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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APOCALIPSISCHEF / Chapter 24: 24

บท 24: 24

* * *

발상은 간단했다.

이 녀석들은 '위험도 수치'라는 것에 따라 봉인 해제에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

'위험도 수치라는 건 아마 강함을 말하는 거겠지.'

서환은 이 중에서 안 그래도 가장 약했던 인물.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원래라면 바로 눈을 떠도 될 정도는 아니다.

아마도 녀석이 멸망의 날 첫날부터 눈을 뜬 이유는.

'저 얼굴의 부상.'

서환의 힘은.

전성기 시절보다도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는 것.

그렇다면 그거.

'여기 누워 있는 녀석들에게도 해당되는 거 아냐?'

내가 만들려는 요리는 간단했다.

내가 지금까지 만든 요리가 부대원들의 건강과 영양 밸런스를 생각하고.

높은 버프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지금 만들 요리는.

그것과는 아예 반대의 방향성을 가진 요리.

'어렸을 때 참 좋아했지. 혼나기도 엄청 혼났고.'

단적으로 말해.

불량식품이다.

그림자 안에서 꺼내 든 것은, 한 덩이의 설탕.

그리고 그 옆에는.

[포이즈네르 전분]

[이계의 작물, 포이즈네르의 전분입니다.]

[특유의 마력으로 인해 식재에 더욱 쫀득한 식감을 제공해주며....]

[다만, 사용에는 주의를 요해야 하는데. 포이즈네르는 특유의 독ㅅ....]

탄약대대에 자리 잡은 알라우네.

그녀의 곁에서 자라고 있던 '이계의 작물'로 만든 재료.

그중에서도 이건 전분의 역할이었다.

"이 가루는 뭐지?"

"음. 우리 부대의 농부가 재배한 걸로 만든 건데...."

나름대로 요리 경험이 있긴 하다 보니.

재료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서환.

무심코 설명해 줄 뻔...했으나.

"...어차피 설명해봐야 모를 테니, 대충 넘어가자고."

"흐음. 그도 그렇군. 이 세계의 작물에 대해서는 들어도 모를 테니."

가까스로 설명하지 않고 넘기는 데 성공했다.

'모르고 넘어가는 게 맘 편할 거거든.'

어쨌든.

그렇게 준비된 전분과 설탕을 일정한 비율로 합친 뒤.

그 위에 물을 부어 섞어주었다.

"일단 이건 이 정도면 됐고."

내가 만들 요리의 재료는 간단하다.

여기에 시럽과 천연색소만 더해지면 끝나는 수준이니까.

다만.

적당한 시럽과 천연색소가 없다는 게 문제인데....

'뭐, 바로 만들어 버릴까.'

[슈가너마이트 잎]

[특유의 풍미를 자랑하는 슈가너마이트의 잎입니다. 잎의 색깔에 따라 요리의 풍미를 조금씩 바꾸어 주는 재료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사용에는 주의를 요해야 하는데, 슈가너마이트는 특유의 질병을 유발하는....]

그림자 속에서 몇몇 나뭇잎을 꺼낸 뒤.

그 잎의 물기를 짜내자.

다양한 색깔의 천연 색소가 완성된다.

특유의 풍미는 덤.

거기에 더해서.

[바로네스 초의 즙]

[육식 식물 바로네스 초의 즙입니다. 깊은 단맛을 가진 재료로써, 다양한 간식 종류에 널리 쓰이는 재료이기도 합니다.]

[다만 사용에는 주의를 요해야 하는데. 이 자체로는 큰 문제가 없지만, 만약 전분과 결합할 경우 건강에 큰 이상을....]

깊은 단맛을 자랑하는 걸쭉한 액체.

시럽까지 완성이다.

"이걸 합쳐 주고...."

"흐음."

"잘 섞은 다음에, 이 빨대 안에 넣어 주면!"

"호오."

[전쟁 요리사의 정성이 가득한 팡폴로]

[어린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다양한 단맛을 내는 과자입니다.]

[요리사의 정성이 가득 들어가, 깊으면서도 산뜻한 단맛을 자랑합니다.]

"완성이다."

"호오. 특이한 형태로군. 이 세계 특유의 요리 같은 것인가? 어디 맛을 한번...."

완성된 팡폴로에 손을 뻗는 서환.

"땍!"

"!?"

나는 기겁을 하며 그 손을 치워 버렸다.

"뭐, 뭐하는 짓인가!"

"...이건 환자들 용이거든. 네가 먹으면 안 되지."

"음? 으음. 그건 그렇군. 미안하다. 달달한 향에 넘어가서 그만...."

말투에 비해 어려 보이는 얼굴.

어쩌면 이런 불량식품에 끌리는 나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조금 짠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거 먹으면 너 큰일 나 인마....'

그렇다고 먹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냐.

어쨌든.

그렇게 완성된 요리를 서환에게 넘겼다.

"...? 나는 먹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었나."

"네가 먹으란 건 아니고. 직접 저 셋한테 먹여 달라고."

"굳이? 만든 것은 네가 아닌가. 직접 먹여도 될 것을."

"아마 이걸 먹자마자 바로 눈을 뜰 텐데. 그때 앞에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으면 기분이 어떻겠냐."

"...음. 틀린 말은 아니군."

이번에도 그럭저럭 속아 넘어가는 서환.

물론, 정말로 그런 이유 떄문에 요리를 넘긴 것은 아니다.

굳이 서환이 요리를 먹이도록 만든 이유는 간단.

저 요리.

[금제]

[천산문 내의 문도들에게 어떠한 적대적 행위도 하지 않을 것.]

잘못하면.

금제를 어기는 걸로 판정이 나올 수도 있거든.

'불량식품...이라는 말은, 사실 팡폴로한테 실례지.'

미디어에서 하도 불량식품이라는 이름으로 괴롭힌 덕에.

어린 시절 많은 아이들이 팡폴로를 먹으면서 부모님에게 혼나야만 했다만.

나중에 밝혀진 사실.

'팡폴로는 딱히 건강에 나쁜 음식이 아니니까.'

멀쩡한 간식거리가.

미디어에 의해 불량한 음식물로 낙인이 찍혀 버린 것.

나중에 그 사장님이 울먹이면서 푼 썰이 꽤 큰 화제가 되었다.

직접 팡폴로를 만들며 여기 어디에 건강에 나쁠 요소가 있느냐 호소했지.

그때 레시피를 봐 두었기에.

이렇게 나도 팡폴로를 만들 수 있었다.

아무튼.

팡폴로는 정확히 말하면 불량식품이 아니다만.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진짜배기 불량식품.'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들어가는 다른 재료들을 바꿔 줄 필요가 있었다.

[포이즈네르]

[깊은 독성을 가지고 있는 구황작물입니다.]

[슈가너마이트]

[섭취 시, 모든 종류의 능력치와 저항력이 감소하는 단점을 가진 풀입니다.]

[바로네스]

[특유의 조리법을 따르지 않을 경우, 신체의 저항력을 크게 깎을 수 있어 주의를 요해야 하는 풀입니다.]

'하나같이 맛은 훌륭한 재료라는 게 또 웃기단 말이지.'

맛은 좋지만.

대신에 건강에 '아주 큰 이상'을 줄 수 있는 재료들.

[섭취 시, 모든 능력치가 대폭 감소합니다.]

[섭취 시, 일시적으로 상태 이상 - '식중독'을 획득합니다.]

[섭취 시, 일시적으로 상태 이상 - '식도염'을 획득합니다.]

[섭취 시, 모든 종류의 저항력이 소폭 감소합니다.]

[....]

[....]

이런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훌륭한....

불량식품의 완성이다.

"이 안의 내용물을 먹이기만 하면 된다, 그거겠지?"

"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환은 긴장한 낯빛으로, 누워 있는 사람들의 입에 요리를 가져다 댄다.

[우진]

[대상 위험도 수치 - 3]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 - 10,531,552....]

"실례하겠습니다. 사형."

말상의 사내.

그의 입에, 극상의 단맛을 자랑하는 불량식품이 들어간다.

그러자.

[대상의 능력치가 대폭 감소합니다!]

[위험도 수치가 변동됩니다.]

[대상 위험도 수치 - 3 -> 2(New!)]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 - 10,531,552... -> 231,552....(New!)]

능력치의 대폭 하락.

각성자로 따지면, 레벨이 반토막 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효과가 가장 먼저 적용되고.

[대상에게 복수의 상태 이상이 적용됩니다!]

[위험도 수치가 변동됩니다.]

[대상 위험도 수치 - 2 -> 1(New!)]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 - 231,552.... -> 42,857....(New!)]

복수의 상태이상.

본래의 컨디션을 발휘할 수 없게 되는 수준의 독기가 몸을 뒤엎는다.

마지막으로.

[대상의 모든 저항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사소한 먼지바람에도 질병이 걸릴 정도의 저항력 감소까지 적용되자.

비로소.

[대상 위험도 수치 - 0]

[봉인 해제까지 남은 시간 - 10....]

[9....]

[8....]

[7....]

이계의 존재를 봉인하고 있던 주체.

세계가, 그 위험도를 0으로 판별했다.

[...2]

[1]

[0]

그 숫자가 0이 된 순간.

말처럼 생긴 남자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마, 막내야?"

"사형...!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조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형제 간의 해우라.'

이득을 보기 위해 한 일이기는 하다만.

한참을 보지 못했던 가족과 재회하는 것.

조금은 감동적인 장면이 될 것이라 예상했으나.

"사, 살아 있었구나. 나는 네가 얼굴에 상처를 입고 죽은 줄로만...!"

"운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사형."

사형이 눈을 떴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서환.

"천운이 따라줬구나."

"예. 정말로요."

"그나저나, 입 안을 맴도는 이 감미로운 단맛은 대체 무엇이더쿨러어어억...!"

그 얼굴을.

우진이 토한 검은 피가 뒤덮었다.

"쿨럭, 커헉.... 뭐, 뭐냐, 이 고통은. 마치 지독한 역병에 걸린 것 같은."

"...."

"크허억. 마, 막내야. 살려다오. 죽을 것만 같... 꺼헉... 끄읍."

아무래도.

감동과는 좀 먼 재회가 돼 버린 것 같다.

"...효과가 조금 과했나."

161화 불량식품 (2)

"그. 뭐라고 해야 하나. 미안하네."

"...아니. 됐다."

결과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작전은 그대로 성공했다.

'저 봉인은 대상의 강함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대상이 약해지면, 봉인 또한 같이 약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

그래서 열심히 최고의 불량식품을 만들었다.

나도 꽤 짬이 찬 요리사인 만큼.

맛에서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다만.

'건강에 대한 건 뭐... 충분히 타협할 수 있거든."

맛만 있다면 그만 아니겠어!

내가 그동안 이룬 '업적'들의 효과로 인해.

내가 만든 요리의 모든 종류의 효과는 배가되어 적용된다.

그 효과에는, 디버프 역시 포함되는바.

결과부터 말하자면.

저들을 약화시켜 봉인의 단계를 낮춘다는 내 작전은 대성공....

하긴 했다만.

"그, 여벌 옷 같은 건 없나?"

"...없다."

너무나도 많은 디버프를 걸어 버린 나머지.

깨어난 모든 이들이 서환을 향해 피를 토하며 고통을 호소해 버렸다는 게 문제.

"정말 문제는 없는 거겠지...?"

"아. 고통은 일시적인 거라니까. 봉인에서 깨어나는 대가로 약간의 고통은 지불해야지."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그 피토를 모두 뒤집어써야만 했던 서환에게는 솔직히 조금 미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

최대한 강한 디버프를 걸려고 작심했던 것이긴 하다만.

그렇게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올 줄은 누가 알았겠냐.

"일단 여벌 옷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있으니, 그거라도."

"...그건 받도록 하지."

그림자 속에 넣어뒀던 여벌 군복을 건네주자.

주섬주섬 갈아입는 서환.

"조금 거슬리는 일이 있었던 건 사실이나...."

"으음."

"고맙다."

그렇게 말하는 서환의 말투에는.

약간의 물기가 느껴졌다.

"나는 저분들이 모두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으나. 저들은 그때 나타난 거악들에게 혼을 빼앗기고 만 것이라고...."

그야.

엄청난 강적들이 나타났다는 전투.

그 전투에서 정신을 잃고 난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계가 멸망해 버린 것이다.

정신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

"훌쩍...."

멸망한 세계에.

혼자 남겨진 생존자.

말투에 비해 아직 앳돼 보이는 얼굴.

어린 마음에 불안감도 컸겠지.

"천산문의 막내로서, 혼자 남아서라도 이곳을 계속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는 건가?"

"아니. 나갈 수 있다는 건 첫날에 확인했다. 하지만. 혹시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괴물이 들어와 사형제들의 유해를 해할까 두려웠지...."

과연.

굳이 승주 스님에게 식량 조달을 명령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나 보다.

"이곳에서 평생을 고독하게, 일어나지 않는 사형제들을 기다리며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훌쩍."

"...."

"정말로 고맙다. 진심이야. 다시 저분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뭐랄까.

고마워하는 건 괜찮은데 말이지.

'어차피 100일 뒤면 깨어났을 거라고는... 말하기 힘든 분위기가 돼 버렸는데.'

뭐.

그 해후를 100일이나 앞당겨 준 것만 해도 꽤 큰일 아니겠냐.

"협박으로 시작된 인연이었던 만큼, 네놈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 우리 세계의 잔재를 조금이라도 남기고자 무예를 가르치긴 했으나, 악인에 가까운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얼굴도 무섭게 생겼고."

"뭐 인마?"

"하지만 착각이었군. 내 제자들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 존재들이었어. 하하하...."

어지간히 감동한 것인지.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녀석.

"크흠. 일단 저 사람들을 깨운 건. 알지? 광일이한테 무예를 가르치기 위함이란 거."

"알고 있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네가 내 사형제들을 살려 준 것은 사실이지. 나는 네게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다."

굳이 은혜랄 거까지야.

"내 목숨을 살려 주는 대가로, 너에게 내 모든 것을 바치라고 했던가."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환.

"내 목숨을 살려 준 것과는 별개로.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평생을 바쳐야 할 것 같군."

"그 말은...."

"네 부하들에게 미리 알려 두는 게 좋을 거다."

씨익.

"내 가르침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는 문구.

띠링!

[강철군단에 가입을 희망하는 인원이 있습니다 (1)]

[수인종 무예 사범]

[서환]

그 메시지를 본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아니어도 되는 건가?'

