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조사
이덕수가 체포됐다.
조사는 합동수사본부가 맡았다.
이덕수를 잡은 건 차유리지만 혼자 한 일은 아니다. 차유리가 파마머리 가발을 쓰고 문 앞에서 아랫집 사람인 척할 때, 다른 형사들도 계단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도 첫 조사는 차유리가 맡았다.
이덕수가 항의했다.
"선량한 사람을 이렇게 잡아와도 되는 겁니까?"
차우진이 코웃음을 쳤다.
"선량은 개뿔. 이덕수 씨. 우리가 당신 어떻게 찾았을 것 같아요? 연태준이 다 불었어요."
이덕수가 움찔했다가 모르는 척했다.
"누구? 연 누구요? 나는 그런 사람 모릅니다."
"연태준. KYL 엔터 상무. 같이 술 많이 마셨으니까 잘 아실 텐데?"
"아아. 그 사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던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합수부장이 유리창 뒤에서 차유리가 조사하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차 형사 말이야. 며칠 파견 와서 수사를 도와주는 거였지?"
팀장이 말했다.
"그렇죠."
"그런데 핵심 용의자 셋을 다 차 형사가 잡았네?"
"혼자 한 건 아니죠. 이번에도 다 같이 움직이다가, 적을 방심시키려고 여자인 차 형사가 접근한 거잖습니까? 파마머리 가발을 쓰고요."
"내가 생각해 봤는데, 며칠 파견이 아니라 합수부에 정식으로 합류…. 어? 어? 아니, 차 형사는 왜 또 저래?"
"속에는 맹수가 들어 있거든요. 아주 사나운 맹수."
"저게 맹수냐? 폭탄이지."
"차 형사 정식 합류 이야기는?"
"내가 그런 소리를 했어?"
차유리가 소리를 질렀다.
"이덕수 씨! 자수해서 광명 찾아!"
"지금이라도 자수하면 받아주는 겁니까?"
"체포된 사람이 무슨 자수야!"
"자수하라며!"
합수부장이 말했다.
"파견 온 차 형사가 공을 많이 세웠어. 원래는 이 정도면 승진도 가능한데…."
"예전에 쳐놓은 사고가 워낙 많아서…. 그래도 부장님이 힘 좀 써주시면 혹시?"
"사고를 한두 번 쳤어야 승진을 시키지. 저놈들이 진짜 간첩이라면 모를까, 아니면…."
차유리가 산발한 머리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그냥 아까 방아쇠 당기게 해서 고자로 만들어버릴걸!"
"히익!"
합수부장이 말했다.
"역시 이번에 승진은 어렵겠지?"
"그러게요."
***
이덕수에 대한 기본 조사를 마친 후에는, 연태준과 이덕수의 대질 신문이 이루어졌다.
연태준은 이덕수를 보자마자 악을 썼다.
"저 새끼입니다! 저 새끼가 나를 죽이려고 킬러들을 보냈습니다!"
이덕수는 연태준을 속여 서해에서 고현우와 만나게 했다. 그런데 낚싯배를 타고 온 고현우는 연태준을 죽이려 했다. 연태준은 그때 칼을 두 방이나 맞았다.
이덕수가 딱 잡아뗐다.
"오해다! 나는 그런 적 없다!"
"네 짓인 거 다 알아! 이 간첩 새끼야!"
"간첩이라니! 내가 왜 간첩이야!"
"너 이미 다 들켰어!"
"나 간첩 아니다!"
"네가 나보다 더 간첩처럼 생겼어!"
이간질을 하려면 이덕수에게도 정보를 줘야 한다. 차유리는 아까 취조할 때 정보 제공자가 연태준이라는 걸 흘렸다.
이덕수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있는 곳을 네가 경찰한테 알려줬냐! 이 배신자 새끼야!"
연태준은 화가 나서 벌게진 얼굴로 외쳤다.
"네가 나를 죽이려고 했잖아! 간첩 새끼야!"
"망하게 생긴 새끼를 부자로 만들어줬더니 나를 배신해? 이 배은망덕한 새끼!"
"내가 노력해서 번 돈이다!"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새끼한테 코인으로 돈을 만들어줬잖아! 내가 아니었으면 넌 옛날에 한강 갔어!"
서로 싸움을 붙이는 작전은 상당히 잘 먹혔다.
대질 신문이 끝난 후에 둘을 분리하고 다시 조사했더니, 연태준과 이덕수는 상대 탓만 했다. 서로 상대를 확실히 보내기 위해서 상대의 약점을 경찰에 알렸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정보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렇게 나온 그 정보 중 일부가 다시 기자에게 새어나갔다.
***
KYL 엔터는 난리가 났다. 2대주주인 연태준이 서해 요트 사건과 목동 공개홀 사건에 깊게 개입했다는 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KYL 엔터 사장이 소리를 질렀다.
"연 상무와 회사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확실히 그어!"
"이미 연 상무가 회사의 핵심 경영자라는 기사가 퍼져서…."
"사장은 나야! 그 새끼가 왜 핵심이야! 그 기사 막아!"
연태준의 혐의는 그것만이 아니다.
새로운 보고를 받은 사장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간첩 이야기는 또 뭐야!"
"연 상무가 북한 간첩에게 회유된 혐의가 있다고…."
"엔터 회사에 무슨 기밀 정보가 있다고 간첩에게 회유돼! 막아! 그거 못 막으면 우리 회사 망해!"
그냥 덮기엔 떡밥이 너무 컸다. KYL 엔터에서 막아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기사가 빠르게 퍼졌다.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에는 제대로 된 근거는 들어 있지 않았다. '수사 관계자'나 '경찰 고위층'이라는 애매한 출처를 대며 기사가 나왔다.
인터넷 게시판에 돌아다니는 확인되지 않은 글을 기사화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기사에서 언급된 사건들이 너무 심각했다. 안 믿는 사람도 많았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기사에 댓글이 붙었다.
- 엔터 회사 상무가 국가 기밀을 어떻게 알고 북한에 팔아먹겠습니까? 이건 오보인 듯.
- 근데 고위층을 접대하면서 슬쩍 빼낼 수는 있지 않을까요?
- 그게 스파이들의 전통적인 수법이긴 하지요.
- 예전에 이름이 숫자인 기획사에서 그런 거 했다던데.
- KYL이 알고 보니 막장이네.
기사가 다 사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 거짓인 것도 아니다.
- 지인한테 들었는데, 저 Y 상무라는 사람이 체포된 건 확실하답니다.
- 이번 말고 저번에, 블루퍼핏을 무전기 폭탄으로 죽이려 했던 혐의로 조사받았다던데요.
- 자기네 회사 연예인을? 왜요?
- 연예인 앞으로 보험을 많이 들어놨다는 소문이 보험업계 쪽에 파다하다던데요.
차우진이 그 기사와 댓글들을 보며 말했다.
"KYL은 끝났네."
KYL 엔터는 상장 회사가 아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주식 시장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돈을 회수하고 손을 떼면 회사는 망한다.
- 어? 경찰이 KYL 압수 수색 중이라는 속보가 떴습니다.
- 그럼 그 기사가 다 사실인가?
- 진짜 간첩인가?
- 진짜로 보험금을 노리고 연예인을 죽이려 했나?
경찰이 압수수색을 했지만, 간첩 혐의에 관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합수본 팀장이 투덜댔다.
"어쩐지 간첩은 아닐 거 같더라니. 상황이 좀 이상하긴 했어."
윤 형사가 말했다.
"대신에 다른 게 수두룩하게 나왔습니다. 이 회사는 막장 맞던데요? 법을 어긴 게 너무 많아서 다 정리하면 책으로 만들어도 되겠습니다."
KYL은 연태준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다. 사장 쪽도 구린 게 많았다.
결국 KYL 엔터 사장도 체포됐다.
***
KYL 엔터는 무너졌다.
회사 임원인 연태준이 소속 가수들을 폭탄으로 죽이려 했다는 게 알려졌다. 거기에 서해 요트 사건을 포함한 여러 사건에도 연태준이 개입했다.
간첩 혐의는 덤이었다.
사장의 비리도 만만치 않게 드러났다. 폭행 사건 몇 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KYL 엔터는 대기업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가 안 무너지면 그게 더 이상하다. 회사의 귀책사유가 워낙 커서 소속 연예인들이 너도나도 계약을 파기했다.
차우진이 LPP 엔터의 전현석 사장을 만났다.
"직원 중에 희망자는 데려오죠. 물론 연태준 라인 빼고, 경찰에 체포된 사람들도 빼고요."
전현석이 난감해했다.
"인원이 많을 텐데,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있을지…."
"이 기회에 회사를 키우시는 건 어떻습니까? 일단 블루퍼핏은 제가 물어보니까 이쪽으로 오고 싶다던데."
블루퍼핏은 잘 나가는 아이돌 그룹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밥값은 한다. 수많은 아이돌 중에 블루퍼핏처럼 방송 출연을 가끔이라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전현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 그래요?"
그러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지만 직원들까지 데려오려면 예산이…."
"제가 투자를 좀 더 할까요?"
"아! 그래 주시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죠. 하하하. 프로듀싱도 맡아주시면 더 좋은데요."
"그건 KYL 엔터 피디를 데려다 쓰세요. 이번 사태에 엮이지 않은 피디도 있다던데."
***
차우진의 친구 민수연이 합동수사본부에 나타났다.
"유리 언니."
차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퀭했다.
"수연아. 너도 잡혀 왔냐?"
"응. 언니는 집에 언제 간 거야?"
"며칠 전에 한 번 갔지."
"잠은?"
"간이침대."
"와. 여기 너무한다."
"너 빨리 탈출해. 아니. 아예 잡혀 오지 마. 아…. 이미 잡혀 왔으니까 늦었구나."
민수연이 물었다.
"언니는 이번에 간첩 잡고 승진하는 거 아녔어?"
"간첩 그거…. 에휴. 간첩은 아닌 거 같아."
"응?"
"이덕수가 거래한 코인 중에 북한에서 나온 것도 있긴 있는데, 다른 곳에서 나온 코인이 훨씬 더 많아."
"그럼 승진은?"
"몰라."
민수연이 한숨을 쉬었다.
"망했다. 나도 일만 하다 챙기는 것도 없이 가겠네."
차유리가 민수연이 들고 있는 가방을 보았다.
"그런데 너 그 가방,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똑같다?"
"우진이가 야식 싸줬어. 걔는 아주 밤새워서 일하라고 고사를 지낸다니까."
"맛은 있겠네. 근데 유리 넌 왜 잡혀 온 거야?"
"암호화 음성통신 어플이 깔린 스마트폰이 세 대가 나왔잖아."
"어. 맞아. 닥터, 마누엘, 이덕수이 가지고 있었지. 인도자한테서는 나온 게 없었어. 그놈도 한 대 있었을 것 같긴 한데 못 찾았다."
"손이 모자란다고, 나도 같이 조사해 달래."
"금방 돼?"
"몰라."
"그럼 우리 중에선 우진이만 놀고먹겠네?"
"그러겠지. 부럽다."
"그러게."
***
블루퍼핏은 LPP 엔터로 옮겼다.
