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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66% APOCCENTROLOG / Chapter 13: 13

บท 13: 13

***

한순간이었다.

파리 곳곳을 메우고 있던 흑마법의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은.

와르르르!

언데드 무리가 순식간에 무너졌고, 악마들 또한 귀속되어 있던 아이템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뭐지?"

순식간에 뚫려버린 길목.

거품처럼 사라져버린 적들 앞에, 모두 당황스러운 눈치였지만······.

덕분에 포로 수용소가 위치한 방돔 광장까지 단번에 다다를 수 있었다.

웅성웅성.

거대한 수용소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들이 차 있었다.

"잘 부탁합니다."

팍스 FC의 힐러들이 총동원되었고, 프리스트 글렌, 그리고 드루이드들이 포로들의 회복을 도왔다.

빠르게 보급된 포션을 마시며, 조금씩 기운을 되찾은 포로들.

그들이 지금까지의 참상을 차분히 증언해주었다.

"각성자들을 위주로 차출해 갔어요. 여기 남은 건 대부분 별다른 각성 능력이 없는 민간인들이고요······."

포로들이 풀썩 고개를 떨궜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벌써 수천 명 이상이 시시포스로 끌려간 상황.

거리는 멀지 않았다.

남쪽으로 채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위치.

파리의 역사가 담긴 고풍스러운 건축물 사이로, 거대한 크기의 시시포스가 떡하니 드리워 있었으니까.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루브르인가."

고대 조각상이 수레에 끌려올 때부터 알아봤지만, 정말 루브르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즉시 놈들의 동태를 살폈다.

프라하의 정찰 능력 각성자인 율리안을 불러왔고, 멀리 뻗어나가는 그의 시야를 공유받았다.

루브르 박물관의 트레이드 마크인 유리 피라미드가 거대한 시시포스의 그늘에 가려진 상황.

그 아래로 향해 들어간 시선에서,

"······저건?"

유독 낯익은 장소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찰칵찰칵.

쉼 없이 맞물리는 톱니바퀴.

타르르르······.

복잡하게 얽힌 파이프관을 미끄럼틀처럼 통과하는 쇠구슬,

틱틱 탁탁 모스부호 같은 박자를 찍어내는 십수 개의 스위치까지.

잔잔한 배기음과 은은한 푸른빛에 둘러싸인 공간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몇 배 이상의 규모였지만, 틀림없었다.

"······상공회의소?"

아공간에 담긴 상공회의소의 지부와 똑같이 생긴 공간이었으니까.

휘이이······.

파리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바르나울의 언데드들이 모조리 쓰러져 있는 상황.

나는 포로들이 한국 또는 엘븐하임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포탈을 놓아주었고, 곧장 성기사들과 기사들을 이끌고 시시포스가 설치된 루브르로 나아갔다.

몇 분이나 걸었을까?

상공회의소의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은,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가 한눈에 들어왔을 즈음······.

-제안할 게 있다.

주위로 몰려든 망령들을 통해, 섬찟한 목소리가 귀를 찌르고 들어왔다.

'저놈인가.'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바르나울의 흑마법사.

목소리의 주인이 상공회의소 유럽 본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바르나울의 가츠라고 한다. 들어와라. 이 안에서는 서로 공격할 수도 없고, 밖으로부터도 공격받을 일이 없으니······."

안전장치로 삼은 상공회의소 본부.

놈이 다차원 최고의 중립 지대로 나를 초대해주었지만,

"잘 들려. 거기서 이야기해."

아쉽게도 우리는 하하호호 차를 나눌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놈도 차마 부정할 수는 없는지,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카멜롯을 포기해라. 어차피 규제 위반에 연루된 이상, 상공회의소가 카멜롯을 내버려 둘 일은 없어. 감찰국은 지옥 끝까지 널 추적할 거다."

시작은 경고였다.

살벌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 놈은,

"지금 시시포스에는 수천 명의 포로가 수용돼 있다. 아직 가동은 하지 않았으니 구하려면 구할 수도 있겠지. 만약 네가 카멜롯만 넘긴다면······."

곧 차분한 목소리로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포로들을 해방하는 건 물론, 말끔히 지구를 떠나주겠다. 이곳 유럽도 텅 빈 땅이 될 테니, 네가 여길 점령해도 되겠지."

놈이 내게 저울을 들이밀었다.

수천 명의 포로, 그리고 충직한 카멜롯의 기사들이 양쪽에 매달린 아슬아슬한 저울.

실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선택지였지만······. 놈은 또 다른 조건을 추가로 덧붙였다.

"다만, 시시포스와 이곳 지하에 있는 조각품들은 가져가겠다. 특별히 인간을 재료로 만든 것들은 남겨두고 가도록 하지. 페르메곤의 악마들이 귀속된 아이템만 챙겨 돌아가겠다."

'······뭐가 이렇게 지들 맘대로야?'

눈치를 밥 말아 먹은 듯한, 일방적인 제안

아무래도,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츠 님!"

걸레짝이 된 로브를 휘날리며, 머리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흑마법사.

헐레벌떡 달려온 그가 바르나울의 사령관에게 귓속말을 남겼고,

"······뭐?"

그의 '믿는 구석'을 산산이 조각내버렸다.

카멜롯을 회수하기는커녕, 엘븐하임에 고립되어 버린 흑마법사들.

그 비참한 소식이 이제야 가츠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으니까.

"······잠깐만, 천천히 이야기해라."

그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부하의 마지막 보고를 끝으로, 결국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엘븐하임이 세계수를 되찾았다고?"

그리고······.

"······드루이드까지?"

그것이 전환점이었다.

자신들의 천적이 이곳 지구에 있음을 알게 된 바르나울.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가츠가 말없이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곤 두 팔을 뻗어, 파리 시내에 먼지처럼 깔려있던 흑마력을 다시 피워올렸다.

타르르르르르륵!

더 이상의 평화는 없었다.

쇠사슬처럼 뼈를 엮으며, 빠르게 수복되기 시작한 언데드.

앙상한 백골의 무덤이 다시금 불사의 군대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가긴 틀린 것 같군."

나는 더 이상 놈의 대화상대가 아니었다.

상공회의소에 앉아 있던 정갈한 포마드 머리의 남성.

틀림없는, 이곳 상공회의소 시설의 관리자에게 그가 말했다.

"본부장, 철수 신청은 철회합니다. 대신, 본 차원에 연락 하나 넣어주십시오."

"뭐, 뭐라고 넣어드리면 되겠습니까?"

본부장의 얼굴이 화창하게 피어올랐다.

그런 그에게, 가츠가 살벌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바르나울이 지구 개척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고. 사유는 수만 그루의 세계수, 그리고 드루이드."

"알겠습니다······!"

지구를 불바다로 만들 생각에 한껏 신이 난 본부장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구어어어······.

파리 도심 곳곳을 울리고 있는 언데드들의 고성.

잠시 숨을 골랐던 만큼, 놈들이 내뿜는 죽음의 향기는 한층 더 끈적했다.

쿠구구구······.

망가진 대관람차처럼, 수천 명의 포로가 실린 시시포스가 서서히 기울어졌고,

녹슨 쇠가 맞물리며, 비명 소리 같은 구동음을 울렸다.

후두두두둑!

챙강!

루브르의 드넓은 지하.

조각상에 귀속되어 있던 수십 마리의 가고일이 유리 피라미드를 뚫고 날아올랐다.

나뒹굴던 두개골이 푸른 안광을 빛냈고, 스켈레톤들이 또 다른 조각상을 끌고 몰려들었다.

마지막으로······.

흑마법사 가츠, 그리고 유럽 본부장만큼은 상공회의소의 안전한 방벽 속에 숨어 있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주변을 관망하던 가츠.

"아직 안 갔나? 생각 없으면 빨리 꺼져. 어차피 여긴 이제 지옥이 될 운명이거든."

그제야 나를 의식했는지, 그가 살벌한 축객령을 내렸다.

나로서는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왜 남의 땅에 들어와 놓고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은지.

내가 대답했다.

"아니, 방은 니들이 빼야 할 거야. 그리고······."

그러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시포스와 루브르 박물관, 거기에 상공회의소 유럽 본부까지.

아공간에 집어 넣기 딱 좋은 시설들이 고스란히 하나로 모여 있었으니까.

"이렇게 죄다 한 데 몰아 놓으면 어떡해? ······맛있게."

"······뭐?"

"꺼윽."

벌써부터 트림이 나왔다.

부활의 상징 (9)

092화 부활의 상징 (9)

쿠구구구······.

낮은 진동 소리와 함께, 격통이 찾아왔다.

팍스에게 저장을 요청한 대상은 '루브르 박물관'.

바르나울에 의해 유령의 집으로 개조돼 있음은 물론, 놈들이 벙커처럼 활용하던 유럽 지부와 '원혼 탈곡기' 시시포스가 덤으로 딸려 들어왔다.

'진짜 더럽게 아프네······.'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던 중, 갖은 장면이 눈앞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붕을 잃은 채 우왕좌왕하는 흑마법사 가츠와 유럽본부장의 모습.

사라진 거대 원판으로부터 우르르 쏟아져 내린 수천 명의 포로.

마지막으로 박물관의 지하 시설까지 말끔히 도려낸 탓에, 지축이 뒤틀려버린 내 시선까지.

"주군!"

"대표님을 지켜!"

그야말로 역대급 규모의 수용이었다.

조금도 몸을 가눌 수 없었지만, 카멜롯의 기사들과 팍스FC의 일원들이 무방비가 된 나를 보호해주었다.

덕분에 득실거리던 언데드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쟤들 이제 우리 편이야."

그들은 더이상 바르나울의 군세가 아니었다.

구어어어어!

달그락!

두개골을 조아리며 내게 부복하는 언데드들.

카멜롯을 넣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원혼들이 귀속된 조각상이 루브르와 함께 수용된 덕에, 이제 내가 놈들의 주인이 되었다.

"너무너무 고맙지 뭐야······."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물이나 지형과 달리,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들은 강제로 아공간에 저장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바르나울이 페르메곤의 원혼을 일일이 조각상에 수납해 준 덕에, 루브르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언데드들을 내 휘하로 빼앗아 올 수 있었다.

카멜롯의 기사들, 그리고 새로 얻은 루브르의 언데드까지.

졸지에 진짜배기 네크로맨서가 되어버린 나였지만······.

바르나울의 흑마법사들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일어나라!"

사악한 언령이 담긴, 쩌렁쩌렁한 목소리.

쿠구구구구······!

이 대신 잇몸이었다.

조각상을 모조리 빼앗긴 탓에 그 수가 줄긴 했지만, 바르나울은 바닥까지 긁어모은 흑마력을 동원해 파리의 죽음을 일으켰다.

구어어어어······.

그 결과, 또다시 만만치 않은 수의 언데드와 스켈레톤이 나타났다.

당연한 결과였다.

페르메곤과 바르나울의 침략에 의한 시체들은 파리 곳곳에 널려 있었고, 시시포스를 이용해 조각상에 귀속시킨 원혼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직접 흑마력을 끌어 써야 했던 탓에, 바르나울의 흑마법사들 또한 빠르게 여유를 잃어갔지만······.

콰아아앙!

달그라라라락!

루브르 박물관이 사라진 채 네모나게 파인 구덩이. 

결국 그 거대한 무덤 속에서, 언데드와 언데드가 맞붙는 대규모의 난전이 연출됐다.

촤아아악!

강에서 수장되어 있던 거인 악마들이 몸을 일으켰고,

썩은 박쥐 날개를 단 악마들이 텅 빈 갈비뼈 사이를 누비며 공격해왔다.

쿠웅!

쿠웅!

지축을 흔드는 거대 악마들의 발소리.

뼈마디 사이사이로 하급 악마들을 숨기며, 항공모함과 같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쐐애애애액!

퍼엉!

뻐어엉!

나 또한 수백 자루의 '악마 포식자'를 뿌리며, 놈들의 공세를 막아 세웠다.

루브르의 악마들을 빼앗은 덕에 한층 유리해진 상황이었지만······.

"의료팀! 여기도!"

"일단 옮겨! 치료는 그다음이다!"

시시포스에서 벗어난 수천 명의 포로가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팍스맨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설치된 포탈로 포로들을 인솔했고, 바르나울로부터 빼앗은 상당수의 가고일이 환자들을 실어 나르기 위한 앰뷸런스로 동원됐다.

벌써 수백 명의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상황.

흑마법사들의 천적인 드루이드들이 있긴 했지만, 당장은 그들의 재생 능력을 환자들의 치료에 쏟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파삭!

뼛가루가 불길처럼 치솟는 언데드들의 난전 속.

결국 흑마법사들과 마주한 것은 나와 카멜롯의 기사들 뿐이었다.

한편, 놈들은 사라져버린 시시포스와 유럽 본부 탓에 사실상 패닉에 빠져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철수가 안 된다니!"

"본청과 연락이 닿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본부가 통째로······."

"미치겠네, 진짜······."

가츠는 버럭버럭 소리를 내질렀고, 유럽 본부장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쯔쯧······."

자고로 유럽 여행을 왔으면 소매를 조심해야 하는 법.

대놓고 안일하게 루브르에 보물창고를 꾸려놓은 탓에, 거하게 내 식사를 거들어준 셈이었다.

더이상의 방해는 없었다.

흑마법사들과 대치하게 된 우리.

그 긴장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바르나울!"

카멜롯의 기사들이었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란슬롯의 푸른 안광.

비록 언데드인 탓에 성창을 비롯한 신성 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기사들의 손에는 최대치로 강화된 운양검이 들려 있었다.

탓!

카멜롯의 기사들이 움직였다.

자로 잰 듯이, 한 몸처럼 전열을 형성한 그들.

그들이 바르나울을 향해 분노에 찬 칼을 내질렀다.

스응!

급변한 전황 탓에 아직 어수선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던 흑마법사들이었지만······.

"······?"

후욱!

기사들의 칼이 닿은 곳에는 검게 물들인 잔상만이 남아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머저리들아!"

바르나울의 수장, 가츠의 솜씨였다.

흑마법사들에게 호통을 내지르며, 손을 뻗어 올린 그.

이미 언데드들을 운용하기 위해 상당량의 흑마력을 소진하고 있던 그는, 남아 있던 마지막 힘을 짜내 흑마술의 환각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후욱!

후우욱!

가츠가 부여한 환각은 정교했다.

카멜롯의 기사들이 흑마법사들에게 쇄도했지만, 내지른 검격은 번번이 검은 안개를 흩어낼 뿐이었다.

쐐애애액!

휘익!

'자동 추적'으로 쏘아낸 성창 또한 별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수십 수백 자루의 성창을 출하해 지면에 고루 박아넣기까지 했지만, 두어 명의 흑마법사들을 겨우 처리했을 뿐, 가츠만큼은 그 틈새를 유령처럼 유유히 빠져나갔으니까.

"이것 참······."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었다.

애당초 여기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듯, 인식을 교란하는 가츠.

남은 흑마력이 충분하지 않은지, 반격을 해오지는 않았지만······.

"······카멜롯의 기사들이여."

놈에게는 아직 '환각'이라는 무기가 남아 있었다.

흠칫.

낮게 울리는 흑마법사의 언령에, 카멜롯의 원혼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츠가 말했다.

"너희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아서가 살아있다는걸."

"······헛소리 마라. 아서는 죽었어."

사랑하던 주인의 죽음.

란슬롯은 즉시 부정했지만, 가츠는 멈추지 않았다.

그 질문을 카멜롯의 다른 기사들에게 건네기 시작했으니까.

"퍼시발,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겠나? 지금 실바니아 숲에서 아서가 널 기다리고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말이 안 되나? 네가 처음으로 아서를 만난 장소인데."

퍼시발은 끝끝내 가츠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카멜롯의 기사, 퍼시발이 소멸했습니다.]

[퍼시발이 카멜롯의 망령으로 돌아갑니다.]

정교하게 짜인 가츠의 환각이 그를 지상으로부터 지워버렸다.

가츠의 말은 계속됐다.

"이봐, 모드레드. 분명 시종장이 술에 독을 타는 걸 봤잖아? 지금 시종들이 그 잔을 들고 아서에게 가고 있다고."

"······."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아서가 식탁에 엎어지는 모습을 몇 번이나 더 보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그건······.!"

후욱.

[카멜롯의 기사, 모드레드가 소멸했습니다.]

[모드레드가 카멜롯의 망령으로 돌아갑니다.]

꺼진 촛불처럼 연기와 함께 사라진 모드레드.

그렇게······.

[그웨인이 카멜롯의 망령으로 돌아갑니다.]

[베디비어가 카멜롯의 망령으로 돌아갑니다.]

[헥터가 카멜롯의 망령으로······.]

