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บท 2: 2

12화 성장의 마족(2)

나와 윤서현이 가세하자 상황은 금세 정리됐다.

"모두 고생했어. 일단 휴식하자."

"후우······."

"다, 다행이다."

고성준의 말에 로만 길드원들이 자리에 주저 앉았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흙투성이에 땀으로 범벅이 되어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겨우 첫 전투인데도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슬쩍 눈치를 보고 뒤쪽으로 빠졌다. 내가 잡았던 늑대의 마정석과 부산물을 회수하기 위함이었다.

『 몬스터에게서 전리품을 갈무리합니다. 』

『 스킬 '해체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슥삭 슥삭.

순식간에 마정석과 가죽이 분리된다. 그 마정석을 인벤토리에 집어 넣으려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윤서현 헌터였다.

'······.'

못 본 척 넘어 가줄 순 없으려나. 협회의 입장이란 게 있으니 그럴 순 없겠지. 다시 마정석을 땅에 내려 놓으려는 그때였다.

슥삭.

윤서현 헌터가 나이프를 꺼내더니 옆에 남은 한 마리에게서 마정석을 꺼냈다. 그러더니 내게 건넨다.

"여기요. 가죽은 내가 챙겨도 되죠?"

"······."

"길드 사람들 보기 전에 빨리하죠. 가뜩이나 협회 월급 쥐꼬리 같은데 이런 거라도 챙겨야죠."

끄덕.

이상한데서 마음이 맞는구만. 뭐, 나쁘지 않다.

덕분에 D등급에 해당하는 가죽과 발톱을 챙겼다. 마정석까지 챙겼으니 마음이 든든해진다.

신속하게 갈무리를 마친 우리는 길드원들이 있는 장소로 돌아왔다.

자연스레 쉬고 있던 로만 길드에게로 시선이 간다.

"조금만 쉬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자. 이번에는 포지션을 더 제대로 잡아보면···."

고성준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모양새였다.

"설마 계속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는 거야?"

"성준 오빠, 이건 아닌 것 같아."

오히려 길드원들이 만류하기 시작했다. 몇 마디가 더 오가고 길드원들의 의견은 돌아가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고성준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왜 이래. 고작 D급 게이트에서. 이번 사냥을 제대로 끝내야 장비도 구입하고 밀린 대금도 지불할 거 아냐."

길드장으로서 길드원들보다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단 건 알겠다. 하지만 상황 파악을 못하는데도 정도가 있다.

'이런 식이면 파티가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지.'

고성준은 자신의 선택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는지 모르고 있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아무래도 좋을 선택이지만······. 이건 현실이다. 한 순간의 판단으로 목숨을 잃는 게 당연한 현실.'

헌터 생활이란 게 그랬다. 게임과 같은 사냥이 계속 이어지니 감각이 무뎌진다. 게이트, 몬스터 같은 이질적인 존재들이 위험하다는 감정 자체가 메마른다.

'결국 목숨이 걸린 일이란 걸 잊게 되는 거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순간에 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나오는거고.

뭐, 그렇다 해도 이번 사건에서 그들은 어디까지나 피해자다. 변칙 게이트의 출현 자체가 사고니까.

변칙 게이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일종의 천재지변과도 같다. 정확한 예측이 안되는 지진 같이 말이다.

고성준의 탓만을 할 순 없겠지.

"조금만 더 가보고 돌아가면 되잖아!"

"그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건데!"

길드원 사이에서도 주장이 나뉘고 있었다. 보다못한 윤서현 헌터가 나섰다.

"음, 제가 보기엔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깔끔하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지금 여러분이 계신 게이트는 변칙 게이트예요. 직접 상대해 보셨으니 아시겠죠. 몬스터들이 제 예상보다도 훨씬 강해요. 우선 돌아가서 협회에 지원을 요청하죠."

"봐봐! 협회 언니도 그렇게 말 하시잖아!"

길드원 박현주가 맞장구를 쳤다. 윤서현까지 나서자 길드 내부의 의견도 돌아가자는 분위기가 됐다.

참다 못한 고성준이 일어섰다. 그는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소리쳤다.

윤서현을 향해서.

"그쪽이 뭔데 나섭니까? 변칙 게이트면 어쩌라는 거예요? 협회 소속이면 답니까? 판단은 우리가 합니다. 괜히 나서지 마세요."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로 침묵이 이어졌다.

자신의 말이 먹혔다고 생각한 건지, 고성준이 은근한 미소를 짓던 그 때였다.

"서, 성준 오빠···. 뒤, 뒤에···."

길드원 박현주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고성준의 너머를 가리켰다.

크르르······.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한 고성준의 뒤로 형형한 두 개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눈동자의 정체가 밝혀졌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침을 질질 흘리는 괴수.

우두머리 은빛 늑대였다.

일반 은빛 늑대의 족히 네 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

모두가 그 크기에 압도 되어 숨을 죽였다.

으르르···.

그저 으러렁 댈 뿐인데도 주변의 공기가 떨리고 있었다. 그 진동에 나조차 심장이 떨릴 정도다.

다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고성준은 그제서야 뭔가가 잘못 되었음을 인지했다.

"뭐, 뭡니까 다들? 내 뒤에 뭔가가······."

고성준이 천천히 고개를 뒤돌아 보는 순간, 우두머리 늑대가 울부짖었다.

크허엉!

몸이 뒤로 밀려날 정도의 박력이다. 온몸이 저릿해 움직일 수가 없다. 날아가버릴 것 같은 정신은 덤이다. 나조차 이를 악물어야 했다.

"으아악!"

불시에 터져나온 소리에 고성준이 바닥을 굴렀다.

『 우두머리 늑대가 울부짖습니다! 공포심이 스멀스멀 기어 오릅니다. 』

『 영향을 받은 대상이 '공포' 상태에 빠집니다. 』

"으아아아!"

"살려줘!"

"도, 도망가야 해!"

딱 한 번 울부짖었을 뿐인데 로만 길드원 전체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크윽.'

나는 피어오르는 공포심을 억눌렀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나까지 패닉에 빠져선 안된다.

그러자 메시지가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띠링!

『 스킬 '정신력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정신력 Lv.2'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정신력 Lv.3'을 획득합니다. 』

『 정신계 상태이상 저항력이 9 증가합니다. 정신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

'좋아, 버텼다.'

정신력 스킬을 획득함과 동시에 레벨이 증가했다. 기본 스탯이 높은 윤서현 헌터도 별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다.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시선은 허겁지겁 뛰어 오는 고성준을 향했다. 녀석은 길드원들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다, 다들 도망쳐!"

멍청한 소리. 여기서 뿔뿔이 흩어지면 절대 안된다.

내가 달려가도, 모두를 잡아두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는 위압 스킬을 사용했다.

『 스킬 '위압 Lv.7'의 효과를 발휘 합니다. 』

『 주변 대상이 위압 상태에 빠집니다. 』

"허억!"

달려가던 고성준이 위압에 걸려 쓰러졌다. 녀석은 볼썽 사납게 얼굴부터 바닥에 쳐박혔다. 나는 녀석을 들어 뺨을 한 대 갈겼다.

그러곤 조용히 말했다.

"정신 차려."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고성준이 날 올려다 본다.

스윽.

나는 녀석을 잘 보이도록 위로 들어 올렸다.

"성준 오빠!"

"헉, 성준아!"

그러자 마찬가지로 가벼운 위압 상태에 걸렸던 길드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그들의 발걸음 또한 멈췄다. 다소 강압적이긴하지만 결과는 좋았다.

우두머리가 늑대가 건 공포를 내 위압으로 덧씌우는 데 성공했다.

나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신차리고 윤서현 헌터한테 붙으십쇼."

이렇게 말했으면 알아듣겠지. 상황을 지켜보던 윤서현 헌터가 알맞게 손을 들었다.

"다들 이리로 모이세요! 공간이동으로 빠져나갈겁니다!"

"자, 잠시만요!"

"나도 데려가요!"

나를 포함한 총 여섯 명의 헌터가 윤서현에게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주변의 일그러기 시작했다.

물론 보스가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시야 한켠으로 달려든 우두머리 늑대가 아가리를 쫘악 벌린다. 단번에 우리를 씹어 삼켜 버릴만큼의 크기다.

"느, 늑대가!"

"으아아아!"

"제바알!"

입을 한껏 벌린 우두머리 늑대가 주둥아리를 콱 다물기 바로 직전.

우리는 그 장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

* * *

"허, 허억······."

"살았다."

아무리 공간이동 스킬이라도 게이트 바깥으로 나갈 순 없다.

그래도 안전한 장소까지는 이동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첫 전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안도감이 길드원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특히 고성준은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콰아앙!

멀리 있는 장소에서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먹이를 놓친 우두머리 늑대가 성질을 부리는 것 같았다.

우리가 있는 곳이 고지대라 그 모습이 훤히 보였다. 다들 멍하니 우두머리 늑대의 난동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빨리 게이트 바깥으로 나가요!"

"그래요. 무슨 늑대가 저따위로 무식하게 크답니까? 살려면 나가야겠어요."

D급에서 경험하기엔 차원이 다른 강함이었다. 울부짖기 한 번에 다들 나가떨어졌으니. 나도 동감한다.

하지만 나가자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주변을 살피던 윤서현 헌터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이상해요. 게이트가 있는 장소로 나온건데 아무것도 없어요. 설마 출구가 사라졌다거나···?"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내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다.

"변칙 게이트이니 당연한겁니다. 사라진 게이트는 보스를 잡으면 다시 나타날 겁니다."

"아, 아아······."

"이런······."

길드원들 사이에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잠시 조용하나 싶던 고성준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까 나한테 맞은 얼얼한 뺨을 붙잡은 채로.

"그게 말이 됩니까? 저 무지막지한 놈을 무슨 수로 잡으란—"

고성준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위쪽 바위에 숨어 있던 늑대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으헉!"

나는 알고 있었다.

촤아악!

손에 든 영혼 포식자를 휘두르자, 단칼에 늑대가 쓰러졌다. 나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어차피 잡는 건 내가 할 겁니다. 뒤지기 싫으면 조용히나 합시다."

그제서야 고성준이 입을 다물더니 슬그머니 뒤쪽으로 물러난다.

드드드드······.

땅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저, 저게 뭐죠?"

박현주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장소에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우두머리 늑대가 있던 곳이었다.

진동의 원인은 명확했다.

거대한 검은 파도가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아우우!

나무, 바위 할 것 없이 뒤집어 삼킨 파도는 이윽고 우두머리 늑대를 덮쳤다.