그 절차가 며칠 만에 처리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KYL 엔터를 떠났다. 연태준 상무가 무전기 폭탄으로 블루퍼핏을 죽이려 했다는 게 알려졌는데 그 회사에 남아있을 수는 없다.
그들의 담당 매니저인 실장도 LPP 엔터로 이직했다.
KYL에서 LPP로 넘어온 연예인은 몇 명 더 있었다. 직원들도 일부가 따라왔다.
그들을 관리하려면 운영자금이 더 필요하다.
차우진이 회사에 투자금을 더 넣고 지분을 그만큼 받았다. 여전히 전현석 사장이 대주주이지만, 차우진은 확실한 2대주주가 되었다.
***
며칠 후에 차유리와 민수연이 합수본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차유리는 대충 씻은 후에 소파에 늘어졌다.
"야. 밥은?"
차우진이 부엌에서 대답했다.
"다 만들었으니까 먹고 누워라."
"눕는 거 좋지. 난 이제 배부른 돼지가 될 테다."
차우진이 옆을 보았다.
"근데 수연이 너는 씻고 왔다?"
민수연은 당당했다.
"당연히 집에 가서 씻었지."
"근데 왜 밥은 여기서 먹냐."
식탁에 머리를 들이밀고 음식을 먹던 민수연이 물었다.
"왜? 아깝냐?"
"아니다. 많이 먹어라."
차유리도 식탁에 앉아서 밥을 흡입하듯이 먹었다.
두 사람이 며칠 굶은 것처럼 먹는 걸 보다가 차우진이 물었다.
"간첩 맞아?"
차유리가 툴툴댔다.
"아니더라. 간첩 잡고 승진하는 줄 알았는데 텄다."
"그래도 그 정도 실적이면 승진하지 않나?"
민수연이 옆에서 말했다.
"언니가 예전에 쳐놓은 사고가 하도 많아서, 그거 퉁 치고 말았대."
"너는?"
"나?"
차우진은 조사할 스마트폰이 늘어나면 민수연이 합수본에 불려갈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차우진이 적을 치면 주로 차유리가 야근하지만, 장비를 조사할 일이 생기면 민수연이 야근하곤 했다.
그래서 차우진은 마누엘이 떨어뜨린 스마트폰을 주워가지 않았다. 그걸 차우진이 가져가면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경찰이 가져가면 철저히 분석한다.
그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돼 민수연이 합수본에 끌려가 며칠 고생하고 돌아왔다.
그게 좀 미안해서 지금 요리를 만들어주는 중이다.
차우진이 고기 요리를 추가로 내밀었다. 삼겹살에 양념을 발라 저온에서 오래 익힌 요리였다.
"이것도 좀 먹어라."
"땡큐."
"넌 성과가 있었냐?"
민수연이 대답했다.
"여러 명이 붙어서 스마트폰 세 대를 분석하고, 그 시간대 통신 패킷 다 뒤져가면서 추적했어."
"그래서?"
"그라나다가 수신 지역이라는 것까진 알아냈는데."
"스페인 그라나다?"
"어. 그런데 정확한 위치는 못 땄다. 세 번 다 상대편의 위치가 좀 달라."
차우진이 씩 웃었다.
"스페인 그라나다. 거기란 말이지."
"왜 웃냐?"
"아는 형한테 거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무슨 이야기?"
"거기에 알함브라 궁전이 있잖아."
206. 스캔들
멸망한 세계에서 차우진이 물었다.
"창수 형. 그 멸망급 테러 빌런 말이야. 유럽에서 죽었다고 했지?"
박창수가 모닥불에 나무를 넣으며 대답했다.
"확실한 건 아닌데, 멸망 초기에 그랬다는 소문이 있긴 했다."
"그놈이 누군지 모르는데 죽었는지는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소문이지. 그래도 근거가 없는 건 아니야."
"뭔데?"
"그놈이 누구인지는 못 찾았지만, 몇 가지 단서를 근거로 어디 사는지 추정한 게 있었거든."
차우진이 버려진 밭에서 찾아낸 고구마를 불에 구우며 말했다.
"그런 단서는 남기지 않는 놈 아니었어?"
"멸망 십 년쯤 전에는 그놈도 가끔 실수도 하고 단서도 남겼거든. 멸망 직전에 그런 과거의 단서들을 다 긁어모아서 분석했더니, 몇 군데 의심 가는 곳이 나왔지."
박창수가 유럽 도시들을 언급했다. 그중에 그라나다도 있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스페인 그라나다?"
"어. 거기도 꽤 유력해. 멸망 십 년 전에 그 새끼를 거기서 잡았어야 했는데, 그때는 거기 있다는 걸 몰랐어."
"그런데 그라나다는 마그마가 터진 곳이잖아."
"마그마가 터진 곳이 한둘이 아닌데 그건 기억하냐?"
"알함브라 궁전이 그때 날아가서 기억해. 내가 거기 꼭 가보고 싶었거든."
"맞아. 바로 옆 산악지역에서 터졌는데, 그 여파로 알함브라 궁전은 물론이고 도시 전체가 소멸했지. 그러니까 거기가 그 새끼의 근거지였으면 그때 뒈졌겠지."
"설사 거기 있었다 해도, 마그마가 터질 때 모든 단서가 불타버렸을 테니까 진실은 알 수 없겠네?"
"그치."
"도시 자체가 날아갔으니까 그때 거기 있었으면 그 새끼도 죽었을 거로 추정하는 거고."
"맞아."
박창수가 고구마를 꺼내며 말했다.
"그것 외에도, 멸망급 재난이 줄줄이 터질 때 그 새끼의 활동이 멈췄거든. 재난이 빌런이라고 해서 피해 가는 건 아니니까. 아마 그때 죽었을 거야."
차우진이 잔소리했다.
"고구마 다 익으면 먹으라고. 아직 덜 익었다고."
"야. 생으로도 먹잖아."
"귀한 건데 좀 맛있게 먹자."
박창수가 고구마를 다시 불 속에 넣으며 말했다.
"고구마 중간을 갈라서 버터를 녹이면 진짜 맛있는데."
"이 형이 배가 불렀네. 요즘 세상에 버터가 어디 있냐?"
***
차우진이 제안했다.
"수연아. 고구마에 버터 좀 얹어서 구워줄까?"
민수연이 얼른 대답했다.
"넌 왜 그런 걸 물어보는데? 일단 구워. 어차피 있으면 다 먹으니까."
"너나 누나나 참 잘 먹는다."
"너보단 덜 먹어."
차우진이 고구마를 구우며 말했다.
"그라나다라…."
그가 스페인 지도를 떠올렸다. 멸망 초기에 전 세계 식량난을 더 심각하게 악화시킨 건 쿠에르노의 비료 첨가제 때문이다. 쿠에르노도 스페인에 있다.
"잘됐네."
"뭐가?"
"고구마 맛있겠다고."
***
차우진이 밤늦게 스톤파인더 사장 정수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은 그 시간이 아침이었다.
- 차 이사님. 미국에 한 번 오셔야죠. 하하하.
"안 그래도 가려고요."
- 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직접 오십니까? 와주시면 고맙긴 한데요.
"마그마에너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경이나 하려고요."
정수찬은 마그마에너지의 사장도 겸직하고 있다. 차우진은 마그마에너지의 이사다.
차우진은 프라하에서 마약조직 스컬스를 처리할 때 미국으로 갔다가 이탈리아를 거쳐 체코로 이동했다.
그때 한국에서 직접 유럽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면 체코에서 스컬스가 무너진 것과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이렇게 하나라도 더 거쳐야 한국에서 누군가 그 사건을 조사하려 해도 일이 까다로워진다.
***
이튿날 차우진이 딥어스테크 개발 2팀을 찾아갔다.
곽수혁 팀장이 활짝 웃었다.
"차 이사님. 오셨습니까?"
"평소보다 더 반가워하십니다?"
"우리 민지 노래 인세가 들어왔거든요. 하하하."
곽민지는 학교를 매일 다니는 학생이라 행사는 뛰지 않는다. 괜찮은 공연에 가끔 초대되면 그때 노래하는 정도로만 활동한다.
대신에 음원이 잘 나갔다.
곽수혁이 웃으며 자랑했다.
"우리 딸이 벌써 자기 대학 등록금을 벌고 있습니다. 하하하."
4년 치 등록금을 다 번 건 아니지만, 첫해는 이미 해결됐다.
"어…. 민지는 대학 가야죠. 공부 열심히 해야 할 텐데."
"우리 민지가 예술 재능은 저를 닮았는데, 공부 머리는 엄마를 닮아서 더 열심히 해야 하긴 합니다."
"그건 사모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는데요?"
"하, 하하. 오늘은 무슨 일로?"
"마그마에너지와 협업하는 것 중에, 테스트 후보 지역 지정도 있지요?"
"예. 우리 쪽에서도 국내 후보지 몇 곳을 보냈습니다. 그래야 테스트 자금이 그쪽에서 들어오니까요."
"외국도 두어 개 추가하시죠."
"예? 외국은 마그마에너지에서 직접 테스트하는데 왜…."
"후보 지역 추천만 하면 됩니다. 출장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해야죠. 어디로 할까요?"
"일단."
차우진이 말했다.
"스페인에 있는 그라나다."
***
이튿날 미국 대사관에서 라이언 최가 찾아왔다.
"차 이사님. 미국을 방문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틀 전에 결정된 건데 금방 찾아오십니다?"
차우진의 집이 미국 정부에 도청되고 있으면 일은 심각해진다.
그래서 차우진은 집에서 도청탐지기를 수시로 돌린다.
어떤 도청 장비는 굳이 집 안에 심어둘 필요가 없다. 레이저 도청기 중에는 창문의 떨림으로도 소리를 감지하는 것도 있다.
차우진은 집 주변에 원거리 도청장치로 감시하는 사람이 있는지 이미 충분히 확인했다.
'난 도청대상이 될 정도는 아니지.'
차우진은 마그마 폭발 위험을 알린 사람이긴 하지만, 그걸 차우진 혼자 공개한 건 아니다.
그는 그걸 공개하기 전부터 정수찬을 개입시키고, 정수찬에게 자료를 제공하고 조언하는 방식으로 결과를 만들어냈다.
정수찬은 차우진이 제공한 자료를 분석해 그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아냈다. 그걸 미국 정부에 연락해 알려준 것도 차우진이 아니라 정수찬이다.
'마그마 폭탄의 해결방법도 정수찬 박사님이 개발해야지.'
심지어 차우진은 마그마에너지에 방문한 적도 없다. 탐지기를 개발한 딥어스테크에는 자주 가지만, 탐지기는 문제를 파악하는 도구이지 해결법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대놓고 도청이나 감시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어떻게 벌써 아셨을까?"
라이언 최가 대답했다.
"마그마에너지를 통해서 연락받았습니다. 그 회사에는 미국 정부 지분이 있잖습니까?"
지분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마그마에너지의 연구 예산 대부분이 미국 정부에서 나온다.
그 회사는 공개 투자를 받을 상황이 아니다. 투자를 받으려면 민간 투자자에게 마그마 폭탄에 대해 알려야 한다. 그럴 수는 없다.
