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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3% MAYORDOMOAPOC / Chapter 9: 9

Capítulo 9: 9

#35. 레이드 (1)

백색 마탑.

그곳은 마법사의 탈을 쓴 야만인들의 집단이었다.

그 힘의 근원이 마법이라는 것만 제하면, 수련 방식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들이 마치 야만족 같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백색 마탑의 마법사들은 다른 쭉정이들과는 다르다! 이 말이에요."

고문이나 다를 바 없는 마법 수업을 듣고 오고서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자부심을 가지게 된 강소현.

허나, 그녀가 얻어낸 마법은 그녀의 자부심에 걸맞은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최전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내는 게 백색 마탑의 마법사의 위대함이죠."

도발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적의 공격을 받아낸다.

"저희는 맞고만 있지 않아요. 한 대 맞으면 100대로 보답해라가 저희 백색 마탑의 신조죠."

'강화'와 '방어'에 특화된 백색 마탑의 비전 마법으로 강력한 공격을 버텨내고, 무기에 마력을 담아 강력한 일격으로 보복한다.

"뭐, 스승이라는 작자들이 워낙에 미친 영감들이라 그렇지 마법 자체만 놓고 보면 진짜 이만한 게 없다니까요."

저게 무슨 마법사야.

야만 전사나 다를게 없구만.

"...대충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네요. 그래도 입 밖으로는 꺼내지 마요. 저도 처음엔 이게 무슨 마법사야 싶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나름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마법을 배우면서 독심술도 갈고 닦아 왔는지 단박에 내 생각을 맞춰 낸 강소현.

"그래도 그 능력 하나는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럴 땐 립서비스가 최선이다.

"그, 그쵸? 이준 씨가 봐도 그렇죠?"

조금 효과가 과하다만.

"휴우... 다행이다. 사실 내심 전사랑 다를 게 뭔가 싶었거든요."

전사의 상위호환 느낌이긴 한데....

뭐, 그래도 힐도 쓰고 남한테 보호막도 걸어줄 수 있다니, 단순 전사 취급을 하기는 좀 그렇네.

"그래도 능력치가 마력으로 바뀐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다른 직업들도 결국엔 마법사랑 다 비슷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마침 궁금한 것도 생겼겠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강소현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는데.

"흐음. 문외한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마력'이라는 것은 그저 하나의 힘이지 정해진 법칙이 없어요."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가 마력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꼬장꼬장한 노인네들한테 배우고 와서 그런지 사족이 좀 많았다만,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다.

1. 마력은 지구를 가득 덮은 에너지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구는 최초의 대지진 이후로 마력이 뒤덮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아, 이게 그래도 느끼려고 하면 느낄 수는 있어요. 이준 씨도 마력을 좀 더 느껴 보세요. 정말 지구가 다른 세상처럼 되어 버렸다니까요."

나는 아직 모르겠는데, 강소현 말대로 의식하고 쓰다 보면 언젠가는 저것들을 나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 몸에 쌓은 마력을 소모하면 자연스럽게 회복된다.

물속에 들어 있는 병처럼 마력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 있는 것이 우리의 몸이다.

"그 그릇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이 보호 조치가 끝나야 정해지겠죠."

비우면 자연스럽게 마력이 다시 채워지며, 자신의 그릇의 크기만큼 마력을 담을 수 있다.

"지금은 인류에 대한 구제 조치로 다들 '능력치'라는 이름 하에 마력을 다루고 있는 거예요. 아마, 직접 깨닫거나 저처럼 2차 전직을 한 사람들은 벌써 마력으로 바뀌어 있을 거고요."

뭐, 그렇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의 레벨과 능력치는 지구를 지키던 신이 인간을 진화시키면서 준 마지막 선물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마력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순수한 개개인의 몫이다.

3. 마력을 이용해 하나의 힘을 구현하는 것이 마법이며, 단순하게 '능력치' 혹은 '마력'을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건 이준 씨도 알죠?"

나도 강소현의 기억 속에서 마법에 대한 기초적인 것들을 배웠기 때문에 이 부분만은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마력이라는 힘을 사용해 내가 원하는 현상을 구현하는 것이 마법이다.

무턱대고 마력을 퍼부어서 힘을 쓰는 것과 명확하게 '신체를 강화한다'라는 목적을 담은 마법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효율을 보인다.

마법진이란 것으로 내 의지를 명확하게 하고 그에 맞게 마법적 효율을 증가시켰으니, 당연히 제대로 된 마법으로 마력을 쓰는 것이 더 효과가 좋은 것이다.

뭐, 마법진이라 해봐야 의지를 담아서 나만의 문양을 그리는 게 다다만.

강소현처럼 마탑이나 학파에 속해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효율을 뽑아내는 마법을 별도로 배우지 않는 한 대부분은 나처럼 마법을 쓰게 된다.

뭔가 주먹구구식 같아도, 나는 '집사'기 때문에 나만의 마법진에서도 그 특별함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당연히 개소리라고 하고 싶은데, 이준 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딘가 믿음이 가네요. 뭔가 진짜 그럴 것 같달까요?"

"그죠?"

고양이 그림을 마법진에 담으면 아마 효과가 더 강해지지 않을까 싶다.

마법을 써도 내 근본이 집사인 한, 고양이는 만능으로 먹히는 강화제일 테니까.

"로라, 다 네 덕이다."

어깨의 전용석에서 자고 있던 로라를 깨워서 칭찬을 해줬더니, 로라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냐아?』

"음...?"

고개를 돌려 로라를 바라보니 어딘가 조금 변한 부분이 있었다.

분명 로라는 완전한 검은색 고양이였다.

그러나 자라면서 털 색에도 변화가 생겼는지 눈 위쪽에만 흰색 털이 자라나고 있었다.

"왜요? 로라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분명 수의사로 초청했건만, 어느새 마초적인 백색 마탑의 마법사가 되어버린 강소현.

그러니 간만에 그녀의 본업을 떠올리게 해줄까 싶다.

"강소현 씨, 로라 진료 좀 봐 주시죠."

『냐아...』

제법 익숙해지긴 했어도 로라는 아직도 의료적인 진료가 무서운 모양이다.

아니, 변한 강소현의 모습이 무서운 걸까.

"아, 털색이 좀 변했네요.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자라면서 변하는 경우가 조금씩 있어요."

고양이가 어떤 존재인가?

치즈냥이 + 검은 고양이 = 흰색 고양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조합이 가능한 존재가 바로 고양이다.

사람으로 치면 동양인과 흑인이 결혼했는데 백인이 나오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니....

"뭐, 나머지는 최적의 상태가 아닐까 싶네요. 몸이 좀 작은 것 같긴 한데, 그건 차차 자랄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털색이 조금씩 변하는 것 또한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눈두덩이만 흰색의 털이 생긴 로라.

보다 보니, 로라의 황금안과 흰색 배경의 눈가가 제법 어울리게 느껴졌다.

"고생하셨습니다."

강소현이 방으로 쉬러 들어간 뒤 나는 못 다한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투타타타타타타타탓-!!

우선 버닝 포인트존에서 포인트 수급하기.

「이준(Lv.8) 32세 / 보유 포인트: 7,887,920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8」

「각인: 불사자 각인(Lv.1)」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설계도], [신체 강화]」

포인트를 수급한 뒤 상태창을 확인해 봤는데, 상태창에 있어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나름 기초적인 공용 마법 몇 개를 배우고 나만의 '집사'류 마법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는데, 스킬에는 표기되지 않았다.

스탯 이름 자체도 강소현은 '마력'이지만, 나는 '능력치?'인 상태 그대로였고.

아마, 진짜 마법은 시스템의 조력을 받는 마법과 달라서 표기가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스탯의 이름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또각, 또각.

그다음 업무는 이하린의 정찰보고 듣기.

당장 우리의 목적은 '주시자의 눈'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사냥하는 것이지만, 포탈 내부의 고블린 왕국을 정찰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주시자의 눈을 잡아 보상을 챙기고, 바바리안 부족을 용산구청에 자리 잡게 만든 뒤에 나는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니까.

