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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APOCALIPSISCHEF / Chapter 2: 2

บท 2: 2

10화 얼마나 크길래

"커허... 헉...."

온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입에서는 단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이겼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리자드들이야 어느 정도 상대를 해 봐서 익숙하다지만, 대장, 치프틴은 달랐다.

단단한 비늘은 '최하급 단도 숙련'을 익힌 칼질로도 벨 수 없었고, 힘도 어찌나 강력한지 광일이를 포함한 전사 계열 각성자 3명이 붙고 나서야 겨우 비등비등한 싸움이 됐다.

안 그래도 인원수로는 우리가 불리한데, 3명이 치프틴한테 붙으니 다른 각성자들의 부담도 늘어났고.

'게다가 약점을 알아도 활용할 수가 없으니.'

리자드들의 약점은 왼쪽 겨드랑이 부위.

정확히는 그곳을 아래로 찔러서 심장 근처 혈관을 베는 것.

그런데 신장이 2.5m에 달하는 치프틴 녀석은 겨드랑이만 해도 2m 근처에 있었다.

어떻게 찌르긴 한다 쳐도, 혈관을 베려면 아래로 찔러야 하니, 비슷한 크기가 아니면 애초에 약점이 되지 않는다.

'피어'의 효과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병사들과 사수 각성자들이 전투에 합류해 다른 리자드들을 제거해 주지 않았다면 시체가 된 것은 우리였겠지.

"의무병! 빨리!"

"아, 아니. 이런 걸 저더러 어떻게 하라고...."

"의무병이잖아! 이 사람들 죽으면 네가 책임질 거냐?"

'...아니, 잘못하면 우리 중에서도 시체 나오겠네.'

다른 병사들과 사수들의 합류로 전투는 승리했지만, 애초에 유리한 전투가 아니었던 만큼 피해도 있었다.

전투에 참여한 각성자들 전원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상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대부분은 목숨까지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일부분은 지장이 있었다는 게 문제.

"한일이, 대원이...."

둘 다 전사 계열 각성자.

정확히는, 광일이와 함께 치프틴을 맡았던 나머지 둘이었다.

'가장 위험한 곳에 나서서 싸워 준 녀석들.'

한일이는 치프틴의 몸통 박치기에 맞고 날아가 벽에 처박힌 채 입에서 피를 흘리며 기절하고 있었고.

대원이는 치프틴의 날카로운 발톱에 복부가 뜯겨 나가 내장이 삐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저런 녀석들이 죽으면... 다음부터는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겠지.'

어떻게든 살리긴 해야 했다.

"의무병... 이름이 의준이였나...."

"시, 신영준 병장님? 아니, 저 물리치료 학과라서, 이런 건 치료하라고 하셔도...."

"그런 거 아니고... 하, 힘들어서 설명도 못 하겠다. 그냥 따라와."

너무 힘들어서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어떻게든 이성을 붙잡고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향한 곳은, 리자드들의 사체들이 널려 있는 장소.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아, 찾았다."

치프틴의 피어 때문에 원거리 공격이 잘 안 먹히긴 했어도, 몇 마리 정도는 접근하기 전에 사수 각성자들에 의해 전투 불능에 빠졌다.

그중에는, 전투는 불가능한 상태지만 목숨만은 붙어 있는 녀석들도 있었다.

내가 찾은 것은 바로 그런 목숨만 붙어 있는 괴물.

"야, 이거 살아 있다.... 이 칼로, 저기, 약점 알지? 거기 찔러...."

의무병에게 내 사시미칼을 넘겨주고 바닥에 철퍼덕 쓰러져 앉았다.

도저히 힘들어서 못 움직이겠다.

칼을 받아든 녀석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벌벌 떨면서 빈사 상태의 괴물에게 다가가 약점에 칼을 쑤셔 넣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잘 될 텐데....'

취사병인 내가 요리사로 각성했다.

사수 각성자들은 대체로 원래도 사격을 잘하던 녀석들이었고.

즉, 이 각성을 통해 주어지는 직업은 완전 랜덤이 아니라 어느 정도 규칙이 있다는 것.

'이 세상이 게임처럼 바뀌었다면, 게임인데 그 직업군이 없지 않을 테니.'

과연 예상이 적중했는지, 칼을 쥔 의무병이 환호를 질렀다.

"돼, 됐습니다! 초보 치유사라고 합니다! 치료 스킬도 있습니다!"

"그래, 가서 대일이랑 한일이 좀 챙겨 줘라...."

이제야 좀 쉴 수 있겠네.

"어, 그런데 이 치유 스킬, 1인용에다가 쿨타임이 하루인데...."

"...우리 부대 군종병 있지 않았나?"

그렇게.

치유사와 사제.

두 명의 '힐러' 계열 각성자들이 합류했다.

* * *

다음 날.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생활관이네."

리자드 사체들 사이에 철퍼덕 쓰러진 채로 기절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다른 병사들이 옮겨 준 모양.

"잘 잤... 끄어어어억."

잠깐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온몸에서 격통이 몰려왔다.

하도 격렬한 전투를 치른 탓에 온몸에 쥐가 난 것 같았다.

"어, 영준이. 괜찮냐?"

"안 괜찮아...."

격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자니, 이민재 병장이 병사 한 명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중수야, 얘 죽으려고 한다. 치료 좀 해 줘."

"옙."

이민재 병장이 말하자, 옆에 붙어 있던 병사가 손을 모아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그러자, 그 손에서부터 하얀 빛무리가 일더니 내 몸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격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 녀석이 군종병이구나.'

"하하, 신이시여라니. 몇 번째 하는 짓이지만 참 어색하네요."

멋쩍게 웃으며 말하는 군종병, 신중수 일병.

"그래? 군종병이면 그래도 나름 익숙한 거 아닌가?"

"아, 저 불교도입니다."

"...."

"아, 참고로 불교학과 출신이거나 스님 출신도 아닙니다. 그냥 3대째 불교 모태신앙이라 했더니 행보관님이 군종병 시키신 거라서요. 불교 출신에, 스님도 아닌 신도인데 사제로 각성했을 땐 제가 다 놀랐습니다. 하하."

아무래도 이 '게임'의 전직 시스템은 좀 대충인 것 같다.

덕분에 살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럼, 거 괜찮나? 종교적으로 좀 그렇지 않아?"

"따지고 보면 이미 불살계도 어겼는데요 뭐. 게임한다는 느낌으로 하면 별생각은 안 듭니다. 이렇게라도 중생을 구원하면 그게 곧 불법을 행하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하하하."

꽤 긍정적인 불교도였다....

"아무튼, 고생 많았다 영준아. 이번 싸움은 네 덕에 이긴 거나 다름없어."

군종병, 아니 사제를 내보낸 후, 민재 형이 말했다.

"그리고, 너도 로그 뜬 거 봤지?"

어떤 로그를 말하는 건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점령 어쩌고?"

리자드 치프틴을 쓰러트렸을 때 나타난 시스템 문구.

"그래. 아무래도 우리가 이 산맥을 점령한 것 같다."

"산맥이라니, 우리 부대는 그냥 산맥의 봉우리 중 하나에 딸랑 위치한 거 아닌가?"

부대가 위치한 곳은 강원도의 험준한 대산맥 한가운데.

그 안에서 우리 부대의 면적은 산맥의 1%도 되지 못할 거다.

"뭐, 꼭 산맥 전체에 병력이 있어야 한다든가, 그런 건 아닌가 보지."

민재 형의 설명은 이랬다.

"그냥 산맥의 봉우리 중 하나에 딸랑 위치한 게 아니잖아? 우리는 산맥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자리잡은 부대니까."

"흠."

"아마 이 산맥 전체에 병력이 퍼져있는 세력이 있다면 그건 저 리자드들일 거다. 하지만 점령전의 기준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의미야. 그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 그곳을 누가 차지하고 있느냐도 영향을 준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대충 이해는 된다.

산맥에 퍼져 있는 리자드들을 격파했으며.

이 산맥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

그 두 가지가, 우리를 점령권자로 만들어주었다는 뜻.

"좋은 얘기는 그게 전부가 아니지."

"응?"

"잘은 몰라도. 어제 그 전투로 적들도 꽤 큰 피해를 입었을 거야. 상징적인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많은 영역에 퍼져 있는 녀석들. 두 세력 중에 우리가 점령권을 얻었다는 건, 놈들의 피해가 크다는 뜻일 테니까. 그렇다면."

민재 형은 약간 흥분한 듯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역공을 노려볼 수도 있을지 몰라."

"아니, 그건 안 되지."

어제의 전투.

이런저런 상황이 겹치긴 했어도, 지형적으로는 우리가 유리했다.

방어선을 펼치고 수비를 하는 입장과 방어선을 뚫어야 하는 입장의 차이는 크니까.

그런 수비전 상황에서도, 자칫 잘못하면 이쪽이 전멸할 뻔했다.

"물론 네 말도 사실이지만. 우리도 각성자가 늘어나고 있잖아. 거기에 네가 어제 보여 준 버프까지 합쳐지면. 내 생각엔 역공도 무리는 아닐 텐데?"

"아, 그 버프는 기대 안 하는 게 좋을걸."

"뭐?"

확실히, 어젯밤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만든 요리의 엄청난 버프 효과 덕분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정도의 요리가 쉽게 나올 리가 있나.

"그때 각성자들한테 먹인 요리. 하나하나가 최소 4시간에서 길게는 7시간 정도 걸려서 만든 거야."

"음."

취사병들이 모아 놓은 질 좋은 재료를 죄다 때려 박고.

각성자들의 입맛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조사하고.

요리 하나당 몇 시간씩의 정성을 들였기에 가능했던 버프다.

"저 거대 리자드가 쳐들어올 걸 걱정해서 미리 대비하려고 만든 거라 가능했던 거지, 다시 하라면 일단 재료부터 그 정도 질이 안 나와. 각성자들 숫자가 늘어나면 더더욱 불가능하고."

"흠.... 그러면...."

"일반적인 수준의 버프는 가능하겠지만, 그 정도로는 어제 그 싸움을 다시 한다고 해도 우리가 무조건 질걸. 수비전이라도 그 정도인데, 역공은."

"불가능하단 거군. 어쩔 수 없지."

좋은 재료들을 수급할 수 있게 된다면 모를까.

내가 여러모로 조사한 요리 스킬의 특성을 볼 때, 그 정도 버프는 한동안은 불가능하다.

"그럼 다음으로 할 얘기가... 위 특전인데."

"아! 그거. 결국 뭐 받았지?"

[대지역 - ROK 소속 인간의 첫 번째 '점령'입니다.]

[업적 달성! - 여기부터 저기까지 내 땅]

[1위 특전이 부여됩니다.]

처음으로 5인의 각성자, '파티'를 만들었을 때도 나왔던 업적 달성 문구.

그때는 3위였는데, 이번에는 1위다.

게다가 달성 업적부터가 파티 만들기 같은 소소한 것도 아니고, 무려 지역 점령.

보상도 엄청나지 않을까.

"이건 설명하기도 뭐하고, 네가 직접 보는 게 낫겠다."

"응? 뭘 받았길래."

민재 형의 말에 로그에 들어가, 1위 특전 부분을 클릭했다.

그러자.

[다음 중 한 가지 특전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1. 발라라크 공의 초대장

2. 기동요새 비마나

3. 느부갓네살의 열쇠

4. 심해의 부름

5. 등천로

6. 역천의 서

7. 부러진 직검

"...이게 뭔데?"

발라라크 공의 초대장?

그게 누군데.

부러진 직검?

어디에 쓰라고?

"그래서 우리도 아직까지 안 고르고 있었던 거야. 어떤 용도인지 알려 주긴커녕 제대로 된 설명도 없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설명창 같은 게 뜨긴 했다.

[부러진 직검]

[부러진 직검입니다.]

[심해의 부름]

[심해의 부름을 받습니다.]

이런 식이라서 문제지.

"그래서 말인데. 난 이거 네가 골라 줬으면 좋겠다."

"응?"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민재 형.

"내가 고른다고 달라질 것도 없을 텐데?"

"어차피 정보가 없는 이상 뭘 골라도 복불복이겠지만. 그래도 네가 골라 주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다른 녀석들도 네가 골랐다고 하면 별 불만은 없을 거야."

그렇게까지 말해도, 나도 아는 게 있어야....

음.

"그러면 저거, 기동요새 비마나로 하자."

"이유는?"

"그나마 이름에서 용도가 추정이라도 되니까? 이동하는 요새라고 하니, 거대 전차 같은 거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전차가 우리한테 필요한가?"

"지금은 필요 없어도, 곧 필요해질 것 같아서 말이지."

부대의 식량 전반을 관리하는 나이기에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머지않아, 부대를 버리고 이동해야 하는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저 기동 뭐시기가 도움이 되겠지.

"이유가 있다면 됐어. 그럼 우리의 특전은 2번이다."

[특전 - 기동요새 비마나를 선택하셨습니다.]

[비마나의 소환 권한이 '신영준'에게 부여됩니다.]

"소환 권한이라. 한번 써 볼까."

생활관 앞의 공터로 나간 후 특전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비마나 소환."

[소환에 필요한 공간이 부족합니다.]

"어, 공간이 부족하다는데."

"생활관 앞 공터는 좀 좁긴 하지. 앞에 풋살장에서 해 보자."

[소환에 필요한 공간이 부족합니다.]

"여기도?"

"연병장으로 가 보자. 우리 부대 연병장은 부대 규모에 안 맞을 정도로 큰 편이니까."

[소환에 필요한 공간이 부족합니다.]

"...."

"...."

이거....

얼마나 큰 거지...?

11화 생존자들 (1)

당장 우리가 얻은 특전을 소환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뒤.

우리는 일단 생활관으로 복귀했다.

당장은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쓸 수 있는 날이 오겠지 하고.

이미 점심시간은 지난 지 오래..

이제라도 식당으로 복귀해서 저녁 준비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긴 했지만.

"다른 병사들도 힘들어서 식당까지 갈 생각도 잘 안 하고 있을걸."

"그런가?"

"대충 전투식량이나 꺼내서 먹는 게 낫지. 너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냐."

라는 민재 형의 말에 따라.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래, 나도 하루 정도는 쉬어야지."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그동안 너무 빡세게 일했다.

취사병이 나밖에 안 남아서 모든 요리를 혼자 한 것만 해도 미칠 일인데.

각성자들 버프 요리까지 만드랴.

멘탈 약한 병사들한테 먹일 특식 만드랴.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으니.

그래도 나름대로 보람은 있었다.

'그 보람이 그냥 기분 탓도 아니고.'

[각성자 : 신영준]

[직업 : 신입 요리사 Lv. 9]

[능력치 : 힘 12, 민첩 13, 마력 10, 행운 10]

[특성 : 최하급 단도 숙련, 최하급 요리 숙련, 최하급 재료 감별, 최하급 화염 친화]

[스킬 : 요리사의 눈, 주방장의 특별 소스]

[포인트 : 1,032pt]

수치로도 보이는 보람.

'레벨이 9!'

경험치는 그간 꾸준하게 쌓아 왔다.

괴물을 사냥했을 때나, 요리를 완성했을 때.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또 하나의 수급처.

[당신의 식사를 대접받은 이가 전투에서 활약했습니다.]

[요리사의 명성이 퍼져 나갑니다!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내 요리를 먹은 사람이 그 버프로 활약하면.

그게 또 경험치가 된다는 것!

'저것 덕에 어제 전투로 엄청나게 벌었지.'

레벨이 오를 때마다 스탯도 하나씩 오르더니.

이제는 레벨 1 때의 내가 버프 요리를 먹어야 가능했던 수치까지 도달해 버렸다.

혹시 필요한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 사용하지 않고 아껴 두고 있다만.

포인트도 상당히 많이 쌓였다.

다른 각성자들한테 물어본 바에 따르면.

현재 포인트든 레벨이든 나보다 높은 사람은 부대에 없다던가.

"내 성장도 좋고. 어제 싸움 이후로 부대를 습격하는 리자드의 숫자도 반 정도로 줄었다고 하고, 부대원들 각성도 잘 진행되고 있고...."

모든 게 순조로웠다.

처음 괴물한테 죽어 나갈 때만 해도, 나만큼은 죽기 싫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제는 조금이지만 여유까지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을 생각하면.

보람이 안 느껴지려야 안 느껴질 수가 없다.

비록 짧은 평화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잘 대처해 나간다면....

"이야, 영준아!"

이런저런 생각에 흐뭇해하던 찰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부대에 나를 이름으로 부를 사람은 몇 명 남지 않은 상황.

민재 형인가 싶어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오셨습니까...?"

나는.

표정이 썩는 것을 기적적으로 참을 수 있었다.

"김 중위님...."

"너 고생 많이 했다며! 수고했어!"

날 부른 것은 김 중위.

우리 부대의 중대장이자.

현재 부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간부.

즉.

현재 최고 지휘관이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않습니까."

"그 당연한 걸 못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은 번지르르하다.

실제로 저 입에서 내뱉는 말이 칭찬이기는 하다.

아마 나도 저 말을 한 게 김 중위가 아니었다면 기분 좋게 들었겠지.

'그 당연한 걸 못 하는 사람.'

괴물이 나타난 지도 벌써 열흘 이상이 지났다.

병사들이 모여서 괴물과 싸우고.

각성자를 늘리고.

각성 열외자들은 어떻게든 각성시키고.

생활관 주변에 방어망을 만들고.

주변을 정찰하고.

리자드 치프틴과 싸우기까지 한.

그 열흘 동안.

