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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21% MULTIVERVENENOSO / Chapter 15: 15

บท 15: 15

< 너도 당해봐. >

버마 마스터 각성자 자오툼은 군부 최고 사령관 민타누의 최측근 중 한 명, 정부군 소속 반군 토벌 정예 병단을 이끌고 있다.

레냐 숲에 숨은 버마 국민해방전선을 소탕하고 놈들의 지도자인 마웅샨의 목을 민타누에게 바치는 것이 자오툼의 임무.

국민해방전선의 근거지와 마웅샨의 행방을 찾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찾기만 하면 뭐가 어렵나?

모가지 따는 건 너무나 쉽다.

그리고 결국 찾아내고야 말았다.

"전군 준비 완료했습니다."

"탱크부터 밀어 넣어."

자오툼이 이끄는 1,500여 명의 부대원 모두 각성자.

심지어 전차 조종수까지도.

결론은 벌써 나 있었다.

반군들은 토벌된 거나 마찬가지.

'도망갈 곳도 없어.'

있긴 하다.

레냐 마수밀집지대.

하지만 놈들은 그곳으로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들어가면 죽을 게 뻔한데.

'설령 도망간다고 해도···,'

마웅샨의 목은 반드시 들고 간다.

쿠쿵, 쿠쿠쿵!

탱크 5대가 전방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는 자오툼.

탱크 5대의 화력이면 엘리트 마수도 순삭.

물론 마수밀집지대에서 화기를 사용하면 웨이브의 위험성이 있지만 깊숙이 들어가지만 않으면 된다.

탱크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비교적 경사가 있는 언덕도 넘고, 물이 졸졸 흐르는 실개천도 지나고, 그리고 짙게 낀 안개 지역도 멈추지 않고 통과.

그런데.

쿠쿵, 쿠르르르,

갑자기 멈춰 선 탱크.

5대가 다 그랬다.

"뭐야? 왜 그래?"

"···어, 가, 갑자기 멈췄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

자오툼의 명령에 탱크 위로 올라간 각성 장교, 장갑을 쿵쿵 두드리며 조종수와 소통을 시도했다.

"이봐! 내 말 들리나? 멈춘 이유가 뭐야? 엔진 고장? 아니면···,"

정부군 각성 장교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으음, 으으으···,"

비틀비틀 몸을 가누지 못하더니,

"큭!"

털썩, 쓰러져 탱크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라는 자오툼.

"아니? 왜···,"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털썩, 털썩, 털썩, 털썩···,

"뭐, 뭐야?"

정부군 최정예 각성 부대원들이 속절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원인이 뭐야?

안개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이런 일이···, 응?

'안개?'

그렇다면,

"독이다! 모두 방독면 써! 안개에서 벗어나!!!"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일부는 방독면 쓰다가, 털썩.

일부는 안개를 벗어나려다, 털썩.

또 일부는 우왕좌왕 허둥대다가, 털썩.

도미노처럼 넘어졌다.

누가 보면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줄줄이 쓰러졌다.

자오툼도 피할 수 없었다.

"으윽!"

도무지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자오툼은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마, 마나가···,"

없다.

몸속 곳곳에 가득 퍼져있던 마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결국 털썩, 쓰러지고 마는 자오툼.

아픈 데도 없었다.

정신도 또렷했다.

그저 힘이 빠졌을 뿐이다.

서 있지 못할 정도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독 기운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릴 뿐.

※ ※ ※

마웅샨은 솔직히 불안했었다.

지금 옆에 있는 남자가 태홍 바이오의 김태주라는 사실은 알겠다.

각성 문양이 없는 일반인처럼 보이지만 웬만한 마스터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도.

하지만 상대는 각성자 몇몇이 아니다.

무려 탱크와 개인화기, 첨단 무기로 무장한 정부군 정예 부대였다.

게다가 전부 각성자.

그런데 홀로 상대하겠다고?

아무리 엘리트 트윈헤드 블랙 재규어를 물어 죽이는 정체불명의 고양이(?)가 함께 한다지만···,

"제가 준 해독제는 모두 드셨죠?"

"네, 빠짐없이 다 먹었습니다."

"그럼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을 겁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희뿌연 안개가 전면에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안개?

시야를 교란할 목적인가?

그러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털썩, 털썩, 털썩, 털썩···,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정부군 각성자들.

'대체 뭐지?'

장관이었다.

1,000명이 넘는 각성 군인들이 맥없이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독이구나.'

솔직히 언제 독을 썼는지도 몰랐다.

저 광범위하게 퍼진 안개가 다 독이란 것만 유추할 수 있을 뿐.

'···이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해?'

안개에 접촉하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모두 쓰러졌다.

마스터도 중독을 피하지 못했다.

"주, 죽었습니까?"

"아뇨, 살아있어요. 아마 조금 있다가 일어날 거예요,"

"그, 그럼 가서 묶어둘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네? "

태주는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마나 거부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 아시죠?"

"어, 네네."

"초중증은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지내지만 그보다 덜한 중증 환자들은?"

"움직일 수는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기력이 약해져서 10세 이하 어린이들보다 운동능력이 떨어진다고."

"지금 쓰러진 군인들이 곧 중증 환자처럼 될 겁니다. 해독제 없이는 10살 아이만도 못할 거예요."

"아!"

마웅샨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인위적으로 중증 마나 거부자들을 만들었구나.'

이제야 깨달았다.

그가 여기 온 이유.

'되팔이 응징이랬어.'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빼돌렸으니 똑같이 당해보라는 의도.

욕심에 눈먼 독재자 민타누는 제 발등을 찍은 것이다.

태주는 공기 중에 있는 독기를 다시 회수했다.

사실 그냥 둬도 상관은 없다.

일반인에겐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번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만들면서 부가적으로 얻은 성과가 있었다.

마나 제거 독, 거기에 근육을 수축하는 독까지 집어넣으면 금상첨화.

동시에 대성을 이룬 혼원무상독령공으로 펼친 독기방사.

레냐 숲의 안개는 독기방사에 의한 독무(毒霧)였다.

1,500명의 정부군이 독무에 갇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혼원무상독령공의 독소 배양 및 조합.

몸 안에 들어간 이상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태주는 아직도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 마웅샨에게 말했다.

"전 네피도로 갈 겁니다."

버마 공화국의 수도 네피도.

"네?"

"수도에 뜻을 같이하는 저항 세력들이 있습니까?"

"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연락하세요. 내일이면 이 명단에 적힌 자들 모조리 정리될 거라고."

"···."

"국가를 정상화해야 하지 않겠어요?"

"마, 맞습니다."

마웅샨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주 회장이 결정했으니 그렇게 될 것이다.

※ ※ ※

버마 공화국 네피도.

권력의 중추는 정부 청사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네피도 수도 방위 사령부.

겹겹으로 둘러 처진 담벼락.

그리고 쥐새끼 한 마리도 출입할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배치된 각성자 경비 군인들.

그 중앙에 화려한 대리석으로 지어진 집이 있다.

바로 민타누가 사는 곳이었다.

버마 공화국의 핵심 병력이 모두 다 이곳에 존재한다.

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다.

민타누는 아침 일찍 일어나 뜨뜻한 물로 목욕하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음식이 가득 차려진 화려하고 길다란 식탁에 홀로 앉았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끈한 스테이크.

비싼 돈 들여 수입한 포자 독 낙타 고라니 고기였다.

"흐음,"

스테이크 한입 먹고 나서 유럽 제국산 최고급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얼마나 좋은가?

쓸모없는 마나 거부자에게 들어갈 돈으로 이 맛있는 고라니 스테이크도 사 먹고, 와인도 마시고.

"태홍 바이오 김태주라,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하단 말이지."

이게 다 그놈이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만들어 준 덕분.

"그놈은 알까 모르겠네. 내가 이렇게 고마워하는지."

바로 그때!

"뭐가 그렇게 나한테 감사한데?"

"그야 치료제를 팔아줘서, 난 그걸 10배 이상 남겨 먹어···, 헉!"

민타누는 화들짝 놀랐다.

이 방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다.

자신 말고 아무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는 저 남자는 누구지?

언제, 어떻게 들어온 거야?

"넌···,"

"사람들 목숨값으로 고라니 고기 처묵하니 좋냐?"

"무, 무슨? ···아!"

설마?

"기, 김태주?"

"그래, 나야."

"···어떻게?"

진짜 김태주가 맞는 것 같다.

정보부 보고서에서 놈의 얼굴을 본 기억이 난다.

회색 코트의 옷차림, 그리고 각성 문양이 없는 얼굴, 동아시아인.

그런데 어떻게 버마 말을 저리 유창하게 하지?

민타누는 태연하게 대처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 손잡이를 슬며시 잡고서는,

"무례하군."

"내가?"

"아무리 유명인사라고 하지만 감히 국가 지도자 집에 함부로 들어와? 삼한 제국에 공식적으로 항의하겠다."

"뭐래? 븅신이."

"···허허."

태주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도자 좋아하네. 넌 그저 되팔이 사기꾼 새끼일 뿐이야. MRC가 무슨 한정판 운동화 같은 건 줄 알아?"

"하!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다."

"좋아, 책임지지. 그럼 너 때문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대한 책임은?"

그러자 비릿한 미소로 답하는 민타누.

"어차피 죽을 놈들이었어. 여태까지 그놈들 없었어도 국가는 아무 문제 없이 운영되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역시 뼛속까지 썩은 놈이었다.

"후우, 그래, 내가 잘못했다."

"사과하는 거냐?"

"사과는 무슨, 그건 그렇고, 어때? 네가 그토록 비난했던 마나 거부자와 같은 신세가 된 기분이?"

무슨 헛소리 하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민타누.

"지금 나보고 마나 거부자라고 했나?"

"아직 못 느꼈어?"

"···대체 뭘?"

그때였다.

덜덜덜덜,

민타누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응?'

급기야.

탱그랑,

쥐고 있던 나이프마저 놓쳤다.

'어?'

너무 놀라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휘청!

저절로 굽혀지는 무릎.

"너, 호, 혹시, 도, 독을?"

"축하한다.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야."

"이, 이놈!!!"

민타누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머리를 들기도 힘들었다.

"마나 거부자가 얼마나 힘든지 몸으로 느껴봐. 치료제? 아마 듣지도 않을 거다. 내가 특별히 신경 썼거든."

"커헉!"

그 충만했던 마나 로드가 완전히 바싹 말랐다.

근육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근위축증 환자처럼.

"그게 초중증 마나 거부자들이 겪는 고통이야. 넌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거고."

모든 게 어려워졌다.

손가락 드는 것도, 말하는 것도, 숨 쉬는 것도.

"이, 이건 아니야. 나한테 이, 이러면 안 돼···,"

"왜?"

"내, 내가···, 없으면 고, 공화국은 마, 망할지도···, "

"괜찮아,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이 국가를 통치할 테니까. 누굴 세워놔도 너보단 잘할 거야."

민타누가 굼벵이처럼 꿈틀거렸다.

"차, 차라리 날 주, 죽여!"

"기다려 봐, 다른 사람들이 네게 자비를 베풀어줄 수도 있으니까."

죽음이라는 자비 말이다.

어쨌거나 민타누는 됐고,

슬슬 마저 정리해볼까?

※ ※ ※

선계.

당군악과 신선들이 마주한 두 가지 과제.

하나는 어떻게든 천도를 따서 태주에게 배송을 보내는 것, 나머지 하나는 선계에 놀이공원을 건설해 천인들이 행복하게 뛰어노는 세상을 보는 것.

천도 확보는 신중해야 한다.

상위 계 전체와 관련이 있는 보물.

게다가 한번 털린 적이 있던 터라 경계가 너무나 철저했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어설프게 시도하다가 실패라도 하는 날엔···, 두 번째 기회는 결코 없을 것이다.

지금은 선계 월드 건설에 집중할 때.

그래서 당군악은 염라를 만나기 위해 황천계 업화궁으로 왔다.

"오! 그대가 독선이군. 드디어 소문의 주인공을 만나게 됐어."

"소문? 그게 뭐요?"

"상위 계의 새로운 바람, 선계 신선들의 지도자, 다른 세상과 교류할 수 있는 법술을 가진 신선···,"

"···."

무슨 소문이 이렇게,

"이리 앉게. 난 자네 편이야. 단지 급격한 변화가 두렵긴 했지만 지금은 뭐,"

"협상 목적으로 강림차사를 보냈다고 들었소이다."

"맞네. 나도 자네의 계획에 동참하고 싶어. 흐흐, 겸사겸사 다른 세상의 문물도 맛보고."

사실 후자가 더 큰 듯하다.

"요즘 일을 벌이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도와줄 건 없나?"

"하나 있긴 하오"

당군악은 미리 가지고 온 선계 월드 설계도를 염라 앞에 펼쳤다.

지구의 설계도를 선계에 맞게 수정한 것.

"응? 이게 뭔가?"

"설명하자면···,"

어디에, 왜, 어떻게 놀이공원을 건설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하는 당군악, 그러자 염라가 반색하는 표정으로,

"껄껄껄, 아주 좋아! 역시 멋진 신선이야. 안 도와줄 수 없군. 심지어 대가를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당군악도 소문을 들었다.

황천계 사람들이 천인들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걸.

그럴 수밖에 없다.

황천계 지옥으로 떨어지는 놈들이 누군가?

환생도 못 하는 악인 중의 악인이다.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다 악인이 되는 건 아니다.

그렇게 치면 당군악도 지옥에 떨어졌어야지.

중요한 건 동기.

왜 그런 짓을 저질렀냐는 것.

악인들의 공통점을 하나만 꼽자면 그건 바로 극도의 이기심,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타인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권리를 서슴없이 빼앗는 자들, 즉 소시오패스.

그에 비하면 천인들은?

악인과 반대로 이타심의 극에 서 있는 자들이다.

호구라고 불리어도 될 만큼.

"아무튼 신선들을 대표해서 황천계에 제안 드리오."

"말해보게."

"선계 월드 하청공사를 맡아주길."

"하청? 뭘 제공하라고?"

"이를테면···, 튼튼한 노동력?"

"아하!"

염라는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쓴 죄인들이 필요하다는 거지? 마침 부려 먹어도 좋은 새끼들이 있네."

염라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떠오르는 영상, 마치 홀로그램같았다.

"땅을 파고 있군."

"맞아. 흑저지옥(黑底地獄)이야. 천장을 보게."

"···내려오는 거요?"

"그렇지. 조금이라도 쉬면 천장이 내려와서 죄인들을 짓눌러버리네. 발에 밟힌 바퀴벌레처럼 퍽! 터지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원 상태로 돌아오고, 계속 반복이지."

죽지는 않겠지만 압사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게다가 바닥도 흙이 아니야. 흑암철이라는 광물이 깔려있어 보통 힘으로는 흠집도 나지 않아."

끔찍하다.

위에서 내려오는 천장.

밑에는 파지지도 않는 흑암철 바닥.

"그래도 잘 파고 있군."

"수백 수천 년 동안 저 짓만 했는데, 잘 파야지."

검증된 노동력이다.

"통제는 가능하오?"

"식은 죽 먹기네. 현생이 어떤 놈이었든, 죄인들은 우리에게 반항할 수 없어."

"좋소. 하청 의뢰하겠소."

"받아들이겠네."

"그리고···,"

당군악은 염라에게 한 가지 더 부탁했다.

"무간지옥에 천마라는 자가 있는데, 그놈도 노역에 포함시켜 주면 안 되겠소?"

"누구 부탁이라고 거절하겠나."

"그럼 계약합시다."

합의가 이루어졌다.

"노역 시간은 천인들이 선계를 떠나고 나서, 죄인과 천인들이 마주치게 해서는 안 되오."

"당연하네. 애초에 내가 부탁하고 싶었어."

이로써 선계 월드 대공사가 급물살을 탔다.

그리고 천인들이 모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뒤, 선계에 나타난 검정색 옷의 차사와 저승사자들.

"자자. 문을 여시오!!!"

지이잉!

지옥의 게이트가 열렸다.

"동작 봐라!"

"빨리 안 나와?"

"소풍 나왔냐, 새끼들아?"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지옥의 죄인들.

너무 굼떠 보인다.

이래서 일이 제대로 될지 모를 정도.

결국 검선이 나섰다.

일단 기강 확립부터.

대충 죄인 한 놈을 골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야! 너, 이리 와봐."

"왜 그러시오."

"···어쭈? 눈빛 좀 보소. 네 이름 뭐냐?"

"혈마."

"혈마? 꼴에 혀얼마? 별호 말고 이름."

"씨발, 혈마라니까!"

"허허허허, 씨발이라, 오랜만에 욕을 먹으니 기분이 새로워."

그러자 옆에 있던 강림 차사가 명부를 뒤적이더니,

"혈마라는 놈의 본명은 왕춘삼이요."

본보기를 보인다.

마침 적당한 놈이 눈앞에 있다.

그리하여 사자후를 터뜨리는 검선.

"춘삼이, 대가리 박아!!!"

< 너도 당해봐.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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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 현장 기강 확립 >

상위 계도 하나의 세상.

기본적인 생활을 하려면 육신이 필요하다.

신선들은 문제없다.

우화등선으로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올라오기 때문에.

그러나 천인과 죄인들은 다르다.

몸을 만들어 줘야 한다.

천인에겐 기쁨과 행복을 영위하게 할 목적으로, 죄인에겐 고통과 절망을 느끼게 할 목적으로.

그런 이유로 천인들은 건강하고 활력 가득한 최상급의 육신을 부여받지만, 죄인들은 하찮고 볼품없는 육신이 주어진다.

비슷하게는 만들어졌지만, 죄인들의 육신은 한계가 있다.

그런데 아주 가끔, 하찮은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자들이 종종 나타난다.

특히 무림인들.

인간계에서 자신이 이룬 경지에 다가가려고 하는 자들.

한때 절대 고수를 경험했던 영혼들이었다.

과거 인간일 때 익혔던 무공 구결들을 모조리 다 기억하고 있었고.

그 중의 한명인 혈마.

혈교의 교주.

천마 신교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강호 무림의 공적으로 악명이 높았던 무인.

사망한 이후, 흑저지옥(黑底地獄)에 떨어져 쉴 틈 없이 땅을 파면서 노역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지옥을 탈출하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혈마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계에서 가졌던 몸은 잃었지만 대체할 수 있는 육신이 있다.

비록 그것이 하찮은 몸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혈마의 도전 욕구를 자극했다.

역천혈마공.

하늘을 거스르는 마귀의 내공심법.

아무도 모르게 역천혈마공을 수련했다.

차사와 사자의 눈을 속이고, 그 무섭다는 판관의 이목도 피하고, 무시무시한 지옥에서, 불굴의 혼으로, 결코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역천혈마공은 모두 7단계.

진혈의 씨앗을 심는 혈종(血種), 여기부터가 시작, 그다음 혈근(血根)으로 뿌리를 내린다.

혈장(血長)으로 혈기의 공능을 키워나가며, 혈화(血和)로 육신과 영혼을 조화롭게 이끌고, 혈전(血全)으로 신공의 완성을 이루며, 혈천(血天)으로 인간의 격을 초월하면서, 혈신(血神)으로 전지전능한 존재가 된다.

역천혈마공의 대성은 바로 혈신(血神).

신(神)이 되어 이 빌어먹을 상위 계를 소멸시킬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흑저지옥의 형벌인 천장 압착 회피하기였다.

압착형을 당하게 되면 기존의 육신은 산산이 터져버리고 다시 새로운 육신을 부여받는다.

열심히 수련한 역천혈마공의 경지가 수포가 된다는 의미.

무조건 피해야 했다.

천장이 내려올 때, 땅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 육신을 보호했다.

