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극비사항 (2)
마법사식 의사소통.
거기에 불필요한 대화는 필요 없었다.
텔레파시를 통해 머릿속으로 흘러드는 균열의 정보.
...마력이 넘쳐나는구나, 정말!
나뿐만 아니라 모든 선임 마법사들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다니.
나였다면 벌써 마력 탈진이라고.
혀를 내두르기도 잠깐.
나는 균열의 위치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프로스트 때랑 비슷해 보이는데.'
프로스트에서 벌어졌던 마왕, 데카라비아의 강림 의식.
그 강림 의식엔 제물.
그리고 절차가 필요했었다.
'피와 시체로 그려졌던 마법진처럼.'
생성된 11개의 균열.
균열들의 위치가 그때처럼 특정한 문양처럼 보였다.
선임 마법사, 뱅그릿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뭔가 말처럼 생긴 모습인데요?"
말과 관련된 별자리가 있다면 저렇게 생겼을까.
듣고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
그러나 핵심은 그런 게 아니었다.
각 균열 간의 거리로 봤을 때.
이번 강림 의식의 스케일이 프로스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게 문제였지.
나는 속으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필요로 하는 제물량부터가 차이가 나잖아.'
하위 마왕과 상위 마왕 사이에는.
평범한 악마와 마왕, 이상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악크샨, 악마 사냥꾼의 말이 피부에 와닿는다.
'하긴 그러니까 원로 마법사 정도 되는 인물들이....'
상위 마왕을 강림시키기 위해서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는 그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래.
빌어먹게 무거운 그랑펠의 긍지께서는 상위 마왕의 앞이라고 한들.
줏대 없이 흔들리는 게 아니었으니까.
설령, 그 무게에 가라앉는다고 해도 말이야.
그러나 또 당연하게도.
'물론, 나한테 가라앉을 생각은 조금도 없거든.'
처음도 아니고.
나는 이놈의 긍지가 어떤 건지 알고 있으니까.
가라앉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쳐왔단 말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대들이 신경 쓸 것은 마왕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움직였잖아?
그 대단하신 마왕님의 강림을 막기 위해서.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대역죄인, 카림제바를 처분하는 것. 목적에 집중하도록."
그랬다.
결국, 핵심은 카림제바였다.
'상위 마왕이 강림하는 걸 왜 미리 걱정하는 건데?'
애초에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움직인 건데. 그러니까 부정 타는 소리는 그만 하란 말이다, 뱅그릿 톰 선임 마법사.
그런 의미에서 입을 열었건만.
"허나, 마왕이 부활한다고 한들. 그대들은 걱정할 것 없다."
마왕 강림 의식 앞에서.
나의 빌어먹을 긍지는 더욱더 높아지고 말았으니.
나는 결국,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있다."
...미칠 거면 제대로 미치자고 다짐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미칠 생각은 없었는데!'
할 수만 있다면 나한테 욕을 쏟아붓고 싶은 심정이다.
그야 지금 내 앞에 있는 인물들이 말이야.
어디 흔한 인물들이냔 말이다.
무려 아르카나 최고의 무력 집단, 마탑의 실세들이시다.
'선임에 수석, 그것도 모자라서 원로까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도 아니고....
고작 333레벨 주제에 못하는 소리가 없다.
이건 플레이어들 앞에서 지껄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치심.
하지만 나의 뻔뻔한 철면피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으니.
"알아들었습니다."
끄덕끄덕─
마르셀로의 대답에 뱅그릿을 비롯한 선임 마법사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게 보인다.
부디,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를.
간절히 빌던 도중.
마르셀로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계획대로 움직이겠습니다."
고오오오─
그건 일종의 신호였다.
텔레파시를 통해 균열의 정보는 다들 파악한 상태.
각자가 포탈을 발현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가만히 있었다.
마력은 최대한 아껴둬야겠지.
'비약초로 도핑을 하긴 했지만.'
만반의 준비.
거기엔 당연히 비약초 도핑도 포함이었다.
[6시간 동안 마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3시간 동안 마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1시간 동안 마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그야말로 풀 도핑.
효과가 중복되지 않는 선에서.
마력 재생에 좋다는 건 다 챙겨 먹고 온 나였다.
'이런 거라도 없었으면 정말 끔찍하다.'
이 또한 나의 발버둥이란 거겠지.
그래도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으로 습득한 비약초에 관한 정보 덕분에 다양한 종류, 효과의 비약초를 섭취할 수 있었다.
비약초를 구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경매장에선 잡템 취급을 받고 있으니까.'
비약초에 관한 지식은 워낙 방대했다.
플레이어들이 비약초의 진가를 알아보기는 힘들 수밖에.
직접 섭취해서 효과를 파악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일단, 비약초라면 보이는 대로 사들였다는 거지.'
그중에선 사색 겨우살이만큼은 아니지만, 스탯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귀한 비약초도 몇 개 있었다.
그래도 그쯤 되면 알아보는 눈들이 있다는 건가. 경매가 붙긴 했지만.
내가.
아니, 그랑펠이 누구던가?
물질적인 삶을 초월한 청렴결백의 화신.
녹차 티백을 구매할 때도 최저가를 찾아 구매해 왔으니. 천문학적인 통장 잔고는 여전히 그대로. 값비싼 비약초라고 해도 고민 없이 사도 무리가 없다는 말이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333]
[능력치]
근력 : 62 / 민첩 : 66 / 마력 : 287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0]
보이는 상태창이 그 발버둥의 결과였다.
근력과 민첩이야.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 꾸준하게 상승시켜 왔으니까.
그것까지 고려한다면 나는 동레벨 플레이어들을 훨씬 웃도는 스탯 총합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숫자 따위, 카림제바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자, 가봄세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카림제바.
탁─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곧장 포탈이 발현됐다.
실화냐.
이건 탐색이고, 간섭이고, 운운할 수준이 아니잖아?!
뭐, 마탑의 선임 마법사 정도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포탈을 발현하니까.
세니오스의 그 대단함이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근데 이게 어디 보통 마법이냐고.'
포탈은 엄연히 고위 마법이었다.
플레이어 중에서도 포탈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
그 성능은 차마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란 말이다.
'무슨 라이트 발현하는 것처럼 포탈을.'
저런 세니오스가 나와 함께한다니.
그래, 최약체인 나한테 이런 배려는 있어야 밸런스가 맞지.
뻔뻔하게 생각하던 내게.
문득, 세니오스가 물어왔다.
"이호열 수석. 그대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인가?"
뜬금없는 질문.
뭐, 추위라면 아주 질색이지.
러시아부터 북해도까지.
'그 한파에 달랑 롱코트만 걸쳤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뼈까지 시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어째 운이 없게도 추운 지방과 연이 잦은 나였으니까.
물론, 추위에 호들갑을 떠는 행동?
그랑펠의 품격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추위조차 나를 막을 순 없다."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군."
잠깐,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그 말뜻을 알아차리는 건 금방이었다.
쌔애애애애앵─!
...뭐냐, 이 칼바람은.
폐로 스며드는 공기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차원이 다른 추위라는 걸.
'온기 버프를 챙겨뒀기에 망정이지.'
보관한 장신구에 [온기] 버프를 부여하는 보석함이 아니었다면.
정장 차림인 나는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저체온증에 시달릴 정도의 추위잖아. 이건!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보이는 건 설원.
그리고 균열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균열의 좌표.
나는 속으로 세니오스를 원망했다.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균열 중에서....
'북극에 있는 균열을 고른 이유가 뭔데?!'
분명하다.
세니오스는 나한테 감정이 있는 게 확실하다...!
물론, 뭐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도 양심이란 게 있었으니까.
상사 대접은 개뿔, 반말에, 항명에.
내가 했던 짓을 생각하면 감정이 없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
"서늘한 게 마음에 드는군."
그러나 세니오스에게 다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 순간,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으니까.
그가 그의 입으로 선언했던 출탑의 목적.
카림제바의 처단.
영락없이 목적만을 생각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많고 많은 균열 중에 북극 균열을 고른 게.
'그럼 단순히 우연이라는 거야?'
그렇다면 이 무슨 우연의 장난이란 말인가!
내가 무슨 철원에서 군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러시아부터 북해도, 북극까지.
무슨 놈의 눈 구경을 계속해서...!!
"강한 상대일수록 유리한 전장을 택하는 건 중요하다네."
유리한 전장?
세니오스의 말에 나는 그의 이명을 떠올렸다.
카림제바가 화룡이라 불렸다면.
'만년설(萬年雪)의 세니오스.'
그는 빙결마법의 정점이었으니까.
"허나, 카림제바. 그 오만하고 멍청한 녀석이라면, 그런 단순한 상식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겠지. 확률은 똑같다는 말이라네. 저 너머를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모른다는 것이지."
세니오스는 곧장 균열로 향했다.
"자, 카림제바. 녀석이 이곳에 있을지 확인해 봄세."
나는 그를 따라나서며 생각했다.
아무리 세니오스가 옆에 있다고 해도.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고 해도.
처음부터 카림제바와 맞닥뜨리는 건 심히 부담스럽다.
부디, 상식이란 걸 지녔기를 바란다. 카림제바.
*
여전히 빌어먹을 감각이다.
"적응되질 않는군."
열한 번째.
카림제바는 마지막 균열을 보며 손을 털었다.
모든 건 '진정한 진리'를 위한 과정에 불과했거늘.
그럼에도 악마와 합을 맞추는 건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의식의 준비는 끝났다. 마왕."
허나, 이제 필요한 것은 오로지 제물뿐.
그 제물을 준비하는 것은 악마 녀석들의 몫이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그저 의식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달려드는 방해꾼을 태워버리는 것뿐.
"부디 모습을 드러냈으면 좋겠군, 아캄파탐."
설령 그게 악마가 됐든.
모험가가 됐든.
예외는 없으리라.
카림제바가 그렇게 다짐하던 찰나였다.
"...!"
카림제바는 느끼고 말았다.
자신의 기척을 추적해 오는 마력을.
명백한 고위 마법이었다.
고작 견습 마법사 수준에 머무르는 모험가들은 고려 대상도 되지 못하는 게 당연. 모험가들을 제외하더라도 이 정도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마법사라."
중얼거린 카림제바는 머리를 굴렸다.
누구인가?
누가 자신의 마력흔을 추적하는 것인가?
떠오르는 건 역시나.
"혹 그대들인가?"
소통이 단절된 원로 마법사.
아니, 악마 숭배자들이었다.
카림제바는 조소를 머금었다.
악마를 지나치게 가까이하더니, 결국에는.
"그 꼴도 악마와 다를 것 없어졌다는 것인가?"
카림제바에게 악마는 '진정한 진리'를 목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녀석들은 달랐다.
악마의 힘에 심취해서는.
결국엔 악마와 다를 것 없이 변해버린 모양이었다.
"모르겠군."
이제와서 녀석들이 자신을 뒤쫓는 이유?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진정한 진리를 목격하기 위해서는.
시작된 의식을 성공적으로 끝마쳐야 한다는 것.
이내, 카림제바의 눈동자가 타올랐다.
"!"
그때였다.
균열 일대에 걸어둔 감지 마법이 발현된 건.
누군가 의식이 거행될 균열에 접근한 것이었다.
'모험가인가?'
모험가들이라면 상관없었다.
그건 제물이 제 발로 기어들어오는 꼴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자신의 감지 마법이 간파되고 파괴되어 버렸으니까.
"역시, 그대들이군."
고오오오─
카림제바는 순식간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당장 해당 균열로 포탈을 열고 배신자들을 불사르리라.
그러나 다짐과 다르게 카림제바는 움직일 수 없었다.
하나.
둘.
그리고 셋.
"!"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배신자 녀석들은 둘에 불과하단 말이다.
과대평가해서 아캄파탐, 놈이 의식을 방해한다고 하더라도....
방해꾼은 셋에서 멈춰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넷.
그리고 다섯.
여섯.
일곱.
차례대로.
균열의 감지 마법이 완벽하게 파훼되고 있었다.
예상 밖의 흐름.
카림제바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떠올렸다.
"...설마 마탑이 움직인 건가?"
마탑이 움직였다고 가정하자.
의문이 하나둘 풀리기 시작했다.
악마 숭배자, 그들이 텔레파시를 전해오지 못하던 것도.
누군가 자신의 마력흔을 추적했던 것도.
동시다발적으로 감지 마법이 파훼되고 있는 것도.
마탑이 자신들의 계획을 알아차렸다고 한다면.
모두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어떻게?'
누가 자신들의 계획을 간파할 수 있단 말인가?
의심이 가는 건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였다.
그는 원로 마법사들에게 의문을 품고 있던 유일한 마법사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의문만으로는 원로 마법사인 그들을 어찌할 순 없었을 터.
'이대로 고민만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마탑이 움직인 이상, 시간은 촉박했다.
다른 선임 마법사면 모를까.
수석, 마르셀로는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마탑이 움직였다고 한들.
계획에 변함은 없다.
다짐했던 대로.
설령 목숨을 내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진정한 진리'는 관철해야만 하는 것.
'온전한 균열은 하나뿐인가.'
슈슉─
카림제바는 해당 균열의 좌표로 포탈을 열었다.
균열에 진입하고, 그 내부에서 방해꾼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주쳤다.
"...!"
조금도 예상치 못한 방해꾼과.
"내 이럴 줄 알았지, 카림제바."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
그가 균열에 진입한 것이었다.
'세니오스가 우리의 계획을 알아차린 건가?'
아니,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면.
그보다 훨씬 전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악마의 저주로 세니오스의 판단력은 명백히 흐려졌었으니까.
물론, 카림제바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니오스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또각─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뒤섞인 균열의 풍경.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은발의 사내.
"!"
...설마?
불현듯 가능성이 스쳐 지나간다.
공동 수석 이호열.
그리고 아캄파탐.
'아캄파탐, 녀석은 분명 이호열에게 접촉하기 위해서....'
잠깐, 아캄파탐이 이호열에게 꼬리를 잡힌 거라면?
"...그랬어. 그렇게 된 거였군."
이제야 알았다.
모든 일의 원흉을.
마탑을 움직인 건.
마르셀로도, 세니오스도 아니었다.
이호열, 저 녀석이었다.
"감히."
카림제바의 동공이 화염처럼 타올랐다.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은 마력이 그의 몸에서 일렁거렸다.
세니오스가 반사적으로 대응하며 혀를 내둘렀다.
"여전히 대단한 열기로군."
그러나 화룡의 앞에서도.