김 중위가 한 일은 다음과 같다.

[.]

무슨 의미인지 풀어서 설명하자면.

없다.

그냥, 없다.

김 중위는, 지난 열흘 동안.

정말 놀랍게도.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각성자를 늘려야 한다고 결정했을 때도.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물자를 생활관 근처로 모으고 방어망을 만들 때도.

'다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리자드 치프틴이 처음으로 발견됐을 때도.

'그런 괴물이 있다고? 조심해야겠네. 난 혹시 올지 모르는 상급 부대의 연락을 기다려야 하니. 그쪽은 너희한테 맡길게.'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결국 모든 일을 병사들한테만 떠넘긴 셈.

아니.

차라리 그냥 하는 일 없이 병사들한테 모든 일을 일임하고 끝이라면.

오히려 나았겠지.

처음 괴물이 나타난 후.

우리 부대는 부상자는 있어도 사망자는 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실종자가 두 명 있었다.

'김 중위가 상위 부대와 연락해 봐야 한다고 우겨서 내보낸. 운전병 두 명.'

유선, 무선을 통한 통신이 되지 않으니.

사람을 보내 연락을 해 봐야 한다는 이유로 나간 운전병들.

그들은 열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못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 두 명과 친했던 몇몇 병사들은 분노.

김 중위가 죽인 거나 다름없다는 식의 말도 거리낌 없이 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 정도면 그래도 양반이지.

지휘관이라는 건지 부대 순찰은 엄청나게 하는데.

그때마다 호감 작업을 엄청나게 한다.

내 경우에는 대충 이런 식이다.

'영준아, 고생한다. 오늘 점심도 잘 먹을게! 아 오늘 점심 고순튀야...? 고순튀는 쫌... 나 파스타 해 줄래?'

없는 식량 아끼고 계산해 가면서 내놓은 식사를 거절하고 요리를 주문.

사람이 눈치가 있으면 저럴 수가 있나 싶은 짓을 거리낌 없이 한다.

덕분에 안 그래도 모자란 고급 재료인 올리브유와 다진 마늘을 사용.

알리오 올리오를 해서 바쳐야 했지.

이러한 일들로 부대 내에서 현재 김 중위의 평가는 최하.

괴물이 나타나기 전에도 좋지 않았던 평가였다만.

바닥에는 더 바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매일 같이 수직 낙하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왔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 보니까 식당 안 하고 전투식량으로 때운다던데, 우리끼리만 뭐 해 먹으면 안 될까?"

역시나 이런 의도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좀 힘들기도 하고, 또 식재료도 아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저희끼리만 요리해 먹는 것도 눈치가 보입니다."

"에이, 무슨 눈치를 보고 그래. 뭐라 하는 놈 있으면 나오라 해. 내가 간부인데."

내가 뭐라 하고 싶어져서 그러는 건데.

"그리고 너 웃긴다? 너희끼리 가끔 요리해 먹고 그런다는 거 내가 모르는 줄 아냐?"

"예?"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있는 재료도 아끼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그 뭐냐, 각성할 차례 된 애들한테 요리해 주고 그러고 있잖아. 저번에는 각성자들끼리 먹으려고 아주 제대로 요리하고 있더만."

맙소사.

설마 이런 거로 트집을 잡을 줄이야.

"그건 각성 과정이 위험한 만큼, 긴장도 덜어 줄 겸 특식으로 해 준 겁니다. 김 중위님도 각성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그럼 이미 각성한 애들한테 해 준 건 뭔데?"

"그건, 저번에 보고드렸던 괴물이 공격해 올 거에 대비해서...."

"그 뭐, 음식으로 능력을 올린다느니 하는 거? 그래 봤자 음식이 얼마나 올려 준다고...."

내 말은 그저 다 핑계고.

그냥 친한 애들끼리 먹은 거 아니냐며 중얼거리는 김 중위.

'이걸 진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일단은 이래 보여도 우리 부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간부.

지금은 아무 쓸모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만.

바깥세상의 군대가 남아 있고.

언젠가 그들과 접촉하게 된다면.

엄청나게 중요해질 사람이다.

"그 버프란 게 생각보다 큽니다."

"야, 됐어. 더러워서 안 먹는다."

어이가 없는 건 나인데.

오히려 화가 난 듯 말하는 모습의 김 중위.

"너 그렇게 친한 사람만 챙기고, 그러는 거 아니다."

김 중위는 그렇게 내뱉듯 말하더니.

아예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역으로 화를 내는 그 모습에는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

'생전 안 펴 본 담배가 이렇게 마려울 수가 있나.'

편두 부분이 이상하게 아파서 머리를 쥐어 잡고 있자니.

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똑똑.

"신영준 병장님?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김 중위 왔다 갔다...."

"아...."

전광일 상병이었다.

"하하, 그것참. 무슨 얘기를 했을지 모르겠지만 뭐. 고생 많으셨습니다."

"말도 마라. 하... 진짜."

"그래도 뭐, 새옹지마라고, 힘든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응?"

영 두통이 가시질 않아서 한숨을 내쉬는 나를 보더니.

대뜸 웃음 지으며 그리 말하는 녀석.

"박태준 병장, 깨어났다고 합니다."

"...!"

내 동기가 눈을 떴다.

* * *

"건강에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걷는 데에는 조금 지장이 있을 겁니다."

"치료사랑 사제가 붙어도 힘들었나?"

"예.... 다치고 바로 치료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만, 열흘이나 지난 상처까지 완벽하게 치료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네가 죄송할 건 없지, 고맙다. 수고했어."

태준이 녀석이 눈을 떴다는 소식에.

나는 다급히 부대의 의무실을 찾아갔다.

'내 유일한 동기.'

레이더반 박태준 병장.

나와 함께 이 부대 병사 중 최고선임이자.

말년 휴가같이 나가기로 날짜까지 맞췄다가.

휴가 전날에 괴물에게 습격당한 동지.

내가 괴물을 죽이면 각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자.

가장 먼저 각성에 임하고자 한 사람이기도 하다.

운이 나쁘게도 그때는 괴물, 리자드의 생명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몰랐을 때라.

아직 힘이 남아 있던 괴물에게 다리를 물어 뜯겨 중상을 입고 기절.

이제야 눈을 뜬 것이다.

'뼈가 보일 정도의 중상이었지.'

그 후로도 의무병인 사의준 일병이 계속해서 붕대를 갈아 주거나 하는 식으로 케어는 했지만.

의준이는 물리치료학 전공.

뼈가 시리다거나 하는 거면 모를까.

뼈가 훤히 보이는 상처를 치료할 방법을 알 리가 없었다.

결국 악화되지 않게 막는 게 한계였고.

그러다가 지난 싸움에서 의준이가 치료사로 각성.

사제로 각성한 군종병 중수와 함께 치료에 들어갔고.

그 결과.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걷는 건 힘들어도, 건강에는 문제가 없도록.

'그 정도만 해도 최선을 다해 준 셈이지.'

"여어, 박태준이. 오랜만이야?"

"왔냐. 나는 바로 어제 만난 느낌이긴 하다만."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금 핼쑥해진 태준이 녀석이 나를 반겼다.

"제대로 나은 건 맞냐? 손가락 몇 갠지 보여?"

나는 검지 손가락을 태준이 녀석의 눈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한 개."

"두 갠데? 너 이 새끼, 머리는 덜 나았구나."

"신영준 병장님... 환자는 놀리는 거 아닙니다."

"킥킥. 미친놈."

대충 인사를 마친 뒤.

나는 태준이에게 그동안 부대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 줬다.

녀석이 기절한 날부터.

현재 부대의 상황까지.

"이거저거 많았지만, 당장은 꽤 안정된 상황이란 거네."

산맥이 우리의 점령지가 된 후로.

괴물들의 공격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리자드 치프틴을 치워 버렸는데도 여전히 공격이 들어온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명령을 받으며 움직이는 것 같진 않은 모습.

우리는 패잔병 같은 녀석들이 남아서 공격해 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아군 각성자도 꽤 늘어난 지금.

한 마리씩 쳐들어오는 리자드들은 상당히 쉽게 제압할 수 있었기에.

지금은 들어오는 족족 각성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말마따나 매우 안정적인 상황.

"그래. 너 누워 있는 동안 우리가 개고생 다 했다."

"하하."

"넌 이제 꿀 빨 일밖에 안 남았다는 거지. 부러운 자식."

"영준아. 그렇게 배려해 줄 필요 없다."

....

"배려해 주는 게 아니라, 이제 진짜로...."

"아니.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된 친구 배려한답시고 그렇게 가벼운 말투로 말하고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큼."

제기랄.

하여튼 이 녀석은 눈치가 너무 빨라서 문제야.

"괴물 좀 줄었다고 문제가 없을 리가 없지."

결국 외부랑은 연락도 안 되고 있고.

전기가 나가서 발전기나 돌리고 있는 상황.

"발전기 전력도 무한하진 않을 테고. 식량 문제도 있을 것이고. 이런 상황에 나 혼자 밥만 축내고 있어도 될 리가 있나."

"그거야 뭐, 어떻게든...."

"그러니까 배려해 줄 필요 없다고."

박태준 병장이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 잊었냐? 나도 각성했다는 거."

"잊었을 리가 있나."

이 녀석은 괴물에게 다리를 물어 뜯기면서도 괴물을 마무리.

각성을 한 상태로 기절했다.

그 얘기를 안 꺼낸 건.

걷지 못하는 각성자 한 명이 늘어난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바뀔 리가 없으니까.

하아.

"그래, 그러면 물어나 보자. 뭐로 각성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안 그래도 궁금했던 점이나 물어보기로 했다.

"전사? 아니지. 네 성격을 생각하면 마법사 쪽일 것 같은데."

"마법사라. 비슷한데 좀 틀려."

마법사가 아니면 역시 전사 계열이라는 건가.

다리를 다친 녀석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직업-

"천문관이란다."

"천문관?"

천문관이라.

으음.

"그게 뭔데?"

"설명을 보면, 별의 운행을 읽어서 천기를 엿보고 여로의 흥망을 점치는-"

뭔가 중얼중얼 설명을 시작하는 태준이였으나.

처음부터 도통 알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에,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됐다. 복잡하니까 넘어가. 당사자인 나도 못 알아먹겠더라."

"크흠."

"대신. 나 좀 밖에 데려다줘라."

"밖에?"

태준이 녀석의 부탁에.

나는 병실 구석에 있던 휠체어를 가지고 와 태준이를 앉힌 뒤.

건물 밖으로 나왔다.

"우리 부대가 이건 참 좋아."

깊은 밤.

하늘에는 달과 별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주변에 불빛도 없고 높은 산에 있으니. 별이 참 잘 보이거든."

"뭐, 우리 부대 풍경들이 참 예쁘긴 하지."

"덕분에 두 가지나 알게 됐다."

응?

두 가지?

"내일, 손님이 찾아올 거다."

손님이라니.

갑자기 무슨-

"그리고... 발톱은 숨기는 게 좋을 거다."

* * *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가 했지만.

다음 날 아침, 바로 알 수 있었다.

"지, 진짜야! 군부대가 있어!"

"거, 내가 뭐랬소! 저기 보쇼! 군인들도 있잖소!"

"엄마아아아."

"수진아, 우리 이제 살았어...."

괴물들이 부대를 습격한 지, 11일째.

생존자들이 나타났다.

12화 생존자들 (2)

괴물들이 부대를 습격한 지 11일째의 새벽 아침.

부대는 난리가 나 있었다.

"신 병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사람들을 발견했다고?"

"예."

괴물들의 습격과 함께.

우리 부대는 외부와의 모든 연락이 차단됐다.

외부와 연락을 하고자 떠났던 병사 두 명은 행방불명.

여기서 부대원들의 머릿속에는.

공통적으로 하나의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바깥은 어떻게 된 거지?'

업적 시스템을 통해,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사회도 괴물의 습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괴물의 습격을 받은 사회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가 군부대긴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고작 100명의 군인도 버텨 낸 공격이야.'

100명의 군인이 버텨 낸 공격.

바깥에는 군인은 물론 경찰도 있다.

평범한 사람은 이기기 힘든 괴물이라고는 하나.

바깥에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군인과 경찰, 많은 사람들까지.

시설 면에서나, 인원 면에서나.

100명밖에 남지 않은 우리 부대보다는 사정이 훨씬 괜찮았을 확률이 높다.

부대 병사들의 주 의견은, 어떻게든 막아 냈을 것이라는 쪽.

'이렇다 할 근거는 없는, 낙관적인 관측이지만.'

사회에는 부대원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살아가고 있다.

당장에 확인할 수 있거나 갈 방법이 없는 이상에야.

'다들 안전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의 짐이 줄어드니까.

"처음 발견한 병사 말로는, 스무 명 정도의 집단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들 추레한 차림이었고... 위치를 생각해 보면, 한두 시간 내로 부대에 도착할 것 같답니다."

산 정상에 있는 우리 부대는, 산으로 올라오는 길목을 관찰할 수 있다.

다른 몬스터가 부대를 습격할 것을 우려해 관측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괴물이 아니라 애꿎은 사람들을 발견한 것.

추레한 차림을 한 채.

본래라면 볼 일 없을 이 산을 걸어 올라오는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

그들이 군사 지역 출입 금지 표지판도 무시하고 산을 오르는 열성적인 등산객이 아니고서야.

부대에 접근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겠지.

'도망쳐 온 거다.'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지역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부대가 위치한 강원도는.

괴물에게서 도망쳐야 하는 공간이 됐다는 사실을.

"...20인분 더 요리해야겠네."

도착할 때쯤이면 아침 식사 시간.

저들과의 조우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밥은 먹이는 게 좋겠지.

* * *

"지, 진짜야! 군부대가 있어!"

"거, 내가 뭐랬소! 저기 보쇼! 군인들도 있잖소!"

"엄마아아아"

"수진아, 우리 이제 살았어...."

그렇게 해서.

지금 이 상황이다.

"자, 자. 다들 진정하십쇼!"

나를 비롯한 병사들은 생존자들이 부대 근처에 도착했다는 얘기를 들은 뒤.

곧바로 마중을 나갔다.

"...많군요."

"그러게 말이다."

처음 발견했던 병사의 말로는 스무 명 정도라고 했는데.

정확히 세어 보니 스물다섯 명이었다.

현재 우리 부대의 생존자들은, 101명 중 행방불명된 2명을 제외한 99명.

생존자들의 숫자가 부대원들의 4분의 1 이상인 셈.

'나이도, 성별도 다 가지각색이야.'

딱 봐도 깐깐해 보이는 할아버지부터.

아저씨 아줌마.

학생에,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까지.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들이 모여서 단체를 이루고 있었다.

"일단은 아까 대충 얘기 나눴던 것처럼, 3층 생활관 인원은 2층으로 보내고. 저분들을 3층 생활관에서 생활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식사부터 할 수 있도록 조치하면 되겠죠?"

"그래, 당장은 그 정도면...."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우리 병사들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나와 병사들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저는 현재 이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김현석 중위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안전하니, 안심하시고 병사들의 안내를 따라 주십시오!"

"기, 김 중위님?"

우리 부대의 유일한 간부.

김 중위였다.

'저 양반이 갑자기 왜?'

괴물이 나타나고.

정전을 노려 괴물들의 대장이 부대를 습격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구석에 숨어만 있던 김 중위.

당연히 이번에 발견된 생존자들에 대한 대처도 마찬가지.

병사들에게 넘기고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따로 보고도 안 했는데.'

그런 김 중위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만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는지.

생존자들을 상대하던 모든 병사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김 중위를 바라보았다.

"뭣들 해! 어서 안내해 드려! 이민재 병장?"

그러자.

오히려 우리를 보며 고함을 치는 김 중위.

"예? 아니. 예! 병장 이민재."

"생활관에 이분들이 지내실 만한 여유는 있겠지?"

"그, 네. 그렇습니다."

"쯧, 대답이 시원치 않군. 책임지고 안내해 드리도록 해. 제대로 안내했는지 나중에 확인할 테니.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바로 보고하고."

생활관에 생존자들이 생활할 만한 공간.

있기는 하다.

생존자들이 발견되자마자.

새벽부터 깨어난 병사들이 3층을 통째로 비워 주느라 고생했으니까.

당연히 말하지 않아도 안내할 생각이었고.

"그리고, 신영준 병장!"

"병장 신영준."

"다들 배가 고프실 테니, 생활관 안내가 끝나는 대로 식사 가능할 수 있게 준비해 두도록. 25인분 정도 추가는 문제없겠지?"

"...예."

"그럼 가 보도록 해."

문제가 없기는 하다.

본래 부대의 식수 인원은 100인.

거기서 25인이 추가된다.

'전체 인수의 4분의 1만큼의 추가 식사를 준비하는 게 바로 될 리가 있나.'

생존자들이 발견되자마자 식당에 향한 뒤.

추가적으로 식사 준비를 해 뒀다.

당연히, 말하지 않아도 식당으로 안내해 밥부터 먹일 생각이었고.

'...김 중위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건 맞는데, 뭔가.'

거북하다.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느낌.

"그, 그렇구만. 알겠소!"

"자, 자. 다들 진정하고, 이 군인분 말대로 합시다! 우린 이제 안전해요!"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간부는 간부란걸까.

우리 병사들이 안내하려 할 땐 군인들을 발견한 흥분 탓인지 제대로 따르지 않던 이들이였다만.

김 중위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는지.

안내에 잘 따르는 모습.

김 중위가 일은 못하고.

욕심도 더럽게 많기는 하다만.

'말 하나는 잘하지.'