라이언 최가 물었다.
"미국에는 혹시 마그마에너지를 도와주러 가는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희 쪽에서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제가 오산 공군기지라도 이용하면 뒷감당은 되시고요?"
"한국 정부에는 통보하지 않고 군용기로 이동하면 되지요. 미국에 가시는 목적에 따라서는 그렇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군침이 당기는 제안이긴 하지만, 받아들이긴 곤란한 제안이다. 차우진이 딱히 하는 게 없어야 감시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연구 개발은 정수찬 박사님이 다 합니다. 전 그냥 구경하러 가는 겁니다."
"그럼 항공권 업그레이드라도 해드리겠습니다."
"설마 미국 대사관에서 하는 건 아니겠지요?"
"당연히 마그마에너지에서 경비 처리할 겁니다."
***
차우진이 미국에 간다는 말을 듣고 정예지가 볼멘소리를 냈다.
"나는!"
"스캔들 나고 싶냐?"
"스캔들 나면 죽냐? 죽어?"
차우진이 타일렀다.
"오윤서 씨라면 몰라도 아직 주연급도 아닌 너한테는 타격이 크겠지?"
"쳇. 나도 빨리 윤서 언니만큼 클 테다."
오윤서가 웃으며 차우진에게 말했다.
"우진 씨가 저와 같이 가준다고 들었어요."
"마침 일정이 비슷하더군요."
"우진 씨가 간다길래 제 일정을 조금 당겼어요. 개인적인 일로 가는데 매니저를 데려가긴 그렇잖아요."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는 제가 일일 매니저를 해드리죠."
오윤서가 죽으면 정수찬은 망가진다. 그러면 마그마 폭탄을 막을 사람이 없어진다.
그러니 차우진이 오윤서를 무사히 데려다주는 건 기회가 되면 하는 게 좋다.
옆에서 정예지가 항의했다.
"내 매니저는 안 해주더니!"
"너한테도 일일 매니저는 해줄게."
"앗! 그럼 오늘부터 일일…."
"다음에 꼭 필요할 때."
"쳇."
***
차우진이 오윤서와 함께 인천공항으로 갔다.
오윤서는 일등석을 이용했다. 차우진도 마찬가지였다.
일등석 이용객은 네 명이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썼지만 비행기에 탑승한 후에는 마스크를 벗었다.
다른 일등석 탑승객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어? 설마 오윤서 씨?"
"네. 반가워요."
"와! 팬이에요! 같이 사진…."
차우진이 손을 내밀었다.
"사진은 안 됩니다."
"네? 누구세요?"
"매니저입니다."
"아. 스케줄 가시나 보다."
"비공개 스케줄입니다."
오윤서가 말했다.
"괜찮아요. 저랑 둘이서 찍어요."
오윤서가 팬과 사진을 찍었다. 차우진은 옆으로 빠져서 그 사진에 모습이 나오지 않게 했다.
스튜어디스 두 명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남자, 오윤서의 매니저래."
"매니저가 퍼스트클래스를 타? 마일리지로 업글한 건가?"
"아니. 돈 다 내고 탔대."
"진짜 매니저 맞아?"
***
두 사람은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뉴욕 공항에 내렸다.
공항 검색대에서 차우진이 여권을 내밀었다. 담당자는 무표정하게 여권을 받았다. 공항 모니터에 여권 정보가 떴다.
담당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 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
"입국하려고요?"
"VIP는 따로…. 아, 아닙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입국 심사는 순식간에 처리됐다.
차우진이 밖으로 나오면서 혀를 찼다.
"쯧. 내가 VIP였어?"
몰랐다.
"이러면 미국을 거쳐서 유럽에 가는 건 이제 기록에 남겠는데…."
지난번에 뉴욕에서 프라하로 갈 때도 이탈리아까지 여객기를 탄 기록은 남았다. 밀항한 게 아니니까 당연하다.
하지만 그때는 VIP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어디 가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는 일단 이탈리아 공항에 내린 후에, 체코 프라하로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동했다.
"VIP의 출국 정보는 어디서 따로 관리하려나?"
스페인에 가려고 미국에 왔는데, 유럽으로 가는 길이 조금 불편해졌다.
"다음부터는 더 조심해야겠네."
그는 먼저 나와서 오윤서를 기다렸다. 오윤서는 조금 늦게 입국 심사를 통과했다.
오윤서가 말했다.
"수찬 오빠는 일이 생겨서 좀 늦는데요. 공항에서 잠깐 커피라도 마시면서 기다려요."
"그럴까요."
두 사람은 공항 카페로 이동했다. 거기서 커피를 사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정예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윤서가 옆에서 발신자를 보고 웃었다.
"예지가 한국에서 우리 비행기가 뉴욕에 도착하기만 기다렸나 봐요?"
"굳이?"
"호호. 굳이 그러고 싶었나 보죠."
차우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예지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 우진 오빠! 지금 어디야!
"뉴욕이지?"
- 여객기 타고 가면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편안하게 자면서 왔다만?"
- 근데 왜 사고가 터지냐고!
"우리 비행기는 사고 같은 건 없었는데?"
- 몰라? 모르는구나!
"뭘?"
- 지금 윤서 언니 스캔들 터졌어!
차우진이 인상을 살짝 썼다.
"음…. 정수찬 박사님이 드디어 노출된 건가?"
- 아니, 너랑!
"응?"
- 우진 오빠 너랑 윤서 언니랑 스캔들이 터졌다고!
차우진이 주변을 재빨리 확인했다.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은 없었다.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정 박사님이 알면 질투하겠네."
- 웃어? 웃음이 나와? 야! 나랑은 스캔들 나면 안 된다고 그렇게 선 긋더니, 어떻게 언니랑 터지냐!
"아니라는 거 알잖아."
- 스캔들 터진 거 보니까 퍼스트클래스 타고 갔더라? 매니저가 무슨 일등석이야!
"난 이코노미 타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항공권 업글 비용을 보내줬거든."
- 이번에도 윤서 언니네 형부 회사지?
정수찬은 스톤파인더와 마그마에너지의 사장이다. 미국 왕복 항공권 업그레이드에 드는 비용은 일단 차우진이 내고 마그마에너지가 나중에 따로 처리해주기로 했다. 그 돈은 미국 정부에서 나온다.
"그렇지."
- 이제 어쩔 거야?
"일단 스캔들 터진 거 기사 링크라도 보내봐. 무슨 소리 하나 궁금하네."
207. 그라나다
정예지가 곧바로 차우진의 톡으로 SNS와 기사 링크를 보냈다.
- 봐! 스캔들 터졌잖아!
차우진이 그녀가 보내준 SNS부터 확인했다.
"이게 무슨 스캔들이냐. 누가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린 건데, 난 나오지도 않았잖아."
오윤서도 옆에서 사진을 보았다.
"어머. 아까 비행기에서 팬이랑 같이 찍은 사진이네요."
- 기사 링크도 보라고!
차우진이 첨부된 기사도 확인했다.
"그 승객이 사진을 올릴 때 매니저도 같이 일등석에 탔다고 썼어?"
- 그걸 본 사람들이 매니저가 일등석을 왜 타냐면서 의심했다고! 기자가 그걸 보고 또 부풀려서 썼고!
정예지의 흥분한 목소리가 하도 커서 오윤서의 귀에도 대충은 들렸다.
오윤서가 옆에서 차우진에게 설명했다.
"아! 제 소속사는 매니저한테 일등석을 끊어주진 않거든요. 배우도 비즈니스 타고 가요. 팬들은 그걸 아니까…."
차우진이 통화 중인 정예지에게 물었다.
"같이 간 사람이 나인 건 기사에 안 나오는데?"
- 어?
"그걸 아는 건 예지 씨뿐이니까 혼자 입 다물면 되는 거 아니냐?"
- 듣고 보니 그렇네? 윤서 언니만 스캔들이고 우진 오빠는 아니네?
"난 괜찮아. 그런데 윤서 씨는…."
- 앗! 윤서 언니는 어쩌지?
"그러게 말이다. 어쩌지?"
오윤서가 말했다.
"사실이 아니니까 해결할 수 있어요. 제 문제는 회사에 연락해서 처리할게요."
- 휴우.
"예지 씨가 왜 안도의 한숨을 쉬지?"
- 이제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아서?
"잠이나 자. 거기 밤이잖아."
- 나 오늘 야간 촬영이라고! 나한테도 관심 좀 가져봐!
"야간 촬영이면 너도 힘들겠다."
- 옜다, 관심. 같은 거 말고!
오윤서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서 소속사에 전화를 걸었다.
차우진은 그 자리에 앉아서 상황을 정리했다.
"지금 당장은 내가 노출되진 않았지만…."
기자들이 오윤서의 스캔들 상대를 찾다가 차우진이 같이 탔다는 걸 알아내고 기사화하면 피곤해진다.
"해결해야겠는데…."
어설프게 덮으려고 하면 의심만 더 살 수도 있다.
"진짜 스캔들이 터졌어도 덮어버릴 정도로 확실한 조치가 필요한데 말이야."
***
정수찬이 공항으로 마중 왔다. 두 사람은 정수찬의 차를 탔다.
운전은 정수찬의 비서가 했다. 오윤서와 정수찬이 뒷좌석에 같이 앉았다.
그런데 차가 한 대 따라붙었다.
차우진이 조수석에서 사이드미러를 힐끗 보며 말했다.
"뒤에 차는 뭡니까?"
"경호팀입니다. 필요 없다고는 했는데, 미국 정부에서 꽤 강하게 권하더군요."
"잘됐네요. 저도 최소한 미국에서는 경호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 굳이…."
"우리 프로젝트는 정 박사님만이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안전대책은 많을수록 좋지요."
한국에서는 남자가 운전할 때 무장강도를 만나는 일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상황이 다를 수 있다.
정수찬이 없으면 마그마 폭발을 막을 방법도 없다.
그런 정수찬을 보호하기 위해 경호팀 하나쯤 운영하는 건 가성비가 굉장히 좋은 선택이다.
"미국 정부가 이런 건 잘하는군요."
"차 이사님도 괜한 걱정을 하십니다. 저한테 사정이 생겨도 다른 학자들이 그 문제를 해결할 겁니다."
차우진이 단언했다.
"못합니다."
멸망한 세계의 학자들은 실패했다. 그곳에서는 은퇴한 정수찬이 복귀한 후에야 해결법을 찾아냈다.
오윤서의 표정은 밝았다. 차우진이 남자친구를 높게 평가하는 걸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파인드스톤이 아니라 마그마에너지 본사였다.
정수찬이 말했다.
"윤서에게 이 회사를 보여주는 건 처음이라."
"여기는 보안시설일 텐데요."
"외부 손님용 공간들은 열려 있습니다. 거기도 아무나 들어오는 건 아니지만, 윤서는 가족으로 등록해둬서 괜찮습니다."
"저는 가족이 아닙니다만?"
"차 이사님은 마그마에너지의 임원이잖습니까?"
이곳은 단순 방문자도 외부 보안실에서 출입자 확인을 해야 한다.
오윤서는 사장인 정수찬과 함께 온 데다가 사전에 방문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외부 보안실 책임자는 여권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 임시 방문증을 주었다.