카멜롯의 기사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한 명 한 명에게 빠짐없이 말을 건넨 가츠.

놈은 기사들이 아서라는 인물과 공유했던 경험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태생상 원혼인 기사들은 흑마법사의 언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한편,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아서'의 죽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을 주제로 꾸며진 수십,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

란슬롯이 내게 전해줬던 것처럼, 이 모두가 시시포스에서 비롯된 환상의 연장이었으니까.

"주군."

결국 남은 것은 란슬롯 하나.

이제 그는 가츠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지만, 곧 사라질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서는 죽었습니다. 결국 그 죽음이 저희를 망령으로 만들었지요. 하지만······."

칠흑같이 텅 비어버린 해골의 두 눈덩이.

그 속에 담긴 푸른 빛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저희는 절대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곤······.

[카멜롯의 기사, 란슬롯이 소멸했습니다.]

[란슬롯이 카멜롯의 망령으로 돌아갑니다.]

휘이이······.

오래된 먼지처럼 흩어져버렸다.

그는 내게 전했다.

나를 아서로 착각하지 않았노라고.

카멜롯의 저주로 인해 내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을 자신의 마음과 혼동하지는 않았노라고.

"······."

그가 흩어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게, 가츠가 말했다.

"뭘 그렇게 감상을 떠나? 다시 불러내면 될 것을. 뭐······. 그러려면 네가 꼭꼭 숨겨둔 카멜롯을 다시 꺼내오는 게 먼저겠지만."

또랑또랑 목소리를 울리는 것을 보니, 이번에는 나를 타겟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놈들의 소원은 줄곧 아서라는 놈을 구하는 거였어. 시시포스에서 욕망이 변형된 탓에 네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그리고······."

하지만 나는 놈의 언령에 반응하는 원혼도, 시시포스의 환상에 죽도록 갈려나간 망령도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놈은 내 심리를 흔드는 것부터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물류센터 사장, 너도 별생각 없잖아? 그냥 물건 몇 개가 들어왔다 나갈 뿐이잖아. 재고품에 무슨 마음을 그렇게 쓰겠다고······."

가츠는 내 의식을 서서히 파고들고 있었다.

정보를 캐내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부풀리고, 때론 축소해가는 식으로.

마음으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에도, 가츠는 카멜롯이 그저 그런 아이템 중 하나라거나, 기사들 같은 원혼들은 우주에 널리고 널렸다거나, 바르나울이 지구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등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꾸준히 주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가장 집요하게 주입되고 있는 생각은 이거였다.

"카멜롯이 없으면 그놈들이 널 따를 것 같아?"

"쫑알쫑알 시끄럽네, 진짜······."

란슬롯은 한차례 내게 이야기한 바 있다.

나를 향한 복종은 카멜롯의 저주에 의한 것이지만,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지는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가츠의 말대로, 나는 물류센터에 카멜롯의 기사들을 넣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까지 함께 딸려 들어왔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물건이 담겨 있는 물류센터라지만, 마음은 택배상자에 담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나 또한 그랬다.

물류센터에 넣고 싶은 것은 기사들의 복종이 아닌 마음.

오히려 그 마음을 넣기 위해서는 카멜롯을 내버릴 수 있어야만 했다.

비록 지금까지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만······.

"출하."

각고의 노력 끝에, 비로소 그들에게 강제된 복종을 떨어낼 수 있게 됐다.

지이잉.

포탈이 푸른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그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철걱.

은빛 갑주를 입은 열 두명의 기사들이었다.

"······."

살갗이 차 오른 양손.

동굴처럼 비어 있던 눈자위는 온데간데 사라져 있었다.

세찬 눈물이 흘러넘쳤고, 부드러운 솜털을 적신 눈물이 턱을 따라 똑하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휘이이이······.

귓바퀴를 타고 들어온 생생한 바람 소리.

반듯한 이마 양옆으로, 긴 갈색 머리를 늘어뜨린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란슬롯이라는 걸.

"······왜 그렇게 울어."

이제는 모든 계약이 끊어진 카멜롯의 기사들.

침묵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본 기사들은, 일제히 내게 무릎을 굽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곤······.

스릉!

바르나울의 흑마법사들을 향해 칼을 빼 들었다.

츠츠츠츠······.

검 끝을 맴도는 정체 모를 기운.

달라진 것은 그들의 외양뿐만이 아니었다.

부활의 상징 (10)

093화 부활의 상징 (10)

물결처럼 아른거리는 가츠의 잔상.

검을 겨눈 란슬롯이 옛 기억을 반추했다.

"······오랜만이구나, 가츠."

비로소 온전하게 된 재회였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구천을 떠도는 망령에 불과했으니.

스응!

하지만 비스듬히 들어 올린 검 면에는 이제는 완연한 인간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너······. 어떻게?"

가츠는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카멜롯이라는 감옥을 뚫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기사들.

속임수를 간파당한 무대의 마술사처럼, 파훼된 흑마법은 악몽 그 자체였으니까.

절대적인 힘을 자랑하던 흑마술의 언령은 살아 숨 쉬는 인간에게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었고, 지금껏 세 치 혀를 놀리며 기사들을 농락하던 가츠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란슬롯이 그런 가츠를 향해 담담히 덧붙였다.

"그때와는 많이 다를 거다."

휘이이이······.

흑마법사들의 검은 로브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 모두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한 상황.

하지만 시시포스에 휘둘려 수백 번의 전투를 치르고, 카멜롯에 갇혀 기나긴 세월을 보낸 기사들 또한 과거의 그들이 아니었다.

지이이······.

기사들의 검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 빛에 따라······.

"······저건?"

주변을 감싸고 있던 촘촘한 보랏빛 실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아해하는 내게, 란슬롯이 부연했다.

"바르나울의 흑마술입니다. 무수히 많은 선택지를 만들고, 그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유도하죠. 하지만 그 어떤 걸 고르더라도 결국 놈들의 입맛에 놀아나게 됩니다."

확실히 그랬다.

눈앞에는 흑마법사들이 표적지처럼 떠 있었지만, 그 무엇하나 실체가 아니었으니까.

기사들이 피워낸 검광에 의해 이제야 비로소 그 전모가 드러난 참이었다.

"놈들이 선택지를 만들어내는 방식,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합니다."

분명, 눈앞에 놓인 것은 환각이다.

하지만 그 환각을 조작하는 흑마법사들의 손길까지 환각일 수는 없었다.

결국······. 

"저희가 길을 열겠습니다."

흑마법의 노예였던 그들이 묶인 줄을 거꾸로 잡아 들었다.

탁!

타닥!

해골이었을 때보다 되레 가벼워진 발걸음.

열두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바르나울의 잔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욱!

훅!

결과는 지금까지와 다르지 않았다.

하나 둘, 거품처럼 꺼져가는 가츠와 흑마법사들.

새롭게 생겨나는 환영과 함께, 엉킬 대로 엉킨 수식이 제자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검광에 비춘 보랏빛 실선들.

그 두 개가 선명한 평행을 이루었고,

쐐애애액!

"······커헉!"

그 사이로 날아든 '악마 포식자'가 마침내 흑마법사의 미간을 꿰뚫었다.

생명을 거슬러 오른 기사들의 검무.

가츠가 펼친 환각을 그 꼬리부터 역추적했고, 숨은 흑마법사들의 본체를 포착할 수 있었다.

"······끄륵."

"······칵!"

촘촘하게 펼친 오선보 위로,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바르나울의 흑마법사들.

거짓과 환영으로 얼룩진 연주가 거꾸로 뒤집히자, 아름다운 생의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침내 도달한 대단원, 동시에 서막이기도 한 장소에는······.

"······."

어느덧 넝마가 된 로브 자락을 휘날리는 가츠가 서 있었다.

놈이 두르고 있는 강력한 척력 때문일까?

비록 벨 수는 없었지만, 기사들의 검이 놈의 교묘한 움직임을 한사코 막아 세웠다.

탁!

"윽!"

발목이 걸려, 고스란히 엎어진 가츠.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대 바르나울에게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그가 흙먼지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아득바득 경고의 메시지를 남겼지만······.

콰득!

다시금 흑마력을 피워올리던 놈의 입에 성창을 찔러넣었다.

창대와 함께 휙하고 넘어간 몸통.

그 뒤로, 두 팔을 풀썩 늘어뜨렸다.

"감히는 누가 감히인데, 이놈 새끼야."

초점을 잃어버린 가츠.

놈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흑마법사들의 최후를 장식했고······.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담."

그제야 드문드문 달빛이 비치는 파리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흑마법사들의 죽음과 함께, 바르나울의 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무더기로 쌓인 뼈들만이 도로 곳곳에 즐비할 뿐.

남은 것은 이제 내 휘하로 들어온 언데드,

그리고 적막에 휩싸인 도시, 그뿐이었다.

***

파리에서의 상황이 일소되기는 했으나, 아직 유럽에는 수백 개의 포로 수용소가 남아 있었다.

"맡겨두세요. 깔끔하게 정리할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프라하의 각성자들과 프리스트를 비롯한 타국의 지원 세력들이 뒷정리를 돕기로 했고, 나는 간간이 게이트 핵을 처리하고 환자 이송을 위한 포탈을 세우는 마무리 작업만 맡기로 했다.

덕분에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둔 채, 아공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층 더 널찍해진 아공간.

한껏 고초를 치른 가족들이 물류센터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문화생활치고는 좀 과한데."

김솔이 머리를 긁적였다.

정원과 지하 전시장을 포함한 루브르 박물관.

그 거대한 규모의 지형이 물류센터의 북쪽 입구에 연결되어 있었다.

심지어 평범한 박물관도 아니었다.

'원혼' 탈곡기 시시포스가 체르노빌의 대관람차처럼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고, 주변으로 악마들이 귀속된 수십 개의 섬뜩한 조각상이 도열해 있는가 하면, 그 앞에는 흑마법사들의 혼이 담긴 성창이 이쑤시개처럼 꽂혀 있었으니까.

이것만 보면 카멜롯을 아득히 뛰어넘는 흉흉한 기피 시설에 다름 아니었지만······. 나는 전시장 한쪽에는 일종의 위령비를 세워둔 참이었다.

"······."

바르나울에 의해 희생당한 원혼들.

'악마 포식자'를 이용해 그들의 혼을 따로 빠짐없이 모아두었으니까.

1,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창이 자그마치 여섯 자루에 달하는 걸 보고 있자니, 파리에서의 참상이 사뭇 끔찍하게 다가왔다.

엘프 장로 윌그라임에게, 혹시 이들을 소생시킬 방법이 없을지 물었지만······.

"······어렵습니다. 카멜롯과는 상황이 달라요."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원혼이 사물에 귀속되어 있는 건 같잖아요?"

"카멜롯에 담긴 건 고작 열둘의 원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한 번에 수백의 원혼을 살려내려면 상상 이상의 자연력이 필요할 겁니다. 차마 가늠조차 가질 않는군요······."

아쉽지만, 이번만큼은 복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재료가 될 세계수를 복사한다 한들, 그 이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성불이라도 시켜야 하나······."

희생자들의 혼으로 신성 폭발이라도 일으켜야 할지 고민했지만, 혹시나 모를 가능성을 간직하며 일단은 박물관에 모셔놓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레오!"

다행히, 모두가 죽은 건 아니었다.

파리의 포로수용소를 손에 넣었고, 시시포스에 들어간 사람들 또한 구해냈으니.

사실 따지자면,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레오는 리디아와 열 살 터울의 어린 꼬마였다.

리디아는 레오를 안은 채 하염없이 울음을 터뜨렸고, 다른 희생자들을 의식하는 중에도 잊을 만 하면 내게 고맙다며 거듭 눈물 섞인 감사를 건넸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함께 고개를 숙이는 레오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을 즈음······.

"인사해. 여기는 레오라고 하는데······."

그간 제대로 정을 붙인 모양이었다.

리디아는 레오를 세계수로 데리고 갔고, 서로를 소개해주었다.

활짝 핀 웃음과 함께, 버프가 섞인 인사말을 건넨 리디아였지만······.

"······!"

추우우욱.

엄마의 숨겨진 또 다른 아들을 마주한 듯, 세계수는 노란 낙엽을 우수수 떨궜다.

"······어? 계수야? 어디 아파? 너 왜 그래?"

거무죽죽하게 시들어가는 세계수.

보아하니 얼추 한나절이면 회복될 게 분명했지만, 경쟁자의 출현에 적잖이 실망한 게 분명했다.

세계수로서는 엄마나 다름없는 리디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을 테니까.

한편, 엘프 장로 윌그라임은 그 풍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이겁니다······. 가족적 사랑을 둘러싼, 인간적이면서도 실존적인 고통! 저런 고통이야말로 뿌리에 두께를 가하는 시련이지요! 이로써 세계수는 점점 어른이 되어갈 겁니다······."

'······이제 보니 이 인간이 문제였구나.'

짝짝!

감격에 찬 눈물을 훔치며 물개박수를 치는 윌그라임.

700살 먹은 엘프 장로가 실은 황천의 뒤틀린 사디스트였을 줄이야.

이 양반의 조언만 아니었어도 세계수와의 관계가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 그러고 보니······."

바르나울을 처리했고, 아공간에 전리품까지 수용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엘븐하임에서 드워프들에 의해 새로운 마력 회로를 새긴 카멜롯.

녀석에게 기사들을 부활시키겠다는 내기를 걸어둔 참이었으니까.

"약속은 지켰지."

이제 그 보상을 확인할 차례였다.

***

기사들과 함께, 포탈을 타고 넘어간 엘븐하임.

공장에서 나온 쿠퍼가 내게 왕관 크기의 카멜롯을 전해주었다.

"회로가 제대로 반응했소. 이게 그 결과물이지."

축축한 잿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새하얀 돌벽이 찬란하게 빛났고, 그 틈새 사이로 푸른 빛의 매끈한 회로가 물줄기처럼 흘렀다.

"작업하던 내내 흑마법 회로가 바깥과 연결을 주고받더이다. 하지만 이제 모두 걷어냈으니,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추적은 없을 거요."

아이템 제작의 명수답게, 쿠퍼는 카멜롯에 부여되어 있던 기능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바르나울의 흑마법에 의해 추적되던 카멜롯 성.

하지만 흑마력 회로를 걷어내고, 부여된 조건을 달성한 덕에 감찰국인지 뭔지 하는 놈들의 추적은 뿌리칠 수 있게 됐다.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카멜롯에는 그 어떤 영혼도 귀속되어 있지 않았다.

해골 기사들은 살아생전의 모습을 되찾았고, 동시에 카멜롯의 제약으로부터도 풀려났으니까.

착취 기능 또한 사라진 덕에, 기사들이 없는 지금은 사실상 깡통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새로 부여된 옵션만큼은 차마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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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천의 카멜롯]

등급: [유니크]

설명: [저주받은 기사들의 궁전이었으나, 각인된 조건을 달성하여 근본적인 성질의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원하는 크기로 설치할 수 있으며, 크기에 비례하는 설치 비용이 소모됩니다.]

속성: [특수]

옵션:

[기사 등록]

-기사를 등록할 수 있습니다. (최대 12명)

※ 단, 과거 카멜롯에 귀속되었던 기사만 등록이 가능합니다.

[꿈과 현실]

-카멜롯을 경유하여, 기사를 '망령' 형태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카멜롯을 경유하여, 기사를 '인간' 형태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역천]

-사망한 기사가 카멜롯에서 부활합니다.

※ 일정 크기 이상의 세계수가 재료로 사용됩니다.

※ 부활에 필요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2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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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진짜 부활이 될 줄이야.'

'역천의 카멜롯'이라는 새 이름을 달았다.

그리고 뒤집힌 하늘이라는 이름답게, 그 본래의 기능 또한 고스란히 뒤집혀 있었다.

'······산 채로 망령이 될 수 있다고?'

기사들은 이제 사람이다.

하지만 역천의 카멜롯을 통해 망령이 될 수 있는 것은 물론, 죽은 뒤 되살려내는 것까지 가능했다.

세계수가 자원으로 소모되기는 하지만, 그거야 복사해서 쓰면 그만이니까.

사실상 24시간의 쿨타임이 부여된 자동 리스폰이라는, 그야말로 사기적인 옵션에 다름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걸 기사들에게 요구할 수 있을까?'

아이템으로의 귀속.

'망령화' 기능과 생명의 본질을 거스르는 부활 효과까지.

그 효과가 하나같이 카멜롯의 저주와 여전히 닮아 있었으니까.

"······."

나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카멜롯의 기사들.

함께 아이템의 정보를 공유받은 그들은,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야 당연하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계약으로 맺어진 주종관계가 아니니까.