키도 큰 편에 어깨도 딱 벌어진.

남자답게 생긴 호남.

딱 그림에 그린 것 같은 군인상이다.

거기다가 말도 잘하는 편에.

부대의 남은 유일한 간부.

거기에 중위라는.

군인들 입장에선 별거 아니지만, 남들이 볼 땐 꽤 그럴듯한 직책.

병사들보다 말에 힘이 실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사실 병사들의 입장에선 그게 더 화나는 부분이었다.

부대의 일을 하다가 분명 김 중위가 잘못한 일이 있어도.

그 참군인스러운 분위기와 말발로 넘어가거나.

오히려 병사의 탓이 되는 경우도 잦았으니까.

'아니. 그래도 덕분에 생존자들 안내는 무난하게 될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부대원들이 김 중위를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 김 중위는 자기 할 일을 잘한 셈이다.

그러니까 좋게 생각하는 게 맞겠지.

맞겠지만.

"중위님, 저, 정말 고마워요...."

"하하, 뭘요. 시민분들을 지키는 것이 군인의 의무! 저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 중위님...."

"여러분은 이제 안전합니다. 다들 지치셨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우선 피로를 푸는 것부터 생각하시면 됩니다!"

상황이 꽤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했다.

* * *

"생활관은 3층을 쓰시면 됩니다. 그쪽에 있던 병사들도 다 1, 2층으로 이동했으니, 침대 숫자는 모자라지 않을 겁니다."

"3층이라니, 가장 높은 층 아녀? 군인이란 양반들이 지친 사람들한테 올라가는 것도 힘든 곳을...."

"박씨 할아버지!"

"쯧, 나 같은 노인은 계단 오르는 것도 힘들어. 산 타는 것도 죽을 뻔했는데 군인이란 양반들이 배려란 게 있어야지...."

안 그래도 묘하게 그림자 져 있던 병사들의 표정이.

노인의 말에 대놓고 찡그려졌다.

다른 생존자 몇 명이 노인에게 눈치를 주는 듯했지만.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안 쓴다는 듯 계속해서 툴툴거리는 노인.

병사들의 시선도 안 좋아지려는 찰나.

그나마 온화한 성격의 광일이가 앞으로 나섰다.

"하하,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괴물들은 보통 1층부터 들어옵니다. 아직까지 날개가 달린 괴물은 없었거든요."

"음."

"저희 부대에 괴물이 쳐들어온 첫날, 죽은 병사들 모두가 1층 생활관에 있었던 병사들이었죠."

"허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어느 정도 불만이 가신 듯한 노인.

"밖에서 고생이 많으셨을 테니 이해는 합니다만, 저희를 좀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안전은 보장할 테니까요."

"크흠, 거, 그런 거면 먼저 설명을 할 것이지...."

"아이고, 할아버지, 그만하시고 들어가요."

어떻게든 노인을 설득하고.

생활관별로 생존자들을 안내했다.

의외로 생존자들이 크게 반응한 부분은 침대 같은 게 아니였다.

화장실과 샤워실.

"드디어 씻을 수 있어...."

"찝찝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 참았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전기가 끊긴 후.

부대의 발전기에 의존하게 되며 전기 절약에는 다들 신경 쓰고 있었지만.

물은 애초에 산에 흐르는 지하수를 끌어다 쓴다.

펑펑 써도 큰 문제가 없었다.

'따뜻한 물은 안 나오지만.'

생존자들에겐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모양이다.

"식사는 이미 준비되었으니, 대충 정리가 끝나시면 바로 식당으로 오시면 됩니다."

"오오! 식사까지."

"나중에 병사들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대충 생활관의 안내가 끝난 것을 확인한 후.

식사에 대해서도 일단 안내는 해야겠다 싶어 말했다.

그렇게 식당으로 향하려던 찰나.

"저, 저기요."

한 여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20대 중후반 정도가 아닐까 싶은 여인.

"예? 왜 그러십니까?"

"그, 저희를 맞아 줬던 분 성함이. 김 중위님?"

"예에."

"그분이 이 부대 최고 계급자 맞으시죠?"

글쎄요.

저희도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 예. 뭐. 그렇습니다."

"그분이랑 더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언제쯤 대화가 가능할까요?"

"...."

여인의 말투는 노인과 달리 정중했다.

그 내용에도 문제는 없고.

충분히 꺼낼 만한 이야기다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의 표정은, 오히려 노인을 대할 때보다도 굳어 있었다.

"저, 저기. 제가 무슨 실례라도...?"

여인도 그 분위기를 읽은 듯.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모습.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화.

대화라.

"곧 가능할 겁니다. 준비되면 알려 드리도록 하죠."

"아, 네. 꼭 전해 드려야 할 얘기들이 있어서요. 정말 고마워요."

"그럼, 쉬고 계십쇼."

그렇게 사람들의 안내를 맡은 몇몇 병사를 제외.

나머지 병사들과 함께 생활관을 나섰다.

"하. 김 중위랑 대화를 해 봐야겠답니다. 진짜 미치겠네."

생활관을 나서자마자 나오는 이야기.

"난 그 할아버지가 3층이라고 따질 때보다 그 소리 들었을 때 더 화나더라, 딱히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니라,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이해합니다. 다들 그랬을 겁니다."

그 여인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묘하게 화가 났다는 얘기.

솔직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이민재 병장에게 '지휘관답게' 명령을 내리던 김 중위의 모습을 떠올리면.

조금 얼굴이 찡그려졌으니까.

아.

그러고보니.

"민재 형이 안 보인다?"

"이민재 병장 말씀이십니까? 시민분들 안내 끝나자마자 씩씩거리면서 어디로 가던데요."

"뭐?"

"아마 김 중위한테 간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어지간히 화났나 보네, 그 형.

"...솔직히, 저는 전쟁이 나거나 하면 병사들끼리 문제가 생길 줄 알았습니다."

"응?"

그 말을 꺼낸 것은.

민재 형과 같은 통신반 출신의 일병이었다.

"신영준 병장님은 이민재 병장보다 선임이라 모르시겠지만요."

"무슨 소리야?"

"그게. 통신반에서는 전쟁 나면 일단 이민재 병장 뒤통수에 오발 사격부터 갈기겠다든가. 뭐 그런 얘기를 좀 자주 했었습니다."

아아.

무슨 얘긴가 했더니.

"큭큭, 민재 형이 많이 빡세긴 하지."

"빡세다 뿐입니까? 진짜 뭐 하나 잘못했다 하면 죽으라고 까대는데...."

그런 경우가 한두 명이 아니긴 할 거다.

선임이 후임을 너무 풀어 주면 오히려 일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도 아마 취사병 후임들 사이에선 비슷한 소리 들었을 것 같은데.

"그런데 막상 일이 터지고 나니까, 이민재 병장처럼 일 처리 확실한 사람이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까요."

"맞습니다. 그런 일들을 같이 겪어서인지, 묘하게 전우애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입니다."

"흠. 전우애라."

그래.

전우애.

지난 2주간, 부대원들은 괴물들을 상대로 함께 싸웠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고.

누군가를 도와주고 고맙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각성이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경험을 같이 공유하기도 했고.

부대에 갇힌 상태로 괴물에게 습격당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함께 싸운 게 그 시작이었을지언정.

이제 부대원들 사이에는.

확실한 전우애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

난 그제야.

오늘 김 중위를 보며 느낀 거북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전우.

그 단어에.

'김 중위는 포함되지 않아.'

김 중위는.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았다.

누구에게 도움을 주지도.

받지도 않았으며.

각성이라는 경험을 공유하지도 않았다.

전우는커녕.

동료라고 불러도 될지조차 망설여지는 위치의 인간.

그런 자가.

우리의 최고 지휘관을 자처하고 있다.

이건.

'조치를 취해야겠어'

13화 생존자들 (3)

"제대로 된 밥을 먹으니까 살 것 같아요."

"흐흑, 짬밥이 이렇게 맛있게 느껴지다니."

"아니, 진짜 맛있는데요? 뭐지. 이게 내가 알던 군대 밥이 맞나?"

아침 식사 시간.

나는 부대 식당의 한구석에서 선 채.

생존자들이 배식을 받은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문제는 많지만.

그래도 내가 한 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은 좋다.

"어라. 취사병분? 잘 먹었습니다. 너무 맛있네요. 군대 밥이라는 생각도 못 하고 먹었습니다."

"아닙니다. 맛있게 드셨다니 제가 더 감사하죠."

가끔 듣는 말이 있다.

요리사나 취사병은 매일 하는 일이 요리이니.

'맛있다, 잘 먹었다' 하는 얘기를 들어도 매일 듣는 얘기라 무덤덤해진다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매번 기분 좋다.

들을 때마다 새롭고 짜릿하다.

"이 맛에 요리하지."

그렇게 흐뭇하게 식당을 지켜보고 있자니.

식사를 마친 광일이가 스윽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신영준 병장님. 어떨 것 같습니까?"

"응? 뭐가."

"아시잖습니까. 그...."

목소리를 낮춘 채, 진중한 얼굴로 물어보는 광일이.

"식량 말입니다."

흠.

"저희 부대원, 100여 명 기준으로 두 달 치 정도 식량이 남아 있어야 했었잖습니까. 이미 2주 가까이 지났고, 거기에 저 사람들까지 포함되면."

"뭐, 영향이 적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200명 이상의 인원을 상정하고 부대에 비축하는 비상식량과 전투식량.

사람들이 죽어 나가서 90여 명만 남았을 땐.

넉넉하진 않아도 모자라진 않은 수준이었지만.

100명 좀 안 되던 부대에, 25명이 늘어났다.

'단순히 비율로 따져도 25%가 늘어난 셈이야.'

식량의 소모도 그만큼 빨라진다.

이미 일반식 재료는 거의 다 소모됐고.

앞으로는 비상식량과 전투식량을 어떻게든 조리해서 내놔야겠지.

"안 그래도 최대한 오래 먹을 수 있게 식단을 조절하고 있었는데, 조금 더 아껴 봐야지."

"그걸로 되겠습니까?"

"글쎄. 그래 봤자 앞으로 한 달 좀 넘는 정도가 한계가 아닐까 싶은데."

광일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면 좋겠습니다만."

뭐?

"너 인마,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야."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광일이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광일이 녀석은 전투할 때는 광전사가 되지만.

평상시에는 부대의 누구보다도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런 광일이까지 자기도 모르게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생존자들의 합류가 우리에게 불안한 요소라는 뜻.

'부대원들 간의 결속은 단단해졌지만.'

아까 병사들과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 부대원들 사이에는 전우애가 생겨났다.

공통의 적에게 맞서 싸우며 서로의 등을 지켜 주길 반복한 결과물.

그 결과.

부대원들 간의 단합은 괴물의 습격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지만.

그 반대급부로.

전우가 아닌 이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영준아, 나 김 중위 저 자식 죽이고 감방 갈란다."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도 진정해 형."

우리와 계속해서 같은 부대에서 생활했던 김 중위.

그는 우리의 '전우'와 거리가 먼 존재였다.

심지어 오늘 합류한 생존자들.

그 이상으로.

"이민재 병장님? 김 중위하고 얘기 나누고 오신 겁니까?"

"어. 화나서 바로 백만 볼트 갈길 뻔한 거 겨우 참고 오는 길이다."

아.

백만 볼트는 민재 형의 전기 마법을 말한다.

당연히 정식 명칭은 그게 아니지만.

초급 전기 방출 같은 이름보다는 그렇게 부르는 게 편하다고.

"무슨 얘기가 오갔길래?"

"그건 나중에. 다른 병사들도 다 모였을 때 따로 설명해 줄게. 일단은 화를 좀 식혀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식판을 꺼내 들고 밥을 먹으러 가는 민재 형.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몰라도.

절대 좋은 얘기는 아니었을 테지.

'김 중위라... 머리가 복잡해지네.'

식량 문제에, 김 중위에.

리자드 치프틴을 잡아내고 그나마 좀 상황이 안정됐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아이고, 잘 먹었습니다."

그런 생각이나 하며 한숨을 내쉬던 찰나.

또 다른 생존자가 인사를 해 왔다.

"잘 드셨다니까 다행입니다."

"어휴, 그냥 맛있는 정도가 아니던데요."

"하하...."

그래도 잘 먹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좀 풀리는데.

그 생존자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직업이 어떻게 되십니까?"

"직업이요?"

직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른 것은, 내 상태창에 떠올라 있는 문구.

[직업 : 신입 요리사]

그 문구대로, 요리사라고 대답하려던 나는.

"대학생, 이였습니다. 지금은 보다시피 취사병이구요."

"아하, 그렇군요. 아무튼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 식당을 나서는 생존자.

그 등을 보며.

머릿속에 차오르는 생각들.

'군인한테 뜬금없이 직업을 물어본다고?'

병사들의 직업이 군인이면 군인이지.

직업을 물을 이유가 있나?

그냥 대화의 소재로 입대하기 전의 직업을 물어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최근 우리 부대에서 말하는 '직업'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직업 : 신입 요리사 Lv. 9]

각성자들만 볼 수 있는.

상태창에 나타나는 직업.

'병사들끼리 직업을 물을 때는, 전사니, 마법사니 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지.'

내 경우에는 그나마 요리사라지만.

저 질문을, 다른 녀석들이 들었다고 한다면.

실수로라도 '전사입니다' 하는 답변을 꺼내게 됐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어젯밤.

태준이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내일, 손님이 찾아올 거다.'

'그리고... 발톱은 숨기는 게 좋을 거야.'

소름이 등을 타고 내달린다.

"제기랄...."

발톱을 숨겨야 한다?

태준이 녀석도 자기는 그저 천기를 읽었을 뿐.

그 상세한 의미까지는 모른다고 답했지만....

하나는 확실한 것 같았다.

이 생존자들 사이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 * *

그날 밤.

"이민재 병장님? 모일 사람들은 다 모인 것 같습니다."

부대의 병사들 대부분이.

생활관 옆의 작은 건물 옥상에 모였다.

"회의라니, 굳이 이렇게 숨어서 해야 하는 거야?"

이곳에 모인 것은 이민재 병장의 요청이었다.

생존자들이나 김 중위에게 들키지 않도록.

병사들끼리 회의를 하자고.

생활관에 남아 김 중위나 다른 생존자들을 관리할 병사 몇 명을 제외.

모든 부대원이 이곳에 모였다.

"우선 하고 싶은 얘기에 앞서서. 오늘 김 중위하고 나눈 얘기를 좀 들려주마."

그렇게 운을 뗀 민재 형이 알려 준.

김 중위와 오간 대화는 대충 이러했다.

'김 중위님,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이민재 병장, 갑자기 무슨 소리지?'

'저희랑 상의도 없이 생존자들한테 나서신 것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김 중위의 난입.

우리로써는 당황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으나.

'그게 뭐가 어때서? 오히려 내 덕에 잘 정리되지 않았나? 아니면, 내가 생존자들을 받아들인 게 문제인가? 너희들은 저 사람들을 내치기로 결정했고, 뭐 그런 거야?'

'그런 얘기가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저런 자리에 나서실 거면, 부대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저희랑 최소한 상의라도....'

'뭐 인마? 야, 이민재. 너 미쳤냐?'

우리의 항의에.

김 중위는 오히려 분노한 듯 반박했다.

'난 지금 이 부대의 유일한 장교고, 최고 지휘관이다.'

'하....'

'내가 너희의 의견을 참고하는 건 내 자유지, 병사 따위가 강요할 일이 아니야.'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게, 저 김 중위만 아니었더라면.

'병사 따위가... 계급이 병장이라고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거기까지 들은 후.

백만 볼트를 날릴 뻔한 충동을 겨우 참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고.

얘기를 듣던 병사들의 표정 역시 좋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저 대화를 바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첫 번째 제안은 다음과 같다."

한 차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입을 여는 이민재 병장.

"김 중위를 치워 버려야 해. 그게 내 생각이다."

"예에!?"

극단적이기까지 한 발언.

병사들 사이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그런 분위기에.

일단은 이민재 병장에게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는 내가 나서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니, 형. 진정하라니까."

"냉정하게 하는 말이야."

"냉정이라니. 김 중위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치우자는게 무슨 소리래."

내 말에.

민재 형은 생존자들이 쉬고 있을 생활관 3층을 흘깃 살펴본 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김 중위가 나서서 생존자들을 정리한 덕에, 생존자들은 김 중위가 우리를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건 뭐, 그렇지."

나도 화나긴 한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 건 아니잖아? 김 중위가 우리한테 이상한 명령을 해도. 우리는 우리끼리 상의하고 결정하면 되는 거고."

"글쎄다.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날까?"

"뭐?"

팔짱을 낀 채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가는 민재 형.

"잘 생각해 봐. 어쩌면. 이렇게 다른 생존자들이 점점 합류하면서. 우리 집단은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질 수도 있다."

한 번 찾아온 생존자들.

그런 이들이 두 번은 안 오리란 보장은 없다.

"그런 합류 때마다, 김 중위가 매번 대표로 나선다면?"

"...."

"언젠가. 우리보다 '김 중위가 우리의 대표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숫자가 더 많아질 거다."

"...!"

확실히.

그런 순간이 오면.

'우리의 의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겠지.'

김 중위가 정말로 우리를 대표하는.

대장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겉보기만 그럴싸할 뿐 능력은 처참한 놈이란 거, 다 알고 있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그 말에는 모두가 공감하는지.

병사들 사이에서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긴 해.'

'김 중위가 우리를 지휘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데.'.

'난 김 중위랑 같은 사무실 썼었는데, 진짜 지옥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도 속으로 생각했다.

