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네놈!]
"그래, 그래. 형 왔다."
원하는 특성을 적용시키는 데 성공한 직후.
나는 병사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녀석의 앞으로 다가갔다.
몸이 부서져 가는 와중에도, 주변에 두른 새하얀 빛무리 덕일까.
묘하게 신성한 분위기가 감도는 괴물.
[도망쳐도 모자랄 마당에. 겁도 없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나다니!]
내가 동족을 요리했다는 사실로 인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듯.
분노한 녀석이 나를 향해 주먹을 뻗어 오고.
나 역시.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방금 얻은 특성을 사용했다.
[수속성 지배]
파도의 위력을 강화하고.
물을 모아 거대한 창으로 만들고.
...이 도시를 수몰시킨 힘.
"어...?"
"괴물 녀석 주변의 물이."
도시 전체를 덮은 물.
그 물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거인의 주변 일대만.
"이, 이건 설마."
"모세의...?"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게 들렸지만.
아쉽게도 그런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죽겠네, 제기랄.'
[수속성 친화]도, [수속성 저항]도 아니다.
[수속성 지배].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특성.
이제 잠깐 사용했음에도, 온몸의 마력이 쥐어 짜내지는 게 느껴졌다.
[네 놈이 어떻게 내 힘을...?]
자신의 능력이 내 손에서 고스란히 사용되자.
제아무리 대단하신 양반이라도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나를 요리한 것인가...? 하지만. 그럴 만한 격이 되지 않을 텐데 어떻게.]
뭐,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았지만.
작전은 간단하다.
[내게서 물을 앗아갈 셈인가.]
창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겠지. 물 위로 나오면 숨도 제대로 못 쉬잖아, 네놈들은.'
저 녀석들.
물고기 같은 생김새대로.
기본적으로 물속에서만 생활하는 종족이란 말이지.
'지원 병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군에게 줄 수 있는 버프량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잖아.
"네 녀석이 약해지면 되는 거지."
[어리석긴.]
[특성 - 수속성 지배가 간섭받고 있습니다.]
"어, 물이 다시...!"
내가 기껏 제거한 물이 다시 제 자리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내가 놈에게서 가져온 특성, [수속성 지배].
그리고 녀석이 원래 가지고 있던 특성, [수속성 지배].
두 특성이 격돌한 것.
[애초에. 이 힘은 본래 나의 것.]
녀석의 말대로.
나도 나름대로 온갖 버프를 둘러서 능력치를 뻥튀기시키긴 했다만.
[수속성 지배] 간의 힘 싸움으로 간다면, 원본인 저쪽을 이길 수가 없겠지.
다만.
"애초에 혼자였으면, 이딴 싸움 안 걸었어."
[뭐라?]
그 순간.
"방울아!"
[...!]
진형의 후열에 있던 이들이 앞으로 나왔다.
정수아.
물의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
그녀가 정령을 이용해 교황 근처의 물의 지배권을 강탈하려 들고.
"저희도 가세하겠습니다!"
거기에 수속성 마법에 특화된 마법사들 역시 가세했다.
'혼자서 딸리면 숫자로 밀어붙인다.'
이렇게 하더라도 물에 대한 지배권은 녀석이 우위겠지.
하지만.
지금은 한창 전투 중이란 말이지.
"크륵!"
[벌레 같은 것이...!]
광기를 해방한 전광일 상병의 공격.
거인의 몸이 살짝 주춤거렸다.
그 짧은 순간.
[특성 - 수속성 지배에 대한 간섭이 약해집니다.]
거인 주변의 물이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녀석은 공격해 오는 부대원들을 계속해서 상대해야 한다.
거기에다가 이제는 물에 대한 지배력 경쟁까지 신경 써야 할 테니.
아마 죽을 맛이겠지.
[특성 - 수속성 지배에 대한 간섭이 약해집니다.]
[크윽....]
점점 우리 쪽으로 우위가 넘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결국.
-...커허억!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
숨을 쉬지 못하는.
질식 현상이었다.
* * *
쿠우웅....
거대한 어인의 몸체가 힘을 잃고 쓰러진다.
'숨을 못 쉬는 상태에서도 몇 분을 더 버티면서 싸울 줄이야.'
주변의 물을 모두 제거한 결과.
중간부터 숨을 쉬지 못하게 된 녀석이었으나.
그 상태에서도 꽤 긴 전투가 이어졌다.
결국 승자는 우리 쪽이었지만.
"...."
그리고.
쓰러진 거인을 향해 한 남자가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창을 쥔 남자.
긴 전투 끝에 우리 부대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절하거나 부상을 입고 전선에서 이탈했으나.
창수만은 끝까지 전투에서 이탈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싸웠다.
그가 손에 쥔 창을 높게 치켜들고 중얼거렸다.
"뒈져라...!"
거인의 약점인 아가미를 향해 내리꽂히는 창.
팍!
"...이게 뭐 하는 짓이오?"
그 창을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과연. 숨통은 직접 끊겠다, 뭐 그런 건가.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난 내 눈으로 이 녀석이 죽는 걸 보기만 하면 그만이니."
아쉽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잠깐 시도해 볼 게 있어서."
창수와 그의 그룹원들은 어인들에 대한 복수심 하나만으로 살아온 이들.
여기서 창을 찔러 넣어도 복수는 그럭저럭 마무리될 것이나.
이만큼 강력한 괴물.
"정확히는, 먹여볼 게 있거든."
그냥 죽이기엔 너무 아깝잖냐.
109화 깊은 자들의 교황 (2)
"잠시 물러나 계십쇼."
"...."
창수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으나.
내가 앞으로 나서자 군말 없이 몸을 비켜주었다.
복수를 위해 살아온 인물인 만큼 괴물의 숨통을 직접 끊고 싶은 마음이 꿀뚝 같겠지만.
이번 전투에서 가장 활약한 건 우리 부대원들이니까.
"마무리를 지을 권리는 그쪽에게 있겠지."
뭐, 그런 거다.
난 물속에 쓰러져 있는 거인에게 다가갔다.
시체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거인.
설마 기절한 건가 싶어서 얼굴을 가져다 대자.
[훌륭하도다.]
깜짝이야.
시체처럼 굳어서 미동도 없던 녀석의 목소리가 갑자기 머릿속을 울렸다.
정작 쓰러져 있는 녀석의 입은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 내 육신은 이미 일어날 힘을 잃었으니.]
음.
상태를 보면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 녀석 특성 중에 정신 언어란 게 있었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와중에도 이렇게 대화를 걸 수는 있는 모양.
[작은 벌레야. 꽤 재주가 다양하구나.]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큭큭. 지난날 내 몸을 태운 힘은 뭐라고 하는가.]
"...?"
[물속을 타고 들어온 공격 말이다.]
아.
"번개를 말하는 거냐?"
[그래. 그 현상은 번개라고 하는가. 나의 고향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현상. 죽기 직전에 새로운 걸 배우는군.]
이계에서 온 괴물들.
이 녀석의 세계에는 번개라는 현상 자체가 없었던 건가.
'과연. 이만한 괴물이 미처 대처하지 못할 만도 하네.'
존재 자체를 모르는 현상에 대응책을 가지고 있는게 이상한 일이니까.
"질문에 대답해 줬으니, 나도 하나 묻자."
[음?]
"넌... 아니, 너희 괴물들은 왜 이 세상을 공격해 오는 거지?"
나름대로 진지한 물음이었으나.
[침략이라. 그 말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군.]
녀석의 대답은 영 애매한 것이었다.
"또 말장난이나 하자는-."
[어디까지나 진실을 말하고 있음이라. 굳이 따지자면... 나는 침략자가 아닌 난민에 불과할지니.]
난민이라고?
"던전의 영역을 그렇게 넓혀 놓고 침략이 아니라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 부분에는 대답할 수 있겠군. 아이들을 위함이었다.]
녀석의 대답에.
뒤에서 창을 쥐고 지켜보고 있던 창수가 눈을 크게 뜨며 다가왔다.
"생선 대가리. 그건 무슨 의미지?"
[너희도 보지 않았는가? 이 공간의 곳곳에 퍼져 있는 동족의 아이들을.]
아이들이라니.
...설마.
"다른 어인 놈들을 말하는 것 같군."
[그렇다. 작고 왜소한 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던가.]
작고 왜소하다니.
유체라는 녀석들도 성인 남성만 하고, 아성체란 녀석들은 2m가 넘어갔다.
5m가 넘어가는 이 녀석한테는 그 정도 크기도 왜소한 건가.
[우리 종족은 성장하기 위해선 넓은 공간이 필요함이라. 더 넓은 물일수록 더 크게 자라날 수 있지.]
이거 그건가.
물고기들이 바다에서는 크게 자라고 수조에서는 일정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하는 현상.
[최대한 힘을 쥐어짜 이 도시를 모두 덮어 보았으나. 그럼에도 너무나도 비좁았음이라.]
그러고 보면.
눈앞의 이 거인은 5m에 달하는 크기.
그다음으로 컸던 건 2m에 달하는 아성체.
중간이 없긴 하군.
[없는 힘을 끌어모아 이 세계를 굽어보았노라. 그나마 많은 물이 고여 있는 공간이 보였으나... 그마저도 모자라.]
아마 이 녀석이 말한 곳은 바다겠지.
그런데 바다로도 모자라다는 건.
[동족의 아이들이 정상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이 행성 표면을 모두 덮을 필요가 있었다.]
"...허."
이러니저러니 말은 많았지만.
결국 이 던전의 영역을 세상 전체까지 넓히려고 했다는 거다.
나로서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아이들을 위한 거였다고?"
창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가 당황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저 지하철의 던전.
그곳의 보스가 모성애를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도 꽤 마음이 복잡했으니까.
[실패한 것이 아쉬울 뿐. 후회는 없다.]
"그럼 다음 질문은."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으나.
[벌레야. 너는 나를 괴물이라 부르지만, 내겐 너야말로 동족의 아이들을 잡아먹은 괴물로 보이노라.]
"...."
[방금의 이야기는 번개라는 현상에 대해 알려준 대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상을 알려줄 의무 따위는 없겠지."
과연.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내 재주가 꽤 다양한 것 같다고 했던 녀석.
그렇다면.
'가장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지.'
난 녀석의 얼굴 부분으로 다가간 뒤.
그 커다란 입을 살짝 벌렸다.
[무얼 할 셈인가.]
녀석의 질문에 굳이 답할 필요는 없겠지.
벌려진 입 안에, 내가 가져온 요리를 집어넣었다.
[중급 요리사의 극한의 행복이 담긴-]
전투식량으로 제조된 요리긴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전력을 다해서 만든 요리.
'이 거인. 엄청 강했단 말이지.'
그런 괴물을 그냥 죽이는 건 좀 아깝잖냐.
이미 아리엘라 같이 요리로 굴복시킨 괴물의 사례가 존재한다.
'이 녀석도 비슷하게 부하로 들일 수만 있다면.'
가지고 있는 정보도 얻을 수 있을 테고.
강한 병력을 손에 넣을 수도 있을 테니 일석이조.
그런데.
[흐음.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하구나.]
"...어?"
뭔가.
반응이 영 미적지근했다.
[갑자기 요리를 먹인 저의는 무엇인가? 그대들만의 장례 방식인가.]
"그... 요리를 먹고 나니까 엄청나게 행복하다던가. 그런 기분 안 드나?"
[전혀.]
녀석의 대답에 조금 당황한 그 순간.
띠링.
[대상의 입맛이 너무 높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요리의 효과가 먹히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시스템 메시지.
[고급 요리를 자주 맛보며 입맛이 극한에 달한 대상입니다.]
[대상의 입맛에 비해 요리의 격이 낮습니다. 효과가 감소되어 적용됩니다.]
"입맛이 너무 높다고...?"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 그대는 내 지위를 아는가?]
지위라니.
이 녀석을 [식재료 감별]로 살펴봤을 때 나온 이름은 분명.
"교황이었지?"
[최고의 요리를 매일같이 맛보았노라. 네 요리는 못 먹겠다 할 수준은 아니나. 내 전속 요리사가 해주던 것에 비하면 맛이 좀 떨어지는군.]
...이 새끼가.
내 요리를 먹고 이런 반응을 보인 경우는 처음이었다.
최근 들어 요리사로서 자존심이 꽤 올라왔으나.
그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가 생겨 버렸다.
"너 딱 기다려. 이건 대충 만든 요리고, 내가 제대로 힘줘서 만들면...."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요리를 먹여 버리고 싶었으나.
[요리 효과 적용률 - 5%]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발이 주춤한다.
'5%라고?'
그럼 뭐야.
이 녀석의 입맛을 맞추려면 내 요리가 지금보다 20배는 맛있어져야 한다던가.
뭐 그런 건가?
'차이가 너무 크잖아.'
생각해 보면.
내 직업은 [중급 요리사].
처음 요리사로 각성하면서부터 요리로 온갖 일을 다 해왔다만.
등급으로 쳤을 때, '중급'이라는 명칭은 그렇게 높은 느낌은 아니다.
요리를 통한 버프에 대해 알고 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네 세계에는. 나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요리사가 존재했던 거군."
그에게서 요리를 대접받은 결과.
입맛이 높아진 녀석은 내 요리 따위 통하지 않은 거고.
...고기를 안 먹는 종족 같은 건 겪어봤지만.
이런 이유로 내 요리가 먹히지 않는 경우도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과연.... 의도를 이해했다. 귀여운 장난이었노라.]
"큭."
[요리사로서의 경지는 얕으나. 이래저래 재주가 많은 것 같구나. 요리를 본격적으로 배운 지 얼마나 되었지?]
그러나.
요리의 효과는 크지 않았을 것임에도.
나를 대하는 녀석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뭐지?'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어, 2년 조금 넘었지."
취사병이 되고 처음 배우기 시작했으니까.
각성자가 된 뒤의 기간만 따지면 1년도 안 되겠지만.
[흠! 2년이라?]
내 대답에 녀석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고작 2년에 그 정도 경지라니. 훌륭한 재능이다. 작은 벌레는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지라.]
"급하게 생각하지 말라니, 뭘...."
[요리의 경지. 네가 가지고 있는 의문. 모두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게 될 일이니.]
뭐야.
결국 제대로 알려주는 건 하나도 없는 건가.
[그럼에도 한 가지 조언을 해 주자면.]
"...?"
[시간이 갈수록 적들은 더욱 강대해질 것이라. 미리 대비하는 것이 좋겠지.]
커허....
그렇게 말을 마친 녀석의 몸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고통스럽구나. 이제 그만 끝내다오.]
녀석의 말에.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냥 식인 괴물들이 아니었다니."
녀석의 숨통을 끊을 생각에 흥분했었던 창수였으나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여러모로 바빠 보였다.
그래 뭐.
가는 길 정도는 쉽게 보내줘도 되겠지.
양손에 식칼을 나눠 쥔 뒤.
거인 녀석의 아가미에 찔러 넣었다.
스윽....
이 녀석들의 약점 부위.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장기들이 부드럽게 베여 나가고.
[벌레야.]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
녀석의 정신이 마지막 말을 건네왔다.
[맛이 썩 훌륭하진 않았으나.... 간만에 그럭저럭 기분 좋은 음식이었노라.]
녀석의 몸 안을 맴돌던 기운이.
내게로 쏟아져 왔다.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깊은 자들의 교황'을 처치하였습니다.]
[한 종족의 수장을 처치하셨습니다.]
[업적 - 킹 슬레이어의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3/3)]
[인간종 최초로 종족 수장급 개체를 다수 제거하였습니다.]
[앞서가는 이를 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특성 강화권]
[칭호 - 왕 시해자]
[특성 - 전투력 측정]
'미친.'
달성 조건이 미친 듯이 까다로웠던 칭호.
그래서일까.
달성으로 인한 보상이 무려 세 가지나 주어졌다.
'특성 강화권은 저번에도 받은 적이 있으니 익숙하다만....'
눈길이 가는 것은 그다음.
[칭호 - 왕 시해자]
[여러 종족과 문명의 수장이 당신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직 살아있는 모든 지도자들은 당신을 보면 영문 모를 공포감을 느끼며, 당신을 보고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의 목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다시금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왕의 위엄은 더 이상 당신에게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모든 스탯이 30% 상승합니다.]
[지도자급 개체를 상대로 하는 모든 종류의 효과가 100% 상승합니다.]
[피어 계열의 스킬, 특성에 대해 완전 면역을 획득합니다.]
안 그래도 깡 스탯이 어마어마했던 내게는 큰 의미를 가지는 능력치 상승이었다.
게다가.
'모든 효과가 100% 상승한다니.'
종족 지도자 급의 개체에 한해서는 내 모든 능력이 2배가 된다는 것.
교황을 대상으로는 내 요리의 효과가 5%밖에 적용되지 않았지만.
이 칭호가 적용되는 상태였다면 10%로 적용됐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별 거 아닌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성 - 전투력 측정]
[많은 종족을 만나고 그들의 피를 거둔 결과, 당신은 대략적으로나마 각 종족의 강함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 종족이 가지는 잠재력과 강함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해당 특성이, 특성 - 식재료 감별의 하위 효과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신 병장님!"