차우진도 여권을 내밀었다.
보안실 책임자는 그 여권을 확인하고 조금 당황했다.
"어? 차우진 이사님?"
"그렇습니다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를요?"
"이 회사를 만드신 분 중 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어…. 설명이 좀 빠져 있지만 그렇긴 하죠."
그들은 보안 절차를 모두 밟고 나서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정수찬이 설명했다.
"이 회사의 보안은 미국 정부에서 맡아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보안 담당 직원은 미국 정부 요원이거나 전직 또는 현직 미군 특수부대원입니다."
"방금 만난 사람은요?"
"출입자를 관리하는 외곽 보안팀장입니다. 차 이사님을 한 번은 만나야 다음부터 출입이 편할 것 같아서 일부러 불렀습니다."
"어쩐지 저를 안다 싶었습니다."
정수찬이 회사를 안내했다.
건물 안쪽은 오윤서에게 보여줄 수 없지만, 1층 로비나 접견실 등은 그녀도 들어갈 수 있었다.
오윤서가 말했다.
"아차. 오빠. 나 스캔들 났어."
정수찬은 멈칫했다.
"스, 스캔들? 누, 누구랑?"
"차우진 씨."
"어?"
차우진이 설명했다.
"그렇게만 말하면 정 박사님이 놀라십니다."
"놀라는 게 귀엽죠?"
"아니요."
"아닌가?"
"콩깍지가 심하게 씌었네요."
차우진이 정수찬에게 설명했다.
"정 사장님이 일등석 티켓 값을 보내주기로 해서 생긴 일입니다."
그는 오늘 한국에서 스캔들 오보가 난 이유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정수찬이 콧김을 뿜었다.
"어느 언론사에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루머를 퍼트립니까? 고소할 겁니다."
오윤서가 옆에서 말렸다.
"연예인이 그런 거로 고소하면 시끄러워져."
정수찬이 씩씩댔다.
"그래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지!"
차우진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럼요. 놔두면 안 되지요."
그냥 놔두면 오윤서와 같은 비행기의 일등석 탑승객을 조사하려는 기자가 생길 수 있다. 그러면 피곤해진다.
"정 사장님이 확실히 처리하셔야지요."
"일단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알아보겠습니다."
***
처음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오윤서의 팬은 스캔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처음 타본 퍼스트클래스를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비행기가 뉴욕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사진을 몇 장 올렸다. 비행기에서 오윤서를 만난 것도 자랑하려고 그녀와 같이 찍은 사진도 추가했다.
그렇게 올린 사진과 글에 질문이 붙었다.
- 오윤서 씨는 혼자 미국에 가는 건가요?
- 매니저와 같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스케줄이 있나 봅니다.
- 매니저는 어디 있는데요?
- 오윤서 씨 옆쪽에 있었는데 사진은 찍지 못했습니다.
그 글과 사진이 오윤서의 팬카페에 올라왔다.
그런데 팬카페에서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이 생겼다.
- 미국 스케줄이 있다고요? 난 처음 듣는데?
- 우리가 모르는 스케줄이 있나 보죠.
팬들은 오윤서의 소속사가 어떤 곳인지 안다. 나쁜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돈을 펑펑 쓰는 곳도 아니다.
- 미공개 스케줄이 있을 순 있죠. 미국에 가서 오디션을 볼 수도 있고, 명품 브랜드의 광고를 비밀리에 찍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회사에서 매니저까지 퍼스트클래스에 태운다고요?
- 이상하긴 하네요. 그 회사는 이사급 아니면 무조건 이코노미인데.
- 이사급도 비즈니스가 나올 걸요?
- 매니저가 젊다는데요?
- 그 회사에는 젊은 임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팬이 생겼다.
- 남친이 있다는 썰이 있지 않았나?
그 팬카페의 글이 다시 몇 군데에 퍼졌다. 언론사의 연예부 기자가 그 글을 보았다.
그는 팬카페의 추측 글을 적당히 조합하고 다른 연예인의 스캔들에 나왔던 상황을 섞은 후에 좀 부풀렸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면 말고."
기사는 쓰되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팬들 중에는 그렇게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는 식으로 기사를 조금 돌려서 쓰긴 했다.
그런데 그 기사의 반응이 꽤 좋았다. 오윤서는 팬이 많은 인기 스타기 때문이다. 그 기사는 올라가자마자 순식간에 여러 인터넷 사이트로 퍼졌다.
그리고 다른 기자들이 그 기사를 다시 퍼트렸다.
***
마그마에너지의 보안 책임자가 설명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오윤서는 감탄했다.
"와. 대단하세요. 그걸 겨우 삼십 분만에 알아내신 거예요?"
아직 오윤서가 마시던 커피잔이 다 비워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벌써 범인을 파악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전형적인 사건이라서 조사자원을 많이 투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누가 제일 먼저 기사를 올렸는지 알아보는 것도 간단했습니다."
정수찬이 물었다.
"막을 수 있겠습니까?"
보안 책임자가 조금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정부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당연히 막을 수 있습니다만,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 일로 정수찬 박사님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연구에 방해될 텐데…."
"오. 넘치도록 충분한 명분이군요!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보안 담당자가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몇 가지를 지시했다. 그런 후에 말했다.
"처리될 겁니다. 깔끔하게."
이제 일을 해야 한다. 정수찬이 오윤서에게 말했다.
"휴게실에서 기다릴래? 아니면 집으로 갈래?"
"음…. 오빠 일 끝날 때까지 난 쇼핑?"
보안 담당자가 얼른 말했다.
"우리 직원을 붙여드리겠습니다."
"네? 저는 여기 직원이 아닌데 그래도 돼요?"
"마침 쇼핑 가고 싶다는 직원이 있습니다."
잠시 후에 단단한 체형의 여자 직원이 들어왔다.
"제시카입니다."
"쇼핑 좋아한다면서요?"
"네. 마담."
"가요. 내가 선물 사줄게요."
두 사람은 회의실을 나갔다.
이제 이 회의실에 세 사람만 남았다. 보안 책임자가 말했다.
"차우진 이사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분도 아까 그분이랑 같은 말을 하시네. 어째서요?"
"정수찬 사장님과 마그마에너지를 설립하신 분이잖습니까?"
"저는 아이디어만 제공한 겁니다. 기술적인 건 모릅니다. 제가 한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겁니다."
"차 이사님이 아니었으면 뉴욕이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음…. 되게 많은 걸 아시네? 그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더 있습니까?"
보안 책임자가 씩 웃었다.
"그건 당연히 기밀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회사 직원들은 최소한의 핵심 인원 외에는 자기들이 어떤 참사를 막으려고 일하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어쨌든 저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연구를 도와줄 일도 없습니다. 뭘 알아야 도와주죠."
차우진이 어떤 사람인지 조사했다면, 그가 지질학과는 상관없는 일만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차 이사님께서 지금까지 해주신 것만 해도 무척 큽니다."
정수찬이 웃으며 말했다.
"차 이사님. 그런데 할 이야기가 뭡니까?"
"아. 미국과 한국 외에 다른 나라에서 탐지기를 돌려보는 거 말입니다."
마그마 폭발을 막으려면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 탐지기 성능을 개선하기 위한 데이터도 필요하고, 마그마의 압력을 낮출 연구를 할 때도 데이터는 필요하다.
마그마 탐지기는 딥어스테크 개발 2팀에서 만들었다. 지금은 마그마에너지와 협업해 성능 개선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다.
정수찬은 강원도와 뉴욕 주변의 지질구조를 참고해, 지구 전체에서 테스트 후보 지역을 수십 개 뽑았다.
딥어스테크에서도 후보 지역을 몇 개 제안했다. 그 지역 선정에는 차우진이 개입했다.
그런 지역들은 모두 후보일 뿐이다. 그중 어느 장소에서 먼저 테스트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미국 자체 테스트야 이미 진행 중이시고."
기존에 만든 마그마 탐지기로도 데이터는 뽑아낼 수 있다. 그래서 미국 영토 내에서의 탐사는 이미 적극적으로 진행 중이다. 그러려면 예산이 많이 들지만, 그 돈은 어차피 미국 정부에서 나온다.
뉴욕 옆에 있는 마그마가 폭발하면 뉴욕이 날아간다. 미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라 예산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아직 미국에서는 새로운 마그마 폭탄은 발견되지 않았다. 뉴욕 옆에 있는 마그마 폭탄도 최소한 몇 년은 버틸 수 있다고 예상됐다.
차우진이 말했다.
"국가 간의 관계를 고려하면 다른 대륙의 다음 탐사 장소는 유럽이어야 하는데."
미국과 관계가 좋은 나라라야 탐사하기도 좋다. 적대 국가에 가서 조사하겠다고 하면 허락을 받기도 어렵지만, 설사 허락한다 해도 뭘 조사하는지 캐내려 들 게 뻔하다.
동북아시아는 이미 한국 강원도에서 데이터가 하나 나왔다. 그래서 다음 순번은 유럽을 골랐다.
"유럽에만 1차 탐사 후보지가 다섯 개입니다. 그중에서."
차우진이 그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스페인 그라나다. 여기를 먼저 확인하는 건 어떠십니까?"
멸망급 테러 빌런을 잡으려면 그곳에 가야 한다.
208. 그라나다 II
정수찬 사장이 말했다.
"스페인 그라나다. 저도 유럽의 첫 번째 테스트 장소로 그곳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생각이 일치하는군요."
차우진은 그 근처에서 마그마 폭탄이 터진다는 걸 안다.
'정 박사님도 그걸 알아냈나? 연구가 벌써 거기까지 진행된 건가?'
그가 조금 기대하며 물었다.
"그라나다를 유럽의 첫 번째 조사 대상지로 고르신 이유가?"
"차 이사님이 제안하셨잖습니까?"
"저는 그 근처에서 관광이나 할까 하고 제안한 겁니다."
"그 도시에서 가까운 곳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고 테스트할만한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그 정도면 좋은 조건이잖습니까?"
"음…. 이유가 그게 전부이신지?"
정수찬이 슬쩍 웃었다.
"강원도와 뉴욕에서 얻은 데이터에 제가 아는 걸 종합해서, 예상 확률을 계산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적중률은요?"
"형편없죠. 미국 땅에서는 다 헛다리를 짚었습니다. 몇 곳을 탐사해봤는데 마그마가 있긴 해도 터질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거기에 마그마가 있긴 있군요."
"예. 그래서 그 이론을 조금 보강해서 다시 돌렸더니, 우리가 골라놓은 후보지 중에서는 스페인 그라나다가 확률이 제일 높더군요."
"조금 보강하신 게 아닌 거 같은데요."
"하하하. 그런데 방금 차 이사님도 그라나다부터 보자고 하잖습니까? 역시 차 이사님이다 싶었습니다."
"저는 뭘 알고 고른 게 아닙니다."
정수찬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수십 개의 테스트 예정지 중에 거길 고르셨는데요?"
"참관인으로 슬쩍 따라가서,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공짜를 좋아합니다."
정수찬이 웃었다.
