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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RENCCFPUNK / Chapter 20: 20

บท 20: 20

#156화. 며칠 걸리지 않는다

#156화. 

일은 벌여놓았으니, 날래게 움직여야 한다. 

"몸은 괜찮습니까?" 

"걱정해 주신 덕분인지, 이제 움직일 만합니다." 

사나흘 간 몸져누워 있던 윌터 하르트. 그의 늙어빠진 몸은 다행히도 호전되어 생기를 되찾았다. 카스트라 뷔에탕이 방공호에 난입한 데 이어 강력한 마력을 쏘아낸 것이 원인이었다. 전 십이제라는 괴물이 다 늙어빠진 노인을 상대로 힘을 내보였으니, 며칠을 쓰러져도 이상치 않았다. 

"한데 딜런님과 전 십이제이신 인형사까지. 로키에서 생존한 군벌들과는 어떤 인연으로 손을 잡으셨—" 

"그런 거 아닙니다. 크게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놀랍게도 부사장님을 공격한 '그 여인' 은 반 컴퍼니와는 연관이 없고 누구인지조차 모릅니다. 그 여인 성명이 인 형사입니까?" 

"그 사실을 모르신다는 게 당최 말이 안 되는 상황······." 

"여튼, 우리의 공식적인 입장은 그렇습니다." 

나는 딜런은 몰라도, 카스트라 뷔에탕의 존재만큼은 끝끝내 부정했다. 딱히 믿지는 않아도 상관없었다. 글로톤 콥은 이제 반 컴퍼니와 운명공동체가 되었으니. 

— 공식적인 입장······그리 말씀하신다면 믿어야지 어쩌겠습니까. 

윌터 하르트는 뷔에탕의 난입 사태 직후 덜컥 겁을 집어먹어 단념했는지, 더는 계약에 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핏대를 올리며 계약을 거부하는 대신 누구보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 그럼 이제 같이 가시지요. 본사는 발할라에 있습니다. 

— 그럽시다. 

나는 기운을 차린 그와 함께 발할라 시티로 떠났다. 

그러고는 메모리칩 기업 '글로톤 콥' 의 본사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칩 제작에 필수라는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을 신속하게 시작했다. 

후우웅! 

사람 몇 명이 겨우 들어갈 법한 비좁고 복잡한 캡슐기기. 푸른 빛이 태양처럼 뿜어져나오는 내부에서 전신에 별 괴상한 장치들을 주렁주렁 매달고는 윌터 하르트에게 보였던 무공과 마법을 펼치고 또 펼쳐냈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조절해 가며. 

치이이이익— 

"······." 

그리고 그 작업은 무려 이틀 내리 반복되었다. 

단전이 비어 가벼워지면 운공을 했고, 여섯 개의 마나회로가 과열되면 식힌 후 다시 기술들을 펼쳐내야 했을 정도로 생각보다 고된 작업이었다. 

그것을 끝낸 뒤에는 어떤 식으로 기운을 운용하고 육체를 움직여야 하는지 같은, 무공구결과 마법의 발현을 위한 수식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익히는 과정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도 빠뜨리지 않고 넣었다. 늙어 죽기 전 깨달음을 남기겠다는 명목으로 동굴 속에 절세비급을 남기는 천하제일인에 빙의한 채로 말이다. 

내가 모든 비급을 다 기록하자, 글로톤 콥이 나섰다. 

그들이 보유한 인공지능을 포함해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내가 기록한 구결과 수식을 넷에 옮겨 입력하고 데이터화시키는 과정에 착수했다. 데이터화 시킨 뒤 메모리칩이라는 저장장치에 심어 봉하면 미래세계판 비급서가 완성된다. 

직접 쥐잡듯 잡아가며 가르침을 내릴 필요도 없이, 그렇게 완성된 비급서인 칩을 대가리 링크포트에 꽂으면 끝. 칩 안에 저장된 데이터베이스는 포트와 이어진 신경망을 통해 뇌에 주입되는 것이다. 

"이런 거였군." 

만약 중원무림이나 몰타왕국 마탑이었다면 목판이나 암석에 글과 그림을 새기거나, 종이에 구결을 적어놓고 도해본을 그려넣어 후대에 전승했을 터인데. 참으로 편한 기능이 아닐 수 없다. 

차르륵— 

나는 그들이 준비해 둔 얼음물에 몸을 집어넣고는, 내가 방금 빠져나온 캡슐을 바라보았다. 바다처럼 푸른 광채 사이로, 증발한 땀이 만들어낸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나온다. 

하하- 

고명한 메가콥의 회장들과 연방의 절대적인 강자들도 저 코딱지만한 캡슐에서 저런 귀찮은 과정을 거쳐 무공과 마법을 메모리칩화 시켰다는 생각에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나에게는 신선하면서도 은근히 좆같은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을 통째로 날려 먹었던 어떤 회사의 배양기 속에서 매일같이 정보를 주입해주던 인공지능 지니가 떠올랐다고 할까. 

"······." 

나는 신경질이 나서 옛날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차가운 얼음욕조에 머리를 끝까지 담가버렸다. 

뇌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쿠르륵···. 

* * * 

하루간 글로톤 콥이 마련해준 곳에서 지냈다. 

글로톤 콥의 직원들은 한 시간마다 나를 찾아와 귀찮은 질문들을 자꾸 던져댔다. 왜 거기서 그 초식이나 수식이 들어가야 하냐느니 하는, 그 목소리들은 어쩐지 인공지능 지니의 음성처럼 귓전을 울렸다. 

나는 놈들의 턱을 돌려버리고 싶은 심정을 잘 참아냈다. 

하기야 저자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이 기술력 좋은 세상에 부모도 없이 태어나, 십 년 가까이 허비했던 내 운을 탓해야지." 

나는 그렇게 신세 한탄을 한 번 하고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윌터 하르트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저 적당히 좋은 무공칩과 마법칩을 생산해 값싼 가격에 시중에 풀어버릴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콧대 높은 무림, 마법계 놈들의 쓸모없는 무력 독점 체제를 조금이나마 희석하는 것이고, 세상이 망하길 무력하게 기다리는 자들도, 역겨운 시체놈들의 침공에 맞서 제 한 몫을 다하게 하는 것. 

그리고 어딘가 숨어있을 기재들을 발견해내는 것. 

'설마 청풍이 같이 재능있는 놈이 세상에 하나 없으랴. 찾으면 회사로 끌고와서 진짜 신공절학들을 가르치면 되겠군.' 

나는 오형검이나 무선대지신공같이, 신공절학이라 불릴만한 것들은 꺼내지도 않았다. 

일단 대성하기 어렵지 않은 흑도사파의 실전적인 무공과, 회로가 없어도 쓸만한 왕국의 저위계 마법만을 고르고 골랐다. 

왜 흑도사파들이 익히던 무공을 택했냐 하면, 빠른 성장에 초점을 두고 몇 대를 거쳐 다듬어진 무공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백도정파 놈들에게 근본도 없는 시정잡배들과 같다며 욕을 먹기 일쑤다. 그러나 그것만큼 익히기 수월하고 허례허식이 없으며 빠른 속도로 강해질 수 있는 무공은 없다. 덧붙여서, 흑도사파가 시정잡배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 화낼 일이 아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백도정파의 무공은 대부분이 매우 훌륭한 절학이나,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경지가 깊어지는 대기만성형이 많아 내 계획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이 세상 무림계는 구파일방을 대가리로 뫼시는 정파의 시대다. 사파의 무공을 익힌 이들은 녹림과 하오문 정도를 제외하면 이미 다 사라졌거나, 있어봐야 성세가 대단치 못하다. 흑도사파는 보통 서로가 제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라, 마땅히 계파를 이끌 종주세력이 없어서 그렇다. 

그렇기에 흑도사파의 무공을 뿌리기가 용이한 상황이다. 중간에 내 임의대로 변형해둔 무공의 초식도 있어서, 비슷한 무공을 쓰는자가 있더라도 큰 상관이 없었다. 

고르고 고른 저위계 마법들은 몰타 왕국 마탑에서 절찬리에 가르치던 전투마법들로, 대륙을 차지한 제국과의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기에 역시나 실전적인 놈들로 골라 뽑았다.

단전과 마나 회로만 있다면, 그리고 멀쩡한 뇌를 가지고 있다면 다 익힐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준비할 것은 하나였다. 

[ 메가콥 여럿을 상대로 싸움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당신이 십이제급의 힘은 가지고 있어야 그들의 압박을 버텨낼 수 있을 겁니다. ] 

부사장 윌터 하르트. 

그 작달막한 노인은 재수 없이 걸려 코를 꿰이긴 했지만, 그래도 꽤 능력있는 기업가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그의 말은 한 치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신공절학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 칩들이 완성되어 팔리기 시작하면 반향이 클 수밖에 없다. 연방 각지에 있는 거대 기업들은 공고히 완성되어 있는 이 사회의 체제를 지키려 할 거다. 사람이 탐욕과 이기심을 놓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그 체제의 지속이 연방의 멸망으로 귀결되어도, 그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끝까지 이기심을 놓지 못할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뒈져본 전생자라 그런 부분에서는 욕심이 없다. 돈욕심과 명예욕 따위는 없는 사람이다. 그저 내 한 몸 지킬 강력한 힘과 지식이면 충분하다. 

재물과 권력을 끌어안고 살아봐야, 죽으면 다 사라질 테니. 

"그래도 오밤중에 암살자를 보내면 좀 무서운데, 앞으로는 방검복을 입고 다녀야겠군." 

다음날, 윌터 하르트가 찾아와 말했다. 

"검법, 보법, 심법 3개의 무공칩과 공격, 보호, 지원계통 마법칩 3개. 총 6개의 메모리칩이 상용화 가능한 완성품으로 생산되기까지 시간이 꽤 필요합니다. 그래도 상용화까지 반년 이상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제 글로톤 콥에서의 일처리가 모두 끝났다. 

나는 그곳을 떠나, 곧장 발할라 산맥의 마탑을 찾아갔다. 

부웅! 

이룩한 경지가 전과 같이 허접하지 않았다. 이제는 발할라 산맥 밑둥에서 차를 잡아타지 않아도 산보를 하듯 가볍게 올라갈 수 있었다. 가끔 심심하면 허공도 날아가면서. 

— 그새 회로를 하나 더 쌓았군. 

—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 굳이 라그나로크에 기업을 세웠다는 것은, 네가 가진 정체불명의 수많은 지식들을 슬슬 세상에 풀어놓겠다는 생각인가? 

— 맞습니다. 

— 일레힌 가문에 연락을 넣어두겠다. 일신의 힘만으로는 헤쳐나갈 수 없는 마찰이 생겨날 것이다. 

마탑 서재에서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를 만나 꽤 긴 담소를 나누었다. 이 세계에서 무선대지신공의 정체와 수준을 아는 것은 직접 신공을 익힌 마탑주 뿐이었다. 그나마 나의 행동방식을 이해하며, 말이 통하는 상대인 것이다. 

그렇게 마탑에서 하루의 시간을 보낸 뒤, 라그나로크 시티로 돌아왔다. 

"······." 

돌아와서 바라본 라그나로크 시티는 밝으면서도 어둑했다. 새벽녘의 어스름을 보며 수련하는 그 맛이 있는 건데, 가짜 불빛들만 가득하니 약간 아쉬웠다. 

그리고 아쉬운 김에, 이제는 다음 벽을 뚫고 나갈 시점이다. 

명색이 전생자인데, 청풍이 놈보다 뒤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그 길로 카스트라 뷔에탕을 찾아갔다. 뷔에탕의 교접인형은 호텔의 한 층 전체를 대여해 사용하고 있었다. 

뷔에탕이 쓰는 플로어에 도착하자. 

활짝 열린 호텔 방문 안으로, 웬 교태로운 음성이 흘러나와 곧장 귓전을 때렸다. 

아— 

지금 앞에 있는 뷔에탕의 교접인형은 나신이었다. 동일하게 알몸인 어떤 사내와 침대 위에서 정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사내는 마력에 홀렸는지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아마도 이 호텔의 사장이었던가. 

난 그들의 정사를 신경쓰지 않고 문을 열어둔 채 정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뷔에탕의 교접인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으로 나왔다. 호텔 가운을 걸치고 있었으며, 호텔 이름이 박힌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였다. 

후우— 

"뭐, 할 말 있어? 들어와서 같이 할래?" 

뷔에탕이 달뜬 한숨과 함께 첫 연기를 뿜어냈다. 나는 뜸 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당신의 인형들을 빌려 내 수련에 사용하고 싶다. 최대한 수가 많았으면 좋겠는데, 혹시 로키 사태때 잃은 인형들이 많아 빌려주기 힘든가?" 

스아아아악! 

순간, 거센 광풍이 내 볼을 훑고 지나갔다. 

풍압에 귀가 찢겨져 나갈 듯한 통증이 일었다. 뷔에탕은 이런 당돌한 제안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더니, 이내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풋, 아이들은 충분하고 어렵지도 않아. 언제까지 빌려줄까?" 

스윽. 

나는 뷔에탕의 물음에 허리춤의 검집을 끌렀다. 그리고는 삽시간에 검집에 기운을 주입해 강맹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서걱! 

검집에서 뻗어나간 검강줄기가 천장에 숨어있던 인형의 턱을 베고 지나갔다. 한 치만 옆으로 그었어도 두 토막을 냈을 것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뷔에탕의 물음에 대답했다. 

"9레벨까지. 며칠 걸리지 않는다."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완전한 9레벨의 경지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157화. 새로운 경지

#157화.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어느 지하 방공호. 

인형사, 뷔에탕은 부탁한지 정확히 십 분여만에 일백의 인형을 집결시켰다. 한 기마다 실로 무식하게 마력을 때려박아 각각이 최소 7레벨 이상 되는 듯했고, 8레벨급의 인형도 넉넉히 섞여 있었다. 

자그마치 일백 기나 되는 꼭두각시 인형이 방공호를 가득 메웠다. 사람이 발 하나 디딜 틈도 보이지 않았다. 인형들의 숨구멍을 통해 토해지는 마력만으로도, 누군가 내 앞에 서서 뺨을 모질게 후려치는 것만 같았다. 

나의 수련은 일 초의 지체도 없이 시작되었다. 

— 네 입으로 며칠 안 걸린다고 했으니까. 다른 소리 할 거 없이 바로 시작할까? 

마치 그 광오함을 손봐주겠다는 듯. 

예상대로, 뷔에탕의 그 싸늘한 한 마디에 온갖 인형이 사방을 점하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짐승처럼 사나운 기세로 뻗어나간 마력은 연신 벽면을 때리며 충격파를 울렸다. 

검집을 끌렀다. 

콰앙! 

전투의 시초에는 일백 기라도 거뜬히 막아낼 만했다. 

이제는 상대가 전(前) 십이제이며 전력을 담아 공격한다 해도, 일격에 쓰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지난 삼 년간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작한지 삼십 분, 한 시간이 지나자 그들의 공세를 막기가 점점 버거워졌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뷔에탕의 압박감은 거셌다. 방공호 내부에 기이한 마력이 진득하게 내려 앉은탓에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아둔 것 같았다. 

더욱이, 나는 인형들을 죽일 기회가 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 강자존의 세상. 나보다도 더한 강자 앞에서 감히 오지랖을 부릴 사안은 아니나, 뷔에탕이 저 불쌍한 사내들에게 허락받아 조종하고 있을 리는 없으니, 오늘따라 내 손속은 거칠지 못했다. 

"뭐야." 

뷔에탕도 그것을 알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눈살이 찌푸려진 것인지, 초승달처럼 휜 것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슨 수련을 하겠다고? 나야 빌어먹을 연방이 뒤집어지면 두 손 들고 환영하는 주의지만, 꼴을 보니 네가 정말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네." 

그것은 실로 내 속이 뒤집어지는 소리였다. 연방이 뒤집히는 사태만을 바라고 있는 작자가, 사내의 마음가짐을 운운하는 것이 참으로 황당했다. 그러나 저것도 수련의 일종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약간 편해졌다. 

우드득! 

나는 흉악한 마력을 품고 달려드는 인형들을 떼어내며 수련을 지속했다. 

뷔에탕의 인형들은 시체와도 그 결이 비슷했다. 

쐐애애액! 

인간이라면 크게 다칠까 본능적으로 주춤할 공격에도, 전혀 몸을 사리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접근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게다가 뷔에탕의 저주마법이 전투 중인 나의 정신을 스멀스멀 침범하려 드니,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그대로 당해 쓰러질 것이었다. 

콰광! 

둔기를 들고 덤벼드는 한 인형을 멀찍이 튕겨내자, 그 빈자리를 또다른 인형이 삽시간에 메꾸어 짓쳐들어왔다. 튕겨낸 인형에선 한낱 비명조차 없었다. 인의 장벽으로 빠져나갈 구석이 없으니, 일단 막아내며 기회를 엿보았다. 나중에 처량한 꼴로 죽어버리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처절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신으로 기운을 운용해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쉬지않고 계속해서 달궜다. 타오르는 아궁이에 집어넣은 부지깽이 쇠막대처럼 말이다. 

그 후로, 시간이 꽤 흘렀다. 

쾅! 

나는 아직도 먹이를 본 개미처럼 끝없이 달려드는 인형들을 쳐내고 또 쳐내고 있다. 이제는 숨이 턱끝을 지나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식은땀과 체액이 비 오듯 쏟아진다. 이리 격렬하게 몸을 움직여본 게 언제였던가? 

푸욱! 

"······." 

그때, 8레벨급 인형이 쥔 날붙이가 마나 보호막을 뚫고 들어와 옆구리를 깊게 찔렀다. 

달아오른 피가 관통된 환부로 새어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뷔에탕은 이번에도 자신의 마력을 거두지 않았다. 대신 의문이 어려있는 시선만 슬쩍 던졌을 뿐이다. 

— ? 

지금 나의 경지라면 많이 지쳤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는 단순한 공격이었다. 기감으로 방공호 내부의 지형지물과 인형들이 풍기는 마력을 속속들이 감지하고 있다. 아닌말로, 마나 보호막에 마력만 조금 더했어도 능히 막아냈을 것이다. 

— ······무슨 수련이 이 따위인지 모르겠네? 자신 있으면 계속 그렇게 해보든가. 

그러나 내가 다쳐도 괜찮다고 진작에 언질을 주었으므로, 뷔에탕은 구태여 마력을 거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교접인형을 너머의 무심한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수련 상대로 뷔에탕을 택하길 특히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이리 만신창이가 된 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일단 손을 멈추었을 것이다. 

[ 네놈은 그냥 더 맞아야 한다. 죽기 딱 직전까지. ] 

······나의 스승 정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푸욱! 

