이지의 움직임을 두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그녀 정도의 강자 앞에선, 숫자는 무의미하다.

"흥! 과연 그럴까? 암살자가 한 명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거지? 그래도 그렇게 여유 있을까?"

"그것도 미안한데, 다 예상 범위 내로군. 당연히 문제없을 거다."

순간,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이자벨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버럭 소리쳤다.

"그 여유만만한 표정! 정말 꼴 보기 싫군! 그럼 이건 어떠냐? 그 암살자들이 해결사 나부랭이들이 아니라면?"

"······뭐?"

"그 암살자들이······ 팬텀의 고스트들이라면? 그래도 여유 있을까?"

이자벨의 눈동자 위로 은은한 광기가 비쳤다. 희번덕한 눈빛과 비틀어진 입매. 그리고 한쪽으로만 찢어진 듯 올라간 입꼬리까지.

하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팬텀의 고스트라고?'

팬텀은 전 세계에서 암약하는 암살자단체다. 그리고 그곳에서 활동하는 암살자를 고스트라고 불렀다.

내가 놀란 이유는 팬텀이 단순한 암살자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계 대도시들의 정치권과 메가코프의 알력에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이들이 등장할 때면 여지없이 피가 강이 될 정도의 희생자가 나왔고, 그 끝은 항상 극단으로 치닫는 전쟁이었다.

지난 3차, 4차 기업 전쟁과 바닐라 시티에서 벌어진 토착민과 일국인 사이의 전쟁, 그리고 사우드 시티의 혁명까지.

즉, 팬텀은 정치권끼리 부딪치거나, 기업끼리 전쟁을 벌일 때나 나타나는 재앙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팬텀이 로제의 암살 의뢰를 받았다고?'

나는 반쯤 눈이 뒤집혀있는 이자벨을 보며 물었다.

"네가 어떻게 팬텀을 고용한 거지? 네 힘으론 불가능할 텐데?"

팬텀이 로제의 암살 의뢰를 받은 것도 믿을 수 없지만, 그것보다 애초에 이자벨이 팬텀을 고용했다는 것 자체가 더욱 의심스러웠다.

팬텀이 재앙으로 여겨지면서도 아직도 멀쩡한 건, 그들의 고객들이 전부 엄청난 권력을 쥔 자들이기 때문이다.

높으신 분들의 손발이 되어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해주니, 그 악명을 떨치면서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런 의미에서 이자벨은 자격 미달이다. 그녀 따위가 뭐라고? 더 나아가 콜레오넬의 가주인 알리오도 간당간당할 거다.

팬텀을 장기말로 이용하는 자들은, 정말 거대한 권력을 지닌 자들이니 말이다.

콜레오넬 가문이 온 힘을 쏟아 「다섯 손가락」에 오르려는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이 크다.

부와 권력은 함께하는 것 같으면서도 절대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하니까.

"내 뒤에 누가 있는 줄이나 알아? 너 따위는 감히 상상도 못 할 거물이 있다고! 그러니 좋게 말할 때 그거 지워! 로제 그년이 진짜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내려온 이자벨이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녀의 자신만만함이 담긴 가슴을 힐끗 바라보곤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아까도 말했지만, 거긴 안전할 거래도?"

* * *

달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임시로 막아놓은 투명 펜스 위로 노란 달무리가 번졌다. 한차례 걸러진 달빛이 실내에 퍼진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달빛을 고스란히 머금으며 하얀 듯, 노란 듯, 포근한 빛을 반사했다.

우드득!

그 순간,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포근함을 찢었다.

대리석 위.

고고한 달빛을 받은 실루엣이 무감정하게 손을 털었다. 손끝에서 떨어져나간 무언가가 거칠게 바닥을 굴렀다.

몇 차례 굴러 거실 벽에 부딪힌 무언가가 멈춘다.

이윽고 드러난 그건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었다. 지금은 시체가 됐으니까.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목이 부러진 시체는 그렇게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그제야 달빛에 물든 실내가 환하게 드러난다.

새하얀 대리석 위. 아니, 새하얗다고 생각했던 대리석 위는 온통 새빨간 핏물과 떨어져 나간 팔, 다리. 그리고 조금 전 버려진 시체와 비슷한 꼴의 시체들로 가득했다.

그때 바닥에서 무언가 꿈틀거린다. 간신히 숨을 헐떡이던 사내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 돼······ 대체 붉은 마녀가 왜 여기에······?"

"······."

실루엣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달빛을 등지고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데이지였다.

그녀가 말없이 사내를 내려다봤다. 시선이 서로 마주친다. 순간 화들짝 놀란 사내가 급히 눈을 감았다.

"자, 잠깐! 나는······ 꺽! 꺼어억!"

아니라며 급하게 고개를 내젓던 사내의 눈에서 불똥이 튀더니, 이내 머리가 불길에 휩싸였다.

난데없이 타올랐던 만큼이나 불은 금세 꺼졌으나, 사내의 목숨은 그 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

실내는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얕게나마 들렸던 숨소리도 조금 전 사내가 죽으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데이지가 말없이 실내를 둘러봤다. 새하얀 대리석을 피로 물들인 시체들과······

"······."

자신.

그녀는 피로 범벅이 된 자신의 양팔과 피에 젖어 달라붙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아찔할 정도의 피냄새가 몰려들었다. 그 외에도 시체에서 쏟아진 각종 오물과 화약무기의 매캐한 매연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녀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시선, 냄새, 공기, 감각들이 잊고 싶었던 과거의 편린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피하려고 했는데······ 또 손에 피를 묻혀버렸네.'

그녀의 손에 죽어간, 무수히 많은 상대의 저주 섞인 언어들이 떠올랐다.

피에 젖은 마녀, 살육에 미친 도살자, 너는 절대로 이 피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고.

······진짜 그런 걸까?

띠리릭!

그때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열렸다. 하나씩 밝혀지는 조명을 따라 누군가 안으로 들어선다.

가라앉았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그쪽을 향한다.

마침내 마주치는 시선.

걷던 걸음을 멈칫한 상대가, 이내 주변을 빠르게 확인하더니 그녀에게 달려왔다.

"괜찮아?"

그건 로제였다. 그녀의 걱정 어린 눈빛이 피에 젖은 데이지의 전신을 훑는다.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데이지가 자그맣게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괜찮아."

"어휴! 이 피 좀 봐! 빨리 씻자!"

탁.

로제가 데이지의 손을 잡았다. 피 묻은 그녀의 손이 로제의 새하얀 손에 붙들린다.

그 거침없는 행동에 데이지의 눈이 동그래졌으나, 로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녀를 이끌고 옆집으로 향했다.

데이지의 집으로.

"일단 옷부터 벗고 있어!"

로제가 화장실로 데이지를 밀어 넣었다.

우두커니 화장실에 남겨진 데이지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비친 그녀 자신이 보인다. 피에 젖은 머리칼. 축축하게 달라붙은 옷. 그리고 붉게 물든 양손까지.

피투성이가 된 거울 속 모습에서 또다시 과거의 편린이 스쳐 간다.

피의 구렁텅이. 다른 자들처럼 나도 피가 그리웠던 걸까? 결국, 이렇게 될 걸 알았으면서도 왜 그 부탁을 받아들였던 걸까?

혼란스러운 마음이 피어오른다. 어디선가 음울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어둡고 음습한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떠다녔다.

그렇게 그녀가 한없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던 그 순간.

"뭐야? 아직도 옷을 안 벗었네?"

화장실 문이 열리고 그새 짧은 옷으로 갈아입은 로제가 들어왔다.

"······어? 왜······?"

심연에서 빠져나온 데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가라앉던 정신이 되돌아왔다고? 여태껏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살짝 정신이 나간듯한 데이지의 물음에 로제가 코끝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왜긴 왜야! 네가 제대로 못 씻을 것 같으니까 왔지! 씻자. 언니가 씻어줄게."

언니? 어렴풋이 로제의 나이를 알고 있는 데이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당장에 눈앞에서 옷을 벗기려 달려드는 그녀의 행동에 데이지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아, 아니······ 나 혼자서도 씻을 수······"

"제대로 안 씻으면 피냄새가 얼마나 오래가는 줄 알아? 내가 현재씨 때문에······ 어휴! 아무튼, 이리와!"

"어, 어어······"

뒷걸음질 치던 데이지의 등이 화장실 벽에 닿았다. 그때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홀라당 벗겨진 채 샤워부스로 떠밀렸다.

쏴아아아---

샤워부스에 하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따뜻한 물줄기가 데이지의 온몸을 씻어내렸다.

하지만 데이지는 오히려 얼어붙기라도 한 듯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거품을 낸 로제가 그녀의 온몸을 구석구석 씻겨줬기 때문이다.

"이, 이제 나 혼자도······"

"쉿! 가만히 있어."

"······."

데이지는 입을 다물었고, 로제는 즐거운 듯 콧노래마저 부르며 그녀를 씻겼다.

이 순간, 잔뜩 붉어진 얼굴로 씻김을 당하는 데이지는 생각했다.

부탁을 들어주길 잘했다고.

그런데 잠시 후······.

"어휴! 안 되겠다. 그냥 나도 같이 씻어야겠어. 괜찮지?"

"······어? 어, 어어······ 괘, 괜찮······"

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눈앞에서 로제가 젖은 옷을 벗어버렸다.

순간 물기에 젖은 로제의 새하얀 나신이 데이지의 눈앞에 펼쳐졌다.

"······."

놀란 듯 살짝 입을 벌린 데이지가 떨리는 눈동자로 다시 생각했다.

제발 또 부탁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 * *

[네가 여기 있다는 건, 로제 고년이 혼자 있다는 뜻이겠지? 지금 시간이······ 아? 지금쯤 이미 죽었을지도?]

[······암살자라도 보냈다는 거냐?]

[그래. 네 실력을 감안해서 보낸 암살자들이라 아마 죽었을 거야.]

[어찌! 어찌 같은 혈육을 죽이는데 그렇게 진심일 수가 있는 거지! 그렇게까지 조카를 죽이려는 이유가 뭐야! 이미 가문에서 나간 사람을!]

[흐응~ 방해가 되거든. 내가 이 가문을 접수하는데.]

[역시 너는 처음부터 가문을 노렸던 건가?]

[사람이 야망이 있어야지? 기회가 없다면 몰라도, 눈앞에 먹어치울 기회가 생겼는데 포기하긴 아깝잖아? 뭐, 그 과정에서 조카들이 죽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뚝.

