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우진은 사덕리소스로 주식 담보대출을 받았다. 목적은 딥어스테크 주식을 사기 위해서였다.
사덕리소스는 이미 딥어스테크 주식을 사들였다.
차우진은 아직 사지 않았다.
"장호철의 비리가 더 알려지면 주가는 더 내려갈 것 같단 말이야."
사덕리소스가 주식을 사야 딥어스테크의 사장이나 부사장과 협상할 수 있다. 거기까지는 이미 진행했다.
차우진은 이제부터 주식을 긁어모으려고 한다.
"지금은 정찰대만 보내자. 예산의 10퍼센트 정도만 써야지."
그동안 사덕리소스 주식은 많이 올랐는데 딥어스테크의 주식은 폭락했다. 덕분에 생각보다 주식을 많이 살 수 있었다.
"내가 주식이 좀 있다는 걸 장호철도 알아야 하니까."
***
이튿날 김태훈이 사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사장님!"
"또 뭐야!"
"사장님. 차 이사의 이름이 차우진이 맞습니까?"
"내가 이야기 안 했냐? 맞아."
"차우진이 우리 회사 주식을 샀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 사덕리소스의 우리 주식 담당자가 차 이사잖아."
"그게 아니라, 차 이사도 따로 주식을 샀습니다."
"응? 얼마나?"
"개인투자자치고는 너무 많습니다."
장호철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넌 그걸 왜 이제 말해!"
김태훈이 어깨를 움츠렸다.
"사장님 지시로 개인투자자를 조사하다가, 차우진이란 사람이 바로 어제 대량으로 매수한 걸 보고 혹시나 해서…."
"씨발. 그러면 주가가 지금보다 더 떨어지면 차 이사도 손해라는 거잖아."
"손해가 막심할 겁니다."
"지금부터 오르면 떼돈을 벌고."
"그야 당연히…."
장호철이 욕을 했다.
"차 이사 그 새끼가 나를 쫓아내고 주가를 올릴 생각이구나. 그 새끼는 내 제안을 받는 척만 한 거였어. 이 개새끼가!"
김태훈이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 이대로면 임시 주총에서 해임안이 통과될 수도 있습니다. 사덕리소스의 지분에 차 이사의 지분까지 부사장 쪽으로 넘어가면…."
"그러면 큰일 나는 거 너도 알잖아!"
장호철은 발등에 불 떨어졌다. 그가 사장 자리에서 쫓겨나도 주식은 남는다. 챙겨둔 비자금도 많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내가 회사에서 쫓겨나면 그동안 우리가 한 일이 다 터질 거야! 그러면 우리가 비자금 만들려고 했던 일들도 밝혀진다고!"
그는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단순히 회계 조작만 한 게 아니다. 실물이 움직였다.
연구소를 새로 건설하는 중이라는 점을 이용해 실험실용 장비도 빼돌렸다.
장호철이 쫓겨나고 홍성준 부사장이 사장이 되면 그걸 조사하지 않을 리 없다.
곽수혁 팀장이 알아낸 자료는 빙산의 일각이다. 사장이 직접 조사하면 더 많은 게 튀어나온다.
그러면 그 장비로 순도 높은 마약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밝혀진다.
김 비서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 그 장비를 마약 생산을 위해 빼돌렸다는 게 밝혀지면…."
"그럼 너나 나나 다 뒈지는 거야! 그러니까 막아야지!"
"어, 어떻게 할까요? 차 이사와 자리를 다시 마련할까요?"
"자리? 지금 자리 마련으로 되겠어? 그러다 또 뒤통수 치면, 이번엔 같이 감방에 가게?"
"그럼 어떻게…."
"문제는 결국 사덕리소스잖아. 사덕리소스가 망하면 해결돼. 그러면 가지고 있는 주식을 토해놓을 테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금광을 가진 회사를 망하게 할 방법이…."
"방법이라면 있지."
장호철의 눈이 시뻘게졌다.
"약쟁이를 모아서 끝장을 내야겠다."
***
차우진은 사덕리소스의 협상 전권을 가지고 딥어스테크를 상대했다.
그런데 장호철의 반응이 차우진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지금쯤 나한테 당했다는 걸 깨달았을 텐데? 독사 같은 그 성격이면 나를 노려야 하는데, 왜 반응이 없지?"
스마트폰으로 이선정 박사의 톡이 들어왔다.
- 토요일 저녁때 먹을 거 정했어요. 석화찜 먹으러 가요.
그는 요즘도 이선정 박사와 가끔 만나 밥을 먹는다. 그녀를 노리던 연쇄살인마는 제거했지만, 그 후로도 가끔 만나 식사하면서 다른 위험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녀의 연구가 성공하면 멸망급 재난 하나를 막을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안전에서 신경을 완전히 끌 수는 없었다.
차우진이 답장을 보냈다.
- 좋죠.
그가 답장을 보내놓고 다시 궁리했다.
"내가 전면에 나서서 협상했고, 내 개인 주식도 지금쯤이면 확인했을 테니까, 곽 팀장처럼 나도 납치하려 해야 하는데."
차우진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그의 감각에 걸리는 놈이 없었다.
"왜 나를 감시하는 놈조차 없지?"
그가 아는 살모사 장은 그대로 당할 놈이 아니다.
"내가 아니면, 누구지?"
***
사덕리소스의 광산은 평일에는 광물을 캔다. 주말에는 장비 점검, 광산 조사, 기타 여러 이유로 작업을 멈춘다.
그래서 주말에는 사덕리소스 금광에 회사 직원들은 출근하지 않는다.
대신에 작업이 없는 주말에만 광산 내부를 조사하는 팀이 움직였다.
그 팀의 멤버는 서준석 사장과 유도진 팀장, 그리고 주말마다 교대로 참여하는 직원 한 명이었다.
서준석이 금광 내부에 들어갔다. 지금까지는 금맥을 하나 찾아서 작업하는 중이다.
"이 금맥 말이야. 파면 팔수록 크다는 생각이 든다."
현장팀장과 비서실장을 동시에 맡은 유도진이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회사 망해서 길바닥에 나앉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기왕이면 새 금맥도 찾아야지. 이게 하나가 아닐 수도 있어."
"하하하. 사장님. 욕심이 나시나 봅니다."
"광산쟁이가 금맥을 봤는데 어떻게 욕심이 안 나냐?"
금광을 조사하는 것도 그들의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여기 들어온 건 아니다. 금광 내부에 안전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게 더 중요했다.
"공기의 질은 어때?"
"전체적으로 정상 수치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광산 내부 공기치고는 괜찮습니다."
"오케이. 당분간은 이대로 관리하면 되겠어."
서준석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스마트워치는 이게 좋아. 지하에서도 시간 보기가 편하잖아. 예전에는 전자시계의 버튼을 눌러야 했는데."
"시계로만 쓰시잖아요."
"시계 아니야?"
"맞긴 하죠."
그가 시간을 확인한 후에 말했다.
"오늘은 일찍 끝내고 밥이나 먹자."
"사장님이 쏘시는 겁니까?"
"너도 이제 이사인데 나보고 쏘라고?"
유도진은 회사가 망하기 직전까지 서준석과 같이 일했다. 금광을 발견할 때도 같이 있었다.
그의 직책은 현장팀장과 비서실장이지만 직급은 이사가 되었다.
당연히 월급도 올랐다.
유도진이 말했다.
"차 이사한테는 잘 쏘시던데요."
"아니야. 보통은 차 이사가 사. 국밥을 주로 사서 그렇지."
"그럼 오늘은 고기?"
"그럴까? 먼지 먹었으니 삼겹살이지?"
"아뇨. 소고기요. 꽃등심."
"응? 어. 그래. 꽃등심."
광산은 아직 개발 초기라 그리 깊지 않았다. 그들은 금방 광산 밖으로 나왔다.
"어?"
광산 밖의 상황에 문제가 생겼다.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근무하는 광산 경비원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괴한 여섯 명이 광산 앞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준석 일행이 나오는 걸 보고 칼을 뽑았다. 작은 단검이 아니라 길이가 30cm가 넘어가는 칼이었다. 칼날의 길이가 식칼보다도 길었다.
서준석은 바짝 긴장했다. 상대는 여섯인데 조사팀은 서준석과 유도진, 그리고 직원까지 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서준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금을 노린 강도였다.
"이 금광은 채굴 초기라서 제대로 된 금괴가 없습니다. 금가루가 섞인 돌덩이만 있단 말입니다."
그 돌덩이를 가공해 만든 금은 이미 처분했다.
지금 여기 있는 건 금이 섞인 광석들이다. 그건 그냥 들고 갈 크기나 무게가 아니다. 설사 트럭에 실어간다고 해도 일반인은 처리할 방법이 없다.
"이건 가져가 봤자 돈으로 못 바꿉니다!"
박정규가 복면을 쓴 부하의 뒤통수를 쳤다.
"내가 빨리 끝내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형님."
"씨발. 이러면 일이 지저분해지는데…."
박정규가 인상을 쓰며 서준석을 향해 칼을 흔들었다.
"어이. 나온 구멍으로 도로 들어가라. 다시 눈에 보이면 다 뒈질 줄 알아."
서준석은 바짝 긴장한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서 유도진 팀장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일단 광산 안으로 피하시죠."
"막다른 곳으로 들어가자고? 그럼 도망칠 수 없잖아. 저 안에서는 휴대폰도 안 터져."
금광을 서준석보다 자주 방문한 유도진이 속삭였다.
"금광 안쪽에서 문을 잠글 수 있습니다."
"아. 그렇지. 그럼 후퇴…. 어?"
서준석의 눈에 침입자들의 옆에 있는 가늘고 긴 물건이 보였다. 가래떡같이 생긴 그 물건이 뭔지는 잘 알았다.
"다이너마이트?"
일반적인 다이너마이트와 형태는 조금 달랐다. 표면에 적혀 있는 글씨도 없었다.
하지만 광산 전문가인 서준석은 그게 폭탄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침입자의 목적을 깨달았다.
"설마…. 우리를 안에 넣어놓고 광산을 폭파하려는 거…."
박정규가 다시 혀를 찼다.
"쯧."
"진짜구나! 도대체 왜!"
"나도 모르지."
"뭐?"
박정규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원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하니까."
그가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조용히 처리하긴 글렀다. 끌고 가. 저항하면 여기서 죽이고."
부하가 물었다.
"이 광산은 어떻게 할까요?"
"계획대로 폭파해야지. 발파 사고로 위장해야 하는데, 잘할 수 있지?"
"물론입니다."
서준석이 급히 물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금광을 무너뜨려서 뭘 얻을 수 있다는 거야! 그런다고 금맥이 사라지는 건 아니…. 어? 설마?"
금광이 무너진다고 해도 매장된 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과 돈을 들이면 다시 캐낼 수 있다.
그런데 사덕리소스는 망하기 직전에 이 금광을 발견해서 기사회생한 회사다. 금광이 무너지면 회사는 즉시 망한다.
그가 외쳤다.
"우리 회사를 망하게 하려는 거냐! 그렇게 해서 금광을 빼앗으려고!"
박정규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유가 뭔지는 나는 관심 없다. 일이니까 하는 거야."
"어, 얼마 받기로 했나! 그게 얼마던 내가 더 주겠다!"
박정규가 실실 웃었다.
"흐흐. 그런 이야기는 같이 가서 말하자고."
서준석은 상대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설마 끌고 가서 돈만 빼앗고 죽일 생각…."
"순순히 항복하면 살려준다니까?"
"거짓말하지 마! 금광을 폭파할 때 우리까지 묻어버릴 생각이잖아!"
"쯧. 그 정도 눈치는 있군."
박정규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뭐해? 잡아!"
"예!"
그의 부하들이 칼을 들고 우르르 다가갔다. 칼날이 시퍼렇게 빛났다.
서준석은 가지고 있던 측정 장비를 무기 대신에 들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제일 앞에서 칼을 흔드는 놈이 말했다.
"이봐. 그냥 편하게 가자. 항복하면 살려줄지도 모르…."
옆쪽 먼 곳에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주먹 크기의 돌 하나가 날아왔다.
그 돌이 선두에 선 놈의 머리를 정확히 때렸다.
"켁!"
돌은 위로 튀어 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돌에 맞은 놈은 마치 작대기가 넘어지는 것처럼 옆으로 넘어갔다.
차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 이 거리에서 그게 맞네."
남은 다섯 놈이 급히 돌이 날아온 방향으로 돌아섰다. 칼을 겨누는 놈도 있었다.
차우진이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이런 재능이 있는 줄 알았으면 야구를 배워볼걸."
49. 금광 II
금광을 폭파하러 온 박정규가 차우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너 누구야!"
박정규의 부하 중 하나는 이미 돌을 맞고 쓰러진 상태다. 나머지 넷이 험악한 얼굴로 칼을 겨눴다.
차우진이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대답했다.
"지나가던 사람."
"뭐?"
"그냥 갈까 했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서 끼어드는 중이다."
차우진은 딥어스테크 사장 장호철이 주식 지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을 노릴 줄 알았다. 그런데 장호철은 그 선택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 남은 건 둘 중 하나였다.
'서준석 사장을 납치하거나, 아예 회사가 망하게 하거나.'
사덕리소스가 망하면 보유한 딥어스테크 주식은 팔려나가 흩어진다. 회사를 망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금광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오늘은 서준석이 금광에 가는 날이다. 남은 두 개의 선택지가 한 곳에 모여있다.
그래서 차우진이 이곳으로 찾아왔다.
차우진이 말했다.
"어쩐지 오늘 이곳으로 지나가면 귀인을 만날 것 같…. 아니지. 내가 귀인이구나."
박정규는 차우진을 경계했다.
'저 새끼. 너무 여유가 넘치는데? 뭘 믿는 거지?'
그가 차우진의 뒤쪽을 훑어보았다. 동료는 보이지 않았다.
"너 진짜 뭐냐? 우리가 든 칼이 네 눈깔에는 안 보이냐?"
"야. 나도 무기 있어."
차우진은 산에서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막대기를 만들어왔다. 그가 그걸 흔들었다.
"이게 나뭇가지로 만든 몽둥이…. 아. 다시 보니까 완전 초보템이네."
"뭐라는 거야!"
"강화는 한 번만 했다. 넝쿨을 감아서 내구를 높였거든. 공격력도 강화하고 싶은데 못이 없더라? 몇 개 박아놓으면 무기의 공격력이 확 올라가는데."
"미친 새끼인가?"
박정규는 차우진이 어떤 사람인지 분석할 수가 없었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니 경계심이 커졌다.
그는 차우진을 신경 쓰느라 광산 입구에 있는 서준석은 굳이 공격하지 않았다.
차우진이 그들을 향해 걸어가면서 돌에 맞아 넘어진 놈을 보았다. 머리를 맞을 때 마스크가 벗겨져 얼굴이 드러난 상태였다.
"어? 저 새끼는…."
그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지금이 아니라 꿈속 미래에서 차우진의 손에 죽은 놈이다.
"하이에나 새끼네?"
하이에나는 미래에 멸망급 빌런의 부하들을 부르는 별명이다.
하이에나 중에는 가끔 기억에 남는 놈이 있다.
지금 돌에 맞아 쓰러진 놈도 그런 놈이다. 문신이 먼저 기억났고, 그 문신을 가진 놈이 한 짓이 기억난 후에 얼굴이 기억났다.
그가 박정규와 부하들을 보며 말했다.
"이 새끼들 중에 생존자는 미래에 하이에나가 되겠구나. 어떻게 멸망급 빌런 밑으로 들어가게 됐는지 궁금하긴 하다만, 지금은 너도 그게 뭔지 모르겠지."
박정규가 소리를 질렀다.
"너 누구냐니까! 지나가던 사람일 리가 없잖아!"
"당연히 아니지. 사실 나는 지나가던 저승사자야."
"이 새끼가!"
차우진이 적들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이놈들을 지금 치우면, 이놈들이 그놈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미래도 없어지나?"
고민은 짧았다.
"아니다. 그런 세상이 오지 않게 막으려고 내가 이렇게 뛰어다니는 건데. 보는 사람도 있고."
멸망한 세계에서는 일단 충돌한 적은 확실하게 제거하는 게 정석이다. 일부만 잡고 넘어가면, 다른 생존자 그룹이 피를 본다.
하지만 지금 이놈들을 제거하면 문제가 두 개나 생긴다.
하나는 목격자다. 지금 여기에는 서준석 사장과 유도진 팀장, 그리고 사덕리소스 직원까지 목격자가 세 명이나 있다.
그리고 다른 것도 의심스러웠다.
'이놈들이 전부일까? 하이에나가 되는 미래를 생각하면 조직적으로 엮인 곳이 더 있겠는데?'
그게 어디인지 알아내고 싶어졌다.
차우진이 박정규와 부하들에게 말했다.
"야. 너희들 오늘 운 좋다?"
"뭐?"
"살겠다?"
박정규는 차우진이 누구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도 알아볼 수 없었다.
'혹시 송천수가 보낸 놈인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가 차우진의 뒤를 다시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혼자인데?'
그가 이번에는 서준석을 힐끗 보았다. 그들은 광산 앞에서 측정 장비나 공구를 무기 대신 들고 있었다.
서준석 쪽은 빠져나갈 공간이 없다. 그나마 갈 수 있는 곳은 금광뿐인데, 아직 개발 초기인 그 금광에 들어가면 빠져나갈 길이 없다.
박정규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너는 나랑 여기를 지키고."
그는 부하 한 명과 함께 금광 입구를 틀어막기로 했다.
"너희 셋이 저 새끼 처리해. 어차피 반항할 테니까 그냥 죽여."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조직원 셋이 차우진을 향해 걸어갔다. 셋 다 단검치고는 길이가 제법 긴 칼을 들고 있었다. 칼을 빙글빙글 돌리는 놈도 있었다.
차우진도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제일 앞에 있던 놈의 걸음이 빨라졌다. 걸음이 뜀박질로 바뀌었다.
칼잡이가 차우진을 향해 돌진하며 칼을 앞으로 내질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차우진의 가슴을 노렸다. 찔리면 치명상을 입는 위치였다.
박정규는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안심했다.
'저건 들어간다. 별것 아닌 놈이었군.'
차우진이 걸어가며 막대기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넝쿨을 둘둘 감은 막대기가 마치 창처럼 움직였다.
적의 칼날은 길이가 30cm는 넘었다. 그런데 나뭇가지의 길이는 1m쯤 됐다. 막대기가 더 길었다.
나뭇가지의 끝이 적의 이마 정중앙을 정확히 찔렀다.
"켁!"
달려들던 적의 고개가 뒤로 휙 꺾였다.
막대기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활처럼 휘었다. 목검도 아니고 근처에서 꺾어온 나뭇가지라 저지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적은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지만, 달리던 기세가 있어서 속도가 느려졌을 뿐 멈추지 않았다. 기절하지도 않았다.
30cm짜리 칼날은 여전히 차우진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을 사용하며 옆으로 슬쩍 움직였다. 칼날이 그의 옆으로 느릿하게 지나갔다.
차우진이 팔꿈치를 들었다. 적의 턱이 팔꿈치에 걸렸다. 적의 고개가 다시 덜컥 젖혀졌다.
이미 이마를 강하게 맞은 상태에서 턱까지 맞았다. 적의 눈이 풀리고 무릎이 꺾이며 몸이 뒤로 넘어갔다. 손에서 힘이 빠졌다.
차우진이 적의 손을 툭 치고 빠져나오는 칼을 잡아챘다. 이제 그에게도 칼이 생겼다.
"나한테 무기가 늘었네?"
오른손에는 나뭇가지가, 왼손에는 칼이 생겼다.
잠깐 사이에 두 대나 얻어맞은 놈은 뒤로 자빠졌다.
뒤에서 걸어오던 두 놈 중 하나가 멈칫했다.
다른 놈은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이 새끼가!"
그 칼잡이는 차우진의 왼쪽으로 이동했다.
차우진이 오른손과 왼손의 무기를 공중에 슬쩍 던졌다. 그런 후에 왼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아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적의 칼보다 먼저 그의 막대기가 적의 옆구리를 강하게 후려쳤다.
"끄아악!"
갈비뼈가 와장창 나가며 적이 비명을 질렀다.
적은 칼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했다. 칼을 쥔 손이 흔들렸다.
차우진이 왼손 나뭇가지를 다시 들어 적의 손목을 내리쳤다. 적의 손에서 빠져나간 칼이 땅바닥에 꽂혔다.
"아악!"
갑자기 차우진이 오른손을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그의 손에서 조금 전에 빼앗은 칼이 작살처럼 날아갔다.
오른쪽에서 조금 전에 멈칫했던 놈이 뒤늦게 접근하고 있었다. 차우진이 던진 칼이 적의 배에 푹 꽂혔다.
"으아악!"
오른쪽 적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왼쪽 놈은 몸을 웅크리다가 떨어뜨린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차우진이 바로 옆 땅바닥에 꽂혀 있는 칼을 막대기로 툭 쳤다. 칼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가 그 칼을 오른손으로 잡았다.
왼손의 막대기는 넝쿨을 감아 내구를 보강했는데도 몇 번 썼더니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가 그 막대기로 갈비뼈가 나간 왼쪽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켁!"
나무가 뚝 부러졌다. 적은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았다.
차우진에게 덤볐던 조직원 세 놈이 순식간에 땅바닥을 굴렀다.
차우진이 박정규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이제 둘 남았네?"
사덕리소스 서준석 사장은 처음엔 상황파악을 못 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그러다 얼굴이 환해졌다.
"이, 이기고 있어! 우리 편이 이기고 있다고!"
유도진 팀장이 옆에서 말했다.
"사장님. 아직 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우리 적의 적이잖아."
"적의 적이 꼭 아군인 건 아닙니다.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목적이 뭐든 다이너마이트와 칼로 우리를 죽이려던 놈들보단 나아."
"아. 그건 그렇습니다."
서준석이 활짝 웃었다.
"우린 이제 살았어! 이제 겨우 두 놈 남았잖아!"
박정규는 부하 셋이 순식간에 쓸려나가는 걸 보고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너. 킬러냐?"
"지나가던 저승사자라니까."
멸망한 세계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셋을 잡았으면 곧바로 남은 두 놈도 쳐야 한다. 적이 당황했을 때 치면 더 쉽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어우. 힘들다."
