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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APOCMASCOT / Chapter 14: 14

Capítulo 14: 14

***

백희선이 회의실에서 서류를 집어 던졌다.

"SL 제약 새끼들이 공격적으로 영업하면 받아치란 말이야! 막아!"

SL 제약은 성기호 사장의 지휘 아래 라이프레인 제약의 백희선 담당 사업부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백재원과 백재우는 회사에 손해가 가는데도 구경만 했다. 백희선의 실적이 나빠져야 경영권 전쟁에서 그들이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비서가 말했다.

"SL 제약에서 언론 플레이도…."

"그런 걸 하라고 당신들한테 월급을 주는 거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싸워서 이겨!"

백희선은 예전에도 회의 도중에 화를 낼 때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화를 내려고 회의에 들어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에 백희선이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따라 화가 더 많이 났다. 도인선이 쓴 기사를 봤기 때문이다.

"드미트리가 죽은 현장에서 증권 계좌가 발견됐어?"

현장에서 체코 조직원 여덟 명이 사망했다. 백희선은 그들과 차우진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발견된 통장은 두 개였다. 차우진은 네 개의 차명 증권 통장 중에 두 개를 백희선에게 계약금으로 주었다. 나머지 두 개는 잔금을 치를 때 주기로 했다.

"그 계좌는 분명히 그 새끼가 가지고 있던 그거겠지?"

백희선은 답답했다.

"그 새끼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것만 알아내면 죽여버릴 거야!"

백희선은 청부업자를 안다. 상칠파 두목 천상칠에게 킬러를 보낸 것도 그녀다.

그런데 차우진에게 킬러를 보내려면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그녀는 차우진의 이름조차 모른다.

"방심했어. 그 새끼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

관심이 없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세르게이와 그 부하들을 동원해서 차우진을 붙잡은 후에 정체를 알아내려 했다.

세르게이가 죽은 후에는 드미트리와 그 부하들을 이용하려 했다.

그런데 드미트리도 죽었다.

"세르게이도 그 새끼가 죽인 거야."

다리가 달달 떨렸다.

"아무리 대단한 새끼라도 머리에 총알이 박히면 죽어. 그런데 누군지 알아야 총알을 박아넣지!"

최근에 형사들이 회사에 찾아왔다. 그들은 백희선만이 아니라 회사 관계자 여러 명과 이야기하고 가긴 했다.

"형사들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갔어. 그쪽은 괜찮을 거야."

거기다 백재원과 백재우도 견제해야 한다.

SL 제약은 대놓고 그녀의 사업부만 공격 중이다.

해결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야! 그 새끼 도대체 누구야!"

***

드미트리 사건을 수사하던 광수대 형사가 팀장에게 보고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차명계좌와 통장 말입니다. 그걸 처리한 대포 통장 업자를 찾았습니다."

팀장이 활짝 웃었다.

"당장 가서 싹 다 잡아들여! 아니다. 같이 가자! 이 새끼들! 한 놈도 놓치지 않겠다!"

대포 통장 업자가 체포되고 그 사무실에서 다수의 집기가 압수됐다.

그중에서 PC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은 분석팀이 분석해야 했다.

특별수사본부장이 그 일을 최우선으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고위층의 지시는 받았는데 분석팀에서 처리하기에는 물량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경찰의 다른 부서 전문가들에게 지원요청이 들어갔다.

그중에 차우진의 친구인 민수연도 있었다.

민수연은 압수된 노트북에서 나온 데이터를 분석하느라 야근을 했다.

차우진이 야식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야근은 끝났다더니?"

"일이 새로 떨어졌어. 이번에는 대포 통장 업자의 노트북에서 나온 데이터 분석이야."

"고생 실컷 해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지?"

"어."

민수연은 차우진이 야식으로 만들어준 고기튀김과 콜라를 먹으며 데이터를 다시 분석했다. 그러다 트림을 하며 말했다.

"께윽. 찾았다."

***

민수연은 아침부터 특별수사본부로 불려갔다. 그녀가 그곳에서 분석 결과를 브리핑했다.

"네 개의 대포 통장이 한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본부장이 물었다.

"그게 누군지 알 수 있나?"

"제일 유력한 건 상칠파 두목 천상칠입니다."

본부장이 살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천상칠? 그 새끼는 죽었잖아."

"그렇습니다."

"천상칠이 확실해?"

"저는 지난번에 천상칠의 거점에서 나온 노트북의 데이터 분석에 참여했습니다. 그때 찾아낸 정보와 겹치는 것을 이번에도 찾아냈습니다."

"그래? 그러면…. 누군가 천상칠을 죽이고 저 통장들을 빼간 건가?"

광수대 팀장이 설명했다.

"천상칠의 아지트에는 비밀 금고가 있었습니다. 금고는 활짝 열린 상태였습니다. 거기서 가져간 것 같습니다."

"그렇겠네. 그런데 그때는 저 체코 조직원들은 국내에 없었잖아."

"드미트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르게이라고, 먼저 국내에 들어와서 활동하던 놈이 있습니다."

"아. 레드 크리스털을 만들던 놈? 그놈도 체코 국적이지?"

"그렇습니다. 체코에 있는 러시아계 범죄조직으로 추정됩니다."

민수연도 설명했다.

"당시에 천상칠은 세르게이의 마약 생산 시설을 은밀히 찾던 중이었습니다. 그 시설은 천상칠이 사망한 후에 우리 경찰이 찾아냈습니다."

본부장이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그렇군. 그러니까 천상칠이 서해안에서 사고를 치니까, 누군가 꼬리를 자르려고 제거했다? 그리고 그때 저 증권 통장들도 가져갔다?"

"그렇습니다."

"그럼 사라진 통장 두 개는? 민 경장 말로는 원래는 네 개였다며?"

"추적 중입니다."

"빨리 찾아. 지금 그걸 가지고 있는 놈이 범인이다."

***

민수연이 요리를 먹으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도 야근이라니까?"

차우진이 밀폐용기가 몇 개 더 들어 있는 쇼핑백을 보여주었다.

"야. 많이 만들어왔으니까 그렇게 급하게 먹지 마라."

"그것도 다 내 거였어? 유리 언니는?"

"이번에는 네가 당첨이라서."

차우진이 빌런을 잡으면 그 여파로 차유리가 야근하곤 했다. 그런데 가끔은 이번처럼 민수연이 야근했다.

"당첨이 뭐야?"

"도시락 당첨이라고."

"아싸. 이거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나 혼자 먹어야지."

"사람들이랑 나눠 먹으라고."

"싫다고. 내가 다 먹을 거라고."

차우진이 물었다.

"그건 네 원래 업무도 아닌데 왜 야근까지 해야 하냐?"

"특별수사본부장님이 하라는데 어쩌냐? 공무원이 까라면 까야지."

"거기서 중요한 걸 찾아내면 승진에 도움이 되냐?"

"몰루?"

"장하다. 아주 장해. 넌 또 그러냐?"

"놀리냐?"

"보고는 네가 직접 해라. 누가 대신 보고하겠다고 하면 배 째라고 해. 네가 찾았다고 꼭 말해라."

"이게 원래 내 일이 아니라 잠깐 지원해주는 거야. 그리고 혼자 추적할 수도 없어. 현장팀이 같이 움직여줘야 한다고."

"그래도 네가 하라고."

"알았다고. 오늘도 내가 직접 보고했다고."

차우진이 물었다.

"그래서 야근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뭔데?"

"자세한 건 비밀인데, 차명계좌 추적에 관한 거야."

"라이프레인 제약?"

민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잉? 그 회사 주식이 그 계좌에 들어 있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증권 계좌 이야기는 이미 뉴스에 났잖아. 나 그 기자랑 아는 사이다. 기사로는 못 썼지만 라이프레인 제약 주식이라고 하더라. 그러면 특수본에서 너한테 뭘 찾으라고 하는 건지는 뻔하지."

"오. 우진이 똑똑해졌어."

"공부는 내가 너보다 잘했다고."

"그건 내가 운동하던 고딩 때 이야기잖아. 컴퓨터는 내가 더 잘해."

"난 너보다 전기를 잘 다루지."

잠시 투덕댄 후에 차우진이 조언했다.

"그 통장. 백희선 이사에게 갔을 거야."

"잉?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건 수사팀도 모르는데?"

"내가 요즘 SL 제약에서 알바를 하는데, 거기서 나온 이야기야. 그런 짓까지 할 사람은 사장 자식 중에 백희선뿐이라더라."

"그런가?"

"경찰 쪽에도 그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걸? 그러니까 넌 그 통장을 백희선이 가져가서 다시 다른 차명계좌로 옮겼다고 가정하고 그쪽을 추적해봐."

"웅…. 그래 볼까?"

***

이튿날 오후에 민수연이 서류를 들고 현장팀을 찾아갔다.

그녀가 말했다.

"찾았어요."

팀장이 환해진 얼굴로 물었다.

"어? 찾았어? 벌써? 역시 민 경장!"

"확실한 건 대포 통장 업자를 잡아서 확인해봐야 해요."

"그런 건 우리가 전문이지!"

***

특수본 회의가 다시 소집됐다.

민수연이 보고했다.

"사라진 두 개의 통장과 차명계좌는 다시 세탁 과정을 거쳤습니다."

팀장이 옆에서 말했다.

"민수연 경장이 그걸 알아냈고, 저희 팀에서 그 업자를 체포해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본부장이 물었다.

"저번에 잡은 그 대포 통장 업자와는 다른 놈이야?"

"예. 천상칠과는 상관없는 놈입니다."

"민 경장. 계속해."

민수연이 보고했다.

"새로 체포한 업자가 가지고 있던 자료를 분석해서, 그 통장이 누구에게 넘어갔는지 조사했습니다. 거기에 다른 경로로 수집된 정보를 더해 용의자를 찾았습니다."

그녀가 화면에 사진을 띄웠다.

"라이프레인 제약의 백희선이 현재 제일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본부장이 말했다.

"중견 제약회사 2세의 짓이라…. 사실이라면 후폭풍이 장난이 아니겠군. 증거는?"

민수연이 팀장을 돌아보았다. 현장을 뛴 팀장이 말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차명 통장에서 여성의 유전자를 찾았습니다."

"그게 백희선이다?"