우두머리 늑대가 거세게 저항하며 머리를 흔들어대지만 파도는 그에 맞춰서 넘실거릴 뿐이었다.

우두머리 늑대는 발광하듯 뛰어 올랐다. 그러나 점차 움직임이 느려진다. 조금씩, 조금씩 검은 액체가 늑대를 집어 삼킨다.

갑작스레 나타난 괴생명체에게 보스가 힘 없이 당하는 모습.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광경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그렇다.

저 놈이 내가 잡아야 할 성장의 마족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윤서현 헌터가 나와 검은 파도를 번갈아 봤다.

"설마, 저걸? 아니죠?"

"맞는데요."

보스가 죽으면서 자동으로 출구가 나타났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보스를 집어 삼킨 저 검은 액체, 그러니까 성장의 마족이 이젠 보스가 된다.

녀석을 잡고 출구를 만들든가, 아니면 저 녀석이 바깥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리든가. 둘 중 하나다.

"······그러면 저희는 뭘하면 됩니까?"

한결 유순해진 고성준이 나를 보곤 묻는다.

"여기서 버티고 있으시면 됩니다. 정 심심하시면 캠프파이어라도 하시든가. "

우두머리 늑대는 마족에게 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하울링을 했다. 그 탓에 일반 늑대들은 중심부를 향해 모여들고 있을 거다.

여기는 비교적 안전하다. 몇 마리 정도라면 이 사람들도 상대할 수 있고.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이대로 그냥 가려는데, 고성준 헌터가 눈에 걸렸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가서 말했다.

"이제 생각났는데, 그쪽이 할 일이 하나 있었네요."

나는 손가락으로 고성준 헌터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것 좀 빌립시다."

고성준이 당황한 표정과 함께 슬금슬금 물러난다.

"이, 이거요? 이거 레어급인데······."

아, 레어급이라고? 그럼 더더욱 좋지.

"뒤지기 싫으면 좀 빌려 씁시다."

* * *

『 쓸만한 메탈 아머 세트 』

- 부위 : 모든 부위 (세트)

- 등급 : 레어

- 품질 : B+

- 효과 : 방어력 + 25, 야수형에게 데미지 감소 5%

상당히 만족스럽다.

고성준 헌터에게서 빌린 메탈 아머의 성능은 훌륭했다. 이러니 늑대들에게 그렇게 쳐맞아도 멀쩡하지.

내게 받은 허름한 가죽 갑옷을 억지로 걸치는 고성준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협회에서 지급하는 물품을 남겨두고 왔으니까, 로만 길드가 버티는데엔 문제 없을거에요. 문제는 우리죠."

윤서현 헌터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나와 윤서현 헌터는 아까 보았던 성장의 마족을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다.

놈의 위치를 찾는 건 쉬웠다.

아우우우!

놈은 높은 절벽에 서서 줄곧 하울링을 해대고 있었으니까. 마치 자기가 원래의 보스인 척 그러고 있었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소리 사이 사이에 미묘한 노이즈가 끼어있다. 완벽히는 흉내내지 못하고 있다.

비탈길을 오르던 윤서현이 물어왔다.

"그래서 저게 대체 뭐예요? 보스를 집어 삼키더니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어요. 저런 몬스터는 저도 처음봐요."

"글쎄요. 저도 처음 봅니다. 대충 때려잡으면 되겠죠."

"와, 굉장한 작전이네요. 우리 둘 다 죽기 딱 좋은 작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족이라고 밝힐 순 없었다.

'지금 당장 마족에 대해 협회에 알리는 건 위험하다.'

지금은 특수한 몬스터라고 말해두면 충분했다.

"삼킨 마수의 능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놈인가보죠. 해야 할 일은 어차피 같습니다. "

쓰러뜨리고 나아갈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녀석에게로 향하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늑대 마수들을 몇 마리 마주쳤지만 금세 물리쳤다.

윤서현의 전투 능력이 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래보여도 저도 조금 있으면 B급 헌터거든요."

"오."

내가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자 윤서현이 뿌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전에 쿠훌렌과의 전투에서 윤서현이 패배한 건 상성 탓도 있었던 것 같다.

'합이 은근히 잘 맞네.'

윤서현의 마법과 내 검술이 합쳐지자 아무리 마기에 의해 강화된 늑대라고 해도 상대가 안됐다.

깨갱! 깨갱!

불쌍한 울음소리를 내며 멀어진다. 재밌는 건 그렇게 사라져서는 동료를 데려온단 것이었다.

『 영혼 포식자가 영혼을 섭취합니다. 현재 영혼의 농도 : 56% 』

몰이 사냥도 이런 몰이 사냥이 없었다. 경험치를 못 받는 게 아쉬울 따름.

'마정석이랑 재료를 놓치는 건 더욱 아쉽다.'

최대한 빨리 성장의 마족에게 가야했다. 녀석이 완전히 소화를 끝내면 이길 방도가 사라진다.

그 거대한 파도를 이길 자신은 아무리 나여도 없다.

『 영혼 포식자가 영혼을 섭취합니다. 현재 영혼의 농도 : 83% 』

처치한 늑대가 늘어날수록 영혼 포식자가 내뿜는 한기가 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영혼은 수월하게 모으겠어.'

성장의 마족은 하울링으로 다른 늑대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모두 집어 삼킨 뒤 영양분으로 삼으려는 거겠지.

'그 점이 무서운 거다.'

다른 존재를 흡수하고 그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 단순하지만 끝없이 강해질 수 있는 능력이었다.

몬스터와 헌터들을 차례차례 집어 삼킨 성장의 마족은 결국 지성을 손에 넣는다. 그가 군단장의 지위를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족들의 위에 군림하던 그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니 처리하려면 지금밖에 없다.'

가장 성장하지 못한 때.

녀석이 막 게이트를 넘어 우리의 세계로 도착했을 때.

바로 지금이 기회였다.

촤아악!

마지막 늑대를 베어내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 영혼 포식자가 영혼을 섭취합니다. 현재 영혼의 농도 : 100% 』

『 영혼 포식자의 특수 기능이 개방됩니다. 』

푸른 빛이 영혼 포식자를 감싸기 시작했다.

13화 성장의 마족(3)

『 영혼 포식자의 특수 기능 '혼령 개방'이 해제됩니다. 』

『 영혼 포식자 : 혼령 개방 』

- 설명 : 몬스터의 영혼이 충분히 모였을 때 사용 가능. 많은 수의 혼령을 검에 둘러 5초간 공격의 위력 및 범위를 대폭 강화 시킨다.

영혼이 100% 충전되고서, 특수 기능이 열렸다.

영혼 포식자의 검날에서 푸른 한기가 묻어 나온다. 그 한기가 내 손을 타고 올랐다.

그러자 혼령 개방을 사용 했을 때의 감각과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굉장한데.'

나는 고개를 들어 절벽 위의 성장의 마족을 바라봤다.

아우우······.

달빛 아래 울부 짖는 커다란 검은 늑대.

녀석의 울음 소리에는 미묘한 잡음이 섞여 있다. 때문에 멀리서 소리를 듣고 다가오던 늑대들도 주변을 맴돌기만 할 뿐 다가가진 않는다.

그럼에도 성장의 마족은 뻔뻔하게 하울링을 반복했다. 충분한 수가 모이면 사냥을 나서겠지.

'그 전에 처치한다.'

검은 슬라임이나 다름없던 성장의 마족은 우두머리 늑대를 삼키고서 그 외형과 힘을 손에 넣었다.

그 크기에서 오는 위압감은 굉장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지금이 가장 놈이 약할 때다.'

놈은 마계에서 이곳으로 넘어와선 우두머리 늑대를 잡아먹었다. 그러나 그 소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녀석이 완벽하게 하울링을 하지 못하는 것도 그 탓이다.

당분간은 파도가 되어 우릴 덮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영혼 포식자의 게이지가 100%가 되기도 했고. 지금보다 녀석을 쓰러뜨리기 좋은 때는 없다.'

위력과 범위를 늘려 주는 특수 기능 '영혼 개방'.

놈에게 대항하기엔 최적의 조건이 갖춰졌다. 특히 놈이 가진 '제약'까지 생각하면 영혼검의 특수 기능 개방은 훌륭한 조커 카드가 된다.

확신에 찬 나와 달리 윤서현 헌터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이었다.

D급 게이트의 난이도를 아득히 넘어선 보스.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그런 그녀가 내게 물었다.

"이길 수 있는 거 맞나요? 아까도 봤지만 마수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것 같은데요. 마치 자연재해 같달까."

"우두머리 늑대를 삼켰으니, 당분간 그런 식으로 움직이진 못할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아는······."

"스킬이요."

윤서현이 더 자세히 물으려던 찰나, 메시지가 떠올랐다.

『 마(魔)를 따르는 자의 권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근처 50m 이내의 생물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

그 불길한 내용에 윤서현의 눈이 커졌다.

"······마를 따르는 자? 제약? 이건요?"

"아주 특수한 몬스터인가 봅니다. 시스템이 직접 경고를 해주는 걸 보니."

"봐봐, 역시 잘 알잖아요!"

"이런 건 센스죠."

윤서현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렇다고 모든 걸 설명해 줄 순 없다. 지금 그녀에게 모든 걸 설명하는 건 시기상조다. 그저 특이한 마수라고 생각하면 충분하다.

마족에 대한 사실은 윤서현을 오히려 위험하게 할 수 있다.

'협회에도 마족이 숨어 있는 걸로 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그걸 원수로 돌려줄 순 없다.

'그나저나 제약이라. 내가 아는 그대로다.'

마족의 제약.

마기를 운용하고, 마(魔)를 다스리는 종족인 그들에게 항상 따라 붙는 일종의 특성이다. 사실상 마족이란 종족 자체가 가지는 특별한 권한이었다.

마족들은 각자 자신의 권역을 소유하고 그곳에 들어 온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성장의 마족의 제약은 성장제한이다.'

녀석의 주변에 있는 생물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성장할 수 없다. 힘을 늘리거나 새로운 능력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단 의미였다.

'지금은 50m 이내의 생물에게 영향을 끼칠 뿐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놈이 강대한 힘을 얻게 되면 그 영향력은 무생물에게도 닿는다.

그렇게 되면 전투 도중 능력을 얻거나, 아이템을 사용해 자신을 강화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역전의 일격이나 숨겨둔 비장의 수 같은 게 통하지 않는다. 녀석은 인류의 사소한 희망이나 일말의 가능성조차 짓밟는 잔혹무도한 마족이었다.

군단장으로 군림하던 성장의 마족은 그만큼 인간들에게 있어 두려움의 대상 그 자체였다.