서환은 이계의 종족.

그런 녀석도 길드에 가입할 수 있다는 건가.

'인간만 가능하다는 문구는 없긴 했다만....'

뱀파이어인 아리엘라는 대다수의 길드원들에게는 존재 자체가 비밀.

가입을 시도한 적도 없었고.

까망이도 붙잡아 온 녀석이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먹이로 구워삶아 버렸단 느낌이라.

길드에 가입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지.

'이 녀석은 인간을 적대한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어차피 길드원들에게 무예를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지.'

그렇다면.

가입을 거부할 이유도 없다.

아니.

오히려 대환영이지.

'트레이너 NPC 영입...!'

이 녀석의 말에 따르면.

무예를 익히는 데에는 한 사람당 최소한 3일은 걸린다고 했다.

모든 부대원들이 무예를 익히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갔다 할 수는 없는 일.

누군가가 부대에 상주해서 무예를 가르쳐 준다면 효율이 급증할 터.

그 트레이너 NPC가, 내게 충성을 맹세한 것.

"그럼 일단 먼저 맡아 둔 일부터 처리하도록 할까."

그 시선이.

높이 있는 전각을 향했다.

"은공에게 비동의 지식을 공유해 달라고, 내가 직접 설득해 보겠다."

* * *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서환을 따라 높은 곳에 있는 전각을 향하자.

내 요리로 인해 눈을 뜬 3인의 수인이 있었다.

가운데 앉아 있는 것이 여우 수인.

이름이 분명 미호라고 했나.

'서환의 말대로라면... 높으신 분이랬지.'

그녀가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아까는 추태를 보여서 정말이지 죄송합니다."

"아. 그건 뭐. 신경 안 써도 되는데."

눈 뜨자마자 피를 토하고 난리 친 것을 얘기하는 모양인데.

그거 아마 내가 원인일 거라서.

"딱히 은혜로 여길 일도 아닙니다. 전부 대가를 받고 한 일이니."

"대가라 하심은."

"이제 당신들 막내는 우리 부대에서 개처럼 일해야 할 겁니다. 우리가 좀 바빠서. 할 일이 쌓였거든요."

이 녀석들의 사형제를 멋대로 데려가게 된 일.

어쩌면 화를 낼 수도 있겠다 생각했으나.

"그건 막내... 서환이 선택한 일이지요."

그녀의 시선이 서환을 향했다.

"서아야. 너도 후회는 없을 테지?"

"예. 사매."

"그렇다면 좋다."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그리고. 아무리 대가가 있었다고 한들."

"...?"

"입은 은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뭐랄까.

여우라는 동물은 귀엽다는 이미지가 있다만.

이 여자는 굉장히 점잖고, 정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녀석들이 익히는 무예가 마음의 수련도 시켜 준다고 했지.'

이들은 모두 서환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했으니.

정신 상태도 그만큼 성숙해 있다는 건가?

"그리 큰 은혜를 입은 처지에, 염치없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만...."

"음?"

"다른 사형제들도 같은 방식으로 깨워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아.

뭘 바라는 건지는 알겠는데.

"그건 좀 힘들겠는데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혹시 대가가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막내처럼...."

"그런 거였으면 저도 좋았겠는데."

민망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했다.

"부끄럽지만, 제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라."

"예?"

이 녀석들의 능력치를 깎아, 위험도 수치를 낮춘 뒤 봉인을 해제시킨다.

그거까진 좋았지만.

그 방법이 통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 셋까지.

"대충 눈치챘겠지만, 봉인을 깨기 위해선 당신들에게 강한 저주 같은 걸 걸 필요가 있거든요."

"...과연. 눈을 떴을 때 느껴진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감각. 그걸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문제는, 제가 걸 수 있는 저주에도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요리 효과로 아무리 능력치를 깎아 본다고 한들.

내 요리로 걸 수 있는 디버프에는 한계가 있다.

위험도 수치가 9인 존재를 0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거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다만."

"...?"

"시간이 지난다면 또 모르죠."

지금은 이 셋 정도가 한계지만.

봉인 해제 시간은 내가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내 요리 실력도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고 있고.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나중이라면."

"그, 그 정도라도 좋습니다! 저희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일...!"

"대신, 조건이 하나."

"뭐든지 말씀해 주시지요!"

그때.

나를 대신해서 앞으로 나선 것은 서환이었다.

"사매."

"음? 무슨 일이냐. 서환."

"은공의 조건을 말하기 전에... 먼저 제 죄를 고하고자 합니다."

"...?"

서환은 나와 나누었던 모든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이곳의 무예를 우리에게 전수하기로 약속했다는 내용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으음. 무예의 전수를 약속했다라...."

그 얘기에.

온화한 인물로 보였던 미호가 얼굴을 찌푸리고.

뒤에 있던 두 수인족 역시 크게 놀란 듯 눈을 벌렸다.

서환 입장에서야, 살아남은 게 자신뿐이라고 생각했으니.

자신들 세계의 지식이라도 남기자는 생각에 한 약속이었다만.

이들 입장에서는 서환이 중요한 기술을 멋대로 유출한 것으로 보일 테니.

"과연. 대가라 함은 그 무예의 유출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겠군요."

"일단은. 그리고, 내 동료 중에는 비동의 무예가 필요한 녀석도 있거든."

"비동.... 봉인된 무예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녀가 더욱더 인상을 찌푸리자.

서환이 당황하며 나섰다.

"사매. 저도 부탁드립니다."

"서아야...."

"이자는 자신의 사욕을 위해서 비동의 무예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동료 중에 고통받는 자가 있어, 그자를 위해...."

아니.

광일이가 강해지는 일은 굳이 따지자면 내 사리사욕이긴 하다만.

서환이 그렇게 설득에 나서자.

미호는 고민이 깊어진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뒤.

"알겠습니다. 비동의...."

"헛소리!!!"

미호가 무언가 대답을 하려고 할 때.

거기에 끼어든 것은.

뒤에 서 있던 돼지 인간.

"저칠 사형?"

저칠이었다.

"우리 무예를 마음대로 남에게 전달한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독단으로 행했단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사형."

"그걸로 모자라. 뭐? 아예 저 이계의 존재의 밑에서 일하겠노라고? 비동의 무예까지 공유해 달라고?"

부히익-!

"더는 못 들어주겠군!"

분노에 찬 그가 커다란 도끼를 들고 일어섰다.

"흥분을 가라앉히거라. 저칠."

"사매도 그렇소. 은혜라니. 이 이계인 놈에게 은혜는 무슨!"

저칠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확실히 나름대로 강해 보이기는 하는군.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기운도 살벌하기 그지없고...."

부힉, 하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막내 녀석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할 만도 해. 나도 혼자서는 힘들겠지. 하지만. 우리 셋에다가, 막내까지 합하면 넷.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이놈들은 적도 아니지 않소."

"...!"

"이놈만 쳐 죽여 버리면, 서환도 다시 천산문에 복귀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말에 담긴 내용에.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저칠아.... 저분이 있어야 다른 사형분들의 봉인을 풀 수 있다는 것은 잊어버렸느냐."

"흥. 막내 혼자라면 모를까. 우리 셋이라면 다른 사형들의 봉인을 풀 방법 따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거요. 굳이 이놈에게 매달릴 필요도 없다는 말씀이지."

"후우.... 그만하거라."

"밖에 나가서 근처에 있는 놈들을 정리한 뒤에, 이 세상을 우리 것으로 합시다. 사매. 우리 세계는 비록 망해 버렸지만, 여기에 다시 천산문을 세우면 되는 것 아니오! 생각해 보십쇼. 어쩌면, 우리 천산문이 황실 같은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 터!"

스스로의 말에 심취한 것일까.

흥분한 녀석이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미안하지만, 네놈은 그 첫걸음이 돼 줘야겠다!"

저칠의 손에 들린 도끼가 나를 향해 쇄도한다.

그리고.

'거 참 말 많네.'

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죄송합니다. 사형."

내 등 뒤에 있던 서환.

그가 앞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형과 사제.

멸망 첫날에 봉인이 풀린 서환과.

앞으로 100일은 봉인당해 있어야 하는 강함이라는 판정을 받은 저칠.

그 수준의 차이는 명백할 터였으나.

결과는.

조금 달랐다.

"꾸웨에엑...!"

서환의 봉에 얻어맞은 저칠의 몸이.

전각을 부수고 저 먼 곳까지 날아가 박혔다.

"...!?"

"서, 서환...?"

그 모습을 본 나머지 두 수인.

미호와 우진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162화 무예 사범

"아무리 방심한 상태였다고 해도 그렇지."

"...저칠을 일합에 제압하다니!"

저칠이라는 양반은 아마도 서환보다 훨씬 앞서가는 실력자였겠지.

방심한 탓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녀석을 일격에 제압했으니.

"서환.... 실력이 많이 늘은 모양이로구나."

두 수인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예? 어. 그게...."

"과연. 우리가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에도 꾸준히 수련을 쌓아 왔다는 것이겠지. 훌륭하다. 천호 사형에게 매달리기만 하던 그 어린아이가, 이렇게까지 성장하다니."

사형제의 성장이 기쁘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는 미호.

하지만.

"이, 이게 대체...?"

방금의 현상에 놀란 것은 두 수인뿐만이 아니였다.

당사자인 서환 역시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당황하는 눈치.

-내가 이렇게 강했나...?

라는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만.

'그럴 리가 있냐.'

서환은 그동안 이 게이트에 처박혀서 좌절한 채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실력이 늘어날 리가 있나.

그럼에도 서환이 저칠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내가 먹여 둔 요리.

그리고.

'길드 빨이지, 뭐.'

피에 젖은 옷 대신 입혀 둔 [강철군단]의 전용 군복.

거기에, 길드에 가입하는 순간 적용되는 엄청난 양의 길드 스킬들.

지금의 서환은.

어제까지의 그보다 족히 두 배는 강해진 상태라고 봐야겠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이런 성장을 이루어 내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어... 예에."

"그리고. 저칠의 입을 다물게 해 줘서 고맙다."

"...예?"

사형제가 저 멀리에 기절해 있음에도 불구.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미호.

"사형을 공격한 것을 나무라지 않으시는 겁니까?"

"널 나무랄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직접 나섰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실례를 용서해 주시길."

"...음."

"저칠은 입문 시기로 따지면 서환과 비슷한 아이입니다. 그전에도 어느 정도 무예를 익혔던지라 실력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정신의 수양은 조금 더딘 편이지요."

이제는 무예의 실력 또한 서환이 앞서게 됐으니.

사형이라고 뻗대기도 어렵겠지.

"다만. 저래 보여도 저칠이 마냥 악한 이는 아닙니다. 그런 자였으면 애초에 스승님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지요."

"저 녀석한테 두 동강 날 뻔한 사람한테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이해합니다. 저칠은 나중에 제가 잘 타이를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시길."

공격을 당할 뻔했을 때는 어이가 없기도 했으나.

본래라면 이 여자가 말렸을 거라는 얘기를 듣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풀린다.

"서환이 나서지 않았다면 네가 말렸을 거라는 말은. 진심인가?"

"네. 은공에게 폐를 끼칠 생각은 없으므로."

"잘 선택했어."

"...네?"

"만약 내가 여기서 죽기라도 했다면, 너희도 곧 다시 눈 감게 됐을 거거든."

우리 부대원들이 복수를 하러 온다든가.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내 요리의 효과는 일시적이니까."

아예 봉인이 걸리지 않았던 녀석들이라면 모를까.

이 녀석들은 그 강함으로 인해 봉인당해 있던 녀석들.

지금이야 내 요리의 디버프로 인해 약해지고, 봉인도 풀린 상태라고 하지만.

"아마 효과가 끝나는 대로, 다시 봉인당하게 될 거다."

"...!"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싶으면, 내가 주는 불량식품을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 이거지."

물론, 이번에는 조금 효과가 과했던 것 같으니.

앞으로는 불량식품의 디버프도 어느 정도 조절하기는 해야겠지만.

내 말을 들은 미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은공에게 목줄이 잡혀 있는 셈이로군요."

"뭐, 그렇게 됐네."

이 녀석들의 봉인을 일시적으로나마 풀어줄 수 있는 것은.

현시점에서는 내가 유일할 터.

물론 100일 뒤에는 알아서 봉인이 풀리기도 하겠지만.

녀석들은 그것까진 모르는 상황이니까.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싶다면.

내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입장이 된 것.

"그런 은공이, 비동의 무예를 공유해 달라 하셨으니. 저희에게 선택지는 없었던 것이군요."

"불쾌한가?"

"설마요. 처음부터 그 내용으로 협박을 해도 되는 일인데, 부탁의 형태를 취해 주신 점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럼. 부탁한 것에 대한 대답은...."

"말씀하셨던 비동의 무예. 공유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됐다!

저칠이라는 양반이 나를 두 동강 내려고 한 것은 사실이나.

지금 이들의 대표격으로 나선 미호는 나를 적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비동의 개방을 약속해 주기까지.

다만....

그렇다고 안심하면 또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니.

확인을 좀 해 두긴 해야겠는걸.

"저칠이라고 했나? 저 사람이 한 말이 마냥 틀린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예?"

"당신들, 상당히 강한 것 같은데."

특히 방금 깨어난 3인은 원래라면 지금 세상에서는 봉인당해 있어야 할 강자.

밖에 나가면 어지간한 괴물들은 다 썰어 버릴 수 있을 터.

"과연. 왜 저칠의 말대로 이 세계를 침공하려 하지 않느냐. 그 얘기로군요."

"힘이 있는데 쓰지 않는다.... 사실이라면 고마운 일인데 말이지."

어디까지나 그게 사실일 때나 고마운 일이고.

"믿을 수가 있어야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괴물이 나타난다고 했던가.

아마 다른 괴물들도 이놈들처럼 봉인당해 있었겠지.

그리고 봉인이 풀린 뒤에는.

저 저칠과 비슷한 생각으로 침공을 나설 테고.

하지만.

미호는 침공을 선택하지 않았다.

단순히 나에게 은혜를 입어서 그렇다거나.

서환의 설득에 넘어갔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답은 간단합니다."

"뭐지?"

그 이유는.

나로써는 짐작도 하지 못한 것.

"침공이라니.... 후후."

가볍게 웃은 그녀가 말했다.

"그런 짓을 해 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

싸움은 허망하다든가.

