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날.
나는 천성호를 데리고 은빛의 날개 본사를 찾았다. 빌딩 내부로 들어서니 세련된 로비가 보인다.
"와아······."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천성호. 우리는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나는 문득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라 물었다.
"근데 그 고등학생들하고는 왜 싸웠던거냐."
"아, 그거요. 그 새끼들 중 하나가 길가에서 돈을 뺏더라고요. 그래서 그 놈을 팼더니, 그 놈이 둘을 불러오고 두 명을 팼더니 네 명이 되고. 뭔지 아시죠?"
"······."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는 거다.
띵.
은날 길드의 부길드장 윤지은이 위치한 방.
"엥?"
그곳으로 들어가니 진세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은 윤지은의 자리에 앉아서 몸을 기댄 채 피자를 먹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
"아빠랑 극적인 합의를 봤죠. 은날 들어가면 헌터 활동 인정해준다고 해서 고민 중이에요."
진세아네 회사인 하이텍트는 은날의 후원 기업이다. 나와 천성호를 번갈아보던 진세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오빠는 그렇다고 쳐도 저 재수없는 상꼬맹이는 왜 왔어요?"
"천성호가 각성했거든."
"네?"
못 믿겠는지 미간을 좁히는 진세아.
"풋, 말이 돼요?"
녀석은 자리에서 걸어나왔다. 천성호도 지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어제부터 계속 걸렸는데 단단히 열받은 모습이었다.
"예의를 밥 말아먹었냐? 상꼬맹이, 상꼬맹이······. 형 앞이어서 참는다. 꼬맹아."
"허허, 이 놈봐라. 오빠 얘 패도 돼요?"
아니, 안돼. 아마 니가 맞을 거다. 어제 패놓지 그랬냐.
둘을 떼어놓으려는 찰나 윤지은이 들어왔다.
"어머, 다들 모여있었네요. 회의가 길어져서 조금 늦었어요. 그래서······."
그녀의 시선이 천성호에게 향했다.
"정말로 각성을 했다고요?"
쉽게 못 믿는 것도 당연하다. 각성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여러 조건들이 있다지만, 가장 중시되는 건 운.
운이 좋아야 각성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운은 인간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 때문에 인위적인 각성은 불가능하다는 게 주류 의견이니까.
백문이 불여일견.
곧바로 천성호에 대한 각성 테스트가 들어갔다. 본래 각성 신고는 협회에서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길드에도 같은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유리창 너머 장비 위에 선 천성호.
모니터에 찍혀나오는 등급을 확인하는 윤지은의 입이 벌어졌다.
"에, 이게······. 이게 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나를 쳐다보는 그녀. 수많은 헌터들을 봐온 그녀가 놀랄 정도였다.
시작부터 S급으로 각성하는 헌터는 정말로 드물다.
진세아는 기겁을 했다.
"그러면 저 상꼬맹이가 나보다 세다고요······?"
"뭐, 그렇겠네."
"세, 세상은 불공평해."
그런 말을 네가 하면 안 되지. 너도 네 전문 분야에선 따라올 사람이 없잖냐.
"지한씨······. 아직 말씀 안하신게 있으면 지금 말해주세요. 저 너무 놀라서 힘들거든요."
윤지은이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지금 하는 말은 검사실에 있는 천성호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압도적인 천재입니다. 대한민국을 뒤흔들 거에요."
그거면 충분하다.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무슨 소리인가 했겠지만······. 지한씨가 말했으니 틀림없겠네요."
윤지은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전의 사고를 딛고 은빛의 날개는 다시금 도약할 것이다.
"만약 제 예상대로라면 신아람이랑 투톱 체제가 될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재능 있는 인재라면 빚을 내서라도 키울거에요."
언젠가 윤지은 그녀는 은빛의 날개의 길드장이 된다. 이번 일로 그 시기가 더 앞당겨질지도 모르겠다.
"뭐 필요하신 거 없으세요? 뭐든 지원해드릴게요."
"공략하고 싶은 던전이 하나 있는데······. 은빛의 날개 소유라. 그거 하나 가져가도 됩니까?"
"물론이죠."
미래의 군단장.
전투의 마족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아이템.
그걸 찾으러 간다.
"오늘 하루만 천성호와 진세아를 데려가겠습니다."
* * *
부우우웅······.
모터 보트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러 나아간다. 그 위에 타고 있는 건 진세아와 천성호. 그리고 나다.
A급 특수 던전.
경기도의 호수 한가운데 위치한 장소다.
"둘이 싸우지마. 놀러가는 거 아니니까."
"물론이죠. 제가 애도 아니고, S급 헌터님이랑 제가 어떻게 싸우겠어요. 저는 한낱 B급 헌터일 뿐인데요."
"어이, 나보고 비꼬는 거 맞지."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나는 스마트폰으로 던전의 위치를 확인했다. 여기가 맞다. 다만 던전의 입구가 물 아래에 잠겨 있다.
"성호야, 부탁한다."
천성호의 이름을 막부르는 날이 오다니. 나름 감회가 새롭다.
"네, 형. 맡겨만 주세요."
팔을 걷어 붙힌 녀석은 보트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양손검을 들어 올리더니 기합과 함께 휘둘렀다.
콰아아아!
호수의 일부가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무수히 방사된 천성호의 마력이 던전 입구 근처로 물이 들어 오는 것을 막아내고 있었다.
저런 세세한 마력의 컨트롤은 나한텐 불가능한 일이다. 진세아가 입을 비죽였다.
"······. 조금 대단하네."
"내려가자."
호수 밑바닥에 열린 던전의 입구.
『 던전에 입장합니다. 』
『 마(魔)를 따르는 자의 권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던전 내부의 생물은 움직임이 40% 느려집니다. 』
"으앗, 또야?"
"형, 이게 뭐에요?"
"제약. 설명은 나중에 할게."
이 던전은 전투의 마족이 사용할 아이템을 숨겨놓은 장소.
저 앞에는 함정이 즐비하다. 움직임이 느려진 상태에서 돌파하긴 까다로운 함정들이겠지만.
"성호야, 한 번 보여줘."
"네."
지금 나와 함께 하는 건 천성호다.
녀석의 검 위로 붉은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아무도 알려준 사람이 없는데도 스스로 체득하고 터득한 마력의 운용.
이내 공기가 가볍게 떨려 온다.
천성호가 마력을 실은 검을 내질렀다.
콰아아아——!
붉은 파도가 동굴 내부를 질주하며 끝없이 파고들었다. 홍수처럼 들이치는 마력의 물결. 거대한 진동이 동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족들에게 있어 천성호의 등장은.
재해나 다름 없다.
84화 군단장의 아이템
동굴의 끝, 보스의 방에 앉아 있는 마족 하나.
그는 최하위 느림의 마족이었다.
'후, 이번 일만 끝나면 높은 지위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아이템 지킴이.
'그나저나 슬슬 찾으러 오실 때가 됐는데.'
아이템 중 만들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아이템이란 세계의 역사와 전승을 담아낸 것. 그 성능은 대개 유일하다.
하여 딱 맞는 아이템을 발견했을 때, 위쪽의 마족들이 탐을 내는 경우가 있다.
지금 느림의 마족이 지키고 있는 아이템이 그러했다.
'어려운 일이야, 차라리 공략을 해서 아이템을 들고 나가는 게 편하겠는데.'
절차가 필요하다는 위쪽의 입장이었다.
상위 마족들은 마족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하셨다. 치욕의 밤 이후로 그들은 진짜로 뒷방 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에휴, 우리 마족들이 고작 인간들의 눈치를 봐야한다니.'
이종족의 반란 따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니던가. 그토록 강대한 힘을 가지고도 그들을 두려워해서야 어떤 일이 제대로 될 수 있단건지.
'곧 하위 마족께서 회수하러 오신다고 하니 그때까지만 기다리자.'
느림의 마족은 자신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믿고 있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던전에 쭉 깔아둔 대규모의 정밀 함정들.
속도의 제약까지 걸어놨으니, S랭크의 헌터들이 와도 던전을 지키는 일은 거뜬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건 절대 못 뚫지.'
그때였다.
쿠구구구—!
상념에 젖어 있던 느림의 마족을 깨우는 진동이 동굴 내부로 울려 퍼졌다. 지진이 일어난 게 아닐까 싶은 강력한 진동.
"뭐, 뭐야······?"
보스방의 입구에서 자신의 권속인 고블린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주,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뭔데? 인간들의 침입이냐?"
"예, 그건 맞는데······."
"놔둬. 어차피 함정은 돌파 못해. 그보다 방금 그 진동은 뭐냐?"
함정은 견고하다, 이 정도 진동에 허물어질 게 아니었다. 느림의 마족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 오해를 바로 잡듯 고블린 권속이 말을 꺼냈다.
"전부 박살났습니다. 방금 동굴의 진동은 인간들의 기술이었습니다."
"그게 뭔······."
그가 말을 끝까지 하기도 전이었다.
쿠구구구—!
다시 한 번 동굴을 뒤덮는 진동이 느껴졌다. 느림의 마족의 얼굴이 굳어졌다.
"장난하지마라, 이 동굴이 얼마나 넓은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이만한 충격을 주려면 최소한 S급 헌터가 와야 한다고. A급 게이트를 공략하는데 S급 헌터가? 그거야말로 낭비가 아니고 뭐냐."
애써 현실을 부정하는 느림의 마족.
고블린 권속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선택하셔야 합니다. 도망가실지 아니면 맞서 싸우실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예, 그렇습니다. 함정은 전부 망가졌고 방금 통신으로 2열 마수들도 전부 죽었습니다. 적들의 출력은 말씀하신대로 S급이 맞습니다."
S급이 도대체 왜 이런 후미진 던전까지 온단 말인가.
'젠장, 운이 없어도 더럽게 없네. 저 놈들을 죽이는 건 문제가 아니야.'
느림의 마족은 게이트 위치한 마기를 끌어 모았다.
A급 게이트의 시스템 보정 덕분에 전투에 자신은 있었다.
'헌터들을 죽이면 이 던전에 이목이 집중된다는 거다.'
높으신 분들의 뜻과는 반대가 되는 상황.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어쩔 수 없지. 인간들을 전부 죽여서 아이템을 챙긴 뒤 던전을 닫는다.'
공략이 끝나 한 번 닫힌 던전은 열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3열 마수들을 집결 시켜라."
느림의 마족은 창을 잡았다. 날카로운 보랏빛 창날.
부우웅, 턱.
능숙하게 휘둘러 바닥에 꽂았다. 창날이 꽂힌 바닥에서 검은 마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마족의 눈이 붉게 빛났다.
"인간들을 쓸어버리고, 아이템을 챙겨 나간다."
쿠구구구——!
또 다시 몰려오는 진동.
옆에 서 있던 고블린 권속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녀석은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그······. 3열도 전멸 당했는데요."
* * *
확실히 잘 싸운다.
천성호의 공략에는 거침이 없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녀석의 움직임에는 확신이 깃들어갔다.
'그보다······. 마력양이 대체 얼마나 되는거냐.'
붉은 마력을 뻥뻥 난사하고 있었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응축된 마력이 파도처럼 동굴을 뒤덮는다.
버서커 신아람이 광화 상태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을.
천성호는 대수롭지않게 해내고 있었다.
"형, 어때요? 제 실력 쓸만한가요? 아직 감이 잘 안 잡히네요."
"잘하고 있어. 그대로만 해."
공략은 천성호의 독주였다. 옆으로 새어 나오는 마수들은 진세아가 잡도록 했다. 아직 진세아에게 A급 특수 게이트의 마수들은 버거운 감이 있었다.
"후우."
그러나 진세아는 특성 신속(神速) 덕분에 전투 중에 스피드 계속해서 증가한다. 잠시 심호흡을 한 진세아는 한달음에 달려들어 마수 세 마리의 급소를 정확히 찔렀다.
피투성이가 된 진세아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도 S급으로 각성 시켜줘요. 사기잖아요."
"그게 되면 나부터 S급으로 각성했겠지. 저건 천성호의 재능이야. 너도 잘하는 거 있잖아."
"내가 잘하는 거요? 그건 강한 거랑은 상관 없잖아요."
진세아의 스킬 '절대 강탈'.
레벨만 더 올린다면 전 세계의 중요 아이템을 휩쓸고 다닐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일단은 훈련을 시킨다.
"은빛의 날개에 들어가는 거 고려해봐. 도움이 될 거야."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솔깃하네."
가장 효과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했다. 은빛의 날개에 인재가 몰리는 감이 있지만 감당 가능한 수준이다.
아니, 오히려 은빛의 날개가 아니면 곤란하다.
'수호길드는 스타 헌터를 육성해내는데는 좋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자리는 한 자리라는 느낌. 진짜 실력을 쌓고 내실을 다지려면 은빛의 날개가 낫다.
'오성에게 보내는 건 절대로 안될 일이고.'
배신 가능성이 높은 김민수가 오성의 길드장이다.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지금 오성에 힘을 더 해줄 필욘 없겠지.
천성호가 휩쓸고 지나가자 동굴이 완전히 깔끔해졌다. 넓은 공동이 나오고, 열 갈래가 넘는 갈림길이 나왔다.
"형, 어디로 갈까요?"
이 중 하나에 보스방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일반적인 던전이었다면 가장 큰 길을 택하는 게 정답이었겠지만.
여기엔 마족이 있다.
'제약을 보니, 최하위 마족인 느림의 마족인 것 같은데.'
미래 김상욱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최하위 마족 중에선 가장 강한 놈이랬다. 게이트의 등급도 A고.
괜히 뒤를 잡히면 곤란할······.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옆에 있는 천성호가 보였다.
'그럴 리는 없겠네.'
천성호의 마력만 충분하다면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저기서부터 하나씩 마력을 쏟아 붓는거야. 그러면 그 중 하나에선 튀어나오겠지."
"오빠, 그게 말이 돼요? 아무리 상꼬맹이가 쎄도 그렇지······. 미친 짓이잖아요."
그러나 내 말에 천성호는 씩 웃으며 팔을 걷어 붙였다.
"까짓꺼 해보죠."
미친 짓 맞다.
그런데 천성호는 그 미친 상상을 뛰어 넘는 놈이거든.
천성호가 양손에 쥔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심상치 않은 기류가 형성 되며 붉은 마력이 검 위에 깃들었다.
『 동료 천성호가 스킬 '초(超) 마력 방사 Lv.7'를 발휘합니다. 』
스킬을 확인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초(超)라는 수식어는 그렇다고 쳐도 레벨이 7레벨이다.
천성호가 바로 어제 각성했음을 고려하면 말도 안되는 수치.
심지어 이 기술은 공격 기술도 아니었다. 그저 마력을 방사해낼 뿐. 그러나 그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해를 불허하는 압도적인 재능.
"하압!"
천성호의 기합과 함께 붉은 마력이 동굴의 모든 갈림길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앙—!
서 있는 게 힘들 정도의 반발력과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쳐왔다.
"으아앙!"
별 생각 없이 서 있던 진세아가 뒤로 날아가버렸다. 나는 재빨리 바닥을 굴러 벽에 쳐박히려는 진세아를 잡아챘다.
그래도 바닥에 얼굴을 부딪히는 것까진 막아줄 수 없었다. 녀석은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빨개진 진세아가 소리쳤다.
"야, 상꼬맹이! 뒤에 있는 사람은 생각하고 쏴야 할 거 아니야!"
"그냥 가볍게 날린 공격인데, 거기에 휩쓸린 사람이 너무 약한 거 아닌가?"
"우악, 이 자식! 덤벼!"
진세아의 오른손이 빛나려는 찰나였다. 뿌옇게 솟은 연기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잘도, 잘도 난동을 피우는구나. 이 빌어먹을 인간 놈들······."
말하는 것치고는 옷이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갈림길 모두에 공격을 써보는 건 정답이었다.
"나 느림의 마족의 이름을 걸고, 네 놈들은 여기서 전부 죽여주마."
화가 머리 끝까지 났는지 놈의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내 눈이 향한 건 느림의 마족이 들고 있는 보랏빛 창이었다.
보랏빛 요기를 은은하게 흘려보내는 창.
'저건······.'
심상치 않다. 꽤 높은 등급의 무기를 들고 있는 것 같다.
느림의 마족은 창을 든 채로 바닥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그대로 창과 함께 내리 꽂히듯 떨어졌다.
콰아앙!
천성호의 검과 느림의 마족이 창이 부딪혔다. 이어지는 공방은 치열하기 그지 없었다.
카앙! 캉! 카앙!
어지러울 정도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첫 대인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천성호는 본능적으로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 던전 내부의 생물은 움직임이 40% 느려집니다. 』
제약 때문에 움직임이 느려진 상태에서도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그 옆으로 진세아가 뛰어 들어갔다.