녹취록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멈췄다.

거대한 회의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조금 전 들었던 대화 내용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알리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선언했다.

"콜레오넬의 피를 보려는 자, 그 열 배, 백 배로 되갚아준다."

"······."

그 누구도 알리오의 말에 대꾸하거나, 반박하거나, 혹은 호응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알리오가 콜레오넬의 가언(家言)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이곳은 재판장이 되었다.

"이 시간부로 이자벨 콜레오넬의 모든 지위를 박탈하고, 가문에서 퇴출. 그리고 10년간 데이터 매트릭스 감옥형에 처하겠습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이의가 있어도 없어야 했다. 특히, 이자벨과 가까이 지냈던 원로들은 더욱.

알리오의 싸늘한 시선이 자리에 앉아있는 인물들을 내려다봤다. 다들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몇몇 시선이 조금 더 오래 머무는 인물들은 고개를 땅에 처박을 듯 숙이기까지 했다.

알리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없는 거로 알고······."

그때 쾅!하며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을 향한다. 그곳엔 잔뜩 분노에 찬 얼굴의 이자벨이 서 있었다.

"난 인정 못 해!"

이자벨이 성난 걸음으로 회의실로 걸어들어왔다.

"고모님. 아니, 이자벨. 이곳은 당신이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닙니다."

"가문 회의에 참여할 권한은 내게도 있어! 나 이자벨 콜레오넬이야!"

"후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뭐하느냐! 어서 끌···, 데려가지 않고!"

알리오의 명령과 함께 가드가 이자벨의 양팔을 옭아매더니 밖으로 끌고 나갔다.

"놔라! 놔! 내가 콜레오넬이야! 내가 역사고! 내가 미래란 말이다! 이거 놔!"

쿵.

죄수처럼 끌려간 이자벨이 사라지고 회의실 문은 다시 닫혔다. 이자벨의 앙칼진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가문을 좀 먹었던 역사는 이제 없습니다."

알리오가 다시 침묵이 내려앉은 장내를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걸 잊을 테니, 가문에 충성하십시오."

"······."

모든 걸 잊겠다.

그 말에 슬그머니 고개를 든 사람들이 주변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 뜻은 케케묵은 과거의 감정은 모두 잊어줄 테니, 자신을 잘 봐달라는 화해의 제스처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원로들의 시선을 바라보던 알리오가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살려는 드릴 테니."

"······!"

사람들은 다시 급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 * *

"······그렇게 모든 일은 마무리됐다."

다시 찾은 콜레오넬 저택.

이번엔 몰래 찾아온 게 아니라 손님으로 방문했다.

"약속은 지키길 바란다."

"푸하하!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내가 지키지 않을 이유가 있나? 일이 이렇게 해결됐는데."

알리오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며칠 전과 분위기가 달랐다.

"로제는 어떻게 할 거지?"

"조만간 내가 찾아갈 생각이야."

"로세툼을? 로제가 반가워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별수 없지. 그 일은 전화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니까."

"······그건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오의 말대로 흉수가 콜레오넬 가문마저 뒤흔들 세력이라면, 확실히 도청 위험이 있는 전화는 위험했다.

"아무튼, 고맙다. 네 덕에 이렇게 꼬였던 일이 한꺼번에 풀려버렸으니."

"고마우면 의뢰보수로 보여주도록. 나는 말로만 던지는 호의는 별로 믿지 않아."

"푸하하하! 그렇지. 너는 해결사니까. 좋아! 마침 잘됐군."

재밌다는 듯 한껏 웃음을 터트린 알리오가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곤 내게 던졌다.

휙.

날아온 물건을 잡아챈 내가 알리오를 쳐다봤다.

"이게 뭐지?"

"내가 알아보니 너는 바이크를 좋아하는 것 같더군."

"뭐, 싫어하진 않지. 설마 바이크 키냐?"

나는 손에 들린 검지와 중지를 맞댄 사이즈의 단말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이크는 바이크지. 하지만 내가 저번에 말한 거 생각나나? 기대해도 좋아."

"기대라······ 뭐, 날아다니기라도 하나 보지?"

"오? 역시 눈썰미가 대단하군?"

"······?"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1)

82화.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42번 구역.

공장지대와 하층민 주거지가 복잡하게 섞인 이곳은 경계 없이 지어진 건물들로 어지러웠다.

이곳 <샤오롱 제련소>도 그런 복잡한 구역 한가운데 지어진 금속공장이다.

24시간 돌아가는 용광로와 끝없이 뿜어지는 매연. 시시때때로 흘러나오는 폐수와 각종 산업폐기물까지.

주거지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공장이지만, 이곳에선 하나 걸러 하나로 이런 공장이 존재했다.

"그러니까 돈을 가져오란 말이야! 아앙? 아니면 너희들만 손해야!"

-아니······ 지난달에도 주고, 지지난달에도 줬잖아! 대체 왜 우리 공장만 노리는 건데?

<샤오롱 제련소> 옥상.

그곳을 점령한 갱단은 <샤오롱 제련소>를 상대로 돈을 뜯어내고 있었다.

전력과 통신설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용광로 차단장치가 이곳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너희만 노리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뭔데!

"그거야 니들이 제일 호구니까! 푸하하하!"

-뭐, 뭐야! 이 개새끼들이!

"그래. 우리 개새끼들인 거 몰랐냐? 우리가 바로 쿠퍼 독 갱단이다~ 이 말씀이야. 아무튼, 돈 가져와. 안 그러면 용광로 꺼버릴 테니."

-아, 안돼! 그거 다시 켜려면 얼마가 들어가는 줄이나 알아!?

"그러니까 돈 가져오라고~ 확 성질나면 모조리 부숴버리는 수가 있어?"

-아, 알았어! 흥분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줘! 우리도 현금을 융통해야 할 거 아니야!

"그래. 오늘 밤까지 기다린다. 더 이상 협상은 없어! 끊는다~"

갱단 두목이 비아냥거리면서 통화를 끊자, 주변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갱단원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오오오! 우리 보스! 역시 돈 뜯어낼 때가 제일 멋있어!"

"난 저렇게 약 올릴 때 막 흥분되더라~ 살짝 젖어버렸잖아~"

"로라! 오늘 밤은 나랑 자기로 했잖아? 잊은 거 아니지?"

"글쎄~ 오늘은 왠지 보스가 땡기네?"

"크흐흐흐! 나야 로라가 찾아온다면 언제라도 네오 홍콩에 보내줄 준비가 되어있지!"

"로, 로라! 그럼 차라리 셋은 어때? 어? 저번에 괜찮았다며?"

노동자를 모조리 쫓아낸 공장엔 그들의 목소리 외엔 어떤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돌아가는 기계설비의 소음만 섞여서 들려올 뿐이었다.

갱단원들은 그렇게 잡담과 음담패설을 섞어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조금 전 통화 내용처럼 이 공장을 몇 번째 털어먹었음에도 반항은커녕 순순히 돈을 내줬다는 거다. 그리고 그게 오늘도 이 공장을 점거한 이유기도 했다.

또 하나는 이 공장의 부지가 꽤 넓어서, 옥상을 점령하면 사실상 주변을 전부 감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하통로도 없고, 공장과 연결된 다른 건물도 없어서 지상으로 접근하는 모든 불청객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휑하게 뚫린 공장 옥상이라 딱히 엄폐물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도 옥상으로 적들이 들이닥쳤을 때의 이야기.

SCPD나 보유한 부유자동차를 타고 오지 않는다면, 옥상엔 접근할 수 없다. 지상에서 모조리 집중사격을 당해 뒈질 테니까.

어느새 내리쬐던 태양은 서서히 스카이라인 뒤로 사라지고, 하늘은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저 멀리 우주에서부터 검게 물든 어둠이 별들과 함께 몰려들고 있었다.

로라는 자신에게 계속 치근덕대는 갱들의 노골적인 시선을 즐기며 해가 지는 노을을 감상했다.

바람이 휘날리며 그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힐끔거리며 그를 쳐다보는 갱들의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물론 다분히 의도적인 연출이었다. 그는 해가 저무는 하늘 따위를 보면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저 이렇게 하면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그때 초점 없는 로라의 시선에 무언가 이상한 게 잡혔다.

"······어?"

처음엔 배달 드론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게 드론보다 훨씬 크다는 걸 느꼈고, 무엇보다 그 위에 사람이 타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좁힌 시야로 안구를 줌인했다. 그의 사이버아이가 대상을 확대한다.

그러자 보이는 늠름한 자태.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일 것처럼 시커먼 그것.

"호버바이크?"

호버바이크(Hoverbike).

부유자동차와 비슷한 계열의 부유바이크다. 초창기엔 부유자동차보다 만들기 쉬워서 많이 팔렸던 이동수단이지만, 출시 후 일 년간 둘에 하나는 추락하는 미친 사고율 때문에 안전상 판매가 중지됐었다.

이건 놀라운 사건이기도 했다. 안전상 판매가 중지된 최초의 공산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는 충분했다.

호버바이크가 판매됐던 1년간 소울 시티의 사망률이 지난 4차 기업전쟁 때보다 높았다는 통계도 나왔을 정도니까.

아무튼, 그랬던 호버바이크가 다시 등장한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다.

기술의 발전으로 안전상 문제가 모두 해결되고, 거기에 오히려 희귀성까지 덧붙자 부유층의 장난감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거다.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하는 바이크도 남자의 로망인 마당에, 뻥 뚫린 하늘을 맨몸으로 질주하는 바이크?

덕분에 호버바이크는 부유층의 낭만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호버바이크가 왜 이런 곳에?'

이곳은 42구역이다. 부유층들이 맨몸으로 호버바이크를 이끌고 나올만한 곳이 아니다.

방탄차량으로도 40번대 구역은 얼씬도 하지 않는 양반들인데, 맨몸으로 바이크를 끌고 나온다고?

불현듯 로라의 전신으로 강한 위화감이 엄습했다.

그가 밑바닥을 전전하면서 소수취향이 된 것도, 전부 살아남기 위한 전략 중 하나였다. 엉덩이를 대주면 생활하기 편해졌으니까.

그때 호버바이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젠 사이버아이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무언가 날아오고 있다는 걸 알아챌 만한 거리.

주변을 감시하던 갱들도 그제야 호버바이크를 발견하며 소리쳤다.

"저게 뭐야!"

"뭐가 날아온다!"

