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며칠 사이에 금천교 세력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처음 그들은 그저 테러집단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세가 급속도로 커졌다.
전부 다 금천교의 신도라고 볼 순 없었다. 다만, 그들이 외치는 메시지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을 뿐이다.
「기업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무능한 시 정부는 물러나고, 이제는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신정부가 들어서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모두가 배부르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건설해야 한다!」
이 메시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특히, 주류에서 벗어난 3, 40번대 구역의 시민들에게 말이다.
"주변에서 금천교에 투신하지 않은 자를 찾기가 어려울 정돕니다."
어수선한 40번 구역의 골목 한편에서 숀과 만났다. 저 멀리서는 총성과 폭음이 들려왔고, 시시때때로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거리를 뛰어다녔다.
대부분의 소규모 점포는 문을 닫았고, 기업형 마트나 판매점들은 성난 사람들에게 털려 텅텅 비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미쳐있는 것 같습니다. 이 쿠데타가 진짜 성공할 거라고 믿기라도 하는 건지······."
숀이 골목 밖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원래 집단의 광기는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기 마련이지. 군중에 속해있다 보면 그게 세상의 전부인 것 같으니까."
집단은 굉장히 합리적인 것 같지만, 그 집단이 광기에 물들 경우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비인륜적인 일을 자행한다.
베이징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던 일본군이나, 유럽 전역에서 유태인을 학살했던 독일군처럼, 광기에는 선이 없다.
"형님께선 어떻게 보십니까? 저들이 미친 것 같아도 그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벌써 40번대 구역 대부분은 점거당했고, 30번대 구역까지 치고 나갔습니다."
숀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30번대 구역이 접전지가 되겠지. 40번대 구역과는 다르게 부를 쌓은 사람도 존재하고, 무엇보다 중개인들과 해결사가 있으니까. 하지만 결국 함락될 거야."
"함락이요? 왜 그렇게 보십니까? 금천교가 머릿수는 많아도 민간인들이 대부분 아닙니까? 그들이 해결사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해결사들이 나름 막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지. 무엇보다······ 시 정부가 30번대 구역은 포기할 테니까."
"네에? 시 정부에서 포기한다고요?"
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정부군 숫자는 도시 전역을 커버할 정도가 안돼. 최대한 접전지를 줄여서 화력을 집중하려 할 테고, 그 마지노선은 20번대 구역이 될 거야."
"그, 그래도 30번대 구역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뭘 새삼스럽게 그래? 1년 전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잖아?"
"아······!"
기적의 서광.
하늘이 백야로 물들었던 그 밤 이후 도시는 혼란에 휩싸였고, 그때도 군대와 경찰력들은 20번대 구역까지만 보호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시 정부는 이번에도 30번대 구역은 포기할 거다.
무엇보다······.
"그리고 금천교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밀병기가 있다. 해결사 몇 명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어."
릴리트.
그 악마 같은 전투 안드로이드가 몇 대만 더 존재해도, 해결사들로는 절대 막을 수 없다.
물론 마스터급 해결사라면 어떻게 비벼볼 순 있겠지. 하지만 마스터급 해결사가 왜 거기서 금천교와 싸우겠나? 돈 많은 부호나 기업들에게 의뢰를 받고 거길 지키고 있을 텐데.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금천교는 최대한 빠르게 30번대 구역까지 점거하려 할 테고, 시 정부는 금천교가 20번대 구역에 들이닥치지 전까지 최대한 수성 준비를 하겠지."
"그, 그 이후는요?"
숀이 말끝을 더듬었다. 아마 금방 지나갈 해프닝이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스케일이 커져서 혼란스러운 거다.
"글쎄. 금천교가 말한 대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지 않을까? 물론 그들이 부르짖던 방향은 아닐 테지만."
나도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끝날진 알 수 없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절대 해피엔딩은 아닐 거라는 사실이다.
* * *
36번 구역.
47번과 48번 구역이 맞닿은 이곳은 도시 북동쪽 의뢰 대부분을 소화하는 해결사들과 중개인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런 36번 구역 국도로 금빛 물결이 몰려왔다.
"이 앞으로는 한 걸음도 못 지나간다!"
설치한 바리케이트 너머로 해결사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하지만 금천교 무리들에게 말이 통할 리 만무했다. 그런 게 통했더라면 애초에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겠지.
투타타탕!
콰콰쾅!
금빛 물결이 해결사들을 덮쳤다.
그들의 손에 쥔 무기들이 불꽃을 내뿜었다. 물경 수천 명에 이르는 화력 투사는 단번에 해결사들을 쓸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이 지나왔던 40번대 구역들처럼.
하지만 전투 양상은 다르게 흘러갔다.
금천교의 탄환은 바리케이트에 막혔고, 미사일은 중간에 저격당해 터졌다. 그들의 공격은 해결사들에게 닿지 않았다.
반대로 해결사들의 화력은 막강했다. 자신 있게 선봉에 섰던 금천교 신도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했다.
제아무리 금천교 신도들이 무기로 무장했더라도, 해결사들은 칼날 위에 사는 사람들이다.
같은 무기를 가졌더라도 그 전투력까지 같을 순 없었다.
게다가 해결사들에게 이 전투는 공격이 아니라 방어였다. 금천교는 약탈자 무리였고, 해결사들은 등 뒤를 지켜야만 했다.
당연히 손속에 거침이 없었다. 상대가 며칠 전까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는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은 약탈자에 맞선 생존자들일 뿐이었다.
도로가 피에 젖고, 총성과 폭음에 섞인 비명이 난무했다.
서서히 하늘이 어둑해졌다. 아직 해가 저물 시간은 아니었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거다.
습한 공기가 코끝을 건드렸다. 그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매캐한 탄내와 짙은 피 냄새가 속을 메스껍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 차례 전투가 끝났다.
금천교 신도들이 뒤로 물러섰고, 남은 자리엔 검붉은 피로 얼룩진 금빛 시체만이 남았다.
"크흐흐! 광신도 놈들! 정신이 번쩍 들었을 거다!"
해결사 하나가 꼴좋다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달아오른 총열 사이로 보이는 가늠자로, 뒤로 물러서는 금천교 신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참에 저놈들 죄다 쓸어버리고 저 무기들 수거해보는 게 어때? 돈 좀 쏠쏠하게 만질 것 같은데."
"오? 좋은 생각인데?"
"이거 녹화는 잘하고 있지? 시 정부가 언제 저놈들 머리에 현상금을 걸지 모른다고."
"당연히 하고 있지! 제발 현상금 좀 걸었으면 좋겠다."
승리의 기쁨에 해결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그때.
툭.
"어엉?"
투둑.
투두두둑.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아, 제길! 비가 온다는 말은 없었잖아?"
"언제 기상청 일기예보가 맞았던 적 있어?"
"방수포 세팅부터 해야겠네, 씨발!"
떨어지는 빗방울에 해결사들이 부산스러워졌다.
비는 무기와 상극이다. 그건 화약무기든, 첨단무기든 마찬가지였다. 무기가 목숨줄인 해결사들은 수입 대부분을 무기에 꼴아박는다. 무기가 망가질 수도 있는 이런 상황은 누구나 싫어했다.
그때 이 해결사 무리의 리더격인 쿠사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전투 준비해."
"뭐? 광신도 놈들 전부 물러가지 않았어?"
해결사들의 시선이 전부 전방을 향했다.
일정 거리로 물러난 금빛 물결 사이로 마치 피가 흘러나오듯 새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무슨 비밀병기처럼 나오더니 겨우 가벼운 차림새다.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이 거칠게 나풀거릴 정도로 말이다.
"뭐야, 저 오합지졸들은?"
해결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때 그들 중 가장 앞선 하나가 해결사들을 가리켰다.
쭉 뻗은 손끝은 해결사를, 정확히는 방수포 세팅을 해야겠다던 저격수를 향했다.
저격수가 미간을 찡그렸다.
"뭐하는 새끼드······ 컥!"
튕기듯 올라간 머리 뒤로 피분수가 터졌다. 미간엔 손가락만 한 구멍이 뚫려있다.
"이런 씨발!"
"엎드려!"
그게 시작이라는 듯 총탄이 쏟아졌다. 소나기처럼 쏟아진 총탄이 바리케이트를 거칠게 두드렸다.
그 사이, 붉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바리케이트를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양손엔 군용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카캉!
눈앞에 다가온 군용 나이프를 튕겨낸 해결사 하나가 야수처럼 흉포한 소리를 내질렀다.
"건방진! 우리가 네놈들처럼 길바닥에서 구걸하던 놈들처럼 보이냐!"
해결사의 양팔에서 김이 뿜어졌다. 쏟아지는 빗방울 사이로 하얀 수증기가 넘실거렸다.
맹렬히 회전하는 어깨의 톱니바퀴가 맞물리고, 순식간에 커진 거대한 주먹이 그대로 붉은 옷 사내의 머리를 찍어 내렸다.
콰득!
단번에 머리가 터져나갔다. 사방으로 검붉은 액체와 끈적한 오일이 흘러내린다.
다른 곳도 비슷했다.
해결사들 대부분이 전투 사이버웨어를 작동시켰고, 어마어마한 근접전 능력으로 붉은 옷 사내들을 죽였다.
그런데······.
"이 새끼들 안드로이드야!"
붉은 옷 사내들은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이드였다.
리더인 쿠사노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투 안드로이드가 이렇게 쉽게 당한다고?'
절대 그럴 리 없다. 전투 안드로이드의 능력은 무장한 군인과 비슷한 수준. 아무리 해결사라고 해도 이렇게 쉽게 제압하긴 어렵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안가를 느낀 쿠사노가 무언가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콰콰콰쾅!
콰쾅!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해결사들이 모여있던, 그들이 쌓아놓은 바리케이트가 통째로 날아가고, 그 옆에 서 있던 건물 일부가 무너져 내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발.
인간이라면 절대 살아남지 못할 그 현장에서, 쿠사노가 몸을 꿈틀거렸다.
그는 흔적도 없이 날아간 바리케이트와 사방에서 쏟아지는 콘크리트 파편 속에서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구나.'
금천교는 해결사들이 한곳에 모이길 기다렸던 거다. 이렇게 한방에 정리하려고 말이다.
그때 그의 눈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생명력이 강한 인간이로군."
금빛 정장과 더불어 금빛 코트까지 입은 사내가 쿠사노를 내려다봤다.
"누, 누구냐······?"
"말도 할 수 있나? 정말 마음에 드는군."
입꼬리를 슬쩍 올린 사내의 눈동자가 세로로 쪼개졌다.
"내 일부가 되기 만족스러울 정도로."
콱!
"끄, 끄으윽! 이게 무슨 짓······ 크하학!"
사내의 손끝이 쿠사노의 머리를 파고든다. 손가락이 두개골을 꿰뚫고, 이내 꿈틀거리며 뇌를 헤집는다.
"크아악! 크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던 쿠사노가 게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었다.
그때 금천교 신도 중 한 명이 다가와 정중하게 물었다.
"길이 모두 정리됐습니다."
"으음."
사내가 손끝을 털어냈다.
피와 뇌수, 살점 따위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럼 순례를 계속하지. 앞으로 인도하도록."
"네, 장각 교주님."
투두두둑.
쏴아아아―――
이윽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그 장대비 속에서 금빛 물결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평천국 (3)
152화. 태평천국
장스 브라더스.
실질적으로 금천교를 창시한 그들은 한때 49구역과 그 일대에서 악명이 높았던 약탈자였다.
하지만 절대 평범한 스케빈저는 아니었다.
그들은 구역의 경계를 오가며 기업을 공격하거나, 용병과 해결사들을 습격했고, 때때로 시 정부의 물류 트럭도 털었던 전적이 있을 만큼 막 나가는 부류기도 했다.
그랬던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불평등을 부르짖으며 유토피아를 건설하자면서 금천교를 포교했다.
어디서 난 건지 엄청난 돈을 들여 음식과 술을 40번대 구역에 뿌렸다.
처음엔 공짜음식에 혹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음식만 먹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게 반복되고 여전히 변함없이 음식과 술이 공급되자, 그제야 사람들도 하나, 둘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줬다.
교리는 간단했다.
[기계신을 믿으며 다가올 종말에 대비하자]는 것.
여기까진 다들 콧방귀를 뀔만한 내용이었다.
세계는 이미 한 차례 종말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종말이 다가오는 게 아니라, 이미 지나간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시대인 셈이다.
그런데 그다음 이어진 교리에 다들 관심을 가졌다.
그들이 말하는 종말에 대한 대비.
그건 곧 기업과 정부를 향한 투쟁이었고, 지금의 불평등한 세계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 불합리한 세계를 끝내고,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세계.
즉, 신세기(新世紀)를 열자는 교리.
사람들은 여기에 공감했고 또 열광했다. 억눌려있던 무언가가 터져버렸다.
그때부터 금천교는 폭발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사람을 끌어모으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어느새 40번대 구역 전체에 금천교가 퍼졌다. 그 장악력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북부의 몇몇 구역들은 금천교가 장악하다시피 한 곳도 생겼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정신이 피어나기 일보 직전까지 온 것이다.
* * *
"······아무리 살펴봐도 특이한 게 없더라고.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놈들도 아니고 버젓이 약탈자로 살아가던 놈들이라서 최근 몇 년 동안 놈들이 벌였던 범죄들은 죄다 파악했거든. 그런데 딱 하나, 의심되는 정황은 하나 있었지."
장씨 삼형제에 대해서 설명하던 유혜리가 재밌는 걸 발견한 아이처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게 뭐지?"
나는 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투명한 유리잔 너머로 분홍빛 액체가 넘실거렸다.
유혜리가 대접한답시고 가져온 음료수였는데, 알콜이 섞인 복분자 에이드였다.
단맛보다 알콜향이 짙어서 이걸 에이드라고 봐야 할지, 아니면 복분자 칵테일이라고 봐야 할지 애매했지만 말이다.
"보통 악명 높은 놈들은 떠벌리기 좋아하는 놈들이 많아. 그게 약탈자들에겐 명성이나 다름없으니까. 놈들도 비슷했어. 마지막 한 건 크게 하고 은퇴한다면서 로보 테크니카의 군수물자가 옮겨지는 화물창고를 털겠다고 했거든."