그래서 마침내 혈천(血天)의 역천혈마공.

만들어진 육신의 격을 초월했다.

강호 무림에서 이룬 성취를 다시 한번 재현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다.

혈신까지 올라선다.

그 와중에 이곳 선계 노역형에 끌려오게 된 것.

흑저지옥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일한다고?

이건 호재였다.

혈마도 귀동냥을 통해 들은 사실이 있다.

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는 황천계와는 달리 선계는 개방적인 공간, 주위 환수계와 요마계, 천계도 연결되어 있었다.

탈출해서 숨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놈은 대체 누구지?

다짜고짜 자신을 지목해서 한다는 소리가···,

"춘삼이 대가리 박아!!!"

혈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은 죄수 신분이지만 한때 강호 무림이 전설이자 울던 아이도 눈물을 그치게 만든다는 자신이었는데.

'이 망할 신선 놈이···,'

참아야 한다.

혈천(血天)의 경지에 올라왔지만 여기서 힘을 드러내면 주목을 받게 되고, 주목을 받으면 탈출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만합시다. 시키는 대로 하겠소."

"눈빛은 그게 아닌데? 잘하면 치겠군."

혈마는 답답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날 괴롭히는 거요?"

"그야, 네가 제일 수상하니까."

"고작 그거 때문에? 지옥의 죄수 중에 수상한 놈들이 어디 한둘이요."

검선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가 혈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 하지만 네놈이 가장 적당하구나.

- 적당하다니, 무슨 뜻이오?

- 너만 조지면 통제가 순조로워질 거란 말이다.

- ···허.

- 일단 처맞고 시작하자. 네 한 몸 희생해서 작업자들의 기강이 잡힌다면 이 또한 보람찬 일일지니.

- ···제기랄!

휘릿!

검선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한숨을 푹 쉬어대는 혈마.

'맞아주는 게 좋겠지?'

이미 혈천에 오른 육신이라 전혀 아프지 않겠지만,

'되도록이면 죽는시늉도.'

엄살 크게 피워주자.

자연스럽게.

그런데?

퍼억!

"···어?"

머리가 핑 돌았다.

뒤를 이은 끔찍한 고통,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질러댔다.

'아, 아파? ···아, 아프다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혈마.

진짜 무지하게 아팠다.

고작 한 방 맞았는데 혈천에 이른 육신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

검선은 정신없는 혈마를 로우킥 한방으로 넘어뜨렸다.

툭!

"히익?"

털썩.

"지구의 무술 중에 파운딩이라는 게 있네."

그리고 가슴 위에 올라타더니.

"얼핏 보면 그저 개싸움에 불과하지만···,"

"자, 잠깐!"

주먹을 번쩍 들어 혈마의 얼굴을 조준했다.

"망나니 교육하는데 이만한 건 없겠더라고."

퍽! 퍼억! 퍽퍽퍽퍽!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살점도 함께 떨어져 나갔다.

"아악! 아아아아악! 으아아아···,"

"같잖은 놈아,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느냐?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퍽퍽! 퍼퍼퍼퍽!

혈마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영혼까지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주먹이었다.

주먹 한 방에 그동안 쌓아뒀던 혈기가 무기력하게 흩어졌다.

혈천(血天)에 다다른 육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그 와중에 차사와 저승사자들이 쪼그려 앉아 혈마가 맞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쯧쯧, 검선, 그러다 죄인 잡겠소."

"춘삼이 생각보다 일 잘하는 놈인데,"

"아니야. 기강은 잡아야지, 아까 춘삼이 눈빛 봤잖아."

"그런가? 하지만 얼마 못 버티겠어."

혈마는 자신을 때리는 신선이 누군지 알았다.

'거, 검선이라니.'

인간계에서 이름은 들어봤다.

하지만 이야기꾼의 입에서나 나오는 전설적인 존재가 바로 검선 아닌가.

전설의 검신이 시정잡배처럼 주먹질을?

퍽퍽퍽퍽!

"끅! 끅! 크헉! 그, 그만! 제, 제발, 머, 멈추시오."

하지만 검선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야지.

비록 너무 허약해서 손맛이 덜하긴 하지만.

이미 피떡이 된 혈마.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

육신도 거의 붕괴 직전까지 갔다.

"아이고, 살살 좀 때리지."

"육신 교체해 줘야 하나?"

"좀 더 튼튼하게 만들어 줘야겠어."

"가만있자, 현재 저놈 경지가 뭐지?"

"내가 확인해보지."

차사 중 한 명이 지옥 명부책을 뒤적이면서 말했다.

"만들어진 몸으로 역천혈마공을 익혔고, 현 단계는 혈천(血天) 단계로군."

"혈천? 그게 대성인가?"

"아니, 혈신(血神) 단계가 남아있어. 그게 역천혈마공 궁극의 경지라 적혀있고."

"하아, 멍청한 새끼, 수백 년 동안 수련했으면서 아직 대성도 못한 거야?"

"저러니 몇 대 버티지도 못하는 거지."

"빨리 혈신 단계로 대성시켜 줘. 새 몸 만드는 것보다 그게 더 편하겠다."

"알았어."

혈마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다 알고 있었다고?'

역천혈마공을 수련해 혈천 단계에 이른 것까지 전부 다?

그것도 그렇지만···,

'혈신으로 대성하게 해준다는 말은 또 뭐야.'

차사가 명부 책을 땅에 내려놓고 엎드렸다.

그리고 붓을 들어,

"어디 보자, 혈마 왕춘삼, 현재 경지가 혈천이니까, 천(天)자를 신(神)자로 고치면···,"

설마?

혈마는 느꼈다.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충만한 혈기.

역천혈마공의 모든 단계가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간다.

"아아아!"

끓어오르는 고양감.

역천이다.

하늘을 부술수 있는 절대적인 공력.

우우우웅!

몸 전체가 혈기로 들끓었다.

혈신(血神), 인간의 격을 벗고 전지전능한 존재로 나아가는 단계,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신이 됐다.

"이놈!!!"

혈마는 벌떡 일어서면서 가슴에 올라탄 검선을 털어냈다.

"으하하하하! 모두 죽여버릴 테다."

그때였다.

획!

갑자기 혈마의 팔을 잡아채는 검선.

"어?"

그리고 훌쩍 뛰어올라 다리 사이로 팔을 끼우더니.

"이게 무슨 짓···,"

"응, 암바."

검선이 힘차게 몸을 쭉 뻗어 뒤로 젖혔다.

뿌드드득!

"끄아아아아악!"

팔꿈치가 반대로 꺾였다.

단전에 가득한 혈기를 일으켜 검선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꿈적도 하지 않았다.

"이거 한번 해보고 싶었다네."

으드드득!

평범한 파운딩이 아니고, 그냥 암바가 아니다.

검선이 시전하는 MMA 기술이었다.

역천혈마공 대성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 그래도 부러지지는 않는군. 차사 양반, 고맙소. 덕분에 손맛이 느껴지는구려."

검선의 칭찬에 차사들은 의기양양해졌다.

"꽤 튼튼해졌을 거요."

"이제 남들보다 일도 더 잘 할거고."

"다른 애들도 만만치 않을걸? 머리 굴리는 놈이 저놈 한 놈뿐일까? 몰래 무공 익힌 놈들, 여기도 수두룩하잖아."

"으음, 그러네. 이참에 다른 놈들도 경지를 올려줄까?"

"하는 거 봐서, 정 허약하다 싶으면 올려주고."

만들어진 몸으로 무공을 익힌 죄인들.

사실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천마.

천마도 혈마처럼 무간지옥에서 천마신공을 대성까지 다시 익혔다.

황천계 탈출을 꿈꾸며 말이다.

하지만 천마는 혈마가 검선에게 처맞는 걸 보고야 말았다.

꼼짝도 못 하고, 처절하게.

'···조, 조심해야겠어.'

천마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처음 문을 빠져나와 건들건들, 미적대던, 불량 죄수들의 눈빛이 변했다.

기합이 바짝 든 모습.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자자, 이동! 일하러 가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죄수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후다다다닥!

천마도 눈치껏 달렸다.

"헛!"

누군가의 발에 걸려 나동그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꽈당!

"이 새끼 봐라? 감히 내 발에 걸려 넘어져?"

"건방진 놈! 곤륜 선인께서 발을 걸면 알아서 잘 피했어야지."

"매화 선인 말이 맞소. 버릇이 없어 그러오, 버릇이!"

"아오, 발목 아프네."

"어디 봅시다. 쯧쯧, 운동화가 더러워졌어."

"삼봉 선인, 내가 참아야 하오?"

"어허! 참으면 스트레스 받소. 사이다 한 번 보여줍시다."

곤륜, 매화, 삼봉, 무림계를 대표하는 3명의 신선.

쓰러진 천마를 포위하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왜, 왜들 이래?"

곤륜 선인이 스산한 미소로 먼저 말했다.

"네가 우리 곤륜 멸문시켰다면서? 내가 속세의 연을 끊어 상관 안 하려고 했는데, 눈앞에 네놈이 보이니 참지 못하겠구나."

매화 선인도.

"천마신공 끝까지 익혔느냐? 얼마나 견디는지 보자."

삼봉 선인도.

"무당의 한도 풀어주지."

천마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한편,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말든,

드디어 멀티플렉스 1층에 발을 들인 염라와 고위 판관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허, 말로만 듣던 멀티플렉스로군."

"1층부터가 대단합니다."

"벽에 붙은 저 초상화는 누구지?"

"이름이 쓰여있잖소, 김태주라고."

"오오오, 실로 훤칠한 청년이로군."

"대왕, 계단으로 올라가 봅시다."

2층이 바로 쇼핑몰.

염라는 올라가자마자 입을 떡 벌리며 탄성을 질렀다.

"처, 천국이로다."

지옥이 자신의 집이었던 그들이었다.

오랜 세월을 어둡고, 축축하며, 지저분한 환경에서 살아왔다.

눈이 돌아갈 수밖에.

"담배는 어디 있나?"

"여기 한가득 쌓여있습니다."

귀곡 선인이 재빨리 말했다.

"여기서 피우면 안 되오."

"허허, 나도 그쯤은 알아, 지옥에서 피울 거야."

쇼핑몰에 진열된 물건들.

염라와 판관들이 바구니를 들고 물건을 쓸어 담았다.

"결제 도와드리겠소."

"여깄네."

염라는 독선에게 받은 신용패를 꺼냈다.

아직 입금된 코인이 없어 마이너스로 찍힐 테지만···,

아무튼 바구니 한가득 쇼핑을 끝내고.

"참! 다른 세상의 문물을 이야기와 영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던데,"

"4층, 5층, 6층으로 올라가면 되오."

"그, 그래?"

염라와 판관들이 부리나케 4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죄인들이 일을 마치고 지옥으로 돌아갈 때까지 말이다.

※ ※ ※

독재자 민타누의 집은 군부대 한가운데였다.

버마 공화국의 핵심 무력이 집중해있는 수도방위 사령부.

놈의 최측근들도 모두 이곳에 있었다.

따라서 여기만 정리하면 군부의 힘은 90% 이상 사라지는 셈.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이삼백이가 오랜만에 본체로 변신했다.

부대 연병장을 가득 채운 삼두백호의 거대한 몸체.

"크르르르르···."

마스터라도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소름 끼치는 포효.

수도 방위 사령부, 아니 버마 공화국 수도 네피아 전역에 울려퍼졌다.

수도방위 사령부 전체가 정적에 휩싸였다.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고 공포에 떨었다.

그 사이 태주는 건물 구석구석을 뒤져 민타누의 최측근, 군부의 유력 권력자들을 붙잡아서 중독시켰다.

그리고 민타누와 같은 방안에 던져뒀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지.

그러고 나서.

'독재자라면 비밀 금고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데···,'

출장비는 든든하게 챙겨서 돌아가야 하지 않겠나.

분명 저택 안에 있을 것이다.

현 시대에서 귀중품에 속하는 물건이라면 뭘까?

금괴? 보석? 미술품이나 골동품?

물론 그것들도 가치가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엘리트 마나 결정체.

만일 금고가 있다면 결정체가 가득 들어있겠지.

'찾아볼까?'

태주는 기감을 확장했다.

혹시라도 결정체의 기운이 느껴질까.

민타누의 자택 맨 위층에서 천천히 아래로 한 층씩 내려가면서.

'여긴 없고,'

밑층도, 그 아래층도, 결국 지하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오!"

점점 기운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지하실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

잠겨있지만 부수고 들어가면 된다.

탈명비도 한자루를 꺼내.

끄걱, 끄거거걱!

문 자물쇠 부분을 도려내니.

애애애애애앵!

비상벨 소리가 자택 전체로 울려퍼졌다.

어쩌라고?

출동할 놈들이나 있나?

문을 여니 계단이 보인다.

내려가니 또 문.

끄거거걱!

또 자르고,

결국 맨 밑층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여기구나.'

대형 금고가 눈앞에 나타났다.

최하층 지하실 전체를 금고로 만든 모양.

'역시!'

독재자의 비밀 금고는 이래야 정상이지.

이제 금고 문을 열어보자.

두꺼운 금고문.

태주는 검선의 검, 만리비검을 꺼냈다.

지이이잉!

짙게 어리는 강기.

푸욱!

그 두꺼운 금고문이 두부처럼 잘렸다.

< 건설 현장 기강 확립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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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고 안엔 뭐가? >

바깥은 아직 조용하다.

마웅샨을 비롯한 군부 독재 저항 세력이 들이닥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부대 내부에선 일이삼백이가 돌아다니면서 독재자 부하 군인들을 해산시키고 있었다.

겁만 주고 달아나게끔.

군인들 중엔 자발적으로 군부에 충성한 놈도 있을 테고, 아니면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가담한 놈들도 있을 테지만.

옥석을 가리는 거야 새로운 정부가 알아서 하면 될 일.

태주는 지하실 금고 문을 사람 한 명, 충분히 들어갈 만큼 네모나게 자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넓은 내부였다.

그 크기가 얼만지 가늠이 안 될 정도.

역시 독재자 금고 스케일은 상상을 초월한다.

금고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광경,

각종 지폐 뭉치들이 정육면체 모양으로 그득 쌓여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모두 고액권 지폐, 아메리카 공화국의 달러화, 유럽 제국의 유러화, 삼한 제국의 원화···,

현찰 말고도 더 있었다.

각종 채권과 유가증권, 정체를 알 수 없는 종이 뭉치들.

'은행 금고도 아니고.'

이것들은 버마 공화국 새로운 정부에게 넘겨주자.

알아서 잘 쓸 것이다.

독재든, 혁명이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아무튼 금고 중앙은 현찰이 쌓였고, 그 주위로 문이 달린 방들이 보였다.

다행히 각각의 문은 열려 있었고.

대충 방 하나 정해 안으로 들어가는 태주.

'이 방 테마는 패션인가?'

마치 백화점 명품 매장인 듯, 수많은 고급 가방과 구두, 지갑 등 잡화를 보기 좋게 진열해놨다.

태주도 사지 못한 물건도 있었다.

주문하면 1년 후에나 받을 수 있는 그런 명품 말이다.

'전부 쓸어 담아야지.'

어차피 사치품.

남겨놔도 국가 운영에 도움이 안 된다.

'한동안 백화점 안 가도 되겠네.'

남성용뿐만 아니라 여성용도 많았다.

듣기론 민타누의 애인만 해도 수십 명, 아마 그들을 위한 것일 터.

명품 방을 나와 다음 방으로···,

'그래, 명색이 비밀 금고인데, 왜 안 보이나 했다.'

번쩍번쩍 빛나는 금괴.

무려 수백 개나 된다.

그러나 별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금값이라고 해야 예전만 못하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화폐 가치의 척도가 금본위제가 아닌 결정체 본위제로 바뀐 지 오래됐다.

물론 금 자체로서의 가치는 남아있지만.

'금괴도 패스.'

다음 방은 보석과 시계 등 장신구.

휘황찬란한 광채를 뽐내는 반지, 목걸이, 귀걸이, 시계···,

부피도 작고, 비싸고, 딱 좋다.

'오! 득템.'

싹 챙겨서 선계로 모두 보내야지.

진짜 엄청났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만 해도 작은 왕국 하나는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

'생각하면 할수록 개새끼였네.'

독재자, 차별주의자, 부정 축재 3관왕의 민타누.

보이는 것만 그렇지, 파보면 더 나올 수도.

사실 버마 공화국 국민들은 형편이 좋지 못했다.

중산층이 무너진 상황이라 일부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가난하다.

그런데 버마가 처음부터 가난한 나라도 아니었다.

인구도 많고, 유전도 가지고 있고, 농업도 발달한 나라.

민타누, 그 새끼 때문에 국가가 이 모양 이 꼴인 거다.

독재자치고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새끼들이 한 명이라도 있었나?

말로만 국익, 국익 하면서 법을 도구 삼아 죄 없는 반대파들을 억압하고, 자기 쪽에 선 사람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묵인해주고.

자격도 없는 놈들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이런 꼴이 일어나는 거다.

어쨌든 다음 방.

'여긴···, 영약인가?'

이쁘게도 모아뒀다.

유리 진열대에 각국에서 만든 마나 증강제, 즉 영약들이 보호 케이스에 담겨 전시되어 있었다.

진품인 것을 확인시켜주는 보증서와 함께.

'영약도 남겨둔다.'

품질도 안 좋은데 뭐 하려고 가지고 가?

그 옆방은 장비 창고.

각종 방어구와 칼이나 검, 창 등등의 무기.

개중엔 정말 비싼 엘리트 장비들도.

'싹 다 패스.'

태주는 현찰이나 금괴, 그리고 레이드에 필요한 영약과 장비들은 일절 손대지 않기로 했다.

버마 정권이 바뀌면 필요한 물건들이니까.

대신 희귀하고 거품 가득 낀 사치품들만 골라 담았다.

'그나저나 이것들 뿐인가?'

금고 방을 다 돌아봤는데···,

뭔가 놓친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멈칫!

'음?'

태주는 아무것도 없는 벽 앞에서 멈췄다.

저 너머에서 익숙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벽이라···,'

태주는 벽을 손으로 두드렸다.

탁탁, 여기저기, 타타탁, 탁탁!

그런데?

타타탕탕.

'소리가 달라.'

안에 뭐가 있다.

순간,

지이잉!

갑자기 벽에서 튀어나오는 카메라 달린 전자 기기 장치.

'안구 인식 시스템인가?'

확실하다.

벽 너머 비밀 방이 있다.

자르고 들어가면 되지.

다시 만리비검을 꺼내,

쑤욱!

밀어 넣은 후,

그극, 그그그극,

알맞게 자르고,

"읏차,"

잘린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제법 큰 방이었다.

'금고 안에 또 비밀 방이라···,'

집무실 같은 공간인 듯.

중앙에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엔 튼튼해 보이는 두꺼운 노트북 하나.

그리고 벽 쪽 진열대 선반엔···,

'엘리트 마나 결정체?'

여기다 숨겨놨구나.

몇 개일까?

대충 세어보니 약 100개 정도.

많이도 모아뒀다.

'흐음,'

고민이다.

다 가져갈까?

독재자의 물건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버마 공화국의 재산.

'그래도 독재자 처리해줬는데···,'

물론 명품하고 보석 등등 챙기긴 했지만.

결정했다.

가져가자.

전부는 말고 5대5로.

'누가 5야? ···당연히 내가 5.'

엘리트 마나 결정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선계에서 놀이 공원이 만들어지면 전기가 엄청 필요할 거야.'

간이 발전기 가지고는 그 출력을 감당할 수 없다.

결국 제대로 된 발전 시설을 갖춰야 한다.

태주도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선계 소형 발전소.

그러기 위해선 엘리트 마나 결정체가 더 많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을 열어봤다.

