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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8% MULTIVERVENENOSO / Chapter 8: 8

Capítulo 8: 8

< 왜 안 오지? >

합빈 교도소에서 숨어있던 마인을 검거했다.

알고 보니 일본계 교도관 다이고 카츠야.

당연히 조사해봤다.

제국에서 태어난 본토 출신이 아니었다.

식민지에서 건너온 각성자 이주민.

신분엔 문제가 없었다.

각성자이기에 합빈 교도관으로 근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고.

약 2년 정도 근무했다.

마인이 되었다면 사람 잡아먹는 걸 억누를 수 없었을 텐데.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합빈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빌런 중에 실종상태인 자들이 무려 5명.

모두 합빈 근처의 도시에서 살던 전과자들이었다.

그놈들이 다이고 카츠야에게 먹혔다.

빌런들은 마인들에게 있어 최고의 먹잇감.

일반인과 비교해 범죄자들이 실종되면 경찰이나 주변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뭐, 또 범죄를 저지르고 어디론가 도망갔겠지.

차라리 눈에 안 보이는 게 낫고.

그놈들이 없어졌다고 누가 신고할까?

다이고 카츠야는 그 점을 노렸다.

교도소에서 출소 예정인 범죄자들의 개인정보를 취득해 자신보다 약한 적합자, 혹은 각성자 빌런들을 사냥감으로 정했다.

그리고 비번이나 휴가를 내서 사냥했다.

제국 정보원 남일복 원장은 문경식 차장이 올린 보고서를 읽었다.

"···진짜 냄새로 판별한단 말인가?"

"제가 몇 번 물어봤지만 대답은 늘 똑같았습니다. 악취가 난다고."

"스킬도 아닐 텐데."

스킬이면 이해한다.

각성자들이 보유한 수많은 종류의 스킬들.

그중에 마인 판별이라는 스킬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하지만 김태주 회장은 각성하지 않았고, 따라서 스킬도 보유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마인을 궁지에 몰아넣고 마수화 스킬을 유도했고?"

"그렇습니다. 마인 다이고의 입장에선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냥 죽느냐, 아니면 마수화로 저항이라도 해보느냐."

"결국 마수화를 선택했지만 너무 쉽게 제압당했단 말이군."

"김태주 회장의 주먹에서 일어나는 마나 응집 현상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마치···,"

"마나 블레이드 같은?"

"네."

요 며칠 새, 마인 세르게이에 이어 마인 다이고까지.

제국 정보원은 연달아 마인 검거라는 성과를 냈다.

"이거 그냥 두고만 볼 수 없겠는데? 출동비 1억 가지고는 생색도 못 내겠군."

"그렇죠. 가진 재산이 거의 재벌급이라."

"···재벌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요즘 미리내 그룹 이기언은 뭐 하고 있나?"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만, 하지만 분명 가만히 있진 않을 겁니다. 이기언은 김태주 회장이 자신의 아들 이동우를 죽였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까요."

문경식의 말에 남일복 원장은 코웃음을 쳤다.

"이기언이, 참으로 뻔뻔한 새끼야! 지 아들이 실종된 걸 왜 김회장에게 뒤집어씌워?"

"실종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근거는?"

"제국 감사원 특허청 감사보고서 기억나십니까?"

"알지, 실종된 이동우 사장이 특허청 직원을 매수해 태홍 바이오 신약 특허 출원을 지연시킨 거?"

"그 건은 혐의가 완벽하게 드러났습니다. 결국 전주학 차장도 자백했고요. 하지만 이동우가 실종상태라···,"

"기소가 중지됐지."

무슨 말인지 알겠다.

공무원 매수는 큰 죄다.

무거운 형벌이 떨어진다.

이동우가 검찰에 소환되어 재판에 넘겨지는 걸 막고자 뒤로 빼돌렸을 것이다.

실종 운운하면서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 김태주 회장에게 일부러 누명을 씌워 태홍 바이오를 공격할 명분도 만들고.

"가만히 두면 안 됩니다. 황실에 끈이 있다고 저렇게 막 나가는 같은데."

"그렇지. 미리내 그룹은 이황자 후원 세력이니까."

"몇 개 터뜨려 볼까요?"

"아니, 그냥 둬. 내가 따로 만나보지. 경고만 해도 충분할 거야."

"놈이 선을 넘으면요?"

"그럼 우리도 넘으면 되지. 마인과 관련된 문제야. 황족들도 어떻게 할 수 없어."

마인을 판별할 수 있는 김태주 회장이다.

제국에 마인들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을 때까지 제국 정보원은 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럼 언제 이기언을 만나보실 겁니까?"

"왜? 김태주 회장에게 생색 좀 내보려고?"

"당연히 내야죠."

"알았어. 최대한 빨리 이기언이 만나서 담판을 짓겠네."

김태주 회장의 뉴서울 일정이 마무리되면 곧 자유도시 구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럼 만나기도 어렵다.

출동 요청 공문을 보내도 씹을지도 모르고.

따라서 제국 정보원의 값어치를 김태주에게 끊임없이 어필해야 한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이렇게 많다! 라는 것을.

※ ※ ※

삼한제국 식약청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부서였다.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제국의 다른 공기관들은 외부 세력에 의한 압박이나 로비가 통할 수도 있다.

실제로 몇 번 있었고.

며칠 전에도 특허청 사태가 터지지 않았나.

식약청은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

최소 30년 동안은 말이다.

그렇다면 30년 전은?

한창 제국의 인구가 폭발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임산부를 위한 여러 신약이 속속 선보였고.

지금은 망했지만 당시 이름있는 제약회사에서 임산부용 철분제를 개발해 식약청 심사 요청을 해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식약청장은 제약회사 사장을 만나 저녁 식사와 함께 10만 원권 지폐가 가득 든 가방을 받았고, 그 회사 철분제는 약식 검사를 통해 신속하게 시중에 판매되게 되었다.

그리고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났다.

그 회사 철분제를 복용한 임산부들이 정신을 잃거나 깨어나지 못한 채 사망해 버렸던 것.

황제는 진노했다.

왜냐하면 그즈음에 황제도 황실의 적통을 반드시 이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끈질긴 호소를 받아들여 황후와 후궁들을 들이고 자식을 낳으려고 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식약청장과 제약회사 사장을 잡아다 참수하고, 그에 관련된 모든 식약청 공무원들을 재판에 넘겨 징역을 살게 했다.

식약청이 폭파됐다.

이름난 제약회사도 하루아침에 망했다.

식약청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그 이후론 식약청에 로비를 시도한 회사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식약청도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조직을 재정비했고.

며칠 전 식약청에 두 개의 신약에 대한 판매 허가 심사가 들어왔다.

성분 분석을 시작해 적어도 인체에 해로운 물질은 들어가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후에, 곧바로 동물 실험에 돌입했다.

삐걱, 삐걱, 삐걱,

실험용 동물들이 들어있는 우리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식약청 약물 연구소 소장이 연구원에게 물었다.

"긴꼬리 쎅토끼들 왜 이래?"

"글쎄요."

"이것들 미친 거 아냐?"

번식력에 있어서는 최고의 마수.

밥만 먹고 나면 그 짓을 하는 마수란 걸 감안 해도 이건 너무 심했다.

하루 종일 한다.

지치지도 않았다.

"쎅토끼 건강 상태는?"

"일주일 지났는데 멀쩡합니다. 그래서 계속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환장하겠군."

일반인도 쉽게 때려잡을 수 있는, 너무나 약한 신체 능력의 쎅토끼였다.

조금이라도 나쁜 성분이 들어있는 물질을 먹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얘들 가지고 실험하고 있는 약물이 뭐라고?"

"건강음료입니다. 태홍 바이오에서 의뢰한 생기불끈이라는···,"

"참나! 진짜 불끈불끈 하나 보네. 정력제 성분 들어 있어?"

"없습니다. 피로 회복제입니다."

"마약 성분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약물 의존도는 어때?"

"일부 섹토끼에게 5일간 생기불끈을 먹이고, 한동안 투약을 중단했는데, 금단 증상 같은 건 없었고요."

곰곰이 생각하는 연구소 소장.

"생기불끈 샘플 몇 개나 들어왔어?"

"300개 들어왔습니다."

"가져와 봐."

연구원이 샘플이 든 박스를 가지고 실험대 위에 놓았다.

그런데?

"응? 이거 100개도 안 되잖아. 벌써 다 쓴 거야?"

"그, 그게···, 연구원들이 스스로 인체실험을 하겠다면서."

"이것들이 미쳤나! 아직 동물 실험도 완료하지 않은 약물을."

"건강음료지 않습니까."

"아무리 음료라도! ···하나 줘봐! 먹어보게."

소장은 태홍 생기불끈 음료를 꿀꺽 마셨다.

그리고 소장이 연구소로 다시 돌아온 건 정확히 2시간이 지난 후였다.

"야야, 임연구원, 생기불끈 있지? 그거 한 병 더 가지고 와봐."

"···여, 여기."

"어? 왜 이것밖에 안 남았어?"

"연구원들이 들이닥쳐서 막 가져가는 바람에,"

"이 새끼들이?"

하지만 소장도 그들을 탓할 수 없었다.

자신도 그런데.

"···이거 빨리 인체실험 들어가자. 태홍 바이오에게 연락해서 샘플 더 가져다 달라고 해."

"몇 개나요?"

"300개, 아니 500개 달라고 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 십전대보탕 같은 보약도 유의미한 효과를 지닌다고 하지만 그건 적합자나 각성자에게만 적용되는 약효.

결국 약에 포함된 마나가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이 태홍 생기불끈은 다르다.

일반인인 자신들에게도 환상적인 효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적합자와 각성자만 좋은 약을 먹으란 법이 있나?

연구소장이 보기엔 이건 빨리 시중에 풀려야 하는 물건.

즉시 인체실험에 들어가야 한다.

힘들 때마다 한 병씩 마시고,

※ ※ ※

등선의 조건은 어떻게 될까?

인(仁)과 의(義)를 행하고, 예(禮)를 지키며, 덕(德)을 쌓으면 신선(神仙)이 될까?

절대 아니다.

인, 의, 예, 덕.

그것은 신선의 도가 아닌 유학의 도이다.

물론 덕선(德仙)이란 신선도 존재한다.

보통 덕을 쌓았다 해서 적(積)자를 붙여 적덕선(積德仙)이라 불린다.

하지만 신선들은 결코 선(善)하지 않다.

인, 의, 예, 덕과는 거리가 멀다.

착해서 신선이 된 것이 아니라, 될놈될, 태어나면서부터 선근(仙根)의 싹을 가지고 있었거나, 혹은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에 등선을 이루는 것이 대부분.

선계의 상위 차원인 천선계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신선들이 얼마나 많은 사고를 쳐왔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

그래서 상제의 부하인 신장(神將)들을 보내 도원(桃園)을 지키게 했다.

혹시나 선도, 천도 복숭아를 훔치러 오는 신선들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도원은 상당히 넓은 곳이다.

그 구역이 다섯 군데.

1구역은 선도 복숭아 나무 500그루가 심겨 있다.

2구역은 1,000그루, 3구역은 1,500그루, 4구역은 2,000그루, 그리고 마지막 5구역은 오직 천도 복숭아 한 그루만.

각 구역마다 신장들이 존재해 방비가 엄중하다.

천도 복숭아 구역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도원이 털려버렸다.

10여 명의 선인에 의해서 말이다.

털린 구역은 1구역과 2구역.

같은 신선이지만 도원의 관리를 맡은 천선(天仙) 종리 선인이 상처투성이로 돌아온 신장(神將)에게 물었다.

"···주동자가 검선(劍仙)이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아니, 그자가 뭐가 부족해서?"

검선은 자신과 함께 선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한 선인 중의 한 명.

선도에 욕심내지도 않았고, 욕심낼 이유도 없었다.

"얼마나 털렸길래, 나무는 다치지 않았고?"

"1구역과 2구역의 선도를 반 이상 다 털어갔습니다. 나무들은 다행히 무사합니다."

"후우."

불행 중 다행.

그나마 나무들은 다치지 않았다.

솔직히 그 개망나니 원숭이 놈이 했던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새끼는 무려 천도 복숭아를 훔쳐먹었으니까.

천년에 한 번씩 열매를 맺는, 그것도 한그루밖에 없는 천도 복숭아에 비하면 선도는 선계의 과일일 뿐이다.

그래도 심각한 피해였다.

나무 하나에 열리는 선도의 개수는 약 50여 개.

1구역, 2구역 합쳐 2,000그루니까, 절반 이상 털렸다면 최소 5만 개 이상 훔쳐 갔다는 의미.

"어쩌다 그런 사달이 났나? 혹시 우발적으로?"

"아닙니다. 도원 경계를 서고 있는데 갑자기 검선이 와서 공격을 해왔습니다. 그사이 다른 선인들이 결계를 뚫고 들어가 선도를 훔쳤고요."

"그 많은 걸 어떻게?"

"호리병박 보패를 가지고 왔습니다. 뚜껑을 열고 진언을 외우니 나무에 달린 선도들이 쭉쭉 빨려 들어갔습니다."

"계획적이란 말이군."

돌려받아야 한다.

이유도 물어보고.

종리 선인은 신장을 보며 말했다.

"동료들 몇 명 데리고 가서 검선과 신선들을 데리고 오게. 윽박지르지는 말고, 정중하게! 내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면 올 거야."

"네."

그리하여 도원을 경비하던 신장 10명이 검선을 만나기 위해 선계로 내려갔다.

종리 선인은 신장들이 그들을 데리고 오기만을 기다렸다.

검선과는 오랫동안 교분을 나눈 사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지금쯤 잘못을 저지른 걸 후회하고 있을 터.

자신이 만나자고 하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런데?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나고, 한나절이 지나도 검선을 데리고 간 신장들은 감감무소식.

'···설마 겁박을 당하고 있나?'

대체 검신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가 뭘까?

그래서 대장군 격인 탁탑신장(托塔神將)을 호출했다.

"이보게, 탁탑."

"말씀하시오. 종리 선인."

"다름이 아니라···."

종리 선인은 도원에서 일어난 사건을 설명하고, 검선을 데리고 올 것을 부탁했다.

"흥!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 검선을 끌고 오겠소. 감히 선계의 법도를 어지럽혀?"

탁탑신장도 선계로 내려갔다.

이번엔 오겠지.

종리 선인은 굳게 믿었다.

하지만 탁탑도 마찬가지.

'왜 안 오지?'

검선은커녕 탁탑 또한 돌아올 기미가 없다.

'허, 참나, 선계가 무슨 무저갱도 아니고.'

마침내 종리 선인을 자리를 떨치고 나섰다.

'내가 직접 가봐야겠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 왜 안 오지?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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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으러 왔다가 도리어 잡혀버렸다. >

탁탑신장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선계로 내려갔다.

기회가 왔다.

빌어먹을 신선 놈들, 언제고 한번은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으리라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검선?

물론 강한 놈이긴 하다.

하지만 천선계 장수가 어디 만만한 존재인가?

탁탑도 보패를 가지고 다닌다.

하나도 아닌 세 개씩이나.

첫 번째는 상제가 하사한 '팔괘 나침반'

찾고자 하는 대상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면 나침반 바늘이 움직인다.

그래서 죄를 지은 놈이 어디 숨든 금방 찾아낼 수 있다.

두 번째는 '천군 소환 풀피리'

이 피리를 불면 천선계에 집결해있는 1만 대군이 순식간에 소환된다.

검선을 발견하면 그 길로 풀피리를 불 생각.

제아무리 검선이라도, 또한 그와 동조하는 신선 무리라도 신장 1만 대군이라면 충분하게 제압할 수 있다.

탁탑은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계속 따라가다가 마침내 선계 넓은 공터에 설치된 기이한 천막을 발견했다.

천막이 있는 곳은 다른 곳보다 유독 어두웠다.

또한 결계가 설치되어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흥! 여기 숨어 있었구나."

탁탑은 허리춤에서 천도 복숭아 가지로 만든 '파사(破邪) 방망이'를 빼 들었다.

그가 가진 세 번째 보패.

천도 복숭아 나무를 관리할 때 자른 가지로 만든 방망이, 삿된 기운을 물리치고 결계를 파괴하는 기능이 있어 신장들에게 지급되는 무기.

휘릿!

쿠웅!

탁탑은 파사 방망이로 결계를 부순 후, 천막을 열어젖혔다.

"검선! 어디 있소? 나랑 함께 갑시다. 죄를 지었으면 응당히 벌을···, 음?"

천막 안엔 검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선계 선인들이 여기 다 모인 것 같다.

"또 왔다. 또 왔어."

"이번엔 탁탑이구나. 잘하면 상제도 오겠네?"

"귀곡! 결계가 너무 쉽게 깨지는 거 아니오?"

"끄응, 파사 방망이는 어쩔 수 없어서."

"하필 결정적인 장면에···,"

쏟아지는 질타.

하지만 탁탑신장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앞에 보이는 영상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대체 저게 무슨···,'

네모난 하얀 천에 비친 풍경.

환영은 분명한데, 마치 살아서 움직이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인간들, 그들이 나누는 대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인 듯한데.

저런 곳은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탁탑은 곧 그 환영 속 세상에 점점 빠져들어 갔다.

희한하게도 저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쏙쏙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귀에 대고 말하는 건 뭐지? 허허, 전화기라니,'

등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씩 들고 있는 사각형의 물체.

그들이 숨 쉬고 살아가는 도시, 집, 그리고 거실과 방.

전부 다 호화롭고 풍요로웠다.

'···뭐? 다이어트? 살을 빼기 위해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요지경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수천 년 넘게 인간계를 왕래했지만 저런 인간사는 처음 본다.

결국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잊어버리고 영상에만 몰두하는 탁탑.

'세상에! 친자확인이라, 요사한 년! 바람을 피워? 쯧쯧, 뻐꾸기 새끼 키우는 게 아니라면 이혼하는 게 당연하지.'

저 안쪽에 자신의 부하들이 와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탁탑에겐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마디씩 던지는 선인들.

"아주 넋이 나갔구만."

"난 드라마보다 탁탑 표정 변화가 더 재미있네."

"이해해줍시다. 누군들 안 저러겠소?"

"그래도 공짜로 보여줄 순 없지."

"어이, 검선! 어떻게 할 거요?"

검선을 비롯한 선도 도적단들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어쩌긴! 다른 신장들처럼 우리가 한 달 요금 대신 대납하겠소."

그러더니 호리병을 기울여 선도를 쏟아내고는.

"독선, 여기 받으시오. 탁탑 요금 선도 25개요."

"···."

당군악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거 장물 아닌가?'

도원이 털려 시중에 풀린 대량의 선도들.

졸지에 장물아비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조사가 나오면 덤터기 쓸지도 모르는데.

'···나중이 아니라, 이미 조사가 나왔잖아.'

조사하러 온 신장들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선인들 틈에서 헤벌쭉한 채, 드라마에만 빠져있어서 그렇지.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다.

선도 복숭아에 장물이라고 쓰인 것도 아니고.

어차피 무한공간에 넣으면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한다.

"알겠소. 탁탑신장 요금 대납받았소."

"그리고 팝콘 하나 있으면 한 봉지만."

"···다 떨어졌소."

"에잉, 짭짤하니 맛있었는데, ···그 손목시계 팔 생각 없소?"

"꿈도 꾸지 마시구려."

"허어, 사람 참! 언제 또 물건이 들어오는가?"

"기약이 없소만."

"들어오면 내게 제일 먼저 말해주시오. 내가 다 사버릴 테니까."

검선의 플렉스에 다른 선인들의 부러움이 쏟아졌다.

"부자네, 부자야."

"도대체 선도 복숭아를 얼마큼 털었길래?"

"오늘만 사는 검선(劍仙)이구나."

"우리도 도원이나 털어볼까나? 아직 많이 남았잖아."

"일단 이거 마저 보고."

검선이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아직도 멍하니 영상만 바라보는 탁탑에게 말했다.

"탁탑!"

"으응? 어, 검선. 그렇지 않아도···,"

"의자에 편하게 앉아서 보시오. 내가 대신 요금을 치렀으니까."

"요금?"

"그거 못 내면 쫓겨나야 하오."

"···허어,"

"하지만 내가 대신 냈으니 한 달 동안 여기 있어도 되오."

"고, 고맙소."

표정이 밝아진 탁탑이 휘적휘적 걸어가 극장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편하게 드라마를 시청했다.

이미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완전하게 잊은 탁탑이었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는 것일 수도.

검선과 그 일당들이 신장들의 요금을 대신 내주는 이유가 뭘까?

뻔하다.

물귀신 작전.

공범을 만드는 거겠지.

등선 전에 절대독마로 불리며 교활함의 대명사였던 당군악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악랄하구나. 악랄해.'

진짜 저자가 검선이 맞나?

드라마 몇 편 보려고 도원을 털어?

하지만 검선은 도원에 널린 게 선도인데 그게 무슨 대수냐는 표정, 천도는 건들지도 않았으니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태연하게 이야기한다.

'뭐, 알아서 하겠지.'

그나저나 선인들의 컨텐츠 소비력이 엄청났다.

하긴, 극장에서 며칠을 죽치고 앉았는데, 하루에 거의 15편에서 20편을 보는 작자들인데.

영웅전 3부작은 예전에 끝났다.

결국 다른 드라마로 넘어가야 했다.

한참을 고심한 끝에, 당군악은 일일 아침 드라마를 틀어주었다.

일단 이들이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지구 세상의 이야기, 그리고 편수도 150편이 넘어서 비교적 시간을 길게 끌 수 있다.

이 많은 편수를 어떻게 일일이 다운받았는지, 새삼 태주에게 감사함을 느낀 당군악.

그런데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바로 언어 소통의 문제.

자신이야 삼한제국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지만 다른 선인들은 아니었다.

그 걸림돌은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학선(學仙) 갈홍 선인이 천리신통(千里神通) 술법진을 극장 바닥에 깔았다.

언어를 직접 번역하는 건 아니다.

당군악이 선인들과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이해한 내용들이 마치 텔레파시 천리통처럼 각 선인들에게 전달된다.

즉 당군악이 드라마 배경과 대사들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면, 선인들이 그걸 깨닫는 식으로.

학습기능까지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굳이 술법진과 당군악이 없더라도 언어를 완전하게 습득하는 효과도 볼 수 있단다.

하지만 무려 선도 500개 분의 선기가 필요한 술법진이었다.

당군악은 과감하게 투자를 결정했다.

모자란 선도야 이자까지 쳐서 천천히 주기로 약속하고.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면 보여줄 수 있는 컨텐츠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다.

그래서 엊그제부터 술법진을 깔고 일일 아침 드라마를 틀었다.

처음 선인들의 반응은 스토리가 아닌 배경에 집중됐다.

"우주는 넓고도 넓도다. 어떻게 저런 세상이 존재할까?"

"우리가 사는 곳은 그저 티끌에 불과했네."