저주가 사라진 이상, 기사들은 더 이상 나를 주인으로 섬길 필요가 없었다.

물론 지구를 벗어나거나 할 수도 없겠지만, 독자적으로 움직이겠다고 선언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지.'

꼭 내 신하가 아니어도 좋았다.

나를 섬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엘프나 드루이드들 또한 든든하기 그지없는 조력자였으니.

솔직히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함께 등을 맞댈 우군이 되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긴 적막 끝에, 란슬롯이 입을 열었다.

어쩐지, 조금은 젖어 있는 목소리였다.

"······드디어 소원을 이뤘군요."

찌르르······.

바람 소리에 섞여 울리는 새소리.

세계수로 가득 찬 엘븐하임의 중심에서, 란슬롯은 살갗이 덮인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사실, 저희끼리도 예전부터 이야기를 많이 나눠왔습니다. 지금까지야 카멜롯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저주가 사라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고요. 그런데······."

멋쩍다는 듯, 란슬롯은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띠링!

[란슬롯이 '역천의 카멜롯'의 기사가 되었습니다.]

[그웨인이 '역천의 카멜롯'의 기사가 되었습니다.]

[퍼시발이 '역천의 카멜롯'의 기사가 되었습니다.]

[모드레드가 '역천의 카멜롯'의 기사가 되었습니다.]

[베디비어가'역천의 카멜롯'의 기사가······.]

'역천의 카멜롯'으로부터 열두 명 전원의 등록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억겁의 시간 동안 카멜롯의 속박에 고통받았던 그들.

그들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다시금 자유를 내던지고 있었으니.

"다들 소원하는 바가 다르지 않더군요."

기사들의 소원.

문득 시시포스에서의 환상이 떠올랐다.

아서라는 주인을 지켜내기 위해 수백, 수천 번의 악몽을 헤맨 그들이었지만······.

"저희도 알고 있었습니다. 주군께서는 나날이 강해지고 계셨고, 머지않아 당신의 발목을 잡게 될 날이 오게 될 거라고요."

기사들의 소원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7위계, 혹은 8위계의 벽에 가로막혀 있던 그들.

그들의 충심과는 별개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었던 카멜롯의 기사들이었으니까.

"그래서 더욱 지독하게 생을 원했습니다. 육체의 땀과 세월을 더해 성장할 수 있었던, 살아생전의 신체를 원했지요. 결국 주군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전해 받은 덕에······."

스릉!

란슬롯이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오러'를 개화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끝에 은은한 검광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제 저희에게도 시간이라는 것이 흐르겠지요. 수천 번, 수만 번 검을 휘두르다 보면······ 점차 더 높은 경지로 주군을 보필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철걱.

란슬롯이 내게 검을 쥐여주었다.

그러곤······.

"많이 늦었지만······ 기사의 맹세를 올리겠습니다."

열두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부복했다.

무소유 (1)

094화 무소유 (1)

유럽에 들어온 불청객들을 모조리 쫓아낸 참이다.

더욱이, 죽은 카멜롯의 기사들이 되돌아 와, 재계약 서류에 도장까지 찍어준 상황.

다른 날이라면 몰라도, 오늘만큼은 저녁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역시 이런 날에는······.

"······회식이지."

새롭게 재편된 카멜롯의 부서 회식.

먹지도 마실 수도 없던 기사들에게 거한 상찬을 베풀어줄 생각이었다.

"오늘만을 기다렸다고."

지금껏 팍스FC의 일원이 된 이종족은 많았다.

엘프, 드루이드, 거기에 드워프들까지.

솔직히 데려오는 족족 밥부터 먹이곤 했지만, 못내 아쉬운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철저한 채식주의로 산채 비빔밥만을 고수하는 엘븐하임의 엘프들.

드루이드들은 히피처럼 틀어박혀 밥 대신 세계수 이파리만 씹어댔고, 그나마 드워프들이 적응하나 싶었지만 얼마 전부터 맥주에 밥을 말아 먹기 시작했으니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

그런 내게 있어, 기사들의 회생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드디어 잡았다······ 푸른 눈의 잡식성 코쟁이······!'

그 역사와 유래가 깊은 외국인 먹방.

나는 카멜롯의 기사들에게 팍스FC가 보유한 K푸드를 원 없이 먹여줄 작정이었다.

물론, 글렌이나 리디아 같은 미국, 또는 유럽의 각성자들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내 새끼들부터 먹이고 봐야지. 뭐, 식량을 안 대준 것도 아니고······.'

나는 팔이 안으로 굽다 못해, 아예 등짝에 붙은 사람이었다.

나를 따라 아공간으로 들어온 란슬롯과 기사들.

내가 젊음을 탑재한 회식 날의 부장님처럼 그들에게 물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언데드였던 동안 자주 생각났던 거라든지······."

란슬롯은 허전한 배를 만지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배고픔이라는 감각을 모르고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

이제 와 허기를 호소하는 신체가 낯설기만 할 테니까.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긴 하군요. 아발론에서는 기사들의 식사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곡식을 굳혀서 만든 딱딱한 건량이었는데······."

이제 보니 엘프들 못지않게 빈궁하게 살아온 그들이었다.

거기에 더 나아가 해골까지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올 따름.

다행히, 란슬롯은 한 가지 메뉴를 기억해냈다.

"포르쿠라는 짐승의 고기를 구워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구에는 포르쿠가 없겠지만······."

"고기구이라······."

흰 살코기를 가진, 돼지를 닮은 동물. 

아쉽게도 지구에는 없는 식자재였지만······.

"일단 가자."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평생 건량을 먹고 살았던 그들.

전장에서 먹었다던 고기의 추억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우가 더 맛있지 않을까?'

일단은 K-미트부터 때려 넣고 시작할 생각이었다.

.

.

.

기사들을 대동하고 도착한 아공간 물류센터의 직원 식당.

란슬롯이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를 내려놓았다.

"어디······."

띠링!

[안심 한우 아랫등심 채끝등심 꽃등심 1++ 구이용 (냉장), 가격은 457,200원입니다.]

아예 kg 단위로 공수해 온 소고기.

집게로 들어 올린 채끝살에는 선명한 마블링이 물결처럼 퍼져있었다.

지방으로 기름칠을 한 뜨거운 불판.

그 위로 후추와 소금으로 겉 간을 한 커다란 고기를 내려놓았고······.

치이이······!

기름 끓는 소리가 한껏 입맛을 자극했다.

사면을 돌려가며, 육즙을 가둬 놓은 고기.

살짝 그을린 듯, 겉면은 선명한 갈색을 띠고 있었지만······.

"······이거지."

잠깐의 기다림 이후,

홍해처럼 갈라진 내부에는 촉촉한 선홍빛 육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입 크기로 숭덩숭덩 잘라낸 뒤,

주사위 모양으로 구운 고기를 기사들의 접시에 담아주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주군······ 뭐가 뭔지······."

기사들은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아공간에 들어온 이래, 가족들의 식사를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던 그들.

옛말에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빤히 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란슬롯."

"예, 주군."

"분명, 더 성장하고 싶다고 했었지?"

"······예, 그렇습니다."

그들의 눈앞에, 모락모락 김을 피어오르는 고기를 흔들었다.

그러곤 대한민국 군대에서 습득했던 괴이한 논리를 그대로 그들에게 설파했다.

"잘 기억해둬. 식사 또한 훈련의 일종이다."

"······!"

저주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간이 된 그들.

그들이 살아있는 육체와 함께 오러를 개화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오러는 정교하게 빚어진, 신체의 강인한 내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란슬롯의 설명이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근력과 체력을 위한 영양 섭취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비록 생전에 건량을 먹으며 살아온 란슬롯이었지만······.

"식사는 훈련······."

그도 내 뜻을 이해한 듯했다.

이제는 준비가 되었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를 집어라. 그리고 여기 생 고추냉이를 얹은 다음, 그 앞에 있는 히말라야 핑크 솔트를 찍는 거야."

"이해했습니다. 고추냉이를 얹은 다음······."

란슬롯이 복명복창과 함께 내 지시를 따랐고,

척!

기사들 또한 일사불란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급식 훈련.

누구에게나 그렇듯, 처음은 쉽지 않았다.

손이 꼬이고, 고기를 놓치고, 젓가락이 바닥에 떨어지기 일쑤.

하지만 기사들은 꿋꿋내 잘 익은 고기를 입에 가져가는 데 성공했다.

"······성공입니다!"

우물우물 터져 나오는 육즙을 씹으며, 푸른 눈을 빛내는 란슬롯.

하지만 훈련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아직 멀었어. 모두, 상추를 집어 들도록."

모두가 큼지막한 손에 상추와 깻잎을 얹었다.

새콤한 파절이와 얇게 썰은 고추를 얹었고, 노릇노릇하게 익은 마늘 편을 쌈장과 함께 올렸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일렬로 늘어선 열두 개의 볼따구.

기사들이 하나같이 훌륭한 저작 작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그거다. 다음은······."

교육은 계속됐다.

무한의 물류센터답게, 교보재는 차고도 넘쳤으니까.

띠링!

띠링!

쉴 새 없이 떠오르는 교보재의 출고 메시지.

[겨울 동치미 물냉면 4인분, 1692g, 4개, 가격은 32,280원입니다.]

[함흥 비빔냉면 2인, 1306g, 3개, 가격은 20,940원입니다.]

[고깃집 된장찌개, 535g, 가격은 5,900원입니다.]

물냉면과 비빔냉면의 차이, 겨자와 식초로 감칠맛을 더하는 법, 팔팔 끓여나온 된장찌개와 흰 쌀밥을 이용해 기름진 입을 씻어낼 수 있는 법을 연달아 교육했고,

[자동 눈꽃 빙수기, KC-2311WS, 가격은 64,510원입니다.]

[서울우유 1급A우유, 2300mL, 가격은 3,820원입니다.]

[당도 선별 수박, 5kg, 가격은 21,900원입니다.]

컵과일을 얹은 눈꽃 빙수와 시원한 수박을 보급해 달아오른 훈련의 열기를 식혔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는 기사들.

하나같이 몸을 옥죄던 철판 갑옷을 벗어 던진 채,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느덧 한계에 부닥친 그들이었지만······.

"······!"

저벅저벅.

느긋하게 허리를 굽힌 채 나타난, 나 김정겸의 할아버지.

두 번째 훈련 교관의 등장에, 식당에는 새로운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빼빼 말랐더니······ 이제야 좀 보기 좋게 됐구만."

포동포동 차오른 기사들의 양 볼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음을 지어 보이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기사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부여했다.

"란씨, 이제 술 혀?"

"······.!"

편견 없이 해골 기사들을 대해주던 할아버지였다.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없다는 현실이 기사들에게도 아프게 다가왔을 터.

란슬롯이 울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할아버지. 이제 술 합니다."

막걸리를 부탁하며 기사들 사이로 자리를 꿰찬 할아버지.

괜찮겠냐는 내 물음에, 란슬롯이 끄덕였다.

꼴꼴꼴꼴······.

차갑게 식힌 밤 막걸리를 황주전자에 쏟아부었고, 양은으로 된 술잔에 넘칠 듯 술을 따라주었다.

훈련의 연장이니만큼 한국식 주도(酒道)를 교육했고, 할아버지와 건배를 나눈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꺾었다.

꿀꺽.

꿀꺽.

건조한 입 안으로 차디찬 폭포가 쏟아졌다.

입술을 넘어간 막걸리가 목젖을 타고 내려왔다.

톡 쏘는 탄산이 혓바닥을 알싸하게 간지럽혔을 즈음······.

콰앙!

쾅!

테이블 위로, 둔탁한 타격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

일제히 고개를 처박으며,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열두 기사들.

할아버지와 함께 허탈함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술 못하잖아······."

***

"주군······."

이튿날 아침,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물류센터로 돌아온 란슬롯과 기사들.

퉁퉁 부은 얼굴과 소용돌이처럼 꺾인 까치집이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해주었다.

"일어났어?"

"아직 훈련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도중에 혼절을 해버리다니······ 면목이 없군요."

"아니, 그건 훈련이라기보다는······."

여러 이유가 있을 터였다.

갓 되찾은 신체이니만큼 아직 단련이 덜 되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흑마법사 가츠와의 결전을 통해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였을지도 모를 일.

그간 묵묵히 죽음에 담겨 있던 그들의 세월을 생각하면, 술에 취해 뻗어버리는 기사들의 모습이 되레 정겹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에게도 알려줄 소식이 하나 있어."

"소식 말입니까?"

나는 곧장 기사들을 데리고 물류센터의 서쪽으로 향했다.

에메스의 자재 창고, 제임스의 작업실과 브로크의 공방을 지났고······.

"이건······."

일본 지부 옆으로 들어온, 상공회의소의 유럽 본부에 다다랐다.

은은한 푸른빛과 함께, 시계 소리처럼 강박적으로 흘러나오는 틱틱 소리.

과연 본부답게, 일본 지부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원래의 주인은 죽었다.

가츠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유럽 본부장.

일본 지부장 헨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놈의 머리 또한 여지없이 터져나갔으니까.

띠링!

[업데이트가 완료된 상태입니다.]

전후 사정이 어쨌든, 유럽 본부가 내 손에 들어온 상황.

새로 들인 시설을 기반으로 곧장 팍스의 새 업데이트를 진행했다.

팍스는 동시에 유럽 본부의 활동 로그를 조회했고, 그 결과 내게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전해줄 수 있었다.

[바르나울로의 송신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송신된 정보는 지구에 있는 세계수와 드루이드에 관한 것입니다.]

[해당 차원 측에서도 수신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세계수와 드루이드.

놈들의 발작 버튼이 지구에 있다는 정보.

전송 시점으로 보건대, 가츠가 요청하기 한참 전에 이미 메시지가 전달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예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르나울이 지구로 들어오겠지."

다만,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상공회의소가 걸어놓은 강력한 제약이 놈들의 진입을 막고 있었으니까.

팍스는 바르나울 또한 상공회의소의 절차를 따라야 하며, 진입이 결정되더라도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해주었다.

"그렇군요. 말씀하신 소식이라는 게······."

확실시 되다시피 한 적들의 침공 소식.

란슬롯 또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 진짜 소식은 그게 아니야."

그에게 전해주고 싶은 소식은 따로 있었다.

새로 얻은 상공회의소의 유럽 본부.

한 단계 상급 기관이니만큼, 일본 지부에는 없었던 새로운 기능이 탑재돼 있었으니까.

"차원 통폐합 기능이 생겼어."

차원들을 이간질하기 위해, 또는 새로운 침략자를 길러내기 위해 상공회의소가 사용했던 기능.

엘븐하임과 라이시온 광산, 대수림과 드워프들의 공장을 지구로 끌어들였던 그 권한이 지금 내게 주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받은 수혜 또한 어마어마했다.

당장 엘븐하임만 하더라도 천혜의 요새가 되어 흑마법사들을 저지한 것은 물론, 자그마치 수 만 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수용해주었으니까.

"네가 말했던 것처럼, 상공회의소는 내게 길을 열어주지 않겠지. 나는 침략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주군, 그 말씀은······."

"반대로 아발론을 지구로 끌어당기면 되지 않을까?"

그 때문이었다.

지금껏 하나씩 랜덤박스를 던져주던 상공회의소, 그 선물을 내 손으로 고르겠노라 결정한 것은.

이번에도 바르나울과 엮여 있었다.

언데드로 뒤덮인 아발론은 이제 놈들의 아이템 공장으로 활용되고 있었으니까.

"이번엔, 우리가 먼저 코털을 뜯어보자고."

그게 내가 기사들에게 전해준 새 소식이었다.

무소유 (2)

095화 무소유 (2)

아쉽게도 당장은 아니었다.

시간이 필요한 것은 비단 바르나울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띠링!

['아발론'의 좌표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통폐합을 위해서는 좌표를 고정하거나, 가변 규칙에 적용된 수식을 계산해야 합니다.]

환각을 다루는 바르나울.

놈들의 식민지답게, 아발론은 흑마법에 꼭꼭 숨겨져 있었다.

AI 팍스가 계산을 통해 아발론의 위치를 추적할 예정이었지만······.

"최소 몇 달은 걸릴 거라고 하네."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 탓에, 팍스 또한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헤집을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구에서의 지형학적인 문제는 물론, 상공회의소가 설정한 차원의 성장 등급 차이까지.

고려해야 할 문제가 이것저것 쌓여있는 상황이었지만,

"아발론을 지구로 말입니까······?"

"세상에······."

가능성 하나만으로, 기사들은 흥분에 휩싸였다.

지구로의 진입을 준비하고 있을 바르나울.

그리고 놈들의 식민지인 아발론을 찾고 있는 우리.

