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요새 (1)
[암부] 놈들의 습격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
나는 부대의 간부들을 회의실로 집결시켰다.
'사망자는 없나.'
꽤 강력한 암살자의 습격이었으나.
다행히 부대원들 중에 사상자는 없었다.
다만... 사상자가 없을 뿐.
모두가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후욱... 후욱...."
"광일아. 괜찮냐?"
"괜찮슴다.... 크륵. 조금만 있으면, 진정될 겁니다. 크르륵."
"어, 어어."
갑작스러운 전투로 인해 [광기] 특성을 사용해 버린 광일이.
녀석은 회의실에 앉아 광기를 가라앉히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괜히 우리 부대 최고의 전사가 아니다.
그나마 이 녀석은 외상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다만.
"형하고 수혁이도. 아프면 치료 먼저 받고 와도 되는데."
"나중에."
"이 정도는 금방 낫습니다."
이민재 병장과 서수혁 상병.
두 사람은 아예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광일이가 저렇게 멀쩡한데, 나만 다쳤다고 쉴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야, 형이랑 수혁이는 1:1에 적합한 직업은 아니니까."
마법사와 사수.
원거리 화력에 특화된 직종인 그들은 기본적으로 근접전에 취약하다.
강제적으로 근접전을 유도하는 암살자에게 고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둘 모두 전투 경험이 상당한 만큼 적을 격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무래도 공격을 어느 정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
"그런 식으로 따지면 신 병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요리사인 신 병장님이 상처 하나 없이 적을 격퇴하셨는데, 전투직인 제가 상처를 입은 것 자체가 잘못이죠."
"아. 그건."
"정말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그냥 버틸 수 있으니, 이 얘긴 여기까지 하시죠."
아니.
그게 아니라.
상처 하나 없이 적을 격퇴했다니.
'난 그냥 죽을 뻔했는데?'
언젠가 실수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며, 혹시 모르니 까망이를 데려가라던 이상아의 조언.
그 조언을 따라 품 안에 넣고 다닌 까망이가 도와줘서 다행이지.
만약 까망이가 없었다면....
글쎄.
'지금쯤 정수리가 두 동강 난 좀비로 변하고 있지 않았을까?'
음....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방심해서 죽을 뻔했다니.
쪽팔리잖아.
나중에 이상아한테 따로 감사를 전하기로 하고.
"아무튼. 박태준 병장님 말이 사실이라면, 곧 그 괴물들이 몰려온다는 거군요."
상처 부위를 억누르며 말하는 서수혁 상병.
회의실로 향하면서, 나는 태준이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었다.
"태준이 녀석의 답변을 요약하자면 강원도 서북부는 지금 특정 몬스터 세력한테 먹힌 상태라고 한다."
민재 형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녀석의 능력은 좀 추상적이다만. 아마도 여기서 서북부라면."
"철원이나, 화천?"
"둘 다일 수도. 본래라면 그들은 바로 동쪽... 우리가 있는 곳을 공격할 예정이었다더군."
그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몇 개월 전에 서북부를 먹었다니."
"...그럼 그사이에는 뭘 했답니까?"
본래라면 몇 개월 전에 이미 우리 쪽을 침공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녀석들.
하지만.
"태준이 녀석이 막아 준 거야."
"예?"
423대대.
강원도에서도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위치한 부대에 자리 잡은 [천문관].
어느 날.
태준이 녀석은 늘 하던 대로 산맥에서 별점을 보던 중.
[무당 : 나 외의 누군가가 별의 운행을 엿보려고 하더군.]
저들의 존재를 눈치챘다.
[무당 : 대충 느껴지는 것만 해도... 당시의 우리 부대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놈들이 우리 쪽을 향하는 건 최대한 막아야만 했어.]
[셰프 : 그래서.]
[무당 : 싸움이 시작됐지.]
그게 태준이 녀석의 소문이 뜸해진 시점이었다.
별의 운행을 두고 벌어지는 전투.
'평범한 전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싸움이었겠지.'
다행히도.
별의 운행을 보는 일이라면 [천문관]인 태준이 녀석의 전문.
423대대가 위치한 저 높은 산맥은 특히나 별의 운행에 관여하는 데 유리한 면이 있다던가.
그렇게 별의 운행을 엿볼 수 없게 되자.
한창 세력을 넓히려고 하던 저 괴물들의 세력은, 자신들 점령지 바깥의 정보를 엿볼 수 없게 되었다.
놈들의 세력 확장 역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고.
"저쪽 입장에선 자신들의 눈을 가릴 만한 존재가 이쪽에 있다는 뜻이니까."
"경계심을 품게 됐다는 거군요."
"그런 거지."
놈들은 지레 겁먹어서 점령지에 머물기를 선택했고.
덕분에 몇 개월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다만.
[무당 : ...몇 개월이 한계더군.]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태준이 녀석이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상상이 갔다.
[무당 :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저쪽이 훨씬 더 노련했어. 숫자도 더 많았고.]
몇 개월의 정보전.
태준이 녀석은 꽤 잘 버텨 주었으나....
'그것도 어제까지.'
결국 패배한 건 이쪽이란 거다.
"놈들은. 우리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됐겠지."
"끄응."
연락이 뜸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있으면 태준이에게 확인을 받곤 했다.
-동쪽으로 가는 게 좋을까, 서쪽으로 가는 게 좋을까?
-이 던전 클리어할 수 있겠냐?
뭐 그런 것들.
저쪽도 비슷한 식으로 능력을 사용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침공을 막을 만한 세력이 존재하는가?
뭐 이런 내용이었겠지.
그리고 그 결과.
저들은 우리를 향해 진격해 오기를 선택했다.
"비교해 보니까 지들이 더 강했단 거겠지, 아마?"
"...."
과거.
아리엘라를 권속으로 삼은 직후.
나는 그녀의 뱀파이어들을 사방으로 정찰 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 살아서 귀환한 것은, 북쪽 끝에 펼쳐진 검은 장벽을 발견한 뱀파이어 몇 마리뿐.
나머지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땐 그냥 괴물에게 죽었겠거니 하고 넘어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놈들한테 당했을 확률도 높겠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괴물들이 도시를 점령하다니."
"이상할 거 없지 않습니까? 인제군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원래는 괴물들로 넘쳐 났잖아요."
"지금 말하는 놈들은 단일 세력인 게 문제지."
강원도 서북부라고 하면 아마도 철원과 화천.
그 두 곳일 확률이 높다.
우리도 이제야 인제군을 겨우 점령하고, 춘천시를 점령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상황.
그런데 이미 몇 개월 전에 그 두 곳을 점거한 세력이라니.
"빡세겠는데."
솔직히.
머리가 살짝 아파 오는 적이란 건 확실했다.
"으음."
"차라리 탄약대대 기지였다면 괜찮았을 텐데 말입니다."
탄약대대 기지를 거점으로 사용한 지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지금 인제군의 탄약대대에는 공병들이 설치한 방어 설비들이 즐비했다.
'군부대에서 가져온 각종 무기들에... 공병들이 설치한 장벽이나 함정들까지.'
게다가 얼마 전.
나와 친구를 먹은 알라우네가 어느 정도 기지를 지켜 주기로 약속하기도 했으니까.
그쪽이라면, 적이 아군의 몇 배 병력이라고 해도 방어해 낼 자신이 있다만.
"형. 지금 우리 방어 설비가 어느 정도지?"
"이 거점에서?"
"응."
잠깐 고민하던 민재 형.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없다."
"...."
"굳이 따지자면 이 건물 자체하고. 저 바깥에 설치된 장벽이 끝이지. 저것도 방어 설비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춘천에는 아직 제대로 된 거점조차 없다.
적의 침공을 막아낼 설비 따위 있을 리가 만무.
"박태준 병장님 말대로라면 괴물들은 엄청나게 많은 숫자로 몰려들겠죠."
"아마도."
서수혁 상병이 아픈 상처를 짓누르며 말했다.
"저희도 부대원들이 꽤 늘긴 했습니다만, 마땅한 방어 설비 없이 대규모의 괴물들을 상대로 싸우는 건 무리입니다. 그러니."
본인도 내키지는 않는 듯하나.
어쩔 수 없다는 말투.
"...후퇴를 건의드립니다."
후퇴라.
간부들의 표정이 조금 찡그려졌다.
녀석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아무리 우리 부대원들이 강해졌다고 한들.
'방어 설비도 없는 곳에서, 수적 열세의 싸움을 벌여야 한다고 하면... 솔직히 좀 쫄리긴 해.'
게다가 저 괴물들.
생각보다 강하단 말이지.
[전투력 측정기]로 알아본 결과.
놈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매우 짙은 노란색이었다.
'아리엘라'
'알라우네'
'강철을 먹는 맥' 등.
파란색 기운을 내뿜는 괴물에 비하면 급이 두 단계 정도 낮기는 하다만.
"문제는 숫자입니다."
태준이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들은 엄청난 숫자로 몰려올 터.
나와 간부들을 덮친 암살대만 해도 생각보다 강했다.
아마도 암살에 특화되어있을 괴물.
그럼에도 전면전에서도 생각보다 버겁다고 느껴졌을 정도니까.
아예 암살이 아닌 전면전에 특화된 다른 개체들이 몰려온다면?
아무리 우리 부대원들이라도 고전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춘천을 버리고 떠난다라.
"그건 안 되겠는데."
"예?"
내가 자신의 의격을 바로 기각해 버리자.
수혁이 녀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던전에서 풀려난 각성자들 대부분이 아직 이 근처에 머물러 있잖냐."
[침식이계 다스무르]를 클리어한 뒤.
그 안에 있던 시민들이 세상에 풀려났다.
대부분이 각성자라는 귀중한 전력.