'별거 없네.'

잡동사니들만 가득하다.

그럼 노트북은?

'켜볼까?'

굳이?

뭐 한다고?

'아니야. 해보자.'

솔직히 호기심이 생겼다.

이곳이 평범한 장소인가?

두꺼운 금고, 그 안에서도 안구 인식 시스템을 거쳐야 비로소 들어올 수 있는 비밀의 방, 그곳에 있는 노트북이다.

여기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할 수밖에.

태주는 노트북을 열어 전원을 켰다.

암호가 걸려 있을까?

'역시 걸려 있었어.'

전원이 작동하지 않았다.

버튼 자체가 지문인식.

대체 뭐가 들어있길래?

이왕 한 김에 끝까지 가보자.

태주는 노트북을 챙겨 독재자 민타누와 그 측근을 모아놓은 방으로 다시 갔다.

"괜찮아?"

민타누는 여전히 바닥에 드러누운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다른 놈들은 정신을 잃었는지 아직 깨어나지 못했고.

"허억, 어어억, 너, 너···,"

"쉿! 손가락 좀 빌리자."

"···뭐? 아, 그, 그건?"

태주의 손에 든 노트북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치켜뜬 민타누.

"왜 그리 놀라? 야동이라도 들었어?"

"아, 안돼."

"돼!"

"개 같은 놈···,"

"아, 거참, 말 많네."

타닥, 타다닥.

태주는 민타누의 아혈을 짚었다.

이제야 조용해졌다.

그리고 놈의 손가락을 노트북 지문인식 장치에 가져다 댔다.

핏!

노트북이 켜졌다.

"···음."

눈에 보이는 바탕화면.

프로그램 아이콘이 딱 하나 있다.

딸깍.

클릭해보니

[안면 인식을 위해 웹캠 카메라에 얼굴을 정면으로 위치해주십시오.]

'안면 인식?'

이것도 보안장치임이 분명하다.

벌써 몇 단계인가?

금고에, 비밀방에, 지문인식에, 안면인식에.

태주는 빠르게 노트북을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 눈알을 빠르게 굴려대는 민타누의 뒤통수를 잡아 강제로 노트북 화면을 보게 만들었다.

[확인되었습니다. A1153 회원님, 딮 월드의 세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딮월드? 이건 또 무슨···,'

그때였다.

파밧, 파바바밧!

몇 개의 창이 자동으로 띄워졌다.

일종의 웹브라우저였다.

주로 영어로 된 게시물, 제목 앞에 달린 말머리들.

구인, 구직, 팝니다, 삽니다, 정보 공유···,

언뜻 보면 평범한 듯 보였지만,

[팝니다] : 비기너 등급 각성자 장기 예약판매, 혈액형 O형,(+8)

[삽니다] : 시체 매입합니다. 최소 일반인부터.(+5)

[구직] : 각종 의뢰받습니다. 깔끔하게 처리해드립니다. 쪽지 주세요.(+20)

[구인] : 14세 미만 여아 구합니다. (삼한 제국 한정) 거부자, 일반인, 적합자 가리지 않습니다.(+2)

[팝니다] : MRC 10개, 선착순.(+115)

[정보] : 국가 간 전쟁 발발 임박, 자세한 내용은 결제 후 열람. (+39)

.

.

.

'하아,'

이게 뭔지 알겠다.

딮웹.

법망을 피해 네트워크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범죄 커뮤니티.

심지어 삼한 제국도 있었다.

괄호 안 숫자를 보니 댓글도 달려있고.

전쟁 임박은 또 뭐야?

어디서 일어난다는 거지?

"이런 미친 개새끼들이!"

딮웹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

순간!

"야앙!"

방으로 들어오는 이백이.

"군인들 다 쫓아냈어?"

"앙! 야아아아, 야아앙, 야아···, "

"아···, 다 쫓아냈는데 마웅샨이 오고 있다고?"

"야앙."

"그래, 알았다."

마웅샨이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들이닥친 모양.

그나저나 이 노트북은···,

'가지고 가야지.'

딮웹에 들어가려면 정해진 특정 도구로, 지문인식, 안면인식을 모두 거쳐야 접속이 가능하다.

접속 도구인 이 노트북은 확보했지만 다른 인증 절차는?

그렇다고 이 독재자 민타누 새끼를 계속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태주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고 나서 쓰러진 민타누의 얼굴과 눈동자를 근접 촬영하고, 찰칵, 찰칵, 손가락 지문도, 찰칵, 찰칵···,

역용술.

얼굴 바꾸는 건 어렵지 않지만, 동공이나 지문까지 똑같이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연습으로 극복이 가능하다.

또 하나 더.

태주는 쓰러져있는 민타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렇게 된 이상 놈이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아무리 익명 접속이지만 딮웹 운영자들은 회원 정보를 다 알고 있겠지.

"넌 행방불명 상태여야 해. 혁명을 피해서 외국으로 도망간 걸로 하자."

"읍읍읍!"

태주가 뭘 하려 하는지 알았나 보다.

공포에 질려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는 민타누,

스윽,

놈의 목을 잡고 강하게 힘을 주니,

우두두둑!

민타누에게서 생기가 빠져나갔다.

동시에 스슷!

시체는 태주의 무한공간으로 들어갔다.

바깥이 시끄럽다.

저항군이 자택 앞까지 다다른 모양.

"가자, 이백아."

"야앙!"

사라진 민타누에 관한 사실은 따로 알려주면 되고,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하겠지.

※ ※ ※

선계도 밤낮이 있다.

낮에는 천계 꽃을 한가득 따 가지고 온 천인들이 와서 신나게 놀다 간다.

게임, 영화, 전동카 레이싱, 앞마당에서 풋살도 하고, 더우면 음료수와 아이스크림도 먹고.

밤에는 건설 공사.

황천계에서 미리 차사들이 도착해 지옥의 문을 열고 죄인들을 불러들이면서 시작.

천선 종리 선인이 하늘 저쪽에 휘황찬란한 광원을 만들어 띄워 올려 작업에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줬다.

아직은 기초 작업 수준.

환수계나 요마계로 가서 목재와 석재를 구해다 다듬고, 땅을 파서 기초를 다지고, 주춧돌과 기둥을 세우고.

차사와 저승사자들이 죄인들을 감독한다.

간혹 반항하는 놈들이 있지만···,

"저 새끼, 게으름 피우네? 초열지옥(焦熱地獄)으로 보내버려."

"아, 아니오. 잠시 한눈을 판 것뿐이···,"

팟!

게으름쟁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에 잔뜩 긴장한 죄인들.

초열지옥은 죄인이 가장 꺼리는 지옥.

말 그대로 뜨거운 곳이다.

육신이 활활 불타오르면서 녹고, 다시 재생되고, 또 녹고, 재생···,

그에 비하면 여긴 지옥도 아니다.

심지어 일 잘하면 새참, 간식도 준다.

심심해서 작업 현장에 놀러 온 주선 태백 선인이.

"너! 이름이 뭐야?"

"추, 춘삼이요."

"아하, 네가 그 유명한 춘삼이구나. 이리 와서 소맥 한잔 마시고 해."

"···소맥?"

혈마 왕춘삼은 주선이 건넨 살얼음 하얗게 낀 유리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일 잘해서 주는 거야."

"가, 감사합니다."

한 모금 삼키니,

"크아!"

"시원하냐?"

"으어어어···, 네."

"특별히 안주도 준다. 이거 치킨이라는 건데."

잘 튀긴 닭 다리도 한입.

바사사삭!

"어때 맛있지?"

혈마는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치명적인 단짠의 조화.

그리고 살얼음 소맥.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검선의 파운딩과 암바에 영혼까지 제압당해 입 꾹 닫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일만 했다.

그런데 이런 보상이라니.

지옥에 온 이후, 수백 년 만에 먹어보는 음식.

게다가 천상의 맛이다.

'더 먹고 싶어.'

그러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죄인들도 동요했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사방에서 들려오는 침 넘기는 소리.

특히 천마는 미칠 지경이었다.

영혼 연결 탓에 소맥과 치킨의 맛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맥뿐인가?

신선들이 입고 있는 옷, 신발, 저 앞에 세워진 전동카, 이곳저곳에 쭉 뻗은 도로까지,

틀림없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세상이 교류하고 있다.

즉, 지구에서 물건들이 선계로 넘어온다는 의미.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여기가 선계인가, 지구인가?

'난 영혼연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당군악은 왜?'

아무튼 미칠 것 같다.

저 치킨과 살얼음 소맥,

원래 아는 맛이 무서운 법이다.

먹고 마시는 것.

이 단순한 기본적인 욕구를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

천마의 몸놀림이 빨라졌다.

대성에 이른 천마신공이 위력을 발휘했다.

"···제기랄!"

쪽팔리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까지도 현장에 남아있는 치킨의 찐득한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팍팍팍팍!

손을 움직일 때마다 푹푹 파이는 땅.

천마군림보로 한발 내디디면 땅이 평평하게 단단히 다져지고, 천근추의 힘으로 기둥을 박고,

그러자 혈마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천마를 노려봤다.

상당히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이 새끼가···,'

핏덩이 주제에 감히 내 소맥을 넘봐?

혈마도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차사와 저승사자, 신선들도 박수치면서 그들을 독려했다.

"잘한다. 잘해! 안전 따윈 신경도 쓰지 마라. 안전해서 뭐 하게? 몸을 갈아 넣으면서 일해! 어차피 죽을 일도 없잖아."

< 금고 안엔 뭐가?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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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커 섭외 >

할 만큼 했다.

민타누도 처리했고, 마스터 등급 각성자 측근들도 마나 거부자로 만들어 거동을 불편하게끔 해놨고, 수도 방위 사령부도 해산시켰고,

삼한 제국으로 돌아가기 전, 태주는 저항군 지도자 마웅샨을 따로 만났다.

"이거 하나만 약속합시다. MRC 치료제는···,"

"정상화하겠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정해진 가격으로."

"좋네요. 꼭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 더.

"제가 누군지 아시겠지만, 여기 온건 비밀로 해주세요. 동료들 입단속도 해주시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민타누는 혁명 세력에 쫓겨 해외로 도망친 걸로 해두죠. 하지만 돌아오진 못할 겁니다. 영영."

"아! 넵."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는지···,"

마웅샨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지금부턴 우리가 스스로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 테니까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니 잘해나갈 것이다.

힘들긴 하겠지.

오랫동안 뿌리내린 군부 독재의 암 덩어리를 어떻게 하루 아침에 잘라낼 수 있을까?

그래도 해준 게 많다.

군부의 대가리들을 분쇄해줬고, 핵심 병력을 무력화시켰다.

더불어 무엇보다 돈.

혁명도 돈이 있어야 한다.

민타누의 비밀 금고에 든 자산이면 저항군의 모자란 부분을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을 터.

태주도 소득이 있었다.

놈의 금고 안 비밀방에서 발견한 노트북, 딮웹 전용 접속 장치.

민타누는 이걸로 MRC 불법 되팔이 거래를 했을 것이다.

딮웹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브로커들과 청부업자들을 통해.

사실 MRC 불법은 아무것도 아니다.

게시물 일부만 살펴보았는데도 천인공노할 내용이 가득했다.

'내가 자경단은 아니지만···,'

이미 목격한 이상 외면할 수는 없지 않나.

인간이라면 말이다.

삼한 제국으로 가자.

구례로 가기 전에 뉴서울 들렀다가.

※ ※ ※

뉴서울.

이고르 바라노프는 태주가 리더스 클럽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쏜살같이 로비로 달려 나왔다.

"회장니임!!!"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환대.

"언제 오시나, 오매불망 기다렸습니다."

"좀 뜸했죠? 제가 많이 바빠서, 참! 회비 낼 때가 된 것 같은데."

"회비라니요! 제가 어떻게 회비를 받겠습니까? 회장님은 평생 무료회원이십니다. 탈퇴만 하지 말아주십시오."

리더스 클럽 다이아몬드 회원 김태주.

그 반사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이고르였다.

태주가 회원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리더스는 최고 명품 클럽이라는 부동의 지위를 획득했다.

심지어 외국에서도 회원 가입 문의가 온다.

세계적인 사교 클럽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

이런 상황인데 회비는 무슨 회비.

오히려 돈을 줘도 모자랄 판.

"저어···, 귀찮으시겠지만 글씨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글씨?"

"으음, 리더스 클럽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요런 내용으로, 될 수 있으면 크게, 회장님 친필 사인도, 하하하."

미리 작정했는지 종이에 먹물과 붓까지 준비해놨다.

"···종이가 상당히 크네요?"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어디다 걸어 놓으려고 하나 보다.

예를 들면 로비 같은 곳에.

어려운 일도 아니고, 따라서 못 해줄 것도 없다.

태주는 붓을 들어 먹물에 푹 찍은 후, 일필휘지로 글을 써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태홍 바이오 김태주라는 서명도.

"며, 명필이십니다. 어떻게 못 하는 것이 없으십니까?"

실로 명필 소릴 들을만했다.

강호 무림에서 당군악의 글솜씨는 문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뭐, 영혼 연결로 인해 자동으로 체득한 실력이지만.

그런데 바로 그때.

"냐아아아···,"

일백이가 태주의 품속에서 잠을 자다 무슨 일인가 싶어 코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오!"

이고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반색했다.

"소문의 그 고양이로군요."

"···알고 계세요?"

"그럼요. 회장님의 반려동물이잖습니까."

이놈도 꽤나 유명해졌네.

일백이가 태주의 품에서 나와 먹 냄새를 킁킁 맡으며 호기심을 보였다.

그 모습에 뭔가 생각났는지 이고르가 눈을 반짝 빛내고는.

"고양이님도 한 글자 적어주시죠."

"냥?"

"아니면 서명만이라도."

"냐아아아?"

이고르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일백이.

그러다가 먹물통에 앞발을 넣어 묻히고는.

푹!

태주의 서명 옆에다 마치 도장처럼 앞발을 찍었다.

이고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걸 보면 영물은 영물이다.

"이게 네 서명이냐?"

"냥!"

태주는 이고르를 보면서 물었다.

"이렇게 해도 괜찮아요?"

"하하하, 너무 좋습니다."

이제 용건을 말할 차례.

태주는 이고르와 단둘이 사무실에서 만났다.

"혹시 해커 한 명 섭외할 수 있겠습니까?"

"해커? 컴퓨터 관련 전문가 말씀하시는 거죠?"

"네, 입이 무거운 사람으로."

"흐음."

이고르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 해킹 기술력으로 따지면 제국 내에서 제정원 만한 곳이 없다.

제정원은 태주에게 매우 협조적이고.

지금도 김태주 회장이 한마디만 하면 제정원 전체가 움직일 텐데 말이다.

'그런데도 굳이 날 찾아왔다는 건···,'

합법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이고르의 추측은 맞았다.

태주는 제정원과 같이 할 마음이 없었다.

아무리 협조적이라 해도 제정원은 국가기관.

앞으로 태주의 행보는 합법적인 것보다 불법적인 일이 훨씬 더 많을 예정이기 때문에.

딮웹을 사용하는 놈들이 평범한 일반인들이겠나?

삼한 제국 정부, 혹은 의회, 사법부 등등 권력 기관의 핵심부에도 있을 수 있다.

딮웹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어나가면 꼬리 자르기나 증거 인멸의 우려도 있고.

그리고 독립적인 정보 취득 수단을 확보할 때가 됐다.

제정원 못지않게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블랙 해커라도 괜찮겠습니까? 예를 들어 불법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는."

"실력만 좋다면야,"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고르는 서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태주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건···?"

"이걸로 전화하시면 됩니다. 저장된 번호는 하나입니다. 불리는 이름은 '죽음의데스', 돈만 주면 어떤 정보든 빼내 줍니다."

"실력은 믿을 만한가요?"

"깐깐하고 과할 정도로 조심스럽지만, 제가 아는 최고의 해커입니다. 'EB'의 소개를 받았다고 말씀하시면 될 겁니다."

이름이 죽음의데스라고?

상당히 오글거리는 이름.

'일단 만나보고 결정하자.'

태주는 클럽 밖으로 나가 이고르가 준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딸깍.

"여보세요. ···그쪽이 죽음의데스?"

- 폰 주인이 아니군.

"소개받았어."

- 소개해준 사람은?

"EB."

- 좋아, 3시간 후에 주소와 비밀번호를 보내주지. 의뢰내용은 거기서 듣겠다.

뚝!

"하아, 새끼, 예의 없네."

제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다니.

※ ※ ※

'죽음의데스'라는 해커가 불러준 주소는 재개발 예정지로 사람들이 별로 많이 살지 않는 오래된 주택가, 그중에서도 폐허가 된 건물의 반지하 방.

문은 잠겨있었다.

태주는 해커가 주소와 함께 보내준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보이는 방안의 모습, 중앙엔 의자가 하나 놓여있었고, 그 앞에 카메라 한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순간!

- 의자에 앉아.

방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기계음.

이고르의 말대로 놈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직접 대면하지 않고, 카메라와 스피커를 통해 원격으로 의뢰를 받는 식.

태주도 피차일반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의 본 얼굴이 아니다.

의뢰가 확정된 것도 아닌 데 굳이 본모습을?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다시 기계음이 들려왔다.

- 의뢰할 것은?

스슷!

민타누가 사용했던 노트북을 꺼내든 태주.

- 아공간 가방인가? 너 부자구나.

"맞아. 내세울게 돈밖에 없어. 의뢰는 이 노트북 해킹."

- 노트북? ···으음, 카메라 앞으로 가까이.

태주는 노크북을 앞으로 내밀었다.

- 옆면과 뒷면, 그리고 열어봐.

빙글빙글 돌려 보여주고, 열어도 주고.

그러자.

- 네 건가?

"아니,"

- 그럼 주운 건 아닐 테고, 훔친 거?

"비슷해."

- 간 큰 새끼였네. 딮웹 접속기 해킹해서 뭘 하려고?

험한 말버릇.

그러나 확실히 실력이 있는가 보다.

노트북의 정체를 바로 아는 걸 보면.

"딮웹의 정보를 빼내고 싶은 거지. 또 운영하는 놈들의 정체도 알고 싶고."

피식!

비웃음이 들려왔다.

- 밝혀내서 뭐 하게?

"알 거 없고, 아무튼 얼마면 돼? 원하는 금액 말해봐."

- 미친 졸부 새끼야. 딮웹 접속기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아? 그게 남의 것이라면 해킹은 불가능하다고.

"실력 있는 해커라더니, 이거 실망스러운데?"

- 무식한 놈, 소유자의 지문과 안구, 그리고 안면과 표정까지 인식해야 작동되는 접속기야. 일단 켜져야 해킹을 하든, 뭘 하든 하지. 인증 절차가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기계가 폭발할걸?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어."

- 니가? 그럴 정도의 실력이라면 왜 나한테 의뢰하지?

"해킹에 실력이 없으니까."

- ···뭐래? 붕신이, 헛소리할 거면 꺼져.

"하나만 물어보자. 만약 이 노트북을 작동할 수 있으면 해킹이 가능해?"

- 크크크, 네트워크에 접속하면 무조건! 근데 안 될게 뻔하잖아.

"흐음,"

스피커로 들리는 음성이었지만 자신감이 실려있었다.

- 그 노트북을 열어 작동하는 것, 그게 가장 뚫기 힘든 방화벽이야. 네까짓 게 그런걸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 포기하고 집에 가서 잠이나 쳐 자.

하아, 이 새끼, 건방지네.

태주는 그냥 보여주기로 했다.

인증 절차를 통과하는 방법을.

그동안 많이 연습했다.

민타누의 지문, 얼굴, 안구, 그리고 따로 동영상을 구해 놈의 말할 때 짓는 표정까지도 완벽하게.