호열은 언제나와 같았다.
"대역죄인, 카림제바."
몰아치는 열기에도.
한결같이 꼿꼿한 자세와 시선.
"그대는 어리석을 정도로 몰상식하군."
마지막으로.
냉랭한 음성까지도.
.
.
.
[대작-비단잉어 비늘 행커치프]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00]
[효과 : 착용 시,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
◈ 100화. 반신전(半神戰) (1)
반신(半神).
원로 마법사들이 절반은 신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무슨 놈의 마력량이 이렇단 말이냐.
아니, 순수한 마력량을 떠나 육체에서 피어오르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
'화룡과 만년설.'
카림제바와 세니오스.
화염마법과 빙결마법의 정점.
둘은 아직 제대로 된 마법은 발현하지도 않았거늘.
'...미칠듯한 위압감.'
무의식적으로 뿜어대는 마력에서부터 압력이 느껴졌다.
둘 중에서도 카림제바가 문제였다.
첫마디부터 몰상식하다고 면박을 줘서 그런가.
그는 나를 향해 노골적인 열기를 뿜어대고 있었으니까.
"감히."
고작 333레벨.
사실 연약한 나로서는 버틸 수도 없을 정도의 열기겠지.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감사한다.
'잘했다, 과거의 나.'
만반의 준비를 한 내게.
여러 우물을 판 내게.
그리고 똥손인 나를 대신해.
수고해 준 마법부여학 선임 마법사, 키코 아르민에게도.
[대작-비단잉어 비늘 행커치프]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00]
[효과 : 착용 시,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 / 모든 공격 회피 확률 상승 / 심미 스탯 개방]
[설명 : 더없이 희귀한 재료를 특수한 제작 방식으로 제작했다. 그 가치는 누구도 감히 평가할 수 없을 정도. 대작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으리라.]
그래, 이런 열기에도.
내가 꼿꼿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간단하게 템빨이라는 거지.
모든 건 행커치프에 달린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 효과 덕분이었다.
'아르카나에서 친화력은 상위 개념에 속하니까.'
해당 속성에 대한 저항력은 물론.
해당 속성 스킬을 발현했을 때 효과까지.
친화력이 상승하면 따라오는 부가 효과는 상당했으니까.
행커치프가 괜히 [유니크] 등급.
그것도 모자라 [대작]이란 이름이 붙은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거기서 만족했으면 만반의 준비라고 할 수 없다.'
말했잖아.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주제 파악 하나는 확실하다고.
그 효과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200레벨 제한 아이템.'
달랑 행커치프 하나로 카림제바의 화염마법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200레벨 제한 아이템으로 반신의 마법을 막아낸다니.
'양심이 없는 거니까, 그건.'
그런 내가 떠올린 건.
앞서 말했다시피 마법부여학이었다.
아이템에서 효과를 추출하고, 그 효과를 다른 아이템에 부여할 수 있는 마법부여학 말이다.
카림제바가 행동에 돌입할 때까지 주어졌던 준비 기간.
나는 그 시간을 헛되게 쓰지 않았다.
'정말 끈질기게 키코 아르민을 괴롭혔지.'
아이템에서 추출할 수 있는 효과.
그럴 수 없는 효과를 판별하고.
추출한 효과를 아이템에 부여하는 과정까지.
'심지어 돈도 안 내고 말이야.'
한마디로.
수석의 권한을 제대로 휘둘렀던 나란 말이다.
그 권력 남용의 결과가 메시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효과 : 착용 시,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
[효과 : 착용 시,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
[효과 : 착용 시,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
[효과 : 착용 시,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
옷부터 구두에 반지까지.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 효과로 떡칠.
그래, 그 구질구질한 발버둥 덕분에.
나약한 내가.
이런 열기 속에서 멀쩡할 수 있던 것이었다...!
'사실 욕심 같아서는.'
[심미] 스탯에 관련된 효과도 추출해서 부여하고 싶었는데.
왜, 아직도 내 심미는 [下]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게 마음처럼 가능할 리가 있나.
'그런 게 가능했으면 전부 마법부여학을 전공했겠지.'
그러니까 이쯤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사실 이것도 감지덕지겠지.
-"이런 성공률은 저도 처음입니다. 으아, 내가 어떻게 한 거지?! 이 감각을 유지해야 하는데...!! 저 이제부터 손 안 씻으려고요."
키코조차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대성공이었으니까.
-"...어쨌든, 전부 이호열 수석님 덕분입니다!"
내 덕분이라니.
내가 한 거라곤.
혹시라도 내 소중한 아이템을 날려 먹을까 봐.
주문서에 노심초사 추신을 적어넣은 것밖에 없었거늘.
물론, 나는 그런 키코의 감사 또한 당연하게 여겼지만.
'어쨌거나 또 한 번 감사할 수밖에 없다.'
반신들의 신경전.
그 기싸움에 오가는 열기와 냉기.
[온기] 버프랑 마법부여로 챙긴 [화염 속성 친화력]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고래 싸움에 새우가 되지 않았을까? 그것도 뜨거운 불판 위에 올려진 냉동 새우처럼.
'제대로 등이 터졌겠지.'
물론,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파아아앗─
카림제바의 손에서 솟구치는 화염.
탐색, 간섭 과정이 생략된 신속한 발현.
그 탓에 위력이 완전할 수가 없었거늘.
...미쳤다, 진짜.
지표면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고 있잖아?
얼마나 고열인 거냐, 저 화염.
아니, 녹아내린 것도 모자라서 용암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세니오스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전장 따윈 고려하지 않을만하군!"
세니오스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강한 상대일수록 유리한 전장을 택하는 건 중요하다네."
강자들의 싸움에서도 전장의 환경은 중요하다고 했었지.
그런 의미에서 균열은 세니오스에게 유리한 전장이었다.
절반에 불과하다곤 해도 설원.
기온 또한 눈발이 흩날릴 정도는 되었으니까.
'그런 전장을 본인에게 유리하게 바꾸고 있어.'
복잡한 고위 마법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파아아앗─
화르르륵─
카림제바는 그저 화염을 발현하는 것만으로.
균열 일대를 용암지대로 바꿔놓기 시작했다.
왜, 그가 화룡이라.
또 반신이라고 불렸는지 알 것 같았다.
'몰상식한 게 아니라 상식이 필요없는 수준이잖아?'
물론, 나도 감탄만 하고 있지 않았다.
카림제바가 화염, 세니오스가 빙결 마법이라면.
나 또한 그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이 전장엔 존재했으니까.
콰드드득─!
카림제바가 화염에 대한 탐색, 간섭의 과정을 생략했다면.
내게는 지금 밟고 있는 '땅'이.
탐색, 간섭 과정을 생략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대상이라는 말이다.
솟구치는 지표면.
그건 더 이상 하찮은 돌벽이 아니었다.
반신, 원로 마법사들이 격돌하는 전장이다.
옛날처럼 하찮은 돌벽을 언제까지 우려먹을 수도 없단 말이다.
콰드드드득─!
이건 말 그대로 지각을 들어 올리는 것.
"오호라."
세니오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과연, 마르셀로의 평가가 정확했군."
콰드드득─!
지각을 들어 올린 이유?
간단하다.
'순진하게 보고만 있을 것 같아?'
카림제바의 영역을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왜, 아무리 뜨거운 용암이라고 해도 화산을 녹일 수는 없는 법 아니겠어? 지형을 뒤바꿀 정도의 발현이라니. 과거의 나였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수준의 스케일이겠지.
그러나 큰 마력 소모는 없었다.
비약초로 인한 도핑?
아이템으로 챙긴 마력 재생력?
적잖게 도움이 되긴 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착용 시,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광물과 모든 식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
[설명 : 헤아릴 수 없이 방대한 지식이 담긴 마도구.]
그랬다.
모든 광물에 대한 지식.
탐색, 간섭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던 것도.
마력에 구애받지 않고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발현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에픽 등급의 템빨 덕분이라는 거다.
"...!"
나의 발버둥 맛이 어떠냐, 카림제바.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땅은 솟구치고 있었다.
쿠드드득─!
그 지각변동이 끝나는 순간.
카림제바가 만들어낸 용암은 더 이상 흐를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의도한 바가 아니었거늘.
어쩌다 보니까 내가 서 있던 땅이 카림제바가 서 있는 땅보다 훨씬 높이 치솟게 됐잖아?
그러니까.
"자신의 처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나는 카림제바를 내려다보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는 더 이상 화룡이 아니다. 대역죄인, 하찮은 악마 숭배자에 불과하지."
...아니, 근데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눈을 치켜뜰 필요가 있나?
카림제바가 열기를 발산하며 대꾸했다.
"닥쳐라. 모험가 애송아."
닥치라고 해서 닥칠 수 있었으면 말이야.
'처음부터 입을 열지도 않았다, 내가.'
세니오스가 그런 나의 입장을 거들었다.
"과연, 대역죄인에 걸맞은 눈높이로군."
"어리석군. 세니오스."
"어리석다니? 내가?"
"너는 이미 알고 있다. 진정한 진리를 외면하려 들지 마라."
진정한 진리?
그건 또 뭔데.
둘만 아는 이야기에 내가 끼어들 수 없었다.
허나, 둘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아도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야 나는 세니오스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카림제바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세니오스는 보란 듯이 이죽거렸다.
"진정한 진리? 개뿔.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는가."
"...뭐, 뭐라고?"
"인간이면 인간답게 행동해라, 카림제바. 주변에서 화룡, 화룡 떠받들어줬더니. 자신이 정말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드래곤이라도 된 줄 알았더냐?"
말했잖아.
생긴 거랑 다르게.
세니오스는 제대로 된 마법사가 아니라고.
자신의 말대로 그는 글러 먹은 마법사였다.
-"자네 앞이라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마탑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의문이었지. 진리를 탐구한다, 뭐다, 하는데.... 결국, 탐구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게 진리라고 한다면. 그 시시한 게 진리가 맞긴 한 건가, 싶었던 게지."
그에게는 마탑의 마법사가 응당 지녀야 하는.
진리 추구의 욕구가 없었으니까.
-"이런 삐뚤어진 마법사가 원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마탑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겠는가? 하하하! 내가 말하고도 민망하구만, 그래!"
그 얘길 들었을 때.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세니오스는 어째서 마탑에 입성하게 된 것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그건 순전히 나의 강함을 증명하고 싶어서였네."
자신의 강함을 증명할 수 있는 존재가 마탑에 있었으니까.
-"나는 화룡을 쫓아서 마탑에 입성했다는 말이지."
화룡.
그 명성은 마탑에 입성하기 전부터 쌓아온 것.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겠지.
마탑의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으니까.
세니오스는 동공을 번뜩이며 이렇게 덧붙였었다.
-"내 손으로 화룡을 쓰러트리고, 강함을 증명할 기회라니! 내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아, 물론. 마탑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도 잊지 않았다네. 그러니까 그 점을 고려해서 출탑의 허가를...."
...내가 괜히 생김새를 들먹인 게 아니라니까?
누가 상상이나 하겠냐.
말해도 믿어주기나 하겠냐고.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가 이런 사사로운 감정으로.
카림제바를 처단하러 나선 거라고 하면 말이야.
"그대라면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착각이었군, 세니오스."
아니.
착각하는 건 카림제바, 너다.
세니오스, 그 양반 생각보다 훨씬 맛이 갔다니까?
고오오오─
다시금 솟구치는 카림제바의 마력.
이번에는 화염이 그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아무리 화염 속성 친화력으로 도배했다고 해도.
저 정도의 화력이라면 스치기만 해도 위험하겠지.
"그렇다면 자비는 없다. 그대도, 모험가 애송이도. 모조리 태워주마."
본격적인 개전(開戰) 선언.
누구보다도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세니오스.
그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쩌저적─!
얼어붙는 공기층.
이내, 거대한 얼음이 세니오스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대를 빠르게 냉각시키고 있었다.
마치 선을 긋는 것처럼.
"감히 만년설의 세니오스를 앞에 두고 다른 이에게 한눈을 팔겠다는 것인가?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네만. 역시, 자네는 상성의 우위를 믿고 있는 모양이군."
세니오스의 말대로 마법에도 상성이 존재한다.
화염마법과 빙결마법은 극상성.
카림제바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당연했다.
"내 화염 앞에서 그대의 잔재주는 소용없다."
물론, 갖가지 마법 서적을 탐독한 나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가 아까운 마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지반을 뒤집어놓은 게 괜한 짓이 아니란 말이지.
'애매하게 끼어들어 봤자 방해다.'
잊지말자, 주제 파악.
말했다시피 나는 고래 싸움에 낀 새우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이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 또한 만반의 준비에 포함된 전개란 말이다.
지각변동.
푸슈슈슉─!!
그탓에 지반 속에서 흐르던 지하수가 솟구쳐 올랐다.
말했다시피 마법에는 상성이 존재한다.
가위 바위 보처럼.
물고 물리는 심오한 상성이 말이다.
──────
빙결 < 화염 < 물 < 빙결 < 화염 < 물....
──────
그랬다.
전장을 최대한 유리하게 바꾸는 것.
이것이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푸슈슈─!
푸슈슈슉─!
곳곳에서 솟구치는 지하수 물줄기.
그건 카림제바의 화염마법에는 쥐약이.
세니오스에겐 빙결마법에는 비약이 되겠지.
"...!!"
그런 전장의 변화를 알아차린.
두 사람의 반응은 명백히 갈렸다.
"...애송이가!!"
"든든한 지원이군, 이호열 수석!"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르셀로, 마티스.
아니, 뱅그릿이라도 좋다.
'하여튼 누구든 빨리 좀.'
[천적관계]도 없는 내게 이런 전장은 너무 벅차단 말이다.
*
마르셀로는 이를 악물었다.
뱅그릿 때와 똑같았다.
"마르셀로 수석. 저건!"
"그렇습니다. 악마들입니다."
무너진 균열.
그곳에서 쏟아지는 악마들.
뱅그릿 때와는 달리 악마의 수준은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숫자가 상당했다.
그 행렬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르셀로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 많은 악마가 오직 마왕의 부활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왕의 부활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림제바도 모자라 악마까지 상대하는 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누가 카림제바를 상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균열은 기이의 공간.
내부에서 외부로의 텔레파시는 불가능했으니까.
그러나 하나는 확실했다.
"벨리에 선임."
"네?"
"속도를 높이겠습니다."
"마르셀로, 그 이상의 무리는...!"
벨리에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말려야 하는데....