"참으로 신기한 세상이로다. 이까짓 선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깨달음을 얻었군."

"쯧쯧, 이러다 또 등선하겠어."

드라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스마트폰, 자동차, 높게 솟아오른 건물, 각종 생활용품과 전자기기들, 상상도 못 했던 문물들도 신선들의 관심을 끌었다.

"보패인가?"

"당연히 보패지."

"수만 리나 떨어진 사람에게 자신의 음성을 전할 수 있는 물건이 보패 아니면 뭔가?"

"나도 자동차 한 대 있었으면 좋겠군."

"선계에 도로도 없는데?"

"깔면 되지."

그러다가 점점 막장 스토리에 빠져들었다.

"아니, 그럼 저 두 남녀가 사실은 남매가 아니었단 말인가?"

"대체 저 여인 아버지가 누구라는 거야?"

"···회장님? 저 늙은이는 딸을 눈앞에 두고도 왜 알아보지 못하나?"

"저저저, 썩을 년! 감히 자신의 치부를 덮으려고 살인 모의를 해? 오냐! 내가 먼저 죽이겠다."

"거참! 일어서지 말라니까. 화면 다 가리잖아."

다행이었다.

다소 생소해서 거부감이 들 줄 알았는데.

이런 걸 받아들일 정도면 다른 컨텐츠는 쉽다.

그렇게 막장 드라마를 상영하자마자.

탁탑을 비롯한 신장들이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결국 그들 모두 극장에 눌러앉았고, 반쯤 혼이 나가 입에서 침이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영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설마 누가 또 오는 건 아니겠지?'

아마도 올 가능성이 높다.

검선을 잡으러 보낸 신장들이 감감무소식인데 가만있을 리 있나?

그리고 그 예상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이, 이게 뭔가?"

천선(天仙) 종리 선인이었다.

이번에도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천선 종리 선인.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고 있는 검선 동빈 선인.

'끝났구나.'

종리 선인도 검선을 잡으러 왔다가 도리어 잡혀버렸다.

※ ※ ※

태주는 간만에 호텔로 왔다.

어제 합빈 교도소에서 마인도 잡아줬고, 공장도 순조롭게 돌아가고.

태홍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이 만족할 만한 품질로 생산되고 있었다.

심지어 식약청에서도 연락이 왔다.

생기불끈 인체실험을 진행하겠다고.

샘플 500병 보내달라는 걸 1,000병 주라고 지시했다.

생각보다 빠르다.

생기불끈이 건강음료라서 그런 듯.

실제로 새살쑥쑥은 여전히 동물 실험 중이었고.

'이제 슬슬 구례로 가자.'

빨리 가고 싶다.

백홍표도 만나 신선주 한잔 같이 마시고 싶다.

고아원 아이들도 그립다.

창훈이와 순철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또 수련했는지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그전에 완전하게 마무리 짓고 가야지.

백서연이 백두 그룹에 보낼 제안서와 계약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일이나 모레쯤 정욱철 회장을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볼 생각.

'좀 씻을까?'

태주는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룸서비스를 시켰다.

그리고 식사를 해결하고 잠시 쉬던 참에.

딩동.

호텔 룸 벨이 울렸다.

누구지?

아마 백서연 아니면 각성 장교 수행원들이겠지.

하지만,

'어?'

호텔 비디오폰 화면에 나타난 한 명의 노인.

흰색 정장에, 흰색 중절모, 새하얀 백발과 은빛 수염, 흰색의 얼굴 각성 문양.

이건 뭐, 백색 성애자인가?

보기만 해도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

"누구십니까?"

- 자네가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인가?

"그렇습니다만."

- 난 황실에서 나온 궁정 비서관 금수호라고 하네.

"···아!"

태주도 이름을 들어봤다.

황제의 가장 최측근이자, 황제 다음으로 강하다는 각성자.

어쩐 일이지?

아무튼 문은 열어줘야 한다.

누구와는 다르게 정식으로 초인종을 누르고 나타났으니까.

철컥.

띠리링!

태주는 비디오폰에서 방문 열림 단추를 눌렀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는 금수호.

처음엔 웃으며 들어왔다.

그런데 태주를 보자마자 정색하면서 우뚝 멈춰 섰다.

'왜 저래? 내가 뭘 잘못했나?'

태주도 금수호를 바라봤다.

순간 든 생각.

'···강하네.'

확실히 남다른 사람이다.

솔직히 그동안 시스템 각성자들을 살짝 무시한 측면이 있었다.

이정학부터 시작해서 오진형과 사단장들, 그리고 이두창, 이기언이 데리고 온 마스터까지.

그들은 마스터라는 등급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약했다.

하지만 금수호 비서관은 다르다.

그는 진짜다.

마스터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일대일로 붙으면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혼원무상독령공이 8성에 올랐는데도 말이다.

한편 금수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방에 들어와서 안색을 굳히고 멈춰선 이유.

그동안 말로만 들었다.

실제로 본 건 오늘이 처음.

그가 절대 적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건 본능에서 오는 두려움

더는 다가가면 안 될 것 같다.

지금 이 거리도 안심할 수 없다.

더 멀찍이 떨어져야 한다.

반면 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렇게 자신을 경계하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호적인 의미로 금수호 비서관을 향해서 양손을 들었는데.

"저기···,"

바로 그때!

휘릿!

파파팟!

섬전같은 몸놀림으로 어느새 호텔 현관문까지 물러난 금수호.

움찔!

태주도 덩달아 놀랐다.

갑작스러운 금수호의 몸놀림에 무한공간에서 비도를 꺼낼 뻔했다.

이게 뭐 하자는 짓인지.

"···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나도 알아. 하지만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금수호도 뻘쭘한 듯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일단 들어와 앉으시죠."

"아니야. 이 거리가 딱 좋아. 여기서 이야기하겠네."

금수호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내가 온 용건은 황명, 아니, 폐하의 친서니까 부담가질 필요 없이 거기서 듣게."

황제가 보낸 편지?

"···어음,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요?"

"천만에! 비공식적인 문서인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폐하를 직접 뵐 때나 예를 갖추면 되는 거고."

무슨 내용일까?

금수호는 황제의 편지를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 잡으러 왔다가 도리어 잡혀버렸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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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의 선물 >

서로의 경지를 알아보는 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법이다.

실력 차가 너무 나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위인지, 아래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래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들다가, 쳐발린 후에야 '아! 나보다 강한 사람이었나.' 하면서 뒤늦은 후회를 하는 거고.

지금까지 태주와 갈등을 일으켰던 마스터들이 거의 그런 식.

마스터라며 으스대고 덤벼댔지만 죽거나, 죽을 뻔하거나, 한방에 정신을 잃었다.

반면 태주와 금수호, 두 사람은 서로의 무서움을 안다.

금수호는 태주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몸이 위축됐다.

사실 그가 평범한 제약회사 사장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지리산 마수 토벌 작전에서 어떤 활약을 했다는 것도.

하지만 금수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김태주에게서 느껴지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위엄, 마치 황제 폐하 앞에 선 기분.

이건 실력이나 재능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의 눈빛에서 한세상 다 살아본 세월의 연륜이 엿보였다.

왜 주변 사람들이 저 젊은 김태주를 회장님, 회장님하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겠다.

'나이가 29살이 맞나?'

태주도 다를 바 없었다.

그도 금수호를 인정했다.

진정한 마스터.

강호 무림으로 비유하자면 10대 고수에는 살짝 못 미치지만 20대 고수엔 충분히 그 이름을 올릴 만한 실력.

그와 서로 싸워보면 깨달을 것이 많을 텐데.

정중히 청해볼까?

비무라도 한번 해보자고.

태주의 의도를 느꼈는지, 금수호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황제의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시, 시작하겠네."

- 해독제를 만들 때부터 짐은 그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또한 마인을 처치해 제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구한 노고에도 항상 감사하고 있다.

- 지리산 마수 토벌에서의 그대의 공도 잘 안다. 당장이라도 그대를 황궁으로 입궁시켜 큰 상을 내리고 싶다만, 요즘 황궁이 시끄러운지라, 굳이 입궁을 권하고 싶진 않다.

황궁이 시끄럽다고?

왜?

황위 계승전이라도 벌어지나?

- 그대에게 짐의 불민한 자식들이 접근할지도 모른다. 간곡하게 부탁하니 절대 누구의 편도 들지 말라.

그러자 부연 설명을 하는 금수호 비서관.

"겉모습은 중년처럼 보이시지만 폐하께선 나이가 많으시네. 각성 마스터라고 영원히 사시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황위 계승에 대한 투쟁이 암중에서 펼쳐지고 있지."

맞구나.

"계승 적격자이신 황태자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다른 황자들이 인정하려 할까? 다들 워낙 잘나신 분들이라, 외가 쪽도 말할 것도 없고."

최강의 각성자라 칭해지는 황제도 자식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황제는 자식들이 많다.

정실과 후궁들에게서 얻은 황자와 황녀들, 혈통 탓인지 그들 모두 재능이 뛰어났다.

"일단은 황태자 대 다른 황자들의 대결 구도이지만 다들 서로의 약점만 노리고 있지. 각자 스폰서나 돈줄을 구해서 세력을 확대하려는 건 기본이고."

태주는 돈이 많다.

명성도 얻었고.

이번 신약이 성공하면 제국 10대 부자 반열에 오를 수도.

그래서 자칫하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오황자님과의 관계를 끊을 필요는 없네. 그건 어쩔 수 없는 우연이었으니까."

"···."

태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황자와도 거리를 둬야 한다.

아예 황위 계승전에서 멀찌감치 떨어지자.

"쯧쯧, 내가 그렇게 결혼하지 마시라고 간언을 드렸는데도, 그만 신하들의 꼬임에 넘어가셔서···,"

"···."

거의 반역에 가까운 발언이지만···, 뭐, 황제의 최측근 금수호니까.

"날 보게! 혼자 사니 얼마나 편한가? 그러니 자네도 결혼하지 마. 험험."

금수호의 낭독은 계속 이어졌다.

- 내가 그대를 입궁시키지 않은 건, 쓸데없는 구설수 때문에 그대의 행보가 방해받지 않을까 해서다. 그래서 비밀리에 짐의 충직한 비서관을 대신 보내 치하를 내리는 바이다.

- 제국 정보원을 도와 마인을 잡아준 것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말라. 마인을 색출할 때 조심, 또 조심하라.

- 지금까지 잡아 왔던 마인들과는 결이 다른 놈들을 만날지도 모른다. 1세대 각성자들도 아직 살아있는데, 1세대 마인이라고 없을까? 만나게 되면 체면 생각 말고 도망쳐라.

"나도 하고 싶은 말이었어. 물론 자네의 실력은 잘 알지만 1세대 마인은 정말로 위험하네."

각성자가 처음 출현했던 시기는 약 200년 전.

그들을 1세대라고 부른다.

각성자의 수명은 비교적 길다.

마스터라면 200년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다.

만약 1세대 각성 마스터처럼 200년이 지나도 살아남은 마인들이 있다면?

마인의 등급이 눈앞에 있는 금수호 비서관과 비슷하거나 황제와 맞먹는다면?

황제의 말대로 조심하는 게 맞다.

하지만 독령(毒靈)의 경지에 오르면 그럴 필요성조차 사라지고.

- 그대의 성공이 곧 제국의 성공이 될 거라 믿는다. 만약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금수호에게 도움을 요청하라. 그가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이 끝이 났다.

"자, 황제 폐하의 친서는 다 읽었네."

금수호는 손에서 불을 일으켜 화르륵! 종이를 태워버리며 말했다.

"이젠 황제 폐하께서 내리시는 상을 줄 차례군."

상?

뭘까?

금수호는 허리띠에 연결되어 있던 작은 가죽가방을 풀어냈다.

익숙한 가방이었다.

지리산 마수 토벌 당시 오진형 군단장이 황실의 지원을 받았다며 가지고 다녔던 그 가방.

설마?

"혹시 아공간 가방을 포상으로 내리시는 겁니까?"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하는 금수호.

"···미안하지만 이건 내, 내 거라서, 가, 가지고 시, 싶나?"

목소리까지 떨려왔다.

"달라고 하면 주실 건가요?"

"어음, 자, 자네 공이 저, 적지 않으니, 정 원한다면."

줄 순 있지만 주기는 싫은 모양.

뭐, 무한공간이 있는데 굳이!

"됐습니다. 다음에 돈 벌면 하나 사죠."

"하하, 그, 그렇지. 곧 사게 될 거라고 믿네."

그러더니 아공간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호텔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 이건?"

유엽비도였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것과 모양과 크기가 똑같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공간 가방에서 계속해서 유엽비도를 끄집어냈다.

저벅저벅,

태주가 가까이 다가가자 금수호는 흠칫하면서 놀랐지만 계속 비도를 꺼내면서 말했다.

"자네가 지리산 마수 토벌 당시 사용했던 단검을 입수해서 그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황실 소속 각성 장인이 만들어낸 명품이야."

"···명품이라 부를 만하네요."

각성자가 시스템에 의해서 배우는 스킬은 전투 관련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제작에 관련된 스킬도 있다.

아공간 가방과 마법 물품을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스킬 각성자가 그 예.

흔히 각성 장인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만들어낸 무구와 장비들은 일반 장인들이 만들어낸 것과 차원이 다르다.

"모두 200자루를 준비했네. 엘리트 마나 결정체와 강철 깃, 거대 도마뱀 발톱, 마나 합금 강철 등의 재료가 들어갔지. 한마디로 엄청 비싸단 말이야."

들어간 재료도 귀하고 개수도 많다.

한 자루당 가격으로 치면 얼마나 할까?

또한 각성 장인이 만든 장비라 평범할 리도 없고.

태주는 황제가 마음에 들었다.

상당히 통이 큰 양반이다.

"비도 하나하나마다 [날카로움] 옵션과 [파괴되지 않음] 옵션이 걸려 있거든. 웬만하면 잃어버리지 말게."

태주는 그중 하나를 집어 손으로 집어 표면을 쓸어보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확실히 구례 장인이 만든 것보다 품질이 뛰어나다.

"하하하, 마음에 드나?"

"폐하께 감사하다고 대신 전해주십시오."

대박이다.

아공간 가방보다 이게 더 좋다.

"내 선물은 따로 있네. ···아공간 가방은 아니고. 자네가 하는 사업에 도움을 주지."

"도움이라면?"

"이기언의 방해 공작은 더 이상 없을 거야. 마음껏 뜻을 펼치게나."

"···괜찮은데요."

"사양하지 않아도 돼. 이미 시작되고 있을 테니까."

빈말이 아니었다.

진짜 괜찮았다.

이기언 따위가 뭐라고?

곧 병원에 입원할 놈인데.

※ ※ ※

미리내 그룹.

이기언 회장은 집무실에서 연신 전화를 돌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화의 목적은 태홍 바이오가 식약청 판매 허가를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

"그래, 박국장, 나도 알지. 식약청 로비야 불가능하다는 걸, 하지만 내 요청은 신약을 통과시키라는 게 아니라 막아달라는 거지 않나?"

이기언이 지금 전화하는 사람은 행정부 소속의 고위 공무원, 식약청은 아니지만 식약청장의 동문 후배였다.

"여긴 자유도시가 아니네. 구례 촌구석 제약회사가 감히 뉴서울에서 검증되지도 않은 약품을 팔면 안 되는 것이야."

전화한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이기언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허허, 고마워. 언제 밥 한 끼 하지. 참! 자네 아들은 회사 잘 다니고 있네. 어찌나 유능한지 밑에서 빨리 승진시키라고 성화야.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고."

또 한 통화 끝냈다.

'후우,'

이기언은 잠시 숨을 돌리며 탁자에 놓인 따뜻한 차 한잔을 마셨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김태주, 그놈에게 당한 망신.

'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덤비라고? 내 그룹은 무사하지 못할 거라니!'

심지어 리더스 클럽에서 퇴출당했다.

'이고르, 그놈도···,'

천배 만배 복수해줄 생각.

그래서 자신이 알고 지내던 클럽 회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클럽 탈퇴를 종용했다.

창공 길드 한대현 마스터도 마찬가지.

각성도 안 한 놈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이용 가치가 없어져 길드 후원을 중단했다.

'내 온 힘을 다해서라도 모조리 죽여줄 테다.'

김태주, 그놈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려면 본진을 박살 내야 한다.

이미 구례로 사람을 보냈다.

구례 자치위원회를 장악해서 놈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 생각.

백두 그룹에도 경고를 보냈다.

만약 김태주를 도와주기라도 하면 전면전을 각오하라고.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백두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야말로 총력전이었다.

지금까지 한 사람을 파묻기 위해 이렇게 심혈을 기울였던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시골에서 상경한 듣보잡 촌놈을 말이다.

이미 게임이 끝났다고 보면 된다.

놈은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다.

바로 그 순간!

똑똑,

노크와 함께 들어오는 비서.

"무슨 일이야?"

"제국 정보원에서 남일복 원장이 찾아왔습니다. 회장님을 뵙고 싶다고."

"제정원 원장이?"

왜 왔지?

아들과 관련된 문제인가?

아들이 실종되고 경찰에 신고했을 때, 관할 경찰 서장이 자신에게 연락한 바 있었다.

실종 사건이 일어나면 제정원이 개입할지도 모른다고.

알았다고 했다.

원래 매뉴얼이 그렇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또 혹시 모르지 않나?

제정원에서 수사하면 범인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설마, 단서를 잡은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이기언은 김태주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럼 증거를 가지고 왔을지도 모를 일.

이기언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똑똑,

다시 노크와 함께 열리는 문.

제국 정보원 원장 남일복이 자신의 각성자 수행원과 함께 집무실로 들어왔다.

"아이고, 남원장님, 매우 바쁘신 분이 어쩐 일로 절 만나러 오셨습니까?"

"바쁘기는요. 일은 밑에 놈들이 다 하는데."

제국 정보원 남일복은 황궁 내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금수호 비서관의 심복.

먼저 악수를 나누고.

으레 하는 인사말을 서로 건넨 후에.

"요즘 회장님 아주 바쁘시더군요."

"그래 보이시나요? 바쁜 것보다는 사라진 제 아들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하아, 죽었는지 살았는지."

걱정 섞인 이기언의 말에 씨익 웃으며 말하는 제정원 원장 남일복.

"그러기에 처음부터 자식 교육을 잘하셨어야죠. 망나니처럼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다가 개망신이나 당하고."

"···네?"

잘못 들었나?

"망신을 당했으면 거기서 멈출 일이지, 경쟁 업체 뉴서울 진출 막겠다고 특허청 공무원 매수나 하고, 그나저나 어디 숨었는지 몰라, 진짜 뒈진 건가?"

뭐지?

아무리 제정원 원장이라도 자신의 면전에서 저런 말을···,

"대체 무슨? 남원장! 지금 정신이 나갔소?"

하지만 남일복 원장의 눈빛은 싸늘했다.

"어이! 이기언이!"

"뭐, 뭐라고? 가, 감히···,"

"닥쳐! 씨발 놈아! 클럽에서도 쫓겨난 주제에."

"···."

갑자기 터져 나온 험한 말투에 이기언은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지금 태홍 바이오 신약, 식약청 판매 허가 방해하려고 이쪽저쪽에 전화 돌리고 있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어, 어떻게?"

그건 비서도 모르는 일이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다.

일대일 전화 통화로만 대화를 나눴지.

···가만!

"호, 혹시 내 전화를 도청한 거요?"

"도청했다면 어쩔 건데? 좆도 안 되는 새끼가, 어디서 수작질이야?"

"어어···,"

남일복 원장의 폭언은 계속됐다.

"나대지 마라!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이 뭘 하든, 넌 근처에도 가지 말고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돼."

"기, 김태주? 지금 김태주 때문에···,"

"당장 공무원 매수죄로 체포 안 하는 걸 다행으로 알아.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비열한 짓거리로 김태주 회장을 괴롭히면···, 휠체어 타고 검찰 출두하는 게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을 들게 해주지."

이기언은 도무지 영문을 몰랐다.

김태주가 제국 정보원까지 움직일 수 있는 놈이었나?

"날 만난 걸 행운으로 여겨. 헛짓할 거면 계속하든가, 그럼 황궁의 금 비서관님이 널 직접 찾아오실 거다."

정말 모르겠다.

군부에다, 황자, 리더스 클럽, 백두 그룹 정욱철, 제정원 원장, 황궁비서관 금수호까지?

남들은 단 하나도 맺기 어려운 인맥을,

대체 김태주, 그놈이 누구길래?

< 황제의 선물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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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별번호 BEM – C04의 북진 >

선계(仙界).

막장 아침드라마가 벌써 30편이나 진행됐다.

천선 종리 선인도 자리 하나 맡아서 검선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었다.

도원 선도 강탈 사건 조사는?

그게 뭐지?

무슨 일이 있었나?

막장 드라마를 상영하면서부터 달라진 점 하나.

"이런 미친! 내 당장 저년을 쳐죽일 테다."

"썅! 그냥 죽이는 건 자비를 베푸는 것이오. 지옥불에 지글지글 익혀야 하오."

"내가 볼 때 저 회장 새끼가 가장 나빠."

욕이 많이 늘었다.

물론 욕하면서도 보지만.

"아니, 저 죽었다가 살아난 여자, 그것까진 이해하겠는데 왜 아무도 못 알아봐?"

"얼굴을 보시오. 뺨에 점 찍은 거 안 보이오?"

"젠장! 이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잘도···, 그래도 재미있군."

"재미있으면 됐지. 뭘 더 바래?"

가끔 특별 상영으로 영화도 틀어줬다.

지구에서 30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들.

그것도 어찌나 재미가 있던지.

그런 이유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지구의 문물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알게 된 이상 지구 문물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지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되나?

직접 가지고 싶다.

직접 먹어보고 싶다.

직접 사용해 보고 싶다.

바로 그 순간!

독선 당군악의 머릿속에서 찌르르르, 신호가 느껴졌다.

"떴다!!!"

당군악의 우렁찬 외침.

드라마를 보던 선인들이 화들짝 놀라서 우르르 몰려왔다.

"떠, 떴소?"

"떴구나! 떴어!"

"진짜요? 허허, 잘됐군."

"뭐요? 어서 꺼내 보시오."

"허어, 궁금하도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팝콘은? 초콜릿은 몇 개나 왔소?"

"발렌타인과 돔페리뇽도 왔으면 좋겠군."

드라마 상영은 즉시 중단됐다.

지금 저쪽에서 물건이 왔다는데, 드라마 볼 정신이 어디 있나?

당군악은 신선들의 성화에도 침착하게 행동했다.

먼저 공유창고에 든 물건들을 모조리 빼내어서 다른 구역으로 옮겨놓고.

'이번에도 가득가득 보냈구나.'

그런데 어째 공유창고의 크기가 커진 것 같다.

아니 확실히 커졌다.

'허허허, 크면 클수록 좋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야.'