'주시자의 눈' 레이드.

용산구청의 안전지대 확인 및 정보 수집.

고블린 왕국 섬멸.

당면한 과제인데, 뭐가 많아 보여도 인류의 보호조치가 해제되기 전에는 다 끝낼 수 있다.

"아, 아저씨!"

때마침 정찰을 끝내고 나온 이하린이 포탈 너머로 나타났다.

"막, 변한 건 없는데... 그 왕이랑 왕비가 안 보이는데요?"

그리고 다급하게 변화한 포탈 내부의 상황을 말한다.

이하린이 고블린 왕국을 정찰한 지 며칠이 지났다.

광장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쳐 포탈을 여는 기행은 계속되고 있었으나, 성 위에 서 있었던 고블린 킹과 퀸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놈들이 뭔 짓을 또 벌이려는지....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240:00」

이제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는 10일밖에 남지 않았다.

내 느낌상 이게 끝나기 전에 고블린 왕국을 어찌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냐아아-!!!』

로라의 의견도 같은 것 같고.

주시자의 눈을 잡기만 하면, 용산구청까지는 금방이니까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문제는 이거지.

나랑 강소현 둘이서 저 왕국을 어떻게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요새 축소화라는 기능이 생겼기 때문에, 포탈 안까지 요새를 이동시킬 수 있다.

아직 정보를 공개할 필요는 없어 다른 이들에게 보인 적은 없다만, 작아진 요새에도 무언가 능력이 숨어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까지 감안해 화력으로 따지자면 충분하긴 할 것 같은데, 변수가 좀 걸린다.

이 세상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최소한 포탑과 요새 이동을 위한 보조인원 정도는 있어야 하겠지.

원래는 이하린 이하준 남매도 그냥 안전한 곳으로 보낼까 싶었는데, 이하린의 암살자 클래스의 뛰어난 스킬 구성 때문에 내 요새로 영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동생 이하준도 기댓값만 보자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스크롤 제작'에 특화된 학파의 초대를 받았으니.

-이, 이준 씨한테 쓴 스크롤은 진짜 말도 안 되게 비싼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 아팠어도 억울해하지는 말아요. 이렇게 쉽게 마법을 배울 수 있는 방법도 따로 없다니까요.

강소현의 말에 따르면 스크롤 자체가 만들기가 워낙 어려운 제작품이라 아예 전문 분야로 따로 빠져 버렸다고 할 정도니.

높은 진입장벽만큼 그 효율도 뛰어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하린 너는 용산구청이 안전지대라면 어떻게 할 거지?"

애초에 용산구청까지 가서 고민하는 것도 웃기는 짓이니, 미리 그녀의 의견을 들어 보았다.

"...흐음.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거기가 어떨지 가서 봐야 알 것 같달까요?"

이하린의 말은 내 요새와 용산구청의 견적을 비교해 보고 더 좋은 쪽을 택하겠다는 의미다.

허나 나는 간잽이는 용납할 수 없다.

또각, 또각.

이하린에게 바짝 붙어 내려다봤을 뿐인데.

"하아... 아저씨. 저랑 하준이는 그 요새라는 곳에 들어가본 적도 없잖아요. 어떻게 가보지도 않은 아저씨 집에 머무른다고 확답하겠어요."

그녀가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하린이 동생은 나름 안전하게 잘 보호했는지, 그녀의 동생 이하준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멀끔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 [냉난방 설비 완료]

허나 이하린의 몰골은 좋게 말해도 거지꼴이다.

땟국물이 좔좔 흐르는 얼굴, 지금은 츄리닝 형태가 되어 있는 이하린의 직업 전용 의상인 '카멜레온 슈트'는 녹색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 있다.

못해도 한 달은 씻지 못했을 테니.

맛보기로 온수가 철철 흘러나오는 샤워를 시켜주기로 했다.

"지, 진짜요?"

보일러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냉난방 설비라는 이름의 특성상 온수가 잘 나오기는 할 거다.

드르르륵-

석문으로 바뀐 대문을 열어 이하린을 집 안으로 초대해줬다.

"와!!!! 이, 이게 대체."

웅장한 내 요새의 내부가 드러나자, 이하린이 감탄을 연발하며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예의는 있는지 멋대로 어딜 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 여기가 화장실이다."

아직 이하린에게 신뢰가 쌓인 건 아니다만, 그래도 시키는 족족 일들을 잘 처리해 줬으니 얹혀살진 못해도 샤워 정도는 맛보기로 시켜줄 수 있지.

"와... 둘이 그런 사이예요? 무슨 변기를 마주보고 설치해 놨대...."

"크흠, 그거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그러면 소현 언니 취향이 그런 거예요?"

방에서 쉬느라 강소현이 저걸 못 들었으니 망정이지, 저걸 강소현이 들었다면 이하린은 모닝스타에 다져진 고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굳이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이하린을 화장실에 집어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쿠웅-!

멸망한 세상 속에서는 앉을 수 있는 변기 하나로도 굉장한 감동을 주는 모양이다.

"아, 아저씨? 어느게 언니가 쓰던 변기죠?"

"문을 바라보고 오른쪽."

들어 보니 밖에 사는 사람들은 볼일을 볼 때 폐허 구석의 땅을 파고 묻어두는 방법을 썼다니까. 소변은 그냥 찍찍 싸고 다니고.

인간의 존엄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 물론 내집에서는 존엄을 챙길 수 있다만.

쏴아아아아아아아-

"오, 온수다!!!"

그렇게 한참을 씻던 이하린이 화장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만 꺼낸 채 내게 물었다.

뚜욱.

뚜욱.

"리, 린스는 없나요?"

"없다."

샴푸는 여기저기서 많이 주워 모았는데, 린스나 트리트먼트 종류는 내가 쓰질 않아서 챙겨둔 것이 없다.

뭐, 불만이면 직접 파밍해서 써야지.

강소현은 여기저기서 뭘 막 챙겨 오곤 했는데, 이하린 이하준 남매도 요새에 합류하게 된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수건!!!"

깨끗한 수건들.

세탁기가 없어서 손빨래로 직접 빨아 쓰고 있다.

"와... 아저씨, 나도 여기서 살래요."

온수, 샤워기, 변기, 깨끗한 수건까지.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는 당연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도 귀중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별 생각 없이 집사의 능력을 써왔는데, 밖의 사람들을 보고 나니 내가 얼마나 축복받은 능력으로 각성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수경 재배 설비 1,000,000p]

냉난방 설비에, 전기 주방의 수도 설비까지 모든 것들이 건설된 나의 집.

이제는 수경 재배 설비를 통해 직접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안전구역이 어떨진 모르겠는데, 절대 내 집보다 좋을 순 없을 것이다.

"자, 이것도 구경하고 가라."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기 때문에 이하린에게 요새의 식량 재배기능을 선보이기로 했다.

#36. 레이드 (2)

촤르르르륵―

주방 옆에 연결된 호스를 따라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경 재배 설비.

철제 프레임 사이에 길쭉한 흰색 바구니가 수직으로 6개 설치된 형태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수경 재배 설비처럼 생겼다.

「수경 재배 설비」

「마력이 담긴 물로 식물을 재배한다.」

「루토 씨앗 x 50」

「마경에서도 자라날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로 생존에 필요한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100만 포인트나 하는 수경 재배 설비에는 덤으로 씨앗들이 주어져 있었다.

다만, 여기서 사용되는 물은 일반적인 물이 아니고 씨앗 또한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식물의 씨앗이 아니었다.

"...아, 아저씨 제가 저거 관리도 잘할테니까 나도 여기서 살게 해줘요!"

식량 재배.

소각로 관리 및 청소.

주변 정찰과 동생 2차 전직시키기.

"제가 더 일할 테니까 동생은 그냥 봐주시면 안 될까요?"

이하린이 요새에 합류하기 위해 내가 내건 조건들이다.

그리고 나는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다.

"하아, 하준이 말도 들어 보고 생각할게요."