'지금은 생명체 한정이니까 영혼검의 효과를 발휘하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녀석을 이번에 처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절대로 녀석이 게이트 바깥으로 나가게 만들어선 안된다.

그때, 윤서현이 멈춰섰다.

"······들킨 것 같은데요."

절벽 위에 앉아 있던 검은 늑대가 우리를 발견했다. 커다란 맹수의 동공이 우리를 향한다.

타악.

녀석은 절벽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땅에 착지하는 소리는 없었다.

성장의 마족이 바닥에 내려왔을 때, 우두머리 늑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윤서현 헌터가 중얼거렸다.

"저건 어린 아이잖아요?"

성장의 마족은 어린 아이의 형태로 변해있었다.

그저 형태만 변했을 뿐 그 외견은 완전히 검다. 살아 있는 게 아닌 그저 잘 세공된 공예품의 느낌.

나는 윤서현의 말에 설명을 덧붙였다.

"어린 엘프네요. 우두머리 늑대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흡수했던 대상일겁니다."

"엘프요? 엘프면 그 판타지 같은데 나오는 거 맞죠?"

"네, 맞아요."

어린 엘프의 두 눈이 나를 가만히 응시한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지만 거기까지다. 아직 놈에겐 지능이 없다.

그저 눈 앞의 대상을 죽이고 흡수하려는 본능만이 존재할 뿐.

우우웅······.

성장의 마족 주위로 여러 개의 검은 마력이 응집한다. 그 수는 총 일곱 개.

"설마, 저걸 한 번에 전부 쏘는 건 아니겠죠?"

거기까진 정말로 나도 모른다. 나도 단편적인 정보를 알고 있을 뿐이니까. 녀석이 사용하는 기술 하나하나까지 세세히 알진 못한다.

나는 윤서현 헌터에게 손짓했다.

"일단 피하고 보죠."

저 스킬 자체도 엘프에게서 빼앗은 기술일 거다. 마법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면 대처할 여지가 생긴다.

타앗.

나와 윤서현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스윽.

성장의 마족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투두두두!

동시에 허공에 모여 있던 검은 마력이 미사일처럼 쏘아졌다. 그 속도는 눈으로 쫓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본래대로라면 나같은 레벨 20의 헌터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이다.

그러나.

『 스킬 '인지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나에겐 스킬이 있다.

순간, 내 눈 위로 이채가 서린다.

검은색 마력 탄환이 그리는 궤적이 단숨에 파악 되었다. 각 마력 탄환이 고유한 곡선을 그리며 따로따로 날아온다.

평범하게 움직여선 피할 수도 없는 공격이다.

『 스킬 '민첩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 스킬 '체술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 스킬 '보법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있는 힘껏 땅을 박차고 공중에서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마력 탄환이 아찔하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콰과과광!

나를 비껴 지나간 마력 탄환은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검은 흙이 차례로 솟구쳐 올랐다.

나는 땅에 미끄러지듯 착지했다.

'스킬 4개를 동시에 발휘해야 간신히 피할 정도라는건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기분만큼은 짜릿하다.

네임드 몬스터인 쿠훌렌과 싸울 때와 같은 고양감이 솟아 올랐다. 성장의 마족이 주는 제한만 아니었다면 스킬을 몇 개 습득했을지도 모르겠다.

재능 없는 F급 헌터였던 내가 제대로 된 전투를 하게 되다니.

'그래도 아직 멀었나.'

착용한 메탈 아머의 옆구리가 뜨거웠다. 마력 탄환이 스친 자리였다.

'방어구를 갈아입고 오길 잘했어.'

맨 처음 입었던 허접한 래더 아머였다면 큰 부상으로 이어졌을 거다.

'놈이 마력을 다시 모으기 전에 내 쪽에서 먼저 공격한다.'

파악!

나는 내 검인 영혼 포식자를 손에 쥔 채 포탄처럼 튕겨져 나갔다. 민첩 스킬과 체술, 보법이 동시에 발휘되며 순식간에 놈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우우웅···!

미처 준비되지 못한 검은 마력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마족의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나는 검을 뒤로 크게 젖히며 소리쳤다.

"지금!"

"알겠어요!"

내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땅에서 보랏빛 마력이 들끓었다. 윤서현의 스킬 마력 사슬이었다.

촤르륵!

보라색 마력 사슬이 땅에서 솟아나며 검은 엘프의 양 팔과 다리를 구속했다. 녀석은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어림도 없다.

이대로 내가 가진 최강의 기술을 꽂아 넣는다. 나는 검을 크게 휘두르며 스킬을 발동했다.

'신태양류 일자베기!'

녀석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새하얀 직선이 공간에 새겨졌다.

비물질조차 가르는 필살의 일격이 녀석에게 정확히 들어갔다.

콰아앙!

그 가공할 위력은 녀석을 꿰뚫고 바닥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주인을 잃은 검은 액체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아무리 마족이라 한들 버틸 수 있는 공격이 아니다.

그렇게 공격이 들어갔음을 인지한 순간이었다.

"!"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크르르······.

자그마한 체구의 엘프는 사라졌다. 대신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젠장.'

내가 잘라냈다고 생각한 것은 녀석의 앞발의 일부에 불과했다. 공격을 받는 순간 놈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피해를 최소한 했다.

"묶었는데 갑자기 커지다니 반칙 아니에요?"

눈이 휘둥그레해진 윤서현이 소리친다. 본능적인 행동이었겠지만, 녀석은 속박 기술의 약점을 그대로 이용했다. 움직임은 봉쇄해도 변신은 막지 못하니까.

"조심해요!"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윤서현이 소리쳤다.

쩌억.

놈의 아가리가 벌려졌다. 나따위는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정도의 크기. 그 안으로 검은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도망가야 된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 최대한 거리를 벌리기 위해 이를 악물고 달렸다.

투두두두두!

거대한 늑대의 입에서 아까와 같은 마력 탄환이 쏘아진다. 변신해서도 이전의 능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뭐, 저런 말도 안되는 놈이······!'

마족이 규격 외의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놀랍다. 나는 바닥으로 몸을 던져 슬라이딩했다. 다시 한 번 아슬아슬하게 마력 탄환들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콰과과광!

다행히도 이어지는 폭발에는 휩쓸리지 않았다. 내 몸 위로 투명한 막 하나가 둘러진 덕이다. 윤서현 헌터가 걸어준 배리어였다.

이틈에 다시 한 번 달려들어 공격한다. 땅을 박차고 쏘아져나가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일자베기가 놈에게 적중했다. 검은 액체가 튀어나왔지만 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나며 회피했다. 우두머리 늑대로 변하고 나서부턴 움직임이 한결 단순해졌다.

그래도 내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단 건 변함 없다.

'쳇.'

퍼엉, 퍼엉.

윤서현 헌터의 불세례가 몇 발 정도 날아왔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공격을 받은 부분이 검은 액체가 되어 요동칠 뿐.

이번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검은 늑대의 아가리가 열렸고 다시 내가 도망다녀야 할 차례였다. 쏟아지는 마력 탄환을 피해 열심히 굴러다녔다.

그 짓을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젠장, 소모전이 되면 우리가 불리해.'

성장의 마족이 사용하는 공격은 단순했다. 피할수록 요령이 붙었다. 문제는 내가 녀석에게 줄 수 있는 데미지가 미미하다는 것.

'지금까지 공격이 전부 무의미했던 건 아니야.'

바닥에 떨어진 검은 액체들은 전부 성장의 마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신체의 일부였다. 저걸 다시 흡수하진 못하는 모양이다.

타격은 분명 제대로 먹히고 있다.

'큰 한 방이 없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

거대해진 녀석의 몸뚱이에 비해 내가 잘라내는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공격력은 충분한데 범위가 부족한 게 문제였다.

'진짜 더럽게 쎄네.'

지금이 제일 약할 때라니. 심지어 우두머리를 완벽히 소화하지 못한 게 저 정도였다.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직접 싸워보니 차원이 다르다. 몬스터와 싸운다는 느낌이 안든다. 거대한 벽에 대고 칼질을 하는 기분이다.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윤서현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마력 탄환 대부분이 나한테 집중되었지만, 그녀도 다수의 마법을 썼기에 마나를 대부분 소비했을 거다.

'길게 끌면 우리가 진다.'

일자베기도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다. 시스템적으로 소모되는 능력치는 없지만 내 기력과 체력엔 한계가 있다.

'그러면 방법은 이제 하나다.'

나는 영혼검의 특수 기능을 떠올렸다.

순식간에 공격 범위를 확장하고 위력을 증대 시키는 '영혼 개방'이라면 이 교착 상황을 타개하기엔 충분할 터.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5초.

확실하게 공격을 성공 시키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했다.

나는 윤서현쪽으로 달려가면서 외쳤다. 쏟아지는 마력 탄환을 피하면서 그녀가 있는 곳까지 다가가야만 했다.

"윤서현 헌터!"

"네?"

"저 녀석의 머리 위로 공간이동 할 수 있습니까?"

"가능은 하지만···!"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공간이동에는 대기시간이 존재했다. 한 번 사용하면 적어도 30분 가량은 다시 쓸 수 없다.

콰앙!

내 바로 뒤쪽에서 마력 탄환이 터졌다. 그 충격에 몸이 거세게 밀려났다. 나는 바닥에 미끄러듯 착지했다.

'어차피 오래 끌면 불리하다.'

여기서 결정해야 했다.

"지금!"

나는 곧장 윤서현 헌터에게로 달려나갔다.

"자, 잠깐만요! 너무 막무가내잖아요!"

눈이 휘둥그레 해진 윤서현이 손을 저어보지만, 어차피 모아니면 도다. 성장의 마족이 주변의 늑대들까지 소화를 끝마치면 우리한테 기회는 없다.

우우우웅!

둘로 나뉘어 있던 나와 윤서현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성장의 마족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검은 늑대 주변으로 이전과는 다른 기류가 형성된다. 당장이라도 폭발하듯 발사 될 것 같은 마력.

나는 멈추지 않고 윤서현을 향해 뛰었다.

상황을 파악한 윤서현이 눈을 꽉 감고 소리쳤다.

"진짜 미쳤어!"

그렇게 말했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그녀 또한 자신이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내 손이 윤서현에게 닿는 그 순간.

스스스···.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형광빛으로 반짝이던 수풀과 나무가 차가운 밤공기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단단하게 딛고 서 있던 땅이 사라졌다.

허공.

나와 윤서현은 공중으로 떠올랐다. 잠시뿐이지만 분명하게.