"나와 보십쇼!"
건물의 바깥에서 부르는 소리에 밖으로 나온 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쩌적....
어두운 하늘이 부서지고.
그 사이사이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던전이 닫히고 있다.'
가슴팍까지 차올랐던 물 역시 어디론가로 사라져가고.
이윽고.
[이계 던전 - 다스무르를 클리어하셨습니다.]
[방랑하는 세계의 파편을 수습하는 데에 성공하셨습니다.]
[공헌도에 따라 보상이 주어집니다.]
[공헌도 - 최상]
[조각난 세계의 정수를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직업 확인 중.... 요리사.]
[보상을 선택해주세요.]
* * *
춘천 시내 전체를 뒤덮고 있던 던전.
그 던전이 클리어되자, 도시는 이전의 모습으로 어느 정도 돌아왔다.
가장 번화했을 중앙부 근처의 건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이상한 신전 같은 게 세워졌다는 것 정도가 조금 다른 점일까.
다만.
그렇다고 평화로운 도시가 된 것은 아니었다.
-크라악!!!
"제기랄!"
"이 녀석들은 또 어디서 나타난 거야."
커다란 야생견처럼 생긴 괴물이 도시의 시민을 덮쳤다.
던전이던 시절에는 다른 몬스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던전이 폐쇄되자,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는 듯 괴물들이 나타난 것.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괴물이 나타나다니."
"예전이 더 나았어!"
본래 던전의 몬스터들을 피해 고층 건물에서 생활하던 이들.
그들은 우리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던전에서 탈출하게 된 셈이다.
괴물에게 습격당한 사람들이 불만에 찬 소리를 내질렀으나.
"으랴!"
-께엥!
불만 가득한 소리와 달리.
무기를 휘두르는 손놀림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 부대와 비슷할 정도로 안전했던 환경.
그 안에서 살던 이들은 대부분이 각성을 마친 상태였다.
비록 레벨이 높은 이들은 많지 않다지만 그럼에도 각성자들.
제 몸 하나 지킬 정도의 힘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부대원들의 성장을 위한 던전행이었지만....'
괴물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문득 드는 생각.
"이거.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이득을 본 거 같은데요."
"그러게."
갑작스러운 몬스터들의 등장.
그로 인해 인류의 9할 이상이 사망했다.
괴물과 인류의 싸움은 언제나 인류의 압도적인 수적 열세였으나.
'그 차이가... 조금은 줄어들었다.'
닫힌 도시 속에서 힘을 썩히고 있던 수많은 각성자들.
그들이 세상에 풀려났다.
110화 해방된 도시 (1)
던전, [침식이계 다스무르]를 클리어한 뒤.
한동안은 혼란이 지속되었다.
-크라악!
"제기랄!"
던전이 붕괴된 직후.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 괴물들.
"갑자기 괴물들한테 목숨을 위협받아야 한다니."
"차라리 갇혀 있을 때가 좋았어."
저 던전 안에 갇혀 있을 때는 식량 등의 문제가 있을지언정.
의외로 괴물들의 습격에서는 안전했다.
어인들은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 건물에만 숨어 살면 됐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보내 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대로 가다간 몇 년 뒤에는 수장당할 운명이었다는 걸 모르는 이들.
불만을 가질 만도 했다.
물론 모두가 불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드디어... 가족들한테 돌아갈 수 있게 됐어."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해 기뻐하는 이들 역시 비슷하게 많았다.
그렇게 세상으로 풀려난 인원들이, 못해도 수천 명.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각성자이다 보니.
콰직!
"후우.... 겨우 잡았네!"
이래저래 불만을 내놓는 경우가 많긴 했다만.
사람들은 비교적 금방 바깥의 환경에 적응했다.
"저만한 인원이 세상에 풀려났다는 건... 생각보다 의의가 클 거다."
얼마 전에 겨우 병원 신세를 면하게 된 민재 형이 말했다.
"식량 문제 같은 것도 있고 하니, 언젠가 저들과 충돌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
'인류의 전력이 크게 늘어났다.'
도시에 나타난 괴물들의 숫자가 상당했다.
본래라면 저 인제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시에서는 숨어 지내거나 할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각성자들이 넘쳐 나는 도시.
각 그룹이 자신들의 영역 근처만 보호한다 해도 도시 이곳저곳에 안전지대가 생기는 셈.
던전 공략에 성공한 뒤 일단 인제군으로 복귀할 생각도 했었다만.
'이 인재들을 놓칠 수 있나.'
안 그래도 인력에 목말라 있던 참.
한동안은 이 도시에 자리잡고 부대원들을 늘려 봐야겠지.
* * *
그렇게 돼서.
우리는 도시에서 주인이 없는 건물 하나를 차지했다.
'차지라고 해 봐야 괴물을 정리하고 들어가 침낭을 깐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 사이에 안에도 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지라.
처리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일단은 이곳을 임시 거점으로 삼은 뒤 시간을 들여서 제대로 된 거점을 늘려야겠지.
"그럼. 근무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괴물들이 늘어나긴 엄청 늘어났다.
부대원들은 주변의 안전 확보를 위해 주기적으로 순찰을 나가기로 했다.
그 와중에 주변에 넘쳐 나는 각성자들에게 합류를 권유하기도 해야 할 테니.
건물에 남은 나는 부대원들의 식사 준비를 마친 뒤.
잠깐 쉬면서 상태창을 확인했다.
그러자 눈앞에 나타나는 문구.
[미수령한 보상이 존재합니다!]
눈앞에 나타나는 문구
애초에 우리가 던전을 공략하려 했던 이유가 뭐였던가.
'파밍이지.'
그 보상을 확인할 때가 됐다.
[침식 이계 - 다스무르의 공략 보상을 확인합니다.]
[공헌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됩니다.]
[각성자, 신영준의 공헌도 - 1위]
내 공헌도는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1위.
2위는 아마 저 번개 마법을 구현했던 민재 형이 아닐까.
그리고.
[보상이 주어집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여기까진 이전에 던전을 공략했을 때와 비슷했다.
몸속으로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기운.
그리고 포인트.
'저번엔 이다음으로 집단 스킬이 주어졌지.'
이번에도 뭔가 집단 스킬 같은 게 주어지지 않을까 했는데.
조금 달랐다.
[조각난 세계의 정수를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직업 확인 중... 요리사.]
[보상이 주어집니다.]
[다스무르 요리사의 정수]
이번에 나타난 것은 집단 스킬이 아니었다.
정수.
'부대원들한테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확인을 좀 늦게 한 편.
먼저 보상을 수령한 부대원들이 있었다.
이번에 주어지는 보상이 집단 스킬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번에 던전 공략 보상으로 얻었던 것은 집단 스킬.
[군단의 기운].
당시 던전의 몬스터들이 가지고 있던 [검은모래의 기운]이라는 특성이 형태를 바꿔서 주어진 것이겠지.
거기에 이번 보상의 이름은 [다스무르 요리사의 정수].
'던전의 보상은 던전 그 자체와 관계가 있다.'
이 가설은 확정이라고 봐도 되겠지.
부대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주어진 보상은 직업군, 공헌도에 따라 모두 달랐다고 한다.
장비를 얻은 녀석도, 스킬을 얻은 녀석도 있다고.
마법사들이라면 수속성의 마법이나 스태프.
전사들은 수속성에 관련된 무기나 방어구, 혹은 온몸에 단단한 비늘이 솟아나는 스킬 같은 걸 얻었다고.
'마법사들은 엄청 좋아했지.'
우리 부대의 장비들은 박씨 할아버지와 이상아를 필두로 한 공방의 생산직들이 책임지고 있지만.
칼 같은 걸 만드는 데에는 도가 튼 박씨 할아버지조차 마법사들이 요구하는 스태프 등의 제작에는 시행착오를 겪고 있었다.
제대로 된 마법사용 장비를 얻은 녀석들은 기쁜 마음에 스태프에 이름까지 붙여 줬었다.
'대체로 공헌도가 높을수록 좋은 보상이 주어졌다고 하는데.'
공헌도 1위의 내게 주어진 보상은 바로 이것.
[다스무르 요리사의 정수]
살짝 푸른 빛을 띠는 동그란 공.
만져 보니 촉감은 말랑말랑했다.
"...흠."
뭔가.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데.
'쓸만한 칼이나. 특성. 아니면 식재료 같은 거라도 주려나 했는데.'
왜, 식재료라고 하면 여러 가지 있잖은가.
한때 판타지 소설의 필수요소로 여겨졌던 드래곤 하트라든가.
무협이라면 공청석유 천년설삼 등.
그런 류의 대단한 녀석이 주어지지 않을까 했다만.
'요리사의 정수라.'
다른 이들이 받았다는 보상과는 조금 달랐다.
당장 랭킹 2위인 민재 형만 해도 마력을 크게 늘려주는 특성을 얻었었지.
다른 이들도 장비나 스킬 같은 거였고.
어떻게 써야 할지 잘 감이 오지 않았으나.
그 순간.
[주의!]
[격이 높은 식재료입니다.]
[재료에 비해 요리사의 경지가 낮습니다.]
[지금의 실력으로 요리를 시도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경지를 높인 뒤에 도전하기를 권장드립니다.]
"어. 뭐야."
이거 먹어도 되는 거냐?
문구 자체는 지난번에도 본 적이 있는 문구였다.
교황의 살점으로 회를 만들려고 하니 떴던 문구.
'생각해 보면. 그 요리가 성공했던 건 운이 좋았지.'
여러 요소가 작용하긴 했을 것이다.
온갖 버프 중첩으로 능력치가 올라가기도 했고.
마침 내 칼도 사시미 전용이었으니.
하지만.
'요리를 실패했다면 아마 재료는 그대로 날아갔겠지.'
당시에야 다른 방도가 없었으니.
좀 과감하게 시도해봤고, 운 좋게도 성공했다만.
"이번에도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단 말이지?"
무려 던전 공략의 보상.
그것도 공헌도 1위에게만 주어진 보상이다.
"...나중에 도전하자."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제 가능해질지는 대충 감이 왔다.
지금 내 직업은 [중급 요리사].
초보, 하급을 거쳐 도착한 직업.
그렇다면 중급의 다음은 아마도.
'고급 요리사.'
그쯤 되면 어지간한 식재료는 전부 가능할 것 같은 이미지잖냐.
최근에 경험치를 어마어마하게 벌어들인 덕에, 의외로 거기에 도착하기까지도 멀지 않았다는 느낌.
그때 제대로 된 요리로 만들어서 먹어 봐야지.
* * *
그렇게 보상을 확인하고 난 뒤.
나는 아무도 없는 내 방으로 들어간 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깐 나와 보지."
바닥을 보며 말을 걸자.
"네, 주인님."
그림자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곧 금발의 여성이 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식사...가 아니라. 은총 시간은 아직인 걸로 아는데. 무슨 일이신지?"
내 요리를 제공받는 걸 조건으로 영혼까지 바쳐 버린 괴물.
뱀파이어들의 준남작.
이 녀석한테 물어볼 게 있었다.
"이번엔 꽤 열심히 했으니까, 간식을 줄까 해서."
"어머!"
나와 부대원들, 거기에 저 도시의 협력자들이 [교황]을 레이드 할 때.
[동족의 아이들이 오지 않는구나.]
[필시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이겠지.]
던전에 널려 있던 다른 괴물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많은 괴물이 전투에 가담했다면 우리 운명도 꽤 달라졌겠지.
'그 일을 맡은 게 바로 이 녀석.'
신전에 입장하기 전.
혹시 몰라 녀석에게 바깥의 방위를 맡겼다.
이 녀석은 밖에서 몰려오는 다른 어인들이 우리의 전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틀어막는 역할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기껏 숫자를 채운 권속의 절반가량이 먼지로 돌아갔다던가.
'살아남은 권속들이 어인의 피를 삼키면서 힘을 키웠으니, 결과적으론 비슷하다는 것 같지만.'
아무튼.
노력한 건 사실이란 말이지.
"이런 보상이 있을 줄이야.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 요리에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버린 녀석이다보니.
간식이라는 말에 신나서는 밤의 귀족의 체통이니 뭐니 하던 것도 무시한 채 다가오는 모습.
나는 그 모습을 조금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 뒤.
스윽.
"어머?"
내 팔목에 칼을 댄 뒤.
살짝 그었다.
주륵.
약간 따가운 느낌과 함께 혈관을 흐르던 피가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간식이라는 게, 주인님의 피였나요?"
"싫냐?"
"설마요!"
이 녀석을 처음 굴복시킬 때는 내 피로 요리를 만들었다.
아무래도 비축해 놓은 피 같은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는 요리에 사용할 피를 쟁여둘 필요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하니.
사냥해 온 괴물들의 피도 따로 빼두게 되어, 내 피를 쓸 일은 없어졌다.
이 녀석에게 내 피를 먹이는 건 그 후로 처음.
"이만큼 질 좋은 피는 어디 가서도 구하기 힘든데. 그 귀한 걸."
"열심히 했으니까. 자. 마셔라."
"헤헤, 감사합니다~"
손목을 들이밀자.
녀석은 거기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할짝.
요리를 거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꽤 맛이 있는 것일까.
고혹스러운 표정으로 피를 핥는 녀석.
살짝 간지러웠다.
그리고.
"어라?"
잠깐 피를 빨던 녀석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피가 멎으셨는데요?"
"...모르는 척하는 거야, 뭐야."
"?"
무려 손목을 그었다.
본래라면 쇼크사가 일어날 정도의 과다 출혈이 있어야 정상.
하지만.
그녀가 한두 번 핥고 끝날 정도의 피가 배어났을 뿐.
피는 금방 멎어 버렸다.
'피가 멎은 이유야 하나밖에 없지.'
스윽.
칼 닦는 헝겊으로 손목을 닦아내자.
이미 아물어버린 손목의 흉터가 보였다.
"어머, 벌써 상처가 나으셨네요."
손목을 베어 버린 상처가 순식간에 나아 버릴 만한 재생력.
각성자들은 인간을 초월해 버린 이들.
일반인에 비하면 상처가 낫는 속도도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긴 하다만.
'이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진 않아.'
갑자기 생겨난 재생 능력.
덕분에 교황과의 싸움에 일찍 복귀할 수 있었고, 던전 클리어에도 좋은 영향을 줬다.
그땐 더 생각할 만한 시간이 없다 보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만.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잖아.'
멀쩡한 사람의 상처가 눈에 보일 만한 속도로 재생되는 현상.
그런데.
'이런 재생력. 난 한 번 본 적이 있단 말이지.'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의심이 가는 원인은 눈앞의 이 녀석뿐.
뱀파이어.
심장이 뜯기거나, 태양 빛에 노출되지 않는 이상.
상처 따윈 금세 회복해 버리는 괴물.
"너 설마...."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대답에 따라 칼을 휘두를 준비를 마친 채.
"나를 뱀파이어로 만든 거냐?"
111화 해방된 도시 (2)
던전 공략이 끝난 뒤.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끝난 공략이긴 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던전을 탈출해 우리한테 구원 요청을 해 온 남자.'
부대원들은 부대 외의 인물에게 영 관심이 없다 보니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 남자는 분명 저 던전을 탈출했다.
어떻게 던전을 탈출하고, 우리에게까지 도착했는지.
지금은 탄약대대 기지에 누워 있을 그가 눈을 뜬 뒤에야 알 수 있겠지.
그리고 또 하나는.
던전에서 마지막으로 치른 전투.
거기서 갑자기 내 몸에 나타난 현상.
'말도 안 되는 재생력.'
배에 뚫린 구멍이 눈에 띌 정도의 속도로 치유되던 광경.
지금 생각해도 기묘하다.
"너 설마... 나를 뱀파이어로 만든 거냐?"
갑자기 생겨난 재생력.
요리의 효과도 아니라고 한다면, 내가 겪은 사건 중 의심이 가는 건 하나밖에 없다.
'뱀파이어.'
이 녀석은 멀쩡한 인간을 뱀파이어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괴물.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날 뱀파이어로 바꾼 거라면.
"설마요. 주인님도 참, 무서운 소리를!"
하지만.
그녀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뱀파이어라는 명칭이 문제인가? 네가 말하는 밤의 귀족이란 걸로 만든 거냐고 묻는 거다."
"아니라니까요."
한숨을 내쉰 그녀가 슬쩍 손톱을 세웠다.
공격하려는 건가 싶어서 손에 쥔 칼에 힘을 주었으나.
그녀의 손톱이 내 피부 위에 닿은 순간.
두웅....
보이지 않는 막이라도 있는 듯.
내 피부의 바로 앞에서 가로막히는 손톱.
"저는 주인님의 허락 없이는 주인님에게 잔상처 하나 내지 못해요. 권속이 된다는 맹세는 그런 거거든요."
"...그럼 이 재생력은 뭐지?"