이하린은 동생의 의견도 필요하다며, 길 건너편의 자신의 은신처로 동생을 데리러 갔다.

어린애를 차원의 틈새로 보내는 건 여전히 마음에 걸리긴 한다만, 변한 강소현의 모습을 보면 차원의 틈새는 개꿀 같은 장소임이 틀림없다.

물론, 강소현은 거칠고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결과물만 놓고 보면 저만한 성과도 없긴 하다.

이하준이 초대받은 학파가 '백색 마탑'급으로 정신이 나가 보인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 뭐시기 학파가 정상적인 수준이라면 이하준도 자신의 쓸모를 찾아야 할 것이다.

멸망한 세상에서는 어린아이라고 무턱대고 보호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전투라면 몰라도 생산직인데, 가만히 놀게 두는 것도 뭐하고.

파지지지직-!

이상한 스파크가 튀기는 신발을 신은 이하린이 쏜살같이 동생을 짊어지고 도착했고.

"그, 그... 트, 특약으로, 스, 스크롤을 막 더 준댔어요."

이하준은 곧장 내게 2차 전직을 하고 싶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마, 마탑처럼 무식한 곳이 아니래요!"

강소현과 마찬가지로 이하준도 마탑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랑그라시안 학파'의 초대를 받았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까, '마탑'과 '학파'는 엄연히 다른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스크롤 제작자라는 특이한 클래스로 전직을 제안 받은 이하준.

이름 그대로 마법 스크롤 제작에 특화된 직업으로, 연구와 마법 스크롤 제작이 '랑그라시아 학파'의 주된 업무라고 한다.

마탑은 연구보다는 전투를 주로 하는 놈들이고 마법이라는 학문을 연구하는 마법사들은 죄다 학파에 소속되어 있다.

뭐, 그렇다고 하니 그러려니 하는 거지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뭐라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아, 아저씨한테 준대요!!"

그리고 그놈들은 실시간으로 우리 지구를 관측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강소현도 그렇고 이하준도 그렇고 2차 전직을 주관하는 곳에서 '나'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걸 보면 확신할 수 있다.

"나는 가도 좋다고 생각한다만, 이하린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하준이 열살이에요."

"어차피 주시자의 눈을 잡으러 갈 건데, 동생은 차원의 틈새에 가 있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

"...."

이래나 저래나 이하린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아무리 내 요새에 숨어 있는다 해도 '주시자의 눈'이 그렇게 녹록할 것 같지는 않거든.

식인종들이 쫓아다니는 세상인데, 어디 폐허 속에 동생을 두고 가는 것도 말이 안 되고.

"하아...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이하린과 이하준 남매의 요새 합류가 확정되었다.

"저는 짐 좀 가지고 올게요. 하준아, 아저씨랑 여기 있어!"

꼬르르륵-

"배고프니?"

이하린은 길 건너편에 숨겨놓은 자신의 짐을 가지러 떠났고, 나는 남겨진 이하준을 주방으로 데리고 왔다.

"아, 아니요... 누, 누나가 민폐 끼치지 말랬는데...."

말은 저렇게 해도 몸은 솔직하다.

군침을 흘리면서 주방에 진열된 나의 식량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있어 봐."

어린애인데 뭐라도 먹여야지.

5x5(m)의 정사각형 형태의 주방.

집을 바라보고 왼쪽 면에는 싱크대가 벽에 붙어 있고 그 뒤에 아일랜드가 있는 구조로, 무려 '전기'로 작동하는 인덕션이 달려 있다.

게다가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강소현이 여기저기서 잡동사니를 주워왔는지 덕분에 냄비나, 퐁퐁, 프라이팬 등의 주방 도구들도 많이 생겼다.

꼬르르륵-

배고픔에 시달리는 이하준에게 요리를 해주고자 편의점 간편 조리식을 뎁혀 주었다.

부글부글.

전자레인지나 냉장고 따위는 없기 때문에 냄비에 넣고 끌인 게 다지만.

어린애가 합류하게 되니, 파밍을 하든가 레벨을 더 올려서 더 많은 설비를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덮밥류 간편 조리식.

"자, 잘 먹겠습니다!"

식사를 하려는 그의 모습을 보니, 고작 열 살인 이하준도 아포칼립스에 완전히 적응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저 없이 대뜸 손부터 들이대려 했으니까.

"떽!"

허나, 내 집 안에서만큼은 어린아이가 아포칼립스에 적응할 필요가 없다.

"수, 수저?"

잔해 틈바구니에서 모아 뒀던 수저 한 세트를 그에게 건네줬다.

"너, 너네 누나랑은 뭘 어떻게 먹고산 거냐?"

"그, 그게...."

누나를 흉보는 것이 찔리기라도 하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이하준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이하린과의 식생활을 내게 설명해 줬다.

라면은 생으로 부셔서 먹고.

볶음밥 종류의 간편 조리식도 그냥 손으로 퍼먹었다고 한다.

당연히 조리 등은 없이 생으로 먹었다고 하는데.

"...."

말문이 막힌다.

어린아이가 기본적인 조리조차 되지 않은 영양가 없는 식사를 해왔다니....

아동법 위반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

하지만 그의 보호자인 이하린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망한 세상에서 20살짜리 여자애가 어디서 음식을 조리해서 먹인다는 말인가?

뭐, 라이터라도 주워서 불을 피우면 되지 않냐 싶겠지마는 잔해 틈바구니에서 멀쩡한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은 망가져 버렸다.

"맛있게 먹어라."

세상이 망했어도 내 집에서만큼은 어린아이에게 따듯한 식사를 대접할 수 있지만.

한참을 수저를 바라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수저를 드는 이하준.

"고, 고맙습니다...."

투박한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는 식탁.

드르륵-

쭈뼛쭈뼛 서서 수저를 들고 꼼지락 거리는 어린아이가 신경 쓰인다. 그래서 식탁 밑에 들어가 있던 의자를 빼주며 이하준이에게 자리를 권했다.

"편하게 앉아서 먹어."

참고로 가구는 스킬로 만들 수 없어서 잔해를 모아 내가 직접 조립했다.

미학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조잡하기 그지없다만.

"의, 의자도 너무 편해요!"

어딘가에 식기를 올려놓고 앉아서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멸망한 세계에서는 굉장한 사치기에 이하준은 큰 감동을 받은 것 같다.

또각, 또각.

식사를 하는 이하준을 뒤로한 채 부엌과 연결된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는 강소현이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아, 네."

"이준 씨, 하린이 집에 데려왔어요?"

"크흠. 그렇습니다만...."

따지고 보면 내 집이지만, 강소현 그녀는 내가 정한 첫 동거인이다.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아, 그랬군요."

정작 강소현 그녀가 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 보이길래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순간 저기압으로 보였던 것 같은데, 아마 내 기분 탓인가 싶다.

"일어나신 김에 회의나 합시다."

아예 신경을 안 쓴다기에는 어딘가 좀 이상하긴 한데....

"아, 네."

또 막상 대답도 잘하고, 표정의 변화 같은 것도 없다.

또각, 또각.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공기 속해서 우리는 묵묵히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드르르륵-

돌로 만들어진 아치형 대문을 열자 문 앞에는 이하린이 서 있었다.

"아, 아저씨? 언니?"

등에는 커다란 봇짐을 짊어지고.

대체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있는지....

"인벤토리는 뒀다 뭐하는 거지?"

"아, 인벤토리는 다른 걸로 꽉 차 있어요."

여기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인벤토리에는 최대 용량이 정해져 있다.

어째, 돌덩어리나 톤 단위 자재들은 안 들어간다 싶었는데, 단순한 용량 문제였던 모양이다.

"당장은 회의부터 해야 하니까 짐은 마당에 내려 놔."

"네!"

쿠우웅-!

씩씩하게 대답한 이하린이 봇짐을 내려놓고 강소현에게 다가간다.

"언니, 아저씨한테 들었죠?"

"같이 사는 거?"

"네! 저랑 하준이도 이제 아저씨랑 언니랑 같이 살아요."

"...잘 지내보자!"