마르셀로의 눈빛은 더없이 결연했으니까.
말을 삼킨 벨리에는 그 대신 스태프를 굳게 쥐었다.
"알겠습니다. 뜻대로 모조리 쓸어버리죠."
어디까지나 목표는 대역죄인, 카림제바.
고작 악마 따위에게 발목을 잡힐 순 없다.
신속히 균열을 폐쇄하고 다른 균열을 지원해야만 한다.
.
.
.
멀리서 쏟아지는 무언가의 형체들.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잠깐만.
이러면 벅차다는 말은 취소하겠다.
나는 곧바로 카림제바에게 선언했다.
"어울리는군, 카림제바."
간절하게 지원군을 기다리던 사람이라고는.
"...어울린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정한 진리를 운운하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도. 결국에는 악마에게 의존하는 모습도. 그 추태가 추악한 악마 숭배자답다는 뜻이다."
뻔뻔하게.
◈ 101화. 반신전(半神戰) (2)
한층 더 짙어진 악마 사냥꾼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확실해. 성장했다.'
이건 레벨이나 스탯의 상승과는 또 다른 성장.
쉽게 말하자면 [천적관계]의 스킬 숙련도가 상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작 [천적관계]엔 스킬 숙련도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저 둘 사이에 끼어들 순 없지.'
잊지 말자. 주제 파악.
[천적관계]가 발동됐다고 한들.
나의 전투력은 저 반신들에 비하면 초라했으니까.
더 나아가서.
"악마의 처리를 부탁하지, 이호열 수석!"
세니오스는 내가 싸움에 끼어드는 걸 원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전장에서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잘할 수 있는 걸 해야겠지.
그래, 악마 사냥 말이야.
높은 곳에서 아랫것들을 내려다보는 시선.
과연, 그랑펠다운 시야로군.
나는 균열의 틈에서 쏟아지는 악마들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과연, 일반적인 악마들과는 달라 보였다.
'역시 마왕군이라는 거겠지.'
그 생김새가 데카라비아 때 봤던 악마들과 비슷했다.
오와 열을 맞춰서.
나와 세니오스를 향해 진격해오는 마왕의 군세.
그러나 당연하게도.
"하찮구나."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느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어떤 악마 앞에서도 고고한 그랑펠의 긍지를 떠나서도.
'뱅그릿 때 봤던 그 물음표랑 비교하면야....'
그래, 나에게는 경험이 있었다.
'박력부터 차원이 달랐지, 그건.'
균열을 박살 내고 등장했던 악마, '???'.
그것도 모자라서 균열 조각을 뜯어서 휘둘러 댔던 이름 모를 악마와 마주쳤던, 그런 무지막지한 녀석의 팔 하나를 [『기이』]로 도려냈던 경험이 말이다.
그래, 이것은 근거 있는 자신감.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의 접근은 허용하지 않겠다."
악마들이 쏟아지고 있는 이 순간.
균열의 붕괴도는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을 터.
데카라비아가 그랬던 것처럼.
마왕은 자신의 부하, 악마조차 제물로 삼켜버리는 놈들이었다.
악마가 의식 장소인 균열에 쏟아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허나, 도망치는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
이미 쑥대밭인 아르카나 대륙에 악마를 돌려보낼 수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무거운 긍지에 따라서.
쏟아지는 악마를 사냥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냥감과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않는 신념.
그래, 침묵이 나의 개전(開戰) 선언이었다.
고오오─!
[천적관계]의 효과로 솟구치는 마력.
거기에 만반의 준비로 마력 재생에 좋다는 비약초를, 중복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섭취하고 온 나란 말이다. 나는 곧장 마법을 발현했다.
콰드드득─!
탐색, 간섭의 과정은 생략.
"!!!!!"
진격해 오던 마왕군이 서 있던 땅이 융단처럼 출렁거렸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을 통해 모든 광물에 관한 지식을 터득한 내게. 땅은, 지반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다.
콰콰콰콰콰쾅─!!!
반신(半神).
카림제바가 용암을 만들고.
세니오스가 대기를 얼렸다면.
나도 지진을 일으킬 정도는 된다는 거지.
"?!?!!!"
갈라지는 땅.
그 아래로 추락하는 마왕군들.
어디까지 떨어진 것인가.
알 수는 없다만 하나는 확실하다.
'역시 질기네.'
마왕군.
그것도 상위 마왕의 악마들이라서 그런가.
지진 한 번으로는 쓰러트릴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 레벨 업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망설임은 없었다.
다시 한번 발현.
콰드드드득─!
연달아서 지진을 일으킨 건 아니었다.
아무리 [천적관계]에 비약초 약빨까지 세운 나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저 반신들에 버금가는 스케일의 마법을 연달아서 발현할 수는 없다.
'효율이 아무리 좋아져 봤자니까.'
나는 333레벨.
절대적인 마력은 그것보다도 낮았으니까.
그러나 이 순간.
쿠구구구구궁─!!
땅은 직전과 마찬가지로.
굉음을 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갈라진 땅.
지하로 떨어진 악마를 영영 집어삼켜 버리려는 것처럼.
그 갈라진 입을 굳게 다물기 시작한 것이다.
"하하. 어떤가, 카림제바. 아직도 자네의 눈에는 그가 모험가 애송이로 보이는가?"
"...!"
"쓸데없이 머리만 커져서는. 노망이 난 것과 다름없어진 우리는 물러날 때가 된 거겠지. 그나저나 언제까지 한눈을 팔고 있을 건가?"
그건 전투에 몰입한 카림제바와 세니오스조차 시선을 돌리게 할 정도의 광경.
...내가 봐도 그럴싸하게 보이기는 하다.
대지진처럼 갈라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마법이라니. 듣기만 해도 엄청난 고위 마법 같군. 하지만 그 실상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냥 반전 마법이거든.'
그랬다.
그저 반전 마법이었다.
은 단검을 변형시키고, 그 내구도를 원상복귀시켰던 소박한 반전 마법 말이지. 스케일만 커졌지, 그 원리는 똑같았다.
물론, 소모되는 마나가 극소량에 불과하다는 것도 똑같다.
'착각할 법도 하네.'
나의 구차한 사정을 모르는 카림제바와 세니오스에겐 영락없이 고위 마법을 발현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물론, 당연하게도. 이 구질구질한 진실을 내 입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쿠구웅─!
반전.
갈라진 땅이 다시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마왕군의 머릿수는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남겨진 이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에게 허락된 장소는 오직 지하, 나락뿐이다."
그래, 이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곧, 그 최선의 결과가 메시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왕군 기병에게 '골절'이 발생합니다.]
[마왕군 보병에게 '질식'이 발생합니다.]
[마왕군 백인대장에게 '화상'이 발생합니다.]....
땅 속에서 느끼고 있을.
지반의 무게.
그리고 지열.
'기껏 해봤자 과학 상식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이 또한 기이라면 [『기이』]겠지.
그 사실을 증명하듯.
연달아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마탑에서 포탈이 사라졌다.
그 소식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게 뭔 상황임???
-ㄹㅇ 마탑의 소중함을 이제야 깨닫네
-ㅁㅊ 균열 위치를 파악하면 뭐함?? 갈 방법이 없는데
-갑자기 왜 저러는 거냐 마탑은??
플레이어 중에서도 포탈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효과가 마탑의 포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천지 차이.
"소모되는 마력도 어마어마할뿐더러. 포탈 사용자가 들어갈 때마다 똑같은 마력이 소모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현재로서 플레이어들이 빠른 시간 내로 균열에 진입하는 건 불가능한 일...."
괜히 세계 각국의 길드들이.
마탑이 있는 대한민국, 서울로 몰려든 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물론, 그 사실을 세상보다 일찍 알게 된 이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행동에 돌입했다.
"현실을 인정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어."
남태민은 말을 이었다.
"우리의 수준으로는 열한 개의 균열, 전부를 돌아보는 건 불가능해. 포탈이 사라진 지금 상황에선 더더욱. 그러니까 목표를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는 거야."
제시 하인네스.
카밀라.
히사기 카즈마.
레오니.
하나하나가 누가 수준을 들먹여도 빠지지 않을 랭커 플레이어들. 그러나 남태민의 말에 그들은 반박할 수 없었다. 상황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마탑에서 포탈이 사라졌다는 건....'
'확실히 그런 뜻이실 거야.'
그러나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모를지라도.
그들은 호열이 짊어진 무게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모르면 모를까,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
호열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래, '긍지'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니까.
"우리의 목표는 가장 가까운 균열."
남태민의 계획은 간단했다.
호열의 여부와 상관없이 가장 인접한 균열에 진입.
해당 균열을 클리어한다.
물론, 그 행동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호열의 짐을 같이 짊어질 수 있다면.
"후우─"
무거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것 같았으니까.
행선지가 같았으니 굳이 인원을 나눌 필요는 없었다.
가온의 전용기.
플레이어들이 신속하게 탑승하던 도중이었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어?"
그건 전용기의 방향을 돌리게 만들 정도의 속보였다.
"...규, 균열이 클리어됐다는데요?!"
뭐라고?
긴급 업데이트가 떠오르고, 균열이 생성된 지는 고작 1시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 놀라기는 했지만, 호열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잠깐만, 이거랑 그거랑 다른 균열이지?"
"어? 뭐야, 진짜 위치가 다른데?"
"다르다는 건 균열이 벌써 두 개나 클리어됐다는 거잖아!"
그래.
클리어된 균열이 하나가 아니었다.
두 개.
아니, 세 개.
아니, 실시간으로.
"...잠깐만,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속보가 떠오르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떠드는 오보나 찌라시 따위가 아니었다.
AAU의 정식 발표였다.
──────
[AAU] 생성된 11개 균열 중 8개 클리어....
──────
그 소식에 세상은 다시금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스튜디오에도 소식이 전달된 걸까.
누군가 틀어놓은 동영상 속에서.
격앙된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아직까지 균열에 진입했다는 플레이어는 없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없겠죠. 하지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호열 플레이어가 움직인 게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되지 않는 일입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이호열 플레이어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균열 붕괴, 미사일, 핵폭탄.
극단적인 이야기까지 튀어나오던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전해진 희소식이다.
세상이 들썩이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물론, 가온의 전용기에 탑승한 플레이어들도 술렁거렸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다행이다."
실시간으로 균열이 클리어되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호열이 무사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젠장."
두득─
남태민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간신히 억누른 감정이 솟구쳤다.
레오니가 중얼거렸다.
"결국 이번에도 혼자서...."
*
사라지는 기이의 공간, 균열.
마르셀로는 포탈을 발현하며 말했다.
"이로써 남은 균열은 둘입니다."
마르셀로를 비롯한 선임 마법사들은 아홉 개의 균열을 폐쇄했다.
먼저 균열을 폐쇄한 이들이 다른 균열 쪽으로 합류했으니까.
당연하게도 균열을 폐쇄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러나 마르셀로는 알고 있었다. 프로스트에서 벌어졌던 마왕, 데카라비아의 강림 의식 과정을.
'경께서는 악마라고 다 같은 악마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마왕을 제외한 마왕군 내에서도 그 서열이 존재한다고 하셨었지. 그렇기에 마르셀로는 균열을 폐쇄하는 과정에서 악마들을 유의해서 살폈다.
'그러나 눈에 띄는 이들은 없었다.'
그러니까 직감할 수 있었다.
"남은 균열은 지금 균열과는 다를 겁니다."
남은 균열에 높은 계급의 악마.
그리고 대역죄인, 카림제바가 존재할 것이라고.
그 증거가 앞에 보이고 있었다.
'호열 경과 세니오스 님은 지금 순간에도.'
호열과 세니오스가 합류하지 않았다는 것.
그들이 아직 균열 속에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마르셀로는 발현된 포탈을 바라봤다.
"서둘러야 합니다."
호열의 말대로.
이번 출탑은 외부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마르셀로는 모험가들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경께서는 우리가 균열을 폐쇄하는 순간, 그 소식을 누구나 알 수 있게 된다고 하셨었지.'
그 말인즉슨.
출탑의 목적은 숨길 수 있을지라도.
균열을 폐쇄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었다.
결국, 나설 수 없는 마탑을 대표해서.
이번에도 책임을 지는 건 호열이라는 뜻이었다.
저벅─
포탈로 진입하는 선임 마법사들.
문득, 걸음을 멈춘 마티스가 마르셀로에게 말했다.
"이호열 수석께서는 피곤하시겠군요."
마티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건넨 말이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니. 경께서 홀로 이번 균열 폐쇄를 떠맡은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으시겠죠. 세간의 소문에 꽤나 시달리실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결국, 이번에도 호열에게 빚을 졌다.
이 빚을 갚기 위해선 보다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했으니까.
결국, 답답한 건 잠자코 지켜보던 뱅그릿 톰이었다.
'...잠깐, 좋은 거 아닌가? 세상의 관심을 받게 되면?'
도리도리.
그렇게 고민하던 뱅그릿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주제 파악을 끝냈다.
하기야 내 단순한 머리로.
두 명의 수석과.
마티스 선임의 큰 뜻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
실전의 중요성.
나는 그 말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니, 상승하는 레벨을 떠나서.
쾅─!
굉음을 쏟아내며 격돌하는 화염과 얼음.
카림제바와 세니오스.
두 원로 마법사의 사투에서 오가는 마법은 지금껏 내가 봐오던 마법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이건 고위 마법으로 묶어서 취급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화염마법과 빙결마법의 정점.
두 정점이 쏟아내는 마법은 그야말로.
화염마법과 빙결마법의 극한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비전(秘傳) 마법이 발현되고.
"어떤가. 아직도 상성의 우위를 믿고 있는가? 카림제바!"
그런 비전에는 비전으로 응수하는.
"닥쳐라. 미련한 녀석."
그 두 사람의 사투가.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볼 수 있게.
눈을 뜨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광경에 몰입한 나를 악마 따위가 방해할 순 없었다.
[악마 군단장 샤르탄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설령 그 방해꾼이 악마 군단장이라고 할지라도.
◈ 102화. 차디찬 승리
만년설이 녹아내린다.
식어가는 냉기.
서서히 느껴지는 격통.
세니오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결국, 극복할 수 없다는 건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세니오스는 강함의 증명이라 답할 수 있었다.
스스로 돌아봐도 참으로 단순무식한 인생이었다.
늙은이가 되어서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런 최후를 맞게 될 줄이야.
'하지만 썩 나쁘지 않았군. 그래.'
극상성.