"씨발! SCPD아니야?"

"호버바이큰데?"

총을 꺼낸 갱들이 날아오는 호버바이크를 조준했다. 그들의 시선에서도 노골적으로 이곳을 향해 날아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로라의 시야에 호버바이크를 탄 인물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무언가 느낀 로라가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저, 적이다! 쏴!"

탕!

그게 신호탄이 됐는지, 호버바이크를 주시하던 갱들이 모조리 총을 갈겼다.

투타타탕!

탄환이 하늘로 날아가며 기다란 궤적을 그렸다. 그대로 쏘아진 탄환들이 호버바이크를 두드리려는 그 순간.

위이이잉!

직진하듯 날아오던 호버바이크가 갑자기 하늘 위로 비상하듯 솟구쳤다. 그 아래로 탄환들이 스쳐 지나간다.

옥상으로 접근하는 걸 막은 듯한 모습. 갱들의 얼굴 위로 우쭐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로라는 볼 수밖에 없었다.

'미, 미친······!'

호버바이크가 하늘로 비상하는 순간, 그곳에서 떨어져나온 무언가가 자신의 코앞에 순간 이동하듯 나타났으니까.

그건 사내였다.

바스락거리는 칠흑의 비옷을 걸친 사내.

"······."

시선을 마주친다. 무저갱처럼 어두운 사내의 눈동자 위로 로라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그의 모습이.

사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남자였나?"

서걱.

그리고 그게 로라가 들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툭. 데구르르.

로라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뒤늦게 새빨간 피를 내뿜는 몸이 쓰러졌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 로라의 시야로 사내가 날뛰는 모습과 갱들의 온몸이 썰려 나가는 모습이 거꾸로 담겼다.

'인생 씨발······'

이윽고 로라. 아니, 로버트의 생각이 끊어졌다.

* * *

"끅, 끄윽······ 대, 대체 우릴 왜······?"

그나마 숨통이 질긴 갱단원이 피로 물든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이 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죽었거나, 곧 죽을 예정이었다. 아무리 고통제어 시술을 했다고 해도, 팔, 다리가 모조리 떨어져 나간 상태로는 오래 살아있기 어려울 테니.

나는 놈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해결사가 찾아온 이유가 왜겠나? 당연히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달라는 의뢰를 받아서지."

"······! 개, 개새끼들······ 기다려 달라더니 해결사를 고용했나······ 비겁한······!"

놈이 적반하장으로 열을 낸다.

나는 새삼스레 이 세계 놈들이 정말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 많구나라고 또 한 번 느꼈다.

마치 빌려준 돈 받으러 왔다가 뒤통수 맞았다는 듯 말하지 않나? 강도 새끼들이.

"애초에 공장을 점거하고 털어먹는 네놈들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큭! 그럼 어쩌라는 거냐! 우리도 먹고살아야지!"

"······먹고 산다는 게 무슨 의민지 모르나보군."

남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게, 먹고, 산다는 것과 무슨 연관성이 있지?

그런데 놈은 오히려 발작하듯 소리쳤다.

"너는! 그러는 너는 떳떳하냐? 너도 먹고살기 위해서 우리를 죽이려고 찾아온 거 아니야!"

나는 녀석의 꽤나 심오한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죽기 직전에 아무거나 되는대로 지껄인 것 같긴 하지만, 나름 현학적인 질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내려져 있다. 내가 이곳에서 지내온 삶의 궤적은 오롯이 그 해답을 내놨다.

"그럼 네놈들도 '먹고살기' 위해서 너희 같은 쓰레기들을 죽이는 의뢰를 받지 그랬나? 왜? 그건 위험하고 번거로워서 싫나? 민간인들은 총만 보여주면 벌벌 떠니 쉬워서 좋고?"

"그, 그건······!"

"네놈들의 목숨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고 착각하지 마라. 네놈들의 목숨값은 하수구에 버려진 오물이나 다름없어.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생명의 가치는 존귀하다고? 맞는 말이지. 하지만 거기서 네놈들은 제외야."

"이, 이익! 네가, 뭘 알아! 이 밑바닥, 인생에 대···해서 네가······ 뭘··· 아냐···고······!"

발악하듯 타올랐던 놈의 불꽃이 서서히 꺼져간다. 눈동자에 초점이 점점 흐려졌다.

나는 놈을 내려다보면서 놈에게 닿지 않는,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닿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밑바닥에서 태어났다고 다 네놈들처럼 범죄자가 되진 않아. 그건 아직도 밑바닥에서 살아가며 필사적으로 일어서려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다."

"······."

놈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흐릿해진 초점과 움직임이 사라진 몸이 그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 * *

나는 거추장스러웠던 우의를 벗어 던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 저 멀리 사라진다.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바닥은 피에 젖고, 절단된 신체 부위와 시체가 이리저리 흩어져있다.

깨끗한 마무리와는 거리가 멀긴 하지만, 아무튼 의뢰받은 대로 갱들은 모조리 죽였다.

"밑바닥 인생이 사그라지는 건 한순간이지.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모르니······."

의뢰인은 분노를 토하며 의뢰를 넣었다.

40번대 구역에서 사업을 하면서 갱들과 얽히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놈들은 그 도가 지나치다고.

어차피 다 그놈이 그놈이라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젠 안 되겠다고 말이다.

"······다시 태어나면 꼭 동물로 태어나라."

나는 죽어버린 놈들의 혹시나 있을 내세를 위해 작게 빌어주고, 워치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호버바이크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확실히 비싼 모델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쓸모가 많군."

솔직히 처음엔 바이크가 난다고 해봤자 얼마나 쓸모가 있겠어? 라는 생각이었다. 뭐, 교통체증에서 해방되는 정도가 가장 커다란 쓸모일까?

그런데 막상 이 세계의 구조를 생각해보니,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건 꽤나 큰 메리트였다.

일단 이번처럼 모든 의뢰가 땅에서 벌어지지만은 않을 테니까.

그때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브의 깜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덕분이 아닐까요, 마스터?

"음! 확실히 그럴지도. 네가 자율주행 AI까지 커버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발견이니."

조금 전 침투에서 내가 바이크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던 이유였다. 내가 없어도 이브가 바이크를 조종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이건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니었다. 이브가 보통 AI보다 뛰어난 개조AI라고는 해도, 태생 자체가 워치에 붙어있는 AI다. 심지어 지금은 <로보 테크니카>의 빅데이터에 접근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지속 연산이 필요한 자율주행을 이브가 커버할 수 있으니, 이건 놀라운 것을 넘어 기적에 가까웠다.

'이브 업그레이드를 서둘러야겠어. 워치에서 이 정도로 딥러닝이 이뤄졌는데, 좀 더 좋은 곳으로 옮겨진다면 진짜 게임시스템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할지도 몰라.'

어째서 이런 게 가능한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상식적인 존재던가?

그냥 어렴풋이 이브 역시 「기적의 서광」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그때 통신 단말기에서 신호가 울렸다.

-그라타입니다. 연결할까요?

"그라타가? 그래. 연결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귓가로 통신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재?

"그래. 그라타. 무슨 일이지?"

-지금 시간 되나?

"지금?"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잠시 머뭇거리듯 숨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보스가 보자고 하신다.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2)

83화.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해방전선자유혁명단.

통칭 <해방전선>이라 부르는 이곳의 거점은 40번대 구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이는 단원들 대부분이 40번 구역의 하층민들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나중에 유입될 신입 단원들도 대부분 그곳 출신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왜냐면 해방전선의 태생 자체가 억압받는 하층민들의 해방과 자유, 그리고 불평등한 도시의 혁명이니까.

그리고 그중 내가 있는 이곳, 45구역의 거점이 최근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거점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남한테 막 해줘도 되나?"

나는 옆에서 해방전선에 관한 각종 TMI를 쏟아내는 그라타를 보며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위치에 관한 정보는 꽤 민감한 거 아닌가?

그런데 녀석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뭐, 대단한 비밀도 아닌데. 무엇보다 네가 남은 아니잖아! 네가 도와준 게 얼만데!"

"······그런가?"

나는 굳이 녀석의 말을 정정하진 않았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해주면 내게 실이 될 건 없으니까.

그때 녀석이 음흉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실 너한테만 말해주는 건데, 진짜 중요한 곳은 따로 있거든. 네가 상상도 못 할 곳에!"

"그래?"

"미안하지만 이건 알려줄 수 없어. 진짜 중요한 비밀이라서. 궁금하면 너도 해방전선에 가입하든가?"

"······궁금하지 않군."

"큭큭! 아마 우리 조직에 대해서 점점 알게 될수록 궁금해질걸~? 내가 장담한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자, 녀석이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 식당 음식이 웬만한 길거리 음식점보다 훨씬 맛있다는 둥, 요즘 여성 단원들이 많아져서 핑크빛 분위기가 풍긴다는 둥 하는 헛소리들 말이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말이 많은 건 여전했다.

나는 녀석의 헛소리들을 한쪽 귀로 적당히 흘려들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상상도 못 할 곳이라······ 그럼 그곳에 있는 비밀거점이겠군. 하긴, 이 시기엔 이미 준비하고 있었을 테지.'

사실 내가 별로 궁금해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냐면 메인 시나리오를 진행하면서 무조건 거쳐 가야 하는 장소였으니 말이다.

게임에서도 그랬지만, 실제로 이 세계에서 살아보니 확실히 남궁민수의 수완이 대단하단 걸 느꼈다.

'설마 20번 구역대에 비밀거점을 마련하리라고는 예상 못 했었지.'

그리고 비밀거점의 용도 역시도.

'그건 해방전선을 조직할 때부터 전부 계획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나는 개미굴처럼 연결된 이곳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시의 파멸을.'

* * *

개미굴의 어딘가.

나는 피곤함이 얼굴 위로 덕지덕지 묻은 후덕한 아저씨를 마주했다.

그는 초록빛 연기가 나는 연초를 태우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태우는 냄새가 아니라 화학약품이 증발하는 냄새가 풍겼다.

"지난번엔 고마웠다. 네 덕분에 단원들도 살았고, 무엇보다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어."

그가 무덤처럼 쌓여있는 재떨이에 연초를 끄며 말했다.

"······별로 대화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군."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그가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왼손의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러자 어디선가 불어온 뜨거운 바람이 녹색 연기를 모두 머금고 환풍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궁민수가 놀랍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놀랍군. 크로노타이늄을 싫어하는 자가 있다니."