"아직 백희선의 유전자를 확보하지 못해 비교하진 못했습니다."

수사본부에 민수연만 참여한 게 아니다. 여러 팀에서 형사를 차출했다. 그중에 서해안 사건과 관련된 팀도 있다.

천상칠이 사망한 장소를 처음 수사한 형사도 특수본 현장팀에 파견 와 있다.

그 형사가 보고했다.

"당시 현장의 모습은 천상식과 킬러들이 서로를 죽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저희 수사팀은 또 다른 인물이 현장에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백희선이란 거군."

"백희선이 보낸 부하나 청부업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천상칠의 통장이 백희선의 손에 있다면 그게 물증이 되겠지."

본부장이 손뼉을 쳤다.

"좋아. 이제부터 백희선을 집중적으로 파봐. 그러면서 DNA 증거를 찾아봐. 상대는 중견기업 오너 일가니까 합법적으로 해. 어설프게 건드리면 소송만 들어온다."

"알겠습니다."

***

백희선이 한강 생태공원에서 KMTV 기자 최용구를 만났다. 그녀가 담배를 입에 물며 물었다.

"최 기자님. 급하게 할 이야기가 뭐죠?"

최용구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드미트리 사건에서 증권 계좌와 통장이 발견된 거 압니까? 그 통장에 라이프레인 주식이 들어 있다는 것도?"

"경찰이 찾아와서 묻긴 하더군요."

"혹시…."

백희선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한테만 물어본 것도 아니고, 회사 관계자 여러 명에게 질문하고 갔어요. 백재원과 백재우도 형사들을 만났어요."

최용구가 손으로 눈 주변을 꾹꾹 누른 후에 물었다.

"백 이사님. 혹시 그 통장 만졌습니까?"

"나는 모르는 통장이라니까요?"

최용구의 목소리가 커졌다.

"백 이사님. 제가 진실을 알아야 대책을 찾을 거 아닙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요?"

"아는 기자를 통해 들었는데, 그 통장에서 DNA가 발견됐답니다."

"범인의 DNA겠죠."

"여자 DNA랍니다."

백희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 기자님. 그 현장에 여자가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이번에 죽은 여덟 놈은 모두 남자란 말입니다!"

131. 배신

백희선이 잡아뗐다.

"DNA?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그래도 새로운 정보가 나오면 계속 알려줘요."

최용구 기자가 의심하는 눈으로 백희선을 쳐다보았다. 백희선은 여유 있는 얼굴로 최용구를 똑바로 보며 담배 연기를 뿜었다.

최용구가 할 수 없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정보를 입수하려면 돈이 듭니다. 공짜가 아니란 말입니다. 예산을 좀 챙겨주시죠."

백희선이 가르치는 듯이 말했다.

"최 기자님. 우리 사업, 아직 실패한 거 아니에요. 본사에서는 한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오직 나만이 레드 크리스털 양산 기술을 완성할 수 있으니까."

최용구가 인상을 썼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내 돈으로 해라?"

"나중에 이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들어올 막대한 돈을 생각해요."

***

백희선은 차를 직접 운전해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한강공원에서 멀리 떨어진 이면도로에 차를 세웠다.

그녀의 얼굴이 걸레처럼 구겨졌다.

"어디서 DNA가 묻은 거지?"

생각나는 게 하나 있었다.

"내가 그놈한테서 통장을 받았다가 도로 던져줬을 때?"

그녀는 차우진이 처음에 넘겨준 증권 통장은 도로 돌려줬다. 네 개의 통장 중에 그 통장 하나만 진짜인 건 아닐지 의심돼서, 일부러 다른 통장으로 바꿔 받았다.

그때 손가락이 통장에 닿았는지 생각해보았다.

"아니야. 난 그때 장갑을 끼고 있었어."

그녀는 그때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장갑을 끼고 있었다. 차우진도 가죽장갑을 낀 건 마찬가지였다.

"그럼 은행 창구 직원의 DNA? 그건 경찰에서 이미 비교해봤을 텐데?"

그녀는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진짜 내 DNA인가? 도대체 그게 어떻게 거기 묻어있지?"

***

차우진이 길거리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 한강공원에 담배꽁초를 버리면 쓰나."

백희선과 최용구는 전에도 한강 생태공원에서 만났다. 백희선은 그때도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던져버렸다.

차우진이 그때 그 꽁초를 주워 차명 증권 통장에 문질렀다.

그 통장은 나중에 드미트리의 주머니에 넣었다.

"백희선은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미국 회사인 파인드스톤의 사장 정수찬의 전화였다.

- 차우진 이사님. 딥어스테크에서 보내준 탐지기와 파인드스톤의 충격파 발생기의 조정이 끝나갑니다. 조만간에 뉴욕시 옆에서 마그마 탐지기를 테스트할 겁니다.

"예정보다 더 빨리 진행하시는군요."

- 결과가 궁금해서 서둘렀습니다. 뉴욕시 바로 옆 지하에 마그마 폭탄이라니. 원래는 말이 안 되는 야이기인데, 차 이사님이 있다고 하니까 불안해서요.

"저도 지하에 그런 게 없었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있을 겁니다."

- 부디 차 이사님이 틀렸기를 바랍니다.

"저도 제가 틀렸으면 좋겠군요."

- 뉴욕에는 언제 오실 겁니까? 테스트에 참여하셔야지요.

"테스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갈 수 있을 겁니다."

정수찬이 큰소리쳤다.

- 뉴욕에 오시면 풀코스로 대접하겠습니다. 하하하.

차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그는 원래는 이 테스트 하나 때문에 미국에 갈 생각은 없었다. 결과는 이미 알고 있고, 테스트하는데 기술적인 도움을 줄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드 크리스털을 만든 놈을 추적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이걸 핑계로 외국에 나갔다 와야겠어."

그러려면 먼저 백희선을 처리해야 한다.

"용구를 통해서 정보를 받았을 테니까, 이제 백희선은 자기가 궁지에 몰린 걸 알겠지."

그건 백희선만 아는 게 아니다.

"백독거미와 같이 해먹던 용구도 자기가 큰일 난 걸 알 테고."

***

최용구가 경찰청에 출입하는 기자에게 술을 사면서 정보를 들었다.

동료 기자가 물었다.

"최 기자님. 그 사건에 관심이 많네요?"

"흥미롭잖아. 냄새도 나고. 우리 방송국에서도 뉴스를 내보내야지. 그 통장에서 발견된 DNA가 누구 건지는 밝혀졌어?"

"비교할 DNA부터 확보해야 범인을 밝혀내겠지요?"

"범인? 아는 게 있나 본데 왜 이렇게 대답을 질질 끌어? 원하는 게 뭐야?"

기자가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흐. 최 기자님. 연예계에 아는 사람 많잖습니까? 나도 그…. 아시죠?"

"너 혹시 연예인이랑 연애하고 싶냐?"

"흐흐흐. 내가 뭐 정예지나 강수민 같은 급을 원하는 건 아니고요. 안 뜬 애 중에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관계 정도?"

예전에는 이런 청탁은 나인세븐 엔터를 통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곳은 원래 엔터 간판만 걸어놓고 이런 청탁을 처리하던 곳이다.

그런데 나인세븐은 완전히 망했다.

최용구는 정보가 급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수습하면 되겠지.'

"알아봐 줄게. 시간은 좀 걸려."

"최 기자님만 믿습니다?"

"이제 대답이나 해."

기자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거 아직은 기사로 내면 안 됩니다. 경찰에서는 라이프레인 제약의 백희선 이사가 DNA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용구의 표정이 굳었다.

"확실해?"

"수사팀은 확신한다던데요."

"증거는?"

"확실한 건 아직 없죠. 그래서 백희선 이사의 DNA를 합법적으로 확보할 방법을 찾고 있다던데요?"

***

최용구는 기자와 헤어진 후에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 씨발!"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백희선. 네가 잡히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백희선이 잡히면 같이 진행하던 마약 사업은 날아간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백희선이 나를 지키려고 입을 다물까? 그럴 리가 없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싶으면 나부터 팔아서 형량을 줄이려고 할 거야."

최용구가 머리를 굴렸다.

"경찰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서 DNA를 비교하려는 거라고? 그러면 경찰은 아직은 나에 대해서는 모르겠네?"

방법이 하나 생각나긴 했다. 최용구가 욕을 했다.

"씨발. 이제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사업이 문제가 아니야. 나 혼자라도 살아야겠다."

***

백희선이 평소처럼 한강 생태공원에서 최용구를 만났다.

그녀가 담배를 입에 물며 물었다.

"경찰 수사 상황은 어때요?"

최용구가 삐딱하게 말했다.

"백 이사님이 그 차명계좌 통장의 주인이라고 확신하고 수사 중이랍니다."

백희선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 왜! 그거 나 아니야!"

"진짜 아니라면, 차라리 DNA를 제공하고 검증을 요구하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죠? 거절할게요."

최용구가 욕을 했다.

"씨발. 맞나 보네."

"씨발? 당신 나한테 지금 씨발이라고 했어?"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아니라고만 하면 해결이 됩니까? 경찰은 결국 당신 DNA를 손에 넣을 거야! 아주 합법적으로!"

백희선이 피우던 담배를 집어 던졌다.

"어떻게!"

아직 타던 담배가 돌에 부딪히며 불똥이 튀었다. 그 모습이 백희선의 눈에 들어왔다.

"잠깐."

백희선은 공원에서 최용구를 만날 때는 담배를 피우곤 했다. 그 꽁초는 평소처럼 바닥에 버렸다.

백희선이 눈빛이 독해졌다.

"최 기자. 당신이 범인이었어?"

"무슨 말입니까?"

"나랑 만날 때 내가 버린 꽁초를 주워서 그 통장에 묻힌 거잖아!"

"백 이사님. 미쳤습니까? 꽁초가 여기에만 있어? 당신은 회사에서 담배를 피우면 재떨이를 직접 처리해?"

라이프레인 제약의 건물은 금연 건물이다.

백희선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담배를 피운다. 그녀가 사용한 재떨이는 비서실에서 처리한다.

비서실에는 백희선의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배다른 오빠인 백재원과 백재우의 사람도 있다.

백희선이 화를 냈다.

"그 새끼들이구나! 백재원이나 백재우가 나한테 누명을 씌운 거야! 재떨이의 꽁초를 이용해서!"