차우진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짜로 힘들었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몸을 복대까지 차고 격렬히 움직이면 여기저기가 쑤시고 힘도 많이 든다.
이럴 때는 대화를 하면서 숨을 조금 돌리는 게 좋다. 그러면 시간 가속 스킬도 다시 쓸 수 있다.
"어서 건강한 돼지가 되어야 할 텐데."
박정규가 얼굴을 걸레처럼 구기며 말했다.
"너 이 새끼. 좀 친다는 건 알겠다."
"좀이라니. 서운하게. 나 되게 잘 친다. 네 부하들 꼴을 봐라."
"네 실력이 좋은 건 알겠는데."
박정규가 재킷을 젖히며 권총을 뽑았다.
"이 새끼. 권총 앞에서도 얼마나 나대나 보자."
차우진은 느긋했다.
"아. 총이다."
"뭐?"
박정규는 차우진이 착각한다고 생각했다.
"이 새끼야! 이거 진짜 총이야!"
"지금 시기의 한국은 개인의 총기 소지는 금지 아니었나?"
한국에는 어마어마한 물량의 총기가 보관되어 있다. 군부대에는 당연히 총이 있고, 경찰 무기고에도 있고, 예비군을 위한 전시 치장물자로도 있다.
그래서 현대 문명이 멸망한 후에도 한반도에는 총이 흔했다.
생존자 그룹은 스스로를 지킬 무기가 없으면 유지되기 힘들다. 그래서 소규모 생존자 커뮤니티도 소총 몇 정 정도는 확보했다.
약탈자들에게도 총은 흔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귀한 건 총이 아니라 총알이다. 탄약을 대규모로 생산하는 공장은 모두 무너지고 파괴됐다.
대신에 멸망한 세계에는 수작업으로 총알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탄피와 탄두는 수작업으로 가공하고, 화약은 재료를 긁어모아 직접 만들었다.
당연히 탄약의 정밀도나 성능은 천차만별이었다. 실력 좋은 장인이 만든 탄약은 싸구려 총알보다 훨씬 가치가 높았다.
그 시대에는 총알을 아끼느라 칼을 써서 싸워야 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래도 제일 선호하는 무기는 역시 총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멸망급 재난들이 터지려면 아직 10년이 남았다.
차우진이 말했다.
"사실 총은 예상 못 했는데."
"이제 긴장이 되냐? 흐흐흐."
"그 총 어디서 났냐?"
"돈 주고 샀다. 이 새끼야."
"파는 곳이 있다고?"
"한국에서는 돈만 주면 못 구하는 건 없다."
박정규가 차우진을 권총으로 겨누며 말했다.
"그러니까 꿇…."
차우진이 갑자기 칼을 던졌다. 칼날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목표는 자신만만하게 떠들고 있는 박정규의 목이었다.
박정규는 깜짝 놀랐지만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목을 스치듯 지나간 칼날이 뒤에 있던 부하의 몸에 푹 꽂혔다.
"컥!"
차우진이 투덜댔다.
"아. 그게 빗나갔네. 아니다. 맞은 놈이 있으니까 원래 저놈을 노린 거로 치자."
칼에 맞을 뻔한 박정규가 소리를 지르며 권총을 들었다.
"이 새끼가!"
박정규는 권총 사격 경험이 충분히 있었다. 그가 두 손으로 권총을 단단히 잡고 차우진을 조준했다.
총구 끝에 차우진이 보였다. 유효사거리 안에 있었다.
"죽어!"
박정규가 방아쇠를 당겼다. 권총이 발사됐다.
50. 광산 III
차우진은 박정규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유지 시간은 1초보다도 짧았지만, 총구의 방향이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는 타이밍은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박정규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차우진이 땅을 박차고 뛰었다.
지금 사용한 시간 가속 스킬만으로는 날아오는 총탄을 보고 피할 수 없다. 대신에 발사되기 직전에 사선에서 벗어날 수는 있다.
총구에서 작은 불꽃이 튀며 총탄이 발사됐다.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총탄이 차우진을 향해 날아갔다.
서준석은 깜짝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유도진과 직원은 총이 실제로 발사되는 걸 보자마자 겁을 집어먹고 광산 안쪽으로 도망쳤다. 유도진이 도망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 광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빨리 오세요!"
권총은 원래 명중률이 떨어진다.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기는 더 어렵다. 그런데도 총탄은 차우진이 서 있던 곳으로 정확히 날아갔다.
차우진은 이미 사선에서 벗어났다. 총탄은 차우진이 지나간 공간을 뒤늦게 가로질렀다.
차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계속 뛰었다. 그쪽에서 접근하다가 차우진이 던진 칼에 맞아 쓰러진 놈이 보였다.
차우진이 달리면서 손을 아래로 내렸다. 적이 쓰러질 때 떨어뜨린 칼이 차우진의 손에 잡혔다.
박정규의 눈에는 차우진이 총알을 보고 피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사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가 차우진이 뛰는 방향으로 총구를 돌리며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에는 차우진이 뛰는 속도까지 고려했다.
두 번째 총탄은 차우진의 몸에서 가까운 곳을 지나갔다.
이것까지는 시간 가속으로 피했다.
차우진은 감각은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단련된 그대로지만 몸은 삼겹살과 라면을 많이 먹은 현대인이다.
시간 가속 스킬 없이는 정확히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기 어렵다.
이미 두 발을 피했다. 시간 가속이 끝나간다.
차우진은 나선 형태로 뛰며 박정규와의 거리를 줄였다.
박정규는 차우진이 뛰는 속도에 맞춰 총구를 더 빨리 움직였다. 그들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조준하기는 쉬워졌다.
이번에는 권총의 총구가 달리는 차우진을 정확히 조준했다.
박정규는 확신했다.
'이건 명중한다.'
차우진도 그걸 알았다. 시간 가속 스킬이 끝났다.
박정규가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엔 절대로 못 피해!'
이제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져서 눈을 감고 쏴도 총탄이 빗나가기 어려웠다.
총소리와 함께 박정규의 눈앞에서 차우진이 사라졌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이 끝나자마자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총탄이 허공을 갈랐다. 차우진이 있던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박정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걸 피해?"
그가 급히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우진이 뛰던 방향은 박정규의 기준으로는 왼쪽이다. 더 빨리 움직여서 총탄을 피했다면 차우진은 지금 그의 왼쪽에 있어야 한다.
왼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오른쪽 옆구리에 칼이 푹 박혔다.
"끄아악!"
박정규가 비명을 지르며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차우진이 그의 옆에 나타나 옆구리를 찌른 후에, 칼을 뽑아 다시 팔을 푹 찔렀다.
"아악!"
박정규의 오른손에서 권총이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차우진이 적의 허벅지에도 칼을 꽂았다. 박정규가 무릎을 꿇었다.
"끄악!"
차우진이 칼을 뽑으며 손으로 허리를 두드렸다.
"그거 뛰었다고 힘들다. 또 파스 값 들겠네. 아. 내 돈이 드는 건 아니구나."
박정규는 눈앞에서 차우진이 사라지는 걸 봤다. 하지만 순간이동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차우진이 너무 가까운 곳에서 너무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시선에서 놓쳤다고 생각했다.
박정규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이런 킬러가 존재할 줄이야…."
"내가 좀 친다니까."
차우진이 박정규의 목에 칼을 댔다.
"누가 시켰냐?"
박정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차우진이 초특급 킬러라고 확신했다. 그런 킬러라면 살인을 망설일 리 없다.
박정규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 나는 돈만 주면 의뢰인의 정체를 묻지 않는다. 지, 진짜다."
"그렇게 아는 게 없으면 살려주겠냐?"
박정규가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부하들은 칼에 맞았다. 박정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는 세 번이나 칼을 맞았다.
빨리 병원에 가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돈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한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쓰려면 살아있어야 한다. 목에 칼이 들어오면 신용 따위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 동료도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다.
그런데 박정규도 이번 일을 누가 의뢰했는지 모른다. 알면 벌써 이름을 말했을 텐데, 아는 게 없다.
당장 목에 칼이 들어오고 있다. 부하들이 모조리 칼에 맞고 머리가 깨졌으니 이 상황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란 것도 안다.
살고 싶으면 뭐라도 말해야 한다.
'거짓말을 할까?'
그는 상대가 특급 킬러라고 판단했다. 거짓말로 위기를 넘기려 했다가 들키면 죽는다.
그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뭐가 됐든 진짜 정보를 넘겨야 한다.
의뢰인을 찾을 단서가 하나 생각났다.
"제 주머니에 대포폰이 있습니다. 그거로 통화한 상대방을 추적하면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내가 경찰도 아닌데 그걸로 어떻게 하라고?"
"그, 그렇죠? 왜 경찰이 아니실까요. 경찰이셔야 좋은데…."
"다른 건?"
"원래 이런 일은 의뢰인의 정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서…."
"너 뭔가 숨기고 있는데?"
"아, 아닙니다."
차우진은 의뢰인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장호철이겠지.'
그 이름은 차우진이 말하는 게 아니라 이놈 입에서 먼저 나와야 한다.
"의뢰인은 어떻게 만났냐?"
"아는 형님 소개로…."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구나?"
"사, 살인은 한 적 없습니다! 다 평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보기엔 너무 익숙하더라? 금광을 폭파하는데 아주 망설임이 없어."
"그, 그건, 광산에 사람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폭파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
"있는 줄 알았잖아."
"아, 아닙…."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히익."
박정규를 쥐어짜면 정보를 더 알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것도 해결해야 한다.
'이놈에 관해서는 경찰이 알아내게 해야겠네.'
차우진이 고개를 돌려 산을 보았다. 산속에 숨어서 망원경으로 이곳을 보는 놈이 있었다.
'저놈이 튀기 전에 저쪽도 가봐야지.'
이쪽이 급해서 먼저 왔지만, 저쪽 놈도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 한다.
차우진이 말했다.
"끝내자."
"사, 살…."
차우진이 박정규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박정규의 목을 스쳤다.
"으악!"
박정규는 목이 베인 줄 알았다. 그가 목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차우진이 박정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켁!"
박정규가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목에서 피는 나지 않았다. 목은 칼등으로 그어 겁만 준 것뿐이다. 목격자가 있는 곳에서 목을 그을 수는 없다.
차우진이 서준석을 돌아보았다. 유도진과 직원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광산 쪽으로 도망쳤다.
서준석은 총소리에 놀라 바짝 엎드려 있었다. 겁이 나서 앞이 아니라 땅바닥만 보고 있었다.
차우진이 서준석에게 말했다.
"대포폰 이야기는 다 들었지요? 경찰에 신고해서 이놈들을 넘기고 그 이야기도 하시죠."
서준석이 고개를 들었다가 차우진을 보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차 이사님?"
"어?"
차우진이 습격한 놈들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모두 기절해 있었다.
유도진 팀장과 직원은 이미 광산에 숨어 있는 상태였다.
차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어떻게 알아봤지? 체형은 바꿨는데? 목소리도 성대모사 느낌으로 다르게 내고 있는데….'
서준석이 말했다.
"목소리가 좀 다르긴 한데, 어쩐지 차 이사님 느낌이…."
"아…."
차우진은 목소리는 평소와 좀 달랐다. 그런데도 서준석은 알아들었다.
'이 정도로는 아는 사람은 아는구나. 목소리 변조 연습을 더 해야겠다.'
그가 배를 내려다보았다.
'체형도 복대만으로는 부족하겠네.'
서준석이 슬쩍 자랑했다.
"제가 원래 사람 목소리를 잘 구분하는 재능이 있습니다. 아까 걸어오시던 모습도 그렇고, 지금 가까이에서 보니까…."
차우진이 잡아뗐다.
"나는 차 이사가 아닙니다. 차 이사는 오늘 여기 온 적이 없습니다."
"예?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이나 말할 때의 억양이…."
"아무튼 아닙니다. 난 그냥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아셔야지요."
서준석은 뒤늦게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지금 여기에는 칼에 맞은 사람이 여럿 있다. 서준석을 구하기 위해 한 일이라 해도 법적으로는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서준석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저를 살려주신 분인데 그 정도도 못 하겠습니까?"
서준석은 이제 상대가 차우진이라는 걸 확실히 알았다. 아는 사람이 도와주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놓였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감히 캐묻지는 못했다.
대신에 다른 걸 물었다.
"누가 금광을 폭파하려고 하는 걸까요? 역시 회사가 망하게 한 후에 금광을 빼앗으려는 거겠지요?"
"금광을 폭파한 후에 빼앗으면 누구 짓인지 들키는데 그러겠습니까? 그냥 회사만 망하게 하려는 겁니다."
"아. 하긴. 그럼 누가…."
서준석이 직원들의 의견을 물어보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두 명은 이미 금광 안으로 대피한 상태였다.
"아니, 어떻게 날 놔두고 자기들끼리만 도망치나. 유도진 팀장. 그렇게 안 봤는데."
"유도진 팀장은 같이 도망치자고 했는데 못 들으셨나 봅니다. 총소리가 나자마자 그냥 엎드리시던데. 나중에 입구에서 빨리 오라고 부르기도 하던데요."
"역시 유 팀장. 믿고 있었습니다."
차우진이 금광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덕리소스가 망하면 누가 좋겠습니까?"
"이런 짓을 저지를 정도로 이익이 크게 충돌하는 회사는 없는데…."
"회사 말고 개인이라면요."
서준석은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설마 장호철 사장?"
"이제 왜 장호철을 딥어스테크에서 쫓아내려는지 아시겠지요?"
서준석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요.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런데 차 이사님이 아니라면서 왜 이런 이야기를…."
"아무튼 난 차 이사가 아니라니까요."
"그럼요. 아니지요. 그것도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차우진이 제안했다.
"그럼 서 사장님은 광산으로 가서 직원들부터 챙기시죠. 그러고 나서 경찰에 신고하시고요."
"차 이사님은요?"
"저는 여기서 빠져나가야죠. 여기 있다가 경찰을 만나면 뒷일이 복잡해집니다."
"그건 그렇겠군요."
"그리고 차 이사 아니라니까요."
"아! 그렇죠. 아니시죠."
***
장호철은 현장에서 꽤 떨어진 산에서 망원경으로 진행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꾸 아랫것들한테만 맡겨두니까 실패하는 거야. 여기서 더 실패하면 답이 없어. 금광을 무너뜨리는 건 내가 직접 관리해야 해."
그래서 장호철은 박정규 일당을 금광 현장에 투입했다. 그런 후에 이 산에서 망원경으로 금광 폭파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확인했다.
그는 휴대폰은 미리 꺼놓았다. 차는 위치 확인 시스템은 물론이고 블랙박스조차 없는 구형 대포차를 이용했다.
차량 번호판은 가짜였다.
"역시 내가 직접 나서야 일이 된다니까."
그는 서준석 일행이 광산에서 나왔다가 박정규 패거리와 마주치는 걸 보고는 짜증을 냈다.
"깔끔하게 처리하랬더니 저 새끼들이. 저러면 증거가 남을 수도 있잖아."
그렇지만 지금은 추가 지시를 할 방법이 없다. 그는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기 위해 무전기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다 차우진이 나타나는 장면을 봤다.
"뭐야? 저 마스크 쓴 새끼는."
그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차우진이 추가돼도 딥어스테크 쪽은 네 명이다. 그중 최소한 셋은 일반인이다.
반면에 그가 보낸 놈들은 칼잡이다. 하나는 돌을 맞고 쓰러졌지만 아직 칼잡이는 다섯이나 더 있다.
"셋을 죽이나 넷을 죽이나 똑같…. 어?"
전투가 벌어졌다. 순식간에 칼잡이들이 쓸려나갔다.
"씨, 씨발!"
장호철은 당황했다.
칼잡이의 수가 더 많으니까 충분히 이길 줄 알았다.
그러다 박정규가 권총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
"씨발. 총에 맞은 놈은 사고로 처리할 수가 없잖아."
그는 욕을 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했다.
"그래. 급하면 권총이라도 써야지. 일단 이겨야…."
박정규가 권총을 연달아 발사했다. 하지만 총탄은 차우진을 맞히지 못했다. 오히려 박정규가 차우진의 칼을 맞고 고꾸라졌다.
그가 보낸 놈들이 다 쓸려나갔다. 그의 계획이 실패했다.
"씨발. 이게 아닌데…."
장호철은 망원경으로 현장을 계속 관찰했다.
"그런데 방금 저 새끼 움직임이 이상했…."
망원경 너머에서 차우진이 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헉!"
장호철이 급히 망원경을 내렸다.
"서, 설마 저기서 여길 본 건 아니겠지?"
51. 폭발
장호철 사장은 산속에 숨어서 망원경으로 금광을 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이렇게 먼 거리에서 산에 숨어 있는 사람을 찾아내기 어렵다.
그런데도 금광 앞에 있는 차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불안했다.
"안 되겠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자."
그가 급히 망원경을 챙기고 현장을 벗어났다.
대포차는 산 아래에 숨겨두었다. 그는 능선을 넘어 산 아래로 내렸다.
"젠장.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새끼가 나타난 거야?"
사람이 산에서 이동하는 속도는 당연히 평지보다 느리다. 장호철이 서둘러 산에서 내려갔지만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내가 골프로, 허억. 건강을 관리했으니까 이 정도지. 허억. 허억. 다 왔다."
한참을 내려온 후에야 오솔길에 세워놓은 차가 보였다. 이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그가 가빴던 숨을 골랐다.
이제 조금 전에 본 상황을 다시 떠올려 되새김질할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그 새끼, 아까 그거 뭐지? 사람이 갑자기 점멸하면서 이동한 것처럼 보였는데?"
아까는 망원경으로 멀리서 봤기 때문에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그가 차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짧은 거리이긴 하지만, 마치 사람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봤구나?"
장호철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돌아섰다. 차우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헉!"
차우진은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복장은 조금 전에 망원경으로 본 것 그대로였다.
장호철은 경악했다.
"너, 너는… 금광 앞에 있던 그 킬러…."
그는 차우진이 얼마나 고수인지 이미 봤다. 칼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장호철은 고민하지 않고 옷 안쪽에서 권총을 꺼냈다.
"이, 이 새끼! 이거 진짜 총이야!"
"그러네?"
장호철이 꺼낸 건 6연발 리볼버 권총이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놈들은 개나 소나 총이 있네."
장호철은 권총을 쥐고 있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광산 앞에서 박정규는 차우진을 향해 권총을 세 발이나 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칼까지 맞았다.
'뒤처리고 뭐고 일단 죽여야 해!'
장호철이 서둘러 방아쇠를 당겼다.
장호철의 사격은 박정규와는 달리 동작이 무척 컸다. 그러면 사격 타이밍을 눈치채기 쉽다.
차우진이 바로 옆 바위 뒤로 이동했다. 뒤늦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총탄이 허공을 갈랐다.
뒤쪽 나무에서 파편이 튀었다.
차우진이 바위 뒤에서 말했다.
"살모사 장. 오랜만이다."
"이 새끼! 너 누구야! 너 나 알아? 아냐고!"
"알지. 너는 아직 나를 모르겠지만."
차우진은 멸망한 시대에 약탈자 살모사 장과 싸운 적이 있다. 그때의 살모사 장은 차우진의 손에 죽었다.
"나를 왜 살모사라고 부르는 거냐!"
"네가 나중에 쌓을 죄가 그 별명을 만들겠지."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니다. 지금도 큰 차이는 없네. 너는 지금도 네 목적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거점을 폭파하니까. 저 다이너마이트도 네가 구해줬겠지."
"씨발.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다른 시대에도 너는 폭탄을 즐겨 썼거든. 이미 챙겨둔 다이너마이트가 꽤 있나? 아니면 직접 만들었나?"
장호철은 차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저 새끼는 총알도 피하는 새끼야. 시간을 끌면 내가 당해.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해.'
그가 바위를 향해 총을 겨눈 채로 뒤로 물러섰다.
바로 옆에 차가 있었다. 그가 오른손의 권총은 바위를 향해 조준한 채 왼손으로 차의 문을 열었다.
"됐다."
그가 차에 올라탔다. 여전히 시선과 총구는 바위를 향했다. 운전석 문은 열린 상태였다.
그가 오른손의 권총은 바위를 겨누고 왼손으로 대포차의 자동차 열쇠를 꽂았다. 그런 후에 왼손으로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이제 빠져나갈 수 있…."
갑자기 차우진이 차의 뒤쪽에 나타나 말했다.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으하악!"
장호철이 기겁하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권총을 돌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차 안을 울렸다.
자동차 뒷문 안전유리에 총알구멍이 뻥 뚫렸다. 하지만 차우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차 안에서 권총을 발사하면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장호철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내 귀!"
차우진이 운전석 옆에서 말했다.
"저놈들은 체포돼도 내가 누군지 몰라. 그런데 살모사 장. 너는 아니지. 내가 서 사장님과 이야기하는 걸 봤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의심하겠지."
장호철은 총소리 때문에 귀에서 삐 소리가 났다. 차우진의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스킬을 본 것도 문제야. 그건 아무도 몰라야 해. 특히 너 같은 빌런은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지."
장호철의 귀에 들리던 이명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는 지금 권총을 뒤쪽으로 겨눈 상태였다.
그가 기회를 보다가 총구를 차우진이 있는 운전석 쪽으로 휙 돌렸다.
차우진이 그 손을 탁 쳤다. 권총이 손에서 빠져나가 뒷좌석에 떨어졌다.
차우진이 말했다.
"네가 사장 자리에 계속 있으면 딥어스테크가 망할 수도 있어."
"씨발! 내 회사가 망하든 말든 네가 왜 상관하는데!"
"그러면 멸망급 재난을 막기 어려워지거든."
"뭐?"
"안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인데 너 때문에 더 힘들어질 순 없지."
장호철은 차우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는 건 깨달았다. 장호철도 차우진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문득, 이미 차의 시동을 걸었다는 게 생각났다.
장호철은 문이 열린 채로 차의 가속페달을 밟았다. 차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아직 문이 열려 있었다. 운전석 문짝 끝이 나뭇가지에 부딪히며 거칠게 닫혔다.
장호철이 가속페달을 밟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 개새끼야! 내가 이대로 포기할 줄 알아? 다음엔 너도 찾아내서 죽이고, 서 사장도 죽이고, 차 이사도 죽이고, 다 죽여버릴 거다!"
그가 사이드미러를 통해 차우진의 위치를 찾으며 소리를 질렀다.