"안 그래도 죽은 사람들이 많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각성하기 힘든 환경이야. 저들을 살려 둬야 인간의 전력을 키울 수 있어."
괴물과 인간의 싸움은 인간 측이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이미 각성을 마친, 수천 명의 각성자들.
저들이 어느 정도 성장을 마친다면?
"저들이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되는 순간, 다른 생존자들을 끌어들이고 각성시켜 나갈 수 있게 될 거야."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서 지내고 있는 생존자들.
그들을 이끌고, 전력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
안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한 괴물들이 나타날 거라는 얘기까지 들은 상황.
인간 측 전력의 핵심이 될 각성자들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이 여전히 춘천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
던전 안에서 각성만 마친 이들이 많아, 레벨도 성장도 모자라다.
"우리가 이곳을 버리는 순간, 저 각성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개격파 당하고 말 거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인상을 찌푸리는 서수혁 상병.
후퇴하자는 의견을 내긴 냈지만.
사실 녀석도 그 의견이 맘에 들진 않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판단하에 나온 제안이었겠지.'
녀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난 마땅한 대안도 없이, 현실적인 의견에 대해 안 된다 안 된다 연호하고 있는 셈.
불만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내 경우.
대안도 없이 한 말은 아니거든.
"결국. 제대로 된 방어시설이 없는 게 문제라는 거잖냐."
"...예. 그렇죠."
탄약대대에 비해 미약한 방어시설.
몰려 들어올 괴물들을 막기에는 부족함이 크다.
그렇다면.
"그 방어시설. 만들면 되는 거 아냐."
"...?"
"네?"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어시설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게 그렇게 단기간에 될 일이라면 고생도 안 했-"
"아니. 아니. 내가 말실수했네."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
"정확히 말하면, 만드는 건 아니지."
각성 초기.
우리 부대는 운이 좋게도 남들보다 훨씬 빠른 각성을 이룰 수 있었다.
덕분에 '최초 달성 보상'을 우수수 달성했지.
하지만 아쉽게도.
그때 얻었던 물건 중,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있는 게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릴 만한 물건이 있거든.
"소환하면 되는 거 아니냐 이 말이야."
[기동요새 비마나]
[기동요새, 비마나를 소환합니다.]
무려 이름부터가 요새인 녀석.
얻어 두고 한참을 썩혀 두고 있었다만.
씨익.
"슬슬 쓸 때가 됐지."
129화 요새 (2)
"소환한다고 하는 게 맞겠지."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태도였다.
"소환한다니."
"...뭘요?"
뜬금없는 얘기에 당황하는 사람들.
하지만 단 한 사람.
반응이 다른 인물이 있었다.
"그 요새 얘기로군."
"이민재 병장님?"
부대 초창기부터 나와 부대의 운영에 대해 소통했던 인물.
민재 형만은 내 말의 의도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확실히 가능하다면 나쁘지 않아. 하지만...."
민재 형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소환할 수 없는 거 아니었나?"
"그게 문제긴 해?"
[대지역 - ROK 소속 인간의 첫 번째 '점령'입니다.]
[업적 달성!]
[여기부터 저기까지 내 땅]
[1위 특전이 부여됩니다.]
과거.
423대대를 습격해온 리자드의 군대.
놈들을 격퇴하고, '산맥'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순간 달성한 업적이 바로 저거다.
그리고.
[특전 - 기동요새 비마나]
저 업적을 달성했을 때.
그 보상으로 부여받은 특전이 바로 이것.
'무려 인간 중 최초 달성 보상이야.'
어떤 게임이든 간에.
최초 달성 보상이 시시한 경우는 절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단한 보상일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한바.
실제로.
나는 그 위력의 일부를 체험해보기도 했다.
'아리엘라의 그림자 장막 속에서. 딱 한번이지만.'
[그림자 장막]은 구성원들의 심상을 구현하는 공간.
저 특전, 기동요새 비마나는 소환되기 전까지는 내 심상 속에 잠들어 있던 것인지.
그림자 장막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었다.
'덕분에 죽을 위기를 벗어났으니.'
그리고.
그때 그 요새가 보여 줬던 능력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을 정도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현실로 복귀한 뒤에도, 이 요새를 사용해 보려고 시도는 해 봤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도 때도 없이 시도해 봤다고 하는 게 맞겠지?"
그럴 때마다 나타난 것은 이제는 익숙해질 정도로 익숙해진 '띠링' 소리.
그와 함께 나타나는 한 줄의 메시지.
[소환에 필요한 공간이 부족합니다.]
그래.
기껏 얻은 점령전 1위 보상.
그 보상을 우리가 사용하지 못한 이유는 어이없게도.
'너무 커서'였다.
423대대는 산꼭대기에 지어진 부대였다.
아무래도 부지가 넓지 않다 보니 그러려니 넘어갔지.
지상에 내려온 뒤.
좀 넓다 싶은 공간이 보일 때마다 소환을 시도해봤다.
'얼마나 크다는 거야. 제기랄.'
하지만 결과는 모두 꽝.
딱 한 번.
그 위력을 체험해 본 곳이 그림자 장막이었으나.
그마저도 아리엘라의 힘이 약화되고 난 뒤.
그림자 장막이 좁아지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최초로 길드 단위 단체를 만든 보상으로 얻은 아이템, [용의 이빨]과 함께.
비마나는 초창기에 얻었음에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슬슬 써 봐야지 않겠냐."
"어. 제가 잘못 이해한 걸 수도 있는데."
요새에 대한 설명을 끝내자.
전광일 상병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공간이 모자라서 소환하지 못하고 있던 거면, 지금도 못 쓰는 거 아닙니까?"
"날카로운 질문이야."
"그렇게 큰 요새를 올릴 만한 땅이 어디 있다고...."
웬만큼 넓은 논밭 위에서도 안 됐다.
장막 속에서 본 기억에 의하면, 이 도시 위에 요새를 소환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하지만....
최근에 물로 가득한 던전에서 꽤 긴 시간을 보냈다 보니.
그 경험이 내 생각을 조금 바꿔 주었다.
"요새를 소환하는 거."
"예."
풀리지 않는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것은.
아주 약간의 발상의 전환이거든.
"굳이 땅 위일 필요는 없잖아?"
* * *
사실.
임시 거점을 떠나 제대로 된 거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는 이전부터 있었다.
당장 급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미뤄 온 것이 후회될 뿐.
나름대로 회의를 거친 적도 있었지.
당시에 꽤 여러 가지 후보지가 언급되었었다.
근처의 대학 부지, 저 괴물들이 건물들을 모조리 치워 놓은 도시 중앙부 등.
그중.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던 지역은 바로.
"강."
춘천시 옆에는 커다란 강이 있다.
그 강에는 여러 개의 넓은 섬이 떠 있다.
그 섬을 거점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자연의 해자가 된 강이 적을 막아 줄 수도 있고.
식수 조달도 매우 쉬울 테니까.
그중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뤄진 것은 유원지가 지어진 섬이었다.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경영난에 빠진 결과 망해 버렸다는 유원지.
그 유원지의 구조물들을 뼈대로 활용하면 방어시설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든가.
"꽤 본격적인 선까지 갔던 계획이다만."
"지금은 시간이 없잖아. 섬들을 활용하는 건 나중으로 하자고."
지금 중요한 것은 강.
그 자체였다.
도시를 끼고 있는 넓은 강.
섬과 섬들 사이에는 상당히 넓은 공간이 비어 있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섬 하나쯤은 더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매우 넓은 공간이.
"여기에 요새를 띄우자니."
"...전 잘 모르겠는데요. 이거 맞습니까?"
내 작전은 간단했다.
그 넓은 공간.
강 위에 요새를 소환하는 것.
"어떻게 기적적으로 소환된다고 해도, 그대로 가라앉아 버리지 않을까요?"
"밑져야 본전이잖냐.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강 사이의 공간은 상당히 넓었다.
'여기서도 공간이 부족하다고 소환이 실패한다면... 진짜 답도 없다.'
다음에는 바다로 나가야 그나마 시도해 볼 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실패했을 때의 경우고.
"만약 성공한다면."
"거점으로 삼기에는... 최고의 위치이기는 하군."
자연의 해자인 강이 수비를 도와줄 것이며, 식수 확보도 쉽다.
저 던전화의 영향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도시 중심부와도 가깝다.
주변의 섬들과 폐허가 된 도시 중앙부까지 일종의 앞마당으로 활용할 수 있겠지.
부대 근처에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최고의 위치였다.
'그러니 제발!'
강의 앞으로 도착한 뒤.
나는 속으로 온갖 신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
그리고.
[기동요새 비마나를 소환하시겠습니까?]
[Y/N]
망설임 없이, 소환 버튼을 눌렀다.
띠링.
[장소를 스캔합니다....]
[스캔 중....]
익숙한 문구다.
지금까지는 이 문구의 다음.
[소환에 필요한 공간이 부족합니다.]
라는 메시지가 떠오르곤 했지.
나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띠링!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는....
[소환 가능 영역이 확보되었습니다.]
"...!'
이전까지 봐 왔던 것하고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해당 장소에 '기동요새 비마나'를 소환하시겠습니까?]
[주의!]
[소환 장소는 신중하게 선택해 주세요.]
[소환 해제 시, 다음 소환에는 긴 대기 시간이 소요됩니다.]
[필요 대기 시간 : 30일]
"하, 하하."
여기에 소환하겠냐고?
'당연한 걸 묻고 있어.'
경고고 메시지고 뭐고.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다.
곧바로 요새의 소환을 선택했다.
그러자.
[요새가 소환됩니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응?
'뭔 충격?'
그 문구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콰아아앙!
귓구멍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폭음.
'...!?'