"그렇게 말씀하셔도. 으음.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녀석.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으음. 제 짐작이 맞는다면, 그 재생력은 주인님이 선택하신 결과일 텐데."
"뭐?"
"아~ 아예 모르시는구나."
녀석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인님. 제가 권속을 만드는 방법이 뭔지, 혹시 아시나요?"
"그거야. 저번에 얘기한 적이 있긴 했지."
녀석이 권속을 만드는 방법.
우선 대상의 피를 모두 빨아들인다.
그렇게 피가 모두 빠진 혈관을.
"네 피로 채운다.... 맞지?"
"잘 아시네요. 그럼 주인님이 저를 제압하실 때의 일은 기억나시나요?"
"그건. 솔직히 말하면 조금 가물가물한데."
워낙 정신이 없었다.
흡혈 특성을 획득한 뒤에 밀려왔던 끝없는 갈증.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녀석의 피를 빨아 재꼈다는 것밖에 기억에 없다.
"주인님의 피를 제가 빨아들이고, 주인님도 제 피를 빨아들였잖아요?"
"...아."
이거 설마.
"그러니까. 주인님이 가지고 있던 평범한 인간의 피가 저한테 오고, 제 마력이 담긴 피가 주인님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그 자리를 메우고. 이거 뭐랑 비슷하지 않나요?"
"권속화랑 비슷하군."
나는 이마를 매만지며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피를 빨 때 떠올랐던 시스템 창 하나가 있었지.
[주의!]
[지나치게 많은 흡혈은 신체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미친.
"제 피를 적당히 드신 것도 아니고, 제가 남작으로 승작하기 직전까지 모아왔던 피를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빨아 가셨으니."
"...네게 피를 줄 때까지만 해도 이런 변화는 없었다. 왜 이제 와서."
"몸에 좋은 요리를 많이 먹었다고 하루 만에 효과가 나오진 않잖아요? 이제야 변화가 적용되기 시작했나 보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럼, 내가 네 권속이 돼 버리는 건가? 이럴 경우에 주종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 시스템상으로는-."
"아~ 그랬으면 좋겠지만요. 권속을 만들 때랑은 조금 달라요."
"다르다니?"
"권속을 만들 때는 빨아들인 피에 제 마력을 담아서 그대로 제자리에 돌려 넣는 것에 가깝거든요. 그 마력에 지배에 관련된 힘이 담기는 거구요. 하지만 주인님이 가져간 피는 정말 온전한 제 피였으니."
"네 피의 영향이 오더라도. 네 권속이 될 일은 없을 거란 거군."
"네. 아쉬워라~ 주인님의 주인님이 된다면 정말 기분 좋았을 텐데."
내가 자신의 동족에 가까워졌다는 게 즐거운 것일까.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녀석.
'요즘 좀 풀어줬더니. 많이 기어오르네.'
이건 나중에 혼내기로 하고.
"권속들한테 들었어요. 이 세계에는 원래 마력도 없었다면서요?"
"그렇지."
"다른 인간들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력에 대한 저항력이 낮은 경우가 많더라고요. 안 그래도 마력에 민감할 몸에, 밤의 귀족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피가 그 정도로 섞여 들어갔으니."
싱긋.
"주인님은 인간보다는 밤의 귀족에 가까워지셨을지도 모르겠네요. 한번 확인해 볼까요?"
그렇게 말하더니.
옷깃을 슬쩍 내리고 자기 목덜미를 보이는 녀석.
"조금만 더 빨아 가시면 아예 종족이 변할 것도 같은데. 어떠세요?"
"...."
"제가 권속으로 만들면 직업도 하나로 고정되겠지만, 이 방법이면 요리사라는 직업도 유지되지 않을까요? 저도 인간한테 굴복하는 것보단 동족한테 굴복하는 게 나은데."
"절대 사절이다."
흡혈을 통해 힘을 키울 수 있다는 등의 이점은 있겠지만.
태양에 약하고, 주기적인 흡혈을 하지 못하면 능력치가 저하한다는 점 등.
페널티도 상당한 종족이다.
아니, 그런 걸 제외하더라도.
인간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뱀파이어가 되라니. 끔찍한 소리.'
이 녀석의 피를 흡혈했을 때.
올라간 능력치의 양이 상당했다.
나중에 이 녀석이 능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면 다시 같은 방법으로 내 능력치를 키워볼까 했었는데.
"큰일 날 뻔했잖아...."
그딴 꼼수를 한 번 더 시도한다면 그걸로 끝.
그대로 인간으로서의 나는 사라지고 밤의 귀족으로서의 신영준이 탄생할 뻔했다는 거다.
...아니.
하지만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아무리 피와 관련된 종족이라고 해도 그렇지. 피를 먹었다고 종족이 바뀌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말씀드렸다시피 이 세계의 인간들은 유독 저항력이 약해서-"
"그렇게 따지면 내가 먹은 몬스터 요리가 몇 갠데."
내 피와 살의 지분은 대부분 몬스터들이 차지하고 있을 터.
그렇다면.
나도 진작에 몬스터가 되었어야 정상....
'아.'
뭔가.
머릿속에 걸리는 게 하나 있는데.
그 걸리는 부분을 떠올리려고 하자 아리엘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
"괴물들의 고기는 요리해서 드셨다고 하셨잖아요? 반면 제 피를 마실 때는 그렇게 거침없이 빨아 드셨고."
요리를 함으로써.
요리사의 힘이 무언가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대화를 저 던전 안에서도 나눈 적이 있었다.
창수가 말했던 한 인물.
괴물을 잡아먹다가 이성을 잃고 인간까지 잡아먹게 되었다는 존재.
'이상식욕자.'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간은 몬스터의 마력에 취약하다.
분별없이 집어삼키면 그 자신이 또 다른 몬스터가 되어버릴 정도로.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마력을 정제하는 것.'
어쩌면.
그게 요리사의 본질이 아닐까.
'내 종족은 바뀌지 않았으니까. 재생력이 생겼다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아.'
이 일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갈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요리사에 대한 의문은 조금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는데.
"나중에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네?"
마침 확인해볼 수단도 근처에 있었다.
창수가 말했던 그 괴물이 된 인간.
창수와 그의 그룹원들은 그 괴물을 토벌하지 못했다.
그 괴물은 우리가 던전을 공략할 때까지도, 던전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라는 뜻.
던전이 폐쇄된 지금.
그 역시 이 도시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을 터.
'조만간 마주치게 되겠지.'
그때가 오면 비로소.
내가 가진 의혹을 해결할 수 있겠지.
* * *
"근무 다녀왔습니다!"
"오냐. 교대자용 식사 해 놨으니까 먹고 들어가."
"옙!"
우리 부대가 이곳에 남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하나.
근처에 넘쳐 나는 각성자들을 우리 부대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지금.
"그래서... 오늘 입대하기로 한 사람이 몇 명이라고?"
"아. 두 명임다."
"으음."
두 명이라.
근무자용 식사를 우물거리던 병사들 역시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생각보다 합류하려는 사람이 적더라구요."
우리가 남기로 한 목적은 부대원을 늘리기 위함이었는데....
정말 처참할 정도로 적은 인원만 합류 의사를 보이고 있었다.
"뭐지? 저 사람들은 약탈자로 변한 탈영병을 만나 본 것도 아닐 테니, 군인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도 않을 텐데."
"아주 좋지만은 않더군요. 우리 때문에 던전이 닫혔다는 건 유명해서."
"그래도. 오히려 저 던전의 보스를 처치할 정도로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게 보통일 텐데."
세상이 멸망하고 괴물이 돌아다니는 시대.
군대라는 타이틀은 이런 상황에서 꽤 안정감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이렇게까지 사람이 안 올 줄은 몰랐다.
"이유? 글쎄.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그 이유를 그나마 우리 부대와 친한 이 지역 출신.
창수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아마 가장 큰 건, 애초에 이 도시의 인간들이 뭉치기 힘든 사람들이란 점이겠지."
"?"
"몇 번 말하지 않았나? 중간에 사람들끼리 큰 싸움이 있었다고 말이야."
아.
"식량을 많이 확보한 이들과 그러지 못한 이들 간의 싸움이었지. 그때 꽤 많은 사람이 죽었어. 우리 그룹이야 비교적 여유가 있는 편이기도 하고, 전투력도 꽤 높은 편이다 보니 공격받진 않았지만."
"허어."
"아무튼 그 싸움으로 인해 여러 그룹이 와해되고, 와해된 그룹의 인간이 다른 그룹으로 들어가고.... 뭐 그런 일이 많았거든. 아마 다른 그룹에 철천지원수가 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을 거요."
어깨를 으쓱하는 창수.
"다른 병사들한테 들었는데, 각성자가 100명이 넘게 모이면 길드가 된다면서?"
"그렇죠."
"도시에 각성자들이 상당히 많았는데도 길드는 하나도 없었지. 다 이유가 있는 거요. 마냥 뭉치면 좋다는 이유만으로 뭉치기에는 사람들의 관계가 영 복잡한 거지. 전원이 각성자인 만큼, 굳이 큰 세력을 이루지 않아도 어떻게든 제 몸 간수 정도는 되니까."
과연.
내가 처음 각성했을 때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차라리 검사나 암살자 같은 직업이었다면 홀로서기라도 해 봤을 텐데.
저들은 그 홀로서기가 되는 이들.
차라리 힘없는 일반인이었다면 우리 길드에 가입하길 원했을 테지만.
제 몸 간수가 되는 이들은 굳이 합류해야 할 이유도 크지는 않다는 거다.
우리를 구심점으로 모이기에는 다른 그룹과의 관계가 영 껄끄럽기도 하니까.
심지어는.
"이렇게 되니 더 아쉽네요. 여전히 저희 부대에 합류하실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눈앞의 남자.
창수와 그의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맞아요. 대장님."
"그러지 말고 저희랑 같이 가시죠."
안 그래도 숫자가 적던 그의 그룹.
그 인원 중 절반가량은 이미 우리 부대에 합류를 결정했다.
'내 요리로 치료받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
얼마 전까지 누워 있던 이들이야 이제부터 천천히 각성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그 사람들을 간병하고 있던 이들은 즉시 전력으로 활용 가능할 정도의 레벨을 지닌 각성자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두 팔을 벌려가며 환영했다.
"미안하지만, 이미 결정한 일이라서."
하지만 창수를 비롯.
일부 멤버는 합류를 거절했다.
"어디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사실 이 그룹을 좀 더 키워서 해 보고 싶은 일이 있거든."
"?"
"100명이 넘으면 길드가 된다고 했지. 일단 거기까지 그룹을 키워 볼까 해. 그리고 어느 정도 힘을 키운 다음에는...."
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세상이 왜 이 꼴이 난 건지. 제대로 알아볼 생각이오."
지난번 던전 공략 이후.
창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것 같았다.
"그 괴물 놈들. 그냥 인간을 먹이로 보는 식인 짐승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 결국 제 아이들을 살리려고 하는 짓이었지. 딱히 그렇다고 용서할 생각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지하철의 던전을 클리어했을 때 깨달았던 것을 창수 역시 느낀 모양.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결국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종족.
각자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강한 이가 살아남는 게 당연한 이치라는 것이었다만.
"생각해 보게. 그 괴물 놈들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거라면, 우리의 원수는 그 물고기들이 끝이 아닌 셈이지."
당초에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던 괴물들은 모두 죽었다.
도시 곳곳에 퍼져 있던 괴물들은 던전이 폐쇄되자 숨을 헐떡이며 자연스럽게 질식사해 버렸지.
그렇다고 '복수는 허무한 거구나.' 하고 끝나진 않은 모양.
"괴물들이 나타나게 된 이 현상 그 자체가 남아 있는 한, 우리 복수는 끝나지 않아."
더욱더 깊은 곳까지 복수를 이어 나갈 셈인 거겠지.
"뭐. 그렇다고 안 좋게 지내자는 건 아니오. 그룹원들 대부분이 그쪽 부대에 합류를 선택해 버렸으니까, 앞으로도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지 않겠나? 혹시 우리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시오."
하긴.
저 인제군의 군부대에도 부대에 합류하지 않은 이들이 많다.
우호적인 세력이 늘어난 걸로 감사해야겠지.
"알겠습니다. 창수 씨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시죠."
"어, 정말 그래도 되나?"
"예?"
"사실, 안 그래도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
바로 말을 꺼낸 게 조금 염치없게 느껴진 것일까.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창수.
"전투식량을 좀 나눠줄 수 없을까 해서 말이지."
전투식량을?
112화 해방된 도시 (3)
"전투식량을 좀 나눠 줄 수 없을까 해서 말이지."
멋쩍게 웃으며 말하는 창수.
그가 내게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내가 만든 요리.
전투식량이었다.
"큼. 너무 염치없었나?"
"무슨 부탁인가 했더니. 그거였습니까?"
"효과가 정말 엄청나더군. 맛은 그보다 더 훌륭하고."
그야 뭐.
누가 만든 요리인데 당연하지.
'음.'
하지만.
그 요리를 만든 나로서는 조금 미묘한 생각도 들었다.
'전투식량이라고 해 봐야... 제대로 만든 요리에 비하면 맛도 효과도 별로 아닌가?'
뭐랄까.
내 대표 요리라고 할 수는 없단 말이지.
이들은 내가 제대로 만든 요리 역시 맛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굳이 전투식량만을 요구한 게 조금 의아했으나.
"맛도, 효과도 대단하지만, 사실 그보다 대단한 건 다른 부분이지."
"예? 요리가 맛이나 효과가 전부지. 뭐가...."
"버퍼가 없어도 버프를 제공할 수 있는 아이템 아닌가."
아.
그게 [전투식량] 스킬의 핵심이긴 하지.
"거기에다가 먹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발휘되니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고. 거기에 유통기한도 길고 부피도 적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이야. 솔직히 말해도 되겠나?"
"...."
"만약 이 세상이 게임이었으면 즉시 밸런스 패치가 이루어졌을걸. 지나친 오버 밸런스였다고 말이야."
창수가 끌린 부분은 맛이나 효과가 아닌, 바로 그 부분이었나 보다.
내 능력이기도 하고.
얻은 지도 오래됐다 보니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다만.
요리 스킬을 겪어 본 것 같은 저 [교황]도 전투식량을 보고는 조금 놀란 눈치였지.
'이거 생각보다 사기 스킬이었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그만한 아이템을 공짜로 달라는 말은 안 하겠소. 분명 제조하는 데도 꽤 많은 대가가 필요할 테니."
"까짓거 드리죠, 뭐."
"우리가 모은 물건 중에는 유용한 것들이 많아. 부족하지만 그걸 대가로 약간이라도.... 어? 지금 뭐라고 했지?"
"가져가시라고요. 전투식량."
내 말을 들은 창수는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전투식량을 달라는 말을 한 것은 본인인데.
"아니, 아니. 아니아니아니. 그렇게 가볍게 줘도 되는 물건이 아닐 텐데."
"그렇긴 한데. 앞으로 우호적으로 지낼 관계란 걸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내줘도 상관없거든요."
사실 그런 물건이 맞기도 하고.
부대에 가입하는 순간 기본적으로 수십 개씩 보급되니까.
'몬스터의 고기는 이제 꽤 많이 쌓였으니, 어느 정도는 내줘도 티도 안 나고.'
만드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대규모 조리]의 재능을 각성한 뒤에는 요리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져서 말이지.
전투식량용 육포 정도야.
재료만 갖춰진다면 하루에 수백, 수천 개도 쉽게 만들 수 있다.
"아니, 그러면 안 되지."
그래서 그냥 건네주려고 했으나.
거절한 것은 창수 쪽이었다.
난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공짜로 준다는데도 거절합니까?"
"말했잖소. 전투식량의 효과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식량 자체가 귀한 시대야. 그런 걸 그냥 공짜로 받아 버릴 수는 없지."
"딱히 부담을 느끼실 필요는 없는데."
"그 말이 더 부담이야. 우리가 그쪽 길드에 가입한 거라면 모를까. 일단은 대등한 관계가 되고 싶거든."
으음.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창수가 말한 대로 전투식량의 효과를 생각해 보니.
생각보다 대단한 물건이 맞다.
즉.
"가치를 제대로 매기고 대가를 받으려고 하면 값이 상당할 텐데요."
"크흠. 그렇겠지."
"제대로 지불은 가능하겠습니까?"
괴물과의 전투로 번 포인트가 많기는 하겠지만.
저들은 식량을 저 [딱딱한 호밀빵]에 반쯤 의존해 왔다.
상점에서 파는 [딱딱한 호밀빵]은 그 맛에 비해 말도 안 될 정도의 포인트를 잡아먹는다.
아마 여유가 있지는 않을 텐데.
"도시에서 주운 물건들이 꽤 있어. 나름대로 가치 있는 물건도-"
"저희도 본진으로 가면 꽤 비축한 물건들이 많습니다. 어지간한 건 눈에도 잘 안 찰걸요."
"큼.... 그래도 가능한 만큼이라도 받고 싶어서 말이오. 우리 그룹원들이 비상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인당 1개씩만이라도."