화룡, 카림제바와 자신의 빙결마법은 극악의 관계였다.
이 순간, 보는 것처럼.
쩌저저저적─!
발현되는 세니오스의 비전 마법.
하늘에서 무수한 고드름이 떨어져 내린다.
고드름 하나하나에 닿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빙결한다.
세니오스가 발현할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높은 살상력을 지닌 마법.
"쓸데없는 짓."
화르르륵─!
허나, 고드름은 카림제바에게 닿지 않았다.
만년설이라고 해도 화염을 얼릴 순 없다는 거겠지.
카림제바의 불꽃과 맞닿은 고드름이 마력을 흩뿌리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하하...."
문득, 세니오스가 웃음을 뱉었다.
카림제바는 의아해졌다.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치던 마력도 잠잠해졌다.
스스로도 승기 따윈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텐데.
"드디어 실성한 것인가, 세니오스?"
너는 어째서 웃고 있단 말이냐.
"그래도 최악의 상성치고는 꽤 괜찮지 않았는가?"
"뭐라고?"
"난 애초에 그대를 이길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카림제바."
세니오스는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개안(開眼)하기 전.
그러니까 마탑에 입성한 뒤.
선임 마법사로 활동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 목표? 화염을 얼리는 것이다."
세니오스는 빙결마법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의 선임 마법사들처럼 자신의 마법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제대로 눈을 뜨고. 마법의 경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됐을 때.
-"한계란 어쩔 수 없군."
세니오스는 인정하고 말았다.
모든 마법엔 한계가 존재하며.
자신의 빙결마법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 또한 삶의 과업 아니겠는가?"
한계를 알기에.
애초에 카림제바, 녀석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녀석과 함께 죽을 생각은 했어도 말이야.
세니오스가 이죽거렸다.
"화염과 빙결. 최악의 상성을 극복하고 무승부를 이뤄낸다면. 오히려 후대의 평가는 내가 더 높지 않겠는가, 카림제바? 어떤가, 그대가 생각해도 그렇지 않아?"
무승부 같은 소리.
"실성했군."
카림제바는 세니오스에게서 광기를 느꼈다.
그리고 혀를 찼다.
"심장조차 멎어가는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흐하하. 심장이 멎어가는 게 아니다. 내가 심장이 뛰는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게지.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마법에 관한 탐구는 중요한 것이다, 카림제바. 진리에 심취한 나머지, 이를 소홀히 한 모양이군."
"...!"
심장이 멎어가던 게 아니라.
뛰는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고?
의미심장한 말에 카림제바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뚝뚝─
세니오스를 감싸고 있던 얼음 날개는 녹아내린 지 오래전.
땅에서 솟구치던 물줄기도 자신의 겁화로 수증기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단 말이다. 그래, 굳이 하나를 꼽자면. 느껴지는 약간의 한기 정도....
'잠깐, 한기가 느껴진다고?'
말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은 화염으로 육체를 감싸고 있지 않았던가?
육체의 착각인가?
그렇게 생각했거늘.
"!"
아니었다.
후욱─!
정말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카림제바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까지 개수작이군. 세니오스."
그 말은 좀 섭섭한걸.
세니오스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후우─
그렇게 웃는 그의 입가에서도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가차 없구만 그래. 개수작이라니. 이 만년설의 세니오스가 오로지 화룡, 카림제바. 오직 그대만을 위해서 발현해 낸 마법이거늘. 나의 정성을 생각해 줄 순 없는 겐가?"
경지에 올라서고.
이 마법을 고안해 냈을 때.
-"나는 정말 글러 먹었구나."
세니오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찼다.
-"이런 걸 써먹을 날이 오긴 하겠는가?"
카림제바를 쫓아 입성한 마탑.
그러나 자신은 어느덧 카림제바와 같은 원로 마법사의 자리까지 올라오게 됐다.
서로 결판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의미 없는 마법이나 만들어 낼 줄이야.
"그런데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그래서 마법에 이름조차 붙이지 않았건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럴싸한 이름이라도 붙이는 건데."
카림제바.
그대가 나를.
마탑을.
탑주님을 기만하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망설임은 없었다.
세니오스는 최후의 마법을 발현할 수 있었다.
"그대는 빙결마법의 본질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후욱─!
가시지 않는 한기.
불쾌함에 카림제바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니오스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는 아름다움이라 말하지. 빛을 반사하는 얼음의 자태는 보석처럼 화려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틀린 말이네. 빙결마법의 본질은 차가움에 있는 것이니."
후욱─!
후우우욱─!
카림제바는 굳어가는 손을 쥐었다 폈다.
움직임도 호흡도 점점 가빠져 갔다.
'들어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카림제바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세니오스, 녀석이 어떤 마법을 발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장단을 맞춰줄 순 없었다.
화르르륵─!
카림제바는 불꽃을 발현했다.
세니오스를 향해 화염의 날개를 펄럭였다.
그리고 목격했다.
'...뭣?!'
믿지 못할 광경을.
뻗어 나가는 불꽃이 너무나도 느리게 보였다.
'뭐지,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니었다.
이죽거리는 세니오스의 입은 그대로였으니까.
"감각조차 얼어붙게 하는 한기는 어떤가, 카림제바. 알아차린 순간, 이미 그대의 육체와 내부 장기는 반쯤 얼어붙어 있을 걸세."
카림제바는 믿지 않았다.
그 정도의 마법을 발현할 틈은 주지 않았으니까.
후우우우욱─!
그러나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몸도 화염도 말을 듣지 않았다.
카림제바는 머리를 굴렸다.
'대체 어느 틈에 이런 마법을.'
나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그리고 이내,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얀 입김을 내뿜는 세니오스를 보고 깨달았다.
'...숨결이다!'
내가 들이마시는 공기를 냉각시킨 것이다.
일대의 공기를 구분 없이 냉각시킨 탓.
녀석의 육체도 얼어붙고 있는 것이다.
한데 어째서 녀석은 멀쩡한 속도로 지껄일 수 있는 것인가?
"말했잖은가? 멎어가는 게 아니라 조절하고 있는 것이라고."
감각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한기.
두─근─두─근....
세니오스의 심장은 그 얼어붙은 감각에 맞춰 뛰고 있는 것이었다.
세니오스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카림제바를 보며 숫자를 셌다.
'단 1초라도.'
카림제바보다 오래 버틸 수 있다면.
녹지 않는 만년설 아래에 화룡을 잠재울 수 있다.
'물론,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냉기에 얼어붙겠지만.'
그래, 예상했던 대로.
잘해봤자 무승부라는 것이겠지.
'뭐, 글러 먹은 노인네의 목숨을 바쳐서 무승부라면.'
그래도 나쁘지 않은 거래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마탑에 대한 자신의 속죄겠지.
세니오스는 미소를 머금었다.
'글러 먹었어도 썩 괜찮은 인생이었군. 그래.'
그러나 화룡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대가 목숨을 걸었을 줄이야. 의외로군."
"...!"
카림제바가 멀쩡하게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 육체는 이미 절반 이상 얼어붙었을 텐데?
흠칫한 세니오스가 카림제바를 바라봤다.
그의 입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허나, 목숨을 건 건 나도 마찬가지다."
...화염을 삼켰다.
그래서 얼어붙은 육체를, 장기를 녹였구나.
세니오스는 너털웃음을 뱉었다.
"젠장맞을."
괜히 화룡이라 불린 게 아니었다.
얼어붙은 장기를 녹이기 위해 불을 집어삼키다니.
그런 판단을 내린 것도 경이로운 일이거늘.
그런 짓을 하고도 태연하게 말을 뱉고 있다니.
'무승부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한계는 어떻게 해도 극복할 수 없다는 건가.
'빌어먹을.'
서서히 눈이 감겨온다.
감각이 무뎌진다.
세니오스가 이를 악무는 순간이었다.
또각─
얼어붙은 땅으로 내딛는 구두 소리가 있었다.
"세니오스. 그대의 마법은 훌륭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간섭 과정이 아쉽군."
그리고 자신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세니오스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런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세니오스는 이 당돌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이호열 수석이었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지."
당당하게 카림제바의 앞으로 나서는 그의 모습.
그래, 저 뒷모습 또한 본 기억이 있었다.
정기 학회, 뱅그릿 톰 선임 마법사의 발표를 지적하던.
그때와 같이 한결같이 꼿꼿한 자세였다.
"빙결마법의 본질이 냉각에 있다는 탐색은 훌륭했다. 그러나 간섭 과정에 아쉬움이 존재하는군. 대상을 냉각시킨다면 과연, 어디까지 냉각시켜야 하는가. 지금처럼 제한이 없는 추상적인 간섭에는 비효율적인 발현만 뒤따를 뿐이니까."
카림제바의 불꽃이 일렁거렸다.
'감히 애송이가 뭐라고 떠드는 것이냐.'
그 꼴이 마치 자신을 앞에 두고 강연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 건방진 녀석을 불사르고 싶었지만.
아직 육체의 감각이 온전치 않았다.
얼었다, 타올랐다를 반복한 육체가 멀쩡할 리 없었으니까.
그러나.
'세니오스는 사실상 끝이다.'
혼자 남은 모험가 애송이를 상대하는 것쯤이야.
온전치 못한 육체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카림제바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반드시 너를 죽여버리겠다."
그러나 호열의 강의는 계속됐다.
카림제바의 일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졌다.
세니오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늙은이를 배려해 주고 있군. 그래.'
자신의 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둘러 말을 끝마치려는 거겠지.
세니오스는 호열의 말에 집중했다.
"간섭 과정에서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했다면 보다 효과적인 발현이 가능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마법의 상성을 극복할 수 없었을 걸세. 그러나 마법이 아닌 [『기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기이』]라니...?
그 개념을 곧바로 이해하는 건.
두 원로 마법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시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모습을 얌전히 지켜볼 카림제바가 아니었다.
'...됐다.'
감각이 돌아왔다.
곧바로 애송이 녀석을....
"간섭 과정에서 『마법』과는 전혀 다른 [개념]을 더한다."
쩌저저저적─!
"?!"
순간, 그대로 멈춰버린 카림제바의 육체.
카림제바는 직감할 수 있었다.
세니오스의 마법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저항할 수 없다...?!'
세니오스의 마법이 육체의 감각을 고장 나게 하는 데 그쳤다면, 이건 정말로 육체가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마력의 흐름까지도...!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력조차 흐름을 멈추게 하는 마법이라니.
카림제바는 역시나 머리를 굴렸다.
'말 속에 이 마법을 극복할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것이다.'
세니오스의 마법을 간파한 것처럼.
그런데 아무리 호열의 말을 되새겨 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그래. 그것이 바로 [『기이』]."
이건 마법이 아닌 [『기이』]라는 것.
"구체적인 목표, 절대영도까지 간섭 대상을 냉각시킨 기이의 발현이라네."
절대영도.
그것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세니오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절대영도, 그 마법의 이름으로 하지. 울림이 좋군."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세니오스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그래.'
이호열 수석.
그는 마르셀로가 인정한 사내가 아니었던가?
세니오스는 마르셀로가 어떤 심정으로 호열을 추천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미련은 없었다.
'부족한 건 빙결마법이 아니라 나였구만.'
보다시피 호열이 발현한 기이에 속수무책이지 않은가?
화염도 모자라 화룡을 그대로 얼려버렸군.
세니오스가 말을 이었다.
"나보다 그대가 더 잘 해내겠지만."
그건 글러 먹은 원로의 처음이자 마지막 노파심이었다.
"그럼에도 마탑을 잘 부탁하겠네. 이호열 수석."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 생애 마지막 강의는 더없이 훌륭했네."
.
.
.
세니오스가 죽었다.
카림제바는 호열을 바라봤다.
'...어떻게 나를?'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느껴지는 마력은 자신은 물론, 세니오스와 비교해도 형편없는 수준이란 말이다.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의 화염에도 멀쩡했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서 녀석은 분명 악마를 상대하고 있었단 말이다. 카림제바는 악마가 어떤 족속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강함을 떠나 악마와 접촉하는 자는 그 정신력이 피폐해진다.
'온전할 수 없어야 한단 말이다.'
원로 마법사들이 그동안 자신들에게 휘둘린 것처럼.
그러나 호열은 멀쩡했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태연했다.
마법의 구조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어 댈 정도로.
'잠깐.'
그 순간, 카림제바는 위화감을 느꼈다.
'녀석은 어떻게 빙의한 아캄파탐을 알아본 거지?'
자신과 같은 악마 숭배자가 아닌 이상.
무언가에 빙의한 악마를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리고 마법사치고는 터무니없이 낮은 마력까지....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대는 악마 사냥꾼인가?"
또각─
그 말에 호열이 등을 돌려 자신을 바라봤다.
카림제바는 확신했다.
맞다, 이 녀석은 악마 사냥꾼이다.
카림제바는 머리를 굴렸다.
'어쩌면....'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빌어먹을 마법. 아니, 기이란 것에서 말이야.
카림제바는 입을 열었다.
"악마 사냥꾼이여. 내가 원하는 것은 진정한 진리를 목격하는 것이다. 악마는 그저 수단에 불과할 뿐. 그대라면 알고 있지 않은가? 아르카나 대륙에 필요한 건 진정한 진리라는 것을!"
그래, 다른 이들도 아니고 악마 사냥꾼이라면.
진정한 진리를 이해할 수밖에 없으리라.
카림제바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호열의 표정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차가운 시선에는 마치 한기가 서린 듯했다.
악마 사냥꾼이라면.
악크샨의 최후를 생각하면.
절대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없을 터.
카림제바가 설마 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그대는 '성전(聖戰)'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
.
.
.
성전(聖戰).
그게, 뭔데.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에 벌어진 일인가?
뭐가 됐든지, 당연하게도 나는 모르는 사건이다.
나한테는 10년 하고도 수년의 공백이 존재했으니까.
카림제바가 주절거렸다.
"나를 풀어준다면 모든 것을 말해주겠네. 성전에 대해서도 진정한 진리에 대해서도! 악마 사냥꾼인 그대라면 내 뜻을 분명 헤아릴 수 있을 게야. 화룡, 카림제바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성전, 그건 악마 사냥꾼.
그리고 악크샨과 관련된 일이겠거니, 하고.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순간, 내게.
그랑펠에게 카림제바는 악마와 다름없었으니까.
말했잖아.
나는 사냥감과 대화하지 않았으니까.
진정한 진리는 개뿔. 무슨 놈의 진리가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마왕까지 부활시켜야 한다는 말이냐. 물론, 성전 같은 떡밥 따위에 멈칫할 이유도 없었다.