그녀가 독기 서린 눈으로 말했다.

"최 기자. 이거 다 그 새끼들 짓이라고. 내가 누명을 벗고 그 새끼들을 박살 낼 거야!"

최용구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거 잘됐군요."

"그래. 이걸 이용해서 반격…. 컥?"

백희선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최용구가 그녀의 배에 칼을 꽂았다.

그녀가 비틀거렸다.

"왜, 왜…."

최용구가 칼을 놓고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백 이사. 당신이 잡히면 나도 잡히잖아. 어차피 당신은 끝났는데, 나 혼자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

"난 누명…."

"다른 건 누명이 아니잖아? 경찰은 당신이 범인인 걸 알아. 결국 다 찾아내겠지. 죽은 놈들과 마약 제조 장비의 뒤에 당신이 있다는 걸 알아낼 거라고."

최용구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건이 너무 커져서 어쩔 수 없었어. 백희선 이사. 혼자 다 안고 가라고."

칼에 찔린 백희선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쿨럭. 개새끼…."

"백 이사. 당신도 내 상황이면 이렇게 했을 거잖아? 아예 킬러를 보내서 처리했겠지. 아. 그래. 천 사장도 당신이 처리했지? 나도 그렇게 되기 싫어서 내가 선수 친 거니까…. 어?"

백희선이 핸드백에 손을 넣었다가 꺼냈다. 손에 조그마한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22구경 2연발 초소형 권총이었다.

그 권총은 드미트리가 죽기 전에 쏘려고 했던 것과 똑같은 모델이었다.

최용구는 권총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어? 어? 배, 백 이사. 진정…."

백희선이 방아쇠를 당겼다. 작은 총탄이 날아가 최용구의 몸에 박혔다.

"컥!"

소형 권총용 22구경 탄환은 위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렇지만 총은 총이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제대로 맞으면 한 방에 죽을 수도 있다.

최용구가 배를 잡고 무릎을 꿇었다.

"씨, 씨발. 총이 있을 줄은…."

백희선의 권총은 손바닥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호신용 권총이다. 2연발이라 아직 한 발이 남았다.

그녀가 최용구를 정확히 조준하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빗나가기 어려웠다.

"끄악!"

총탄을 두 발이나 맞은 최용구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씨발.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차우진이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용구야. 네가 백독거미를 먼저 쳤구나. 네가 먼저 당하면 어쩌나 했는데."

"허, 헉. 누, 누구냐!"

"증권 통장에 DNA를 묻힌 사람."

최용구의 눈이 커졌다.

"네, 네가…. 왜…."

"백희선이 내 타깃이거든."

백희선은 차우진을 알아보았다.

"너…. 나를 속였…."

그녀가 차우진을 향해 총구를 돌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초소형 권총에는 총알이 딱 두 발 들어간다. 그 두 발은 최용구의 몸에 박혀 있다.

남은 총알이 없었다.

백희선이 손을 덜덜 떨며 말했다.

"네가 다 꾸민 짓…."

"일을 꾸미는 건 네가 잘했지. 레드 크리스털 양산 기술 개발을 위해서 네가 연구원들에게 한 짓을 생각해봐."

"월급 줬…."

"월급 주면 사람을 네 마음대로 해도 되는 줄 아냐? 그리고 천상칠이나 천중칠은 너한테 월급을 받은 것도 아니잖아."

"너도 세르게이랑 드미트리를 죽였…."

"빌런은 다 뒈져야지."

백희선과 최용구는 멸망한 세계에서는 빌런이 된다.

차우진은 그 멸망을 막는 게 목표다. 그래서 멸망한 후에 빌런이 된다는 것만으로는 지금 시대에 처단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둘은 다르다. 이들은 이미 빌런이다. 문명 세계가 멸망하면 더 큰 빌런이 된다.

그런데도 그동안 이 둘을 살려둔 건, 레드 크리스털 제작자를 찾는 데 필요해서였다.

이제 더 늦출 이유가 없다.

"그런데 너는 내가 손을 쓸 필요는 없겠어."

"쿨럭."

"내가 죽는 놈을 많이 봐서 아는데, 백희선. 넌 죽어. 지금 당장 구급차가 와도 늦었어."

"사, 살려…."

"네가 지은 죄를 생각하면 이렇게 편하게 죽으면 안 되는데, 이미 늦었으니 어쩔 수 없지."

"돈 줄게. 돈 많이 줄…. 쿨럭."

백희선의 머리가 바닥에 닿았다.

최용구가 찌른 곳은 급소였다. 그냥 놔두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냥 놔뒀다.

차우진이 최용구를 돌아보았다.

"용구야. 백독거미에게 권총 같은 무기가 있다는 건 예상했어야지. 그게 아니면 왜 저 여자가 아무도 없는 이런 곳에서 너를 만나겠냐?"

"씨발…."

"용구야. 살고 싶냐?"

"사, 살려줘."

차우진이 최용구가 총에 맞은 곳을 확인했다. 첫발은 중상은 아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맞은 곳이 문제였다.

'이놈도 10분을 못 넘기겠네.'

응급조치를 하면 살릴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줄 이유가 없다.

차우진이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끌며 말했다.

"내 목적은 백희선이야. 넌 도움이 안 되니까…."

최용구가 다급히 말했다.

"나 기자야. 기자. 내가 당신이 하는 일을 도와줄게!"

"그러다 일이 틀어지면 백희선처럼 칼로 찌르게?"

"아, 아니…."

"난 정보가 필요하다."

"뭐, 뭐든지…."

최용구는 천상칠이나 백희선에게 붙어 있었을 뿐, 레드 크리스털의 개발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차우진이 다른 걸 물었다.

"도인선 기자 알지?"

132. 남매

최용구는 차우진이 도인선을 아느냐고 묻자마자 겁을 덜컥 먹었다.

"너, 너 설마 도인선이 시켜서 나를 죽이려는 거냐?"

"너한테 총을 쏜 건 내가 아닌데?"

백희선이 쐈다.

"도 기자가 선을 그렇게 많이 넘을 사람은 아니잖아."

"그, 그렇지. 도인선은 살인청부를 할 리가 없지. 없어야 해."

차우진이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거짓과 진실을 섞어 말했다.

"난 네가 아니라 도인선과 거래할 거다. 그러려면 도인선이 제일 원하는 걸 거래 조건으로 내놔야지. 도인선의 오빠가 1년 전에 실종됐다. 어디 있냐?"

"어? 어?"

"모르면 이 상태로 경찰에 발견되던가."

최용구는 총에 맞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는 모른다. 그의 목숨은 몇 분 남지 않았다.

그가 다급히 말했다.

"도정민은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쿨럭. 그놈이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은 거라고! 커억. 그건 사고였어!"

"그 절벽은 어디에 있지?"

***

한강공원에서 총소리가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당연히 경찰이 출동했다.

현장에서 백희선의 시체가 발견됐다.

특수본 현장팀장이 백희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인은 칼이겠지."

먼저 현장에 도착한 형사가 보고했다.

"급소를 당했습니다. 이 정도면 1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을 거랍니다."

"손에 쥔 작은 권총이 2연발이야. 총소리도 두 번 났다고 했지?"

"예. 총소리치고는 좀 작아서 한 번이었으면 신고를 안 했을 거라고 했습니다."

"총에 맞은 쪽은?"

형사가 다른 쪽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사망했습니다."

최용구의 시체가 그쪽에 있었다.

"사인은? 총 맞아?"

"예. 두 발을 맞았습니다. 즉사는 아니고, 10분쯤은 살아있었을 거라더군요."

팀장이 백희선을 보며 말했다.

"라이프레인 제약의 백희선 이사. 수사망이 좁혀오니까 제거된 건가? 그럼 저쪽이 킬러인가?"

"그게, 킬러가 아니라 KMTV 최용구 기자입니다."

"어? 기자?"

"예."

"이거 수사 정보가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답이 나왔네. 그런데 우리 조사 대상에 최용구 기자가 있었어?"

"아니요. 없습니다."

팀장이 혀를 찼다.

"쯧. 그러니까 최용구는 백희선만 죽이면 자기는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쏘고 찌른 거겠죠."

"총부터 쐈으면 칼로 찌를 수 없었겠지. 최용구가 먼저 찌르고, 백희선이 총으로 반격했을 거야."

***

백희선과 최용구가 한강공원에서 발견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현장을 본 사람의 목격담이 그 기사와 함께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왔다.

댓글이 달렸다.

- 서로 찌르고 쏜 건 맞나요?

- 백희선을 찌른 칼을 최용구가 샀다는 게 밝혀졌고, 최용구의 몸에서 나온 총탄 두 개가 모두 백희선이 쏜 권총에서 발사된 것도 밝혀졌습니다.

- 치정관계인가?

- 어디서 봤는데, 둘이 공범인데 최용구가 백희선을 죽이고 수사망에서 벗어나려다가 잘못돼서 둘 다 죽었다던데요.

- 어디서요?

- 다시 찾아보니까 지워졌더라고요.

- 소리언덕 도인선 기자도 비슷한 내용으로 기사를 썼습니다.

- 도인선? 서해안 사건 때 잠입 취재하다가 죽을 뻔한 기자잖아요. 그럼 맞겠네.

***

차우진이 SL 제약 사장 성기호와 성혜리를 만났다. 성혜리는 차우진 직속 분석팀의 팀원이다.

성혜리가 기운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백희선을 잡으려고 우리 분석팀이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공범과 싸우다가 죽어버리니까 허무하네요."

차우진이 말했다.

"허무해 하지 말아요. 분석팀이 도움이 많이 됐으니까."

차우진은 딥어스테크의 조사팀과 SL 제약의 분석팀 덕분에 백희선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덕분에 체코 마약조직 스컬스의 세르게이와 드미트리, 다수의 조직원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스컬스의 위치도 파악했다.

백희선과 최용구를 공멸시킬 때도 두 팀의 분석 데이터가 도움이 많이 됐다.

성혜리는 그 말을 다르게 이해했다.

"물론 우리가 그동안 일을 잘하긴 했죠. 자료를 모아서 한 방 제대로 먹이려는데, 백희선이 죽어버려서 아쉽다는 거예요."

성기호 사장도 맞장구쳤다.