훌륭하다. 윤서현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 뒤부터는 내 손에 달렸다.

내 발 밑으로 성장의 마족이 보였다.

지금 나는 놈의 머리 꼭대기에 떠 있다. 그것이 잠깐 뿐이란 걸 안다. 나는 검을 머리 끝까지 들어 올렸다.

아직도 성장의 마족은 입 안에 머금었던 마기를 쏟아내고 있다. 당연히 녀석이 공격한 방향엔 아무것도 없고.

취이이이!

내 검 영혼 포식자에서 푸른 연기가 미친듯이 치솟는다.

『 영혼 포식자 : '혼령 개방'을 사용합니다. 』

『 일시적으로 공격 범위 및 위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보름달. 그 아래로 달빛을 받은 영혼 포식자가 번뜩였다.

"신(新) 영혼류 초대형 일자베기!"

남은 건 10m에 달하는 높이에서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것 뿐. 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한기가 일직선의 아름다운 궤적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다.

몸집을 줄여도, 몸집을 키워도 일자베기가 녀석을 반드시 이등분한다.

순식간에 밤하늘과 땅을 잇는 직선 하나가 생겨났다.

그렇게 내 검이 바닥에 닿은 순간.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참격이 성장의 마족을 집어 삼켰다. 방대한 양의 검은 액체가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른다.

『 마족 처치 ( 1 / 1 ) 』

『 무재조정 : 한계돌파의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

『 축하드립니다. D등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

『 모든 스킬의 최대 레벨 1 증가합니다! 』

『 이제 레벨당 능력치 증가량이 1.2배가 됩니다! 』

『 인과역전의 상점이 개방됩니다! 』

후두두둑···.

성장의 마족이 몸을 이루고 있던 검은 액체.

그것은 한 줄기의 빗방울이 되어 끊임 없이 주변의 땅을 적셨다.

나는 쏟아져 내리는 검은 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해냈다······."

감격스러웠다.

그도 그럴게 마족에게서 따낸 첫 승리였으니까.

14화 인과역전의 상점(1)

이건 미친 짓이었다. 아니, 정말로 미친 것 같았다.

분명히 미친 짓이었는데, 해냈다.

"하아······. 하아······."

윤서현은 바닥에 주저 앉아 숨을 내쉬었다. 검은 비가 추적 추적 내린다. 맞아도 무해한 비일까? 모르겠다.

멀지 않은 장소에 쓰러진 이지한이 눈에 들어왔다.

마나를 급격히 소모한 탓에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잠시 뿐이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윤서현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사람이었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만년 F급 헌터.

그게 이지한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협회에서 확인한 이지한의 정보에는 이렇다할만한 특이사항이 없었다.

그가 각성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만 빼면 그는 평범한 헌터였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늦어도 반년이면 F급 헌터에서 벗어나 D급이 된다. 특수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은 그랬다.

그런데 저 남자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F급이었다. 게이트 공략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꾸준하게 게이트에 들어 갔단 기록이 남아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능력을 숨기고 있었던거야?'

윤서현이 본 이지한은 결코 F급에 머물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F급 게이트에서 목격한 네임드 몬스터 쿠훌렌과의 결투. 쿠훌렌을 물리친 건 분명 이지한이 맞았다. 그 고블린은 이지한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리고 오늘.

윤서현은 다시 한 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하는 규격 외의 존재.

변칙 게이트에 등장한 새로운 보스 몬스터.

도저히 쓰러뜨릴 수 없을 것 같은 몬스터를 이지한은 단칼에 베어냈다. 한줄기로 이어진 검의 푸른 잔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 공격도 전혀 통하지 않았는데.'

자신도 몇 번이고 파이어볼을 던져봤지만 마수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힐 수 없었다.

마지막에 자신의 공간이동이 도움을 줬다곤 하나, 결국 몬스터를 죽인 건 이지한의 칼날이었다.

무엇보다 그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이지한의 눈.

'미쳤어.'

어떤 미친 사람이 마수의 머리 위로 공간이동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압도적인 화력을 뽐내는 마수를 향해서.

실패하면 뒤가 없는 정신나간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이지한은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공격이 성공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기세에 밀려 공간이동을 했다.

그 결과는······.

어처구니 없게도 대성공이었다.

지금 내리고 있는 검은 비가 바로 그 증거였다.

내색은 안하고 있었지만 윤서현은 나름대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조용히 있으라는 언니의 말을 좀 새겨 들을 걸 후회도 잠깐했었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이지한 덕분이었다.

그런 기적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검을 움켜쥐고 쓰러져있다.

윤서현이 그를 흔들었다.

"일어나요, 자고 있을 시간 없어요."

"으윽, 당분간 못 움직입니다."

확실히 큰 기술이었으니 못 움직일만도 했다.

"아뇨, 그래도 움직여야할 것 같은데······."

윤서현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은빛 늑대들이 그녀와 이지한을 둘러싸듯 포위하고 있었다.

그 수는 어림잡아 50마리 이상.

게이트 내부의 모든 늑대가 모인 걸지도 모른다. 검은 늑대가 쓰러지자, 이때구나 하고 몰려든 모양이었다.

늑대들은 이빨을 드러내며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5분만 버텨주시죠."

"정말······."

뚜껑을 따서 포션을 쭉 들이키자 시원한 청량감이 느껴졌다.

윤서현은 입가에 흘러내리는 포션을 닦으며 말했다.

"그쪽이 무조건 밥 사요. 제일 비싼걸로."

"······. 1분만 버텨도 됩니다."

무조건 버틴다.

윤서현의 손에 푸른 마력이 맺히기 시작했다.

* * *

"나왔다! 감사합니다!"

"사, 살았어요.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정말 감사해요."

변칙 게이트에서 빠져 나온 로만 길드원들이 각자 한마디씩 뱉었다. 내부에서 그만한 일이 있었지만, 바깥은 고요했다. 들어오기 전과 같다.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하지. 실제 공략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까.'

윤서현은 놀랍게도 혼자서 늑대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 시간을 전부 합쳐도 예정된 범위 안이었다.

나는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자연 회복 스킬은 부상에는 특효였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력이나 기력의 회복은 느렸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못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일자베기를 한계까지 늘여 사용한 반동이었다. 위력이 높은만큼 그 대가도 컸다. 그래도 이제는 적당히 회복 되었다.

"이제 됐습니다. 혼자 걸을 수 있습니다."

"그래요?"

로만 길드의 길드장인 고성준에게 방어구를 돌려줘야했다. 마음 같아선 가져가고 싶지만 쓸데없이 고소 당하고 싶진 않았다.

"여기. 잘썼습니다."

"윽······."

너덜너덜 방어구를 받아든 고성준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진짜 잘 쓰긴했다. 마력 탄환을 몇 번씩이나 막아줬으니까.

내가 살려줬다는 자각은 있는지, 고성준도 뭐라 입을 열진 못했다. 게이트 내부에서 목격했던 장면이 상당히 충격적이었을테니.

다른 길드원인 박현주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어요. 만약 두 분이 없었으면 저희끼리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도 싫어요."

나머지 길드원들도 연신 고개를 숙였다. 빳빳하던 고성준의 고개도 슬쩍 내려간다. 머리를 식히고보니 깨달았을 거다.

자신이 길드원 모두를 사지로 몰고 갈 뻔 했단 걸.

윤서현 헌터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협회에서 연락이 갈건데, 그때 잘 좀 말해주세요."

이번 사건은 지난 네임드 몬스터 사건과는 다르다.

변칙 게이트인 걸 미리 파악했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막았다. 로만 길드 중 누구도 심하게 다치거나 죽지 않았다.

윤서현의 말을 잘 새겨들은 박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그런데······."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윤서현 헌터님 말고 다른 분 이름을 미처 못 여쭤봤네요. 혹시 이름이······?"

갑자기 내 이름을 묻는다. 옆에 서 있던 윤서현이 내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뭐, 어때요. 어차피 보고서에 들어갈 건데."

그러니까 그게 곤란하다.

"김갑환입니다."

"아, 김갑환 헌터님! 정말 감사합니다. 절대로 안잊을 거에요."

그냥 생각나는 이름을 댔다. 물론 내 이름은 이지한이다.

윤서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길드원들이 뒷정리를 하기위해 물러서자, 그녀가 내게 물었다.

"진지하게 물을게요. 혹시 수배 중인 빌런이에요? 21세기에 왜 그렇게까지 신상정보를 숨기는거에요? 지난번도 그렇고."

"별로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나라고 숨기고 싶어서 숨기는 게 아니다. 내 잠재력을 인정 받아 대형 길드의 후원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문제는 그러기엔 내 성장이 너무 빠르다는 거다.'

경험치 10만배는 단순히 레벨 뿐 아니라 스킬에도 적용된다. 그 성장세는 단순히 재능으로 치부하기엔 확실히 비정상적이다.

사회에 숨어든 마족 놈의 블랙리스트에 올라는 건 사절이다.

'적어도 날 지킬 힘이 생길 때까지는 적당히 사리자.'

대한민국에서 헌터를 하는 이상, 완전히 나를 숨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괜히 튀어서 좋을 건 없다.

이미 성장의 마족을 쓰러뜨린 시점에서 상당한 활약이긴하다. 그러나 이 정도는 윤서현 선에서 틀어막을 수 있는 정보다.

'성장의 마족을 잡은 것도 문제는 안된다.'

성장의 마족은 다른 마족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최하위 마족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보니 군단장이 된 것 뿐이다. 다른 마족들은 녀석의 존재도 모른다.

"변칙 게이트의 보스도 윤서현 씨가 잡은 걸로 하죠. 제 도움은 부가적인 정도로. 협회에서도 그쪽을 더 선호할테고요."

혹여 나에 대한 기록이 남더라도 괜찮다. 내 뒷조사를 하고 그 점들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내는 정도가 되면 나는 이미 충분히 강해져 있을테니까.

눈을 가늘게 뜬 윤서현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무리 뻔뻔해도 그건 아니죠."

"F급 헌터가 그런 대형 마수를 잡을 리가 없잖습니까."

지난번 사건 때 써먹었던 변명이지만 이게 사실이다. 이제 한등급 올라서 D등급이긴하지만 그게 그거다.

보스를 잡아도 C등급 상위인 윤서현이 잡는 게 자연스럽다.

"부탁 좀 하겠습니다. 대신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그건 원래 사는 거였잖아요."

잠시 고민하던 윤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죠. 대신 협회에서 깊게 추궁하면 저도 거짓말은 못해요."

"아마 관심도 없을겁니다."