"나도 놀고만 있진 않았걸랑요."
신속에 의해 보정 받은 움직임. 녀석은 양 손에서 단검을 꺼내 마족을 향해 던졌다.
카앙! 푹!
"크으윽, 이 쥐새끼 같은 놈."
천성호의 검을 막으랴, 옆에서 날아 오는 진세아의 단검을 막으랴 바쁠 거다.
화아악!
느림의 마족이 뿜어내는 마기가 일시적으로 증가했다. 일순 창의 끝에 검은 마기가 짙게 일렁였다.
그대로 내질러지는 창.
콰아앙!
천성호는 마력을 두른 검으로 그것을 받아냈다. 동시에 천성호의 뒤쪽 동굴이 무너져내렸다.
한동안의 고착 상태.
느림의 마족이 이죽였다.
"소모전이라면 지지 않는다. 내 마기의 양은 방대하거든. 인간인 네 놈과 다르게."
"이 새끼가······."
콰앙! 콰앙!
천성호가 고착 상태를 해제하고, 검을 휘둘러 상대를 몰아붙였다. 검의 끝에서 채찍처럼 솟아난 붉은 기운이 마족을 강타했지만 마족은 능숙하게 공격을 흘려냈다.
도발에 놀아나 힘을 소모하는 꼴이 되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아직 어리다는 건가.'
이번이 첫 전투. 말도 안되는 싸움이긴 했다. 변화된 신체에 적응할 시간도 제대로 없었으니까.
'여기선 내가 나선다.'
나는 대검을 들고 달려나갔다. 느림의 마족이 나를 바라보며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잔챙이는 빠져!"
잔챙이는 누가 잔챙이냐.
어느새 놈의 뒤에는 고도로 응축된 마기가 모여 있었다. 그것이 등 뒤에서 넘실거리며 피어난다.
'천성호와 전투하면서 힘을 비축해 둔 건가.'
확실히 노련하다. 놈이 최하위 중에서 최강이라는 이유를 알겠다.
'나도 더 강해져야 한다.'
발전의 마족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은 칭호의 효과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선 당연히 마계 필드 1000%의 데미지가 없다.
그렇기에 지금 수준으로는 중위 마족을 쓰러뜨릴 수 없다.
화아악!
놈이 모아둔 마기에서 보랏빛 창이 두 자루 솟아나왔다. 그것은 자유자재로 허공을 맴돌며 나와 진세아를 향해 쏘아졌다.
미안한데, 내가 그렇게 잔챙이는 아니거든.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허공에 푸른 잔상이 새겨지며 보랏빛 창과 마기를 통째로 집어 삼켰다. 이제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큭."
느림의 마족이 내 접근을 눈치 채고, 모아둔 마기를 전부 창 위에 쏟아부었다. 오러처럼 검게 불타오르는 창날.
나는 소리쳤다.
"천성호, 그 녀석을 붙들어!"
"네, 형!"
천성호의 검이 미친듯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검 끝에서 퍼져나간 붉은 마력은 천성호 본인의 몸 전체를 덮을 정도였다.
"뭐, 이런······!"
느림의 마족은 선택해야 했다.
나를 막을지, 아니면 눈 앞의 괴물 천성호를 막아낼지.
찰나의 고민. 놈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다.
"죽어라!"
느림의 마족은 본능적으로 천성호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응축된 마기와 천성호의 마력이 충돌하며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 선택은 정답이 아니었다.
『 스킬 '각성 일자 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
동굴의 천장과 바닥을 잇는 푸른 직선. 그것은 내 공격을 미처 대비하지 못한 마족에게 정확히 직격했다.
콰아아앙!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강렬한 섬광이 동굴 내부를 뒤덮었다. 동굴 내부로 강력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빛이 잦아들었을 때, 느림의 마족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스스스······.
뿌옇게 솟은 먼지가 가라앉았다.
『 최하위 '느림의 마족'을 처치하셨습니다. 』
『 271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천장과 바닥에 뚫린 끝을 알 수 없는 구멍. 그 충격파에 바닥을 구른 진세아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 오빠도 S급······?"
천성호 또한 그 위력에 입을 슬쩍 벌렸다.
"다시봐도 개쩌네······."
어쩐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한층 달라진 것 같다.
『 레벨업! Lv.77이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78가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79가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80이 되었습니다. 』
『 B등급 최대 레벨에 도달하셨습니다. 』
위력이야 대단하긴 한데.
'역시 피로감이 장난 아니네.'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알림창을 확인했다. 준비해 놨던 포션을 마시니 그제서야 살만하다.
'남은 보스 처리는 천성호한테 맡기면 되겠어.'
그때였다.
뀨!
내 몸에 방어구로 붙어 있던 오르티마가 뛰쳐나갔다. 녀석은 각성 일자베기 때문에 생긴 구멍을 향해 뛰어들었다.
잠시후 녀석이 상자와 창을 등에 지고서 위로 올라왔다.
"오······."
상자를 살피던 내 눈이 살짝 커졌다.
'이건 던전 클리어 보상이잖아.'
느림의 마족은 던전을 공략하고 빠져나가려는 생각이었던건가. 뭐, 중요하지 않다. 그보단 이곳에 담긴 내용물이다.
중위 전투의 마족이 군단장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아이템 중 하나.
샤아아아—!
상자를 여니 찬란한 총천연색의 빛이 뿜어져나왔다. 아름답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이펙트였다.
이 빛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내 생에 이걸 얻게 될 줄이야.'
레전더리급 아이템이다.
85화 재능 개화의 물약(1)
『 레전더리 아이템을 습득하셨습니다. 』
'드디어······.'
일반, 레어, 유니크에 이어 현 시점에 존재하는 아이템의 마지막 단계.
레전더리.
미래에는 상위의 아이템도 발견 되지만, 그건 나중의 일.
'지금 시점에선 두말하면 입 아픈 최강의 아이템이다.'
『 아이템 설명 』
- 이름 : 초회의 장갑
- 등급 : 레전더리
- 효과 : 첫번째 공격의 데미지 250% ( 쿨타임 24시간 ), 근접 전투시 능력치 30% 상승, 방어력 35
- 스킬 : 바람의 기운 Lv.3 타격 Lv.3
'능력치가 미쳤네.'
그야말로 레전더리다운 능력치. 미래에 군단장이 될 전투의 마족이 소유하고 있던 아이템 중 하나답다.
"뭔진 몰라도 대박이네요. 축하해요, 형."
옆에 서 있던 천성호가 그렇게 말했다. 헌터가 된지 1일차, 레전더리급이 어느 정도 위상인지 모르는 걸까.
"운 미친 거 아니에요?"
반면 진세아는 어이가 없단 표정이었다.
"······일단 이 아이템은 내가 가진다. 이견 없지?"
"어차피 전 한 것도 없걸랑요."
"형이 가지는 게 저도 좋아요. 저한테 검도 주셨잖아요."
천성호가 내가 준 양손검 츠바이핸더를 들어 올렸다. 그거 그렇게까지 좋은 물건은 아닌데. 조금 양심에 찔리는 걸.
다음에 더 좋은 걸 구하면 가져다주자.
그때였다.
토옹!
오르티마가 내 손에 든 장갑을 향해 뛰어올랐다. 나는 재빨리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허공을 스치고 바닥에 떨어진 슬라임 오르티마가 시무룩하게 몸을 구부린다.
"이건 안돼."
오르티마가 먹은 아이템은 레벨업이 가능해진다. 성능은 뻥튀기 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오르티마는 한 번에 하나의 아이템으로 밖에 변할 수 없다.
지속적으로 아이템의 효과를 받아야 하는데 이러면 손해다.
"귀여워라. 이런 귀여운 슬라임은 대체 어디서 구해 온 거에요?"
진세아가 시무룩해진 오르티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천성호도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툭툭 오르티마를 건드려 본다.
싫지는 않은지 통통거리는 오르티마.
"주웠어."
"나도 줍고 싶어요. 어디서 주웠어요?"
미래에서 주웠다.
진세아 네가 버리고 간 걸 주워왔다.
녀석들이 오르티마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나는 다른 아이템을 살폈다.
느림의 마족이 들고 있었던 창이다.
『 아이템 설명 』
- 이름 : 칠흑의 창
- 등급 : 유니크
- 효과 : 착용자의 속도 15% 상승, 공격력 60
나쁘진 않은데, 회수의 창만큼의 값어치는 없다.
'이건 팔아도 되겠어.'
유니크 아이템의 가치는 최소 10억원에 육박한다. 어디까지나 최소. 아이템의 성능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레전더리의 경우에는 부르는 게 값이었고.
'최하위 마족 주제에 꽤 좋은 걸 들고 다녔네.'
부가적인 수입이 된다. 분배를 하더라도, 내 손에 떨어지는 돈이 꽤 된다.
'목표로 했던 초회의 장갑은 손에 얻었다.'
이 장갑이 문제가 되는 건 맨 처음 스킬. 첫 1회 공격시 데미지 250%. 이게 말도 안되는 성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놈이 군단장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장갑 덕이라고. 미래의 김상욱이 그리 말했었다.
'이계 규율의 업적 달성은 이번에는 나오지 않는건가.'
최하위 마족은 이미 여러번 잡았다. 더 이상 업적 취급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무언가 그럴싸한 것을 이루어야 업적이니.
'어쨌든 강해져야 한다.'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나 자체가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템의 효과를 제대로 발휘 하려면 능력치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기초 레어 스킬 중 지금 내가 없는 건······. 민첩, 체력, 지력.'
이 네 가지를 모으면 스킬이 통합되며 유니크 스킬로 넘어갈 수 있을 거다.
'레벨업이 불가능한 지금. 스킬과 포인트를 모으는데 집중해야겠어.'
게이트 바깥으로 나왔다. 천성호의 마력에 의해 호수가 걷히며 우리는 보트 위로 다시 올라올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
진세아가 결심한 듯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은빛의 날개에 들어갈래요. 나도 오빠처럼 강해지고 싶어요. 영웅도 좋지만, 당장은 더 강해지고 싶어요. 그러려면 은날에 들어가는 게 제일 좋겠죠?"
"그래, 잘 생각했네."
누군가는 은빛의 날개에 들어가는 것을 꿈으로 여긴다. 그러나 천재들에게 있어 출발하는 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디에 도달하느냐. 얼만큼 빠르게 가느냐가 이들에게 달린 일이다.
'타재간파에 의해 진세아의 재능은 개화되어 있다.'
이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천성호도 마찬가지. 모두 기존보다 강화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을 거다.
천성호가 히죽이며 진세아에게 말했다.
"그러면 내가 먼저 계약했으니까 선배겠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내가 헌터 생활을 먼저 시작했으니 내가 선배지. 알겠니?"
진세아도 지지 않고 받아친다.
시험삼아 각성 이후의 천성호에게도 타재간파를 사용해봤지만. 재능 개화 난이도가 전부 S가 넘는다.
현시점에선 개화가 불가능한 것들 뿐이었다.
이로써 이 두 명은 은빛의 날개에 가입하게 되었다. 녀석들의 성장은 윤지은 헌터에게 맡겨 놓으면 되는 부분이다.
이제 나만 강해지면 된다.
* * *
수호 길드, 회의실.
길드원들은 원탁 테이블에 둘러 앉아 있었다.
"최근 증가한 변칙 게이트와 고위험 게이트. 사전에 알아챌 방법은 없단건가?"
길드장 사최헌은 눈을 지긋이 감으며 말했다. 정부에서는 협회와 길드에게 지속적인 압박을 넣고 있었다.
대한민국 1위 길드인 수호 길드에게 화살이 쏟아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협회에서도 지속적인 조사 중에 있다고는 하는데, 큰 기대는 안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이텍트 사에서 게이트 제어 기술을 개발했다고는 들었는데. 은날의 후원사다보니 도움 요청이 쉽지 않고요."
하나 같이 어렵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만해도 머리가 아픈데, 이런 일까지 떠맡으려니 버거웠다.
대부분의 실무를 부길드장에게 맡기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은빛의 날개하고 공동으로 진행해. 우리 길드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굳이 자존심 부릴 건 없으니까."
사최헌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지난 도심지 고위험 A급 게이트 공략. 도움을 준 친구가 있다고 했었나? 내가 알기로 호라이즌 길드에 그만한 인재는 없었는데."
"신태양군하고 친분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황금방패 이수연의 말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신태양이 눈을 번쩍 떴다.
"예? 제가요? 아뇨,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디서 그런 오해가······."
신태양은 일단 부정하고 봤다.
굳이 긁어 부스럼만들지 말라는 스승의 말이 있었으므로. 옆에 있던 이수연이 눈썹을 찡그렸다.
"인터뷰도 했잖아. 그 분이 없었으면 공략은 불가능 했을 겁니다, 어쩌구."
"그랬었나? 기억이 잘······."
그 말에 사최헌이 씩 웃었다.
"호라이즌 길드는 공략 전문 길드가 아니야. 정보 길드지. 그런 인재가 있었으면 백묵이 나한테 먼저 말해줬을 거라고. 그 말은 즉······."
그의 올곧은 시선이 신태양을 향했다.
"우리가 기용할만한 인재라는 거지."
당황한 신태양이 머리를 긁적였다.
"용병 활동은 하시는 것 같은데, 어디 길드에 묶여서 활동하시는 건 싫어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정도 실력이시면 진작에 어디 들어갔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주절주절 이야기를 뱉던 신태양이 결론을 내렸다.
"하여튼 저도 잘 모르니까 묻지 마세요. 진짜 몰라요."
"······."
"씁, 잘 아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사최헌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유사시에 용병으로 고용할 기회는 있다는 거군. 아직 길드가 없다는 건 오히려 호재지. 상황에 따라 우리쪽으로 끌고 올 수도 있으니까."
"그건 또 그렇네요······."
신태양은 포기했다. 이제 스승님께 변명할 말이 사라졌다.
'못난 제자가 입을 함부로 놀렸습니다. 스승님······. 용서해주세요.'
다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그저 용병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엿본 것 뿐이니까.
"신태양 입장을 생각해서, 일단 백묵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마침 해외에서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았으니까."
사최헌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백묵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호 길드와 호라이즌 길드는 협력 길드.
세간에는 호라이즌 길드의 명성이 크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길드를 오래 운영해 온 사람이라면 호라이즌의 영향력을 모를 순 없었다.
- 여보세요. 아, 사최헌씨. 간만이네요.
"해외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 말도 마세요. 죽을 뻔했습니다. 조만간 아주 재밌는 소식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회의 중에 전화드린 겁니다. 이번에 호라이즌 길드에서 대단한 헌터를 발견해서 그런데 혹시 이름과 번호를 알 수 있을까합니다."
잠시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무언가를 뒤적이는 소리가 나더니. 백묵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 이게 무슨······. 이건 말이······. 허.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린 백묵이 말을 이었다.
- 아, 제가 해외에서 입국한지 얼마 안 돼서요. 정신이 조금 없네요. 당장은 어려울 것 같고요, 나중에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그러나, 말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보였다.
툭.
전화가 끊어지자 자연스레 회의장의 시선이 신태양에게로 모였다. 신태양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아니, 전 모른다니까요. 죽어도 말 못해요!"
* * *
게이트 공략을 마친 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진세아와 천성호는 은빛의 날개로 돌아갔다.
나는 정보창을 불러왔다.
'아직 받지 않은 보상이 하나 남았다.'
그건 바로 최대 레벨 보상.
『 B등급 최대 레벨 80을 달성 하셨습니다. 』
『 '무재조정:한계돌파'의 효과로 아이템을 보급 받습니다. 』
이 보상에서 받았던 것들은 예전에 사용하던 영혼 포식자, 회수의 창, 정령 파괴자 같은 걸출한 무기들이었다.
'이번에도 무기를 받는건가?'
스킬 웨펀 마스터 덕분에 어떤 무기를 받아도 능숙하게 다룰 자신이 있었다. 일자베기를 적용 시킬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고.
허공에 모인 새하얀 빛이 천천히 아래로 가라 앉았다. 그 빛의 색깔로부터 등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반 등급······?'
지금까지 한계돌파 보상에서 나왔던 아이템이 유니크 등급임을 생각하면 어쩐지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잠깐.'
빛이 잦아들며 아이템의 형체가 드러났다. 그렇게 나타난 아이템의 모습은 범상치가 않았다.
황금빛의 호리병.
그 형태는 재능 획득의 물약과 비슷하지만.
『 재능 개화의 물약(일반) 』
이름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 오르티마가 옆에서 통통 튀어 올랐다. 빨리 마셔보라고 재촉하는 것 같다.
'이 녀석은 뭘 알고 이러는 건가.'
아이템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다만, 내 능력으로 생겨난 아이템이니 나쁜 효과가 있을 리는 만무.