"맞아. 라이프레인 제약과 정면으로 붙어보려고 했는데, 싸울 상대가 없어졌어."

차우진이 말했다.

"아. 라이프레인은 그냥 계속 두들겨 패도 됩니다."

"응?"

"백희선은 그동안 중범죄를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게 다 터지면 라이프레인은 수습하는 것조차 버거울 겁니다."

"하지만 백희선은 죽었잖아."

"살아있는 상태로 그게 다 터졌으면 회사가 망했겠지요. 지금도 그 회사는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겁니다. 회사가 망하지 않으려면 사업부도 몇 개 정리해야겠지요."

"잠깐. 우리와 충돌하던 사업부는 다 백희선이 담당하던 건데…."

"그 사업부들을 포기해야 백희선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회사를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성혜리도 끼어들었다.

"그러면 그 사업 영역들은 우리 회사가 먹으면 되겠네요?"

"다른 제약회사들도 손가락만 빨고 있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대비만 잘하면 점유율을 많이 높일 수 있을 겁니다."

"꺄아. 역시 차 이사님! 믿고 있었어요! 앞으로도 차 이사님만 믿을게요!"

차우진이 물었다.

"앞으로라니요? 내가 할 일은 다 한 것 같은데요?"

"네?"

"난 원래 백희선을 상대하려고 이사 자리를 받은 건데…."

성기호 사장이 다급히 말했다.

"차 이사. 그건 아니지. 차 이사가 그만두면 분석팀 직원들은 어쩌라고?"

"맞아요! 선장이 떠나면 안 되죠!"

"그런가?"

"그렇죠!"

"그럼 뭐, 평소에는 팀원들이 각자 부서에서 일하다가, 상황이 생기면 소집되는 TF 형식으로 운영하면…."

"딱 좋네요."

"그럼 그러시죠."

차우진이 남는다는 말에 성혜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은 성기호도 내쉬었다.

"휴우. 그럼 차 이사. 이번 일이 마무리된 기념으로 내일 바다낚시나 갈까?"

"사장님은 라이프레인 제약이 포기하는 사업들을 받을 준비를 하셔야지요?"

"사건이 일단 마무리됐으니까 담당 직원들한테 휴가는 줘야지. 안 그러면 직원들 입 튀어나와. 당분간은 라이프레인의 움직임도 지켜봐야 하고."

"직원들은 쉬어도 되는데 사장님은 일하셔야죠."

"아니, 차 이사…."

"저는 내일 캠핑장에 갈 예정이라서."

"으응?"

성혜리가 얼른 찬성했다.

"캠핑 좋죠! 저도 갈게요!"

"당일치기입니다만?"

"그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좋아요!"

***

충청북도 산 아래쪽에 있는 캠핑장에 차우진과 분석팀이 모였다.

분석팀은 이번 일이 마무리된 기념으로 휴가를 받았다.

팀원이 어깨를 흔들며 좋아했다.

"오늘은 근무일인데도 놀고, 내일부터는 일주일간 휴가!"

"우리는 이러려고 그렇게 야근을 했나 보다!"

성혜리가 말했다.

"그런데 차 이사님은 요리만 해놓고 어디 가신 거야?"

"산에 올라가셨잖습니까?"

"그러니까 왜 산에 혼자 올라가냐고요. 나도 데려가지."

"따라올 사람은 따라오라고 하셨는데…."

"너무 빨라서 못 쫓아가잖아요."

팀원이 제안했다.

"성 대리님. 같이 술이나 드시죠. 하하하."

"술이요? 그러면 돌아갈 때 운전은 누가 하죠?"

"술 안 마시는 사람이?"

다른 팀원이 얼른 끼어들었다.

"어이쿠. 나도 마셔야지."

"근데 안주가 진짜 맛있네요. 차 이사님 요리 솜씨가 장난 아닙니다?"

성혜리가 요트 위에서 먹은 음식을 떠올리며 자랑했다.

"해물 요리도 진짜 잘해요. 배가 너무 부른데도 계속 먹게 하는 마성의 요리라니까요."

***

차우진이 이 캠핑장에 온 건 근처에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였다.

"이쯤일 텐데."

최용구는 죽기 전에 도인선의 오빠 도정민이 이곳에서 사망했다고 털어놓았다.

차우진이 도인선이 사망한 장소로 가는 방법이나 주변 환경 등을 구체적으로 질문했을 때, 최용구는 머리를 굴리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최용구의 표정이나 목소리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최용구는 목숨이 걸린 일이라 허튼수작을 부릴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차우진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절벽이 보였다.

"용구가 말한 곳에 진짜 절벽이 있었어. 여기서 추락했나 보다."

그가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이 없고 지형도 험하지만, 멸망한 세계에서는 이것보다 더 험한 지형도 뚫고 다녀야 했다.

"끙차. 도 기자에게 유품이라도 찾아서 전해주면서 여기를 알려줘야겠다."

차우진이 절벽 아래에 도착했다.

"음?"

절벽 아래에는 시체가 없었다.

"1년이나 지났으니까 짐승이 물어갔을 수는 있지만…. 보통은 뭐라도 남지 않나?"

차우진이 그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주변 지형을 확인한 후에 이동했다. 작은 산도 하나 넘어갔다.

산 중턱에 허름한 집이 한 채 있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낡았지만 그래도 비는 막을 수 있었다.

마당에 개도 한 마리 있었다. 개가 차우진을 보며 짖었다.

"컹컹!"

마루에서 마늘을 까던 남자가 물었다.

"누구십니까?"

차우진이 상대를 떠보기 위해서 물었다.

"용구가 보냈는데."

"용구? 그게 누구지? 이름이 익숙한데…."

차우진이 남자를 자세히 보았다.

얼굴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흙이나 검은색 때가 묻어있지는 않았다. 머리도 푸석하긴 했지만 제대로 씻은 모습이었다.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이런 상태인 사람을 많이 보았다.

'샴푸나 비누 없이 맹물로 씻는 사람. 그런 생필품이 없나 본데….'

마당에 사람의 힘으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수동식 펌프가 보였다.

'씻는 건 저 물을 썼을 테고.'

차우진이 아까 출발한 절벽 방향을 돌아보았다.

'거기서 길을 잃고 헤매다 보면 이쯤으로 올 확률이 높은데….'

차우진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도정민 씨?"

"도정민?"

"당신 이름이 도정민 아닙니까?"

"몰라요. 옛날 일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서."

"음…. 그러면 기억이 나는 건 언제부터입니까?"

"일 년쯤 전부터?"

"그렇게 된 거군요."

차우진이 도인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어머. 차우진 씨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전화를 했을까?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요."

- 좋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해요. 용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서 좋은데, 그놈은 그냥 죽어버리면 안 됐잖아요.

"영상통화 가능합니까?"

- 지금요? 되죠?

차우진이 영상통화로 전환했다.

- 어머. 거기 어디에요? 산인가? 등산? 팔자 좋네요. 난 오늘도 일하는데.

"내가 누굴 좀 보여줄 텐데, 아는 사람인지 확인이 필요해서."

- 제보자인가요?

"그건 아니고."

차우진이 영상통화에 남자의 모습을 담았다.

"아는 사람입니까?"

신나게 떠들던 도인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잠시 기다려도 대답이 없었다.

"맞나 보네."

- 오, 오빠?

"혹시나 했는데, 진짜군요."

도인선이 소리를 빽 질렀다.

- 야 이 새끼야! 꼴이 왜 그래!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요. 기억상실 같으니까."

- 기억상실이라니요?

"자기 이름도 기억 못 합니다.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만."

- 거기 어디에요? 차우진 씨! 거기 지금 어디냐고!

"여기는 충청북도인데, 찾아오기 좀 어려우니까, 내가 알려주는 캠핑장으로 와요. 거기서 만납시다."

- 지금 당장 갈게요!

"운전 조심하고. 서두르다가 사고 나면 곤란합니다. 도정민 씨의 안전은 내가 확보했으니까 천천히…."

- 지금 간다고!

"과속하지 마라니까."

***

차우진이 도정민을 데리고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성혜리가 깜짝 놀라 물었다.

"누구를 데려오신 거예요? 혹시 산속에 사는 거지…."

"아는 사람의 가족인데,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네? 발견이요? 혹시 도망…."

"사고로 기억상실이 와서 그동안 산에서 지냈다더라고요."

"아…."

"그동안 근처 마을 일을 도와주면서 먹고 살았답니다."

"일이요?"

"밭일도 도와주고, 마늘도 까주고."

"아…. 그래서 지금 고기를 보고 저렇게…."

SL 제약 분석팀 팀원들은 차우진이 해준 요리를 다 먹고 나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도정민이 고기를 보며 침만 꼴깍 삼켰다. 도정민이 데려온 개도 옆에서 고기가 먹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차우진이 물었다.

"우리 오늘 고기 남습니까?"

성혜리가 얼른 대답했다.

"당연히 남죠! 너무 많이 사서 오늘 다 못 먹을 만큼 많아요!"

"고기는 내가 구울 테니까, 도정민 씨도 좀 먹어요."

도정민이 머뭇거렸다.

"제 이름이 도정민…."

"확실합니다. 동생한테 확인도 했으니까. 영상통화 하셨잖아요."

"아. 그 사나운 여자…."

"사납긴 하지만 동생 맞습니다."

133. 회복

차우진이 고기를 구웠다. 소시지나 버섯 등도 넉넉히 준비되어 있었다.

성혜리가 자랑했다.

"한우는 제가 따로 샀어요. 투뿔로."

"어쩐지 맛있더라."

차우진이 구운 고기는 도정민이 부지런히 먹었다. 그러면서 연신 감탄했다.

"이거 진짜 맛있습니다!"

성혜리가 아이스박스에서 맥주도 한 캔 꺼내 주었다.

"맥주로 기름기를 씻어가면서 먹으면 더 맛있어요."

"으어어! 이것도 진짜 시원하고 좋다! 고기가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그녀가 물었다.

"평소에 고기를 못 드셨어요?"

"산에서는 잡히는 게 별로 없어서요."

"네?"

"그래도 지난달에는 토끼는 먹었는데…."

"아니…. 그럼 평소에는 뭘 드셨어요?"

"일을 도와주고 라면, 국수 같은 걸 얻어서 먹었죠."