무소유를 추구해야 한다든가.

뭐 그런 얘기를 하려는 건가 했으나.

"저칠의 말대로. 이 세상에 천산문을 세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겁니다."

"뭐?"

"저 황실처럼, 저희가 세상의 지배자를 자칭할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도 없겠지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욕망에 충실해 보이는 모습.

"그럼 왜?"

"저칠은... 천산문에서 치른 마지막 싸움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

"그것보다 한참 전에 치른 싸움에서 큰 상처를 입고 기절한 상태였지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그이기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모른다니.

뭘 모른다는 거지.

"저희가 아무리 날뛰어 본들...."

말을 잇는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언젠가 나타날 거마(巨魔)의 파도 앞에서는, 개미처럼 짓밟히고 말 운명이라는 것을...."

* * *

천산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쟁.

"그곳에 나타난 괴물들은, 하나하나가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이었습니다."

어쩌면....

신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적들.

그들이 세계를 파괴하고자 나섰을 때.

그 악에 맞서 싸운 최후의 전장이.

이곳 천산이었다.

"저희 역시 그 싸움에 나섰지요."

지상의 생명체들 중 제일로 꼽히던.

천산문의 스승.

세계의 법칙을 관리하는 위대한 수호자.

천상의 대라신선들.

그리고....

천상의 황제와.

그 친위대들까지.

"모두가, 그 거악의 파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이곳 천산에 강림했지요."

하지만.

그 결과는....

나는 고개를 돌려.

전각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산산조각이 난 채 파괴되어 버린 세계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처참한 패배.'

이 세상은 조각조각으로 파괴되어 버렸으며.

그 파편 중의 하나가, 우리 세계로 흘러들어 왔다.

"저칠의 말대로 한다면... 확실히, 짧은 시간 동안은 이 세계의 패권을 잡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요."

이 세계의 모든 이들을 발아래 무릎 꿇게 하고.

위대한 영화를 쌓아 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쌓아 올린 영화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말을 잇는 그녀의 눈에는.

공허함만이 담겨 있었다.

"어차피 잿더미가 되어 버릴 영화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이것이.

그녀가 저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이유.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조각난 채 파괴된 이 세계에 숨어서 짧은 평화를 누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은공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예의 전수라고 하셨지요.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지만... 얼마든지 내어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몸. 남은 생을 사형제들과 함께 보낼 수만 있다면. 진정한 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무예 따위, 얼마든지...."

도대체 얼마나 강한 괴물들이었길래.

이 정도로 절망한 걸까.

"은공께서도 어떠십니까. 저희와 함께 이곳에 숨어 지내시는 게."

"여기에?"

"예. 조각조각 나 버린 탓에 그다지 넓지는 않습니다만, 은공 한 분 정도야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그녀의 제안은, 순전히 선의에서 이루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은 고맙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일단 부딪쳐는 봐야지 성이 풀릴 것 같아서."

"이해합니다. 직접 저항하고 깨져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부질없는 저항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호.

"제 눈을 뜨게 해주신 것에 더불어, 다른 사형제 분들 또한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하셨으니... 저 미호, 힘이 닿는 곳까지는 은공을 돕도록 하지요."

"그래 봐야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

"부질없는 저항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전력을 다하고 난 뒤에 실패를 해야, 비로소 집착을 내려놓고 포기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리고.

힘이 닿는 곳까지는 돕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듯.

[강철군단에 가입을 희망하는 인원이 있습니다 (1)]

[수인종 무예 사범]

[미호]

"...!"

길드의 가입 문구가 나타났다.

"이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전력을 다해 돕겠노라고."

서환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 그녀.

"막내를 혼자서 보내는 것도 도리가 아니기에."

"사, 사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트레이너 NPC가 두 배...!'

부대원들이 무예를 익히는 시간도 두 배로 빨라질 것이라는 뜻.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내게 협력하든 간에.

나로서는 기꺼운 마음으로 이용해 주면 그만.

"그러면 일단은...."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비동으로 가시지요."

* * *

"시, 신 병장님? 이 사람들은 대체."

"그럴 만한 일이 좀 있었거든. 아무튼 따라와."

갑자기 나타난 미호를 보고 당황한 눈치의 광일이.

그를 데리고, 무예 서적을 보관하는 서가로 이동했다.

"광일아."

"예. 병장님."

"너. 나한테 민폐 끼치는 거 싫다고 그랬던가?"

"...예? 아. 그런 말을 하긴 했습니다만."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이냐는 듯.

어리둥절한 채로 대답하는 전광일 상병.

난 녀석에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어쩌냐. 이번에는 내가 너 때문에 고생 좀 했거든."

"...예!?"

내 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광일이 녀석.

씨익.

"그러니까. 앞으로 더 잘해. 인마."

"시, 신 병장님? 그게 무슨...!"

그리고.

서가의 구석.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비동의 문 앞에 선 미호가, 허리춤에 찬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칼을 움직이는 그녀.

이윽고.

철문 앞에 선 그녀가 작은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서환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미호 사매는 본신의 무예 실력은 낮은 편이나... 본문에서의 위치는 꽤 높은 편이시다.

-음? 이유가 있나? 뭐, 그 스승이란 양반의 딸이라든가.

-설마. 본문은 철저한 실력 지상주의.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실력지상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임에도.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다는 여자.

미호.

그 이유는 간단했다.

-미호 사매의 머릿속에는... 본문이 보관하고 있는 모든 무예가 들어 있다.

-...!

-그 지식을 통해 새로운 무예를 창조하는 일에도 이골이 난, 천산문 최고의 지능이시지.

그렇기에.

미호은 천산문에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직위를 맡고 있었다.

-무각주.

무각이라 함은.

무예를 보관하고 있는, 바로 이 서재를 일컫는 말.

'이 서재의 주인이라는 뜻.'

그녀는 이곳에 있는 모든 무예를 알고.

그 무예를 통해 새로운 무예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일종의 연구실장.'

그리고, 무각주라는 말은 즉.

천산문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무예.

그 무예들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

그래.

-비동에 있는 무예 역시 마찬가지다.

촤르르륵....

"...!"

비동의 앞에서 검무를 추는 미호.

그 검무에 맞춰.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의 쇠사슬들이, 스스로 풀려난다.

화르륵.

비동을 봉인하고 있던 거대한 부적들이 순식간에 불타오르고.

끼이익.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철문이.

스스로 그 입을 열었다.

천산문의 봉인된 무예를 보관하는 장소.

비동으로 향하는 길이.

지금 열렸다.

163화 밤의 귀족 (1)

비동의 문이 열렸다.

그 안쪽은 깊은 동굴 같은 곳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광일이가 나를 보며 전율했다.

"신 병장님. 절 여기 데려오신 게, 설마...!"

"말했잖냐. 앞으로 더 잘하라고."

"...!"

그리고.

비동 안으로 모습을 감춘 미호.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은공."

잠시 뒤.

비동에서 나온 미호의 손에는, 한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낡고 해져, 볼품없어 보이는 책 한 권.

하지만.

그 가치는, 결코 볼품없지 않았다.

[천살신무]

[SSS+]

'...!'

다른 부대원들이 가르침을 받기로 한 A급 무예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엄청난 가치의 무예.

그 무예가 담긴 책이.

광일이의 앞으로 내밀어진다.

"받으시지요."

"...!"

그 책을 본 광일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 무예가 바로...."

"천살성을 위해 만들어진 무예입니다. 저희 스승님께서 직접 창안하신, 최고의 절학이지요."

그 책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건네받는 전광일 상병.

"이, 이 무예를 익히면, 내 광기를 억누를 수 있단 말이오!?"

[광기]는 전광일 상병의 가장 큰 무기이자.

동시에...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했다.

"정말로 그 광기를, 원하는 대로 억누를 수만 있단 말인가...!"

"예? 그건 무슨 소리십니까."

그 걸림돌을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드물게 흥분한 채 말을 떠는 전광일이었으나.

그 말을 들은 미호는.

"억누르다니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아까운 걸 왜 억누른단 말입니까."

"...?"

"분명 천살이란 누군가에게는 저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그 무엇보다도 뛰어난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기운입니다. 그런 것을 타고나셨으니...."

어리둥절해하는 광일이에게.

미호가 건넨 답은, 지나칠 정도로 간단한 것이었다.

억누르는 게 아니다.

"완벽하게 통제하고, 이용해야지요."

* * *

"...하, 하하."

미호의 말에.

온몸에 힘이 풀린 듯, 바닥으로 무너지는 전광일 상병.

"시, 신 병장님. 들으셨습니까."

"그래."

"...통제할 수 있답니다. 이 광기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고...."

그래.

그러려고 내가 이 개고생을 한 거잖냐.

"흐윽...."

서고의 바닥에 드러누운 채.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하는 광일이.

'아. 뭔가 데자뷔....'

저만한 덩치의 남자가 바닥에 뒹굴면서 우는 꼴.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광경이겠지만.

아쉽게도, 내게는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부대원들의 각성을 진행할 때.

괴물이 무섭다고 뻗댈 때의 광일이가, 딱 이런 느낌이었지.

"무, 무서웠습니다."

그때와 마찬가지.

광일이 녀석이 눈물을 흘리는 원인은,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대상은 조금 달랐다.

"충분히 강하지도 않은 주제에, 그 힘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니...."

"...."

"언젠가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나 끼치지 않을까, 그게 정말이지.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면.

스스로의 나약함에서 오는 두려움.

하지만.

그 두려움을 달고 버텨 온 결과.

바로 지금.

"제어할 수 있답니다. 더 강해질 수도 있다고요."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온몸의 긴장이 한 번에 풀리는 느낌이겠지.'

녀석이 광기로 고통받는 것을 보는 나도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는데.

당사자였던 녀석은 오죽할까.

"흐윽...."

그동안 쌓였던 감정.

그 모든 게, 눈물에 담긴 채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 울어라.'

그렇게 울어서.

모두 털어 내면, 그걸로 되는 것 아니겠냐.

"광일아."

"흐윽, 예...!"

피식.

"나중에 강해졌다고 나 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나 진짜 서운할 것 같거든."

"신 병장니임...!"

그래.

절대 잊으면 안 되지.

광일이 이 녀석은....

앞으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질 거거든.

* * *

"평생...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아! 알겠으니까 그만 달라붙어, 자식아!"

어지간히 감동했는지.

한바탕 울음을 터트린 광일이 녀석을 진정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크흐읍...! 충성충서어엉!"

"야이, 씨! 콧물...!"

온갖 진상을 다 부리는 녀석.

덩치도 산만 한 게 힘도 나보다 세다 보니.

떼어 내고 싶다고 떨어지지가 않는 것.

"훌쩍.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후욱... 그래. 들어가라."

그렇게.

어떻게든 진정시킨 광일이 녀석을 떼어 내는 데 성공하자.

"동료분과의 사이가 좋으신 것 같군요."

"동료가 아니라 후임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두 개는 다른 건가요?"

"선후임 관계는 명확히 해야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미호가 다가왔다.

"그나저나, 다시 보아도 대단한 재능이더군요. 천살성은 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함께 타고나니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재능이라. 그런 게 보기만 해도 보이나?"

"어느 정도는. 물론 제 눈도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 얘기를 듣자.

문득 궁금해지는 부분이 하나.

"그럼 그 눈으로 봤을 때. 내 무예의 재능은 어떤 것 같지?"

"...."

"음?"

"솔직하게 대답해 드리는 게 좋을까요? 조금 상처받을지도 모르는데."

"...됐다."

젠장.

어차피 내 직업은 요리사.

쌈박질에 재능이 없을 것 정도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럼. 본격적인 무예의 교습은 내일부터 시작하는 걸로 해야겠군요."

어느덧 늦은 시간.

제대로 된 무예의 전수는 다음 날부터 이뤄지기로 했다.

"뭐... 잘 부탁한다. 다들 우리 부대에선 굉장히 중요한 녀석들이라."

"은공의 동료... 후임분들인데, 당연히 최선을 다해야지요. 믿고 맡겨 주시길."

그렇게.

나 역시 일단 휴식을 취하러 이동하려던 찰나.

"...아! 그러고 보니."

"응?"

전각으로 들어가려던 내 팔을 붙잡은 것은.

서환이었다.

"뭔가 까먹은 것 같더라니,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군."

"중요한 거?"

"은공과는 아직 대련을 하지 않았지 않나."

"...아!"

미친.

그러고 보니 맞네.

광일이 녀석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단서가 발견되자.

어떻게든 그쪽을 해결하려고 집중한 나머지.

정작.

나는 아직도 서환과의 대련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를 위한 무예 역시,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고.

"대련이라니?"

"아. 사매."

그 얘기를 들은 미호가 흥미롭다는 듯 다가오자.

서환은 자신이 우리 부대원들과 대련을 거쳐 적당한 무예를 선별해주었음을 알렸다.

"흐음. 그런 일이."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느냐. 아예 우리 모두가 그 대련을 참관하는 것이지."

"예?"

"은공에게 어떤 무예가 어울릴지,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저칠 사형까지 말입니까?"

"음. 저칠도 내가 엄하게 혼을 냈으니, 굳이 난리를 치지는 않겠지."

그렇게 해서.

깊은 밤.

나와 서환의 대련이 확정되었다.

전각 안에 있는 커다란 수련장.

그 벽면에는, 여러 가지 수련용 무기들이 걸려 있었다.

"흐음."

그중에서.

단도 계열의 무기는, 대충 열 개가 조금 넘는 정도.

"음? 은공은 단도를 사용하는가. 의외로군."

"그렇긴 한데. 의외랄 것까지 있나?"

"단도라. 암습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아니고서야, 주력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무기니까."

서환의 세계에서도 그런 건가.

나는 나열돼 있는 단도 중 그나마 마음에 드는 두 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속으로 고민했다.

'아무래도 요리를 통한 버프까지 하는 건 좀 아니겠지?'

대련을 하려면 내 전력을 보여 주는 게 맞겠지만.

그 상태는 내 평소 상태와는 조금 다를 테니까.

"일단은 묻겠는데. 혹시 요리사를 위한 무예는 없겠지?"

"숙수를 위한 무예라니."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서환.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은가!"

"...."

"하하. 은공도 참 어이없는 얘기를 하는군."

그렇다면 더더욱.

요리를 통한 버프는 안 하는 게 맞겠네.

요리를 제외하면 내 전투 능력은 영 맹탕이다 보니.