그와 함께.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파도가 우리를 향해 몰아쳤다
"미친!"
"다들, 충격에 대비하라!"
갑작스러운 해일.
병사들이 급하게 몸을 웅크렸다.
"푸핫...!"
"다, 다들 괜찮아!?"
"예!"
"푸읍! 멀쩡함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쪽은 전원이 각성자로 이루어진 무리였다는 것.
파도에 밀려 뒤로 날아간 이가 몇 명 있긴 했다만.
대부분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어. 어어...?"
"잠깐."
"신 병장님?"
병사들이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 병사들이 입을 떡 벌리며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저, 저거 좀. 봐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
병사들이 가리킨 장소는.
본래라면 강이 있어야 할 장소.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
세상이.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니, 아니구나."
세상이 검은색으로 뒤덮인 게 아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거대한 벽.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은, 요새의 벽이었다.
* * *
던전에서 해방된 각성자들.
그중 일부는 각자의 사정에 따라 먼 길을 떠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춘천 근처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춘천에 남아 있던 각성자들 사이에는, 최근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
얼마 전.
명실상부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인 군인들.
그 군인들의 기지에서 들려온 전투 소리 때문.
"군인들만 있는 건물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몬스터의 사체를 교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그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는 이들도 많다.
군인들의 거점 근처는 일종의 광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많은 각성자들이 오고 가는 만큼, 괴물 따위는 진작에 청소된 지 오래인 장소.
"그곳에서 전투를 벌일 이유가 뭐가 있다고?"
부대 외부의 인간들이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사람들이 추측해 보기로는.
'내분... 혹은 쿠데타.'
나름 시간이 지난 지금.
아주 적은 수준이긴 하나, 부대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는 알려진 상태였다.
군인들의 지휘관은 김현석 중위.
그와 같은 부대였던 병사들이 핵심이 되어 일구어 낸 세력이라는 점 정도.
다만.
저 군부대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은 간부 출신도, 병사 출신도 아니었다.
'새롭게 합류한 외부인들.'
분명 군부대는 군부대지만.
출신 성분으로 따지면, 병사 출신이 아닌 일반인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
군인과 일반인들.
"뭔가 특별한 수를 쓴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건 당연하지."
"...내부 분쟁이라."
군인들뿐인 건물에서 전투가 벌어진 상황.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 바로 이것이었다.
"저 식량 생산만은 유지됐으면 좋겠는데."
"쯧. 그러게 말이다."
군부대가 무너져서 혼란이 생긴다고 한들.
도시의 인간들은 대부분이 각성자였다.
어떻게든 제 한 몸 지킬 수는 있는 이들.
문제는 식량이었다.
괴물의 고기를 먹으면 괴물이 된다.
농사를 짓자니, 하루아침에 농작물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각성자들은 군인들이 가공해 주는 전투식량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이번 내분에서 그 가공에 필요한 시설이나, 병사가 죽었다면?"
"...이 도시의 각성자들 중 반 정도는 굶어 죽겠지."
이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긴장감을 가지고 군부대의 동향을 살필 수밖에 없게 된 것.
그 순간.
쿵!
"응?"
"군인들이다."
군인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건물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나온 병사들이 어딘가를 향해 이동을 개시했다.
모든 병사가 함께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든 채 다가오는 병사들.
그 손에 들린 물건은 이 도시의 인간들에게는 꽤 익숙한 것이었다.
대충 휘갈겨 쓴 글씨가 잔뜩 적힌, 싸구려 종이.
"군인 양반! 지난번에 있었던 소란은 대체 뭐였던 거요?"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거고."
몇몇 사람들이 종이를 붙이려고 오는 군인을 향해 말을 걸었으나.
"...."
"그건 해결됐으니 걱정 마십쇼."
군인들의 반응은 묘하게 싸늘했다.
"걱정 말라니."
"자세한 일은 내부 사정이라. 이해해 주십쇼."
군인들이 이상할 정도로 외부인들을 배척한다는 사실.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몇 안 되는 군인들에 대한 정보였다.
궁금한 게 많은 이들이었으나, 한숨을 내쉬면서 물러날 수밖에.
뒤로 물러난 사람들은 군인들이 돌아다니며 붙인 종이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대충 썼군.'
'얼마나 귀찮았던 거야.'
병사들을 모아다가 쓰게 시킨 것일까.
귀찮음이 넘쳐 흐르는 글자들.
[경고]
그런데.
그 내용이 조금 살벌했다.
[서북부 방면에서 대규모 몬스터 웨이브 발생을 감지하였습니다.]
[대규모 괴수 집단이 도시로 접근 중.]
"...뭐?"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안 그래도 불안 불안한 군부대의 분위기에 술렁이던 각성자들.
이 종이에 적힌 내용은 너무 파격적인 것이었다.
"몬스터 웨이브라니."
"...뭐. 걱정할 거 있겠어?"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굳이 놀랄 것 있냐는 태도였다.
"군인 양반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잖아."
"아...."
"게다가 여기에 모인 각성자들만 해도 수천 명은 될걸. 괴물이 몰려온다고 해 봐야 이 도시를 함락시킬 수 있을 리가 없지."
그 얘기를 듣자, 사람들이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
아무리 많은 몬스터라고 한들, 저 강한 군인들이 있는 도시를 함락시킬 수는 없-
"아니."
"응?"
"저거. 마지막 줄을 봐."
[본 부대는 전력을 다해 지역 사수 작전에 임할 것이나, 작전 승리를 확신하기 힘든 상황.]
[근방 민간인분들의 대피는 자유이나, 동부 방면으로 피신하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작전 승리를 확신하기 힘들다.
피신할 거면 동쪽으로.
저런 내용이 붙은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설마."
"...아마 그거겠지."
몬스터 웨이브에 대항하는 지역 사수 작전.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는 뜻이냐...?"
"그 강하기 짝이 없던 군인들이...!?"
* * *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춘천 외곽에 있는 한 건물.
지금 그곳은 한 그룹이 점거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몬스터 웨이브.'
괴물들이 침공해 온다.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질문.
"떠나야 한다고 본다."
"떠나자니."
한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꼭 그래야 하나? 다들 알잖아. 저 군인들이 얼마나 강한지."
"맞아요. 저 어제도 군인들이 괴물 사냥하는 거 봤는데. 저게 같은 각성자가 맞나 싶을 정도였는데...."
"괴물이 온다고 해도 저 양반들이라면 어떻게든...."
"강한 거 알지! 아는데."
작게 소리친 남자가 창가로 몸을 옮기며 말했다.
"강하면 뭐 하냐고."
창문 밖의 풍경을 보라는 듯 팔을 펼치는 남자.
창밖에 펼쳐져 있는 것은... 도시.
"저기에 방어시설이 있길 해, 뭐가 있길 해?"
멸망한 끝에 성한 모습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스러져 가는 도시의 모습이었다.
"큼. 뭣도 없긴 하네."
"그래! 아무리 강해 봐야. 방어시설이 없다고!"
그룹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건물이 많으면 방어시설로 활용할 수 있을 텐데."
"...그 건물도 많이 없어졌잖아?"
가장 많은 건물들이 지어져 있던 도시 중심부.
하지만 그곳은 지금 텅 빈 폐허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도시가 던전화되어있던 시절.
가장 수심이 높았던 곳이 도시의 중심부였다.
그리고.
"어인놈들이 씹어먹어버렸으니."
정말로 씹어먹은 건지 뭔지.
그 물속에 잠긴 건물들은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군인들. 강하지. 그냥 강한 것도 아니고 엄청 강해. 하지만... 숫자 앞에는 장사 없는 법이다."
조용해진 사람들을 보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저 군인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더 많은 수의 적을 이기려면 방어시설은 필수야."
"방어시설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긴."
1:1이라면 지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는 군인들이지만.
"1대 다수의 전투를 하게 되겠지."
"끄응."
"아예 우리가 가담하는 건 어때? 이 근처에 넘치는 게 각성자 아닌가?"
한 남자가 그런 말을 꺼냈으나.
"가담하는 사람들도 있기야 하겠지. 하지만 대부분은 도망칠걸?"
"하긴. 우리가 저 군인들만큼 강한 것도 아니고. 방어시설도 없으니까."
방어시설이 없는 만큼.
전투는 꽤 불리한 상황에서 치러질 것이다.
그리고 불리한 전투라고 한다면.
"군인들보다 약한 평범한 각성자들이 가장 먼저 죽어나갈 테지."
"...그걸 알면서 참전할 사람은 많지 않을 테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화에, 그룹의 분위기가 술렁였다.
결국 대화의 방향은 한곳으로 치우쳤다.
춘천을 떠나.
동쪽 어딘가로 피난을 가는 쪽으로.
그 순간.
한 여자가 말했다.
"그럼 도망가실 분들은 가세요."
"어? 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전 여기 남으려구요."
다른 그룹원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여자를 말리려 들었다.
"...드디어 미쳐 버린 거냐?"
"괴물들이 몰려올 게 뻔한데, 굳이 여기서 죽겠다고?"
"그건 그렇긴 한데. 다른 곳 가서 굶어 죽을 바에야, 여기서 싸우다 죽는 게 나을 것 같지 않아요?"
"...."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군인들이 제공하는 요리.
전투식량.
"...다른 곳으로 간다고 꼭 굶어 죽으란 법은 없다. 어디 빈 땅 하나 찾아서 농사라도 지으면."
"농작물들은 뭐 하루아침에 나와요? 그리고 여기 농사 지어 본 사람이 있기나 한가?"
"농사야 배우면 되는 거고. 작물이 나올 때까진 버티면 되는 것 아냐. 지금 비축해 둔 전투식량...은 여유가 없지만. 포인트로 호밀빵이라도 사가면서 버티면."