나는 마개를 뽑아내고, 호리병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시원한 액체가 목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동시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현재 보유하고 있는 '미약한 재능의 파편'은 세 개입니다. 』
『 해당 파편이 '미약한 재능의 조각'으로 합쳐집니다. 』
주변의 풍경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한지에 떨어진 먹물이 번져가듯이 점차 눈 앞이 어두워진다.
오르티마가 서둘러 내 몸에 달라 붙는 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거냐.'
어두워졌던 세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나는 어느 숲에 있었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는 알록달록한 숲.
『 대상 이지한의 재능을 개화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이동합니다. 』
『 환상계 : 잊혀진 하이 엘프의 숲 』
'여기서 재능을 키우라는 건가······?'
이 숲에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두리번 거리며 주변을 살펴보던 찰나.
눈에 딱 띄는 생명체 한 마리.
히이잉!
새하얀 유니콘 한 마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놈이 도망치지 않게 천천히 대검을 꺼내들었다.
"일단······."
저 놈부터 잡고 생각할까.
86화 재능 개화의 물약(2)
유니콘
환상종이라고 불리는 생명체 중 하나이며, 그 피는 엘릭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수복한다. 정확히는 사용한 대상의 본모습을 찾게 하는 것이지만, 표면적인 효과는 회복이다.
털조차도 고급 포션의 재료로 사용된다.
심지어 그 뿔은 최고급 무기의 재료가 되니, 헌터들이 게이트에서 유니콘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이유였다.
유니콘을 잡으면 인생 대박.
그런 표현이 널리 퍼져있던지라 나도 일단 대검을 꺼내들고 봤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멈추게, 청년. 나는 불필요한 싸움은 하고 싶지 않다네."
유니콘이 중후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굉장히 점잖은 태도였다. 의외의 상황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지성이 있는건가?'
일반적으로 던전에서 등장하는 마수 유니콘에게는 지성이 없다고 들었다. 매우 빠른 속도로 질주하며, 정령을 불러 인간을 공격한다고 했는데.
저 유니콘은 뭔가 다르다.
나는 재능 개화의 물약을 마시고 떠올랐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 환상계 : 잊혀진 하이 엘프의 숲 』
'환상계라······.'
이곳은 일반적인 게이트나 던전이 아닌 것 같다. 지난번 유니크급 재능 획득의 물약을 먹고 미래에 갔던 것처럼, 나는 다른 세계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눈 앞의 유니콘은 마수가 아니라 이 세계의 주민일지도 모른다.
유니콘은 내게 경계심을 풀라는 듯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를 공격할 생각은 없다네. 그러니, 위협적인 태도는 그만두고 내 말을 들어보는 건 어떻겠나."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싸우겠다고 덤벼들 없겠지. 나는 대검을 내렸다.
띠링!
뒤늦게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 재능 개화의 물약 퀘스트 』
- 목표 : 일자베기 레벨 13 달성, 레어 기본 스킬 획득(민첩, 체력, 지력)
- 보상 : 귀환 및 추가보상
이전 미래에 갔을 때와 비슷한 형식의 퀘스트였다.
'이번에는 제한시간이 없다.'
보상이 귀환이라는 건······. 달성하지 못하면 이 환상계에 계속 갇혀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럴 순 없지.'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가는 걸 목표로 해야한다. 다만 퀘스트 자체는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기도 하다.
'재능 개화의 물약을 먹고 여기에 온 거니까, 저 스킬들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단 걸거야. 근데······.'
일자베기 13 레벨은 미래에서 검성에게도 배우지 못했는데 어떤 식으로 습득할 수 있단거지?
여기에도 날 가르쳐줄만한 사람이 있나?
그리 생각하는 내 시선이 눈 앞의 유니콘에게로 향했다.
"······."
설마 유니콘이 날 가르쳐주나?
"생각이 깊어보이는군, 청년."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지. 유니콘이라도 배울 점만 있다면 스승으로 모시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참고로 난 약하다네. 그런 무지막지한 검을 맞았다간 뼈도 제대로 못 추리겠지. 날카로운 것에 대한 공포증이 있으니까, 아예 넣어주면 안 되겠나?"
"······."
유니콘한테 배우란 건 아닌 것 같다.
갑작스레 떨어진 환상계.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상대는 유니콘 한 마리. 어쨌든 당장은 그의 말을 따르는 게 낫다.
재능개화의 물약이 날 여기에 떨어뜨린 이유가 있을 거다.
스윽.
나는 아예 대검을 집어 넣었다. 체인지 웨펀이나 오르티마로 여차할 때는 싸울 수 있으니 괜찮다.
"고맙군.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 다행이야. 자네만 괜찮다면 우리의 마을로 안내하도록하지."
"······처음보는 절 뭘 믿고 데려갑니까?"
너무 친절해서 오히려 내가 수상하게 느낄 정도다.
"그리 경계할 필요 없네. 마을이라고 부르지만 부락이나 다름 없는 곳이니까. 거기에 유능한 학자님이 한 분 계시다네. 그 분이 자네를 뵙기를 원하셔."
유니콘은 뒤를 돌아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여기에 올 거란 것도 그 분이 알려주신 거지. 마을을 유지하는 것도 그럴 듯한 삶을 유지하는 것도 전부 그 분의 덕. 흠,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그 학자라는 자가 이 부근의 우두머리인가.
그때였다.
촤르륵!
돌연 땅 바닥에서 솟아난 검은 줄기가 유니콘을 잡아 챘다. 아니, 잡아채려고 했다. 유니콘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땅을 박차고 줄기를 피해냈다.
유니콘을 놓친 줄기가 아쉬운 듯이 땅을 내리쳤다.
"후, 이 근처 숲에는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항상 주의해야 한다네."
이걸로 끝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바닥에서 솟아난 검은 줄기는 검은 꽃을 피웠다.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식인 식물.
식물은 다시 줄기를 뻗었다. 각각의 줄기가 어마어마한 기세로 돌진해 왔다.
'빠르다.'
나는 가까스로 몸을 던져 피할 수 있었다.
반면 유니콘은 은빛 가루를 흩날리며 유려하게 하늘로 뛰어 올랐다. 줄기의 공격을 전부 피하고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
고개를 젖히며 은빛 갈기를 휘날린 유니콘이 내게 말했다.
"이거 곤란하군. 마을로 가는 길을 아예 막고 있으니. 그대가 저 식물을 처리해 줄 수 없겠나?"
"돌아가면 안 됩니까?"
"으음, 마을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 여기인지라. 부탁하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는데.
나는 식인 식물을 바라봤다. 날카로운 이빨을 콰득콰득 부딪히는 흉측한 식물. 통찰 스킬이 녀석의 강함을 체크했다.
『 대상 '광폭화 식인 식물'의 등급은 A++입니다. 』
『 해당 마수는 중간보스급입니다. 』
A급 상위의 강력한 마수였다.
마수들은 등급에 따라 강함이 구별된다. 보스와 일반 몬스터들의 등급이 같지 않은 것처럼.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다른 단어였다.
'광폭화라고······?'
마족들이 점거한 세계에서 마기를 듬뿍 흡수한 마수들 전반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이성을 잃고, 폭발적인 능력치 상승을 가져오는 일종의 버프.
'이 세계도 마족들의 지배에 있는 곳인가?'
쐐애액!
유니콘에게 질문 할 시간이 없었다. 검은 줄기가 채찍처럼 나를 향해 휘둘려졌다.
『 스킬 '회피 Lv.10'을 발휘합니다. 』
『 공격 회피 확률 10% 증가, 회피 동작시 민첩 10% 증가 』
돌진과 동시에 채찍을 뛰어 넘었다. 일자베기를 발휘하려는 순간.
촤아악! 촤악!
땅에서 돋아난 두 줄기의 식물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피할 수 없는 궤적이었다.
『 무패의 반지의 스킬 '방어막 Lv.10'을 발휘합니다. 』
투명한 구체의 막이 생겨나 내 몸을 둘렀다. 식물의 줄기는 나와 보호막을 통째로 날려 보냈다.
콰앙!
뒤쪽의 나무가 부숴지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방어막 덕분에 데미지는 없지만 저 줄기는 너무 빠르다.
이전에 싸웠던 촉수들보다 훨씬 더.
투두두두!
이어서 식물의 입에서 검은 마기가 실린 씨앗이 발사 되었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으로 달렸다.
콰과과!
조그마한 씨앗이 닿은 땅이 움푹 파이고 흙이 솟구쳐 올랐다. 심지어는 그 자리에서 줄기가 돋아나기까지 했다.
'이거 장난 아닌데.'
어마무시한 기세로 다시 휘둘러지는 줄기들. 그 수는 열이 넘는다.
"발을 움직이게나! 마력을 발 주변으로 보내고, 몸을 가볍게 하는 걸세!"
뒤에 있던 유니콘이 소리쳤다.
"뭐요?"
줄기들이 사정없이 나를 덮쳐 온다. 대검으로 베어내기 위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 마족 상대로도 이 정도로 쫓기지는 않았다.
"아니지, 마력을 흩뿌린다는 생각으로 달려나가야 한다네. 내가 시범을 한 번 보여주지."
"······!"
갑자기 유니콘이 줄기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는 유려한 몸놀림으로 덮쳐오는 줄기 사이를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 빠르고 강력한 줄기 중 어느 하나 유니콘의 몸을 스치지 못했다.
"어떤가, 이런 식으로 말일세."
유니콘의 어그로가 빠지자, 다시금 내쪽으로 달려드는 검은 줄기들. 이번에는 마기가 담긴 씨앗까지 같이 날아온다.
투두두두!
"아니지, 아니야. 마력을 흩뿌리라니까. 허, 참. 그거 그렇게 아니라니까."
안전한 장소에 서 있는 유니콘이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
나는 그냥 식물의 범위 밖으로 나왔다. 파고드는 건 경계가 심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냥 안 하겠습니다. 마을에는 가지 않는 걸로 합시다."
"······내가 잘못했네. 나는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말일세.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유니콘이 고개를 숙였다.
"부탁하네, 저 식물을 좀 없애주게. 그래, 저 놈을 잡으면 내 갈기를 마음껏 뽑아가도 되네."
"마음껏이요?"
"아, 아니 한움큼······."
"말을 바꾸는 게 어딨습니까."
나는 다시 대검을 들어 올렸다. 훈수처럼 보였지만, 유니콘의 훈수는 사실 꽤 도움이 되는 말들이었다.
내게는 잠시 배운 걸 되새길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 미약한 재능의 조각이 희미한 빛을 발합니다. 』
『 일시적으로 재능이 조금 상승합니다. 』
세 개의 파편을 모아 완성한 재능의 조각.
'느낌이 온다.'
어렴풋이나마 느껴진다. 방금 전 유니콘이 보여주었던 움직임과 마력의 사용 방법이 왠지 모르게 알 것 같다.
그 느낌은 정말로 실낱 같은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 특성 '무재조정'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칭호 '초성장'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스킬 경험치가 20만배가 됩니다. 』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바람처럼 쏘아져 나아갔다. 줄기 사이를 파고든다. 보법만으로는 부족한 민첩함을 마력의 활용으로 메꾼다.
촤아악! 촤악!
나를 향해 달려드는 거센 줄기를 한끗차이로 회피하고.
투두두두!
쏟아지는 마기 씨앗의 안쪽으로 오히려 파고든다. 내가 지나가는 길에 푸른 잔상이 새겨지고, 달려나가는 다리는 전에 없이 가벼워진다.
촤르르륵!
『 레어 스킬 '환상종의 민첩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환상종의 민첩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환상종의 민첩 Lv.3'을 획득합니다. 』
···
..
.
『 스킬 '환상종의 민첩함 Lv.10'을 획득합니다. 』
순식간에 솟아오르는 메시지창의 향연.
레어 기본 스킬 '거인의 힘'에 이은 두번째 기본 스킬 '환상종의 민첩'.
'좋았어.'
태양의 발걸음과 합쳐지니 줄기들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모든 공격을 회피한 나는 식인 식물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촤르륵, 촤륵!
놈은 다급하게 모든 줄기를 뻗어 견고한 방패막을 형성했다. 검은 마기가 송글송글 맺혀 보호막처럼 그 앞을 가린다.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뚫을 수 없을 견고한 방패지만.
『 아이템 '초회의 장갑'의 특수 효과를 발휘합니다. 』
새롭게 얻었던 레전더리 장갑에서 붉은 빛이 샘솟았다.
『 첫번째 공격의 데미지가 250% 상승합니다. ( 쿨타임 : 24시간 ) 』
『 근접 전투시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
대검 위로 스며든 붉은 기운.
레전더리의 성능을 제대로 보여줄 시간이다.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콰아아아——!
줄기로 얽혀 만들어진 방패 위에 그어진 푸른 선 하나.
일자베기 단일이 아니다. 데몬헌트, 거인의 힘, 태양류 검술 등등······.
각종 스킬들이 더해지니 그 파괴력은 더욱 상승할 수 밖에.
콰드득, 콰득!
푸른 선이 줄기 방패를 통째로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리듯 수축시켜 그 끝에는 식인 식물의 몸까지 양단한다.
콰아아앙!
놈의 몸에 고여 있던 마기가 폭발하여 흙먼지가 솟구쳤다.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하는 흙먼지들.
놈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검은 잎사귀 하나가 덩그러니 바닥에 놓여 있을 뿐.
『 240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포인트 양만 봐도 놈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마족하고 맞먹는 양이었다.
『 '일자베기 Lv.12'의 숙련도가 3% 상승합니다. 』
'오오······'
그간 성장이 멈춰 있었던 일자베기의 숙련도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본 스킬을 얻어서인가.
또각, 또각.
식인 식물의 잔해를 살피는 유니콘의 눈이 커졌다.
"저, 정말로 쓰러뜨렸군. 정말 학자님의 말대로가 맞군. 하, 굉장하군."
그런데 어쩐지 반응이 심상치 않다. 길가에 있는 식물 하나 처리한 것치고는 과한 리액션이다. 나는 혹시나 싶어 물었다.
"흔히 있는 일 아닙니까? 길목을 막고 있었다면서요."
"아, 그건 거짓말이었네. 딱 봐도 돌아가면 되지 않았겠나? 시간은 조금 더 걸리겠지만서도."
"······."
뻔뻔한 유니콘이다.
"멋대로 자네를 시험해서 미안하네. 그래도 이 식물은 굉장한 골칫거리였으니, 자네는 큰일을 해준 게 맞다네."
환상종의 민첩이라는 레어 스킬을 얻을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론 좋았다. 심지어 일자베기의 경험치도 올랐고.
"내 소개가 늦었군. 나는 유니콘 겔론드일세. 아, 자네의 이름은 알고 있다네. 이지한. 맞지 않은가?"
"어떻게 아는 겁니까?"
"우리 학자님은 뭐든지 알고 계시니 말이야. 자, 그럼 따라오게. 덕분에 지름길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어."
나는 그를 따라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형형색색으로 빛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는 숲의 안쪽.
흙으로 지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집의 갯수는 총 10채 정도. 정말 작은 마을이었다.
"여기가 살아남은 자들 마을, 아스텔이라네. 어떤가. 멋지지 않은가."
"운치가 있네요."
특이하게도 마을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거대 기둥들이 마을의 좌우에 세워져 있었다. 그 수는 총 열 개.
그리고 그 중앙.
'저건······.'
커다란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발전의 마족의 연구소 지하에 놓여 있던 그것과 똑같았다.
'초월의 비석.'
이게 이곳에도 있을 줄이야.
저걸 사용해서 엘프 소녀 세레네를 본래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줬었다. 고향에선 잘 살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살피는데, 유니콘 겔론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 마침 학자님께서 오시는군."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거기에는 안경을 걸친 여성 엘프가 있었다.
"저 분이 우리 살아남은 자들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지. 인사하게나."
갈색 멜빵과 거기에 달린 나침반, 지도. 영락없는 탐험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책을 들고서 내게로 다가왔다.
"어서오세요! 이지한씨!"
그리고선 아주 반가운 얼굴로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성인 엘프를 만난 적은 이번이 처음인데.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까?"
"섭섭하게 왜 그러세요! 절 구해주셨잖아요. 봐요, 기억 안나세요?"
안경을 벗고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는 그녀.
그제서야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는 듯 하다.
"저에요, 저! 세레네."
발전의 마족과의 전투 끝에 고향으로 돌아간 엘프 세레네.
나에게는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모를 수밖에.
'······.'
나는 재능 개화 물약의 효과를 얕보고 있었다.
재능의 물약은 시간조차 뛰어 넘는다는 것을.
인과를 뛰어 넘어 없던 시간조차 만들어낸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후에 들은 바에 따르면.
여긴 발전의 마족 처치로부터 200년.