제대로 된 무예를 받을 수나 있을지 조금 걱정도 된다만.

"과연. 은공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네."

"응?"

"확실히 숙수를 위한 무예는 없네. 하지만, 말했잖은가."

서환의 시선이 미호를 향하고.

미호는 나를 보고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미호 사매는 무예를 만드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라고."

"아...!"

"미호 사매가 참관을 자처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닐세. 만약 은공에게 어울리는 무예가 없을 경우에는...."

"직접 만들어 주기 위해서?"

"바로 그거지."

고개를 돌려 미호를 바라보자.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숙수를 위한 무예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네. 하지만."

"만드는 건 가능하단 거군."

"미호 사매라면 충분히."

과연.

그렇게까지 해 준다면야, 나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는 일이다.

"그럼. 전력으로 오시게. 은공."

"전력이라."

비교적 편안해진 마음으로 대련을 하려던.

그 순간.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최근에 얻은 스킬이 하나 있었지?'

으음.

아직 실전에서는 써 본 적이 없다만.

이번에 실전에서 연습한다는 느낌으로 써 보는 것도 뭐.

나쁘진 않겠지?

"그럼... 전력으로 간다?"

"오시게!"

머릿속으로 녀석을 상대하기 위한 전술을 가다듬은 뒤.

자세를 잡는다.

두 자루의 단검을 쥔, 내 오래된 전투 자세.

그 자세를 잡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스킬 발동....'

[스킬 : '보조 셰프'가 발동합니다.]

그러자.

내 등 뒤에 있던.

내가 고르지 않은 열 자루가량의 목재 단도들.

"...?"

둥실....

그 단도들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내 등 뒤로 도열하는 단검들.

저게 가능한 이유는.

내 레벨이 30을 넘으면서 새롭게 얻게 된 스킬.

[보조 셰프]

[보이지 않는 보조 셰프들이 당신의 작업을 보조합니다.]

[보조 셰프들은, 플레이어의 스탯을 공유합니다.]

[보조 셰프들은, 특성 '중급 요리 도구 숙련'을 지닙니다.]

[보조 셰프]의 효과는 간단했다.

설명에 나타나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 요리를 도와준다.'

재밌는 점은.

그 무언가는 보이지 않는 걸 넘어서, 아예 실체가 없는 존재 같다는 것.

덕분에.

둥... 둥....

저렇게.

칼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좋아. 그럼 간다... 아?"

스킬의 발동도 끝났겠다.

전력을 다해서 서환에게 부딪혀 보려고 했으나.

"...."

"...."

"...."

"저기요?"

천산문의 수련장.

그 넓은 장소에,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두가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어, 어버버. 어버버버버버...."

단 한 명.

미친듯한 기세로 어버버 대고 있는 것은.

일전에 나를 두 동강 내려고 했던 돼지 인간.

저칠.

비록 미호에게 잔소리를 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만은 않은 녀석이었는데....

"아, 아아. 아까는 정말이지."

"?"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아앗!"

그런 그가.

엄청난 기세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다.

"...뭐?"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지켜보고 있자니.

"...하하. 어이가 없군."

서환 역시 말문을 잃은 듯.

두 손 꽉 쥐었던 봉을 슬며시 내려놓는다.

"고작 이 며칠 사이에, 천살성보다 놀라운 것을 보게 될 줄이야. 대단한 은공이라고 해야 할지."

그리고.

구석에 앉아 대련을 관람하고 있던 미호.

"재능을 보는 눈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였군요."

그녀는 멍한 눈으로 내 등 뒤에 떠 있는 단검들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기어검이라...."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경악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다루는 분한테, 대체 어떤 무예를 만들어 드려야 할지...?"

* * *

그렇게.

신영준 병장을 위한 무예의 개발이 시작되고.

군단 병사 10인이, 서환에게서 무예를 익히기 시작하게 됐을 무렵.

강원도의 북서쪽.

그 가장 극단에 있는, 검은 벽.

"도착했습니다, 주인님."

"으음~ 드디어?"

그곳에.

일단의 무리가 자리를 잡았다.

수십, 아니 어쩌면 백에 가까울 정도의 인원.

그리고, 그들이 정중하게 들어서 옮긴 거대한 관 하나.

그 관 안에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휴우! 남의 눈치 안 보고 이러고 있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찬란하게 흘러내리는 금발.

거친 군복을 입고 있음에도 가려지지 않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그 비현실적인 외모와 어우러져, 묘한 공포감을 자아내는 핏빛 눈동자와 날카로운 송곳니.

"맘 같아선 조금 휴양도 즐겨보고 싶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주인님에게 은총 한 끼 취소를 당할 테니...."

밤의 귀족.

카르슈타인 혈족의 남작.

아리엘라 카르슈타인.

그녀가 철원군의 구석.

녹색갈기 부족의 영토를 밟았다.

"그럼 어디."

그 붉은 눈동자가.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던 [녹색갈기 전사] 하나를 발견했다.

"병력부터 좀 불려 볼까?"

164화 밤의 귀족 (2)

신영준 병장이 게이트에 입장하기 전.

아리엘라는 생각했다.

'본녀가 이 안에 따라갈 필요가 있나?'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고 하니.

딱 봐도 오래 걸릴 일 같고.

장막 너머에 느껴지는 힘은 강하긴 하지만.

강철의 마수인 '맥'보다는 약했다.

시간 낭비가 싫은 것은 아니다.

그녀가 신영준의 권속이 되기로 한 것은 그가 넘겨주는 은총....

그러니까, 밥 때문.

아무것도 안 하면서도 매끼 맛있는 피를 먹을 수 있다면 오히려 이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잘만 활용한다면... 다음 작위를 노려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최근에 준남작에서 남작으로의 승작을 이룬 그녀.

그녀는 주인인 신영준이 알고 있는 것보다도 많은 부분에서 성장을 이뤘다.

안 그래도 상승 욕구만은 넘쳤던 그녀.

한번 계급의 상승을 이루어 내자, 그 쾌감을 쉽게 잊기 힘들었다.

뭣보다....

'조금은 열심히 일해야 간식도 챙겨 주고 하시는 거 아니겠어.'

그렇기에, 주인에게 제안했다.

잠시 자신의 자유 행동을 허락해 달라고.

주인을 설득하기 위한 말은 간단했다.

'최근에 남작으로 승작하면서 생긴 변화가 몇 가지 있는데요.'

'...뭐지?'

'권속으로 삼을 수 있는 개체 수가 늘어나고... 또, 권속으로 만들 수 있는 종족의 범위가 조금 넓어진 것 같아요. 음. 최근에 만난 괴물 중에 예를 들면.'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신영준 역시 크게 놀라며 그 행동을 허락했다.

'그 녹색피부 돼지들 정도?'

그렇게.

카르슈타인 혈족과 녹색갈기 부족의 전쟁이 결정되었다.

* * *

부족원들의 관리를 맡은 상위 계층의 전사.

하르잔은 아침부터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크르륵.... 지난 밤에 전사들이 10명 넘게 사라졌다!

그 분노의 원인은 다른 게 아니었다.

-멍청한 놈들! 또 제멋대로 순찰 구역을 벗어났다가 길을 잃은 거겠지!

녹색갈기 부족의 전사들은 매우 빠르게 성장한다.

하지만 그런 만큼, 몇몇 개체를 제외하면 육체에 비해 정신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전투에 있어서 그 숫자는 그야말로 폭발적이나.

평상시에는 지독할 정도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종족이기도 했다.

-조사는 하지 않는 건가? 하르잔.

-크륵! 멍청한 놈들이 명령을 어겨서 생긴 사고일 게 뻔한데, 조사는 무슨 조사!

-그럴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하룻밤에 열씩이나 되는 전사가 사라진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한 번에 사라진 이들은 많아 봐야 셋 정도였다.

-이상한 건 그놈들 머릿속이겠지! 지금은 마수들의 뱃속에 들어가 있을 놈들을 내가 왜 신경 써야 하나!

-...흠.

하르잔은 그 전사들이 개별 행동을 하다가 마수에게 사냥당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마수는 계속해서 세상에 풀려나고 있고, 그 양도 워낙 많다.

일대의 패자가 된 녹색갈기 부족 역시.

영토 내의 마수들을 모두 제거하진 못했다.

그로 인한 사고가 하루가 다르게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

'허나 기묘하다. 고작 이틀 전에도 이 일로 하르잔이 분노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어린 전사들이라고 한들, 고작 이틀 만에 또 사고를 칠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노회한 주술사인 하카진은 무언가 꺼림칙함을 느꼈다.

'혹시 모르니. 조사를 해 봐야겠구나....'

본래라면.

이런 일은 주술사들의 예언을 통해 해결한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는 주술사들의 예언을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안개를 걷어 내는 데 성공했거늘.'

많은 주술사들의 협력으로 그 존재의 방해를 치우는 데에 성공했으나.

얼마 전 치러진 대규모 침공 전쟁에서.

그들 부족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냥 패배하기만 했다면 다행이지만.

많은 주술사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문제.

그들의 예언은 다시 안개 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녹색갈기 부족은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발로 뛰는 수밖에.'

하카진은 사라진 전사들이 맡았던 순찰 경로를 되짚었다.

정말 그들이 제멋대로 경로를 이탈했다고 한들.

그 흔적을 더듬는다면 유해 정도는 찾을 수 있을 터.

그런 생각으로 조사를 시작한 하카진.

그런데.

-음?

조사를 시작하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하카진은 주변의 공기가 이상함을 느꼈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설마!

하카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녹색 피부의 주술사가 급하게 땅에 손을 가져다 댄다.

-정령들이여!

그들의 고향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 만큼.

이질감이 느껴지는 흙에는 주술이 잘 통하지 않았으나.

-이 땅의 기억을, 나와 공유해다오!

그와 계약을 맺은 대지의 정령들.

그들이 어떻게든 이 땅의 기억을 읽어 그에게 전해 주었다.

* * *

-크워어어...!

주변을 순찰하던 녹색갈기 부족의 어린 전사.

그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른다.

자신에게 달라붙은 불길하기 짝이 없는 존재.

그것을 어떻게든 떨쳐 내려고 날뛰어 보는 전사였으나.

"후후.... 죽음이 두려운가 보구나."

-크륵, 컥....

"걱정하지 마라, 아이야. 이것은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목덜미를 붙잡고 있는 것은.

전사에 비하면 가녀리기 그지없어 보이는 존재.

하지만.

그 작은 몸에서 나오는 힘은, 전사의 그것을 월등히 압도하고 있었다.

결국.

전사의 저항은 맥없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중얼거리는 작은 여인.

"본녀가 네게 선사하는, 두 번째 삶일지니...."

* * *

-허억, 허억...!

여기까지가.

정령이 하카진에게 전달해 준, 땅의 기억.

그 기억을 살핀 하카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터,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대한 마(魔)로구나.

직접 그곳에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불길한 마력.

노련한 주술사인 하카진이었으나.

그런 그로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이 세계는 침공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 정도의 존재가 지상을 활보하고 있단 말인가?

사실.

그의 의문은 합당한 것이었다.

밤의 귀족은 무한에 가까운 군세를 부리는 종족이다.

비록 혈족의 말예라고는 하나.

그 일원인 아리엘라 역시, 매우 강력한 존재인 건 마찬가지.

본래라면 100일은 더 잠들어 있었어야 정상이었겠지.

하지만.

하카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어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의가, 인간의 무력을 제압하기 위해 그녀의 봉인을 강제로 해제했다는 것.

둘째.

그로 인해 그녀는 머릿속에 강력한 주박이 새겨진 채로 한 벙커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는 것.

그리고 셋째.

그 주박에서 벗어날 힘을 키우기 위해, 군세를 외부로 내보낸 결과.

그녀는 한 토착종의 무리에 의해 토벌당했으며.

그 무리를 이끄는 취사병에 의해....

그녀를 지배한 주박 역시 해제되었다는 것.

벙커에 갇혀 있던 시절의 아리엘라는 본연의 능력을 상당 부분 제한당한 상태였다.

권세를 늘리는 것이 지나칠 정도로 어렵고 복잡해져 버린 덕에.

그녀의 군세는 밤의 귀족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적고, 나약했다.

하지만 지금.

이제 그녀를 가둬 두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본래라면 수백 일은 더 봉인당해 있어야 했을 규격 외의 존재.

태양을 제외하면 그 군세를 당해 낼 자가 없다고 여겨지는 종족.

밤의 귀족이.

세계를 자유롭게 활보하기 시작했다.

하카진은 직감했다.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부족에 큰 위기가 찾아오겠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이 땅의 기억으로부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하카진은 빠르게 몸을 돌렸다.

일단 일대의 부락을 관리하는 상위 전사.

하르잔에게 이를 알려야 한다.

그 후에는 대전사와 대주술사를 찾아간 뒤.

거악에 대비할 방법을 부족 단위로 논의해야....

"발걸음이 무척이나 빠르구나."

-...!

"급히 가야 할 곳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에.

하카진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이곳을 찾아오는 것과.

정령을 통해 땅의 기억을 읽는 것까지.

시간이 지나치게 많이 소요된 결과.

'달....'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밤이 찾아왔고.

"바쁜 건 알겠지만, 본녀와 잠깐 대화를 나눠보는 건 어떻겠느냐."

밤의 주인이 그를 찾아왔다.

-저, 정령들이여!

"음? 단둘이 얘기하는 건 민망하다는 건가. 후후. 귀엽기는."

-저 악귀를 제압해다오!

대지의 정령들이 하카진의 부탁에 부응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정령들은, 아리엘라의 피부에 닿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크뤄어어어억!!!

-...쿨타르! 타구진까지!

어둠 속에서 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내, 정령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이들.

그들의 정체는, 하카진의 동족.

녹색갈기 부족의 전사들이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하나.

그들의 고향.

푸른 초원을 떠올리게 하던 녹색 눈동자.

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

-아, 아아... 이럴 수가.

"너무 부러워하지 않아도 좋아."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습한 숨결.

하카진은 몸을 벌벌 떨며 눈을 감았다.

"너도 곧 우리와 함께하게 될 테니."

그 몸의 떨림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잠시 뒤.

-주인님께, 영광을....

정령들의 목소리를 듣고, 부족원들에게 존경받는 주술사.

부족의 지도자들과 위대한 선조들을 제외하면 고개를 숙인 적도 없던 그가.