'김 중위가, 병사 따위, 라는 말을 썼다고?'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런 말을 한 이가 우리의 대장이 되었을 때.

과연 우리를 어떻게 대우할지.

"다들 알겠지만. 김 중위가 우리의 대장이 되는 날이 우리 부대가 망하는 날이 될 거다."

"큼."

"그 전에 김 중위를 어떻게든 해야 해."

민재 형이 하고자 하는 말은 알겠다만.

"그래도... 저희는 일단 군대 아닙니까."

얘기를 듣던 광일이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바깥에는 아직 군대의 체계가 남아서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잘은 몰라도, 하극상은 현대전에서도 극형 감 아닙니까?"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은 이민재 병장은, 오히려 예상한 지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오히려 그러니까 치워야 하는 거고."

"예?"

"우리 부대의 유일한 장교인 김 중위가 없어지면. 최고 계급자는 말년 휴가 직전이었던 박태준, 신영준. 두 말년 병장이 되겠지."

부대원들의 시선이 나와 태준이.

두 사람에게 몰렸다.

"그러면 혹시라도 바깥의 군대들과 마주했을 때,"

그리고 그 중.

특히 나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강하게 말을 이어가는 민재 형.

"영준이. 네가 우리를 지휘하고 있어도 문제가 없게 되니까."

"뭐?"

"김 중위를 치운거는 뭐.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거고."

갑작스럽게 내게 몰리는 시선들.

그 시선에 조금 당황스러워 하던 찰나.

"다들 모여 달라고 한 건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민재 병장은 이번엔 다른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

"모두가 함께 모여 있을 때 해야만 하는 말이니까. 내 두 번째 제안이자, 사실상 오늘 이야기의 본론이지."

내 쪽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며.

"우리를 지휘하는 건, 신영준 병장이어야 한다."

민재 형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지휘를 해야한다고?

아니.

"무슨, 취사병이 무슨 대표성이 있다고...!"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인사 처리.

당황한 나는 손사래 치며 그렇게 말한 뒤.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녀석들도. 취사병 따위가 대장을 맡는다는 얘기를 수긍할리가-"

주위에서도 당연히 나하고 같은 생각일 거라는 예상에.

동의를 구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어."

"...."

"얘들아?"

다른 병사들은 그저 나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이렇다 할 반대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그걸 보고 깨달았다.

'다른 병사들하고. 어느정도 얘기가 되어 있구나!'

하긴.

민재 형이 이런 말을 돌발적으로 할만한 양반은 아니다만.

"반대는 없는 것 같네."

"아니, 잠깐만."

하나 있는 반대 의견.

정확히 말하자면 당사자의 의지따위는.

"그럼 이 안건은 통과한 거로 하자."

가볍게 무시당했다.

"이제부터 우리의 대장은, 신영준 병장이다."

그 순간.

눈 앞을 가득 매우는 메세지.

띠링!

[조건이 충족됩니다.]

[30인 이상의 인원(30/31)]

[과반수의 인원에게 인정받는 리더(1/1)]

[클랜 결성!]

'클랜, 이라고?'

[최소의 공격대 단위, [클랜(30인)]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클랜은 임시 모임에 불과한 파티를 넘어, 본격적인 집단이 형성되는 첫 단계입니다.]

[과반수의 인정을 받는 리더와 그 지휘에 순응하는 다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클랜은 평범한 파티의 모임과는 차원이 다른 결속력을 보여줄 것입니다.]

[대지역 - ROK의 두 번째 클랜입니다.]

[소지역 - ROK. 17의 첫 번째 클랜입니다.]

[업적 달성 - 전우! 전우!]

[남들보다 빠르게 클랜을 결성하는 데 성공한 당신들!]

[앞서가는 이들을 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2위 보상 - 집단 스킬(증표)]

[당신은 이제부터, 423 클랜의 리더입니다.]

[각성자 : 신영준]

[직업 : 신입 요리사 Lv. 9]

[소속 : 423 클랜]

[직위 : 클랜 리더]

눈 앞에 나타난 상태창은.

나야말로 이 집단의 리더라고, 확실히 명시하고 있었다.

'어차피 다른 병사들하고는 다 얘기를 끝마친 것 같고.'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오오!"

"하하, 고생 좀 해 주셔야겠습니다, 병장님!"

대놓고 신나서 떠드는 병사들.

도대체 왜 나를 지휘관으로 삼고자 한 건지.

아직도 이해는 안 간다만.

어차피 맡게 된 일이라면.

제대로 해야겠지.

"그럼, 대장으로서 첫 번째 제안이다."

"예! 말만 하십쇼!"

"김 중위를 치운다는 건 반대야."

"...예?"

이 녀석들.

자기들이 대장으로 만들어 놓고, 첫 제안부터 불만이냐.

"일단 하나 약속하자."

나는 병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어어, 예?"

"음. 명령이라면 따르겠습니다만,"

의아해하는 병사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부대를 위한 일이야."

서수혁 상병의 질문에.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이득이 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면.

우리는 몸만 살아남을 뿐.

'정신은 죽고 말 거야.'

이 규칙을 가장 먼저 제시한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부대가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어. 그럼 김 중위는 어떻게 합니까."

"저희끼리 신 병장님을 대장으로 삼아도, 김 중위가 건재하면 의미가 없는데...."

"아, 그 부분은 사람을 죽이는 거랑 별개다,"

"예?"

"원래부터 김 중위를 치우는 건 반대였거든."

김 중위 같은 사람을 치우다니.

"아깝잖냐."

"...?"

김 중위.

당장은 쓸모가 없는 것은 물론, 피해만 끼칠 뿐인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치워 버리는 건, 조금 아깝지.'

쓸모가 없는 인간이라면.

해결법은 간단.

"쓸모 있게 만들어 주면 될 일이거든."

14화 김 중위 (1)

"병사들이 복귀한 것 같습니다, 형님."

생활관 3층의 한방.

창문 블라인드를 살짝 열고 바깥을 살피던 사내가 말했다.

"흥, 이 오밤중에 단체로 밤 산책이라. 살판났구만."

형님이라고 불린 사내가 답했다.

"...혹시 문제가 되진 않을까요?"

"큭큭, 그래 봐야 갓 스무 살짜리 아기들이야. 유일한 간부라는 녀석도 군인정신만 투철한 순둥이 같던데. 자기들끼리 작당을 해 봤자지."

방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각자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것보다. 내가 확인하라고 한 거. 제대로 확인하고 있는 거 맞지?"

"예에. 몇몇 병사들한테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어봤습니다만, 아직까지는 각성자스러운 답은 없었습니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편하게 대화하는 사내들.

병사들이 방을 배정해 주는 과정에서 성별을 기준으로 먼저 나눈 뒤, 친한 사람들끼리 같은 방을 쓸 수 있게 조치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슬쩍 봤는데, 괴물을 처치할 때는 총을 쓰는 것 같더군."

"제가 물어봤을 때도, 이상하게 여기는 경우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들 별 의심도 없이 답해 주는 것 같더군요."

"그러면 역시 각성자는 없을 확률이 높겠군. 예정대로 하면 문제는 없을 거다."

"예. 그럼 결행은 언제로 할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며칠은 상황을 지켜보고 문제가 없을 거 같으면 바로 하는 거로 하자. 신중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예. 형님."

* * *

부대원들끼리 모여 회의를 마친 다음 날 아침.

나는 조식 준비를 마친 후 식당 휴게실에 앉은 채.

목에 맨 군번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잘 차고 다니지도 않던 군번줄을 붙잡고 있는 이유.

갑자기 이 철 쪼가리의 감촉이 그리워졌다든가.

뭐 그런 건 아니고.

[클랜의 증표 - 리더]

[클랜의 소속원임을 증명하는 증표입니다.]

[소속 집단의 규모에 따라, 능력치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이게.

이 게임으로 변한 세상에서 내가 처음으로 얻은 '장비 아이템'이기 때문.

'클랜이라.'

지난밤.

회의를 통해, 우리 부대는 '파티' 규모에서 '클랜' 규모로 성장했다.

'30명의 각성자와 한 명의 리더.'

30명의 각성자는 아슬아슬하게 기준을 충족한 상태였다.

치프틴과의 싸움에서 잡은 리자드 중 숨이 붙어 있던 녀석들은 전부 각성의 재료가 되었고.

그 후 쳐들어온 리자드들도 모두 각성에 이용했으니까.

본래는 리자드를 안전하게 제압하는 게 쉽지 않았다.

10마리가 쳐들어왔다 해도 그중 각성에 이용 가능한 것은 2마리 정도가 한계.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부대원들도 리자드들을 상대하는 데 익숙해지고.

각성자도 늘었으며.

'무엇보다 힐러가 생겼으니까.'

리자드가 약간의 저항을 하더라도.

힐러들이 나서서 치료를 해준다.

꼭 리자드가 저항조차 못 하는 상태까지 몰아갈 필요가 없다.

공격해 오는 리자드의 잔당들은 모두 부대원들의 각성 재료가 되었다.

덕분에 각성에도 속도가 붙어 30명이나 각성할 수 있었다.

거기에 리더가 정해짐으로써.

우리 부대의 지위가, 클랜으로 격상된 것.

업적에 나타난 메시지를 보면.

클랜 규모의 단체를 만든 것은 ROK....

즉.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두 번째.

그러고 보니.

5명의 각성자가 모여 파티 규모의 업적을 달성했을 때만 해도 3위 보상을 받았던 것 같은데.

'한 팀은 우리가 제친 건가?'

우리가 이렇게 빨리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나쁠 건 없지. 업적 보상도 훌륭하고.'

내가 쥐고 있는 이 군번줄이 바로.

두 번째로 클랜을 만들어 낸 업적의 보상.

[집단 스킬(증표)]

[집단의 상징물이 될 만한 물건을 선택해 증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증표는 해당 집단에 소속된 이들만이 착용할 수 있으며, 집단의 규모에 따른 능력치 보너스를 제공합니다. 보너스 수치는 집단 내의 지위에 따라 변동됩니다.]

"좋네."

설명도 없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비마나'와는 다르다.

집단에 소속된 이들 전원에게 능력치 보너스를 제공한다는.

심플하면서도 강력한 효과.

리더급인 나는 말 할 것도 없다.

다른 각성자 병사들도 체감이 될 정도로 상승치가 쏠쏠했다.

내가 적당하게 힘을 줘서 만든 요리를 먹은 정도의 수치 정도?

'부대원들 전원이 가지고 있고, 증표로 삼을 만한 게 군번줄밖에 없어서 아쉽지만.'

군번줄에 증표 스킬을 사용하자.

각성자들이 지니고 있는 군번줄은 모두 아이템으로 변했다.

거기 적힌 내용도 조금씩 바뀌었다.

군번이 적히던 부분에 클랜명과 직위가 들어갔고.

배경에는 작은 문양 같은 것도 생겼다.

군번줄.

목걸이 형태라 언제든지 휴대하고 다닐 수 있고.

소속을 증명하는 데도 좋다.

나름 다른 부대원들과 상의한 끝에 결정한 만큼.

솔직히 최선의 선택이라고는 생각한다.

"하필 개목걸...."

아니.

군번줄이란 게 심적으로 좀 안타까울 뿐이지만.

하지만.

안타까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왜 하필 내가."

클랜의 조건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한 명의 리더.

그게 하필 나였다는 사실.

'아니, 내가 왜 리더야? 취사병이 무슨 부대를 대표한다고.'

어젯밤의 회의가 끝난 후.

나는 민재 형을 찾아가 물었다.

'가장 먼저 각성한 것도 너고, 각성자를 늘려야 한다고 부대의 방침을 정한 것도 너다.'

'아니. 그런 건 그냥 운이 좋게....'

'괴물들의 약점을 알아낸 것도, 대규모 습격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것도.'

'....'

'게다가 요리의 버프 효과를 늘려야 한다면서 부대원 입맛 조사한다고 개개인 면담까지 하면서 가장 자주 소통한 것도. 바로 너고.'

'그건.'

'이 정도면 네가 아닌 게 이상할 정도 아니냐?'

'그렇긴 한데.'

조목조목 따지고 보니.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도 아니라고.

'다른 각성자들은 총으로 어느 정도 힘을 뺀 리자드를 죽였지만, 너는 식칼 하나로 괴물을 죽였지. 그것도 두 마리나.'

'말처럼 쉽지는 않았는데.'

'습격 첫날, 네가 괴물의 피가 묻은 식칼 들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많은 부대원이 봤다.'

'?'

'네가 칼 한 자루만으로 총에도 버티는 괴물을 죽였을 정도로 강하다는 소문이 부대에 쫙 퍼졌지.'

아니.

그딴 소문이 어느 틈에.

'여러모로 불안정한 상황이다. 우리 부대에는 강한 리더가 필요해.'

'그게 나라고?'

'그나마 광전사인 광일이가 비슷한 이미지지만. 녀석은 본래 성격이 너무 순하다. 나는. 으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뭐하지만. 인망이 그다지 좋진 않고.'

전쟁나면 이민재 뒤통수에 총부터 쏘고 본다느니.

그런 얘기를 듣긴 했지.

'결국 너밖에 없어.'

민재 형은 며칠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른 부대원들의 의향도 물어본 결과.

반대할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를 리더로 추대한 것이라고.

그저 살기 위해.

살아서 언젠가 내 식당을 열기 위해.

그 수단으로써 부대를 강하게 만들고자 고군분투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모습이 부대원들에겐 다르게 비쳤나 보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 거절할 수도 없고.'

결국 나는 리더 자리를 수용.

몇 가지 안건을 더 나눈 뒤에 회의를 파했다.

이제 부대원들은.

김 중위가 아닌 나를 지휘관으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과연.

식당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니.

"충성."

"그래, 부탁한 일들은 다 됐고?"

"예."

한 병사가 나를 찾아왔다.

"부대 내에서 저희한테 직업을 묻는 경우, 절대 상태창의 직업을 말하면 안 된다. 이상한 티도 내지 말라. 잘 전했습니다."

"잘 했어."

"각성과 관련된 이야기도 최대한 함구하는 거로 전달 완료했으니. 다들 잘 대처해 줄 겁니다."

이것은.

어제 회의에서 내가 제의한 안건 중 하나.

나는 태준이 녀석이 별을 보고 한 말을 떠올렸다.

'이빨은 숨기는 게 좋을 거야.'

정작 태준이 녀석 또한 그게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는 모른다고 했지만.

발톱을 숨겨야 한다.

즉.

능력을 숨겨야 한다는 뜻임은 확실했다.

'나에게 직업명을 물어본 그 남자.'

소름이 돋는다.

그가 뜬금없이 내게 직업을 물어봤을 때.

내가 생각 없이 '신입 요리사'라고 답변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내 경우엔 요리사라서 그나마 괜찮지만, 다른 녀석들이라면.'

직업을 묻는 게 뭐 그리 이상한 일이냐 싶을 수도 있지만.

만약 그 질문을 한 것이 또 다른 각성자라면.

질문의 의도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너도 각성자냐.'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별의 운행을 통해 천기를 엿보고, 어쩌구 하는 직업.

천문관으로 각성한 태준이 녀석의 경고를 들은 뒤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각성자들의 존재를 최대한 숨기되, 각성자를 늘리는 작업은 늦춰선 안 돼."

"예. 어차피 괴물의 제압은 사수 각성자들 위주로 하고 있었으니 별문제 없을 겁니다."

"사수 각성자들은 겉보기엔 그냥 총을 든 군인하고 차이가 없으니까 말이지."

그냥 화력이 일반 군인의 수 배.

레벨과 스탯에 따라 수십 배까지 차이가 날 뿐.

"각성할 차례가 된 병사는 리자드의 사체를 옮기러 가는 척하면서 숨통을 끊고 각성하도록 할 테니, 숨기는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나?"

"생존자들이 계속해서 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꼭 나눠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고요."

그러고 보니 그랬지.

"그, 여자분 말하는 거 맞나?"

처음 생활관에 생존자들을 안내했을 때.

우리에게 처음 대화를 요청했던 여자.

"예. 보기와 다르게, 그 여자가 생존자 집단의 리더 역할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화라...."

저들은 우리의 대표를 김 중위라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

대화의 장에 나서야 하는 것도 김 중위겠지만, 당장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지. 김 중위는 나한테 맡겨."

"정말 괜찮겠습니까? 차라리 김 중위를 빼고 저희끼리 가는 게 낫지 않을지...."

"이런 상황이니까. 최고 지휘관이 직접 나서 주는 게 좋지."

그렇다고 김 중위가 마음대로 우리를 지휘하게 둘 생각은 없다.

약간 수를 쓸 필요가 있겠지.

"생존자들도 대표를 정해서, 3일 뒤, 저녁 식사 후. 생활관 2층 회의실로 와 달라고 전해."

"예."

"아, 우리 쪽에서 회의에 참여할 병사들한테는, 가급적 우리 부대의 상황에 대한 건 어떤 부분이라도 누설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전해 주고."

"알겠습니다."

그럼, 생존자들에게 얘기를 전하는 건 저 병사가 잘해 줄 테니.

"나는 내 할 일을 해야겠지."

미뤄 뒀던.

서열 정리를 할 때가 왔다.

* * *

나는 작은 쟁반에 몇 가지 요리를 담은 후, 식당을 나섰다.

이번에는 특별히 공들여 만든 요리들.

'특히 평상시보다 재료 면에서 자유로웠지.'

덕분에 좀 더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여 만들 수 있었다.

쟁반 위에 올라간 그릇들만 해도.