"다른 새끼들처럼 다 죽여버릴 거라고!"
권총을 뒷좌석에 떨어뜨렸다는 게 생각났다. 그가 권총이 어디 있는지 찾으려고 룸미러를 확인했다.
장호철이 조금 전에 권총을 쐈을 때 뒷좌석 창유리에 큼지막한 구멍이 났다.
그 구멍에 원통형 다이너마이트가 꽂혀 있었다. 구멍의 크기가 다이너마이트 하나 꽂아놓기 딱 좋은 크기였다.
심지어 그 다이너마이트에 연결된 도화선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어?"
그 다이너마이트는 장호철이 박정규에게 광산을 폭파하라고 준 다이너마이트였다.
"저, 저게 왜 여기 있어!"
차우진이 그 다이너마이트를 하나 가져와 장호철의 차에 꽂아놓았다.
장호철이 상황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씨바알!"
그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이너마이트를 뽑아서 던져버리기 위해서였다.
늦었다. 거의 동시에 다이너마이트가 뒷좌석에서 폭발했다.
***
차우진이 멀리서 폭발하는 차를 보며 말했다.
"장호철은 좀 더 사장 자리에서 버텼어야 했어. 그래야 회사 경영진이 더 엉망이 되는데."
그는 서준석 사장을 금광으로 들여보낸 후에 안에서 문을 잠그게 했다. 그러고 나서 현장에 있던 다이너마이트 하나만 가져왔다.
"그러면 조금 더 살았을 텐데, 이번엔 선을 너무 많이 넘었어."
차우진이 그곳을 벗어났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공간이동 스킬도 사용했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또 스킬을 쓰니까 이젠 진짜 피곤하다."
산에 숨어서 감시하던 장호철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이것보다 훨씬 더 울창한 숲에 매복한 놈도 찾아냈다. 이런 평범한 산에서 유리가 반짝이는 망원경으로 감시하는 사람을 찾는 건 쉬웠다.
금광에서 여기까지 장호철이 도망치기 전에 도착하는 건 좀 힘들었다.
사람이 그 거리를 걷거나 뛰어서 이동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평지라 해도 오래 걸릴 거리인데 여기에는 산이 있다.
차우진은 그 산을 고속으로 이동했다. 곳곳에 있는 난코스들은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써서 건너뛰었다.
차우진이 금광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평범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짧았다.
"이게 뭔 고생이냐. 몸에는 알 배길 거 같고, 스킬도 너무 많이 썼어."
그래서 체력이 바닥났다.
"일단 빠져나가서 며칠 쉬자. 힘들어서 지금은 못 해먹겠다."
***
광산 회사 사장이 금광에서 습격당했다. 범인들은 권총도 사용됐다. 심지어 다이너마이트도 발견됐다.
처음 출동한 경찰은 권총을 챙겨갔다. 경찰특공대도 무장하고 출동했다. 현장에는 구급차도 몰려왔다.
서준석 사장은 당시 상황을 형사들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그가 유도진을 가리켰다.
"그때 저 녀석들은 도망치고 저만 여기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유도진 팀장이 항의했다.
"아니, 사장님. 저희는 사장님도 같이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금광으로 피할 때도 같이 가자고 했고, 도착해서도 빨리 오시라고 불렀잖습니까?"
"총소리가 막 나는데 그 소리가 들렸겠냐? 좀 크게 말하든가."
"저놈들이 무서우니까 큰 소리를 못 냈죠."
형사가 물었다.
"사장님. 알겠고요. 그래서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있습니까?"
"어, 그게…."
유도진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우리 측정기에 시간이 찍혔거든요. 몇 분 몇 초인지까지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게 있었지. 있구나. 있어도 되나 모르겠네."
"예?"
"아니야."
경찰이 출동한 곳은 그곳 하나가 아니었다.
총소리가 들리고 나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그 소리가 난 곳으로도 경찰이 출동했다.
찾는 건 쉬웠다. 산 아래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경찰은 그곳에서 폭발한 차량을 한 대 발견했다.
광산에서는 꽤 떨어진 위치였다.
형사팀장이 차가 폭발한 곳에 도착해 물었다.
"폭탄이라고?"
"예. 다이너마이트가 차에서 터진 것처럼 보입니다."
"운전자는?"
"사망했습니다."
"피해자 신원은?"
"그것도 조사 중입니다."
"블랙박스는?"
"없습니다."
팀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승용차인데 블랙박스가 없어? 폭탄이 터질 때 날아간 거 아니야?"
"원래 없었을 겁니다. 자동차 번호판도 가짜니까요."
"뭐?"
형사가 설명했다.
"그래서 차대번호로 조사해봤는데, 대포차입니다. 블랙박스는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안 달았나 봅니다."
형사팀장이 금광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망자가 일반인은 아니란 소리구나. 다른 건?"
"뒷좌석에서 권총을 발견했습니다."
팀장이 증거물을 확인했다. 6연발 리볼버 권총은 망가지긴 했지만 심하게 손상된 건 아니었다.
"광산을 습격한 놈들도 저런 권총을 썼잖아."
"예. 같은 모델입니다."
"국과수에 보내서 이걸 누가 쐈는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팀장이 권총을 보며 말했다.
"이러면 사망자는 금광을 습격한 놈들이랑 한 패일 수 있겠는데? 누구인지는 확인했어?"
"지문만 확인되면 조회하겠습니다."
***
차우진은 집으로 돌아왔다.
산에서 빠져나올 때는 단거리 순간이동 능력을 종종 사용했다. 그래야 경찰이 현장을 조사해도 그가 어디로 이동했는지 알아내지 못한다.
그가 집에서 상황을 정리했다.
"장호철을 직접 만나서 통수를 치면 나를 노릴 줄 알았는데."
그가 호텔에서 협상할 때 장호철을 직접 만난 이유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그런데 장호철은 차우진이나 서준석이 아니라 금광을 폭파하려고 했다. 사덕리소스가 망하면 누가 결정권을 가지든 상관없었다. 그는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차우진이 불평했다.
"역시 약탈자 새끼들은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선을 너무 쉽게 넘어."
멸망한 시대의 살모사 장은 폭탄으로 생존자 커뮤니티를 공격하는 일을 숱하게 저질렀다.
현대의 장호철도 궁지에 몰리면 살모사 장으로 불릴 때처럼 행동했다. 방화로 연구원들을 죽이려고도 했고, 도박꾼 전기 기술자 김양석도 죽이려 했다.
이제 장호철은 죽었다. 그러면 딥어스테크의 상황도 변한다.
"계획보단 좀 빠르지만, 다음 단계로 가야지."
애당초 장호철은 그의 목적도 아니고 목표도 아니었다. 차우진이 원하는 건 멸망급 재난을 막는 데 필요한 마그마 탐사기다.
차우진이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서 사장님은 지금쯤 경찰서에 있으려나. 고생하시겠네."
52. 수사
금광을 폭파하려던 박정규와 부하들은 일단 병원으로 보내졌다.
서준석과 직원들은 다친 곳이 전혀 없어서 형사들과 함께 경찰서로 갔다.
서준석이 형사들을 모아놓고 입에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 나쁜 놈들이, 우리가 금광에 있을 때 거길 폭파해서 다 죽이려고 했다니까요?"
형사가 물었다.
"누가 왜 그런 일을 시켰는지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서준석은 차우진에게 들은 게 있다.
'장호철이 범인이라던데.'
"아니요. 누구 짓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시죠."
서준석은 차우진에 관한 것만 빼고 열심히 설명했다.
"채권자들은 금광이 잘되어야 돈을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폭파할 이유가 없죠."
"경쟁 업체는요?"
"회사 경영권을 노리는 움직임이 있긴 합니다."
"그쪽도 조사해봐야겠군요."
"그런데 그럴 거면 다른 방법을 썼지 금광을 폭파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너진 금광을 다시 파내려면 돈이 굉장히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면…."
형사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마약 쪽은 어떻습니까?"
서준석은 당황했다. 이런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다.
"예? 갑자기 그걸 왜…."
"체포된 놈들은 전부 마약중독자입니다."
"어? 그 말씀은…."
"한 놈이면 중독자이지만 여섯 놈이면 조직이라고 봐야죠. 마약조직이 광산을 습격했습니다."
서준석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마약조직이 원래 돈만 주면 청부도 받고 그럽니까?"
"대가로 돈은 물론이고 마약도 약속받았다더군요."
"아. 그렇게 된 거군요."
형사가 서준석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서준석 사장님을 누가 구해줬는지 모른다고 하셨지요?"
"지나가던 사람이라더군요."
"그게 말이 안 되는 거 아시죠?"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누군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형사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서준석 사장님의 마약 반응을 검사하고 싶습니다만."
"네? 저를 중독자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아니시면 흔쾌히 동의해주시죠."
서준석은 형사가 왜 이렇게 나오나 생각하다가 뭘 의심하는지 깨달았다.
"아! 혹시 제가 금광을 이용해 마약 거래를 했나 의심하시는 겁니까?"
"꼭 의심한다기보다는…. 박재구 아시죠?"
"알긴 압니다. 우리 회사를 빼앗으려던 사채업자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망했다고 들었는데요."
"조직 간의 싸움에 내분까지 나서 무너졌다고 판단하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박재구가 왜 사덕리소스를 노렸겠습니까?"
"당연히 금을 팔려고?"
"그것도 있지만, 돈세탁도 있었습니다. 마약조직도 돈을 세탁해야 쓸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나를 의심…."
서준석은 문득 다른 게 생각났다.
'가만. 그럼 혹시 그때도 차우진 이사가 박재구 문제를 해결해준 건가?'
형사가 물었다.
"뭐 생각난 게 있으십니까?"
서준석이 얼른 말을 돌렸다.
"아니요. 마약 검사는 제 머리카락이면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검사하시죠."
"감사합니다. 그럼 머리카락을…."
서준석이 얼른 손을 들었다.
"아. 머리카락 말고 다른 거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더니 머리가 빠지는 것 같아서…."
***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한 차량의 사망자가 밝혀졌다.
형사가 보고했다.
"차의 뒷문은 폭발로 날아갔지만, 차량 내부는 조사가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지문만 확인해도 사망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형사가 화면에 사진을 띄웠다.
"이름은 장호철."
총기와 폭탄이 사용된 사건이라 경찰도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 이 보고도 회의실에서 경찰서장이 직접 받았다.
서장이 물었다.
"마약 조직원이야?"
"아닙니다. 딥어스테크 사장입니다."
"그건 뭐 하는 곳인데?"
"코스닥에 상장된 중견기업입니다."
서장이 화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안 그래도 큰 사건인데 더 커지겠구나. 뭐 하는 회사야?"
"장비 개발부터 지질 분석, 토목공사까지 여러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력은 토목입니다."
"어? 잠깐. 토목공사? 사덕리소스도 광산 회사잖아. 둘이 겹치는 데가 있나? 경쟁회사야?"
"그건 아닙니다. 땅을 판다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관계는 있구나?"
"서준석 씨에게 물어봤더니, 최근에 딥어스테크의 지분을 많이 인수하긴 했답니다. 딥어스테크는 현재 경영권 문제로 내부 갈등이 있습니다."
"그래?"
서장이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사덕리소스는 누구를 지지하는데? 장호철은 아니지?"
"네. 오히려 장호철 같은 나쁜 사람이 회사를 경영하면 안 된다고 열변을 토하던데요?"
"더 알아낸 건?"
"현장에서 장호철의 지문이 있는 망원경을 찾았습니다."
"망원경?"
"금광을 감시할 수 있을 정도로 고배율 망원경입니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차량에서 나온 권총은 범인들의 것과 같은 모델이라고 했지?"
"예."
"거기서 지문 나왔나?"
"국과수에서 아주 일부만 추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만, 추출된 부분이 장호철의 지문과 일치합니다."
"토목공사를 하는 회사의 사장이니까 다이너마이트를 빼돌리는 건 어렵지 않았겠지."
서장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거 어떻게 봐도 그림이 딱 그려진다. 약쟁이 놈들을 동원한 게 장호철이겠네. 그쪽으로 집중해서 파봐. 뭐라도 나오겠지."
"알겠습니다!"
"다음 건으로 가자. 장호철의 차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린 놈은 누구야?"
형사가 화면을 바꾸었다.
"현장을 철저히 수색했습니다. 근처 나무에서 권총탄을 발견했고, 발자국도 몇 개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갔는지는…."
"못 찾았냐?"
"죄송합니다."
"금광에 나타나서 약쟁이들을 잡은 놈이 거기까지 가서 터트렸을 수도 있잖아."
형사가 화면에 지도와 도표를 띄웠다.
"시간이 맞지 않습니다. 광산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곳까지 그 시간에 가려면, 최소한 산악용 오토바이라도 이용해야 합니다."
"그런 건 없고?"
"네. 오토바이는 물론이고 자전거 바퀴 자국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범인은 두 명 이상이거나, 별개의 사건이란 거네."
"그렇게 판단하고 수사 중입니다."
***
차우진이 서준석을 만났다. 장소는 삼겹살집이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서준석이 소주를 마시며 말했다.
"아이고. 빨리도 물어보십니다. 내가 진짜 경찰서까지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술하느라 진이 다 빠졌습니다."
"고생하셨네요."
"저만 고생했나요. 차 이사님도 그놈들이랑 싸우셨…."
"차 이사 아니라고요."
"네?"
"아. 지금은 차 이사죠."
"하, 하하."
서준석이 경찰서에서의 일을 설명했다.
"형사가 장호철 사장과 무슨 원한이 있냐고 묻더군요. 역시 그 개새끼가 폭탄으로 우리 금광을 터트리려고 한 게 맞습니다."
"서 사장님이 쌍욕을 하는 건 처음 봤습니다."
"죽을뻔했으니까요. 나도, 광산도. 그리고 우리 직원들까지…."
차우진이 물었다.
"장호철은 죽었다던데요."
"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형사들에게 장호철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쫙 다 설명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캬아. 소주가 달다. 달아. 그런데 말입니다. 장호철의 차에서 폭탄을 터트린 건 누구일까요?"
서준석은 경찰에 신고하고 나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꽤 멀리서 들렸었다.
장호철이 어디서 죽었는지는 형사에게 들었다.
그는 차우진이 그 짧은 시간에 산속을 가로질러 그곳까지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형사들도 그렇게 판단했다.
차우진도 소주를 마시며 말했다.
"자기들끼리 싸우다 그랬겠지요."
***
경찰은 장호철이 금광 폭파를 사주했다고 판단했다.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지만 현장 상황만 봐도 그 정도는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호철은 이미 사망했다.
경찰은 대신에 비서인 김태훈을 긴급 체포했다.
김태훈이 반항했다.
"나, 나를 왜 체포하는 겁니까!"
"장호철 사장이 사망했습니다."
"나도 소식은 들었지만, 내가 그런 거 아닙니다! 나 그때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장호철 사장의 차에서 터진 다이너마이트. 당신 그거 어디서 난 건지 알지?"
"몰라요. 모릅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김양석 씨가 살해당할 뻔했을 때 당신처럼 생긴 사람을 봤다던데."
"그, 그건 내가 아니라…."
"그날 알리바이는 있습니까?"
"이, 있습니다! 난 그날 사장님을 돕고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살아계실 때 증언해주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고?"
"그렇습니다."
"당신을 지목한 사람이 더 있던데요. 조태혁도 당신이 청부했다고 자백했잖습니까?"
"그건 그놈의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증거가 없잖습니까! 증거!"
김태훈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구속은 피했다.
신동욱 전무가 말했다.
"김 비서. 내가 너 빼준 거야. 비싼 변호사 써서. 돈 많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전무님."
신동욱이 제안했다.
"회사 일 중에 덮을 수 없는 건 장호철 사장이 안고 가게 하자.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까."
"예? 전무님은 사장님의 최측근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장호철의 저지른 비리 중 일부는 신동욱이 깊게 관여했다.
"김 비서. 이게 나만 좋자고 하는 게 아니야. 그래야 너도 살아."
"저, 저요?"
"그래. 너도 심부름 많이 했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러면 저는…."
"앞으로는 나랑 일하자. 당분간은 비서실 말고 한적한 부서로 가서 남들 관심을 좀 피해. 승진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차장이면 되겠어?"
"전무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
차유리가 거실 소파에 누워서 배를 긁으며 말했다. 왼손에는 TV 리모컨을 쥐고 있었다.
차우진을 음식을 준비하며 물었다.
"그놈들 뒤에 누가 있어?"
"독립적으로 움직이던 놈들이긴 한데, 뒤에 조직이 하나 있다는 소문은 있어."
"왜 금광을 폭파하려고 한 거래?"
"돈을 주고 의뢰한 놈이 있으니까 한 거지."
"장호철?"
"어. 조직원 중에 한 놈이 입을 열었다는데, 누가 마약을 공급해준다고 했다더라. 우리 쪽에서는 그게 장호철이라고 보고 있어."
차우진이 물었다.
"장호철은 마약이 어디서 나서?"
"연구소에서 빼돌린 장비를 쓰면 만들 수는 있대."
"본격적으로 약장사를 할 생각이었나? 아니면 마약조직과 다른 커넥션이 있는 건가?"
"그건 수사하다 보면 밝혀지겠지."
"밝힐 수 있을까?"
"몰라. 우리 관할 아니야."
그동안은 차우진이 싸우면 차유리는 야근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에 와서 배를 긁었다.
차우진이 생각했다.
'이게 맞지. 매번 야근하는 게 말이 되나.'
차유리가 물었다.
"내 김치전은?"
"여기."
차유리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차우진이 탁자에 김치전 접시를 올려놓았다.
그녀는 한 젓가락 맛보자마자 신나서 냉장고를 열었다.
"김치전이 술을 부르는구나. 막걸리는 없지만 안동소주가 있네?"
"내가 사놓은 술에서 손 떼라."
"돈도 많은 놈이 치사하게 굴지 마라."
차유리가 안동소주의 뚜껑을 열고 작은 잔에 술을 따랐다.
차우진이 물었다.
"관할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잘 알아?"
"아는 선배가 그쪽 팀에 있어."
"빼돌린 장비로 마약을 만들 수 있는 건 어떻게 알아낸 거야?"
"곽수혁이라고 그 연구소 팀장이 알아낸 횡령 건을 조사하다 알아냈지."
"그래서 장호철이 곽수혁 팀장을 죽이려고 했구나."
차유리는 차우진이 이번 사건에 관해 물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순히 대답했다.
사건이 벌어진 곳은 사덕리소스의 금광이다. 그녀는 차우진이 사덕리소스의 지분을 10퍼센트나 가지고 있다는 걸 안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런데 경찰이 이런 것까지 알아냈으면 곧 뉴스에 나올 테고."
그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딥어스테크 주가는 더 폭락하겠네."
"왜? 거기 주식도 사게?"
"더 떨어지면?"
"돈 없다며?"
"있더라고."
"야. 치킨도 배달시켜라. 두 마리."
"돼지냐? 한 마리면 되지."
"넌 안 먹게?"
"두 마리 시키는 중이야."
53. 지분 거래
차우진이 서준석 사장을 만났다.
서준석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차 이사님. 딥어스테크의 주가가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그건 차우진이 예상했던 일이다.
"장호철이 사장 자리에 있으면서 저지른 짓이 있으니까요."
"찌라시를 하나 봤는데, 회사 장비를 빼돌려서 마약까지 만들었답니다. 아무리 찌라시라도 그건 너무 허황…."
"그거 진짜입니다."
"예?"
"장호철은 방화, 납치, 금광 폭파를 이용한 살인을 시도했습니다. 마약 만드는 정도는 하고도 남죠."
"그럼 그 찌라시가…."
"경찰에서도 이미 파악하고 있으니까, 기사가 곧 뜨겠지요."
"그래서 그 정보를 아는 사람들이 주식을 팔아치워서 주가가 폭락하는 거군요."
"사덕리소스 때처럼 100원짜리로 떨어지진 않겠지만요."
서준석이 한숨을 푹 쉰 후에 말했다.
"차 이사님. 주가가 떨어져도 우리는 속상해하지 맙시다. 딥어스테크가 설마 망하겠습니까? 경영진만 정신 차리면 언젠가는 주가도 회복할 겁니다."
"속 안 상합니다."
"차 이사님은 주식 담보대출까지 받아서 사셨는데…."
차우진이 살짝 머뭇거렸다.
"어…."
"반응이 왜 그러십니까?"
"저는 10퍼센트 정도만 샀습니다. 정찰대만 보낸 거죠."
사덕리소스가 딥어스테크 주식을 대량으로 매집한 건, 그래야 사장이나 부사장 같은 경영진을 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우진 개인은 가용 자금의 10퍼센트 정도만 그 주식을 사는 데 사용했다.
서준석이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우진이 물었다.
"왜 눈으로 욕하고 그러십니까?"
"입으로도 하고 싶습니다. 같이 매집하는 줄 알았는데…."
"처음에는 장호철을 속여야 하니까 저는 지분이 없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일부러 표가 날 만큼만 샀습니다. 장호철이 저한테 화가 나야 저를 노릴 테니까요."
"근데 장호철은 저를 공격했잖습니까?"
"대놓고 금광을 폭파하려 할 줄은 몰랐습니다. 사장님은 하필 그때 거기 계셔서 말려든 겁니다."
서준석이 차우진을 다시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거 진짜지요? 주식이 더 싸지길 기다린 거 아니시죠?"
"어…."
차우진이 말을 돌렸다.
"오늘은 국밥에 수육 추가할까요? 제가 사겠습니다."
"소주도?"
"물론 소주도."
서준석이 눈에서 힘을 풀며 말했다.
"차 이사님이야 주식 고수이니까, 다 계획이 있으셔서 그러셨겠지요. 우리 회사도 망하는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크게 들어오셨잖습니까?"
그때는 사덕리소스가 진짜 망할 상황이어서 주가가 100원도 안 됐었다. 그래서 차우진이 사덕리소스의 지분을 10퍼센트나 살 수 있었다.
서준석이 물었다.
"그런데 차 이사님. 그때 우리 회사 주식은 왜 사들인 겁니까? 금광에서 금맥이 발견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망할 상황이었는데."
그 금맥은 차우진이 주식을 매수한 후에 발견됐다.
차우진이 대답했다.
"10년 후에도 안 망할 걸 알았으니까요."