이계의 여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 * *

"과연. 네놈들의 언어는 이런 식인가 보구나. 돼지 같은 생긴 놈들답게 참으로 허접한 구조로구나. 나로서는 발성하기도 힘들겠어."

-정말이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어쩔 수 없지. 네놈 같은 야만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언어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니."

주술사의 피 안에 녹아 있던 지식.

그 파편이 아리엘라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그녀가 녹색갈기들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를 찾은 게 예언을 통한 것은 아닌 게 확실하겠지?"

-예에. 저희의 눈을 가리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 안개를 걷어내는 것은 지나치게 고단하여....

"휴우. 벌써 들킨 건가 했는데, 아니라니 다행이야."

아리엘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대로구나."

농담이 아니라.

아리엘라는 정말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직 군세를 늘리기 위한 작업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벌써 존재를 들켰다면 아무리 그녀라도 발을 뺄 수밖에 없었겠지.

"그럼. 이제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얘기해 보거라."

-어떤 정보를 말씀하시는지...?"

"쯧. 다른 짐승들에 비하면 똑똑한 편인가 했더니, 눈치가 없는 점은 비슷하구나. 홀로 돌아다니고 있을 만한 놈이 있는 곳. 슬쩍 모습을 감춰도 문제가 없을 만한 녀석들. 위험한 강자들이 몰려 있어 접근하면 안 되는 곳. 혹은, 너희들의 급소 같은 장소. 뭐라도 좋다. 아는 게 있느냐?"

녹색갈기 부족의 오르크들은 높은 긍지를 타고난다.

본래라면 어떠한 종류의 협박도 듣지 않는 종족.

심지어는 신영준 병장의 요리마저도 그를 완벽히 굴복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나.

-...정도가 있습니다.

"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정보로구나."

-영광이옵나이다....

권속이 되어버린 하카진에게는 저항할 의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본래의 성정과는 무관한, 절대적인 복종.

밤의 귀족이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점이었다.

-근처 부락을 관리하는 것은, 상위 전사인 하르잔입니다....

"그렇구나. 약점이라 할 만한 점은?"

-그는 매일 밤 소수의 전사들을 이끌고 마수 사냥을 나섭니다.... 제가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고 말려보았으나, 전투를 숭상하는 전사답게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이더군요.

아리엘라는 하카진의 말에서 작은 감정을 찾아냈다.

"네 조언을 듣지 않았다는 게로군."

-...예.

"그 이유가, 정말 전투를 숭상해서일까?"

-...아니겠지요.

그러자.

주술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감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놈들은 태생부터가 멍청하게 태어났으니...! 뇌마저 근육으로 채워진 녀석들이, 자신들의 우둔함을 속이기 위해 꺼낸 변명이 전투를 숭상한다는 말일 겁니다. 현명한 자의 조언을 알아먹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것들...!

"쌓인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지난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술사들은 퇴각을 권했는데도, 전사인 하라-발이 전투를 감행한 끝에 벌어진 참사...! 실로 벌레만도 못한 지능이 아니겠습니까. 대족장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거늘.

그 추악한 감정을 목격한 아리엘라는 기쁜 웃음을 지었다.

"네 말대로. 참으로 어리석은 녀석들이로구나. 그렇다면, 똑똑한 네 조언을 무시한 그 전사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끔찍한 일을 겪고 난 뒤, 제 말이 옳았음을 깨닫게 되어야 하겠지요.

"후후.... 좋은 대답이구나."

그녀가 손짓하자.

하카진의 뒤로, 권속이 된 녹색갈기의 전사들이 나열했다.

"네 조언을 무시한 이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 아이들을 네게 빌려주마."

-그 말씀은?

"똑똑한 너라면, 그 전사가 충분히 후회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지?"

-아아! 물론입니다!

주인의 은총에 감격한 주술사가 과장되게 몸을 숙인다.

그리고 그날 밤.

아리엘라의 권속 중에는, 꽤 강력한 전사 한 마리가 포함되었다.

그 전사가 관리하던 일대의 부락이 모두 몰락하기까지.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165화 밤의 귀족 (3)

신영준이 자신의 권속에게 건 제한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죄 없는 인간을 권속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두 번째는, 권속의 숫자는 100으로 제한한다.

후자의 제약을 건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많은 권속들을 휘하에 둘 경우.

그 병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피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

즉.

반대로 말하면.

"유지할 생각이 없는 병력이라면 상관없는 것 아니겠느냐?"

-정말이지 현명하신 말씀...! 저희 따위는 얼마든지 쓰고 버려주시길!

어두운 밤.

한때는 인간들의 것이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녹색갈기 부족의 부락이었던 건물들.

그 중심의 빌딩 옥상.

아리엘라는 그림자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부족의 주술사였던 하카진이 그녀를 보좌하고 있었다.

빌딩 아래의 지상.

그곳에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구의 전사들이 있었다.

그 숫자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수백.

전투를 숭상하며, 누구보다 자존심 높은 전사들.

그들이 아리엘라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인간조차 아닌 괴물들이라면 권속으로 만드는 데에 제한도 없지."

권속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피?

다른 녹색갈기의 것으로 충당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권속을 늘릴 때마다.

아리엘라의 힘은 더해져만 간다.

승작을 거친 지금.

권속을 늘릴 수 있는 양도 과거에 비해 배는 늘어난 상황.

감당하기 힘들어질 정도로 늘어난 권속들은 전투를 통해 빠르게 소모.

그녀의 힘은 점점 더해져 가고.

녹색갈기 부족의 힘은 점점 깎여나가는 작전이었다.

"후후.... 처음 제안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잘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늘."

솔직히.

지금의 성공은 그녀 스스로도 조금 놀라울 정도였다.

큰 세력을 이룬 이들은 그 세력을 관리하기 위한 체계도 마련되어 있기 마련.

이들도 뱀파이어의 준동을 빠르게 눈치채고 대응에 나섰어야 마땅했으나.

"정말 짐승 같은 종족이로구나. 내부를 이렇게까지 방치하고 있을 줄이야?"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 역시 그 일원이었다는 것이 수치스러울 따름!

이들은 그 체계라고 할 만한 것이 너무나도 미흡했다.

엄청난 숫자를 바탕으로 한 정복 전쟁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이나.

그렇게 확보한 넓은 영토.

그 관리까지 잘되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는 것.

'주인님의 동료라는 자가 시야를 가려 준 덕이 크겠지.'

본래라면 내부의 우환을 알아내는 것은 주술사들의 역할이나.

신영준 병장의 부탁을 받은 박태준 병장이 활약.

주술사들의 예언은 안개 속에 갇혀 버렸다.

'주인님이 나를 토벌하는 데 성공한 것도 우연은 아니란 거지.'

그리고.

그런 신영준이 그녀의 활동을 보조한 결과.

그녀의 침공은, 상상 이상의 성과를 이루고 있었다.

* * *

-12, 18, 20번 군락 역시 연락이 두절되었다.

-18번 군락이라면 식량 창고로도 쓰이던 중요 거점 아닌가!

-상당한 전사들이 자리 잡고 있었을 텐데?

-그런 걸로 따지면 이미 함락된 곳들도 마찬가지지.

녹색갈기 부족의 점령지 중심부.

한때는 군청이라 불렸던 장소에서, 거구의 괴물들이 언성을 높인다.

그러던 중.

-크륵...!

거구의 전사 하나가, 분을 참지 못하고 짐승 울음소리를 냈다.

쿵!

-고작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다!

아리엘라가 녹색갈기 부족의 영역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10일이 지난 지금 와서야.

그들은 그녀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부족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자리.

고위 전사들과 주술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후방에 나타난 괴물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피해가 상당하다. 우리 점령지의 10%는 이미 통제를 잃었다고 봐야겠지.

-으음. 고작 열흘 만에 이렇게 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적은 아무래도 정신 지배에 특화된 존재인 것 같더군.

-뭐라?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파견된 전사들은 그곳에서 동족의 공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 말에.

주술사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정신 지배라니.

-대주술사님조차 쉽게 시전하지 못하는 최고위 주술이 아닌가.

-으음.... 이곳은 우리가 있던 곳과는 다른 세계이니, 그런 이능을 아무렇지 않게 다루는 존재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만한 존재가 이렇게 빠르게 등장한다는 것은, 명백한 이변.

-지난번 전쟁의 패배도 그렇고.

-지나친 악재로군....

자리에 모인 모두가, 정체불명의 적에 대해 경계심을 품었다.

-뭘 두려워하는 것이냐.

그 중심에 앉아있던 거인.

부족의 대전사가 입을 열었다.

-언젠가 저런 존재와도 싸우게 되리란 건 이미 알고 있던 것 아닌가.

-흐음. 예정보다 조금 빨라진 것은 사실이나... 틀린 말은 아니구려. 대전사.

대전사의 옆에는 늙은 오르크 하나가 앉아 있었다.

안 그래도 메마른 몸이 대전사의 옆에 있으니 더욱 왜소해 보였지만.

그 직위마저 왜소하지는 않았다.

부족의 대주술사.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한 적들이 나타난다.

이미 고향을 버리고 도망쳐 온 우리는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렇기에,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빠르게 영토를 넓히려고 한 것이었다만.

오르크 족은 대지의 정령과 교감함으로써 힘을 쌓는다.

영토가 넓어질수록 부족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

그렇기에, 다소 급하게 정복 전쟁을 수행해 왔던 것이었으나.

-설마하니 내실을 다지지 않은 것이 문제를 일으킬 줄은.

대주술사는 턱을 쓰다듬으며 침음성을 흘렸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겠소. 대전사.

-쯧.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대전사.

그 모습을 본 주술사가 다른 이들을 보며 물었다.

-다음 침공 준비는 얼마나 돼 가고 있느냐?

-전사들의 소집은 거의 완료된 상태입니다. 토착종들의 요새와 그 요새를 지키고 있다는 수호자들에 대한 대비만 끝난다면, 곧바로 침공을 나서게 될 것으로-

-그렇군. 그렇다면 그 전사들에게 전하라.

-예. 뭐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후방으로 복귀하라.

-...!

지난번 그들을 패배시킨 토착종의 요새.

그 요새를 확실히 함락시키기 위해 모여있던 병력들을.

모조리 복귀시키라는 것이었다.

-허면. 그 토착종들의 요새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분명 대전사님이 직접 나서서 놈들을 징벌하실 계획이었던 게...!

-예상보다 빠르게 강적이 나타났다. 아쉽지만 놈들에 대한 정벌은 뒤로 미뤄야만 하겠지.

대주술사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했다.

-토착종들을 함락시키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다.

-...!

-반면 저런 존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타날 테지. 연습 상대로는 제격 아닌가.

그렇게 말을 하긴 했으나.

대전사 역시 지금의 상황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흥. 내 힘만 완벽했다면 굳이 이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을.

대전사와 대주술사 역시, 본래라면 아직은 움직이지 못해야 정상인 강자들.

하지만.

평균 수명이 짧은 녹색갈기 부족이다.

오랜 시간을 살아남아 높은 지위에 오른 그들의 경험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허허. 대전사께서는 말을 조심히 할 필요가 있겠소. 자칫하면 우리의 주술을 탓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

그렇기에.

주술사들은 그들의 몸에 쇠약의 저주를 걸었다.

해주가 불가능한 저주를.

덕분에 전성기보다 약해졌을지언정.

그들은 봉인에서 벗어나 세상을 활보할 수 있게 된 것.

-아주 틀린 말은 아닐 텐데? 해주가 불가능한 저주라니.

-...크륵.

-주술사들의 능력이 충분했다면, 해주 또한 가능했어야 정상 아닌가.

-...핏덩이같이 어린놈이, 감히-!

대주술사가 어금니를 보이며 분노했으나.

-...허허. 불가능한 일을 가지고 난리 치는 것만큼 추한 일은 없소. 젊은 대전사여.

-흥. 싱겁기는.

그는 자신의 분노를 조절할 줄 아는 연륜을 지닌 존재였다.

-병력이 준비되는 대로 내가 직접 토벌에 나서겠다. 적은 하루가 다르게 우리 전사들을 감염시키며 군세를 늘리고 있지. 최대한 빠르게 토벌한다.

-흐음. 나는 저 군세의 강함이 조금 납득가지 않는구려. 균형을 벗어난 강함.... 어쩌면 뭔가 약점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대전사는 토벌을 준비하는 데 집중하시오. 나와 주술사들은 놈의 약점을 파헤쳐 볼 테니.

영토 확장에 치중되어 있던 부족의 힘.

그 힘이, 내부의 적을 향해 집중되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그 움직임을, 박태준 병장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무당 : 아무래도 영준이가 말한 방법이 통한 것 같은데.]

[마법청년 : ...! 정말이냐?]

얼마 전.

신영준 병장은 길드 메시지를 통해 한 작전을 전달해 왔다.

자신이 모종의 방법으로 녹색갈기 부족의 후방을 교란해 보겠다던가.

그런 얘기.

그리고 지금.

그 '모종의 방법'이 통한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

그 메시지를 접한 부대원들의 반응은 간단했다.

"...이게 왜 되지?"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신영준 병장의 얘기를 들었을 때.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이게 무슨 개소리시지?' 정도의 반응이었다.

"신 병장님은 지금 양구군 쪽으로 진출해 계신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리고 적들의 후방이면. 아마 철원군 쪽일 텐데."

"...그러니까 말이다."

적의 후방은커녕.

군단의 본진보다도 녹색갈기 부족과 떨어진 장소에 위치해 있을 신영준 병장.

그가 무슨 수로 적들의 후방을 교란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박태준 병장님이 거짓말을 하셨을 리도 없고."

"이번엔 또 무슨 방법을 쓰신 거야?"

길드 메시지를 본 모든 부대원들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괴물들이 먹는 음식에 독을 탔나?"

"그러려고 해도 말이지. 일단 물리적으로 거리가 안 되잖아."

"혹시 모르지. 신 병장님쯤 되면 축지법 같은 것도 쓸 수 있을지도."

"축지법이라니. 여기가 북쪽 나라도 아니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말이 안 될 것까지 있나. 마법사들이라면 나중에 텔레포트 같은 건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신 병장님은 이미 무슨 아공간 같은 것도 사용하시잖아. 그걸 감안하면, 흠."

"...진짜 축지법인가?"

온갖 허무맹랑한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짐작이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설마....'

이민재 병장이 슬쩍 서수혁 상병을 바라보자.