크로노타이늄.

그가 조금 전까지 태워대던 연초 성분의 이름이다.

아주 강력한 각성제 성분으로 직접 음용하거나, 혹은 주사제로 만들어서 혈관에 직접 주입하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기화시켜 흡입하는 걸 대부분 선호한다. 후유증이 거의 없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인들도 사용할 순 있다. 각성제의 효능이 사람을 가리진 않으니까.

다만, 미친 듯이 비싼 탓에 대부분은 크로노타이늄이 아니라 마약을 선택한다. 어차피 각성되는 건 비슷하니까. 마약의 후유증으로 뇌가 녹는 것만 감내한다면 말이다.

"약물과는 별로 친하지 않아서."

"크로노타이늄을 알면서 그런 소리를······ 흐음? 허?"

나를 신기한 눈길로 쳐다보던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사이버웨어가 없나? 허허······ 이거 놀라 자빠질 일이군. 비행정을 갈라버린 그 능력이 순수 인간의 몸에서 비롯된 능력이라니."

크로노타이늄은 단순히 후유증이 없는 각성제가 아니다.

정확한 능력은 각성으로 신체를 부스팅시켜 신체와 결합된 사이버웨어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약물이었다.

따라서 사이버웨어를 이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약물이었고, 그래서 비상식적으로 비싼 거다.

"놀랄 일도 많군. 그것보다 왜 나를 보자고 했는지가 궁금한데."

"크하하! 듣던 대로 성격이 급하군. 좋아. 피차 겉치레로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공간의 모든 불빛이 꺼지더니, 나와 남궁민수 사이에 찬란한 홀로그램이 생성됐다.

"우리가 지금 계획하는 일이 있다. 그 일에 네가 합류해줬으면 좋겠군."

홀로그램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어떤 공간을 구성한다. 투박하고 거대한 건물의 3D 도면이 허공에 떠오른다.

"이게 어디지?"

"소울 프리즌. 시 정부의 감옥이다."

"······감옥은 왜? 설마 감옥을 습격하겠다거나 하는 계획이라면 미리 거절하지."

소울 프리즌.

소울 시티의 유일한 감옥인 이곳은 그 거대한 공간만큼이나 온갖 범죄자가 갇혀있는 곳이다.

그 말인즉, 이곳의 보안이 웬만한 군사시설 못지 않는다는 뜻이다. 워머신을 착용한 군인 숫자만 백 단위를 헤아릴 거고, 각종 전투 기계와 안드로이드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셀 수조차 없을 거다.

거길 습격한다?

자살행위다. 이 정도 규모를 공격하려면 메가코프도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가능하다.

"크하하! 농담도 재밌게 잘하는군!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그곳에 갇힌 시 정부의 고위 관료를 암살할 거다."

"······암살? 감옥에 갇힌 자를 왜 굳이 죽이려는 거지?"

나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물었다. 감옥에 들어갔다는 건, 이미 그 죄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뜻 아닌가?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

"이곳 출신이 아니라더니 진짠가 보군."

그가 무의식적으로 크로노타이늄으로 만든 연초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놈이 갇힌 건 요식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어차피 몇 달 있다가 풀려날 테지. 재건절 특사니 뭐니 이름 붙여서 말이야."

"······."

나는 왜인지 씁쓸한 그의 목소리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겪어본 이 썩어빠진 도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내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애초에 '왜' 그를 죽이려는 건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왜' 내가 필요한 건지 듣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그 정돈 당신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왜 내가 필요한 거지?"

감옥에 갇힌 죄수를 암살하는 일이다. 바깥과 단절된 공간이라 외부 침입에 대한 보안은 탄탄하겠지만, 내부에서는 다를 거다.

해방전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감옥 안에 사람을 심는 게 가능하다. 하다못해 암살자를 죄수로 들여보내도 되고.

그리고 일단 침투하는 순간, 죄수 하나 죽이는 일쯤이야 간단하다.

어쨌든 감옥이라는 공간 자체는 단체생활을 해야 하는 곳이고, 무조건 암살대상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

그런데 남궁민수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평범한 죄수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놈은 감옥을 장악하고 있는 프리즌 갱의 비호를 받고 있다."

어디나 그렇듯, 폐쇄된 공간은 또 다른 세계나 마찬가지다. 바깥과 단절됐기에, 그곳에서만 적용되는 법칙이 작동된다.

하물며 소울 프리즌은 온갖 흉악범과 잡범들이 모조리 끌려오는 도시의 유일한 감옥.

당연히 이 안에서도 약육강식이 작동됐고, 무리를 이뤄 감옥을 지배하는 갱단이 생겨났다.

그게 프리즌 갱이다.

감옥의 죄수들 위에 군림하는 갱들.

교도관들도 프리즌 갱이 알아서 감옥의 군기를 잡고 규율을 잡아주니, 굳이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펑범한 관료가 아니로군?"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프리즌 갱의 비호를 받을 정도라면, 절대 평범한 관료가 아니다. 프리즌 갱을 움직일 정도의 거물이 그 관료의 뒤를 봐주는 게 분명했다.

남궁민수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놈은 도시개발회의 의장이다."

"도시개발회의라면······ 설마 재개발인가?"

얼마 전 의뢰가 뇌리로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놈이 하울을 핑계로 시작한 재개발의 사업권을 쥔 자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돈이 걸려있지. 프리즌 갱도 재개발 사업권을 약속받은 건설사에서 고용했을 거다."

"······들어보니 지난번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뭐지? 재개발과 너희는 아무런 상관없지 않나?"

나는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남궁민수를 바라봤다.

그가······ 아니, 해방전선이 하려는 일은 결코 단순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다.

군사시설에 버금가는 감옥의 보안을 뚫고, 그곳에서 프리즌 갱의 보호를 받는 시 정부 고위 관료를 암살하는 일이다.

듣기만 해도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데, 대체 이 일을 하려는 이유가 뭐지?

무엇을 위해서? 그들에게 어떤 이득이 있다고?

그때 차분히 나를 바라보던 남궁민수의 눈빛 아래에서, 무언가 반짝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놈을 심판하여 이 도시의 밑바닥, 뭉개지고 짓밟힌 삶에도 희망이 있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알릴 거다."

그건 불꽃이었다.

"그리하여 이 도시의 타락한 위정자들에게 선포하겠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나홀로 타오르는 불꽃.

무저갱과 같던 어둠을 밝히고, 이내 모든 걸 불태워 버릴 불꽃 말이다.

"······뭐?"

하지만 나는 이 급작스러운 대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전개는 내 예상과 다르다. 내가 알고 있는 전개는 분명 이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만약, 이대로 계속 흘러가다간 분명······!

"소울 시티에 해방의 때가 왔음을!"

"······."

이윽고 내뱉어버린 남궁민수의 광기 어린 선언에 나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레지스탕스」.

해방전선이 소울 시티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이 시나리오의 시작은······ 이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 *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그 시작은 해방전선이 소울 시티에 화려하게 등장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40번대 구역을 담당하는 시 정부 지역사무소의 테러였다.

아무리 40번대 구역이라 하더라도 지역사무소는 시 정부의 건물이었고, 이는 해방전선이라는 이름을 도시 전체에 알리기엔 충분했다.

여태껏 그 누구도 시 정부를 상대로 테러해놓고, '그게 우리요!'라고 밝힌 조직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감옥 테러에 시 정부 고위관료 암살이라면 스케일이 더 커진다.'

지역사무소 테러와 감옥에 들어간 시 정부 고위 관료 암살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 파급효과가 비교도 되지 않을 거다.

아마 단숨에 해방전선은 최고 등급 수배인 자색수배령(Purple Notice)이 내려질 테지.

그럼 도시의 모든 해결사와 용병들이 눈에 불을 켜고 해방전선을 쫓을 거다.

지금의 해방전선 수준이라면 앞으로 활동이 불가능해질 정도의 리스크다. 이걸 남궁민수가 모를까?

"리스크가 너무 크지 않나? 자색수배령이라도 내려지면 너희가 감당할 수 없을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마라. 수배령은 내려지지 않는다."

내 길었던 의문이 허탈할 정도로 남궁민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우릴 도와줄 존재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이런 계획은 세우지도 않았을 거다."

도와줄 존재?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누가 도와준다는 거지? 그것보다 위정자들에게 선전포고한다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겠다고?"

"큭큭! 우릴 도와줄 자는 위정자가 아니다. 정치인도, 공무원도, 기업가도 아니지."

"······그런 자가 무슨 힘으로 도와준다는 거지?"

정치인도, 공무원도, 기업가도 아닌데, 시 정부의 수배령을 막아줄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그걸 믿으라는 건가?

"그런 존재가 있다. 이 소울 시티에서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장 순수한 존재가."

"말해줄 생각은 없나 보군."

"아직 그런 걸 터놓기엔, 우리 사이가 이르지 않나? 아니면 이제라도 우리와 합류하는 건 어떤가?"

남궁민수가 은근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든 나를 입단시켜보려고 애를 쓰는군?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군. 뭐, 좋아. 나야 대가만 충분하다면 상관없지. 해결사니까."

"탐이 날 정도로 훌륭한 해결사로군."

까끌까끌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남궁민수가 이젠 숫제 탐이 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피식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의뢰 보수 이야기를 해보지."

"돈은 걱정하지 마라. 네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줄 수 있으니까."

"미안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다."

"······? 그럼 뭘 원하지?"

남궁민수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긴, 해결사 대부분이 돈에 미친 귀신들이긴 하지.

하지만 애초에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돈이 아니었다.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오직 지금. 이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얻어야 한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원하는 것을 말했다.

"이글 아이. 당신이 갖고 있지?"

"······! 그걸 어떻게?"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3)

84화.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이글 아이(Eagle Eye)는 조기경보드론의 초창기 모델이다.

남궁민수는 오래전 과거 이글아이를 얻었고, 그걸 개량해서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는 세계 최고의 로봇공학자이자 사이버러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내가 이글아이를 가진 걸 어떻게 알았지?"

남궁민수가 잔뜩 의혹이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딘지 모르게 푸근했던 아저씨 같은 얼굴 위로 서늘함이 깃들었다.

"그게 대단한 비밀은 아니지 않나? 요즘 같은 시대에 수십 년 전 고물이 날아다니면 오히려 눈에 띌 거라 생각하는데?"

"······내가 묻는 게 그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그걸로 내가 이글아이의 주인이라는 걸 알아낼 순 없다."