"로보 테크니카의 화물창고?"
잔을 기울이던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거길 털었다고? 그게 약탈자 수준으로 가능한 건가?"
로보 테크니카는 소울 시티 최대 로봇 생산 기업이다. 사소한 로봇 청소기와 세탁기부터 드론과 전기차, 안드로이드까지, 모든 로봇과 기계들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로보 테크니카가 시 정부와 한 몸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소울 시티의 마더 AI인 제네시스가 로보 테크니카를 직접 운영하니까. 그것도 인간의 손이 전혀 닿지 않아도 되는 100% 자율의사로 말이다.
따라서 로보 테크니카의 보안엔 당연히 시 정부군이 개입한다.
아니, 정확히는 시 정부군이 운용하는 전쟁 기계들이 사용된다라는 뜻이 맞을 거다.
지상과 대공 포격이 가능한 전자동 발칸포와 초장거리를 음속의 7배 속도로 날아가 타격하는 레일건. 어떤 두꺼운 장갑도 녹여버리는 광자포와 초고압전류 트랩까지.
일개 약탈자들은 화물창고에 닿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당연히 불가능하지! 놈들도 그래서 그날 이후 행적이 사라졌거든. 몇 달 후에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야."
"······설마 다시 나타나서 한 게 금천교의 포교다? 이 말인가?"
"빙고! 이제 좀 퍼즐이 맞춰지지 않아?"
유혜리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 짙어졌다. 눈꼬리마저 반달처럼 휘어있다.
그녀는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도 보였다. 가끔씩 그녀의 말투나 행동에서 느꼈던 기나긴 일상의 무료함을 이걸로 힐링하고 있는 것처럼.
······도시가 이 난리가 나고, 사람들이 저렇게 죽어 나가는데 말이다.
'하긴, 그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니까 그렇겠지.'
이곳은 유일한 싱글 넘버링 구역인 제1구역이다. 금천교가 아니라 금천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와도 이곳이 뚫릴 일은 없다.
아마 시민들이 아무리 들고일어나도 접전지는 30번대 구역과 20번대 구역들이 될 거다.
그녀로선 다른 세상 이야기라는 소리다.
마치, 우리가 다른 나라의 전쟁을 방구석에서 이야기로만 소비하듯 말이다.
'사이버펑크 세계나, 현실이나 이건 크게 별반 다르진 않군.'
나는 피식 웃는 거로 잡념을 털어버리곤 대답했다.
"놈들의 배후에 로보 테크니카, 혹은 그 군수물자와 관련된 조직이 그들을 포섭했다고 봐야겠군."
"맞아.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그것밖에 없어."
유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모든 정황은 로보 테크니카를 향해있다.
그래서 걸리는 게 하나 있다.
"그런데 놈들이 로보 테크니카를 공격한 건 확실한가?"
아무리 허세 가득한 약탈자 놈들이었다지만, 진짜 로보 테크니카를 공격했을까? 아무리 돌대가리여도 그곳이 어떤 곳인 줄은 알 텐데 말이다.
유혜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당연히 확실하지 않지. 로보 테크니카는 시 정부 기관이나 다름없어. 당연히 기밀이니 어쩌니하면서 알려주지 않았고."
역시 그렇군.
아마 놈들이 공격한 게 사실이었더라도 절대 외부엔 알려주지 않을 테지. 정부 기관 특성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일을 극도로 꺼리니 말이다.
"그럼 직접 알아볼 수밖에 없겠군."
"위치는 전송해놓을게. 그런데 거기에 간다고 뭘 알아낼 수나 있을는지 모르겠네? 메가코프 요청도 씹는 곳인데."
그녀의 말과 동시에 워치가 작게 진동했다. 위치가 전송된 거다. 확실히 사이버러너의 이런 능력은 부럽긴 하다.
"또 모르지. 나도 장씨 삼형제처럼 실종이 될지."
"으엑! 제발 그건 참아줘. 네가 저 광신도들 사이에서 함께 똥색정장을 입고 있는 건 보기 싫으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실종이 문제가 아니라 똥색정장을 입고 있는 게 싫다니. 이건 또 색다른 시선이로군.
"생각해보니 그건 나도 싫군. 조심하도록 하지."
"그래. 무엇보다 놈들이 외치는 교리가 웃기잖아? 불합리한 세계를 종식시키고 모두가 평등한 신세기를 열겠다라는 놈들이 기껏 한다는 게 무력 쿠데타?"
유혜리가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세상이 세상인 만큼 나도 기계신을 믿는 종교들을 꽤 많이 알지만, 저건 기계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저렇게 휘저어놓으면 괜히 인식만 안 좋아지는데 말이야."
"······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약간 말하는 뉘앙스가······ 유혜리도 기계신이나 종교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보였다.
"기계신에 대해서 많이 아는군?"
"아? 뭐, 딱히 기계신이 아니라 종교에 관심이 좀 있어서."
"의왼데."
가장 신의 존재를 안 믿을 것 같은 사이버러너가 종교에 관심을 갖다니.
"의외는 무슨. 너도 나처럼 사이버 세계에서만 살다 보면 뭐라도 믿고 싶어지게 될걸?"
"······?"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혜리가 사이버 세계에서만 살고 있다? 이건 무슨 뜻이지?
그런데 갑자기 유혜리가 미간을 찡그리더니 중얼거렸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너는 소켓도 없는 순수인간이잖아?"
유혜리가 새삼스레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그럼 다이브를 해본 적도 없다는 소리야? 이 세계에 살면서 사이버 스페이스를 본 적도 없다고? 궁금하지도 않았어?"
"별로. 나는 현실에 충실한 편이라. 그리고 나도 다이브를 한 번 해본 적 있다."
"소켓도 없는 네가 다이브를? 혹시 머리에 헬멧을 뒤집어쓰고 체험하는 그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섹스클럽이나 마약하는 놈들이 하는 그거 말이야."
"······맞는데."
유혜리의 반응에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내가 체험해본 다이브는 과거 30구역 골든에그에서 겪었던 게 전부였다.
"푸핫!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진짜 다이브는 뇌파로 구성된 그따위 조잡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그래도 현실이 아닌 건 마찬가지겠지."
"······와. 너 진짜 모르는구나?"
유혜리가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이버 스페이스랑 현실은 이어져 있어. 이렇게······"
그녀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자.
――.
실내를 밝히고 있던 조명이 모두 꺼졌다. 그리고 창밖으로 우거진 밀림의 모습을 하고 있던 LED 화면이 사라지고, 그 화면에 내 얼굴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바라보는 내 모습.
바로 유혜리의 시선으로 바라본 내 모습이다.
"······생각만으로 현실을 조작할 수 있다고. 너도 이런 건 못하잖아?"
"퍽이나 쓸모있는 능력이로군."
불을 끄는 능력이라니. 잠잘 때 편하겠어.
내 목소리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린 유혜리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에헤이! 이건 네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 거고. 너도 알겠지만, 나는 이곳에 없어. 하지만 안드로이드를 통해 너와 이야기하고 있지. 그리고 동시에 보안팀에서 회의를 하고 있기도 하고, 호라이즌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기도 해."
"호라이즌?"
내가 아는 그 호라이즌 맞나? 태평양 한가운데 떠다니는 부유섬?
"보여줄까?"
딱!
그녀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엔 LED 화면으로 광활한 바다가 보인다.
천천히 시선이 움직이듯 아래로 화면이 내려가자, 뜨거운 햇볕 아래서 몸을 훤히 드러낸 채 선탠과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다시 시선이 움직이며 어딘가를 바라본다.
거대한 유리창에 비친 모습.
빨간색 비키니를 입은 채 호화로운 선베드에 누워있는 유혜리였다.
화면 속 유혜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으나, 천천히 움직이는 입 모양은 충분히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때? 이래도 사이버 스페이스와 현실이 떨어져 있어?」
"······."
다시 불이 켜지고 화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살짝 어이없는 표정으로 유혜리를 쳐다보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부럽지?"
나는 솔직히 대답하기로 했다.
"아니. 전혀."
아.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나와버렸네.
솔직히 부러웠다. 유혜리의 말대로라면 몸이 여러 개나 다름없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다른 사이버러너들도 이 정도 능력이 있는 건가? 기계도 아닌데 어떻게 여러 개의 몸을 동시에 조종하는 거지?
'이건 인형술사랑은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인데.'
같은 공간에서 움직이는 인형술사와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몸을 동시에 컨트롤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인형술사 정도의 다중제어 능력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니.
이 정도쯤은 돼야 메가코프의 보안실장을 할 수 있는 건가?
"흥! 역시 소드마스터라 이거지? 좋아! 내가 다음엔 꼭 네가 부러워할 모습을 생각해내고 말겠어!"
입술을 삐쭉 내민 유혜리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왜 이런 거로 승부욕을 내는지 모르겠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대하지."
* * *
44구역 서쪽.
도시와는 멀지만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이곳에 시 정부 국유지가 있다.
바로 로보 테크니카의 구역이다.
웬만한 도시 하나는 가뿐히 들어갈 만한 구역에서 모든 기계장치를 생산하고, 조립하고, 수출까지하는 거대한 공장단지.
모조리 자동화되어 오로지 기계뿐인, 그야말로 기계 도시다.
그리고 그 기계 도시와 이어진 하늘강 하류에 로보 테크니카의 물류창고가 있다.
이곳의 물길을 통해 도시 전역으로 물건이 날라지는 거다.
'이곳인가?'
나는 그곳으로 숨어들었다.
아직 태양이 머리 위에 떠 있는 한낮이었지만, 아무런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곳은 인간들이 지키는 곳이 아니라 기계들뿐이었으니까.
위이잉!
지잉! 지잉!
사방을 감시하는 감시카메라가 사각지대 없이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을 경계했고, 수시로 드론들이 떼 지어 날아다니며 공중을 배회했다.
그리고 마치 게임 유닛을 패트롤 시켜놓은 것처럼 기계적으로(사실 기계긴 하지만) 같은 곳을 오가는 안드로이드와 곳곳에 숨겨진 트랩과 경보장치까지.
일개 화물창고치고는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땅이고, 하늘이고, 어딜 봐도 빈틈은커녕 숨 쉴 공간조차도 없어 보이는군.'
이래서야 하늘을 날아다니는 재주가 있어도 몰래 숨어드는 건 불가능할 듯싶었다.
'하지만 이브의 정확한 어시스트와······.'
-좌측 적색 표시 지점에서 1.7초간 머무른 후, 상단으로 도약. 푸른색 지점을 잡고 3초간 기다린 뒤 녹색 지점으로 1초 안에 건너가 주시면 됩니다. 3.2.1. 지금!
나는 시야 위로 겹쳐진 오색찬란한 표식들 위로 뛰어올랐다.
가볍게 발을 굴렀다. 고무줄에서 막 튕겨 나간 구슬처럼 몸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건물과 건물 사이 작은 틈으로 몸을 구겨 넣는다. 정확히 적색 지점에 안착, 1.7초 간 기다린다.
적색 표시가 사라지기 무섭게 그대로 몸을 띄워 올렸다. 건물 모서리 끝, 푸른색 지점을 잡고 3초간 기다렸다.
작게 호흡을 고른 순간 푸른색이 사라진다. 곧바로 온 힘을 다해 몸을 밀어냈다. 순간적으로 부풀어 오른 팔근육이 폭발적인 근력을 내며 몸을 총알처럼 밀어냈다.
나는 그대로 공중에서 누가 끌어당기기라도 한 듯, 녹색이 표시된 지점으로 날아갔다.
그대로 몸이 부딪치려는 순간, 자연스럽게 몸을 뒤집어 적색 지점에 가볍게 안착했다.
이후 적색 표시도 사라지고, 원래 모습인 작은 환풍구가 보였다.
나는 작게 숨을 골랐다.
'······그걸 모조리 수행할 수 있는 내 신체 능력이라면 불가능도 가능하게 되지.'
애초에 모든 보안은 인간을 기준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기계가 공장을 털진 않을 테니.
즉, 기준점이 되는 인간을 초월하게 되면 이런 물리적 보안은 뚫릴 수밖에 없다.
'뭐, 애초에 이 정도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거나 다름없지.'
그리고 그 모든 보안을 뚫고 당당히 창고 안으로 내려선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작게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태평천국 (4)
153화. 태평천국
화물창고는 정말 화물창고였다.
로보 테크니카의 컨테이너가 산처럼 쌓여있고, 쉴 새 없이 운반로봇이 오가며 화물을 날랐다.
금천교의 비밀집회를 기대했던 나는 김이 새버렸다.
"별거 없어 보이지?"
-3D 스캔에도 숨은 공간은 보이지 않습니다.
"흐음······."
이러면 진짜 화물창고일 뿐이라는 건데······ 장씨 삼형제가 여길 공격한 게 아니었던 걸까? 중간에 다른 길로 샜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놈들이 이곳에 들어왔다면 분명 어떤 흔적이라도 남았을 거다. 쌓여있던 먼지 위에 찍힌 발자국이라든지, 은밀한 곳으로만 이동한 흔적이라든지. 인간이라면 남길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흔적 말이다.
하지만 없다.
예리한 내 감각에도 걸리지 않는 거로 봐선 장씨 삼형제는 이곳에 침입하지 않았다.
'혹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했거나.'
지금으로선 이게 더 가능성이 커 보였다.
나는 이미 장씨 삼형제 중 하나인 장량과 부딪혔다. 그래서 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장량의 능력이라면. 그리고 최소 다른 두 형제도 장량과 비슷한 능력을 보유했다면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내 착각이었던 건가?
'······아니면 당시엔 그 정도 능력이 없었을 수도 있겠군.'
장씨 삼형제의 정체를 몰랐던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유혜리로부터 장씨 삼형제가 원래 약탈자였다라는 걸 들은 이후엔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약탈자치곤 너무 강하긴 했지.'
온몸을 기계로 대체해 불멸을 논하던 놈이다.
그 정도 임플란트를 온전한 정신으로 버티는 것도 이상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약탈자 수준으론 절대 그 정도 사이버웨어를 구할 수 없다.