"하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회사에서는 공짜 항공권 정도만 제공해 주시면, 관광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 하하. 농담을 계속…. 어…. 농담이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보안 책임자도 당황했다.
"차 이사님. 그럼 진짜로 관광을 위해서…."
"그러니까 만나서 영광이라는 말은 하지 맙시다. 보다시피 난 아이디어만 조금 내놓고 단물만 빨아먹는 사람이니까."
***
유럽의 첫 번째 탐사 장소는 스페인 그라나다로 결정됐다. 그 탐사는 미국에서 이미 하던 것이다. 그래서 기존에 사용하던 탐사 장비들만 챙기면 추가로 준비할 건 없었다.
정수찬이 말했다.
"어차피 마그마에너지의 예산 중 절반은 사용처가 외부에 공개되지 않습니다. 스페인에 가시면 차 이사님의 활동비로 좀 써도 됩니다."
"아무리 남의 나라 돈이라도 그렇게 쓸 수는 없지요."
마그마에너지의 돈을 쓰면 회계처리를 기밀로 해도 어딘가에 기록이 남는다. 그렇다고 현금 뭉치를 받아가면 그것도 이상하다.
"도착한 후에는 제 돈으로 알아서 할 테니까, 수송기에 자리만 만들어주시죠."
미국 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다. 탐사 장비를 다른 승객들도 타는 여객기에 싣고 다니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산하 기관에서 직접 관리하는 수송기를 이번 출장에 제공했다.
차우진은 유명한 마그마 폭탄 몇 개를 안다. 그중 하나가 스페인 그라나다 인근에 있다.
땅속을 조사할 때는 정확한 위치에 탐지기를 꽂아야 데이터를 더 잘 뽑을 수 있다.
"맨입으로 그 비행기를 얻어탈 수는 없으니까, 현장에 가면 저도 가끔 도와주겠습니다."
탐사팀이 이용할 수송기에는 화물칸만 있는 게 아니라 연구원들이 탑승할 자리도 충분히 있었다.
차우진은 관광객 콘셉트를 계속 유지했다.
"내일 출발이니까, 오늘은 뉴욕 관광이나 해야겠습니다."
정수찬이 제안했다.
"필요하시면 안내를…."
"괜찮습니다. 혼자 다니는 게 편합니다. 아. 스캔들 문제는 어떻게 됐습니까?"
정수찬이 씩 웃었다.
"확실히 손을 썼습니다. 슬슬 결과가 나올 겁니다."
***
오윤서의 스캔들 루머를 퍼트린 박 기자가 술을 마시며 말했다.
"조회수가 짭짤했지."
여기저기서 그 기사를 재생산하긴 했지만, 최초로 공개한 박 기자도 조회수를 꽤 많이 먹었다.
같이 술을 마시던 사람이 물었다.
"오윤서 쪽에서 항의 안 해?"
"소속사에서 항의하긴 하더라."
오윤서가 뉴욕 공항에서 소속사에 연락하고, 소속사에서는 바로 그 언론사에 항의했다.
"근데 뭐 어쩌라고? 내가 오윤서가 남친이랑 단둘이 미국으로 여행 갔다고 썼어?"
"그렇게 썼잖아. 남친의 정체는 신인 배우라고도 썼고."
"아니지. 나는 '그런 의혹을 팬들이 가지고 있다'고 썼지. 그러니까 그렇게 주장한 건 팬이지 내가 아니잖아."
"그래서 기사 안 내릴 거야?"
박 기자가 씩 웃었다.
"맨입으로는 안…."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했다. 편집부장이었다.
"응? 잠깐만."
박 기자가 전화를 받았다.
"네. 부장님. 지금 정보원과 미팅…."
편집부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 야 이 새끼야! 그 기사는 왜 쓴 거야!
"네? 무슨 기사…."
- 오윤서 스캔들 기사! 너 그거 근거는 확인하고 쓴 거야?
"부장님. 우리가 언제 근거가 있는 것만 썼다고…."
- 지금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났어!
"기획사가 또 항의합니까?"
- 기획사가 아니라 기업에서 광고 빼겠다고 연락 왔다! 우리 광고가 뭉텅이로 빠져나가게 생겼다고!
박 기자는 당황했다. 조회수도 좋지만 광고가 빠지면 돈이 그만큼 빠진다.
"당장 기사 내리겠습니다."
- 이미 내가 내렸어!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 다음이고 자시고, 오윤서랑 같이 있던 남자 누구야? 신인배우라며?
"네? 그걸 왜…."
- 정체를 알아야 우리도 대응할 거 아냐!
"누군지는 저도 모르…."
"야 이 새끼야! 모르는데 스캔들인지 어떻게 알고 기사를 써!
"그거야 원래 다들 그렇게 기사를 쓰니까…."
- 당장 회사로 튀어와!
전화가 뚝 끊어졌다.
박 기자가 휴대폰을 보며 화를 냈다.
"기사 이렇게 쓴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왜 나한테 화를 내고 지랄이야?"
어쨌든 들어오라고 했으니 회사로 가기는 해야 한다. 박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갈게. 마시다 가라."
박 기자가 나간 후에, 같이 술을 마시던 남자가 투덜댔다.
"아. 저 새끼. 또 계산 안 하고 갔어."
***
박 기자가 인터넷 언론사로 돌아갔다.
"부장한테는 적당히 사바사바하면 되겠…."
그가 멈칫했다. 그의 사무실에서 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이 박 기자를 노려보며 편집부장에게 물었다.
"저 새끼야?"
"예. 사장님."
사장이 화를 벌컥 냈다.
"야 이 새끼야! 빨리 오보 사과 기사 써!"
"예?"
"빨리 사과 기사 쓰고, 오윤서가 귀국하면 선물이라도 사서 찾아가!"
"사장님. 저 기자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대기업 광고도 빠지고, 미국 대사관에서도 항의가 들어왔어!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예? 예? 미국 대사관에서 왜…."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나한테 대답해야지!"
"저는 모르는 일…."
"모르는 짓을 왜 해!"
***
한국 정보기관의 김 과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로 오윤서의 스캔들 기사는 오보였다고 사과문이 올라왔네?"
그는 오윤서가 출연한 영화를 좋아한다. 올해에 개봉한 영화 운명의 풍차는 특히 더 좋아했다.
그래서 사과문을 전부 읽어봤다. 기자가 납작 엎드려서 쓴 사과문이었다.
"우리나라 기자가 사과 기사를 써? 그것도 이렇게 길게? 이런 경우가 흔한가?"
"거의 없죠. 미국 대사관에서 항의하니까 알아서 엎드린 거 아닐까요?"
미국 대사관의 항의는 비공식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에게 공개되진 않았다.
김 과장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 대사관이 왜 한국 배우를 위해서 항의했을까?"
"제가 물어봤는데, 정보공유를 안 해줍니다."
"공유도 안 해줄 거면서 왜 대놓고 움직이는데? 평소처럼 뒤에서 은밀히 움직이지."
"글쎄요? 거기에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 친구들이 좀 있어서요."
"대사관에서 누가 항의했대? 미국 대사가 이런 일로 직접 항의하진 않았을 거 아냐."
"라이언 최라고, 최근에 미국에서 들어온 간부가 항의했답니다. 제가 거기까지는 알아냈습니다."
과장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음…. 이러면 우리도 알고는 있으라고 대놓고 움직인 건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좀 더 알아봤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부하직원이 설명했다.
"오윤서의 남자친구 이름은 정수찬입니다. 세계 지질학계에서 유명한 과학자이고, 미국에 있는 스톤파인더란 회사의 사장이기도 합니다."
"잘 나가네. 교포야?"
"아닙니다. 미국에 가서 일하지만,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럼 한국인 사이의 일이잖아. 가만. 그럼 혹시 스톤파인더가 하는 일이 미국 국가안보와 관계라도 있나? 군납 장비라도 납품해?"
"그건 파악이 안 됩니다. 그런데 정수찬은 최근에 마그마에너지라는 회사를 설립해서 사장을 겸직하고 있답니다."
"마그마에너지? 초자력 충전이나 퀀텀처럼 이름을 거창하게 붙인 건가?"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더니 에너지 개발 회사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회사라서 소문이 도는 것도 없습니다."
김 과장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다는 아니지?"
"국내와의 관계도 알아봤습니다. 국내 여러 회사에서 장비나 소재를 납품받고 있습니다."
스톤파인더는 딥어스테크의 탐지기를 사용해 마그마를 탐지 중이다. 탐지기 업그레이드도 공동으로 진행한다.
다만 딥어스테크 한 곳만 거래하면 목적을 들킬 수 있다. 그래서 여러 업체에서 다양한 장비와 소재를 수입했다.
그렇게 수입한 장비는 다른 미국 업체에 다시 넘기면 손해는 보지 않는다. 적당한 마진을 붙이면 이익도 볼 수 있다.
그런 자연스러운 거래 속에 딥어스테크의 탐지기를 끼워 넣으면, 한국에서는 추적이 불가능해진다.
"마그마에너지에 한국인이 또 누가 있어?"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음…. 미국 주재원한테 정수찬 씨와 접촉해서 물어보라고 할까?
부하직원이 말렸다.
"미국 애들이 싫어할 텐데요. 오윤서 쪽은 알아서 관리할 테니 눈감아달라고 신호를 준 것 같은데, 우리가 대놓고 파고들면 좀 그렇잖습니까?"
"그렇겠지?"
"네. 그렇죠."
"그래도 그냥 눈 감고 있으면 자존심 상하는데…. 그럼 오윤서랑 스캔들 난 사람은 누구야?"
"그건 오보가 맞을 겁니다. 정수찬이 남자친구라는 건 확인했으니까요."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저도 궁금해서 오윤서가 탄 비행기의 일등석 승객 명단을 알아왔습니다. 당시 일등석 승객은 다섯 명인데, SNS에 사진을 올린 사람은 마일리지로 좌석을 업그레이드했습니다."
"그 사람은 아닐 테고, 오윤서도 빼면, 세 명 남네?"
"여기 명단입니다."
김 과장은 부하직원의 스마트폰에 있는 명단을 보았다.
"차우진? 이 사람은 누구야?"
"계좌를 털어본 건 아닌데, 일등석 티켓쯤은 부담 없이 샀을 겁니다. 여러 회사에서 임원을 겸직한다고 하니까요. 출장 경비가 회사에서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능력 쩌네. 부럽다."
"다른 두 명도 잘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김 과장이 그 두 사람에 대해서도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부러워하면 뭐하냐. 국밥이나 먹으러 가자."
***
이튿날 차우진이 뉴욕 공항에서 수송기에 탑승했다.
정수찬 사장의 최측근은 한국인 박태우다. 그는 정수찬이 스톤파인더를 만들 때 한국에서 데려간 사람이다. 그가 마그마 탐지기의 메인 시스템을 담당했다.
박태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전용 심사대에서 출국심사를 받으면 됩니다. 소지품 중에 마약이나 총기만 없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겁니다. 하하하."
"그런걸 왜 가져가겠습니까?"
"경호팀은 가져갑니다."
차우진이 경호팀 쪽을 쓱 보았다. 그들은 가방에 권총이나 기관단총 같은 무기를 넣어두었다.
