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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MAGOPORTURNOS / Chapter 1: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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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OPORTURNOS

Autor: Kakao_cuenta

© WebNovel

Capítulo 1: 1-11

[정따블] 턴제의 마법사 1-105 (연재중)

 1화

미궁의 심연

사실 모든 실시간 게임은 턴제 게임이라는 말이 있다.

'무한히 작게 쪼개진 단위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나의 턴을 마친 것으로 생각한다면 말이다.

궤변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 미친 게임에 빙의하고 턴제의 마법사가 되기 전까지는.

***

 <미궁의 심연>

그 게임은 전통적인 D&D 방식의 턴제 전략 RPG 게임이었다. 미궁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로그라이크 싱글 게임.

4인 파티를 조직해서 비밀을 파헤치고 모험하며 만나는 적들과 턴제 전투를 벌인다.

내게 1턴 동안 주어지는 시간은 60초. 전투에서 이기려면 그 시간 안에 철저하게 전략을 짜야 한다.

돌아가는 파티원의 순서에 맞춰서.

[그림자 도약]

내 도적의 이동 기술을 써서 적 궁수 옆에 배치하면.

[파수꾼 재배치]

궁수는 도적과의 근접전이 부담스러우므로 이동 기술을 써서 고지대로 피신한다.

그걸 기다렸다.

[포지션 스와핑]

그다음 돌아오는 내 마법사의 턴에 아군 궁수와 적 궁수의 위치를 바꾼다.

그럼 내 궁수가 고지대로 갔음은 물론, 적 궁수는 이동기가 빠진 채로 우리 전사 옆에 놓인다.

[용의 일격]

돌아오는 전사의 턴에 강력한 물리 공격으로 적 궁수를 박살내놓는다.

이런 식으로 체스를 두듯이 적의 수를 예측하고 각 파티원의 행동을 하나하나 분배해서 전략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측면 공격, 지역 통제, 지뢰, 함정, 밧줄, 언덕, 절벽, 하천, 덫, 덤불, 나무, 끈적이, 중립 몬스터, 유독 가스, 기름통, 마법 화살, 폭탄, 소환수, 포션 등 온갖 요소들을 활용하면서.

그게 재밌었다.

다른 사람들도 재밌었는지, 한동안 게임 '미궁의 심연'은 꽤 흥했다.

문제는······.

-아니 ㅅㅂ 게임 졸라 어렵네

-이거 엔딩 보는 사람이 있긴 있냐

-마지막 장인데 미궁 마스터 이 새끼는 대체 뭐냐 활화산 마법 한방에 그냥 다 죽는데?

-미궁 마스터 부하로 나오는 새끼들도 존나 쎈데?

이 게임은 매우 어려워서 엔딩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세계 최초로 클리어 방법을 찾아낸 것은 나였다.

공략의 요지는 미궁 마스터의 활화산 마법 범위 안에, 미궁 마스터의 부하들까지 우겨넣어 모두를 전멸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내 파티에선 '마법사' 만큼은 살려낸다.

마법사에게 최후의 저항 축복을 걸어서 생명력 1로 버티는 것이다.

[레이즈업 데드바디]

그다음엔 사령 마법을 써서 동료들을 부활시킨다.

[순리의 시계태엽]

그럼 미궁 마스터가 디스펠 마법을 발동한다. 언데드들을 죽이기 위해서다.

이때 미궁 마스터 본인의 '상태이상 저항' 축복도 사라지는데, 처음부터 그게 목표였다.

이젠 마법사와 미궁 마스터의 일기토.

각종 상태이상 마법과 CC 아이템을 던져가며 꾸역꾸역 패서 잡는다.

그런 식으로 깼다.

내가 짠 전략은 일종의 공식 가이드라인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내 방식을 따라했다.

그리고 나는 게임의 난이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클래식 난이도를 깨고나면 2회차 플레이어를 위한 '어려움' 난이도가 오픈되었던 것이다.

몇 달 고생해서 어려움 난이도도 클리어.

난이도 : 전략가

다음 난이도가 오픈됐다.

그때부터는 멈출 수가 없었다.

미친놈처럼 중독되어서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과 전략으로 게임을 반복해서 깨나갔던 것이다.

난이도 : 최고의 전략가

난이도 : 끝없는 사투

난이도 : 진정한 리더

난이도 : 명예의 전당

난이도 : 전설의 시작

난이도 : 고행

난이도 : 절망의 분투

난이도 : 끝없는 도전

난이도 : 불굴의 정신

난이도 : 해탈

난이도 : 위대한 지혜

난이도 : 절대 전략

난이도 : 전략의 끝

난이도 : 인간성의 초월

난이도 : 전략의 신

······.

한동안은 날 따라서 같이 고난도에 도전하는 플레이어들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싹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나도 뮤튜브를 통해 클리어 전략을 나눠주던 걸 관두었다. 그게 아마 '명예의전당' 쯤이었던가?

하지만 나는 전략 전투 자체가 재밌어서 이 짓을 계속 반복했고, 그러던 어느 날.

[난이도 : 개발자]

별 신기한 이름의 난이도에 이르게 되었다.

"개발자?"

참고로 그 직전의 난이도는 '턴제 마스터'였다.

난이도 이름으로 계속 그럴싸한 단어들만 줄줄 나오다가 갑자기 '개발자'라니.

왠지 김이 새면서도 동시에 이게 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개발자 깨고 나면 이제 뭐하지.'

개발자 난이도를 시작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게는 엔딩이 목표가 아니라 일과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게임이 끝난다니, 시원섭섭한 기분이다.

[케일럽]

닉네임을 설정하고, 개발자 난이도의 새 캐릭터를 생성했다.

이번에도 마법사였다.

지금까지 파티원들의 포지션은 여러번 바뀌었지만, 내 메인 캐릭터는 항상 마법사였다.

마법사가 대부분 전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능력치 포인트 10점을 분배하세요]

나는 이렇게 찍었다.

[근력(0), 민첩(0), 지혜(10), 건강(0), 솜씨(0)]

지혜가 높을수록 마법의 위력이 강해진다.

예전에는 마법사도 초반에 근력, 건강, 등을 몇 점씩 찍어서 강한 방어구로 초반 생존력을 높이는 메타가 유행했었다.

그러나 내 경험상 '절대 전략' 난이도부터는 그것도 안 먹힌다. 초반에 무슨 짓을 해도 한 방 맞으면 죽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새롭게 개발한 방법이 지혜에 몰빵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물몸이라면, 맞기 전에 죽인다는 마인드다.

[특수능력을 선택하세요]

특수능력은 스킬과 구분되는 캐릭터 특유의 이능 같은 것이다.

시체를 뜯어먹고 생명력을 회복하는 '시체포식'이라든지, 생명력이 가득 차 있을 때 공격력이 높아지는 '완벽주의자'라든지.

'이번에도 저번 난이도처럼 시작해볼······어?'

특수능력 탭을 살펴보던 나는 뜻밖의 선택지를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특수능력을 선택하세요.]

....

-턴제의 모래시계 : '턴제 마스터' 난이도를 클리어하여 해금되었습니다.

"이게 뭐야?"

개발자 바로 이전 난이도가 '턴제 마스터'였다. 그걸 할 때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특수능력이다.

"한번 해볼까?"

해보고 별로면 지우고 새로 키우면 된다. 어차피 최종 난이도인 '개발자'를 내가 한방에 깰 거라는 기대는 없으니 상관없다.

나는 특수능력을 고르고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미궁의 심연에 들어가시겠습니까? Y/N]

Y버튼을 누르는 순간.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게임 속.

나는 마법사가 되었다.

***

좆됐다.

내가 욕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닌데,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없다.

'진짜 좆됐어.'

군대에서 폐급 맞후임이 북측으로 포를 쏴버려서 북한에서 대응 방송이 나왔을 때보다도 더.

내가 있는 곳은 마법 대학이었다.

수없이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이곳 풍경이 익숙하다.

마법사로 게임을 시작할 때 나오는 그 장면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시점.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쿼터뷰가 아니라 1인칭 시점이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약 20명.

우리는 마법 대학의 노예들이다. 대학 측이 어젯밤에 노예상으로부터 사들인.

"오늘 너희는 미궁에 들어갈 거다. 거기서 살아 나오면 마법 대학의 학생이 될 수 있다. 미궁에서 직접 돈을 벌어 자기 몸값을 변제하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늙은 교수가 나와서 설명했다.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온갖 가설을 세워보다가 빠르게 관두었다.

일단 내가 들어 앉아있는 몸이 내 몸이 아니다. 처음에 커스터마이징 했던 내 캐릭터 케일럽이었다. 명백하게 반물리적인 이 상황에 그 어떤 상식적 추론도 의미가 없다.

그냥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미궁은 물론 위험하지만, 신중을 기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답이 안 나오는 고민에 골몰할 시간도 없다. 이 게임은 도입부부터 정신없이 몰아친다.

"다들 앞에 나와서 마법 완드를 하나씩 집어가라."

노예들이 한 명씩 나아가서 완드를 집었다.

나도 하나 집어왔다.

"4인 1조로 나눈다. 그리고 조교를 따라서 미궁에 입장해라."

곧바로 사람들이 줄을 나누어 섰다.

내 팀의 조합은 엘프 여자와 인간 남자 셋이었다. 나도 그 인간 남자 셋 중 하나다.

엘프녀는 공포에 질려서 거품 물기 직전이었고, 뚱뚱한 체격의 인간 남자 하나는 극도로 긴장해서 땀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둠 질라아카야 사라비탄야 와 아브랍사로 키리만타야······."

양손을 깍지 껴서 모은 채 필사적으로 기도문을 중얼중얼 외고 있었다. 이 게임의 세계관으로 미루어볼 때, 멀리 남부 사막지대에서 온 사람이다. 보너스로 그는 절름발이였다.

그가 지금 읊는 저 기도문의 내용은 대략 '제가 죽으면 천국으로 데려가주세요' 정도 된다.

'큰일이다.'

졸도 직전의 엘프녀, 겁먹은 뚱뚱이, 광신도 절름발이.

셋 중 누구도 미궁 전투에 적합해 보이진 않았다. 이 게임은 시작할 때 랜덤으로 만들어지는 팀 운도 중요한 편이다.

어떤 머저리가 한 팀에 와도 거기에 맞는 전략을 짜낼 자신이 있었지만, 그건 60초씩 시간이 주어지는 턴제 게임일 때 얘기다.

"3번 팀. 따라와."

우리가 3번 팀이었다. 조교의 지시에 따라가는 표정들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황소와 다를 바 없었다.

***

"입장 위치는 네 명 단위로 자동으로 바뀌기 때문에, 들어가면 너희 넷만 있을 거야. 다른 팀들은 미궁 1층의 어딘가에 랜덤하게 있을 거다."

조교가 설명했다.

그는 밖에 남고, 우리 넷은 미궁 게이트를 넘어갔다.

단번에 온 세상이 암전되었다. 게이트는 바로 사라졌다. 이제 출구 게이트를 찾아야 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종유석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똑똑 울렸고, 깊은 안쪽에서는 괴물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히! 히히히! 히히!

하는 웃음소리.

쿵!

엘프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완드를 든 채로 덜덜덜 떨었다.

"못하겠어요."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는 못해요."

"헉······헉······."

뚱뚱이 역시 공포에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수준이었다.

"자르반카야 와 엘로스탄데 크로미 아짜랍타미 와 땔라끄로······."

놀랍게도 광신도가 제일 멀쩡해 보였다. 그는 기도를 몇 마디 더 중얼중얼 외더니 표정이 밝아졌다.

"됐습니다! 이제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기도를 마쳤으니 우리가 죽어도 주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해주실 거요. 겁먹지 말고 죽어도 좋소! 하하하!"

방금 한 말 취소.

역시 이 새끼가 제일 맛이 갔다.

아무튼 지금 이렇게 퍼질러 앉아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세이프 존이 아닌 이상 미궁 안에서는 언제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모른다.

"여기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 움직입시······다······."

사람들을 격려하려던 순간에 눈앞에 비현실적인 장면이 들어왔다.

초고속 카메라로 재생한 것처럼 천천히, 어둠 속에서 우리를 향해 뛰어 오르는 흉측한 표정의 녹색 괴물.

게임에서 고블린이라 부르던 그것이다.

게임이라면 '기습당함!' 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적들에게 선제권 보정이 들어간 채로 턴제 전투가 시작된다.

그러나 시발 당연히.

'그럴리가 없지.'

퍽!

조잡한 창끝이 뚱뚱이의 등 뒤에서부터 가슴으로 관통해서 튀어나왔다.

내 얼굴에 뜨거운 피를 쏟아버리면서.

"히히! 히히히!"

뚱뚱이 뒤에 고블린 두 마리가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꺄아아악!"

엘프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펄쩍 뛰었고.

"오오! 죽음이여! 어서 내게 오라! 하늘에 계신 내 주인님! 당신의 왕국의 정문을 활짝 열어······."

퍽!

또다시 창이 날아와서 광신도의 목을 따버렸다.

'미친.'

나는 몸이 굳어버렸다.

현대인이 게임이나 소설에 빙의해서 무쌍 찍는 이야기는 전부 다 핍진성 오류다.

현대인은 그렇게 못한다.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특수부대 출신이면 모를까.

어제까지 욕조에 거품 내서 씻고, 마트에서 사온 소고기 구워 먹던 내 입장에선 그냥 뇌정지 그 자체다.

눈앞에서 사람이 창에 찔려서 피가 분사되는 것을, 현대인은 살면서 볼 일이 없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히히히!"

고블린이 칼을 들고 내 앞에 뛰어오르는 순간까지도.

[턴제의 모래시계 발동]

그 메시지가 떠오를 때까지도.

나는 내가 놀라서 굳어버려 못 움직이는 줄 알았지만, 약간 달랐다.

[당신의 턴입니다.]

나를 포함한 온 세상이 정지했다.

[60]

[59]

[58]

눈앞에는 모래시계가 나타나서 카운트다운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렇게 3초가 흘렀지만 고블린의 칼은 아직도 내 목을 치지 않았다.

"뭐······뭐야?"

귀까지 찢어진 고블린의 그 입꼬리, 광신도 목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핏물, 내 목에서 불과 20센티미터 떨어진 곳의 칼날까지.

모래시계를 제외한 세상의 그 무엇도 미동조차 없었다.

***

모든 실시간 게임은 사실 턴제다.

무한히 작은 단위 시간을 하나의 턴으로 본다면.

나는 고블린이 내 목을 치는 0.0몇 초의 그 주어진 턴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턴이 종료되고 목이 날아갈 운명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60초의 시간을 벌어주는 것. 그 60초 동안 전략을 강구할 수 있는 것.

그게 특수능력, '턴제의 모래시계'였다.

2화

턴제의 모래시계

상황을 파악하는 데 5초.

전략을 강구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은 55초.

······라고 생각하면서 또 1초를 손해 봤다.

'생각해. 생각.'

이 위기를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

모래시계 위에는 행동력이 표시되어 있었다.

[행동력 : ■■■■]

본래 컴퓨터로 게임을 할 때 행동력이 4점이라면 10미터 이상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내 몸은 꼼짝달싹을 못했다.

그 이유도 짐작이 된다.

지금 주어진 60초는 생각할 시간일 뿐.

사실 내 행동력은 0.0몇초의 그 찰나의 순간을 기준으로 책정된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행동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에 힘을 주어 억지로 들어보았다. 손이 3센티미터 쯤 움직이자 행동력이 한 칸 줄었다.

[행동력 : ■■■□]

'안 돼.'

이 방법은 안 된다. 행동력을 전부 써도 완드를 들어서 저 칼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피하는 건?

내가 피할 수 있을까?

남은 행동력을 쥐어짜서 머리를 숙이면?

칼날은 내 목의 경동맥 대신 광대뼈를 칠 것이다.

즉사하진 않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존나게 아프겠지. 그냥 즉사할걸! 하고 후회할 정도로. 실수하면 눈알도 날아간다.

그리고 생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칼에 맞으면 그 충격에 고개가 돌아갈 것이고, 내 시야가 놓쳐버린 고블린 2번이 창으로 내 폐부를 찔러버릴 테니까.

아니 그럼 시발 잠깐만.

이 60초가 대체 뭔 소용인데?

죽기 전에 그냥 기도할 시간 주는 거 아냐? 이게 광신도한테나 좋지 나한테 무슨 쓸모가 있냐?

"하아."

무심코 한숨을 뱉은 다음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거 봐라?

좀 이상하잖아?

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한숨은 어떻게 쉬었지? 0.0몇 초 동안 이렇게 느린 한숨을 토할 수 있나?

아까 세상 만물이 정지했을 때 나도 모르게 '뭐야?'하고 말을 해버렸다.

"말을······할 수 있나?"

조심스럽게 성대 밖으로 목소리를 꺼내보았다.

정말 된다.

나는 말을 할 수 있다.

그 이유도 짐작이 되었다.

이 게임은 최대 4인까지 멀티플레이를 지원한다. 아무도 멀티를 하지는 않아서 싱글 게임 취급받지만.

'채팅 기능이다.'

그건 멀티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기능이었다. 게임 중 엔터를 치면 채팅창이 뜬다. 거기서 문자를 치면 캐릭터 위에 말풍선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럼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은 채팅의 일종으로 판정되는 게 아닐까?

전투 중에 아무리 채팅을 쳐도 행동력을 잡아먹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영창도 할 수 있을까?'

이 게임의 마법사들은 마법을 쓸 때 항상 영창을 한다.

그러면 채팅을 할 때와 똑같이 말풍선으로 마법사 캐릭터 위에 영창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 영창 메시지는 물론 플레이어가 엔터키를 치고 입력한 건 아니다.

캐릭터가 마법을 쓰면 자동으로 뜬다.

하지만 둘 다 똑같은 타입의 말풍선이다.

그럼 혹시······.

'제발.'

나는 손목을 돌려서 완드의 방향을 조정했다. 눈앞의 고블린을 겨누었다.

[행동력 : ■□□□]

손목의 움직임과 함께 행동력은 두 칸 줄었고, 모래시계의 시간은 4초 남았다.

3초.

2초.

"파이어볼."

영창 주문을 외는 순간, 새 메시지가 떠올랐다.

[행동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턴을 종료합니다.]

[모래시계가 다시 뒤집어졌습니다. 쿨타임 : 60초]

콰아아앙!

지혜 10점의 파이어볼이 완드 끝에서 분출했다. 그 화염은 눈앞의 고블린과 그 뒤에 창을 들고 있던 고블린 2번까지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

"끼이이이이이아아아아아악!"

불이 붙은 고블린 둘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그것은 마치 지옥이 뿜어내는 비명 같았다.

잠시 후에 그들이 축 늘어진 다음.

"헉···!"

