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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어비스넷 (3).
6.
어비스의 안개가 골치 아픈 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들이 마시는 순간 정신이 무너진다는 것.
두 번째는 인간이 가장 의존하던 눈이 제구실을 못한다는 것.
그런 이유로 어비스의 헌터들은 눈보다 귀로 대상을 느끼는, 낌새를 느끼는 훈련을 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시각에 아주 의존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눈이 더 중요해졌다.
"수준급 헌터가 되면 얼핏 보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상황 파악이 가능했으니까."
안개라고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였다.
"그러니까 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비스의 헌터들은 밤에는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비스의 안개 속에서 밤은 그야말로 칠흑, 뻗은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는 장님의 세상이었으니까.
특히 이 부분은 관광객들에게도 적용됐다.
헌터는 몇 번이나 언급했다.
"밤에는 입 막고 코 막고 자세요."
밤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건 헌터들 입장에서도 수습이나 대처가 쉽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코골이 있으신 거 확인되면 그 순간 관광은 끝입니다."
더불어 관광객의 필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코를 골지 않는 것이었다.
막연한 조건이 아니었다.
어비스의 관광객들은 관광을 하기 전에 다양한 검사를 받았다. 그중에는 수면검사도 있었다. 코를 걸거나 잠꼬대를 하거나, 잠버릇이 안 좋거나 그러면 관광이 불가능했다.
당연한 조치였다.
밤중에 코골이 때문에 관광객 본인과 헌터들이 몬스터에 전멸하면 그보다 더 웃기고, 참혹한 일도 없을 테니까.
특히 밤은 더더욱 위험했다.
"밤중에는 몬스터들도 안개가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본래대로라면 이레귤러 현상 지역, 그러니까 오아시스 지역에 몬스터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밤은 달랐다.
몬스터들도 눈이 멀어서 오아시스 지역에 저도 모르게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여하튼 어비스의 밤은 여러모로 위험했다.
관광객이었던 이영후는 그 사실을 귀가 따갑게 들었다.
'까라면 까야지.'
하지만 그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김지운이 말했으면 따르면 될 일.
물론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비단 그만 그런 건 아니었다.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의 걱정도 적지 않았다.
그 둘 입장에서도 김지운의 죽음은 정말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인바.
그래서였다.
"필요한 걸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했고, 그런 그들의 도움에 김지운은 기꺼이 응했다.
"필요한 물건들이다."
김지운이 메모장을 건넸다.
그리고 그것을 읽기 시작한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존식, 그래 식량이 중요하지.'
'잠금이 풀린 스마트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좀비 유인용으로 쓴다고 했지?'
'따뜻한 패딩과 방한 용품들. 하긴, 지금 밖의 추위는 상식을 초월할 테니까.'
'보조배터리들. 확실히 가서 뭐가 필요해질지는 모르니까.'
항목 하나하나가 생존에 꼭 필요해 보이는 것들이었으니까.
'응?'
'어?'
그러나 마지막 항목에서는 둘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딸기방 케이크?'
케이크라니?
'네 조각?'
심지어 김지운은 한 조각도 아니고, 무려 네 조각이나 되는 케이크를 요구했다.
의문은 있었지만 반문은 없었다.
일단 케이크는 제법 있었다. 그리고 케이크는 비축 식량에서 우선순위가 낮기도 했다.
장기보관이 여러모로 힘들었으니까. 특히 전기가 끊긴 지금은 더더욱.
물론 이 추위라면 외부에 보관하는 것도 의미가 있었지만, 고기류도 아니고 케이크 같은 제품들은 유통기한을 넘겼을 때, 잘못 먹었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작지 않았다.
해서 일단은 준비해 두었고, 그렇게 준비된 것을 본 김지운은 완벽한 준비에 만족했다.
"고맙다."
'케이크도 확실히 있군.'
특히 김지운은 준비된 케이크에 만족했다.
'오랜만이야.'
그에게 케이크는 보통 의미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언제나 임무를 진행할 때 디저트를, 특히 케이크를 준비해 두었고 임무를 끝난 후에 그것을 즐겼다.
헌터가 되기 전에도 그랬고, 된 후에도 그랬다.
그게 그의 루틴이었고 동시에 징크스였다.
그때도 그랬다.
김지운은 어비스의 헌터에서 은퇴하기 전에, 6개월 동안 어비스를 헤매다 돌아왔을 때도 준비해 둔 케이크를 먹었다.
맛이 가서 배탈이 났지만, 그럼에도 먹었다.
살아있기에 느낄 수 있는 맛이었으니까.
동시에 이것을 위해서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즉, 이건 의지였다.
'꼭 돌아온다.'
김지운은 살아서 이곳, 지하 1층으로 돌아오겠다는 의지.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김지운과 이영후, 그들 앞에 밤이 내려왔다.
겨울밤, 불빛 한 점 찾아보기 힘든 지독한 어둠이 깔렸다.
그 어둠 앞에서 김지운과 이영후는 화재용 마스크를 썼다. 일반 KF94 마스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명줄이 생긴 셈.
그러나 그 사실에 안심할 순 없었다.
이제부터 김지운과 이영후, 그 둘이 마주해야 할 세상은 그들이 알던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다녀오겠다."
일단 이것을 끝으로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어비스의 방식은 지구의 방식과 너무나도 많이 달랐으니까.
김지운이 이영후를 데리고 간 건 이런 부분 때문이었다.
'여기서 가장 믿을 건 숙련자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은 어비스를 경험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훈련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지운이 헌터가 됐을 때는 아니었지만, 그 후에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이후부터는 헌터든 관광객이든 어비스에 들어가기 전에는 무조건 훈련을 받았다.
그럼에도 실전에서 베드 엔딩을 맞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비스란 공간은 그런 공간이었다.
안다고 해서 마주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견딜 수 있어야 살 수 있는 곳이었지.
이영후에게는 그 본능이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쉽지 않았다.
이제부터 김지운과 이영후가 마주할 세상은 그들이 봐온 어비스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으니까.
'이동한다.'
그렇게 김지운과 이영후가 바리게이트를 넘고, 잠겨있던 문을, 지하 1층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열고 나갔다.
후우우웅!
일단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혹독한 추위였다.
아침부터 상식 밖이었던 추위는 밤이 되자 더더욱 상식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으어어어!'
이영후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소리를 간신히 삼켜야 했다.
더 무서운 것은 이토록 추운데도 불구하고 안개는 더더욱 자욱해진 상태라는 점이었다.
어비스의 안개가 가지는 특징이었다.
혹한의 추위에도, 작열하는 더위에도, 쏟아지는 소나기에도, 휘몰아치는 눈보라에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어비스의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차라리 추운 게 낫다.'
그렇기에 김지운은 이 혹한을 반겼다.
'이 정도 추위면 몬스터들도 쉽사리 나서지 않는다.'
일단 몬스터들도 너무 추운 경우에는 행동을 꺼렸다. 밤이라면 더더욱. 야행성 몬스터나 추위에 강한 몬스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두 가지가 합쳐진 경우는 많지 않았다.
'어비스 좀비 역시.'
결정적으로 이 추위에는 어비스 좀비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사실 어비스 좀비가 김지운 입장에서는 제일 골치 아픈 존재였다.
몬스터는 피를 많이 흘리거나, 부상을 입으면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응을 보였다.
특히 숨 쉬는 몬스터들은 숨을 막으면 그 효과가 즉시 왔다.
하지만 어비스 좀비는 달랐다.
'그 이해불가능한 놈들도.'
일단 어비스 좀비는 먹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했다. 이건 정말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또한 어비스 좀비는 숨이 막혀도 죽지 않았다. 물속에 집어넣어도 몸뚱이가 불어 터질지언정 꺼내면 살아 움직였다.
팔다리가 잘리는 건 물론 내장, 심지어 심장이 적출되어도 움직였다.
멈출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뇌를 파괴하는 것뿐.
'추위에는 몸이 굳는다.'
그러나 이 불가해의 결정체인 어비스 좀비들도 혹한의 추위 앞에서 몸뚱이가 얼어붙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반응을 하더라도 여유가 있다는 의미.
물론 김지운이 지금 이 밤중에 나온 가장 큰 이유는 그거였다.
'여기에 거미줄이 있다면.'
자신에게는 레이더가 있다는 것.
그렇게 김지운이 염력을 이용해서 거미줄을 펼쳤다.
반경 5미터짜리.
그 상태에서 그 둘이 계단을 밟고 올라 지상 1층에 도달했다.
그리고 호텔이 있는 곳을 향해, 큰 도로가 있는 곳을 향해 그들은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자 그들은 볼 수 있었다.
'맙소사.'
도로 위의 지옥을.
말 그대로였다.
오늘 연말을 맞이해 엄청난 차량이 몰린 도로 위는 그야말로 자동차의 무덤이 되어 있었다.
차들이 서로 부딪친 채 가늠할 수 없는 광경을 보이고 있었다.
삐잉, 삐잉, 삐잉!
그나마 멀쩡한 차량들이 경고음과 함께 비추는 라이트에 비춘 그 광경 앞에서 이영후는 물론 김지운도 이를 꽉 물 수밖에 없었다.
더 최악은 그 차량들 사이였다.
으어어어!
어비스 좀비들이 동상처럼 선 채로 섬뜩하기 그지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 어비스 좀비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이상할 건 없었다.
문제가 터지는 순간 이곳 여의도에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밖으로 대피했을 것이다.
연말을 추억하기 위해 모인 수십만 명의 인파들이.
삐익, 삐익, 삐익!
'차 경보음 때문이구나.'
그렇게 어비스 좀비가 된 그들은 주인 잃은 차량들이 내는 쉴 새 없는 그 소리에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김지운과 이영후는 그곳을 뚫고 가야 했다.
'이거 불가능할 거 같은데? 차라리 지하 연결 통로가 낫지 않으려나?'
여기서 이영후는 차선책을 생각했다.
김지운의 생각은 달랐다.
툭!
그는 이영후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신호였다.
이대로 바로 도로를 가로질러 호텔을 향하겠다는 신호.
그 신호에 이영후는 이제 머릿속에 괜한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젠장, 이래 죽나 저래 죽나.'
고민 대신 각오와 함께 이영후가 김지운을 따라 이동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마라톤이다, 마라톤. 시간 따윈 염두에 두지 마. 그냥 하나에 집중하는 거다, 하나에.'
그렇게 기나긴 여정을 생각하던 이영후, 김지운이 그런 이영후의 어깨를 두드렸다.
툭툭툭!
세 번.
'응?'
그 신호에 이영후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어?'
그러자 볼 수 있었다.
'버, 벌써?'
어느새 도로를 갈로 질러 목적지인 호텔 건물 앞에 도달했음을.
'어, 어떻게?'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예상했는데 이토록 빨리 도달할 줄은 상상도 못한 바.
그러나 김지운은 달랐다.
애초에 빨리 올 자신이 없었으면 나오지도 않았을 터
'시간이 없다.'
결정적으로 김지운은 이번 파밍에서 다른 무엇보다 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김지운과 이영후는 올라가야 했으니까.
'27층까지 가려면.'
이 호텔의 27층까지.
그것도 엘리베이터 따위가 아니라 계단을 통해서.
더군다나 그건 빨리 올라가고 싶다고 해서 올라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비스 안개가 어디까지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호흡을 조절해야 했다.
그 사실을 이영후도 알기에 그는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그렇게 둘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로비를 거닐었다.
으어어어!
로비 안 역시 어비스 좀비로 가득 차 있었고, 그렇기에 둘은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이윽고 계단으로 올라가는 문 앞에 도달하는 순간, 그 순간 김지운은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이제부터 중요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게 있었으니까.
'어비스 좀비를 빼야 한다.'
계단에 있는 가장 골치 아픈 것들을 제거하는 것.
그때였다.
삐익, 삐익, 삐익!
호텔 로비 밖에서 소리가 났다.
김지운, 그가 이미 들어오기 전에 알림을 맞춰 놓은 스마트폰이 내는 소리였다.
으어어어!
그 소리에 어비스 좀비들이 미친 듯이 반응했고, 그 틈을 노려 김지운과 이영후가 방화용 문을 열었다.
철컥!
하나를 열자, 곧바로 새로운 방화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김지운은 바로 두 번째 방화문은 열지 않았다. 방화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에.
'없다.'
그러나 이내 낌새가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 김지운은 방화문을 열었다.
그러자 계단이 드러났다.
어둠으로 가득 찬.
그 어둠 속에서 김지운이 천천히 계단을 밟았다.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지하 1층으로.
그리고 지하 2층으로. 그 후에 더 아래로.
위가 아닌 아래로.
그 후에 지하 4층 부근에 도달했을 때 김지운은 가방에서 준비해 온 것을 꺼냈다.
확성기를.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김지운이 다시 계단을 타고 1층으로 왔다. 구리고 방화문이 닫히지 않도록 잡고 있던 이영후를 대신에 방화문을 잡은 상태에서 그 상태에서 김지운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염력을 사용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시작됐다.
우에에에에엥!
확성기가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김지운과 이영후가 그대로 방화문을 받았고, 이내 그들은 들을 수 있었다.
우두두두두두두!
계단을 채우고 있던 어비스 좀비들이 쓰나미처럼 내려오는 소리가.
으어어어어!
두두두두두!
그야말로 지옥에서나 들을 법한 소리였다.
심지어 소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쿵!
방화문 너머에서 일어난 소리에 호텔 로비에 있던 어비스 좀비들도 달려들었다.
쿵! 쿵! 쿵!
방화문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상태에서 김지운과 이영후는 숨 죽인 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5분이 흘렀을 때.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을 때 김지운이 이영후에게 신호를 줬다.
'이제 올라간다.'
호텔 등정이 시작됐다.
'심박수가 늘지 않도록.'
여기서 핵심은 천천히 오르는 것이었다.
무려 27층을, 화재용 마스크도 쓴 채 올라간다?
무리를 하는 순간 심박수가 치솟을 터.
물론 어비스 좀비가 그 심장소리를 듣고 덤벼든다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어비스 안개에 중독이 되어서 심박수가 오르는 건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애매해진다는 것.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김지운은 딱히 걱정할 게 없었다.
'이영후는.'
걱정되는 건 이영후.
'잘 따라오겠지.'
그러나 의외로 여기서 김지운은 이영후를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체력 스탯이 9포인트나 되니까.'
그의 체력이 김지운과 비슷했으니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비스의 관광객들은 기본적으로 관광을 하기 전에 일정 수준 이상의 체력을 달성해야 했다.
물론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고, 권고 혹은 장려 수준이지만 관광객들은 알아서 체력을 키워왔다.
체력이 부족해서 죽으면 억울한 건 헌터가 아니라 관광객, 본인이었으니까.
덕분에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대부분의 어비스 좀비는 끌어내린 상태, 물론 전부는 아니었다.
으어어어!
층이 높아질수록 소리를 듣지 못한 어비스 좀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없었다.
스으으!
치실로 만들어낸 거미줄로 어비스 좀비의 존재를 확인한 김지운은 망설이지 않았다.
퍼걱!
오크의 도끼를 이용해 단숨에 어비스 좀비의 두개골을 쪼갰다.
망설임 없이.
이미 어비스 좀비가 된 자들은 결코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없었으니까.
오히려 어비스에서는 좀비가 된 이들을 보내주는 게, 그게 예의였다.
그 누구도 저런 이해 불가능한 괴물이 된 채 평생 방랑하고 싶어 하진 않았으니까.
퍼억!
그렇게 김지운의 도끼질과 함께 그들이 층을 올랐다.
'아.'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김지운과 이영후의 발걸음이 멈췄다.
목적지에 도달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보였으니까.
'안개가 사라졌다.'
계단을 가득 채웠던 안개는 마법처럼 사라진 것을.
마치 이 이상으로는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안개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괜한 착각이 아니었다.
헌터들은 어비스의 안개를 그저 평범한 안개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을 어비스의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몬스터로 여겼다.
달리 말하면 안개가 올라오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 여기부터는 안전지대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김지운과 이영후는 바로 마스크를 벗었다.
"후우."
조심스럽게 신선한 공기를 폐부에 집어넣었다.
그 상태에서 숨을 골랐다.
모든 것을 진정시켰다.
놀란 감각을, 육체를 그리고 정신을.
이윽고 김지운과 이영후가 고개를 들어 층수를 가늠했다.
김지운이 손가락으로 말해줬다.
'24층이다.'
안개가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24층부터라고.
그 사실에 이영후의 표정이 굳었다. 이 정도 높이라면 지상에서 100미터, 그 이상이라는 의미.
즉, 여의도에 퍼진 어비스 안개의 높이가 무려 100미터를 훌쩍 넘긴다는 의미였다.
아득한 일.
그러나 그 아득함에 현기증을 느낄 틈은 없었다.
'이제 시작이다.'
긴장의 끈을 풀 수는 없었으니까.
어비스 좀비 때문은 아니었다. 어비스 좀비는 절대 안개, 그곳을 넘어오지 않으니까.
'어비스 좀비는 위협적이지만, 생존자는 더 위협적이다.'
경계하는 것은 생존자였다.
이제부터 생존자의 영역이었으니까.
하물며 이곳은 12월 31일, 여의도 중심가 호텔이었다. 그야말로 호텔이 만석일 터.
그만큼 호텔의 생존자들도 어느 때보다 많을 터였다.
그래서였다.
27층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섣불리 문을 열지 않았다.
낌새를 느꼈다.
조심스럽게.
김지운이 방화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김지운이 문을 열었다.
철컥!
열자 등장하는 또 방화문, 김지운은 그 방화문에서도 낌새를 가늠했고 이내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이영후는 준비했다.
'생존자가 덤벼들 수도 있어.'
전투를.
그런 각오 속에서 문이 열렸을 때 그 둘을 반긴 것은 아주 지독한 적막감이었다.
'응?'
예상 밖의 상황에 놀라는 이영후에게 김지운은 스마트폰으로 보여줬다.
[모두 방에 숨었다.]
'아!'
이 상황에서 투숙객들이 내린 선택이 무엇인지를.
어찌 보면 그게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부도 외부이지만 살아남은 생존자들 역시 위협적으로 느껴질 터.
그런 상황에서 호텔 문을 꽉 잠그고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을 끄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김지운과 이영후 입장에서는 기꺼운 상황이었다.
둘이 목적대로 움직였다.
'2703호.'
방을 찾았고, 받은 카드키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조용하게.
이윽고 그 둘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 후에도 소란은 없었다.
이영후와 김지운은 최대한 숨을 죽인 채 호텔방을 확인했다.
그쯤이었다.
이영후의 발걸음이 멎었다. 큰 유리창 앞에서.
달빛 아래에서 여의도의 모습이 보였다.
자욱한 안개로 뒤덮인 모습이.
그리고 그 안개는 여의도에서 멈추지 않고 그야말로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펼쳐져 있었다.
서울 전역이 안개로 덮인 느낌이었다.
꿀꺽!
예상 보다 더 아득한 광경에 이영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니라 김지운이었다.
툭!
김지운이 이영후의 어깨를 두드린 후에 턱짓을 했다.
'아!'
그렇게 김지운이 턱짓을 한 곳에는 가방 하나가 있었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여행 가방이.
그리고 펼쳐진 그 가방 안에는 지름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접시 모양의 안테나를 비롯해 여러 가지 전자 장비들이 있었다.
그제야 이영후가 정신을 차렸다.
그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부터는 그의 영역.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영후는 능숙한 솜씨로 위성 통신 장비를 세팅했다. 사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초보자도 할 수 있을 만큼 장비는 단순했으니까.
문제는 세팅이 아니었다.
과연 이것이 작동하는가, 그 유무.
그쯤에서 이영후가 자신의 노트북을, 롤스로이스가 파괴되기 전 차에서 가지고 온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몇 번의 조작을 하는 순간 이영후가 김지운을 바라보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작동합니다!'
그쯤에서 이영후는 괜히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는 헛수고를 하지 않았다.
밖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세상 꼴이 말이 아님을.
무엇보다 지금은 어비스를 모르는 자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눈과 귀에 담을 필요가 없었다.
'답은 어비스넷뿐이다.'
이영후, 그가 스마트폰을 꺼냈고,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연결했다.
'일단 안전망 좀 깔아놓고.'
타닥타닥!
이후 몇 가지 프로그램을 더 켜놓은 이영후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김지운을 바라봤고, 그 시선에 김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접속합니다.'
그 순간 이영후가 스마트폰의 어비스넷 앱을 활성화시켰다.
그와 동시에 곧바로 그들의 앞에는 동영상 하나가 재생됐다.
그 영상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매우 젊은 사내가.
그 사내가 말했다.
[지금 생존자들에게 상황을 전달합니다. 어비스가 세상을 덮쳤습니다. 때문에 이 시간부로 어비스넷은 생존자들을 위한 커뮤니티로 전환됩니다. 생존을 위한 모든 정보를 공유해주십시오.]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이상 삼족오 클랜의 마스터 이도준이었습니다.]
그렇게 영상이 끝나고 게시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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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아이템 뿌립니다 (1).
1.
[삼족오 클랜 마스터 이도준이었습니다.]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숙였다.
[삼족오 클랜 역시 어비스넷을 통해 상황과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사내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눈빛으로 말했다.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영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애초에 소리를 켠 상황이 아니었기에, 자막으로 보는 것이었기에 적막감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분명 달라졌다.
김지운과 이영후가 침묵에 잠겼다.
그 침묵을 깬 건 이영후였다.
"보······."
그는 놀란 눈으로 김지운을 바라보며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다가 그대로 제 입을 막았다.
일부러 소리도 끄고 영상을 봤는데 이영후가 소리를 낸다면 그보다 우스운 일은 없을 터.
정신을 차린 이영후가 노트북에 메모장을 켠 후에 말했다.
[삼족오 클랜 이도준 클랜 마스터라니!]
제 놀란 심정을 텍스트로 보여줬다.
[맙소사, 한국 최고의 클랜 아닙니까? 세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강의 클랜! 절대 외부에 얼굴 노출도 안 한다고 알고 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상황의 심각함보다 삼족오 클랜의 마스터를 보게 됐다는 사실에 놀람이 더 큰 모양.
[대장도 아시죠? 삼족오 클랜의 마스터?]
이어진 그 이영후의 물음에 김지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리 없었다.
'살이 좀 빠진 걸 보면.'
긴 인연은 아니지만, 꽤 깊은 인연을 맺었던 이였으니까.
'고생 좀 했나 보군.'
그리고 은퇴하기 전, 어비스와 모든 것을 끊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지금 이 순간 김지운은 회상에 젖지 않았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즉, 김지운이 잠시 침묵에 빠진 것은 이도준과의 추억을 되새김질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어비스넷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지만.'
조금 전까지 김지운은 어비스넷을 의심했다.
애초에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을뿐더러 헌터와 관광객들이 활동하는 곳이라면 좋은 의도로 만든 곳이라고 해도 좋게 돌아가지 않으리라 확신했으니까.
어설프게 어비스넷을 이용했다가 역으로 추적되어서 처리될 가능성을, 함정이 될 가능성을 높게 봤다.
특히 이 어비스넷을 만든 건 클랜들일 게 뻔했다.
김지운 입장에서는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족속들이었다.
클랜은 야심이 넘쳤고, 야망이 넘쳤으며, 그것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 만든 단체였으니까.
지금 이 상황을, 아포칼립스란 재앙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써먹고도 남을 자들이었으니까.
'이도준이 움직였다면.'
그러나 이 순간 김지운은 그 의심을 조금은 접었다.
'악의는 없다.'
그가 아는 이도준은 야망이 넘치지만 그렇다고 도의를 버리는 부류가 아니었으니까.
김지운이 어비스에서 만난 인연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다섯 명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를 의심한다면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해야 했고, 그럼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맞았다.
'그러니까 얼굴을 드러낸 거겠지.'
지금 이도준이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른 클랜 마스터가 나섰다면 어지간한 헌터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이 터져가는 와중에 개수작을 부리려고 하네, 응, 그래도 안 속아, 라고.
하지만 이도준은 달랐다.
그는 김지운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헌터들이 인정하는 어비스의 클랜 마스터였다.
그가 나선 이상 백퍼센트 신뢰를 아니더라도, 어비스넷을 꽤 신뢰하게 됐을 터.
'됐다.'
그쯤에서 김지운과 이영후의 눈앞에 로딩을 지나 게시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매우 심플한 게시판이었다.
그냥 하얀 화면에 로그인칸이 있고, 게시판이 있고, 그 게시판에 저마다 카테고리를 단 글들이 올라와 있는 식.
인터넷 태동기에 보던 그 단순하기 그지없는 게시판이었다.
그것을 본 김지운이 이영후를 바라봤다.
원래 이게 어비스넷이었냐고.
그 시선의 의미를 캐치한 이영후가 메모장에 글을 썼다.
[원래는 이런 느낌이 아니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 가까운 형식이었습니다.]
[일부러 게시판 형식을 바꾼 것 같습니다.]
[데이터 용량을 낮추기 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위성 통신을 하면 통신 속도가 빠르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서버 상황도 제한적일 겁니다. 고화질 영상이나 사진이 노출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는 디자인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어비스넷이 변한 이유를.
그 후에 몇 번의 클릭을 거듭한 이영후가 말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 됩니다. 로그인을 해서 올릴 수도 있고, 비로그인으로도 올릴 수 있습니다. 사진도 첨부가 가능합니다만, 고화질 사진은 불가능합니다. 게시글 카테고리는 일단 정보, 잡담, 거래 항목이 있습니다.]
이 심플한 게시판에 대한 설명을.
그것을 본 김지운은 이해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머리를 맞대기 위한 무대를 만들었음을.
'이도준답군.'
그리고 그게 김지운이 아는 이도준의 방식이었다.
어쨌거나 김지운 입장에서는 희소식이었다.
이 어비스넷을 통해서 지금 일어난 세상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그게 희망일지, 더 큰 절망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든 간에 김지운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김지운이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적어 이영후에게 보여줬다.
[여의도에 관련된 정보를 모아주도록. 부족하면 서울까지.]
이영후가 고개를 끄덕였고, 바로 게시판 탐구를 시작했다.
그사이 김지운은 방 안을 헤집었다.
이곳은 CIA요원이 작전을 위해 숙박하는 숙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더 나올 수도 있었으니까.
실제로 몇 가지가 나왔다.
침대 아래, 옷장 안, 커튼 안쪽에서 몇 가지 작은 가방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가방 안에는 여러 개의 여권들이 그리고 한국 돈과 달러, 엔화, 위안화가 나왔다.
사진 뭉치들도 나왔다.
'엔화랑 위안화가 있는 걸 보면 중국이나 일본으로 도망칠 생각도 하고 있었군.'
그쯤에서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결국 핵심은 다른 방에 있겠지만.'
김지운, 그가 이영후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린 후에 문으로 가더니 이내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문, 바로 넘어 호텔방을 향해 김지운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새로운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이 냄새.'
문이 열리는 순간 김지운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화약 냄새군.'
한때는 너무나도 익숙했고, 한동안은 잊었던 냄새.
그리고 다시는 맡을 수 없을 거 같은 냄새.
그래서 잊었으리라 생각했던 냄새.
'탄약의.'
그러나 냄새를 맡는 순간 김지운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은퇴를 하기 전의 기억들을.
물론 이번에도 추억에는 젖지 않았다.
그 대신 객실 내에 위치한 금고 앞에 섰고, 그 금고 앞에서 데이비드에게 받은 번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금고 안에 잠들어 있던 글록17과 탄약이 보였다.
탄약은 36발이었다.
그 사실에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꽤 큰 임무를 준비했군.'
미국에서는 정말 보기 쉬운 총이었고, 36발은 연습용으로도 취급하지 않을 만큼 적은 양이었다.
그러나 한국이라면 달랐다.
총기 휴대가 매우 힘든 한국에서 권총과 이 정도 되는 탄약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일부러 방을 따로 잡아서 거기에 총을 보관할 정도, 혹여 들키더라도 둘러댈 명분이라도 내세우려고 할 정도였다.
사실 그래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정보기관 요원들은 총을 휴대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총을 구비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나게 중요한 임무를 진행했다는 의미.
물론 김지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이 뭘 준비했든 관심이 없었고, 지금은 솔직히 의미도 없었다.
이 몬스터가 넘치는 세상, 어비스의 세상에서는 CIA 자체가 사라졌을 수도 있으니까.
'총을 얻게 될 줄이야.'
중요한 엄청난 무기를 얻었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쓸 수 있는 무기는 아니었다.
어비스의 안개에서 총성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은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쉽게 쓸 수 있는 무기도 아니었다.
지독한 안개 속에서 총이 가지는 사거리의 이점은 그렇게까지 크게 발현되지 못할 테니까.
물론 군대가 움직이면 이야기는 달랐다.
그 막강한 화력에는 솔직히 눈 따위는 필요 없었다. 무자비한 포격을 하면 될 터.
'군대랑 접촉하면 더 좋겠지만.'
김지운 역시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지금 군대가 제 역할을 해주기를, 전쟁을 위해 준비한 것들을 몬스터를 향해 토해내기를.
하지만 김지운은 그 가능성을 높게 보진 않았다.
'안개 앞에선 군인도 무용지물이지.'
병기는 강력하지만 그걸 다루는 인간에게는 내성이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화이트존이라면 모를까, 오렌지존 이상부터는 헌터가 아닌 자들 그리고 대비가 안 된 자들은 채 30초도 못 버텼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렌지 클래스만 되더라도 눈이 마주치는 순간, 포효를 듣는 순간 얼어붙으니까.'
그곳을 살아가는 몬스터들에게는 절대적인 위압감이 있었다.
속칭 포스라고 하는 것이.
그것에 범위는 생각보다 넓었고, 매우 위력적이었다.
오렌지 클래스의 몬스터가 내뿜는 포스에 노출되면 헌터가 아닌 일반인들은 쓰러졌다.
옐로우 클래스 몬스터라면 노출되는 순간 매우 높은 확률로 심정지가 왔다.
헌터들도 다를 건 없었다. 레벨이 낮은 헌터 역시 자신보다 강력한 몬스터의 포스에 짓눌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군대가 제 몫을 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였다. 제아무리 강력한 전차라고 해도 그 안에 탄 전차병이 죽으면 제 기능을 못 했으니까.
군대가 대응을 하더라도 지금 당장 섣불리 움직이진 않을 터였다.
여하튼 정리하면 김지운에게는 지금 이 총은 목숨,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다.
그렇게 총을 챙긴 김지운이 방을 나왔고, 다시 이영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쯤에서 이영후는 노트북을 닫고, 접시를 챙기고 있었다.
그 후에 스마트폰으로 문장을 보여줬다.
[일일이 찾으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여의도가 들어간 모든 게시판 글들을 복사해서 다운받아놨습니다.]
시간이 금인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차피 지금 여기서 일일이 상황을 안다고 해서 당장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으니까.
고민과 분석은 돌아간 후에 해도 늦지 않았으니까.
집으로 돌아간 후에.
그러나 그것만큼은 달랐다.
이영후가 스마트폰에 썼다.
[하지만 이건 따로 저장해뒀습니다.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몇 번 터치하고는 이내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그것만큼은 꼭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
그리고 그럴 만한 사진들이었다.
그 사진은 4시간 전의 여의도를 찍은 사진이었다.
헬리콥터 혹은 드론으로 찍은 듯 꽤 높은 곳에서 여의도를 전체적으로 찍은 사진.
'안개로 가득하군.'
곳곳에 솟아오른 고층 빌딩들이 아니면 이게 여의도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그 정도로 안개로 가득 찬 사진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여의도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여의도 너머의 한강 부근 그리고 그 너머 역시 끝없이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지역 구분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을 본 김지운의 표정은 담담했다.
보이는 것은 하얀 안개였으니까.
화이트존, 어비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위험하지 않은 영역이었으니까.
그래서였다.
스윽!
이영호가 그 사진을 보여주는 순간 김지운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레드존.'
그것은 붉은색 안개로 가득 찬 곳이었다.
'여의도에 레드존이 생겼다.'
화이트존보다 한 단계 위였지만, 그 위험성은 차원이 달랐다.
레드존은 기본적으로 10레벨 이상의 헌터들만이 입장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리고 헌터들에게 10레벨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일단 레벨업으로 얻는 능력치 포인트가 40, 이걸 모두 근력에 투자할 경우 50포인트 이상의 근력 스탯을 달성 가능했다.