그 역시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역시. 그 뱀파이어를 보낸 건가.'

자신들의 전우를 죽이기까지 했던 적.

아직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쓸모가 있다는 점 하나만큼은 확실하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었다.

그 녀석이 권속으로 삼고자 제거한 약탈자들의 숫자만 해도 상당하다.

그것만으로도 근처의 치안 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짓까지 가능할 줄이야.'

벙커에 있을 적의 뱀파이어는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게 절실히 체감됐다.

'아니. 그 상태의 뱀파이어도 영준이가 아니었으면 토벌할 수 없었겠지.'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서자마자.

저 거대한 세력을 움직이게 할 정도라니.

새삼 신영준이 저 뱀파이어를 굴복시킨 것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용한 건 유용한 거고.'

여전히 그 뱀파이어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뱀파이어가 활약하고 있는 지금.

인간들이 밀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뭐가 됐든 간에, 영준이의 작전이 성공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예?"

"다음은 우리가 일할 차례다."

아무리 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적이라고 한들.

그 병력이 후방에 집중 중이라면.

전방에는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신 병장님이랑 전광일 상병이 없는 게 조금 걸리긴 합니다만."

"나도 그렇긴 하다만... 슬슬 한 번은 보여줄 때도 됐거든."

"?"

"영준이 녀석이 키운 우리 군단이, 얼마나 쓸모 있게 변했는지."

이 찬스를 놓칠 이유 따위.

어디에도 없다.

"요새의 방어는 용아병과 소수의 병사들에게 맡긴다."

"그 말씀은."

"나머지는, 지역 탈환 작전을 준비하라고 전하도록."

"...!"

부족이 병력을 후방으로 돌리고 있을 때.

"다들 장비 챙겨!"

"군장에 장난질 치다 걸리면 나중에 식사 대신 통조림 하나 주고 끝낸단다! 다들 주의하도록!"

"전차에 넣을 기름 좀 가져다 주십쇼!"

"저번에 양구군 다녀온 상인한테 받은 기름이 꽤 많으니, 그걸로 어떻게든-"

"저 절이랑, 근처 각성자들한테도 협력 요청 돌린다!"

군단은 진군 준비에 들어갔다.

166화 밤의 귀족 (4)

내가 수인들의 봉인을 강제로 해제하고.

벌써 4주의 시간이 지났다.

"정말 저들과 함께 갈 생각이시오, 사매?"

"은인께서 우리 사형제들을 깨워 주기로 약속하셨으니, 나는 그 은혜에 대한 도리를 다해야지."

그동안.

이곳에 있던 부대원들은 서환을 통해 무예를 전수받았다.

"거기에. 은공의 무예는 아직 완벽하지 않으니. 내가 계속해서 지켜봐야 할 것 같구나."

"끄응."

조금 복잡해졌던 내 일정도.

일단 대충은 마무리가 되었고.

그러니 이제.

게이트를 나가, 부대에 복귀해야 할 때가 왔다.

"뭐.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곳은 우리에게 맡겨 주쇼."

"언제든지 돌아오실 수 있도록. 지키고 있겠습니다.'

이 게이트....

천산 무관은, 저칠과 우진이 지키고 있기로 했다.

이미 우리 길드에 가입한 것으로 처리된 서환과 미호는, 나를 따라 우리 부대로 떠날 예정이었다.

이들은 트레이너 NPC.

군단 병사들의 교관 역할을 맡아 주게 되겠지.

"그럼... 가시지요."

"음. 조금 서둘러야겠는데."

"서두르다니요?"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은공."

미호와 서환의 말에.

나는 허공에 떠 있는 시스템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도배되고 있는 메시지.

[당신의 식사를 대접받은 이가 전투에서 활약했습니다.]

[요리사의 명성이 퍼져 나갑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당신의 식사를 대접받은....]

[요리사의 명성이....]

[경험치를....]

나는 기본적으로 요리사다.

어쩌다 보니 전투도 꽤 자주 치르고는 있다만.

경험치 수급처 역시, 일단은 요리.

내 요리를 먹은 이가 어떤 방면에서 활약을 할 경우.

내게도 경험치가 주어지는 것.

그리고.

지난 3주간, 내 몸 안에는 계속해서 경험치가 쌓이고 있었다.

저기서 말하는 '활약'은, 몬스터 한 마리를 죽이는 정도로는 해당하지 않는다.

최소한 다섯 마리 이상은 잡고 나서야 발생하는 문구.

그렇게 해야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아무래도. 저쪽은 조금 바쁜 것 같거든."

한없이 치열한 전투가.

매일같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

* * *

-크뤄어어어어어어억!!!

철원군.

녹색갈기 부족의 전사가 괴성을 내지르며 무기를 휘둘렀다.

-크뤄어억!

그리고 그에 맞서는 것은.

그와 매우 닮은 모습을 한, 또 다른 녹색갈기의 전사.

차이점이 있다면.

이쪽의 눈은,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쿠웅!

-크륵, 커, 크허어....

두 전사의 결투.

승자는, 붉은 눈을 지닌 쪽이었다.

-형제여! 어째서 우리를 공격하는가!

-저자는 이미 우리 형제가 아니다! 죽여라!

결투에서 승리한 붉은 눈의 전사 역시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동료의 죽음을 본 전사들이 우르르 달려든 결과.

뱀파이어의 몇 안 되는 약점인 심장을 쪼개 버렸기 때문.

'이런 전투가 벌써 며칠째란 말인가.'

가까스로 적 하나를 처치한 녹색갈기의 주술사가 생각했다.

녹색갈기 부족이 뱀파이어의 존재를 눈치챈 뒤.

최근 이 근처에서는 계속해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끌 일이 아니었을 텐데...!'

아무리 뱀파이어들이 강하다고 한들.

부족이 가진 숫자의 힘은 엄청난 것이다.

그 전력을 모두 동원한 토벌전.

본래라면, 아무리 까다로운 적이라도 지금쯤이면 토벌이 되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의외의 변수가 발생했다.

'갑자기 개입한 그 토착종들만 아니었어도...!'

그들과 영역을 마주하고 있던 토착종의 세력들.

놈들은 마치 부족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

뱀파이어 토벌을 위해 후방으로 집결한 순간.

부족의 영토를 공격해 들어왔다.

'마치 시기를 맞춘 것처럼!'

물론.

저런 엄청난 거악과 나약한 토착종이 아군일 리는 없는 일.

그저 운이 나쁘게 그들의 후방에 거악이 나타났으며.

거기에 악운이 겹쳐진 결과, 우연히 토착종들이 반격을 시작한 것이겠지만....

'버겁다.'

그 결과.

부족이 싸워야 하는 적은.

뱀파이어뿐만이 아닌 상황이 되어버렸다.

"옴마니반메홈 옴마니반메홈...."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뒈져라, 마두야!"

콰직!

불경을 읊으면서 적의 머리통을 거침없이 으깨 버리는 중들.

얼마 전, 군단과의 동맹을 맺은 뒤.

녹색갈기 부족과의 싸움을 지원하겠다 약속한 이들.

"아미타불!"

묘양사의 무승들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장비들이로군요."

"승주 스님의 말이 맞습니다. 동맹을 맺으면 장비를 지원해준다 했을 때는, 무슨 의미인가 했습니다만...."

과거에는 상점산 장비로 무장하고 있던 그들이었으나.

지금.

그들은 평범한 승려처럼 잿빛 가사를 입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가사는 아니었다.

[중급 재봉사의 잿빛늑대 가죽 가사]

마수의 가죽으로 만들어져, 어지간한 철판보다도 단단한 것은 물론.

활동성 면에서는 비교조차 안 되는 물건.

특히 이 장비를 만든 이상아는 활동성에 집중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후웅.

녹색갈기의 전사가 휘두르는 무기를 가볍게 피하고.

콰직!

"이토록 움직이기 편할 줄이야!"

"허허! 갑옷을 입고 활동할 때와는 비교조차 안 됩니다그려!"

흉흉하게 생긴 철봉과 철곤으로 머리통을 으깨는 승병들.

그 움직임에는, [항마승병무예]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잿빛의 가사는, 승병들이 무예를 펼치는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설계된 물건이었다.

"뭐, 뭐야, 저 스님들은."

"스님들이 저렇게 강하다니. 무슨 소림사도 아니고. "

그 모습을 멀리서 당황스럽게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군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 중인 춘천의 각성자들이었다.

"그나저나. 다들 그거 들으셨습니까."

"?"

"저 괴물들 머리 하나당 전투식량 5개 준다는 거."

"...스님들한테 질 수는 없지. 우리도 갑시다!"

한 명 한 명은 아직 그렇게까지 강해지지 못했으나.

그 숫자만큼은 상당했다.

그리고.

그들이 힘을 합쳐 하나의 부락을 공략할 때.

"아.... 좌로 30도."

끼이익...."

"풍향 좋고. 각도 좋고... 발포!"

콰아아아아앙!!!

군단의 전차가 포화를 발하자.

녹색갈기 부족이 세워둔 방어벽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방어시설 무너졌다! 돌입!"

"군단의 승리를 위하여-!!!"

무너진 틈을 향해 전진하는 군단의 병사들.

안 그래도 일대의 세력 중에서도 최강을 자랑하는 이들이다.

거기에....

[군단의 기운]

[같은 기운을 지닌 이들이 일정 이상 모여 있을 시 시너지 효과가 발휘됩니다.]

[전쟁 노래]

[같은 세력에 속한 이들이 동시에 군가를 부름으로써, 광역 피어를 형성합니다.]

모이면 모일수록 높은 효과를 발휘하는 길드 스킬들.

엄청난 양의 버프가 그들의 몸을 뒤덮었다.

* * *

본래라면.

각성자들의 세력 하나하나는 녹색갈기 부족의 상대가 되지 않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힘을 합친 것은 물론.

-이렇게 사방에서 몰려오다니...!

북방, 철원군에서 몰려오는 뱀파이어들.

서방, 묘양사의 무승들.

남방, 춘천시의 각성자들.

동방, 군단의 병사들.

한 곳도 아닌.

전방위로 몰려오다 보니.

아무리 엄청난 숫자를 자랑하는 녹색갈기 부족이라고 한들.

어느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이 포위된 상황.

제대로 된 싸움을 벌이기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크륵...!

-이 토착종들, 생각보다 강하다!

힘겨운 전투를 벌이게 된 전사들.

그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우리 땅 안에 있던 놈들과 같은 종족 맞는가!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영토.

그 안에도 분명 인간들은 있었으나.

그들을 처리하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그때도 각성자들의 저항은 어느 정도 있었으나.

그들은 부족의 전사 하나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니까.

하지만.

저들은 달랐다.

-평균적인 전력부터가 평범한 토착종들과는 다르군.

-한두 마리 정도라면 또 모를까, 저만한 숫자가 모두 상당한 힘을 발휘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여기에는.

녹색갈기 부족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이유가 하나 있었다.

"3일 치 전투식량. 배급 왔습니다!"

"오오!"

춘천의 각성자들에게 전투식량을 만들어 준 뒤.

그 수수료 격으로 받은 것이 창고에 쌓여있다시피 하던 전투식량.

그것을 매일같이 각성자들에게 보급하고 있었기 때문.

전투식량을 먹은 각성자들은, 비록 혼자서는 그렇게 활약할 수 없을지언정.

본래 약하던 이들이라도 셋 이상이 모이면 녹색갈기의 전사 한 마리를 감당할 수 있을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철원군과 화천군.

두 지역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녹색갈기 부족이었으나.

지금 와서는.

각각의 50% 정도를 겨우겨우 틀어막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륵....

이런 상황에서.

누구보다 불편한 것은 다름 아닌.

부족의 대전사였다.

-이 허접한 저주만 아니었어도!

그 근처에 모여있던 이들은 대전사의 눈치를 보며 몸을 움츠렸다.

의기양양하게 뱀파이어들을 토벌하겠다고 나섰던 그였으나.

갑자기 사방에서의 공격이 시작된 상황.

어느 세력 하나도 토벌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 순간.

-주술을 탓하는 건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나.

대주술사가 그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말장난을 칠 생각이라면....

-후방에 나타난 놈들의 약점을 알아냈네.

-...!

-태양에 약한 것 같더군.

-...뭐야. 그 얘기였나.

대주술사의 말에 조금 기대했던 대전사였으나.

이어진 말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놈들은 언제나 밤에만 나타나서 싸운다. 낮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으리란 것쯤, 바보라도 짐작할 수 있지.

문제는, 저들은 낮에는 도통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인지.

그 위치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약점을 알아도 토벌에 나설 수 없다는 게 문제였으나.

히죽-

-그게 전부일 리가 있나. 놈들의 은신처 역시 알아냈지.

-...!

-하늘이 막혀서 예언은 쓰지 못하지만, 대지의 정령들은 여전히 눈을 뜨고 있거든.

그렇다고 한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크하하하! 병력을 집결시켜라!

-집결시키라니. 사방에서 적이 쳐들어오고 있는데 말입니까!?

-다른 지역은 조금 내줘도 상관없다. 일단 한쪽을 먼저 정리한 뒤, 나머지는 천천히 되찾으면 그만!

서로 도와줄 수 있는 위치의 토착종들과 달리.

뱀파이어는 다른 이들과 단절된 위치에 있었다.

뱀파이어들만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면, 적어도 후방은 안전해진다.

그들의 병력 분산도 확연히 줄어들게 되겠지.

-전투는... 새벽에 치른다.

* * *

철원군 구석에서 영역을 넓히던 아리엘라.

그녀를 향해.

부족의 토벌대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걱정마십시오, 주인님!

그녀를 옆에서 보좌하던 녹색갈기의 주술사.

하카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놈들의 지능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

"일단은 네 동족이었다만?"

-저놈들은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일 뿐! 주인님의 군세라면 능히 적을 꺾을 수-

"...있을 리가 없잖니."

-있을 터... 예에?

하아.

한숨을 내쉰 아리엘라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그녀가 숨어 있는 동굴 바깥.

저 멀리서 떠오르기 시작하는 태양이 보였다.

"증오스러운 천적 같으니라고."

태양의 아래에서, 그녀의 군세는 대부분의 힘을 잃는다.

은신처 안에서는 그나마 전투력이 유지되긴 하겠으나.

'좀 더 빨리 발을 뺐어야 했나.'

저들의 숫자를 보아하니.

아주 제대로 이를 갈고 온 것 같아 보였다.