박창수는 차우진에게 사덕리소스가 멸망 초기까지 운영됐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로 그때까지 버티는지는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멸망 초기까지 버텼다는 건, 그때까지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나름 잘나갔다는 뜻이다.
서준석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느낌이 좋았거든요."
꿈속 미래 이야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 말해봤자 서준석이 믿지도 않겠지만, 믿어서도 안 된다.
멸망급 빌런 중에는 끝내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놈들이 있다.
차우진이 10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공개하면, 그 빌런들도 멸망급 재난에 관한 정보를 가지게 된다.
'그 재난 중에 하나만 터져도 인류 절반이 죽어. 두 개면 60억이 사망하는 거고.'
그래서 미래 이야기는 말할 수 없다.
서준석은 알아서 납득했다.
"아. 느낌…. 동물적 감각으로 투자하시는 스타일이시구나. 그래서 이번 딥어스테크도…."
"그렇죠."
"그럼 딥어스테크는 어떻게 보십니까? 주가가 다시 오르겠지요?"
"욕을 먹는 건 장호철인데 이미 죽었으니까요. 남은 사람들, 그러니까 홍성준 부사장의 세력이 일을 제대로 하면 회사는 유지되겠지요."
"그래야 하는데요. 그럼 이제 관망하면 되는 걸까요?"
"저는 물을 좀 타려고요."
"예?"
"주가가 더 폭락하면 물을 타서 지분을 늘릴 생각입니다."
"아니. 그러다 그 회사가 망하면 손실이…."
"안 망할 거라면서요."
"그, 그야 그렇지만…."
차우진은 딥어스테크가 필요하다. 정확히는 딥어스테크에서 개발이 중단된 마그마 탐지기가 필요하다.
회사가 망하면 개발 2팀만 따로 스카우트하는 방법도 있긴 있다.
하지만 스카우트가 계획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다. 연구원들이 사덕리소스가 싫다고 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팀을 통째로 스카우트한다고 해도 그 개발이 잘 진행될지는 알 수 없다. 개발 환경이 변하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제일 좋은 건 딥어스테크에서 지금처럼 개발하게 하는 것이다.
서준석이 물었다.
"물은 얼마나…."
"이제 몰빵하려고요."
서준석이 잠시 생각했다.
차우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의 회사는 이미 예전에 사채업자 박재구에게 넘어갔을 수 있다.
얼마 전에 차우진이 구하러 오지 않았으면 금광이 폭파됐을 때 죽었을 게 뻔하다.
서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도 금광을 담보로 돈을 더 마련해서 사들이겠습니다. 명분은 뭐, 기업 가치를 고려한 물타기가 되겠군요."
***
장호철의 범죄가 더 많이 뉴스에 나왔다. 다른 회사의 금광을 폭파해 그 회사를 망하게 하려 했다는 것도 알려졌다.
찌라시가 돌 때 이미 폭락했던 딥어스테크의 주가가 또 폭락했다.
그렇다고 예전의 사덕리소스처럼 동전주가 된 건 아니다. 주식이 폭락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가격대는 지켰다.
차우진과 사덕리소스는 그 주식을 사들였다.
***
부사장 홍성준이 슬쩍 웃었다.
"죽은 사람도 있는데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이러면 우리가 경영권을 장악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송 이사가 맞장구쳤다.
"사장이 죽어버리면서 사장파가 중심을 잃었으니까요."
"그러면 사덕리소스 차우진 이사의 요구는 받아들일 필요가 없겠군. 사장 해임을 위한 임시 주총 자체가 취소됐으니까."
송 이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합니다. 우리보다 작은 회사의 이사가 감히 우리 회사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건 아니지요."
다른 이사도 맞장구쳤다.
"거절 통보를 하시죠."
"그래야지."
송 이사가 얼른 나섰다.
"부사장님은 이제 사장님이 되실 테니, 이사는 이사인 제가 상대해야죠. 제가 가서 통보하겠습니다."
홍성준이 사장석에 앉아서 손을 흔들었다.
"어. 그래. 차 이사는 송 이사 선에서 정리해."
***
차우진은 얼마 전에 부사장 홍성준과 협상했다.
차우진이 임시 주총에서 장호철을 해임하는 걸 도와주면, 홍성준은 차우진에게 특정 개발팀을 지원할 권한을 가진 개발이사 자리를 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송 이사가 차우진을 만나 통보했다.
"우리 회사 사장님이 돌아가셔서, 임시 주총은 취소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번에 부사장님과 합의한 건 없던 일로 합시다."
"이러면 곤란한데요."
송 이사는 처음 왔을 때부터 건들거렸다.
"그리고 거 젊은 사람이 말이야. 남이 아쉬울 때를 노려서 괜히 이사 자리나 요구하고 말이야."
차우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음…. 이 반응은 뭘까?"
"이사 자리가 그렇게 시장 바닥에서 사는 것처럼 되는 자리인 줄 아나?"
"사장 자리는 돈으로 사는 게 맞는데, 이사 자리는 다른가?"
"뭐? 당신 왜 이렇게 말이 짧아?"
"말이 짧은 건 당신이 먼저고."
"너 몇 살이야!"
"내가 살아온 세월이 좀 긴데."
차우진이 꿈속 미래에서 경험한 세월은 꽤 길다. 그걸 다 포함하면 현실 나이에 상당한 숫자를 더해야 한다.
송 이사가 소리를 질렀다.
"이사라고 다 이사인 줄 아나! 회사도 급이 있고 이사도 급이 있어!"
송 이사는 화를 벌컥 내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차우진이 혀를 찼다.
"선 넘네."
송 이사가 선을 넘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임시 주총이 없으니까 내 도움이 필요 없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지나친데?"
어쨌든 일이 좀 복잡해졌다.
***
서준석 사장은 송 이사가 어떻게 하고 갔는지 듣고 화를 냈다.
"그 사람들은 참 신의가 없습니다. 저번에는 그렇게 아쉬운 소리를 했다면서요?"
"장호철이 죽어서 판이 바뀌었으니까요."
장호철이 살아있을 때는 홍성준이 차우진의 요구를 다 받아줄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장호철이 죽자마자 태도가 바뀌었다.
그렇다고 장호철을 살려둘 수는 없었다. 미래의 빌런 장호철이 살아남아서 계속 발악하면, 서준석이 죽거나 딥어스테크가 망할 수도 있었다.
서준석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손 터시겠습니까? 주가가 회복될 때를 기다렸다가 팔아버리면 손해는 없는데…."
"송 이사가 선을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회사는 신경 쓰지 마시고…."
차우진이 말했다.
"왜 선을 넘었는지가 궁금하네요."
"네?"
"초면인데 너무 대놓고 넘어서."
서준석이 말했다.
"세상에는 그런 인간이 많습니다. 사람에 대한 기본 예의가 없는 거지요."
차우진은 마그마 탐지기가 필요하다. 그걸 만들어내려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주식은 아직 우리 손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송 이사의 반응은 역시 너무 이상합니다."
차우진이 서준석에게 말했다.
"주식은 팔지 마세요. 상황을 좀 알아보겠습니다."
***
차우진은 장호철의 집으로 찾아갔다. 위치는 알고 있었다.
장호철이 없어도 그 집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사람이 있네?"
정원이 넓은 저택의 담장에는 CCTV 여러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누가 어느 방향으로 접근하든 카메라에 찍히지 않고는 담장을 넘을 수 없었다.
"사각이 없어. 보안 업체에 돈 많이 줬나 보다."
상관없다.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은 총칼이 오가는 전투에만 쓰는 게 아니다. 침투용으로도 좋다.
이 저택의 CCTV는 사람이 걸어서 이동한다는 걸 전제로 설치되어 있다. 사람이 하늘을 날아가기만 해도 찍히지 않는다.
차우진이 밖에서 담장 안으로 공간을 건너뛰었다. CCTV에는 당연히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
차우진이 정원에서 작게 말했다.
"여기서 챙길 정보가 있으면 좋겠는데."
딥어스테크 관한 새로운 정보가 필요했다. 그는 장호철이 숨겨둔 단서가 있을까 해서 이곳을 찾아왔다.
"사람이 없으면 집에서 비밀 공간이라도 찾아보려고 했는데."
거실에 사람들이 있었다.
"저 사람들의 대화에서도 건질 게 있겠지."
***
장호철의 아내 박현진이 붉은색 와인을 마셨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그녀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바람이나 피고 나 때리던 놈이에요. 잘 죽었어."
딥어스테크 신동욱 전무가 물었다.
"그래서 맞바람으로 상대하셨습니까?"
"어차피 쇼윈도 부부였는데 그놈만 즐기란 법 있어요? 그래서 뭐? 그걸로 돈 뜯으러 왔나?"
신동욱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돈을 받아가려는 게 아니라, 드리려고 왔습니다."
"응? 어떻게?"
"물려받으시는 사장님의 지분, 저희 쪽으로 넘기시죠."
"흐응."
박현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많은 걸 다?"
"전부 다 필요합니다."
"내가 사장에 취임할 수도 있는데?"
신동욱이 실실 웃었다.
"사모님이요?"
"왜? 내가 못할 것 같아요?"
"능력이 있으면 하실 수는 있겠죠. 사장 자리에 앉으실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사장이 되시려면 먼저 부사장 파벌과 싸워야 할 텐데, 혼자서 가능하시겠습니까?"
박현진이 잠시 생각하다 제안했다.
"음…. 신 전무님이 도와주면?"
신동욱이 활짝 웃었다.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그의 얼굴에 올라왔던 웃음은 말 몇 마디와 함께 사라졌다.
"저는 제가 사장이 되려고 찾아온 겁니다만?"
***
차우진은 창문 아래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송 이사가 이상할 정도로 선을 넘는다 싶더니, 역시 상황에 변화가 있었네. 홍성준 부사장은 이 상황을 모르나 본데."
차우진이 말했다.
"그럼 내 조건도 변해야지."
54. 이호경식
박현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신 전무님. 그런 야심이 있으셨네."
신동욱 전무가 실실 웃었다.
"제가 사장님의 오른팔 아닙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부사장이 아니라 제가 사장이 되어야지요."
"내가 말이에요. 홍 부사장과 싸우는 게 아니라 손을 잡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내가 사장이 될 텐데?"
신동욱이 피식 웃었다.
"오너 리스크로 주가가 폭락한 회사를 사모님이 물려받으시겠다?"
"주식은 내가 제일 많으니까요?"
"부사장 쪽 투자자들은 사장님을 쫓아내서 주가를 회복시키는 방식으로 돈을 벌려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사모님을 받아주겠습니까?"
박현진이 인상을 썼다.
"그래요? 그럼 내가 지분을 홍 부사장에게 파는 선택지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쪽이든 우리든 값은 비슷하게 쳐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신동욱이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표정이 다시 차가워졌다.
"사모님은 바람이 한 명과 난 게 아니더군요."
박현진의 표정이 굳었다.
"신 전무. 내 뒷조사를 어디까지 한 거죠?"
"제가 아니라 사장님이 하셨습니다."
장호철은 비서인 김태훈을 시켜 박현진의 뒷조사를 했다. 그건 장호철이 신동욱에게는 알리지 않은 정보였다.
이제 김태훈은 신동욱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 정보도 넘어갔다.
신동욱이 말했다.
"저는 그 정보를 물려받은 것뿐입니다."
"그래서요? 나 이제 욕 좀 먹으면 되나요?"
"이거 다 까면 그냥 욕이 아니라 조리돌림을 당할 겁니다. 사모님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으신데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요?"
신동욱이 다시 웃었다.
"협박이라니요. 거래를 제안하는 겁니다."
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당근을 제시했다.
"사모님은 경영에 관심 없는 거 압니다. 이제 간섭하는 사람도 없어졌는데, 앞으로는 돈 실컷 쓰면서 행복하게 사셔야지요."
박현진은 고민했다.
그녀의 보유 지분이 많긴 하지만 회사를 단독으로 장악할 정도는 아니다. 혼자서 홍성준 부사장의 세력과 싸울 자신도 없다.
게다가 신동욱도 참전을 선언했다.
'나 혼자서 부사장에 신 전무까지 이기는 건 무리야.'
박현진은 원래 회사 경영은 관심도 없었다. 기회가 오면 해볼까 하는 생각은 있지만, 적극적이진 않았다.
'그 돈으로 인생을 즐기며 속 편하게 사는 게 나은 거 아닐까?'
그녀가 입술을 핥았다.
"신 전무님. 얼마까지 생각하고 오셨을까?"
"요즘 주가 폭락 중인 거 아시죠? 그 손해를 어느 정도는 복구할 만큼 프리미엄을 붙여드리죠."
박현진이 웃었다.
"호호. 신동욱 전무님. 그럴 돈은 있으시고요?"
"설마 제 돈으로 그걸 다 사겠습니까?"
"그럼?"
"제가 인맥이 좀 있잖습니까? 저도 투자자를 모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런 회사를 뭘 보고 투자했대요?"
"설마 우리 회사가 망하기야 하겠습니까? 만약에 일이 안 풀려서 망할 것 같으면, 그때는 회사 자산을 팔아서 투자금부터 갚으면 됩니다."
박현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돈 되는 자산을 팔면 회사는 어쩌라고?"
신동욱이 실실 웃었다.
"사모님한테는 강 건너 불구경 아니겠습니까?"
"그거 마음에 드네요. 불구경."
그녀도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다른 조건은?"
"현재 보유한 주식을 한 주도 남김없이 우리 쪽에 전부 넘기는 조건. 거기다 부사장 쪽과는 협상 자체를 안 하셔야지요. 양다리를 걸치시면 곤란합니다."
차우진이 창문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작게 말했다.
"저 아줌마. 주식 다 팔겠네."
***
차우진이 그곳을 빠져나온 후에 사덕리소스 서준석 사장을 만났다.
차우진이 물었다.
"딥어스테크 주식은 매집 중이시죠?"
"예. 주가가 내릴 때마다 밑에서 살살 받아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가가 잘 안 내려갑니다. 장호철이 그런 짓을 하고 죽었는데도 주가는 버티네요."
"다른 세력도 매집하고 있어서 그럴 겁니다."
"예? 왜 이 회사를 굳이…."
"장호철은 죽었으니, 부사장만 밀어내면 집어삼킬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누가 참전했는지 혹시 아십니까?"
"신동욱 전무. 장호철의 최측근입니다."
***
대표이사 해임을 위한 임시 주총은 취소됐다.
그렇다고 대표이사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다. 새로운 대표이사 선임을 위한 임시 주총이 필요하다.
사장 대리 자격으로 그걸 준비하던 홍성준 부사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사모님이 지분을 다 넘겼다니!"
윤 이사가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분에 변동이 있습니다. 사모님의 지분이 통째로 다른 쪽으로…."
"도대체 누가!"
"정체를 파악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윤 이사가 침을 꼴깍 삼켰다.
"신동욱 전무 쪽에서 외부 세력과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 그쪽이 수상합니다."
"뭐? 이 시기에? 신 전부가 아무 돈이나 끌어들이는 거 아니야?"
송 이사가 물었다.
"부사장님. 이제 어떻게 하지요? 저쪽에서 사장이 되면…."
홍성준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우리 쪽은 다 해임되겠지."
신동욱 전무가 사장이 되면 홍성준 쪽 이사들을 해임할 핑계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다들 흠집 하나 없이 그 자리를 유지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증거가 명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신동욱이 사장이 되고 외부 세력과 손잡아 충분을 지분을 확보하면, 홍성준 쪽 이사들을 다 날릴 수 있다.
송 이사가 제안했다.
"부사장님. 신 전무와 협상하는 건 어떠십니까?"
"협상?"
"사장 자리는 넘겨주되 우리 자리는 유지하는 겁니다."
"신 전무가 왜 그걸 받아들이겠나?"
"우리 쪽에서 확보한 우호지분이 꽤 되니까요."
홍성준이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신 전무가 우리와 권력을 나눌 것 같아? 여기 있는 사람은 다 자를 거야. 우리 쪽에 줄을 선 모든 사람의 목을 칠 거라고."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홍성준도 사장이 되면 신 전무와 그쪽 이사들을 자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윤 이사가 제안했다.
"사장님. 우리에게는 아직 계산에 넣지 않은 우호지분이 있잖습니까?"
"어디?"
"사덕리소스 말입니다."
"그쪽 제안은 이미 거절했는데…."
"다시 받아주면 되잖습니까?"
홍성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사덕리소스만 잡으면 할만해."
***
홍성준이 사덕리소스의 서준석 사장을 찾아갔다.
약속장소에 나온 건 차우진이었다.
홍성준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에도 차 이사님이 나오셨군요."
"저번에도 말했듯이, 제가 이번 일의 전권을 가지고 있거든요. 저와 이야기하시죠."
"하긴. 저야 합의만 할 수 있으면 되니까요."
"그래서 보자고 하신 이유가?"
"지난번에 하신 제안 말입니다. 임시 주총에서 나를 지지할 테니 이사 자리를 달라고 하셨잖습니까? 개발팀을 지원할 수 있는 이사 자리 말입니다."
"아아. 그 조건."
홍성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상황이 변했습니다."
홍성준의 표정이 급변했다.
"사덕리소스도 지분을 팔았습니까?"
"우리가 아니라 딥어스테크의 상황이 변했죠."
"예?"
"새로운 세력의 참전으로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이렇게 다시 찾아오셨잖습니까?"
홍성준는 당황했다.
'이미 판을 다 읽고 있구나.'
그가 손을 흔들었다.
"사실 그때 그건 거절이 아니라 잠시 대답을 미룬 겁니다. 이제라도 동의할 테니까…."
"그때 찾아온 사람, 이름이 뭐더라…."
"아. 송 이사를 보내서 잘 말씀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말을 참 기분 나쁘게 하던데, 역시 그게 홍 사장님이 보낸 메시지군요."
홍성준은 깜짝 놀랐다.
"예? 송 이사가요? 아니, 그럴 리가…."
"왜 모르는 척하십니까?"
홍성준이 손을 흔들었다.
"절대로 아닙니다! 아니, 제가 왜…."
"흐음. 홍 사장님 뜻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차우진은 홍성준이 이 상황을 모를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송 이사가 프락치겠지.'
홍성준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해해주셔서 고맙습…."
"이해한 거 아닙니다만."
"예?"
차우진은 홍성준의 손을 들어주려는 게 아니다. 송 이사가 프락치라는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때 우리 제안을 거절하셨으니, 우리도 거절하면 깔끔하게 정리되겠군요."
홍성준은 다급해졌다.
"그건 아니지요! 서 사장님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 사장님이 지금 금광에 가 계셔서 바쁘긴 한데, 밖에 나와 계시려나."
차우진이 스마트폰의 스피커폰 모드로 서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곧바로 연결됐다.
"사장님. 딥어스테크 홍성준 부사장님이 사장님과 이야기해야겠답니다."
- 아니, 날 만나서 뭐하게? 그건 차 이사가 전권을 가지고 있잖아. 나 바빠. 다시 들어가야 해. 차 이사가 다 알아서 해.
차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들으셨죠?"
홍성준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 협상이 실패하면 홍성준만 잘리는 게 아니다. 그에게 줄을 섰던 사람들은 다 날아간다.
홍성준은 회사 지분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다. 회사를 그만둬도 풍족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회사를 나가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 딥어스테크 사장 자리가 있다. 이 위기만 넘기면 이인자가 아니라 일인자가 될 수 있다.
다른 문제도 있다. 그에게 줄을 선 사람 중에는 지금 잘리면 길바닥에 나앉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회사를 새로 차리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컸다.
어차피 이 업종으로 회사를 차려야 하는데, 딥어스테크가 방해하면 일이 잘 풀릴 리가 없다.
그는 회사를 차렸다가 쫄딱 망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다.
홍성준이 침을 꼴깍 삼킨 후에 물었다.
"차 이사님. 원하는 조건이 있습니까?"
"아. 지난번에는 개발팀을 하나 지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만."
"그렇죠. 그거는 당연히 오케이를…."
"이젠 그거로 부족합니다."
"그럼 뭘 더…."
"연구 예산 집행권."
"예산을 어느 팀에 밀어줄지 그 권한도 드린다고 이미 말했습니다만."
"필요하면 연구소가 아니라 다른 사업부서의 예산을 빼앗아서 연구비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예산권을 원합니다."
홍성준이 항의했다.
"예? 아니, 그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차우진은 딥어스테크가 목적이 아니다. 마그마 탐지기의 완성이 목표다. 연구비가 더 필요하면 다른 부서에서 빼앗아서라도 밀어줘야 한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 돈을 내가 가져가겠다는 게 아닙니다만? 다 연구비에 투자하는 겁니다."
"그야 그렇지만…."
"지금 딥어스테크를 먹으려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르겠지요. 나는 그 예산을 연구비로 쓰지만, 신동욱 전무 쪽은 회사가 망하든 말든 투자금부터 회수하고 싶을 테니까."
홍성준도 안다. 외부 세력이 공짜로 신동욱 전무와 손을 잡을 리 없다.
'회사의 자산을 팔아치워서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하겠지.'
게다가 그는 방금 차우진이 한 말에서 '신동욱 전무'라는 말을 들었다.
'차 이사는 이미 우리 회사의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어. 어설프게 속이려 했다가는 판이 깨진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사덕리소스의 지분이 없으면 임시 주총에서 신동욱 전무를 이길 방법이 없다.
게다가 차우진은 이미 돌아가는 판을 다 알고 있다.
홍성준이 항복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서 이사들과 투자자들을 설득하겠습니다."
***
홍성준이 떠난 후에 서준석이 그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광산이 아니라 근처에 있었다.
서준석이 물었다.
"전화가 오길래 미리 말을 맞춘 그대로 대답하긴 했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차우진이 대답했다.
"홍 부사장이 항복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덜 급한가 봅니다. 서두르지를 않네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요?"
"전무가 부사장 쪽에 프락치를 심어놨더군요. 부사장이 서두르지 않으면 그사이에 전무가 움직이겠지요."
55. 이호경식 II
딥어스테크는 원래 사장 밑에 부사장 홍성준과 전무 신동욱이 있었다.
홍성준은 회사 지분을 조금 가지고 있고, 예전부터 우호지분 일부와 인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장호철이 있을 때는 기를 제대로 못 폈다.
신동욱 전무는 원래 사장의 오른팔이었다. 회사 전체로 보면 삼인자이고, 사장 계파에서는 이인자였다.