비로소 나는 긴장으로 막혀있던 숨이 탁, 하고 터졌다. 마치 댐이 무너져서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입에서 날숨이 꿀렁거렸다.

"헉······. 헉······."

목이 따끔하다. 고블린 1번이 파이어볼에 처맞고 날아갈 때 그놈의 칼끝이 내 목을 얼마간 파고들었던 것이다. 찢어진 틈에서 피가 흘러서 뜨거웠다.

'죽을 뻔했다.'

미친.

죽을 뻔했다고!

태어나서 처음 겪어본 죽음의 공포에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추운 날 오줌 싸면 부르르 떠는 거랑 같은 수준으로.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거렸다.

"흑······흑흑."

뒤에서 엘프녀가 우는 소리가 났다.

나는 울지 않았다. 그 대신 새삼 다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대체 나한테 왜 지랄이야.'

그 쓰레기 같은 게임 클리어한 게 무슨 잘못이라고!

엄한 사람을 여기로 끌고 와서 이딴 진창에 처박아놓은 신인지 개발자인지 우주 물리학의 어떤 쓰레기 같은 법칙인지를 저 고블린처럼 태워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 과정에서 부정 다음이 분노라고 했던가?

고백하건대 처음 마법 대학에서 완드를 집어들고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부정을 실컷 했다.

이건 멍청한 악몽의 하나일 거라고. 곧 깨어날 거라고. 이건 말도 안 된다고.

그리고 이제는 분노의 턴이다. 왜 하필 나야! 난 착하게 살았잖아! 하는 분노가 불처럼 들끓었다.

'침착하자.'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악을 썼다. 침착해야 한다. 냉정해야 한다.

나는 절대로 분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을 거다.

난 절대로 죽지 않는다.

나는 턴제 마스터를 깨고 개발자 난이도에 도달한 플레이어다. 이 게임의 마법사 육성의 달인이다. 나만의 빌드업으로 그 누구보다도 이 마법사를 잘 키워낼 수 있는 사람이 나다.

나는 반드시 여기서 살아남을 거다.

***

머리가 좀 식으니까 보다 구체적인 계획이 서기 시작했다.

일단 턴제의 모래시계.

그 용법을 알려주는 친절한 메시지가 떠 있었다.

[턴제의 모래시계는 60초에 한 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법은 모래시계를 뒤집는 것입니다.]

[턴제의 모래시계는 응급 상황에서 자동 발동됩니다.]

홀로그램으로 된 마법 모래시계가 일정한 거리에서 나를 따라왔다.

언제든 그걸 뒤집기만 하면 60초의 시간을 벌고 전략을 짤 수 있다.

뒤집는 방법은?

손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겐 보이지도 않고, 나도 만지는 것 자체가 안되는 물건이니까.

다행히 손대는 것보다 사용법은 더 간단했다.

그냥 뒤집겠다 마음을 먹는 것.

그거면 모래시계를 발동할 수 있다.

'이거면 당장 죽을 위험은 없다.'

다만 항상 무적은 아닌데, 모래시계는 한 번 쓰면 60초를 기다려야 다시 재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모래시계는 발동 이후 재발동할 때까지 60초의 대기시간을 갖습니다.]

아까 고블린 둘을 처치한 후에도 '모래시계가 다시 뒤집어졌습니다'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실제로 마법 모래시계는 그때 뒤집어져서 모래가 반대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쿨타임으로 보건대 아마 실제 전투에서 모래시계를 쓸 수 있는 횟수는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

이제 모래시계의 남은 쿨타임은 17초.

가능하면 이 시간을 모두 소진한 다음 움직이는 게 좋겠군.

이전에는 다들 멘붕한 상태로 멍청하게 있다가 불시의 습격을 받은 것이지만, 이제부턴 사방을 경계하면서 진행해야겠다.

난 어떻게든 출구 게이트를 찾아내 탈출할 것이다.

난 절대로 죽지 않을 거다.

'그리고 파밍.'

마법 대학에서 주는 초반 완드는 각자 1등급 마법이 하나씩 담겨 있다.

내 것은 '파이어볼'이었고, 뚱뚱이의 것은 '염력', 광신도의 것엔 '얼음송곳'이 담겨 있었다.

난 그들의 완드를 챙겼다.

"이 중에 쓰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니요······."

엘프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쪽은 완드에 무슨 마법 들어 있어요?"

"번개 쇼크요······."

"몬스터가 가까이 붙으려고 하면 그거 쓰세요."

"네······."

고블린 시체에서 마석 두 개, 아군 시신에서 감자 두 알을 챙겼다.

나는 엘프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갑시다."

솔직히 전력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

엘프녀가 정신을 놔버린 줄 알고 약간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괜찮았다. 그녀는 10분 쯤 걷자 아주 미약하게나마 활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내게 이런 질문을 던져왔다.

"왜 우리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이런 짓이요?"

"비싼 돈 주고 노예로 사들여서 청소나 빨래 같은 걸 시킬 줄 알았어요. 왜 우리를 미궁에 보내는 걸까요······?"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게임 시나리오상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생성하는 시점보다 몇 년 전.

미궁이 분출했다.

그로 인해서 수많은 모험가들이 죽었다. 이제 마법 대학의 마법사는 턱없이 모자란다. 그래서 마법 대학은 미궁 탐험 마법사를 속성으로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대량의 노예들을 미궁에 던져넣고 살아남는 사람을 마법사로 키우기'였다.

그 근거 첫 번째. 완드 하나 들고 미궁에 들어가서 출구를 찾아 나올 정도면 미궁 마법사로서 재능이 출중하다고 볼 수 있다.

근거 두 번째. 노예의 몸값은 매우 싸다. 엘프녀 기준에서나 '비싼 돈'이지, 마법 대학이 한 해 굴리는 자본을 기준으론 푼돈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지식들을 엘프녀에게 나눔하진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이 이곳 세계와 백 퍼센트 일치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낯선 세계에서 살아남는 최선의 방법은 침묵하는 것이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엘프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중에 누가 살아 나오는지 내기라도 하나 보죠."

열패감에 찌든 평범한 인간 노예가 동료 노예에게 분을 털어놓듯 할 만한 답변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라는 그녀의 질문에도 내 대답은 망설여졌다.

가능하면 그녀와 인간적인 대화를 섞고 싶지 않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정을 붙이는 것은 질색이다.

하지만 서로 이름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어떤 위급 상황에서 '엘프녀! 바닥에 엎드려!'라고 외칠 수는 없으니까.

"케일럽이라고 부르세요."

계정을 생성할 때 쓴 이름이다.

"그쪽은요?"

"예르닐이에요."

그녀는 내 옆을 쪼르르 따라오며 또 질문했다.

"케일럽 씨는 여기 오기 전엔 뭘 하셨나요?"

이런 질문 곤란하다.

나는 캐릭터 생성 이전의 기억이라곤, 팬티 바람으로 허벅지 긁으면서 개발자 난이도를 켠 게 전부니까.

"케일럽 씨는 과묵하시네요."

내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가 멋쩍어하며 혼잣말을 했다.

"노예상선에서 다른 분들하고는 꽤 살갑게 대화하셨던 것 같은데."

뭐?

그럼 마법 대학에 도착하기 전의 나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이건 좀 걱정스럽다.

여길 탈출한 후에,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저는 동쪽 끝에 요정 숲에서 살다가 플랑도르 시로 갔어요."

예르닐이 묻지도 않은 자기 얘길 시작했고 난 거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마법 대학이 미궁에 처넣는 바람에 생긴 트라우마로 인한 기억 상실.'

이런 변명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여길 탈출하는 것 자체가 고비인데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 일을 걱정할 여력 따윈 없다. 현재에 집중하자고.

"거기서 심부름센터에 취직해서 소포 배달하는 일을 했거든요."

옆에서 떠드는 예르닐의 목소리가 다소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근데 그 심부름센터가 소포로 위장해서 마약을 공급했던 거예요. 저는 당연히 몰랐죠! 근데······결국 마약 운반책으로 몰려서요. 벌금 못 내서 노예가 됐어요."

그 팔자 넋두리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예르닐."

"네."

"조용히 하세요."

짜증부린 건 아니다. 파티를 위한 조언이었다. 소음을 듣고 어떤 몬스터가 찾아올지 모르잖아.

이건 게임하고 달리 실제 상황이라고.

"죄송해요······."

생기가 푹 꺼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새삼 내 실수를 깨달았다.

그녀는 뚱뚱이와 광신도가 죽은 충격으로부터 이렇게라도 벗어나야 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 기구한 운명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이 지옥 같은 상황에 대한 일말의 위로라도 얻어야만 했다.

그녀에겐 지금 이 미궁의 삶을 이어갈 최소한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필요했다.

"······목소리 낮춰서 얘기하면 괜찮아요. 너무 크면 몬스터······."

철컥.

예르닐의 발밑에서 소리가 났다.

[당신의 턴입니다]

[행동력 : ■■■■]

모래시계가 뒤집어졌고 시간이 멈췄다.

"하."

탄식이 절로 터졌다.

"이러지 마 제발."

절망감에 눈을 꾹 감았다.

예르닐이 함정을 밟았다.

3화

함정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실수고 어떻게 교정해야 할까?

예르닐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던 내 첫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입을 진즉에 틀어막아야 했다. 떠들 정도의 여력이 있으면 앞과 발밑과 벽을 한 번 더 살펴보라고. 잠깐이라도 집중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우리는 소풍나온 게 아니고, 미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그렇게 얘기했어야 했다.

'생각하자.'

이 핀치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먼저 상황 분석부터 하자.

지금 우리는 폭이 5미터 쯤 되는 통로에 나란히 서있다.

벽, 나, 예르닐, 벽

······과 같은 순서로.

벽은 중요하다.

미궁 1층 함정 중에는 벽에서 흉기가 튀어나오는 게 많기 때문이다.

인간의 보행 속도를 계산해볼 때, 함정을 밟은 곳에서부터 앞뒤로 1미터 전후가 주된 피격 범위다.

천만다행히도, '눈알을 굴리는 것'은 행동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나는 예르닐 쪽 벽을 필사적으로 탐색했다.

그쪽에는 '구멍'이 없었다.

창이나 화살 같은 게 튀어나오는 분출구 말이다.

그럼 내 쪽은?

내 왼쪽의 벽에서 뭔가가 튀어나올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 내가 하필이면 예르닐한테, 작은 목소리로는 떠들어도 된다고 멍청한 선의를 베풀려던 그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고개를 예르닐 쪽으로 틀어버린 채, 모래시계가 발동된 이 상태에선 내 왼쪽을 볼 수는 없다.

[48]

벌써 10초 이상 흘렀다.

'행동력을 쓰자.'

물론 행동력이 아깝긴 하지만, 시간이 더 아깝다. 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서 눈알을 끝까지 굴렸다.

[행동력 : ■■■□]

인간의 시야각은 수평으로 약 200도 정도다. 물론 좌우 끝에 대한 식별 능력은 정면에 비해 크게 뒤처진다.

하지만 내가 찾는 게 벽에 뚫려있는 2센티미터 지름의 구멍들이라면, 러프하게 식별되어도 알아볼 수 있다.

[행동력 : ■■□□]

고개를 30도 정도 돌리자 행동력 2점이 날아갔다. 그리고 내 왼쪽 벽에 대한 정보를 파악했다.

'구멍은 없다.'

이 함정은 벽에서 튀어나오는 종류의 함정이 아니다.

'떨어지는 함정이라면?'

천장에서부터 통나무 같은 게 그네처럼 스윙하며 날아올지도 모른다.

그대로 눈알을 위로 굴려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보이는군.'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인게임에서 내 경험상 천장 함정이 있다면 천장의 모양이 미세하게 달라야 한다.

이제 남은 가능성은 '바닥 함정'뿐인가?

미궁 1층에서 내가 경험해본 바닥 함정의 종류를 머릿속으로 나열해본다.

1번. 솟아오르는 송곳 함정.

송곳이 예르닐의 발바닥부터 발등까지 수직으로 뚫고나와 아작 내버릴 것이다. 내가 다치진 않겠지만 그녀는 제대로 걷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2번. 폭발하는 쇠못 함정.

함정을 밟은 그녀의 왼발뿐만 아니라 하반신 전체, 그리고 그녀의 왼편에 서있는 내 오른쪽 다리 옆면이 전부 걸레짝이 되어버릴 공산이 크다. 내게도 큰 부상이고 그녀에겐 치명상이다.

3번. 가스 함정.

함정을 밟은 그녀의 발바닥 밑에서부터 독가스 또는 수면 가스가 분출되어서 우리를 쓰러뜨릴 것이다. 어느 쪽이든 결국 몬스터의 밥으로 끝나는 엔딩이다.

4번. 낙하 함정.

바닥이 푹 꺼져서 미궁 2층으로 추락하는 것인데, 이 케이스라면 우리에겐 그야말로 일말의 생존 희망도 없다.

'어떻게 할까?'

1번과 4번은 운에 맡겨야 한다. 이미 함정을 밟아버린 이상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하지만 2번과 3번은 다르다.

그 둘은 밟았던 발을 떼어내는 순간 작동하는 함정이다.

모래시계가 풀리면 예르닐은 아마 걸어가던 관성 그대로 발을 떼어버릴 게 분명하다.

어떻게 아냐고?

그녀의 발뒤꿈치가 벌써 올라가있으니까.

[20]

[19]

[18]

1번 함정이 아니라는 근거가 떠올랐다.

바로 모래시계의 작동 타이밍이다.

뚱뚱이와 광신도가 창에 찔려 죽을 때까지 모래시계는 작동하지 않았잖아.

만약 예르닐 발밑의 버튼이 1번 함정이라면, 피해를 보는 건 예르닐 하나뿐이다. 고로 이 이기적인 모래시계가 작동할 리가 없다.

따라서 이것은 2, 3, 4, 셋 중 하나다. 어느 것이든 터지는 순간 내게도 위협적이다.

[6]

[5]

[4]

"아아아!"

짜증이 솟아서 소리를 질렀다.

"내가 밟자."

그 방법뿐이다.

그럼 2번, 3번일 때 터지는 걸 막을 수 있다.

그래도 4번이면 망하는 건 똑같지만, 4번 함정만큼은 제발 아니길 빈다.

나는 남은 행동력을 소모하면서 내 오른발을 예르닐 쪽으로 밀었다.

[행동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턴을 종료합니다.]

탁!

발끝은 아슬아슬하게 버튼 가장자리를 밟았다.

"으악!"

동시에 내 발에 걸린 예르닐이 휘청거렸다. 그녀의 입장에선 내가 갑자기 그녀의 발을 걸어버린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왜, 왜 그러세요······?"

넘어질 뻔했다가 중심을 잡은 그녀가 물었다.

"······예르닐 씨가 함정을 밟았습니다."

"함정이요?"

천만다행히도 4번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바닥이 꺼지지 않았고, 우리는 미궁 1층에 있었다.

그리고 역시 1번도 아니었다. 이건 폭발하는 쇠못, 또는 가스 함정 둘 중 하나다.

"예르닐 씨가 발 떼는 순간 터지는 함정이에요. 안 터지게 하려면 제가 발을 들이밀어서 대신 밟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예르닐은 매우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저······정말요? 죄송해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이런 종류의 함정을 밟았을 때 해결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무거운 물체를 대신 올려놓는 것이다.

"예르닐 씨. 아까 우리가 진행해온 길에 오크통이 두 개 있었어요. 기억나세요?"

"네."

"그것 좀 갖다줄래요?"

***

예르닐이 날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미궁에 대한 그녀의 공포감으로 미루어 볼 때, 마지막 파티원을 잃어버리고 혼자가 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한 악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크통은 우리가 이미 진행해온 길에 있으므로, 그녀가 몬스터와 마주칠 가능성도 지극히 희박하다.

따라서 예르닐은 내가 준 미션을 성공해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대신 발을 들이밀었던 것이지만, 그래도 예르닐이 사라지고 혼자가 되니까 마음이 동요한다.

예르닐이 떠난 후 30분째.

'왜 안 돌아오지?'

불길한 상상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어떤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서 예르닐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어떡하지?

지금까지 진행해온 길에 몬스터는 없었지만, 그 사이에 다른 통로로 들어온 게 있다면?

그래서 예르닐이 그놈들에게 살해당한다면?

'함정이 또 있다면?'

우리가 운 좋게 안 밟고 지나온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르닐이 그걸 밟고 폭사해버리면 어떡하지?

역시 예르닐 대신 함정을 밟아주는 것은 미친 짓이었나?

가스 함정이라면 우리 둘 다 죽었겠지만, 폭발하는 쇠못 함정이라면 나는 살 수 있었다.

예르닐은 출혈이 심해서 곧 죽어버리겠지만, 나는 절뚝거리면서 진행할 수 있었다.

차라리 그쪽에 희망을 걸어봐야 했나?

아니면 대신 밟아준 다음 예르닐을 붙잡았다면? 그녀에게 다시 버튼을 밟으라고 윽박지르고 내가 오크통을 가져오는 건?

그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예르닐이 겁을 먹어서 밟지 않겠다고 저항한다면 협박이라도 하면 된다. 완드 또는 주먹, 어느 쪽을 겨누더라도 겁 많은 그녀는 내 지시를 따랐을 것이다.

그녀를 이 자리에 세워놓고 내가 오크통을 가지러 갔어야 했다.

지나치게 젠틀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온다.

'더 이기적이었어야 했어.'

딱히 그녀를 배려해준 건 아니었지만, 이건 목숨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내 부족한 영악함에 분노와 후회가 들끓었다.

바로 그때.

"케일럽! 가지고 왔어요!"

예르닐이 끙끙거리면서 오크통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너무 무거워서요."

"······."

비로소 내 머릿속의 끔찍한 상상들이 싹 가셨고, 나는 다시 얼마간의 명예와 배려와 리더십을 아는 문명인으로 되돌아왔다.

인간은 영악하고 적응이 빠른 동물이다.

"그걸 제 발 옆에 올려주세요. 이 돌판 타일 위에."

"네!"

그녀와 함께 작업을 끝내고 난 다음.

안전거리를 확보한 나는 마법 완드를 꺼냈다.

뚱뚱이가 가지고 있었던 '염력' 지팡이다. 지금 가진 마법들 중에 가장 사거리가 길다.

"저 오크통을 쓰러뜨려보겠습니다."

함정을 확인해야 한다. 정말 내 계산대로 폭발하는 쇠못 함정 또는 가스 함정 둘 중 하나였는지.

아니면 내 지식과 다른 새로운 함정이 여기에 존재하는지.

후자라면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이 많다. 계산이 훨씬 복잡해질 테니까.

"보이지 않는 손길로 움직여라."

영창을 외자 염동력이 작용해서 오크통의 끝을 툭툭 밀었다.