세레네는 성인 엘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87화 재능 개화의 물약(3)
"마셔요, 마셔!"
내 환영파티 겸,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알고보니 세레네는 굉장한 주당이었다. 맥주잔을 연달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취기로 살짝 달아오른 세레네가 미소를 지었다.
"내 은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너무 기뻐요. 아, 참. 여기 계신 분들 소개를 해야겠네요."
마을 주민 전부를 불러 모았다. 하나 같이 인간은 없고 유니콘, 곰, 늑대 같은 동물들 뿐이었다. 다 합쳐서 약 15명 정도.
"이쪽 곰은 멕베른, 늑대는 하셀, 고양이는 플포포, 여기 페어리는······."
그들 마수나 야생동물이 아닌 지성을 가진 종족이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광경이 펼쳐지니 색다른 기분이다.
나는 어설프게 그곳의 주민들과 인사를 나눴다.
"소개가 길었네요, 자자, 어서 드세요. 술은 싫어하시나요?"
"예, 술은 괜찮습니다."
야외의 테이블에 늘어 놓은 음식들. 대개 만두나 찐빵 비스무레 한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고기가 든 찐빵을 한 입 베어물며 물었다. 육즙이 진하게 베어 있어 일품이다. 근데 음식 평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진짜로 여기가 200년 후인 겁니까?"
내 말에 세레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한씨가 발전의 마족을 쓰러뜨리고 절 고향으로 보내주신지 약 200년.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어요."
"굉장하구만. 시간을 뛰어 넘은 인연이 있다니."
"그러면 저 남자는 우리 학자님을 찾으러 온 거야? 이렇게 감동적인 스토리라니······."
옆에 있던 주민들이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타앙!
얼굴이 붉어진 세레네가 맥주잔을 강하게 테이블에 내리쳤다. 그것으로 분위기를 완전히 휘어잡았다.
"저기요,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지금 완전 중요한 이야기 중이라고요. 제 은인에게 실례인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하여튼."
그녀는 안경을 올려쓰며 말했다.
"많은 일이 있었었는데, 저는 고향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해 타차원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었어요."
세레네는 마족의 실험체로 오랜 시간을 잡혀 있었다. 고향에 돌아가서도 동족을 찾을 순 없었다고 한다.
마족에 의해 멸망해 텅 비어 버린 세계.
그곳에서 세레네는 한줄기의 희망을 찾았다. 그녀의 종족이 남긴 수많은 문헌들과 비전. 최후의 하이 엘프인 그녀만이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었다.
"그 원동력은 마족들에게 복수하고 싶단 마음. 적어도 한 방은 먹여주고 싶다는 거죠."
주먹을 가볍게 붕붕 휘두르는 세레네. 말은 간단하게 하지만, 마족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멸망한 세계의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 슬픔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마족이 남긴 흔적을 쫓아 이곳저곳 다니다보니, 여기 환상계까지 오게 된 거에요. 여기 있는 주민분들 모두 사실상 최후의 생존자세요. 제 이야기는 이 정도면 됐고. 이제 지한씨 이야기를 할까요."
세레네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제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전지(全知)의 능력의 소유자라는 건 알고 계시죠?"
잊을 리가 없다. 내 입장에선 세레네를 만났던 게 얼마 안 된 일이니까.
"200년 동안 전지의 능력도 조금씩 강해졌어요. 예전에는 연구소에 한정된 지식만을 알 수 있었다면, 지금은 좀 더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죠."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이 기적적인 만남은 축하할 일이지만, 이곳은 지한씨의 세계가 아니에요. 머물러가는 찰나의 시간에 불과하죠."
나는 재능 개화의 물약을 사용해서 이곳에 왔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으니 말해주기로 했다.
물약과 미래에 다녀왔던 것, 그리고 다시 한 번 물약을 사용에 이 세계에 온 것까지.
그 말을 전부 들은 세레네가 눈을 반짝였다.
"거, 거기까지는 몰랐는데. 들어 본 적도 없어요. 그건 완전히 인과를 초월하는 간섭······. 그렇구나, 흐음.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세레네가 미간을 좁혔다.
"지한씨가 경험한 미래와 지금 이 세계 전부 그저 만들어진 세계는 아닐 거에요. 가능성의 세계, 도달할 수 있는 미래라는 거죠."
그렇다면 질문이 늘어난다.
본래대로라면 세레네는 연구소를 탈출하지 못하고 죽을 운명이었다. 그게 나로 인해 바뀌었다.
그러한 미래라면 하나 물어 볼 수 있는 게 있다.
"인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타차원을 넘나들며, 전지의 능력을 가진 세레네라면 알고 있을 거다.
나는 세계를 구했는가.
세레네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그 답을 얻고 싶다면······.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실래요?"
* * *
다음날, 나와 세레네는 숲 속으로 탐험을 나섰다. 유니콘 겔론드와 곰 멕베른도 함께다.
"이지한 같은 강자가 와주셔서 30년은 절약할 수 있겠네요."
엘프다운 시간 감각이다.
인류가 살아 남았는지에 대한 답.
세레네는 부탁을 들어주면 알려준다고 했다.
그 부탁이란 유적의 복구.
"마을에 놓인 커다란 기둥을 보셨죠? 중간에 놓인 초월의 비석도요. 그것들을 합쳐서 초월의 유적이라고 부르는데, 많이 훼손된 상태에요."
초월의 비석만으로는 차원 이동의 힘이 작동하지 않는단다. 세레네도 사실상 환상계에 발이 묶여 있는 상태.
"복구하기 위해선 초월의 종이란 게 필요해요. 그걸 얻는 걸 도와주세요."
능숙하게 나무를 타고 오른 세레네가 손가락으로 저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 저 검은 세계수가 보이실 거에요. 저 꼭대기에 놓여 있어요. 지한씨 실력이면 어렵지 않게 가져오실 수 있겠죠."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세계수. 쳐다보는 것 만으로 익숙한 불길함이 느껴진다. 나무에서 내려온 세레네가 손을 털었다.
"그 과정에서 지한씨가 원하시는 것들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에요."
내 목적을 세레네에게는 공유해 놨다. 일자베기의 레벨업과 레어 기본 스킬들의 획득. 힘과 민첩을 얻었으니 이제 남은 건 체력과 지력이다.
"체력 스킬은 곰족 멕베른씨가 직접 알려주실거에요. 특별히 제가 부탁드렸어요."
그녀의 말에 뒤에서 따라오던 유니콘과 곰이 멈춰섰다. 곰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알통을 만드는 자세를 취했다.
"다른 건 몰라도 체력이라면 자신있지. 학자님의 지인이니, 성심성의껏 가르쳐 드리지. 음, 그러면 날 업게나."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내 두 배만한 크기의 곰이 양 팔을 벌리고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체력을 기르려면 고생을 해야 하는 법이지. 검은 세계수가 있는 장소까지 나를 업다보면 금방 스킬을 얻을 수 있을 걸세."
그래도 나도 나름대로 B급 헌터다.
레벨은 80. A급이나 다름 없다.
그간 차근차근 클리어한 한계돌파 덕분에 능력치 배수가 적용되어 있다. 능력치만 두고 본다면 S급에 가깝다.
이런 곰쯤이야.
그리 생각하며 업힌 곰을 들어 올리는 순간.
"크헉."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며 몸이 기울어졌다. 온 몸이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곰은 별거 아니라는 듯 내 어깨를 툭툭쳤다.
"나는 몸무게를 조정할 수 있거든. 강도는 적절히 조절할테니, 잘 부탁하네."
"그러면 출발할까요?"
세레네가 나무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쩐지 신나보인다.
"끄윽, 갑시다."
더럽게 무겁네. 모든 스킬을 다 발휘하니 그럭저럭 걸음을 뗄 수 있었다. 근데 뒤쪽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저런, 거 다리에 힘을 주고, 자세를 낮춰야지. 팔은 털을 꽉 붙잡고. 해야지 힘이 들어가지. 그래가지고 되겠나?"
옆에 있던 유니콘이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허 참, 재능이 없구만."
"······."
이번에는 별로 도움이 되는 훈수가 아니다. 나는 유니콘을 지긋이 바라봤다.
"아까 식물 잡았으니까 갈기 뽑아도 된다고 하셨죠. 지금 뽑겠습니다."
"으응? 아니아니, 지금 힘들텐데. 빨리 가야지. 허험."
헛기침을 하고서 서둘러 세레네의 곁으로 달려나가는 유니콘.
결심했다.
돌아가기 전에 저 유니콘 갈기는 다 뽑아서 가져가자.
* * *
검은 세계수와의 거리는 걸어서 약 하루.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밤하늘 위로 쏟아질 것 같은 별빛이 가득하다.
"무게를 더 올리겠네."
"크윽."
나는 하루 종일 이 곰을 업고 다녔다. 마수가 튀어 나와 전투를 할 때도, 잠시 쉴 때도 조금도 빠짐 없이.
그런데 스킬이 생길 기미가 안 보인다.
"이거 방법이 맞는 겁니까?"
경험치가 20만배인데 스킬이 안 생긴다는 게 너무 이상하다. 뭔가 수련 방법이 잘못 된 게 아닐까.
"헉."
곰이 아차 싶다는 듯 헉소리를 냈다.
"아닐세, 아니야. 아무 문제 없어. 음. 지금부터는."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멕베른씨, 혹시 마력을 주입하지 않은 거 아니에요?"
"사소한 실수지, 사소한 실수."
멕베른의 마력이 내 등줄기를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력 동화였다. 어떤 스킬들은 고유한 마력을 나눠주는 것으로 그 성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금처럼 야수의 마력을 나눠받는 것으로.
내가 얻을 스킬의 감각을 미리 느낄 수 있다.
멕베른이 마력을 흘려 보내기 시작한지 약 30분.
촤르르륵!
기다리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 스킬 '야수의 체력 Lv.1'을 전수받습니다. 』
『 스킬 '야수의 체력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야수의 체력 Lv.3'을 획득합니다. 』
···
..
.
『 스킬 '야수의 체력 Lv.10'을 획득합니다. 』
『 체력 40% 증가, 지구력 20% 증가 』
단순하지만 효과가 확실한 스킬이었다.
"후우······."
곰을 내려주자 몸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워졌다. 마냥 생고생은 아니었다. 도중에 다른 스킬도 획득했기에.
『 스킬 '인내 Lv.10'을 획득합니다. 』
정신계 스킬로 인내력을 길러준다. 이런 스킬들은 대부분 좋은 취급을 못 받지만, 나에겐 의미가 다르다.
뭐든지 10레벨을 찍으면 그 효과는 무시할 수 없게 되니까.
"그러면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죠."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세레네가 지팡이를 땅 위에 꽂았다. 그녀가 그 위에 손을 가져다대자 불길이 일며 모닥불이 만들어졌다.
"식사는 제가 대접하죠."
나는 배낭에서 라면을 꺼내 끓였다.
『 스킬 '요리 Lv.11'을 발휘합니다. 』
"뭐, 뭐에요? 엄청 맛있어요?"
"청년, 굉장하군. 더 없나?"
"이런 음식이 있었다니, 다시 태어난다면 곰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군."
유니콘과 곰도 환장하는 맛.
음식을 나눠먹으니 분위기가 한결 화기애애해졌다.
그때 세레네가 말을 꺼냈다.
"아참, 그러고보니 주의 사항이 하나가 있는데요."
그때였다.
쿠구구구······.
지축이 울리기 시작했다.
까악, 까악.
숲에 잠들어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숲 속의 동물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쿠우우우!
달빛 아래 밤하늘을 유유자적하게 날아오르는 용 한 마리. 놈은 검은 구름을 흩뿌리며 다시금 숲 속으로 파고들었다.
쿠구구구!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확실히 위험해 보인다. 크기 뿐만 아니라 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피부가 아려올 정도로 지독한 마기였다.
나는 물었다.
"저걸 조심하라는 겁니까?"
내 말에 세레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당황한 듯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 아니······. 저걸 깨우면 안 된다고 말하려던 건데······."
쿠우우——!
울음소리와 함께 다시금 별빛 아래로 솟구쳐 오르는 용.
"검은 세계수를 지키는 봉인된 마수. 몰테인. 왜 몰랐던 거지······."
잠시 중얼거리던 세레네는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설마······."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전지의 능력.
그 힘으로 인해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간혹 그 능력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내가 관여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88화 검은 세계수(1)
밤하늘을 비행하는 검은 용 몰테인.
그 위압감은 우리를 얼어붙게 하기엔 충분했다. 세레네가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진짜 용은 아니에요, 검은 세계수를 이용해 만들어 낸 환상체죠."
그녀의 말대로 달빛 아래의 용의 몸을 살피니, 비늘이 아닌 검은 줄기가 용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힘 없는 우리들에겐 용이나 다를 바가 없지만 말일세."
유니콘 겔론드가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세레네는 침착하게 유니콘과 곰에게 지시를 내렸다.
"두 분 다 지금 돌아가서, 마을 사람들 전부 유적의 지하에 대피하라고 말해주세요. 거기라면 안전할 거에요."
"학자님하고 청년은 괜찮으시겠는가?"
그 말에 세레네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학자님께서 하신 말씀이 틀린 적이 있었나? 어서어서 가자고!"
"그래, 그 말이 맞지. 부디 안전하시길!"
결심을 굳힌 곰과 유니콘이 빠르게 숲 너머로 사라졌다.
"짐작하고 계셨겠지만, 이 세계는 마족에게 점령 당했다 버려진 차원이에요. 마족이 버려두고 간 수호자 몰테인. 검은 세계수에 봉인 되어 있었을 존재가 어째서인지 풀려버렸어요."
"그건 저 때문인건가요?"
"글쎄요, 단정 지을 순 없어요. 이지한씨가 있으면 제가 가진 전지(全知)의 능력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난다는 건 확실하지만요. 봉인이 풀린 걸 미처 파악하지 못한 건 제 불찰이겠죠."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용의 형태를 띈 마수 몰테인은 하늘과 땅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때로는 땅을 파고들어 숲을 헤짚었다가, 하늘에서 유영을 즐기기도 하는 것 같았다.
'더럽게 크네.'
용과 같은 존재를 신수라고 부르나, 저건 검은 세계수의 마기를 듬뿍 머금어 흉흉한 느낌밖에는 안든다.
"저게 있는 이상, 마을이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에요."
그리 말한 세레네는 검은 세계수의 정상을 올려다 보았다.
"세계수 꼭대기에 있는 초월의 종을 찾아 유적을 복구해야해요.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어요. 종만 찾는다면, 마을에 있는 분들을 전부 데리고 제 고향으로 도망갈 수 있어요."
모두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종을 찾아 유적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야 했다. 그리하면 초월의 비석을 사용해 차원 이동이 가능해지므로.
나는 대검을 들어 올렸다.
"까짓꺼 해보죠."
본래의 세계로 귀환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스킬을 얻어야 한다.
'어쩌면 저 마수의 등장도 필연적일지 모른다.'
일자베기의 경지를 13레벨로 올리기 위해서라면, 저 녀석을 쓰러뜨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재능 개화의 물약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봐야지.'
세레네에게는 발전의 마족을 쓰러뜨릴 때 도움을 받았기도 하고. 모른 척 지나갈 순 없다.
뀨!
그때, 장비의 형태로 내 몸에 붙어 있던 오르티마가 새끼용의 모습으로 변했다. 녀석은 세레네에게로 달려가 찰싹 달라붙었다.
"그래, 너도 있었구나."
세레네는 오르티마를 쓰다듬어 준 뒤, 결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도 예전처럼 무력하진 않아요. 그때부터 200년이나 지났으니까요."
스스스······!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른 녹빛의 아지랑이가 내게로 스며 들었다.
『 버프 '하이엘프의 축복'을 받습니다. 』
『 버프 '물빛 정령의 가호'를 받습니다. 』
『 버프 '바람 정령의 가호'를 받습니다. 』
···
..
.
『 버프 '달의 은총'을 받습니다. 』
나열하기도 힘든 양의 버프가 내 몸을 변화시켰다. 모든 능력치가 대량으로 향상된 기분이 든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버프를 중첩해서 걸 수 있다니.
"대단하네요."
"별 거 아니에요. 200년이나 살다보면 이 정도는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러면 갈까요."
용이 이 일대를 전부 파괴하기 전에 초월의 종을 찾아야했다.
"좋습니다. 출발하죠."
* * *
근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세레네가 앞장 섰다. 그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숲길을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 붙었다.
촤아악! 콰득!
갑작스레 옆에서 튀어 나오는 마수들을 처리하면서 신속하게 나아갔다. 약 1시간을 그렇게 달렸을까.
나와 세레네는 검은 세계수 앞에 섰다.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준비되셨나요. 여기부터 세계수를 지키는 오염된 마수들이 나타날 거에요."