"잘 봐."

스르륵,

태주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피부색도 달라지고, 눈의 크기, 코의 높이, 눈썹, 심지어 얼굴에 난 작은 흉터까지.

"이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 ···버마 공화국의 민타누?

"눈썰미 좋네."

- 혁명이 일어났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넌 민타누가 아니야. 솔직히 말해. 넌 누구지?

"내가 그걸 왜 알려줘야 하나? 너도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서."

- 그래? 그럼 대화는 여기서 끝이야.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어차피 처음 얼굴도 진짜가 아닌 것 같은데.

태주는 고민했다.

정체를 밝혀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중단하고 제정원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 같잖은 새끼, 어디서 마법 아티팩트 하나만 믿고, 뒈지기 싫으면 여기서 당장 나가.

해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어쩔 수 없다.

제정원에다 의뢰하는 수밖에.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캬아아악!"

또 나왔다.

이번엔 삼백이로.

태주가 욕먹는 걸 보고 화가 나서 나온 모양.

"넌 들어가 있어."

"니앙?"

그때였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 ···자, 잠깐.

위이잉!

줌을 당겨 찍는 듯 전면 카메라 렌즈가 움직였다.

- 그, 그 고양이, 서, 설마?

뭐지?

- 마, 맞나? ···맞는 것 같은데. 그럼?

왜 갑자기 호들갑이야.

일이삼백이를 알고 있나?

겉모습은 그냥 평범한 고양이인데.

- 아, 어음, 아아아···.

떨리는 목소리.

- 죄, 죄송하지만 본모습을 보여주시면···, 부, 부탁드립니다.

말투도 변했다.

존칭으로 말이다.

- 안 될까요? 확인하고 싶습니다. 제발···,

"···."

이렇게 된 이상 숨길 필요도 없다.

스르르륵,

역용을 풀고 본모습으로,

- 으힉!

스피커가 시끄럽게 울렸다.

콰당탕!

비명과 함께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

곧이어.

- 지, 진작 말씀해주시지.

"응? 나 알아···, 요?"

- 당연하죠! 제 인생을 구원해주신 분인데.

구원하다니?

- 저 마나 거부자였습니다. 회장님 덕분에 삶의 희망을 품었고요.

"아!"

-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뵙고 말씀드릴게요. 빨리 가겠습니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 ※

무시무시한 천마 신공의 위력.

작업 현장을 평정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폭풍과도 같은 작업 속도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혈마도 분투했지만, 애초에 경쟁자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기어코 받아든 치킨 한 조각과 살얼음 소맥.

'후우,'

심호흡 한번 하고.

천마는 먼저 소맥을 조심스럽게 들이켰다.

꿀꺽, 꿀꺽, 꿀꺽.

목울대가 꿀렁이고 삽시간에 500ml 소맥 한잔이 반이나 비워졌다.

그리고,

바사삭,

프라이드치킨 튀김옷이 이빨에 부서지는 소리.

천마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너무 맛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비참하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강호를 공포에 떨게 했던 자신.

그러나 지금은 지옥에 떨어져 치맥 얻어 먹어보려고 온갖 아양을 떨었다.

저 멀리, 건물 옥상에서 염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당군악의 모습이 보인다.

정말 부끄러워 미칠 지경.

멀티플렉스 7층 꼭대기에서 염라와 함께 선계 월드 건설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당군악도 묘한 감정이었다.

"호오, 독선, 그대가 무간지옥에서 천마를 노역에 합류시키라고 했을 때 솔직히 긴가민가했었소. 그런데 저렇게 일을 잘하다니."

"네, 진짜 예상 밖으로···."

당군악은 쓴웃음을 지었다.

천마가 어떤 존재였나?

강호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정파, 혹은 사파 세력을 멸문시키고, 관군도 파죽지세로 쳐부쉈던,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시산혈해가 생긴다는 공포의 대명사, 마교의 교주 아니던가.

그런데 고작 소맥과 치킨 하나 얻어먹어 보겠다고 저렇게 기를 쓰고 달려들어?

하긴,

여긴 인간계가 아니다.

천마든, 혈마든, 제아무리 독문 무공을 대성했어도, 그들을 어린애 놀 듯 가지고 노는 초월자들이 수두룩했다.

차사나 사자들은 또 어떻고?

저 허술해 보이는 강림차사만 해도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실력자.

천마 10명이 달려들어도 안 될 것이다.

염라가 손에 든 담배를 깊숙이 빤 후 연기를 내뿜으면서 말했다.

"연초보다 못하지만 달달하니 맛이 좋아."

당군악이 선물한 액상형 전자담배.

선계는 금연 구역이지만 액상 전자담배는 허용해주기로 했다.

"푸우, 그건 그렇고, 할 말이 뭔가? 내가 지금 드라마를 보다가 나와서, 빨리 들어가 봐야 하는데, 곧 있으면 친자 확인 결과가 나온단 말이야."

당군악이 염라를 따로 부른 이유.

그건 바로···,

"대왕, 서왕모가 사는 도화궁 안뜰에 천도 나무가 있지 않소이까?"

"있지."

"만약···, 천도를 훔치면 어떤 벌을 받소?"

순간, 눈빛을 반짝이며 당군악을 지그시 바라보는 염라.

"무슨 의도로 질문하는 건가?"

"그냥 궁금해서."

"천도라, 독선 그대가 필요한 건 아닐 테고, 그럼···, 허허."

한번 헛웃음을 짓고 난 다음,

염라는 한참을 침묵했다.

이윽고.

"허락받는 것보다 용서받는 게 쉽다는 말이 있긴 해. 뭐, 천도 하나 사라진다고 해서 상위 계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소이까?"

"황천계는 자네 편이야."

"···고맙소."

염라는 당군악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다만 보물엔 임자가 있기 마련이라."

"임자라면?"

"그 원숭이 새끼가 제힘으로 천도를 훔쳐먹었겠나? 애초에 자격이 안 되면 따기도 힘든 게 천도인데, 천도가 알아서 선택한 거지."

"···."

염라의 말이 맞다.

천도를 훔쳐먹은 제천대성.

하지만 결국은 자신에게 주어진 대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여래계에 들었다.

태주는 어떨까?

과연 차원이 다른 데도 천도의 선택을 받을까?

< 해커 섭외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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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정해져있었다. >

태주는 삼백이와 함께 해커를 기다리는 중.

"손님이 올 거니까 얌전하게 있어."

"니아아야옹!"

"화났어? 건방지긴 했지만 몰라서 그런 거잖아."

"니앙!"

"요놈 봐라? 지리산에서 나하고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 이빨 드러내면서 막 으르렁대면서···,"

"니아아아아···,"

태주의 다리에 몸을 비비며 애교를 떨어대는 삼백이.

비록 웬만한 엘리트 마수쯤은 한입에 물어 죽이는 놈이지만.

"귀여워서 봐준다."

"니앙?"

그나저나 이놈은 언제 오는 거야?

잠시 후.

부르르릉.

집 밖에서 들리는 스쿠터 소리.

삑삐비빅, 삑!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회장님!"

잔뜩 흥분한 얼굴의 소년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죽음의···, 아, 아니, 김동훈입니다. 너무 만나고 싶었습니다."

생각보다 어려 보였다.

"김태주입니다. 반가워요."

"마, 말 놓으세요. 저 아직 18살입니다."

"···학생?"

"아뇨, 중학교는 졸업했는데···,"

"그래?"

중졸의 천재 해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곧잘 나오는 흔한 설정이지만···,

"부모님은?"

"안 계세요."

"돌아가셨니?"

"아뇨, 버려졌어요."

"···."

"니아아아···,"

알만하다.

어려서부터 마나 거부자였다면.

"참!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집으로 가시죠. 그 접속 장치 안전하게 열어보려면 몇 가지 장치가 필요하거든요."

이제 실력을 확인할 때.

마음에 들면 붙잡아야지.

※ ※ ※

김동훈의 거처도 재개발 예정지 안에 있었다.

허름해 보이는 단독주택, 그가 쓰는 방안에는 모니터와 컴퓨터를 비롯해 각종 기계 장치들이 즐비했다.

"노트북 주세요. 전원 장치 켜기 전에 먼저 손 좀 볼게요."

태주는 김동훈에게 노트북을 넘겨줬다.

전원선을 연결하고, 몇 가지 케이블을 꽂아서 자신의 컴퓨터와 연결하더니.

"됐어요. 이제 켜시면 돼요."

"알았어. ···근데 알아둬. 사실 이번 인증 절차 처음 해보는 거야."

"네?"

"그전에 한 번 접속하긴 했는데 원주인 몸으로 직접 인증했고."

"···아! 얼굴 바꿔서 하는 건 한 번도 안 해보셨단 말이죠?"

"그래도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실험해보자.

역용술로 바꾼 지문과 얼굴로도 인증이 되는지.

일단 전원을···,

핏!

"후우,"

지문은 통과.

다행히 켜졌다.

"와! 폴리모프 아티팩트가 있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지문까지 바꿀 수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뭐, 아이템은 아니지만.

역용술의 최대 관건은 얼마나 미세하게 기운을 조절할 수 있느냐는 것, 그러나 태주는 혼원무상독령공 대성을 이뤄낸 몸이다.

"다음 단계 인증해볼까?"

"아뇨. 그 전에 노트북을 제 컴퓨터와 연결할게요. 저도 조작할 수 있어야 하니까."

연결하는 동안 태주는 미리 역용술로 얼굴과 안구를 변경했다.

"다 됐어요. "

"이제 클릭해도 돼?"

"네."

마우스를 움직여 딮웹 브라우저 아이콘을 클릭하니.

[안면 인식을 위해 웹캠 카메라에 얼굴을 정면으로 위치해주십시오.]

될까?

[확인되었습니다. A1153 회원님, 딮 월드의 세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됐다.

파밧, 파바바밧!

자동으로 띄워지는 창들.

"오! 진짜네요. 계속 웹캠 앞에 있어 주세요. 검색하시는 척하면서."

"알았어."

완벽한 민타누가 된 태주.

김동훈의 말대로 노트북 앞에서 태연하게 마우스를 조작했다.

제목부터 거슬리는 게시물들이 보였다.

'망할 놈들.'

특히 눈에 밟히는 것.

[구인] : 14세 미만 여아 구합니다. (삼한 제국 한정) 거부자, 일반인, 적합자 가리지 않습니다. (+5) - 거래 중.

'씨발,'

전엔 댓글만 달려있던 제목에 거래 중이란 글이 추가됐다.

현재 인신매매가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

장소는 삼한 제국.

성별은 여자아이.

구매자와 판매자가 누군지, 어디서 어떤 식으로, 거래되는지 빨리 알아내야 한다.

"바이러스 심었어요. 회장님."

"벌써?"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처음 접속하는 게 어렵지, 일단 접속하기만 하면 해킹하는 건 쉽다고."

진짜?

"···바이러스를 실행하면 어떻게 되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에요. 하나는 시간을 두고 은밀하게 자료를 빼내는 거,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저쪽은 해킹당하고 있는지도 모를 거예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약 한 달쯤? 더 걸릴 수도 있고요."

너무 늦다.

"두 번째는 뭐야?"

"즉시 모든 자료를 다운받고, 아예 딮웹 메인 서버 자체를 박살 내는 거. 하지만 이 경우, 이곳 위치가 노출될 수 있어요."

"그거 말고 다른 단점은?"

"받을 수 있는 건 암호화된 문자 기록만, 사진이나 동영상은 안 돼요. 용량이 커서."

어떻게 할까?

사실 선택은 정해졌다.

시간이 없다.

여자아이가 거래되는 걸 막아야 한다.

"두 번째로 가자. 지금 당장 알아봐야 할 정보가 있어."

"이 게시물 때문에 그러는 거죠? 구인, 14세 미만 여아 구합니다."

"맞아."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당장 바이러스 작동시킬게요. 그리고 딮웹이 운영되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내 보는 것도."

시원시원하게 대답해줘서 고맙긴 한데.

"위치가 드러나면 여긴 더 이상 못 쓰겠네. 네가 위험해질지도 모르고."

"흐흐, 상관없어요. 제가 누구 때문에 희망을 얻었는데, 회장님이 MRC를 만들어주시지 않았다면 10년도 살지 못했을걸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해킹의 대가로 거액의 돈을 안겨주려 했지만···,

"동훈아, 너 나랑 같이 살래?"

"···네?"

"이참에 정리하고 같이 구례로 내려가자고."

"으음,"

"어차피 이곳 위치 드러나면 너도 집을 옮겨야 할 거 아니야."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듯 김동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구례에 있으면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친구들도 많을 거고."

"지, 진심이세요?"

"그래, 내가 사람 욕심이 조금 유별난 편이라, 너 유능하잖아. 태홍 바이오 본사 보안팀으로 채용할게. 원하는 연봉 말해봐."

"···."

김동훈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실 해커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긴 했지만 사정이 좋은 건 아니었다.

해커 일이 원래 그렇다.

보호받지 못하는 직업이다.

불법적인 일이라 들키면 그날로 끝.

목숨도 위험해질 수 있고.

게다가 아직 나이도 어려서 본업 외의 일은 문외한이나 마찬가지.

그런데 같이 일하자고?

그 유명한 김태주 회장님과?

순간!

띠딕, 띠디디딕.

"어, 다운이 시작됐어요."

화면에 다운로드 상태창이 띄워졌다.

급속하게 올라가는 숫자.

"저쪽에서도 알아차렸을 거예요. 아마 우왕좌왕하겠지만."

"다운되기 전에 들키지 않을까?"

"이미 늦었어요."

띠링!

"다 넘어왔거든요."

동시에 딥웹 노트북 화면이 암전됐다.

"어? 꺼졌네?"

"메인 서버가 바이러스 때문에 파괴됐어요. 하지만 그전에 위치는 확인했습니다."

"어디?"

"···어."

"왜?"

"위, 위치가 삼한 제국인데요."

"뭐? 삼한 제국이라고?"

"정확히는 옛 일본 땅, 북해도 자치령, 미나모토 길드 사옥."

이런 망할 새끼들.

북해도, 300년 전엔 홋카이도라고 불리었던 섬, 현재 일본계 제국민들이 가장 많이 사는 땅이다.

"혹시 북해도 자치 정부하고 연관된 건 아니지?"

"그건 확인할 수 없어요. 하지만 길드장은 알고 있겠죠. ···잠시만요."

김동훈이 인터넷 검색창을 띄워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길드장 이름은 미나모토 신이치, 마스터 등급이고, 어우, 자료가 넘쳐흐르는데요? 북해도에선 상당히 유명한 각성자인가 본데···,"

"자료는 싹 다 이 스마트폰으로 전송해줘."

"넵!"

위치도 특정했고, 얼굴과 이름도 알았다.

이제 놈은 독 안에 든 쥐.

천천히 잡아도 된다.

먼저 급한 것부터.

"아까 그 게시물 있지? 여자아이 거래, 구매자, 판매자 정보와 둘 사이 대화 기록 볼 수 있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기록이 암호화되어서, 빨리 풀겠습니다."

이게 가장 급하다.

만사 제쳐놓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

마음이 급했지만 참고 기다렸다.

이윽고.

"다 됐어요. 프린트해드릴게요."

지이잉.

드디어 정보를 손에 넣었다.

먼저 확인해야 할 건 거래가 진행 중인지, 끝났는지.

프린트 종이엔 놈들이 주고받은 쪽지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D2098 : 물건 확보. 5 battcoin 중도금 선입금 요망.]

[Z8374 : 중도금 입금 완료. 물건은 어디서?]

[D2098 : 입금 확인, 물건 넘겨받을 시간과 장소는···,]

'개자식들,'

드디어 알아냈다.

거래 날짜를 보니 바로 오늘, 그나마 다행히 아직 시간이 넉넉하다.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동훈아."

"네."

"여기 위치가 알려진 거 맞아?"

"저쪽에서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럼 피해 있어. 내가 뉴서울 올 때마다 묵는 호텔이 있거든."

"어어, 제 기계는요? 놓고 가면 안 되는데, 비싼 게 많아서."

"어느 걸 가져가야 해? 짚어봐."

"으음, 노트북과 저장장치는 제가 챙기면 되고, 일단 이 모니터랑, 본체···,"

순간!

스슷!

"헉!"

사라지는 대형 모니터와 본체.

"어, 어떻게."

"또 없어?"

"더 있어요. 전파 방해 장치하고, 네트워크 라우터와···,"

스슷, 스스스슷, 스스슷!

기계들이 무한공간 안으로 사라졌다.

책상이나 가구, 수납함들도.

"다 됐냐?"

"어음, 네, 됐어요."

"그럼 백두 호텔로 가. 내가 미리 전화해 둘 테니까. "

이제 맘 편안히 잡으러 가자.

잡고 나서는?

경찰이나 제정원에 넘기진 않을 것이다.

'살려 둬서 뭐 하게?'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제정원과 함께 했겠지.

※ ※ ※

당군악은 귀곡 선인과 함께 도원을 걸었다.

곳곳에 신장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서왕모가 멀티플렉스 극장에 있는 걸 확인하고 왔다.

드라마 틀어주고 왔으니 다 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고.

곧 도화궁 대문 앞에 도착한 당군악.

정면에 보이는 건 오직 문 하나, 담벼락도,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반드시 저 문을 통해야 도화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첫 번째 결계구나."

당군악은 쓰고 있던 투명 보자기 보패를 벗었다.

스르르륵!

그리고 귀곡 선인도 보자기를 벗고.

"어디 보자···, 문단속 결계 같은데, 이 정도 진법이야 어렵지 않지."

팔을 들어 소매를 떨쳤다.

그러자,

후두두둑!

도화궁 대문 주위로 떨어져 바닥과 문틀, 이곳저곳에 꽂히는 나무젓가락.

파바바바박!

"됐소. 진법은 망가졌어."

귀곡의 임무는 자물쇠 따기.

결계진을 무력화하여 안으로 진입이 가능하게 하는 역할.

그리고.

- 이젠 내 차례군.

귀곡의 도포 주머니에서 쏘옥 머리를 내미는 아주 작은 형체.

한 마리 작은 개미였다.

그런데 말도 한다.

전음을 통해서.

- 내가 안쪽을 살펴보고 오겠소.

어떤 생명체로도 변신할 수 있는 신선술을 가진 종리 선인이었다.

- 자자, 개미맨 나가신다.

"조심하시오. 내가 밟을지도 모르니까."

종리 선인은 염탐 역할이다.

개미로 변한 몸으로 도화궁 안으로 먼저 들어가 경비의 위치를 확인한다.

동시에 들려오는 전음.

- 대문 너머 신장 셋이 지키고 있소. 안뜰로 통하는 문에도 3명.

"정확한 방향만 설명해주시오."

- 방향이 어디냐 하면···,

당군악은 종리 선인이 가리킨 쪽으로 독기방사를 시전했다.

주위로 퍼뜨리지 않고 정해진 표적만 공격할 수 있도록.

독령이 반응했다.

마치 유도 미사일처럼 날아가는 독기.

독의 종류는 수면 독.

신체엔 전혀 해가 없다.

그저 잠이 매우 잘 올뿐이다.

털썩, 털썩, 털썩,

안쪽에서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선은?"

"저어기···,"

먼 하늘 위에 보이는 작은 점.

바로 검선이었다.

굳이 만리비검이 아니더라도 어검비행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검선의 임무는 운전.

천도 약탈이 성공하면 재빨리 당군악을 검에 태워 선계 밖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배송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숨어서 지낸다.

천도 도적단.

각 분야의 스페셜 리스트들이 함께 힘을 합쳤다.

은행강도가 나오는 드라마를 많이 본 덕분.