"스페인 공항 밖으로는 안 가져가겠군요."
"거기까지는 협의가 안 됐다더라고요."
공항 출국심사는 전용 심사대에서 진행됐다. 소지품인 가방은 일반적인 투시 검사기를 통해 확인했을 뿐 열어보지도 않았다.
투시 검사기를 통과하면 안 되는 물건이 있으면 그 검사는 생략하겠다고 공항 직원이 먼저 제안했다.
차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은 소지품 중에 무기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게 낫다.
'복대는 가져갈 걸 그랬나?'
차우진이 수송기에 탑승했다.
수송기 내부에는 화물을 싣는 공간과 승객이 앉을 수 있는 여객용 공간이 같이 있었다.
먼저 온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보안팀도 있고 연구팀도 있었다.
보안요원이 차트를 보며 물었다.
"성함이?"
"차우진입니다."
"헉. 차 이사님?"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 중 몇 명이 그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209. 그라나다 III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전부 몸이 탄탄했다.
차우진이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일반인은 아닌데?'
그가 박태우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스톤파인더와 마그마에너지에서 일하는 박태우가 옆에서 설명했다.
"마그마에너지에는 국방부 소속인 친구들이 좀 있습니다."
"보안팀이군요. 전투 경험도 많아 보이고요."
"차 이사님은 취사병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그걸 어떻게…."
"그건 또 어떻게 아셨을까?"
"사장님한테 들었습니다. 사장님은 아마도…."
"출처를 타고 가면 오윤서 씨를 거쳐서 예지 씨가 나오겠군요."
연구원들은 비행기 좌석에 앉은 상태로 차우진을 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여자 연구원 한 명은 눈까지 반짝였다.
차우진이 물었다.
"보안팀은 그렇다 치고, 저분들도 내 이름을 아나 본데요?"
"연구팀인데, 차 이사님이 최초 발견자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정수찬 박사님이 다 하신 거라니까요."
"분석과 연구는 그렇지만, 발견자가 차 이사님인 것도 사실이잖습니까?"
"딥어스테크 개발 2팀과 같이 한 겁니다."
먼저 일어선 보안팀의 리더가 다가와 인사했다.
"차 이사님. 만나서 영광입니다."
"뭘 영광까지야. 일단 반갑습니다. 그런데…."
차우진이 박태우에게 물었다.
"도대체 회사에서 저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데, 만나는 분마다 이런 소리를 할까요?"
"차 이사님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회사 직원 중에는 보안팀 몇 명과 임원, 그리고 기술진 중 핵심 인원이 이름만 압니다."
"그런데도 여기 있는 분들은 다 아시는 것 같군요."
여기 있는 사람만 해도 열 명이 넘어간다.
박태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번 탐사팀은 바로 그 핵심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니까요. 하, 하하."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정 사장님한테는 그냥 명함만 파 주면 된다고 했는데, 일을 키우셨네."
***
미국 수송기는 뉴욕 공항을 이륙해 스페인으로 날아갔다. 민간 수송기인 데다가 공식적으로는 민간 연구 활동을 위해 가는 것이라 외교나 군사 쪽으로 처리할 일은 없었다.
대서양 상공에서 여자 연구원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차 이사님. 아만다예요."
보안팀은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연구원은 이름부터 밝혔다.
"네. 아만다 씨."
"마그마 탐지 기술에 관해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안 됩니다."
"네?"
"아는 게 없어서."
"어머. 최초 발견자신데…."
"발견만 한 겁니다. 데이터 분석부터 이론 연구까지 다 정수찬 사장님이 하고 계십니다. 물론 여러분과 같이요."
"사장님은 천재인 거 저도 알아요. 그런데 사장님은 차 이사님 덕분이라고 하시던데."
"정 사장님이 겸손하시긴 하죠?"
"그런가요?"
"그런 겁니다."
***
스페인 공항에서는 남들처럼 출국심사를 받았다. 이 탐사의 진짜 목적은 스페인 정부에 알리지 않았다.
보안팀은 총기는 비행기에 남겨두었다.
공항을 나온 후에 차우진이 말했다.
"밥 먹읍시다."
박태우가 물었다.
"예? 호텔부터 가는 게 아니고요?"
"호텔은 따로 쓰잖습니까? 나는 자리만 얻어타고 온 거지 현지 관광은 내 돈으로 할 거라서."
"아니, 그래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부터 먹읍시다. 무슨 비행기가 기내식도 안 주고 말이야."
"햄버거 드렸는데…."
"햄버거가 어떻게 밥입니까?"
"네?"
차우진이 사람들을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갔다.
모두 같이 이동할 수는 없었다. 장비를 관리하는 연구팀은 따로 움직여야 했다. 보안팀도 대부분 연구팀을 따라갔다.
결국 차우진과 같이 움직인 건 곽태우와 연구원 아만다, 그리고 보안요원 한 명이었다.
차우진은 그들을 데리고 식당을 찾아갔다.
"내가 아는 맛집이 있습니다."
한국의 합동수사본부는 스마트폰 세 대를 추적해 상대편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냈다. 세 번 다 수신자의 위치는 스페인 그라나다였다.
하지만 세 번 다 수신 위치가 조금씩 달랐다. 차우진은 그중 한 곳인 식당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그 식당은 한쪽 벽이 완전히 트여 있는 형태였다. 위치는 1층이고, 바깥쪽에 테이블이 여럿 나와 있었다.
음식은 맛있었다. 곽태우가 감탄했다.
"여기 진짜 맛있습니다. 여긴 어떻게 아셨습니까? 예전에 관광 오셨었나?"
"제가 와본 건 아니고, 맛잘알인 사람이 왔다더군요."
멸망급 테러 빌런이 맛잘알이라고 알려진 건 아니다.
'창수 형은 테러 빌런이 돈 많은 놈일 거라고 했으니까.'
멸망한 세계의 수사기관에서 그렇게 분석했다.
'돈 많은 놈이 고급 식당도 아닌데 여기 왔다면, 맛있어서겠지. 아니면 다른 놈과 접선하러 왔던가.'
테러 빌런이 정확히 이 식당에 왔는지 확인된 건 아니다. 합수본에서는 수신자 위치가 이 근방이라는 것까지는 알아냈다. 하지만 정확한 좌표는 아니었다.
그 빌런이 이 식당에 들렀을 확률이 제일 높다는 건 민수연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왔다.
차우진이 말했다.
"맛있네요. 매일 밥 먹으러 들러야겠다."
***
마그마 탐지기는 그라나다 옆에 있는 산악지역에 설치하기로 했다.
마그마를 찾기 제일 좋은 장소는 차우진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그라나다 옆 국립공원에서 터졌다는 건 안다. 이 정도만 돼도 꽤 정확한 데이터를 한 번에 확보할 수 있다.
이 국립공원에서 테스트하자고 제안한 건 차우진이다. 정수찬 박사도 동의했다.
정수찬의 연구는 그동안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일단 지역만 정해지면, 그 지역에서 제일 적합한 위치를 찾아내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탐사 현장 지휘는 박태우가 맡았다.
첫날은 쉬고, 이튿날 연구팀이 현장을 점검했다.
박태우가 현장에서 차우진에게 말했다.
"탐지기를 설치할 위치를 잡으려면 며칠은 필요하겠는데요? 현장에 장애물도 많고 지형도 평탄하지 않습니다. 본사에 있는 사장님과 연락하면서 오차 보정을 하려면 오늘 하루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수송기 대여 기간은 넉넉하잖습니까?"
"이번 프로젝트가 일찍 끝나면 남은 기간은 관광이라도 하다가 가려고 했는데…."
"그래서 며칠이나 걸리겠습니까?"
박태우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최고의 데이터를 뽑으려면, 준비에만 최소한 사흘?"
"실제 조사를 하고 끝난 후에 뒷정리까지 한 후에 하루쯤 쉬고 출발하려면… 일주일은 필요하겠군요. 난 그동안 관광이나 다녀야겠습니다."
"네?"
"여기는 관광하러 온 거라서."
"아니, 그래도 기왕 오셨는데 일을 도와주시면…."
"현장 일은 아는 게 없습니다만? 그건 박 실장님이 책임자잖습니까?"
차우진은 지금 이곳도 참관만 하겠다면서 따라왔다.
박태우가 말했다.
"그래도 차 이사님이라면 뭔가 새로운 걸 알려주시지 않을까 했습니다. 사장님에게 듣기로는 전에도 그러셨다면서요."
"그거 정 사장님이 과장한 겁니다."
***
차우진은 탐사 임무는 맡겨놓고 그라나다 시내를 돌아다녔다.
테러 빌런이 나타난 곳은 세 지역이다. 그는 다른 두 지역은 관광하는 척하면서 돌아다니다가, 밥은 점심과 저녁 모두 그 식당에 가서 먹었다.
'그놈이 여기 직접 다시 올 확률은 낮아. 그렇지만 한국에서 이 위치를 알아냈는지는 궁금하겠지. 누가 여기를 조사하러 오는지도 확인하고 싶을 테고.'
그래서 차우진은 그 세 지역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저녁때는 그 식당에 들러 밥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가 호텔에서 소형 디지털카메라를 꺼냈다. 낮에 돌아다닐 때는 가방 속에 넣어둔 이 카메라로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밤새 확인해야겠네."
차우진이 영상을 재생하며 사람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가 낮에 돌아다닌 곳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얼굴도 모두 확인했다.
낮에 미리 봐둔 사람은 물론이고, 영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특이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모두 따로 골라냈다.
"이 사람은 주변을 힐끗거리면서 다니네?"
그런 사람들의 얼굴은 따로 스크린샷을 떠서 사진으로 만들어 정리했다.
의심 가는 사람의 얼굴 사진을 모았더니 그것만 해도 수십 장이 나왔다.
차우진은 이튿날 오후에도 두 지점을 돌아다녔다. 저녁때는 그저께부터 들르던 그 식당에서 음식을 시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당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저놈은 어제 오후에 콘서트홀 근처에서 봤는데?'
차우진이 어젯밤에 정리한 파일에도 같은 사람이 있었다.
어제만 본 게 아니다. 오늘 낮에도 봤다. 그런데 지금 여기 식당에 또 나타났다.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니지.'
차우진은 어제와 오늘은 다른 옷과 헤어스타일, 안경을 사용했다. 그 정도는 여행지에서 기분에 따라 바꿀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렇게만 해도 인상이 조금 변했다. 어제와 오늘의 그는 언뜻 보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저놈이 한국에서 온 사람을 찾으러 다닌 거면 그 정도 차이는 알아봤겠지. 관심이 없었으면 못 알아봤을 테고.'
차우진이 먼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
그가 가게를 나가고 잠시 후에 파블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음식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가 식당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차우진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파블로가 근처 골목으로 들어간 후에 전화를 걸었다.
"의심 가는 상황이 몇 건 있습니다."
그가 쓰는 건 스페인어가 아니라 영어였다.
- 구체적으로.
"세 지역에서 두 번 이상 마주친 사람이 세 명 있습니다. 관광객이니까 동선이 겹쳤을 수는 있습니다."
- 의심한 이유는?
"셋 다 동양인입니다."