"맡겨만 주시죠."
거대한 줄기를 밟고 나무를 올라갈 수 있었다. 나선형 계단처럼 줄기가 세계수를 감싸고 있었기에 올라가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높다곤 해도, 헌터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우웅!
문제는 줄기의 틈새에서 빠져 나오는 검은 기운들.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온 마기가 구체를 이뤄 우리의 앞 길을 가로막았다.
정령의 아종인 위습이다. 놈은 도깨비불처럼 번쩍이더니, 자그마한 마기 파편을 여러개 쏘아냈다.
슈우우!
곡선을 그리며 미사일처럼 날아오는 파편들.
『 스킬 '매직 미사일 Lv.10'을 발휘합니다. 』
나는 마법으로 응사했다. 내 손에서 발사된 새하얀 마력의 미사일이 그대로 위습을 꿰뚫었다.
콰아아—!
옆에 있던 오르티마도 브레스를 뿜어내며 위습을 순식간에 처리했다. 위로 올라갈 수록 그 수가 많아졌지만, 오르티마의 브레스 앞에선 무의미했다.
『 오르티마의 레벨이 1 상승합니다. 』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 Lv.111 → 112 』
"꽤 하는데."
나는 녀석의 머리를 두드려줬다. 고개를 슬쩍 내밀어 아래를 바라보니 아찔하게 높다. 나무들이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직 꼭대기까지는 꽤 남았다.
"몰테인이 우리를 발견한 것 같아요."
세레네의 말대로 용이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저거 브레스도 쏩니까?"
그랬다간 나무 위에서 꼼짝 없이 공격을 받아내야 했다. 세레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신수를 본 떠서 만든 일종의 위조 마수니까 그런 능력은 없을 거에요."
"다행이네요. 빨리 올라가죠."
브레스가 없어도 몸으로 밀고 들어오면 큰일이다. 우리는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세레네의 체력도 굉장한 수준이었다.
"거의 다 왔어요!"
꼭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달칵, 달칵.
숨어 있던 나무 마수들이 튀어나왔다. 역시 마기에 점철된 상태로 조그마한 엔트와 같은 생김새였다.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콰아아아!
엔트들이 나뭇가지처럼 일제히 부숴지며 세계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 수가 너무 많다.
물 밀듯이 밀려오는 놈들은 정상으로 가는 길을 빽빽하게 막아섰다. 베어내도 끝이 없다.
검은 구름을 몰고 오는 몰테인이 굉장히 가까워진 상황. 남은 시간은 약 3분.
나는 결단을 내렸다.
『 타재간파의 서를 펼칩니다. 』
『 1만 포인트를 소모하여 '광화(자아통제) Lv.10'을 활성화 합니다. 』
붉은 기운이 내 전신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몸 전체에서 끓어 오르는 폭발적인 힘.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 스킬 '야수의 체력 Lv.10'을 발휘합니다. 』
불도저처럼 놈들을 밀고 나가서.
『 스킬 '환상종의 민첩 Lv.10'을 발휘합니다. 』
쏟아지는 공격을 모두 피해낸다.
그러고 나면 내 차례다. 모아둔 마력과 힘을 쏟아붓는다.
『 스킬 '거인의 힘 Lv.11'을 발휘합니다. 』
콰아아앙—!
뿜어져나온 마력 앞에 백여 마리의 미니 엔트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막혀 있던 길이 뻥하니 뚫렸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세레네.
"기, 길이 이렇게 간단하게 열렸네요."
"달리죠."
여전히 나무 사이에서 마수들이 개떼처럼 기어나오고 있었다. 길이 사라지기 전에 돌파해야했다.
콰아아—!
달려드는 놈들을 오르티마의 브레스가 태우고.
콰앙!
세레네의 마법이 미니 엔트들을 몰아냈다. 마지막으로 내 대검이 놈들을 세계수 바깥으로 밀어냈다.
우수수 떨어지는 마수들을 보니 속이 시원할 지경이다.
그때였다.
달 아래를 비행하던 몰테인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놈은 마기의 구름과 함께 맹렬히 돌진해 왔다.
쿠우우웅!
세계수와 정면충돌하진 않았지만, 몰테인의 거체는 나무의 몸통을 스치고 지나가며 강렬한 진동을 만들어냈다.
그 충격에 세레네가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
그 밑은 아무것도 없는 낭떠러지. 놀란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추락 직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덥썩.
나는 옆에 있던 오르티마를 집어 던졌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빙글빙글 날아간 오르티마가 세레네의 근처에 도달했다.
"잡아요!"
다행히 세레네는 오르티마를 붙잡았다. 그러나 새끼용인 오르티마가 버티기엔 무게가 가볍지 않다.
"오르티마! 회수의 창!"
내 말에 즉각 반응한 오르티마가 회수의 창으로 변화했다. 그 즉시 창의 회수 스킬을 사용했다.
창과 세레네가 동시에 나를 향해 딸려왔다.
엉겁결에 내 품에 안긴 세레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고, 고마워요."
"빨리 가죠."
시간이 없다. 저 미친 괴물은 금방 다시 올 거다.
* * *
세계수의 정상.
그곳에는 작게 조성된 호수와 또다른 숲이 있었다. 온통 검게 물든 세계수의 내부에서 유일하게 청정한 지역.
호수의 중심에 황금빛을 발하는 종이 있다.
"저게 초월의 종이에요."
종을 회수하기 위해 세레네가 그 앞으로 다가갔다.
"본래 이 세계수는 마족들의 것이 아니었어요. 세계를 보호하고, 유지시키는 존재가 세계수였죠. 마족들은 그걸 멋대로 개조하고 내버려 둔 거죠."
파직, 파지직.
일순 검은 기운이 방출되며 그녀를 가로막았다. 종의 주변을 검은 마기가 가로 막고 있었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당황하진 않았다.
"결계네요. 예상은 하고 있었어요. 몰테인이 부활한 시점에서부터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천천히 결계에 손을 대보던 세레네가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제 힘으로는 무리에요. 저는 진짜 하이엘프를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기록으로 보고 들었을 뿐이죠.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지한씨는 가능할지도 몰라요. 절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셨을 때처럼."
세레네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이 엘프의 지력이라면 결계에 간섭할 수 있어요. 지력이란 마력에 간섭하고 그것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
녹빛의 마력이 내게로 흘러들어 온다.
"그 능력의 일부나마 전할 수 있다면······."
간절한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내 정신에 하이 엘프의 마력이 아로새겨진다. 마법을 이해하고 다루는 방법. 그것들이 자연스레 체득 된다.
『 스킬 '하이 엘프의 지력 Lv.1'을 전수받습니다. 』
'이게······. 하이 엘프의 지력.'
힘, 체력, 민첩에 이은 마지막 기본 스킬.
나는 결계 앞으로 다가섰다. 어떻게 해야할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없다.
오히려 감각에 가까운 이 느낌은······.
재능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 해당 결계를 해제하는데 실패하셨습니다. 』
파직, 파지직!
마기가 튀어 오르며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 스킬 '하이 엘프의 지력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하이 엘프의 지력 Lv.3'을 획득합니다. 』
쿠우웅!
거센 진동이 다시금 검은 세계수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결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촤르륵!
『 스킬 '하이 엘프의 지력 Lv.4'를 획득합니다. 』
···
..
.
『 스킬 '하이 엘프의 지력 Lv.10'를 획득합니다. 』
실패해도 끊임없이 시도한다. 누군가 봤으면 미친 짓이라고 했겠지만, 나에겐 다르다. 20만배의 경험은 실패조차 의미를 가지게 만든다.
그 경지가 10레벨에 도달했을 때.
『 결계의 해제에 성공했습니다. 』
검은 막이 걷혀지기 시작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의 종.
유적을 복원하기 위한 열쇠.
그것을 자리에서 떼어내자.
쿠어어어어——!
비명과도 같은 울음소리가 숲 전체를 메웠다. 혐오스러운 울음소리다. 동시에 세계수 전체로 거센 충격이 몰려왔다.
세계수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적으로 돌아가야 해요!"
세레네의 외침에 나는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그녀의 뒤에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몰테인의 안면이 보였다.
검은 나무 줄기 사이 붉은 눈이 섬뜩하다.
"꺅!"
나는 세레네를 양 손으로 들쳐 앉았다.
쩌억—!
우리를 향해 입을 벌리는 거대한 몰테인을 피해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놈의 아가리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세계수의 아래로 낙하했다.
중력에 몸을 맡기고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미, 미쳤어요? !"
세레네가 나를 꽉 붙잡고 소리쳤다.
'광화상태는 유지되고 있다.'
나는 마력을 발산해서 최대한 낙하 속도를 낮추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쿠우웅!
높이에 비해 비교적 적은 충격으로 땅에 내려올 수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세레네가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두,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어요. 빠, 빨리 가죠. 내려주세요."
"아뇨, 이대로 갈 겁니다."
"네에?"
세레네를 안은 채 나는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길은 기억 탐색으로 외워두웠다. 몰테인보다 빠르게 유적에 도착해야 했다.
쿠구구구!
바로 뒤쪽에서 분노한 몰테인이 난동을 부리는 게 느껴졌다.
"뒤, 뒤에!"
세레네의 기함에 슬쩍 뒤를 돌아보니, 숲 전체가 갈아 엎어지고 있었다. 나무가 뿌리째 뽑혀나가고, 흙과 풀이 미친듯이 허공으로 치솟는다.
몰테인이 우리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다.
이대로 가다간 따라잡힌다.
『 타재간파의 서를 펼칩니다. 』
『 1만 포인트를 소모하여 '신속(神速) Lv.10'을 활성화 합니다. 』
"오르티마, 뒤쪽에 브레스!"
어깨에 매달린 오르티마가 브레스를 뿜어냈다. 공격 효과는 미미하지만 의미가 있다.
신속의 효과 때문이다.
도망치면서도 전투를 지속한다면 내 속도는 점점 빨라지게 되어 있다.
"거리가 벌어지고 있어요!"
"계속 갑니다!"
몰테인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속력으로 마을로 향했다.
크어어어—!
내가 따라잡히지 않자 분노한 몰테인은 땅에서 나와 하늘로 날아 올랐다.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렇네, 브레스를 못 쓴다고 했지, 원거리 공격을 못한다곤 안했었네.
콰과과과!
검은 장대비가 떨어진 땅이 폭격을 맞은 것처럼 쑥대밭이 됐다. 내 바로 뒤까지 따라 붙었지만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이제 바로 앞에 마을이에요!"
"초월의 종은 어디에 가져다 두면 됩니까?"
"중앙! 비석이 있는 중앙으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몰테인이 입가에서 뱉어낸 응축된 마기의 탄환이 내 바로 뒤에 직격했다. 땅에서 솟아난 폭발에 나와 세레네는 튕겨져 나갔다.
나는 바닥을 몇 차례 구르다 검은 비석에 부딪혔다. 목표로 하던 초월의 비석 앞이었다.
"크윽!"
"괘, 괜찮으세요?"
나보다 먼저 일어난 세레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아요."
세레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유적이 복구되어도, 비석을 기동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이미 늦은 것 같네요. 죄송해요."
그런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우우우웅······.
검은 구름을 딛고 붉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몰테인. 놈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입 속으로 마기를 계속해서 모으는 중이었다.
대기가 떨릴 정도로 압축되는 마기.
이 일대를 완전히 날려 버리기엔 충분한 위력일 거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이르다.
"아뇨, 아직 모릅니다."
나는 초월의 종을 검은 비석에 가져다 대었다. 금색 종은 비석 위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메시지창이 하나 떠올랐다.
『 유적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
찬란한 황금빛이 마을에 위치한 모든 기둥에 깃든다. 허물어져 있던 유적이 말끔하게 복원 되며 오색 찬란한 모습을 띄기 시작했다.
검은 비석에 새겨진 음각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쏟아진다.
완벽하게 본 모습을 되찾은 유적.
나는 마수 몰테인을 향해 대검을 들어 올렸다.
"이제 시작이니까요."
『 유적 복구에 성공하셨습니다. 』
『 현재 '필드 : 유적'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칭호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
『 무성(無星)등급 칭호 : 기적의 발현자 』
『 유적 필드에서 데미지가 1,000% 상승합니다.』
발전의 마족을 쓰러뜨리면서 얻었던 칭호 '기적의 발현자'.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89화 검은 세계수(2)
검은 세계수의 줄기로 이뤄진 몰테인.
놈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크기와 위력은 대형 마수로 취급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본래는 대규모 공략대를 편성해서 공략해야 할 놈이지만.'
이 세계에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 모양이다.
철컥.
나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금색 구체를 손목에 착용했다. 구체는 두꺼운 팔찌의 형태로 변해 내 손목을 휘감았다.
『 유니크 아이템 '마도 : 마력 증폭 제어 장치'를 장착합니다. 』
『 마력 증폭 상태에 돌입합니다. 』
발전의 마족의 연구소에서 얻은 유용한 아이템이다. 체내에 잠들어 있던 마력이 전신에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마력이 끓어 오르는 게 느껴진다.'
아직 타재간파로 활성화 시킨 광화 상태가 끝나지 않았다. 그 마력 증폭과 광화 상태가 겹쳐지니, 내 몸에서 뻗어 나오는 아우라의 양은 배가 되었다.
나는 공중에 머물고 있는 목룡(木龍) 몰테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몰테인의 입 앞에 응축된 검은 마기. 그 크기만해도 집 한 채와 맞먹는다.
위력은 유적 전체를 뒤덮고도 남을 거다. 나와 세레네, 지하에 있는 모두를 흔적도 없이 지울 몰테인의 회심의 일격.
그러나 물러서지 않는다.
나에게도 마법이 있다.
『 스킬 '매직 미사일 Lv.11'을 획득 및 발휘합니다. 』
『 추가효과 : 미사일의 위력 40% 증가 』
내 손 앞에서 맺힌 새하얀 빛의 구체가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내 주위를 도는 고유 서클이 더욱 가속하며 마력을 불어 넣는다.
『 스킬 '하이 엘프의 지력 Lv.11'을 획득합니다. 』
『 마법의 위력 33% 증가, 마법 해석력 55% 증가 』
거기에 세레네가 알려준 스킬까지 더 한다면.
『 기적 발현자 : 유적 필드의 효과로 데미지가 1,000%가 됩니다. 』
맞설만하다.
콰아아아—!
풍압과 함께 쏘아진 거대한 타원형의 마력 미사일. 몰테인 또한 머금고 있던 마기의 구체를 뱉어냈다.
두 개가 충돌하며 강렬한 섬광이 일대를 뒤덮었다. 유적 전체를 뒤덮는 빛과 굉음. 뒤이어 휘몰아치는 폭풍 앞에서 세레네가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 돼······. 더 강해졌잖아요······."
세레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나는 다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광화 상태 덕분에 마력이 지속적으로 차오른다.
『 스킬 '매직 미사일 Lv.11'을 발휘합니다. 』
『 스킬 '매직 미사일 Lv.11'을 발휘합니다. 』
두 개의 매직 미사일을 연달아 발사했다. 새하얀 꼬리를 남기며 날아간 매직 미사일이 몰테인의 몸통에 적중했다.
아니, 적중했다고 생각했다.
『 목룡(木龍) 몰테인이 '자가방어마법'을 구축합니다. 』
『 해당 마법은 마력의 침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
반투명한 보랏빛의 실드가 마법을 방어했다.
쿠어어—!
귀가 찢어지는 듯한 울부짖음과 함께 몰테인이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나는 오르티마를 내 손 위로 불러 들였다.
『 타재간파의 서 : 오러블레이드를 활성화합니다. 』
『 1만 포인트가 소모 됩니다. 』
세 발자국을 앞으로 뛰어 회전과 함께 창으로 변한 오르티마를 던졌다. 밤하늘에 푸르른 오러를 흩뿌리며 날아가는 창.
그것은 몰테인의 방어 마법을 쳐부수고 지나갔다. 본디 물리력에는 약한 방어막이었는지, 간단히 침입을 허용했다.
콰악!
몰테인의 몸통에 박힌 오르티마.
다시금 용의 모습으로 변한 녀석이 강렬한 브레스를 뿜어냈다.
물론 그 데미지 또한 10배일 거다.
쿠어어어어——!
몰테인이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 * *
"최대한 빨리 유적을 기동할게요! 어쩌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에요."
넋놓고 전투를 바라보던 세레네가 정신을 차리곤 소리쳤다. 그녀는 곧바로 검은 비석 위에 손을 올렸다.
빛을 발하던 금색의 글자들이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최악의 경우, 시간을 끌다가 탈출 하면 된다.'
물약의 효과로 이쪽 세계에 온 내가,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물론 나는 저 놈을 잡을 생각이지만.'
마족이 남기고 간 소환수다. 저 녀석을 잡는다면 쓸만한 칭호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우웅—!