그럴 바에야 그냥 준다고 할 때 받지.
전투식량이 필요는 하고, 그렇지만 공짜로 받는 것만큼은 거절하고 싶나 본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 이렇게 합시다."
"응?"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지만.
나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도시에 괴물들이 넘쳐 나는 상황이고 하니, 그쪽 분들도 괴물들을 사냥하고 할 것 아닙니까."
"그렇지. 특히 우리 그룹은 레벨업에도 중점을 둘 생각이야."
"그 괴물들의 시체를 가져다 주시죠. 그럼 그걸 재료 삼아 전투식량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런 게 가능한가?"
"대신 가져오신 몬스터의 고기 중 50%는 저희한테 주시는 걸로. 일종의 수수료 같은 개념이죠."
이 방법이라면 나름대로 대가도 지불되고.
우리도 손해는 안 보니까.
그 얘기에 창수가 눈을 크게 떴다.
"대가가 그걸로 충분한가?"
"...50%면 많은 거 아닙니까?"
"어차피 괴물의 고기는 먹을 수도 없잖나. 가죽이야 어떻게든 쓸 구석이 있다고 해도, 고기는 어차피 버리는 부위였는데."
괴물의 고기를 먹은 자는 괴물이 된다던가.
이들 입장에서는 쓸모없게 느껴질 만도 하다만.
"그 고기. 우리한테는 그럭저럭 가치가 있거든요."
내가 요리한 고기는 지금까지 부작용이 없었다.
식재료야 많으면 많을수록 이득이기도 하고.
"으음. 그래도 말이지. 수수료를 더 챙겨가도 될 것 같은데."
"50%면 충분해요. 아니면 그냥 없던 일로 하시든가."
"아니, 아니! 내가 괜한 말을 했군."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그렇게 거래가 확정되자.
난 그림자 속에 손을 집어넣어 전투식량 한 박스를 꺼냈다.
"...그 아공간? 같은 건 언제봐도 기묘하군. 그런 능력을 갖추고도 직업이 요리사였다니."
[요리사의 특별소스].
박스의 내용물에 소스를 한 줌 뿌린 뒤, 창수에게 건넸다.
"이건 일단 계약금 같은 겁니다."
"...정말 고맙소."
고맙긴.
던전 클리어를 비교적 빠르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협력 덕분이 크다.
특히 창수 본인은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않고 함께 전투를 치렀던 인물이기도 하고.
창수에게 넘겨준 전투식량에는 정신 안전과 관련된 소스들을 뿌려주었다.
복수에 미친 이들이라고 하나 인간성은 유지하고 있으니.
저 요리가 정신 안정에도 도움이 되면 좋겠는데.
"다시금 말하지만. 고맙소. 언제든 우리 힘이 필요하면 찾아오시오."
"예예. 들어가세요."
* * *
"뭐. 문제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창수를 보내고 난 뒤.
난 부대의 간부들에게 이런 식의 거래가 있었다는 얘기를 전했다.
"그 양반은 나름 열심히 싸워주고 했으니까. 신 병장님만 괜찮으시다면야."
"그렇지?"
허허 웃으며 말하는 광일이.
나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흠."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병사들.
이민재 병장과 서수혁 상병이었다.
'...?'
그러고 보니.
저 둘은 부대에서도 특히나 실리를 추구하는 성향이 높은 편이었지.
말하자면 극한의 효율 충들.
그들의 표정을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나 너무 호구같이 군 건가?'
지금의 거래.
창수의 그룹이야 어차피 우호적인 세력이고, 전투식량 정도야 만드는 게 어렵지도 않고 하니.
별생각 없이 전투식량을 건네줘 버렸다만.
전투식량의 가치가 사실 꽤 대단하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면.
좀 퍼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란 말이지.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이건 100% 잔소리 각이군.'
둘 모두 내 의견은 가급적 존중해주는 편이다만.
뭔가 잘못됐다 싶으면 조언이란 이름의 잔소리가 날아오는 편이란 말이지.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어? 어어."
따끔한 조언을 들을 생각에 약간 긴장했으나.
서수혁 상병의 질문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질이 높은 요리를 자주 먹은 사람은 질 낮은 요리의 효과를 잘 못 본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만. 확실합니까?"
"아. 그랬지. 나도 이번에 알게 된 거지만."
던전의 보스 몬스터였던 [깊은 자들의 교황]
그 이름에 붙은 [교황]이란 건 어떤 비유가 아니었던 것 같다.
본인 세계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었을 존재.
덕분에 온갖 고급 요리를 먹은 결과.
'내 요리로는 녀석의 높아진 입맛을 맞출 수 없었지.'
지금 생각해도 분하다.
여유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요리 실력을 올린 뒤에 그 말을 후회할 정도로 맛있는 요리를 대접해 버렸을 텐데.
서수혁의 질문에 대답하자 이번에는 민재 형이 말을 이었다.
"영준이 너는 아마 현시점에서 가장 뛰어난 요리사겠지."
"그렇다면 으음...."
뭔가를 계산하려는 듯 고민에 빠진 두 사람.
그들은 이내 옅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영준이로군."
"현명하십니다."
"엉?"
뭐야.
뭔가 오래 고민하는 것 같길래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결론이 왜 이래.
"네 계획은 잘 알겠다. 병사들에게도 전해야겠군. 도시의 각성자 중 전투식량이 필요한 이들이 있으면 몬스터 고기를 가져오라고 말이야."
"다른 이들한테는 수수료를 더 높여 받긴 해야 할 겁니다. 저희 길드에 우호적인 이들일수록 그런 부분에서 혜택이 있다는 걸 알려야죠."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나 빼고 알아서들 이야기를 진행하는 두 사람.
'호구짓했다고 욕먹지나 않을까 했는데, 다른 이들한테도 전투식량을 제공하자니.'
도대체 무슨 의도지?
* * *
"...모두 모인 것 같군요."
아직도 물기가 모두 빠지지 않은 도시.
그 한구석의 건물에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전부 합쳐서 서른 명 정도인가. 꽤 적구려."
"어쩔 수 없잖아요? 서로 믿고 함께 하기에는 일이 꽤 많았으니까."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은 서로 간에도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대화를 주도하려고 하는 이 역시 구심점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을 정도.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들.
저 던전 안에 있을 때 같은 그룹이었던 것도 아니다.
본래라면 서로 의심하는 통에 한곳에 모일 리도 없었을 인간들.
"일단 확인해 두겠습니다만."
그럼에도 그들이 여기 뭉치게 만든 공통점은 하나.
"우리 목표는 춘천을 탈출하는 겁니다. 다들 동의하십니까?"
"음."
"동의하오."
"애초에 그러려고 모인 거잖아요?"
이 도시.
춘천을 떠나고자 하는 이들이라는 점.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드디어 집으로."
애초에 춘천 시민이 아닌 이들.
일이 있어서 잠깐 이곳에 들렀다가 얼떨결에 던전에 갇혀 버린 인간들.
그리고.
'드디어...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어.'
소중한 사람이 다른 도시에 있는 이들.
던전 안에 갇혀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잊고 살았으나.
밖으로 나온 이상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족, 연인, 친구.
소중한 이들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움직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임의 리더를 맡은 남자.
이주혁이 말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저희 첫 번째 목표는 영동 지방으로 이동, 강릉에 도착하는 겁니다."
지도를 펼치며 말하는 남자.
"여기 모인 사람들의 목적지는 모두 영동 지방 쪽이니까요. 일단 강릉에 도착한 뒤에는 각자 목적지에 따라서 개별 행동하는 걸로."
그들이 뭉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나마 목적지가 가까운 편이라는 것.
강원도를 반으로 가른 산맥.
춘천은 영서지방의 대표적인 도시인 반면, 여기 있는 이들의 목표는 영동 지방 쪽에 있었다.
목표를 확실히 한 뒤에는 회의가 시작되었다.
"도로는 사용하기 힘들 거예요. 고장 난 차량들이 들어찬 건 물론이고. 그 차량 구석구석에 괴물이나 좀비도 숨어 있다더군요."
"빌딩 옥상에서 봤는데 고가도로 하나는 아예 무너져 있었어. 터널 같은 곳도 멀쩡할지 모르겠군."
여러 가지 문제가 논의에 올랐으나.
대부분의 문제에는 나름대로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계속돼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가 하나.
"하아, 역시 식량이 문제로군."
이주혁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나마 이동을 빠르게 도와주던 도로가 대부분 무너지거나 사용할 수 없게 된 지금.
괴물들과 싸우면서 강릉까지 가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 길을 풀떼기만 먹으면서 이동할 수도 없는 일.
"가는 길에 보이는 마트 같은 걸 털다 보면."
"우리가 저 안에 몇 달을 갇혀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지간한 식량은 바깥의 생존자들이 이미 다 털어간 상태일걸요."
"끄응."
"괴물을 사냥해서 구워 먹어 본다거나."
"미친 소리. 난 가족을 만나고 싶은 거지, 괴물이 돼서 가족을 잡아먹고 싶은 건 아니야. 당신이 괴물이 되고 싶은 거라면 말리진 않겠소."
"노, 농담이오."
사람들의 고민이 이어졌으나 뚜렷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먼 길을 떠나야 하는 만큼, 확보해야 하는 식량도 상당할 겁니다."
"으음. 그렇겠지."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여러분들은 어디까지 각오하고 계시는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갑작스러운 이주혁의 말에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생각입니다. 여기서 하루 지체되는 동안, 혹시라도 아직 살아 있을 가족들이 위험에 처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셈이죠."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각오로는 질 생각 없어요."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로는 빠르게 식량을 수급할 만한 방법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군요."
"...설마."
"그만한 식량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서... 빼앗아 오는 것."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 딱딱하게 굳었다.
인간을 공격해 식량을 확보하자는 것.
저 던전에 갇혀 있을 때도 비슷한 비극이 있었다.
"당신. 대체 무슨 소리를."
"어디까지나 다른 방법이 나오지 않았을 때의 얘기입니다. 일단은 평화적인 방법을 알아봐야겠죠. 안전하게 식량을 구할 만한 다른 방법을."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라는 듯 말을 끊는 이주혁이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생각했다.
'그딴 방법이 있을 리가 없잖아.'
모두의 직감이 한곳을 향했다.
결국 자신들은 죄 없는 누군가를 공격하게 될 것이라고.
그런데 그 순간.
휘잉-
그들이 머물던 건물 바깥에서 큰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면서 바깥을 뒹굴던 종이 한 장이 창문을 통해 건물 안쪽으로 들어왔다.
"뭐야 이건."
"전단지 같은 거겠죠. 대충 버리고 회의에 집중을...."
"아니, 뭔가 적혀 있는데?"
평범한 하얀색 종이.
그곳에는, 손으로 휘갈겨 적은 듯한 문장이 하나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식량을 원하는 자. 군단으로.]
"...?"
모두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식량을 얻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113화 전투식량 (1)
수몰된 도시....
아니, 던전에서 풀려나 세상에 풀려난 각성자들.
그 숫자는 무려 수천 명에 달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이 수천 명인 것에 비해, 식량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
자칫 잘못하면 수천 명의 약탈자들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쿵!
"그쪽이 말한 대로 괴물들의 시체를 가져왔소."
본래는 평범했을 상가 건물.
그 건물의 주변에는 정체불명의 회색빛 장벽이 세워지고 있었다.
강철을 연상시키는 잿빛 장벽은 군사 시설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강철 군단이라.... 이름값 하는군.'
사내는 건물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조금 의심스럽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괴물의 사체를 가져다주면 식량을 준다고 했지? 속는 셈 치고 와 보긴 했지만... 솔직히 믿기 힘들군. 혹시라도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어디 보자. 예. 확인했습니다. 여기에 이름 적으시고. 2~3일 뒤에 다시 오시죠."
"...큼."
남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덤덤하게 일지 같은 것을 작성하는 군인.
'어차피 괴물의 사체는 쓸모도 없으니까.'
만약 거짓말이라고 해도 손해 볼 일은 없다.
남자는 약간의 찜찜함을 남긴 채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며칠 뒤.
"어디 보자. 예. 이거군요."
쿵.
남자가 가져온 가방에 반쯤 채워진 육포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말했다.
"내가 가져왔던 괴물들이 한두 마리가 아니었을 텐데. 이게 전부요?"
"수수료가 80%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80%라니...."
단순 공임비라고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수치.
남자의 인상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아무리 괴물의 사체가 쓸모없다고는 하나, 그 정도로 뜯어 가면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밖에.
하지만 그 표정을 본 병사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제 말 믿으십쇼. 80%도 싼 겁니다."
"...군인이라는 양반들이 이렇게 폭리를 챙겨도 되는 건가?"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비꼬는 것처럼 들릴 테니. 뭐. 먹어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그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솔직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 군인들은 저 수몰된 도시의 괴물들을 전멸시킨 세력.
눈앞의 군인도 총 한 정을 메고 있었다.
'약한 게 죄로군.'
남자는 씁쓸하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주 상황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식량을 얻긴 했으니까."
가방에 담긴 육포들.
이 정도 양이라면 배불리 먹어도 1주일, 아끼면 2주일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괴물을 사냥하면서 식량을 모두 소진해 버린지라 벌써 이틀을 굶주렸던 상황이었다.
남자는 일단 배를 채우기 위해 가방의 육포 한 점을 꺼내 베어 물었다.
그 순간.
"...어?"
남자의 입에서 당황스러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입 안에 들어간 순간 부드럽게 녹아드는 고기.
이빨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새어 나오는 육즙까지.
과거에는 나름대로 고급 육포도 자주 먹어 봤던 남자였으나.
"마, 맛있어."
어지간한 고급 육포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맛이었다.
"뭐야.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런 건가...? 아니, 이 맛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잖아."
어떻게 괴물을 먹을 수 있게 가공했는지조차 의문인 상황.
게다가 그 가공처는 군대였다.
군대에서 나온 전투식량에 맛을 기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의 맛.
그 맛에 감동한 남자는 남은 고기 역시 허겁지겁 집어삼켰다.
그러자, 또 다른 이변이 일어났다.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데?'
단순히 배고프던 것이 해결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상태창을 열어보자.
실제로 버프를 받은 것처럼 능력치에 보너스가 추가되어 있었다.
남자는 과거 사제 계열의 각성자에게서 버프를 받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올라간 능력치를 보면서도 꽤 감탄했더랬지.
"그때 그 버프는 지금이랑 비교하면 뭣도 아니군."
엄청난 능력치의 상승.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요리를 먹은 것만으로도 그의 전투력이 두 배 가까이 상승한 셈이다.
그제야 아까 만났던 군인의 말이 이해가 갔다.
'이 정도의 버프가 있다면, 저번에 사냥했던 괴물 정도는 훨씬 수월하게 사냥할 수 있다.'
이 요리를 통해 괴물 사체의 수급이 쉬워진다면.
군단을 통해 더 많은 식량을 얻을 수 있게 될 터였다.
80%의 수수료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하... 그 군바리들. 꽤 괜찮은 녀석들이었잖아."
가방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일주일 치 이상의 고기.
보기만 해도 든든해지는 그 모습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최근 내 일과에는 한 가지 일이 추가되었다.
전투식량의 양산.
'옛날이었으면 전투식량 하나 만드는 데에도 꽤 시간이 들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재능 : 대규모 조리]
[요리 속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괴물 한 마리를 육포로 만드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고기를 말려서 건조해야 하다 보니 최소 이틀 정도를 잡기는 한다만.
내 작업 시간만 따지면 부담은 없는 수준.
[전투식량이 완성되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그 적은 노동만으로 경험치를 얻기도 하고.
또한.
"식량이 쌓이는구만."
"당분간 고기 걱정은 없겠습니다."
도시의 각성자들이 가져온 엄청난 양의 고기들이, 부대의 임시 창고에 쌓였다.
식재료야 다다익선.
그뿐만 아니라, 쓸 만한 특성을 가진 고기들은 따로 빼서 그림자 속에 쟁여 두었다.
말마따나 고기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신 병장님."
"엉?"
그때.
식량 관련 업무를 맡고 있던 병사가 나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아까 가져다준 재료들은 이미 작업 다 끝났는데."
"그 많던 게 벌써 다 됐단 말입니까...? 아.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녀석.
"전투식량 완성까지 이틀 정도 걸린다고 안내했더니, 그 며칠을 못 기다리겠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그거 기다리는 게 뭐 얼마나 어렵다고."
솔직히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런 자잘한 일은 병사 선에서 돌려보내는 식으로 해결해도 될 일이었다.
전투 쪽으로는 실력이 늘었어도 이런 업무 관련해서는 여전히 신병급인 녀석들이 많다 보니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제대로 알려줄 생각이었으나....
"자꾸 어딜 가기 위해서 식량이 필요하다느니 하는데 무슨 얘기인지 잘...."
"어딜 간다고 했다고?"
그 얘기를 듣고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바로 병사의 뒤를 따라 몸을 옮겼다.
"괴물을 잡아 오면 식량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가져왔다구요."