나는 윤서현을 지긋이 바라봤다. 그녀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뭐, 덕분에 큰 사고를 하나 막기는 했으니까요. 근데 진짜 이래도 되나 몰라."

"됩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아는거에요. 혹시 아는 사람 중에 협회 사람 있어요?"

나는 대답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있기는 있었다.

회귀 전 협회 이야기를 줄기차게 늘어 놓던 인간이.

'그 사람은 협회가 제대로 굴러가기만 했어도 세계가 멸망할 일은 없었다고 생각했었지.'

협회에서 나를 찾는다해도 둘러댈 거리는 많다. 변칙 게이트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마기 측정만 있는 건 아니니까.

"나중에 연락이나 꼭 해요! 그쪽이 밥 사기로 한 거 잊지 말아요!"

뒤를 돌아선 윤서현이 멀어지며 소리쳤다.

당장은 윤서현을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 같다. 왜인진 몰라도 그녀는 내게 호감을 보이고 있으니까.

일단 성장의 마족에 대한 건 마무리 됐다.

아, 이렇게 돌아가면 안된다.

기껏 공간이동 능력자를 만났는데.

"잠깐!"

"네? 왜요?"

내 부름에 윤서현이 멈춰섰다. 뭔가 기대하는 표정이다. 물론 그 기대는 내가 다음 말을 꺼내자마자 사라졌다.

"용산까지 좀 데려다주시죠."

"······저기요, 이지한씨. 저한테 뭐 맡겨놨어요?"

"싫으면 됐습니다."

턱.

그냥 돌아서려는데 윤서현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중얼거렸다.

"뭐, 싫은 건 아니고요."

* * *

윤서현 덕분에 편하게 아이템 반납을 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서 하루를 꼬박 잠들었다. 큰 부상은 없었지만 몸을 격렬하게 움직인데다 일자 베기의 후유증이 심각한 탓이었다.

그래도 한숨 자고나니 온몸이 상쾌해졌다.

『 스킬 '자연 회복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 초인적인 회복 능력! 』

메시지를 확인하는 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역시 스킬이 사기야.'

자연 회복이 아니었다면 며칠 동안 꼬박 잠만자야 했을 거다.

『 대량의 스킬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 자연 회복 Lv.10 [ 35% ] 』

메시지를 확인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 레벨 옆에 경험치 퍼센티지가 표시되고 있었다.

'맞다, 마족을 처치하고 최대 레벨이 늘어났지.'

덕분에 일반적인 스킬의 최대 레벨인 10 이상으로 경험치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한숨자고 일어난 걸로 35%의 경험치가 찼다. 누가 들으면 기가 막힐만한 성장세긴 했지만, 조금 불만스럽다.

확장된 레벨이여서 그런가? 10만배라는 배율을 감안해도 경험치가 오르는 게 엄청나게 더디다.

'스킬의 레벨이 10을 넘어가면 그 효과가 무지막지 하다고 알고 있긴한데.'

그 성능만큼 경험치를 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걸까.

스킬의 레벨을 최고치 이상으로 올리는 아이템은 엄청난 고가에 거래 된다. 나하고는 연이 없는 이야기였지. 그런 능력을 그냥 얻었으니, 말이 안되는 거긴 하다.

'응?'

무재조정 특성의 위대함을 느끼며, 문득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알림이 떠 있다.

- 부재중 전화(4) : 윤정수

내가 과거에 일했던 헌터 사무소의 소장이었다. 다른 길드의 땜빵을 이유로 전화를 건 것 같다.

'대타는 더 이상 뛸 생각이 없는데······.'

이제부터는 벌이가 달라지는데, 땜빵이나 하면서 푼돈을 모을 생각은 없다.

나는 인벤토리에 몰래 넣어두었던 마정석을 꺼내들었다.

『 경이로운 순도의 마정석(D++) 』

희미한 붉은 빛을 발하는 마정석이었다. 성장의 마족을 잡고 나온 녀석이었다. 내가 괜히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게 아니다.

덕분에 들키지 않고 챙길 수 있었다.

'태생이 D등급 게이트여서 아이템 등급은 좀 아쉽지만. 이게 어디야.'

낮은 등급의 게이트에서 나올 수 있는 마정석의 등급엔 제한이있다. 그건 변칙 게이트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해당 게이트가 품고 있는 마력 수준이 정해져 있어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최소 오백만원은 받지 않을까?'

경이롭다는 수식어가 붙었으니 그 이상의 가격을 기대해 봐도 좋았다. 마정석의 활용처는 무궁무진하지만, 그 순도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니까.

물론 이번 마족 사냥의 결과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성장의 마족을 잡고 나왔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 이제 레벨당 능력치 증가량이 1.2배가 됩니다!

앞으로 레벨을 올리는 동안 능력치가 1.2배로 오른단 의미다. 이건 기초 능력치가 되어 아이템을 착용할 때 폭발적인 힘을 낼 기반이 된다.

'레벨업은 게이트만 구해지면 순식간에 할 수 있으니 문제가 안되지.'

여기에 더해 모든 스킬의 최대 레벨 상승.

- 모든 스킬의 최대 레벨 1 증가합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올리기만 한다면 기댓값이 크다.'

만족스러운 보상이었다.

하지만 진짜 핵심은 따로 있었다.

'처음부터 궁금했다. 이게 대체 뭐일지.'

특성 '무재조정:한계돌파'가 만들어낸 또 다른 기능. 이것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이름으로 아이템을 구매하는 상점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당연하다.

이건 이 세계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획득한 능력일테니까.

- 인과역전의 상점이 개방됩니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상점 기능을 활성화 시켰다.

15화 인과역전의 상점(2) (수정)

인과역전의 상점이 열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상점 이용에 대한 정보였다.

『 인과역전의 상점 : 유의사항 』

1. 이제 레벨을 올릴 수 없을 때, 경험치 대신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2. 포인트를 사용해 상점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3. 환불 및 교환은 불가능합니다.

간단한 내용이었다.

게임에 흔히 나오는 상점 시스템이다. 포인트로 상점에 있는 아이템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

가장 중요한 건 1번이었다.

'레벨업을 할 수 없을 때 경험치 대신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다는 건가.'

설마 포인트도 10만배는 아니겠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포인트라고 명시해 놓은 걸 보면 아닐 듯 싶다.

틱.

유의사항 창의 확인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다른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 인과역전의 상점 - 카테고리 』

- 0. 소모품

'······상점 치고는 꽤 단출한데.'

선택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소모품 뿐이었다. 그래도 숫자가 있는 걸보니 앞으로 새로운 목록이 생길 것 같긴 했다.

'나중에 무기나 장신구가 추가되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내 헌터 등급이 오를 때마다 종류가 추가되는 걸지도 모른다. 일단은 추측이지만.

'중요한 건 소모품에서도 뭘 파냐지.'

바로 떠오르는 건 포션이나 영약이다. 포션은 상처나 마나를 회복 시켜주고, 영약은 영구적으로 능력치를 상승시켜준다. 둘 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물건들이다.

그냥 얻어서 팔기만해도 이득이 된다.

'웬만하면 나쁜 건 없을 것 같다.'

무재조정의 효과로 등장한 상점이니, 보통 이상의 물건이 있으리라 예상된다.

틱.

소모품을 누르자, 그 목록이 떠올랐다.

『 인과역전의 상점 - 소모품 』

- 재물 획득의 물약(일반) : 1/1 ( 무료 )

- 재능 획득의 물약(일반) : 1/1 ( 1000 Point )

목록을 확인하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이거.'

처음보는 아이템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아이템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런 아이템이 있었던가?'

헌터로서의 내 경험이 부족한 건 맞다. F급 헌터를 전전하다 결국 일반인이나 다름 없는 삶을 살아 왔으니까.

하지만 내가 살아오는 동안 보고 들어온 것들은 적지 않다.

멸망 전에는 높은 등급의 헌터가 되고 싶어서 관련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이 두 아이템은 듣도 보도 못했다.

'진짜 처음 듣는 아이템이다.'

어쩌면 당연한걸지도 몰랐다.

인과역전의 상점을 개방한 사람은 이 세계에 나밖에 없을테니까. 이건 내 특성 무재조정 덕분에 생겨난 아이템일지도 몰랐다.

혹시나해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지만 게임 관련 내용만 있을 뿐, 헌터 용품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시스템창을 진지하게 살피던 내 눈에 단어 하나가 들어왔다.

'잠깐, 재물 획득의 물약은 무료라는건가?'

가격 대신 무료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지금 내가 보유한 포인트는 당연히 0 포인트. 시험삼아 하나를 구매 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재물 획득의 물약이라.'

가능하면 재능 물약을 고르고 싶었지만, 무료로 구매할 수 있는 재물 획득의 물약이 유일한 선택지다.

'어차피 공짜로 준다고 하니까 괜히 아낄 필요는 없다.'

마침 돈이 필요하기도 했다.

게이트를 공략하는데에는 많은 돈이 든다. 기본적인 아이템만 해도 그 성능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니.

띠링.

『 재물 획득의 물약(일반)을 구매하셨습니다! 』

『 무료 아이템을 구입하여 포인트를 소모하지 않습니다. 』

'재물이니까 돈 말고 값비싼 물건도 포함되는 거겠지.'

밑천이 제대로 마련된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헌터가 나타났다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란 훌륭한 무기다.

거기에 내가 가진 미래의 지식이 결합된다면?

그 시너지는 상상 이상이 될 거다.

'투자를 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해.'

지금 내 전 재산은 마족을 잡고 나온 마정석을 판다 해도 500만원 정도가 된다. 이걸론 불려 봤자 한계가 있다.

20배를 해도 1억이다.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최상위 헌터에게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생각하면 부족하기 그지없다.

애초에 처음부터 눈덩이가 크면 굴리기도 쉽다.

재물의 물약을 선택하고 잠시 기다리니 상점창에서 빛의 유체가 흘러나왔다.

스르르

유체는 잘록한 호리병의 모습으로 빚어졌다. 그 겉면의 무늬는 고려 청자를 연상시켰다. 꽤 그럴듯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일단은 설명이라도 보고 마셔볼까.'

『 아이템 설명 』

- 이름 : 재물 획득의 물약

- 등급 : 일반

- 효과 : 인과를 역전시켜, 사용자에게 필요한 재물을 얻을 수 있는 경로를 미리 보여줍니다. 효과는 1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인과를 역전 시킨다는 거창한 말이 적혀 있었다. 직관적인 설명은 아니었다. 그래도 먹어서 탈나는 물건이 아니란 건 확인했으니 충분하다.

내게 이득이 된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제 마시자.'