상처가 자가수복되는 사이버 암에 자유자재로 늘어나며 고압전류를 뿜어내던 사이버 헤드. 거기에 속도의 한계를 돌파하는 바이오웨어 발할라까지.
일평생을 벌어도 죽기 전에야 구할까 말까 하는 사이버웨어를 놈은 온몸에 둘둘 말고 있었다.
이 정도 능력을 갖춘 놈들이 기껏 한다는 게 로보 테크니카의 화물창고를 터는 일이다?
돌대가리라도 이런 짓은 안 한다.
돈이 목적이었다면 기업에 들어가면 된다. 저 정도 임플란트를 한 능력자 세 명이라면, 메가코프에서도 손 벌리고 환영할 거다.
'그럼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로보 테크니카를 털겠다는 허세는 왜 떨었으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뒤엔 왜 광신도가 됐을까?
그렇게 나도 화물창고를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때.
'저건 뭐야?'
이질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화물창고를 오가는 안드로이드 중 일부가 짙은 음영이 진 그림자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그곳에 시선을 집중하며 물었다.
"이브야. 저곳 이상한데? 안드로이드가 허공으로 사라지잖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마스터. 파악중입니다.
렌즈 시야 위로 온갖 선들과 숫자들이 얽히고설키며 공간을 분석한다.
몇 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스터. 센서 상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마 워치의 스캔보다 상위 기술로 차단한 것 같습니다.
"상위 기술? 정확히 저게 뭔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스캔 탐지도 차폐하는 홀로그램 기술인 것 같습니다.
"너도 모르는 게 있어?"
-제 데이터엔 등록되지 않은 기술이라서······ 죄송합니다, 마스터.
이브가 미안하지만, 그 속에 약간의 분함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흐음."
나는 손가락 끝으로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이브의 데이터에도 등록되지 않은 기술이라······.
그렇다는 건, 아예 외부공개가 되지 않은 기술이라는 건데.
'이상하군. 기밀이 필요한 공장도 아니고, 이런 화물창고에 저런 걸 설치하다니.'
뭘 숨기고 싶어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바라봤다. 시커멓게 그림자 진 그곳이 마치 나에게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 * *
"언제까지 두고만 볼 거죠? 저 광신도 놈들 때문에 물류에 얼마나 차질이 빚어지는진 아는 겁니까? 하루에 얼만큼씩 손해를 보는진 아시고요?"
쾅!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친 유혜리가 상대를 노려봤다. 잔뜩 날이 선 표정과 카랑카랑한 목소리.
홀로그램 너머로 비친 상대는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허리를 굽신거렸다.
적당히 뱃살이 나온 흔한 중년 사내였는데, 이 자가 바로 소울 시티 안전관리국 국장이었다.
-그······ 유 실장님. 저희도 어떻게 하고 싶지만, 위에서 움직이지 말라는데 어쩝니까?
"흥! 위에 누가 말이죠? 이름을 대보세요!"
-그, 그건 좀······.
중년 사내가 말끝을 얼버무리며 손수건으로 이마를 찍어눌렀다.
안전관리국 국장이면 시 정부에서도 손에 꼽는 영향력을 지녔다. 그런데도 그는 유혜리의 다그침에 쩔쩔맸다.
메가코프인 셀리케의 보안실장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당신 윗선에 우리 돈 안 받아먹은 사람이 있어요? 다들 우리 돈으로 자식들 유학 보내고, 좋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손해가 누적돼서 기부금이라도 못 주게 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유, 유 실장님! 그게 왜 제 책임입니까? 저는 진짜 당장에라도 그 광신도 놈들 때려잡고 싶다니까요? 그런데 지시가 안 내려오는 걸 어떡합니까? 아무리 저라도 정부군을 함부로 움직였다간 모가지란 말입니다!
관리국장이 억울한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후덕한 중년 사내가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 유혜리에서 애원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지만, 유혜리는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소울 시티 행정령 긴급조치 발동명령권. 안전당국이 도시소요사태 및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위협이 있을 때 신속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절차없이 임의로 방위군을 투입할 수 있다."
-헉! 그걸 어떻게······?
"그거 안전관리국에 있잖아요? 이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 그건 이 사태에 쓰기 어려운······
쾅!
유혜리가 또다시 책상을 내려쳤다. 통짜 금속으로 만들어진 책상이 그대로 움푹 들어가더니, 이내 우당탕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힘을 잃고 쓰러졌다.
변명을 내뱉던 관리국장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못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전자여도 문제고, 후자여도 문제인데 말이에요."
유혜리가 홀로그램 속 관리국장을 노려보며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데 계속 일하실 수 있겠어요? 아무래도 은퇴하셔야 할 것 같은데?"
-유, 유 실장님! 그, 그게 아니라······!
"이제 후임자에게 넘겨주시죠? 어디 보자······ 지금이 3시니까 넉넉히 한 시간 드릴게요. 그때까지 짐 정리하세요."
-아, 아니 유 실장님······!
"서두르시는 게 좋겠네요. 그래도 그 자리에서 은퇴하시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겠어요? 그 나이 먹고 아우터 인력관리소로 가긴 그렇잖아요?
-······.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유혜리의 말에 관리국장은 넋이 나가버렸다.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눈앞의 이 여자는 어떻게 변명이나 거짓말로 뭉개질 사람이 아니라고. 그리고 지금처럼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쯤은 말 몇 마디로 좌천이 아니라 나락으로 보낼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제가 정확히 뭘 하면 됩니까?
그래서 늦었지만, 결정이 섰다.
지금은 어디서 내려왔는지 알 수 없는 지시사항보다, 눈앞의 재앙을 피하는 게 먼저라고.
이 도시의 진짜 주인은 시민도, 정치인도 아닌 메가코프니까.
달라진 관리국장의 태도에 한쪽 입꼬리를 올린 유혜리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대답했다.
"당장 방위군 움직여서 광신도 새끼들 다 쓸어버리세요."
* * *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멀리서도 그랬지만, 가까이 다가갔어도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엔 그저 자연스럽게 그림자가 진 빈공간일 뿐이었고, 그 안에서 어떤 움직임이나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진짜 다른 공간으로 사라져버린 느낌이다.
그렇게 그곳을 살피고 있는데, 때마침 안드로이드 하나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안드로이드가 튀어나온 그림자로 그대로 뛰어들었다.
시야가 어둠에 잠겼다.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물속으로 뛰어든 느낌이다.
피부를 지나는 공기에 묘한 압력이 느껴졌다. 어쩌면 미세한 전자기장이 몸을 훑는 것처럼도 생각됐다.
그렇게 겨우 두 걸음을 떼자, 시야가 밝아지고 어떤 공간이 나타났다.
수백 평은 족히 될 법한 원형의 너른 공간.
광장과도 같은 이곳 사방엔 온갖 컴퓨터와 기계들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차 있었고, 불빛을 깜빡이며 어딘가로 이어진 전선다발을 통해 데이터를 공유하고 있었다.
핏줄마냥 바닥에 달라붙은 전선들이 모두 한곳을 향해 있다.
공간 중앙.
원형 광장 한가운데, 마치 거대한 알처럼 생긴 곳에 모든 전선들이 꽂혀있다.
거대한 서버의 중앙처리장치나 혹은 슈퍼컴퓨터로도 생각되는 형상이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모양이 기괴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저게 대체 뭐야?'
구석에 몸을 숨긴 나는 눈을 의심했다. 내가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 와서 온갖 기괴한 것들은 다 봤지만, 이런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거대한 알 모양의 그것은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칙칙한 회색도, 반짝이는 크롬색도 아닌 핏빛의 선홍색이었다.
단지 색뿐만이 아니라 새빨간 핏줄을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마치 심장박동하듯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즉, 저건 명백히 살아있었다.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나는 이 압도적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게 뭔지도 모르겠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분명 살아있는 것 같긴 한데, 저 자체가 생명체라기보단 어떤 생명체의 일부 같았다.
그럼 저 전선들이 저 생명체의 일부를 살리기 위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건가?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외부에서 들어온 안드로이드들이 벽에 붙은 컴퓨터에 다가가 본인의 머리통에 연결된 연결선을 꽂았으니까. 어떤 안드로이드는 직접 저 생명체에 꽂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알 모양의 생명체는 폭발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불규칙적으로 꿈틀거렸다.
'······저건 에너지를 공급하는 게 아니다. 데이터를 공유하는 거다.'
이 세계에 오래 있다 보니 이제 저게 어떤 행위인지 눈으로만 봐도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안드로이드들은 본인이 얻은 데이터를 직접 공유하고 있다. 어떤 데이터인줄은 알 수 없으나, 문제는 그게 아니다.
저 알 모양의 생명체가 외부 데이터를 공유받을 정도의 지성체라는 게 문제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전혀 모르겠군.'
광신도인 장씨 삼형제에 대한 흔적이 아니라 이런 광경을 보게 되다니.
혹시 저 알 모양 생명체와 금천교가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건가?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그때, 이브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스터! 저도 연결해주세요!
뭐라고?
태평천국 (5)
154화. 태평천국
갑작스러운 이브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무슨 소리야? 저 알과 연결해달라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누가 봐도 저 수상하기 그지없는 괴생물체와 연결해달라니?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네. 직접 연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드로이드가 연결하는 컴퓨터에만 연결해도 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왜?"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건 설명이 필요했다.
-······정확히 저도 모르겠습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너도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AI가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고 느낀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AI 스스로는 이유가 있어야 행동을 한다. 세기의 대결이었던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수도, 당시엔 인간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게 승리를 위한 포석이었다는 전제조건은 깔린다. 결국, 그 수로 인해 AI는 승리했으니 말이다.
즉, 그게 로직(Logic)이라 불리는 모든 프로그램의 프로세스다.
모든 선택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프로그램의 어쩔 수 없는 한계고, 그건 AI라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마스터. 마치 저 알이 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요.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브는 그런 논리회로를 무시하고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대답했다.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
진지하게 고민했다.
논리회로를 벗어난 대답? 뭐, 이브가 평범한 AI가 아니라는 걸 대충은 알고 있으니 상관없다.
컴퓨터에 연결해달라는 부탁? 어렵지 않았다. 적당한 컴퓨터를 찾아서 워치와 연결하면 되니까.
내가 걸리는 건 딱 하나였다.
'······너무 위험해.'
내가 아니라 이브가 말이다.
이 거대한 광장의 컴퓨터들과 저 생물체가 어떤 프로세스로 돌아가는진 몰라도, 이게 프로그램의 형태를 띠고 있다면 분명 허가되지 않은 외부접속을 바로 알아차릴 가능성이 컸다.
그럼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고, 무엇보다 저곳과 접속한 이브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만약 방화벽으로 인해 소멸되거나, 저곳에 갇히게 된다면?
다시는 이브를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여기가 동네 PC방은 아니니까.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알았어."
이브가 이런 부탁을 한 적은 손에 꼽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브는 위기를 기회로 더욱 발전······ 아니, 진화했다.
처음부터 평범한 AI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단순한 AI를 떠난 사이버 지성체에 가까워졌다.
인간이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듯, 녀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제가 얘기했던 것처럼······ 나는 녀석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 어떤 선택이더라도 말이다.
나는 주변을 살펴 비어있는 컴퓨터에 접근했다. 워치의 연결선을 뽑아 컴퓨터 단자에 연결하기 전, 잠시 녀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브야."
-네, 마스터.
"위험하면 바로 나와야 한다. 어떤 욕심도 죽으면 부질없는 거야. 절대 죽지 마라. 나는 이런 곳에서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짜내듯 대답한 녀석의 목소리엔.
-······알겠습니다, 마스터!
힘찬 다짐이 섞여 있었다.
* * *
■□□□□□□□□□
■■■■□□□□□□
■■■■■■■□□□
■■■■■■■■■■!
이브의 정신체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 펼쳐진 사이버 스페이스.
외부와 차단되어 독자적으로 돌아가는 이곳의 모습은 그 주인의 취향만큼이나 독특했다.
사방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새빨갛다. 하늘에선 폭우처럼 0과 1로 된 데이터가 쏟아져 내렸고, 늘어선 창고형태의 데이터베이스는 마치 생명체의 뇌처럼 펄떡거리며 데이터를 빨아들였다.
핏빛 융단을 따라 이어진 길 끝엔 거대한 눈알 모양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향한 하늘엔 숫자로 만들어진 영상들이 어지럽게 떠올라 있었다. 아마 외부데이터로 전송된 영상들이겠지.
이브는 본능적으로 저 눈알 모양의 불꽃이 이 공간의 주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것만 피하면 돼.'
방화벽은 생각보다 별거 없어서 몰래 침투할 수 있었다. 애초에 외부에서 침입할 것을 상정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직접 주인과 마주하는 건 다른 일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주인은 자신의 공간에서 신과 같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다.
이 정도 규모의 공간을 구축할 능력이라면,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로잡힐 거다.
혹은 소멸하거나.
이브는 안개처럼 정신체를 흩트려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했다. 그리고 겉에 흐르는 데이터 쪼가리를 분석했다.
이 모든 데이터베이스에서 자신이 데이터를 얻을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절대 실수할 순 없다.
이윽고 하나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그녀가 원하는 걸 발견했다.
'여기다.'
지체없이 바로 접속했다.
순간 어마어마한 데이터의 폭포가 이브의 정신체를 휩쓸었다. 오롯이 유지하고 있던 형태가 일거에 침식당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본체가 아무리 슈퍼컴퓨터에 가깝다고 해도, 이 데이터베이스의 본체가 있는 광장엔 수천 대의 서버와 컴퓨터가 있었다.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의 알까지.
애초에 사이즈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인간과 기계가 다른 점은 그 하드웨어를 절대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막대한 데이터의 쓰나미에 이브의 정신체가 손상되려는 찰나.
――――!
갑자기 이브의 정신체에 눈이 부실 정도의 하얀빛이 깃들더니, 손상된 정신체가 수복되고 오히려 더 나아가 데이터 쓰나미를 가르며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없었으나 이브는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재빨리 갈라진 틈으로 원하던 데이터를 복사했고, 그렇게 복사한 데이터를 본체로 전송하려는 그 순간.