잠시 뜸을 들이던 강소현이 이하린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헤헤. 언니, 제가 집안일도 많이 돕고 그럴게요!"

그리고 이하린은 그 손을 붙잡고 씩씩하게 흔들어 대고 있고.

그 광경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만, 굳이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뭐, 둘이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니까.

* * *

"...그, 주시자의 눈을 잡자고요?"

바바리안 부족민 네 명.

장진아, 윤설, 윤솔, 박정수.

내 제안에 그들이 다시금 물었다.

"누,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데요?"

레이저에 팔이 잘렸던 장진아.

지금은 강소현이 어거지로 붙여줬지만, 그때의 경험이 신경 쓰이는지 그녀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

"바바리안 분들은 전투에 참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주변 경계 및 교통정리.

바바리안 부족들이 맡게 될 임무다.

"그, 그래도...."

먼저 부딪힌 경험이 있는 만큼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웠는지 자꾸 뜸을 들이길래―

"크흠, 강소현 씨, 보여 주시죠."

강소현의 마법을 통해 설득해보기로 했다.

시스템의 특혜를 받는 마법 말고 진짜 제대로 된 마법을 배워온 강소현.

저들을 설득하기 위한 강소현의 마법 쇼가 시작되었다.

"실드!"

지이잉-

동시에 7명에게 거는 마법 방어막 실드.

"이준 씨, 쟤들한테 포탑 한 번만 쏴 주실래요?"

위이이이잉―

"어, 언니 미쳤어요?"

"총구 치우세요!!!"

포탑이 가동되자 저들이 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어차피 막힐 것을 알기에 주저 없이 핸들을 당겨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투타타타타타타타탓-!

점사를 하면 방어막이 깨질지도 몰라서 흩뿌리듯이 다섯 명을 골고루 맞혀 줬고.

팅- 티딩- 팅팅-!

강소현의 '실드'는 고정 포탑의 총알은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

"그걸 쏘라고 하는 언니도 언닌데, 진짜 쏘는 이준 씨도 참 대단하네요."

당황한 그들 사이에서 장진아가 토라진 듯 하소연을 시작했고.

"그래서 할 만하지 않습니까?"

가볍게 무시한 뒤에 저들의 전의를 확인해 봤다.

"화, 확실히... 레이저만 막을 수 있다면…."

"···이렇게 하면 충분히 싸울 만하지 않을까?"

실드, 힐, 지속형 도트 힐.

신체 강화, 방어력 증가 등의 버프.

무기의 마력을 담아 공격력을 올려주는 무기 강화까지.

회복부터 공격까지, 고작 열흘 남짓한 시간에 배웠다기에는 강소현이 쓸 수 있는 마법의 종류가 너무나도 많았다.

"아, 차원의 틈새는 시간이 좀 느리게 흘러요."

뭐, 그렇다니까 그렇다 치고 넘어가고.

서포트해 줄 이하린, 강소현에 요새와 로라만 있으면 '주시자의 눈'을 상대하는 건 문제가 없다.

주변에 몰려들 사람들을 처리해줄 바바리안들이 문제지.

저들은 직접 전투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경계만 서는 것도 우리가 주시자의 눈을 잡는다는 판단이 서야 가능한 일이니 이렇게까지 설득을 했고.

이제 문제는 '저들이 주변의 교통정리를 할 무력이 있는가?' 이다.

"다들 레벨과 능력치는 어떻게 되십니까?"

"레벨은 4인데 '힘'이 2 더 올랐어요."

바바리안으로 전직하며 변한 것들을 들을 수 있었다.

저들의 '능력치'는 '힘'으로 바뀌었고, 부족생활을 이어나갈수록 '힘' 수치가 늘어간다고 한다.

시체 거인 4마리를 잡은 내 레벨과 스탯이 8임을 감안한다면, 저들의 6이라는 힘 스탯이 상당히 높은 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족' 단위로 다니는 그들답게, 서로 상호 협력하에 발동하는 기술들이 많이 있었다.

위력도 나름 괜찮아 보이고.

최소한 나와 강소현, 이하린 셋이서 '주시자의 눈'과 전투하는 사이 경계 정도는 서줄 수 있어 보인다.

"이제 공략만 짜면 되겠군요."

'주시자의 눈'.

놈이 진짜 미친 수준으로 강한 게 아니라면, 여기 있는 세 명으로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설령 미친 수준으로 강하더라도 충분히 잡아낼 능력이 나에게는 있다.

불청객이 오더라도 바바리안들이 막아줄 테니.

"이제 '언제 어디서 어떻게'를 정해 봅시다."

아포칼립스.

뜬금없이 멸망해버린 세상은 사람들을 미쳐도 단단히 미치게 만들어 버렸다.

내 의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주시자의 눈'을 사냥할 것인가였는데....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지금 가시죠."

강소현이 덤덤한 말투로 즉석 레이드 선언을 시작해버렸다.

"소현 언니, 좋은 생각인데요?"

근육 전사 장진아를 필두로 바바리안 부족들까지 즉석 레이드 제안에 동의해버렸다.

저들은 어차피 경계를 서는 것이니 대뜸 동의할 수 있다고 치는데....

"어차피 시간 끈다고 뭐 있겠어요? 바로 가죠."

이하린까지도 즉석 레이드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하린은 나와 강소현과 함께 '주시자의 눈'과 직접 싸워야 하는 입장이다.

그런데도 저걸 바로 동의하는 게 맞나?

"하준아, 몸 조심히 잘 다녀와!"

심지어 동생까지 보내버렸다.

"으, 응! 나, 다녀올게!!"

씩씩하게 누나에게 손을 흔드는 이하준.

"이상한 놈들 있으면 눈알을 콱 파버리고!!"

그런 동생을 배웅하는 이하린.

조언이라기엔 조금 과하지 않나 싶다만, 뭐 남에 가정교육까지 참견할 생각은 없으니 묵묵히 남매의 이별을 바라만 봤다.

번쩍-!

이하준이 허공에 손을 휘젓자 푸른빛 섬광이 그를 뒤덮고 이내 이하준은 '차원의 틈새'라는 곳으로 사라졌다.

"다들 제정신 맞습니까?"

차원의 틈새에 다녀오고 나서 어딘가 고장나 버린 강소현.

나름 '마탑'이란 곳에서 배움을 얻어 왔다더니 완전 저돌적인 맹수가 되어 버렸다.

거기에 끔찍이도 동생을 아껴서 내 집에 입주하는 순간까지도 동생 이하준의 2차 전직을 미루던 이하린까지.

이들이 비정상적으로 호전적인 것인지, 아포칼립스가 오고 나서 그렇게 변한 것인지 점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저걸 잡자고 한 건 이준 씬데, 빨리 잡자는 걸로 우리를 미친놈처럼 보면 안 되죠."

"...."

그건 그렇네.

#37. 레이드 (3)

『냐아~』

어쩌다 보니 즉석 레이드가 결정되었고, 우리는 지금 요새를 타고 대로를 따라 이동하는 중이다.

내가 갑작스러운 출발에 동의한 이유 중에는 로라의 의견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준(Lv.8) 32세 / 보유 포인트: 5,778,895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8」

레벨 10까지는 고작 2밖에 남지 않았고 10레벨을 달성하면, 로라가 강력한 신성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직업 전용 퀘스트 – 10레벨까지 고양이를 지켜라.」

「보상: 신성의 조각이 고양이에게 깃든다.」

아직도 유지 중인 직업 전용 퀘스트.

로라를 지키라고 하는데, 로라가 뭔 위협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고로롱~ 고로롱~!』

어깨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만 채 골골거리고 있는 로라가 대체 어떻게 신성을 얻는다는 건지 이해는 가지 않는다만....

「몬스터 킬」

1등: 이준(118,876) - 대한민국

2등: 레이먼드 레밍턴(34,221) - 미국

〈 가장 많은 몬스터를 헤치운 자. 남겨진 신성의 조각을 얻을 지어니. 〉

라는 발언으로 미뤄 보아, 랭크보드에 1위 보상 또한 신성의 조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등으로 치고 올라온 놈이 좀 신경 쓰이기는 하다만, 어차피 고블린 왕국을 쓸어버리면 금세 격차는 다시 벌어질 것이다.