성전.
카림제바가 그 단어를 입에서 꺼낸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절멸]
그래.
그러니까 나는 곧장 마법을.
아니, [『기이』]를 발현했다.
절대영도.
분자조차 움직임을 멈추는 극한의 온도.
"나느으으은...!!"
이내, 카림제바가 긍지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추악한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깨진 차원의 틈 : ה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주한 악마 숭배자를 처분하라. (성공)
●상위 마왕의 부활을 저지하라. (성공)
◈ 103화. 나아가야 할 길
원로 마법사.
만년설의 세니오스.
대역죄인, 카림제바의 처분 과정에서 전사(戰死).
그의 추모는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빌어먹을."
누군가 그렇게 말하며 이를 갈았다.
마탑의 원로 마법사가 전사했다.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도 부족한 일이었거늘.
고작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이 그를 애도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마탑의 내부 사정.
그 진상을 알고 있는 건 선임 마법사, 이상의 마법사들뿐이다. 세니오스의 죽음을 아는 것도 그들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죄송합니다. 세니오스 님."
복잡한 감정이 섞인 애도 속에서.
마르셀로는 얼어붙은 세니오스를 바라봤다.
'웃고 계시는군요.'
영영 녹지 않는 만년설 속에서.
세니오스는 웃고 있었다.
마치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처럼.
'하지만 남겨진 이들은 그렇게 웃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마르셀로는 명심하고 있었다.
세니오스가 눈을 감은 건 악마.
그리고 악마 숭배자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세니오스에 대한 애도가 끝난 순간.
마르셀로는 입을 열었다.
"이로써 마탑은 되돌리기 힘들 정도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세니오스의 사망.
이제 마탑에 남아있는 원로 마법사는 단 한 명뿐이다.
그러나 세니오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로써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마르셀로의 목소리엔 감정이 실려있었다.
"우리, 마탑의 적이 누구인지를."
그 감정은 명백한 분노였다.
모순의 굴레를 끊어내고 비로소 움직이고 시작한 마탑.
세니오스의 희생은 그런 마탑에게 행선지를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폭풍전야.
고요하게 흐르는 정적.
선임 마법사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진입했던 균열에서 목격하지 않았던가?
쏟아지던 악마들의 모습을.
그로 인해, 악마가 아르카나 대륙도 모자라 이 세계에까지 마수를 뻗쳐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정에 변화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악마라는 목표가 생겼으니.
머뭇거려서는 안 되는데.
'...나는.'
뱅그릿은 쉽게 세니오스를 바라볼 수 없었다.
쓸데없는 것에 매달리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모자라서 악마 숭배자에게 속아 넘어가기까지.
내가 낌새를 알아차렸더라면....
속지 않고 마탑에 그 사실을 알렸더라면....
세니오스 님께서 이렇게 되실 일도....
뱅그릿은 고개를 숙였다.
한참이나.
머리를 떨구고 있던 뱅그릿을 일깨운 건 고고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지, 뱅그릿 톰 선임 마법사."
"...!"
"과한 묵념 또한 격식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호열의 목소리였다.
"...이, 이호열 수석님."
뱅그릿은 고개를 들어 호열을 바라봤다.
호열에게 집중되는 시선.
호열은 이 자리, 어떤 마법사보다 고된 일을 겪었다.
카림제바를 상대한 것도 모자라서.
군단장으로 불리는 악마들이 모조리 호열과 세니오스가 진입했던 균열에 쏟아졌던 것이다.
게다가 호열은 세니오스의 최후까지 목격했다.
'누구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크실 거야.'
'악마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피폐해졌겠지.'
'나였으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텐데....'
호열을 걱정하는 것이 당연했건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호열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그저 꼿꼿하게 선 자세로 세니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애도에는 어긋남이 없었다.
격식과 절차에 따라서.
호열은 동요하지 않고 세니오스에 대한 애도를 끝마쳤다.
지켜보던 이들은 생각했다.
'감정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으신 거겠지.'
호열은 언제까지나 마탑의 수석이었다.
마탑에 공백이 생긴 지금.
자신이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 마르셀로가 슬픔에 빠지지 않고.
곧장 마탑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던 것처럼.
뱅그릿은 그런 호열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이호열 수석께서도 참아내시고 있는데....'
나 따위가 엄살을 부리다니.
뱅그릿은 서둘러 세니오스 앞으로 나아갔다.
굳게 입을 다물고 절차에 따라 세니오스를 추모했다.
"...."
정작, 당사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거늘.
호열의 등장 이후.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었다.
.
.
.
나는 슬퍼할 수 없었다.
세니오스와 알고 지낸 기간이 어쩌고.
친분이 저쩌고.
인간적으로 슬퍼하고 어쩌고저쩌고를 떠나서.
나는 그의 최후를 목격했으니까.
나의 빌어먹을 긍지께서.
조금도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니오스는 결국, 자신의 긍지를 증명하고 전사했으니까.
나는 세니오스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미련 하나 남지 않은 얼굴이었지, 그건. 추악한 모습으로 얼어붙은 카림제바와 비교되는 최후였다.
나는 다시금 세니오스를 바라봤다.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생애 마지막 강의는 더없이 훌륭했네."
그 후회 없는 표정이 내 덕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야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세니오스, 그 양반이 글러 먹은 마법사라는 걸.
'그 성격을 고려하면....'
그는 최후의 순간.
빙결마법으로 카림제바를 이겼다는 것에 가장 기뻐했을 거다, 아마도.
하지만 그에 대한 나의 애도는 더없이 진심이었다.
마음에 없는 행동은 죽어도 할 수 없는.
나 또한 글러 먹은 놈이었으니까.
"감정을 추스르실 시간도 부족하실 텐데, 죄송합니다. 경."
그런 내게 마르셀로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렇게 정중하게 사과할 필요 없다니까.
방금 말했잖아?
나는 내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놈이라니까.
그러니까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개의치 말게."
또각─
곧장 걸음을 옮겨서 내가 향하는 곳은 간단했다.
마탑의 로비.
얼핏 인터넷을 확인했는데, 이번 사태에 관한 세간의 관심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거든.
하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
다들 그 이름부터 짐작했을 거 아니야?
적정 레벨 900레벨, [깨진 차원의 틈] 균열.
그때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균열이 11개나 생성됐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모든 균열이 클리어된 셈이었으니까.
'정작 플레이어들은 나서지도 못했는데 말이지.'
플레이어들이 나서지 못한 이유?
간단하다.
내가 마탑 포탈 발현을 멈춰버렸으니까. 어디까지나 이번 [깨진 차원의 틈] 균열은 마탑 내부 사정과 관련되어 생성된 것.
플레이어들이 알아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니까 결국.'
다들 착각할 수밖에 없다는 거겠지.
마탑의 선임 마법사.
아니, 그들로도 모자라서.
원로 마법사까지 균열에 진입했다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까.
자연스럽게 관심이 나를 향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내가 모든 균열을 클리어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과대평가도 이런 과대평가도 없구나, 정말...!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고. 그게!
그 짧은 시간에 혼자서 균열을, 그것도 11개나 클리어하는 게 가능하겠어?
내가 진짜 이게 마탑의 내부 사정만 아니었어도...!
그러나 나는 이놈의 긍지를 알고 있었다.
『그랑펠에게 겸손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그런 나는,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지껄일 수 있겠지.
그러나 피곤하신 긍지에 따라서.
나는 없는 말을 지어낼 수도 없었으니.
마탑에 모여든 수많은 인파 앞.
쏟아지는 플래시 속에서.
나는 이렇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대답할 수 있는 사항에만 대답하겠다."
내가 생각해도 더없이 뻔뻔하게.
"불만이 있다면 질문을 삼가도록."
*
호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속보가 쏟아진다.
──────
[속보] 이호열, "내가 균열에 진입했다."
[속보] 이호열, "내가 마탑의 포탈을 정지했다."
[속보] 이호열, "내가 균열을 클리어했다."
──────
이호열이 인터뷰에 응할 줄이야!
취재진으로서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횡재가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 이호열은 평소와 다르다.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 주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에 민감한 질문을 던진 기자도 있었다.
"균열에서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지만.
──────
[속보] 이호열, "균열에서 있던 일? 대답하지 않겠다."
──────
허나, 기대조차 하지 않아서 그럴까?
호열의 태도가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그 상황을 지켜보는 세간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ㅁㅊㅋㅋ 밀당 지리네
-그래도 인터뷰 태도 많이 좋아졌다
-ㄹㅇㅋㅋ 언제는 말도 못 걸게 했는데
-근데 태도가 좋아진 건 기자들 아니냐? 나 저렇게 질서정연한 기자들은 처음 본다 진짜
-하긴ㅋㅋ 이호열 태도는 한결같이 꼿꼿하네
쉽게 오지 않는 기회인 만큼.
기자들은 끈질겼다.
그들이 던진 질문 중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질문도 있었다.
"균열의 공략 난이도는 어떠셨습니까?"
균열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알 수 없다면.
이렇게 둘러서라도 물어보겠다.
그런 의도가 담긴 질문이었다.
──────
[속보] 이호열, "나에겐 어떤 균열이든 똑같다."
──────
어떤 균열에서도.
또 어떤 악마 앞에서도.
변함이 없는 호열의 태도.
그런 의미의 대답이었거늘.
듣는 이들이 호열의 속사정을 알 순 없는 일이었으니.
-자신감보소ㅋㅋㅋㅋㅋㅋㅋ
-저럴 말할 자격 충분하지 이호열은ㅋㅋㅋ
-이번에도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줌 ㄹㅇ
그건 더없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내비칠 뿐이었다.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댓글.
지켜보던 레오니가 작게 말했다.
-근데 그건 안 물어보나???
"...그래서 포탈을 정지한 이유가 뭔데."
다른 플레이어들은 몰라도.
레오니를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남태민, 히사기. 그리고 제시에겐 더없이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래, 댓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호열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줬으니까.
'...나따윈 도움도 되지 못하는 걸까.'
어째서일까.
제시는 그 질문에 대한 호열의 대답은 듣고 싶지 않았다.
이번 사태에서 진지하게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호열에게 자신의 도움 따윈.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게 아닌가 하고.
'그렇지 않고서야 포탈을 정지하실 이유는 없으셨겠지.'
말보다는 행동.
마치 자신을 쫓을 필요는 없다는 것처럼 포탈은 가동을 멈췄었으니까. 제시는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호열이 그런 뜻에서 포탈의 가동을 멈춘 것이라면....
'망설임 없이 대답하시겠지...?'
자신과 호열 사이엔 선이 그어지는 셈이겠지.
호열에게 도움은커녕 방해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
그건 제시,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자리에 모인 모두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긴장 속에서 이윽고 질문이 던져졌다.
-"혹시 포탈의 가동을 멈추신 이유가 따로 있으셨던 겁니까?"
그리고 망설임 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대답하지 않겠다."
"...!!!"
호열이 대답하지 않았기에.
그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체념하고 있던 이들에겐 충분한 대답이었다.
'일단은 보류라는 말씀이신가.'
'호열 씨가 지켜보시겠다는 거야.'
'...나 진짜 금방 따라잡을 거니까.'
아직 선은 그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
호열과 같이 나아갈 수도,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남태민, 레오니, 히사기가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이것 때문에 우리를 뭉쳐놓으신 건가?"
"야씨."
"아니, 그냥 넘길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과한 해석 아니야?
레오니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왜, 말하지 않았던가?
호열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준다고.
그러니까 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단거리 텔레포트.
어느새 자리를 떠난 제시가 눌러썼던 고깔모자의 챙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고깔모자. 아니, 스승을 향해 선언했다. 어떤 퀘스트 목표가 됐든 상관없었다.
"저 열심히 할게요!"
호열과 같은 선상에 서기 위해선.
클래스 퀘스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정말, [대마법사]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았으니까.
이 또한 호열 덕분일까?
마탑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 이들.
그리고.
그런 플레이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목요일.
아르카나의 정기 업데이트였다.
.
.
.
『여러분 곁으로 새로운 지역이 찾아옵니다.
신규 지역, '여신교단 성지, 뮤온'이 추가됩니다.』....
*
여신교.
여신교는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하는 종교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였다.
제국에서는 '셋이 모이면 그중 하나는 반드시 재미없는 놈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재미없는 놈.
그건 여신교의 신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여신교의 교리는 빡빡하기로 유명하다.
동시에 셋 중 하나라는.
어마어마한 여신교의 신도 수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했다.
그 여신교의 성지, 뮤온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호열의 활약상이 채 식기도 전이거늘.
연달아 떠오른 업데이트 내역에 커뮤니티는 다시금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여신교단이면 무조건 퀘스트 쏟아진다ㅋㅋㅋㅋㅋ
-옛날부터 종교는 퀘스트 덩어리였거든ㄹㅇㅋㅋ
-그래두 플레이어들은 한시름 놨겠다ㅜㅜ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아르카나 대륙에서 종교의 역할은 상당했다.
특히나 플레이어는 교단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기본적인 버프를 비롯, 상태이상 치료, 힐러 계열 클래스로의 전직까지.
플레이어들이 기대감에 부푸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뭔가 구색이 맞아가는 거 같지 않아?"
"그치. 마탑에. 유스라 왕국에 프로스트. 뮤온까지."
"소수 정예지만 뭐, 있을 건 다 있네!"
그래, 이상한 건.
그런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사람이리라.
예를 들면.
달칵─
느긋하게 찻잔을 내려놓는 호열처럼.
.
.
.
나는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했다.
여신교단의 성지, 뮤온이라....
10년 하고도 수년의 공백이 있다하더라도 여신교는 모를 순 없지. 여신교는 아르카나가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부터도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종교였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이상한 일이지.
그 대단하신 여신교가 말이야.
'어째서.'
나는 점멸하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퀘스트창을.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절멸]
악크샨과 악마 사냥꾼의 절멸.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성전에 얽힌 진실을 파헤쳐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성전에 참가한 세력을 파악하라. (진행 중)
●여신교단의 성자와 조우하라. (진행 중)
[악크샨의 절멸]이란 퀘스트에 얽혀있는 걸까?
말했다시피.
나에게는 10년이 훌쩍 넘는 공백이 존재한다.
그래서 성전(聖戰)이 무엇인지도.
그에 얽힌 진실이 무엇인지도.
여신교단이 왜 퀘스트 목표에 떠오른 건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진 않는다.
달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절차에 따라서 해결하면 되는 일."