군대 식당 기준으로는 고급스러운 것들뿐.

취사반장의 휴게실에 있던 걸 꺼내 온 물건들.

타 부대의 간부들이나 장성급 인사들이 시찰을 올 때나 쓰던 그릇이다.

그렇게 화려하게 만들어진 음식들을 들고 향한 곳은.

어두컴컴한 식당의 지하실.

낡은 전등 하나만이 덜렁거리고 있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구우웅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

각종 보일러 장치와 수도 장치, 발전기 등이 돌아가는 진동음만이.

이 작은 지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말이 지하실이지, 사실상 보일러실 같은 곳이니까.'

지하실은 식당 건물에 난로와 온수, 전기 등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다만.

설계 당시에 필요 이상으로 크게 지은 것인지.

꽤 넓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각종 기기들의 옆에는 여러 가지 비품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존재했다.

주로 시설병들이 비품을 저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도별로 분류된 작은 창고들.

그 숫자가 총 7개.

'감방으로 쓰기엔, 적당한 숫자.'

일반적인 군대의 경우.

감옥을 대신하는 개념으로 영창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부대는 규모가 작고.

상위 부대에 속해 있는 하위 대대.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영창 시설이 존재할 리가 없다.

'병사가 영창에 갈 일이 있으면 상위 부대의 영창에 들어갔지, 보통?'

그래서 영창을 대신할 감옥 시설로 선택한 곳이.

바로 이곳.

식당 지하실의 창고 7곳을 개조.

임시 수감시설로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개조된 창고 중.

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이 감옥의 첫 번째 이용객.

"여, 영준이냐?"

"안녕하십니까."

우리 부대의 유일한 간부이자, 최고의 폐급 간부였던 남자.

"김 중위님."

김 중위였다.

15화 김 중위 (2)

"여, 영준아! 네가 와 줘서 다행이다. 내 말 좀 들어다오!"

지난밤.

정확히는, 내가 부대원들에게 이 부대의 리더로 인정받은 그날 밤.

모든 부대원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였고, 당시의 의제는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다름 아닌 나.

신영준 병장을, 우리 부대원들의 리더로 삼는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한 의제가 바로.

김 중위를, 치워 버리자는 것.

"며, 며칠 전에 갑자기 병사들이 쳐들어오더니. 나를 이곳에 가둬 버리지 뭐냐!"

나를 리더로 삼는다는 의제가 통과된 시점에서.

김 중위를 치운다는 의제 역시 통과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 중위는 묘하게 정치에 능한 양반이다보니.

가만히 뒀으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대를 먹어 치워버릴테니까.

그런 미래를 피하려면.

김 중위를 치우는 것은 필수.

'김 중위를 치우자는 건 반대다.'

'아깝잖냐.'

그걸 반대하고 나선 것은 나였다.

'김 중위를 치우자고 말한 건 나니까, 내가 직접 치울 생각이었다만. 꼭 말려야겠냐?'

'그 부분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좀 도와주기만 해.'

민재 형은 김 중위를 직접 치워 버릴 생각까지 했던 모양이지만.

결국은 내 의견을 존중.

내게 협조해 주기로 했다.

김 중위는 그렇게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민재 형이 부탁을 잘 들어줬네.'

민재 형의 전기 마법.

속칭, 백만 볼트를 뒤통수에 얻어맞고 기절한 김 중위..

'그대로 이곳의 첫 수감자가 되었지.'

민재 형의 능력.

누군가를 제압하는 데는 최적이더라고.

"혹시 병사들이 내게 서운한 게 있어서 그러는 거라면 사과하겠다고 전해다오!"

"예?"

"저번에 내가 커피를 잘못 쏟아서 레이더 장치 고장 난 거 당직병한테 돌린 것도, 검열 때 내가 실수한 부분 가지고 병사들한테 화풀이한 것도!"

"...."

"그리고 또 뭐냐, 업무 시간 때 내 업무까지 행정병한테 짬 때려 놓고 창고에서 쉬던 것도! 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에 갇혀 있는 상황.

김 중위도 자신이 왜 갇히게 된 것인지.

나름대로 이래저래 생각을 많이 했나 보다.

그 원인이 원한 관계에 의한 것이라 결론 내린 것일까.

원한 가질 만한 행동을 줄줄이 나열하며 사과하겠다는 모습.

'아니 근데 많기도 하네.'

이미 병사들 사이에선 유명한 폐급 간부.

내가 알고 있는 얘기도 많았지만.

나는 물론이고 다른 병사들도 몰랐을 폐급 짓들도 많이 저지른 모양.

"저런, 그러셨습니까."

"그, 그래! 영준이 네가 날 좀 도와다오. 넌 부대원들하고 사이도 좋잖니."

부대원들하고 사이는 좋지만.

당신하고도 좋지는 않다.

'라고 할 뻔.'

꾹 참고서 생각해 놓은 말을 입에 담았다.

"저도 나름 설득해 보려 했는데, 아직은 반대하는 부대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김 중위님에게 원한을 가진 병사들이 생각보다 많았으니까 말입니다."

"그, 그럴 수가...."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 김 중위.

'아마 지금쯤 머릿속에는, 전시 상황에서 부대원들에게 살해당한 간부의 사례 같은 게 떠오르고 있지 않을까.'

참고로.

전시 상황에 지나치게 병사들에게 FM을 강요한 간부가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지나치게 폐급이라 격리된 간부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제가 계속해서 설득해 볼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크흡. 영준아...."

"그보다, 이것 좀 드시죠. 갇혀 지내느라 힘드셨을 텐데...."

혼자서 감동했는지 훌쩍이는 김 중위 앞에.

들고 온 쟁반을 내려놓는다.

"김 중위님, 면 요리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파스타로 준비했습니다."

"아아. 영준아... 정말 고맙다!"

준비한 요리는 크림파스타와 함께 먹기 좋은 간단한 가니시와 음료.

면 요리를 좋아하는 김 중위의 취향을 저격한 요리였다.

'오랜만에 재료 걱정을 덜 하고 만든 요리인 만큼, 내가 생각해도 꽤 제대로 된 요리가 나왔지.'

자신이 있는 요리였던 만큼.

반응도 즉각적으로 나왔다.

"마, 맛있어!"

"그렇습니까."

"후루룩... 근데 이 고기들은 뭐니? 내가 듣기로는 분명, 부대에 식재료가 얼마 안 남았다고...."

"...아, 그거요? 그냥 그, 뭐냐. 닭고기 같은 겁니다."

"닭고기가 남아 있었어?"

"으음. 뭐 대충 그런 셈이죠."

일단 설명에는 '닭고기와 비슷한 맛'이라고 되어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귀중한 재료를... 고맙다 영준아.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내가 아주 제대로 사례하마."

원래도 식탐이 강한 것으로 유명했던 김 중위.

입맛을 저격한 정성 들인 요리.

당연히.

효과는 엄청났다.

'그리고 아마, 내가 기대했던 쪽의 효과도... 곧 나오겠지.'

내 생각은 곧바로 적중했다.

김 중위의 태도가, 묘하게 변한 것이다.

"흐... 흐힛...."

태도라고 해야 할까.

기묘한 웃음을 흘리는 김 중위.

"왜 그러십니까?"

"응... 아니... 오랜만에 맛있는 걸 먹어서 그런가... 기분이 좋네. 헤헤...."

"기분 좋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김 중위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다.

그가 조금...

아니, 상당히 무능하고, 사소한 죄들이 많다곤 한들.

무언가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김 중위를 치워야 한다는 얘기가 오갈 때는.

내 손에 직접 피를 묻힐 각오도 했었다.

그에 비하면야.

죄책감에 파묻히는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친 김 중위를 보며.

나는 식기를 대충 정리해 방을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역시, 정성 들인 요리를 김 중위에게 가져다 바쳤다.

"젠장. 그 녀석들... 간부인 나를 이렇게 만들다니...."

"진정하시죠."

"바깥의 상위 부대와 합류하면, 모조리 영창, 아니 군사재판에 넘겨 버릴 거다. 영준이 너는 특별히 봐주마."

"감사합니다."

"그, 그래서. 오늘 메뉴는...."

"오늘은 국수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사과하겠다느니 어쩌니 한 말은 까맣게 잊은 듯.

나가면 군사재판에 넘기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는 김 중위.

'어이가 없긴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쓸 단계도 아니고.'

난 그런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계속해서 그에게 요리를 먹였다.

"흐흐... 흐힉... 헷...."

"...."

식사가 끝날 때마다.

기괴한 웃음을 흘리는 김 중위.

나는 그런 그를 묵묵히 지켜보다가.

식기를 대충 정리해 들고 자리를 떠났다.

식사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제공됐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끼.

면만 먹으면 질릴 수도 있으니.

다른 요리들도 종종 섞었다.

부대원들에 의해 경질되어 갇혀 있는 김 중위.

이제는 아무런 권력도 없는 그 남자에게.

나는 굳이 요리를 해서 바쳤다.

"흐... 흐흐... 영준이, 왔냐."

"...예."

그리고 이제.

김 중위는 음식을 먹지 않았음에도 기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늘 메뉴는ㅡ 뭐지...?"

"오늘은, 가장 좋아하시는 닭고기 파스타입니다."

"흐흐... 좋아, 좋아... 흐힉...."

[극상의 행복이 담긴 리자드 로제 파스타]

[삶의 모든 고통과 근심, 모든 것들을 잊고, 그저 행복함만이 남게 될 파스타입니다.]

[인류 역사상 사용된 적 없는 재료를 이용해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했습니다. 경험치 상승량이 증가합니다.]

이 이상 행복할 수가 없을 것 같은 웃음을.

* * *

[리자드의 허벅다리 살]

[파충류 계열의 이족 보행형 종족, 리자드의 고기.]

[식재료 감별 - 닭고기와 비슷한 맛이 날 듯하다. 전사종의 고기로, 잦은 운동 탓에 지방이 적어 담백한 맛이 다소 떨어졌다.]

리자드의 고기.

오늘 부대원들이 사냥한 녀석으로, 다른 리자드들처럼 태우기 전에 부탁해 식당으로 가져온 것이다.

"...몬스터를 재료로 요리를 해 본 건 처음이지만."

리자드의 고기.

말로만 하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 녀석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지난날.

부대를 습격한 녀석들에 의해 부대원들의 절반이 죽었다.

그들의 사체는 리자드들의 한 끼 식사가 되어 처참하게 손상되었고.

"그런 괴물의 고기를 맛있게 먹자고 대령할 수도 없고."

안 먹어 본 요리라던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을 먹어도 되는가에 대한 문제.

부대원들이 과연 리자드를 식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들의 생각을 확인하기 전까진 리자드 고기를 식용으로 활용할 수 없었다.

덕분에 식사는 부대에 남아 있던 식재료만을 이용해야 했고.

그 양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식용으로 활용했을 때 어떤 맛이 나는지는 확인해 둘 필요가 있어.'

정말로 먹을 게 없을 때는 몬스터라도 먹어야 할 테니까.

마침 그 실험대가 생기기도 했겠다.

나는 곧바로 리자드의 고기를 사용해 요리를 해 봤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극상의 행복이 담긴 리자드 크림 파스타]

[삶의 모든 고통과 근심, 걱정을 잊고 그저 행복감만이 남게 될 파스타입니다.]

[미량의 마력이 포함되었습니다. 요리의 전체적인 맛과 성능이 향상합니다.]

몬스터의 고기를 이용한 탓인지.

마력이 포함되어 요리의 맛과 성능이 향상됐다.

그것만 해도 엄청난 효과였지만....

[인류 역사상 사용된 적 없는 식재료를 이용해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였습니다.]

[해당 요리를 통해 얻는 경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업적 - 이, 이 맛은!]

[요리사로서, 최초로 몬스터를 이용해 요리를 제작하였습니다.]

[역사에 획을 긋는 자들은, 모두가 기괴한 도전 정신을 지닌 법!]

[요리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당신에게, 업적에 대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칭호 - 길을 개척하는 자.]

[자신의 분야에서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간 인물에게 주어지는 칭호.]

[직업 관련 스킬, 특성의 효과가 50% 증가한다.]

업적의 달성.

그리고 보상으로 주어진 칭호.

'칭호라는 건 처음 받아 보는데?'

혹시나 싶어 상태창을 열어 보니.

각성자 이름의 아래 칸에 [칭호(new!)]라는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런저런 정황을 봤을 때.

우리 부대가 이 세상에서도 특출나게 앞서 있는 건 확실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모르고 있던 요소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라웠다.

'...어쩌면 우리가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는 지금 이 단계조차, 이 게임에선 프롤로그에 불과한 건 아닐까?'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고민해 봐야 쓸모없는 부분.

그보다는 당장 얻은 칭호의 효과를 확인하기로 했다.

"...훌륭해."

모든 스킬과 특성의 효과가 50% 증가.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는 효과다.

그 분야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점이, 그만큼 대단하게 평가된 것이겠지.

"그렇다면, 나쁠 건 없지."

나는 그렇게 요리를 들고 김 중위에게 향했다.

김 중위에게 내 요리를 가져다준 첫날의 일이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오늘.

김 중위에게 요리를 가져다준 지 3일째가 되었다.

"흐헷... 헷... 영준이... 왔어?"

이제는 요리를 먹지 않았음에도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침을 흘리는 김 중위.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슬슬 다음 단계로 나갈 때가 왔음을 확신했다.

"예."

"그래... 오늘 아침 식사는 뭐지?"

오늘도 당연히, 내가 맛있는 식사를 제공할 것이라 믿고 있는 김 중위.

하지만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이 없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그냥 전투식량입니다."

"...뭐?"

무언가 잘못 들은 거겠지, 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김 중위.

'미안하지만, 잘 들으셨습니다.'

나는 김 중위의 앞에, 요리 대신 가져온 물건을 내려다 놓았다.

사각형의, 노란 박스.

대한민국 군대의 보급형 전투식량이다.

"그래도 전투식량 중에서 김 중위님이 좋아하시는 제육 맛으로 골라 가져왔습니다. 조리법은 당연히 아시죠? 여기, 이 플라스틱 끈을 당겨서...."

"자, 잠깐! 그게 무슨 소리냐! 오늘 그럼 이거 말고는 요리가 없다고?"

"예. 그렇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당연히, 매일같이 제공되던 양질의 식사가 아니라는 사실에 분노하는 김 중위.

나는 이유를 설명해 주기로 했다.

물론 진짜 이유는 아니지만.

"부대에 식재료가 얼마 남지 않아서요. 앞으로는 저번 같은 식사 제공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슨, 그럼 난 뭘 먹으라고...."

"뭘 먹냐니. 거기, 전투식량이 있지 않습니까."

전투식량 하면 끔찍한 맛을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전투식량은 또 나름대로 개량이 많이 된 것들이라.

입맛이 관대한 병사들에 한해,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는 된다.

"그동안 요리를 해 드린 것도 김 중위님을 배려해서 무리한 거, 아시잖습니까."

"이... 이익...."

"앞으로는 이걸로 버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크게 문제가 될 일도 아니다.

그냥 식사가 한동안 좀 맛없어졌다 정도의 일.

전투식량도 못 먹을 수준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미 내 음식에 혀와 뇌가 절여져 버린 김 중위에겐 아니지.'

그에겐 내 요리를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엄청난 중대사가 되어 버렸으니까.

"영준이, 너 이 새끼... 내게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냐?"

"...."

"상위 부대와 합류해도, 너만은 좋게 보고해 줄 생각이었는데. 이래 봐야 네게 좋을 것도 없어!"

"하아, 김 중위님. 사정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고! 빨리 요리나 해 와!"

이제는 소리를 질러대는 김 중위.

나는 그를 무시한 채, 전투식량만을 던져두고 창고 방에서 나왔다.

전투식량은 식기를 정리할 필요도 없으니, 새삼 편했다.

"너 이 새끼!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내게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나도 생각이 있어!"

방을 나왔음에도 김 중위가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려왔지만, 무시한다.

지금의 김 중위는 상식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니까.

"흐음. 내 예상대로라면...."

아마 한 끼도 못 버티지 않을까.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흐... 흐으윽...."

"...."

"이, 이 맛이 아니야... 이 느낌이 아니라고...."

다음 식사 시간이 되어 찾아오자마자 이 꼴이다.

좁은 창고 방의 한구석에서 흐느끼고 있는 김 중위.

구석에는 차갑게 식은 전투식량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김 중위님."

"여, 영준아!"

내가 찾아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듯, 하염없이 흐느끼던 김 중위가 내 목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들었다.

"새, 생각이 바뀐 거냐? 점심 식사는 제대로 된 요리인 거지?"

"...."

"하, 하긴. 부대의 사정이 어려우니까. 하루에 한 끼 정도는 전투식량으로 때울 수도 있는 거지. 나도 원래 아침은 대충 먹는 스타일이었고! 그래, 점심 메뉴는...."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내가 내민 것은.

이번에는 불고기 맛 전투식량.

"이. 이건...."

"제육 맛을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다른 맛으로 가져왔습니다."

당연히, 김 중위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신영준 병장...."

"예. 병장, 신영준."

"이건, 이 부대 최고 지휘관으로서 하는 명령이다... 당장 제대로 된 요리를 가져와!"

이젠 지위를 사용해서 명령까지 하는 모습.

명령이라.

"하아...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김 중위님."

"뭐?"

"정말 요리를 먹고 싶으시다면, 태도가 잘못됐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세상에. 다짜고짜 명령이라뇨."

"이, 이익... 이건 간부로서의 명령이다! 내 명령이 우습나!"