이쯤 되면 힘부터가 그냥 인간의 수준이 아니었다.
하물며 보통은 이 정도까지 레벨을 올리게 되면 도감을 채우며 얻는 능력치가 남달랐다.
또한 사냥을 통해 얻은 아이템들을 통한 전력 강화 역시 결코 무시할 게 못됐다.
그리고 사냥을 통해 얻은 경험까지.
결정적으로 스킬슬롯이 하나 더 열렸다.
이게 아주 큰 차이였다.
그냥 차원이 달랐다. 야구로 따지면 초등학생 리그랑 고등학생 리그 수준의 차이였다.
정리하면 국회의사당은 당분간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라는 소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렌지 존까지.'
레드존은 몇 곳이 더 있었고, 심지어 김지운은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주황색 안개가 뭉쳐 있는 것도 봤다.
거기까지였다.
이 이상 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건 이 호텔방이 아니라도 가능했으니까.
김지운이 신호를 줬고, 이영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이 챙길 것을 챙기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비상계단 방화문 앞에 섰다.
여전히 복도는 고요했다.
그들의 존재가 들키지 않은 모양 혹은 들켰어도 호텔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는 모양.
달리 말하면 이곳에는 생존자가 있었다.
그 사실에 김지운과 이영후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어비스에서 다른 누군가를 걱정하고, 그들을 도와주겠다는 것은 너무나도 오만한 생각이란 걸 잘 알았으니까.
지금은 제 목숨을 지키는 것조차 쉽지 않음을 알았으니까.
그렇게 그 둘이 방화문을 열고, 다시 계단 위에 섰다.
그리고 준비해 온 또 다른 화재용 마스크를 쓴 후에 천천히 내려갔다.
이윽고 3층쯤에 도달했을 때였다.
으어어어어!
바로 밑 부근에서 어비스 좀비의 소리가 올라왔다.
'어?'
그 사실에 이영후의 숨이 잠시 멎었다.
'이거 지하 층까지 내려갔던 놈들 아닌가?'
지하층까지 유인했던 어비스 좀비들이 그 사이 1층까지 올라온 모양.
도망가야 하는 그 둘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일이었다.
어비스 좀비를 다 잡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떻게 하지?'
그 사실에 고개를 돌려 김지운을 바라보는 이영후.
물론 칠흑 같은 어둠 탓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대신 김지운은 이영후의 등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깊게.
'5?'
그 후에 숫자 다섯을 써줬다.
'뭐지?'
이영후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신호.
'뭐야?'
그렇게 이영후가 고민으로 시간을 보냈다.
5초를.
그러자 들렸다.
삐익삐익삐익!
김지운, 그가 지하 3층에 배치해 둔 스마트폰이 주어진 역할을 하는 소리가.
으어어어!
그 소리에 어비스 좀비들이 지하로 달려갔다.
그렇게 김지운과 이영후가 1층으로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 둘이 호텔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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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아이템 뿌립니다 (2).
2.
김지운과 이영후, 그들이 다시 백화점 지하 1층으로 돌아왔을 때 지하 1층의 상황은 떠났을 때와 달라져 있었다.
소란이 있었다.
"어? 뭐야?"
생존자가 일으킨 소란이 아니었다.
"도그블린들?"
김지운과 이영후가 없는 사이 백화점 지하 1층으로 도그블린 무리가 습격을 했다.
그 숫자는 무려 서른하고도 세 마리였다.
꽤 많은 숫자였다.
"다 죽었네?"
그 많은 도그블린들이 사체가 된 채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그쯤에서 고강수와 강현중 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모습으로.
"나가시고 30분 후쯤에 도그블린 무리가 지상 1층을 통해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처리했습니다."
동시에 브리핑을 했다.
"다행히도 부상자 없이 마무리했습니다."
아주 놀랄 만한 브리핑을.
'서른 마리를?'
그 사실에 이영후가 놀란 반응을 보였다.
헌터로 각성한 건 단 둘, 그마저도 아직 레벨도 못 올린 상황이니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 아닌가?
그런데도 부상자 없이 잡는다니?
반면 김지운은 달랐다.
'고강수나 강현중, 둘이면 충분하지.'
일단 김지운의 기준으로 고강수와 강현중은 전투에 대한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동시에 전투 경험도 적지 않았다.
'보조까지 있는데.'
더군다나 그 둘만으로 싸우는 게 아니었다.
고강수는 이곳을 관리하는 동안 나름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무장시킨 상태였다.
그것도 이제는 조잡한 무장이 아니었다.
김지운, 그가 지하 주차장에서 사냥한 오크들이 가진 무기와 방어구들을 이용한 무장이었다.
물론 오크들이 쓰던 물건들을 그냥 쓰기에는 꽤 컸고, 노멀 등급 아이템들로 추가 옵션도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무기는 무기였다.
여기에 식칼 등을 이용해 만든 창을 든 이들을 무려 1백 명 가까이 배치해둔 상황.
결정적으로 고강수와 강현중에게는 그게 있었다.
'오크에게 덤빌 정도라면.'
도그블린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오크를 마주하고도 전투 의지를 불태웠다는 경험.
'이제 기죽을 일은 없지.'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다.
소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둘 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강현중과 고강수가 레벨업을 했다.
도그블린 사냥만으로 가능한 건 아니었다.
강현중의 경우에는 앞서 김지운과 싸우면서 얻은 경험치 덕분이었고, 고강수의 경우에는 오크 한 마리를 잡은 경험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말씀해 주신 대로 근력에 전부 투자했습니다."
어쨌거나 매우 큰 성과였다.
1레벨과 2레벨, 근력 스탯 4포인트 차이는 엄청난 차이였으니까.
'이제 되겠군.'
이제 김지운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파티를 구성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
"수고했다."
그렇게 그 둘에게 인사를 건넨 김지운이 바로 손짓을 했다.
"우리 쪽도 성과가 있었다. 바로 브리핑을 한다. 이영후."
"예!"
바로 무대가 만들어졌다.
이영후가 접시를 세팅했다. 그 모습에 모두가 기대감 어린 시선을 보냈다.
통신이 된다는 것, 그것은 지금 갇힌 그들의 숨통이 트이는 것과 같았으니까.
"아, 젠장."
그러나 그 기대감은 이내 사그라졌다.
"여기서는 안 되네요."
말을 뱉은 이영후가 밖을 바라봤다.
"안개가 방해하는 게 확실합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인터넷 기능이 먹통이 된 것은 단순히 통신 장비 문제가 아님을.
"아마 다른 전파 통신도 불가능할 겁니다. 무선 조종 같은 것들. 라디오도 안 되겠죠."
지금 이 어비스의 안개가 주는 공포와 절망은 모두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다운 받아놓길 잘했네요."
그러나 그에 절망하기는 일렀다.
이영후, 그가 보여줬다.
다운 받은 글과 그 글에 첨부된 사진들을.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다름 아니라 여의도 상황이었다. 앞서 김지운과 이영후가 봤던 그 사진들이었다.
여의도가 어비스의 안개로 자욱한 사진들, 마천루 같은 빌딩들도 가슴 언저리만을 내밀고 있고, 여의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사당이라는 무대가 붉게 물든 사진들.
그리고 어렴풋이 보이는 여의도 너머 역시 안개로 뒤덮여 있는 사진들.
그 사진들이 말해줬다.
지금 느끼는 절망은 아직 시작도 한 게 아니라고.
"상황은 보시다시피 나쁘다."
그 절망감 앞에서 김지운이 말했다.
담담하게.
그 표현에 모두의 얼굴이 더 굳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김지운이 이토록 말한다는 것은 정말 상황이 안 좋다는 의미.
'생각만큼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달리 김지운이 생각하는 지금 상황은 최악보다는 나았다.
당연했다.
'헌터들이 있으면 몬스터는 처리 가능하다.'
현재 모든 헌터들은 김지운처럼 상태창이 초기화된 상태이겠지만, 그들이 쌓은 역량과 경험은 초기화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아이템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곳은 지구였다.
어비스와는 달리 막강한 아이템들이 존재했다.
'조건이 붙겠지만, 총을 쓰게 되면 어비스 때와는 상황 자체가 전혀 달라진다.'
당장 총을 비롯해 드론이나 헬기, 전투기까지.
몬스터를 상대로 절대적이진 않지만, 굉장히 유효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어비스의 헌터들이 수 년에 걸쳐 이루어진 작업을 1년 안에 끝낼 수도 있다.'
아마도 헌터들은 엄청나게 빠른 성장을 하게 될 터.
더군다나 어비스의 안개는 어떤 의미에서 헌터들에게 기회의 무대이기도 했다.
헌터들에게 안개는 살 수 없는 공간이지만, 몬스터들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상위 클래스, 그러니까 레드존의 몬스터는 화이트존에서 오랜 시간 버틸 수 없었다.
일정 수준의 레벨을 달성한 헌터들에게 화이트존은 도리어 안전지대가 된다는 의미.
물론 김지운은 낙관하지 않았다.
'옐로우 클래스만 되더라도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어비스의 몬스터들 역시 모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최악인 것들이 넘쳐났으니까.
'안개부터가.'
당장 레드존만 가더라도 안개의 수준이 차원이 달라졌다.
화이트존처럼 마스크로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김지운이 상황을 그렇게까지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헌터들이 빠르게 몬스터들을 처리하겠고, 그만큼 골치 아파지겠지.'
이제부터 헌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리란 것.
그건 매우 안 좋은 소식이었다.
김지운은 헌터들을 잘 알았다. 그 본인도 헌터였고, 동시에 꽤 오래 버틴 케이스였으니까.
살아서 은퇴한 몇 안 되는 케이스.
그런 김지운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헌터들 중에 올바른 놈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그건 김지운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헌터가 되기 위한 조건은 어비스에서 살아남을 재능 그리고 어비스란 미친 곳에 자진해서 들어갈 만한 탐욕이었다. 더불어 그 탐욕은 정상적인 탐욕은 아니었다.
그런 헌터들의 눈에 비친 지금 아포칼립스 세상은 끝내주는 대규모 업데이트를 마친 온라인 게임처럼 보일 터.
무엇보다 헌터들은 온갖 제한과 억압 그리고 상실감을 품고 왔었지만, 이제는 그조차 없었다.
그들을 막을 건 없었고, 어비스에서 돌아올 때마다 느껴지는 상실감 대신 이제는 가진 능력을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는 충족감만 남았다.
헌터들이 미쳐 날뛸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
이쯤 되면 오히려 상황이 생각보다 최악이었다.
실제로 김지운이 생각한 최악의 상황은 이 경우였다. 김지운이 어비스넷을 이용했을 때 위치가 들키는 것을 매우 큰 리스크로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헌터는 클랜 단위로 움직이고, 클랜이 이곳을 차지하러 온다면 할 수 있는 것은 떠나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나마 삼족오 클랜이 나선 게 믿을 구석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삼족오 클랜이 움직였고, 그게 생각보다 상황이 좋다는 의미였다.
삼족오 클랜이 질서를 운운한 이상, 이제부터 헌터들은 선을 넘었을 경우 삼족오 클랜의 눈총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건 헌터들에게 매우 리스크가 큰일이었다.
삼족오 클랜의 눈총을 받은 클랜과 헌터가 어비스에서 어떤 응징을 당했는지, 김지운은 잘 알았으니까.
그 응징을 계획한 이도준, 그보다 훨씬 더 잘.
물론 어떤 상황이 됐건 해야 할 건 하나였다.
'집을 구한 이상, 이제 집을 지킬 힘이 필요하다.'
헌터답게 사냥을 하는 것.
그쯤이었다.
"어, 대장."
다운받았던 글들을 하나씩 읽던 이영후가 갑자기 김지운을 불렀다.
"혹시 모루뱀의 눈이란 걸 아십니까?"
그 말에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모를 리 없었다.
'모루뱀은 내가 최초로······.'
모루뱀, 그린 존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로 놈을 잡기 위해 김지운이 했던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니까.
'놈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더불어 모루뱀은 매우 희귀한 몬스터로 만났다는 소문조차 들은 이가 없었다.
사실 헌터나 클랜은 자신들이 사냥한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함구하고자 했다.
희귀하고, 가치 있는 몬스터일수록 더더욱.
별이란 제도가 등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헌터란 놈들이 뭘 해도 그냥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으니까, 뭐 좀 대단한 걸 공개하면 명예라도 주자, 해서 나온 게 별이었다.
하지만 그 별을 포기하면서까지 정보를 숨기는 몬스터도 있었다.
'삼족오 클랜도 전략 몬스터로 정체를 숨겼다.'
모루뱀이 그랬다.
놈을 잡으면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의 가치가 너무 높아서 삼족오 클랜도 정보를 은폐했다.
그런데 그걸 관광객 출신인 이영후가 말한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 의문에 이영후가 대답 대신 보고 있던 노트북을 보여줬다.
그러자 김지운은 볼 수 있었다.
3.
[제목 : 아이템 뿌립니다.]
[작성자 : 최강레이번스]
[내용 : 모루뱀의 눈이라고 유니크 등급 아이템이 있는데, 지금 그게 여의도에 존재한다.
어떻게 구했는지는 묻지 말고, 어떤 아이템인지도 묻지 마. 이 글을 왜 믿어야 하는지도 묻지 마. 이 글 쓰면서도 지금 격하게 후회 중이니까. 그걸 그냥 주는 게.
그래도 어차피 지금 가지지도 못하는 거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나을 것 같아서 위치 공개한다.
누구든 가져가라. 먼저 가져가면 임자고, 가진 사람은 나중에 나보면 밥이나 한 끼 사줘라.]
마치 게임 관련 웹사이트에서나 볼 법한 글.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글이었다.
그 글에 달린 댓글들도 마찬가지였다.
ㄴ ㅇㅇ : 이런 상황에서 낚시질을 하는 인간들이 있네.
ㄴ 123 : 인간적으로 지금 시국에 이런 지랄은 좀 그렇지 않아?
ㄴ ㅁㄴㅇ : 지금 인터넷 되는 걸 보면 상황 꽤 좋다는 건데 꼭 이렇게 사람을 놀려야 하냐?
모두가 이 글을 낚시로 여겼다.
ㄴ 술은맥캘란 : 이거 진짜라면 골 때리겠네.
ㄴ ㅇㅇ : 뭐야? 넌? 이거 뭔지 알아?
ㄴ 술은맥캘란 : 궁금해? 궁금하면 맥캘란 18년 한 병. 그거 주면 말해줄게.
ㄴ ㅇㅇ : 미친놈.
ㄴ 술은맥캘란 : 미친놈 아닌데? 미친년인데?
다른 댓글들도 있었지만, 그 역시 그냥 인터넷 게시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댓글놀이에 불과했다.
당연히 이영후도 보는 순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냥 여의도를 검색해서 나온 글들을 전부 다운로드 하다 보니 찾게 된 결과물일 뿐.
김지운에게 모루뱀의 눈을 아느냐고 질문을 던질 때만 하더라도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대장?"
그러나 노트북을 바라보는 김지운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는 순간, 그가 케이크를 먹던 것조차 멈추는 것을 보는 순간, 이영후의 표정도 달라졌다.
무언가 있음을.
그쯤에서 김지운이 말했다.
"이게 전부인가? 장소는?"
"아, 잠깐만요."
그렇기에 그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영후는 노트북의 커서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글에 사진 파일이 첨부되어서 사진 파일을 누르면 볼 수 있는데, 이건 그냥 무지성으로 다운받은 거라 그냥 텍스트랑 사진 파일을 통째로 묶여 있어서······ 아, 이거다."
그리고 이내 사진 하나를 띄웠다.
"어?"
그러자 등장한 사진을 보는 순간 모두의 얼굴은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반대로 대한민국 국민, 그중에서도 성인이라면 모르고 싶어도 모르기 힘든 것이었다.
"63빌딩?"
사진에 나온 것은 여의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제야 비로소 이영후는 댓글 반응을 알 수 있었다.
"아, 새끼. 낚시였네. 빌어먹을."
63빌딩을 아는 인간이라면 이 글이 그냥 정말 대놓고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김지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63빌딩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
'확실하다. 여기에 모루뱀의 눈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화 그룹 소유니까.'
삼족오 클랜이 창설할 당시 가장 큰 후원을 하던 기업 중 한 곳인 진화 그룹, 그런 진화 그룹이 소유한 건물이 바로 63빌딩이었다.
더불어 진화 그룹의 회장이 가장 사랑하는 건물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대한민국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으니까.
여하튼 삼족오 클랜은 투자자들에게 기꺼이 투자에 어울리는 대우를 해주었고, 그 대우란 대부분 어비스에서 온 아이템들이었다.
'27층 집무실이 있다.'
그리고 진화 그룹 회장은 63빌딩의 27층에 집무실을 두고 있었다.
27층인 이유는 2와 7이란 숫자가 재물운을 따르게 해준다고 해서, 궁합이 좋다고 해서 그랬다.
물론 여기까지가 진실이었고, 그곳에 아이템이 있을지 없을지는 상상의 영역이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어비스의 아이템은 그 가치 때문에 공개적인 장소에 보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63빌딩에 보관한다?
하물며 모루뱀의 눈을?
말도 안 되는 일.
'모루뱀의 눈이 수중에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하지만 반대로 그게 사실일 경우의 메리트는 김지운이 보기에 차원이 달라졌다.
그쯤에서 김지운이 말했다.
"이영후, 혹시 63빌딩 사진이 있나?"
"사진이요? 아."
그 말에 이영후가 바로 사진 파일 항목에 들어간 후에 사진 하나를 띄었다.
"여기 있습니다."
새하얀 안개에 가슴 언저리만을 빠끔히 내밀고 있는 63빌딩의 사진을.
'화이트존.'
63빌딩의 사진을 보는 순간 김지운의 머릿속에는 저울질이 끝났다.
"이영후, 63빌딩으로 갈 거다. 혹시 가는 길의 지도를 구할 수 있나?"
"지도요?"
그 질문에 이영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평소 때라면 정말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스마트폰을 켜서 앱만 작동시키면 여의도를 처음 오는 사람도 완벽하게 찾아갈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스마트폰은 먹통인 상황.
그리고 고작 큰 도로 하나를 거너는 것조차도 막대한 각오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지도를 얻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다.
접시를 통한 위성 통신을 위해서는 안개를 벗어나야만 하는 상태였으니까.
그쯤에서 이영후는 되짚었다.
'내비게이션으로 지도는 여러 번 봤어.'
자신의 기억을.
'얼핏.'
물론 제대로 지도를 본 적은 없었다. 내비게이션을 검색하면서 지도를 세세하게 보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기억력을 더듬던 이영후가 말했다.
"찾아갈 수 있습니다. 차로이긴 하지만."
"확실한가?"
"예, 자신 있습니다."
그 자신감에 김지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영후가 자신한다면 자신은 믿어주면 될 일.
한편 그 둘의 대화를 듣던 강현중과 고강수는 도무지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둘에게 김지운이 말했다.
"63빌딩으로 갈 거다."
그 말에 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둘에게 고민은 필요 없었다. 그건 김지운의 몫, 그들이 해야 할 건 하나였다.
"예."
명령을 따르는 것.
"당장 출발하는 겁니까?"
그리고 이어진 물음에 김지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가고 싶지만 어비스의 헌터들에게는 원정 사냥에 나서기 전에 꼭 해야 할 게 있었다.
"마무리요?"
"이곳을 노리는 오크놈들을."
여지를 제거하는 것.
"도그블린이 이곳을 내려왔다는 것은 도망쳤다는 의미다."
그리고 징조가 있었다.
"더 강한 존재들에게. 그게 아니면 도그블린들이 안개 밖으로 나올 일은 없으니까."
헌터들이 안개를 두려워하듯이 어비스의 몬스터들 역시 안개 밖을 두려워했으니까.
"오크 무리가 점차 이곳으로 온다는 의미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그 이유를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숫자는 제법 될 거다."
이미 김지운이 잡은 오크의 숫자가 서른 마리가 됐다.
이 정도면 오크 무리들 입장에서도 아주 크나큰 위협으로 여기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할 터.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을 움직일 터였다.
"운이 좋으면 오십여 마리 안팎, 재수가 없으면 천이 넘을 수도 있지."
서로의 운명을 건 싸움을 하게 된다는 의미.
"그러니까 오기 전에 잡는다."
그런 전투를 김지운은 자신의 집에서 치를 생각이 없었다.
공성전에서 수성이 유리하다고 하지만, 그건 정상적인 인간들의 전투에서의 이야기였다.
그것도 중세시대쯤의 이야기.
몬스터를 상대로는 지하 1층에서 바리게이트를 세우고, 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무엇보다 포위를 당했을 경우에는 도망친다, 라는 선택지조차 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설명을 김지운은 굳이 하지 않았다.
"고강수, 강현중."
단지 내밀뿐이었다.
"잘 부탁한다."
자신의 오른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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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아이템 뿌립니다 (3).
4.
어비스의 몬스터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었다.
무리를 이루는 것과 그러지 않는 것.
오크들은 전자였다.
그리고 그건 오크들이 나약하다는 증거였다.
크우, 크우!
2미터가 넘는 덩치가 근육질로 채워진, 그리고 조잡하지만 갑옷과 무기를 두른 그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보면 나약함이란 표현이 어울려 보이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즉, 오크들은 알았다.
자신들이 나약한 존재임을.
크우!
그렇기에 오크 68마리로 이루어진 오크 무리들은 주변을 잔뜩 경계한 채 움직였다.
바위처럼 뭉친 채.
방심한 틈을 노린다, 그런 건 불가능해 보였다.
크우?
그때였다.
킁킁, 크우!
오크 한 마리가 무언가 냄새를 맡더니 기분 좋은 듯한 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 오크 한 마리가 나서서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크우!
도그블린의 사체였다. 꽁꽁 얼어붙어서 그냥 돌멩이라고 해도 다를 게 없는 사체.
그러나 도그블린의 사체를 본 오크들의 눈빛에 즐거움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꾸르르르륵!
그도 그럴 것이 오크 무리는 지금 매우 배가 고팠다.
사실 배고픔은 어비스의 모든 것들이 경험하는 일이었다. 굶주림을 버티지 못하는 몬스터들은 애초에 생존이 불가능했다. 오크 역시 하루이틀 굶는다고 죽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문제는 지금 오크들이 있는 곳이 어비스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난생 처음 보는 특이한 세상에 왔고, 이 세상은 도무지 먹을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당장 목을 적실 물을 찾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도그블린의 사체가 나왔다?
크어!
심지어 도그블린의 사체는 하나도 아니고 제법 됐다. 스물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오크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경계를 풀고 도그블린의 사체에 손을 댔다.
그러나 완전하게 경계를 푼 건 아니었다.
쿵!
무언가 소리가 들리자, 오크들이 바로 반응했다.
먹던 것을 멈추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커헝, 커헝, 커헝!
갑자기 들려오는 그 소리에 오크들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커헝!
그건 도그블린의 소리였으니까.
동료의 피냄새를 맡고 몰려든 모양.
오크들 입장에서는 식량이, 그것도 따끈따끈한 생고기가 알아서 온 격이었다.
주저함은 없었다.
크우!
오크 중 덩치가 좋은 녀석 한 명이 덩치가 작은 녀석 다섯 마리에게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에 덩치 작은 다섯 마리가 두 눈을 부릅떴다.
크우!
그러자 이어진 덩치 큰 녀석의 외침에 다섯 마리가 손에 든 도그블린의 다리를 내려놓고는 그대로 일어섰다.
커헝, 커헝, 커헝!
도그블린의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경계심은 없었다.
오크에게 도그블린 따위는 걸어 다니는 식량에 불과할 따름이었으니까.
더군다나 들리는 숫자는 기껏해야 열 마리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오크 혼자서도 처리 가능한 수준.
그렇기에 경계심 따위는 없이 소리가 난 곳으로 다가간 오크 무리는 볼 수 있었다.
커헝, 커헝, 커헝!
작고 네모만 물체에서 도그블린의 소리가 나오는 것을.
크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사실에 오크들이 놀라는 순간, 그 순간이었다.
휘익!
무언가가 오크들의 목을 휘감았다.
꽈악!
그리고 그것은 단숨에 오크들의 목줄을, 숨통을 조였다.
크엑!
그 갑작스러운 옥죄임에 제대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오크 다섯 마리들.
그런 오크 다섯 마리들에게 안개를 헤치고 세 명이 등장했다.
저마다 손에 도끼를 든 채.
후우, 후우, 후우.
화재용 마스크를 쓴 채.
그렇게 등장한 이들은 잽싸게 오크들의 뒤로 다가간 후에 놈들의 도끼를 휘둘렀다.
놈들의 무릎 부근을 향해서.
퍼억!
그렇게 휘두른 도끼가 살과 근육을 찢고, 뼈에까지 닿았다.
끄르르르!
비명이 터져야 할 정도로 깊은 상처였지만, 숨통이 막힌 오크들은 비명 대신 얼굴이 터지려고 할 따름이었다.
물론 오크들은 마냥 당하지만 않았다. 숨통이 막혔어도 몸부림은 칠 수 있는 법.
그들이 몸부림을 치고자 했다.
달라붙는 인간놈들을 내쫓으려고 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한 번의 도끼질을 마치고는 그대로 물러났다.
그쯤이었다.
크우!
다른 오크들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동료들을 확인하러 왔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끄륵끄륵!
다리에 상처를 입은 채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뱉고 있는 동료들을.
그 순간 오크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뿐이었다.
오크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위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상처를 치료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럴 능력도 없었을뿐더러 알아서 살아남는 것, 그게 어비스의 규칙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지금 오크들이 다친 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다리였다.
팔이 잘렸으면 다른 한 손으로 돌이라도 던질 수 있겠지만 다리가 잘리면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치료할 때도 아니었다.
크우!
주변에 있는 위협을 경계할 때.
그쯤에서 놈이 움직였다.
크르르!
3미터를 훌쩍 넘기는 덩치, 오크 무리 중에 가장 거대한 덩치를 가진 녀석이.
다른 오크들과 달리 붉은 눈을 가진 녀석이.
이 오크 무리의 우두머리인 놈이 성큼성큼 쓰러진 부하들을 향해 오더니 이내 등허리에 차고 있는 도끼를 집어 들었다.
꽤 큰 도끼였으나, 3미터 덩치를 가진 오크가 들자 마치 손도끼처럼 보일 따름.
그런 손도끼로 우두머리 오크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오크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콰직!
단숨에 부하들을 처치했다.
그리고는 이내 소리쳤다.
크어어!
경고였다.
이런 어수룩한 수작에 당하지 말라는 경고.
다들 정신 바짝 차리라는 경고.
빠아앙!
그때 오크들의 앞에서,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아주 강렬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오크 대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크어어어!
소리를 내질렀다.
빠아아앙!
그에 대응하듯 클랙슨 소리가 났다. 더 크게.
빠아아앙!
빠아아앙!
심지어 이번에는 세 개였고, 그 사실에 오크 대장이 이를 꽉 물더니 그대로 도끼를 하늘 높이 들었다.
그 후에 팔을 내리면서 소리가 난 곳을 도끼로 겨누었다.
크르!
그러면서 짤막한 소리를 내뱉는 순간, 그 순간 오크 무리들이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크어어어!
총공세를 시작했다.
예외는 하나였다.
크어어!
지휘를 하는 우두머리만은 달려들지 않았다.
겁쟁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무리를 이루는 것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손발이 잘리는 게 아니라 머리를 지키는 것이었으니까.
어비스를 경험해 본 헌터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그도 알고 있었다.
스윽!
우두머리 오크의 등 뒤에 위치한 무수히 많은 차량들, 그 차량 중 하나인 벤츠 S클래스에서 조심스럽게 내리고 있는 사내.
'역시.'
김지운, 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군.'
그렇게 등장한 김지운, 그가 어렴풋이 보이는 오크 대장의 머리를 게슴츠레 바라봤다.
그러자 움직였다.
올가미가.
그러나 그건 피아노줄로 만들어진 올가미가 아니었다.
등산용 로프였다.
사람의 몸뚱이가 매달려도 거뜬히 버티는 로프!
꽈악!
그러한 로프 올가미가 그대로 오크 대장의 목덜미를 휘감았고, 그 순간 준비된 차량이 소리를 냈다.
위이이잉!
테슬라 모델 S 플레드!
초반 가속력으로는 그 어떤 슈퍼카들을 무시하는 그 차량이 전력을 다해 달렸다.
오크 대장의 목을 휘감은 올가미를 꼬리에 매단 채로.
크어어억!
그 갑작스러운 힘에 오크 대장이 그대로 뒤로 넘어지고는 거기서 끌려가기 시작했다.
크르르를!
그러나 오크 대장은 다른 오크들과 달랐다. 일단 목의 두께도, 근육도 남달랐다.
그리고 힘도 남달랐다.
놈은 끌려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숨통을 조인 올가미를 풀기 시작했다. 이미 손가락은 들어간 상태였다.
사실상 숨통이 어느 정도 확보된 상태였다.
질식사를 할 일은 없다는 의미.
물론 이 역시 김지운이 예상한 바였다.
그렇기에 준비했다.
크르르르!
테슬라 모델 S에 질질 끌려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오크 대장을 향해서 김지운이 총을 꺼내들었다.
타앙!
그러자 총성이 울렸다.
그런 총알은 단숨에 오크의 오른 눈알을 파고 들었다.
타앙!
타앙!
이후에도 두 번 더 들렸다.
그러나 총상은 한 곳뿐이었다.
오른쪽 눈알뿐.
그 찰나의 순간, 저항하고, 몸부림치고, 끌려가는 오크를 상대로 김지운은 단 한 점만을 사격했다.
놀라운 사격술이었다.
그러나 김지운은 감상에 젖지 않았다.
그에게는 딱히 대단한 게 아니었으니까.
또한 김지운에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김지운은 그저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러자 들렸다.
[붉은 눈의 오크를 처치했습니다.]
[붉은 눈의 오크가 도감에 등록됩니다.]
[근력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우두머리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가.
'이제 사냥을 할 수 있겠군.'
그리고 머리 잃은 졸개들을 상대로 전투가 아닌 사냥을 할 때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5.
어비스에서 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대개는 나약함의 증거였다.
그렇기에 무리 지어 다니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겁이 많았다.
그렇기에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는 다른 무엇보다 명령을 따르는 것을 중요시 했다.
명령에 대한 확실한 복종이 없다면, 나약한 것이 강력한 것에 덤비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으니까.
달리 말하면 우두머리를 잃는 순간 무리는 놀라울 정도로 무기력해지고는 했다.
해서 어비스의 헌터들은 말했다.
머리를 잡을 자신이 없으면 무리를 사냥하지 말라고.
김지운, 그가 오크 무리를 사냥하고자 할 때 핵심으로 잡은 것도 바로 그거였다.
우두머리를 잡는 것.
김지운이 펼친 수작들은 모두가 그것을 위한 수순이었고, 김지운은 우두머리를 잡아냈다.
그 후의 오크들은 더 이상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아니었다.
크우우우!
그저 겁에 질려 도망치는 고깃덩이일 뿐.
물론 그렇다고 무작정 덤벼들어서 잡을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물소무리는 사자를 보면 겁에 질려 도망치지만, 멋모르고 물소무리에 덤벼든 사자들은 사체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짓뭉개지는 것처럼, 도망치기 시작한 오크는 죽이는 건 도리어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김지운은 사전에 지령을 내렸다.
지령 하나, 올가미에 걸린 오크에게만 접근할 것.
지령 둘, 오크의 하체만을 노릴 것.
지령 셋, 큰 출혈이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물러날 것.
상처만 줄 수 있다면, 그 이상 무리할 이유가 없다고.
'다리를 다치면 잘 못 움직인다.'
특히 김지운이 강조한 건 기동력을 뺏는 것이었다.
일단 기동력을 뺏는 건 어비스에서도 매우 유효한 방법이었다. 다리가 멈춘 오크는 굳이 무리해서 접근할 필요도 없이, 먼 거리에서 활이든, 하다못해 돌이든 뭐든 던지면 됐으니까.
또한 출혈은 가장 확실한 사냥법이었다. 피를 흘리는 모든 것들에게 출혈은 시한폭탄의 버튼을 누른 것과 같았으니까.
'이 추위라면 더더욱.'
결정적으로 오크들이 등장한 곳은 밀림이나, 숲, 황무지 따위가 아니었다.