뷔에탕의 다음 공격은, 약 한 시간쯤 지난 뒤 내 어깻죽지에 적중했다. 

푸욱! 

다음 공격. 

푸욱! 

다음 공격. 

푸욱! 

또 다음 공격 역시도. 

나의 육신 어딘가를 깊고 날카롭게 찔렀다. 

결국. 

"후우······." 

나는 수련을 시작한지 반나절만에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를 악물고 진기를 운용해야 겨우 쫓아오는 인형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도망치다가 죽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약 한나절 만에 온몸이 피에 절어 피투성이가 되었다. 볼이 찢어져 입에 고여있던 피가 주르륵 새어나왔다. 그럼에도 쫓아오는 뷔에탕의 인형들은 살기짙은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힘을 내서 더 빠르게 발을 움직여야했다. 

······이후로 나는 하루를 버텼고, 그 대가로 한쪽 팔을 완전히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방공호는 아직 무너져내리지 않았다. 참 튼튼하게 지은 듯싶다. 

푹- 푹- 

······나는 이틀 낮까지 너끈히 버텨냈고, 양팔은 물론 한쪽 다리도 절게 되었다. 그래도 경공을 허투루 익히지 않아 깽깽이발로 뛰어다니며 인형들의 공격을 회피했다. 

푸욱! 

······하지만 나는 이틀 밤이 되는 날, 두 다리를 모두 절게 되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깽깽이 발로 펼치는 경공으로는 한계가 있던 탓이다. 슬슬 영육이 극한까지 내몰리기 시작했다. 

푸욱. 

······사흘 아침이 되는 날, 공격을 너무 당하여 사지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한쪽 눈마저도 어디에 긁혔는지 자꾸 감기는 것이 위태했다. 그때부터는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익숙하니까.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던 내공과 회로를 혹사하여 방공호를 제집처럼 뛰어다녔다. 가끔은 기어다니고, 가끔은 걸어다녔다. 

아침에는 뛰고, 점심에는 걷고, 저녁에는 기고. 

그렇게,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 또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눈꺼풀조차 뜨지 못하는 초주검 상태가 되었고, 수련한 지 나흘째 아침을 맞았다. 

"······." 

사방이 어두우므로 아침인지 저녁인지는 정확치 않았다. 세상이 어두운 게 아니라 내 눈꺼풀이 감겨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제야 모든 힘을 다 잃었다. 그래. 확실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털썩. 

거기에 더해 무릎관절이 부서져 무릎을 꿇을 수도 없는 관계로, 산등성이처럼 늘어서있는 인형들을 내려다본 채 억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대강 허리만 세운 것을 가부좌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모를 일이다. 

— ······. 

방공호의 중간에서 시선이 교차한다. 

카스트라 뷔에탕의 안광은 늘 그렇듯 여전히 침침했다. 

하지만 지난 나흘간 뷔에탕도 무언가를 느낀 것이 있는지, 아니면 정말 내 입에서 그만하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멈출 생각이 없는 것인지. 

쾅! 

백여 기의 인형들은 가차없이 땅을 박찼다. 방공호의 부서진 천장 사이에 가부좌를 튼 나를 향해, 살기짙은 마력들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지칠 기색이 없는, 시커먼 인영이 코 앞까지 들이닥쳐 날붙이를 들이민다. 

이제 조금이라도 피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입에 고인 침을 질질 흘리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후우우우우······ 

폐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숨이 그대로 새어나갔다. 

그래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점점 감기려던 눈을 번쩍 떴다. 

딱 죽기 직전인데도, 내 찢어진 입가에는 오히려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되······었다." 

* * * 

다섯 번의 삶. 

나는 그 중 이번 삶에서, 가장 드높은 경지에 발을 들였다. 

정기신의 부조화로 제 수준을 완전히 낼 수 없어 강제로 막아두었으나, 어릴 적부터 임독양맥을 타통해 상단전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으며. 

직전 생의 대륙에서 아쉽게 오르지 못했던 6위계까지 끝끝내 달성했다. 그간 로라 마르티네즈의 육체 재구축 등 여러 일들이 있었을뿐더러, 과거에 한 번 걸어보았던 길이니만큼 이리도 빠르게 올라선 것이다. 

그런데. 

마나회로를 하나 더 쌓아 6위계를 달성한 이후였다. 

'···?' 

갑자기, 심장과 단전 부근에서 알 수 없는 온기가 감돌았다. 

심장을 휘도는 6개의 마나회로와 내공이 그득히 쌓여있는 단전. 그 두 곳에서 공명이라도 하듯 한날한시에 그러했다. 

괴상한 감각이었으며 전생에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상단전을 제외한 무공의 수위는 화경 직전의 8레벨 끝자락, 마법은 6위계를 달성했으니 8레벨의 초입. 

'지금부터는 전생의 기억을 등대삼아 갈 수 없겠구나.' 

이제 무공과 마법 양쪽에서 전생에 이뤄보았던 경지를 훌쩍 뛰어넘었으므로, 무슨 일인지 곧장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이 세계에 마나회로와 단전을 모두 지니고 있는 자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나처럼 전생의 지식이 없다면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므로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나에만 집중해 갈고 닦아도 일정 경지에 오르기가 지극히 빠듯하여, 돌연변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게다가 양쪽을 8레벨 이상의 경지에 올려놓은 이는 연방에 내가 유일할 것이니, 이러한 경험을 겪어본 자들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있을 리가 없었다. 

'무언가 일이 생긴다면, 그때 대응하는 수밖에.' 

그렇게 나의 육신은, 6위계를 달성한 후 며칠 주기로 단전과 마나회로가 동시에 달아오르다가 식기를 반복했다. 어떨 때는 서로의 기운이 더 강한지 힘겨루기를 하는 듯했다. 

생소한 경험. 

다행히도 육신에 큰 문제나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저 바닷물의 만조와 간조 때처럼, 점차 달아오르다 식어 멀쩡해지기를 반복하니 답답함과 호기심이 크게 일었을 뿐. 

그런데, 기다리던 변화는 뜻밖의 장소에서 겪게 되었다. 

글로톤 콥. 

칩의 데이터를 제작하기 위해 간 그곳. 푸른 광채가 흘러나오는 캡슐기기 내부에서 무공과 마법을 이틀 내리 펼쳐낸 뒤, 차가운 얼음욕조에 몸을 머리 끝까지 담갔을 때. 

뇌가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 들더니. 

돌연. 

쾅! 

'!' 

하단전과 심장 사이를 꽉꽉 틀어막아 두었던, 내가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단전과 마나회로를 나누던, 어떠한 경계가 갑작스레 허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 일이던가? 

찰나의 순간, 나뉜 경계가 넓게 벌어지며 양쪽에서 터져나온 기운이 서로의 그릇으로 콸콸 흘러 들어갔다. 마치 임독양맥을 타통해 상단전을 열어젖혔던 그때처럼. 

마나 회로를 여섯 개나 휘감은 심장과 내공을 담은 단전이 구슬꿰듯 이어진 상황. 따로 놀아야 할 놈들이 견우와 직녀도 아니고 저들끼리 오작교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건 내버려두면 위험하다. 주화입마와 다름없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이 날뛰는 기운은 언제 독이 되어 돌아올지 모르는 위험요소다. 허나 내가 대처하기 위해 소주천을 하며 전신경맥으로 뻗친 기운을 회수하려 할수록, 벌어진 경계는 점점 더 넓어져만 갔다. 

그러다 종래에는, 하나의 큰 통로가 생겨나고 말았다. 애초부터 막을 수 없던 것이다. 

그 와중에 조금 더 강한 기운을 담은 하단전이, 마나회로가 있는 심장 쪽으로 끝없이 제가 가진 기운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듯 하단전부터 심장까지 이어진 기운의 흐름은, 내가 임시로 막아둔 상단전까지 역행을 거듭하며 나아가려 했다. 

'이 흐름의 목적지는 임독양맥의 타통인가?' 

그러나 내쪽은 상단전이 진작에 열려있었다. 

게다가 단전과 심장에 이어 상단전까지 기운의 흐름이 치밀어오른 뒤에도 계속 멈추지 않는다면, 그 다음으로 무너뜨릴 경계는 어디란 말인가? 

있어봐야 몸 바깥으로 흘러나갈 일밖에 더 없지 않겠나. 

그리된다면 나의 최후는 주화입마로 인한 죽음이 분명할 것이다. 

나는 그쯤 되어,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을 찾았다. 

'육체의 그릇이 작아 두 힘의 양립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8레벨의 수준으로 감당하기에 마나회로 6개와 막대한 몇 갑자의 내공을 담아둔 단전은 벅차겠어. 사람 둘을 합쳐놓은 꼴이니.' 

그간 운공을 통해 들끓는 기운을 가라앉혀 왔으나, 세상의 섭리와도 같은 커다란 격류를 인간의 몸으로 계속 막아설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우선 날뛰는 기운들을 통제해 잠시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글로톤 콥에서의 일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를 찾아갔다. 

과거 내게 무선대지신공을 배워 익힌 덕에 목숨을 부지한 일레힌 포이체카.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되려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라면 무언가를 일깨워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 새로운 형태의 주화입마인 듯합니다. 살고 싶다면 어느 한 쪽을 선택해 폐하는 방법이 있으나,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 

[ 흐음. 과거 나의 마나회로가 망가졌을 때, 네게 받은 무선대지신공을 익혀 단전을 만들어 살아남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나? ] 

[ 생생히 기억합니다. ] 

[ 그렇다면 그때 나누었던 대화도 기억나겠군. 무선대지신공(舞仙大地神功)은 나약한 근골과 정신을 탈태시켜주는 효과가 있다고 너의 스승이 그랬다지. ] 

[ 예. 그랬지요. ] 

[ 맞는 말이다. 네게 그 심공을 배워 익히기 전에는, 나의 성정이 불같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발할라 시티에 퍼질 대로 퍼져있었지. 하지만 지금 내 성정을 보아라. 불같아 보이나? ] 

[ 죽었다 살아나면 사람이 바뀐다지 않습니까. ] 

[ 웃기는 소리. 이건 네 심공이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9레벨 마법사의 회로가 모두 재건될 때까지 그 막대한 기운을 버텨내는 심법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때는 목숨이 귀해 네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지만, 과연 무당과 소림이 가진 절학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리할 수만 있다면 이미 연방은 그들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겠나. ] 

[ ······. ] 

그렇게. 

나는 마탑주와 하루 간의 담소를 나누었다. 

형용할 수 없으나 분명 어떠한 도움이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번뇌와도 같은 관조를 거듭했다. 무아의 과정에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들까지 되짚어가며 헤집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하기로,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조화로구나.' 

무선대지신공(舞仙大地神功)의 진정한 공능은 조화(調和)라고. 

'필시 조화다. 다만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 뿐.' 

숨겨져있던 무리(武理)를 깨우치니, 무학 자체가 새로이 정립된다. 

근골과 정신을 탈태시켜주는 것은 본래의 공능이 아니라, 절세의 심법으로 세상의 탁기를 거르고 정순한 내력만을 쌓으니 자연히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이는 것만 보니, 대단한 천하무적의 공능으로 느껴졌던 것이었다고. 

누군가가 그리 말하고 있다. 

내가 몇 번의 생과 여러 일들을 되짚어 다시금 이해한 무선대지신공은, 정신이 나가버린 자가 세상과 다시 조화되기 위하여 창안한 것이었다. 

정신나간 자들을 다시금 정도의 궤에 올려 걷게하고, 세상과 다시금 조화시키기 위한 신공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진 신공이다. 

절강성의 삼류흑도에 불과했던 나의 스승이 화경이라는 절대의 경지에 오른 뒤, 홰까닥 돌아버린 어린 아해에게 제 손을 내밀었듯 말이다. 

왜. 

그 양반이 왜 그러했나.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미친놈 주제에, 사내는 무얼 찾으려 했는가. 

문득, 스승이 내게 온갖 독을 처먹였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 극음초(極陰草)다. 대단한 천년설삼도 원래는 음의 기운이 가득한 독약일 뿐이지. 허나 공력을 끌어올려 양기를 불어넣어 주면 음양(陰陽)이 조화되어 천고의 영약이 되는 것이다. ] 

[ 무선대지신공(舞仙大地神功)을 익힌 네 놈이 고작 극음초 따위에 패한다면 살 이유가 없다. ] 

나는 본능적으로 무선대지신공의 구결을 읊으며 생각했다. 정신이 나가버린 그때의 내가 극음초라면, 스승이 날 붙잡아 불어넣어준 무학들은 나의 정신머리를 고쳐줄 극양기가 아닐까. 

그렇다면 조화의 결과물인 내가, 천고를 논할 사내가 될 수 있겠는가. 

"······." 

나는 우주의 숨겨진 비밀이라도 깨달은 양, 방방 떠있기가 싫어 지그시 고개만 끄덕였다. 뒤이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스승을 향해 뇌까렸다. 성대가 잘렸는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뻐끔대며 말했다. 

'혹, 정신 나간 나를 세상과 어울리는 놈으로 만들어보려 하셨습니까? 아니면 스승도 나처럼 이러했습니까.' 

개보다 못한 놈도 두들겨 사람으로 만드는 인간이었으니, 그것은 사실일지도. 

쉬이 형용할 수 없는 무리를 새삼 깨우치니, 통제 불가한 독으로 느껴졌던 기운의 충돌과 덤벼드는 뷔에탕의 인형들이 그저 온화한 훈풍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 

나흘간 피를 많이 흘렸다. 

사지는 부상을 입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죽어가는 몸이라, 생을 향한 의지가 남아있다 해도 깃들 길이 없다. 그 덕분에 눈앞에 아른거릴 만큼 떠오른다. 광인의 매질에는 미치지 못해도, 이 정도면 옛 생각을 하기에 적당했다. 

'주화입마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단전과 회로를 막아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신공은 이미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었구나. 매질이 극음초고, 신공이 양기라.' 

나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뒤, 끝내 틀어막고 있던 기운을 놓아버렸다. 의심과 의지를 제하고, 모든 흐름을 새로이 깨우친 신공의 공능에 맡겼다. 

그러자. 

"······." 

잠시 세상이 조용해지나 싶더니. 

스아아아아······. 

갑자기 전율적인 감각이 일며, 대기가 울렁이다 이지러졌다. 서릿발처럼 형형하기만 했던 인형들의 기세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서서히 감기던 눈을 부릅뜬 순간. 

화아아아아악—!!! 

털썩. 털썩. 털썩. 

눈앞까지 달려들던 뷔에탕의 인형들이 실 끊어진 듯 풀썩 쓰러지고, 장내를 메우고 있던 모든 기(氣)가 나의 피투성이가 된 육신으로 빨려들어왔다. 

마지막까지 교접인형의 아름다운 눈을 차지하던, 뷔에탕의 칙칙한 적안도 어느새 사라지고 그 안쪽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만이 남았다. 

내 심장과 단전으로 빨려 들어온 기운은 전신을 휘돌다가, 결국 한곳으로 합류하여 활짝 열려버린 상단전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만약 마법사의 심장인 마나 회로를 중단전으로 본다면······' 

그렇게 하, 중, 상단전이 이지러이 조화를 이룬다면. 

필시, 새로운 경지가 열리리라. 

뿌드드득-

#158화. 조화

#158화. 

찰나의 순간, 환한 섬광이 요란하게 번뜩였다. 

푸스스— 

그에 공유하던 감각이 무(無)로 흩어지며 탈력감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인형의 조종에 집중했는지, 몽롱해진 정신을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 

카스트라 뷔에탕.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토해냈다. 

방공호로 보내 놓았던 인형들과의 연결이 외력의 방해로 끊어져버렸다. 

···그것도 무려 백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공들여 주입해둔 마력의 주도권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고유한 마력에 담아둔 뷔에탕의 의지 역시도 말끔히 소멸했다. 

아무리 인형과 본신이 떨어져 있었다지만, 말처럼 쉽게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바꿔 말하자면, 8레벨 따위가 낼 수 있는 힘이 아니라는 뜻. 

파르르- 

"······." 

뷔에탕은 탁자에 놓여있던 와인잔을 잡았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의식적으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떨림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추었다. 

그렇게. 

오랜만의 충격으로 잠시간 멍해져 얼이 빠져있던 뷔에탕은, 불현듯 미소 짓고는 나른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그녀는 어느새 퍽 흡족한 얼굴로 변해있었다. 

"젊은 한때의 치기나 오만인 줄 알았는데." 

아마도··· 

방금 전의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나약했던 남자가, 이제 정말 9레벨이라니." 

현재도 연방 전역에 명성이 퍼져있는 것은 물론이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멋대로 떠들기 좋아하는 언론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수없이 오르내리고 있는 수준인데— 

벌써, 9레벨의 반열까지 올라오면 어쩌자는 건지. 

"나도 못 믿겠는데, 제대로 알려지면 아주 난리가 나겠어." 

9레벨의 경지를 틀어막고 있는 어떠한 벽과 한계. 그건 건물 담벼락처럼 자기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8레벨에서 9레벨의 반열에 오르는 과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누구에게나 복잡하고 난해하다. 평범한 연방 주민이 까마득한 시티장벽을 맨손으로 기어올라 등반하는 난이도라고 할까. 

사실 그것보다도 몇십 배는 뛰어넘기 어려울 거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래서 9레벨의 영역에 이른 자들은 대부분 천재의 범주에 들어가있던 자들이다. 대단한 천재, 기재라고 불리는 이들 중에서도 내로라하는 재능과 자질을 지닌 이들이 평생을 바쳐 갈고닦아야만 허락되는 경지. 

과거보다 에센스라는 영약이 흔해져서, 그 문턱이 조금 낮아지긴 했지만······9레벨의 문턱은 그럼에도 굉장히 드높다. 

그런데 저 남자는 최근 명성을 꽤 날린 덕에 초월자들이 우습게 보이는지, 며칠내로 9레벨의 경지에 오르겠다는 광오하고 거만한 말을 지껄였다. 

8레벨 후반쯤이 되면 진정한 벽에 부딪히기 전 자신감이 넘치기 마련이다. 뭐든 뛰어넘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감히 자만한다. 그 거대한 벽 앞에서 십중팔구는 무너져 좌절하는데도. 

그렇기에 한 번쯤 과하게 자신감을 내비치는 줄 알았다. 

어찌 보면 불손하면서 우습기도. 또 다른 방면으로는······귀엽기도. 

아무튼 정확히 뭘 하는지는 모르겠어도, 그 남자가 원하는 대로 어울려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대로된 수련은 성립되지 않았다. 