퐁.

마개를 뽑아 주둥이를 입으로 가져다 대고 단숨에 들이켰다. 달콤한 맛의 액체가 목구멍 너머로 흘러들어왔다.

『 재물 획득의 물약을 사용하셨습니다. 』

'······. 뭔가 달라진 건가.'

나는 슥슥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특별히 새로운 감각을 얻었다거나 그런 느낌은 없었다.

그러던 찰나.

묘한 느낌의 푸른 빛이 내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재빨리 그 빛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푸른색 빛은 방바닥에 놓인 스마트폰에 물방울처럼 맺혀 있었다.

'스마트폰······?'

폰을 들어 올리자, 물방울의 크기가 줄어들더니 화면의 한쪽 구석으로 이동했다.

'아, 이걸 누르라는 건가?'

그렇게 몇 번 빛의 물방울을 따라 터치하자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물방울이 가늘게 떨린다. 통화 버튼을 누르라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상대가 영 꺼림칙하다.

- 부재중 전화(4) : 윤정수

헌터 사무소의 윤정수 소장이다. 아까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무시했었던 그 놈이다.

'이 놈한테 다시 전화를 걸라는 건가.'

며칠 전에도 이 인간에게 전화를 받고 땜빵을 한 번 뛰었다.

'그러고 4만 5천원을 받았지.'

회귀 전 나는 이 인간한테 잡혀서 내 헌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F급인 나를 노예 부리듯 착취하던 쓰레기 같은 인간이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그 시간에 노가다를 뛰는 게 나았을텐데.

'사람을 가장 미치게 만드는 게 희망이지. 그 애매한 희망. 조금만 더 하다보면 빌어먹을 F급에서 벗어날거란 어이없는 믿음. 그게 문제였지.'

간절함은 악독한 인간의 먹잇감이 된다. 그 당시의 나는 간절했고, 윤정수는 그걸 이용했다.

'그냥 연을 끊으려고 그랬는데.'

재물 획득의 물약이 누르라고 하니까 누른다. 뭐, 돈이 된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곧 스마트폰의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신호음이 두 번쯤 울렸을까.

윤정수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 땜빵 이 개새끼야! 뭐하고 있다가 이제 전화를 해?

잔뜩 화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친다.

- 헌터하기 싫으면 말을 해, 오늘 안으로 이 바닥 뜨게 해줄테니까. 오갈데 없는 니 새끼 받아준 게 누군데······.

쉼 없이 쏟아지는 개소리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개소리도 이 정도로 하면 예술의 경지로 인정해줘야 하나?

- 뒤지기 싫으면 당장 사무소로 뛰어와라. 하, 이 새끼 진짜.

예전의 나였다면 용서를 빌면서 사무소로 뛰쳐 나갔을 거다. 그땐 윤정수가 헌터로서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길처럼만 보였으니까.

물론 지금의 나는 아니다.

"야, 거기서 딱 기다려."

푸른 물방울이 현관 문에서 위아래로 요동치고 있다.

* * *

30분 뒤.

'헌터의 정수 사무소.'

나는 윤정수가 운영하는 사무소 앞에 서 있었다. 낡은 상가 2층에 걸린 간판이 묘하게 정겹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뭐든지 미화된다는 게 맞는 것 같다.

'일단 오기는 했는데.'

푸른 빛의 물방울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여기서 무슨 돈 나올 데가 있다는 거지?'

그런 의문과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 도착하자 익숙한 문이 보였다. 물방울은 그곳의 문고리에 걸쳐졌다.

끼익.

"땜빵! 이 시발새끼야!"

휘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명패 하나가 날아온다. 나는 고개를 슬쩍 숙였다. 내 머리 바로 위를 지나 벽에 부딪힌 명패가 산산조각이 났다.

'······.'

들어오자마자 물건이 날아왔다. 던진 사람이 누군진 뻔했다. 나는 넓지 않은 사무소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윤정수를 확인했다.

그가 이 사무소의 소장이다. 아니지, 그냥 개새끼다.

"내 연락을 씹어? 하, 니 새끼 때문에 놓친 의뢰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오늘 각오 단단히 해라."

윤정수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는 헌터가 아닌 일반인이다. 그럼에도 그가 내게 한없이 거만히 굴 수 있는데엔 이유가 있다.

내가 F급 밑바닥이란 게 첫번째고.

두번째는 그가 고용하고 있는 두 명의 D급 헌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손 좀 봐줘야겠네."

"이 새끼 표정봐라. 자다 와서 아직도 정신 못차렸나보네."

양측의 검은 소파에 앉아 있던 덩치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뚜두둑.

익숙한 일이라는 듯 손을 풀고 어깨를 돌린다.

"허, 이거 아직도 이러고 서 있네. 눈 안깔아? 형님, 이 새끼 이상한데요? 뭐 잘못먹었나."

내가 가만히 서 있자 덩치 둘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는 명확했다.

회귀 전 나였다면 사무소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엎드려서 빌었을 거다.

'······.'

괜히 떠올리니까 기분이 한층 나빠진다.

윤정수는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래! 내 말이 그거야. 지난번에 전화할 때도 그렇고, 갑자기 애가 이상해졌다니까. 정신 좀 차리게 적당히 손 좀 봐줘라."

"예, 형님."

이거 말만 사무소지 거의 깡패나 다름 없다. 이런데서 버티고 있던 과거의 내가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D급 헌터 두 명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 중 하나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빨 다치기 싫으면 이 꽉 물어라."

그가 다른 쪽의 주먹을 치켜 들었다. 그 단단한 주먹이 내 머리통을 향해 날아오는 순간.

『 스킬 '인지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나는 슬쩍 머리를 숙여 움직여 피했다.

휘익

덩치의 주먹이 허공을 지나갔다. 헛손질을 한 덩치가 고개를 우드득 꺾었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 피해? 이 새끼 좀 붙잡아 봐."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다른 헌터가 내 뒤로 다가왔다.

덥썩.

놈은 내가 옴싹달싹 못하도록 내 양팔을 꽉 붙잡았다.

"이 새끼 정신머리부터 썩어 빠졌네. 그래, 오늘 같은 날에 먼지나게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앞에 있는 덩치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슉슉 쉐도우 복싱을 한다.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안면을 향해 잽을 날렸다.

이 놈들은 착각하고 있다.

내가 아직도 F급 밑바닥인 줄 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 F급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눈 앞의 녀석들과 동일한 D급이다.

애초에 여기 이 두 놈은 제대로 된 헌터가 되기를 포기한 양아치 같은 놈들. D급 밑바닥에서 F급인 나나 다른 헌터들을 괴롭히며 우월감을 느끼는 쓰레기였다.

'기본적인 스펙은 비슷하지만 이 놈들하고 나에겐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건 바로 스킬이다.

D급 초반에서 정체 되어 있는 헌터들이 가진 스킬이라고 해봐야, 일반 스킬 레벨 5를 넘어가지 않는다.

그 가짓수도 정말 많아봐야 3개 정도고.

반면에 내 스킬의 갯수는 12개다. 레벨은 전부 10이고.

상대가 안되는 게 당연하다.

『 스킬 '근력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 스킬 '체술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커헉?!"

내가 몸을 틀자 나를 붙잡은 놈이 그대로 딸려왔다.

퍼억.

덩치가 날린 잽이 그대로 녀석의 안면에 명중했다.

"어, 미안. 이 새끼가······!"

잠시 당황하는 듯 했지만 금세 덩치가 주먹을 크게 휘둘러온다. 그 움직임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느릿하다. 장난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스윽.

나는 그냥 인사를 하듯 상체를 숙였다.

"어엇?!"

날 붙잡은 놈이 그대로 날아가 덩치에게 부딪혔다. 뒤엉킨 둘은 바닥에 쓰러졌다. 덩치가 동료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야, 뭐해? 저거 하나 똑바로 못 잡고!"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저 놈 힘이 왜 이렇게······. "

그래 이상하긴 할 거다.

뚜두둑.

이번에는 내가 손을 풀었다. 그런데 쓰러진 녀석이 일어서려한다.

"어딜."

거창한 동작까지도 필요 없었다. 놈의 복부를 발로 세게 찼다.

"끄윽!"

신음소리가 들려 왔다. 녀석은 고통에 말도 못하고 배를 붙잡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아픈가 싶다.

"으으—-!"

"야, 무슨 엄살이야. 이 새끼 장난치지 말고······."

옆에 나란히 누워 있던 덩치가 눈썹을 일그러뜨린다. 장난이 아니란 건 직접 맞아보면 알거다.

쿵!

덩치 놈의 안면에 잽을 먹여줬다.

"크아악!"

바닥과 뒤통수를 크게 부딪힌 덩치가 머리를 붙잡고 좌우로 데구르르 굴렀다. 얼굴이 시뻘게진 덩치가 나를 노려본다.

"이, 이 새끼가!"

"이 새끼?"

쿵! 쿵! 쿵!

솔직히 복수 같은 거 구차하다고 생각했다. 마족 놈들 쓸어버리는 게 중요하지 이런 놈들따위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랬는데 막상 때리니까 가슴에 있던 십년 묵은 원한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다.

'휴. 이 좋은 걸 참을 뻔했네.'

그래 이왕 온 김에 회귀 전에 맞았던 것까지 때려야겠다.

『 스킬 '기억 탐색 Lv.10'를 사용 합니다. 』

스킬 덕분에 아주 세세하게 생각난다. 이 놈들한테 맞은 게 한 두번이 아니었구만 이거. 한 대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패줘야겠다.

쾅! 쾅! 쾅!

"크헉!"

"다시 말해봐."

"혀, 형님······."

아참, 잊을 뻔했다.

"누가 니 형님인데?"

"크헉! 서, 선생님······!"

쾅.

두 놈 다 골고루 때려야지.

복부를 붙잡고 쓰러진 놈에게도 철저한 응징을 가했다. 괜히 일어나서 무기라도 꺼내들면 곤란해진다.

특히 나중에 복수한다고 설치면 아주 곤란해진다.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도 못하게 전신을 골고루 두드려 팼다.

이윽고 두 헌터가 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손을 대충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억······."

윤정수가 자리에 앉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당황스러울 법도 하다. 믿고 있던 D급 헌터 두 명을 며칠 전까지 F급이었던 헌터가 개박살을 내놨으니.

"너, 너······."

"응. 말해."

"대체, 대체 어떻게······."

당혹감과 좌절감이 교차되어 굳어진 표정이다. 여기서 용서라도 빌면 몇 대 덜 팰까 생각까지 했는데, 녀석은 끝까지 발악했다.