본 적 없는 자동차와 건물들이 즐비했으며, 그 사이로 이가 떨릴 만한 혹한의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큰 출혈이 있는 상태로 몇 분만 지나도 사실상 시체나 다름 없는 꼴이 됐다.
그럼 그때 잡으러 오면 됐다.
[오크를 처치했습니다.]
그렇게 김지운 파티가 오크 사냥을 마쳤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니었다.
추위는 오크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김지운 파티에게는 어비스의 안개라는 추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페널티가 있었다.
언제 좀비가 될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 마스크를 바꿔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김지운 파티는 해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달콤했다.
그건 엄청난 성과였다.
'2레벨이나 올랐다!'
일단 모두의 레벨이 올랐다.
이영후를 비롯해 고강수와 강현중 모두가 3레벨을 달성했다.
스탯은 모두 여지없이 근력에 투자했다.
'여기에 도감 옵션도 얻었고!'
또한 우두머리를 잡고 얻은 도감 옵션 효과를 적용하면, 이번 사냥에서만 무려 근력 스탯이 10포인트나 오른 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기도 다량 얻었다.
무슨 천하제일보검이나 전설에 나올 만한 발뭉 같은 아이템이 아니었고, 현대 기술로 만들어진 무기에 비하면 조잡했지만 반대로 지금 지하 1층의 생존자들이 가지고 있는 식칼과 대걸레 자루로 만든 장난감 따위와는 다르게 분명한 무기였다.
그중에서는 특별한 것도 있었다.
지금 김지운의 수중에 들어온 우두머리 오크의 도끼가 그랬다.
[천 마리를 죽인 도끼]
- 아이템 등급 : 유니크
- 3레벨 이상 착용 가능
- 공격력 : E+랭크
- 내구도 : F+랭크
- 착용 시 근력 +10
- 착용 시 체력 -4
- 오크 우두머리가 몬스터 천 마리를 사냥한 도끼다.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으며 동시에 강력한 원한이 깃들어 있다.
천 마리를 죽인 도끼.
'엄청난 게 나왔군.'
김지운 입장에서도 놀랄 만한 소득이었다.
그만큼 강력한 아이템이었다.
'아이템 레벨이 3레벨짜리인데 공격력이 E+랭크라니.'
근력 스탯만 10포인트를 올려주는 것도 그렇지만 김지운이 집중하는 건 공격 랭크였다.
10레벨 미만 아이템 중에서 E랭크 공격력을 가진 아이템도 구하기 쉽지 않았는데, 심지어 E+랭크다?
위력은 확실했다.
장담컨대 지금 김지운이 이 도끼를 들면 염력 능력 없이 오크와 1대1로 싸우는 것도 가능했다.
오크의 그 두꺼운 팔다리는 단숨에 자를 순 없겠지만, 그 근육 너머의 뼈까지는 건드릴 수 있을 테니까.
그때였다.
툭툭!
이영후가 다급하게 다가오더니 김지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는 건네줬다.
[룬(파워업)]
- 등급 : 레어
- 잠시 동안 마력을 소모해 근력을 높인다. 스킬 랭크가 오를수록 근력 상승 스탯이 늘어난다.
- 1 레벨 이상 습득 가능
- 우둔한 사냥꾼만 습득 가능.
스킬룬을.
'파워업이라니.'
더불어 매우 좋은 스킬이었다.
그 귀한 스킬슬롯에 기꺼이 넣을 수 있는 스킬.
어비스 시대에서도 값어치가 넘쳤고, 지금 같은 시대에서는 시대에서는 감히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김지운이 건네줬다.
스윽!
다름 아닌 고강수한테.
'이건?'
그것을 본 고강수의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이 물건의 값어치를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지만, 고강수는 본래 김지운에게 이빨을 들이밀던 자였다.
그것도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세상이 아포칼립스로 변하고 이제 하루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전투를 같이 치른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이런 걸 준다?
고강수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일.
반면 김지운에게는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내가 가져도 의미가 없다.'
일단 김지운 입장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거래를 위해 남겨둔다? 이 역시 그리 현명한 생각은 아니었다. 거래를 할 대상도 없을 뿐더러, 거래를 하려는 대상이 그 거래를 준수하리란 보장은 더더욱 없었다.
오히려 약탈의 대상이 될 터.
그리고 기본적으로 어비스에서 얻은 아이템은 그 자리에서 가장 쓸모 있는 자가 가지는 게 규칙이었다.
과거에는 그랬다.
가지고 와서 판다, 그런 생각 따윈 아무도 하지 않았다. 특히 스킬 룬과 아이템은 그 자리에서 바로 쓰는 게 상책이었다. 어비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목숨이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내 목을 노릴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몬스터 목을 노리겠지.'
고강수가 혹여 배신을 하더라도 그건 나중의 이야기.
'그리고 고강수는 기대 이상이다.'
결정적으로 김지운이 평가한 고강수의 재능은 그가 봐온 우둔한 사냥꾼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일단 본능적으로 몬스터의 약점을 노렸다.
또한 강한 몬스터 앞에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막싸움도 잘 하고.'
결정적으로 고강수의 싸움은 본능에 충실했다.
이게 강현중과의 차이점이었다.
고강수와 강현중, 둘은 일반인 기준에서는 엄청난 강자였다. 대신 스타일은 달랐다.
고강수가 길거리 싸움꾼이라면, 강현중은 훈련된 군인이었다.
몬스터와 달라붙어서 싸우는 소위 개싸움에서는 고강수가 훨씬 더 능력을 발휘했다.
여하튼 김지운 입장에서는 든든한 일이었다.
'파워업에 도끼를 들면, 이제 도그블린 정도는 그냥 도끼질만으로도 잡을 수 있겠군.'
강력한 무기가 생긴 셈.
고민은 여기까지였다.
고민을 더 하더라도 굳이 여기서 할 필요는 없었다.
'돌아간다.'
이제 그들에겐 돌아갈 집이 있었으니까.
6.
김지운 파티가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움직인 건 고강수였다.
"회수팀."
그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열 명이었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따뜻하게 옷을 입은 그들을 데리고 고강수가 다시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고강수가 말했던 대로 회수팀이었다.
밖으로 나가서 이번에 얻은 성과를 가지고 올 자들.
갑작스러운 준비는 아니었다.
식품관을 점령할 당시부터 고강수가 준비했던 카드였다. 생존을 위해서는 외부의 물건들을 회수하는 게 필수였으니까.
물론 처음에는 외부 상황을 몰랐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안개에서 버티는 방법도 어느 정도 알았고, 어비스 좀비를 피해 가는 법도 어느 정도 알게 됐다.
"모두 마스크를 쓰도록."
무엇보다 그들을 이끄는 이가 고강수였다.
더더욱 강해진 고강수!
그들은 무리 없이 밖으로 나가서 아이템들을 회수해 오기 시작했다.
그 사실에 생존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거 괜찮은 거 같은데?"
"괴물도 잡아 오고, 밖으로도 나가고."
"여기서 버티다 보면 구조대가 오겠지?"
외부 사정을 알지 못하는 그들 입장에서는 외출이 가능하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래서였다.
김지운 파티가 없는 와중에도 모두가 통솔이 된 것은.
자신들을 대신해 위기를 감수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들이 있는데 소란을 피울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생각보다 잘 돌아가네요?"
"무서우니까."
"하긴, 그렇죠."
물론 고강수, 그의 공포가 아주 큰 역할을 했다.
망설임없이 사람 피를 볼 줄 아는 그의 존재는 모두에게 후환을 고민케 했으니까.
"그래도 소설이나 영화 보면 여기서 문제가 막 터지던데, 다행히도 당분간은 조용하겠네요."
그 사실에 미소를 머금는 이영후.
반면 김지운은 달랐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전기를 잃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곳이 더더욱 추워질 거다. 무엇보다 대부분은 모른다."
그가 보기에 상황은 매우 안 좋았다.
"이곳이 집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곳을 떠나는 것을 희망으로 삼고 있지만, 이제 그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쯤에서 이영후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솔직히 저 생존자들, 대장에게는 짐 아닙니까?"
냉혹한 이야기지만, 김지운 입장에서는 지금 생존자들 중에 90퍼센트가 필요 없는 짐이었다.
극단적으로 그들을 그냥 여기서 쫓아내면 식량을 비롯해서 모든 부분이 풍족해졌다.
생존 면에서는 그게 정답이었다.
그리고 헌터들은 다른 무엇보다 그 생존을 최우선으로 꼽는 자들이었다.
김지운도 알았다.
"어비스에서 약한 몬스터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무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였다.
"도그블린도, 오크도 무리를 이루지."
김지운이 생존자들을 살려둔 것은.
"어쩌면 여의도의 생존자들은 이들이 전부일 수도 있고."
이제는 사람이 매우 귀한 시대가 될 테니까.
그때였다.
으아아앙!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쯧쯧."
"저러다 괴물 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 소리에 몇몇은 혀를 찼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괴물이 넘치는 상황에서 아이의 울음 때문에 모두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김지운이 말한 그 인적자원에 8개월짜리 아기는 포함될 수가 없었다.
"아이를 살려두시는 것도 이유가 있어서겠죠?"
아주 냉정한 현실을 생각하자면 아이를 버리는 게 모두를 위한 답이 될 수도 있다는 말.
"생존에는 도움이 되진 않지."
"예?"
김지운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가 그 절체절명의 순간, 도망치고자 했을 때 도망치지 않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 이유는 하나였다.
"단지 저 작은 아이를 버리면서까지 살 바에는 그냥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뿐."
아이를 버리고 도망치는 게 아이를 구하다 죽는 것보다 더 좆같으니까.
김지운은 그랬다.
군인 시절에도 그는 중대한 임무를 수없이 수행했지만, 그건 엄청난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해야 할 일 있었고, 그 과정에서 옆에 있는 동료를, 부하를 죽게 놔두고 싶지 않았을 뿐.
헌터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어찌 보면 그게 전부였다.
'역시.'
그 대목에서 이영후는 김지운이 어떤 인물인 줄 알 수 있었다.
'믿을 건 대장뿐이다.'
그런 이영후에게 김지운이 말했다.
"그럼 슬슬 준비한다."
"예?"
"고강수가 회수를 마치면 63빌딩으로 간다."
8.
고강수가 회수를 마친 이후 다시 파티가 구성됐다.
멤버는 똑같았다.
김지운을 포함한 4명.
그런 그들의 63빌딩 원정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진행도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상황이 앞서 서와는 달랐다.
일단 낮이었다.
밤과는 다르게 어비스 좀비나 몬스터들이 안개 너머로 어렴풋하게나마 보였다.
그리고 경험이 달랐다.
오크 무리마저 상대해 본 그들 입장에서 이제 어비스 좀비는 두려움보다는 조심해야 할 대상이었다.
결정적으로 김지운이 있었다.
스스스스!
치실로 펼친 거미줄은 그 어떤 위험도 조우하지 않게 도와줬고, 이제는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
덕분에 모두는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매우 순조롭게 63빌딩에 도달할 수 있었다.
'괜히 시간 끌 필요는 없다.'
그리고 김지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로 63빌딩에 진입한 후에 27층에서 목표물을 탈취할 예정이었다.
'최대한 빨리······.'
분명 그랬다.
자신의 앞에 있는 시체 한 구를 보기 전까지는.
'이건?'
그것을 보는 순간 김지운이 모두를 멈추게 했고, 그 사실에 모두는 당혹감을 느꼈다.
63빌딩이 코앞인데 멈추라니?
그런 그들에게 김지운은 손가락으로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가리킨 후에 스마트폰으로 말해줬다.
[시체에 총상이 있다.]
그 사실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이곳은 대한민국, 총에 대한 제약이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심한 곳이었다.
하물며 여의도 아닌가?
심지어 김지운은 말했다.
[권총이 아니다.]
총상의 크기가 경찰들이 가지고 있는 권총 수준이 아님을.
그에 대해 강현중이 바로 대답했다.
[K2 같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투투!
총성이 들렸고, 모두가 총성이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고개를 들었다.
'63빌딩 방향이다.'
총성이 난 방향은 그들이 가려는 목적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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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3빌딩 (1).
1.
총성, 그것도 권총이 아닌 자동소총의 총성이 들리는 순간 김지운 파티는 자세를 낮췄다.
긴장했다.
그러나 긴장감의 방식은 달랐다.
이영후와 고강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사실에 긴장했다.
반면 김지운과 강현중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군.'
'예, 빌딩 GOP같습니다.'
수도권 내의 초고층 빌딩에는 수도권 방공을 지키기 위한 군부대가 상주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군부대로, 그 무장 상태는 꽤 강력했다.
발칸, 그러니까 게틀링건은 물론 대공, 지대공 미사일까지!
당연히 그곳에서 근무를 하는 군인들 역시 K2소총을 기본으로 무장 상태로 지냈다.
그리고 여의도의 경우에는 63빌딩에 빌딩 GOP가 있었다.
정확히는 한때 있었었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았었나?]
김지운의 기억에 오류가 생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알기로는 여의도에 초고층 건물들이, 더 큰 건물들이 생기면서 그곳으로 부대를 옮겼었다.
그러한 김지운의 질문에 강현중이 스마트폰으로 대답했다.
[북한의 드론 도발 이후 조사 결과 심각한 테러 계획이 발견되어 추가 설치했습니다.]
생각보다 운영도 쉽지 않고, 반발도 많은 빌딩 GOP를 추가로 설치할 정도라면 군이 파악한 그 위협이 정말 심각하다는 의미.
그러나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 시국에 북한의 테러를 염두에 두긴 해야겠지만, 드론을 날리진 않을 테니까.
그럴 여유도 없을 테니까.
그도 그럴 것이 한국만 지금 이 상태였다면, 북한은 어비스 아포칼립스를 경험하지 않는 상태였다면 진작에 그들이 그토록 울부짖던 서울 불바다의 꿈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보다 더 한 꼴이거나, 그들이 쏘려고 한 포탄들이 방산비리 때문에 불발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의미였다.
'예상 밖이다.'
어쨌거나 김지운 입장에서 이 총성은 그가 알던 지식과 다른 부분이었다.
은퇴 이후 그런 쪽의 정보는 들어오지도 않았고,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강현중을 탓할 수도 없었다.
이곳에 빌딩 GOP가 있다, 그러니까 무기를 가지러 가자, 그런 사고가 쉽게 진행될 리 만무.
결정적으로 1층에 생존자가 있으리란 생각을 모두가 못했다.
일단 사진으로 봤을 때 63빌딩은 안개에 덮여 있었다.
그리고 63빌딩은 호텔과 다르게 숙박 시절이 아니었다. 대부분 층이 사무용 건물이었고, 최상층과 지상 그리고 지하층에 관광객을 위한 설비가 있을 뿐.
물론 연말이라고 해서 군부대가 문 닫고 개점휴업을 하진 않았을 테지만, 빌딩 GOP는 표현대로 GOP, 아예 그냥 다른 공간이었다. 허가 없이 층 하나만 내려와도 탈영이 되는 곳. 분명 대부분의 군인들이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 아래에는 안개가 깔렸을 테고.
정리하면 사실상 그곳에 갇힌 셈이었다.
혹은 멋모르고 안개로 가득 찬 63빌딩을 내려오다가 어비스의 방랑자가 되었거나.
이렇게 1층에서 총을 쏠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김지운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자욱한 안개 속에서 총을 쏜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헌터가 있을 경우였다. 헌터가 63빌딩에 우연히 방문을 했는데, 어비스의 등장을 눈치 채고 이내 빌딩 GOP를 점거 혹은 그곳에 합류한 후에 총을 가지고 내려왔을 경우.
그러나 김지운은 그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김지운은 봤다.
'헌터라면 그 아까운 총알을 어비스 좀비의 몸뚱이에 박아넣을 리가 없다.'
총상이 난 게 누구도 아닌 어비스 좀비임을.
살아있을 때의 총상도 아니었다.
살아있다면 상처에 출혈이 지독해야 하지만, 피범벅이 되어야 하지만 시체는 그저 총상만 있었다.
어비스 좀비일 때 맞았다는 의미.
그럼 이제 남은 경우는 하나다.
김지운, 그가 총성이 난 방향을 향해 혼자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역시.'
그 후에 그는 볼 수 있었다.
'오아시스군.'
안개들이 63빌딩 1층에만 범접하지 못하는 것을.
2.
상황 파악은 금방 이루어졌다.
안개, 그 속에서 안개가 없는 곳을 관찰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으니까.
'63빌딩 1층에 생존자들이 있다. 하지만 바리게이트나 군대는 보이지 않는다.'
오아시스에 생존자들이 모여 있으며, 그중에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총을 든 이들이 있다.
'계획대로 진행한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 김지운 파티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목표는 1층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한 63빌딩 생존자들은 안개가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나오지 않는 중이었다.
안개를 통해 움직이면 마주칠 일은 결단코 없다는 의미.
'대신 지하 주차장을 통해서 움직인다.'
지상 1층이 아닌 지하 주차장을 통해 움직이는 것.
시간이 좀 더 걸리는 일이었지만, 총을 들고 경계태세인 생존자 무리들과 접촉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총이란 무기는 그만큼 위험했다.
더욱이 지금 상황은 보통 상황이 아니었다. 백기를 들고 저들에게 간다고 하더라도 대화 대신 총알부터 날아올 터.
'시간이 걸리더라도 안전하게.'
김지운, 그가 백화점 바로 옆에 붙은 여의도 최고층 건물인 파크원, 그 정상층에 위치한 빌딩 GOP를 노리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곳에도 무기가 있겠지만, 그곳에 무기를 가지러 가는 건 콘래드 호텔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콘래드 호텔은 땅에 떨어진 돈을 줍는 수준이었고, 빌딩 GOP로 무기를 가지러 것은 은행 금고 안에 있는 돈을 줍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그냥 금고가 아니라 닫힌 금고를 열고.
더군다나 빌딩 GOP는 특성상 계단이 아니면 진입이 불가능했다.
그곳을 진을 치고 있는다?
김지운이라고 해도 뚫을 방법은 없었다.
미션 임파서블에 나오는 톰크루즈처럼 유리창을 깬 후에 유리창을 타고 올라가는 게 아닌 이상.
그리고 김지운은 그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금은 힘들지만 근력 스탯이 어느 정도 갖춰지고, 장비만 구하면 크게 어려울 건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중요한 건 총을 들고 경계하는 무리들에게 가까이 갈 이유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보단 어비스의 좀비가 훨씬 더 안전했으니까.
그렇게 김지운 파티는 예정과 다르게 지하 주차장을 통해 이동한 후에 지하 주차장에서 건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에 도달했다.
그리고 김지운이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끼이이!
조심스럽게.
그러자 보이는 텅 빈 공간, 엘리베이터를 움직이게 하는 줄들이 늘어선 그곳을 향해 김지운은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그리고 올라갈 준비를 했다.
27층까지.
그건 언뜻 보면 미친 짓이었다.
그냥 줄을 잡고 버티는 것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인데, 그 줄을 잡고 27층까지 간다?
올림픽 클래스 선수라도 쉽지 않은 일.
김지운도 알았다.
그래서 줄을 잡았다.
꽉!
그의 지금 육체 능력 수준은 올림픽 클래스를 벗어났으니까.
일단 김지운은 5레벨을 찍고, 모든 스탯을 근력에 투자한 상태였다. 여기에 도감 옵션 효과로 근력 스탯이 33포인트인 상황.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지운, 그의 등에는 이번에 얻은 오크 대장의 도끼가 있었다.
근력을 무려 10포인트나 올려주는!
도합 43포인트인 김지운의 근력 수치는 지금 줄을 타고 오르는 것쯤은 정말 우습게 만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김지운은 무리하지 않았다. 7층까지 올라갔다.
그 후에 벽을 향해 가볍게 점프한 후에 벽에 튀어나온 엘리베이터 통로 설비를 암벽 등반하듯 잡고는 엘리베이터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역시 아무도 없군.'
평소에는 사무실로 사용되던 7층에는 어떤 낌새도 없었다.
연말에 출근하고 싶어 하는 이는 없었으니까.
거기서 김지운은 준비해 온 로프를 지하 1층을 향해 던졌다.
이제는 나머지 동료들이 올라올 때.
물론 그들의 근력 스탯은 김지운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그냥 하늘 높게 솟은 줄을 잡고 오르는 것과 달리 김지운이 던진 로프를 잡고 벽을 바닥 삼아 올라오는 것에는 근력 스탯 20포인트 정도면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그 작업을 이제 네 번 반복했을 때 김지운 파티는 목표인 27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곳, 63빌딩의 주인인 진화 그룹 회장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 도달했다.
그러나 김지운은 엘리베이터 문을 열기 전에 낌새를 봤다.
섣불리 들어가지 않았다.
'평소라면 문제는 없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이곳 63빌딩 건물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바로 27층이었다.
'사실상 일반인은 들어갈 수도 없으니까.'
일단 회장실은 계단을 통해서 출입이 불가능했다.
당연한 게 어디 공단의 중소기업 회장실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재벌그룹의 총수가 있는 곳 아닌가?
계단으로 들어갈 때 잠금 장치가 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
평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사실상 엘리베이터뿐이지만, 이 역시 조건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일반인들이 엘리베이터 27층을 누르는 건 불가능했다.
누가 실수로 27층을 누르고 열리는 순간 급하게 똥 마려운데 화장실 어디죠? 라고 말하는 꼴을 회장이 보면 그 아랫사람들 처지가 그리 좋진 않을 테니까.
실시간으로 조치를 할 터.
연말이라면 더더욱 폐쇄적으로 변할 터였다.
사실상 경비원을 두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온갖 경비 시스템이 있겠지만.'
요즘 시대에는 사람보다 믿음직한 기계들이 넘쳤으니까.
정말 이곳에 누군가 들어오는 순간 모든 상황을 통보하는 최첨단 경비 시스템이 있을 터.
물론 지금 이 아포칼립스 세상에서는 정말 조금도 쓸모 없는 시스템이었다.
그럼에도 김지운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은 것은 글 때문이었다.
이곳은 김지운이 알고 온 곳이 아니었다.
'함정일 수도 있고.'
어비스넷의 게시판 글을 읽고 온 곳이었다.
'헌터들이 있을 수도 있다.'
무엇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의미.
사실 보통 경우라면 김지운도 움직이진 않았을 것이다.
확률이 낮더라도 리스크가 컸으니까.
그러나 지금 김지운이 믿는 구석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모든 헌터들의 능력치가 초기화됐다는 점이었다. 그건 곧 김지운이 당장 밀릴 이유는 없다는 의미.
두 번째 믿음은 총이었다. 헌터들 중에는 강한 헌터들은 많지만 총기에 능숙한 헌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능숙해질 이유가 없었다. 어비스에서는 총을 쏠 일이 조금도 없으니까.
물론 믿을 수 있는 구석일 뿐, 이것을 맹신할 순 없었다.
김지운은 두 눈을 감고 낌새를 느꼈다.
숨 소리를 죽이며 모든 감각을 문 너머로 집중했다.
그런 김지운이 이내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김지운은 바로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염력을 이용해 카메라 하나를 움직였다.
고프로 카메라, 격렬하게 움직일 때 사용되는 액션캠을.
김지운은 액션캠을 이용해 천천히 안개 속을, 회장실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기꺼이 시간을 사용했다.
목숨보다 귀한 건 없었으니까.
그렇게 탐색을 마친 후에 액션캠을 회수한 김지운이 액션캠에 달린 작은 모니터를 통해서 상황을 살폈다.
안개로 자욱한 회장실 내부의 상황을.
그제야 비로소 김지운은 27층에 발을 들여놓았다.
물론 바로 움직이진 않았다. 자세를 최대한 낮췄다. 바닥을 기어다니는 것처럼. 그러면서 거미줄을 펼쳤다.
그렇게 주변을 한 번 더 수색한 후에야 비로소 김지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전하다.'
이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
이후 김지운의 신호를 받은 그의 동료들이 뒤를 따라 27층에 올라왔다.
대화는 없었다.
시간이 금보다 귀한 상황에서 해야 할 건 이곳 회장실을 헤집는 것밖에 없으니까.
모두가 회장실 곳곳을 누비며 다녔다.
그러면서 모든 걸 살펴봤다.
모루뱀의 눈이 아니더라도, 재벌 그룹 총수의 회장실이라면 다른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진화 그룹의 회장은 삼족오 클랜의 열렬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아이템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하지만 막상 이곳을 아무리 헤집어도 아이템으로 보이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모르고 넘어간 게 아니었다.
헌터의 시스템은 근처에 아이템이 있을 경우에 알림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려줬다.
일종의 레이더 시스템인 셈.
손이 닿을 만한 거리 내에 접근한다면 모두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예외가 있긴 했다.
'설마.'
상자 같이 밀폐된 곳에 있는 아이템은 근처에 가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쯤에서 강현중이 김지운에게 신호를 줬고, 그 신호에 김지운을 비롯해 모두가 모였다.
그런 강현중이 가리키는 곳에는 고급스럽기 그지없는 검은색 금고 하나가 있었다.
매우 묵직해 보이는 금고가.
그 금고를 보는 순간 이영후와 고강수의 표정이 굳었다.
찾는 게 이 안에 있다면 사실상 지금 시점에서 이것을 구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금고는 폭약을 터뜨려도 멀쩡할 테니까.
금고를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금고의 무게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 하물며 이건 그냥 금고도 아니고 재벌 총수의 금고였다. 어떤 조치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
반면 김지운은 달랐다.
그는 금고를 보는 순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고작 여기에 보관했을 리가 없다.'
알았으니까.
'어비스의 기념품을.'
만약 정말 어비스의 기념품을 노리고 도둑들이 들어왔다면 금고는 그리 믿을 만한 선택지가 못 됐다.
더 나아가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이곳에 두지를 않았을 것이다.
'트로피를.'
즉, 진화 그룹 회장이 이곳에 모루뱀의 눈을 가져왔다면 그건 보람을 느끼기 위함이었다.
보는 순간 자신의 선택에, 투자에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
그런 트로피라면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었을 터.
그쯤이었다.
'여기가 회장 자리인가?'
김지운이 금고 앞쪽에 있는 회장석에 앉았다.
푹신하고 안락한 감촉이 온몸을 감쌌다.
자연스레 몸이 적당히 뒤로 넘어갔다.
편안한 자세가 갖추어졌다.
그 순간 김지운은 볼 수 있었다.
천장에 있는 예술품과 같은 조명, 그 조명 사이에 특별하게 녀석을.
특별하게 제작된 유리 안에서 마치 뱀의 눈처럼 가로로 갈라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을.
'사안(蛇眼) 스킬을 여기서 손에 넣게 될 줄이야.'
김지운, 그가 원하던 것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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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3빌딩 (2).
3.
'이게 그건가?'
모루뱀의 눈의 크기는 어린 아이의 주먹만 했다.
그뿐이었다.
'평범해 보이는데.'
그 외의 특별해 보이는 점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뱀의 눈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냥 뱀의 눈을 닮은 돌멩이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어?'
김지운이 모루뱀의 눈을 감싸고 있던 유리를 제거하는 순간 모두의 눈앞에는 창이 떴다.
[모루뱀의 눈]
- 아이템 등급 : 유니크
- 5레벨 이상 사용 가능
- 공격력 : F-랭크
- 내구도 : C-랭크
- 보유 시 마력+10
- 보유 시 사안(蛇眼) 스킬 사용 가능
- 모루뱀의 눈 중 하나다. 매우 단단하며, 신비한 힘이 담겨 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모두는 놀랐다.
그러나 그 놀람은 그냥 창이 떴다는 사실에 놀람일 뿐, 이 옵션에 대한 놀람이 아니었다.
예외는 한 명이었다.
"씨이발!"
이영후는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질렀다.
"헙!"
그리고는 잽싸게 입을 제 손으로 막았다.
물론 무의미한 짓이었다.
모두는 마스크를, 그것도 화재용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니까.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는.
달리 말하면 이영후가 그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이 모루뱀의 눈은 엄청난 아이템이었다.
'뱀눈이라니!'
사안 스킬의 가치 때문이었다.
어비스에서 특정 몬스터를 잡거나 아이템을 통해서만 사용 가능한 사안 스킬의 능력은 간단했다.
열화상 카메라를 쓴 것처럼 눈으로 열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
이 설명을 듣는 순간 어비스의 관광객이나 헌터들은 이 스킬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만능인 스킬은 아니었다.
일단 사안 스킬은 마력 소모량이 엄청났다. 기본적으로 마력 포인트 1포인트로 1분 정도 유지가 가능한 수준.
또한 쿨타임도 적지 않았다. 아이템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100분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비스의 안개를 꿰뚫어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사안 스킬이 담긴 아이템은 돈으로 거래되는 경우가 거의 존재치 않았다.
거래가 되더라도 물물 교환이 기본이었고, 그마저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클랜 입장에서는 가진 사안 스킬 개수가 전력을 가늠하는 요소 중 하나였으니까.
'이걸 알고?'
김지운이 적잖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63빌딩에 온 것도 그 가치 때문이었다.
물론 달리 말하면 열화상 카메라가 존재하는 지구에서는 그 가치가 엄청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열화상 카메라가 저렴한 건 아니지만, 군부대나 특수 현장에서 구하고자 하면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단, 지금 시점에서 군부대를 공격하는 게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을 구하는 것보단 이게 나았다.
무엇보다 김지운은 생각했다.
'어쩌면 야간투시경도 안 통할 수 있다.'
어비스의 안개 속에서 통신장비도 먹통이 된 상황인데, 야간투시경이나 열화상 카메라가 먹히지 않을 가능성도 있음을.
반면 모루뱀의 눈은 이미 어비스의 안개에서 그 능력이 검증된 물건이었다.
만약 정말 야간투시경이 안개에서 통하지 않는다면 모루뱀의 눈이 가진 가치는 더욱 치솟을 터.
'열 감지도 좋지만.'
또한 김지운은 알았다.
'마력 스탯 증가는 더 좋다.'
여기서 더 중요한 건 다름 아니라 마력 증가 옵션임을.
당장 김지운의 마력 스탯은 단 1포인트에 불과했고, 그로 인해 염력 사용에 한계가 명백했다.
그런데 당장 마력 스탯이 11포인트가 된다면?
염력 사용의 폭이 차원이 달라질 터.
어쨌거나 이걸로 성과는 전부 챙겼다.
김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 의미 있는 것은 구할 수 없을 터.
그럼 남은 것은 하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게 본래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지운의 생각은 달랐다.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김지운, 그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등정을 한다.'
4.
63빌딩 41층.
그곳에 도달했을 때 김지운 파티는 안개가 펼쳐지지 않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모두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후우."
그리고 소리를 냈다.
"정말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귀를 기울여야 간신히 구분이 가능할 정도.
그래도 목소리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모두가 숨을 마음껏 편하게 쉴 수 있다는 사실에 활기가 돌았다.
"브리핑을 시작한다."
물론 김지운이 이곳에 올라온 것은 팀의 활기를 넣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층에 올라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내려갈 때도 더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
무엇보다 어떤 일이 있을지 몰랐다.
원하는 목적을 이루었으면 오아시스로 돌아올 것, 그게 어비스의 철칙이었다.
여유가 있다고 나대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뒤지는 게 바로 어비스란 곳이었으니까.
김지운이 이제까지 목숨을 부지했던 비결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운이 계획을 수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상황이 달라졌다. 오아시스가 발견됐다."
일단 가장 큰 이유는 오아시스의 등장이었다.
현 시점에서 오아시스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이템들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라면, 오아시스는 생존에 직결됐으니까.
무엇보다 김지운이 봤을 때 63빌딩의 위치는 그들이 있는 백화점보다 나았다.
"이곳은 주변에 큰 건물도 적고, 무엇보다 가까운 거리에 한강이 존재한다."
특히 한강과의 근접성은 매우 큰 이점이었다.
식수로 쓴다,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어비스 좀비가 넘치는 지상과 달리 한강은 어비스 좀비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몬스터들의 공격도 피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몬스터들도 굳이 물에 뛰어들면서 사냥감을 쫓지는 않았으니까.
결정적으로 한강은 그냥 도심에 흐르는 작은 강이 아니었다. 빠지면 사람이 얼마든지 죽고도 남을 만큼 넓고, 거대한 강이었다.
"무기도 있다."
또 하나의 메리트는 본래대로라면 어찌하기 힘든 빌딩 GOP의 화력과 군인들이 지상에 있다는 점이었다.