당군악은 미리 준비한 단주(丹朱) 선인의 보패 부적 100장과 철장(鐵匠) 선인의 보패인 신령비도(神靈飛刀) 한 자루를 집어넣었다.

나머지 공간은 모두 선도로 꽉꽉!

그러고 난 후, 편지부터 꺼냈다.

"아!"

"으흠,"

"쩝."

"아이고."

"에이!"

신선들은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당군악의 손에서 종이 한 장이 나오자 저마다 탄식했다.

당군악은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반짝임이 끝나기 전에 답장을 적어 보내야 한다.

빠른 피드백이 중요하다.

김태주가 직접 쓴 글씨.

선도는 잘 먹었다.

드라마나 영화가 괜찮으냐?

자극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어 고매한 신선들의 마음이 어지럽힐까 두렵다.

게임기도 준비했는데, 이번엔 보내지 않았다.

괜찮으면 언제라도 보내주겠다.

손목시계도 몇 개 더 보냈다.

전에 보낸 것보다는 덜 고급스럽고 싼 물건이지만 그래도 성능은 매우 좋은 편이다.

동료 신선들이 원하면 선물로 드려라.

당군악은 픽 웃었다.

고매한 신선은 무슨,

도원을 털어 선도를 도적질하고 드라마 보면서 욕설이나 내뱉는 자들인데.

선물? 택도 없다.

이제 다 읽었으니 답장을 써야지.

미리 준비한 종이와 붓, 먹물로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너무나 감사하다.

영화와 드라마도 신선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다.

게임기도 보내라. 아주 좋아할 것이다.

쓸만한 보패도 몇 개 보내니, 마음껏 사용해라.

모자라면 뭐든 요구하고.

그리고 고이 접어 공유창고로 넣었다.

잠시 후, 핏! 반짝반짝한 빛이 사라진 공유창고.

이제 물건을 확인할 차례.

신선들은 당군악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쪼그려 앉아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당군악을 바라보는 선인들.

과연 뭐가 나올까?

먼저 팝콘부터 보여주고.

"팝콘이다!!!"

"떴다!!!"

"카라멜 맛도 왔소?"

"치즈가 최고지!"

열광하는 선인들.

팝콘 다시 집어넣고 다음은,

"콜라구나!"

"어후, 톡 쏘는 맛."

"내가 이거만 기다렸네."

양주 몇 병도 꺼내 보여주자,

"맥켈란!!! 드디어 맛을 보는군."

"···발렌타인은?"

초콜릿, 믹스커피, 과자와 버터구이 오징어, 스팸···, 공유창고가 커진 탓인지 다양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마다 선인들은 환호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와중에 검선과 선도 도적단들이,

"독선, 빨리 물건을 파시오, 선도는 얼마든지 주겠소, 그러니···,"

하지만 당군악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판매방식을 바꿀 거요."

"무, 무슨?"

"추첨제로, 모두 번호표를 한 장씩 받고 당첨되면 그 선인에게 물건을 팔겠소."

"···어."

"선도가 많다고 물건을 독점하면 쓰나?"

당황한 표정의 검선과 선도 도적단들.

이러면 나가린데.

그러나 선도가 많지 않은 선인들은 당군악의 결정에 환호했다.

"역시 독선이야."

"암! 성인군자지."

"기회의 균등, 이것이 공정과 상식이로구나!"

"추첨할 때 은근슬쩍 술법 쓰는 자들, 조심하시오."

"구라치다가 걸리면 손모가지 자르면 돼."

"특히 눈보다 손이 빠른 검선을 눈여겨봅시다."

"···시나리오 쓰고 있네.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쇼?"

그때 당군악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조용해진 신선들.

"추첨 없이 직접 파는 물건도 있소."

당군악은 무한공간에서 잘 포장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저건 또 뭘까?

상자부터 고급지다.

뚜껑을 열자.

"아!"

"오!"

"세, 세상에."

"···저, 저건? 꼭 사, 사야 해!!!"

상자 안에서 영롱하고 황홀한 자태를 뽐내며 나타난 물건.

"손목시계···."

"아름답도다."

"내가 찜했으니 건들지 마시오."

손목시계 하나면 선계 인싸가 된다.

어떤 선인이든 자신을 우러러보게 될 터.

"선도 5,000개!!!"

검선이 최대로 질렀다.

하지만 당군악은,

"선도로 받지 않겠소. 일대일 교환, 손목시계 하나당, 보패 하나."

"···보, 보패?"

"교환하고 싶은 사람은 보패를 들고 나한테 조용히 오시오. 심사 후에 결정하겠소."

신선들이 난리가 났다.

저마다 자신의 보패를 꺼내 당군악의 눈앞에 흔들어댔다.

탁탑과 종리선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 보시오! 여기!"

"자자, 천도 복숭아 가지로 만든 파사 방망이!!!"

"고농도 신선주요."

"하늘을 나는 검, 어떠시오, 자동 이기어검술!"

"조요경이라고 들어봤소?"

사악한 미소의 당군악.

신선들의 보패와 지구의 손목시계.

그 값어치를 따지자면 일대일 교환은 말도 안 되는 사기 행각이지만, 뭐 어때? 자발적 사기 피해자들이 줄을 서는데.

'시계는 보패로 바꾸어서 태주에게 다시 돌려줘야지.'

※ ※ ※

이제 뉴서울 일정의 마지막.

태주는 백두 그룹 정욱철 회장을 만나러 갔다.

백두 그룹도 바이오 제약 계열사가 있었다.

정욱철 회장이 몸소 나서서 야심차게 만든 '백두 바이오 사이언스.'

시설 투자도 엄청 많이 해서 제국 내 약품 공장 중 백두 바이오 사이언스만큼 대량의 물량을 뽑아내는 곳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 백두 그룹의 바이오 사업은 모종의 사건으로 폭망했다.

지금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백두 바이오 사이언스 연구소 소장과 10여 명의 연구원이 연구 중인 신약의 자료들을 모조리 가지고 자취를 감췄던 것.

연구 막바지에 다다른 신약들, 특허 심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신약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디 숨었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백두 바이오 사이언스에서 연구했던 신약들이 줄줄이 미리내 제약의 신약으로 특허를 받아 시장에 나왔다.

뒤통수 제대로 맞았다.

그래서 현재, 백두 바이오 사이언스는 신약 개발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회사의 약품을 위탁생산(CMO)해주고 있을 뿐.

그마저도 일감이 없어 공장이 놀고 있다.

급기야 계열회사 매각설도 솔솔 흘러나오는 판국.

백두 그룹 정욱철 회장은 태주가 건네준 태홍 생기불끈 자양 강장 드링크제를 한 병 쭉 들이켰다.

특허는 받았지만 아직 판매 허가는 나지 않은 건강음료.

"어떠십니까?"

"맛은 좋군. 태홍 바이오의 이름값도 있고, 잘 팔리긴 하겠어. 하지만···,"

정욱철 회장은 아직 망설이고 있었다.

태주가 가져온 위탁생산(CMO) 계약서가 너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량이 문제였다.

태홍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의 생산 요구량.

백두 바이오 사이언스가 1년 내내 밤낮없이 공장을 돌려도 맞추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판매 허가는 둘째치고, 이만한 물량을 시중에 풀면 다 소화할 수나 있을까?

"뭐가 문젭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피로회복 드링크 시장은 미리내 제약과 후지 제약, 발해 바이오가 시장을 3등분하고 있네. 거의 포화상태야."

"그렇긴 하죠."

"어중간한 약효로는 파고 들어가기가 힘들어. 게다가 병당 5천 원이라니, 다른 드링크제의 2배 가격 아닌가?"

"재료를 좋은 걸 써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중간한 약효라뇨?"

씨익, 웃으며 말하는 태주.

"아직 느낌이 오지 않으세요?"

"···느낌이라니?"

"으음, 회장님은 아직 건강하신가 보네요. 풀어야 할 피로가 없을 정도로, 하긴 그것도 좋은 일이긴 합니다."

"무슨 소리! 대기업 회장이라고 어디 놀고먹나? 쉴 시간이 없어서 뒷목도 뻐근하고 눈도 침침해서···, 응?"

반응이 왔다.

늘 저런 식이다.

벌떡!

"어어어···, 맙소사!"

자양 강장 드링크의 효과가 좋으면 얼마나 좋겠냐 하다가, 막상 체감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약효의 효과에 감탄하면서 눈이 휘둥그레진다.

"혹시···?"

"마약 성분은 티끌만큼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정욱철 회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계약서에 서명부터 했다.

"물량 최대한 많이 주게."

"반장급 직원들 우리 공장으로 파견 보내세요. 만드는 방법 가르쳐야 하니까."

"당장 보내지. ···새살쑥쑥도 비슷한가?"

"기존에 팔리는 외상 치료제는 다 망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 말고도 준비하고 있는 신약은 또 있고?"

"당연하죠. 아직 많이 있습니다."

"허허!"

정욱철 회장은 감탄했다.

삼한제국 제약 시장에 괴물이 출현했다.

세계 시장을 호령할 정도.

자양 강장 드링크제와 외상 연고제 팔 데가 제국밖에 없나?

해외 수출도 생각해야 한다.

"빨리 시장에 풀렸으면 좋겠군."

"아무래도 절차가 있으니 조금 기다려야 할 겁니다. 그때까진 많이 만들어 놓고."

"흐음, 자네가 만든 해독제처럼 군수물자로 지정되면 좋겠어. 그럼 절차가 매우 빨라질 텐데."

"하하하, 그것도 판매 허가가 나야죠. 뭐,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모를까."

"그렇긴 하지."

계약 완료.

태주는 정욱철과 악수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외 추가하실 부분은 뉴서울 지점 최동일 지점장님에게 말씀하시면 될 겁니다."

"응? 자넨 어디 가나?"

"구례로 돌아가야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쯧쯧, 우리 손녀딸이 너무 만나고 싶어 하던데."

"다음에 기회가 있겠죠. 어차피 판매가 시작되면 다시 뉴서울로 올라올 생각이라서."

백두 그룹과의 위탁생산 계약을 끝으로 뉴서울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그리하여 태주와 백서연, 각성 장교 수행원들은 기차를 타고 구례시로 돌아갔다.

※ ※ ※

북경 거점 도시.

그 남쪽이 비욘드 엘리트들의 영역이 된 지 약 60년 정도.

하지만 마수 웨이브의 위험성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물론 마수들끼리 영역 다툼은 항상 일어난다.

그로 인한 웨이브가 일어나기도 하고,

그러나 중국 땅은 워낙 넓다.

웨이브가 일어난다 해도 그 안에서 해결된다.

쓰나미처럼 파도가 되어 밀려오다가 북경 거점에 닿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사라져버리는 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시는 항상 필요하다.

감시의 수단은 드론 또는 초고도 정찰 비행기.

인공위성 사용은 어렵다.

어떤 이유에선지 300년 전 마나의 침공으로 우주 궤도에 떠 있던 인공위성들이 추락하거나 서로 부딪혀 파괴됐다.

남아있는 건 소수의 통신용 위성과 미국이나 유럽 소유의 위성 몇 개뿐, 새로 쏘아 올리면 되지만 기술과 자본이 여의치 않아 엄두도 못 내는 실정이었다.

북경 거점 정찰부대 감시 장교는 드론에서 보내는 영상을 판독 중이었다.

'흐음, 마수들이 점점 많아지네.'

주요 감시 지역은 북경 밑에 세워진 천리장성부터 남쪽으로 약 30km 지점까지, 그 구간이 민간 레이드팀의 주요 사냥터였다.

'웨이브라도 일어났나?'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저 밑에서 일어난 웨이브의 영향으로 일부 마수들이 이곳까지 밀려왔겠지.

'···경고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감시 장교는 하루 더 지켜보기로 했다.

다음 날.

마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이 정도면 주의를 기울여야 할 수준.

감시 장교는 상부에 보고를 올렸고, 곧 민간 레이드팀에게 마수 주의보가 발령됐다.

마수가 늘어나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다.

그다음 날.

"씨발! 이게 무슨 일이야?"

천리장성 남쪽 약 30km 지점을 새까맣게 뒤덮은 일반 마수들, 허둥지둥 후퇴하는 민간 레이드 팀들의 모습도 화면에 잡혔다.

천리장성이 세워진 후로 이런 경우는 처음.

당연히 마수 경보가 떨어지고, 민간 레이드 팀의 사냥 금지가 내려졌다.

동시에 북경 주둔 전투 부대 6개 사단에 진돗개 둘 발령.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났다.

"어? 이놈, 에, 엘리트 아냐?"

"맞네. 올라오고 있어."

"웨이브가 여기까지?"

"좆 댔다."

일반 마수에 이어 엘리트 마수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초고도 정찰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천리장성 주위로 전투부대들이 총집결했다.

시간이 흐른 후, 초고도 정찰 비행기에서 전해온 영상.

원인을 알았다.

북경에서 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지역.

천천히 올라오는 악어를 닮은 거대 마수 한 마리, 바로 비욘드 엘리트 마수였다.

"아아아아···,"

"미친!"

"왜 움직여?"

핵무기에도 끄떡없다는 그 비욘드 엘리트 마수가 북상 중이었다.

그 기세에 떠밀려 일반 및 엘리트 마수들이 올라오는 것이고.

모든 비욘드 엘리트 마수는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다.

북상하는 놈의 식별번호는 BEM – C04.

놈이 끝까지 올라올지, 아니면 중간에서 멈출지, 혹은 서쪽이나 동쪽으로 방향을 틀지, 아직은 모르지만 이동의 영향은 실시간으로 여기까지 적용되고 있었다.

놈이 만약 멈추지 않고 끝까지 올라온다면?

삼한제국 전체가 위험하다.

< 식별번호 BEM – C04의 북진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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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택 >

뉴서울발 구례행 고속 열차.

드디어 귀향이었다.

태주는 VIP 객실에 편안하게 누워 휴식을 취했다.

바로 옆자리는 백서연.

"우리 진짜 잘하고 왔죠?"

"네, 기대 이상입니다. 회장님 혼자서 캐리하셨습니다."

"뭘요, 우리 백사장님하고 수행원들이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어줘서 해낸 거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회장님이 아니었다면 특허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요. 리더스 클럽 다이아몬드 등급에, 오황자님도···,"

"아아! 됐어요. 서로 겸손 떨지 말고 우리 모두 잘한 걸로! 됐죠?"

"···네."

"그럼 이제 눈 좀 붙여요."

태주도 눈을 감았다.

태홍 바이오 제약 뉴서울 진출.

물론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거의 성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백서연도 금방 곯아떨어졌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나도 슬슬 잠이나 자볼까?'

슬슬 눈이 감기는 찰나!

찌르르르,

머릿속에서 울리는 신호.

'오!'

이 기분 좋은 느낌.

공유창고가 열렸다.

'떴구나.'

태주는 자는 척하면서 무한공간을 열었다.

먼저 침착하게 공유창고에 든 물건들을 꺼내고, 준비해둔 물건을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태주의 무한공간 반 이상은 모두 독선 당군악에게 보낼 물건들.

'이거 또 커졌네?'

벌써 처음보다 두 배.

매우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스윽.

태주는 편지부터 꺼내 읽었다.

'흐음···, 좋아하는구나.'

심심한 선계에서 영화나 드라마처럼 자극적인 컨텐츠를 접해보는 것도 수행에 도움이 되겠지.

게임기도 보내야겠다.

재빨리 공유창고의 물건을 조금 빼내 그 빈자리에 미리 구입해 둔 게임기를 옮기고,

태주는 만년필과 종이를 꺼내 당군악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이 만년필도 당군악에게 보내려고 산 필기구, 공유창고에 이거와 같은 만년필 10자루를 이미 넣었다.

그렇게 편지까지 집어넣자,

픽,

공유창고 반짝임이 꺼졌다.

다음은 물건 확인.

선도 복숭아가 엄청나게 많다.

'이게 대체 몇 개야?'

대충 세어봐도 30개가 넘는다.

그리고 심상치 않아 보이는 종이 뭉치.

독선 당군악의 편지에 적혀있었다.

신선이 만든 부적.

보기만 해도 선기가 줄줄 흘렀다.

'···이런 걸 막 받아도 되나?'

신선들이 만든 보패.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100장 중 50장이 호신부(護身籍), 하루에 한 번씩, 몸에다 붙이면 치명적인 공격을 막아주고 30초간 무적상태를 유지해준다.

10장은 벽마부(僻魔符), 선기로서 마귀를 제압하는 부적, 마귀가 가진 힘을 약화시킨다.

또 10장은 투명부(透明符), 1시간 정도 몸을 투명하게 해주는 부적이다.

특정 대상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는 추적부(追跡符)도 10장, 적을 옴짝달싹 못 하게 그 자리에서 묶어두는 구속부(拘束符)도 10장, 자신의 몸에 붙여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주는 신속부(迅速符) 10장.

'아껴 써야겠다.'

편지엔 부적 사용하다가 모자라면 종류별로 요청하라고 쓰여있지만, 이 귀한 물건을 막 낭비하면 쓰나.

그리고 하나 더.

신령비도(神靈飛刀).

신선 장인이 만든 보패 무기.

'···미쳤네.'

이젠 포기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오고 가는 물건의 균형을 맞추는 건 불가능하다.

선계에서 날아온 보물과 지구 양산 쓰레기가 어떻게 비교가 되겠나?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간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다.

눈 딱 감고 받아서, 감사하게 잘 쓰자.

태주는 신령비도를 꺼냈다.

모든 명검이나 명도가 그렇듯, 이건 주인을 인식하는 무기, 그래서 피를 먹여야 한다.

서걱,

손바닥을 신령비도로 가르자, 스르륵, 새빨간 피가 흘러나와 비도로 흡수됐다.

우우우웅!

가늘게 진동하는 신령비도.

태주는 황제에게 받은 엘리트 유엽비도를 꺼냈다.

한 손엔 황실 장인의 무기, 한 손엔 신령비도.

'아아아,'

진짜 미안하지만, 솔직히 황실 장인의 비도는 하찮게 보인다.

그래도 내색하지 말고 둘 다 잘 써야지.

암기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빨리 실전에서 사용하고 싶다.

구례에 도착하자마자 지리산으로 가서 엘리트 몇 마리 잡아보자.

엉덩이가 들썩들썩거렸다.

좋은 무기와 만났는데 그냥 무한창고에만 넣어두면 예의가 아니다.

'언제 도착하지?'

뉴서울에서 구례까진 12시간.

오전 11시쯤에 기차를 탔으니까 도착 예정 시간은 밤 11시.

이윽고 기차가 구례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끈적한 열기.

확실히 뉴서울과는 공기 자체가 달랐다.

각성 장교 수행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모두 수고들 하셨어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오면 꼭 불러주십시오."

"오늘 부대에 복귀하지 말고 내일 하세요. 뒤풀이해야죠."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고 싶지만 빨리 복귀하라는 명령이 내려와서."

"음? 이 밤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건 들어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각성 장교들도 부대로 복귀.

"서연씨도 일찍 들어가서 쉬세요. 내일 점심쯤에 회사에서 보죠."

"네."

백서연도 보내고.

태주는 곧바로 역을 빠져나와 지리산 밀림으로 달렸다.

※ ※ ※

태주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암기술이라면 역시 비폭일섬(飛瀑一閃).

가장 단순하고, 그래서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변주가 가능하며, 단일기와 광역기를 입맛에 따라 골라서 펼칠 수 있는 기술.

일섬(一閃)을 신령비도로 펼치면 어떻게 될까?

츠피피핏!

비도가 쏘아졌다.

어두운 밤, 달빛에 반사되어 허공에 그어진 은빛 실선.

그런데 그 실선이 갑자기 90도 각도로 꺾인다.

스릇, 츠핏!

바로 옆에 있던 두꺼운 나무줄기를 관통하며 지나간 후.

휘릿!

피핏!

다시 돌아와 관통.

휘릿! 핏! 휘릿! 핏! 휘릿! 핏···.

마치 재봉틀로 바느질하는 것처럼 그 두꺼운 나무줄기를 왔다갔다 꿰매듯이 지나간다.

'멈춰.'

순간!

우뚝!

허공에서 둥둥 떠오른 채 정지 비행하는 신령비도.

'대박이구나.'

이게 이기어검이 아니고 뭔가?

물론 무공의 경지가 아닌 신병이기에 의존한다고 해도 말이다.

'돌아와.'

휘리릿!

심지어 움직이는 데 별다른 기운도 필요치 않다.

손에 익힐 겸 자이언트 반달곰 몇 마리 사냥해서 웅담이나 가져가야지.

문득 저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트 삼두백호가 계속 거기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가서 얼굴이나 보고 오자.'

스팟!

태주는 표홀질풍보로 천왕봉을 향해 달렸다.

파파파파팟!

확실히 8성에 오르니 몸놀림도 빨라졌다.

이윽고 올라온 천왕봉 꼭대기.

달빛 밑으로 거대한 생명체 한 마리가 보였다.

"크렁?"

엘리트 삼두백호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아마도 이 꼭대기가 놈의 영역인 듯.

"크르르르르, 크르륵, 크륵."

갑자기 태주를 경계하듯 몸을 바짝 낮추며 몸을 웅크리는 엘리트 삼두백호.

"흐음···,"

혼원무상독령공 7성이었을 때는 솔직히 긴가민가했다.

이길 수 있었지만 자신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지금은?

'할만해.'

거뜬하게 제압할 수 있다.

신령비도도 있고.

이젠 그 큰 몸집이 귀엽기까지 하다.

태주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카릉! 캬오! 캬악!"

삼두백호는 위협의 포효를 내질렀지만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다.

저 인간, 만나본 기억이 난다.

그땐 자신과 엇비슷했다.

조금 무리하면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잡아먹기는커녕 잡아먹힌다.

게다가 인간의 몸에서 피어나는 신령한 기운.

그래서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와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저 머리만 땅에 푹 처박을 뿐.

가까이 다가온 태주는 엘리트 삼두백호의 콧잔등을 두드렸다.

툭, 툭, 툭.

머리 하나에 한 번씩, 총 세 번.

움찔했지만 태주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짜식! 잘 지냈어?"

"크릉, 크릉? 크르릉."

"나 없는 동안 인간은 안 건드렸지?"

"크르르르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데?

확실히 놈은 마수의 범주를 넘어섰다.

영수(靈獸)가 틀림없다.

'보면 볼수록 귀엽네.'

뭐라도 주고 싶다.

간식 같은 거 말이다.

태주는 무한공간을 열었다.

'흐음.'

마땅히 줄 게 없다.

영수에 어울리는 거라면···,

"에이! 인심 썼다."

태주는 선도 하나를 꺼냈다.

"이거 원래 아무에게도 안 줬던 거야. 우리 백원장님 먼저 주려던 건데, 너 먼저 주는 거니까 감사하면서 먹어."

30개 넘게 있으니까, 하나쯤은 뭐.