'어쩌면... 본녀도 위험해질지도 모르겠구나.'

167화 광전사 (1)

쿠웅...!

-아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분하도다...!

은신처 안에서 치른 전투는, 아리엘라의 예상대로.

뱀파이어들의 패배로 끝났다.

그녀의 권속이 된 이들은 오히려 생전보다도 강한 힘을 얻지만.

그럼에도 숫자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바깥에 태양이 펼쳐진 상황에서는 탈출조차 불가능하니, 압도적인 숫자의 군세를 상대로 불리한 전투를 치러야만 했고.

그 결과.

그녀가 그동안 쌓아 올린 권속의 대부분이 심장을 뽑혀 재로 돌아갔다.

그리고.

재로 돌아간 전사의 뒤에 서 있던 여인을 보고.

-네놈이었구나...!

권속들을 대부분 처치한 주역.

대전사가 이를 갈며 말했다.

-크륵...! 잘도 동족들을 가지고 놀아 줬구나, 사악한 마녀야.

최근 부족을 덮친 커다란 악재.

그 대부분은 이 한 마리의 괴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가 후방에서 암처럼 몸덩이를 키움으로써, 약해진 그들 부족을 토착종들이 공격해 들어온 것이었으니.

그로 인해 부족은 쌓아 올린 영역의 절반가량을 상실해야만 했다.

그 땅과 감응하던 정령들과의 연결이 끊겼고, 부족의 힘도 조금은 약화되었다.

터무니없을 정도의 피해.

'그 피해를 입힌 거악의 실체가, 고작 이런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존재였을 줄이야.'

그를 무엇보다 화나게 하는 것은.

그녀에 의해 세뇌된 그의 동족들.

그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선조도, 정령도 아닌 저 보잘것없어 보이는 여인의 이름을 부르며 스러져 갔다는 점이었다.

대전사의 기세가 분노로 일렁거렸다.

"가지고 놀기는 했지. 하지만 너무 화내지는 말거라."

그러거나 말거나.

아리엘라는 머리를 매만지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저 아이들도 충분히 행복했을 테니."

-뭐라...?

"본녀 같은 고귀한 존재가 저딴 짐승들과 놀아 준 것이다. 짐승들의 입장에서는 저승에 가서도 자랑하고 싶을 일 아니겠느냐."

명백한 조롱.

이를 듣고도 참고 있을 만한 존재는 거의 없겠지.

———!!!!!

분노한 대전사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날렸으나.

"야만스럽기는...."

[안개화]

아리엘라의 몸은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뱀파이어들에게 두 번째 목숨을 보장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강력한 특성.

이 특성 탓에, 녹색갈기 부족의 전력이 압도적임에도 토벌에는 긴 시간이 들어야만 했다.

평범한 권속들의 것도 그 정도였는데.

그 주인의 것은 오죽할까.

"착각하지 말거라."

-도망치지 마라-!

"너 하나뿐이었다면, 너 또한 친히 내 강아지로 만들어 주었을 테니."

지나치게 큰 숫자의 차이.

그것만 아니었다면, 저 녀석의 피 맛을 봐주었을 텐데.

아리엘라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동굴 밖으로의 탈출을 감행했다.

-어딜...!

대주술사가 주술을 발동해 그 안개를 붙잡으려 했으나.

-주인님을 방해하지 말라.

-...자네는 설마. 하카진! 그토록 현명했던 주술사마저!

마지막 순간까지 숨어서 신중하게 상황을 관망하던 하카진.

그가 내뿜은 주술이, 대주술사를 방해했다.

주술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 아리엘라가 빠르게 동굴을 벗어났다.

새벽부터 시작된 공격.

하지만 그녀의 권속들도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안개화까지 써 가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라고 명령했으니까.'

바깥의 태양은 이제 저물어 가고 있었다.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잔잔한 노을빛이 피부에 닿자.

"크으윽...!"

온몸이 불타 들어가는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으나.

저물어가는 태양은, 그녀를 죽일 정도의 빛을 내뿜지는 못했다.

어떻게든 적들의 포위를 빠져나온 뒤.

그녀가 녹색갈기의 괴물들을 둘러보았다.

그녀를 토벌하기 위해 나섰던 상당한 병력도, 절반가량이 줄어 있는 상태.

거기에 이제까지 후방을 교란하며 그녀가 직, 간접적으로 해치운 숫자 또한 어마어마할 터.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지?'

실제로.

권속들을 모두 잃었음에도, 그녀의 격은 아득하게 상승해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로서는 해야 할 일을 다 한 셈.

그러니 나머지는....

'주인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뭐~'

그녀는 최대한 빠르게 녹색갈기의 영역에서 몸을 빼기로 했다.

한번 이만한 분탕질을 쳐 놓았으니.

아무리 야만스러운 짐승들이라고 한들.

학습능력이란 게 있는 이상, 다시 그녀의 침투를 용납하지는 않을 터.

괴물을 피해 도망치는 신세.

본래라면 밤의 귀족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치욕이었지만.

아리엘라에게 있어서, 이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단 하나.

'후후.... 이만큼 열심히 일해 놨으니. 특식... 이 아니라! 특별한 은총 정도는 챙겨 주시겠지?'

그녀의 주인이 약속한.

공로에 합당한 보상....

"어쩌면... 저놈들 아까 본 전사 놈의 피를 먹여 주실지도. 후후후."

즉.

밥 생각뿐이었다.

* * *

-도망치지 마라—-!!!

괴성을 지르는 대전사였으나.

그 소리를 들어야 할 대상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난 뒤였다.

-쫓아간다!!! 저 저주받을 벌레의 목을 따러....

-진정하라, 대전사.

흥분한 대전사.

그를 진정시킨 것은, 노회한 대주술사였다.

-적의 수괴를 처치하지 못한 것은 아쉽긴 하나... 이걸로 영토의 후방은 안정화되었다.

-저놈을 잡지 못한 이상, 언제 다시 같은 짓을 할지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런 짓은 내가 용납하지 않지.

통.

대주술사의 지팡이가 바닥을 치자.

대지의 정령들이 그에 감응해 고개를 끄덕인다.

-정령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한, 다시는 같은 장난은 치지 못할 터.

-...허나. 녀석은 우리 동족들을! 전사들을 모욕했다!

-나 또한 오랜 친우인 주술사를 잃었다. 분한 건 마찬가지. 하지만... 언젠가는 저 마녀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길 터. 복수는 그때 해도 늦지 않다.

-...후욱.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젊은 대전사. 분노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아둔하진 않을 텐데?

-...그렇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대전사.

그가 주변의 전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강대하던 거악이, 우리 전사들의 힘에 굴복해 도망쳤노라!

-크워어어어어어어어!!!

-그러니 이제!

그의 시선이.

저 먼 곳을 향했다.

-거슬리던 토착종들을 정리하러 간다!

발걸음을 옮기는 대전사.

그 뒤를, 전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 * *

후방을 정리한 녹색갈기 부족.

그들의 역공이 시작되자.

각성자들은 빼앗은 영토의 방어에 나섰다.

묘양사, 춘천시의 각성자들, 거기에 군단까지.

3개의 세력이 하나의 부족을 상대하는 싸움이었으나

놀랍게도.

"커헉...!"

"제기랄, 부상자다! 후방으로 옮겨!"

"치료사들도 마나가 다 떨어져 간답니다!"

우세한 쪽은 녹색갈기 부족이었다.

사실 당연한 얘기였다.

전쟁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엄청난 숫자는 물론.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결코 약하지도 않다.

오랜 경험을 통해, 내정에는 취약할지언정 침공에는 이골이 나 있는 전사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강하군."

녹색갈기 부족이 열세에 놓였던 것은.

그전까지는 사방이 포위된 채 공격당하는 형태였기 때문.

그중에서도.

후방을 교란하는 뱀파이어들의 세력이 가장 큰 핵심이었다.

뱀파이어가 사라지자.

4면 포위에서 3면 포위로 바뀐 전황.

그 차이는 상당했다.

상당한 병력을 잃었을 것임이 분명한 녹색갈기 부족임에도.

그 3면의 전선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게 되었을 정도로.

'조금 유리하다 싶을 때는 생각보다 별거 아닌가 싶었다만.... 결국은, 영준이가 굴복시킨 뱀파이어 덕에 가능했던 일이란 건가.'

그 차이를 감안해도, 이전에 비해 전투가 너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

적진의 한가운데서 괴성을 지르는.

3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구의 괴물.

"제기랄. 피어다!"

"또 저 녀석인가...!"

지금까지 군단이 상대한 적 중에 저보다 더 거대한 적은 있었지만.

저보다 강력한 적은 극히 드물었다.

녹색갈기 부족의 대전사.

카르가라.

그가 손에 쥔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자.

"커헉...!"

"이한일 상병님!"

그를 상대하기 위해 나선 군단의 정예 병사 셋이, 피를 토하며 날아간다.

그 모습에 군단의 병사들은 불안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동안, 대전사는 뱀파이어의 토벌에 집중한 나머지 각성자들과의 전선에 나선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역공에 나서게 된 지금.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장에 나타나, 각성자들을 상대로 무쌍을 펼쳤다.

"...맛있게 생긴 적이네요."

"어어, 막내다!"

"쟤 또 괴물 먹으려고 한다!"

"도와!"

군단에도 규격 외의 강자가 없지는 않았다.

'이상식욕자'라는 직업을 가진 이현진.

그녀가 다른 고레벨 병사들과 힘을 합쳐, 어떻게든 대전사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으나.

-하하.... 젊은 대전사가 드물게 신난 듯한데, 방해하면 안 되지.

"...!"

후방에서 대기하던 대주술사.

쿠르단.

그가 대지의 정령들과 교감해 대전사를 보조하니.

대전사의 횡보를 잠깐 저지하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웠다.

"...말이 되냐고, 이게."

각성자들로서는.

그야말로 거대한 벽을 마주한 듯한 기분.

"제기랄...."

"신 병장님만 계셨더라면!"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병사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영준이에게 의존하고만 있었던 거다.'

그동안.

군단에는 지금보다 더한 위기가 수없이 많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 정도의 세력을 이룬 것은, 모두 신영준과 그의 요리 덕분이었다.

"춘천시 각성자들은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후퇴하겠답니다!"

"묘양사 스님들도... 숫자가 적은 자기들로서는, 여기까지고 한계라고."

"저희도 더는 못 버팁니다! 다른 두 세력이 남아 있다면 모를까. 저희만 남는다면 적들의 모든 화력을 감당해야 할 겁니다!"

아무리 그가 자리를 비웠다고 한들.

그가 직접 만들어 준 전투식량도 있는데, 바로 이 꼴이라니.

'짜증 나는군.'

이민재 병장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영준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놈들이었냐!"

"...그, 그건."

"아닙니다!"

적들의 공격이 매섭기는 하다.

기껏 이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왔건만.

요새에서의 방어전을 이겨 냈던 과거와 달리, 이렇듯 제대로 된 방어 설비가 없는 곳에서의 전투는 부족함이 많다는 것.

반대로 말하자면.

그렇기에 오히려.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적들의 영역에 이렇게까지 깊숙이 파고든 상황이다.

신영준의 뱀파이어가 토벌된 지금.

만약 물러난다면.

언제 다시 이곳까지 쳐들어올 수 있을지 모른다.

후퇴한 뒤에 다시 이곳을 탈환하려 할 때는, 글쎄.

지금보다 수십 배는 어려운 싸움을 해야만 하겠지.

파지직....

이민재 병장의 피부를 타고 푸른 전기가 일렁인다.

콰릉!!!

번개가 내리치며, 한 무리의 적을 숯덩이로 만든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병사들.

그 병사들을 보며, 이민재 병장이 소리쳤다.

"최대한 버틴다!"

"...!"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황.

후퇴가 아닌 다른 명령에, 많은 병사들이 당황했으나.

눈치 좋은 몇몇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 병장님 일행이 출발했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거겠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번개의 창을 쥐는 이민재 병장.

"그 정도는 해 줘야, 쓸모없는 녀석들이라는 소리는 안 들을 수 있을 테니까."

"하하.... 뭐, 신 병장님이 그런 소리를 하실 분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확실히, 쓸모없다고 생각되고 싶지는 않군요."

그렇게.

군단의 병사들이, 이를 악물고 사투를 시작했다.

전차의 포화가 빗발치고.

사수들의 사격이 전장에 붉은 궤적을 그린다.

"커허...!"

많은 병사들이 치명상을 입고.

치료사와 사제들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피해가 나오면서도.

"버텨라!"

군단의 병사들은.

전선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영겁과도 같은 고통의 싸움이 이어지고.

"...하, 하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신 병장님이다!"

"신영준 병장님이 오셨습니다!"

구원군이 도착했다.

"민재 형?"

"영준아.... 어떻게든 버텼다."

마력을 과도하게 끌어 쓴 탓일까.

이민재 병장의 얼굴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전장에 도착한 신영준 병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녹색갈기 부족의 영토에는, 군단병들이 활용할 만한 어떠한 방어시설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상태.

그럼에도,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압도적인 숫자의 부족을 막아내고 있었다니.

"...대단하네. 이런 상황에서 여기까지 버티다니. 정말 대단해."

"큭큭, 너 없다고 우리가 아주 병신은 아니란 거겠지."

지친 이민재 병장이 바닥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끼린 여기까지가 한계인 거 같다. 조금 자존심 상하지만... 네가 해결해 줘야겠어."

"흠."

일단 신영준이 왔으니.

그에게 맡긴다면.

이 어려운 전장도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이 전장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마 너밖에 없을 테니까."

모든 병사들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걸 해결하라니."

그 얘기를 들은 신영준 병장은.

손을 절레절레 휘저으며 말했다.

"어.... 될 리가 있나."

"뭐?"

"아니. 그렇잖아."

요리를 하려고 해도.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 요리를 먹을 수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신영준 병장 혼자 싸우자니.

요리 도핑으로 그렇게 오래 싸울 수가 있을 리도 없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데?"

그 말에.

이민재 병장의 안 그래도 초췌해진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영준이 너 이 자식. 너답지 않게 무슨 소리를...!"

"그러니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병사들이 멍한 눈으로 그들의 희망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당사자인 신영준 병장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씨익.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거든."

"...?"

신영준 병장이 몸을 틀자.

그 뒤에 있던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단단한 군복과 강철의 건틀렛.

그리고.