"호밀빵... 호밀빵 좋죠. 근데."
여자의 얼굴에 실소가 지어졌다.
"많이들 드세요. 전 이제 그 빵은 못 먹을 것 같아서."
"...."
"다들 아시잖아요? 저 입맛 까다로운 거."
전투식량은 단순한 식량이 아니었다.
식량이나, 버프 아이템으로써의 효과도 크지만.
"저 전투식량으로 맘껏 배 채우는 생활을 하다가. 다시 그 맛대가리 없는 호밀빵을 먹어야 한다니"
가장 중요한 건 맛.
"죽으면 죽었지, 그 생활로는 못 돌아가겠네요."
"이해는 하는데... 여기 있으면 정말로 죽을 거다."
"꼭 죽는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저 군인들이 어떻게든 방어전을 한다고 했으니 방법이 있겠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숫자 앞에는 장사 없는 법이라고. 이 도시에 무슨 요새 같은 거라도 지어져 있으면 모를까. 이런 곳에서 방어전이라니."
"제가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긴 한데요, 어떻게 하든 제 맘이잖-"
짧은 실랑이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쿠우우웅!!!
"...!?"
"뭐, 뭐야!?"
건물 밖.
도시의 중심부 근처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려왔다.
얘기에 집중하고 있던 각성자들이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 소리...."
"아까 그 군인들이 향했던 방향이야."
그중.
뛰어난 청각을 지닌 한 각성자가 중얼거렸다.
몬스터 웨이브에 대한 경고.
군인들의 이동.
군인들이 이동한 곳에서 들려온, 커다란 굉음.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설마."
"그 몬스터 웨이브라는 거. 당장 오늘부터 시작되는 거였어?"
그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었고.
군인들이 전투에 나섰으리란 것.
"제기랄. 벌써 침공이라니."
"야! 너랑 말싸움하다가 다 같이 죽게 생겼-"
"헛소리할 시간에 짐이나 챙겨!"
정말로 침공이 시작된 것이라면.
당장 짐을 챙기고 도망가야만 했다.
당황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자 필요한 최소한의 짐만을 챙긴 뒤 동쪽으로 도망치려던 찰나.
"어?"
한 남자가 창문 바깥의 풍경을 보고 멍한 소리를 내뱉었다.
"뭐해 인마!"
"늦으면 다 같이 죽는...."
"아, 아니. 다들 저기 좀 봐."
"?"
남자의 말에.
급하게 짐을 챙기던 이들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
그리고.
그룹원 모두가,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저기요."
다들 도망치더라도 자신은 남겠다고 한 여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까... 요새라도 있으면 모를까, 라고 하셨죠?"
"그랬지. 어어. 그랬어."
"그러면."
그녀의 손가락이 창문 밖을 가리킨다.
창문 밖.
저 멀리, 도시 중앙부를 조금 더 지나.
커다란 강이 있는 장소.
그곳에 자리 잡은.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검은 요새를.
"저 정도면. 어느 쪽이 이길지 모르는 거 아니에요?"
"하. 하하."
여자가 요새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도망쳐야 한다며 사람들을 설득하던 남자가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모르긴 뭘 몰라."
"네? 분명 아까는 방어시설이 있으면 모른다고."
"그러니까."
여자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는 남자.
"어느 쪽이 이길지 모르는 거 아니냐고? 너 진짜 바보냐?"
"바보라니...!"
군인들이 향한 장소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요새.
"아무것도 없던 장소에 갑자기 요새가 나타났어."
"그렇죠."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어느 쪽이 이길지 모르는 거 아니냐고?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딨냐.
"당연히. 저런 기적을 일으킨 쪽이 이기겠지!"
"...."
불과 수십 초 전까지만 해도 다들 도망쳐야 한다고 열변을 토해 내던 남자.
그가 얌전히 짐을 내려놓았다.
"다들 어여 짐 내려놔. 여길 떠 봤자 갈 곳도 없는데 어딜 가겠다고."
"...."
130화 요새 (3)
"맙소사."
"크기 좀 봐. 끝이 안 보이는데?"
"거의 여의도만 한 거 아니냐, 이거?"
강 위에 소환된 요새.
그 엄청난 크기에 부대원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 그런데...."
그렇게 요새의 소환에 성공한 것은 좋았으나.
사소한 문제가 하나.
"우리는 어떻게 들어갑니까? 저기?"
"...."
요새는 강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우리도 딱히 접근할 만한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
'배라도 있으면 타겠는데.'
도시가 던전으로 뒤덮였을 당시에 모두 부서진 것일까.
강가에는 그 흔한 작은 배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법사들에게 강물을 얼리라고 하기도 뭐하니.
떠오르는 답은 하나.
"수영해야지 뭐."
"아."
각성자들의 체력이면 못 할 것도 없지 않겠냐.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기 위해 군복을 벗으려던 찰나.
"자, 잠시만요."
"?"
누군가가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공병들의 대장 역할을 맡고 있는 병사.
이공우 상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공병이라면.
"너희... 설마 배도 만들 수 있나?"
원래는 기껏해야 DIY가 취미인 수준이었던 시설병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공병으로 각성한 뒤에는 대충 재료만 던져 주면 온갖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예? 아아. 배 정도야 만들라고 하시면 못 만들 것도 없긴 합니다만."
"응?"
"더 좋은 방법이 있거든요."
씨익.
이공우 상병의 얼굴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서렸다.
"다리를 만듭시다."
"...다리?"
처음 들었을 땐 뭔 소리인가 싶었다.
배를 만드는 게 다리를 만드는 것보단 쉽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는데.
"다리 만드는 거. 원래 공병의 주 업무 중 하나거든요."
나는 취사병이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병사들의 특기에 대해서는 주워들은 지식이 전부.
공병들의 업무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얼마 없었다만.
이공우 상병의 말에 따르면.
원래 임시 가교를 설치하는 것이 공병의 주 업무 중 하나라는 듯.
"뭐. 우리 부대야 공병대대도 아니다 보니 실제로 설치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괜찮은 거냐?"
"사실 원래는 온갖 중장비를 동원해서야 수십 미터 정도 다리를 만드는 게 한계일 겁니다. 하지만."
녀석이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가 그냥 공병은 아니잖습니까?"
하긴.
평범한 취사병이었던 나도 지금은 식칼로 철판도 썰어 댄다.
내가 이 정도인데, 공병들이라고 평범할까.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음?"
"다른 병사들 좀 지원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가교를 만들어야 하다 보니, 약간 노가다가 필요할 것 같거든요."
"그거야 뭐. 어렵지 않지."
* * *
라고 생각했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약간 노가다는 무슨...!"
속아도 제대로 속아 버렸다.
저 요새까지의 거리는 적어도 백 미터 이상.
그만한 거리를 연결하는 임시 가교를 만드는 일이다.
'그게 쉬울 리가 있나!'
슬쩍 주변을 돌아보자.
"허억, 허억...."
"끄르륵."
살아있는 중장비나 다름없는 고레벨 병사들.
그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온다.
'후욱. 후욱.'
나 역시 마찬가지.
그나마 깡 스탯은 말도 안 되게 높다 보니 버틸 만한 거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포기했을 정도의 노동 강도였다.
그도 그럴 게.
"자자! 일꾼 여러분. 조금만 더 힘냅시다!"
"다음은. 보자. 저기 저 건물 정도면 딱 좋겠네."
가교 설치.
그걸 위해서는 다른 준비도 준비지만.
무엇보다 재료가 중요했다.
나름대로 부대에서 챙겨 온 자재들이 많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가교를 만드는 건 불가능.
거기서 공병들이 생각한 방법은 꽤 간단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꽤 무식했다.
-건물 몇 개만 뜯으면 되겠는데요?
말 그대로.
건물을 철거해서 자재를 얻는다는 것.
-무슨 게임도 아니고. 말이 되냐?
타이쿤 같은 종류의 게임을 하다 보면, 버튼 클릭 몇 번에 건물이 해체되고 재료로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이라서 가능한 일.
현실에서 그딴 일이 가능할 리가 있나.
건물 하나를 해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중노동이었다.
더 놀라운 게 있다면.
"...이게 말이 되네?"
쿵!
부대원 한 명이 대검을 휘두르자, 주변에 있던 한 건물의 벽이 통째로 베어져 나간다.
그렇게 떨어져 나온 거대한 파편들을 부대원들이 들고 옮겼다.
건물을 철거해 재료를 수급한다.
게임에서나 가능할 법한 방식인 건 사실이다만.
'병사들의 능력도 게임에서나 볼 만한 수준이 돼 버렸으니.'
이딴 개막장스러운 방법이 잘 통하고 있다는 거다.
어이가 없네.
"끄윽. 가져왔다."
"감사~"
그렇게 건물을 말 그대로 뜯어서 공병들에게 전달.
공병들은 그 거대한 파편들을 두들기며 자신들이 원하는 모양으로 뜯어고쳤다.
'...대단하긴 하네.'
그러고 보니.
공병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도 꽤 오랜만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본 게 전투 차량을 개조하는 작업이었으니까.
그 후로도 시간이 꽤 지난바.
공병들의 레벨과 수준도 그때와는 비교하기 힘든 수준으로 올라와 있었다.
건물에서 뜯겨나온 파편들은 농담으로라도 제대로 된 형태라고 말하기 힘들었으나.
공병 몇 명이 거기에 달라붙자.
"3번 파츠, 완성이다!"
"옙. 옮겨 두겠슴다."
자연스럽게, 가교를 만들기 위한 조립형 부품으로 가공되었다.
건물을 해체해서 재료를 얻자는 말에는 꽤 당황했었다만.
이 방법, 꽤 잘 먹히는데?