무게중심을 넘겨서 옆으로 기울어뜨렸다.

쿵.

오크통은 쓰러져서 데구르르 굴러갔고, 버튼에서부터 떨어져 나오자마자······.

콰앙!

강렬한 폭발과 함께 쇠못이 분출했다.

"꺄아악!"

예르닐은 기겁했고, 나는 안도했다.

내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

함정 사건 이후로 예르닐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약간 바뀌었다.

음, 뭐랄까.

연심 쪽이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겠다만, 이건 거의 숭배에 가까운 존경이었다.

그러지 마라.

난 철저하게 내 생각만 했던 사람이다.

오크통을 가져오라고 너를 보낸 다음에도, 네가 버튼을 밟게 해야 했다고 후회한 사람이다.

그리고 더 잔인한 상상을 해보자.

만약 그 함정이 솟아오르는 송곳이었다면? 터져도 다치는 게 예르닐 뿐이었다면?

그때도 나는 위험을 감수하며 대신 밟아주어서 함정 폭발을 멈추었을까?

'글쎄.'

솔직히 자신 없다.

어디까지나 내가 다치지 않기 위해서 발을 들이밀었고, 나 혼자 함정 위에서 쓸쓸히 죽거나, 같이 박살나거나, 둘 다 무사히 살아남거나, 세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도박을 벌인 것뿐이다.

그러니 그녀가 나를 그렇게 존경스럽게 쳐다보면 솔직히 좀 민망하다.

하지만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부분도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녀가 생존을 낙관하게 된 것이다.

내가 고블린 두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함정을 대신 밟아주고 노련하게 처리한 데서 신뢰를 얻은 모양이다.

내 입장에서도 그 신뢰는 나쁘지 않다.

앞으로 예르닐이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줄 테니까.

그건 정말 중요하다.

게임에선 내가 4인 파티 네 명을 전부 조종했지만, 지금은 내 한 몸 움직이기도 빠듯하지 않은가.

내 파티원들이 내 지시에 따라 수족처럼 움직여주는 것은 전투 승리에 있어 필수요소다.

나는 그 정도의 신뢰 관계가 다져진 파티원이 앞으로 반드시 필요하다.

예르닐은 당장 전투력은 떨어지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괜찮아 보였다. 충분히 잘 성장하기만 하면 써먹을 만할지도.

그럼 마법사 말고 다른 걸 시켜야겠지만.

4화

마법대학 노예팀

희망이 보인다.

나 역시 생존을 낙관하게 되었다.

지혜 10점과 턴제의 모래시계의 궁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선공권을 항상 잡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내 파괴력이 미궁 1층 기준으로 웬만하면 원샷원킬이라는 게 놀라울 정도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내가 처음 고블린 둘을 파이어볼로 태워죽인 순간을 기억하는가?

그때 행동력이 한 칸 남아있었던 내 턴은, 파이어볼 영창과 함께 종료됐었다.

그럼 가능성은 두 가지.

첫째. 마법 영창은 행동력을 소모한다.

둘째. 마법 영창은 턴을 소모한다.

답은 예상대로 첫 번째였다.

[당신의 턴입니다.]

[행동력 : ■■■■]

"파이어볼."

[행동력 : ■■■□]

파이어볼을 다시 써보니 행동력은 딱 한 칸 줄었다.

완드 끝에 파이어볼을 마치 이슬처럼 머금은 상태로, 여전히 내 턴이었다.

게임에서도 1등급 마법은 모두 행동력 소모량이 1칸이고, 행동력이 남아있으면 턴은 유지된다.

[당신의 턴입니다.]

그럼 이 상태로 마법을 또 쓸 수 있는가?

쓸 수 있다.

[파이어볼 쿨타임 : 5초]

이 쿨타임만 지난다면 말이다.

모래시계는 한 턴에 60초를 주므로, 그중에서 5초를 기다린 다음.

"파이어볼."

두 번째 파이어볼을 발동해보았다.

'밀려난다.'

첫 번째 파이어볼은 전방 고블린을 향해 10 센티미터쯤 앞으로 이동했고, 원래 그게 있던 자리에는 새로운 불꽃이 피어나서 완드끝에 걸렸다.

[행동력 : ■■□□]

행동력은 또 한 칸 소모되었다.

'이론적으로는 한 턴에 파이어볼을 네 발 쏠 수 있겠군.'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네 발까지 쏠 일이 거의 없다. 왜냐면 조준하는 데도 행동력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처음에 고블린 칼에 내 목이 잘려나갈 뻔했을 때, 나는 완드로 막으려다 포기했었다. 팔을 3센티미터만 움직여도 행동력이 한 칸 날아갔기 때문이다.

신체의 움직임은 행동력 소모량이 극단적이다.

즉, 지금처럼 고블린 둘이 서로 꽤 떨어져있다면, 나는 손목을 돌려서 완드 끝을 조정하는 데 행동력이 다 날아가버린다.

따라서······.

"얼음송곳."

나는 왼손에도 완드를 들기로 했다. 광신도의 것이다.

[행동력 : ■□□□]

이러면 고블린 둘에게 각자 마법을 모두 배치하고도 행동력이 남았다.

몸을 움직여서 턴 종료.

[행동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턴을 종료합니다.]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면 갑자기 소환된 불덩어리 두 개와 얼음 송곳이 불과 얼음의 마법 쇼를 펼친다.

펑! 퍼벙!

방패가 날아가고 불타버리고 얼음에 꼬챙이가 되어버리는 고블린들.

모래시계는 최고다.

***

"케일럽은 초고속 시전 재능이 있나봐요."

고블린들의 사체에서 마석을 주우면서 예르닐이 말했다.

"그게 뭡니까?"

진짜 몰라서 물어보았다. 게임할 때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초고속 시전은 마법을 하나 쓰고 다음 마법까지 딜레이 시간이 짧은 거예요. 아주 재능 충만한 마법사들이 가끔 엄청나게 집중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한대요."

"그래요?"

"게다가 무영창으로 시전하는 재능도 있는 것 같아요. 보통 이만한 재능은 하나만 있어도 상위 0.1퍼센트라던데, 동시에 두 개나 갖고 계시다니."

"······."

본의 아니게 재능충이 되어버렸다. 사실 내 턴일 때 해치운 것뿐인데.

"그래서 케일럽은 완드 두 개가 잘 어울려요."

그녀의 얘기에 따르면 쌍수완드는 매우 다루기가 어려워서 마법사들 중에서도 천재 소리 듣는 사람들이나 쓰는 방식이란다.

내 지식으로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게임상에서도 쌍수완드를 쓰는 마법사는 거의 없었다.

NPC 중에서도 극히 드물고, 플레이어 중에서는 전무했다.

왜냐?

마법사는 워낙 물몸이기 때문에 완드+방패로 방어력을 챙기거나, 아예 양손 스태프를 들어서 근접 대응력을 갖추는 빌드가 정석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고행 난이도부터 그 한계를 체감했다.

그래서 쌍수완드 빌드를 개발한 것이다. 완드에 붙어있는 치명타 증가와 지혜 증가를 이중으로 챙겨서 공격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그럼 진짜 물몸 중의 물몸이 되지만, 맞기 전에 죽인다는 마인드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게임이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도 비슷하다.

한 턴 안에 최대한 많은 마법을 써서 다 죽여야 내가 산다.

그러니까 쌍수완드를 쓸 수밖에.

"저, 혹시······. 이 방패 제가 써도 돼요?"

예르닐이 고블린 방패를 가리켰다.

쌍수완드 같은 광기어린 빌드에 그녀는 관심이 없었다. 방패를 한 손에 들어서 좀 더 안정적으로 진행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안 돼요."

그러나 그녀에겐 방패가 적절하지 않았다.

"왜, 왜요······?"

예르닐은 예상 밖의 대답이었는지 조금 당황했다.

안 되는 이유는 예르닐의 근력이 후달리기 때문이다.

방패를 써봤자 한 대 맞으면 못 버티고 방패째로 날아가 버릴 공산이 크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오크통 가져오는 데 한참 걸렸으니까.'

그 거리와 시간을 계산해볼 때, 아마 오크통을 가져올 당시 그녀는 게임적 표현으로, '무게 초과' 상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그녀의 근력은 3점 미만이다.

그럼 나머지 스탯은?

이참에 한 번 확인해보자.

"예르닐. 벽에다가 번개쇼크 마법을 써보세요."

콰지직!

완드에서 분출한 번개의 위력은 형편없었다.

그녀는 지혜도 기껏해야 1~2점이다. 어쩌면 0점.

그럼 남는 것은 민첩, 건강, 솜씨인데.

"예르닐, 점프해볼 수 있어요?"

약간 멍청해보이는 질문을 했다.

"점프요? 그야, 당연히······. 할 수는 있죠. 점프는."

"최대한 높이요."

"최대한 높이······."

예르닐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

"천장이 너무 낮아요. 머리 박을 것 같은데······."

천장 높이는 약 3미터 정도 된다.

서전트 점프로 저기에 머리를 박는다고?

잠깐만.

"몇 미터 정도 뛸 수 있어요?"

"요정숲에 있을 때는 나무 위로 점프할 때, 한······. 으으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하다 대답했다.

"4미터? 정도?"

됐다.

힘은 3점 미만, 지혜도 1점 이하. 민첩은 최소 5점 이상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포지션을 새로 잡는다.

"예르닐."

나는 그녀에게 고블린 궁수의 활과 화살을 건네주었다. 얼음송곳을 맞고 죽어버린 그놈의 것이다.

"이걸 써보세요."

예르닐은 어깨에 화살통 끈을 묶고 활을 들었다.

"이것도 쓰세요."

이어서 나는 일찍이 주워놨던 고블린 도적의 단검도 그녀에게 보조 무기로 건네주었다. 예르닐은 허리띠와 바지 사이에 단검을 끼워 넣었다.

그녀의 모습이 어설픈 레인저처럼 바뀌었다. 마법사보다는 이쪽이 백배 낫다.

"번개쇼크 완드는 제가 쓸게요."

그녀에게 완드를 넘겨받았다.

이로써 나는 우리 파티원 네 명의 완드를 싹 다 수집한 완드 콜렉터가 되고 말았다.

한 개만 더 모으면 타노스로 변신해서 핑거스냅도 할 수 있을 것 같군.

허리띠 사이에 완드를 끼워놓는데, 예르닐이 말했다.

"사실 저도 활이 더 편해요."

예르닐이 말했다.

"그래요?"

"요정숲에서는 가끔 썼거든요."

그래서 활이며 단검이며 챙겨주는 걸 순순히 받아들였구만.

그럼 왜 처음에 방패를 들겠다고 한 걸까?

"그게······. 완드 말고 다른 무기를 쓰면, 탈출해도 마법 대학이 쓸모없다고 생각해서 이상한 데 팔아버린다고 해서······."

"어디다 팔든 미궁보다 나쁘겠어요?"

"그도 그래요. 근데 이유가 또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뭔데요?"

"저는 잘 모르긴 하지만······. 누군가 방패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미궁 탐험에서 탱커는 필수라던데요."

기특하구나 예르닐.

원딜에 자신있고 마법사로 시작했지만 몸소 탱을 서주시겠다?

"케일럽이 마법 쏠 때까지 시간을 벌어줘야할 것 같아서······."

"하지만 지금은 탱커가 없어도 돼요."

나는 그녀의 자기희생(?)을 거절했다.

이유는 크게 둘.

하나는 미궁 1층을 기준으로, 지혜 10점의 마법사한테 웬만한 필드 잡몹들은 원샷원킬이라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모래시계가 어지간한 기습은 전부 커트해서 선공권을 쥘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등 뒤에서 공격당한다면 낭패겠지만, 이건 예르닐이 방패를 들어도 마찬가지로 대처하지 못한다.

그러니 차라리 원거리 공격력을 더 높여서 전방의 적이 달라붙기 전에 제압하는 게 낫지.

"갑시다."

***

마법 대학의 다른 노예팀.

그들은 일반적으로 위험하다.

그들 대부분이 별도의 준비 없이 미궁에 내던져졌으므로, 대부분 처음 몇 시간 안에 죽거나 자포자기한다. 예르닐이 주저앉았던 것을 상기해보라.

그 시기를 지나서 이 시점이 되면, 대개 분노만 남아서 악다구니를 쓰게 되어 있다.

게다가 원래 범죄자였던 놈들이다. 예르닐도 마약사범(?)이었듯이.

그러니까 위험할 수밖에.

미궁 1층에 들어온 지 네시간 반.

"······."

나와 예르닐은 노예팀 하나와 대치하고 있었다.

상대는 인간 남자 네 명.

마법대학에서 준 완드와 고블린 칼과 방패 등으로 무장하고 있고, 활을 든 놈도 있었다.

서로 10여 미터 거리를 두고 경계하면서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한다.

완드를 쥔 양손에 땀이 찬다.

무기를 먼저 겨누면 저쪽에서도 위협을 느끼고 공격해올 수 있으므로 내려둔 상태지만, 손목에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언제든지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눈 떼지 마요."

마치 산을 오르다가 맹수를 마주쳤을 때 대처법처럼, 서로를 빤히 쏘아보면서 천천히 옆걸음질, 뒷걸음질로 이동했다.

서로 충분히 멀어지자 경계가 천천히 풀렸다.

멀어져가는 놈들이 우리를 힐끔거리면서 계속 속닥거렸다.

"빨리 갑시다."

이놈들하고 거리를 벌리고 싶었다.

그리고 예르닐과 함께 40분쯤 이동했을 무렵.

"케일럽."

예르닐이 나를 불렀다. 사뭇 불안한 표정이다.

"아까 그 남자들이 우리 쫓아오는 것 같아요."

"네?"

"그 남자들 발소리가 들려요. 중간에 방향을 튼 것 같아요. 우릴 뒤쫓고 있어요."

"······."

나는 전혀 안 들린다.

물론 이 게임엔 민첩 스탯의 차이에 따라 청력이 달라진다는 설정이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예르닐. 눈 감아봐요."

그녀가 눈을 감자, 나는 돌 세 개를 집어서 그녀의 등 뒤에 던졌다.

따닥!

"돌이 몇 개 떨어졌는지 알겠어요?"

"세 개?"

"······."

확실하다.

예르닐은 특수능력으로 '사운드맵핑'을 가지고 있다. 소리를 듣고 대상의 위치나 움직임 등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럼 아까 노예팀이 우릴 쫓아오는 것 같다는 그녀의 말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망할.

그 새끼들 어째 느낌이 쌔하더라.

"몬스터랑 마주친 상태에서 뒤를 잡히면 진짜 위험하니까, 차라리 해결을 보고 갑시다."

나는 예르닐을 데리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따라오세요."

바로 앞에서 적당한 지형을 봐뒀다.

커다란 기둥이 두 개 있는 가로세로 10여 미터의 넓은 공간.

적들이 우리를 뒤쫓아서 들이닥칠 진입로에는 바닥이 우묵하게 파여있고, 물이 고여 있었다.

수면의 높이는 기껏해야 20 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웅덩이였지만.

"적들이 저리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요. 기둥 뒤에 숨어서."

예르닐과 함께 몸을 숨기고 잠복한 채 잠깐 기다렸다.

저벅, 저벅.

이제 그들의 발소리가 내 귀에도 들렸다.

예르닐은 엄청나게 긴장해서 거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나도 비슷할 것이다.

'왔다.'

이윽고 통로에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잠깐 망설이다가 물을 찰박거리면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타이밍에 맞춰서 재빨리 튀어나갔다.

"멈춰!"

냅다 소리를 질렀다. 나는 완드 두 개 쌍권총처럼 겨누었고, 예르닐은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놈들은 방패 두 개를 앞세워 전방을 막은 채로 뒤에서 화살과 완드를 겨누었다.

"왜 우릴 쫓아오지?"

다른 노예팀이 지랄하는 경우는 보통 식량 때문이다.

마법 대학에서 식량이랍시고 나눠준 삶은 감자를 뺏으려고 다른 파티를 죽이려는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처음 봤을 때 옆구리의 감자봉투가 봉긋했다. 그럼 식량 때문에 목숨 걸고 다른 파티를 습격하진 않을 것이다.

그냥 싸이코패스 살인광일 가능성?

없진 않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자기들끼리 안 죽이고 배겼을까.

그럼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인데, 설마······.

"너."

방패 뒤에서 대머리가 말했다.

"그 엘프 계집을 넘겨."

"······!"

예르닐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럴 줄 알았다.

인간은 극한의 스트레스와 절망에 빠지면 말초적인 흥분으로 위안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법도 도덕도 없는 미궁 속이라면, 특히 제대로 된 모험가가 아니라 이런 전과범 노예 팀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년만 넘기면 넌 살려주지."

대머리가 엄포를 놓았다.

5화

마법대학 노예팀 (2)

대머리는 그쪽 노예 파티의 대장으로 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나와 싸우기보다는 나를 포섭하는 쪽으로 전략을 짜놓고 찾아왔다.

좔좔 쏟아놓는 논리가 청산유수다.

"어차피 1등급 마법으로는 이 방패를 못 뚫어."

잘못된 정보지만 지금은 맞는 말이다. 1등급 마법으로 고블린 방패를 파괴하려면 지혜가 13점을 넘어야 하니까.

"그 이쑤시개 같은 화살도 마찬가지고."

대머리가 예르닐이 든 화살을 가리켰다. 이번에도 맞는 말이었다. 화살은 방패에 튕겨져 나오거나 꽂히거나 할 것이다.

"너희 무기가 그게 전부라면, 이 방패 너머로 우릴 공격할 방법은 없단 소리야."

이것도 그럴싸한 겁박이다.

고블린 놈들이야 방패를 쓸 줄 몰라서 제멋대로 들고 뛰어다니는 걸 빈틈 노려서 요격할 수 있다지만, 저렇게 시위대 앞에 배치된 전경처럼 방패를 배치하면 까다로운 게 사실이다.

"그리고 네가 뭔가 영창을 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 궁수가 네 미간을 뚫어버릴 거다."

대머리가 자기 팀 궁수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이대로 싸우면 너희한테는 승산이 하나도 없다는 소리야. 잔대가리 굴리지 말고 그냥 그 엘프 계집만 넘기면 돼. 그럼 넌 곱게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지. 그것도 아니면······. 그년 빼고 5인 파티를 새로 짜는 방법도 있어."

전의를 꺾은 다음 포섭으로 넘어간다.

"그게 너한테도 유리할걸? 그 엘프 계집보다는 남자 넷이랑 같이 다니는 게 안전하지 않겠어?"

아니.

나는 예르닐을 불침번 세워놓고 잠을 잘 수는 있지만, 너희를 믿고는 절대 한숨도 못 잔다.