그래도 힘을 얻기위해 인간임을 포기하는 등신들이 넘치는 세상.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얕은 영감이나마 얻고 싶어 하는 발버둥이 나름 봐줄만했다. 

그런데 나흘째가 되는 날. 

어느 순간, 가공할 위력의 폭풍이 바닥부터 들고 일어나 위태롭던 방공호를 끝내 무너뜨렸다. 분명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지금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온 생명을 불사르며 불빛처럼 타올랐다. 

공간에 있는 마력이 그의 전신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강대한 무형의 파동에 조종하던 마력을 빼앗겨 시야 공유가 끊기기 전, 뷔에탕은 목도하고야 말았다. 

거대하고 드높은 그 9레벨의 벽을, 정말이지 성대하게 돌파해버린 괴물의 형상을. 

'환골탈태였지. 분명.' 

사람의 살갗이 꽃처럼 일어나며 허물이 벗겨졌다. 

뿌드득- 뼈 뒤틀리는 괴성이 스산하게 들려왔다. 

조금 더 구경하지 못한게 아쉬울 정도로 기이한. 

그런 광경을 다시금 떠올리니— 

꿀꺽. 

손끝이 기분 좋은듯 잘게 떨리고,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형태의 갈증과 허기가 일었다. 뷔에탕은 타는 목을 와인으로나마 달래려 잔을 채웠다. 

주르르······ 

붉은 와인 한 줄기가 뷔에탕의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러나 갈증과 허기는 해소되지 않았다. 뷔에탕도 이해하고 있다. 

이건, 그 남자를 안아야만 비로소 해갈되는 감정일테니. 

"내가 그 맛있는 걸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그런 말을 하면서도, 끝없이 일어난 욕정이 정신을 두들긴다. 뷔에탕의 입 안으로 침이 고였다. 

다음 순간, 뷔에탕은 달아오른 눈길을 억지로 내렸다. 

"······." 

나흘간 마신 와인병과 지루해 태운 담배가 한가득이다. 

그리고 옆에는 몇 번이나 만졌던, 작은 손거울이 있었다. 

붉게 침잠된 눈동자에 창백한 얼굴이 거울에 비쳐보였다. 오늘따라 입가에 옅게 패인 주름이 유독 신경쓰였다. 

챙강! 

알아갈수록 호기심이 더해져만가는 남자. 

그 남자가, 약간의 마력조차 떨치지 못해 발할라 마탑으로 도망간 게 언제였더라? 

아. 

앞으로는 과거의 나날을 따지고 있는 게 의미가 없을 거다. 이제는 자신과 비슷한 9레벨의 반열에 올랐으니. 

"그런데, 두들겨 맞으면서 성장하는 게 취향인 건가?" 

손거울을 깨버린 뷔에탕은 레반이라는 남자의 기이한 취향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에 더해서. 

"십이제가 된다···아주 웃기는 소리는 아니었어." 

커다란 가능성을 보았다. 

아니. 

가능성에 불과한 게 아니라, 충분히 가능할 거다. 

들끓는 자신의 욕정이 본능적으로 선택한 저 남자라면. 

곧, 뷔에탕의 칙칙한 적안이 초승달처럼 길게 휘어졌다. 

"푸훗." 

이윽고, 적당히 달뜬 신음이 웃음처럼 새어나왔다. 뒤이어 뷔에탕이 조종하던 다른 인형들의 시야가 머릿속으로 공유된다.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집중해 뭔가를 만드는 엘프. 

어설픈 무인들과 한창 대련을 펼치는 안드로이드. 

걱정스러운 얼굴로 푹 엎어져 있는 흑발의 꼬맹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능글맞은 태도로 인형쪽을 응시하고 있는 마법사. 그리고 그 옆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데 집약해 놓은 듯, 고아하고 화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마법사. 

정말 쓸데없이 많기도 하네? 

그들의 동태를 확인한 뷔에탕은 곧, 신경쓰이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래······손쉽게 가질 수 있는 남자는 매력이 없더라." 

* * * 

9레벨. 

화경의 고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해나가는 경지. 

일류에서 절정의 경지에 오를 때처럼. 세상을 지탱하던 축이 흔들리고 개념이 뒤바뀐다. 초절정 끝자락에 이른 고수가 억지로 뽑아내는 검강을 장난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 한 마디로 줄이자면, 인간의 규격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경지에 발을 걸친 자들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곳에 이르렀다. 어두운 무아 속에서. 

스승의 거침없는 손속에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떠올라, 나의 존재조차 망각하고 집중했다. 나는 고요한 무아 속에서 이 세상의 근원에 한층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었다.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끝없이 확장되는 감각. 오감은 물론이고 육감이라는 직감에 더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칠감이 새로 생겨난 듯 했다. 굳이 따지자면 세상의 근원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라고 해야 할까. 

화아아아악······ 

성난 황소처럼 혈도 기맥을 이리저리 뚫어대며 돌아다니던 기운이 잠잠해진 것은 방금 전이었다. 

나는 필생의 의지력을 쥐어짜 날뛰는 기운을 갈무리했다. 

"······." 

어느덧 깨어나니 세상은 어두침침했다. 

그리고 무언가 쏟아져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자 허연 돌가루가 잔뜩 흩어지고, 뿌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윌터 하르트와 찾아왔던 방공호는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기감이 무한하게 확장되는 듯하다. 

세상이 너무도 가깝다. 먼지조차 느껴진다. 

공간이 나의 의념에 반응해 움직여 줄 것만 같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려 검을 뽑으려다 문득 포기했다. 천장이 산사태라도 난 듯 무너져 내려있다. 검을 휘두른다면 저 지하 깊은 곳에 파묻히고 말 것이다. 

검은 나중으로 미뤄두었다. 

"부서져라." 

그러고는, 대체 언제 붙었는지 멀쩡하게 반응하는 손을 하늘로 들어 그대로 마력을 방출했다. 외부에서 기운이 빨려들어오며 크게 휘돌았다. 

그런데. 

빨아들인 기운은 평소처럼 마나회로가 있는 심장 주변이 아닌, 나의 전신을 시원하게 휘돌았다. 

이윽고, 그 힘은 채 멈출 순간도 없이 발현하여 폭사했다. 

"······." 

꽈과과과과광—!!! 

무너진 방공호의 천장으로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이곳은 심도 백 미터가 넘는 지하의 땅속. 헌데 저 위쪽에서 싸구려 조명 빛이 비쳐오는 걸 보면, 지면 위까지 단번에 꿰뚫어버린 모양이었다. 

곧이어, 귓전으로 사이렌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러 오는 경찰인 듯했다. 어지간해선 움직이지 않는 이들일 터인데······. 

그러나, 지금 저들이 문제가 아니다. 

쌓은 내공이 몇 갑자며, 마나 회로가 몇 개다. 보통 그것으로 이룩한 경지를 나누곤 한다. 그만큼 명확한 경계가 또 없으니. 

헌데 지금의 나는······ 

하단전과 마나회로, 상단전이 이어지며 조화되었다. 계속 새로이 흘러들어오는 감각들이 실로 낯설어 몸이 휘청이기도 하였다. 

나지막이 내 입이 열렸다. 

"······진공진인이 이루었다는 공령지체(空靈之體)인가? 아니다. 그것과는 명확히 다르다." 

마치 온 육신이 기운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된 것만 같다. 기운의 수발이 너무나도 신속하고 자유로웠다. 

그저 의지만 가졌을 터인데, 곧장 세상의 기운이 빨려들어온다. 육신으로 흡수해낸 기운은 단전과 심장, 뇌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전신을 회전했다. 단전과 마나 회로의 경계는 완전히 흩어졌다. 

그렇다면. 

순간, 등줄기로 찌르르한 감각이 내달렸다. 

활짝 열린 상단전을 통해 느끼기로 화경. 그것도 초입의 수준을 곧장 지났으며 이미 상단전으로 이뤄놓았던 완숙한 9레벨의 경지까지 도달해 있다. 

게다가 이 육신 자체를 마나회로로 삼는다면 과거보다 한 단계 높은 7위계의 마법까지 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필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허면. 

무공과 마법 양쪽으로 9레벨 경지에 오른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몇 레벨인가? 

일견 멍하니, 허여멀건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나의 손바닥을 보고 있는데도 무언가 다르다. 

나는 그전까지 스스로를 나름 강자라고 믿었다. 

허접한 수준으로도 앙굴리마라와 전투를 벌이고, 전 십이제의 저주에서도 살아남고. 바만차를 죽이고, 남궁의 전대가주를 죽이는데 손을 보태고, 자신을 사파라 자처하는 9레벨의 시체를 때려잡고, 네임드 시체 파루무치. 그 거대한 자연재해와 마주쳐서도 살아남은 놈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니었다. 

사방으로 기감을 펴보자, 뷔에탕이 남기고 갔던 마력이 전보다 더 세세히 느껴졌다. 그저 막연했던 것이 피부로 와닿는 상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기이한 마력이 물감처럼 손바닥에 탁하게 남아있었다. 

"······." 

다른 이가 쏟아낸 힘의 잔흔마저 느껴진다. 

있는지도 몰랐던, 세상을 이루는 무형적인 무언가. 

강함은 이토록 상대적인 기준이다. 

잠시 그리 청승을 떨고 있자니, 나는 문득 스승 생각이 났다.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생이 무림이라 먼저 생각이 날 수밖에. 또한 스승은 특이한 인물이었으니, 인상이 깊이 새겨져 있을 수밖에. 

'나는 두 번의 삶이 더 지나고 나서야······스승의 그림자를 겨우 따라잡았구나.' 

스승, 절강 출신의 광마는 대단한 화경의 무인이었다. 중원무림 십대고수. 그러한 은인을 마주친 것은 무림이 유일하여 이런 경지를 이루자마자 그의 얼굴부터 떠올랐다. 

아, 은원이 이래서 중요한가보다. 

은혜는 갚을 도리가 없으니, 여지껏 괜히 원한만을 꺼내어 곱씹게 되었던 것이로구나. 

나도 참 등신같은 놈이라고 할 수 있다. 

"하하하!" 

그래서 나는 굉장히 등신같이 웃었다. 

지금까지의 고단함은 씻은 듯 날아가고 실없는 웃음만이 나왔다. 대단한 고수가 되었는데, 은혜를 갚을 사람은 여기에 없구나. 

나는 한참을 그러다 어느순간 웃음을 뚝 멈추고 가부좌를 틀었다. 

어디선가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무시하고, 조용히 내면을 관조했다. 그리 심도있게 내면을 관조하다 보니 나약했던 옛 생각들이 우후죽순으로 떠올랐다. 

매화검신, 제국의 별, 앙상하게 말라 썩어가는 불가해. 

나중에는 그들의 그림자마저 밟을 수 있겠는가? 

콰앙! 

나는 보통 경우가 있지만 성급하기도 한 사람이다. 

여러 생각들을 하다보니, 갑자기 문득 떠오른 인물이 있다. 

내면의 관조를 마친 나는, 조금 전 뚫어놓은 구멍으로 가볍게 솟구쳤다. 

* * * 

라그나로크 시티. 

하늘 높이 솟아있는 어느 타워크레인. 

결이 찢어진 장포가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오늘도, 광활한 목초지를 관리하는 목동처럼 오연하게 서서 먼 곳을 내다보고 있다. 세상을 깔아보는 사내의 삼백안은 여전했다. 

그 사내. 

칠좌, 능광객은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말문을 열었다. 

— 정기신(精氣神)이 합일(合一)하다. 

"감사합니다." 

곧장 능광객을 찾아온 레반은 정중히 포권함과 동시에, 그를 향해 물었다. 

"고인께서는 그 괴물을 어찌 깔아보셨습니까?" 

— ······.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앙상하게 썩어버린 그 이형의 존재가 뒤늦게 탄생한 칠감의 틈새마저 파고들었기에. 

무엇보다 능광객을 먼저 찾은 레반은 다시 묻고 싶었다. 

인지하기만 해도 각혈이 토해지는, 격외급 불가해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당신은 어찌 견뎌냈는지. 

그러한 호기심을 도무지 참을 수 없었기에. 

곧. 

능광객은 저 멀리를 직시하며 고요하게 입을 열었다. 

— 반열에 올라보니, 다시금 실감하였는가. 

"예, 지금에서야 나약함을 실감했습니다." 

그러자, 능광객의 의념이 레반의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 그때의 협의지심(俠義之心)은, 마음 한켠에 아직도 남아있는가? ] 

"예." 

레반은 망설임 없이 물음에 대한 답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잠시뒤. 

능광객의 두 번째 의념이, 레반의 머릿속을 장대하게 울렸다. 

[ 나도 그러했을 뿐. ] 

"······." 

레반의 눈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능광객은 먼 곳만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약함을 실감하게 해 도신을 무디게 만든다는 불가해의 존재를 지평선 너머로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는 불가해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칼을 뽑아 들었다. 세상을 깔아보는 삼백안으로, 본질적인 두려움조차 깔아보았다. 그러니 수많은 로키 주민들의 목숨을 붙여놓은 그를 누가 감히 나약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레반은 생각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심기를 어지럽히는 먹구름이 조금 걷히는 느낌이었다. 오매불망 원하던 힘을 얻게 되니, 막상 쓸데없는 근심을 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반은 능광객의 뒷모습을 향해 포권했다. 

그러고는 이내 발걸음을 돌려 사라졌다. 

다음 순간. 

고요하게 홀로 남은 칠좌 능광객. 그는 섬전처럼 멀어지는 레반의 강대한 기운을 느끼며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 세상이 놀라겠구나.

#159화. 구매하세요

#159화. 

라그나로크 중심업무지구. 

일찍부터 공사 중인 대형 빌딩 사이, 덩그러니 남아 펜스로 가려져있던 금싸라기 땅. 

그곳에는 어느새 거대한 규모의 초고층 빌딩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저 빌딩이 바로, 반 컴퍼니의 본사다. 

"······." 

나는 완공 직전의 그 빌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건설비용은 딜런과 신도시에서 한탕을 노리던 사채꾼들의 주머니를 털어 조달했고, 레나와 루벤카, 론 카산드라를 비롯한 여러 인물도 조금씩 끼어 지분을 가져갔다. 

하층부는 전체적으로 고성을 위로 길쭉하게 늘려놓은 모양이다. 볕을 보지 못하는 뱀파이어들이 갑자기 튀어나올 것만 같이 생겼다. 권위를 중요시하는 군벌이자 마법사인 딜런은, 저렇듯 위압적인 형태를 선호했다. 

그리고 현재는 건물의 최상층부가 지어지는 중인데, 상층부는 원통형 우주선같이 곧게 올라갔다. 발두르 시티에 있는 무당의 초고층 전각과 비슷한 높이. 중간에 헬리콥터나 캐리어가 곧장 내려설 수 있는 착륙장도 있다. 게다가 유명한 조명예술가를 초빙해, 빌딩의 외벽 전체를 하나의 스크린으로 제작해 두었다. 

시작부터 과하다. 

직원이 고작해야 오십 명도 안 되는 신생 기업 주제에 말이다. 

그렇지만, 중요 인력이자 동업자인 딜런이 반드시 그리하고 싶다는데 어쩌겠는가. 악명높은 군벌의 명성은 곧 억제력이다. 힘만 넉넉히 있다면 법보다 주먹을 더 가까이 둘 수 있고, 법보다 주먹을 더 열심히 써야 할 시기가 곧 올 것이다. 

여튼, 규모를 보자면 적어도 라그나로크 시티의 스카이라인과 업무지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 얼마 뒤면 언평 선생의 진법과 함께, 건물의 상량식이 있을 예정. 

완공이 머지 않았다니. 시간은 참 빠르다. 

와삭- 

"형님." 

불현듯, 나와 같이 공사 중의 빌딩을 바라보던 루돌프놈이 감자칩을 퍼먹으며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올라왔네요. 다해서 100층이 넘을 거라던데. 저도 전망 좋은 고층에 사무실 하나 내주시는 거 맞죠?" 

"음." 

놈의 물음을 무시하고 저 빌딩을 조용히 응시했다. 

워낙 거대하여 근처 건물들의 일조권을 방해할 듯했다. 

뭐, 이 세상에 해라는 것은 일 년에 몇 번 비치지 않으나······ 

남의 일조권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저 혼자만 쑥쑥 크는 초고층 빌딩보다는, 조금 낮더라도 다른 빌딩들과 조화되는 건축물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점이 아쉬우니···. 

무공과 마법 양쪽으로 완숙한 9레벨의 반열까지 쑥쑥 솟아오른 나라도, 다른 이들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혼자만 높게 솟아서는 이 무너져가는 인류를 살려낼 수 없다. 커도 같이 커야지 조금이나마 승산이 있을 터. 

그러한 사실을, 경지가 깊어질 때마다 절감한다. 

음. 

"아니, 형님. 사람 답답하게 '음음' 만 하지 마시고요. 저도 존나 멋진 사무실 하나 내달라고요. 어차피 빌딩에 남는 사무실 많잖습니까. 듀···플렉스 펜트인가? 그걸로 부탁드립니다." 

"······." 

순간, 판판했던 내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사람은 보통 시간이 흐르면 점점 변해가기 마련이다. 

더해서, 자연스레 주위의 환경마저 바뀌다보면 어떠한 초심을 잊는다. 하지만 늘 바뀌지 않고 전과 똑같은 놈들도 있어서, 나라는 인간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구나. 경지가 깊어져도 가끔 그리 자각하고는 한다. 

"돌프야." 

"네." 

"입을 좀 닥쳐라. 나 풍광 감상중이다." 

"······." 

"이 금수같은 놈은 어째서 늘 한결같은지. 쯧. 짐승에 또 넣어버릴까." 

나는 급작스레 시무룩해진 놈을 향해 삿대질하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언가를 깨달은 인간처럼 굴었는데, 결국 끓어오르는 폭력성을 참지 못하고 과거 중원무림과 정크타운을 마구 휘젓던 왈패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그에, 루돌프놈은 역시나 지지 않고 눈치없이 대꾸했다. 

"에이~말을 그렇게 하세요. 전 형님이 분위기 잡고있는 줄 몰랐죠." 

"······." 

등신같이 재잘대는 루돌프놈을 바라보자, 전신으로 용암과도 같은 기운이 휘돌았다. 

이놈이 과연 지금 내 주먹질도 견딜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허나 좋은 날에 피를 볼 수는 없기에 심호흡을 하고는 주먹을 내렸다. 

"그렇게 늘 주제를 모르는 것도 큰 재주다. 돌프야. 항상 위만 보지말고 고개를 내려서 밑도 봐라. 저 길바닥이 얼마나 넓니. 가서 자빠져 자." 