당군악은 도화궁 문을 열었다.

삐걱,

안으로 들어가자 별천지가 펼쳐졌다.

화려하게 지어진 궁궐.

흩날리는 도화 꽃잎.

개미로 변신한 종리 선인이 앞쪽에서 도적들을 안내했다.

- 따라오시오.

종리가 염탐하고, 귀곡이 자물쇠를 풀고, 당군악이 경비들을 재우고.

손발이 착착 맞았다.

그리하여 도화궁의 심처.

천도 나무가 심어진 안뜰에 도착한 일행들.

그리 크지 않은 나무였다.

잎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분홍색의 복숭아 한 알만이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달려 있었다.

"오오오!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기운이 느껴져."

"향기도 기가 막히는군."

- 실로 보물이라 할만해.

천도가 바로 눈앞에 있다.

따기만 하면 끝.

"독선, 빨리 따시오."

- 일단 무한공간에 들어가기면 하면 끝난 게임···,

그때였다.

"하아,"

뒤쪽에서 들리는 한숨 소리.

"결국 여기까지 왔군요."

서왕모였다.

들켰나?

월궁 선자와 미호 선자도 있었다.

"···어떻게?"

"날 우습게 보는군요. 예전부터 그대가 천도를 욕심내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요?"

"으음."

"실망이에요. 난 진심으로 대하나 싶었는데."

"그, 그게."

갑자기 풀쩍 뛰어오르면서 강하게 발을 구르는 미호.

"어머? 여기 개미가 있네?"

콰악!

동시에,

쑤욱!

종리 선인이 미호의 발에 밟힌 채 본신으로 돌아왔다.

"으가각! 이 미친 여우년이,"

"개미가 말을 해?"

"발 치워라. 뒈지기 싫으면,"

"싫은데?"

"네년 꼬리를 뽑아서 목도리로 만들어주마."

"해봐."

그러자,

"미호야, 경거망동하지 마라."

"네, 왕모님,"

서왕모는 당군악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던 일 계속해보세요. 독선."

"···무슨?"

"천도를 따고 싶다면서요. 저기 있잖아요."

"정말이오?"

"네, 따세요."

못할 것 있나?

당군악은 천도 나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응?'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그리하여 비로소 천도 나무 지척에 도착한 당군악.

그 모습에 월궁 선자가 화들짝 놀라며 옅은 비명을 질렀다.

"아! 와, 왕모님!"

"쉿! 조용히 하거라."

"하, 하지만···,"

그럴 수밖에.

천도는 절대 타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선자들도 예외 없었다.

오직 서왕모만이 천도에 저렇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런데 독선이?

당군악은 천천히 손을 올려 천도를 잡았다.

자신이 먹을 것이 아니다.

다른 세상의 자신, 김태주가 먹을 천도.

당군악은 눈을 감았다.

천도도 영성이 있다.

그래서 질문했다.

'따도 되겠는가?'

순간!

멈칫!

행동을 멈추는 당군악.

어느새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검선이 소리쳤다.

"뭐하나? 빨리 따버리시오."

하지만 당군악은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왜?"

"아직 때가 아니오."

"때가 아니라니,"

"덜 익었소."

"엥?"

"덜 익은 복숭아는 입에 쓴 법이지."

다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오직 서왕모만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독선, 축하해요."

"고맙소. 나중에 신상으로 보답하겠소이다."

천도를 손에 잡는 순간 깨달았다.

이미 인연이 정해져 있다는 걸.

그 대상이 태주가 맞는다는 걸.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걸.

핵심은 변화였다.

선계를 비롯한 상위 계의 변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천도도 먹기 좋게 익어 줄 것이다.

천도의 주인이 정해졌다.

이 소문은 상위 계 전체로 퍼져나갔다.

< 이미 정해져있었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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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일 놈과 찢을 놈 >

뉴서울 외곽의 폐공장.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구매자 안형대는 레귤러 등급의 각성자.

그러나 각성자 신분은 안형대가 가진 지위 중 가장 하찮았다.

뉴서울대 결정체 공학과 교수 안형대.

삼한 제국에서도 이름난 명문가 출신.

그의 조부가 황제와 함께 제국을 건설한 개국공신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엘리트였다.

그렇게 교육받아왔고,

하지만 그에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바로 사디스트, 가학적 이상 성욕자.

평범한 성행위로는 욕구를 만족할 수 없었다.

제압하고, 지배하고, 길들이고, 통제하고.

물론 이상 성욕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몇몇 비밀 성매매 업소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곳은 한계가 있었다.

미리 약속된 플레이.

정해진 선이 있었다.

그건 가짜였다.

안형대는 진짜를 원했다.

그 때문에 사고를 친 적도 있었다.

규칙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플레이를 진행하다가 그만 실수해서 여자의 목을 꺾어버렸다.

물론 거액을 들여 무마하긴 했지만,

비밀 성매매 업소도 못 가게 됐다.

정상적인 관계로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어서 갈증은 더더욱 심해졌고.

완전한 사육.

적당한 대상을 납치한 후, 억압하고 길들여 자신에게만 의지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좋다.

그래야 훈련하기 더 쉬우니까.

하지만 직접 납치하는 건 부담이 있다.

삼한 제국에서 실종 사건이 일어나면 무조건 제정원이 개입한다.

꼬리가 잡히면 모든 게 끝장.

그러다 우연한 경로로 딮웹의 존재를 알게 됐다.

모든 것이 거래되는 은밀하고 깊숙한 익명의 시장.

안형대는 여기서 여자아이를 구해, 가학적 지배 욕구를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거액을 들여 딮웹에 회원 가입하고, 전용 접속 장치를 받았다.

그리고 철저하게 변장한 후,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 거래 시작.

하지만,

"약속이 틀리잖아. 10코인만 더 입금하면 되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가 맞지 않아. 20코인 내놔. 안 그러면 물건을 넘겨줄 수 없어."

현 시세로 1배트코인은 2천만 원, 중도금까지 합쳐 총 25배트코인이면 5억이 넘는다.

"살아있는 물건을 구하는 게 쉬운 줄 알아? 게다가 13살이라고, 싫으면 그만두던가."

"···."

어쩔 수 없었다.

"20코인 추가 입금해줄게. 하지만 물건 먼저 확인해야겠어."

"흐흐, 당연히 눈으로 확인하고 사야지. 저기, 차 트렁크 열어봐."

안형대는 폐공장 안에 주차된 자동차로 다가갔다.

덜컥!

트렁크를 열어보니.

"읍읍! 으으읍!"

입에는 테이프, 눈에는 안대, 손과 발이 꽁꽁 묶여, 온몸을 비틀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소녀.

아아, 이렇게 애처로운 몸부림이라니.

안형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시라도 빨리 욕구를 채우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 한적한 별장에 감금실도 준비했다.

"맘에 들어?"

"좋군."

"그럼 입금해."

공병식은 히죽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적합자.

각성자와의 거래라서 품속에 결정체 탄환이 장전된 마나 권총을 준비해왔는데, 쓸 일이 없을 것 같다.

놈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

당장이라도 빨리 여자아이를 데리고 가고 싶은 모양.

'흐흐흐, 돈은 이런 식으로 버는 거지.'

사실 적합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많다.

그중에서도 제일 쏠쏠한 직업은 마수 레이드 전투 보조팀.

하지만 각성자보다는 적게 번다.

위험부담도 크고.

사냥하다가 엘리트 마수라도 만나게 되면?

딮웹의 청부를 받아 일을 처리해 주는 것.

마수 레이드보다 훨씬 안전하다.

아이 하나에 5억인데.

"확인해봐."

"정확히 들어왔어. 이걸로 거래 끝이군."

순간!

"냐옹,"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흔하게 볼 수 있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뭐야?"

열린 트렁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폴짝.

그리고 묶여있는 여자아이 옆에서 다소곳하게 웅크리고 앉았다.

"···네가 기르는 건가?"

"천만에! 난 고양이 싫어한다고,"

"그런데 이놈은 어디서···,"

"뭐가 문제야? 고작 길고양이 한 마리인데."

"흐음, 아무튼 이 차 내가 몰고 가도 되지?"

"몰고 가. 자동차는 서비스야.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

그때였다.

"이런 미친 새끼들."

안형대와 거래자는 깜짝 놀랐다.

좀 전엔 고양이지만 이번엔 사람.

이놈은 또 어디서 나타난 거지?

"···넌?"

태주의 눈이 분노로 차올랐다.

스팟!

먼저 안형대의 멱살을 잡은 후,

콰앙!

콘크리트 벽으로 밀어붙여,

"허억!"

유엽비도로 안형대의 어깨를 그대로 찔러 벽에 박아넣었다.

콰악!

"끄아아아악!"

하나 더.

콱!

안형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양어깨를 관통한 칼이 콘크리트까지 한꺼번에 박혀버렸다.

"너, 넌 누구? 왜 날···?"

"몰라서 물어?"

"지금 시, 실수하는 거야. 내, 내가 누군 줄 알아?"

"실수?"

"내 신분을 알면 너, 넌 후회할 거야. 아, 아직 늦지 않았어. 사과하고 물러나면···,"

태주는 안형대의 눈을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아하, 대단하신 분이구나. 그럼 넌 내가 누군 줄 알아?"

"씨, 씨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각성자도 아닌 새끼가···, 어?"

눈이 휘둥그레지는 안형대.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떠올랐다.

각성자가 아니지만 각성자보다 강하고, 주무기는 단검, 그리고 저 트렁크 안에 고양이.

"···서, 설마 김태주?"

"그래, 여전히 내가 실수하는 것처럼 보이나?"

틀림없다.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이다.

"당신이 어떻게?"

너무 놀라 아픔도 잊었다.

자신의 가문?

김태주에겐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리 개국공신의 명문가라 하더라도.

머리 굴릴 때가 아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죄, 죄송합니다. 모든 걸 털어놓고 경찰에 자수하겠습니다."

"괜찮아. 안 그래도 돼. 신고도 안 할거거든."

신고를 안 해?

그렇다면···,

"···제, 제발! 사, 살려주세요."

"지옥에나 가라!"

콰직!

한 자루의 탈명비도가 놈의 이마를 파고 들어갔다.

"끅!"

한편,

겁에 질린 공병식은 슬금슬금 자동차 트렁크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의문의 남자.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구매자는 각성자였다.

그러나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었다.

다음은 자신일 터.

여기서 안전하게 도망칠 방법은?

'아이를 인질로 잡아야 해.'

공병식은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서 앞에다 세우려 했는데,

"캬악!"

길고양이가 자신을 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비켜!"

지저분한 털바퀴 새끼가 성가시게.

하지만,

스팟!

"어?"

트렁크 안에서 도약한 일백이가.

"냥!"

강력한 앞발로 공병식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퍼억!

뿌득.

순식간에 목이 부러진 공병식.

"끅."

펀치 한 방에 즉사.

태주는 안형대의 시체를 무한공간에 넣고, 일백이에게 다가왔다.

"죽였네?"

"냥."

"살살하지. 이러면 물어보지도 못하잖아."

"냐앙, 냐아아아···,"

"그래, 맞다. 어린아이를 인질로 삼으려는 놈은 죽어도 싸지."

이제 어떻게 한다?

일단 시체부터 넣자.

태주는 트렁크로 가서 묶인 아이의 수혈을 조심스럽게 짚었다.

새근새근 잠이 든 걸 확인한 후.

묶인 줄을 풀고, 안대도 벗기고, 입에 붙인 테이프도 떼 내고, 안아서 자동차 뒷자리에 눕혔다.

태주는 일백이를 품속에 넣고 운전대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자동차를 몰고 한참을 달렸다.

그리고 시내와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죽은 놈이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

잠시 기다리니 경찰들이 몰려왔다.

뒷좌석에 잠든 아이를 발견하자, 구급차가 왔고.

태주는 이 모든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차를 타고 오는 과정에서 얼굴과 키, 그리고 옷도 갈아입었기 때문에 정체가 드러날 일은 없을 것이다.

죽인 놈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알 필요도, 알 생각도 없다.

죽일 이유가 충분했고, 그래서 그렇게 했다.

바로 그때!

찌르르르.

선계에서 보내온 배송 신호.

'왔구나.'

마침 잘됐다.

민타누의 비밀금고에서 얻은 명품과 보석들을 보내야지.

※ ※ ※

부우웅!

해맑 선녀는 전동카를 몰고 선계로 몰래 들어가고 있었다.

독선님이 어둑어둑한 밤에는 오지 말라고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선계가 궁금해서 도통 잠이 와야 말이지.

'···몰래 왔다고 혼날까? 으응,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 될 거야.'

독선님, 주선님, 검선님···, 모두 친절한 분이니 용서해 주실 것이다.

저어기, 멀티플렉스 방향에서 환하게 떠오른 찬란한 빛.

공사가 완공되면 놀 곳이 많아진다던데.

순간!

'어?'

길옆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신선님들인가?'

아마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듯.

'가봐야지.'

가서 응원해드리자.

해맑은 해맑 선녀는 차에서 내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 ※ ※

역사적으로 '마(魔)'라는 글자가 별호에 들어간 무인들이 꽤 있다.

너무나 강해서 마(魔)인 자들도 있고,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지르고 다녀서 마(魔)가 붙은 새끼들도 있고.

독마(毒魔), 천마(天魔), 혈마(血魔), 검마(劍魔), 도마(刀魔), 권마(拳魔), 그리고 음마(淫魔).

수백 명의 여인을 간살하며 강호의 공적으로 몰렸던 음마(淫魔) 사도굉도 지옥에 있었다.

흑저지옥(黑底地獄)에 떨어져 땅만 파다 선계로 끌려와 노역에 투입된 사도굉, 그의 임무는 건설공사에 필요한 석재와 나무들을 구해 현장으로 옮기는 것.

생각보다 편했다.

흑저지옥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지.

오늘도 요마계 가까운 곳에서 아름드리나무를 잘라 선계로 나르는 중.

그런데 바로 그때.

'음?'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향그러운 살갗 내음.

'오!'

확실하다.

여인의 향기다.

멀지 않은 곳에 여자가 있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욕구가 화산폭발처럼 치밀어 올랐다.

대체 누굴까?

사도굉은 주위를 둘러봤다.

가까운 곳에 차사나 사자들도 없다.

그리고 몰래 냄새가 나는 쪽으로 기어서 들어갔는데.

'아!'

여자가 맞았다.

그것도 매우 젊고 아름다운 소녀.

'신선과 선자는 아니야.'

그리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기회가 왔다.

강간 후 살인.

수백 년 동안 잊어온 행위.

그것이 지금 되살아났다.

이걸 어떻게 참아?

'빠르게 해치우고 시체는 요마계 깊숙한 곳에 묻어두면 돼.'

사도굉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녀에게 은밀하게 접근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이보시오."

"어맛! 깜짝이야! 누, 누구세요? ···신선님?"

"그렇소, 환희 선인이라고 불러주시오."

"아하, 환희 선인님이시구나. ···그런데 이상하게 생기셨어요."

"이, 일을 하는 중이라 씻지 못해서."

눈빛을 반짝 빛내는 해맑 선녀.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힘든 일인가 봐요?"

"하하, 궁금하시오?"

"네! 알고싶어요오! 응원해드릴게요오!"

"이리 따라오시오, 내가 잘 알려줄 테니."

"정말요?"

순진한 년이다.

그래서 더더욱 좋다.

얼마나 맛이 좋을까?

달리지도 않은 아랫도리가 근질거렸다.

아랫도리가 없어도 상관없다.

절망에 빠진 소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손을 잡으시오. 자칫하면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넵!"

해맑 선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애초에 남을 의심하는 성격이 아니다.

사도굉이 내민 손, 천진난만한 얼굴로 잡으려고 했는데.

그때였다.

"이게 누구신가? 천인 아니시오."

"앗! 안녕하세요오! 전 해맑입니다."

강림 차사였다.

"하하하! 반갑소이다."

"신선님이세요? ···환희 선인과 친구신가요?"

"환희 선인? 아! 이분 말이구려. 맞소, 무척 잘 아는 사이라오. 우리는 황천계에서 왔소이다."

"와아! 황천계 분이시네요. 전에 한번 봤었는데."

강림은 혼자 오지 않았다.

4명의 저승사자가 사도굉의 옆에 붙어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도 친한 사이죠."

당황한 얼굴의 사도굉.

그러나 강림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는,

"그런데 여긴 어째?"

"선인님이 제게 어떻게 일하는지 보여준댔어요. 저도 응원해드리려고요."

"그렇소이까?"

헤실헤실, 영롱한 목소리로 말하는 해맑.

"여기 말고 저어기, 멀티플렉스로 가시면 구경하기 편하실 겁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우리가 안내해드릴 테니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네에! 고맙습니다."

그러고 나서 함께 온 사자 2명에게 눈짓하자.

"선녀님, 이리로 오시지요.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으음, 나 전동카 타고 왔는데,"

"타고 오셔도 됩니다. 우리가 걸음이 빠르거든요."

"헤헤, 저도 정말 빨라요."

"그럼 같이 경주할까요?"

"네! 그렇게 해요오."

강림차사는 사자들과 함께 멀티플렉스 방향으로 떠나는 해맑 선녀를 끝까지 지켜봤다.

그런 후에,

"후우, 이 씨발 새끼가."

강림과 사자 둘은 남았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미 속박당해 꼼짝도 못 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음마 사도굉,

"아, 아닙니다. 뭘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다 오, 오해···,"

"찢어!"

사자들이 양옆에서 사도굉의 팔과 다리를 한쪽씩 잡았다.

"으히히힉?"

그리고 힘을 주니.

찌지지직!

"끄아아악!"

세로로 찢어지는 사도굉의 몸.

아픔을 잘 느끼도록 특화되어 만들었기에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다시 붙여. 소리 못 지르게 입은 없애고."

스르륵!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이 감쪽같이 붙었다.

"또 찢어."

"자, 잠깐, 읍!"

찌지지직!

"가로 세로로 찢었다, 붙였다, 계속 반복."

스르르륵!

찌지지직!

"근데 음마 새끼가 왜 흑저지옥에 있어?"

"···으음, 저도 잘 몰라서, 살펴보겠습니다."

두 손은 음마를 찢고 있었기에 사용할 수 없고,

대신 명부책이 허공에 떠올랐다.

차르르르르.

저절로 넘겨지는 책.

그러더니,

"아! 이놈과 이름이 비슷한 놈이 있어서, 분류 실수 같습니다."

"이 개자식들아! 일 똑바로 안 해?"

"죄송합니다."

그 와중에도 찢겼다 다시 붙여지는 사도 굉.

찌지지직!

스르르륵!

"몇 번 더 하다가 색욕 지옥에 집어처넣어."

"네!"

사도굉이 원래 가야 할 곳은 색욕 지옥.

일명 촉수 지옥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쾌락은 없다.

오직 고통만 있을 뿐이다.

강림차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큰일 날뻔했다.

저 더러운 음마 새끼가 고귀한 천인과 몸이 닿기라도 했으면···,

'사자들을 더 데리고 와야겠군.'

어쨌든 불미스러운 상황에서도 이렇게 천인을 만나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

몇 마디 나누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마음.

그런데 저 벌레만도 못한 새끼가 감히?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그나저나 대왕에겐 어떻게 보고하지?

< 죽일 놈과 찢을 놈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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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 선계 발전 계획 >

북해도 자치령.

일본계 제국민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

과거 황제 류태현이 일본 정벌에 나섰을 때 가장 빠르게 항복한 곳이 바로 북해도, 전쟁의 포화에서 빠르게 벗어났기 때문에 기반시설이 비교적 많이 보존되어 있다.

북해도 행정의 중심은 아사히카와, 그곳에 자치 정부가 있다.