과연 호락호락하지 않다. 은근슬쩍 주제를 흐리려고 했는데 바로 날카롭게 찔러온다.

하지만 나도 딱히 대답해줄 적당한 이유가 없다. 사실 이 사이버펑크 세계가 게임 속 세상인데, 그걸 다른 세계에서 플레이해봤다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을.

"뭐, 우연히 알아냈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마침 내가 이글아이에 관심이 많았거든."

"······대답을 회피하는군."

남궁민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게 중요한가? 어차피 수십 년 전 모델이고, 당신이라면 신형 모델도 충분히 운용할 수 있을 텐데."

"네 말은 맞다. 하지만 나도 되묻고 싶군. 그런 수십 년 전 고물을 왜 원하는 거지?"

"골동품이나 클래식카를 수집하는 사람들에게 거창한 이유가 있던가? 그냥 갖고 싶을 뿐이고, 마침 당신에게 있었을 뿐이다."

"······이글아이가 단순한 골동품으로 취급될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서서히 분위기가 경직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에 호의적이었던 태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 자리를 만든 건 남궁민수고, 그의 계획엔 내가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끔 내 능력을 보여줬으니까.

즉, 이 자리의 주도권은 명백히 내게 있다.

내가 할 일은 그 사실을 남궁민수에게 일깨워주면 된다.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이글아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싫으면 관두던지. 어차피 나도 어떤 복잡한 일이 터질지 모르는 일에 엮이기 싫으니."

물론 블러핑이다. 조금 귀찮아져도 이글아이는 꼭 손에 넣어야 한다. 남궁민수의 이글아이는 오래된 조기경보드론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

남궁민수가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눈빛이다.

나 역시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더 할 말 없으면 일어나지."

내가 아쉬울 게 없다는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제야 남궁민수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후우. 그래. 인정하지. 여태껏 만났던 모든 해결사 중에 가장 말을 잘하는군."

"그런 소리를 종종 듣긴 하지."

"좋아. 이글아이를 주겠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의뢰를 받아들이지."

"······이게 잘하는 건지 모르겠군."

남궁민수가 허탈하게 웃으며 내 손을 마주 잡았다.

* * *

'순수 인간이라······ 이건 내 예상 밖인데.'

남궁민수는 멀어지는 강현재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임플란트가 없는 순수 인간이라니. 사이버웨어가 있다면 언제라도 침투해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 텐데, 그걸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돼버렸다. 내심 직접 얼굴을 대면한 이유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그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크로노타이늄을 물었다. 손가락이 연초 끝을 스치자 거짓말처럼 연초가 타올랐다.

'이데아로 물들었던 그 날 밤도 그렇고, 이 도시에서 활약도 그렇고······ 확실히 평범한 존재는 아니야.'

해방전선엔 강현재와 함께 탈출했던 노동자가 많았다.

처음 그들에게 강현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과장이 많이 섞였다고 생각했다.

칼 한 자루로 나르시스의 마약공장을 쓸어버린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얼마 전 36번 구역에서 블랙스컬과 싸웠던 장면을 확인한 그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말이 축소됐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전투비행선을 추락시켜버릴 줄이야. 그건 진짜 상상도 못 했지.'

그날 이후, 남궁민수는 강현재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어떤 의뢰들을 해왔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서 도시에 들어왔고, 나르시스의 마약공장엔 왜 잡혀들어갔으며, 그보다 과거엔 뭘 했었는지.

시간의 역순으로 말이다.

행적을 좇아가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도시에서의 행적은 '소드마스터'라는 이명이 붙을 정도로 유명했고, 도시에 들어온 과정도 시간 선을 따라 모조리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모든 행적은 마약공장에서 단절됐다.

강현재는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마약공장 이전의 기록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그때는 그게 참 이상했는데 말이야······ 직접 마주해보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거지.'

순수 인간.

강현재의 행적이 어떻든 간에, 그가 순수 인간이었다는 것만큼 충격적인 사실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인간의 신체로 전투비행선을 갈라버릴 수 있었던 걸까? 겨우 칼 한 자루로.'

해방전선에도 각성자가 여럿 있다. 심지어 강현재와 같은 곳에서 각성한 노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비행선은커녕, 소형자동차조차 파괴할 수 없었다. 바이크 정도면 가능할까?

그래서 전투 사이버웨어 임플란트는 필수였다. 각성된 능력과 사이버웨어의 조합은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으니까.

그런데 강현재는 그런 것 따위는 모조리 무시한 채, 순수 인간의 몸으로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보여줬다.

'······규격 외 존재라는 건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남궁민수는 그런 존재를 여럿 목격했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감히 잣대를 들이밀 수 없는 규격 외의 존재. 이곳에선 그런 존재들을 이렇게 부르곤 했다.

도시 전설이라고.

'뭐, 오히려 좋아. 덕분에 몇 단계나 건너뛰고 이번 일을 계획할 수 있었으니.'

남궁민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가 내뿜은 크로노타이늄의 연기로 실내는 다시 초록빛에 휩싸였다.

* * *

개미굴 같던 해방전선 기지를 빠져나왔다.

주변을 서성이던 그라타가 나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와 물었다.

"어때? 보스를 만나보니?"

"뭐가?"

"막 너도 해방전선에 가입하고 싶지 않아? 안에서 피가 끓지 않냐고!"

뭔가 기대감이 섞인 그라타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해방전선에 가입하고 싶지 않냐고?

"전혀."

오히려 더욱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적당히.

그래야 오늘처럼 만족할만한 '거래'가 이뤄질 테니까.

너무 가까우면 해방전선이 벌일 갖가지 귀찮은 일에 엮일 테고, 너무 멀면 또 여기저기 흘리고 다닐 떡고물과도 멀어지게 된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딱 지금이 좋았다.

"······그래?"

그라타가 실망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기대했던 게 이거였었나? 나는 괜히 실소가 흘러나왔다.

"······하긴 너는 예전부터 무리에 섞이지 못했지. 대충 예상하고는 있었어."

"뭐, 그렇다고 해두지."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정확한 이유는 아니지만, 딱히 아닌 것 같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야기는 잘 끝냈지? 어떻게 하기로 했어?"

금세 원래대로 돌아온 녀석이 이번엔 또 다른 기대감으로 물든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참여하기로 했다."

"좋았어! 네가 있다니 실패할 일은 없겠네! 어쩐지 이번 계획을 들었을 때부터 느낌이 좋더라니!"

녀석이 환호를 내질렀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나도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긴 한데, 솔직히 이번 일은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블랙스컬 같은 놈들을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니."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이번엔 우리가 서포트를 확실하게 할 테니까!"

나는 녀석의 말을 듣다가, 뭔가 이상한 포인트가 있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 서포트는 내 역할이다만? 이번 일은 너희 계획이고."

"아니야. 내가 촉이 좋거든? 내 촉이 말하는 데, 이번 일도 어차피 네가 결정지을 거야. 내가 장담한다!"

한껏 진지한 얼굴이 된 녀석이 나를 보며 당당하게 헛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촉이 틀리길 바라야겠군."

* * *

헛소리를 해대는 그라타를 반쯤 강제로 쫓아내고, 잠시 바이크 위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드디어 이글아이를 손에 넣는군.'

조기경보드론은 이브의 업그레이드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비록 수십 년 전 모델이라도 해도 조기경보드론의 기본적인 성능이 크게 뒤떨어지진 않을 거다. 아마 최신 모델도 세대를 거듭하며 좀 더 현시대에 맞춰서 개량되거나 발전된 수준이겠지.

예를 들면 하드웨어적인 부분?

하지만 그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하드웨어를 만져줄 명장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스미스가 냉병기 덕후라해도 기본적으로 무라마사 공작소의 명인이지. 조기경보드론 정도는 가뿐히 다룰 거다.'

무라마사 공작소가 세계 최대 무기생산기업은 아니지만, 그 기술력만큼은 세계 최고를 논할 정도는 된다.

스미스는 그곳에서 단 다섯 명에게만 허락된 명인 등급의 기술자이자, 추후 광휘의 스미스라고 불리는 소울 시티의 전설이 된다.

조기경보드론의 하드웨어 업그레이드쯤은 식은 죽 먹기겠지.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탐나는 건 수십 년 된 고물인 이글아이를 현역으로 만든 남궁민수의 프로그래밍이다.'

게임 설정에서도 공인된 세계 최고의 로봇공학자이자 사이버러너가 남궁민수다.

그가 수십 년간 손을 대 개량을 거듭해온 이글아이의 CPU를 이브가 학습할 수만 있다면······.

'이브는 지금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할 수 있다.'

물론 이브만 진화하는 게 아니다. 나 역시 진화라고 불릴 정도로 변하게 될 거다.

내가 처음부터 조기경보드론을 원했던 이유.

'인벤토리.'

바로 하나씩 늘어갈 무기를 즉각적으로 보급받을 수 있는 공중보급소를 얻게 될 테니까.

그럼 휴대 때문에 사용하지 못했던 거대한 그레이트 소드나, 투핸드 배틀엑스 같은 것도 용도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지금은 거기에 다른 용도가 추가됐다.

그때는 없었던 새로운 능력이 생겼으니까.

'점점 강해질 중력조작의 힘이라면······ 소규모폭격인 강철비도 가능하다.'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중력조작으로 수십 배 증폭된 운동에너지를 머금고 지상에 낙하할 무기들이 만들어낼 폭력적인 광경이.

'멀지 않았다.'

꿈에 그리던 그 날이 말이다.

부아앙!

호버바이크의 쓰로틀을 당겼다. 순식간에 도로 위를 질주한 바이크가 이내 하늘로 쏘아지듯 날아올랐다.

나는 발아래 펼쳐진 광경을 내려다봤다.

차가운 크롬과 콘크리트. 매캐한 매연과 쓰레기로 뒤덮인 도시를 화려한 네온과 홀로그램의 빛이 힘겹게 가리는 광경을.

나는 화려한 거짓으로 점철된 이 세계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 도시 위로 군림하겠다고. 그리고 이 세계의 비밀을 밝혀내고 말겠다고 말이다.

나는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닿지 않을 것 같았던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4)

85화.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난지 섹터(蘭芝 Sector).

26구역에 위치한 이곳은 하늘강이 흐르며 토사물이 쌓여 섬처럼 만들어진 곳이었다.