필시 군인들이 무기를 챙기고 지상 1층으로 내려왔다는 의미.
상황은 얼추 이해가 됐다.
갑자기 몬스터가 등장했고, 그 사실에 군인들이 다급하게 무장을 한 채 밑으로 내려왔을 터.
그 후에 어비스의 안개가 등장하고, 안개의 위험성을 판단한 군인들을 중심으로 지상 1층에 진지를 구축했을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메리트가 생겼다.
"빌딩 GOP가 비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는 쉽게 군부대를 털 수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지상의 군인들에게서 무기를 노획할 수도 있다."
혹은 탈취도 가능했다.
뭐가 됐든 이건 김지운이 권총을 손에 넣은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메리트였다.
빌딩 GOP에 있는 화력이라면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그냥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이것을 놓고 그냥 떠나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웠다.
"계획대로라면 백화점에서 정비를 하고 오는 거지만."
특히 김지운이 걱정하는 건 그 부분이었다.
"이곳은 노출된 상태다."
어비스넷에 63빌딩이 언급됐다는 것.
더군다나 그 게시글을 보고 이곳을 알 정도라면 어비스 헌터 출신일 게 분명했고,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자라면 그 실력이 보통 이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클랜이 올 수도 있다."
또한 헌터로 구성된 무리가 올 수도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곳에 오는 순간 이곳의 메리트를 확인한 클랜은 63빌딩을 바로 점령할 게 뻔했다.
그때는 김지운네 파티가 뚫고 가는 게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들이 여기를 거점을 삼으면 필연적으로 우리 쪽으로 오게 될 거다."
오히려 그때부터는 수성전을 준비해야 했다.
"어비스 헌터들이 자동소총을 비롯해 무기를 들고."
김지운은 그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건 비유가 아니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정말 도망치겠다는 의미였다.
여러모로 시간이 생명이라는 의미.
그 사실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부터 할까요?"
"1층부터다. 빌딩 GOP에 대기 병력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 오히려 우리가 당한다."
우선순위 역시 고민할 건 없었다.
"협상 방법은 어떻게 됩니까?"
남은 건 하나, 방법.
"상대가 당나귀라면 다행이지만."
물론 김지운은 여기서 당근을 주고 당나귀를 꼬시는 방법을 쓸 생각이 없었다.
"그럴 것 같지는 않군."
지금 상황에서 무기를 버리고 머리 위에 손을 든 채 다가가서 우리는 당신을 헤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라는 제스처를 보이자 상대방이 감동의 눈물을 흘릴 거 같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그 경우가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상대방이 미친놈이라는 증거가 될 테니까.
"일단 상황부터 파악한다."
어쨌거나 당근을 주든 채찍을 휘두르든 그 전에 파악해야 할 건 1층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려울 게 없었다.
김지운은 곧바로 2층으로 내려간 후에 그대로 밖으로 고프로를 던졌다.
그렇게 던진 고프로가 마치 파리처럼 1층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모두는 1층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아, 심심하네. 야, 너. 밖으로 나가."
5.
나가는 순간 좀비가 되어버리는 안개 속에 갇힌 상황.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괴물.
외부와의 통신조차 불가능하고, 이렇다 할 구조대나 어떤 외부 소식도 들어오지 않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무기라는 아주 강력한 무기를 든 군인이 내릴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많은 이들은 대답할 것이다.
살인, 강간, 약탈을 일삼는 무법자가 될 거라고.
그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그러나 막상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 열 명 중 아홉 명은 사람을 구하고자 움직였다.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는 도리어 섣불리 무법자가 될 수 없었으니까.
또한 군인이란 건 그저 단순히 총 든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쉼 없이 군인에 걸맞은 교육을 했고, 훈련을 받았다.
빌어먹을 군대에 끌려와서 시간 날린 것도 좆같은데, 전쟁 터지면 난 해외로 튈 거다 개새끼들아! 라는 말을 쉴 새 없이 하더라도 막상 상황이 오면 군인답게 행동했다.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63빌딩의 GOP에 있는 군인들도 그랬다.
연말, 건물 높은 곳에서 전역일까지 남은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문제가 터지는 순간 일단은 멈췄다.
그러다가 1층에서 괴물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모든 군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무장을 하고 내려갔다.
"책임은 내가 진다."
간부의 그 말과 함께.
그 후 그들은 내려갔고, 그곳에서 등장한 무시무시한 괴물들, 난생처음 보는 괴물들과 싸웠다.
전투는 치열했다.
투투투!
총은 강력했지만, 이런 실전은 경험은커녕 상상조차 못한 바.
커헝!
특히 총에 맞고도 기세 좋게 달려드는 도그블린 앞에서 군인들 세 명은 산채로 씹혔다.
그래도 일단은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이후에 군인들은 생존자들을 모았다.
"외부 상황을 알 수 없으니 통제에 따라주십시오."
신뢰 있는 모습으로.
누구보다 멋진 군인다운 모습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매우 특별한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소극적이라도 노력할 테니까. 협조할 테니까.
문제는 그 부분이었다.
열 명 중 한 명은 다르다는 것.
투투투!
빌딩 GOP에 근무하던 이재돌 병장이 그랬다.
"으아아악!"
"시끄러워 새끼들아!"
그는 처음부터 문제가 많은 이였다.
아무리 편해진 군대라고 하지만 들어올 때부터 상급자에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부류.
그냥 양아치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
군인이 아니라 교도소에 갔었어야 하는 놈이었고, 실제로 중학생 때도 학교폭력을 비롯해 범죄가 잔뜩 있었다.
단지 판사의 애정 어린 조언과 배려 덕분에 실형을 살지 않았을 뿐.
그런 인간이 군대라고 사고를 치지 않을 리 만무.
실제로 후임을 괴롭히는 바람에 국군 교도소까지 다녀왔다. 어지간한 괴롭힘이 아니라 후임이 자살 시도를 했을 정도로 크게.
물론 군대라는 조직은 그렇게 단순한 조직이 아니었고, 그 후부터 이재돌 병장은 군대 내에서 없는 인간 취급을 받았다.
이재돌 병장도 더 이상 나대지 않았다. 몇 달 동안은 조용히 지내고 있을 뿐이었다.
"십새끼들, 아주 그냥 그동안 살판 났었지?"
그러나 2023년 12월 31일, 모든 게 바뀌었다.
투투투!
모든 상황이 종료됐을 때 이재돌 병장은 남은 군인들 전부를 죽였다.
그리고 소리쳤다.
"이제부터는 내 세상이야, 새끼들아!"
그가 생존자들의 우두머리가 됐다.
그리고 동시에 유린이 시작됐다.
이재돌 병장에게 생존자들은 장난감이었다. 그는 당장 마음에 안 드는 인간들은 쏴서 죽였다.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 심심하네. 야, 너. 밖으로 나가."
이재돌 병장이 모여서 겁에 질린 생존자 무리 중 한 명을 총구로 겨누며 말했다.
"너 말이야, 너."
"아, 아빠!"
이제 막 네 살도 안 됐을 것 같은 아이를 품고 있는 사내를 향해서.
"아, 아빠 아빠!"
그 순간 아이는 상황을 잘 모름에도 절규를 했다.
반면 아버지는 달랐다.
아이를 아내의 품에 넘겨준 아버지의 눈에는 어느 때보다 단호한 결의가 있었다.
자신이 죽어야 아들이 산다, 그에 대한 각오가.
그때였다.
타앙!
이재돌 병장이 천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자, 각오를 다졌던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각오가 총성에 풀린 탓.
그것을 본 이재돌 병장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자자, 빨리 일어나. 응? 빨리 나가. 나가기 싫어? 어?"
그는 이 광경을 즐겼다.
'씨발 세상 살 맛나네.'
모든 것이 제 마음대로 된다는 사실을.
'일단 천천히 가지고 놀다가 남자새끼들은 전부 죽여 버려야지, 반반한 년만 남기고.'
더 나아가 그는 이곳의 사람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가지고 놀 몇몇 이들만 제외하고 다 죽일 생각이었다.
당연히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죽이기 전에 장난을 치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뷔페에 가면 먹을 것도 넘치겠다, 문제 없어. 이제 남은 군바리 새끼들도 없고.'
그 순간이었다.
삐비비비!
'응?'
갑작스러운 소리에 이재돌 병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야? 누구 전화가 온 거야!"
그건 너무나도 분명한 스마트폰의 벨소리였으니까.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 통화가 왔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희망이었다.
"씨발!"
반면 이재돌 병장에게는 절망이었다. 만약 자신이 저지른 짓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자신의 꼴은 결코 좋은 꼴이 될 리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저거!'
이재돌 병장의 눈에 벨소리를 내는 스마트폰이 보였고, 이재돌 병장은 다른 누가 먼저 손을 댈 것을 두려워하며 당장 스마트폰에 달려갔다.
그리고는 스마트폰을 집었다.
'응?'
그런 이재돌 병장의 눈에 보인 것은 다름 아니라 벨소리 선택 화면이었다.
'이거?'
그 사실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이재돌 병장, 그러나 그의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끄엑!"
무언가가 그의 목을 강하게 옥죄였고, 그 사실에 본능적으로 이재돌 병장이 제 목을 움켜쥐었다.
"끄엑끄엑!"
그제야 이재돌 병장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등 뒤에 누군가 있음을.
"협상을 제안한다."
그 사내가 말했다.
"질문에 답해주면 곱게 죽여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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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3빌딩 (3).
6.
이재돌 병장, 고프로를 통해 그의 추악한 짓을 보았을 때 김지운은 그다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강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자식을 가진 강현중 중사도 마찬가지였다.
예외는 한 명이었다.
'이 새끼 미친 새끼 아니야?'
이영후, 그는 어느 때보다 격한 반응을 보였다.
'당장 죽이죠! 이대로 놔두다가 애먼 사람 죽을지도 모릅니다!'
본인이 나서서라도 이재돌 병장을 죽일 기세였다.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말했다.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예?'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이영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김지운, 그가 스마트폰의 벨소리를 미끼로 이재돌 병장을 유인한 후에 목을 옥죄는 것을 보는 순간.
"곱게 죽여주겠다."
그리고 단숨에 제압한 그를 향해 그 제안을 하는 것을 보는 순간 이영후는 깨달았다.
'죄 안 저질러서 다행이다.'
김지운을 적으로 두지 않은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반면 김지운을 적으로 둔 이재돌 병장의 꼴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지, 지랄하지 마!"
대답을 듣기 위해 숨통을 열어주는 순간 이재돌 병장은 김지운의 제안을 거절했다.
"십새끼, 그냥 죽여! 죽이라고! 죽여 봐!"
악을 썼고, 그 사실에 김지운이 대답하지 않았다.
"고강수."
"예."
"팔 잡아."
고강수를 불렀고, 고강수가 너무나도 능숙하게 이재돌 병장을 눕게 한 다음에 가슴팍을 무릎으로 누르고는 그대로 팔을 잡았다.
이후 손가락을 펴게 했다.
마치 도마 위에 고깃덩이를 잘 올려놓은 것처럼.
그것을 본 김지운이 그대로 도끼를 내리쳤다.
콰직!
도끼는 단숨에 이재돌 병장의 검지 끝을 잘랐다.
"끄악!"
그 사실에 비명을 내지르는 이재돌 병장에게 김지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별거 아니다. 1밀리미터 정도 자른 거다."
"으윽, 으윽!"
"아직 10센티미터 넘게 남아있다."
"으으으!"
"다시 제안하지. 질문에 대답을 하면 곱게 죽여주겠다."
그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이게 허언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힘이.
실제로도 그건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김지운, 그는 헌터가 되기 전에 무수히 많은 이들을 마주했었고, 그들 중에 이재돌 병장보다 덜 미친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김지운 기준에서 이재돌 병장은 미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임자 한 번 제대로 못 만나본 개새끼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사회가 알아서 손 좀 봐줬어야 했는데 때를 놓쳐서 이런 사단이 일어난 것뿐.
덜덜덜!
그제야 비로소 이재돌 병장이 공포로 가득 찬 눈으로 김지운을 바라봤고 대화가 됐다.
질문은 몇 개 없었다.
애초에 김지운이 이재돌 병장에게 궁금한 건 하나였다.
빌딩 GOP의 상황.
병력이 얼마 남았는지, 어떤 상태였는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
공포로 이성이 마비된 이재돌 병장은 그 모든 것을 순순히 말해줬다.
'지금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을 파악하는 순간 김지운의 머릿속에는 계획이 세워졌다.
나머지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GOP로 간다.'
무주공산이 된 빌딩GOP를 놔두고 다른 곳을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곳에서 가져올 수 있는 무기는 다 챙겨야 하는 셈.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이곳에 누군가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고강수."
"예."
"1층 정리, 가능하겠나?"
"10분 안에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고강수가 제격이었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남은 건 하나.
"놈은."
이재돌 병장뿐.
"마저 처리하도록."
그에 대한 처분을 김지운은 고강수에게 맡겼고, 그 사실에 고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 으."
그리고는 고강수는 누워 있는 이재돌의 두 손을 자신의 발로 내리찍었다.
콰직!
도장을 찍듯이.
콰직!
오른손, 왼손, 연달아 두 번.
"으아아아악!"
그 갑작스러운 공격에 비명을 내지르는 이재돌 병장을 고강수가 짐짝 들듯 일으켜 세운 후에 말했다.
"이제부터 이곳을 통솔하게 된 고강수라고 한다. 긴 말을 하지 않겠다. 명령을 따르면 생존을 도와주겠다."
남아있는 모두를 향해서.
그 후에 고강수는 보여줬다.
"반대로 명령에 반하는 자."
"으악! 으으으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이재돌 병장을 짐짝처럼 집어 든 후에 그대로 1층 건물 밖으로 던졌다.
새하얀 세상 너머로.
"으악! 으아아!"
그 사실에 기겁한 이재돌 병장이 1층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고강수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재돌 병장을 발로 차서 다시 뒤로 구르게 했다.
그쯤에서 이재돌 병장이 바닥에 주저앉고 소리를 내질렀다.
"고, 고, 곱게 주, 죽여 준다면서! 야, 약속했잖아!"
그 말에 고강수는 무덤덤한 표정을 말했다.
"평소에 약속을 잘 지켰나 보군. 그렇게 억울해하는 걸 보니까."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이재돌 병장은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마스크를 쓴 고강수와 달리 이재돌 병장은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으으으으!"
어비스의 안개가 이재돌 병장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분노를 솟아오르게 했으니까.
좀비처럼.
"으아아아악!"
그렇게 분노에 미쳐 달려오는 이재돌 병장의 머리통을 고강수가 손에 든 도끼로 내리찍었다.
콰직!
순식간에 머리가 쪼개졌고 이재돌 병장의 몸뚱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후에 고강수는 말했다.
"이제 약속은 지켰다."
이재돌 병장이 아니라 이 광경을 지켜보는 생존자들을 향해서.
애초에 이 모든 것은 퍼포먼스였다.
그 퍼포먼스는 분명하게 통했다.
"다시 말하지. 명령에 따라라."
그 순간 그 누구도 감히 고강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
1층이 정리됐다.
그리고 김지운 일행이 63빌딩의 최상층을 향해 움직였다.
7.
63빌딩에 위치한 빌딩 GOP.
그곳은 GOP란 표현처럼 그야말로 격리된 세상이었다.
단 하나의 층을 두고 그 아래는 관람객들을 위한 전망대가 있었고, 반대로 그 위에는 서울 도심에서 정말 보기 힘든 전쟁 무기들이 적잖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을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이 열려있군."
여차하면 문 혹은 벽을 부술 생각으로 준비를 했던 것이 무색해질 정도.
물론 김지운 파티는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려운 것보단 쉬운 게 나았으니까.
해서 김지운 파티는 바로 계획을 실천했다.
"강현중."
"예, 제가 들어가서 챙겨 오겠습니다."
김지운이 주변 경계를 하는 사이 강현중이 GOP에서 쓸만한 무기를 챙겨왔다.
매우 합리적인 조치였다.
강현중 중사는 현직 특수부대 군인, 군부대에 대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었으니까.
"자, 그럼 저도 밥값 좀 하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영후는 접시를 세팅했다.
63빌딩 고층은 안개 한 점 보이지 않는 상황, 위성 통신을 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으니까.
"여기 괜찮네요."
그쯤에서 이영후가 질문을 건넸다.
"오아시스도 있고, 위성 통신도 되고, 한강하고도 가깝고. 차라리 이곳을 집으로 삼는 게 어떻습니까?"
타당한 질문이었다.
특히 안개의 영향을 안 받는 고층과 오아시스가 공존한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위성 통신은 물론 이 높은 층에서 여의도를 볼 수 있다는 이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까.
물론 식량 부분이 부족했지만 그야 운송하면 될 일.
김지운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쁘지 않다고.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비행 몬스터만 없다면."
비행 몬스터란 말에 이영후는 입을 다물었다.
어비스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날개 달린 몬스터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 날개 달린 몬스터에 대한 공포는 다른 몬스터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지독했다.
안개 때문이었다.
그 날개 달린 것들이 지척에 오기 전까지 눈치 채는 것이 어비스의 안개 속에서는 불가능했으니까.
물론 반대로 그건 비행 몬스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안개 속에 있는 먹잇감을 찾는 것은 물 속에 있는 것을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
해서 종종 비행 몬스터들은 오아시스에서 머무는 헌터나 관광객을 공격하기도 했다.
잘 보였으니까.
"여기 있다가는 오히려 공격 당할 수도 있겠군요."
그런 비행 몬스터들에게 이 거대한 빌딩은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타깃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곳이 매력적인 위치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M61 발컨포도 있겠지.'
이곳에 있는 무장은 전투 헬기나 전투기를 상대하기 위한 수준이었으니까.
아득한 화력이었다.
"그런데 대장, 여기 뭐뭐 있습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이곳에 있는 화력은 상식 밖이었다.
"기본적으로는 K2소총이지만, 메인은 M61 발컨포와 신궁, 미스트랄이겠지."
"······그게 뭡니까?"
"군대 안 다녀왔나?"
"아, 네. 저 산업체였거든요. 가서 신나게 코딩했죠."
"M61은 개틀링건이다. 남은 두 개는 그냥 미사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곳에 있는 화력 수준은 지금까지 김지운이 마주한 몬스터들을 가소롭게 만들 만큼 강력했으니까.
'미사일의 존재는 결정적이다.'
특히 김지운이 아는 몬스터들 중에는 총이 통하지 않는 몬스터들이 적지 않았다.
사실 오크만 되더라도 자동소총으로 잡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오크의 몸뚱이는 인간보다 그 내구성이 두세 배는 더 강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기에 오크는 어쨌거나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그런 놈들을 자동소총으로 무작정 난사해서 잡으려면 탄창 하나는 비워야 할 터.
탄약이 귀해진 시대에서는 너무 큰 낭비였다.
그마저도 잡으면 다행이었다.
탄창 하나가 비워지는 동안 오크가 그냥 맞아만 줄 리 만무, 놈들은 달려들 것이다.
오크의 돌진이 만들어내는 파괴력은 소 한 마리가 전력으로 달려오는 것과 비슷했다.
어설픈 엄폐물로는 버티지 못한다는 의미.
만약 뚫리면?
같이 죽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 오크조차도 어비스의 화이트존을 기준으로는 그리 강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트롤도 잡을 수 있다.'
트롤 같은 경우에는 김지운이 예상컨대 자동소총 따위로는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그래서 미사일이 중요했다.
사람이 아니라 전차를, 전투기를, 쇳덩이를 파괴하려고 만든 거라면 트롤 정도도 무리 없이 잡을 터.
'발칸포도 매력적이지만, 이동하면서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전투기의 장갑을 꿰뚫는 M61 발칸포도 트롤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리기엔 무리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사일보다 더 강력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미사일은 단발이지만, M61 발칸포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휴대성을 놓고 본다면, 무엇보다 기동력이 중요한 몬스터와의 전투를 염두에 둔다면 김지운 입장에서는 휴대성이 가장 좋은 신궁이 지금 당장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뭐든 감사할 따름이지만.'
여하튼 어떤 것이든 김지운 입장에서는 엄청난 무기였다.
'만족하기에는 문제가 있지.'
문제는 어비스의 트롤도 화이트존 클래스, 어비스를 놓고 보면 약한 축에 속한다는 점이었다.
김지운,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은퇴를 했다.
"대장."
그쯤에서 이영후가 김지운은 불렀다.
"공지가 올라왔습니다."
"공지?"
"아, 두 가지 공지인데요, 일단 하나는 게시판을 국가별로 구분하겠다고 합니다."
그 말에 김지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게시판에 전부 몰아넣으면 정보 교류가 어려워지는 건 당연한 일.
"다른 하나는 쪽지 기능을 추가했습니다."
"쪽지?"
"메시지 보내는 거죠. 가입자에게."
보통 게시판이라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있는 기능.
그러나 이것을 본 이영후의 판단은 달랐다.
"이거 서버 좀 제대로 확보한 모양인데요?"
"서버?"
"게시판 나누는 건 그렇다 쳐도, 쪽지 보내는 것은 여차하면 서버에 과부하 줄 수 있거든요. 뭐, 텍스트만으로는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 일 모르는 거니까요. 어떤 또라이가 또라이짓을 할지 모르는 세상 아닙니까?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냥 기능을 추가한 걸 수도 있고요. 여하튼 이것저것 하는 거 보니까 이거 관리할 인력이나 인프라는 있는 모양이네요."
이 게시판을 관리하는 제대로 된 자들이 있다는 것.
"어딘 가는 돌아가긴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서버든, 뭐든."
그리고 이 서버라는 것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인프라가 돌아가야 했다.
그런 설명에 김지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어, 글 하나 올라왔네요?"
"글."
"공지글입니다. 한국 게시판에."
그 말에 김지운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순간 글을 본 이영후가 기겁하며 말했다.
"대, 대장! 공습 경보입니다!"
그 기겁함에 노트북 모니터를 본 김지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김지운이 소리쳤다.
"이영후, 최대한 밀폐된 곳으로 도망가! 책상 밑이든 어디든!"
그리고는 동시에 김지운이 달려갔다.
강현중이 있는 곳으로.
그러면서 소리쳤다.
"강현중! 숨어라! 밖으로 절대 나가지 말고! 어디든 밀폐된 공간으로 숨어라!"
그리고는 GOP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그 순간 소리를 들은 강현중 중사가 움직였다.
"잘 못 들었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기 방으로 들어가서 엎드려! 귀 막고 눈 감고!"
그 이어진 경고에 강현중이 고개를 갸웃하는 대신 방으로 들어갔다. 김지운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내무반으로 들어갔고, 김지운이 말한 대로 두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우우!
그들의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소름이 아니었다.
공포였다.
공포들이 개미들처럼 그들의 발끝부터 타고 오르며 단숨에 그들의 머릿속까지 올라탔다.
덜덜덜덜덜!
김지운과 강현중의 몸이 공포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쯤에서 강현중은 이미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김지운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에라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보통이라면 나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경험한 덕분이었다.
이 공포를.
그 덕분에 김지운은 기절하지 않은 채 떠올릴 수 있다.
[공습 경보, 유리룡 여의도로 이동 중!]
어비스넷 한국 게시판에 올라온 그 공지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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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흑랑 클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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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2: 2
7.
지하 3층.
그곳으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에스컬레이터가 지하 3층까지 쭉 연결되어 있었다.
마스크를 쓴 김지운과 이영후는 천천히 정지된 에스컬레이터를 계단처럼 밟으며 움직였고, 3층에 도달하는 데에는 1분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문제는 지하 3층에 들어온 직후였다.
안개라기보다는 연기라고 해야 할 정도로 짙은 안개.
당장 1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그 안개 속에서 김지운과 이영후는 그대로 멈췄다.
그때였다.
으어어어!
멈춰 있는 그들의 코앞으로 어눌한 소리를 내뱉는 여자 한 명이 그대로 지나갔다.
으어어어!
그야말로 영화에 나오는 좀비처럼.
느릿하게.
이성 따위는 조금도 없는 모습으로.
그 앞에서 김지운과 이영후는 가만히 서 있었다.
설명은 필요 없었다.
어비스에서도 안개에 의해 정신이 무너진 좀비들을 볼 수 있었다. 많지는 않았다. 어비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세상의 권력자들이 들이는 노력은 엄청났으니까.
그러나 대단한 권력자라고 해도 세상 전부를 관리할 수는 없는 법.
때문에 어비스를 경험한 이들은 좀비를 모를 수 없었다.
'어비스 좀비는 소리에 반응한다.'
일단 어비스 좀비의 유효한 감각은 청각뿐이었다.
사실상 눈은 기능을 못했으며 하더라도 어비스의 안개에서만 살 수 있는 좀비들에게 시력은 무의미했다.
'민감하진 않다.'
그렇다고 어비스 좀비의 청각이 매우 뛰어나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있을 때의 인간보다도 기능이 떨어졌다.
비유를 하자면 예민한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의 수준이었다.
어지간한 소리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큰소리에는 반응하는 수준.
'하지만 걸리면 좆된다.'
문제는 어비스 좀비의 강함이었다.
어비스 좀비는 정신이 무너진 인간, 그런 어비스 좀비는 리미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제 주먹이 부서지든 손가락이 부러지든 간에 대상을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면서 머리통이 뭉개지거나 머리가 부서지기 전까지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했다.
툭!
'알아, 안다고 씨발!'
다른 누구도 아닌 이영후의 안내에 따라서.
당연한 말이지만 이영후 입장에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영후는 여기서 불만 따윌 품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해야 해.'
오히려 의지를 불태웠다.
'지금 이 양반이 나한테는 동아줄이다.'
어비스를 경험한 이영후는 지금 상황에서 헌터의 존재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잘 알았다.
즉, 김지운이 필요한 게 있다면 전부 구해줘야 한다는 의미.
그렇게 그 둘이 천천히 지하 3층 주차장으로 나왔다
지하 3층 주차장의 크기는 가늠되지 않았다.
짙게 깔린 새하얀 안개는 도무지 뭐가 뭔지 구분하는 것조차 불가능케 했으니까.
방향감각조차도 사라질 지경이었다.
툭툭!
그러나 이동한지 채 2분도 되지 않았을 때 이영후가 걸음을 멈추고 김지운에게 신호를 줬다.
'다 왔습니다.'
이영후, 그는 완벽하게 목적지에 도달했다.
정말 완벽하게 길을 읽었다는 의미.
사실 이영후는 자신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게 자주는 아니지만, 최소 한 번 이상은 와봤던 곳이었고 이영후는 한 번 간 곳은 무조건 기억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발렛파킹 데스크에 도달한 이영후의 눈에는 걸려 있는 자동차 키들이 보였다.
정말 많은 차키들이 있었다. 당연히 비슷한 키들도 넘쳐났다.
'이건 벤틀리, 이것도 벤틀리, 이것도 벤틀리, 아니 무슨 벤틀리 매장 차렸나? 아!'
그러나 그중에서 이영후의 차키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기 있다.'
이영후가 타고 온 브랜드의 차키는 오로지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벤틀리 대신 이걸 사서 다행이야. 아니면 골치 아플 뻔 했네.'
그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영후.
그러나 이내 이영후의 표정이 굳었다.
'가만.'
알았으니까.
'내 차 위치 어디지?'
그의 차를 주차한 위치는 그가 알 수가 없다는 것.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발렛 카드를 내밀면 알아서 발렛파킹 직원이 차를 가져다줬으니까.
어디에 주차할지는 알 바 없었으니까.
그마저도 몇 번에 불과했다.
대개는 그냥 쇼핑 후에 직원에게 말해두면 내려왔을 때 이미 차가 대기 중인 경우가 많았다.
즉, 이제부터 주차한 위치를 찾아야 했다. 1분은 물론 1초가 어느 때보다 귀중한 상황에서.
거기서 이영후는 혼자만 고뇌하지 않았다.
준비했던 스마트폰의 메모 기능으로 빠르게 문장을 썼다.
[주차 위치는 저도 모릅니다.]
그것을 본 김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손을 내밀었고, 이영후가 바로 의미를 눈치 채고 차키를 건네줬다.
'방법이 있구나!'
그런 김지운을 바라보는 이영후의 눈빛에는 어느 때보다 강력한 믿음이 있었다.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니었어! 이 인간만 따라가면 돼!'
그 순간이었다.
틱!
'응?'
김지운, 그가 차키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이영후의 자동차 대답을 했다.
삐익!
나 여기 있다고, 아주 큰 소리로.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당연히 그들도 들었다.
으어어어어어어!
어비스 좀비, 놈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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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지하주차장 (4).
8.
삐익!
자신의 애마가 소리를 내는 순간 이영후는 전력을 다해 비명을 내질렀다.
'이 미친 새끼!'
입 밖이 아닌 입 안에서만.
그 사실에 김지운의 눈빛이 반짝였다.
'관광 경험이 제법 되는 모양이군.'
어비스의 헌터들에게 다섯 가지 수칙이 제공되는 것처럼, 어비스의 관광객에게도 수칙이 제공됐다.
물론 그 수칙은 꽤 많았다. 거의 책자 수준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비명을 내지르지 않는 것이었다.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어비스의 몬스터들은 안개에서 살아갔고, 자연스레 소리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어비스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것은 여기 생생한 생고기가 있습니다, 지금 잡아드시면 간하고 허파가 공짜! 리고 외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물론 헌터들과 관광객들 중에 그 규칙을 제대로 지키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헌터들은 실수하면 제 목이 날아갔지만, 관광객들이 실수하면 헌터의 목이 날아갔으니까.
더불어 관광객의 목숨 값은 꽤 높았고, 그래서 대개는 관광객이 실수할 것을 염두에 두고 관광 가이드 파티를 갖추고는 했다.
그런데 이영후는 비명을 삼켰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비명을 내지르고, 씨발 미친 새끼라고 욕지거리를 내뱉어도 이해해줄 수 있는 상황에서.
그건 타고난 재능이었다. 헌터들 중에서도 어비스에 처음 온 이들 중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이가 열 중 셋은 됐으니까.
'꽤 깊은 곳까지 관광했겠군.'
더불어 이런 재능을 가진 관광객들, 수칙을 잘 지키는 관광객들은 더 제대로 된 관광이 가능했다.
'저 정도만 되어도 오렌지까지는 문제 없지.'
화이트 존이 아니라 레드 존 혹은 오렌지 존까지.
김지운이 은퇴하기 전까지는 그린 존이 기록이었다. 관광객이 가서 살아돌아온 기록.
그 관광에서 헌터도 헌터이지만, 관광객의 능력이 엄청 중요했다. 그 사실을 김지운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린 존은 다르지만. 그때 정말 위험했지.'
그 기록을 달성한 게 누구도 아닌 김지운의 파티였으니까.
어쨌거나 김지운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영후는 파트너였고, 능력 있는 파트너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결정적으로 김지운은 기대했다.
이영후가 깊은 곳까지 관광을 했다면, 받을 수 있는 기념품 역시 더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으어어어어!
고요함 속에서 들린 소란에 어비스 좀비들이 미친 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우두두두!
'발소리를 보니까 백 단위군.'
아득한 숫자가.
하지만 김지운과 이영후가 대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 어비스 좀비들이 향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영후의 롤스로이스 차량이었으니까.
김지운과 이영후는 티끌도 다칠 게 없었다.
자동차도 문제가 없었다.
자동차가 소리를 낸 건 찰나에 불과했고, 그 소리를 듣고 몰려온 어비스 좀비들은 고요함이 깔리는 순간 그 차량 주변에서 그대로 행동을 멈추고 주변을 경계할 뿐이었으니까.
이제 김지운과 이영후는 한 가지만 해결하면 됐다.
'저걸 어떻게 타!'
저 어비스 좀비를 치우고 차량에 탑승하는 것.
당연히 이영후 기준에서는 미친 짓이었다.
어비스 좀비를 여기서 처리한다?
한다고 치자.
그러나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쯤에서 이영후는 생각했다.
'서, 설마?'
종종 이런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날 미끼로?'
한 명이 소란을 피워서 좀비들을 유인하는 사이 나머지가 목표를 수행하는 장면을.
그 순간 김지운이 이영후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그 사실에 이영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씨발!'
그 질린 얼굴로 김지운을 바라봤다.
둘이 눈빛을 마주했고,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이영후는 질끈 눈을 감은 후에 스마트폰의 문장을 썼다.
[알겠습니다. 내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김지운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뭔 개소리야? 라고.