"형님, 지금 제 앞으로 빚이 얼마나 있는줄 아십니까?" 

"얼마나 있는데." 

"대충 한 200억 크레딧정도 될 겁니다. 원금에 이자율이 하루마다 50% 붙고, 연체 금리까지 붙는 중입니다. 그래서 내일이면 10억 크레딧 더 늘어납니다. 다음 달까지 가면 500억 크레딧을 넘길 걸요." 

"그래, 내년쯤 되면 사천당가를 통째로 팔아도 못 갚겠구나." 

복리의 마법이다. 

"맞습니다. 이제 좀 사채의 두려움을 느끼시겠어요?" 

"대책도 없이 크레딧을 그리 많이 빌리면 어쩌냐." 

와삭- 

그러자 루돌프놈은 몇 개씩 주워먹던 감자칩을 한 번에 입속에 털어넣고는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형님이 사채꾼들 털어서 돈 좀 빌려오라 하지 않습니까. 저 빌딩도 사실 제가 뜯어온 크레딧으로 올라가는 건데요." 

"그러냐. 그러면 그 사채는 그냥 갚지 마라." 

"법적 효력이 있대요. 연방군이 저 잡아가면 어떡합니까? 요즘 라그나로크 시티내 치안 확립한다고 개 난리인데." 

"군이 개입하면 네가 알아서 해결해라. 반 컴퍼니는 합법을 지향하는 회사라 네 악행과는 전혀 연관이 없으니." 

"······." 

반 컴퍼니는 철저하게 합법적인 회사다. 

라그나로크의 밑바닥부터 사채 시장을 쓸어담아 훑는 작업에는 루돌프놈과 딜런의 보좌들만 움직였다. 

놈들은 기업의 정직원이 아닌, 비공식적인 전력. 

지금까지의 기행들은 모두 놈들의 독단적인 소행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니 반 컴퍼니는 나중에라도, 저런 하찮은 일로 누군가에게 꼬투리 잡힐 걱정이 없는 것이다. 

그때, 루돌프놈이 억울한 듯 제 얼굴을 들이밀며 항변했다. 

"서럽네. 언제는 반 컴퍼니의 그림자가 되라면서요? 기업의 더러운 칼이 되어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더럽게 못생겨서 창피하니까 밖에 싸돌아다니지 말라고 한 거잖아. 동네 부끄러우니까." 

"그게 그거죠. 그래도 사람대우는 해주셔야지." 

루돌프놈은 계속 앓는 소리를 냈다. 

이놈 징징대는 건, 언제나 듣기가 싫다. 

"그리고 형님, 그 새끼들이 평범한 사채꾼 같아도 생각보다 노련하고 무서운 놈들입니다. 저만 보면 자꾸 날붙이로 찌르고요. 지난달에는 변절자라면서 연방군에 신고까지 넣었더라구요······좋게 대해줬더니 개새끼들 그거. 아휴. 아무튼, 상황이 이러니까 사무실 하나만 내주십쇼. 예? 서러운 동생 가오 한번 살려주십쇼." 

"생각은 해보마." 

"크으. 그럼 전 형님만 믿고 갑니다. 시체놈들 패 죽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시끄럽게 굴던 루돌프놈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떠나갔다. 

순식간에 귀가 편안해지며 안정이 찾아왔다. 

이제야 좀 멀쩡히 정신이 드는군. 

시끄러운 놈. 

화르르르륵— 

나는 길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검에 기운을 밀어넣어 덕지덕지 굳어있는 시체의 피를 녹여버렸다. 

뒤틀렸던 정기신이 완전히 합일하고, 무공과 마법 모두 9레벨이라는 경지에 오른 지도 꽤나 시간이 지났다. 

그간 나는 참으로 분주했다. 

[ 이만 가보겠습니다. ] 

칠좌 능광객과의 대면 이후. 

곧장 라그나로크 시티 외곽으로 가서 장벽을 뛰어넘었다. 

물론 지금은 시티의 장벽 보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으나, 그때의 허술한 광역보호진은 평범치 않은 9레벨의 격한 질주를 막지 못했다. 

그렇게, 장벽 밖으로 나가 마음놓고 힘을 발산했다. 

극도로 넓어진 기감의 범위에 들어오는 시체란 시체는 빠짐없이 도륙하고, 소란을 듣고 몰려온 시체까지 죄다 때려잡으며 이룩한 일신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했다. 

매일 장벽 바깥으로 출근도장을 찍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시체를 베어넘겼다. 날뛰는 기운을 다스리며 보이는 족족 죽여댔다. 

그리한 결과, 상단전의 운용과 환골탈태를 이룬 육신을 다루는 법은 반년 전보다 능숙해졌다. 지금껏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초식과 수식을 내 식대로 수정하기도 했다. 

그것은, 무공과 마법을 창시한 대종사보다도 더한 지경에 올랐다는 말과도 같았다. 

해서···오늘을 마지막으로 매듭을 짓기로 했다. 

"벌써, 반 년이나 지났나." 

경지에 오른 이후. 6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내가 현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체득했다. 

매일같이 시체만 때려잡는 일과도 이제는 지겹군. 

나는 어깨에 매어둔 오늘치 '수확' 을 들고 바닥을 박찼다. 

후우우욱! 

주변의 정돈되지 않은 풍경이 순식간에 위로 말려 올라간다. 

찰나의 순간. 

라그나로크 시티 전체가 발아래에 보일 정도로 높이 솟구쳤음에도, 방금 전까지 내가 밟고있던 건물 옥상의 피뢰침은 약간의 미동조차 없었다. 

말인즉, 경신공도 흠잡을 곳이 없다는 뜻. 

나는 이윽고, 허공을 밟으며 쏘아졌다. 

출렁— 

어깨에 매어둔 거대한 항아리 안에서, 영롱한 빛깔의 에센스가 넘칠 듯 출렁거렸다. 

* * * 

"불안해서 한 끼도 못 먹었어. 또 장벽 밖에 다녀온 거지?" 

레나는 복귀한 나를 보자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붉게 물든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한 끼도 못 먹었는데 과자는 잘 먹은 모양.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레반, 앞으로 어디 갈 때는 말이라도 해주고 가면 안 될까? 귀찮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머리에 또 칩은 넣으라고 안 할테니까······." 

레나는 그간 주식과 반 컴퍼니의 업무를 병행하고 있었다. 

온갖 인공지능 시스템이 기본적인 회계나 세무까지 처리해주는 시대라지만, 배워야 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으니. 

나는 레나의 말에 시티넷 단말기를 꺼내보였다. 

"이미 있다." 

"단말기 있는 거 알아. 그런데 연락하는데 쓰지를 않잖아. 연락을 보내도 잘 받지도 않고······?" 

스윽- 

나는 돌연 옷가지를 들어올렸다. 방검복이 드러났다. 

혹시 모를 암살을 대비하기 위해 쓸데없는 전자기기대신 테크 방검복을 차고, 최대한 몸을 가볍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롭게 넷 단말기를 꺼내서 두들길 여유도 없고 거추장스럽다. 게다가 금세 부서지거나 가끔 충전을 해줘야 하니, 점점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논지로 말하자, 레나는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도 앞으로 연락은 잘 남겨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레반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때 딜런씨랑 교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단 말이야. 나 정말 한 끼도 못 먹었다니까? 불쌍하지도 않아?" 

"······그래. 노력은 해보마. 밥은 호텔가서 먹고." 

"어휴, 저번에도 노력 한대놓고······." 

레나의 표정이 심히 뾰루퉁해졌다. 의자를 드르륵 밀며 무언의 불만을 표출하는 레나 뒤로, 뒷짐을 진 채 대기중인 삼호문 놈들이 보였다. 

'저놈들이 있었군.' 

지난 반 년간, 삼호문에도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평소에는 아힘사와 수련을 하는듯 하고, 일이 없을 때는 레나를 호위하다가 가끔 루돌프놈 뒤통수를 따라다니며 수금 심부름을 하는 정도. 

이 멀고먼 라그나로크까지 끌려와서 사채꾼들을 겁박하는 흑도 짓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삼호문은 흑도가 맞다. 그리고 잡일이나 시키기 위해 데리고 온 것 역시 맞다. 허나 쓰레기굴에서 왕 행세를 하다가 웬 신도시에 끌려와서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놈들이 즐거울 리는 없다. 

그래도 조만간 새로운 무공을 가장 먼저 배워 익힐 놈들이니, 상관은 없겠지. 

내가 그리 생각하던 때. 

"그런데 레반, 아까 발할라 시티에서 서류랑 보관함이 하나 왔어. 마법사 배달부를 시켜서 보내왔던데?" 

반 컴퍼니 앞으로, 서류 한 통이 날아왔단다. 

챠륵- 

열어보니 글로톤 콥의 윌터 하르트가 보내온 서류였다. 

안에 든 내용이 중요한 정보일수록 이런 아날로그식이 좋다. 

앞으로도 자택 근무니 넷 근무니 염병을 떨다가, 넷 러너에게 해킹당해 정보를 털렸다며 징징댈 일은 없을 것 같아 퍽 마음에 들었다. 

툭. 툭. 툭··· 

내가 서류와 동봉되어 송달온 마공학 보관함을 뜯어내자, 손바닥에 여섯 개의 작은 메모리칩이 떨어졌다. 여섯 개 모두 완성품이었다. 

그리고, 서류 안에 담겨있던 장황한 내용을 짧게 함축하면— 

대략 이렇게 간단히 적을 수 있겠다. 

『 무공, 마법칩 생산 시작 』 

"정말로 반 년이 걸렸군." 

······그래, 기다림의 시간이 제법 길었다. 

* * * 

수르트 시티. 

북경에서 가장 소란스럽다는 도시, 장안(長安).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초고층 전각의 외벽들은 하나같이 같은 광고를 선전하고 있었다. 

근방으로 많은 명문정파의 본산이 존재하여 관광 명소로도 널리 알려진 도시가 이 장안이다. 수십 개의 복잡한 교차로 중심에 세워진 전각들의 외벽 광고판은, 연방의 도시의 광고판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 

과거 무림계와 마법계의 대전쟁에서, 무림계의 전쟁 선포가 이 장안에서 이루어졌을 만큼 화제성으로는 단연 손꼽히는 도시인 것이다. 

이러한 장안의 화제가 된다면, 곧 세계로 퍼진다는 말과 같다. 

[ 세상에는 참 치사하고 더러운 놈들이 많지 않습니까? ] 

그리고 지금은, 그 장안 전각들의 광고판에서 낭랑한 목소리의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삶이 보잘것없고 지겹지 않으십니까? ] 

헌데. 

그것은 마치 사천당가 코퍼레이션의 인스턴트 마약 광고를 베껴 제작한 듯, 굉장히 발랄한 분위기의 배경과는 다르게 '정신나간' 소리를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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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 황당하고 정신나간 광고가 성황리에 끝나자. 

— ······ 

항상 관광객들과 뜨내기 무인들이 구름처럼 운집해 혼잡하고 소란스러웠던 장안의 길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해졌다. 

주루에 앉아, 혹은 길거리에서 그 광고를 구경하던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긴 침묵에 빠졌다. 

한편. 

발할라 시티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 그렇다면 새롭게 출시된, 반 컴퍼니 — 연방의 젊은 영웅 '레반' 의 철학과 '딜런' 의 노하우를 녹여낸 『 공격계, 보호계, 지원계 』 패키지 세트를 추천드립니다! 전문 마법사들이 측정한 판매가는 1천만 크레딧! 하지만 판매가는 단돈 10만 크레딧입니다. 등신처럼 망설일 시간에 지금 바로 구입하여 대마법사의 발판을 닦아보는 건 어떨까요? ] 

그리고 그 외에도. 

오딘 시티. 

발두르 시티. 

프레이야 시티. 

알 헤임달 시티. 

마지막으로 라그나로크 시티의 중심업무지구, 어제 막 완공된 반 컴퍼니 본사 건물까지.

연방의 모든 거대 도시에 동일한 광고가 내걸렸다. 

[ ······단돈 10만 크레딧입니다······ ] 

나는 반 컴퍼니 본사 빌딩의 외벽에서 끝없이 재생되는 광고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쁘지 않군." 

"······." 

그런 옆으로는 반 컴퍼니 최초의 동업자. 

동상처럼 묵묵히 서있던 딜런이 다음으로 입을 열었다. 황망한 의문과 불신이 가득 녹아들어가있는 목소리였다. 

"내 마법 노하우를 언제 가져가서 저기다 녹였지? 대체 무슨 병신같은 소리냐 저게?" 

"9레벨 마법사의 이름이 붙어 있으면 많이들 구매할 테니까." 

"이해가 선뜻 안 가는군. 저걸 왜 10만 크레딧에 판다는 거냐? 광고하려고 처음에는 할인을 해주는 건가?" 

"계속 저 가격으로 팔 거다. 기업 놈들이 제 밥그릇 바닥에 내려놓을 때까지." 

"······." 

순간. 

날벼락 맞은 사람처럼 딜런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원래 딜런의 목표는 그저, 몇 년 내로 라그나로크 시티를 잡아먹고 메가콥이 되는 소소한 것이었다. 

[ 메가콥 놈들처럼 좆대로 행동하면서 크레딧도 갈퀴로 긁어모으고, 에센스도 마음껏 빨고, 이 병신같은 세상이 망하기 전까지 펑펑 쓰면서 살아보자고. 돈 벌면 쓸 곳이야 넘쳐나거든. 가상현실 게임에 돈을 처바르면 주먹질 한 번으로 대륙을 날릴 수도 있다던데. 큭큭. ] 

나의 명성과 자기 힘을 합쳐 라그나로크를 장악한 합법적 군벌이 되자! 그렇다면 우리는 연방이 망하기 직전까지 신명나게 살 수 있다···같은. 

라그나로크에 세력을 만들어 힘을 과시하는 것. 

그게 딜런의 오롯한 목적이었다. 

"너, 생각보다 더 미친 새끼였군." 

그랬던 딜런이기에, 아무래도 싼값에 칩을 뿌려 온 연방의 미움을 받을 준비는 되어있지 않은 듯했다. 

내가 칩을 제작할 것이라고만 했지, 값싸게 만들어 배포한다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런데 뷔에탕의 인형이 계속 붙어있었을 텐데, 설마 그 미친년은 이걸 알고도 내버려둔 거냐?" 

"애초부터 연방이 아예 뒤집히길 바라는 여자라." 

흉터로 가득한 딜런의 얼굴에 생기가 사라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반 컴퍼니가 성장할 토대를 잘 닦고 있다며 싱글벙글하던 사내였는데. 

"······병신. 넌 좆됐어." 

"내가 아니라 우리다. 이미 한 배를 탔으니." 

"······그건 그렇지. 내가 병신같이 동업하자 했지. 이런 젠장." 

괄괄한 욕설을 뱉고 있는데도, 반 컴퍼니 공동창업주인 딜런의 눈빛은 오늘따라 공허했다. 

그리고, 그 시점. 

심후한 법력이 해일처럼 일어나며 주위를 뒤덮었고. 

우우우우웅—— 

원영경 수도자인 언평 선생이 오랜 기간 준비해온, 진주언가의 진법이 반 컴퍼니의 본사 빌딩 전체를 덮어씌우며 세상에 녹아들었다. 

언평 선생의 법력이 주변을 따스히 휘돌자, 나는 연신 재생되는 반 컴퍼니의 첫 광고를 음미하며 긍정적으로 말했다. 

"적어도 폭탄테러로 무너져 죽을 일은 없겠군."

#160화. 해결사

#160화. 

[ ······단돈 10만 크레딧입니다······ ] 

천문학적인 권력과 자본을 휘두르는 기업들의 놀이판에서, 허위나 과장 광고는 일상이다. 

그렇기에 광고의 내용과 실제 제품이 조금 다르다고 하여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사안에 따라 동업자끼리의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존 기업들의 영역을 심히 위협한다면. 

게다가 대를 이어 구축한 생태계를 뒤흔들 정도의 사안이라면. 허위인지 진실인지는 관계없이 수많은 구둣발에 밟혀 사라지게 되어있다. 연방 사회는 지금까지 그렇게 흘러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간다. 

푹- 

풀 태운 향이 솟아올라 공기를 덥히고, 희귀한 화강석을 깎아만든 벽면에 여러 자루의 휘황찬란한 보검이 걸려 있는 집무실. 

그 다른 한쪽 면에는 신비한 곤충들이 무수히 박제되어 있었다. 천상의 염료를 풀어낸 듯 날개가 푸른 나비부터, 상태좋은 성충을 구하기가 힘들어 금보다 귀하다는 풍뎅이까지. 요즘같은 세상에 좀처럼 보기 힘든 곤충들이 가득했고, 개중에서는 금선이라고도 부르는 '매미' 박제가 가장 많았다. 

또한 괴상하게도, 허물을 탈피하고 우화의 단계에 들어선 매미나, 우화 직후의 매미 박제가 유독 많았다. 아예 애벌레조차 벗어나지 못한 것도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를 빗어올린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 하룻강아지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푹. 

그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매미 다리에 얇은 압정을 꽂아넣었다. 그는 희귀한 곤충, 특히나 매미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허물을 벗기 전의 매미. 우화를 기다리며 수년간 버틴 놈의 몸통을, 세상 빛을 보기 직전에 굳혀 박제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영원히 우화 직전의 한 때에서 머물도록. 

푹. 

반 컴퍼니. 창립이 일 년도 되지 않은 신생 기업. 

이제 겨우 수복한 라그나로크 시티에서 뭘 팔아가며 사업을 하는지는 모른다만, 로키 시티의 군벌 중 하나였던 딜런이란 마법사가 표면으로 드러나 있다. 요즘 그 작은 기업이 연방을 뒤흔들고 있었다. 노인은 그 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9레벨의 마법사가 있으니, 그리 난장을 쳐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가? 작은 세상에 갇혀있던 놈이라 그런가. 허장성세가 과하고 생각이 짧겠구나." 

따각. 따각. 

노인은 매미의 다른 다리에도 압정을 강하게 박아 넣었다. 그러자 우화 직전의 매미가 조명 아래에 놓여 제대로 빛을 발했다. 이렇게 하면 혼자서 굳이 날개를 펼치지 않아도, 환한 빛 아래에서 영영 날개를 펼칠 수 있지 않은가. 

"좋구나." 

노인은 방금 자신이 제작한 박제품이 마음에 들었다. 

몸통에 특이한 황동빛이 돌며, 날개는 지극히 투명한. 보기드문 상등품의 매미였기 때문이다. 

노인은 꼼짝없이 박제된 매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리도 특이하고 모난 돌은 반드시 정을 맞지. 너 금선도 그리 생각치 않느냐." 