하지만 그 협박이 우리를 갈라치기하는 용도로 예르닐에게는 꽤 먹혔는지, 그녀는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날 곁눈질했다.

"케, 케일럽······?"

"어때? 우리랑 합류해서 다섯이 파티를 새로 짜자고. 너한테도 좋은 조건이야. 지금까진 동료가 그년 하나뿐이라 못 건드렸겠지? 이제는 네 맘껏 해도 좋아."

"······."

"우리는 솔직히 이 미궁에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놈들이라고.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이런 찬스를 놓치지 마."

예르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주춤거리면서 내게서 반걸음쯤 떨어져 나갔다.

이제 슬슬 예르닐의 불안을 덜어줘야겠다.

대머리가 떠드는 걸 잠자코 들어준 건, 그 시간 동안 놈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더 파악할 건 없는 듯하니.

"개소리 집어치우고 지금 물러가면 살려는 주겠다."

최대한 단호한 어조로 대머리에게 경고했다.

"푸하하하!"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지?"

"진심이다. 이게 마지막 기회야."

그것은 내가 베풀 수 있는 최후의 인간성이었다.

아무리 거지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하더라도 반나절 전까지 현대인이었던 내게 살인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살인의 부담감에 질려서 이런 상황에 쩔쩔맬 생각은 없다. 공포 영화 보면 그런 놈들이 젤 먼저 죽잖아.

이곳에서 잠깐의 망설임은 치명적이다. 나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만약 여기서 죽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너희여야 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순간 너희를 죽여버릴 것이다. 진심이다. 나는 이미 각오가 섰고 언제든 너희의 뻔뻔한 얼굴에다 파이어볼을 박아버릴 수 있다.

놀랍게도 내 멘탈은 침착하고 냉정했다. 마치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그 비정한 각오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나 스스로가 낯설 정도로.

"하아."

대머리가 머리카락도 없는 정수리를 긁적였다.

"어쩔 수 없구만. 죽여."

그가 궁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활시위를 놓을 수 없다.

[당신의 턴입니다.]

[행동력 : ■■■■]

내 턴이었으니까.

***

감전.

이 게임의 상태이상 중 하나다.

번개 쇼크 마법으로는 한 번에 하나밖에 감전시키지 못하지만, 물이 있으면 또 얘기가 다르다.

솔직히 말해서 게임에서처럼 완벽하게 작동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해본 이 세계는 게임의 룰을 거의 100%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 물리를 가정하더라도 당연히 순수한 증류수가 아닌 이상 저런 웅덩이에는 전기가 통하겠지.

"번개쇼크."

먼저 예르닐한테 받은 완드로 번개 마법을 쓴다. 목표 지점은 물웅덩이.

빠직!

번개는 사거리가 짧은 대신 '투사체'가 아니라서 공격이 즉발적이다.

새파란 전류가 완드에서 튀어나가 바닥의 물웅덩이까지 연결되었다. 흡사 파란 줄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턴이 종료되자마자 적들을 감전시킬 것이다.

그럼 방패도 활도 완드도 모두 떨굴 수밖에 없겠지.

[행동력 : ■■■□]

남은 행동력은 3점.

방패가 떨어질 것을 감안하며 하나씩 마법으로 저격한다.

"파이어볼."

[행동력 : ■■□□]

다만 첫 번째 파이어볼은 물웅덩이를 향해서 배치해놓았다.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49초]

쿨타임을 기다린 다음.

방향을 조정해서 첫 번째 방패 너머의 대머리를 겨누었다.

[행동력 : ■□□□]

"파이어볼."

번개쇼크 한 방과 파이어볼 두 발을 배치했다.

[행동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턴을 종료합니다.]

***

그 번개는 '빠르다' 같은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의하고 있었는데 놓쳤다'거나, '너무 순식간이라 대처를 못했다'거나, 그런 종류가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몰랐는데 사실 이미 번개를 맞은 후였더라' 같은 느낌이었다. 이미 던져진 주사위를 사후에 확인한 것에 더 가깝다. 턴제 게임에서 상대에게 공격당하면 내 턴이 시작될 때는 이미 피격된 후인 것처럼.

적들은 심지어 잡아당긴 활시위를 '놓을 틈'조차 없다.

"끄르르륵!"

이상한 신음과 목에 선 핏발.

발등과 발목을 타고 네 사람을 감전시킨 고압 전류는 근신경을 마비시켰다.

그들의 몸뚱이는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뒤로 기울었다.

칼과 방패와 완드를 쥔 상태 그대로. 활에 활시위를 메긴 자세 그대로.

하지만 감전 상태는 길지 않다.

첨벙! 하고 웅덩이 속에 몸이 처박힐 때면 서서히 감각이 돌아올 것이다. 그 증거로.

퓽!

마침내 시위에서 해방된 화살이 발사되었다. 감전으로 인한 마비가 풀리면서 근신경이 이완되고 시위를 놓아버린 것이다.

탁!

하지만 이미 방향이 심하게 어긋난 화살은 돌천장에 부딪혔다.

그리고 시위를 놓은 것처럼 고블린 방패와 칼, 완드 따위의 무기들도 힘이 풀린 손아귀에서 우르르 떨어지는 게 보였다. 무장 해제된 적들을 향해.

콰광!

파이어볼 두 발이 작렬한다.

한 발은 방패를 떨어뜨린 대머리에게, 또 한 발은 물웅덩이로.

고열에 갑자기 끓어버린 물웅덩이에서 먼지 섞인 수증기가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아악!"

"뭐야!"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수증기 너머에서 비명이 쏟아진다.

완벽하게 판이 뒤집어졌다.

"안 보여!"

증기 때문에 적들은 시야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흩어져!"

사방으로 첨벙첨벙 물이 튀기는 소리가 난다.

나 역시 증기 속에 있는 그들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예르닐!"

우리 팀엔 사운드맵핑 궁수가 있다.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면서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쏴요!"

다행히 예르닐은 헤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퓽!

"크악!"

증기 속에서 모든 캐릭터는 실명 상태가 되지만, 사운드맵핑 특수능력 보유자는 해당 사항 없다.

'예르닐은 실명 상태여도 공격 범위가 확보된다.'

그래서 이 작전을 짰다.

"전부 쏴버려요!"

내 마법의 쿨타임은 5초. 모래시계가 끝났기 때문에, 실제 시간 속에서 쿨타임 회복을 기다려야 한다.

증기는 5초 이상 가지 않을 것이다. 벌써 가라앉기 시작했다.

저게 끝나기 전에 예르닐이 최소한 하나 이상 잡아줘야 한다.

내 파이어볼이 대머리를 태워버리는 데 성공했다면, 예르닐이 한 명은 처치해야 2대 2 상황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해도 사실 희망적인 전개는 아니다.

-퓽!

왜냐면 나는 지혜만 찍은 마법사고, 예르닐도 근접 전투는 취약한 궁수이기 때문이다.

반면 저쪽에는 고블린 칼을 든 전사가 있다. 물론 스탯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보다는 힘이 세겠지. 이 거리라면 증기가 가라앉고 우리한테 접근하면 끝장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파이어볼 완드에 불빛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쿨타임 남은 시간 아마 2초 남짓.

시발 5초가 이렇게 길 줄이야!

증기 속에서 시체가 된 대머리의 다리와 몸통이 식별된다. 이제 증기가 사라지는 것이다.

"전사부터 요격해요!"

최악의 사태를 방지코자 예르닐에게 다시 소리를 질렀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다 죽였어요."

"어?"

아니 잠깐만. 예르닐 너 화살 두 발만 쏘지 않았니?

***

증기가 가라앉은 후에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예르닐의 화살 첫발은 적 궁수의 목에 정확히 꽂혔고, 두 번째 발은 방패 전사의 경동맥을 찢어버리고 날아가서 그 뒤의 마법사 목에 꽂힌 것이다. 그래서 화살 두 발로 트리플킬.

감전 이후 공황 상태에서 일어나는 전사와 마법사의 위치와 각도가 공교롭게도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실제 게임에서도 관통 히트 또는 도탄 히트 같은 판정이 있긴 하다만 이렇게 될 줄이야.

예르닐 너······너 좀 무서운 애였구나?

"커헉!"

대머리가 피를 한 움큼 토했다.

"살아있었군."

이제 보니, 예르닐이 3킬, 나는 0킬이었다.

"기절······했었나······."

쇼크로 기절했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양팔이 다 날아가버렸으니까.

그는 방패를 떨어뜨린 후에 날아오는 불꽃을 보고는 반사적으로 팔을 X자로 교차해서 막으려고 했는데 덕분에 팔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누가 손대지 않아도 이미 죽기 직전이었다. 대머리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충혈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너······너 대체 뭐냐······."

출혈로 인한 한기에 몸을 떨면서.

"무영창으로 마법을 쓰잖아······?"

역시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이놈이 물웅덩이에 발을 담근 채 허세를 부린 이유도 아마 그것이었겠지.

'번개 쇼크'를 영창하는 사이에 화살이 날아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영창 소릴 듣지도 못하고 당해버렸으니 대머리 입장에선 억울할 만하다.

"게다가······마법 세 발을······딜레이도 없이······동시에······. 흐, 흐흐흐! 콜록."

그는 기침을 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세상 존나······ 불공평하네······."

대머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누군 시발······. 마법 재능 없어서 파문당하고 노예가 됐는데 누군······. 쿨럭! 초고속 시전자에 무영창 재능충······헉! 쿨럭."

대머리가 예르닐하고 똑같은 얘길 했다.

"거기다······. 여자까지 끼고 크흐흐흐. 인생 개같네······."

그의 호흡이 점점 느려졌다. 눈꺼풀에서 힘이 점차 빠지고 있었다.

"마법대학······새끼들이······ 좋아하겠······."

대머리의 숨이 멎었다.

"케일럽······."

예르닐이 내 눈치를 보면서 갑자기 대뜸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뭐가요?"

"살아있는 줄 몰랐어요."

"······?"

"아까 제가 다 죽였다고 했잖아요······."

아.

그때 잘못된 정보를 줬으니까 미안하다고?

"괜찮습니다. 다음에는 확인 사살까지 부탁해요."

"네······."

그녀는 긴장이 풀리자 어깨가 심하게 떨렸다.

"사람······쏜 건 처음이에요······."

"······저도 사람한테 마법 쏜 건 처음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침착했다.

나 사실 싸이코패스였나?

의심이 들 정도로.

현대에서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면 멘붕이었겠지만, 이 정신나간 게임의 미궁 속에서 벌어진 이 상황은 뭐랄까.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오히려 놀랍지도 않은?

그런 기분이다.

고블린한테 처음 죽을 뻔했을 때와 크게 대비된다. 인간은 그만큼 자기중심적인 걸까?

아니면 미궁에 들어온 후 불과 반나절만에 내 멘탈이 참전 군인처럼 속성으로 강화되고 있는 걸까?

다만 심경은 무디더라도, 코끝은 지독하게 비리다.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와 거기 섞인 피비린내.

단언컨대 내가 맡아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역겨운 냄새였다.

***

놈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을 싹 다 빼앗았다. 완드 네 개와 감자가 든 봉투, 그리고 침낭이 결합된 커다란 배낭 하나.

"이 배낭은 뭐지?"

마법 대학은 노예들에게 이런 걸 준 적 없다. 배급된 건 완드 하나와 감자봉투 하나가 전부였다.

"다른 모험가의 물건을 빼앗은 게 아닐까요?"

예르닐의 생각이 아마 맞을 것이다.

배낭을 열어보았더니, 안에서 수저통, 손수건, 열쇠고리, 성경, 작은 프라이팬 하나, 물병 하나, 힐링 포션 한 개, 큼직한 빵과 베이컨, 버터가 한 덩어리씩, 그리고 다목적용 나이프와 로프와 지갑이 나왔다.

지갑을 열어서 신분증을 꺼내보았다.

[애비슨]

-위 인물이 F등급 모험가 자격을 갖추었음을 확인함.

-미궁조합원장 (인)

해쓱한 인간 남자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 배낭의 진짜 주인으로 보였다

아마 자기 파티가 있었는데 미궁을 탐험하다가 사망해서 버려졌거나, 낙오되어 혼자일 때 살해당했을 것이다.

미궁에서 죽음은 흔하다.

F급 모험가가 아니라 S급 모험가여도 언제 어떻게 비명횡사할지 아무도 모른다.

게임할 때도 각종 기가 막힌 방법으로 게임오버 되는 경우가 흔했지.

예컨대 대머리.

그 역시 같은 노예한테 자신이 죽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아까 전의 대화로 미루어볼 때, 그는 마법 대학의 학생이었던 모양이고, 전투에 대해서도 꽤 지식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비쩍 마른 인간 하나와 엘프 하나쯤, 쉽게 처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게임이었다면 난 어땠을까?'

대머리는 물웅덩이에 진입한 순간 패색이 짙어졌다. 나는 과연 물웅덩이에 진입하지 않고 밖에서 웅덩이를 제거하고 들어갔을까?

추적 중인 노예 2인 떨거지 파티의 마법사가 매복하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무영창으로 번개 쇼크를 박아서 감전 상태이상으로 아군의 방패를 떨어뜨리게 만든 다음, 파이어볼을 연속 시전해서 증기로 가둬놓고 사운드 맵핑 엘프 궁수한테 요격하게끔 지시하는 경우의 수를 고려한다?

그럴 리가.

그냥 빠른 진행을 위해 들어갔겠지.

나 역시 대머리와 똑같은 꼴이 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 반대 위치에 있었다면.

쓰벌. 갑자기 생존 난이도가 한참 올라간 기분이다.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은 그저 운빨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 모래시계라는 이레귤러 특성의 운빨.

이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모든 전투는 확실하고 완벽해야 한다. 모든 전략은 철저하게 짜맞춰진 것이어야 한다. 심지어 내 목숨이 달린 문제잖아!

그걸 못하면 대머리 꼴이 나는 거다.

정신 차리자. 더 집중하고 더 많이 생각하자.

나는 애비슨의 신분증을 배낭에 넣었다.

사망해서 버려졌건, 낙오되어 사망했건, 어느 쪽이건 그 역시 지금쯤 역겹고 비릿한 냄새를 풍기고 있을 것이다.

가급적 그 시신과 조우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다.

6화

레벨업하는 꿈

미궁에 들어온지 열두 시간 째.

우리는 고블린을 20마리 정도 잡았고, 배낭에 마석이 꽤 모였다.

그리고 슬슬 체력적으로 한계다.

휴식이 필요했다.

"좀 쉽시다."

"정말요?"

내 말에 예르닐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노예팀과의 전투 후에 줄곧 우중충하다가 갑자기 생기가 돈다.

너 표정이 아주 투명하구나?

"식사하실래요?"

그녀가 물었다.

"그럽시다."

애비슨 씨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그가 좋은 곳으로 갔길 기도하면서 배낭을 열었다.

근처에서 편평한 돌을 몇 개 주워다가 받침을 만들고, 그 아래에 나뭇가지를 갖다대고 불을 피웠다.

프라이팬을 거기다 얹은 다음 베이컨을 구웠다.

그 사이 예르닐은 빵 사이에 정성스럽게 버터를 발라서 내게 내밀었다.

"케일럽 드세요!"

"고마워요."

현대인 기준으로 엄청난 음식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감동적인 식사였다. 버터의 고소한 기름기와 탄수화물이 뱃속으로 들어가니 좀 살 것 같다.

"케일럽."

예르닐이 옆에서 넌지시 말을 걸었다.

"오늘 두 번이나 구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두 번째는 같이 싸운 건데요 뭐. 예르닐이 다 잡았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나 혼자였다면 못 이겼을지도 모른다.

예르닐이 사운드맵핑을 가지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하지만 케일럽이 만약 그 사람들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예르닐은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제가 왜 그러겠어요."

솔직히 너랑 나, 둘 중에 한 명만 살아야 한다면 나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너도 그렇게 할 거잖아.

우리가 서로를 위해 대신 죽어줄 정도의 사이는 아니다.

근데 아까 같은 상황이면 같이 힘 합쳐서 싸우겠지.

미궁에서 믿을 수 있는 동료라는 건 그만큼 중요한 자산 가치니까.

우리는 식사를 마쳤다.

대단치는 않지만 풍족한 식사였다.

수면은 번갈아가면서 취하기로 했다. 배낭에 결합돼 있던 침낭을 풀어놓은 다음.

"케일럽 먼저 주무세요!"

예르닐의 배려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들어가보니 침낭이 젖어 있었다. 내가 물웅덩이 번개 증기쇼를 벌였던 탓이다.

이거 내 체온으로 말려주게 생겼군. 설마 예르닐의 전략인가? 너 사실 고수였구나? 절대전략 난이도 정도는 그냥 깨겠군.

혼자 머릿속으로 헛소리하며 웃는 걸 보니 내가 피곤하긴 한가보다.

그럴 만하지.

다른 애들은 오전 10시에 미궁에 들어온 것이겠지만, 나는 회사 퇴근하고 밤 11시에 미궁의 심연 개발자 난이도를 켜면서 여기로 왔거든.

체감 시간으론 밤을 꼬박 새운 것과 같았으며, 심지어 고블린, 싸이코패스 살인범들하고 계속 싸워왔으니.

체력도 정신력도 모두 한계다.

침낭에 들어가 눈을 감자마자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휴식 상태에 돌입합니다.]

나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창을 보았다.

[케일럽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Lv.1 → Lv.3

[예르닐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Lv.1 → Lv.3

이 게임의 레벨업 방법은 '잠자기'다.

***

이건 꿈일까?

아니면 진짜로 레벨업 시스템이 제공되는 걸까?

글쎄. 모르겠다.

사방이 모두 한밤중처럼 캄캄하다. 예르닐도, 캠프의 불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둠 속에 둥둥 뜬 채로 상태창을 관찰하고 있었다.

[능력치 포인트 2점을 분배하세요]

[케일럽 Lv.3]

[근력(0), 민첩(0), 지혜(10+2), 건강(0), 솜씨(0)]

지금까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게임적 흐름을 충실히 따라왔다.

이것도 실제 상황일 가능성이 높지.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감격스럽다.

지혜는 왜 10+2점일까?

대강 짐작이 된다. 확인차 손을 가져다 댔더니 아래에 설명이 떠올랐다.

[얼음송곳 완드로부터 +1]

[파이어볼 완드로부터 +1]

장비빨이 확실히 적용되고 있군.

나는 능력치 포인트를 모두 지혜에 찍었다.

『지혜(12+2)』

이제 고블린 방패도 박살낼 수 있다.

그럼 예르닐을 살펴볼까?

[능력치 포인트 2점을 분배하세요.]

[예르닐 Lv.3]

[근력(0), 민첩(8+1), 지혜(0), 건강(0), 솜씨(2)]

와! 예르닐!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구나!