"쌀이 아니라?"

"국수로 달라고 하면 쌀보다 많이 받을 수 있으니까요."

"반찬은요?"

"나물도 뜯고, 채소도 심고…."

"고기 더 드실래요?"

"네!"

도정민이 키우는 개도 옆에서 고기를 얻어먹었다. 성혜리가 물었다.

"이 개는 이름이 뭐예요?"

"타이거요."

"네? 도대체 어디를 봐서…. 누가 봐도 시골 잡종인데?"

도정민이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말하면 기분 나빠해요."

"이 개가요?"

"네."

"헥헥헥."

"좋아하는데요?"

"그건 고기 줘서 그런 거예요. 마을 사람들한테 그렇게 아부 떨어서 뭐 얻어먹고 그랬거든요. 나보다 잘 먹어요."

"똑똑한가 보다. 어디서 났어요?"

"마을에 개가 새끼를 낳았을 때 한 마리 얻었어요."

"아. 공짜로…."

"마늘 한 포대 까주고요."

"공짜는 없네요."

"집은 공짜로 받았어요."

정혜리가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이 동네는 부동산을 줘요?"

차우진이 설명했다.

"산속에 쓰러져가는 버려진 집이 있더라고요. 도정민 씨를 거기서 찾았습니다."

"아…. 버려진 집…."

두 시간 후에 도인선이 캠핑장에 도착했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천천히 오라니까."

"어디 있어요? 어디 있냐고!"

"저기서 놀고 있습니다."

도인선이 고개를 돌렸다. 도정민이 배를 두드리며 개와 놀고 있었다.

도인선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이 새끼야! 살아있으면 연락을 해야 할 거 아냐!"

도정민과 타이거가 얼른 성혜리의 뒤로 숨었다.

"저 여자 무섭다."

"깨갱."

"야!"

차우진이 설명했다.

"인선 씨. 도정민 씨는 사고로 기억을 잃어서 연락할 수 없었던 겁니다."

"여긴 한국이에요! 파출소만 찾아갔어도 자기가 누군지 알고 연락할 수 있었어요!"

"사고 초기부터 한동안은 사람이 좀 멍한 상태였다더군요.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온 후에는 그냥 익숙해진 산에서 살았고요."

"저 모습이 어딜 봐서 정상인데요?"

"기억을 잃어서 그래 보이는 겁니다."

"기억은, 돌아올 수 있는 거겠죠?"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차우진이 도정민의 머리에 손을 댔다. 그 상태로 회복 스킬을 사용했다.

피부만 살짝 베인 상처 정도는 그 정도만 해도 즉시 낫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도정민의 기억상실은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

'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차우진이 평소보다 힘을 더 썼다. 회복 스킬이 조금 더 강해졌다.

도정민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기억을 잃은 지 일 년이나 지났다. 절벽에서 추락할 때 생긴 상처는 이미 예전에 아물었다. 그러니 회복 스킬로 치료할 상처가 없다.

대신에 다른 효과가 생겼다.

차우진이 스킬을 쓰자 도정민의 머리 쪽 회복력이 강해졌다. 그러면서 뇌의 잠들어 있던 부분이 서서히 깨어났다.

그 변화는 아주 천천히 진행됐다.

도인선이 물었다.

"왜 우리 오빠 머리에 손을 대고 있어요?"

"좋은 기운을 전해주려고?"

"뭐예요? 그 사이비 교주 같은 농담은."

차우진이 손을 내리며 말했다.

"병원에서 치료받으면 좋은 결과가 있겠죠."

"맞아요. 당장 병원에 데려갈게요."

도정민이 말했다.

"아직 고기가 남았…."

"고기 사줄게!"

도정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가자! 고기다!"

"멍!"

도인선이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우진 씨. 우리 오빠가 기억만 빼고는 정상으로 돌아온 건 맞아요?"

"아마도?"

"빨리 병원에 가서 검사부터 받아볼게요."

차우진이 조언했다.

"병원에 갈 때는 조심해서 운전해요. 서두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그래야죠."

그녀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숨을 골랐다. 그런 후에 차우진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고마워요. 우리 오빠를 찾아주셔서요."

"찾은 게 아니라, 산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겁니다."

"우연히요?"

"회사 사람들이랑 캠핑 왔다가 우연히."

그녀는 차우진이 딥어스테크의 개발이사라는 걸 안다.

"아! 딥어스테크 분들과…."

성혜리는 업종이 다른 회사인데도 딥어스테크에 경쟁심을 느꼈다. 그래서 얼른 끼어들었다.

"아뇨! 차우진 이사님은 우리 SL 제약 분석팀과 같이 오셨어요."

"왜 SL 제약과…."

"차 이사님은 우리 회사 이사님이니까요."

"네?"

그녀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씩 웃었다.

"어머. 모르셨구나. 앞으로는 꼭 아셨으면 좋겠어요. SL 제약 차우진 이사님이세요."

"그럼 딥어스테크에서는 잘렸…."

"겸직이시죠. 사덕리소스의 이사도 겸직하시잖아요."

"네? 우진 씨가 사덕리소스에서도 이사님이세요?"

"어머. 그건 모르셨구나? 그래도 우리 SL 제약이 메인이세요. 그쵸?"

차우진이 말했다.

"난 원래 전기 기술자가 메인인데…."

"아, 쫌. 그냥 그렇다고 해줘요."

"오늘은 그렇습니다."

"음. 부족하지만 만족."

도인선은 당황했다.

"아니, 그러니까 차우진 씨는 세 개 회사에서 임원으로…."

"우리 SL 제약이 메인이라니까요. 나머지 둘은 덤이에요. 덤."

차우진이 말했다.

"SL 제약이 제일 늦게 얻은 자리입니다만?"

"그러니까 메인이죠. 원래 맛있는 건 제일 마지막에 먹는 거예요."

도인선은 당황했지만 지금은 이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그녀가 차우진에게 말했다.

"저 일단 오빠 데리고 병원에 갈게요. 내일 연락드릴 테니까 좀 만나요."

"그러시죠. 갈 때 타이거도 데려가고요."

"네? 타이거요?"

"저 개요. 도정민 씨가 키우는 개입니다. 이름이 타이거라던데."

도인선의 눈이 커졌다. 차우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놀랍니까?"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이 타이거예요."

"그럼 이제 타이거가 두 마리…."

도인선이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개 이름은 기억하면서 나는 기억을 못 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아니, 그렇다고 아픈 사람 멱살을 잡지는 마시고…."

"이 여자는 역시 무섭다."

"깨갱!"

"야!"

도인선이 도정민을 데리고 떠났다. 개도 데려갔다.

성혜리가 멀어지는 차를 보며 말했다.

"폭풍이 몰아쳤다가 사라진 것 같네요."

"실종된 오빠를 일 년 만에 찾아서 반가워서 그런 거겠죠."

"그렇게 보기엔 너무 막 잡던데…."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있으니까 마음도 놓였겠죠."

"마음을 어떻게 놓으면 저렇게 폭력적으로…."

"원래 좀 폭력적이긴 합니다."

성혜리가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아는 분이에요?"

"소리언덕의 도인선 기자입니다."

"네? 아. 저 사람이…. 우리 분석팀에서 수집한 자료에 도인선 기자 이름이 많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서해안 사건 때 그…."

"거기로 취재하러 갔다가 죽을뻔했죠."

"발로 뛰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 걸고 뛰는 기자네요. 그래서 요즘 꽤 유명해졌던데요."

"이름이 좀 알려지긴 했죠."

"그럼 우리가 오늘 고기를 먹여서 보낸 사람은요?"

"도정민 기자."

성혜리는 당황했다.

"네? 잠깐만요. 저 바보가 도정민 기자였다고요?"

"압니까?"

"홍보팀에서 들었어요. KMTV 기자인데, 취재 능력이 대단했대요. 그런데 1년 전에, 그러니까 제가 홍보팀으로 옮기기 전에 실종됐다고…. 아. 그럼 그때 여기서 사고를…."

차우진이 걱정했다.

"복직하려면 머리부터 나아야 할 텐데."

***

이튿날 차우진이 도인선을 만났다.

도인선이 머리를 꾸벅 숙였다.

"고마워요. 덕분에 오빠가 살았어요."

"원래도 살아는 있었습니다."

"그래도요. 엄마 아빠도 우진 씨한테 진짜 고마워하세요."

"우연히 찾은 거라서."

그녀가 물었다.

"우연…. 맞아요?"

"우연이 아닐 이유라도?"

"최용구가 죽자마자 우리 오빠를 찾아내셨는데…."

도인선은 전부터 최용구가 도정민의 실종에 관련되어 있다고 의심했다. 그런데 최용구가 죽자마자 차우진이 도정민을 발견했다.

"최용구는 백희선과 서로 찌르고 쏘면서 죽은 거로 밝혀졌습니다."

도인선도 안다. 그녀는 사건 현장을 직접 찾아가 취재했다.

"그렇죠. 현장만 보면 확실하죠.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그럼 된 거잖습니까?"

도인선도 도정민을 찾기 전까지는 최용구와 백희선이 서로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 말이 되나?'

그녀는 어떻게 된 일인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는 못했다.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으리란 걸 깨달아서였다.

차우진이 물었다.

"병원에서는 뭐랍니까?"

도인선의 표정이 밝아졌다.

"뇌 손상은 없대요. 바보처럼 보이지만 바보가 된 건 아니고, 언젠가는 기억이 돌아올 수 있대요."

"다행이네요."

"어젯밤에는요. 오빠가 자기 기억이 조금 돌아온 거 같다고 말했어요. 집에 돌아와서 그런가 봐요. 진짜 고마워요."

"우연히 발견했다니까요."

"우연…. 네.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할게요."

***

이튿날 미국에 있는 정수찬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차 이사님. 탐지기 테스트 준비가 거의 끝났습니다. 날짜도 저번에 말한 날로 확정됐습니다.

"이제 며칠 안 남았군요."

- 비행기 티켓을 보냈습니다. 호텔도 준비했으니까 차 이사님은 몸만 오셔도 됩니다.

"뭘 항공권까지…."

- 마그마에너지의 차 이사님이시잖습니까? 이 정도는 회사 차원에서 제공해야죠.

"그 회사는 아직 안 만들었잖습니까?"