저 잘났다며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놈들이 지금까지 없었겠는가? 그들 중에는 대단한 무재를 지닌 무인도 있었고, 누구보다 비상한 머리로 높은 지위를 꿰찬 마법사. 그뿐 아니라 별별 사건들을 해결하며 영웅이라고 불리던 놈들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모두 한때의 이슬처럼 증발하듯 사라졌다. 이름도 크게 남기지 못하였다. 태풍같은 맹위를 떨치고도 연방의 역사 속에 묻혀버린 자들만 열 손가락을 넘어간다. 

본래, 이 세상은 그렇게 허망히 흘러갈 수밖에 없으니. 

드르륵— 

이윽고, 노인은 박제해 굳혀둔 매미를 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의복을 정돈하고 바깥으로 나가자, 기백이 형형한 무인들이 길게 도열해 있었다. 노인은 그들마저 뒤로한 채 대형 세단에 몸을 실었다. 

차량은 지하도로를 빠르게 내달려 북경으로 향했다. 

노인을 태운 차량은 북경 어딘가에서 멈추어섰다. 노인이 차량에서 내리자 주름이 가득한 눈앞으로 권위적인 전각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굉장한 재력가이기도 한 노인이 보아도, 그 규모가 상당했다. 

전각의 사방은 돌풍이 불어닥치기 전처럼 고요했다. 허나 동요하는 기운을 숨기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노인은 그들의 동요를 느끼며 발을 옮겼다. 가장 커다랗고 화려한 전각 앞에 이르자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덜컥. 

들어간 안쪽으로는,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 선객들이 있었다. 척 보아도 출신을 알 수 있게 가지각색의 의복을 걸쳤다. 대부분은 연배가 굉장히 높았으나, 가끔 어린 인물들도 끼어 있었으며 어려보이는 자들은 하나같이 형용할 수 없는 기도를 풍겨댔다. 

후우우우— 

전각 안쪽으로 겹겹이 쌓여있는 가공할 기운은 천근보다 더 무거웠다. 노인의 빗어올린 머리칼이 올올히 기세에 반응하며 춤을 추었다. 

노인이 잘못 느낀 것은 아니었다. 거대 기업을 대표하는 무림계의 거목들이 한데모여 회동을 갖기위한 자리이니. 

"늦지는 않았구려." 

노인은 자연스럽게 비어있는 자리를 채웠다. 노인의 입장 이후로도 몇 명이 더 들어왔다. 표표히 허공을 걸어 들어오는 자도, 대머리가 우습게 번쩍이는 승려도 있었고, 아득히 심유한 현기를 풍기는 도인도 있었다. 

문이 닫히자 실내에는 묘한 기운이 뒤섞여 흘렀다. 

속을 읽을 수 없는 무심한 눈빛들이 오고갔다. 

그렇게,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던 와중. 

— 천둥벌거숭이가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데 어찌할 겁니까. 연방의 영웅. 그 존귀한 명성을 남용하니 그 거만함이 이를 데 없습니다. 

누군가가 탁기가 묻어있는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노인은 고요한 눈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무림계 거목들의 중심. 고급스러운 비단이 깔린 큰 탁자 위로, 여섯 개의 칩과 붉은 세필로 작성된 문건이 올라와 있었다. 

『 레반. 

출신 불명. 실체 불명. 

과거 발할라 시티,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 소속. 

무공과 마법을 모두 운용하는 특이한 실력자. 독자적인 무공과 마법을 익히고 있으며, 그간의 전적으로 미루어 보아 8레벨의 끝자락으로 추정. 9레벨을 달성했을 가능성도 존재. 일류에 준하는 세 가지의 무공칩과 세 가지의 마법칩을 헐값에 판매중. 위치는 라그나로크 시티 중심업무지구, 반 컴퍼니 본사. 』 

무림계 거목들의 시선이 그 문건으로 향했다. 

그때, 어린 승려 하나가 웃으며 모두에게 물었다. 

— 겉모습만 화려하고 속은 추레할 수도 있을진대, 정녕 저 무학들이 뛰어난 것이 맞습니까? 소승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나긋나긋한 음성. 

승려는 마치 동자승처럼 체구가 작고 말랐다. 

그 물음에, 반대쪽에서 동시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 꽤 놀랐습니다. 

— 예상외로, 너끈히 일류에 준했소. 

대답을 한 이들은 붉은 얼굴에 길게 수염이 자라있는 노인과 투실한 살집을 가진 장년이었는데, 성질이 실로 고약할 것 같은 면면이었다. 

여하튼 그들은 이미 저 무공칩을 확인해본 것이었다. 칩들의 성능은 둘의 확언으로 명확해졌으니, 입을 닫고있던 이들도 서서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 그 광고가 백만방도까지 퍼져 알려진 지 이제 사흘. 그런데 연방증권시장이 벌써 요동치고 있지요. 아무래도 상황이 유쾌하지 못하니, 하루바삐 소요를 정리함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이 칩을 파는 족족 언제까지고 회수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듯 소요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다른 이들이 그에 호응하며 대화가 이루어졌다. 

— 허면, 그 칩의 제작과 생산을 맡은 기업부터 징치합시다. 

— 글로톤 콥이라는 기업인데, 본사가 하필 발할라 시티에 있소. 

— 마법사들도 이번 일로 심기가 편치 못할 터. 서로 일각을 다투는 사안에, 누가 벌을 주나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레반이라는 자가 마탑과도 깊게 엮여 있어 마법사들도 가볍게 움직이지 못할 테지요. 발할라에서 마탑의 권위를 부정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 연방 정부는 나서지 않을 거요. 연방의 손으로 영웅이라며 콧대를 세워놓은 인사이니. 

— 아무렴, 그치들도 생각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 마법계 놈들이야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는 빠르게 나서 본보기를 보여야하지 않겠습니까. 

— 그렇다면, 라그나로크로 가서 경고를 줍시다. 

— 그렇게 합시다. 

무림계 거목들의 회동이 간단히 마무리되어 간다. 라그나로크 시티로 건너가서 군벌인 딜런과 레반이라는 철없는 이를 징치하자는 분위기였다. 표정이 떨떠름한 이들도 보였으나, 대부분은 찬동하는 기색. 

이제는 집행자를 뽑을 시간이었다. 

— 천지분간을 못하는 젊은이 하나와 군벌 마법사를 계도하는 일이 될 것인데, 누가 가면 좋겠습니까? 

곧장 앞으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누군가는 해결을 볼 일인데, 복잡하게 먼 도시까지 여정을 떠나 자기 손에 피를 묻힐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9레벨의 마법사가 끼어있으니, 산보하듯 간단하기만 한 일은 또 아니었다. 

특히 종남과 화산, 무당은 이번 회동에서 조용했으며 이러한 사태에는 지극히 철저하고 자비가 없기로 이름난 사천당가까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아, 뒤에서 조용히 관망하던 노인에게까지 기회가 찾아왔다. 

— 누가 가시겠습니까? 

노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뜻을 받잡아 가겠소. 그것이 남들 보기에도 좋을 터." 

— ······. 

노인이 나서자 자리의 다른 이들은 무언으로 긍정을 표했다. 

왜냐하면, 그럴 자격이 차고도 넘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얗게 센 머리를 깔끔히 빗어올린 그 노인은 인형사가 지독한 악명으로 인해 십이제(十二帝)의 지위에서 강제 퇴출당하자, 비어버린 십이제의 위를 차지한 무림계의 거물. 

이전에는 무정수(無情手)라는 별호로 불리던, 청성 코퍼레이션의 절대고수 이광백이었으니. 

이윽고, 소림(少林)의 어린 승려가 흡족하게 입을 열었다. 

— 분연히 나서주시니, 소승의 마음이 놓입니다. 자칫하면 민생을 크게 어지럽힐 수 있는 일. 그 사안의 중대함이 이루말할 수 없으니, 가서 그들의 저속한 치기를 잘 타일러 주시고, 다시는 삿된 마음을 먹지 않게 온정으로 감싸주길 바랍니다. 

십이제, 이광백은 결정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무림계 거물들의 기운이 요동치는 전각을 떠나며 어린 승려의 말에 화답했다. 

"정은 다른 이를 감싸줄 때 쓰는게 아니오. 모난 놈을 내리칠 때 쓰는 것이지." 

이광백은 청성의 검수들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 * * 

[ 캐리어의 화물칸에 넣어 보내겠습니다. ] 

상선의 캐리어를 통해 글로톤 콥이 보낸 물건을 받았다. 

나는 광고를 전 연방에 걸쳐 대대적으로 때린 뒤, 당장에 칩의 판매를 시작했다. 

무공, 마법칩 각각 세 개. 

칩에는 개당 5만 크레딧의 판매가를 책정했고, 3개를 세트로 사면 10만 크레딧에 팔았다. 그것은 레나와 클로에, 나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어차피 열심히 팔아봐야 원가나 겨우 나올법한 수준이라, 판매 과정에서의 이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얼마나 시끄럽게 지랄을 잘 떨어대서, 무공과 마법을 독점 중인 기업들이 밥숟가락을 포기하고 내려놓게 할 수 있냐. 

일단 나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판매 첫날부터 글로톤 콥이 보내온 초기물량은 완판되었다. 생각보다 판매 속도가 빨랐다. 다른 기업의 끄나풀들이 끼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냥 신경쓰지 않고 팔아치우라고 지시했다. 

지금은 무슨 사태가 터질지 모르기에. 여기저기 현실적인 문제가 산재해 있어 반 컴퍼니 본사에서만 판매하고 있으나, 어느 순간이 오면 전 연방의 도시까지 배송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칩 판매 사태 덕분인지, 반 컴퍼니라는 기업명은 개방이 운영하는 백만방도 포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칩을 판매한지 사흘 째의 아침이 되었다. 

반 컴퍼니 본사. 

딜런의 집무실은 자욱한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외벽의 화려한 조명만이 이곳이 최상층 어딘가에 있는 집무실임을 실감케 한다. 딜런은 곧 우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로키 주민들을 구하자고 할 때부터 이상만 좇는 놈인건 알았다만······그래, 결과적으로 사람 갈아가며 구하기는 했지. 이번에는 반 컴퍼니가 갈려나가는 건가? 난 아직 병신처럼 죽기가 싫은데." 

나는 담배를 뻐끔대는 딜런을 향해 말했다. 

"오래 살고 싶으면 담배를 끊어라." 

"이봐, 다른 기업 꼰대들이 어떻게 나올까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일단 메모리칩 생산하는 곳부터 부숴먹지 않겠나? 그러면 생산량을 늘리기도 전에 끝이잖냐."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힘을 써 막고있다." 

"마탑주라는 인간이 그리 함부로 움직여도 되나?" 

"마탑주의 배경에 마법계 대그룹인 일레힌 가문이 있으니." 

"후, 그거 병신같은 와중에 다행인 소식이군. 네가 9레벨 경지에 올랐다는 소식 다음으로 다행이다. 나중에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라." 

딜런은 다혈질인 사내였으나 아주 바보는 아니다. 이 일로 나와 치고받고 싸워봐야 몸만 상하지 얻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아무리 군벌 이력에 성격이 폭급해도 강력한 9레벨의 마법사라는 건, 지금까지 무수한 역경들을 헤집고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것. 

상황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탁월했다. 

드르륵- 

딜런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머리를 받치곤 의자에 길게 누웠다. 

"오늘쯤이면 슬슬 반응이 오겠지?" 

타 기업의 끄나풀들이 판매 첫날부터 이곳에 와서 칩을 구입해갔다. 사실 그 놈들이 수를 써서 대부분을 구매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 칩들은 즉각 다른 도시로 퍼졌을 것이고, 그 칩을 확인한 이들이 캐리어를 타고 이 라그나로크까지 날아와 당도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오늘이다. 

말인즉, 시장의 반응이 피부로 와닿을 시기가 된 것. 

소식을 듣고 칩을 확인하자마자 눈이 뒤집혀, 산 넘고 물 건너 뛰쳐오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드르륵! 

"······젠장, 누구라고? 시작부터 재수 더럽게 없군." 

갑자기 일어난 딜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방금 전까지 잘 태우던 담배를 죄다 분지르는 것을 보니, 아래층의 보좌들로부터 무언가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딜런의 고성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곧. 

고성을 질러대던 딜런이 코트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밑에 십이제가 기어 왔다. 청성의 이광백이라는데." 

무림계의 십이제. 

이거, 시작부터 굉장한 거물이 걸음을 했다. 

싹이 자라지도 못하게 썩둑 잘라버리겠다는 듯이.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잘 짜둔 계획이 있었으므로, 급히 나가는 딜런을 따라 반 컴퍼니의 1층 로비로 향했다. 

잠시 뒤, 빌딩 로비. 

— ······. 

흰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올린 노인이 보였다. 

명백한 노인이지만, 가공할 기세로 보아 그가 바로 십이제 이광백이었다. 척 봐도 평범한 무인들과는 격이 달랐다. 

이광백의 뒤쪽으로는 메가콥 청성의 검수로 보이는 무인들이 위압적으로 도열해 있다. 느껴지는 기도를 보면 하나 하나가 정예. 그 수가 꽤 많아서 마치 뷔에탕의 인형들을 보는 듯했다.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저런 전력을 망설임없이 끌고 왔을 것이다. 메가콥과 권력을 쥔 이들의 저력이라 할 수 있겠다. 장정들이 저리 늘어서 있으니 드넓은 로비는 실로 스산했다. 

"안녕하십니까." 

곧, 이광백의 앞에 선 딜런이 인사를 올리고는 나름대로 공손하게 물었다. 딜런은 뷔에탕의 앞에서도 그렇듯, 강자 앞에서는 철저하게 이성적인 사내였다. 

"그런데 십이제나 되는 거물이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 ······. 

딜런의 질문에, 이광백은 잠시 고개를 들어 높은 로비의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고급스러운 샹들리에가 걸려있었다. 마치 딜런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허나 이광백은 막상 그 태도와는 달리 정중한 말투로 답해주었다. 

— 정말 무슨 일로 온 것인지가 궁금한가? 아니지. 오늘 그대들이 어떤 일을 겪을지가 궁금했겠지. 부디 대화로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네. 

그러자, 딜런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 했다. 아마도 기쁜 얼굴을 하고는 '그래요? 서로간에 오해가 었었던 모양입니다. 사무실로 들어가서 차나 한잔 하시죠.' 뭐 대충 그런 모양 빠지는 소리가 아닐까. 

툭! 

나는 딜런의 옆을 치고나가며 이광백과 눈을 마주보았다. 북풍한설의 냉기가 등골을 타고 오르는 느낌이다. 여기까지 기어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자 할 만큼, 정 많은 인간의 안광은 저렇지 않다. 그렇게 압도적인 기세를 가닥가닥 뿜어내는 이광백의 앞에서. 

가만히 선 나는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레반입니다." 

이광백은 곧장 대답했다. 

— 이광백이다. 

이광백이 저리 대답을 한 순간. 그를 둘러싼 주변으로 무형의 기파가 일렁이는 흔적이 내 눈에 그대로 보였다. 육감을 넘어선 상단전의 통찰력. 아니나 다를까 저 이광백은 이미 전투가 벌어질 것을 상정하고 왔다. 대화는커녕, 눈 깜빡하는 순간 사지 한 군데가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 

스르릉- 

내 허리춤에서, 허연 날을 자랑하는 광선이 길게 뽑혀나왔다. 

— 어린 친구가 긴장을 많이 했군. 

이광백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꾸며냈다. 주름진 입매에 옅은 미소까지 만들어냈다. 필시 제정신인 인간은 아니었다. 동류는 서로 알아본다고, 나는 과거부터 정신병력이 가득한 사내라 훑어보기만 해도 미친놈을 골라낼 수 있었다. 저놈은 어딘가 미친놈이 맞다. 

나는 검을 앞으로 뻗어 기수식을 취했다. 예리한 검끝은 이광백을 향했다. 

"정말, 대화로 잘 해결이 되겠습니까?" 

그러며 내가 꽤 진지한 얼굴로 묻자. 

스으으으······ 

삽시간에 이광백이 풍기는 기세가 농밀해졌다. 

이광백은 곧, 주름진 입매에 그려낸 가짜 미소를 거두었다. 그리고는 무정한 어조로 제안을 건네왔다. 

— 다리 한쪽 정도라면. 해결이 되겠네. 어떠한가? 

"······다리 한쪽 말입니까?" 

아. 그러면 그렇지. 

강호무림은 본래 이렇게 차갑고 냉엄한 법. 

나는 심히 두려운 얼굴로 몸을 떨며 대답을 준비했다. 해결하려면 다리를 내놓으라니. 십이제라는 위명이 어찌나 두려웠던지, 입술이 발발 떨려 말까지 더듬었다. 

"찌, 찌그러져라." 

콰지지지직—! 

그리고 다음 순간, 이광백 뒤에 늘어서있던 검수들의 다리가 죄다 형편없이 찌그러지고 부러져 병신이 되었다. 

내가 일으킨 마력이 공간 전체를 찰나간 강하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 공간 압축 』 단일 공간 내 순간적인 위력만큼은 7위계에 준하는 상위 마법. 9레벨 중에서도 수준이 높을 이광백은 당연하게도 멀쩡히 버텨냈으나, 그가 끌고온 문파의 검수들은 아니었다. 

로비는 삽시간에 통곡과 신음의 장이 되었다. 

— ······. 

이광백은 침침한 눈으로 무너진 본문의 검수들을 돌아보았다. 나도 딜런의 얼굴이 궁금하여 돌아보았다. 딜런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입만 뻐끔댔다. 좆된다. 대충 그런 단어였다. 

나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고, 쓰러져 피눈물을 흘리는 청성의 검수들을 바라보며 놀랍다는 듯 말했다. 

바로, 그들의 다리가 감쪽같이 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해결이 되었군요."

#161화. 대화

#161화. 

"이제 해결이 되었군요." 

"······." 

딜런은 연신 뻐끔거리는 입을 닫았다. 

목이 메어 말이 곧장 튀어나가지 않았다. 

그저 레반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혼자 생각했다. 

'씨발, 해결되기는 뭐가 해결돼. 그냥 더 좆됐잖아······.' 

조금 전. 

갑자기 등신처럼 말을 더듬던 레반이, 자그마치 메가콥 청성의 검수들을 공격했다. 

설마하니······십이제를 상대로 먼저 공격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물론, 딜런도 사태가 심상찮게 흘러갈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청성은 이번 반 컴퍼니 칩 사태를 깔끔하게 정리하러 온 청소부들이다. 자그마치 십이제가 직접 움직여 라그나로크까지 당도했고, 본사 앞을 찾아왔을 때부터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일이 이딴 식으로 흘러갈 줄은 몰랐다. 