그런데 사장이 사망했다.
그 계파의 이사가 말했다.
"이제 전무님이 회사의 이인자가 되셨습니다."
신동욱이 호통을 쳤다.
"뭐? 이 사람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죄송합니다. 돌아가신 사장님 생각하면 벌써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사장님이 돌아가셨으니 내가 일인자이지! 당신 지금 내 위에 홍 전무를 두는 거야?"
"예? 아, 아닙니다. 당연히 전무님께서 일인자시죠. 사장 취임이야 그냥 형식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신동욱이 실실 웃었다.
"당연하지. 사모님이 가지고 있던 사장님 지분도 우리 투자자들이 나눠서 인수했으니까, 부사장은 이제 내 상대가 안 돼."
"미리 축하드립니다."
그들이 웃고 즐기는 곳에 다른 사람이 뛰어들었다.
"저, 전무님. 큰일 났습니다."
"왜?"
"차 이사가…."
신동욱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회사에 차 이사가 있었어? 난 왜 모르지?"
"사덕리소스 이사입니다."
"아아. 그 차 이사. 거기는 사장님이 직접 접촉하던 곳이잖아."
"예. 맞습니다. 부사장 쪽에서 오늘 차 이사와 접촉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신동욱이 인상을 구겼다.
"잠깐만. 사덕리소스는 원래 어느 쪽 손도 안 들어준 거 아니었어? 그리고 사장님한테 듣기로는 우리 쪽으로 좀 기울었다고 했는데?"
장호철은 차우진에게 당했다는 걸 깨달은 후에 직접 금광을 폭파하러 갔다. 신동욱이 들은 건 그러기 전의 상황이었다.
신동욱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 약도 쳐놓았다.
"그리고 차 이사와 부사장이 왜 손을 잡겠어? 부사장 쪽에서 거절할 때 차 이사를 모욕했으니까, 잡아도 내 손을 잡아야지."
"그렇기는 한데…."
신동욱이 물었다.
"차 이사가 왜? 부사장 편에 서겠대?"
"차 이사가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는데, 부사장 쪽에서는 그걸 받아들일 분위기입니다."
"그러면 판이 바뀌나?"
"사덕리소스가 확보한 지분이면 캐스팅보드 역할이 불가능한 건 아니라서…."
신동욱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조건은? 무슨 조건인데 부사장이 받아준다는 거야?"
"연구소의 연구 예산을 어떻게 배정할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나 봅니다."
"뭐야. 그게 다야?"
"다른 부서의 예산을 끌어다 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원한답니다. 저번보다 요구 조건을 올린 겁니다."
신동욱의 표정이 풀렸다.
"다른 건 뭐 없어?"
"예. 중요한 조건은 그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신동욱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별것 아니네. 그 정도는 나도 해줄 수 있지!"
같이 있던 이사가 말렸다.
"하지만 전무님. 그렇게 되면 연구소는 예산을 쥔 차 이사가 좌지우지할 겁니다. 그런 힘을 줄 필요는…."
"우리 회사는 원래 토목이 메인이고 연구소는 사이드잖아. 그러니까 연구 예산을 이리저리 조정하겠다는 것 정도는 들어줘도 돼."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연구소가 아니라 경영권이야!"
신동욱 전무가 손을 휘휘 저으며 지시했다.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차 이사와 당장 자리 만들어!"
***
신동욱이 차우진을 만났다.
"차 이사님은 듣던 대로 젊으시군요. 뉴욕에서 오셨다고요?"
"전임 사장님한테 그렇게 들으셨나 봅니다."
"하하하. 그렇죠."
신동욱은 차우진이 장호철을 '전임'이라고 부른 게 마음에 들었다.
'사장 자리는 이제 내 거니까.'
그가 여유를 부리며 손을 흔들었다.
"연구 예산에 관한 권한. 원하는 만큼 드리지요. 그러니 나하고 손잡으시죠."
"그러면 전무님이 유리해집니까?"
"주총에서 부사장을 확실히 밟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장이 된다는 말이지요."
"좋으시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차우진이 씩 웃었다.
"오늘 저쪽과 이야기한 건데, 어떻게 벌써 알고 오셨을까?"
"기업 간의 전쟁도 정보력 싸움입니다. 내부의 전투도 마찬가지지요. 홍 부사장은 그게 안 되지만, 나는 됩니다. 그러니 차 이사님도 나랑 손잡는 게 이익입니다."
차우진이 신동욱 전무를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장호철 사장과는 가까운 사이셨습니까?"
장호철은 방화 살인미수나 횡령, 금광 폭파 청부까지 다양한 범죄가 드러난 상태다.
그것 때문에 회사 주가도 폭락했다.
신동욱이 생각했다.
'이놈도 결국 주가를 높여서 이익을 보는 게 목적이군?'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하. 왜 물으시는지 알겠는데,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내 일만 했습니다. 내가 능력이 있으니 내치지 못한 거지요."
"그러시구나."
차우진이 신동욱 전무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저분들은?"
"제 밑에 있는 직원들입니다."
차우진은 그중 한 명을 본 적이 있다.
'저 새끼는 살모사 장의 부하네?'
"저분 성함이?"
"정동진 비서입니다만, 왜…."
"어디서 본 것 같아서요."
***
박창수가 망원경으로 정동진을 보며 말했다.
"저 새끼가 살모사 장의 오른팔이야."
차우진이 물었다.
"이름은?"
"정 뭐더라. 동해 어디랑 비슷했는데. 옛날에 기차 타고 해돋이 보러 가던 곳인데…."
"정동진?"
"아. 그래. 정동진."
차우진이 소총의 조준경 십자선에 정동진을 담았다.
박창수가 물었다.
"이 거리에서 가능하겠어?"
"저격은 가능한데, 몸에 방어구를 많이 둘렀어. 한 발로는 안 돼."
"저놈은 방어 계열 스킬을 각성했다. 한 발로 못 잡으면 저격은 실패야."
"잠깐만."
"왜?"
"저쪽에 있는 생존 커뮤니티를 습격하려나 본데?"
박창수가 다시 망원경을 들었다.
"살모사 장의 부하가 커뮤니티를 습격하려면…."
"폭탄부터 집어넣겠지. 창수 형. 일단 쏘자."
"한 발로는 안 죽는다니까."
"일단 맞으면 습격은 포기하겠지.
"정동진은 접근전으로 처리해야겠네. 오케이. 갈겨."
***
차우진이 정동진의 이름을 떠올렸다.
'해돋이 보던 곳이랑 같은 이름이라서 기억났다.'
차우진이 정동진을 보며 결론을 내렸다.
'역시 이쪽이 장호철의 부하들이야. 홍성준 부사장 쪽이 그나마 낫겠어.'
차우진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잘 생각하셨…."
"거절합니다."
"예?"
"알겠는데 거절합니다."
신동욱은 당황했다.
"이, 이유가 뭡니까? 우리와 손잡는 게 부사장 쪽보다 더 이익인데!"
"그거야 우리 쪽에서 판단할 일입니다만?"
신동욱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게 무슨…."
차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총 때 봅시다."
차우진이 나간 후에 신동욱이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 도대체 뭐야! 우리 조건이 더 좋잖아! 부사장 쪽보다 더 확실하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잖아!"
회의에 참석한 이사가 말했다.
"전무님. 이미 저쪽과 이야기가 많이 진행됐나 봅니다."
"그건 아직 결정 난 건 아니야! 그래서 이렇게 급히 찾아온 건데!"
비서 정동진이 물었다.
"전무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저 새끼가 누구인지 알아봐. 뉴욕에서 뭐 하는 새끼인지 알아내!"
"알겠습니다."
"부사장 쪽에서 결정하고 차 이사와 손잡으면 늦어! 그 전에 빨리! 오늘 당장!"
***
차우진이 건물을 나온 후에 말했다.
"정동진이 살모사 장의 오른팔이 됐다는 건, 신동욱 전무는 그때는 없다는 뜻인데."
차우진은 장호철의 부하 얼굴이나 이름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진 않는다. 정동진은 장호철의 오른팔인 데다가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는 것뿐이다.
"신동욱 전무는 중간에 잘리거나, 아니면 멸망 때 죽나 보네."
10년 후에 멸망급 재난이 동시다발로 터지면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현대 문명은 무너지고, 살아남은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지옥이 펼쳐진다.
그 재난을 피해 살아남으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
"아니면 그사이에 정동진한테 잡아먹혔거나."
차우진이 걸어가며 말했다.
"신동욱 전무는 이번엔 얼마나 오래 살려나."
***
정동진이 신동욱에게 보고했다.
"전무님. 차우진 이사는…."
"알아봤어?"
"그러긴 했는데, 그게…."
"그 새끼 어떤 새끼야?"
정동진이 머리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름 말고는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 제대로 조사한 거 맞아?"
"사덕리소스는 차 이사의 정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 한두 번 해? 그러면 직원을 매수해서라도 알아냈어야지!"
"몇 명 접촉해봤습니다만, 직원들도 이름만 안답니다."
"그 회사 이사라며? 왜 직원들이 이사에 대해 몰라?"
"최근에 이사로 취임해서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뉴욕은? 그쪽은 어떻게 됐어?"
"인맥을 동원해 알아봤지만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다른 이름을 쓴 것 같습니다."
"그런다고 못 찾아?"
"여기서 뉴욕에 전화로 물어보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신동욱이 화를 냈다.
"정동진! 너 일 이따위로 할 거야?"
"죄송합니다."
"김태훈은 이런 거 시키면 어떻게든 알아왔단 말이다!"
정동진이 허리와 머리를 숙이며 인상을 구겼다. 구긴 얼굴은 아래로 향하고 있어서 신동욱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내가 이런 새끼하고 일을 하니까 답답하다. 답답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하면 다야? 해결할 솔루션을 제시해야 할 거 아냐!"
정동진이 고개를 들며 제안했다.
"전무님. 차라리 차 이사를 납치해서 말을 듣게 만드는 건 어떠십니까?"
"치려면 그 회사 사장을 쳐야 하는 거 아냐? 차 이사 그 새끼. 아무리 잘나가도 결국은 사장 밑에 있는 이사잖아."
"서준석 사장은 금광 사건으로 언론에 나왔습니다. 그런 사람을 납치했다가 일이 틀어지면 금광 사건이 재조명되어서…."
"그래서 차 이사가 낫다?"
"어차피 차 이사가 전권을 쥐고 있습니다."
신동욱 전무의 눈이 번뜩였다.
"돈이 안 통하는 놈이면 칼은 통하겠지. 그게 낫겠다. 진행해!"
"예?"
"왜?"
"누구를 시켜서…."
신동욱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 이 새끼. 김태훈은 이런 일을 시키면 알아서 세팅까지 다 한다던데, 너는 뭐냐?"
"죄송합니다."
"모르면 김태훈한테 물어서라도 처리해. 나가!"
***
신동욱은 김태훈을 딥어스테크의 한직에 배치했다. 너무 한직이라서 사무실에 혼자밖에 없었다.
김태훈이 투덜댔다.
"이게 아닌데…."
김태훈은 신동욱이 아니라 장호철의 측근이다.
신동욱은 김태훈을 데려와 정보만 빼내고 한직에 처박아두었다.
김태훈이 지금 구치소가 아니라 밖에 있는 건 신동욱이 인맥을 움직여 빼준 덕분이다. 그는 아직 수사를 받는 상태다. 그래서 신동욱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정동진이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야! 김태훈!"
"뭐냐."
"너 나 좀 보조해야겠다."
"내가 니 시다바리냐? 꺼져라."
"전무님 지시다."
"전무님은 나한테서 아직도 빼먹을 게 남았나?"
"너 지금 네 처지 모르냐? 도로 유치장에 처박아줘?"
김태훈이 욕을 했다.
"씨발. 뭘 도와주면 되는데?"
"너 사람 섭외할 때 연락하던 놈들 있지? 거기랑 다리 좀 놔라."
"성구파는 요즘 분위기가 안 좋아. 비밀리에 키운 별동대가 이번 일로 날아갔거든."
"그 손실을 복구하려면 돈이 필요하겠네. 그러니까 그놈들은 내가 주는 일을 받을 거다."
"무슨 일인데?"
정동진이 말했다.
"사람 모아서 차 이사를 칠 거다. 전무님 지시다."
시큰둥하던 김태훈이 반응을 보였다.
"사덕리소스의 차 이사?"
"너도 알지?"
"나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들었지."
김태훈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다리 놔 줄 테니까 너도 나처럼 일해봐라. 그러다 결국 내 꼴 날 거다."
"끈 떨어진 패배자 새끼가 어디서 충고질이야? 나는 잘할 거니까 구경이나 해라."
56. 강습
차유리가 차우진을 발로 툭툭 찼다.
"야. 여기 있던 파스 또 네가 썼냐?"
차우진이 소파에 누운 채로 대답했다.
"이번엔 나 아니다."
"그럼 이게 어디 갔는데!"
"이번은 아니고 저번에 썼어."
"이게 확 그냥. 야. 나가서 사와."
"나중에 나갔다 올 때까지 기다려."
차유리가 팔을 보여주었다. 멍이 들어 있었다.
"보이냐?"
"뭐지? 왜 다쳤지? 곰하고 싸웠냐?"
"오늘 현장 덮치러 갔는데 어떤 새끼가 숨어 있다가 습격하더라?"
"죽였어?"
"나 형사다. 죽이겠냐?"
"또 부러뜨렸네."
차유리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어. 그래서 오늘은 현장에 얼굴도 비치지 말란다."
"거 성질 좀 죽이지."
"그 새끼가 칼 들고 덤볐다니까? 빨리 나가서 파스 사와!"
집에 있던 파스는 차우진이 그동안 다 썼다.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경찰은 파스 보급 안 나오나?"
차유리가 소파에 얼른 누워 리모컨을 잡으며 말했다.
"나오겠냐?"
"잠깐. 뭐지? 목적이 파스가 아니라 소파냐?"
"이게 바로 일타쌍피 아니겠냐?"
차우진이 집 밖으로 나왔다.
"이제 신동욱이 움직일 텐데, 협상을 제안하려나. 아니면 칼을 들이밀려나."
신동욱은 멸망한 미래에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떤 성향인지 확실히 아는 건 아니다.
"장호철의 현재 오른팔과 미래의 오른팔이 같이 있으니까, 어떻게 나올지 뻔하긴 하다만."
***
이튿날, 신동욱 전무의 비서 정동진이 차를 몰고 경기도의 시골길을 달렸다. 그 길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좁고 관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비포장도로였다.
그 길로 한참 들어가자 돼지를 조금 키우는 한적한 농가가 나왔다.
정동진이 농가 앞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농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남자가 다가왔다.
"어디서 오셨을까?"
"사장님 계시지?"
"어디서 오셨냐니까?"
"김태훈이 미리 연락 다 해놨다고 하던데?"
"아. 그분이시구나? 확인이 필요해서 물어본 거니까 이해하쇼."
남자가 휴대폰을 꺼내며 농가로 들어갔다.
정동진이 혼자 남아 침을 뱉었다.
"김태훈 그 새끼가 처음부터 일을 제대로 처리했으면 나까지 이런 냄새나는 곳에 올 일은 없었는데. 무능한 새끼."
***
차우진이 그 농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손에는 망원경이 있었다.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네. 주변에 집도 없고, 목격자고 없고."
그 농가에 있는 건 돼지를 몇 마리 키우는 작은 축사와 그리 크지 않은 집, 창고 정도였다.
"저 돼지는 직접 키우는 걸까? 아니면 빌린 걸까? 그것도 아니면 빼앗은 건가?"
정동진은 짜증을 내면서 담배만 피웠다.
"공기 좋은 곳에 와서 담배는. 아. 축사 때문에 냄새는 좀 나겠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그곳으로 차가 한 대 다가왔다.
차에서 성구파 두목 박성구가 부하들과 내렸다. 농가를 지키던 놈이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인사했다.
차우진이 고배율 망원경으로 박성구의 얼굴을 확인했다.
박성구의 얼굴이 익숙했다.
"하이에나 새끼네?"
하이에나는 멸망한 세계의 대규모 조직에서 활동하던 놈을 부르는 별명이다. 그 조직의 두목은 멸망급 빌런이라고 알려졌다.
"금광에 나타났던 놈도 하이에나였는데, 여기도 한 마리가 있단 말이지. 내가 제대로 찾아왔구나."
차우진은 하이에나가 싫었다.
***
박창수가 폐허가 된 콘크리트 더미 뒤에 등을 붙이고 있었다. 그가 머리를 내밀려고만 하면 총알이 날아왔다.
박창수가 불평했다.
"저 하이에나 새끼들은 탄약이 남아도나."
차우진이 말했다.
"이쪽에 탄약 생산 기술자가 있잖아. 거래용 탄약도 있고."
멸망한 세계의 탄약은 기업의 금속 가공 공장에서 만드는 게 아니다. 그런 공장은 이미 다 무너졌다.
새로 제작되는 탄약은 대부분 기술자가 수작업으로 만든다.
"그거면 소모한 탄약은 보충하고도 남는다고 판단했겠지."
"어떻게 할래? 이대로 가면 포위될 거다."
차우진과 박창수는 탄약을 사러 왔다가 전투에 휘말렸다.
오늘 거래 상대방 중에는 탄약 기술자가 있었다.
탄약의 대금으로 지급할 물품 중에는 총알을 만들 때 쓰는 자재도 있다. 탄약 기술자는 그 자재의 품질을 확인하려고 동료들과 같이 왔다.
그런데 그들이 습격당했다. 차우진과 박창수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습격당한 후였다.
차우진이 말했다.
"적이 훨씬 더 많아. 우리가 빠지면 이 사람들은 탄약 기술자만 빼고 다 죽을 거야."
"그거야 당연하지. 어떻게 잡을 거냐고."
"형이 시선을 끌어."
"내가 미끼구나. 나한테 제일 위험한 거 시키고 있어."
차우진이 손가락으로 절벽 위쪽을 가리켰다.
"그때 내가 저기로 이동해서 위에서 내리꽂을게."
"저기? 블링크로 가기에는 너무 멀지 않아?"
"무리하면 돼."
"나한테 두 번째로 위험한 거 시키고 있어. 지금?"
"지금."
박창수가 방탄 방패를 들고 옆으로 뛰었다. 그러면서 소리를 질렀다. 탄약을 아끼지 않고 방아쇠도 당겼다.
거의 동시에 총탄이 소나기처럼 날아와 방패를 때렸다. 그중에는 관통력이 강해서 방패를 뚫고 들어오는 것도 있었다.
"으아아아! 지금!"
***
차우진이 그 전투를 떠올렸다.
박성구는 그 전투에서 박창수의 방패에 구멍을 낸 놈이다. 그 후에도 충돌한 적이 있다. 그래서 얼굴을 기억했다.
"저놈도 멸망 후에 살아남았네. 그러고 보면 장호철도 그렇고 정동진도 그렇고, 나쁜 놈들이 꽤 많이 살아남았어."
***
박성구가 축사 옆에 드럼통을 갖다놓고 삼겹살을 구웠다.
그가 집게로 삼겹살을 집어 먹으며 물었다.
"김 비서 후임이시라고?"
정동진이 삼겹살을 같이 집어 먹으며 대답했다.
"후임이라니. 김 비서가 망쳐놓은 일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박성구는 소주를 물컵으로 마셨다.
"우리가 이번에 손해를 많이 봤는데 말이지요."
정동진도 기세에서 눌리지 않으려고 물컵으로 술을 마셨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제 윗분이 회사를 장악할 겁니다. 그러면 보상은 충분히 하겠습니다."
"돈이야 당연히 많이 주셔야지. 그런데 이번 일을 받으려면, 거기에 하나 더 얹어줘야겠는데."
"뭘 말입니까?"
"내가 힘들게 키운 별동대가 이번에 다 칼을 맞고 체포됐단 말이지."
금광을 습격한 박정규는 박성구의 돈을 받아 쓰고 정보도 지원도 받았다. 박정규의 조직은 독립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그쪽 부하들은 그런 내막은 몰랐다.
정동진이 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합니까? 그건 사장님과 김 비서한테 따지셔야죠."
"장 사장은 죽었잖아."
"김 비서는 살아있습니다만?"
박성구가 피식 웃었다.
"내가 뭐 의뢰인한테 따지겠다는 건 아니고."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면서 눈알이 번들거렸다.
"어떤 새끼가 그랬는지 알아야겠는데."
정동진이 씩 웃었다.
"알면 어쩌시려고?"
박성구가 집게를 돼지우리 방향으로 향했다.
"잡아다 돼지 먹이로 줘야지."
정동진의 표정이 굳었다.
"어? 설마 지금 이 고기…."
"왜? 맛이 특별히 좋으신가?"
"씨, 씨발."
박성구가 웃었다.
"크크. 마트에서 샀으니 맛있어야지."
"어디까지가 진짜입니까?"
"죽은 놈을 돼지 먹이로 주는 거? 아니면 그 고기? 고기는 마트에서 산 거 맞아. 우리는 돼지 도축은 할 줄 모르거든."
그가 축사를 다시 가리켰다.
"저건 위장용으로 키우는 거야."
정동진은 찜찜했지만, 일부러 고기를 집어 이를 갈듯이 씹으며 말했다.
"이번 타깃은 사덕리소스 이사입니다. 별동대가 금광을 폭파하려다 당했으니까, 누구 짓인지 차 이사도 아는 게 있겠지요. 잡아서 직접 물어보면 될 겁니다."
"흐흐. 그렇게 날로 먹으면 쓰나. 당신네가 알아내서 나한테 알려줘야…."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습격…. 으아악!"
차가 사람을 치는 소리도 들렸다.
박성구가 벌떡 일어났다.
"어떤 개새끼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
차우진이 망원경에서 눈을 뗐다.
"왜 하필 오늘 습격하는 거야?"
그는 박성구의 조직을 찾아내려고 정동진을 미행했다.
"장호철이 청부업자들을 보낼 때 이용하던 브로커는 찾았는데."
정동진이 박성구를 왜 만나는지도 짐작이 갔다.
"여기서 정보도 좀 얻고 미리 정리도 좀 하려고 했는데."
새로운 놈들이 쳐들어왔다.
차우진이 혀를 차며 농가를 향해 움직였다.
"쯧. 저놈들이 다 죽으면 나는 어디서 정보를 얻고 일은 어떻게 키우라고."