과연 어느 쪽이 먼저 선빵을 때릴지 예상할 수 없었지만, 당분간 시간이 유예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물론······.

"······뒤처리가 남아 있긴 하니까."

그렇다고 한가한 건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이제야 사태 수습을 위한 첫 삽을 떴고,

유럽에서는 아직 한창 포로들을 구출하고 있는 상태.

"부지런히 움직이자고."

나도 할 일이 많았다.

아직 남아 있는 유럽의 게이트 핵.

포로들을 구하는 한편, 그 자리에 아공간 포탈을 설치해주어야 했으니까.

심호흡과 함께 어깨를 붕붕 돌리며,

나는 기사들을 대동한 채,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페르메곤의 게이트가 사라진 자리를 아공간 포탈이 대신했고, 수용소에 갇혀 있던 수만 명의 포로를 해방했다.

더불어,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따로 모아, '포탈 운송'을 이용해 엘븐하임으로 이송했다.

작은 대륙만 한 크기의 엘븐하임.

수천 명의 사람쯤이야 너끈히 수용할 수 있었으니까.

세계수가 논밭처럼 늘어선 엘븐하임에서, 나는 큰누나 김주연 씨와 인사를 나눴다.

"이게 다 환자야?"

"그럼 다 환자지. 니가 다 수입해오고 있잖아."

숲에는 수천 개의 병실용 침상이 늘어서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한 환자들.

유능한 간호사, 김씨스터즈 1호께서는 이곳에 대규모의 병원 시스템을 구축했고, 팍스FC의 힐러들과 드루이드들을 배정해 숨 가쁘게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현대 의학과 각성 능력, 거기에 자연력까지 더해진 최첨단의 치료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다리 절단 환자! 지혈부터!

-복부 관통상입니다! 핀드릭 선생님을······!

팍스맨들의 이마에 맺힌 땀은 도무지 마를 기색이 없었다.

"뭐가 이렇게 바빠?"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힐러들의 수는 한정돼 있는데, 환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잖아."

"치료를 안 할 수도 없고······."

인명 구조라는 대의적인 목적 외에도, 환자들을 구조하고 치료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직접적으로 팍스FC의 도움을 입은 사람일수록 이후 팍스맨에 지원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결과 내 전력이 늘어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곤 했으니까.

-으으······.

-아파······. 누가 좀······.

하지만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중환자들에게 밀려,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경상 환자들.

몸을 쿡쿡 찔러오는 통증 탓에 하나같이 끙끙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큰일이야. 죽는 사람까지야 많지 않겠지만······. 다들 장애나 후유증이 남을 텐데."

푹 한숨을 꺼뜨린 큰누나.

하지만 불현듯 들려온 소리에, 우리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치익······. 치익······!

"······뭐지?"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소리의 근원지는 나무에 매달려 있는 작은 스피커.

큰누나가 엘븐하임에 병원 시스템을 구축하며 설치한 중앙 방송 시스템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희는 엘븐하임의 갈라돈 의회입니다.

"엘리?"

다름 아닌 갈라돈 의회의 의장, 엘리였다.

그제야 숲 너머 봉우리에 설치된 조악한 간이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땜빵으로 얼룩진 천을 옮기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엘프들.

엘리는 지체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모두들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조금이나마 치료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우리 엘븐하임에서 깜짝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부디 공연이 여러분에게 용기를 더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연극······?"

"어머나······."

치료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엘프들이다.

아무래도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을 보며, 줄곧 마음이 쓰였던 모양.

문득, 엘리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엘프들은 문화예술을 사랑해요. 음악을 노래하는 것도, 그런 음악과 함께 소소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을 나누는 것도 좋아하죠.

"마음이 정말 고맙고, 따듯하네······."

바로 그 연극을 선물로 준비해 온 엘프들의 친절.

연극이 시작되기도 전, 큰누나는 이미 감동한 표정이었다.

한편,

"케루가 주인공인가? 에단도 있고······."

해안가에서 처음 만났던 엘프들.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무대 위로 올라왔고,

엘리의 나지막한 내레이션과 함께 무대의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소년 엘프, 로난은 고아로 태어났어요. 결국 양육시설로 보내졌지만, 로난에게 돌아온 것은 무시와 괄시뿐이었죠. 하지만 태생 너그러운 성격이었던 로난은 친구들의 가방을 들어주고, 뭉친 어깨를 주물러 주고, 부드러운 빵을 사다 주며 원만한 관계를 이어 나갔답니다.

"음······."

-마침내 로난이 110살 성년이 된 어느 날, 시설의 원장이 로난에게 지금까지의 양육 비용을 청구했지요.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오른 로난이었지만, 지금껏 그를 키워준 원장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답니다. 시설을 나오자마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로난은 그날 코가 깨져 버렸지요.

"······?"

"······??"

심상치 않은 전개.

큰누나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로난은 갈라온 의회에서 지급된 보조금으로 작은 원룸을 구했어요. 하지만 며칠 뒤,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로난은 중고 수레 매매단지로 가, 수입산 수레를 60개월 풀 할부로 구매했지요. 원래 보러 갔던 수레와는 다른 물건이었고, 왼쪽 바퀴가 찌그러져 있기도 했지만 로난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엘븐하임에 카지노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목구멍이 턱 하니 막혀오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서사.

아니나 다를까, 관객들 또한 서서히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으으······."

"끄으으윽······! 끄으······."

악몽을 꾸듯, 신음하는 환자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에 모두들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룰렛에 남은 재산을 모조리 털어 넣은 로난은 마침내 신체 포기 각서를 쓰게 되었어요. 그날 로난은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셨고, 행인과 시비가 붙은 끝에 누명을 쓰고 구치소에 갇히게 되었답니다. 구치소에 여자친구가 찾아왔어요. 보육원에서 함께 자라, 70년 동안 함께 했던 엘프였죠. 하지만 그녀는 사실 로난의 절친한 친구와 몰래 45년째 사귀고 있었다며 로난에게 이별을 통보했······.

"끄르르르륵······."

"끄르륵······."

끔찍한 반전이 대단원에 이르렀고, 환자들은 거품을 물며 눈알을 뒤집었다.

"······중단시켜."

"예, 주군."

카멜롯의 기사들이 무대로 날아들었고,

컴컴한 무대 뒤, 숨어 있던 각본가 윌그라임이 두 팔이 잡힌 채 끌려 나왔다.

"나, 나는 고통의 심오함과 상처를 보여주려······.!"

짧은 두 발을 버둥거리며, 결백을 주장하는 윌그라임.

보나 마나, 세계수 양육법을 인간들에게까지 적용하려던 게 분명했다.

사도 마조히즘의 극을 달리는 그의 '명작' 덕분에, 환자들의 숨이 일제히 끊어질 뻔했다.

입안 가득 고구마 단내를 풍기며, 큰누나가 내게 물었다.

"······방법을 찾아야겠지?"

"그래야지······."

환자들로 가득한 엘븐하임.

아쉽게도, 엘프들의 공연으로는 그들을 치료할 수 없었다.

"힐러들을 더 모아올게."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두말할 것 없이 인력 확충이었으니까.

***

나는 곧장 유성철을 만났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전국에 설치된 아공간 포탈을 관리하는 합참 본부.

각성자들이 나날이 늘어가는 추세임에도, 정작 팍스맨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이제 한국에는 더 이상 힐러들이 없는 건가요?"

"아닙니다. 팍스FC 힐러들이라 해봤자 수백 명이 고작인데요. 그것보다는······."

휙 하니 고개를 저은 유성철이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한국에 새로운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최근 들어 부쩍 성장하고 있다고 해야 맞겠네요."

자그마치 마석 1만 개가 소모되는 단체 개설.

놀랍게도 그 큰 금액을 지불하는 각성자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김 대령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가 한국의 모든 지역을 커버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산간 지역은 물론이고······ 지방 소도시를 중심으로 한 생존자 집단도 셀 수 없이 많죠."

곳곳에 포탈을 설치했고, 스마트폰까지 뿌려 물자를 보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팍스FC의 영향 밖에 놓인 지역들이 즐비한 상황.

가족이나 지인, 주거지와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무수히 많은 집단이 형성됐고, 유성철의 말처럼 단체를 개설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수망교(修望教)'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대구 쪽 대형 병원들을 통합한 놈들인데······ 팍스FC가 군과 손을 잡고 사람들을 포탈의 제물로 바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더군요."

아예 대놓고 팍스FC와 척을 지는 단체까지 생겨났다.

"그런 헛소리를 믿는다고요?"

"의외로 먹히는 모양입니다. 실제로 전국 곳곳에서 인신공양이 벌어진 사례가 적지 않았거든요."

오래 생각할 것도 아니었다.

쿠데타를 일으켰던 1군단장.

그 같은 녀석이 하나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일종의 신흥 종교 같은 집단입니다. 인간의 삶에 재물은 헛된 것이고······. 모두의 소유가 사라진 지금이 무소유의 때라느니, 상공회의소가 진리의 메신저라느니 하는······."

아무래도 미리 조사를 해둔 모양이었다.

수망교에 관한 정보를 줄줄 늘어놓던 유성철.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게 다 김대령과 국군의 허술한 관계를 지적하는 겁니다! 하루라도 빨리 국군의 소속이 된 다음, 그 소식을 국방일보에 대서특필해야······! 국민들도 비로소 김 대령님의 진심을 깨닫고······."

"아뇨, 그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게거품을 문 유성철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 내가 다시 물었다.

"아무튼, 거기에 힐러들이 많다는 거죠? 의사들은 더더욱 많고요."

"······그렇죠. 대구에 있는 대형 병원 15개가 모두 수망교 소속이니까요."

그들 모두가 수망교도일 리는 없었다.

개인의 사상보다는 생존이 우선시되는 지금,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테니까.

더욱이 지금은 수망교가 대놓고 팍스 FC에 견제를 놓고 있는 상황.

힐러들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한국에서의 세력 균형을 다져줄 필요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무소유'의 교리를 주장하는 집단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가 전해주어야 할 것은······.

"새로운 깨달음을 줘야겠네요."

무소유에 맞선 풀소유였다.

무소유 (3)

096화 무소유 (3)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힐러와 의사들이 보충될수록 한층 더 탄탄한 의료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을 터.

사상자들이 즐비한 아포칼립스 세상답게, 의료 서비스는 식량만큼이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좋은 수단이었다.

치료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회복된 각성자들은 자연스레 팍스FC의 훈련 프로그램을 밟았고, 그렇게 키워낸 팍스맨들은 고스란히 팍스FC의 충성스러운 전력이 되곤 했으니까.

"······지금 같은 시기면 더더욱."

더군다나 우리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르나울이 준비하고 있을 대대적인 '개척 사업'.

나 또한 그에 맞는 방대한 세력을 구비할 필요가 있었으니.

더욱이,

'그것뿐만이 아니지.'

지방의 군소 단체들을 흡수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의의가 있었다.

아공간에 저장한 상공회의소의 유럽 본부.

일본 지부의 상급 기관답게, 새로운 '존재 등록 신청서'를 출력할 수 있었으니까.

팔랑.

나는 가만히 팍스가 출력해준 문서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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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원 존재 등록 신청서 (6위계)

귀하의 존재 등록을 환영합니다.

신청에 앞서, 아래 항목을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존재 등록 발급 준비물 : 본인을 대표로 하는 소속 단체.

존재 등록 발급 조건 : 100개 이상의 산하 단체 (각 1,000명 이상)

본인 : (자필 서명)

▣ 다차원 상공회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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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요구된 조건은 100개의 산하단체.

팍스FC 아래로 100개 이상의 단체를 거느려야 했고, 하나같이 1,000명 이상의 소속원을 필요로 했다.

"마농족, 시카고, 프라하, 엘븐하임······."

현재 팍스FC 산하에 소속된 단체는 서른 개가량.

적은 수는 아니지만, 요구된 100개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물론 소속원들을 잘게 쪼개어 인위적으로 단체를 개설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 수십만에 달하는 마석을 소모해야 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전략은 아니었다.

"역시 그보다는······."

어차피 눈앞에 표적이 있었다.

대구에서만 열다섯 개의 대형 병원을 병합했다는 수망교.

그 밖에 놈들이 산하에 두고 있다는 십수 개의 군소 단체를 포함한다면, 수망교만으로도 최소 서른 개 이상의 단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유독 한국에서 이렇게 우후죽순 단체가 형성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내가 뿌린 씨앗이긴 한데······."

겸손도 과하면 병이라고, 지금 한국은 사실상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었다.

지역마다 설치된 포탈에서 갖은 물자들이 지원됐고, 팍스FC와 연계한 지역 대표들이 잊을 만하면 괴물을 토벌하고 다녔으니까.

이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시기는 지났다.

각성자들은 파티를 이뤄 주도적으로 사냥에 나섰고, 그만큼 적지 않은 마석을 손에 넣고 있었다.

1만 개의 마석이 소모되는 단체 개설.

수십 개의 단체를 거느린 수망교의 발흥에는 알게 모르게 내 지분이 상당 부분 녹아들어 있는 셈이었다.

물론, 본의 아니게 뿌린 씨앗이었지만······.

"이제 거둬들일 때가 됐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 했던가.

지금은 한국에서의 내홍을 정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외세와의 싸움을 대비할 때.

집 안 정리의 일환으로, 산하단체를 잔뜩 거느린 수망교부터 고스란히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어쭈?"

타이밍 좋게, 놈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온 것은.

***

문제가 발생한 지역은 역시나 대구.

환자 이송을 위해 출동했던 큰누나가, 누군가와 대치를 벌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아니, 글쎄 이 미친놈들이······."

우뚝 멈춰 서 있는 팍스FC의 앰뷸런스.

환자를 눕힌 들것 앞에, 흰 가운을 입은 사내들이 길목을 막고 있었다.

"환자를 내놓으라고 하잖아."

큰누나가 부르르 목소리를 떨었다.

한편, 사내들의 가운에는 푸른색의 꽃 모양 배지가 달려 있었다.

일견 선하면서도, 묘하게 광기가 떠올라 있는 얼굴.

개중 한 명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내게 다가왔다.

"유성병원 응급의료센터에서 나왔습니다. 환자는 저희 쪽에서 데려갈게요."

유성 병원.

수망교에 소속되어 있던 병원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대형 병원이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고집을 부리는 그에게 내가 물었다.

"뭔 개소립니까? 애초에 우리 쪽에 구조요청을 한 환자인데."

응급까지는 아닌,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환자.

하지만 들것에 누운 그의 손에는 분명 팍스FC가 보급한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애당초 구조 요청이 없었다면 우리가 차를 몰고 나타날 이유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것은 저세상에 처박힌 수망교도의 논리였다.

"이 사람을 포탈의 제물로 사용할 생각이잖습니까?"

"······뭐?"

"히, 히익!"

제물이라는 말에 누워 있던 환자가 경악했고,

이때다 싶었는지 수망교도가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들이 모를 것 같습니까? 저 포탈을 타고 넘어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을요. 당연하겠죠. 포탈을 유지하려면 사람들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야 할 테니까요."

놈의 뚫린 입 사이로 새어 나오는 음모론.

당연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환자들은 강남 세브란스로 이송됐고, 의료진들은 엘븐하임에서 포로들을 치료하고 있었으며, 각성자들은 팍스FC의 훈련 시설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설명한다 한들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꽤 교묘하게 찌르고 들어오네.'

그들이 대구에 없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으니까.

놈들은 한 방울의 진실 섞인 거짓으로 대구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증거가 없는 한, 의혹은 해명보다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덜컹······!

환자가 겁의 질린 표정으로 들것에서 내려왔다.

다리를 절뚝이면서까지 내려온 것을 보니, 완전히 패닉에 빠진 상태.

수망교도가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중얼 자신들의 교리를 읊어댔고······.

"당신들은 마석을 긁어모으며 강해지는 데에만 혈안이 돼 있죠. 하지만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평화, 치유입니다. 다 함께 소유를 내던지면······."

"얼, 얼른 갑시다!"

되레 환자가 수망교도를 재촉했다.

그들은 즉시 차에 올랐고,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한편, 우리 쪽에게서는······.

"······죽이면 안 되겠지?"

"······."

분노한 김주연 씨께서 내게 싸늘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안 되지. 환자가 괜히 도망갔겠어?"

"제물? 그런 헛소리를 믿는다고?"

"믿지는 않아도 걱정은 되겠지.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는 세상이니까. 좀 허름해도 동네 병원으로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상황이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땅도, 자원도 아닌 사람.

놈들을 잡아 죽인다면 팍스FC의 악명만 높아질 게 분명했고, 그런 방법으로는 힐러와 의사들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뒤를 캐봐야지. 저렇게 남 호박씨나 까는 놈들치고, 깨끗한 놈 못 봤으니까. 마침······."