메가콥이 신생 기업의 본사 내에서 다짜고짜 공격당했다. 평생에 한 번이나 겪을까 말까한 상황. 솔직히 조금 시원하긴 했으나, 이것을 빌미삼아 더 거대한 충돌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 끄으윽······. 

— 다리, 다리가······. 

게다가 적당히 경고만 준 것도 아니고, 무인의 생명인 다리를 몽땅 작살내놓았다. 그들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다 결국 바닥에 개구리처럼 엎어졌다. 자존심이 마법사 못지않은 무인들이 고통에 겨워 신음을 흘린다. 아마 더럽게 수치스럽겠지. 

"······." 

딜런이 군벌이었을 적에도, 저 정도로 막나가지는 않았다. 레반은 시작부터 저쪽에서 용납할 수 있는 선을 넘어버렸다. 

꾹- 꾹- 

딜런은 갑자기 몰려오는 피곤함에 뒷목을 주물렀다. 

'메가콥인데, 쪽을 저렇게 줘버리는군. 정신나간 새끼.' 

다만. 

방금 레반이 보여준 그 신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방금 그 마력 운용, 말도 안 되긴 하는군.' 

······찌그러져라. 

더듬대며 뱉은 그 짧은 음성영창에, 실제로 로비를 채우고 있던 마나입자가 그대로 쏟아져내려 공간을 찌그러뜨렸다. 압축이라는 말이 맞았다. 마법의 발현은 찰나였고, 무시무시한 위력과 조작하는 속도는 또 어떤가. 

'자신감이 있을 만도 하다. 로키때만 해도 분명 저렇게 강하지는 않았는데.' 

그간 대체 무슨 수련을 한 거지? 

심장의 회로를 통해 대기의 마나를 빨아들이고, 필요한 수식과 개념을 계산하고, 회로를 거쳐 뽑아낸 마력에 의지를 담아 최종적으로 마법을 발현한다. 위력이 강한 마법일수록, 거리가 멀어질수록 필요한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실로 복잡한 작업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수식계산과 발현 과정을 돕는 서포트 칩이나, 마력을 담아 쏘아내는 마공학 병기들을 애용한다. 혹은 마법 발현에 필요한 수식을 문신 형식으로 아예 몸에 새겨버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레반은 그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진 게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공할 위력의 마법을 즉석에서 뿜어냈다. 그거, 서포트 칩 백 개를 박아도 안 되는 놈들은 안 된다. 

회로가 세상의 마나와 일체되어 있기라도 한 것인가. 

그냥 짧게 한 마디로 일축하면, 그냥 괴물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거다. 마나와의 감응력을 날 때부터 타고난 체질. 성장하는 속도만 봐도 일리가 있지 않은가. 전생에서 신의 축복이라도 받았나? 

······하지만. 

이제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상대가 십이제인데.' 

십이제(十二帝). 

9레벨의 경지 끝자락이나, 10레벨의 경계에 걸쳐있는 진짜배기 괴물들. 

같은 9레벨 안에서도 무력의 격차는 지대하다. 경지가 낮은 이들이 보기에는 비슷한 초월자들로 보이겠으나 실상은 다르다. 십이제급이라면, 어중간한 9레벨은 몇 분 내로 박살낼 수 있다. 

그렇기에 실력에 자신이 있는 딜런도, 과거의 십이제였던 뷔에탕과의 마찰을 극도로 피해온 것이다. 기습으로 크게 한 방 먹이고 전투에 들어가는 게 아닌 이상, 결과는 패배밖에 그려지지 않는다. 분명 압도적인 기량의 격차가 날 테지. 

하나 그럼에도, 딜런은 우선 7개의 마나회로를 달구었다. 

'병신 같지만, 일방적으로 쳐맞을 바에 붙어는 보자.' 

저편에 우두커니 선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이광백 

아마도 이쪽의 사지를 어떻게 찢을까 분개하고 있겠지. 

딜런은 몸을 뜨겁게 덥히며 이어질 전투를 준비했다. 

그런데. 

문득, 담담히 서있던 이광백이 의아하다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 

"내가 움직이리라는 사실을 어찌 알았나? 조금만 늦었어도 저 군벌놈의 다리가 잘려나갔을 것인데." 

그 말에 덜컥 멈춘 딜런은, 황당한 얼굴로 레반을 바라봤다. 

"······." 

* * * 

나는 이광백의 물음에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직감으로 알았습니다." 

"직감?" 

그러자. 

이광백은 이제야 완전히 이해했다는 듯 읊조렸다. 

"허장성세를 부리기 좋아하고 생각이 짧은 게 아니라, 실력을 전부 내보이지 않았다 생각하여 자신이 있었던 거로군."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특히나 네 기운은 평범치 못하다. 여느 무인도, 마법사와도 다르다. 그러니 경지를 파악하기조차 곤란했다. 그런데 그 연배에 벌써 9레벨이라······." 

이광백은 아까부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말꼬리를 길게 끌었다. 

내가 완연한 9레벨의 반열에 오른 사실을 알고있는 이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반 년의 시간을 거의 장벽 바깥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해봐야 측근으로 매일 마주하는 레나와 루돌프놈, 외부 인사로는 뷔에탕과 마탑주 정도. 반 컴퍼니의 공동창업주인 딜런도 최근에서야 알았을 정도니. 

그런 면에서, 이광백의 말이 맞았다. 

이제는 세상에 알려질 대로 알려진 만큼, 괜히 힘 좀 있다며 설치기보다 본 실력의 삼 할은 숨겨두는 게 현명했다. 큰 일을 앞두고 내 전력을 다 까놓을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때였다. 

"이제 모두 나가라. 안이 번잡하다." 

말꼬리를 끌며 하던 고심이 끝났는지, 이광백은 신음을 흘리는 청성의 검수들에게 일갈했다. 예뻐서 저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싸움에 걸리적거릴 테니, 미리 내보내는 듯 보인다. 그렇게 청성의 검수들은 부러진 다리를 붙잡고 기어나갔다. 

처량한 청성의 검수들이 사라지자. 

곧, 이광백의 고개가 모로 비틀렸다. 그 무정한 눈빛이 이번에는 딜런을 향해 가있었다. 

"나가라는 말을 못 들었나?" 

"······뭐요?" 

나는 삐딱한 딜런에게 직접 전음을 보냈다. 

[ 저놈들 따라 나가 있어라. ] 

[ 저 새끼들이야 다리 병신이 됐으니까 기어 나간다치고. 나는 왜? ] 

[ 그러면 저 노인네 상대로 몰매라도 놓아볼까. ] 

딜런이 끼어들어 진심으로 전투를 벌이면, 이광백이라도 필시 고전할 것이다. 그러나 이광백은 십이제로 막강한 위명을 떨치는 인물이며, 청성 코퍼레이션의 명예회장이나 다름없는 위치의 거물. 

게다가 무림계의 대표 격으로 걸음한 듯한데, 동네 흑도처럼 둘이 합세해 몰매를 놓았다간 인생이 크게 고달파질 거다. 

뭐,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으나······ 

[ 거, 메가콥 새끼들은 참 속 편하게 사는군. 자기들 마음 내킬 때만 명분을 찾을 수 있어서. 씨발, 이래서 나도 메가콥 회장 놀이좀 해보고 싶었던 건데. ] 

더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딜런은 잠시 불평불만을 늘어놓더니, 휘적휘적 걸어 로비 바깥으로 나갔다. 

마침내 나는 이광백과 로비에 둘이 남았다. 넓은 로비는 아무도 없어 적막했고,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대형 샹들리에만이 천장에서 조명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잠시간의 적막이 흐른 뒤, 뒷짐을 진 이광백이 먼저 아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놈은 이미 한참 전에 우화를 마친 금선(金蟬)이었구나. 그것을 모르고 꺾는 재미를 보러 왔으니, 오늘은 나의 불찰로 좋지 못한 하루가 되겠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앞서 문제를 해결했는데, 약속과는 달리 돌아가시지 않을 모양입니다." 

"그래도 최상등품의 금선이다. 인정하마." 

뜬금없이 곤충 얘기를 늘어놓는 걸 보니 취미도 고약한 듯하다. 역시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아니다. 

쿵! 

그때, 이광백이 앞으로 한 발을 내뻗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만 시작하지." 

쩌어어억—! 

대답을 채 하기도 전, 한달음에 간격을 좁힌 이광백. 그가 예고도 없이 뻗어낸 손바닥에서 막대한 경력이 뿜어져 폭사했다. 

쿠구구궁···! 

장법에서 터져나온 공력은 내가 미리 세워둔 마나 장막을 때렸다. 충격파가 어찌나 거세게 요동치는지, 기습을 막아냈음에도 몸이 허공에 붕 뜰 정도였다. 아무래도 이광백은 후배에게 선수를 양보할 대인배는 아닌 모양이다. 

'장법을 주로 쓰는 무인은 아니군.' 

와중에 나는, 마나 장막을 한번에 뚫지 못한 손바닥을 보며 이광백의 주특기가 장법이 아니란 걸 단박에 알아챘다. 

애초에 청성은 예나 지금이나 명백한 검문(劍門)이라 검을 쓸 텐데, 이광백은 왜인지 맨손으로 박투를 벌였다. 나는 과거의 기억과 이광백의 행동거지를 근거삼아 추측했다. 이 인간, 필시 단검이나 비수같은 병기를 몰래 숨겨 놓았을 놈이라고. 

지근거리에서 이광백이 다시 한 번 장을 뻗었다. 

콰과과과광! 

내가 회피하여 이광백의 장법이 허공을 가르자, 거대한 경력의 파동이 그의 손끝에서 일어나 근방을 전부 휩쓸어버렸다. 언평 선생의 진법으로 보호받고 있지 않았다면, 방금의 공격에 빌딩이 무너져 내렸을 거다. 

나는 즉시 거리를 벌렸다. 이광백의 힘을 조금 더 확인하고 싶었다. 

팟! 

허나 거리를 벌리려 물러서자마자, 이광백은 귀신같은 신법으로 가까이 따라붙어 말을 건네왔다. 허공을 나비처럼 거니는 그의 눈은 광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 좋은 검을 뽑아놓고, 계속 마법 따위로 막아낼 텐가?" 

"제가 노야께 검으로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노야도 장을 쓰지 않습니까. 앞으로 제 검은 장식이라 생각하십시오." 

화악! 

그 말과 동시에, 오색광채를 뿜어내는 검극으로 이광백을 찔렀다. 허나 돌아오는 손맛이 없었다. 이미 이광백은 연기처럼 사라진 뒤였다. 

짧은 몇 합으로도 눈치챌 수 있었다. 속도로는 나보다 위쪽에 있는 노인네라, 언제 대가리에 구멍이 뚫려도 이상치 않다고. 

우우우웅— 

'장막을 최대한 두껍게 쌓아야겠군.' 

나는 이광백이 몸을 뺀 틈을 타 전신으로 마나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지금까지는 마법이 보조와 지원등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왜냐하면 나의 사정상, 무공쪽의 발전이 월등히 빨랐기 때문이다. 해서 강자들과 싸운다면, 제약이 많은 마법을 쉬이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선대지신공의 공능인 조화를 통해 회로와 단전이 같은 길을 걸으므로, 마법 역시도 거리낌없이 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어느새 짓쳐든 이광백. 그가 손바닥에 무지막지한 크기의 강기를 담아 강하게 내뻗었다. 강기의 밀도며 규모가 전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이번엔 귓전에 울리는 파공성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꽈드드드득—! 

강대한 경력이 후욱 불어닥치며 겹겹이 쌓아둔 마나 장막에 구멍이 뻥 뚫렸다. 나는 이를 한 번 악무는 것으로 대응했다. 

동작을 통한 마법의 발현. 

『 변환 』 

스르륵- 

이를 악물자 구멍뚫린 마나 장막의 형태가 순식간에 변화했다. 마나 장막은 보자기처럼 넓게 펴지더니, 힘으로 뚫고 들어온 이광백의 팔을 삼키듯 감싸버렸다. 

"······." 

이광백의 무정한 눈빛이 미세히 흔들렸다. 나는 그틈을 놓치지 않고 마법을 완성했다. 

『 공명 폭발 』 

구구궁··· 

어딘가 막혀있는 듯한 폭음이 터져나왔다. 이광백은 장막에 삼켜진 팔에 호신강기를 불어넣었으나, 완벽히 방어하지는 못하여 손가락 몇 개가 뒤틀렸다. 하지만 이광백은 기운을 불어넣어 뒤틀린 손가락을 즉시 맞춰버리더니, 품속에서 얇고 기다란 단검을 꺼내 쥐었다. 

스르릉— 

흑요석처럼 예리하게 갈아둔 검날이 세상에 드러나자, 어마어마한 투기가 사위를 무겁게 짓눌렀다. 장법을 쓸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잔재주가 있었구나. 내 앞으로는 조심하마." 

"그러십시오." 

교활한 노인네. 너구리가 따로 없다. 

이광백은 내가 어떤 수를 쥐고 있는지 몇 번 가늠해본 후에야 자신의 진신병기를 꺼낸 것이다. 

곧. 

단검을 쥔 이광백의 기세와 살기는 몰라보게 부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광백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슥- 

"······."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기다란 빛줄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간 뒤였다. 뺨 아래로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공격보다도 한 박자 늦게 파공성이 일었다. 

십이제의 위명은 거짓이 아니다. 극히 빠르다. 사람의 눈으로는 곧장 쫓을 수 없을 만큼, 실로 현묘하고 고절한 신법과 검법. 청성의 무공은 대개 바람같았다. 

꾸욱. 

아무튼, 나는 대응을 위해 한쪽 눈을 감았다. 발끝에서부터 일어난 기감이 음파처럼 뻗어나가 근방의 정보를 선명히 전해왔다. 

그러나 그 정보 안에 이광백은 없었다. 

나는 즉각 오형검 일 초식과 이 초식을 연계했다. 사방팔방으로 가는 검강줄기가 쏘아져 일대를 넝쿨처럼 휘어감았다. 

콰과곽! 

찾았다. 좌측 하단, 검강과 검강이 부딪치는 충격이 고스란히 피부를 타고 흘러들어온다. 오색빛의 불똥이 스산히 튀었다. 나는 충돌이 일어난 쪽으로 검끝을 돌렸다. 

스걱. 

허나 깊지 못했다. 살갗만을 겨우 스쳐지나갔다. 

푹! 푹! 

덕분에 그 짧은 새, 다리를 두 번이나 찔렸다. 품 속으로 파고들었던 이광백은 단검을 회수해 훌쩍 물러났다가 다시금 허공을 짓밟으며 쇄도했다. 그의 몸이 너무도 날래, 찰나간 지근거리까지 허락해야 했다. 바람과도 같은 이광백 앞에서, 간격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듯했다. 

카가가강! 

나는 광선을 올려들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이광백의 공격을 쳐냈다. 검강과 검강이 육중하게 부딪치며 날선 기파를 토해냈다. 우리는 순식간에 열 합을 넘어 스무 합 가까이를 나누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 

갑작스레 어지럼증이 도지며 세상이 거뭇해졌다. 이광백이 사용하는 검법의 궤적이 지나치게 변화무쌍하다보니, 그 공격을 하나하나 간파하던 상단전이 무리를 호소하는 것이다. 

내 상태가 무언가 달라졌음을 직감적으로 느낀 듯, 이광백의 주름진 입가에 무정한 미소가 맺혔다. 뒤이어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달아오른 상단전의 칠감이 마지막으로 경고를 보내왔다. 푹! 허벅지가 심히 뜨끈했다. 

···그리고 그 시점, 나는 그제서야 닫아둔 하단전을 개방했다. 

콰아아아아아—!!! 

순간, 어마어마한 기운이 내 몸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며 근방에 있는 모든 것을 밀어냈다. 해일과도 같은 기운의 파도가 공간 자체를 잠식하며 부풀어 오른다. 밀려나는 것은 섬전처럼 달려들던 이광백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 

쾅! 

이광백은 그 파도에 속절없이 떠밀려, 자석이라도 붙은 양 천장으로 끌려올라가 부딪혔다. 그가 자랑하는 신법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고는 중력이 거꾸로 뒤집어진 듯 내려오지 못했다. 나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힘이 계속 그를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빙글- 

이광백은 허공에서 잠시 몸을 비트나 싶더니, 균형을 바로잡고는 단검을 투척했다. 대단한 기예였다. 끔찍히도 농밀한 검강을 머금고 빛살처럼 쏘아진 단검은, 나의 허벅다리에 정확히 박혔다. 

"고작 밀어내는 것이 한계인가?" 

가벼운 조소를 머금은 이광백은 품에서 단검을 하나 더 꺼냈다. 뒤이어 빠르게 천장을 박차려 했다. 

그러나. 

내 눈에, 이광백의 움직임은 흐릿하게만 보였다. 조금전 내 몸에서 쏟아져나와 공간을 가득메운, 무수한 기운의 알갱이가 회오리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후우우우— 

저것은 나의 단전에 쌓아두었던 정순한 기운이었다. 나는 하단전을 단숨에 비워버리며 안에 쌓여있던 기운을, 마나 회로를 통해 세상 바깥으로 쏟아내버린 것이다. 그것은 곧 기(氣)이자 마나였고, 이제는 나의 통제만을 따르는 마력이다. 

지난 반 년의 성과가, 헛되지 않았을 것이다. 

콰아아아아아— 

곧, 나의 육신을 중심으로 건조한 마력의 광풍이 불었다. 무수한 기운 알갱이로 이루어진 소용돌이가 탄생하더니 빠르게 세를 불려나갔다. 

챙강- 

천장에 매달려있던 샹들리에가 떨어져 깨졌다. 마력의 소용돌이는 물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 육신 만큼은 자연스럽게 지나 통과했다. 나의 회로가 세상과 감응하여 하나로 동화되고, 나의 기운이기에 그렇다. 

마치 세상이라는 배경과 동떨어져, 나만이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물리력을 가진 마나 알갱이들이 휘몰아치는데, 나는 그 중심에 유령처럼 멀쩡히 서있었다. 마나 알갱이들은 내 몸을 통과하며 계속 휘몰아쳤다. 

소용돌이는 점차 강대해졌다. 그러다 떨어져 깨진 샹들리에마저 삽시간에 흡수해 몸집을 부풀렸다. 곧 샹들리에의 깨진 조각들에도 강대한 마력이 깃들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이윽고. 

꽈드드드드득— 

드넓게 퍼져있던 소용돌이의 권역이 나의 손짓에 따라 좁혀지고 줄어들었다. 종래에는 그 소용돌이가 내 몸을 중심축으로 삼아 응집되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팔을 하늘로 뻗었다. 