"나, 날 때리면 니 헌터 인생 그대로 끝나는 거야. 이렇게 깽판치고도 니가 괜찮을 것 같아? 이 바닥 좁은 거 알지?"

되도 않는 협박을 한다. 나는 씩 웃었다.

"그래?"

그런 것치고는 푸른빛의 물방울이 녀석의 턱 주변을 미친 듯이 가리킨다. 마치 이곳을 강하게 타격하라는 것처럼.

16화 인과역전의 상점(3)

"죄송······. 진짜 미안합니다······."

내게 한껏 두들겨 맞은 윤정수가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눈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코에선 쌍코피가 흘러내린다. 매 앞에는 장사 없다는 게 맞다.

그 악독한 놈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갑자기 떠오른다.

"······일당에서 택시비를 빼는 건 너무하잖아."

벼룩의 간을 빼먹어야지.

생각난 김에 놈을 몇 대 더 팼다.

"끄어억. 죄송,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교통비까지 꼭 챙기겠습니다······."

"늦었어."

뻐억.

흠씬 두드려 맞은 윤정수가 바닥에 쓰러졌다.

'일단 여기까지.'

아무래도 일반인이다보니 헌터들만큼 팼다간 죽을 것 같아서 적당히 힘조절을 했다.

'그래도 기분은 시원하네.'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다.

아무 생각 없이 팬 건 아니다. 나는 윤정수를 협박할 비밀을 꽤 알고 있다. 그에 밑에서 일했던 시간이 있으니 당연했다.

최하위 헌터들을 갈취해 헌터 전용 대출을 유도하거나, 게이트에 대타를 명목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도록 지시했나거나하는 것들.

'하도 많아서 일일이 생각하기도 힘드네.'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존재했다. 나는 고개 숙인 윤정수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패기는 했는데, 정말 이 녀석한테서 돈 나올 구석이 있는 건가?'

그때, 푸른 물방울이 옆쪽에 있는 책장으로 옮겨갔다. 각종 헌터와 관련된 책들로 빼곡한 책장.

나는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윤정수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책장에 뭐가 있기는 있는가보네.'

푸른 물방울이 책장과 책장 사이의 부분을 파고든다. 자세히 보니 두 개의 책장이 이어져 있는 거였다.

나는 힘을 주어 책장을 양 옆으로 밀어냈다.

"야, 야······. 거, 거기는 왜 보는 건데?"

"보는 건데? 말이 짧다."

살아온 햇수만 봐도 내가 더 많다. 겉보기엔 어리겠지만.

"왜, 왜 보시는 겁니까?"

윤정수가 한껏 비굴한 표정을 짓고서 슬금슬금 내 쪽으로 기어온다. 당황해 하는 걸 보니 확신이 든다.

여기에 뭐가 있다.

그 뭔가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통통

푸른 물방울이 벽면을 두드린다. 나는 그 안내에 따라 벽을 쿵쿵 두드렸다.

그러자 정사각형 모양의 벽면이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오."

이런 걸 숨겨두고 있었구나. 이건 몰랐다.

열린 벽면 안쪽에는 철제 금고가 있었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전자식으로 되어 있다. 마정석을 사용한 종류의 금고였다.

'A급 헌터가 와도 못 부순다는 광고를 들었던 것 같은데.'

비밀번호를 모르면 금고를 열 수 없다. 나는 슬쩍 윤정수를 바라봤다.

"야, 비밀번호 뭐냐?"

"그, 글쎄요? 저도 잘······."

딴청을 피우는 놈의 입가에는 희미한 조소가 걸려 있었다. 몇 대 쥐어패야겠다.

"아악, 아악! 기억이 안나요. 기억이!"

"개소리를 할 거면 좀 성의 있게 해라."

"끄어억······."

아파 죽는 시늉을 하며 꿈틀거린다. 결국 비밀번호는 말하지 않았다.

'더 팬다고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은데.'

이 안에 있는 건 쌓아올린 악행을 집대성한 물건.

이걸 나한테 주느니 여기서 버티는 게 싸게 먹힌다는 계산을 했겠지.

'맞는 말이다.'

여기가 무법지대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윤정수를 죽이거나 고문하는 것까지는 불가능하다.

'쳐맞는 말.'

뻐억, 뻐억.

"왜, 왜 때리는······? 사, 살려주십쇼······."

그래도 끝까지 입을 안 연다.

'어쩐다. 비밀번호는 나도 모르는데.'

윤정수는 금고 자체를 비밀스럽게 숨겨왔다.

내가 그 위치도 몰랐던 마당에 비밀번호를 알 리가 없었다. 기억을 뒤져도 관련된 정보는 없다.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

금고의 번호 위에 있던 푸른 물방울이 가벼운 파동을 내뿜었다.

푸른 파동이 금고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윽고 물방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나는 그 움직임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였다.

삑. 삑. 삑. 삑——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 관한 지식을.

인과를 뛰어 넘어 전해 준다.

스리슬쩍 나를 지켜보던 윤정수의 얼굴이 굳어간다.

"어, 어떻게······?"

비밀번호가 참 길기도 했다. 10자리가 넘는 번호를 실수 없이 누르자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잠깐만, 대체 어떻게 안거야?!"

녀석이 소리치며 내쪽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발로 가볍게 밀쳐냈다. 녀석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져선 눈만 껌뻑였다.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

삐리릭.

듣기 좋은 해제 소리와 함께 금고의 문이 열렸다.

* * *

금고의 문이 열리자 각종 서류 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윤정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 그러면 비밀번호를 알면서 일부러 나를 때린 거야? 이 지독한······."

녀석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괜히 내가 더 나쁜 놈 같잖아.

나는 금고 안의 서류를 전부 꺼내서 찬찬히 살폈다.

'각종 부당 이득들에 관한 장부네.'

헌터들을 착취해서 긁어 모은 것도 있고, 길드를 협박하거나 몰래 아이템을 빼돌려서 판 기록도 있었다. 이 일에 연루된 각종 헌터와 사무소, 길드의 이름도 적혀 있다.

기록을 살피는 나는 새삼 감탄했다.

'이 놈 생각보다 능력있는 쓰레기였구만.'

돈 벌려고 사람들 쥐어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 노력(?)의 결실 덕일까. 마족이 본격적으로 인류를 침공하기 직전, 윤정수는 상당한 부를 축적해서 도피했다.

'······그럴만했네.'

그때였다.

땡그랑.

서류 사이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열쇠였다.

'이건 뭐야.'

나는 그걸 주워서 살폈다.

철로 된 열쇠에 조그마한 보라 마정석이 박혀 있다.

확인을 마치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 아이템 설명 』

- 이름 : 마정석이 박힌 열쇠

- 설명 : C등급 이하의 상자를 개방할 수 있습니다.

'오호.'

여기서 말하는 '상자'란 게이트나 던전에서 나오는 보상 상자를 의미한다. 상자 내부에는 가치 있는 아이템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건 그냥 팔아도 천만 원이다.'

드디어 재물 획득의 물약의 성능을 체감한다.

근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좀 그렇다.

물방울이 시키는대로 하기는 했는데······.

'미친, 이건 그냥 강도잖아.'

사무소에서 쳐들어와선 전부 후드려 패고 금고에서 물건을 털어간다.

물방울 이야기만 빼면 그냥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아니, 물방울 이야기를 껴도 미친놈인 건 변함 없다.

물론 양심의 가책은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윤정수 이 놈 밑에서 구른 시간만 몇 년인데. 이걸론 오히려 부족하다.

열쇠는 인벤토리에 바로 집어 넣었다.

뭔가 더 없나해서 서류를 탈탈 털어봤지만 딱히 나오는 건 없었다. 다만 눈에 띄는 서류 몇 장은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것도 가지고 있어?'

그 중 하나는 낡은 종이에 정체 불명의 문자가 적혀 있었다. 영혼을 매개로한 계약서인 것 같은데 나랑은 관련 없는 물건이다.

'그것보다 이게 대박인데.'

나는 다른 종이 한 장을 집어들었다.

제일 중요한 건 이거였다.

[ 인천 던전 조사 보고서 ]

- 등급 : 최소 D+

- 특이사항 : 다량의 마정석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음, 현재 협회에 등록되지 않았으며 의뢰주의 요청에 따라 숨겨진 상태

- 공략 정보 : 입구에 강력한 정신계 방벽 존재. 최소 C++등급의 '정신 저항'을 소유한 헌터 필요

정신방벽으로 보호되고 있는 던전에 관한 보고서였다.

난이도는 D등급 정도에 마정석이 포함 되어 있단다.

'나혼자 공략하면 제대로 꿀빨 수 있겠는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시스템이 생긴 이후로 이 세계는 크게 변했다. 대표적인 것들이 게이트, 던전, 탑과 같은 것들이다.

'게이트와 달리 던전은 클리어 보상이 따로 준비되어 있다.'

던전은 현실의 지형을 변형시키며 그곳에 마수들의 소굴을 생성한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던전이 꽤 있다.

'게다가 여기는······.'

보고서에 적힌 주소를 살피는 내 눈이 가늘어진다.

아직은 추측이지만, 만약 여기가 내가 알고 있는 던전이라면 굉장한 아이템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

"윤정수, 고맙다."

보통 던전은 보상이 좋기에 대형 길드에서 많이 채가는데, 그걸 미리 발견해선 숨겨 놓다니. 능력 하나는 인정해줘야겠다.

내 고맙다는 말에 윤정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스스슥 기어와선 서류를 보더니 잠시 굳어졌다.

이내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잇는다.

"그, 그건 제가 비싼 돈을 들여서 공략을 준비하고 있던 장소거든요······. 지금 헌터를 수소문하는 차였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D급 헌터는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거기 써있지 않습니까?"

불안한지 목소리가 떨린다. 그도 그럴 게 마정석이 포함된 던전이다. 그 가치는 게이트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던전에는 마정석이 광물의 형태로 산에 내포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대신 마수에게서 마정석이 안 나온다. 전투 없이 그걸 캐내기만해도 이득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고."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녀석의 얼굴에 절망감이 번진다.

그때였다.

딸랑.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열고 나타났다. 수려한 외모가 눈에 띄는 남성이었다.

"?"

회색 정장 바지 위로 새하얀 셔츠와 멜빵. 안경을 쓴 모습이 상당히 지적인 느낌이다.

'응?'

그를 보자 곧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이미지가 완벽히 겹친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는 잠깐 주변을 둘러봤다. 바닥에 널부러진 D급 헌터 두 명, 흠씬 두들겨 맞은 사무소장 그리고 서류를 살피는 헌터 하나.