나는 척하니 손을 가리켰다.

"저분이 뭔가 알고 계실 것 같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허름한 셔츠를 입은 남자.

나도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큰누나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김 간호사."

.

.

.

그의 이름은 이국중.

과거 뉴스에도 자주 나오곤 했던 의사였는데, 큰누나와는 해외 의료 봉사를 통해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팍스FC를 찾아온 건데······ 이렇게 김 간호사를 만날 줄은 몰랐네요."

"정말요. 어떻게 된 거예요?"

이국중은 대구에서 큰 수술을 집도하던 중 멸망을 접했으며,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유성 병원 소속의 의사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팍스FC를 찾아온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약이 필요해요."

"약이요?"

"김 간호사도 알고 있겠지만······ 힐러들이 치료할 수 있는 건 대부분 외상뿐이에요. 여전히 당뇨나 혈관 질환 같은 건 의사들의 영역이고, 약으로 치료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한데, 이 근처 병원에서는 약품이 씨가 마른 상황이에요."

환자들을 치료할 약이 필요하다는 것.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공간에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복사해온 전문의약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수망교가 환자들을 속이고 있어요."

"······속인다뇨?"

"약이 없어 사실상 치료가 중단된 환자들이 태반이에요. 하지만 수망교주는 여전히 치료가 이뤄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있어요."

"아니, 그게 속인다고 속여져요?"

"원래는 못 속이죠. 각성 능력이 없다면."

이국중은 수망교주가 '마취'와 관련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단순히 통증을 무마해주는 식으로 환자들의 치료를 가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마당에 CT가 있겠어요, 초음파가 있겠어요? 그저 통증이 사라졌으니 나은 거구나 하는 거죠. 그러고 나서 수망교 소속 병원에 가면 병이 잘 낫더라, 수망교주 말만 잘 들으면 되더라 하며 돌아다니는 거예요. 고통 없이 웃으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거지요."

사실상 진통제만 들입다 부어버리는 격.

놈들의 종교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멸망을 담담히 받아들이라는 식의 패배주의적 사상.

밑도 끝도 없이 명상과 평화를 강조하며,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마비를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내가 교수에게 대답했다.

"약이야 공급해 드려야죠. 하지만 환자들에게 약을 쥐여주려면 병원들부터 먼저 점유해야 할 것 같은데요."

"병원들이 팍스FC 소속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습니다만······."

고개를 끄덕인 이국중 교수.

그가 걱정스럽다는 듯 덧붙였다.

"무단으로 점거한다면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환자들은 물론이고······. 힐러나 의사 중에서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

"아유, 걱정 마세요. 평화롭게 해결할 겁니다."

이번 사태를 통해 한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물자 보급, 구조 활동, 거기에 인재 양성까지.

아낌없이 먹여주고, 재워주는 팍스FC였지만, 세계를 이끌 진정한 구심점이 되기 위해서는 딱 하나 더 필요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팍스FC만의 철학이 있어야지.'

아등바등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눈앞의 멸망을 주도적으로 타개하고, 사태의 원흉인 상공회의소와 맞서 싸울 의식.

무한 보급의 수혜에 기반한 '풀소유'의 의식이 필요했으니까.

조금은 막연한 이야기였을까?

큰누나가 내게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되도 않는 누명을 씌우고 있다며? 우리도 해명할 건 해야지."

하나하나 설명하면 될 것이다.

아공간 포탈은 사람을 물지 않는 착한 포탈이며, 우리는 쌀과 연탄을 나눠주는 자선활동을 하고 있고, 팍스맨들이 외계인들을 무찌르는 애국지사들인 반면 수망교는 외세에 들러붙은 매국노 찌질이 사기꾼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런다고 믿어줄까?"

큰누나가 의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믿을 수밖에 없을 거야. 실로 '몸에 와닿게' 전해줄 거거든."

나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그 말을 전하는 건, 다름 아닌 버프/디버프 능력을 갖춘 리디아가 될 테니까.

병원 사람들에게 풀소유와 무소유를 둘러싼, 천당에서 나락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급류를 몸소 체험하게 할 작정이었다.

"뭐, 다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문명생활의 보배.

그리고 낭랑한 목소리를 따라 요동치는 디버프와 버프의 파도.

그건 일종의 종교적인 체험에 가깝지 않을까?

"좋든 싫든 우리 팍스FC를 사랑하게 될 거야."

무소유 (4)

097화 무소유 (4)

이곳은 수망교 소속의 유성병원.

8인 병실에는 환자와 힐러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저마다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은 밥 나온대요?"

"그제 준 거 마저 먹으라던데요. 이럴 줄 알고 남겨두길 잘했지."

대답한 남자는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건빵 봉지를 꺼냈다.

잔뜩 구겨진 봉지 아래로, 이제는 바닥을 보이는 건빵.

허기에 몸부림칠 만도 했지만, 어쩐지 병원 사람들은 잠잠하기만 했다.

"참아봐요. 생각 안 하면 배 안 고파요."

비단 식사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

아무리 바깥보다야 안전하다지만, 얼룩진 환자복과 침대 시트, 거기에 씻지 못한 환자들의 체취가 어우러져 병원에는 한가득 악취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몇 주 전만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병실마다 한두 명쯤은 적극적인 사람들이 있었고, 종종 밖에서 구해온 식량을 나눠주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부질없는 연명보다는 마음의 평화가 더 중요하지요."

"암요, 암요."

그마저도 활동도 접어버린 채, 모두 남은 여생을 침대에 눌러앉기로 결정해버렸다.

움직이는 건 수망교에서 직접 구성한 소수의 활동원이었고, 상당수가 각성자들인 이곳 병원의 환자들은 이따금 제공되는 식량, 그리고 수망교주의 명상 프로그램을 위해 가지고 있던 마석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모두 덜어내고 나니,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주머니에 마석 하나라도 있었어 봐요. 하나를 벌었으니, 이제 두 개가 돼야 하고······ 그렇게 끝도 없이······."

철저한 무소유의 실천.

방금 전만 해도, 병원 방송을 통해 수망교주의 명상이 진행된 참이었다.

덕분에, 뻣뻣한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간 옆 병실 최 씨의 죽음에도 덤덤할 수 있었고, 허기짐, 찌는 듯한 더위, 씻지 못한 몸에서 느껴지는 찝찝함을 어렵지 않게 견뎌낼 수 있었다.

그렇게, 양 볼이 수척한 병원 사람들이 저마다 침대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수망교주의 명상을 떠올리기 시작했을 즈음······.

-치익! 치익!

병실 방송 스피커에 불이 들어왔다.

"어라?"

의아한 일이었다.

기름 발전기를 돌려 가동해야 하는 병원 방송실.

에너지 절약과 환경보호라는 명목하에, 오로지 수망교주의 명상 시간에만 방송이 켜지곤 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망교주가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친애하는 생존자 여러분. 팍스 FC입니다.

"······팍스?"

한국의 유통업계를 섭렵했던 대기업의 이름.

하지만 무상교주는 팍스FC가 무소유의 평화를 깨뜨리는 번뇌의 원흉이라 지목한 바 있었다.

당연하게도, 병실 사람들은 팍스FC의 등장에 한껏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마구니야, 마구니······!"

"수망······ 수망······."

애써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들.

사실 팍스FC에 특별히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식량을 보급해준다는 이야기가 그들의 번민을 일으키곤 했고,

그로 인해 마취가 풀리는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괴로움이 찾아들곤 했으니까.

하지만······.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수망교주님의 명상 2부 시간으로, 여러분께 무소유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응?"

팍스FC가 대뜸 '무소유'를 긍정하기 시작했다.

젊은 여성의 낭랑하면서도 맑은 목소리.

'좋은 말씀'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쾌청하게 흘러들어왔기에,

조금씩 긴장을 누그러뜨린 사람들이 천장에 달린 스피커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제 무소유의 평안을 찾을 시간입니다. 모두 창밖을 확인해주세요.

"창밖?"

병실, 로비, 심지어는 당직실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ㄷ'자 모양으로 세워진 병원 건물과 중앙에 놓인 지상 주차장.

그들이 마주한 것은······.

"히······ 히익!"

거대한 크기의 아공간 포탈이었다.

모두가 겁을 집어먹었다.

팍스FC가 사람들을 포탈의 제물로 사용한다는 소문.

모두가 그 소문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겁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아공간 포탈은 그들 모두를 집어삼킬 듯, 장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후두두두둑.

후두둑.

사람들을 집어삼키기는커녕, 포탈은 되레 미친 듯이 물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쌀, 라면, 생수, 거기에 갖가지 가공식품들까지.

산더미처럼 쌓인 식량에 텅 빈 건빵 봉지를 부스럭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오래지 않아, 팍스FC의 '좋은 말씀'이 시작됐고,

-양은 냄비에 팔팔 끓인 라면을 떠올려 보세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운데, 이불처럼 덮인 계란 사이로 면을 건져 올리면, 탱글한 면에 뜨끈한 국물이 묻어나옵니다. 한 젓가락 크게 덜어, 국물을 몇 숟가락 끼얹어 주고, 저기 주차장에 나뒹굴고 있는 싱싱한 종갓집 김치를 한 팩 뜯어 얹어주면······.

"아아······!"

"아······!"

꿀꺽.

굶주린 사람들의 마음에 '마구니'가 끼기 시작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식사에 관한 소박한 찬미.

또렷한 목소리와 함께 전해지는 버프가 병원 사람들의 식욕을 자극했다.

"하······ 한 봉지만······."

주차장에 널브러진 수천 개의 라면 봉지를 보며,

누군가 무심코 침을 흘렸을 즈음······.

-이 모두가 번뇌를 만드는 법이죠. 자, 우리는 다시 무소유로 돌아갑니다.

슈와아아아아악!

주차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식량들이 일순에 포탈로 빨려 들어갔다.

'소유'에서 '무소유'로의 적나라한 전환, 다시 말해 '상실'을 보여주기 위해.

"허억······!"

"끄흐으으윽!"

병원 사람들이 터질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리디아가 '무소유'라는 단어에 실어놓은 강력한 디버프.

그 번뇌가 사람들의 감정을 나락까지 끌어 내렸다.

심지어는······.

-여러분, 번뇌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어엇!?"

'좋은 말씀'은 계속되고 있었다.

다음 포탈에서 나타난 것은 커다란 샤워 시설.

쏴아아아······.

곳곳에 매달린 샤워기로부터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고, 주변으로 샴푸와 바디워시, 면도기를 비롯한 세면도구들이 텅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물이다······!"

"칫솔도 있어!"

다시 시작된 버프.

마취의 몽롱한 기운이 신선한 바람과 함께 씻겨 날아가는 가운데, 모두가 자문했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씻어본 게 언제였던가?

그제야 느껴졌다.

며칠 내내 흘러나온 땀이 소금처럼 몸에 절여져 있다는걸.

살갗이 닿을 때마다 쩍 하며 달라붙는 감촉이 불쾌하다는걸.

절규하듯 오소소 올라온 땀띠가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이 또한 신기루였다.

샤워장이 눈 깜짝할 사이 포탈로 빨려 들어갔고······.

"아아아아!"

"안 돼애!"

'무소유' 체험은 계속됐다.

포탈은 데구루루 바닥을 구르던 클렌징폼 하나 놓치지 않았고,

주차장에는 텅 빈 절망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흐으으으윽!"

"크흐으윽! 그만해애애!"

이제는 눈물로 호소하는 병원 사람들이었지만······.

-여러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승의 하찮은 쾌락으로는 열반에 이를 수 없으며······.

무소유의 현자, 팍스FC는 멈추지 않았다.

두꺼운 갑옷을 걸친, 푸른 눈의 외국인들.

그들 열두 명이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를 들고 나타났고, 기다란 테이블에 갖은 물건들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치이이······.

달그락!

보글보글······.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누군가 뜨겁게 달아오른 불판에 커다란 고기를 얹었고, 누군가 채반에 깨끗하게 씻은 쌈 채소를 올려두었으며, 그 옆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솥 뚜껑이 열렸고, 또 누군가는 보글보글 끓인 두부 된장국 위로 칼칼한 고추를 썰어 넣었다.

"······."

"······."

마취 상태에 빠져 있던 병원 사람들.

팍스FC는 그들의 어깨를 수천 번 들었다 놓고 있었고,

수망교주의 마취는 탈골된 어깨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적나라한 '무소유'의 현실.

그 현실이 사람들의 욕망에 불길을 집어넣고 있었다.

"무소유······."

"족까!"

우르르르르르!

무소유의 '무'자만 들어도 입에서 거품이 나왔다.

다시 욕망의 주인이 된 병원 사람들.

그들이 팍스FC의 포탈을 향해 쇄도했다.

***

사람들은 알아차렸다.

고귀한 결단이 아닌, 막연한 명상과 평화로 덧칠된 무소유.

욕망을 거세당한 채, 마취에 사로잡힌 죄수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리디아의 버프/디버프와 아공간의 물자들이 그들의 마취를 풀어버렸다.

그러곤 더덩실 춤을 추며 '풀소유'를 연호하는 그들에게 교주의 진실을 들려주었다.

"······치료되던 게 아니었다고?"

"잠깐만, 그럼 우리 어머니는······."

그저 허울에 불과한 병원과 치료.

수망 교주의 마취로 통증을 걷어내며, 오히려 병을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리고 자신뿐만이 아닌, 가족과 지인들이 그 당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결과······.

"이미 죽었다고 합니다."

작전본부장 유성철이 전해온 소식.

실로 사이비 교주다운 말로였다.

최측근이던 간부 하나가 손수 수망교주의 숨을 끊었다고 했으니까.

덕분에 단체 '수망교'가 공중분해 되어 버렸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병원 쪽 단체 대표들은요?"

"빠짐없이 포획했다고 하더군요."

그 산하에 있던 병원과 단체들을 빠짐없이 흡수한 상태.

이참에 아예 강남 세브란스와 더불어, 힐러나 의사들의 관리를 큰누나에게 일임할 생각이었다.

내가 말했다.

"쌍방으로 잘됐네요. 엘븐하임에는 힐러들이 필요하고, 여긴 약재가 필요한 상황이니······."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생존자가 늘어나게 될 상황.

수망교가 환자를 가려 받은 덕이다.

상당수가 각성자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팍스FC의 전력으로 흡수될 터였다.

그 업적을 치하하려는 듯, 유성철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화롭게 해결해서 다행입니다. 충돌이 있었다는 소식이 돌면 다른 군소 단체들도 겁을 먹었을 테고요."

그의 말대로였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그저 '풀소유'의 가르침을 설파하며, 물자를 풀어놓았을 뿐.

유성철이 그간의 고충을 토로하듯 덧붙였다.

"사실, 그동안 군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단체들이 워낙 많았습니다. 하지만 팍스FC를 인정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공권력이 미칠 수 있는 영역도 점점 많아지겠죠."

그의 소원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재건.

그 목표를 위해, 지금까지도 내게 끈질긴 추파를 던지고 있었지만······.

"언제 팍스FC로 들어오실 겁니까?"

"······예?"

이번에는 내 쪽에서 물었다.

명실상부한 동맹이라 볼 수 있는 합참본부.

하지만 이제 그들이 나를 품는 게 아닌, 내가 합참본부를 품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곧 바르나울이 공격해 올 겁니다. 그 전에 아발론을 끌어와야 하고요."

우리는 이미 전 지구적인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적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팍스FC 또한 동맹을 가리지 않았다.

중국, 일본, 미국과 유럽, 거기에 엘븐하임까지, 팍스FC의 세력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었으니까.

한국에서의 집안 살림을 도와주는 합참본부의 노력은 고마운 일이지만, 슬슬 서로의 방향성을 합쳐둘 필요가 있었다.

"본부장님, 한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하지만 합참본부는 국가기관입니다. 아무리 명목상이라곤 하지만······."

국가와 기관, 그리고 기업의 관계.

그 틀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유성철이었지만, 그에게 나는 새로운 꿈을 불어넣어 주었다.

"뭐······ 팍스FC가 세계 정부 같은 거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요?"

국가를 포괄하는 초 국가적 물류센터.

대한민국의 합참본부쯤이야 넣고도 남을 만한 그릇이었으니까.

유성철의 눈이 빛났다.

문화 강국 (1) (수정)

098화 문화 강국 (1)

콰아아앙!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와 함께, 조각상이 쓰러졌다.

한국에서의 상황을 마무리 된 다음이다.

나는 유럽에서의 상황 정리를 돕는 겸, 바르나울의 흔적을 찾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더 이상 파리에는 루브르가 존재하지 않았다.

아공간으로 함께 딸려 들어온 카후젤 개선문과 정원.