얼굴이 시뻘게진 채 따지는 김 중위였지만, 약간의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 식사 때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어떤 태도가 좋을지, 잘 생각해 두시길 바라죠."

아침 식사부터 점심시간까지의 텀은 5시간.

반면 점심부터 저녁 시간까지의 텀은 7시간이다.

생각할 시간도 많을 거고.

고통에 몸부림칠 시간도 많겠지.

[극상의 행복이 담긴]

김 중위가 저렇게 부족함을 호소하는 이유.

내가 그에게 먹인 요리마다 붙어 있던 저 수식어 탓이다.

'요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감정 변화는 일시적이지. 하지만...'

그 감정의 변화가 준 여파는 오래 간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전광일 상병을 비롯해 겁먹어 각성하지 못하던 병사들.

그들에게 '용기'의 요리를 먹였을 때.

용기를 얻은 이들은 광전사처럼 날뛰며 리자드를 죽였지만, 다음 날에는 아무렇지 않게 원래의 성격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그 변화가 의미가 없던 것은 아니야.'

그렇게 한 번 용기를 얻은 이들은.

각성 후에 리자드와 싸울 때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요리의 효과인 용기가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용기를 가지고 괴물과 싸운 경험이, 공포를 물리친 것이다.

감정의 변화 자체는 일시적이지만.

그 감정이 남긴 경험과 기억은, 그 후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김 중위가 요리를 먹고 느낀 행복감 역시 마찬가지.

'지나치게 커다란 행복은....'

그 행복이 끝났을 때.

더욱 크게 다가오는 법이니까.

'거기에 효과를 최대로 끌어낸 요리를 하루 세끼, 이틀 이상을 먹였지.'

광일이 녀석은, 효과가 강해진 용기의 요리를 먹자마자 광전사가 되었다.

한 끼만 먹어도 그 정도의 효과.

그걸 며칠 동안 먹었으니.

그 행복감이 느껴지지 않을 때의 공허함은, 아마도....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흠."

"이, 이런 걸로는 모자랍니다.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아요... 제발, 뭐든지 할 테니...."

단 하루.

그나마 정신력으로 버티던 점심부터, 저녁까지의 7시간.

"제게, 요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김 중위가 굴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뭐. 그러죠. 요리. 해 드리겠습니다."

"아아...."

"단, 조건이 있습니다."

"뭐든지, 뭐든지...."

사실, 김 중위에게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다른 병사들도 감금하고 방치하면 되지 않겠냐는 의견이었고.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김 중위를 굴복시킨 이유.

"제가 하는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명령입니다. 따라오세요."

각성자들이 얻는 직업의 경향을 봤을 때.

'김 중위는, 복권일 수도 있다.'

나는 김 중위를 데리고 식당 지하를 나와, 병사들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방어선으로 향했다.

때마침 부대를 공격하던 리자드 한 마리가 제압당하는 모습.

"저 괴물을, 죽이시면 됩니다."

김 중위는, 내 말에 복종해 괴물을 죽였다.

그리고....

[초보 지휘관]

[특성 : 최하급 지휘]

[지휘하에 놓인 병사들의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퍼센트 증가...!'

혹시나 싶어 긁어 본 복권은.

당첨 복권이었다.

16화 준비

게임에 존재하는 능력치 상승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고정 수치 증가와 퍼센트 증가.

'증표로는 고정 수치가 증가했었어.'

고정 수치 증가는 버프 대상의 기본 능력치가 낮을수록 높은 효과를 보인다.

반대로, 퍼센트 증가는 버프 대상의 기본 능력치가 높을수록 큰 효과를 보이고.

그리고, 방금 각성한 김 중위의 능력은 바로.

'퍼센트 증가!'

증표가 아직 약한 부대원들의 능력치를 단숨에 쓸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려 준다면.

김 중위의 '최하급 지휘'는, 부대원들의 자체 능력치가 높아질수록 높은 효율을 보일 것이다.

거기에....

'두 버프는 보통, 시너지를 보이지.'

퍼센트 증가식의 버프는 고정 수치 증가의 버프까지 포함해서 계산한다.

이미 증표를 통해 고정 수치 증가 버프를 확보한 우리 부대에는, 김 중위의 능력이 날개를 달아 준 셈이나 다름없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업적 : 헤어날 수 없는 맛.]

[요리를 통해 한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는 요리사로서 이룰 수 있는 최대의 업적 중 하나입니다.]

[업적 보상으로 [최상급 식재료 : 아룡의 심장]이 지급됩니다.]

[경험치를 대량으로 획득합니다.]

[견습 요리사 lv. 10에 도달하셨습니다.]

[승급이 이루어집니다.]

[견습 요리사 lv. 10 → 하급 요리사 lv. 1]

업적 달성.

그리고 견습 요리사 lv. 10.

"9에서 죽어라고 안 늘더라니."

한동안 오르지 않던 레벨에 의아해하던 차였다.

하지만 10을 찍자마자 승급한 직업을 보니, 이해가 간다.

'원래 승급전은 빡센 법이니까.'

레벨 업도 했겠다, 하급 요리사로 바뀐 능력치에 무언가 변화가 있나 확인해 봤다.

우선 기본적인 능력치 상승.

이건 레벨 업이 이뤄질 때마다 있었지만, 약간 바뀌었다.

'레벨 업마다 1씩 오르던 스탯이 2가 올랐어.'

승급이 이뤄졌기 때문일까.

레벨 상승에 따른 스탯 상승치도 올라가는 듯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최하급 요리 숙련 → 하급 요리 숙련]

[최하급 화염 저항 → 하급 화염 저항]

.

.

.

'최하급 특성들이 전부 하급 특성으로 바뀌었어.'

내가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특성들.

최하급 단도 숙련, 최하급 요리 숙련 등.

모든 특성이, 최하급에서 하급으로 바뀌었다.

최하급만 해도 그 분야의 달인 수준의 능력을 보여 주던 특성들.

그 특성들이 거기서 한 단계 더 성장했다고 하니,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킬 - 전투식량 (new)]

[살다 보면,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전투에 참가하는 병사들이 대표적인 예!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야전에서 섭취 가능한 전투식량의 맛을 끌어 올리는 연구는 모든 군사 세력 지도자들의 주요 과제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당신을 발견한다면, 어떻게든 채용하고 싶어 안달이 날 겁니다!]

[전투용 보존 식량의 제조가 가능해집니다.]

[전투식량은 일반 식사에 비하면 능력치가 다소 떨어지나, 유통기한이 길고, 작은 크기의 음식으로도 높은 열량의 섭취가 가능해 휴대에 용이합니다. 보장된 맛은 물론이구요!]

전투식량.

김 중위가 먹고는 맛없다며 괴로워했던 물건과 같은 이름.

"하긴, 전투가 격화되면 모든 병사에게 매끼를 챙겨 주긴 힘들 테지."

이 스킬로 만들어지는 전투식량은, 일반 군부대의 전투식량과는 격이 다르다.

일반식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고 하나, 능력치의 상승효과는 물론.

요리사의 실력에 따라 맛 또한 보장된다.

"나쁘지 않아."

이 스킬은,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나름대로 유의미한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

그리고, 김 중위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

그렇다면 다음은.

"신영준 병장님. 슬슬...."

"그래. 이쪽도 마침 준비가 끝난 참이다."

부대를 찾아온 생존자들.

그들과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다.

* * *

"김 중위님. 말씀드린 거, 이해하셨겠죠?"

"모든 대화는 병사들에게 맡기고, 나는 뒤에서 고개만 끄덕이는 역할... 알겠습, 아니. 알겠다."

내 요리를 먹고 완전히 굴복한 김 중위는, 이제는 내 명령에 완벽히 복종하는 상태가 되었다.

부대원들이 급격하게 순해진 김 중위를 보고 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놀랐을 정도.

"존댓말, 주의하세요."

"으음, 아, 알았다...."

부대원들에게서 리더로 인정받은 것은 나지만.

일단 우리 부대의 최고 지휘관은 김 중위.

그렇기에, 대외적인 활동에는 김 중위가 우리 부대의 대표로서 나서 주는 걸로 결정했다.

취사병 병장인 나보다는, 중위라는 제법 그럴싸한 직위를 가진 김 중위가 나서 주는 것이 외부인들이 보기에 그럴싸해 보일 테니까.

실제로 업무능력 같은 게 부족하고 불성실해서 그렇지.

김 중위는 생긴 것만 보면 그럴싸한 참군인에 말도 잘하고, 일은 못 하면서 정치질은 잘하는 편이다.

어차피 김 중위는 내 요리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으니, 멋대로 이상한 짓을 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일개 병사한테 자꾸 존대를 하려고 하는 저 버릇. 저것만 어떻게 된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아무튼, 그렇게 강제적인 개과천선을 마친 김 중위의 첫 번째 대외 업무가 바로.

생존자들과의 대화의 장.

'대화의 장이라고 하면 훈훈해 보이지만.'

나와 병사들은, 이 대화를 말로 이루어지는 전투라고 여기기로 했다.

'저들 중에 우리에게 위해를 끼칠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괴물에게서 도망쳐 온 생존자들.

분명 피해자이고, 약자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선하다거나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은 되지 않는다.

'발톱을 숨겨야 한다.'

태준이가 남긴 메시지에 의하면, 어째서인지 우리는 저들에게 우리의 능력을 감춰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대화에서 취해야 할 전략은 단순하다.

'아군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적게, 저들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많이.'

그런 생각으로 나름 비장한 각오를 하고, 준비된 방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회의를 담당하게 된 이민재 병장입니다."

"김 중위님이 아니라요?"

"중위님도 회의에는 참여하실 겁니다. 다만, 생존자분들과의 협의는 지휘를 담당하시는 중위님보다는 현장 일을 담당하는 저희가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셔서요."

"아, 네."

일단 우리 중 대표로 나서기로 한 것은 민재 형.

우리 부대에서 가장 고학력자로, 머리도 좋고 말도 잘한다.

민재 형은 리더인 나를 내세우려고 했지만, 내가 리더 권한으로 명령하니 결국은 수긍하며 대표로 나서게 된 것.

'리더 자리는 수긍했지만, 그렇다고 온갖 귀찮은 일까지 다 맡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나저나....'

저들에게는 이번 대화에 참여할 만한 대표들을 정해 와 달라고 했다.

스무 명이 넘는 생존자들 전원과 대화하다 보면 입이 늘어난 만큼 괜히 복잡해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 쪽에는 김 중위와 민재 형을 포함한 부서별 최고참 병사들이 한 명씩.

그리고 저쪽에는 다섯 명의 남녀가 참여했다.

'생활관별로 한 명씩 나온 건가?'

우리 생활관의 3층을 통째로 내어 주며 한 방에 5명씩 배정됐으니까.

그 와중에 나름대로 친한 이들끼리 같은 방을 쓸 수 있도록 했으니, 방당 한 명씩의 대표를 정해서 보낸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그중에 내게 우리 부대가 '몇 대대'인지를 물어봤던 사내가 있지 않나 둘러봤지만,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흥, 일반 병사들하고 말이 통할지나 모르겠는데."

"여기 모인 병사들은 부대의 실무를 담당하는 부서별 최고참 병사들이니, 궁금하신 점이나 원하는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셔도 될 겁니다."

"쯧, 궁금한 점이라.... 그럼 하나만 묻지."

과연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김 중위가 대표로 나오지 않은 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덩치가 꽤 큰, 험악한 인상의 중년 사내.

얼굴은 그렇다 쳐도 자리에 앉아 있는 자세부터가 묘하게 껄렁거리는 것이, 그다지 질이 좋아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 회의를 여는 데 3일이나 걸린 이유는 뭐요?"

"...여러분들이 긴 도피로 인해 지쳐 있는 만큼 휴식 시간과 회의에서 나눌 이야기나 대표를 정할 시간을 드리고자 했고, 또 저희도 부대의 업무 때문에 바빠서...."

"그러니까, 다른 업무들 때문에 우리는 뒷전이셨다?"

남자의 태도는,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만했다.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지.'

자기 세금이 군인의 월급을 내는 데 쓰인다는 이유로, 자신을 군인들의 상전쯤으로 생각하는 경우.

눈앞의 남자 또한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면 무슨!"

"박권창 씨!"

박권창이라 불린 사내는 트집 잡을 거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따지려 들었으나.

또 다른 생존자의 목소리가 그런 그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우리에게 처음으로 대화를 요청했던, 젊은 여자였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주신 분들이에요. 불만은 알겠지만, 지금은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흥, 알겠소."

박권창이라는 사내는, 좋게 말하면 드센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지랄 맞은 성격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남이 자신의 말을 중간에 끊었음에도, 약간의 불만은 보일지언정 수긍하는 모습.

그 모습을 통해, 생존자들의 진짜 대표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생긴 것만 봤을 땐, 솔직히 상상도 못 했는데.'

기껏해야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저 여자가.

생존자 그룹의 리더다.

"죄송해요. 권창 씨는 성격이 좀 불같은 분이라."

"아닙니다. 저희 측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인걸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나쁜 의도가 있던 것은 아니고...."

"이해했어요. 이런 상황인걸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저는 이상아라고 해요.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작은 양복점에서 일했죠."

다행히 박권창과는 달리, 대표로 보이는 이상아 씨는 어느 정도 부드러운 태도였다.

"그러면, 저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만... 그전에, 저희 부대에 도착하게 된 경위를 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경위요?"

"예.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저희 부대는 상당히 외진 곳에 있으니까요. 이런 곳까지 도망쳐 오시게 된 경위를 알아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아, 네."

저건 딱히 거짓말이 아니다.

우리 부대는 깊은 산골에 위치해 있다.

산을 내려가 도시로 가는 데에도 차를 타고 1시간은 걸리는, 제1급 격오지 부대.

사회와 지나치게 격리된 탓에 병사들에게 위로차 추가적인 휴가가 지급될 정도로 외진 곳에 있고, 접근성도 떨어진다.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것인지는 알아 둘 필요가 있겠지.

"일단...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지금부터 약 2주 전. 갑자기 괴물들이 나타났어요. 동시에 인터넷이나 TV, 전화 같은 연락 수단들이 모두 단절됐고요."

"그렇죠."

괴물이 출현했을 당시의 상황은 우리하고 비슷했던 모양이다.

"다양한 괴물들한테 습격당하고, 심지어 괴물에게 습격당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 좀비가 되어 일어나다 보니... 엄청난 혼란이 일었죠."

음, 우리도 참 혼란이 컸었지.

.

.

.

어?

'분명 비슷한데, 뭔가 다른 단어가 들려왔는데?'

좀비.

좀비라고 하지 않았나?

"좀비요?"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선임병이 무심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야 인마!'

당황스러운 건 알지만.

그렇게 놀라는 티를 내면 안 되지...!

"네. 좀비가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민재 형이 급하게나마 둘러대며 수습하려고 나섰다.

"아, 아닙니다. 저희 부대에서는 좀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거든요."

"으음.... 그래도, 어떻게 봐도 좀비처럼 생겼는데.... 그러면 여기선 어떻게 부르죠?"

"...워커라고 부릅니다."

그야, 좀비를 그렇게 부르는 드라마 같은 게 있기는 했지.

"아하. 드라마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은가 봐요. 저도 그 드라마 재밌게 봤어요. 그럼 저희도 워커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요?"

"아뇨. 생각해 보니, 좀비라는 단어가 더 정확한 것 같네요. 저희가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네, 어쨌든, 그렇게 돼서-"

다소 어색한 변명이긴 했지만, 다행히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놀라서 입을 열었던 선임병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우리 부대와 사정이 비슷한 것 같았지만. 조금, 아니 많이 달라.'

이상아 씨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 내용은 요약하자면, 괴물들과 좀비들을 피해 열심히 도망치다 만난 다른 생존자들과 합류하며 지금 정도의 규모가 되었고.

안전한 장소를 찾아 헤매던 도중, 생존자 중 한 명이 '그러고 보니 여기서 가까운 산에 군부대가 있다.'고 알려 줬다고.

"그게 나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구면이었다.

분명 다른 사람이 부르길.

'박씨 할아버지?'

생존자들을 생활관으로 안내했을 때.

젊은 병사들이 저층을 쓰고 생존자들은 3층으로 몰아넣냐고 불만을 말했던, 깐깐해 보이던 할아버지.

"건설 일을 하는 친구가 있어서 말이지. 자기가 군부대에 일을 하러 갔는데, 그 부대가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곳이었다는 얘기를 하더군. 내가 들은 건 이 산의 깊숙한 곳에 군부대가 있다는 수준이었지만 말이야."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박씨 할아버지가 말한 그 부대를 찾아가 보자는 얘기가 나왔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크게 이상한 것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 부대원들의 입장에서는,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내용이 있었다.

'일단은 좀비.'

우리 부대의 본래 정원은 약 300인.

그중 간부, 휴가 나간 병사들을 제외하면 부대에 상주하는 병사가 200명 정도 된다.

괴물들이 습격해 온 날 그 절반이 괴물들에 의해 사망했지만.

그중에, 좀비가 된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부대원들이 이 사태를 아포칼립스라고 칭한 적은 있어도, 좀비 아포칼립스라고 칭한 적은 없었어.'

부대에서는 좀비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당연하다.

지상에선 사람들이 죽으면 좀비가 되어 일어났다고 하는데, 우리 부대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

의아한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몬스터.'

우리 부대를 습격한 것은 리자드들의 무리뿐.

하지만 이상아 씨의 설명에 의하면, 산 아래의 도시에는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나타나 날뛰었다고 했다.