***
앞쪽이 좀 찌그러진 승용차에서 천수파 두목 송천수가 내렸다.
승용차의 앞쪽에는 농장 입구에서 어슬렁거리며 보초를 서던 놈이 팔다리가 꺾인 채로 쓰러져 있었다.
뒤따라온 승합차에서도 얼굴을 가린 놈들이 우르르 내렸다.
박성구가 외쳤다.
"너 이 새끼! 송천수!"
송천수가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알아보네?"
"그걸로 그 커다란 얼굴이 가려지겠냐? 그리고 이렇게 무식하게 쳐들어올 새끼가 너밖에 없잖아!"
"그런가?"
박성구가 이를 갈며 물었다.
"네가 여기에 왜 왔지? 여긴 내 나와바리다."
송천수가 실실 웃었다.
"흐흐. 사무실도 아니고 공장 있는 곳까지 나와바리라고 하면 쓰나. 여기서 물건을 파는 것도 아닌데."
"너도 이 동네에 공장 차리려고 왔냐? 여기가 창고도 많고 축사도 많아서 공장 돌리기 좋지."
"공장을 왜 새로 차려?"
송천수의 웃음이 서늘해졌다. 그의 눈이 창고를 향했다.
"이미 있는 공장 빼앗으면 되는데."
박성구가 욕을 했다.
"이 새끼가 돌았구나. 넌 나한테 안 되는 거 몰라? 다 뒈지고 싶냐?"
"안 되는 건 아니지. 전에도 맞다이 까면 우리가 딱 한 끗 차이로 밀리는 정도였어. 그런데 말이야."
송천수가 활짝 웃으며 손가락 여섯 개를 폈다.
"네 별동대가 통째로 날아갔다며? 여섯 놈이 비지니스 나갔다가 모조리 칼 맞았다던데?"
별동대의 상황은 박성구의 조직 내에서도 몇 놈밖에 모른다.
"이 새끼가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아는지는 짐작이 갔다.
'간부 중에 입이 가벼운 놈이 있구나.'
박성구도 송천수의 조직원을 매수해 두었다. 그런데 그건 간부급이 아니라 일반 조직원이었다.
송천수가 말했다.
"그 정보를 입수하고 나서 깨달았지. 아. 지금이 박성구를 잡고 성구파의 생산 시설부터 영업망까지 싹 다 먹어치울 찬스구나."
박성구가 인상을 쓰며 병력을 비교했다. 성구파는 일곱이 이곳에 있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차에 치여서 팔다리가 부러졌다. 이제 여섯이 남았다.
송천수 쪽은 열 명이다. 성구파보다 넷이나 더 많았다.
송천수가 조직을 다 동원했으면 박성구도 첩자를 통해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습격을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이 기습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확실한 놈들만 골라서 데려왔어.'
조직원들은 칼이나 쇠파이프를 움켜쥐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박성구는 일부러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그의 자세는 여유로워 보였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머릿수도 저 새끼들이 더 많아. 이대로 붙으면 불리해.'
그렇다고 여기서 항복할 수는 없다. 그러면 부하들은 살아도 박성구는 죽는다. 설사 살아남는다 해도 팔다리 하나쯤은 날아간다.
박성구가 입을 열었다.
"어이. 천수야. 이러면 다 뒈져."
"너네가 다 뒈지겠지."
"여기서 설마 나 하나 못 빠져나가겠냐? 여기 있는 애들 다 못 죽이면 전쟁이다. 그럼 너희는 다 뒈지고, 우리도 껍데기만 남는다. 그걸 바라나?"
송천수도 안다.
'전부 다 데려오면 저 새끼가 눈치챌 테니까 일부러 믿을만한 놈들만 골라왔는데….'
예상보다 성구파 조직원이 많았다. 이길 자신은 있지만 전멸시킬 자신은 없다.
'저 새끼들만 제끼면 다 먹을 수 있겠는데, 그러다 놓치면 진짜 전쟁이란 말이야.'
송천수가 협상을 제시했다.
"성구야. 그러니까 혼자 다 먹지 말고, 나한테도 나눠…."
갑자기 야구공 크기의 돌이 날아왔다. 그 돌이 천수파 조직원의 머리를 정확히 때리고 튕겨 나갔다.
"켁!"
조직원 하나가 막대기가 넘어지듯이 옆으로 쓰러졌다.
천수파의 조직원들이 즉시 칼을 들었다.
"뭐, 뭐야!"
"이 새끼들이! 쳤냐!"
박성구는 당황했다. 지금 붙으면 성구파가 불리하다.
"아, 아니다. 이건 우리가 한 게 아니…."
차우진이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쳐들어왔으면 그냥 싸워라. 왜 협상하려고 하냐. 서운하게."
57. 강습 II
작은 축사가 딸린 농가 앞에는 성구파 조직원 여섯과 천수파 조직원 열 명이 대치하고 있었다.
숫자는 천수파가 더 많았다. 양쪽이 박빙으로 싸우게 하려면 천수파의 숫자부터 줄여야 한다.
차우진은 이미 돌을 던져 천수파부터 한 놈 저격했다.
"난 진짜 야구를 배웠으면 잘했을 거야. 컨트롤이 어마어마하잖아."
송천수가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 뭐야!"
박성구도 소리를 질렀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박성구 너 이 새끼! 함정이냐!"
"나도 모른다고!"
차우진은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송천수는 차우진이 자기들을 노린다는 걸 눈치챘다. 부하가 하나 날아갔는데 모를 수가 없다.
"박성구 저 새끼는 항상 이런 식이지. 툭하면 함정이나 파는 새끼."
차우진이 어느새 가까워졌다. 곧 조직원 하나와 부딪힌다.
송천수가 소리를 질렀다.
"씨발. 뭘 쳐다보고 있어? 조져!"
조직원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목표는 차우진의 머리였다.
차우진의 눈에 조직원의 움직임이 들어왔다.
뻔한 동작이고 기교도 없었다. 다가오는 차우진의 머리를 후려칠 생각만 하느라 시선도 그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하수를 상대할 때는 스킬을 쓸 필요가 없다.
차우진이 적을 향해 걸어가며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머리를 노린 쇠파이프가 허공을 갈랐다.
차우진이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오른손을 옆으로 뻗었다. 파이프를 잡으려는 게 아니다.
손에 쥔 작은 단검이 적의 옆구리에 푹 꽂혔다.
"끄악!"
적이 비명을 질렀다. 허공에 휘두르던 쇠파이프가 손에서 빠져나갔다.
차우진이 비틀거리는 천수파 조직원을 성구파 쪽으로 밀었다. 그런 후에 천수파의 다른 조직원을 향해 걸어갔다.
칼을 맞은 놈은 허리를 잡은 채로 성구파 쪽으로 밀려났다. 그쪽에 있던 성구파 조직원이 반사적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켁!"
한 놈이 고꾸라졌다.
차우징는 계속 천수파 쪽으로 걸어갔다. 다음 타깃이 된 놈이 차우진을 향해 회칼을 크게 휘둘렀다.
"이 새끼가!"
차우진의 몸이 아래로 슬쩍 가라앉았다. 칼날이 허공을 수평으로 갈랐다. 차우진이 몸을 일으키며 적의 배에 칼을 꽂았다.
"컥!"
칼이 작아 이번에도 한 방에 제압되지는 않았다. 상관없었다. 이번 놈도 성구파 쪽으로 밀었다.
칼에 맞고 밀려난 놈의 눈앞에 성구파 조직원들이 있었다.
그는 조금 전에 다른 조직원이 어떻게 당했는지 보았다. 천수파 조직원이 왼손으로 칼에 찔린 배를 막으며 회칼을 허공으로 크게 휘둘렀다.
"오, 오지 마. 이 새끼들아!"
반항하는 놈을 향해 성구파 조직원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파이프가 회칼보다 길었다. 금속 파이프가 천수파 조직원의 머리를 때렸다.
"케엑!"
머리를 제대로 맞은 놈이 고꾸라졌다.
차우진은 이미 셋을 잡았다.
하나는 돌을 던져서 잡고, 둘은 칼을 한 번씩 찔렀다. 칼이 작아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성구파로 밀어버리면 성구파가 알아서 처리했다.
이제 천수파는 일곱만 남았다. 성구파는 여섯이었다.
천수파 두목 송천수는 성구파와 대치 중이라 부하들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사이에 부하 둘이 날아갔다.
송천수는 부하들이 줄어드는 걸 보고 발악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씨발! 전부 다 죽여버려! 쳐라!"
박성구는 차우진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런데 차우진은 송천수 쪽을 공격하는 중이다.
그는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착각했다.
'천수한테 원한이 있어서 복수하러 왔나?'
박성구는 '적의 적은 아군이다'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적의 적은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 새끼까지 포함하면 우리도 일곱이잖아.'
박성구의 얼굴이 환해졌다. 머릿속에서 간단한 계산이 이루어졌다.
'이 기회에 천수파의 주력을 쓸어버리고 그 영업망까지 내가 다 먹으면?'
송천수는 천수파의 간부급이나 핵심 조직원만 데려왔다. 그들이 전멸하면 천수파는 쭉정이만 남는다.
'그럼 질러야지!'
그는 차우진이 누구인지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차우진에 관한 건 이 전투에서 이기고 나서 해결하면 된다고 판단했다.
그가 부하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구경만 하지 마, 이 새끼들아! 가서 저 새끼들을 싹 다 죽여버려!"
시간 가속 스킬은 유효 시간이 짧다. 그러니 그건 필요할 때 써야 한다.
차우진이 천수파 셋을 잡아 수를 일곱으로 줄였다. 성구파는 여섯이다.
'하나 더 줄여야 균형이 맞겠네.'
차우진이 보폭을 넓혀 성큼 걸어갔다.
송천수는 차우진을 성구파에서 고용한 킬러라고 착각했다.
그는 뒷일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지면 다른 놈은 몰라도 송천수는 죽는다.
'살아남는다 해도 병신이 되겠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송천수가 칼잡이를 향해 악을 썼다.
"죽여! 어차피 묻어버리면 돼!"
천수파 최고의 칼잡이가 차우진을 향해 튀어나갔다.
칼잡이의 공격에 살기가 깃들었다.
조직원들은 차우진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공격했는데, 칼잡이는 확실히 죽일 생각으로 칼을 썼다.
칼잡이가 칼을 크게 휘둘렀다. 칼날이 커다란 원을 그렸다. 빨랐다. 그 원의 끝에 차우진의 목이 있었다. 맞으면 죽는 위치였다.
차우진이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뒤로 몸을 젖혔다.
그는 적이 휘두르는 칼날이 닿지 않을 정도로 몸을 젖히면서도, 적이 헛손질한 후에 바로 반격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는 유지했다.
칼잡이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차우진이 조금 전에 조직원 두 명의 공격을 어떻게 피하는지 보았다.
'최소한의 움직임? 그럴 줄 알았다!'
칼잡이가 휘두르던 단검을 손에서 놓았다. 칼날이 원심력을 받아 차우진을 향해 날아갔다. 그는 처음부터 이렇게 공격할 생각이었다.
손에서 놓치듯이 던지는 칼로는 치명상을 입히지 못할 수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목은 칼이 스치기만 해도 위험해지는 곳이다. 당연히 정통으로 맞으면 한 방에 죽는다.
칼잡이는 확신했다.
'잡았….'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칼잡이의 손에서 칼이 빠져나오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고, 칼날이 느리게 날아오는 것도 똑똑히 보였다.
그가 뒤로 젖히던 몸을 옆으로 슬쩍 비틀었다. 칼날이 그의 목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허공을 가르고 날아갔다.
칼잡이는 당황했다.
"헉!"
그가 급히 왼손을 허리로 향했다. 그는 단검을 네 자루나 가지고 있다. 방금 하나를 던졌으니 아직 세 개가 남았다.
차우진이 앞으로 한 걸음 이동하며 오른손의 작은 단검을 적의 배에 박았다. 칼날이 푹 들어갔다.
"컥!"
차우진이 작게 말했다.
"하이에나들이 쓰던 수법이네?"
멸망한 세계에서는 총알이 부족해서 칼로 싸울 때가 많았다. 그때 싸운 하이에나 중에 이런 식으로 잔재주를 부리는 놈들이 있었다.
차우진은 그런 놈들과 싸운 경험이 있다. 지금 칼잡이의 잔재주는 칼을 손에서 놓기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 여기엔 하이에나가 될 놈이 둘이네? 비율이 너무 높은데?"
금광을 습격한 박정규도 미래에 하이에나가 된다. 그러면 셋이다.
멸망급 재난의 생존률을 생각하면 비율이 너무 높았다.
"그건 좀 이상하네."
이제 천수파는 여섯으로 줄었다. 성구파와 숫자가 같아졌다.
차우진이 작은 단검을 뽑아 옆으로 휙 던졌다. 단검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천수파 조직원 하나가 차우진을 향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그놈의 가슴에 단검이 꽂혔다.
"컥!"
단검이 작아서 그것만으로는 제압되진 않았다. 그래도 더 달려들지 못하게 하는 효과는 있었다.
배에 칼을 맞은 칼잡이가 뒤로 빠져나가려 했다.
차우진이 그놈을 따라가며 칼잡이의 허리에서 단검을 뽑았다. 칼잡이가 기겁하며 손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그 손은 허공만 휘저었다.
차우진이 그 단검을 다시 칼잡이의 몸에 박아넣었다.
"케엑!"
칼잡이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차우진이 고꾸라지는 놈의 허리 뒤에서 단검을 하나 더 뽑았다.
"넌 칼이 많구나."
차우진이 방금 뽑은 칼을 가슴에 작은 단검을 맞고 비틀거리는 쇠파이프에게 던졌다. 날아간 칼날이 이번에는 적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커억!"
쇠파이프를 든 놈도 고꾸라졌다.
이제 천수파는 다섯, 성구파는 여섯이 남았다. 뒤에 서 있는 양쪽 두목을 제외하면 각각 넷과 다섯이 남았다.
그들은 차우진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성구가 활짝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제 우리가 더 많아! 죽여! 다 죽이란 말이다!"
송천수도 외쳤다.
"저 킬러 새끼는 이제 칼이 없다! 죽여!"
칼잡이는 허리에만 칼을 네 자루나 숨겨두었다. 그중 하나는 칼잡이가 썼고 두 개는 차우진이 썼다.
차우진이 칼잡이의 허리 칼집을 발로 툭 찼다. 마지막 칼이 빠져나왔다.
그러는 사이에 조직원들도 서로 싸우다 각각 한 놈씩 칼에 맞았다. 이제 성구파와 천수파는 두목을 제외하면 넷과 셋이 남았다.
박성구가 차우진을 향해 소리쳤다.
"송천수를 잡아! 저 새끼만 잡으면 우리가 이긴다!"
차우진이 칼잡이의 칼집에서 빠져나온 단검을 집으며 물었다.
"뭔 개소리냐?"
"뭐?"
"우리라니? 내가 왜 네 우리야?"
"그게 무슨…."
차우진은 성구파를 도와주러 온 게 아니다. 그는 성구파를 조사하고 미리 정리하러 왔다.
그런데 그 계획은 천수파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틀어졌다.
그는 일단 천수파부터 공격해 두 조직의 숫자를 비슷하게 맞추었다.
이제 남은 놈들은 서로 싸우고 있었다.
차우진이 조직원 두 놈이 싸우는 곳으로 성큼 걸어갔다.
천수파 조직원은 차우진이 적이라는 걸 확실히 인식했다. 그는 차우진이 다가오자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씨발!"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너무 멀었다.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차우진이 그대로 성큼 걸어가 적의 몸통에 칼을 박았다.
"컥!"
적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차우진이 적의 몸통에 꽂은 칼에서 손을 놓고 떨어지는 단검을 잡아챘다.
그 단검을 맞은 편에서 멍하니 구경하던 성구파 놈의 몸에 꽂았다.
"으악!"
성구파 조직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싸움이 중단됐다.
이제 양쪽 두목을 제외하고 조직원은 성구파가 셋, 천수파가 둘밖에 안 남았다.
박성구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뭐, 뭐야? 송천수의 적 아니야? 적의 적은 아군이란 말이다!"
"오해가 있었군."
"뭐?"
차우진이 그들을 둘러보며 선언했다.
"너희는 전부 다 나의 적이다."
"그, 그게 무슨…."
"이런 소리지."
성구파가 하나 더 많다는 말은, 조직원 둘이 천수파 하나를 공격하는 곳도 있다는 뜻이다.
차우진이 그곳으로 성큼 걸어갔다.
2대 1로 천수파 조직원을 공격했던 성구파 조직원 하나가 당황해서 칼을 휘둘렀다.
"으아아!"
당황해서 휘두른 칼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심지어 칼날이 닿을 거리도 아니었다.
차우진이 손을 뻗었다. 단검이 표창처럼 날아가 허공에 칼을 마구 휘두르던 적의 가슴에 푹 꽂혔다.
"끄악!"
적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휘두르던 칼은 손에서 빠져나가 차우진 쪽으로 날아왔다.
차우진이 날아오는 칼을 공중에서 손으로 잡았다.
이제 성구파와 천수파 모두 조직원은 둘씩밖에 남지 않았다.
박성구는 뒤늦게 깨달았다.
"씨, 씨발."
'적의 적을 이용하는 건 나만 할 줄 아는 게 아니었어! 저 새끼가 송천수를 이용해서 나를 쳤구나!'
박성구는 이미 병력 대부분을 잃었다. 송천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전장은 차우진이 지배하고 있었다.
박성구는 마지막 패는 숨겨두고 있었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넌 이제 뒈졌다! 내가 이건 끝까지 안 꺼내려고 했는데!"
그가 재킷 속에서 권총을 꺼냈다. 38구경 6연발 리볼버 권총이었다.
58. 강습 III
차우진이 혼잣말을 했다.
"이놈도 권총이 있네."
박성구는 권총만 있으면 설사 부하들이 다 죽어도 자신만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아까 여유를 부린 것도 최후의 순간에는 권총을 꺼낼 생각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차우진 때문에 그 최후의 순간이 와버렸다.
차우진이 천수파 조직원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권총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맞히는 건 어렵다.
박성구의 권총 사격 실력은 사덕리소스의 금광을 폭파하려 했던 박정규보다는 떨어졌다. 그래도 차우진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총구가 따라올 정도는 됐다.
박성구가 차우진의 움직임을 쫓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빗나갔다.
차우진은 시간 가속 스킬 없이 옆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 그 사격을 피했다.
빗나간 총탄이 차우진의 뒤쪽에 있던 천수파 조직원의 몸통에 명중했다.
"으악!"
조직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걸 본 송천수도 소리를 지르며 권총을 꺼냈다.
"씨발! 박성구 이 새끼야! 총까지 쏘면 진짜 다 뒈지는 거야!"
그가 가진 것도 38구경 6연발 리볼버 권총이었다.
한국에서 조직 간의 싸움에 권총을 쓰면 뒷감당이 어렵다. 칼만 가지고 싸운 것보다 치러야 하는 대가가 훨씬 크다.
경찰이 작정하고 수사하면 조직이 가루가 될 때까지 갈아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투가 한창일 때도 권총은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죽어줄 수는 없다. 송천수도 마지막 순간이 오자 결국 총을 꺼냈다.
송천수가 차우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사격 실력은 박성구보다도 못했다. 총탄이 허공을 갈랐다.
"씨발! 이거 왜 안 맞아!"
차우진이 이번에는 성구파 조직원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송천수가 방아쇠를 계속 당겼다.
몇 발의 총탄이 더 날아갔다. 하지만 사격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차우진에게 닿는 건 없었다.
한 발은 뒤쪽에 세워둔 승합차에 명중했다.
다른 한 발이 박성구의 조직원에게 꽂혔다.
"아악!"
결과만 놓고 보면 양쪽 조직의 두목이 상대편 조직원을 총으로 쏜 꼴이 됐다.
이제 양쪽 조직원은 하나씩밖에 남지 않았다.
박성구가 권총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씨, 씨발. 다 노린 거였어. 송천수 이 새끼야! 너도 저 새끼한테 이용당한 거라고!"
"알아! 이 새끼야!"
송천수도 이제는 그걸 안다.
"저 킬러 새끼가 우리끼리 싸움을 붙여놓고 그 틈에 애들을 제거하는 거 나도 다 봤다고 이 새끼야!"
박성구가 소리를 질렀다.
"이거 다 저 새끼가 판 함정이다! 우리가 당했단 말이다!"
"처음에 돌 던져서 내 부하부터 공격한 거, 그것부터가 싸움을 붙이려고 한 거였어!"
그 돌 때문에 박성구와 송천수의 협상은 시도하자마자 깨지고 전투가 시작됐다.
차우진이 말했다.
"너희들끼리 싸움 붙이는 걸 전문용어로 이호경식이라고 한다."
"뭐?"
"아. 너희들은 호랑이가 아니라 하이에나니까 이호경식이라고 하면 안 되겠네."
"그게 무슨 소리냐!"
"개끼리 싸우고 있으니까 개판이라고 해야지."
박성구와 송천수는 권총이 있지만, 부하들은 하나씩만 남았다.
박성구는 이 와중에도 기왕이면 차우진이 상대편을 먼저 공격하기를 바랐다. 부하가 하나만 있는 쪽이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차우진은 오늘 박성구의 조직을 털러 왔다. 그런데도 그가 먼저 공격해 수를 줄여놓은 건 송천수의 조직이다.
송천수는 이번에도 차우진이 자신을 먼저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하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 저 새끼 막아!"
하나 남은 부하가 칼을 들고 벌벌 떨었다. 이미 조직원들이 차우진에게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그의 눈에는 차우진이 무시무시한 괴물처럼 보였다.
송천수가 악을 썼다.
"뭐해? 이 새끼야! 빨리 막아! 찌르라고!"
공포에 질린 조직원이 갑자기 뒤로 돌아서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으아아!"
차우진이 오른손을 휙 뻗었다. 손에서 단검이 날아가 도망치는 적의 등에 화살이 박히는 것처럼 꽂혔다.
"으아악!"
천수파의 마지막 조직원이 달리다가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그 순간 송천수의 눈이 번뜩였다.
"저 새끼 빈손이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차우진을 향해 사격했다.
"뒈져!"
이번에는 조준이 꽤 정확했다. 단순히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피하기 어려웠다.