민첩에 붙은 플러스 점수는 고블린 활 때문인 것 같고, 기본 민첩이 8점이라면 엄청나게 뽑기가 잘 된 캐릭터다.

게다가 내 파티 육성법에서 궁수는 솜씨도 조금 필요한데, 그게 이미 찍혀 있다.

스탯 중 단 1점조차 낭비된 게 없다니!

게임을 하다가 목숨을 담보로 미궁에 처박힌 놈의 팀 운이라기에는 괴상할 정도로 좋다.

나는 그녀의 능력치 포인트를 전부 민첩에 찍어주었다.

그리고 상태창에서 특수능력 탭을 살펴보았다.

-특수능력 : 사운드맵핑

(해당 능력은 소리를 통해 대상의 숫자와 위치 등을 파악할 수 있으며, 실명 상태일 때 대상에 대한 명중률을 정상값으로 보정해줍니다.)

역시 내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특수능력도 잘 찍혔다.

아니 진짜 괜찮은데?

예르닐, 너 훌륭한 궁수 꿈나무구나?

***

눈을 뜨면 이 지옥에서 탈출해서 내 방 침대 위에 있길 기도했지만, 역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식사를 하고 잠을 좀 잔 덕분에 훨씬 몸이 개운했다.

"이제 예르닐이 자세요."

"고마워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뭐하세요?"

좀 떨어진 곳에 고블린 방패를 세워놓고 파이어볼 지팡이로 겨누었다.

"검증이요."

"검증?"

"파이어볼."

콰광!

불벼락이 날아가 방패를 박살내버렸다.

고블린 방패는 지혜 13점부터 부술 수 있다.

역시 내가 방금 겪었던 레벨업은 꿈이 아니다.

"우와."

침낭 속에서 예르닐이 탄성을 뱉었다.

"방패를 부숴버리다니······."

예르닐은 갑작스런 나의 방패 차력쇼에 관심이 있는 듯 눈을 빛냈다.

곧바로 그 위를 눈꺼풀이 덮어버렸지만.

피곤하긴 했나보군.

그녀는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우리는 2.5시간씩 서로 번갈아가면서 각자 5시간씩 잘 것이다.

시간은 어떻게 재느냐고?

똑. 똑.

천장에 박아놓은 얼음송곳에서 떨어져내리는 물방울로.

저거 한 개가 다 녹는 데 평균 2.5시간이 걸린다.

덕분에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

미궁의 모든 층에는 '출구 게이트'와 '계단'이 있다.

계단은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통로인데, 지금 우리 관심사는 아니다.

우리는 출구 게이트를 찾아야 한다.

게이트의 위치는 랜덤이고, 이걸 찾아내는 작업은 보통 운에 좌우된다.

게임으로 할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운 좋으면 몇 시간만에도 찾고, 운 나쁘면 몇 주 동안 여기 고립될 수도 있다.

그럼 게임하다가 이 개같은 미궁 속에 납치된 빙의자의 운빨은 어느 정도인가?

아마 뒤에서부터 손에 꼽겠지.

예르닐, 미안하지만 네가 들어온 파티는 개쩌는 천재 마법사가 버스 태워주는 파티가 아니라 운빨 최악의 저주받은 파티란다.

우리는 출구 게이트 찾으려면 한 일주일은 삽질을 해야될······걸?

"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찾아버렸다.

[EXIT]

출구룸이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에 게이트가 있을 것이다.

"······."

문제는 출구룸의 문 앞에 이미 모험가들이 모여 있었다는 것이다.

총 세 명.

드워프 남자 전사, 수인 남자 도적, 인간 여자 신관이었다.

장비 수준으로 볼 때 경력이 꽤 있어 보인다. 노예팀 같은 오합지졸이 아니라 제대로 된 파티였다.

"자네들, 마법 대학 노예팀인가?"

드워프 전사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동시에 예르닐이 내 팔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이미 대머리 노예팀한테 곤욕을 치러본 예르닐은 다른 모험가들의 존재 자체가 무서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미궁에서 다른 모험가는 위험한 존재지만, 협력을 할 수도 있다.

일단 저쪽에선 적개심이 보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이쪽이 출구인데 돌아가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마법 대학이 노예팀을 집어넣은 게 언제였지?"

드워프 전사가 수인 도적에게 물었다.

"어제 오전 열 시예요."

인간 신관이 대신 대답했다.

"그럼 하루하고도 한나절이 지났군."

드워프는 나를 물끄러미 훑어보았다.

내 허리띠에는 완드가 무려 여덟 개나 꽂혀 있었다. 하나는 내 거. 세 개는 예르닐, 뚱뚱이, 광신도의 것. 나머지 네 개는 대머리 파티의 것이다.

하지만 예르닐은 완드 없이 활을 들고 있었다.

"엘프는 진즉에 마법에 소질 없는 걸 깨닫고 무기를 바꿔든 모양이고."

드워프가 우리 파티의 지난 하루를 추측하고 있었다.

"인간 남자는 완드를 수집해놓은 데다가 심지어 양손에 들고 있는 거 보니까······. 자네는 마법에 자신이 좀 있나보지?"

"네."

"크흐흐. 겸손 안 떨어서 좋구만. 파이어볼 완드도 있나?"

"네."

그러자 드워프는 자기 친구들과 다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떡할까?"

"여기 더 죽치고 있을 수는 없어."

수인 도적이 꼬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더 좋은 마법사를 구하기도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신관이 말했다.

"그럼 저 마법사를 포섭해봐?"

"일단 본인 입으론 자신 있다잖아요?"

"자신 있다고 해봤자 노예팀 마법사야. 애비슨 수준을 생각하면 실망이 클 거야."

애비슨?

우리 배낭의 주인이잖아?

"동료 마법사분을 잃어버리셨나요?"

"그래. 블랙 호넷을 만나서 죽어버렸지."

드워프가 대답했다.

블랙 호넷은 검은색 말벌처럼 생긴 몬스터로, 미궁 1층에서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다.

"아직 안 죽었어요."

인간 신관이 부정했다.

"제가 영혼 보존 마법을 걸었다구요. 부활 스크롤을 가지고 오면 살려낼 수 있어요."

"그 부활 스크롤을 가지러 나갈 수가 없으니 하는 얘기지."

대강 상황이 짐작이 된다.

이들은 마법사를 잃어버렸고, 출구룸을 찾아냈지만 마법사 없이는 돌파할 수 없는 강적이 안에 있는 것이다.

'출구 보스.'

출구룸을 지키는 보스들을 그렇게 부른다. 이걸 잡아야 출구 게이트가 오픈된다.

어떤 놈일까?

언데드 계통이라면 신관이 있으니 문제없다.

트롤이나 샐러맨더, 황동염소 같은 것도 이 조합이면 문제없다. 전사나 도적이 신관의 버프를 받고 협공하면 충분히 잡아낼 수 있다.

'비행 타입?'

가능성 있다.

비행 타입의 출구보스라면 기사나 도적이 맞추기 어려운 상대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나보다 예르닐에게 더 관심이 있었겠지.'

공중 대상을 요격하는 걸로는 마법사보다 궁수가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근데 마법사, 특히 그중에서도 파이어볼 완드를 찾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은 하나뿐.

"출구 보스가 베노믹 스파이더인가요?"

"······!"

모험가들이 화들짝 놀랐다. 드워프는 어깨까지 들썩일 정도로.

"뭐야?"

"어떻게 알았지?"

"노예 마법사가 베노믹 스파이더를 어떻게 알아?"

삽시간에 웅성거리는 그 파티원들 가운데.

"자네 미궁에 대해 좀 아는가?"

드워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좀 압니다."

아마 너희보다 더 잘 알걸.

베노믹 스파이더는 치명적인 독극물과 거미줄을 쏴대는 골치 아픈 몬스터다. 저 출구룸 안은 거미줄로 가득 차 있을 테고, 그 거미줄 위를 스파이더는 엄청난 속도로 뛰어다니며 파티원들을 요격하려 할 것이다.

전사와 도적은 거미줄을 맞고 '둔화' 또는 '속박' 상태가 되어서 꼼짝달싹 못한 채 처맞다가 죽는 수밖에 없다.

파훼법은 마법사.

정확히는 화염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다. 불꽃으로 거미줄을 다 태워버리는 것이다. 천장에 불을 질러서 거미가 바닥에 내려오면 기사와 도적이 줘팬다는 계산이겠지.

"흐음······."

드워프는 도적, 신관과 다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마법은 모르겠고 꽤 머리가 빠릿빠릿해 보이는데."

"저 친구 믿고 한번 들어가봐?"

"어차피 방법은 그거밖에 없어."

세 사람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다가 곧 결심을 굳혔다.

"너희 둘, 우리 파티에 임시로 들어와라."

"싫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

뜻밖의 대답에 드워프 파티가 당황했다.

7화

출구룸

"케일럽······?"

예르닐이 날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왜······왜 거절하세요?"

"우리 파티에 들어오는 게 싫다고?"

드워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 출구 게이트는 네 명밖에 지나가지 못하잖아요?"

"으음."

그러자 세 사람 모두 중요한 지적을 당했다는 듯 침음을 삼켰다.

"맞는 말이야."

출구 게이트는 매우 불안정해서 사람이 한 명 지나가면 그때부터 5분 안에 붕괴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붕괴가 가속되기 때문에, 한 번에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최대 네 명이 한계다.

게이트가 없어지면 같은 층의 다른 랜덤한 장소에 다시 새로운 출구룸이 만들어지며, 다시 그걸 찾아다녀야 한다.

"노예팀인데 꽤 미궁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군?"

몰랐으면 스파이더를 잡은 후에, 셋이 먼저 게이트에 들어가버렸겠지? 우린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고?

하여튼 미궁에선 순진한 놈만 당한다.

"자네 이름이 뭔가?"

드워프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케일럽입니다."

"그래. 그런데 케일럽. 이 친구야. 잘 생각해보게."

드워프가 이번에는 나를 회유하는 작전으로 돌아섰다.

"우리가 필요한 건 궁수가 아니라 '마법사' 한 명뿐이야."

대머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자네에게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노예 팀이 아니라 제대로 된 모험가 팀에 합류해서 출구룸에 도전할 기회 말이야. 자네들이 여기서 하루는 버텨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티겠나? 하룻밤 꼬박 같이 보낸 여자친구 손을 놔버리는 게 간단하진 않겠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한 마디로 예르닐을 손절하고 같이 나가자는 소리였다.

"······."

상황을 파악한 예르닐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

아, 좋아요! 저도 여길 당장 나가고 싶다고요!

눈앞의 달콤한 유혹과 함께 머릿속에서 망상이 펼쳐진다.

미안하지만 예르닐, 우리의 모험은 여기까지예요. 당신은 개쩌는 재능충 궁수지만 저는 사실 평범한 직장인이었답니다. 미궁 같은 데서 목숨 걸고 싸우는 게 애초에 저랑 안 어울려요! 저는 따뜻한 집에서 푹신한 매트리스 깔고 누워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지금 당장 나가고 싶네요. 미안해요. 그래도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세요. 당신도 제 입장이었으면 저를 손절했을 거잖아요?

나는 드워프 파티와 함께 베노믹 스파이더를 처치하고, 예르닐은 혼자 남겨져서 훌쩍훌쩍 울고, 나는 먼저 이 지옥을 탈출!

오! 이럴 수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 그지 같은 미궁을 정말로 나올 수가 있다니! 이 상쾌한 공기와 따뜻한 햇살! 이게 바로 인생이지!

'귀환주라도 한 잔 할까!'

호쾌한 드워프의 제안으로 우리는 함께 주점을 향할 것이다.

'공짜 술이라면 마다하지 않죠!'

그리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드워프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에 열중하던 바로 그때.

갑자기 마법 대학의 조교들이 찾아와서 내 어깨를 붙잡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너는 아직 노예란다. 몸값을 못 갚았잖니? 네가 모아온 마석들은 푼돈이야.'

아뿔싸.

당장 이 미궁을 탈출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넌 다시 미궁에 들어가야 한단다.'

그리고 이번에는 파티 뽑기 굴림에 실패했다.

애초에 예르닐 같은 궁수를 처음 뽑았던 게 기적이었지.

겁 많고 멍청하고 능력치도 이것저것 골고루 찍힌 잡캐 궁수, 전사, 로그를 데리고 나는 혼자 분투하기 시작한다.

아니 왜 아무도 몰래 뒤쫓아오는 노예 마법사 팀을 눈치채지 못했지?

아니 왜 아무도 증기 속에 있는 적들을 요격할 줄 모르지? 하나라도 잡아봐!

사운드 맵핑 같은 거 아무도 없냐고? 어? 특수능력으로 왜 대식가가 찍혀있어? 근력이 올라가봤자 너는 궁수잖아! 식량만 더 축날 뿐이잖아!

아니 전사라는 새끼가 왜 방패 들고 앞에 서는 걸 무서워해 미친놈들아! 돌아버리겠네!

내가 아는 애는 팀을 위해서 빈약한 근력으로 자진해서 방패를 들려고 했다고!

이 트롤들이 답답해질 때쯤이면, 나는 길바닥에서 시체 하나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 시체가 누구인고 살펴보았더니, 아! 이럴 수가.

예르닐!

너만한 궁수가 없었던 것을.

꽃이 지고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

***

잠깐 광기어린 상상을 펼치다 보니 왠지 얼굴이 해쓱해지는 기분이다.

"팀을 갈아타고 싶지는 않습니다."

"엇?"

드워프와 수인, 신관 모두 놀란 기색을 보였다. 내가 당연히 넘어올 줄 알았던 모양이다. 마법 대학 범죄자 노예에 대한 신뢰도가 그 정도다.

"헉."

보너스로 예르닐도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무슨 개쩌는 의리의 상남자가 된 것 같군.

"그보다 이런 건 어떠세요?"

어차피 혼자 탈출해도 도로아미타불 미궁행이라면, 차라리 지금 그 근본적인 문제를 뿌리 뽑자.

이건 오히려 대박 찬스다.

"여러분이 저희를 고용하시는 겁니다."

"고······용?"

세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푸하핫!"

별안간 드워프가 무릎을 탁, 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출구 게이트는 탐내지 않을 테니, 스파이더를 때려잡는 보수를 달라? 너희들 노예 팀을 정식으로 고용하라?"

"그렇습니다."

"크하하핫! 재밌는 녀석이군. 그래, 얼마를 원하지?"

"1만 골드요."

금액은 재밌지 않았는지 드워프의 입꼬리가 싹 내려갔다.

"케헥!"

예르닐한테선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녀는 눈에 동공 지진이 나면서 날 쳐다보았다.

"케일럽! 이······ 1만 골드요!? 1만 골드가 얼만지 아세요!?"

우리가 만 하루 동안 미궁 1층에서 모은 마석과 애비슨의 배낭을 포함한 모든 현물을 싹 다 팔아치웠을 때, 기대해볼 만한 수익은 2,000골드 정도다.

마법 대학에 저당 잡힌 나와 예르닐의 몸값이 각각 3,000 골드라고 들었고.

따라서 1만 골드는 꽤 큰 금액이었다. 그래서 드워프의 표정이 심술궂은 고블린처럼 변했지만, 대신 성공한다면 노예 신분 청산이 가능하므로 자진하지 않는 이상 다시 미궁에 처박히지 않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리고 이 액수는 저 녀석들 상대로는 한번 불러볼 만했다.

그 근거 첫 번째, 저쪽 파티는 몸값 비싸기로 악명 높은 신관을 일행에 들였을 정도로 상당히 숙련되었고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파티다. 1만 골드 정도는 지불할 능력이 된다.

그 근거 두 번째, 대화와 행색으로 미루어보건대 저쪽 파티 셋은 이미 지쳐있다. 그들은 하루빨리 미궁을 탈출하고 싶어한다.

근거 세 번째, 이게 중요한 건데, 그들은 애비슨에게 영혼 보존 마법을 걸어놓았다. 시체의 손상이 심각해지기 전에 다시 돌아와서 그를 찾아내 부활시켜야 하므로 그들은 시간이 없다.

마지막으로 안전 장치.

"이 부분을 신관님께서 나타니엘 여신의 이름 앞에 맹세해주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영혼 보존 마법을 썼다는 것, 그리고 목걸이의 십자가 문양으로 보아, 그녀의 종파가 짐작된다. 그들은 자기 여신의 이름 앞에 걸어놓은 언약은 절대로 어길 수 없다.

"흐음······."

드워프는 고민에 잠겼다.

"뭘 고민해? 어차피 다른 마법사는 없어."

수인 도적이 말했다.

"9천 골드."

됐다.

드워프가 흥정을 시작했다.

"9천 5백."

"9천 3백."

"9천 5백이요."

"에잇. 자네 이름이 뭐야?"

"케일럽입니다."

"내 살다살다 노예 마법사가 참전비로 1만 골드 요구하는 건 처음 봤네. 천장에 불 좀 질러주는 대가로 9천 5백이라니? 이 정도 바가지면 너무 커서 트롤 머리에도 쓰겠구만? 우리가 엄청난 손해를 보는 장사지만."

그는 양손 도끼를 번쩍 들어서 어깨에 짊어졌다.

"그렇게 하세. 어쩔 수 없군. 파이어볼 마법엔 자신이 있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얼른 그 언약부터 해치우자고."

드워프가 신관에게 곁눈질을 했다. 그러자 신관이 양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모두에게 공표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타니엘 여신의 이름 앞에 신관 엠마가 언약을 맺습니다. 저희 파티원 비르타넨, 지칼, 엠마 3인은, 케일럽, 예르닐 2인의 파티를 9,500골드로 고용함을 약속합니다. 이 계약의 완수 조건은 비르타넨 파티가 게이트로 탈출하는 것이며, 양쪽 파티 중 하나가 전멸할 경우 무효가 됩니다. 계약의 이수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의 파티에 위해를 끼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합니다. 대표자 비르타넨, 케일럽."

"위 내용을 인지했으며 굳게 맹세한다."

드워프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맹세합니다."

나도 장단을 맞춰주었다. 사실 나타니엘 여신을 믿지 않는 내게는 별 의미 없는 맹세였지만, 그들에겐 중요해 보였으니.

"좋아."

드워프는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준비됐나?"

"가시죠."

철컥!

출구룸의 문이 열렸다.

***

들어가자마자 출구룸 내부 구조와 대상의 위치와 지형지물부터 분석한다.

방의 크기는 가로 15미터, 세로 15미터, 높이도 10미터는 되어 보였다. 고딕 양식 성당처럼 천장이 엄청나게 높았다.

전체적으로 어두침침한 데다가 거미줄이 천장과 벽, 바닥을 빽빽할 정도로 도배해놔서 사물의 식별이 쉽지 않았다.

끔찍하게 오래된 흉가.

그곳이 주는 첫인상이다.