몸부림치던 목룡 몰테인의 몸 곳곳에서 검은 마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안개 같은 마기들은 허공에서 응축되어 쏟아져 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작위 살포가 아니다.
나를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오히려 잘 됐다.'
비석을 활성화 시키는 세레네 쪽으론 공격이 가지 않게 해야 했으므로. 나는 반대편으로 달려나갔다.
쿠구구구!
『 스킬 '신속 Lv.10'을 발휘합니다. 』
쉼 없이 쏟아지는 마기의 구슬들.
땅에 떨어질 때마다 강한 폭발을 일으켰지만, 전부 나를 스치지도 못했다.
나는 가볍게 공격들을 따돌린 뒤, 힘껏 바닥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 스킬 '거인의 힘 Lv.11'을 발휘합니다. 』
콰아앙!
내가 딛고 서 있던 돌바닥이 산산히 부숴지며 솟구쳤다. 나는 그대로 공중을 날아 올라 부유했다.
이전에는 닿을 수 없던 공중에 단 한번의 발돋움만으로 도달했다.
콰득!
나는 몰테인의 몸에 대검을 박아넣었다. 놈이 미친 듯이 몸을 흔들기 시작했지만, 그럴 수록 오러블레이드가 나무 줄기로 이뤄진 놈의 몸을 파고 들었다.
『 스킬 '야수의 체력 Lv.11'을 획득 및 발휘합니다. 』
'떨어질 순 없지.'
손아귀에 쥔 힘을 풀지 않고, 발을 올려 몸부림치는 놈의 몸 위로 완전히 올라갔다.
'몰테인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원, 심장을 찾아 없애야 한다.'
그때 아래에서 세레네가 소리치는게 들렸다.
"머리, 머리에 있어요!"
역시 전지의 능력인가. 잘 작동하지 않으니 어쩌니해도 도움이 된다. 나아갈 길을 바라보니 몰테인의 몸에서 솟아난 나무 줄기들이 촉수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끝까지 발악한다 이건가."
나무 줄기들이 나를 노리고 덮쳐 왔다. 덥썩! 발이 붙잡혔지만 나는 가볍게 베어냈다.
이런 나무 줄기는 여기에 처음 왔을 때 상대 해봤다.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다.
'더 빠르게.'
달빛 아래,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날 가로막는 줄기들을 뛰어 넘어 놈의 머리가 있는 곳까지.
『 스킬 '환상종의 민첩 Lv.11'을 획득 및 발휘합니다. 』
쿠어어어——!
그래, 머리 위에 누가 올라가 있으니 불안하겠지.
그 불안함 내가 없애주마.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나는 놈의 머리 위에 일자베기를 시전했다.
콰아아—!
가공할 위력의 푸른 선이 놈의 검은 나무 줄기를 갈라냈다.
그 틈새로 보이는 붉은 빛의 보석.
이게 놈의 동력원······.
다시 한 번 일자베기를 시전해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 놈이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잠시 허공에 떠오른 나를 물어챈 몰테인은 그대로 땅으로 추락했다.
쿠우우웅!
자욱한 흙먼지가 치솟아 올랐다.
"크허억!"
『 스킬 '맷집 Lv.11'을 발휘합니다. 』
『 스킬 '불굴의 정신 Lv.11'을 발휘합니다. 』
엄청난 고통이 전신으로 밀려왔다. 마땅한 방어구가 없는 상태여서 더 심한 데미지였다.
바닥에 드러누운 몰테인은 몸을 꿈틀 대더니 뱀처럼 또아리를 틀기 시작했다. 아직도 할만 하다는 건가.
크어어—!
놈의 붉은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나는 체력포션 하나를 들이키고선 대검을 들어 올렸다. 몸이 만신창이였지만 스킬 덕분에 움직일 수 있다.
"2차전 시작인가."
어느새 오르티마도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크아아아—!
목룡 몰테인의 전신에서 솟아나온 나무 줄기가 숲을 뒤덮으려는 그때였다.
『 유적의 시스템이 복구 되었습니다. 』
『 해당 유적의 방어 시스템이 활성화 됩니다. 』
마을에 있는 열개의 기둥에서 솟아나온 황금빛 사슬이.
촤르르륵!
몰테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콰득, 콰드득!
가만히 있을 몰테인이 아니었지만, 놈이 몸부림칠수록 사슬의 속박은 견고해졌다. 놈의 발악에 땅 위로 진동이 울려퍼졌으나 점차 잠잠해졌다.
"나이스, 세레네."
유적에 이런 기능이 있을 줄이야.
저벅, 저벅.
나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타재간파의 활성화 시간이 다 되기 전에 끝을 내야했다. 미리 발동했던 광화 상태는 진즉에 끝났다.
나는 대검을 들어 올렸다.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오러블레이드에 감싸인 대검의 끝에서 시작된 일자베기. 푸른색의 짙은 선이 놈의 머리를 관통했다. 어두웠던 숲 전체를 푸른 빛이 잠시 훑고 지나갔다.
각성 스킬까지도 필요 없다.
속박 되어 있는 녀석에겐 이 정도면 충분했다.
『 목룡(木龍) 몰테인을 처치하셨습니다. 』
『 429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오르티마의 레벨이 3 상승합니다. 』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 Lv.112 → 115 』
『 이계 규율이 업적을 정산합니다. 』
* * *
"영웅이야, 영웅!"
"이것도 드세요. 오늘은 숨겨놨던 술도 전부 꺼냅시다!"
"음식은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몰테인의 처치 이후, 마을의 주민들은 한바탕 축제를 벌였다. 주민 20명 남짓한 마을에서의 소박한 축제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환호했다.
"나는 청년을 처음 봤을 때부터, 딱 알아봤다네. 늠름한 기개, 훌륭한 검솜씨. 음,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할 사람이다. 내 혜안이 적중한 걸세."
술에 취해 벌겋게 달아오른 유니콘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콘도 술을 먹는구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 세계의 잠재적인 위협이 사라졌으니, 그들이 신나는 건 당연했다.
내 옆으로 다가온 세레네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두 번이나 도움을 받았네요. 정말 고마워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서로 돕고 사는 거지 뭐. 발전의 마족의 연구소에선 나도 도움을 받았고.
세레네는 잠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약속대로 말씀 드려야겠죠."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여기는 200년이 지난 시점, 인류는 멸망했는가?
유적을 복구하면 세레네가 답을 주기로 했었다.
그 답은 이러했다.
"괴로운 답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마족은 건재하고, 인류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요."
"······."
"하지만 그게 인류가 완전히 멸망했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지한씨가 계신 문명계는 멸망했지만, 살아남은 인간들이 몇 있다고 들었어요."
미래는 여전히 어둡다는 이야기였다.
뭐, 새삼스레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마족에게 저항하는 세력. 그들을 이끄는 리더가 문명계의 인간이라는 소문. 이름이······. 천성호였던가요."
인류 최후의 리더 천성호.
200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그가 살아 있단 소리였다.
별에별 기적이 다 있는 세계니까, 장수하는 게 특이한 건 아니겠지.
다만 궁금했다.
"그 사람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없습니까?"
"소문에 따르면 스승인지 형인지를 찾아다닌다고 했던 것 같은데······. 죄송해요. 타차원의 일은 저도 알 수가 없어요. 소문으로 들은 게 전부에요. 제 전지의 능력이 예전보다 강해진 건 사실이지만, 애초에 불완전해서요······."
말을 마친 세레네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 마셨다.
나도 옆에 있던 맥주잔을 들이켰다.
'으음.'
천성호가 찾아다닌다는 스승인지 형인지······. 회귀 전에는 들어 본 적 없는 일이다. 그에게 스승이나 형이 존재하지 않음은 당연하고.
그게 나라고 생각하는 건 자의식 과잉일까.
옆에 있던 세레네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신경쓰지마세요, 여기는 지한씨의 시간대와는 다른 장소. 가능성의 세계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뭔가 오해한 것 같다.
"아뇨, 오히려 자극이 되네요. 더 열심히 할 이유가 생겼으니까요."
무언가가 바뀌었다. 나에 의해 미래가 바뀌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내가 앞으로 나아갈 이유는 충분하다.
'좋아.'
마족 놈들을 뛰어넘기 위해선 미래를 바꾸기 위해선 더 큰 무언가가 필요하단 의미였다.
결심을 다지며 만두를 입에 넣던 그때였다.
쿠구구구······!
숲 전체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세레네와 내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동력원인 붉은 보석을 박살내, 움직일 리 없는 목룡 몰테인이 들썩이고 있었다.
"뭐, 뭐야?! 죽은 거 아니었어?!"
"대피, 대피합시다!"
"도망가게나! 청년 부탁하네!"
주민들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그야 당연하다.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다시 움직이면 놀랄 수 밖에.
"다들 괜찮습니다. 다시 돌아오셔도 돼요."
"무,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천천히 목룡의 앞으로 다가갔다.
"으아악, 청년 무슨 짓인가!"
"위험해요! 무기도 안들고······?"
스윽.
목룡은 나를 덮쳐오기는 커녕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 온순한 모습에 마을 사람들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뭐, 뭡니까?"
이 녀석은 무해하다.
『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가 목룡(木龍) 몰테인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
『 대상의 격이 높아 유지 시간에 제한이 생깁니다. 』
오르티마가 그 모습을 흡수한 것 뿐이니까.
90화 검은 세계수(3)
환상계의 숲은 아름답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몽환적인 색의 나무들이 가득한 장소.
그런 숲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메시지창을 노려보고 있었다.
『 이계 규율이 업적을 정산중에 있습니다. 』
검은 세계수를 지키는 마수 몰룡 몰테인은 처치했다. 하지만 귀환 목표는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
『 재능 개화의 물약 퀘스트 』
- 목표 : 일자베기 레벨 13 달성, 레어 기본 스킬 획득
- 보상 : 귀환 및 추가보상
기본 스킬들은 전부 획득했지만 일자베기 13레벨이 문제였다. 각종 기본 스킬들을 습득하며, 일자베기를 사용한 결과 다량의 경험치를 모으기는 했다만.
『 현재 '일자베기 Lv.12'의 경험치는 45%입니다. 』
13레벨까지 필요한 경험치는 55%.
일단은 제쳐두고 새롭게 떠오른 메시지들을 살폈다.
『 레어 기본 스킬을 모두 습득 및 마스터하셨습니다. 』
- 야수의 체력 Lv.11
- 거인의 힘 Lv.11
- 환상종의 민첩 Lv.11
- 하이엘프의 지력 Lv.11
거인의 힘을 제외한 나머지가 환상계에서 얻어낸 스킬들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여기에 온 가치는 충분했다.
『 네 가지의 스킬들이 통합 됩니다. 』
『 통합 레어 스킬 '기본 능력 Lv.11'을 획득합니다. 』
레어 스킬들이 하나의 스킬로 합쳐졌다. 스킬들의 효과는 그대로 사용할 수 있으면서 장점이 추가 된다.
『 추가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 레어 스킬의 획득 확률이 상당히 증가합니다.
- 유니크 스킬의 획득 확률이 소폭 증가합니다.
'좋았어.'
미소가 절로 피어오른다.
이건 부족한 내 재능을 메꿔주는 역할을 할 거다. 통합된 스킬들이 다음 등급의 스킬을 위한 탄탄한 기반이 되어 주는 거다.
'재능 개화의 물약의 효과가 대단하기는 하네.'
내게 필요한 스킬들을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장소로 날 보내준 셈이다. 나는 대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일자베기의 경험치도 더 잘 오르겠는데.'
기본 스킬을 습득하는 과정에서도 일자베기의 경험치가 올랐었다. 기본적으로 전투 상태일 때 경험치가 많이 오르긴 하지만.
나는 일자베기를 발휘해 눈 앞의 나무를 베어냈다.
콰드득!
야수의 발톱이 새겨진 것처럼 푸른 상처가 생겨났다. 그대로 넘어간 나무가 소음을 내며 쓰러졌다.
'경험치는 미동도 없군.'
그래도 분명 효과가 있을 거다. 기본 스킬을 전부 모았으니까. 나는 묵묵히 일자베기를 시전했다. 고유 서클 생성 덕분에 10번까지는 마력 걱정 없이 쓸 수 있다.
그 다음은? 간단하다. 포션을 마시면 된다. 이후 일자베기.
'여기서부터는 반복이다.'
그렇게 약 4시간.
"후우······."
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이렇게 올린 경험치가 약 1%.
『 일자베기 Lv.12 [ 46%] 』
'이런 식으로 하면 언제 끝날지 모르겠는데.'
마력 포션도 다 떨어졌다. 따라서 소요되는 시간은 더 늘어난다.
'사실 경험치가 오른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긴 해.'
굳이 내 없는 재능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이 이상의 경지는 신태양도 알지 못하는 영역이다.
'내 특성 무재조정만이 뚫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경지.'
경험치가 올라간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계산을 해보자면.
4시간에 1%니까 최소 220시간.
열흘은 꼼짝 않고 여기에 있어야 한단 말이었다. 잠자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약 2주.
'내가 원래 있던 곳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단 보장이 없다.'
지난번에는 전부 물약을 마신 시점으로 귀환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그러란 보장은 없다.
가능한 빨리 돌아가는 게 맞다.
그때였다.
쿠구구구······!
땅이 울리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거대한 목룡(木龍)이 튀어나왔다. 목룡 몰테인으로 변한 오르티마였다.
그 머리에는 세레네가 있었다.
흙투성이가 된 그녀는 밝은 미소와 함께 오르티마에게서 내려왔다. 세레네는 오르티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르티마 덕분에 검은 세계수에 대한 조사를 추가적으로 할 수 있었어요. 수호자였던 몰테인만 갈 수 있는 장소가 있었거든요."
세레네는 내게 나뭇가지 하나를 내밀었다. 외관은 별 다를 게 없어보이는 평범한 나뭇가지였지만.
순수하고 정결한 마력이 은은하게 퍼져나오고 있다.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정화 되는 느낌이다.
"검은 세계수의 중심부에 있던 성물(聖物) 세계수의 나뭇가지에요. 마기로 오염된 검은 세계수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부분이에요."
"그러면 이걸 사용해서 새로운 세계수를 되살리는 겁니까?"
세레네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네? 아뇨. 지한씨 드리려고요. 달여서 마시면 능력치가 올라가요. 굉장하죠?"
이른바 영약이었다.
"이 땅은 오염되어서 세계수가 자생하긴 불가능해요. 마기로 오염된 세계수도 나름 역할을 다해주고 있고요. 그러니까 이건 드릴게요. 나름의 보답이에요."
세레네는 나뭇가지를 내 손에 쥐어줬다. 준다고 하니 잘 받아야지.
그 순간이었다.
띠링!
『 이계규율의 상점 : 레시피에 존재하는 아이템을 감지 했습니다. 』
『 재능 획득의 물약 레시피 ( 2,000 Point )를 구매하시겠습니까? 』
메시지창을 바라보는 내 눈이 커졌다.
'뭐야, 이런 기능이 있다고?'
물품이 추가되면서 다양한 레시피가 생기긴 했었다. 구매해 놓긴 애매해서 사지 않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다.
'2천 포인트면 싼 편이지.'
『 2,000 포인트를 소모하여 '재능 획득의 물약 레시피'를 구매하셨습니다. 』
구매와 동시에 내 앞으로 낡은 양피지 하나가 생겨났다. 양피지는 끝부분에서부터 검게 타들어가더니, 재가 되어 내게로 스며들었다.
물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보가 내 머릿속으로 깃들었다.
만들 수 있는 재능 획득의 물약은 일반, 레어, 유니크까지다. 레전더리는 아직 마셔 본 적이 없어서인가.
'재료만 있다면 만들 수 있단 건데······.'
『 재능 획득의 물약(일반) [ 환상 제조법 ] 』
- 세계수의 가지
- 유니콘의 갈기
- 드래곤의 발톱
문제는 그 재료란 것들이 하나 같이 어마무시한 것들 뿐이다. 겨우 일반 등급을 만드는데 이런 재료가 드니, 상위 등급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근데 일반 등급은 충분히 만들 수 있겠는데.'
레시피의 재료 목록을 살피던 나는 미소를 지었다. 운 좋게도 전부 당장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잘 쓰겠습니다. 달여마시는 것도 좋지만, 더 좋게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더 좋게요······?"
일자베기의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나는 저 멀리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유니콘을 바라봤다. 마침 근처에 있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세레네에게 가볍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네요. 약속이니까요."
그녀도 이해해주는 모양. 나는 유니콘을 향해 다가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응? 우리의 영웅! 청년 이지한 아닌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입꼬리가 올라가 있군."
"······."
"왜,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겐가. 헉, 설마."