그나마 좀비들은 숫자가 문제지, 건장한 남성이라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어지간한 괴물들은 총이라도 없으면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고.

이 부분은 그래도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했다.

'우리가 영역을 차지하기 전까지, 이 산맥은 리자드들의 영역이었으니까.'

리자드들 역시, 총이 없으면 인간 따위는 가볍게 찢어발기는 괴물들.

리자드들의 무리가 산맥을 점거하면서 다른 괴물들을 쫓아낸 게 아닐까 싶다.

약점을 모르는 상태라면, 그 단단한 비늘을 뚫을 방법이 없는 강력한 몬스터인 셈이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례지만, 지난번에 보니 무장이라고는 총이나, 하다못해 칼 같은 무기도 보이지 않고 기껏해야 쇠 파이프 정도였던 것 같은데."

"네."

"그 괴물과 좀비들 사이는 어떻게 뚫은 겁니까?"

"그 질문을 하실 것 같았어요."

이상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잠깐 숨을 크게 들이쉰 후,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는 초능력을 각성했답니다."

나름 각오를 하고 입을 연 것 같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예상하고 있던 말이다.

역시, 각성자가 없을 수 없지.

"저희 25명 중에 각성자는 저밖에 없지만요."

"네?"

각성자를 숨기려는 우리가 나쁜 놈인가, 싶을 정도로.

시원하게 자신들의 전력을 유포하는 여인.

"그 초능력 덕분에, 좀비들을 뚫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죠."

"...."

"역시, 쉽게 믿을 수는 없겠죠."

너무도 쉽게 자신들의 전력을 알려 주는 모습에 우리가 약간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그녀는 우리가 초능력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품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그녀가 양손에 꺼내든 물건은, 가위였다.

한 손으로 들 만한 사이즈긴 하지만, 평범한 가위에 비하면 꽤 큰 가위 두 개.

길이가 40센티는 되지 않을까?

"재단용 가위예요. 커튼 같은 걸 수선할 때 쓰는 거라, 일반적인 가위보다는 꽤 크죠."

"아, 그렇군요."

"그리고, 흠. 실례 좀 할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우리가 앉아 있던 나무 책상에 가위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싹둑.

가볍게 원목 책상을 잘라 버리는 가위.

상당히 초현실적인 광경이었지만.

'...상황이 뭔가 익숙한데.'

내가 식칼로 나무 책상을 썰어 버리며, 각성의 존재를 입증했을 때.

그때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언제나처럼 양복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암만 봐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인간들이 가게를 습격했어요.... 이 가위로 좀비의 머리를 찔렀는데, 재봉사로 각성했다는 문구가 뜨면서 여러 능력을 얻었어요. 덕분에 가위질 한 번으로 좀비의 목을 잘라 버릴 수 있게 됐죠."

"대단하군요.... 그런 능력을 가진 건 상아 씨뿐인 겁니까?"

생존자들이 각성자에 대해 솔직하게 밝히긴 했지만.

민재 형은 일단 우리 측의 각성에 대해선 숨기는 태도를 유지하려는 듯했다.

"네. 저는 좀비를 죽이자마자 각성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더라구요. 다른 생존자 그룹과 마주쳤을 때 만난 각성자도 좀비를 죽이고 각성했다곤 했는데, 정확한 조건이 뭔지는 모르겠어요."

'좀비는 리자드와 다른 건가?'

리자드는, 가까이에서 죽인다는 조건만 충족하면 100%의 확률로 각성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좀비는 죽여도 각성에 성공하는 경우가 있고, 못 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

그 탓에 25명이나 되는 생존자 그룹에서 각성자는 이상아 씨뿐이고, 나머지는 이상아 씨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했다고 한다.

그녀가 생존자 그룹의 리더가 된 이유다.

'하지만....'

자신이 그룹의 유일한 각성자라는 것을 거리낌 없이 밝힌 이상아.

그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뻗은 그녀.

딱히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태준이 녀석이 남긴 말은, 이 안에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각성자가 아닌 이들이 큰 위해를 끼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무엇보다 나에게 직업을 물었던 남자.

그 후에도 몇몇 병사들에게 비슷하게 직업에 대해 물었다고 했으니, 확신할 수 있다.

그 질문은 각성 여부를 다분히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인가?

'숨기고 있다.'

이 안에.

정체를 숨긴 각성자들이, 섞여 있다.

17화 위협 (1)

"저희에게 알려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그 초능력 각성에 관한 것인가 보군요."

"맞아요. 정확한 기준은 모르겠지만... 저희끼리 추측한 바에 따르면, 좀비를 죽이다 보면 랜덤으로 각성이 가능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그 정보를 알려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상아 씨는 그 외에도, 자신은 괴물과도 전투가 가능하니 문제가 생긴다면 언제든 불러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생존자들을 보호하며 이곳까지 안전하게 안내한 사람답다고 할까.

'저런 사람이 나쁜 짓을 꾸미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렇다면 우리 부대를 위협하고 있는 존재는, 다른 곳에 있다는 뜻이다.

상아 씨가 괴물들에게서 생존자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싸우는 동안.

그 뒤에 숨어서 정체를 숨기고 있었을 이들이.

"그럼 그 외에는... 혹시 저희에게 요청하실 건 없으십니까? 일단 최소한의 편의는 모두 맞춰 드렸습니다만...."

"그러면 혹시 남는 의류를 좀 받을 수 있을까요?"

"그거라면 지금은 부대에 없는 병사들의 활동복... 아니, 추리닝이 남아 있습니다. 필요한 만큼 챙길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그 외에는 또 없습니까?"

"당장은 없네요. 반대로, 저희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그렇다면 생활관의 청소 작업이나, 식당의 설거지 보조 작업을 좀 도와주실 수 있다면...."

"그러면 저희 쪽에서 몇 명씩을...."

민재 형은 그 외에도 불편한 점이 없는지, 혹시 특이 사항을 가진 인원은 있는지 등.

여러 가지 세부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그 와중에도 마냥 우리가 베풀기만 하는 것이 아닌, 민간인도 가능한 부분에 대해선 협력을 요청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진행하기까지.

이번 대화의 대표를 맡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대화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돌려 생존자들의 대표들을 바라봤다.

중간중간 민재 형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고, 생활관의 청소 일정 등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이들.

'숨은 각성자가 있을 거야. 이건 거의 확실해.'

사실, 그게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도 아주 어렵진 않을 것이다.

이미 내게 꼬리를 밟힌 자가 있으니까.

'나에게 직업을 물어봤던 사내.'

그는 그 후에도 몇몇 병사들에게 직업에 대해 물었다고 하니.

정말 남의 직업이 너무 궁금한 게 아니고서야, 각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정중하게 물어봐야겠네."

* * *

생존자들과 회의를 마친 후.

다음 날부터 생긴 변화가 한 가지 있었다.

"설거지 지원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아, 어서 오십쇼."

취사반의 후임들이 죽고, 나 혼자 식당을 담당하게 된 이후 기본적인 요리부터 설거지, 청소까지 모든 식당 업무는 나 혼자 담당해야만 했다.

'하다못해 설거지만 해도 원래는 병사들이 도와줬는데, 괴물들이 나타나는 시국이니 그럴 바에 정찰조로 돌렸고.'

다행히 각성하며 얻은 '최하급 요리 숙련'은, 최하급이란 이름에 맞지 않게 어마어마한 성능을 보여 줬다.

덕분에 요리와 관련된 작업이라면 엄청난 속도로, 큰 힘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게 된 것.

거기에 부대의 인원수가 기존의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도 있어서, 어떻게든 혼자서도 식당이 굴러가기는 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식사 준비가 업무의 전부라면 모를까.

각성자들의 버프용 음식 만들기.

부대의 온갖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 마련 회의 참가까지.

기본적으로 취사병은 아침 일찍 일어나 조리를 시작하는 만큼 반대급부로 일과 시간에 휴식 시간이 주어지는데, 최근에는 휴식 시간에도 일을 해야 했다.

'지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그러던 와중에, 생존자들과의 대화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생존자들이 민간인도 가능한 부대 업무의 일부분을 도와주기로 결정됐다.

그것이 식당의 경우엔, 설거지와 청소 지원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

'덕분에 온전히 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지.'

즉, 지금의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개꿀....'

완전 편해졌다는 것.

"설거지 다 끝났어요!"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처음으로 설거지 지원을 온 것은,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두 여학생이었다.

일하면서 심심풀이로 물어본 결과, 근처 고등학교에 다니던 자매라고.

다소 의아했던 것은, 여동생 쪽은 꽤 의젓하고 싹싹한 반면.

언니 쪽은 묘하게 힘이 없고 주눅 든 모습이었다는 점.

'뭔가 사정이 있겠지.'

세상이 이 꼴이 되어 버린 상황.

온갖 싫은 일들을 겪었을 게 뻔하다.

그녀 말고도, 생존자들 사이에선 저렇게 유독 기운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흠.... 그렇다면.'

덕분에 일이 편해지기도 했으니, 보답을 해 주도록 하자.

설거지를 끝내고 복귀하려던 자매를 불러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이거, 제가 만든 간식인데. 하나씩 먹고 가요."

"네? 먹어도 되는 거예요?"

"설거지랑 청소를 도와주셨잖아요? 그 보답입니다."

"와아...!"

내게는 딱히 새로운 일도 아니다.

부대가 멀쩡할 때도, 식당 업무에 지원 나온 병사들에겐 수고했다며 아이스크림 같은 부식을 하나씩 챙겨 주곤 했으니까.

물론 부식 보급이 끊긴 지금은 그때 같은 기성품을 줄 수는 없지만.

'부대의 물은 원래부터 지하수를 사용한 만큼 아직도 잘 나오고. 아직은 발전기가 잘 돌아가고 있는 만큼, 얼음도 많아. 기성 제품인 아이스크림은 없지만....'

아이스크림이 없다?

그럼 만들면 되는 거 아냐?

부대에 남아 있는 재료들만으로 만들 수 있는, 간단한 간식이 몇 개 있었다.

[행복한 감정의 미숫가루 아이스크림]

부대 내에 그나마 많이 남아 있는 재료인 설탕, 물엿과 후임들이 가져왔던 재료인 미숫가루를 이용해 만든 아이스크림.

미숫가루 아이스크림이라니 그게 뭐냐, 싶은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이게 또 의외로.

"맛있다!"

"응.... 그러네."

맛있단 말이지.

거기에, 주방장의 특별 소스도 약간이나마 첨가되었다.

"어? 언니 지금 웃은 거야?"

"...내가?"

"언니.... 엄마, 아빠가 죽은 뒤로 한 번도 웃은 적 없었는데...."

특별 소스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동생 쪽은 그렇게 말하더니, 씩씩한 태도는 어디 갔냐는 듯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부모님을 잃은 건가.

밝은 척 행동하고 있지만, 동생 쪽도 여러모로 힘들었겠지.

"잘 먹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두 자매와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대화가 오간 후.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슥슥 닦아낸 여동생은 그렇게 말하더니, 해맑게 웃으며 제 언니의 손을 잡고 생활관으로 사라졌다.

식당을 나서기 전 해맑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

조금이지만 마음이 훈훈해졌다.

"...각성하고 얻은 능력들은 버프라든가, 칼질이라든가. 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전투에서 굉장히 유용하게 쓰이는, 강력한 스킬과 특성들.

아마 이 '게임'으로 변한 세상에서, '요리사'라는 직업은 전투에 유용한 버프 계열 직업에 속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능력은 역시...."

사람들의 마음에 안정을 줄 수 있는 힘.

[주방장의 특별 소스]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은 육체의 상처만 입은 게 아니다.

육체보다 더욱 큰 상처가 남은 곳은, 다름 아닌 마음.

우리 부대만 해도, 바로 전날까지 같이 생활하던 부대의 선임, 후임, 동기들을 잃었다.

부대원들만 해도 그 정도일진대, 사랑하는 가족을 눈앞에서 잃었을지도 모르는 생존자들은 어떨는지.

[주방장의 특별 소스]로 줄 수 있는 감정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광일이 녀석에게 '용기'의 요리를 먹였을 때.

과도한 용기에 이성을 잃은 녀석은 광전사처럼 날뛰었지만, 다음 날이 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온화한 성격으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그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가 의미가 없지는 않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광일이는 더 이상 공포에 굴복하지 않았으니까.

'한 번 용기를 가지고 괴물과 싸운 경험이, 마음의 벽을 부숴 준 거야.'

스킬 자체로 인한 마음의 변화는 일시적이지만, 그 마음의 변화로 인한 사건은 효과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저 자매들 역시, 부모님을 잃은 충격으로 마음에 상처가 났겠지만.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얻은 행복함의 기억이 그 충격을 조금이나마 무마시켜 주겠지.

* * *

그 후로도, 부대의 업무는 별다른 변화 없이 진행됐다.

여전히 한두 마리씩 부대에 쳐들어오는 괴물들은, 사수 각성자와 각성하지 않은 부대원들의 총으로 처리하고.

각성할 차례가 된 부대원들은 생존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죽은 괴물의 시체를 치우러 접근한 척하며 각성을 진행한다.

"내가 끼어들 일이 없네."

덕분에, 나는 계속해서 식당 업무에만 집중했다.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은 식재료를 어떻게든 나누고 쪼개어 식사를 배식하고, 각성한 부대원이 먹을 만한 버프 요리를 고안한다.

별다른 일 없는 그런 일상.

그러던 와중에, 특이한 일이 생겼다.

"너, 취사병아."

"예?"

"너 이름이 뭐냐."

그렇게 물은 것은, 다름 아닌 박씨 할아버지.

우리에게 계속해서 깐깐하게 굴던 그 노인이, 설거지 지원을 와서는 하라는 설거지는 안 하고 내게 말을 걸었다.

"병장, 신영준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알려 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니, 별생각 없이 대답해 줬으나....

"흥.... 그럴 것 같더라니."

"그럴 것 같았다니, 뭐가 말입니까?"

"네가 쓰고 있는 그 칼, 네 거 아니지?"

"...!"

다음에 이어진 말은,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긴 사시미칼.

식당을 덮쳤던 괴물들을 사냥하기 위해 처음으로 손에 잡았고.

이후로도 묘하게 손에 착 감기는 탓에, 요리에도 사용하고 있지만....

'내 칼은 아니지.'

지금은 죽은, 내 맞후임.

일도 잘하고 성격도 무난해 '황준산 엄마'라고 불리던, 이준혁 상병의 유품이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몰라서 묻는 거냐? 한자로 음각이 돼 있잖냐. 빛날 혁? 좋은 의미긴 하지만, 칼에 그냥 붙여 놓을 이름도 아니지. 아마 그 칼의 원래 주인 놈 이름인가 보지?"

손잡이 부근의 날을 보니, 확실히 한자어로 음각이 되어 있기는 했다.

이 칼은 일식 요리를 공부하던 준혁이 녀석이 스승님에게 선물로 받은, 상당히 비싼 칼이라고 했다.

나름대로 제대로 된 일식당에서 공부했다던 준혁이.

그 스승이라는 분이, 제자에게 줄 칼에 애정을 담아 그 이름을 음각해 준 것이리라.

이유를 듣고 보면 눈치챌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엄청난 관찰력이었다.

"...대단하시군요. 맞습니다."

"쯧, 그런 좋은 칼을 쓰는 녀석이 관리를 그따구로 하고 있으니. 누구라도 이상하다 싶어서 유심히 보게 될 거다. 누구 거냐?"

관리를 그따위로 했다니.

나름 열심히 날도 갈아 주면서 애지중지했는데....

"제 후임 녀석이 쓰던 칼입니다."

"과거형이구만?"

"네. 괴물들에게 부대를 습격당한 날...."

"흥. 뭐, 그렇지 않을까 싶긴 했다만."

그리 말하곤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한 노인.

'뭐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 줘 봐."

"예?"

"그 칼, 내놓으라고."

갑작스러운 강탈 선언.

'이 할아버지가...!'

아무리 좋은 칼이라도 그렇지, 남의 후임이 남긴 물건에 손을 대려고...!

깐깐하게 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우리 부대를 위협하려는 적이 이 할아버지였나?

"허. 이놈 눈빛 봐라. 훔쳐 가려는 것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놔, 이 녀석아."

그러더니 강압적으로 칼을 뺏어 드는 노인.

나는 혹시라도 가지고 튀려고 하는 건 아닐까 경계하며 노려보고 있는데, 노인은 알 바냐는 듯 칼을 들고 주방 구석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꺼내 드는 노인.

"숫돌...."

3개의 네모난 돌.

식당에서 쓰던 칼갈이용 숫돌이었다.

"나름대로 관리를 하겠답시고 손질을 하긴 한 것 같은데,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녀석이 손질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법이지."

그리 말하며, 숫돌들과 칼을 물에 담그는 노인.

그러고는 숫돌의 수평이 맞는지.

칼의 상태는 어떤지.

이런저런 확인을 거친 후.

샤각, 샤각.

숫돌에 비스듬히 칼날을 가져다 대고, 날을 갈기 시작했다.

나 역시, 숫돌을 꺼낸 시점에서 노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칼 갈아 주려는 거면 그렇다고 말을 하시지.'

괜히 무안해진 나는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 저도 나름 취사병이라. 칼 가는 법은 안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른이 일하는데 말 시키는 거 아니다."

"…."

"그리고 너 칼 가는 법 모르는 게 맞다."

"...."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칼갈이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좋은 칼이야."

무려 한 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칼을 내게 돌려주는 노인.