선도 하나를 던져주자 냉큼 받아먹는 삼두백호.

"크릉?"

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새끼, 좋은 건 알아가지고.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크륵? 크르륵?"

내 입은 입이 아니냐는 듯 태주를 바라보는 두 개의 머리.

깜빡했다.

'···이 새끼, 머리가 3개였지.'

각각의 얼굴도 다 다르게 생겼다.

하나의 몸에 세 개의 독립 개체.

하는 수 없다.

이왕 준거 다 줘버리자.

다시 2개를 꺼내서 하나씩 입에 물려주니.

"그륵, 그르륵."

만족한 듯 선도를 씹어 삼키는 삼두백호.

태주는 놈의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주며 말했다.

"확 납치해서 데려다 키우고 싶지만, 넌 덩치가 너무 커. 머리가 3개, 입도 3개라서 사룟값도 장난 아니게 들겠고."

"크릉, 캬르릉? 캬릉···,"

"앞으로 인간들 괴롭히지 말고 마수나 잡아먹으면서 살아. 알았냐?"

마음이 통했는지 엘리트, 아니 영수(靈獸) 삼두백호가 낼름낼름 태주의 손을 혀로 핥았다.

"또 보자, 그럼 나간다."

이제 자이언트 반달곰 몇 마리 잡고 집으로 돌아가자.

※ ※ ※

육해공 합동참모본부.

4성 장군 김송겸 합참의장의 주재 아래 각 군 본부의 참모장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였다.

거의 육군 출신들이었다.

해군과 공군은 손에 꼽을 정도.

해군과 공군은 각성자가 아닌 현대 무기에 의존하는 탓에 직접 타격보다는 육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는다.

해군은 작전지역이 한정되어 있고, 바닷속은 무시무시한 거대해양 마수들로 쫙 깔렸다.

가까운 바닷길은 비교적 안전하지만 먼 바닷길은 아직 위험한 상태.

특히 태평양 진출은 꿈도 꾸지 못한다.

공군도 마찬가지.

전투기나 폭격기는 비행 마수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놈들의 영역을 침범하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비행 마수가 비행기를 공격해온다.

그래서 비행 마수의 영역을 피해 안전한 항공로로 보급이나 군사 지원을 하는 정도.

육군이 주력이다.

제국군 적합자와 각성자들이 죄다 육군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회의실에 띄워진 영상.

"식별번호 BEM – C04, 일명 흑악지룡(黑惡地龍)이라 불리는 마수입니다."

마치 악어처럼 생긴 마수였다.

거대하고 칠흑같이 새까만 몸체, 등에 돋아난 강철 가시, 하지만 꼬리는 매우 짧다. 대신 연신 입에서 날름날름 빠져나오는 길다란 혀.

"흑악지룡이 북상하는 이유가 뭡니까? 밝혀졌나요?"

"이유라면 단 하나뿐입니다. 세력 다툼에서 패배했겠죠. 그래서 새로운 둥지를 찾아 북상하는 것 같습니다."

"제기랄! 왜 하필 북쪽으로."

국가 재해급 마수다.

비욘드 엘리트 마수 몇 마리 때문에 중국이란 나라가 망했다.

"아직도 계속 북상 중입니까?"

"현재는 잠깐 멈춘 상태입니다. 숨 고르기를 하려는지···,"

"다행이군."

"제발 거기서 멈추길···,"

참모 하나가 손을 들고 물었다.

"만약 놈이 다시 북진해서 쭉 북경까지 온다면 예상 도달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속도가 느린 편이지만, 계산해보면 약 석 달 정도?"

"후우,"

"끄응,"

"애매하군."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랬을 때 주어진 시간은 약 석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오기 전에 타격할 방법은? 폭격 가능할까요?"

"폭격이야 가능하겠지만···, 추천하고 싶진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마수의 진화 능력은 추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엘리트 마수만 해도 포탄 한두 발로는 어림도 없다.

미사일이나 포탄, 로켓을 이용해 정밀 집중 타격해야 비로소 한 마리 정도 잡는다.

게다가 단번에 잡지 못하면 놈들은 진화한다.

마치 항생제에 면역 능력을 갖춘 슈퍼박테리아처럼.

비욘드 엘리트 마수가 왜 만들어졌나?

핵공격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핵무기로 비욘드를 죽일 수 없다.

한 번에 수십 발을 때려 부으면 모를까.

그런데도 살아남으면?

자칫하면 비욘드를 넘어선, 지구 멸망 급의 초마수가 출현할 수도 있다.

"제국 총동원령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비역을 포함해서, 필요하다면 민간 각성자들까지."

"각성자들로 막으려면 피해가 극심할 텐데."

"그래도 막으면 다행이지요. 막지 못하면···,"

"일단 현재 당면한 과제부터 해결합시다."

비욘드 엘리트 마수는 아직 멀리 있다.

문제는 이동의 여파로 천리장성 지척까지 도달한 대규모 마수 무리들.

"현재 원정을 나가 있는 전투 군단들 다 회군시켜야 합니다."

"지금 영토 확장이 문제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러다 천리장성이 뚫리기라도 하는 날엔···."

그때였다.

"정찰 센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BEM – C04 흑악지룡(黑惡地龍)이 다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방향은?"

"···여전히 부, 북쪽입니다."

"젠장!"

대체 어디까지 오려고?

이동을 시작하면 천리장성으로 마수들의 압박이 더 심해질 것이다.

김송열 합참의장은 결단을 내렸다.

"일단 전군 진돗개 둘 발령한다. 자넨 황실에 연락해. 지금 바로 입궁한다고."

"네, 알겠습니다."

김송열 합참의장이 입궁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황명이 떨어졌다.

내용은 영지군을 포함한 현역 제국군 전원 북경 거점도시로 총집결.

제국 전체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 ※ ※

밤 11시에 구례에 도착해서 바로 지리산으로 가서 삼두백호와 만난 후, 자이언트 반달곰 사냥까지.

신령비도로 사냥하는 건 너무나 쉽고 재미있다.

자이언트 반달곰 씨를 말렸다.

정작 웅담을 가공하는데 시간이 많이 들었다.

이러다 보니 벌써 새벽녘.

점심때 회사에 가야 하는데.

'일단 집으로 갔다가···.'

오랜만에 돌아오는 집이다.

잠금장치 번호를 눌러서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 회장님! 이제야 집으로 오셨네요. 어젯 밤에 도착하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집에서 일하는 정원사가 부리나케 마중나왔다.

"하하, 볼일이 있어서, 제가 실례를 했네요. 미리 전화드리는 건데."

"아이고! 실례라니요! 참! 배고프시죠? 식사 준비할까요?"

"괜찮습니다. 조금 있다가 나갈 거라서."

"···그런데 뉴서울에서 반려동물 한 마리 입양하셨습니까? 하하, 귀엽게 생겼네요."

"네? 반려동물이라니···,"

"저어기, 회장님 발밑에."

태주는 발밑을 내려다봤다.

"냐옹?"

"아! 씨발, 깜짝이야!"

이거 뭐야?

언제 따라왔어?

흔히 보는 고양이였다.

하얀색 털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그런데 이상하다.

왠지 익숙한 느낌.

선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가만!

"너 혹시 백호니?"

"야오옹!"

몸집이 작아진 영수 삼두백호였다.

< 간택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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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백 이백 삼백 >

태홍 바이오 구례 본사.

회의실에 태주를 비롯해 백홍표 원장, 백서연, 장순철, 백창훈, 5명이 모였다.

"수고했다. 태주야."

"형님도 고생 많이 하셨죠?"

"하하하, 나야 우리 아이들하고 맨날 놀기만 했는데."

말은 저렇게 하지만 백홍표가 고아원 운영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잘 안다.

"스, 스승님, 보고 싶었습니다."

"흐흐, 몇 번이라도 뉴서울로 올라가려고 했어요."

백창훈과 장순철도 정말 오랜만에 본다.

"그래, 너희도 그냥 논 건 아니네? 많이 늘었어."

태주의 칭찬에 백창훈과 장순철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보기만 해도 느껴진다.

오행신공의 성취가.

그러자 백서연이,

"저기, 그런데 회장님이 데리고 오신 그 고양이···,"

"아! 이놈요?"

"한번 만져봐도 돼요? 너무 귀여워서."

"마음껏 만져보세요."

백서연이 머리를 쓰다듬자, 갸르릉 소리를 내며 앞발에 침을 바르는 고양이.

"냐아아앙."

그러자 장순철도, 백홍표도 관심을 보였다.

백창훈은 빼고.

"허허허, 기특하네. 사람을 잘 따르는 것 같군."

"마수는 아닌 것 같아요."

"맞아, 마수가 아닌 고양이는 드문 편인데."

"저도 만질게요. 오! 귀염 터진다."

"난 고양이 싫음."

사실 엘리트 삼두백호였다.

오전 동안 쭉 같이 있다가 회사로 데리고 왔다.

처음엔 그 엘리트 삼두백호의 새끼인 줄 알았다.

혹시 몰라서 '너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냐?'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쑥쑥 몸이 커지길래 급하게 중단시켰다.

그놈이 맞았다.

처음부터 이런 능력이 있었는지, 아니면 선도를 3개나 먹어서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작고 평범한 고양이로 변신할 줄이야.

"회장님이 키우시는 거예요?"

"뭐, 그렇게 됐습니다."

"얘 이름이 뭐죠?"

"어디 보자. ···일백, 일백이네요."

"일백이요? 으음, 뭔가 이름이···,"

지금은 일백이다.

태주는 미리 준비해온 가방을 회의실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안에서 작은 술병 하나와 5개의 잔, 그리고 커다란 접시와 축구공 크기보다 조금 작은 복숭아도 한 개 꺼냈다.

"이거 술 아닌가? 대낮부터?"

"와! 복숭아네.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커요?"

태주는 각자 앞에 술잔 하나씩 놓았다.

"뉴서울 진출 성공했는데, 축하 파티 정도는 해야죠."

"에이, 태주야. 축하 잔치치고는 너무 소박하다."

"스승님! 제가 멋진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캐슬 안에 기막힌 맛집 알아뒀거든요. 거기서···,"

쪼르르륵!

병에서 황금빛 액체가 흘러나온다.

그러자 회의실 안을 가득 채우는 환상적인 주향(酒香).

"···어?"

"어머?"

"와아!"

"으음."

신선주.

단지에 담긴 술을 유리병에 덜어 담았다.

전체 양의 5분의 1 정도?

소박한 잔치라,

이 술 한잔을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1억, 아니 10억을 준다고 해도 절대 안 판다.

술을 따르고 난 후, 선도 복숭아도 유엽비도를 이용해 잘게 잘게 한입 크기로 잘랐다.

워낙 크기가 커서 한 개만으로도 접시에 수북하게 쌓였다.

"으아아아···,"

"세, 세상에! 무슨 복숭아 향기가."

"술도 술이지만, 이 복숭아는 정말···,"

"이거 진짜 복숭아 맞아요?"

복숭아는 맞다.

신선이 먹는 선도(仙桃)라 그렇지.

"자, 한잔합시다. 건배!"

술잔에 코를 바짝 대고 향기를 느끼면서 쭉 마시는 사람들.

태주도 한잔하고.

조용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하면 향기가 날아갈라, 그저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냐앙?"

일백이가 태주의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넌 술 안 돼. 복숭아도, 육포나 먹어."

"냥!"

이놈은 선도만 먹는 게 아니었다.

고양이가 먹는 음식도 곧잘 먹는다.

조금 많이 먹어서 탈이지만.

복숭아를 먹이로 인식하면 큰일.

시킨 일 잘했을 때나 상으로 주면 된다.

통으로 말고 조금씩 잘라서.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번쩍 뜬 백홍표.

"대, 대체 이 술은 뭔가?"

"누가 줬습니다."

"누, 누가? 어음, 한잔 더 마셔도 되나?"

"당연하죠."

척척척척!

태주의 앞으로 빈 술잔이 모인다.

또 한 잔씩 쪼르르르.

"기가 막히는군."

"내가 지금까지 마셨던 술은 뭐지? 구정물인가?"

"몸이 따뜻해졌어요."

참 희한하다.

신선들은 지구의 술에 환장하고, 여기 사람들을 신선주에 환장하고.

"복숭아도 한 조각씩 드세요. 안주 삼아서."

복숭아라고 다를까?

"미쳤다, 미쳤어."

"입에 들어오자마자 사라지는구나."

"진짭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고 그냥 녹아요."

"과즙이 뿜뿜 나와."

다들 얼굴이 붉어졌다.

신선주도 술이니까.

"진짜 자넬 만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복이야."

백홍표가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백서연도 몽롱한 눈빛으로 태주에게 물었다.

"회장님. 이거 귀한 거겠죠?"

"네."

"돈으로 못살 만큼?"

"억만금을 줘도 절대 못 사요."

"그럴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 신선들이 먹는 술과 복숭아를 먹으면 어떤 영향을 받을까?

나중에 밝혀지겠지.

순간 백서연이 태주 무릎에 앉아있는 고양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음? 제가 취해서 그런가? 일백이 얼굴이 바뀐 것 같아요."

"···기분 탓이겠죠."

"그런가?"

역시 백서연의 눈썰미는 대단하다.

지금 이놈은 일백이가 아니라 이백이다.

현재 평범한 고양이로 변한 터라 머리가 하나로만 보인다.

하지만 얼굴이 수시로 바뀐다.

그것도 순식간에.

삼두백호의 머리는 3개.

그래서 일백, 이백, 삼백, 이름도 3개.

일백이었다가 어느새 이백이, 또 좀 있으면 삼백이.

몸체는 새하얗지만 얼굴에 희미하게 난 줄무늬와 몇몇 흉터 자국을 보면 구별이 가능하다.

이백이가 나왔으니 고양이용 육포 한 조각 물려주고.

"야옹!"

좀 있다가 삼백이도 나오면 하나 줘야지.

그때였다.

띠링! 띠링! 띠링···,

각자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에서 연신 울리는 알림음.

"어? 재난 문자네."

"지진이라도 났나?"

"뭐야?"

확인해보니.

<안전안내문자>

[삼한제국 국방부] 삼한제국 서북부 북경 거점도시에 마수 웨이브가 우려됩니다. 이 근방을 오가는 여행객이나 현지 주민은 즉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길 권고드립니다. 우리 군은 마수 웨이브 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으며···,]

"···북경?"

"거기도 웨이브가 일어나나?"

북경 거점.

태주도 얼마 전에 다녀온 곳이다.

그땐 웨이브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예감이 심상치 않다.

국방부에서 날아온 재난 문자라면 오진형 중장도 알지 않을까?

지이잉!

때마침 연락이 왔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오진형이 건 전화.

태주는 회의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중장님."

- 김회장, 재난 문자 봤지? 나 지금 애들 데리고 북경으로 가는 중이야. 안 그래도 얼굴이나 볼까 했는데, 그만 일이 터져서···, 미안해! 당분간 나 만나기 힘들 거야.

"···네."

누가 들으면 되게 보고 싶어 하는 줄 알겠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북경에 웨이브라니."

- 극비 사항이지만 자넨 알 자격이 있으니까. 비욘드 엘리트 마수 흑악지룡이 북상 중이야. 그 여파로 천리장성에 웨이브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비욘드 엘리트 마수?"

- 놈이 북경까지 올라올지는 아직 몰라. 지금 급한 건 마수 웨이브 때문에 천리장성을 방어해야 해. 아마 자네에게도 국방부에서 협조 요청이 갈 걸세.

"협조 요청이라면···,"

이거 웨이브 방어에 참여해 달라는 건가?

솔직히 내키지 않는다.

뉴서울에서 급하게 내려온 이유가 뭐겠나?

금수호가 가지고 온 황제의 편지 때문이다.

황자들이 자신에게 접근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황위 계승 다툼에 휘말리기 싫다.

이런 상황에서 북경 마수 웨이브에 참여한다고?

공적을 쌓고 이름을 떨칠 기회지만, 이번에도 주목을 받으면 황자, 황녀들과 엮일 수도 있다.

- 딴 게 아니라, 현재 생산 중인 태홍 회복제 전량을 국방부에 판매해달라고, 알다시피 회복제는 레이드에 있어서 필수잖아. 괜찮겠나?

"아···"

다행이다.

와달라는 게 아니라서.

"당연히 협조해야죠."

- 고맙네. 나도 바빠서 이만 끊어야겠어. 그럼 부탁하네.

비욘드 엘리트 마수라.

국가 재해급 마수다.

그냥 엘리트가 아니다.

중국을 멸망시킨 마수들.

그래도 두려움보다는 궁금증이 더 크다.

'슬쩍 가서 구경이나 하고 올까?'

혼원무상독령공 8성에 신령비도와 부적이면, 설령 잡지 못하더라도 위험하진 않을 것이다.

'일단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고.'

그나저나 태홍 회복제 납품을 위해서 자이언트 반달곰 웅담이 더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리산엔 씨가 말랐고.

'설악산 전초기지 쪽엔 꽤 있겠지?'

그쪽도 반달곰 서식지로 유명한 곳.

"니아옹!"

어느새 밖으로 나와 다리를 비벼대는 삼백이.

"너도 나하고 같이 갈래?"

"니앙?"

"그래, 같이 가자. 너도 선도 값은 해야지."

태홍 회복제 한 알에 500만 원.

국방부라면 삼한제국에서 예산이 가장 많은 기관이니 즉시 현금 결제해주겠지.

1만 알만 납품해도 5백억이다.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

"즉시 태홍 회복제 판매 중단하세요. 전체 물량 모두 국방부로 들어갈 겁니다."

※ ※ ※

오랜만에 구례로 귀향했는데, 오자마자 또 밖으로 나돌게 생겼다.

가기 전에 노고단 이정학 길드장이나 보고 가자.

태주는 캐슬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가 이미 완공되어서 배를 타고 들어갈 필요도 없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잘 지내셨죠? 길드장님."

"네, 덕분에."

이정학도 뉴서울 소식을 들었다.

태홍 바이오 뉴서울 지점 공장 준공식에 오황자와 백두 그룹 회장을 비롯한 귀빈들이 참석했다는 기사.

이젠 자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버린 사람이다.

"아참! 얼마 전에 미리내 그룹에서 회장 비서라는 놈이 찾아왔더라고요."

"···미리내 그룹이라, 직접 만나셨습니까?"

"아뇨, 민동열이하고 지광인에게 찾아와 거액을 제시했답니다. 태홍 바이오를 손보려 하는 데 도와달라고."

"그래서 받았대요?"

"그럴 리가요. 지들 목숨줄을 누가 잡고 있는데."

이기언, 그놈 별짓을 다 한다.

그 짓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태주는 이정학 길드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구례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표를 끊고 강원도 인제읍에 있는 설악산 전초 기지역으로 출발.

숄더백에 일백이, 아니 지금은 이백이를 넣어 어깨에 메고.

이백이가 가방 안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야옹!"

틈만 나면 먹을 걸 달란다.

하지만 무한공간에 고양이 먹이가 가득가득 들어있어 별다른 문제가 안 된다.

심지어 싸지도 않아서 감자 캘 일도 없고.

태주는 인제 전초기지역에 내려서 설악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설악산은 오지 중의 오지라 군부대 말고는 민간 레이드팀도 없다.

'참 오랜만에 와 보네.'

저쪽엔 자신이 근무했던 전초기지도 있을 테지만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다.

가보고 싶은 마음도 없다.

스팟!

표홀질풍보로 설악산 깊숙한 곳에 들어가서.

"이백아."

"냐앙?"

"···일백이구나."

"냐아아앙!"

가방 안에서 걸어 나오는 일백이.

"내가 말이야. 자이언트 반달곰을 잡아야 하거든?"

"냐아···,"

"넌 명색이 삼두백호잖아. 그러니 몇 마리 잡아 와라."

"냥!"

그때였다.

쑤우우욱!

몸을 키우기 시작하는 일백이.

"어어, 딱 거기까지."

"캬릉!"

흔한 마수 정도 크기다.

자이언트 반달곰보다 살짝 큰.

이게 2단계 변신.

여기까지도 머리가 하나다.

하지만 본체가 되면 머리 3개가 떡하니 나타난다.

"잡아와!"

"캬앙!"

스팟!

백호가 된 일백이가 쏜살같이 설악산 깊은 지역으로 달려갔다.

'잘 잡아 오려나?'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의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적당한 나무 밑에 앉아서 일백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캬아···,"

백호 일백이가 나타났다.

"···어,"

자이언트 반달곰을 이빨로 물고 질질 끌면서 말이다.

"벌써?"

"캬웅!"

이런 기특한 놈을 봤나!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두툼한 육포 하나를 꺼냈다.

휙! 던져주자, 덥석 받아먹는다.

"난 웅담 손질하고 있을 테니까 한 마리 더 잡아 와."

스팟!

또 다시 숲속으로 사라지는 일백이.

웅담 손질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어흥!"

이번엔 이백이 얼굴로 나타났다.

역시 자이언트 반달곰 한 마리 물고.

"···."

그리고 육포 하나 던져주니.

휘익!

낼름 먹고서,

스팟!

사라졌다가.

"크릉."

삼백이로 나타났다.

돌아가면서 한 마리씩 잡아 온다.

"짜식들,"

코끝이 찡해온다.

이렇게 말을 잘 듣다니.

이게 반려동물 키우는 재미인가.

끝나면 선도나 먹여줄까?

통째로 말고 한 조각씩만.

※ ※ ※

선계(仙界).

월궁선자(月宮仙者)는 서왕모의 명을 받들어 도원의 천도를 보살피는 임무를 맡고 있다.

천도가 무사히 자라는 걸 확인한 후, 그녀는 선도가 자라고 있는 외곽지역으로 갔다.

4구역 별일 없고, 3구역도.

그런데 2구역에 들어서자.

'음?'

이게 무슨 일인가?

나무에 빼곡하게 달려있어야 할 선도가 듬성듬성 열렸다.

'선도 나무가 왜 이래?'

2구역뿐 아니라 1구역도 마찬가지.

'영양이 부족해서 그런가.'

월궁선자는 가만히 앉아서 도원 땅을 손으로 짚었다.

스스스스스스···,

그녀의 손에서 무럭무럭 뿜어져 나오는 선기.

그러자 휑한 선도 나무에서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곧 탐스러운 선도들이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했다.

선계의 선기를 이용해 선도 나무를 키우는 능력, 서왕모께서 특별히 내려주신 선술이다.

도원 1구역과 2구역은 예전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갔다.

'종리, 그놈은 어딜 갔어?'

도원을 지키는 신장들도 안 보인다.

이렇게 된 이유를 알아봐야 하는데···,

그때였다.

선계 저쪽에서 들리는 함성.

"떴다!!!"

"떴다!!!"

"떴다!!!"

"떴다!!!"

.

.

.

얼마나 우렁찬지 도원까지 들렸다.

'대체 뭐가 떴다는 거야?'

종리 선인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심지어 탁탑신장 음성도.