- 계속 조사해.
"알겠습니다."
상대편이 지시를 추가했다.
- 내일부터는 다른 사람과 교대해서 조사해. 같은 사람이 계속 움직이면 상대편 눈에도 뜨인다.
파블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걸으면서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미행당하지 않는지 확인했다.
그렇게 걷다가 외진 곳에 세워놓은 차에 올라탔다. 그가 운전석에서 불평했다.
"이 쉽고 짭짤한 일을 다른 놈에게 넘겨주려니까 좀 아쉽다."
그가 차를 출발시켰다.
"역시 다음 놈한테 소개비를 좀 받아야겠어. 제일 많이 부르는 놈에게 넘겨야지."
차는 10분 정도 이동한 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2층 건물이 앞에 있었다.
파블로가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그 건물로 들어갔다.
차우진이 그 건물을 보며 말했다.
"여기에 그놈이 있는 건 아닌 듯한데."
테러 빌런이 여기에 있다면 파블로가 전화로 상황을 보고할 리 없다.
"저놈은 그 테러 빌런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잔챙이지만, 돈만 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하는 타입으로 보이는데."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건물 내부에 사람이 여럿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불이 꺼진 방도 있었다.
차우진이 그 건물 지붕을 확인했다. 그곳은 물론이고 주변에도 CCTV가 보이지 않았다.
"스페인에 오니까 CCTV가 적은 건 좋구나."
차우진이 그 건물 지붕으로 점프했다.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거리라서 어렵지는 않았다.
바로 아래에 불이 꺼져 있는 창문이 하나 있었다. 차우진이 잠시 기다렸다가 지붕에서 벽을 슬쩍 타고 내려간 후에 그 창문을 열었다. 창문이 스르륵 열렸다.
차우진이 그 상태에서 다시 단거리 공간이동으로 실내로 진입했다.
집안으로 침투한 후에는 주변의 소리를 확인했다.
1층에서 파블로가 사람들을 불렀다. 2층에 있던 사람들은 1층으로 내려갔다.
차우진은 텅 비어버린 2층을 확인했다. 다른 방에 마약이 있었다.
"폭탄도 있네?"
폭약은 보이지 않았지만, 기폭장치가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 기폭장치의 모양이 목동 공개홀에 설치됐던 것과 똑같았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210. 거점
차우진이 2층에서 기폭장치를 발견했다. 기폭장치는 그것만으로는 쓸모가 없다. 폭약에 붙여야 폭탄이 된다.
그는 이곳에 폭약도 있는지 확인하면서 1층에서 들리는 소리에도 신경을 썼다.
파블로는 동료들에게 동양인을 찾는 일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했다.
"다 달라는 게 아니야. 커미션 좀 떼 달라는 거지."
"10퍼센트?"
"10 나왔고, 누구 더 없어?"
"15?"
"겨우 5퍼센트 더 부르는 건 아니지. 누가 20을 제시하라고."
"파블로. 너무 심한 거 아냐?"
"내가 너희 생각해서 넘겨주는 건데, 이 정도도 못 주나? 이거 그냥 꿀 빠는 일이라니까?"
파블로는 감시자를 바꾸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그 지시를 들은 건 파블로뿐이다.
'어차피 넘겨줘야 한다는 걸 이놈들에게 안 들키면 되잖아.'
그래서 그는 선심 써서 일을 넘기는 척하면서 돈을 요구했다.
망설이던 놈이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끄응. 내가 20 내지."
파블로가 커미션 20퍼센트를 제시한 놈과 함께 건물을 나왔다. 그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었다.
이제 저녁이 지나고 해도 떨어져 길은 어두웠다.
차우진이 그들을 조용히 미행했다.
현대의 도시는 멸망한 세계와 달리 건물이 다 멀쩡했다. 그래서 미행하면서 몸을 숨길 곳이 많았다. 거기다 가끔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섞어 쓰면 들킬 위험은 더 낮았다.
"이놈들이 이번에는 차를 안 타네?"
두 놈은 10분쯤 걸어간 후에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 안에서 디에고가 얼굴을 가린 채로 나타났다.
"미행은?"
"당연히 확인하면서 왔지."
파블로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따라온 놈은 없어."
차우진이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차우진은 파블로가 아니라 디에고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차에서 들은 놈하고 목소리가 달라."
그때 들은 스마트폰 속 목소리는 음성 변조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음색만으로는 같은 목소리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런데 음성 변조는 말할 때의 습관까지 바꾸진 않는다. 차우진이 그 차이를 구분해냈다.
"이놈도 그 테러 빌런은 아니야. 하수인들과 연락할 놈을 중간에 끼워 넣었어."
박창수는 지금 시기의 테러 빌런은 조금 허술해서 가끔 단서를 남겼다고 했다.
"이게 허술한 거면, 나중엔 얼마나 꼼꼼했다는 거야?"
디에고가 파블로에게 현금 뭉치를 건넸다.
파블로가 활짝 웃었다.
"짭짤하네. 다음에도 이런 좋은 건수가 있으면 또 나한테 맡겨달라고."
"큰 건이 곧 있을 거다."
디에고는 파블로가 데려온 남자에게 선금을 주며 물었다.
"어디를 어떻게 조사해야 하는지는 들었겠지?"
"당연하지. 파블로가 체크한 놈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다 들었다고. 내가 눈이 좋으니까 나한테 맡겨."
두 사람은 돈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
디에고가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돌아섰다.
"보스에게 저것들을 정리하자고 해야겠군. 너무 오래 거래했어."
지금 그가 쓰는 말은 스페인어가 아니라 영어였다.
차우진이 디에고를 미행했다.
"보스랑 친한가 보다?"
디에고는 10분쯤 걸어 그럴듯한 단독주택에 도착했다. 저택이라고 하기엔 조금 작지만, 넓은 마당과 높은 담장이 있는 2층 건물이었다.
디에고가 그곳으로 들어갔다.
차우진이 근처 조금 높은 곳에서 그 건물을 보았다.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하수인들을 배치해놨구나. 차량이 추적당하는 것을 경계했나?"
그 건물은 담장이 높아 안쪽이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담장 외부에는 CCTV가 여러 대 붙어 있었다.
"외부에는 사각이 없네?"
CCTV가 건물 주변의 모든 길을 감시했다. 들키지 않고 진입하려면 하늘이라도 날아야 한다.
아니면 공간을 건너뛰어도 된다.
그런데 그 스킬을 쓰려면 내부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 내부 CCTV 앞에서 공간이동을 쓰면 뒤처리가 복잡해진다.
"장비를 가져와서 확인해야겠다."
***
차우진은 이튿날 아침에 조사 작업을 준비 중인 박태우를 찾아갔다.
"박 실장님. 드론 남는 거 있지요?"
조사팀은 주변 지형을 확인할 때 쓰려고 드론을 가져왔다. 그 드론은 지금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네. 예비로 한 대 더 가져왔습니다."
"그거 좀 빌려주시죠."
"주변 지형 탐색을 하시게요?"
"아니요. 관광지 사진 좀 찍으려고요."
"네? 이건 회사 장비인데…."
"압니다."
"아, 네. 아시는구나."
차우진은 드론을 빌려 도시로 들어갔다.
어제까지 돌아다니던 세 지역은 가지 않았다. 거긴 이제 갈 필요가 없다.
그는 대신에 디에고가 들어간 저택 쪽으로 이동했다.
차우진이 드론의 메모리카드를 교체한 후에 하늘에 띄웠다.
지형 분석 작업에 쓰려고 가져온 그 드론에는 고해상도 카메라가 장착돼 있었다. 카메라의 성능은 군사용으로 써도 될 정도로 우수했다.
그 드론에는 저장된 영상을 외부로 자동 전송하는 기능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몰래 써먹기 딱 좋았다.
카메라가 워낙 고성능이라 드론을 저택에 접근시킬 필요도 없었다. 그는 멀리서 드론이 띄우고 담장 안쪽 마당과 건물 외부를 촬영했다.
드론을 날린 시간도 길지 않았다. 그는 필요한 영상만 확보한 후에 드론을 회수해 메모리카드를 교체했다.
그는 이번에는 알함브라 궁전 쪽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다시 드론을 띄워 그 궁전을 멀리서 촬영하게 한 후에 조사팀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차우진이 박태우에게 드론을 돌려주었다.
"잘 썼습니다."
박태우가 물었다.
"어디를 찍으셨습니까?"
"알함브라 궁전이요. 아주 멀리서 전체 풍경을 담았습니다. 멋있더군요."
"아. 그 영상 보고 싶은데요?"
"파일은 이미 지웠는데…. 나중에 복사해서 보내드리죠."
메모리카드에 저장된 파일은 일부러 지웠다.
오늘 일을 아무도 신경 안 쓰면 좋지만, 설사 누가 지운 파일을 복구해봤자 알함브라 궁전을 찍은 것만 나온다. 메모리카드 자체를 교체했기 때문이다.
차우진이 물었다.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준비는 거의 마쳤습니다. 내일 탐지기를 설치하고 마그마를 찾을 겁니다. 이쪽 관청의 허가도 다 받았습니다."
"내일은 저도 와서 봐야겠군요."
박태우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곳 지하에서 뭐가 나올지 기대됩니다.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게 이 지역에는 최선인데, 그러면 우리는 또 헛걸음한 거라서…. 이거 참 뭘 원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하하하."
차우진은 이 지역 땅속 깊은 곳에 10년 후에 터지는 마그마 폭탄이 있다는 걸 안다.
"조사하면 뭐라도 나올 겁니다."
"어? 혹시 따로 지형이나 지질구조를 분석하신 거라도…."
"그냥 찍은 겁니다. 뭐라도 의견을 내야 할 것 같아서."
"아, 예."
***
차우진은 드론을 돌려주고 호텔로 돌아왔다.
"시간이 넉넉하진 않아."
차우진이 내일 굳이 조사 현장에 가려는 건, 경찰의 조사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온 평범한 기업 조사팀처럼 보이면 아무래도 의심을 덜 받는다.
'테러 빌런이 쉽게 항복할 리 없지.'
저항하는 놈들은 죽일 수도 있다. 특히 테러 빌런은 확실히 죽여야 한다.
차우진은 드론으로 촬영한 건물 영상을 확인했다. 멀리서 촬영했는데도 고성능 카메라에는 담장 안쪽 상황이 선명하게 보였다.
"CCTV가…."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은 CCTV에 찍혀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CCTV 감시영역 밖에서 담장 안쪽 건물까지 한 번에 건너뛸 수도 없다.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공간이동 스킬을 써서 침투하려면 일단 담장 안쪽 지점을 징검다리로 삼아야 한다.
"있네."
담장 안쪽에도 CCTV가 있었다. 그래도 외부처럼 사각지대 하나 없이 철저히 배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사각도 있어."
징검다리로 삼을 장소를 찾았다.
차우진은 내일은 현장에 가야 한다. 그러려면 이곳에는 오늘 밤에 침투해야 한다.
밤까지지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지만, 관광한다고 와서 호텔에만 있으면 의심을 산다.
차우진이 여행용 가방 하나만 들고 호텔을 나왔다. 원래 여기 올 때도 가방 하나만 가져왔다.