"···!"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몸을 빼려던 이광백의 신형이, 그 소용돌이 쪽으로 확 끌려가더니 그대로 휘말려 들어갔다. 지금 이 공간을 장악한 기운은 모두 나의 몸에서 빠져나간 것. 십이제라도 일단은 나의 통제에 따라야했다. 

수많은 마나 알갱이가 칼날처럼 도사리는 소용돌이 안. 이광백은 즉시 전신으로 호신강기를 두른 뒤 허공을 박찼다. 

허나 부질없었다. 자연재해처럼 휘몰아치는 마력의 소용돌이는 이광백을 빠져나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거대한 회전력의 고리는 그를 야금야금 끌고 들어가 단단히 붙잡아 두었다. 중간에서 마력이 깃든 샹들리에 조각들이 이광백의 살갗을 찢고 뜯어냈다. 

쐐애액— 

동시에, 나는 광선에 기운을 가득 주입해 집어던졌다. 고아한 오색광채를 머금고 번갯불처럼 쏘아진 광선이, 허공에 묶여있던 이광백의 허벅다리를 꿰뚫고 천장에 가 박혔다. 대체 얼마나 강하게 박혔는지, 진법이 흔들리며 세상이 잠시 점멸할 정도였다. 

푸욱! 

"······." 

이광백의 주름진 미간에 깊디깊은 골이 패였다. 그의 구멍뚫린 허벅다리에서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나의 한쪽 다리는 진작에 병신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쯤에서. 

십이제, 이광백을 향해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사내답게 치고받았으니, 이제 슬슬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이광백은 아직도, 휘몰아치는 마력의 소용돌이 안에 갇혀있었다.

#162화. 인간이라서

#162화. 

마력으로 빚어낸 소용돌이 뇌옥. 

지금 반 컴퍼니 로비에서, 이광백을 제외한 세상의 기운은 오로지 나의 통제만을 따르고 있다. 

이광백의 주위로 거센 소용돌이가 몰아치며 몸뚱이를 강하게 붙잡아둔다. 무수한 마나 알갱이들은 별무리처럼 유형화된 호신강기마저 깎아내고서는, 그 안에 숨어있던 속살을 찢어 게걸스레 탐했다. 

촤아악— 

사방팔방으로 이광백의 선혈이 분무되어 실로 좋지 못한 광경이었다. 심약한 이들이 저걸 보았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함에 두 눈을 가렸으리라. 

이광백의 깔끔히 빗어올린 하얀 머리칼은 이미 아무렇게나 흩어져 봉두난발이 되었다.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이광백의 감정없는 눈이 보였다. 

나는 몸이 산산이 찢겨나가는 중인데도, 아직까지는 냉정하고 무덤덤한 이광백의 눈을 응시했다. 다른 십이제에 비하면 최근에 지위를 얻었다 하나, 그래도 십이제는 십이제인 것이다. 

"······." 

그러나 무표정을 연기하는 이광백의 안면 뒤로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듯, 깊은 의문과 떨떠름함이 뒤섞여있는 게 보인다. 

혹, 나의 희망 사항일 뿐인가? 그냥 과중한 임무에 퍼져버렸던 상단전이 다시 돌아온 것이라 믿겠다. 

내가 이광백의 속내를 완전히 읽을 수 없다 해도, 그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이제는 저자도 승패의 향방을 자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나를 오늘에서야 처음 마주한 인사다. 그러니 확신이 서지 않는 게 당연했다. 활동을 시작한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초출내기를 상대로, 정보를 긁어모아 봐야 얼마나 긁어냈겠는가. 

이윽고, 복잡한 한숨을 한 번 내쉰 이광백의 입이 열렸다. 

"모르겠군. 모르겠어. 이미 허물을 벗은 놈이니, 이걸 어찌해야 할까." 

그런데 이광백은 무언가 흥미와 동력을 잃은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이광백의 말을 듣고는, 그의 허벅지를 관통한 뒤 천장에 박혀있는 광선을 슬쩍 바라보았다. 워낙 강하게 쏘아낸 탓에 아직도 강기를 머금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피투성이가 된 이광백이 이어서 말했다. 

"목을 걸고 승부를 가려 날개를 뜯어내야 하는가?" 

그 말에 음습한 삭풍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이광백은 마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실제로 고심하고 있다. 

저리 고심할 만큼, 나의 존재가 예상외라는 뜻이기도 했다. 

십이제, 이광백은 그렇게나마 나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이 전투가 생사결로 번지면 반 컴퍼니의 입장이 곤란해진다. 

돈을 들여 치료하고 정양하면 그만인 다리 한짝 정도야 서로 웃으며 주고받을 수 있다. 

그러나 목을 걸고 승패를 가리는 것은, 이광백이 아니라 먼 미래에 빌어먹을 시체 놈들과 해야하는 거다. 

그래. 분명 그러하다. 

허나. 

"고심이 깊으시다면, 싸움을 마저 끝내시죠." 

"객기로다." 

나중의 상황이 지극히 곤란해질 것 같다고 해서, 당장 날개를 뜯네 마네 하는 말을 헤실대며 웃어 넘겨버릴 수야 없는 노릇. 비위나 맞추며 호호 웃어대는 것은 내 정신머리상 용납할 자신이 없다. 

게다가 무력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온 자다. 남의 영업장 앞까지 뭣 하러 무인들을 끌고 왔겠는가? 지랄 떨러 왔지. 

또한 십이제라는 지위까지 차지한 괴물이라면, 무공에 미쳤든 정신이 미쳤든 미친놈이다. 

그러한 미친놈과 대화가 무던히 풀릴 리가 만무하다. 

그렇기에, 아까 집어던진 광선을 곧장 회수했다. 

콰득— 

"!" 

진법 천장에 박혀있던 광선이 순식간에 뽑혀 역으로 쏘아졌다. 이광백의 허벅지를 한 번 더 스치고 돌아온 광선은, 피를 잔뜩 묻힌 채로 내 손바닥에 쥐어졌다. 

후읍. 

참았던 호흡을 몰아쉬자 콧속으로 기운이 빨려 들어와 단전을 채우고 주천했다. 발바닥 용천혈에 막대한 경력이 모여, 찰나간 폭발할 준비를 마쳤다. 

치이이이익······. 

광선의 검극에서 피가 타오르며 대차게 번뜩인다. 칼에 몇 번이나 맞은 내 허벅다리는 병신처럼 절뚝거렸다. 

물론 이광백의 한쪽 다리도 마찬가지다. 몰아치는 마력을 견뎌내느라 혈도를 짚을 여유가 없으니, 피가 계속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늙은 이광백을 배려하며 말했다. 

"오십시오. 이러다 주저앉으면 모양 빠집니다." 

"그리하지." 

우우우웅— 

그리고 다음 순간, 이광백의 손에서 뻗어나온 강기가 한계까지 압축되고 압축되어 구의 형태를 만들었다. 

이미 눈에 짙게 보일만큼 극한까지 기운을 눌러 유형화한 강기(罡氣)를, 한번 더 벼려내고 압축한 것이다. 강기를 압축하고 구겨낸 강환(罡丸). 이광백은 그러한 강환을 수십 다발이나 만들어 뿌려댔다. 

저거, 내공의 화후가 대체 얼마나 깊다는 뜻인가? 

콰과과과과광—!!! 

강환 다발의 성대한 대폭발은 그것과 맞닿은 반경을 그대로 지워버렸다. 로비를 보호하던 진법이 대차게 뒤흔들렸다. 근방을 통제하고있던 나의 기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아아······. 

몰아치던 마력의 소용돌이는 그 거대한 충돌에 힘을 상실하여 단전으로 돌아오고, 피투성이가 된 이광백은 자유를 얻자마자 허공을 박차고 쏘아졌다. 

불현듯. 

스걱— 

이광백의 신형이 홀연히 사라지나 싶더니, 어느새 목덜미 근처를 한줄기 바람이 가르고 지나갔다. 극한까지 단련된 신법과 쾌검의 묘리. 검날이 짧다는 단점을 속도와 기예로 가뿐히 초월해내고 있었다. 

허나 대응조차 쉽지 않았던 이전보다야 약간은 느릿해져 피할 여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다리가 병신이었기에. 병신처럼 한 다리로 싸우느라 느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쾅! 

그래서, 두 번째 검로는 능히 알아채고 받아냈다. 나의 기다란 광선과 이광백의 짧은 단검이 한데 어우러져 비대칭한 십자를 그렸다. 

순간, 내 손바닥에 어마어마한 압력이 전해졌다. 

콰드드득! 

"실수한 걸세. 기회가 있을 때, 다리가 아니라 목을 참했어야지." 

이광백은 한 손으로 잡고있던 단검에 힘을 보태려는 듯, 다른 손으로 검병끝을 누르고 있었다. 강기가 꿀럭꿀럭 주입되는 꼴을 보아하니, 물러설 마음은 없어 보인다. 

살아온 세월로 인해 내공의 화후가 굉장히 깊을 터. 정면을 점하고 공력싸움으로 가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다. 바닥과 한 몸이 되기 싫다면, 내쪽이 반드시 몸을 빼며 싸워야 할 테니. 

"늙은 십이제를 죽여 무엇에 쓰겠습니까? 알아서 내려오시면 몰라도." 

꽈악! 

"······." 

하지만 나는 몸을 빼기는커녕, 광선의 검병을 부러질 듯 강하게 붙잡았다. 어차피 다리가 병신이라 한 번 물러서면 연신 밀리는 형세가 지속될 것이고, 드워프 다르간트의 역작인 광선이 먼저 부러질 일은 없었기에. 

"혈기는 좋다만. 무모하군." 

이광백은 진절머리를 치며 손에 힘을 더했다. 

그그그그극···! 

그는 비스듬히 누인 단검을 두 손으로 잡아 가공할 힘으로 눌렀고, 나는 꼿꼿이 세운 광선을 부러져라 잡고는 오직 전방으로 공력을 보탰다. 교차한 검신끼리 힘과 예리함을 겨루며 절절한 검명을 내질렀다. 

그러다 마침내. 

쿠직. 

막대한 검강의 격돌지에서 균열이 생겨났다. 이광백이 순간 손가락의 위치를 달리하여, 정면으로 누르던 단검의 궤적을 비튼 것이다. 

눈부신 검광이 번갯불처럼 여러 갈래로 폭사했다. 

끼기기긱— 

서걱. 

위에서 떨어지는 광선의 검날을 산등성이처럼 타고 긁으며 쏘아진 이광백의 단검. 그것은 찰나에 검을 쥔 내 손등부터 어깻죽지까지를 길게 긁고 지나갔다. 

손가락 마디가 반절쯤 절단났고, 한쪽 면의 감각이 곧장 사라졌다. 근육과 힘줄이 결대로 잘려나간 것이다. 

하지만. 

나를 공격한 이광백의 몸에서도, 이내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뚝. 

"······!?" 

내 육신을 베고 지나간 그의 단검이 어딘가 틀어박힌 것처럼 우뚝 멈추었다. 검을 쥔 이광백의 팔꿈치도 뒤로 홱 젖혀졌다. 마치 형태없는 무언가에 강하게 붙잡힌 듯. 

꿈찔- 

"무슨!" 

더해서, 끈적한 진창 속에 빠진 것처럼 이광백의 움직임이 굉장히 둔해졌다. 몹시도 느려졌다. 그래도 어지간한 8레벨 끝자락의 무인보다는 신속했으나. 본래의 섬전과도 같은 속도에 적응이 된 내 상단전과 눈으로는, 한참 둔하게 보이는 것이다. 

주위를 메운 공기의 밀도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정확히는, 내가 운용하는 마력의 밀도가 달라진 것이다. 이광백이 만들어낸 강환처럼. 나는 미세한 마나 입자들을 찰나간 겹치고 또 겹쳐 주변으로 조용히 퍼뜨려 놓았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공간 전체의 형질이 변했다. 

그 마력의 진창과도 같은 지대를 온몸으로 뚫고 지나간 이광백은, 한 발을 내딛는데도 막대한 저항감을 받아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속이 진탕되었을 것이고, 마나를 포개는 과정에서 생긴 어마어마한 마력풍이 사방을 덮어누르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변화한 환경에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자유로이 움직였다. 밀도있게 풀어놓은 마나 입자들은 내 전신을 통해 뿜어져나온 친숙한 기운이기에. 

팟! 

점과 점을 잇듯. 

나의 신형은 가속이 붙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이광백의 후방을 점했다. 내 형편없이 뜯어진 옷가지 안쪽으로 빽빽하게 새겨놓은 문신들이 주변의 마나를 게걸스레 빨아먹고는, 이제야 그 빛을 발했다. 

그렇게. 

아직도 끈적한 마나의 진창 속을 헤엄치는 이광백의 머리 위. 

광선의 섬뜩한 칼날이 작두처럼 공간을 절삭하며 떨어졌다. 

이광백은 막대한 양의 공력을 뽑아올려 막으려 했으나······ 

이번만큼은, 그의 검보다 나의 검이 더 신속했다. 

콰직— 

* * * 

절뚝··· 

절뚝··· 

나는 다리를 크게 절며 로비의 승강기로 향했다. 

곧, 굳게 닫혀있던 승강기 옆의 버튼을 누르자. 

우우우웅— 

로비를 법력으로 가두고 있던 언평 선생의 진법이 그제야 활짝 열리며 갑자기 다른 세상의 풍광처럼 변했다. 

어느 때는 절벽의 풍경을 보여주고, 어느 때는 장벽 바깥의 풍경을 보여준다. 끝도 없이 걷히는 진법은 마치 다른 세상을 꿰매어 이어둔 듯했다.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뒤따라온 이광백은 그러한 절경을 보더니 무덤덤히 말했다. 

"이곳을 단신으로 빠져나가려면 크게 애를 먹었겠군." 

"아닙니다." 

나는 이광백의 말을 정정해주려 지친 와중에도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언평 선생의 진법을 조금 업신여기는 듯하여. 

"연고도 없는 이곳이 노야의 무덤이었겠지요. 다리가 그리 썩둑하고 잘리셨는데." 

지금 이광백은 검에 잘려나간 자기 다리를 집어들고 있었는데, 따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 

이윽고, 나와 이광백은 활짝 열린 승강기에 함께 올랐다. 승강기 내부는 발할라 산맥의 꼭대기처럼 기(氣)자체가 풍부했다. 승강기 자체도 진법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한쪽에는 영롱한 에센스가 담겨있는, 주먹만한 항아리가 있었다. 

구웅- 

곧, 작은 방 크기의 승강기가 뻔한 작동음을 내며 움직였다. 아무 층에도 멈추지 않고 무한히 움직였다. 아래로. 또 아래로. 가끔은 위로. 하지만 종착지는 없다. 그렇게 무한정히 움직였다. 진법이라 그렇다. 

잠시 뒤. 

"너는 오만했다." 

철썩! 

이광백이 잘린 다리를 환부에 붙이며 먼저 말했다. 가부좌도 틀지 못하는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여럿 패어 있었다. 

"이제야 세상으로 기어나온 주제에 광오했다. 땅속을 전전하며 뿌리의 수액이나 받아먹다가, 탈각하여 윗공기를 맡아보니 백 년을 버텨온 거목들이 갑자기 우스워지던가?" 

메가콥이 만들어낸 세상의 덕을 보다 경지에 오른 뒤 그들을 우습게 여기는 그 해악한 유충. 

이광백은 나를 그리 정의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로 반 컴퍼니쯤은 통째로 쓸어버려 흔적조차 말끔히 지워버릴 수 있는 메가콥들이 워낙 거목이긴 하지. 

그리고 이 세상에는 그러한 거목이 참 많이도 깔려있다. 무림계부터 마법계까지. 백여 년 전 대전쟁 이후로 도시를 빼앗기든 말든 자기 배만 불려오던 거목들이. 

척! 

나도 몇 갈래로 잘린 팔을 세심하게 이어 붙이며 말했다. 

"매미가 빨아먹을 먹잇감이 많다는 소리로군요." 

이광백은 또 조소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주제를 모른다는 말을 그리 해석하다니······."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움직이는 승강기 안이 적막해졌다. 

찰박- 

나는 말없이 이광백에게 에센스를 한움큼 퍼서 건네고, 나도 한움큼을 떠서 마셨다. 에센스의 품질이 극히 높았다. 일단은 잘린 팔다리를 붙여놓아야 뭐라도 할 것 아닌가. 

피투성이가 된 나와 이광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전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지혈을 위해 짚어둔 혈도를 풀고는 오래간 운공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잘린 다리가 대강은 붙어 몸이 한결 나아진 이광백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전보다는 날이 조금 덜 서있는 어조로. 

"좋은 무공칩을 아무리 시중에 풀어봐야, 강대한 기업들이 마음먹고 회수하려면 모두 회수할 수 있다. 무슨 꿍꿍이를 낸들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요."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도 혈기가 방장했던 사내들은, 각자 팔 다리가 한 쪽씩 잘리고 나서야 이렇듯 적당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광백은 무림계를 대신해 경고를 전하러왔다. 무림계의 거물이라 불리우는 기업 대부분이 반 컴퍼니가 일으킨 지금의 사태를 불쾌해한다며, 나름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나는 강제로 퇴출된 인형사를 대체하여 십이제의 위에 오른, 열둘의 십이제 중 말석(末席)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기묘한 진법이 네놈을 받치고 있지 못했더라면, 그리 자신있게 싸울 수 있었겠는가? 세상에는 나보다 더한 강자들이 있다. 그러니 일찍이 포기해라." 

이광백이 그리 경고하기에, 내가 궁금해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기를 쓰고 막으려 합니까? 어차피 조만간에 망해버릴 세상 아닙니까." 

그러자, 이광백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심했다. 얼마 뒤 봉두난발이 된 머리칼을 다시 깔끔히 넘겨낸 이광백은 어렵지 않게 답을 내놓았다. 

"우리가 한낱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허망함이 짙게 묻어있는 대답이었다. 

"모난 돌은 정으로 내리치고, 사다리를 오르려는 놈은 밀어버리고, 먼저 다리를 건너면 그 다리를 부수어 땔감으로 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 그렇다. 생사여탈권을 쥐고있는 자들은 세상이 망해갈수록 그것을 더욱 놓지 않으려 한다. 나약한 이들을 탄압하고 통제아래 놓기 위해 힘을 쓴다. 나도 그러하고, 인간의 본성은 그러하다. 이유를 찾지마라." 

나는 이광백의 대답에 꽤나 동감했다. 

전생의 아포칼립스 회차에서 이미 한 번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삶을 지나온 나조차도, 한때 인간의 이기심을 버리지 못했다. 