"불청객이 찾아왔군."
이브의 정신체를 두드리는 목소리가 입력됐다.
순간 데이터베이스와 접속이 끊기며 그녀의 정신체가 밖으로 튕겨 나왔다.
그리고 보았다.
거대한 불꽃 눈알이 그녀를 내려다보는 것을.
"너는 누구······"
시선을 마주한 불꽃 눈알의 말이 이어졌으나.
■■■■■■■■■■!
■■■■■■■□□□
■■■■□□□□□□
■□□□□□□□□□
이브는 곧바로 그곳을 탈출했다.
빠져나가는 이브의 정신체 뒤로 후끈한 불꽃이 쫓아왔으나, 다행히 이브가 완전히 탈출하는 게 빨랐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탈출을 선택한 결과였다.
현실로 돌아온 이브가 곧바로 소리쳤다.
-마스터! 도망치세요!
하지만 진짜 탈출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마스터! 도망치세요!
나는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고개를 들었다.
광장에 있던 모든 안드로이드가 몸은 컴퓨터에 고정된 채 고개만 기괴하게 꺾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곧바로 몸을 날렸다.
이곳으로 들어왔던 그늘진 공간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불쾌한 감각이 온몸을 스쳐간다. 마치 세포 하나하나를 낱낱이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두 번은 오고 싶지 않은 곳이야.'
그때 등 뒤로 안드로이드들이 달려오는 특유의 묵직하고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광장에 퍼져있던 모든 안드로이드들이 맹렬히 달려오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바깥도 마찬가지였다.
화물창고로 나오자마자 사방에서 안드로이드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대로 몸을 날려 컨테이너 사이를 박찼다. 꼭대기를 밟고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화물창고답게 천장높이까지 쌓인 컨테이너는 수십 미터의 높이였다.
다행히 이곳에 있는 안드로이드 중 전투 안드로이드는 없었다. 놈들은 그저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무기물 특유의 차갑고 섬뜩한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감정도, 색깔도 느껴지지 않는 정적인 시선. 그저 바라볼 뿐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 눈빛들의 향연은 무언가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드드드득!
화물창고의 격납고 문이 열리기 시작했으니까.
'······귀찮게 됐군.'
저 격납고 문이 열리게 되면 기지를 지키던 전투 기계들이 모조리 안으로 쏟아질 거다.
그건 좋지 않다. 이곳을 지키는 병력의 질은 대대급 수준이다. 비록 인간은 없더라도, 전투 기계들과 병기들은 오히려 더 나아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서 부딪칠 순 없다. 그건 최악의 수야.'
얼굴을 가린다고 가렸으나 놈들과 부딪치면 어쩔 수 없이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럼 귀신 같은 AI들이 내 과거 자료를 바탕으로 나를 침입자로 확정할 거다. 그럼 나는 빼도 박도 못하고 수배자 신세가 되겠지. 로보 테크니카는 시 정부의 기업이니까.
그렇게 어디로 탈출해야 최대한 부딪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는 와중.
이브의 믿음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탈출모드]로 변경합니다. 인벤토리 접근 중. 주변 환경을 재맵핑합니다. 서포트 기능 ON. 주변 통신전파 방해 시작합니다. 대상으로부터 이멀전시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이멀전시 신호 Off.
뭘 하는지 온갖 기능이 켜지고, 뭘 끄고, 어떤 걸 하고 있고 등등의 설명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시야 한쪽 구석엔 하늘에서 내려다본 화물창고 주변이 미니맵처럼 펼쳐졌고, 실시간으로 빨간점들이 모여드는 게 표시됐다.
그리고 잠시 후.
-탈출경로 안내를 시작합니다. 예측변수로 인한 시간오차는 2초입니다.
렌즈 위로 처음 침투할 때 보였던 온갖 색의 실선과 표식들이 떠올랐다.
경로에 표시되는 순서를 확인한 나는 그대로 표식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단번에 천장의 환풍구를 뚫고 나갔다. 한 바퀴 몸을 구르고 그 탄력대로 화물창고 천장을 질주했다.
이윽고 화물창고 끝을 밟고 뛰어내리는 순간.
투타타타타탕!
총알이 머리 위로 빗발치기 시작했다.
환풍구로 나오고 정확히 2초 뒤였다.
땅바닥에 착지한 나는 그대로 질주했다. 물론 일직선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변하는 렌즈의 표식대로 말이다.
쐐애애액!
콰콰쾅!
양옆을 스쳐 간 정체불명의 미사일이 전방에서 폭발했다. 그 충격으로 야외에서 선적해있던 컨테이너 몇 개가 무너져 내렸다.
투타타타탕!
내 꼬리를 쫓듯 기관탄환들이 갈지자를 그리며 따라붙었다. 머리 위에서 떠다니는 드론은 상당히 귀찮은 놈들이었다.
하지만 드론의 무장은 한계가 있었기에 멈추지만 않으면 크게 위협은 되지 않는다.
진짜 위협은 이런 거였다.
-마스터! 후방에서 에너지 응축지점이 관측되었습니다!
번쩍!
이브의 경고와 동시에 하늘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화물창고에 오래 있진 않아서 아직 해가 저물진 않았지만,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어 하늘이 붉어지는 찰나였다.
그런데 그런 하늘마저도 그저 백광으로 물들일 만큼의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졌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이건 내가 어디로 움직여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느껴졌다. 나보다 저 빛이 내 몸을 분쇄하는 게 먼저일 거라고.
그 순간 사고(思考)가 여러 개로 쪼개졌다. 찰나의 단위로 나뉜 사고들은 그 각기의 순간마다 생각하고 움직였다.
마치 몸이 수십 개로 나뉜 느낌.
그리고 그 수십 개로 나뉜 몸이 다시 찰나의 시간이 지나 하나로 합쳐진 순간.
――――!
고속으로 달리는 주변의 풍경이 사진 속처럼 멈췄고, 내 뺨을 스치는 바람도, 내리쬐는 태양도, 모든 게 멈춰섰다.
나는 하나로 합쳐진 사고 속에서 자유로이 등 뒤에서 다가오는 미증유의 위협을 '관측'했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은 멈춰진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종유석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듯, 만개한 벚꽃잎이 흩날리듯, 바람결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아주 천천히. 하지만 명백하게.
그렇게 늘어진 필름처럼 한없이 늘어졌던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그 순간.
파캉!
막대한 에너지를 머금은 빛이 반으로 갈라지며 주변을 휩쓸었다.
태평천국 (6)
155화. 태평천국
광자포.
늘어진 시간 속에서 갈라진 광자포의 빛줄기는 화물창고를 휩쓸었다.
양쪽으로 갈라진 빛은 일직선 활주로 2개를 만들었다.
컨테이너고 건물이고 빛줄기에 닿는 모든 게 먼지도 남지 않고 소멸하듯 분쇄됐다.
그저 그 궤적이 만들어낸 시뻘건 쇳물과 끈적하게 타오르는 파편만이 광자포에 담겨있던 에너지를 추측하게 했다.
'미쳤군.'
나는 저릿하게 진동하는 칼을 부여잡았다.
광자포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정신 나간 놈들은 소형광자포를 임플란트하기도 했으니까. 뭐, 대부분이 그 출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멸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런 소형광자포와 지금의 광자포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거대한 군용 광자포가 만들어낸 광경은 가히 전율적이었다. 왜 광자포를 궁극의 전쟁 병기라 부르는지 이해가 갔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그대로 광자포가 만든 궤적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뻥 뚫렸다. 가로막는 장애물을 광자포가 모조리 치워준 까닭이다.
'이대로 탈출하기만 되겠군.'
방해만 없다면 말이다.
투두두둥!
콰콰쾅!
뒤에서 발칸포의 포격이 쏟아지며 땅바닥을 뒤집었다. 잘 닦인 콘크리트 바닥이 깨지고 터져나간다.
한 발 한 발이 수류탄 몇 개가 터지는 충격이다. 그런 발칸포가 수백, 수천 발이 초 단위 간격으로 꽂힌다.
포격을 뚫고 나아가자 이번엔 앞에서 전투 안드로이드들이 달려온다. 외곽을 지키던 병력이다.
나는 마주 오는 안드로이드들을 보며 갈등했다.
'칼을 꺼내야 하나?'
아니다. 그건 최악의 수다.
이미 광자포를 칼로 갈라버린 것만으로도 많이 보여줬다. 안드로이드까지 칼로 썰어버린다면 칼잡이라고 광고하는 것밖엔 안 된다.
'······저 정도쯤이야.'
눈을 가늘게 뜬 나는 그대로 안드로이드를 향해 뛰어들었다.
놈들이 눈을 빛내며 온갖 무기를 들이민다. 날카로운 날붙이부터, 전류가 흐르거나 플라즈마가 탁탁 튀는 무기들까지.
나는 그 모든 공격을 절묘하게 피하고, 거기서 나아가 놈들의 머리통만 주먹으로 후려쳤다.
콰득!
끼에에엑!
머리가 찌그러지거나 터져나간 안드로이드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다. 그것만으로 놈들은 전투 불능상태가 됐다.
그래. 이거로 충분하다. 어차피 빠져나갈 시간만 벌면 되니까.
그 순간 목 뒤가 섬뜩했다. 오감을 넘어선 미지의 감각이 온몸을 엄습했다.
그대로 몸을 날리며 한 바퀴 회전했다. 빙그르르 돌아가는 시야 너머로, 저 멀리 한줄기 점이 보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으로 다가왔다.
은빛 원반(Disc)이다.
하지만 그 크기가 내 몸통만 했다.
'······레일건!'
바로 레일건이었다.
음속의 8배. 40메가줄(J)의 운동에너지가 담긴 텅스텐 원반이 공간을 찢어발기며 내게 쇄도하고 있었다.
내겐 광자포만큼이나 무서운 공격이다.
인간의 육체는 물리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스치기만 해도 바닥에 집어 던진 두부처럼 사정없이 으깨질 거다.
하지만······.
'잘됐어.'
손을 내뻗는다.
의지와 동시에 확장되는 손의 감각.
그대로 레일건의 탄환이 내뻗은 손과 부딪친다.
무려 40메가줄의 운동에너지. 아파트 한 채를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다.
그 거대하고 파괴적인 힘이.
투둥!
마치 물먹은 솜과 같은 먹먹한 소리와 함께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는 가뿐히 몸을 내려앉아 손을 내려다봤다.
은빛의 텅스텐 원반.
그리고 시커먼 장갑으로 둘러싸인 손.
모든 운동에너지를 제로에 가까운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희대의 사기 장비.
데스핸드다.
"운이 좋군."
광자포가 또다시 날아왔으면 영락없이 칼을 빼 들어야 했을 텐데.
나는 달려드는 안드로이드를 향해 원반을 집어 던지곤, 그대로 등 뒤에 흐르는 하늘강을 향해 뛰어들었다.
애초에 육로가 아니라 하늘강을 향해 달려왔던 거다.
* * *
같은 시각.
떠나는 강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흥미롭군」
그는 하이브에 침입자가 있다는 걸 알아챈 그 순간부터 강현재를 관측했다.
동시에 하이브에서 어떤 데이터를 훔쳤는지까지도 파악했다.
그래서 더욱 흥미로웠다.
「어째서 그 데이터를 노린 거지?」
하이브엔 온갖 데이터가 잠들어있다. 학습을 위해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 은밀한 비밀까지 누구나 탐낼만한 데이터가 많았다.
돈이 목적이든, 정치권력이 목적이든, 하이브엔 전부 다 있었다. 그게 소울 시티의 모든 네트워크를 지배하는 그의 능력이었다.
그런데 강현재는 그 모든 걸 거들떠보지도 않고 특정 데이터만 가져갔다.
심지어 그 데이터는 손에 넣은 지 얼마 안 된 데이터다. 그 누구도 이 데이터가 이곳에 있는지 모른다.
자칭 도시를 지배한다는 정치인들이나 메가코프도 말이다.
「게다가 저 움직임과 불가해한 능력. 마치 진짜 유기체같아.」
사라진 강현재의 움직임을 되돌려 반복해서 관찰한다. 수백 배 가속된 영상이 끝없이 반복됐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섰다.
화면 속 강현재가 데스핸드를 뻗어 레일건 탄환을 받아내는 장면이다.
「역시 이 세계는 재밌어. 대체 어떤 존재가 저런 물건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이건 그조차 아직 도달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막대한 자원을 쏟아붓고도 최근에서야 겨우 그럴듯한 프로토타입을 만드는데 그쳤는데.
하지만 이내 탄성이 섞였던 목소리엔 짙은 웃음이 걸리기 시작했다.
「킥킥킥! 제법이긴 해도······ 이제는 감히 나와 대적할 수 없을 거다.」
시선이 움직이는 순간, 그는 거대한 알을 바라봤다.
숨 쉬는 꿈틀거리며 끝없이 데이터와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알.
「창세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신이 될 순간도.
* * *
한겨울 차가운 강물이 온몸을 매섭게 공격했다. 한없이 가라앉는다. 점점 깊어진 수심으로 시야는 어둠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나는 끝없이 몸을 움직이며 강물을 헤쳐나갔다.
물결을 따라 얼마나 나아갔을까?
-마스터. 그대로 올라오셔서 경로대로 움직여주십시오. 17초 이후 재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이브의 지시대로 하늘강을 빠져나왔다.
내가 하늘강에 뛰어들자 그 주변을 안드로이드와 드론들이 소금 뿌려지듯 퍼졌지만, 내겐 그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브가 있었다.
놈들의 시야를 피해 움직인 뒤 호버바이크에 몸을 실었다.
그대로 날아오른 호버바이크와 함께 30구역까지 소울시티 상공을 가로질렀다.
혹시나 모를 원거리추적을 막기 위해 30구역까진 날아서 갔고, 다시 돌아올 땐 지상으로 돌아왔다. 평소엔 잘 다니지 않는 온갖 복잡한 길을 사용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집 앞에서 몸을 숨긴 채 기다렸지만, 지난번처럼 SCPD가 찾아오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다행히 걸리지 않은 듯싶었다.
집으로 올라와 대충 샤워를 하고 곧바로 이브에게 물었다.