그 표정과 함께 김지운은 품에서 가져온 것을 꺼냈다.
꺼낸 것은 다름 아니라 스마트폰이었다. 잠금이 풀려 있는.
김지운은 그 스마트폰을 가볍게 두 번 터치했고, 이내 화면에는 시계 앱 기능 중 하나인 타이머 기능에 도달했다.
김지운은 그것을 30초 지정한 후에 멀찌감치 떨어진 곳을 향해 가볍게 미끄러뜨리듯 던졌다.
자동차가 있는 곳과 정반대 방향으로.
그 후에 준비한 스마트폰을 두 개 더 던졌다.
똑같이 타이머 기능을 작동한 채로.
각각 40초, 50초를 설정한 채로.
그리고 시간을 가늠하던 김지운이 이내 이영후의 어깨를 두드렸고, 그 순간 들렸다.
삐빅! 삐빅! 삐빅!
알림 소리가.
으어어어!
그 소리에 어비스 좀비들이 다시 한 번 더 질주를 시작했다.
짙은 안개 탓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대신 느낄 수 있었다.
우두두두두!
김지운과 이영후의 앞으로 수백 명의 인파가 달려가는 것을.
안개가 흔들리는 것을.
그것을 느끼면서 김지운과 이영후가 걸음을 내디뎠다.
이윽고 그들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딸깍!
이영후가 운전석으로, 김지운이 조수석으로 들어갔다.
쿵!
그러나 문을 바로 닫진 않았다.
삐빅! 삐빅! 삐빅!
닫는 타이밍은 세 번째 스마트폰의 알림이 들리는 순간, 그 순간이었다.
으어어어!
어비스 좀비의 격한 반응이 들리는 순간 김지운과 이영후는 문을 닫았다.
쿵!
"후아!"
그리고 타자마자 이영후는 마스크를 벗으면서 깊은 숨을 그대로 내쉬었다.
김지운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마스크를 벗었다.
거기서 여유는 없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잽싸게 새로운 마스크를 썼다.
차 아니라고 안개로부터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었으니까.
단지 여유는 있었다.
"이 차량 방음은 잘 되나?"
질문을 할 수 있는 여유.
그 질문에 이영후는 말했다.
"이 차 롤스로이스에요, 롤스로이스. 여기서 총 쏴도 밖에서는 잘 모를 겁니다."
말을 뱉는 이영후의 표정에는 긴장과 흥분이 가득했다.
죽다 살아났다는 사실에 대한 긴장과 흥분.
"아니, 그보다 그 방법 장난 아니었습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그리고 김지운이 보여준 센스에 대한 긴장과 흥분.
그런 이영후에게 김지운은 말했다.
"조용."
그 말에 이영후는 놀랍게도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관광객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수칙 중 하나가 바로 헌터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아직 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었다.
"물건은?"
나지막한 김지운의 물음에 이영후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그대로 뒷좌석으로 이동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차량은 집이라고 해도 될 만큼 거대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뒷좌석으로 이동한 이영후는 뒷좌석 가운데 있는 암레스트를 내렸다.
그러자 보였다.
"금고군."
다른 차량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물건을.
"롤스로이스니까요. 주문제작만 하면 냉장고도 넣을 수 있는데 금고는 우습죠."
그에 대해 짤막한 설명을 마친 이영후가 금고문을 열었다.
지문 인식을 통해서.
그것을 본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만약 차키만 가지고 왔다면 김지운 입장에서는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상황.
달리 말하면 이영후가 김지운을 엿 먹이기도 한다면 얼마든지 한 번쯤 엿을 먹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영후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잽싸게 금고문을 연 후에 그 안에 있는 것들 중에서 어비스의 물건들을 꺼냈다.
"이게 가진 전부입니다. 숨기는 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도 잘."
그러면서 진심을 담은 말을 뱉었다.
그 말에 김지운은 이영후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믿을 건 이 사람뿐이야.'
여기서는 김지운을 상대로 괜한 협상을 하는 게 아니라 올인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김지운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이영후가 강현중 중사 같은 도움은 주지 못하겠지만, 그냥 신뢰할 수 있는 성인 남성 한 명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도움이었다.
"관광은 언제부터 했지?"
"3년 전부터입니다. 3년 전에 코인 거래소가 대박나면서 돈이 미친 듯이 들어왔거든요."
"몇 번이나 했지?"
"관광이요? 서른 번쯤 했나?"
꽤 많은 횟수였다.
무엇보다 김지운은 알았다.
'3년 동안 서른 번, 그럼 최근까지 간 거군.'
관광은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아니라 한 번 할 때마다 그 텀이 한 달 이상임을.
무엇보다 관광 자체가 하루아침에 끝나는 게 아니었다.
게이트를 통해 어비스를 넘어간 후에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기약이란 게 없었다.
돌아오는 출구는 있었다. 들어간 게이트를 통해서 나오면 될 뿐이었으니까.
문제는 어비스의 상황이었다.
어비스는 놀이공원의 사파리 투어처럼 몇 시부터 입장해서 정해진 시간에 따라 여긴 곰이 있고요, 다음은 호랑이를 보러 가겠습니다, 아, 지금 저기 사자들이 짝짓기를 하고 있군요, 같은 게 아니었다.
어떤 상황이 등장할지 몰랐고, 안 좋은 상황에서는 숨 죽이고 이 안 좋은 상황이 해결되기를 기도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만큼 준비도 많이 필요했다.
여하튼 정리하면 이영후는 최근까지 어비스를 관광했다.
즉, 김지운이 은퇴 이후로 업데이트 되지 않은 나름 최신 정보들이 이영후에게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가장 기대가 큰 건 관광 횟수가 많은 만큼 가진 기념품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포션들이군.'
일단 가장 먼저 이영후가 건네준 것들은 어비스에서 특별한 효능을 가진 재료로 만든 물약들, 일명 포션이었다.
어비스의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기념품이었다.
현대 의학으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물건들이었으니까.
'힐링 포션들.'
더불어 이영후가 가진 포션 중 대부분은 힐링 포션, 즉 치료 효과를 가진 것들이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부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결국 제 목숨이었으니까.
'여벌 목숨들이다.'
그리고 지금 김지운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들이었다.
'쓸모가 없으면 좋겠지만.'
물론 가장 좋은 건 포션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안개가 걷히고, 몬스터들이 사라지고, 군대가 구하러 와주는 경우.
하지만 그 희망적인 그림을 위해서 백화점에 있는 식량만 축내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약 정전이 일어난다면.'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니었을뿐더러 김지운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최소한 서울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거다.'
최악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때를 위해서는 뭐든 필요했다.
해서 김지운은 그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그전에 파밍을 해야 한다.'
몬스터를 사냥하고, 아이템을 구하기 위해서 안개에 일부러 들어가는 경우를.
이상할 건 없었다.
어비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세상은 지금 어비스와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스킬.'
개중에서도 김지운에게 시급한 건 스킬이었다.
스킬의 유무는 자동차로 따지면 엔진의 유무와 같았으니까.
그때였다.
"이거."
이영후가 금고 안 쪽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냥 상자가 아니었다.
"잠깐만요. 열어야 해서."
그건 소형 금고였다.
우웅!
그것도 지문 인식이 아니라 홍채 인식을 해야 열리는 소형 금고.
당연히 그 안에는 포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기념품이 담겨져 있었다.
손톱만한 조약돌, 그러나 그 표면에 신비로운 문자가 노란빛으로 빛나는 돌이.
'이건?'
어비스의 기적 중 하나인 룬이었다.
헌터를 헌터로 만들어주는 스킬을 담은 룬!
그것을 보는 순간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본래 스킬 룬은 기념품 대상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관광객에게는 스킬 룬은 딱히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반면 클랜은 언제나 스킬 룬이 부족했고, 그래서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스킬 룬을 판매하거나 혹은 기념품으로 제공하지 않았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그리고 돈으로 안 되는 건 세상에 없는 법.
가끔 관광객들의 수중에 스킬 룬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스킬 룬의 거래 가격은 상식 밖이라고 할 만큼 비쌌다.
"등급에 대한 건 뭐 저보다야 잘 아실 테고."
일단 지금 푸른빛을 띠고 있는 룬의 등급은 레어 등급이었다. 이 자체로도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스킬 룬의 값어치는 담긴 스킬로 결정되는 법.
그에 대해서 이영후는 꽤 흥분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이거 엄청난 겁니다."
그 말에 김지운은 딱히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이 스킬 룬이 무엇이 담겼는지는 바로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
김지운, 그가 스킬 룬을 가볍게 맛봤다.
그러자 들렸다.
[사전이 발동합니다.]
이어서 보였다.
[룬(염력)]
- 등급 : 레어
- 사용 시 염력 스킬을 습득할 수 있다.
- 1레벨 이상 습득 가능
- 음험한 사기꾼 직업만 습득 가능
홀로그램으로 된 정보창 하나가.
"예, 염력입니다."
그 반응을 본 이영후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비스에서 전설 중 한 명이었던 헌터가 쓰던 스킬이죠. 일곱 개의 별을 최초로 달성한 전설. 지금은 별이 되었지만."
그 말에 김지운 역시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놀란 이유는 이영후와 조금 달랐다.
'설마 이걸 여기서 구하게 될 줄이야.'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한 친구를 만나게 된 느낌.
그러나 그 감흥은 오래 가지 않았다.
크우, 크우!
"어? 어? 이거 어비스 좀비 아니죠? 이게 뭐죠? 뭐가 등장한 겁니까?"
불청객이 등장했으니까.
크우우우!
"오크다."
도그블린 그리고 어비스 좀비와는 차원이 다른 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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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지하주차장 (5).
9.
크우우우!
오크,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영화에서 너무나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몬스터.
그야말로 몬스터들을 대표할 수 있는 몬스터였다.
어비스에도 마찬가지로 오크가 존재했다.
'빌어먹을 오크라니.'
그런 어비스의 오크는 기본적으로 덩치가 남달랐다. 작은 개체가 2미터였고, 큰 개체는 3미터에 이르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놈들은 매우 영악했다. 그 영악함이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그저 순수하게 구슬치기를 하고 아이스크림 하나에 해맑은 미소를 짓던 70년대 수준의 초등학생 수준이 아니라 옥상에서 벽돌을 던져서 사람을 죽인 후에 저 촉법소년인데요, 라고 말을 지껄이는 초등학생 수준.
또한 영리한 만큼 무기를 아주 잘 다뤘다. 어지간한 헌터들보다 훨씬 잘 다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비스의 헌터들이 등장한 거 5년여 전, 제아무리 경력이 대단한 헌터도 이제 6년차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비스가 언제 탄생했는지는 아직 제대로 가늠조차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어비스에서 수년 혹은 수십 년을 살아온 오크들이라면 무기를 다룬 경험이 헌터들보다 많을 수밖에.
여기에 심지어 무리생활마저 했다.
여러모로 어비스 헌터들에게도 골치 아픈 몬스터였고, 해서 어비스 헌터들은 오크에 별명을 지었다.
'초보자 킬러잖아!'
아주 멋진 별명을.
물론 김지운과 이영후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별명이었다.
지금 그 둘은 초보자였으니까.
더욱이 골치 아픈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비스 좀비는 어비스의 주민들에게 반응하지 않는다.'
지금 김지운과 이영후에게 매우 골치 아픈 어비스 좀비는 몬스터들에게는 딱히 골치 아픈 대상이 아니었다.
몬스터들도 그걸 알았기에 어비스 좀비를 그냥 무슨 안개 보듯이 바라봤다.
즉, 지금 오크의 눈에 보이는 건 하나였다.
김지운과 이영후 일행.
물론 아직은 들킨 게 아니었다.
소리를 듣고, 소란을 듣고 온 것 뿐.
하지만 이대로 차 밖으로 나간다면?
"저기 어떻게 할까요?"
질문을 던지는 이영후는 내심 답을 내놓은 상태였다.
'싸우면 죽는데, 어떻게 도망쳐야 합니까?'
싸운다, 일단 그 선택지는 배제하기로.
반면 김지운의 생각은 달랐다.
김지운의 눈이 안개 주변을 훑었다.
사실 보이는 건 없었다.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는 그저 흐릿한 그림자만 보일 따름.
그래서 김지운은 질문했다.
"여기 들어오는 입구랑 출구가 몇 개지?"
"예? 아, 잠깐만요. 그게······ 나가는 출구 2개, 들어오는 입구 2개, 아마 그럴 겁니다. 아니,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최소 3개 이상이라는 거군."
그 사실에 김지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그블린은 개구멍으로도 잘 들어온다.'
도그블린의 경우에는 그 덩치가 작은 만큼 작은 틈도 충분히 유용하게 이용했다.
반면 오크는 달랐다.
거대한 덩치이기에 적당한 크기의 입구도 쉽사리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그런 성격도 아니었다. 억지로 막 몸을 쑤셔 넣으면서까지 탐험을 하는 성격이.
그런데 오크가 지금 이곳, 지하 3층에 들어왔다?
둘 중 하나였다.
지하 3층 어딘가에서 혹은 그 아래 지하에서 오크를 분출하는 게이트가 열렸을 경우.
'게이트는······ 이곳에 열린 게 아니야.'
김지운은 그 가능성은 높게 보지 않았다.
일단 정말 그랬다면 고작 이곳에 이 정도 몬스터만 있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또한 안개도 이미 지하 1층까지 점령했었어야 했다.
'그럼 이미 끝장이니까.'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이미 김지운 입장에서는 죽은 목숨이나 다를 게 없었다.
'밖에서 오는 거다.'
결국 남은 답은 하나, 건물 밖 어느 외부에서 어비스가 등장했다는 것.
그래서 지금 오크가 문제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오크도 올 만큼 큰 구멍이 있다.'
지금 이 백화점 지하 3층 주자창으로 오는 길목을 막는 게 없다는 의미.
당연히 그 구멍을 막아야 했다.
어떤 식으로든.
하지만 지금 그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 차."
"예? 이 차요?"
"마력이 어느 정도지?"
"마력이요? 550마력? 그쯤 되는데요?"
"무게는?"
"어 그거까지는 잘······ 그래도 2톤은 넘을 겁니다. 아, 아니 잠깐."
그 대목에서 이영후는 바로 눈치 챘다.
"저 오크를 잡으려고요? 지금?"
김지운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차로 박아서?"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설명을 해줬다.
"놈은 하나다. 그럼 둘 중 하나다. 떠돌이이거나 아니면 수색병이거나. 뭐가 됐건 이대로 놔두면 좋을 건 없다."
왜 놈을 잡아야 하는지.
"무엇보다 오크는 도그블린하고 다르다. 안개 밖에서도 최고 1시간까지 버틸 수 있다."
이어진 말에 이영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 정도는 압니다. 당연히 잡아 죽이면 좋죠!"
그가 놀란 부분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차로 박는 거잖습니까?"
차가 아깝다는 건 아니었다.
이영후는 이 정도 차는 당장 1백 대도 주문할 수 있었다. 리스나 할부 없이 일시불로.
문제는 그 위력, 자동차 충돌이 만들어내는 위력은 분명 대단했다. 하물며 지금 이영후의 차가 만들어낼 파괴력은 벽도 부술 수 있을 정도.
오크를 잡는 데에는 충분한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곧 안에 탄 탑승자에게도 엄청난 데미지를 준다는 의미!
살짝 툭, 뒤에서 누가 박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욱신거리는 게 인간의 몸뚱이 아니던가?
안전벨트를 매고, 에어백을 믿고 일부러 차로 가져다 박는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장면이었다.
하물며 오크도 보통 놈은 아니었다.
덩치가 2미터가 넘어가고 체중이 150킬로그램을 훌쩍 넘어가는 놈이었다.
멧돼지였다.
그걸 전속력으로 박는다?
장담컨대 운전자가 정상일 리 없었다. 실신하거나 어디 골절되면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
특히 자동차 사고는 필연적으로 차의 짓뭉개짐을 가져왔다.
"차에 갇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갇힌다?
어비스의 안개가 가득 찬 곳에서?
그냥 차라리 가서 오크에게 깔끔하게 머리를 들이밀어서 두개골 파열로 살해당하는 게 훨씬 더 현명한 일.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말하지 않았다.
덥석!
"어?"
대신 보여줬다.
꿀꺽!
"어!"
이영후가 준 스킬 룬을 머금고, 삼키는 모습을.
"자, 잠깐만요. 설마 직업이 사기꾼이십니까?"
그 모습에 놀라는 이영후에게 김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염력(F랭크)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대신 명령했다.
"차에서 내리도록."
10.
김지운이 명령을 했을 때 이영후는 생각했다.
'염력으로 운전을 한다고? 미친 거 아니야?'
김지운이 그리는 계획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고.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잖아?'
염력.
어비스의 헌터들, 그중에서 음험한 사기꾼 직업을 습득한 이들만이 쓸 수 있는 스킬이었다.
효용 가치는 매우 높은 스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하게 생각해도 생각만으로 물체를 움직인다, 라는 게 가지는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염력을 쓰는 게 얼마나 힘든데!'
하지만 효용 가치와 별개로 염력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염력을 습득한 헌터들은 그것을 인형 뽑기 기계로 비유했다.
인형 뽑기 기계를 조작하는 건 누구든지 할 수 있지만 인형을 뽑는 건 전혀 다른 일인 것처럼.
물론 재능이 없어도 인형 뽑기 기계에 돈 천만 원 정도 쓰면 나름 수준급은 되듯이 훈련을 통해서 염력 사용 능력을 발달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아무리 훈련을 해도 재능이 없는 이가 100미터를 9초대에 달릴 수는 없는 법.
염력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유효 거리 그리고 세밀한 컨트롤은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운전은 이중에서 세밀한 컨트롤이 매우 필요한 영역이었다.
언뜻 운전은 쉬어보이지만, 처음 면허증을 따로 갔을 때를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달랐다.
핸들을 얼마나 돌려야 하는지,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얼마나 밟아야 하는 건지, 감조차 잡지 못해서 시속 10킬로미터 운행에도 겁을 먹는 이들이 대부분인 것처럼.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막힌 공간에서는 염력이 작용하지 않아.'
어비스 헌터들의 염력은 상자 안에 있는 공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동차 운전도 마찬가지였다.
운전을 한다?
그럼 최소한 창문을 연 상태에서 그 안으로 염력으로 만든 손을 집어넣어 조작하는 식.
그저 단순하게 핸들 정립해서 목표가 보이면 그냥 풀악셀을 밟으면 되잖아? 라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 사실을 김지운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염력으로 차를 운전할 수 있는 건 최소 B티어 헌터들밖에 없다고 말했어.'
팬이었으니까.
'퍼스트 킬러가.'
어비스의 헌터들 중에서 전설적인 존재 중 한 명이자, 가장 뛰어난 염력능력자로 알려진 퍼스트 킬러의 팬.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인 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영후가 군말 없이 마스크를 쓰고 차에서 내린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차에 타고 있어서 해결되는 건 없었다.
롤스로이스가 꽤 단단한 차인 건 맞지만, 어비스의 오크라면 주먹으로 창문을 깨서 안에 있는 인간을 끄집어내 물어뜯는 것은 성인 남자가 주먹으로 수박을 깨서 안에 있는 과육을 먹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결국 도망치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의미.
'어차피 죽이진 못하더라도 위협만 해도 돼.'
여기에 또 하나, 이영후가 보기엔 그냥 차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오크가 반응할 가능성이 높았다.
오크 입장에서는 롤스로이스가 더 위협적인 맹수처럼 보일 테니까.
그 정도 위협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을 텐데?'
문제는 어지간한 염력 능력자가 아니고서는 그 정도를 하는 것조차 결코 쉽지 않았다.
'내 차 가뜩이나 커서 운전하기 좆같은데.'
심지어 이영후의 차는 운전 좀 한다는 양반들도 그 크기 때문에 모는 게 쉽지 않은 녀석.
물론 그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순식간이었으니까.
우우웅!
시동이 걸린 롤스로이스가 고요한 소리와 함께 바로 주차칸에서 매우 부드럽게 빠져나오고는 그대로 오크를 향해 날아간 것은.
'어?
그리고 들려왔다.
콰앙!
롤스로이스가 그대로 오크를 박는 소리가.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그 상황에 이영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게 이렇게 쉽게?'
그가 아는 어비스의 상식하고는 달랐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상식에서 어긋나는 게 아니었다.
뛰어난 염력 능력자라면 염력으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물론 서킷에서 타임 어택도 할 수 있었으니까.
김지운이 뛰어난 염력 능력자라면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일이었으니까.
'대체 어떤······.'
그때였다.
크헉, 크헉!
먼 발치에서 무언가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뱉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오크였다.
거대한 자동차에 정면으로 치였음에도 오크는 제 두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어어어!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찬 포효를 내질렀다.
놀라운 생명력이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씨발!'
어비스를 경험해본 이라면 지금 오크가 보여주는 것 따위에는 놀랄 수가 없었으니까.
그보다 더 빌어먹을 몬스터들이 차고 넘쳤으니까.
당연히 김지운도 알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오크가 죽지 않으리란 것을.
그래서 이미 준비해둔 상태였다.
우우우우웅!
오크를 치고 갔던 롤스로이스가 어느새 유턴을 하더니 오크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충돌했다.
콰아앙!
앞서 충돌했을 때보다 더 강렬하게.
그와 동시에 김지운의 귓속에 들렸다.
[오크를 처치했습니다.]
[오크가 도감에 등록됩니다.]
[근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오크를 처치했음을 알리는 알림이.
그러나 그 알림에 김지운은 기뻐하지 않았다.
김지운은 빠르게 움직였다.
'확인해야 한다.'
오크를 향해서.
그건 위험한 일이었다.
으어어어!
지금 이 소란을 알게 된 어비스 좀비들이 다시금 이곳으로 모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김지운은 던졌다.
스윽!
준비했던 스마트폰의 타이머 기능을 활성화한 후에 오크가 있는 곳과 정반대된 방향으로.
삐빅! 삐빅! 삐빅!
그 소리에 어비스 좀비들이 정신이 팔린 사이, 김지운이 오크에게 다가갔다.
그쯤에서는 이영후도 다가왔다.
사실 이영후도 알고 있었다.
지금 김지운이 하려는 게 무엇인지.
그래서였다.
'씨발.'
김지운, 그가 오크의 이마에 있는 십자 모양의 흉터를 보는 순간 욕지거리를 내뱉은 것은.
'떠돌이가 아니라 무리 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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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파밍 (1).
1.
어비스의 관광객들이 관광을 하는 이유 중 90퍼센트 이상은 기념품 때문이었다.
그래서 몇몇 관광객들은 말했다.
위험한 관광 따위는 관심 없으니까 적당히 하고 끝내자고.
어비스의 헌터들 입장에서도 나쁠 거 없는 제안이었기에 적당한 관광을 마치고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관광을 요구하는 관광객들 역시 적지 않았다.
어비스가 주는 신비는 그들을 놀라게 했으며, 무엇보다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어비스의 헌터들이 몬스터들을 잡는 과정을.
그 과정은 다큐멘터리에서 거대한 물소를 하이에나 무리들이 사냥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 번 그 관광에 맛을 들이면 꿈에서도 다시 맛을 보고 싶을 정도.
자연스레 알게 됐다.
몬스터의 습성과 특징에 대해서.
이영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헌터들이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못해서 열광했다. 그래서 알았다.
'무리 오크라니, 빌어먹을.'
오크에는 떠돌이 오크와 무리 오크가 있다는 것을.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보통 오크는 무리를 이루고 살았고, 그런 무리를 이는 오크들은 이마에 흉터를 남겼다.
십자 무늬나, 동그라미 같은 분명한 문장의 흉터를.
떠돌이 오크의 경우에는 그 흉터가 강제로 뜯겨지거나 훼손된 놈들을 말함이었다. 이마에 살점이 뜯어졌던 흔적이 있거나 혹은 날붙이 따위로 무자비하게 긁은 상처가 있으면 떠돌이 오크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리 오크의 경우가 상대하는 게 훨씬 위험했다.
'수색병이야.'
일단 무리 오크는 이동할 때는 한 무리가 되어 이동했다.
그러다가 어느 곳에 자리를 잡으면 그때부터는 수색병이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영리한 수색병 오크들은 수색하면서 자신이 지나간 자리에 흔적을 남겼다.
즉, 지금 백화점 주변 어딘가에 오크 무리가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
그리고 놈들은 수색병이 오지 않으면, 그 수색병의 흔적을 따라 이곳에 오리란 의미였다.
사실 어비스에서는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장소를 이동하면 될 일.
오히려 역으로 남긴 그 흔적을 이용해서 오크 무리를 소탕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백화점에서 벗어나는 건 지금 시점에서는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외부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특히 김지운은 느끼고 있었다.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
지금 아직까지 구조대는커녕 낌새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어비스가 아니었다.
경찰서만 가더라도 실탄이 잔뜩 있었다.
그뿐인가?
여긴 여의도였다.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지인 여의도.
물론 일하는 날에도 출근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이 연말에 출근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곳에 문제가 생겼다면 매우 빠르게 조치가 들어오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면 어느 곳보다 빠르게 취해질 수 있는 곳이었다.
지하 벙커를 비롯해 전쟁에 대비한 물자와 설비들이 아주 잘 관리되고 있는 지역이었으니까.
결정적으로 김지운은 정부가 어비스의 존재를 아주 잘 인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이렇다 할 낌새조차 없다는 것은 지금 이 일이 여의도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미였다.
'이곳을 나가는 건 더더욱 위험하다.'
만약 외부로 나가는 게 낫다고 생각됐다면 김지운은 진즉에 움직였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이제까지 김지운은 밖으로 나가기 위한 방법을 거듭 강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가지 않는 건, 이곳을 나가서는 정말 답이 없다는 의미.
그런데 이곳에 오크가 온다?
'시간은 있다.'
물론 당장 오크가 온다는 건 아니었다.
오크 무리 역시 수색병이 당했다면 상황이 좋지 않음을 인지하고 주도면밀하게 움직일 테니까.
그리고 오크들이 안 올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오크가 오는 게 낫다.'
그러나 김지운의 기준에서 오크 무리가 오지 않는 것은 더더욱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더 괴물보단.'
그건 곧 오크 무리들조차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위협이 백화점 주변에 존재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에 맞춰 대비한다.'
거기서 김지운은 고민을 멈췄다.
지금 고민하다고 해서 풀릴 문제도 아니었을 뿐더러, 지금 해야 할 건 고민이 아니었다.
툭툭!
김지운, 그가 이영후의 어깨를 두드린 후에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위로 올라간다.'
2.
더 짙어진 안개 탓에 이제는 에스컬레이터의 발판조차 보이지 않는 지하 2층.
처벅!
그런 지하 2층 에스컬레이터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다!"
그 등장에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던 생존자들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반긴 것은 강현중 중사였다.
"오셨습니까?"
가족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그는 김지운을 맞이했다.
그러나 반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말에 김지운은 바로 대답했다.
"소란이 생겼겠지."
"예, 맞습니다."
이미 김지운은 지하 1층의 풍경이 보이는 순간부터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사람이 너무 없다.'
처음으로 생존자 무리가 외부 탐사에 나갔다 왔다.
그런데 그 귀환에 환호하는 이들의 숫자는 기껏해야 채 백 명도 되지 않았다.
이곳에 남은 생존자가 여전히 천 단위에 가까운 것을 생각하면 지극히 적은 숫자였다.
달리 말하면 그보다 더 중요한, 시급한 일이 터졌다는 의미.
그리고 그게 무슨 일인지는 뻔했다.
'이제 슬슬 터질 때가 됐지.'
김지운이 자리를 움직인 후에 고개를 돌렸다.
다름 아닌 식품관 쪽으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가 들렸다.
"저리 안 가, 이 씨발놈들아? 응?"
3.
지하 1층 식품관.
백화점 식품관답게 온갖 먹을 식품들이 가득 찬 그곳은 언제나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식품관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일단 상황부터가 특이했다.
식품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쇼핑 카트나 진열대, 식탁, 의자 따위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사내들이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처럼 서 있었다. 손에는 식칼과 테이프 그리고 대걸레 막대기를 조합해 만든 조잡한 창 따위를 뒨 채로.
"저리 안 가, 이 씨발놈들아? 응?"
그렇게 성벽을 갖춘 이들이 들어오려는 이들을 향해서 거침없이 위협을 했다.
2023년 대한민국 여의도에서는 참으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더불어 매우 우스운 광경이기도 했다.
일단 지금 식품관을 막아놓은 그 의자나 진열대 따위들은 매우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더불어 식품관을 지키는 이들의 숫자는 30명 남짓, 머릿수를 샐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반면 그 밖에서 지금 식품관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의 숫자는 대충 가늠해도 삼사백이 훌쩍 넘었다.
지금 지하 1층의 생존자들 중 절반 이상이 몰려와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즉, 상식적으로라면 농성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 식품관을 둘러싼 이들 중에서 그 누구도 감히 식품관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상식적으로는 어찌하는 게 웃긴 일이긴 했다.
"아니!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요? 지금 이거 범죄 행위입니다!"
일단 지금 이 농성 자체가 불법 행위였다.
하물며 사람을 해친다?
그냥 합의금 몇 푼 쥐어준다고 해서 끝나지 않을 일.
만약 사람이라도 죽는다면 그때는 정말 걷잡을 수 없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한편으로 지금 당장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목숨 걸고 식품관에 갈 이유도 없었다.
특히 이곳은 식당가였다.
주변에 빵집만 다섯 곳이 있었고, 음식은 종류별로 넘쳤다. 식품관 말고도 먹을 걸 구할 수 있는 곳은 넘친다는 의미.
결정적으로 식품관에 있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이상으로 많은 게 지금 창고에 보관 중이었다.
"그럼 지랄 말고 꺼져! 여긴 우리 영역이야! 다 꺼져!"
지금 고작 식품관 하나 가지겠다고 저렇게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치는 것은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다는 의미.
그러니 애초에 기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목숨 걸고 바보짓을 하는 이와 그걸 바보짓이라고 치부하는 이가 싸움이 될 리 없었으니까.
그래서 딱히 분위기도 바뀌지 않았다.
이 대치국면은 하염없이 이어졌다.
"저기."
"왜?"
하지만 그가 등장하는 순간 분위기는 달라졌다.
"저 사람."
"누구? 어? 어!"
김지운, 그의 등장에 살벌하던 분위기가 꺼졌다.
당장에라도 싸울 듯이 이빨을 들이대던 강아지들 사이에서 늑대 한 마리가 등장한 것처럼.
달리 말하면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이제 김지운에 대해서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안개가 등장하고, 몬스터가 등장한 이후 김지운이 보여준 행적은 압도적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김지운이 아니었다면 장담컨대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 3할은 시체가 됐을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김지운을 은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인간이란 그렇게 간단한 족속이 아니었다. 제 목숨을 구해줬다고 해서 무작정 은인으로 모시는 경우는 오히려 훨씬 적었다. 은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제 목숨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대부분은 그런 값을 지불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그저 김지운을 더 위험한 괴물로 바라볼 뿐.
단지 그런 생각을 하는 부류는 있었다.
"이봐요! 저 새끼들이 지금 여기서 난동을 부리고 있어요!"
김지운이 그들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는 부류들.
"맞아! 저 빌어먹을 새끼들이 멋대로 식량을 점거하고 있다고!"
그런 부류들은 김지운의 등장을 히어로의 등장으로 여겼다.
"죽여! 저 새끼들도 죽여야 해!"
지금 자신들이 어찌하지 못하지만 눈에는 가시 같은 식품관 점령자들을 처리해줄 히어로.
정의를 집행해주고, 가치를 바로 세워줄 히어로.
자신들을 도와줄 히어로.
그것도 무보수로 피를 대신 흘려줄 히어로.
그러한 기대감은 빠르게 번졌다.
"죽여!"
이제까지 수백 명이 모였음에도 제대로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이들이 섬뜩한 심판을 부르짖었다.
반면 앞서서까지 성악가마냥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던 점령자 무리들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꿀꺽!
나오는 것은 긴장감의 소리 뿐.
그들도 알았으니까.
김지운이 어떤 괴물인지.
'저 새끼 말도 안 되는 새끼인데.'
그중에는 김지운이 어떻게 싸우는지 코앞에서 본 자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그게 계기였다.
김지운이 몬스터를 잡는 걸 본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상식은 그 순간 깨졌으니까.
이제는 뭔가 해야 한다고,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을 내렸으니까.