차우진은 그걸 눈치채자마자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차우진은 총기를 사용한 근접 전투 경험이 무수히 많았다. 스킬까지 쓰면 권총탄 한 발을 피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다.
차우진이 총탄을 피하며 송천수를 향해 돌진했다.
갑자기 뒤에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차우진이 재빨리 뒤를 확인했다.
박성구가 차우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차우진이 땅을 박차며 옆으로 뛰었다. 총탄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방향에는 송천수가 있었지만, 박성구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둘 다 박성구의 적이다.
권총탄이 송천수가 몸통에 명중했다.
"컥! 이 개새…."
송천수는 비틀거리면서도 박성구를 쏘려고 권총을 들어 올렸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걸 본 박성구가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다 죽어! 이 새끼들아!"
총탄 두 발이 차우진과 송천수 쪽으로 날아갔다.
박성구는 송천수보다는 사격 실력이 나았다. 차우진을 향해 쏜 건 빗나갔지만, 송천수를 향해 쏜 건 정확히 명중했다.
"케엑!"
송천수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뒤로 자빠졌다.
차우진이 송천수의 뒤로 이동했다. 그는 뒤로 넘어지는 송천수의 등을 손으로 잡았다.
박성구가 다시 차우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38구경 리볼버에서 발사된 총탄이 차우진의 앞에 있는 송천수의 몸통에 퍽 꽂혔다.
"컥."
송천수의 몸이 축 처졌다.
박성구가 권총으로 차우진을 조준하며 부하에게 소리를 질렀다.
"가서 처리해!"
부하도 조금 전까지는 겁을 먹고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차우진이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였다.
그는 총을 가진 박성구가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며 차우진을 향해 돌진했다.
"으아아아!"
차우진이 축 처진 송천수의 허리에서 단검을 뽑았다. 그 단검이 적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케엑!"
조직원이 달려오다 칼을 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박성구는 당황했다.
"씨, 씨발."
차우진은 송천수를 방패로 삼고 있어서 맞히기 어려웠다.
송천수는 총탄을 세 발이나 맞아 축 늘어져 있었다. 차우진이 그런 송천수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았다.
박성구의 옆에는 승합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그는 차우진이 권총을 잡는 걸 보자마자 급히 그 승합차 뒤로 뛰어가 숨었다.
그곳에 먼저 숨어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박성구가 깜짝 놀라 권총을 겨누었다.
"으악! 이 새끼 뭐야!"
"나, 나다! 나!"
그곳에 숨어 있는 건 신동욱 전무가 보낸 정동진이었다.
박성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놀랐네."
정동진이 급히 물었다.
"박 사장! 저 새끼 뭐야! 누구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너 따라온 거 아냐?"
"나, 나는 모르는 놈이다!"
"나도 모르는 새끼야!"
차우진이 송천수를 앞으로 밀었다. 선 채로 권총탄을 세 발이나 맞은 송천수가 바닥에 엎어지며 먼지를 날렸다.
차우진이 상체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오늘은 조금 힘들다."
이렇게 많은 적과 싸우는 것이나 스킬을 연속으로 사용하는 건 몸에 부담을 많이 준다.
쇠로 만든 단검을 작은 동작만으로 화살처럼 빠르게 던지는 것도 팔에 부담을 줬다.
그는 전투 사이사이에 일부러 말을 주고받는 식으로 잠깐씩 쉬면서 싸웠다.
그런데도 몸이 쑤셨다.
"자고 일어나면 근육통 확정이네. 이러다 진짜 살이 빠지겠어."
이제 이곳에 서 있는 건 차우진과 박성구, 그리고 딥어스테크에서 온 정동진뿐이다.
박성구가 차 유리를 통해 맞은편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유리의 틴팅이 너무 진해 건너편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정동진에게 지시했다.
"씨발. 이봐. 당신. 저 새끼 어디 있는지 확인해."
정동진이 거절했다.
"그러다 나도 총에 맞으면 어떻게 하라고!"
박성구가 권총을 정동진의 얼굴에 겨누었다.
"아니면 내 총에 맞아 뒈지던가! 빨리 확인하라고!"
"히익!"
겁먹은 정동진이 차 뒤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가 재빨리 다시 몸을 숨겼다.
"아직 저기 그대로 서 있어. 아까 쳐들어온 두목이 있던 자리에 그냥 서 있다고!"
박성구가 이를 갈았다.
"씨발. 저 새끼는 내가 꼭 죽인다."
그는 한국의 권총 실탄 사격장은 가본 적이 없다. 그곳을 이용한 기록이 남으면, 나중에 진짜 총을 쏠 때 단서가 남을 수도 있어서였다.
대신에 동남아에 놀러 갔을 때 실탄 사격장을 여러 번 이용했다. 그래서 권총 사격이 어느 정도는 익숙했다.
박성구가 정동진을 툭툭 차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이. 그쪽으로 튀어나가."
"어? 확인은 방금 했잖아."
"여기로 돌아오지 말고 아예 튀어나가라고."
"그럼 내가 너무 위험…."
박성구가 다시 정동진의 얼굴에 권총을 들이댔다.
"씨발. 나가라고. 진짜 총 맞고 싶어?"
정동진이 밀려나듯이 승합차 옆으로 뛰어나갔다.
"으아아!"
정동진이 튀어나간 직후에 박성구도 반대쪽으로 뛰었다. 그가 차우진이 있던 곳을 권총으로 겨누며 생각했다.
'미끼를 먼저 내보냈으니까, 지금 쏘면….'
"어?"
차우진이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권총탄을 세 발이나 맞고 엎어진 송천수만 있었다.
뒤쪽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나 찾냐?"
박성구는 화들짝 놀랐다.
'언제 내 뒤까지 온 거야? 도대체 어떻게?'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은 발동 시간이 짧다. 이런 근거리 전투에서 쓰면 적의 뒤를 쉽게 잡을 수 있다.
박성구가 급히 몸을 뒤로 돌리며 권총을 쏘려고 했다.
차우진이 더 빨랐다. 그는 송천수가 가지고 있던 두 번째 단검을 가져왔다.
차우진이 박성구의 가슴에 단검을 푹 찔러넣었다.
"컥!"
박성구가 뒤로 비틀거렸다. 권총을 들어 차우진을 쏘려고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씨발…."
박성구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놈은 독기가 약하네. 저놈은 총을 맞아도 한 발 정도는 버티던데."
이제 이곳에 서 있는 건 정동진뿐이다.
차우진은 칼을 맞고 쓰러진 송천수의 손에서 권총을 챙겼다. 그런 후에 정동진에게 다가갔다.
"너 말이야."
정동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조금 전에 도망치던 천수파 조직원이 등에 단검에 맞고 고꾸라지는 걸 봤다.
그런데 지금 차우진은 칼이 아니라 권총을 가지고 있다.
정동진은 겁이 나서 도망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히익! 사, 살려줘!"
"그러면 약팔이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아, 아니야! 난 저놈들하고 상관…."
차우진이 정동진의 머리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천천히 당겼다. 회전탄창이 돌아가면서 공이가 천천히 젖혀졌다.
정동진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차우진이 손가락을 방아쇠에서 뗐다.
"아니다. 총을 쏘면 한 방에 죽잖아."
"허억. 허억.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죽으면 말을 못 하지. 난 듣고 싶은 게 많은데."
차우진이 송천수에게 돌아가 그 권총을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후에 정동진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집었다.
"역시 너한테는 칼이 좋겠다."
정동진은 뒤늦게 후회했다.
'저놈들이 싸울 때 송천수라는 놈이 가지고 있는 권총이라도 내가 주울걸.'
이미 늦었다. 차우진이 칼을 들고 돌아왔다.
정동진이 다급히 외쳤다.
"나, 난 저놈들하고 한패가 아닙니다!"
"같이 있었잖아."
"의, 의뢰하려고 찾아온 겁니다!"
차우진이 정동진의 앞에 서서 물었다.
"의뢰? 무슨 의뢰?"
정동진은 머리를 굴릴 여유가 없었다. 지금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다. 겁을 집어먹어서 머리가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 그게…."
"말하기 싫으면 그냥 죽던가."
"아, 아닙니다! 차 이사를 납치하라는 의뢰였습니다!"
사덕리소스 차우진 이사가 칼끝을 정동진의 가슴에 댔다.
"차 이사라고만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그게 누군데?"
59. 횡령 장비
당황한 정동진이 급하게 대답했다.
"차 이사는 사덕리소스의 이사입니다!"
차우진이 정동진의 가슴에 칼을 댄 채로 물었다.
"사덕리소스는 또 뭐야?"
"그러니까, 금광 회사인데 지금 매출이…."
"내가 그런 디테일한 것까지 알아야 하냐?"
"아, 아닙니다!"
"납치하는 목적은?"
"딥어스테크 주총에서 헛짓거리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상한데? 왜 사장이 아니라 이사를 납치하지? 너 나 속이냐?"
"아, 아닙니다! 사장은 저번에 뉴스를 크게 타서, 납치했다가 잘못되면 못 덮으니까 대신에 이사를 노린 겁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납치하고 싶은 건 사장인데, 문제가 생길까 봐 만만한 이사를 납치하려고 했다?"
"맞습니다. 차 이사는 꿩 대신 닭입니다!"
"닭이라…."
차우진이 칼을 목에 들이댔다.
"죽고 싶냐?"
"히익! 아,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면, 말을 안 들으면 죽이려고 했겠네?"
정동진이 급히 손을 흔들었다.
"저는 그런 건 하나도 모릅니다. 저는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아랫것입니다!"
"그것도 모르는 놈을 내가 왜 살려둬야 할까?"
정동진이 급히 말을 바꾸었다.
"신동욱 전무는 그럴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 사람 아주 무서운 사람입니다!"
"나는 안 무서운가 보다?"
"히익!"
차우진은 멸망한 미래에서 정동진을 본 적이 있다. 그냥 본 것도 아니고 두 번이나 싸웠다.
한 번은 정동진이 탄약 기술자를 습격했을 때였다. 두 번째는 차우진이 정동진을 습격했다.
'힘이 있을 때는 기가 세고 잔인하지만, 멘탈을 무너뜨리면 뭐든 다 털어놓는 놈.'
그때도 하이에나 조직에 관한 정보를 정동진을 통해 제법 입수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아는 거 있으면 더 털어놔라. 지금까지 말한 것만으로는 네 목숨값으로 부족하니까."
정동진이 눈알을 굴렸다. 그러다 시선이 박성구에게 향했다.
"아! 저기 저 박 사장이 알아봐 달라는 게 있었습니다!"
"뭔데?"
"성구파의 별동대가 최근에 금광을 공격했다가 전멸했는데, 누가 그랬는지 알아달라고 했습니다. 차 이사가 모르면 회사 차원에서 조사해서라도 알아내라고…."
차우진이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그때 잡은 놈들의 뒤에 이놈들이 있었어. 그러면 다른 청부업자들의 브로커도 이놈들이었겠는데?'
쏠쏠한 정보였다.
"겨우 그걸로 네 목숨값이 되겠냐?"
"네?"
"그걸 내가 알아내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냐?"
"그, 그게…."
차우진이 송천수를 가리켰다.
"저놈에 대해 아는 걸 말해야지. 내가 오자마자 저것들부터 치던 거 못 봤냐?"
그가 원하는 건 송천수가 아니라 박성구의 조직에 관한 정보다. 그렇다고 박성구에 대해서만 물어보면 상대가 진짜 목적을 눈치챈다.
정동진은 당황했다.
"저놈들이 누군지는 진짜 모르겠습니다. 저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차우진이 이제야 박성구를 가리켰다.
"그럼 저놈은? 저놈도 모르면 네 목숨값은 못 치르는 거로 하자."
정동진이 급히 말했다.
"박성구! 성구파 두목입니다. 원래는 사장님, 그러니까 딥어스테크 장호철 사장님이 부리던 놈들입니다. 장 사장이 시키면 살인은 물론이고 납치도 했습…. 아마 했을 겁니다!"
박성구는 칼에 맞아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칼에 맞은 고통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정동진이 성구파에 대해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차우진은 정동진의 앞에 서 있었다.
박성구는 정동진도 오늘 이 습격에 한몫했다고 착각했다.
'씨발. 이 새끼도 저 새끼도 다 나를 속였어!'
칼에 맞아 아파 죽을 것 같았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손도 움직이긴 했다.
권총은 아직 그의 손에 있었다.
차우진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살기였다. 뒤에서 박성구가 움직이는 것도 느껴졌다.
'이제 깨어났네.'
박성구의 지금 상태로는 방아쇠를 당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차우진이 옆으로 쓱 이동하며 뒤로 돌아섰다. 박성구의 총구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이 보였다.
그 방향으로 쏘면 차우진이 맞을 리 없다.
대신에 다른 놈이 맞았다.
총성과 함께 권총탄이 날아가 정동진의 다리에 박혔다.
난데없이 총에 맞은 정동진이 다리를 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박성구가 쏘려고 한 건 차우진이지만, 정동진이 맞아도 상관없었다.
박성구가 소리를 지르려 했다. 칼에 맞아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말은 할 수 있었다.
"이 배신자 새끼. 너도 함정을 팠어."
정동진은 다리를 붙들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나 맞았다! 나 맞았어! 살려줘!"
"다 죽어!"
박성구가 차우진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차우진이 박성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명중률은 당연히 올라간다.
박성구가 차우진을 정확히 조준하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죽어라. 이 새끼야."
공이가 탄피를 때렸다.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
차우진이 박성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거 6연발 리볼버인데, 넌 좀 전에 다섯 발을 쐈더라. 한 발 남은 것도 방금 쐈고. 너 총알 숫자 안 세고 쏘냐?"
총알이 떨어졌다는 걸 알자마자 박성구는 공포에 질렸다.
"사, 살려…."
차우진이 박성구의 턱을 걷어찼다.
"켁!"
박성구는 고개가 돌아간 채로 바닥에 엎어졌다. 손에는 탄약이 떨어진 권총을 쥐고 있었다.
차우진이 정동진에게 가서 물었다.
정동진은 총에 맞은 다리를 붙잡고 덜덜 떨고 있었다.
"나, 나 죽는다!"
"아프냐?"
"살려줘!"
"내가 널 치료할 방법은 없고."
다리의 총상 정도는 차우진이 해결할 수 있다.
총상은 멸망한 미래에서 많이 치료해보았다.
그 시대에는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는 것만으로 총상을 치료해야 한다. 못하면 죽는다.
그렇지만 정동진을 위해서 그런 것까지 해줄 생각은 없다.
애당초 정동진이 총에 맞은 것도 차우진이 의도한 것이다. 그는 일부러 박성구와 정동진 사이에 서 있었다. 박성구도 완전히 기절시키지 않았다.
정동진에게만 그렇게 한 게 아니다. 좀 전에 총에 맞은 조직원 두 놈에게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
'권총이니까 급소만 안 맞으면 한 방에 죽지는 않겠지. 죽으면 할 수 없고.'
정동진이 총에 맞아 죽어도 이 상황을 처리할 방법은 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쪽이 좀 더 써먹기 좋다.
살아있어야 경찰에 자백할 게 많아진다. 죽은 놈은 자백할 수 없다.
경찰이 정동진을 통해 신동욱 전무에 대해 많이 알아낼수록 차우진에게 좋은 쪽으로 결과가 나온다.
차우진이 정동진에게 말했다.
"119에 전화해서 살려달라고 해라."
정동진이 급히 물었다.
"그, 그, 그래도 됩니까?"
"지금 말고."
"예?"
차우진이 정동진의 턱을 툭 쳤다. 정동진은 고개가 돌아가며 기절했다.
이제 이 공간에 서 있는 사람은 차우진밖에 없다.
차우진은 농가 건물들을 돌아보았다. 작은 집 한 채, 축사 하나, 그리고 창고가 있었다.
총격전이 꽤 치열했으니 정동진이 신고하지 않아도 경찰은 온다.
이곳을 조사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차우진의 창고의 문부터 열었다. 내부는 일반 농가의 창고와 달랐다. 굉장히 깔끔했다.
"이야아. 장호철이 빼돌린 장비가 어디 갔나 했더니."
그 깔끔한 창고 안에는 딥어스테크 연구소 횡령 사건에서 사라진 장비들이 있었다.
"그게 여기 있었네?"
***
정동진은 잠시 후에 깨어났다. 총에 맞은 다리가 너무 아파서 오래 기절하지도 못했다.
"으아악!"
그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차우진은 보이지 않았다.
"119!"
그는 휴대폰을 차에 두었다. 여기 왔다는 것 자체를 숨기기 위해 전원도 꺼놓았다.
정동진이 일어나려다가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내 다리!"
다리가 아팠지만 이대로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아파서 걸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땅바닥을 기어갔다.
그의 차는 기어서 가기에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정동진이 박성구의 앞까지 기어간 후에 그의 손에서 권총부터 빼앗았다.
"으아아! 나도 이제 총이 있…. 이건 총알이 없잖아!"
그가 박성구의 몸을 더듬었다. 스마트폰이 하나 나왔다. 구형 모델이지만 지문인식으로 여는 방식이었다.
그가 박성구의 지문을 찍고 휴대폰의 잠금을 해제했다.
그런 후에 119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고 상대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 119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동진이 망설였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알려지면 정동진도 체포될 수 있다.
그렇다고 전화를 끊을 수도 없다. 그는 지금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빨리 병원에 안 가면 죽을지도 몰라.'
지금 살 방법은 구급차뿐이다.
민간 병원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부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구급차가 와도 총상을 보면 경찰에 신고를 안 할 리가 없다.
정동진이 휴대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살려줘!"
***
총상 신고를 받고 구급차가 달려왔다.
구급차와 함께 경찰차도 도착했다.
경찰도 총소리가 여러 번 들렸다는 신고는 받았다. 거기에 119 센터에서도 출동 요청이 들어왔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기겁했다.
"이게 뭐야!"
119 구급대원도 즉시 지원을 요청했다.
"부상자가 많습니다! 열 명 이상, 거의 스무 명입니다! 구급차가 많이 필요합니다! 민간 구급차라도 다 보내줘요!"
총소리가 들렸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두 명은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권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긴장한 채로 현장을 살폈다.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던 정동진이 손을 흔들었다.
"여기입니다. 여기. 나 좀 살려줘요."
경찰은 깜짝 놀랐다.
"총이다!"
박성구의 총에는 탄약이 없다. 정동진은 그래서 송천수의 권총도 챙겼다. 자기 자신을 지킬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현장에 출동한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경찰관 두 명이 즉시 정동진을 향해 권총을 겨누며 소리를 질렀다.
"총 버려!"
"어? 아니, 이건…."
"당장 버려! 쏜다!"
정동진이 권총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건 내 거가 아니라…."
실수로 총구가 경찰 쪽으로 향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경찰의 권총 첫발은 공포탄이 들어 있었다. 공포탄이 터졌다.
정동진은 기겁했다. 이미 총에 맞았는데 또 총소리를 들었다.
"으아악!"
정동진이 겁에 질려 권총을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살려줘!"
송천수의 권총이 땅에 떨어지는 충격으로 격발됐다. 총소리와 함께 총탄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경찰들도 깜짝 놀라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 두 발이 정동진의 바로 옆으로 날아가 차에 꽂혔다.
"히이익!"
정동진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소리를 질렀다.
***
사건 현장에 형사들이 출동했다. 경찰특공대도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현장을 장악했다.
구급차도 여러 대 도착해 칼이나 총에 맞은 조직원들을 병원으로 옮겼다.
제일 먼저 실려 간 건 천수파 두목 송천수였다. 송천수는 박성구가 쏜 총탄을 세 발이나 맞았다.
경찰이 대규모로 출동했다는 소문을 듣고 기자가 찾아왔다.
기자가 형사팀장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여긴 뭐 전쟁이라도 터졌습니까?"
"박 기자?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저 기자입니다?"
팀장이 불평했다.
"젠장. 누가 건수 있다고 흘렸겠지. 이번엔 또 어떤 새끼인지 잡히기만 하면 확 그냥."
"에이. 왜 그러십니까? 상부상조하는 거죠. 기삿거리를 주면 제가 또 모른 체하겠습니까? 나중에 팀장님 급하실 때 필요한 기사 제가 딱 써드리잖습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음…. 아니, 뭐. 그렇긴 한데."
박 기자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래서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사건입니까?"
"보면 알잖아."
"모르겠는데요? 전쟁이라도 터졌잖습니까?"
팀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수사 중인 사안이라 알려줄 수는 없어. 이런 큰 사건은 더 조심해야지."
"에이. 김 팀장님. 그냥 속보 몇 줄 쓸 정도만이라도 알려주시죠. 어차피 좀 지나면 여기로 기자들이 몰려올 텐데, 그러면 결국 다 알려집니다. 아는 사이에 좀 도와주십쇼."
팀장이 잠시 생각하다 현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놈들은 성구파. 서울에서 활동하는 조폭이야."
"서울 조폭이 왜 여기 있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그가 다른 놈들을 가리켰다.
"천수파. 성구파의 경쟁조직이지. 두 조직이 오늘 여기서 끝장을 본 거야. 새끼들이 그냥 서울에서 싸우지 말이야. 왜 남의 동네에 와서 지랄이야?"
기자가 물었다.
"총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두 조직의 두목이 권총을 하나씩 가져왔더라. 그걸로 서로를 쐈어. 천수파 두목은 세 발이나 맞았다."
"권총 종류는요."
"6연발 리볼버."
"혹시 분실한 경찰 총기…."
"아니야. 러시아산이야."
60. 횡령 장비 II
기자가 말했다.
"아. 러시아에서 들어온 권총이구나. 어디 항구에서 밀수했나? 그것도 두 개나."
형사팀장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니. 성구파 두목이 쏜 건 러시아에서 만든 건데, 천수파는 미제야. 그래서 구분이 쉬웠지."
기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쨌든 조폭들이 서로 총질한 건 사실이군요. 보통은 칼은 써도 총은 안 쓰잖습니까?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뭐랍니까?"
팀장은 정동진이 한 말을 생각했다.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던 회사원은 중간에 킬러가 난입했대고 주장했는데.'
정동진은 황당하게 들리는 이야기를 횡설수설 떠들어댔다.
- 분명히 CIA가 보낸 비밀 암살 요원일 겁니다! 아니면 고대 비전 무술의 전승자겠지요!