도시와 분리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오래전부터 폐기물 매립지로 쓰이다가, 수십 년 전부터 감옥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과학기술과 사이버웨어가 기형적으로 발전하면서 도시 내에 감옥을 유지하는 게 보안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난지 섹터 전체가 감옥이 됐고, 그 감옥을 일컬어 소울 프리즌(Soul Prison)이라 불렀다.

* * *

소울 프리즌의 중앙통제실.

위잉위잉!

통제실 전체가 난리다. 스피커에선 연신 경고음이 들려왔고, 다급한 발소리와 혼란스러운 목소리들로 시끄러웠다.

"빨리 진입시켜!"

"라인부터 구축해!"

"차단막 내려서 연결부터 끊어야지 뭘 하는 거야!"

사방에서 들려오는 무전과 지원요청들. 그걸 통제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통제실장의 시선은 CCTV에 꽂혀 있었다.

평상시 전체를 비추던 CCTV 화면은 모조리 재소자 수용동 내부로 바뀌어 있었고, 그곳에선 죄수들이 닥치는 대로 주변을 부수며 감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4수용동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다급히 달려온 교도관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뭣!? 4수용동도?"

통제실장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런데 그걸 시작으로 다른 교도관도 달려와 소리쳤다.

"5수용동! 6수용동에서도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런 미친!"

이젠 구겨지다 못해 시커멓게 변해버린 통제실장이 욕설을 내뱉었다.

수용동 한곳의 죄수 숫자는 천명을 헤아린다. 그럼 벌써 몇 명이 들고 일어났다는 거야?

통제실장이 빠르게 상황판을 확인한다.

수용동 상황을 표시한 경고등이 실시간으로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7, 8수용동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마치 감옥의 죄수들이 단체로 오늘을 날로 잡은 것마냥, 폭동의 불씨는 꺼지기는커녕 점점 주변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 이런 미친놈들이! 왜 하필 지금!"

몰려오는 두통에 통제실장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안 그래도 휑한 정수리의 머리털이 버티지 못하고 뜯겨나갔다.

아직까지는 소울 프리즌에서도 간신히 감당할 만한 숫자다. 하지만 여기서 더 늘어나게 되면 감당할 수 없다.

물잔에 담긴 물은 어디에도 흘러나갈 수 없지만, 그 물잔이 넘쳐버린다면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다. 게다가 넘친 물이 어디로 흐를지도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즉, 손이 모자라 감옥의 경계에 구멍이 뚫린 순간,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시 정부 감사를 앞둔 통제실장을 비롯한 소울 프리즌의 공무원들에겐 지옥과도 같은 일이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간, 단순히 옷을 벗는 거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크윽! 안 되겠다. 외부지원 요청해!"

나중에 소장한테 한소리 듣더라도 지금은 외부의 도움이 절실했다.

* * *

-여기는 소울 프리즌! 지원을 요청한다!

통신단말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아있던 사내가 단말기를 연결하곤 묻는다.

"무슨 일이지?"

-재소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우리가 최대한 막고 있지만, 그 규모가 심상치 않다! 빠른 지원 바란다!

"이런? 우리도 테러가 발생해서 병력 대부분이 출동했는데 어쩌지?"

-그, 그런!

건너편에서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하필 이 시기에 테러가 벌어졌다니!

말문이 막힌 상대방의 거친 숨소리를 기분 좋게 듣고 있던 사내가, 선심이라도 쓰듯 느릿하게 말했다.

"음! 마침 기동타격대 한팀이 복귀하는군. 여기라도 보내도록 하겠다."

-한팀으론 터무니없이 모자라다! 여긴 폭동 규모가 만 명 단위가 넘는다고!

"당장 여기부터 보낸다는 뜻이다. 나머지는 로테이션 당겨서 순차적으로 지원 보내도록 하지."

-고, 고맙다!

"그럼 바쁜 것 같으니 바로 보내도록 하지."

뚝.

다급했던 통신이 끊겼다.

사내는 물끄러미 통신단말기를 바라보다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치직!

사내가 입에 물고 있던 연초에 불을 붙였다. 어두웠던 얼굴에 순간적으로 불꽃이 반짝이며 사내의 얼굴이 드러난다.

"후우······."

사내가 녹색빛이 감도는 연기를 뿜어낸다. 흔히 볼 수 없는 고가의 크로노타이늄 연초다.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군."

사내의 정체는 바로 남궁민수였다.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린 그가 단말기를 조작해 다른 곳과 연결했다.

"꼬리칸 폭동이 시작됐다. 승무원들은 다음 칸으로 이동한다."

-롸져.

짧게 통신을 마친 남궁민수가 단말기를 아예 내려놨다. 그리곤 녹색 연기를 피워내는 연초를 마지막으로 쭉 빨아들이곤 망설임 없이 재떨이에 꺼뜨렸다.

"후우! 이제 현실 일은 맡겨놓고 제대로 놀아볼까?"

남궁민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컴퓨터와 연결된 전선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딥 다이브 헬멧이다.

아이리스(Iris)라고도 불리는 이 장비는 사이버러너들이 사이버스페이스 내부에 직접 정신체를 구성하는 용도로 쓰이는데, 생각만으로 본인이 구축한 영역의 모든 데이터를 조작할 수 있다.

즉, 외부에선 최소 몇 초에서 몇 분이 걸리던 작업을, 딥 다이브 중엔 1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인간의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이유기도 했다.

잠시 아이리스를 내려다보던 남궁민수가 거침없이 머리에 뒤집어썼다.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해야겠지."

그가 할 일은 소울 프리즌을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격리시키는 것.

잊혀졌던 세계 최고의 사이버러너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등장할 시간이다.

* * *

일단의 차량이 난지 브릿지(蘭芝 Bridge)를 건너간다.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 승합차들이었으며, 겉엔 'S.C.M.S.F'라는 소울 시티 기동타격대의 준말이 각인되어 있었다.

부아아앙!

멀리서부터 엔진소리가 들릴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질주해오고 있다.

난지 브릿지를 차단하고 있던 교도관들이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차량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차단막을 올렸다.

쌔애앵!

차량들이 순식간에 검문소를 지나갔다. 그 거칠고 흉포한 움직임에 교도관들은 긴장된 얼굴로 지나가는 차량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내 차량들이 소울 프리즌 입구에 도착했다.

끼이익!

얼마나 급하게 운전했는지 멈춘 도로 위로 기다란 스키드 마크가 그려졌다.

멈춰진 차량에서 기동타격대가 우르르 내렸다. 검은색 전투복에 온갖 장비가 주렁주렁 매달린 군인들의 모습이다.

마침 기다리고 있었는지 교도관 몇몇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오셨습니까?"

"이번 작전을 맡은 타격대장이다. 책임자는 어디 있지?"

난데없이 책임자를 찾는 기동타격대장의 말에 교도관들의 얼굴 위로 불안감이 깃들었다.

대번에 책임자를 찾는다는 건 이 일이 끝난 후,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그, 소, 소장님이신데······ 지금은 안 계십니다."

교도관 중 한 명이 소장을 지목했다. 그 말에 다른 교도관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어진 타격대장의 말에 누군가는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럼 여기서 가장 높은 자는?"

"······접니다."

누가 봐도 책임지기 싫은 얼굴로 대답했다. 소장 핑계를 댔던 사내였다.

타격대장이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하게 묻지. 지금 가장 중요한 곳이 어딘가?"

타격대장의 말에 사내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간다. 이걸 묻는다는 건 그곳으로 가겠다는 뜻이겠지?

"주, 중앙통제실입니다!"

그곳엔 통제실장이 있다. 자신보다 직급이 두 단계나 높은 사람이니, 만약 책임질 일이 생겨도 자신보다 그 쪽에게 무게가 더 실릴 거다.

사내는 자신의 대답에 만족한 듯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래. 이 정도 임기응변은 돼야 공무원으로 살아남지!

그런데 타격대장이 고개를 저었다.

"거긴 우리가 필요 없어! 우리가 왜 온 것인지 아직도 이해를 못 했나? 일이 커지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고!"

"아, 아닙니다!"

"그럼 다시 묻지! 이 폭동이 번졌을 때 가장 위험한 곳이 어딘가?"

타격대장의 다그침에 사내가 재차 머리를 굴렸다.

이번엔 진짜 저자의 의중을 파악해서 원하는 대답을 해놔야 했다. 아니면 이 사태가 끝나고 재수 없게 뒤집어쓰게 생겼으니.

'가장 위험한 곳?'

그러자 한곳이 바로 떠올랐다.

"1! 1수용동입니다!"

그곳은 흉악범과 커다란 죄를 지은 죄수들이 갇힌 곳이었다.

프리즌 갱이라면서 거들먹거리는 쓰레기들 대부분이 모인 곳이기도 했다.

게다가 감옥의 어디까지 선이 닿았는진 몰라도, 몇몇은 입소할 때 걸렸던 사이버웨어의 제약도 풀린 상태다.

이미 무리를 이루고 있는 놈들이기에, 그놈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상당히 위험해진다. 무엇보다 무기도 있는 놈들이니까.

그때 사내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타격대장이 흡족한 얼굴로 소리쳤다.

"좋아! 우리는 1수용동으로 가지! 추후 오는 지원군이 있다면, 1수용동은 우리가 갔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전달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타격대장이 턱짓을 하자 뒤에 도열하고 있던 기동타격대가 우르르 감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왔을 때 만큼이나 거침없는 움직임이다.

교도관들은 살짝 얼이 나간 상태로 기동타격대가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그때 사내의 시선에 무언가 덜컥하고 걸렸다.

허리춤에 칼을 두 자루나 찬 기동대원이 무리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기동타격대가 웬 칼을······?'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동타격대가 예비대 성격을 띠고 있긴 하나, 그래도 정규군이기에 최첨단무기를 가장 먼저 지급 받는다.

그런데 칼을 휴대했다? 그것도 두 자루씩이나?

사내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거 혹시······!

'······새로운 신무기가 또 나왔나 보군. 제길. 아무리 쓸 일이 없다지만, 감옥은 항상 보급에 뒷전이란 말이지. 하여튼 탁상공론만 하는 공무원 놈들이란······'

그는 그렇게 시 정부 공무원들을 욕했다. 기동대원이 찬 두 자루의 칼이 비공개된 신무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 *

제1 수용동.

멀리서부터 요란스러웠던 감옥은 점점 그 소리가 가까워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요제프가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커다란 외눈 안경을 의미 없이 벗었다, 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옆방이 잠시 부스럭대더니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내가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디 폭동이라도 일어났나 보군."