미나모토 길드는 북해도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는 민간길드, 그러나 주 수입원은 마수 레이드가 아니다.

아사히카와시 길드 건물 지하엔 남들이 모르는 비밀 장소가 있다.

딮웹 서버 데이터 센터.

여기가 바로 미나모토 길드의 핵심 사업부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터졌다.

메인 서버가 해킹당하고 터져버렸다.

그래서 열린 긴급 간부회의.

길드장 미나모토 신이치가 터져 나오는 화를 꾹 삼키며 회의를 주재했다.

"복구 진도는?"

"···현재 진행 중입니다."

"후우, 완료 시점은 예상 가능해?"

"시, 시간이 걸리겠지만 반드시 복구될 겁니다."

피해가 워낙 컸다.

막으려고 했지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어떤 놈인지 역추적해봤겠지?"

"네, 서버 터지기 직전에 알아냈습니다."

"위치 말해봐."

"···뉴서울입니다."

미치겠다.

"혹시 제정원인가?"

"그쪽은 아닙니다. 서버가 터진 직후, 사람을 보내봤는데, 아무것도 없이 텅비어 있어서···, 다만,"

길드 소속 서버 엔지니어가 인쇄된 종이를 미나모토 신이치에게 넘겼다.

"그곳 아이피 주소에서 마지막으로 접속했던 놈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어떤 새끼가···, 어?"

미나모토 신이치는 눈을 비비며 다시 사진을 응시했다.

잘못 본 게 아닐까?

웹캠이 있는 모니터를 응시하는 남자의 모습.

'이놈이 왜 여기에?'

너무 황당해서 어이가 없었다.

"···민타누? 맞아?"

"회원 번호 A1153, 민타누가 확실합니다."

버마 공화국의 군부 독재자.

저항군의 기습에 모든 걸 잃고 해외로 도피했다고 알려진 놈.

'도피한 곳이 삼한이라고?'

그것도 그렇지만, 왜 해킹을 시도하는 거야?

설마 딮웹의 운영권을 손에 넣어 재기를 시도하려는 건가.

'감히.'

어딜 넘봐?

"유출된 자료는?"

"회원 정보 일부와 주고받은 쪽지, 실시간 채팅 기록···, 하지만 사진이나 동영상은 유출되지 않았습니다."

"제기랄!"

최고 기술자들을 모아 철저한 보안으로 딮웹 서버를 구성했는데, 고작 바이러스 하나에 털려?

"혼자 저지른 일일까?"

"그럴 리 없습니다. 민타누가 해킹이라뇨? 분명 조력자가 있습니다."

다른 의견도 이어졌다.

"애초에 민타누가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폴리모프 아이템을 사용한다거나."

"폴리모프 아이템이 지문, 안면, 동공 인식을 뚫을 만큼 정교하다고?"

갈수록 수수께끼다.

"버마 공화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봐야 합니다. 솔직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버마 정부군은 반군에게 당할 만큼 약하지 않아요. 마스터만 해도 몇 명인데."

"동의합니다. 분명 뭔가 있어요."

미나모토가 결정을 내렸다.

"메인 서버를 옮긴다. 여긴 깨끗하게 정리해."

"어디로···?"

"삿포로."

과거 훗카이도 최대의 도시.

하지만 반쯤 물에 잠겨 지금은 예전 같지는 않다.

"복구도 그곳에서 진행합니까?"

"그래, 최대한 비밀리에."

그리고.

"버마 공화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해봐. 직접 가든지, 아니면 현지 정보원을 섭외하든지,"

"네. 알겠습니다."

지금은 움직일 때가 아니다.

들켰으니 숨는 게 먼저.

더불어 빨리 서버를 복구해야 하고.

※ ※ ※

김동훈은 태주의 지시대로 백두 호텔로 왔다.

"어서 오십시오. 뭘 도와 드릴까요?"

"저, 김동훈이라고 하는데요."

"네?"

"···기, 김태주 회장님이 전화하셨다고."

"아! 김동훈님!"

호텔 여직원이 활짝 웃으며 김동훈을 안내했다.

"제가 도와 드릴게요. 이쪽으로."

호텔 여직원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리고 최상층으로 올라가,

"여깁니다. 따로 짐은 없으세요?"

"으음, 어, 없습니다."

"그럼 편히 쉬시고,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해주세요."

김동훈은 처음 보는 백두 호텔 로얄 스위트룸의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짜 꿈만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진짜 여기 있어도 되나?

'···일이나 하자.'

딮웹 서버에서 다운받은 자료들.

외장 하드에 미리 챙겨왔다.

노트북을 열고, 하드를 연결하고.

김동훈은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다.

누가 들어오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이윽고.

"동훈아."

"···어? 회, 회장님."

"냐앙!"

"일은 잘 끝나셨어요?"

태주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김동훈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덕분에, 너 아니면 큰일 날뻔했다."

"오! 잘됐네요. ···나머지 암호화 기록도 풀고 있었어요."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즉시 이야기하고."

"네, 어차피 서버가 날아가 딮웹도 먹통이 됐으니까, 더 이상 거래는 불가능할 거예요."

"저쪽에서 딮웹 서버를 복구하려고 할까?"

"당연하죠. 거기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얼만데?"

하지만 절대 복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전에 끝내버릴 테니까.

"참! 부탁이 있다."

"뭐든 시켜만 주세요."

"특정 장소에 자체적인 네트워크를 설치할 수 있어? 외부 인터넷 연결 없이."

"당연히 가능하죠."

"무선 신호도 송출할 수 있고?"

"장비만 있으면 뭐···,"

태주는 선계에 네트워크를 깔 생각이다.

놀이공원도 만들어질 테고, 그럼 찾는 사람도 많아질 테고.

"스마트폰도 이용할 수 있나?"

"그렇죠. 독립 인트라넷을 구성하면···, 스마트폰 프로그램도 살짝 손보면 됩니다. 채팅뿐만 아니라 전화, 게임이나 자료공유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해?"

"글쎄요, 범위를 넓히려면 케이블을 깔아야 할 거예요. 중계기 같은 장비도 필요하고. 뭐, 돈이 많이 든다는 의미죠."

"돈은 걱정하지 말고,"

"아! 맞네요. 그럴 필요가 없겠어요."

천선계 인트라넷.

신선들과 천인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서로 대화하고 친교를 다진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일단 자세한 이야긴 구례로 가서 나누자."

"넵!"

※ ※ ※

태주는 김동훈과 함께 구례로 왔다.

자신의 자택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시키고.

무한공간에서 장비를 꺼내 다시 돌려주고는

"집은 나중에 구해줄 테니까, 당분간 여기 있어."

그후 태주는 백서연 총괄경영자를 만났다.

"급한 불은 껐죠?"

"네, 각국에서 마나 거부증으로 인한 사망 위험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좋네요. 그렇다면 슬슬 다른 약품 생산 라인을 복원해야겠어요."

태홍 바이오 전 공장은 MRC 비상 생산 체제.

거의 모든 곳에서 MRC만 생산되고 있었다.

이젠 생산량을 조절해도 된다.

물론 태홍 회복제와 모기 독, 포자독 해독제는 지금도 제자들이 따로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

태주가 말하는 건 다른 약들.

"생기불끈, 새살쑥쑥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약이니까요."

"네."

"가능하겠죠?"

"여력은 충분해요. 노동자들의 생산 숙련도도 높아져서 생산성이 갈수록 올라가고 있으니까요."

더불어 새로 확충된 생산 설비들, 미리내 제약의 공장과 파주의 신공장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섰다.

"하지만 아무래도 수출 물량은 턱없이 부족해서,"

"아아, 수출···."

여기저기서 요구가 빗발쳤다.

삼한 제국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공화국, 그리고 유럽 제국에서도.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만."

"뭔가요?"

태블릿을 열어 태주에게 보여주는 백서연.

"···화이백 인수?"

"네! 불법 카피약으로 과징금 때려 맞고, 주가도 폭락 중이고, 현재 거의 빈사 상태입니다. 우리가 인수할 수 있어요."

미국에 지사를 둔다?

"또한 불법 카피약을 생산한 경험이 있기에 대규모 생산 시설과 숙련된 노동력도 확보 가능합니다."

생각해보니 좋은데?

"비록 재료가 차이가 나서 약효가 조금 떨어질 거라는 문제점이 있지만···,"

"그건 손보면 됩니다. 환경에 맞는 제조식을 새로 만들면 되니까."

"추진해볼까요, 회장님?"

"당장 하세요."

따로 시간 내어 아메리카 공화국에 가 봐야겠다.

"참! 제가 전에 이야기한 건?"

"아! 중형 발전기 설비 말씀이시죠? 전력 공사에 주문을 넣어 모듈 형식으로 발전 설비를 받기로 했습니다."

중형 발전기라고 해도 웬만한 지방 도시쯤은 충분히 커버한다.

다만 크기가 너무 커서 공유창고를 이용해 선계로 넘겨주기가 어려운 것이 문제, 뭐, 그것도 해결 방법이 있다.

전체 설비를 작은 장치로 분리해서, 모듈 형식으로 선계에 넘길 예정, 그럼 그곳에서 발전기를 조립해서 설치하면 된다.

발전에 필요한 연료는 당연히 마나 결정체, 현재 지구의 주된 에너지원이다.

석유도 에너지원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비중이 많이 줄었다.

"그런데 제대로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일반 결정체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결정체 연료봉에 엘리트 마나 결정체가 들어간다고 해서···."

발전소는 결정체 연료봉으로 돌아간다.

중형 발전소 한 기당 연료봉이 100개 정도 들어간다고 하니 엘리트 마나 결정체도 100개.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엘리트 결정체야 제가 확보할 수 있으니까."

"네."

백서연의 장점 중 하나.

중형 발전 설비가 필요한 이유를 절대 묻지 않았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

태주가 어디서 MRC의 재료인 꽃을 공급받는지, 또한 왜 그렇게 쇼핑을 많이 하는지, 물류 창고에 보관했던 그 많은 물건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지시하면 그대로 따를 뿐.

그래서 믿고 맡길 수가 있는 것이고.

"당분간 제가 없어도 되겠죠?"

"또 어디 멀리 가시는지···,"

"아뇨, 제국 안에 있을 겁니다. 다만 매우 바쁠 것 같아서,"

"하아, 가끔씩 회사 직원들 만나서 격려도 좀 해주세요. 새로운 직원들이 회장님 얼굴 한번 보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데."

"하하, 꼭 시간을 내볼게요."

어디 회사 직원뿐인가?

각종 강연과 행사 초청, 수상식 참석 등등, 지금도 문의가 쇄도하는 중.

미나모토 그놈만 잡아서 족치고 회사와 선계 발전 계획에 본격적으로 전념해야지.

치료제 빼돌리기, 장기 거래, 어린 소녀까지 물건으로 거래되는 추악한 인신매매, 어지러운 지구였다.

그에 비하면 선계는 얼마나 평화로운가?

신선들 보기에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 ※ ※

황천계를 비롯한 염라의 하루 일과는 바쁘게 돌아간다.

그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새로 들어온 망자들을 분류해, 지옥으로 보낼 놈은 보내고, 환생 시킬 사람은 시키고, 천계로 갈 영혼은 고이 모셔드리고.

그러고 나서 죄인들을 이끌고 선계 방문.

건설 공사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확인하고 나서, 극장에 틀어박힌다.

일이야 밑에 놈들이 하면 되고.

또 부하들도 교대로 근무하니 큰 불만은 없었다.

"저저저, 망할 년이! 자기 친딸한테? 어이, 오도 판관! 저년 한빙지옥에 집어넣어!"

"저분 연기잔데요?"

"···흐음, 그렇군."

"과몰입도 병입니다. 병!"

"아니, 연기를 너무 잘하잖아."

그런데 바로 그때.

엉거주춤한 자세로 극장 안으로 들어오는 강림.

막장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는 염라에게 가까이 와서.

"저어, 대왕님."

"응? 무슨 일이야?"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하지만 잘 처리했습니다."

"그래? 말해봐."

강림은 염라의 귀에 대고 음마와 해맑 선녀와 있었던 일을 소곤소곤 보고했다.

표정이 심각해지는 염라.

옆에서 듣던 판관들도 분노했다.

"···뭐?"

"미친 음마 새끼가."

"이런 썅!"

음마가 천인을 건드리려고 했다고?

"자, 잘 해결했습니다. 해맑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니까요."

그럼에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염라.

아는 사람은 안다.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그 새끼는 어디 있어?"

"몇 번 찢어서 색욕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부족하다. 창의적으로 조져."

"염려 마십시오. 극도의 고통을 줄 수 있게끔 차사들과 사자들이 연구 중입니다."

"재발 방지책 철저하게 마련하고."

천인에게 죄스러운 마음뿐.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생각도 하기 싫다.

일단 해맑 선녀를 만나보자.

괜찮은지 확인하고.

'멀티플렉스로 왔다고 했지?'

염라는 극장을 나가 1층 휴게실에 왔다.

1층에서 도란도란 신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해맑 선녀가 보였다.

다행이다.

아무 일 없어 보인다.

이 착한 천인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염라는 기분이 좋았다.

저 천진한 미소.

주위 사람들을 저절로 행복하게 만드는 해맑 선녀.

마음이 푸근해졌다.

선계에 오길 잘한 것 같다.

그래서 그녀에게 다가가서.

"해맑 선녀, 혹시 나 기억하시오?"

"앗! 대왕님! 안녕하세요오. 오랜만이에요."

"하하하, 날 기억해주니 송구스럽소, 만난 김에 선물하나 해주고 싶은데, 쇼핑몰로 갑시다. 원하는 건 다 사드리겠소."

"괜찮은데···,"

그런데 선인들이 난리가 났다.

"대왕! 무슨 염치없는 짓이오?"

"여, 염치라니? 내가 뭘 했다고?"

"해맑 선녀에게 아무나 선물할 수 있는 줄 아오?"

"무, 무슨?"

"새치기하지 말란 말이오. 안 그래도 해맑이에게 선물하고자 하는 신선들이 줄을 섰는데."

"다음 차례는 나요."

"허어,"

선물하려면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고?

해맑을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쯧쯧, 황천계 사람들은 경우가 없어."

"극장에서도 시끄럽게 떠들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그 시간에 극장으로 안가잖아."

"조금만 참자고, 어차피 공사가 끝나면 여기 못 와."

"맞소. 코인 바닥나면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

사실 염라가 걱정하는 바가 바로 이것.

공사가 끝나고 코인도 다 써버리면?

노역 형벌 명목으로 죄인들을 투입해 공사비를 선도 코인으로 받았다.

그걸로 시계도 사고, 간식도 사고, 술도 사고, 연초도 사고, 막 쓰는 중, 선계 멀티플렉스에 한창 재미가 들렸다.

그러나 선계 건설 공사가 완료되면 코인이 지급되지 않을 것이고,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한다.

천인들 만나는 것도 힘들어진다.

'대책을 세워야겠군.'

황천계의 또 다른 가치를 찾아내야 한다.

독선에게서 코인을 받아낼 수 있도록.

< 본격 선계 발전 계획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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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끔하게. >

납치당해 팔려 갈 뻔했던 여자아이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실종 여아, 사라진 지 48시간 만에 부모의 품으로 돌아와.>

<천만다행이지만 납치범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뉴서울 경찰청, 범인 체포에 총력을 기울일 예정.>

미안하지만 수사는 어려울 것이다.

범인들은 다 죽었으니까.

시체도 마수 밥으로 던져줬고.

구례 태주의 자택.

김동훈이 다운 받은 딮웹 암호화 기록을 다 풀어내고 정리해서 가져왔다.

"앞으로 진행 예정인 거래들인데, 다행히 장기 판매나 인신매매 같은 건 없었어요. 거의 정보 구매, 혹은 마약, 불법무기 등등이고요."

그마저도 메인 서버 복구가 완료되지 않아 거래가 중단된 상황.

"과거 이뤄졌던 거래 내역은 여기 있어요."

"그래? 그건 그렇고, 이쯤이면 딮웹 운영자 놈들이 서버를 거의 복구했겠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쪽도 꽤 실력 있는 놈들만 모아뒀을 테니까."

김동훈이 해킹한 건 메인 서버 데이터의 일부일 뿐이다.

놈들의 본거지에 더 많은 자료가 남아있을 터.

북해도로 가서 자료를 탈취하든, 혹은 복구할 수 없게 철저하게 파괴하든,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와야지.

'슬슬 다녀올까?'

그 와중에 걸려온 전화.

"여보세요."

- 회장님, 문경식입니다.

제정원 마인 파트 문경식 차장이었다.

서로 간단한 안부를 나눈 후,

- 다름이 아니라, 마인의 짓으로 의심되는 실종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

- 실종자가 레귤러 등급 각성자입니다. 마인의 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익스퍼트 미만 각성자들은 마인의 주 표적이라서.

"실종된 사람은 누구죠?"

아직 안 죽었으면 찾을 수 있다.

- 실종자 이름은 안형대, 뉴서울대 결정체 공학과에 재직하는 교수입니다. 개국공신 가문이라 권력도 상당한 양반인데도 말이죠.

"안타깝네요."

- 그런데 수사 과정에서 특이점이 발견되어···,

"뭐죠?"

- 실종자 안형대의 집을 수색하던 중, 그의 개인 금고에서 딮웹 전용 접속장치가 발견되었습니다.

"···."

그놈이었구나.

내가 누군지 아냐며 큰소리쳤던 구매자 새끼.

- 사진 보내드리겠습니다.

띠링,

스마트폰에 문경식이 보낸 메시지도 날아왔다.

첨부된 사진을 보니 놈이 맞았다.

- 회장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딮웹이라는 비밀 네트워크 거래 사이트가 존재합니다. 그곳에서 온갖 물건이 거래되는데, 안형대도 물건을 거래하다가 신분을 숨긴 마인에게 유인당한 것 같습니다.

"굳이 딮웹을 통해 거래할 정도라면···, 실종됐다는 안형대도 썩 좋은 사람은 아니겠네요."

- 맞습니다. 솔직히 마인만큼 나쁜 놈입니다. 과거 비밀 성매매 업소 접대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수사받다가 결국 증거 부족으로 무혐의 처리된 적도 있고.

잘 죽었다.

아니 잘 죽였다.

- 수사하다가 단서가 포착되면 도움 요청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단서는 찾지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제정원도 딮웹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제정원을 이용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딮웹을 이용했던 구매자와 판매자들의 처리 말이다.

'일단 그놈부터 잡고.'

그리하여 야심한 밤.

태주는 북해도 아사히카와시로 날아갔다.

'떠올려볼까?'

태주는 추적부를 꺼내 손으로 잡았다.

김동훈이 수집해준 미나모토 신이치의 모든 것.

그의 나이, 학력 등의 신상정보, 그리고 얼굴이 잘 나온 사진, 인터뷰 영상···,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부적이 잘 발동한다.

화르르륵!

추적부가 불타오르면서 하늘 위로 날아간다.

동시에 미나모토 신이치의 위치 정보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여기가 아니네?"

추적부 쓰길 잘했다.

※ ※ ※

삿포로.

미나모토 길드의 제2본부.

아사히카와시 본부보다 작고 허름하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땐가.

새로운 거점에서 미나모토 신이치는 자신의 최측근인 길드 간부 3명과 함께 대책 회의를 하는 중, 부하들은 모두 슈페리어 익스퍼트.

"메인 서버가 99% 복구됐습니다."

"나머지 1%는 뭔데?"

"추가 보안작업이 필요해서요. 방화벽과 우회 장치, 함정도 만들 예정입니다."

"최대한 빨리 가동해. 현재 고객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있어."

경쟁 업체들이 즐비하다.