"아니 그러니까, 이걸 정제해서 먹을 수 있는 요리로 만들어 주는 거라 최소 며칠은 기다리셔야-."
"한시가 급하단 말입니다!"
끼익.
"어, 신 병장님?"
"...?"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병사를 상대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수고했다. 이 사람이랑은 내가 얘기해 볼 테니까, 넌 근무 복귀해."
"아. 옙. 알겠습니다. 충성."
고생하던 병사가 경례를 하며 방을 나가고.
난 한창 실랑이를 하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부대의 지휘관 분이십니까?"
"아뇨?"
여전히 사람들과 엮일 만한 귀찮은 일은 전부 김 중위에게 떠넘기고 있다.
"취사병인데요."
"...취사병?"
"예. 요리 관련해서 얘기하러 오신 거 아닙니까? 저희 부대 요리는 다 제가 하고 있으니까.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영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
일개 취사병이라고 하니 뭐 하는 놈인가 싶겠지.
"후우. 어쩔 수 없군. 얼마 전에 도시에 돌아다니는 전단지를 봤습니다."
"아. 그거 적느라 저희 부대원들이 엄청 고생했죠. 프린트도 없어서 죄다 손으로 적는데, 얼마나 노가다였는지."
"...몬스터를 잡아 오면 식량을 준다고 써 있더군요. 그래서 잡아 왔습니다. 그런데 며칠을 더 기다리라니?"
뭐, 이런 얘기인 건 이미 병사에게 들었다.
난 남자가 가져온 괴물들의 사체를 보았다.
[식재료 감별(강화)]
대부분은 근처에서 부대원들도 조우했던 적이 있는 괴물들이었다.
그리고.
"빨강색이 대부분이고. 주황색도 좀 있긴 하네."
"예?"
"아. 혼잣말입니다."
갑자기 색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당황하는 남자.
생각하던 게 새어 나와 버린 모양이다.
저 색에 대한 얘기는 별거 아니다.
[식재료 감별(강화) - 전투력 측정기]
얼마 전.
업적 달성의 보상으로 얻은 특성, [전투력 측정기].
[이종족의 전투 능력을 그 마력량을 통해 측정합니다.]
[대상 몬스터의 강함이 색으로 표현됩니다.]
효과는 간단하다.
괴물의 전투력을 볼 수 있다는 것.
'스X우터 같은 거지.'
각성자들이야 레벨이 있으니 대략적인 전투력 측정이 되지만.
괴물들은 싸워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아니란 거지.
괴물들을 바라보며 특성을 발동하면, 그들의 몸 주위로 옅은 기운 같은 게 보인다.
그 색에 따라 강함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
'빨주노초파남보... 가장 약한 게 빨강이고, 강한 게 보라겠지.'
좀비들은 거의 핑크색에 가까울 정도로 옅은 빨간색이 대부분.
도시에 넘쳐 나는 괴물들은 주로 빨간색에, 가끔 주황색 괴물들이 섞여 있는 정도.
그런데.
남자가 가져온 괴물들 중 한 마리에 시선을 두자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노란색이잖아?'
노란색의 괴물은 도시에서 보기 드물었다.
'최소한 리자드급.'
우리 부대를 습격했던 괴물들.
리자드들이 딱 노란색의 괴물이었지.
게다가 이 녀석에게서 보이는 노란색은 그렇게 옅지도 않았다.
'저 던전에서 싸웠던 다스무리안 아성체... 그 녀석하고 비슷한 수준인가?'
우리 부대원들이야 1:1로도 처리할 수 있겠지만.
도시의 각성자들은 몇 명씩 조를 짜서 처리했던 그 괴물과 비슷한 수준.
사체에 난 상처를 보니, 무기는 한 종류였다.
"이 녀석. 혼자서 잡으신 겁니까."
"예."
뭐야.
좀 치는 양반인가 본데?
"실력이 대단하신가 본데, 왜 그렇게 급하게 구시는 겁니까?"
"...저 강릉 사람입니다."
"?"
"여긴 잠깐 출장 온 거구요. 가족들은 강릉에 있어요. 어떻게 됐을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음.
대충 사정은 이해가 갔다.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찾아가는 게 하루 늦을수록 가족들이 무슨 일을 당할 확률도 늘어나는 셈이구요."
"강릉이라. 혼자서 가실 생각입니까? 위험하실 텐데."
"그 근처에 볼일이 있는 사람이 저 말고도 있습니다. 스무 명 조금 넘는 정도. 그 사람들과 함께 이동할 생각이죠."
흠.
20명 이상의 인간이 먼 곳으로 떠날 예정이라는 거지.
이거.
마음에 드는데?
"잠시만 기다리십쇼."
식량 창고로 쓰는 방으로 이동한 나는 거기 쌓여 있는 박스들을 둘러보았다.
"노란색이... 여기 있네."
노란색 빛을 띠는 괴물로 만들어진 전투식량.
그 박스를 남자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져가십쇼."
"이, 이건."
"가져오신 몬스터들로 요리한 거랑 비슷...은 아니고, 더 좋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고마움에 고개를 숙이는 남자.
"하지만 원래는 저희가 가져온 괴물로 요리를 하는 거라고."
"원래는 그런데."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가족들 찾아가야 한다는 사람을 어떻게 붙잡아 둡니까."
"...!"
"원래는 수수료로 고기 중 80%까지 가져가는데, 대충 50% 정도 뗀 거로 계산했습니다. 이런 특혜 얼마 없으니까 남들한테 말하고 다니진 마시고."
"정말 감사...."
"그리고 강릉으로 가실 거라고 하셨죠?"
"예에."
난 품에서 노트 한 장을 꺼낸 뒤.
거기에 약도를 하나 그려 주었다.
"저희 부대원들 정찰 결과에 따르면 이쪽 도로가 그나마 쓸 만할 겁니다. 다른 길은 괴물들도 많고 해서."
"이렇게까지 해 주시다니...."
다른 병사에게 소리 지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감격에 몸을 떠는 남자.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기필코...."
"은혜는 무슨. 가족분들 꼭 찾으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예!"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떠나는 남자.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감사하긴 뭘.'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지.
* * *
그런 생각을 하며 방을 나오는데.
"은인이시여."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정수아.
'아.'
내 요리 덕에 눈이 치료됐다는 점 때문일까.
정수아는 나를 지나치게 떠받드는 경향이 있다.
그 강력한 특성 덕에 부대에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공을 생각해 부대의 간부급 자리를 하나 내주는 것도 생각하고 있을 정도이지만
너무 떠받드는 말을 하다 보니 솔직히 말해서 좀 부담스러울 때가 많단 말이지.
이번엔 무슨 얘기를 하려는가 싶었는데.
"...저들에게 너무 많은 온정을 베푸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114화 전투식량 (2)
정수아.
그녀가 강철 군단이라는 길드에 합류한 지도 이제 꽤 시간이 지났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던 군복도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주 업무는 정령을 통한 정찰이다.
정령안을 사용하는 데에는 상당한 마력과 정신력이 필요하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언제나 전력을 다했다.
'은인께서 맡기신 일.... 허투루 할 수는 없으니까.'
각성자가 되고, 시력을 대가로 정령안을 얻었을 때.
그녀는 평생을 눈먼 채로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각오는 충분했으나.
그럼에도 잠에서 깨었을 때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면, 모든 게 잘 보이는 꿈속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을 치료해 준 것이 바로 그.
'위대하신 분.'
사실.
처음 눈을 떴을 때만 해도 그저 감사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
기적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다.
그런 기적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눈을 뜨게 해 준 은인에게 어떻게든 은혜를 갚을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각은 조금 변화해 갔다.
약탈자들에게 잡혀 있던 노예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고,
한 그릇의 요리로 수백의 사람을 먹이며,
성스러운 요리를 통해 병사들에게 신성을 부여하고 악을 벌하는 위업까지 달성했다.
최근에는 정신을 잃은 채 죽어 가고 있던 사람들마저 일으킨 것은 물론,
마법사조차 아닌 그가 물을 가르는 기적까지 일으켰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쯤 되면 오해할 여지 따윈 없다고.
'메시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을 키워 왔다.
그 신앙에 빗대어 보았을 때 지금의 세상은 큰 시련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 시련을 이겨 낼 방법 또한 내려 주시는 법.
'군단장님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오신 구원자임이 틀림없어.'
마음 같아서는 그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었으나, 그녀가 바보는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알리면,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생각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들에게만 이야기를 꺼내 왔다.
그럼에도 지금 와서는 그녀의 생각에 공감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모두 그분의 위업에 감화된 이들.
그만큼 그분이 많은 이들을 구원해 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분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 생각이 그녀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오늘 역시 자신의 한계까지 모든 힘을 소모해 주변을 정찰하고, 위험 요소를 확인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휴식을 위해 이동하려던 찰나.
-와. 저 진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엿듣는 것도 취미가 아니기에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그거 요리하는 데 며칠 걸린다고 하는데도, 못 기다리겠다고 아득바득 우기면서 더 높은 사람 불러오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 정말이지...!
-넌 그렇다고 그걸 신 병장님 선까지 올려 보냈냐?
멈칫.
은인의 이름이 들리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앗... 그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음다. 너무 당황해서 그만.
-그런 사소한 일로 길드장한테 직접 보고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옛날이었으면 너 위로 신 병장님 아래로 다 불러도 이상할 거 없었을걸.
-으윽.
-나중에 제대로 사과드려.
-그럴 생각입니다. 아무튼 어이가 없어서. 그 외에도 수수료로 가져가는 양이 너무 많은 게 아니냐고 따지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지.
-확실히. 그런 건 좀 짜증 나긴 해.
후임을 혼내던 선임병도 그 이야기에는 공감했다.
-신 병장님의 요리가 가지는 가치를 생각하면 8할 가져가는 것도 자원봉사급 아닌가? 막말로 그거 안 해주면 다 굶어 죽거나 자기들끼리 식량 두고 싸워야 할 사람들이.
-고마워하긴커녕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불만이라니. 외부인들한테 잘해 줘도 소용없다니까요.
길드원들이 외부인들을 묘하게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반대로 같은 길드원들 간에는 엄청나게 잘해 주는 게 조금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
그녀는 이미 같은 길드원이었기에 굳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니 넘어갔다.
-신 병장님이 사람이 착해서 다 봐주시는 거지. 다른 사람 같으면 꺼지라고 했어도 할 말 없을걸.
얘기를 모두 듣고 나니,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았다.
'은인께서 또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푸셨구나.'
동시에 걱정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은인께선 너무 선하시다.'
그렇기에 자신에게도 기적을 베풀어 주신 거겠지만.
병사들이 나누는 얘기를 듣고 나니 머릿속에 안 좋은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여러 이야기 속에서 메시아라고 불리는 이들.
하지만 그들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의 선함을 믿고 한없이 베풀다가 배신당하고 마는 이야기가 더 많아.'
은인께서는 선의 집합체 같은 존재.
하지만 다른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은인이 베푸는 호의를 이용하기만 하다가, 언젠가 배신의 칼날을 뽑아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은인께서는 지나치게 선한 존재.
어쩌면 그런 상황에서도 호구처럼 당해 주기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은인께서도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혹시 모르니 한번 말을 꺼내 봐야겠어.'
그렇게 돼서.
"너무 많은 온정을 베푸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녀의 말을 들은 은인은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혜를 베푸는 건 확실히 훌륭한 일이에요. 하지만... 세상에는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거든요"
"그거야 뭐. 그렇긴 하지."
"은인께서 베푼 요리를 통해 배를 불리고, 힘을 키운 사람들이... 나중에 저희를 적대할 수도 있다는 거죠."
구원자의 행보에 딴지를 거는 건 가슴 아프지만,
혹시 그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한다면 바른길로 나아가도록 고쳐야만 한다.
"은인께서는 너무 착하신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가 착하다고?"
"모든 인간이 은인분처럼 선하지만은 않은 법이에요."
그 와중에도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은인.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뭐. 맞는 말이야."
아... 알아주셨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걸."
앗.
설마하니 '다른 사람들을 너무 의심할 필요는 없다.' 같은 얘기를 하려는 건가 싶어진 그녀는 다시 가슴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은인이 꺼낸 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딱히 공짜로 베푸는 건 아니거든."
"...수수료로 받는 80%를 말하시는 건가요? 은인이 베푸시는 요리에 비하면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은데."
"그거 말고."
그 외에 어떤 이득이 있단 말인가.
"지금 이 도시에는 각성자가 넘쳐 나."
"그렇죠."
"이건 아마, 우리가 던전 공략해서 얻은 어떤 보상보다도 큰 보상일 거다."
"...?"
은인이 하시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가는 은인.
"그들의 문제는 식량이 없다는 거지."
"아, 네."
"자칫 잘못하면 수천 명의 약탈자가 될 게 뻔한 상황이지만, 그건 내가 대충 해결할 수 있잖아? 쓸모없는 몬스터 고기를 식량으로 바꿔 주겠다는데. 안 바꾸고 배겨?"
그의 얼굴에 악동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내 전투식량은 맛도 효과도 최상급이지. 요리사라는 직업 자체가 희귀한 편 같기도 하고, 설령 다른 요리사가 있다고 해도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
"아."
"내 요리를 맛본 사람들이, 다른 요리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제서야 정수아는 은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천의 각성자들.
그 각성자들이 모두 은인이 만든 요리를 맛보게 된다는 것.
엄청난 버프를 간단한 조건으로 제공하며, 그 맛 역시 천상에 닿은 수준의 요리를 말이다.
'그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건 은인뿐.'
한번 신영준의 요리를 경험하게 된 이상 그 효과와 맛을 포기하기는 힘들다.
수천의 각성자들이, 좋든 싫든 간에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은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정수아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의 인간을 보는 눈빛에는 자연스럽게 경외감이 담겼다.
'위대하신 분은... 몇 수 앞을 더 바라보고 계셨던 거야.'
그가 일으킨 기적들은 하나하나가 성서에 기록될 법한 일이었으나.
몇 수 앞을 읽어 내는 혜안 또한 앞선 기적들에 꿇리지 않을 정도였다.
"뭐, 여기까지가 민재 형이랑 수혁이 녀석이 얘기해 준 이유다. 난 거기까진 생각도 못 했지만."
"겸손까지 겸비하시다니."
"엉? 뭐가?"
공을 남에게 돌리는 겸손한 모습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뭐. 거기에 하나 더 이점이 있기는 해."
"네?"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 살아남는 것도 힘겨운 세상이다 보니 각성이 쉽지도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 5명당 각성자가 한 명은 될까 싶을 정도지."
인간과 몬스터들 간의 전쟁.
인간들은 승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수적 열세에 처해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그렇겠죠."
"우리 길드가 나설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다른 지역까지 신경 쓰기는 쉽지는 않고. 그러니...."
씨익.
"저 사람들한테 먹을 거 두둑하게 챙겨 주면서 사방으로 퍼트리면 다른 지역 사람들한테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겠냐."
"아...."
"원래라면 우리 부대원들을 파견해서라도 해야 할 일인데. 밥 좀 챙겨 주는 것만으로도 공짜로 일해 줄 사람들이 저렇게 많은 거야. 개꿀이잖아?"
"후후. 그렇네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내 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
"말마따나 내 요리를 챙기고도 잘못된 마음을 먹는 사람들이 나올지도 몰라. 하지만."
품 안의 권총을 툭툭 건드리는 은인.
"그런 녀석들에게 군단이 질 리가 없잖냐."
* * *
신영준과의 대화를 마친 정수아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방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양손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아. 위대하신 분.
군단의 병사들은 남을 배척하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그분은 다르다.
'은인께서 바라보는 것은 전 인류의 구원.'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은인께선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깊은 혜안을 발휘하고 계셨다.
'내 신앙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확고했던 믿음이 더욱 깊어져 갔다.
* * *
띠링.
[조건이 충족됩니다]
[1. 신성의 파편 (1/1)]
[2. 일정 이상의 신앙을 가진 신도 (1/1)]
[조건 달성의 보상으로, 새로운 스탯 : 신력이 개방됩니다.]
"...?"
정수아와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뒤.
저녁 준비를 위해 냉장고를 열자, 갑자기 이런 문구가 나타났다.
"뭐야 이건."
너무나도 뜬금없는 메시지.
당황하며 상태창을 열어보자.
[신력 : 1]
아예 새로운 스탯이 생겨난 것이 보였다.
신력이라니.
'교황의 살점을 먹어서 그런 건가?'
교황의 살점을 회로 요리해 먹었을 때.
뭔가 효과가 적용된다는 문구가 있긴 했다.
뭐가 적용된다는 건가 했는데, 이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 조건 같은 게 충족된 모양이다.
설명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신성력 비슷한 게 아닐까 싶은데....
우리 부대의 사제 각성자한테 말을 걸어 보았다.
"신력...? 아. 신성력 말씀하시는 거군요. 당연히 있죠. 제 신성력은 무려 30이 넘는...."
"아니, 가운데 성 빼고. 신력."
"글쎄요. 그런 능력은 들어본 적이 없군요."
사제조차 정체를 모르는 스탯이라니.