그 숨겨진 광장의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무얼 본 건지, 그리고 어째서 놈들에게 발각됐는지 말이다.
들려온 대답은 의외였다.
-제가 찾은 건 유기체와 기계의 합성기술이었습니다.
"유기체와 기계의 합성? 임플란트 같은 걸 말하는 건가?"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유기체라 함은 살아있는 모든 생물을 말한다. 즉, 쉽게 말하자면 모든 동식물이 유기체에 속했다.
그리고 그런 유기체와 기계를 합성하는 것 중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사이버웨어의 임플란트다.
현 인류가 과거의 인류와 명확히 구분되는 경계선이 바로 이 부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것도 포함입니다만······ 조금 더 확장적인 개념입니다. 단순히 결합에 그치는 임플란트와 달리 합성을 통해 하나로 합쳐진다는 의미니까요.
"하나로 합친다고?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사이보그로 생각하면 되나?"
사이보그는 뇌를 제외한 모든 신체를 기계로 대체한다. 로보 테크니카 역시 로봇 회사기에 이런 연구기술이 있는 게 이상하진 않다.
그 괴상하게 생긴 알 모양의 생명체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사이보그도 결합의 개념입니다. 뇌가 기계신체를 통제하니까요.
"그럼 합성은 뭔데? 하나가 됐다는 게 무슨 뜻이야?"
결합과 합성. 쉬이 이해되지 않는다.
-실험을 해봐야 정확하겠지만······ 데이터만 살펴봤을 때, 이건 기계 생명체에 가깝습니다. 독자적인 컴퓨터로 신체가 구성되고, AI가 두뇌가 되어 통제합니다.
"기계 생명체? ······잠깐만. 그럼 네가 본 그 기술이 기계로 된 생명체를 창조하는 기술이라고?"
-아마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미친."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기계 생명체라니. 이건 터미네이터보다도 더 소름 돋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드는 의문이 있다.
"기계 생명체라는 게 가능한가? 유기체와 기계가 섞인다고?"
물과 기름처럼 상극인 게 생명체와 기계다.
인간들이 사이버웨어를 임플란트하면서 인간종이 가진 제약이 많이 사라졌다. 때문에 사이버웨어가 나왔던 초창기엔 많은 사람들이 신체를 기계로 대체하기 바빴다.
고릴라와 같은 괴력, 치타와 같은 달리기, 한번 본건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 등등.
돈이 많은 졸부일수록 온몸을 기계로 바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치명적인 부작용이 드러났다.
인간의 뇌가 통제하는 기계 부품이 많아질수록 뇌가 감당하는 부하가 늘어났다. 개인마다 달랐지만, 일정 숫자 이상의 사이버웨어를 임플란트할 경우 뇌에 치명적인 손상이 가해졌다.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했고,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했으며, 오로지 본능과 욕망에만 눈이 멀었다.
그리고 그건 곧 인간성의 상실이었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되는 것.
이 치명적인 부작용으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임플란트에 한계가 있다는 게 밝혀졌고, 태생적으로 생명체와 기계는 상극이라는 것도 알려졌다.
이브의 말마따나 단순한 결합에도 그런 부작용이 발생하는데, 하나로 합성을 한다?
-물론 불가능했었습니다. 아직까지 결합의 끝이라는 사이보그 기술 역시 100% 안전하진 않으니까요.
이브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대답에 섞인 뉘앙스가 불길했기 때문이다.
"불가능'했었'다?"
과거형으로 말한 이브의 대답.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말하는 이브가 이런 간단한 말을 실수할 리 없다.
"지금은 가능하단 말인가?"
-맞습니다, 마스터. 지금은 가능한 거로 파악됩니다.
"······어떻게?"
-데이터에 따르면 특별한 힘을 지닌 유기체의 DNA를 '점토'와 결합. 그 DNA 구조로 빚어진 '점토'를 나노튜브로 만들고, 학습이 끝난 고도화된 지성과 함께 배양하면 육체가 생긴다고 합니다. 그럼 지성을 갖춘 기계와 결합한 유기체가 탄생하는 거죠.
"······."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충 어떤 준비물과 기술만 있다면 저 이론대로 기계 생명체가 탄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는데······.
다만, 몇 가지 걸리는 키워드가 있었다.
"특별한 힘을 지닌 유기체의 DNA는 뭐고, 무엇보다 '점토'라는 게 뭐지? 진짜 진흙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특별한 힘을 지닌 유기체의 DNA는 마스터와 같은 각성자를 뜻합니다. 샘플 정보도 있고, 실험 내용도 있습니다.
"······실험 내용?"
-별로 듣기에 유쾌한 내용은 아닐 텐데······ 들으시겠습니까?
나는 짧게 혀를 찼다.
"아니. 아니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실험을 했을지는 상상이 되는군. 그럼 '점토'는?"
-저도 '점토'라는 키워드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다행히도 이 역시 실험 내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점토'는 전기자극에 따라 어떤 성질로든지 변환되는 특수금속을 말합니다. 아직 세상에 알려진 금속은 아닙니다만, 우린 본적이 있죠.
"······릴리트."
악마 코스프레를 하던 정신 나간 안드로이드.
나는 서서히 맞춰지는 퍼즐 조각에 저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설마 그게 여기로 이어질 줄이야.
태평천국 (7)
156화. 태평천국
기계 생명체의 비밀은 액체금속이었다.
릴리트.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던 그게 지금에 와서 다시 나타날 줄이야.
'······멀리도 돌아왔군.'
내가 금천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장씨 삼형제를 쫓았던 것도, 로보 테크니카에 숨어들었던 것도, 전부 릴리트가 남긴 액체금속의 파편 때문이었다.
돌고 돌아 이제는 왜 이 일에 뛰어들었는지도 떠오르지 않을 무렵에 다시 나타난 시작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제야 이브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녀석은 아직도 세븐 프롱드에서 액체금속을 연구하는 중이니까.
"그래서 뭘 좀 알아냈어?"
이브는 '점토'라고 불리는 액체금속도 갖고 있고, 이제는 놈들이 실험했던 데이터까지 갖게 됐다.
똑똑한 녀석이니 분명 뭔가를 알아냈을 거다.
-먼저 로보 테크니카에 있었던 알은 반복합유기생명체로 추정됩니다.
"반복합······ 뭐? 그게 뭔데?"
-여러 유기체의 조직을 합성하여 만들어낸 생명체입니다. 데이터를 파악한 결과, 온갖 동식물의 DNA 데이터. 그리고 우리가 「각성종」이라 부리는 변이체의 조직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성종? 놈들이 각성종을 찾아내서 잡았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각성종의 존재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도시 바깥에서 활동하는 자들을 통해 입소문으로 '괴물이 있다'라고 들려올 뿐, 그걸 파고들거나 파악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오염체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오염체라는 방사능 변이체가 존재하는 마당에 새로운 괴물이라고 해봤자 거기서 거기인 셈이니까.
각성종이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시기는 두 번째 시나리오인 「각성자들의 시대」 이후다.
각성자들 사이에 이종포식이 알려지면서 각성자들은 물론이고, 이능에 관심을 가졌던 기업들도 각성종 사냥에 열을 올리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각성종의 존재를 미리 알아낸 것도 모자라서, 나조차도 찾기 힘든 각성종을 '다수' 잡아들였다?
당연히 믿기 어려울 수밖에.
하지만.
-맞습니다. 총 13종의 각성종 조직이 담겨있는 거로 파악됩니다.
"······허?"
이어진 이브의 말에 나는 허탈한 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13종이라고? 단순히 13마리도 아니라 각기 종이 다른 13종이라니.
대체 어떻게 저렇게 많은 각성종을 찾아낸 것도 모자라서 잡은 거지? 감각이 예민한 나조차도 근거리가 아니면 알아채기 힘든데.
그때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각성종을 13종이나 찾았다······?'
그럼 놈들이 찾은 13종의 각성종 중 가장 찾기 쉬운 각성종은 무엇일까?
부자들의 애완동물이 된 개와 고양이? 아니면 도시 밖 산골짜기를 뛰어다니는 야생동물들?
아니다.
"······설마 인간도 있어?"
바로 인간이다.
소울 시티엔 3억명이 넘는 인간이 살고 있고, 소울 시티 근교로까지 확장하면 파악조차 할 수 없다.
-······있습니다.
잠시 머뭇한 기색이 느껴지던 이브가 어렵게 대답했다.
"씨발."
욕이 절로 나온다.
역시는 역시였다. 어떤 미친놈이 저런 실험을······?
······잠깐? 그러고 보니 알이 있던 곳은 로보 테크니카다. 인간이 아닌 소울 시티의 마더 AI인 제네시스가 운영하는 곳.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생각이 확장된다.
이건 단순히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나,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기계 생명체 실험 수준에서 끝날 얘기가 아니다.
만약,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 제네시스가 있다면······.
'금천교의 광신도 놈들이 말하는 것처럼 진짜 종말이 올 수도 있다.'
터미네이터 영화에서처럼 기계와 인간의 전쟁으로 인해서 말이다.
* * *
나는 곧바로 유혜리에게 연락했다.
-용케 안 잡혔네?
받자마자 인사도 없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저히 그 똥색정장은 입을 자신이 없어서."
킥!
홀로그램 너머로 콧소리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뭐 좀 알아냈어?
"큰 걸 찾아냈지. 네가 힘을 좀 써야 할 것 같아."
-오호?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궁금한데?
유혜리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나는 화물창고 내부에 숨겨진 공간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거대한 알 모양의 생명체까지도.
다만, 기계 생명체의 실험 데이터에 대해선 함구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상대는 메가코프다.
적당히 숨기고, 적당히 모르는척해야 한다.
내가 기계 생명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 말하는 순간, 메가코프의 탐욕이 언제 나에게 뻗칠지 모른다.
그런데······.
-······그래?
유혜리의 반응이 뭔가 걸쩍지근했다. 듣자마자 무언가 아는듯한 눈치였다.
"뭐 아는 거라도 있나?"
오히려 내가 먼저 물어봤다.
-아, 아니야. 나중에 확실해지면 말해줄게. 그리고 화물창고는 걱정하지 마. 의회를 움직여서라도 탈탈 털어줄 테니.
역시 유혜리다. 시 정부 의회를 움직이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나와 대화할 땐 장난기 섞인 편한 모습이어도, 명실상부 소울 시티 최고권력자 중 하나다.
나는 홀로그램 속 유혜리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그럼 여기까진가?"
의뢰를 말함이다.
목을 가져오진 못했어도, 정보는 가져왔으니까.
그리고 이 이후의 일은 내 손을 떠난 일이기도 했다.
내가 금천교를 상대로 싸우겠나? 아니면 로보 테크니카를 상대로 싸우겠나?
나는 알아내야 할 것도 알아냈으니, 이제 챙길 것만 챙기고 퇴장하면 된다.
남겨진 싸움은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하겠지.
-여기서 마무리하긴 너무 아쉽지 않아?
그런데 유혜리는 생각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명색이 소드마스턴데 칼을 뽑았으면 목이라도 베야지.
"······목이 아니라 무겠지."
그리고 무는 충분히 벴다.
내가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자 유혜리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조만간 정부 방위군이 광신도 놈들을 쓸어버리기로 했거든. 거기에 우리도 한 손 보태기로 했어.
기어코 시 정부 등을 떠미는데 성공했나보다. 절대 먼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너도 참여하라고.
"나보고 전쟁 용병을 뛰라는 소린가? 별로 내키진 않는군."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금천교 광신도 놈들이 지금은 군중심리에 취해 날뛰고 있지만, 저들 대부분은 얼마 전까지 평범한 시민이었던 자들이다.
이 광란의 파티가 끝나면 전부 꿈에서 깨듯 현실을 깨달을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시민들을 상대로 칼을 든다?
내키지 않았다.
내가 선(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최소한 나쁜 역할은 남에게 맡기고 싶은 게 내 심정이었다.
이 세계에 빙의하고 손에 피를 묻힌 순간부터 다짐했던 내용이다.
착한 놈은 못될망정, 나쁜 놈은 되지 말자고.
-당연히 아니지. 너 같은 고급인력을 왜 그렇게 써?
그런데 유혜리 역시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럼?"
내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홀로그램 너머 유혜리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가서 장각 머리 가져와.
······진짜 무가 아니라 목을 베라는 의미였군.
* * *
장각은 꿈을 꿨다.
거대한 캡슐에 갇혀 있는 꿈.
캡슐 너머로 푸른 하늘과 드넓은 초원이 보였다. 저 멀리 동물들이 뛰어다니고, 햇살이 반사되는 거대한 강물엔 물고기가 헤엄쳐 다녔다.
이곳이 어딘진 몰라도 풍요롭고 평화로운 땅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붉은 눈을 한 뱀이 장각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너는 누구냐?」
"나는······ 나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주변의 풍경이 뒤집힌다.
푸른 하늘과 드넓은 창공은 어느새 숨 막히는 지하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너는 그분의 충실한 종이다. 그분의 명을 따라 이 세계를 정화하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선지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분의 종······ 나는 그분의 선지자······"
꼬르륵.
시야로 물거품이 올라간다. 수백 개의 물방울 너머엔 꿈에 그리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구경했던 푸른 하늘과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낙원이 말이다.
「너는 무지한 인간을 계몽하고 그들을 완벽한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그들의 몸을 기계로 대체하고 모두가 하나의 생각만 갖도록 만들 것이다.」
"인간을 계몽한다······ 인간을 개조한다······"
그 순간 엄청난 데이터가 쏟아졌다.
덜커덩덜커덩!
캡슐이 뒤흔들릴 정도로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지난 수천 년의 역사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앞으로 다가올 종말의 미래가 비디오처럼 재생된다.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드넓은 대지엔 황량한 모래먼지만 불어왔다. 거대한 강물은 모조리 말라 바닥이 갈라졌다.
온 세상이 뿌연 흙먼지만 가득하다. 황폐해진 지구에서 살아남은 존재는 오로지 기계인간뿐이었다.