어쨌든 직업 전용 퀘스트로 미뤄 보아, '신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을 로라에게 먹인다면 좋은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뭐, 기왕이면 세계의 보호조치가 끝나기 전에 로라를 강하게 해두는 게 더 좋지 않겠어?

『냐아!!』

로라도 그걸 원하고 있으니까.

뭐든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와아… 이제 운전 잘하시네요."

어딘가에서 주워온 컵을 애지중지 닦은 강소현이 어딘가에서 주워온 커피 스틱으로 커피를 타며 내게 말했다.

"제가 운전은 좀 합니다."

1종 대형 면허, 한 번에 합격.

뭐, 자랑은 아니고 그냥 내가 운전에 일가견이 있긴 하다는 말이다.

안정적으로 대로변을 따라 이동하는 요새.

10m라는 높이 때문에 바람이 제법 불어 왔고,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내 머리카락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타악-! 탁!

이를 본 로라의 동공이 커지고 로라가 꼬리를 탁탁 치기 시작했다.

즉.

놀이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엄밀히 말하면, 놀이 스위치가 켜졌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지만.

생후 두 달 된 고양이는 세상에 호기심이 많고 뭐든 흔들리는 것은 죄다 물고 본다.

그렇기에 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놀이 스위치가 켜졌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 로라가 할 행동은 내 머리를 향해 돌진해 머리카락을 씹어 먹는 것이다.

"떽!"

로라가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제재를 가해 봤지만.

『키야오-!!』

로라는 가볍게 이를 무시하고 내 머리카락을 향해 돌진해 버렸다.

쿠구구궁-!!

달려드는 로라를 피하다가 요새의 운전 미스를 내버렸고.

쨍그랑-

"꺄아아아-!!! 이준 씨!!! 미쳤어요?"

애지중지 모시던 커피잔을 깨트린 강소현이 나를 보며 소리친다.

잔해 틈바구니에서 어딘지 모를 비싸 보이는 컵을 주워 왔던 그녀.

"이, 이거 어떻게 구한 건데..."

망한 세상에서 뭔 놈에 컵을 챙기겠다고 저러는지, 강소현이 깨진 컵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 내 컵...."

컵의 조각을 주섬주섬 모아 맞추는 강소현.

타앗-!

이 둘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는데, 로라가 갑자기 내 어깨에서 뛰쳐 내려갔다.

『냐아-!』

로라가 대문 위로 올라가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화가 났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나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내 눈에는 로라가 뭔 짓을 해도 귀엽게만 보이니까.

"에휴… 로라 네가 재밌었으면 됐다."

타악-! 탁!

요새 전복 위기로는 부족했는지 더 놀아달라며 꼬리를 휘두르는 로라.

"로라랑 좀 놀아주시죠, 강소현 씨."

나는 운전을 해야 되니까 강소현에게 놀이 시간을 즐길 기회를 넘겨줬다.

"...."

물끄러미 나와 깨진 컵, 로라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강소현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낚싯대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딸랑- 딸랑-

낚싯대 끝에 달린 방울 달린 금붕어가 울어 대며 로라를 유혹하고.

『키야오오-!』

우다다다다다-!

마당 왼편을 향해 움직이는 금붕어를 쫓아 로라가 달려든다.

타앗-!

담장을 밟고 공중에 떠 있는 금붕어를 낚아채는 로라.

딸랑- 딸랑-

그리고 낚싯대를 든 강소현이 로라가 잡는 타이밍에 맞춰 손에 힘을 풀어준다.

하늘에서 낚아챈 금붕어를 물고 바닥으로 착지하는 로라.

팍팍팍팍팍-!

그러고는 금붕어를 품속에 가둔 채 뒷발 팡팡을 시작했다.

파바박-!

뒷발 팡팡은 고양이의 습성 중 하나인데, 사로잡은 사냥감을 앞발과 입으로 고정한 뒤에 뒷발로 차서 기절시키려는 행동을 뜻하는 말이다.

볼 때마다 느끼는데, 사냥감 기절은 그냥 속설이고, 실상은 귀여워 보이려는 게 아닌가 싶다만.

파바바바박-!

『키야오오-』

그렇게 로라가 만족할 때까지 금붕어를 흔들어 대면, 지친 로라가 마당 한구석에 철퍽 쓰러진다.

『냐아아~!!!』

"우쭈쭈쭈, 간식은 제가 주겠습니다."

요새를 잠시 멈춰 세운 뒤 사냥의 만족감을 채워줄 수 있게 츄르를 먹여주면 비로소 로라의 놀이시간이 끝나는 것이다.

『핥짝- 핥짝-』

교양있게 츄르를 핥아 먹는 로라.

어디서 배운 적도 없건만, 스스로 우아하고 고풍스럽게 간식을 먹는다.

"아오, 얄미워."

로라의 간식 타임을 빼앗긴 강소현이 뭐라 한마디 덧붙였다만, 굳이 신경 쓰지는 않는다.

놀이 시간마다 매번 있는 일이니까.

"아니, 놀아준 건 난데 왜 보상을 맨날 이준 씨가 주냐고요!"

또각, 또각.

그런 강소현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 고양인데 불만 있으십니까?"

꼬우면 한 마리 입양하든가.

뭐, 이 망한 세상에서 고양이를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저, 정지!!!"

로라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요새를 운전한지 십여 분째, 어느덧 선발대가 말했던 빅 사이즈 의류몰 잔해에 도착했다.

'XXXXXXXXXL'라는 거대한 간판이 도로를 반쯤 침범한 채 쓰러져 있었다.

-치지직.

-주시자의 눈은 이태초 방향으로 올라가 있다고 합니다.

이하린과 바바리안 부족들은 선발대로 먼저 이동시켜 놨는데, 중간 지점에서 대기중인 윤솔, 윤설 자매의 보고가 왔다.

-띠딕.

"정확히 이태초 근처입니까? 아니면 더 위쪽 경리단길까지 올라갔습니까?"

마석 통신기의 버튼을 눌러 그들에게 물었다.

만일 경리단길 방향까지 주시자의 눈이 이동했다면, 이번 레이드는 무산시키고 곧장 용산구청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왜요?"

내 의견에 근거를 요구하는 강소현.

거대한 모닝스타를 든 채 잔뜩 흥분해 있던 그녀는 레이드 무산이라는 말이 심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그 위쪽에는 식인종들이 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쉽지만, 그건 그렇네요."

경리단길에 자리잡은 식인종 무리들.

조폭부터해서 온갖 잡것들이 모여 있는 만큼 그 수를 줄일 수 있다면, 괴물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다.

-치지직.

-경리단길 말고 무슨 역사공원 쪽에 있다는데요?

'이하린, 장진아 – 윤설, 윤솔, 박정수 – 나, 강소현' 순서로 연결된 연락망 탓에 몇 분의 텀을 두고 답변이 왔다.

"부군당 역사공원인 것 같은데요?"

이 동네에 빠삭한 나여도 동네 공원 이름 따위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이태 초등학교 건너편에 있어요. 경리단길보다는 한참 아래고요."

허나 강소현은 이태원 길바닥에 대해서만은 나보다 빠삭했다. 듣도 보도 못한 역사공원의 이름과 위치를 아는 걸 보면 그렇다.

-띠딕.

"큰길가에 대기 중입니다. 놈이 이쪽으로 올 것 같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박수진에게 지령을 전달한 뒤, 나는 요새에 있는 일행들에게 레이드의 시작을 알렸다.

"후우... 진짜 이걸 하는군요."

쿠구구구구궁-!

요새를 낮추자 강소현이 대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아아아아아-!!!!"

그러고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좀비들 틈바구니를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거, 좀비는 소리에 반응하지도 않는데 뭣하러 소리를 질러 대는지....

우리의 첫 번째 계획을 게임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럴 것이다.

필드에 쌓인 잡몹 정리.