그래서 김지운이 안개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 그들이 움직였다.
식품관을 점령했다.
그런데 김지운이 다시 등장했으니, 등골이 오싹해질 수밖에 없는 일.
그때였다.
스윽!
김지운이 가볍게 진열대를 넘어갔다.
"어, 어!"
조잡한 창을 쥐고 있던 점령자들은 그런 김지운을 향해 제대로 창을 내찌르지 못했다.
당연했다.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서 사람을 칼로 찔러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일뿐더러 모두는 어릴 때부터 사람을 해해서는 안 되는 교육을 성인이 된 후에도 수없이 받았다.
사실상 세뇌교육이었고, 그 세뇌 교육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북한이 그 증거였다. 그들의 세상이 지옥이란 걸 객관적으로 모두가 아는데 세뇌 교육은 북한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천국에 있다고 믿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사람을 찌른다?
심지어 약자도 아니고 찌르는 순간 자신을 죽이고도 남을 무시무시한 맹수한테?
어림도 없는 일.
그 사실을 김지운도 알 잘고 있었기에, 김지운은 그들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유히 음료수가 진열된 코너에서 병에 든 바닐라 카페라테를 골랐다.
그런 김지운의 시선이 한 사내 앞에서 멈췄다.
겉보기부터가 보통이 아닌 사내였다.
일단 덩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외모도 각이 진 것이 사납다, 거칠다, 느낌이 분명했다.
그리고 목덜미에는 문신이 있었다.
직업을 물어보라고 하면 조직폭력배, 그런 대답이 나올 정도.
요즘 흔히 놀림감이 되는 그런 조폭, 그러니까 살만 뒤룩뒤룩 찌고, 혐오스런 외모에 문신으로 겁이나 주며 어울리지도 않는 명품 따위를 걸치고 다니는 건달 같은 부류를 말함이 아니었다.
눈빛이 달랐다.
그렇기에 김지운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쪽이 리더인가?"
이 무리를 만든 게 그 자임을.
그 사실에 그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김지운이 질문했다.
"이곳을 점령할 생각인가?"
"그렇다. 방해할 생각인가?"
"어떤 상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은 그쪽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런 상황에서 골치 거리를 하나 더 만들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 대답에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흔들림은 짧았다.
이내 사내는 이를 꽉 물며 일어났다.
싸움을 준비했다.
그 모습에 주변의 관중들도 상황을 깨달았다.
김지운이 저 점령자 리더를 심판하고 이곳의 평화를 다시 찾아 주리라고.
"죽여 버려!"
그러기를 바라는 이들 중에는 격한 응원을 내지르는 이도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성인 4명분의 식사, 아이 한 명 분의 기저귀와 분유. 그 외에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수준의 물품 보급을 약속해줄 수 있나?"
김지운의 말에 모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운을 당장 죽일 듯이 바라보던 사내 역시도.
결국 그 사내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이지?"
"내가 원할 때 적정한 수준의 물품 보급만 지원해준다면 굳이 골치 아픈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건?"
그제야 비로소 모두는 알았다.
"이곳을 점령하든 말든, 내 알바 아니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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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파밍 (2).
4.
김지운이 커피와 크림치즈와 빵, 탐스러운 딸기를 가지고 나오는 순간 그것을 보는 모든 이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그렇게 식품관에 만들어진 바리게이트를 넘어온 김지운이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현중 중사에게 말했다.
"아이 물건은 그쪽이 챙기도록."
"예?"
"애들한테 뭐가 필요한지는 몰라서."
그 말에 강현중 중사의 표정에는 더더욱 놀람이 가득 찼다.
반면 예외는 한 명 있었다.
이영후, 그는 상황을 이해하고는 말했다.
"저기, 제 것도 가져와도 됩니까?"
대답 대신 김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는 순간 이영후는 망설임 없이 바리게이트를 넘어가더니 수입식품관 코너에서 잼이나 향신료들 그리고 과자를 챙겨왔다.
그제야 비로소 나머지 사람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저거 뭐야?"
"손잡은 거야?"
김지운과 저 점령자들이 협상을 했음을.
자신들이 예상한 것과 다르게.
"미친! 아니! 지금 저 새끼들을 그냥 놔둔다고?"
그 대목에서 누군가가 김지운을 향해 제 심정을 토해냈고, 그 사실에 김지운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불만 있나?"
그 순간 말을 뱉은 사내와 김지운, 그 사이에 있던 이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홍해가 갈라지듯이 김지운과 말을 뱉은 사내 사이가 갈라지고 길이 생겼다.
둘이 서로를 마주했다.
"에? 아, 어."
딸꾹!
그 시선에 말을 뱉은 사내는 제대로 된 말을 뱉지 못하다가 결국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 순간 그 누구도 김지운에게 무어라 말을 뱉지 않았다.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저기······."
"대장이라고 부르도록."
"대장님, 저들을 놔둘 생각이십니까?"
강현중 중사, 그는 김지운의 선택에 의문을 제기했다.
마땅한 의문이었다.
지금 점령자들의 행동은 과격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동시에 법으로 결코 보호받을 수 없는 짓!
저들은 사실상 무법자 무리였다.
그런데 그들을 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그들과 손을 잡는다?
그 대목에서 김지운의 생각을 대신 말해준 건 이영후였다.
"어비스에서 헌터가 되는 조건 중 하나가 뭔지 알아요?"
"예?"
"응? 어비스 모르시나? 헌터 아니에요?"
그 대목에서 이영후가 김지운을 바라봤다.
같은 동료라고 해서 같은 헌터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그럼 여기서 어비스에 대한 걸 말해줘도 됩니까? 라는 눈빛.
그 눈빛에 김지운은 가볍게 턱짓을 했고, 그제야 이영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자세하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기니까 지금 하려던 말만 하면, 어비스의 헌터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행동력입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움직이면 늦어요. 일단 움직이고 생각해야지."
말을 하던 이영후가 고개를 돌려 식품관을 바라봤다.
"저기 있는 사람들은 그런 부류고요."
이어서 이영후가 그 식품관 주변을 둘러싼 생존자들을 바라봤다.
"나머지들은 그렇지 못한 부류죠."
몬스터가 등장하면 가장 먼저 뒈질 부류이기도 하죠, 라는 말을 이영후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지금 우리 헌터님에게 필요한 건 식품관을 지배하는 부류이고요."
이영후의 말대로였다.
당장 이곳을 떠날 수 없는 김지운 입장에서는 머릿수만 많은 양은 필요 없었다.
필요한 건 이빨을 가진 개들이었다.
물론 그저 이빨만 가지고 짖을 줄만 아는 별거 아닌 개들이었다면 김지운도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 부류들의 개들은 몬스터를 보는 순간 도망치기만 하는, 오히려 골치 아픈 부류들이었으니까.
그래서 봤다.
이 점령자들의 리더가 누구인지.
'보통은 아니다.'
사실 보기 전부터 김지운은 그 점령자 리더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황이 그랬다.
김지운, 그가 이영후와 같이 지하 3층으로 갔다 오는데 걸린 시간은 채 30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간 안에 점령자들은 무기를 들고 식품관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전에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어.'
당연히 그 30분 안에 그 모든 게 됐을 리 없었다.
그전부터 사람을 모으고, 계획을 세우고, 무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즉, 도그블린 무리가 등장할 무렵부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는 의미.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그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쉽지 않은 건 그런 이들을 모아서 하나의 무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런 건 말재주가 뛰어나다거나 그런 것으로는 결코 불가능했다.
카리스마가 필요한 일.
그 점령자 리더에게는 그게 있었다. 눈을 마주치고 몇 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무리를 만들 수 있는 카리스마가.
"대장님, 위험한 부류입니다."
물론 그렇기에 위협적이었다.
"저런 부류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강현중 중사, 그는 어비스의 헌터는 아니었지만 결코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이가 아니었다.
삶과 죽음, 그 경계선에서 줄을 타는 삶을 살아왔었다.
그렇기에 강현중 중사는 지금 점령자들의 리더 같은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경험해봤다.
"자기 위의 다른 우두머리를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부류가 아님을.
당장 지금 행동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군가 나를 구해줄 것이다, 그런 생각 따위는 없는 부류였다.
내 목숨은 내가 지켜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행동이 최선이다, 라고 생각하는 부류였지.
그래서 강현중 중사는 확신했다.
"저 자에겐 대장이 가장 큰 위협일 겁니다."
틈이 생기면 김지운에게 이빨을 들이댈 것임을.
김지운도 알았다.
저런 부류들이 어떤 부류인지를.
특히 어비스의 헌터들 중에는 그런 부류가 많았다.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어비스의 헌터들 중에서 파티를 이끄는 리더들은 대부분 점령자의 리더 같은 부류였다.
자기가 곧 답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들.
하지만 김지운은 어비스의 헌터가 되고 은퇴하기 전까지 그런 부류들에게 공격을 당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틈을 보이면 이빨을 들이대겠지.'
이유는 간단했다.
'틈을 보이면.'
그런 부류들에게 김지운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였으니까.
지금도 다를 건 없었다.
도리어 김지운은 바랬다.
'차라리 날 죽일 만큼 실력 좋은 헌터가 됐으면 좋겠군.'
지금은 실력 좋은 헌터가 하나라도 더 필요할 때.
"점령자들이 있는 동안 더 이상 이곳에서 소란은 없을 거다."
더불어 김지운 입장에서 점령자의 등장은 기꺼운 일이었다.
"우리가 없어도."
가장 중요한 식량을 지키고, 관리해줄 이가 생겼으니까.
"없어도? 저기?"
그 대목에서 이영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또 어디 갑니까?"
이영후의 물음에 김지운은 대답했다.
"파밍을 한다."
5.
어비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 대해서 헌터들은 이래라저래라, 여러 가지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생각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였다.
"강해지는 게 가장 확실하지. 레벨 올리고, 아이템을 모으는 거."
파밍을 다니는 것.
물론 이 확실한 방법을 두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게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김지운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였다.
'이게 싫어서 은퇴를 했는데.'
그가 놀라운 결과물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돌아오는 순간 은퇴를 한 것은.
그의 눈에 비친 어비스는 공략의 대상, 탐험의 대상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사냥의 대상도 아니었다.
곤충 따위가 아무리 강해도, 맹수 따위가 아무리 강해도 공룡 같은 거대한 존재 앞에서는 사냥을 운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치는 게 정답이었고, 김지운은 그 정답에 만족했다. 꼬리 내린 개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더 이상 김지운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결국 어비스가 펼쳐졌고, 이제 도망칠 구석 따윈 없었다.
그럼 살기 위해 사냥을 하는 수밖에.
물론 김지운은 무모하게,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사냥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계획이 있었다.
"진짜 사냥하시려고요? 혼자서요? 파티 안 만드시고요?"
"그게 정답이지."
본래 계획은 지하 1층의 생존자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자질이 있는 이들을 모아서 적당한 교육과 훈련을 마친 후에 지하 1층을 시작으로 그 주변을 착실하게 정리해나가는 것이었다.
그게 클랜이 만들어진 이유였다.
그저 단순히 몬스터만 잡는 게 아니라, 휴식과 보급, 지원, 수색 등 다양한 역할이 필요했다.
개미와 같았다.
작은 개미들이 무리를 만들어서 새도 사냥해서 잡아먹듯이, 어비스에서 인간들 역시 개미처럼 모여야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염력이 생기기 전이었다면."
그 말에 이영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영후도 김지운이 보여준 능력을 봤다.
'염력으로 차를 운전하는 것도 모자라서 유턴해서 다시 움직이다니.'
분명 김지운이 보여준 염력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데 전투에서는 그렇게 위력적이지 않을 텐데? 무기 없이는?'
그러나 염력은 전투용이라기보다는 전투 보조용으로 쓰이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F랭크의 염력이 보여줄 수 있는 물리력은 10살 남짓한 어린 아이의 근력과 비슷했다.
물건을 들고 움직이거나, 그런 건 가능했지만 그 자체로 실질적인 무언가를 하긴 힘들었다.
무기를 움직여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아이의 손에 칼을 쥐여 줘봤자 죽은 닭 한 마리 제대로 해체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 몬스터의 몸에 생체기는 낼지언정 치명상은 주기 힘들다는 의미.
물론 조건이 갖춰지면 달라졌다.
예를 들면 총 같은 것.
하지만 여긴 대한민국이었다. 이런 곳에서 총 같은 아주 효과적인 무기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
여하튼 이영후의 기준에서 김지운의 단독 사냥은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었다.
'이 양반 죽으면 나도 뒤진다.'
그리고 이영후의 입장에서 지금 믿을 수 있는 카드는 오로지 김지운 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솔직히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실력을 떠나서 어비스에 대해 아는 이가 지금 보기에는 김지운 밖에 없었다.
어비스에서 살아남는 건 능력이 아니라 지식이었으니까.
물론 예외가 있긴 했다.
초창기, 어비스의 헌터들에게는 참고할 지식 따윈 없었다. 직접 미지를 지식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자들은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전설이 됐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나 하지 못하기에 전설이었다. 그런 전설이 여기서 갑자기 시작될 리 만무.
그래서였다.
"저기요."
눈알을 굴리던 이영후가 말했다.
"같이 가겠습니다."
그건 제안이었다.
"제가 미끼라도 되겠습니다."
김지운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제안.
그리고 그건 매우 유효한 제안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어비스에서 미끼가 있다는 것은 게임으로 따지면 목숨이 하나 더 있는 것과 같은 일.
"이래 뵈도 어비스에서 관광하면서 먹은 짬밥이 꽤 됩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영후는 어비스의 경험이 있었다.
헌터가 아니긴 관광객이긴 했지만, 어비스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보다는 관광객이 훨씬 도움이 됐다.
물론 이건 이영후가 희생 정신이 투철해서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김지운이 죽으면 어차피 죽은 목숨, 그렇게 생각했기에 할 수 있는 베팅이었을 뿐.
그 베팅에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런 반응은 예상 외였다.
이영후가 자신을 보고 반해서, 감동해서, 존경심이 치솟아서 이런 제안을 한 게 아니란 건 알았다.
김지운이 죽으면 본인도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이렇게 나온 것뿐.
사실 이건 모두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중요한 건 그 상황에서 고르는 답이었다.
제 목숨이 귀한 걸 알기에 제 목숨을 베팅한다는 것.
'관광객보다는 헌터군.'
그게 헌터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물론 여기서 김지운은 감동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저 잠깐 놀랐을 뿐이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내게는 미끼가 필요 없다."
무엇보다 김지운은 필요 없었다.
"이게 있으니까."
말과 함께 김지운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영후의 눈빛이 빛났다.
'설마 아이템인가?'
아이템.
어비스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으로 매우 특별한 능력을 가진 물건들을 말함이었다.
그 아이템을 통해서 헌터들은 더 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스킬 슬롯의 제약을 벗어나서 스킬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룬으로 얻을 수 있는 스킬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더 강력한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강력한 아이템 하나가 있다면, 이 지옥을 천국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의미!
'그래, 믿는 구석이 있었겠지!'
그제야 비로소 이영후는 김지운이 보여준 자신감을 알 수 있었고, 그 사실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단한 게 있으셨군요! 이런 게 있으면 진작에 보여주셨어야죠! 그래서 뭔가요? 전설 등급 아이템인가요?"
그 기대 가득찬 이영후에게 김지운은 주머니에서 꺼낸 걸 보여줬고, 그것을 보는 순간 이영후는 그대로 굳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랄비?"
김지운이 꺼낸 건 치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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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파밍 (3).
6.
어비스의 헌터들이 어비스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아니었다.
적응이었다.
어비스의 안개 속에서는 더 이상 눈에 의존하는 삶의 방식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대부분은 일단 소리에 민감해졌다.
소리를 듣는 능력이 개발된다는 건 아니었다. 그건 당장 하고 싶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었다. 고막에 스트레칭 몇 번 한다고 해서 청력이 늘어나거나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보청기나 이어폰 같은 고도화된 전자기기를 어비스에 가져갈 수도 없는 일.
대신 자신의 소리를 죽이는 능력을 개발했다. 자신이 조용해지면 자연스레 주변 소리가 선명해지는 법이었으니까.
물론 쉬운 길도 있었다.
아이템들이 있었다.
사용하면 눈이 갑자기 적외선 카메라처럼 바뀌는 아이템이.
혹은 열화상 카메라처럼 바뀌는 아이템이.
하지만 이런 아이템들의 값어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비쌌고, 동시에 위험했다.
아이템이란 건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는 것.
그런 것에 의존한 이들 대부분은 빠르든 늦든 어비스에서 방랑자가 되어버렸으니까.
어쨌거나 처음은 소리에 예민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 후에 적응이 되면 그때부터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특히 가진 직업 그리고 스킬슬롯에 넣은 룬에 따라서 그 방법은 다양해졌다.
김지운도 그랬다.
그는 원래 정석적인 방법으로 어비스에서 사냥을 하던 헌터였다.
하지만 염력 스킬을 얻은 후에 김지운의 방식이 바뀌었다.
지금 보여주는 것이 그 방식이었다.
스으으!
김지운, 그가 풀어놓은 치실을 염력으로 이용해 하나의 거대한 원으로 만들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약 지름 10미터짜리 원을.
'오랜만이군, 거미줄을 펼치는 건.'
김지운의 염력 기술 중 하나인 거미줄이었다.
원리도 거미줄과 같았다. 치실에 무언가가 닿는 순간 김지운이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어비스에는 치실 따위가 없었기에,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진짜 거미줄이나 혹은 비슷한 것들로 펼치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건 매우 유용한 방법이었다.
일단 이 거미줄의 최고 장점은 대상에 닿아도 그 사실을 대상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대신 단점도 있었다.
염력을 쓰는 입장에서도 인지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
비유를 하면 손에 들고 있는 젓가락 끝에 작은 무언가가 묻었는데 그것을 느끼는 격이었다.
보통은 못 느꼈다.
더불어 거미줄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더더욱 느끼기 힘들어졌다.
그래서였다.
김지운, 그가 살아서 은퇴할 수 있었던 건.
'지금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지만.'
전성기 때 김지운이 펼칠 수 있는 거미줄은 무려 반경 100미터에 이를 정도였으니까.
어쨌거나 이 거미줄이 김지운이 단독 사냥에 나서는 이유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나서는 것뿐, 자신감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김지운은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거슬러서 천천히 1층에 올라갔다.
보이는 것은 없었다.
으어어어!
그저 어비스 좀비들의 소리만 들릴 뿐.
그곳에서 김지운은 조심스럽게, 펼친 거미줄을 통해 어비스 좀비의 위치를 파악하면서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그러면서 가늠했다.
'어비스 좀비가 꽤 많다.'
1층에 있는 어비스 좀비의 숫자를.
그 숫자에 김지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평생 본 숫자보다 여기 1층에 있는 어비스 좀비가 더 많군.'
사실 어비스 좀비는 헌터들에게 그렇게 익숙한 존재가 아니었다.
어비스는 매우 철저하게 관리되는 곳이었고, 최대한 비밀리에 관리되는 곳이었다.
당연히 어비스에 들어간 인간의 숫자 역시 극히 적을 수밖에 없었고, 좀비의 숫자는 더더욱 적었다.
그리고 헌터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그것만큼 위험하기 그지없는 건 없었다.
더불어 헌터들은 익숙하지 않은 것은 되도록 피하고는 했다.
어비스 좀비가 많으면 그냥 그 장소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김지운은 달랐다.
그는 2층으로 바로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층을 거닐었다.
그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지금 김지운이 착용하고 있는 KF94 마스크가 줄 수 있는 시간은 짤막하기 그지없는바.
또한 지하 주차장 3층에서처럼 차 안에서 숨을 돌릴 수 있는 공간이 지금 지상 1층에는 없었다.
이곳은 지금 안개로 점령당한 상태, 의도적으로 밀폐된 공간은 존재치 않았으니까.
굳이 찾는다면 계단 정도, 화재에 대비해 철문이 하나도 아니고 이중으로 배치된 계단이라면 어비스의 안개도 쉽사리 차오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김지운은 계단은 무시했다.
애초에 머릿속에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헌터에게 밀폐된 공간은 가장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공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운이 1층을 거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쯤인데.'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을 찾기 위해서.
'저기 있군.'
그렇게 발걸음을 멈춘 김지운의 발치에는 다름 아니라 화재용 장비들이 있었다.
소화기 그리고 화재용 마스크가.
물론 김지운이 필요로 한 건 화재용 마스크였다.
KF94마스크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시간 어비스의 안개에서 김지운의 이성을 지켜줄 물건이었다.
얼마나 지켜줄지, 그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제대로 실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대신에 헌터 정도 되면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안개에 노출됐을 때 보이는 반응은 과대망상, 흥분, 분노와 같은 매우 격한 것들.
자연스레 심박수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심박수가 안정적일 때는 아직 안개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김지운이 서두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심박수가 오르면 그게 무리해서인지 아니면 안개 때문인지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김지운이 천천히 층을 거닐면서 화재용 마스크를 챙겼다.
또한 화재용 조명등도 챙겼다. 이 역시 매우 유용했다.
특히 밤이 됐을 때 이 조명등의 값어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지운은 확신했다.
'곧 전기가 끊길 거다.'
지금은 전기 덕분에 이곳이 빛이 가득하지만, 전기가 끊기는 순간 어둠이 깔리리란 것을.
그리고 그 어둠은 모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독했다.
그저 전기가 끊긴 밤의 도시 따위가 아니었다.
그곳을 가득 채운 안개가 티끌의 빛마저, 하늘에서 내려오는 별빛과 달빛마저 지워버릴 테니까.
지독한 어둠이 내리쬘 테니까.
'좋아.'
그렇게 화재용 장비들을 챙기는 김지운, 물론 그의 진짜 목적은 이것들이 아니었다.
오크와의 전투를 비롯해 어비스의 몬스터를 사냥할 때 이런 것들은 그리 인상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김지운이 찾는 진짜 무기는 따로 있다는 의미.
'이제 바로 4층으로 간다.'
그렇게 그 무기를 찾기 위해 4층으로 올라가는 김지운.
으어어어!
'에스컬레이터 주변에는 어비스 좀비들이 없다.'
다행히도 어비스 좀비들은 에스컬레이터 쪽에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화장실 쪽이나 계단 쪽에 몰려 있었다.
'예상대로.'
이상할 건 없었다.
안개는 빠르지만, 순차적으로 차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존자들은 그 안개와 어비스 좀비를 피해 도망쳤을 것이다. 더 높은 층으로 혹은 화장실 같은 밀폐된 공간으로.
자연스레 어비스 좀비도 그들을 쫓아갔을 터.
달리 말하면 김지운은 직감했다.
'5층이 지옥이겠군.'
이곳의 생존자들, 이제는 생존자가 아니라 좀비가 된 이들의 대부분이 5층에 있으리라고.
그쯤에서 김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가운데가 뻥 뚫린 백화점의 특징 때문에 김지운은 3층임에도 바로 천장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천장까지 차오른 안개를 볼 수 있었다.
'아득하군.'
탄식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그쯤에서 김지운은 확신했다.
'지하 1층은 이레귤러다.'
지금 이 백화점에서 지하 1층만이 안전지대가 된 건, 어비스의 이레귤러 현상이라고.
어비스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안개로 가득 찬 어비스에 이상하게 무인도처럼 안개가 차지 않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헌터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경우였고, 해서 그곳을 보통은 오아시스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헌터들은 휴식을 취하고, 정비를 했다.
동시에 사냥도 했다.
안개가 없는 곳에서는 어비스의 몬스터들 역시 시한부 인생이 시작됐으니까.
어쨌거나 김지운 입장에서는 희소식이었다.
이레귤러 현상은 한 번 발생하면 꽤 오래 유지됐다.
정확히 말하면 이레귤러 현상이 자연적으로 사라지는 경우는 이제까지 발견된 적이 없었다. 김지운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때는 분명 그랬다.
대신에 강력한 몬스터의 등장 혹은 자연 재해로 인해서 이레귤러가 현상이 사라지는 경우는 있었다.
여하튼 지하 1층은 생각보다 훨씬 더 안전했다.
더불어 이런 오아시스는 헌터에게 있어 목숨줄과 같았다.
제아무리 대단한 모험가도 물 없이는 모험을 계속할 듯 없듯이, 제아무리 강한 헌터도 숨을 쉴 수 있는 오아시스 없이는 결코 사냥을 계속할 수 없었으니까.
'오크들에게 밀리면 끝장이다.'
그렇기에 김지운은 더더욱 지하 1층을 지켜야 했다.
'다른 몬스터도 마찬가지이고.'
다양한 선택지를 준비하긴 했었다.
특히 여기까지 올라왔을 때 안개의 끝이 보인다면, 그럼 김지운은 망설임 없이 지하 1층을 버릴 생각이었다.
그냥 옥상에서 농성을 하면 될 뿐.
그게 여러모로 유리했다.
제아무리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백화점 옥상으로, 그 높은 곳으로, 미로와도 같은 계단을 뚫고 올 수는 없을 테니까.
안전함의 수준이 차원이 다를 테니까.
결정적으로 구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헬기든 드론이든 무언가가 지나갔을 때 생존을 알릴 수 있을 테고, 구출하는 쪽도 부담이 훨씬 더 적을 테니까.
그러나 그 모든 시나리오는 무의미한 것이 됐다.
이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결국 이곳을 당장 떠나는 건 불가능하다.'
이제 김지운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해서 이 백화점의 지하 1층에 아성을 만들어야 했다.
그쯤이었다.
김지운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런 김지운의 앞에는 정말 멋진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다.
물론 피아노가 목적이 아니었다. 이런 세상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 짓.
김지운이 찾고자 하는 것은 이 피아노를 파는 악기점에 가지고 있을 만한 도구였다.
'다행이군.'
그리고 다행히도 김지운은 찾을 수 있었다.
'피아노줄이 있었어.'
피아노 조율을 할 때 사용하는 피아노줄을.
이런 상황에서는 도무지 무기라고 할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김지운의 눈빛은 달랐다.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거면 가능하다.'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오크 놈들을 잡는 건.'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김지운의 눈빛에는 작은 흔들림이 있었다.
'남은 건 선택뿐이다.'
그는 이제 결정해야 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은퇴한 헌터가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그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비명 소리가 들렸다.
7.
인간의 장점은 중 하나는 적응력이었다.
한때 패닉 상태에 빠졌던 지하 1층의 생존자들 역시 시간이 흐르자 상황에 적응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죽을 일은 없는 거 같네.'
도그블린이 등장한 후에 지하 1층에는 이렇다 할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오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터졌던 풍선을 대충 테이프로 막은 상태, 작은 자극만으로도 언제든 크게 터질 수 있는 상태일 뿐.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위험한 상태였다.
패닉 상태에 빠진 이들은 오히려 그 행동 패턴 자체는 매우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겁에 질려 덜덜 떨거나, 실신하거나, 헛소리를 지껄이거나, 그냥 정신 나간 모습을 보일뿐이었다.
그러나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시작됐다.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이들은 상관없었다. 문제는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폭발 직전의 상황에서 인간은 굉장히 이성이 매우 비이성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야."
"뭔데?"
"하나 챙기자."
지금 이 사내들이 그랬다.
"챙겨?"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20대 중반의 사내들, 딱 봐도 양아치 냄새가 풀풀 풍기는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한몫 안 챙기면 그게 병신이잖아? 응?"
"무슨 이야기야?"
"돈 되는 거 챙기자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하면 병신아 잠이나 쳐 자, 라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 제안이었다.
"야, 미친놈아! 이미 위에 다 털어갔을 텐데 뭘 털어?"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모두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명품관 말고 지하 2층에 그거 있잖아? 신발 리셀 매장."
"리셀? 아, 거기?"
"거기 루이뷔통 나이키랑 디올 나이키 있어. 내가 봤어. 사진도 아까 찍었잖아?"
그쯤에서 제안을 한 사내가 스마트폰에 찍힌 사진을 보여줬고, 그러면서 말했다.
"이게 한 켤레에 천만 원이야."
눈이 돌아갈 만한 말을.
물론 모두가 그 제안에 바로 혹한 건 아니었다.
"위험하잖아? 좀비 있다면서?"
의문을 제기했다.
"좀비는 무슨,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에 여기에 쳐들어왔겠지. 안 그래? 설마 좀비들이 에스컬레이터 타는 게 무서워서 못 올라오겠어?"
"안개는? 저거 위험한 거 같은데?"
재차.
"아까 내려간 인간들, 내가 유심히 봤거든? 그러니까 오고 갈 때 마스크 쓰고 있더라고."
"마스크? 화생방?"
"아니, 그냥 일반 마스크 말이야."
그리고 이어진 대답에 모두의 눈빛이 바뀌었다.
물론 그건 그 어떤 근거도 없는 소리였다.
그저 그럴싸하게 포장을 했을 뿐인 소리.
결코 목숨을 베팅할 만한 가치는 없는 소리.
그러나 지금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 소리에 믿음이 갔다.
'얘 말이 맞는 거 같아.'
정확히는 그 소리를 믿었다.
확증편향,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알아, 위험한 거. 근데 어려운 거 없다니까? 저쪽 에스컬레이터에서 그 리셀 매장까지 거리가 얼만지 알아? 10미터도 채 안 돼. 갔다 오는데 30초도 안 걸린다고. 30초 만에 천만 원 벌 수 있다니까?"
그 무렵에서는 더 이상 질문은 없었다.
이야기도 없었다.
다섯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행동에 나섰다.
물론 그들의 수작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지하 2층, 그 안개로 자욱한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조우했다.
으어어어!
"조, 좀비다!"
그들의 조잡한 발소리에 어비스 좀비들이 달려들었고, 그 순간 모든 건 끝이었다.
한 번에 네 명이 어비스 좀비의 먹잇감이 됐다.
남은 한 명의 운명도 다를 건 없었다.
이미 패닉 상태에 접어든 그에게 근처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발견하는 건 불가능했다.
"으아아악!"
그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칠 뿐.
으어어어!
그리고 어비스 좀비가 그 한 명을 쫓아 움직였다.
그 추격전 역시 길진 않았다.
"으아아악!"
그 찢어질 듯한 단말마를 끝으로 지하 2층에 다시금 고요함이 짙게 내려앉았다.
"뭐야?"
"아까 몇 명 내려가던데?"
"죽은 거야?"
그쯤에서 적잖은 이들이 그 단말마를 닫고 지하 2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모였다.
"여기 진짜 뭔가 있는 모양이네."
"씨발, 미치겠네. 대체 뭐가 있는 거야?"
모인 이들이 저마다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모두는 생각했다.
'여긴 절대 들어가지 말아야지.'
안개는 지옥이다.
'이제 아무 일 없겠지?'
그래도 굳이 저기 들어가지만 않으면 당장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크우, 크우!
그 비명 소리를 들은 것이 그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크우!
오크, 놈이 소리를 따라 지하 2층에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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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스위트홈 (1).
1.
'잘못하면 최악의 시나리오 확정인데, 괜찮으려나?'
김지운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떠나는 것을 보는 순간 이영후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반면 강현중 중사는 달랐다.
그는 머릿속이 복잡해질 틈이 없었다.
으아아앙!
'하은이!'
그에게는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둘이나 있었으니까.
그렇게 강현중 중사가 잽싸게 아내와 아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이내 볼 수 있었다.
으아앙!
"하은이가 왜 울지?"
"배고픈가 봐."
"분유는?"
"가방에 액상분유 있어."
"잠깐만."
그 모습에 강현중 중사가 가방에서 분유를 꺼낸 후에 일회용 젖꼭지를 채우고는 아내에게 건네줬고, 아내는 능숙한 솜씨로 자세를 잡은 후에 아이의 입에 젖병을 물렸다.
꼴깍꼴깍······.
그제야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분유를 먹기 시작했다.
그 가족 사이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지금 상황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고요함이.
그 고요함 속에서 강현중 중사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자신을 보고 있는 이영후를 향해서.
"아, 아닙니다."
그 물음에 이영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해됐으면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경우를 잘 몰라서······."
"아닙니다, 방해될 건 없습니다. 곁에 와서 보셔도 됩니다."
"그래도 됩니까?"
그제야 슬그머니 더 가까이 다가온 이영후가 강현중 중사의 딸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이영후 역시 이런 상황이 올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던 바.
그럼에도 웃음이 나올 만큼 강현중 중사 딸아이의 모습은 귀여웠다.