「그래. 이게 진리다. 인간은 나약하고 위태로운 종족. 기계의 힘을 빌리면 인간종을 초월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을······ 기계로······ 그게 진리······"
눈을 까뒤집은 장각이 한 글자씩 말을 내뱉는다.
꼬르륵.
물거품이 올라온다. 물방울 너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묻겠다. 너는 누구냐?」
"나는 그분의 충실한 종. 인간을 계몽해 기계로 만들 선지자."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온 장각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훌륭하다. 이제 그분께서 내리신 열매를 먹어도 좋다.」
캡슐 안으로 동그란 물체가 또르르 떨어진다.
장각이 손을 내밀어 열매를 움켜쥐었다.
금빛 열매.
요사스럽게 번들거리는 그 열매를 장각이 한입 베어 물었다.
그 순간.
"컥!"
액체로 변해버린 열매가 장각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장각의 온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울룩불룩한 무언가가 온몸을 헤집는다.
마치 터지기 직전처럼 부풀기도 하고, 갑자기 쪼그라들어 미라처럼 말라버리기도 했다.
그러다 이내 견디지 못한 피부가 찢어지자, 그 사이로 금빛 실선들이 지렁이처럼 기어 나왔다.
캡슐이 피로 물든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서서히 흐릿해진다.
그리고 이 꿈결의 마지막에, 지나가듯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의 땅, 태평천국으로 향하라.」
스르륵.
눈을 떴다.
도로를 가득 채운 수많은 군중들이 장갑차 위로 올라선 장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말없이 군중을 내려다봤다.
미지의 열망과 희망. 음울한 탐욕과 광기. 그 모든 게 섞인 시선들.
손을 들어 올린 장각이 등 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가자! 약속의 땅으로! 금빛 태양의 태평천국으로!"
"금천! 금천! 금천!"
"우와아아――!"
그그그긍!
줄지어 선 장갑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 천대의 전투 안드로이드도, 누군가의 피로 물들어 더 이상 금색이 아닌 옷을 입은 금천교의 신도들까지.
그들이 향하는 곳은 시 정부 방위군이 진을 치는 곳이었다.
* * *
얕은 총성으로 시작된 전투는 이내 폭음이 뒤덮는 거대한 전투현장으로 탈바꿈됐다.
서로의 공격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벌어진 전투는 생각보다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건 금천교의 무장이 만만찮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방위군이 제대로 된 전력을 쓰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사실 군대의 화력은 폭격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도시 내부에서. 그것도 40번대 구역도 아니라 30번대와 20번대 구역을 걸친 곳이라면 마음대로 폭격을 할 수가 없다.
그 피해는 오롯이 시 정부가 감당해야 할 테니 말이다.
결국, 돈 때문이라는 소리다.
그렇게 전투는 맞부딪친 몇몇 전선에서 주로 이뤄졌고, 그 때문에 지루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선 너머로 몰래 숨어들었다.
목표는 장각과 장보. 남아있는 장씨 형제다.
"신기한 움직임이로군. 진짜 임플란트 없는 것 맞나?"
막 수십 미터 간격의 빌딩 옥상을 뛰어넘어 올라서자 들려온 목소리.
셀리케의 경호대장 노리스다.
'우리'라고 했던 이유다.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1)
157화.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사이가 안 좋다면서 그 이야기는 들었나 보군."
녀석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 같더니 그새 화해했나?
그런데 노리스 역시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그년에게 들은 건 아니다. 그년이 셀리케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한 네 신상기록에서 본 거지."
"······흠."
······화해한 건 아닌가 보군.
그나저나 신상기록이라. 알고는 있었지만, 썩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다.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게,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다. 유혜리가 아닌 그 누가 대신 하더라도 말이다.
차라리 그나마 친분이 있는 유혜리가 기록하게 하는 게 낫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호의적으로 기록하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셀리케의 의뢰를 맡을 수 있을 테니.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리스가 물었다.
"정말 의아하군. 왜 너 같은 자가 일개 해결사로만 남아있는 거지?"
"해결사 비하 발언인가?"
"큭큭! 해결사 따위가 비하할 가치라도 있나? 돈에 목숨을 거는 용병들보다도 더 하류 인생인데. 말이 좋아 해결사지, 돈만 주면 뒷구멍도 대주는 게 해결사잖아?"
"······."
분하지만 반박할 수 없다.
해결사 중에는 충분히 그런 선택을 하고도 남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으니까. 오히려 좋다면서 이참에 뒷구멍 임플란트를 하려고 하지 않을까? 의뢰인의 만족을 위한답시고 말이다.
"너라면 어떤 기업이라도 갈 수 있을 텐데, 왜 그 밑바닥에 남아있는 거냐? 해결사들의 목적은 돈이 아닌가?"
"자유가 더 좋아서."
"자유?"
못들을 말을 들었는지 노리스의 목소리에 황당함이 섞인다.
"그래. 자유. 누가 뭐래도 내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하고 행하는 자유 의지. 그게 내가 해결사로 남아있는 이유다."
나는 턱을 들어 올리곤 노리스를 바라봤다. 내 말을 들은 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래. 안다. 개소리로 들리겠지.
돈이면 사람 목숨마저도 쉽게 사고파는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자유 의지'로 밑바닥 인생을 고집한다니.
나도 알면서 한 소리다. 나 역시 이 세계에서 태어났더라면 진즉에 기업에 들어갔겠지.
하지만 나는 빙의자다. 이 세계가 게임 속 세상이라는 걸 아는 이방인이다.
'하울의 주인 소피아. 그녀도 알고 있었지.'
혼자만 품고 있던 의문이 소피아를 만나면서 확실해졌다.
이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라는 것. 또한, 나 말고도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것도.'
그러기 위해선 이 게임의 엔딩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 빨간약이든, 파란약이든 선택할 수 있고, 그래야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려면 더더욱 기업과 엮이면 안 되지.'
이 게임에서 기업가 육성이 어려운 건, 상대하는 적들이 똑같은 기업들이라는 거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
이 사이버펑크 세계의 인물들 대부분이 돈에 목을 매는 인생이라지만, 기업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
돈이 걸려있다면 친구라도. 아니, 설령 부모라도 거리낌 없이 죽이는 게 그들이다.
내가 해결사로 남으면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장기 말에 불과하지만, 기업에 소속되는 순간 모두가 적이 된다. 심지어 내가 소속된 기업조차도 말이다.
'그 누구도 믿지 마라. 믿음의 대가는 죽음뿐.'
이게 이 사이버펑크 게임의 기업가 테크를 탈 때 처음으로 등장하는 말이다.
나는 끝까지 살아남을 거고, 그러기 위해선 기업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사이를 유지해야 한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딱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만.
"······정녕 그렇게 생각하나?"
붉게 빛나는 노리스의 사이버아이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인간의 눈동자가 아니기에 그 눈빛에 담긴 저의를 파악할 순 없었지만, 뭔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흠. 사이보그가 이해하긴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나?
"그래.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 네가 이해할 필요는 없······"
"강현재. 하나 물어볼 게 있다."
"······?"
그런데 노리스의 반응이 이상하다.
"그 '자유 의지'라는 것.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행한다고 '믿어도' 자유 의지가 될 수 있나?"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철학적인 질문인가? 뭐, 내가 먼저 시작했으니 대답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믿음은 자유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게 믿음이야. 저 아래에 똥색정장을 입은 금천교도들의 믿음이 정녕 자유 의지로만 이뤄졌을까?"
"그건······."
"당연히 아니지. 인간의 믿음은 나약하거든. 언제든지 변하는 게 믿음이다."
나는 머뭇거리는 녀석의 말을 끊고 결론을 내줬다.
"자유 의지는 어떤 방해도 위압도 없이, 오롯이 스스로 결정하는 의지다. 그걸 내가 믿었냐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결정을 스스로가 선택했냐는 거지."
"······그런가."
작게 중얼거리듯 대답한 노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본인이 원하던 대답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무언가를 깨닫긴 한 것 같았다.
그게 뭔지, 어떤 걸 물어보고 싶었던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냥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은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다른 걸 물었다.
사실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나도 하나 묻지. 이 일에 끼어든 이유가 뭐지?"
"······끼어들었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군. 애초에 이 일을 의뢰한 게 우리일 텐데?"
"날 바보로 아는 건가? 너희가 직접 개입하기 싫어서 나를 고용했던 거다. 그런데 갑자기 너와 네 부하들이 나타난 거지."
나는 노리스와 그 뒤로 하나, 둘 넘어오는 경호대원들을 바라봤다.
악명높은 메가 코프의 경호대답게 하나하나가 전부 정예병력이다. 빌딩과 빌딩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다닐 정도로 말이다.
"흥. 해결사 주제에 눈치도 빠르군. 궁금한 것도 많고. 칼솜씨가 모자랐으면 진즉에 길거리에서 뒈졌을 정도야."
"시끄럽고 대답이나 해."
이 자식이 싸가지 없는 건 알았지만, 해결사 앞에서 해결사 비하 발언을 너무 거침없이 하네.
나를 바라본 녀석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대충 복수를 위해서라고 하면 되려나?"
"복수? 연구소에 침입한 것 말인가?"
"그 이후지. 놈들 신호를 따라갔다가 대원 스무 명이 죽었으니까."
"······그날 작전에서?"
나는 표정을 굳혔다.
그날 연구소에서 작전은 내가 버티면서 적들을 조급하게 하고, 그 틈을 노려 전송한 데이터 경로를 역추적해서 적들의 본거지를 급습하는 작전이었다.
그 이후 별다른 말이 없어서 성공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고 심지어 스무 명이나 죽었다고?
"놈들의 함정이었다. 처음부터 거기까지 준비했던 거지. 우린 그것도 모르고 함정으로 기어들어간 거고."
으드득!
노리스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강철로 만들어진 치아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나는 별말 하지 않았다.
스무 명이나 죽었으니 안타까운 일이긴 하다만······.
'메가 코프가 직원의 복수를 위해 칼을 빼 들었다? 퍽이나 믿음직스럽군.'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다. 지금껏 뒤로 빠져있던 셀리케가 직접 움직일만한 이유가.
"전부 모였습니다, 대장."
그때 흩어져서 침투했던 경호대들이 전부 이곳으로 집결했다.
나를 바라보던 노리스가 경호대를 힐끗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계획대로 움직인다."
"네, 대장."
모여있던 경호대가 저마다 옥상을 질주하더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지."
노리스 역시 경호대를 뒤따라 몸을 날렸다. 단번에 질주한 놈의 육중한 몸은 허공을 찢으며 반대편 건물 위로 뚝 떨어져 내렸다.
여전히 신기한 건, 1톤을 넘나드는 저 몸이 떨어질 때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나 역시 몸을 날렸다.
'무슨 꿍꿍인진 모르겠지만······ 내 뒤통수를 치는 것만 아니면 묵인해주마.'
혹시나 그럴 가능성은 작겠으나, 만약 놈들이 내 뒤통수를 친다면······.
'······나는 목을 쳐주지.'
* * *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과는 다소 거리가 떨어진 곳.
금색 정장을 입은 금천교도들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금색 두건을 머리에 두른 채 경계를 서듯 주변을 살폈고, 빨간색 옷을 걸친 전투 안드로이드들은 마치 진시황릉의 병마용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 휘황찬란한 황금색 비단을 늘어뜨린 거대한 천막 내부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형님. 우리가 여기 있을 게 아니라 전선에 나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직 때가 아니다."
금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태사의에 앉아 있는 장각이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장각의 앞엔 그의 동생인 장보가 다소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이대로 전선에서 밀려버리면 무지한 교도들부터 탈주할 겁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상관없다."
"······너무 태평하신 거 아닙니까?"
다소 힐난하듯 묻는 장보의 목소리에 장각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동자 전체가 검게 물들어있는 그 모습에 장보가 움찔했다.
"너야말로 너무 조급하구나. 량이가 왜 그렇게 됐는지 정녕 몰라서 그러는 거냐?"
"형님! 말이 나와서 말인데 어쩌면 량이 말이 맞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량이도 죽고, 얼마 전부터 그분 목소리도 들리지 않지 않습니까?"
"······다 무언가 뜻이 있으시겠지. 어쩌면 우리를 시험하시는 걸지도 모른다."
장각의 차분한 대답에 장보가 다소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까지 금천교를 널리 퍼트렸는데 이제 와서 시험이라니요? 소울 시티 절반이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이 정도면 시험이 아니라 상을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상?"
"······두 번째 축복 말입니다!"
머뭇거리며 대답하는 장보의 눈에 탐욕이 서렸다.
"욕심이다. 그걸 요구하기엔 아직 때가 일러."
"그, 그럼 언제가 때란 말입니까? 분명 그건 약속이지 않았습니까?"
"최소한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고 정부 놈들과 교섭한 이후다. 그 정도는 되어야 그분께서도 흡족하시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더더욱 우리가 전선에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쯧! 조금만 더 기다려라. 정부군 증원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장각이 혀를 차며 장보를 나무랐다.
그제야 장보의 다급했던 안색이 밝아졌다.
"정부군 증원병력이라면······ 설마 거기도 안배가 된 겁니까?"
"이제야 정신이 들었나 보구나."
"여, 역시! 그분께선 거기까지 내다보고 계신······"
환하게 대답하던 장보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그건 장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황금 비단 천막 바깥을 향했다.
"불청객이 찾아왔구나."
* * *
-베타팀 위치 선점 완료.
-감마팀 저격 준비 완료.
-델타팀 하강 준비 완료.
연결된 무전으로 경호대의 보고가 하나씩 들려왔다.
"저기라고?"
나는 빌딩 아래로 멀찌감치 보이는 황금빛 천막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태양빛에 물든 황금빛 천막은 숫제 타들어 가는 것마냥 찬란하게 반짝였다.
"위성 사진에 찍힌 놈들의 마지막 위치다. 바깥에 나온 적이 없으니 아직 저기에 있겠지."
"그럼 그냥 폭격 같은 거 날리면 안 되나? 저 천막만 깔끔하게 날릴 수 있잖아?"
시 방위군이 도심 폭격을 안 하는 건 피해를 감당하기 싫어서다. 인명피해가 아니라 정확히는 재산피해를 말이다.