"크윽, 제기랄."
물론.
문제가 하나 있었다.
"끄윽, 힘들어 죽겠네."
"아니. 우리는 전투직 아니야?"
"왜 공병들 일을 우리가 하고 있냐."
노가다에 참여한 병사들의 불만.
'불만을 가질 만도 하지.'
나름 요리를 통해 전우애를 키워 놓긴 했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업무 영역이 다르니까.'
평범한 군부대 시절에도 비슷했다.
서로의 업무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
모든 군인들이 가장 신경 쓰는 기본적인 예의였으니까.
남의 일을 하게 된 병사들이 불만을 내뱉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노가다 인력을 쉬게 둘 수는 없지.
"밥 먹고 하자~"
해결법은 간단하다.
자고로 대부분의 불만은....
[중급 요리사의 넘치는 열의의 혼마르 사골탕]
배고프고 짜증 나서 생기는 일 아니겠냐.
"크흐흐. 남은 건 저 정도인가? 한 시간이면 떡을 치겠군."
"한 시간? 졸면서 해도 그것보단 빨리 끝나겠다!"
"끼요오오오옷!!!"
배를 채워 주면 그걸로 끝.
방금 전까지의 불만은 온데간데없다.
열의에 가득 찬 병사들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로 작업을 시작했다.
사람은 배부르고 등 따시면 어지간한 일에는 짜증도 안 나는 법이다.
내 경우에는 소스의 역할이 좀 크긴 했지만 뭐.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
아무튼.
그렇게 병사들이 열정을 불태우며 일해 준 결과.
"완성입니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요새까지 이어지는 다리가 완성되었다.
경악할 만한 속도.
아무리 각성자라도 이런 짓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였다.
"뭐... 어디까지나 임시입니다. 시간도 없었고."
다리의 설치를 끝마친 이공우 상병이 말했다.
"최대한 급조해서 만든 거라, 무거운 물건은 못 올라갑니다. 무거운 전투차량 같은 거라도 올라가는 순간... 아시죠? 폭삭."
"일단은 병사들만 올라갈 수 있는 건가."
"예. 일단 이 다리를 뼈대로 삼아서 점차 보강해 나가야죠."
어찌 됐든.
물 위에 떠 있는 요새에 연결된 작은 다리.
나와 부대원들은 그 다리에 올라타 요새를 향해 걸어갔다.
"오오, 흔들린다."
"격하게 움직이지 마! 무너질라."
급조된 만큼 불안할 정도로 크게 흔들리는 가교를 위태롭게 통과.
요새의 벽에 접근하자.
띠링.
[비마나가 개방됩니다.]
갑자기 눈앞에 떠오르는 문구.
그리고.
쿠우웅....
커다란 진동과 함께, 요새의 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들 정지!"
이 강에 떠 있던 다른 섬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크기의 방대한 요새.
그 요새의 성벽이, 먼지를 흩날리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쿠웅!
문이 완전히 열린 순간.
띠링!
[기동요새 - 비마나의 개방이 완료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소환 권한이 인식되었습니다.]
[비마나가 주인을 인식합니다.]
[축하합니다!]
[이 요새는 이제 당신의 것입니다.]
[새로운 칭호가 주어집니다.]
[칭호 : 비마나의 성주]
[효과 : 요새 관리 메뉴의 접속 권한.]
새로운 칭호가 주어졌다.
칭호를 대충 확인한 나는 성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문 안쪽에 펼쳐진 요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건.
요새라기보단, 글쎄.
"요새 도시로군요."
거대한 성벽에 둘러싸인, 넓은 도시의 모습이었다.
* * *
"무슨 건물들이 다 이렇게 새까맣냐."
"강철 같은 건가?"
성문을 넘어 요새 안쪽으로 진입한 뒤.
부대원들은 일단 요새의 내용물들을 살피기로 했다.
[그림자 장막] 속에서 한번 경험해 본 요새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워낙 바쁘다 보니.
이 요새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시간도 없었지.
안쪽에는 요새 도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건물 중 한 곳에 다가가 벽면에 손을 대 보았다.
'차갑다.'
검회색의 건물에는 약간의 윤기가 돌고 있었다.
병사들의 말대로 강철 같은 느낌.
[식재료 감별]로 확인한 결과에 따르면 실제 강철은 아니었다만.
'길드의 요새로는 어울린다.'
우리 길드의 이름은 강철 군단.
강철을 연상시키는 이 감촉은 꽤 기분 좋은 우연이었다.
"여기 이 건물은 생활관 같습니다!"
"창고도 있어. 엄청 넓은데?"
작은 섬만 한 크기의 요새.
안쪽에 세워진 건물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곳이 정말 우리의 거점이 된다니."
인간종 최초로 [점령전]을 진행한 결과 얻은 특전.
괜히 최초 보상이 아니란 거다.
나 역시, 처음 봤을 때는 그 위압감에 짓눌렸을 정도.
하지만.
조금 의아한 것은.
'장막 속에서 봤을 때보다 규모가 작은 것 같은데?'
[그림자 장막] 안에서 보았을 때는.
건물들 역시 훨씬 더 높았으며.
요새의 크기도, 지금보다 배는 거대했던 것 같다.
'기분 탓인가?'
내가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병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민재 형."
"응?"
"애들 관리 좀 해 줘. 난 잠깐 가 볼 곳이 있어서."
"가 보다니?"
넓은 거점이 생긴 것은 좋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하나.
'태준이 녀석이 경고한 몬스터 웨이브. 그걸 막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
그냥 벽만 있는 게 전부라면 방어시설로써의 의미가 없으니까.
안 그래도 의아한 부분이 하나 생기기도 한 참.
그걸 확인하기 위해선 우선 내가 받은 칭호.
[비마나의 성주]의 효과를 발휘할 필요가 있겠지.
'요새 관리 메뉴의 접속.'
추측이긴 하다만.
이 효과를 누리려면 아마.
"내성으로 가보려고."
"음."
성주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 봐야 하지 않겠어.
* * *
작은 해자에 둘러싸인 건물.
작은 다리를 건너 열린 성문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웅장하구만."
정말 중세 귀족들이나 살법하게 생긴 내성.
안쪽에는 다양한 시설과 방들이 즐비해 있었다.
다른 곳도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 내가 살펴봐야 할 곳은 따로 있지.
내성은 요새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내가 향한 것은 그 내성에서도 중심부.
그곳에.
아주 넓은 방이 하나 있었다.
[지휘 통제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가 이 요새의 중심.
...아니.
다 좋은데.
"왜 하필 지휘 통제실이야."
지통실.
하필이면 특전으로 받은 요새에서도 지겨운 군대의 향취가 묻어나다니.
[성주의 권한이 확인되었습니다.]
[요새 관리 모드에 진입이 가능해집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거다.
관리 모드.
이 요새가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
여기서 확인해야 한다.
[요새 관리 모드에 진입합니다.]
그러자.
눈앞에 떠오르는 커다란 시스템 메시지.
[기동요새 - 비마나 (Lv. 1)]
[성주 - 신영준]
[외부 면적 = 1,000,000㎡]
[내부 면적 = 3,000,000㎡]
[현재 수용 가능 인원 = 1000]
[내구도 = 99873/100000]]
[...]
[...]
"상태창 같은 건가."
각성자들이 자신의 상태창을 볼 때와 비슷하다.
요새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모양.
그런데.
신경 쓰이는 게 몇 가지 있었다.
일단은.
"...왜 내부 면적이 외부 면적보다 넓어?"
그것도 3배나.
상태창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리는 없으니.
이 요새.
바깥에서 보이는 것보다 안쪽이 3배는 더 넓다는 거다.
'물리법칙 어디 갔냐.'
뭐, 내 입장에서는 요새의 면적이 넓다는 건 나쁠 게 없는 얘기.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데.
다음으로 신경 쓰이는 것은 이것.
요새의 이름 뒤에 붙어 있는 숫자 하나
[Lv. 1]
"...과연. 어쩐지 장막 안에서 본 것보다 작은 것 같더라니."
묘하게 각성자의 상태창하고 비슷하다 싶더니.
진짜 각성자들처럼 레벨까지 붙어 있었다.
"장막 안에서 본 요새는. 이보다 레벨이 높은 상태였지."
하도 정신이 없던 상태에서 봤기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분명 Lv. Max라는 글자를 많이 본 것 같다.
[그림자 장막]은 심상 속의 세계니까.
현실과 심상.
그 사이에 있던 공간.
이 비마나 역시.
잠재력이 최대한 해방된 상태로 구현되었단 거겠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나쁠 건 없었다.
'레벨을 올리면. 장막 속에서 본 것과 같은 모습이 된다는 거니까.'
문제는.
이 레벨을 어떻게 올려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는 건데.
그렇게 요새의 상태창을 읽다 보니.
아래쪽에 버튼 하나가 보였다.
[관리자 시점으로 전환]
관리자 시점이란 게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별생각 없이 그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자.
'...!?'
분명 방금 전까지 지휘 통제실에 있었는데.
내 시점이, 어딘가 높은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슬쩍 아래쪽을 내려다보자.
검회색 빛 건물들로 가득 찬 요새가 보였다.
"관리자 시점이란 게."
공중에서 이 요새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뜻이었어?
갑자기 시야가 바뀐 것은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이렇게 내려다보는 풍경.
무언가 익숙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략 모바일 게임.'
왜, 그런 거 있잖냐.
영지를 키우는 류의 모바일 게임.
나도 대학 다니면서 취미로 몇 번 해 보았다.
과금 유도가 심해진 순간 바로 접었지만.
딱 그런 류의 게임들에서 영지를 내려다보는 시점과 유사한 느낌이었다.