"포, 폭동이라니! 위험한 거 아닌가, 누커만?"

깜짝 놀란 요제프가 물었다.

누커만이라 불린 사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 누구도 당신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테니. 내가 누군지 잊었소?"

"그, 그렇지."

누커만의 차가운 눈빛을 바라본 요제프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겐 그 악명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젠틀한 모습만을 보여줬던 누커만이지만, 이곳에 지내면서 은연중 들었던 것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자신이 이곳에 갇힌 지 한 달.

그 사이에 누커만의 손에 죽어 나간 사람 숫자가 양손을 합쳐도 모자라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기로 했던 것만 잊지 마시오."

"다, 당연하지! 내 이곳에서 무사히 나가면 그 일부터 처리하겠네!"

"좋구려."

누커만이 입을 쭉 찢으며 웃었다. 크롬으로 대체된 날카로운 치아가 섬뜩하게 반짝였다. 요제프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때 수용동 문이 열리고 시커먼 전투복을 입은 무리가 들이닥쳤다.

투타탕!

하늘을 향해 경고사격을 한 그들이 수용동 죄수들을 보며 소리쳤다.

"1수용동 죄수들은 전부 복도로 집합한다!"

"빨리빨리 움직여!"

죄수들은 난데없이 벌어진 상황에 불만을 품으면서도 그들의 통제에 따랐다.

일단 그들의 손에 총이 쥐어진 게 첫 번째 이유였고, 가끔씩 이런 귀찮은 일이 벌어졌던 걸 경험해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귀찮은 상황이 조금 다른 것 같긴 하지만.

죄수들이 모두 복도로 모였다. 입구에서 차분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동타격대가 소리쳤다.

"지금부터 전부 벽에 등을 대고 양손을 머리 뒤로 올린다. 실시!"

"······뭐?"

선을 넘는 지시에 죄수들이 얼굴을 구겼다.

"우린 조용히 있었는데 왜 이러는 거야?"

"우리는 폭동 일으킬 생각 없다고!"

"그냥 다른 곳으로 가지? 조용히 있는 사람들 건드리지 말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하지만 상대는 총을 쥔 군인들이다. 아무리 막 나가는 죄수들이라도 함부로 들이댈 수 없었다. 일단 죽여놓고 사고사처리 해버리는 게 이 도시의 군대였으니까.

"시끄럽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작전방해죄로 즉결처분······"

"잠깐."

그때 복도 중앙을 가로질러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왔다.

"거기 너! 네 자리로 돌아가!"

"궁금증이 풀리면 돌아가도록 하지."

"뭐야! 즉결처분당하고 싶나?"

철컥철컥.

순간 사내의 온몸으로 기동타격대의 총들이 조준된다. 수십 개의 레이저포인터가 사내의 몸 위로 드리워졌다.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기세건만, 사내는 오히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한 궁금증은 아니라서 그냥 대답해줬으면 좋겠군. 그럼 우리도 통제에 따를 테니까."

"······말해라."

"당신들은 누구지? 교도관들은 어디에 있고?"

"우린 소울 시티 기동타격대다! 교도관들은 전부 다른 곳으로 지원 나갔고, 이곳의 통제권은 우리에게 있다! 궁금증은 풀렸나?"

"······기동타격대?"

까끌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사내의 시선이 어디론가 향한다. 그리고 그건 다른 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이의 시선을 받은 사내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또다시 통제에 따르지 않는 이가 발생하자, 타격대장이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너는 또 뭐야? 네 자리로 돌아가!"

"기동타격대 어디?"

"······뭐?"

"어디 출신이냐고 너희. 기동타격대라며."

새롭게 걸어 나온 사내가 기동타격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2미터를 훌쩍 넘는 거구에 폭발적인 근육. 거기에 한껏 성난 핏줄이 보이는 대머리까지.

진한 마초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사내였다.

"남부지구 1타격대다! 이제 헛소리 그만하고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푸하하하!"

타격대장의 성난 목소리를 뚫고 대머리 사내가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정색하며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

"너희 뭐하는 개새끼들이냐? 남부지구 타격대인데 나를 몰라봐?"

"우리가 네놈들처럼 한가한 줄 알아! 죄수놈들 신상이나 꿰고 있게?"

"푸핫! 이거 그냥 개새끼들이 아니라 웃긴 개새끼들이네."

실소를 흘린 대머리 사내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나 전 남부지구 타격대장이다, 이 존만이들아."

"······!"

타격대장을 비롯한 기동타격대 인원 전원이 흠칫 몸을 꿈틀거렸다.

그 모습을 노려보던 대머리 사내의 눈빛에서 새빨간 안광이 터져 나왔다.

순간 그의 머리 위로 치익!하며 수증기가 뿜어지더니, 온몸의 근육이 급속도로 팽창하며 몸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뭐해! 이 새끼들 조져!"

"이런 빌어먹을!"

타격대장. 아니, 그라타가 꼬여버린 계획에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번쩍!

그라타의 눈앞으로 야수처럼 달려들던 대머리 사내의 몸에서 번쩍하며 빛이 났다.

처음엔 그게 그의 대머리가 반사한 조명 불빛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금세 밝혀졌다.

푸화화확!

달려들던 대머리 사내가 양쪽으로 갈라진 채 그라타를 스쳐 지나갔으니까.

"······!"

피를 흠뻑 뒤집어쓴 그라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눈앞에서 사람이 반으로 갈라졌는데,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건, 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당황과 놀람을 담은 시선들이 어딘가로 움직였다.

그건 마치 본능과도 같았다. 지금 이곳에, 난데없이 등장한 이질적인 존재를 향한 경계였다.

그리고 발견했다.

뚝뚝.

피 묻은 검을 들고 고고히 서 있는 타격대원을. 칼날 끝에 맺힌 진홍색 핏방울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광경을.

그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살고 싶으면 전부 꿇어라. 지금부터 서 있는 놈들은 모조리 죽이겠다."

강현재였다.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5)

86화.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소름 끼치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쓰나미가 해안가를 덮치듯, 폭발적인 살기가 죄수들을 덮쳤다.

가까이 있던 자들은 숨쉬기 곤란한 듯 가슴을 부여잡더니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그보다 멀었던 자들은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으며, 그보다도 먼 자들은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의 서늘함에 온몸을 흠칫 떨었다.

그야말로 이 거대한 수용동 전체가 자욱한 살기로 뒤덮였다.

"이, 이이익!"

"끄흐흐······ 카, 칼잡이 따위가!"

"크학! 우리를 뭘로 보는 거냐!"

그때 몇몇 죄수들이 이를 악물고 비명에 가까운 포효를 내질렀다.

그게 신호라도 됐는지, 공포로 잠식됐던 장내의 분위기가 환기됐다. 그리고 이내 흉악범들답게 자신들을 협박하는 칼잡이를 상대로 살기를 내뿜었다.

'좀 쎈 놈 같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감히 '우리'한테 그따위 협박을 해? 건방진 칼잡이! 죽여버리겠다!'

이게 지금 죄수들 머릿속에 떠오른 원초적인 생각이었으며, 살기를 뿜어내는 원동력이었다.

콰콰콰콰!

강현재가 뿜어낸 살기와 죄수들이 뿜어낸 살기가 부딪쳤다.

그 소리 없는 침묵의 격돌 속에서 먼저 움직인 건, 사이버웨어를 가동시킨 죄수들이었다.

"뭐해! 우리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죽여!"

사이버웨어를 착용한 죄수들이 강현재를 향해 쇄도했다.

콰쾅!

묵직한 충격음이 장내에 퍼졌다.

그제야 다른 죄수들도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저 새끼들 조져!"

"다 죽여버려!"

"이런 빌어먹을! 쏴라!"

투타타탕!

이윽고 죄수들과 기동타격대. 아니, 해방전선이 격돌했다.

사방이 총성과 비명으로 얼룩졌다.

* * *

나는 안구에서 붉은빛을 뿜어내며 달려드는 죄수의 팔을 튕겨냈다.

콰쾅!

묵직한 타격음.

이내 튕겨 올라간 죄수의 살갗이 찢어지며, 인조 피부 아래 차가운 금속이 드러난다.

"죽어!"

"죽어랏!"

한 놈이 튕겨 나가자 두 놈이 달라붙는다. 그 뒤로 또 성난 걸음으로 뛰어오는 놈들이 늘어섰다.

나는 달려드는 두 놈의 가슴을 향해 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은빛 궤적이 섬광처럼 늘어지며 순식간에 두 놈의 가슴을 꿰뚫었다.

"크윽! 겨우 이 정도냐!"

"이깟 칼 따위!"

가슴이 꿰뚫린 두 놈은 작은 침음만 내뱉곤 다시 달려들었다.

뚫린 구멍으로 피와 함께 거뭇한 오일이 흘러내렸다. 상체의 일부분까지 개조한 놈들이다.

나는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어느새 죄수들의 무리는 나뉘어서, 한쪽은 나, 한쪽은 해방전선을 상대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내게 쇄도하던 두 놈이 양쪽으로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양방향을 점한 놈들이 나를 찍어 내릴 듯 주먹을 내지른다. 인조 피부는 이미 벗겨져서 온통 크롬으로 이뤄진 기계 팔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왼발을 뒤로 빼며 먼저 한 놈의 팔꿈치를 날려버렸다. 아무리 크롬으로 도배했더라도 관절부위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서걱.

칼날이 지나간 순간 팔꿈치는 박살 난 듯 떨어져 나갔다.

"크악!"

하지만 한 놈이 더 있었다.

나는 올려친 검을 그대로 역수로 움켜잡고 궤적을 멈춰 세웠다.

급제동이 걸린 칼날이 찰나의 순간 정지했고,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하며 끌어당기듯 내리긋는 움직임에 벼락처럼 아래로 내리꽂혔다.

번쩍!

그 궤적에 위치한 놈의 양팔이 거짓말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이번엔 박살이 아니라 레이저로 자른 듯 예리한 단면으로 잘려나갔다.

"크, 크읏!"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건 두 놈이 달려든 그 한 호흡 만에 이뤄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하지."

순식간에 팔을 잃은 놈들에게 칼날을 들이밀며 말했다.

"꿇어라. 그럼 살려주마."

"조, 좆까!"

"퉤! 너나 꿇어 이 새끼야!"

놈들이 비틀린 웃음을 내뱉으며 소리쳤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서걱.