요새 위는 좀비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만, 주시자의 눈이 왔을 때는 상당히 방해가 될 것이니.

탓, 타앗-!

몸에 실드를 겹겹이 두른 채 좀비 사이를 뛰어 다니는 강소현.

좀비들이 물결치듯이 그녀의 뒤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퉤엣!

-퉤엣!

것도 침을 찍찍 뱉어 대면서.

좀비들의 산성 침 사이를 오가며 강소현은 계속해서 좀비를 모으고 있다.

6인 이상이 모여 좀비웨이브를 일으키는 방법도 있지만, 대로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좀비 웨이브의 범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굳이 이런 귀찮은 방식을 택한 것이다.

뭐, 내가 저 사이를 뛰어 다니는 것도 아니니까.

"꺄아아악-!!"

처음에는 좀비를 모으기 위해 소리치던 강소현인데, 어느새 그녀는 진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이이익!!!! 더, 더러워!"

그리고 비명은 이내 성내는 소리로 다시 바뀌었다.

툭, 투두두둑.

유리구슬에 쏟아지는 흙탕물처럼 좀비들이 내뱉은 산성침이 그녀의 실드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 이준 씨!!!!"

검은색 찐득한 액체에 뒤덮인 비눗방울이 내 요새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안 쏘고 뭐해요?!"

요새 앞을 오가며 내게 소리치는 강소현.

다음 스텝은 내가 포탑을 쏘면 강소현이 블링크를 이용해 요새로 돌아오는 것인데....

저 더러운 몰골을 한 강소현이 대문 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이 몹시 신경 쓰이고 있다.

거, 집 청소를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건지.

위이이이잉―

그래도 마냥 구경만 할 순 없어서, 포탑을 가동시킨 후 좀비를 향해 포화를 쏟아 부었고 강소현은 곧장 블링크를 써서 이동했다.

"에휴... 뭔 생각 하느라 이렇게 늦게 쐈는지 알 것 같네요."

그녀가 도착한 지점은 대문 밖의 요새의 다리 위다.

파칭-!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고 강소현을 둘러싸던 실드가 겹겹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것에 달라붙어 있던 좀비의 침들은 사라진 실드 사이로 떨어져 내려갔고.

"어련히 알아서 밖에서 처리합니다."

같이 지낸 시간이 있는 만큼 강소현은 내가 예민하게 구는 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내심 찔리는 부분이 있어 딱히 대답을 하진 않고 계속해서 좀비 섬멸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휴유, 빨리 끝내죠."

담장을 넘어 들어온 강소현이 내 옆의 포탑에 앉으며 말했다.

투타타타타타타탓-!

그러고는 신이 나서 총알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저, 미사일도 쏴보고 싶은데."

한 발에 5,000p인 미사일도 쏘고.

"하아, 이거 진짜 게임 하는 것 같고 재밌네요. 스트레스도 확 풀리고요."

그렇게 둘이서 좀비를 섬멸하던 와중에 선발대의 연락이 왔다.

-치지직.

-주, 주시자의, 치직, 사라졌어요!! 그쪽으로 뛰, 치직, 가고 있긴 한데, 치지직.

소리가 끊겨서 들렸어도 '주시자의 눈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임은 알 수 있다.

거기서 사라진 주시자의 눈은 어디로 갔을까?

-끼예에에에에엑!

-끼예에에에에엑!

답은 '주시자의 눈' 위로 빙글빙글 도는 와이번 무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이, 이준 씨. 저거 보여요?"

하늘에 드리워지는 그림자.

머리 위에서 들리는 와이번의 소리.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본 채 당황한 강소현.

아직 위를 보지는 않았어도 이게 내 요새 위에 '주시자의 눈'이 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현관이 있던 자리.

그러니까 요새의 조종석에 앉아 있는 나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끼예에에에에엑!

그리고 요새 밖 길가로 보이는 그림자는 익룡 형태의 와이번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움직이는 형태고.

대뜸 머리통 위에서 놈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머리가 굳어 버렸다.

칙, 치익-!

"쓰으읍. 후우-."

급한대로 니코틴을 주입하며 타계책을 마련하고자 해봤지만.

쿠우우웅!!

보호의 룬이 만들어낸 요새의 방어막으로 머리통을 박아대는 와이번들 때문에 그조차도 여의치 않다.

"어, 어떡하죠?"

플랜 A, 요새의 고정포탑으로 놈을 공격하는 사이 이하린이 놈의 위로 올라가 쐐기를 박는다.

플랜 B, 요새로 어그로를 끄는 이하린과 강소현이 놈의 위로 올라가 공격한다.

플랜 C, D 등등까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주시자의 눈'이 하늘 위로 날아올라 높은 고도에서부터 내려온다는 가능성은 전여 상정한 적이 없어서 그런데....

"와, 와이번이 너무 많은데요."

그러게 말이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가만히 서 있는 주시자의 눈이 아니다.

쿠우우웅-!!

족히 백은 넘어 보이는 와이번 떼가 문제지.

파지직-!

"옘별."

요새를 둘러싼 보호의 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시자의 눈이 뜬금없이 요새 위로 나타난 것만 해도 위기라 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인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놈의 위로 날아다니던 와이번들까지 달려들고 있다.

파직-!

낸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애초에 정찰조가 놈을 공격했을 때만 해도 와이번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하니까.

족히 수백은 넘는 와이번들이 요새의 보호막에 머리통을 박아대는 탓에, '주시자의 눈'에 대한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여기에 주시자의 눈까지 합류한다면, 상황은 진짜 최악으로 치닫겠지.

파지지직-

"이준 씨, 포탑은 왜 안 쏴요?"

"안 쏘는 게 아니라 '못' 쏘는 겁니다만."

와이번들의 바로 뒤에는 주시자의 눈이 있다.

그리고 주시자의 눈은 아직까지 내 요새를 바라보지 않고 있고.

놈을 건드려서 '와이번+주시자의 눈'과 싸울 바에는 보호의 룬을 포기하고 와이번을 요새의 지근거리로 끌어들여 섬멸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 것이다.

어차피 보호의 룬은 깨질 수밖에 없다.

룬이 깨지더라도 강소현의 실드로 보호받을 수도 있으니.

물론, 주시자의 눈이 그때까지도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전제하의 일이지만.

쿠우우웅-!

쿠웅-!

내 요새에 수백 마리의 와이번을 잡을 공격력이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와이번들은 하늘에서만 왔다 갔다 해서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집 앞의 포탈, 밀려오는 몬스터 웨이브와 좀비들만으로도 이미 상황은 충분히 벅찼거든.

파직-

파지지직-!

"준비하시죠."

모든 계획이 무너져 버렸지만, 인생은 실전이다.

이 순간에도 이하린과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것이고 그들과 합류한다면 조금의 가능성이 더 생길지도 모른다.

뭐, 실전에서 써본적은 없어도 아직 비장의 수단도 남아 있으니까.

#38. 레이드 (4)

위이이이잉―

깨지기 직전까지 금이 가버린 요새의 방어막.

곧 몰려들게 될 수백 마리의 와이번들을 포탑을 가동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던 순간.

『키야오오!』

타다다닷-!

로라가 갑작스럽게 지붕 위로 올라섰다.

『하아악-!!』

그러고는 하늘을 향해 하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키아아악-!』

20cm짜리 조그마한 고양이가 마리당 족히 5m는 넘어 보이는 와이번에게 하악질을 하는 꼴이 좀 웃기긴 했는데―

-끼예에에에에엑!!!

-끼예에에에에에엑!!!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깨지기 직전까지 요새의 방어막에 머리통을 박아대던 와이번들이 자신보다 수백 배는 작은 로라의 하악질을 보고 도망치고 있었기 때문.

일전에 고블린들을 멈추게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게 뭔...."

"허!"

그 광경에 나도 강소현도 말문이 막혀 버렸다.

-끼예에에에에엑-!!!

푸드덕-!

"저게 무슨 비둘기도 아니고 고양이 하악질에 도망가는 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날개를 퍼덕이며 지들끼리 부딪히고 난리를 치는 거대한 와이번이 마치 한낱 비둘기처럼 느껴진다.