어차피 망해버릴 세상. 총과 칼 한 자루씩을 차고 불온하게 접근하는 놈은 가차없이 죽였다. 사실 불온하지 않더라도 내가 불안하면 눈 앞에서 치웠다. 

식량과 물을 구걸하면 쳐다보지도 않고 내쳤다. 문을 손톱이 떨어질 때까지 긁어도 끝까지 열어주지 않았다. 

나의 안전과 생존을 위협받고 싶지 않았으니. 

같은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참으로 많이도 저질렀고, 덕분에 서서히 정신줄을 놓고 미쳐갈 수 있었다. 

그때도 아주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인간이라서. 

때문에 나는 이광백의 답이 꽤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이광백은 사람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그거, 죽도록 두들겨 맞으면 고쳐집디다.'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이 단체로 미쳤어도, 죽도록 두들기면 어떻게든 고쳐볼 수 있다는 얘기 아니던가? 오늘 이광백과의 만남에서 얻은 게 없지 않았다. 

"무림의 경고는 받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는 다리가 붙은 이광백을 진법에서 내보내 돌려보냈다. 그는 우화 어쩌고 할 적부터 흥미를 잃었던 지라, 청성의 무인들과 함께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 고요히 명상하며 이 세상을 죽도록 두들길 방법을 모색했다. 금강석보다도 견고하게 구축해둔 무림계와 마법계. 그들의 틈새를 어떻게 비집고 들어갈까 하며. 

그렇게. 

어느새 깨어나보니 시간이 꽤 흘렀고, 잘린 팔도 붙었다. 

나는 명상을 깨고 일어나자마자 그 길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 먼 곳까지 직접 걸음하셨습니까?" 

"할 일을 마치면 찾아오라 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자네가 벌여둔 일을 듣자마자, 가만히 앉아 기다릴 마음이 들지 않더군." 

놀랍게도, 내가 명상 중에 염두에 두었던 자가 한발 앞서 반 컴퍼니에 도착해 있었다. 

인류 연방에는 편입되어 있으나, 인간 세상과 그다지 친하지 못한. 

인간보다 기본적으로 육체가 튼튼하고 강성하며, 수명까지 길고. 

무림계도 마법계도 아닌 제 3의 소수 세력을 대표하는······ 

슬레모킨의 아비이자 엘프들의 군주. 

아이작 모드릭. 

내가 지금 찾아가려던 그가, 동일한 사안으로 먼저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칩, 인간을 상대로만 팔 필요가 있는가?"

#163화. 법

#163화. 

세계의 굵직한 역사는 대부분 인간에 의해 쓰여졌다.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 

인간들은 우주 진출마저 우습게 볼 만큼 막대한 성세를 구가하고 있었고, 세계를 힘으로 눌러 지배하며 이끌어가는 주류는 언제나 무림계와 마법계를 주축으로 한 기업 집단이었다. 

그런데 인류는 너무나도 먹고 살만했던 나머지, 하루가 멀다하고 진영을 나누어 전쟁을 벌여댔다. 배는 부르고 손은 심심하니, 파국으로 직행하는 편도 티켓을 끊어보기로 결의라도 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이 갑자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기이한 감염 사태가 심상찮게 벌어지는 와중에도 그저 양 진영으로 나뉘어 학살과 전쟁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시체의 힘이 보잘것 없었기에 방심했을 터.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실로 얼빠진 작자들이 따로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기점을 지나자 시체들이 눈에 띄게 강해지며 수가 폭발적으로 불어나더니······ 

대규모 감염 사태가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인간들은 무림계와 마법계 간의 대전쟁을 종식하고 총력으로 대응에 나섰다. 허나 긴 전쟁으로 인해 전력이 깎여나간 마법계와 무림계는 제 힘을 온전히 쏟지 못했다. 

이미 세계 전 지역에 퍼질대로 퍼져버린 시체는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 

그렇게 시체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인류의 터전을 차례차례 집어삼켰고, 설상가상으로 인류쪽 강자들의 변절까지 가속화되어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전성기를 구가하던 인류는 거대 도시를 최후의 보루삼아 장벽을 치고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장벽 바깥을 부지런히 배회하는 200억 마리가량의 시체.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그 괴물들은 사실상 인간의 작품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오만한 인류의 연이은 헛발질로 멸망을 코앞까지 끌어당긴 세계의 역사에서, 늘 변두리쪽으로 밀려나 조명받지 못하는 종족들이 있었다. 

수인, 엘프, 흡혈귀, 드워프등···이족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우선 좋은 말부터 하자면, 그 이족들은 비록 주류는 아닐지언정 약하지 않다. 

대부분의 이족들은 태생부터 인간보다 강력한 육체를 타고난다. 그래서인지 평균적인 수명도 긴 편. 수인들의 경우 단련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신체의 강성과 탄력이 저레벨의 무인과도 맞먹을 정도다. 

힘이 필요한 세상에, 대단한 장점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족들은 인간처럼 고도의 문명이랄 것을 세워 올리지 못했다. 물론 알 헤임달의 풍경을 보자면 이족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온 기술과 문명은 있으나, 인간에 비하면 절대적인 머릿수가 적어 한계가 명확했다. 

또한 끝없는 기업 간 경쟁과 전쟁으로 양방향 교류를 주고받으며 급속도로 발전한 인간 사회와는 달리, 이족들은 종족 간의 교류조차도 적었기에 그것이 더 두드러졌다. 

하기야 과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지금은 연방을 이루는 일곱 도시뿐이나, 세계는 본래 참으로 거대했기 때문에. 

인류가 끝끝내 지켜온 일곱 개의 거대 도시와 기타 개척지의 면적을 전부 합쳐봐야 이 세계 땅의 1퍼센트나 겨우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거대 도시라는 말이 그토록 초라할 수가 없다. 

그리고 150여년 전만 해도 시체라는 위협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거대한 대륙의 변방 어딘가에 같은 종족끼리 박혀 잘 살아가면 되는 세상이었다. 

인간들은 저들끼리 이권다툼을 하느라 대륙 변방에 울타리를 치고 살아가는 이족들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고, 그것은 이족들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니. 

다만, 현재는 각자도생이 불가능한 시대. 

이족도, 인간도 집단 특유의 배타성을 버리고 교류를 해야만 했다. 이족들은 알 헤임달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채굴해 연방 도시들에 공급하고, 넘치는 활기로 장벽 바깥의 땅을 끝없이 개척했다. 

······알게 모르게, 연방 내 인간들에게 무시와 차별을 당해가면서.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당연지사 강력한 거대 기업들이 자리했다. 

심성이 고운 기업인들도 찾아보면 있기야 하겠지만, 눈물 없이 살기는 건조하고 퍽퍽한 세상이다. 그러니 뭐라도 무시하고 깔봐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는가? 때문에 본성에 충실한 다수의 연방 기업들은 문명이 뒤처진 이족을 열등하다 업신여겨 상냥하게 대하지 못했다. 

마치 이족을 변두리에서 자원이나 캐먹고 사는 토인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간 은근하게 얕잡아보던 이족들의 수중에, 애써 막으려던 나의 칩이 잔뜩 넘어가는 광경은 생각보다 꽤 볼만 할 것이었다. 

라그나로크 중심업무지구. 반 컴퍼니 본사. 

아이작의 중후한 음성이 내 집무실을 웅웅 울렸다. 

"난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습니까. 듣기에 아주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지만 크게 걱정할 거리는 아니다. 미래에 사위가 될 인간이라면 조금은 신뢰한다. 적어도 이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없다는 뜻. 그러니 약혼을 선택한 것이겠지." 

"······." 

나는 저 엘프군주인 아이작이 어떤 마음으로 이곳까지 친히 왕림한지 알고 있다. 저리 실없는 농담을 던질 여유까지 있다니. 

역시 종잡을 수가 없는 엘프다. 

잠시 뒤. 

"인간과 이족들이 연방이라는 공동체로 묶여 있다 해도, 역사적으로 소수세력에 불과한 이족의 인식과 취급은 좋지 못했다. 언제나 박한 대접을 받아 뒤편으로 밀려 있을 수밖에 없었지. 우리 엘프부터가 그럴 정도인데, 다른 이족들은 오죽하겠나. 인간은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놓은 설움을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거다." 

인간과 이족의 불편한 관계로 서두를 연 아이작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나는 입을 뗀 그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때. 인류가 무너진 로키를 탈출해 대지를 가로지르던 때, 칠좌 능광객과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불쾌한 존재' 의 전투를 잠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초월적인 힘의 격돌에 하늘이 천 갈래로 갈라지고, 광활한 땅이 순식간에 썩어 무너져내렸다." 

곧. 

아이작의 안면에 설핏 웃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를 무엇보다 또렷하게 응시하는 아이작의 눈. 상상속의 전투를 복기하는 듯 위압적인 그의 전신에서 기운이 들불처럼 치고 일어나 웅혼하게 빛을 냈다. 

그러던 아이작은 문득,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전투 중 적절히 개입해 칠좌의 목숨은 붙여 돌아왔다. 하지만 연방의 목숨은 언제까지고 붙어 있을거라 낙관할 수 없겠더군. 그래서 낡아빠진 편견과 취급부터 걷어낼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에, 마침 이렇게 적절한 기회가 찾아온 거다." 

잠시 말을 멈춘 아이작은 빌딩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반 컴퍼니의 본사 최상층. 라그나로크 중심업무지구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 이제는 반년 전처럼 죄다 공사판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아닌, 화려하고 멋들어진 야경이 발 아래로 길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윽고, 멈추었던 아이작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묘왕(卯王),서왕(鼠王),계왕(鷄王). 수백만 수인 꼭대기에 군림하는 수인왕 셋을 설득하고 오는 길이다. 묘왕과 계왕은 무공을 원하고, 서왕은 마법칩을 원하더군." 

대전쟁 시절 이전부터 존재했다던, 알 헤임달에서 무력으로는 감히 대적할 자가 없다는 수인들의 왕. 

서왕과 계왕은 몰라도, 묘왕 우륵바갈은 본 적이 있었다. 

두 눈이 있어야 할 부위가 어둑하게 뚫려있던 토끼들의 왕. 일전에 개척도시 롬진에서 8레벨급 시체와 전투를 벌이다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맨손으로 강력한 8레벨 시체를 간단히 찢어버릴 정도의 초강자였다. 

그쯤에서 잠자코 듣고있던 내가 말문을 띄웠다. 시간을 들여 하려던 것을 이미 아이작이 모두 해치운 채로 라그나로크에 왔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칩을 알 헤임달에 풀더라도 금세 무림과 마법계의 귀에 들어가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그들의 압박을 감내할 수 있다면—" 

"한 번 걱정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동의합니다." 

근심과 걱정은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다. 

마약이든 술이든 살인이든 도박이든 다 비슷하다. 시작하기까지가 가장 어렵지 한번 시작하면 끝내기가 힘들다. 그렇기에 시작이 절반이라는 소리도 있는 것인데, 아이작은 일말의 근심 걱정조차 하지 않으니 문제가 없어보였다.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저 하면 되는 것. 

"허면 팔겠습니다." 

젊으면서도 재능이 뛰어난 엘프와 수인은 많을 것이다. 수준 높은 무학과 마법을 그들이 깨우칠 수 있다면, 연방의 전력 증강에 큰 보탬이 되겠지. 

기업의 비전기술로 칩을 제작하면 대부분 수준이 맞는 기업이나 막후의 재력가를 상대로 팔아먹지, 족보도 모르는 이족에게까지 칩을 팔지 않는다. 어찌어찌 판매가 된다고 해도 알맹이까지 팔아먹는 기업은 없었다. 게다가 칩을 만드는 절차도 매우 까다롭거나 받지를 않는다고 들었다. 이족들은 칩 제작과 관련해서도 차별을 받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족들에게 보물단지나 다름없으리라. 

몇 세대나 뒤처진 증기기관을 없애버리지 않고, 한계까지 발전시켜 아직까지 잘 사용하고 있는 알 헤임달이 떠오르는 하루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이족들도 기이한 신념이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 잡념을 지우고 아이작에게 물었다. 

"이전에 저 말고도, 비슷한 일을 계획했던 자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얼핏 기억이 난다." 

"그때도 이런 제안을 해보셨습니까?" 

"다들 압박을 버텨내지 못하고 시작해보기도 전에 사라지거나 죽었다. 연방의 도시 전체에 광고를 올리고, 실제로 헐값에 팔아치우기까지 성공한 것은 이번이 최초겠군. 9레벨쯤 오르면 현실을 알고 타협을 선택하기 마련이니." 

"그런데 초기에 생산된 대부분의 칩은 메가콥이나 대기업의 수중으로 흘러 들어갔을 겁니다. 앞으로도 회수를 자신하고 있습니다." 

"알 헤임달에서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럼 언제까지 보내드리면 되겠습니까." 

"빠를수록 좋다." 

"상선의 화물선적용 캐리어가 발할라를 거쳐 알 헤임달 스테이션으로 갈 겁니다." 

"기억해 두겠다." 

아이작이 직접 나섰으니, 일처리는 속전속결이다. 

알 헤임달 시티의 이족들은 라그나로크의 주민들보다도 빠르게 강해질 터. 이제 무림계를 비롯한 세력이 어떻게 나올지를 손꼽아 기다리면 되었다. 

그렇게 아이작은 나와의 대화를 마치고는,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만 남겨둔 채 자리를 떠났다. 

"좋은 소식, 기대하고 있겠다." 

* * * 

편안한 휴식과 일상은 사내에게도 꽤나 중요한 부분이다. 

한 번 제대로 피를 보면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흥분하기 마련. 그렇게 연신 긴장하고 흥분해있다보면 뇌와 몸이 점점 뻐근해진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정신이 홰까닥 나가서는 미쳐버리게 되는 거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총으로 타운의 갱을 전부 쏴죽이는 학살극을 벌였다든지, 이기지도 못할 상대에게 덤벼들어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고 있다든지 하는 일들은 그럴때 벌어진다. 정신나간 놈은, 항상 혼자만의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마침, 십이제 이광백과의 전투에서 피를 많이 보았다. 무림계에서 불어온 첫 풍파는 무사히 넘겼으나, 언제고 다시금 들이닥칠지 몰랐다. 누군가와의 싸움 도중 '어째서 나한테만 지랄이지?' 고함을 지르며 칼을 휘두르지 않으려면 미리 머리를 식혀두는 게 좋았다. 

그러니 뻐근해진 머리를 서둘러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정서적인 안정을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 

스윽- 

피 냄새를 지우려 옷을 말끔히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본사, 레나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레반?" 

레나는 기다란 흑발을 말아올려 옥색의 비녀를 꽂고 있었다. 항상 심한 불면증이 있었는데, 요새는 숙면을 취하는지 날이 갈수록 성장해 루벤카의 몇 년 전 모습이 비쳐보이기도 했다. 나는 머리를 강하게 털었다.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왔어?" 

"잠깐 들렀다." 

언평 선생의 진법이 튼튼한 건지, 아니면 꼬박 밤을 새우며 업무에 집중하다 잠이라도 들었던 건지, 레나는 내가 십이제라는 인간과 큰 전투를 벌인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걱정할 거리가 없을 테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레나는 피곤한 기색으로 눈을 비벼대며 물었다. 

"이제는 장벽 바깥으로 안 나가는 거야? 반년간 쉬는 날도 없이 계속 나가더니······." 

"할 일이 많아질 시기라." 

"······일은 나도 많거든. 아무리 멋대로 운영하려고 세운 기업이라도 그렇지, 클로에씨랑 둘이서 업무 맡아 보는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쿡. 

툴툴댄 레나는 가까이 다가와 내 팔을 가볍게 찌르더니, 무언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입주변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어있었다. 레나는 굳은 얼굴로 조용히 속닥거렸다. 

"레반, 언니가 빌딩 밖에서는 그 늙은 여자 꼭 조심하래. 계속 따라다니면서 전부 감시한다는데 요새 유독 심해졌대." 

"늙은 여자?" 

"언니가 이렇게 말하면 분명 알 거라던데?" 

아마도 카스트라 뷔에탕을 말하는 듯했다. 근심 걱정은 한 번 하면 끝이 없다지만, 뷔에탕은 확실히 경계해야할 인물이긴 했다. 

"응? 알겠지?" 

대답이 늦자, 은근히 걱정하며 올려다보는 레나. 

레나의 고운 속눈썹은 몇 번이나 깜빡이며 대답을 재촉했다. 

이상하게도, 그 광경이 느릿느릿하게 보였다. 

이광백과 팔 다리를 하나씩 교환하던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안이 조용한 일상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별것도 아닌데 말이다. 

* * *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슬슬, 알 헤임달 시티에 상선의 화물 캐리어가 당도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의 명령 서류요." 

생전 처음보는 '코릭' 이라는 이름의 연방 집행관이 대낮부터 웬 서류를 들고 반 컴퍼니 본사를 방문했다. 집행관의 태도는 기업을 잡아먹는 저승사자답게 꽤 고압적이었다. 

"회장 레반, 읽어 보시오." 

"······." 

마치 어디서 미리 한 번 겪어본 듯한 기시감. 

옆에 있던 레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연방 집행관, 코릭이 내민 서류를 받아 곧장 훑어보았다. 

그러자. 

『 대부업법 위반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 위반 

총포·도검·화약류 등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건축법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관한 법률 위반 』 

『연방대법원』 — 『반 컴퍼니』 

『 법인 강제 해산명령 』 

놀랍게도, 회사를 때려치우라는 법원의 개똥같은 명령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참, 있는 놈들이 더한다더니. 

과거 중견기업 반 바이오 컴퍼니를 폭삭 무너뜨리고 레나의 아비인 반 회장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연방대법원의 억지 서류가, 3년이 넘는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반 컴퍼니 본사에까지 도착했다. 

이유야 뭘 갖다 붙이건 법인이 강제로 해체되면 글로톤 콥과의 정당한 계약은 의미를 잃고, 하루 아침에 힘없는 개인으로 전락하게 되는 거다. 칩 판매도 필연적으로 강력히 저지당하겠지. 

연방의 영웅 약발이 벌써 떨어진 건가. 

헌데, 내가 저 법들을 다 어긴 것은 맞나? 

애초에 법이 이렇게나 잘 작동하는 세상이었군. 

어째서 나한테만 지랄이지? 

화르륵— 

"······!?" 

"대법원이라······." 

나는 연방 집행관을 잠시 바라보다, 통보 서류를 삼매진화로 불태워 버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머리가 뻐근해지는 감각이 서서히 엄습하는 듯했다.

#164화. 웃는지 우는지

#1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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