- 이번 실험은 파인드스톤과 딥어스테크가 주도하지만….

정수찬이 진지하게 말했다.

- 만약 차 이사님이 예상한 대로 결과가 나오면, 마그마에너지는 곧바로 설립될 겁니다. 그때부터는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으니까요.

***

차우진은 도인선 기자를 다시 만났다.

"오빠 상태가 더 좋아졌어요. 기억이 진짜로 돌아오고 있거든요. 의사도 깜짝 놀랐대요. 약을 먹어서겠지만, 이렇게 빨리 기억이 회복될 줄 몰랐대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할 말이라도?"

도인선이 말했다.

"오빠가 1년 전에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 기억해냈어요. 최용구가 절벽에서 밀었대요."

"저런. 쯧쯧."

"그런데 최용구가 죽자마자 우진 씨가 우리 오빠를 찾아내셨잖아요."

"운이 좋았다니까요."

"그렇죠. 운…. 공식적으로는 그렇죠."

도인선이 확실히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과장되게 끄덕이다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SL 제약과 딥어스테크만이 아니라, 사덕리소스에서도 이사님이라면서요."

"어쩌다 보니."

"제가 기자라서 정보 접근이 쉬워요. 사덕리소스의 2대 주주 이름이 차우진이던데…."

"운이 좋았죠."

"네?"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주가가 워낙 싸서 샀는데 그게 그렇게 오를 줄이야."

도인선은 그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주식투자도 잘하시나 보다. 혹시 투자 전문가?"

"운이 좋았다니까요."

도인선은 차우진이 어떻게 2대 주주가 됐는지까지는 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남들이 물으면 전기 기사라고 하고 다녀요?"

"사실이니까? 전기 쌍기사입니다만?"

"아…. 네."

그녀가 오늘 나온 건 그런 걸 알아보려는 게 아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 말씀만 하세요. 제가 나름 정보력이 좋아요. 사건 전문 기자잖아요."

"그래 보이긴 합니다."

"최용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지른 살인자인지 밝혀졌어요. 덕분에 예전에 알던 기자들이 많이 연락 왔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조용하고 은밀하게 정보를 알아다 줄게요."

차우진이 물었다.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도인선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차우진 씨와 그러다 보면 기삿거리가 알아서 떨어질 것 같아서? win-win이죠."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요."

"사건 수사 정보도 좀 알아왔어요. 백희선의 DNA가 확보돼서 천상칠의 차명 증권 통장에 묻어있던 것과 비교했대요."

"결론은?"

"일치했어요. 경찰은 백희선이 청부업자를 보내 천상칠을 살해했다고 결론 내렸어요. 백희선이 그 청부업자들을 고용했다는 것도 알아냈거든요."

"이미 죽었으니까, 백희선을 처벌할 수는 없지만…."

차우진이 느긋하게 말했다.

"라이프레인 제약은 난리 났겠군요."

***

소식을 들은 성기호가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드디어 때가 왔다! 라이프레인의 사업부를 우리가 잡아먹자!"

성혜리가 맞장구쳤다.

"다른 회사에서 달라붙기 전에 우리가 먼저 뜯어먹어야 해요!"

"차 이사는 어디 있지?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아빠! 언제까지 우진 오빠한테 의존할 거예요? 우리도 잘하는 걸 보여줘야죠!"

"으, 응? 너 지금 뭐라고…."

"아니, 아니, 차 이사님이요."

"실수로 그렇게 부른 거지? 그렇지?"

"실수 아니고 싶네요."

"혜리야?"

134. 공항

차우진이 손하은을 만났다. 그녀가 밝은 얼굴로 근황을 이야기했다.

"엄마는 병원을 옮겼어요. 그랬더니 건강이 점점 좋아지시는 거 있죠? 며칠 후에는 퇴원하실 거예요. 통원치료해도 된대요."

"하은 씨가 참고 기다려준 보람이 있군요."

"고마워요. 우진 씨 덕분이에요."

차우진이 강조했다.

"공식적으로는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야 합니다. 하은 씨도 마찬가지고. 안 그러면 하은 씨가 곤란해져요."

"저도 알죠. 백희선이 연구소를 이용해서 마약 양산 기술을 개발했다는 게 밝혀졌으니까요. 저도 연구소에서 일했잖아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야죠."

손하은은 그 연구에 참여한 핵심 연구원 중 한 명이다.

그녀가 말했다.

"그것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해요."

"경찰은?"

"저도 조사받았어요. 그래서 우진 씨가 알려준 대로 말했죠."

대응 방법은 차우진이 미리 조언했다.

손하은이 말했다.

"백희선이 양산 기술 연구를 철저히 분리해서 연구원들에게 맡겼다는 걸 설명했어요. 변호사님이 그러는데, 처벌은 받지 않을 거래요."

"변호사요?"

"백희선에게 속아서 일한 연구원들이 공동으로 변호사를 선임했어요. 이런 사건 전문 변호사님이라 실력이 좋아요."

"경찰 쪽은 계속 그렇게 대응하면 되는데, 회사에서는 어떻게 나옵니까?"

"저를 내보내려고 해요. 제가 중요 연구과제를 담당했기 때문에 남아있으면 껄끄러운가 봐요. 괜찮아요. 어차피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차우진이 조언했다.

"돈이라도 넉넉히 뜯어내고 나와요. 그냥 나오면 억울하니까."

"앗. 그래야겠네요. 엄마 데려오려면 투룸이라도 얻어야 하니까요."

"목표가 작네. 아예 집 한 채를 노려야지."

"네?"

"강하게 나가면 통할 겁니다. 회사가 선 넘는다 싶으면 나한테 말하고요."

손하은이 활짝 웃었다.

"아! 네! 그럼 서울 변두리에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목표로 할게요!"

"파이팅."

멸망한 세계의 손하은은 약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을 구했다. 차우진도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옮길 회사는 찾아놨습니까?"

"찾아봐야죠."

"하은 씨 실력이면 다른 큰 회사로 이직할 수 있을 겁니다."

"옮긴 회사에서 또 이런 짓을 시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들어요. 그리고 큰 회사는 양산 기술의 중요 개발자였던 저를 뽑고 싶지는 않을 걸요? 괜히 기사라도 나가면 골치 아파지니까요."

"음…."

SL 제약에 손하은을 추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태가 터진 후에 경쟁 회사인 SL 제약에 가면 그림이 나쁘다.

게다가 SL 제약은 손하은이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차우진이 말했다.

"작은 회사도 괜찮습니까?"

"작아도 분위기 좋고 믿을만한 곳이면 좋겠어요."

"그러면 추천하고 싶은 곳이 있는데…."

"어디인데요?"

"이름은 못 들어봤을 겁니다. 화선바이오라고…."

손하은이 손뼉을 쳤다.

"앗! 이선정 박사님이 계신 곳이요?"

"어?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분 천재시잖아요."

"천재 맞죠. 그런데 아직은 그걸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멸망 초기의 전문가들은 이선정이 마상국에게 살해당하지 않았으면 혼자서 오메가 바이러스를 막아냈을 천재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멸망한 세계에서 그런 평가를 한 시기는 지금부터 10년 후다.

"이선정 박사님의 논문을 본 적이 있어요. 저 진짜 신세계를 보는 줄 알았어요."

"어…. 그 논문의 진짜 가치를 알아보는 건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데…."

"앗. 저도 좀 하는 건가요?"

차우진은 이선정이 다른 회사와 협업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 이선정의 연구가 협업 기업의 이익 때문에 변질될 수도 있어서다.

하지만 이선정의 밑에 유능한 연구원이 들어가는 거라면 나쁘지 않아 보였다.

"내가 말이라도 해볼까요?"

"꼭 좀 부탁드려요. 저 그분 팬이에요."

"팬이라면서, 전에는 못 알아보던데."

"네?"

"논문만 알고 얼굴은 몰랐나 보군요."

***

손하은은 이선정을 만나자마자 당황했다.

"코드네임 로즈?"

이선정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부끄러우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이선정 박사님께서 어떻게 코드네임 로즈…. 아니, 그날 공원에서는 분명히 비밀 요원이라고 하셨는데…."

이선정이 급히 변명했다.

"우진 씨 일을 도와주느라 그런 거예요. 본명을 말하기엔 여러 가지로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요."

"아…."

손하은은 나름대로 이해했다.

'그건 맞아. 나도 그래서 엄마한테도 비밀로 했으니까.'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있었다.

"그런데 왜 코드네임이 필요…."

취미 생활을 들켰을 때는 상대도 그 세계로 끌어들이면 부끄러움이 줄어든다.

이선정이 얼른 제안했다.

"손하은 씨는 코드네임을 뭐로 할래요? 우리랑 일하려면 필요한데."

"그, 그래요?"

"그래요."

"저는 그러면…. 블루썬더?"

"어머. 있어 보인다. 코드네임 블루썬더."

차우진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둘이 그런 방향으로 죽이 맞기를 바란 건 아닌데…."

***

백희선이 라이프레인 제약의 연구소를 이용해 마약 대량생산 기술을 연구했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도인선 기자도 기사를 썼다.

서해안 사건은 도인선이 이미 예전에 독점 기사를 썼다. 그녀는 이번에 새롭게 알려진 걸 더해서 그때보다 더 자세한 기획기사를 썼다.

세르게이와 드미트리 사건도 다른 기자들이 기사를 썼다.

그것도 도인선의 기사가 더 자세했다. 그녀의 기사에는 다른 기자는 모르던 내용도 적혀 있었다.

그녀의 기사가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도 올라왔다. 댓글이 붙었다.

- 이 기자는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까요?

- 그러게. 작은 인터넷 언론사 기사가 어떻게 공중파보다 더 자세하지?

- 도인선 기자가 서해안 사건 때 피해자니까 당연한 거 아닐까요? 더 철저히 조사했겠죠.

- 맞네. 그때 잠입 취재하다가 납치돼서 죽을뻔했다던데.

- 역시 목숨 걸고 발로 뛰는 도인선 기자.

- 이런 기자가 왜 작은 인터넷 언론사에 있을까요?

- 원래 KMTV 기자였는데, 쫓겨났답니다.

- 어? KMTV는 이번에 백희선을 칼로 찌르고 총 맞아 죽은 그 기자가 있던 곳이잖아요?