요새 곳곳을 흥분해서 돌아다니는 병사들의 모습도 보인다.
"응?"
그런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빈 공간이 왜 이렇게 많아."
이미 세워진 상태의 건물들도 많지만.
막상 상공에서 내려다보니, 어떤 건물도 세워지지 않은 공터들이 너무 많았다.
[그림자 장막] 안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저런 공터들은 없었을 텐데?
[건물터]
[원하시는 건물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시선을 집중한 순간 나타난 문구.
[원하시는 건물을 선택해 주세요.]
[훈련소]
[대장간]
[연구소]
[병영]
[감옥]
"...."
아무래도 이 요새.
완제품이 아니었나 보다.
"직접 건물을 지어야 한다니."
이렇게 된다면 나가린데.
몬스터 웨이브가 언제 우리를 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
건물을 지을 여유 같은 게 있었으면 요새를 강 위에 소환하는 도박수를 두지도 않았다.
심지어.
[주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전용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공병들이 건물을 짓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쯧."
그래도 지을 수 있는 건물들의 목록을 보니.
나름대로 그럴싸한 이름들이 몇몇 있긴 했다.
대장간 같은 건 지어주면 공병들이 좋아할 것 같고.
감옥...은 쓸 일이 없길 바라야겠지만, 또 모르는 일.
그런데.
그렇게 리스트를 내리던 와중.
한 건물의 이름이 내 눈에 띄었다.
[식당]
"...맞아. 이게 있었지."
그 이름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손.
[식당을 건설하시겠습니까?]
[Y/N]
정신 차리고 보니.
내 손은 YES 버튼을 향한 상태였다.
'아차!'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낼 수 있는 시설.
[식당]의 위력이 검증된 상태라고는 하나.
저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낼 수 있을 정도일지는 모른다.
'심지어 포인트까지 소모된다고 했는데...!'
제기랄.
하지만 어쩔 수 없잖냐.
내 직업이 요리사인데, 식당 건설을 어떻게 참아.
"취, 취소 버튼이...."
[식당의 건설이 시작됩니다.]
[소모 점령전 포인트 : 1000]
"...."
급하게 취소할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그딴 건 없었다.
건설이 시작된다는 문구와 함께, 소모되는 포인트.
...그런데.
"어?"
건설에 소모된다는 포인트.
그 이름이 조금 익숙한 것이었다.
[점령전 포인트]
"이거. 여기서 쓰는 거였어?"
점령전 포인트.
괴물을 쓰러트려서 얻는 일반적인 포인트와는 조금 다르다.
그 이름 그대로.
일정 영역을 점령하고, 그 점령을 유지함으로써 벌 수 있는 포인트.
점령지가 넓고, 오랜 시간 점령이 유지될수록 더 많은 포인트가 지급된다던가.
그리고.
건물 건설에 필요한 게 점령전 포인트라는 것은 즉.
"...큭큭."
우리 길드의 점령지는 [산맥]과 [소도시 (3)]
그리고 불과 몇 시간 전에 늘어난 [대도시 (2)]까지.
특히 [산맥]의 경우.
점령에 성공한 지 꽤 긴 시간이 흘렀거든.
그동안 점령전 포인트는 꾸준히 쌓이고 있었다.
도무지 어디에 쓰는 포인트인지 알 방법이 없다 보니.
그저 쌓이는 걸 지켜보기만 했었다만.
"내가 모바일 게임 할 때는 과금 유도 때문에 접었지."
돈 없는 대학생 시절이다.
건물 하나 지을 돈이 없어서 게임을 접어야만 했지.
하지만.
여기선 아니다.
'건물 하나를 짓는 데 들어간 게 1000포인트라.'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꽤 많은 양처럼 보이겠지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게.
점령전 포인트?
그거.
[소유 점령전 포인트 : 21873]
"차고 넘치거든."
131화 용아병 (1)
[식당을 건설합니다.]
[공병 1인이 차출됩니다.]
[대장간을 건설합니다.]
[공병 1인이 차출됩니다.]
[훈련소를 건설합니다.]
[공병 1인이 차출됩니다.]
[병영을 건설합니다.]
[공병 1인이 차출됩니다.]
[제1 포대를 건설합니다.]
[제2 포대를...]
....
...
점령전 포인트가 넘쳐 난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쓸모가 있겠다 싶은 이름을 한 건물들을 모조리 선택했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건물 건설 메시지.
"이래도 포인트가 남아?"
점령지를 유지한 시간이 상당히 길었으니까.
쓸모 있다 싶은 건물은 모조리 건드렸는데도 절반 남짓한 포인트가 남았다.
'[자율방어시스템]같은 건 없는 게 조금 아쉽지만.'
아무래도 요새의 레벨이 오른 뒤에야 해금되는 건물들이 있는 모양.
생각해 보면, 이름은 [기동요새]인데도 관련된 시설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요새의 레벨을 올리면 그런 기능들이 해금된다는 거겠지.
그런데 조금 신경 쓰이는 문구가 있었다.
[공병 1인이 차출됩니다.]
시스템에 나온 메시지.
무슨 의미일까 싶어진 나는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요새의 등장에 흥분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병사들.
멈칫.
그들 중 몇 명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제자리에 선 채 허공을 바라보는 녀석들.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난 건가."
각성자들이라면 꽤 익숙한 모습이었다.
뽈뽈뽈....
허공에 나타난 메시지를 읽는가 싶더니.
어딘가로 뽈뽈거리며 뛰어가는 녀석들,
얼굴은 안 보이지만, 아마 공병 각성자들이겠지.
피식.
"이렇게 보니까 조금 귀엽네."
가까이서 보면 다리털 숭숭 난 아저씨들인데 말이지.
그렇게 공터에 도착한 녀석들이 무언가 작업을 시작했다.
[식당 건설 중....]
[소요 시간 - 3시간]
[작업에 투입된 공병의 능력에 따라 보너스가 부여됩니다.]
"흠."
과연.
그냥 만들라고 한다고 공터에 뿅 하고 건물이 세워지는 게 아니란 거다.
요새의 건물 건설에는 공병이 일꾼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일꾼의 능력치에 따라 보너스가 부여된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겠지.
"새참이라도 해 줘야겠네."
건설에 필요한 시간은 3시간.
새참을 요리해서 가져다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새참이라니...!"
"감사함다!"
나는 공사 중인 현장들을 돌면서 열심히 만든 음식들을 전달했다.
음식을 먹는 동안 건설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불타는 열정의-]
"우오오오오!!!"
요리를 먹고 열정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는 공병들.
그 결과.
[식당 Lv.1이 완성되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일꾼의 열정과 재능이 빛을 발합니다!]
[완성된 식당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식당 Lv.2]
"...오."
그렇게.
모든 건물들이 2레벨인 상태로 완성되었다.
* * *
대충 요새에 대한 파악이 끝난 뒤.
나는 내성에 있는 거대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너... 부대원들하고 상의도 없이 건물들을 지어 대다니."
"헤헤. 식당이란 이름을 보니 흥분해서 그만."
"...잘했다."
회의를 주관하기로 한 민재 형이 말했다.
"요새가 생긴 덕분에 방어가 훨씬 수월해졌다. 특히."
그의 시선이 회의실의 창문 밖.
요새의 성벽 쪽으로 향했다.
[제1 포대 Lv.2]
[제2 포대 Lv.2]
[제3 포대 Lv.2]
성벽 위에 자리 잡은, 거대한 대포들.
"저런 방어시설이 특히나 유용하겠지."
넘치는 포인트를 통해 지을 수 있는 방어시설은 모두 올렸다.
요새가 완제품이 아니란 걸 알았을 때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결국 큰 차이는 없겠지.
탄약대대에 있는 전차들 역시 이쪽으로 옮겨 오는 중이다.
방어 설비는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갖춰진 셈.
다만.
그걸로 충분할 것 같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인력이 좀 부족해."
춘천에 있는 부대원들의 숫자는 200명 남짓.
"그 얘기 말인데. 일단 도시의 각성자들 일부가 협력 의사를 밝혀 왔다."
도시의 각성자들은 아직 평균적인 레벨과 수준이 낮다.
적들의 강함과 숫자에 대해서는 이미 경고를 마쳤으니.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도시의 각성자들은 대부분이 피난을 선택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소환된 요새를 보니 할 만하다 싶어졌겠지.'
나조차도 놀랄 정도의 요새였으니까.
약간의 대가만 제공해 준다면 방어에 협력하겠다고 접촉해 온 이들이 꽤 많았다.
그 대가야 대부분은 전투식량으로 때워질 터.
우리에겐 손해 볼 게 없으니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쁘진 않은데. 으음."
하지만 그래 봤자란 말이지.
아무래도 도시의 각성자들은 수준이 낮아도 너무 낮으니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약한 전력이 아니야.'
지금 필요한 건 정예 병력.
최소한 우리 부대 막내급은 될 만한 전력이 더 필요했다.
"어, 신 병장님?"
"어디 가십니까?"
다른 간부들이 방어 작전에 대한 회의에 들어갈 때쯤.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작전 같은 건 너희들이 더 잘 짜잖냐."
전투직들은 기본적으로 전투에 관한 센스가 높다.
게다가 김 중위 같은 [지휘관] 각성자도 있으니.
세밀한 작전 같은 걸 짜는 데 내가 낄 구석은 없겠지.
"난 내가 할 일을 해야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회의실에 앉아서 저 얘기를 듣는 것이 아니니까.
회의실을 나와 내성의 계단을 내려가자.
-정 방법이 없으시면 제가 좀 노력해 볼까요?
그림자 속에서 아리엘라가 말했다.
뱀파이어를 늘린다라.
'나쁘지 않긴 한데.'