< 일백 이백 삼백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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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1) >

이번 현역 제국군 총동원 명령엔 각 영지군도 포함됐다.

그래서 파주 영지 김웅방 준장도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북경 거점도시로 출발하려는 중이었다.

"조심하세요. 여보. 우리 아들들 다치지 않게 지켜줘요."

"걱정하지 마시오."

"삼황자님 곁에도 꼭 붙어야 해요. 아이들이 그분의 눈에 들어야···,"

"됐소. 내가 알아서 하리다."

남편과의 대화를 마친 후, 혼다 미쯔이는 김태평과 김태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희도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지?"

"···네."

"아, 알고 있어요."

"반드시 실수를 만회하거라. 삼황자님 앞에서 공을 세우면 중앙 제국군으로 진출할 수도 있으니."

지리산 토벌 작전 견학 후, 매사에 주눅이 든 두 아들, 결국 임관 희망지에서 다 탈락해서 파주 영지군으로 부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웨이브 방어전이 아이들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줬으면 좋으련만.

혼다 미쯔이는 북경으로 떠나는 남편과 아이들을 배웅했다.

'아버지도 규슈 영지에서 출발했겠지?'

아버지 혼다 카즈오는 삼황자의 후원 세력.

제국 내 일본계 유력 인사들은 하나같이 삼황자 편에 서 있다.

얼마 전까지도 삼황자는 이황자와 세력이 비등했다.

그러나 최근 오황자 세력에도 밀려 궁지에 몰린 상황.

이번 방어전을 계기로 쇄신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다.

삼황자만 믿지 않았다.

그가 들어둔 보험이 얼마나 많은데.

파주 영지도 그의 보험 중 하나.

혼다 미쯔이는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그녀의 아버지가 사람을 시켜 전해준 독약을 아직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혼다 카즈오는 무서운 사람이다.

20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을 독살하라고?

자신의 사위를?

'···절대 그럴 순 없어.'

혼다 미쯔이는 남편을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둘씩이나 낳지 않았겠지.

그러나 그녀는 독약병을 버리지 않았다.

그저 다시 주머니에 넣어둘 뿐.

※ ※ ※

식별번호 BEM – C04, 흑악지룡(黑惡地龍)의 뜬금없는 북상.

북경 거점도시 웨이브 경고 안내 문자가 제국 전역으로 돌았다.

국방부는 현역 전군 소집 명령을 내렸고, 언론에선 날마다 기사를 쏟아냈다.

<삼한제국이 위험하다. 국가 재해급 마수의 북상>

<비욘드 마수에 밀려 엄청난 숫자의 엘리트 마수도 함께 북상.>

<국방부, 전군 총동원령! 변방 개척 부대들 속속 귀환.>

<예비역 혹은 민간 각성자 동원 방안도 생각하고 있어.>

국가적 위기 상황이었지만 이걸 기회로 삼는 자들도 있었다.

<황태자 류진영 전하, 북경 웨이브 방어에 이 한 몸 바치겠다고 선언.>

<류진수 이황자님도 참전, 흑악지룡의 북상을 저지하겠다>

<다섯 분의 황자들 모두 참전, 일황녀, 이황녀, 삼황녀까지도>

<이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주, 고귀한 신분의 도덕적 의무>

황제의 자식들, 5남 3녀가 모두 참전 선언을 했다.

사실 숨겨진 속내가 있다.

이게 다 막내인 류진철 오황자 때문,

오황자는 지리산 마수 토벌 작전에 참여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세간엔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형제들은 모두 비웃었다.

알려지지도 않을 작전에 뛰어들었다가 소득도 없이 돌아왔다고.

하지만 미처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인 황제가 류진철 오황자를 따로 불러 극진하게 칭찬했다.

무려 최고급 영약도 하사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결코 도망가지 않고, 제국군 병사들을 위해 끝까지 용감하게 잘 싸웠다면서.

그 일로 인해 평소 경쟁상대 축에도 들지 못한 오황자가 급부상하면서 황위 계승의 유력후보로 올라왔다.

그 와중에 흑악지룡 북상 사태가 터졌다.

당연히 황자, 황녀들은 줄줄이 참전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각 황자들을 지원하는 후원 세력도 초비상이 걸렸다.

미리내 그룹은 이기언 회장이 직접 나서서 이황자 후원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상황, 물론 황가나 군부에서 따로 지원을 받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이황자를 따르는 군부 전투부대와 민간 각성자들만 해도 몇 명인데.

영약 지원은 기본, 각종 무기와 방어구, 치료제나 마나 회복제 같은 소모품들, 그리고 자금 지원도.

"이황자님께서 요청하신 군수 물자들 다 확보했지?"

"거의 다 준비됐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이기언이 자신의 큰아들인 이병우 부회장에게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구, 구하기 어려운 것이 있어서."

"빨리 말해! 지금이라도 백방으로 뛰어야지."

"태, 태홍 회복제입니다. 지금 이황자님이 300알을 요구하고 계세요."

"···이런!"

하필 태홍 회복제?

분통이 터져 미치겠다.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이황자가 잘 돼야 그룹이 산다.

원래는 황태자 쪽에 선을 대려 했지만 그쪽은 사람이 너무 많이 붙었다.

그래서 이황자쪽에 접근했고.

후회는 없다.

황태자와 비견될 정도로 막강한 이황자 세력.

또한 황태자는 약점이 많은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다른 황자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황위 계승에 달려드는 이유다.

이번 웨이브 방어전에서도 이황자가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

그럼 구해달라는 건 무조건 구해줘야지.

이황자가 황위에 오르면 김태주, 그놈부터 죽인다.

절대 곱게 죽이지 않는다.

고통이란 고통은 죄다 맛보게 해줄 것이다.

그때를 위해 지금은 어떤 치욕이든 참아주겠다.

"···현재 확보된 태홍 회복제 수량은?"

"120알 정도입니다."

"후우,"

뉴서울에선 구하지 못하는 약.

그 약은 구례에서만 파는 물건이다.

"구례에 직접 사람을 보내. 거기서 사면 되잖아."

"현지 판매가 중단된 상황이에요. 생산량 전부가 군부에 들어간답니다."

"제기랄! 도대체가···,"

순간!

욱신!

쑤셔오는 가슴 통증.

요즘 밤낮없이 일하느라 무리했나 보다.

"···으흑, 바, 방법은 있어?"

"중고 거래 사이트인 오이 마켓을 통해 웃돈을 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물량이 달려서."

"돈이 있어도 사, 사지 못한다고?"

미리내 그룹도 제약회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약도 아니고, 남의 회사 약을 사야 한다니, 심지어 물량도 없단다.

이게 김태주 때문이다.

모든 일에 다 연관이 되어 있다.

그놈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기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치솟는 혈압에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무, 무조건 사, 사들여! 두 배, 아니 세 배를 주어서라도···, 사, 사아···, 큭!"

급기야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이기언.

"크억!"

"아, 아버지! 아버지! 저, 정신 차리세요."

아들 이병우가 화들짝 놀라 이기언을 부축했다.

"밖에 아무도 없나? 빨리 구급차 불러!!!"

구급차가 도착하고 응급실에 실려 가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한번 정신을 잃은 이기언은 깨어나지 못했다.

병명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뇌손상.

즉 식물인간 상태.

각성자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는 건 매우 드문 경우지만 어쩔 수 있나?

진단 결과가 그렇다는데.

※ ※ ※

태주는 3일 동안 일백이, 이백이, 삼백이와 함께 설악산과 치악산, 오대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자이언트 반달곰을 사냥했다.

이러다 삼한제국 남부 지역의 자이언트 반달곰 마수가 씨가 마르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하지만 걱정 없다.

웅담이 자이언트 반달곰에만 있나?

삼한제국 북부 시베리아 접경지역에 서식하는 골리앗 그리즐리도 곰 종류 마수, 그 위쪽에 푸른 눈 폴라베어도 그렇고.

걔들도 웅담도 있겠지.

약효가 쓸만한지 나중에 잡아서 시험해 보면 되고.

자이언트 반달곰 웅담 하나로 만들 수 있는 회복제는 약 4000개.

거기에 일반 마나 결정체, 변종 마황, 마나초 등등이 들어간다.

태주가 이번에 수집한 웅담만 120여 개, 현재 태홍 바이오 약재 창고에 보관된 웅담이 약 60개 정도니까, 모두 합쳐 약 180개.

산술적으로 태홍 회복제 72만 알을 생산할 수 있다.

정작 군에서 요구한 물량은 겨우 2만 알.

재료도 충분하고, 만드는 이도 태주, 백창훈, 장순철, 3명이나 되고.

하루면 다 끝난다.

그러나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니 최소 30만 알 정도는 만들어 두는 게 좋겠다.

그래서 태주는 제자들과 함께 약품 제조실에서 회복제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 능숙해졌네? 열양공도 그렇고, 한음공에 침투경까지."

"흐흐, 감사합니다. 저도 실력이 팍팍 느는 게 몸으로 느껴집니다. 이러다 마스터 되겠어요."

"에이, 마스터는 무슨! 기대도 안 해, 우리가 어떻게···,"

태주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너흰 1년 안에 마스터가 될 거야. 오행신공만 잘 익혀도 문제없어."

현재 둘은 모두 미들 익스퍼트 등급.

영약 하나씩 먹이면 슈페리어, 마스터가 뭐가 어려워?

그러나.

"그래도 마스터가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겨우 시작일 뿐이야. 마스터끼리도 천차만별인 거 알지?"

"네!"

회복제 제조는 순조로웠다.

워낙 많이 만들어서 숙련도 됐고,

군에 납품할 물량은 이미 만들어 1차 분량을 넘겼으니 쉬엄쉬엄 만들어도 된다.

가끔 제조실 TV로 뉴스도 시청하면서.

- 오늘의 천리장성 상황은 어떻게 됩니까?

- 현재 천리장성 남쪽 20km 지점까지 대규모 마수 무리가 진출하고 있습니다. 집중 포격으로 숫자를 줄이고 있지만, 곧 포격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 포격을 중단하다니요? 이유가 뭡니까?

- 일반 마수들 뒤를 따라 북상하는 엘리트 마수들 때문입니다. 어정쩡한 포격으론 놈들을 절대 죽일 수 없고, 자칫하다간 진화의 빌미를 줄지도 모릅니다.

- 진화라면?

- 지구 과학 무기에 점점 적응하는 거죠. 놈들에게 예방주사를 맞히는 꼴이 되는 겁니다.

- 그럼 적합자 각성자가 직접 투입되겠네요. 인명피해가 우려됩니다만.

- 그래도 예상보다는 피해가 훨씬 줄어들 걸로 생각합니다.

- 왜···?

- 바로 태홍 바이오 제약에서 만든 태홍 회복제라는 기적의 신약 덕분이죠.

"오! 우리 약 나왔다."

"흐흐흐, 열심히 보람이 있네."

우쭐한 표정의 백창훈과 장순철.

뉴스에 직접 자신들이 만든 약이 언급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 아무튼 이런 상황을 만들게 한 원흉인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에 관해 이야기해 보지 않을 수 없는데요. 놈은 어떤 마수입니까?

- 아시다시피 핵공격에도 살아남아 중국을 망하게 한 마수 중의 한 놈입니다. 몸길이 약 100m, 체고 약 20m, 형상은 악어처럼 생겨서 마나 블레이드도 막아내는 철갑 가죽을 가지고 있고요.

- 놈의 주요 공격수단은요?

- 전반적인 스피드는 느립니다만, 역시 가장 무서운 건 놈의 혀죠.

- 아! 혀.

- 긴 혀를 가지고 있어 공격 범위도 넓고, 공격 속도도 매우 빠릅니다. 또 혀와 함께 나오는 침에는 강력한 부식독이 섞여있습니다. 그것에 닿으면 사람이든, 자동차든, 탱크든, 콘크리트 건물이든, 심지어 엘리트 장비도 녹여버리는 극악한 독 때문에···,

움찔!

TV 뉴스를 듣던 태주의 몸이 잠시 멈칫했다.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옆에서 배를 드러내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 삼백이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선 태주.

"어? 스승님, 들어가서 쉬시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저희가 알아서 다 만들게요."

태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무래도 재료가 부족할 것 같다. 웅담을 더 구해와야겠어. 이번엔 시간이 걸릴 거야. 일주일 정도 걸릴 수 있으니까, 나 없더라도 열심히 만들고 있어."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부님."

그리고 백서연과 백홍표에게도 재료 수급 때문에 자리를 비울 거라고 전화로 연락했다.

'흑악지룡, 긴 혀에서 나오는 강력한 부식독이라···,'

생각만 해도 몸이 달아오른다.

※ ※ ※

선계에서 추첨으로 뭔가를 한다는 건 매우 애로사항이 많다.

선인들이 어디 보통 놈들인가?

온갖 잡술을 동원해서 자신이 원하는 상품만 척척 골라갈 텐데.

그래서 공정한 추첨을 위해 독선 당군악은 심혈을 기울였다.

일명 로또식 구슬 뽑기.

철장 선인에게 부탁해서 두꺼운 철판으로 만든 원형 통을 준비하고 귀곡 선인과 갈홍 선인에게 부탁해 갖가지 술법진을 새겼다.

외부의 힘이 절대 작용할 수 없게끔.

그리고 번호와 물건의 이름이 적힌 구슬을 철통 안에 넣었다.

구슬의 크기와 무게는 똑같다.

역시 작게 술법진을 새겨 번호와 글씨가 잘 보이지 않게 만들고.

왜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었을까?

신선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도 모자란다고 도원을 털어버리는 놈들을 어떻게 믿어?

당군악이 철통 옆에 달린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안에서 구슬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구슬 뽑기 통 앞에 다소곳이 모여앉은 선인들.

손에는 저마다 번호가 적힌 물품 교환 우선권을 들고 있었다.

교환권이 아닌 우선권.

선도를 가지고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권리.

긴장감이 흐른다.

꿀꺽.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

입을 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데구르르르.

드디어 철통에서 구슬이 통로를 통해 굴러 나온다.

선인들이 교환 우선권을 꼭 쥐었다.

그들의 손바닥엔 땀이 흥건했다.

마침내 완전하게 빠져나온 구슬을 손에 쥔 당군악.

구슬을 앞으로 내밀자 숨겨져 있던 번호와 글씨가 드러났다.

"24번, 상품은 최고급 고디바 초콜릿 세트! 선도 5개로 교환 가능하오."

번호가 불리자마자.

"떴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오는 허령 선인.

"하아!"

"후우,"

"다행이다."

"제기랄!"

누군가는 탄식을, 누군가는 안도를,

검선은 안도 쪽이었다.

검선이 노리는 건 단 하나.

바로 손목시계.

당첨되면 자신이 가진 보패와 교환이 가능하다.

어디 검선뿐인가?

수많은 선인들이 자신의 번호가 불리길 기대하며 초조하게 앉아있었다.

그러다 번호가 불리면,

"떴다!"

.

.

.

한마디로 축제였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선인들이 노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월궁선자.

'저 망할 놈들이 대체 뭘 하고 노는 거지?'

<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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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2) >

퍼펑! 펑펑펑펑!

제국의 자주포 부대가 천리장성 남쪽을 향해 포탄을 뿌려대고 있었다.

융단 포격으로 촘촘하게.

일반 마수들은 지리멸렬 도망가기에 바빴다.

하지만 포격은 전투 부대 레이드팀이 전열을 가다듬는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방책, 또한 엘리트 마수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포격은 중단될 것이다.

실질적인 전투는 육군에 소속된 적합자와 각성자들이 한다.

그들만이 엘리트 마수를 확실하게 사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전투 요원들인 일반병사들도 정신없이 바빴다.

임시 숙영지 건설, 레이드팀을 위한 취사와 배식, 보급품 정리와 분배···, 자잘한 일들이 매우 많다.

게다가 동원된 일반 병사들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북경 거점 도시는 천리장성 하나를 두고 마수와 대치하고 있는 위험지역이기 때문에 일반 병사들의 숫자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노련한 상병급 이상의 병사들만, 그래서 소수의 숫자로 열 일을 해야 하는 상황.

그들의 피로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각성자나 적합자들도 전투 준비로 힘든 판에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북경 천리장성 방어 본부에서도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전투 병력만큼이나 중요한 비전투 병력들.

이들이 있기에 원활한 마수 레이드가 가능하다.

가장 힘든 비전투 주특기를 꼽아보라면 역시 보급 부대 군인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차로 들어오는 보급품을 내리고, 수량이 맞는지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분배하고.

서형식 육본 주임원사는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보급 부대 본부에 방문했다.

일반인이지만 탁월한 업무 능력으로 육본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이번에도 보급 전반에 관한 지휘 임무를 맡았다.

"멸마!"

"멸마! "

서형식 원사가 나타나자 경례를 붙이며 일어나는 비전투 보직 부사관들.

"뭐야? 쌩쌩하네? 안 피곤해?"

"괜찮습니다! 할만합니다."

"흐음, 내가 간식과 드링크제를 준비했으니까 이거 먹고 해."

"···아아,"

"내가 마셔본 거 중에서 가장 좋은 걸로 준비해왔어."

"어음, 가, 감사합니다."

어째 심드렁한 표정.

육본 주임원사 서형식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놈들, 너무 멀쩡한데.'

보급 부대 부사관들이 매일 식사도 거르고, 야근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왔는데, 피곤한 표정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도 그렇다.

피로에 지쳐 입술도 부르텄다.

그러던 중에,

'음?'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병들.

'드링크제인가.'

하지만 처음 보는 제품.

서형식은 자양 강장 드링크 전문가나 다름없었다.

업무가 업무이니만큼 거의 모든 드링크를 다 먹어봤다.

빈 병을 들어서 이름을 확인해보니.

'···태홍 생기불끈?'

태홍이라면 기적의 신약, 태홍 회복제를 만든 그 회사인가?

"이거 어디서 났어?"

그러자 슬그머니 손을 들고 말하는 부사관 하나.

"제 형님이 백두 바이오 사이언스 약품 공장에서 근무하는데, 거기서 몇 상자 얻어왔습니다."

"백두? 이건 태홍 바이오 제품이잖아."

"위탁생산하고 있는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효과가 매우 좋다고."

"그래? 나도 한 병 줘봐. 효과가 좋으면 구매신청 하게."

"···그, 그게 저어, 아, 아직 식약청 판매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서형식 원사의 눈이 매서워졌다.

"뭐? 이 새끼들이! 안전이 보장되지도 않은 드링크제를 먹었단 말이야?"

"하, 하지만 형님이 식약청 사람들도 하루에 한 병씩 먹는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도 그렇지!"

그렇지만 호기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려 태홍 바이오 제품 아닌가.

"···진짜 효과가 좋아?"

"끝내줍니다. 피로가 싹 날아갈 정도로."

"그럼 나도 마셔보자. 하나 줘봐."

"네. 여기···,"

서형식도 한 병 꿀꺽 마셨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양팔에 태홍 생기불끈 드링크 상자를 하나씩 끼고 웨이브 방어 총본부로 달려갔다.

가자마자 김송열 합참의장을 비롯한 군부 장성 앞에서.

"이 드링크제는 하루 빨리 시판되어야 합니다. 군수물자로 지정해서 우리가 우선 공급받아야 해요."

강력하게 주장했다.

때아닌 호들갑에 장성들은 당황했지만, 일단 서형식이 건네준 드링크제를 한 병씩 마셨다.

그리고 당연히 그 효과를 생생하게 체감했다.

이거 쓸만하다.

각성자, 적합자, 일반인 모두에게 효과가 있다.

전력상승에 큰 도움이 될 터.

김송열 합참의장은 식약청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청장님, 태홍 바이오에서 판매 허가를 낸 드링크제 말입니다. 그래요, 생기불끈, 지금 검사 통과 일정이 얼마나 남았···, 아! 절차상 최소 두 달은 걸릴 거라고요?"

두 달이라,

너무 길다.

"청장님이 보시기에 그 드링크제 어떻습니까? 지금 시판해도 문제가 없는지? ···인체실험도 마무리 단계라고요? 부작용도 없고?"

그뿐만이 아니다.

태홍 바이오가 허가 신청을 한 다른 약이 하나 더 있단다.

"새살쑥쑥 외상 치료제라, 효과는요? ···그래요?"

전화하는 도중에, 김송열 합참의장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태홍 바이오 제약.

해독제는 물론 마나 회복과 내상 치료까지 한 번에 해결하는 기적의 신약, 태홍 회복제를 발명한 회사였다.

그 회사가 만든 피로 해소 드링크제, 어떤 외상이라도 즉시 지혈하고 아물게 하는 치료제, 이름값 톡톡히 하는 약일 것이다.

"청장님, 지금 당장 판매 허가 서둘러주십시오. 아!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황제 폐하께 윤허를 받겠습니다."

김송열 합참의장은 즉시 황궁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

금수호 비서관과는 매우 친한 사이, 사석에선 선배님으로 모신다.

식약청 약품 판매 조기 허가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웨이브 방어에 필요하다고 간절하게 부탁하면 들어줄지도 모른다.

"선배님, 부탁드립니다. 약의 효과가 너무 좋습니다. 식약청에서도 부작용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고요."

- 무슨 약인가? 판매 허가 심사 중인 신약이 얼마나 많은데.

"아! 제가 그걸 말씀 안 드렸네요. 깜빡했습니다. 태홍 바이오에서 만든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입니다."

- ···쩝, 그럴 줄 알았어. 판매 허가가 떨어지도록 폐하께 건의해보지.

김송열 합참의장은 살짝 놀랐다.

무리한 부탁이라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허락을 받았다.

- 자네는 주문이나 넣어둬. 오늘 안에 해결될 거야.

이렇게 빨리?

그리하여 태홍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은 하루 만에 시판 허가가 떨어졌다.

※ ※ ※

북경까지 가려면 역시 기차를 타야 한다.

하지만 북경행 직통 열차는 웨이브 때문에 막혔다.

북경과 가장 가까운 도시는 승덕시.

거기까진 기차가 간다.

태주는 간단한 트레이닝복에, 일백이가 들어있는 백팩 가방을 등에 메고 승덕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일백이는 두고 가려고 했지만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데리고 갈 수밖에.

"냐앙?"

"쉿! 가방에서 절대 나오지 마."

"냥."

구례에서 출발할 때부터 역용술과 축골공으로 얼굴과 키를 바꿨다. 휴대폰도 무한공간에 집어넣었다.

일정이 빠듯하다.

빨리 흑악지룡을 만나서 독을 채취하고 돌아와야 한다.

10시간 정도 걸려서 태주는 승덕역에 도착했다.

내리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가 북경 거점 도시로 가는 군수 보급 열차로 몰래 갈아탔다.

BEM – C04 흑악지룡(黑惡地龍).

놈에 대해 미리 알아봤다.

중국이 망할 당시 기록이 남아 있었다.

주로 생존자들의 증언.