- 그냥 기자도 아니고 KMTV 보도국의 부장급 기자입니다.

- 최용구는 기자 비리의 종합판이라던데요. 그러니까 진짜 기자인 도인선이 거슬렸겠죠.

- KMTV 안 되겠네.

***

KMTV 보도국 국장이 도인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 도 기자. 복귀해야지?

"여기도 있어 보니까 괜찮은데요?"

- 에이. 그런 작은 언론사에서 뭘 한다고. 내가 좋은 자리로 준비해둘 테니까 빨리 돌아와.

"앗! 지금 취재원이 이동을…. 끊겠습니다!"

도인선이 전화를 뚝 끊었다. 그런 후에 불평했다.

"나 쫓겨날 때는 쳐다도 안 보더니, 왜 이제 돌아오래?"

옆에 있던 동료 기자가 물었다.

"도 기자. KMTV로 돌아가는 거야?"

"아니. KMTV는 지금 최용구 때문에 욕을 너무 많이 먹으니까 나 데려다가 방패로 쓰려는 거야. 내가 그걸 뻔히 알면서 왜 돌아가?"

"그래도 KMTV인데…. 월급도 우리보다 많이 주잖아."

"됐어. 여기 있어야 기사를 내 마음대로 쓰잖아. 편집장님하고 그렇게 합의했어."

동료가 물었다.

"돌아갈 것도 아니면 더 세게 말하지 그랬어."

"에이. 그건 아니지."

도인선이 씩 웃었다.

"우리 오빠는 KMTV에 복직시켜야지. 백수로 놔두면 내가 먹여 살려야 하는데, 그럴 순 없잖아."

***

라이프레인 제약의 백재원과 백재우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백재원이 말했다.

"사업부 몇 개는 포기해야겠지? 접자."

백재우가 반발했다.

"그건 안되지. 그걸 왜 접어?"

"그럼 네가 맡아서 살려보던가."

"형이 그년한테 맡긴 거니까 형이 책임져야지!"

"뭐? 책임? 지금 나보고 독박 쓰라는 거냐?"

"난 그런 거 모르겠으니까 맡긴 사람이 책임을 지라고!"

백재원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네 꿍꿍이를 모를 줄 알아? 어림도 없다! 사장 자리는 장남인 내 거야!"

"요즘 시대에 장남을 왜 따지는데! 나도 사장 할 거야!"

"해보자는 거냐?"

"그래! 해보자!"

***

SL 제약 분석팀이 보고했다.

"백재원과 백재우의 강력한 경쟁자인 백희선이 사라졌습니다. 라이프레인 제약의 경영권 분쟁은 전면전으로 바뀔 것으로 보입니다."

성기호 사장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물었다.

"차 이사가 볼 때는 누가 이길 것 같아?"

"왜 꼭 승자가 있다고 보십니까? 회사가 위태로운데 내분까지 일어나면 망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그러니까 저렇게 계속 싸우면 회사가 망하기 전에 둘 다 쫓겨날 겁니다."

"그때는 사장이 병원에서 복귀하거나 전문 경영인을 쓰겠군."

"그런다 하더라도 회사가 망하지 않으려면 백희선이 맡았던 사업분야에서는 손을 떼야 할 겁니다."

성기호가 실실 웃으며 제안했다.

"그럼 우리는 그쪽을 잡아먹어 볼까? 어때? 차 이사가 맡아볼래?"

"아니요."

"으, 응?"

"바빠서 한 회사에 묶여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당장 해야 할 일도 있거든요."

"오늘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서 다시 이야기를…."

차우진이 시계를 보았다.

"오늘은 더 안 됩니다. 미국에 가야 하거든요. 뉴욕에서 미팅이 있어서요."

성혜리가 옆에서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차 이사님. 설마 미국 회사로 옮기는 건 아니죠?"

"슬슬 일어나야겠군요."

"왜 아니라고 말을 안 해요? 차 이사님? 저기요?"

"당연히 이번 출장이 끝나면 돌아올 겁니다만?"

차우진이 회의실을 나간 후에 성혜리가 안도의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혜리야?"

"아빠.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닌 거 맞지? 그치?"

성혜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

차우진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항 퍼스트클래스 라운지에는 그가 아는 사람이 있었다.

정예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머! 우진 오빠도 미국에 가나 봐요? 나도 가는데. 미국에서 CF 촬영이 있거든요.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죠?"

"드라마는?"

"내가 나오는 장면은 당분간 없어요. 그 틈에 미국에 갔다 오는 거죠."

"음…. 그런데, 이 공항에 비행기가 미국행만 있는 건 아닌데 왜 나도 미국에 간다고 생각했을까?"

"앗!"

차우진이 비행기 항공권을 확인했다. 그의 항공권은 스톤파인더의 정수찬 사장이 보내주었다.

"예지 씨 자리가?"

"어머. 옆자리다. 이런 우연이…."

"정수찬 사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아니, 그게…."

"CF 촬영팀이 단체로 표 살 때 끼어서 할인받았나?"

"네?"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아니, 야! 너…."

"야?"

"오빠?"

오윤서가 다가왔다.

"저도 이번에 수찬 씨한테 가요. 예지는 제 표 살 때 같이 산 거예요. 예지의 CF 뉴욕 촬영 스케줄이 겹쳤거든요."

정예지가 씩 웃으며 물었다.

"어머. 맞다. 우진 오빠는 퍼스트 클래스는 처음 타죠?"

평범한 직장인은 퍼스트 클래스를 탈 기회가 별로 없다. 이코노미에 비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윤서는 차우진이 딥어스테크의 이사라는 걸 안다. 게다가 정수찬은 그녀에게 차우진은 천재 과학자라고 말했다.

오윤서가 말했다.

"예지야. 그게…."

차우진이 항공권을 보며 말했다.

"그냥 이코노미 타도 되는데."

정예지가 옆에서 얼른 말했다.

"어머. 이런 건 공짜 표 받았을 때 타봐야죠."

"그런가?"

"근데 미국에는 왜 가요? 그 회사에 전기 공사하러 가요?"

"내가 직접 하는 건 아니고, 일하는 거 구경하러 갑니다."

"아…. 윤서 언니 구해준 게 고마워서 초청하나 보다. 일하러 가는 게 아니니까 나랑 같이 뉴욕 관광이나 하면 되겠다."

"스캔들이 안 무섭나 보네?"

"외국에 있으면 나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이럴 때 하는 거죠."

"그러다 누가 알아보면?"

"그때는 내 매니저라고 소개해야지."

"같이 다니지 말아야겠다."

"야!"

135. 뉴욕

정예지가 여객기의 넓은 좌석에 앉았다.

"아. 편하다."

차우진이 옆쪽 자리에서 말했다.

"그런데…."

"왜요?"

"예지 씨 평소 수입으로 뉴욕행 퍼스트클래스는 무리 아닌가?"

"이거 왜 이래요? CF 찍으러 가잖아요. 그러면 제작사가 나한테 비즈니스 항공권 정도는 내주거든요?"

"여기는 퍼스트인데?"

"그래서 차액만 내가 내기로 했어요."

"오. 그거 괜찮은 방법이네요."

"더 괜찮은 건 우진 오빠처럼 돈을 아예 안 내는 거죠."

"그건 인정."

좌석은 비싼 만큼 편안했고 음식도 괜찮았다. 차우진은 식사를 챙겨 먹고 라면도 추가로 주문해서 맛있게 먹었다.

"하늘에서 먹는 라면이라 그런지 더 맛있네."

정예지가 옆에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우진 오빠. 나 한 입만."

"먹던 라면을? 스캔들 안 무섭냐고."

"하늘에서 무슨 스캔들이냐고. 그리고 지금 퍼스트클래스에는 승객이 우리 셋밖에 없는데, 설마 승무원이 사진 찍겠냐고."

"하나 더 끓여달라고 하던가."

"한 그릇 다 먹으면 붓는다고. CF 어떻게 찍으라고."

"그럼 남은 건 내가 먹으면 되겠네. 난 두 그릇 먹어도 되니까."

"어머! 천잰데?"

정예지는 라면을 새로 주문해 딱 한 젓가락만 먹었다.

"음. 역시 라면은 맛있어."

차우진이 손을 내밀었다.

"이제 넘겨요."

"잠깐만요. 한 젓가락만 더요."

"그럼 CF는?"

"한 젓가락쯤은 괜찮지 않아요?"

"그러다 두 젓가락 되고, 그러다 다 먹고, 그러다 국물도 먹으면, 내일 촬영은 팅팅 부어서…."

"거기까지 가기 전에 오빠가 꼭 말려줘요. 일단 난 한 젓가락만 더 먹…."

"잠깐만."

"왜요?"

차우진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문제가 생겼나 본데?"

"에이. 라면 한 젓가락 먹었다고 문제가 생기지는 않…."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튜어디스들의 움직임이 소란스러워졌다.

잠시 후에 기내 방송이 나왔다. 기내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면서 의사를 찾는 방송이었다.

차우진이 스튜어디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쓰러진 분이 계셔서요."

"의사는 찾았습니까?"

"아니요. 승객 중에는 없나 봐요. 혹시 의사세요?"

"그건 아닌데."

"아. 네."

"응급조치를 잘해서."

"앗! 그럼 잠깐만 봐주실 수 있을까요?"

차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으로 향했다. 정예지가 얼른 선글라스를 쓰고 따라왔다.

젊은 여자가 통로에 누워 있었다.

차우진이 그녀를 향해 걸어가면서 상태를 눈으로 확인했다.

'안 좋은데?'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의 경험 덕분에 죽어가는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

차우진이 말했다.

"놔두면 죽겠는데…."

스튜어디스가 깜짝 놀라 물었다.

"어, 어떻게 해요?"

"운이 좋은 아가씨네."

"네?"

차우진이 그녀의 옆에 오른쪽 무릎을 대고 앉으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런 후에 압박을 시작했다. 동작이 익숙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상태는 단순히 심폐소생술만 한다고 해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

스튜어디스가 옆에서 말했다.

"비행기에 비치된 자동 심장충격기를 써 봤지만 소용없었어요."

"심장이 멎은 건 아니니까요."

차우진이 심폐소생술과 함께 회복 스킬을 사용했다. 피부가 베인 정도는 즉시 낫게 하는 힘이 그의 오른손에서 나와 그녀의 가슴에 깃들었다.