먼지가 많아서 공기가 텁텁하고 건조하다. 퀴퀴한 썩은 냄새가 났다.

'안 보여.'

표적인 베노믹 스파이더는 아직 포착되지 않았다. 천장의 거미줄들 사이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게임 디자인이 그 괴물의 몸 색깔도 천장과 비슷한 고동색으로 칠해놔서 천연 위장술이 기가 막힌다.

'중립 사물은?'

나는 미간에 힘을 주고 필사적으로 사방을 살폈다. 방의 구석진 곳에 오크통 몇 개가 보였다.

붉은색 폭탄 그림.

안에는 폭약이 들어있다.

"바닥에 거미줄을 안 밟게 조심해."

드워프가 말했다.

"밟으면 발 떼기 힘드니까."

인게임에서는 거미줄을 밟으면 '둔화' 상태에 걸렸다.

두 번 밟으면 속박.

"스파이더를 찾아야 해요."

드워프에게 말했다. 그놈을 찾아야 공격을 시작할 것 아닌가?

그러나 드워프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할 일은 천장의 거미줄들을 다 태워버리는 거야. 굳이 거미를 찾을 필요가 없······."

"키이익!"

찾았다.

천장 한쪽에서 몬스터의 괴성이 들린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에 쏠렸다.

쭈와아악!

······하고 마치 짤주머니로 슈크림을 짜내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날아오는 건 그렇게 달콤한 게 아니었다.

"정신 차려!"

쐑!

드워프가 힘껏 양손도끼를 휘둘러서 거미줄을 쳐냈다.

아마 게임이면 '슈퍼 세이브' 메시지가 떴겠지.

"빨리 천장의 거미줄을 다 태워버려! 저놈이 바닥에 내려오게 해야 돼!"

"끼이익!"

베노믹 스파이더는 나한테 거미줄 투망을 한 이후 엄청난 속도로 위치를 옮기고 있었다.

침 탁 뱉고 도망가는 게 게임에서도 짜증났는데 현실에서 겪으니 진짜 기분 더럽다.

'하지만 위치는 알았다.'

천장의 거미줄들이 흔들린다. 그 너머에서 시커먼 실루엣이 꿈틀대는 게 확실하게 식별되었다.

나는 완드를 들어 올렸다.

[당신의 턴입니다.]

[행동력 : ■■■■]

***

베노믹 스파이더는 빠르지만, 방향을 확인하고 저격하면 맞출 수 있다.

보스 몬스터는 그 체력이 상당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한 턴에 최대한 많은 타격을 줘야 한다.

게임으로 할 때는 마법사한테 연금술사의 불꽃 같은 버프 물약을 먹이고 화염 데미지를 끌어올리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다.

'대신 모래시계가 있지.'

게임에서는 한 턴 안에서는 쿨타임이 흐르지 않아서 이런 게 불가능했지만.

"파이어볼."

[행동력 : ■■■□]

지금은 쿨타임이 흐른다.

5초를 대기한 다음 다시 마법을 쓴다.

"파이어볼."

[행동력 : ■■□□]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50초]

다시 5초.

"파이어볼."

[행동력 : ■□□□]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45초]

마지막 5초.

"파이어볼."

[행동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턴을 종료합니다.]

[모래시계가 다시 뒤집어졌습니다. 쿨타임 : 60초]

***

천장에 불 좀 질러주는 대가로 9천 5백 골드라면 솔직히 내가 드워프여도 분통 터져서 밤에 잠이 안 올 거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앞으로 미궁 도시에서의 내 평판을 위해서라도 이 레이드에서 1인분은 할 작정이니까.

이런 식으로.

쾅!콰과광!

지혜에 몰빵한 마법사의 파이어볼 네 발이 기관총처럼 발사되었다.

8화

출구룸 (2)

그 장면은 흡사 상하 반전된 융단 폭격 같았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불벼락 네 발이 잇달아 천장에 꽂히며 폭발을 일으켰다.

불붙은 거미줄과 썩은 천장의 나무판자 파편들.

우수수 쏟아지는 그것들이 마치 불로 된 폭포처럼 보였다.

"아니 이게 무슨······."

"어떻게 한꺼번에 네 발이나······."

"영창은 나만 못 들은 거야?"

그 충격적인 장면에는 드워프 파티 셋도 잠깐 굳었다.

"거기다 파괴력도 엄청나!"

그렇겠지. 물론 내가 드워프 파티보다 레벨은 좀 낮겠지만, 대신 지혜에만 모든 포인트를 다 찍었으니까.

딜량만 따지면 2층에서도 꽤 먹힌다.

하물며 그걸 한꺼번에 네 발이나 박았으니······.

"가아아아악!"

베노믹 스파이더가 비명을 지르면서 추락하고 있었다.

나도 그 비명에 뒤질세라 힘껏 소리쳤다.

"다들 정신 차려요!"

베노믹 스파이더는 단번에 체력 1/3 이상이 날아가는 큰 타격을 입었을 때, 천장에서 떨어진다.

경험상 이 기회에 폭딜을 해야 승산이 높아진다.

그러니까 지금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퓽!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놀랍게도 예르닐이었다.

그 재능충은 떨어지는 스파이더를 화살로 공중 요격했다. 그 명중률은 확실히 박수를 쳐줄 만했지만.

'이쑤시개 같군.'

고블린 활과 화살은 베노믹 스파이더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

"예르닐은 안 싸워도 되니까 저쪽에서 대기해요."

그녀에게 오크통 방향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이제 바닥에 떨어진 스파이더는 괴성을 지르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출구룸 바닥 한복판.

괴물의 몸에 붙은 불꽃이 사방으로 번진다.

"신관님!"

니는 신관에게도 소리쳤다.

"마법 보호막이요!"

"아, 알겠습니다."

이번엔 드워프와 수인 차례다.

"보호막 생기면 바로 돌진해요! 정신 차리기 전에!"

"풋내기가! 명령하지 마! 알고 있으니까!"

수인이 자존심 상한 듯 왈칵 역정을 부렸다.

"여신의 손바닥 아래!"

신관의 영창이 터졌다.

푸르스름한 보호막이 전원의 몸을 에워싼다.

"성격이 좀 그래. 이 친구가."

드워프는 수인을 가리키며 킥 웃더니 도끼를 들쳐메고 돌진했다.

수인도 몸이 안개화되더니 불꽃을 뚫고 들어가버렸다 '도약 암습' 스킬이다.

그리고 자극받은 예르닐도 오크통으로 달려가려고 하기에.

"잠깐!"

얼른 붙잡았다.

아직 오크통 쪽은 불이 번지지 않아서 직선 경로가 죄다 거미줄로 가득하다.

"하지만 보호막!"

예르닐이 자기 몸을 가리키며 펄쩍 뛰었다.

워낙 급해서 다섯 살 어린이마냥 단어로 의사 표시를 했지만 무슨 말인진 알겠다.

보호막이 있을 때 거미줄을 뚫고 가야한다 이 뜻이지? 지금 타이밍 놓치면 보호막이 사라질 거다?

근데 예르닐아. 그 보호막은 화상은 막아줘도 거미줄은 못 막아.

그러니까······.

"이거 밟고 가요, 예르닐!"

예르닐과 오크통의 직선거리 정가운데, 거미줄 위로 냅다 배낭을 던졌다.

훌륭한 징검다리다.

탕!

예르닐이 사슴처럼 깡총거리며 배낭을 밟고 넘어가자, 나는 곧바로 완드를 바꿔 들었다. 광신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손길로 움직여라."

역할을 다한 배낭을 염동력으로 들어 올린다. 지금 내가 가진 제일 소중한 재산이기 때문에 불길 속에 내버려둘 수 없다.

하지만.

'역시 안 떨어지네.'

마치 치즈스틱을 쭈욱 잡아늘인 것처럼 바닥의 거미줄 수십 가닥이 배낭에 따라붙었다.

그래도 괜찮다. 염동 손아귀로 이렇게 당기고만 있으면 된다. 불이 번지면 치즈가 끊어지듯이 알아서 떨어질 테니까.

이건 됐고······.

'저쪽을 신경 써야지.'

드워프와 수인이 박자를 주고받으면서 거미를 두들겨패고 있었다.

이제 슬슬 타이밍이 됐다.

물론 인게임처럼 생명력 바 같은 게 없으므로 스파이더의 남은 피통이 얼만지는 모르지만, 대충 가늠이 된다.

콰직!

수인의 절단 스킬에 스파이더의 제일 큰 다리 한 짝이 날아가버렸다.

"터진다!"

동시에 거미의 아랫배에서 형광으로 빛나는 독샘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별자리 방패!"

신관은 기다렸단 듯이 드워프와 수인 앞에다가 방패를 소환했고, 두 사람은 방패에 몸을 딱 붙인 채 웅크렸다.

'드워프 파티도 이 패턴을 알고 있었군.'

베노믹 스파이더는 생명력이 30% 이하로 떨어지면 독샘 폭발을 시전한다.

보통은 저게 일반적인 대처법이지만, 더 좋은 방법도 있다.

"얼음송곳!"

독샘 내부에 든 것은 액체고, 얼음송곳이 꽂히면 얼어버린다.

물론 출구보스는 레벨이 높아서 빙결 상태 이상에 저항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불이 붙었고 포위당해서 개처맞는 중이니 저항력에 페널티가 붙겠지.

"끼이익!"

경련하는 괴물에게서 이상한 신음이 요동쳤다.

얼음이 박힌 독샘에는 하얀 서리가 앉았다. 부풀던 게 멈추고 수축하기 시작했다.

됐다!

"안 터져요! 밖으로 나와요!"

이런 방법은 몰랐는지, 신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나는······.

"빨리 나오라고요!"

쓰벌 속 터진다.

독샘 폭발 안 한다고! 미친놈들아!

"하지만······."

수인과 드워프가 아직도 방패 너머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니까 독샘이 터지는지 아닌지 확신을 못해서 저러는 거다.

환장하겠네.

내가 전부 조종하는 턴제 전투였으면 이미 끝난 건데.

더 시간을 주면 스파이더는 천장으로 거미줄을 발사하고 그걸 타고 도망칠 것이다.

놓치면 귀찮아진다.

[턴제의 모래시계 쿨타임 : 14초]

모래시계는 아직 14초 남았다.

염동 완드는 배낭에 사용중이라 안 된다. 얼음송곳은 쿨타임. 이걸 치우고 파이어볼을 쓸까? 하지만 스파이더가 거미줄로 탈출하려 한다면 그때 파이어볼로 불태워서 떨어뜨려야 한다. 역시 지금은 아끼는 게 낫겠다. 그럼 번개 쇼크를 쓴다면? 완드를 갈아끼우는 사이에 도망치면 어떡하지?

답답하네 정말.

"독샘 안 터진다니까! 공격해요! 좀!"

그러자 공격했다. 예르닐이.

퓩! 하고 이쑤시개 같은 고블린 화살이 날아와 거미 옆구리에 박힌 것이다.

"예르닐 말고!"

"으앗!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없는데.

아무튼 드워프랑 수인 이 출퇴근 시간의 올림픽대로 같은 새끼들아!

"나가서 좀 때려 제발!"

"흐압!"

내가 속으로 욕하는 걸 들었는지, 마침내 드워프가 용기를 내서 튀어나왔다.

번쩍 도끼를 치켜드는 폼이, 내가 아는 스킬을 연상시킨다.

도끼술 2등급 스킬. 장작 쪼개기.

콰직!

쪼개진 것은 장작 대신 키틴질 껍데기였지만.

괴물 거미한테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조직과 내골격이 뭉개지는 소리도.

툭 튀어 오르는 체액, 축 늘어지는 다리들.

"자······."

드워프의 얼굴이 밝아졌다.

"잡았다! 끝났어!"

······같은 소리를 하는 걸 보니 확실히 스파이더에 대해서 잘 모르는군.

***

"저, 저게 뭐야! 저기 좀 봐!"

스파이더 시체로 다가오던 수인이 갑자기 천장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고양이과 수인은 종족 특성으로 '암시야'를 기본 탑재하고 있다. 천장 저 높은 곳의 어두컴컴한 그림자 속에서 벌어지는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뭔데?"

드워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뭐가 있는데요?"

인간 신관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내 눈에도 안 보이지만, 그게 뭔지는 안다.

베노믹 스파이더 보스전 2페이즈.

알집 수백 개가 부화하면서 새끼 거미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수인 말고도 그걸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으니까.

사운드 맵핑의 재능충.

이쑤시개 발사 전문가.

"으, 으으······."

예르닐은 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끔찍한 광경에 달달달 떨었다.

"예르닐! 오크통을 이쪽으로 굴려요! 힘껏!"

그녀의 등 뒤에는 폭발물이 든 오크통이 있다.

나는 그걸 여기서 쓰려고 너를 거기다 배치해놨단다.

"흐읍!"

예르닐은 재빨리 오크통을 쓰러뜨리고 힘껏 떠밀었다.

이미 바닥의 불길은 거미줄을 다 태우고 자체 진화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을음과 재만 남은 바닥 위로 오크통이 데굴데굴 굴러와서는.

"던지라는 건가?"

드워프의 발치에 머물렀다.

"네!"

"하지만 나는 위치를 모르네."

드워프가 오크통을 어깨에 짊어지며 말했다.

"저쪽이야 저쪽!"

수인이 천장에 대고 손가락질하면서 펄쩍 뛰었다.

"아니 그렇게 얘길 해도 나는······."

"신관님! 예르닐한테 웨펀 라이트!"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도록."

신관이 재빨리 영창을 외었다. 그러자 예르닐의 화살촉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예르닐은 내가 뭘 시키려는 건지 정확히 깨달았다.

"방향을 표시해줘요!"

빛나는 고블린 화살이 천장으로 날아간다.

드워프는 그 궤적을 추적하면서 투포환 선수처럼 팔을 휘둘렀다.

"흐압!"

화살은 알집 앞에 집결하는 거미떼를 쫓고.

오크통은 화살을 뒤쫓고.

나는 그리로 파이어볼 완드를 겨누었고.

[당신의 턴입니다.]

[행동력 : ■■■■]

치트 좀 썼다.

나는 예르닐처럼 날아가는 걸 공중 요격하는 천재 궁수가 아니라서.

"파이어볼."

"파이어볼."

"파이어볼."

방향을 미세 조정해가면서 이번에는 세 발만 쐈다.

***

대폭발 이후 불타버린 새끼 거미의 사체들과 오크통의 파편들이 화산재처럼 쏟아진다.

"또 무영창에 초고속 시전······."

신관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공했군."

드워프의 발밑에서 잘 구워진 새끼 거미의 사체가 과자처럼 바스락거렸다.

나는 전투 중에 염동력으로 간신히 구출해낸 배낭을 챙겨서 어깨에 짊어졌다.

'아오, 답답해. 편한데 답답해!'

양가적인 감상이 동시에 떠오른다.

게임에서 노예팀으로 보스를 잡을 때는 온갖 지랄을 다 해야 하는데, 숙련 파티로 잡았더니 확실히 편하다.

답답한 부분은?

'이놈들 말 더럽게 안 들어!'

물론 이해는 된다. 내가 드워프나 수인이었어도 노예 마법사 오더를 듣진 않았을걸.

하지만 게임에선 내가 전부 턴제로 쾌적하게 컨트롤하다가, 내 몸 하나밖에 못 움직이는 현실이 되니까 솔직히 복장 터진다.

드워프랑 수인놈 방패 뒤에 웅크리고 있을 때는 진짜로 뒤통수 한 대 세게 치고 싶더라고.

만약 스파이더가 천장 갔으면 이 전투 어떻게 됐을지 몰랐다. 이놈들아. 천장에 숨어서 피 채우고 새끼 거미 알집도 깠을 테니까.

"야, 풋내기, 너 대체 정체가 뭐냐?"

남의 속을 모르는 수인은 감동을 잔뜩 받았다.

"독샘 폭발을 어떻게 멈춘 거야?"

"얼음송곳을 독샘에 꽂으면 빙결되어서 터지지 않아요."

"난 독샘에다 마법 쏘기에 그거 터뜨려서 우리 다 죽이려는 줄 알았어!"

"아. 그 생각을 못했네요. 그랬으면 게이트 우리 건데."

농담을 받아쳤더니 수인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크. 한 방 먹었군."

그는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내 어깨를 토닥였다.

"아까 소리 질러서 미안. 너 정도면 오더 내려도 되겠어."

"솔직히 정말로 감탄했네."

드워프는 홀린 표정으로 달려와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자네 대체 뭐하던 사람인가?"

나는 그냥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뭐하던 놈인지 나도 모르거든.

"그냥 마법 대학 노예입니다."

"허, 얘기하기 싫은가보군. 그럴 수 있지.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나."

내 사연이란 팬티 바람으로 허벅지 긁으면서 새 게임 버튼 딸깍 누른 거다.

"야 이것 좀 봐!"

수인 도적이 베노믹 스파이더의 시체 속에서 마석을 꺼내서 번쩍 치켜들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E등급.

"이거 판매금은 9천 5백 골드에 더해서 너희에게 4할만큼 분배해주지."

드워프가 마석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근데 진짜로 아무도 안 죽고 이걸 잡을 줄이야."

그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자네 둘이 죽을 줄 알고 그 계약을 오케이했던 건데."

"······."

예르닐의 표정은 해쓱해졌지만, 난 대강 예상했던 바다.

아마 수인이나 신관도 그것까지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우리의 계약 내용은 '서로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지, '서로 보호해준다'가 아니다. 그들이 출구 보스로부터 우리를 반드시 지켜줘야 하는 의무 같은 건 없다.

갑옷 한 벌 제대로 못 갖춰 입은 노예 마법사와 궁수가 난전 속에서 사망해버릴 가능성은 꽤 높았으며, 아마 이 말도 안 되는 바가지요금을 받아준 데는 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까지 계산하고 금액을 크게 불렀는가?"

드워프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물었다.

"염두에 두긴 했죠."

추가로 우리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뒤따랐고.

솔직히 말해서 신관이 우리한테도 마법 보호막을 씌워준 게 오히려 뜻밖이었다.

파이어볼 이후로는 쭉 그냥 방치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돈값은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이 정도면 확실하지.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닐세."

"압니다."

"뭐가 끝이 아냐? 게이트까지 나왔잖아? 이제 정산해줘."

수인의 말에 신관이 왜 끝난 게 아닌지 알려주었다.

"정산은 마을에서 해요."

예르닐은 무언가 잘못 돌아간다는 걸 깨달은 듯 눈이 커졌다.

"마을······이요?"

지금 마을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저쪽 셋뿐이 아닌가?

"계약 조건은 저희 파티가 '출구 게이트를 넘어가는' 거였어요. 그전에는 계약이 완수된 게 아닙니다."