툭.

두 놈의 목을 날려버렸다.

사이버아이의 불빛이 꺼진 놈들의 머리가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머리가 사라진 몸에선 피분수 대신 울컥울컥 끈적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

뒤에서 달려들던 놈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가 떨어졌으니.

나는 놈들을 바라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이제 기다려주는 시간은 끝났다."

이놈들은 전부 바깥에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들어온 놈들이다. 이 감옥의 죄수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곳 1수용동은 특히.

살인, 강도, 강간, 방화가 흔한 세계다. 이놈들이 저지른 범죄 중엔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역겹고 더러운 것들도 있을 거다.

"지금부터 서 있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주마."

나는 검을 고쳐잡고 그대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콰직!

순간적인 가속으로 인한 반작용으로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진다.

나는 발끝에서 느껴지는 지면의 반탄력을 계산하며 고쳐잡은 검을 내뻗었다.

스릉.

칼날이 죄수의 목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 결과까지 부드럽진 않았다.

"커, 컥!"

놈이 반으로 갈라진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으니까. 뒤늦게 피분수가 터지며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죽음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죄수들을 덮친 게.

번쩍!

"끄억!"

"허, 허허억······!"

"컥!"

조명에 반사된 은빛 궤적이 반짝일 때마다 죄수들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팔, 다리가 이리저리 날아다녔고 몸을 잃은 머리가 바닥을 굴러다녔다.

자신만만하게 사이버웨어를 드러낸 죄수들은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썰린 짚단처럼 쓰러졌다.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살고 싶다면······ 꿇어라!"

나는 야수처럼 포효하며 죄수들에게 달려들었다.

* * *

한편, 전투가 벌어진 현장을 지켜보던 누커만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저놈들 장비도 그렇지만 실력도 웬만한 갱단과는 비교조차 되질 않는군.'

그는 쓸려나가는 죄수들을 바라봤다.

가짜 기동타격대 놈들 주제에 무기 다루는 솜씨가 예술이다. 심지어 사이버웨어를 사용해도 놈들 근처로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그건 놈들이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전술 개념을 이해한 놈들임을 뜻했다.

하지만 괜찮다.

천명에 달하는 죄수들은 여전히 많이 남았고 놈들의 탄환 숫자는 제한이 있으니, 결국 저놈들은 죽게 될 거다.

······저놈들뿐이라면 말이다.

'······저건 말도 안 되는 칼잡이로군. 도금도 아니라 순수 크롬강철 사이버웨어를 무 썰 듯 썰어버리다니?'

그의 시선이 그보다 앞에 있는 칼잡이와 자신의 친위대를 바라봤다.

특별히 사이버웨어 제약을 풀었을 뿐만 아니라, 업그레이드까지 시켜준 놈들인데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쓸려나간다.

지금도 두 눈으로 보고 있지만,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

'하긴 처음에 아틸라를 반으로 쪼개버렸을 때도 그랬지.'

전 기동타격대의 지부장인 아틸라. 그의 온몸은 크롬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사이버웨어를 임플란트한 게 아니라 크롬 본(Chrome Bone) 이식 수술까지 마친, 두개골을 비롯한 온몸의 뼈가 크롬으로 대체된 괴물이었다.

그런데 칼잡이는 저 허름한 칼 한 자루로 크롬 본 마저 갈라버렸다. 수백 톤의 운동에너지를 버틴다는 크롬 본을.

그때 요제프가 불안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어, 어떻게 할 건데? 저 미친놈들이 우릴 다 죽이게 생겼어!"

그의 시선엔 죄수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누커만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우리 숫자가 압도적이니 결국 이기긴 할거요. 하지만 위험한 것도 사실이지."

"수, 숫자 문제가 아니라 저 미친 칼잡이부터 어떻게 해야······ 히, 히익!"

반쯤 정신이 나간 듯 소리를 질러대던 요제프가 갑자기 공포에 질린 비명을 토했다.

그의 시선 끝.

그곳에 위치한 칼잡이가 정확히 요제프를 쳐다봤기 때문이다.

그 순간, 피에 젖은 칼잡이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그를 향해 걸어왔다.

다행히 다른 죄수들이 다시 칼잡이에게 달려들며 시야가 끊겼으나, 그 짧은 찰나. 요제프가 공포에 질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누커만 역시 칼잡이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 같자 얼굴을 구겼다.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소. 놈을 상대하기엔 장소가 좋지 않군."

"조, 좋아! 빨리 가세!"

그들은 누커만이 사용하던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죄수들보다 압도적으로 크고 좋은 방. 분명 감옥임에도 감옥이라는 게 크게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누커만이 턱짓하자 친위대 죄수가 침대를 밀었다. 그러자 뻥 뚫린 비밀통로가 드러났다.

"자, 들어가······."

쾅!

쩌저적!

그때 바닥이 울릴 정도의 충격과 함께 폭음이 터져 나왔다.

재빨리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리자, 문 앞의 벽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피떡이 된 죄수가 박혀 있었다.

아니, 그건 죄수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사이버웨어만 남기고 나머지 신체는 짓이겨진 고깃덩이가 돼버렸으니까.

"히, 히이익! 빠, 빨리! 빨리 들어가게! 어서!"

요제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 * *

한차례 죄수들을 치워낸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 혼란과 분리된 자들을 확인했다.

'이 난장판에 따로 떨어진 자들이라?'

높은 확률로 목표대상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때 그들 중 누군가와 정확하게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렌즈 위로 빠르게 인적정보가 깜빡이듯 지나가고, 이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표 대상 요제프 바르코프. 찾았습니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놈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빠르게 그라타에게 무전했다.

"그라타. 얼마나 버틸 수 있지?"

-후욱후욱! 왜!

무전 너머로 그라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타겟을 발견했는데 도망가는 것 같군."

-뭐, 뭐야? 그럼 빨리 쫓아가야지!

"그래서 묻는 거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큭! 걱정하지 마라! 우리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으아아! 이 개새끼들! 그만 기어와!

나는 무전 너머로 들려오는 녀석의 괴성에 피식 웃고는 짧게 무전을 마쳤다.

"좋아. 믿어보지."

고개를 들어 달려드는 죄수들을 바라봤다.

분노로 가득한 일그러진 얼굴. 하지만 그 눈빛을 자세히 살펴보면 명백한 두려움 또한 존재했다.

서걱.

촤륵!

툭.

나의 전투엔 커대란 소음은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살을 가르고 뼈가 썰리는 소리만 가득하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핏방울이 흩날린다. 피에 젖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사방에 피를 뿌려댔다.

이 피와 살육의 시간은 오롯이 나에게만 허락된 시간이었고, 그럴수록 죄수들의 눈빛에 숨어있던 두려움은 점점 커지며 분노를 잠식했다.

이윽고······

콰쾅!

쩌저적!

내지른 발차기에 날아간 죄수가 짓이겨진 고깃덩이로 변하자, 그 두려움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으, 으으······ 괴, 괴물!"

"나, 난 그만할래!"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죄수들이 다른 곳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좁아터진 수용동에서 도망칠 곳이라야 마땅하지 않건만, 놈들은 필사적으로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도망치는 놈들에게 신경을 끄고 요제프가 도망갔던 방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드러난 커다란 구멍.

"비밀통로라······ 이걸 이렇게 빠져나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목소리에 섬뜩한 감정이 실렸다.

"이브. 이 뒤에 뭐가 있지?"

-파 내려간 방향으로 보아 하수도일 확률이 53%, 자재창고일 확률이 47%입니다.

애매한 확률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니까 반올림하면 5:5라는 소린데······.

'여기는 난지 섹터. 하수도를 이용한다면 바로 하늘강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하수도로 갔겠군."

-길 안내를 시작합니다.

* * *

요제프와 누커만. 그리고 친위대 인원 몇몇은 하수도로 내려왔다.

온갖 배관과 전선이 지나가고, 긴 수로로 흐르는 물 위로 각종 하수와 오물들이 떠다녔다.

덕분에 이곳 전체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다.

"우욱! 누, 누커만! 여긴 대체 우욱! 어디로 향하··· 우욱! 는 거지?"

요제프가 연신 헛구역질을 하면서 물었다.

"바깥으로."

"바깥? 감옥 밖 말인가? 우욱!"

"그렇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외부 일을 처리하고 돌아올 때 사용하는 통로지."

담담히 대답하는 누커만의 말에 요제프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 진짜 바깥이란 말인가? 그, 그런······?"

'그럼 탈옥을 할 수도 있는데, 안 한다는 말이잖아?'

그런 요제프의 생각을 읽었는지, 누커만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죄수가 도시를 자유롭게 돌아다녀서 불만이오?"

"아, 아니······ 나는 왜 자네가 감옥에 계속 있나 싶어서······ 돌아오지 않아도 되잖나?"

"내가 왜 그래야 하오? 이곳에선 내가 왕인데. 무엇보다 죽을 걱정도 없고."

"······."

이런 감옥에서 왕 노릇을 하면 뭘 한단 말인가? 그래 봤자 자유 없는 죄수가 아닌가?

요제프는 누커만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도시의 진짜 밑바닥 삶을 모르기에.

그때 하수도 멀리서 쿵쾅거리는 폭음과 함께 총성이 들려왔다.

"이런. 벌써 따라왔나?"

누커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나 해서 부하들을 중간중간 세워놨는데 벌써 전투가 벌지다니.

"그, 그놈 아닌가? 그 미친 칼잡이 말이야!"

"아마 그렇겠지."

누커만이 고개를 돌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친위대를 바라봤다.

"너희들이 막아줘야겠다. 남은 가족은 내가 책임지마."

"알겠습니다, 보스!"

"살펴가십시오, 보스!"

마지막 인사가 될지 모를 그들의 인사를 받은 누커만이 몸을 돌렸다.

"조금 더 서둘러서 걸어야겠소."

"아, 알겠네!"

그렇게 걸음 속도를 올린 그들이 몇 걸음이 걸었을까?

쿠쿠쿵!

투타타탕!

지근거리에서 폭음과 총성이 들려왔다.

바로 조금 전, 마지막 친위대가 남겨진 공간에서.

"······!"

놀란 둘의 시선이 천천히 뒤를 향했다.

······.

언제 폭음과 총성이 들렸는지, 거짓말처럼 침묵이 내려앉은 어둠 속.

저벅저벅.

그곳에서 어둠을 가르며 누군가 걸어 나왔다.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6)

87화.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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