특성이나 스킬을 얻은 적은 있어도 새로운 스탯을 얻은 건 처음이라 영 당황스러웠다.
설마 나쁜 건 아니겠거니 싶다만.
'재생력도 그렇고. 이 정체 모를 스탯도 그렇고.'
뭐랄까.
요즘 들어서 성장에 가속도가 붙어 버린 느낌이 든단 말이지.
막 각성자를 늘리기 시작했을 때.
가끔 부대원들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각성자가 강할까, 총 든 군인이 강할까?
당시의 결론은 당연히 총 든 군인 쪽이었다.
아무리 각성자라고 한들 총 맞으면 죽는 건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비슷한 얘기가 오갈 때면 붙게 된 말이 있었다.
-'지금은' 말이지.
언젠가는 맨몸으로도 총을 든 군인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가정이 붙게 된 것이다.
재생력까지 얻은 지금의 나라면 실제로 가능한 얘기가 아닐까.
슬슬 나 자신이 평범한 인간의 영역을 넘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종종 들곤 했다.
"뭐. 상관없나."
지금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여러 능력들을 통해 수명이 조금은 늘어났다.
그게 중요한 거니까.
'이 스탯도, 언젠가는 쓸 일이 있겠지.'
* * *
그 후로도 비슷한 나날이 이어졌다.
오늘도 부대 급식을 만들기 위한 식재료를 꺼내려 그림자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주인님의 주인님이시여.
안쪽에서 물건을 옮겨 주던 뱀파이어가 말했다.
보통은 내가 시키는 대로 물건만 옮기는 녀석들이 갑자기 말을 걸다니.
무슨 일인가 했는데.
-당근, 양배추, 파, 마늘 등등이 거의 다 소진되었나이다.
"아."
-무도 거의 다 떨어져 가고, 감자는 그나마 여유가 있습니다만 이것도-
무려 '뱀파이어'라는 녀석이 내뱉기에는 지나치게 현실감 넘치는 말.
냉장고 야채칸이 비어 가고 있다는 거다.
탄약대대를 떠날 당시에는 넉넉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가져왔던 재료들.
[오병이어]까지 동원한다면 부대원들을 몇 년은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 양이었다만.
'[오병이어]는 마력을 동원하는 스킬이니까.'
혹시 마력이 소모된 상태에서 불의의 습격이라도 당하면 큰일.
급식을 만들 때는 굳이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
"채소가 벌써 다 떨어졌나."
고기야 도시의 각성자들이 가져오는 것들로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채소도 뭐.
탄약대대에 한 번 더 들러서 보충하면 될 일이긴 하다만.
불현듯 드는 생각.
'고기류에 비해서... 채소류의 질이 너무 떨어진단 말이지.'
질이 떨어진다는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채소들을 제공해 주는 것은 탄약대대 근처의 마을에 있는 농부 각성자.
그는 나름대로 재배한 물건들 중에서도 신선한 재료들만 보내 주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평범한 취사병 시절의 질 떨어지는 채소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싱싱한 것들뿐이고.
문제는.
[거완 혼마르의 전지살]
[앞발을 통해 큰 힘을 발휘하는 거완 혼마르의 앞다리살입니다.]
괴물의 고기들은 기본적으로 마력을 품고 있어서 요리해서 먹으면 [요리에 담긴 마력이 몸 안에 스며듭니다.] 같은 문구가 붙는다.
평범한 소고기, 돼지고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반면 채소들은....
"신선하긴 한데. 고기하고 비교하면 여엉."
요리의 실력이 올라갈수록.
평범한 채소들에서 재료의 한계를 조금씩 느끼게 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채소를 안 먹일 수도 없는 일이니까."
조만간 한번 인제군에 들러서 채소류를 보충해 와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차.
[재봉사 : 저기요, 군단장님?]
양반은 못 된다는 것일까.
길드 메시지 한 통이 날아왔다.
인제군의 탄약대대는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그곳을 관리하고, 주변의 사람들을 부대원으로 만드는 등의 작업을 맡은 것이 바로 우리 부대의 재봉사, 이상아 대대장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훌륭하게 탄약대대 기지를 관리해 주었다.
본진이 안정적으로 버텨 준 덕분에 원정군인 우리가 던전 공략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곳 춘천에 정착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만.
[제봉사 : ...좀 도와주셔야겠는데요?]
그 든든한 본진에서.
구원 요청이 날아왔다.
115화 밀림 (1)
"군단장님!"
이상아 조장의 구원 요청.
그걸 확인한 나는 곧바로 부대원들을 이끌고 탄약대대로 복귀했다.
춘천으로 영역을 넓히기 위한 활동을 그만둘 수는 없었기에.
데리고 온 부대원들이 많지는 않았다.
내가 미리 만들어놓은 전투식량의 양도 상당하니, 저쪽은 저쪽대로 돌아가고 있겠지.
도시 간의 이동이 쉽지는 않다만.
그나마 지하철을 확보한 우리는 강행군을 통해 며칠 내로 탄약대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꽤 많이 바뀌었네.'
탄약대대의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본래 넓은 부지를 제외하면 낡은 군부대에 불과했던 탄약대대였으나.
누가 봐도 튼튼해 보이는 거대한 방벽 같은 것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와 부대원들이 던전 공략을 위해 떠난 지도 몇 주가 지났으니.'
탄약대대에 남은 전투 계열 각성자는 많지 않았지만,
공병과 같은 생산 계열들은 꽤 많이 남았었다.
인간을 초월한 작업 능력을 가진 공병들.
그들이 쉬지 않고 일한 결과물이란 거다.
"무슨 일이야?"
나는 마중 나온 병사들을 보며 물었다.
저 웅장한 방벽도 그렇고.
겉보기에는 문제 따위는 없어 보이는데.
"그게...."
"일단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약간 의아했지만.
병사들의 인도를 따라 부대 안쪽으로 진입했다.
"군단장님? 죄송해요, 오신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어느 정도 안쪽으로 진입하자.
이 부대의 관리를 맡은 [재봉사].
이상아 대대장의 모습을 보였다.
손에는 커다란 가위를 들고 있는 그녀.
본래 그녀의 주 무기는 한 손에 하나씩 쥘 수 있을 정도의 가위였으나.
저 가위는 엄청나게 컸다.
재봉사인 그녀가 쓸 만한 물건이라기보단.
나무의 가지치기 정도에나 쓸 법한 물건으로 보일 정도로.
그리고 실제로.
"...뭐 하는 거야?"
"보이시는 대로."
싹둑.
"나무를 자르고 있어요."
그녀가 그 커다란 가위로 자르고 있는 것은 나무.
정확히 말하면.
"밀림...?"
탄약대대 안쪽, 아니.
탄약대대 지부를 넘어, 뒤쪽의 산맥 전체를 뒤덮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나무들이었다.
* * *
탄약대대, ASP.
다양한 폭발물을 보관하는 부대의 특성상, 유폭의 우려가 있어 건물들 간의 간격이 넓다.
부대의 부지 자체가 일반적인 부대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것.
'후방에 있는 탄약창들은 서울대의 몇 배 정도라던가.'
전방에서 탄약을 보관하는 탄약대대는 그 정도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우 넓은 부지라는 점은 같았다.
그 넓은 영역을 모두 방어하기도 힘든 일.
우리 부대는 탄약대대의 일부 지역만 사용하고 있었다만.
"탄약대대 부지의 3분의 2가 침식되었다?"
"네.... 부끄럽지만."
우리가 사용 중인 지역을 제외하고, 탄약대대의 부지 대부분이 저 밀림에 침식당해 버렸다는 거다.
"어쩌다 저렇게 된 거지?"
"어쩌다...라기보단. 어느 날 갑자기 저렇게 되어있었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시선을 옮겼다.
본래 탄약대대의 영역 끝에는 낮은 산들이 펼쳐져 있었다만.
'어쩐지 부대 풍경이 많이 바뀐 거 같더라니.'
원래는 나무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던 산.
그 나무들도 하나같이 메말라서 안쪽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였으나.
지금은 정반대.
허접했던 산의 대부분이 거대한 나무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차라리 천천히 생긴 현상이라면 저희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을 텐데,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나니 저렇게 되어 있었음다."
"저희가 연락을 드린 것도 바로 그날이에요."
다른 병사들도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저만한 밀림이 하루아침에 생겨나다니.
그야 말이 되나 싶지.
"저런 일이 가능한 괴물이 있다고 해도. 부대 근처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저희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어요."
공병들의 손이 닿고 시간이 꽤 지난 탄약대대 기지.
나름의 정찰 체계도 완성되어 있었다만, 저 현상은 그 체계를 뚫고 일어났다.
"...허공에서 갑자기 뿅하고 떨어진 게 아니고. 도대체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말이 하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적은 강대해질 것이라. 대비하는 것이 좋겠지.]
교황이 죽기 전에 적선하듯 남긴 말.
이미 지상에 있는 괴물들이 더 강해질 것이라는 얘기로 이해했었는데.
'애초에. 괴물들 자체가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났잖아.'
멸망의 날은 물론.
춘천의 던전이 닫힌 순간, 마치 원래 거기 있었다는 듯 나타난 몬스터들까지.
허공에서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났단 말이지.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몬스터들이 소환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멸망의 날에 나타난 괴물들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후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괴물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을지도.
저 현상 역시 마찬가지.
애초에 저 산속에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 일으킨 현상이라면.
정찰 체계가 뚫린 것도 이해가 간다.
"태워 버리는 것도 고려는 했는데, 아무래도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판단했어요."
"그야. 부대를 다 집어삼킨 밀림이니까."
"잘못하면 우리 부대는 물론, 부대 주변에 자리 잡은 마을까지 피해가 갈 것 같더라구요."
오랜 시간을 들여서 안정화된 부대와 마을이다.
밀림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마을까지 피해를 입어 버리면 본말전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싹둑.
"넓혀져 오는 걸 잘라내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었어요."
"...."
[가위 숙련]을 가지고 있는 그녀.
지금은 가지치기용 대형 가위를 들고 서서히 접근해 오는 나무를 베어 내고 있었다.
'가위로 병사들 이발해 줄 때도 그렇고. 이제는 나무를 자르는 용도로까지 쓰다니.... 묘하게 특성 활용을 잘하네.'
근처를 둘러보니.
다른 병사들도 나름대로 톱 같은 걸 들고 영역을 넓혀 오는 나무들을 잘라내고 있었다.
"공격해오진 않는 건가?"
"안쪽으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괜찮은 것 같아요."
안쪽으로 들어가면 공격도 한다는 거냐.
살벌하네.
"일단 너희도 도와줘."
"아. 예."
데려온 부대원들에게 말하자.
녀석들의 표정이 묘하게 안 좋아졌다.
'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지금 이거.
부대에 있을 적에 정말 끔찍하게 싫어했던 일하고 조금 비슷하단 말이지.
"제초 작업이라니...."
"각성까지 했으니 진짜 제초 작업이면 쉽게 했을 텐데. 저건."
뭐 어쩌겠냐.
뺑이 쳐야지.
* * *
"휴... 힘드네요."
각성자들도 각성자들이지만, 잘라야 하는 것도 평범한 풀도 아니었던지라.
제초작업은 상당히 체력을 소모했던 것 같다.
그녀의 얼굴에도 땀이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네?"
그림자 속에 손을 집어넣은 뒤.
원하는 재료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사미란의 차가운 뿔]
도시의 각성자들이 가져온 다종다양한 괴물들.
그중 쓸 만해 보이는 건 모두 그림자 속에 넣어 뒀다.
'이 녀석은 마법사도 아닌데도 얼음 같은 걸 쏘던 괴물이라고 했지.'
그 뿔은 얼음처럼 차가운 것은 물론, 주위로 묘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콰직.
그걸 칼등으로 내려치자.
뿔의 끝부분이 얼음이 깨지는 것처럼 조각났다.
나는 식당의 컵에 물을 담아 조각난 뿔을 넣은 뒤.
그 위에 시럽을 살짝 추가했다.
그러자.
[요리가 완성되었습니다.]
[중급 요리사의 서늘한 한기가 담긴 사미란 드링크]
효과는 다양했다.
체온 조절, 냉기친화력 상승, 피로도 감소 등....
"마셔."
"아. 감사...."
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원하고 달달하다는 것.
"후우!"
춘천에서도 몇 번 이렇게 해서 먹었는데, 영 나쁘지 않았다.
땀 흘리고 난 뒤에 체력 보충용으론 적당하겠지.
"간만에 군단장님 요리를 먹어 보네요."
"요리라고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음료를 마시고 나니 조금은 기분이 상쾌해진 듯한 그녀.
저 밀림도 밀림이지만.
내가 없는 동안 궁금했던 일들을 먼저 묻기로 했다.
"그때 그 남자는 아직도 누워 있나?"
"아. 네. 몸 상태는 많이 나아졌다고 보고를 받았는데, 아직 정신은 못 차린 것 같아요."
던전에서 탈출해 우리를 찾아왔던 남자.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묻고 싶은 게 많긴 한데, 그건 나중에 해야겠네.
"벙커나, 이 근처에 만들어진 마을도 꽤 커지고 있어요. 그쪽에서 길드에 가입을 문의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구요."
"다행이네."
그 외에도 근황을 물어봤다만.
여기도 나름 잘 돌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저 밀림이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지.
"크흠. 취사병 총각...이 아니라. 군단장님이라 불러야 하나?"
그렇게 이상아에게 부대의 근황을 듣고 있자니.
누군가 다가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익숙한 얼굴.
"철욱 아저씨."
"하하. 이제 편하게 불러 주십쇼."
내가 이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우리 부대의 채소류를 공급해 주는 인물.
농부 각성자였기 때문.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편하게 부르라는 것도 그렇고, 복장도 그렇고.
특히 내가 군단장이라는 것은 마을 사람들은 모르는 일.
"아. 방금 말씀드렸죠? 가입 문의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철욱 아저씨도 그중 한 분이세요?"
"어. 정말?"
이건 좀 의외인데.
우리 부대에 합류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긴 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합류를 꺼리는 건, 우리 부대는 괴물과의 최전선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 때문.
사람들은 약간의 보호비를 내더라도 안전하게 보호받는 것을 원했다.
농부인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한동안 지내다 보니까 생각이 조금 바뀌더군."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철욱.
"군부대에 징용된다는 생각을 하니 꺼려진 게 컸는데, 지내다 보니 군인 양반들 얼굴빛이 나쁘지 않더구려. 어차피 합류해도 난 농사일이나 할 테니 위험할 것 같지도 않고."
"이끄시던 그룹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쪽 사람들은...."
"마을도 안정화가 됐으니까."
굳이 리더인 그가 없어도 다들 문제없을 정도라는 것 같다.
우리를 꽤 경계했던 그가 합류했다는 건, 부대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좋아졌다는 뜻.
좋은 일이지.
그런데.
"실은... 군단장님이 오셨으니 말씀드리는 건데."
그가 말을 걸어온 것은 단순히 인사를 위한 게 아니었나 보다.
"저 밀림. 평범한 밀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 보이는 것 이상으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했는데.
"[하급 농부]로서의 감이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대체 무슨."
"저 안에, 농부의 혼을 불타오르게 할 만한 것들이 자라나고 있다고!"
...그건 좀.
"구미가 당기네."
* * *
"후우."
"조심해."
부대원 한 명이 슬쩍 밀림 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콰직...!
"으어어."
주변을 천천히 침식해 오던 나무뿌리들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다리를 붙잡힐 뻔한 병사가 급하게 몸을 빼며 뒤로 넘어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나무뿌리를 바라보는 녀석.
이상아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쪽에 사람을 보내 볼 생각도 해 봤지만 저런 느낌이네요."
"흐음."
침식해 오지 못하도록 끝부분부터 정리하는 것에는 반응이 없지만.
안쪽에 몸을 들이미는 순간 공격이 시작된다는 거다.
"나무를 베면서 파고 들어간다면 어느 정도는 전진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저 나무들은 몬스터의 본체도 아닌 것 같단 말이죠?."
"그건 어떻게 알았지?"
"경험치를 획득했다는 문구가 안 나왔거든요."
과연.
나무를 베면서 파고 들어가 봐야 부대원들의 체력만 소모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흠."
나는 슬쩍 몸을 돌려 뒤로 물러난 뒤.
부대 안쪽에 원래부터 나 있던 가로수용 나무에 다가갔다.
빠직.
나무의 가지 하나를 뜯은 뒤.
"군단장님?"
"잠시만."
그 나무가지를 밀림 안쪽에 던져 보았다.
최대한 스핀을 주어서.
그 결과.
"...."
"뭘... 하시려는 겁니까?"
반응은 없이 잠잠했다.
과연.
"움직이는 물체에 반응하는 건 아니고."
다음으로는 그림자 속에 손을 집어넣은 뒤.
안쪽에서 고기 덩어리 하나를 꺼냈다.
휙!
아까운 식량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나뭇가지와 비슷하게 회전을 주어서 던지자.
꽈아아아악...!