차우진이 그 상태로 심폐소생술을 몇 번 더 시도했다. 그러면서 회복 스킬을 계속 썼다.

그런데 회복 스킬은 체력을 심하게 잡아먹는다. 차우진이 그녀의 가슴을 몇 번 누른 후에 지친 얼굴로 손을 뗐다.

"후우."

구경하던 사람이 불평했다.

"아니, 뭐, 서너 번 누르고 말 거면 왜 나서서…."

옆에서 환자의 상태를 살피던 스튜어디스가 환성을 질렀다.

"수, 숨을 쉬어요! 숨이 돌아왔어요!"

차우진이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이제부터는 승무원들이 그녀를 챙겨야 한다.

차우진이 오른손을 흔들었다.

"어우. 힘들다."

정예지가 물었다.

"심폐소생술은 몇 번 안 했잖아요."

이번 경우에는 심폐소생술은 보조 수단이었다. 쓰러진 여자가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된 건 회복 스킬 덕분이다.

"그 몇 번을 어떻게 했냐가 중요한 거라서."

두 사람은 비행기 앞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승객 중 한 명이 그들의 앞쪽에서 통로로 나왔다.

"우진 씨?"

"응? 도인선 기자?"

"이 비행기에 탔어요?"

"미국에서 일할 게 있어서. 도 기자는?"

"미국 출장이요. 공식 스케줄이 끝나면 뉴욕에서 휴가를 며칠 쓸 거예요. 회사에서 포상 개념으로 출장을 잡아준 거죠."

"하긴. 좋은 기사를 많이 쓰긴 했지요."

"우진 씨 덕분…. 아니, 그게 아니라…."

도인선이 정예지를 보았다. 정예지가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며 말했다.

"저는 CF 찍으러 가요. 우진 오빠랑은 스케줄이 우연히 겹쳤어요."

"우연히요?"

"그러니까 스캔들 기사 쓰면 안 돼요. 이거 다 우연이에요. 우연."

"요즘은 연예 기사는 잘 안 써요. 보도 기사로 대박 냈잖아요."

"휴우."

"안도의 한숨?"

"아니, 아니에요."

도인선이 차우진에게 제안했다.

"그럼 뉴욕에서 시간 되면 같이 밥이나 먹죠?"

차우진이 말했다.

"시간이 될지 모르겠네. 애매한데."

"어머. 튕기는 거예요?"

"상황 봐서 정합시다."

"네. 그래요. 아. 그리고."

그녀가 응급환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시카를 구해줘서 고마워요."

"아는 사람입니까?"

"제시카도 기자인데 서로 얼굴 정도는 알아요."

"그렇군요."

차우진이 자리로 돌아왔다.

정예지가 라면을 그릇째로 넘겼다.

"이거 다 먹어요. 아니다. 너무 불었나?"

스튜어디스가 웃으며 다가왔다.

"새로 끓여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이거 그냥 먹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정예지가 실실 웃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흐흐. 그런가?"

"사람 구해서?"

"그것도 있고, 또…."

"또?"

도인선이 밥 먹자는 말을 차우진이 거절한 게 마음에 들었다.

"그런 게 있어요."

차우진은 그녀가 남긴 라면을 먹었다.

그 라면을 국물까지 다 비우고 났더니 스튜어디스들이 찾아와 초콜릿 같은 간식을 제공했다.

"이것도 좀 드세요."

"퍼스트클래스는 이런 간식도 나옵니까?"

"아니요. 저희가 먹으려고 챙겨온 건데, 도와주신 게 고마워서 드리는 거예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차우진은 회복 스킬을 쓰느라 체력을 많이 소모했다. 그걸 보충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

차우진이 과자나 초콜릿을 부지런히 까먹다가 옆으로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는 생글생글 웃던 정예지가 지금은 째려보고 있었다.

"왜?"

"맛있어요?"

"살살 녹네요."

"쳇. 많이 먹고 배나 더 나와라."

***

차우진이 뉴욕 공항에 도착했다.

스톤파인더 사장 정수찬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윤서야!"

오윤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렸다.

"조용히 해. 남들이 봐."

"그러니까 우리 그냥 공식 발표를 하자고 내가…."

"벌써 발표하면 이상한 소문만 돌아. 기다려."

"알았다. 알았어."

정수찬이 차우진을 보며 웃었다.

"옆에서 보니까 나만 좋아하는 거 같지요?"

"아니요."

"하하."

***

차우진은 뉴욕 외곽의 실험 장소로 이동했다.

뉴욕시를 벗어난 곳에 있는 아무것도 없는 평지에 충격파 발생기가 설치되었다.

차우진이 딥어스테크 개발 2팀과 강원도에서 이 테스트를 했을 때는 세 대의 충격파 발생기와 세 대의 탐지기를 사용했다.

그 구성 자체는 지금도 그대로였다. 여섯 대의 장비가 여섯 개의 점에 설치되었다. 그 중심에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본체가 자리 잡았다.

그런데 강원도에서 테스트했을 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이번에는 스톤파인더에서 개발 중인 충격파 발생기를 사용했다. 스톤파인더의 것이 출력이 훨씬 더 강했다.

탐지가 설치 간격도 이번이 훨씬 더 넓었다. 강원도에서 테스트할 때는 딥어스테크의 탐지기를 100m 간격으로 설치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500m 간격으로 설치했다. 그래서 거대한 육망성이 만들어졌다.

정수찬이 설명했다.

"광물 탐사가 목적이 아니라, 지하에 마그마가 있는지 확인하는 게 목적이잖습니까? 그래서 범위를 넓게 잡았습니다."

"우리가 찾는 건 범위가 넓어야 데이터가 더 잘 나오니까요. 500m면 적당하네요."

오윤서가 옆에서 말했다.

"수찬 씨가 돈 많이 썼어요. 이 실험을 수찬 씨가 개인적으로 회사에 의뢰하는 형식으로 진행했거든요. 그런데도 이 실험이 실패했으면 좋겠대요.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정수찬은 그녀가 걱정할까 봐 실험의 진짜 목적은 알려주지 않았다.

차우진이 말했다.

"저도 이 실험이 실패하기를 바랍니다. 성공할 것 같긴 하지만요."

"두 분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천재들끼리만 통하는 그런 건가?"

"저는 천재가 아니라서."

옆에서 정수찬이 웃었다.

"하하하. 그럼 설마 제가 천재겠습니까?"

오윤서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작게 말했다.

"나중에 예지랑 말이 통하는 거 하나 늘어나겠다."

탐지기 테스트가 시작됐다. 정수찬은 긴장했다.

파인드스톤에는 정수찬이 한국에서 데려간 직원이 있다. 비밀 유지를 위해, 그 직원이 한국에 들어가 딥어스테크 개발 2팀에서 장비 사용법을 배웠다.

그 직원이 이번 뉴욕 실험의 메인 시스템 제어를 맡았다.

"사장님. 모든 장비 세팅 완료했습니다. 시작하시죠."

"내가 시작해야 해?"

"이 실험이 성공했을 때의 후폭풍을 생각하면, 적어도 처음은 사장님이 지시하셔야지요."

"알았다. 이거 긴장되네."

정수찬이 말했다.

"시작합시다. 1호기부터."

첫 번째 충격파가 땅을 울렸다. 발끝에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었다.

"1호 가동 성공했습니다."

"계속 진행해."

"2호, 3호 진행합니다."

진동이 두 번 더 느껴졌다.

"데이터 들어옵니다!"

메인 시스템의 모니터에 데이터가 쏟아지듯 표시됐다.

"후우."

"사장님. 모든 장비 정상 작동 중입니다."

"반복해서 테스트하고, 위치 옮겨서 계속 테스트해."

오윤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굉장히 긴장해서 실험한 것에 비하면 꽤 조용하게 진행되네요? 꿍꿍 소리 세 번 난 거 말고는 별거 없잖아요."

차우진이 옆에서 대답했다.

"중요한 건 겉모습이 아니라 데이터니까요."

"이런 작업을 며칠 동안 반복해야 하는 거예요?"

"충격파 발생기는 진짜 지진은 아니라서, 비교할 데이터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정확한 3D 이미지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위치를 옮겨가면서 계속 실험할 겁니다."

"저는 봐도 모르겠네요."

정수찬이 차우진 쪽으로 걸어왔다.

"테스트는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과가 나오려면 며칠 걸리겠지만요."

"광물 탐사가 아니라 그런지 역시 오래 걸리는군요."

"그래도 실패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게요."

"이제 현장은 우리 직원들이 맡아서 진행할 겁니다. 저는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데, 차 이사님은 계속 여기 계시겠습니까?"

"여기에는 제가 필요한 상황은 없어 보이는군요."

"그래도 이 시스템의 개발 책임자에 지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분인데…."

"전 나온 김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 어디 갔다 와야 합니다. 며칠 걸릴 겁니다."

"아. 그래도 테스트가 끝날 때는 돌아와 주시죠. 안 계시면 제가 불안해서…. 하, 하하."

"그때까지는 마무리 짓겠습니다."

***

차우진은 뉴욕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는 이탈리아에 도착한 후에 기차를 타고 오스트리아로 이동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차를 빌렸다. 정식 렌트카 업체가 아니라 현지인의 차를 현금을 주고 빌렸다.

"이게 차는 낡았지만, 그래도 굴러는 갑니다."

"딱 좋군요."

차가 워낙 낡아서, 보증금으로 맡겨놓은 돈이 중고차 시세보다 비쌌다.

그는 그 차를 타고 체코 프라하로 이동했다.

"드디어 왔다. 프라하."

이곳에 마약조직 스컬스의 본거지가 있다.

"박사는 어디 있으려나."

레드 크리스털을 만든 박사의 위치를 알아내려면 먼저 스컬스의 두목을 잡아야 한다.

"외국이라서 정보가 부족하단 말이야."

현장 정보가 많을수록 안전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프라하에 인맥이 없다. 천천히 정보를 수집할 시간도 없다.

게다가 스톤파인더의 탐지기 테스트가 끝나기 전에 뉴욕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프라하에서는 24시간 안에 일을 끝내야 한다.

"어쩔 수 없지. 오늘쳐들어가야겠다."

136. 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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