그래, 클래스 퀘스트가 떠오른 이상.
뭐든 차차 알아나가면 되는 일이니까.
그저 퀘스트 목표가 향하는 곳으로 말이야.
뭐, 그 과정에서 어쩌면.
여신교단을 파헤쳐야 할지도 모르겠지.
'그거 완전 신성모독이 따로 없겠는데.'
그러나 상관없었다.
나와 그랑펠의 몇 안 되는 공통점 중 하나가 있거든.
"나는 신 따위 믿지 않는다."
물론, 신은 믿지 않아도 레벨은 또 믿는다.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번엔 분배할 포인트가 좀 많아서 말이야.
◈ 104화. 악취가 나는군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377]
[능력치]
근력 : 62 / 민첩 : 66 / 마력 : 287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44]
카림제바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경험치를 주진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는 오로지 마왕군을 사냥한 것만으로 무려 44레벨을 올린 것이었다...!
'...엄청나군.'
레벨이 높아질수록.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아르카나 시스템. 나 또한 그 악랄한 시스템을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체감했거늘.
44레벨이나 상승하다니.
그러나 놀람은 없다.
나는 태연하게 읊조렸다.
"지극히 당연한 성과다."
아무렴요,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래, 내가 사냥한 악마가 많긴 했으니까.
게다가 그 악마들이 어디 보통 악마들이란 말이냐.
마왕군, 그것도 상위 마왕의 부하들이었다.
'분명 군단장도 섞여 있었지.'
떠올랐던 수많은 메시지를 하나하나 기억하진 못한다.
게다가 그때 나는 세니오스와 카림제바의 전투에 한눈이 팔려있었으니까.
누군가는 흠칫하면서 물을 수도 있겠지.
한눈이 팔린 상태로 그 많은 악마를 쓰러트렸다니.
나한테 그 정도의 여유가 있었냐고.
물론, 여유는 없었고 사정이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구질구질한 사정이.'
세니오스의 빙결마법.
카림제바의 화염마법.
극상성의 두 마법은 충돌하며 순수한 마력으로 변했었다.
극과 극인 두 속성이기에 가능했던 일.
덕분에 나는 균열 일대에 넘실거리던 순수한 마력을 마음대로 써먹은 것이었다.
'뱅그릿의 마력에 간섭했던 것처럼 말이지.'
두 원로 마법사, 반신(半神)들의 마력이었으니까.
그 마력량은 나조차도 물 쓰듯 마법을 발현할 수 있게 해줄 정도였다.
물론, 내 마력이 아니라서 경험치에서 손실은 조금 있었지만, 그걸 탓하기엔 양심에 찔린다.
그것도 모자라서.
'차원이 다른 전투.'
이호열이라면 그냥 넋 놓고 지켜보기도 벅찼을,
두 반신의 전투에서 나는 '무언가'를 목격했다.
그랑펠의 재능 덕분에 알아차린 것이다.
말로 표현하자면.
개안(開眼).
마치 감고 있던 눈을 뜬 것 같은 정도의 느낌이랄까.
눈을 뜨고 한 차원 높은 마법의 '경지'를 바라본 것 같았다.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경지를 무의식적으로 흉내 낸 덕분에.
나는 악마 군단장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기이』]로 카림제바까지 처단할 수 있었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경지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왜, 나한테는 경험이 있었으니까.
마법에 관해 무지하던 시절에도.
탐색, 간섭, 발현이라는.
마법의 구조를 곧장 파악했던.
그랑펠의 재능 덕을 톡톡하게 본 경험.
경지가 실존한다는 것쯤이야,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아쉽게도 그 경치가 흐릿하군."
경지는 말 그대로 반신의 경지였다.
그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몰입.
경지를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쉽게 말하자면 세니오스와 카림제바 덕분에 짧게나마 강제로 눈을 뜨게 된 거지.
'내가 아무리 날로 먹기 좋아해도....'
고작 377레벨로 반신의 경지를 넘보는 건 양심에 찔리는 일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보다 양심에 찔리는 생각을 하고 말았으니.
"그러나 기이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경지다."
그래,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기이』]를 통해 경지에 오른 카림제바를 쓰러트렸으니까. 그 사실을 알기에 목표가 생겼다. 이번에는 그저 경지를 따라 한 것에 불과했지만.
'자력으로 눈을 뜨고 [『기이』]까지 발현할 수 있다면.'
그때는 정말 나도 구질구질하지 않을 수 있겠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러나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말이 있다.
스탯 포인트를 배분하는 것도 그 걸음의 일부란 말이다.
'근력하고 민첩은 클래스 퀘스트 보상으로 충분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포인트를 마력에 올인하려다가 멈칫했다.
'...왜 하필 44포인트란 말이냐.'
44레벨 상승.
죽을 사(死)가 두 개씩이나.
하지만 내뱉었던 말이 있는 나였다.
무교, 신조차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으면서.
고작 미신 따위에 휘둘리는 건 또 보기가 조금 그렇다.
[마력 : 331]
다짐했던 대로.
나는 마력에 포인트를 전부 투자하고 시선을 옮겼다.
당장의 목표,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성전에 참가한 세력을 파악하라. (진행 중)
●여신교단의 성자와 조우하라. (진행 중)
일단, 여신교단의 성자가 어떤 인물인지부터 파악해야겠군. 당연하게도 자리에서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이 또한 기이."
마탑에서 웹서핑하는 걸 거창하게 말하지 마라, 그랑펠.
'나중엔 아주 새벽 배송도 기이라고 하시겠군.'
나는 여신교단에 관한 정보를 검색해 나갔다.
'...뭐?'
그리고 후회했다.
행운에 1포인트라도 투자할 걸 그랬다, 하고.
왜, 악마 사냥꾼의 후각이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성녀(聖女)는 있어도 성자(聖子)는 없어어어?!'
여신교에서 심상치 않은 냄새가 풍기고 있다고!
*
여신교단 성지, 뮤온의 등장.
그 업데이트 내역에 누구보다 기대감에 부푼 건 다름 아닌 보헤미안의 길드 마스터, 가이버였다.
가이버는 지난 균열, [포식자의 늪지대]에서의 굴욕을 떠올렸다.
'잊고 싶은 치욕이다.'
유럽에 생성됐던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
덕분에 EU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균열에 진입했던 보헤미안이었다.
그러나 균열 공략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가장 큰 활약을 보여주겠다던 목표?
사실상 이호열이 나타난 순간.
물 건너간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거기에 대해선 아쉬울 것도 없어.'
하지만 이호열을 제외하고 따져보더라도 대실패라는 것이었다.
모든 건 자신의 판단 미스 때문이었다.
두 마리의 네임드 몬스터를 동시에 낚아채려던 욕심.
그 실책 때문에 잃어버린 게 너무나도 컸다.
'모두에게 면목이 없다.'
전투 도중 전사한 길드원들이 발생하기도 했으니까.
그 패턴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역시나 호열 때문이었다.
호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가 연합해서 대응하게 만들었다.'
그 판단으로 세계수의 씨앗까지 싹 틔우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호열과 자신 사이엔 열등감을 가지기도 민망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자신에게도 설움을 씻어낼 기회가 찾아왔다.
여신교단 성지, 뮤온의 등장!
가이버의 클래스는 성기사였다.
그것도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 중인 선택받은 성기사.
여신교단의 성기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교단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우린 여신교와 우호적인 관계였으니까.'
자신만 하더라도 여신교단 NPC들과 친밀도가 꽤나 높았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가이버는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계산기를 눌러봐도.
'균열을 공략하는 것보다 이쪽이 남는 장사야.'
퀘스트를 받게 될 확률.
아니, 퀘스트를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뮤온은 혼란스러운 상태가 확실하겠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르카나 대륙에서 지구로 순간이동 한 셈이었으니까.
'설명하는 과정에서 친밀도를 올릴 수 있다는 거야.'
내가 괜히 꿈에 부풀었던 게 아니란 말이다.
가이버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뮤온의 좌표가 떠오르자마자 곧장 뮤온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이버, 뭔가 이상한데?"
그 뮤온이 상상하던 것과 달랐다.
프로스트 때처럼 불길이 치솟거나 악마의 손아귀에 빠진 모습은 아니었다.
순백색의 성채.
뮤온은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모습과 똑같았으니까.
"가이버, 성벽 위에 저거 성기사들 맞지...?"
그래.
성벽 위에서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오고 있는 성기사들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역시나 현장에 모여든 취재진들.
그들이 가이버의 등장을 알아채고 질문을 던져왔다.
"성기사들이 움직이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
끄덕─
가이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이 성기사를 움직인다는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플레이어가 가이버였으니까.
'하지만 저런 규모의 성기사는 나도 처음이다.'
아르카나 대륙 최대의 종교.
여신교의 성지답게.
뮤온은 웬만한 대도시의 버금가는 성채를 가졌다.
그런 뮤온의 성벽 위에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성기사들이 성벽 위에 빼곡하게 정렬해 있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가이버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적대적일 이유가 없잖아?'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게 확실했다.
그러나 오해가 아니었다.
뮤온에서 들려오는 기척.
뿌우우우─!
그건 뿔피리였다.
이내, 이목을 집중시키는 웅장한 소리가 멎어 들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여신의 성지, 뮤온에서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은 성녀님의 안배. 우리에게 도움 따윈 필요 없다."
"그러니 뮤온에 접근하는 자."
선언이 이어졌다.
"우리가 여신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인류에 대한 명백한 적대 선언.
.
.
.
──────
[속보] 여신교단 성지 뮤온, "대화 원치 않아."
[속보] EU, "깊은 유감, 오해 풀기 원한다."
[속보] 성기사 랭킹 1위 가이버, "심각한 상황이 확실하다."
[속보] AAU, "현재 사태 파악 중...."
──────
상상과는 전혀 다른 뮤온의 태도.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여신교단의 행보를 떠올리면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라면 이해가 돼요. 업데이트된 NPC들.... 그러니까 현실로 소환된 아르카나인들도 처음엔 저랬잖아요. 뜬금없이 낯선 세상에 떨어진 거니까."
성현준의 말에 윤수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건 정도가 지나치잖아요? 선배, 위성 사진 확인했어요?"
뮤온, 여신교단이 적대감을 보인 이상.
AAU 또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위성을 가동, 뮤온 내부의 모습을 촬영한 AAU였다.
딸깍─
마우스를 클릭.
성현준의 모니터에 떠오르는 뮤온의 전경.
"일단, 성기사 규모부터 말이 안 되는 수준이잖아요. 못해도 수만 명. 최대 10만 명까지. 기사 하나 육성하는 데 들어가는 골드 아시잖아요, 선배도?"
"알지. 그래도 그건 뭐. 아르카나 대륙 최대의 종교, 여신교단이니까 이해할 수 있다고 넘어가자고. 의아한 건 언제부터냐는 거야."
"네, 저도 그게 의문이에요."
"저 정도의 성기사를 육성하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할 텐데.... 대체 언제부터?"
모든 것은 성녀의 안배.
자신들에게 도움 따윈 필요 없다고.
선언했던 것처럼.
뮤온에는 부족한 게 없어 보였다.
의식주, 모든 게 뮤온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냥 하나의 작은 나라야, 저건."
"안배라는 게 진짠가?"
"마치 이런 날을 대비한 것처럼...."
후우─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도 모자라 골치가 아파졌다.
무엇보다 이런 반전은 사양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이호열 덕분에 한시름 놓은 게 겨우 어제인데...."
긴급 업데이트에 정기 업데이트까지.
아주 그냥 쌍으로 지랄을....
그러나 뭐라도 해야만 했다.
타다닥─
윤수겸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플레이어 중 몇몇이 움직일 건가 봐."
"...움직인다는 거면 뮤온에 접근한다는 거예요?"
"응, 여신교단에서 전직한 플레이어들 같아."
"오, 그건 가능성 좀 있겠는데요?"
"그렇지. 그래도 자기네 편이잖아."
그러니까 어느 정도 대화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그 오해라는 게 굉장히 깊고 오래되어 보였으니까. 성기사들의 날이 선 경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안배라고 했었지...?'
윤수겸은 말을 곱씹었다.
"분명,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겠다."
당연하게도 심판의 날이 뭔지는 알지 못했다.
뿔피리 선언에서 알 수 있는 건 '성녀'가 누구인지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성녀, 프레이자].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여신교단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인물.
"어디 찾아볼까."
심판의 날과 그놈의 안배라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그녀에 대한 설정을 찾아볼 필요가 있었다.
윤수겸은 AAU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간단하더라도 정보가 남아있을 거야.'
성녀, 프레이자에 관한 정보를 검색했다.
그런데, 검색 결과가 떠오르지 않았다.
윤수겸은 흠칫했다.
"...말이 안 되는데 이거?"
프레이자는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존재하던 NPC였다.
그것도 여신교단의 성녀라는 비중 있는 NPC란 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윤수겸은 사내 메신저에 접속했다.
'설령 남은 기록이 없다고 해도 기억엔 남아있을 거야.'
왜, 마왕 데카라비아가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프레이자의 설정 담당은 뭐라도 알고 있겠지.
윤수겸과 비슷한 생각을 한 직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도 이미 프레이자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하고 있었다.
타다다닥─
타닥─
탁─
이내, 움직임을 멈추는 윤수겸의 손가락.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없어."
"네? 뭐가 없어요? 아, 카페인? 제가 한잔 사드려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넋 나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성녀, 프레이자를 기획했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
*
프레이자.
여신교단의 성녀.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유명한 NPC였다....
뭐, 예전 같았으면 그냥 아르카나인이구나, 하고 넘어갔을 거다.
퀘스트창에 성녀가 아니라 성자라고 적힌 걸 보고, 오타라도 난 건 아닐까. 오히려 퀘스트를 의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대격변 이후.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는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았거늘.
이미 현실에, 사회에 교묘하게 숨어든 악마들의 존재를.
악마들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아르카나 대륙은 말할 것도 없겠지.
무려 10년 하고도 수년 전, 내가 아르카나를 플레이할 때도. 인간에게 빙의한 악마를 사냥하는 퀘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나는 진지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성녀, 프레이자는 악마가 아닐까?'
만약에 여기가 아르카나 대륙이고.
내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냈다면.
나는 셋 중 한 사람한테 돌팔매질을 당했겠지.
여신교 입장에선 신성모독도 이런 신성모독이 없을 테니까.
근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미 절반 이상 확신하고 있거든.'