이놈 혼자서 중국 인민해방군 5개 사단을 전멸시켰다.

지구의 화약 무기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채찍 같은 긴 혀가 한 번씩 휘둘러질 때마다 각성자들 수십 명이 우수수 썰려 나갔다.

부식독이 얼마나 강한지 탱크든, 장갑차든, 그냥 녹여버렸다.

놈이 대도시를 습격해 건물을 부수고, 사람 하나 살지 않은 폐허로 만든 시간은 불과 한 달 남짓, 그리고 다음 도시로 이동하고.

'섬찟하네.'

마스터의 마나 블레이드도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태주도 솔직히 자신 없다.

이걸 어떻게 잡아?

그러나 잡으러 가는 게 아니다.

부식독만 채취하고 빠르게 빠져나온다.

먼저 투명부(透明符)를 이용해 경계가 삼엄한 천리장성 방벽을 넘는다.

지속 시간이 1시간이니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다음은 추적부(追跡符).

흑악지룡의 위치를 탐지한다.

놈에게 접근한 후, 구속부(拘束符)로 이동을 멈추고, 벽마부(僻魔符)를 이용해 놈의 힘을 약화시킨다.

놈이 공격해오면?

호신부(護身籍)가 있다.

몸에 붙이면 치명적인 공격을 막아주는 동시에 30초간의 절대 보호 상태에 들게 해주는 부적.

독을 채취할 시간은 충분하다.

끝나고 나서 신속부(迅速符)로 속도를 높여 냅다 도망치면 끝.

아아.

독선 당군악은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가.

아무리 다른 세상의 자신이지만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아오른다.

그가 보내준 부적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부식독.

그 독으로 독정은 또 얼마나 성장할까?

혼원무상독령공 9성이 눈앞에 보인다.

이윽고 북경 거점 도시 역에 도착한 보급 열차.

태주는 바로 투명부(透明符)를 몸에 붙였다.

스르륵!

눈 깜짝할 새 사라지는 태주.

처음 사용해보는 부적이지만 효과가 기가 막혔다.

태주는 빠르게 도시를 가로질러 천리장성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퍼펑! 펑펑펑펑!

콰쾅! 콰콰콰쾅!

아직도 계속되는 포격.

하늘에서 날아오는 포탄이야 감각으로 피하면 되는 것이고.

태주는 추적부(追跡符)를 꺼냈다.

흑악지룡의 모습을 떠올리자.

화르륵!

추적부가 불타오르면서 하늘로 멀리멀리 날아간다.

그리고 동시에 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할지 머릿속에서 정해졌다.

'···으음, 좀 머네.'

신속부 한 장 붙이고, 그리고 표홀질풍보.

쐐액!

태주의 몸이 잔상을 남기면서 남쪽으로 쏘아졌다.

"니아아?"

백팩 안에서 일백이, 아니 삼백이가 갑작스러운 빠르기에 깜짝 놀란 듯, 머리를 내밀었다.

"가만히 들어가 있어. 나오면 위험해."

"니앙!"

쐐애애액!

넓은 평야에 가득 찬 마수들.

드문드문 보이는 엘리트 마수.

뭔가에 겁을 먹은 듯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스슷!

이윽고 투명부와 신속부의 효과가 사라졌다.

태주의 몸이 나타나자 마수들이 달려들었다.

그 정도야 가볍게 피해 주면서.

한참을 달렸다.

거의 8시간 넘게.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중간에 신속부 한장 더 붙이고.

'이거 돌아가는 게 힘들겠구나.'

그 많던 마수 무리가 점점 사라진다.

좀 더 가니 아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다 온 것 같은데···.'

그때였다.

쿵쿵쿵쿵!

굉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거리는 땅.

'저놈이네.'

새까만 흑색의 몸체.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마수보다 더 거대한 놈.

비욘드 엘리트 마수 흑악지룡이었다.

이제 남은 건 부식독 채취.

빨리 처리하고 구례로 돌아가자.

※ ※ ※

선계.

하늘이 도운 것일까?

승리자는 결국 검선(劍仙)이었다.

"어이쿠, 생각보다 무겁군."

왼쪽 손목에 번쩍번쩍 빛나는 시계를 착용한 검선, 긴 소매를 어깨까지 걷은 채 선계를 활보하고 다녔다.

"이보오, 주선(酒仙), 지금 몇 시인지 궁금하지 않소?"

"···선계에서 시간 따위를 알아서 뭐 하게."

"네시 반이오. 하하하!"

"···."

"째깍째깍, 소리도 좋구나!"

"저리 좀 꺼지시지?"

주선 태백 선인은 이번 추첨에서 완전히 망했다.

술은커녕 팝콘이나 초콜릿, 흔한 커피믹스 하나 얻지 못했다.

그래서 자랑질이나 하고 다니는 검선이 아니꼬울 수밖에.

"에이, 다음 기회가 있겠지. 그러지 말고 선도 100개 줄 테니, 신선주나 꺼내 보시오. 같이 술이나 한잔하면서 기분이나 풀어봅시다."

"도원 도둑 주제에, 훔친 선도로 내 술을 사가시겠다?"

"훔쳤다니! 잠시 빌려왔을 뿐이오."

"그래서 갚을 생각이나 있고?"

"뭐, 때 되면···, 그리고 어차피 종리나 탁탑 모두 나하고 공범인데,"

음흉하게 웃는 검선을 바라보면서 주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태상노군은 뭐 하나 몰라, 이런 놈 안 잡아가고.

독선 당군악 또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필이면 검선이 보패 교환권 당첨자였다.

그자가 손목시계와 바꿔 간 보패.

바로 만리비검(萬里飛劍).

한번 비행을 시작하면 일만 리, 약 4000km를 간다는 비행검이다.

비행의 용도로 사용되지만 검 자체의 성능도 매우 뛰어나다.

보검 중의 보검, 명검 중의 명검.

하지만 태주에겐 별 쓸모가 없다.

당군악도 마찬가지.

검 따위 어디다 쓰나?

애초부터 검술은 익히지도 않았다.

암기술은 비겁하다면서 검이야말로 만병지왕이라고 으스대고 다니는 새끼들을 가장 혐오해왔던 사람이 바로 자신.

그리고 태주도 자신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쯧, 이거 보내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때였다.

찌르르르.

머릿속에서 울리는 느낌.

'오!'

공유창고가 열렸다.

당군악은 서둘러 물건을 옮겼다.

뭐가 굉장히 많다.

가면 갈수록 커지는 공유창고.

그리고 그 빈자리를 선도로 꽉꽉 채웠다.

한 100개 정도 거뜬히 들어갔다.

선도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복숭아를 먹어 선기가 늘어나면 태주의 무한창고 크기도 점점 커지겠지.

그다음으로 보낼 물건은···,

'이거밖에 없구나.'

당군악은 어쩔 수 없이 만리비검을 공유창고 안에 넣었다.

태주에게 많이 미안하다.

절대독마에겐 그다지 필요 없는 검 쪼가리나 보내서 말이다.

'뭐, 알아서 잘 쓰겠지.'

최소한 이동은 편해질 것이다.

지구의 비행기만큼이나 빠른 만리비검이니까.

한편 아직 돌아가지 않고 저 멀리서 천리지청술법과 천리안으로 선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훔쳐보던 월궁 선자.

당연히 검선과 주선이 나누는 대화도 들었다.

도원 도둑?

'검선, 이 새끼가···,'

드디어 알아냈다.

도원 1구역, 2구역의 선도가 사라졌던 이유를.

<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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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3) >

식별번호 BEM – C04 흑악지룡의 이동은 초고도 정찰기에 의해 실시간으로 감시된다.

정찰기에서 보내오는 흑악지룡의 영상을 판독 중인 감시병.

볼수록 기분이 좋지 않다.

이 새끼는 대체 어디까지 올라올 것인가?

올라오는 이유가 뭘까?

영역싸움에서 밀렸다는 추측이 있는데, 그럼 이 흑악지룡보다 더 강한 새끼가 있다는 말 아닌가?

그렇게 모니터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순간이었다.

"어?"

갑자기 이동을 멈춘 흑악지룡.

"오오! 멈췄구나."

그래, 더는 움직이지 말아라.

거기가 지금부터 네 영역이다.

놈의 동태를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감시병은 화면을 확대했다.

그런데!

"···뭐야?"

잘못 봤나?

눈을 비비고 한 번 더 봤다.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문질러도 봤다.

그래도 변하지 않았다.

"사람?"

흑악지룡 앞을 막아선 한 명의 인간.

감시병은 서둘러 상부에 보고했다.

천리장성 웨이브 방어 본부에 각 부대 지휘관 및 참모들이 모였다.

그중엔 지리산 방어군단을 이끌고 북경에 합류한 오진형 중장도 있었다.

"맞군. 사람이야."

"왜 저기에···,"

"자살하러 갔나?"

"허어···."

오진형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 비슷한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지리산 마수 토벌 작전 때 천왕봉에서 말이다.

김송열 합참의장이 감시병에게 물었다.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나?"

"가능합니다."

"해봐."

"정찰 드론 투하하겠습니다."

초고도 정찰기에서 거대한 포탄 하나가 떨어졌다.

포탄이 지면에 가까이 다가가자, 저절로 분해되더니 그 안에서 수십 기의 드론들이 튀어나왔다.

위이이잉! 위잉!

"곧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꿀꺽.

오진형은 잔뜩 긴장했다.

'설마 또···,'

이윽고,

"얼굴 잡혔습니다."

화면에 나타난 젊은 남자의 얼굴.

"엉?"

"···누구지?"

"혹시 아는 사람 있나?"

"전 처음 봅니다."

"저도."

오진형은 안도했다.

그렇지.

김태주 회장일 리 없지.

얼굴도 완전 다를뿐더러 체형도 다른 사람이다.

그는 태홍 회복제 만드느라 바쁘다.

지금도 재료를 확보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는 판에.

순간!

쿠쿠쿠쿠쿵!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피어오르는 자욱한 먼지 폭풍.

파파파팟!

드론들이 폭풍에 휘말려 산산조각이 났다.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 ※ ※

새로운 독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따로 독을 채취해서 혈관에 집어넣거나 먹어보는 것.

다른 하나는 무식하게 직접 당해보는 것.

후자는 매우 위험하다.

특히 저놈은.

강호 무림에서도 갖가지 요괴들이 존재한다.

인면지주에서부터 천년 묵은 이무기까지.

그러나 저만한 요물은 없다.

인간계에선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존재해서도 안 되는 마물.

하긴!

핵폭탄에도 견디는 놈들인데.

저런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공격을 직접 당해본다고?

초상 치를 일 있나.

결국 전자로 가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독을 채취해서 간접적으로 몸에다 적용한다.

하지만 그것도 문제.

엘리트 마수들은 기본적으로 강기막이라는 것이 있다.

마나 블레이드로 뚫을 수 있는 일종의 보호막.

그런데 저 비욘드 새끼의 강기막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쿵쿵쿵쿵,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멈추지 않고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흑악지룡.

우웅! 우웅! 우웅···.

움직일 때마다 뚜렷한 강기막이 눈에 보일 정도로 놈의 몸 주위에서 넘실거린다.

파삭! 파사사삭!

거대한 지우개가 지나가는 것 같다.

강기막에 닿는 모든 사물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바람에 날아온 마른 풀도, 땅 위에서 구르는 커다란 바위도, 심지어 놈이 딛고 다니는 바닥의 흙도 바스러져 먼지가 되어 올라왔다.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강기 보호막은 방어의 수단뿐만 아니라 공격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저러니 대도시도 폐허가 되어 사라지지.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일단은 저 말도 안 되는 강기막부터 뚫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일백아?"

"···."

"이백, 아니 삼백아?"

"···."

조용하다.

백팩을 열어보니 고양이 상태로 파르르 떨고 있었다.

"겁먹었구나."

"···."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야. 중꺾마! 몰라?"

"···."

이해한다.

비욘드와 그냥 엘리트는 천지 차이.

그래서인지 주위엔 그 어떤 마수들도 없다.

일이삼백이도 자신이 데려오지 않았다면 접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놈, 너무 약해 빠졌다.

가슴이 아프다.

강하게 키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태주는 백팩을 닫고 흑악지룡과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에다 놓은 후,

"여기 가만히 있어. 절대 나오지 말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전진해오는 흑악지룡 앞에 섰다.

언제든지 부적들을 끄집어낼 수 있게 준비하고.

"쿠오오오···."

폐부를 찌르는 치명적인 피어.

놈의 입장에서 자신은 뜨거운 횃불에 날아드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겠지.

그러나 놈도 자신을 의식하는 듯했다.

이동을 멈춘 흑악지룡.

하루살이 정도였다면 그냥 밀고 지나갔을 텐데.

갑자기!

위이이이잉!

저 하늘에서 하강하는 드론들.

'참나, 기술력 하나는 좋네.'

지리산 천왕봉의 그때와 비슷하다.

태주는 역용술과 축골공을 다시 점검했다.

드론은 어차피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마수가 그냥 놔두겠나.

쿠쿠쿠쿠쿵!

바로 지금처럼.

파파파파팟!

엄청난 마나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로 인해 드론들이 부서지고 한 치 앞도 알아볼 수 없는 거대한 먼지 폭풍이 일어났다.

스슷!

태주는 호신부를 꺼내 왼쪽 가슴에 붙였다.

오른쪽엔 신속부를 붙이고.

'가자.'

스팟!

쐐애애애액!

한줄기 선이 되어 날아가는 태주.

우지끈!

그의 몸과 비욘드 마수의 강기 보호막이 충돌했다.

파삭!

화르륵!

호신부가 불에 타면서 태주의 몸에도 신령한 보호막이 피어올랐다.

남은 시간 30초.

무한공간에서 꺼낸 벽마부가 놈을 향해 훨훨 날아갔다.

선기로 만들어진 부적이다.

마귀든 마수든, 효과가 없을 리 없다.

파슈슛!

놈의 몸에 닿자, 움찔움찔, 뒤로 물러나는 비욘드 엘리트 마수.

'아끼지 말자.'

마귀의 힘을 약화시키는 벽마부는 총 10장.

모조리 꺼내 날려 붙였다.

"쿠오오오오오오오!"

흑악지룡의 강렬한 포효.

정말 대단하다.

10장이나 붙였는데도, 크게 약해진 것이 분명한데도, 아직 이정도라니

스팟!

태주는 강기 보호막을 뚫고 놈의 등 위에 올라탔다.

스슷!

어느새 손에 들린 신령비도.

시간은 충분하다.

시험해보자.

보패의 위력을.

지이잉!

신령비도에 어리는 강기.

태주는 놈의 등을 강하게 찔렀다.

쿠욱! 쿠욱! 쿡!

손에 가득 느껴지는 저항감.

대단한 놈이다.

칼이 안 들어간다고?

사실 신령비도의 영험함은 칼의 날카로움에 있지 않다.

칼과 사용자의 의식이 연결되어서 이기어검의 효과를 내게 해주는 것.

그래도 보패이기에 조금은 들어간다.

쿡! 쿡! 쿡! 쿡!

완전하게 들어갈 때까지 찌른다.

"쿠오오오!"

남은 시간 15초.

흑악지룡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쭈욱 빼서 뒤로 돌렸다.

동시에 입에서 섬전처럼 쏘아져 나오는 놈의 혀.

츠리리릿!

강기로 휩싸인 검정색 줄기가 태주의 허리를 채찍처럼 직격 했다.

퍼억!

'···엥?'

희한하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힘에 밀려나지도 않았다.

성인 남성 허벅지처럼 굵고 두꺼운 혀에 당했는데.

그 독한 부식독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쿠오오···?"

놈도 당황한 모양.

이렇게 환상적인 효과라니.

호신부를 하루에 한 장밖에 쓸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하루 두 장부터는 효과가 없단다.

다시 효과를 보려면 최소 24시간이 지나야 한다.

쿡쿡쿡쿡!

계속해서 놈의 등을 찔렀다.

남은 시간 약 8초.

급기야 긴 혀가 태주의 몸통을 휘감았다.

휘리리릭!

아마 끌어당겨서 이빨로 씹으려는 모양.

혀에 묻어있는 끈끈한 점액질의 부식독.

'됐어.'

스슷!

미리 준비해온 세라믹 용기를 꺼냈다.

드르륵!

놈의 혀에 대고 긁으니 용기에 가득 차버린 부식독, 세라믹 용기는 무한공간에 넣고.

채집 완료.

돌아가자.

태주는 자신의 몸을 칭칭 휘감은 혀를 썩둑 잘랐다.

철갑 피부와는 달리 혀는 의외로 쉽게 잘렸다.

그리고 구속부를 꺼내 놈의 등에 붙였다.

신속부는 자신의 몸에 붙이고.

'남은 시간이···,'

2초도 남지 않았다.

스파파팟!

쐐애애액!

빠르게 벗어나는 태주.

눈 깜짝할 새에 놈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툭!

츠리릿!

뒤쪽에서 들리는 기묘한 파열음.

마치 투사체가 공기를 찢고 날아드는 소리.

'무슨···?'

휘리릭!

"헉!"

검정색 혀가 태주의 발목에 휘감았다.

그 여파에 바닥으로 넘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콰당!

'···혀? 좀 전에 자르지 않았나?'

툭!

츠리리릿!

또 날아오는 혀.

이번엔 창처럼 얼굴을 향해 쏘아졌다.

'재생할 수 있었어?'

내구성 대신 재생을 택했구나.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혀를 툭하고 토막 내어서 쏘아 날리는 식으로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태주는 신령비도에 강기를 있는 힘껏 불어넣었다.

거대해진 비도를 곧추세워,

찌이이이잉!

흑악지룡의 혀를 막았다.

쩌어어어억!

강기 날에 세로로 길게 갈라지는 혀, 동시에 끈끈한 체액이 태주를 흠뻑 적셨다.

촤아아아악!

"으윽!"

치지지직!

호신부 효과가 사라지자마자 덮쳐오는 부식독의 위력.

옷이 녹았다.

살이 타오른다.

꿈틀!

독정이 순식간에 반응했다.

하지만 좋아할 때가 아니다.

치칙! 치지지지직!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부식독.

아찔!

"으음···,"

정신이 혼미해진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사실 이건 정상적인 반응이다.

새로운 독이 들어왔을 때, 그걸 받아들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적응과정.

츠리릿!

놈의 혀 토막이 또 한 번 태주를 향해 날아왔다.

더 멀리 도망가야 하는데, 구속부에 묶여 놈이 이동하지 못할 때 가야 하는데, 하지만 발목이 놈의 토막 혀에 칭칭 감겨있고.

치지지지직!

발목도 끊어질 듯 아프다.

"씨발!"

태주는 신령비도를 들었다.

하필 이때 독정이 반응할 줄이야.

'···이까짓 것.'

이 정도 위기는 위기도 아니다.

태주는 혼원무상독령공을 믿었다.

꿈틀대는 독정을 무시하고 억지로 독기를 끌어올렸다.

찌이이이이잉!

온몸에 차오르는 독기, 선기, 마나의 기운.

쩌어어어억!

비도에 의해 또 한 번 잘려 나가는 놈의 토막 혀.

"넌 뒈졌어."

감히 절대독마이자 암기술의 대가에게 이따위 공격을 해?

태주는 재빠르게 발목에 묶인 흑악지룡의 혀를 잘라냈다.

서걱!

순간!

툭, 툭!

츠릿! 츠리릿!

토막 혀 2개가 동시에 날아왔다.

스슷!

어느새 태주의 손에서 나타난 암기들.

'이대로 싸워?'

아니지.

'튀자.'

판단은 빠르게.

아직은 몸이 완전하지 않다,

도망갈 수 있을 때 도망가자.

목적도 다 이뤘고, 아직 구속부의 효능은 유지되고 있으니까.

그때였다.

"크르르릉!"

집채만 한 생명체가 태주의 앞을 막아섰다.

"크앙!"

그리고 중앙의 두 번째 머리가 태주를 덥석 물어버렸다.

"···어?"

삼두백호였다.

"야야, 너 지금 뭐하고···,"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태주를 입에 문 채, 펄쩍펄쩍 뛰어서 멀리 달아나는 삼두백호.

푹! 푹!

동시에 흑악지룡이 쏘아 보낸 혀 토막 두 개가 삼두백호의 몸통을 관통했다.

"크릉, 크르륵!"

고통에 찬 울음소리.

하지만 중앙의 백호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소리를 내면 입에 문 태주를 놓칠 수도 있으니까.

커다란 몸집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에서 쉼 없이 줄줄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그저 무조건 달려서 태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

한참을 달려서 흑악비룡이 까마득한 점으로 보이는 그때서야 우뚝 멈춰, 비틀비틀하더니 가만히 입을 벌려 땅에다 태주를 내려놓았다.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이제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털썩 옆으로 쓰러지는 삼두백호.

그리고,

스스스스스···,

거대한 몸체가 삽시간에 줄어들어 고양이로 변해버렸다.

"너 미쳤어?"

"···냐아아,"

혼자 해결할 수 있었다.

이놈이 나설지 생각도 못 했다.

"냐···,"

점차 숨소리가 잦아드는 놈.

"하아,"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가슴 한구석이 미어진다.

죽을 줄 알면서도 자신을 구했다.

"이 새끼···,"

이럴 때가 아니다.

자신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죽어가는 삼두백호.

독을 흠뻑 뒤집어써서 아직 지글지글 녹고 있는 태주의 육신.

또한 좀 전에 억지로 독기를 끌어올리느라 무리한 탓인지 독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중요한 때다.

독정이 9성으로 발돋움하려는 순간이다.

조용한 곳에서 독기를 다스려야 한다.

"조금만 참아."

고양이로 변한 삼두백호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 나서 선도 하나를 꺼내 손으로 쥐어짰다.

후루루룩,

삼두백호의 식도를 통해 넘어가는 선도의 과즙.

'이걸로 될까?'

최소한 응급처치는 되겠지.

그리고 새살쑥쑥 연고를 잔뜩 펴서 발라주고, 회복제도 억지로 몇 알 퍼먹이고.

'지둔술.'

푸욱!

태주는 백호와 함께 땅속으로 들어갔다.

당군악이 강호 무림을 떠돌 때 익혔던 지둔술을 이용해 깊게 깊게 들어갔다.

마치 두더지처럼 말이다.

아직 흑악지룡은 멀쩡하다.

놈이 이동하다가 자신들을 발견하면 큰일 난다.

지둔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숨구멍 만들기.

신령비도가 태주의 의지에 따라 드릴처럼 회전하면서 흙을 파고 올라가 구멍을 만들었다.

무너지지 않게 잘 다져주고.

땅속으로 들어가 몸을 엎드려 공간을 만든 후 일백이인지, 이백이인지, 혹은 삼백이인지 모를 고양이 삼두백호를 꼭 껴안았다.

서로의 체온으로 금세 따뜻해진 공간.

"복수는 나중에 하자."

"오옹···,"

독정부터 다스린다.