고깃덩어리에 몰려드는 나무뿌리들.
대충 알겠다.
나뭇가지에는 반응이 없고, 고깃덩어리에는 반응한다라.
"살아 있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고. 식물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 같네."
"아...!"
그제야 내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파악한 듯한 부대원들.
저 밀림이 적을 구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공격 조건을 알아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우리 부대원들 중에 식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하지만 달라지는 게 없지는 않다.
'움직이는 걸 모두 공격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나름대로 방법이 있거든.'
[파란의 물방울 젤리]
[절대 미각의 두 번째 효과를 적용하시겠습니까?]
[일시적으로, 특성 - 환경 동화를 획득합니다.]
"아!"
입안에 젤리를 집어넣는 것을 본 이상아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설마 또 위험한 짓을 하시려고...!"
"정답이다."
철욱의 말에 의하면.
저 안에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마도 이 사태의 원인이 될 만한 존재.
밀림을 모두 태워 버리는 방법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둬야 할 테니.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잖냐.
[환경 동화]
주변 환경에 맞추어 녹아드는 몸.
기본적으로 잘 보이지 않게 된다는 은신 스킬로써의 효과도 있지만.
이 특성의 이름은 [환경 동화].
내 몸이 주변 환경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저벅.
밀림 안으로 군홧발을 집어넣었으나.
타인을 배척하는 나무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구, 군단장님!? 잠깐! 위험하다니까요!"
밀림에 동화된 몸.
나는 밀림의 안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바스락....
나무들이 공격해 오지는 않는다고 하나.
밀림 안쪽을 이동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습.... 맘 같아선 다 잘라 버리면서 이동하고 싶은데.'
지나치게 울창한 나무들.
인간을 위한 길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보니,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칼을 꺼내 마체테처럼 잘라내며 이동할까 생각도 들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선 넘는 거겠지.'
환경동화가 되었다고 하나.
그런 적대 행위까지 그냥 넘어갈 것 같진 않으니까.
"허억...."
탄약대대의 넓은 부지를 지나, 산 쪽으로 향해야 한다.
그 와중에 길은 없고 죄다 나무로 막혀 있다 보니.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지친다.
중간에 잠시 근처 나무에 걸터앉은 나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절경이구만."
사진으로나 보던 거대한 나무들.
그 나무들로 둘러싸인 밀림.
이 산에 있던 나무들은 모두 영 힘이 없어 보였다만.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지금이야 그냥 풍경에 감탄할 따름이다만.
'이만한 밀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괴물이라.'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 걸까.
잠시간의 휴식을 끝낸 뒤.
어떻게든 나무 사이로 몸을 욱여넣어 가며 밀림의 중심부를 향했다.
그 대단한 녀석이 있다고 한다면, 분명 중심부 근처일 테니.
그렇게 얼마나 긴 거리를 이동했을까.
'연기?'
저 멀리.
나무 사이로 무언가 흐릿한 연기 같은 것이 보였다.
아니.
연기가 아니군.
[전투력 측정기]
몬스터들이 품고 있는 마력.
그것이 시각화되어 피어오르는 기운.
그 기운을 본 순간.
멈칫.
나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야.
"...파란색이라."
그 연기의 색이.
꽤 살벌했거든.
116화 밀림 (2)
"파란색...."
[전투력 측정기]가 알려 주는 적의 강함은 색에 따라 나뉜다.
빨, 주, 노, 초.
그리고 파랑.
'노란색만 되어도 상당히 강한 편인데.'
초록색 괴물쯤 되면 우리 부대원들이라도 여럿이 붙어서 상대해야 할 정도의 괴물이다.
그걸 넘어 파란색이라니.
사실.
파란색 기운을 내뿜는 괴물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내 그림자 속에 있는 괴물.
'밤의 귀족이란 종족이 딱 파란색이었지.'
다만.
아리엘라를 바라보았을 때 나오는 푸른색은 아주, 아주 옅었다.
아슬아슬하게 파란색에 해당하는 강자지만, 딱 그 정도라는 뜻.
그야 준남작이라는 칭호만 봐도 그렇겠지.
반면 눈앞의 존재는....
'아주 짙은 건 아니지만, 옅지도 않아.'
최소한 아리엘라보다는 강한 괴물이라는 뜻.
나도 자신이 없지는 않았다.
자신이 없었으면 애초에 이 안에 혼자 들어오지도 않았지.
-어떻게, 저희가 나서 볼까요?
그림자 속에 있는 병력만 100인.
울창한 밀림 속으로는 햇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전력이 감소되지도 않을 터.
다만, 문제는 이 환경.
'밀림을 움직이는 괴물이라.'
저 녀석이 이 주변의 나무들을 조종하는 존재라면.
이 전투는 100:1이 아니다.
'이 숲 전체와 싸우는 꼴이 되겠지.'
어쩌면 지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터.
잠깐 고민한 나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일단 모습만 확인하고 후퇴한다.'
애초에.
내 강점은 서로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서의 전면전 따위가 아니니까.
[요리사의 눈]
[식재료 감별(강화)]
적의 약점과 정보를 파악하는 두 능력.
그리고 그 능력으로 파악한 약점에 유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요리] 버프.
이 두 가지의 조화를 잘 이용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 것이 나의 주된 전략이다.
여기서 바로 싸워 줄 필요 따윈 없단 말이지.
하지만 그 전략을 활용하기 위해선 일단 적의 모습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
[요리사의 눈]은 상대를 어느 정도 집중해서 바라보기 전에는 발동하지 않으니까.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몸을 옮긴다.
푸른 기운을 내뿜는 형체.
그 모습이 조금 보이려고 하던 순간.
콰직.
"...!?"
발목을 조여 오는 감각.
바닥의 나무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미친.'
들킨 건가!?
혹시나 해서 특성을 확인해 보았으나.
[환경 동화]는 유지되고 있었다.
난 아직 이 밀림에 동화된 존재라는 뜻.
그런데 어떻게....
아니.
"제기랄, 파란색쯤 되는 괴물이잖아."
무슨 짓이 가능해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 이 숲은 놈의 영역.
아무리 [동화]되었다고 한들, 방심해선 안 됐는데!
파아아아악!
내 발목을 붙잡은 나무뿌리가 급격하게 늘어나는가 싶더니.
내 몸을 어디론가로 옮기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한테 좋은 일 해 주려고 이러는 건 아닐 테니.
"전투 준비...!"
급하게 그림자를 보면서 소리친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뱀파이어 병력이 다 갈려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볼 수밖에.
생각의 회로를 전투용으로 바꾸며, 급하게 칼을 뽑아 들었다.
일단은 이어질 공격을 쳐낸 뒤, 발목을 자른 나무 또한 베어 낼 생각이었으나.
....
이어지는 공격은 없었다.
"뭐지...?"
내 발목을 붙잡고 어디론가로 이동하던 나무.
그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보아도, 공격해 오는 움직임은 없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제자리로 돌린 순간.
"...ㅆ...바 깜짝이야."
내 얼굴 정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식재료 감별 - 강화]
[알라우네]
[요리사의 눈]
[중급 요리 비결, '알라우네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그곳에 있는 것은....
한 그루의 작은 나무였다.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대수림.
그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작고 왜소한 나무.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무늬가 조금 신기하다는 점이었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나무의 결과 무늬가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거.
이 나무도 마찬가지.
중심부의 무늬는 마치 사람의 이목구비를 빼다 박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뒤룩.
'정신 건강에 안 좋네, 이거.'
나무에 박혀 있던 이목구비.
그 눈이 떠지는가 싶더니, 눈알이 뒤룩뒤룩 구르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처럼 보이는 무늬가 아니라 진짜 얼굴이었냐.'
나무껍질에 뒤덮인 얼굴이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나도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눈싸움을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정신 건강에 좋은 짓은 아닐 것 같았다.
너무 징그럽게 생겼잖아, 이거.
"...."
-...
그 뒤로 한동안 눈싸움이 이어졌다.
공격은커녕.
계속해서 잠자코 내 얼굴을 바라보는 녀석.
-주인님? 공격할까요?
"아니... 아니. 일단 대기해."
지금 나는 발을 붙잡힌 채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상태였다.
피가 정수리 끝에 모이는 기분이 영 불쾌했다.
마음에 드는 꼴은 아니다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를 공격하려는 것도 아닌 것 같단 말이지.
"혹시라도 내가 공격당하면 바로 반격한다. 필요하다면 네 권속들을 모두 잃어도 좋아. 내 목숨을 최우선으로 한다."
-명하시는 대로.
일단 혹시 모르니 그렇게 명령을 해 놓은 뒤.
매달린 상태로 눈앞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갸웃...?
그러자.
나무에 박힌 얼굴이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휘익.
발목을 붙잡은 나무뿌리에 이끌려.
거꾸로 매달린 내 몸이 어딘가로 움직인다.
슬쩍 뒤쪽을 돌아보자.
꽤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휘익.
또 다른 곳으로.
이번에는 종이 조금 다른 것 같은 나무가 또 한 그루.
"사람 거꾸로 매달아 놓고 뭐 하는 짓이냐. 이건."
-저는 좀 알겠는데요?
"뭐?"
영문을 모를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으나.
제3 자의 시선에서 보고 있던 아리엘라에게는 짐작 가는 게 있었나 보다.
-다른 나무들에 가져다 대면서 비교하고 있잖아요.
"그게 뭔...."
-주인님을 처음 보는 모양의 나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
특성, [환경 동화]는 유지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밀림에 동화된 상태라는 뜻.
보통의 경우에는 은신 능력 정도로만 활용한 특성이다만.
정작 이 녀석에게 은신으로써의 효과는 없었다.
다만.
이 특성이 아예 효과를 상실한 건 또 아니라는 뜻.
-매달려 있는 주인님 시점에선 모르겠지만, 여기서 보면 딱 그 느낌이거든요. 얘만 왜 이렇게 모양이 다르지? 하면서 여기저기 비교하는 거.
"...그럴싸하군."
은신 효과가 없어졌을지언정.
이 밀림에 동화된 효과는 유지되고 있다 보니 날 특이하게 생긴 나무로 인식하고 있다는 거다.
저 눈빛도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이런 나무도 있었나?
그야.
땅에 박히지도 않은 채로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나무다.
내가 저 녀석의 관점이 되어도 신기할 것 같긴 해.
-일단은 잘된 거 아닌가요? 공격당할 일은 없다는 뜻이니.
"그건 아직 모르지."
당장은 여유가 있는 듯하니.
난 방금 알아낸 알라우네의 정보를 살펴보았다.
[알라우네]
[역사와 규모가 남다른 숲속에서만 드물게 나타난다는 전설적인 종족, 알라우네입니다.]
[주변의 식물들을 영향하에 둘 수 있는, 식물들의 지배자로서의 힘을 타고난 종족입니다. 그 특별한 능력 덕에, 잠재력을 모두 개화한 강대한 알라우네는 세계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알라우네를 손질하기 위해서는 우선 뿌리를 깨끗이 씻고-]
설명에 따르면.
이 녀석은 주변의 식물을 지배하고 영향하에 두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 밀림이 그 결과물이겠지.'
그리고.
"이 녀석의 관점으로 보면, 난 녀석의 지배를 받지 않는 나무인 셈이잖냐."
식물들을 지배하는 능력을 가진 괴물.
그런 녀석이 자기 지배를 따르지 않는 존재를 마주했다.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 수 없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하나.
'건방지게 내 말을 거부하다니!'
오만방자한 귀족이 반항하는 노예의 목을 한 번에 댕강- 해 버리는 그런 장면.
이 녀석이 식물을 지배하는 존재라면.
지배를 거부하는 나를 건방지다며 처분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반응에 따라 대처도 달라져야겠지.
그리고.
투욱.
"어. 내려 주는 거냐?"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놓는 나무줄기.
바닥을 딛고 서자.
이번에는 알라우네 본체에 나 있던 뿌리가 내게 다가왔다.
내 앞에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뿌리.
이건.
"악수라도 하자는 건가?"
-잘됐네요.
그림자 안에서 들려오는 키득거리는 소리.
모든 식물을 지배하는 존재.
그 앞에 나타난 지배받지 않는 식물.
건방지다는 이유로 없애 버리지나 않을까 했다만.
-친구로 인정받으셨나 본데요?
생각해 보면.
동등한 존재로 인정할 수도 있는 일이지.
* * *
알라우네는 나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공격할 의도는 없는 것 같으니 조금은 안심해도 되려나 싶던 찰나.
녀석의 눈이 스르르 잠겼다.
이거 설마.
"...자는 거냐?"
-꽤 태평한 나무네요.
아무리 동등한 존재로 인정했다고 해도 그렇지.
편하게 대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는 거 아냐?
'그래도 뭐. 위험하진 않겠네.'
저 녀석이 편하게 잠이나 자는데 나 혼자 긴장하는 것도 웃긴 일.
나도 조금은 긴장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하늘 위까지 뻗은 거목들.
"천천히 보니 더 대단하네."
이 정도의 밀림.
적어도 대한민국에는 없을 게 확실했다.
아니 해외로 나가도 있긴 할까?
밀림의 중심부여서 그런 것일까.
주변의 나무들은 하나하나가 거대하고, 높았다.
인터넷에서 본 바오밥 나무 같은 게 실제로 보면 저런 느낌이지 않을까.
특히, 알라우네 주변.
주인을 지키듯 모여 있는 거목들은 특히나 거대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사이즈.
덕분에 덜 자란 가로수 같은 사이즈의 알라우네가 더 작아 보였다.
자세히 보니.
밀림에 있는 것은 그냥 거대한 나무가 전부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의 다양한 식물들.
처음 본다고 하긴 했지만, 애초에 식물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다 보니
당연히 원래 이 산에 있는 것들이 변이된 건가 싶었다만.
[버제스토마 약초]
[미스쿠스 나뭇가지]
"뭐야."
자세히 보니.
애초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중간부터 식물들의 모습이 좀 이상해진 것 같기도 하고.
철욱이 남겼던 말도 떠올랐다.
-저 안에! 농부의 혼을 타오르게 하는 것들이 자라나고 있다고!
"이것들 얘기였나 보구만."
다른 괴물들이나, 알라우네와 마찬가지.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식물들.
농부인 그가 흥분하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품질이 다소 저하됩니다.]
"환경의 영향이라."
이 밀림이 생겨난 산.
농담으로도 명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나무도 듬성듬성하게 나 있었고, 그 나무들 상태도 영 메롱이었단 말이지."
뭐 평범한 동네 뒷산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식물의 성장에는 땅의 힘도 중요한 법.
우리나라는커녕, 세계를 뒤져 봐도 찾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나무들의 숲.
일개 동네 뒷산의 지력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 그렇다는 건 설마."
나는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알라우네 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잠들었을 때는 참 태평한 놈이다 싶었다만.
알라우네가 박혀 있는 자리의 바닥을 내려다보자.
[식재료 감별(강화)]
[흙]
[신선도 - 최하]
"최하...."
흙에게 신선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냐 싶을 수도 있다만.
저 [신선도]라는 건 생각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
저 흙은 지력을 모두 상실했다는 뜻.
알라우네 역시 설명에 의하면 식물의 한 종류.
그렇다면 땅에서 영양 섭취를 해야만 할 텐데.
갑자기 잠들어 버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영양실조로군."
이 땅의 지력은 저 알라우네와 주변 식물들을 감당할 수 없다.
갑자기 잠든 건 마음이 편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눈을 뜨고 있을 힘도 없었던 거야.'
다리도 없는 알라우네가 다른 지역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을 리는 없다.
부대원들도 자신들의 감시망을 뚫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으니까.
아마 내 추측대로 갑자기 '뿅' 하고 이쪽에 나타나 버린 거겠지.
그렇게 나타나고 보니 땅의 상태가 영 아니었다는 거고.
'운도 더럽게 없는 나무로군.'
대충 상황은 파악됐다.
그리고 내가 파악한 게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처리하기가 어렵진 않겠네."
이 밀림을 만들어 낸 주범.
알라우네는 이곳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밀림의 영역이 넓혀지고 있던 것도... 어쩌면 새로운 영양을 섭취할 만한 땅을 찾기 위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그렇겠지."
다만.
적어도 이 밀림이 넓혀져 가는 방향 중 한 곳은 우리 부대원들이 틀어막고 있다.
다른 방향으로 나가도 그렇게 영양분이 넘치는 땅은 없을 터.
즉.
-가만히 두기만 해도 금방 말라 죽겠는데요?
지금 부대원들이 하고 있는 제초 작업.
그걸 범위를 좀 넓혀서 몇 주 정도만 이어 가도 충분하다.
영양을 섭취할 만한 새 땅을 찾지 못한다면, 녀석은 혼자서 말라 죽어 버리겠지.
탄약대대와 마을을 위협하던 사건은 간단하게 해결되는 셈이다.
나쁘지 않다.
나쁘진 않은데.
흠.
"좀 아까운걸."
-네?
"저 식물들."
알라우네 주변에 퍼져 있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
처음 각성했을 때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마력을 품고 있단 말이지."