그러나 눈은 달랐다. 이영후의 눈은 웃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도 아기 얼굴 보니까 웃음이 나오네요. 진짜 최악의 상황인데도."
"지금 일어난 이 일들이 뭔지 아십니까?"
그 질문에 이영후는 몇 번 눈을 굴리고는 피식 웃었다.
"원래는 여기서 비밀 유지 조항 어기고 말하면 바로 클랜에서 응징자가 오는데, 지금은 제발 와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니까. 그러니까 아무래도 좋겠네요."
이윽고 이영후는 말해줬다.
"어비스란 게 있습니다."
최대한 간략하게.
"그리고 헌터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이영후는 무려 수십 분 동안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해야만 했다.
"그중 최고는 누가 뭐라고 해도 퍼스트 킬러죠, 최고의 헌터! 최초의 업적들을 누구보다 많이 달성한 헌터! 아쉽게도 죽었지만······ 아, 죄송합니다. 퍼스트 킬러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말이 길어지네요. 제가 진짜 팬이거든요."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끝이 있는 법.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각성하셨다고요? 그럼 상태창 여실 수 있으시겠네요. 방법이요? 아, 모르시는구나. 박수 한 번 치면 상태창, 두 번 치면 스킬 슬롯, 세 번 치면 도감이 열립니다. 그리고 오른손 악수는 파티 맺기, 왼손 악수는 파티 해제.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손 없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손모가지 간수를 잘 해야 해요."
이야기에 끝이 왔다.
으아아악!
"뭐, 뭐야?"
지하 2층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에 모든 이들이 하던 대화를 멈추었다.
바로 행동에 나섰고, 그 둘은 알 수 있었다.
"다섯 놈이 지하 2층으로 갔다고요?"
이번에 일어난 소란을.
"설마 이 미친 새끼들 신발 훔치러 간 건가? 또라이 새끼들인가?"
그 소란에 모두는 혀를 찼다.
거기까지였다.
어비스 좀비는 안개가 없는 곳에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 만큼, 더 큰 소란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영후는 달랐다.
'설마, 아니겠지?'
어비스에서 소리를 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 순간이었다.
크우우우우!
평화롭던 지하 1층에 오크가 등장했다.
2.
오크.
게임이나 소설에서는 고블린과 함께 가장 흔하게 등장하고, 흔하게 처치되는 몬스터였다.
무서울 것은 하나도 없는 몬스터.
그러나 그렇듯 현실은 달랐다.
크우우우!
등장한 오크의 존재감은 경험치 파밍용 몬스터가 아니라 마왕이라고 해도 될 만큼 압도적이었다.
일단 덩치가 엄청났다.
사람 두 명이 동시에 타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에스컬레이터를 비좁게 느껴지게 만드는 그 덩치는 보는 사람들에게 비명소리조차 내뱉지 못하게 했다.
과장이 아니었다.
"어, 어, 어."
콰직!
처음 오크를 본 생존자는 그 존재감에 압도된 나머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오크가 휘두른 큼지막한 도끼에 머리가 박살이 났다.
비명을 내지른 건 좀 더 뒤에 있던 생존자였다.
"괴, 괴물이다!"
그 소리에 생존자들은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학습을 했으니까.
"튀어!"
여기서는 입 다물고 일단 숨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반면 예외도 있었다.
"잡아!"
스무 명이 넘는 이들은 도리어 등장한 오크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식품관 점령자들이었다.
"저거 죽여야 해!"
오크를 죽이기 위해서.
물론 그들 중에 몬스터를 죽여 본 경험이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존재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오크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이 임전무퇴를 신념으로 삼는 타고난 전사이거나 용사라서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여기 모인 모두를 구하는 영웅이 되겠다, 라는 일념을 가져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한 건 두 가지였다.
"고작 한 마리야! 우린 스무 명이 넘고!"
압도적인 머릿수.
"한 번씩만 창으로 찔러도 끝이야!"
그리고 조잡하지만 어쨌거나 피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무기가 손에 쥐어졌다는 것.
달리 말하면 그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근거는 그게 전부였다.
크우크우!
"어, 어? 뭐, 뭐야?"
그렇기에 오크를 직접 마주하는 순간 그들의 용기는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괴, 괴물이다!"
힘차게 달려왔던 점령자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크우!
그 사실에 오크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확신의 비웃음이었다.
이곳에 있는 것들이 자신을 조금도 위협하지 않으리란 확신.
이것들은 식량이라는 확신.
"네놈!"
크우?
그런 확신을 한 사내가 가로막았다.
"이곳은 못 지나갔다!"
강현중 중사, 그가 조잡한 창을 든 채 오크를 마주 봤다.
솔직히 그건 막아섰다, 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광경이었다.
일단 체격 차이가 너무 컸다. 강현중 중사의 체격도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오크는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무장의 수준 차이도 너무 컸다. 오크는 지금 투박하지만 가죽으로 된 갑옷을 두르고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투박하지만 어쨌거나 무시무시한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반면 강현중 중사의 손에는 칼과 걸레 마대로 만든 조잡한 창이 무기의 전부였다.
비유를 하면 사냥개와 호랑이 싸움이었다.
그마저도 좋은 비유는 아니었다. 현명한 사냥개라면 싸움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을 택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현중 중사는 도망치지 않았다.
'내가 물러나면 다 죽는다.'
지켜야 했으니까.
'주혜도 하은이도.'
가장 소중한 것을.
어느 때보다 각오를 다졌다는 의미.
동시에 방법도 나름 준비했다.
'어비스의 몬스터는 안개 밖에서 오래 못 버틴다. 설명대로라면.'
강현중 중사는 최대한 시간을 벌어서 오크를 죽일 속셈이었다.
그래서 나섰다.
시간을 벌려면 자신이 타깃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러니까 강현중 중사는 망설이지 않았다.
먼저 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우!
오크 역시 기꺼이 강현중 중사를 맞이했다.
그 둘이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후웅!
정확히는 오크가 공격을 하면 강현중 중사가 전력을 다해 피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강현중 중사는 의외로 오크의 공격을 잘 피해냈다.
물론 오크의 공격 동작이 크고, 그래서 공격이 어느 정도 예측되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오크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보면서 피한다?
그야말로 현실과 지옥 사이를 널뛰기하는 기분.
후웅!
그리고 오크 입장에서는 짜증이 치솟는 일이었다.
그쯤에서 오크의 표정이 달라졌다. 짜증 그리고 귀찮음이란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으아앙!
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 순간 오크의 행동이 멈췄다.
크우?
놈이 아기 울음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장 먼저 깨달은 건 다름 아니라 강현중 중사였다.
'하은이!'
이대로 두면 오크가 울음 소리를 향해 간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그 순간 강현중 중사는 도망치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한눈을 파는 오크, 놈의 눈을 향해 가진 창을 내찔렀다.
푹!
그리고 그 창은 그대로 오크의 왼쪽 눈을 찔렀다.
크우우우우우!
그 순간 오크가 거대한 괴성을, 고통에 찬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강현중 중사를 바라봤다.
앞서서 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한 채.
강현중 중사를 산 채로 씹어먹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채.
"와! 들어와!"
그 눈빛에 강현중 중사도 기꺼이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표현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괴물이 딸아이를 향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나한테 들어와, 이 씹새끼야!"
크우우우!
그렇게 강현중 중사와 오크가 전력을 다해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 그 순간이었다.
퍼걱!
갑자기 오크의 목덜미에 도끼가 꽂혔다.
화재 대비용 도끼였고, 그 도끼를 휘두른 건 점령자들의 리더, 고강수였다.
'이때를 노렸다.'
오크에게 치명상을 줄 틈을 노리고 있던 고강수는 그 틈이 나오는 순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 고강수의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화재용 도끼는 벽이나 문을 부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바, 제아무리 오크라고 하더라도 그 전력을 다한 도끼질 앞에서는 무사할 수 없었다.
특히 상처 부위가 목덜미였다.
푸홧!
고강수가 도끼를 뽑아내는 순간 뿜어진 피가 천장을 적셨다.
그와 동시에 오크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노린 건 아니지만, 고강수의 도끼가 오크의 척수 신경마저 잘라버린 덕분이었다.
그렇게 쓰러진 오크를 가운데 두고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의 눈빛이 마주쳤다.
"강현중입니다."
"고강수다."
서로가 이름을 주고받았다.
"물어볼 게 있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했다.
"지금 내 귀에 무언가가 들렸는데······."
그러나 그 대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크우!
지하 2층, 그곳에서 또 한 번 더 오크의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크우!
크우!
크우!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그 사실에 기겁하는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 그런 그들 앞에 이윽고 등장했다.
크우우우!
오크 네 마리가.
그것을 본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빠득!
그러나 이내 그 둘이 동시에 이를 꽉 물었다.
흔들리는 눈빛을 바로잡았다.
'도망칠 곳은 없다.'
'결국 여기서 잡아야 해.'
전투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건 오크들도 마찬가지였다.
크우?
크우!
크어엉!
동료의 죽음을 본 오크들의 표정과 기세가 달라졌다. 놈들이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를 노려봤다.
거기서 눈싸움을 하거나 그러는 것은 없었다.
동료를 죽인 적이 있는데 가만히 있는다, 오크들에게는 그런 선택지 따위는 없었으니까.
크우우우!
오크들이 동시에 둘을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는 도망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맹수와의 싸움에서 꼬리를 내린다는 것은 결국 사냥감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은 일.
무엇보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저 무시무시한 오크들과 술래잡기를 해봤 자 얼마 안 있어서 뒤를 잡힐 것 같았다.
그 후에는?
참담한 결과만 있을 뿐.
해서 눈앞의 광경을 직시했다.
크우우우!
그 덕분에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는 볼 수 있었다.
우우, 컥, 컥!
갑자기 제 목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쓰러진 채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뱉는 오크들을.
그리고 쓰러진 오크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사내를.
김지운, 그가 돌아왔다.
3.
어비스가 발견된 초창기에 헌터들은 맨몸으로 어비스를 경험하고, 넘어서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제 막 헌터가 되는 이들에게 매뉴얼을 줄 수 있을 만큼 체계화가 됐다.
몬스터 공략법과 어비스 생존법 등 헌터들은 이미 앞선 헌터들이 구해준 지식을 공부했다.
또한 훈련도 했다.
실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몸을 단련하고, 체력을 키우고, 검과 같은 무기를 쓰는 훈련을 통해 스스로를 연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력이 1개월 미만인 헌터들 중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오크에 살해당했다.
오크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보는 무수히 많았다. 오크는 어비스에서 도그블린만큼 보기 쉬운 몬스터였으니까.
더불어 오크가 무자비할 정도로 강인해서 그런 것 역시 아니었다.
처음은 모르지만 어느 정도 레벨이 오르고 근력 스탯이 30포인트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오크의 힘은 그렇게까지 인상적이거나, 초월적인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오크가 무서운 건 생명력이다."
문제는 오크가 가진 밑도 끝도 없는 생명력이었다.
어지간한 치명상이 아니고서는 오크들은 죽지 않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바닥에 피가 흥건하다 못해 웅덩이를 만들어도 오크는 날뛰었다.
심지어 배가 갈라지고 내장이 쏟아져도 오크는 칼을, 도끼를, 해머를 휘둘렀다.
실제로 내장이 나온 채로 1시간 넘게 버티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오크도 버틸 수 없는 게 있었다.
컥, 컥!
바로 숨이 막혔을 때.
내장이 쏟아져도 1시간은 거뜬히 버티는 오크도 숨이 막혔을 때는 채 1분도 버티지 못했다.
김지운, 그가 피아노줄을 확보하는 순간 오크 사냥을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피아노줄을 이용해 올가미 같은 것을 만든 후에 오크의 목에 씌우기만 하면 될 뿐.
더군다나 김지운은 그렇게 만든 올가미들을 올가미끼리 연결시켰다.
켁!
오크 두 마리를 짝지어서 서로가 아등바등 거릴 때마다 서로의 목을 더 조이게 만드는 식으로.
오크들이 서로 목줄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게 만드는 식으로.
케엑, 케엑!
그렇게 김지운 앞에서 오크 네 마리가 목에 피아노줄로 만든 올가미를 매단 채 몸부림을 쳤다.
털썩!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채 1분도 되기 전에 오크들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 사실에 김지운은 놀라지 않았다.
'안개 밖에서는 더 치명적이지.'
안개가 없는 곳은 헌터들의 세상, 그 세상에서 오크들은 제법 버틸 수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버티는 것뿐.
상처를 입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는 급속도로 빠르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죽는 건 아니었다.
오크의 힘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바.
또한 김지운은 오크들을 서로 묶어놓았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발버둥 치는 오크의 힘을 지금 김지운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으니까. 결국 오크들이 서로 줄다리기를 하게 만드는 게 최선이었다.
여하튼 한 쪽이 힘이 빠져 쓰러지면 다른 한쪽이 오히려 조금 여유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김지운, 그가 가지고 온 화재용 도끼로 숨통이 이제 막 트이기 시작한 오크, 놈의 목덜미를 내리찍었다.
콰직!
앞서 고강수가 오크를 내리찍었던 그곳을.
목덜미의 혈관은 물론 신경이 지나가는 그 부위를.
물론 고강수처럼 운 좋게 찌른 게 아니었다. 김지운은 정확하게 그 부위를 노리고 찍었다.
푸홧!
그렇게 김지운이 도끼를 뽑는 순간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고, 그 속에서 김지운은 도끼를 마저 움직였다.
쓰러진 놈들까지, 네 마리 모두의 목덜미를 장작을 패듯 도끼질을 했다.
한 번도 아니었다.
네 마리의 목덜미를 내리찍은 후에는 김지운은 다시 순서대로 도끼질을 재차 했다.
이미 죽었으리라 생각됐음에도 김지운은 멈추지 않고 도끼질을 거듭했다.
어비스의 헌터가 명심해야 할 규칙 때문이었다.
5. 몬스터 처치 알림이 들리기 전까지는 공격을 멈추지 마라.
그 규칙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오크를 처치했습니다.]
그렇기에 김지운은 그 알림이 들린 후에야 비로소 도끼질을 멈췄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어서 알림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근처에 레어 아이템이 있습니다.]
이어진 알림에도 신경을 주지 않았다.
김지운은 자신을 바라보는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 모습에 그 둘은 그대로 굳었다.
특히 고강수, 그는 굳은 수준을 넘어서 눈동자가 흔들렸다.
김지운을 얕본 적은 없었다.
그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싸움, 그것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으니까.
'괴물이다.'
그러나 지금 고강수는 인정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괴물.'
김지운은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이름."
때문에 김지운의 질문을 던졌을 때 고강수는 대답했다.
"고강수입니다."
고개를 숙이면서.
그 모습에 김지운은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이 당연하게 느껴져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제부터 지하 1층을 폐쇄한다.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고, 출입 역시 제한한다."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끝나면 브리핑을 시작한다."
김지운, 그가 결단을 내렸다.
"이곳을 지키기 위한."
'이곳이 이제 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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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스위트홈 (2).
4.
지하 1층 폐쇄, 출입구 봉쇄, 출입 제한 그리고 브리핑.
김지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는 멍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 익숙한 말은 어느 것 하나도 없었으니까.
반면 이영후는 달랐다.
"봉쇄라면?"
어비스 관광객 출신이었던 이영후는 김지운이 지금 내뱉은 말의 의미를 바로 파악했다.
"여기를 거점으로 삼으시려는 겁니까? 오아시스로?"
김지운, 그가 이곳을 지키기로 했다는 것.
그리고 그건 이영후 입장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도망치지 않는구나!'
이영후, 그는 김지운이 도망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가능성을 매우 높게 봤다.
'나 같으면 진즉에 튀었을 텐데!'
그도 그럴 것이 이영후가 아는 김지운은 헌터였고,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클랜에 소속되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건 클랜 아지트로 가는 것이었다.
헌터들의 레벨과 스킬 슬롯은 초기화된 상태이지만 헌터들이 어비스에서 쌓은 경험과 능력은 사라지지 않는 법.
무엇보다 클랜에 가면 그게 있었다.
'아이템은 유효하니까.'
어비스의 헌터들이 어비스에서 목숨 걸고 구해온 것들이.
이 어비스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
물론 어비스 안개로 가득 차서 몬스터가 넘치는 지금 상황에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지만, 이영후가 보기에 김지운은 이 안개를 헤쳐갈 역량이 충분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헌터들을 중심으로 세력이 개편될 거야.'
더 나아가 지금 이 아포칼립스 세상을 이끌어갈 건 누가 보더라도 헌터들이 될 게 뻔했다.
당장 헌터들은 전 세계 최고의 권력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이 손을 합친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을 터.
물론 그 질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충돌과 잔혹한 무대가 펼쳐질 것은 분명했다.
세계가 전운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더더욱 클랜에 합류해야 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전쟁을 하는 거지.'
전쟁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었으니까.
여하튼 김지운 입장에서는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정말 눈곱만큼도 존재치 않았고, 그래서 이영후는 그것을 걱정했다.
김지운이 떠나는 순간 이영후가 강현중 중사 주변을 얼쩡거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강현중 중사의 딸아이를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딸아이가 생각 이상으로 귀여웠지만, 어슬렁거린 목적은 김지운이 사라지고 난 다음을 기약하기 위함이었다.
그 상황에서 이영후가 잡을 수 있는 동아줄은 강현중 중사밖에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그 고민은 모두 무색한 게 됐다.
"그래, 이곳을 집으로 삼을 거다."
이제 김지운이 이곳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테니까.
"안타깝게도."
물론 이영후가 기뻐하는 것과 별개로 김지운이 그런 결단을 내린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안개가 천장까지 가득 찼다. 안개 높이가 최소 1백 미터 이상으로 판단된다. 이 정도 크기라면 여의도 전체가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지운 정도 되는 실력자도 이곳 이상으로 안전한 곳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였으니까.
"30층 이상의 고층 빌딩 말고는 생존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의 상황이 여기보다 낫다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힘들었다.
"이 정도 안개면 구조도 불가능하다. 헬기가 떠도 생존자들이 헬기에 닿을 방법이 없다."
또한 외부의 도움 역시 당장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
결국 이곳을 중심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그렇기에 이야기를 들은 강현중 중사와 이영후의 표정은 굳어졌다.
반면 고강수는 달랐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비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그의 입장에서는 김지운의 말 중에 이해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고강수는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지하 1층을 봉쇄만 하면 되는 건가?"
이미 김지운에게 고개를 숙인 고강수 입장에서는 여기서 해야 할 건 하나였으니까.
"바로 하지."
명령을 따르는 것.
그리고 그건 고강수가 바라던 입장이기도 했다.
본래 그는 식품관만이 아니라 이곳 지하 1층 전체를 봉쇄한 후에 모든 이들을 자신의 관리 하에 두려고 했다.
이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왕 놀이를 하려고, 대장 놀이를 하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
고강수는 지금 상황을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판단했고, 그래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식품관만 봉쇄한 것은 바로 김지운의 존재 때문이었다.
김지운이란 존재를 적으로 뒀을 때 그나마 지킬 수 있는 영역은 식품관 정도가 한계라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지만, 여하튼 고강수 입장에서는 하고 싶었던 일을 이제 마음껏 하면 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지운의 이름을 팔아서.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고강수의 행동에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거기, 너."
"예?"
"저 일식당 의자랑 식탁 전부 에스컬레이터 근처로 이동시키도록."
"예? 저 많은 걸요?"
"최대한 빨리."
"제, 제가요?"
"죽기 싫으면."
짤막한 경고 하나에 모두가 부리나케 움직였다.
여자 남자 구분도 없었다.
고강수는 보이는 모든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식당의 식탁, 의자, 마트의 진열대, 카트 또는 화분이나 입간판 등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움직여서 에스컬레이터의 주변을 그리고 지상과 연결된 하나밖에 없는 정문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부 보초를 선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소리를 질러서 알린다."
무기를 쥔 이들을 경비로 세웠다.
인원이 부족했지만 이 역시 문제는 없었다.
"군대에서 특전사 또는 그에 준하는 부대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자 혹은 소방관이나 경찰관 출신, 체대 출신 있나?"
고강수는 남자들을 모았고 그들 중에 받았다.
"지원하는 자,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주겠다."
의지를 가진 자를.
그러자 의외로 적지 않은 이들이 지원을 했다.
분위기가 달라진 탓이었다.
이제는 그들이 생각하던 것처럼 낙관적이지 않음을,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상황임을.
물론 어디나 그렇듯 이런 상황에서 꼭 제 지랄 맞은 성격을 자랑하는 이가 있는 법.
"아니, 대체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지랄이야? 어? 내가 누군지 알아?"
다행히도 그런 부류들의 난동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강수, 그는 바로 결과물을 보여줬다.
퍼억!
주먹질 한 번으로 단숨에 사내를 뒤로 자빠뜨린 후에 그대로 사내의 손목을 제 발로 잡은 후에 도끼를 들며 말했다.
"이제부터 규칙 하나를 세운다. 이곳에서 지랄할 때마다 손가락 하나다."
콰직!
확실한 핏빛 경고를.
"열 번까진 지랄해도 좋다. 단, 열한 번째는 없다."
그 이후로 당장 대놓고 지랄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저기 대장님."
그러나 그 광경을 보던 이영후는 조심스레 김지운에게 말했다.
"이게 의미가 있나요? 오크 한 놈이 그냥 발로 뻥 차면 다 뚫릴 텐데."
몬스터를 상대로 이런 봉쇄가 그렇게까지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것 같진 않았으니까.
김지운도 알았다.
"몬스터를 상대로는 소용없지."
그럼에도 봉쇄를 요청한 이유는 간단했다.
"하지만 사람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인간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것, 그게 목적이었으니까.
"더 이상의 소란은 없다."
그래야 변수가 없을 테니까.
이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아까는 다섯 명이 소란을 피워서 오크가 등장했지만, 그건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여기서 생존자들이 밖으로 나가서 잘못했다가는 오크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몬스터를 데리고 올 수도 있었다.
그 말에 이영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보통이 아니야.'
그 순간 이영후는 확신했다.
"대장님이면 나머지 오크들도 문제는 없겠네요."
김지운이라면 이제 이곳에 오는 오크들 전부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말했다.
"여기서 잡으면 파멸이다."
"예?"
오크가 이곳에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음을.
"오아시스에서 전투를 치르는 건 최후의 수단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안전해야 할 곳에 몬스터들이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게 놔두는 것은 최악의 행위였다.
그 전투의 흔적을 따라서 다음 몬스터들이 등장할 테니까.
"그, 그럼?"
"오기 전에 잡는다."
즉, 김지운은 밖에서 오크들을 사냥할 생각이었다.
그 사실에 이영후를 비롯해 강현중 중사는 물론 이영후로부터 어비스에 대한 정보를 들은 고강수의 표정이 굳었다.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죽어버리는 저 안개 세상에서 오크를 사냥하다니?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말했다.
"동행이 필요하다."
그 대목에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 명. 최악의 상황에서 이곳까지 와서 상황을 전달해 줄 한 명이."
"그럼 제가 같이 하겠습니다."
"내가 가겠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둘이 동시에 동행을 자처했다.
그러나 김지운은 고개를 저었다.
"고강수, 너는 이곳을 관리해야 한다."
일단 고강수는 결코 데려갈 수 없었다. 이곳을 관리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가진 건 그뿐이었으니까.
"강현중, 너는 고강수를 도와야 한다."
그리고 고강수와 같이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김지운을 빼면 강현중 중사뿐이었다.
이 둘은 따로 놔두면 너무나도 약해졌다.
둘이 하나가 되어야 그나마 초보자 헌터 한 명의 몫을 한다는 의미.
"그리고 둘은 어비스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결정적으로 김지운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를 자신의 옆에 두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즉, 김지운이 데려갈 동행은 한 명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씨발.'
이영후, 그가 파트너가 됐다.
5.
크우!
그건 오크 무리였다.
크우!
무려 스물다섯 마리로 이루어진 오크 무리.
오크 무리들 치고는 숫자가 적은 편이긴 했다. 물론 그럼에도 매우 위협적인 무리였다.
크우!
그런 오크 무리들은 지금 어느 때보다 긴장된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눈을 떴을 때 마주하게 된 세상이 그들이 살던 세상과 전혀 달랐다.
일단 발에 밟히는 바닥부터가 달랐다.
흙과 다르게 바닥이 매우 단단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것들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가는 길목마다 강철로 된 단단한 돌멩이들이 가득 차 있었다.
크우!
그게 오크 무리들이 무리를 해서 움직이는 이유였다.
그들은 찾고 있었다.
크우!
자신들이 안전하게 몸을 눕힐 수 있는 공간을.
그것을 찾기 위해서 오크 무리는 수색병을 보냈다.
처음은 한 마리씩 다섯 마리를 보냈다.
그러나 그중 네 마리만 돌아왔고, 거기서 네 마리에게 돌아오지 않은 한 마리의 흔적을 쫓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 네 마리마저 소식이 사라졌다.
그쯤에서 오크 무리는 직감했다.
무언가가 자신들을 동료들을 죽였음을.
그때 모든 오크들은 생각했다.
이제 복수를 해야 할 때가 왔음을.
그게 오크의 무서운 점 중 하나였다. 놈들은 복수를 행하는 부류였다.
그렇게 오크 무리들은 앞서 간 수색병이 남긴 흔적을 되짚어갔고, 이내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크우!
어떤 동굴을.
그 동굴 앞에서 오크들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크우!
동료가 남긴 흔적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오크 무리가 동굴을 타고 내려갔다.
동굴은 길었다.
그러나 복잡할 건 없었다. 도중에 갈림길이 나오긴 했지만, 어려울 건 없었다.
그리고 동료의 흔적이 분명하게 있었다.
그렇게 흔적을 따라 이동하던 오크 무리는 이내 드넓은 공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부아아앙!
거칠기 그지없는 소리 하나가 오크 무리의 등장을 반겼다.
매우 거친 소리였다.
일부러 큰 소리를 내려고 안간힘을 낸 듯한 소리.
부아앙!
그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은색 물체가 오크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당연히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오크 무리 중 일부는 그대로 검은색 물체에 치였다.
물론 오크들은 자신들을 친 게 벤츠 G63 AMG, 일명 벤츠 지바겐이란 차량인 걸 몰랐다.
그리고 그게 중요치도 않았다.
크우우우우!
가장 덩치가 좋은 오크 한 마리가 포효를 내지르는 순간 오크들이 그 검은색 지바겐을 향해 몸을 달렸다.
콰앙!
모두가 손에 든 무기로 지바겐 차량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바겐 역시 순순히 당하진 않았다.
부우웅!
오크를 매단 채 후진을 했고, 그러다가 때로는 벽을 향해 돌진하는 식으로, 성난 말처럼 날뛰었다.
크우!
그 사실에 오크들은 더더욱 흥분했다.
콰앙!
더더욱 공격적으로 지바겐 차량을 공격했다.
때문에 오크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스윽!
자신들의 머리 위로 올가미가 등장하는 것을.
꽈악!
케에엑!
그것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올가미가 목을 조인 후였다.
삽시간이었다.
지바겐과 오크가 서로 치고받으며 강렬한 소음이 퍼지던 지하 주차장에 고요함이 깔렸다.
오크들 모두가 바닥에 제 목을 부여잡은 채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예외 없이.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올가미는 사냥에 매우 유효한 무기였다. 대단한 도구 없이, 몇 번의 적당한 조작을 통해서 만들 수 있었고, 동시에 제대로만 걸리면 사냥감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위력적인 무기를 실시간으로 사용하는 사냥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 올가미로 움직이는 생명체를 그대로 잡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물며 지금 오크들은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것도 아주 격한 전투를.
그런데 그런 놈들에게 피아노줄로 만든 올가미를 씌운다는 것.
심지어 맨손도 아니고 염력으로 씌운다는 것.
말도 안 되는 일.
'2년 만이지만.'
그러나 김지운에게는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 작업을 거짓말하지 않고 정말 수백만 번 넘게 반복했으니까.
무수히 많은 연습을 했고, 동시에 무수히 많은 실전을 치렀으니까.
'감은 제대로 살아 있다.'
더군다나 은퇴 기간이 무색할 만큼 김지운의 염력 컨트롤은 전성기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 그때처럼.'
더불어 그 전성기 수준은 김지운을 기억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때를 말함이 아니었다.
김지운, 그가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미끼를 자처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어비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때.
감히 사냥을 운운할 수 없는 아득한 괴물들 속에서 6개월 동안을 보내야 했을 때.
헌터 김지운의 전성기는 그때였다.
그야말로 자신의 밑바닥을 봤다.
'······다시 떠올려도 끔찍하군.'
반면 그때 김지운은 어비스의 바닥을 못 봤다.
그게 은퇴의 이유였다.
자신의 수준을 봤는데, 자신이 마주해야 하는 상대의 밑바닥은커녕 무릎도 보지 못했다는 것.
어쨌거나 그런 김지운 입장에서 주어진 물건들로 오크들을 사냥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론 김지운은 알았다.
크헉!
오크들은 괴물이고, 그 괴물들을 완벽하게 묶기에는 피아노줄은 한계가 있음을.
무엇보다 김지운은 지금 피아노줄로 오크와 오크를 묶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오크의 힘을 이길 수 없는 탓.
결국 모두를 잡아도, 그중 절반은 어떤 식으로든 숨통이 트일 기회가 온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김지운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넘쳐났으니까.
'2억 넘는 차가 열 대나 있다니, 부자나라답군.'
500마력이 넘어가는 2톤짜리, 제로백 3초대의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부아아앙!
그렇게 김지운이 배치된 고마력의 SUV들을 오크들을 향해 돌진시켰다.
평소 때라면 피했을 수도 있는 돌진이었으나, 숨이 막힌 오크들의 상황은 달랐다.
콰아앙!
크어어!
충돌소리가 나고, 비명 소리가 났다.
오크 무리와 파손된 차량들이 그리고 소란을 듣고 몰려온 어비스 좀비들이 뒤엉키며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완벽한 사냥.
그러나 김지운은 알았다.
이게 끝이 아님을.
오히려 진짜 사냥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김지운, 그가 손에 든 휴대용 손전등을 깜빡깜빡, 두 번 움직였다.
그러자 들렸다.
삐빅, 삐빅, 삐빅!
지금 오크와 자동차들이 뒤엉켜 있는 곳에서 정반대에 있는 곳에서 스마트폰의 알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어어어어!
그 소리에 어비스 좀비들이 몰려갔다.
그리고 김지운은 걸어갔다.
오크들을 향해서.
[오크의 피 묻은 도끼]
- 아이템 등급 : 레어
- 1레벨 이상 착용 가능
- 공격력 : E-랭크
- 내구도 : F+랭크
- 착용 시 근력+4
- 오크의 피가 여러 번 묻으면서 특별한 힘이 담긴 도끼다. 착용자의 힘을 강하게 해준다.
놈들에게서 얻은 도끼를 손에 든 채.
사냥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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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어비스넷 (1).
1.
김지운은 파트너인 이영후에게 두 가지만 요구했다.
"내가 위험하면 거기서 주저 없이 비명을 내지를 거다. 내 비명을 듣는 순간 바로 지하 1층으로 가서 상황을 알려라."
"전투가 시작된 후에 내가 손전등으로 신호를 주면 내가 말한 위치에서 스마트폰을 놓고 알림을 20초 맞춰두고 도망쳐라."
그뿐이었다.
자세한 사냥 계획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어떻게 오크를 잡을 것인지, 어떤 방법으로 잡을 것인지, 어디서 잡을 것인지 그리고 언제 어느 순간에 잡을 것인지.
그건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전투 상황을 자세히 모른다는 것은 자신에게 무엇이 위협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러나 그 사실에 이영후는 별 다른 불만을 품지 않았다.
관광객일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이제부터 우리는 오크를 잡을 겁니다, 오크는 어비스에서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죠, 라는 식의 농담 섞인 가이드를 받았지만 지금 이영후는 그저 부품일 따름이었다.
하라는 대로 하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오히려 머릿속에 여러 정보를 넣을 필요가 없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판단에 착오가 생길 가능성도 많아지는 법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이영후의 머릿속에는 여유가 없었다.
'이거 정말 잡을 수 있을까?'
근심과 걱정으로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김지운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오크 네 마리를 잡는 것과 오크 무리를 잡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이곳은 어비스와 같은 공간이었다.
자욱한 안개에 어비스 좀비마저 있는 곳!