형사들은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총에 맞은 충격으로 맛이 좀 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동진이 말한 것 중에는 현장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있었다. 어느 권총이 누구 것인지, 왜 차에 치인 놈이 있는지 등은 정동진이 말한 대로였다.
정동진의 말 중에 사실이 섞여 있다. 그래서 팀장은 기자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 정동진에 관한 부분은 대부분 빼고 말했다.
대신에 다른 걸 알려주었다. 그건 기자들이 몰려오면 어차피 공개될 이야기였다.
"어쨌든 둘 다 서울 지역 조폭인데, 저 창고에 최신 기계가 좀 있어. 그걸 노린 게 아닌가 싶어."
"예? 이런 시골에 무슨 최신 기계가 있어요?"
"있더라고."
기자가 바로 옆 축사를 보았다.
"잠깐만요. 마약을 만들 때는 일부러 축사 옆에서 한다던데요. 냄새 때문에."
"그렇긴 하지."
"그럼 이거 그림이 딱 나오네요. 조폭이 쓰는 최신 기계가 뭐겠습니까? 설마 그걸로 반도체를 만들겠습니까? 당연히 마약이지. 마약 냄새를 숨기려고 돼지를 키웠겠죠."
"여기 그림만 보면 그렇긴 한데…."
기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마약은 얼마나 찾으셨습니까?"
"기계만 설치하고 아직 생산은 안 한 것 같더라고. 그리고 걸리는 게 하나 있어. 그러니까 마약 이야기는 기사로 쓰지 마."
"아니, 왜요? 딱 봐도 마약 맞는데."
"기계가 되게 좋아 보여."
"그게 무슨…."
"무슨 첨단 연구소에 있는 기계들 같다니까? 저걸로 진짜 마약을 만들려고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조폭이 그런 기계를 왜 씁니까? 아니, 어떻게 씁니까?"
"저놈들도 어디서 기술을 배워서 쓰려던 거겠지."
***
차우진이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었다.
복대를 풀었더니 배가 도로 나왔다.
"이것만으로는 알아보는 사람이 있던데, 전신 쫄쫄이라도 옷 속에 입어야 하나…."
그는 보정 속옷으로 체형을 숨길 생각만 했지 살을 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늘처럼 무리해서 움직이면 살 빠질 텐데. 인덕을 유지하려면 잘 먹어야겠다."
지금은 피곤해서 음식을 만들기도 귀찮았다.
"배달시킬까? 중식으로 쫙 깔거나, 족발 보쌈 세트에 쟁반 국수를 먹거나…."
휴대폰이 진동했다. 차유리의 전화였다.
"왜?"
- 오늘 저녁은 고기 요리를 준비해라.
"꺼져. 피곤해. 고기는 밖에서 먹고 들어와."
- 오늘 집에 수연이 데려간다. 얘 고기 좀 먹여야 해.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초췌해졌어.
민수연은 차우진과 어릴 때부터 한 동내에 살던 친구다.
"수연이 팔아서 고기 먹으려는 수작이야?"
- 어허! 수연이 굶기기 싫으면 냉큼 준비하렸다! 그럼 오늘은 소고기인가?
"돼지."
- 동파육 같은 거?
그런 걸 만들기엔 너무 피곤했다.
"그냥 삼겹살 구울 거야."
***
조직간의 분쟁에 칼이 사용되는 일은 흔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총격전도 벌어졌다.
게다가 사건 현장에서 마약 제조 시설이 발견됐다.
전문가가 찾아와 장비를 확인했다.
"약을 제조하려던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마 마약이겠죠."
팀장이 물었다.
"이 장비 좋은 거지요?"
"기업 연구소에서나 쓸 정도로 성능이 우수한 장비들입니다. 마약 제조 과정에서 나는 냄새를 제거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옆에 축사가 있는데요?"
"범인들이 이 장비의 성능을 잘 몰랐나 봅니다."
"역시 기술을 배워서 만들려던 건가 보군요. 아니면 시키는 대로 기계만 작동시키려고 했던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팀장이 인상을 썼다.
"그런데 이놈들은 도대체 누구한테서 배우려던 거지?"
***
현장에 제일 먼저 찾아온 기자는 속보를 내보냈다.
후속 기사에서는 사건 규모도 알렸다. 그러면서 마약 제조 시설 이야기도 흘렸다.
그 기자는 단독으로 기사를 내면서 먼저 꿀을 빨았다.
기사를 본 기자들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왔다.
기자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정보도 많이 흘러나왔다.
현장에 온 사람 중에는 인터넷 언론사 소리언덕의 도인선 기자도 있었다.
그녀가 형사에게 질문했다.
"저건 어떤 마약을 만드는 장비인가요?"
"저희도 조사 중입니다."
"형사님들은 그냥 보면 아시는 거 아니에요?"
"장비가 워낙 최신형이라서요."
"그렇구나. 최신형이구나."
형사가 푸념했다.
"솔직히 말해서, 저런 거 처음 봤습니다. 여기가 무슨 연구소도 아니고."
"장비가 좋아 보이긴 하네요. 근데 저건 비닐도 다 안 벗겼네요? 완전 새것인데요?"
***
조직 간의 싸움에 총이 사용되고, 거기다 마약 제조 장비까지 발견됐다. 그 정도면 공중파 뉴스에서 다루고도 남을 기사였다.
그래서 그 사건이 9시 뉴스에 나왔다.
차우진이 집에서 성구파와 천수파 사건을 TV로 보며 말했다.
"장비 사진이 잘 나왔네. 그 장비들이 어디 갔나 했더니 저기 있었어."
민수연이 삼겹살을 먹으며 물었다.
"그 장비라니?"
"딥어스테크에서 연구소 장비를 빼돌린 횡령 사건이 있었어. 그게 어디 갔나 했더니 저기 있다고."
민수연이 손뼉을 쳤다.
"아! 맞다. 너 거기서 일하다가 불도 껐잖아. 그럼 이 삼겹살은 그때 번 돈으로 사는 거야?"
"너 온다고 준비했지."
민수연이 젓가락으로 불판을 툭툭 쳤다.
"준비를 왜 이렇게 해?"
"삽겹살이 어때서?"
"너 요리 잘하잖아."
"굽는 것도 잘해."
"하긴. 맛있긴 하다. 쫀득쫀득하게 잘 굽네."
이번에는 차우진이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빈손으로 왔냐? 양심이 있으면 과일이라도 사와야 하는 거 아니냐?"
"상추 사 왔잖아."
"그래. 넌 상추만 먹어."
"닥쳐! 이 고기 다 내 거야!"
차우진이 차유리에게 물었다.
"누나. 얘가 입맛이 없어서 비리비리하다더니? 어디가?"
"응? 내가 언제 그랬어? 초췌하다고 했지."
"아. 경찰한테 비리라고 하면 안 되나? 비실이라고 하자."
민수연이 활짝 웃었다.
"내가 좀 가냘파 보이냐? 갈대처럼?"
"네가 미쳤구나? 너도 누나처럼 선출이야."
"난 육상인데? 그리고 경찰은 운동 말고 다른 특기로 들어갔는데?"
차유리가 한마디 했다.
"그래. 난 무술 특기 특채다. 덤비는 놈이 있으면 일단 주먹부터 날리지. 넌 갈대라서 좋겠다?"
"에이. 언니. 아니죠. 언니도 갈대잖아요."
"고기 더 먹을래?"
"당연하죠!"
차우진이 말했다.
"갈대치고는 너무 튼튼한 거 아니냐?"
"언니 욕하지 마!"
"수연아. 왜 네 욕이라고는 생각 안 하냐?"
"닥쳐!"
"하여간 내 주변 여자들은 왜 이렇게 많이 먹지?"
민수연이 한마디 했다.
"내가 우리 중고등학생 때 너한테 해준 김치볶음밥이 몇 그릇인데 이걸로 생색이야? 고기 더 내놔."
"네가 볶음밥만 하면 자꾸 태워서 나중엔 내가 했어. 넌 몇 번 안 했어."
"그 볶음밥에 담긴 마음이 중요한 거지."
"네 마음에서 탄내가 나더라."
민수연이 TV를 보며 말을 돌렸다.
"그러면 저 장비를 유출한 회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망해?"
"딥어스테크? 주가는 더 떨어지겠지만, 망하면 안 돼."
"왜?"
딥어스테크의 개발 2팀은 그 회사에서 계속 탐지기를 연구해야 한다.
"망하면 큰일 나."
이건 지구 멸망이 걸린 일이다. 딥어스테크는 망해서는 안 된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런데 다시 봐도 회사가 너무 막장이다. 망하지 않게 하려면 역시 내가 주식을 더 사야겠다."
민수연이 물었다.
"주식 살 거야? 그럼 나도 그 회사 주식 좀 살까?"
"너한테 주식 살 돈이 있었어? 먹는 데 다 쓴 거 아니었냐?"
"이거 왜 이래? 나 월급 따박따박 들어오는 공무원이야. 적금 들은 거 만기가 돼서 찾았어."
"음…."
세상이 망하면 돈은 어차피 휴지가 된다. 돈이 가치가 있으려면 멸망급 재난을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딥어스테크는 망하면 안 된다.
딥어스테크의 주가는 이미 여러 번 폭락했다. 주가는 워낙 저점이라 회사가 망하지만 않으면 지금보다는 오를 확률이 높다.
"사."
"얼마나?"
"뉴스 나왔으니 월요일에 더 빠질 거다. 충분히 빠지거든 사."
"진짜? 그러면 올라?"
"어. 10년 안에 언젠가는."
민수연이 눈을 깜빡였다.
"응? 10년?"
"어. 10년."
멸망급 재난이 터지는 건 10년 후다.
"그 전에 언젠가는 오르겠지."
"그거 나 시집갈 돈인데?"
"너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그런 헛된 꿈을 꾸냐? 그냥 월요일에 주식에 몰빵해라."
"우이씨! 야. 고기 더 구워. 오늘 여기 고기 다 먹고 갈 거야. 어차피 오늘 금요일이잖아! 술도 더 가져와!"
***
딥어스테크 신동욱 전무는 뉴스를 보다가 너무 놀라 술잔을 떨어뜨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오늘 비서인 정동진을 성구파에 보냈다.
그런데 지금 TV 9시 뉴스에 성구파와 천수파가 충돌해 전멸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젠장. 왜 하필 오늘 저 새끼들이 싸워! 도대체 왜 오늘!"
화도 나고 불안하기도 했다.
"정 비서 이 새끼. 어디서 뭐 하고 있는데 저런 걸 보고도 안 하고!"
그가 정동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았다.
"이 새끼는 전화를 왜 빨리 안 받아!"
***
형사가 말했다.
"전화가 계속 오는데 그냥 받으시지 왜?"
정동진의 스마트폰에는 발신자로 신동욱 전무의 이름이 떠 있었다.
정동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안 받아도 되는 전화입니다."
정동진은 회사원이 왜 조폭 간의 싸움에 끼어 있다가 다리에 총을 맞았는지 숨기고 있었다. 납치 청부 심부름을 하러 갔다는 걸 들키면 당연히 체포된다.
그런데 그 청부를 지시한 신동욱 전무가 속도 모르고 전화를 걸었다.
'젠장.'
그렇다고 형사 앞에서 전화를 받을 수는 없었다.
전화를 받았는데 신동욱이 오늘 납치 청부에 대해 말하면, 조용한 병실에 같이 있는 형사가 들을 수 있다. 그러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형사가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물었다.
"회사 전무님 전화인데 안 받아도 됩니까?"
"퇴근했잖습니까? 지금은 근무시간이 아니라서요."
"그래도 전무님 전화인데? 그러면 더 수상한 거 아시죠?"
형사가 다리에 총상을 입은 사람을 병실까지 찾아와서 조사하는 건, 당연히 정동진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정동진은 범죄조직 두 곳이 주력이 전멸한 현장에서 발견됐다. 성구파 두목의 총에 맞긴 했지만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다.
"아니, 그게…."
정동진은 일단은 입을 다물려고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래도 한 가지 생각은 했다.
'신 전무가 밖에 있어야 빽을 써서라도 나를 빼낼 수 있어. 김태훈도 빼냈는데 나도 어떻게든 빼주겠지.'
그가 그런 생각으로 입을 다물었다.
형사가 한숨을 쉬었다.
"하. 답답하시네.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병실에 다른 형사가 들어왔다.
"정동진 씨. 우리가 현장에서 녹음기를 하나 찾았습니다."
정동진은 화들짝 놀랐다.
"예? 노, 녹음기요?"
"일단 들어보시죠."
그가 녹음파일을 재생했다.
정동진이 현장에서 했던 말이 나왔다. 전체 상황이 아니라 정동진이 말한 부분에서 신동욱 전무를 언급한 부분만 잘라낸 것이었다.
"이, 이건 그 새끼가 녹음을…."
정동진이 소리를 질렀다.
"이거 녹음한 새끼가 범인입니다! 현장에서 싸울 때 쳐들어온 그 킬러 새끼 말입니다! 이거 나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남겨둔 거란 말입니다!"
"축사 옆에서 삼겹살을 누가 구워 먹었던데, 녹음기는 그 의자 밑에 붙어 있던 겁니다."
"예?"
"그러니까 그 킬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일부러 거기에 녹음기를 붙였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정동진 씨가 삼겹살을 먹을 걸 미리 알고?"
"거기는…."
그 장소에서 정동진은 박성구와 함께 삼겹살을 먹었다.
"그리고 중간에 난입했다는 그 사람에 관한 건 우리가 수사 중이니까, 정동진 씨는 여기 집중합시다."
"아니, 나는…."
"여기 녹음된 걸 보면, 당신 입으로 신 전무가 시켰다고 말했던데."
"그 녹음은 누가 내 약점을 잡으려고 조작…."
그는 갑자기 장호철 사장의 비서 김태훈이 했던 말 하나가 떠올랐다.
- 다리 놔 줄 테니까 너도 나처럼 일해봐라. 그러다 결국 내 꼴 날 거다.
'김태훈이 내 약점을 잡으려고 박성구와 짜고 녹음을….'
그러면 녹음기가 하필 의자 밑에 붙어 있던 이유가 설명된다. 박성구가 갑자기 삼겹살을 먹자고 한 거나, 고기 먹으면서 일 이야기를 한 것도 설명된다.
정동진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커졌다.
"김태훈 그 새끼가!"
61. 협상
형사가 물었다.
"김태훈이라고요? 흥미롭군요. 더 이야기해보시죠."
정동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아니, 그게…."
"정동진 씨. 감춰봐야 어차피 다 밝혀집니다. 녹음파일까지 나왔는데 협조 안 하시면 혼자 다 뒤집어쓸 겁니다."
정동진의 눈알이 흔들렸다.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피할 수 없는데 녹음파일까지 나왔다.
'망했다. 이러면 나는 못 빠져나가.'
그는 신동욱이 김태훈을 빼낼 때처럼 자신도 빼낼 줄 알았다.
그런데 김태훈은 직접적인 증거는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정동진은 녹음파일이 나왔다.
'이러면 신 전무는 나한테 뒤집어씌우고 자기만 빠져나가려고 할 거야.'
정동진이 아는 신동욱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정동진이 결론을 내렸다.
'안 되겠다. 나라도 살아야겠다.'
"형사님. 저는 심부름만 했습니다. 신동욱 전무님이 시켜서 심부름만 했다고요."
"신동욱 전무. 방금 전화 걸었던 그 사람이군요."
"맞습니다. 월급쟁이가 위에서 시키면 해야지, 어떻게 안 한다고 합니까?"
"사람 죽이라고 시켜도 하면, 그건 월급 받아 하는 일의 선을 넘은 거지."
정동진이 얼른 손을 흔들었다. 살인 청부와 납치 청부는 심각성이 완전히 다르다.
"죽이라고 시킨 건 아닙니다!"
"그럼?"
"잡아다 혼내주라고…."
"일단 납치에 폭행 청부는 인정하시는군요."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저는 신 전무님의 메시지만 박 사장한테 전달한 겁니다. 진짜입니다."
"그럼 방금 말한 김태훈은?"
정동진이 화를 벌컥 냈다.
"그 새끼가 진짜 나쁜 새끼입니다! 원래 박 사장이랑 성구파 사이에서 일하던 건 내가 아니라 그 새끼란 말입니다!"
형사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제안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국밥 시켜드릴까? 아니다. 여기는 병원이니까 병원 밥 드셔야겠네."
***
차우진이 사덕리소스 서준석 사장을 만났다.
국밥 식당 TV에서 성구파와 천수파가 권총까지 쏘면서 싸운 이야기가 나왔다.
"서 사장님. 저 뉴스 보셨습니까?"
"봤지요. 어마어마하던데요. 저기서 칼이나 총을 맞은 놈이 스무 명 가까이 된다면서요?"
"열여덟입니다. 성구파가 일곱, 천수파가 열, 그리고 신동욱 전무의 비서가 한 놈."
서준석이 깍두기를 집다가 멈칫했다.
"예? 잠깐만요. 누구요?"
"신동욱 전무의 비서 정동진이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아니, 차 이사님은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가 본 기사에는 그런 이야기까지는 없었는데요."
"경찰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그래서 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신 전무의 비서가 왜 저기 있습니까?"
"서 사장님. 금광을 폭파하러 온 놈들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서준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 설마…."
"장호철 사장이 저놈들에게 시킨 겁니다. 장 사장이 죽고 신동욱이 그 자산을 물려받은 거고요. 신동욱도 비슷한 짓을 하려던 거죠."
"와…. 신동욱 개새끼."
"서 사장님이 쌍욕 하는 건 두 번째 보네요."
"그러게요. 저절로 욕이 나오네요."
"저는 욕을 잘 못 해서."
"네?"
서준석 사장이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차 이사님은 욕보다 손이 빠르…. 아닙니다. 뭐, 그렇다고 하시니 그런 거로 하는데…."
서준석이 물었다.
"신 전무가 우리를 치려고 했으니까, 그럼 우리는 홍성준 부사장을 지지해야겠군요."
"원래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홍 부사장 쪽이 나았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
"그런데 그걸 홍 부사장은 알면 안 되죠."
"예?"
"사람이 귀가 얇더라고요. 지금쯤이면 귀가 팔랑거리고 있겠군요."
차우진이 TV를 가리켰다.
"저 뉴스가 나왔으니 정보 빠른 사람들은 신 전무 짓이란 걸 들었을 겁니다. 주가는 또 떨어지겠지요."
"신 이사 쪽 투자자들의 반응이 궁금하군요."
"범죄에 크게 연루됐으니까 움츠러들겠죠. 매수도 멈출 테니까, 월요일 장이 열리면 주가는 폭락할 겁니다."
"하긴."
"그래서 저는 월요일에 몰빵하려고요."
서준석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월요일에 주가가 내려가면 우리 회사가 확보한 지분의 평가 총액도 내려갑니다."
"언젠가는 회복되겠지요."
"차 이사님은 경영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지분을 원하잖습니까? 그런데 주가가 내려가면 홍성준 부사장 쪽에서도 주식을 더 사들이지 않을까요?"
"월요일에요?"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홍 부사장 쪽에서는 자기들이 이겼다고 판단할 겁니다. 그럼 그쪽 투자자들도 무리할 필요가 없죠."
"우리만 몰빵하는군요. 이거 위험한 모험입니다."
"압니다."
어차피 마그마 탐지기가 개발되지 못하면 멸망급 재난도 막지 못한다. 수십억 명의 목숨을 걸고 도박하는 것보다는 돈을 거는 게 낫다.
차우진이 말했다.
"저는 월요일에 전부 털어 넣어 물을 탈 겁니다."
서준석이 차우진을 가만히 보았다. 그는 차우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회사를 사채업자에게 빼앗길 뻔했을 때도 차우진 덕분에 지킬 수 있었다. 금광에서 습격을 당했을 때도 차우진이 구해주었다.
그는 신동욱이 누구를 노렸는지 짐작은 갔다.
'차 이사 아니면 나겠지. 말을 안 들으면 둘 다 납치하려 했을 테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내 가족까지 노렸겠지.'
TV에서 성구파와 천수파의 전쟁에 끼어든 사람을 언급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로 존재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서준석은 누가 그랬는지 짐작이 갔다.
'저놈들이 공격할 걸 알고 먼저 친 거겠지.'
그가 차우진을 돕지 않았다면 장호철 사장이나 신동욱 전무, 성구파가 그를 노릴 일은 없었을 수도 있다. 금광 폭파 미수 사건도 없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짚어가다 보면, 차우진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미 예전에 사채업자 박재구에게 회사를 빼앗길 뻔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서준석이 장담했다.
"차 이사님. 우리에겐 금광이 있습니다. 설사 딥어스테크가 망한다 해도 우리까지 망하진 않을 겁니다. 회사 차원에서도 자금을 추가로 확보해 열심히 물을 타겠습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연구소만 잘 컨트롤하면 딥어스테크는 안 망할 겁니다. 거기에 그럴만한 아이템이 있거든요."
"그럼 더 좋죠. 나중에는 주가가 오를 테니까요."
***
형사들이 딥어스테크를 찾아갔다. 그들은 비서실로 쳐들어가 정동진의 자리에 있는 모든 걸 압수했다.
주말인데도 출근한 직원이 몇 명 있었다. 형사들은 그들에게 정동진에 관해 질문했다.
"전무님 비서라서 저는 잘…."
신동욱에 대해서도 물었다.
"형사님. 전무님에 대해 제가 함부로 말하면 저 잘립니다."
장호철의 비서 김태훈은 집에 있다가 체포됐다. 그는 반항했다.
"나를 왜 또 체포합니까?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김태훈 씨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정동진 씨가 다 자백했습니다."
"그거 다 정동진이 거짓말한 겁니다! 나를 음해하려고 거짓말한 거라고요!"
"자세한 건 가서 이야기하시죠."
신동욱 전무에게도 형사들이 찾아갔다. 체포영장을 가져간 건 아니었다.
신동욱이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정 비서가 그런 말을 했어요? 그 사람 참. 나한테 불만이 많았나? 왜 그런 거짓말을 해?"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봐요. 나 딥어스테크 전무입니다. 그런 음지에서나 일어나는 일을 내가 왜 지시합니까?"
"그러면 같이 가서 설명해주실 수 있겠군요."
신동욱은 경찰서로 같이 가자는 말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긴 어딜 가! 할 말이 있으면 내 변호사하고 해! 난 안 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