운영이 중지된 틈을 타 다른 업체가 치고 올라올 수도 있는 상황.

"그리고 운영이 시작되는 대로 재고로 쌓인 마약들, 싸게 풀어."

"얼마나 싸게···?"

"흐음, 10분의 1로, 헐값에 올려."

"그럼 손해가 큽니다."

"괜찮아. 떠난 고객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해."

마약을 싸게 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잠시 고민하다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미나모토 신이치.

"너희들은 열도 남부로 내려가 쓸만한 여자들, 몇몇 납치해와."

"몇 명이나?"

"5명 정도."

"···팔 겁니까? 위험부담이 클 텐데요."

"열도 내부에서 소화하면 돼. 배달도 쉽잖아."

젊은 여자들은 여전히 최고 인기 품목이다.

팔 물건이 많아야 회원들이 다시 돌아오겠지.

삼한 제국의 식민지인 옛 일본 열도에도 구매자들이 가득하니.

바로 그 순간!

"너희들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투명부를 해제하고 나타난 태주였다.

하지만 겉모습은 버마 독재자 민타누로.

"헉!"

"뭐야?"

"미, 민타누?"

화들짝 놀라는 미나모토 신이치와 간부들.

갑자기 나타난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지, 진짜 민타누라고?"

"보면 몰라?"

"서,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넌 민타누가 아니야."

"그래, 아니라고 해두자."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우리 서버를 망가뜨린 놈은 확실하구나."

"어, 맞아."

스르릉.

미나모토는 허리춤에서 엘리트 결정체를 섞어 만든 일본도를 꺼내 들었다.

"그럼 폴리모프? 투명화 아이템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마음대로 생각해."

미나모토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폴리모프와 투명화 아티팩트.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다.

"넌 실수한 거야.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알약 몇 개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의 최측근 길드 간부들도.

'뭘 먹는 거지?'

순간!

우우웅!

요동치는 마나의 기운.

놈들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았다.

주체하지 못한 마나가 머리털을 통해 분출되는 모양,

'···약인가?'

놈들의 기세가 달라져 있었다.

확실히 강해졌다.

'흐음, 영약은 아니야.'

그렇다면?

강호 무림에도 저런 비슷한 약이 있었다.

예를 들어 광혼단(狂魂丹).

잠력을 폭발시켜 평소보다 두 배 이상의 힘을 내게 하는 마약의 일종.

먹고 나서 며칠 동안 힘을 쓰지 못하는 부작용도 있고.

그러나 웃기기만 하다.

감히 절대독마 앞에서 약을 처먹어?

미나모토와 그 일당들의 눈이 시뻘게졌다.

불끈, 팔뚝에서 꿈틀거리는 근육.

"푸우, 푸우, 건방진 놈, 아티팩트 몇 개 믿고 감히 여길 나타나? 조각조각 잘라서 죽여주마."

거친 숨소리.

자신만만한 표정들.

하긴, 두 배 이상 힘이 강해졌으니 자신감이 생길 수밖에.

"죽여!"

스팟!

태주가 먼저 놈들을 맞이했다.

독기방사는 기본.

환영미리보.

동시에 금나수, 분골십이수(粉骨十二手).

뼈를 분쇄하는 무공,

일단 한 놈.

머리로 찔러오는 칼은 슬쩍 피하면서, 목을 잡아 그대로 돌려버리자.

뿌득!

피하고, 잡고, 꺾고.

으드득.

스팟!

가까이 다가가서 주먹으로 한 방,

퍼억!

꽈득.

두개골 함몰.

"···어?"

멈칫,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미나모토.

'다들 왜 쓰러져있지?'

놈이 먼저 움직인 것은 봤다.

희끗희끗한 그림자도.

부하들이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뒤에서 기습하면 그만, 그런데 벌써 끝나버렸다.

이렇게 빨리?

그리고 왜 힘이 자꾸만 빠지는 거야?

'대, 대체?'

미나모토는 이빨을 까득 깨물었다.

지이잉!

일본도에 어린 마나 블래이드.

"빠가야로!"

츠팟!

있는 힘껏 휘둘렀다.

'벴나?'

물론 아니었다.

덥석.

"끄억."

단 한 수에 목이 잡혀버린 미나모토.

뿌리치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자, 잠깐, 얘, 얘기 좀 하자."

"갑자기?"

"이, 이유가 뭐야? 우, 우린 네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잖아."

"나쁜 놈들 죽는 데 이유가 있을까?"

"도, 돈을 주겠다. 아공간 가방도 있어. 날 살려주면···,"

"필요 없어."

아니 필요하긴 하지.

"솔직히 말해줄게. 난 민타누가 아니야."

"그, 그럼?"

태주는 미나모토의 귀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김태주."

"···뭐?"

뿌드득!

미나모토의 목이 부러졌다.

털썩.

'후우,'

요 며칠간 너무 많이 죽였다.

기분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일 터.

하지만 후회 따윈 없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아무리 악인이라고 해도 갱생의 기회는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은 맞는 말이다.

갱생의 여지가 있는 범죄자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놈들은 절대 아니다.

방금 전에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약을 팔고 여자들을 납치할 계획을 꾸민 놈들.

'그건 그렇고, 아까 아공간 가방 이야기하던데···,'

쓰러진 미나모토의 몸을 뒤져보니,

'여깄군.'

허리에 차고 있었다.

슬링백 형식의 아공간 가방.

'뭐가 많이 들어있네.'

나중에 확인해보자.

태주는 죽어있는 길드 간부의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문은 이미 바꾼 상태, 목소리만 변화시키고 제정원 신고 전화 113을 눌러.

"여보세요. 신고하려고 하는데요. ···아뇨, 마인 신고는 아닙니다. 딮웹인가? 여기가 그 딮웹 본부라던데···, 제가 누구냐고요? 글쎄요. 누굴까요. 아무튼 빨리 오시죠."

태주는 전화를 끊지 않고 회의실 탁자 위에 가만히 뒀다.

시체도 놓고 간다.

스스스스스···,

방사한 독기는 다시 거둬들이고.

딮웹 조사는 제정원에서 알아서 하겠지.

요원들이 오는 것까지 확인하고 가자.

깔끔하게.

잠시 후,

애애애앵!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스슷!

태주의 몸도 사라졌다.

※ ※ ※

황천계에서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안건은 대역죄를 저지른 음마에 대한 처벌과 새로운 선도 코인 수익 사업을 찾아내는 것.

강림 차사가 염라와 판관들 앞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음마(淫魔) 처벌 방안 보고드리겠습니다. 먼저 초열지옥으로 보내 화끈하게 며칠간 태웁니다. 그다음 발한지옥으로 보내 얼려버리고, 도검지옥에서 포를 뜨듯 살을 저며내고···,"

꽤나 신경 써서 세운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진하다.

음마가 지은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내가 창의적으로 조지라고 했잖아."

"최대한 머릴 짜낸 건데요?"

"됐다. 내가 너에게 뭘 기대하겠냐?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지속적인 코인 수급 방안.

그래서 어떻게든 선계 멀티플렉스를 오래도록 이용하는 방법.

의견들이 속속 나왔다.

"공사 기간을 좀 길게 끌어볼까요? 휴식 시간도 늘리고, 게으름 피우는 것도 넘어가 주고, 그래서 작업을 지연시키면···,"

"안 돼. 눈치 빠른 신선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아니면 다른 일감을 만들어 보는 것도."

"어떤 거?"

"도로를 확충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미 검선이 하고 있어. 곧 슈퍼카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면서."

"와! 역시 검선은 다 계획이 있구나."

"지금 감탄할 때야?"

아아!

노동력 말고는 빈약한 황천계의 자산.

신선들은 하루에 하나씩 선도를 받아 코인으로 바꾸고 있고, 천인들은 꽃만 꺾어와도 코인을 입금해주는데.

"하나 생각났습니다."

"뭔데?"

"놀이 공원이 지어졌다고 다 끝나는 건 아니죠. 유지 보수할 인원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오! 그렇지. 청소도 해야 하고, 파손된 시설도 수리하고."

괜찮은 생각이다.

"모범 죄인들 파견해서 일하게 하면···,"

"미쳤어? 그걸 죄인 새끼들에게 왜 맡겨?"

"맞아, 내가 하면 되지."

"···아냐! 내가 한다. 현장에 제일 오래 있었잖아."

"어허! 이놈들이, 짬밥 안 되는 놈은 닥치고 있어."

그러자 슬며시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하는 강림.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뭐야? 말해봐."

"제가 철장 선인하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무슨 이야기?"

"선계 월드가 거의 지어지면 관람차 제작 같은 어트렉션 작업을 할 거랍니다."

"그거야 나도 알지."

"그런데 철이 부족하다네요."

"철?"

나무와 석재는 선계, 환수계, 요마계에도 널렸다.

그러나 철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리 철만큼 단단한 나무가 있다지만, 어트렉션을 목재로만 제작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근데 그게 왜?"

"금속이야 우리 황천계에 발에 채일 정도로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아!"

맞다.

가장 대표적인 광물이 바로 흑암철.

당장 흑저지옥 형벌이 뭔가?

바닥에 깔린 흑암철을 파내는 거 아닌가?

"처치 곤란이긴 하지."

"품질도 좋죠. 황천의 기운이 서려 있어서 잡귀의 침범도 막고, 단단하고, 녹도 슬지 않고···,"

사실 흑저지옥은 태초의 지옥이란 별명이 있다.

모든 지옥은 흑저지옥에서 출발했다.

바닥을 파고, 파고 계속 파서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면 불이나 얼음처럼 특정 속성의 지옥으로 만들고, 다시 다른 곳에 또 땅을 파고.

셀 수도 없이 오랜 세월 동안 땅만 팠다.

그래서 지옥은 계속 확장 중.

악인들이 좀 많나?

파낸 흑암철은 어떻게 처리할까?

그냥 쌓아만 두고 있었다.

"황천계 곳곳에 솟은 수많은 산을 보십시오. 다 흑암철이 쌓인 겁니다. 그걸 팔아서···,"

"하아!"

열변을 토하는 강림을 보며 한숨짓는 염라.

"차사의 우두머리가 이리 멍청할꼬."

"···네?"

"네 말대로 흑암철을 갖다준다 치자. 그게 얼마나 필요할 것 같으냐?"

"아···,"

"어트렉션? 청룡열차나 회전목마 전체를 철로 만든다고 해도 그렇지, 흑저지옥 하루 작업량이면 쓰고도 남겠다."

염라의 말이 옳다.

흑암철도 지속적이지 않다.

어트렉션 다 만들면 더는 필요가 없어진다.

"아예 건물도 철로 만들자고 건의하면요?"

"거의 다 지어졌잖아."

"허물고 다시 짖자고···."

"되겠냐?"

"···."

"저기 가서 대가리 박고 있어."

"네."

하지만 염라는 흑암철 광석을 들고 독선을 만나볼 생각.

어쩔 수 없다.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선도 코인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독선이 이 흑암철을 받아줄지가 관건.

제발 사줬으면 좋겠다.

헐값이라도 상관없으니 말이다.

< 깔끔하게.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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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보내보자. 혹시 모르니까. >

언론에선 조용했다.

그 어디에도 딮웹 관련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묻으려는 걸까?

조사할 것이 많아서 그런 걸까?

자치경찰이 아닌 제정원에 신고했으니 묻어버리진 않을 것이다.

'아공간 가방이나 살펴보자.'

미나모토 신이치가 가지고 있었던 아공간 가방.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자체만으로 보물.

이제 태주가 가진 아공간 아이템은 총 5개.

가방을 열자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 의식 속에서 떠올려졌다.

'어이쿠, 뭐 이런 걸 다···,'

거의 결정체.

일반 마나 결정체가 대다수, 엘리트 마나 결정체도 20개나 들었다.

결정체만큼 유동성이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언제, 어디서든 돈으로 바꿀 수 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약이구나.'

미나모토 신이치와 부하들이 먹었던 알약도 약병에 가득.

하나를 꺼내 냄새를 맡아보니.

'쯧, 온갖 혼탁한 기운이 뒤섞여있네.'

확실하게 알아보려면 먹어봐야 한다.

입에 넣어서 꼭꼭 씹었다.

'마약에다가, 도핑에 쓰이는 각종 스테로이드제, 결정체 성분도 있고.'

그냥 즉효성으로 힘을 올려주는 성분이라면 아무거나 막 집어넣은 모양.

이건 약이 아니다.

저급한 마약 각성제다.

하지만 이런 약이 만들어지는 것도 이해가 된다.

부작용이 크다 하더라도, 쓰이는 곳이 있기 때문에.

가장 대표적인 쓰임새가 바로 마수 레이드.

대부분 각성자들의 사냥 목표는 비교적 잡기 쉬운 일반 마수,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변수는 늘 존재한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엘리트 마수와의 전투.

좀처럼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놈이어서 거의 만날 일이 없다고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일까?

사실 전투라고도 볼 수 없다.

일반적인 레이드 팀 구성으로는 엘리트 마수를 이길 수 없다.

도망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일 뿐.

짐꾼들이 가장 먼저 죽는다.

그다음으로 적합자, 각성자···,

운이 좋으면 절반 정도는 살아남고, 운이 나쁘면 전멸한다.

그런데 일정 시간 동안 능력치를 끌어올려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약을 있다면?

물론 양날의 검이긴 하다.

부작용도 매우 심각한 편이고, 약을 먹어도 탈출에 실패하면 무조건 사망.

하지만 종종 쓰인다.

지구에서도, 강호 무림에서도.

당군악도 복용했었다.

동시에 연구도 많이 했고.

따라서 태주의 머릿속에도 근력과 마력, 그리고 민첩과 속도를 순간적으로 최소 3배 이상 끌어올릴 방법이 무궁무진···,

'가만!'

이거 괜찮은데?

각성 마약이 위험한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부작용.

만약 부작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방법이 있다면?

당군악은 줄이지 못했다.

누구라도 줄이지 못한다.

이런 약은 원래 그렇다.

기존 능력을 억지로 뻥튀기하기에, 그에 따른 부작용은 필수.

그러나 태주는 당군악과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찌르르르.

머릿속에서 울리는 배송 신호.

'왔어.'

일단 물건 바꾸기부터.

공유창고에 가득 들어있는 선도와 천계 꽃들.

주로 금정화와 음양화, MRC의 주요 재료들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다른 종류의 꽃도 보내고 있다.

죄다 고유한 효험을 가진 꽃들.

뭉친 근육을 풀어준다거나, 일시적으로 몸을 빠르게 해준다거나, 오감을 극대화해준다거나.

천계 꽃이라면 가능하다.

그리고 조화의 선기를 가진 선도도 넣어보고.

'연구해서 만들어 보자.'

배송된 물건들을 옮겨놓고, 배송할 물건들을 채워놓고.

미리 준비해뒀다.

주로 먹거리들.

갑자기 선계에 사람들이 많아져서 간식거리가 많이 필요하단다.

특히 맥주와 치킨의 인기가 많다면서,

무한공간에 보관해두면 음식이 상하지 않는다.

처음 넣었을 때 그대로 보존된다.

'피자도 200판 준비했으니까.'

이 정도면 양껏 먹을 수 있겠지.

보낼 것이 더 있었다.

바로 전력선.

그리고 전기 발전 설비 일부분.

전선은 전봇대가 아닌 땅속에 매설할 예정.

선계 전력 생산을 위한 1차 발송분이었다.

모든 설비를 다 보내 설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앞으로 선계에서 전기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

그때.

지이이잉!

스마트폰의 진동음.

'응?'

제정원 문경식 차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 회장님.

"네, 접니다. 차장님."

- 혹시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딮웹을 운영하고 있던 조직이 소탕됐습니다.

"아, 그래요? 전 몰랐는데, 뭐, 잘됐네요."

- ···으음, 모르셨군요.

"그렇죠.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해커도 아니고."

- 어쨌든 딮웹에 저장된 모든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안 파는 게 없더군요. 마약에, 무기에, MRC에, 사람까지.

"저런!"

- 안형대 교수도 연루된 것이 맞았습니다. 심지어 어린 여자아이를 거래하려다가 실종 당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죽어도 싼 놈이었네요."

- 그렇죠. 폐하께서도 분노하셨습니다.

"일이 많으시겠어요."

- 네, 삼한제국뿐 아니라, 유럽, 그리고 아메리카 공화국 등에도 자료를 넘길 예정입니다. 지금 체포 작업이 진행되는 중이며 곧 있으면 언론에도 나올 겁니다.

언론이 조용한 이유도 알겠다.

딮웹과 관련된 모든 놈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잠시 숨겼을 것이다.

"참, 전엔 깜빡 잊고 못 물어봤는데, 혹시 블랙 마피아에 대한 정보는 없나요?"

- 현재로선 그 어떤 정보도 없습니다. 유럽 제국 경찰과 정보기관이 열심히 수사하고 있지만 다 잔챙이뿐이고, 간부들에 대한 단서는 아직 찾지 못했답니다.

제대로 숨은 모양.

'한번 가봐야 하나?'

만약 놈들을 직접 찾아야 한다면 그쪽에 모든 걸 올인해야 한다.

숨고자 작정했다면 찾기도 힘들고, 유럽 제국이 얼마나 넓은데.

- 그리고 현재 유럽 제국 정부에서 블랙 마피아보다는 전쟁에 더 신경을 쓰는 상황이라···.

"전쟁?"

그러고 보니 동훈이가 정리한 기록에서 열람한 기억이 난다.

- 모스크바 왕국 내전이 임박했다는 정보가 딮웹에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왕국 정부와 유럽 제국도 알고 있고요.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 매우 희박합니다. 설령 일어난다고 해도 유럽 제국에서 즉시 개입할 겁니다. 다른 국가라면 모르겠지만 모스크바 왕국이 전쟁에 휘말리면 절대 안 됩니다.

알만하다.

과거 300년 전 강대국이었던 러시아.

마나의 침범으로 인해 지금은 작은 도시국가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 모스크바 공화국은 핵보유국.

핵보유국에서 내전?

까딱하면 중국 꼴이 날수도.

- 그럼 건승하십시오. 중요한 정보가 나오면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그리고 제가 생기불끈, 몇 상자 본부로 보내드릴게요. 그거 드시고 힘내시길."

- 어이쿠! 너무 감사합니다. 그 구하기 어려운걸···,

아무튼 자신의 역할은 다한 것 같다.

이제 신약 개발과 회사 일에 집중하자.

그럼 첫 번째로 할 일은?

'화이백부터 인수해볼까?'

수출보다 현지 공장을 세워 생산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수출은 물류비가 너무 많이 든다.

비행기로 운송해야 하므로.

게다가 대량 수출도 불가능하다.

바다를 이용하면 수출도 생각해봄 직하지만 문제는 해양 마수, 아무리 피해서 간들 태평양은 너무나 넓다.

언제 어디서 마수들의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

뱃길만 뚫리면 아마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혁명이 될 터.

※ ※ ※

태주는 백서연과 만났다.

"동훈이는 어때요?"

"어쩜, 회장님은 어디서 그런 인재만 쏙쏙 데려오는 거예요?"

"일을 잘한다는 말이죠?"

"컴퓨터와 네트워크에 모르는 게 없던데요? 우리 태홍 바이오 인트라넷 보안 취약점을 벌써 몇 개나 찾아냈는지 몰라요."

데려온 보람이 있다.

"그래도 서연씨에 비하면 손색이 있죠."

"네?"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백홍표 원장님과 서연씨 만난 건데요."

"갑자기 훅 들어오시네요."

"하하하, 진심입니다."

립서비스 한번 해주고.

"아메리카 공화국 방문해야겠어요."

"아! 혹시?"

"그래요. 화이백 인수해야죠."