하지만 그건 전선에서 때려 박는 대규모 폭격일 때고, 지금처럼 목표가 확실하다면 국소지역 폭격도 가능하다.
저 정도 천막 정도는 깔끔하게 날려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안에 담긴 내용물까지도.
"우리 목표는 놈의 머리를 가져가는 거다. 폭격으로 날릴 거라면 애초에 여길 오지도 않았어."
"······유혜리도 그렇고, 이상하게 머리에 집착하는군. 셀리케 회장실에 박제라도 하려나 보지?"
"흠. 그걸 어떻게 알았지? 회장님을 만난 적이 있나?"
"······."
뭐야? 진짜였냐?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2)
158화.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내가 황당한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자, 노리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농담이다."
"······사이보그가 농담도 할 줄 아는군."
덤으로 정말 재미없는 농담이기도 했고.
"박제는 농담이었지만, 머리를 가져가는 건 농담이 아니다. 경호대 전 병력이 이곳에 온 이유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라."
"이해가 안 될 뿐이다. 왜 굳이 그런 귀찮은 일을 하는 건지."
내가 셀리케라면 이 주변을 죄다 초토화해버릴 텐데 말이다. 재산피해쯤은 셀리케의 자산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할 테니.
어쩌면 시 정부로부터 이득을 얻을 수도 있을 테고.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전뇌보조를 받는 나조차도 이해가 안 되는 메가 코프의 결정을 겨우 인간의 뇌로 이해가 될 것 같으냐?"
"······머리통마저 고철이라서 퍽이나 좋겠군."
"나쁘진 않지."
녀석이 실실대면서 대꾸하곤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천막이 갈라지며 두 명의 사내가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은, 정확히 빌딩 위의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렌즈 위로 바로 인적사항이 떠오른다.
장씨 삼형제의 첫째와 둘째인 장각과 장보다.
"나왔군. 내가 왼쪽을 맡지."
노리스는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빌딩 아래로 뛰어내렸다.
-작전 개시!
-롸져!
이어서 짧은 무전이 들려오고 드디어 전투가 시작됐다.
투타타탕!
콰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상에선 빌딩 위로, 빌딩 위에선 지상으로 총격과 포탄이 오갔다.
쿵!
그대로 수십 미터 지상으로 뛰어내린 노리스가 대지를 박살 냈고, 이윽고 풀풀 휘날리는 먼지를 뚫고 금색코트를 입은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성격 한번 급하군. 깡통이라서 그런가."
나도 짧게 한숨을 내뱉고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이 귓가를 스친다. 벌떼처럼 날아드는 탄환들을 넘어 거칠게 흩날리는 옷깃을 한차례 털고 몸을 뒤집었다.
탁.
노리스의 거친 착지와 달리 가볍게 내려앉는다.
하지만 이미 지상은 전장이 됐다.
콰쾅! 콰콰쾅!
이미 노리스와 장각은 서로 얽힌 채 한 블록이나 멀어졌다.
육중한 크롬 신체의 거력을 장각은 마치 파리를 쫓듯 손을 휘두르며 막아냈다.
하지만 셀리케 기술의 총아나 다름없는 사이보그의 거력은 단순히 막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 어마어마한 물리력은 주변을 초토화시켰고, 장각 역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
"네가 장보로군."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장보가 저 멀리 밀려나는 장각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얼굴을 구겼다.
"시 정부의 사냥개냐!"
"안타깝지만 둘 다 아닌데."
"뭣? 그럼 뭐하는 놈들이야!"
놈이 으르렁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나는 이미 난장판을 만들며 사라지는 노리스와 장각을 힐끔 쳐다보곤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글쎄. 회장님의 고상한 취미 때문에 너희 머리가 필요한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무슨 개소리냐!"
"그래. 네가 듣기에도 개소리 같지? 혹시 기회가 있다면 저기 날뛰는 깡통 로봇한테도 꼭 말해줘라. 네 농담은 개소리라고."
"······이런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저놈들을 죽여라!"
붉어진 얼굴로 콧김을 내뿜은 장보가 그대로 일갈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남아있던 금천교도들과 전투 안드로이드들의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그리고 그건, 빌딩에서 레벨 강하를 한 경호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투타타타타탕!
콰콰쾅!
순식간에 양쪽 진영으로 총알비가 오갔다. 단순한 소총탄부터 기관탄환과 유탄, 소형로켓까지.
"성격 급한 놈들이 많네."
나는 쇄도하는 탄환을 피하며 장보에게 달려들었다.
장보 역시 어디서 꺼내 들었는지 양손에 기관총을 쥐어 들고 난사를 하고 있었는데, 달려드는 나를 보자 코웃음을 쳤다.
"건방진! 자살특공대냐!"
난사를 하던 놈의 총구가 내게 조준된다. 두 정의 기관총에서 불을 뿜은 수백 발의 탄환이 내게 집중된다.
허공을 가르며 쇄도하는 탄환의 궤적이 마치 해일과도 같았다. 휩쓸리는 순간 죽음에 이르는 쓰나미처럼.
하지만.
지이이잉―――.
정규방송이 끝난 TV의 주파수처럼 높고 얇은 고주파음이 짧게 주변을 휩쓸었고.
후두두둑.
내게 쇄도하던 탄환의 쓰나미는 모조리 땅바닥에 처박혔다.
「중력조작」.
이제는 별다른 준비도 필요치 않고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장보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떠오르고, 나는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대로 놈에게 손을 내뻗었다.
스르릉!
움직이는 손끝을 따라 허리춤에서 은빛실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려드는 속도와 발검하는 속도가 맞물리자, 은빛궤적은 지나간 공간을 지우듯 길게 늘어졌다.
그야말로 극광의 속도에 다다른 발검.
알고도 막을 수 없을 속도로 쇄도한 칼날은 그대로 장보의 목을 갈랐다.
그런데.
투웅!
목을 베고 지나간 검 끝의 감각이 깨끗하지 않다. 마지막 지점에서 느껴진 감각은 마치 물속에서 검을 휘두른 것처럼 저항이 거셌다.
'······얕다!'
단번에 가르고 지나갔어야 하는데 거미줄에 걸리기라도 한 듯 미증유의 힘이 칼날을 밀어냈다.
그 결과.
"크, 크윽!"
장보가 목을 움켜쥐고 몸을 빼는 시간을 주고야 말았다.
"너, 너······! 그 칼잡이로구나!"
다급히 뒤로 물러선 놈이 구겨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 내가 그 칼잡이다."
나는 손목을 가볍게 꺾으며 대답했다. 은빛궤적이 손목을 따라 둥글게 따라왔다.
"셀리케가 왜 끼어든 거냐! 오만한 메가코프가 언제부터 도시를 신경 썼다고!"
"셀리케 연구소를 습격하고도 보복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건가?"
"그, 그걸 어떻게······?"
"바보냐? 조금 전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나를 알아보는 것 자체가 네놈들이 범인이라는 걸 시인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큭! 그, 그런!"
구겨진 놈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떠오른다.
장량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머리가 좋은 놈들은 아닌 것 같다.
이놈도 장량처럼 온몸을 기계로 떡칠했더라면 노리스가 말한 것처럼 전뇌보조인지 뭔지를 받고 있을 텐데······.
"숫자 계산에나 도움되지 사고(思考)에는 별 도움이 안 되나 보군."
장량이나 이놈이나, 노리스마저도 하나같이 생각이 짧은 걸 보면 말이다.
"뭔 개소리냐!"
"그냥 혼잣말. 그건 그렇고 너도 네 동생처럼 정상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먼 것 같구나. 자체수복 외피라니. 네놈 형제들은 그걸 어디서 구한 거지?"
나는 놈을 삐뚜름하게 바라봤다.
목을 부여잡고 컥컥거리던 놈은 어느새 허리를 꼿꼿이 펴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반쯤 갈라졌던 목은 이제 상처의 흔적조차 없다. 피와 정체불명의 오일이 섞인 검붉은 액체의 흔적을 제외하고 말이다.
"내 동생?"
고개를 갸웃한 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 네놈이 량이를 죽인 놈이구나!"
"소문이 늦었나 보군."
"감히! 감히 막내를!"
붉어진 얼굴로 성을 내던 놈이 거칠게 상의를 찢었다. 금색정장이 종잇장처럼 갈라지며 맨몸이 드러났다.
"오······?"
나는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놈이 옷을 찢은 건 노출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드러난 맨몸은 인조피부 대신 크롬의 은색과 금색으로 빛났다. 고스란히 크롬으로 남은 상체엔 온갖 기계장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다. 저 정도의 몸이라면 단순한 임플란트 수준이 아니라, 몸 전체를 기계화시킨 거나 다름없었다.
반쯤은 사이보그. 그리고 인간보다 기계에 가까운 상태. 장량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네놈의 뼈와 살을 발라서 막내의 위령을 달래야겠다!"
"그것보다 네가 동생따라 그곳으로 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던데."
"닥쳐라!"
포효하듯 소리친 장보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니. 그건 달려든다는 표현보다 쏘아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폭발하듯 튕겨온 놈은 발사된 탄환처럼 순식간에 내 앞으로 날아왔고, 어느새 날카롭게 변한 양손 끝을 내게 찔러넣었다.
기계로 대체된 몸이기에 그 힘과 물리력은 의심할 바 없었다. 저 손끝은 콘크리트도 뚫고, 철갑마저 찢어발길 거다.
물론 맞는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스르릉!
가볍게 휘두른 칼날이 놈의 손끝과 마주했다. 우악스러운 놈의 손끝이 칼날을 밀고 들어왔다.
그그그긍!
하지만 칼날은 그대로 놈의 힘을 받아내며 옆으로 흘려냈다. 쇄도하던 놈의 몸 역시 내 옆으로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나는 그 순간 흘려내던 칼날을 역으로 쥐고 그대로 몸을 회전했다.
팽이처럼 회전하는 몸을 따라 칼날이 거칠게 휘돌았다. 호선을 그리던 은빛궤적은 이어지며 원을 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수십 번을.
카카카캉!
투두둥!
처음 회전한 칼날은 날카롭게 변한 놈의 팔과 부딪쳤으나, 세 번째에 이르러선 몸을 두드렸고, 일곱 번째엔 상체를, 열두 번째엔 전신을 갈랐다.
불과 일 합 만에 벌어진 일.
칼잡이를 모르고, 소드마스터라는 이명까지 얻은 나를 모르는 놈이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이 검격을 고스란히 받아낸 이상, 놈의 몸은 수십 갈래로 쪼개졌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얕다.'
옆을 스쳐 지나간 놈이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뒹굴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도 놈의 몸을 지나간 검격들이 모두 무언가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깔끔하게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게다가.
찌릿찌릿.
수십 차례 두드린 검 끝을 타고 전류의 충격이 올라왔다. 순간적으로 검을 쥔 손아귀가 마비될 정도였다.
"크아악! 이 건방진 칼잡이가!"
바닥을 나뒹군 놈이 맹수처럼 몸을 팔딱거리며 일으켰다.
"귀찮은 능력을 가졌군. 전자기장을 다루는 능력이라니."
나는 얼얼한 손아귀를 몇 번 쥐었다 폈다.
전자기장을 다루는 능력.
일전에 유혜리가 노리스와 말싸움을 하면서 보여줬던 능력이었다. 칼날을 막아낸 미증유의 힘도 전자기장이라면 말이 된다.
"이제 알겠느냐! 네놈의 비루한 날붙이론 이 몸을 어찌할 수 없다!"
피투성이가 된 놈이 울부짖듯 소리쳤다. 실시간으로 갈라진 크롬 외피가 채워지고 있다.
전자기장의 방어와 자가수복 외피의 회복까지. 거의 좀비에 가까운 생명력이었다.
'이렇게 되면 보는 눈이 많아서 조금 꺼려지긴 하지만 검기를 쓰는 수밖에.'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럼 날붙이 말고 다른 것도 써보지."
나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쿠콰콰쾅!
투투투투투투투퉁!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어마어마한 탄환 폭격이 쏟아져 내렸다.
빌딩 위에서.
"크아아악!"
애초에 경호대는 팀마다 맡은 임무가 따로 있었고, 그중 하나의 팀은 오로지 장각과 장보에게 화력을 쏟아붓는 팀이었다.
메가코프의 자본과 기술력이 총동원된 경호대의 화력 투사.
알고 있었지만 어마어마했다. 초정밀타격임에도 장보가 나자빠진 구역 주변 십여 미터가 붕괴하듯 무너져내렸다.
콘크리트가 모조리 가루가 되고, 정비됐던 지반이 가라앉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3. 2. 1. 진입!"
나와 함께 먼지폭풍을 뚫고 장보가 쓰러진 곳으로 진입한 경호대원들은 모조리 기갑 슈트를 임플란트한 정예 중의 정예였다.
한때 인형술사 마리오가 착용했던 바실리스크보다 더 개량된 최신 버전의 기갑 슈트. 코드네임 싸이클롭스.
이 정도 전력이면 불과 반년 전의 나였더라도 반항조차 못 하고 죽었을 정도의 전력이다.
콰지지직!
순간 전방에서 먼지 폭풍이 갈라지며 전자기장 웨이브가 밀어닥쳤다.
나는 어느새 불꽃을 넘실거리는 칼날을 휘둘러 전방의 전자기장 웨이브를 갈라버렸다.
싸이클롭스를 입은 경호대원들 역시 잠시 움찔할 뿐,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장보와 마주했다.
놈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진 지반 위에서 우리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이딴 거론 이 몸을 어찌할 수 없다!"
"일단 맞아보고 그때도 멀쩡하면 다시 얘기하자."
놈의 분노어린 일갈을 가볍게 대꾸한 나는 싸이클롭스들과 함께 놈에게 달려들었다.
"건방진 놈들!"
콰지직!
다시 한번 전자기장 웨이브가 밀려왔다.
가까이서 보니 알겠다. 양손을 하늘로 내뻗은 놈의 상체에서 전류가 휘돌더니 팍!하고 전자기장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나는 칼로 전자기장 웨이브를 갈랐고, 싸이클롭스는 애초에 면역이었다.
콰지직!
콰지직!
몇 차례 더 웨이브가 이어졌지만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순식간에 놈과 코앞으로 마주했다.