이제 그 자리에는 움푹 파인 직사각형 모양의 빈 공간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비스듬한 경사로 이루어진 기다란 공간,

"으랴!"

꽈아아앙!

후드득!

그 끝을 향해 김솔이 기합과 함께 볼링공을 던졌고,

아랫목에 깔아 둔 열 개의 '비너스 상'을 단번에 박살 났다.

몇 차례 휘청거리며 끝끝내 버티던 마지막 비너스 상이 마침내 쓰러졌고,

김솔이 씨익 웃으면 내게 말했다.

"리필!"

"······."

일종의 '근력 훈련(?)'의 일환이었다.

사람 크기의 조각상을 대상으로 한, 투포환 볼링.

나 또한 자동 볼링 머신에 빙의하여, 틈틈이 열 개의 비너스 상을 삼각 대형으로 세워주고 있었다.

태평하기 짝이 없는 그녀와 달리······.

'쉽지 않네.'

사실 나는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 있었다.

특히, 통폐합으로 아발론을 지구로 끌어오는 계획에 관해서.

'······가능하다면 바르나울이 들어오기 전에 하는 게 좋은데.'

기사들의 고향을 되찾아주는 것이 가장 첫째 되는 목표였지만, 아발론은 바르나울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사업장 중 하나이기도 했다.

놈들의 보급창고 하나를 빼앗은 채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을 테니까.

물론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상황.

지금도 팍스가 아발론의 좌표를 찾기 위한 계산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성장 등급이라······."

통폐합.

여기에는 상공회의소가 부여해놓은 특별한 조건이 있었다.

모 차원의 등급이 통폐합 차원의 등급보다 낮을 수 없다는 조건.

간단히 말해, 지구가 아발론보다 더 높은 평가 등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현재 지구의 등급은······.

[CCC+]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입찰 경쟁 직후 [CCC]로 격하된 이래, 겨우 한 계단 올라간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내심 억울한 기분이었다.

"······아니, 양심이 있어야지. 그렇게 처맞아 놓고도······?"

강함을 척도로 하는 것이 아니었나?

이미 상공회의소를 비롯한 외계 깡패들을 여러 번 후두려 팬 우리다.

초고속 승진을 예상했음에도, 정작 까 본 인사고과에 내일 짤려도 이상할 게 없는 성적이 기록된 셈이었다.

그때, 김솔이 손가락 위로 빙빙 볼링공을 돌리며 다가왔다.

"아니지, 아우야. 실력이 다가 아니란다."

"······다가 아니면?"

그러곤 회전하는 볼링공을 휙 하니 어깨에 얹어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간지! 간지가 있어야 하는 거야. 지금 스탯은 좋은데 정작 등급이 F따리라는 소리 아니냐. 실력은 있는데 듣보잡이라 평가절하당하는 거지. 나는 간지가 보충되면 해결될 문제라고 본다."

"음······."

게임 용어를 동원해 상황을 반추하는 김솔.

얼핏 들으면 개소리였고, 실제로도 개소리가 맞았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깡촌, 변방, 촌놈, 냄새나는 뭐시기.

하나같이 외차원 놈들이 우리를 부를 때 썼던 표현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다차원의 입장에서는 지구가 아주 불모지에 가까운 모양.

흥미로운 해석이었다.

어쩌면 바로 그 '명성'이라는 것이 평가 등급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일지도 몰랐으니까.

"바깥으로 이미지를 좀 쌓아야 한다는 소리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이 있나?"

"그건 세계 총통 각하께서 알아서 하셔야지. 낄낄."

"······."

유성철의 소행이었다.

나로 인해 세계 정부의 꿈을 키우게 된 그.

열기구처럼 허파에 바람을 집어넣고는 세계 정부를 건설하겠다며 설레발을 치고 다녔고, 김정겸 대령께서 초대 총통이 될 거라는 소리에 가족들이 나를 각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안에서 세계 정부면 뭐하냐고. 밖에서 찐따인데."

물론 아직 지구에서도 많이 할 일이 남아 있었지만,

당장으로서는 아발론을 되찾고 바르나울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확실히 쉽지 않아.'

하지만 어떻게 지구가 그런 '유명세'를 얻을 수 있을지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구애의 춤사위를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려던 찰나······.

"······응?"

비너스 상을 향해 공을 던지던 김솔이 우뚝 자세를 멈춰 세웠다.

부서진 조각상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간 우리는 조각상의 부서진 조각을 만지며 서럽게 울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끄흐흐흐흑! 흐흐흐흐흑!"

'······얜, 또 뭐야?'

딱 봐도 지구의 종족이 아니었다.

수달과 몹시 흡사한 외양이기는 했지만, 세상에 실크 셔츠를 입는 수달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한쪽 눈에는 금색의 외눈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똑똑.

빳빳한 털 사이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수달.

녀석이 한껏 붉어진 눈으로 우리에게 소리쳤다.

"왜! 대체 왜 부수는 거야!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을!"

"······?"

"이러니 등급이 그따위지!"

찾은 것 같았다.

우리 푸른 별 지구의 진가를 알아줄 존재를.

***

"히흑! 히흑!"

아직 울음이 가시지 않았는지, 거칠게 숨을 말아 쉬는 수달.

녀석이 짧은 팔을 버둥거리며, 튀어나온 주둥이까지 고등어를 툭하니 집어 올렸다.

[국내산 순살 고등어, 100g, 8개입, 가격은 16,190원입니다.]

수달의 이름은 해리스.

녀석은 자신을 다차원 언론 '에코스'의 예술부 기자라고 소개했다.

다차원 언론 에코스니, 예술부 기자니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놈이 눈물까지 쏟을 만큼 지구의 예술에 진심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별다른 전투 능력은 없었다.

대신, 고위계의 척력을 두르고 있는 놈이었지만······.

"저기, 근데 이거 풀어주시면?"

"안돼."

지금은 두 발이 묶인 채, 인어공주 같은 자세로 생선을 받아먹을 뿐이었다.

"그보다······ 아까 하던 이야기 좀 마저 해봐."

내가 물었다.

부서진 비너스상에 이성을 잃었던 해리스.

녀석이 이미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터였으니까.

해리스는 침략자도, 그렇다고 마농족 같은 난민도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목적을 갖고, 상공회의소로부터 임시비자를 발급받아 지구로 방문했다.

그리고······.

"······지구가 불바다가 되기 전에 미술품 좀 챙겨가려 했다는 거요?"

"아니, 등급 이야기 한 거 말야."

공교롭게도, 녀석은 지구의 평가 등급을 올릴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앞발로 수염을 털어낸 해리스.

녀석이 기억을 되짚으며 대답했다.

"좋은 작품이 있다면, 그걸로 다차원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 수 있어요. 자연스레 지구의 이름값도 올라갈 테고······ 상공회의소의 평가 등급에도 영향이 가겠죠."

해리스는 지구의 평가 등급과, 개척 규제는 무관하게 적용된다고 덧붙였다.

등급이 오른다 해서, 갑자기 3위계, 4위계에 달하는 괴물들이 지구에 들어올 일은 없다는 소리.

오히려 지구와 협력을 원하는 차원들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고.

"그럼 이거라면······ 등급이 얼마나 올라갈까?"

나는 곧장 새 물건을 꺼내 들었다.

라는 제목의 조각상.

드높게 높게 치켜든 팔이 일품인 고대 그리스의 물건이었다.

"오······."

역동적인 조각상의 자태에 해리스는 내심 감탄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도움은 되겠지만······ 하지만 작품 하나만으로 바로 등급 상승까지는······."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거지?"

나는 즉시 노선을 변경했다.

기존 작품을 중첩하고, 섞고, 살을 덧붙여 보기로.

이참에 아예 제대로, 스케일을 키워볼 생각이었다.

"이게 사실 어떻게 돼 있는 작품이냐면······."

아공간에서 출하된 싱싱한 고등어를 얻어먹은 해리스.

내게 일종의 인벤토리 능력이 있다는 건 예상했겠지만, 정작 사물까지 복제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더욱이 내가 그걸 통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설치 미술'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도.

제목을 바꿨다.

에서, 로.

밋밋한 땅덩어리 위로 조각상들이 수백 개로 불어났고, 고고한 자세를 뽐내는 것만 같던 검투사의 모습은 어느덧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검투사들의 생생한 장면으로 순식간에 전환됐다.

"······."

조금씩 말을 잃어가는 해리스.

하지만 이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싸움에 휘말린 포로라도 되는 것일까?

몸을 베베 꼬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상을 비극적으로 진열했고,

중간 지점에 을 세워, 성난 파도처럼 억압을 뒤집고 일어나는 노예들의 모습을 급진적으로 연출했다.

"흐으으······ 흐윽······."

조금씩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해리스.

속속들이 나타나고, 또 연결되는 조각상들은 한 편의 장엄한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다.

촤아악! 촤악!

이제 마지막이었다.

저 멀리 배를 타고 들어오는 승리의 여신 를 발견했을 때에는······.

"······."

해리스의 솜덩이 같은 입이 쩍 하니 벌어져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앙증맞게 발을 버둥대는 녀석.

밧줄을 풀어주자, 녀석이 꼬리를 펄떡이며 경이에 찬 눈으로 조각상을 눈에 담았다.

짧은 손을 움찔거리며, 터져나올 듯한 탄성을 애써 막아보려는 듯했지만······.

"흐흐흐흐흑! 흐으으윽!"

애써 참은 감탄이 되레, 물줄기 같은 눈물로 펑펑 터져나왔다.

지구가 불바다가 된다면, 틀림 없이 작품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테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이 사라져야 한다니! 흐흐흐으윽! 끅!"

해리스가 전해준 소식은 비단, 등급 상승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녀석도 바르나울과의 전쟁이 곧 시작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고, 사라질 예술품들을 미리 보존하기 위해 이곳 지구에 찾아온 에코스의 예술 기자였으니까.

덕분에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한 달 뒤, 바르나울이 지구 땅을 밟을 것이며, 거기에는 6위계에 달하는 흑마법사들이 열 명이나 포함될 것이라는 소식을.

밑도 끝도 없이 지구의 패배를 예상하는 녀석이었고, 그래서 울음도 터뜨린 것이겠지만······.

작품에 대한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제가 기사를 쓰겠습니다. 이 정도 작품이라면 호사가들이건, 수집가들이건 엉덩이가 들썩일 거예요."

결국 펜을 들었으니까.

특별히 조건도 덧붙였다.

아직 충분히 자립하지 못한 지구이니만큼, 예술에 호의적인 차원들을 선별해 선택적으로 기사를 배포해주겠다고 나섰다.

침략에 별다른 관심이 없거나, 중립을 지키는 차원들을 위주로.

"그것만으로도 등급 상승에는 충분히 도움이 될 겁니다. 이런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이라면 분명······ 따흐흑!"

조각들로부터 차마 눈을 떼지 못하는 해리스.

그 격한 반응에, 나 또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스펙터클하게 연출이 될 줄이야.'

하나만 보여줬을 때 비하면, 그 반응이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원작가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것저것 뒤섞이며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들어버린 셈.

그래도 덕분에, 감화된 해리스가 지구의 안위를 위해 직접 발 벗고 나서고 있었다.

'이제 평가 등급 쪽은 어떻게든 되겠네.'

아발론을 끌어당기기 위한 조건 하나가 충족된 상황이었지만,

한 가지 더, 반드시 준비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6위계 흑마법사 열 명이라······.'

얼추 놈들의 전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맞붙었던 가츠가 6위계를 두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비껴버리는 놈들의 환각이 문제였다.

물론, 기사들의 오러를 이용한다면 그 환각을 파훼할 수 있을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열 명은 좀······.'

카멜롯의 기사들만으로는 그 많은 환각을 깨뜨릴 수 없었다.

그러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팍스FC에 더 많은 '오러 유저'들이 양성되어야 하는 것은.

란슬롯을 비롯한 기사들을 훈련 교관으로 삼고, 팍스맨 중 신체 각성자들을 선별하여 집중적으로 교육을 진행해볼 작정이었다.

일단은······.

"아뵤!"

"아아아아악! 안 돼애!"

콰드드득!

저기, 저 비너스 상을 박살 내고 있는 격투기 캐릭터부터.

공동 묘지의 공집합 (1)

099화 공동 묘지의 공집합 (1)

틱틱!

부드러운 가죽 소파가 놓인 물류센터의 한쪽 구석.

77인치 OLED TV 앞으로, 김솔이 바쁘게 컨트롤러를 누르고 있었다.

화면 중앙에 담긴 것은 바쁘게 초원을 내달리는 한 명의 중세기사.

그런 그의 앞으로, 거대한 몸집의 중장기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히힝!

마갑을 두른 말이 거칠게 앞발을 치켜들었고,

후우우웅!

얼마 지나지 않아 반월 같은 할버드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틱! 틱!

버튼을 누를 때마다, 캐릭터가 쉴 틈 없이 바닥을 굴렀다.

그러곤 적의 무거운 움직인 사이사이로 부지런히 칼날을 찔러넣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도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

비장한 음악과 함께, 김솔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올 즈음······.

"시간을 정확하게 재야 합니다. 적의 준비 동작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가속해 들어오는 타이밍까지 계산에 둔다면······."

"에이! 거기선 앞으로 굴렀어야죠!"

후우우욱!

후우욱!

카멜롯의 망령들이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아! 내가 알아서 한다고!"

쉬지 않고 로테이션으로 들어오는 망령들의 훈수.

김솔이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두둥실 떠오른 란슬롯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일 뿐이었다.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주군께서 신신당부하셨으니까요. 김솔 님께서도 오러를 개화하셔야 한다고요."

"자, 잠깐만! 안 보이잖아!"

내력은 꾸준한 훈련을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내력은 깨달음의 경로를 통해 오러로 발현된다.

문무를 겸비해야 다다를 수 있는 오러 유저의 길.

기사들이 김솔에게 24시간 내내 들러붙은 것 또한, 다름 아닌 그 길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아악! 김정겸!"

싸늘한 시체가 된 캐릭터를 보며 게거품을 무는 김솔.

하지만 아무리 팔을 휘둘러봐도, 망령이 된 기사들은 연기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백여 명에 달하는 손님들이 아공간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오······ 왔어?"

부상이 완치된 백민우, 세브란스 병원의 송현구, 훈련 프로그램을 이수한 여하의 각성자들까지.

모두가 바르나울과의 싸움을 대비하기 위한 팍스FC의 전력이었다.

10명이나 되는 고위 흑마법사들을 상대하기엔, 카멜롯의 기사들만으로는 그 수가 모자랐으니까.

"다들 따라오시죠."

물론, 머릿수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흑마법사들을 타격하기 위한 두 가지 열쇠는 오러와 정교한 합공.

상당한 수준의 훈련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함께 합을 맞춰볼 만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했다.

내가 준비한 것은······.

"······이곳입니까?"

"뭔가 썰렁한데······."

아공간에 설치된 텅 빈 방.

희고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이 공간은 다름 아닌 아공간 이었다.

나는 잠시 상태창을 띄워, 실험실 능력에 관한 정보를 확인했다.

띠링!

---

◈ 아공간 실험실 (3)

-외부에서 식별된 대상을 홀로그램으로 형상화할 수 있습니다.

-형성된 홀로그램을 대상으로 모의 시뮬레이션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 단, 대상에 대해 확인된 정보만 시뮬레이션에 반영됩니다.

---

'식별된 대상'은 두말할 것 없이 가츠.

그리고 그가 다른 흑마법사들과 펼쳤던 흑마법이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지만."

이미 몇 시간 전,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츠의 모습을 재현해 본 터였다.

대상에 대해 '확인된 정보만'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는 실험실 능력의 한계.

내 인지 능력을 벗어났던 탓인지, 시뮬레이션을 통해 재현된 환각에서는 듬성듬성 새카만 구멍이 드리워져 있었다.

더욱이······.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듯, 란슬롯이 덧붙였다.

"흑마법사들마다 환각을 만들어내는 고유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들어올 흑마법사들 모두 저마다 다른 패턴을 가지고 있겠죠."

창의성까지 겸비한 바르나울의 흑마법사들.

놈들이 어떤 환각을 들고나올지는 미지수였으니까.

이것저것 제약이 많은 홀로그램 훈련이었지만······.

"······그 점을 모두 감안해도 놀랍습니다. 바르나울을 상대로 한 모의 훈련이라니요. 다차원을 통틀어 이런 훈련이 가능한 곳은 주군의 아공간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바르나울은 워낙에 베일에 싸인,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한 놈들이었다고 하니까.

"각각 열 명씩이면 된다는 거지?"

"예. 6위계 흑마법사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그 이상의 매듭을 만들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애초에 그만해도 상당한 수준이고요."

곧장 실행으로 이어갔다.