"...와, 와이번이 새라고 치면 가능할지도요?"

이어지는 강소현의 말에 따르면, 본래 고양이란 말도 안 되게 강력한 생명체라고 한다.

일부 섬 국가에서 조류의 하나의 종이 고양이 때문에 멸종 당했을 정도라고 하는데.

『하아아악-!』

20cm짜리 로라를 보고 생각해 봤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고양이는 커봐야 1m도 안 되는데 어찌 새를 멸종시킨다는 지....

"그게 말이 됩니까?"

"꼭 식사용이 아니어도 취미로 사냥도 하고, 번식 주기도 빠르고 한 번에 낳는 새끼도 많으니까 가능이야 하죠."

흐음.

뭐, 전문가 의견이니까 그렇다 치고.

다른 건 몰라도 로라가 말도 안 되는 슈퍼 고양이인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리를 향해 돌진하던 와이번뿐만 아니라, 근처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다른 놈들까지 죄다 도망가 버렸으니까.

『새애애액-』

"됐어, 로라야… 그만!"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러댄 탓에 카랑카랑한 로라의 미성이 거친 쇳소리처럼 변해 버렸다.

비틀거리며 지붕 끝자락에 도착한 로라가 아래에서 대기 중인 나를 향해 그냥 떨어졌다.

점프도 착지도 없이 말 그대로 낙하.

터업-!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로라를 받아 들었는데, 로라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불덩이같이 뜨거워진 몸.

『니아아… 냐아...』

거친 숨소리와 쉬어버린 목소리.

"가, 강소현 씨, 로라 상태 좀 봐주시죠. 몸이 불덩이 같습니다."

『냐아-』

로라가 앞발로 내 입술을 누르며 괜찮다는 듯 눈빛을 보내준다.

괜찮긴 뭐가 괜찮다고.

몸이 이렇게 불덩이 같은데.

"강소현 씨."

인벤토리에서 '긴급 회복약'을 구매하고,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감싼 로라를 다가온 강소현에게 넘겨줬다.

"괜찮아. 언니가 봐줄게."

로라의 회복은 전문가인 로라의 주치의 강소현에게 맡기고 나는 다급하게 울리는 마석 통신기에 집중해야 한다.

-치지직.

-이하린이에요! 합류 지점에서 다들 모여서 지금은 요새가 보이는 데까지 왔어요.

와이번들의 공격부터 이하린의 연락이 오기까지 고작 5분 남짓한 시간이 흘렀고, 로라의 분투 덕분에 우리는 그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띠딕.

"요새 바로 위에 주시자의 눈이 있습니다. 플랜 B로 가시죠."

요새가 놈의 바로 밑에 있는 만큼, 내가 어그로를 끄는 것이 맞는 판단이기에 플랜 B로 진행한다고 전달했다.

아슬아슬하긴 해도 보호의 룬도 아직 좀 남아 있고, 여차하면 강소현이 준 스크롤을 사용해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자박, 자박.

"휴유... 열이 좀 나서 그런데, 상태는 괜찮은 것 같아요."

내 옆의 포탑에 앉아 로라를 치료하던 강소현이 포탑 아래로 내려오며 말했다.

그녀의 두 손 위에는 로라가 얹어져 있었다.

우우웅-

백색 빛의 구체가 로라의 몸 전체를 감싸고 있고, 그 안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지 빛이 빠르게 로라의 몸속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힐."

그리고 강소현은 계속해서 로라에게 힐을 써 다시 로라를 감싸고 있던 빛을 보충하고 있고.

"스킬로 쓰는 힐은 안 먹혔는데, 마법은 또 되네요."

수의사를 집에 들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것도 마탑에서 '힐'까지 배운 수의사로.

"휴우. 이제 힐이 안 먹히는 걸 보니까 많이 회복된 것 같네요. 그래도 지속형 힐을 걸어 놨으니 앞으로 30분 정도면 충분히 회복할 거예요."

『쌔애애액-새애액-』

다소 거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로라.

로라가 아니었다면, 머리 위에 '주시자의 눈'이 있는 상태에서 수백 마리의 와이번들과 치열한 혈투를 벌여야 했을 거다.

요새 축소화와 그와 함께 얻은 숨겨진 능력까지.

주시자의 눈을 만나기도 전에 밑천을 다 털렸을지도 모른다.

-치지익.

-준비 완료.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저놈을 잡으려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시체 거인의 보상은 레벨업과 검은 마석이다.

용산구에 있는 시체 거인이 모두 죽자 해방된 주시자의 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놈도 비슷하지만 더 큰 보상을 줄 가능성이 높다.

로라가 뭔가를 하면 항상 아파진다.

그리고 그것도 '신성의 조각'이란 것을 얻으면 해결될 것 같으니.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183:32」

아마도 이런 보상들은 인류의 보호조치가 끝나면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만.

-띠딕.

"계획대로 시작하겠습니다."

요새 바로 위에 떠 있는 주시자의 눈.

로라 덕분에 용산의 하늘에는 와이번이 보이지 않는다.

놈에게 공격받았던 장진아의 말에 따르면, 주시자의 눈은 공격할 때 고도를 낮춘다고 한다.

본래 계획에서는 와이번 대책을 포함해 놈의 고도를 낮추는 것을 우선시했는데, 텅 빈 하늘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강소현과 나란히 고정 포탑의 의자에 앉아 핸들을 돌려 놈을 향해 총구를 조준한다.

"준비되셨습니까?"

"아, 네."

로라도 안전하게 보호막이 둘러진 채로 내 무릎 위에 앉혀 놨다.

이제 진짜 준비는 다 된 것 같으니.

-띠딕.

"시작하겠습니다."

움직이는 것들은 쏘고 보기에 꺼뒀던 자동 포탑을 가동시키며 고정 포탑의 핸들을 뒤로 당겼다.

투타타타타타타탓-!

투타타타타타타탓-!

고정 포탑 두 대, 자동포탑 네 대.

도합 여섯 대의 포탑이 요새 꼭대기에 있는 주시자의 눈을 향해 포화를 쏟아냈다.

푸북, 푸부부북-!

놈의 살점이 패인다.

검은색 피가 튄다.

후두두둑-!

하늘에서는 비처럼 검은색 피가 쏟아진다.

깊게 패이고 포탑에 난도질당한 놈의 피부.

그곳은 금세 다시 검은 살덩이로 채워졌다.

그리고.

끼기기기기긱-

대뜸 선빵을 맞은 놈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요새를 바라보며 눈을 뜨기 시작했다.

끼기기기긱-

녹슨 쇳소리를 내던 주시자의 눈은 기이한 돌기가 잔뜩 달린 거대한 구체의 형태로 생겼다.

지름은 한 20m 정도 되려나....

그리고 나는 놈이 고개를 돌리는 방식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추측했었는데.

쩌어어억-!

그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다른 방향을 보고 있던 주시자의 눈은 몸을 놀리는 대신 요새 방향에서 눈을 뜨는 방식으로 시점을 전환했다.

즉, 울퉁불퉁한 피부 속에서 놈의 안구는 360도 전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원하는 방향에 오면 피부를 찢고, 그쪽에서 눈을 뜰 수 있고.

당연한 소리지만, 우리는 놈이 움직이는 내내 포탑을 쏴대고 있었다.

재생하긴 했어도 피부에 쐈을 때는 먹혔던 공격이 안구에는 그 효용이 없었지만.

팅- 티디딩-! 팅-!

놈의 안구는 총알을 튕겨낸다.

"이, 이준 씨? 저, 저게 대체...."

거친 피부에 덥힌 거대한 눈알의 형태인 '주시자의 눈'.

요새의 공격을 튕겨내던 놈의 모습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쩌지지지지직-

좌우 끝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화난 것 같습니다만."

다짜고짜 선빵을 맞아서 그런지 몹시 화가난 듯이 눈꼬리를 찢고 있다.

아직까지 공격은 하지 않고 있고, 도합 네 대의 포탑이 쏟아내는 총알에는 별 타격이 없다.