역시 야생동물이라 그런가. 눈치가 빠르군.
유니콘 겔론드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내 옆에 서 있는 세레네에게로 향했다.
"에, 엘프 학자여."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 그러나 세레네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약속하셨다면서요. 왜 그러셨어요."
"그, 그거는······. 엉겁결에······. 자, 잠깐!"
내가 휙하고 달려들자, 유니콘은 재빠른 몸 놀림으로 잔상을 남기며 숲 속으로 파고들었다. 역시 환상종. 움직임이 남다르다.
『 스킬 '환상종의 민첩 Lv.11'을 발휘합니다. 』
하지만 그 환상종의 민첩함은 이제 나도 가지고 있는 스킬이거든. 망설임 없이 숲 안으로 뛰어 들었다.
"자, 잠깐만! 기다리게나 청년!"
덥썩!
어렵지 않게 유니콘을 붙잡을 수 있었다. 공포에 질린 눈이 나를 응시했다.
"설마 정말로 다 뽑는 건 아니겠지."
"조금 걸릴 겁니다."
"자, 잠깐······!"
으아아아아——.
유니콘의 비명이 숲 전체에 울려퍼졌다.
* * *
보글보글.
세차게 끓어 오르는 솥.
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장작을 몇 개 더 집어 넣었다.
"이 정도면 불 세기는 충분하고······. 슬슬 재료를 넣으면 되겠네요."
"물약 제조도 할 줄 알았던 거에요?"
"얼마 전에 배웠습니다."
유니콘에게서 뽑아낸 금빛의 갈기를 가마솥 위에 흩뿌렸다. 물에 닿자마자 내 마력과 용해되며 금색으로 녹아들었다.
역시 최고급 소재다.
『 스킬 '철형(鐵形) 연금술 Lv.11'을 발휘합니다. 』
『 추가효과로 인해 연금술의 위력 50% 증가합니다. 』
이전에 연금술사 이철형에게서 뜯어낸 스킬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추가효과의 성능이 특히 대단하다.
"갈기가······. 내 갈기가······."
망연자실해진 유니콘 겔론드가 멍하니 솥을 들여다보고 있다. 갈기를 죄다 뽑혀서 밍숭맹숭해진 유니콘이 되었다.
채집 스킬 덕분에 그렇게까지 고통이 있진 않았을 거다. 아마도. 정신적인 타격이 꽤나 큰 모양.
『 해당 장소의 인과적 특수성에 따라 귀환 시 아이템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 』
지난번 미래와 마찬가지로 아이템을 가져가는 건 불가능. 그냥 여기서 전부 소모하고 가기로 했다.
이계 규율의 예외 규칙이 작동한다면 뭔가 가져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기색은 없어보인다.
"오르티마, 새끼용으로 변해서 이리 와."
세레네에게서 작은 칼을 들고서 손짓했다. 유니콘이 당하는 모습을 봐서였을까. 어쩐지 오르티마가 점점 멀어진다.
"······발톱만 가져가려는거니까 이리 와."
새끼용도 드래곤이다. 이걸로 드래곤의 발톱을 대신할 수 있을 거다. 레시피에도 확실하게 체크가 되는 걸 보니 확실하다.
드래곤의 발톱을 넣고 마지막으로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물에 담그면 된다.
오묘한 빛이 솥 안쪽으로 가득차기 시작하더니, 내 심장 쪽에서 빠져나간 신비한 힘이 솥 안에 담겼다.
『 재능 획득의 물약(일반)을 완성하셨습니다. 』
『 해당 물약의 완성도가 매우 높습니다! 』
그것을 바라보는 세레네의 입이 벌어져있다.
"이건 대체······. 이런 물약은 처음봐요. 영약을 만드는 거 아니었나요? 아니, 재료들의 기질상 나올 수가 없는건데."
그녀는 바지에서 수첩을 하나 꺼내더니 깃펜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이것도 이지한씨의 능력의 일부인거죠. 보면 볼수록 신기하네요. 언젠가 꼭 조사해보고 싶어지는데요."
나도 내 능력이 신기하긴 마찬가지다.
완성된 재능 획득의 물약.
국자로 퍼서 바로 마셨다.
꿀꺽.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붉은 물방울이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 재능 획득의 물약을 섭취하셨습니다. 해당 효과는 1시간 동안 유지됩니다. 』
휘익!
슬라임으로 변한 오르티마가 물방울을 잡으려는 듯이 뛰어다닌다. 물방울은 필사적으로 도망다니고 있다.
녀석에게도 보이는 건가.
나는 오르티마를 잡아서 세레네에게 넘겼다. 실망한 오르티마가 축 늘어진다.
"잠시 이 녀석을 부탁합니다. 수련 좀 하고 오겠습니다."
지금의 내게 필요한 건 일자베기의 수련이다. 재능 획득의 물약이 그 길을 알려줄 수 있을 거다.
포션은 넘칠만큼 있다.
* * *
재능 획득의 물약은 내 의지대로 일자베기 수련에 매진하게 해주었다. 내가 휘둘러야 할 검의 궤적을 안내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알려줬다.
인과를 비틀어 합당한 미래를 도출하는 사기적인 능력.
3일째 되는 날.
나는 일자베기의 경험치를 99%까지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이제 앞으로 한 번 남았다.'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한 번만 더 일자베기를 사용한다면 13레벨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었다.
세레네의 주도하에 주민들이 나를 배웅하러 나왔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더 있다가시지······."
"아직 축제를 몇 번은 더 열 수 있다고요."
"술도 많이 남았는데, 아쉽네요."
전부 붙임성 좋은 사람, 아니 이종족들이었다.
"지금까지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잘 먹고 잘 쉬고 훈련도 잘할 수 있었다. 뒤쪽에 있던 유니콘이 또각또각 걸어나왔다.
갈기가 없어 허전한지 자꾸 목을 뒤로 돌리며 말했다.
"청년, 자네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군. 잊을래야 잊을 수 없겠지. 잘 가게나!"
마지막으로 세레네가 주민들을 대표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안고 있던 오르티마를 내게 내밀었다.
"지한씨에겐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요. 그러니 다른 미래가 새로운 가능성이 분명 존재할 거에요. 그러니까 힘내요."
그리 말을 마친 세레네가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언젠가 또 만날 일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런 행운이 찾아오기를."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뒤로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봐주세요."
내 수련 때문에 허허벌판이 된 숲을 향해 자세를 잡았다.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시원하게 뻗은 직선이 좌에서 우로 숲을 양단했다. 선에 닿은 나무가 파괴되며 잘려나간다. 닿은 것들을 집어 삼키 듯 부순다.
어떤 스킬을 더하느냐에 따라 그 성질이 변하는 스킬.
검성의 말에 따르면 일자베기의 정점.
이게 기존의 일자베기.
『 일자베기의 스킬 경험치가 100%가 되었습니다. 』
『 스킬 '일자베기 Lv.13'을 획득하셨습니다. 』
그렇다면 13레벨의 일자베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제 그 답을 볼 차례다.
91화 귀환(1)
나는 조용히 일자베기를 시전했다.
13레벨에 오른 새로운 경지를 확인하기 위해.
스으으······.
대검 위로 푸른 기운이 모여든다. 오러블레이드와는 다른 낮고 음산한 기운이었다.
『 스킬 '일자베기 Lv.13'을 발휘합니다. 』
『 세계의 본질에 한 발자국 다가섭니다. 』
좌에서 우로 베어낸 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강하게 그어진 푸른 선이 눈 앞의 나무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콰아아아—!
푸른 마력의 물줄기가 세차게 흐르며 선에 닿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집어 삼킨다. 그 아름다운 선에 뒤에 있던 주민들이 탄성을 흘렸다.
그러나 겉모습은 이전의 일자베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건······."
세레네만큼은 그 점을 눈치 챈 것 같았다.
푸욱.
나는 대검을 바닥에 꽂았다.
눈 앞의 광경을 바라보는 내 눈이 조금 커졌다.
『 베어낸 대상에게 씻어낼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
『 대상의 본질에 상처를 남깁니다. 』
일자베기에 의해 삼켜진 모든 나무의 밑동이 썩어가고 있었다. 씻어낼 수 없는 상처란 이런 것이었다.
콰드득, 콰득!
순식간에 검게 변한 나무들은 저절로 무너져 내렸다. 생명력을 잃고, 무참하게 부숴져내렸다.
검이 만들어낸 선이 닿은 모든 장소가 죽음의 장소로 변하고 있었다.
'이게 일자베기 Lv.13······.'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엄청난 탈력감과 피로 때문이었다. 대검에 몸을 기대지 않으면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마력이나 체력 같은 게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크게 소모 되었다.
"괜찮아요?!"
내가 휘청 거리자 세레네가 뛰어서 다가왔다.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좋은 사람이다.
"네, 괜찮습니다."
나는 손을 들어 괜찮은 척했다. 마지막인데 좋게 끝내야지.
내 몸의 근처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반딧불이처럼 주변으로 날아오르는 순수한 마력의 덩어리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 퀘스트의 목표를 달성 하셨습니다. 』
『 본래의 세상으로 귀환 및 추가 보상을 지급합니다. 』
세상이 하얗게 물들며 시야가 점점 좁아진다. 주민들의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잘가요! 영웅!"
"청년, 잘 가게나!"
"덕분에 재밌었네!"
마지막으로 세레네의 목소리까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재능 개화 물약의 효과로 올 수 있던 환상계.
언젠가 다시 올 일이 있을까? 당연하게도 알 수 없다.
여기는 가능성의 세계.
내가 본래 있을 곳이 아니다.
또한 이번 일을 겪었기에 미래는 다시 바뀔 것이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내가 직접 마족을 몰아내고 미래를 바꿀 것이다.
"크윽."
중력이 아래에서 위로 뒤바뀌며, 상하좌우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한 없이 추락해 떨어져 내려갔다.
귀환할 때는 늘 있던 현상이다. 놀랄 것도 없다.
띠링!
『 이계 규율의 업적 정산이 끝났습니다. 』
- 달성 업적 : 목룡(木龍) 몰테인 처치, 초월의 유적 재가동, 환상계 안정화, 세계의 본질
- 기록 : 성장력 SSS, 파괴력 SS, 데미지 SS, 전투 S+, 인과 변동 SSS
- 종합 평가 : SS+
나는 목록을 살폈다.
'이렇게 나열하니 꽤 그럴싸한 일을 하기는 했네.'
『 전무후무한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
『 이계 규율의 상점 : 3700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오오······.'
이만큼의 양이면 타재간파의 서에 소모한 포인트를 복구하고도 이득이다. 역시 강한 적 앞에선 포인트를 아낄 필요가 없다.
『 해당 업적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
『 소수의 초월자들이 당신의 존재를 인지합니다. 』
나는 메시지를 주의 깊게 살폈다.
아카식 레코드.
이것은 지구에 있는 개념이다. 세계의 모든 정보가 기록된 초월적인 저장소. 그러니 내 업적이 기록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예전에도 계속 뜨던 메시지고.
내가 주목한 건 그 아래였다.
'소수의 초월자가 내 존재를 인지한다고······?'
초월자라는 그 단어조차 생소했다. 아니, 잘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세레네가 이계 규율에 대해 설명해 줄 때 했던 말이 있다.
- 그 힘은 결코 부정되지 않는 모든 것의 규칙이자 초월자의 자격이다.
뭔가 이어지는 듯 하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당장은 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였다.
『 업적에 대한 보상을 지급합니다. 』
『 칭호 : 환상계의 영웅 』
- 환상계에서 모든 능력치 250% 상승
늘 그렇듯 칭호로 끝날 줄 알았는데.
띠링.
메시지가 하나 더 떠올랐다.
『 무성(無星)등급 아이템 '봉인된 역전의 검'을 지급합니다. 』
'?!'
기뻐하거나, 아이템을 살펴볼 틈도 없었다.
중력이 거세게 뒤바뀌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인류의 배신자 김상욱.
'대체 어디로 가신거야. 빌어먹을. 이제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인데.'
그는 하위 마족들의 명을 받아, 대한민국에 있을 마족의 방해자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열심히 이곳저곳을 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수상해보이는 놈들을 확인하며 다녔지만 범인이 나올 리가 없었다.
프로젝트 마기와 메이저 게이트를 방해하는 인간.
그건 바로 이지한이었으니까.
김상욱의 주인이기도 했다. 김상욱은 미리 이지한이 지시했던대로 그럴싸한 빌런 놈들을 찾아다니며 정리하는 중이었다.
뻐억!
"저,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 애들은 진짜 사람 패고, 죽이는 것밖에는 모르는 놈들입니다! 마족? 그런 거랑은 조금도 관련이······."
"야, 그럼 맞아도 싸겠네."
퍼버벅!
김상욱의 무자비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불쌍한 척하지만 이 놈은 일대에서 악명이 자자한 빌런이었다.
놈은 먼지 날 때까지 후드려 맞았다.
김상욱은 비릿한 미소와 함께 손을 털었다.
'속이 다 후련하네.'
지난번 게이트 때 아무것도 못하고 뒤쪽에만 서 있었던 게 생각난다. 자신도 나름 A급 헌터인데 이지한 앞에선 뭔가 약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빌런 놈들을 잡아 패고 다니다 보니까, 자신감이 생겼다.
'이러다가 영웅 협회에서 표창장이라도 주는 거 아닌가 몰라.'
부하들을 시켜 빌런 놈들을 제압해 놓고선 김상욱은 건물의 바깥을 내다봤다. 도로를 오가는 차들과 보도 위의 사람들.
'더럽게 평화롭네.'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마족들이 세계를 야금야금 집어 삼키는 도중에도 참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평화롭다.
그런 생각을 하던 김상욱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완전히 세뇌 당한건가. 에이씨, 아무려면 어때. 그 빌어먹을 마족 놈들 전부 안 족치면 죽는 건 난데.'
이지한.
그 남자의 말대로 마족이 세운 계획에 인류는 없었다. 인류를 배신해서 얻을 이익보다 잃을 게 더 많았다.
차라리 일찍 알게 된 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이걸 다 알고 있는거야?'
각성자 중에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뭐, 그런 종류의 예언자라도 되는건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 쎈데 말이야.
그때였다.
스마트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슥 꺼내 확인하니 이지한이었다. 김상욱은 재빨리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일주일 동안 어디계셨던겁니까?"
- 뭐, 그럴만한 일이 있었지. 그보다 잘 되가고 있나?
"제가 하는 일인데 잘 안 될 리가 없죠. 이제 놈들도 인내심이 다 할 때가 됐다는 거 빼면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일들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 하위 마족의 은신처 중 하나를 불러.
김상욱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서, 설마. 쳐들어가려고······?'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생각과는 반대로, 김상욱은 저도 모르게 주소를 말하고 있었다. 그게 종속이 계약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잠깐 아무리 그래도······."
툭, 전화가 끊어졌다.
* * *
일주일이나 시간이 지나있었다.
환상계에서 보낸 시간은 일주일보다 적었다. 시간의 흐름이 달랐다. 오래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나는 김상욱과의 통화를 끝내고, 벽에 등을 기댔다.
'지금이라면 하위 마족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거다.'
일자베기 13레벨은 각성 기술과는 별개로 탈력감이 심했다. 연달아 쓰는 건 불가능하다.
'스킬의 성장만 너무 빨랐던거야.'
예를 들자면, F급 헌터에게 적절한 마법은 매직 미사일이다. 보유한 마력과 능력치의 수준이 딱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차근차근 성장하며 상위의 마법을 익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배운 스킬의 수준이 너무 높다면 문제가 생긴다. 설령 F급 헌터가 메테오를 배웠다고 해도 사용하려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결론은 내가 더욱 강해져야 한다는 의미다.'
본질을 훼손시키는 궁극의 일자베기. 각성과 합쳐진다면 어떤 위력이 나올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래도 당장은 괜찮다.'
일자베기의 레벨은 13이지만, 12레벨 수준의 일자베기를 발휘하는 건 가능하다.
비장의 무기로 남겨 놓는다면 충분하다.
'바쁘게 움직여야겠어.'
나는 바닥에 떨어진 녹슨 검을 주워들었다. 검집이 심하게 녹슬어 검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 아이템 설명 』
- 이름 : 봉인된 역전의 검
- 등급 : 무성(無星)
- 효과 : 없음
이번 이계 규율의 보상으로 받은 건데 능력치가 완전히 봉인 되어 있어 그 효과를 알 수가 없다.
'유니콘의 피도 안 통하는 것 같고.'
혹시나 싶어 오르티마에게 가져다댔지만 녀석은 격렬하게 거부했다. 이것만봐도 뭐가 있기는 하다는 건데.
'무기는 역시 전문가한테 맡겨 봐야 알 수 있으려나.'
김건에게 맡겨 두었던 아이템 제작이 끝났을 거다. 일주일이나 지났으니까.