"지, 직접 가신다고요?"

"다른 사람들은 바쁘잖아요. 회사에서 제일 많이 놀고먹는 사람은 저 같은데."

"어머, 회장님만큼 바쁘신 분이 또 어딨다고··· 아무튼 인수 실무단 구성해보겠습니다. "

"일단 인수 이야기는 꺼내지 말고···, 놀러 가는 걸로 하죠. 백악관 초청받아서."

"네!"

실제로 초청받았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진짜 놀러 가는 목적도 있다.

쇼핑도 하고.

"법적인 문제를 담당할 로펌 정도는 물색해 놓겠습니다. 또 회장님 보좌할 수행원들도 꾸리고."

"너무 거창하게 하지는 마세요. 소박하게."

"걱정하지 마세요. 회장님 체면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잘 준비할게요."

하지만 백서연은 결코 소박하게 꾸릴 생각은 없었다.

인류를 구원한 영웅이 해외로 출장을 가시는데, 소박? 그러다 욕먹는다.

더구나 외유 명목이 백악관 초청이지 않나.

격에 맞춰 준비해야지.

태주도 슬슬 움직였다.

개인적인 준비는 해야지.

'일이삼백이는 제자들에게 맡겨두고.'

공식적인 방문이다.

당연히 비자도 신청해야 하고.

과거와 다르게 무비자로 갈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대사관이나 가볼까?'

가만히 있어도 백서연이 알아서 하겠지만.

직접 가보는 것도 좋겠다.

겸사겸사 아메리카에 방문한 계획이라고 미리 알려주고.

그래서 태주는 뉴서울 아메리카 공화국 대사관으로 갔다.

신청서를 작성해 비자를 발급해주는 대사관 직원에게 제출하면서.

"비자 신청하러 왔습니다."

"네, 김태주씨, 방문 목적은 어떻게 됩니까?"

"거기 초청이라고 적혀있습니다만."

"이보세요. 이러면 비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너무 두리뭉실해요."

대사관 직원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보세요. 어디서, 누구에게서 초청받았는지."

"흐음, 백악관? 빌리 피트먼 대통령이···,"

"하아, 진짜! 김태주씨, 시간 낭비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다음에 오실 땐 명확한···, 어?"

갑자기 말을 멈추는 대사관 직원.

그러더니 신청서 이름과 태주의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고는···,

"호, 혹시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님?"

"네, 접니다."

"으아아, 지, 직접 오셨어요? 비서를 안 보내시고···,"

"뭐, 다른 사람들은 할 일이 많아서."

솔직히 비서가 무슨 필요가 있나?

회사 업무는 남들에게 다 맡겨두고, 혼자서 이쪽저쪽으로 다니는 판에.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대사님 모시고 오겠습니다."

"아니, 급하지 않아도···,"

삼한 주재 아메리카 공화국 대사관에 비상이 걸렸다.

잠시 후, 아메리카 대사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 ※ ※

당군악은 하루에 한 번씩 도화궁으로 간다.

이미 찜해 놓은 천도.

혹시라도 어떤 놈이 와서 채갈까.

'특히 원숭이를 조심해야 해.'

그러나 여전히 때가 아니었다.

대체 언제쯤 허락해줄까?

다시 터덜터덜 멀티플렉스로 돌아왔는데,

"험험, 이보게. 독선."

기다리고 있었는지.

염라가 할 말이 있는 듯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오, 대왕?"

"물어볼 것이 있어서···,"

"뭐든 물어보시오."

"혹시 선계 월드 공사가 끝나면 더 이상 죄인들이 필요치 않겠지?"

"당연하오.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해도 되오만."

"허허, 그렇군."

어쩐지 풀이 죽어 보이는 염라.

당군악은 염라가 무슨 의도로 질문해왔는지 짐작이 갔다.

아마도 코인 때문에 그럴 거다.

공사가 끝나면 코인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지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다른 세상의 귀중한 물건들을 대가 없이 누릴 수 있나?

신선들은 선도를, 천인들은 꽃을, 그것이 공정거래다.

"쓸만한 보패라도 가지고 오면 교환은 가능하오. 선도 코인으로."

"보패? 흐음, 보패라, 보패···, 그럼 이건 어떤가?"

염라는 손에 끼고 있던 반지 하나를 벗겨 당군악에게 건넸다.

"뭐요? 이 촌스럽게 생긴 구리 반지는?"

"어허, 촌스럽다니! 망자 재판을 담당하는 판관들이 필수적으로 착용하는 보패야."

"기능은?"

"참과 거짓을 판별하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대상이 거짓을 고하고 있으면 반지가 알려주지."

"흐음,"

괜찮은 보패다.

태주가 사회 생활하는 데 도움도 될 것이고.

세상에 구라쟁이들이 얼마나 많나.

당장 신선들도 사기 치고 다니는 판에.

"사겠소. 3만 코인. 선도 300개의 가치요."

"조, 조금 더 쳐줄 수 없나."

"싫으면 안 팔아도 되···,"

"팔겠네."

염라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선도 300개, 아껴 쓰면 몇 년간 영화나 드라마 보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걸로 부족하다.

지속적인 코인 수급처.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이거···, 감정 부탁하네."

염라가 주섬주섬 꺼낸 물건.

바로 검정색 돌덩어리.

"···."

뜨악한 표정의 당군악.

"거, 너무한 거 아니오? 하다 하다 돌멩이까지 주워 와 사달라니."

"어허! 단순한 돌멩이가 아니라 광석이야. 흑암철 광석."

"흑암철? 쯧, 철은 저쪽 세상에서도 많은데, 재활용도 잘 되고."

"하, 한 번만 봐주게. 이래 봬도 황천의 기운이 담겼네."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황천의 기운이 뭐요? 물건 팔려고 왔으면 자세하게 설명해주셔야지."

"잡스러운 마귀나 요괴들이 겁에 질려 가까이 다가오지 못해."

"부적하고 비슷한 거군."

"어허, 부적은 종이잖아. 이건 철이고, 내구도가 같나."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괴라면 지구의 마수도 포함될 터.

마수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다?

딱히 쓸모가 있을까?

마수야 때려잡으면 된다.

흑암철, 황천의 기운 때문에 도망친다면 쫓아가서 잡아야 한다.

오히려 귀찮아진다.

'그래도···, 울타리 정도는 만들 수 있겠네.'

한번 보내볼까?

하지만.

"광석이라, 태주가 제련하기 귀찮아할 텐데."

"여기 철 주괴로 가지고 왔네, 특히 초열지옥에서 녹여 제련해 황천의 기운이 듬뿍 서려 있지."

"무게가?"

"열 근."

초열지옥에서 제련한 흑암철.

이러면 어설픈 마수들은 보자마자 도망치겠는데,

"일단 그거 하나만 줘보시오. 저쪽으로 보내보게."

"자, 잘 부탁하네. 계속 납품됐으면 좋겠어."

"그야 태주가 결정할 문제고."

"태주 대협에게 이야기 좀 잘해주게."

"봐서···."

그때였다.

찌르르르,

'오!'

신호가 떴다.

물건 빼고 넣고.

'문제는 이 철괴인데···.'

이딴 거 보내봐야 뭘 하겠나?

쓰잘데기없고 무겁기만 한 철 덩어리 보냈다고 욕이나 안 들으면 다행이지.

'그래도 넣어보자.'

판단은 태주가 하겠지.

일단 뭔지는 알려주고.

당군악은 철괴 표면을 유엽비도로 긁어서 간단하게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공유창고 안으로 넣었다.

< 그래도 보내보자. 혹시 모르니까. > 끝

ⓒ 꾸찌꾸찌

=======================================

< 흑암철의 가치(1) >

황제 류태현은 요즘 하루하루가 살맛 난다.

요즘처럼 정치하기 편할 때가 또 있을까?

특별히 뭔가 하지 않아도 제국은 태평성대였다.

무엇보다 MRC 발명, 생산, 접종, 그리고 완치.

그로 인한 사회, 문화, 경제적 효과는 엄청났다.

위대한 혁명이자 미래를 향한 인류의 진보.

20대 초중반을 넘기지 못했던 아까운 인재들이 구원을 받았다.

단순히 목숨을 연장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숨죽이며 살았던 마나 거부자들이 적극적인 사회 활동으로 공동체 발전의 시너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게 다 김태주 회장 덕분이다.

그가 삼한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감사할 뿐,

"이런 식이라면 황제 자리 내어놓아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폐하보다 인기가 훨씬 많아졌는데요."

궁정 비서 금수호가 살짝 놀리듯이 말했지만.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제발 넘겨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절대 달라고 하지 않을걸요? 아마 다른 나라로 도망갈지도."

"흠."

황제도 생각이 있었다.

지긋지긋한 황제의 자리.

아들이나 딸 중에 똘똘한 놈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계승해 주고 물러났을 것이다.

자식들이라고는 멍청한 놈들투성이기에 섣불리 넘겨줬다간 나라 망할까 봐,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뿐이지.

그나마 막내가 기대에 부응해주고는 있지만 그다지 눈에 차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라도, 나중에···,'

삼한제국이 계속 번성하려면 지도자가 똑똑해야 한다.

현재로선 김태주 회장 말고는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

순간,

지이잉!

궁정 비서 금수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응, 날세. 무슨 일인가? 그래, 폐하와 함께 있긴 하지만···, 뭐?"

화들짝 놀라는 금수호.

황제도 궁금한 듯 호기심을 보였다.

"뭔데 그래? 스피커폰으로···,"

"아, 좀! 가만히 계셔보세요. 지금 중요한 이야기 하는 중이지 않습니까!"

"···."

이 새끼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굉장히 중요한 일 같았으니까.

"왜 간다는데? 초청? 아, 아니, 전엔 콧방귀도 뀌지 않더니만,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 어어, 일단 알았네. 폐하에게 말씀드려보지."

금수호는 전화를 끊고 황제에게 말했다.

"김태주 회장이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간답니다."

"···뭐? 갑자기?"

"백악관 초청을 받아들였답니다. 지금 백악관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허어,"

제약회사 대표가 해외로 출장을 간다는 게 무슨 큰일이겠냐마는, 그 사람이 김태주라는 것이 문제다.

"단순히 초청받아 가는 건 아닐 거야."

"그렇죠. 목적이 있을 겁니다."

"뭘 거 같나?"

이유를 알 것 같다는 표정의 금수호.

"사업 확장이겠죠. 지금도 삼한제국 내 공장만으로 약품 생산을 치고 나가기가 버거운 상황 아닙니까?"

맞다.

가장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투자라면 문제 될 것이 있나.

"···투자라, 괜히 호들갑 떨었어. 아무것도 아니었군."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응? 뭐가 또 있나?"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태홍 바이오 제약 생산공장을 유치하는 게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어,"

황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시, 시작?"

"빌리 피트먼, 그 새끼가 공장 유치 하나만으로 만족할 놈입니까?"

"어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고, 다 갖다 바쳐서 김태주 회장을 아메리카 공화국에 눌러 앉히면?"

"그건 안 돼!!!"

큰일 날 소리.

"이 새끼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이 씨가 될지도 모르잖아."

"조심하자는 뜻이죠. 이거, 가볍게 보면 안 됩니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멍청하게 보고만 있을 땐가?

"당장 아메리카 공화국 우리 대사관에 연락해. 아니, 전화 연결만 해줘. 내가 대신 이야기 하지."

※ ※ ※

아메리카 공화국의 수도는 캔자스시티, 영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교통도 편리해서 사라진 워싱턴의 대안으로 적당한 장소.

현재 캔자스시티 백악관은 초비상상황.

빌리 피트먼 대통령이 보좌관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비자는 어떤 걸로 발급해줬나?"

"영구비자입니다. 비자 면제나 마찬가집니다."

"그걸로 되겠어? 시민권 발급도 추진해봐."

"이미 하고 있습니다. 명분도 충분하니까요."

MRC 개발자로서 인류의 희망으로 떠오른 김태주.

그가 아메리카로 온다.

김태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쓸 수 있는 수단은 다 강구한다.

"철저하게 신경을 써야 해. 최국빈 대우, 아니 그보다 등급을 높이라고."

"미인계도 써볼까요? 애인도 없고, 결혼도 안 한 거 같은데."

"응? 애인이 없어?"

삼한제국, 아니 세계 최고의 신랑감이 여자친구도 없다니.

"어···, 혹시 취향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접대 인원에 그 분야에서 인기 많은 '남자'도 포함시키겠습니다."

"···어쨌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퍼부어."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이런 기회가 두 번 올까?

"그건 그렇고, 방문 목적이 우리 초대에 응한 거라고는 했지만, 그뿐만은 아니겠지?"

"당연합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겁니다."

"뭘까?"

"투자 목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예를 들어 신공장 건설, 혹은 인수합병 같은 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태홍 바이오가 아메리카의 로펌과 접촉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단순한 방문이라면 로펌이 뭐가 필요할까요?"

투자 목적이라.

바라던 바였다.

"둘 중 뭘까? 신공장 건설? 인수합병?"

"제가 만약 김태주 회장이라면 화이백 인수를 선택할 겁니다."

"근거는?"

"새로 짓는 것보단 훨씬 좋죠. 특히 생기불끈 같은 경우는 카피약을 생산한 경험도 있어 노하우도 있고, 인수만 되면 당장이라도 생산에 들어갈 수 있겠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화이백을 노리는 게 분명합니다. 유럽 수출도 훨씬 쉬우니까요."

항공 운송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아메리카 공화국과 매우 유럽은 가깝다.

김태주는 화이백을 인수 합병하길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화이백 주가가 얼마나 돼?"

"거래 중지된 상태입니다. 주가가 폭락해서 거의 휴짓조각 수준이라."

"그럼 장내 거래를 통한 취득은 어렵겠고···, 지분 구조 파악해서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보자고,"

김태주는 자신의 딸을 살려준 사람이다.

화이백이 태홍 바이오에 합병되어 공장이 유치되면 서로 윈윈하는 신의 한 수.

그런데.

"사실 걸림돌이 있습니다."

"무슨?"

"화이백 지분을 가지고 있는 투자자들요. 그들이 인수합병 정보를 입수하면 순순히 지분을 내놓겠습니까? 당장 프레드 밀러, 그놈이 가진 지분만 해도 10%입니다."

"끄응."

"또 중지된 주식거래가 재개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주가가 하늘을 찌르겠군."

보좌관의 말이 맞다.

정상적인 방법으론 인수가 힘들지도.

"당장은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으니까, 오늘 여기서 오고 간 이야기는 절대 비밀로 해."

"알겠습니다."

하지만 소문은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정보는 곧 돈.

백악관 보좌관 회의가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된다고 해도 이런 고급 정보는 반드시 새어나가게 되어 있다.

아메리카 공화국은 극 자본주의 국가다.

돈의 힘이 정치 권력보다 강하다.

화이백 CEO 프레드 밀러가 믿었던 것도 돈의 힘.

그래서 처음 카피약을 인지했을 때도 섣불리 치지 못했다.

MRC 수출이라는 명분이 주어져서 화이백을 날릴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

돈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이 가만히 있을까?

※ ※ ※

구례 태홍 바이오 본사에 임원들이 모였다.

아메리카 공화국 진출에 대한 전략을 짤 때.

태주도 회의에 참여했다.

"현재 화이백 주가는 거래 중지된 상황입니다. 따라서 주식 시장에서 매입하는 건 불가능하고 대신 블록딜로 장외에서 대량으로 매입하면···,"

"이게 참 어렵습니다. 대주주들이 지분을 순순히 내어놓으려 할까요? 특히 화이백 지분 대부분은 투자회사들이 쥐고 있습니다."

"맞아요. 그들의 탐욕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적정가의 수십 배 이상을 요구할지도."

화이백.

원래 부도덕한 제약회사로 유명했다.

예를 들어 유아 대사증후군 치료제를 개발한 제약회사가 있었다.

화이백은 그 제약회사의 자금줄을 막고, 적대적 MNA로 회사를 인수했다.

그러고 나선 유아 대사증후군 치료제 가격을 100배나 인상해 버렸다.

20달러밖에 안 하던 약값을 2,000달러로 올려버린 것.

그 짓을 한 놈들이 바로 프레드 밀러와 대주주들이었다.

그 사실은 태주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인수할 필요는 없어요.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중단합시다. 끌려다닐 필요도 없고."

"그럼?"

"플랜 B, 신규 공장 설립으로 방향을 틀죠. 뭐, 새로 공장을 지어서 생산하면 그만이니까."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우리가 급할 게 있나요? 까짓거 천천히 팔면 그만이지."

아쉬운 것이 뭐가 있나?

생기불끈이 사람의 목숨과 연관된 약도 아니고.

"그래도 접촉은 해보세요."

"네!"

간단한 문제다.

칼자루를 쥔 쪽은 태홍 바이오니까.

그 와중에 황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간다고?

"네."

- 왜?

"뭐, 놀러도 가고···, 겸사겸사 일도 하고."

- 얼마나 오래 있을 건가? 곧 올 거지?

"그야 상황에 따라 다르죠."

- 흐음, 사업에 배 놔라, 감 놔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될 수 있으면 빨리 와. 그리고 미국에서의 일정과 수행, 경호는 우리가 전적으로 책임지지. 내가 대사관에 다 이야기해놨네.

이렇게 고마울 데가.

- 그건 그렇고, ···이참에 결혼 생각은 없나?

"···."

- 생각 있으면 나한테 먼저 이야기하게. 그렇지 않아도 혼기가 꽉 찬 딸들이 있는데···.

"아! 지금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돌아오면 찾아뵐게요."

- 어, 그, 그래.

태주는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이 양반이···, 갑자기 혼기 꽉 찬 딸 이야기는 왜 나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비행기 표도 예약했고, 거기 가서 숙박할 호텔도 정해졌고,

이제 출국이 하루 남은 시점.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선계 배송은 받고 가야지.

MRC 재료인 천계 꽃도 비축해놓아야 하고, 선계 전력 생산을 위한 발전기 모듈 부품도 보내야 하고.

순간!

찌르르르.

'떴구나.'

여전히 꽉 찬 공유창고.

공유창고와 아공간 가방을 비우고, 지구의 물건들도 집어넣고,

시간은 넉넉하다.

반짝임이 꽤 오래 지속됐다.

그런데 낯선 물건들이 보인다.

구리반지 하나랑, 직육면체 모양의 새카만 철 주괴.

'이건 뭐야?'

독선이 보낸 물건이다.

당연히 평범한 물건일 리 없다.

"···어?"

거무칙칙한 철 주괴 표면에 칼로 긁은 듯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천천히 읽어보니.

"오!"

볼품없는 구리반지는 역시 보패였다.

참과 거짓을 판별해 낸다는 황천계 판관들의 장신구.

'통역 반지보다 더 좋은데?'

바로 껴야지.

이제 사기당할 일은 없겠다.

다음으로 철 주괴.

이 쇳덩어리의 이름이 흑암철.

황천의 기운을 담고 있으며 무려 초열 지옥에서 녹여 제련했단다.

독선은 쓸데없는 물건을 보냈다며 미안하다는 글을 적었지만···,

바로 그때.

태주의 눈이 번쩍 떠졌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세, 세상에!'

이게 말이 되나?

마귀와 요괴들이 황천의 기운을 무서워한다고?

진짜일까?

그 말대로라면 이건 보물 중의 보물이다.

'실험해보자.'

과연 지구의 마수들에게도 적용이 되는지.

아마도 될 가능성이 높다.

선계의 부적도 마수에게 효과가 있었다.

먼저 태주는 백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연씨, 접니다. 네네, 다른 게 아니라 아메리카 출국 일정, 일주일 정도만 연기할 수 있을까요? 아뇨, 특별한 일은 아니고요.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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