김솔과 민우를 비롯해, 비슷한 전투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한 조로 구성했고, 실험실 홀로그램을 이용해 가츠와 휘하에 있던 하급 흑마법사들을 재현했다.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우뚝 서 있는 흑마법사들의 모습.

한 조로 구성된 열 명의 각성자가 대열을 갖추었고, 망령이 된 기사들이 홀로그램과 팍스맨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세세한 위치와 자세를 교육했다.

후웅! 타악!

스릉!

일제히 주먹과 칼을 휘두르는 팍스맨들.

마치 율동이나 체조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고······.

"아발론에서는 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바르나울에 맞서기 위해 고안했던 전투 방식이었죠."

실제로도 그런 맥락이 포함돼 있었다.

직접 타격하기 위한 것이 아닌, 본체를 추적하기 위한 예비 공격.

알면서 모르듯이, 모르면서 알듯이.

바르나울의 환영을 가르는 그 공격에는 라는 이름이 썩 잘 어울렸으니까.

바르나울의 환각 앞에서, 압도적 힘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속이는 자와 그 속임수를 추적하는 자.

양자 간의 치열한 수 싸움만이 남아 있을 뿐.

우리 쪽에서도 철저한 준비를 갖춰가는 중이었지만······.

"주군, 문제가 있습니다."

30분 가량이 흘렀을 즈음, 훈련을 주관하던 란슬롯이 돌연 내게 돌아왔다.

"뭔데 그래?"

"흑마법사들을 상대로 훈련하는 건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다들 도무지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고 있어요."

그를 따라나섰고, 한창 훈련이 진행되고 있는 실험실의 풍경을 내다봤다.

"······너무 끌려다니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시시각각 흩어졌다 돌아왔다를 반복하는 흑마법사들의 모습.

기사들이 오러를 피워 흑마법사들의 보랏빛 실선을 드러내주고 있었지만, 다들 속임수를 파훼하기는커녕 날아다니는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할 따름이었다.

"반응속도가 부족합니다. 매시간 패턴이 변하는 환각이니만큼, 처지지 않고 따라붙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고 있어요."

"이런······."

저마다 각양각색의 각성 능력을 가지고 있는 팍스맨들.

하지만 신체가 강화되고, 무기 숙련도가 얻는다 한들, 완벽히 모든 영역을 초월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환영들의 움직임을 읽어낼 만한 동체시력, 그리고 그에 맞춰 스텝을 밟고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순발력은 각성 능력과는 별개의 영역이었으니까.

동체 시력과 순발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 케이스는 단,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카멜롯의 기사들처럼 살아생전 뼈를 깎는 수련을 했거나······.

"······지금으로선 김솔뿐인가?"

"그렇습니다. 벌써 오러까지 개화했더군요."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거나.

"으으음······."

곤란한 상황이었다.

싸움 내내 우리를 귀찮게 했던 바르나울의 환술.

이번엔 열 배로 놈들에게 끌려다니게 생겼으니.

그렇게 고민에 잠겨있을 즈음,

"음?"

밖으로 이어진 포탈로부터, 누군가 입장을 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들어왔다.

위치는 베이징.

수십 명에 달하는 방문자들의 정체는······.

"······운양?"

영약을 찾으러 떠났던, 중국의 무림인들이었다.

.

.

.

곧장 포탈 밖으로 나가 그를 마중했고, 우리는 웃는 얼굴로 포권을 주고받았다.

"무용담은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정겸 대협."

운양을 직접 보는 것은 꽤 오래간만이었지만, 사실 베이징과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아온 터였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듣기로는 운남에서 좋은 일이 있으셨다고······."

"하하, 예, 물론이죠. 이겁니다."

그가 검게 칠이 된, 작은 목함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안에는 금실 자수가 박인 붉은색 손수건이 덮여 있었는데, 손수건을 걷어내니 동글동글하게 말아놓은 새카만 영단 두 알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한 알은 제가 먹어봤습니다. 한데 이게 참······."

"무슨 문제라도······?

"아뇨,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다만 소모품이라서 문제죠."

보통은 내공을 증진시켜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영약.

하지만 운양은 아쉽게도 그 정도 단계의 약은 아직 구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영약을 만들 수 있는 각성자가 아직 충분한 레벨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건 청심단이라는 이름의 단약인데, 기와 혈맥을 깨끗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다만 그 효과가 일시적이라 저도 정겸 대협이 가장 먼저 떠오르더군요."

"기와 혈맥이라면······. 정확히 어떤 효과가 있다고 보면 될까요?"

"무공을 사용하는 제 입장에선 기감이 예민해지고, 대응도 한결 빨라지더군요."

예민한 기감과 대응.

동체 시력과 반응 속도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바르나울의 환각 앞에서 거북이처럼 처진 팍스맨들을 보고 나온 터였으니까.

"그것참 잘됐네요. 마침······."

나는 운양에게 우리가 바르나울이라는 흑마법사들의 차원과 싸우고 있으며,

놈들의 환각을 뚫기 위해 각성자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예민함과 민첩성이 필요해진 시점이었다고 덧붙였다.

다행히 영약은 의약품 카테고리를 통해 수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더욱이 아공간에 저장한 채 무한히 복사하게 된다면, 소모품이라는 청심단의 약점 또한 보완할 수 있게 될 터였다.

"그거 잘 됐군요! 청심단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운양 또한 반색하며, 내게 협력을 다짐했다.

"저희도 손을 보태겠습니다. 공교롭게도 무림인들이 제법 칼을 쓰니까요."

씨익 웃으며, 농을 건네는 운양.

든든한 지원군의 등장에, 조금은 어깨가 가벼워지려던 찰나.

어느덧 표정을 굳힌 그가, 내게 한 가지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협. 사실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중국 본토 쪽에 균열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균열이요?"

"예, 처음에는 단순히 괴물들이 나타나는 평범한 스팟이라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보기엔 그 크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게이트 포탈이냐하면 그건 또 아니었고요."

"······위치는요?"

일단은 신중해지기로 했다.

머지않아 바르나울의 침공이 시작될 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놈들이 밀려 들어온다면 꽤나 골치가 아프게 될 테니까.

하지만······.

"병마용(兵馬俑)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위치를 전해 듣자마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바르나울의 소행일 수밖에 없다는걸.

"물론······ 들어봤죠."

진시황의 무덤 근처에 위치한 유적지.

흙을 구워 만든 수천 명의 토병이 잠들어 있는 동시에, 실제로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생매장 당했다고 전해지는 끔찍한 장소였다.

다른 세력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시체와 골동품, 바르나울이 사랑하는 모든 재료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차라리 잘됐네요. 대비라도 할 수 있으니."

운양과는 이튿날 바로 병마용에 생겨난 균열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놈들이 들어올 자리를 특정할 수 있다면, 아예 그곳을 중심으로 진영을 깔아둘 수도 있을 테니까.

"일단 들어가시죠."

곧장 청심단을 아공간에 수용했고, 운양과 함께 아공간으로 돌아왔다.

첫째는 각성자들에게 무한히 복제한 청심단을 먹여주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무림인들에게도 흑마법사들의 환각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

운양은 지그시 기사들의 를 바라보았다.

퍼즐처럼 정교하게, 꽃잎처럼 화려하게 흩어지는 기사들의 칼날.

흑마법과 오러가 서로를 감추고 비추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을 즈음······.

"정겸 대협. 저거······."

운양이 내게 물었다.

"진법(陣法)이잖아요?"

공동 묘지의 공집합 (2)

100화 공동 묘지의 공집합 (2)

운양의 말처럼, 청심단의 효력은 확실했다.

물에 젖은 듯, 무겁기만 했던 팍스맨들의 몸짓.

그들에게 산처럼 쌓인 청심단을 제공했고, 사탕 먹듯 볼때기를 부풀린 모두가 신들린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슈우우욱!

타아악!

나름 상호작용까지 주고받을 수 있는 아공간 .

팍스맨들의 공격을 허용한 흑마법사가 신음을 흘리며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 잡았다!"

가 자아내는 춤사위.

기사들이 알려준 동작 하나하나가 환각을 걷어내기 위한 계단이었고, 모든 퍼즐이 사다리처럼 이어진 결과, 홀로그램으로 재현된 가츠의 흑마법을 파훼할 수 있었다.

요컨대, 수십 번의 합공이 이뤄낸 쾌거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한 가지 준비할 것이 남아있었다.

란슬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모두들 오러만 개화하면 되겠군요."

검무를 통해, 흑마법을 벗어난 팍스맨들.

하지만 그 곁에서는 기사들이 '오러'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비록 검무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밥을 숟가락으로 떠먹여 줬다 볼 수 있는 상황.

오러는 흑마법사들의 숨은 '선'과 '매듭'을 드러내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였다.

하지만 기사들을 제외한 일행 중 오러를 피워낼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천외천 김솔밖에 없었다.

다행히, 우리 팍스FC의 임직원들에게는 강해지고자 하는 열의가 충만한 상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상에 누워있던 민우.

녀석이 내게 말했다.

"두 번 다시는 그딴 꼴 겪고 싶지 않다. 나중엔 다들 망치로 후두려 팼다며? 두고 봐. 나도 아주······."

민우는 가고일에게 부상을 입었던 인천에서의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그마치 7위계의 척력을 두르고 있던 가고일이다.

차후 성기사들이 신성력이 깃든 워해머로 대처했던 걸 떠올려 본다면, 민우의 패배는 십분 이해할 만한 일이었지만, 녀석은 그 날의 굴욕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나는 민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세브란스를 비롯한 강남의 병원 세력들을 이끄는 송현구.

그가 다음 면담 상대였다.

"더 강해질 기회라면 언제든 달려오겠습니다. 이번에도 제대로 배워서 병원 식구들에게도 전해줄 생각이에요."

"오······ 그것참 좋은 생각입니다. 병원 쪽에는 유달리 강화계 각성자들이 많기도 하니까요."

지금까지의 상황을 미루어볼 때, 각성 능력은 묘하게 주변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물류센터에서 물류센터 능력을 각성하고, 택배기사 이용수가 운전 능력을 각성하고, 공돌이 제임스가 메카닉 능력을, 중국 전통의 무술학파 일원들은 무림계 능력을 각성한 상황.

비슷한 맥락이라 해야 할지, 체육센터나 병원에서는 근력이나 순발력, 유연성과 관련한 신체 능력을 각성한 강화계열 각성자들이 많이 생겨나곤 했으니까.

심지어는 팔이나 다리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각성 능력을 얻어 되레 초월적인 신체를 얻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매번 고맙습니다. 현구 씨. 이제 강남만 떠올리면 마음이 참 든든해요."

"뭘요, 정겸 씨. 아직 보답하려면 멀었습니다. 진성학 패거리에 휘둘리던 때를 생각하면······ 이번 싸움도 전심을 다해 돕겠습니다."

송현구와 훈훈한 덕담을 나누며, 함께 전의를 다졌다.

마지막으로 이어진 천무지체 김솔과의 면담은······.

"······뭐 어쩌라고?"

"그러시겠지."

일상적인 남매간의 대화로 가볍게 마무리 지었다.

.

.

.

더 강해지기 위해 '오러'를 개화하겠다 다짐한 팍스FC의 일원들.

당연한 말이지만, 오러를 개화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과정이 아니었다.

더더욱이······.

"아니, 김 소저······! 대체 이 불순한 기운을 뭐란 말입니까?"

"왜요?"

이렇게 사공이 많은 경우에는.

김솔을 보며 까무러치는 운양.

그녀의 손에는 기사들로부터 훈련받은 '오러'가 푸르스름하게 서려 있었다.

'오러 소드'와는 또 다른, '오러 주먹'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무림인들은 도무지 그 기운에 적응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비워내고 다듬는 것이 아닌, 채워내고 덜어내는 힘이군요. 물론 음양의 조화를 완전히 잃어버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불순물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형태······."

운양이 무림 버전의 전문용어를 줄줄 늘어놓았다.

바르나울의 환각을 제거하기 위해, 무림인들 또한 기사들의 검무를 배워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내력을 쌓는 과정이 달라도 많이 다른 모양이었다.

더욱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화아아악!

운양이 불어넣은 검기.

'오러'가 아닌 '검기'였음에도, 흑마법사들의 동선을 추적하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무림인 중에서 검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고작 대여섯 명에 불과했기에, 사실 도긴개긴 더 나아질 것이 없었다.

'오러'인가, '검기'인가?

양자택일의 혼선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운기조식이 아니라, 마나연공을······."

란슬롯을 비롯한 카멜롯의 기사들이 담배 연기처럼 떠다니며 중얼거렸고······.

"심장이 아니라, 여기! 여기 단전에 내력을 쌓아야······!"

운양을 비롯한 무림인들이 배꼽 아래를 팡팡 두드렸다.

한편, 팍스만들은 혼란에 빠졌다.

기사들을 따라 소드 마스터의 길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무림인들의 꿈을 따라, 절정, 초절정을 넘어선 생사경의 고수가 될 것인가?

모두가 진로 선택을 앞둔 원서철 수험생들처럼 게다리 스텝을 밟았고, '강함'을 둘러싼 두 가지 길이 바르나울이라는 거대한 적을 앞두고 충돌하고 있었다.

"그냥 둘 다 하면 되는 거 아냐?"

김솔이 코를 후비적거리며 나름 대안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심장에 마나를 쌓는 동시에 단전으로 내공을 운용하는 미친 작업이 가능할 리 없었다.

결국, 양자택일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를 구해준 것은······.

"······그냥 다들 잘하는 걸로 하세요."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사실 기사들은 물론, 무림인들 또한 사람들의 재능을 판가름할 만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기사들은 물체에 마력을 부과하는 마나 운용능력을 통해, 무림인들은 맥박을 통해 전해지는 혈맥과 기의 순환을 통해 사람들의 재능을 판가름하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가 될 상이요!"

"비와 위장이 실한 것을 보니······ 영락없는 소양인이군요. 우리와 함께 가야겠습니다."

란슬롯과 운양은 각각 '그리핀도르'와 '슬리데린'을 외치는 마법 모자처럼 목청을 드높이며 백여명의 팍스맨 사이를 종횡무진했다.

대게 열에 아홉은 마나와 내공 중 하나에 치우진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오래 지나지 않아 백여명에 달하는 팍스맨들이 모두 저마다의 재능을 기준으로 일목요연하게 분류되었다.

물론······ 예외가 있긴 했다.

"봐라! 이게 바로 듀얼 코어다!"

"오오······!"

마나연공과 운기조식.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하는 기행을 벌이며, 김솔이 '나는 둘 다 하겠다' 선언했고, 검사 클래스 각성자인 동시에, 운양의 수제자이기도 했던 민우가 같은 전철을 밟았다.

물론······.

"나도 해볼게."

"우우······."

"······?"

천재와 범재.

서로 다른 두 사람에 대한 반응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힘내라."

나는 다시 한번 민우의 어깨를 두드려줄 뿐이었다.

***

마나와 내공.

오러와 검기.

마나연공과 운기조식 등등.

일대일 대응 쌍을 이루는 기사들과 무림인들의 개념이었지만, 적어도 서로 한 가지 개념만큼은 예외적이라 할 수 있었다.

기사들의 훈련을 보며, 무림에서의 '진법(陣法)'을 떠올렸던 운양.

하지만 그 차이를 부연하려는 듯,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진법에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는 인술진(人術陳)으로, 다수의 사람이 합공을 진행할 때 공유하는 세세한 전투 규칙 같은 거라 볼 수 있죠. 기사분들의 도 그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흑마법사들의 환각을 물살처럼 거슬러 올라가는 기사들의 검무.

어쩌면 가볍고 아름다운 춤사위처럼 보일지 모르는 그 율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에 참여하는 인원들 개개인의 역량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한 사람의 실수만으로도 전체적인 과정이 어그러질 수 있으니까요. 앞 사람이 커다란 붓으로 그려낸 선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어받아야 하는 게 바로 저 검무입니다. 거기에 흑마법사들의 변주에 그때그때 대응해야 하니, 실로 만만치 않은 작업이기도 하죠. 한편, 두 번째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실질적으로 흑마법사들과 맞붙게 될, 팍스맨들의 임무였다.

그에 반해, 운양이 내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기문진(奇門陣). 아예 환경을 구성해버리는 방식입니다."

보다 심화된, 진법의 두 번째 의미였다.

"두 진법은 크게 보자면 사실상 같은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술진 또한 여러 사람의 움직임을 통해 전장에서 모종의 환경을 구성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기문진에서는 사람이 아닌 그 밖의 요소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쪽이 내 역할이겠네요."

"그렇습니다."

실상이 그랬다.

능력을 통해, 그 누구보다도 강한 화력을 지니고 있는 나.