9성으로 올라간다.

땅속에서 자동으로 운기되는 혼원무상독령공.

규칙적인 태주의 숨소리.

"후우, 후우, 후우···,"

"냐아, 냐아, 냐아···,"

고양이 삼두백호의 호흡도 자연스럽게 태주와 맞춰졌다.

<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3)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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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4) >

흑악지룡은 한동안 꼼짝없이 가만히 있었다.

걸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발조차 내디딜 수 없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구속력.

대체 뭐지?

물리적인 힘이었다면 그냥 부수고 나아갔을 텐데.

몸은 움직여졌지만 앞으로 나아가지질 않았다.

그래서 머리 3개 고양이, 그놈을 쫓을 수가 없었다.

감히 눈앞에서 사냥감을 가로채?

그나저나 그 인간의 정체가 뭐였을까?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놈의 공격을 받아 단단했던 등이 살짝 상처 입었다.

지금도 등 쪽이 간질간질거리고.

이윽고.

자신을 옥죄고 있던 정체 모를 구속력이 사라졌다.

흑악지룡은 잠시 고민했다.

계속 올라가느냐, 아니면 여기서 머무르느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곳은 새로운 둥지가 되기엔 부족하다.

위로 더 나아가야 한다.

쿵쿵쿵쿵!

흑악지룡은 다시 북쪽으로 진군했다.

※ ※ ※

태홍 바이오 뉴서울 신공장.

공장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식약청의 판매 허가, 게다가 생산된 신약 전부를 군에다 납품해야 한다.

창고에 있는 물량으로도 모자랄 지경.

결국 야근 불가라는 회사 방침을 잠시 접어야 했다.

지금은 제국 전체가 마수와 전쟁을 하는 비상 상황이니까.

판매 허가의 배경엔 백두 그룹이 있었다.

허가가 떨어지기 몇 시간 전 백서연 총괄경영자에게 걸려온 정욱철 회장의 전화.

- 백사장, 드링크제는 충분히 만들어 뒀는가?

"그럼요. 공장 창고가 가득 찼는걸요."

- 모자랄 건데, 아마 야근이 필요할 텐데.

"왜 그리 급하세요? 아직 허가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만?"

- 곧 판매 허가가 떨어질 거야. 빠르면 오늘 내로! 그리고 전량 군에다 납품해야 할 걸세. 그쪽에서 반응이 터졌어.

"네? ···군? 군이라니요."

- 얼마 전에 북경 웨이브 방어 보급 부대에 드링크제 상당량 들여보냈거든. 효과를 실감해보라고.

"어머? 회장님, 그건 불법 아닌가요?"

- 허허, 불법이라니! 우리 공장에 근무하던 직원 하나가 전방에서 고생하는 부사관 동생을 위해 효과 쩌는 피로 해소 드링크제 몇 상자 빼돌려서 준 것뿐인데, 돈 받고 판 것도 아니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알고 계시네요."

- 전쟁은 위기지만 반면 기회이기도 하지. 어차피 전력상승에도 도움이 되는 약 아닌가.

그리고 정욱철 회장 말대로 됐다.

식약청 판매 승인, 군부에서 전량 매입.

생기불끈뿐만 아니라 새살쑥쑥까지 주문이 들어왔다.

- 그나저나 김태주 회장은 요즘 뭐 하고 있나?

"태홍 회복제 물량 맞추느라 재료 확보하러 다니고 계세요. 웅담이 부족하거든요. 재료 가공할 수 있는 사람들도 몇 명 없고."

- 쯧쯧, 연락이 안 돼서 뭐 하나 했더니···, 회장씩이나 돼서 아직도 직접 발로 뛰고 있었군. 그 친구도 고생이 많아.

"그 부분은 저도 항상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 자네도 연락이 안 되지?

"네, 스마트폰이 터지지 않는 곳에 계시나 봐요."

하지만 정욱철도, 백서연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도 아니고.

태주의 부재는 조금 길어졌지만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 ※ ※

태주가 흑악지룡과 만난 시점으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천리장성에서 벌어진 본격적인 전쟁.

미친 듯이 몰려오는 마수들, 그 뒤를 쫓는 엘리트 마수.

놈들을 막기 위해 수십여 개의 전투 사단이 집결했다.

적합자들은 성벽 위에서 마수 사냥용 마나건을 들고 조준사격을 실시하고 있었고, 각성자들은 레이드 팀을 조직해 성 바깥으로 진출했다.

일반 병사들도 정신이 없었다.

의무병은 응급 구조 키트를 들고 동분서주했고, 성 안쪽에선 보급 부대 트럭이 물자 수송을 위해 움직였다.

천리장성 모든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진 건 아니다.

성벽의 중앙 지점, 약 50km 구간이 가장 치열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숫자의 마수들이 몰려왔다.

"비행 마수다!"

"요격 미사일 준비해!"

"결정체 탄환이 다 떨어졌다고! 탄약 보급 아직 멀었나?"

"조금만 기다려! 지금 간다."

"103번 레이드팀 복귀 완료, 105번 레이드팀 교대 준비 완료!"

"부상자 발생했다. 의무병! 의무병! 어디 있나?"

"남서쪽 5km 지점에 엘리트 마수 출현! 좌표 발송했다. 스페셜 레이드팀 투입 필요."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이라면 중간중간 소강상태를 틈타 쉴 수 있는 시간이라도 있었을 테지만 마수와의 전쟁에서는 그런 게 없다.

계속되는 흑악지룡의 북상에 마수 또한 꾸역꾸역 줄을 지어 밀려왔다.

인간이 사라져 망해버린 중국 땅, 전체가 마수 밀집지대나 마찬가지였다.

전투가 밤낮없이 이어졌다.

잠을 잘 시간도 없었다.

이쯤 되면 모두 피곤으로 지쳐 나가떨어져야 하지만 태홍 생기불끈의 효과는 정말이지 극적이었다.

"난 전쟁이 끝나면 이거 박스째로 사다 놓고 매일매일 먹을 거야."

"생기불끈이 시중에 풀리면 살 기회도 없을걸?"

"그렇지? 쩝, 보급품이라 빼돌릴 수도 없고."

"공짜로 줄 때 많이 먹어둬."

응급 구조를 전담하는 의무병들도.

"붕대도 필요 없어. 새살쑥쑥 하나면 다 돼."

"그것뿐이야? 태홍 회복제 때문에 사상자가 거의 없는 수준이잖아."

"진짜 이번 전쟁은 태홍 바이오가 혼자 다 하는 거네."

하지만 전쟁이 언제 끝날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 했다.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의 북상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흑악지룡을 감시하고 있는 정찰 본부엔 연일 탄식만 들려왔다.

"하아, 어째 속도가 빨라진 것 같은데?"

"제기랄! 이 쌍놈의 새끼!!!"

"···이러다 북경까지 오겠어."

"재, 재수 없는 소리 마!"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놈의 북상은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어?"

또 한 번 눈을 비비면서 모니터를 확인하는 감시병.

"세, 세상에···,"

대체 이게 뭐지?

"내가 지금 미친 건가?"

환각을 보나 보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 ※ ※

독정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독정 폭발은 세 단계에서 일어난다.

첫 번째는 혼원무상독령공이 화경, 즉 7성에 다다랐을 때, 두 번째는 10성 대성, 마지막은 독령을 깨달았을 때이다.

그래서 8성 때도 그랬고, 9성으로 올라가는 순간도 독정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주 조용히 성장했다.

"흐음."

태주는 땅속에서 눈을 떴다.

들어간 지 5일 만이었다.

'이제 9성이구나.'

대성까진 한 단계 남았다.

'큰일 날 뻔했네.'

원래는 독을 채취해 철저하게 통제된 곳에서 9성에 오르려 했는데.

호신부 효력이 끝나자마자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의 독에 접촉했고, 의도치 않은 독정 반응이 일어났다.

가장 허술한 순간에 공격을 받아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뭐,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 됐으니까.'

하지만 또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으니 항상 조심해야지.

"아참!"

일이삼백이는?

고롱, 고로롱.

코까지 골면서 참 잘 자고 있다.

태주는 자는 놈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다 나았구나. 다행이다."

나서지 않아도 문제없었지만···,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공포에 질려 백팩 안에서도 벌벌 떨던 놈이었는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다니.

"언제 깨는 거냐?"

여기 오래 있다 보니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다.

무한공간 열어서 선도 하나를 꺼내 으적으적 씹어주고.

"너도 하나 먹을래?"

또 하나 꺼내서 자는 고양이 코앞에 가져다 댔다.

순간!

킁킁, 냄새를 맡더니 눈을 번쩍 뜨면서 복숭아를 한입에 삼키는 일백이.

"냥!"

쩝쩝쩝쩝.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야앙?"

이백이도 나타났다.

"그래, 너도 하나 먹어라."

당연히 삼백이도.

"니아아···,"

한번 줄 때마다 3개씩 줘야 한다.

하지만 그깟 선도가 뭐가 아까울까?

"으음, 몇 개 남았지? 하나, 둘, 셋, 넷···,"

20개 남았다.

"많이 남았네."

바로 그순간!

찌르르르···,

"오!"

반짝이는 공유창고.

물건을 확인해보니.

"하하하, 이게 대체 몇 개야?"

당군악이 보내온 선도가 최소 100개는 넘어 보인다.

태주는 즉시 물건을 빼냈다.

그리고 미리 넣어둔 답례품을 공유창고 안에 넣었다.

공유창고가 또 커져서 많이 넣을 수 있어 좋다.

당군악이 요구한 건 더 많은 영상 컨텐츠, 그리고 영화를 볼 때 먹을 과자와 음료, 인스턴트 식품, 통조림.

그것 말고도 엘리트 마나 결정체 전기 발전기도 하나 더 샀다.

4k 빔프로젝터과 휴대용 스크린도 하나 더, 전기를 연결할 멀티탭, 케이블, 충전기.

심지어 명품백 몇 개도.

쓸데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싼 거니까.

가방 안에다 초콜릿 같은 단것들도 다 쑤셔 넣었다.

'일단 편지부터 볼까?'

꼼꼼하게 읽고, 답장도 쓰고, 마지막으로 물건 확인.

"···와!"

당군악이 보낸 물건은 선도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만리비검(萬里飛劍)!"

무려 검선(劍仙)이 타고 노닐던 검이란다.

보패에도 우열이 있다.

선도 600개짜리 신령비도와는 격이 다른 검선의 검.

하늘을 나는 건 부가적인 기능의 하나일 뿐, 검 본연의 기능에 충실했다.

뭐든 찌르고 벤다.

하지만 당군악은 검 따위를 보내서 미안하다고 전했다.

미안해할 필요는 없지만···, 물론 그 마음도 이해한다.

태주도 검술에는 거의 문외한.

아는 검술이라고는 삼재검법 말고는 없다.

'가만있자···,'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의 북상.

만리비검이라면 저지할 수 있을지도.

그리고 더불어.

"일백, 아니 이백아!"

"야앙?"

"너 복수하고 싶은 마음 있어? 그놈에게?"

"캬릉!"

하고 싶단다.

"도망 안 칠 자신도?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야."

"캬르르르르!"

"그래, 좋다. 하자!"

순간!

불쑥!

삼두백호로 변신한 일이삼백이들.

푸아아아아아악!

흙을 헤치고 바로 지면으로 올라섰다.

거대한 놈의 본체,

"전보다 커졌구나."

커진 것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힘도 한 단계 성장했다.

선도를 먹은 덕택인가?

혹은 죽을 고비를 넘겨 진화했기 때문일까?

언뜻 보기에도 변화된 삼두백호의 위용은 엄청났다.

"아직 아니야. 돌아가."

스스슷!

삼두백호는 다시 고양이로 변했다.

태주는 추적부를 활성화했다.

'꽤 멀리 갔네.'

먼저 만리비검에 자신의 피를 먹이고.

"이리 와."

일백이로 변한 백호를 안아 들면서.

둥실둥실,

지면에 낮게 깔려 떠올라 있는 검 위에 올라탄 태주.

"가자!!!"

"냐앙!!!"

쐐애애애액!

만리비검이 음속의 속도로 쏘아졌다.

근두운에 올라탄 손오공처럼.

태주는 놈을 잡을 자신이 있었다.

비록 엄청나게 강한 놈이지만 반대로 약점도 뚜렷한 놈.

일단 놈은 너무 느리다.

강기 보호막만 무력화하면 거대한 과녁 수준.

한참을 날아가니 저 앞에 흑악지룡이 보인다.

역용술과 축골공을 점검하고.

"준비됐지?"

"캬륵!"

"좋아, 물어!"

"컁!"

일이삼백이는 검 위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30초 잊지 마! 30초 지나기 전에 도망쳐야 해!"

"냥!"

슈우우웃!

떨어지자마자 본체로 변한 삼두백호.

"크릉!"

중력과 질량을 이용해 흑악지룡의 몸통을 짓이겼다.

콰쾅!

"쿠오오오오오!"

난데없는 공중 내려찍기 공격에 깜짝 놀라 포효를 질러대는 흑악지룡.

삼두백호가 비욘드 엘리트의 무시무시한 강기 보호막과 접촉하자, 태주가 미리 붙여놓은 호신부가 작동했다.

30초 동안은 그 어떤 피해도 받지 않는 신령한 보호막, 솔직히 이건 사기템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0초.

흑악지룡은 삼두백호가 가하는 분노의 공격을 저항도 못 하고 온전히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크아악!"

덥석!

납작해진 흑악지룡에 올라타 놈의 목덜미를 입으로 물어버린 삼두백호.

파지지지직!

강기과 강기가 부딪힌다.

아직 힘이 모자라는 듯 삼두백호의 이빨은 단단한 철갑 피부를 파고들지 못했다.

그러나 삼두백호는 혼자가 아니다.

뒤를 이어 검을 잡고 뛰어내린 태주.

지이이잉!

검선의 검, 만리비검에 어린 선명한 강기의 기운.

지금까지 섭취했던 온갖 종류의 독기, 마나, 선기가 함께 서려 있었다.

게다가 강기를 두르지 않아도 무엇이든 자른다는 신검.

마치 두부에 식칼을 꽂듯,

조금의 저항도 없이, 놈의 등에 검신 전체가 박혔다.

쑤욱!

"쿠에에에에에엑!"

남은 시간 25초.

태주는 검 손잡이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은 채, 있는 힘을 다해 끌어당겼다.

서거거거거걱!

흑악지룡의 등이 수박처럼 쩌억 갈라졌다.

갈라진 부분은 극히 일부지만 고통을 주기엔 충분했다.

급기야 그 육중한 몸을 뒤집어 데굴데굴 구르는 놈.

"엇차!"

가볍게 뛰어내려 주고는.

흑악지룡은 파충류 계열의 변종 마수.

거의 모든 파충류가 그렇듯 등보다는 배의 피부가 더 약하다.

흑악지룡이 데굴데굴 구르는 틈을 타서 삼두백호가 놈의 야들야들한 뱃살을 이빨로 콱 물었다.

동시에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댄다.

머리도 세 개, 이빨도 세 개, 따라서 놈이 겪는 고통도 세 배.

"크에에엑!"

남은 시간 15초.

흑악지룡도 가만히 공격만 당하지 않았다.

긴 혀를 이용해 후려쳐 보기도 하고, 휘감아보기도 하고, 이빨로 물어뜯던가, 발톱으로 할퀴기도 해봤다.

그러나 다 헛방이다.

공격이 먹혀들지 않았다.

또한 속도도 빠르지 못한 놈.

도망갈 수나 있나?

태주는 삼두백호가 놈을 물고 있는 동안 만리비검으로 자유롭게, 구석구석 찌르고 갈랐다.

푹푹푹! 서걱! 서거거거걱! 쩌어억!

남은 시간 5초.

태주는 피투성이가 된 흑악지룡의 몸에 구속부를 붙였다.

그리고 표홀질풍보를 펼치면서,

"이제 빠져!"

지시가 떨어지자 빠르게 물러나는 삼두백호.

둘 다 멀찍이 물러났다.

공격은 멈췄지만 흑악지룡은 계속 몸부림쳤다.

"쿠에에에···,"

비명도 지르고,

몸을 뒤집어 도망치듯 앞으로 걸어가려다, 이동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멈칫! 하더니, 털썩 사지를 뻗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죽었나?"

아직 아니다.

여전히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태주는 궁금했다.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마나 결정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4)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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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5) >

본격적으로 터진 천리장성 웨이브, 그런데 생각보다 잘 막아내고 있었다.

제국 전역에서 도착한 각성자 병력들, 그중 마스터만 해도 100명이 넘었다. 제국군 마스터가 거의 총동원됐다고 보면 된다.

거기에 황실 소속의 마스터까지.

그러나 천리장성 웨이브 본부는 침울한 분위기.

웨이브의 근원을 뿌리 뽑지 못하면 결국 이 전쟁은 패배하고 만다,

현재 본부에서 열린 주요 지휘관 회의의 주제도 바로 이것, 어떻게 흑악지룡을 상대할 것인가?

지휘관 회의에 황태자를 비롯한 황자, 황녀들도 참석했다.

대형 화면에 나타난 지도를 보며 브리핑하는 참모 장교.

"여기가 최종 라인입니다. 이 선을 넘으면 무조건 직접 상대해야 합니다."

흑악지룡이 저 지점, 혹은 더 위에다 자리를 잡으면 북경 거점 도시까지 놈의 영역이 된다.

뉴서울에서 기차로 불과 5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비욘드 엘리트 마수를 둔다고? 절대 허용할 수 없다.

황태자 류진영이 책상을 쾅! 치며 말했다.

"그럼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요? 지금이라도 민간 각성자 강제 동원령을 내려야지, 예비역까지! 내가 폐하께 건의를 올리겠소."

그러자 픽, 하고 비웃는 류진수 이황자.

"민간 각성자 강제 동원이라, 비욘드 엘리트 마수 잡겠다고 반란 유도할 일 있나?"

"너, 이 새끼가···,"

"머리가 있으면 생각 좀 하고 삽시다. 형님이라면 참전하시겠소? 그냥 도망가고 말지."

"제국의 백성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다."

"그건 형님 생각이고."

"너,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냐?"

"못할 것도 없지."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흥미로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황자와 황녀들.

반면 김송열 합참의장은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다.

아직 회의가 시작도 안 했는데 형제 둘이 싸우는 꼴이라니.

결국 나서야 했다.

"두 분 말씀 다 옳습니다. 민간인 각성자들도 동원해야 하는 것도 옳고, 또한 동원하는 데 있어 신중히 접근해야 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오로지 황제 폐하만이···,"

그때였다.

벌컥! 하고 열리는 회의실 문.

흑악지룡의 동태를 감시하는 병사였다.

황태자를 비롯한 황자와 황녀, 그리고 별들이 까마득하게 모인 회의실을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나타났다.

"저, 저어,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뭐야? 급한 일이어야 할 거야. 아니면···,"

"주, 죽었습니다."

"누가? 앞뒤 맥락도 없이."

"···비, 비욘드 엘리트 마수 흑악지룡이요."

순간 조용해진 회의실.

너무 황당무계해서 어이가 가출했기 때문이다.

"자네 정말 미쳤나?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정말인데요?"

"어허! 여기가 어디라고!"

"진짜 죽었습니다. 정찰기에서 보내온 영상으로 확인했습니다."

"···."

"···."

"···."

.

.

.

다시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어, 어떻게?"

"그때 그 사람 기억나십니까?"

"누구···,"

"흑악지룡의 앞을 막아섰던 사람요."

"아! 그 사람? ···죽지 않았나?"

"안 죽었습니다. 심지어 대형 마수 한 마리와 함께 나타나서 흑악지룡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왜 그때 보고 안 했나? 전투가 벌어졌으면 바로 달려왔어야지."

"그, 그게 너무 순식간에 끝이 나서."

"순식간이라니,"

"30초 걸렸습니다. 흑악지룡이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이."

동시에 회의실에서 터져 나오는 실소.

"푸훗! 나참! 믿을 뻔했네."

"껄껄껄, 나도 그랬습니다."

"아이고, 순간 혹했어. 그런데 저 새끼, 미친놈 아니야?"

"당장 후송 보냅시다. 정신에 문제 있는 놈에게 감시병 보직을 주다니."

"후송이 아니라 영창을 보내야죠. 저거 의가사 제대하려고 미친 척하는 겁니다. 내가 저런 놈들 수도 없이 봐왔어요. "

감시병이 발끈하면서 외쳤다.

"여기 녹화본도 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하십시오."

감시병은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모니터에 저장장치를 꽂고 메뉴를 조작했다.

곧이어 영상이 흘러나왔다.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북상 중인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

순간!

화면이 하얗게 변하면서 거대한 마수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새하얀 털에 머리가 3개 달린 마수.

"어?"

"사, 삼두백호?"

"저놈이 저길 왜···,"

"엄청 거대한 놈이군."

"···지리산 엘리트 삼두백호보다 훨씬 큽니다."

"그럼 비욘드?"

"그, 글쎄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삼두백호는 허공에서 떨어지는 속도 그대로, 흑악지룡의 몸을 짓이겨 버렸다.

사람들이 모두 앞으로 우르르 달려와 모니터 앞에 섰다.

진짜?

혹시 CG가 아니야?

그리고 삼두백호 뒤를 이어 낙하하는 한 명의 인간.

마치 광선검처럼 빛나는 검으로 흑악지룡의 철갑 피부를 마구마구 찌르고 갈랐다.

놈은 인간과 백호의 공격에 저항도 제대로 못 했다.

"허어,"

"아···,"

"으음."

"대, 대체 무슨?"

"미, 미친!"

"···맙소사!"

"이거 영화의 한 장면 아니지?"

말대로 딱 30초 걸렸다.

정체불명의 남자와 삼두백호는 뒤로 빠졌고, 공격을 당한 흑악지룡은 이동을 멈추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 그때 그 인간 맞습니까?"

"흐릿하지만 이목구비를 보면···,"

"입고 있던 옷도 비슷해요, 군데군데 찢어지고 헤졌지만."

잠시 꿈틀꿈틀하던 흑악지룡.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스슷!

화면에서 삭제되듯 사라지는 마수와 인간.

"음? 어, 어디갔지?"

"···귀신인가?"

"그럴 리가, 투명화 스킬이겠지."

"삼두백호도 사라졌잖소."

"투명화 마법 아이템일 수도."

아무튼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흑악지룡은 죽은 게 분명하다.

회의실의 참석자들은 모두 혼란스럽다는 표정.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을 수가 없으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기뻐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얼떨떨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오직 오진형 중장만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간의 심증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김태주 회장이 분명해.'

얼굴과 체형이 다르다는 건 안다.

그러나 오진형은 지리산 마수 토벌 작전 당시 태주와 함께 싸워온 사람.

어떻게 모를 수 있나?

저 특유의 몸놀림, 빠르기, 움직일 때마다 나오는 버릇.