무엇보다 클래스 퀘스트에 명시되어 있었으니까.
성자는 있어도 성녀는 없다고 말이야.
게다가 이 순간.
뮤온의 태도가 나의 의심을 더욱더 깊게 만든다.
"뮤온에서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랬다.
아무리 너그럽게.
퀘스트란 편견을 버리고 봐도.
그랑펠의 긍지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신교.
그렇게나 많은 신도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또 그렇게 대단하신 성기사 님들을 수만 명이나 육성했으면서도. 그들은 어째서 대륙이 악마에게 쑥대밭이 될 때까지.
뮤온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걸까? 심판의 날이라는 것만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안배랍시고 부추긴 게 바로 성녀, 프레이자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쥬.
그랑펠의 긍지가 그따위 행동을 용납할 수 있을 리가.
나는 무심하게 읊조렸다.
"그 무책임한 행동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어쨌거나 필요한 건 진상을 파악하는 것.
아르카나 대륙에서 여신교의 행적을 추적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는 몰라도 나한테는 어렵지 않은 일이거든.
성녀의 안배라고 했나?
그래, 나한테도 안배라는 게 있었으니까.
나한테는 아르카나 대륙에 심어둔 정보원이 있다는 것이다.
숲의 정령, 님프 말이야.
님프를 소환하기 위해서라도 균열로 향해야겠군.
그러고 보니까 이번 업데이트로 생성된 균열이 있었지.
나는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했다.
◈ 105화. 출탑 - 만트라 광산
마탑.
유일의 사교 장소, 부유 정원.
숙련 마법사들은 담소를 나눴다.
"다들 신청서는 작성하셨나요?"
미지에 대한 탐구 욕구.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마탑의 외부.
현실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동안은 출탑의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외면하고 있었거늘.
"아! 물론, 출탑 신청서를 말하는 거랍니다."
출탑이 가능해지다니.
최근 들어 선임 마법사님들께서 자주 자리를 비웠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분명 출탑에 관한 회의를 나누신 거겠지. 질문에 대답이 쏟아졌다.
"당연히 작성했죠. 기한을 정하는 게 문제였지만...."
"어떻게, 우리끼리만 기한을 살짝 공유해 볼까요?"
"...그래도 되나?"
"뭐, 어때요? 적어도 우리끼리는 겹치지 말아야죠!"
"하긴. 그래야겠지?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문제는 그 신청서 작성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출탑의 사유를 작성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사유 작성이야, 마탑 내에서도 지겹도록 적어봤으니까.
문제가 되는 건 기한이었다.
"일정에 맞지 않는 신청서는 전부 반려하신다니."
그랬다.
출탑의 기한을 담당자의 일정에 맞춰야 한단다.
문제는 담당자가 그 일정이란 걸 알리지 않았다는 것.
"무슨 시험 문제 찍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서로서로가 신청서를 둘러보던 중.
누군가 한숨을 뱉었다.
"...사실 꼭 나가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거 담당자님 때문이죠?"
"다들 똑같이 생각하잖아요. 안 그래요?"
게다가 출탑의 담당자가 누구던가?
공동 수석 마법사, 호열이었다.
아차 싶었는지 숙련 마법사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물론, 대단하시단 생각은 들어요. 얼마나 많은 마법사가 이 출탑 신청서를 작성했겠어요? 둘러보는 데만 하더라도 엄청난 수고를 하시겠죠.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호열 수석과 단둘이서 균열에 진입하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야 익히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호열의 악명을 말이다.
이내, 클레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맞아요. 클레는 경험이 있잖아요?"
"...네? 경험이요?"
"뭘 그렇게 놀라요? 왜, 학회 사전 검증에서 이호열 수석하고 단둘이 대화를 나눠봤잖아요. 그때 울면서 토파즈 홀을 뛰쳐나온 마법사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클레는 어땠나요?"
...어땠냐고?
휘적휘적─
클레는 티스푼으로 찻잔을 빙글빙글 저었다.
그러고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았어요."
"네?!!"
"물론, 걱정했던 것보다는요!"
클레는 다짐했다.
설령 다른 숙련 마법사들이 호열을 꺼리고, 그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떤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자신만은 그런 태도를 보이면 안 된다고.
그래, 클레는 호열이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꽤나 흥미로운 접근법이군."
-"논리와 과정에는 비약도, 문제도 없어 보이니 필요한 것은 결과겠군."
-"자신감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하도록."
비약초의 육성법.
연구의 가능성을 알아봐 준 게 바로 호열이었으니까.
애매한 클레의 반응에 숙련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들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아, 그래서...."
클레의 신청서에서 기한을 가리켰다.
"이렇게 빠듯하게 날짜를 정했군요, 클레?"
"네? 그건 그냥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싶어서...."
"역시 클레는 성격보단 얼굴이 더 중요하구나?"
"...뭐? 그게 무슨 뜻이야, 너?!"
"아악! 클레, 너 옆구리 꼬집기야?!"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반응이 격한 클레는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이 재미를 위해서라도.
클레의 출탑 신청서가 허가되면 좋으련만.
"아무리 그래도 저희보다 선임들의 출탑이 우선이겠지요?"
그건 숙련 마법사들의 생각만이 아니었다.
선임 마법사들도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화염마법학 선임 마법사, 벤쉬 윌리엄.
"좋아. 일정에 겹치는 선임들도 없고. 완벽해."
벤쉬는 제출한 출탑 신청서를 떠올렸다.
목적은 간단하게.
기한은 가장 빠듯하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까.
"대체 그 괴물을, 화룡을 어떻게 제압하신 걸까."
벤쉬가 궁금한 건 균열 내부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아무리 세니오스 님이 희생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빙결마법과 화염마법은 극상성이었으니까.
'분명, 이호열 수석께서도 뭔가 활약을 하셨겠지.'
벤쉬는 호열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호열과 단둘이 균열에 진입하는 게 껄끄럽지는 않으냐고?
마티스 선임하고도 동행한 마당에 또 못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물론, 걱정되기는 하지만."
마티스랑 동행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말 한마디 하지 않으셨지, 마티스 선임....
그러나.
그날의 뒷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면야 참아야겠지.
물론, 벤쉬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스스슥─
별안간 양피지에 떠오르는 글씨.
그를 확인한 벤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 반려라고? 내가?!"
그가 제출했던 출탑 신청서가 되돌아왔으니까.
같은 시각.
벨리에는 또 한 번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벨리에 선임 마법사님! 제 출탑 신청서가 통과됐어요!"
클레는 분명 벤쉬 윌리엄과 같은 날짜에 출탑 신청서를 작성했을 텐데.... 그의 신청을 제쳐놓고 클레의 신청서가 통과되다니.
벨리에는 마르셀로의 말을 떠올렸다.
-"...또한 이호열 수석께서는 판단에 출탑 희망자의 직위는 고려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그 말이 진심일 줄이야.
하긴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 님께서도 이호열 수석에게 정식으로 출탑의 허가를 요청하고.
허가를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었지.
벨리에는 미소를 흘렸다.
"시기적절하게 잘됐네요. 클레."
그나저나....
이래서야 앞으로는 선임, 숙련, 견습 마법사 가릴 것 없이 출탑의 경쟁률이 더욱 심해지겠는걸? 그런 의미에서 자신도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벨리에가 은근하게 말을 이었다.
"그 까다로운 기준에 합격하기 위해선 어떻게.... 잠시만요, 클레. 혹시 어떻게 출탑 신청서를 작성했는지 제게만 살짝 알려줄 수 있을까요?"
*
수석의 무게를 깨닫는다.
무슨 놈의 업무가 이리도 많단 말이냐.
하지만 투덜댈 수는 없다.
'모두 내 입방정으로 자초한 일이다.'
모든 출탑은 나의 일정에 맞춰 진행된다.
뱉은 말에 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
나는 늘어난 수석의 업무를 처리했다.
물론, 내가 괜히 입방정을 떤 건 또 아니지.
왜,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는 법.
나는 업데이트 내역을 떠올렸다.
'적정 레벨 무려 550레벨.'
뮤온과 함께 업데이트된 신규 균열들.
그 균열들의 적정 레벨은 [포식자의 늪지대]에 버금갈 정도였다.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있던 일을 다시금 떠올려 보면....
'마지막에 세 길드의 도움을 받지 못했더라면.'
나는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우기는커녕.
몬스터한테 짓밟혔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
377레벨에 불과한 나로서는.
'[천적관계]도 없이 550레벨 균열 솔플은 아직 무리다....'
여전히 부담되는 적정 레벨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래, 나한테는 출탑의 전권이 있었으니까.
'이보다 든든할 수 없다...!'
그건 마탑의 마법사와 함께 균열에 진입할 수 있다는 뜻.
그래, 처음 마탑에 입성하게 됐을 때부터.
이날만을 꿈꿔오던 내가 아니던가?
그러나 꿈과 현실엔 괴리가 있는 법이었다.
욕심 같아서는 말이다.
웬만한 출탑 신청서는 전부 통과시키고.
수많은 마법사와 함께 균열을 클리어하고 싶었건만.
나는 엄격한 절차에 따라서.
수많은 신청서를 반려시켰다.
나는 유달리 건성인 신청서 하나를 내려놓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벤쉬 윌리엄 선임 마법사."
목적에 '친목 도모'라고 적어넣으면 아주 그냥 잘도 통과를 시켜주겠다, 내가! 그래, 그런 내가 절차에 따라 허가한 출탑 신청서는 일단 하나였다.
[클레 오디아]
출탑의 목적이 연구에 필요한 비약초 채집이라.
내가 사색 겨우살이를 채집했던 것처럼.
균열에서는 비약초를 채집할 수 있었으니까.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목적이었다.
게다가 나는 클레의 '비약초의 육성법'.
그 연구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사실 숙련 마법사 한 명도 든든한 아군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왜, 벤쉬가 균열에 동행했다고 생각해 보자.
'...몬스터가 남아나지 않지 않을까.'
순식간에 십여 개의 균열을 클리어했던 선임 마법사들.
그 무력을 간접적으로 확인한 내가 아니던가?
확실히 다행이군.
이거 하마터면 콩고물조차 태워버릴 뻔했잖아?
이래서 사람이 절차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살아야 한다.
자화자찬도 잠깐.
균열에 진입하는 건 내일이었으니까.
나는 서적을 펼쳤다.
'경지를 목격한 이상.'
내게는, 그랑펠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항상.
스륵─
나는 일과처럼 마법 서적을 탐독하고.
달칵─
차로 우려낸 비약초를 섭취했다.
하지만 그 행동에 담긴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적어도 나, 스스로 알고 있다.
여태까지는 가라앉지 않기 위한 발버둥에 불과했다면.
[비약초, '적월화'의 효과로 지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이제부터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버둥이라는 것이다.
.
.
.
[만트라 광산 - 1광구]
[적정 레벨 : Lv.550]
[붕괴 진행도 : 1.8%]
"우와. 이게 균열이군요."
클레는 로브를 푹 눌러쓰고는 감탄을 뱉었다.
사실 아까부터 감탄은 끊이지 않았었지.
커다란 빌딩도, 낯선 복장의 사람들도, 클레에겐 모든 게 처음 보는 광경일 테니까.
그런데 벌써 놀라기엔 이를 텐데 말이야.
'균열 내부는 한술 더 뜨니까.'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뒤섞인 풍경.
곧바로 균열로 진입하자 클레는 흠칫한 기색이 역력했다.
"...뭔가 굉장하네요."
빌딩 숲과 광산이 뒤섞인 풍경.
그 풍경이 멀쩡할 리는 없었다.
마치 커다란 동굴 속에 종유석처럼 건물이 돋아난 모습.
이렇게 기괴한 균열은 나도 처음인데...?
[천적관계]도 발동되지 않는 걸 보니까.
악마도 굳이 건드리고 싶진 않다는 거겠지.
물론, 그런 속내를 내색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만트라 광산. 등장하는 위협 요소에 대해 알고 있나?"
"앗! 만트라 광산이라면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처음엔 평범한 광산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것까지만. 그래서 위협 요소까지는 잘...."
"숙지하도록."
나는 위협 요소.
그러니까 [만트라 광산 - 1광구]에 등장하는 몬스터의 목록을 읊었다. 모든 건 업데이트 내역에서 그 정보를 파악해 둔 덕분이었거늘.
그 사실을 알 수 없는 클레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까다로운 위협 요소군요."
그렇게 대답할 만도 하다.
만트라 광산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죄다 [유령] 속성이었으니까. 애초에 그탓에 버림받은 광산이었다.
왜, [유령] 속성 몬스터에겐 물리적인 공격이 먹혀들지 않았으니까.
'처치하기 위해선 마법이나 버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광산에 그만한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채굴할 가치는 없었다는 거겠지. 뭐, 중요한 건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마법으로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으니까.
'그보다.'
나는 목적대로 님프를 소환했다.
소환 과정이야 계약을 맺을 때 숙지했던바.
이내, 님프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계약에 따라 당신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흡.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정령과 계약했다는 사실은 마르셀로만 알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클레로서는 의외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까지 놀랄 이유가 있나?
'애초에 마탑엔 정령학이 존재하잖아.'
허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나 또한 속으로 흠칫하고 말았다.
...뭐냐.
님프의 외관이 어째 더욱 화려해져 있었다. 아니, 외관만 화려해진 게 아니라.... 뿜어내는 {자연}의 기운이 이전과는 확실하게 다르잖아.
과연, 나의 긍지에 영향을 받아서인가.
님프는 무엇 하나 숨김이 없었다.
그런 님프가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세계수의 영향으로 제게 조금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세계수!
그래, 나는 님프의 능력으로 세계수를 성장시켰었다.
그런 나도 세계수를 싹 틔웠다고 보상을 받았는데. 당사자인 님프도 그 보상을 받는 게 당연한 거겠지. 살짝 놀라긴 했지만, 역시나 나는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 또한 당연한 변화겠지."
"과연, 짐작하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아니, 보기 전까진 짐작하진 못했다.
물론, 과대평가에 반박할 수 없는 나니까.
나는 님프에게 물었다.
"나의 안배는 목격했는가?"
"물론입니다. 그에 관해 전해드릴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런가. 그 이야기부터 천천히 듣도록 하지."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여신교의 행적.
묻고 싶은 바가 있었지만.
모든 것엔 절차가 존재하는 법.
나는 우선 님프의 보고를 전달받았다.
그리고 흠칫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그렇게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
.
.
이호열 수석께서 정령과 계약하셨을 줄이야.