'나가기 전에.'
나는 바닥에 떨어진 파편을 주워들었다. 환상계에서 귀환한 대가로 받은 보상이었다.
『 특이한 재능의 파편 』
'어?'
별 생각 없이 확인 한 거였는데. 이름이 뭔가 다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미약한 재능의 파편을 세 개 합쳐 만든 미약한 재능의 조각.
이건 특이한 재능의 파편이란다.
'이것도 전부 모으면 재능의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겠지.'
기쁜 마음으로 인벤토리에 넣고선 집을 빠져나왔다. 주문 제작했던 아이템을 찾으러 갈 시간이다.
택시를 타고 장인거리에 도착하자, 굉장한 활기가 느껴졌다.
"어서 오세요! 좋은 장비 많이 있습니다! 보고 가세요!"
"장신구 필요하신 헌터분들, 이리로 오세요!"
"와아, 예쁘다."
이전에 왔을 때는 한산한 느낌이었는데, 그 사이에 헌터들이 엄청나게 늘었다. 오늘이 특별한 날도 아닌데.
나는 사람들을 비집고 김건이 있는 가게로 향했다. 거기에도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이건 얼마에요?"
"품질 되게 좋다. 보통 솜씨가 아닌데."
"이게 이 가격이 말이 돼······? 당장 길드에 전화해. 발주 넣으라고."
카운터에 있던 김건이 한 손을 들며 소리쳤다.
"아, 지한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리로, 이리로 오세요!"
쪽문으로 빠져나가니 한산한 사무실이 나왔다. 이전과 다르게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커피를 가져왔다.
김건은 미소와 함께 커피를 홀짝였다. 인스턴트 커피 맛은 언제나 달콤하지만 이전에 김건이 끓여줬던 것만큼은 못하다.
김건은 창 밖을 살짝 보더니 입을 열었다.
"뭐가 많이 바뀌었죠? 최근에 박종필 패거리가 뭔가 되게 열심히 하더라구요. 마케팅이나 홍보 같은 걸 해주니까 이렇게 됐어요. 무리한 갑질도 사라졌구요."
박종필은 장인 거리를 관리하던 길드다. 백묵의 산하 길드인데, 관리를 핑계로 갑질을 일삼던 녀석들이었다.
아마 크게 바뀌었나보다.
'백묵이 손을 써놨나본데.'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바뀔 리는 없으니까.
"여기까지가 근황이구요. 아이템은 완성 되었습니다. 그걸 가져와줘요."
그의 말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창고에서 갑옷을 가져왔다. 김건은 갑옷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은 재료 덕분에 최고의 장비가 탄생했어요. 지한님은 레어 아이템이면 충분하다고 하셨지만······."
김건이 갑옷에 마력을 불어넣자, 갑옷에 수많은 선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바실리스크 아종의 비늘을 한땀한땀 새겨 넣은 모양이었다.
'내가 준 재료가 마족의 마정석이랑, 바실리스크 아종의 각종 부산물이었지.'
김건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유니크 장비가 탄생했습니다. 제 역작이에요."
그 이야기를 듣는 내 두 눈이 커졌다.
김건이 만드는 아이템은 성장형 아이템이다.
잠깐만, 시작부터 유니크라면······.
성장만 시킨다면 레전더리급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92화 귀환(2)
원형의 테이블을 중심에 둔 회의실.
백묵은 그 가운데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스마트폰으로 메시지 하나가 왔다.
'이지한이 다시 나타났다라······.'
그에겐 할 말이 많았다. 해외의 게이트에서 마주한 마족. 거기에 더해 귀환해서 그의 성장을 확인했을 때 백묵은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일주일 동안 종적을 감춘 바람에 어쩔 수 없었지만.
'이지한을 꼭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듣자하니 수호 길드에서도 이지한을 노리는 것 같던데.
'일단은 눈 앞의 목표에 집중할까.'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유명인들이 하나둘씩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대한민국 10대 길드를 대표하는 자들. 그 뿐이 아니라 헌터 협회의 중역, 영웅 협회의 영웅들도 모인 자리였다.
"뭔진 몰라도 슬슬 시작하시죠."
"그래서 저희를 왜 부른 겁니까?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자자, 다들 바쁘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손해 볼 일은 아니니 잘 들어 보시죠."
그들을 모두 불러 모은 건 다름 아닌 백묵이었다.
길드 호라이즌의 수장이자, 대한민국의 정보 사냥꾼.
동시에 S급 헌터이기도 한 그의 영향력은 유명 길드 사이에선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약 1주일 전 미국에 다녀왔습니다. 미국의 S급 헌터인 그렉스와 게이트 공략도 하나 하고 왔고요."
"뭐? 협회 허가도 없이 해외에서 게이트 공략을 했단 말입니까?"
자리에 앉아 있는 헌터 협회의 이사 언성을 높였다. 백묵이 귀찮은 듯이 손을 저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태평하고 안일하다는 말을 하려는 거죠."
백묵이 손가락을 튕기자 뒤쪽으로 빔 프로젝트의 영상이 떠올랐다. 특수 장비로 찍은 게이트 내부의 영상과 사진이었다.
거기엔 분명하게 찍혀 있었다. 보랏빛 피부와 검은 뿔, 붉은 눈을 가진 존재가.
마족이라 불리는 존재.
그러나 그 외관을 알아 보는 이는 적었다.
"그냥 마수잖습니까. 지금 고작 신종 마수 하나 발견했다고 유세 부리는 겁니까?"
단단히 화가 난 협회 이사가 팔짱을 꼈다. 백묵이 허가 없이 해외의 게이트를 공략한 게 영 아니꼬운 모양.
백묵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게이트와 시스템. 초창기에는 멸망의 징조라는 말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이라고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잖아요. 근데 우리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빠뜨렸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마성이 있었다. 화를 내던 사람도 일단은 듣게 만드는 짙은 호소력.
"이 넓은 세계에 왜 인류만이 시스템을 활용하고,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죠."
그는 잠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더니 입을 열었다.
"만약 이 세계를 노리는 인류가 아닌 다른 집단이 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회의실이 술렁였다. 놀랍다는 것보단 황당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허, 참나."
백묵은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무심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믿던지 말던지는 자유입니다. 그들은 마족이라 불리며 게이트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습니다. 일반 마수가 아니라는 말이죠. 대화도 가능하고요."
그 말에 회의실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몇몇 길드는 들을 가치도 없다면서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시스템과 게이트가 초창기에 등장했을 때만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질 나쁜 소문이거나 인터넷 상에 떠도는 괴담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이 되고, 일상이 되자 그 감각은 무뎌졌다. 그런 상황에서 마족이라는 종족의 등장이라니.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것처럼 터무니 없게 들릴 뿐이었다. 그나마 정보 길드로서 영향력을 끼치는 백묵이 한 말이기에 이 정도였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런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다.
수호 길드의 길드장 사최헌.
그는 흥미롭다는 듯 영상 속의 마족을 바라봤다. 그는 백묵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있었다.
백묵은 이런 정보를 아무 이득 없이 공유하는 남자가 아니란 걸.
"자세한 정보를 얻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지?"
그 말에 백묵이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단독으로 조사한 일이니, 적절한 대가를 치르신 분들께만 데이터를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
길드들의 허탈한 탄성이 쏟아졌다.
여기서부터는 유료였다.
* * *
"제 역작입니다."
나는 김건으로부터 장비를 받아 들었다.
『 아룡종의 비늘 갑옷(유니크) 』
- 방어력 : 50
- 인챈트 스킬 : 착장 Lv.3 착용 Lv.3 가벼움 Lv.3 자동수복 Lv.4
- 특수 효과 : 독 저항이 5% 증가합니다.
비늘 한땀한땀을 이어 만든 갑옷. 비늘 사이로 흐르는 영롱함에 나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
스킬을 읽어나가는 내 눈이 커졌다. 대박, 아니 대박 수준이 아니다. 여기에 붙은 스킬들의 가치를 하나하나 계산해보자면······.
'얼마를 매겨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아무리 낮게 잡아도 최소 20억, 내가 김건에게 준 돈은 4천만원이었다. 아이템 재료를 내가 전부 대주기는 했지만.
'굉장한데······.'
나는 감격스런 표정으로 김건을 바라봤다.
"이거 받아도 되는 겁니까? 너무 잘 나왔는데요."
"말씀드렸잖아요. 제 역작이라고요. 물론 이지한씨 드리려고 만든 거구요. 재료부터 시작해서 전부 제공해줬으니 저는 만족스럽습니다."
나는 갑옷을 들어 몸으로 가져갔다. 착용 마법이 있어 번거롭게 입지 않아도 갑옷이 녹아들 듯 몸에 착용된다.
'착장 기능을 사용하면······.'
평소에는 갑옷의 외관이 감춰진다. 굳이 감추지 않더라도 갑옷이 워낙 멋있게 디자인 되어 있어서 괜찮았다.
'심지어 아직 성장할 여지가 남은 방어구라니.'
그야말로 미쳤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내가 흡족해하자 김건은 만족스런 얼굴로 말했다.
"언제든지 재료가 생긴다면 제게 맡겨주세요, 지한씨를 위한 갑옷이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요. 만사 제쳐두고요."
"감사합니다."
어차피 계약을 맺어놔서 내가 가장 먼저 아이템을 받을 수 있지만. 장인의 마음도 중요하니까.
그러고보니까 이게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무기 하나를 꺼냈다.
『 봉인된 역전의 검 』
- 등급 : 무성(無星)
- 효과 : 현재 해당 아이템은 봉인되어 있습니다.
이계규율의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이다. 무성 등급이라는 걸 보니, 굉장히 사기적인 효과가 감춰져 있을 게 뻔한데.
유니콘의 피를 써도 봉인 해제가 되지 않는다.
"이걸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대장장이인 김건이라면 뭔가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등급 체계가 다르다보니 알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이건 무기인가요······?"
김건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무기에 고개를 쳐박을 듯이 가져다대었다.
그러더니 잠시 눈을 감고 무기를 쓰다듬는다.
"흐음, 너는 어떤 아이니······."
완전히 집중한 듯 나를 개의치않고 중얼거린다.
"뭐? 누가 널 먹으려고 해? 대체 누가 그런 짓을······."
옆에 서 있던 직원이 내게 귓뜸을 해줬다.
"당황스럽죠? 저도 처음에는 그랬는데 익숙해지니까 괜찮아요. 아이템과 대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네요."
"그런거였군요."
김건은 미래에서 또라이라고 불리며 기인 취급을 받는다. 그가 아이템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달려 들던 것도 그래서였나.
근데, 아이템이 아니라 재료만 봐도 정신을 못 차렸는데. 그냥 사람이 그런건가.
"응응, 그렇구나."
잠깐의 진단(?)이 끝난 뒤 김건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쩐지 황홀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멋진 검은 처음이에요. 본 적 없어요. 지금은 봉인 되어 있어 보기 흉한 모양새지만요. 어디서 구하신거에요?"
"그냥 던전에서 주웠습니다."
"그렇군요······. 하긴 이런 검을 사람이 만들었을 리가 없죠. 아주 특별한 검이에요. 등급을 매기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요."
"그래서 봉인 해제 조건은 뭡니까?"
"음."
내 말에 김건이 입을 다물었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 봉인을 푸는 게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조건은 알아낸 겁니까?"
"네. 조건 자체는 간단해요. 막대한 양의 경험치. 에고 소드처럼 경험치를 흡수하는 녀석이거든요. 아, 이 검이 에고 소드라는 건 아니에요."
그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볼펜을 하나 꺼내더니, 무언가 수식을 적기 시작했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어림잡아 S급 던전 60개 분량의 경험치가 필요해요. 모든 경험치를 혼자 먹었을 때니까······. 대한민국 최강이라는 사최헌 헌터에게 가져다줘도 봉인을 해제하는 건 10년은 걸릴 거에요."
나는 S급 헌터도 아니고, 현 시점 S급 게이트를 단독 공략하는 헌터는 미국의 그렉스가 유일하다.
사실상 봉인 해제가 불가능한 무기라고 보는 게 맞았다.
'근데 나한테는 아니지.'
특성 무재조정 10만배, 칭호 초성장 2배. 총합 20만배의 경험치. 봉인을 풀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큰 도움이 됐네요."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새로운 재료가 있으면 언제든지 또 방문해주세요. 저도 계속 성장중이거든요."
최근 백묵에게 재료들을 팔아 넘기긴 했는데, 앞으로 쓸만한 재료가 있다면 김건에게 넘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나는 장인거리에서 마력 소나무 진액을 구매해 집으로 향했다. 내가 걸친 장비를 성장형 아이템으로 만드려면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건 레벨업인가.'
검과 장비의 레벨업.
사냥과 중위 마족의 부하를 한 번에 처리할 계획이었다.
* * *
다음날.
허름한 시골 폐가의 앞.
"이번에도 마족이라는 거죠?"
윤서현이 팔짱을 낀 채 게이트를 노려봤다. 나는 그 옆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는 여기가 맞다.'
김상욱이 알려준 하위 마족의 은신처가 있는 장소.
지력의 마족.
놈은 전투의 마족의 부하였다. 놈을 죽이고, 전투의 마족과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야했다.
"이번에는 일로 온 거니까요. 빨리 끝내보죠."
윤서현은 손가락을 두두둑 풀었다. 이번에는 협회 사람인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게이트 공략 도중에 난입하는 거였다. 일반적으로는 금지되는 일이다. 특수 게이트라는 명목 하에 벌이는 일.
윤서현이 가볍게 설명을 했다.
"이 게이트는 A+ 등급의 특수 게이트에요. 내부는 평원이고, 클리어 방식은 몰살이에요."
"내부에서 공략하는 건 누굽니까?"
"대한민국 8위 '하루' 길드에요. 전에 만나본 적 있는데 다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게이트에 마족이 있다면, 벌써 위험에 빠져있을 수도 있겠네요."
바깥에 있던 하루 길드의 사람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대기조다.
게이트로 누군가가 침입하는 것을 막는 역할.
"심각한 일인가요?"
하위 게이트야 협회가 개입하는 일이 많다지만, 상위 게이트쯤 되면 길드들도 알아서 잘 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개입은 없는 편.
윤서현이 대답했다.
"네, 심각합니다."
그 말에 하루 길드의 대기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족의 출현은 심각한 문제가 맞기는 하다.
우리는 그들을 두고서 게이트 내부로 발을 옮겼다.
화아악!
시야가 뒤바뀌며 넓게 펼쳐진 평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노을이 인상적이다.
『 게이트 클리어 조건 』
- 목표 : 마수 처치 ( 125 / 1000 )
- 분류 : 몰살
이제 125마리를 처치했으니 공략이 막 시작된 찰나였다.
"일단 하루 길드원들의 상황부터 살피러가죠. 설명을 해야하니까요. 문제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건데······."
평원이었지만, 중간 중간 바위나 큰 나무 같은 구조물이 많아 찾기가 어려웠다.
주변을 살피는 그때였다.
취익! 취익!
스무 마리의 검은 오크들이 우리를 발견하곤 달려오고 있었다. 다크 오크들의 손에 들린 건 날카로운 철제 무기였다.
이 정도 등급의 게이트가 되면 마수들의 무기도 원시적인 수준에서 벗어난다.
더 이상 투박한 도끼나 몽둥이는 없다. 검과 검의 진검승부만이 있을 뿐.
나는 오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달려오는 놈들은 사냥해도 법적으로 괜찮은 거 맞죠?"
"그거야, 물론이죠."
"오르티마, 쓸어버려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쿠구구구!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거대한 목룡(木龍). 윤서현이 기겁을 했다.
"조, 조심해요!"
나를 붙잡고 순간이동을 하려는 걸 간신히 말렸다.
"진정해요. 마수가 아닙니다. 제 펫입니다."
"네······?"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피는 윤서현.
콰아아앙!
목룡으로 변한 오르티마가 다크 오크들을 덮쳤다.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오크들이 하늘 위로 튀어 올랐다.
손에 든 검이 애들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크 오크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나갔다.
연이어 땅을 훑고 지나가는 진동.
그야말로 압도적인 강함이었다.
촤르르륵!
『 아룡종의 비늘 갑옷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아룡종의 비늘 갑옷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아룡종의 비늘 갑옷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
『 아룡종의 비늘 갑옷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순식간에 내 눈 앞을 가득 채우는 메시지.
'이거지.'
나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서현에게 말했다.
"그러면 달려드는 마수들을 잡으면서 계속 가보죠."
이렇게 소란을 피웠는데, 마수의 특성상 잔뜩 몰려 올 거다. 그러면 또 어쩔 수 없이 사냥하는 수밖에 없다.
그냥 당할 수는 없으니까.
자, 레벨업의 시간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