남자는 순식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이해했단 표정이다.

"아하. 이거 이상한 타이밍에 왔나 보네요."

나에겐 이 남자에 대한 기억이 존재했다. 이따금 찾아와 소장 윤정수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던 인물이었다. 과거에는 몰랐다.

그냥 평범한 손님들 중 하나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확실하게 알겠다. 이 남자는 평범한 손님이 아니다.

'뭐야, 진짜인가?'

인상이나 스타일은 완벽하게 일치한다.

"으음, 아. 있다. 있네."

내가 고민하는 사이 남자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서류로 향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헌터들을 피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기 저는 백묵이라고 하는데요."

그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백묵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혹시 절 아시나요? 저는 당신을 대강 알거든요."

그 이름을 듣는 내 팔에 소름이 돋았다.

알다마다. 모를 리가 없다.

백묵이라는 이름 두 글자는 내 뇌리에 정확히 박혀 있었다. 멸망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게 이상한 이름이었다.

멸망한 세계의 정보상 백묵.

뛰어난 S급 헌터인 동시에 유명 정보 단체의 수장으로 군림하던 존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보 수집력과 행동력으로 유명했지.'

가장 먼저 마족의 침공을 예견하고 물밑에서 착실하게 대비한 괴물이었다. 영웅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불린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랑 자기 잇속을 너무 챙겨서.

그것만 빼면 훌륭한 놈이라는 게 대다수의 평론이었다.

근데 나를 알아?

"재능 없는 F급 헌터. 각성하고도 아무런 스킬도 익히지 못해서 쓰레기 헌터라고 불렸던 분 맞잖아요."

······잘 알긴 한다. 스쳐지나가면서 본 것 말고는 없을텐데.

"아, 오해하지마세요.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 하는 말이니까요."

"미안한데, 남자한테는 관심이 없어서."

내 말에 백묵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본인도 마찬가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멋진 복수네요. 힘을 일부러 숨기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하기야 그렇게까지 재능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죠."

힘을 숨기긴 개뿔.

그는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참고 견딘다라. 말하긴 쉬워도 그게 가능한 인간은 별로 없거든요."

아무래도 내가 사무소에서 깽판을 친 게 그가 보기엔 다 계획이 있는 복수처럼 보였나보다.

"나까지 속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흥미로운 사람이네요, 당신."

"······."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런 말을 했다.

백묵의 시점에서 보면 그리 보일 수도 있긴 했다. 내가 시간을 넘어 회귀했다고는 생각치 못할테니.

그는 품 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건네었다.

"받아두세요. 아직 길드도 없죠? 그게 아니더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세요."

그렇게 말을 마친 백묵의 시선이 윤정수에게로 향했다.

"정수씨, 내가 찾는 게 없다고 왜 거짓말을 했어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히익! 자, 잠깐만! 아냐, 아냐! 이건 무슨 오해가!"

윤정수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발작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나한테 맞을 때보다 더 당황한 기색이다.

우우웅

잠시 사라졌던 푸른 물방울이 특정한 종이 한장에 맺혔다.

'이건?'

아까 내가 봤던 낡은 종이였다. 누군가의 영혼 계약서. 물방울은 이걸 백묵에게 건네라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어차피 해석도 불가능한 수준의 계약서다. 내가 가지고 있어도 쓸모 없다.

나는 그걸 백묵에게 내밀었다.

그가 놀란 눈으로 잠시 날 보더니,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오, 감사합니다. 제가 이게 필요한 줄은 어떻게 아시고."

백묵이 종이를 집어든 그때였다.

"오, 오해라니까!"

별안간 윤정수가 백묵이 가져간 종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뻐억.

백묵이 발을 슬쩍 들어 올리자 윤정수의 두 눈이 휘둥그레해지더니 초점을 잃었다. 녀석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백묵은 그런 윤정수를 가볍게 어깨에 들쳐 업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내게 머물렀다. 호의적인 시선이었다.

"이거 굉장한 도움을 받았네요. 아마 이지한씨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요. 보답하고 싶은데, 지금은 좀 어렵고요."

백묵은 아주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

"1주일 정도 뒤에요. 꼭 그 번호로 연락 줘요."

그는 한쪽 손을 흔들며 문밖으로 사라졌다. 늘어진 윤정수를 데리고.

이걸로 윤정수 뒤처리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려나.

'······.'

푸른 물방울이 백묵의 명함 주위를 빙글 빙글 돈다.

예상했던 것보다 얻은 게 많았다. 특히 백묵의 명함과 호의는 돈 주고도 어떻게 할 수 없는거다.

'이게 전부 물약의 효과 덕분이란건가?'

기이하다 못해 신묘하다.

'이럴 게 아니지.'

나는 스마트폰의 시계를 확인했다.

재물 획득 물약의 지속 시간이 5분 정도 남았다.

나는 서류 뭉치를 몽땅 인벤토리에 집어 넣고 사무실 바깥으로 나섰다. 물약은 최대한 알뜰하게 사용해야지.

'남은 시간 동안 복권이나 사야겠다.'

물방울이 당첨 복권을 알려줄지도 모른다.

17화 솔로 플레이(1)

푸른 물방울은 내 의도를 알아채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 지시를 따라 가니 금세 복권을 파는 가게에 도착했다.

'복권하면 로또지.'

처음보는 금고의 비밀번호까지 맞히는데, 로또 1등 당첨이라고 못할 건 없지 않겠는가.

'으음.'

그런데 로또 용지를 들어도 물방울은 요지부동이였다. 이쪽으로 올 생각을 안 한다.

'로또는 안되는 건가.'

물방울은 즉석 복권이 있는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곧 물약의 효과가 사라질 시간이 된다. 서둘러 즉석 복권을 잡았다.

물방울이 맺혀 있는 복권을 구입해서 긁기 시작했다.

슥슥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으로 복권을 긁자 새겨진 그림이 나타났다. 두 개의 그림이 일치하면 당첨인데······.

'당연히 되겠지.'

재물 획득의 물약이 직접 찍어 준 복권이니까.

그 결과는 당연하게도 당첨.

'와······.'

그 액수에 내 입이 슬쩍 벌어진다.

- 1천만원

내가 놀람과 동시에 메시지 창이 모습을 들러냈다.

『 스킬 [ 행운 Lv.1 ]을 획득합니다. 』

『 초심자의 행운이 깃듭니다. 운이 좋아집니다. 』

'응?'

예상치도 못한 스킬 습득이었다. 심지어 '행운' 스킬의 습득.

이건 재능을 뛰어 넘어 운이 좋은 사람만이 획득할 수 있다.

확률성 아이템에서 좋은 결과를 내거나, 좋은 상황을 만들어 낼 확률이 올라간다.

운 하나로 결정되는 승부도 있는만큼, 그 중요도는 말할 수 없다.

'미쳤네. 미쳤어.'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차오른다.

천 만원에 더해 행운 스킬까지 한 번에 얻었다. 심지어 이렇게 큰 돈을 한 번에 벌어 본 건 처음이었다.

'C등급 열쇠도 얻긴 했지만, 그건 아직 돈이 아니니까.'

실제 돈이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게 기뻤다. 마음이 든든해진다.

앞으로 헌터 생활을 하며 많은 돈을 벌겠지만, 이건 불로소득이기도 했고. 공짜로 천만원을 얻는 느낌이다.

'달다.'

행복감에 잠시 젖어 있던 그때였다.

스스스—

자신의 본분을 끝마친 푸른 물방울이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이런······.'

약간 정(?)이 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손을 들어 올렸지만 녀석은 무심하게도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스읍.

'아쉽군.'

나는 터덜터덜 복권 가게를 걸어 나왔다.

재물 획득의 물약의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집에서 나와 이제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많은 걸 손에 넣었다.

산뜻한 복수, C등급 열쇠, D등급 던전의 위치, 백묵과의 연결고리 그리고 복권으로 얻은 1천만원까지.

'특히 백묵에게 호의를 샀다는 점은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

멸망한 세계의 정보상이라 불렸던 그는 세계가 온전한 지금에도 훌륭한 실력자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인맥 네트워크나 정보력은 대한민국에서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백묵을 활용하면 앞으로의 활동이 한결 수월해지겠어.'

그렇다고 백묵에게 모든 걸 기대할 순 없다. 호의를 얻었다곤 하나 아직 그가 보기에 나는 조금 특이한 헌터일 뿐이니까.

그를 움직이기 위해선 돈과 확실한 이득이 필요하다.

'하여튼 대단한 효과였어.'

인과역전의 상점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상점 창을 다시 열었다.

『 인과역전의 상점 - 소모품 』

- 재물 획득의 물약(일반) : 0/1

- 재능 획득의 물약(일반) : 1/1 ( 1000 Point )

재물 획득 물약의 재고가 0이 되어 있었다.

'다시 재고를 채울 순 없는건가?'

이곳 저곳 터치해봤지만 반응이 없다. 당장에 방법은 없어보였다.

'그래도 아직 재능 획득의 물약이 남아 있으니까.'

그 성능 또한 보통이 아니겠지.

구매를 하려면 포인트를 모아야했다. 포인트는 레벨이 잠겨야 쌓인다.

'지금 내 레벨은 20이고 등급은 D.'

레벨이 잠기려면 C등급인 40레벨이 되어야 한다.

결론은 사냥이었다. 나는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원래는 게이트에 들어가려했지만.'

게이트는 이것저것 귀찮은 게 많다. 길드들이 사전에 예약을 하고 공략하기 때문에 개인이 이용하기 힘들다. 최소 인수 제한 같은 것도 있고.

그러니 사무소를 털고 알아낸 던전의 의미가 더 큰 거다.

'윤정수 덕에 이득 좀 볼 수 있겠어.'

나는 손에 든 D급 던전 보고서의 내용을 살폈다.

'내부 마력은 D등급 수준에 마정석이 잠들어 있을 확률이 크다라.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군.'

이건 헌터 사무소장인 윤정수가 숨겨둔 던전이다. 즉, 협회에 등록되지 않았다.

길드가 없는 내게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여기서 레벨업도 하고, 수련도 같이 하면 되겠다. 안에 있는 마정석은 전부 캐오고.'

안에 있는 걸 전부 캐내기만 한다면 1억원도 우습게 벌 수 있지 않을까. 레벨업과 돈을 동시에 벌 수 있다는 게 좋다.

그러려면 적절한 준비가 필수겠지.

나는 그대로 은행으로 향하려다 다시 복권 가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행운 스킬도 얻었는데, 복권 몇 개 더 긁어봐야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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