철욱이 괜히 농부로서의 혼 어쩌구 한 것이 아니다.
요리사인 내게도 마찬가지.
평범한 고기보다는 마력을 품은 고기가 맛도 효과도 뛰어나다.
그렇다면.
채소도 비슷하지 않을까?
"안 그래도 요즘 재료들이 좀 빈약하다고 생각했거든."
저대로 말라 죽게 만들기엔 너무 아깝잖냐.
난 아까운 건 그냥 못 넘어가거든.
결정을 내린 나는 몸을 일으켰다.
꿈뻑....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감겨 있던 알라우네의 눈이 다시 떠지며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르르.
힘없이 다시 감기는 눈.
어지간히 배고픈가 보지.
"금방 다녀오마."
녀석은 내가 떠나는 것도 붙잡지 않았다.
올라갈 때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내려오는 길은 그보단 나은지라.
별다른 방해 없이 산을 내려와 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 어어!"
"신 병장님이 돌아오셨다!"
부대에 돌아오자.
열심히 밀림의 침식을 막고 있던 부대원들이 나를 보고 소리쳤다.
소란을 듣고 찾아온 이상아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무모한 짓은 안 하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봐. 멀쩡하게 돌아왔잖아."
"...."
할 말을 잃은 듯한 그녀.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지금은 좀 바쁘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이상아를 뒤로한 채.
나는 모여 있는 부대원들 사이에서 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박철욱 부대원."
"추, 충성."
내 부름에 부대원들 사이에서 달려 나오는 남자.
농부 각성자, 박철욱.
그는 전역한 지 오래되었다가 최근에야 재입대한 셈이다.
지금은 취사병 총각으로서가 아닌 군단장으로서의 호출.
오랜만에 느끼는 분위기에 조금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중요한 임무가 하나 있어."
"뭐든지 말만, 아니. 말씀만 해 주십쇼!"
긴장한 듯 몸을 쭉 핀 그에게 명령했다.
"비료 만드는 법을 좀 가르쳐 줘야겠다."
"...예?"
전역한 지 오래된 양반이라 그런 것일까.
대답이 영 군기가 빠졌는데.
"영양가 있는 흙이 필요하니 비료 만드는 법... 아니."
"...?"
"비료를 요리하는 법을 가르치라고."
흙이 영양을 잃은 탓에 영양실조가 된 나무들.
그렇다면 요리사로서 할 일은 하나뿐이잖냐.
기다려라.
'내가 만들어준 흙이 아니면 안 된다고 울부짖게 만들어 주지.'
117화 밀림 (3)
저 밀림의 근간이 된 것은 탄약대대 뒤편의 산.
하지만 그 산은 본래도 지력이 썩 강하진 않아 보였다.
저만한 밀림을 감당할 만한 지력 따위 있을 리가.
그 결과
'알라우네는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
즉.
인간으로 비유하면, 배를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다른 복잡한 문제가 있다면 모를까.
단순히 배고파 죽겠다~ 하는 거라면.
'까짓것 해 주면 되는 것 아니겠냐.'
식물이 좋아할 만한 요리를.
"크흠. 이런 걸 윗사람한테 가르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박철욱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료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니."
"아까는 뭐든 맡겨 달라고 하지 않았나?"
"...알겠습니다."
불만은 잠시.
그의 얼굴이 조금 진지하게 바뀌었다.
"일단 가르쳐 드리기로 한 이상, 군단장님은 제 가르침을 받는 제자인 셈입니다."
"그렇지."
"제가 말하는 걸 절대적으로 따라 주셔야 한다는 뜻이죠."
무슨 걱정을 하는 것인지는 알 것 같았다.
취사병 총각으로 알고 있던 때라면 모를까, 길드원들 사이에선 내 위치가 절대적인 갑.
혹시라도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이겠지.
하지만 단언할 수 있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냥 취사병 병장이었거든.
시키는 것만 하는 데에는 도가 튼 게 대한민국 군인 아니겠냐.
"그러면 일단 재료부터인데."
"아."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비료를 만들 생각을 하긴 했다만.
내가 살면서 비료를 만드는 장면을 본 것은, 영화의 한 장면이 전부다.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도 그렇고,
그 영화의 장면도 그렇고.
"...혹시 분변 같은 게 필요한가?"
비료의 재료는 하나뿐이었다.
위생이 생명인 요리에서 가장 위생과 거리가 먼 재료를 쓰게 되려나 했는데.
"아뇨아뇨. 언제적 얘깁니까 그게."
내 얘기에 철욱은 손을 가로로 휘저었다.
"분변으로 만드는 비료 같은 건 다 옛날 얘깁니다. 요즘은 어지간한 시골 농가에서도 그런 방법은 안 쓰죠. 취미로 농사 짓는 사람들이 재미로 하는 거라면 모를까."
어.
그건 그것대로 조금 충격인데.
"그럼 어떤 걸 쓰는 거지?"
"기본적으로는 뭐든 재료가 될 수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식물도 가능하고, 화학 비료로 가면 질소질 인산질 칼슘질... 여러 가지가 있죠. 현실적으로 지금 저희가 쓸 만한 건."
밭 근처의 창고.
그곳에서 봉투 하나를 여는 철욱.
"동물성 비료죠."
동물의 사체를 이용해 만드는 비료.
세상에 넘쳐 나는 게 몬스터다 보니, 우리 부대에는 그 사체가 차고 넘쳤다.
[하급 농부의 정성이 들어간 아라크론 비료]
"제가 만든 비료입니다. 입대하고 나서 받은 몬스터 사체로 만든 놈이죠."
"굉장한데."
"몬스터들의 마력이 영향을 주니까요. 어지간한 고급 화학 비료와도 비교가 안 될 겁니다."
확실히.
[식재료 감별]로 보았을 때도 꽤 훌륭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비료가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꼭 군단장님이 직접 만드셔야 하는 겁니까?"
"응?"
"군단장님의 직업은 요리사고... 저는 농부죠."
철욱이 볼을 긁으며 말했다.
"비료를 만드는 걸로 따지면 아무래도 제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글쎄."
사실 당연한 얘기다.
요리사와 농부.
누가 더 비료를 더 잘 만드냐를 비교하기 전에, 애초에 요리사는 비료를 만드는 지식 자체가 없는 경우가 절대다수겠지.
하지만.
그건 평범한 요리사의 경우에나 그런 거고.
'이미 철판때기도 요리해 봤는데 무슨.'
예전에는 식물에게 뭘 먹인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겠지만,
철물만 섭취하는 [강철을 먹는 맥]... 까망이에게 요리를 해 준 뒤부터.
내게 요리의 개념은 한도 끝도 없이 넓어졌다.
비료 또한 식물을 먹이기 위한 요리.
그리고 요리라면.
"내 전공이거든."
* * *
"후우... 정말 안전한 거 맞죠?"
"이미 한번 다녀왔잖아. 안전 확인은 끝난 셈이지."
"그 안전 확인을 자기 몸으로 하셔 놓고서."
여전히 한숨을 내쉬는 이상아.
그녀와 부대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금 밀림 속으로 발을 옮겼다.
이미 한 번 가 봤던 길.
두 번째 산행은 처음보다는 훨씬 더 할 만했다.
"후우!"
겨우겨우 산을 올라 밀림의 중앙부에 도착했다.
중앙에 홀로 서 있는 나무.
그 가운데 박힌 얼굴이 나를 보고 눈을 껌뻑였다.
스륵....
나를 보고는 다시 눈을 감는 녀석.
[재능]을 각성한 덕에 시간을 대폭 단축하긴 했지만.
그래도 비료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들다 보니.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초췌해졌군.'
주변을 슬쩍 둘러보자.
근처의 나무들 역시 상태가 꽤 나빠진 것이 보였다.
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알라우네의 앞에 섰다.
나무 한가운데에 박힌 인간의 얼굴은, 솔직히 영 징그럽다만.
'뭐, 몬스터 중에 안 징그러운 놈이 드물지.'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힘이 없는지 늘어져 있는 모습을 확인한 뒤.
[그림자 장막]
나는 그림자 속에서 포대 자루를 하나 꺼낸 뒤.
그 자루를 열었다.
비료가 가득 들어 있는 포대 자루.
하지만 비료 하면 떠오르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완전에 가까운 무취.
철욱이 한 말이 떠올랐다.
'냄새가 하나도 안 나다니.... 대단하시군요.'
'뭐가 잘못된 건가?'
'반대입니다. 비료라고 하면 악취가 심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정말 완성도가 높은 비료는 아무런 냄새도 안 나는 법이죠. 몬스터의 사체로 만드는 비료는 난이도가 높다 보니, 제가 만든 비료들도 아직 악취가 심한 편입니다만.'
내가 만든 비료는 아니란 거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하나는 내가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레벨의 요리사라는 점.
요리의 제약이 없어진 내게는 비료를 만드는 행위도 요리의 하나.
내가 가진 스킬과 특성들도 그대로 적용되었겠지.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얼마 전에 얻은 특성.
[전투력 측정기].
'이 특성이 강적을 판별하는 법은 결국 체내 마력의 질과 양이란 말이지.'
듣자 하니.
철욱이 비료를 만들기 위해 받아온 몬스터의 고기는 요리로 쓰기 애매한 것들이었다.
너무 상처가 심해 살이 뭉개지거나 한 것들.
당연히 그가 받은 몬스터들의 종류는 랜덤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 특성을 얻은 나는 몬스터의 강함이나 마력량을 대충 측정할 수 있었고.
양질의 마력을 품은 괴물들만 골라 사용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중급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깊은 친밀감의 혼합 몬스터 골육분 비료]
비료치고는 영 화려하고 긴 이름.
그걸 알라우네 주변의 흙에 뿌리고, 섞었다.
꿈뻑.
-...?
내가 하는 짓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녀석.
내게는 느껴졌다.
땅에 뿌려진 비료들.
거기 섞인 마력이 빠르게 땅에 섞여 들어가고.
그 마력이, 알라우네를 향해 움직인다.
'지금인가.'
그 마력이 녀석의 몸에 닿아 흡수되기 직전.
나는, 활성화되어있는 특성 하나를 해제했다.
[특성 – 환경 동화가 해제됩니다.]
스륵.
주변의 환경에 동화되어있던 몸이, 평범한 인간의 것으로 변해 간다.
그 순간.
...!
나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알라우네.
녀석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고.
-카야아아아아아아악!
"뭐야 너. 말할 수 있는 거였냐?"
나무에 박힌 얼굴에서 괴성이 뿜어져 나온다.
꽤 살벌한 표정.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퍼져 있는 거대한 밀림.
나무들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나 싶다만.
그 모두에게서, 엄청난 적의가 느껴진다.
이윽고.
콰직...!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땅을 뚫고 나왔다.
그것이 내 몸을 강타하려던.
바로 그 순간.
멈칫.
코앞에서 멈추는 거대한 뿌리.
'식겁했네.'
멈춘 이유는 알 만했다.
내가 만든 요리.
비료의 마력이, 알라우네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캬아아...아. 아...?
숲에 들어오는 모든 이물질을 공격하던 녀석.
나 역시 그 이물질 중의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녀석의 분노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내가 의도한 대로.
[요리사의 특별소스]
[깊은 친밀감]
"저번에는 네가 나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해 줬지?"
하지만.
그건 좀 모자라단 말이지.
부대원들은 후임밖에 안 남았고,
유일한 동기는 저 산 위에 처박혀 있는 상황이다.
사실 지금 내 주변에는 친구라 부를 만한 존재가 딱히 없었다.
그러니.
"베스트 프렌드가 돼 줘야겠어."
나를 바라보는 알라우네.
나무에 박혀 있는 그 눈빛에서는.
지난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친근함이 느껴졌다.
스륵....
나를 공격하기 위해 튀어 올랐던 뿌리는 물론.
어느새 주변에 몰려 있었던 나뭇가지, 가시 등등이 조용히 물러났다.
생글생글.
"맛이 괜찮았나 보네."
친한 친구를 보는 것처럼 기분 좋게 생글거리는 녀석.
보아하니, 요리의 효과는 직빵이었다.
'그야 내가 전력을 다해 만든 요리니까.'
부대원들에게는 전력을 다한 요리를 먹이기가 힘들다.
그나마 20레벨이 넘은 간부급 인원들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것 같다만....
그 외 병사들이 내가 전력을 다한 요리를 먹을 경우.
지나치게 강력한 버프가 오히려 신체에 엄청난 부담을 일으킨단 말이지.
반면....
눈앞의 녀석은 무려 푸른색의 기운을 내뿜는 강력한 몬스터.
내가 전력을 다한 요리도 충분히 버틸 만할 터였다.
'약간 걱정이었던 건 친근함을 느낀 나머지 하나가 되려고 한다든가, 어디도 못 가게 묶어 둔다든가 그러진 않을까였다만.'
다행히 이 녀석의 인성...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천성이 나쁜 녀석은 아닌 듯.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우린 친구지?"
싱글벙글.
기분 좋게 웃기만 하는 녀석.
다만.
이걸로는 아직 조금 모자라다.
[요리사의 특별소스]의 효과는 일시적이다.
지금이야 기분 좋게 웃고 있다만.
효과가 끝나는 순간 다시 괴성을 지르며 나를 공격해도 이상할 게 없단 말이지.
하지만.
모든 게 일시적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지나친 용기의 잔재가 광기로 남아 버린 전광일 상병.
지나친 안도감과 친밀감이, 전우를 제외한 이들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진 부대원들.
특별소스의 효과는 일시적이지만.
그 효과가 강렬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질수록.
그 후유증.
감정의 잔재는 오래 남는다.
그러니.
턱.
턱.
턱.
그림자 안쪽에서 비료 포대를 꺼내 바닥에 쌓는다.
한두 포대로는 모자랄 테니, 일부러 잔뜩 가져왔거든.
미안한 얘기지만.
"좀 과하게 친해져 보자고."
일시적인 효과를 넘어.
나를 보기만 해도 친근함이 들 때까지.
* * *
"...후우."
부대를 침범한 밀림.
그 앞에 선 이상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걱정되십니까?"
"그야. 걱정되지 않을 리가요."
그녀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답이 안 나와서 구원 요청을 보내긴 했지만... 설마 저 안으로 혼자 들어가서 해결하려 하시다니."
아무리 그녀로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고 한들.
무려 길드 마스터 직위에 있는 사람을 위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들다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본인 선에서 해결하지 못한 그녀의 책임이나 다름없었다.
"에이. 신 병장님이면 문제없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하신 일을 보면 뭐. 그렇지?"
그녀의 반응을 본 다른 병사들은 맘 편하게 웃었다.
그들의 군단장에게 관심이 없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무언가 막힌다 싶을 때면 어떻게든 해결법을 내놓던 것이 신영준 병장.
병사들 사이에선 슬슬 그가 무슨 짓을 해내도 이상하지 않다는 분위기가 돌았다.
하지만.
'...무책임한 생각이야.'
이상아는 그런 생각에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그녀는 맘 편하게 웃고 있는 다른 병사들을 살짝 흘겨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이 뛰어난 건 인정하지만... 결국 그도 사람인걸.'
개중에는 정말 그를 신처럼 여기는 사람도 종종 있을 정도이다.
그야 지금까지는 정말 뭐든지 해낸 인물이니 이해는 간다만....
'그렇게 마음 놓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건 신영준 병장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신영준 병장이라면 괜찮을 것이라 방심했던 주변 인물의 책임이 되겠지.
20명 남짓한 인원이었다고는 하나, 한 그룹을 이끌어 봤던 그녀다.
단체를 이끄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과정에서 나오는 작은 실수 하나가 얼마나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는지.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었다.
'당장 내 그룹도 범죄자들 때문에 무너질 뻔했으니까.'
그 위기를 구해 준 것이 이 부대와 신영준 병장.
은인이나 다름없는 그가 안 좋은 일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녀는 '괜찮겠지 뭐~' 같은 안일한 태도로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말려 봐도 본인이 말을 안 듣는다는 게 문제지만."
하아.
그렇게 한숨을 내쉬던 순간.
그 순간
스스슥.
"...!?"
그녀와 부대원들이 열심히 잘라내며 침범을 막고 있던 밀림.
그 나무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영역을 넓혀 오던 때와는 전혀 다른 격렬한 움직임.
"...전투 대형으로!"
이상아의 명령에 부대원들이 급하게 무기를 빼 들었다.
곧바로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녀의 명령은 적절한 것이었으나.
스스슥....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부대 일부를 침범하고 있던 나무뿌리가 점차 뒤쪽으로 후퇴하고,
그 나무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마치 땅이 스스로 움직여 길을 여는 듯한 모습.
묘한 경외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진 나무들 사이에 생긴 길.
그 사이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이상아는 그 남자를 보고 헛웃음을 지은 뒤.
지휘관을 향한 경례를 올렸다.
"...충성. 복귀가 생각보다 빠르셨네요."
"충성."
그녀의 경례를 받은 인물은, 당연하게도 신영준 병장.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렸거든."
118화 밀림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