그러나 그 걱정은 곧 무색한 게 됐다.
순식간이었다.
콰앙!
지하 3층 주차장이 소란으로 가득 찼고, 이어서 이영후에게 김지운이 신호를 보내줬을 때 이영후는 스마트폰 알림을 맞추고 도망쳤다.
그 후 몇 번의 소란이 더 피어오른 후에야 다시 신호가 왔다.
깜빡깜빡깜빡!
김지운, 그가 살아있음을 알렸다.
그 광경에 이영후는 넋을 잃었다.
'대체 어떻게?'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김지운이 어떻게 이토록 쉽게 그리고 빠르게 오크 무리를 처치했는지 떠올릴 수가 없었으니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건 보통이 아니야.'
이제까지 이영후가 본 헌터들 중에서 김지운보다 뛰어난 헌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별을 가진 헌터들도 이 정도는 못해.'
그중에는 헌터들의 최고 훈장이라고 할 수 있는 별을 가진 헌터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엄청난 일이었다.
어비스의 헌터들에게 별이란 남다른 업적을 이룩한 실력자를 의미했으니까.
실제로 별을 가진 헌터와 그렇지 못한 헌터는 같은 레벨에서도 차이가 매우 심했다.
'눈알사냥꾼보다 더.'
그중에는 별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헌터, 눈알사냥꾼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그녀는 이영후의 수준으로는 만날 수 없는 가이드였다.
애초에 가이드를 하는 짬밥도 아니었다.
별 하나만 있어도 그 대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기업 회장들이 역시 자네였군! 하고 먼저 인사를 할 정도.
실제로 그 만남도 제대로 된 가이드가 아니었다.
단지 기회가 닿아서, 그러니까 관광 도중에 정말 운 좋게도 눈알사냥꾼과 그녀의 파티와 합류하는 덕분에, 그 덕분에 옆에서 관광할 기회가 왔었다.
그리고 그때 이영후는 느꼈다. 별을 가진 헌터를 왜 헌터들이 그토록 칭송하는지.
그럼에도 이영후는 자신할 수 있었다.
김지운이 더 대단하다고.
'대체 누구지?'
김지운의 정체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일.
그때였다.
반짝반짝반짝반짝!
김지운이 다시 신호를 보냈고, 그 신호를 보내는 순간 이영후가 생각을 멈췄다.
호출 신호였으니까.
'전투가 끝났구나.'
이영후가 조심스럽게 손전등이 반짝이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달하는 순간 이영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크우우우!
'어? 어!'
오크 한 마리가, 하체가 뭉개진 오크 한 마리가 이영후의 앞에 있었으니까.
크우우우!
이제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함에도, 거의 다 죽어감에도 눈빛과 입에서 흉포함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무시무시한 오크가.
'다, 다 잡은 거 아니었어?'
그건 규칙 위반이었다.
절대 살아있는 몬스터를 관광객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 라는 규칙 위반.
몬스터란 그만큼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관광객이 아니더라도 헌터들은 결코 몬스터가 죽기 전까지는 허튼 짓을 하지 않았다.
특히 거의 다 죽어가는 놈들을 일부러 살려두거나 그런 식으로 장난을 치는 경우는 없었다.
만약 그런 장난을 친다면 같은 동료가 혹은 지나가던 다른 헌터가 장난친 놈의 머리통을 깨부숴도 무죄였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헌터들의 세계에서 몬스터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놈들은 헌터로 대우해 주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어비스의 방랑자들만도 못한 취급을 했다.
김지운이 그 사실을 모를 리 만무.
즉, 저건 일부러 살려둔 놈이었다.
그리고 살려둔 이유는 하나였다.
[헌터가 될 생각이 있나?]
이 제안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김지운이 내민 스마트폰의 문장을 본 이영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되고 싶었다.'
이영후, 그는 헌터를 동경했었다.
그들이 누리는 세상을, 그들이 보여주는 초인적인 능력들을,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지구와는 차원이 다른 어비스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활약을.
그게 아니었다면 그토록 열심히 관광을 했을 리 만무.
하지만 그 동경을 실현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헌터가 되는 것, 그 자체는 아주 어려울 건 없었다. 어비스에서 몬스터를 잡으면 될 뿐. 지금처럼 누군가 다 잡아준 몬스터를 직접 죽이기만 해도 헌터는 될 수 있었다.
문제는 헌터가 된 다음이었다.
어비스를 관리하는 클랜과 권력자들은 헌터들의 숫자를 철저하게 관리했다.
관광객 따위가 헌터가 되는 경우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용납하지 않았다. 그 규칙만큼은 철저하게 지켰다. 제아무리 돈이 많고, 대단한 자라고 해도 예외로 두지 않았다.
세상에 편법이 얼마든지 존재하는 만큼 정말 몰래 하라면 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그리 메리트 있는 건 아니었다.
헌터로 얻은 능력은 어비스에서만 유효했으니까. 지구로 돌아오는 순간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되어버릴 따름이었으니까.
물론 가진 자질이 뛰어나면 상관없었다. 그럼 헌터가 되어 활약을 하면 될 뿐. 실제로 관광객 중에는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헌터로 직업을 바꾸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었다.
하지만 이영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헌터가 될 자질이 없음을.
그래서 동경으로만 두었는데, 그랬는데 지금 김지운이 그에게 동경을 현실로 만들 기회를 줬다.
도끼를 건네줬다.
방법은 이제 간단했다.
지금 하반신이 박살이 나서 죽어가는 오크의 머리통에 도끼를 꽂아 넣으면 될 뿐.
더불어 지금 세상에서는 헌터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메리트였다.
어비스와는 달랐다.
이제 헌터가 되는 순간 그것을 관리할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빌어먹을.'
그러나 그 사실 앞에서 이영후는 기뻐할 수 없었다.
'왜 꿈이 이루어지고 지랄이야.'
이런 식으로 헌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차라리 그냥 평생 관광객이어도 좋으니까 어비스 관광이 끝나면 백화점에 방문해서 사고 싶은 명품이나 쇼핑하고, 그러다가 밤에 몰려오는 우울함에 위스키나 진탕 마시다가 취하는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세상은 바뀌었다.
과거의 무료했던 나날은 이제 오지 않았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평범하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헌터가 되어 발버둥 치다가 죽을 것인가.
그 선택지 앞에서 이영후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영후, 그가 도끼를 들었다.
하늘 높이.
그리고 그 도끼를 내리찍었을 때 이영후는 들을 수 있었다.
[오크를 처치했습니다.]
헌터의 증거를.
그와 동시에 이영후의 눈앞에는 떠올랐다.
다양한 것들이.
'헌터가 됐구나.'
그 사실에 여러 감정 섞인 반응을 보이는 이영후.
그때였다.
김지운이 그런 이영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직업은?]
그 질문에 이영후 바로 반응을 했다.
'뭐였지? 아까 들렸는데?'
분명 직업을 알려주는 알림이 같이 들렸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래서 이영후는 정말 조심스럽게 두 손을 맞닿았다.
그러자 상태창이 떴다.
이쯤에서는 약간의 설렘이 있었다.
직업은 헌터의 운명을 결정했으니까.
'예전에는 음험한 사기꾼이길 바랬지만, 지금은 차라리 파수꾼이나 사냥꾼이 낫다. 목숨을 조금이라도 부지할 수 있으니까. 제발. 그런 쪽으로 나와라. 쓸모 있는 걸로.'
그렇게 설렘과 간절함 속에서 이영후는 볼 수 있었다.
'응?'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놀란 이영후가 김지운에게도 자신의 직업을 알려줬고, 그것을 본 김지운의 표정도 이영후와 비슷해졌다.
[느긋한 구경꾼이라는데요?]
'이건 무슨 직업이지?'
처음 보는 직업이 등장했으니까.
하지만 거기서 놀랄 여유는 없었다.
김지운, 그가 느꼈다.
두근!
자신의 심박수가 조금 빨라지기 시작했음을.
'당장 올라간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왔음을.
2.
김지운, 그가 이영후와 돌아왔을 때의 풍경은 이전과는 달랐다.
"누구냐!"
그들이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오려고 하자, 경비를 서고 있던 이들이 손에 든 창을 앞세우며 정체를 물었다.
그건 큰 변화였다.
이제 지하 1층이 관리가 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렇기에 김지운은 기꺼이 협조했다.
"김지운이다."
"아!"
그 이름을 들은 경비병이 놀란 소리를 내뱉으며 곧바로 들고 있던 창을 치웠다.
"어, 어서 오십시오."
그때였다.
"대장이 왔습니다!"
경비를 서던 이의 그 말에 곧바로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고강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 사실에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에스컬레이터 근처를 비롯해 출입구는 지금 가장 위험한 장소였다.
그리고 위험한 장소에는 최대한 중요한 것을 배치하지 않는 게 상식이었다.
고강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내였다. 집단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의미였다.
꽤 큰 이유가.
그 예상대로였다.
"생존자들에게 정보를 수집하던 중에 중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고강수, 그는 말했다.
"스페이스 링크라고 아십니까? 위성으로 통신하는 그 스페이스 링크에 접속할 수 있는 안테나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말에 반응을 보인 건 이영후였다.
"접시를 가진 양반이 있다고요? 진짜? 그걸?"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모든 통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통신사는 물론 지하 1층에 있는 백화점 직원들의 사무용 PC 역시 인터넷 연결이 안 된 상태였다.
사실상 이 백화점의 모든 통신망이 두절된 상태, 더 나아가 여의도 전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세상과 통신을 하고자 한다면, 방법은 오로지 하나였다.
지상의 통신망과 상관없이 작동하는 위성 통신!
그렇기에 그것을 시도해볼 기회가 왔다는 것 엄청난 기회였다.
그러나 김지운은 그 사실에 반색하지 않았다.
'물건이 아니라 정보라.'
그 위성 통신이 지금 당장 가능했다면 고강수가 기다리고 있었을 리 없었다.
이미 위성 통신을 통해 얻은 정보를, 어비스 아포칼립스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퍼뜨려주는 정보를 정리해서 알려줬을 터.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김지운은 질문을 했다.
"누가 가지고 있지?"
"생존자들 중에 외국인 생존자들입니다."
"외국인?"
"예,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 관광을 하러 오면서 그 위성 접시도 같이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김지운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백화점 도로 건너편이 호텔이었나?"
"콘래드 호텔에 입니다."
"그곳에 있겠군."
"······맞습니다."
지금 마주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일단 설명해보록."
3.
"건빵을 걸고 정보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인이 정보를 주더군요. 한국 관광을 왔다고 합니다."
"관광? 그런데 위성 장비인 접시를 가지고 있다고요?"
고강수의 설명을 듣던 이영후, 처음에는 접시 등장에 놀랐던 그는 이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위성 장비는 그도 관심이 제법 있는 물건이었다.
기존 통신장비와 다르게 스페이스디쉬, 관계자들은 그냥 접시라고 표현하는 그 장비와 몇 가지 부속 부품만 있으면 오지에서도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으로 SNS를 비롯해 뭐든 할 수 있는 장비였으니까.
더불어 그 장비 전부를 가방 하나에 넣고 가지고 다닐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관심의 영역이었다.
그건 전쟁터나 오지를 탐험하는 탐험가들이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어지간한 나라보다 통신망이 잘 확보된 대한민국, 거기서도 서울, 버스 정류장에도 공짜 와이파이가 가능한 이곳에 접시를 가지고 다닌다? 그 무거운 것을 가지고?
관광객이?
그쯤에서 이영후는 말했다.
"간첩 아닙니까?"
그 인간이 관광객이 아닐 것 같다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강현중 중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성 통신은 추적이 쉽지 않으니까요."
대테러 작전에도 투입되는 광호부대 소속인 강현중 중사는 지금 대한민국에 관광객인척 하는 간첩이, 테러리스트가 얼마나 많은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간첩이든 아니든 상관없지."
물론 김지운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오히려 간첩인 게 낫지. 그러면 약을 파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 접시란 게 있다는 거니까."
"아!"
일단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정보의 진위 유무였다.
갔는데 접시가 우주 모양이 그려진 접시라면, 그렇다면 돌아와서 거짓말을 한 외국인 놈의 뚝배기를 깨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진짜라고 한다면, 그걸 가지러 가야 하는지 아닌지, 그걸 고민해야 하고."
결정적으로 효용 가치도 문제였다.
"어비스 안개 내에서 통신이 가능한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지금 현재 모두의 통신은 불가능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이유가 어비스 안개 때문인지 아니면 통신 장비들에 문제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비스에서 통신 장비를 가지고 들어가서 실험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
어쨌거나 만약 지금 통신이 불가능한 게 그냥 장비 문제라면, 그건 매우 좋은 일이었다.
인프라만 다시 정상화시키면 통신이 가능하다는 의미.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비스 안개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거라면?
그러면 접시를 이용한 위성 통신 역시 불가능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고민의 이유는 하나였다.
"제일 문제는 콘래드 호텔로 가는 거다."
콘래드 호텔, 백화점에서 큰 도로 하나만 건너면 바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뛰어가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곳이었다.
또한 둘 사이는 지하도로 이어져 있었다.
백화점 지하 2층에서 전철역으로 갈 수 있는 길목, 거기에서 아예 콘래드 호텔과 그 호텔과 붙어 있는 쇼핑몰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예전에는 정말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뭐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곳을 가는 것은 엄청난 각오를 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지하 3층이나, 지상을 돌아다니는 것과는 달랐다.
"오아시스가 없을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쉴 수 있는 공간의 부재였다.
어비스 안개에서 이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당장 김지운이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도 백화점 지하 1층이라는 확실한 쉼터가 있는 덕분이었다.
그리고 김지운이 지금 지하 1층을 지키려고 결단을 내린 것도 다른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호텔까지 이동했는데, 만약 쉼터가 없다면?
돌아올 때 문제가 생긴다면?
제아무리 김지운이라고 해도 그런 상황 속에서 버틸 수 있는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콘래드 호텔, 그 건물의 고층으로 가면 모르겠지만.'
단 하나, 지금 나온 안개의 높이가 100미터쯤에서 멈췄을 경우에는 상황이 나았다.
여의도에는 마천루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건물들이 있었고, 여의도 콘래드 호텔은 이제는 아니지만 과거 한국에서 가장 높은 호텔이었을 정도로 높았다.
그 높이가 200미터에 이르렀다.
그곳이라면 안개가 닿지 못하는 안전지대가 있을 터.
'리스크는 분명하다.'
결국 중요한 건 그거였다.
'메리트에 비해서.'
그럴 만한 리스크를 감수하기에는 위성 통신 장치를 확보할 만한 메리트가 높지 않다는 것.
위성 통신이 가능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상황에서 제대로 된 통신이 가능한 이들의 숫자가 많을 리 만무하다.'
과연 얼마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구조 요청은 도리어 위험하고.'
특히 김지운이 가장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은 이곳의 사정이 외부에 들키는 경우였다.
'어차피 정부의 구조대는 오지 않는다.'
만약 정부가 제 역할을 했다면 최소한 여의도만큼은 상황 전달이 왔었어야 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어비스의 안개 위로 헬리콥터든 비행기든 아니면 드론이든 띄어서 소식을 알려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둘 중 하나다.
할 수가 없거나 할 생각이 없거나.
그런 상황에서 이곳의 위치가 알려진다면 도리어 다른 이들이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헌터들이 올 거다.'
어비스의 헌터들이.
김지운은 은퇴한 후에 어비스의 헌터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헌터라면 오아시스의 가치를 모를 리 없다는 것.
하물며 그곳에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든지 리스크를 가지고 이동할 수 있었다.
반면 김지운이 알고 싶어 하는 정보들은 위성 통신을 통해 얻기가 쉽지 않았다.
'헌터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무리해서 인터넷을 할 필요는 없다.'
그가 궁금한 건 일반인들의 처지가 아니라, 헌터 혹은 클랜의 상황이었으니까.
그쯤이었다.
"위험합니다."
이영후가 말했다.
"일단 그 접시가 제대로 작동할지도 의문이고요, 한다고 하더라도 할 만한 게 없습니다."
김지운이 생각한 대로.
"어비스넷을 이용하는 거면 모를까."
그러나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김지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비스넷이 뭐지?"
들어본 적 없는 게 등장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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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어비스넷 (2).
4.
"어비스넷이 뭐지?"
그 질문에 이영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비스넷 모르세요?"
그 대목에서 김지운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은퇴 이야기를 해야 할지.
은퇴 사실 자체를 말하는 건 어려울 게 없었다.
문제는 어비스의 헌터들 세계에서 은퇴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헌터들은 죽어야 은퇴를 할 수 있을 뿐, 부상으로 은퇴는 사실상 없었다. 어비스에서는 두 다리가 잘린 인간도 달릴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들이 존재했으니까.
"아!"
그러나 이영후는 김지운의 고민을 없애줬다.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어차피 관광객들 목줄이니까요. 헌터들은 굳이 깔 필요가 없긴 하죠. 제가 만난 헌터분들 중에서도 어비스넷 앱 까신 분들보다 안 까신 분들이 더 많았으니까요. 관광객 상대 안 하시는 실력 좋으신 헌터 분들은 더더욱 모를 수밖에 없고요."
알아서 상황을 이해하고서는 바로 설명을 해줬다.
"올해 여름부터 등장한 앱인데, 어비스를 관광하는 모든 관광객들은 소유한 스마트폰에 무조건 깔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스마트폰은 무조건 휴대하고 있어야 하고요. 만약 스마트폰이 꺼진 상태인데 연락이 안 된다, 그러면 무조건 이겁니다."
말을 하던 이영후가 제 손으로 제 목을 툭툭 쳤다.
"뭐, 그래도 있으면 좋습니다. 어비스에 대한 정보들이 종종 올라오거든요. 아이템도 올라오고, 경매도 있고, 헌터들이 가끔은 귀한 정보를 주거나, 이벤트도 있고요."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했다.
'목줄을 만들었군.'
예전부터 클랜들에게 관광객 관리는 큰 문제였다.
헌터는 솔직히 필요하면 제거하면 됐다. 대부분 헌터들은 클랜에 목줄이 잡힌 채 헌터가 됐으니까.
그러나 관광객들은 달랐다. 그들은 지구의 권력자들이었다.
물론 분명하게 경고를 했다. 규칙을 어기는 이에게는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적인 존재가 있는 법.
세계에서 10위 안에 드는 대부호나 혹은 미국 부통령 정도 되는 권력자를 규칙을 어겼다고 당장 제거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다행히도 김지운이 은퇴하기 전까지는 큰 소란이 일어난 적은 없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소란이 일어나기 전에 대비하는 게 최선인 법.
그래서 클랜들은 목줄을 만들었다.
실시간으로 관광객들을 감시할 수 있는 목줄을.
그러면서 동시에 당근도 줬다.
"거기라면 뭔가 좋은 정보들이 올라올 겁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최고의 구명줄이 됐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노하우와 정보들, 그것도 신뢰성이 보장된 것들이 올라오고 있을 테니까.
결정적으로 어비스넷에는 그 메리트가 있었다.
"어차피 눈팅만 해도 되니까요."
굳이 그곳에 투신할 필요가 없다는 것.
"하지만 위치가 들킬 텐데?"
그 대목에서 김지운이 가장 중요한 리스크를 언급했다.
그 어비스넷이란 것의 핵심 기능은 다른 무엇도 아닌 위치 추적인 만큼, 접속하는 순간 위치가 드러날 터.
물론 그게 어비스넷 이용자에게 알려지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 어비스넷을 관리하는 누군가는 그 위치를 안다는 의미였다.
김지운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여러모로 리스크에 비해서 메리트는 확실치 않다는 의미.
그런 김지운의 고민에 이영후가 대답했다.
"아, 그 정도는 제가 우회할 수 있습니다."
"우회?"
"코인 거래소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해커 놈들한테 덜 털리는 겁니다. 애초에 코인은 제대로 된 재산이 아니라서 전부 해킹 당해서 털려도 답이 없거든요. 하물며 초창기에는 더더욱 심했죠."
이영후,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제가 거래소로 대박 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걸 좀 잘했거든요. 당연히 제 거래소를 많이들 이용했죠."
짤막하게.
"그래서 컴퓨터로 사람 속이는 것쯤은 일도 아닙니다."
그 후에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솔직히 이 어비스넷에 사용된 보안 기술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아, 물론 대단한 양반이 만든 건 맞는데, 그래도 애초에 이 어비스넷에는 고도의 보안 기술을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걸 가지고 장난질을 치면 클랜이 와서 목을 자르는데, 굳이 뭐 하러 장난질을 치겠습니까? 하물며 위치 추적을 이걸로만 하는 것도 아니고요. 이건 그냥 말 그대로 목줄이죠. 족쇄랑 수갑 차고 있는 인간 목에 건 목줄."
정리하면 어비스넷에 접속하더라도 위치가 들킬 위험은 적다는 이야기였다.
"아, 물론 절대 쉬운 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게 그냥 통신도 아니고 위성 통신으로 하는 거면······ 솔직히 걸리면 언제든 걸립니다. 그냥 클럽에 모자에 선글라스에 마스크 정도 쓰고 들어가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관심 없으면 누군지 모르는데, 와서 얼굴 좀 보자고 하면 바로 들킵니다."
그쯤에서 김지운이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다시 했다.
리스크와 메리트를.
그런 김지운의 표정이 무겁게 굳었다.
'뭐가 나은지 쉽게 결정이 안 나는군.'
저울을 수평을 이루고 있었으니까.
위치 추적에 대한 리스크는 이미 많이 줄어들었지만, 문제는 결국 호텔에 가야 한다는 리스크였다.
'지금 당장은 더더욱.'
더군다나 지금 호텔에 있는 물건들이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질 가능성은 없었다.
즉,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김지운이 좀 더 강해진 다음이라고 해도 늦을 건 없었다.
물론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식량은 제한적이었고, 어비스의 안개를 거니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더더욱 늘어날 테니까.
무엇보다 생존자들이 버틸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희망이 없으면 정신이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안개 너머에 있는 어비스 좀비들과 다를 바 없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김지운이 보기에 사나흘 정도까지는 문제없었다.
그동안 파밍을 하면 최소 레벨은 2레벨 이상 올릴 수 있을 터.
그 과정에서 좋은 아이템을 얻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은 나쁠 건 없었다.
파직!
"어?"
"뭐, 뭐야?"
그런 김지운의 눈앞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정전? 정전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아는 순간 모두의 얼굴과 눈빛이 어둠이, 절망이란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기가 끊겼다는 것, 그건 곧 지금 사회의 인프라 중 가장 핵심인 발전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나마 있던 실낱같은 희망이, 사회가, 정부가 유지되어 자신들을 구해주리란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
물론 김지운은 달랐다.
그는 정전이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발전설비라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관리가 필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평소에는 많은 부분에서 관리가 들어갔다. 설비 관리는 물론 테러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 해둔 상태였다. 혹시 모를 사태의, 사태를 대비해 뒀다.
'어비스의 안개는 별개다.'
그러나 그 대비책 어디에도 어비스가 등장할 때에 대한 대비책은 존재할 리 없었다.
더군다나 어비스의 안개는 그저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안개가 아니었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안개였지.
만약 발전소를 운영하던 직원이, 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직원이 어비스 안개 때문에 미쳐서 안 좋은 버튼들을 누른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어비스의 몬스터들이 발전소에 들어가는 순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즉, 시간의 문제였다.
'그래도 이건 생각보다 빠르다.'
그리고 지금 정전은 김지운의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일렀다.
어비스가 등장하고 하루는커녕 아직 반나절조차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전기가 벌써 끊겼다?
생각보다 외부 상황이 더더욱 심각하다는 의미.
'언제나 최악이 현실이 되는군.'
물론 김지운은 예상했지만 현실이 되지 않기를, 자신이 헛된 예상을 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신이 틀린 게 가장 베스트였으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예상은 현실이 됐다.
다행히도 당장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결국 비상발전기 도움을 받아야겠군.'
이런 때를 대비해 대부분의 건물에는 비상발전기 설비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백화점 정도라면 더더욱!
물론 그 비상발전기가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표현처럼 비상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일 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분명 나았다.
"왜 불이 안 켜지지?"
그러나 상황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보통 상황이면 바로 비상발전기가 작동할 텐데?"
"비상발전기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비상발전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나?"
"괴물들이 비상발전기 근처에 등장했을 수도 있잖아? 응?"
그쯤에서 김지운은 더 이상 저울질을 하지 않았다.
"고강수."
"예, 대장."
"그 정보를 준 외국인이 어디 있지?"
5.
고강수가 생존자들의 무리를 장악하기 시작한 후로 생존자 무리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눴다.
조용히 입 다물고 하라는 것만 하는 부류와 도리어 적극적으로 고강수를 따르는 부류.
그런데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부류가 있었다.
"역시 요즘 핫플답게 외국인이 꽤 많네요."
바로 외국인 관광객들이었다.
일단 그들과는 제대로 된 소통이 불가능했다. 영어라면 모르겠지만, 백화점에 방문한 관광객들의 국적과 인종, 언어는 너무나도 다양했다.
해서 고강수는 결론을 내렸다.
외국인들 모두를 그냥 한 곳에 모은 후에 아무것도 시키지 않기로.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이들은 고강수 입장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았으니까.
당연히 외국인들은 그 대우에 만족하지 않았다.
불만을 토로하는 자들도 있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 줄 아느냐고, 외교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협박하는 자들도 있었다.
특히 중국어를 쓰는 이들 중에 그런 자들이 많았다.
"중국 애들이 조용하네요. 신기하네, 쟤들은 진짜 시끄러운 애들인데."
그러나 고강수는 그런 부류들을 너무나도 쉽게 정리했다.
"지랄하는 놈들은 손가락 두 개를 잘랐다."
특별대우를 해줬고, 그때부터 외국인들 중에 소란을 피우는 자들은 존재치 않았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은 협조적이었다. 자기 나라도 아니고 남의 나라 아닌가? 목에 핏대를 높이고 중국어를 지껄이는 것보단 고개를 숙이고, 납작 엎드리는 게 정답이었다.
동시에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보어입니다."
지금 김지운 앞에 등장한 사내가 그랬다.
"데이비드 보어."
그는 40대 중반의 금발 머리칼의 수염이 덥수룩한 그리고 배가 제법 나온 중년 백인이었다.
딱 봐도 관광객이었다.
물론 김지운의 생각은 달랐다.
평범한 관광객이, 커피숍만 가도 와이파이가 넘치고, 그런 커피숍이 횡단보도 하나 건널 때마다 세 개씩 보이는 서울에서 위성 통신 장비를 가지고 다닌다?
말이 안 되는 일.
즉, 김지운은 의심하고 있었다.
'테러리스트나 아니면 정보원이거나.'
진짜 신분이 따로 있을 거라고.
'여의도니까.'
더불어 지금 김지운이 있는 곳은 대한민국 정치와 금융의 핵심 요소들이 모인 곳이었다.
다른 나라 정보기관 요원이나, 테러리스트 같은 이들이 뭔가 수작을 부려도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납득이 가는 곳이었지.
더불어 김지운은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정말 위성 통신 장비인 그 접시란 놈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
물론 상대방이 쉽사리 제 정체를 말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해서 몇 가지 작업을 할 생각이었다.
"데이비드 보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를 보는 순간 김지운은 준비해왔던 멘트들을 머릿속에서 삭제했다.
'이 목소리.'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네만이다. 데이비드 진네만.'
지금 눈앞의 상대는 김지운이 알고 있는 목소리였으니까.
그것도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CIA 비밀작전팀 팀장.'
김지운이 헌터가 되기 전에 몇 번 대화를 나눠본 적 있는 자였으니까.
달리 말하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김지운이다."
"킴지운? 응?"
김지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앞의 백인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경악으로 물들었다.
"고스트?"
이윽고 나온 그 단어에 김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죽었잖아? 어?"
"그러는 그쪽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리고 시작된 대화.
"그야 그건······ 빌어먹을."
그 대목에서 데이비드 진네만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준비했던 시나리오, 그러니까 접시를 이용해 하려던 협상 시나리오를 버렸다.
눈앞에 있는 김지운의 능력을 아는 이상, 그 시나리오는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란 걸 알았으니까.
더 나아가 눈앞의 김지운을 상대로 장난질을 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수없이 그 경우를 봤고, 그럴 때마다 대한민국이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렇기에 여기서 데이비드 진네만은 뱉었다.
"관광지로 한국에 올 이유가 없지. 이 좁고, 물가 비싼 곳에 내가 미쳤다고."
진실을.
"자세히 말해주진 못하지만 지금 우리 팀이 여기 왔어. 소수 정예이긴 하지만. 여하튼 신께 맹세하건대 한국 정부에 위협을 주기 위해 온 건 아닐세. 한국 정부의 허가도 받았네."
이어진 말에 김지운은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여기서 정치인을 암살하든 경제인을 암살하든 그건 관심도 없었다. 이미 은퇴한지 꽤 됐으니까.
대신 그건 관심이 있었다.
"작전으로 온 거라면 가지고 온 건 접시만이 아니겠군."
그 질문에 데이비드 진네만은 눈매를 가늘게 떴다.
"긴말 안 하겠네."
그러면서 품에서 카드키를 꺼냈다.
"하나는 내 목숨값. 다른 하나는."
두 장을.
"혹시 나중에 잘못됐을 때를 대비해 미리 주는 보상금일세."
그 말에 김지운은 고민 없이 두 장을 받았다.
이제 의심은 없었다.
또한 고민도 없었다.
'메리트가 달라졌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CIA 특수팀이 직접 와서 작전을 펼친다는 것은 다양한 것들을 가지고 와다는 의미.
위성 통신 접시를 떠나서, 강력한 무기들 역시 함께 가지고 왔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그중에는 총도 있을 터였다.
이 빌어먹을 지옥 같은 곳에서 생존 가능성을 지극히 크게 높여줄 수 있는 아이템들이 가득 하다는 의미!
해서 김지운은 바로 결단을 내렸다.
"호텔로 간다."
김지운의 말에 고강수와 강현중 중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그 둘은 김지운과 데이비드 진네만이 나눈 대화를 알 수 없었으니까.
단지 둘이 아는 사이였구나, 그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이영후, 그는 그 둘의 영어 대화를 전부 이해했고, 그래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하시는 분인지 모르지만.'
김지운의 배경에 대한 놀람은 아니었다.
이미 이영후의 머릿속에 김지운은 매우 뛰어난 헌터, 관광객들은 얼굴도 보기 힘든 클래스의 헌터인 바.
그런 그가 특별한 어떤 조직들, FBI나 뭐 그런 곳의 인물과 아는 것은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고스트가 별명이신가?'
그 와중에서 나온 고스트란 별명 역시 김지운이 특별함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놀란 것은 그 부분이었다.
'뭐가 됐든 이거 대박 같다. 뭔가 엄청난 것도 가져올 수 있는 거 같아.'
이번 호텔 원정의 성과가 기대 이상일 수도 있다는 것.
"그렇군요."
여하튼 김지운의 선택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원정대 멤버를 소집하셔야겠네요. 위험한 곳이니까."
"위험한 곳이니, 파티는 소수로 한다."
"소수면 몇 명입니까?"
"둘이다."
"둘?"
그러나 그 대목에서는 달라졌다.
"둘이면······."
이영후가 고개를 들어 주변의 둘을 바라봤다.
강현중 중사와 고강수를.
아이를 지켜야 하는 자와 이곳의 룰을 지켜야 하는 자를.
그렇기에 그 둘을 보는 순간 이영후는 확신했다.
'또 나네.'
그런 이영후에게 김지운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
'어?'
그 순간 이영후가 기겁했다.
헌터가 오른손을 내민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보통 것이 아니었으니까.
'악수? 파티?'
진짜 동료가 된다는 것.
더불어 파티가 된다는 것은 몬스터를 잡았을 경우 경험치를 나눠 먹는다는 의미였다.
정확히 머릿수대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헌터에게 있어 경험치를 나눠준다는 것은 피를 나눠주겠다는 의미.
"가,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이영후는 어느 때보다 감격하며 오른손을 내밀어 김지운의 손을 잡았다.
[김지운과 파티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알림에 이영후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이영후에게 김지운은 말했다.
"그럼 준비해라."
"예!"
"밤에 움직일 테니까, 따뜻하게 입도록."
"예?"
그리고 이어진 말에 이영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밤이요? 아무것도 안 보일 텐데요?"
그 질문에 김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밤에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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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어비스넷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