그보다 균열에서는 정령 소환이 가능할 줄이야.
그 사실을 수석께선 미리 알고 계셨을 줄이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클레였다.
정령은 마법사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목격하고, 계약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모험가인 이호열 수석이 정령을 소환한 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흡!"
그러나 그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클레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래, 클레도 마탑의 어엿한 숙련 마법사였다.
'계약 정령이라고는 해도....'
당연하게도 정령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정령학파 숙련 마법사들의 정령은 물론.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 님의 파이어 드래이크까지.
그런데, 저 정령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느껴지는 기운이 달라!'
크고 작음의 기운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클레는 어디까지나 치료학파 마법사.
정령학에는 조예가 없기에 잘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뭐랄까, 여태까지 본 정령과는 뭔가 차원이 다른 느낌...?'
그래, 고상하고 고아한 느낌이 들었다.
그 격이 외관에도 드러난다는 것처럼.
흠잡을 것이 없는 자태였다.
파이어 드래이크를 처음 봤을 때보다도 더한 충격이었다.
클레는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혹시 상위 정령, 아니면 그보다도 더?'
도리도리─
아무리 그래도 상위 정령보다 더 높을 수는 없겠지?
페이얀 님의 파이어 드래이크가 상위 정령이니까.
그러나 클레의 예상은 곧 무너져 버렸다.
호열과 님프가 나누는 대화 덕분에.
'...세, 세계수라고요?'
'안배는 또 뭐야...?'
'아, 아니! 그것도 모자라서 드워프?!'
어떻게 저런 대단한 이야기들을.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나누실 수 있는 걸까?
역시 두 분 다 내 생각보다도 훨씬 대단하신 게 확실해!
◈ 106화. 에고(Ego) (1)
반격.
그 선봉장은 당연하게도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이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맹활약을 했다.
방향을 다를지언정 마탑에 버금가는 기술력을 자랑하던 드워프들.
그런 드워프들이 오로지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제작했던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아니던가?
쿠구우웅─!
기계탑이 대지를 내디디며 내는 지진.
"...저게 뭐지?"
"도, 도망쳐!!"
"으아아아아악!!"
그 울림이 악마들에겐 공포가.
"저 기계가 악마를 쓰러트리고 있어요!"
"신이시여...."
"이게 대체!"
악마에게 고통받던 이들에겐 희망이 되었다.
물론, 악마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계탑을 멈추기 위해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고 [퀴른베르크 기계탑] 내부에 진입했던 것이다.
위이이이잉─!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에서 확인했다시피 기계탑 내부는 그야말로 함정투성이였으니까. 아니, 악마에겐 함정을 넘어선 지옥과도 같았다.
"은이잖아!! 빌어먹으으으으을!!"
플레이어들을 경쟁 콘텐츠로 착각하게 하였던.
은(銀)으로 만든 함정이 악마의 약점을 파고든 것이었다.
악마는 실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당하고 나서야 간신히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가동을 중지할 수 있었다. 수십 개의 기계탑 중 고작 하나를.
"대체 어떤 새끼들이지...?"
악마들의 기세는 오히려 꺾이고 말았다.
상대는 멈추지 않는 기계였으니까.
그것도 스스로를 제물로 삼아서 최후의 최후까지 구마의식을 진행하는 결전병기. 결국, 악마들은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공략하기보다 회피하는 쪽을 택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우리의 등불이다!"
"기계탑을 쫓아라!"
"우리의 뒤엔 기계탑이 있다. 물러서지 마라!"
기계탑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생존자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기계탑을 호위로 삼아 목적지로 나아갔고, 누군가는 기계탑에 용기를 얻어 악마와 맞서 싸웠다.
아르카나 대륙에도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는 것일까?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수의 축복이 내려졌다.
악마의 등장 이후.
처음으로 악마의 세력이 주춤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소식이 대륙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쿠우우웅─!
아득히 먼 곳에서 느껴지는 진동.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움직이며 내는 굉음.
그 떨림이 은신처에 숨어있던 드워프들에게도 전해진 것이다.
"...악크샨에 생존자가 남아있던 것인가?"
그것이 드워프들이 움직이게 되는 계기가 됐다.
두둥실─!
그들이 움직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르카나 대륙 상공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하늘을 나는 게 신기할 정도로 거대한 비행정.
드워프 기술력의 집약체가 비행을 시작한 것이었다.
콰콰콰쾅─!
비행정에서 쏟아지는 폭격.
드워프의 비행정은 [퀴른베르크 기계탑]과 더불어 악마들에게 또 하나의 재앙이 되었다.
어째서 아르카나 대륙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반격을 하는 이들도.
또 악마도 그 이유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모든 게 고작 '한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아직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
.
.
님프가 전해 온 아르카나 대륙의 소식.
덕분에 조금이나마 체감이 됐다.
...와씨, 나 진짜 엄청난 일을 벌였구나.
'진짜 유산이라고 호들갑을 떨만했네.'
[퀴른베르크 기계탑].
대악마용 결전병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활약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 내부에서부터 악마 하나는 제대로 사냥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다만.
'그 악랄한 녀석들이 오히려 피해 갈 정도라니.'
아무래도 상성이 좋은 덕분이겠지.
악마들의 가장 큰 무기는 어디까지나 [상태이상]이었으니까. 왜, 반신이라 불리던 마탑의 원로 마법사들조차 [상태이상]에 휘둘렸을 정도였잖아?
'기계한테는 먹히지 않는 게 당연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흠칫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악크샨은 그 상성까지 염두에 뒀던 건가?
그렇다면 정말 악마 사냥꾼답군.
'사고방식부터 악마의 천적답네.'
물론, 그저 감탄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가동한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아니던가.
그래, 내게는 정당한 권리가 있단 말이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경험치가 축적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명성이 축적됩니다.]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에 대한 습득 권한을 획득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악마를 학살하고 있는 기계탑.
그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을 습득할 권한이...!
이거, 솔직히 짐작도 되지 않는데. 명성은 둘째 치더라도 기계탑에 얼마나 많은 경험치가 쌓여있는지 말이야. 방금도 님프가 말했었잖아?
"기계탑 하나를 정지시키기 위해 수십만의 악마가 달려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기계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수십만에 가까운 악마를 처치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대충 따져도 경험치가 얼마야, 이게!
탐욕이 샘솟았거늘.
그건 어디까지나 내색할 수 없는 나의 속사정.
"당장 대륙으로 향하고 싶군."
그러나 이번만큼은 뜻이 통했다.
그랑펠이 그저 긍지에 따라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아르카나 대륙을 밟고 싶은 거라면.
나는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를 습득하기 위해서라도 아르카나 대륙을 밟고 싶었다...!
"수십? 아니, 수억의 악마가 가로막는다 한들 상관없다."
나한테는 칭호가 있으니까.
[최후의 모험가 :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즉시 현실로 귀환하며 일정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 쿨타임 : 24시간]
현실이나 균열에서는 몰라도 말이야.
적어도 아르카나 대륙에서 비명횡사, 긍지에 가라앉아서 익사할 걱정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방법만 찾아낸다면...!
'복권 당첨이라는 거지.'
그런 불순한 뜻으로 지껄인 나였거늘.
나의 말에서 오히려 비장함이라도 느낀 것인가.
님프가 입을 열었다.
"그 마음을 저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당분간 큰 우려는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기계탑과 더불어 드워프들이 나선 덕분에 악마들은 큰 혼란에 빠진 모양입니다."
아차, 드워프들도 빼놓을 수 없겠구나.
나는 머리를 굴려봤다.
가만히 있던 드워프들이 어째서 움직인 걸까?
굳이 이유를 꼽자면 역시나 [퀴른베르크 기계탑]이겠지.
그에 얽힌 구체적인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예상할 수 있는 건 그저.
드워프들이 [악크샨의 절멸]에 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 물론, 지금 고민할 건 아니었다. 뭐, 관련이 있다면 알아서 퀘스트 목표에 떠오를 테니까.
'다만, 여신교처럼 구린내가 나지는 않아.'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서.
대륙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드워프들에게 사정은 있을지라도.
긍지가 없는 족속은 아니라고.
가슴 속의 긍지가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때가 되면 그들과도 만날 날이 오겠군."
님프의 보고는 그쯤에서 정리.
나는 말이 나온 김에 님프에게 물었다.
혹시 여신교의 행적에 관해 아는 바가 있느냐고.
님프는 우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과거에도 근래에도. 그들의 행적에 대해선 들은 바는 없습니다."
님프는 숲의 정령.
숲의 정령은 나무와 대화할 수 있어 아르카나 대륙 소식에 밝았다.
그런 님프조차 근래에도 과거에도 여신교의 행적에 관한 소식은 들은 게 없다라....
'정말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모양이군.'
심판의 날인가.
뭔가 하는 날만 기다리면서 말이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구리다.'
신성모독이고 뭐고.
여신교는 한번 뒤집을 필요가 있겠는데?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
무엇보다 여신교는 거대 세력이었으니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커뮤니티에서 소란이 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뮤온에 대기 중인 성기사만 하더라도 십만에 육박한다고 했겠다.... 그것도 모자라 같은 여신교단 플레이어들의 접근조차 불허했다고 하니까.
'성지, 뮤온은 난공불락의 요새란 셈이지.'
나는 그런 뮤온에서 성녀도 아니고,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성자와 조우해야 했다. 벌써부터 막막하지만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세력에 맞서려면 나 또한 거대해지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균열에 진입했다면 레벨을 올리는 것부터 시작하자.
물론, 한 우물만 팔 생각은 없다.
나는 아까부터 입을 다물고 있는 클레에게 말했다.
"숙련 마법사, 클레 오디아."
"네, 네?!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아니, 들었어도 끝까지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그게 엿듣고 싶어서 엿들은 게 아니라...!"
"알고 있다."
기계탑, 세계수, 드워프까지.
사실상, 내 자랑이나 다름없잖아.
성격상, 당당하게 드러내면 드러냈지 숨길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당사자가 아닌 이가 남의 이야기를 섣부르게 떠벌리는 것 또한.
"그대는 그저 격식에 맞게 행동하면 되는 일이다."
격식에 어긋나는 일.
내 말에 클레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하죠! 모든 건 격식과 절차에 따라서.... 저는 제 목적인 비약초 채집에 집중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불러주세요!"
허둥지둥─
클레는 늘어진 로브에서 손을 빼내고 동굴에 자라난 잎에 손을 뻗었다.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는 풀잎. 누가 봐도 귀한 비약초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클레 오디아."
"...네, 네!"
"비약초를 채집하는 데에도 절차는 존재한다."
"...네?"
"주변을 살펴라."
"?!"
[모스파이크 용병의 원혼 : Lv.560]
[모스파이크 용병의 원혼 : Lv.560]
[모스파이크 용병의 원혼 : Lv.560]....
순식간이었다.
클레가 비약초에 손을 뻗는 순간.
스스스스─
유령들이 클레를 둘러쌌다.
"으, 으앗!"
마치 클레가 비약초를 꺾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동굴 벽면에 숨어서 머리만 내놓은 채 클레를 응시하고 있던 것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수석님...!"
클레가 기겁해서는 비약초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내게 물어왔다.
"혹시 수석님께서는 저 비약초에 관해 알고 계신 건가요?"
알다마다.
나에게는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을 통해 습득한 지식이 있었으니까.
그 지식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 비약초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귀생초."
"귀생초? 역시, 제 좁은 식견에서는 처음 듣는...."
"무지한 게 당연하다. 클레 오디아."
그래,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귀생초는 절대 흔한 비약초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 효과를 읊었다.
"귀생초에는 혼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강령술사, 네크로멘서의 비약 재료가 되기도 하지. 그러나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겐 그저 유령을 불러들이는 불길한 식물에 불과하다."
클레는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네크로멘서.... 그래서 알려지지 않았군요."
아르카나 대륙에서 네크로멘서는 흔치 않았으니까.
플레이어 중에서도 네크로멘서 클래스는 극히 드물었다.
그 전직 조건이 알려지지 않기 전까진. 히든 클래스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귀생초가 알려지지 않은 데엔.
'꼭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거든.'
나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원혼들을 바라봤다.
아쉬움을 나로 달래려는 걸까.
이내, 벽면에서 빠져나온 놈들이 전투태세를 취했다.
'근데, 너희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내가 옆구리에 검을 차고 있어도 말이야.
이래 봬도 마법사거든.
그것도 마탑의 수석 마법사.
'낙하산이긴 하지만.'
악마 사냥꾼과 악마가 천적관계인 것처럼.
마법사와 유령도 그에 못지않은 천적관계라는 것이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질문이다. 클레 오디아."
"...질문? 넵, 최선을 다해 답하겠습니다!"
"그대는 그런 특이한 효과를 지닌 귀생초가 어떤 곳에서든 자라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으음, 아닙니다! 비약초는 환경에 밀접한 영향을 받는 식물이니까요!"
"클레 님은 비약초에 관해 조예가 깊으시군요."
"아, 아닙니다! 정령님께서 그리 칭찬해 주실 수준은...!!"
님프의 말대로 정답.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채취했던 사색 겨우살이만 하더라도. 적게나마 세계수 씨앗에 영향을 받아 평범한 겨우살이에서 귀하신 비약초로 자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귀생초가 어떤 요소에 영향을 받아서 이곳, 만트라 광산에 자라났다고 생각하는가?"
"음, 그거는...."
클레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물어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나 또한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으로 획득한 모든 식물, 광물에 관한 지식이 아니었다면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을 테니까.
'귀생초는 귀철(鬼鐵)이 묻힌 곳에서만 자라난다.'
희귀하기로만 따지자면.
한 손가락에 꼽히는 그 광물이.
폐쇄된 만트라 광산에 묻혀 있다고는.
으스스스스─!
내게 달려드는 모스파이크 용병의 원혼들.
그래, 귀철이라면 이해가 된다.
저 용병들 또한 값진 귀철을 노리고 만트라 광산에 발을 들였던 거겠지. 그러나 귀철은 쉽게 채취할 수도, 쉽게 제련할 수도 없다.
물론, 나한테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채취?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이 있었으니까.
제련?
귀철을 포함.
그 어떤 광물이라도 제련할 수 있는.
드워프에 관한 소식을.
나는 조금 전 님프에게 전해 들은 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건 너희밖에 없다는 소리다.'
신속하게 이뤄지는 탐색과 간섭.
나는 마법을 발현했다.
쩌저저저적─!
"!!!"
원혼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 107화. 에고(Ego)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