신관이 그녀에게 못 박듯 말했다.

"하······하지만 이제 출구 게이트가 나왔잖아요? 그냥 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그러나 계약은 정확하게 지켜야 합니다. 저희 파티원 모두가 마을에 도착해야 계약이 완수되는 겁니다. 정산은 그곳에서 할 겁니다."

"만약 저희가 마을로 못 가면요······?"

"양쪽 파티 중 하나가 전멸하면 계약은 무효가 됩니다."

"······."

예르닐은 당했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

"그, 그것까지 계산하고 저희랑 계약을······!"

"염두에 두긴 했지."

드워프가 날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삼류 노예 2인 파티가 미궁에서 자력 탈출할 가능성? 0에 수렴한다.

드워프의 간사함에 예르닐은 입을 틀어막았다.

"케일럽은 알고 있었어요?"

그녀가 이번엔 내게 물었다.

"네."

"정말요!?"

"당연한 겁니다."

순진한 예르닐아.

그럼 1만 골드 벌기가 쉬운 줄 알았니?

여기서 돈을 받을 수는 없다.

왜냐?

애초에 1만 골드씩 들고 다니는 모험가가 흔치 않으니까. 예르닐은 그들의 경제력에 대한 감이 아예 없으니 지금 돈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미궁 내에서 벌어지는 고액 계약의 일반적이고 잔인한 룰이다.

정산은 당연히 마을에서.

귀환하지 못하는 이에겐 보상이 없다.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그 '생환 리스크' 역시 가격에 책정되므로, 미궁 내의 용역 비용이 지금처럼 비정상적으로 치솟을 수 있다.

"하. 그렇게 되는군?"

예르닐만큼 순진한 듯한 수인 도적은 상황을 파악하고 씩 웃었다.

저걸 몰랐던 걸 보니 수인도 미궁 초보자구만.

"내가 하자고 부추기긴 했지만, 우리 구두쇠가 9천 5백을 덥썩 받기에 솔직히 좀 놀랐거든. 이유가 있었구만?"

수인이 드워프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파티 재정을 열심히 관리하는 것뿐이야!"

드워프가 항변했다. 수인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풋내기. 꼭 마을로 생환해서 돈 받아가."

"네."

"돈은 물론 아깝지만, 이젠 너만한 재능충이 죽는 게 더 아깝다. 돌아와서 우리 드워프하고의 호구 잡기 싸움에서 꼭 이겨줘."

"네. 저한테 베팅해두세요."

"조크도 내 스타일이야. 맘에 들어 정말."

수인이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럼 슬슬 가볼까요?"

신관이 출구 게이트를 가리켰다.

저걸 넘어가면 마을이다.

우리 몫은 아니지만.

"잠깐만요."

나는 세 사람을 붙잡았다.

아직 그들과 딜할 게 남았다.

"이 배낭. 여러분의 동료분 겁니다. 애비슨 씨요."

9화

신뢰의 마법사

"애비슨!"

수인의 귀가 쫑긋해졌다.

"이게 애비슨 배낭이라고!?"

"자네 애비슨을 만났는가!"

드워프가 고함을 질렀다.

"어쩐지 눈에 익는다 했어요! 시신을 어디서 보셨어요?"

신관이 반색했다.

"애비슨의 시체를 찾은 건 아니고, 노예 마법사 팀이랑 싸우고 전리품으로 얻은 겁니다."

나는 대머리 파티와의 일화를 간략하게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진짜 대박이군!"

신관과 수인이 감격에 겨워하며 배낭 내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드워프는 계산부터 했다.

"배낭을 찾아준 값으로 뭘 원하는가?"

"배낭을 원합니다."

좀 웃기는 대답이 나왔다.

하지만 드워프도 아마 이 답변을 예상했을 것이다.

왜냐면, 이제 마을로 넘어갈 예정인 그들에게 배낭에 들어있는 베이컨, 빵, 냄비 같은 건 필요 없기 때문.

대신 애비슨의 지갑과 열쇠 같은 귀중품은 챙기고 싶겠지.

나는 그 대가로 드워프 팀이 가지고 있는 소모품들을 좀 더 넘겨받을 것이다.

"좋아. 우리 식량을 전부 주지."

"전부요?"

"우리한텐 어차피 이제 짐만 되는 것들이야."

드워프 파티와 짐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애비슨의 손수건, 열쇠고리, 지갑, 성경 등을 돌려주면서 내가 물었다.

"바로 돌아오실 생각은 없군요?"

나가서 부활 스크롤만 가져다가 돌아오는 거라면, 식량을 우리에게 전부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

빵 두 덩어리와 버터 하나, 삶은 달걀 12개와 양념에 절여서 말린 소고기를 건네면서 드워프가 대답했다.

"부활 스크롤을 받는 데 시간이 걸리거든. 행정 처리가 귀찮아서 말일세."

"이미 한 장 받아왔기 때문이죠."

신관이 옆에서 설명을 거들었다.

"부활 스크롤요?"

"네."

어쩐지 영혼 보존을 걸어놓고 스크롤은 없다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

"그건 어쩌셨어요?"

"애비슨 씨가 죽어서 벌써 썼어요."

아니 애비슨아······.

너는 그냥 미궁 탐험하지 마라.

"아무튼 우리는 스크롤을 새로 받는 동안 마법사를 보충할 거예요."

신관이 베이컨, 옥수수 통조림 다섯 캔, 휴지 한 통, 물병 두 개를 건네며 말했다.

"그리고 4인 파티로 돌아와서 애비슨을 부활시켜서 도시로 보내고, 우리는 다음 출구룸을 깨서 나가는 거죠."

"그렇군요."

"하아. 솔직히 말해서 노예 마법사인 자네가 애비슨보다 한 3만 배 정도는 더 낫네."

드워프는 애비슨 때문에 골치가 많이 아팠던 모양인지 이마를 탁, 짚었다.

"처음부터 자네 같은 마법사를 영입했더라면 일이 편했을 텐데 말이야."

"다음 기회를 노리십쇼. 제 몸값은 비쌀 겁니다."

농담으로 받아치고 가방을 들쳐메던 바로 그때였다.

"저······."

지금까지 조용히 짐 정리에 열중하던 예르닐이 갑자기 손을 들고 발언권을 요청했다.

여기서 가장 무능(?)했고 성격도 소심했던 예르닐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목이 확 쏠린다.

그리고 예르닐의 입에서 나온 발언은 진짜 충격적이었다.

턴제 마스터인 나조차 예상치 못한.

"그럼, 케일럽을 데려가시면 안 되나요?"

뭐?

"게이트에 자리 하나 남잖아요······."

예르닐, 너 미쳤니?

***

"케일럽이 여러분하고 같이 게이트를 넘어가도 계약은 완수되잖아요? 여러분 파티 세 분 모두 게이트를 넘은 거니까요. 안 그래요?"

"아니 그건 맞지만······."

예르닐의 지적에 그 계산적인 드워프도 당황했다.

"신관님!"

예르닐은 이번엔 신관의 팔을 잡아당기며 졸랐다.

"마법사를 보충하실 거라면서요? 케일럽이 나가서 9천 5백 골드를 받고 자유민이 되어서 여러분 파티에 들어가면 되잖아요."

그녀의 논리는 타당하다.

"그리고 자유민이 되고 남는 돈으로 장비도 맞출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신관님 파티에 들이면 안 되나요?"

하지만 문제는······.

"아니, 그럼 당신은 어쩌고요?"

신관이 기겁하며 물었다.

"당신이 혼자 남잖아요!"

내가 드워프 파티와 함께 넘어가버리면 예르닐은 여기에 혼자 남게 된다.

"케일럽처럼 재능있는 마법사조차도 미궁에서 혼자서는 살아남기 힘들어요. 하물며 당신은 하루도 못 버틸 거예요!"

신관의 지적에 예르닐은 바짓자락을 꾸깃꾸깃 매만지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말라서 부르튼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가가 붉어지더니 시선을 푹 떨구면서.

"사실 여기 출구룸 앞에서 마법사만 필요하다고 하셨을 때."

그녀가 훌쩍이며 말했다.

"그때 이렇게 얘기하는 게 맞았다고 생각해요. 케일럽."

"······."

"죄송해요······. 그때는 용기가 없어서 얘기를 못 했어요. 이분들하고 같이 넘어가세요."

이건 대체 뭘까?

일종의 정신 승리 같은 건가?

내 발목을 잡는다는 부채감 때문에? 아니면 나중에 자기가 버려질까 봐 선수를 치는 건가? 그도 아니면 내가 나중에 본인을 원망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예르닐의 이 황당한 제안의 기저에 어떤 심리가 있는 건지 쉽게 짐작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데 알고 보니 놀랍게도 나름대로는 이성적으로 분석을 한 결과였다.

"우리 둘이 출구룸을 또 깰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녀는 절망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일럽의 마법은 엄청 강력하지만 저는······전 봤잖아요. 제가 쏜 화살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어요······."

그것은 이성적인 각오고 냉철한 판단이다. 용감하기보다는 공포에 질려서 눈물을 훌쩍훌쩍 쏟으면서 어쩔 수 없이 내놓는.

하지만 비장한 결심이다.

"이대로 우리 둘이 진행하면······. 결국 다음 출구룸에서 죽을 거예요······. 저 때문에 그러지 마세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건 게임적이지 않다. 게임에서 이런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갑자기 여기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란 게 새삼 소름 돋게 다가온다.

"엘프 아가씨."

드워프가 나지막이 탄식을 뱉었다.

"지금 아가씨가 얘기한 게 전부 맞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 당장 케일럽을 영입해서 데려가고 싶어."

"······."

"하지만 미궁에서 다른 파티의 파티원을 영입하려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세."

"하, 하지만, 출구룸 앞에서는······!"

"문 앞에선 자네들이 '전과자 노예'니까 신경 쓰지 않았던 거야. 누가 죽든, 말든, 어떻게 되든, 아무도 신경 안 쓰거든."

잔인한 얘기지만 사실이다. 나도 짐작했던 부분이고.

"하지만 지금은 나도 자네들을 보는 시각이 좀 다르네. 그러니 두 사람 입장을 모두 존중해서 이렇게 하지."

드워프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케일럽. 우리 파티를 대표해서 자네에게 정식으로 영입 제안을 하겠네. 우리 파티에 들어온다면 25% 수익을 배분하고, 출구룸 앞에서 맺었던 계약대로 9천 5백 골드를 지급하지."

그가 신관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래도 상관없겠지, 엠마?"

"네. 저희는 계약을 다 이행하는 게 됩니다."

그러자 예르닐이 이번에는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케일럽. 저쪽 파티로 넘어가세요. 저는 괜찮아요. 벌써 저를 세 번이나 구해주셨잖아요. 처음에 고블린 때, 그리고 함정 밟았을 때, 그리고 다른 노예 팀 만났을 때."

"······."

"사실 저는 진즉에 죽었어야 했어요. 이번 출구룸에서도 저는 아무 도움도 안 됐잖아요. 저도 제 주제를 알아요."

말은 비장하게 하면서 팔다리가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솔직히 무서울 수밖에 없잖아. 여기 자진해서 혼자 남겨지겠다니. 이게 말이 안 되는 거다.

"저 혼자 죽으면 되는데 당신까지 끌고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지금이면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어요."

"선택은 자네 몫이네. 케일럽."

드워프가 최후 통첩을 했다.

"웃으면서 인사하게 해주세요."

예르닐은 눈물을 닦으면서 억지로 웃었다.

그리고.

띠링! 띠링!

모래시계는 자명종처럼 흔들리며 울었다.

[모래시계 확장 기회!]

▶지금 예르닐의 곁에 남으면, 예르닐의 신뢰도가 100%에 도달합니다.

▶이후 신뢰도를 80% 이상으로 유지한다면, 당신의 턴에서 예르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턴을 종료한 후, 예르닐은 자신의 의지로 명령을 수행합니다.

'이건 또 뭐야?'

대머리 팀과 조우했을 때.

출구룸 입구에서 드워프의 제안을 받았을 때.

그리고 지금.

세 번 연속 예르닐을 두고 시험에 빠진 나는 모래시계의 숨겨진 옵션을 찾았다.

***

게임 미궁의 심연에서 특수능력은 레벨업에 따라서 추가되기도 하고, 상위 단계로 확장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시체 포식' 같은 특수 능력은 많이 사용하다보면 능력이 새로운 차원으로 개화해서 추가 옵션이 붙는 것이다.

원래 시체를 먹어서 생명력만 회복할 수 있었는데, 스킬 쿨타임도 회복된다든가.

추가로 스테이터스 버프를 얻는다든가, 피식자의 뇌를 먹으면 기억을 일부 엿볼 수 있다든가.

그런 게 특수능력 확장 기능이다.

이 기능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도 적용되는 모양.

'턴제의 모래시계'라는 특수능력의 확장 기능은, '파티원에게 명령 내리기'다.

어떤 식으로 작동되는 걸까?

'내 턴에서 명령을 내리고 턴을 종료하면, 예르닐이 그 명령을 수행한다?'

모든 명령을 다 수행할 수 있는가?

불가능한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되지?

두 시간 동안 숨을 참아보라고 하면 질식사할까? 아니면 결국 숨을 쉬게 될까?

애초에 장시간에 걸친 명령어는 불가능할 공산이 크다. 예를 들어서 명령어로 앞으로 50년간 내 말에 절대복종하라고 지시했을 때 그게 먹혀들 것 같지는 않다.

내 턴에서 내릴 수 있는 명령은 단순 액션일 것이다.

예컨대······.

'방패 버리고 나와서 거미를 때려요!'

같은 명령처럼.

행동력으로 비유하자면 행동력 1점짜리 액션 정도겠지.

아까 드워프와 수인은 내가 복장 터지기 직전까지 안 나왔지만, 예르닐은 턴제 명령 즉시 튀어나올 것이다.

"······."

좋은데?

아니 엄청난 거 아냐?

행동력 1점짜리 턴 하나가 파티원에게 주어진다는 게 얼마나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어떤가?"

드워프가 답을 재촉한다.

잠깐만 좀 기다려 봐.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니까.

1. 모래시계의 확장 기능과 재능충 궁수 예르닐.

2. 무려 1만 골드 상당의 금화와 미궁을 즉시 탈출하는 기회 및 숙련 파티 자리.

예르닐 때문에 솔직히 나도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만, 감정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미궁의 심연은 크고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중요한 게임이다. 모든 사소한 이벤트가 후반부에 커다란 나비효과로 돌아올 수 있다.

위 선택지 두 개를 저울추에 달아놓고 고민해보자고.

이런 데서 실수하면 대머리 꼴 난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최대의 이익이 되는가?

나는 무엇을 골라야 하나?

"케일럽."

드워프야 미안한데, 생각 좀 할게.

60초만.

[당신의 턴입니다.]

[행동력 : ■■■■]

***

"처음 예정대로 세 분이 넘어가십시오. 저는 예르닐하고 따로 탈출하겠습니다."

예르닐의 충격적인 자기희생보다 더 놀라운 답변이 출구룸에 폭탄처럼 떨어졌다.

"······어······어엇······."

예르닐은 과장 없이 진짜로 '휘청거렸'다. 그 정도로 경악했다.

"허······."

그리고 드워프와 수인도 눈이 두 배로 커졌고, 신관은 헉 소릴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진심인가?"

"네, 진심입니다."

결핍된 정보가 너무 많아서 어느 쪽이 이득이 되는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게임이라면 어땠을까? 난 게임에서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답은 100 퍼센트 예르닐이다.

당장의 숙련 파티 자리와 1만 골드 같은 건 훌륭하지만, 미궁의 최종 클리어까지 고려하면 예르닐을 지금부터 키우는 게 더 이득이니까.

그 정도의 장기적 투자 없이 미궁 마스터를 잡는 것은 보다 낮은 난이도에서도 불가능했다.

하물며 개발자 난이도에서? 절대 안 되지.

물론 맘에 걸리는 부분도 있다.

고생해서 데리고 나간 예르닐이,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행복을 찾아 요정숲으로 떠납니다' 하고 탈주해버린다든가.

마을에서 내가 미궁 모험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안전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구한다든가.

이게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니까 그런 경우의 수들이 확률적으로 날 괴롭히는 것이다.

특히 후자는 강렬한 유혹이다. 9천 5백 골드로 자유민이 된다면 진짜로 그게 될지도?

하지만 지금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넓게 접근하는 게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그렇게까지 냉정하지 못해.'

내 턴이 20초 남았을 무렵, 예르닐 얼굴을 보고 나서 마음이 기울었다.

어떤 영웅심에 예르닐을 지켜준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영웅적이기보다는 소시민적인 사람이고, 백마 탄 기사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단지, 지금 같을 때 예르닐을 내다 버릴 정도로 비정하지도 못한 것뿐.

사실 인간은 의외로 그렇다.

물소 떼는 사자 한 마리가 뛰어들면, 낙오자를 버리고 100마리가 도망가버리지만, 인간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낙오된 동료를 구출하러 뛰어드는 광기의 생물이다.

의외로 인간은 비정하게 이성적이지 못하다.

차라리 에라이 쓰벌, 따라와! 하고 같이 클리어해버리는 게 속 편하지. 이대로 떠나버리면 밤에 발 뻗고 자겠나.

"케, 케일럽!"

내 속을 모르는 예르닐은 조금 다급해졌다.

"케일럽! 미쳤어요!? 왜 안 나가요!?"

충분히 심란하니까 조용히 해줄래?

"이 성격까지 탐나는구만."

드워프는 진짜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의리가 있어. 미궁에서 이 정도 신뢰는 '초고속 마법 시전'이나 '무영창 시전' 뺨치는 재주거든."

"······."

"마법 대학이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된 물건을 건졌네요."

신관이 흐뭇해했다.

"탈출하면 말이지만. 예르닐 얘기는 다 맞는 말이었어."

수인 도적이 덧붙였다.

"네. 솔직히 말해서 둘이서 출구룸을 찾아서 나가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신관이 동의하듯 맞장구를 쳤다.

"케일럽은 강하긴 하지만, 둘이서 다음 출구 보스를 어떻게 잡으시려고요?"

"그래서 말인데, 베노믹 스파이더 사체, 저희가 가져도 될까요?"

다들 감동한 분위기 속에서 불쑥 질문을 던졌다.

드워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체?"

그들 파티는 본래 사체를 통째 게이트 너머로 가져가려 했다. 거기서 부산물을 뜯어내면 돈이 좀 되기 때문이다.

"자네들한테 감동한 건 맞지만 이건 또 다른 얘기일세."

캬.

분위기로 어떻게 묻어보려 했는데 안 되는구만?

드워프 너 T지?

"그럼 저희한테 파시죠."

"사체를요? 값은 어떻게 치르시게요?"