그는 일단 알함브라 궁전을 관광했다.
"이 궁전이 10년 후에 사라진다니. 역시 그건 아니지."
마그마 폭탄이 멸망급 재난이긴 하지만, 미리 경고할 수만 있다면 이 도시의 사람은 대피시킬 수 있다.
그런데 도시 자체를 옮길 수는 없다.
시간과 예산이 충분하면 이 궁전을 옮기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런데 궁전을 옮겨야 한다는 건, 마그마 재난을 막지 못했다는 뜻이다.
전 세계에서 마그마 폭탄이 펑펑 터져대면, 그때는 문화재보다 탈출과 생존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차우진은 일부러 궁전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낮에 충실히 관광을 즐긴 것처럼 보여야 한다.
실제로 관광을 즐기기도 했다.
"창수 형이 여기 와봤다고 그렇게 자랑했는데, 이번엔 내가 먼저 왔네?"
저녁을 먹을 때는 고기와 탄수화물이 잔뜩 들어간 음식을 실컷 먹고 술도 충분히 마셨다. 그런 후에 술값까지 카드로 결재했다.
차우진이 저녁을 먹은 후에 작은 호텔로 갔다.
그 호텔은 한국의 작은 모텔 정도 규모였다. 1층 출입구에는 CCTV가 있었다. 주변 다른 건물들은 높이가 낮았다.
차우진이 호텔에 들어가 일단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술은 다 깼고."
차우진의 해독 스킬이 아까 마신 알코올을 완벽하게 해독했다. 씻고 났더니 몸에서 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체형을 바꾸는 옷은 가져오지 않았다. 그런 걸 가져오다가 걸리면 보안팀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남들은 잘 시간이니까, 나는 움직이자."
휴대폰은 호텔 방에 놔두었다. 나중에 누군가 위치추적을 한다 해도 차우진은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잠든 것으로 알아야 한다.
깊은 밤에 차우진이 창문을 슬쩍 열었다. 완전히 연 건 아니지만, 사람이 빠져나가기 충분한 크기로 창문이 열렸다. 안쪽에는 커튼을 쳐서 내부가 보이지 않게 했다.
이미 방의 불은 껐다.
그가 건너편 건물의 지붕을 보았다. 2층짜리 낮은 건물이었다. 건너뛰기 딱 좋았다.
차우진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방에서 사라졌다가 길 건너편 2층 지붕에 나타났다.
그는 시간을 충분히 두고 쉬었다가 다시 공간을 건너뛰었다. 그렇게 세 번을 더 이동한 후에 골목으로 내려왔다.
"저녁 잘 먹어두길 잘했지. 안 그러면 체력 빠져서 고생할 뻔했네."
공간이동 스킬을 쓰면 체력이 많이 빠진다. 그래서 일부러 미리 잘 먹었다. 그래야 빠진 체력을 도로 채울 수 있다.
***
파블로 대신에 교체된 조직원이 말했다.
"오늘 내가 잘 봤는데, 아무도 두 곳 이상에서 다시 마주치지 않던데?"
디에고가 물었다.
"어제까지 확인했던 사람들은?"
"오늘 본 동양인 중에는 파블로에게 들은 것처럼 생긴 사람은 없었는데…."
"확실하지 않다는 거군."
"사람이 교체됐으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줘야지."
"음…."
디에고가 잠시 생각하다 지시했다.
"내일부터는 파블로도 다시 투입해."
"어이. 난 겨우 하루 일했다고. 이건 아니지."
"너와 파블로까지 두 배로 일하란 말이다."
"돈은?"
"각자 그대로 나갈 거다."
남자가 웃었다.
"그러면 좋고. 흐흐흐. 사람 더 필요하면 말하라고. 내가 동료가 많아."
***
차우진이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해 담장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가 나타난 곳은 CCTV에 찍히지 않는 사각 지역이었다.
그가 앞으로 이동하려다 멈칫했다.
"음?"
CCTV는 없는데 거슬리는 게 있었다.
앞쪽 땅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잔디의 색이 조금 달랐다.
"덫이네?"
밟으면 발이 푹 빠지는 함정 타입의 덫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구덩이 속에 뭐가 들어 있든 발목에 좋은 것일 리는 없다.
함정의 목적이 뭔지는 뻔했다.
"일부러 사각 지역을 만들고 거기에 함정을 만들다니. 침입자를 조져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함정 지역은 제법 길었다. 함정을 하나하나 탐색하면서 지나가면 결국 들키게 된다.
그럴 필요는 없다.
그가 잠시 기다렸다가, 다음 지점을 향해 공간을 건너뛰었다. 그의 몸이 담장 아래에서 사라졌다가 열려 있는 창문 안쪽 실내에 나타났다.
차우진이 실내에서 귀를 기울였다. 전투 센스 덕분에 사람들이 내는 평범한 소리도 더 잘 들을 수 있다.
"아래층."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차우진이 조용히 아래로 움직였다.
"음?"
1층 실내 차고에서 세 명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디에고였다.
디에고는 손짓만 하고 실제로 일하는 건 다른 두 명이었다. 그들은 단단해 보이는 금속 상자를 가져와 차 트렁크에 넣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거점을 옮기는 건가? 어디로? 오늘 밤에 차로 이동할 수 있는 곳이겠지.'
디에고가 말했다.
"보스가 기다린다. 서둘러라."
그 정도면 자백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테러 빌런이 있구나?'
211. 숲
디에고가 차 트렁크에 짐을 모두 실은 후에 말했다.
"빠진 건?"
"서류부터 약까지 모두 챙겨 넣었습니다."
"단서는 단 하나도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부하가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상자에는 기폭장치가 조립된 폭탄이 있습니다.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폭탄은 너보다 내가 경험이 많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경계 임무에나 집중하라. 특히 침입자 감시에 신경 써라."
"알겠습니다."
"인터폴이나 체코 경찰이 찾아와도 걱정하지 마라. 남겨둔 증거는 없으니까, 너희는 저택 관리인이라고 말하면 된다."
"물론입니다."
"여기가 의심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돌아오지. 물론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은 평소처럼 지급될 거다. 만약 경찰이 찾아온다면 보너스도 약속하지."
두 놈의 얼굴이 밝아졌다.
차우진이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놈들은 영어를 쓰네?'
수상한 사람을 찾으러 돌아다니던 파블로 같은 놈들은 스페인어를 썼다.
'테러 빌런이 스페인 밖에서 데려온 놈들이구나.'
***
디에고는 저택을 떠난 후에 아예 도시를 벗어났다. 그 도시 바깥에 울창한 숲이 있었다.
마그마에너지의 탐사팀이 조사 활동을 벌이는 곳은 도시를 기준으로 반대쪽에 있었다.
디에고는 그 숲에 들어가 차를 세웠다. 산길에 가까운 좁은 비포장도로는 부러진 나무로 막혀 있었다.
그가 차에서 내려 잠시 기다렸다가, 손을 위로 들고 손가락을 튕겼다.
남자 두 명이 숲에서 걸어 나왔다. 둘 다 어두운 녹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었다.
디에고가 말했다.
"나다."
그의 얼굴을 손전등 불빛이 빠르게 훑었다.
"확인했습니다."
"트렁크에 물건이 있다."
이곳은 스페인인데 그들의 대화도 스페인어가 아니라 영어였다.
디에고가 버튼을 눌러 트렁크를 열었다. 안에는 금속으로 된 상자와 여행용 캐리어, 그리고 하드케이스 서류가방이 있었다.
"오른쪽 상자는 주의해라. 폭탄이 들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보스는?"
"모릅니다. 거기는 우리는 못 들어간다는 거 알잖습니까?"
"물건만 여기 내려놓고 내가 연락하겠다. 그런 후에 나는 다른 곳으로 잠수를…."
차우진이 말했다.
"야. 네가 보스 있는 데까지 안내하는 거 아녔냐?"
디에고가 뒤로 휙 돌아서며 외쳤다.
"누구냐!"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네가 만나는 걸 피하려는 사람."
"경찰?"
"인터폴이다."
"젠장. 벌써!"
디에고와 같이 있던 두 놈은 인터폴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한 놈이 먼저 칼을 꺼냈다.
차우진이 손을 휙 뻗었다. 단검이 작살처럼 날아가 칼을 꺼내는 놈의 가슴에 박혔다.
"컥!"
적이 뒤로 나자빠졌다.
"야. 형님들 대화하는 데 연장 꺼내지 마라."
디에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인터폴이 아니구나!"
"어떻게 알았지?"
"인터폴이면 그렇게 다짜고짜 칼을 날릴 리가 없으니까!"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인터폴은 아니고 MI6다. 빵칠이 형은 총을 주로 쓰지? 난 칼이 좋더라고."
"빵칠이?"
"모르냐? 살인면허인데."
디에고는 살인면허라는 말은 알아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를 죽이러 왔다는 거냐?"
"그렇지. 야. 그런데 너 왜 겁먹냐? 너희는 죽으면 천국에 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거 아녔냐?"
"그, 그건…."
"아. 그렇지. 죽은 후의 천국은 보험 같은 거고, 실제로는 현실에서 천국을 누리길 원하지?"
디에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디까지 알고 왔지?"
"전부?"
디에고가 갑자기 부하에게 소리를 질렀다.
"놈은 맨손이다! 막아!"
차우진은 방금 칼을 던져서 손이 비어 있었다.
부하가 칼을 뽑아 들고 차우진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디에고와 함께 차우진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디에고는 명령만 내려놓고 숲 안쪽으로 뛰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야. 저놈 튄다."
달려들던 놈은 당황했지만 공격을 멈추기엔 너무 늦었다.
게다가 지금 차우진을 죽이면 돈이 들어온다.
'여기까지 찾아온 놈을 죽이면, 최소한 10만 달러는 나오겠지.'
적이 땅을 발로 콱 밟고 허리를 돌리며 칼을 내질렀다. 칼날이 차우진의 목을 노렸다. 빨랐다.
그렇게 큰 동작으로 몸을 쓰면 차우진에게 공격 타이밍과 방향을 읽힌다.
차우진이 적의 팔을 잡아 반대쪽으로 콱 꺾었다.
"끄악!"
팔이 꺾이면서 손에 힘이 빠졌다. 차우진이 적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아 적의 가슴에 박아넣었다.
"컥!"
차우진이 꺾어놓은 팔을 놓았다. 적이 뒤로 넘어갔다.
"이 길을 지키는 놈이 둘."
그놈들은 방금 처리했다.
"그럼 이 길 안쪽에 뭐가 있다는 건데."
차우진이 먼저 처리한 놈에게 다가가 그놈이 손에서 떨어뜨린 단검을 주웠다.
디에고는 숲 속으로 도망쳤다. 이미 거리가 조금 멀어졌다.
지금 이 숲을 비추는 빛은 현대 문명의 인공조명이 아니라 달빛과 별빛이다. 숲이 너무 어두워서 보통 사람의 눈에는 디에고의 형상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차우진의 눈에는 대충 보였다.
사람의 모습이 정확히 보인 건 아니다. 그렇지만 뭔가가 어디로 얼마나 움직이는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