"단단하고, 균형도 잘 잡혔어. 덕분에 손질에도 시간이 걸리고, 힘든 편이지만. 이런 칼은 한 번만 잘 관리해 놔도 오랫동안 날카로움을 유지하는 법이지."

빛이 날 정도로 날카롭게 갈린 칼.

슬쩍 들어보니, 날에서는 차가운 예기가 흐르고, 옆으로 돌려 보니 칼의 면에 내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안 그래도 좋은 칼인데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을 줄이야.'

뭐라 할 말이 없다.

이 결과물을 보고 나면, 내 칼갈이가 '개못함' 수준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감사합니다."

"흥. 현지랑 혜지한테, 아이스크림 만들어 줬다며?"

"네?"

현지, 혜지?

그게 누구지.

"언니가 웃는 모습은 영영 못 보게 될 줄 알았다고, 혜지가 그러더구나. 얼마 만에 먹어 본 달달한 음식인지 모르겠다고도. 뭐 얼마나 맛있었길래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만. 이건 그 값이라고 생각해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현지와 혜지.

그것이 얼마 전에 설거지 지원을 왔던 자매의 이름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할아버지, 일단 생존자들 대표 중 한 명이었지.'

생존자들은 호실별로 대표를 정했었다.

이 할아버지가 대표를 맞았던 호실에, 두 자매가 포함되어 있었던 거겠지.

"...칼갈이 아저씨한테 아이스크림 하나 주고 값이라고 하면 길길이 화내실 텐데. 이게 값이 맞나 모르겠습니다."

"큭큭. 그럼 아이스크림은 선불이라 쳐라. 나머지는 천천히 갚고."

"아이스크림 더 있는데, 할아버지도 드시죠?"

"나는 이 시려서 못 먹는다. 대신...."

힘이 많이 들었는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말하는 박씨 할아버지.

"앞으로도 사람들을 위한 요리를 해. 잔금은 그걸로 퉁치는 걸로 하고."

그렇게 말하고는, 생활관으로 돌아가시는 할아버지.

'설거지는 안 해 놓고 가셨지만....'

사시미칼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날카롭다 못해 반짝거리기까지 하는 칼을 보면,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정도.

'사람을 위한 요리를 하라고.'

[주방장의 특별 소스]는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힘.

그 힘은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치료하는 데 쓰일 수 있다.

내 힘을 악용하지 말고, 이로운 쪽으로 사용해달라는 얘기겠지.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박씨 할아버지가 말한 잔금 지불은, 조금은 미뤄야 할 것 같다.

'내가 지금부터 할 요리는, 그다지 좋은 요리는 아닐 테니까.'

그날 저녁.

설거지 지원조가 생긴 후.

내가 가장 기다려 왔던 사내가, 식당을 방문했다.

"...오랜만입니다."

"하하, 그러게요. 설거지는 어디서 하면 됩니까?"

아무런 의심도 없이 열심히 설거지를 하는 사내에게.

나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간식을 건넸다.

[초보 요리사의 심혈을 기울인 솔직한 마음의 미숫가루 아이스크림]

"간식 하나 만들어 놨는데, 드시고 가시죠."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달콤한 자백제를.

18화 위협 (2)

우리 부대를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

그것은 확실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

며칠 전.

이 일에 대해, 민재 형과 상의하기도 했다.

"가장 큰 단서는, 영준이 네게 말을 걸었던 그 남자인데. 일단 몇 호실인지는 파악했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도."

해당 호실은 다섯 명의 남자가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은근슬쩍 생존자들과 나눠 가며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좀비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들이라는 듯했다.

"하지만 친하다고 전부 공범이라고 볼 수도 없지."

"그래. 반대로 그 다섯 명 모두가 그 위협일 수도 있지만."

용의선상이 좁혀지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냅다 가서 '너희들이 우리한테 위협이 될지도 모르니, 잠깐 따라와 줘야겠다.' 하고 연행해 갈 수도 없는 노릇.

다른 생존자들이 반발할 것은 물론이고, 그들 중 몇 명이 그 위협에 해당할지도 모르는 일인 만큼 애꿎은 피해자만 늘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애초에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식의 위협이 될지도 아직은 모르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그 위협이 실현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어."

우리 부대에 대한 위협이 실현된 뒤에, 뒤늦게 범인들을 잡아 봐야 늦는다.

어떤 형태의 위협인지 모르는 만큼, 생각보다 큰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일.

일어나지 않은 지금 해결해야만 한다.

"...방법이 없지는 않아."

범인을 찾을 방법이, 없지는 않다.

지금까지 숱하게 사용한 방법이 있으니까.

"앞으로 생존자들이 부대의 업무를 돕게 한다고 했지?"

"그래. 생활관이나 식당의 청소, 그런 민간인도 가능한 작업에 한정되긴 하겠지만."

"그럼, 내가 말한 그 남자는 식당 쪽에 배정되도록 해 줘."

부탁 자체는, 위협을 찾아내는 일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내용이었다.

보통이라면 이쯤에서 '어떤 방법을 쓰려는 거냐'는 질문이 나오겠지만.

"...하아. 네가 말하는, '설득'을 할 셈이냐."

"음. 그렇지 뭐."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이민재 병장.

괴물이 무서워서 못 움직이겠다고 버티던 광일이가, 괴물의 약점을 물어뜯게 만들고.

불안감에 떠는 병사들을 모조리 각성의 장으로 보내 버린, 그 '설득'.

'...이 정도로 대놓고 썼으니. 알아채도 이상할 건 없지.'

그 모든 설득을 직접 지켜본 민재 형은, 이미 내게 모종의 특별한 수단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힘이 필요한 상황인 건 확실하니까 별말은 안 하마. 그래도, 너무 그 능력에 의존하는 것도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알고 있어. 나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고."

[주방장의 특별 소스]

음식을 먹은 대상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힘.

확실히 강력한 능력이긴 하지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아무도 내 요리를 먹으려 하지 않겠지.'

민재 형이 이미 어렴풋이 눈치챈 것처럼.

이 능력은, 남발하다 보면 그 정체를 들킬 확률도 높아진다.

'필요할 때 아껴서도 안 되겠지만, 사용할 땐 들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

[초보 요리사의 심혈을 기울인 솔직한 마음의 미숫가루 아이스크림]

열심히 만든 이 요리 역시 마찬가지.

중요한 것은 들키지 않는 것이다.

"냅다 그 남자를 데려와서, 입에 강제로 쑤셔 넣어도 되기야 하겠지만."

잘 먹겠습니다, 하고 내 요리를 먹은 사내가 갑자기 '지나치게 솔직한' 상태가 돼 버린다?

그 이변을 본 모두가, 이변의 직전에 입에 들어간 음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생존자들은 물론, 병사들까지 내 음식을 꺼림칙하게 여기게 되겠지.

그래서 준비한 방법이 바로.

'설거지 지원.'

식당 일을 도와주러 오는 사람들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간식을 건네준다.

부대가 정상이었을 때도 해 왔던 일이고, 음식을 건네주는 이유로도 자연스럽다.

그렇게 몇 번씩 나눠 주다 보면, 소문도 날 것이다.

'식당 일을 도와주면 간식을 챙겨 주더라.'

그렇게만 되면 충분하다.

'남들도 다 먹은 요리인 만큼, 이상이 생긴다 해도 요리를 의심하진 않을 테니까.'

거기에, 혹시라도 '위협'이 되는 적들이 우리 부대원들을 경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남들 다 먹은 간식을 주겠다는데 그것까지 경계하지는 않을 것이다.

* * *

"간식 하나 만들어 놨는데, 드시고 가시죠."

"아, 이게 그 유명한 아이스크림이군요."

바로, 이 남자처럼.

"소문이 다 났습니까?"

"하하, 생활관 청소 지원으로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를 겁니다. 식당에 지원 갔다 온 사람들이 전부 싱글벙글 웃으면서 돌아오니까요."

생활관 쪽 사람들이 부러워한다고?

"아.... 이런, 생활관 지원으로 가신 분들한테 미안하게 됐네요. 그쪽에도 뭐라도 해 드려야 했는데...."

"안 그러셔도 될 겁니다. 어차피 교대로 로테이션이 도니까요. 그쪽 사람들도 식당 지원 쪽으로 가는 날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건 정말 모르고 있었는데.

다행히 생활관 청소 쪽으로 빠진 사람들의 불만이 크진 않나 보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입에 담는 사내.

"으음!"

상당히 입맛에 잘 맞았는지.

'으음,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숟가락을 놀리는 사내.

그야 엄청 열심히 만들었으니, 맛있기도 하겠지.

특히 당신을 위한 메뉴는 특제라서, 재료를 아끼지 않았거든.

"잘 먹었습니다! 이야, 진짜 맛있네요! 이렇게 달달한 음식은 얼마 만인지."

그렇게 금방 그릇을 비운 사내.

그릇을 반납하면서도 웃음이 가시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럼 이제....'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하하, 제가 더 고맙죠."

시작해 볼까.

"그런데 혹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음? 저한테 궁금하신 게 있습니까? 뭐든지 물어보십쇼."

달달한 것을 먹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친절하기도 하다.

그 친절함에 힘입어, 나는 거리낌 없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번에 저한테 직업을 물어보셨잖습니까."

"예?"

"그거. 왜 물어본 겁니까?"

"...."

만약에 이 남자가 그 '위협'이 아니고, 그 질문도 그저 가벼운 대화를 위한 질문이었다면.

별생각 없었다는 대답이 나오겠지.

그러면 그 대답만 듣고 보내 주면 그만이다.

그럴 경우 이 남자는 평범한 생존자 중 한 명이었을 뿐.

당사자도 그냥 별거 아닌 질문이었네, 하고 넘어가고 말 테지.

하지만....

"아, 이 부대에 각성자가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총이 있는 군부대라면 각성에 성공한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그런 경우엔 작전을 달리해야 했겠죠. 아니라는 말을 들어서 참 안...심...했는, 데?"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주다가.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는 듯 말꼬리를 늘이는 사내.

"...."

"뭐, 그럴 것 같았습니다."

언제나 하하, 하고 웃으며.

밝은 척, 친근한 척 접근하던 사내.

"...이런."

그의 표정이, 저렇게까지 일그러질 수 있을 줄이야.

놀라울 정도였다.

"이건 호기심에 묻는 건데, 만약 저희 부대에 각성자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나왔을 겁니까?"

"...일단 규모를 확인했을 겁니다. 각성자들이 많은 부대라면 전면전에선 승산이 없으니, 조용히 잠입한 상태에서 기회를 노렸겠죠. 젠장, 나한테 무슨 짓을...!"

"음, 우리의 각성자 전력이 강하단 걸 확인했다면 더 철저하게 숨었을 거란 뜻이군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탓에, 경계가 좀 허술해지신 거고?"

각성자들은 종류도 많고,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 남자가, 우리가 각성자를 양산해 내고 있는 부대라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가볍게 내가 건네는 음식을 먹지도 않았겠지.

각성자들이 다양한 능력을 지닌 만큼, 어떤 부분에서도 경계를 가볍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잡아내는 데에 훨씬 더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었을 테지.

'능력을 숨기는 편이 좋다는 건 이런 거였나.'

무언가 위협이 있다는 걸 알아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다면 잡아낼 방법이 없을 테니.

"제기랄...!"

"어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급하게 몸을 돌려 도망치려는 사내.

하지만....

"잠시만요, 물어볼 게 있습니다."

"...."

아무런 강압적인 태도도 섞이지 않은.

가벼운 '물어볼 게 있다.'라는 말.

그 말에, 당장에라도 뒤돌아 도망치려던 사내의 발걸음이 우뚝, 하고 멈췄다.

그러고는.

끼기긱.

하며 돌아가는 고개.

"무엇이든... 물어보시죠."

그렇게 나와 얼굴이 마주친 그는, 식은땀이 뻘뻘 흐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흠, 효과 제대로네.'

[주방장의 특별 소스]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그중 하나는, 요리 자체의 효과가 극대화될수록 특별 소스의 능력도 극대화된다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준 아이스크림은 미숫가루와 설탕, 물엿 정도로 만들었지만.

[초보 요리사의 심혈을 기울인 솔직한 마음의 미숫가루 아이스크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건 부대에도 얼마 안 남은 연유까지 써 가며, 수제작이나마 안에 공기가 들어가 부드러운 맛을 낼 수 있도록 어마어마한 공을 들인 작품이다.

"이성적으로는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시겠죠?"

"...예."

"그것도 뭐,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는 지금, 세상 그 누구보다 '솔직한' 성격이 되었다.

물어볼 게 있다는 말만 들어도 대답하기 위해 몸이 절로 움직일 정도로.

'지나친 용기가 광일이를 광전사로 만든 것과 비슷한 현상.'

차이가 있다면.

의도하지 않았던 광일이의 경우와 달리.

이번의 경우엔 철저하게 내 의도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러면 계속 묻겠습니다만. 동료는 있습니까? 그중 각성자 숫자랑 대장이라 할 만한 사람은?"

"같은 호실을 쓰는 다섯 명이, 모두 동료고, 각성자입니다. 대장은, 호실의 대표를 맡았던 박권창 형님...."

"와, 혹시나 했는데 다섯 명 다?"

대장 역할을 맡았다는 박권창은, 생존자들과 대화의 장에서 왜 김 중위가 나오지 않았냐 따지려 들었던 그 중년 사내.

이 녀석들, 생존자 그룹 내에서도 나름대로 입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다섯 명씩이나 모여서, 뭘 하려고 한 겁니까?"

"...이 부대를 점거하려고 했습니다."

뭐 그런 게 아닐까 싶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방법.

총으로 무장한 군인이 100명이 넘는 이 부대를, 어떻게 점거한다는 것인지.

"우선, 약간의 시간을 들여서 각성자나, 다른 위협이 없는지 확인...."

이 부분은 걱정 없다.

부대원들에게 각성자로서의 모습을 들키지 말라고 당부해 놨으니까.

혹시 나중에라도 각성자가 나타났다면, 위협이라고 판단한 이 녀석들이 더 은밀하게 활동했을 수도 있었겠지.

"그리고,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이 부대에는 각성자나, 그에 준하는 위협은 없다고 판단. 작전을 결행한다."

계속해서 자신들의 작전을 누설하는 녀석

그런데.

'...응?'

뭔가 이상한데.

"'판단한 후에 결행한다.'가 아니라, '판단. 결행한다'라고 하신 겁니까?"

"...예. 각성자는 없다고 판단됐으니, 작전 결행은 오늘 저녁."

그 말을 듣고, 식당의 창문으로 바깥을 보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사 후 정리하는 시간.

해가 지고, 어두워진 부대의 풍경이 보였다.

저녁.

...지금 아닌가?

"제가 돌아가는 대로, 작전이 시행될 겁니다."

"미친."

"그리고 저도."

그러더니, 긴장된 표정은 어디 갔냐는 듯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 사내.

"아니, 나도. 약간은 틀어지긴 했지만, 돌아가서 작전을 시행할 셈이었고."

그 순간.

화르르르르륵.

"...불?"

사내의 몸에서,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스스로에게 방화라도 한 건가 했지만.

"크큭...."

사내는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는 듯, 오히려 비열한 웃음을 내보이고 있었다.

"무슨 짓을 당한 건지 몰라 당황했지만, 생각해 보니 당황할 필요도 없었군."

이제는 친근한 척 굴 필요도 없다는 걸까.

말투가 상당히 건방져진 녀석.

"당황할 필요가 없다? 이유는?"

"정황상, 이 부대에도 각성자가 꽤 많은 것 같긴 한데... 그래 봐야 눈앞에 있는 건, 기껏해야 요리나 할 줄 아는 취사병 한 명 아닌가?"

"음? 뭐. 그렇지?"

질문에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솔직함'은 유지되고 있다.

'솔직하다고 해서 얌전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만화나 영화 같은 거에도 가끔 있잖은가.

상대가 궁금한 건 다 대답해 주면서도, 계속해서 공격하는 설명충 악당.

딱 그런 느낌이다.

활활 타오르던 불길은 점차 사내의 몸 전체를 향해 뻗어 나갔다.

머지않아, 그 모든 불길이 사내의 오른손으로 옮겨 가고.

거대한 불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가볍게 태워 버리면 될 뿐! 정체를 들키게 되는 건 뼈아프지만, 동료들과 합류하고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돼!"

그러더니, '죽어라!' 하고 외치며, 오른손에 모인 거대한 불덩어리를 나를 향해 던지는 녀석.

영화에서나 볼 법한, 화려하고 거대한 불길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거대한 불덩어리가 나를 향해 날아오는 모습은, 확실히 엄청난 위압감이 있었지만.

'흠.'

그 열기가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요리사란 게, 불과는 꽤 친근한 직업이란 말이지.'

왜, 식당 아줌마들은 뜨거운 냄비를 아무렇지 않게 맨손으로 잡지 않던가.

그거랑 비슷한 거다.

쿠우웅.

픽.

"...넌 진짜 안 되겠다."

내 몸에 닿은 그 거대한 불덩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하급 화염 친화]

[요리란, 그 기원에서부터 이미 불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불길 앞에서, 강철의 팬을 잡고 휘두르는 것이야말로 요리사의 숙명!]

"미안한데, 좀 맞자."

"뭐, 뭣...!"

믿고 있었던 불덩이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고 사라지자.

크게 당황한 듯 뒷걸음질 치는 녀석.

스릉.

그러거나 말거나.

사시미칼을 잡아 든 내 [요리사의 눈]에는.

[하급 요리 비결 - '영장류 손질법의 깨달음']

녀석을 '효과적으로 손질하는 법'이 보이고 있었다.

19화 위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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