그녀는 얼마 전에 남작으로 승작을 이룬바.
권속을 늘리기에 필요한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는 모르지만, 잘만 하면 최소 100마리는 늘릴 수 있겠지.
그 뱀파이어들의 평균 전력도 조금 더 올랐을 거다.
몇몇 제약이 있긴 하지만.
그걸 제외하면 평범한 각성자들보다 훨씬 강력한 전력이긴 한데.
"안 돼. 네 권속은 100명까지다."
뱀파이어들을 유지하려면 피를 먹여야만 한다.
지금은 몬스터의 피로 어느 정도 감당이 되지만.
숫자가 늘어나다 보면 감당할 수 없는 구간이 오게 되겠지.
게다가.
뱀파이어는 대부분이 약탈자와 같은 범죄자들을 '재활용'해서 만드는 전력.
"이 도시에는 그 정도로 범죄자가 많지도 않잖아."
-그렇긴 하죠. 이번 보충으로 사실상 씨가 말랐다고 봐야 할 거예요. 권속화 할 수 있는 괴물의 양도 많지는 않구요.
적어도 이 도시에서, 각성자들은 우리 부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부대 근처에서 범죄를 저지를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얼마 없다는 것.
다른 지역으로 떠나간 각성자들이 약탈자로 변모했을 가능성은 있겠지만.
적어도 이 근처에는 재활용할 만한 쓰레기가 많지 않다.
-꼭 범죄자만 권속으로 만들어야 하나요. 필요하시다면 조금 약한 인간들을 데려다 권속으로 만들기만 해도 효율이....
"굶고 싶냐?"
-....
뱀파이어가 된다는 건 사실상 죽음보다 더한 형벌.
죄 없는 사람까지 뱀파이어로 만들 생각은 없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구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방법이... 없지는 않지"
-네?
"나도 확신이 없는 방법이라는 게 문제다만."
이번에 요새 안에 지은 건물들.
그 건물 중.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병영 Lv.2]
병영.
군대식으로 해석하면 그냥 병사들이 머무는 건물이다만.
이 세상의 법칙이 반쯤 게임처럼 변해 버렸단 말이지.
그리고 게임에서 [병영]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하나.
'병력을 뽑아내는 시설.'
* * *
회의실을 나선 나는 병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설 중이던 병사에게 새참을 나눠 줄 때.
병영에도 한 번 들른 적이 있었다.
당시의 감상은 간단했다.
'이딴 게 병영이라고?'
뚜벅....
내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내성의 지하.
요새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내성 지하 1층.
그곳에.
자그마한 제단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병영 Lv.2]
이 제단이 바로 병영.
제단의 한 가운데에는 무언가를 올려놓거나 할 수 있는 커다란 그릇이 하나 있었다.
그 그릇을 중심으로 세워진 제단.
제단의 뒤에는 기묘한 무늬가 새겨진 커다란 문이 하나 있었다.
이 시설을 만든 공병에게도 얘기해 봤다만.
자기도 머릿속에 떠오른 설계도를 따를 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이런 형태인지는 모른다던가.
"병영이라기보단... 뭐랄까."
악마 소환의 제단.
뭐, 그런 느낌이란 말이지.
아무튼.
나는 제단의 중심에 있는 고상한 무늬의 그릇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영 Lv.2가 활성화됩니다.]
그러자 눈앞에 나타나는 문구.
[요새에 귀속된 병사의 소환이 가능해집니다.]
[현재 귀속된 병사 : 0/200]
[병사의 소환이 멈춰 있는 상태입니다.]
[소환에 필요한 매개체를 등록해 주세요.]
마지막 한 줄의 메시지를 보자.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뭐야 그게.
양심적으로 시설을 지었으면 병사는 공짜로 나와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매개체 같은 게 있을 리가 없...."
어이가 없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자니.
[소환에 사용 가능한 매개체가 {1} 감지됩니다.]
[용의 이빨]
"...지 않나?"
소환 가능한 매개체가 있다는 메시지.
'용의 이빨.'
이제는 꽤 오래됐지만.
비마나와 비슷한 시기에 얻었던 보상이다.
"분명... 인간종 최초로 길드를 만들었을 때."
최초의 길드 창설 보상.
당연히 이것도 활용하려고 여기저기 시도를 해 보았다.
박씨 할아버지에게 건네준 적도 있었지만, 가공에는 실패.
내가 요리하기에는 너무 고급 재료 같아서 건들지도 못하고 있었다만.
'업적의 내용만 보면 비마나하고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물건이야.'
어차피 쓰지도 못하고 있던 것.
나는 용의 이빨을 그릇 위에 올려 보았다.
[매개체 - '용의 이빨'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소환 병력 - 용아병 x10]
[용아병]
[강력한 힘과 함께, 그에 못지않은 탐욕을 지닌 용족.]
[그들이 자신의 보물 창고를 지키기 위해 창조한 병사들입니다.]
[강대한 힘을 지닌 용의 이빨로 만들어진 용아병들은, 용들이 자신들의 창고를 믿고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최고의 수호자들입니다.]
[보물 창고를 지키기 위해 탄생한 병사들인 만큼, 무언가를 방어하기 위한 전투에서 높은 효율을 자랑합니다.]
[용아병들은 절대 지치지 않습니다.]
[파괴되기 전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오."
용아병이라는 녀석에 대한 설명은 결코 길지 않았으나.
강대한 힘을 지닌 용의 이빨이니.
최고의 수호자들이니.
엄청나게 강한 놈이란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업적의 내용만 고려하면 비마나와 비견될 만한 아이템이 용의 이빨.
저 용아병 10체는, 이 거대한 요새에 비견될 만한 전력이라는 뜻이다.
"그래도 조금 아쉽네."
강력한 전력이란 건 알겠는데.
아쉬운 점이 딱 하나.
[주의!]
[소환에 사용된 매개체는 즉시 소멸됩니다.]
"이거 일회용이었냐?"
[용의 이빨]을 사용해 용아병 10체를 소환할 경우.
저 귀한 아이템이 그대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
'아무리 강한 전력이라고 해도 그렇지. 10마리가 전부라고?'
아니.
강하다는 것도 시스템 메시지가 그렇게 설명해 줬을 뿐.
실제로 얼마나 강한지는 보지도 못했다.
10마리의 용아병.
만약 그중 반 정도가 이번 몬스터 웨이브에서 파괴되기라도 한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터.
"쓰읍. 그건 너무 아까운데."
그렇다고 다른 방법을 떠올리자니.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 내 보았음에도, 마땅히 떠오르는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네."
최대한 이 10마리가 강한 놈들이기를.
부서지지 않고 오래 쓸 수 있기를.
그렇게 기원하며, 그릇 안에 이빨을 떨어트리려던 순간.
"신 병장님! 여기 계셨습니까?"
"응?"
누군가가 내성의 지하 계단을 내려와 내게 말을 걸었다.
"광일이? 웬일이야."
전광일 상병이었다.
회의에 참가 중이었을 텐데 여긴 또 왜.
"하하. 이제 막 회의가 끝난 참이라서요. 회의 결과를 보고드리려고 왔슴다."
"아아. 나중에 보고해도 상관없는데."
"신 병장님이 우리 대장인데 말도 안 되죠... 음?"
작전 회의를 끝내고 결과를 보고하려고 찾아왔다는 녀석.
그런데.
광일이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물건에 향했다.
"손에 드신 그건 뭡니까?"
"아, 이거. 예전에 얻은 아이템인데-"
"뼈같이 생겼는데. 그걸로 뭐 요리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저 그릇은 냄비 같은 거구요?"
"...."
용의 이빨.
상아색의 이빨은 슬쩍 보면 뼈같이 생기기도 했으니.
오해할 수도 있긴 했다.
"그런 건 아니고. 이 녀석을 사용해서... 음?"
아니.
잠깐만.
뼈라고?
'...많이 비슷하긴 하지.'
이빨.
그리고 뼈.
예전에 지나가면서 듣기로는, 이빨과 뼈의 구성 물질은 굉장히 비슷하다고 했다.
뼈로 구분되지 않는 이유도 일단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당히 유사한 개념이라고.
그리고 뼈라고 한다면....
"광일아."
"예?"
"너 천재냐?"
"...???"
의아해하는 전광일 상병.
난 녀석을 뒤로한 채 계단을 올라 내성 밖으로 향했다.
"신 병장님! 일단 보고는 받으셔야...!"
"나중에!"
뒤에서 광일이 녀석이 뭐라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일에 비하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얘기일 것이라고.
내성 밖으로 나와 내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당연히.
[식당 Lv.2가 활성화됩니다.]
[요리사의 숙련도에 보정이 가해집니다.]
[요리의 결과물에 보너스가 추가됩니다.]
식당이었다.
내가 보자마자 건설 버튼을 누르게 만든 시설.
이미 한 번 들른 적이 있어서 알고 있다만.
이 내부는.
"완전 취사장처럼 생겼지."
거창한 요새 안쪽에 세워진 식당.
안쪽은 평범한 군대의 취사장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대단한 레스토랑의 식당도 딱 보기에는 급식실과 비슷해 보이는 법이니까.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
식당 안에 있는 다양한 요리 도구들에도 시선이 갔지만, 최대한 무시하고.
내가 바로 발걸음을 옮긴 곳은 거대한 국솥의 앞이었다.
못해도 백인분의 국을 끓일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솥.
"영차."
나는 그 안에 한가득.
물을 쏟아부었다.
이빨과 뼈의 성분은 굉장히 유사하다.
그리고, 이만한 크기의 뼈라고 한다면.
"국 끓이기엔 딱이거든."
조금 국물이 옅긴 할 텐데... 뭐.
군대 요리가 다 그런 거 아니겠어!