'평범하지 않다는 건 이미 그전에 알고 있었지만,'

무려 비욘드 마수까지 잡아냈다.

심지어 지리산에 있어야 할 저 엘리트 삼두백호까지 대동하고.

'얼굴과 체형을 바꿨다는 의미는···,'

무슨 이유인지는 말 모르겠지만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존중해줘야지.'

그래서 오진형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 ※ ※

태주는 잠잠해진 흑악지룡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다.

삼두백호도 고양이로 변신하지 않고 놈을 계속 경계하고 있었고.

곧 죽을 것이다.

온갖 독이란 독은 다 집어넣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 태주.

'지금도 보고 있나?'

아마 그럴 것이다.

초고도 정찰기가 계속 흑악지룡 주위를 선회하면서 감시하는 중이니까.

따라서 놈과 싸우는 장면도 찍혔을 터.

태주는 역용술과 축골공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눈썰미 좋은 사람은 의심할 수도 있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란 게 있을까?

언젠가는 비욘드 엘리트 마수를 죽인 사람의 정체가 자신이란 사실이 밝혀지겠지.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본다.

역용과 축골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김태주, 마스터에 필적하는 제약회사 사장.

딱 거기까지.

현재 벌어지고 있는 황위 계승 싸움 때문이다.

어느 한쪽을 편들면 나머지는 모두 자신의 적이 되는 질척한 암투의 장.

근처에도 가지 않기로 맹세했다.

강호 무림에서도 권력 다툼은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절대독마 당군악도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그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사업이나 하면서 편하게 살고 싶다.

잠시 기다리다 보니 흑악지룡의 생명 반응이 완전히 멈췄다.

'죽었구나.'

혼원무상독령공 9성에 올라온 후, 새로 얻은 능력.

독소 배양 및 조합.

독기가 아주 조금이라도 몸속으로 들어가면 바이러스처럼 무한 증식한다.

동시에 놈에게 가장 효과적인 독이 알아서 서로 결합해 장기와 내부 세포들을 공격한다.

저 커다란 흑악지룡의 몸체도 순식간에 독으로 가득 찼을 터.

벌써 놈의 몸이 급속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사실 진정한 실력만으로 이놈을 잡은 것은 아니다.

'운이 좋았지.'

호신부를 비롯한 각종 부적, 검선의 검 등 선계의 보패, 그리고 한 단계 성장한 삼두백호, 결정적으로 느려터진 흑악지룡의 약점.

이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졌다.

만약 스피드가 빠른 비욘드 엘리트 마수였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슬슬 수확해볼까?

놈의 몸 전체를 해체해서 가져가는 건 무리고···, 엑기스만 빼가자.

태주는 옆에서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본체로 머무는 삼두백호를 바라봤다.

무한공간을 열어 거대한 한쪽 다리에 투명부 한 장을 붙여주고.

스르륵!

"크렁?"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자 살짝 놀라는 삼두백호.

"이제 고양이로 돌아가도 돼."

피시시시시···,

거대한 기운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리 와."

"야옹!"

투명한 무언가가 품 안으로 폴짝 뛰어 올라와 안겼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도 붙이고.

스르륵!

태주는 놈에게 가까이 다가가 몸체에 손을 대고 가만히 기를 흘려보냈다.

강렬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진다.

'다행히 있었네.'

만리비검으로 놈의 시체를 깊숙이 가르니,

'···와!'

심장 부근에 박혀있는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마나 결정체.

엄청나게 크다.

오색찬란한 빛깔의 향연.

'이거 무한공간 들어갈까?'

직경 1m 넘으면 안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살짝 넘는 것 같기도 하고.

'해보면 되지.'

스슷!

순식간에 사라지는 비욘드 결정체.

'들어갔네.'

이거면 됐다.

다른 부산물은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걸로 뭘 하지?

아마도 사상 최초의 비욘드 마나 결정체일 것이다.

다룰 수 있는 사람이나 있을까?

지구상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이라면?

'이제 돌아가자.'

슬슬 마수들이 보인다.

영역을 지배하는 폭군이 사라졌으니

투명화 부적은 1시간 동안 지속된다.

효과가 끝나기 전에 한 장 더 붙이면 되겠고.

※ ※ ※

삼한제국의 황제 류태현.

황제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황제는 단 한 사람이니까.

구별할 필요가 없다.

황제는 몇 년 전부터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황명은 금수호 비서관만을 통해 전달할 뿐.

황궁의 비처.

각종 최첨단 의료시설이 완비된 침실에서 금수호 비서관은 황제를 알현했다.

"왔는가?"

"옥체는 좀 어떠하신지."

"매일 똑같지. 다를 게 있나?"

황제는 죽어가고 있었다.

노화로 인한 것은 아니다.

그는 경지를 넘어선 1세대 마스터.

200년을 살아왔고, 앞으로 더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황궁을 침입한 마인과의 전투에서 그만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었고.

독(毒)도 아니고, 질병도 아니고.

그의 생명을 좀먹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마나였다.

정체불명의 마인 마스터가 남긴 음산한 마나.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도무지 없어지지 않고 있었다.

"쿨럭, 쿨럭, 어디 좀 보세."

"네, 여기 있사옵니다."

북경 천리장성 방어본부에서 방금 전송된 따끈따끈한 영상 하나.

황제는 태블릿을 받아 유심히 영상을 시청했다.

구간별로 멈추기도 하고, 확대해서 보기도 하고.

"누군 것 같나?"

"짐작 가는 사람이 있기는 하온데."

"말해보게."

"김태주 회장 같습니다. 뭐, 얼굴이 다르긴 하지만···, 걸음걸이, 뒷모습, 팔을 휘두르는 행동, 서 있는 자세, 이런 게 자꾸만 그를 연상케 합니다."

"용모와 체형을 바꾸는 마법 아이템이야 흔하지."

금수호도 동의했다.

"아무튼 다행이야. 고맙군, 쿨럭! 이, 이렇게 제국의 걱정거리를 처리해줘서."

"만약 그가 맞다 해도 본신의 실력으론 어림도 없었을 겁니다. 삼두백호의 도움도 받았고,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수단도 있는 것 같고, 게다가 이 검(劍), 범상치 않습니다."

"그게 어때서? 아이템이든 뭐든 다 능력에 속하는 거네."

황제는 금수호에게 태블릿을 돌려주며 말했다.

"어쨌거나 이자가 김태주 회장이라 치고, 그가 정체를 숨겼다는 건 드러나고 싶지 않다는 건가?"

"맞습니다. 제가 만나봤을 때도 명예욕은 크게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숨겨주게. 우리가 따라줘야지."

"한번 떠보고는 싶은데···."

"그거야 자네가 알아서 하고, 이 영상은 전부 삭제해. 전에 지리산 천왕봉 영상도 함께."

금수호는 오랜만에 편안한 황제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걱정거리를 덜어서 그런 것일까?

"그나저나 뭐라도 줘야 하는데···,"

"전처럼 엘리트 무기 하사라도?"

"김태주 회장이 든 그 검만큼 만들 수 있나?"

"그건 불가능하지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황제.

"하는 수 없군. 구례라도 넘겨줄 수밖에."

"네? 영지 하사 말입니까? 김회장은 군에 뜻이 없습니다."

"칙령을 내리면 돼. 구례 종신 시장이면 어떤가? 직위 계승 권한도 주고."

"그, 그게 영지와 뭐가 다릅니까?"

"이름이 다르지."

"···그러네요."

금수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의 공로가 너무 크다.

그가 만든 약만으로도 논공행상의 명분을 만들기에 충분하니까.

"귀한 인재야. 그렇지 않아도 유럽 제국과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눈독을 들인다는 소문이 있는데, 빼앗기면 어떡하나?"

"절대 안 되죠."

※ ※ ※

선계.

독선 당군악은 태주가 보내온 게임기를 처음 선보일 때 고민이 많았다.

과연 신선들이 좋아할까?

그래서 영화 상영을 멈추고 게임기를 연결했을 때도 반신반의했다.

반응이 시원찮으면 안 하면 되는 것이고.

그런데 생각 외로 좋아한다.

옆에서 보는 것도 좋아한다.

훈수를 두는 것도 좋아한다.

한판에 선도 한 개.

줄을 섰다.

첫 번째로 소개한 건 콧수염 난 인간이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거북이를 밟고 버섯을 먹어 힘을 키우는 게임.

"어허! 거기서 뛰어야지, 무슨 배짱으로 그냥 지나가나?"

"거, 조용히 안 하시오? 답답하면 직접 해보던가?"

"안 그래도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오."

"···에잉! 당신 때문에 죽었잖소?"

"쯧쯧, 핑계하고는, 빨리 자리나 비키시오."

"몰라! 안 비켜!"

두 번째는 두 명이 겨루는 대전 게임도.

"이익! 선인이 이렇게 얍삽해도 되나?"

"얍삽은 무슨! 이기면 되지."

"한판 뜰까?"

"오냐! 천막 뒤로 따라와!"

그중에서도 발군은 검선(劍仙).

복숭아 하나로 벌써 두시간째 놀고 있었다.

"이보오, 독선! 검선 좀 어떻게 해보시오. 도통 자리를 비켜주지 않으니."

"맞소. 기다리는 선인들을 보시오."

당군악은 할 수 없이 검선에게 선도 3개를 쥐여 주며 게임을 중단시켰다.

게임을 선보인 건 잘한 결정이었다.

선인들이 게임에 빠지니 컨텐츠 소모도 줄어들었고, 선도 수입도 쏠쏠하고.

그렇게 평화로운 선계였다.

선계 허공에서 커다란 저울추가 떨어지기 전까지,

쐐애애애액!

콰쾅!

판관의 저울추.

신선들을 관리하는 태상노군의 보패.

극장 내부 모든 술법의 효과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 해괴한 것들은 다 뭔가? 자네들은 대체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태상노군이 나타났다.

"정신이 없는 거죠. 도원을 털어먹는 자들이 제정신이겠어요?"

서왕모도 나타났다.

'아!'

당군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올 것이 왔구나.'

장사 망하게 생겼다.

<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5) > 끝

ⓒ 꾸찌꾸찌

=======================================

< 다른 세상 물건 들인 게 죄는 아니잖아! >

선계에도 법이 있다.

인간계보단 느슨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기면 벌을 받게 된다.

신선들이 보통 유별난가?

특히 선계 고인물들은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자들이다.

선계는 일종의 유배지.

우화등선이란 깨달은 자들이 얻은 축복이 아니라, 초월성을 획득한 자들을 인간계와 분리하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성이 무한한 존재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어떤 방향으로든 뻗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다.

그것이 일종의 통제 역할로써 작용한다.

수백만 명을 죽인 전쟁광이든, 연쇄살인마든,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교주든, 자신의 욕심을 위해 백성을 착취하는 폭군이든, 언젠가는 결국 다 죽는다.

그리하여 혼란한 세상은 다시 평화로워진다.

수명의 유한함은 일종의 자정 기능.

그런데 불멸성을 획득한 인간이 있다면?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죽지 않는 인간.

그들의 성향이 어찌 되었든 무조건 인간 사회에서 분리해야 한다.

선계가 바로 그런 곳이다.

인간계에서 분리된 초월자들이 모인 세상.

그런 이유로 선인들은 죄수나 다름없다.

자신들도 그걸 잘 알고 있고.

천선계에선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선인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특별한 죄를 짓지 않는 이상 선계에서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있으며, 가끔 인간계로 유람을 보내주기도 한다.

그런데 선계의 근간을 뒤흔들만한 중죄를 지었다면?

당연히 법도에 의해 벌을 받는다.

그렇다면 신선들이 받는 벌은 뭘까?

불멸성을 획득한지라 죽여도 죽지 않는다.

그럼 선계에서의 추방?

누구 좋으라고!

추방되면 신선들이 더 좋아한다.

신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벌은 바로 '봉인'이다.

법구에 의해 힘을 억제당한 채 거대한 바위산 밑에 깔려 수천수만 년을 보내야 한다거나, 조롱박 감옥에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거나.

신선들에겐 더없이 끔찍한 벌.

독선 당군악은 선계의 뇌옥에 수감 됐다.

곧 봉인될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

극장에 있던 게임기, 태블릿, 4k 빔프로젝터, 발전기, 싹 다 몰수당했다.

곧 있으면 판관의 저울추에 의해 재판을 받을 터.

이미 1차 심문은 거쳤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대한 사실 확인.

선인들은 봉인이라는 벌을 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독선이 영상물을 보려면 선도를 내놔야 한다니, 어쩌겠소이까! 달라면 줘야지요. 그래서 훔쳤소."

"난 죄가 없소. 수요자가 문제겠소? 공급자가 문제지."

"독선이 그 물건들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난 도원을 털지 않았을 것이오."

"생각해보시오. 독선이 등선하기 전엔 우린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소. 하지만 그가 선계에 나타나고서부터는···,"

"우린 중독된 거요. 군악 선인의 선명(仙名)이 달리 독선(毒仙)일까?"

독선 때문에, 독선이 우릴 홀려서, 독선이 아니었다면.

죄다 당군악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빌어먹을 배신자 새끼들.

아무리 봉인의 벌이 무섭다 해도 이건 아니지.

물론 당군악의 편을 들어준 선인들도 많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검선(劍仙).

"야이, 개새끼들아! 날 선계라는 좆 같은 감옥 안에 가둬놓고 나 몰라라 했던 놈들이 인제 와서 우리보고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판관의 족쇄를 손과 발에 차고도 길길이 날뛰는 검선.

"다 내가 한 짓이다, 쌍놈들아! 독선은 우리에게 유희의 즐거움을 선사한 선인이야. 너 같은 새끼들보다 천만 배는 더 훌륭한 신선이다! 그러니 독선은 건들지 마!"

주선(酒仙) 태백 선인 또한.

"망한 놈의 천선계, 내가 만든 술이 맛있다고 넙죽넙죽 사갈 때는 언제고, 독선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두 번 다시는 네놈들에게 술을 팔지 않겠다. 아니 만들지도 않겠다. 어디 가두려면 가둬봐!"

귀곡 선인도.

"독선이 결계를 치게 시켰냐고? 갓 등선한 선인이 무슨 죄가 있겠나. 내가 스스로 행한 일이야."

그 밖에도 많은 선인이 당군악을 비호했다.

배신자들보다는 적었지만.

이제 남은 절차는 최종 판결.

당군악은 손과 발에 판관의 족쇄를 차고 재판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판관의 족쇄는 일종의 선술 제어 도구다.

이걸 차고 있으면 능력이 봉쇄된다.

무한공간도 열 수가 없다.

당연히 공유창고도.

삼엄한 재판장 안.

양쪽으로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천계의 신장들이 도열해 있었고, 중앙엔 태상노군과 서왕모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증거품을 가지고 와라!"

신장들이 극장과 신선들에게 압류한 지구의 물건들을 가지고 재판정 앞에 놓았다.

태상노군이 싸늘한 눈빛으로 당군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독선! 최종 변론의 기회를 주겠다. 이 요사스러운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선계를 어지럽힌 이유가 뭔가?"

그러자 비웃는듯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당군악.

"선계가 어지럽혀졌다고? 내가 보기엔 깔끔하기만 한데."

"도원을 침입해 선도를 훔쳐 간 행위가 정당하단 말이더냐?"

이 새끼가···, 만만해 보이냐?

등선했다고 해도 절대독마의 본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말이다.

"내가 했소?"

"···뭐?"

"내가 선도를 훔쳤냔 말이오?"

"가, 감히! 이 모든 게 네놈으로부터 빚어진 일이다. 네가 선도를 요구하지 않았느냐! 선도와 보패를 다른 세상으로 유출한 것도 네놈이다!"

"그럼 그 귀한 물건과 영상들을 공짜로 보여주라고? 또 받았으면 보답을 해야지. 태상노군이라면서 단순하기 그지없는 등가교환의 법칙도 모르다니."

"허어!"

"그렇지 않아도 보내준 물건에 대한 보답이 턱없이 부족해 미안하던 참이었는데···, 이것들, 고작 선도와 보패 몇 개로 퉁칠 물건들이 아니오!"

얼굴이 시뻘게진 태상노군.

서왕모는 흥미로운 눈초리로 당군악을 빤히 쳐다봤다.

"선계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을 들인 주제에, 뻔뻔하게 교환을 주장하는구나. 염치가 없도다!"

"하하하!"

당군악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건 누가 결정하는데?"

"무슨?"

"내가 가져온 것들이 선계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란 걸 누가 결정하냐고?"

"선계의 질서와 법도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

선계의 질서.

사실 이건 당군악도 예전부터 궁금했던 부분이다.

"이상하지 않소? 질서와 법도가 그렇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어야지."

"음?"

"처음부터 다른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가 막혔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왜 열렸을까?"

"어···,"

"왜 선계의 질서가 다른 세상과의 교류를 허용했을까? 막았으면 그만일 텐데."

"···."

"왜 저 태블릿과 빔프로젝터, 그리고 발전기가 아무런 제한 없이 작동할까?"

태상노군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군악이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선계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닫힌 공간이다.

허용되지 않는 외부 물건은 들어올 수도 없다.

억지로 들여온다 해도 소멸하거나, 제 기능을 상실한다.

"내가 추측하는 바를 말해주겠소."

당군악이 태상노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작은 질서는 큰 질서를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오."

"···큰 질서? 그, 그게 뭐길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당신도 모르는걸."

"이놈! 요사한 궤변으로 날 현혹하려 해?"

"아아아! 잡설이 길기도 하네. 빨리 재판이나 합시다. 판결할 때가 안 됐나?"

"오냐! 어디 한번 저울추를 달아보자꾸나."

태상노군은 판관의 저울추를 꺼냈다.

이건 염라(閻羅)가 선계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준 보패.

선계의 존재하는 모든 자연 요소의 정화를 저울추에 집어넣었다.

선계의 기운, 선계의 물, 선계의 불, 흙과 돌, 바람···,

그리고 별도의 의식을 통해 우주 만물의 법칙을 담아 만들어낸 것.

원래 염라가 사용하던 저울추는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만든 것.

저울추가 왼쪽으로 기울면 선업(善業), 오른쪽으로 기울면 악업(惡業)을 의미한다.

하지만 태상노군의 저울추는 신선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다.

신선의 업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조화(造化)냐, 혼돈(混沌)이냐.

조화면 풀려나고, 혼돈이면 아마 수만 년 동안 빛도 들어오지 않는 암흑 속에 봉인될 터.

"판결을 내리겠다."

태상노군은 저울대에 추를 달았다.

"천지신명께 고하노니, 부디 선계를 어지럽히고 이치에 거스른 독선에게 심판을 내려주소서."

그러자 저울추가 움직였다.

아직은 혼돈에 머물러 있는 저울추.

"이걸 봐라. 지금 네 눈엔 추가 어디 있는 걸로 보이느냐? 혼돈이다! 즉 네놈의 행위는···, 어?"

갑자기 저울추가 움직인다.

혼돈에서 조화로 슬금슬금 올라갔다.

"이, 이게?"

급기야 중립을 지나 조화 끝자락에 도달한 저울추.

"내 눈엔 조화로군. 이제 됐소?"

그럴 줄 알았다.

이치에 맞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연결될 리도 없었겠지.

멍하니 저울만 바라보는 태상노군.

바로 그 순간!

철커덕, 철커덕.

당군악의 손발을 옥죄던 판관의 족쇄도 저절로 풀렸다.

판결은 무죄.

"쯧쯧, 신선들을 통솔한다는 자가 이렇게 무지해서야."

유유히 앞으로 걸어가는 당군악.

그리고 증거품 신세가 된 지구의 물건들, 태블릿, 발전기, 빔프로젝터 등등, 모조리 무한공간으로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찌르르르···,

때마침 열린 공유창고.

'오!'

당군악은 서둘러 물건들을 빼내 옮겼다.

하지만 현재 줄 수 있는 건 오직 선도뿐.

'잡혀가지만 않았어도 보패 몇 개 더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태주에게 미안한 마음밖에 없었다.

'선도나 꽉꽉 채워 보내자.'

다행히 150개 이상 들어간다.

이 큰 공간에 겨우 선도만 넣어야 한다니.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나서 당군악은 태상노군을 보며 물었다.

"이제 가도 되겠소?"

"대, 대체 이, 이런 일이, 큰 질서? 선계의 법칙 위에 더 큰 법칙이 있었다고?"

"나도 모른다고 했잖소. 아무튼 조금 전에도 저쪽에서 물건이 도착했소이다."

"···또?"

"마침 새로운 것들이 왔는데 구경이나 해보시오."

당군악은 무한공간 안에 옮겨놓은 태주의 답례품 중에서 처음 보는 신상을 꺼냈다.

하늘색 가죽 재질에, 앞쪽에는 금속의 자물쇠가 달린 네모난 가방, 안엔 각종 단것들을 집어넣어 구겨지지 않게 모양을 잡았다.

이런 가방이 무려 5개나 왔다.

당군악이 희한하게 생긴 가방을 꺼내자 즉각 호기심을 보이는 서왕모.

"···독선, 그건?"

"아! 이 가방? 엘메스 버킨백이오. 다른 세상의 여인들이 오매불망 소원하는 귀물이지. 돈이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물건도 아니요."

"에, 엘메스 버킨백?"

"하나 드리리까?"

"···그, 그 가방을 말이에요?"

"천만에! 이런 귀물을 아무나 막 줄 수 있나! 내가 드리겠다고 한 건 이 가방 안에 든 초콜릿이지, 이거나 맛보시오."

당군악은 가방에 손을 넣어 초콜릿과 사탕을 한 줌 꺼내 서왕모 앞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가방 속이 작군. 무한공간 술법진이나 그려서 넣어야겠네."

그러고 나서 가방을 다시 무한공간에 넣었다.

"아!"

서왕모의 안타까운 탄식을 뒤로 하고 재판정을 휘적휘적 걸어 나가는 당군악.

무죄가 입증되었지만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외면한 선인들 때문이었다.

'이 배신자들!'

같이 보고 먹고 즐길 때는 언제고.

어디 두고 보자.

이제부터는 국물도 없다.

한편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서왕모는 아직도 독선 당군악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부스럭, 부스럭.

당군악이 준 단음식 하나의 껍질을 까서 입에 넣고 있는 태상노군.

"···지금 뭐 하는 거죠?"

"아니, 독선이 맛이나 보라고 해서···."

"그걸 당신한테 줬나? 나한테 준 거지. 저리 가요!"

서왕모는 초콜릿과 젤리, 사탕을 급히 바구니에 쓸어담았다.

그리고 자신도 하나 집어서 포장을 벗겨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달았다.

그리고 맛있었다.

전엔 결코 먹어보지 못했던 맛.

선도야 매일 먹는 맛이고, 환수계 대왕벌들이 만든 꿀보다 더 달고 맛있었다.

하지만 단것을 먹어도 욕구는 결코 충족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그 아름다운 가방이 계속 아른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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