하지만 다른 각성자들처럼 유려한 칼춤을 출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물류센터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렇다.

걷고, 뛰고, 근육을 움직이며 상품을 트럭에 싣고 내리고, 고객에게 택배 상자를 전달하는 팍스맨들.

하지만 내 역할은 그들이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도록 물류망을 깔아주고, 더 좋은 배송 차량을 제공하는가 하면, 다수의 배송지를 연결하는 최적의 배송 루트를 설계해주는 등의 환경을 구성하는 일에 가까웠으니까.

신통방통한 기문(奇門)이란 아공간 포탈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팍스맨들로 가득 찬 거대한 진법(陳法)은 수천수만 개의 서로 다른 장소들이 실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파렴치하리만치 거대한 유통망으로서의 환상을 부여하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오러를, 또 누군가는 검기를 수련할 테지만······.

'······나는 아니지.'

내가 다뤄야 할 대상은 여전히 사물, 장소, 그리고 환경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 팍스맨들의 성장과 더불어 우리가 준비하고자 하는 전략은 간단했다.

"잘됐네요. 마침, 바르나울이 어디로 들어올지도 가늠이 된 상황이니······."

놈들의 근거지가 될 병마용을 중심으로, 촘촘한 기문진을 펼쳐 놓는 것.

백여명의 팍스맨들, 그리고 수십 명의 무림인이 신명 나게 칼춤을 춰댈 테니, 나도 그에 발맞춰 화끈한 무대를 마련해줘야만 할 터였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내가, 운양에게 재차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만들면 됩니까?"

"눈길을 사로잡는 사물을 여럿 설치하는 게 좋습니다. 이정표가 될 것 같은 물건일수록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길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거든요. 표지판이라든가, 장승이라든가, 석상이라든가······."

"오······."

마침 딱이었다.

아공간 루브르에 널리고 널린 것이 석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길을 잃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조금 아쉬웠다.

풀썩 땅이 꺼지고, 옆으로 수십 자루의 창대가 날아들고, 머리 위로 도끼자루가 쏟아질 정도는 돼야 비로소 제대로 된 함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어려운 일도 아니지.'

조각상에 이런저런 장치를 가미하는 방법이 떠올랐다.

아공간에 그득그득하게 쌓여있는 다종다양한 마법 스크롤.

제임스의 실력이라면, 입에서 파이어볼을 뱉는 비너스 여신 같은 것도 뚝딱 만들어줄 수 있을 테니까.

"운양, 혹시 이런 것도······."

곧장 그에게 내 생각을 공유했고, 운양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가능하다마다요. 그런 걸 일컬어······."

그러곤 덧붙였다.

"기관진식(機關陣式)이라고 부르죠."

공동 묘지의 공집합 (3)

101화 공동 묘지의 공집합 (3)

"오케이. 이해했어."

듬성듬성 그려진, 나의 아이디어 스케치를 받아든 제임스.

그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묘한 조화였다.

그리스 조각상들을 이용한 무림식 기문진법.

그 제작자가 미국인 기술자인 꼴이었으니.

비너스상에 강력한 라이트 마법을 심어 두 눈으로 조명을 비추는 경보장치를 만들기로 했고,

제임스 또한 스핑크스 석상에 성창을 발사할 수 있는 자동 발사 장치를 설치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더욱이, 꼭 모든 함정이 석상으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었다.

조각상이나 공예품, 그 밖에 눈에 띄는 지형지물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진법을 헤매도록 하기 위한 이정표에 불과했으니까.

그밖에 다종다양한 수천 개의 부비트랩이 흑마법사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고, 그 모두가 운양이 말한 '기문진식'의 거대한 틀을 이루게 될 참이었다.

"이것저것 좀 많기는 하지만······."

장치를 만들 수 있는 건, 비단 제임스뿐만이 아니었다.

쿠퍼를 비롯한 제작스 드워프들, 거기에 팍스FC의 훈련 프로그램을 이수한, 신인 기술자들이 손을 거들기로 했다.

"그 안으로 어떻게든 될 거요."

내가 요구한 시간은 최대 3주였다.

바르나울의 침공이 시작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한 달가량.

진법에 완성된 함정들을 설치할 시간 또한 필요할 테니까.

"이제 다음 할 일은······."

균열이 나타났다던 병마용갱.

그곳을 확인해보는 일이었다.

***

우우우웅.

다시 베이징에 설치된 아공간 포탈을 타고 나왔다.

그러곤 이용수가 모는 수송기를 타고 균열이 발견되었다는 중국 시안의 병마용으로 향했다.

수송기를 이용하니 대략 한두 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제임스가 제작했던 P-22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시간이 급하지 않은 만큼 비교적 안전한 기체를 타고 가기로 했다.

"꽤 오랜만이네요."

조종 스틱을 쥔 이용수가 그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근래 줄곧 포탈을 타고 이동해 온 탓에, 운전대를 맡길 일이 좀처럼 없었으니.

물론, 그도 놀고 있는 건 아니었다.

비록 그 수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운전이나 조작과 관련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들이 꾸준히 팍스FC로 흡수되고 있었고, 그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 또한 그의 역할이었으니까.

"택배기사 양성 프로그램이라고나 할까요."

허허 우스개를 내뱉는 이용수.

실제로 나 또한 폭탄이나 중량 무기를 실은 채 하늘을 누비는 폭격기들을 떠올렸었다.

물류센터의 복제 능력을 사용한다면, 비행기든 폭탄이든 제한 없이 찍어낼 수 있을 테니까.

이용수가 훈련시키고 있는 각성자들 하나하나가 그 파일럿이 될 것이었고, 역사적으로 폭격기가 전쟁의 판도를 뒤집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비약적인 속도로 지구를 물들인 침략자들을 지워낼 수 있게 될 터였다.

내가 땅에 설치될 기문진법을 고민하며, 팍스맨들의 전투-물류망을 깔아두고 있는 지금.

이용수는 이미 사방으로 뚫린 물류망을 배경으로, 머지않아 하늘을 누비게 될 폭탄 배달부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바르나울과의 싸움에서 그들의 첫 '항공특송'을 기대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나저나, 아발론이 문제인데······."

그와는 별개로,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배송'을 두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상공회의소의 통폐합 기능을 이용해, 지구로 아예 끌어당기고자 하는 기사들의 고향.

하지만 바르나울의 은폐 탓에, 통폐합을 위한 정확한 좌표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팍스가 바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지만, 아발론의 위치는 좀처럼 드러나질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잠자코 내 고민을 듣고 있던 이용수가, 불현듯 옛날이야기를 꺼내 든 것은.

"정겸 씨, 기억하시겠지만······ 제가 팍스 풀필 옆에 대현택배에서 일을 했었잖아요?"

"네네, 그랬죠."

"그때 물류센터에서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어요. 주문이 들어온 것도 확실하고, 자동분류기에서 지나간 기록도 뜨는데, 상하차하려고 보니 아무리 봐도 물건이 없는 거예요. 다들 분류기 시스템에 오류가 났구나 생각했었죠."

그는 지금의 상황을 자신의 옛 경험을 비추어 보고 있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물건이 아발론이라면, 자동분류기에 발생한 오류는 바르나울의 은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어떻게 해결했는지 아세요?"

"······어떻게 해결했는데요?"

"완전히 똑같은 주문을 임의로 한 번 더 넣었어요. 빨갛게 표시된 상자가 분류기를 통과해 컨베이어 벨트를 돌았고······. 결국 사라진 상자를 발견했었죠."

끝끝내 되찾게 된 물건.

하지만, 거기에는 더 핵심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사실, 상품 하나쯤 누락되는 건 아무 상관 없었어요. 그보다는 자동분류기를 고치는 문제가 더 중요했죠. 그래서 정확히 어떻게 오류가 나타나는지 확인해보려고 했던 거고요."

좋은 결말이었다.

사라진 물건을 찾아낸 것은 물론, 자동분류기의 오류를 고쳐 재발을 방지했으니까.

자신의 경험담을 우화처럼 풀어낸 이용수.

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한 달 뒤에 바르나울이 지구로 들어오는 게 분명하다면······ 그 정보를 토대로 놈들이 아발론이 있는 장소를 추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숨은 아발론의 위치를 찾아낼 방법이었다.

문제점은 그거였다.

흑마법에 의해 시시각각 좌표가 변하고 있는 아발론.

그 패턴을 파악해야만 아발론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으니까.

바르나울이 지구를 아발론과 마찬가지로 식민지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만약 놈들이 지구의 좌표에도 동일한 패턴의 흑마법을 동원한다면?

"······확실히, 그 방식이 겹칠 수도 있겠네요."

망설이지 않고, 곧장 팍스를 불러냈다.

"아발론 아직 못 찾았지?"

[그렇습니다.]

"혹시, 지구에 바르나울이 들어오는 시점에 맞춰, 아발론의 위치를 역산할 수 있겠어?"

[조건을 수정합니다.]

[가변 규칙에 '바르나울의 진입'이라는 상수를 고정값으로 반영됩니다.]

[연산 중······.]

아무리 고성능 AI라지만, 그런 방법까지는 고려해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식과는 달리, 지혜는 아직 인간들의 영역이었으니.

새로운 계산에 들어간 팍스가 얼마간 뜸을 들였고······.

[가능합니다.]

마침내, 긍정적인 대답을 내어놓았다.

.

.

.

아발론의 통폐합이 유력한 상황.

이용수가 병마용을 향해 수송기를 몰고 가는 동안, 아공간으로 들어온 나는 란슬롯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발론은 어떻게 생겨먹은 곳이야?"

아발론을 통폐합하는 것에 있어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

그건 다름 아닌 아발론의 크기와 지형이었으니까.

'삼킬 때 삼키더라도······. 크기는 보고 삼켜야지.'

단순히 생각해봐도 그렇다.

아무리 통폐합 기능이 있다 한들, 지구보다 큰 차원을 들려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물며 그 크기가 비슷한 경우나, 대륙만 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기존 지형 위로 타차원의 지형을 덧씌우게 되는 통폐합.

만약 지구의 환경이나 무고한 생존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면 곤란할 테니까.

망령 상태의 란슬롯.

그가 안개로 싸인 얼굴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그리 크지 않습니다. 지구로 따지자면······ 작은 도시 정도 되는 크기겠군요."

란슬롯은 담담히 자신의 고향을 떠올렸다.

벌써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그 풍경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도시 전체는 둥근 원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산악지형이 끼어있고, 중간중간 강물이 흐르는 곳도 있지만······ 결국 그 중심에는 해자를 낀, 왕성이 위치하는 구조지요."

흔히 알고 있는 중세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커다란 외성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그 중심부에 왕이나 귀족들이 머무르는 왕성이 자리 잡은 형태.

하지만 그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해보던 나는, 한 가지 의문에 부딪혔다.

"잠깐······ 그런데 카멜롯은 지금 내 아공간에 있잖아?"

"맞습니다. 카멜롯이 아발론의 왕성이었죠. 아마 아발론의 중심은 텅 비어있는 상태일 겁니다. 그 주변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모두 과거의 저희처럼 언데드가 되어 있을 테고요."

다시 말해 아발론은 지금, 거대한 일종의 도넛 형태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모양을 보여주려는 듯, 제자리를 빙글빙글 맴도는 란슬롯.

어스름한 연기가 꼬리의 꼬리를 물자, 구름으로 만든 동그란 도넛 모양의 형태가 눈앞의 환상처럼 아른거렸다.

"바르나울은 남은 아발론을 완전히 공장지대로 바꿔버렸습니다. 과거 기사단 소속이었던 나이트건, 중심 시장가에서 상회를 운영하던 거상이건, 변두리에서 농사를 짓던 평범한 백성이건 모두 바르나울의 영원한 노예가 되어버렸죠. 노예로 쓸 수 없는 원혼들은 모두 흑마법 아이템에 실어 밖으로 추방한 참이고요."

죽음으로 뒤덮인 도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죽음이 아발론을 멈출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죽으래야 죽을 수 없는 언데드가 되어버렸으니까.

"크기로만 보자면······ 미국에 있던 라이시온 광산 수준의 크기일 겁니다."

다행이었다.

눈대중으로도 엘븐하임보다 훨씬 더 작은 크기.

널리고 널린 중국 땅을 이용하거나, 여차하면 바다에 띄워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확실히, 데려올 수 있겠어. 시기도 얼추 정해졌고······."

다른 때를 생각할 수 없었다.

바르나울이 지구로 진입하게 될 바로 그 시점.

정확히 그때가, 바르나울이 자신의 내밀한 패턴을 드러낼 때가 될 테니까.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이었다.

아발론을 끌어당길 장소를 고르는 것.

그 구체적인 위치를 고민하기 시작했을 즈음······.

"정겸 씨, 병마용입니다."

수송기를 몰던 이용수가 도착을 알려왔다.

.

.

.

균열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온 운양.

하지만, 내가 병마용에서 발견한 것은 균열,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 수준이 아닌데?"

그것이 내 감상이었다.

진시황의 병사들이 잠들어 있다던 고대 유적.

그 모두가 황금빛 장막 안에 둘러싸여 있었으니까.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아직 상공회의소는 바르나울의 침입을 공지하지 않았다.

최소한 지구인들에게나마 흑마법사들의 침공 소식은 베일에 싸여 있었고, 당최 누구 입맛에 맞춘 공정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놈들의 거점이 될 병마용으로의 침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아쉽군요. 병용을 미리 박살 내둘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이용수.

누가 들으면 문화유산을 박살 내겠다는 파렴치한 주장이라 비난하겠지만, 그 토병에 죽은 원혼들이 덧씌워지는 아포칼립스 세계라면 그게 사리에 맞는 생각이었다.

"······그러게요."

내 입장에서도 그랬다.

운양과 함께 준비하고 있던 대규모의 기문진법.

애당초 계획은 병마용 내부를 기관진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로로 꾸미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장막은 병마용갱과 서쪽에 위치한 박물관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방문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결국······ 빙 둘러싸야 하나.'

장막을 따라 기다란 기문진을 형성하는 것.

애써 배운 진법을 써먹기 위한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한계 또한 명백했다.

사방으로 더 많은 출구를 허용하게 되는 것은 물론, 진법의 두께 또한 얇아지게 될 테니까.

팍스FC의 병력은 산산이 분산되는 데 반해, 수천에 달하는 병마용의 군세는 그 어느 위치로든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터였다.

죽어도 죽지 않을, 흙으로 빚은 언데드.

무덤 밖을 뛰쳐나오려 아등바등하는 바르나울을 막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통폐합은 여기에 해야겠네."

그 주변으로 거대한 울타리를 세우는 것이었다.

"아발론을 우군으로 들이고, 다 같이 중심을 치는 걸로."

카멜롯 왕성을 상실한 아발론.

그 형태는 공교롭게도 가운데가 뻥 뚫린 도넛 모양이었으니까.

공동 묘지의 공집합 (4)

102화 공동 묘지의 공집합 (4)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근 한 달의 시간을 보내고, 어느덧 바르나울의 진입을 하루 앞두게 된 시점.

"······장족의 발전이군요."

팍스맨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란슬롯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물우물.

청심단을 사탕처럼 문 팍스맨들.

는 예리해졌고, 검이나 주먹에 실린 오러 또한 눈에 띄게 선명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석의 소모와 더불어, 각성 능력의 경험치가 요구되기 시작한 레벨업.

기사들이 가르친 마력과 오러, 그리고 무림인들이 설파한 내공과 검기는 팍스맨들의 성장에 탁월한 촉매로 기능했고, 그 결과 실제로 레벨업과 위계 상승의 결과로 이어졌으니까.

김솔과 운양이 나란히 7위계로 올라섰고, 백민우와 송현구 또한 그 목전까지 레벨을 끌어올리는가 하면, 상당수의 팍스맨들이 10레벨을 달성해 8위계의 척력을 두르게 됐다.

"드디어 오러 유저의 경지에······."

"아닙니다. 이건 마땅히 '절정'의 경지라 불러야······."

물론 그 경지를 부르는 표현은 저마다 달랐지만······.

"······뭐,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지."

아무쪼록 상당한 전력 상승을 일궈냈다는 점은 분명했다.

이제 병마용을 두르고 있는 기문진과 팍스맨들이 구축할 인술진을 가다듬고, 또 한편으로는 병마용을 감싸며 들어올 아발론과의 통폐합을 대비하면 될 터.

사방에서 싸움이 벌어지겠지만, 그 싸움에 참여하게 될 세력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하물며 엘프와 드루이드들까지 지원을 자처한 상황이니까.

"한 번쯤 정리를 해야지."

그 일환이었다.

엘븐하임에 모여, 팍스FC의 종합적인 전략을 수립하기로 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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