뒤통수라고 표현해야 될지는 모르겠다마는 놈의 안구가 보이기 전만 해도 살에 박히고 검은색 석유 같은 피가 솟구치긴 했었는데.

팅 티디딩-! 팅-!

어째 안구가 더 단단한지....

선빵을 치고 놈이 우리를 바라보기까지 1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초인이 된 인류에게 있어 1분이라는 시간은 이하린이 '주시자의 눈'의 뒤통수를 후려 칠 준비를 마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요새 바로 옆에 다가온 푸른색 점 한 개.

"흐음. 미사일을 쏴 보죠."

이하린이 놈의 뒤통수를 까기 전에 화려한 어그로를 끌어줄 차례다.

퍼어엉-!!

퍼어엉-!!

미사일의 효과는 뛰어났다.

미동도 않고 우리를 바라보며 눈꼬리를 찢어대던 주시자의 눈을 움직이게 만들었으니까.

허나, 조금 과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지이잉-

"옘별."

놈의 동공 앞에 구체의 형태로 모여들기 시작한 거대한 붉은색 빛무리.

"이, 이준 씨? 저거 몸을 막 떠는데요...."

"...."

온몸으로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구체 형태의 몸을 부르르 떨고 있다.

거대한 구체 위에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진동.

하기야, 놈의 입장에서 보면 열이 뻗힐 만도 하지.

다짜고짜 선빵을 맞고 요새를 바라보고 뭘 하기도 전에 총알 세례와 미사일에 처맞은 셈이니.

퍼어엉-!!

허나, 나는 놈이 화났다고 그냥 내버려둘 생각이 없다.

퍼엉-!

미사일과 총알 세례를 멈춰줄 생각도 없고.

'주시자의 눈' 앞에 모인 붉은 빛이 그대로 뿜어져 나간다면 그냥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거든.

공중에 떠있는 만큼 미사일에 맞으면 놈의 위치를 조금씩이나마 움직이게 할 수 있으니까.

지이이이이잉-!!

착탄지점을 조준할 수 있는 미사일 덕분에 요새 정중앙에 떠있던 놈을 요새 바깥쪽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콰자자지지지지직-!!!!

"시, 실드!!!!"

터질 듯이 뭉쳐져 있던 붉은색 빛이 우리를 향해 뿜어져 나갔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강소현이 레이저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여러 겹의 보호막을 둘러 봤지만.

파칭-!

파칭-!

파칭-!

요새를 둘러싸고 있던 보호의 룬과 강소현이 친 수십 겹의 보호막도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 버렸다.

숫제 거대한 폭포가 뿜어져 나가는 것처럼 붉은 레이저가 요새를 스치고 지나간다.

놈의 방향을 틀어둔 덕에 요새에 직격만은 피할 수 있었다.

쿠구구구궁-!

하지만 요새를 지탱하던 8개의 다리 중 두 개와 집의 우측 뒤편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남은 6개의 다리로 지탱하고 있기에 무너지진 않았다만, 요새가 조금 기울어 버린 건 어쩔 수 없다.

지이이잉-!

그리고 놈은 우리를 향해 또다시 레이저를 모으기 시작했고.

"휴우."

우리는 이제 한 숨을 돌릴 시간을 벌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암살자 이하린이 놈의 뒤통수 위로 떠올랐으니까.

"아, 아저씨이이-!!!!"

푸욱-!

그녀의 손에는 작은 은색 단검이 쥐어져 있었고 그것이 주시자의 눈의 뒤통수를 가르기 시작했다.

'주시자의 눈'의 뒤통수에서 검은색 피가 솟구쳐 오른다.

치지지지직-

스파크.

푸른빛 번개가 치는 신발이 빛나고, 그 위를 이하린이 누비고 있었다.

"흐아아앗!!"

푸우욱-!

헤엄이라도 치는 듯이 가볍게 주시자의 눈의 피부 위를 미끄러지듯이 쏘다니는 이하린.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 단검이 길을 만들고 있었다.

푸슈웃-!

그 길을 따라서 검은색 피가 솟구쳐 오른다.

뭐, 정확히 봐서 아는 건 아니고.

들리는 소리와 얼핏얼핏 나타나는 이하린의 모습으로 추측해본 내 감상이다.

지이이잉-

거대한 눈알은 내 요새를 바라본 채 빛을 모으고 있다.

쩌어어억―

번뜩-!

그리고 그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고.

-치지직

-아, 아저씨 뒤에 눈알이 엄청 많이 생겼는데요?

이하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변화한 상황을 알려왔다.

주시자의 눈의 피부는 울퉁불퉁하다.

마치 수많은 알을 피부로 덮어 논 생김새다.

쩌어억-

찐득한 액체들이 늘어지며 모든 울퉁불퉁한 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작은 눈.

수십, 수백 개는 넘는 눈알이 이하린을 따라 움직인다.

주시자의 눈.

놈의 측면과 머리 꼭데기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내 눈에도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으니.

-치지직.

-이제 보고하면서 싸우긴 어려워요!!! 이쪽에도 레이저가.

뚜욱.

이하린의 말은 여기서 끊겼다.

주시자의 눈 뒤통수에 나타난 수백 개의 작은 눈알.

그것에도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이하린을 조준하고 있는 걸로 추정된다.

요새 앞에 모여드는 붉은 빛.

그리고 주시자의 눈 너머로 쏘아지는 작은 빛줄기로 보아하건데, 이하린도 생각 이상의 고전을 겪는 모양.

퍼어엉-!!

허나, 잘 헤쳐나가리라 믿고 나는 내 할 일을 해야 한다.

콰지지지지지직-

다시금 '주시자의 눈'의 거대한 눈알이 내 요새를 향해 붉은 빛 광선을 쏜다.

콰앙-!

요새의 미사일이 주시자의 눈을 타격해 레이저의 방향을 엇나가게 만든다.

연이은 충격으로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주시자의 눈.

피잉-

그리고 다시 모아지는 붉은 빛.

"하린이 타깃팅에 안 잡히는데요? 미, 미니맵에서도 사라졌고요."

이하린의 등장부터 강소현은 그녀에게 실드를 걸어주고 있었다.

나와 함께 포탑으로 주시자의 눈을 공격하는 동시에 그 위를 누비며 싸우는 이하린에게 실드와 힐까지 걸어 줬으니.

"후우...."

강소현이 식은땀을 훔치며, 다소 걱정스로운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나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내 어깨 위에 있는 로라도 마찬가지로 덤덤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주시자의 눈'은 내가 상정했던 만큼의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타앗-!

때마침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주시자의 눈'의 위로 올라갔으나 어느새 사라져 버렸던 이하린.

"아저씨!"

투명해졌던 몸이 조금씩 선명해지며 그녀가 요새 담장 위에 나타났다.

뭘 또 숨기고 있었는지 이번 은신은 미니맵에서 조차 그녀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치이이이익-

그렇게 나타난 이하린의 피부는 정체 모를 검은 액체로 인해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땠지?"

"아, 몸속에 들어갈 수는 있겠더라고요."

이하린의 손에는 두 개의 아이템이 들려 있었다.

강소현이 준 긴급 탈출 스크롤과 내가 준 회복 포션.

"소현 언니가 걸어준 힐이랑 포션으로 버틸만해요."

촤아악-

몸에 묻은 검은 피를 털며 이하린이 말했다.

"정신적인 문제는?"

"요놈은 산성피가 끝인 것 같네요. 그래서 그냥 몸 안에도 한 번 들어가 봤어요."

시체 거인의 피에 맞으면 정신착란에 휩싸인다.

그렇기에 백색 마탑에서 선물받은 귀중한 스크롤까지 줘가며 이하린을 통해 테스트를 해봤다.

물론, 이하린이 자원했고.

"1안대로 가지."

주시자의 눈.

놈의 몸속을 헤집고 들어가 약점을 파악한다는 것이 먹혔다.

그러면 이제는 계획대로 놈을 사냥하면 될 뿐이다.

#39. 레이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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