신관이 웃으며 물었다.

"저희 9천 5백 골드에 달아놔주세요."

"크하하!"

드워프가 호탕하게 웃었다.

"좋아, 그렇게 하세. 1,500골드. 어떤가?"

"1,300요."

"1,500도 파격적인 가격일세."

"알겠습니다. 그럼 1,500."

사실 이렇게 외상 치러주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드워프는 내가 죽는 쪽에다 9천 5백 골드를 베팅해놓은 사람이니까.

"좋아. 그리고······. 엘프 아가씨."

드워프가 예르닐에게 물었다.

"이름이 뭔가?"

아니 잠깐만 드워프야.

지금까지 예르닐의 이름조차 몰랐냐?

너무하네 정말.

"예······예르닐이요."

"예예르닐."

"아뇨! 예르닐."

"아뇨르 예르닐."

"아니······."

뭐하는 겨······.

별안간 둘이서 잠깐 스탠딩 코미디를 벌였다.

"예르닐. 나는 자네도 대단히 용감했다고 생각하네. 덕분에 4연발 초고속 파이어볼보다 더 멋진 장면을 봤구만."

"······."

"절대로 죽지 말고, 케일럽을 놓치지도 말고, 꼭 같이 도시로 귀환하게."

드워프는 예르닐에게 힐링 포션 네 개를 챙겨주었다.

엠마 신관은 예르닐의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

"나타니엘의 축복을."

예르닐의 몸에 하얀빛이 감돌았다.

게임에선 지속시간 12시간에 모든 능력치+1점, 그리고 저주, 부패에 면역이 되는 축복이다.

실제로 어떤진 모르겠지만.

"나타니엘의 축복을."

신관은 내게도 축복을 걸어주었다.

이런 것 때문에 파티에 신관이 있으면 편하긴 하다.

"난 뭐, 줄 건 없고. 마을에서 만나면 맥주나 한 잔 살게!"

수인이 게이트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저희가 탈출해서 마을로 나가면, 세 분을 어디로 찾아가면 될까요?"

세 사람에게 물었더니, 신관이 답했다.

"나타니엘 신전으로 찾아와서 엠마 신관을 불러달라고 하세요. 제가 곧바로 보수를 지불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먼저 마을로 가겠습니다. 두 분의 앞날에 행운을 빌어요."

신관, 엠마가 먼저 우리에게 인사하고 게이트를 넘어갔다.

콰과광!

게이트의 색깔이 푸른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했다.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이, 풋내기 마법사. 내 이름은 지칼이다. 기억해둬."

수인 도적, 지칼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시에서 반드시 다시 보자고."

그가 게이트를 넘어가자, 이번엔 게이트의 색깔이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했다.

"자아, 그럼. 두 사람은 넘어갈 생각이 없고."

드워프 전사, 비르타넨은 주머니에 넣었던 E급 마석을 다시 꺼내더니 게이트 너머로 스르륵 굴려 넣었다.

콰앙!

게이트의 색깔이 노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했다.

마석으로 '사람 한 명분'이 건너간 것처럼 처리한 것이다.

미궁에서는 이게 예의다. 넘어가는 인원이 4인 미만이라면, 마석을 써서 게이트가 빨리 닫히도록 해줘야 새 게이트가 빨리 생성되기 때문에.

"도시로 오면 모험가 길드에서 드워프 전사 '비르타넨'을 찾게."

드워프가 자기 가슴을 통통 두드리고 게이트를 넘었다.

***

쿠웅!

이제 게이트는 완전히 소멸했다.

출구룸 안에는 나와 예르닐만 남아있었다. 수많은 불타버린 거미 사체와 함께.

털썩.

갑자기 예르닐이 주저앉았다.

태연한 척 웃으면서 먼저 가라더니 역시 허세였다.

"왜······왜 안 가셨어요."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 둘이서 출구룸을 어떻게 깨요······?"

"울지 말고 이리 와봐요."

예르닐.

걱정하지 마라.

이 게임의 미쳐버린 고인물,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나는, 진즉에 누울 자리 견적을 다 짜보고 발을 뻗었단다.

"스파이더 독니 뜯읍시다."

이번에는 이쑤시개 두 발 날렸지만, 다음 출구룸에서는 죽음의 맹독 화살을 날리게 해줄게.

너는 드워프와 수인, 두 명 몫의 폭딜을 할 것이고, 우리는 같이 탈출할 것이다.

[예르닐의 신뢰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턴에서 예르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모래시계가 자명종처럼 흔들렸다.

10화

턴제의 예르닐

쿠르르릉-.

클리어된 출구룸은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천장에서 알집 껍데기와 나무 서까래, 진흙과 돌, 모래 따위가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미궁 1층의 구조가 변하는 중이다. 그리고 출구룸은 어딘가 새롭게 생성되겠지.

클리어된 출구룸은 약 5분이 지나면 닫힌다. 벽이 점점 다가와서 공간을 좁히다가 텁! 하고 전부 집어삼켜 버리는 것이다.

그 안에 있으면 죽는다.

그러니 멀쩡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후다닥 튀어나가야 정상이지만, 아직도 베노믹 스파이더 출구룸에는 인간 하나와 엘프 하나가 머무르고 있었다.

나하고 예르닐.

"케일럽, 근데 제가 진짜로 일하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고요. 저는 케일럽이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 생각이 있거든요? 위험하면 제 목숨을 갖다 써도 좋아요. 근데요."

보험을 실컷 깔아놓으면서 예르닐이 물었다.

"같이······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베노믹 스파이더의 독니는 위턱 좌우에 하나씩 박혀있고, 예르닐은 오른쪽을 뽑고 있었으며, 나는 그걸 구경하고 있었다.

"예르닐."

"네."

"떠들지 말고 독니 뽑기에 집중해요."

"······네!"

예르닐은 재빨리 작업으로 돌아갔다. 고블린 단검으로 독니 뿌리의 잇몸 조직을 쓱싹쓱싹 썰어대면서.

예르닐.

미안한데 왼쪽 독니를 내가 뽑아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이런 종류의 아이템 추출 성공률은 솜씨 스테이터스를 따른다는 것.

그렇다면 솜씨 0점 마법사의 독니 추출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

게임에서 경험해본 바로 내 조카랑 비슷하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는 파괴왕-. 벽지와 장난감과 자기 엄마의 입생로랑 립스틱과, 200만 원짜리 새로 산 TV 액정까지 모조리 박살내버리는 그 어린이처럼, 나는 아마 독니를 뽑다가 기어이 독샘을 터뜨려버리겠지.

게임에서 성공률은 10% 안팎이었다.

예르닐처럼 솜씨 2점을 기준으로는 성공률 90%.

"제가 근데 시간 안에 할 수 있을까요?"

어허.

예르닐이 말대답?

너 모래시계 맛 좀 볼래?

"가능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웃기는 대사를 떠올리며 그녀를 달래주었다.

게임에서도 턴제 기준 독니를 뽑는 데는 행동력 1점밖에 소모되지 않는다.

그러니 집중해라 예르닐. 독니 한 개에 60초면 충분할 테니.

"뽑았다!"

것 봐라.

"뽑았어요!"

예르닐은 독니 하나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이리 주시고, 옆에 것도 뽑아주세요."

"네!"

예르닐에게 독니를 받아 챙기면서 나는 눈앞에 있는 모래시계 메시지창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

마치 어린애한테 마당 잡초를 뽑으라고 시켜놓고 신문 읽는 미국 아빠 같군.

[예르닐과의 신뢰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턴에서 예르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턴을 마치면 예르닐은 자신의 의지로 지시 사항을 수행합니다.]

[고난도의 동작 또는 예르닐의 성향에 위반되는 명령은 예르닐이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고난도의 동작이나 예르닐의 성향에 위반되는 명령은 예르닐이 못할 수도 있다?'

과연 게이머를 동의도 없이 납치해버린 통수의 모래시계답다.

이런 중요한 정보를 내가 결정한 이후에 알려주다니.

하지만 어떤 건지 대강 예상은 된다.

예를 들어서, 예르닐! 거미 독샘이 터지니까 거기서 비르타넨이 도망치지 못하게 뒤에서 떠밀어버려! 비르타넨이 독에 녹아버리도록!

······같은 명령은 예르닐 성격상 절대 수행하지 못하겠지.

그리고 예르닐! 트리플 악셀을 돌면서 10연발 화살을 발사해요!

······같은 명령은 예르닐의 운동능력이 감당하지 못해서 실패할 것이다.

예르닐이 어느 정도까지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천천히 테스트해봐야겠다.

"다 뽑았어!"

예르닐이 독니 두 개를 번쩍 치켜들고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얼굴에 체액을 잔뜩 묻힌 채.

"갑시다. 화살 만드는 건 밖에서 하죠."

***

예르닐도 민첩이 11점이나 되는데 왜 공격력이 그렇게 안 나왔을까?

베노믹 스파이더의 옆구리에 꽂힌 그녀의 화살은 거의 이쑤시개 수준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장비가 구리기 때문이다.

궁수는 특히 장비빨을 심하게 받는데, 고블린 활이 너무 구린 탓이다.

반면 마법사는 마법의 위력 자체가 무기 공격력보다는 지혜 값에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4연발 파이어볼이 웬만큼 폭딜을 했다.

궁수에게도 비슷한 게 있다.

'특수화살.'

쓰레기 활로 쏘더라도 엄청난 위력을 뽑아내는 방법이다. 화살 자체가 강력하기 때문에.

출구 보스는 어떤 놈이든 보통 노예 2인 파티의 딜량으로 제압하기 쉽지 않다. 애초에 우리는 예르닐의 파워업이 필요했고, 나는 이 출구룸에 베노믹 스파이더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이 전략을 수립했다.

"독니에 고블린 화살을 결합해서 독화살을 만들면 됩니다."

나는 예르닐에게 독니 두 개를 모두 건네주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예르닐이 해주세요."

게임에서는 조합창을 열어서 독화살을 만들 수 있는데, 거기서도 성공률은 솜씨 스테이터스에 비례한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제작자는 너다. 예르닐.

"으음."

게임에서는 조합창을 열고 아이템 두 개 넣고, 조합 버튼 딸깍하면 된다. 근데 여기선 어떨지 나도 잘 모른······.

"이렇게요?"

예르닐이 딸깍하더니 독화살을 만들었다.

"뭐야? 어떻게 했어요?"

"그냥 독니 안쪽에 연부조직으로 조심해서 찔러넣었어요."

"······."

말이 쉽지.

몰캉거리는 연부조직이랑 독샘이 붙어 있어서, 고블린 화살촉처럼 무딘 끝으로 세게 쑤셨다간 독샘까지 터지고 살살하면 안 들어가는데.

"얍."

예르닐은 두 번째 독화살도 깔끔하게 제작했다.

무슨 레고 블록 끼우듯이 금방 해버리네.

아무튼 잘 됐다.

아마 게임이었다면 아래와 같은 설명창이 떴겠지.

[독화살]

▶독 데미지 : 60~68

▶물리 데미지 : 7~9

▶대상 지역에 독가스를 생성합니다.

[독가스]

▶가스를 들이마시는 생물체에게 '중독' 상태이상을 유발합니다.

7~9의 물리 데미지가 고블린 화살 기준이고, 저 독 데미지는 출처가 베노믹 스파이더라서 저 미친 위력이 나온다.

게다가 독가스를 방출해서 범위 중독 피해까지!

저 중독의 도트딜이 엄청나기 때문에 다음 출구보스도 화살 두 방 맞으면 질질 짜면서 미궁 마스터한테 돌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갖고 계세요. 제가 지시하기 전까지는 쏘지 마시고."

"네."

"아껴야 하니까요. 이제 가봅시다."

우리도 새 출구룸을 찾아야겠다.

***

이동하는 길에 모래시계의 확장 기능을 테스트해본다.

일단 간단한 것부터 실험해볼까.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60초]

[행동력 : ■■■■]

"예르닐.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서 저한테 주세요."

명령을 내렸지만 내 행동력은 소모되지 않았다.

예르닐에게 내릴 수 있는 지시는 일종의 보너스 행동력처럼 취급되는 모양이다.

내가 직접 행동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겠지?

진짜 개쩐다.

"케일럽."

턴을 종료했더니 예르닐은 갑자기 내게 물병을 내밀었다.

"갑자기 물은 왜요?"

시침 떼고 물어본다. 내가 명령한 거지만, 예르닐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목이 마르실 것 같아서요. 여기 좀 덥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는군.

그다음에는 전투 중에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테스트해보았다.

통로를 진행하면서 만난 고블린 둘을 발견하고 일부러 앞에 있는 한 마리만 파이어볼로 터뜨려버리고, 나머지 하나는 예르닐에게 시켜본 것이다.

"예르닐, 뒤에 있는 고블린의 다리를 쏴요."

그러자 예르닐은 다리를 쏴서 고블린을 쓰러뜨렸다.

"끼아아아악!"

바닥에서 비명을 지르며 뒹구는 고블린의 숨통을 끊으면서 예르닐에게 다시 확인해보았다.

"왜 머리를 안 쏘고 다리를 쏘셨어요?"

"엇······. 그······그냥? 다리가 맞추기가 더 쉬워서요."

그렇게 생각하는군.

모래시계의 안내문대로다.

내 턴에서 예르닐에게 명령을 내리면, 예르닐은 자기 의지로 그 명령을 수행한다.

확실히 편리하다. 이거면 내가 다루기 까다로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예르닐에게 처리해달라고 맡길 수 있다.

다만 너무 어려운 액션 또는 예르닐이 모르는 것을 주문하면 예르닐은 수행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으로.

"예르닐. 슬릭백을 춰봐요."

"······."

지시를 내리고 턴을 종료했지만, 예르닐은 뭔가 불편한 표정으로 그냥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렇다면······.

"예르닐. 아무 춤이나 춰봐요."

턴 종료.

어떻게 되나 볼까······?

음.

뒤따라오던 예르닐이 갑자기 들썩들썩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셔플 댄스 비슷하게.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까 재빨리 멈추었다.

"······."

"······."

그녀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군.

좋아, 잘 알았다.

다음으로는 성향적으로 그녀가 수행하기 어려운 걸 주문해본다.

"예르닐 저한테 키스해보세요."

갑자기 무슨 성인 웹툰에 나오는 최면 어플이라도 굴리는 기분이다.

약간 죄책감이 드는걸?

아무튼 턴 종료.

"······."

예르닐은 이번에도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녀의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보면, 갑자기 파티원에게 기습 키스를 갈겨버리는 건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슬릭백 때와는 다르다.

왜냐면 예르닐의 얼굴이 노을처럼 새빨갛게 익어서는 고개를 푹 숙였기 때문이다. 채도를 보아하니 아까 셔플댄스 걸렸을 때보다 한 열 배는 진한 빨간색이다.

부끄러워하는군.

아마 내게 키스하는 걸 상상하고 수치심 때문에 저러는 것 같다.

지금 분석한 정보들은 중요하다.

똑같이 불가능한 지시라도, 슬릭백처럼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 단어는 머릿속에 떠올리는 단계부터 막힌다.

그러나 키스처럼 성향에 반하는 지시는 머릿속으로 상상까진 할 수 있다. 예르닐처럼 표정이 투명한 사람이라면 낯빛의 변화만으로도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그렇다면······.

"예르닐."

중요한 질문들로 넘어가보자.

"게임 미궁의 심연을 하다가 여기에 빙의된 사람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예르닐은 머릿속으로 떠올리기에 실패할까?

아니면 아는데 일종의 금기 같은 거라서 난감한 표정을 지을까?

그도 아니면 뜻밖에 노다지 정보가 쏟아져나올까?

"······."

턴을 종료하고 두근두근 가슴을 졸이며 기다려보았는데.

'반응이 없군.'

슬릭백 쪽이다.

실망스럽구나, 예르닐!

빙의자는 나 말고는 없는 걸까?

아니면 있지만 예르닐이 모르는 걸까?

아무튼 이렇게 아무 수확 없이 끝낼 수는 없다.

"예르닐."

줄곧 마음에 걸리던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미궁에 들어오기 이전, 저에 대해서 아는 걸 얘기해주세요."

나는 내 과거에 대해 모른다.

그게 내게 위험 요소로 다가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사전에 파악해둬야 한다.

***

이번에는 예르닐이 제법 아는 게 있었다.

"케일럽. 노예 상선에서 같이 타고 올 때도 생각했던 건데요."

예르닐은 자신의 의지로 내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케일럽이 노예가 된 게 살인죄 때문이었댔잖아요?"

"푸훕!"

아까 예르닐이 준 물병을 마시다가 그대로 뱉어버렸다.

시작부터 막장이군.

살인이요? 살인!?

아니 난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괜찮아요?"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괜찮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엄청 무서운 분인 줄 알았는데, 자상한 것 같아서 좋다고요."

"······."

"아마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도 뭔가 사연이 있으셨겠죠. 저는 듣진 못했지만."

"그······렇죠."

그런가? 그렇겠지?

제발!

"팀 동료였던 요호족의 어떤 여자를 죽이셨다고 하셨잖아요."

요호족은 미궁의 심연에 등장하는 이종족 중 하나다.

요망한 여우 종족(?)인데 마법에 능하고 머리가 좋고 외모도 빼어나서 사람을 잘 홀린다는 설정이다.

"아마 그 여자가 죽을죄를 지었을 거예요!"

예르닐.

혹시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니······?

완전 광신도 비슷하게 변해버렸잖아?

잠깐만.

근데 그 요호족 여자가 '팀 동료'였다는 건 뭔 소리야?

"케일럽은 멀리 동쪽에 있는 어떤 미궁 도시에서 미궁 모험가로 활동했었다면서요?"

그래?

"마법 대학에서 노예 4인 파티에 한 명씩, 미궁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넣어두었는데 우리 팀에서는 그게 아마 케일럽이었을 거예요."

다시 대머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확실히 그 녀석은 마법 대학 파문 어쩌고 한 걸 보니 원래 마법 대학 소속의 마법사였고, 미궁 경험도 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파티에서는 그 포지션이 나였단 말이지?

그리고 내가 죽였다는 요호족 여자는 옛 미궁 파티 동료······.

인제 보니 나와 예르닐의 빚이 둘 다 3천 골드인 것도 공교롭다.

누가 봐도 살인죄가 마약 운반보다 훨씬 죄질이 무겁잖아.

내 실제 빚은 아마 몇만 골드 이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근데 3천 골드밖에 안 되는 것을 보면, 그 살인 사건에 참작해줄 만한 어떤 사연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케일럽!"

예르닐이 갑자기 전방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봐요!"

"어?"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이야.

진짜로 게임하다 미궁에 납치당한 운빨 좆망 게이머인 내가 맞냐?

"출구룸이에요!"

이렇게 빨리 찾는다고?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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