132화 용아병 (2)
꽤 불합리한 세상이 돼 버리긴 했다만.
일의 난이도와 보상의 정도는 언제나 비례했다.
용의 이빨.
획득할 때의 업적 내용을 보면 허접한 아이템일 가능성은 우선 없다고 봐도 되겠지.
이를 통해 소환 가능한 10체의 용아병이란 녀석들도 상당히 강력할 거다.
하지만.
'양이 너무 적어.'
고작 10마리를 소환하고 끝이라니.
한 마리라도 죽는 순간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는 셈이다.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긴데.
군대에서 가끔 이런 일이 생길 때가 있다.
'담당 병사의 실수로 요리에 필요한 재료가 적게 오거나 하는 경우.'
재료의 양이 적으면 당연히 문제가 되긴 한다만.
그런 사고를 해결하는 임기응변이야말로 현장 취사병의 능력이다.
"재료는 적게. 물은 많이."
좀 많이 밍밍해지긴 할 텐데, 뭐 어쩌겠냐.
자고로 군대 밥은 질보다는 양.
맛은 별로여도 양은 충분해지는 취사병의 꼼수란 거다.
솥에 가득 찬 물.
난 [용의 이빨]을 쥔 손을 그 위에 올렸다.
그러자.
[주의!]
[격이 높은 식재료입니다.]
[재료에 비해 요리사의 경지가 낮습니다.]
[요리를 시도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문구구만."
나름 요리 실력에 자신이 붙은 나지만.
그래 봐야 아직 [중급 요리사]란 거다.
이름부터 거창한 재료들을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
하지만.
여긴 다름 아닌 [식당].
[Lv.2 식당]
[요리사의 숙련도에 보정이 가해집니다.]
탄약대대 시절.
박씨 할아버지와 공병들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공방]이라는 시설을 지으면 그들의 작업과 작업물에 보너스가 더해진다던가.
'자기들이 만든 공방은 어디까지나 임시 공방일 뿐, 제대로 된 공방은 아니라고도 했지.'
그 제대로 된 시설이란 거.
이렇게 점령전 포인트를 지불해서 만들어진 시설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공방을 통해 보너스를 받는 다른 생산직들과 마찬가지.
이 식당이라는 시설의 보조를 받는다면, 내 요리 실력은 한 단계 향상된다.
[식당 Lv.2의 숙련도 보정이 부여됩니다.]
[격이 높은 식재료에 도전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주의!]
[희귀한 매개체입니다.]
[요리 재료로 소모할 시, 다시는 복구할 수 없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피식.
"옛날이면 손을 뺐을 수도 있겠네."
이런 딱 봐도 대단해 보이는 재료.
그걸 고작 요리에 쓴다니.
예전이었으면 아깝다는 생각에 기겁하며 손을 뺐을 것이다.
이제는 아니다.
'요리라는 행위가 가진 잠재력은, 내 생각보다도 더 대단하거든.'
얼마 전의 사건들을 통해 그것을 확인한 지금.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퐁당.
끓는 물 속으로 용의 이빨을 넣었다.
"으음. 이것만으론 좀 부족한데."
사골국이라는 게 뼈 넣고 끓인다고 전부가 아니다.
뭐 군대에서야 캔 하나 까서 넣으면 끝이었다만.
제대로 만들려면 온갖 약재들로 잡내를 잡아주는 등의 과정이 필요하겠지.
약재라.
"...괜찮은 게 있잖아?"
그림자를 열어 안쪽에 있는 상자 하나를 꺼낸다.
얼마 전.
탄약대대를 떠날 때, 농부 각성자 철욱이 건네준 상자.
그 안에는.
[쿠스락의 뿌리]
[레이디올 잎]
처음 보는 이름의 각종 식물들.
마력이 담긴 이계의 식재료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중요할 때 쓰려고 아껴두고 있었는데 말이지."
설마 벌써 쓸 곳이 생길 줄이야.
[식재료 감별]
[레이디올 잎]
[신선도 - 상]
[특유의 향이 있어 호불호가 갈리는 재료입니다.]
[그 자체만으로 요리에 쓰이는 경우는 많지 않으나, 잡내를 제거하거나 다른 요리에 곁들여 먹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다른 식재료의 마력을 복돋아 주는 효과가 있어 건강식으로도 자주....]
나는 그중에서도 이번 요리에 쓸 만해 보이는 물건들만을 따로 선별한 뒤.
깨끗이 세척하고 손질하여 솥에 같이 넣어 주었다.
"...후우!"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뿐.
중간중간 거품이 올라오는 걸 걷어 주면서 국물이 우러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요리가 완성되었습니다!]
[요리사의 수준에 맞지 않는 고급 식재료를 요리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 *
나는 완성된 요리를 들고 [병영]을 향했다.
이름에 걸맞지 않게 생긴 제단.
그 한가운데 있는 그릇 위로 완성된 요리를 올렸다.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상아빛의 액체.
[중급 요리사의 드래곤투스 스프]
[용의 이빨을 우려내어 만든 국물 요리입니다.]
[용의 마력이 진하게 스며들었으며, 다양한 약초들로 인해 마력의 질이 크게 상승하였습니다.]
완성된 요리는 꽤 훌륭한 물건이었다.
먹는 용도가 아니라서 문제지.
먹는다면 엄청난 버프를 얻을 수 있을 것이 확실한 음식.
문제는.
"한 그릇뿐이라."
본래 계획대로라면 양이 좀 더 많아야 했다.
하지만 요리가 완성되기 직전.
그 많던 물이 갑자기 한 번에 졸아들더니, 이렇게 한 그릇 정도의 양으로 줄어들어 버렸다.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긴 한데. 뭐 상관없나?"
내 [요리]도, [용의 이빨]이라는 재료도.
아직 밝혀진 게 적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중요한 것은 하나.
이렇게 요리로 바뀌어 버린 녀석도 소환의 매개체로 작동하냐인데....
난 조심스럽게 요리를 들고 그릇에 접근했다.
그러자.
[매개체가 확인됩니다.]
[드래곤투스 스프]
[소환 병력 - 열화 용아병x200]
"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잘 넘어간 것 같다.
요리를 했더니 매개체로 사용될 수 없다거나 하면 말짱 도루묵이었으니까.
"숫자가 20배로 늘어나고. 대신 전투력이 조금 떨어졌나 보네."
기존에는 용아병을 10마리 소환할 수 있다던 [용의 이빨]
이걸 요리했더니, 열화 용아병 200마리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병영 Lv.2]
[병력 : 0/200]
200마리라면.
정확히 Lv.2 병영이 소화할 수 있는 최대치.
양을 불린다는 소기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 셈.
"질이 떨어진 건 조금 아쉽긴 하다만."
이대로 소환을 해도 꽤 훌륭한 전력이 되어 주겠지.
하지만.
"10마리의 용아병에서, 200마리의 열화 용아병이라."
숫자만 늘어났을 뿐.
아마 총합 전력 자체는 큰 차이가 없을 확률이 높다.
요리에 들어간 약초들을 생각하면 이쪽이 조금 더 강할 수도 있다만....
씨익.
"이 정도로는 만족 못 하지."
난 가볍게 웃으며 요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 이빨을 굳이 요리하기로 선택한, 진정한 이유는.
바로 이것
"오병이어."
[스킬 - 오병이어]
[빵 다섯 개와 두 마리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인 기적의 일화를 아십니까?]
[이제 당신에게는 기적이 아닌 현실입니다.]
완성된 요리를.
복사하는 능력.
물론, 생각만큼 쉽게 되지는 않았다.
[격이 높은 요리입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됩니다.]
지난번.
던전 공략 당시, 다스무르의 교황을 요리했을 때도 같은 메시지가 나왔었다.
지나치게 격이 높은 요리는 복사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힘.
상당히 기합으로 가득찬... 치트.
혹은 핵.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신력 : 2]
['2'의 신력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합니다.]
요리사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일은, 아마도 1의 신력만으로는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지금 내 신력은 이현진을 인간으로 만들면서 2에 도달한 상태.
[스킬 발동이 재개됩니다.]
[복사할 양을 선택해주십시오.]
이 정도 불가능은.
가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거다.
"내 신력과 마력이 허용하는 한, 최대로."
[적용 중인 요리의 효과 - 4]
이때를 위해.
미리 마력을 올려주는 요리를 잔뜩 퍼먹고 왔다.
[스킬이 발동합니다.]
빵 다섯 조각.
두 마리 물고기.
이를 통해 수천을 먹인 기적.
신화에서나 다뤄질 법한 기적이.
내 손 아래에서 실현된다.
몸 안의 마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들고 있던 요리를 그릇 안으로 흘려 넣었다.
재단 중심에 세워진 고풍스러운 그릇.
그 안을 상앗빛의 액체가 채워 나갔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상앗빛 액체.
이를 끝없이 받아들이는 제단의 그릇.
그릇이 가득 차 넘쳐 흘러야 할 정도의 양이 들어갔음에도.
그릇은 넘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쿨럭."
[주의!]
[마력의 소모가 극심합니다!]
[상태 이상 - 마력탈진]
내 몸 안의 마력이 모두 고갈되자.
흘러내리던 상앗빛 액체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병영 Lv.2]
[열화 용아병의 생산이 시작됩니다.]
[개체당 소요 시간 : 3시간]
[생산 대기 병력 계산 중....]
[계산 중....]
병영의 제단 뒤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문.
그 문의 틈새 사이로, 커다란 빛이 새어 나온다.
[계산 완료.]
[헤아릴 수 없음.]
이윽고.
열린 문 사이로, 갑옷을 입은 형체가 한 명씩 걸어 나오는가 싶더니.
철컥.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병영 Lv.2]
[1/200]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