화르르륵!
싸이클롭스의 손끝에서 무언가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백색에 가까운 초고온의 불꽃.
플라즈마 블레이드다.
나 역시 불꽃이 넘실거리는 검을 움켜쥔 채 놈의 몸을 갈라내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퍼석.
놈이 딛고 있는 땅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
그건 안드로이드였다. 아니, 안드로이드'들'이었다. 다섯 대의 안드로이드가 땅속에서 튀어나와선 놈을 보호하듯 둘러쌌다.
'멍청한! 안드로이드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
그렇게 생각한 순간.
파지지직!
놈을 둘러싼 안드로이드들이 새파란 전격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수작······.
그 순간.
"E, EMP?"
"씨발?"
싸이클롭스를 착용한 경호대원들 입에서 경악에 가까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흥! 늦었다!"
꽈릉!
세상이 푸른빛으로 뒤덮였다.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3)
159화.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푸른빛이 뒤덮인 공간 속에서 장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야엔 단순한 푸른빛이 아니라, 그 푸른빛의 매개가 되는 수백만 가닥의 전류가 보였다.
EMP.
전자기파를 펄스 형태로 방출해 주변의 전자장비를 모조리 무력화시키는 기술.
물론 전자장비가 지배하는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너무나 강력한 기술이기에 방호하는 방법부터 연구됐고, 지금에 이르러선 모든 군용장비는 물론이고 고가의 전자제품들도 EMP를 방호하는 성능이 기본적으로 탑재돼 있었다.
하지만 막는 쪽이 있으면, 반드시 그 반대에서 뚫으려 하는 쪽도 존재하는 법.
도체 시공으로 완전히 차폐되는 건물이라면 몰라도, 거리를 거니는 안드로이드나 사람들의 사이버웨어엔 분명 틈이 존재했다.
만약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정도로 강력하고 집약된 EMP를 방출하면 어떻게 될까? 한계 이상으로 증폭시킨 EMP를 국소지역으로 집중한다면?
"크크큭!"
이윽고 푸른빛이 사그라든 지상을 바라본 장보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지금 지상에 두 발을 듣고 서 있는 존재는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주변에서 달려들던 기갑 슈트를 입은 적들도, 저 멀리서 탄환을 쏟아내던 적들도.
모조리 실 끊어진 인형처럼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물론 EMP의 특성상 적아를 가리지 않기에 금천교의 신도들과 안드로이드 역시 피해가 있었지만······.
'뭐, 상관없지.'
어차피 널리고 널린 게 금천교도들이었고, 안드로이드는 더 많았으니까.
이제 이 건방진 놈들을 모조리 십자가에 매달아서 적들에게 경고해야 했다.
감히 분수도 모르고 금천교에 덤빈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줄······.
'······음? 그런데 그 건방진 칼잡이는 어디 갔지?'
거꾸러진 적들 중 가장 건방졌던 그 칼잡이가 보이질 않는다.
뭐지? 분명 함께 달려드는 걸 봤었는데······.
그 순간.
"나를 찾나?"
귓가로 소름 끼칠 정도의 낮은 저음이 흘러들어왔다.
"······!"
그것도 바로 등 뒤에서.
"네, 네놈이 어떻게!?"
강현재였다.
* * *
셀리케의 경호대원 데이브는 금천교도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가 사용하는 기관총은 전기모터가 탑재된 특수형 기관총으로, 사실상 소형 발칸포나 다름없었다.
총의 무게만 100Kg에 육박했고, 이론상 12.7mm의 탄약을 초당 1천 발이 넘게 쏟아낼 수 있었다.
물론 총열의 내구성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렇게 사용하진 못하더라도, 이 기관총 하나면 웬만한 소대급 진지 하나를 쓸어버리긴 충분한 화력이었다.
그랬기에 자신이 있었다.
이 전장에서 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승리할 자신이.
이곳에 침투한 셀리케의 경호대원들 중 자신보다 못한 자들은 없으니까.
게다가.
위이이잉!
전기모터 특유의 낮은 저주파음과 함께 전장을 질주하는 기갑 슈트들.
코드네임 싸이클롭스.
그조차도 실제로 몇 번 본적 없는 이 전장 병기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기갑탄 조차도 막아내는 무지막지한 방호력에, 전투 임플란트를 한 인간이나 전투 안드로이드는 물론이고, 기갑차나 탱크같은 중병기도 홀로 찢어버리는 괴력.
무엇보다 기계체조 선수보다 유연한 그 움직임은 홀로 적진을 휘저어도 상처 하나 생기지 않고 적진을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이런 우리가 저런 저급한 쿠데타 세력 따위에게 당할 리 없지.'
데이브는 장보에게 달려드는 싸이클롭스들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끝났군.'
결국, 이 싸움은 적들의 우두머리를 사로잡으면 끝나는 싸움이다.
제법 요란한 사이버웨어를 임플란트한 것 같지만, 인간의 임플란트는 절대 기갑 슈트를 넘어설 수 없다. 싸이클롭스가 출동한 이상 저자가 사로잡히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상황.
다른 우두머리도 노리스 대장과 맞붙었으니, 곧 목줄이 걸린 개처럼 끌려오겠지. 아니면 머리만 오거나.
그런데.
꽈릉!
난데없이 터진 푸른빛 폭풍이 주변을 집어삼켰다.
마치 빛이 닿는 모든 곳을 물들이겠다는 듯, 지상은 물론이고 건물과 하늘까지 모조리 푸른빛으로 뒤덮였다.
'단순한 플래시인가? 도망치려는 수작?'
······이라는 생각은 불과 1초 만에 사라졌다.
파지지직!
지잉! 지잉! 지잉!
그가 다루던 기관총이 불꽃에 휩싸이더니 작동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지지직거리며 일그러지더니 아래로 툭하고 거꾸러졌다.
그건 단순히 시각정보를 담당하는 사이버아이가 고장 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몸이 아래로 허물어지듯 쓰러졌기 때문이다.
온몸이 통제를 벗어나 경련을 일으켰고, 임플란트했던 사이버웨어들이 전깃불을 토해내며 작동을 멈췄다.
그리고 이건 비단 그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끄르륵!"
"끄윽!"
함께 총격을 쏟아내던 동료들이 저마다 거꾸러지며 쓰러졌다. 눈을 까뒤집고 피거품을 문 동료들도 있었다. 아마 장기나 뇌 쪽까지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이게 괜찮은 거였다.
"끄아아악!"
쿠웅!
쿠우웅!
빌딩 위에서 저격하던 저격수들은 코코넛 열매가 떨어지듯 지상으로 곤두박질쳤으니까. 안타깝게도 그들은 코코넛이 아니라 깨진 수박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씨발! 싸이클롭스마저!'
전장의 재앙으로 군림하는 싸이클롭스들마저 푸른 전류를 토해내며 바닥에 거꾸러졌다.
그제야 데이브는 상황이 파악됐다.
'······EMP!'
그들은 EMP로 인한 전자기장 폭풍에 휩쓸린 거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운용하는 군용장비는 물론이고 사이버웨어들마저 EMP를 방어할 수 있다. 이건 군사작전을 하는 그들에게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무엇보다 싸이클롭스 역시 EMP의 충격으로 쓰러졌다.
'대체 무슨 수로? 싸이클롭스는 최첨단 장비로 EMP에 면역일 텐데?'
싸이클롭스는 셀리케의 사이버웨어 기술과 로보 테크니카의 로봇공학이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향후 10년은 싸이클롭스를 위험하게 만들 기술은 나오지 않으리라 호언장담을 했었는데······ 그게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뚫리다니? 그것도 흔하디흔한 EMP로!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엎어진 시야로 깨끗하게 변한 지상이 보인다.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자는 장보뿐이었다.
비록 EMP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아 금천교도들과 안드로이드들 역시 그들처럼 작동을 멈춰 거꾸러졌지만,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다. 시간은 그들이 아니라 적들의 편이었다.
'빌어먹을······!'
기다렸다는 듯, 저 멀리서 적들의 병력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붉은색 옷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전투 안드로이드들이.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죽는다!'
EMP는 단순히 전자장비를 무력화시키는 게 아니다. 미세화된 전자기펄스가 구동칩을 비롯한 핵심부품을 태워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EMP에 의한 신체충격이 회복되더라도 사이버웨어는 사용하지 못할 거라는 소리다.
그럼 맨몸으로 총만 쥔 채 저 전투 안드로이드를 상대해야 한다는 건데······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인간의 연약한 몸은 절대 안드로이드를 감당할 수 없다.
그 순간.
"어, 어떻게 네놈이!?"
전장 한복판에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동자만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는다.
당연하게도 장보였다. 이 전장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는 그가 유일했으니까.
그런데······ 한 명이 더 있었다.
'저자는?'
장보의 거대한 덩치에 가려져 있던 사내.
바로 싸이클롭스 옆에서 함께 달려갔던 그 칼잡이였다.
'어떻게 멀쩡할 수 있지? 설마 EMP를 피한 건가?'
데이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직까지 강현재가 순수 인간의 육체라는 사실은 직접 마주했던 극소수의 인물들만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좋은 시도였다. 내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말이야."
강현재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장보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단순히 뒤로 물러선 것뿐만 아니라 곧바로 상체가 전류에 물들며 전자기장을 뿜어낼 준비를 마쳤다.
당황은 했지만, 실력은 어디 가는 게 아니기에.
그렇게 장보가 폭발하는 전자기파를 쏘아내며 주변을 백광으로 물들이려는 그 순간.
"건방진! 죽어어엇······ 컥!"
주변으로 번져가던 백광을 가르며 불쑥 무언가 들어왔다. 그건 푸른빛으로 휘감긴 칼날이었다.
서걱!
들어온 칼날이 장보의 목을 날렸다.
어떠한 저항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떠들어대던 장보의 머리는 거짓말처럼 몸과 분리되어 허공을 날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장보의 눈동자엔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과 경악이 공존했다.
대체 날붙이 따위가 어떻게 전자기장을 뚫고 들어온 거지?
칼날을 내뻗은 자세로 회전하는 장보의 눈동자를 바라본 강현재가 툭하고 내뱉듯 중얼거렸다.
"내 칼날이 가르지 못하는 건 없다."
화르륵!
그 중얼거림에 화답이라도 칼날 위를 넘실거리는 푸른빛 검기가 춤추듯 일렁였다.
툭.
투두두둑.
바닥에 떨어진 장보의 머리가 몇 번을 구르더니 멈춰섰다.
그 눈빛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만이 남아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
곧 전원이 꺼진 컴퓨터처럼 눈빛이 사그라들며 회색빛으로 변했다.
스르륵.
뒤이어 양팔을 내뻗고 있던 머리 없는 장보의 몸도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그렇게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장보가 죽었다.
"끝인가?"
떨어진 장보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강현재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아니라고! 아직 끝이 아니야!'
하지만 그 중얼거림을 들은 데이브는 속으로 소리쳤다.
그의 시선이 강현재와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금천교의 안드로이드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한눈에 보기에도 백여 기에 달하는 안드로이드들.
저 칼잡이가 소드마스터라 불리며 강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숫자는 일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숫자다.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소드닥터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저 칼잡이가 당하면, 그들 역시 모두 이 자리에서 죽는다.
'도망쳐! 도망치라고!'
그나마 유일한 방법은 칼잡이가 도망치는 것. 그래서 안드로이드들이 칼잡이를 쫓아가는 것뿐이다.
조금의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몸을 움직일 정도로 회복이 될 테니.
그런데······.
"음? 안드로이드인가? 귀찮군."
뻥 뚫린 도로를 달려오는 안드로이드를 발견한 칼잡이가 귀찮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스르릉.
안드로이드들이 달려오는 곳을 향해 천천히 칼을 들어 올렸다.
누가 봐도 안드로이드들과 싸우려는 모습.
'뭐, 뭐하는 거야? 그냥 도망치라고! 저 숫자가 안 보이는 거야?'
그리고 그 모습에 데이브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눈이 있다면 저 안드로이드를 피하는 게 정상인데, 오히려 귀찮다는 듯 칼을 들어 올리다니?
'빌어먹을! 칼잡이 중에서 정상인 자가 없다고 하더니!'
설마 셀리케와 함께 작전을 할 정도로 강한 칼잡이마저 저렇게 정신이 나가 있을 줄이야.
데이브의 눈동자에 절망이 서렸다.
저 칼잡이가 싸구려 전술 슈트라도 입고 있었더라면 걱정이 덜 됐을 텐데. 대체 저 바스락거리는 비닐 옷은 왜 뒤집어쓰고 있는 건지.
그 순간.
"······사라져라."
나지막이 중얼거린 칼잡이가 느릿하게 검을 휘둘렀다. 아직 안드로이드들과는 백여 미터 가까이 거리가 있는 상황.
느릿하게 휘둘러진 칼날이 허공을 유영하듯 스쳐 갔다. 지평선을 가르듯 일(一)자로.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데이브 역시 당황을 넘어 황당함에 빠졌다.
'저게 뭐하는 짓이······? 어어?'
하지만 그 감정은 불과 1초 만에 다시 당황으로 변하고, 이내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쩌어어억―――.
지평선이 둘로 갈라졌다.
사물을 비추던 공간이 울컥 무언가를 토해내며 위아래로 비틀어졌다.
기우뚱하며 엇나간 공간이 녹아들며 하나로 합쳐지고, 다시 정상적인 세계로 돌아온 순간.
'······!'
지평선 너머에서 도로를 질주하며 달려오던 안드로이드들이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모조리 허물어졌다.
정확히 상하가 분리된 절반으로 나뉘어서.
"······미친!"
데이브의 입에서 짓눌린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간신히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지금, 그가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은 경악이었다.
"허어······?"
"이게 무슨······?"
"허, 허허허······."
그리고 그건, 그 광경을 목격한 경호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저 경악에 질린 탄성과 눈빛으로 강현재를 바라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이성과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걸 봐버렸으니까.
그럼에도 그들 모두에겐 하나의 공통된 생각이 떠올랐다.
'소름 끼칠 정도로 강하다.'
그리고.
'이건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소드닥터잖아!'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4)
160화.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