"전 상병님...?"

짙은 광기로 무장한 괴물이.

그곳에 있었다.

168화 광전사 (2)

다른 이들이 모두 후퇴할 때.

군단의 병사들이 굳이 이곳을 틀어막은 이유는, 단 하나.

지금은 비록 힘든 전장이라고 한들.

신영준 병장이 찾아오면, 순식간에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걸 해결하라니.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데?"

막상 그 당사자인 신영준 병장이 저런 말을 내뱉자.

병사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래.... 아무리 신 병장님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기는 하겠지.'

'너무 무턱대고 신 병장님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믿어 버렸던 거야.'

지금까지 입은 피해가 상당하지만.

지금이라도 후퇴를 해야 하나 했을 때.

"그러니까 광일아."

"예."

"니가 해결하자."

신영준 병장의 등 뒤에서.

그와 함께 양구군으로 떠났던 남자.

전광일 상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 상병님...?"

병사들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싹텄다.

"그, 그게. 뭐라고 해야 하나."

"물론 전광일 상병님이 엄청나게 강하신 건 압니다만...."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냐고 하면. 으음."

전광일 상병이 강하긴 하다.

하지만, 이 세계에 나타난 괴물들은 그보다도 더 강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어지간한 괴물들을 상대로는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 주는 전광일 상병이었으나.

진정한 강적들을 상대로는 언제나 고전해 왔던 남자.

당장 그 예시 중 하나가, 일전에 그들의 춘천을 침공했던 녹색갈기 부족.

그들의 지휘관이었던 하라-발이었다.

반면.

당장 이 전장을 헤집고 있는 것은, 부족의 대장 격으로 여겨지는 전사.

하라-발보다 배는 강해 보이는 대전사를 상대로, 전광일 상병이 승리할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뭔가. 절 같은 곳에 가서 무술을 익혔다고 하는 걸 듣긴 했는데....'

'그래 봐야 무술이잖아. 스킬 하나 더해지는 수준일 텐데.'

하지만.

"뭐. 지켜보면 알 거야."

"...으음."

신영준 병장은.

전장으로 향하는 전광일 상병을 보며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어?"

병사들은.

그 자신감의 원인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 * *

군단의 병사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던 괴물.

대전사는 생각했다.

'토착종 중에서 그나마 거슬리는 건 이놈들뿐인 것 같군.'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올 때는 고전한 것이 사실이지만.

막상 후방을 정리하고 나니.

그들을 제대로 상대할 만한 전력을 지닌 이들은, 저 이상한 무늬의 옷을 입은 토착종뿐이었다.

즉.

'이놈들만 밀어낸다면, 부족이 다시 일대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겠지.'

그렇기에.

대전사는 힘을 아끼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물론.

아무리 대전사라고 한들, 쇠약의 저주를 입고 있는 상태.

결코 무적은 아니었고.

위기의 순간은 몇 번인가 있었다.

'특히. 전사들을 집어삼키며 달려오던 그 토착종.'

말 그대로 적을 '먹음'으로써, 일시적으로 그 힘을 얻는 듯 보였다.

아무리 토착종들의 능력이 다양하다지만, 기괴할 정도의 힘.

그 한 마리라면 모르겠으나.

뒤따르는 토착종들의 숫자가 상당했기에, 한 번에 상대하게 된다면 대전사라고 한들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대주술사가 그를 적절히 도와주었다.

'겁많은 노인이지만... 능력 하나는 쓸 만하군.'

그가 대족장이 된 뒤에는 부하가 될 자.

앞으로는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일단은 이 녀석들을 몰아내고 난 뒤, 영역을 복구하고 부족의 힘을 정비한다.'

저들의 요새라는 것이 거슬리긴 하지만.

충분히 힘을 회복하고, 준비를 한 뒤에 정벌에 나선다면.

뚫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요새를 지키고 있다는 수호자들은 대전사인 자신이 해결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웅성웅성....

토착종들 사이에 약간의 소란이 이는가 싶더니.

자신과 싸우던 이들이 슬쩍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흠. 토착종의 자살 희망자인가?

한 남자가 자리를 잡았다.

토착종들치고는 거대한 덩치.

하지만.

그래 봐야 한 마리에 불과한 적.

대전사는 그 한 마리의 토착종을 보며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그가 전성기에 비하면 조금 약해진 상태라고는 하나.

그 강함은, 다른 고위 전사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경지에 올라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도 아니었다.

전광일 상병을 쓰러트렸던 부족의 치프틴, 하라-발.

그 하라-발이 세 명이 몰려온다고 한들.

지금의 대전사는 가볍게 승리를 취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런 그에게.

고작 혼자서 맞서 오다니?

'어이가 없군.'

그를 무시하는 것 같은 처사에 약간의 짜증도 났지만.

그렇다면, 해결방법은 간단한 것 아니겠는가.

'저 겁도 없는 토착종을 최대한 빠르게 쳐 죽여 주면 그만.'

그렇게.

각 세력 최강의 전사들.

그 둘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카하하하하!!!"

광기에 휩싸인 채.

미친 듯 웃으며 주먹을 뻗는 전광일 상병.

그 자체는, 군단의 병사들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

지금의 전광일 상병은, 무언가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눈썰미가 좋은 병사 몇 명은 그 전투를 지켜보다가 의아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전광일 상병님....'

'광기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저렇게 잘 싸우셨던가?'

광기의 휩싸인 상태의 전광일은 분명 강하다.

그 전과 비교하면 족히 수 배의 전투력 차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하지만, 강력한 힘인 만큼.

단점도 분명하게 존재했다.

지나친 광기는 이성을 잡아먹고.

이성을 잃은 전사는, 제 몸의 안위 따위는 챙기지 못하게 된다.

그 상태의 전광일 상병은 공격성만큼은 정말로 대단했지만.

오히려 이성이 있을 때보다도 빠르게 상처를 입고는 했다.

그렇기에.

최대한 광기와 이성의 비율을 조정하고자 노력했던 것이고.

하지만.

"크르륵...!"

-그야말로 짐승이로군...!

지금의 전광일 상병은.

아무리 봐도 광기를 최대한으로 해방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도가 있다.'

훅!

곧게 뻗어지는 주먹.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움직임.

그 하나하나가.

지독할 정도로 정교했다.

'저게 정말... 이성을 잃어버리신 모습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체감하고 있는 것은.

그와 직접 싸우고 있는 대전사였다.

-큭!

분명, 빠르게 쳐 죽인 뒤 다른 토착종들을 사냥할 예정이었는데.

처음 경계심이 든 것은.

그가 두른 살의와 광기를 느꼈을 때였다.

'이만한 살의와 광기라....'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대전사는 자신의 패배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많이 흥분한 상태인 것 같군.'

드물게.

전투로 인한 흥분으로 인해 미친듯한 기세를 내뿜는 적들이 있다.

지나친 흥분으로 인한 아드레날린의 과다 분비.

그 결과.

상처를 입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평상시와는 비교도 하기 힘든 전투 능력을 보인다.

또한 그런 이들은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기에.

중상을 입고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기도 한다.

'광전사라는 전설도... 분명 거기서 유래된 것이겠지.'

그들이 상처를 체감하는 것은, 전투가 끝난 뒤.

그 흥분이 가라앉았을 때.

그제야 자신이 죽을 만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공포에 발버둥 치다가,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 간다.

부족의 어린아이들에게 전해지는 동화 같은 이야기.

'광전사'의 원형 또한, 아마도 그것이리라.

대전사는 그리 생각했다.

물론.

오랜 싸움을 거쳐 온 대전사는 그런 이들을 몇 번이고 만나 봤으며.

냉정을 잃은 그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술은, 대체 뭐지?

적이 흥분해서 실수를 저지를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광기에 뒤덮인 적은, 그 광기가 무색할 정도로 침착하게 공격을 뻗어왔다.

'그냥 침착한 정도가 아니다...!'

그가 내뻗는 주먹과 발길질.

그 과정에 사용되는 모든 근육의 움직임.

그 하나하나에, 대전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은 묘리가 담겨 있었다.

-크륵...!

단순한 빠름과 강함.

그리고 본능과 경험으로 전투를 이끌어 나가는 대전사와는 다르다.

지금 전광일 상병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지금은 멸망해 버리고 만, 하나의 세계.

그 세계가 헤아릴 수 없는 먼 옛날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무(武)의 정수!

평생 전투만을 거듭하며, 20년 이상을 산 개체가 보기 드물 정도인 녹색갈기 부족.

그들로서는 쌓아 올리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했던 무의 예술.

무예(武藝)였다.

계속되는 싸움 속.

전광일 상병은 광기에 잠식되어 있었으나.

단 한 줌 남아 있는 이성으로 생각했다.

'즐겁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비등한 싸움.

아니.

대전사가 약간은 우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전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를 입을수록... 강해지고 있다.'

저 몸을 뒤덮은 광기.

그것은, 상처를 입을수록 그 몸집을 불려 나갔다.

마치 상처 입는 전투 그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카하하하하!!!"

-...광기가 짙어질수록. 기술이 정교해진다니.

녀석이 휘두르는.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고등한 기술.

그 기술 역시.

광기가 커짐에 따라 점점 더 정교해져 갔다.

보통이라면.

광기가 심해질수록, 기술의 정확도는 떨어져야 정상.

그 반대의 현상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천살신무 SSS+]

[숙련도 Lv.2]

보통이라면 저주로 여겨지는 광기.

그 광기를 철저하게 굴복시키고.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예.

-말도 안 된다. 설마... 그냥 전설이 아니었단 말인가.

후욱!

전광일의 손이 뻗어 나온다.

그 경로를 피하려던 대전사였으나.

-그토록 벌레 같던 토착종들 사이에서, 정말로...!

마치 원래부터 그곳을 노리려고 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주먹.

"카하하하하!"

-광전사가....

콰앙!

건틀렛을 장착한 그 거대한 주먹이.

자신보다 거대한 대전사의 턱을 올려 쳤다.

"군단의 승리를 위하여-!"

건틀렛에 세워져 있던 날카로운 가시들이, 그의 턱을 찢어발긴다.

온몸을 두른 광기가, 강철보다도 단단한 그의 턱뼈를 으깰 힘을 부여했다.

그 주먹질로 인해, 고개가 돌아간 대전사.

그 시선 끝에는.

'...그러고 보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대주술사가 서 있었다.

'왜, 날 돕지 않았지...?'

그제야, 대전사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돕지 않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무언가 이상했다는 것.

'나를, 그딴 눈으로 보지 마라....'

실망했다는 듯한.

쓸모없는 것을 보는 눈.

'아아. 족장님.'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광전사의 주먹질로 인해, 두개골이 흔들린다.

정신을 잃은 거구의 전사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죄송합니ㄷ....'

* * *

-쓸모없는 자식 같으니.... 머리는 나빠도 싸움만은 잘한다 여겼건만.

대주술사의 시선이 전장을 살폈다.

대전사가 쓰러졌다.

그것도 고작 한 명의 토착종에 의해서.

'광전사라.... 그냥 동화 속의 존재는 아니었는가.'

본래라면, 그가 어떻게든 수를 내서 대전사를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전장에서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대전사뿐만이 아니었다.

전체적인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 놈들인지 모르겠군....

그 이유는 하나.

부족의 전사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무위를 보이고 있는 이들.

다른 토착종들과 겉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신묘한 기술을 다루는 이들이 열 정도.

거기에, 짐승의 냄새가 풍기는 기묘한 강자가 둘.

'쯧.... 저 녀석과 부족을 이용해 대업을 이루고자 했거늘. 일이 크게 틀어져 버렸어.'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부족에게 승산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 주술사 본인 역시, 이곳에서 살아나가긴 힘들겠지.

그렇다면....

'한 놈쯤은, 길동무로 데려가야겠구나.'

그의 시선이, 대전사를 처리한 강대한 전사에게로 향했다.

비록 자신은 실패했지만.

거슬리는 적 하나쯤은 미리 치워 놓는 게 좋겠지.

'언젠가 이 세상에 내려오실... 주인님을 위해.'

노구의 주술사가, 발걸음을 옮긴다.

시체가 되어 쓰러져가는 대전사를 가리키며, 중얼거리는 대주술사.

-어둠의 정령이여.... 계약이다.

대지의 정령과 교감하는 녹색갈기 부족.

그들이 절대 불러서는 안 된다고 금기시하는 이름이, 대주술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윽고.

그의 눈앞에는,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원하는 것?]

-저 토착종 중, 가장 위협이 될 존재를 제거해다오.

[가장 위협이 될 존재? 확인. 대가?]

-나와, 저 대전사의 목숨을 주도록 하지. 지금은 조금 나약해졌으나, 그 본질은 꽤 가치가 있을 터. 그 둘의 가치에 합당한 저주를 부탁하지.

그의 말에.

검은 그림자가 어딘가로 뻗어 나간다.

[성립.]

적의 공격으로 인해 기절한 대전사.

그 몸을 검은 정령이 뒤덮자.

대전사의 몸이 조각조각 갈라지더니, 허공으로 떠오른다.

스르륵-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둠의 정령이 자신의 몸을 뒤덮는 것을 느끼며.

그는 생각했다.

'나의 목숨이, 주인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조각조각 난 대전사의 시체가, 어디론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가 말한 '가장 큰 위협'.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공격이 시작된 것이겠지.

대족장이 사라진 지금.

부족에서도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둘.

그 목숨을 바쳐 만들어 낸, 필살의 저주.

아무리 대전사조차 쓰러트린 저 광전사라고 한들.

이 저주를 버텨 내지는 못할 터.

그 또한 산산조각 난 시체로 변하고 말리라.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던 대주술사였으나.

'어?'

자신의 몸마저 조각조각 나기 직전.

그 눈동자에 조금 이상한 것이 비쳤다.

조각난 대전사의 파편들.

그것들은 분명.

저 '광전사'를 향해 쇄도해야 할 터였으나....

-거, 거기가 아니다!

그 방향이.

조금 달랐다.

급하게 항의하는 대주술사였으나.

-저 광전사를 노려야 한단 말이다! 이 멍청한 정령같으ㄴ...!

쩌저적-

그 몸마저 조각이 난 뒤에는.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조각난 그 몸이, 필살의 저주가 되어 어딘가를 향해 거칠게 쇄도한다.

이곳에 자리 잡은 토착종들.

"...엥?"

그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존재를 향해.

169화 어둠의 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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